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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는 힘이 세다

Bollnow 2024. 4. 1. 15:07

염소는 힘이 세다

김승옥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때때로 홍수(洪水)의 꿈을 꾼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홍수의 꿈을 꾸었다. 황톳빛 강물이 부글부글 끓듯이 거품을 일으키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강변에 있는 마을의 폐허 위에 서 있었다. 간밤의 폭우(暴雨) 때문에 집들은 더러운 판잣더미가 되어 있었고, 강물이 흐르며 내는 소리- 그 무겁고 한순간도 휴지(休止)가 없는 쭈욱 이어서 들리는, 그래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처음엔 그 소리가 끝날 때를 기다리지만 차츰 그 소리가 음악이나 사람의 울음소리와는 달라서, 결코 언젠가 끝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그러자 그것이 생명과 의지를 가진 괴물처럼 생각되어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그러한 강물 소리가 울려서인지, 그 비에 젖어 시꺼멓게 된 판잣더미가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로부터 도망치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판잣더미 속에서 매애애하는 염소의 울음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나는 판잣더미를 헤쳤다. 하얀 털을 가진 염소새끼 한 마리가 그 속에 있었다. 나는 그놈을 가슴에 안았다. 새끼염소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은 내 귀에 들리지 않던 무서운 강물 소리가 내가 그놈을 가슴에 안고, 어디서 이놈의 임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동안에 다시, 나를 휩쓸고 갈 듯이 달려들었다. 나는 새끼염소를 안은 채 도망쳤다. 그 무서운 강물소리,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소리의 메아리라고나 하는 편이 좋을 만큼 귀신 같은 데가 있는데, 그 웅웅거림이 끝없이 나를 쫓아오고 있었고 그리고 내 가슴에 안긴 새끼염소는 나의 달음박질을 독려하듯이 쉬임 없이 그 곱게 떨리는 소리로 울고 있었다. 나는 잠이 깨었고 눈을 떴다. 그것은 내가 우리 집의 염소를 처음 얻던 때의 바로 그 사정인 꿈이었다.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는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때때로 홍수의 꿈을 꾼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홍수의 꿈을 꾸었다.

꿈이 깼을 때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앉았다. 무서운 강물의 웅웅거림과 염소의 슬프고 끊임없는 울음 소리는 꿈이 깨었음에도 여전히 내 귀에 들려 오고 있었다.

내 할머니는 조금 귀머거리다. 그래서 할머니는 산골에서 살아도 무방하고 자동차들과 전차들이 잇달아 달리는 도시의 한길가에 살아도 별로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할머니는 이 집에서 살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내 어머니와 누나는 눈도 맑고 귀도 밝다. 그래서 항상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아아, 깨끗하고 조용한 곳으로 이사 갔으면! 저 찻소리들 때문에 난 죽고 말 거야.” 그러면 나두 그래, 엄마하고 누나가 말한다. 나는 어머니와 누나를 깨끗하고 조용한 곳으로 보내드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곳으로서 깨끗하고 조용한 곳은 우리 학급 반장네 집의 변소뿐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누나를 남의 집 변소로 보내드릴 수는 없다. 나는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사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 집 앞 한길가에서 수레나 오토바이, 트럭이 살림살이를 잔뜩 싣고 달리는 것을 자주 본다. 내가 알고 있는 이사는 그것이다. 살림살이를 실은 차들이 유난히 많이 지나다니는 날엔 할머니는 오늘이 손이 없는 날인 모양이군하시곤 한다. “저 차들은 멀리 가?”하고 내가 할머니에게 소리쳐서 묻는다. “아아니라고 할머니는, 거리에서 곧장 집 안으로 날아오는 먼지들 때문에 항상 쉰 목소리로 대답하신다. “기껏해야 서울 시내겠지.”

내 귀에 여전히 들려오고 있는 강물소리가 집 바로 밖의 거리를 자동차들이 달리며 내는 소리의 혼합체인 것이 점점 뚜렷해졌다. 나는 집 밖의 거리 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여러 소리들이 범벅이 되어 마치 범람하는 강물 소리 같은 그 소리 속에서 버스가 내는 소리와 택시가 내는 소리와 트럭이 내는 소리와 전차가 내는 소리를 나는 차츰 구별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여전히 내 귀에는 한 가지 이상한 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것도 염소의 슬픈 울음소리였다. 우리집 뒤안에서 나야 할 소리가 거리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집 염소 소리지?” 병들어 쭈욱 누워 계신 어머니가 근심스런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서 이른 아침인 밖으로 뛰어나갔다.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는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염소가 죽는 순간까지도 힘이 세었던 것을 보았다.

