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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Bollnow 2024. 3. 30. 06:06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구효서

 

. 그렇습니다. 혼자 살고 있어요...... 서른하나. 용띠니까요...... , 예예. 그렇지요. 혼자가 아니지요. 정신이 없어서 그만...... 죄송합니다. 그래요.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하나 있지요. 나중에, 아마 얘기하다 보면 그 얘기도 나올지도 모르지요. 그건 그때...... 제 아이요? 은철이, 은철이예요...... 전 사실 여기에 온다는 게 많이 겁났었어요. 정말 여자 수사관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을 못...... , 알았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한유미예요. .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 아직. 아직 역할을 맡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내년 봄엔 아마 무대에 설 수 있을 겁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연습을 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세요? 연극을 좋아하신다니 참 다행이에요. 정말이지 연기란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연극이란 것이 원래 그런 거래지만 말이지요.

......아무래도 제겐 그게 제일 큰 문제였지요. 네 살난 아이. 그 애를 데리고 다니면서는 연극은커녕 면봉 한 개비도 제대로 팔 수 없었을 테니까요. . 잠실동이 맞습니다. 아뇨. 천백십칠 동이지요. 일일일칠. 예 육백육 호는 맞아요. ......그 얘기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전 그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물론, 물론 그의 이름은 윤 뭐랬더라. , 윤명훈이랬어요. 하지만 누가 알겠어요. 그의 이름이 윤명훈인지 뭔지...... , 그래요? 그게 본명이었다고요? 그랬었군요.

글쎄요. 그가 분명히 윤명훈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지만 그게 정말 그의 이름이라는 믿음은 들지 않았어요. 아마 그런 걸 거예요. 그가 워낙 누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타입이라 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그게 본명이든 아니든 그 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그의 이름 따위를 기억하거나 그걸 어디에다 기록하거나 헤야 하는 일은 여간해서는 생길 것 같지 않았으니까요. 하는 일 없이 하루종일 공원의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 있거나 아이들 놀이터에서 해바라기나 하는 남루한 사내의 본명을 누구든 알려고 하지 않지요.

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그래요, 그냥 저어기라고 하거나, 그쪽이라고 하거나, 애가 부르는 걸 따라서 아저씨라고도 했습니다. 정해진 호칭은 없었고, 그 나이의 남자에게 어울리는 모든 대명사로 불렸던 것입니다.

마흔하나? 많아야 마흔둘이겠다는 생각은 했었지요. 나이 같은 걸 서로 묻거나 대답한 일은 없었으니까요. 어느 쪽에서도 그런 게 궁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그래요? 서른여덟이었다구요? 생각보다 나이가 적었군요. 그래요. 어떨 땐 나와 같은 세대구나, 라는 생각도 얼핏 들긴 들었으니까요.

......, 그를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언젠가부터 그가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그게 작년 가을이었는지 올 봄이었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는 아파트 단지에 스며들 듯. 이런 표현은 어떨진 모르지만, 하여튼 스며들 듯 나타난 셈이지요. 그가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시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그래요. 그만큼 그의 존재는 미미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사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겁니다. 잠실동의 저층 주공 아파트란 대부분 재개발을 염두에 둔 돈 많은 사람들이 사다 놓은 거라서 주민은 가난한 세입자들 뿐이지요. 전출과 전입이 빈번하고, 웬만해서는 집을 고치는 일도 없습니다. 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퇴락해 가는 게 눈으로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누가 이살 왔고 우가 떠나는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겁니다. 아마 지

금도 윤명훈이란 사람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예요. 저야 뭐 애 때문에 그를 알 수밖에 없었지만요.

......, 바로 그 말씀을 지금 드리려는 겁니다.

-이 놈이 아주 착해요.

이것은 그가 제게 처음 던진 말이었습니다. 그의 오른손을 제 아이의 왼손이 꼭 잡고 있었지요. 두 사람 사이로 시월의 눈부신 햇살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얼굴을 얼른 쳐다볼 수 없었지요. 그가 오후 네 시의 강렬한 역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마른 칡처럼 황량하고 거친 성대의 근육질이 엑스레이 음화처럼 얼핏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쇳다고 해야 할지 갈라졌다고 해야 할지, 하여튼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곧 드러난 그의 행색이라는 것도 음성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요. 구겨지고 빛바랜 홑바바리, 깍지 않아 지저분하게 엉겨 있는 턱 밑 수염, 빗지 않은 머리, 별 신통치 못한 것들로만 가득 들어찬 듯한 퉁퉁한 몸피......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근거 없는 적개심을 품을 것까진 없었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듭니다. 아무리 멀쩡한 사람이라도 피치 못할 이유로 하룻밤 한뎃잠을 잔다면 누구든 그 정도는 헝클어질 법했으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의 음성이며 입성이며가 매우 불결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지요. 불결했다기 보단 불온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도 같습니다. 그가 제게 던진, 기묘하고도 불유쾌한 웃음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무엇보다 먼저 아이를 그의 손에서 떼어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얀마, 다음에 또 보자. ? 짜아식!

그는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툭, 차고 뒤돌아 어디론가 뛰어갔습니다. 양아치 두목이 새끼 양아치에게 하는 듯한 행동과 말투로 말이지요. 게다가 그는 저를 향해 성격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지요. 그의 웃음에선 아닌 게 아니라 씨익이라는 소리가 들려올 법했지요. 그만큼 명료하고 적나라한 웃음이었지만 저는 그 웃음의 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매우 야비하게 느껴질 뿐이었지요.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에 떠올리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란 훨씬 더 야비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종종 그랬듯, 그날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포한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지요. 그런 아파트에서 살지만 않았어도 그런 인간 따위는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나는 왜 그런 아파트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서울의 강남, 그것도 잠실 한복판에 아직도 연탄으로 층계참이 더러워지는 아파트가 있다니. 수사관님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사는 아파트는 그렇습니다. 자장면집에서건 양념통닭집에서건 함부로 남의 집 현관에다 스티커를 더덕더덕 붙이고, 반마나 부서져 나간 화장실 사기타일은 규격품이 없어 시멘트나 회반죽으로 메워야 하고, 악마의 이빨 같은 계단의 녹슨 난간은 그네처럼 휘청거리지요. 벽이란 벽은 그곳을 스쳐간 수많은 가구(家口)들이 남겨놓은 고달픈 삶의 벽화들로 심란하고 어지럽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린 고양이의 충혈된 눈처럼 간신히 불을 밝히고 있는 알전구가 어두운 복도를 게슴츠레 내려다보고 있는, 그런 아파트이지요.

화단에다 시뻘겋게 토악질하는 남자를 보거나, 낡은 집기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며 그악스럽게 싸워대는 이웃들의 악다구니를 들을 때마다 저는 문득문득 의식 공황 상태에 빠져 좀처럼 제힘으로 헤어나질 못했지요. 결국 그런 곳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과 그런 곳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었던 제 지난날에 대한 울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내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의 손바닥 거죽이 벗겨지도록 아이의 손바닥을 박박 문질러 닦고는 다시는 그 아저씨를 만나지 말라고 뺨을 일곱 대나 후려쳤습니다. 그러고도 저는 두 시간을 더 헤어브러시로 제 머리를 미친 듯이 빗어댔지요. 뽑힌 머리카락이 헤어브러시 핀에 새집처럼 뭉치면 사납게 뜯어서 오줌버캐 앉은 변기에다 처박았습니다. 그러곤 한차례 담배를 빡빡 피우고, 또다시 변기에 붙어 있는 이상스레 가늘고 길고 구불구불한 재 머리카락을 노려보며 맹렬하게 머리를 빗었던 것입니다. 머리가 우두둑 우두둑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지요. 난 인생이 왜 이래! 저는 마침내 차가운 타일바닥에 엎어져 눈알이 자두처럼 빨개지도록 엉엉 울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정말이지 죽어버려야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했지요. 죽어버려야 한다. 이렇게 살아서 뭐해,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입니다.

......아니에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가 우리의 일상에 끼여든 것은 아이가 그를 무턱대고 좋아했기 때문이었지만, 저로 인한 이유도 있었지요. 기왕에 시작한 것, 보다 더 연극에 몰두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지금까지 무엇에건 푹 빠지거나 몰두할 줄 몰랐지요. , 사랑마저도 그런 식이었으니까요. 저 자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한두번 한 게 아니었어요. 아이가 생기면서부터는 아이 때문에 더욱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겁니다. 요컨대 그가 가끔씩, 제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아이를 봐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거지요.

-제가 살고 있는 집은 천백이십사 동 사백삼 호

언젠가 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나타난 그가 저를 보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를 만나지 못하도록 아이를 윽박지르는 일도 이미 포기한 뒤였습니다. 종결사를 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가 한없이 유치해 보였습니다.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

저도 종결사를 뺐지요. 한껏 비꼬는 투로 말입니다. 그의 대답이 또 웃겼습니다.

-부랑자.

-부랑자?

-오브 코오스. 도시의 부랑자.

기가 막혀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제가 웃었습니다. 오브 코오스는 또 뭣에 쓰다 남은 건지.

-당신이란 사람을 제가 어떻게 믿죠?

-전 절 믿어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종결사가 튀어나왔지요.

-내 아이를 당신에게 맡길 수 없다는 얘기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지요. 다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그때 저에겐 그의 그런 행동이 몹시 불량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뭐 금방한 생각한 건데......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지요.

