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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가루의 조상이

Bollnow 2024. 3. 29. 06:34

캉가루의 조상이

계용묵

 

1

실제를 이상화하기는 쉬워도 이상을 실제화하기는 그렇게도 어려운 듯하다.

문보가 약혼을 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할 적에도 이상과는 너무 멀었던 사실이다.

'내가 약혼을 하다니!'

앞길의 판재에 현재를 더듬어 미래를 내다볼 땐 천생에 죄를 지은 듯이 마음이 두렵다.

멘델의 유전학적 법칙은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정문보가()의 유전적 내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죔손이, 절름발이, 곱사등이, 앉은뱅이, 애꾸눈이 - 대대로 이런 불구자를 계승하여 내려오는 가계(家系)에서 자기 따라 이, , , 비가 분명하고 사지 백체가 제대로 가진 인간으로 대를 가시어 놓기 바랄 수 있을 것일까?

오십여 생을 손이 묶인 듯이 쓸 수 없던(쥠손이) 아버지의 불행에 비하면 한 눈이 멀다는 자기는 행복된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차라리 한 눈이 마저 멀어 세상의 모든 것을 애초에 볼 수가 없었더면 얼마나 행복된 일이었을까? 불구의 고민을 잊을 때가 없거니, 이제 자기의 불구한 고민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불행한 생명을 세상에 내어 놓아 자기와 같은 고민 속에서 일생을 보내게 한다는 것은 몇 번이고 생각해도 그것은 인생에 대한 죄악이었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불구의 불행한 씨를 근절시켜 놓는 것이 차라리 그들의 행복이리라, 결단코 결혼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인생의 반생을 한뜻같이 독신으로 살아온, 아니 영원히 살려던 문보였다.

비록 한 눈은 멀었을망전 그것이 흉하여 자수의 짙은 안경을 매양 끼고 있으니 좀 건방져는 보일망정 문보가 불구한 인간이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 나머지 부분의 붙음붙음이 분명하고 고르게 정리된 뚜렷한 용모와 체격의 남자다운 늠름한 품격이 남달리 이성에의 흠모의 적()이 되어 동경의 학창 시대엔 결혼 신청을 받기도 실로 수삼차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건만, 이런 것들을 물리치기에는 조그마한 무란도 없이 그의 생각은 철저하였다.

눈에 들고자 갖은 아양을 피워 가며 계집으로서의 온갖 미를 아낌없이 자기의 앞에서 떨어 낼 때 인생의 본능에 자극을 아니 받을 수 없어, 그것을 이겨 내기란 참으로 괴롭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한 번은 동경에서도 이름난 미인으로 유학생들이 입술에서 오르내리고 있던 금봉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아까운 것 없이 바치기를 아끼지 않으려 할 때, 금봉의 미모와 정열에 청춘의 마음이 본능적으로 휘어 들어감을 억제치 못하여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한 적도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문보의 불구한 부분을 찾게 되므로 금봉은 그만 실색을 하고 돌아서서는 다시 찾아 주지를 않던 것이 지금도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여 오거니와, 그 후부터 문보는 이성에 대한 교제는 더 한층 각별히 주의를 하여 왔다. 학창 시대에 동경서 같이 노닐던 벗들은 학업을 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모두 결혼들을 하여 벌써 아들딸을 둘씩이나 둔 사람도 있었건만 문보는 애써 결혼에까지는 맘을 두지 않아 왔다.

그러나 미자와의 교제가 도타워 갈 때, 그것은 지난겨울이었다.

하루는 새로 발표한 창작에 대하여 뜻 아니한 미지의 여성으로부터 한 장의 찬사를 받게 된 것이 그의 맘에 밈을 돌린 시초다.

문단에 나선 지 칠팔 년 작품을 발표한 수도 적지 않건만 불구한 성격이 빚어낸 그의 독특한 인생관 - 남달리 이상한 문체, 그 주의는 언제나 독자의 이해 밖()에 악평의 적()이 되어 유명 무명 간에 들어오는 투서는 누구의 것이나 판에 박은 듯이 욕으로 일관된 그 속에서 미자의 편지를 찾은 것은 확실히 한 가닥의 기쁨이었다.