우리 집의 오른편으로는 시멘트 벽돌로 지은, 좀 길다란 느낌을 주는 단층집이 있다. 그 건물의 한길로 향하고 있는 면은 더러운 유리가 끼어 있는 미닫이문과 커다란 간판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긴 건물이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간판도 각각 다른 내용으로서 세 개다. 그중 한 개는 초록색의 길고 굵은 구렁이가 숲 속을 헤치며 달리고 있는 그림이다. 그 간판이 달린 집에서는 미닫이문 밖의 인도(人道),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화로를 내어놓고 그 위에 항상 김이 새어 오르는 약단지를 올려놓고 있다. 그 화로는 겉은 쇠로 되어 있고 안은 황토를 두껍게 발라서 만든 크고 높은 것으로서, 그 안에는 수많은 뱀들이 저주하기 위해서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연탄불의 작고 파란 불꽃이 수없이 있다. 그 불꽃 위에 올려진 약단지 속에는 진짜 뱀들이 담겨 있고 끓는 물이 그 뱀들의 형체를 풀어헤치며 뱀 속에 있던 가지가지의 맛과 양분을 빨아들이고 있다. 새파란 불꽃과 끓는 물과 그 속에서 요동치다가 점점 형체가 녹아 버리는 뱀떼와. 그래서 내게는 그 화로 전체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었고 그래서 그 화로의 무게는 나로서는 짐작도 안 되는 것이었다.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얀 페인트칠을 해버린 유리창에 붉은 글씨로 생사탕(生蛇湯)’이라고 써놓은 그 집에서, 지옥 바로 그것인 그 화로를 유리창의 안- 집 안에 두지 않고 유리창 밖- 행인들이 오고 가는 한길에 내어놓고 있는 이유도 내게는 연탄가스 때문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고 오직 그 화로, 지옥의 무게를 감당해낼 수가 없어서인 것만 같다.