-요 앞 파출소 같은 데 함께 가서 공증 같은 거라도 서면 어떨까요?

전혀 진지하지 않은 태도였지요. 세상을 대하고 섰는 그의 자세는 삐딱한 것이었습니다. 짧은 말에서도 그런 게 확 드러났지요. 부랑자라는 말을 장난으로 한 말은 아닌 듯싶었습니다. 몸에서 특별한 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지만 그를 보면 왠지 자꾸 새벽 재래시장 골목에 웅크리고 있는 크고 퉁퉁하고 시꺼먼 비닐 쓰레기 봉지가 떠올랐지요.

-사는 곳이 어디랬죠?

-천백이십사 동 사백삼 호.

그는 저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매우 심상하게 대꾸했습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눈빛이 그때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요: 앞으로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란 사람은 당신이 의심하고 어쩌구 할 만큼 제대로 생겨 먹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하릴없이 주변을 맴도는 부랑자일 뿐이다. 그러다가 역시 주변을 떠도는 당신의 어린 아들과 또 몇몇의 아이들을 만났을 뿐이다. 이 아파트 단지엔 떠도는 아이들이 많다. 당신 아들관 그런 사이일 뿐 그 이상 아무 관계도 아닌 것이다. 아주 우연한 관계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그런 관계라는 것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숙식은 어떻게 해결하시죠?

그렇게 물으면서 사실 저는 제가 너무 주제넘은 질문들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때까지 전 전혀 제 굳은 얼굴을 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뭐 그럭저럭......

썩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그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들고 멋쩍게 웃었습니다.

-집에서 대충 해결할 때도 있고, 에 또 아이들 부모가 대접하는 걸 고맙게 얻어먹기도 하지요.

-이 아파트 단지에서 당신한테 식사 대접을 하는 집이 있단 말이지요?

-아주 가끔 있는 일이지요. 아주 가끔.

그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를 동전 한 닢 정도 떼어서 저에게 보여주며 또 멋쩍게 웃었습니다.

-이 아파트 단지에서만 돌아다니세요?

제 질문에 그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좀 과장되게 펄쩍 뛰었습니다.

-, 천만에요. 천만해. 이래봬도 강북의 혜화동에서 강남의 대치동까지 제 활동 영역이라는 거 아닙니까, 흐흐 .

천박하게 그가 웃었습니다.

-성함을 좀 알아도 될까요?

-, 물론. 윤명훈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지요. ? 예예. 그랬지요. 문밖에 세워놓고 워낙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글쎄요. 좀 미안했던 거겠지요. 모르겠어요. . 그랬지요. 아마 칼국수가 아니었던가 싶은데요.

뭐 저도 무슨 고정수입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집이야 어머니가 얻어준 거라서 그럭저럭 살고 있었지만 먹고 입는 건 어쨌든 저 스스로 해결해야 했어요. 해결이레봤자 결국 안 먹고 안 입는 거였지요. 극단에서 받아오는 돈이란 물세와 전기세를 지불하면 남는 게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십만 원이 채 못됐어요. 극단에서 제가 하는 일에 비하면 그것도 과분한 거였지만요.

-이런 말하면 불쾌하시겠습니까?

그가 칼국수를 열심히 먹고 나서 말하더군요. 잘 먹거나 맛있게 먹는 게 아니고, 그의 먹는 폼은, 그래요 아주 열심히 먹는다는 인상을 주었지요. 그가 칼국수를 먹고 있을 때 전 그가 무언가 작업같은 걸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지요. 헐거워진 수도관 조인트를 수리하는 설비공과도 같았지요. 비로소 진지했던 겁니다. 칼국수를 다 먹고나서 '자 다 마쳤습니다.' 라며 제게 출장비를 요구할 것만 같았거든요.

-어떤 말을 하려는 거죠?

제가 물었습니다.

-솔직한 말이죠.

국수를 먹고 나자 그는 여유가 생겼는지 다시 삐딱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대꾸하지 않았어요.

-뭐 형편이 저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요.

그는 한쪽 어깨를 비스듬히 식탁 의자에 기대고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저희 집 실내를 두리번거렸습니다. 뽀얗게 먼지 앉은 마른 화초 토마토가 한 뭉텅이 현관문 위에 매달려 있었고, 화장실 앞 건조대에는 미쳐 걷지 못한 아이의 바지며 제 낡은 팬티며 브래지어들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아이의 빈 플라스틱 저금통, 지점토 바구니의 구겨진 세금청구서들, 물때 묻은 빈 어항과 오래전에 말라버린 맥주컵 속의 프리지아, 네 귀퉁이가 말아져 올라간 장판, 십사 인치 텔레비전...... 그런 것들이었지요.

조금 전에 질문 공세를 퍼붓던 나에 대한 보복으로 저딴 말을 하는 걸까. 하여튼 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미 사는 형편 따위에 관에선 일종의 초월상태를 경험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도 내 벌이가 얼마나 되는지 꽤나 궁금하겠구나, 하고 말이지요. 그러자 조금 전에 그에게 숙식은 어떻게 해결하냐고 물었던 저 자신이 여간 우습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란 너나할것없이 다 그렇고 그런 형편이었으니까요.

-최저의 삶처럼 편하고 자유로운 것도 없지요.

그가 말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원해서 최저의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투로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그때까지 그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비꼬는 투였지요.

-물론 적극적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삶이 편하고 자유스럽게 느껴지는 건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더 이상의 불행과 더 이상의 추락은 없는 건 아닙니까.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이대로 사는 것도 꼭 나쁘진 않겠다, 그런 생각 들지 않아요?

저는 그가 비운 그릇을 개수대에 넣으며 꼭 비꼬는 투로 말했지요.

-빈한함만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요. 지긋지긋하게 해온 일이라서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고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는 참을 수 없어요. 뭔가를 해야만 한다구요. 그게 사는 거예요.

그는 아무 소리 없이 저희 집 거실의 먼지 앉은 유리창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 사이 저는 연극에 대해 생각하며 서너 모금의 담배를 빨았습니다. 얼마 후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숨처럼 말했습니다.

-그래요. 해야지요, 무언가를......

창문으론 전날보다 훨씬 차가워진 바람이 새어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퉁퉁한 몸을 지탱하기엔 저의 집 식탁의자는 터무니없이 작고 위태로웠지만, 초라해 보였던 것은 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남자 쪽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 뒤로도 그다지 그를 자주 볼 순 없었죠. 어쩌다 아이를 그에게 맡기고 외출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란 아주 드물었지요. 아이를 맡길 경우에도 그에게 특별히 미안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그가 유난히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쪽에서 고마워할 지경이었으니까요. 그에 대한 저의 거부감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이나 얻어먹으며 아이들과 모래싸움이나 하는, 그의 말마따나 부랑자 같은 사람이었던 겁니다. 부랑자 같은 사람이 아니라 부랑자였죠.

, 그럼 그 얘길 하지요. 그건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지요. 저도 정말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쳐대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그토록 처절하게 우는 걸 저는 그 애가 태어난 뒤로 처음 보았지요.

생각해 보세요. 아이 때문에 정체 모를 남자를 집안에다 재울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것이죠. 애들이란 그렇게 발악적으로 울더라도 뭐 오 분이나 십 분쯤 지나면 다 잊는 거니까요. 하지만 아이는 그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필사적이었지요. 저녁 아홉 시가 되고 열 시가 돼도 아이는 그의 소매를 놓지 않고 울기만 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 결국 아이 때문에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더군요. 자정이 가까웠을 땐 이미 그를 제집에서 재우려고 맘먹고 있었습니다.

-행여 빨아 주시거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워낙에 단벌이라 양말 한 켤레라도 물에 젖으면 곤란하거든요.

그는 부랑자답게 남의 집에서 자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 같았지요. 겉옷과 양말을 훌훌 벗고 아이와 이부자리에 들어가서는 천연덕스럽게 아이와 낄낄거렸습니다. 별난 인생이군, 하고 저는 한숨을 쉬었던가 그랬지요.

거기까지는 사실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이와 함께 방에서 자고 저는 차렵이불 하나를 둘둘 만 채 신발장 곁에서 어쨌든 밤을 보내야 했으니까요. 새벽이 되니까 어깨가 시려오면서 그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사내아이는 어쨌든 남자 품에 안겨 자보기도 해야 하는 것이라는...... 문제는 아침에 일어났던 겁니다. 예고도 없이 어머니가 들이닥친 거지요. 허기야 저희 어머니란 양반은 늘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긴 하지만요.

- 누구냐? 너 아직 정신 차리지 못했구나?

그때까지 그와 아이는 이불 속에 있었습니다.

-, 그런 게 아니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지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냥 아이가 하도 보채길래...... 어쩌구 하는 말로는 변명이 통할 수 없었지요. 전 말없이 그의 더러운 신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지요. 그건 짓밟힌 빵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와 아이가 부시시 일어났지요. 그의 몰골은 정말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얼굴로 제 어머니께 꾸벅 인사를 하더군요. 하도 기가 막혀서. 금방 물속에서 나온 펭귄 새끼 모양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서 말입니다.

어머니는 화가 나서 도로 현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리 애비 없는 아이로소니 그에 보는 앞에서 너 함부로 그래도 되는 거니?

어머니는 화단을 가로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저도 어머니의 그 말에 금방 화가 나고 말았지요.

