몌별
몌별
(* 몌별 : 소매만 스치듯 섭섭히 작별한다는 것. 그것을 몌별(袂別)이라 쓰고 메별이라 읽는다.)
구효서
1. 그간의 일을 아룁니다
선생님께 그간의 일을 아룁니다. 전느 서른한 살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가을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벌써 7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뵈온 것도 그해였습니다. 그해 여름이었지요.
그때 저는 스물네 살이었고 남편은 스물여덟이었지요. 아버지 친구 분의 아들이며 동네 오빠이며 같은 대학 4년 선배였던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시던 말슴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널 창혁이한테 주기로 했다. 네가 태어나던 해 그렇게 하기로 했어.
술이 얼근하게 취하기라도 하시면 아버진 제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그랬을 겁니다.
- 난 아빠랑 결혼할 건데.
그때는 그렇게 대답하곤 했지요.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 내가 뭐 물건인가요. 주고 어쩌고 하게요?
라고 샐쭉거렸지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재밌다는 듯이 허허허 웃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될까 싶었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나이를 먹어 마침내 스물이 넘었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농담을 계속하셨습니다. 지금은 시아버님이 되신 분도 제 아버지와 다르지 않으셨지요.
-우리 아기 잘 있었나? 어서어서 자라 우리집엘 와야지.
집에 오실 때마다 그 말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저와 창혁이 오빠는 두 분 때문에 자주 곤혹스러웠으나 두 분은 그게 즐거우셨던 모양입니다.
두 분이 서로의 각별한 친분을 그런 식으로 나누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지요. 종종 그러는 아버지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직접 당사자라고 할 수 있었던 저와 창혁이 오빠는 일부러라도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게 어려웠고 귀찮았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창혁이 오빠가 반에서 일등을 하거나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어김없이 두 분은 집안의 경사를 축하하는 실제 사돈들처럼 즐거워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어머니들마저 그랬습니다. 오빠가 막 졸업한 대학에 제가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는 듣기에도 민망하게 부창부수라는 이상한 말까지 거침없이 했던 두 분이었습니다. 바늘 가는 데 어찌 실이 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지요.
그 창혁이 오빠라는 사람이 지금의 제 남편입니다. 부모님들 뜻대로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부모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제가 그이와 결혼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이와 결혼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는 것이 첫째 이유라면 이유였고, 실제로 그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둘째 이유였던 것입니다.
남편이 종종 짖궂게 “나 사랑하는 거야?”라고 묻는 까닭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그럼 저는 “자기는 어떤데?”라고 보기좋게 되받아치지요. 그이도 거의 비슷한 이유로 저와 결혼한 거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가까운 집안의 오빠였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부부싸움을 해도 부부싸움 같지 않았습니다. 번번이 한 집안의 남매가 싸우는 꼴이 되어버리곤 했지요. 저는 걸핏하면 시어머니나 시누에게 달려가 남편의 못된 버릇과 행동들을 일러바치곤 하였습니다. 남편에 대한 시부모님의 꾸중도 한 집안의 가장이나 한 여자의 지아비를 향한 꾸중이라곤 할 수 없었습니다. 여동생을 못살게 구는 오라비를 꾸짓듯 했던 것입니다. 남편도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는 자식일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저희들 사이에 아이가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결혼한 지 7년이 되었지만 우리에겐 아직까지 아이가 없습니다.
남편에게도 저에게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데 도무지 아이가 생기질 않습니다. 결혼을 한 뒤 2년까지는 저도 직장엘 다녀야 했기 때문에 아이를 일부러 갖지 않았었지요. 스물여섯이나 일곱쯤엔 가져도 괜찮겠다 싶었던 것이 아직까지 없습니다.
아이를 정말 갖고 싶기는 합니다. 그러나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저와 남편은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서둘러 포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애가 없는 것으로 해서 부부에게 특별한 갈등과 고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고 제 생각입니다. 고맙게도 친정식구들과 시집식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주십니다. 다만 아이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이는 그이대로 저는 저대로 언제까지나 아이이고 자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 여전히 남매처럼 옥신각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입양을 생각해봤습니다. 그랬습니다. 만일 그날 제가 선생님을 뵈려고 집을 나서지만 않았더라도 저는 그날 남편과 입양기관을 찾았을 겁니다. 이번 일요일엔 맘먹고 입양기관에 일단 한번 가보는 게 어떨까, 라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두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날 남편과 입양기관엘 가지 않고 선생님을 뵈러 집을 나섰던 것입니다. 입양에 대한 망설임이 그런 돌발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집을 나서면서 거푸 되새겨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날 선생님과 어떤 약속도 돼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선생님이 제게 전화를 하신 것도 아니었고 제가 미리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생님도 그러셨겠지만 저도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7년 넘게 단 한차례의 전화 통화도 없었으니까요. 선생님이 근무하시는 지역과 학교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드릴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계신 곳은 서울로부터 최소한 세 시간은 달려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그동안 선생님께 관한 소식을 전혀 듣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헛걸음이 될 수도 있는 거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무작정 집을 나서고야 말았습니다. 왜 그랬어야만 했던 건지, 저는 지금도 그걸 생각합니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을 수도 있는 거였습니다. 선생님은 무려 7년 전에 그곳에 계셨었으니까요. 전근을 가시지 않았더라도 휴일이고 하니까 선생님은 어디 멀리 출타를 하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어째서 7년 동안 소식을 모르던 분을 갑자기 찾아나셨냐는 게 이상합니다. 그리고 그게 하필 선생님이었냐는 점이 이상합니다.
선생님이 계시는 지방으로 향하면서 저는 저한테 물었습니다. 전에도 그러니까 7년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 않았느냐고 말이지요. 불쑥 선생님을 찾았었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때도 그랬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선생님이 그곳에 계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선생님을 처음 뵈온 지 겨우 1년이 지나 있던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7년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헛걸음을 충분히 염두한 결행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가서 선생님을 뵙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곳에 가는 것, 그것이 출발 동기의 전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을 해놓고도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날 제가 어째서 선생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차를 몰게 되었는지 좀더 자세히 되짚어봐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간의 일들을 선생님께 잘 말씀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
여름만 되면 전 일종의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일종의> 불안감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딱히 불안감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주먹만한 것이 가슴 한켠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온 여름내 그랬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3,4일 정도 그러다가 말았습니다. 고통스러웠던 것도 아니었고 못 견딜 만큼의 자각증상을 동반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점차 기분이 나빠져서 왜 이럴까 싶다 보면 생리일이 가까워진 것을 깨닫듯, 제가 말씀드리는 불안감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불안감이 생리일과 겹쳐서 모르고 지난 여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증상이 느껴질 때마다 저는 어느새 여름이 깊어진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불안감이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여름 내내 지속되던 것도 아니었고, 참을 수 없을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에 시달렸다고도 말할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전 일종의 불안감을 느꼈습니다>라는 한마디 말에 이토록 여러 설명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런 증상이 해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재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7월 22일이었습니다. 또 이러네,라고 중얼거리며 달력을 보면 7월 20일이거나 21일이거나 22일이었습니다. 앞뒤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22일 빠진 적은 없었습니다. 반드시 22일이 포함되었지요. 그래서 저는 제 불안의 진원일이 7월 22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남편에게 그런 증상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누구한테 된통 얻어터진 적이 있나 보지. 이를테면 고등학생 때 흑장미파한테 몰매를 맞았다거나.....”
남편은 도무지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못된 오라비처럼 말할 뿐이었습니다.
“7월 22일이면 여름방학중이에요. 흑장미파한테 얻어터질 만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나는.”
그러면서 저는 7월에 있었던 불행한 기억들을 되짚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7월에 있었던 불행한 기억들>이란 항목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기억이란 대개 <가장 좋아흔 색깔은?> 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저장돼 있는 것이니까요.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런 건 나한테도 있었어. 가을 초입만 되면 불안했지. 왜 이럴까, 왜 이럴까, 싶다가 우연히 달력을 보면 9월 초가 돼 있는 거야. 정확히는 9월 5일이지. 입대일이었거든. 몇 년 동안 그걸 몰랐어. 막연히 뒤숭숭할 뿐이었지. 하지만 그날이 그날이라는 걸 안 뒤로는 괜찮았어. 뒤숭숭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뒤숭숭해도 그래서 그런 거라고 넘어가게 되었다는 얘기야. 군에 입대할 때는 잘 몰랐어. 당신도 알다시피 시침 딱 떼고 갔었잖아. 남들 다 갔다 오는데 겁낼 거 뭐 있겠냐는 식이었잖아. 썩 의연했지. 하지만 실은 꽤나 막막하고 두려웠던 모양이야. 그러니 제대를 하고 벌써 7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가을 초입만 되면 맘이 뒤숭숭해지는 거겠지. 요즘은 거기에 하나 더 붙었어. 가끔씩 아직도 제대를 못하는 꿈을 꾸는 거야. 국방부의 전역자 명단 처리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 동기들은 다 제대했는데 나만 남아 있는 거야. 분개해서 인사과로 달려가 따지면 인사과 선임하사가 늘 말하지. 1주일만 참아라, 곧 전역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1주일 갖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잘못 싸웠다간 덤터기를 쓸 것 같아서, 1주일이니 꾹 참자 견디기로 하지. 하지만 군대에서의 1주일은 너무 길고 화가 나고 그러는 거야.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그야말로 현실 자체가 구원이지. 나 군대생활 그다지 힘들게 했다곤 생각지 않아. 하지만 꽤나 힘들었던 모양이야. 현실에서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에도 무의식 깊은 곳에는 상흔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나 봐. 하지만 그런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게 중요해. 그러나 그 누구나가 다 그런 걸 갖고 고민하지는 않지.”
제 불안을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결국 남편의 긴 말은 제 증상이 <별거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런 건지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자신의 불안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낸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그러지 못했지요. 그만큼 제 불안의 원인은 미미한 거라고도 볼 수 있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전 불안했고, 남편의 말마따나 뒤숭숭했습니다. 그날도 그랬지요.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했으면서도 남편은 아침을 먹고 나서 또 샤워를 했습니다. 아주 무더운 날이었습니다. 침실과 앞뒤 베란다의 문을 다 열어놓고 저는 잠깐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느라 금방 더워진 몸을 식힐 겸 해서였지요. 있는 문을 다 열어놓았는데도 몸안의 열기 때문인지 덥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천장에 뜬 달을 보았습니다. 달 같았습니다. 베란다에 떨어져 내린 햇빛이 세숫대야에 받아놓은 물에 반사되어 천장에다 희고 밝고 둥근 달을 만들어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달로 보였던 까닭은 음영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냥 희고 밝고 둥근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음영이 일렁이고 있었지요. 보름달에 드리운 분화구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걸 두고 물그림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전 천장의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저게 바로 물그림자라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세숫대야에 담긴 물의 수면 위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일 터였습니다. 바람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뭐랄까, 그냥 공기의 움직임 정도였겠지요. 바람 같은 건 느껴지지 않던 아침이었으니까요.
그랬습니다. 바람은 아니었고 집 안을 떠도는 공기의 흐름 정도였습니다. 피부로는 느낄 수 없는 공기의 미세한, 그러나 끊임없는 움직임들이 물의 표면을 건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집 안은 물론 이 세상도 전부 그런 공기들로 가득 차 있겠지요. 아주 가득 차 있겠지요. 그것들을 끝없이 대류하고 있을 겁니다. 볼 순 없지만 믿곤 있지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눈으로 보인 거지요. 쉴새없이 움직이는 공기의 모양을 저는 침대에 누워 바라보았습니다. 끝없는 파문의 빠른 생성과 소멸을 말입니다. 분주하고 분방하게, 때로는 꽃을 만들고 때로는 구름을 만들고 때로는 웃음을 만들고 때로는 절망을 만들어냈습니다. 너무도 현란해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습니다. TV를 보고 있을 때도 그것들은 우리들의 눈과 화면 사이에서 쉴새없이, 저토록 현란한 군무를 추고 있는 거겠지요.
미미한 거더라도 하여튼 저를 불안하게 하는 것의 모양을 문득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것들도 저토록 내 안에서 분망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져지지도 보여지지도, 심지어는 잘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지만 그것들의 움직임은 너무도 바쁘고 왕성하고 절박하고 치열한 것은 아닐까.
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그리곤 읽던 책을 다시 펼쳤지요. 책에는 이런 얘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남자가 꽝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무엇엔가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엉뚱한 일을 당한 것 같기도 하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습니다. 냉장고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드와이저 한 병을 꺼내 들고 벌컥벌컥 마셔댔습니다. 여자(아내이거나 친구거나 애인이었을 겁니다)가 말했습니다.
“무슨 황당한 일을 당한 사람 같군요.”
남자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찰리. 인근 고등학교의 미술 교사였습니다.
그날 그는 예고 없이 전에 가르쳤던 한 여제작의 방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4,5년 전에 졸업한 그 여학생은 결혼반지를 낀 가정주부가 되어 갓난아이를 안고 찾아왔다는 것이었지요. 5년 전만 해도 그에게 미술 수업을 받았던 안젤라였습니다.
찰리는 그녀를 조용하고 평범한 소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스승께 예의를 갖춰 안부를 묻고 나서 안젤라는 긴 얘기를 시작했지요.
얘기를 요약하자면, 고등학교 다닐 때 의붓아버지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았다는 거였습니다. 때리고 밤마다 침대로 들어왔다는 얘기. 공포스러웠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죽기로 결심했었다는 거였지요. 부모가 여행을 떠나기를 기다려 자살 준비를 마쳤답니다. 어머니에게 긴 유서를 써놓고 차고로 가서 테이프로 문틈을 빈틈없이 발랐답니다. 아마 자동차 배기가스로 자살을 할 모양이었던가 봅니다.
준비를 다 끝내놓고 안젤라는 마지막으로 학교엘 갔답니다. 금요일 오후 수업을 마치는 대로 집으로 와 곧장 계획을 실행에 옮길 작정이었지요. 금요일 여덟째 시간인 미술 수업을 받을 때까지도 안젤라는 그 계획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술 교사인 찰 리가 수업중에 그녀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찰리는 안젤라의 미술 숙제를 점검하면서 그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습니다. 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 안젤라가 하는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부드럽게 어깨를 두들겨주고나서 교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안젤라는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써놓은 유서를 없애버렸노라고 찰리에게 말했습니다. 차고의 테이프들도 모두 뜯어버렸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나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달려온 목사의 권유에 따라 집을 떠났으며,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젤라는 그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그 모든 감사를 찰리에게 돌리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찰리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찰리와 여자(아내거나 친구거나 애인일)는 여학생들의 몸을 접촉하지 말라고 남자 교사들에게 경고하는 학교 방침에 대해 조용히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학생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금지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교육적일 수 있는가, 혹은 부드러운 손길이나 따뜻한 접촉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될 수 있는지 모른단 말인가, 등등.
안젤라는 그 미술 수업 시간에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한 친절한 선생님이 자신에게 다가와 관심을 가져주고 따뜻한 손을 얹어주면서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세상에 자신을 돌봐줄 또다른 많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찰리는 말을 다 마치고 나서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며 여자를 쳐다보았지요. 그는 매우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낸시, 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든 것은 내 자신이 그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거야!”
서너 줄 더 남아 있었지만 저는 그 글을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침대에서 튕겨져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지요.
“밖에 좀 나갔다 와야겠어요.”
라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욕실에서 나오곤 하는 남편을 그날만큼은 타박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제 말이 찰리의 말만큼이나 단호했었던가 봅니다. 남편은 집을 나서는 저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지도 못했습니다. 입양기관에 가기로 했던 일은 그래서 다음으로 미루어지게 된 것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그날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을 나와서도 전 어째서 선생님을 떠올린 것이고 어째서 선생님을 찾아뵈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그것도 아무런 조짐도 암시도 없이 불현 듯 그렇게 되었던 것인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찰리의 <기억조차 하지 못한>이라는 말과 <부끄럽게>란 말이 묘하게 뒤섞이며 유발한 충동이라는 것밖에는요.
2.
선생님도 그때를 기억하시겠지요
처음 선생님을 뵙던 날 말입니다. 어쩌면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날과 선생님이 저를 처움 보신 날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와 선생님은 1992년 여름 어느날(7월이었던 건 분명합니다)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선생님이 근무하시던 용동초등학교에 도착했을 때 그때 선생님은 분명 교장 선생님과 이장님과 그곳 농민 후계자 되시는 분들과 함께 계셨었으니까요. 아이들이 스무 명쯤 있었고, 주민들도 적잖이 마중을 나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 선생님이 선생님이 아닌 줄만 알았어요. 그냥 그곳 마을 주민 중 한 분인 줄만 알았지요. 그건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더랬습니다.
선생님 같지 않았으니까요.
교사라고 뭐 특별히 명찰이라도 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교사라고 언제 어디서나 유달리 교사라는 태가 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사인지 아닌지 구별할 어떤 기준도 표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냥 알 수 있는 거잖아요. 특히 그곳은 시골이고 농촌이었던 것입니다. 기준이나 표지가 없어도 어렵지 않게 교사인지 구분할 수는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그해 그곳으로 농활을 갔던 학생들 모두.
물론 쉽게 구분했지요. 교장 선생님과 5학년 담임을 맡고 계셨던 박 선생님을 저희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장이라는 분과 농민 후계자라는 분들까지도요. 다만 그렇게 쉬운 구분에서 선생님은 제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외된 건 아니었지요. 선생님은 주민들 쪽으로 구별되어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제가 다니던 대학의 버스가 처음 그곳 용동초등학교에 도착했을 때 운동장에는 여러분들이 계셨습니다. 흰 모자를 쓰신 분이 교장 선생님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요.
주민들은 당연히 환영할 거라고 우리는 믿고 있었고, 우리의 믿음대로 선생님들과 주민들은 우리를 환영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환영의 모습이란 것이 우리가 (어쩌면 저 혼자뿐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상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는 은연중에 흔히 보아왔던, 약간은 형식적이고 호들갑스런 환영식을 떠올렸던가 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서둘러 반기는 쪽은 교장 선생님과 박 선생님, 그리고 이장과 농민 후계자들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분들이 환영을 안해주었냐면 그건 아니었지요. 다만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는 것뿐입니다.
주민들 중 몇몇은 버스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냥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전혀 웃지 않는 분도 더러 계셨지마는요. 하여튼 그랬습니다. 내리쬐는 땡볕 때문에 아이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반기기보단 아이들은 대학 이름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냉방버스에 먼저 호기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버스에서 내릴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가 궁금했던 겁니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설렘과 기대에 앞섰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들의 얼굴은 <환영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인상적인 환영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주민들과 아이들의 검게 탄 얼굴을 보면서, 저는 그동안 너무도 흔해빠진 만남의 장면들만 봐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텔레비전 카메라에 익숙한 사람들은 불쑥 카메라를 들이대도 여유 있게 웃거나 윙크를 해 보입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라든가 오지의 아이들은 검고 깊은 눈으로 무표정하게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지요. 비유가 적절친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날 저는 아이들과 일부 주민들에게서 한없이 깊고 검은 눈을 보았습니다.
환호성을 지르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환영이 아니라,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굳어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저는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빛만큼 우리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웅변은 없었으니까요. 그게 멋진 환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학교 교실에 마련된 저희들의 임시 숙소엔 세상에서 가장 큰 모기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저희들을 위해 새로 장만한 모기장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지요. 그 매끈거리고 윤기는 커다란 모기장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하여튼 끝나는 날까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모기장 한땀 한땀에 우리를 반기는 주민들의 맘이 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우린 그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이들 사이에 끼여 있던 운동장의 선생님. 선생님도 아이들의 표정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아이들과 똑같은 호기심과 궁금증에 휩싸여 계셨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선생님의 눈빛은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때는 선생님이 선생님인 줄 몰랐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선생님이 선생님이란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저는 그날의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끔 옷곤 했습니다.
글쎄요. 이것이 아이와 어른을 구분짓는 어떤 기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호기심에 넋을 잃는 시간이 어른들보다 훨씬 길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그만큼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이들보다는 자주 반추한다는 뜻이겠지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훨씬 빈번하게 자신에게 던진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잠깐 맥을 놓았다가 금방 표정을 수습하는 게 어른이라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그날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들하고 똑 같았어요. 물론 제 시아버님은 지금도 종종 입을 헤벌리시고 TV를 보십니다. 식구들이 다 알고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써도 아버님은 도무지 모르시지요. 입 밖으로 흘러나온 침의 이물감에 놀라 황망히 입을 수습하시는 아버님을 보고서야 식구들은 와락 웃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연한 말씀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왕 버릇없이 군 김에 더 말씀을 드리자면, 그날 선생님의 모습은, 철없던 그즈음 대학생들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자면, 귀여웠습니다.