오늘 아침, 그 화로가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되는 곳에 굴러 넘어져 있었고 빨갛게 단 연탄은 산산조각이 되어 길 위에 흩어져 있었고 약단지는 금이 가서 김이 나는 물이 그 틈 사이로 새어 나와 길바닥 위에 뱀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생사탕집의 뚱뚱보 영감이 한 손으로는 우리 염소의 목고리를 쥐고 기다란 나무토막을 쥔 다른 손으로는 염소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염소는 약하게 울고 있었다. 그것은 울음이 아니라 이제 죽어 가는 신음이었다. “우리 염소예요. 왜 때려요?”하고 나는, 길에 굴러 넘어진 지옥의 주인인 그 영감의 팔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분노 때문에 나는 울먹거렸다. 나는 다시 집으로 달려가서 할머니를 끌고 나왔다. 염라대왕과 만나서 싸울 수 있는 것이, 우리 할머니라면 가능했다. 할머니는 비로소 사태를 아셨다. 우리 할머니는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염라대왕에게 달려들었다. 염라대왕이 염소를 때리던 매질을 멈추고 할머니를 상대하기 위해서 그가 쥐고 있던 목고리에서 손을 떼자 염소는 맥없이 쓰려졌다. 나는 염소를 부둥켜안았다. 할머니와 염라대왕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요 할미야. 고삐를 단단히 매어 두지 않고 왜 풀어 놨느냔 말야, 약탕관 값하고 뱀 값을 물어내란 말야, 저놈의 염소 한 번만 더 밖에 나왔다간 봐라, 아주 죽여 버릴 테니…….”그러나 염소는 우리 식구들 모르게 고삐를 말뚝에서 슬쩍 떼어내고, 우리집 뒤안 변소와 헛간이 붙은 판잣집 속에 있는 자기의 우리로부터 거리로 뛰어나올 기회를 영영 갖지 못하고 말았다. 벌써 숨이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는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머리칼이 하얗고 입속에는 어금니 세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귀머거리 할머니는 목소리를 제외하면 힘이 세지 않았다. 목소리는 아무리 커도 힘이 될 수 없으니까 할머니는 완전히 힘이 세지 않았다. 달포 전까지는 종로(鐘路) 거리를 오락가락하며 꽃장사를 하다가 마지막 가을비가 내리던 날부터 쭈욱 끙끙 앓으며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있는 어머니도 힘이 세지 않았고 그리고 누나- 이젠 어머니 대신,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교외에서 수레에 꽃을 실어 가지고 온 꽃 도매상에게서 꽃을 받으러 청계로(淸溪路)로 갔다가 바구니에 두서너 종류의 꽃을 받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을 지어 먹고 다시 꽃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종로의 어머니가 나가 앉아 있던 빌딩의 벽밑,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골목 사이로 가는 누나도, “열일곱 살이면 힘도 좀 쓰게 됐는데……하시는 할머니의 말씀만 없다면 힘이 세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열일곱 살이 힘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모르니까 누나도 완전히 힘이 세지 않았고 그리고 여름철의 폭풍이 부는 밤이면 우리 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버리고 싶다는 듯이 쿵쾅 소리를 내며 날뛰는 우리집의 양철지붕도 힘이 세지 않았고 집 앞 한 길에 교외의 도로포장공사장(道路鋪裝工事場)으로 가는 불도저가 지나갈 때면 덜덜덜 떨고 있는 우리 집의 썩어가는 판자담과 판지로 된 쪽대문도 힘이 세지 않았고 염소가 그럴 생각만 있었으면 간단히 고삐를 떼고 도망칠 수 있었던 말뚝도 힘이 세지 않았고 미닫이를 사이에 둔 우리 집의 방 두 개도, 아무리 밝은 날에도 저녁때처럼 어두컴컴하기만 해서 힘이 세지 않았고 좁은 마당도 그것이 좁아서 힘이 세지 않았고 아니 우리 집 전체가, 그것이 날이 갈수록 키가 자라나는 벽돌 건물들 틈에 끼어 있기 때문에 힘이 세지 않았다. 그리고 나, 바로 나도 열두 살짜리의 힘없고 키 작은, “아유, 우리 예쁜 고추야!”일 뿐이었다.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아저씨는 우리 집에 살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아저씨는 힘이 세었다. 할머니가 나에게 아저씨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아저씨는 키는 작지만 턱과 볼에 수염이 많고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고 사람과 얘기할 때는 조그만 눈으로 상대방을 흘겨보며 얘기한다. 나는 상대방을 흘겨보면서 얘기하는 아저씨의 그 모습이 부러워서 나도 동무들과 얘기할 때는 상대방을 흘겨본다. 언젠가 나보다 힘이 센 아이가 진짜로 나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 넌 왜 날 째려보지?” “아아냐하고 나는 말했다. “째려보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정말 그 애를 흘겨보지 않고 시선을 밑으로 떨구어버렸다. 그때 나는 서투르게도 아저씨 흉내를 낸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염소가 죽었다? 염소를 파묻어달란 말이지? 알았어.”하고 아저씨는 이부자리 속에 누운 채 여전히 잠들어 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따가 가겠다구 할머니한테 말해. 제기랄, 파묻다니, 미련하게.” 아저씨는 여전히 눈을 감고 누운 채 혀를 쯧쯧 찼다. “, 국수 한 그릇 먹고 가련?”하고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집에서 파는 돼지기름 냄새나는 국수를 나는 싫어했다. 그것은 정말 비위에 거슬리는 냄새였다. 지게꾼들은 그러나 그 냄새 역겨운 국수를 맛있게 먹곤 했다. 지게꾼들은 힘이 세다. 