-내가 뭘 어쨌다는 거예요. 엄만 내 말 따위는 통 들으려 하지 않잖아요!

전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둥, 애비 없는 아이가 어쨌다는 말은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사실은...... 제가 아버지를 모르는 자식이거든요. 제가 태어났을 때 어머닌 이미 혼자였던 것입니다. 친척도 친구도 아무도 없었어요. 그리고 전 다 알아요. 어머니는 혼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만났는지를. 그런 어머니가 저한테 그러실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전 적어도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닌 마치 제가 당신처럼 살고 있는 줄 착각하는 거죠. 전 그 점이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그만. , 그래서 제가 막 화를 냈던 겁니다.

-얘가 뭘 잘했다고 아침부터......

어머니가 말했지요. 저도 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화 낸 게 누군데요. 그리고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구 그러시는 거예요?

-엄마한테 그런 걸 미리 알렸으면 이렇게 아침부터 놀랄 일은 생기지 않을 거 아니니?

-알리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저 사람은 우리 극단 사람이에요. 다음에 올릴 작품엔 저 사람과 제 대사가 가장 많단 말이에요. 늦게까지 연습하다 그렇게 됐던 것뿐인데......

얼떨결에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말았지요.

-그 말을 누가 믿겠니?

-정말이라니까요.

저는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건 그렇구. 그럼 네가 이제 주연급이 됐다는 얘기냐?

-그렇구말구요.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작품 이름이 뭔데?

-'......사블랑카'.

- 그거 험프리 보가트가 나오는 영화 아니냐?

-'카사블랑카'가 아니구요,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이예요. 우리끼리는 줄여서 그냥 '카사블랑카'라고 하는 거예요.

-우디 알렌 거?

-맞아요. 어머니도 아시네......

-그나 저나 저 사람 유명한 배우냐?

- 두말하면 잔소리죠.

- 이름이 뭔데?

-, 윤명훈이요. 그래요 윤명훈.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머니도 한때 연극판에 잠시 있었거든요.

-잘은 모르겠다만 어쨌든 얘야, 거 그 사람한테 내 말을 전하렴. 잘 때는 분장 좀 깨끗이 지우라고...... 터널에서 금방 빠져나온 사람처럼 그게 뭐니?

그래서 얼렁뚱땅 그날을 넘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는 그를 집안에다 들여놓지 않아야겠다고 다짐을 한 것은 물론이지요.

그런데 그 뒤로 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일이 생긴 겁니다. 도무지 저 혼자선 결정을 내릴 수 없었지요. 그래서 어느 날 오후 그를 다시 재 집으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지요.

-제 어머닌 어머니 멋대로 저와 당신의 관계를 규정짓고 있는 게 분명해요. 어떻게든 해명을 하든지......

그는 저희 집 안으로 들어와 아무렇지도 않게 식탁 의자에 앉게 식탁 의자에 앉아서는 지나간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지요. 구겨진 누런 트렌치코트를 벗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저는 그에게 제가 처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자동응답전화기의 재생 버튼을 눌렸지요. 어머니의 메시지를 직접 들려주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자동응답기 재생 버튼을 누르자 테이프 레코더의 빨간 불빛이 몇 차례 하르르 하고 떨더니 저장된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에미다. 오는 십이일 토요일 김선생님 댁으로 오너라. 문정동 김박사님댁 말이다. 시간은 저녁 일곱 시쯤이면 좋겠다. 한때 너와 나를 도와주시던 고마우신 분들을 한자리에서 뵙게 됐다. 그 윤 뭐신가 하는 사람도 꼭 데리고 오너라......

 

그는 신문에 눈을 박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지요.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 건지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저는 탁 소리가 나게 자동응답전화기의 정지버튼을 눌렀지요. 그제서야 그는 물끄러미 절 바라보더군요.

내가 도대체 김선생 댁인지 박선생 댁인지 왜 가야 한다는 겁니까, 라고 당장에라도 저한테 화를 낼 것 같았지요. 전 맘을 졸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얘기해야만 했던 겁니다.

-가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럼요. 상관없구말구요. 하지만 전 어쨌든 당신으로 인해 쓸데없는 오해를 받고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든 어머니에게 변명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사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전 당신이 연극을 하는 우리 극단 배우라고 말해버렸거든요. 어떡하겠어요. 집안에 낯선 남자가 자고 있는 상황에서...... 물론 거짓말을 한 건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뭐라고 할말이 없었잖아요. 당신이 우리집에 와서 자게 된 것이 전적으로 제 탓만인가요. 물론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건 아녜요. 단지 전 지금 상당히 난처한 사정에 처하게 된 거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가서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자리예요. 당신이 가지 않겠다면 저 혼자 어떻게든 어머니에게 변명을 해야 되겠죠. 그러나 당신이 직접 나서서 해주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덜할 거라는 얘기예요. 믿지두 않을 거구. , 모르겠어요. 내가 왜 당신 앞에서 이 따위 말을 늘어놓아야만 하는 건지.....

정말 또 죽어버리고 싶었지요. 마음 같아선 막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헤어브러시를 움켜쥐고 사정없이 머리를 빗질하고 싶었습니다. 열흘 동안 머리를 빗지 않은 것처럼 두피가 근질근질해 미칠 지경이었지요. 저는 냅다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때 그가 말했지요.

-아무래도 그곳엔 먹을 것이 많겠지요.

그제서야 저는 새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배고픈 부랑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먹을 거요. 그야 물론이지요.

저는 갑자기 희망에 들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좋아요, 뭐 어차피 할 일이라곤 없는 신세니까......

너무도 쉽게 그가 허락을 하자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지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냥 멍하니 그의 엉긴 턱수염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토요일엔 저 수염을 깎는 게 낫겠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저어, 한 가지 물어도 된다면......

그가 저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 극을 하십니까?

-아 예, . 그저 뭐......

저는 갑자기 낯을 뜨거워졌지요. 아직 저는 누구에게 연극을 한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거든요.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어떤 분이신지......

그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얘길요?

저는 순간 긴장했지요. 사실 제게 있어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라면 어머니에 대한 것입니다.

-아 예, 별 뜻은 없고요. 그저 좀 알고 있어야 토요일 날 뵐 때 제가 좀 수월할 것 같아서요. 그뿐입니다. 일테면 시력은 어떠며 훈제연어는 좋아하시는지, 그 정도......

그때 아이가 낮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나왔습니다. 아이는 눈을 비비고 나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곧장 그에게로 가 안겼지요.

저는 그에게 말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말입니다.

토요일 오후에 저는 아이와 그 사람이랑 문정동엘 갔습니다. 거리엔 낙엽이 지고 있었지요. 햇살을 받은 플라타너스 노란 이파리가 투명하게 빛났습니다. 저희 집에서 문정동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지요. 걸어서 가기로 했습니다. 걷는 걸 누구보다 좋아했던 것은 그였지요. 부랑자란 무엇보다 길을 잘 걸어야 하는 거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 아이가 자꾸 그에 등에 업히려는 게 신경이 쓰였지요. 그가 힘들까 봐서가 아니라, 왠지 그의 몸은 아직 냄새나고 더러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물론 그날은 목욕도 하고 머리도 빗고 면도도 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와 일 미터 오십 센티가량 떨어져 걸었습니다.

