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닦는 스님
총을 닦는 스님
김은숙
코스모스가 한창이었다.
여자는 꽃을 따기 위해 몸을 약간 구부렸다.
순간 바람이 불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변이 대충 보였다.
둘러보니 피어있던 꽃들은 온데간데없었고 서 있던 땅바닥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여자의 몸이 시멘트 반죽처럼 질척한 늪지대로 빨려들고 있었다. 허우적대던 여자는 주변에서 나무를 발견하고 가지를 힘껏 움켜잡았다. 가지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늪이 그녀의 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페이지의 맨 아래쪽 단락이었다. 여자는 눈이 너무 아파서 책을 덮었다. 계산해보니 4시간도 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여자는 책을 밀어버리고 리모컨을 사용해서 소등을 했다. 그제야 여자는 창에 붉은빛이 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손을 더듬어서 라이터와 담배를 집어 들었다. 라이터 불빛이 입에 문 담배의 색깔을 선명하게 했고 순간 여자는 힘껏 빨았다.
해롭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여자는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담배를 피우곤 했다. 담배를 물고 창 앞으로 다가가자 검붉은 창에 여자의 몸이 희미하게 비쳤다. 여자는 커다랗게 열려 있는 자신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창문을 열어 연기를 내뿜었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기운과 연기가 마치 붓으로 휘저어 놓은 물감처럼 뒤섞였다.
우울증은 아주 오래전 여자의 마음에 둥지를 틀었다. 여자는 우울증 약을 거의 복용하지 않았고 엄살을 떨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 병이 마음 안에 자리 잡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살았다. 우울증과 불면증은 사촌지간이어서 새벽녘이면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고 더러 밤새도록 별이나 양의 숫자를 헤아릴 때도 있었다.
여자는 외출을 위해 등산화를 꺼내었다. 가게는 종업원이 열어도 되니 휴대폰을 준비해가면 될 것이고 무작정 떠나는 길이니 지도책만 있으면 되었다. 가다가 눈에 뜨이는 절에 들러 삼배를 하고 그 주변을 돈다거나 아니면 가까운 강이나 바다를 찾기로 했다. 여자는 티셔츠 위에 얇은 파카를 걸쳤다.
간혹 절에 다니는 건 마음이 가벼워지기 위한 일이었다. 삼배든 구배를 하고나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승려와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신도들과 어울릴 필요도 없었다. 사람과 교류하는 게 싫어서 중간에 도매유통업으로 바꿨다. 개개인을 마주해야 하는 소매업은 말품을 팔아야만 하는 직업이었다.
하늘이 청명해서 멀리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여자는 삼거리에서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간혹 여자는 너덧 시간 정도 걸리는 지방까지 가기도 했다. 대학생인 아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은 빈 둥지나 마찬가지였다. 일박이일로 일정을 잡아도 관계가 없겠지만 잠자리가 바뀌면 아예 백야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당일치기였다. 여자는 되도록 멀리까지 시선을 두었다.
브레이크를 밟았던 이유는 잔디밭에 서 있는 탑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절은 보이지 않고 탑만 눈에 띄어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탑돌이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불그스레한 아침 햇살이 이슬에 젖은 탑을 비스듬히 비치고 있었다. 잔디가 이슬에 푹 젖어 여자는 천천히 발을 떼었다.
바짓단이 금방 젖었지만 신발은 천과 세무가 반반씩 사용되어 겉만 적셨다. 잔디가 깔린 바닥에는 군데군데 토끼풀 무더기가 있었고 시든 꽃이 더러 붙어 있었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탑은 마치 갓을 차곡차곡 얹어 놓은 모양새였다. 위쪽에 대접 모양의 돌이 몇 개 더 얹혀 있었다. 표지판을 보니 워낙 오래된 탑이었다. 표면에 검은 이끼가 군데군데 끼어있는데다 주변 환경이 열악해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맨 꼭대기 층에 이름 모를 풀이 자라나서 자잘한 꽃송이를 매달고 있었다. 탑을 둘러보던 여자는 3층의 갑석 위에 나란히 놓인 몇 개의 동자승 인형을 발견했다. 파란 법복을 입은 동자승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도로 그 자리에 놓았다.
탑돌이를 시작했다. 합장한 채 시계 방향으로 세 번 돌고 나서 삼배를 했다. 가까운데 절이 있으면 들러 갈까 하고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기와지붕의 처마 모서리를 보았다. 끝부분이 쳐들려 있어 마치 대숲을 비집고 나온 것 같았다.
바람이 없어 대숲은 미동조차 없었다. 고르게 들어찬 대나무를 쳐다보다가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비스듬히 서있는 일주문이 보였다. 여자는 일주문 앞에 다가가 반배를 했다. 딱딱딱딱딱...여자는 소리에 놀라서 얼굴을 치켜들었다. 가지를 다 잘라버린 나무에 까만 새가 수직으로 붙어 있었다. 새는 긴 부리로 구멍을 연신 쪼아대었다. 그 나무는 일부분의 껍질이 벗겨져있는 상태였고 마치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창백한 빛깔을 띠고 있어 한눈에도 죽은 나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쪼는 소리가 한 음절씩 톡톡 끊기는 상태로 뒷산에 부딪쳐 되돌아오곤 했다. 딱따구리는 여자가 쳐다보자 동작을 멈추더니 느티나무의 짙푸른 그늘로 날아가 버렸다. 주변에는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담도 없이 덩그러니 서 있는 일주문 앞에서 여자는 절을 살폈다. 탑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 절이었다. 대웅전이 정면으로 보였고 그 옆에 자그마한 조립식 주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택의 철제지붕은 기왓장과 흡사했고 벽은 회색이었다. 아마 요사로나 쓰일 것 같았다. 대웅전의 단청은 색감이 깨끗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찰 같지 않았다. 대 이파리가 짙푸른 빛깔을 머금고 있어 단청이 한층 돋보였다.