비로소 예술의 이해자를 찾은 문보는 미자란 이름을 잊을 길이 없어 염두에 두고 지내 오던 어느 날 돌연히 또한 그 여자의 방문을 받은 것으로 교제는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가끔 만난대야 문단과 예술 방면의 이야기로 만족할 수 있던 미자는 차츰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의미를 은근히 비추기도 했다.

하지만 문보는 그저 모르는 듯 냉정했다.

그러나 미자의 정열은 식는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는 하려는 말을 기어코 하고야 말았다.

"선생님! 전 선생님을……."

듣기에 놀라운 소리였으나 엷은 강철같이 떨리는 음향은 그다지도 문보의 마음을 당기었다.

이럴 때면 문보는 인생의 행복을 멀리 등진 불구의 고민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괴로움에 그의 마음은 탔다.

"선생님, 선생님……."

못 견딜 듯이 정열에 타는 미자의 눈, 매어나 달리는 듯한 아양에 떨리는 몸부림 - 그래도 문보의 마음은 휘지 않았다.

"나를 잊어 주시는 것이 차라리 행복이리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할 자격을 잃고 있습니다."

"건 저를 모욕하시는 거예요, 자격이 없으시단……."

"아니 정말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합니다. 불구자입니다."

미자는 문득 놀라고 더 말이 없다.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나는 한 눈이 좀 부족합니다."

문보는 어디까지든지 미자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숨김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하였다.

그러나 이 소리를 들은 미자는 그것만으로는 불구자랄 것도 없다는 듯이 금시에 낯갗은 다시 화기에 물들며.

",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에요. 전 뭐……."

"……."

"전 뭐, 선생님의 마음의 움직인 것 같애요. 사람을 용모로 따진다면 그건 결국…… ? 전 선생님을……."

놀란 것은 도리어 이쪽이었다. 불구자인 줄은 알면서도 사랑한다! 맘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외모로써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찾는 미자, 미자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 이 세상이 미자같이 참 되다면 자기는 결코 불구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다만 미자를 본다. 왜 뻐젓이 눈을 내어놓지 못하고 미자 앞에서 가리고 다니었던가? 이제 그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렇게도 열렬하게 사랑하던 금봉이가 한 번 자기의 불구한 부분을 찾자부터는 그만 실색을 하고 말던 것에 미루어 보면 미자는 범인을 초월한 초인적 존재도 같았다. 무엇인지는 꼬집어 말할 수 없으나 불구의 고민 속에서 오늘까지 찾아오던 진리는 비로소 미자의 마음속에서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미자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과는 떼려 땔 수 없는 한 개의 물체로 융합이 되는 듯 휘어들어갔다.

마음의 힘이란 그렇게도 센 것일까. 장래의 문제엔 마음을 보낼 여유도 없이 실로 그 일순간에 사라의 관계는 맺히고 약혼은 성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융합이기로 유전적 법칠이 무시될 리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그 후에 따르는 문보의 고민이었다.

 

2

날마다 근심은 더해 왔다.

'불행의 씨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과 같이 그것은 따라오고 마음은 두려웠다.

'며칠 동안에야 무에 그리 쉽게 생겼을꼬?'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에 자위(自慰), 보증할 수는 없다.

'단연히 파혼을 해야 돼.'

언제나 생각하다가는 이렇게밖에 더 맺혀짐을 찾지 못하던 그 결론이 지금도 다시 돌아와 맺힘을 당연한 일이라고 문보는 마음속에 따져 보다가도, 그러나 이미 씨가 들어 있는 몸이었다면 그 곤란할 것 같은 처리에 다시금 생각은 얼크러져, 보면 알기나 할 것인 듯이 치맛감을 마르고 있는 미자를 힐끗 치어다보았다.

"이 치마 빛은 봄빛보다는 좀 짙지?"

자기로 인하여 문보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난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미자는 혼자 즐거움에 엉뚱한 질문을 들이댄다.