-어머닌 월남 세대예요. 언제 누구와 왜 월남하지 않으면 안 되었나 같은 건 말하지 않지요. 그냥 제가 추측할 뿐이죠. 육이오를 전후해 월남한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겠지 여기는 거예요. 월남이란 말 이젠 너무 생소하지 않아요? 그 말을 듣거나 말하게 되면 왜 백제 사람이 신라 땅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광경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어머니는 얘기를 하지 않는 거예요. 어렸을 적 일이라 별로 기억에 남는 일이 없는 건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일부러 얘기하지 않는 이유라도 있는지...... 뭐 육이오란 어쨌든 이 민족이 겪어야 했던 가장 큰 비극이었다니까 어머닌 그 비극의 편린이었겠구나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제게 있어 어머니란 곧 비극이었지요. 그녀의 삶이 비극적인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전 어려서부터 나와 어머니가 불행하게 사는 것에 대해 특별히 슬퍼해 본 적이 없어요. 숙명처럼 느껴졌으니까요. 어머니는 이런저런 점포의 종업원도 하고 몇몇 남자와 잠깐씩 살림을 차리기도 하고 유랑극단을 따라다니기도 했어요. 한곳에서 석달을 머문 게 가장 오래 정착한 것이었지요. 전 어머니를 따라 바람처럼 물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흘러 다녔던 거예요. 나란 존재는 늘 뒷전이었지요. 어머니긴 하지만 딸을 살갑게 보살피는 일이 없었어요. 불쌍해서라도 가끔씩 보듬어 줄만도 한데 오히려 언제나 짐이 되어 미치겠다는 식이었죠. 터전을 옮길 때마다 나란 존재는 가장 귀찮은 짐 정도로 여겨졌던 거예요. 어딜 가나 어머닌 처녀 행세를 했지요. 그러니 제가 나타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할 수밖에요. 한 번은 충청북도 제천에서 유랑극단의 천막 뒤에 숨어 있다가 동네 도살견에게 물려 다리뼈가 부서질 정도였는데도 어머닌 화를 내면서 내 빰을 후려쳤지요. 넌 왜 내 인생을 망치려 드니, 하며 절 때렸던 겁니다. 저는 날카로운 개 이빨 자국 속으로 드러난 하얀 정강이뼈를 바라보면서도 울 수조차 없었습니다. 제 작고 흰 얼굴에 어머니의 손자국이 빨간 장갑처럼 찍혀 있었지만 울지 않았습니다. 제 나이 열세 살이었을 땐 마흔이 넘은 변태성욕자한테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지요. 그때 어머닌 저를 그 남자한테 아주 팔아 버리려고 한 적도 있어요. 어머니가 터무니 없는 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결국 무산됐지만 말예요. 전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을 했지요. 아마 나를 있게 한 남자, 그러니까 제 아버지 되는 사람이겠지요, 그 남자는 어머니를 아주 학대했었나 보다 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 남자의 흔적이며 씨앗인 나를 어머닌 복수하듯 미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지요. 나이가 들어서도 어머닌 가만히 거울 앞에 앉아 있질 못했어요. 끊임없이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던 거예요. 그녀를 찾는 전화는 하루에 보통 서너 통씩 걸려왔지요. 제가 어머니에게 전해주는 전화도 있었는데 대부분 점잖고 부유한 목소리의 남자들이었어요. 어느새 어머니의 취향이나 사고도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어요. 단순히 남자들을 만나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마작도 하고 오페라도 가고 심지어 무슨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그러는 것 같았으니까요. 요즘은 아예 그들 모두가 정다운 이웃처럼 만나고 있지요. 사실 저나 어머니나 그게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방식이라고 여겼던 것뿐이지요. 나름대로 정형화된 삶의 한 방식. 서로가 인정하는 거예요. 인정. 나나 어머니나 어머니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나 모두. 서로 말예요. 그리고 그녀의 삶이 그토록 기구했던 건 육이오랄지 무슨무슨 환경이랄지 그런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라고 저는 생각했던 거예요. 그건 그녀의 천성이었을 뿐이라는 거지요. 김박사님을 비롯해서 오늘 만나는 사람들이란 최근까지 엄마가 만나고 있는 남자들인 셈이에요. 우습지요? 하지만 그들이 실제적으로 나와 어머니의 생활에 도움을 주었던 건 사실이에요. 저와 어머니는 지금까지 정부나 민간단체에서 벌인 불우이웃돕기 캠페인에 직접적인 수혜자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런 건 결국 아무도 돕지 못하고 결국 상처만 덧나게 할 뿐이지요. 매정한 어머니였지만 물론 저를 굶긴다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어쩌면 어머닌 저로 하여금 당신의 삶을 맘껏 경멸하고 저주하게끔 자산을 연출했는지도 모르지요. 나는 죽어도, 죽어도 어머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내 안에서 시시각각 환기되고 들끓길 바랬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무론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거예요. 지난번 어머니가 화를 냈던 것도 그런 쪽에서라면 이해될 수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현재 제 삶이라는 건......

그는 제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지요. 아이를 업기도 하고 무동을 태우기도 하며 그는 활기차게 걸었습니다. 하늘의 흰 구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이에게 보라는 시늉을 하기도 했지요. 그는 아이들을 왜 그리 좋아하는 건지 저로선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해서 말했을 뿐이에요.

저는 나름대로 큰맘 먹고 얘기를 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그는 제 얘기에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저는 기분이 좋을 수 없었지요. , 참 희한한 인생이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낯모를 뜨내기 사내의 어깨에 내 어린 아이를 올려놓고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가을길을 걸으면서 어둡고 우울한 어머니 얘기라니! 어째 이런 앞뒤 없는 장면이 내 인생에 문득 끼어든 걸일까.

-우리 악수해요.

그때 그가 불쑥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우리 부랑자들끼리......

그러나 저는 그의 손을 뿌리쳤지요.

...... , 그랬어요. 문정동에서 그는 실수 같은 걸 하거나 그러진 않았지요. 다행히도 그는 제가 요구하는 대로 잘 따라주었습니다. 인사하라면 인사했고, 앉으라면 앉았지요. 그곳에 보인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는 아무래도 먹는 것에 조금 욕심을 부리더군요. 그래서 전 그에게 먹을 것만큼은 충분히 갖다주었지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를 보고 역시 연극을 하시는 분이라 그런 분위기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남루함이 그들에겐 독특한 분위기로 비쳤던 거겠지요.

그런데 결정적 위기가 닥쳤던 겁니다. 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으레껏 술자리가 벌리어지는 건 당연했지요. 아뇨. 그가 술에 취해서 어쨌다는 건 아닙니다. 술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흥충동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뿐이지요. 이제 나눌 얘기도 대충 나누고 술도 거나해지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거나 다들 장기를 자랑하거나 그러지 않습니까.

. 그런 겁니다. 도곡동에서 골프 용구점을 하는 분이 먼저 자신의 십팔 번인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습니다. 대학에서 화공학을 하신 분인데 노래 실력이 대단했지요. 언제나 그곳 멤버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 했지요. 전 생각했습니다. 제가 데려온 그도 팔자에 없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구나 하고요. 하지만 뭐 어때, 이런 기회에 한 번 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라고 전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조금은 기대도 됐지요. 재미있기도 했구요. 과연 그가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김박사란 분이 먼저 일어섰습니다. 일어서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연극을 하신다구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아무거라도 좋으니 멋지게 대사 한 토막 연기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 말에 동의 하시는 분은 박수!

막무가내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요. 그는 배우가 아녜요, 그럴 순 없어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지요.

그가 긴장해서 절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다 들통나버렸다고 저는 생각했지요. 미구에 어머니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독설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저는 그에게 절망의 눈빛을 보낼 수밖에 없었지요. 적당히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는 건 이제 그의 수완에 달려 있었던 겁니다.

-그래요.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한 번 해봐요.

어머니가 상냥한 말로 채근을 했지요. 어머니의 음성이 그렇게 상냥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건 노회한 어머니가 미리 꾸민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그런저런 걸 곰곰이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요.

그는 얼결에 일어서서 저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전 고개를 숙인 채 이젠 될대로 되라 하고 모든 걸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무슨 동작인가를 했지요.

그건 아이들이 포충망 같은 걸로 나비나 잠자리를 잡는 시늉이었습니다. 아니면 벽에다 페인트를 칠하는 시늉이었던지. 여하튼 그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마임이었지요. 그건 연극배우의 몸동작이 아니었던 겁니다. 저런 멍청이! 하마터면 제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적당히 핑계를 대고 빠져나올 것이지 웬 가당치도 않은 몸동작이냐 몸동작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들 의아한 눈짓을 교환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전문적인 것이어서 그런지 우리한텐 너무 어려운 마임인데요. 허허......

'그리운 금강산'을 불렸던 분이 매우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석연치 않은 웃음들을 웃었지요. 저 따위 인간에게 무언가를 바랬던 내가 잘못이지. 전 누군가에게 굉장히 화가 나 있었지요. 마임을 끝낸 그는 인사를 하고 이마를 쓸어올리며 말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이건 어떨까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극작가 중에 제임스 로젠버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부조리를 형상화하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지요. 그의 희곡 '스니키 휘치의 죽음' 중에서 가수 역할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워낙은 여자가 맡아야 할 대목이지만......

그리고 그는 좌중의 한복판으로 나왔지요. 그의 연기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그는 모자를 벗어 우아하게 인사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이 서부의 거리 고퍼 걸치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곳 고포 걸치는 실제로 있지는 않았지만, 있을 법한 환상과 함께, 전설과 얘기에 싸여 있는 전설 속의 거리입니다. 여러분이 비록 시속 백이십 마일로 고속도로를 질주해 다니면서도 잊지 못하고 떠올리는 그 어린 시절의 꿈속입니다. 또 어쩌면, 걱정에서 시작하여 두통을 지나, 긴장에 이르는 길가에 이 고퍼 걸치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좌우간 이곳에는 서부의 멋진 인물들이 모여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에게 바싹 다가가며) 총잡이 랙컴! 그는 이 서부의 가장 빠른 총잡이입니다. ('그리운 금강산'이 웃었지요) 그리고 그의 동업자인 마빈 베일. (얼굴을 칠 듯이 선 끝으로 김박사를 가리키며) 성실한 봉사 정신을 가진 몹시 바쁜 장의사죠. (좌중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아, 제가 술집 작부 메룬입니다. (스커트를 들어 허벅지를 살짝 보이는 시늉) 물질적인 도덕관을 가진 아가씨라 심장마저도 십팔금으로 되어 있죠. 다음은 우리의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의사 닥 버치! (논현동에서 소극장를 경영하는 분을 일으켜 세워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술병 속에 든 액체를 너무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이분의 양심은 순금으로 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네, 신께서도 이 고퍼 걸치에 은총을 베푸셔서, (작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론 신께서도 한눈을 팔긴 팝니다만, 우리 거리에도 역시 충직한 종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사 리버엔드 블렉우드! (박수 유도, 좌중에서 박수가 터졌습니다)

