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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풍장(風葬)

Bollnow 2024. 4. 4. 14:37

내 사랑, 풍장(風葬)

유금호

 

1부 불꽃놀이

흰색 하나로만 뒤덮여버린 시베리아 북단 툰드라 지역 한켠, 축치족 원주민 다섯 가구의 순록 가죽 천막, 야랑가 들이 흩날려대는 눈 속에 묻혀 가고 있다.

맨 왼쪽 천막 안에서 지금 막 나이든 한 남자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고 있다.

끊어질 듯 계속되던 환자의 호흡이 한순간으로 멎자, 둘러앉았던 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맞바라본다.

사자의 아내가 맨 처음 한 걸음을 물러앉자, 가족들이 뒤따라 무릎걸음으로 사자에게서 두어 걸음씩 물러나 앉는다. 뒤이어 가족 사이에 끼어 있던 나이 든 이웃 남자들이 준비해 두었던 순록 가죽 한 장을 환자 곁에 넓게 펼쳐 놓는다.

시신은 곧바로 옷이 벗겨지고, 알몸만 순록 가죽으로 싸여 자루처럼 묶인다.

노인의 임종이 알려지자, 옆 야랑가에서 사람들이 수선거리며 모여들어 그동안 눈 폭풍 불리자드 때문에 입구가 막힌 야랑가 앞의 눈을 치운다.

누군가 천막 지붕 위에 너무 많이 쌓인 눈 더미까지 밀어내고 있다.

황량한 툰드라의 설원을 순록 떼를 따라 움직여 다니던 다섯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순록 가죽에 싸여 장지(葬地)로 옮겨지는 고인의 뒤를 말없이 따르기 시작한다.

평소 죽은 사람이 직접 돌보았던 순록들이 끄는 썰매에 실려 시신은 그가 평소 순록 떼와 더불어 생활하던 눈밭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흩뿌리던 불리자드의 눈 폭풍도 잠시 조용해진다.

작은 언덕이 나오고 언덕 위로 말라죽은 고목 서너 그루가 비스듬히 서 있다.

두어 주일쯤 머물러 온 그들의 천막이 보이지 않는 거리에 왔을 때 썰매를 멈추고 나이 든 두 남자가 썰매에서 시신을 내려 거기 하얀 눈밭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바람은 조용해졌지만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순록 가죽 자루 위로도 금방 허옇게 눈이 덮여 버린다. 두 남자는 가죽 위의 눈을 손으로 쓸어내고 죽은 사람의 아내에게서 사자가 생전 늘 몸에 지녔던 칼을 받는다. 그 칼로 가죽을 묶었던 순록 힘줄의 끄나풀을 잘라내고 나서, 한 남자가 사자의 아내가 내민 커다란 순록의 살코기 두 점을 받아 든다.

그 고기 한 점으로 사자의 얼굴을 덮고 나서, 다른 한 조각으로 사자의 음부를 빠르게 덮고 잠시 남자가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얼굴과 음부에만 순록 살코기가 덮인 벌거벗은 시체 위로 계속 눈발이 흩날려 덮인다.

일행들은 몇 걸음을 물러나서 눈발이 흩뿌려대는 하늘과 끝없는 설원, 그 설원에 한 무리씩 흩어져 열심히 쌓인 눈을 후비며 눈 속 이끼를 찾아 먹고 있는 순록 떼들, 바로 머리 위 언덕에 앙상하게 서 있는 몇 그루 고사목(枯死木), 그 모든 것을 망연히 돌아본다. 죽은 자가 생전에 가까이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대신 바라보는 것처럼.

일행들의 시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 두 남자의 손에 들린 예리한 칼날이 시체의 목에서부터 배꼽아래까지를 세로로 깊이 갈라놓는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가슴 부위부터 가로로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러 번 칼질을 한다. 그들이 일상에서 순록 고기를 칼질하듯 그렇게.

가능한 한 잘게 칼질을 해주는 것이 짐승들이 시신을 쉽게 먹는 데 도움이 되리라. 빨리 시신이 처리될수록 죽은 자의 영혼은 속세와의 인연을 털고 자유로워지리라.

시신의 해부가 끝날 때쯤 일행들은 해체된 시신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면서 까욱 까욱....까마귀 소리를 내어 시신이 있는 곳을 동물들에게 알린다.

몇 사람은 눈밭을 뒹굴면서 늑대 소리를 흉내 낸다.

이때쯤 사자(死者)의 영혼은 어느 위치에서 제 영혼의 낡은 껍질들이 쪼개져 흩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일까.

밤늦은 시간, T.V 다큐멘터리 시간에 잠깐 화면을 스쳐 지났던 장면이었다.

북방계 몽골리안들이 베링 해협을 지나 알라스카와 북아메리카를 거쳐 남아메리카까지 내려갔으리라는 인류학적 가설을 추적하던 탐사단이 시베리아 최북단의 툰드라 지대에서, 몽골리안 계열의 축치족 장례 풍속을 촬영한 장면이 왜 의식 속에서 그 장례에 직접 참여라도 했던 것처럼 자주 떠도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그건 그곳만의 독특한 정서는 아니야."

그 장례의 풍경이 직접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온다고 얘기하자, 시인 윤()은 내가 전생에 순록을 몰고 다니던 그곳 목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낄낄대며 웃었다.

윤은 시인으로의 직관력과 투시력으로 상대방이 살아왔던 전생"前生"을 흑백 화면처럼 떠 올려 볼 수 있다고 가끔 허풍을 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전혀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처음 만나는 여자 앞에서도 전생 이야기를 꺼내곤 하는데 대개는 어느 나라 귀족 부인이었다던가, 역사 속의 공주나 왕비, 아니면 서태후, 왕소군, 양귀비나 장록수......칼멘 같이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전생의 모습을 구사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 습관은 고등학교 때 여학생들과의 미팅 때도 효과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만 가을 소풍 때였나, 멋쟁이로 소문 난 영어 선생님이 전생 감정을 의뢰하자, 의외의 대답을 했었다........ 개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본인 자신에게도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도 하거든요.......혹시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없으세요?....한참 뜸을 들이더니, 선생님은...... 옛날 고려 시대에 몽고병들과 항쟁이 오래 계속되었을 때......많은 비극이 있었구요.....그때, 우리는 침을 삼키며 고려의 유명한 장수 이름이 튀어나오기를 기다렸다.......그때 몽고병들이 우리 땅에 오래 주둔하게 되면서, 과부 별감, 처녀 별감까지 설치되어 고려 여자들이 징발되었거든요....우리는 다시 침을 삼키고 몽고병의 악명 높은 장수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때, 그 몽고병 주둔지 근처에 호색씨 촌이 있었어요.....호색씨가 뭐냐?.....왜 양색씨가 있었듯이요....그래서? 그때..... 그 호색씨 촌에서 몽고병들을 호객하던 펨프들이 있었거든요. 그 펨프 중에 선생님 모습이......죄송합니다. 선생님.....망할 녀석....우리가 배를 안고 뒹굴기 시작하자, 선생님은 벌써 자리에서 멀어져 버렸지만 본인은 도사 같은 얼굴로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그 사건으로 그 멋쟁이 선생님은 우리가 졸업한 후에까지도 펨프라는 별명을 떨구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목부라도 좋은데 내게는...그 설원, 아무 것도 없는 흰빛의 눈밭이 자주 보았던 풍경 같단 이야기야... ..."

나는 그것이 50호 남짓한 커다란 유화 작품, 두껍게 발라진 흰색 물감의 질감이 아니었다면 아직 붓을 대지 않은 빈 캔버스라고 여겨지던 그림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난삽하게 흩어진 화실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페인팅용 나이프를 들고 서 있는 모습까지도......

"맨날 장례식에다, 추도식만 보아 온 이 시대 공통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게 내 결론이야."

나는 싱겁게 웃으면서도 그 시베리아 설원의 장례 풍경에 한채희, 그 여자의 모습이 오버? 되어 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라핀 냄새를 체취처럼 풍기며, 시신이 되어 있는 내 육신을 오일 패인팅을 하던 무딘 나이프로 힘들게 여미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 뒤로 끝없이 계속되는 북극의 설원, 바람 소리 속에 들어난 나의 내장 위로 흩뿌려대는 눈발......나는 고개를 저었다.

"티베트 쪽의 조장(鳥葬) 풍습 들어 봤지? 시체를 독수리한테 내주는 거야. 비슷한 거지.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거니까. 티베트에서는 바위산까지 시신을 운반해다가 바위 위에다 시신을 조각내서 대머리독수리들이 먹도록 하니까, 들짐승에게 주는 것이나 독수리에게 주는 것이나 한가지 아니겠어? 모르지. 독수리 쪽이 더 입체적이니까 한 수 위가 될지...... 그렇게 되면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 풍습이 제일 하위적 염원이 되나?...... 장자(莊子)는 그걸 간파해서 임종의 자리에서 제자들이 장례 절차를 묻자, 땅 위에다 자신의 시신을 그대로 버리라 했는지도 모르겠어. 땅 위의 짐승이 먹는 거나, 땅속의 벌레들이 육신을 파먹는 거나 다를 게 뭐 있느냐는 그 사고에 나는 동감이야."

"내가 자네보다 오래 살면 자네 시체는 까마귀나 벌레들이 사이좋게 뜯어 먹게 설악산이나 지리산 숲속에다 벌거벗겨 내 버리도록 가족들을 설득해 볼게."

"자네가 앞서 죽어도 내가 도와주지."

"나는 그쪽은 맘에 안 들어....."

"이미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육신이란 거추장스러운 거니깐 조금이라도 빨리 그 흔적을 지워버리겠다는 그런 염원이 시체 훼손과 관련이 있는 것은 확실할 거야...... 혹은 죽은 자의 영혼이 이미 망가져 버린 제 육신에 미련을 가지고 머뭇거릴까 봐 육신의 흔적을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지워버리는 것일 수도 있고.... 시체 냄새를 맡은 독수리 떼 수십 마리가 시신과 가족들의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날고 있다가 입맛을 다시며 바위 위로 내려와 상이 차려 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생각해 봐..... 전문적으로 시체를 조각내 주는 장의사가 따로 있는데 이 친구들, 가족들이 몇 푼 쥐어 주면 독수리들이 빨리 먹어 치우도록 더 잘게 고기를 토막내 준다는 거야. 말하자면 천당으로 가는 급행료가 거기서도 있는 셈이지.....우리 나라 화장터에서도 인부들에게 급행료를 주어야 뼈 가루를 잘게 부수어 주거든."

친구 윤()은 내가 시베리아 설원의 장례 이야기를 꺼내자 신이 나서 제가 아는 각가지 장례 풍습을 질리지도 않고 늘어놓았다.

그의 조장(鳥葬)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나는 이번에는 바위 위에 흩어진 내 시체 조각들을 독수리들이 나누어 먹는 환상에 빠졌다.

이번에도 역시 한채희가 그림을 그리던 무딘 오일 나이프로 힘들여 가면서 내 살점들을 잘게 여미고 있었다.

채희는 그림을 그리던 여자였다.

내가 30을 막 넘겼을 때 채희도 30이 되어 있었고, 그림을 그리며 살던 오피스텔에 나를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 화실 사방, 화구와 그리다 만 미완성 그림들이 흩어진 방 곳곳에 그녀는 서른 개나 되는 촛불을 켠 뒤 맥주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라 왔다.

나는 맥주잔에 담긴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벽에 새워진 50호짜리의 이상한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전체가 흰색으로 보여 작업 전의 새 캔버스로 알았는데 흰색으로 두껍게 덧칠된 흰 물감 뒤쪽에 갈색, 초록, 검정 색들이 곰팡이 흔적처럼 숨어 있었다.

찔금거리며 안주도 없이 큰 잔의 위스키를 반 남아 마시고 났을 때 그녀는 곧바로 옷을 벗어 팽개쳐 버리고 그림 앞에 서 있는 나를 뒤에서 안았다.

"스무 살 때 난 그런 상상을 했어. 내게 애인이 생겨 섹스를 나누게 되면 하얀 눈밭 위에서 첫 섹스를 하고 싶다, 그렇게 말야.....그럼 눈이 녹아 우리 몸이 점점 젖어 들고, 그 눈밭 위에 내 처녀의 흔적이 꽃처럼 남아 번져 가고...."

"이 그림을 그리면서도 내내 눈 위에서의 섹스만 생각했겠네."

"한 달도 더 걸린 거야. 이 그림. 여길 봐, 계속 눈이 내리고, 또 내리고...."

그녀는 손으로 화폭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그림 앞에 옆으로 누웠다. 흰 눈밭 위에 이제 그녀가 발가벗고 누워 있는 셈이 되었다.

"난 불을 켜고 하는 게 좋아. 얼굴 표정을 볼 수 있거든. 불을 꺼 버리면 내가 지금 누구랑 섹스를 하는지 모를 수도 있잖아?"

섹스를 하는 동안 채희는 곧 세상이 종말이라도 올 것 같이 격정적으로 육체를 탐닉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얼굴이 되어 물감들을 뒤섞곤 했다.

"첫 남자애하고는 너무 서둘다가 실패했어. 자기도 그런 경험 있어?"

눈 덮인 대지만으로 채워진 커다란 화폭과 시베리아 툰드라의 설원 풍경은 결국 같은 연상의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죽음과 섹스는 또 다른 동질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녀가 기억의 안쪽에서 살아난 것은 오늘 한현상의 추도식이 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재 가루로 물과 바람, 공기와 대지 속에 풍화되어 섞여 버린 한채희를 나는 가급적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한채희만이 아니라 떠나 버린 모든 것, 죽어 사라져 버린 것들의 일체를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의지와 상관없이 때때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의 기억, 다시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 어떤 식으로도 되돌려 자리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들이, 그녀 그림 속, 두꺼운 눈밭 속에 숨었던 갈색과 초록, 회색의 흔적같이 왜 살아남아 있는 것인지.....

나는 좀 급하게 잔을 비웠다.

"안주도 같이 먹으라구..."

윤이 두어 번 주의를 주었을 때에야 나는 내가 좀 급하게 마셔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미이라 말이야.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이 구별 안 되는 묘한 풍습이라고 생각지 않나?"

이짚트인들의 미이라 기술에서부터 잉카의 미이라들, 화장(火葬)을 하여 갠디스강에 띄워 보내는 인도인들의 장의 풍습에, 수장(水葬)과 풍장(風葬), 파푸아 뉴기니아 일부 종족 간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시식(屍食)의 습관까지도 윤은 계속 떠들어대었다.

그는 신기하게도 자기가 관심을 가졌던 화제가 나오면 지치지도 않고 화제를 독차지하는 습관이 있었다.

윤만이 아니라 그가 출강하고 있는 학원 동료, 조영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시식이라면......시체를 먹는다는 이야기야?"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주며 나는 술집 <나그네>의 벽, 유리창의 창살 무늬, 주방과 홀을 나누고 있는 엷은 천 조각까지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니까. 그것도 가족끼리.......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가족끼리라도 나누어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염원.......생각해 봐. 그건 사랑이야...... 뉴기니아나, 인도네시아 오지에는 지금도 정부의 통계 자료에도 잡히지 않는 원시 부족들이 많이 남아 있거든......그 지역의 다른 부족에서는 마을의 지도자가 죽었을 때만 마을 여자들이 죽은 사람의 골수를 나누어 먹는 습관도 있어. 죽은 자의 지도력을 생산을 상징하는 여자들이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는 거지. 머리 속에 삶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었을 거라는 이 유감 현상은 아직 계속되고 있어서 최근 유솜의 한 연구위원회가 이들 시식 습관과 거기 여자들의 수명 관계에 대한 역학 조사를 한 적이 있어......이상하게도 그 종족 여자들 수명이 특히 짧다는 거야. 여자들이 빨리 죽으니까 부족 간 약탈혼이 현재도 성행하고 싸움이 계속되고 한다는군. 아직 시식 습관과 수명과의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는 안 나왔지만.....작년에 자카르타 국립대학 인류학 교수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니까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야.......그러나 내게 가장 근사하게 느껴지는 건 역시 티베트의 그 조장 풍습이야. 자네도 아마 같을걸."