아마 그 돼지기름 냄새가 나는 국수를 먹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 냄새가 싫다. 나는 고기 기름 냄새가 나는 거리를 지날 때면 항상 뜀박질을 했다. 나는 많은 거리를 뜀박질로 지나가야 한다. 서울엔 고기 기름 냄새가 나는 거리가 너무나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고기 기름에 대한 혐오감 속에는 그것에 대한 부러움도 섞여 있다. 고기 기름을 먹을 수 있으면 힘이 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늘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있기 때문이다.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며칠 전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고 힘센 것은 모두 우리집의 밖에 있다. 아저씨는 우리 집의 밖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아저씨는 힘이 세다. 힘이 약한 사람은 힘이 센 사람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아저씨는 말했다. “미련하게 염소를 왜 파묻어요? 그걸 이용해 보도록 하세요. 꽃 파는 것보담야 훨씬 나을걸요.” 할머니도, 병을 앓고 누워 계신 어머니도 아저씨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나는 어쩐지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고개를 끄덕거리시는 것이 조마조마했다. 고개를 끄덕거려서는 안 될 것처럼 문득 생각되었지만 아저씨의 의견이 눈에 보이는 일과 물건들로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엔 명절날처럼 신나기만 하였다. 마당가 장독대 곁에 큰 가마솥이 놓였다. 우리집의 죽어버린 힘센 염소가 털이 벗겨지고 여러 조각으로 잘려서 그 가마솥 속에 들어가 않았다. 부엌에 뚝배기가 많아졌고 누나는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돋을 만큼 뚝배기 속에서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는 길 건너편에 있는 내과병원의 하꼬방 같은 입원실로 옮겨 가셔서 그 입원실의 우리 집 쪽으로 향한 벽만 바라보며 누워 계신다. 할머니는 이따금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뭐요? 뭐라구요? 난 귀가 잘 안 들린다우, ? 외상으로 하겠다구? 안 돼요. 안 돼, 자기 몸 좋아지려구 고깃국 먹구서 외상으로 하자니 말이 되나?” 나는 때때로 힘없이 썩어가는 우리 집의 판자담과 판자로 된 쪽대문에 정력 보강 염소탕이라는 광고지를 새로 써서 갖다 붙이곤 한다. 염소고깃국에서는 돼지기름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났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매일 한 번씩 식구들 몰래 뒤 안에 있는 변소에 가서 토했다. 그러나 그 고약한 냄새는 점점 더 부풀어서 마당을 채우고 마루를 채워 버리고 두 방을 채워 버리고 심지어 뒤안의 이젠 비어 버린 염소 우리도 채워 버렸다. 벽에서도 그 냄새가 났고 이불에서도 그 냄새가 났고 누나의 옷에서도 할머니의 머리칼에서도 났고 밤늦게 방문을 안에서 잠그고 난 후 할머니와 누나와 내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며 차례차례 셈해보는 돈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아유, 기름 냄새!”하며 내과병원의 여드름 많은 간호원은 내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병원 안에 들어서면 손바닥으로 코를 막았고, “고기 기름 냄새가 별로 좋지 않구나라고 어머니도 그 하얗고 가죽만 남은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냄새는 아젠 나조차도 휩싸 버렸다. 이제 나는 그 냄새가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우리 집 염소는 보름쯤 전에 죽어버렸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집의 밖에 있다. 염소 고깃국을 사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서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기운이 세다. 기운 센 사람들은 사흘 만에 염소 한 마리씩 삼켜버린다. “겨울철엔 뭐니 뭐니 해도 염소 고깃국이 제일이거든. 한 그릇 먹고 나면 얼굴이 불그스름해지고 사타구니가 뜨뜻해진단 말야.”손님 중의 한 사람이 말한다. “예끼, 이 사람, 아닌 게 아니라 마누라도 가끔 데려와서 이걸 먹여야겠어.” “동네가 요란해지겠군.” 그들은 난 알 듯 말 듯 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높은 소리로 웃어 댄다. 나는 그들이 좀더 기운이 세어서 염소를 하루에 한 마리씩 뱃속으로 삼켜버리기를 원한다. “염소고기에 소주 한잔이 없어서 될쏘냐?”하고 어떤 손님이 말했다. “할머니, 술도 좀 가져다 놓구 파시라우요.”하고 그 손님이 외쳤다. 많은 손님들은 술을 찾았다. “손님들이 술을 팔라구해요.”라고 나는, 어머니의 저녁밥을 바구니에 놓고 병원에 갔을 때 어머니께 얘기했다. “, 그건 안 된다. 술은 팔지 말라구 꼭 할머니한테 말씀드려라.” 어머니는 손까지 내저으며 성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정말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할머니께 내가 말했다. “엄마가 술은 절대로 팔지 말라구 하셨어.” “오냐, 오냐. 술은 팔지 말아야지. 너 이젠 엄마한테 그런 얘긴 하지 말아야 돼. 엄마 병이 더해진단다.”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푸른색의 작은 술병들을 부엌 선반에 줄지어 세워 놓고 손님들에게 술을 판다.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마치 싸움이라도 할 것 같아서 서럽다. 나는 어머니에게 술을 팔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만 알고 있기로 하였다.