정말 모두 순수한 심장을 가지신 분들이죠. 그런데 여러분, 다만 유감스럽게도 다 된 밥에 뿌려진 재 같은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남자는 없었지요. 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어머니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죄송하다는 시늉을 헤 보이곤 계속했지요) 바로 스니키 휘치! 잘 익은 사과 틈에 낀 썩은 사과요. 이 근사한 얘기를 망치고 아름다운 무대장치를 더럽히는 꼴, 그게 바로 스니치 휘치입니다. (거듭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눈짓을 했지요. 어머니는 어색하게 웃으셨지만 그의 연기에 감동하는 듯 했습니다. 그는 다시 연기로 돌아가서) , 그럼 도대체 스니치 휘치는 누구일까요. 이놈은 마을의 건달입니다. 서부의 전설에 나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건달이 아니라 이건 진짜 건달에, 그야말로 더럽고 치사한 놈이죠. (손가락으로 어머니를 가리켰습니다. 어머닌 찔끔 놀라더군요) 좌우간 사람들이 스키니 휘치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놈이 아주 비겁하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놈은 지독한 겁쟁이에, 또 비겁하기로는 단연 첫째가는 놈입니다. (어머니는 그의 손가락이 또 자신에게 올까 봐 전전긍긍하는 표정이었지요. 그만큼 그의 연기는 실감나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를 외우는 사이사이 그는 어머니를 향해 죄송하다는 눈짓을 보냈지요. 그러면 어머니의 긴장된 얼굴이 풀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실에 대해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니, 그 옛날 기사들이 전투나 무술 시합을 하듯 서부의 거리에서 서로 총 솜씨를 겨루는 이 얘기에, 어떻게 그런 놈이 나올 수 있게 됐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스키니 휘치는 결투를 두려워 두려워하고 절대로 총을 뽑으려 하지 않습니다. , 정말 이 놈을 평원에 살려 두다니, 하나님도 무심하지 뭡니까......

여기까지 외었을 때 김박사라는 분이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지요. 너무 훌륭한 연기였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표정이 위태롭게 여겨졌나 봅니다.

박수 소리에 좌중은 현실로 깨어나고 있었지요. 저 역시 저도 모르게 힘껏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겁니다. 다를 사람들 보다 현실로 돌아오는 데 약간 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뒤늦게 딱딱딱딱 박수를 쳤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훌륭한 연기자였던 겁니다.

......그렇지요. 연기를 공부하고 있는 저로서는 좋은 선생님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세상에, 그런 우연도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동안 그에게 야박하게 굴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태도를 돌변시킬 수가 있습니까. 조금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랬지요. 아마,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저희 집에 왔을 겁니다. 뭐 핫도그도 만들어 먹고, 초장 스파게티도 만들어 먹곤 했지요. 그거요? 그냥 스파게티 국수를 십 분간 삶아서...... 예 그냥 삶아요. 그러고서 양념 초장에 비벼 먹는 거지요. 그런 걸 먹거나 커피 같은 걸 마시면서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시간을 보내곤 했어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우호적으로 변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던 거죠.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부랑자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의 표현대로라면 나 역시 아이가 딸린 부랑자일 뿐이겠지만 하여튼 그가 사는 방식이 제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고 그게 제가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걸 막았던 겁니다.

그렇게 그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지요. 가을이 다 지나갈 무렵 저는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천이십사 동 사백삼 호에서 말입니다. 그는 양배추며 레디쉬, 건포도, 게맛살, 파슬리를 사고 이탈라안 소스까지 사더군요. 저를 위해 무언가를 잔뜩 준비하는 것 같았습니다.

-돈은 어디서 나서 그런 걸 사지요?

제가 말했습니다.

-난 부랑자일 뿐 거지는 아니에요.

그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지요.

-많지는 않지만 조금씩은 벌어요.

-그래요?

-궁금해요?

꼭 알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저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연극 포스터며 팜플릿에 몇 자 쓰기도 하고 잡지 같은 데다 감상평을 쓰기도 하지요. 뭐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고 순전히 아마추어리즘이지요. 일다운 일을 한다는 건 일종의 월권이지요.

-연기를 했다는 걸 왜 저에게 말하지 않았죠?

저는 그의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금방 어디로 이사라도 갈 듯한 분위기였지요. 벽에는 아무것도 걸린 것이 없고 바닥에도 뭐 하나 널려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예쁜 집기들은 때론 삶을 부추기는 작용도 하지요.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걸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구로부터 공짜로 얻은 집이어서 제집 흉내를 내기 싫었던 건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벽에는 커다란 못이 한 개 박혀 있었고 거기엔 그의 바랜 가을 외투가 초라하게 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양상추 한 장을 손으로 뜯어 입으로 가져가며 그가 말했습니다.

-글쎄 왜 그러냐구요?

너무 다그치는 것 같아서 저는 약간 웃어 보였습니다. 그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더군요.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아놓고, 혹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저 과거에 연극했습니다, 라고 다짜고짜 말한다는 건 우습잖아요.

-나중에라도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래요, 그렇죠. 어쨌든 그래서 당신은 알게 된 것 아닙니까. 나란 사람이 언젠가 연기라는 걸 했었다는 사실을......

저는 할 말을 잊고 말았지요. 저도 실은 낯선 사람에게 연기를 공부하고 있다는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저는 하드롤의 부드러운 속살을 끝으로 끄집어내면서 말했습니다.

-굳이 부상자로 남고 싶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내가 선택한 삶이니까.

-전 왜 당신이 그런 삶을 선택했느냐가 궁금한 거예요...... 아아, 이거 또 주제넘은 질문이군요. 미안해요. 제 질문에 신경 쓰실 거 없어요...... 이런 하드롤 이 근처엔 없는 것 같던데요. 광화문 크라운 제과에나 있을까......

-난 죽으려고 했었지요.

그가 갑자기 말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전 사레가 들릴 뻔했지요. 그는 그 말을 뱉어놓고 망연히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4층 창까지 뻗어 올라온 은행나무 가지끝이 텅 비어 있었지요. 그가 조금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왜 죽으려 하는지 궁금할 거예요.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사실 제가 죽으려 했던 이유는 다시 살아나서 생각하니까 그건 죽을 만한 이유가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쨌든 죽으려고 맘먹었을 당시에는 그게 이유가 되긴 했지만요.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그래요, 사람으로부터, 자동차로부터, 빌딩으로부터, 섹스, 구토, 음악, 필름, 폭력으로부터 지독한 배신감을 소외감 뭐 그런 것들에 쉽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만한 큰 사건이 제겐 있었지요. 그런 것들이 제 주위에서 연달아 일어났던 겁니다. 제가 꾸리고 있던 극장과 극단이 해체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요. 연극이란 제 인생의 전부였다고도 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계속 악화만 되는 사건은 결국 제가 연극에 환멸을 느끼도록 했지요. 인생의 환멸을 느낀 것과도 같았다는 말입니다. 모든 가치와 이상과 목적이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지요. 제 앞엔 죽음밖에 남아 있을 게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죽는 사람마다 죽는 이유와 형식이 다 다르겠지만 하여튼 저에겐 죽음이 그런 모양으로 다가왔지요. 어느 날 술에 취해 약을 먹기 시작했죠. 소주 한잔 마실 때마다 안주 삼아 약을 집어 먹던 겁니다. 취하지 않더군요. 새벽 다섯 시까지 혼자 여섯 병의 소주를 비우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가 아침 여덟 시 정도는 됐던 것 같았습니다. 제 마지막 기억이 눈부신 햇살로 마감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입안에서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돌린 후 느리게 삼켰습니다. 저도 커피를 입안에 댔지요. 다 식어 있더군요.

-깨어났을 때는, , 그러니까 일백오십 시간쯤 지나 있더군요.

그가 말을 계속했습니다.

-여섯 날 좀 넘게 죽어 있었던 겁니다. 깨어나자마자 제가 생각한 건 그거였습니다. , 난 너무도 통속적인 이유로 죽으려 했다는 거였지요. 창피했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솔직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달빛에 반사된 중환자실의 푸르른 천장을 바라보면서 저는 중얼거렸지요. 다음엔 정당한 이유로 죽으리라......

-정당한 이유.....

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죽고자 한 데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밖에 없었던 거예요. 세상이라는 옷이 제게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항상 거추장스러울 뿐이지요. 성가시고 불편했습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날의 오후의 피로 같은 게 끈질기게 제 몸에 따라다녔지요. 그건 그림자 같기도 하고 무슨 냄새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그 정체 모를 것들이 유발하는 자각증상이란 마치 신트림 같은 기분 나쁘기 이를 데 없는 거였지요. 십 분에 한 차례씩, 어떤 날은 오 분에 한 차례씩 그런 증상이 반복되었어요. 윤명훈이라는 한 인간의 유기체가 온 힘을 다해 세상을 거부하는 증상 말입니다. 결코 만성화되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너울은 조금씩 조금씩 커져서 내 전체를 뒤집을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연극에 그토록 몰두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은 그 너울의 실제로부터 맹렬하게 도망쳐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을 겁니다. 죽지 못하고 다시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걸 알았던 거지요. 나는 어쩌면 인간이 아닌 도마뱀이나 물총새로 태어났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세상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일이 그토록 피곤하고 힘이 들겠습니까.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세계를 정복해 나가도록 키워집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란 모두 거기에서 발생하는 거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추구해선 안 될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 거지요. 죽어서, 비로소 애당초 제가 태어날 모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소름이 끼치도록 싫었던 그림자와 냄새와 신트림 따위가 깨끗이 가시기만 한다면, 비록 바퀴벌레나 이구아나나 도마뱀으로 태어난다 할지라도 훨씬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제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얘기가 한갓 별스런 농담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이지 전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은근하고도 집요한 고통으로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지요. 이 세상의 수십억 인구 중에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수도 꽤 될 거라는 믿음마저 생기게 되어 이젠 그다지 외롭거나 그러지도 않지요. 이제 비로소 이 세상의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내가 추구해야 할 일이 생긴 셈입니다. 죽음. 그것은 나 같은 인간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요. 제가 발견한 정당한 이유란 바로 그런 겁니다......

