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
채널
최수철
1
순간의 초조함이 영원을 망친다. 그러나 초조함이 엄습했을 때, 그 순간은 영원의 시간과 다를 바 없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회전문을 밀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세 칸으로 나뉘어진 둥근 원통 안에서 짧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를 눈앞에 떠올렸다.
다람쥐가 제아무리 빨리 발을 움직여도 그 둥근 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어쩌면 내가 순간적으로나마 회전문 안에 영원히 갇혀버린 것도 그와 다를 바 없다. 회전문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그 문이 건물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물론 건물 뒤쪽에 따로 비상구가 있기는 하지만, 내게 그것은 진정한 문이 아니라 일종의 배설구와 다를 바 없다.
회전문은 돌아가면서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고, 그와 더불어 사람들을 삼켰다가 뱉어낸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각기 다른 칸에서 서로를 힐끔거린다. 문은 그 육중한 무게로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지금 나의 눈앞에서는 그 문의 규칙적인 회전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인간들의 혼란스런 움직임으로 인해 수시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의 머리와 팔과 다리가 문틈에 끼였다가 이내 뎅겅뎅겅 잘린다. 마침내 나의 목이 문틈에 걸렸다. 살찐 나의 목은 몹시 두터웠던 탓에, 쉽게 잘리지 않는다. 문은 계속 돌아가기 위해 나의 목을 짓누른다. 그 동안 다른 칸에 있는 사람들은 절망적으로 그 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두 손을 들어올려 고통스러운 듯 손바닥으로 유리벽을 비벼대며 사지를 비튼다. 어떤 이들은 제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온몸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문을 민다.
나는 저항하지만 서서히 질식하여 죽어간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서 나의 죽음을 지켜본다. 그들은 나의 죽음에 대한 목격자들이자,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문의 공범들이다. 또한 그들은 회전문의 숭배자들이자 하수인들이다.
이윽고 목뼈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나의 목이 종잇장처럼 얇아지더니 마침내 나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툭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회전문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다른 칸의 사람들은 해방되어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밖으로 뛰쳐나가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나의 몸뚱이는 밖으로 밀려 나가고, 나의 머리는 사람들의 발길에 차여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문의 일부가 되어 함께 회전한다.
2
내게 지난 일주일은 실로 힘든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에 갇혀서 그토록 기괴한 상상적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내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나 스스로 그 자초지종을 따져보려 하는 것이다.
엿새 전의 이 시간에 나는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내가 유럽 출장 계획서에 이집트와 터키를 슬쩍 끼워 넣었을 때, 나의 직속 상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나의 업무 처리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던 터라, 이번 출장에는 일종의 포상 휴가의 성격이 가미되어 있었던 탓이다.
외국 항공사 소속의 그 비행기에는, 각 좌석마다 모니터가 장치되어 있었다. 그 모니터를 통해 승객들은 마음대로 채널을 바꾸어 영화나 티브이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필름을 볼 수 있었고, 다양한 음악들과 게임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즐길 수도 있었다. 당연히 나는 줄곧 그 많은 채널들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승객들이 잠을 잘 수 있도록 기내의 불이 모두 꺼졌을 때, 나는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오던 중에, 낯설고도 기괴한 광경에 깜짝 놀라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령처럼 각자 모니터를 켜놓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에 빠져들어 있었다. 각각의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하거나 불그스름한 다양한 색의 광선들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고, 그들은 마치 어떤 거대한 힘에 마취되고 중독된 듯이 그 발광의 근원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주변의 세계, 바로 옆자리의 존재마저도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비행기라는 기계 덩어리에 함께 목숨을 맡기고서, 이른바 운명 공동체로서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니, 지금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사람들의 뒤통수들이 마치 어떤 미지의 존재가 한자리에 슬어놓은 알들처럼 보였다. 그 알들 하나하나가 조만간 어떤 괴물을 토해내려는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그 섬뜩한 광경에 비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때 여승무원이 다가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윽고 나 자신도 나의 모니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3
사실, 나는 다분히 냉혈한으로 태어났다. 나는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 냉혈함 덕분에 지금까지 나는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 물론 나는 악당이나 악마는 아니다. 단지 내게는 몇 가지 강박 관념이 있는 터이고, 그 강박 관념과 더불어 세파를 헤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전에 가졌던 그 강박 관념들 중의 하나는 내 몸속의 뼈와 관련되어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내 몸의 뼈대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물이 무너지듯 조만간 관절들이 부러지고 뼈마디가 살갗을 찢고 몸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온몸이 바닥으로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이고, 그 결과 한 무더기의 뼈들과 찢어진 보자기처럼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살갗만 남게 되리라 믿고 있었다.
실제로 어렸을 적부터 내 오른쪽 빗장뼈 약간 아래쪽에는 뼈 하나가 튕겨나와 봉긋이 살갗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뼈대의 해체는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듯 당장이라도 육체가 해체되어버릴 것이라는 위기감에 시달리고 있는 터에, 살아가면서 내가 못 할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또 다른 강박 관념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한마디로 채널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얼마 전부터 내게는 삶의 순간순간이 찰칵찰칵 채널이 바뀌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실제로 항상 내 귀에는 찰칵거리며 채널 바뀌는 그 소리가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각기 하나의 채널로 우리 주변에 자리 잡고 있고, 심지어 우리 속에서도 복잡하게 구성된 채널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현대인의 욕망은 수많은 채널로 철저히 분화되어버렸다. 때문에 나는 어쩌다가 채널이 돌아가지 않고 있음을 느낄 때면 참을 수 없는 답답함과 거북함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곤 했다.
물론, 채널 속에는 면도날 같은 것이 숨겨져 있어서, 그렇듯 비정하게 채널이 돌아가다 보면 정작 인간들이 그 날카로운 칼날에 찢기고 잘릴 위험이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그저 둥글둥글해진 몸으로 언제까지고 회전목마 같은 것 위에 머물러 있을 뿐, 어디에도 제대로 발을 디딜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이런 세상에서는 그 무수한 채널들을 통해 자아를 확장시켜서 냉혹하게 취할 것은 취하는 것, 삶의 질을 양적으로 향상시키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여 요즘 나의 삶은 ‘채널’이라는 것에 온통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없이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고 내 속에서 그 강박 관념들이 채널 돌아가듯 하다가, 급기야 채널 그 자체가 강박 관념이 되어버렸다고 말이다.
무너져내린 뼈마디들이 각기 하나의 채널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현대는 강박 관념 없으면 드라마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오직 강박 관념만이 드라마를 만든다. 실제로 나의 강박 관념은 그런저런 우려들을 초월하여 내 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그 강박 관념이 내게 이 세상에서 못 할 게 없도록 만들었다. 내가 남들의 눈에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제야 밝히지만 나는 전자 기기의 수출입을 담당하는 한 무역 회사의 홍보팀장이다. 내가 맡고 있는 일은 제품 선전을 위한 광고를 제작하고 소비자들이 참여하는 이벤트를 기획하는 일이다. 티브이 프로그램에서는 3초마다 뭔가 터지지 않으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려버린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 말은 나의 업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랫동안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 보니, 나 스스로 그 말에 세뇌되어버렸다. 내 속에서도 3초 내에 뭔가 터지지 않으면 내 속의 채널도 함께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채널이 내 속에도 무수히 많은 채널을 만들어놓았다.
그러고 보면 티브이의 채널은 거의 러시안룰렛과 다를 바가 없다. 내 안의 채널과 바깥의 채널이 서로 만나 함께 터질 때까지 게임은 계속되고 방아쇠는 계속 당겨지고 탄알을 끼우는 구멍은 계속하여 돌아간다. 그러다가 총탄이 발사될 때, 안팎의 채널이 함께 맞물릴 때, 우리는 잠시 죽음을 경험하며 환희를 느낀다.