이젠 단골손님이 좀 생겼니?” 어머니가 내게 물으셨다.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내가 대답했다. “장사를 하려면 단골손님을 많이 가져야 한단다.” 어머니는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씀하셨다. “광화문에서 꽃을 팔 때 내게 오는 단골손님이 꽤 많았단다. 그중에서 거의 날마다 내 꽃을 팔아주는 사람이 있었단다. 내가 앞에 꽃바구니를 놓고 앉아 있는 건물은 은행인데 그 사람은 그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남자였지. 머리를 깨끗이 빗어 넘기고 안경을 쓴 사람이었어…….” “엄마, 나도 한번 봤어하고 내가 말했다. “언제더라? 내가 엄마한테 학급비 타러 갔을 때 그 사람이 우리 앞을 지나가면서 엄마에게 절했잖아? 저 사람이 내 꽃을 많이 팔아준다구 그때 엄마가 그랬잖어?” “그랬던가?”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마 그랬을지도 몰라. 내 앞을 지나갈 때 항상 인사를 했으니까. 난 한 번 물었지, 꽃을 거의 날마다 사가지고 가서 어디에 쓰느냐구 말야. 그랬더니 자기 약혼자가 꽃을 아주 좋아한다는 거 아니겠니?” “약혼자는 색시지?” “맞았다.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이란 뜻이야. 나도 한 번 그분의 심부름으로 어느 다방으로 그 여자를 만나러 간 적이 있지 않았겠니! 그 두 사람이 시간 약속을 했는데 남자에게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내가 남자의 부탁으로 여자에게 간 거야. 한 시간쯤 기다려줬으면 좋겠다고 내가 말하니까 그 여자가 방긋 웃으면서 말하더라. 아주머니, 몇 시간이고 기다리겠단다고 좀 전해 주세요, 라고. 참 좋은 사람들이었어.”