문보는 하고 싶은 대답도 아니었으나 실상은 대답할 수도 없는 질문임에 잠자코 말았다.

"봄빛은 물빛보다도 짙어야 산뜻한데 그런게 원 있으야 말이지."

아무래도 그것은 마음에 개운치 않은 빛인 듯이 뒤적거리던 치맛감을 훌훌 털어 허리에 두르고, 잠깐 아래위를 훑어보며, 그리고 보아 달라는 듯이,

"아무래두 빛이 좀 짙지?"

하기 싫은 대답이라고 세 번째나 못 들은 척할 수는 없다.

"옥패(친구의 아내), 뭐 그런 빛을 입었든데?"

"아이 어찌나!"

"뭣이?"

"옥패가 이런 빛을 입으문 난 못 입어."

"건 또?"

"옥패야 벌써 애를 낳지 않었수? 애를 낳면 맘도 늙는다우."

"그러문 그 치맛감은 두었다 애를 낳어야 입겠군."

"싱겁긴!"

"싱겁긴 뉘가 싱거운데? 그렇게 빤히 알면서 그런 치맛감을 사올 때야 애가 그리워 기저귀를 마련하는 격이……."

"아이 망칙두 쉐 - 뉘가 뭐 애를 낳겠대나! 바스럭거린다니께 꼬집지 흐응!"

"배면 안 낳고 배길 장사가 있어 그래?"

"글쎄 난 죽어두 앤 안 날 테데 뭘 -."

이 말은 결코 아직 애는 안 밴 말이다.

우연한 문답에서 문보는 어렵지 않게 미자의 뱃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순간, 문보는 얼크러졌던 마음의 고삐가 스르르 하고 풀리며 결론은 다시 굳어졌다.

'당장 파혼을 해야 돼.'

"애를 배면 청춘이 간답니다."

그러나 문보는 이론을 더 앞으로 계속하려고도 아니하고 그저 파혼을 하여야 된다는 데만 열이 올라, 다시 더 여기에 마음이 돌지 말고자, 아주 굳혀 버리기로 벌떡 일어서 테이블을 마주하고 의자에 하반신을 묻었다.

어제저녁에 배달된 신문이 그대로 테이블을 덮고 있다. 집어드니 마음은 먼저 학예면을 더듬고, 눈은 이달의 창작평에 멎는다.

가장 회심의 작이라고 자처하고 싶던 이번의 작품도 자기의 것만은 또 악평의 대상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이런 작품은 아암 인류사회 이후에는 몰라도, 인류의 역사가 있기까지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단안을 내렸다.

반드시 비평가만이 작품을 바로 본다고 믿을 것은 아니로되, 벗들 사이에서도 이미 이러한 의미의 말을 여러 번 들어왔고 또 며칠 전에는 미지의 독자들로부터서도 역시 같은 뜻의 서면을 받고 있던 것을 미루어 이제 그 평점이 일치됨을 찾고 문보는 일반의 이해에 벗어나는 자기의 예술에 다시금 우울함을 느끼었다.

자기가 보는 인생관 사회관은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도 이해를 못 가지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는 현실 사회와는 인연 먼 존재 같다. 그러나, 일반의 이해를 잃었다 하여 자기의 마음을 결코 슬퍼하고 싶지는 않다. 도리어 현실을 비웃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에 공명하는 이 없으니, 자기가 옳다는 데는 자만심이 꺾이지 않아도 마음을 통하여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집단 속에 사는 개인의 심정으로서는 아니 고적할 수가 없었다.