이건 제 생각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송충이. 생각나시는지요. 선생님의 바지에 털이 무성한 커다란 송충이가 붙어 있었던 거 말입니다. 벌레라는 것에 익숙지 못했던 우리 중 누군가가 죽을 듯이 비명을 질렀지요. 아마 영문과에 다니던 조은이라는 애였을 겁니다.
선생님은 느릿한 손동작으로 선생님의 바지에서 송충이를 털어냈습니다. 선생님의 침착한 동작은 우리들에게 <정말이지 별거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지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송충이를 털어낸 선생님의 표정이 그때 어땠는 줄 아시는지 아시는지요. 발그스름해졌었습니다.
송충이가 무섭거나 징그러워서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공연히, 그 송충이란 놈이, 다른 데가 아닌 내 바지에 붙어서 정말이지 놀란 사람한테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런 표정이셨거든요. 그게 어째서 선생님이 미안해할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생님은 굉장히 멋쩍고 죄송하고 심지어는 부끄러워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여학생인가가 옆의 다른 여학생에게 빠르게 속삭이는 소리를 저는 들었습니다.
- 저분, 귀여운 것 같애. 그렇지 않니?
그러자 옆의 학생이 말했습니다.
- 너도 그렇게 생각했니?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선생님의 나이가 우리들보다 그다지 많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우리들의 나이는 스물에서 많게는 스물셋이었는데, 복학한 예비역 남학생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게 잡아도 그때 선생님의 나이는 서른 이상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미혼인 것 같았구요.
어쨌든 선생님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사흘인가가 걸렸을 겁니다.
선생님은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교무실 앞 계단을 쓸곤 하셨지요. 그 마을은 아침마다 안개가 끼는 곳이었습니다. 새벽안개 속에 제일 먼저 깨어 움직이던 것은 언제나 선생님이셨지요. 그 마을의 아침은 선생님의 싸리비 소리로 시작되었습니다. 슥삭슥삭.... 지금도 제 귀는 선생님의 싸리비 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싸리비 소리에 잠을 깨곤 하였으니까요.
아, 학교에서 일하시는 관리 아저씨쯤 되는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중엔 선생님을 아저씨라고 부른 학생도 있었지요.
“아저씨, 교실에 벌이 들어왔어요.”
그러면 선생님께선 쓸던 싸리비를 들고 교실로 들어와 아주 능숙하게 벌을 내쫓아주었습니다. 내쫓았다기보단 벌을 바깥으로 내보내주신 거지요. 왠지 그렇게 보였습니다. 벌을 위협해서 내쫓은 게 아니라, <너는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벌에게 이해시킨 것만 같았으니까요. 선생님은 싸리비를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벌이 나가야 할 길을, 벌이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들고 계셨을 뿐이지요.
하여튼 그럴 때도 선생님은 <나, 이 학교의 교사외다>라는 말씀 같은 건 하지 않으셨습니다. 워낙 말씀이 없던 분이셨으니까요. 아저씨라는 호칭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은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겁니다.
우리들에게 경운기며 농약분무기 사용법을 가르치실 때도 그랬습니다. 물론 그건 선생님 담당이 아니었습니다. 농민 후계자들의 몫이었지요. 그러나 웬만한 분이라면 그 일에 끼여들어 함께 설명하려고 했었을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마치 저희 일행 중 한 사람인 것처럼 저희들과 함께 그들의 설명을 듣곤 했지요.
우리가 대학생들이어서는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배우길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었는지, 그들의 설명법은 지나치게 분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분들은 삽질하는 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 오른손은 삽 상단의 손잡이 중앙 부분을 바로잡기로 잡고, 왼손은 삽자루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하단을 역시 바로잡기로 잡습니다. 물론 왼손잡이라면 이와 반대겠죠. 이때 허리의 각도는 약 45도. 삽날을 작업 대상 부분에 접근시킨 뒤 오른손잡이는 왼발을, 왼손잡이는 오른발을 삽날 어깨 부분에 얹고 힘껏 밉니다. 삽날이 작업 대상 부분에 깊이 박히면 오른손잡이일 경우 왼손은 당기고 오른손은 밀면서 대상물질을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시키면 되겠습니다.
그분들의 설명을 들으며 저는 중학교 1학년 땐가 치렀던 주관식 도덕시험의 한 문항을 떠올렸더랬습니다. <손님에게 차를 접대할 때는 찻물을 찻잔에 ( )가 되게 따르며 ( )에 받쳐내야 한다. 빈칸을 알맞게 채우시오>라는 문제였습니다. 답은 <2/3>와 <쟁반>이었습니다. 저는 시험을 치르다가, 만일 손님이 주방의 식탁에 앉아 있다면, 그래도 쟁반에다 받쳐내야 하는 걸까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체육문제에도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멀리뛰기의 순서를 도움닫기 → 발구르기 → 공중동작 → 착지동작으로 적어야 한다거나, 앞구르기를 할 때 몸이 매트에 닿는 순서를 머리 → 목 → 어깨 → 등 → 엉덩이 → 다리로 적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저는 결코 농기구 사용법에 대한 그분들의 설명법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은 정말이지 우리들 때문에 너무도 애를 쓰신 분들이었습니다. 특히 콤바인 운전법은 순서와 작동법을 자세히 모르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요. 경운기도 그랬고 농약분무기도 그랬습니다. 안전수칙을 안 지키는 바람에 한 예비역 선배가 농약을 주다가 논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잖습니까.
그분들은 헌신적으로 저희들의 농활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농활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농촌활동이라는 말의 준말인 <농활>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었지요. 그건 농촌활동이었다기보단 농촌체험이었던 겁니다. 그분들 덕에 우리들은 소중한 농촌체험을 한 것이었지요. 도움을 주기는커녕 잔뜩 도움만 받고 돌아온 셈이었던 겁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선생님을 기억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선생님을 말씀이 없으셨다는 것 말입니다. 선생님은 다만 우리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실수를 하고 어디서 망설일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하셨습니다. 설명을 다 들은 남학생 하나가 경운기의 시동을 걸려고 했을 때 선생님은 얼른 경운기 회전판에 달린 손잡이를 빼주셨지요. 그 학생이 뭣 때문에 망설일 것인가를 선생님께서는 미리 예측하고 계셨던 거고, 그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식이셨습니다. 개울가에 간이다리를 놓으려고 그 마을 하천 하류에서 모래를 채취할 때도 선생님은 우리들의 어설픈 삽질을 보다 못해 가래를 만들어주셨었지요. 삽날목에 두 가닥의 긴 줄을 늘어뜨리는, 아주 간단한 장치였는데 일이 훨씬 쉬워지는 걸 보고 우리는 모두 놀랐습니다.
“우와, 이게 뭐예요? 원래 이렇게 일하는 방식이 있었던 거예요?”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삽을 잡으면 나머지 두 사람이 각각 줄 끝을 잡고 호흡을 맞추어 끌어당기는 거였습니다. 엄청난 양의 모래를 힘들이지 않고 속도감 있게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도 선생님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지요, 마치 자신이 한 일이 매우 부끄러운 거라도 되는 것처럼 멋쩍어하셨습니다.
“원래 이런 게 있었던 거예요?”
질문을 했던 학생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제서야 선생님은 가래,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셨지요. 가래라는 거예요, 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가래, 였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말슴을 안하시거나, 하더라도 아주 짧았습니다. 하긴 말이 필요 없을 경우가 더 많긴 했지만요.
가래질이 처음이었던 우리들은 호흡을 잘 맞추지 못해 처음엔 헛삽질을 했습니다. 그때도 선생님은 말 대신 직접 내려와 줄을 딱 한번 당겨주셨지요. 줄을 당길 때는 두 사람이 동시에 힘껏 당기되, 놓을 때는 충분히 늦춰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충분히 늦춰주는 것. 그래야 삽을 쥔 사람의 종작이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처럼 따라하자 일이 금방 쉬워졌습니다. 우리들은 바보가 도통이라도 하는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게 그 일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주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부분을 살짝 건드려주는 것으로써 많은 일들을 저희들 스스로 쉽고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요령을 모르는 사람에겐 아주 간단한 지도(指導)가 구원처럼 여겨질 때가 있는 거거든요.
벌을 쫓는 것도 그랬고, 경운기 손잡이를 빼주시던 것도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일들을, 마술을 부리듯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던 건 그 학교에 다니던 2학년짜리 아이였습니다. 자기 담임 선생님이라는 거였습니다. 모두들 반신반의했지요.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이라구?”
농약을 주다 논에 쓰러졌던 예비역 선배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체육 선생님이에요.”
“담임 선생님이라면서?”
“맞아요.”
“몇 반?”
“1반이오. 여긴 한 반씩밖엔 없어요.”
“한 학년에 한 반씩뿐이야?”
“네.”
“한 반에 몇 명쯤 되니?”
“열세 명이오.”
“열세 명?”
“네.”
“근데 너 체육 선생님은 또 뭐야? 이렇게 작은 초등학교에도 체육 선생님이 따로 있다는 거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근데 넌 지금 체육 선생님이라고 했잖아. 담임 선생님이 맞는 거야. 아니면 체육 선생님이 맞는 거야?”
선배는 아이에게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둘 다요.”
“둘 다?”
“체육 선생님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체육을 무지 잘 하시거든요.”
“체육을 잘하신다고?”
“네.”
선배가 자꾸 따져 묻자 아이는 점점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임마, 축구를 잘한다면 모를까 체육을 잘한다니까 이상하잖아. 농구나 배구를 잘한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체육을 잘한다니,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잖니.”
“다 잘하세요. 축구, 배구, 농구, 육상, 줄넘기도요. 뜀틀도요. 그런 게 다 체육이잖아요.”
아이의 말이 맞았습니다. 공연히 억지를 부리고 있었던 건 선배였습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마침내 체육을 좋아하시고 체육을 잘하신다는 선생님과 남학생들과 어울려 그날 오후 족구를 했습니다. 기억나시지요? 그날 선생님은 대단했습니다. 전부 입이 딱딱 벌어졌지요. 여학생들이야 선생님 팀 스코어가 쑥쑥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놀랐지만, 남학생들은 선생님의 진정한 실력에 감탄하고 절망했던 겁니다.
제가 보더라도 실력 차이라는 게 장난이 아니었으니까요. 오죽했으면 저분이 왜 축구 국가대표팀에 가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걸까를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었겠습니까.
코트 안에서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말없이 느릿느릿 움직이시는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비유도 <비호같았다>는 고전적인 표현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빠르고 강하고 정확했습니다. 특히 공을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눈빛, 그리고 팀을 리드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다 못해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었으니까요. 경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모두들 고개를 홰홰 저었습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마이크 앞에서 기막힌 노래솜씨를 보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을 종종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그런 것에 댈 게 아니었습니다.
휴우 - . 다들 고개를 숙이고 코트에서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비로소 선생님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체육 선생님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지요. 선생님은 우리들의 체육 선생님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저는 그날 선생님을 처음 보았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저와 우리들을 그곳에 도착하던 날 처음 보셨겠지만, 우리는 사흘이나 지나서야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날과 선생님이 저를 처음 보신 날이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앞에 썼던 이유를 이제야 아시겠지요.
그렇게 그날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족구를 하시던 선생님의 강렬한 인상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아 그날만큼은 일찍 잠들지 못했습니다. 밤개구리 소리, 그걸 악머구리란다고 선생님이 나중에 말씀해주셨지요. 그 악머구리 소리를 새벽 2시까지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선생님한테는, 선생님의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글쎄, 그게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진 몰라도, 하여튼 뭔가가 들어 있다, 라고요.
*
농활이 지루했던 건 아니지만 며칠이 지나자 처음의 각오와 다짐들이 점차 조금씩 바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다고 게으를 수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일찍 일어났고, 열심히 일했고, 늦게서야 잠들었습니다. 다만 온통 짙푸르기만 한 세상과, 그 위로 떨어져 내리는 폭염에 치여가고 있었습니다.
고추밭 한가운데 단 10분만 서 있어도 농촌이라는 것이 시원한 냉방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스치는 평온한 들녘 풍경을 바라볼 때의 것과 얼마나 다른 건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땡볕도 땡볕이지만 땅에서 솟아오르는 지열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를 알게 되었지요. 일의 양이나 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햇볕과 후끈거리는 땅심을 견디는 것 자체가 고달픔이었지요.
풀이 그토록 빠르게 자라는 건지를 몰랐습니다. 밭이랑의 잡초를 뽑는다고 뽑아놓으면 다음날 정확히 그만큼의 풀이 다시 자라 있었습니다. 놀라움이 아니라, 그것은 무서움이었습니다. 풀에 대해서라면 우리들은 완벽하게 무지했습니다. 풀들은 그런 우리들의 무지를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왠지 우리를 보란듯이 위협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시 무성해진 풀들을 바라보면서 농활은커녕 학교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허구한 날 저 이랑의 풀들과 전쟁만 치르다 말 것 같았습니다. 겨우 한 줄의 이랑과 말입니다.
일이라는 게 그랬습니다. 하루종일 밭을 일구고 이랑을 내고 콩을 심었습니다. 몸이 느끼는 노동량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일의 성과라는 것도 몸이 느끼는 노동량에 비례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지, 일을 마치고 나와 뒤돌아본 밭은 그야말로 실망이었습니다. 종일 더위와 싸우며 일군 밭이 고작 저것이었던가. 손바닥만했습니다. 부끄러워서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땅과 물이 우리들 몸 속의 염색체를 마구 바꾸어버리려는 것 같았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우리를 아예 식물로 변태시켜 자신들의 땅 위에 꽂아 키우려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런 꿈을 꾸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작물로 변해 자신이 일군 밭에 서 있는 꿈 말입니다. 의인화된 동화책 속의 나무들처럼, 우리들은 슬픈 얼굴로 인간이었을 때의 일들을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점차 웃음을 잃어갔습니다. 웃을 기력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지요. 걸음걸이며 말투며가 거의 시골 아저씨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아닌게아니라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몸이 시나브로 초록빛으로 변해 어느 순간 옥수수나무로 벌떡 일어설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농활이 후회스럽거나 고통스러웠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나친 의욕과 자만심이 잦아든 것일 뿐이었습니다. 농촌과 농사라는 것의 현실을 관념이 아닌 몸으로 느껴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각오와 다짐들이 조금씩 바래가기 시작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릅니다. 필요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농촌과 농사라는 것의 실체를 깨닫는 계기였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한 일의 질과 양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바깥에서 바라보던 농촌과 농사를 안에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농활의 의미는 충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농촌에서 농민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요. 자연 속에서 작물을 키우며 삶을 연명한다는 것의 의미 말입니다. 그것은 자연과 작물과 노동과 삶이라는 개념들을 새로이 일깨우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땡볕과 땅심에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그들의 저항력에 놀랐습니다. 자칫 자연의 무서운 기운에 치여 쓰러져 그것들의 자양분으로나 소멸하고 말 수도 있는 거였습니다. 그들은 일견 깡마르고 누추해 보였지만, 한없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천 수만의 자연 개체들 속에서 독자적인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그들의 말없는 숨은 투쟁을 보았습니다.
어디 인간뿐이겠습니까. 숲과 강과 들판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이 다 그러할 거였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생태계 속에서 온몸으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버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버팀과 저항이 있음으로써 자연은 숨막히는 긴장으로 조화와 균형의 장관을 연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활동>을 했던 게 아니라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체험 한복판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도 기억하시겠지요.
우리가 말도 없이 웃음도 없이, 시골 촌부 시골 아낙처럼 지쳐 학교 숙소로 돌아오더 오후 말입니다.
“이리로들 와보세요!”
학교에 거진 도착했을 때 선생님이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학교 뒤로 난 작은 고샅에서였지요. 선생님은 어떤 나무를 올려다보고 계셨습니다. 아직 다 자라지는 않은 듯한, 아담한 나무였습니다.
“무슨 나무예요?”
우리들 중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층층나무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어째서 이름이 층층나무일까? 나무가 층층으로 자라서일까?”
나무 이름을 물었던 친구가 다시 궁금증을 내보였지만 선생님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느 한곳을 줄곧 올려다보고만 계셨지요.
그제서야 우리는 선생님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나무를 보여주러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뭇잎이었지요. 더 정확하게는 나뭇잎에 붙어 있던 곤총이었습니다.
“어머!”
한 여학생이 탄성을 질렀습니다.
층층나무 이파리에 두 마리의 노린재(선생님은 그때 그 노린재의 정확한 이름을 알려주셨지만 까먹었습니다)가 서로 꽁무니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암컷인 듯한 큰 노린재가 수컷인 듯한 작은 노린재를 꽁무니에 매단 채 이리저리 끌고 다녔지요.
짝짓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은 그 두 마리의 노린재 등 한복판에 샛노란 하트 문양이 명료하게 찍혀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도 샛노랗고 선명해서 마치 돌출해 있거나 불을 켠 듯했습니다. <ON AIR>라는 불빛이 방송중이라는 뜻이듯, 그것들의 샛노란 하트 문양은 <사랑중>임을 표시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보라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을 나누고 있는 노린재의 샛노란 하트 문양을 말입니다. 충분히 재밌고 볼 만한 거였으니까요. 정말이지 모양자를 대고 그려도 그토록 정확하고 사랑스런 문양은 그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대부분의 곤충들은 교미가 끝나자마자 산란을 해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회임기간이 그렇게 짧아요?”
한 남학생이 물었지요.
“태생이 아니라 난생이니까요. 수정만 되면 되는 거잖아요. 태생동물과 달라서 회임기간 같은 건 없어요.”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갑자기 생물시간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체육 선생님이 아니라 생물 선생님이었지요.
선생님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보이겠다는 듯, 짝짓기를 끝낸 암컷 노린재가 마침내 알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층층나무 이파리 한복판에다 좁쌀보다 작은 반투명의 녹색 알들을 낳기 시작했지요. 열과 오를 맞춘다고 하나요. 노린재는 알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나뭇잎 위에다 촘촘히 붙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을 구우면 윤기가 나면서 녹색을 띠잖아요. 꼭 그런 색깔이었고 윤기였습니다. 노린재는 그런 알을 한 30개쯤 낳았습니다. 줄을 잘 맞추어서 말이지요.
그리곤 냉큼 알들 위로 올라가 배를 깔았습니다. 알을 보호하려는 것이었겠지요. 벌레의 알이 그토록 예쁘게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알을 품은 노린재는 산고를 달래려던 것이었는지 꼼짝않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개미 한 마리를 이파리 위에다 얹으셨지요. 개미가 노린재 알을 좋아한다는 걸 선생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가봅니다. 개미가 볼 것 없이 노린재 알로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개미를 막아내는 어미 노린재의 방어술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개미는 전후좌우룰 오가며 노린재 알을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어미 노린재의 노련한 방어에 번번이 막혔습니다.
방패처럼 생긴 등으로 개미의 접근을 막아냈습니다. 그랬습니다. 노린재의 등은 영락없이 방패의 모양이었지요. 실제 방패를 1만 분의 1 정도로 축소해놓으면 노린재의 등과 똑같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의 배지도 방패 모양이었지요.
노린재의 방어는 다급해 보이지도 두려워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개미의 공격 습관을 이미 다 꿰뚫고 있는 듯했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이었달까요. 리드미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전느 거의 모든 노린재들이 어째서 방패 모양을 하고 있는 걸까를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그냥 방패 모양이 좋아서 그것을 자신의 탈로 뒤집어쓴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연히 그런 모양으로 태어났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구에겐가 “노린재들이 어째서 방패 모양을 하고 있는 줄 알아?”라고 묻고 싶어졌습니다. 상대는 분명 모를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개미의 공격으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야!”라고 말이지요.
이틀 뒤였던가. 저는 지연이라는 친구와 층층나무엘 가보았습니다. 노린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나뭇잎 위에, 자기가 낳아놓는 알들 위에 말입니다. 처음 봤을 때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틀 뒤였던가. 그때는 선생님이 우리들 모두를 데리고 그 층층나무로 갔었지요. 우리는 생물 선생님을 따라 현장학습을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무척 더운 날이었습니다.
노린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붙어 있었습니다만, 그날은 쉴새없이 날갯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1초에 2백 번 정도쯤 할 거예요. 날갯짓 말이에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2백 번이나요?”
제가 물었지요.
“알이 더워할까 봐 식혀주는 거예요. 선풍기처럼 바람을 내고 있는 거예요.”
아하,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요.
한동안 날갯짓을 하던 노린재가 날개를 접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후 다시 날갯짓을 시작했습니다.