그러나 이런 업무가 내게는 그다지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주의가 산만하다는 말을 무수히 들어온 나로서는 오히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기분이다. 채널들 덕분에 나는 숨통이 트인다. 실제로 나는 기왕이면 이 세상에 채널이 수천 개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멋진 삶이란 무수히 많은 채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노동자에서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고 있다. 당연히 여러 여자들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자칫하면 죄의식이라는 블랙홀에 빠져들게 되므로, 나로서는 계속하여 채널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쿨리지 효과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여자들 중 어느 하나의 삶에 깊이 연루되지 않고자 한다. 그들이 돌리던 채널 중의 어느 하나에서 내 얼굴이 우연히 클로즈업되어 내가 불쑥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채널들에는 어차피 논리적인 연관 관계가 없다. 단지 우연적인 것들만이 있을 뿐이고, 그 우연들을 통합하는 ‘나’가 있는 것이며, 그 속에서 나는 그야말로 신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우리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나는 온갖 잡동사니 위에 서 있는 자유의 화신이다. 그러나 정신없이 채널을 돌리다 보면 때로 나 자신도 그 채널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 느낌 너머로 늙고 병들어 철저히 고립된 채 쉬지 않고 채널을 돌려대고 있는 사내의 환영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그동안 나는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 이는 무척 중요한 것인데, 한마디로 채널을 돌릴 때 내 나름의 원칙을 충실히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 동안 채널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를테면 채널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내가 그 원칙을 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냉혹함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아직은 나 자신도 뭐라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4
비행기에서 하루를 넘기고 다음 날 나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가방을 찾는 데 약간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구를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 엇갈린 방향으로 걷고 있을 때, 푸른색 정장 차림의 한 여자가 다가와서 나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녀를 알아보았다.
편의상 나는 그녀를 C라고 부르기로 한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만난 사람들에게 대략 알파벳 순서로 이름을 붙여주려는 것이다. 그녀는 막상 공항까지 나를 마중 나오긴 했지만, 평소 나의 성격을 아는지라 자기가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금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그 점은 그녀가 틀리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나타남으로써 나의 채널 체계를 뒤흔들어놓았고, 결과적으로 나의 원칙을 거스르는 행동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내가 공항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었고, 그녀가 마중 나왔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그녀가 직접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가 돌발적으로 자신의 채널을 내게 끼워넣은 것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나는 그녀의 차를 타고서 강변도로를 달렸다. 비스듬하게 쏟아져 내리는 저녁 햇살에 차도 위의 자동차들이 발광충처럼 차체를 번쩍이고 있었다. 그때 나의 시야에서 정연하게 평행선으로 이어지고 있던 차선과 차량의 행렬이 일순간 뒤엉키면서 승용차 한 대가 오른쪽으로 튕겨 나가고 중형 트럭이 왼쪽으로 급하게 쏠렸다. 곧 트럭은 가드 레일에 부딪친 뒤 우당탕거리며 앞으로 밀려 나가다가 가까스로 멈춰 섰다.
하지만 그 바람에 짐칸에 실려있던 페인트통들이 바닥에 떨어져내렸고, 통들이 터지면서 그 속에 들어 있던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 검은색, 흰색의 페인트가 흘러나와 도로를 뒤덮었다. 차도의 아스팔트 위에 뒤죽박죽으로 한데 뒤섞인, 그러나 각 부분마다 선명하기 그지없는 그 다양한 색채, 지상에 피어난 무지개, 그 위로 쏟아지고 있는 황금빛 햇살에 나는 눈이 부셔서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 광경을 광고의 한 장면, 혹은 뮤직 비디오나 영화의 한 컷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바닥에 그려진 추상화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정차했던 우리의 자동차는 얼마 후 다시 출발하여 꽃밭을 짓밟듯 그 자리를 지나쳤다.
C는 무척이나 놀라고 상기된 표정으로 연신 후면경으로 뒤를 돌아보며 내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나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머쓱해하는 듯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이런 식으로 채널이 어긋나곤 했다. 이른바 연인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얼마나 민망하고 거북한 노릇이겠는가. 때문에 그녀는 내게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우리 사이에 채널이 잘 맞지 않는 모양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남자의 생리와 여자의 생리가 때때로 맞부딪쳐 생겨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화가 난 그녀는 항상 내게 싸움을 걸려 했다. 나라는 인간에게는 채널이 너무 많아서, 자기로서는 내게 채널을 맞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녀에게 채널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싸움을 걸 때 결코 거기에 응해주지 않았다. 싸움을 거는 행위는 어찌 보면 가장 강력하게 채널을 맞추는 것인 셈인데, 요즘 내 속에서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내가 얕은 시냇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발을 벗고 들어와 첨벙거리면 온 존재가 들썩거릴 정도로 화를 내고, 잠시라도 혼자 버려져 있으면 금방 외로워져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남녀가 함께 살며 같이 먹고 싸는 사이에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진정한 교섭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한때 결혼이라는 실수를 한 적이 있어서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C 또한 결혼한 몸으로 반쯤 별거 상태에 있으면서 그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어쩌다 채널이 저절로 맞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녀의 머릿속에 오가는 생각이 내 귓속으로 흘러들곤 했다. 그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자가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나는 그게 어떤 모습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당신을 떠나지 못하는 거야.’
그런데 맙소사, 이상적인 모습이라니.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기야 여러 가지 모습들을 한데 섞어버리거나 마구 돌려버리다 보면 잠깐잠깐 그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이 떠오르긴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윽고 자동차가 나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따라 내리며 내 서류 가방을 집어들었을 때, 나는 집 안이 어수선할 테니 안에 들어가기보다는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더욱이 지금 집 안에는 K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내 손에 가방을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내 왼뺨을 두세 번 툭툭 두들기고서 몸을 돌렸다.
5
그녀가 떠난 뒤, 나는 삼층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회색 벽 위에는 스크린에 형상이 비쳐지듯이 나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무척 지친 듯이 보이는 한 남자가 천천히 어두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그다지 지친 것이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는 남들의 눈에 형편없이 지쳐 보이는 걸음걸이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느 낯선 남자가 움직이는 영상처럼 내 눈앞에서 죽 펼쳐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어떤 행위를 계속하면서 그런 나를 완전히 제삼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내 머릿속의 생각까지도 철저히 객관적으로 다시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윽고 그는 관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스스로 뚜껑을 닫듯이,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잠근다. 그는 여간하여 남들을 집에 들이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어둠침침한 실내에서는 복잡하게 뒤섞인 착잡한 냄새가 풍긴다. 움직임은 없고, 여러 덩어리의 어둠이 여기저기에 잠복한 채 곧 도래할 변환의 순간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불이 켜지면서 멍청하면서도 뻔한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거실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긴다. 창밖에서 흘러들어온 불빛으로 인해 실내의 사물들은 푸르스름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구석진 곳에서 털이 긴 개 한 마리가 온몸을 흔들어 털을 털며 가벼운 걸음걸이로 걸어나온다. 그는 그 개를 K라고 부른다.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알파벳 중에서 K보다 개에게 더 잘 어울리는 글자가 무엇이 있겠는가.
바닥에 깔린 싸구려 양탄자에서는 K의 배설물 냄새가 난다. 며칠 집을 비웠던 탓에 그 냄새는 더욱 지독하다. 불을 켜지 않아도, 양탄자 한쪽이 개의 오줌으로 젖어 있을 것임을 그는 안다.