문보는 그 작품이 실린 잡지를 집어들고 자기의 작품을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구절구절이 도리 정연한 문장이다. 한 사람의 불구자의 입을 빌려 현실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시킨 그 시미창일한 문장 속에 스스로 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문보는 문득 놀라고 눈앞에 나타나는 미자를 보았다. 써 놓은 원고를 한 장 한 장 옆에서 읽어 주고 정리하여 주던 미자가 과연 하는 솜씨라고 그 조그마한 무릎을 연거푸 세 번이나 치던 그 구절이 역시 그 구절이었던 것을 문득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보니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은 많았으되, 이 작품을 이 구절에 작자인 자기가 무릎을 쳤다. 그리고는 다만 미자가 쳤을 따름이다. 그렇게도 미자는 자기의 예술에 공명을 갖는다. 이해를 잃은 고독한 마음에 오직 미자로부터 공감을 받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듯 미자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런 미자와의 파혼이 차마 아까움을 순간 느낀다. 언제라도 미자의 마음은 싫지 않을 것 같고 생애에 있어 미자는 영원한 마음의 반려일 것 같다. 이해를 잃은 곳에 생활의 윤택은 없다.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희망일진댄 이해자를 차버리는 것은 스스로 파멸을 도모하는 것과도 같다. 가뜩이나 침울한 생활은 미자를 잃을 때 그 얼마나 더할 것일까?

못 견디게 아까운 마음에 문보는 파혼에까지 결론을 지었던 이론을 다시 이렇게도 전도시켜 보았다.

그러니, 그적에는 그 뒤에 따르는 두려운 그 유전.

문보는 가리기 어려운 괴로운 마음에 아프게 몸을 비틀었다.

 

3

"오늘 아침 신문에 사꾸라꽃이 벌써 핀댔구먼?"

약혼이 성립되던 날 결혼은 사꾸라꽃 필 무렵에 하자던 문보가 창경원에 일 주일 이래로 야앵이 개원되리라고 하는데도 이렇다 준비가 없는데 미자는 은근히 문보의 마음을 짚어 보는 것이다.

"철두 좀 빠르군. 벌써 사꾸란가!"

"아이, 그런데 참 날을 받어야 안 해요?"

문득 생각킨 듯이 미자는 바싹 따진다.

", 꽃구경은 반다시 해야 하는 법인가?"

"아니 그날 말에요.

"그날이라니?"

"아이, 왜 당신이 그적에 사꾸라꽃 필 무렵에 하자고 안 그랬에요?"

"으응, 결혼식 말야 뭐?"

"! 바루 모르는 척허지, 능측허기두."

사실 문보는 능측하였다. 미자의 말가퀴를 모를 리 없건만 대답할 말에 이미 준비가 없었으매 이야기의 빈곤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식이 그리 바쁠 게 머야."

"가식!"

"그럼 가식 아니고, 난 결혼에 예식의 필요를 그리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데…… 본시 결혼이란 마음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니, 마음의 결합보다 더 튼튼하고, 굳고, 아름다운 것이 어데 있어? 예식으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그 자체부터가 가식인 동시에 결합에의 모욕이거든."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문보는 만일을 위하여 농담 삼아 이렇게라도 말해 둘 필요를 순간 느끼었다.

그러나, 미자는 이 말을 조금도 농담으로 듣고 싶지 않았다. 농담이라 하여도 진정으로 듣고 싶을 만큼 가식을 벗어난 그 진실한 맘의 태도에 오히려 감복하는 것이 있었다. 가식에 얽매여 뜻 없는 마음으로 애석히 청춘을 썩여 내던 지난날의 결혼 생활을 연상하는 때문이다.

미자는 이미 어느 전문학교 교수와의 결혼 생활이 있어 보았다. 그러나, 인생관 사회관이 다른 그 결합에서 귀하다고 하는 개성을 살릴 수가 없어, 견디다 못하여 가정을 박차고 뛰어나온 '노라' 의 후예였다.

부모가 간섭한 강제의 결혼도 아니었고, 인물이든지 학식이든지 그 사회적 지위든지 무엇에 있어서나 남편으로서의 갖춰야 할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에 장래의 행복을 그와 더블어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결혼을 하고 지내보니 동경하던 행복은 오지 않았다. 알 수 없이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고 까닭없이 그리운 것이 있었다. 그렇게도 있는 정성을 다하여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었건만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의 우울이 있었다. 아내로서의 사랑을 받기 전에 마음의 사랑을 받고 싶었고, 또 그 마음을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정의 용해를 얻으므로 자기라는 존재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느낄 수 없는 곳에 마음의 우울은 깃을 들이고, 그리고 그것은 처녀 시절에 알 수 없이 우울하던 그런 것과는 달리 마음의 파멸을 침노하였다.