“이런 차림이라 죄송합니다.”
절을 살펴보던 여자는 남자의 말소리에 눈을 낮췄다. 등받이도 없는 벤치에 앉아있는 작은 체구의 승려였다. 벤치가 한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어 여자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엉거주춤 일어난 승려는 법복 바지를 입었고 상의는 러닝셔츠였다. 머리는 반 이상이 세어 하얀 빛깔에 가까웠지만 굵은 눈썹은 검정색이었다. 5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여자는 쏘아보는 눈초리가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내리깔면서 합장을 했다.
“들어가시지요.”
승려는 공손히 말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마당을 지나고 몇 계단을 밟아 대웅전 문턱 앞에 섰다. 대웅전의 천장에는 빨간색의 연등이 빼곡히 들이 차 있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냉장실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향을 꽂고 얼굴을 들었다. 머리만 까맣고 몸 전체가 금빛인 부처는 한쪽 가슴을 절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약간 내리깐 부처의 눈과 마주치자 여자는 울컥했다. 여자는 몇 걸음 뒷걸음질을 쳐서 방석에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삼배를 하고 난 후 여자는 합장을 한 상태로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여자가 나오자 승려는 팔을 구부렸다 펴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아침운동 같은 그런 개념인 것 같았다. 벤치 모서리 쪽으로 다가가자 승려가 옆에 기대어 있던 물건을 집어 들었다. 한 손으로 집어 든 것은 공기총이었다. 여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승려와 총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승려는 총을 무릎위에 놓고 커다랗게 열린 여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살님, 겁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노리쇠 뭉치는 강에 던져버렸으니까요.”
“노리쇠요?”
“예...”
승려는 총을 양손으로 들었다.
“방아쇠 말인가요?”
“방아쇠는 이것이고요. 노리쇠는 안쪽에 들어 있는 부품이죠. 그게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랍니다.”
총은 길고 날렵한 모양이었는데 손잡이가 유난히 반들거렸다. 승려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얹은 다음 손가락을 방아쇠에 끼웠다. 왜소한 몸집에 단신이었지만 총을 다루는 솜씨가 군인처럼 숙련된 느낌이었다. 여자는 총구가 향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가장자리에 바위 몇 개가 놓여있는 작은 웅덩이였다. 웅덩이에는 연잎이 가득했고 햇살이 잎을 반짝거리게 하고 있었다. 꽃은 보이지 않았다. 승려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리 아프실 텐데 앉으세요.”
승려는 말을 하면서 총구를 들여다보았다. 총알이라도 튀어나오면 눈 부근이 관통될 것 같았다. 죽는다는 상상은 쉬웠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여자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승려는 총의 이음새를 돌리다말고 바지에 손을 닦았다. 다시 돌렸지만 계속 헛돌았다. 승려는 주머니에서 면장갑을 꺼내었다. 장갑을 끼고서 돌리자 총이 쉽게 분리되었다.
“보살님, 둘이 앉는다고 부러지는 의자는 아닙니다.”
“예...”
여자는 승려와 두어 뼘 쯤 거리를 두고 앉았다. 해부에서 조립과정이 매우 단순한 총이었다. 여자는 개머리판처럼 단단해 보이는 승려의 어깨를 곁눈질했다. 승려는 조립한 총을 세워서 어깨에 걸쳤다. 섀미로 쓱쓱 닦는 장갑 낀 손을 바라보다가 여자가 물었다.
“총은 어디에 쓰시는지...”
“도둑놈을 잡아야죠.”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대답을 했다. 승려는 한 손으로 총의 중간 부분을 잡아 세우고서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밤껍질처럼 윤기가 흐르는 총을 바라보는 승려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옷만 갖춰 입었다면 곧 사냥이라도 떠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노리쇠가 없으니 제대로 쓸 수는 없겠군요.”
승려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건너왔다.
“그거 강에서 건져 파출소에 맡겨 놨어요.”
농담과 진담의 구분이 되지 않아서 웃기도 어려웠다. 총을 눕히고서 승려가 허리를 숙이자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승려의 뒤통수는 복사뼈처럼 뾰쪽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여기에도 도둑이 드나요?”
“하하하 그럴 리가요. 여긴 가져갈 게 없어요.”
껄껄거리는 승려를 쳐다보면서 여자도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재담을 잘해서 날카로운 이미지에 비해 편한 사람 같기도 했다. 승려는 군데군데 이음새 부근까지 입술로 바람을 불어 가면서 섀미로 닦아냈다.
“마음을 비우니 좀 편하십니까?”
승려가 갑자기 물었다.
“글쎄요...”
얼른 대답하기 어려웠다. 여자는 점점 좁아지는 그늘에 시선을 던졌다. 해가 많이 올라온 것 같았다. 승려는 벤치에 걸쳐져 있던 가죽집을 들어서 총 아래에 깔았다. 마치 옷을 입히듯 총을 집어넣고 지퍼를 채우더니 일어섰다.
“차나 한잔하시죠.”