그러나 이제 K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인의 질책이 오히려 자기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예우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평소에 개는 똥과 오줌을 동시에 싸지 않는다. 그 둘을 새벽녘과 오후에 나누어 하고 있으며, 그로서는 출근 전과 퇴근 후에 배설물 처리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창가에 서 있는 할로겐등에 불을 켠다. 그리고는 오줌을 싼 벌로 K를 개집에 집어넣고 입구를 벽 쪽으로 돌려놓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는 낮은 소파에 주저앉아서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가 다음으로 하는 일은 앉은 자리 주변을 더듬어 리모컨을 찾는 것이다. 리모컨은 소파의 엉덩이 닿는 부분과 등받이 사이의 틈 속에 깊숙이 끼워져 있다. 그는 리모컨을 가볍게 쥐고서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린다. 지금이 그에게는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는 티브이를 보면서 세상의 무수한 채널 하나하나를 모두 자기 것으로 경험한다. 실제의 경험은 오히려 하나같이 구질구질할 뿐이다. 그리하여 혼자 사는 남자가 저녁에 귀가한 후로 새벽녘에 이르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는 리모컨으로 끊임없이 채널을 바꾸며 티브이를 본다. 티브이 화면을 통해 흘러나온 빛이 채색된 그림자를 끌며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가 다채로운 반향을 일으키며 불길한 날짐승처럼 공중을 가로지른다. 조명이 충분하지 않은 실내,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그 닫힌 공간 속에서 수없이 많은 단편적인 영상들이 역시 단편적인 온갖 소음과 음향을 흘리며 음울한 낯빛으로 떠다니고 서성대고 배회한다. 오랫동안 털을 깎아주지 않아서 얼굴이 온통 털로 뒤덮이고 까만 코만 삐죽이 나와 있는 시추가 소파 위로 뛰어올라서 그의 허벅지 밑으로 파고든다.
벌에서는 진작에 풀려났지만 원망의 감정을 완전히 삭이지 못한 채 구석진 곳을 돌아다니던 K는 마침내 스스로 관대함을 회복하고서 그의 무릎 위에 턱을 올려놓는다. 그는 티브이 화면을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개를 쓰다듬는다. 그의 손끝에 강아지의 살갗과 살집과 외부 기관들과 털과 뼈가 알알이 와 닿는다. 그는 개의 몸이 그의 손에 의해 해부되고 분해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상상의 시야 속에서 해체되어 펼쳐지고 있는 개 몸통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그는 간간이 헤어진 가족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다.
그는 결코 어느 한 채널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그는 케이블 티브이와 위성 방송을 포함한 60여 개의 채널을 쉴새 없이 넘나든다. 그에게서는 피아노 건반 위를 종횡무진 미끄러지는 피아니스트의 손이 연상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정신의 숨결은 점점 더 가빠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데, 그러나 그는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시간은 그에게 정지되어 있다. 이 공간 속의 하루가 바깥세상에서는 10년에 해당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때 그는 문득 리모컨 위에 놓인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춘다.
음산하고 불길한 푸르스름한 기운을 내뿜는 티브이 화면 속에서 그는 자기처럼 혼자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 또 다른 사내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 사내 역시 리모컨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쉴새 없이 화면을 다른 화면으로 바꾸고 있다.
그는 그 사내를 유심히 바라본다. 세상에는 티브이를 보는 자가 있고, 티브이를 보는 자를 보는 자가 있고, 티브이를 보는 나를 보는 자가 있고, 티브이를 보는 자를 보는 내가 있다. 그것들이 한데 맞물려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 채 그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그 광경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다시 리모컨을 들어 올려 채널을 바꾼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모든 채널에서 그는 같은 장면과 마주친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채널을 돌리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결국 그는 저항을 포기하고서 화면 속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사내는 그와 생김새가 너무도 흡사하다. 그는 잠깐 잠이 든 듯, 혹은 생시와 죽음이 겹쳐지듯, 멀쩡히 깨어서 경험하는 꿈처럼, 화면 속의 세계로, 밤이 와도 어두워지지 않는 백야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문득 그는 어디선가 강한 바다 냄새가 코끝에 훅 끼쳐오는 것을 느낀다. 전에도 그는 도시 한복판에 앉아서 자주 바다 냄새를 맡곤 했다. 그럴 때면 티브이가 켜지고 채널이 맞춰지듯 눈앞의 광경이 바닷가의 풍경으로 바뀌어 그 상태로 고정되곤 했다.
지금 그는 바닷가의 백사장 위에 앉아 있다. 그는 왼손으로 바닥의 모래를 움켜쥐었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게 한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곁에 앉아 있는 개의 긴 털을 쓰다듬으며 저 멀리 흰 포말이 일고 있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리모컨이 들려 있다. 공기는 적절히 뜨겁고, 바람은 기분 좋게 미지근하며, 햇살은 견딜 만하게 따갑다. K가 뜨거운 모래에 몸을 지지며 나른한 어조로 말한다.
“여긴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롭고 한가해서 좋군요.”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심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 K가 다시 말을 잇는다.
“하기야 여유롭다고 달라질 건 없지요. 하루하루가 채널 하나와 같고, 채널 돌아가듯 하루하루가 흘러가니까요. 우리는 채널을 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지요.”
그는 약간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K를 내려다본다. 개치고는 상당히 문어적인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는 다시금 시선을 앞쪽으로 돌리며 무료함을 지우기 위해 아무렇게나 리모컨을 누른다. 그때 그는 정확히 1시 방향에서 번쩍 섬광이 일어나 그의 눈을 찌르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날카로운 빛이 그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온다.
그는 깜짝 놀라 목을 빳빳이 세운다.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라서 두렵다기보다는 차라리 가슴이 벅차오른다. 온몸의 신경선이 한데 뭉쳐지더니 무거운 돌이 매달린 동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 빛이 눈앞에 거의 이르렀을 때, 그는 반사적으로 리모컨을 다시 들어올려 방향을 그 섬광에 맞추고서 아무 버튼이나 누른다.
그와 동시에 그가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주위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그는 승용차를 운전하며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다. 그는 차창을 내리고 문틀에 왼팔을 올린 자세로 주위를 돌아본다. 그의 옆자리에는 모자를 쓴 한 여자 N이 앉아 있다. N도 공기와 바람과 햇살에 취한 듯 느긋한 표정으로 게으른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다.
그때 그는 방금 전에 보았던 그 섬광을 다시 발견한다. 그 섬광은 여전히 같은 방향에서 같은 각도로 계속하여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그는 제동 페달에 발을 얹을 생각도 없이 망연히 그 섬광을 바라본다. 이윽고 그 빛이 아주 가까이에 다가왔을 때, 그는 그것이 한 마리의 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분명 눈부시게 흰 날개로 날카롭게 햇살을 반사시키고 있는 한 마리 갈매기다. 순백색의 깃털과 살찐 몸통을 가진 그 새가 동체 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처럼 날개와 다리를 접고서 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고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다.
마침내 그 새는 앞 유리창에 부딪힌다. 부리가 유리를 꿰뚫고서 안으로 파고들고, 곧 대가리 전체가 안으로 쑥 들이 밀어진다. 그 새는 부리를 중심으로 얼굴 전체가 순식간에 벌건 피로 물들어버리고, 그와 동시에 아래쪽 부리가 부서지면서 그 파편이 유리 조각과 함께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새는 핏빛 어린 두 눈을 크게 치뜨고서 그를 노려본다. 그는 N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뻣뻣하게 굳은 등을 의자 등받이에 바짝 붙인다. 그때 갈매기가 부서진 부리를 벌리며 날카롭게 울음 소리를 낸다.
그때 그가 리모컨을 누른 모양이다.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세상은 다시금 완전히 달라져 있다. 아니, 달라진 것이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 그는 K와 함께 모래밭에 앉아 있고, 아까 보았던 그 섬광이 허공에서 태양을 약간 옆으로 등지고서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좀더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그것이 한 마리 새라는 사실은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순백색의 깃털과 살찐 몸통을 가진 그 갈매기는 동체 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처럼 날개와 다리를 접고서 그의 얼굴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든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갈매기는 그의 오른쪽 안경알에 부딪히고, 그 부리가 렌즈를 꿰뚫고서 그의 눈알 속으로 파고든다.