여기서 미자는 처녀 시절에 알 수 없이 마음이 허하고 무언인지가 만지고 싶게 그립던 것은 이성을 상대로 일어나는 한낱 사춘기의 여성의 마음이었음을 깨닫고 그것만을 만족시키므로 만족할 수 없는 마음속에서 아내로서의 알뜰한 정이 남편의 그것과 융합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삼 년을 하루같이 결혼이란 법망에 얽매여 뜻 없는 생을 지탱해 오다가 충실한 문보의 독자이던 미자는 지난겨울에 발표한 사람이라는 작품을 읽게 되므로 비로소 그 속에서 자기를 찾은 듯이 마음의 위안을 느끼고 불구한 문보인 줄을 알면서도 약혼까지 성립시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맘의 이해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꿈꾸며 사꾸라꽃이 필 무렵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 그래요, 예식이라는 건, 한낱 눈을 속이는 거짓이구요. 결혼식 있었다고 마음이 변한다면 그 사랑이 아니 깨어질 수 있겠어요? 깨어진 사랑이 예식에 얽매여 부부생활이 계속된다는 건, , 허수아비 장난이구……."

참으로 그렇다는 뜻을 강조하는 의미는 태도를 정색하게 가진다.

도리어 문보는 놀랍다. 난처한 경우에서 대답에 궁하여 그럴듯이 끌어다 붙인 말이 그렇게도 미자의 마음을 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여자의 처지로서는 극히 불리한 것인 줄을 미자가 모를 리 없건만 그렇게까지 미자는 허식을 떠나 참을 찾는 그 아름다운 마음에 문보의 마음은 흔들렸다. 불구한 고민 속에서의 그들의(자식) 불행한 일생을 건져 주기 위하여 절대의 독신주의를 지켜 오던 자기가 이렇게도 미자와 약혼까지 성립을 시키고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이미 그것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고 있는 자기이면서도 마음을 판단하지 못하고 거짓말로 마음의 자위를 얻으려는 자기는 도무지 사람 같지 않았다.

", 생각하면 너울을 쓰고, 반지를 받아 끼고, 맹세를 하고- 맹세는 뉘게다 하는 게에요, 우스워요. 그럼, 우린 어느 날 그저 동무들이나 청해 놓고 기념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요?"

그렇게 해도 그것은 소위 그 결혼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글쎄?"

이렇게 말끝을 흐리어 놓을 밖에…….

 

4

며칠을 두고 애를 태웠으나 시원한 해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돋우서고, 저쪽을 누르면 이쪽이 돋우서고-.

이에 생에 대한 의문은 점점 문보의 마음속으로 스미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제 스스로 못 가짐은 사람 같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개도, 돼지도 살아는 있다. 살아 있다는 것[生存과 산다는 것 生活]은 자못 그 거리가 멀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다만 죽지 않았다는 대명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마음에 충실함으로 삶을 다하려던 자신이 가엾기도 했다. 세상에는 이러한 뼈 없는 존재가 결코 자기만은 아닐 것이지만 이러한 무리들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되나? 이러한 무리들은 생선 엮듯 한 묶음에 꽁꽁 묶어서 한강의 깊은 물속에 풍덩실 들어 던진단들 세상은 조금도 애석해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뼈 없는 무리들이 그래도 저로라고 뽐내는 이 사회는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차아펙은 그 작품 속에서 인조인간(人造人間)을 일찍이 예언하였고, 어떤 학자는 인류 다음에 올 고등동물은 캉가루라고까지 설파하였다. 이 학설을 그대로 믿고 본다면 인류는 올챙이가 개구리로 화하듯 캉가루로 화하여 가는 그 과정에 처한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선조가 쌓아 놓은 인류 문화의 이 찬연한 탑을 우리는 아무러한 반항도 없이 그날그날의 생활에 순응하고 만족함으로 캉가루 사회에 양여하여야 옳은가? 영원한 인류 문화의 축적에 피를 흘린 거룩한 역사에 한 개 삽이 되어 미진의 북돋움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장래 사회의 인류의 혼을 애석히 추모하는 캉가루의 조상이 될진대 차라리 값없는 목숨이 귀할 것 없었다. 단연히 끊는 것이 도리어 인류 문화에 공헌을 더하는 표시는 되는 것이다. 캉가루의 조상에서 인류를 구하는 셈은 되니까.