염소는 힘이 세다.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가마솥 속에서 끓여지는 염소는 힘이 세다. 수염이 시커멓고 살갗이 시커멓고 가슴이 떡 벌어졌고 키가 크고 손이 큰 남자들도 가마솥 속의 염소에게 끌려서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 염소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만 골라서 우리 집으로 끌어들일 만큼 힘이 세다.

우리 집 쪽대문에서 스무 발짝쯤 떨어진 곳에 합승 정거장이 있다. 한 남자 어른이 항상 거기에 서 있다. 그 사람은 어떠한 합승이 올지라도 타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은 항상 거기에 서서, 합승의 여차장이 내미는 종잇조각에 무언가 적어 주고 있기만 한다. 그 사람은 합승회사에서 내보낸 사람으로서 운전사들이 회사에서 정해 준 시간을 잘 지키고 있나 없나 조사하러 나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마흔 살쯤 먹은 사람이다. 방한모자를 쓰고 있고 낡은 오버를 입고 있고 두껍고 커다란 가죽장갑을 끼고 있다. 코가 납작하고 턱이 뾰족하고 두터운 입술이 바나나만큼이나 크다. 그 사람도 우리 집 단골손님이다. 이젠 고깃국을 먹지 않더라도 틈틈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불을 쬐며 할머니와 큰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는다. “할머니, 영감님은 언제 돌아가셨소?”하고 그 남자는 소리쳐서 묻고 낄낄댄다. “늙은이를 놀리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거야.” 할머니가 외치신다. “술 한 잔 주슈하고 그 남자가 외친다. “술값을 내야만 주지.” 할머니가 외치신다. “, 월급 나오면 어련히 드리겠수. 소주 한 잔 살짝 덥혀서 줘요.” “이 선생은 너무 술을 좋아해서 망할 거야.”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시면서 술을 준다. 나는 그 남자가 기분 나쁘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내가 귀여운 모양인지 이따금 내 머리를 주먹으로 툭 치며 히이 웃는다. 내 누나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 치기도 한다. 그럴 때 누나는 손에 들고 있던 것 이를테면 물이 든 바가지라든가 국자라든가 연탄집게를 그 남자를 향하여 내던지며 소리 지른다. “제발 좀 그러지 마세요.”그러면 사내는 온몸에 물을 뒤집어쓰고도 끄떡없이 히이 웃으며, “선아 중매는 내가 서야지라고 말한다. 눈이 많이 내려서 집 앞 한길을 달리는 차들이 바퀴에 쇠줄을 감고 찍찍거리며 달리던 날, 나는 뒤안에 있는 헛간- 우리집 염소가 살아 있을 때엔 염소의 우리로 쓰던 곳으로 갔다. 그곳으로 연탄을 가지러 간 누나가 오지 않아서 누나의 연탄을 가지러 갔던 것이다. 나는 헛간문 앞에서 갑자기 덜덜 떨리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가마니로 문을 가린 헛간 속에서 끼익끼익 하는 무서운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괜찮아, 괜찮아, 이러지 말아. 오오 귀엽지, 자아 자아……라고 굵고 낮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고 횃대에서 닭이 쥐를 보고 놀라서 푸다닥거리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나는 누나에게 큰 변이 생긴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무서워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겨우 몸을 움직여서 가마니와 헛간문의 기둥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합승 정거장의 사내가 아랫도리를 반쯤 벗은 채 한 손으로 누나의 입을 틀어막고 누나의 몸 위에 엎드러져 있었다. 누나의 발이 힘없이 허공을 차고 있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할머니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뛰어서 방으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이제 막 나간 손님들이 앉아 있던 식탁을 행주로 닦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어서 알려야 한다는 마음과는 반대로 입이 영 열리지 않았다. 목구멍 속이 뜨겁기만 했다. 결국 아뭇소리도 못하고 마루로 나와버렸다. 그때 합승정거장의 사내가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모두 내 두 눈 속에 모르고 그놈을 쏘아보았다. 그놈은 핏발이 선 눈을 묘하게 오그리며 히이 웃고 아무 말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헛간으로 달려갔다. 누나는 더러운 짚더미에 머리를 처박고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누나의 치마가 조금 걷어 올려져서 드러나 보이는 하얀 허벅다리에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누나아!”하고 나는 고함질렀다. 누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누나는 내 다리를 감싸 안으며 다시 소리를 죽여 울었다. 그놈은 그 후로도 뻔뻔스럽게 우리집에 드나들었다. 매일 서너 차례씩 들렀다. 그놈이 대문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누나는 얼른 부엌 속으로 들어가서 그놈이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누나와의 약속대로 할머니에게도 병원에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도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와 누나는 가끔 둘이서만 있게 되면 그놈을 어떻게 죽여버릴 수 있을까 하고 작은 소리로 의논하였다. 그러나 그 방법은 전연 생기지 않는다.

염소는 힘이 세다.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가마솥 속에서 끓여지는 염소도 힘이 세다. 수염이 시커멓고 가슴이 떡 벌어졌고 키가 크고 손이 큰 남자들도 가마솥 속의 염소에게 끌려서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 염소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만 일부러 골라서 우리 집으로 끌어들인다.