죽은 자의 생명들이 수십 개로 나뉘어져 우리가 발 딛고 있던 이 평면의 지상을 떠나 비상한다는 것. 육신이 하나였을 때 그 체중 때문에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했던 것을 이제 가벼운 조각으로 해체되어 하늘을 마음대로 날고 싶어 했던 인류의 오랜 꿈을 상징적으로 실현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는........죽음이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면 티베트의 조장만큼 생명의 분화와 비상으로의 상징이 또 있겠느냐고.....그날 우리는 분신자살한 학생, 한현상의 3주기 추모식이 끝나 사람들이 침울하게 흩어지고 났을 때, 참 오래간만에 골목길의 소주 집 <나그네>를 찾았었다.

신기하게도 술집 <나그네>는 달라진 게 없었다.

자리에 앉자 <죽음>에 대한 화두가 튀어나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그날 오후 검은 상장이 펄럭거리는 속에서 향냄새를 계속 맡았던 우리로서는 3년 전의 오늘과 그 3년 사이의 기억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더구나 30에 죽겠다던 약속대로 서른하나가 되기 전 목숨을 버린 그의 누이 한채희의 기억까지가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윤의 이야기가 공소하게 들려 오면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오늘 추도식에 연관된 직접적인 기억들을 비켜 가기 위해 주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윤 역시 같은 기분이 들었던지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3년이 지났어. 벌써."

"그날도 밤에 부슬거리며 비가 내렸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한현상이 2학년이었나? 그때....."

다시금 우리는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3년이라는 산수적 시간은 우리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나이와 더불어 묻혀져 버린 완료형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 학생의 추모식이 열리는 교정의 한켠에 별로 아는 얼굴도 없는 추모객에 섞여 나와 윤이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은 우리가 지난 3년의 세월 속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가는 빗줄기가 계속 술집 출입구 유리창에 부딪혔다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어둠이 그동안 야금거리며 골목을 점령해 들어와 있었고, 그 어둠을 따라 시간이 알콜 속에서 분해되다가 한순간 퇴행되고 정지되고 있었다.

3년이 지나기는 했지만 나이 어린 한 대학생의 분신자살을 기억 속에서 반추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이념이었건, 투쟁의 한 방법이었건, 어둡고 힘들었던 한 시대의 상징으로 그의 죽음이 놓이고, 그때 우리는 스물아홉. 20대를 가파르게 넘어서며 서른을 맞아 가고 있었다. 그 한 시기의 기억들이 의도적인 유화 물감 덧칠하기로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우리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한현상의 죽음은 한채희와 나, 또 시인 윤()과 나, 거기에 박민주와 나, 일렁이며 들끓던 피 속의 타나토스. 그러나 왜소해 가던 자기 확인의 비참함, 지독한 양의 독서로의 도피와 쓸쓸한 체념, 우리 모두의 무력감, 어금니를 앙다문 채 도서관 복도 벽에 머리를 짓찧어 대던 슬픈 새벽과 새우깡 안주의 소주와 가슴 서늘하던 사랑의, 우리 20대 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같이하고 있는 거였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 분신 학생을 알지 못했다. 또 특별한 인연이 있을 수도 없는 사이였다. 내가 조교로 근무하던 학교의 법학과 학생이었다는 것도 그가 죽은 다음 날에야 나는 학교에서 들었다.

나로서는 그 시절, 소속 대학도 아닌 다른 학과의 학생 개인 신상에 관심을 둘 처지도 아니었다.

그가 운동권에 몸담고 있었던 강경파의 학생이거나, 학과 성적이나, 특기 같은 것으로 알려질 만한 학생이 아닌 보통 대학생이었다는 사실 역시 그의 죽음이 있고, 며칠이 지나서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던 날 우리는 술집 <나그네>에 새벽까지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현상.

교문 앞에서 피켓을 든 학생이 단독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모습을 출근길에 스쳐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몇천 명의 학생 중 한 명의 일이었고, 그런 풍경은 오래전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일이었다. 그 시절은 거의 매일 최루탄 가스로 눈이 충혈된 채, 감기 증세 같이 기침을 해대면서 일종 데모 불감증에 걸려 있던 시기였다. 그날 아침 출근길에 교직원이나 동료 학생들도 그가 가부좌의 자세로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것을 보았었다. 그러나 특별하게 그 전날이나, 또 그 전날과 달라진 모습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몇 명인가의 동료 학생들이 아침결에 그의 곁에 머물기는 했지만 강의가 시작되면서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그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그가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인 것은 막 점심 시간이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고 했다.

그의 절명 소식을 들으면서 영 취하지 않는 소주를 우리는 계속 비우고 있었다.

그냥 맥이 풀려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병원으로 옮겨가서 두 시간이 못 되어 숨이 끊겼다고 했다. 그 분신 학생에 대한 연민과 외경심, 방향 없는 분노와 허탈감과 갈증에 우리는 무력증의 상태로 마주 앉아 소주를 맥주 컵에 따라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술집 안은 3년 전이나, 2년 전이나, 1년 전이나, 바로 어제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간이 그 작은 술집만은 비켜서 흘러가는 느낌을 우리는 이곳에 들릴 때마다 확인하고 놀란다.

낡고 커다란 벽시계나 서툰 붓글씨체의 메뉴표도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세월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두부구이, 돼지머리 고기와 순대, 그리고 파전, 뚱뚱한 몸피하고는 다르게 여섯 개의 탁자와 혼자 살림방으로 쓰는 그 집 특별석인 작은 방 사이를 부지런히 움직여 다니는 환갑이 조금 넘은 주인아줌마, 한 번도 우리가 웃는 얼굴을 본 적 없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역시 혼자 산다는 깡마른 주방 아줌마 한 사람. 그것은 하나의 정물화였다.

.......서럽다 뉘 말하는가...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되살아 오는 세월에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빛나는 그 눈 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고......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마른 잎 다시 살아 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마른 잎 다시 살아 나 이 강산은 푸르리......

3년 전 윤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자기와는 나보다 더 아무런 인연이 없는 한 대학생의 절명 소식에 그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주 낮은 윤의 노래 소리에 나는 큰 컵의 소주를 목구멍에 들어붓는 것으로 화답하며 어금니만 어스러지게 앙다물었다. ...? ? ?...맥주 잔 가장자리 한쪽이 내 이빨 사이에서 탁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우리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삶에 술집 <나그네>는 고정되어있는 무대 배경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있었다.

60년대 시골 변두리 이발소에 흔히 걸려 있던, 과장되게 목가적이고 동화적인 물레방아가 있는 시골 풍경화 같이 그 집의 풍경은 시간을 창밖으로 흘려보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유리창에 흩뿌리다가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기껏 3밀리 안팎의 유리가, 달려가는 세월을 차단시키고 있다는 맹랑한 사념에 빠진 적도 더러 있었다.

여러 해를, 때로 거의 매일, 때로는 뜸하게 찾아가는 그 작은 술집은 그 집 주인 아주머니의 얼굴 주름살 수효마저도 변하는 것 같지를 않았다.

도시 변두리 신설대학 후문 쪽은 값싼 음식점과 호프집, 커피캔들이 꽤 많이 있었다.

<나그네> 역시 그런 흔하디 흔한 평범한 술집의 하나였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나그네>에는 나이 어린 학부 학생들의 출입은 거의 없었다. 학생들 편에나 교수들 사이에 낄 수도 없이 어정쩡한 위치의 사람 들, 조교들, 하급 사무직원들, 몇 군데인가를 정신없이 뛰는 젊은 강사들이 그날 마침 몇 푼 강의료를 받고 다음 일정이 비어 있는 그런 오후, 들리는 집이 왜 <나그네>로 고정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정쩡한 나이와 위치의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하면서 보다 젊은 학생들이나 관록이 붙어 가는 교수들은 나름대로 자기들 격에 맞는 술집으로 옮겨 간 셈이었지 싶다.

제대를 했거나, 교도소를 다녀온 복학생들이 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어어, 이 집이 그대로 있네, 아줌마는 하나도 안 변하고....., 그렇게 놀라고 반가워하는 모습이 어쩌다 보이기도 하고, 생각 없이 들어섰던 신입생들이 영 저희들 취향이 아니다 싶은지 서둘러 되돌아 나가기도 하는 모습을 그곳에 앉아 있으면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보다 정확히 내 주변의 가까웠던 몇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작은 술집 <나그네>는 때로 일상의 끝과 새로운 시작의 통과 의례적 공간이었고, 밀실이었고, 도피처였다. 지친 일상이 그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정지되고 정화되어, 전혀 다른 추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잠시 치유 받고, 재생되어 좁은 골목길을 보무당당히 새로운 기분으로 걸어 나갔던 것이다.

상처 입은 짐승들이 잠시 숨어드는 바위틈의 작은 동굴, 각자의 생활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가진 것 없던 젊은 전사들의 대기실, 절망적 외로움의 순간, 아직은 살아야 할 이유들을 확인해 보는 재생적 공간으로 그곳이 우리 곁에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더구나 나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굴욕감과 오기와 학구열, 침울한 꿈, 안으로 눌러 삼키던 슬픈 열정과 인내의 잔영들이 그곳 벽에는 묵은 벽지처럼 다닥다닥 화석으로 굳어 있다.

박민주를 만난 것도, 한채희를 만난 것도 그곳이었고, ()과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어가며 몽환적이고 고답적인 결론 없는 담론에 젖어 유리창을 긁어대는 비바람 소리를 들었던 곳도 그곳이었다.

여자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젊은 날의 영혼 깊이 때로 불이었다가, 얼음덩어리였다가, 안개였다가, 선명한 5월의 햇빛이 되기도 했던 두 여자의 이야기를 같이 해야겠다.

박민주를 만난 것은 한 현상이 죽었던 그 밤, 새벽이 가까워오는 늦은 시간이었다.

윤과 내가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놓고 앉아, 윤이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내 이빨 사이에서 맥주잔 귀퉁이가 깨뜨려져 탁자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던 시간이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어깨를 내려뜨린 남학생 셋에 여학생 한 명이 귀퉁이 탁자에 무너져 내리듯 앉는 것이 보였다.

주인아줌마가 말없이 그들 탁자에 소주병과 순대 접시를 가져다 놓았지만 그들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고 움직일 것 같지를 않았다.

남학생 하나가 한참 후에야 여자아이의 머리칼을 두 손으로 부벼 대었다.

잠시 후 우리는 그 여학생의 머리칼 한 부분이 불에 그을린 것을 보았고, 낯이 익은 느낌이 왔지만 내 소속 학과의 학생은 아니었다.

박민주. 인류학과 졸업반 학생. 전체 성적 4,3.

한현상 학생의 온몸이 불길에 쌓이면서 비명이 터지는 것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도서관을 나오다가 보았던 학생 중의 하나였다.

엉겁결에 불길을 향해 달려간 학생들이 막 불길이 휘돌고 있는 남학생의 몸을 윗옷들을 벗어 감싸 안았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이었지만 이건 안돼, 안돼, 그렇게 소리 질렀던 것 같아요."

상당히 시간이 흐르고 나와 개인적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 민주가 직접 한 말이었다.

얼떨결에 구급차에 같이 올라 병원까지 동행을 했고, 그의 절명 소식을 제일 앞서 들은 학생 중 한 명이 박민주였다.

분신 학생의 절명을 안 순간 그녀는 복도 바닥에 무너져 내려 흰 벽에 머리를 짓찧었다고 했다..... 나하고는 가까이 본적도 없는 애였는데요. 왜 죽어가면서 그가 내 곁에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민주는 훗날 그날의 충격적 경험을 그렇게 회상했다. 부드럽던 머리칼이 그을린 것을 안 것은 술집 <나그네>에 가까이 와서였다고 했다.... 계속 사방에서 살이 타는 냄새가 났어요. 그 애가 불에 타면서 풍기던 냄새가 왜 나를 따라왔는지, 그 생각에 젖었는데 남학생 한 녀석이 내 머리카락이 많이 탔다고 하더라구요, 토하기 시작했어요........그 학생을 태웠던 불길 한 가닥이 제 머리칼을 태웠다고 느끼자 곧바로 토악질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긴 밤 지 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저 거친 광야에서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누가 앞서 낮은 음성의 다른 노래를 시작했을까. 민주와 같이 왔던 남학생들이었을까, 아니면 윤이 앞서 노래를 한 것이었을까. 잠시 후 노래는 합창으로 바뀌어 그 작은 술집 안을 가득 채워 가고 있었다.

민주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며칠 후 학내에서 격렬한 시위가 있던 날 저녁이었다.

학교 전체가 자욱한 최루탄 연기로 하여 숨쉬기조차 곤란했던 황혼 무렵 그녀가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채 비칠거리며 현관으로 뛰어 들어왔었다.

심하게 기침을 해대며 누군가 우리 사무실 앞에 쓰러질 듯 주저앉는 걸 부축해서 사무실 세면기 앞까지 데려갔을 때야, 그녀 불에 그을린 머리칼 일부가 눈에 들어 왔었던 것이다.

"여러 번 행궈 내.... 좀 나아질 거야."

열 번도 더 찬물로 얼굴을 씻어내고 나서야, 죄송해요. 그녀가 벌겋게 충혈된 시선으로 내게 말했다.

"프로들은 손수건에다 치약 정도는 상비약으로 준비를 한다구......최루탄에 대한 내성도 문제지만."

"조교 선생님도 학생 때 데모 많이 했어요?"

"전문가까지는 아니었어도 닭장차에는 몇 번 탔어."

훅 그녀가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에 유난히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

"박민주예요. 인류학과 4학년..... 언제 교양 과목 시험 때, 우리 과 감독 들어오신 적 있어요. 어떤 친구, 그 시간 학생증 지참을 안 했다고 혼 내주던 기억 나요......그때는 저 꼴통, 대학 때 데모 같은 건 한 번도 안 해 봤을 걸....맨 날 도서관에 숨어서 학점 관리하고, 대학원 시험 준비하고 그랬을 거라구....조교도 성적 나쁘면 못 하거든..... 남자애들이 몇이 그렇게 수근거렸지 싶어요."

"일부는 맞는 말이야."

"죄송해요."

그녀가 다시 푸스스 웃었다.

경찰의 교문 봉쇄 때문에 우리는 사무실에 꽤 오래 남아 있다가 밤이 늦어서야 후문을 빠져나왔다. 우리가 서로 얼마간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늦은 시간 같은 방향으로의 택시 동승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 선생님, 아니 그냥 강 선배님이라 할께요. 그게 더 편하실 것 같네요. ........데모 잘하게 보여요?... 그런대로 운동권 학생으로, 민주 투사로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이름도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아버지가 일부러 그렇게 지어주셨다니까......새벽까지 학습하고, 자기 비판하고, 대자보 쓰고... <광야에서><진혼곡>을 목메어 부르다가, 아침 해를 보면서 동지들과 전의를 다지며 소주 한잔 털어 넣는 모습....... 어울려 보여요?.....그리고 상당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녀가 피곤해서 잠이 든 것으로 잠시 생각했다.....믿으실지 모르지만 졸업반 될 때까지 데모대 곁에 얼씬도 해본 적 없었어요..... 우리 과 조교 언니 말마따나 천연기념물 같은 학생이 저예요.......열심히 학습하고, 대자보 만들고, 돌격대에 참가하고 그런 아이들....심정적으로 이해는 해요. 하지만 난 아니에요. 기질이랄까, 출신 성분....용어가 좀 이상한가요?.....이런 시간까지 거리에 있어 본 게 지금까지 열 번쯤....학술 답사 빼면요.....지금 시간, 집에 들어가 아버지 눈에 뜨이면.... 내일 아침 초상 하나 더 치룰지도 모르는 환경에서 자라 왔구요 .....믿어지세요? 정말 그렇게 자랐어요.... .....하지만 며칠 전, 그 후배 학생 죽음을 곰곰 되새겨 보면서.....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독해질 수 있을까,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어요.......그녀 집 가까운 골목길의 포장마차 앞에서 차가 멈추었을 때 나도 같이 따라 내려 버렸다.