승려는 땅꼬마처럼 작은 키였다. 실로폰 가방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총 가방을 들고 있어 유난히 왜소해 보일 수도 있었다. 나란히 서자 승려의 이마는 여자의 귓불 근처에 닿았다. 승려의 발에 끼워져 있는 고무신에 비해 여자의 등산화는 다소 굽이 있었다. 앞서서 걷던 승려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고개를 돌려 여자의 눈을 쳐다보다가 그만두었다. 여자는 승려를 따라 요사채로 들어갔다.
승려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동안 여자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붙박이식 옷걸이가 붙어 있었고 법복이 몇 개 걸려있었다. 워낙 무늬가 요란해서 마치 낙서장 같은 벽지였다. 두 짝으로 된 밤색 장과 흰 냉장고가 마주 보는 상태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냉장고 위에는 상이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 책상 옆에 있던 선풍기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성용 화장품이 몇 개 놓여 있었고 책꽂이에는 한자가 쓰인 두꺼운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꽂아져 있었다. 책꽂이 위쪽에 달력이 있었는데 숫자 아래쪽으로는 한자가 쓰여 있었다. 한자 옆에 단순한 동물이 그려져 있어 이해를 돕고 있었다. 책꽂이에 꽂힌 책도 대부분 제목이 한자어로 되어 있었다.
방의 한 귀퉁이에 철사줄이 달린 백등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명칭이야 백등이지만 한지를 사용해 만든 것이니 미색이랄 수 있었다. 게다 일 년 묵히게 되면 흰색에서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방 앞에 선 승려는 유난히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끈 승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쟁반을 들고 왔다. 주전자 꼭지에서 김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승려가 책상다리를 하면서 여자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보살님의 고운 자태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방입니다.”
“아닙니다. 스님.”
고개를 저으면서 여자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승려는 넘칠 것처럼 차를 따랐다. 찻잔을 받아 든 여자는 연푸른빛이 살짝 도는 물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물속에 누가 빠지기라도 했나요?”
여자의 눈꺼풀이 힘껏 치켜 올라갔다. 승려의 눈동자가 카메라처럼 여자의 얼굴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천천히 훑었다. 승려는 눈빛만 강렬했지 내내 온화한 얼굴이었다.
“아뇨...”
여자는 피식 웃으며 잔을 놓았다. 승려는 여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입을 열었다.
“절에 더 자주 오시면 좋을 텐데...”
“제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오늘처럼 평일에 오시면 사람도 없고 좋잖아요.”
여자는 웃음 띤 얼굴이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보살님이 보다시피 저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죠. 눈썰미가 있으시니 벌써 짐작은 하셨을 테지만.”
“무슨 그런 말씀을?”
찻잔을 들고 있던 여자는 고개를 저였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제가 원래는 잡놈이었습니다.”
이와 찻잔이 살짝 부딪쳤지만 여자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찻잔을 기울였다. 잔을 접시에 놓자 딸깍 소리가 났다.
“통, 모를 말씀만 하시는군요.”
“저는 영원한 해병입니다. 노병은 죽지만 해병은 죽지 않으니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병대를 가야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중학생 때부터 꼴통이었거든요.”
“철없을 때야 더러 그렇죠.”
“저는 별났어요. 담배 꼬나물고 모자는 삐딱하게 쓰고 말이죠. 맹꽁이 운동화는 항상 새것 같았고 날이 선 나팔바지는 칼끝처럼 반짝반짝 했죠. 그런 거 다 꼬붕들이 했어요. 운동화는 절대 이슬에 젖지 말아야하니 아침이면 녀석들 등을 타고 다녔죠. 하하하...콜록콜록...”
그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다가 산해 들린 것처럼 기침을 했다. 기침이 멎자 차를 꿀꺽꿀꺽 소리가 나도록 마셨다.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하라고 하셨죠. 물론 저도 깡다구가 있는 군인이 되고 싶었고요.”
“아...”
여자는 다리를 조금 펴서 반대편으로 오그렸다. 티셔츠의 앞부분도 조금 당겨 올렸다.
“외줄타기를 하는데 처음에는 정말 무섭더군요.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당연히 잘 해냈죠.”
“그거 연습할 때는 그물을 깔고 하지요?”
“그물이라니요. 그냥 합니다. 그러니까 해병이죠.”
“그래요?”
여자의 눈동자는 조금 커졌다.
“맨 처음 줄을 타는데 선임하사가 나를 비웃었죠. 내 키가 작다고 무시하는 것 같더군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가다가 되돌아왔습니다. 줄에서 내려 다짜고짜 선임의 뺨을 때렸죠.”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군대는 상명하복이 법이나 마찬가지라던데...”
“그러니까 해병이죠. 해병대는 넘어갈 건 넘어갑니다. 저는 사격 솜씨도 대단했어요. 날아가는 새도 맞힌다 했죠.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부대에서 오발 사고가 났어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자는 양쪽 손을 꽉 잡았다.
“사람이 맞은 건가요?”
“그렇죠. 집안 사정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사병이 동료를 쏜 거죠. 개머리판을 어깨에 얹자마자 총이 나갔어요. 자세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총알이 튀어나가 표적물이 아닌 엉뚱한 사람을 맞힌 거죠.
“아...”
여자는 입을 벌린 채 승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발적으로 그랬다 하더라도 살인은 살인입니다.”
우울한 표정으로 바뀐 승려는 차를 따르더니 술처럼 단숨에 마셔버렸다. 여자도 나머지 차를 다 마셨다.