이렇게도 생각한 문보는 잠에서 깨는 사람처럼 정신이 새로웠다. 비로소 앞길을 내다본 듯이, 그리고 큰 짐을 벗어 놓는 듯이 마음이 가뿐하여지는 것 같았다.

자살,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이 값있는 것이라면 아까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생이란 것이 그렇게도 괴로운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것 만으로라도 생에 대한 대접은 되는 것이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서라도 불구의 불행한 씨를 근절시키는 것만이 원이었더라면 그 행하기 어려운 삶을 질질 끌어가며 버둥칠 필요가 나변에 있는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근절시키므로 그들의 행복만을 도모하였으면 그만이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 만족할 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하고, 그러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 데 있어 과연 자기는 이 세상에 대하려 한 점의 미련도 없을까를 마음속에 따져 보았다.

그러나, 문보는 그 순간, 아깝게도 스스로의 대답이 궁함을 느꼈다. 돌아보아야 모든 것에 있어 손톱만한 미련이 없었건만 차마 그 미자의 마음은 버리기 아까웠던 것이다.

문보는 여기서 미자와의 정사를 또 문득 생각한다. 자기의 마음을 그렇게도 이해하는 미자라면 여기에도 이의는 아니 가질 것 같은 것이다.

정사! 이래 두고 세상에는 정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문보는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던 그 정사자의 심리를 엿본 듯하였다.

"미자!"

문보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으응?"

"난 영원히 살 도리를 찾고 있는데……."

"네에?"

미자는 그것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몰라 잠깐 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이 세상에 내가 없다 해도 미자는 살 수 있겠나?"

"당신은 제가 없으문 어떡허지요?"

"난 살 수 없어."

"그럼 저도 못 살 께 아네요?"

"그러기 말야 미자! 난 이 세상에선 더 살고 싶지 않구, 그렇다구 또 미자는 떨어지구 싶지 않구 어쩌면 좋은가?"

"아이 또 소설 재료에 궁하셨나베, 남의 맘을 엿뜨려구……."

"아니 그런 게 아냐 미자! 미자는 혹 정사라는 걸 생각해 본 일이 있는지, 나는 미자와 같이 이 세상에선 인연을 끊고 싶어. 그래서 도무지 세상을 잊고 싶단 말야."

열정에 떠는 침착한 문보의 태도는 실없는 농담도 무슨 소설의 재료도 아닌 것 같은 데 미자는 놀라고 대답이 막힌다.

"? 안 그래 미자?"

"그게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에요?"

"진정이라는 것보다도 내 가슴은 미자를 사랑하는 마음에 불붙고 있으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진실한 사랑을 안고 세상에서 인연을 끊을 필요가 있겠어요?"

"난 살기가 무서운 것이 있어. 난 천벌을 받은 사람이 아닌지 몰라. 조상 적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이 불구의 유전- 내 할아버지도, 내 아버지도, 다 병신이었어. 그리구, 나두 병신이니, 이 유전적 법칙을 어떡헌단 말야, 후계 자손에게도 반드시 이런 불구자는 오구야 말 것이니, 나의 이 불구한 고민을 생각할 땐, 차마 자손에게까지 이 불행을 물려주고 싶지가 않구만. 아니, 그것은 죄악두 같아, 그러나, 그렇다고 미자와는 떨어질 수 없으니 후계 자손에게 영원한 행복을 도모하라면 목숨을 끊는 길밖에 없단 말야. 안 그래? 미자!"