"선배님은 더 가셔야 한다면요?"

"뭘 좀 먹어야겠어. 사실 점심때부터 위장에 집어넣은 게 없어."

내가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만약 우리 아버지를 저 안에서 만나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모르겠네....선배님이 변명을 잘 해주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이 시간에 아버지가 왜 저기 계셔? 술꾼이셔?"

"직업이 그래요. 말씀드렸죠? 제 출신 성분.....그래서 이 시간 집 들어가도 아버지 얼굴 안 부딪치고 들어갈 거 같은 예감이에요."

"뭘 하시는데? 아버지."

"나 같은 아이들 잡아가는 것. 우리 아버지 그래요. 무서운 사람이에요. 사람이 아니고 직책이죠."

우리는 꼼장어 구이와 소주 한 병에 국수 하나씩을 시켰다.

"지난번 <나그네>에 계셨지요? 정신이 없어서 그날은.....노래가 합창될 때까지 나는 그곳이 술집이었는지 누가 그 안에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머리칼이 불이 붙어 돈 안 들이고 퍼머가 된 것도 골목에 들어서서야 알았는 걸요....."

"난 좀 둔해. 그래서 남자애들이 설명을 해줄 때까지 나도 민주, 그날 헤어스타일을 이해 못 했어..... 그것도 내 친구가 사태를 다시 이중 통역을 해주어서야 짐작을 했지만."

", 친구분, 그날 같이 계셨는데.... 첨엔 선배님도 못 보았지만요. 그분 더러 선배님 사무실에서 뵌 분 같던데, 아닌가요?"

"시인이야. 윤진우라고.....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야. 학원에서 영문법 강의를 해. 돈은 많이 받지만 스트레스도 심한 모양이야. 그래서 둘이 만나면 현실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만 실컷 하지...... 아마 곁에서 누가 우리 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신 병원으로 전화를 할 건지 말 건지 좀 망서려질 그런 대화만 같이 하는 친구.... 이해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같이 만나서 둥둥, 구름 위에 떠다니는 이야기만 실컷 하고 나면 조금씩 숨통이 트이곤 하니까. 결국 헤어질 때는 피차 쓸쓸해지지만...... 민감하고, 재주도 많고, 많이 알고, 참 이쁜 딸도 하나 있어....요새는 그 친구도 조울증이 온 것 같애."

갑자기 그녀가 끼루륵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조울증이라는 말이 비슷한 용어를 떠올리게 하잖아요?"

"못되었군. 처녀가."

"알았습니다. 선배님. 주의할게요....그리고요. 이건 다른 이야긴데요....학과 학생들 사이에요, 강 선배님 인기, 따봉인 거 아세요?...... 우리 과 학생들은 노처녀 히스테리에 질려서 다음번 조교 선생님은 남자 선배 아니면 결사반대, 그런 분위긴데...."

"과 아이들은 나더러 노총각 히스테리라는데?"

"아직 노총각은 아니잖아요?"

"과 아이들 눈에는 파싹 늙은 꼴통으로 보이는 모양이야."

꼼장어 구이에 결국 나는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민주는 두 잔을 비웠다.

"사실 그 사건이 터진 날 우리는......우리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속에서 비참해 있었어....... 그냥 싸구려 술집에 앉아 소주 마시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지. 말하자면 일종의 무력감이랄까.....아마 그때 누가 와서 분신했던 학생이 단독 시위한 걸 보았느냐고 물으면 본적이 없노라고....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관심이 없어서 무심히 지나쳤노라고......대부분 선량한 국민은 생업에 바빠서 그런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거라고......그런 모범 답안을 생각하면서 비참해 있었어. 그건 윤 그 친구도 마찬가지고....그 친구, 대학땐 꽤 선동적인 시를 학교 신문에 써서 기관에 불려 간 적도 있었거든...... 지금은 투명한 서정시만 써......"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되요."

그녀가 보조개를 보이면서 홀짝거리며 국수 국물을 맛있게 마셨다.

"우리 둘 대화 속에는 늘 신화 같은 것만 있어. 우습지 않아? 어른들이란 게"

"그런 나이의 궤도에 들어선 걸 괴로워하실 일 아니지 않아요?"

"개떡같애. 가끔 비참해지고."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요....시국과는 별 관계없는 거요.....엘리아데를 읽었거든요..."

"종교형태론? ()과 속()? 샤마니즘?"

"종교형태론....왜 그 안에 이런 거 있잖아요? 달을 바라보던 고대인들이 달이 점점 커져서 보름달이 되고, 다시 작아지다가 끝내 사라져 버리는 것....그리고 사흘이 지나서는 또다시 작은 달로 태어나는 걸 보면서......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반복되는 자연현상을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출생과 죽음, 순환의 사이클을 유추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이론 말이에요. 전혀 교류가 없는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원형 개념 말이죠.....억압에서의 자유, 불의에 대한 분노나 저항, 그런 것들도 결국 그런 원형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할까요?...강 선배님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고요..... 며칠 사이, 자유나 억압 그런 개념들을 떠올리면서 원형의 개념은 확대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어떤 시대, 어떤 공간에서도 억압은 저항을 잉태하는 것. 원형 개념으로 본 억압과 저항 의식.....재미있겠는데.....졸업 논문 기대해야겠다."

"다음 또 국수 사 먹을 기회 있기 기대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헤어지며 악수를 청했고 깊이 보조개를 보이며 웃었다.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시험을 치루기 위해 나는 그동안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죽음들의 충격에 몇 번이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영어와 독일어 원서를 내동이 치고 싶은 유혹에 잠기곤 했다. 참으로 우리의 20대와 30대는 너무 많은 죽음을 보고, 들어야 했었다.

인간의 죽음, 혹은 장례 풍습 등을 한 걸음 떨어져 학문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흥미 있는 일인가.

가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얼음을 깨뜨리고 바닷물 속에 잠겨 들어가는 에스키모 노인의 이야기나, 저 남쪽 진도의 춤추고 노래하며 망자를 이별하는 독특한 장례 풍속의 의미를 학문적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바라보기에는 그러나 당시의 우리 주변이 너무도 각박했다.

어느 시대이고 전쟁이나, 질병, 사고사 등의 부정적 죽음은 있어 왔지만 그 무렵, 제 몸에 불을 붙여 육신을 태워 버린 젊은이나,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몇 마디 구호와 생을 맞바꿔 버린 죽음 들, 버젓한 국가 공안 기관의 대낮 사무실에서, 혹은 대도시 도로 한 가운데에서 전혀 개인적 증오 없이 집단의 광기에 숨져간 사람들의 소식을 우리는 너무 자주 들어야 했다.

게시판에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젊은이들의 죽음에 관한 대자보가 붙고, 학생들의 가슴에는 검은 상장이 일상처럼 매달려 있었던 시기에 우리는 20대 후반과 30대를 살았다.

그해에는 일찍 시작한 봄장마가 거의 매일 교정을 휘덮어대는 최루탄 가스를 부지런히 씻어내 주고 있었다.

참으로 끈질기고 긴 봄장마였다.

나는 가능한 귀를 틀어막고 책 속에만 묻혀 있으려 노력했다. 30이 되려는 내 나이에 대한 강박감도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도 예비 박사의 위상이라도 획득해야 했다.

노쇠해 가는 시골의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꽤 똑똑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좋은 대학에서 장학금도 받았고, 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밥을 먹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그 똑똑한 아들이 다들 어렵다는 그 박사까지도 금방 따서 대학의 선생이 될 것이고, 예쁜 도시 처녀를 며느리 감으로 데려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 번이나 박사과정 입학 시험에서 쓴잔을 마신 뒤였고, 가난했고, 주변은 늘 최루탄 냄새였다.

우리는 그 우울한 계절에서도 가끔 <나그네>에 들려 지친 정신에 에너지를 보충했다.

대개 윤과 둘이만 마주했던 자리에 민주가 가끔 끼어들면서 우리들 화제가 때로 좀 학구적인 냄새를 피우기도 하고, 윤과 나 사이에서는 잊혀진 옛날이야기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아서 생명력을 얻기도 했다.

"민주 학생에게는 고백을 안 했겠지만 말에요. 이 친구 아홉 살 때 동정을 잃은 친구라구요. 가까이 할 위인이 못 되는 거지."

어느 날 윤은 엉뚱하게 그런 식의 화제를 꺼내 우리들 배꼽을 쥐게 하였다.

"열아홉 살도 아니구요?"

민주가 풀쐐기라도 대하듯 의자를 내 곁에서 좀 떼어 앉았다.

"문제는 상대거든."

"추행이라도 당한 거예요? 설마 그 나이에..."

민주가 허리를 꺾으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당했다는 표현이 맞겠지....상대가 누구였느냐 하면 말이지....민주씨, 개미 알지? 땅 위에 기어다니는....그 개미들이 바로 강영규의 첫 번째 상대였으니까, 이건 어떻게 되나? 적당한 용어가 없는지 모르겠네."

결국은 내가 앞서 웃음을 터뜨리고 윤의 발설을 해명해야 했다.

시골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나 역시 다른 시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틈만 나면 산새 새끼를 잡으러 어지간히도 산과 들을 쏘다녔다. 뱁새에서부터 종달새, 방울새, 때로 때까치나 물까치의 둥우리를 뒤지러 다니느라고 내 종아리며 손목은 성한 날이 없었다.

특히 보리밭에 둥지 틀기 좋아하는 종달새 둥지를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종달새는 어미 새가 공중에서 직접 일직선으로 낙하해서 제 둥지에 내려앉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땅 위에 내린 다음, 둥지를 향해 기어가는 위장술을 쓴다. 그래서 종달새 둥지를 찾기 위해서는 바위 뒤나, 키 작은 나무 뒤에 숨을 죽이고 있다가 어미 새가 땅에 내려앉은 다음, 숫자를 열까지 세고 낙하지점에다 돌멩이를 던지면서 뛰어나가야 한다. 이때 어미 새는 낙하지점을 중심으로 사방 20m 안의 어딘가의 둥지에 들어 있다가 그 순간은 놀라 무방비 상태로 뛰쳐 날아오르기 때문에 눈알의 활동이 보통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날아오르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 주위를 둘러보면 앙징스러운 알이 네 개에서 다섯 개, 혹은 새끼 새가 그만큼 숫자로 기다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제 머리 크기보다 크게 주둥이를 벌리며 울어대는 것이다.

뱁새나 방울새, 떼까치 들은 종달새만큼 교활하지는 않지만 사람이 보고 있으면 절대로 새끼가 있는 둥지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벌레를 입에 물고 있는 어미 새를 발견하면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한곳에 몸을 감추고 어미 새가 이쪽의 존재를 잊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미 새에게서 시선을 놓치기만 하면 어미 새의 모습이 사라지기 때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숨어 있어야 한다. 완전 이쪽의 존재를 잊게 되면 그때야 어미 새는 둥지로 돌아가고 우리는 새끼 새가 있는 둥지에 접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꺼내서 집으로 옮겨 온 새끼 새의 먹이이다. 벌레를 먹는 네 마리나 다섯 마리의 새끼 새는 쉬지 않고 입을 벌리고, 먹이를 졸라대어서 하루 종일 땡볕을 헤매며 벌레를 구해 와도 그 왕성한 식욕을 채우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드디어 소년은 삽을 가지고 나와 개미집을 파 뒤집는다. 하얀 쌀알 같은 개미알과 유충이 수십 개, 수백 개 흩어져 있다. 그러나 크기가 작아 열 개나 스무 개쯤의 알이나 새끼를 이 녀석들은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리는 것이다.

그동안 종아리며 팔뚝으로 기어 올라온 개미들이 소년의 온몸을, 특히 고추 끝을 수십 마리가 물어대는 것이다.

드디어 민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자처럼 커다랗게 웃어댄다.

"개미한테 동정 빼앗긴 이상한 남자가 강 선배님이라니......."

민주의 허리가 탁자 아래로 꺾여지고, 우리 세 사람은 세월을 퇴행하여 작은 홀 안을 가득 웃음소리로 채운다.

"바닷물이 진짜 짠맛인지 아닌지를 고등학교 때에야 확인한 순 촌놈도 있었어. 바닷물이 정말 짜다는 걸 발견한 충격이 이 땅에 별 필요도 없는 시인 하나를 더 만들어 낸 중요한 계기가 된 건 몰랐지?"

나는 드디어 바닷가 시골의 내 고향 집에 찾아왔던 윤이 바닷물을 찍어 먹어 보던 이야기를 꺼낸다. .....민주, 이 고약한 강 선배, 흉 하나만 더 볼까? 내가 직접 바닷물 맛을 그때까지 못 본 것은 부정할 생각 없으니까 인정하구....한번은 심각하게 이 친구가 그러는 거야. 너무 가난한 바닷가 사람들은 소금 반찬도 없을 때는 바닷물에 밥을 말아먹는다고..... 이 친구네 마을 아낙네들이 김장을 하면서 배추를 바닷물에 절구는 걸 보고 난 뒤였거든......솔직히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아려 왔어........이 친구, 거짓말을 너무 참말처럼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민주도 강선생 모든 발언에 대해서는 사전 점검이 필요할거야...... 3 방학 때였을 거야..... 한번은 낙지 알지? 낙지볶음 있잖아? 어린 낙지를 이 친구네 바닷가에서는 흔히 통째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더라고..... 그런데, 이 친구가 엄청 큰놈을 내게 통째로 먹으라는 거야. 자기가 앞서 작은 낙지로 시범을 보이고 난 뒤여서 어떻게 해? 일단 머리통을 입에 넣었지. 문제는 큰 머리통을 입에 넣은 것 까진 좋았는데, 순간 여덟 개의 다리에 붙은 흡반이 얼굴로 달라붙는가 하더니 다리 두개가 콧구멍으로 기어드는 거야..... 죽는 줄 알았어. 실제 큰놈을 그렇게 먹다가 목구멍이 막혀 죽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 친구 아버지가 그날 밤에야 말씀 하시더라구..... 똑같이 멍청한 놈들...... 큰 일 나려고....., 호통을 들었지......낙지를 이용한 살인 미수 사건이었던 셈이지.......한데 이 친구, 한 수 더 뜨는 거야.......축농증에는 그만인데 좋은 기회 놓쳤다, 하구 말야......그 낙지 발이 콧구멍 안쪽을 완전히 훑어 들어갔다 나오면 아무리 심한 축농증도 다 낫는다고.....실제 그런 식으로 심한 축농증 치료를 하는 민간요법이 있다는 거야.....이 친구 상상과 현실이 가끔 뒤섞여서 자기가 거짓말하는 걸 인식을 못하는 거야..... 그때 생각으로는 곧 소설가로 유명해질 줄 알았는데 신통하게도 요사이 학자가 되겠다니까 기다려 보자구.....민주는 콧물,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어댔고, 우리 역시 그 음울한 장마 비도 잊은 채 작은 홀이 떠나가게 웃어댔다.