저도 가끔씩은 미치도록 죽고 싶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울음이라는 것이 저를 이 모진 세상에다 다시 건져 올려놓곤 했지요. 가엾은 내 아이와, 내 실패한 사랑과, 연극을 떠올릴 때마다 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서 처참하게 죽어 가는 자신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헤쳐나갈 자신이 없는 정글 한복판에서 깊디깊은 수렁으로 천천히 빨려들어 죽어가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고통은 어쩌면 그와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너무나 살고 싶은 나머지 극단적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왜 아직까지 죽고 않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아이가 그의 무릎에다 손가락으로 무슨 그림인가를 그리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요. 그는 아이의 머리를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는 어느새 웃는 얼굴이 되어 있었지요. 아이가 무릎을 간지럽혀서인지 아니면 그냥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인지 하여튼 그는 밝아진 얼굴로 저를 응시했지요. 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다시 죽으려니 이 세상한테 조금은 미안하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는 이제 입을 활짝 벌려 웃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잠시나마 적을 두었던 세상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무슨 작은 보답 같은 걸 남기고 싶은 데 당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죽음에 관한 얘기를 무슨 농담처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그의 얘기가 모두 거짓말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지요. 나를 상대로 어떤 희곡작품의 한 대목을 연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겁니다.

......아니에요. 가을은 그렇게 갔고, 겨울로 접어들어서야, 아마 십이 월 이 일이었던가, 저는 그와 처음으로 대사를 맞출 수 있었지요.

-린다, 온 우주가 흔들리는 것 같지 않소?

저희 집에서 차를 마시던 도중에 갑자기 그가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우두커니 있다가 린다라는 인물의 이름에서 곧 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었지요. 린다는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에 나오는 여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

그다음 대사는 린다가 놀라면서 되묻는 것이었죠. 저는 재치 있게 원고대로 외쳤습니다.

-사랑합니다, 린다.

-왜 이러세요?

-, 아니 입으로만 하지 말고

그가 대사를 끊고 말했습니다.

-직접 연기를 해봐요. 린다는 알란의 갑작스럽고 엉뚱한 접근을 뿌리치려는 거예요. 놀라고 당황해서...... , 다시 해봐요.

-왜 이러세요.

-그래요. 좋은데 좀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이쪽으로 틀어 봐요

-왜 이러세요?

-좋아요!

-저어 린다, 우린 서로 꼭 어울리는......

-알란, 이 손 치워요. 당신 미쳤어요?

-, 내 사랑 린다!

-왜 이래요? 난 유부녀에요! ...... 강간이야!

-유부녀에요 하고 강간이야 사이를 조금 떼고......

-왜 이래요? 난 유부녀에요! ...... 강간이야!

-바깥에서 듣고 사람들이 신고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봐요!

......그런 식이었죠. 그는 자, 이제부터 연습에 들어가 볼까요, 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컵라면을 먹다가 시장통을 걷다가 쑥 대사를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너는 저에게 다가와 갑자기 껴안기도 했지요.

-깨진 스탠드 따윈 걱정할 거 없어요. 린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는 놀라는 저에게 야단을 쳤지요.

-뭐 해요? 대사를 까먹은 거야? 당신은 지금 알란에게 얼떨결에 안겨 있는 거라구!

-, 전 꼭 벼, 변상하겠어요. 스탠드......

그제서야 전 가까스로 대사를 떠올릴 수 있었지요.

-안 돼요.

그는 진지하게 꾸짖었습니다.

-당신은 린다예요. 빨래를 너는 가난한 미혼모가 아니라구. 하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부동산 재벌 딕크의 아내에요. 항상 딕크의 아내예요. 시장을 보거나 잠을 자거나 김치를 담글 때도 당신은 딕크, 딕크, 딕크의 아내라구요, 다시!

-깨진 스탠드 따위는 걱정 할 거 없어요. 린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전 꼭 변상하겠어요. 당신의 스탠드잖아요.

-, 껴안은 채 옥신각신하는 거예요. 조금은 희극적으로......

-글세 그럴 필요 없다니깐, 린다.

-전 속된 여자예요. 십 달라면 될까요?

-제발...... 그렇담 뭐 오 달라만 내요. 나도 속된 놈이니까.

-알란 제발 이러지 말아요.

-봐요. 아직도 극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잖아. 탁 뿌리쳐야 하는 장면인데 제 몸에 둘렀던 팔을 풀고 그가 말했습니다.

-아직 당신의 대사에선 빨래를 너는 가난한 미혼모 냄새가 묻어 있다구.

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미혼모라는 말이 자꾸 귀에 거슬렸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해 볼께요.

저는 다소곳해졌습니다. 배우는 학생이었으니까요.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태에서든 당신은 영점 일초 안으로 린다가 될 수 있어야 해요. , 다음으로 가요.

-린다, 오해하지 말아요. 농담이었어. 난 당신을...... 시험해 본 거야. 난 그저 순수한 키스를, 아주 가벼운 키스를 해보려구 그저......

-가야겠어요!

-좋아요. 문 쪽으로 가요!

-린다!

-괜찮으니까, 아무 걱정 마세요!

-문 쾅 닫고 나가요.

-이게 무슨 꼴이람. 내가 꼭 짐승 같은 짓을 했으니...... 린다는 딕크에게 얘길 하겠지? 아냐, 막바로 경찰서에 가서 성희롱 당했다고 고소할지도 몰라. 내가 무슨 험프리 보가트라구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딕크한테는 뭐라고 하지? 영화를 흉내 내느라 체면을 손상했으니, 이제 난 아라비아의 하렘에나 들어가서 내시 노릇이나 하는 게 나을 거야!

(초인종 소리가 나고) 어이쿠 벌써 형사대가 들이닥치는군!

-자 문을 열고 나타나요! 어서.

-알란, 저를 사랑한다고 그러셨어요?

-거기가 제일 중요해요. 아주 애절한 표정, 하지만 코믹하기도 해야 돼니까. 다시 한번.

-알란, 저를 사랑한다고 그러셨어요?

-다가와서 날 껴안아요. 키스...... 끝나고, 감탄한 알란 .

-아아,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 번!

......정말 키스하진 않았어요. . 시늉만 냈을 뿐이지만 그가 하라고 했으면 정말 했을지도 몰라요. 어디까지나 연기였으니까요.

하여튼 그의 연기 지도는 특이한 거였지요. 상추쌈을 싸먹다가도 그가 대사를 꺼내면 저는 감전된 듯 린다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상추쌈으로 불룩해진 볼을 하고서 대사를 외우는 거였어요. 우디 알렌의 작품이어서 오히려 그런 우스꽝스런 모양으로 연습하는 게 도움이 되긴 했지만요. 극과 현실이 아무렇게나 몽타주 돼 있는 필름을 돌리는 것 같았지요. 왜 그런 놀이 있죠.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하는 거 말예요. 꼭 그런 놀이 같았어요. 그의 입에서 대사가 튀어나오면 저는 소변을 보다가도 멈추고 린다로 변신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십이월이 가고 있었지요. 시간이 갈수록 저는 린다가 되어갔고 그는 알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그와 함께 보낸 하루를 생각하면 충일하다는 느낌이었지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기분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처음이었습니다.

연습을 하지 않을 때의 그는 그러나 더도 덜도 아닌 부랑자였지요. 아파트와 종로와 올림픽공원 등을 되는대로 싸돌아다녔습니다. 아이들과 모래싸움 하고 자주자주 굶었지요.

-동숭동 학전소극장 앞에 가면 리어카에서 떡볶이도 팔고 어묵도 파는 파랑 스카프의 아줌마가 있는데요. 손님이 없을 때 제가 가면 이것저것 주지요. 왠지 아세요? 손님 있을 땐 제발 와서 얼쩡거리지 말아 달라는 거예요. 장사 안된다고. 그렇게 해서 얻어먹는 데만도 서울에서 열 군데도 넘어요.

영락 없는 부랑자인 셈입니다. 제게 연기 지도를 할 때완 영판 달랐지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제 안에는, 막연한 생각 한 조각이 날아 들어와, 말없이 움을 트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살아갈까,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제 몸 한구석에서 저도 모르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 아버지 출연이 그다지 놀랍지 않는 일로 받아들여졌던 걸까요.

출연이라는 말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아이 아빠의 근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그를 만나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뿐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아이 아빠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은 내 안에 윤명훈이라는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겁니다. 그동안 아이 아빠가 내 안에서 줄곧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아마 옳을 겁니다.

그 떠돌이 부랑자는 아무래도 아이 아빠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 아빠는 어쨌거나 제 사랑이었던 것이고, 그는 뭐랄까요, 썩 적절한 말은 아니지만 동지와도 같은 제 의지처였던 것일 겁니다. 형편이 같고, 함께 대사를 외우고, 웬만큼은 세상을 체념하기도 한, 그리고 얼마쯤은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듯한 삶...... 그런 조건들이 감출 것도 뽐낼 것도 없이 서로를 적나라하게 했던 거겠지요. 그런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란 것도 소중하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이 아빤 저를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지요.