뜻밖의 사실에 미자는 놀라고 잠깐 말이 없더니 고개만이 점점 숙어진다. 눈물이 스미어 나옴을 느끼는 까닭이다.

문보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미자의 눈물은 확실히 죽음의 절망 속에서 삶의 화살을 겨누는 약자의 무기임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렇게도 모든 것에 있어서 마음이 일치되면서도 오직 죽음이라는데 있어선 뜻을 달리 가진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렇게도 두려운 것일까.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미자의 마음이 아까운 것은 무슨 뜻일꼬?

알듯 하면서도 알 수 없는 마음이 안타까웠다.

'나 혼자는 왜, 죽지 못하나?"

 

5

괴로움에 일어서 나온 것이 거리였다.

거리는 자기의 마음보다도 어지러운 것 같다. 발을 임의로 옮겨짚기에도 주의가 가는 복잡한 거리- 자동차, 전차, 자전거, 인력거, 심지어 오토바이, 구루마까지도 전날보다 더 나도는 듯 걸음의 자유를 구속한다.

어디로 가자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남대문통으로 내려가던 문보는 고스톱을 기다리기가 싫어 가던 길을 되돌아서 동일은행을 꺾어 지향 없는 발길을 다시 종로로 내켰다.

가지 각가지로 제멋대로의 단장을 하고 나서서 꿈틀거리는 인파는 마치 쓰레기통을 쏟아 놓은 듯이 정리의 필요가 있는 듯하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로되, 왜 그 행색은 그리 일치하지 못할까, 그들의 행색은 다 그들의 마음의 표시가 아닐까. 머리를 깎고, 기르고 혹은 골을 가르고, 뒤로 넘기고, 그리고 검고, 누르고, 회색, 갈색, 무어라 이름조차 따지기 어려운 그러한 빛깔의 옷까지 떨쳤다. 무슨 까닭일꼬. 신은 사람을 이렇게 창조하여 놓고 멋에 살며 허덕이는 꼴을 봄으로 무쌍의 행복을 일삼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사람 제 자신이야 삶에 대한 그러한 멋으로 만족할까보냐. 그것은 확실히 슬픈 멋이다. 사람은 반드시 이런 멋 속에 신의 노리개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한번 사람 제 자신의 멋대로 삶을 통제시켜 창조의 신으로 하여금 노리개를 삼음으로 멋을 잃은 신의 괴로워하는 꼴을 보고 우리도 한번 무쌍의 행복을 느껴 보면 얼마나 통쾌한 일일고? 생각하다 문보는 문득 얼른 하고 앞에 꺼꿉 서는 시커먼 그림자에 놀라고 우뚝 걸음을 세웠다.

"나리! 한 푼만 적선하십쇼? 나리!"

거지의 애원이다.

문보의 손은 두말없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한 닢의 동전을 찾았다. 그러나 거지의 손바닥 위에 던져진 것은 뜻하지도 않았던 오십 전 은화다.

굽실하고 거지는 참으로 고맙다는 뜻을 표하고 또 그럴 만한 손님의 앞으로 옮아선다. 그러나 손님은 거절이다. 다음 손님도, 또 그 다음 손님도…….

이것을 본 문보는 자기의 적선이 우스웠다. 생을 붙안고 살아갈 인간들이 그 불쌍한 거지에게 이렇다 한 푼의 적선도 없는데 자살을 도모하는 자기가 살겠다는 인간에게 적선은 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미자밖에 미련이 없던 그가 이 거지에게 동정이 가는 것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사람마다 본 척 지나치고 마는 거지, 그 거리를 왜, 자기 따라 불쌍히 여길까고? 언제나 거지에게 일전 한 푼의 거역은 있어 본 일이 없었지만 그 이상 더는 그를 이하여 마음을 가져 본 일도 없었다. 그러나, 설잡힌 그 오십 전이 결코 아깝지 않다. 그리고 그 마음은 언제까지라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면 거리 사람들이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일면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불구한 거리에 삶을 찾는 이 불구한 무리들- 자기가 육체의 불구자라면 그들은 확실히 맘의 불구자다. 이 맘의 불구자들은 죽음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이 생기에 충만하다. 맘의 불구자는 삶을 찾고 육체의 불구자는 죽음을 찾는다! 자기가 이미 자살을 도모하였을진댄 맘의 불구자들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야 옳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도 그들이 그렇게도 살기를 원할진댄, 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시계는 그 불충분한 기계를 드러내고 완전한 것으로 갈아 넣어야 되듯이 그 맘의 불구한 부분을 갈아 넣어 주고 싶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영원한 값있는 생명을 부어 넣어 캉가루의 조상이 되기 전에 인류 문화의 축적에 빛이 되는 거룩한 인류의 조상을 만들어 주고 싶다. 이 거리에는 이런 인간 수선의 기사는 없는가.