그날 집 부근까지 버스를 같이 탔다가 잠깐 나란히 걸으면서 민주가 물었다.

"길러 본 산새들이 몇 종류나 되었는지 기억할 수 있어요?"

"다섯, 아니 열.....종달새, 뱁새, 오목눈이, 방울새, 물총새, 떼까치, 그리고 어치, 산까치라고도 하는 거 있지?...그건 꽤 오래 길렀어. 그리고 산비둘기, 물총새도 길렀는데....이 물총새가 물고기를 먹는 바람에 미꾸라지와 송사리를 잡으러 다니다가 물에 빠져 죽을 번 한 적도 있어. 그 일로 아버지한테 몹시 맞았지..... 힘든 종류로는 꿩, 오색딱따구리.......생각하면 좀 심했어."

"산새 새끼에게 그토록 집착을 보인 건 뭘까요?.... 그토록 여러 종류를, 한도 없이 직접 기르고 싶었던 건 결국 소유욕인가요? 지배욕인가요? 아니면 어떤 것에 대한 보상 욕구.....수컷의 미숙한 본능 표출?"

"우리 시골 애들은 다 그렇게 컸어....."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자라며 틈만 나면 새끼 산새를 잡아다 사육하곤 했지만 그 심리의 근저에 무엇이 깃들여 있었을까 따위에 대해서는 나이 먹은 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남자애들은 고추까지 물리지 않았을 거예요...... 소유욕, 지배욕, 자기 가치 체계 속에 모든 걸 늘어놓고 싶은 그런 욕망의 미숙한 표현......그게요. 혁명가, 독제자의 기질인 거 아시죠? 정치를 꿈꾸는 사람들, 권력에의 중독 증세, 프래이보이의 여성 섭렵, 결국 다 마찬가지거든요. 유년기의 가족 간, 동료 간의 애정 결핍이 때로 그 기질에 불을 붙이기도 해요."

"애정 결핍이?"

나는 섬뜩해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요. 강 선배님을 보고 있으면 금방 느껴져요. 쓸쓸함이....애써 태연하려 하는 것까지 드러나 보여요."

그녀는 그렇게 말해 놓고는 깊은 보조개를 보이고 골목길을 달려가 버렸다.

민주가 불쑥 선() 문답의 화두 같이 던져 놓고 간 <쓸쓸함>이란 말이 여러 날을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윤을 만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자네가 대꾸를 잘 못 한 거야. 그토록 새끼 새에 집념을 가졌던 건 인류가 가졌던 원초적 욕구, 집단 무의식이라고 했어야 하는 거라구.....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 욕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대신 하늘을 나는 새를 자기 곁에 대신 붙잡아 두고 욕구의 대리 투사를 하는 거라고..... 결국 같은 말이 되어 버렸나?.......결론부터 이야기하지. 박민주가 말야, 충격받지 말게.....강영규를 남자로 사랑하게 된 거야.....윤은 푸수수 웃는 얼굴로 결론을 내리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실 자네한테는 좀 그런 게 있어. 쓸쓸함이나 같은 말이지. 말을 않고 있을 때면 더..... 어머니의 부재.....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민주가 그걸 눈치챈 건 자네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니까, 앞으로 조심해."

생각지도 않게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정말 쓸쓸한 기분이 되어 그날 저녁 꽤 취하도록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윤이 모처럼 나를 내 혼자 사는 원룸 아파트에까지 데려다주어야 했을 만큼.....적당히 이제 장가 가. 궁상맞아 못 보겠다. 이럴 때 마누라 있으면 좋잖아? ....수도꼭지에서 좔좔 찬물을 한 컵 받아 내 머리맡에 놓아주고, 윤이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부터 이상하게 여름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나는 어머니의 꿈을 세 번이나 꾸었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을 빼고는 전혀 꾸지 않았던 어쩌면 의식적으로 지우고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꿈을 왜 다시 꾸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

사흘간이나 어머니의 모습이 집안에서 사라졌고, 사흘 후 어머니가 시신이 되어 거적에 덮여 방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마당 한켠에 자리 잡았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그 놈의 갈매기 혼령 때문이여.....아버지는 마당 한켠,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을 노려보며 그 장작불보다 더 벌겋게 취해서 그렇게만 말했었다.

갈매기나 물오리들에 혼령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열 살배기 아이로는 숙성한 감정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다.

내게 있어서 어머니는 안개이거나 늘 바람이었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슬그머니 어디로인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나타났다가는 안개나 연기같이 금방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런 존재였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내게 있어 어머니의 기억은 한 달이나, 두 달 터울로 먼바다 위에 해무(海霧"가 자욱히 덮인 그런 날 저녁 무렵, 밥 짓던 부지깽이를 아궁이에 그대로 둔 채 바람처럼 싸리문을 휘청거리며 열고 나가거나, 가을날 황혼 무렵 저녁노을이 하늘과 바다를 한 빛으로 물들여 일렁거리던 그러한 때, 널고 있던 빨래를 빨래통에 그대로 둔 채 어디론가 증발되곤 하던 그런 대상이었다.

한나절, 때로는 하루나 이틀 후 그녀는 힘든 품삯 일을 하고 돌아온 그런 모습이나, 실컷 매라도 맞고 온 그런 몰골로 사립문을 밀고 들어와 쓰러져 버리곤 했다.....갈매기 혼령 때문이여......아버지는 됫병 소주를 툇마루에 갔다 놓고 앉아 아내가 나가 버린 사립 쪽을 바라보며 자주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시체는 바다 물결이 거센 톱머리 갯바위 사이에 밀려 있었다고 했다. 이젠 제 맘대로 훨훨 갈매기들 따라 혼령으로 날아다닐 것이여......이제 제 편한 대로 갔어.....사람들은 아무도 내 어머니의 죽음을 서러워하거나 울지 않았다....그래, 죽음은 우는 게 아니야, 슬픔, 눈물. 그런 게 아니야...... 열 살배기 시골의 사내아이는 그렇게 혈육의 죽음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유일한 사람이 친구 윤이었다. 시골집에 데리고 갔던 고등학교 때 그가, 새어머니와 내 나이가 맞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웃거려서, 그를 바닷가로 데리고 나가서 그에게 말했었다..... 그래, 지금 엄마, 새엄마야. 내 친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바로 저기 톱머리 물에 빠져 죽었어. 갈매기 혼령이 씌워 몇 년간이나 바닷가를 헤매다가......되었어? 이제?.......난 한 방울도 울 엄마 시체 앞에서 눈물을 안 흘렸고......나만이 아니라, 아무도 내 엄마 죽음에 눈물을 안 흘렸어. 그래서 나는 앞으로 누가 죽어도 안 울 생각이지. 제 어미 죽었을 때 안 울었던 사람이 다른 죽음에 눈물 흘릴 수 있어?......미안해, 그가 허옇게 이빨을 드러낸 파도가 바위 잔등을 물어뜯고 긁어대는 걸 바라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 후 우리 사이에는 한 번도 내 어머니가 화제에 올라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내게 <쓸쓸함>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는 유년기의 모성 분리, 모성 부재가 성장 후 여성관과 삶의 행태에 어떤 식의 양상으로 나타나는가를 나를 표본으로 관찰하고 있었던 것일까.

학기가 끝나 가면서 학과 교수들의 성적 처리며. 사무정리 등, 내게는 일거리가 한꺼번에 쌓여 들었다.

사무 처리에 쫓기면서도 나는 거의 밤을 새우며 지독하게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나그네>에도 동료 직원들과 잠깐씩 두어 번 들린 것뿐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그동안 거의 20년간 한 번도 꾸지 않았던 어머니의 꿈을 세 번이나 꾸었다.

어머니는 흰옷의 한복 차림으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가고 있었다. 바다 위로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 있는 듯했는데도 어머니의 모습은 그 안개 속에서 조금도 흐려지지 않고 선명하게, 원근법이 무시된 그림처럼 보였다. 그림을 보듯이 그렇게 어머니의 모습을 내가 감동 없이 바라보는 그런 꿈이 첫 번째였다.

거의 비슷한 배경 속에서 다시 꿈에 본 어머니의 모습은 나를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할 듯 했지만 곧 어디로인가 사라져 버렸었다.

세 번째는 어머니의 시신이 거적에 덮여 있고, 아버지가 장작불 곁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풍경이었는데 흰옷의 어머니가 내 곁에서 내 손목을 잡은 채 그 풍경들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꿈이었다.

왜 어머니가 거적 속에 덮여 마당 한쪽에 누워 있는데 내 곁에 어머니가 또 있는 것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잠이 깨었다.

이상하게도 잠이 깬 뒤 내가 울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지겨운 장마와 더불어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함성과 구호들이 최루탄 냄새와 함께 사라져 버리자 교정은 매일 내리는 빗물에 잠겨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가는 느낌이 왔다.

7월 말이 되면서 비가 멈추면 곧바로 불볕더위가 몰려오곤 했다.

민주가 내 사무실에 들른 것은 불볕더위 속으로 열대지방의 스콜같이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고 난 오후였다.

"조금 식혀가면서 일하세요."

청바지 아랫단이 흠씬 젖은 채,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한 손으로 훔쳐내며 그녀는 포장해 온 빙수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조개를 보였다.

"시집이라도 가 버린 줄 알았더니......"

"갈려고 했었죠. 열대 우림 속에서 맨 날 벌거벗고 있는 건장한 원주민 추장한테요....... 며칠 인도네시아에 다녀왔어요. 외삼촌이 거기 계시거든요. 선배님한테 엽서라도 쓸려 했는데 우습게 되어 버렸어요. 엽서가요.... , 서울 돌아온 훨씬 뒤에 올 가능성 있는 거 있죠? 그게 얼마나 웃겨요?"

"뭐라고 쓸려고 그랬는데?"

"정말로 이쁜 새들이 엄청 많아서요....새끼 새 잡으러 안 오시겠느냐고 그런 이야기요...."

"새끼 새?"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민주도 깊이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정부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문명하고는 동떨어진 원시 부족들이 아직도 밀림 속에 많이 흩어져 살고 있는 거...... 쓸 건 무지 많았어요. 그리고 거기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 엄청 열심히 부자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일제 말에 강제로 징용에 끌려가서 그곳에 눌러앉아 살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더라구요. 신교환씨라고......70대 후반 할아버지를 만났거든요......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해방되고도 거기 그대로 눌러앉은 분인데 엄청 부자예요.....하인이 열 한 명이나 되요. 풀장 관리하는 사람에서부터 잔디만 돌보는 사람, 집안 청소하는 사람.......대단했어요.......동경대학에서 열대식물을 공부하다가 징용에 끌려가 현지 군인들의 군량 생산 연구팀으로 농장에서 일을 했대요. 1년에 3모작이 가능한 그 땅에다 제2의 조국을 만들겠다고 광복 후에도 귀국을 안 했다는데요....."

"거긴 학생들 데모 안 해?"

"수하르토 장기 집권으로 국민들 밑바닥 정서 속에는 불만들이 깊이 쌓여 가나 봐요. 겉으로는 조용하구요."

"침묵이 체념과 동의어는 아니거든."

"침묵의 민중이라는 게 어느 순간 불만 표출의 계기가 마련되면 엄청 폭발력을 가질 수도 있겠죠. 거기다 동 티모르 종족 분쟁도 있고요. 그래도 자카르타 시내만 겉으로 보면요, 사람들이 너무 더우니까 그저 지쳐 있는 것으로만 보여요. 과거 식민지 생활을 하두 오래한 타성에서인지 무표정하고, 나른하고 무기력하고 좌우간 사람들 표정이 겉으로는 그래요."

"사람 사는 곳의 갈등은 민족이고, 국가고 늘 마찬가지겠지."

"내 관심은요. 정부에서도 인구 파악이 안 되는 밀림 속 소수 종족들의 그 원시적 삶, 문명하고는 관계없는 그들의 모습이에요. 그 속에 묻혀 한 10..... 그냥 20년이고, 30년이고, 거기 원시 부족 마을에서 원주민들과 살아가면서요....... 엽서 부치지 못해서 대신 여기요....."

그녀가 가방에서 엽서 석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깃털로 머리 치장을 한 원시 부족의 남자들이 벌거벗은 채 페니스에 커다란 장식용 페니스 케이스를 끼우고 창을 치켜든 호전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엽서가 한 장, 원숭이 가면을 쓰고 민속춤을 추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리고 자카르타 시가지의 사진이 한 장이었다.

내 시선이 페니스 케이스를 찬 원주민 사진에 가 있는 것을 눈치챈 민주가, 보세요. 코데카라고 그래요. 그거. 보세요.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개미가 못 물죠, 해 놓고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민주의 귀국 환영 소주 파티를 하기로 하고 둘은 오랜만에 <나그네>로 내려갔다.

그녀는 소주를 콜라에 타서 석 잔을 마셨다.

석 잔째를 비우고 나더니 가방 속에서 작은 목걸이용 플라스틱 펜단트 하나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검은 베레모에 턱수염을 기른 미남형의 젊은 남자가 플라스틱 안에 갇혀 있었다.

"누군지 알겠어요?"

아주 눈에 익은 얼굴인데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게바라. 체 게바라예요."

"게바라?"

"쿠바의 카스트로의 동지였던 전설적인 혁명가.....지금은 죽었어요. 남미의 반체제 투쟁 집단에 참여했다가 죽은 걸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건 왜?"

"운동권 선배가 내게 이걸 주더라구요. .... 난 그쪽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기질도 아닌데 지난번 일로 나를 자기들 동지로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한현상이 몸에 불을 붙였을 때, 나 역시 같이 타 죽으려 뛰어든 것으로 착각하는 거죠. 아니 그렇게 몰아가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선배님, 우리 한 잔씩 더 해요."

그녀가 내 작은 잔과 그녀의 큰 잔에 소주를 같은 양으로 부었다.

"자요. 위하여."

"위하여.... 그런데, 뭘 위하여 해야지?"

"우리 만난 지 오늘이 100일이에요."

"그랬었나?"

"우리 집 골목길 포장마차에서 국수 같이 먹은 날로 해서 오늘이 100일째거든요."

우리는 잔을 부딪쳐 술을 비우고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어느새 빗줄기가 어둠에 젖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우산을 접고 어깨를 움츠리며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기질이라는 말 썼죠? 그래요. 난 비교적 현실주의자예요. 운동권 학생들 투쟁에도 그 정신만은 얼마간 공감도 해요. 하지만 난 아까 자카르타에서 신교환씨 만났다고 했죠? 식량 부족의 우리나라, 그래서 열대 식물학 공부, 일본군의 식량 조달을 위한 부서에 징집되었지만 3모작 가능한 그 환경에서 그는 누구나 배고픔을 덜 수 있을 만큼 먹거리 생산을 두 곱, 세 곱, 혹은 그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이 늘 머리 속에 우선했다고 했어요...... 선배님은 그를 반민족주의자라고 간단히 매도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잠시 말을 끊고 손바닥과 얼굴로 빗방울을 받았다.

나는 그녀가 다시 내 우산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요.....우리 아버지, 내겐 한 분뿐인 좋은 아버지는 외길로 살아온 충실한 공무원이에요.....그때, 그랬지요. 밤늦게 동네 앞길 포장마차에서 아버질 만날지 모르겠다고 했던 말.... 기억하시죠? , 아버지....지금..."

갑자기 흑 흐느끼며 그녀 상체가 내 가슴으로 기우뚱 쓰러져 왔다.

어쩔 수 없이 내 한팔이 그녀 어깨를 감쌌다.