베란다에 따듯한 햇살이 내려쪼이던 어느 날 저는 그에게 아이 아빠 얘길 했습니다. 아이 아빠로부터 연락이 온 지 삼 일 짼가 되는 어느 날이었지요. 저나 그나 할 일이 없을 땐 베란다에 나가 종종 해바라기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따듯한 햇살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릅니다. 시린 겨울 하늘을 가로질러 내려온 햇살이 움추려든 피부를 따스하게 덥힐 땐 세상에 아직 우릴 버리지 않았구나 하는 확신마저 들 지경이라니까요.

-글쎄요. 당신을 만나선 안 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어쨌든 그런 사람도 있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뭐 처음부터 그런 사람을 구별하기란 힘든 일이었겠지요.

그는 찬 공기로 발그스름해진 자신의 코끝을 만지작거렸습니다.

-힘들 것까진 없었지요. 아버지도 모른 채, 유랑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지독히도 가난한 여대생이 내노라하는 부잣집 맏아들과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지요. 그게 왜 이루어질 수 없는 건지는 더 나이를 먹은 뒤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당시엔 젊은것들이 먼저 그것을 알았지요. 최루탄의 시대였었거든요. 그는 반동이거나 매판자본이었고 전 민중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전 돌을 던지거나 화염병을 나르지는 않았어요. 너무도 가난한 나머지 그런 데조차 끼일 수조차 없었던 겁니다. 그런 걸 만들 시간에 전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가 무슨 반동이나 매판자본은 아니었지요. 부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학사회에 팽배해 있던 무서운 집단 적개심은 그를 무척 힘들게 했습니다. 너무도 외로운 나머지 저들과 함께 화염병을 던지고 싶다고도 말했지요.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자신에게 더욱더 비겁한 짓이라는 것 그는 알았던 거예요. 우리는 이상한 극단에서 서로를 만났던 거지요. 이상한 극단에서...... 그렇게 만났던 겁니다.

- ......

그는 아무 말 없이 창밖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저는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에게도 왜 사랑이 없었으랴 싶어졌습니다.

-그다음부턴 그야말로 통속 멜러였어요. 처음엔 그이의 부모가 맹렬하게 반대했고, 나중엔 제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었지요. 두 집안이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거래에 빠져드는 걸까 한심하기도 했고 기가 막히기도 했지요. 반대의 이유란, 신물 나게 소설에서도 봐왔고 텔레비젼에서도 봐왔던 것하고도 한치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어요. 그게 극 중에서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어쩌면 그렇게 현실과 똑같던지요. 거의 환상적이라 할 만한 일치였습니다. 말하자면 전 그때까지 현실다운 현실을 살고 있지 않았다는 거였겠지요. ,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요. 그쪽에서 절 반대하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저나 어머니나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어요. 그쪽은 미리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의 아버지가 제 어머니를 알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과거의 한때 얘기지만 어쨌든 그냥 단순히 아는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았어요.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말도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했지요. 어머니는 갑자기 완강해져서는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놈을 만나려거든 먼저 나를 찔러 죽여라. , 이제 비로소 이 드라마는 완벽한 대단원에 이르렀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지요. 이제 그를 떠날 수밖에 없구나......

저도 그처럼 창밖으로 바라다보아는 먼 산을 향하고 있었지요. 그는 이따금씩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할 뿐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혹은 저 겨울 하늘을 향해 말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사랑에게 정말 저희들은 미안했던 겁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아직 온전히 남아 있는데 떠난다고 대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한 거지요.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저는 그와 겨울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바로 이맘때였지요. 무척 추운 겨울이었어요. 강원도 평창이란 데에서 열하루를 머물렀지요. 그곳엔 손님이 들지 않는 서림호텔이란 곳이 있어요. 열하루룰 머무는 동안 그곳은 천지를 구분할 수 없을 눈으로 뒤덮혀 있었지요. 먹을 것을 잃은 검은 새들이 호텔의 창문틀에 날아와 앉아 모이를 구걸하곤 했지요. 우린 그곳에서 두문불출하고 지냈지요.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사람들처럼 서울에 돌아온 뒤의 계획 같은 건 있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도합...... 그래요, 사십 번 혹은 오십 번에 가까운...... 섹스를 했던 겁니다. 열하루 동안 말이예요.

- ......

-섹스랄 것도 없었지요. 우리는 그렇게 죽어가는 거라 생각했던 거예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 있기가 힘들었거든요. 우리는 사고할 수 있는 기력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광포하게 서로에게 몰입했어요. 죽어 있는 시간이었던 겁니다. 죽어 있었지만, 도무지 세수 할 기력조차 없었지만, 분명한 건 서로가 어렴풋한 행복감을 느꼈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어쩌면 행복감이 아니라 죽음 문턱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혼몽함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쨌든 우린 지독한 허기와 무기력감에 휩싸여 열하루를 보냈던 거예요. 그대로 죽음에 이른대도 후회하거나 두렵지 않을 것 같았지요. 정말 그땐 그랬어요...... 창밖의 검은 새들이 우리들의 발가벗은 몸을 신기한 듯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지요. 나중에 우리들의 몸 안에 새털만큼의 기력밖에 안 남게 되었을 땐, 우리가 먹이를 주던 그 새들이 우리를 한입에 삼켜 버릴 것만 같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차라리 그 검고 거대한 새들의 부리에 갈가리 찢기고 싶었습니다. 이젠 아무래도 후회 같은 걸 하지 않겠다. 죽어도 좋은데 무얼 더 후회할 것인가. 그의 집안에서 끌고 온 앰뷸런스에 나란히 실려 서울로 돌아오면서 저는 다짐했던 거예요. 이제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그는 겨울 하늘을 나는 검은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진 않더군요.

- ......하지만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자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색다른 고통들이 새록새록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고통이란 건 참으로 끈질기고 다양하고 화려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미혼모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이란 수백억 종류도 넘을 꺼란 생각이 들었지요.

아이 아빤 끌려가다시피 미국으로 가서 어떤 대학에 등록을 했고 간신히 편지로나마 서로의 안부를 전하게 되었던 거지요. 그마저도 이 년 전부터 끊긴 상태였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아이의 생일날 겨우 엽서 한 장 도착하는 게 전부였지요. 물론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지요. 하지만 전 언제 학위가 끝나는 건지, 왜 연락이 뜸한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생활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지요. 아이와 싸우고, 머리카락이나 쥐어뜯고, 펑펑 울고, 단원들한테 욕이나 얻어먹는 일이 제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이즈막엔 내 팔자란 애당초 고작 그 정도밖엔 되지 않는 모양이라고 체념하고 살았습니다. 산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진 거지요. 그런데...... 그런데 엊그제 그에게서 연락이 온 거예요. 함께 미국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썼더군요. 그는 그동안 혼자서 저와 아이를 함께 끌어드리는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요, 당장 그로부터 그런 제안을 받으니까 갑자기 허탈해진달까 힘이 빠지는 거예요. 과연 그곳엘 가기만 하면 그와 아이와 함께 제대로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걸까. 지금까지는 그를 미워하거나 그리워하는 것으로 살 수 있었지만, 이제 또다른 상처를 받게 된다면 도무지 전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이런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두려운 거예요. 차라리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는 건 어떨까 어젯밤도 그 생각으로 한잠도 못 잤어요. 이제 아이도 말을 배워가고...... 당신으로부터 연기 지도를 받으며 배우로 성장해가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는 생각도 하게 된 거지요. , 이건 솔직한 맘인데요, 정말이지 전 당신에게 감사해요. 전 당신으로 인해 사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 연기에 대해 자신감을 얻은걸요......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그가 상심하겠지요. 그도 많은 고민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린 걸 텐데 말예요. 저만 좋다면 그는 당장 저와 아이를 데리러 식구들 몰래 들어오겠다는 말을 하더군요. 이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는 팔꿈치를 창틀에 기댄 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제 얘긴 더 이상 지속되진 않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제 얘기가 곧 이어질 거로만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워낙 저 혼자동안 얘길 했으니까요.

더 이상 제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자 그는 고개를 돌려 저를 보더군요. 그냥 빙그레 웃으면서 말입니다.

-저기 저 하늘의 새들 좀 봐요

그는 손가락으로 빈 은사시나무 가지 위를 가리켰지요.

-서정주 시인의 동천이란 시가 생각나요. 그 시는 정말 겨울 하늘을 나는 검은 새들을 보며 음미해야 제격이죠.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동숭동엘 가요. 요즘 거기선 아주 그럴듯한 시화전이 열리고 있거든요. 최고의 시인과 최고의 화가가 만나니까 정말 사건이 터지더라구요. 직접 보지 않으면 안돼요. 아이가 일어나면 함께 가요.

그는 왜 동천이며 시화전을 떠올렸던 걸까. 내 말 중에 그런 걸 떠올리게 할 만한 내용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 그래서 그날 동숭동엘 갔었지요. 오후 네 시쯤 도착했던 걸로 기억돼요. 날씨가 쌀쌀해서였는지 마로니에공원에는 그다지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문예진흥원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지요. 날씨는 화창한 편이었습니다.