“사진에서 보는 총 맞은 시체와 내 자신이 쏜 총에 맞은 사람, 느낌이 분명 다릅니다. 한 달 이상 밥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스님이 그러셨다고요?”
“그렇죠. 제가 오발 사고를 냈지요. 저는 그 일로 형을 치루고 불명예제대를 했지만 문제가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건 제가 항상 안고 가야할 문제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죽은 사람에게 용서를 받기 어렵다는 겁니다.”
승려는 엉덩이를 뒤쪽으로 조금 밀어서 벽에 기대앉았다. 여자는 멍청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저는 저 총으로 사냥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아침에 총을 닦으면서 제 자신을 반성하고 죽은 친구에게 용서를 구하죠.”
그런 치부를 털어 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자세를 바꾼 다음 무릎위에 두 손을 모아 얹었다.
“보살님의 얘기를 먼저 들어야 순서인데 거꾸로 되었네요.”
“아니요. 제가 고맙습니다.”
잠깐 침묵이 흐르면서 선풍기가 꺼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승려는 스위치를 돌렸다. 자세를 바로잡은 승려는 이마를 닦았고 여자는 시선을 돌려 이것저것 살펴봤다. 달력에는 낙서가 많았다. 메모장으로 쓰이기도 하는 것 같았다. 몇 개의 전화번호와 시장을 보아야 할 품목이 적혀 있었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머리보다는 기록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도 간혹 잊는 버릇이 있어서 기록에 의존하곤 했다. 하지만 잊어버려야 할 일들은 흡사 용접이라도 해버린 것처럼 머릿속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고민이 있으신 것 아닌가요? 마당에 들어설 때부터 보살님이 짊어진 짐이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부끄러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는 쥐구멍이 열 개라도 부족하지요.”
여자는 쓸쓸해 보이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승길까지 가지고 갈 생각 하시지 말고 털어 놓으세요. 오늘 이후부터 편해지시길 바랍니다.”
눈을 깜박거리던 여자는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을 펴서 손톱 끝을 들여다보았다.
“부처님께서도 해결해 주시지 않더군요.”
승려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여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승려는 찻잔 두 개에 차를 연거푸 따른 다음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여자는 도시에 있는 고모 집에서 고교에 다녔다. 방학이 되면 집에 내려가곤 했는데 그해 겨울 방학에는 학원에서 타자와 부기를 배운다고 일월 하순쯤에 내려가게 되었다.
고모네와 시골집을 오갈 때는 거의 기차를 이용했다. 기차역에서부터 집까지의 거리가 4킬로쯤 되었는데 중간에 저수지를 거쳐서 그렇지 다닐만한 길이었다. 도로와 두어 마을을 지나고 나면 저수지 근처였다. 저수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면 마을 뒤쪽으로 연결된 길이 나타났다. 기차역을 이용할 때 늘 오가는 길이기도 했다. 저수지는 겨울이면 산그늘이 드리워진 쪽으로는 늘 얼어 있었다. 마을과는 거리도 있었지만 사건이 있어 아이들이 썰매를 타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여자가 아직 어렸을 때 또래 넷이서 썰매를 타다 둘만 목숨을 건진 사건이었다. 그 후 겨울부터는 저수지의 얼음 위로 걷는 것도 삼갔다.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결빙구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모한 짓일 수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저수지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집이라고는 제각 한 채가 저수지를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제를 지내는 가을의 딱 하루를 빼 놓고는 항상 문이 잠겨 있는 작은 기와집이었다.
햇살은 따스했지만 바람은 차가웠다. 여자는 간혹 가방을 놓고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양 볼을 감싸곤 했다. 길바닥은 햇살이 닿는 곳만 질척거렸다. 검정색 코트 아래 펼쳐진 나팔바지 끝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직 남은 활엽수의 이파리가 새처럼 날곤 했다. 저수지 한쪽과 연결되어있는 산은 야트막했고 그 옆으로 이어지는 산세는 협곡처럼 험준했다. 산자락을 돌자 한 남자가 산기슭에 앉아 있었다. 멀리서 한 점처럼 보이던 사람이었다. 여자는 주춤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졌다는 생각을 하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쪽으로 가면 동행해도 되겠다.”
여자는 말꼬리를 흐리는 남자를 쳐다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신발 끝으로 땅을 톡톡 차다가 멈춰 섰다.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에 햇살이 닿아 반질거렸다. 남자는 땋은 머리칼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긴 좀 따뜻하네. 손 좀 녹이면 안 될까?”
여자는 남자를 힐끔 쳐다본 다음 굼뜬 동작으로 산기슭을 밟았다. 여자가 풀밭에 앉자 마른 풀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엉덩이를 움직여 여자 옆으로 왔다. 대학교 일학년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여자네 아랫마을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 마을은 100여 호 이상 살았기 때문에 남자의 외가댁은 잘 모르는 집이었다. 그 청년이 반대편에서 기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조금 엇갈렸던 것 같았다. 어릴 적에 오고 두 번째라는데 그 사이에 십여 년이 흘러서 길이 가물가물하다는 말을 했다. 여자는 남자의 눈꺼풀이 지나치게 떨리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간혹 바람이 이마를 스쳐 갔지만 그리 춥진 않았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는 완만했지만 그 위쪽으로는 경사가 급해서 담장처럼 바람막이가 되었다. 한쪽으로는 자잘한 나무의 가지들이 덩굴과 엉켜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희었고 손가락이 가냘팠다. 쌍꺼풀진 눈앞에 걸린 뿔테 안경과 긴 목은 청년을 지적인 분위기로 보이게 했다. 두툼한 파카를 입었는데 스텐칼라가 목을 제대로 감싸지 못했다. 남자는 마른 풀밭에 놓았던 포켓용 책을 집어 들었다. 어린 왕자라는 제목의 영문소설책이었는데 표지에는 이상한 차림의 소년과 별이 그려져 있었다. 남자에게 책을 넘겨받은 여자는 몇 장 넘겼다.