"아버지가 왜?"

"경찰 간부예요. 아버지.....딸은 데모하러 다니고......아버지는 부하들과 그걸 진압하러 다니고......아버지는 딸에게 최루탄을 쏘고, 딸은 아버지에게 화염병을 던지고......말도 안 되는 희극, 말도 안 되는 3류 풍자, 아이러니 아니에요?.....우리 아버지, 데모 진압 중 부상으로 입원 중......어떻게 생각하세요?...... 학생들이 다치면 민주 열사가 되어 꽃다발에 묻혀요. 공무로 다친 우리 아버지 입원실에는 딸조차 몰래 눈치 보며 문병을 가야 하네요. 아버지가 부상당했다는 전화를 받고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싫어졌어요. 이 나라, 이 땅 모두가요. 그래서 도망치고 싶어요."

"이해해."

"아주 멀리.....아무 소식도 전해지지 않는 그런 곳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싶어요."

나는 우산을 기우뚱 내린 채, 한쪽 팔로 그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쏴아 소리를 내며 거친 바람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바람이 가슴속의 바닷물을 뒤집어 대며 허연 파도를 일으키며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

"괴로웠겠다. 그동안."

"왜 선배님은 선배님 이야길 안 해 줘요?"

"뭘 듣고 싶어?"

"뭐든지요. 선배님에 관계된 모든 것."

"윤 시인 외에는 모르는 얘기야."

"......"

"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그것도 바다에 빠져서....시체는 집안에도 못 들어오고 거적에 덮여 있었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둘은 우산을 접어 버린 채 거기 커다란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둥에 어깨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쓸쓸함. 겨울 들판처럼 황막한 풍경 속에 두 사람이 갇혀 있다는 느낌이 왔다......한 달쯤 거기 자카르타에 머물면서.....유학 간 선배들 같이 그림엽서를 써 보고 싶었어요....아주 상징적인 그런 용어들을 골라서.....선배님 얼굴에 묻은 쓸쓸함을 언제 발견했는지 추상적인 용어들로 모호한 엽서를 쓰려고 벼렸는데.....민주가 그 쓸쓸함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고 있었다......네 어깨에도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게 입을 열려다가 나는 고개를 들어 얼굴에 빗물을 받았다.

우린 자동차들이 씽씽대며 달려가는 학교 앞 도로에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빗줄기 속에 우리가 꼼짝 못 하고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어깨가 젖어 가고 처연하게 가슴속을 휘저으며 달려가는 바람소리를 우리는 같이 들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빗물에 섞여 몇 방울인가 흘러내렸다......학교 휴학했으면 해요. 전부터 사실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녀가 호주머니 속에서 체 게바라의 초상이 갇혀 있는 플라스틱 조각을 길을 향해 내팽개쳤다. 포장도로 위에 굴러떨어진 펜단트는 한순간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드러나 보였다가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그 위로 자동차들이 달려갔다.....아버지 다치기 전에도 힘이 들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요... 그녀의 목소리가 내 턱 밑에서 바람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 왔다.

나는 가만히 한 손으로 그녀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내 손가락 다섯 개가 빗이 되어 그녀 머리칼 속을 쓸기 시작하고 있었다.

 

현대소설 분야에서도 특히 어느 쪽 연구를?....... 전후 문학 쪽에 관심이 있다고 조금 전 이야기한 것 같은데.....정확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습니만 50년대 소설은 30년대의 내적인 기교가 잠시 중단된, 전쟁이라는 상황을 직접이든 간접이든 받아들이면서 실존적 분위기가 강했다고 생각됩니다......서구적 성격의 실존주의적 측면이 한국적 상황, 특히 민족끼리의 전쟁 경험 속에 어떻게 변용, 작품에 표출되었는지......존재나 상황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네에,..... 그렇지만 한국적 숙명 인식이랄까, 그런 게 우리 전후 문학에도 여전히 깊이 침잠해 있을 거라는.....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하지만 아직은....그저 막연한 느낌입니다. 제대로의 방향은 좀더 ......좋아요. 최인훈의 <광장>이나, 장용학의 <요한시집>, 이범선, 서기원...그런 작가들에게 그럼 관심이 많겠는데 그런가요?..... 세 사람의 구술 교수들은 무려 한 시간이 넘게, 내 머리칼 1cm 안쪽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흥미와 관심,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집념의 강도가 어떤지를 끈질기게도 물어 왔다....사실 전 김동리에 대한 관심이 깊습니다.....그래요? 비교적 젊은 교수가 안경 속에서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동리 문학은 전후 문학과는 이질 체계에 있는 걸로 인식되고 있는데 좀 특이한 관심이군, 좋아요. 그 관심의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 보세요..... 동리 소설은 외부적인 문제나 현실 상황에서 단절된 인간 내면의 본질 추구, 인간의 원형적 사고와 숙명 등에 관심을 보여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그가 사는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가정 하에서 동리 소설을 상황과의 관계 위에서 재조명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엉뚱합니다만......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다른 교수가 .....되었어요. 이 친구 입학되면 우리 한국 소설 문학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질 거 같잖습니까? 재미있는데.......껄껄껄......웃어 보였다. 젊은 교수도 빙그레 보였다....소설을 직접 써 보았거나 앞으로라도 쓸 생각은 없어요?......침묵을 지키던 다른 교수가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아직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창작을 해 보겠다는 생각은 더러 해 왔습니다......결혼은 했어요? 아직 아닙니다. 약혼이나, 애인은 그럼?...... 네에, 아직은요......나는 그때 그렇게 대답하면서 애인이 있다고 대답해야 면접 점수가 더 높게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빠르게 민주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민주를 애인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부정했다......부모님은?.....시골에 계십니다....,조금 나이 차이가 있는 남동생이 둘, 장남입니다......지금 D대학 조교로 있다고 그랬지요? 학비나 생활비는 본인이 직접 조달해야 되겠고......외국어 시험은 잘 쳤어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면접시험을 끝내고 K대학의 긴 오솔길을 걸어내려 오면서 정말 소설을 한 번 써 버릴까 하는 충동이 왔다.

윤은 가끔 자기 시가 발표된 잡지를 가져다 내게 보여주면서, 시 원고료가 나왔다고 소주값을 자기가 내곤 한다. 요새 시 원고료 형편없다며?.... 나는 술을 얻어 마시면서도 가끔은 심통을 부린다.....그러니까 자넨 소설을 써. 정말 한 번 써 보는 거라구. 어렸을 때 했던 못된 장난들만 추억해 내도 소설 몇 편은 될 거 아냐? 그리고 봐. 거기다 어차피 소설 이론을 공부해야 잖아? 자기 이론에 맞는 소설, 무슨 베스트 셀러 쓰라는 게 아니고, 자기가 추구하는 이론에 합당한 소설을 직접 쓸 수도 있잖아? 거기다 소설은 시 보다 원고료가 우선 많으니까 더러 고급술을 나도 얻어 마실 수 있고......그와 앉아 비현실적이고 엉뚱한 대사들에 빠져들다 보면 정말 격 높은 소설을 몇 편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말 한 번 써 봐? 물총새 잡으러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하늘이 노랗게 되던 걸 아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테니까 ..... 낙지 발로 축농증 치료한다는 사기꾼 이야기도 있잖아? ......새끼 새 찾으러 다닌 이야기만 해도 꽤 될텐데......그렇다니까. 그 개인적 체험들이 보편성만 획득하면 되는 거야. 그안에 기본적인 휴머니티만 도금이 가능하면, 거기다 적절한 언어의 안배, 위트가 있으면 좋고.....아니야, 거기 한국적인 전통 정서를 깔아야 해........한참을 둥둥, 대화의 해일에 묻히다가 내가 술집 탁자를 두드리며 고개를 흔든다.....말도 안 된다. 그러다 세상 사람 들, 다 소설가 되고, 시인되겠다. .....이봐 윤, 창작은 선천성이야. 천재성이라고.... 신 내린 무당 같은 천재성이 없고는 되질 않아. 위대한 시인, 소설가가 이론 공부를 따로 한 줄 알아? 그냥 쓰는 거야. 생래적으로 ....작품이 앞서 있고, 이론은 미련한 친구들이 그 작품 뒤를 쫓아가면서 나불대는 거지. 학문은 노력으로 가능해. 하지만 창작은 신의 영역이야....그럼 윤 아무개는 강영규 보다는 비교적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나?...자넨 신까지는 안돼......용 같으면 뭔가? 이무기 정도.....미당 서정주 쯤 되면 신에 근접해 있는 거고.....그러나 면접관의 질문 때문이었을까, 소설을 써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슴 안쪽을 흔들어 오면서 윤을 만나 한잔하고 싶어졌다.

입학시험의 긴장이 한순간 풀려 버린 것인가.

갈증이 오면서 윤의 전화번호를 빠르게 기억 속에서 더듬어 내었다.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민주도 보고 싶어졌었다.

나는 공중전화를 찾아 윤이 나가는 학원에 전화를 건다. 10분쯤 후에 전화를 하면 수업이 끝나니까 통화가 가능할거라고 아가씨가 친절하게 답변해 준다.

운이 괜찮아 합격이 되면 앞으로 1주일에 두 번은 들락거려야 할 K대학 교문 부근을 빙 둘러보고, 맨 앞서 눈에 들어 온 2층 찻집 계단을 올라가 커피 한 잔을 시킨다.

10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윤의 학원 전화번호를 돌린다.

민주에게도 전화를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녀 전화번호나 연락할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고? . 그건 호외감이다. 거기 그대로 꼼짝 말고 20분만 있어. 우리들 한꺼번에 그쪽으로 택시 타고 갈 테니까."

수화기 앞에 기다리고 있었던지 윤은 직접 전화를 받으며, 나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쾌활하게 대꾸한다.

윤은 정확하게 20분 후 같은 학원 동료라며 젊은 여자 둘과 같이 나타난다.

최선희. 30. 영어 강사. 미국 유학생으로 완벽한 미국식 회화를 구사할 수 있음, 부유한 부모 덕분에 유학 중 세계 여행을 상당히 많이 해서 세계 각 지역에 대한 짧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 여행 가이드로도 조언이 가능함. 고등학교 때 미팅으로 만난 모 재벌 회사의 촉망받는 사원과 목하 열애 중. 곧 결혼에 골인할 것으로 보임. 성격은 긍정적이고 조용하지만 술값은 잘 계산함. 술 실력, 소주 한 병 반, 위스키 반 병.

조영선. 31. 논술 강사. 현재까지는 독신주의자를 표방하고 있지만 노처녀 변덕은 알 수 없음. 시시콜콜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어 가끔 상대방으로 하여 전공을 헷갈리게 만듦. 박학다식, 다변이다가도 때로 긴 침묵으로 또다시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는 조울증 증세 있음. 산새나 물고기, 식물에 대한 지식들도 전문가 못지않아 강영규와 그 방면의 진지한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임. 가끔 혼자 디스코텍에 가서 전신 운동을 즐기기도 한다는데 확인된 바는 없음. 때로 다른 취미와 전공을 가진 사람으로 느껴지게 하는 카멜레온 같은 여자. 술 실력, 소주 한 병.

강영규. 29. 현재 D대학 조교로 시한부 근무 중임. 곧 학위 논문을 쓴다고 백수로 전락, 전철표를 못 사서 먼 거리를 걸어 다닐 가능성도 있음. 한 시간 전 여기 K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시험 면접에서 진땀을 흘리고 나온 중임, 합격 가능성 95%정도. 3, 4년 후면 문학박사 학위는 확실하고, 그 무렵 변두리 신설대학 전임 교수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음. 아직 깊이 사귀는 여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남성에 문제가 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된 바 없음. 최근 후배 여학생 하나와 상호 연애 감정을 어렴풋이 느껴가고 있는 징후가 일부 포착되고 있으나 여성 공포증에 여성 기피 증세가 있어 발전 관계는 예측이 힘듬. 시골 바닷가에서 자라면서 어렸을 적 짓궂은 장난들을 많이 한 악동 출신으로 친구들에게 선의의 피해를 입힌 적 있음. 특히 살아 있는 낙지를 통째로 먹으면서 낙지 흡반이 콧구멍 속으로 기어드는 것을 가끔 즐김. 본인은 축농증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함. 가끔 현실과 상상을 구별하지 않아 같이 어울려 떠들다 보면 상대방도 곧잘 헷갈리게 됨. 이 기질은 앞으로 소설을 쓸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임.

윤이 찻집에 들어와 차가 나오기도 전에 서로가 초면인 동석자들을 빠르게 소개했다. 워낙 이야기가 빨라서 두 여자에 관한 부분들이 머리 속에서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두 여자는 윤이 떠드는 동안 웃기만 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해 두었던 듯, 두 사람은 곧바로 친밀감을 보여 왔다.

"낙지 다리가 콧구멍으로 밀고 들어가요?"

화장기 없는 얼굴의 논술 강사가 그 대목이 특히 인상에 남았는지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앞서 말을 걸었다.

"막힌 콧구멍 뚫리는 건 이해되는데요. 그 콧구멍에 들어간 낙지는 그다음 어떻게 처리해요?"

"그건 삶거나 볶아서 저기 윤진우가 먹습니다. 윤 시인은 낙지 살아 있는 건 못 먹거든요."

"코딱지 같은 게 안 붙어 있을까요? 낙지나 문어, 주꾸미, 꼴뚜기 같은 다족류 연체동물은 흡반이 강하거든요."

윤의 소개대로 그녀 조영선은 낙지 다리에 붙은 흡반에서 최근에는 영양가 높은 주사액을 뽑아 내는 연구가 있었다고 한술 더 뜨는 화제를 꺼냈다.

거기에 얼마 전 포장마차에서 날 꼴뚜기를 안주로 먹은 남자가 복어 독에 감염되어 곧바로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복어알에 지독한 독이 있잖아요? 복어 중에 어떤 녀석은 꼴뚜기 몸 가까이에다가 알을 낳는다는군요. 복어 독이 묻은 꼴뚜기를 먹고 즉사한 거죠...... 동물들의 이상한 습성을 우리 기준으로는 이해 할 수가 없어요. 모두가 타자(他者) 관계죠. .......사자가 코끼리 배설물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 같은 거 말예요. 코끼리 배설물을 먹고 환각 상태에 빠지는 습관이 왜 사자에게 있는지, 그 배설물이 다른 동물에게도 환각 상태를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전혀 모르잖나요? 그래서 용인에 있는 사파리 동물원에서는 코끼리와 사자가 같이 방사되는 곳에서 사육사가 종일을 졸졸 코끼리 엉덩이를 따라다니거든요. 사자가 코끼리 배설물을 먹은 후 환각 상태로 똥 주정을 하기 전에 배설물을 치워야 하니깐요.....영어 강사와 윤은 늬들 잘 만났다, 하는 눈으로 우리 쪽을 건너다보며 빙글거렸다.

맨 처음 낙지가 화제에 올랐었기 때문에 우리는 낚지볶음을 먹으러 무교동으로 자리를 옮겨 소주를 마셨다. 낙지집에서는 마침 그 집 출입구에 잉꼬 한 쌍이 새장에 있었는데 그 때문에 화제가 새 쪽으로 옮아갔다..... 제네들 원산지가 호주인 건 아시지요?로 시작된 화제는 내 유년 시절의 기억에 뒤섞여 결국은 딱따구리의 혀에 관한 이야기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딱따구리 같은 새는 흔하지가 않아서 일반인으로 그 생태나 해부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제까지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기껏 천연기념물....크낙새....까지가 한계였고 지식이었다. 그런데 조영선은 딱따구리의 특이한 습성, 마른 고목을 쪼아대면서 그 반동으로 나무 껍질 속의 벌레가 기어 나오도록 한 다음 독특하게 긴 혀로 낼름 벌레를 잡는 습성에서부터, 고대 조류에서나 있었던 딱따구리 긴 혀의 특이한 구조, 머리 위의 두개골을 한 바퀴 돌아 왼쪽 콧구멍에 그 끝을 날름대고 있는....그래서 딱따구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쪽 콧구멍 속에서 끊임없이 혀끝이 들락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까지를 자세히도 알고 있었다.