그 사람은 키도 작고 우락부락하게 생기지도 않았지만 힘이 센 듯했다. 그 사람과 함께 온 검은 유니폼을 입은 순경보다 더 힘이 센 듯했다. 염소가 왜 그 사람조차 우리 집으로 끌어들였는지 모르겠다. 염소는 힘자랑이 몹시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이 할머니에게 말했다. “허가도 내지 않고 술을 팔고 음식을 팔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몰랐단 말요.” 할머니는 벌벌 떨며 말씀하셨다.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허가를 어떻게 내는 줄도 몰랐습니다.” 누나는 부엌 속에서 떨고 있었고 나는 방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었다. “누가 이집 주인이오?” 순경이 말했다. “우리 며느리가 주인입니다. 저도 주인이구…….” “며느님은 어디 있어요?” 순경이 말했다. “병을 앓아서 요 앞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남자는 없어요?” 순경이 말했다. “, 있지요.” “어디 갔어요?” 할머니가 내 방 안에 숨어 있는 나를 부르셨다. 나는 무서움에 질려서 비틀비틀 마루로 나갔다. “남자 어른 말에요, 어른하고 세무서에서 온 사람이 할머니에게 귀에 대고 소리쳤다. “아무도 없어요. 전쟁통에 모두 죽었어요. ”할머니가 울먹거리며 대답하셨다. “며느님한테 갑시다.” 순경이 말했다. “우리 며느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 빕니다. 우리 며느리는 죽어요. 며느리한테는 가지 마세요.” 할머니가 손을 비비며 말씀하셨다. 두 남자는 무어라고 수군거렸다. 한참 동안 수군거렸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순경이 말했다. “오늘부터 당장 그만두시오, 할머니. 그러잖으면 징역 삽니다. 꼭 장사를 하시려면 구청에 허가를 받구 해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리며 대답하셨다. “알았습니다, 나으리.” 그 사람들은 돌아갔다. 누나와 나는 병원의 어머니한테로 달려갔다. “우리가 잘못한 거야.”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젠 그만 집어쳐요, 엄마. 우리 그 장사는 그만 집어쳐요.”라고 말하면서 누나는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대고 울었다. “무서워요. 무서워 죽겠어요.” 계속해서 누나가 말했다. “살기란 힘든 거란다.” 어머니가 힘없이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를 아저씨에게 보내셨다. 아저씨는 말했다. “세금을 내면서 그 장사를 하려면 음식값을 많이 받아야 한다. 음식값을 많이 받으면 누가 그걸 사 먹으러 오겠니? 순경 말은 못 들은 체하구 그냥 계속 하라구 할머니한테 그래라.” 그러나 우리는 아저씨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아직 덜 나으신 몸을 집으로 다시 옮겼다. 누나가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청계로에 나가서 꽃을 받아왔다. 누나는 아침부터 꽃바구니를 들고 종로로 나갔고 어머니는 오후에 누나의 것보다는 작은 꽃바구니를 들고 소공동(小公洞) 쪽으로 나가셨다.

염소는 힘이 세다, 죽어버린 염소도 힘이 세다. 앓는 어머니를 소공동 쪽으로 밀어 보낼 만큼 힘이 세다.

나는 학교가 파하면 소공동으로 간다. 어머니 곁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심심해지면 종로에 있는 누나에게로 간다. 누나는 자기 곁에 앉아 있는 사탕장수 아주머니에게서 사탕 한 알을 얻어 나를 준다. 어느 날 누나가 말했다. “그놈이 오늘 점심때 나를 찾아왔어.” 누나의 음성은 무서움으로 떨고 있는 듯했다. “뭐라구 그랬어?” 내가 물었다. “난 암말두 안 했어. 그랬더니 나한테 점심 사줄 테니 따라오래.” “그래서?” “난 안 따라갔어.” “잘했어.” “누나, 무섭지?” “.” 누나는 내 손을 꼬옥 쥐며 말했다. “내가 권총 한 개만 있으면 그놈을 그저…….” “그러면 감옥살이하니까 그건 안 돼.” 누나는 근심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누나는 거짓말쟁이였다. 어느 일요일 오후에 나는 누나를 찾아갔다. 항상 앉아 있던 자리에 누나가 보이지 않았다. 사탕장수 아주머니에게 물어 보았지만 누나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그 아주머니는 대답했다. 나는 종로 2가에서 동대문까지 천천히 걸으며 누나를 찾았다. 길가의 장사꾼들 틈에 살펴보았지만, 땅콩장수가 가장 많다는 사실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지저분하고 좁은 골목들도 모두 살펴보았지만, 그 골목들 속엔 여관이라는 간판이 가장 많다는 것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동대문을 지나서 저쪽으로 갔을 리는 없었다. 그쪽에 꽃을 살만한 사람들은 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나는 교통순경의 눈을 피하여 동대문의 쇠창살을 넘어 들어가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 숭인동 쪽 거리와 서울운동장 쪽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 형편이었다. 동대문 건물 속의 음산한 마루에만, 거기에 귀신이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서, 신경이 쓰였다.