아이는 먼저 저만큼 앞으로 뛰어나갔다간 다시 뛰어 들어오곤 했지요. 예총회관 벽면에는 미술회관과 문예회관에서 열리는 행사 현수막들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는 은행나무공원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로 키 큰 은행나무들이 많았습니다.

공원 중앙에는 비둘기 떼들이 땅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쪼고 있었지요. 비둘기의 발은 하나같이 불구였습니다. 찢기고 부러지고 비틀린 발로 딱딱한 보도블록위를 기우뚱거리며 걸어다니고 있었던 겁니다. 저 새들은 왜 하나같이 불구가 되어 있는 걸까. 발갛게 언 불구의 발목을 보느라 저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때 그가 불쑥 대사를 던졌지요.

-린다, ...... 우린 아무래도 끝을 내야 될 것 같아요.

-, 저두 알아요. 문밖에 잠깐 나가 있는 동안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어요. 그래서 당신을 위해 딕크와의 결혼을 포기할 것인가 생각해봤죠. 그런데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거였어요. 전 딕크를 사랑해요.

전 즉각 그의 대사를 받았지요. 그와 함께 연습을 한 뒤로 언제 어디서라도 대사에다 감정을 이입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던 겁니다.

-그래요?

-그이에겐 제가 필요해요. 왜인가는 설명할 수 없지만...... 또 저도 그이가 필요해요.

비둘기에게 모이를 던져주던 젊은 커플이 우리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요. 고급스런 털외투를 입은 여자아이의 맑은 눈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딕크에게 당신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연기는 진지했습니다. 제게 연기 지도를 하기 위해 대사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무대 위에서 실연하는 것 같았지요.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틀렸다, 그게 아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주문이 몇 차례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사는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잘 이어져 나갔지요. 저는 저도 모르게 극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었습니다. 아이는 은행나무 아래 놓인 육각형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우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그 아이에게도 우리들의 연기란 그다지 생소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공원을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 둘 우리들 주위로 모여드는 걸 저는 보았습니다. 해도 기운 겨울 공원의 갑작스런 퍼포먼스였으니 흥미롭기도 했겠지요. 그가 너무도 열심히 해 주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요. 한치라도 실수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저는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딕크 외에 사랑을 느껴보긴 당신이 처음이예요. 정말 전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그 때문에 지금 제가 그만두지 못하면 전 아마 너무 깊이 빠져 딕크에게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전 당신과 있었던 모든 일을 기억하겠어요. 당신 때문에 제가 딕크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거니까요.

-됐어요. 린다, 집으로 돌아가요. 딕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대사를 외울 때마다 그와 제 입에선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왔지요. 저는 점점 더 많아지는 관중들 때문에 기가 질릴 것만 같았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어디서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왔던 것인지...... 그러나 전 그가 그만 이라고 말할 때까지 열심히 그의 대사를 받아냈어야 했던 것입니다. 제 평생 그토록 많은 관중들 앞에 서보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흥분된 감정을 힘들게 힘들게 억누르며 오로지 그의 눈빛만 바라보았습니다.

-절 기다리고 있다구요? 딕크가요?

-당신이 잠시 나간 뒤에 여기 왔었는데 당신을 데리고 클리브랜드로 가고 싶대요. 할 얘기가 있을 거예요. , 난 그저 앞으로도 당신 둘이랑 계속 친구가 되고 싶은 희망뿐입니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관중들도 진지했지요. 저는 환상을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각에 그 많은 인파가 몰려들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관중은 두 겹 세 겹 네 겹으로 늘어났지요. 겹겹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완전히 린다가 돼 있었지요.

-정말이예요, 알란? 그저 절 보내시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 아니죠?

-이건 제 진심이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톤으로 그가 말했지요. 대본에서는 여기서부터 피아노곡이 깔리도록 돼 있거든요) 우리 둘 다 마음속으론 당신이 딕크의 사람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친구에게 용기와 자신을 주는 일이요, 정신이요, 그 무엇입니다. 만일 클리블랜드행 비행기가 뜰 때 당신이 그 친구 옆에 없다면 당신은 후회할 것입니다. 오늘은 안 할수도 있고, 내일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리고 그때부터 나머지 인생은 후회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 알란, 정말 멋있는 말이예요.

-이 말은 저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마지막으로 하는 대사인데, 사실 저는 평생토록 이 대사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 것 같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가가 뺨에다 부드럽게 키스를 했지요. 대본에 그렇게 나와 있거든요. 그리고 두 세 발자국 멀어지면서 말했습니다.

-안녕히......알란......

그때 관중들로부터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지요. 그 박수에 놀라 저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았을 때 그도 저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내 아이도 조막손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제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잘했어. 정말 잘했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요.

우리 주위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모여들 때도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하나둘씩 흩어져 갔습니다. 그들은 고원을 걷다가 혹은 큰길의 가로수 아래를 걷다가, 우리 둘의 목소리를 듣고 걸어와서는, 우리의 진지한 연기를 보고, 감동한 만큼의 정직한 박수를 남기고 떠난, 그야말로 순수한 관객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에 다시 한두 마리씩 비둘기가 모여들기 시작하더군요. 하지만 제 귀에는 그 잊지 못할 우레와도 같은 박수소리가 언제까지나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윽히 웃고있는 그를 향해 말했습니다.

-고마워요.

......, 이제 제 얘기도 거의 끝나 갑니다.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 ...... 그건 아이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 였지요. , 그래서 사흘동안 집을 비웠던 겁니다. 제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선 좀더 복잡한 절차가 남아 있더군요. , 아이를 데리고 다녔지요. 아이는 제 아빠를 보고도 시큰둥하더군요. 틈틈이 사진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요. , 그 사이에 오디션을 받았어요. 새로 생기는 큰 극단에서 새해 이월부터 일하기로 결정이 됐지요. 다 윤명훈, 그 사람 덕분이었죠. 남편은 저보고 미국에 가서도 계속 연기 공부를 하라고 했지요. 그러기 위해선 이곳에서의 경력도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사흘 동안 비어 있던 집으로 돌아와 전 보일러에 연탄을 갈아넣고 먼지를 닦았습니다. 자동응답기에 메시지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지만, 우선은 비워놨던 집에 내려앉은 먼지들을 제거하는 게 급했지요. 찬물에 걸레를 빨아 여기저기 훔쳤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재생버튼을 누른 모양이었습니다. 테이프가 돌아가면서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지요. 그의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방에 엎드려 한 손으로 걸레질을 하면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지요. 그의 목소리가 반가운지 아이가 아찌다, 아찌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테이프는 무어라 무어라 하는 그의 음성을 쏟아놓고는 금방 멈추었지요.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굉장히 석연치 않은 느낌이 거기에서 느껴졌습니다. 뭔가 제 가슴 한복판에 낚시 같은 게 탁 걸리는 기분이었지요.

저는 방을 훔치다 말고 일어나 자동응답기로 갔습니다. 찬 걸레를 쥐고 있던 제 빨간 언 손이 떨렸지요. 테이프를 되감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당신이 이 녹음을 듣고 있을 때 난 천백이십사 동 사백삼 호에 잠들어 있을 거요. 영원히. 떠나기 전에 내 마지막 음성으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당신은 나에게 고맙다고 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소. 두 번이나...... 무엇보다 그 말이 나로선 사무치게 고맙소. 난 비로소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소. 당신, 아이, 그리고 세상이여 안녕.

추신: 내 낡은 책상 서랍에 워너브라더스 원판의 '카사블랑카'가 있을 거요. 그걸 당신 앞으로 남기오.

 

전 아이의 손을 잡고 곧장 집 밖으로 뛰쳐나왔지요. 천백이십사 동까지는 오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나와 아이는 길을 무시하고 잔디밭 철책을 마구 넘어 그의 집 앞까지 다다랐습니다. 날씨는 잔뜩 흐렸고 하늘에는 난데없는 헬기들이 낮게 떠서 어디론가 굉음을 내며 사라졌습니다.

헬기가 사라지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요. 그의 아파트 입구에는 십여 명의 주민들이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흰색 앰블란스 한 대가 초록빛 패트롤 라이트를 번쩍이고 있었지요. 삼층의 계단 창으로 하얀 가운을 입은 두 명의 사내가 보였지요. 그들은 이 층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무언가 무거운 것을 들고 말입니다.

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섰습니다. 온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왔던 거지요. 그러곤 하다 만 청소를 다시 부지런히 시작했습니다. 창틀과 거울을 닦고 문지방과 가구들을 훔쳤습니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빈 어항을 빡빡 소리가 나게 닦았지요. 그런데 아이가 또 재생버튼을 눌렀지요. 저는 전화기로 맹렬하게 달려가 스톱 스위치를 누르고 필름을 꺼냈습니다. 그걸 쓰레기통에 버릴까 생각하다가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선반에다 올려놓았지요. 텅 빈 선반 위에 놓인 마이크로필름이 쓸쓸해 보였습니다. 전 언제까지나 그걸 거기에 넣어두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제 하루가 지난 것입니다. 무얼 생각했는지, 어떻게 밤이 지나갔는지 사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형사님의 전화를 받았지요. 경찰이 절 찾을 거라는 걸 예상하곤 있었지만 형사님이 여자라는 걸 안 순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더군요.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무엇이든 대답하겠습니다. ? , 그렇다면 전 좋지요. 사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이상으로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 그러지요. , 이게 그거군요. 맞아요. 이쪽이 험프리 보가트군요. 그래도 될까요. 고맙

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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