“날개를 접을 때는 쉬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앞발을 잘 봐요. 알과 알 사이의 간격을 떼어놓고 있잖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네요.”
지연이가 말했습니다.
“공기가 잘 통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열흘 동안 줄곧 저러고 있어요. 아무것도 먹지도 않은 채, 하루에 나뭇잎을 평균 여덟 장쯤 먹어치우는 놈인데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리를 뜨지 않는 거예요.”
우리들은 또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무슨 이파를 먹고 사나요?”
남학생 하나가 초등학생 같은 목소리로 초등학생처럼 물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지요.
저는 선생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어떠셨는 줄 아세요?“ 노린재에 빨려들어가 있었어요. 초등학생 목소리 같던 남학생의 질문은 선생님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겁니다.
선생님껜 희귀한 장면도 아닐 텐데, 여름이면 자주 보는 것일텐데 어째서 넋을 잃으셨을까 싶었지요. 여쭤볼 수도 없었습니다. 워낙 선생님의 얼굴이 굳어 있었으니까요. 하여튼 선생님한텐 뭔가가 있는 것 같다니까,라고만 속으로 중얼거렸지요.
그리고 며칠 뒤 비가 내렸습니다. 대단한 비였습니다.
우리는 그날의 일정을 모두 미루고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날 지연이와 교실 복도에 서서 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정말이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았습니다. 쏟아붓는, 그런 비였지요.
“그 노린재는 잘 있을까?”
지연이가 말했습니다. 저는 글쎄, 라고만 대답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얼마간 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마침내 지연이가 복도 바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우산도 없이 말이지요.
“지연아!”
제가 불렀지만 지연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학교 뒤쪽으로 뛰어갔습니다. 지연이의 모습이 금세 우연(雨煙) 속에 갇혔습니다.
얼마 뒤 지연이는 함빡 젖어 돌아왔습니다. 옷을 입은 채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요. 무언가에 잔뜩 겁먹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래?”
제가 다그쳐 물었지요. 지연이는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죽은 것 같애, 아무래도.”
“노린재가?”
제가 되물었습니다.
지연이의 눈엔 초점이 없었습니다. 더이상 말을 못하고, 제 질문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폭우 속을 뚫고 나갔지요. 노린재가 있는 층층나무에 다다랐습니다. 노린재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알 위에 배를 깔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굵은 빗방울들이 쉴새없이 층층나무 이파리 위에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파리들은 그네처럼 흔들렸습니다. 출렁거리는 이파리 위에 노린재는 죽은 듯 붙어 있었습니다.
빗방울이 노린재의 등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러나 노린재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요. 지연이의 말마따나 죽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뭐랄까요. 죽은 것에서만 감지될 수 있는 섬뜩한 기운이 노린재에게서 느껴졌습니다.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다른 거잖아요. 모양은 같지만 느낌은 완전히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였습니다, 그날 제가 느낀 것도 그런 거였습니다. 아주 작은 곤충에서, 그것도 딱딱한 각질뿐인 외양에서 그런 것이 완연하게 느껴졌다는 게 놀랍고도 무서웠습니다. 등 한복판의 하트 문양도 색깔이 한껏 바래 있었습니다. 머리에 묻어 있는 커다란 빗방울 때문에 노린재의 눈과 더듬이와 이마가 괴상하게 확대되어 보였습니다.
이튿날 다시 햇볕이 내리쪼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모시고 층층나무로 갔지요. 지연이는 차마 못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노린재는 살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날갯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어젠 꼭 죽은 것만 같았어요. 정말이에요.”
제가 말했습니다.
“사력을 다한 거겠지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던 걸까요?”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 사나운 비까지 내렸으니까요.”
“노린재는 말할 것도 없고 알도 이미 다 완전히 젖어 있었는걸요. 그런데도 왜 미련하게 그 비를 다 맞고 있었을까. 개미라면 모를까 비는 막을 수 없었는데도....”
“비를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노린재한테 중요한 게 아니었을 거예요. 어쨌든 막아야 한다는 일념이 중요했던 거겠죠.”
저는 지연이한테 달려가 노린재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꼭 열흘 째 되던 날 알이 부화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경건하게 노린재의 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진딧물처럼 작고 푸른 노린재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크기나 모습이나 징그러워서 바라볼 수 없을 지경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노린재 새끼들의 탄생을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숲에 사는 모든 생물들이 그렇게 태어나고 살아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무서워했던 송충이도 벌도 그럴 것이었습니다. 어느것 하나 사소한 것이 없었습니다.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눈을 들어 산을 한바퀴 휘둘러 보았지요. 그 숲속에 살고 있을 모든 생명들한테 맘속으로 절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갑자기 더 크고 더 충만해졌습니다.
그날 저녁이었을 겁니다. 저는 선생님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은, <그 무언가>가 무언지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습니다.
5학년 담임이셨던 박 선생님이란 분이 선생님에 대해 짧게 얘기해주셨었거든요. 박 선생님은 선생님을 참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검정고시로 패스한 분이라고 박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태안반도 끝 어디 죽도라는 곳에서 선생님이 태어나셨을 때 선생님의 아버지께서는 이미 몇 달 전에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그만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셨다지요. 그나마 선생님의 어머니마저 선생님이 갓난애였을 때 그만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들을습니다.
선생님은 말하자면 고아셨던 셈입니다. 선생님은 육지의 아동보호시설로 옮겨져 열세 살까지 자라셨고, 그 뒤론 혼자 삶을 해결해야 했으며 대학에 다닐 때도 내내 고학을 하셨다고요.
선생님은 혼자셨던 겁니다.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줄곧 그러셨던 겁니다. 부모와 친척 없이 혼자 생존해오신 긴 세월의 회한들이 뭔가에 열중하시거나 몰입하실 때 문득문득 드러났던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이 꼭 맞을 리는 없겠습니다만 저는 하여튼 선생님의 눈빛에 언뜻언뜻 비치던 어둡고 깊은 그늘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나이도 많지 않은 사람이 어째서 도무지 요즘 젊은이 같지 않느냐에 대한 박 선생님 나름대로의 해석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나이가 스물아홉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선생님은 많이 달랐습니다. 앞서지 않으면서도 할 일을 다하셨고, 힘들고 아니고를 떠나 선생님은 모든 일을 내 일처럼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냥 할 만큼만 하는 게 아니었지요. 오랜 세월 온몸으로 외로운 삶과 부닥쳐온 분답게 선생님은 어떤 일에건 방법과 요령을 터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고장난 농기구와 수도 파이프는 물론이고, 얼른 걷지 못하는 갓난 송아지라든가 암내 난 돼지도 선생님의 손길만 닿으면 금방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박 선생님도 그러셨다지만 우리들도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었던 일이 있었지요. 저 때문에 벌어진 소동이었습니다. 농활 마지막 일정을 하루 앞둔 날 저녁이었습니다. 다음날이면 모두 서울로 돌아와 해단식을 가질 참이었지요.
그날 오후 학교 뒷산에 모두 올랐던 것 선생님도 기억하시지요. 정상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저는 멀쩡했었습니다. 정상에 올라 그동안 우리들이 헤매고 다녔던(농사일을 거든다고 다닌 일입니다만 지금 생각하니까 헤매고 다닌 것만 같습니다) 논과 밭과 들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을 곧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색다른 감회가 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스치며 보는 그렇고 그런 시골풍경과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주일 남짓 우리들의 땀과 한숨과 다짐들을 심은 곳이었습니다. 풍경에 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였던 건지도 모르지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든 풍경과 작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습니다. 그러니 한평생 함께하던 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지난 세월의 이농민의 맘은 어땠을까요.
잠깐 감상에 젖었던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만 저는 조금씩 속이 거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참을만은 했습니다. 제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 선생님은 걱정을 하셨지요. 산을 내려올 동안 선생님은 끝까지 제 곁에서 저를 부축해주셨습니다.
오를 때보다 내여올 때가 훨씬 힘들었습니다. 그만큼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었나 봅니다. 산 아래 보이는 학교가 천리 만리 밖처럼 아득했습니다.
배를 움켜쥔 채 가까스로 학교에 당도했습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자리에 누웠지요.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나아졌습니다.
두 시간 정도 매미 소리를 들으며 저는 그렇게 누워 있었던가 봅니다. 일어서서 조금씩 걷기 시작했지요. 기운이 없긴 했지만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는 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힘이 들었던 모양이라고 동료들이 말했습니다. 어쩌면 더위를 먹은 건지도 모른다고 했지요.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건 아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워낙 입이 짧은 편이라 음식을 적게 먹었다고 해서 탈이 날 몸은 아니었습니다.
많이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꼭 그래서였던 건 아니겠습니다만 저는 그날 아픈 사람답지 않게 저녁을 꽤 먹었던가 봅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닌게아니라 허기가 졌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간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다 보니 이제 저도 농촌사람들의 식성을 닮아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지요. 그게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결정적으로 탈을 불러왔습니다. 저녁을 먹자마자 반시간도 안되어 저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지요.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몸이 아프다기보단, 뭐랄까요, 아,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가 보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겁이 나고 무서웠습니다. 물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요. 저는 교실 마룻바닥을 개처럼 기어야 할 만큼 무서운 통증을 느꼈습니다. 머리도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악 소리 한번 제대로 낼 수가 없었지요. 그런 걸 관격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만 어쨌든 저는 마룻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사람이 죽어가니까 동료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뭔가를 몸으로부터 세차게 토하고 배설해버리고 싶었지만 몸은 앞뒤가 꽉꽉 막힌 자루처럼 답답했습니다. 정말이지 누군가가 당장 총을 빵 쏴서 나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죽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달려왔습니다. 누군가가 급히 선생님을 모셔온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해결사였으니까요.
“저 얼굴 좀 봐요. 종잇장 같애!”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자꾸 얼굴이 파래져요. 숨이 넘어갈 것 같애요!”
또다른 누군가가 울먹였습니다.
저는 그 와중에서도 선생님이 도착했다는 사실에 얼마간 더 용기를 낼 수 있었지요. 선생님이 왔으니 이제 금방 나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마술사이셨으니까요. 선생님의 손길이 한번 스치기만 하면 무엇이든 정상으로 되돌아가곤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선생님은 그날 제게 실망만 안겨주었습니다. 선생님은 허둥지둥 제 배만 연거푸 쓰다듬었습니다. 도무지 선생님 같지 않으셨지요. 서두르고 허둥대는 꼴이 그랬습니다. 죽어 넘어가는 제 앞에서 선생님이 보인 절망적이 눈빛이라니, 아무런 방법도 요령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라니.
물론 선생님은 의사 선생님이 아니셨습니다. 체육을 잘하고 노린재의 생태를 잘 알고 수도꼭지나 농기구를 잘 고치는 분이었을망정 의사 선생님은 아니셨던 겁니다.
제가 선생님께 기대했던 것도 병의 치료 따위는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선생님이라면 저를 안심시키거나, 사태를 수습할 다른 방법을 갖고 계실 거라고 믿었을 뿐입니다. 선생님의 침착함 말입니다. 용의주도함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은 어땠는 줄 아십니까. 오히려 아픈 저보다 더 안절부절못하셨습니다. 팔을 이리저리 주무르고 무작정 배를 쓰다듬는 것뿐이었습니다. 아픈 제가 외러 선생님을 보고 불안해할 정도였으니까요. 평소와 같은 모습만 보여주셨더라면 선생님의 처방이 비록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하더라도 저는 많이 안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날 선생님의 모습은 체육 선생님의 처방이 적절한 거였더라도 믿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겁만 많고 요령부득한 사람의 전형적인 수선과 분망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제 배를 쓰다듬으면 쓰다듬을수록 오히려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이 사람이 날 죽이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저는 그때 고통으로 혼란스러웠고 두려웠습니다. 누군가가 선생님을 말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마침내 남학생 하나가 외쳤습니다.
“어디에 연락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대론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그러자 선생님이 바보같이 더듬은 말로 말했습니다.
“그, 그래야 하, 할 것 같아요.”
“어디로 해야 하죠? 읍내 의원이라도 연락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누구 근방에 차 가진 사람을 부르든지요.”
“그,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은 여전히, 바보처럼, 그 말 뿐이었지요.
“읍내 의원 전화번호 아세요? 선생님! 읍내 의원 전화번호를 아시냐고요?”
저도 저였지만 의원에 실려가면 선생님부터 어딘가를 고쳐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선생님은 정상이 아니셨던 거지요.
“이, 이장님한테 우선 연락하세요. 그분이 연락처를 다 알아요.”
선생님은 그제서야 가까스로 이장님을 떠올리는 것 같았습니다.
남학생이 달려나갔고, 얼마 뒤 이장님이 황급히 뛰어오셨습니다. 이장님이 달려오는 데 얼마만큼 시간이 걸렸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거의 혼절해 있었으니까요.
이장님은 제 상태를 보시더니 선생님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이 지경이 되도록 말예요!”
분명 그건 꾸짖는 말씀이셨습니다. 선생님을 꾸짖고 계셨던 겁니다.
“의, 의원에 연락은.”
선생님이 이장님한테 물었습니다.
“의원이나마나, 이러다간 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숨이 넘어가겠잖아요!”
이장님은 선생님을 사납게 밀쳐내셨습니다. 그리고 제 팔과 다리를 한차례 빠르게 주무른 뒤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 그리고 엄지와 검지발가락 사이를 세차게 눌렀습니다. 일종의 지압같은 거였던 모양인데 그때 저는 처음으로 악 소리를 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느끼고 있던 아픔의 백만 배도 넘는 일시적 통증이 몸을 강타했습니다. 아주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이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혼절했지요.
그러나 혼절한 게 아니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난 뒤 1분쯤 지나자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숨통이 틔었습니다. 살 것 같았습니다. 단 1분 만에 그토록 달라지다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몸에 비로소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숨소리를 제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크고 단단한 얼음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었거든요.
1분 만에 소생한 것이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그런 놀라움도 잠시, 정신을 차린 저는 선생님이 점점 미워졌습니다. 1분이면 간단히 회복될 수 있는 것을 선생님은 저를 10여 분 동안이나 사경을 헤매게 했으니까요. 10여 분이긴 했지만 저에겐 평생보다 긴 시간이었습니다. 평생이 뭡니까. 아무래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억겁의 세월 같은 거였지요. 1분이면 해결될 거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10여 분 사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 쓸데없었던 10여 분이 너무도 아깝고 분했던 것입니다.
공연히 선생님을 미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분명 이장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가 겨우 한숨을 돌리고 고른 숨을 쉬며 늘어져 있을 때 이장님은 선생님께 말씀하셨습니다. 들릴 듯 말 듯한 말이었지만 분명 나무라는 투의 음성이었습니다.
“알고 있었으면서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둔단 말이오 그래? 지난해 강 선생도 오늘처럼 똑같이 내가 사관을 터서 살려낸 적이 있었잖아요. 그걸 설마 벌써 까먹진 않았을 텐데, 쯧쯧....”
<사관을 튼다>말이 손가락 사이와 발가락 사이를 누른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도 이장님의 <사관>으로 살아났던 적이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애꿎은 제 배만 중뿔나게 문지르고 계셨던 거지요.
그러니 제가 어찌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의 그 요령부득한 처방 때문에 그때 제가 입고 있던 니트엔 보푸라기만 무성하게 일었었습니다. 그 보푸라기들을 볼 때마다 선생님에 대한 실망과 원망이 새삼 새록새록 솟구쳤습니다. 선생님은 스스로 선생님의 인상을 망쳐버렸던 거지요,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스스로를 그렇게 만든 선생님이 딱하고 못나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선생님께 전 그걸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애당초 선생님을 잘못 보아왔던 건 아닐지. 그걸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교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디론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던 것이지요. 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눈길로만 선생님을 찾아보았습니다. 선생님은 교무실에도 운동장에도 없었습니다. 아침이면 늘 싸리비를 들고 계셨던 칸나꽃 피어 있던 계단에도 없었습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막 깔리기 시작할 즈음 전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층층나무 밑에 앉아 계셨습니다. 꽤나 쓸쓸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선생님은 무성한 잡초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몇 미터 앞쯤인가에 시선을 던져놓고 계셨습니다. 제가 나타난 걸 아셨으면서도 선생님은 고개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였죠?”
전 그렇게 짧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묻는지 선생님도 잘 아실 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거였지요. 긴 설명이 필요 없었기도 했지만 일부러 짧게 물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질문에 제 맘이 묻어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선생님을 잘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 화가 나 있는 게 사실이다, 라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풀대궁을 뽑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지요.
날은 빠르게 어두워져 갔습니다. 선생님 어개 뒤의 하늘이 군청색으로 물들고 있었지요. 그 군청색 하늘 아래, 그날 오후 우리가 올랐던 산이 검게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해결사셨잖아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계셨다니요?”
제 말엔 여전히 서운함이, 역력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밤쓰르라미가 울기 시작했지요. 선생님은 처음 모습 그래도 발 앞 몇 미터쯤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알고 계셨다면서요?”
제가 한걸음 더 선생님 앞으로 다가셨습니다. 선생님의 얼굴 윤곽이 금방 어둠에 묻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말없이 풀대궁을 만지작거렸습니다. 풀대궁을 만지던 그 손은, 요령부득으로 제 배만 쓸어대던, 그래서 옷에 온통 보푸라기만 일으켜놓았던 손이었습니다. 그 손이 그때처럼 미운 적도 없었습니다.
“선생님도 그걸로 살아났었다면서요?”
제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분명히 선생님을 추궁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왜 그런 투로 선생님을 대했던 건지 선생님도 그때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건... 사실, 위험한 거였어요.”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워험한 거였다고요?”
저는 즉각 되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둠 속에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곤 아무 말슴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지요.
“어떻게 금방, 거짓말같이 멀쩡하게 나았잖아요. 뭐가 위험하다는 거죠?”
선생님은 여전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무슨 대답인가를 준비하고 계시는 듯했습니다. 저는 그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어둠은 더욱 짙어졌고, 밤쓰르라미 소리도 더 커졌습니다. 조금 있으면 달이 떠오를 참이었습니다. 저는 곧 달이 떠오를 검은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어머니가... 그걸로 돌아가셨거든요.”
저는 선생님의 말슴을 듣고 있었습니다.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만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얼른 말을 잇지 않으셨습니다. 다음 말이 나오려면 얼마간의 <간격>이 필요한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간격을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얼마 뒤 선생님이 말씀하셧습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일곱 살에야 알게 되었지요. 그 사관이라는 거.... 기가 충돌해서 죽을 수도 있는 거랍니다.”
이제 선생님이 말씀하시고 저는 말없이 듣는 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많은 간격들이 필요한 거라고 저는 생각했지요. 그래서 선생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수많은 <간격>들이 흘러갔습니다. 간격들만 흘러갔습니다.
하기야 더 무슨 말이 필요했겠습니까. 제가 선생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으면 그만이었겠지요. 그 사관이라는 것. 민간에 유전되는 지압처방법이라는 것. 그것은 어쩌면 선생님 말마따나 위험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에서나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극약처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오히려 그분의 처방이 그동안 줄곧 효과를 봐왔기 때문에 그 사관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를 미처 모르고 계셨던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선생님이 잘못 알고 계신 건지도 몰랐습니다. 사관이란 것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민간에서는 예전부터 흔히 쓰여지던 처방이었을 뿐인데, 선생님의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짓이었기 때문에 선생님한테만 그게 유달리 위험천만한 일로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말이지요.
어찌 되었든, 선생님이 제 앞에서 쩔쩔맸던 이유는 밝혀진 셈이었습니다. 선생님답지 않게 허둥대고 분망했던 이유가 밝혀진 셈ㅇ이었습니다. 저라도 그랬겠지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처방을 어떻게 쓸 수 있었겠습니까. 선생님께 잠시나마 실망했던 제가 속이 좁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는 궁금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선생님은 그 처방을 받아들이셨던 거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따지러 물었던 게 아닙니다. 정말이지 궁금했습니다.
선생님은 침묵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검은 산등성이 위쪽이 환해졌습니다. 달이 떠오르려는 모양이었습니다.
“작년엔가 이장님이 선생님을 그걸로 살려내셨다면서요?”
선생님은 손에 들고 계시던 풀대궁을 입에 무셨습니다. 여전히 아무 말씀 없이 말입니다.
“사관이라는 것. 선생님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처방이잖아요. 실제로 어머니께서도 그걸로 돌아가셨고요. 그러면 거부했었어야죠.”