그는 놀랍고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움켜쥔 채 부르르 몸을 떤다. 그는 세상이 온통 뒤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때 그는 방금 자신이 지른 비명이 바로 옆에서 다시 들리는 것을 깨닫는다. 그와 동시에 왼손 손가락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K를 쓰다듬던 손으로 K의 목덜미를 세게 움켜잡은 것이고, 깜짝 놀란 K가 그를 깨문 것이다.
그는 리모컨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서 왼손을 감싼다. K는 제풀에 놀라 꼬리를 감추고서 소파에서 뛰어내려 제 집으로 달아난다. 티브이는 고장이 났는지 아니면 미쳤는지, 화면이 제멋대로 마구 바뀌고 있다.
그는 잃어버린 시각으로, 시야 저 깊이 더 멀리에서, 뭔가가 빛을 번쩍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6
다음날, 깨어났을 때 나는 한 손에 리모컨을 움켜쥔 채 소파 위에 누워있었다. K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팠다. 근래 꾸어보지 못한 그 끔찍한 악몽이 여전히 머릿속에 두렵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악몽부터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A부장에게 출장과 관련된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을 이틀이나 늦출 수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다행스러웠다. 까닭 없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을 때 나는 단호하게 채널을 돌려버렸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났을 때, 대학 동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 시절에 각별히 가깝게 지내던 선배가 모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의 선배 B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이 나라에서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로 대접을 받아 가면서 거들먹거리며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새삼 경탄의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만큼 그는 오만하고 냉소적이면서도, 적절히 비판적 지식인의 자리를 지키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수준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저런 사정 탓에 요즘에는 그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말았지만,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몇 년 동안 우리는 특히 절친한 사이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지방 출신이라 서울에서 하숙을 하던 나는 수시로 그의 집에 들러서 밥을 먹었고 그의 방에서 함께 자곤 했다. 별로 말이 없는 편이던 그의 아버지와 딸이 많았던 그 집의 부산한 분위기, 그의 어머니가 마련해주던 음식, 특히 각종 해물과 된장을 함께 넣어 끓인 찌개가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적잖이 달래주었던 탓이었다.
사실 그 무렵에 그와 나 사이에는 단순히 우정이나 선후배 사이의 정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후 적잖은 시간이 흐른 뒤, 아마도 3년 전쯤일 텐데, 그로부터 불쑥 연락이 왔다.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서로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한동안 지방에 머물고 있던 그가 어느 날 내게 전화를 걸어 서울 나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도 뜻밖이라 예전에 그에게서 느꼈던 거북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정도였다. 하지만 내심 반가움도 아주 없지는 않았던 터라, 나는 주말에 손님 대접할 준비를 했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수산 시장으로 갔다. 그러나 게나 새우 따위를 사는 대신, 마침 제철을 맞은 석화를 잔뜩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밥이나 찌개는 생략하고, 상 위에 석화를 잔뜩 쌓아놓고서 그를 맞았다. 그는 전보다 살이 많이 찐 나를 보고서 몹시 놀라워했다.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칼끝으로 단단한 굴 껍질을 비집어 열어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초고추장을 뿌린 생굴을 안주로 하여 백포도주를 마셨다. 굴 껍질을 벌리는 일이 쉽지 않았던 터라, 나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그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뚜껑이 열리고 그 속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질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입 밖으로 흘리곤 했다.
더욱이 철저히 밀봉되었다가 벌어지는 석화 속의 풍경은 각기 하나의 새로운 세계처럼 너무도 다양했고, 이 세상의 지형도만큼이나 복잡했다. 그때 나는 석화를 하나씩 여는 것이 마치 채널을 돌리는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그것도 애써 힘을 들여서 채널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화제가 자연스럽게 채널 쪽으로 넘어간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그가 내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채널 돌리듯이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게 네 특기지. 뒤집는 거. 뭐든지 뒤집으려 하다가 안 되면 자기가 뒤집어지는 거 말이야.”
그 말에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의 과도한 반응에 그는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상체를 뒤로 젖히고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며 말했다.
“그래, 그런 거지. 채널 하나만 돌리면 되는 거야. 그러면 세상이 전혀 달라지는데. 그런데 그 채널 하나를 못 돌려서 온갖 문제가 생겨나는 거지.”
그의 말을 듣고서 문득 나는 엉뚱하게도 성전환 수술을 받아 전혀 새로운 세상을 살고 싶어 하는 한 트랜스젠더와 마주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공연히 그에게 반발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세상과 채널의 문제가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다는 말인가.
“글쎄, 과연 그럴까. 채널만 돌리면 되는 걸까. 요즘 누가 채널 돌리는 법을 모를까. 우리 속에서는 끊임없이 채널이 돌아가고 있잖아. 그래도 별반 달라지는 게 없지. 이혼을 하고 가족을 버린다고 해봐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건 아니고, 그저 채널만 돌아가는 거잖아. 하도 채널만 돌려대다 보니, 이제 우리한테 남은 것은 끊임없이 채널을 돌려대는 손, 우리의 것이면서도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닌 그 손만이 있을 뿐이지. 이제 문제는 그 손과의 투쟁이야. 채널을 돌릴 때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나의 말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단순하고 명료한 것은 참지 못하는 네 버릇은 여전하구나. 하지만 그거야 이 무의미한 세상을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이 무어냐 하고 관련되는 거겠지. 누가 내게 세상을 왜 사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 나는 세상을 연구하기 위해 산다고 말이지. 나한테 세상을 제대로 사는 건 세상을 연구하는 거지. 채널을 돌리는 것도 그래서이고.”
그가 말을 마쳤을 때, 나는 잠시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방금 한 말은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도 그 말과 관련하여 그와 나 사이에 언쟁이 오갔던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와 내가 비슷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본업이 시를 쓰는 일이었지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하고 사진을 찍고 영화와 미술 평론도 했으며, 특히 역마살이 끼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행을 자주 했다. 그런가 하면 예전부터 지금까지 여자 관계가 복잡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그런 점은 내가 쉬지 않고 채널을 돌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세상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고, 그런 면에서는 나와 다른 것이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우리가 채널을 돌리는 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이고 비천한 욕망 때문이야. 연구니 뭐니 하는 건 그 욕망을 감추려 하는 것이지.”
그가 내 말을 받았다.
“나는 그 말도 인정해. 욕망을 감추려 하는 건 허위의식이겠지. 하지만 나는 채널을 돌리면서 내 비천한 욕망까지도 연구하려고 하는 거야.”
내가 그의 말을 받았다.
“연구한다는 명분을 가진 자가 어떻게 그 욕망의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겠어. 그거야말로 허위 의식 아니겠어?”