이놈!”하고 성벽(城壁) 아래에서 누가 외쳤다. 내려다보니 교통순경이 나에게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겁이 나서 다른 쪽으로 도망갈 수가 없을까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빨리 내려오지 못해?” 순경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도망갈 길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며 밑으로 내려왔다. 순경이 따귀를 철썩 때렸다. 불이 번쩍하며 앞이 껌껌해졌고 바지에 오줌을 질금 싸버렸다. “이놈 정신 차려. 다시는 올라가지 마. 알았어?” 순경이 말했다. “.”하고 나는 울음이 터질 듯해서 입술을 깨물며 겨우 대답했다.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대답해. 알았어?” “.” 동대문까지 오던 길을 다시 거슬러 가며 길가를 살폈지만 누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라리 광화문 쪽으로 먼저 가볼 걸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좌우로 눈을 열심히 돌렸다. 파고다공원 앞에 왔을 때 나는 길 건너 저쪽에 누나 같은 여자를 보았다.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보았더니 틀림없는 나의 누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누나 곁에는 그놈이 붙어 서서 누나와 나란히 걷고 있었고 누나의 꽃바구니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누나는 고개를 조금 숙여 길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고 그놈은 마치 자기 딸이라도 데리고 가는 듯이 거만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혹시라도 나를 발견할까 봐 얼른 파고다공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쇠창살 틈으로 길 저편의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놈이 누나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누나는 웃는 얼굴로 그놈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다. 그들의 모습이 건물에 가려진 내 시야의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쇠창살에 이마를 댄 채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쇠창살은 무척 차가워서 내 이마는 금방 꽁꽁 얼어버렸다.

이윽고 나는 느릿느릿 공원 밖으로 나섰다. 길의 어느 곳에서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힘껏 숙이고 주먹으로 자꾸 샘솟는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걸었다. 내 가슴이 무섭게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정민아!”하고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의 목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누나는 사탕장수 아주머니의 옆 자기 자리에 꽃바구니를 천연스럽게 놓고 앉아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놈을 향하여 그랬었던 것처럼 온 힘을 두 눈에 모으고 입을 꼭 다물고 누나를 쏘아보며 서 있었다. 누나의 얼굴이 하얘지며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왜 그러니?” 누나의 입에서 자장면 냄새가 풍겨 나왔다. “더러워.”하고 나는 말했다. “더러워, 저리 가!” 누나가 내 양쪽 어깨를 자기의 두 손으로 아플 만큼 눌러 쥐었다. “아무것도 아냐. 나도 취직할 수 있을 뿐인 걸.” 누나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나는 힘차게 어깨를 흔들어 누나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사람들을 비켜 가며 빨리빨리 걸었다.

누나가 타고 있는 합승이 처음으로 우리집 앞을 지나는 날, 나는 집 앞의 길에서 누나의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할머니도 쪽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셔서 나에게, “아직 안 오니?”하고 내게 물으셨다. “아직 안 와요라고 내가 대답하면 할머니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나오셔서, “아직 안 오니?”하시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는 항상 합승 정거장에 서 있는 그놈에게, “고마워요, 이 선생하고 말하시지만 나는 그놈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는다. 나는 염소를 생각해본다. 그놈은 무척 힘이 세었다. 그놈이 죽어버리니까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어쨌든 누나를 힘세게 만들어 주었다. 누나가 타고 있는 합승의 번호가 저쪽에 나타났다. 내 가슴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할머니이하고 나는 집 안을 향하여 고함쳤다. “누나 차가 왔어, 빨리빨리할머니는 어금니가 세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합죽한 입에 웃음을 가득 담고 허둥지둥 뛰어나오셨다. 나와 할머니는 썩어 가는 우리 집의 판자담 틈에 눈을 붙였다. “오라잇!”하고 누나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분홍색 합승이 우리집 쪽대문 앞 한길을 부르릉거리며 지나갔다.

차창 그 안에서 누나가 승객들을 향하여 무어라고 말하며 손짓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정민아!”하고 할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나지막하게 말씀하시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그러나 우리 귀머거리 할머니의 음성은 항상 힘이 세다. “할머니!”하고 나도 중얼거렸다. 누나의 차가 남기고 간 푸르스름한 연기가 길 위에서 어지럽게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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