혹시, 선생님도 그때 저처럼 누군가가 당장 총으로 빵 쏘아 죽여주었으면 싶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전 그때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를 죽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도 그걸 알고 있었지요. 만약 누군가가 내 이마에 총을 들이대고 쏘려 했다면 아니라고, 농담이었다며 살려달라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받아들이셨습니다. 선생님께 사관이라는 것은 총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여쭐 수밖에요. 어째서 선생님은 죽음과도 같은 사관을 받아들이셨을까.
마침내 둥근 달이 검은 산 위로 떠올랐습니다. 달이 뜨자 산은 더욱 검어졌고, 선생님의 모습과 선생님이 기대고 계셨던 층층나무도 더 까맣게 변했습니다.
학교 쪽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지막 밤이였습니다. 운동장에 이장님이며 선생님들이 작별의 밤을 위해 모여 있을 터였습니다. 주민들과 아이들, 그리고 농민 후계자들도 석유 묻힌 장작더미 주변에 모여 있을 것이었습니다.
“먼저 가봐요. 곧 따라갈테니.”
어둠 속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끝내 대답이 없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 쪽으로 두어 걸음 발을 떼어놓았을 때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쓸쓸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저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 난 줄곧 언제든 내 인생에서 퇴장하고픈 고달픔과 허망함에 시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는 건 내게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쪽에서 누군가가 또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선생님은 어두운 허공에 대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내 말 잘 이해가 안될 거예요.”
저는 그날 선생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캠프파이어에 둘러앉아 작별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날이 밝으면 멀리 더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 마지막 정을 나누노라니... 아니, 이 노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올드 랭 사인’이었을 겁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 간들 잊으리요......
타오르는 불빛이 어둠을 핥았습니다. 선생님도 어느샌가 그 어둠 한켠에 서 계셨지요. 불빛에 반사된 선생님의 주황빛 얼굴이 어둠 속에서 얼핏얼핏 드러났습니다.
선생님의 그 모습을 저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습니다.
3
선생님은 그곳에 계시긴 계셨습니다
하지만 쉽게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용동초등학교. 학 학년에 한 학급씩뿐이었고, 한 학급에 학생 수가 열 명 남짓이었던 학교. 그 학교는 폐교되어 있었습니다. 운동장엔 무릎을 넘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교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요. 방학중이라서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차가 막 교문을 들어섰을 때 저절로 시동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오래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습니다. 빈집이었습니다. 사람의 기척과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빈 교사였습니다.
시동이 꺼진 제 차는 몇 년 전부터 그 자리에 버려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다시는 시동이 걸릴 것 같지 않았지요.
사각형 철제 구령대의 네 다리도 잡초에 묻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침마다 싸리비로 쓰시던 돌계단. 그 위에는 몇 년째 내려 쌓였을 마른 잎들이 나뒹굴었습니다.
계단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교무실 출입문과 연결되어 있었지요.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교무실 출입문을 선생님은 드나드셨더랬습니다. 그 교무실 문은 바람이 그랬는지,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뻥 뚫린 직사각형 너머로 깊은 어둠이 고여 있었습니다. 한쪽 문짝을 잃은 건물은 마치 한쪽 눈을 잃고 숨을 거둔 주검과도 같았지요.
극성을 부리고 있었던 것은 한낮의 쓰르라미 소리뿐이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쓰르라미 소리로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귀가 아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그 소리는 오히려 폐쇄된 교사에 적막감만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곳에 선생님은 계시지 않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읍내거나, 아니면 더 큰 도시 어딘가로 전근을 가셨겠다고 생각했지요.
하기야 뭐, 선생님을 꼭 만나야겠다는 건 당초부터 아니었습니다. 저를 그곳으로 이끈 것은 선생님이었다기보단 막연한 불안감과, 그것으로 인한 역시 막연한 충동 정도였으니까요. 차를 몰고 그곳으로 가고자 했고, 갔다는 것, 그것이 그날의 외출이었던 것뿐입니다.
저는 천천히 학교를 돌아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쌀을 씻고 설거지를 하던 수돗가엔 물이 말라 있었습니다. 철봉과 시소와 미끄럼틀은 녹슬어 있었지요. 부풀다 굳은 유성페인트 사이사이로 벌건 녹이 흘러내렸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그 학교 출신의 졸업생인 것만 같았습니다. 계단과 교사의 외벽과 화장실 문턱들이 묘한 감회를 부추겼습니다. 잡초들로 묵정밭이 되어버린 칸나 화단이 서글펐습니다. 백엽상은 절름발이처럼 다리 한쪽이 주저앉았고, 풍향풍속계의 철심도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복도문엔 녹슨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 뒤편으로 돌아가 복도 창문을 통해 안쪽을 들여다보았지요. 세월의 때로 탁해진 유리창 너머로 복도 안의 풍경이 보였습니다. 제가 배를 안고 뒹굴던 교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복도 벽에는 그때까지도 몇 개의 포스터며 표어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 반 소개>라는 매직팬 글씨 위에 붙은 사진. 그 사진 속에서 아이들은 길게는 10수 년이 되었을 웃음들을 여전히 천진스레 웃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고 또, 마지막날 저녁 선생님께서 잠시 앉아 계시던, 층층나무에도 가보았습니다. 층층나무까지 나 있던 좁다란 길은 잡초에 완전히 덮여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의 세월을 의식하고 있었던 탓인지 층층나무는 조금 더 큰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모양은 그때 모습 그대로였지요. 저는 무척 반가웠습니다. 층층나무는 그저 지나는 바람에 무심히 나뭇잎을 흔들었을 뿐입니다. 초저녁달이 떠오르던 하늘도 그날의 하늘이었고 능선도 그날의 능선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심하기는 층층나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운동장에 차를 세워둔 채 저는 교문 밖까지 천천히 걸어나갔습니다. 차를 몰고 다시 그곳을 훌쩍 떠나버리기가 뭣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음료수라도 마시며 그늘에라도 얼마간 앉아 있고 싶었습니다.
교문 밖에 문방구가 있었다는 걸 저는 기억해냈던 거지요. 문방구라기보단 그저 작은 잡화점이었습니다. 색종이와 크레파스도 팔았지만 막걸리와 북어포도 팔았던.
가게는 8년 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작고 허름해진 것 같았습니다. 하기야 가게뿐만 아니었지요. 제가 본 것들은 거의가 그랬습니다. 학교 앞에 서 있던 소나무도 그랬고, 길가의 농가들도 그랬고, 개울 건너 교회당의 첨탑도 그랬습니다. 어쩌면 폐교가 되어버린 쓸쓸한 학교와 이제는 없는 선생님의 자취 때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 어떤 것도 저의 방문에 특별한 반응들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낮은 추녀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습니다. 한여름 한낮이었지만 가게 안은 어둠과 냉기로 가득했습니다. 색종이나 크레파스 같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척을 내고 서성이다 주인을 불렀지요.
“계세요?”
부르고 나서도 한참을 더 서성거려야 했습니다. 키가 작은 아주머니 한 분이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나왔습니다. 저는 캔사이다 하나를 달라며 물었습니다.
“언제 학교가 폐교됐나요?”
제 얼굴에서 오래 전에 그곳을 떠난 어떤 가족의 인상을 찾아내려는 듯한 눈길이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곤 얼른 대답해야 했습니다. 어째서 학교에 대해 묻는지를 말입니다. 아주머니는 그걸 궁금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몇 년 전에... 8년 전에 이곳에 내려와 봉사활동을 했었거든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그때 대학생들?”
이번엔 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습니다.
“기억하세요?”
“기억하다마다요. 대학생들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걸요.”
“그 뒤론 이곳에 내려왔던 대학생들이 없었나요?”
“폐교가 돼서 그런지 어쩐지는 몰라도 없었에요.”
“오래됐나요. 폐교된 지는?”
제가 물었습니다.
“폐교된 지는 한 4년 됐어요. 몇 명 있던 애들은 읍내 학교로 버스 타고 다녀요.”
“아, 예.....”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었습니다. 묻자면 많을 수도 있었겠지만 김친가를 담그다 나온 아주머니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들도 다 전근을 가셨겠네요?”
아주머니도 안으로 들어가려다 대답했습니다.
“아마 반은 읍내로 가고 반은 논산으로 갔다지요?”
“강 선생님은 그럼 어디로....”
“그 선생님 찾아온 거예요?”
되묻는 아주머니의 낯빛이 방금 전과 달랐습니다. 분명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주머니는 대답을 망설였습니다. 이미 다 마른 손을 앞치마에 다시 문지르는 모양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한동안 멍하니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얘긴가를 하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끝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게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아주머니는 서둘러(분명 서두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안쪽으로 사라졌습니다.
무얼까... 저는 바깥으로 나와서도 얼른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사이다캔을 따는 것을 한참 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의 석연찮았던 낯빛이 저를 오래도록 그곳에서 못 떠나게 했습니다. 저는 눈을 돌려 학교를 바라보았습니다. 재차는 학교 운동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 앞 소나무 그늘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곳에 잠시 걸음을 쉬고 있는 아저씨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 사이다를 드렸지요. 그리고 제가 누구며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를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아저씨도 아주머니처럼 저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8년 전에 학생들이 내려왔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얘기 끝에,
“강 선생님도 논산 쪽으로 가셨나 보죠?”
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저씨는 마시던 사이다를 약간 흘리셨습니다. 가겟집 아주머니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낯빛이었습니다. 저를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사이다캔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마을 주민 모두에게 물어도 다 똑같은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아주머니나 아저씨나, 그런 질문이라면 별로 대답해줄 말이 없다, 그런 표정이었으니까요. 대답을 피하는 것 같았다는 말입니다. 공연한 오해에 휘말리기 싫다는.
왜일까.... 저는 아저씨에게 더 묻고 싶었지만 아저씨는 가겟집 아주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늘을 떠나면서 아저씨가 말햇지요.
“그 선생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제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어디에 계신단 말입니까?”
“글쎄요. 이장님은 아실까....”
아저씨는 땡볕 속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그분을 따라가 본댔자 더 이상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분이 뚫고 가는 햇볕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제 눈이 하얗게 타버릴 것 같았습니다.
*
아, 복통!
저를 소개하자 이장님은 박수를 칠 듯이 기뻐하셨습니다. 이장님은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대신 복통으로 죽다 살아난 여학생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리셨습니다.
“예, 제가 바로 그 복통이에요.”
아무래도 복통으로 통하는 게 빨랐습니다. 이장님은 제 두 손을 꼭 잡아주시며 반기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신 분이었는데 이장님은 마치 제가 당신의 은인인양 반기셨습니다.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이장님은 물으셨습니다.
“지나다 들렀어요. 그때 생각도 나고 해서요.”
“복통 말이지?”
이장님은 유쾌하게 물으셨습니다.
“예....”
저는 이장님에게 선생님의 안부부터 물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장님의 반가운 웃음을 빼앗을 순 없었던 겁니다. 그분의 웃음을 살려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다 들렀다고 말씀드렸던 거지요. 물론 가겟집 아주머니나 소나무 그늘에서 만났던 분의 얘기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이장님은 개구리참외를 손수 깎아 저한테 주시면서 말했습니다.
“이게 원래 무슨 참왼 줄 아는감?”
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원래 이게 말이야. 개똥참외거든.”
“개똥에서 자라는 거였나요?”
“뭐 꼭 그렇진 않지만, 뒤꼍이나 밭두렁 자투리땅 같은 데서 저절로 자라던 것이었어. 가꾸거나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랐지. 아무렇게나 내버려둬도 잘 자란다고 해서 개똥참외였겠지. 사람들은 얼룩덜룩하고 속이 뻘건 이런 개똥참외보다는 샛노랗고 속도 하얀 참외를 좋아했던 거야. 그래서 이게 개똥참왼데, 요즘은 이게 더 비싸. 요즘 사람들은 취향이 별나서 꽁보리밥이니 개똥참외니 하는 걸 더 좋아해. 이제들 배가 부르니깐 희한한 걸 재미삼아 먹는 모양이야. 허기야 나도 먹어보니깐 꽁보리밥도 맛있고 개똥참외도 맛있더구만, 핫핫핫...”
저는 이장님과 윤기나는 툇마루 위에 앉아 개똥참외를 먹었습니다. 이장님의 모시적삼이 썩 어울렸지요. 저는 이장님의 웃음이 잦아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제 질문이 이장님의 웃음을 타고 자연스럽게 스며들길 바랐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저는 가겟집 아주머니나 소나무 그늘의 아저씨와 같은 표정을 이장님한테서가지 뵙고 싶진 않았걷느요.
“이리로 오기 전에 학교엘 먼저 들렀었는데요. 제가 복통을 앓던 그 교실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쳐요, 그때 이장님이 아니셨더라면 전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저는 활짝 웃었습니다.
“내가 이 손으로 살려낸 사람 목숨만도 스물은 넘어. 마법의 손이지, 허허허....”
이장님은 천성이 쾌활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 결혼은 했구?”
이장님이 물었습니다.
“그럼요. 벌써 서른하나인걸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하,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러면 애들은?”
“애는... 아직.”
“없는 건가, 아니면 아직 안 낳은 건가?”
“.... 없는 거예요.”
“저런....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아직 나이가 있는 걸 뭐. 늦게 나오는 놈이 큰일을 한다네. 큰일 준비하느라 채비가 더딘 모양이지. 허허허....”
“그때 강 선생님이란 분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이장님의 웃음이 채 멈추기 전에 제가 얼른 물었습니다.
“강 선생?”
이장님이 되물으셨지요.
“예, 총각 선생님 한 분 계셨잖아요.”
“보자... 강 선생이라, 강 선생이라....”
이장님은 실눈을 뜨고 먼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입속으론 강 선생이라,를 되뇌이셨지요. 강 선생이란 분을 새삼 떠올리느라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강 선생님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그걸 궁리하고 계시는 거라는 걸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치미를 떼고 태연하게 개똥참외를 포크로 찍어 베어 물었지요.
“강 선생 말야. 그 사람 죽었어.”
이장님의 대답은 의외로 빠르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장님은 어느새 씁쓸한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저는 많이 놀라긴 했지만 아, 예, 그랬군요, 라고만 반응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죽음이라는 건 사실 누구에게나 놀랄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알던 분이었으니까 그 놀라움이 더욱 컸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긴 해도 선생님의 죽음은 저와 실질적인 관련이 없었습니다. 놀라긴 했어도 무턱대고 소스라칠 만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그건 순간이었을 뿐입니다.
“안됐어. 젊은 나이에...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이장님이 혀를 찼습니다.
“언제, 왜 그리 되셨나요?”
제가 물었습니다.
“벌써 그게... 가만있자. 6년 전 일이지 마아. 7월이었는데. 가만있어 봐라. 어? 그러고 보니까 오늘이 바로 그 사람이 죽은 날이네. 오늘이 7월 22일 맞지?... 저런.”
저는 무언가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7월 22일. 해마다 계속되던 막연한 불안감. 충동적인 외출. 그리고 기일에 맞춘 방문. 소름이 끼쳤습니다. 제가 그곳에 갔던 것은 우연이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벌서 오래 전부터 여름이면 선생님은 저를 부르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6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선생님을 찾게 된 것이지요.
그렇담 저는 어째서 그곳에 가게 된 것이었을까요. 아니, 선생님은 어째서 절 그곳을로 불러내리셨던 걸까요. 무언가의 필요에 의해 제가 그곳에 갔고 선생님이 절르 부르신 거라면, 과연 그 무언가가 무엇이었까요.
저는 손이 떨려 더 이상 포크를 쥐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 기일을 영 잊을 뻔했구만..... 그 사람 생시엔 통 그러지 않더니 죽고 나니까 제 몫을 챙기고 싶어하는 모양이네... 그러니 학생을 보내 제삿날을 기억기킨 게야.... 허허 참.”
한동안 툇마루 위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장님은 묵념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계셨습니다. 또 그 쓰르라미 소리가 마당 안까지 밀려왔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학교는 폐교됐고, 마을을 떠날 분들은 떠났고, 그리고 선생님, 강 선생님은 돌아가신 거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기일에 맞추어 그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아니, 선생님이 저를 불러내리신 거였습니다. 분명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언제, 왜 돌아가시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잖습니까.
제가 그곳을 왜 찾았는지, 선생님이 어째서 저를 불러내리셨는지, 그건 선생님만 아실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고, 이장님의 말슴으로나마 선생님의 유고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장님께 물을 수는 없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어째서 이곳에 왔으며, 하필 그날이 선생님의 기일이었는지를요.
이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학생이 강 선생의 기일에 딱 맞추어 온 걸 보니까 예사로운 일 같지는 낳구만. 예사로운 일 같지는 않어. 하지만 어떡하나. 묘지를 알면 개똥참외라도 갖다 놓고 간단한 제라도 올리련만.....”
“묘지를 어디다 쓰셨는데요?”
제가 여쭈었습니다.
“여게다 썼지. 저기 학교 뒷산에다 말이야.”
“그런데 알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저는 이장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경황중에 묻은 데다, 사람들은 모두 그날 사고를 떠올리기 싫어했어. 폐교되기 전까지는 박 선생이란 사람이 줄곧 묘지의 풀을 깎아주곤 했었지만 그 사람마저 이곳을 뜬 뒤론 아무도 돌보질 못했지. 그곳은 또 입산금지 구역으로 지정돼서 이제 너무 우거졌어. 얼마 전에도 근처를 지나다가 보았는데 도무지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더군. 그래. 너무 오랫동안 사람이 찾질 않았어. 그랬으니 제 기일을 좀 기억해달라고 학생을 내려보낸 건지도 모르지. 하필 왜 학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저는 또 한번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장님 말마따나 그게 하필이면 저였을까요.
“그, 박 선생님이란 분은 그러면 강 선생님의 무덤을 기억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물었습니다.
“글세,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마지막까지 무덤을 돌본 것은 그 사람이었으니까....”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논산으로 갔어. 그곳 어느 초등학교에 있다더만.”
“논산이라면 여기서 얼마나 걸리나요?”
"뭐, 차로 한 시간 반쯤 걸리겠지만... 왜? 거길 가보려구?“
저는 얼른 대답을 못했습니다. 제가 논산으로 가기보단 박 선생님이 오실 수만 있다면 오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선생님의 기일이었고, 선생님의 묘가 그곳 용동마을에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박 선생님이라면 오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혹시 박 선생님의 연락처라도...”
“전화번호 같은 건 모르고... 그 사람이 근무한다는 학교 이름은 알지. 왜? 연락해보려구?”
저는 또 얼른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어려울 거야. 당최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다니요?”
“특히 그 사고와 관련한 일이면 더 그러지. 맘고생이 많았던 사람이야. 물론 지금도 그 악몽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겠지만 말일세.”
“악몽....”
저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연락을 해도 만나거나 어떤 얘기를 들을 수는 없을걸세. 학생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그때 그 일들을 다시 환기시키고 얘기하고 해야 할 텐데 만나주겠나?”
“악몽이라면 어떤 겁니까. 제가 알면 안되는 일인가요?”
제가 물었습니다.
“뭐 안될 건 없지. 어차피 알 만한 사람에갠 다 알려진 사실이니까. 다만 박 선생뿐만 아니라 이 용동마을 사람들은 그 얘기를 꺼린다는 거야. 일이 그렇게 됐어. 하여튼 우리끼리도 이젠 쉬쉬하는 일이 되어버렸는데 타관 사람에게 굳이 그런 말들을 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그렇지 않은가? 지나는 사람에게 재미삼아 할 말들은 아닌 셈이지. 학생도 이렇게 들러가는 사람일 뿐이잖은가?”
그렇긴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내려간 사람이었습니다. 이장님껜 그렇게 말슴드리진 않았으나 전 분명 선생님의 부름을 받았던 겁니다. 수년 전부터 있어왔던 여름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 7월 22일.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장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강 선생님이 저를 보내 기일을 기억시킨 거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도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걸요. 그러니 강 선생님의 묘라도 찾아봬야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강 선생님의 묘는 박 선생님이란 분만 알고 계신 거예요. 어쨌든 연락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박 선생님이 정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면 말로라도 강 선생님의 묘소 위치쯤은 가르쳐줄 수 있지 않을까요?”
“글세....”
이장님은 고개를 갸웃거리실 뿐이었습니다.
“박 선생님이란 분이 강 선생님의 묘소를 돌봤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위치쯤은 가르쳐주시겠지요.”
“그게 말이야....”
이장님이 제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곤 말씀하셨습니다.