"딱따구리를 화제로 이야기 나눌 여자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술자리가 끝나 커피 한 잔씩을 나누면서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키위라는 새 들어 보셨어요?"

"이름은 알죠. 뉴질랜드의 상징적인 새. 날개가 없는..."

"그 새가 야행성이라는 것도 알고 계세요?"

"야행성입니까? 그 새가?"

"날지를 못하니까 낮에 나다니다간 다른 짐승에게 잡혀 먹죠. 밤이 되어서만 간신히 먹이를 찾아 나서는 비극적인 새에요. 더구나 제 몸집의 절반 가까이 큰 알을 낳아야 하기 때문에 알을 낳다가 많이 죽어요."

"그렇군요."

최 선생이 앞서 자리를 떴고, 윤 역시 딸아이가 감기가 걸렸다면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도 찻집을 나왔다.

"입가심 맥주로 한 잔씩만 더하고 헤어질까요?"

내가 앞서 말했다.

"딱 한 병씩 해요."

찻집 옆에 붙은 작은 생맥주집에서 그녀 말대로 우리는 맥주를 병으로 딱 하나씩 더하고 헤어졌다.

"왜 결혼 안 하느냐고 안 물어요?"

전철 역 입구에서 그녀가 물었다.

"남자들은 서른쯤 된 여자가 혼자 산다고 하면 왜 결혼을 않느냐고 대개 묻지 않나요?"

"딱따구리나 키위새를 화제로 대화를 나눌 남자, 혹은 사자가 왜 코끼리 배설물을 기를 쓰고 먹고 난 뒤 환각 상태에 빠질까, 그런 대화가 가능한 젊은이가 살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각박한 거겠죠."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면서....<나그네>인가 하는 소주집, 언제 한번 찾아가도 되겠어요?...., 내 전화번호 있어요....그녀가 명함 한 장을 꺼내 내게 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총총히 계단을 내려간 뒤 가로등 밑에서 들여다본 그녀 명함에는 그녀 이름과 휴대폰 전화번호만이 달랑 적혀 있었다.

그해 가을과 다음 해 봄학기까지는 대학원 박사과정의 강의가 목요일 하루와 금요일 오전에 있었고, 직장 쪽은 전보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구호와 최루탄 냄새에 쌓여서 우울하고 힘들게 지났다.

중요한 것은 내가 20대를 보내 버리고 30대에 들어선 사실이었다.

20대 초반에 30이라는 나이를 상상하면서 젊음도 한물가버린 꾀죄죄한 생활인을 생각하곤 했는데 어느새 내가 그 자리에 와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확연하게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할 텐데도 생활과 의식 전반에서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내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지난 가을학기가 시작될 때 나는 인류학과 조교실에서 박민주의 휴학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 집 전화번호를 적어 왔었다.

그러나 직접 민주에게 전화를 걸어 보진 않았다.

퇴근하는 길, 버스 정류장에서 비 오던 날 같이 기대 서 있던 커다란 플라타너스 꼭대기를 올려다본 일이 있었다.

또 넓은 도로 어딘가에 나뒹굴다 으깨어졌을 체 게바라의 초상이 든 펜단트가 떨어졌던 위치를 짐작으로 살펴보았지만 아스팔트 위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현상이 몸에 신나를 뿌리고 라이터 불을 켠 자리 역시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앞을 지날 때면 불길에 쌓인 한 남학생의 환상과 그를 덮쳐 불을 끄려는 몇 명의 학생들 환영이 겹치면서 민주의 깊은 보조개진 뺨이 떠올랐다.

가끔은 민주가 보고 싶었다.

그녀 아버지가 아직도 병원에 누워 있는지, 혹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퇴직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보다 아직 민주가 아버지 병실을 지키고 있을지, 혹은 친척이 있다는 인도네시아를 다시 찾아서 거기 어디 깊은 밀림 속, 페니스 케이스를 차고 있는 원주민 부족 마을을 기웃거리고 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대학원 박사과정 합격자 발표가 있었던 오후, 그리고 그해 겨울, 눈이 많이 내리던 한낮, 또 봄비답지 않게 장대비가 쏟아지던 이듬해 늦은 봄날 저녁, 두어 번씩 수화기를 들기까진 했지만 그녀 집 전화번호를 누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뒷날 <나그네>, 내 사무실에 민주가 나타나면 수화기를 들었다가 번호를 돌리지는 않았다는 말을 할 셈이었다. 퇴근하면서 버스 정류장 곁의 플라타너스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는 이야기도 할 셈이었다. 그럼, 그녀가 보조개를 만들며 장난스럽게 물을 것이다. 왜 번호를 안 눌렀어요? 겁이 났어요?.....그때 해야 할 내 대답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너 역시 내게 전화를 할 생각이 났었다고 할까 봐 겁이 났어...... 그건 아니었다....., 우리 민주, 약혼자하고 지금 자카르타에 가 있는데 뉘시우? 그런 대답이 나올까 봐 겁이 났지....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갑자기 민주 음성이 수화기에서 나오면......그래 이상하게 쓸쓸해질 것 같아서.....아주 깊은 쓸쓸함이 들켜 버릴 것 같아서..... 그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도 정확한 정답일 수 없겠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나는 새해 서른 살이 되면서 상당히 많은 책들을 읽어댔다.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 미셀 푸코의 <문학비평>, 미셸 뷔토르의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위르겐 슈람케의 <현대소설의 이론>,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 조르주 바타이유의 <문학과 악>, 신구문화사 판 <전후 세계문학전집>, 보들레르, 미슐레, 윌리암 블레이크, 사드, 마르셀 프루스트, 카푸카, 장 주네......김동인, 이기영, 홍명희, 이상...... 읽어야 할 책들은 그러나 여전히 쌓여 갔고 직장과 학교를 오가는 도로는 자주 정체되어 시간을 잡아먹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그러나 <나그네>에 들려 술을 마셨으며 윤과 최선희, 조영선이 서너 번쯤 그 자리에 동석했었다.

여전히 최선희는 말을 아끼는 편이었으며, 조영선은 늘 새로운 잡학 상식으로 우리를 기죽게 하곤 했다.

보통은 최근에 읽은 문학이나 철학에 관련된 책이 화제가 되었고, 거기에 내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발표할 문학적 관심이나 주장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특히 장 주네에 대해서는 네 사람의 관심이 비슷해서 상당히 깊게까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도덕적 엄숙성이라던가 관습이 주네에 오면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어 버리는가.

("이라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 하는 따위에서 출발하여 윤은 시인답게 희랍 신화에서 보들레르와 사드에 이르는 시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성 의식과 관련된 악마성에 대해 열을 뿜으며 자기 의견을 쏟아내곤 했다.

그날은 집에서 기르는 관상용 식물 이야기가 나와 식물의 음악에 대한 반응, 조영선은 그것을 식물 심리학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쓰면서 설명했는데 식물의 감정 표현에 대한 반응을 특수 장비로 촬영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다가 팝보다는 클래식이 난()을 재배하는데 효과가 있었다는 일본의 식물학 잡지의 리포트 내용에서, 결국 난() 이야기로, 난 예찬론으로 비약이 되었다.

"난에는 나눔의 미학이 있어요. 수석이나 분재에 빠진 사람들하고는 나는 절대 교제 안 해요.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거든요.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라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그 소유와 자기 집착, 소름이 끼쳐요. 혼자만 갖겠다는 그 소유욕과 편집증을 생각해 봐요."

"난도 아주 비싸게 거래가 된다는 기사를 봤는데요."

"난에도 그런 측면은 있어요. 희귀한 난은 분 하나에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니까...그런 특수한 사례를 빼면 보통 난은 해마다 새로운 싹이 돋아 늘어나요. 촉이라고 하죠. 불어난 난을 친구에게, 후배에게 우정으로 분양해 주고 꽃이 피면 잠시 탈속의 착각도 해 보고.....세속과 상관없이 그 향에 취해 보는 것도 괜찮지만, 우선 누구에겐가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게 수석이나 분재와 본질적으로 다르거든요."

그녀는 송매, 용자, 집원, 만자 등의 전통적 중국란의 생태에서 시작하여, 대만산 오봉(吳鳳)에 얽힌 비극적인 전설에.... 법정 스님의 수필 <무소유>의 내용,..... 2차 대전의 패망 속에서도 중국에 주둔 중이었던 일본군이 자기 부대의 마스코트로 길렀던 중국란 군기(軍旗"를 본국에까지 가져가 증식시킨 지독한 민족성에, 일본 춘란과 한란의 꽃 색깔에까지 전문가 못지않게 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선생도 이제, 난 기르는 남자라면 오케이 하시는 거요?"

"대화의 일부는 공유되겠죠. 그래요. 일부."

"사자 배설물이나 딱따구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에 보들레르나 서정주 초기 시를 화제에 끼울 수 있고, 고전 음악이나 팝송에도 자기 주견을 보이면서도 난을 기르는 그런 남자, 흔하지는 않아도 찾아보면 있기는 할 거예요. 하지만 이미 유부남이거나 나이 먹어 버린 이혼남이 아닐지 조금 걱정은 되네요."

"유부남이나 이혼남이면 어때요? 그쪽 세계를 변형이나 파괴시킬 의향이 없는데."

"사람과 사람 관계를 그토록 수학적인 선으로 구별 짓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네요."

"인간관계, 남녀 관계는 결국 타자와 타자에요, 이질감이나 허망함의 확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혼이나 깊은 교제는 낭비라는 생각에 변화는 없어요. 서로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씩만 공유하고, 나누고, 그럼 절망에 이를 필요도 없고 좋지 않겠어요?".....그런데 강선생은 내가 시집가면 그렇게도 좋겠어요?"

"글쎄요. 갑돌이 갑순이도 시집가고, 장가간 뒤에, 달을 보고 운 것으로 시나리오가 되어 있으니......나도 장가를 가고 나서야 알 거 같습니다."

"장가는 갈 거예요?`"

"글쎄 아직은 나도...."

윤과 최선희가 우리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싱글거리며 웃었다....나는 그래서 조선생에게 시집을 가라느니, 남자란 게 어떻다느니 그런 소리를 절대로 않거든....올드 미스의 심리란 게 아주 묘해서 말이야....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술값, 오늘은 제가 내요, 조선생이 쭈르르 주방 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계속되는 대학원의 세미나 준비와 학과 교수들의 논문 교정, 학생들의 출결 점검들로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일주일에 하루 반을 대학원 쪽에 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들로 그간 해 오던 일을 표시 나지 않게 눈치껏 처리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윤은 만날 때마다 소설 이야기를 꺼냈지만 소설을 써 보겠다던 생각은 대학원 수강이 시작되면서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깐깐한 내 지도교수는 한 학기가 훨씬 지난 뒤에도 처음 면접 때의 내 대답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면서, 학문이라는 것이 만만하게 치기 어린 발상이나, 추론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우려는 듯, 잠시도 내 의식의 휴식을 허용하지 않았다.....적어도 하나의 학문적 주장과 학설을 세우기 위해서는 거기 따른 객관적 자료와 명징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학문은 보편성이 아니라 전문성이고, 감상적 정서가 아닌 논리라는 것을 명심하도록.....소설을 쓸 수도 있어요. 그러나 창작과 학문은 기본적으로 그 코드가 달라요. 한쪽이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다른 한쪽은 그 뿌리가 머리니까.....더구나 시류라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학문은 유행이나 대중적 관심하고는 별개의 코드거든요. 특별한 천재의 경우는 머리와 가슴을 정확히 이등분하여 창작과 학문을 병행할 수도 있겠지요...<특별한>이라는 단어에 특별하게 엑센트를 주며 이야기하는 지도교수의 안경 안쪽에서 날카롭게 빛을 내는 눈앞에 서면 나는 오금이 저려들곤 했다.... 그래요. 교수님 당분간 소설 창작에는 신경 안 쓰겠습니다...... 나는 가급적 시국이나 현실 문제 쪽에는 귀를 닫고 살기로 했다. 지도교수의 얘기대로 학문은 오직 객관적 자료와 논리적 근거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초여름이 되면서 학생회에서는 여러 날째 한현상의 1주기 추도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날은 학교 곳곳에 검은 만장이 휘날리기 시작했고, 광장 한쪽에 분향소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창문으로 내다보였다.

합판더미를 실은 추럭과 무대를 만들기 위해 쌓아 놓은 교단 수십 개가 초여름의 초록색 교정을 공사 현장처럼 만들어 갔다.

아마 며칠간은 학부 강의 진행이 힘드리라. 그러나 교수들은 강의실이 비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강의실에 들어갈 것이다. 3분이나, 5분쯤 빈 교실에 서 있다가 그들은 처연해진 기분으로 연구실로 돌아가 줄담배를 태울 것이다. 더러 어떤 교수는 교단을 꺼내가 버린 황막해진 강의실 풍경에도 아랑곳 않고 학생이 없는 그 강의실 칠판 앞에서 50분을 고집스럽게 서 있다가 출입문을 밀고 나올 수도 있으리라.

며칠간 대학 2학년의 평범했던 학생, 한현상은 민족의 열사가 되어 다시 살아나 교정 전체를 지배할 것이다. 추도사 속에서 그는 영웅으로 부활되고, 불꽃의 생명으로 타올라 분향소에서 광주 망월동까지의 긴 거리를 울음과 투지에 찬 결의와 연민의 젊은이들로 채우리라.

죽어서 사는 삶. 불꽃 속에 타올라 재가 된 뒤, 문득 다시 재생하는 새, 피닉스. 한현상은 이제 피닉스로 다시 날아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이맘때의 평범하기 그지없던 법학과 2학년 학생 한현상은 어디에 있는가. 몇 년간 숱하게 다치고 죽은 사람들, 그 개인 개인의 생활, 사랑, 희망, 넘쳐나던 열정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문의 행간에 묻혀 사라진 진압 부대의 사망자와 부상자, 그 가족들의 육친에 대한 사랑과 슬픔은 어느 자리에 놓여야 하는가. 역사는 어차피 엄정한 객관이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조명을 바꾼다. 박민주를 생각한다. 데모 진압 중 부상을 입었다던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네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불구가 되었거나 이미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민주 아버지의 고통이나, 민주의 고뇌 서린 새벽이 끼어들 역사의 행간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제방을 쌓아 올리는 거대한 공사장에 돌멩이 하나, 흙 한 줌으로의 소멸이 역사의 당위성이라는 것일까.

삶과 죽음, 한 개인의 소멸과 그 영향. 창밖으로 지나가는 시류의 흐름과 개인 한 사람 한 사람만의 자기 세계의 완벽한 독립이 가능한 것인지. 외부에서 가해지는 시류의 거대한 물리력 앞에서 완전한 개인적 자유가 가능한 것인지, 잡다한 사념의 해일 속에서 나는 서서히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귀를 닫고, 눈을 감고, 학문적 자료 더미와 활자 속에 틀어박힐 수 있는 것인지에도 회의가 온다. 모든 외부적 조건들에서 완전 독립되어 사색하고 활동할 수 있는 두뇌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그 완전 자유, 절대 자유라는 것은 개념으로만 존재되는 것은 아닌지, 두통이 점점 심해져 갔다.