“난 영문학과야. 넌 몇 학년이니?”
“고 일이에요.”
무릎에 턱을 올린 상태로 여자가 대답했다.
“보다시피 이건 한 페이지는 영문, 한 페이지는 한글로 되어 있어 오히려 편하지. 단어를 외운 다음 양쪽을 번갈아 가며 읽는 거야. 그러다보면 저절로 익혀진다고 할 수 있지.”
남자가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어가면서 읽었다. 발음이 여자의 담임인 영어교사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여자는 딴청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내용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남자의 몸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방향제 같기도 했고 화장비누 냄새 같기도 했다.
“너는 무얼 지망하고 싶니?”
남자에게 책을 넘겨준 다음 여자는 근처의 잔돌을 주웠다.
“아마 교대를 가게 될 거에요.”
돌을 던지던 여자가 천천히 대답을 했다. 돌은 길바닥까지 느릿느릿 굴러 내려갔다.
“그렇구나. 아참 내 정신 좀 봐. 어린 왕자를 읽었는지조차 묻지 않았네.”
여자는 곧 얼굴을 붉혔다. 남자가 어색하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네겐 어려운 책이야. 에구...내 얘기가 재미없었겠다. 벙어리장갑 하나만 벗어 봐.”
헐렁거리던 장갑은 쉽게 벗겨졌고 남자의 손에 건네졌다. 남자는 납작하게 펴서 들여다봤다.
“손으로 짠 것 같은데 네 솜씨야?”
여자가 풀밭에 손을 좍 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가 장갑을 놓아버리고 자신의 검지로 여자의 가운뎃손가락을 살짝 눌렀다.
“내 손가락보다 더 긴 것 같네.”
두 개의 손가락이 겹쳐져 있는 동안 목의 줄에 걸려있던 장갑 한 짝이 약간 흔들렸다. 이어 바람이 불면서 마른 풀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덤불 사이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손가락이 치워지자 여자는 얼른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간혹 짧은 울음을 토하는 새는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자가 살피는 주변의 덤불에는 찔레 덩굴도 섞여 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열매는 뭐지?”
작은 나뭇가지를 타고 오른 망개나무 열매였다. 갈색으로 말라버린 잎도 더러 눈에 띄었다.
“망개 열매에요.”
“망개? 맛있게 생겼네.”
입으로 가져가려 하자 장갑을 손에 끼던 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맛없어요. 원래 맛은 시큼털털하거든요. 지금은 속이 아예 말라 있죠.”
“그렇구나.”
남자는 너덧 개가 붙은 열매를 손가락으로 비벼 돌렸다. 여자는 남자의 수정체가 사시로 변했다가 다시 제자리를 잡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상체를 기울이면서 열매를 여자의 머리에 꽂았다.
“열매도 예쁘고 네 볼도 빨가니 예쁘다. 잠깐만. 눈 좀 크게 떠 봐. 어? 점이잖아. 눈이 너무 커서 흰자위에 점이 있나 보다.”
남자가 여자의 턱을 약간 잡아 올렸다. 얼굴이 빨개진 여자는 치켜떴던 눈을 다시 내렸다.
“속눈썹이 참 가지런하네. 이제보니 눈동자가 한가지 빛깔이 아니구나.”
점점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여자는 몸을 조금 뒤로 젖혔다. 남자의 입술에서 나온 뜨거운 김이 여자의 얼굴을 스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남자의 입술이 닿자 여자는 장갑 낀 손으로 남자의 몸을 잡고 눈을 감았다. 남자는 여자의 몸을 꼭 껴안았다. 파카와 오버차림이어서 조금 답답한 느낌은 들었지만 따뜻했다. 남자의 떨리던 입술에의해 여자의 입술이 살짝 눌렸다. 남자의 팔이 여자의 목을 한 바퀴 감아 돈 상태였고 등받이처럼 언덕이 몸에 닿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몇 초 쯤 흘렀을까.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무엇인가가 닿았다. 남자의 안경이었다. 여자는 감았던 눈을 떴다. 남자의 어깨너머로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눈이 떨렸다. 아버지였다. 간혹 기차 시간에 맞춰 나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걸 깜빡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추위 때문에 땅을 보고 있어서 여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남자의 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남자를 밀어냈지만 남자는 팔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쳐다보기 전에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이러지 마세요. 안돼요!”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아버지가 얼굴을 들어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목을 거위처럼 뽑아냈다.
“누구야!”
“아버지!”
여자는 울음소리를 냈다. 여자가 더 힘껏 밀어냈기 때문에 팔을 풀려던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쪼그린 자세로 얼굴을 감싸는 행동을 취했고 남자는 오던 길로 뛰기 시작했다. 올라오던 아버지가 몸을 돌려 쫓아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 잡히면 죽는다.”