“박선생이 강 선생의 묘지를 돌본 까닭은... 죄의식이랄까, 하여튼 가책 때문이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거야. 아니면 그 반대로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된 행위였거나. 하여튼 동료로서의 우정이라든가, 사고무친한 고인을 위해 베푼 순수한 연민 같은 건 아니라는 거지. 말하자면 박 선생을 무덤을 돌보는 일에 관해서도 썩 자유롭지 못했다는 얘기야. 그래서 그 사람이 강 선생의 무덤을 혼자 돌보려고 나섰을 때 마을사람들은 아예 관여를 하지 않았지. 미묘한 문제였거든....
그러니까 박 선생이 강 선생의 무덤을 돌봤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강 선생 무덤의 위치를 선뜻 알려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봤기 때문에 가능해진 생각이야. 허기야 학생으로선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거겠지만.“
“악몽, 죄책감, 결백... 그런 말들 갖고는 그 사건을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이장님은 먼데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곤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박 선생이 강 선생을 죽였다는 거지.”
“죽여요?”
제가 놀라 되물었지요.
“말하자면이라고 했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그럼, 사실은 어떤 건데요?”
“그건 아무도 몰라. 박 선생과 강 선생만이 알 뿐이야. 하지만 강 선생은 이미 죽어버렸으니 박 선생만이 진실을 알지.”
“박 선생님은 물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겠군요?”
“처음엔 자기가 죽였다고 했어.”
“박 선생님이 직접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했지. 마을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그 말은 바뀌었지. 사실은 죽이지 않았다는 거야. 결국 박 선생은 무혐의로 풀려났어.”
“도무지...”
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러니까 8년 전에 박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5학년 담임을 맡고 계셨지요. 그분이 사람을 죽이다니요. 그것도 선생님을 말입니다.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강 선생님을 누구보다 좋아한다고 말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어째서 선생님을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로 그랬던가요? 선생님은 아실 것 아닙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이미 땅속에 잠들어 계셨습니다.
이장님 말씀에 따르면 선생님은 6년 전 여름, 그러니까 그해 7월 22일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박 선생님과 저수지 둑방에 계셨다고요.
두 부이 함께셨다니까 거기까지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곳에 한 아이가 물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저수지에요. 그 아이는 다름아닌 박 선생님의 조카였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d나이가 열한 살인가 그랬답니다. 선생님도 그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삼촌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하니까 아이는 혼자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를 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그만 깊은 물에 빠졌다지요.
사고는 그렇게 시작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박 선생님이 아이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지요. 조카는 빠져서 허우적대는데 삼촌인 박 선생님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답니다.
아주 급박한 상황이었겠다는 것, 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이를 구해야 되는데 박 선생님은 그럴 수 없었지요. 아이는 자꾸 깊은 데로 빨려들어가는데.
그때 박 선생님이 선생님을 물속으로 떠밀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뭐든지 잘하시는 분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선생님은 아이들에겐 체육 선생님으로 토앟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박 선생님이 (엉겹결이었겠지마는요) 선생님을 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소문이 그러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은 공연히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강 선생을 제가 죽인 것입니다.”
몰려온 마을사람들 앞에서 박 선생님이 그렇게 절규했었다니까요.
아이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이를 구한 선생님은 끝내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은 계속해 울부짖으셨답니다.
“강 선생이 수영을 잘하는 줄만 알았어요. 당연히 잘할 줄 알았어요!”
마을사람들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말이지요. 정말로 강 선생을 박 선생이 밀었더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도리질만 쳤답니다. 아니라고 했으면 모르되 그냥 도리질만 쳤답니다. 모르겠다는 뜻이었겠지요.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사경을 헤매다 저도 모르게 살아난 아이가 어떻게 그 사정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아이가 뭘 알면서도 도리질을 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답니다. 이미 선생님은 죽어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아이가 정말 그런 계산까지를 했었던 건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어른들의 심중으로 아이를 보다 보면 그런 오해가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그런 의심들이, 공공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분명 마을사람들 사이를 나쁜 전염균처럼 떠돌아다녔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박 선생님이 경찰에 가 조사를 받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하면서 말을 바꾼 것에도 원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너무 놀라고 두렵고 가책이 되어 솔직하게 말하다가 조사를 받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어쩌고 하면서 시나브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제 살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을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박 선생님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불신이 커져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선생님이 과연 수영을 못했던가도 관심의 초점이었답니다. 아니, 선생님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을 박 선생님이 정말 모르고 있었던가 하는 것 말입니다. 만일 정말 선생님이 수영을 못했다면 적어도 박 선생님만큼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거라는 게 마을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던가 봅니다. 그런데도 박 선생님이 선생님을 떠민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한 살인행위였던 것입니다.
박 선생님의 입장은 점점 불리해졌습니다. 물론 무혐의로 풀려났기 때문에 법적으론 무죄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무혐의 처리가 마을사람들의 의구심을 완전히 씻어주진 못했지요.
그러자 박 선생님은 선생님이 죽은 이유를 은근히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자살성 죽음으로 말이지요. 박 선생님은 선생님이 오래 전부터 큰 근심거리를 갖고 있었던 사람으로 말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날도 안색이 안 좋고 통 말도 없고 그래서 바람을 쏘이며 속내나 들어줄 양으로 저수지 둑방에 나갔던 거라고 말했답니다. 물론 박 선생님은 선생님에 대해 보고 느낀 대로 말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을사람들의 시선이었지요. 아무래도 박 선생님이 책임을 회피하려고 자신의 양심마저 속이는 걸로 보였던 겁니다.
무덤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의혹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답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거지요. 가책 때문에 열심히 무덤을 돌봤다는 겁니다. 아니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보아란 듯이 그러는 거라는 의견이 고작이었습니다. 거짓 된 성의였다는 거지요.
물론 저는 어째서 박 선생님이 선생님의 무덤을 돌보았던 건지, 그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굳이 박 선생님을 의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무덤을 끝까지 돌보았던 분이 박 선생님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된 셈이었지요.
이장님의 말슴을 듣고 보니, 제가 박 선생님의 연락처를 물었을 때 이장님이 어째서 망설이셨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장님의 말씀 대로라면 박 선생님은 정말이지 아무도 만나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한때 그 마을에 아주 잠깐 머물렀던 사람이었고, 기껏해야 한나절 스쳐 지나가고 말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박 선생님이 만나줄 리는 만무했습니다. 선생님의 무덤을 찾는 일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4
대신 저는 선생님의 옛집을 찾았습니다
선생님이 혼자 사시던 집 말입니다. 일자(一字)형 집이었지요. 부엌과 방과 헛간이 나란한 집이었습니다. 초가지붕을 들어내고 거기에 물결무늬 석면 슬레이트를 얹은 집. 지붕을 그런 식으로 일제히 개량했던 것은 새마을운동 때였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더랬습니다.
학교가 그랬듯이 그 집도 비어 있었습니다. 마당은 학교 운동장처럼 잡초들로 무성했습니다. 하지만 방 바깥쪽의 앙증스럼 툇마루는 여전했습니다. 그 집을 처음 보았을 때 꼭 TV 드라마 세트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창호지 바른 작은 방문을 보면서 저 문으로 정말 사람이 들락거릴 수 있는 건지가 궁금했었습니다. 낮은 지붕은 보는 사람을 한없이 평온하게 했습니다. 툇마루 밑의 넓적한 신방돌들도 그랬습니다. 그곳에 살면 마음이 동화처럼 예뻐질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그곳에 사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내려갔던 8년 전 여름만 하더라도,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 사택의 방 한 칸을 쓰고 계셨지요. 그래서 아침마다 싸리비로 학교 계단이며 화단길을 관리 아저씨보다 먼저 쓸고 계셨던 겁니다.
선생님이 그 집으로 옮긴 것은 그 다음해였습니다. 7년 전, 그러니까 농활 이듬해 제가 다시 선생님을 잠깐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의 사택에 안 계셨지요. 새 집으로 이사를 하셨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새 집은 아니었지요. 누군가가 살던 집을 선생님이 지상권(地上權)만 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선생님의 새 보금자리였던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농활 이듬해, 저는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습니다. 그해 저는 졸업을 했고, 스물네 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을이면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참이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여름이었지요. 처녀로서는 마지막 여름이었던 셈입니다.
그때 그곳엘 왜 갔었던 건지, 자세하고 분명한 동기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추측해볼 뿐입니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주는 묘한 절박감이 그곳으로 가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결혼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결혼이라는 건 뭔가의 끝이며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처녀로서의 여름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미혼으로서의 하늘 바람 같은 것, 곧 미혼으로서의 세상을 저는 그해의 여름으로 마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건 결코 별스런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며 누구에게나 있을 일을 별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저는 예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냥 한가하고 담담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착잡함, 그것 정도였을 겁니다.
결혼이라는 건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지요. 얼마든지 기대와 꿈에 부풀어도 좋을 일 아니겠습니까. 워낙 어려서부터 부모님들이 지속적으로 저희들의 <결혼>을 얘기하셨고, 그것 때문에 그와 결혼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부부로서 연을 맺고자 했을 때 그와 저 사이에는 별다른 문제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지극히 순탄했다고 볼 수 있지요. 저희들 주머니엔 얼마간의 용돈이 있었고, 그것으로 유람선의 승선권을 살 수 있었고, 배만 타면 일정한 관광 코스를 돌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결혼을 그런 것이었습니다. 가만있어도 배는 저희들을 태우고 떠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이 그토록 순탄하게만 시작된다는 것이 썩 편안하지만은 않았던가 봅니다. 물론 결혼을 앞두고 으레껏 겪게 되는 갈등과 혼란이 없다고 하여 불평할 일은 아니었지요. 그런 건 될 수 있는 한 적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결혼 전에 그런 갈등과 번민에 얼마간 시달린다면 외려 맘을 다잡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아무리 순탄한 시작이라 할지라도 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새 삶을 꾸리는 데는 적당한 각오나 다짐 같은 게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좀 편안하지 않았던 거겠지요. 처녀적 기분이나 습관들이 수습되지 않은 채 가을을 맞자니 불안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어떤 것의 끝과 시작 사이에 놓이게 되면 얼마간 감정이 복잡해지고 불안해지는 것 아닐까요. 아마 그런 거였을 겁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라면, 그 과정이 순탄했든 순탄치 못했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알 수 없는 미래라는 것 때문에 긴장들을 하는 거겠지요. 그 긴장 속에는 물론 기대와 꿈이라는 것도 섞여 있을 겁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가져다 줄 행복의 단꿈 이면에는, 주체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한 존재로서 갖게 되는 당연한 염려 같은 게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걸 막막함이나 망설임이나 우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겠지요. 분기점에 선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종의, 그래요, 착잡함, 그것 정도일 것입니다.
저한텐 그게 여행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그때까지도 그 사람은 군에 있었습니다. 제대를 보름쯤 남겨두었었던가 그랬습니다. 그가 제 곁에 있었다면 아마 혼자 떠나는 여행 따위는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저 스스로도 그 여행을 이상하게 여기질 않았습니다. 절실했던 것도 아니었고, 멀리 떠나는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기껏해야 하루쯤 어디 조용한 곳을 다녀오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여행이랄 수도 없는 거였습니다. 바람이나 쐬고 싶다는 것 정도였으니까요.
다만,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떠나보질 않았기 때문에 저한텐 그게 여행처럼 느껴졌던 거겠지요.
그렇게 떠나보려 했지만 막상 갈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아니, 첨부터 선생님을 염두에 두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선생님이 계신 곳이라면 적당하겠다고 말입니다. 마침 며칠 전에 복통을 앓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증상은 비슷했지요. 아니, 복통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선생님을 한번 뵙고는 싶었거든요. 층층나무 밑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그리고 캠프파이어 불길에 어른거리던 선생님의 마지막날 밤 얼굴이 사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께 저는 그곳에 내려간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설명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러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를 먼저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지요.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요....”
라고 말이지요.
그리곤 제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듯 조금은 과장된, 짓궂고 무책임한 웃음을 웃어보였습니다.
제가 불쑥 나타난 것에 대해 선생님은 적이 놀라셨지요. 하지만 전 그런 선생님 앞에서 여전히 짓궂은 아이처럼 뱅글뱅글 웃고만 있었습니다. 제가 뭐 못 올 곳엘 왔습니까, 라는 투로 말이지요.
선생님도 어떻게 찾아왔느냐는 물음 따위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얼마간 놀란 눈으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셨을 뿐입니다. 그리곤 이내 반가운 낯으로 저를 맞아주셨지요. 이유야 어땠든 잘 왔다, 라는 표정이셨습니다. 이유를 알려고 해봤자 알 수 없을 거라는, 그리고 또 그런 것 일부러 알 필요까지 있겠나 싶은, 그런 얼굴이셨습니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에 저는 선생님을 학교로 찾아갔더랬습니다. 그때가지도 저는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의 사택에 살고 계시는 줄 알았지요. 적어도 교무실에는 계실 터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학교에 계시질 않았지요.
“곧 방학이라서요. 단축수업을 했어요. 아마 댁에 계실 거예요.”
교무실엔 제 나이 또래의 젊은 여선생님 한 분이 점심 도시락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학교는 한산했습니다.
“댁이라면... 교장 선생님 사택 말인가요?”
제가 물었지요. 여선생님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집을 얻어 이사를 하셨다고요.
여선생님은 교무실 밖으로 나와 저에게 선생님의 집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여선생님은 계단 위에 서서 희고 가냘픈 팔을 들어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지요. 한길 위로 하늘색 군내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당에서 오른쪽으로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지막한 슬레이트 지붕이 있었습니다.
“보이세요?”
여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제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농활 때는 보지 못했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여선생님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학교를 나왔습니다. 교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여선생님은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 때문에 식사가 중단된 것이 못내 미안했습니다.
그때는 운전도 못했었고 차도 없었습니다. 선생님 집에 도착하는데 15분쯤 걸렸을 겁니다. 뒤꼍에서 나와 마당으로 들어서시던 선생님과 마주쳤습니다.
"안녕하셨어요?“
제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얼른 저를 못 알아 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못 알아 보신 게 아니라 제가 어째서 그곳에 나타나게 된 건지 혼란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밖에요. 온다간다 말도 없이 불쑥 찾아뵈었던 것이니깐요.
“어....쩐 일이에요?”
궁금해서라기보단 그냥 놀라워서, 인사도,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요....”
그리곤 웃었지요. 선생님은 한동안 웃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이 한 웅큼 들고 계시던 상추며 쑥갓 때문에 저는 더 웃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걸로 점심이라도 드실 거였던 모양입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 손에 들려있던 상추며 쑥갓이 너무도 싱싱해서, 웃음이 자꾸 나왔습니다. 밭에서 막 뜯어온 것이었을 테니 싱싱한 건 당연했지요. 그런데 너무 싱싱했었다는 거에요. 상추나 쑥갓은 그때까지도 자기들이 뜯겨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싱싱했지요. 뜯겨졌다는 사실도 이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들은 금방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가 소화돼버리고 말 거라는 생각을 하니 자꾸 신기하고 웃음이 나고 그랬습니다.
“마침 근방에 들를 일이 있어서요...”
저는 그렇게 능청을 떨었습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남자의 손에 들린 아주 싱싱한 상추라는 게 왜 자꾸 재밌게만 느껴지던지요. 저러다간 상추가 뜯겨진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엤어,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답니다.
“이마에 땀 좀 봐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곤 수돗가로 가 얼른 수도꼭지를 트셨지요. 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어디선가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하수였던가 봅니다.
상추와 쑥갓을 씻으려는 줄 알았습니다.
“세수.. 하세요.”
그러나 선생님은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떠 세수대야에 옮겨 담으시곤 말했습니다.
저는 한동안 세수대야에 담긴 맑은 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생님이 비누를 가져다 주실 때까지 저는 물빛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참... 화장이 지워지나?”
그제서야 선생님은 황망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사려 깊지 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세요. 제가 닦을게요.”
제가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얼른 상추며 쑥갓을 내주시지 않았습니다. 상추와 쑥갓을 한 웅큼 쥔 남자의 손, 선생님도 그게 쑥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계셨지요.
결국 제가 선생님께 다가가 상추와 쑥갓을 받아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두커니 서 계셨을 뿐입니다. 제가 총을 들이대고 꼼짝 마! 라고 외친 것만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저한테 무장해제를 당하는 적병 같았습니다.
물은 한없이 맑고 차가웠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상추와 쑥갓을 씻으면서 정말 세수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장이 지워진들 무슨 대수겠나 싶었지요. 화장이래봤자 에센스 위에 눈썹이나 그리는 정도였으니까요.
천천히 상추와 쑥갓을 씻었습니다. 선생님이 모란꽃 무늬가 새겨진 쟁반을 갖고 나오셨지요. 그때 그 쟁반의 모란꽃이 얼마나 붉었는지 선생님은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금방이라도 후드득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붉은 모란꽃 위에다 씻은 상추와 쑥갓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새 물을 두 손 가득 떠올려 얼굴을 적셨지요. 비누를 풀어 손과 얼굴을 오래오래 닦았습니다. 찬물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그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저는 머리까지 감았습니다. 지하수로 머릴를 감으면, 그것도 비누로만 감으면 머리카락이 뻣뻣해질 텐데, 하는 생각은 잠시뿐이었습니다. 머리가 답답하거나 근질거려서 감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뭐랄까요, 물의 유혹?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는 세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부터 무언가를 더 저 물속에 담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물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럼 무엇이 냉큼 머리까지 감게 만든 거였을까요. 무엇이 불쑥 선생님을 찾아가고도 모자라 예의마저 벗어나게 대뜸 머리를 감게 했던 것이었을까요. 물의 유혹이란,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이유일 것 같았습니다. 햇살과 바람과 초록의 풍경들을 끌어다 대더라도 그 충동의 이유가 다 설명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일종의 모반의 충동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굳이 예의를 따질 것도 없이, 남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머리를 감는다는 것은 상식에조차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몰랐던 게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걸 개의치 말자는 묘한 반의가 고개를 쳐든 것이었지요. 저는 그토록 짓궂은 인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모반의 충동은 그야말로 충동된 것일 뿐 제 의지가 장난을 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전 아주 천연스럽게 머리를 감았을 겁니다. 제 행동에 선생님이 얼마나 놀라실까 따위는 생각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날 저는 그랬었습니다. 물빛과 햇살과 바람과 초록의 풍결들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 돌연한 행동을 그 물빛과 햇살과 바람과 초록의 풍경들이 무마해주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릅니다.
전 그날 분명, 예기치 못했던 방문과 돌연한 행동이 선생님께 드릴 당혹감 따위를 괘념치 않았습니다. 상궤를 벗어난 듯한 제 행동들이 가져올 혼란과 미심쩍음들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럴 것을 몰랐다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고의는 아니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혼란과 미심쩍음들을 저 스스로 용납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천연스러울 수 있었겠지요. 용납했다면, 용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도 알고 있어야 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가져온, 그리고 그런 것들이 가져올 동기나 결과를 알지 못했습니다.
요컨대 저는 저 스스로 그런 상황을 초래했으면서도 그 이유와 목적을 알고 있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참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조차 생각지 않았으니까요. 곰곰이 생각해보기는커녕, 그런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태평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께 정말 부끄럽고 죄스럽고 그렇습니다.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을 불쑥 찾아와 수돗가에 꿇어 엎뎌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하다니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그러는 누이동생을 보듯 했습니다. 제가 머리를 다 감았을 때 선생님은 흰 수건을 가져다 주셨지요. 잘 빨아 말린 수건을 두 손으로 떠받듯 들고 와서는 제 앞에 내밀었습니다. 그 흰 수건 위에 떨어져 내리던 여름 한낮의 햇살, 그 눈부신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때 그 수건의 눈부심을 저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시는지요. 제 당돌함과 무례를 받아주시는 선생님의 너그러운 마음씨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줄곧 저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그토록 기탄이 없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그때는 그런 맘이 들지 않았었다는 말이지요. 제가 임의로이 굴어야, 갑작스런 선생님에게나 저에게나 어색하지 않을 거라는, 아주 편리하고 단순한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맨얼굴에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하고서 선생님과 툇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었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참 그날 저는 어째서 그토록 가관을 떨었던 걸까요. 남들이 보았다면 아닌게아니라 푼수떼기 여동생이거나 게으른 아내와 때늦은 점심을 먹는 걸로 알았을 겁니다.
선생님은 찬밥덩어리밖에 없다며 걱정하셨지만 저는 상추쌈에는 찬밥이 제격이라는 너스레까지 떨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나누어 먹겠다며 큰 양푼에 찬밥을 떠오는 저를 보시고 선생님은 비로소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이게 가을상추라는 거에요. 가을상추는 딸도 안 준대요.”
“아직 한여름인데요?”
상추쌈을 한입 가득 물고 제가 말했습니다.