나는 도무지 정신이 집중되지 않아 펴놓았던 책들을 서류 가방에 밀어 넣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일본 추리소설 번역 원고 윤문은 마감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원고용지 2,000매 분량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잡지사나 출판사를 떠돌며 청춘을 보낸 나이 든 노인에게 아마 싼 값으로 번역을 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문장이나 맞춤법, 매끄럽지 못한 표현들을 손질하는데 나 같은 하급의 값싼 지식 노동자가 동원되는 것이다. 책의 표지에나 후기 쪽의 어디에도 이 원고를 우리말로 서툴게 옮긴 구식 일본어에 능숙한 노인이나, 내 이름은 표시되지 않는다.

원작자 이름 아래 같은 크기의 활자로 소개되는 번역자의 이름은 이 원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명 대학의 권위 있는 교수 이름이 찍혀 나갈 것이고, 나는 지식 세계의 지적 사기단의 말단 하수인이 되는 셈이다.

몇 푼의 윤문료를 받고 내가 전혀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 쓴 글을, 내가 전혀 모른 사람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으로 서점에 꽂힐 책의 원고를 손질하는 것이다.

출판계의 이 오래된 관행이 그러나 대학원생의 생활비를 만들어 준다.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의 숱한 일 들을 대학생이 되고는 쉬지 않고 해 왔으니까 그중에서 이건 그러나 고급스러운 일이야. 윤과 출판문화를 힐난하다가 동시에 우리는 씁쓰레하게 웃었다.....학원은 학원대로 이건 녹음기야. 그러기만 하는 줄 알아? 시간마다 학생들의 반응이 체크되는 거야. 실력? 교육? 그런 게 어디 있어?.....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느냐의 문제야. 학생들이 넋이 빠지도록 마이크를 들고 연기를 하는 거라구....코미디언이 되었다가, 녹음기가 되었다가, 가끔 나도 회의가 와....그래서 우리는 만나면 생활과 관계되는 어떤 이야기도 화제에 올리지를 않는다.

내일은 대학원에 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도무지 읽어야 할 책의 내용들이 자꾸 의식 밖으로만 떠돌아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오늘 사무실에서 틈틈이 읽을 계획이던 책은 절반밖에 소화를 못 했다는 자괴감이 스스로를 초라하게 질책해 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면서 분향소 벽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걸개그림 속의 주인공 모습을 보았다.

곱사한 얼굴에 일부러 강조해 그렸겠지만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젊은 투사의 모습이 분향소 벽면 하나를 완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만약 그날 불붙고 있는 한현상 쪽으로 뛰어 달려갔던 박민주가 머리칼 일부가 아니라 전신에 불이 붙어 그녀 역시 절명하고 말았다면 민주의 얼굴도 저렇게 눈빛이 강한 그림으로 걸렸으리라. 그래서 그녀도 며칠간 부활의 축제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불변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진리는 늘 새로운 진리에 의해 파괴되고 부정되고 수정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닌가.

나는 걸음을 빨리해서 얼른 분향소 앞을 떠났다.

소식이 끊긴 지 1년이 되어 가는 민주에 대한 기억들이 살아나는 것이 두려웠다. 사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밀려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면 언제고 <쓸쓸함>이라는 단어가 파도소리 같이 아득하게 들려 오고, 바람 소리, 빗소리들을 듣거나 연상할 때면 어김없이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나를 망연한 그리움에 잠기게 하리라는 것을 안다.

20대를 회상하는 일이 있을 때도 어김없이 그녀가 보조개를 깊이 만들며 <쓸쓸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이 너무 많이 밀려 있었다.

.....포연이 자욱히 피어오르는 저 언덕 묘지 위에...... 비에 젖은 흐느낌 울려 퍼지어 살아 귓가에 넘실거린다......피 분수 솟구쳐 붉게 드리운 흰옷의 꽃망울...상처 남은 가슴 위로 ...분노의 염원이 숨쉰다....떨리는 저 몸부림....목 메인 그 함성으로.....쓰러져 ........그대 원혼...가슴에 남아....타올라라...복수 복수를 위해...굽이쳐라...해방을 위해....

.....총성이 아련히 멀어져 가는 메마른 흙무덤에.... 핏발 서린 눈동자 잠들어 있고 깊은 어두움만이 고였다......불꽃에 휩싸여 재가되어 버린.....흰옷의 옛 사랑...타다 남은 잿더미에 피의 이 산천이 숨쉰다...떨리는 저 몸부림...목 메인 그 함성으로 쓰러져... ...그대 원혼....가슴에 남아 ...타올라라....복수 복수를 위해...굽이쳐라...해방을 위해.....

분향소 설치가 끝났는지 갑자기 그쪽에서 녹음된 테잎이 돌아가는 소리가 내 뒤통수를 따라붙었다. 나는 가급적 그 노래에서 멀어지려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도 그 노래는 계속 내가 교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반복되면서 내 뒤통수를 따라왔다.

우선 내일 아침 대학원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읽어 치우고 요약하여 발표할 책이 두 권이었다.

프로프의 <민담학 개론>과 김태곤의 <한국무속연구>.

아마 두 권을 읽고 요약하려면 새벽까지 책상 앞에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요약문을 컴퓨터 자판으로 두드릴 즈음에는 아침이 오고 있을 수도 있었다.

되도록 빨리 그 노래에서 벗어나려 빠르게 교문을 빠져나왔는데 한현상이 혼자 피켓을 들고 앉아 있었던 자리에 사람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흰옷을 입은 여자였다.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져 나는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한현상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여자는 무릎을 세우고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무릎에 묻고 있었다. 오래전부터였는지 지금 막 그녀가 거기 앉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만 움직일 수가 없어져 버렸다. 가슴속이 마구 쿵쾅거려 오기 시작했다.

여자는 오래도록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그렇게 있었다.

분향소에서 들려 오는 진혼곡 소리는 계속되었다.

나는 교문 기둥에 잠시 기대서서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천천히 황혼의 어스름이 그 여자 주위를 감싸 도는 것을 지켜보았다. 늦게 교문을 나가던 학생들 몇이 그 여자 쪽에 시선을 주었다가 멀어졌다. 어둠이 시작되고 있는 교문 앞의 넓은 광장에는 그 흰옷의 여자와 나만 남아 있었다. 얼굴 윤곽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내 담배가 다 타고났을 때 여자가 일어나서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천천히 골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그 여자가 옆구리에 스케치북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왜 갑자기 그 여자의 뒷모습에서 어머니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흰옷과 어스름의 배색, 혹은 미끄러지듯 골목으로의 이동에서 꿈속에서 보았던 그 물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여 가던 어머니의 잔영이 살아난 모양이었다.

여자가 완전히 몸을 감추자 홀리듯 나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여자가 사라진 골목길을 뒤따라 뛰어갔다.

그러나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 한채희를 나는 <나그네>에서 곧바로 다시 만났다.

늘 어울려 다니던 윤이나, 다른 패거리 없이 혼자 들어서는 나를 잠시 의아해하던 아주머니는 심상하게 두부 한 모와 소주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지 몸에다 불 싸질렀다던 학생 죽은 지가 벌써 1년이 되었수?.....아주머니는 내 잔에 술을 한잔 따라 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틀어 놓은 진혼가가 이 술집 안까지 아스라하게 끊겼다 들리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젊은 학생들 죄 없이 죽게는 안 해야 되는데.....그 죄값을 어떻게 벗으려고 그러는지..... 오늘은 손님도 없는데 한잔하세요.... 못 먹우...내 술 먹는 거, 강선생 언제 본 적 있수?......내가 술 먹으면 술장사 안 하고 내가 다 마셔 버리라고.......언젠가 영감님 다녀가셨다고 눈썹도 그리시고 했던 날....혼자 한 병을 다 마시던 사람은 그럼 다른 아주머니였나 보네요......한 병을? 아이구, 숭해라. 별걸 다 안 잊어버리네. 그게 벌써 해가 두 해나 바뀌었는데....요새는 그 영감님 안 오세요? 풍채가 좋으시던데.....젊었을 때는 인물 하나는 훤했지. 얼마 전에 풍을 맞았대누먼.....그래서 큰 집 안방에서 꼼짝도 못 하는 모양이우. 그 영감 젊어서 죄 많이 지어서 죄값 받는 거라우. 그래도 꼼짝도 못 한다니 마음이 안 좋아....가서 한 번 볼 수도 없고.....손님이 한 명도 없어서였을까. 아주머니는 평소 같지 않게 내가 따라 주는 소주를 손을 내 저으면서도 석 잔이나 받아 마셨다.

결국 소주 한 병이 더 왔고, 나는 술 마시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혼자 잔을 비워 갔다.

그때 한 여자가 흰 한복을 입고 그 술집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여기 소주 한 병 줘요."

주방 쪽으로 얼굴을 돌려 한마디하고 여자는 벽 쪽을 바라보고 앉아 버렸다.

진혼곡 소리가 흘러드는 작은 술집은 더 이상 손님이 들어서지 않고 시간이 흘렀다. 홀 안은 다른 방향으로 얼굴을 돌린 두 사람이 각자 자기 잔을 채우고 비워 가는 작은 소리뿐, 고교로운 정적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여자는 교문 앞에 앉아 있을 때보다 몸피가 작게 느껴졌다.

처음 얼굴을 돌렸을 때 눈썹이 진하게 느껴진 것 말고는 맞은편 벽을 향해 앉은 여자의 생김새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벽을 마주하고 앉는 순간부터 그녀는 계속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어서 그녀 주변이 안개에 덮인 듯한 분위기가 되어 갔다. 학교 쪽에서 진혼곡 소리는 끊길 듯 이어지며 계속되었다.....여기 한 병 더요....벽을 향한 채 여자가 말했다.

소주 한 병을 더 가져간 아주머니에게 여자가 계산을 하는 것 같았다.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정적 속에서 혼자 마신 두 병째가 바닥이 났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나는 전혀 술기가 느껴지지를 않았다. 아주머니를 불러 술값을 계산했다.

바로 그때 여자도 혼자 두 병을 다 마셨는지 의자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자의 몸이 연체동물같이 스르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색씨. 왜 그러우? 여봐요..."

아주머니가 황급히 달려와 그녀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지만 여자의 몸은 마치 무척추 동물 같이 다시 흐물거리며 무너져 내렸다.....마실 줄 모르는 술을 웬 두 병씩이나..... 큰 일났네....일어서려던 나는 그대로 술집을 빠져나올 수도, 그렇다고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보호자로 나설 수도 없어 어쩡쩡해지고 말았다......30이면 너무 인생이 지루해......빨리 끝냈어야 하는데....간신히 의자에 엉덩이를 걸친 여자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웅얼대더니 탁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정신 차려요. 색씨 이러면 안 돼.......여봐요.....색씨, 집이 어디우?....이거 큰 일 났네......아주머니의 눈이 나를 향해 구원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냉수 한 컵을 따라다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냉수를 벌컥거리고 나더니 힐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풀쑥 웃었다.....여자 주제에 마시지도 못하는 술, 왜 퍼 마시고 왜 지랄이냐?....알아요. 후훗.....그래요. 인생이 지루해서 그런 거니까....여자가 기를 쓰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러는 사이 탁자 위에 놓였던 그녀의 스케치북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들판의 이글거리는 햇빛이 고흐의 그림을 생각나게 했다. 노랑과 빨강 색 불꽃으로 일렁이고 있는 한낮의 땡볕을 배경으로, 부조된 듯 떠올라 있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 뭉크나 달리의 그림이 뒤섞인 듯한 기묘한 젊은 사내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그러다 한순간 아, 나는 짧게 신음했다.

수채화 물감이 확실한데 유화 같은 느낌을 주는 그녀 그림 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조금 전 학교를 빠져나오면서 보았던 분향소에 내 걸린 한현상의 얼굴이었다.

"왜 이상해요?"

"한현상, 맞지요? 이 그림.?"

"30까지면 지루하니까..... 초라한 30이 되기 전에 내가 끝내기로 한 것 알면서.....망할 짜식이...나쁜 놈......."

여자가 충혈된 눈으로 나를 올려 보았다.

"망할 짜식이 순서를 바꿨다니까요......나쁜 놈....그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고.... 되었어요?"

그녀 눈에 눈물이 비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허공을 향한 그녀 눈에서 여름날 술집 유리창을 적셔가며 흐르던 빗물처럼 눈물이 계속되었다.

"내가 택시를 잡아 드릴게요."

"왜요? 여기서 현상이처럼 몸에다 불이라도 붙일 것 같아서요? .....난 그렇게는 안 죽어요."

"개인적으로는 나도 그 학생을 모르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댁은 지금 너무 취했고.....사실은....교문 나오다가 댁이 거기 앉아 있는 걸 보았구요....."

"몸에 불을 언제 붙이나 지켜보았나요?"

그녀가 깔깔거리며 날카롭게 웃었다. 아주머니가 냉장고에서 드링크 두 병을 꺼내 왔다.....색씨, 이거라도 좀 마셔 보우.....이제 좀 괜찮우? ....강선생도 하나 마시우.......아주머니는 여기쯤에서 사태가 수습된 게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후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한채희였다.

누군가 부축이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 바스라져 버릴 것 같은 그녀의 분위기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택시 정류장까지 그녀를 부축하고 나온 것은 좋았는데 그녀는 한사코 택시 타기를 거부하고 고개를 내저어 댔다.

부축한 팔을 풀면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져 내려 얼음덩어리처럼 녹아내려 버릴 것 같았고, 그녀가 생각을 바꿀 때까지 그녀를 지켜주기도 난감했다.

"불꽃으로 살다가 말에요.....서른이 되면 불꽃으로 타겠다고 한 건 나였지...., 현상이 새끼가 아녔어요......이해되요? 개새끼. 위태위태하게 나를 시한폭탄같이 지켜보더니...... 말도 안돼...제가 뭔데..."

그녀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나는 더 이상 학교 앞의 정류장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까 그 교문 앞의 그 자리에 가서 현상이를 불러 보는 게 났겠어요."

결국 서른 살 된 남자는 서른 살의 여자를 가까운 여관으로 데려갔다.

방에 들어서자 말자 화장실로 내달린 여자는 화장실 벽에까지 오물을 튀기며 토하기 시작했다.

담배 두 대를 연거푸 태우고 난 다음, 변기 입구에 얼굴을 처넣고 있는 여자를 끌어 내렸다.

오물을 대강 치워준 뒤 나는 고무풍선같이 가벼워진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여자는 계속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한채희는 왜 서른이 되기 전에 죽고 싶었을까. 결국 인생은 늙는 것이고, 예쁜 피부는 탄력을 잃고, 순수한 꿈은 퇴색되고, 사랑은 변질되며, 불타던 예술 혼은 초라한 흑백 사진처럼 흐려질 것이 두려웠을까. 우리들 어머니들의 펑퍼짐해져 가는 육체, 주책스러움, 게걸스런 탐욕의 얼굴들을 관찰하면서, 그 변화의 기점을 서른으로 잡았던 것일까. 뒷날 그 여자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젊디 젊은 날 죽음을 생각했느냐고. 그때 채희는 아주 엉뚱한 대답을 서슴없이 했다....예수님을 보세요, 서른셋에 모든 것을 완성했어요. 어차피 우리가 서른셋까지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 미완으로 끝내는 거예요....맞았어. 저 사람도 서른셋까지만 살았다면 큰 일을 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 아니에요?....나는 조금 맥이 빠졌지만 채희는 동생 한현상의 죽음을 심하게 질투했다. 개새끼, 그건 내 몫이었어. 그렇게.

정작 한현상의 1주기 추모식 날은 심하게 비가 내려 거친 시위는 없었다.

나도 그의 제단 앞에 향 두 개를 살라 주었다.