생각하다 문보는 제결에 놀라고 다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제 자신에게도 마땅히 찾아야 할 종류의 것은 아닌가 하니 금시에 도모하던 자살이 유성처럼 번쩍 하다 눈앞에서 부서지고 생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굳세어짐을 느끼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지금가지 되풀어 온 이론은 모두 저도 모르는 가운데서 지금까지 생긴 죽음에 대한 미련의 반증도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거리에 대한 애착이 이다지도 알뜰할 리가 있었을까. 다만 한 개의 여자로 말미암아 제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그 순간의 고통 속에서의 일시적 착각임이 틀림없는 게고, 자실이란 이러한 경우의 그 순간을 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인생의 가장 처참한 한 장면일 것도 같았다. 백을 넘기지 못하는 인생의 한 명이라는 것을 다 살고 죽는다 하여도 그것은 확실히 비극의 한 토막 이어늘 삶의 목숨을 중도에서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그것은 너무도 비극적이다. 만일 창조의 신이란 것이 분명 있어 인생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면 제 목숨을 제 스스로 끊는 그 처참한 행동을 취할 때 신은 자신의 작희에 한 마리에 순한 양같이 아무러한 반항도 없이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통쾌해 할 것인가. 자살이란 신의 작희에 만족을 주는 것밖에 더 되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 그것이 사람의 빛이 아닐까. 사람은 사는데 그 존재가 있을 것이고 죽음으로 벌써 그는 한 개인간의 역사요, 인간은 아니다. 인간은 역사를 짓기 위하여 살 것은 아니고, 생을 빛내기 위하여 산다. 생이 빛나는 곳에 인간의 역사 또한 빛날 것이 아닌가. 단연히 미자는 잊어야 옳다. 잊지 못하는 곳에 불행의 씨는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깃들여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고통은 또 얼마나 할 것이며, 신은 자기의 그 조화의 기능에 얼마나 만족해할 것인가.

이렇게도 생각하면 미자란 사람의 마음을 긁어먹는 악마도 같았다. 인간의 어여쁜 악마! 그것이 미자가 아닌가?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 놓았던 것은 틀림없는 미자였다. 이러한 미자를 생명을 걸고 사랑하였는가 하면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친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미자를 눈앞에 대하기만 하면 그 아름다운 마음과 미모에 다시 마음은 끌려 들어갈 것 같다. 문보는 집으로 들어가기가 차마 두려웠다. 하릴없는 거리를, 거리에는 밤이 오는데도 거리거리 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라도 거리로만 돌아가는 수는 없다. 그는 문득 며칠 전에 받은 대동강 선유에의 벗의 청요장을 생각하고 주저도 없이 떠난다는 전보를 쳤다.

 

6

차에 올라서 그는 한 장의 편지를 미자에게 썼다.

가장 집물은 다 당신의 것으로 하시오. 이달 집세는 아니 낼 수 없으니 ××사에 고료를 채근하면 그것이 될 게요. 내가 가는 길은 알았댔자 필요 없는 줄 아오.

밤차 속에서 정문보 씀

간단한 사연이었다.

차는 다리를 지나는지 더 한층 소리는 높아진다. 창밖의 하늘엔 빛 잃은 봄달이 외롭고 한가한데 -.

발표지 : <조광>(1939. 5.)원제는 '캉가루의 조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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