“아직 한여름이지만 상추한테는 가을이에요. 벌써 대가 이만큼 자라고 쓴물이 들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방문을 여셨고, 방을 건너가 맞은편의 뒷문까지 여셨습니다. 뒷문 밖에 상추밭이 있었습니다. 상추대궁이 사람의 무릎높이로 자라 있었습니다. 상추는 아닌게아니라 쌉싸름하고 맛이 있었습니다.
“저건 무슨 꽃인가요?”
저는 손가락으로 뒷문 밖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에는 노란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쑥갓꽃이에요.”
“쑥갓도 꽃이 피나요? 저렇게 이쁘게?”
꽃은 정말 이뻤습니다. 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뒷문 밖에도 눈부신 햇살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까요. 떨어지는 햇살 때문에 상추 이파리는 투명한 초록 한지 같았습니다. 검은 점 박힌 주황색 나리꽃도 보였습니다. 채송화도 있었습니다. 분꽃과 봉숭아도 피어 있었지요. 꽃과 채소가 사이좋게 제자리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보랏빛 가지도 있었습니다.
“상추도 꽃을 피워요. 감자도 가지도 고추도 오이도 다 꽃을 피우죠. 물론 쑥갓을 관상용 식물 못지않은 화사한 꽃을 피우지만 말예요.”
문들을 다 열어놓자 집 앞뒤가 훤히 보였습니다. 창호지 문틀조차 채소 이파리나 꽃잎 같았습니다. 방안에 앉아 어느쪽 문을 열어도 그곳엔 채소며 화초며 나무들이 가득할 것이었습니다. 멀게는 산봉우리와 들과 강물이 보일 것이었습니다.
“이런 데서 살면 저절로 맘이 이뻐질 것 같에요.”
저는 연거푸 입을 딱딱 벌리면서 상추쌈을 처넣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선생님이 또 웃으셨지요. 현실 같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떠날 때만 하더라도 그런 광경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아침에 어머니가 떠주시는 무국에 밥을 말아 먹었었는데, 어느새 선생님과 작고 앙증맞은 툇마루에 마주 앉아 쑥갓꽃을 보며 가을상추을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맨얼굴에, 젖은 머리로 말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지 반 시간도 안 지났는데 저는 이미 1년도 더 넘게 그곳에서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함부로, 목젖이 보일 만큼 입을 딱딱 벌렸습니다.
선생님께 가는 데 네 시간 정도 걸렸을 겁니다. 기차로 버스로 가는 데 그것밖에는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주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지요. 거리와 시간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저는 문득 전혀 다른 세상에 뚝 떨어져 내린 것 같았습니다.
물론 늘 보아온 거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시골 풍경이라는 것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들과 산과 하늘과 바람이라는 것도 예전의 기억들과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직접 자주 눈으론 못 보더라도 우리는 언제든 TV나 신문이나 잡지로 시골풍경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제 기분과 느낌들이, 그리고 평소와는 좀 다른 행동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을 거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이 고무되어 있던 제 기분과 느낌들 때문에 산이며 들판의 빛깔이 다르게 보였으면 보였을 겁니다. 상춧잎에 떨어져 내리던 햇살이며 노란 쑥갓꽃이 그토록 예뼜던 것도 제 기분 때문이었을 겁니다.
저는 어떤, 다른 차원의 세계로 쑥 둘어가버린 사람 같았습니다. 버뮤다 상공을 나는 여객기 안에서 한 승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지요. 4차원 혹은 그 이상의 차원의 세계로 빨려든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정말 그랬다면, 그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누군가와 갑자기 상추쌈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여튼 그날의 점심은 저한텐 비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낯익고 편안한 비현실이었지요.
“일곱 살 땐가 여덟 살 때 기억인데요...”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한 보모가 그렇게 상추쌈을 좋아했었어요. 특히 가을상추가 나오기 시작하면 하루 세 끼를 모두 상추로만 해결했지요. 상추와 고추장. 그게 반찬의 전부였어요. 보육원에 상추밭이 있었기 때문에 상추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 보모의 상추쌈이 얼마나 컸던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서 이만했어요.”
선생님은 두 손끝을 둥그렇게 맞대어 공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배구공보다 작았지만 핸드볼공보다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 원생들은 먹는 것도 잊고 그 보모만 쳐다봤지요. 과연 그게 입 안으로 다 들어갈까 매번 궁금했던 겁니다. 그건 마치 마술과도 같은 거였어요. 물론 얍, 하고 그 큰 상추쌈을 단숨에 입 속에 넣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입을 몇 번 우물우물하면 손에서 공만한 상추쌈이 정말로 없어지곤 했었거든요. 보모는 상추쌈 먹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우리들이 일제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요. 그게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모습이 제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것은 그 큰 상추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나이가 많진 않았지만 그 보모는 정말 제 부모 같았어요, 귀여워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부모처럼 야단치고 때리고 그랬었거든요, 그냥 잘 보살펴만 주었던 보모들은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 있질 않아요. 제가 가을상추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분을 떠올리면 완고하면서도 한없이 푸근했던 모습이 생각나야 할 텐데, 자꾸 그 상추쌈이 먼저 떠오르는 거예요.”
선생님은 저를 한번 바라보시곤 조용히 웃으시며 말을 마쳤습니다.
“상추를 보면 이젠 두 사람이 생각나게 생겼어요. 보모와.... 그리고 학생.”
그날 점심은 그런 거였습니다. 문을 있는 대로 다 열어놓고 상추쌈을 먹은 거 말입니다. 지금 떠올려도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경험한 현실로서가 아니라, 언젠가 제가 출연했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듯한 기분입니다.
그곳에 간 것도 다 영화 촬영을 위해서였고, 그곳에서 철수한 것도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지요. 선생님과 저는 촬영을 위해 빌린 작은 집에서 잠시 대사를 맞춘 것 뿐이고, 촬영이 끝나자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는.
점심을 먹은 뒤 수도꼭지를 틀어 시원한 냉수를 마시고 설거지를 했던 기억들도 그렇습니다. 그때 저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죽어라 소리를 질렀었지요. 부엌바닥을 기어가는 노래기를 보았던 것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배로 기어다니거나 다리가 스무 개 이상 달린 길다란 벌레는 딱 질색이거든요. 질색 정도가 아닙니다. 저걸 보고 있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지요.
그날도 그래서 죽어라 비명을 질렀던 겁니다. 선생님이 뛰어들어왔지요. 선생님은 제가 왜 그토록 놀랐는지 금방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리곤 저한테 보아란 듯이, 저를 안심시키시려고, 아주 과장된 동작으로 그놈의 노래기를 발로 밟아 죽였지요.
그런 것마저도 필름의 한 장면처럼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집도 선생님이 사시던 집이 아니라, 그러니까 선생님의 삶이 그곳에 있었던 게 아니라, 실감나는 장면을 위해 두 배우가 실제 집이라고 애써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집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그곳으로 떠났던 방식이 영화적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영화처럼 극적었다는 게 아니라, 나중에 연결시키려고 당장은 앞뒤가 안 맞거나 단절되게 찍는 영화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곳에 내려갔던 것도 그랬고, 그곳을 떠나왔던 것도 그랬습니다. 앞뒤가 단절되어 있었지요. 동기와 결과, 이유와 목적이 불분명했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선생님을 만나 상추쌈을 먹고 노래기를 죽인 내용은 분명 있는데, 그 앞뒤의 연결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 기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당장 찍어놓은, 아직 편집되지 않은 필름의 한 조각 같을 수밖에요.
설거지를 끝냈을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한두어 시간 학교엘 다시 다녀와야 해요. 방학중에 군내 초등학교 대항 핸드볼 대회가 있거든요. 지도할 사람이라곤 저밖엔 없답니다. 두어 시간이면 돼요. 그동안 들어가셔서 책이라도 읽고 계세요. 마치는 대로 금방 올게요.”
저는 그렇게 하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사립문 밖을 나섰습니다. 마당에 서서 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자전거가 한길로 접어드는 걸 보고 저는 툇마루로 올아섰습니다. 그때까지 앞뒷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요.
저는 선생님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낮은 천장 아래로 책들이 나란히 쌓여 있었습니다, 책장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표지에 고호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시집 한 권을 꺼냈지요. 그러나 읽지는 않았습니다. 뒤꼍의 쑥갓꽃이 너무 예뻤으니까요. 사람들은 왜 쑥갓꽃은 화분에 심지 않는 걸까 따위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집은 낡은 편이었지만 방바닥이며 벽이며 천장은 깨끗했습니다. 이사하시기 전에 도배를 새로 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만 방바닥에 눕고 말았습니다. 상추가 잠초라더니 그래서 그런 모야이라고 생각했지요. 흰 천장과 노란 장판이 아늑했기 때문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잠은 자지 않았습니다. 매미 소리를 들으며 뒤꼍의 쑥갓꽃을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날의 촬영 일정은 거기까지인 것 같았습니다. 물론 들리진 않았습니다만, 누군가가 컷! 하고 외친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그리곤 시집의 속표지에다 몇 자 적었지요. <갑작스럽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할 것 같기에 인사를 못 드리고 떠납니다. 쑥갓꽃이 예뻐서 참 좋았습니다> 라고요.
어쩌면 비현실적인 현실이 자각됐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계속 머무르면 현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만 같았던 것일까요. 왠지 현실 같지 않다고 느끼는 마지막 희미한 자각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마비될 것만 같았는지도 모릅니다. 뭐 그리된다 한들 큰 상관이었겠습니까마는 선생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오래 머물 생각도 아니었긴 하지만, 좀더 시간이 지나 선생님이 오시고 나면 작별의 순간과 내용을 두고 얼마간 고심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그럴 것 같았지요.
저는 선생님의 집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앞뒤가 단절된, 하나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 그날의 기억이, 제 사려 깊지 못한 행동 탓에 아무렇게나 완성된 셈이었습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자니 아이들의 힘찬 외침 소리가 운동장 쪽에서 들려왔습니다. 저는 회양목으로 둘러싸인 운동장가로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회양목 사이로 선생님과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구령에 맞춰 운동장을 돌고 있었습니다. 또 몇몇 아이들은 그물이 쳐진 작은 골문 앞에서 슛연습을 하고 있었지요. 아주 활기차 보였습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패스를 하고 슛을 하고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아이들의 검은 얼굴이 햇빛 아래 번들거렸습니다. 구호와 외침뿐 다른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요. 슛동작을 바라보며 무어라고 외치는 선생님의 모습도 아주 진지해 보였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니까요. 회양목 사이로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우승은 따논 거나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쉴새없이 넘어지고 미끄러져도 아이들은 엄살을 부리거나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습니다. 점프슛을 쓸 때마다 맨땅에 흙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공의 방향과 동료선수들의 움직임을 쫓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얼굴에 흙먼지가 묻든 무릎이 가지든, 그런 건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토록 의연하고 대견한 애들은 저는 처음 보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지도 덕분이었겠지요. 저는 핸드볼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아이들과 선생님의 눈빛만으로도 우승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가 왔고, 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외침이 점차 멀어졌습니다. 저는 버스 뒷유리창으로 흙먼지가 일고 있는 학교 지붕은 점점 낮아졌습니다. 버스가 멀어져 갈수록 운동장의 크기는 점점 좁아지고, 선생님과 아이들의 모습은 작아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학교는 푸른 풍경에 완전히 묻혀버렸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외침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운동장의 흙먼지도 학교 지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떠나왔지요. 그야말로 뜬금 없는 외출이었고 귀가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날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저한테는 무언가가 충족된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다녀온 뒤로 비슷한 충동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시집 속표지에 남긴 제 글을 보시고 선생님이 얼마나 당황해하셨을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빈방에 달랑 메모 한 줄 남기고 사라졌으니 선생님은 혼란스러우셨을 겁니다. 갑작스런 방문과 홀연한 귀경. 왜 안 그러셨겠습니까. 제가 어째서 선생님을 찾았던 건지 선생님은 알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말을 안했으니까요. 선생님은, 천천히 말하겠거니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핸드볼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겠거니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곳에 저는 없었지요. 쑥갓꽃을 바라보다 문득 떠나버렸으니까요. 도깨비에라도 홀린 것 같으셨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정말 저는 선생님께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었습니다. 말씀드릴 만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게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말씀, 그러니까 드릴 말씀이라든가 방문의 이유가 있어서 찾아뵌 건 아니었다는 말슴 정도는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하고 버릇없게 떠나왔던 점에 대해서는 그후로 쭉 죄송한 맘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만 생각한 탓입니다. 철부지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저는 선생님이 계신 그곳에 다녀온 뒤로 무언가가 많이 정화된 것 같다는 기분에만 만족했습니다. 제가 원했던 게 바로 그런 비현실의 공간이 아니었던가 싶었습니다. 저에겐 나름대로 충분했습니다만 선생님껜 두고두고 수수께끼였을 테지요.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저는 그런 비현실의 공간을 통과해야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이라는 또다른 현실을 맞이하기 위해 그전의 현실로부터 얼마간의 단절을 경험해야만 했었던가 봅니다. 현실과 또다른 현실 사이에 비현실이라는 분명한 구분점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전 선생님께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애꿎은 선생님만 혼란스럽게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단순한 혼란스러움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물론 제 입장에서입니다만, 일종의 해프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해프닝치고는 선생님께 꽤나 곤혹스러운 짓이었겠지만 말이지요. 무례한 해프닝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가 봅니다.
박 선생님의 음성에서 저는 뭔가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느낌이 저의 7년 전, 혹은 8년 전 방문과 어떤 상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요. 박 선생님과 통화를 할 때는 알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 전화를 받는 박 선생님의 태도가 뜻밖이었다는 것밖에는요.
그랬습니다. 저는 박 선생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선생님의 예집을 다 둘러보고 말입니다. 상추와 쑥갓이 자라던 뒤꼍도 가보았지요. 제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던 수돗가에도 앉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박 선생님께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묵정밭이 다 되어버린 마당 한가운데 서서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건, 이장님이 알려주신, 박 선생님이 근무하신다는 논산의 한 초등학교의 이름뿐이었습니다.
저는 세 번 전화를 해야만 했습니다. 114에 한 번, 학교에 한 번, 그리고 박 선생님의 자택에 한 번... 세 번이나 다이얼을 누르면서 망설이기도 했지요. 공연한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박 선생님은 사람들을 기피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는 까닭이야 이장님의 설명을 듣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요.
다른 얘기도 아닌, 선생님에 대해 물을 게 뻔한 제 얘기에 과연 박 선생님이 대답해주실까.
“저는 서현이라고 합니다. 민서현...”
박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저는 얼마간 반응을 기다리다 물었지요.
“용동초등학교에 함께 근무하시던 강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는데요....”
여전히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냥 끊어버리고 말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지요. 그러나 끊지는 않으셨습니다. 묻지는 않았지만 제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긴장이 감도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강 선생님의 묘지를 알고 계신다기에....”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저쪽에서 마침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혹시...”
역시 박 선생님은 예사롭지 않은 예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침묵하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던 이유였습니다. 박 선생님이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 복통을 앓았던?”
“예, 맞아요. 제가 바로 그 학생이에요.”
제가 얼른 대답했지요. 그러자 박 선생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습니다.
“거기 어딥니까?”
얼마나 목소리가 컸던지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용두리에 와 있어요.”
“그리로 가겠습니다.”
제 말이 끝나자마자 박 선생님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달려올 기세였습니다.
“선생님은 사람들을 잘 안 만나주신다기에 전화하기 전에 무척 망설였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박 선생님은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그랬어요. 그랬지요. 하지만 학생은 달라요. 학생을 만나야 돼요. 만나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조금 불안해졌습니다. 선생님의 죽음이, 그리고 박 선생님이 받는 오해가, 저라는 사람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런 것도 모르고 제가 무심코 지내버린 그동안의 세월은 무얼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름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잠깐씩 시달리곤 했지만, 그래도 제가 보낸 세월들은 평온하고 무고한 날들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제가 모를 어떤 것으로 인해, 그러나 저 때문에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것이라면 저는 저라는 존재의 아리러니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거였습니다.
“기다리세요. 기다리셔야 합니다.”
박 선생님의 음성은 절박했습니다. 저는 그저 예, 예, 라고만 대답했지요.
5
길도 없는 쑥구렁에, 선생님은 누워 계셨습니다
박 선생님은 몇 번이고 산길을 잘못 드셨습니다. 오르던 길을 다시 내려와야 했고,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미 길이 아니었습니다. 잡초와 관목들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풀잎들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지요. 정강이를 섬뜩하게 스쳤습니다.
기억.
그랬습니다. 박 선생님은 산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길이었던 곳의 기억을 더듬고 계셨던 것이지요. 저는 그곳에 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풀잎이 스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저에게 박 선생님은 쐐기를 조심하세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토리 나뭇잎은 피라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겁먹은 아이처럼 박 선생님 뒤를 바짝 따랐지요. 발 밑에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뱀이라는 놈이 제 발등 위를 스르륵 넘어갈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8년 전 그곳에 처음 왔었을 때를 떠올리려고 애들 썼습니다. 그때는 아닌게아니라 산길이 있었으니까요. 농활 마지막 날, 그러니까 제가 복통을 앓았던 그날, 우리들은 산 정상까지 올랐었습니다. 그때도 산길이 그다지 분명하지는 않았었지만 앞사람들의 밟아놓은 풀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박 선생님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 산길 아닌 산길은 8년 전에 올랐던 방향과도 달랐습니다. 박 선생님은 오르다 말고 미아가 된 아이처럼 막막한 눈빛으로 주변을 한차례씩 휘둘러보곤 했습니다. 그리곤 방향을 꺾거나 다시 되짚어 내려오곤 했지요.
여기 어딘가에 때죽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나뭇잎들 밑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제겐 거기가 거기인 것 같았고 그 나무가 그 나무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미 8년 전에 풀과 나무가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지를 알았습니다. 제가 그곳을 떠나 그곳을 잊은 듯 7, 8년을 사는 사이에 학교 뒷산의 나무와 풀들은 밀림처럼 우거졌던 것입니다.
폐교가 되어 논산으로 전근 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박 선생님은 선생님의 무덤을 돌보셨답니다. 그런 박 선생님마저도 선생님의 무덤을 얼른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엄두도 낼 수 없었겠지요.
박 선생님은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씻어냈습니다. 공연한 수고를 끼쳐드리는 것 같아 박 선생님께 죄송했지만 그날 박 선생님은 저보다도 더 절실하게 선생님의 무덤을 찾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미안함이 조금 덜하긴 했지요. 오히려 박 선생님은 우거진 산속을 끌고만 다녀서 제게 미안했다는 낯빛이셨습니다.
바위로 올라와 좀 쉬라는 것을 저는 괜찮다며 그냥 서 있었습니다. 박 선생님의 이마가 땀으로 허옇게 불어 있었습니다. 손수건도 어느새 펑하게 젖어 있었지요.
손부채질을 하던 박 선생님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기척이라도 내면 무언가가 도망칠까 봐 비닉(秘匿)을 유지하는 사냥꾼의 은밀함이었습니다. 시나브로 낯익은 광경을 알아보는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혹여나 하던 눈빛이 금방 놀라움으로, 그리고 이내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박 선생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엇엔가 빨려들 듯 갑자기 수풀을 헤치고 나가셨지요. 그 동작이 너무 빨라 저는 따라갈 염도 못 내고 있었습니다. 박 선생님도 저라는 사람의 존재를 그때만큼은 의식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박 선생님이 풀숲으로 자취를 감춘 것은 눈 깜짝 할 사이였습니다. 저는 멍하니 박 선생님이 사라진 숲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지요. 아득한 적요가 숲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박 선생님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리 와보세요!”
저도 박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쏜살같이 풀숲을 헤치고 달려갔지요.
그랬습니다. 그곳에, 산쑥과 쑥부쟁이로 뒤덮인, 무덤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구 엉켜 자란 잡초와 쑥부쟁이 때문에 처음엔 그것이 무덤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인공의 흔적이 분명한 하나의 봉분이 쑥구렁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박 선생님은 한동안 말없이 서 계셨습니다. 저도 그 곁에 서 있었지요.
달려오느라 풀에 스치고 쐐기에 쏘인 정강이가 마침내 화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박 선생님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봉분 위의 풀들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산쑥은 뿌리 가깝게 줄기를 꺾고, 쑥부쟁이는 뿌리째 뽑아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박 선생님의 동작은 거칠고 빨라졌습니다. 그동안 찾아보지 못했던 미안함을, 미친 듯 풀을 뽑는 것으로 달래는 듯했습니다. 저도 허리를 숙여 풋내가 물씬 풍기는 풀들을 뜯기 시작했지요. 풀들은 그동안의 제 무심함을 탓하기라도 하듯 질기고 거칠었습니다.