그후로도 우리 사이에는 계속하여 그런 말이 오갔다. 돌이켜보면 마치 아이들이 티브이를 앞에 놓고 채널 다툼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제풀에 지쳐서 멍청한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굴을 까던 칼이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손가락을 찔렀던 것이다. 곧 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탁자 위로 방울져 떨어졌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미 까놓은 굴 속에 초고추장을 대신하여 나의 피를 흘려넣었다. 그리고는 그 굴을 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는 분노에 찬 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래도 아까 꺼내려다 말았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와 내가 자주 어울리고 함께 자고 했던 데에는, 한마디로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끈끈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는 그것 또한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비천한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이 항상 붙어 다니는 우리 사이를 놓고 농담조로 빈정거리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관계의 가능성이 부챗살처럼 좍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실만으로 기분이 무척 좋았던 나는 기왕이면 거기에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무시당하는 관계의 채널도 슬쩍 끼워 넣고 싶었다. 하여 나 또한 농담조로 툭 말을 던졌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애인 사이라는 걸 몰랐어. 나중에 그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갔고, 당연히 나는 그가 그저 웃어넘기리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내가 우리 사이를 망쳐버렸다고 화를 냈다. 심지어 괴로워하기까지 했는데, 그가 보기에 순간의 실수로 몸을 망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어버린 나로서는 그가 화를 내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괴로워하는 것은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이 실제로 동성애였든 아니든, 그 또한 우리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는 여러 가지 채널들 중의 하나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상호 간에 가지는 관계의 채널이 수없이 돌아가고 있고 우리 스스로 그 채널을 돌릴 수 있는 터에, 두려워하거나 혐오스러워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러나 그에게 나의 행위는 거창하게도 사람들 사이의 감정적 진실과 내밀한 윤리적 양심을 저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어쩌면 그가 언젠가 자살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떤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지금도 잘 알 수 없지만, 그 느낌만은 아직 내 몸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여하튼 어처구니없게도 그때부터 우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사건건 충돌을 벌이고 으르렁거리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오랜 관계의 짐을 훌훌 벗어 던졌으며,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7
아마도 누구든 그러하듯이, 아직 어려서 감상적이었던 시절, 나는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문을 하나씩 통과한다고 생각했다. 한 손으로 그 문을 밀어 열 때, 나는 매번 다른 낯선 향기를 머금은 한 줄기 바람이 나를 휘감으면서, 매번 다른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랐다. 이를테면 다른 채널의 세상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나는 상심했다. 청년기에 이르러 낭만적이었던 시절, 나는 세상의 채널이 바뀌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내 눈의 채널, 내 마음의 채널을 바꾸기로 했다. 그리하여 날마다 다른 채널로 다른 세상을 보고자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내가 원하던 바가 이루어졌다. 눈을 한 번 꾹 지려 감았다가 다시 뜨면, 실제로 다른 세상이 보였다. 어지러워진 가슴을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하고 나서 가슴을 쫙 펴면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그 과정이 너무도 쉽고 간단하여서, 나 스스로도 잘 믿어지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더 나이가 들어 현실적이 되었을 때, 나는 그토록 간단히 채널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진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내키는 대로 채널을 바꾸어 내가 원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설 수 있었지만, 왠지 전처럼 여간하여 성이 차지 않았다. 하루가 끝나고 세상이 닫힐 무렵이 되면, 나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까닭 모를 안타까움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루하루가 바닷물처럼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내게 더욱더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와 더불어 현실적이었던 나는 금방 비관적이 되어갔다.
나는 이미 내가 치유 불가능한 병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물론 나의 눈과 마음에서는 여전히 채널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게는 더 이상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이리저리 돌아가고 있는 채널만이, 그리고 그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나의 손만이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채널과 손만이 나의 세상이었다.
나의 세상은 온통 채널과 손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차츰 그로테스크한 환각에 빠져들었다. 지금 나는 낯선 향기를 머금은 한줄기 서늘한 바람을 이마로 느낀다. 그때 나의 시야 한가운데에서 큼직한 손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의 것인 손 하나가 떠오른다. 저 혼자 움직이는 저 손. 그리 길지는 않지만, 적절히 갸름하고 끝이 길쯤한 손가락, 흰색이 섞인 발그스름한 분홍빛의 손바닥, 그 모든 것을 통제하고 배반하며 느릿느릿 움직이는 손등. 그 게으른 손은 구식 티브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둥근 채널 조정기를 움켜쥐고 있다. 그 모습은 다리가 두툼하고 긴 거미 한 마리가 제 몸보다 더 큰 곤충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손등의 힘줄과 정맥이 꿈틀거릴 때마다, 채널이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8
나는 상가(喪家)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서 한동안 망설였다. 그동안 나는 남들의 경조사에 머리를 내밀지 않는 것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곳에 가면 나는 채널의 움직임이 뻑뻑한 세상에 와 있는 듯했다. 기왕에 상을 치르는 곳이라면, 그곳에서는 잠정적으로나마 채널이 죽음에 제대로 맞춰져 있어야 했다. 채널이 죽음에 정확히 맞춰진 곳에서는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었다. 중국의 현인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했다지 않는가. 장자는 사람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물에 들어가도 죽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탈 수 있는 경지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실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여 있는 채널의 중요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아간 곳에 또 다른 현인 열자가 있다. 열자는 바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람이 되고 구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되고 물에 들어가면 물이 되고 불에 들어가면 불이 되는 경지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연과 자신 사이에 채널을 맞추어 이를 수 있는 궁극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의 어정쩡하기 짝이 없는 상가라는 공간은 내게 고통의 장소였다. 더욱이 나는 주말에 몇 군데 돌아보아야 할 곳이 있었다.
「넌센스」, 최수혁, 꿈 2001, 김성수 마임극단,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앵콜 록 뮤지컬 「가스펠」, 말리 극장의 「가우데 아뭇」,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컬트 삼총사」 등등, 공연을 보거나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나의 스케줄은 달력 위의 숫자들만큼이나 빽빽했다.
하기야 어제저녁에 귀국했다는 것과 빈소가 충청남도 바닷가의 한 도시에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세워, 직접 조문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결례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줄곧 망설이고 있었다. 틀어져 버린 과거의 한 채널에 대한 감상적인 집착이 가라앉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버릇처럼 채널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B의 어머니는 그동안 선산이 있는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한동안 더 냉혹함과 회한과 무심함, 짐짓 숙연한 표정과 망쳐버린 주말에 대한 아쉬움, 자존심과 자학의 감정 사이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이미 나의 채널에 뭔가 문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단지 약간 화가 나 있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며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터라, 늦게 점심을 먹고서 혼자 자동차로 서울을 떠났다.
어느덧 겨울이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 날씨는 맑았고 공기는 선선했다. 나는 오후 늦게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도를 보면서 정확한 위치를 찾던 중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서 깊은 정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벌써 몇 시간 동안 줄곧 하나의 채널에 매여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던 터라, 나는 거기에 우발적인 채널 몇 개를 끼워넣고 싶었던 것이다. 상가에 머무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서, 정자에 올라가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주차장은 언덕을 깎아내고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어놓은 자리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터라 주위에 공사 장비와 자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 한쪽 귀퉁이에 제법 커다란 포장마차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사장의 인부들이 자주 이용했음 직한 그 포장마차는 거친 골격 위에 주황색 비닐 천을 을씨년스럽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 앞에 서서 그 포장마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포장마차는 오랜 시간 운전을 한 탓에 온몸이 찌뿌드드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 유혹은 은밀하면서도 불온한 것이어서, 내게는 그 유혹을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이 온당치 않게 여겨졌다.
나는 열었던 자동차 문을 소리나게 닫고서 포장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처음 그 두 젊은 사내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나는 그 두 사내를 편의상 D와 E로 부르기로 한다. 그들은 주차장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서로 뭐라고 말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대패질도 하지 않은 나무틀 위에 주황색 비닐을 덧씌운 문을 잡아당길 때, 그중의 한 사내 D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 눈길을 옆으로 돌리는 시늉을 했지만, 분명 초점을 흐트러뜨리는 척하며 그 느슨한 시선의 그물 한 귀퉁이에 나를 잡아두고 있었다. 그 그물은 단번에 거미줄처럼 내 얼굴에 끈끈하게 엉겨붙었다.
나는 거미줄을 손으로 걷어버리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포장마차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는데,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시간이라 그런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나는 진열대 앞의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해가 덜 떨어진 시간, 덜 떨어진 해, 떨떠름한 분위기, 낯선 타지에서 차를 몰고 상가로 가다 말고 포장마차에 들러 술을 마시려 하는 나야말로 덜떨어진 인간이었다.
나는 남자처럼 운동 모자를 쓴 사십 대 여주인에게 소주 한 병과 참새구이를 주문했다. 사실 나를 결정적으로 이곳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참새구이였다. 포장마차 지붕에 붙어 있던 안주 목록 중에서 참새구이가 아까 내가 느낀 강력한 유혹의 핵심이었다. 포장마차에 맞추어져 있던 채널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참새구이 쪽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내 연배의 남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참새구이는 내 유년의 기억을 구성하는 감각적인 요소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적에 단 한 번 참새를 먹어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의 경험이, 그 전후 사정은 기억 속에서 거의 증발되어 버리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혀끝에 독특한 맛으로 살아남아서 내 몸과 더불어 영원히 지속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내게 참새구이는 다양한 음식의 채널들 속에 자리 잡은 블랙홀인 셈이었다.