뒤를 돌아보던 남자는 지름길로 가기 위해 저수지로 뛰어 들어갔다. 저수지는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냈고 아버지는 뒷걸음질을 치듯 멈춰 섰다. 이미 울음을 그친 여자의 시선은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남자는 저수지 위에서 거의 미끄럼을 탔다. 가냘픈 몸에 비해 운동신경이 발달한 남자였다. 불안해 보였지만 제방 근처까지 별 탈 없이 달렸다.
쳐다보던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데 남자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기우뚱거릴 틈도 없이 얼음이 깨지면서 몸이 물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남자 몸의 반 정도가 물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되는 순간 남자의 팔이 양서류처럼 제방에 붙었다. 남자는 양손으로 돌을 하나씩 움켜쥐면서 올라갔다. 제각각의 모양대로 축대를 이루고 있는 돌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올라가는 시간이 얼마나 더디던지 여자는 한동안 숨소리를 내지 못했다.
실신한 사람처럼 제방 위에 누워있던 남자는 한참 만에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남자는 몇 초 정도 여자가 있는 곳을 쳐다보더니 곧 돌아섰다.
여자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데 어린 왕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책을 얼른 집어서 가방에 넣었다. 길바닥으로 내려오자 저수지 앞에 있던 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부릅뜬 눈으로 여자의 옷매무새를 살폈다. 큰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자 부릅떠져 있던 눈이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가방 제대로 안 닫혔다.”
가방을 탁탁 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여자는 가방의 한쪽 고리만 잠긴 것을 보고 허리를 숙여 고리를 끼웠다.
“여자는 몸을 망치면 시집도 못가. 알았어?”
고리를 끼우는 동안 아버지는 언성을 더 높였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저런 새끼들은 저수지에 빠져 죽어도 싸.”
말을 뱉어낸 아버지는 앞서서 걸었다. 아버지를 뒤따르던 여자는 몇 번이나 돌아보았지만 푸르스름한 하늘과 흰빛으로 반사되는 저수지만 눈에 잡혔을 뿐이었다. 여자는 그날 밤 어린왕자를 읽다가 엎드려서 잤다. 며칠 만에 두 번씩이나 보았지만 통 이해가 가지 않는 소설이었다.
“흠...”
승려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숨을 토해내듯 소리를 냈다.
“관습과 제도가 빚어낸 모순 같은 거랄까. 마음이 아프군요.”
여자는 승려의 말에 고개를 조금 떨어뜨리면서 고개를 조금 저었다.
“저는 그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습니다. 비인간적인 선택을 했으니까요. 오직 저만 편하기 위해서였죠.”
승려는 볼을 긋고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판단하기에는 시간도 짧았고 나이도 어렸을 겁니다.”
“당시에는 죄책감도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풍문 같은 것이었지만 그 소식은 제게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승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참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조금 위안이 될까싶어 몇 년 전부터 해마다 연등도 달았어요.”
“그러셨군요. 그분 이름도 알고 있었나 봅니다.”
“예. 어린 왕자라는 그 책 표지 안쪽에 이름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겠지요?”
“마음먹기에 달렸지요. 보살님.”
“하긴 제가 너무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겪은 일은 차마 입에 올리기도 어려우셨을 텐데...”
“그렇긴 하지요. 아무튼 보살님은 마음이 오늘 이후로는 가벼워졌으면 합니다. 아마 그분도 보살님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랬을까요?”
여자는 무연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선풍기의 일정한 소음이 더위처럼 방에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얘기하는 내내 느끼지 못했던 소음이었다. 무릎도 저리고 등이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9월 초였지만 아직 더운 계절이기도 했다. 여자가 왔을 때 솟아오르던 해는 벌써 하얀빛을 내리쏟고 있었다. 매미 소리가 모스 부호처럼 끊어졌다가 이어지곤 했다. 여자는 지친 사람처럼 냉장고에 등을 기댔다.
“보살님은 어느 쪽에서 사시는지요? 처음 오셨으니 궁금해서요.”
“여기에서는 꽤 먼 곳이지요. 우연히 들렀습니다만 자주 오고 싶네요.”
“자주 온다는 분들은 아예 안 오시죠.”
“그럴 리가 있나요.”
다소 밝아진 표정으로 여자가 대답했다.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의외로 매미가 많았다. 10여 년 동안 긴긴 잠속에 빠져있다 세상 밖으로 나와 고작 한 달 정도 사는 게 매미의 한살이였다. 인생도 즐거움이 잠깐이니 그것과 별로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여자는 즐거운 시간이나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저는 아직도 그 책을 갖고 있어요.”
말을 하면서도 여자는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승려가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담배를 피울 때처럼 승려는 얼굴에 손가락 두 개만 펴서 댔다. 여자는 승용차 안에 있는 담배를 잠깐 떠올렸다. 때로는 약보다 나은 역할을 하는 게 담배였다.
“좋은 소설 같더군요.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치밀하게 그려냈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께서도 소설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연애 소설을 읽다 질리면 쓸 만한 것도 하나씩 봅니다. 하하하”
승려는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여자는 문득 승려가 절대 허술한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와 승려의 얘기가 끊겼던 것은 49제를 의논하러 온 신도들 때문이었다. 승려의 생계와 관계있는 일이니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여자는 승려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신발을 신었다. 잠깐 따라 나왔던 승려에게 여자는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느냐고 물었다. 승려는 탑 근처까지 따라 나와서 가는 길을 설명했다. 여자는 바쁜 걸음으로 일주문을 통해 사라지는 승려를 바라보다 차 문을 열었다.