박 선생님의 얼굴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기로 번들거렸습니다. 박 선생님과 저는 손바닥이 퍼렇도록 풀을 뜯었습니다. 말없이 그 일에 열중했습니다. 박 선생님은 박 선생님대로 저는 저대로 땅속에 누워 계시는 선생님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이 덮고 계신 흙은 부드러웠습니다. 풀을 뜯으면서 저는 한 웅큼씩 그 흙을 쥐어보곤 했지요.
손으로 풀을 뜯어낸 거여서 선생님의 무덤은 이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낮이라도 갖고 오는 건데, 라고 박 선생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강 선생의 무덤을 돌봤다는 것도 겨우 늘 이런 식이었죠, 뭐.”
박 선생님은 자신의 무성의를 탓했습니다.
“하지만 봉분이 드러나니까, 선생님의 존재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제가 말했지요.
박 선생님은 흙 묻은 손을 손수건에 닦고 준비해온 술병을 땄습니다. 소주 한 병, 종이컵 하나, 풋사과 한 개와 북어포 한 마리였지요.
박 선생님은 신발을 반쯤 벗고 무덤 앞에 잔을 올렸습니다. 저도 박 선생님 곁에 무릎을 꿇었지요. 정중하게 이마를 땅에 댄 박 선생님은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못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무덤을 찾고 풀을 뽑고 잔을 올리는 박 선생님을 보면서 저는 마을사람들의 오해가 오해일 뿐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느낌이었을 뿐이지만 때론 느낌처럼 정확한 것도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어째서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이 무덤을 돌보았던 거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일까요.
재배를 마친 박 선생님은 제가 불 수 없도록 반대편으로 빠르게 고개를 젖혀 짙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셨지요.
저는 선생님 무덤 저편에 막 피기 시작한 노란색 작은 꽃들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쑥방망이라는 꽃이에요.”
박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많이 진정되신 것 같았습니다.
“쑥갓꽃도 저런 빛이었는데....”
제가 말했지요.
“결국 다 국화과니까요.... 음복을 해야겟죠?”
박 선생님은 남은 소주를 종이컵에 따르셨습니다. 저를 한번 바라보셨지요. 저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습니다.
“그럼 저만이라도....”
박 선생님은 천천히 소주를 드셨습니다. 그리곤 북어포를 찢어 입에 무셨지요.
박 선생님과 저는 선생님의 무덤을 등지고 앉아 산 아래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넓은 들판 위로 백로 몇 마리가 한가하게 날고 있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들판을 바라보며 박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저 역시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서현 씨라고 하셨지요? 강 선생이 서현 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아무도 모릅니다. 저 역시 모르지요. 저도 다만 추측할 뿐이었습니다. 하여튼 언젠가부터 강 선생의 말수가 많이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서현 씨가 어느날 문득 용동리에 잠깐 왔다 갔다는 말을 강 선생으로부터 얼핏 들었었는데, 그 뒤부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저는 강 선생의 뭐랄까, 울기(鬱氣) 같은 것이 서현 씨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지요. 쉽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게 제 입장이었으니까요. 강 선생이 혹시 서현 씨를 맘에 두고 있는 건 아닌가,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생각에 지나지 앟은 것이었으니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던 겁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지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박 선생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서현 씨에 대한 거라면 강 선생은 저한테밖에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그 얘길 아무한테도 전하지 않았지요. 그러고 싶지도, 그럴 필요도 없는 거였으니까요. 제 생각엔 그랬습니다.... 강 선생이 서현 씨를 맘에 두고 있거나 어떤 형태로든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할지라도, 서현 씨란 존재는 분명 강 선생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는 거지요....”
말하면서 박 선생님은 도리질을 쳤습니다.
“영향? 아, 말이 자꾸 어려워지죠? 뭔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거여서 그럴 겁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제 말씀은, 강 선생의 울증이 서현 씨로부터 촉발된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반드시 연정이나 아니면 염세 같은 말로 쉽게 설명될 일 같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제 부족한 말주변 때문인지 역시 아무리 해도 제대로 제 느낌을 전달하기가 힘들군요... 차라리 연정이었다고 말하면 말하는 사람은 편할 겁니다. 뭐 듣는 사람으로서도 그쪽이 이해가 빠르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말해버릴 수는 없는 거였습니다. 좀더 복잡하달까, 아니면 좀더 근원적인 어떤 것에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몇 년 전에 제가 말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강 선생은 성장환경이 남달랐지요. 그래서 평범하게 성장해온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간단한 것 같은 문제도 강 선생한테는 결코 간단할 수 없는 경우란 게 있었을 겁니다. 늘 ‘해바라기’가 그려진 시집에 눈이 가닿곤 했던 것만 봐도 강선생의 울증은 서현 씨로부터 촉발된 건 분명한데, 그렇다고 서현 씨를 보고 난 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전에 없이 맹렬한 반추랄까, 아니면 응시를 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옳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전 아무에게도 서현 씨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날, 그러니까 강 선생이 물에 빠지던 날도 강 선생은 한쪽 주머니에 그 시집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서현 씨가 한 해 전 가을에 결혼을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더군요, 하지만 강 선생의 우울이 그날의 사고를 가져온 간접적인 원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서현 씨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곤 저라도 말할 수 없는 거였지요. 그래서 그날 강 선생의 기분상태에 대해 경찰에서 진술을 했습니다. 서현 씨 얘기는 꺼낼 수 없었어요.”
박 선생님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 제 말씀에 부디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저는 다만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엇던 얘기를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서현 씨니까요. 서현 씨가 아니라면 제가 이런 얘길 누구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서현 씨가 아니라면 누가 제 얘길 들으려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서현 씨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어요.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그들에게 이런 얘기 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미 말했듯, 저는 서현 씨가 강 선생 우울의 포괄적 원인이었을망정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봐요. 그리고 강 선생이 죽은 직접적인 원인이란 것도 강 선생이 수영을 못했다는 점이고, 어이없게도 그걸 제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되겠지요. 사람들은 그날 강 선생의 기분상태까지를 제가 조작해낸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러건 말건, 사실이야 어떻든 간에 저는 이미 그들에 의해 가해자로 낙인 찍혀 있으니까요. 제가 서현 씨한테 이런 말 한다고 해서 그들의 오해가 풀릴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안 풀려도 상관없습니다. 상관없이 전 서현 씨한테 말하고 있는 거니까요..... 부담가지시라고 이런 말씀 드리는 거 결코 아닙니다. 부담을 드리려했다면 제가 서현 씨를 직접 찾아가 먼저 말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서현 씨가 이곳에 내려와서 강 선생의 무덤을 찾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또 오늘이 마침 강 선생의 기일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서현 씨는 강 선생의 기일에 찾아와서 저에게 무덤의 위치를 물으셨던 겁니다. 이 알 수 없는 우연이 저에게 말을 꺼낼 용기를 준 거지요. 제가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서현 씨는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미 강 선생과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인연의 이유와 내용과 성격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다고 하여 존재하는 뭔가가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지요. 이 점에 대해선 저나 서현 씨나 생각이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제가 드릴 부담이 있다면, 그건 이미 서현 씨가 갖고 있었던 걸 거라는 말입니다.”
저는 박 선생님의 말씀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마다 반복되던 불안, 충동적인 외출,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충격적 소식은 이미 저를 걷잡을 수 없는 궁금증으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날이 7월 22일이었지요. 박 선생님의 말씀이 저에겐 결코 부담일 수 없었습니다.
“박 선생님이야말로 부담이 크시겠어요. 마을사람들의 오해 말입니다.”
저는 분명 <오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면서 저도 박 선생님을 바라보았지요. 박 선생님은 제 눈길을 피해 다시 들판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오해긴요. 강 선생이 죽은 건 저 때문이었는걸요.”
제가 물었지요. 박 선생님은 빈 종이컵에 다시 소주를 따라마셨습니다.
“무언가 저한테 말할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전 그렇게 느꼈지요. 그래서 저수지에나 가자고 했던 겁입니다. 제가 가자고 했지요. 그곳에 가지만 않았어도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사고가 날 거라는 걸 알았다면 박 선생님이 저수지엘 가자고 하셨겠습니까. 누구나 앞일은, 그것도 돌발적인 일은 알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마침 제 조카아이가 물에 빠져버리고 만 거예요. 평소에 그놈이 날 잘 따라다녔는데 그날도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던 거예요. 그놈을 쫓아버리지 못한 것도 제 불찰이었습니다.”
“공연한 자책이세요.”
“공연한 게 아닙니다. 그놈이 물에 들어가는 걸 말리지 않은 게 접니다. 결국 그놈이 물에 빠져버렸어요. 머리통이 물위로 들락날락거리는데 삼촌이란 작자는 손을 못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 선생님은 수영을 못하셨으니까요.”
“이장님이 그러시든가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그래도 뛰어들었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수영을 못한다고 발만 동동 구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목숨부터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참을 수가 없어요.”
박 선생님은 서둘러 빈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 그래요. 제 입장만 강변한다면, 강 선생을 너무 믿었기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요. 제가 제 목숨을 먼저 생각했던 게 아니라 강 선생의 존재를 너무 믿었던 거라고 말이지요. 실제로 강 선생이 곁에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믿어주지 않았어요. 웬 줄 아세요?”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의 생각대로였기 때문이에요. 강 선생한테 기댔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먼저 저는 제 목숨을 생각했던 겁니다. 조카녀석과 함께 물에 빠져 죽는 게 두려웠거든요. 이런 말 서현 씨한테 처음 하는 거예요, 전 정말 그 정신없던 순간에도 두렵기만 했어요. 그런 제가 정말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 저한테가 처음이라구요?”
제가 물었습니다.
“전 마을사람들에게도 전부 솔직히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못난 것. 두려웠다는 것. 그래서 강 선생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그런 것마저 마을사람들한테는 교활한 변명처럼 들릴 터였습니다. 사람을 떠밀어 물에 빠뜨려놓고 다른 말로 얼버무린다고 생각할 터였습니다.... 하기야 제가 떠민 것이지요.”
“박 선생님이 떠밀지 않았다는 것은 경찰뿐만 아니라 박 선생님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지 않습니까?”
“떠민 것입니다. 조카아이가 점점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강 선생을 쳐다보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강 선생도 저와 똑같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때 제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강 선생의 표정이 곧 제 표정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때 저는, 아이들한테 체육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강 선생이 어째서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데 저러고 있을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얼른 뛰어들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지요. 강 선생이 그러고 있는 게 답답하고 원망스럽고 그랬습니다. 나라도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요. 아이는 가라앉고 있었으니까요. 변명 같습니다만 1초만 더 지체했어도 저는 물에 뛰어들었을 겁니다. 순간이었지요. 하지만 결국 강 선생이 먼저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된 거예요. 강 선생님도 박 선생님과 똑같은 맘이었을 겁니다. 목숨을 아깝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두 분 다 그 상황에 놀라고 계셨던 것뿐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두 사람의 맘이 똑같았었다구요? 목숨을 아깝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두 사람 다 그 상황에 놀라고 있었던 거라구요?”
박 선생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강 선생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전 아니었어요. 물에 빠지면 나는 죽는다고만 생각했지요.... 강 선생이 왜 그토록 망설였는지를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강 선생이 물에 가라앉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조카놈을 구하느라 강 선생이 탈진한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 그만 죽어버렸잖아요. 그 사람도 나처럼 수영을 못했던 것입니다. 설마 했는데, 그랬던 거예요. 강 선생이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지요. 강 선생이 수영하는 걸 본 학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민들도 없었고요. 수영을 못하는 사람을 제가 떠밀다시피 한 셈이지요. 그 뒤로 저는 강 선생의 마지막 표정에 오래도록 시달렸습니다. 살려달라는 표정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노예주처럼 매정하고 가혹했던 겁니다. 그때 제 표정과 강 선생의 표정이 같았을 거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승사자거나 사형집행인이거나 악랄한 고문기술자의 인상이었을 겁니다. 제가 그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던 겁니다.”
저는 박 선생님께 무슨 말인가를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른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겨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러니까 강 선생님이 수영을 할 줄 몰라 망설이고 있었던 거라면, 강 선생님은 누구보다 박 선생님의 두려움을 가장 잘 이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 선생님은 박 선생님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글쎄요. 강 선생이 그걸 알고 있었을까? 말한 기억은 없는데....”
“모르고 계셨더라도 그 순간 깨달으셨을 겁니다. 조카가 물에 빠졌는데 삼촌인 박 선생님께서 속수무책 발만 구르고 계셨으니 강 선생님이 몰랐을 리 없겠지요. 강 선생님은 박 선생님의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물속으로 들어가셨을 거라는 겁니다. 박 선생님을 이토록 고통스러워하시는 걸 지하의 강 선생님이 아신다면 매우 안타까워하시지 않을까요. 박 선생님이 고통스러워하시면 강 선생님도 고통스러워하실 겁니다.”
박 선생님이 느끼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까 하여 드린다고 드린 말씀이었습니다만, 저는 또다른 궁금증을 못 이기고 우선 그렇게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제가 말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을사람들 말이에요. 박 선생님이 처했던 사정을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벌써 6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마찬가진 것 같아요. 애당초 당시의 자세한 사정 따위는 따져볼 생각도 않고 무턱대고 박 선생님을 가해자로 밀어붙이려 했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요. 사건의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보다 박 선생님에 대한 단죄가 앞선 것 같다는 말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미 박 선생님이 그르다고 판단해버린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허허허.....”
박 선생님이 하늘을 보고, 허망하게 웃으셨습니다.
“... 역시 외지 사람이시라 그런 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런 게 있긴 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의 누에 그런 게 보이지 않습니다.”
“왤까요?”
“오랜 구원(舊怨) 때문이지요.”
“구원...”
“부친께서 지은, 업보 같은 게 있습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만, 우리 사회에선 원한이라는 게 세습되게 마련이지요.”
그게 무언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선 원한이라는 게 분명히 세습되는 거니까요.
“저는 그들한테 원한이 없습니다. 저는 그들이 어째서 저와 제 가족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에게 아버지는 분명 가해자셨습니다. 물론 절대적 가해자는 아니었지요. 어떤 세상이 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가해였고 피해자였습니다.”
“6. 25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유일한 만석꾼 집안이었습니다. 용동리의 거의 모든 땅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소유셨다니까요. 지금은 그게 이상합니다만 그때만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지요.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농토가 지주들의 것이었고, 그런 체제였던 겁니다. 이 사회가, 그런 체제가 분단과 전쟁으로 한바탕 근본부터 혼란의 와중에 계급적인 적대관계가 형성될 수박에 없었고, 따라서 한쪽이 피해자든 가해자든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랬겠지요. 다 아는 얘깁니다.”
“북한군이 밀고 내려왔을 때, 소위 그들에 의해 소작인들의 신분이 해방되었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어야만 했던 충격과 수치가 어땠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어요. 물론 소작인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지요. 계급이란 건 다른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해에 걸려 있는 문제였으니까요. 사람의 품성을 따질 일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의 한 시점에선 그랬습니다. 혼란기였고 난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쪽에게만 함부로 잘잘못을 물을 수는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건 그 난리를 겪지 않았던 저 같은 전후세대에게나 가능한 이해지요. 그때는 아무래도 죽느냐 죽이느냐는 문제로 다급했었을 겁니다. 세계관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는 거지요. 그랬기 때문에 거기엔 원한이라는 게 싹틀 수밖에 없었겠지요... 아버지의 업보라는 것도 그런 겁니다. 다분히 봉건적인 생산관계 질서 속에 있었던 아버지였던만큼 당신의 처신이 전혀 그르다고만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양쪽 다 얼마간은 옳고 얼마간은 옳지 않았겠지요. 다만 이쪽에 의해 저쪽이, 그리고 저쪽에 의해 이쪽의 선악이 규정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도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였으니까 그 양상이란 극단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지요. 재산을 빼앗고 빼앗기는 일이었습니다. 제도와 질서가 깨지고 화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도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일대 다수의 대립이었으니까 아버지의 처신은 자연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유엔군의 상륙이 있었고 용동리에선 인민위원장이 살해되었지요. 그 인민위원장은 어떤 사람이었냐면 전쟁 전에는 소작인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소작인들의 대표였던 셈이지요. 소작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던 사람이었던만큼 용동리 주민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소작인들은 그의 죽음에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가 누구에게 어떻게 살해되었든, 그 혐의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박 선생님의 아버님께서요?”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때는 국군이나 경찰에 의해 부역자들이 처형되던 때 아니던가요? 굳이 아버님께서 그 일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물론 아버지는 간단한 조사만 받고 곧장 풀려나셨답니다. 저도 아버지가 직접 그 일을 하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때의 정황을 아무리 따져봐도 아버지가 인민위원장을 살해할 이유는 없었지요. 아버지가 사람을 죽일 수 없을 만큼 유약하거나 인품이 높으신 분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서현 씨 말대로 군과 경찰이 북쪽에 부역한 사람들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마당에 굳이 아버지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경찰에서도 그렇게 판단을 내린 거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군요.”
“그래서 원한이라는 겁니다. 인민위원장을 누가 죽였든, 사람들의 원한은 일찍부터 아버지에게 쏠려 있었으니까요.”
“그 일이 어떻게 강 선생님의 죽음과 연관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도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다 끝난 일인 줄 알았지요. 아니, 끝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는 아버지와 마을사람들 사이의 구원이 어떠하든 상관치 않기로 했었습니다. 저만큼이라도 원한 따위를 세습받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이미 50년이나 지난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 원한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저는 놀라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한번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제 아비를 빼닮았다는 비난을 듣기 싫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때 아버지는 인민위원장을 살해해놓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잡혀 죽을 걸 알고 미리 목숨을 끊었다는 게 아버지와 경찰의 주장이었습니다. 제가 마을사람들 앞에서 강 선생의 우울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웠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강 선생을 물속으로 떠밀었다는 마을사람들의 오해 때문에 제가 괴로워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으니까요. 저는 저와 강 선생 사이의 관계가 의심받고 왜곡되고 악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만든 것이 결국 저라는 거지요. 저의 못난 행동이 강 선생과 강 선생의 죽음마저 우습거나 헛된 것으로 만든 거예요. 강 선생 앞에서 부끄럽고 죄스러운 건 저, 저 자신 때문입니다....”
박 선생님은 고개를 숙이셨스빈다. 더 이상 소주도 드시지 않았지요. 박 선생님은 자신이 수영을 못했다는 것, 그래서 선생님께 조카의 구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아파했습니다. 목숨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면 수영을 하고 못하고 간에 물속으로 뛰어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자기 대신 선생님이 돌아가신 거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선생님.
그제서야 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째서 여름마다 선생님이 절 부르셨었는지를요. 물론 제가 그걸 얼른 알아차라지 못해 결국 6년이나 지나서야 선생님을 찾게 되었습니다만, 늦게나마 알 수 있었던 겁니다.
선생님은 박 선생님의 아픔을 알고 계셨습니다. 땅속에 누워 계시면서도 선생님은 박 선생님을 늘 안타깝게 생각해오신 겁니다. 그리고 박 선생님의 고통을 덜어줄 사람은 저라는 것을 아셨고, 해마다 저를 부르셨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곳에 간 것이었습니다.
“강 선생님이 수영을 못하시는 분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되셨다고요?”
산을 내려오면서 박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정말 강 선생이 수영을 못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허망하게 물에 빠지고 만 겁니다. 물론 조카놈을 건지느라 탈진했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평소 제가 보아왔던 강 선생이라면 그 정도에 탈진할 사람은 아니었지요. 그가 죽고 난 다음에야 그도 나처럼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때부터 전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모든 학생들한테 일일이 물었습니다. 주민들한테도 물었습니다. 강 선생이 수영하는 걸 본 사람이 있는지를 찾아다녔습니다. 길 가는 다섯 살바기 애한테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제가 죽인 것이었습니다. 제가 떠민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적어도 저를 대신해 죽은 것이었습니다.”
박 선생님은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 듯 어깨를 움츠려 떨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델 빠뜨렸어요, 박 선생님은.”
제가 말했습니다. 박 선생님은 제 말의 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 한 군델 더 찾아가 보실 걸 그랬어요.”
“한 군데라니요?”
박 선생님이 걸음을 멈추고 되물으셨습니다. 제가 말했지요.
“강 선생님이 유년을 보냈던 아동보호시설이지요. 태안읍 어딘가에 있다는....”
“아동보호기관 말입니까?...”