그후 스스로 돈을 벌어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자주 참새구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길을 지나다가 어디에서든 참새구이라는 글귀를 보면 예외 없이 저항하지 못하고 차를 멈추거나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참새 사냥이 금지되어 있었던 터라 참새구이는 무척 귀했다. 자연히 나는 다른 새들, 메추리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몸집이 큰 새들까지도 일부러 찾아가 먹으면서 참새구이에 대한 욕구를 달랬다. 헛되이 인터넷에서 참새구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나의 욕구는 전혀 만족되지 않았다. 하기야 실제로 내가 전에 먹어본 것과 똑같은 참새구이를 찾았다 하더라도, 나는 만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그 맛은 내 몸보다는 내 정신 속에 고착되어 있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얼마 후, 여주인이 내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을 때, 그 위에 겹쳐져 누워 있는 다섯 마리의 작은 새는 문외한이 보아도 참새보다는 메추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안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으면서, 간간이 오그라든 날갯죽지와 다리를 조금씩 떼어 먹는 것으로 만족하며 술을 마셨다. 아무래도 긴장이 되어 있는 탓인지, 몸속으로 들어간 술은 쉬 분해되지 않고 위장 속에 고인 채 출렁거렸다. 술을 마셔도 몸이 뜨거워지지 않고, 오히려 찬 액체로 인해 위장이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느낌, 술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그 느낌이 얼마나 거북한 것인지 잘 알 것이다. 그러다가 그 술은 급기야 위장 전체를 얼려버린 뒤, 어느 순간 갑자기 한꺼번에 몸속으로 스며들어 그 차가운 불꽃으로 몸과 마음의 정상적인 상태를 동시에 뒤흔들어놓는 법이었다. 그럴 경우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뒤탈이 나고야 마는 것이니, 미리 주의를 해야 했다.
내가 가능한 한 천천히 술을 마시기 위해 애쓰는 동안, 아까 보았던 두 사내, D와 E가 조용히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포장마차 주인과 안면이 있는 듯했다. 그들은 곁눈으로 나와 내 앞에 놓인 술병과 안주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그들의 짐짓 무심해하는 표정 속에 뭔가 복잡한 생각이 가라앉아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들은 나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가락국수를 달라고 했다. 그들은 시선의 끝에 줄곧 나를 매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 모종의 음모가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앞에 놓인 술병이 반은 비었는데도, 여전히 나는 술 마시기가 어려웠다. 차츰 내 몸이 차갑고 냉랭한 유리병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유리병에 낯선 이들의 시선이 날벌레처럼 날아와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내가 자주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술이 채널 돌아가는 데 윤활유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두 낯선 존재가 내게 결정적으로 훼방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좀더 시간이 지나자 이제 그들은 내게로 향한 자신들의 시선을 거두어들이려고도, 책임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한 잔까지 입 안에 털어넣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이제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공중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차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아까 그 두 사내 중에 D가 내 앞으로 불쑥 나섰다. 내가 약간 놀라 멈춰 서자, 그는 성의 없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혹시 담배가 있냐고 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무렵에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때는 담배를 무척 많이 피웠으나, 비후증이 악화되면서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담배라는 채널을 하나 잃어버린 것이다.
여하튼 나는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D는 순순히 내 앞길을 비켜주었다. 내가 자동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동안, 두 사내는 나란히 붙어 서서 여전히 딴청을 피우며 내 쪽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가급적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그곳을 떠났다. 낯선 곳에서 술 마시고 운전하는 것으로 이미 약점은 잡힌 셈이므로, 최소한 느긋하고 당당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 후, 과연 나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실내 후면경 위에 나타났다. 한적한 시골길이라 차량의 통행이 뜸했는데, 아까부터 흰색 소형차 한 대가 줄곧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 주차장에서 보았던 그들의 차도 낡은 흰색 소형차였다. 처음에 나는 내가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천천히 달려보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보기도 했는데, 그 차는 줄곧 후면경 위에 머물러 있었다.
해는 이미 서산 마루에 걸려 있었다. 나는 점차 관자놀이가 화끈거리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뒤늦게 술기운이 돌면서 열기가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때문에 작은 마을을 지날 때 파출소를 보았지만 차를 세울 수도 없었다. 하기야 음주 운전 중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섣불리 그들에게 어떤 혐의를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어쩔 수 없이 막막한 조바심으로부터 비롯된 자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 자책감은 내 속에 들어 있던 오만함을 일깨우면서 차츰 분노의 감정으로 변해갔다. 나는 간간이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으로 함부로 아무 데나 내리쳤고, 이마로 운전대를 짓찧었다.
그들은 실로 공격적인 채널이었다. 그들의 채널은 나와 소통을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검고 끈끈한 거미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감히 그 거미줄과도 같은 채널로 나를 참새처럼 사로잡으려 하고 있었다. 내 혀끝에서는 아까 먹었던 참새구이의 맛이 되살아났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참새들이 내 입 안으로 꾸역꾸역 날아 들어왔고, 나는 그것들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도 여전히 흰색 승용차는 나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뒤를 따라왔고, 결국 나는 길가의 작은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실내등을 켜고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후면경을 통해 곁눈질로 뒷차의 동태를 살폈다. 뒷차도 나로부터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 차도 꽤 긴 시간 동안 가만히 엎드려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로나 듣던 상황이 실제로 연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직 어찌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내 쪽의 반응을 살피며 숨을 죽이고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차라리 어떤 발작적인 행동을 벌여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9
지난겨울, 나는 C와 동해안을 여행했다. 그 여행에는 모종의 결단 따위의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서울을 떠나던 날, 톨게이트를 지날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도 거의 끝나갈 참이라, 곧 눈이 그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태백산맥이 가까워질수록 눈발은 더욱 굵고 거세졌다. 우려했던 대로, 미시령으로 통하는 길목에서는 경찰들이 통행을 차단하고서 체인을 갖춘 차량들만 통과시키고 있었다.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자, 모자에 눈을 수북이 쌓아올린 경찰관이 내게 진부령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쪽은 고개가 낮으니까 아직 차들이 넘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진부령 쪽으로 달렸다. 그의 말대로 진부령의 오르막길은 적어도 아직은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진부령 정상에 거의 이르렀을 때,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길을 막고서 월동 장비를 갖춘 차들에게만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서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이미 나의 머리카락과 상의는 내리는 눈에 뒤덮였고, 눈 녹은 물이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려 이마를 적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는 늙수그레한 대머리 사내에게서 체인을 샀다. 나는 그에게 잠깐 동안 아무 모자라도 빌릴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선뜻 자기 모자를 벗어서 내게 내밀었다. 그가 머리카락이 거의 없는 대머리라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맨머리를 보니 나이도 훨씬 더 들어 보였다. 나는 두 손을 내저었으나, 그는 거의 강제로 내 머리에 자신의 털모자를 씌웠다. 그리고는 체인을 감기 위해 눈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몸을 웅크렸다.
이윽고 그에게 모자를 돌려주고서 차를 출발시키고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로 고개의 정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워낙에 가파른 길이어서 체인이 전혀 무용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리막길은 천천히 움직이면 그럭저럭 맨바퀴로도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길 위의 눈이 질퍽하게 녹아있어서 바퀴를 감은 철제 사슬이 아스팔트 바닥과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우고서, 아까 대머리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팔에 토씨도 끼지 않고 몸을 구부려 체인을 풀었다. 그 동안 여러 대의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치며 내게 예외 없이 젖은 눈 세례를 퍼부었다. 체인을 풀어버린 자동차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설악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탓에, 곳곳에 다시금 경사진 길이 나왔고, 그때마다 차를 거의 지그재그로 움직여서 간신히 올라갈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채널을 연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언덕에 이르러서는 결국 중턱쯤에서 차가 서고 말았다.