승려의 설명대로 삼거리에서 조그마한 다리를 지났다. 그 후부터는 외길이어서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여자는 표지판의 속도와 계기판의 속도를 맞춰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사오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길가에서 경찰관의 시선유도용 빨간 봉을 발견한 여자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과속은 하지 않았지만 괜히 가슴이 벌렁거렸다. 앞에 가던 대부분의 차들은 별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출발하곤 했다. 여자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가까이 대고 불어 주십시오.”
의경은 음주측정기를 여자의 입술 가까이에 댔다. 의경은 팔을 접어 음주측정기를 들여다보더니 다시 여자를 쳐다봤다.
“면허증 좀 볼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데요?”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가 쳐다보자 의경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참고할 게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의경은 면허증을 내미는 여자의 얼굴과 몸을 힐끗거리면서 워키토키에 대고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자는 의경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창을 통해 앞을 주시했다.
“잠시 협조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차를 저쪽으로 대 주시죠.”
그는 차의 왼쪽 헤드라이트 부근에 바짝 서서 갓길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만약 여자가 차를 출발한다면 그의 몸 일부분이 여자의 차에 받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자는 창틈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월권행위가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흰색 엘란트라. 신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예?”
“은혜사에 다녀오셨지요? 스님께서 신고하셨군요.”
여자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금방 헝클어져 버렸다. 무슨 영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기분이 몹시 나빠서 여자의 얼굴은 붉어졌다.
“제가 여기서 마냥 기다려야 하나요?”
“잠시 소장님과 얘기하시죠.”
의경은 다시 도로 쪽으로 가서 다른 의경과 차를 멈추게 하고 음주측정기를 차에 들이 밀었다. 차들은 서서히 달렸다가 다시 속도를 내곤 했다. 여자는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상태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시골집처럼 옹색한 파출소의 내부가 들여다보였다. 집기가 몇 개 안되는 것 같았고 직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서더니 금방 나왔다. 경위였다.
“죄송합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저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기분이 나쁘군요.”
“제가 전화 연결을 해드리지요.
소장은 여자의 얼굴을 흘끔거리면서 번호를 눌렀다.
“스님 접니다. 여자분께서 노발대발이십니다.”
“제가 소장님께 폐를 끼치는군요.”
“아닙니다. 그 점은 염려 마시고요. 어차피 음주단속 중이니까요.”
일부러 여자의 귀에 들리도록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소장은 쳐다보던 여자에게 통화를 하던 휴대폰을 내밀었다.
“스님 무슨 일인지요?”
다소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여자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제가 신도들 때문에 허둥거리다가 드릴 말씀을 깜빡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는 사람의 길을 막고서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귀를 기울였지만 승려는 얼른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요?”
다그치듯 여자가 물었다.
“보살님의 진심을 그 불자님께 전달해야지요.”
“예?”
여자는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고리의 줄이 손가락에 걸렸기 때문에 다시 고쳐 잡았다.
“보살님이 얘기하던 그 청년은 불법 공부를 하신답니다.”
“그분을 알고 계셨군요.”
“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그 불자님을 떠올렸지요. 직감이라는 거 참 무섭지요.”
고개를 숙인 여자는 티슈를 뽑아서 손가락에 끼웠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보살님. 전생의 업이려니 생각하세요.”
숨이 차서 여자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여자의 깊은 한숨에 침묵을 지키던 승려가 입을 열었다.
“월례법회에 참석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법주사라고 하더군요. 매듭은 제가 없어도 풀 수 있을 겁니다.”
통화가 끝났는데도 여자는 휴대폰을 끌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소장이 손을 내밀었을 때서야 여자는 휴대폰을 닫았고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얹었다.
법회에 참석하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9월의 법회는 놓쳤고 10월 중순경의 법회를 날짜로 잡았다. 단풍의 절정기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여행하기는 좋은 계절이었다.
아직도 맨 처음에 어떤 말을 끄집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 중이었다. 또 다른 고민은 너무 늙은 나이에 마주한다는 점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는 염색약으로 감출 수 있겠지만 얼굴의 주름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짙은 화장을 하는 건 싫었다. 직업 때문에 늘 화장을 했지만 짙은 화장은 피하는 편이었다. 사소한 것까지 집착하는 자신을 보면서 상황을 얼른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라디오를 틀어 놓은 상태였다. 금요 인물탐방은 여자가 좋아하는 프로이기도 했다. 출연하는 인물들이 독특했기 때문에 신선하다는 느낌이었다. 여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 시간에는 라디오를 꼭 들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차를 한잔 마시면서 들으면 그만이었다. 밖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여자는 승용차 안의 라디오를 틀어 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괴짜스님을 만나보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멘트에 여자는 잘못 들었나하고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옆 차가 빵빵거리면서 지나갔다. 여자의 차가 속력을 늦추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앞질러 가던 승용차였다. 여자는 주차 공간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가까운 농협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 동안 탑에 대한 유래를 소개했고 흔적만 남아 있는 절터에 새로운 절이 들어서게 된 동기를 얘기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명쾌했다. 탑을 보호하기 위해 절이 세워졌다는 말을 듣고 여자는 절에 대한 얘기는 전혀 듣지 않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그날 승려는 여자가 그런 질문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제 총을 닦는 스님을 모시겠습니다.”
박수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여 든 것 같았다. 녹화 프로이니 며칠 전일 것 같았다. 매미가 울면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더러 가을 중턱에도 남아 있는 매미가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스님께서는 키가 참 작으시군요.”