그의 대형 걸개그림 아래로 그의 장례 때와 무덤의 사진, 응급실에서 찍은 듯한 그의 마지막으로 보이는 사진과 학과 환영회와 미팅 때의 사진, 그리고 누나, 한채희와 찍은 사진이 있었다.

눈썹 선이 유난히 뚜렷한 사진 속의 한채희는 잔뜩 심통이 난 듯 입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향을 피우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누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윤이 조영선과 같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들에게 한채희를 만난 이야기를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 주었다.

"강선생도 거기서 같이 잤어요?"

나는 조영선이 잠깐 반짝 눈빛을 빛내는 걸 보았다......그럼 당연하지.... 절망 속의 여자를 그대로 버려두고 나올 수 있었겠어? 그건 최소한의 예의야..... 여자가 술 취하고, 주정하고, 토하고 추한 모습을 다 보였는데 같이 섹스라도 하지 않아 봐. 여자 편에서는 자살할 기분이 들 거 아냐?...섹스는 때로 상당한 불균형을 한순간에 균형으로 복구시켜 줘......윤이 너스레를 떨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도 다른 날 같이 <나그네>에 들려 같이 소주를 마시다가 헤어졌다.

"의외였지만 그림 속의 인물은 루오의 그림 속 인물들같이 비극적이고 슬퍼 보였어."

"투사의 이미지는 없었다?"

"지치고 권태롭고 고통스러워 보이는....그런데 그 그림을 보는 순간 한 번도 실물을 본 적 없는 한현상의 얼굴이다, 그런 느낌이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물론 상황이 여러 가지를 연상시키게 하긴 했겠지만...."

"누나의 눈에 보였던 한현상의 이미지였겠지. 시대의 지열에, 투쟁을 외치는 격한 친구들 열정에, 소외감으로 외로웠던 지도....평소 조용한 학생이었다며? 투쟁적으로 보이는 강경파 학생들이 죽는 것 봤어? 우리 대학 때도?"

"그래도 그것으로 분신자살이 설명되지는 않아."

나는 30이 되면 죽겠다고 늘 동생 앞에서 말했다는 채희의 곧 바스라질 것 같던 이미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 찾기의 방법으로 죽음이 선택될 수도 있어."

"정체성 확인이라는 말을 너무 편협하게 쓰지 마세요."

조영선이 적당히 우리 두 사람 대화 속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는 잠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계속 들려 오는 진혼곡 소리의 여운이 우리의 새로운 대화를 자꾸만 맥없이 만들어 갔다.

"피카소가 진흙 한줌을 쥐었다고 놓으면 그건 탁월한 예술이 되지만 나나, 강선생의 경우는 재료만 버려 놓는다.....흔한 넌센스 퀴즈로 들리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대상이 아니라 예술혼의 투사 여부가 재료를 변화시키니까요."

영선은 분위기를 바꾸어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뛰어난 여자였다. 피카소에서 마티스, 세잔느, 고흐, 달리, 천경자, 장승업, 이중섭, 허소치에 허백련까지의 그림 이야기를 그녀는 꽤 오래 했다.

그러나 그날은 그런 얘기들이 노래 소리 때문이었는지 진지하게 가슴을 적셔 주지를 않았다.

"오늘은 내가 무지 술을 마시고요. 여기 쓰러져요...... 조금 있다가 토할 거고, 그럼 강선생이 한현상이 누이같이 어디 잠잘 곳에 데려다줄래요? 그리고 같이 곁에 있어 주고?"

오늘은 영 아니다 싶었던지 그녀가 엉뚱하게 말을 바꾸었다.

나는 자꾸 화가 나려고 했다...... 조선생은 그렇게 취하지도 않겠지만 ......, 그 여자 눕혀 주고 곧바로 나왔어요. ....낄낄낄......영선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가끔 여자랑 자고 그러세요. 그게 정신 건강에 좋아요. 애써 사랑 같은 거 하라는 얘기까지는 아니고......필요한 만큼 서로 공유하는 것, 나누어 가지는 것, 그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얘기, 이해 가세요?......조선생은 아무 남자랑 자요?.........아무 남자는 아니죠. 서로가 비슷하게 필요하다, 그렇게 느껴지는 남자, 공유가 가능한 남자하고만....그 이상이면 관심이 되고, 간섭이 되고, 피곤하고, 지치고 .......그날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뒤 한채희와 같이 자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회오리처럼 들었다.

채희에게서 풍기던 비극적인 냄새와 시한적인 불꽃의 분위기. 곧바로 스러져 버릴 것 같은 나약함과 불꽃의 소멸성 때문에 우리는 섹스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젊은 혈기나 욕정의 무모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금방 스러져 사라질 것 같은 나약함, 그 나약함 속에 도사린 푸른 불꽃의 자존심, 특히 그녀의 가는 어깨에 묻어 있는 가을바람 같은 쓸쓸함이 그녀를 안게 되리라는 예감을 가중시켰다.

섹스가 죽음이라는 것과 기묘한 동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계기는 아주 쉽게 찾아왔다.

아버지의 입원을 알리는 새어머니의 음성이 차분하고 조용하게 전해진 것은 학기 말이 가까워져서 몹시 일상 업무가 바빴던 날의 오후였다.....바쁘고 시간도 없을 텐데...그래서.....그래도 아버지 연세도 있고.....전화선 저쪽에 서 있는 새어머니의 침착한 얼굴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라 왔다.

광주에 있는 J대학 병원 신경외과라 했다.

점심 잡수실 때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나는 잠시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키며 잠시 망연했다. 보다 철저하게 공부에 매달렸어야 했는데....그래서 지금쯤 학위를 받았어야 했는데.....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학과 주임 교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학원 동료에게도 이번 세미나의 발표 순서를 조정해 달라는 전화를 했다.

광주까지는 비행기로 아무리 빨리 이동해도 공항까지의 거리가 있어서 세 시간은 걸린다.......그 세 시간 동안 나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거적에 덮여 있던 관과 그날 밤 타오르던 장작불의 불꽃, 한현상의 추모식 때 휘날리던 만장, 대학 때 동료들의 죽음과 그들 가족의 오열,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떠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몰랐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럼? 그럼?....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한테는 새엄마가 있으니까, 그럼요. 아버지껜 새엄마가 있고, 또 새 아들들도 있고, 바다도 있고.....난 내가 고아였으면 더구나 이 각박한 시대, 차라리 훨씬 자유롭게 살고 죽을 수 있는 고아였으면....그렇게 못된 생각을 했던 나쁜 놈이었어요....죄송합니다. 아버지......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가슴이 무겁게 미어져 왔다.

아버지는 수술실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빨리 왔다......내 두 손을 맞잡아 쥐는 노쇠해 가는 한 여인의 얼굴에는 굵은 주름들이 깊게 파여 있었다.....왼쪽 머리 실핏줄이 터졌다는구나. 수술하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드먼......새어머니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어머니, 죄송합니다.....괜찮을 거예요. 아버지, 워낙 건강한 양반이 되어서......더러 그 일본어 번역물 일거리며, 리포트 자료 정리를 거칠게 밀어 버리고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사는 바닷가에 갔어야 했다....죄송합니다. 어머니, 제가 아주 못 되어 먹었어요....도시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다음 무슨 핑계를 대던지 방학 때마저 고향 가기를 기피했던 이제 서른이 된 아들은 자꾸 콧마루가 시큰거려 갔다.

아버지는 만 48시간을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깎인 머리를 미이라처럼 흰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링거 병이 매달린 침대 머리맡에 산소통과 가습기까지 두고 아버지는 호흡만을 거칠게 해 댔다.....연세가 있으시긴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이곳 혈관이 터졌거든요. 빨라도 한 달쯤은 입원을 각오하시는 게 좋겠습니다......의사는 대학원의 내 주임교수처럼 차고 냉철해 보였다.

나는 아버지가 일반 병실로 옮겨지기까지 사흘 동안 거의 잠들지 않고 아버지 머리맡을 지켰다. 나이 들어 처음으로 아버지 곁에 길게 머물렀던 시간이었다.

한채희가 그날 병원을 찾아온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아버지가 일반 병실로 옮겨진 오후 그녀는 안개에 쌓여 있다가 형체를 드러낸 것처럼 그렇게 입원실 복도에 서 있었다.

한 번은 다시 만나리라는 예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곳으로 나를 찾아오리라는 상상은 하지 않았었다. <나그네>에 찾아가서 내 이름과 신분을 알아냈고, 다시 학과 사무실에 들려 이곳 병원을 알아냈다고 했다.

수면 부족으로 초췌해진 나에게 채희는 술과 저녁을 샀다.

내게 술을 따라 주면서 지난번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거지처럼 하수구 같은 데 처박혀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키득대며 웃었다....... 곧바로 연락을 하려 했지만 며칠간 정신없이 앓았는데 아파서 죽는 것도 역시 초라해서 속이 상하더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웃으면서 서른을 넘기기 전 한 남자를 만나리라는 예감이 있었다고 했다. 열아홉 살에도 남자를 만났고, 스무 살에도, 스물두 살, 다섯 살에도 늘 남자를 만났지만 서른 살에 만나는 남자는 의미가 좀 다르다고 했다.

"뭐가 다른가요?"

"서른 살이지 않아요?"

사람의 일생이 하루 같다면 자기는 지금 막 황혼에 서 있다고 했다. 곧 어둠이 오겠지만 하루 중 어느 때와도 다른 불붙는 빨강과 노랑, 주홍, 갈색이 뒤섞인 서쪽 하늘 색깔을 연상해 보면 자기의 실체가 보일 게 아니냐고 그녀가 반문했다.

우리는 그날 밤 같이 잤다.

피곤과 절박감, 불안, 혼란의 환영 속에서 우리는 출구를 찾듯 거의 필사적으로 서로의 육체에 매달렸다. 그녀는 가끔 섹스를 하는 중에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서너 끼씩 식사를 건너뛰며 그림에 빠져 있을 때도, 그 한순간으로 죽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였다. 하지만 완벽한 성적 오르가즘 속에서 생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쪽이 훨씬 화려한 현세와의 이별이 아니겠느냐며 그녀는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가을이 시작된 뒤에야 아버지는 퇴원을 했다.

아버지와 시골집까지 동행했던 나는 오래간만에 바다 쪽으로 나가, 톱머리라고 불리는 갯바위에 한 시간쯤 앉아 있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잘 모셔다드렸어?"

윤이 퇴근 가까운 내 사무실에 주인인 것처럼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병실에 조영선과 함께 한 번, 두 번은 혼자 찾아와 옛날 고등학교 때 낙지 먹던 이야기를 꺼내 아버지까지 힘들게 파안을 하게 하고는 두 주일이 지난 것 같았다.

그는 날짜 지난 신문 한 장을 내게 내밀고는 담배를 태워 문 채 창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어 재꼈다.

그의 어깨를 스쳐 들어오는 바람결이 며칠 만에 놀라울 만큼 서늘해져 있었다.

<미모의 젊은 여류 화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예술적 재능을 비관한 듯....>

덤벼들 듯 3단짜리 기사 제목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손과 팔목에 맥이 풀리면서 신문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창밖 저녁노을의 빨강 색이 달리의 그림처럼 흐느적대면서 파도로 변해 내 앞으로 덤벼드는 환영 속에서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부터 사흘 동안 직장에 병가 신청을 냈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숙소에 틀어박혀 안주 없는 소주를 들이켰다.

떠나는 자유와 남은 자의 스산한 황막함.

나는 개인의 특수성이 보편적인 개연성으로 확대되어 기록될 수 있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다.

사흘 만에 내 방을 나서면서 어금니를 악물면서 나는 소리쳤다.

, 그래. 내가, 소설을 쓰겠어. 그렇게.

 

- 여기 테오티와칸.

멕시코 시티에서 한 시간여. 1,600만 명이 산다는 도심을 빠져나와 마야의 영혼이 숨 쉬는 유적지를 다녀왔어요.

화산석으로 쌓아 올린 60m<해의 피라밋>45m 높이의 <달의 피라밋>. 해발 2,300m가 넘는다는 도시의 고도 때문인지 피라밋 꼭대기에서는 서울하고는 다르게 숨쉬기가 힘들었어요.

달의 피라밋에서 해의 피라미드까지의 10여 분의 거리가 사자(死者)의 거리래요. 파괴되고 흩어진 신전의 돌 더미 밑에서 수많은 유골이 나왔다고 해요.

먼 과거 태양신에게 제사 지내던 제물의 잔해들인지, 혹은 그들이 스페인 군대에게 쫓겨가면서 남겨 놓고 가야 했던 희생자들의 유골인지는 알 수가 없답니다.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의 심장을 도려내서 태양신에게 바쳤다는 그들의 의식 속에서 그 희생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삶 이상의 죽음. 개인의 희생보다는 민중의 안녕,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희생자는 죽음에 임했을까요?

1년이 지나고 있는 그 소신공양(燒身供養)의 현장에 제가 있었던 것도 운명이었을까요?

엉덩이에 몽고 반점을 지닌 키가 작고 목이 짧은 마야의 원주민들은 이제 피가 섞이고 섞여 갈색의 피부를 하고 있어요.

왜 과달루페 성모님이 갈색으로 발현했는지 이해가 될 듯해요.

수많은 기적을 이룬다는 갈색 성모에게 다가가기 위해 계단에서부터 무릎으로 기어가고 있는 신도들 중에는 단 한 명의 금발머리도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옛 마야의 후손이나 유색 인종만이 왜 이 기적의 성모를 찾는 것일까요?

결국 춥고 배고픈 사람들만이 신을 찾는 것은 아닐까요?

외삼촌이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그대로 계셨으면 이곳에 올 생각을 못 했을지 모르겠어요.

한 학기를 아버지 병실에서 보내고 나서 생각했어요.

내 머리칼이 그을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학교를 모두 떠난 뒤에 학교에 돌아가자. 그리고 우선은 가능하면 서울을, 한국을 떠나 있자. 그래서 선배님께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다시 학교에 돌아갈 수 있을지를 모르겠어요.

하지만 계절도 밤낮도 뒤바뀌어 있는 이 엉뚱한 공간에 와서 선배님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

가족 외에는 유일하게 고국으로 보내는 소식입니다.

쓸쓸해하지 마세요.

저의 아버지는 퇴원을 하셨고, 또 퇴직을 하셨습니다.

열대지방의 이쁜 새들을 보면 선배님 생각할께요.

9월 첫째 날

박민주 올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소깔로 광장이에요.

사진에서는 안보이지만 정부에 불평과 민원을 가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광장 절반쯤을 아예 텐트까지 처서 점령해 놓고, 숙식까지 해결하고 있어요.

거지와 민예품 장사, 거기에 비둘기에 모이를 주고 있는 행색 초라한 노인. 모든 게 뒤 섞여 있어요.

그러나 최루탄을 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몹시 더워요. 이곳은.... .

쓸쓸해하지 마세요.

9월 다섯째 날

박민주 올림

 

며칠 학교를 쉬는 동안 발신인의 주소가 기재되지 않은 민주의 편지와 엽서가 뜻밖에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와 엽서는 멕시코 시티의 소인 날짜는 달랐지만 같은 날 배달된 것으로 보였다.

헤어지기 전 농담처럼 인도네시아 원주민 마을을 얘기했던 민주는 전혀 엉뚱하게 지구의 반대 쪽 그것도 지구의 남반부에서 소식을 전해 온 것이었다.

<쓸쓸함>이라는 단어를 읽으면서 주소가 있어 답장을 쓸 수 있다면 꼭 써야 할 구절이 있음을 생각했다.

<쓸쓸함은 남아 있는 자의 몫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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