나는 다시 체인을 감고서 겨우 언덕마루에 이르렀다. 그러나 체인이 부실했던 것인지, 내가 체인을 부실하게 감았던 탓인지, 어느새 체인은 서로 엉키고 끊어져서 제구실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차에서 내려 자세히 보니 그 완강하던 고리들이 제멋대로 풀어져서, 도저히 다시 짜 맞출 수 없는 어지러운 영상들과 다를 바 없게 되어 있었다. 가까스로 체인을 풀어내고서 언덕 너머의 길을 내려다보니 경사가 아주 급해서 도저히 그냥은 내려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망연자실해 있는데, 때마침 제설차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제설차가 눈을 쓸고 간 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차를 움직였다. 그러나 길이 미끄럽기는 여전해서 차체가 이리저리 쭉쭉 미끄러졌다. 몇 번이고 배수로에 빠질 위험을 겪고 나서 평지에 이르렀을 때, 내 몸에는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서인지 낮은 지대에도 눈은 두텁게 쌓여 있었다.
얼마 후 우리 앞에서 회색 소형 승용차 한 대가 1차선으로 천천히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날이 곧 저물 터이므로 마음이 급했던 나는 그 차를 추월하여 가급적 눈이 덜 쌓인 곳을 골라 자주 차선을 바꾸며 달렸다. 그러나 마음만 앞설 뿐 차는 그다지 속도를 낼 수 없었고, 후면경 속에는 내내 그 회색 차가 들어 있었다. 그 차의 운전자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나는 곳곳에 쌓여 있는 눈더미를 피하기 위해 계속 차선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요란하게 경적이 울리더니, 뒷차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내 차에 철퍽 하며 눈을 끼얹었다. 그와 동시에 뒷자리 오른쪽의 창문이 열리면서, 한 젊은 여자의 얼굴과 두 손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언뜻 보기에 진한 화장을 한 그 여자는 상체를 내밀고서 우리 차를 향해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표정과 몸짓으로 보아 험한 욕설을 퍼붓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차선을 자주 바꾸어 뒷차의 운행을 방해했다는 뜻일 것이었다. 순간, 나는 눈앞이 아뜩했고, 등골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회색 차는 계속 속도를 높여서 달아나듯 휑하니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가속기에 얹은 발에 힘을 주었다. 온통 흰 눈으로 덮인 텅 빈 차도에서 갑자기 두 대의 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나로서는 딱히 어쩌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 차를 따라잡아서 욕을 되돌려주거나 사과를 요구하거나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단지 방금 그 여자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더욱이 지는 해의 햇살이 눈에 반사되어 그 차의 회색 차체를 너무도 완강하게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어떻게 해서든 그 완강함을 지워버리고서 그 안에 들어 있을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리고 아까 그 여자의 얼굴과 몸짓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방금 내가 겪은 일에서,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도저히 현실감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나로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몸과 마음의 균형 감각을 되찾아야 했다. 최악의 경우에 속되기 짝이 없는 드잡이가 일어난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될 성싶었다. 나는 애원하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으로 계속 그 차를 바짝 뒤따랐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차의 번호판에서 ‘경기’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러나 진하게 선팅을 한 탓에, 자동차 안의 상황은 육안으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하튼 그 차의 운전자도 이곳 지리에 익숙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는 방금 전에야 내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뒤에서 보기에도 그 차는 초조하고 조급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다 붉은 신호등에 걸릴 때에도 약간 제동을 하는 듯하다가 미처 좌우를 살필 시간도 가지지 못하고서 내처 횡단보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도로 위에는 차도 사람도 드문드문 눈에 띌 뿐이었다. 나의 간절한 안타까움은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근질거림으로 바뀌고 있었다. 앞차는 깜박이 등도 켜지 않고서 추월도 하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도 하면서 나를 떼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난폭 운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붉은 등이 켜져 있는 사거리에서도 영화 속의 자동차 추격전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졌으며, 나는 공중전을 벌이는 전투 비행사처럼 그 차의 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차를 세울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바짝 뒤에 붙어 달리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나로서는 그 차가 사거리에서 정차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앞차가 갑자기 멈춰 서서 가만히 있는다면, 내가 뭘 어쩔 수 있다는 말인가.
얼굴이 잔뜩 상기된 C는 간간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던졌지만 나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리모컨을 함부로 눌러대고, 나는 거기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C와 나의 관계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 때, 나는 주변의 풍경이 눈에 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도로 이정표를 보니, 내가 아까 체인을 벗겼던 곳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제야 안 사실이지만, 가파른 언덕길을 피할 수 있는 우회로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다시금 미시령으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나타날 것이었다. 내 차는 물론이고, 앞차도 체인을 달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곧 추격전이 끝나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은 셈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하게 경사진 길이 앞을 가로막았다. 제설차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지만, 그 위로 다시 눈이 내려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앞차는 희뿌연 배기 가스를 내뿜으며 갈지자로 움직였다. 눈 위로 앞차가 남긴 타이어 자국이 선명했고, 내 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앞차가 멈춰 섰을 때, 나도 차를 세웠다.
우리는 거리를 조금 두고서 한동안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나는 마치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조난을 당한 동료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 차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제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그와 상의를 하려는 심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나는 검은색 색안경을 고쳐 쓰고서, 앞차 쪽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러나 그때 내 머릿속은 휑하니 비어 있어서 여전히 전혀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고, 내 몸은 여전히 자동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 나는 더할 나위 없는 불쾌감과 싸우고 있었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거북함이 바닥 모를 자책감을 동반하여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운전석 옆에 서자, 잠시 후 차창이 천천히 내려갔다. 운전자는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순진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약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짓궂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뒷자리의 유리창도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몸을 숙여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발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 작은 차 안에는 여러 사람이 타고 있었다. 조수석에서는 운전자의 아버지인 듯한 노인이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고, 뒷자리에는 운전자의 어머니인 듯한 노파와 그 옆에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 그리고 다시 그 옆에 아까 보았던 여자, 이 상황에 결정적으로 동기를 부여한 삼십대 중반쯤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착잡한 표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동안 내게 쫓기면서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을 갈등과 언쟁과 분연한 결의 따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조수석의 차 문이 열리면서 노인이 아이를 안은 채 밖으로 나왔고, 곧 뒷문들도 열리면서 뒷자리의 사람들도 하나씩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운전자 사내도 이제 달리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몸짓으로 안전띠를 풀고서 차 문을 열려 했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차 문을 몸으로 막았다. 나는 그들이 그렇듯 모두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아까의 그 거북스런 불쾌감이 얼떨떨한 혼란스러움으로 바뀌어 있음을 느꼈다. 방금 전에 차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내 앞에서 최종적으로 채널이 덜컥 소리를 내며 바뀐 것이다. 그 동안 제멋대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바뀌던 채널이 이제 한 장면에 고정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곤충이나 파충류의 것처럼 보이는 알주머니가 보이고, 그 주머니가 터지면서 수없이 많은 알들이 쏟아져나오고, 그 각각의 알에서 조그만 곤충이나 파충류처럼 보이는 것들이 무수히 튀어나와 티브이 화면 같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아까 내가 왜 그토록 놀라고 당황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C도 차에서 내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회색 차에서 그들이, 그 거미 같은 것들이, C와 내가 서울에 두고 온 가족들이, 우리의 아이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 C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와 내가 마지막으로 채널이 완전히 맞춰진 순간이었다. 나는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까닭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계속 몸에 힘을 주어 차 문이 열리는 것을 막고 있었다. 운전자는 순순히 행동을 멈추고서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제풀에 힘이 풀려 뒤로 밀려났고, 비틀거리고 반쯤 미끄러지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10
미시령에서의 그 일이 있은 지 1년 남짓의 시간이 흐른 후, 이제 나는 바닷가의 한 마을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뒷차에서는 여전히 움직임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분노감의 낭떠러지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벌컥 차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서 곧바로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던 터라 차 안의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이 시치미를 떼고서 말을 돌리면 나 또한 시치미를 떼고서, 그저 길을 묻는다거나 하는 평범한 대화를 그들과 나눌 생각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시비를 붙여온다면, 아마도 우리 사이의 채널이 마침내 파열되어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반쯤 거리를 좁혔을 때, 흰색 자동차는 약간 후진을 하더니 곧 앞으로 급발진하여 차도로 들어서서 휑하니 달려가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점차 어두운 그늘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논두렁과 야산 자락을 바라보았다. 막상 그들이 사라져버리고 나자, 나는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모든 만남은 두려우면서도 가슴 뛰게 기쁜 일이었고, 모든 헤어짐은 다행스러우면서도 서글픈 일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지도를 살피고 사람들에게 묻고 하여 어렵게 상가를 찾았다. 빈소가 마련되어 있는 방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B가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도 많이 변해 있었다. 상복을 입고 건을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낯선 느낌을 주었을 터인데, 지나칠 정도로 바싹 마른 몸과 약간 비틀거리는 듯한 걸음걸이는 내게 연민을 자아내기 위해 그가 일부러 내 앞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도 무척 힘들어하는 듯이 보였다. 아마도 오랜 어머니 병 수발에 기력이 쇠진한 모양이었다. 그로 인해 나로서는 지금의 나와 과거의 그를 이어주는 것이 뭐가 남아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심지어 그가 늘 그런 모습이었는데, 단지 내가 기억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는 분향을 하고, 생전의 그의 어머니가 내게 자주 끓여주던 게처럼 엎드려서 아주 천천히 두 번 절을 했다. 그러고 나서 B를 따라 사랑채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나는 아까 만났던 두 사내, D와 E를 다시 보았다. 처음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가, 문지방을 넘어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벌떡 몸을 일으켜서 반색을 하며 번갈아 가며 덥석덥석 나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나 또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로 그들이 반가웠다. 아까 있었던 일은 이제 한바탕의 유쾌한 장난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B의 고향 후배였다.