“제가 막내라서 젖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랐다더군요. 미음을 먹었답니다. 그래서 항상 밥솥에 물을 넉넉하게 부었다고도 들었습니다. 하하...”
아나운서도 함께 웃었고 여자도 웃었다.
“키 때문에 군대도 면제 받으셨다는데... 총은 사격 연습용으로 구하신 건가요?”
여자는 깜짝 놀라듯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얼굴은 좀 험상궂게 생겼지만 사격은 질색입니다.”
“음...그렇다면 호신용인가? 요즘 도둑이 많으니 절이라고 해서 봐줄 리는 없겠지요.”
“이 부근 마을은 몇백 년 동안 도둑이 들지 않은 곳이랍니다. 오해가 될 만한 말씀은 삼가 주십시오.”
“그럼 스님께서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스무고개가 아니라 서른 고개까지 가야 답이 나올 것 같으니까요.”
“그러지요.”
스님은 몇 번 기침소리를 냈다.
“제가 아는 불자가 한 분 있어요. 그분이 가끔 사냥을 하셨죠. 꿩이나 산비둘기를 잡았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토끼를 한 마리 잡게 되었는데 곧바로 죽지 않아서 눈동자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데 몸을 떨던 토끼가 불자님을 빤히 보더랍니다. 눈물이 어려 있는 눈이었다고 하더군요. 마음이 약하고 여렸던 불자님은 그날 밤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답니다.”
“마음이 여린데 사냥을 해요? 뭔가 안 맞는군요.”
“안 맞죠.”
“그럴만한 사연이라도 있나요?”
“그렇습니다. 스무 살 적의 상처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상처요? 그 나이라면... 아, 실연당했나 봅니다.”
“아니죠.”
스님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자는 스님이 고개를 흔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게 평범한 일은 아니랍니다. 중요한 건 불자님이 자신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던 소녀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데...증오의 마음을 풀기 위해 사냥을 했던 것이고요.”
“어떤 일인데 그 정도의 증오심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 일로 인해 발가락을 잘랐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한겨울에 물에 빠졌는데 신발 한 짝을 잃어 버렸다 하더군요. 신발이 없는 상태로 먼 길을 가다가 발에 동상이 들었던 거죠.”
“아...그렇군요. 이해가 갑니다.”
“불자님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 하니 그 사연을 다 얘기하진 못합니다.”
“예...”
“그분이 그 토끼를 사냥하던 날 이후로는 총을 쓰지 않았고요. 또한 불제자가 되다 보니 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거죠. 어느 날 정중히 제게 선물하고 싶다 하더군요.”
“아하... ”
“실은 제가 총을 좋아합니다. 어릴 적에는 늘 총 놀이만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고 물총하고 새총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죠. 혹 군대에 가지 못해서 생긴 콤플렉스 같은 거 아닌가요?”
아나운서는 말을 하면서 마치 남자처럼 웃었다.
“김희진 아나운서께서는 남의 아픈 데를 사정없이 후벼 파는 버릇이 있군요. 저는 성격상 콤플렉스 같은 건 별로 없어요. 실은 총을 닦고 있으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죠. 처음에는 사람들의 그런 호기심이 좋아서 열심히 닦았습니다.”
“사람은 금기시하는 걸 볼 때 관심을 많이 갖죠. 스님이 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스님도 총 갖는 거 법적으로 제제하지 않죠?”
“당연합니다. 중도 사람이니까요. 간혹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신도들을 볼 때가 있어요. 그분들은 저승까지 갖고 가겠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죠. 털어버리면 훨씬 가벼워질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데에는 이 총이 최고입니다. 제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용해서 입을 열도록 유도하는 거죠.”
“그렇군요.”
“다만 거짓말을 하는 성미는 아니지만 어느 보살님께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
아나운서와 승려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길게 느껴졌다. 여자는 몸이 움츠려들어서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가을 햇살이 숨바꼭질하듯 그림자를 동쪽 벽에 떨어뜨리면서 서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여자는 사무실의 한쪽 벽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면서 총구가 여우 주둥이처럼 뾰쪽한 총을 떠올렸다.
“이 총으로 김희진 아나운서를 유혹해 볼까요?
“그 총으로 저를 쏘려는 게 아니고요?”
“하하 이거 노리쇠도 없고 탄피도 없어요.”
“총을 만져 봐도 되겠죠? 아...무겁군요. 뭐랄까...잘생겼다고 해야 하나. 디자인이 세련되었군요. 이게 엽총인가요?”
“아뇨. 화약의 힘으로 총알이 나가는 건 엽총이고 이건 압축된 공기의 힘으로 나가니 공기총이죠. 엽총은 살상용이고 이건 훨씬 위력이 약합니다.”
“너무 이론에 밝으신 거 보니 몰래몰래 사냥을 하시나 봅니다.”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무튼 총을 매개로 얘기를 시작하다 보면 한숨과 함께 묵혀두었던 상처가 끌려 나오죠.”
“무슨 얘기인지 잘 알겠군요.”
여자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마무리를 짓고 광고 멘트가 흘러나올 시간이었다.
아나운서는 여자의 생각대로 몇 마디 더 하고 승려와 인사를 나누었다. 여자는 라디오를 껐다.
바람이 잠깐 불었다 그치곤 했다. 수은등 빛을 받아 가로수의 이파리가 반짝거렸다. 앞 유리창을 통해 거리를 보던 여자는 키를 돌려 시동을 켰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밀어 넣고 칵테일 바에 가서 한잔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잠깐 사이에 가로등 빛이 한층 밝아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