“예. 그 보호시설 앞에 너비가 2, 30미터쯤 되는 긴 수로가 있었답니다. 관개수로였겠지요. 예닐곱 살부터 여름이면 아이들은 그 수로의 수초를 붙잡고 물장구를 쳤습니다. 누군가가 수영을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그래서 배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물속에 들어가 더위를 식히며 장난을 치는 거였지요. 그러다가 몸이 물에 뜨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마침내는 몇 미터씩 개헤엄을 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곤 말할 수 없었지요. 인정을 못 받았던 겁니다. 수영을 할 수 있고 없고는 수로를 건너갔다 올 수 있느냐 없느냐로 판결이 나는 거였지요. 수로의 폭이 2, 30미터쯤 됐으니까 그 수로를 건너갔다 오려면 적어도 30미터쯤은 안전하게 헤엄을 칠 수 있어야 했겠지요. 하지만 대개의 아이들은 7미터나 겨우 10미터쯤 헤엄을 할 줄 있다면 충분히 건너갔다 올 수 있다는 게 아이들 나름대로의 믿음이었습니다. 강 선생님도 그랬지요. 계산으로만 따진다면 수로 한가운데서 익사해야 맞는 거지요. 수로 중간 지점은 어른의 키로 두세 길 되었던 모양입니다. 빠지면 그대로 죽는 거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그 무모한 도전을 해마다 시도했고, 모두 성공했습니다. 강 선생님도 일곱 살 때 수로를 건넜습니다. 물이 깊어질수록 수온도 낮아져 겁먹은 아이의 배 아래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지나갔지요. 아주 낯설고 기분 나쁘고 두려운 냉기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아이는 필사적인 힘을 내는 것입니다. 물장구나 치던 때는 물에 뜨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죽음과 마주선 순간에는 그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쉬워졌습니다. 힘들기는커녕 저절로 몸이 쑥쑥 나가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했습니다. 수로를 다 건너갔을 때는 이미 다시 돌아오는 게 두렵지 않았지요. 돌아올 때는 여유와 멋까지 부리며 한껏 수영 솜씨를 뽐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운 수영은 설령 몇 년 동안 수영을 쉬더라도 잊어버리지 않는 법이지요. 문제는 자신감일 테니까요.”
“강 선생이 한 말입니까?”
박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을 성공케 하는 것의 반은 모험심이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철저한 준비라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없거나 두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물론 강 선생님이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런 말을 이제야 듣게 되다니....”
“말씀드렸지만, 강 선생님도 저한테 수영 얘기를 하신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하나의 예를 든 것뿐이지요. 사람들은 때로 지나칠 만큼 충분한 준비와 연습을 하고도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심지어는 실행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준비와 연습에만 몰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셨지요. 준비와 연습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마는 경우 말이에요. 그런 말씀을 하신 거에요.”
“믿고 싶지만... 왠지 쉽게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너무 오랫동안 강 선생님이 수영을 못하시는 분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박 선생님은 끝내 강 선생님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싶으신 건지도 모릅니다. 그랬기 때문에 강 선생님이 저를 불러내리신 거겠지요.”
“불러내렸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래요. 박 선생님에 대한 강 선생님의 우정이 저를 불러내리신 거예요.”
그제서야 저는 제가 그곳에 가게 되기까지의 사정들을 박 선생님께 좀더 소상히 말씀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사롭지 않던 기미와 느낌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서쪽으로 설핏 기울었습니다. 산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한여름의 서슬이 완연했던 나뭇잎이며 풀잎들이 갑자기 얌전해진 듯했습니다. 햇빛의 각도에 따라 풀잎과 나뭇잎들의 기세도 달라지는 거였습니다. 한여름이 가기엔 아직도 멀긴 했지만 오후 한나절을 지나는 산은 갈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폐교된 학교 곁 고샅을 지나다가 박 선생님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박 선생님 곁에 말없이 서 있었지요. 박 선생님은 길고 깊은 한숨을 두어 차례 내쉬었습니다.
“서현 씨 차인가요?”
박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지금 가실 거라면 논산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제가 말했습니다.
운동장에 들어서서도 박 선생님은 한참 동안 학교를 휘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곤 저에게 물었지요.
“서현 씨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강 선생이 수영을 못한 게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강 선생님이 어린시절을 보내셨다던 그 아동보호시설엘 가보면 더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직접 강 선생님한테 들은 얘긴걸요. 그러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요. 제게 사실과 다르게 말씀하실 이유나 필요가 강 선생님한테는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박 선생님께 말씀드렸듯, 제가 여기까지 온 묘한 사정만 따져 보아도 강 선생님은 수영을 못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입니다. 제가 여기에 내려오게 된 이유는, 박 선생님께, 강 선생님이 결코 수영을 못해서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는 말씀을, 강 선생님 대신 전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저도 이곳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제가 왜 이곳엘 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밝혀진 겁니다. 강 선생님이 사고를 당해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소릴르 듣고 말입니다. 이장님과 박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말입니다. 이제 확연해진 거지요. 강 선생님은 이마 오래 전부터 자책과 번민으로부터 박 선생님이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저라고 생각하셨겠지요. 그게 선생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만 벗어나세요. 그래야만 지하에 계신 강 선생님도 안타까움으로부터 벗어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줄곧 앞쪽만 보고 운전을 했습니다. 박 선생님은 아쉬운 듯 자꾸 뒷뮤리를 바라보았지요. 저는 룸미러로나마 멀어져 가는 용동리의 풍경을 잠깐 잠깐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담 어째서... 그토록 허망하게 갔던 걸까요?”
박 선생님의 그 질문에는 그러나 저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제가 저한테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었으니까요.
제가 박 선생님을 만남으로써, 아닌게아니라 박 선생님은 오랜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도 있을 터였겠지요. 따라서 선생님도 오랜 안타까움으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구천을 맴돌지 않을 수 있을 터였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선생님께서 저를 불러내리신 이유의 전부였을까요? 그랬던 걸까요? 수영을 할 줄 아셨던 분이, 박 선생님의 말마따나 허마앟게 가셨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래야만 했었는지에 대해선 선생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셨던 겁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박 선생님을 만나 드릴 말씀이 있었듯, 박 선생님도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저를 만나 해주실 말씀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박 선생님을 만났던 것은 박 선생님께 무슨 말인가를 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박 선생님으로부터 무슨 말인가를 전해듣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박 선생님께 들었습니다.
박 선생님은 제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추측>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추측>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지요. <영향>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나 그것도 좀더 <복잡하고> <근원적인 어떤 것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며 <연정이라 단정할 수 없>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맹렬한 반추와 응시>였을 뿐, 저라는 존재가 선생님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포괄적 원인>에 해당한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의 말씀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거였는지를 저는 압니다. 하지만 박 선생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시선이 자주 해바라기 표지에 머물렀다는 것, 그리고 사고 당일날에도 선생님은 그 시집을 한쪽 주머니에 갖고 계셨다는 것, 제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저라는 존재가 선생님의 우울과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다고 박 선생님은 말씀하셨지만 저는 도대체 그 직접과 간접의 경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돌아가셨거든요, 이미 돌아가셨는데 어떤 이유와 원인이 직접적인 것이었든 간접적인 것이었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선생님. 아니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좋아한다는 데도 수천 수만가지의 차별적 수사가 가능하겠지만 저는 다 거두절미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좋아하셨습니다. 저한테 부담이 될 것 같다고요? 그런 염려까지는 하지 마세요. 부담이고 아니고는 선생님이나 박 선생님이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행여 부담이 될까 봐 끝내 이 일을 저한테 안 알렸다고 해보세요. 그럼 제가 행복할까요? 2, 30년 뒤에 제가 어쩌다 알게 된다면(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어쩌시려구요?
다만 저는 선생님께 죄송할 뿐입니다. 선생님이 그럴 거라는 걸 저만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제 생각만 했던 탓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과 홀연한 증발, 터무니없던 그 짧은 순간에도 저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마음에 또렷한 발자국으로 찍힐 수 있다는 사실은 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철부지였습니다. 그랬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부담을 안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부담은 땅속에 계신 선생님이 박 선생님에 대해 가졌던 부담이나, 박 선생님이 선생님에 대해 가졌던 부담과는 다른 것입니다. 선생님은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박 선생님의 부담을 덜기 위해 저를 불러내린 것일 뿐, 저에게 새로운 부담을 지우기 위해 불러내린 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릅니다. 그 부담과 이 부담은 다른 겁니다. 선생님이나 박 선생님이 갖고 계셨던 부담은 의당 해소돼야 할 것이었습니다. 사실이 밝혀지면 저절로 해소될 것이었습니다. 사실이 밝혀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제가 안을 부담이 생긴 것뿐이지요.
선생님이나 박 선생님이 그동안 갖고 계셨던 마음의 부담은 그러니까 온당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대신 제가 갖게 된 부담은 온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것입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다만 죄송할 뿐이에요. 제가 느낄 부담 같은 건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선생님 약속드리겠습니다. 제 부담이 선생님의 부담이 되게 하진 않겠어요. 박 선생님처럼 고통스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죽음의 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선 뻔뻔한 말이겠습니다만 전 그걸 결코 부담으로만 생각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전 이제부터 선생님을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좀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삶 속에 선생님의 죽음이 깃들여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한시라도 허투루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모습을 선생님이 지켜보실 테니까요. 제가 열심히 살아야 선생님도 그곳 세상에서 편히 계실 거라고 감히 생각하는 것, 살아 있는 자의 궁색한 자기변명만은 아니라고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박 선생님.”
용동리는 이제 거울 속에 먼산으로만 보였습니다.
줄곧 뒷유리창을 바라보시던 박 선생님이 자세를 고쳐앉으셨습니다.
“고맙다니요?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박 선생님은 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용동리의 산빛은 저렇게 멀어져 가는데, 강 선생님의 무덤은 멀어지지 않아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차가 달리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따라오고 있어요.”
박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 말이에요...”
제가 말했지요.
“... 함께한 시간이라든가 내용 따위에 비례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박 선생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제가 말을 이었습니다.
“경험 이전의 것들이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런 정보도 나누지 않았는데 사슬이 될 수 있나요?”
“서현 씨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꼭 전생이 아니더라도 경험 이전의 어떤 세상이 현실에 작용하는 힘을 일컬어 우리는 인연이라 부르는 건지도 모르지요. 제가 강 선생을 좋아했던 것도 그런 작용이 팔할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박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걸 모를 뻔했어요. 알게 해주신 것, 고마워요.”
그제서야 박 선생님은 제가 왜 고맙다고 했는지를 이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제가 여름마다 어떤 불안감에 시달렸던 것, 충동적으로 용동리에 갔던 것, 그리고 선생님의 죽음과 박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 그런 것들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들이었지요. 박 선생님의 말씀마따나 그것은 현실에 미치는, 경험 이전의 세상이 작용하는 어떤 간절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저나 박 선생님이나 그날 그걸 알게 되었던 거지요.
마을은 점차 멀어지는데, 우리가 손에 퍼런 물을 들이며 풀을 뜯었던 선생님의 무덤이 멀어지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냥 기억이나 마을에 선생님의 무덤을 간직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거지요. 선생님의 존재가 차의 속도를 이겨내며 우리를 따라왔던 것은, 인연이라는 것이 삶과 죽음의 세계을 넘나들며 엄존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박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당시 제 느낌을 좀더 솔직히 말할 수 있겠군요. 강 선생 그 사람... 아무래도 서현 씨를 사랑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 저는 이해할 수 없었지요. 저만 이해 못했던 게 아니라 아마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저는 웃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웃으면서 박 선생님한테 말했습니다.
“저라도 그랬었을 테니까요. 아니, 그랫던 셈이니까요....”
박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 하지만 이제 알겠어요. 인연이란 주어지는 것이지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제가 웃으며 말했던 까닭을 선생님도 아시겠지요. 그때 선생님은 제 차창 밖에서 줄곧 절 보시고 계셨을테니까요.
6
아이는 천인국을 들고 있었습니다
원추천인국이라는 꽃 말입니다. 원추형의 꽃잎을 가졌다고해서 원추천인국인 모양입니다. 이름이 어째서 천인국(天人菊)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국화의 일종이어서 천인국이겠지요. 하지만 국화과 식물의 잎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이른바 심상(心狀)의 결각(缺刻) 엽편(葉片)은 아니었습니다. 이파리가 심장의 모양도 아니었고 가장자리가 파이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국화 같지는 않았습니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라면 이름도 외래어를 그대로 따올 법한데 천인국이라는 한자를 이름으로 달고 있는 꽃이었습니다.
어쩌면 중국을 통해 들어온 꽃이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아주 오래된 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거나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볼 수 없었던 꽃입니다. 요즘엔 국도변이나 관공서의 화단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말이지요.
그 꽃이 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잎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노란색 꽃잎? 우선은 그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주 노란색이었지요. 해바라기 꽃잎 색깔이었습니다. 선생님댁 뒤안에 피어 있던 쑥갓꽃잎이 그랬지요. 그리고 선생님 무덤 뒤에 피어 있던, 쑥방망이라는 꽃의 꽃잎도 그런 색깔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노란 꽃잎 때문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꽃이란 대개 붉은 꽃 아니면 노란 꽃일 테니까요. 그 꽃을 들고 있던 아이. 그 아이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천인국은 이제 흔한 꽃이었습니다. 그날 남편과 함께 들렀던 입양기관의 화단에도 그 꽃이 한창 피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그 많은 꽃 중에 하나를 꺾어들고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들고 있던 노란 꽃은 꽃이라기보단 하나의 기호와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표식 같기도 했고요. 무슨 뜻인가가 내포된, 무언가와 은밀히 소통할 수 있는 비표(秘標) 같았습니다. 화단에 피어 있던 다른 천인국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어째서 아이의 꽃이 제 눈엔 그렇게 비쳤을까요. 그 꽃을 들고 있던 아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돼보였습니다. 한눈에 봐도 말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보호시설에 있는 아이들한테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경계심과 소외감 따위가 묘하게 뒤섞인 눈빛을 그 아이에게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인상은, 그 아이가 들고 있는 천인국이 각별한 기호로 보일 만큼 특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천인국이니 이파리니 빛깔이니 하는 것들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 아이 앞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화단앞에 천인국처럼 서 있었고, 저와 남편은 곧장 상담실로 향했지요.
한 아이를 내 아이로 입적시키는 데는 수월치 않은 조건과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국내 입양이 해외 입양보다 훨씬 어렵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입양기관에서는 애당초 양부모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아이에 대한 절실한 바람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런 건 입양기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라면 으레껏 갖고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만 앞세운다고 될 게 아니었습니다. 핏줄에 대해서라면 유별한 정서가 있는 사회이고, 그만큼 파양(罷養)도 잦기 때문이겠지요. 이해 못할 것도 없었습니다. 한 아이의 인생이 좌우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양부모의 자격을 심사하는 데 지나칠 만큼 외압적인 조건들을 따졌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와 남편은 국가의 중요비밀사업에 관련된 회사에 입사원서를 쓰듯 입양신청서를 써야만 했습니다. 함께 제출해야 할 구비서류라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신분과 수입과 입양 이유에 대해 준엄하게 묻는 듯한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제가 한순간 망설였던 것은, 어쩌면 입양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자격은 저희들에게도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다만 과연 아이를 데려다 키울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저 자신한테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양기관을 찾기 전에 이미 그점에 대해서라면 남편과 충분한 논의가 있었고 각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상담실 의자에 앉아 신청서 양식의 세부 항목들과 마주하게 되자 아이를 데려다 키운다는 사실이 새삼 엄혹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거지요.
아이가 필요해서, 그러니까 아이에 대한 우리들의 필요가 입양을 결정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아이 쪽의 필요에 충분할 수 있는 존재들이냐는 점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고민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신청서 양식의 세부 항목들은 바로 우리에게 그 점을 끊임없이 묻고 있었습니다.
저는 힘겹게 신청서를 적어 내려가다 잠시 손을 멈추었습니다.
“내가 쓸까?”
남편이 물었습니다. 저는 말없이 상담실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곤 대답했지요.
“아뇨. 내가 쓸게요.”
그리곤 지체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지체없이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한 항목만 남겨놓고 말입니다.
저는 상담원에게, 그 빈 항목을 짚으며,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말했습니다.
“저 아이를 키우고 싶어요.”
상담실 창 밖을 가리키며 제가 말했습니다. 천인국을 든 사내아이를 가리키며 말이지요.
상담원이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담원의 표정으로 봐선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그 늙고 뚱뚱한 여자 상담원이, 제 기분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 웃음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아이를... 그렇게 고르는 건 아닙니다.”
제 안에는 이미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고른 게 아닙니다. 주어진 겁니다.”
상담원의 얼굴이 금세 난색으로 변했습니다.
“저 아이는 일곱 살입니다. 게다가 한 번 파양의 경험이 있어요. 방문자께서는, 아직 젊으시니까 3세 이하의 영아가 좋을 듯 합니다.”
“저 아이가 아니라면 안돼요.”
제가 말했습니다.
“여보....”
남편이 제 팔을 흔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남편의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남편께는 미안했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제 아이를, 아니 누구의 아이든, 누군가와 상의해서 결정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비록 남편일지라도 말입니다. 한 생명이, 한 존재가 상의와 타협의 대상이 되다니요.
“빈 칸에 저 아이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저는 완강했습니다. 남편은 더 이상 저를 말리지 못했습니다. 잃었던 아이를 되찾기라도 한 기세였으니까요.
“말씀드렸습니다만...”
상담원이 커다란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꺼지도록 큰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습니다.
“... 저 아이는 일곱 살입니다. 한번 파양 경험도 있고요. 그 동안 몇 차례 저 아이에 대한 입양 신청이 있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왜냐면, 이제 저 아이에게도 의향을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곱 살이라는 것, 파양을 기억학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신청을 거부했던 아이라는 것... 이 세가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좋으시다면 적어두지요....”
상담원도 더 이상 저를 설득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저와 남편이 상담실을 나올 때까지 여자 상담원은 얼굴을 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말이 먹혀들지 않을 만큼 저라는 사람이 까다롭고 고집스럽게 보였을 테니까요. 그런 데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저와 같은 방문자를 가장 꺼릴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제 뒤를 묵묵히 따랐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겠지만 어떻게든 제 기분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저는 그의 발자국 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지요.
저는 낯선 뜰을 가로질러 아이에게로 갔습니다. 아이는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이에게 웃음을 지어보였지요. 아이의 눈에는 하늘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내년엔 학교엘 들어가야겠구나.”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똘망거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저와 남편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학교에 갈 때는 아주 노란 티셔츠를 입으면 어울리겠어. 아주 잘 어울리겠어.”
아이는 눈으론 저와 남편을 여전히 응시하면서 손가락 끝으론 가만히 자기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안녕. 또 보자.”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저는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인연이란, 스치듯 지나치는 순간 바람처럼 이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스치듯 지나쳐버리고 말 수는 없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버림으로써 초래되는 결과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불현 듯 그걸 깨달았던 것입니다.
남편에겐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도 제가 어째서 그날 그토록 완강했었는지를 점차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입양기관에서 연락이 왔으니까요. 저보다 남편이 더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저보다도 그 아이가 먼저 현실에 작용하는 인연의 힘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아이의 서류에는 상담원의 전언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는 파양 후 2년 동안 여섯 차례나 입양 신청을 거절한 끝에 귀하를 부모로 받아들였습니다. 귀하와의 인연이 각별한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이의 기아 발생일은 1995년 9월 17일로, 발생 당시 생후 14개월 정도 경과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아이의 생일을 입양일로 하시든지, 아니면 귀하가 특별히 정하고 싶은 날로 정해 기억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귀하와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우리 아이의 생일을 7월 22일로 해요...”
남편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 아니, 23일로 했으면 좋겠어요. 7월 23일, 좋잖아요?”
“당신이 좋다면 그렇게 해요. 아예 생일을 1년에 두 번 차려 주는 게 어떨까?”
남편은 아이의 얼굴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해서 아이의 생일은 7월 23일이 됐습니다. 선생님은 1992년 7월 22일에 돌아가셨고, 아이는 다음날인 7월 23일에 태어난 것입니다. 아이가 제 곁에 있는 한 선생님을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여름도 이제 더 이상 불안하거나 하지 않겠지요.
이것입니다. 이것이 그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좀 늦었지만, 그간의 일들을 선생님의 영전에 이렇게 아룁니다.
내일은 뜰 앞에다 하늘나라의 국화인 천인국을 심겠습니다.
땅 위엔 해마다 노란 꽃이 피겠지요. 선생님. 어떤 인연도 결코 사소한 것일 수 없다는 것, 잊지 않겠습니다. 평안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