B가 나서서 소개를 하고 말 것도 없이,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서 곧바로 술잔을 맞부딪쳤다. B가 잠시 영문을 몰라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다가 문상객들을 맞기 위해 자리를 비운 후로, 우리는 체증이 풀린 듯, 채널을 묶어두고 있던 매듭이 풀린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 나는 주로 참새에 대해, B에 대해, 그리고 그와 나 사이의 채널에 대해 말했고, 그들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 내 말에 무턱대고 맞장구를 쳤다. 이미 우리 사이에 지켜야 할 예절이나 도리 같은 것은 없었다.
술잔이 계속 돌았고, 전작이 있었던 터라 나는 금방 피로와 취기로 인해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B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동차를 세워놓은 뒷마당으로 갔다. 어차피 술자리 한쪽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느니 자동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여볼 요량이었다.
내가 차 문을 열고서 막 차에 타려고 할 때, 뒤에서 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술 드시고 운전하려는 겁니까?”
그들이 다시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차 문을 붙잡은 채로 대답했다.
“이번에도 내 뒤를 따라올 생각이오?”
그러자 E가 쿡쿡 소리내어 웃으며 내 몸을 붙들더니 뒷문을 열고서 나를 타게 했다. 그리고는 D와 함께 앞자리에 올라타서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엔 나를 어쩔 생각이오?”
나는 검은 넥타이를 풀어 상의 주머니에 넣고서 자꾸 감기려는 눈으로 창밖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대충 그런 말을 들은 듯했다. 아마도 B가 그들에게 나를 잘 보살피라고 말을 해두었을 터였다. 얼마 후,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제법 규모가 큰 호텔 앞에 이르러 있었다. 나이트클럽의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서 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갔다.
취중에도 나는 D와 E가 여러 사람과 알은체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말이어서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지만, 빈자리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우리는 무대 가까이에 마련되어 있는 넓은 자리에 앉았다. 요란한 소음을 예상했는데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무대 위에서는 여러 쌍의 남녀가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아마도 그곳은 젊은 사람들이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곳이 아니라, 주로 어느 정도 나이 든 사람들이 사교춤을 추는 무도장에 가까운 곳인 듯했다.
얼마 후 세 명의 여자가 우리와 합석했다. D가 내 귀에 대고서 말했다. 우리끼리는 심심할 것 같아서 함께 춤을 출 여자들을 불렀다는 것이다. 나는 안락의자에 파묻혀 있던 몸을 일으켜 그녀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가씨들이 바로 택시 걸이군요.”
내 말에 그녀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 중에 한 여자는 모욕을 당한 듯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런 객쩍은 말을 할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도장에서 손님들과 춤 상대를 해주는 직업적인 댄서들을 택시 걸이라고 하지요. 나도 말로만 들었지만.”
내가 내친김에 말을 잇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치 무척이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손뼉까지 쳐가며 깔깔대고 웃었다. 먼저 택시를 타시죠. D가 숨이 막힐 듯 웃으며 나를 일으켜 무대 쪽으로 밀었다. 나는 첫 번째 여자와 춤을 췄고, 잠시 쉰 후에 계속하여 두번째, 세번째 여자와도 춤을 췄다. 나는 춤을 잘 추지도 못하면서 술김에 내 살찐 몸을 내 딴에는 율동적으로 움직이며 그녀들과 어울렸다. 그러는 동안에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나는 이 채널 저 채널로 부산히 옮겨 다니듯이 세 여자의 품속을 번갈아 파고들며, 그녀들의 목덜미와 가슴과 허리와 엉덩이와 허벅지에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나는 현란한 불빛 아래서 부서지고 으깨지고 갈리고 있었다.
11
이집트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레 전에 나는 나일강 상류 쪽에 위치한 이집트의 도시 아스완에 있었다. 처음 카이로에 도착했을 때, 내게는 일행이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아스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미 혼자였다.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한 고립이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일행 중에 몇 사람은 처음부터 내 성격상의 문제를 내세워 내가 그들과 합류하는 것을 꺼려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는 설마 그 먼 이역의 땅에서조차 남들과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보자면 다른 사람들의 우려가 정확한 것이었고, 나는 잠시 방심을 했다가 나 자신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었다.
처음에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했다. 더욱이 강과 사막과 인간들의 놀라운 건축물이 어우러져 있는 아스완의 풍광은 나를 매혹시켜서 수시로 거의 비현실적인 환각 상태에 빠져들게 했다. 이를테면 채널의 근원지, 혹은 채널이 끝난 곳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고 할 만한 그곳은 아직까지 내가 알아왔고 살아왔던 곳과는 사뭇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만약 내가 다시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오리라고 굳게 결심했는데, 그렇듯 낭만적인 충동에 흠뻑 젖어본 적은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돛을 달고 노를 저어 움직이는 펠루카를 타고서 몇 번이고 강 위를 미끄러졌다. 배가 잔잔한 물 위에 띄워진 나뭇잎처럼 하안을 따라 유유히 흘러내려가는 동안, 배 주위에서는 까만 피부의 어린아이들 몇이 각기 양철 깡통 같은 것을 펴서 만든 일종의 작은 뗏목 위에 엎드려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헤엄을 치는 듯한 자세로 널빤지 모양의 노를 저으며 함께 어울려 놀고 있었다. 검은 새끼 오리들을 연상시키는 그들은 수시로 목울대를 떨어서 기묘한 소리를 냈다. 그 동물적인 소리는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 위로 미끄러져서, 섬의 그림자가 만들어놓은 시원한 그늘 속으로 스며들어 깊은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날씨의 일교차만큼이나 정신의 일교차도 큰 곳이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그 낭만적인 환각의 세계는 차츰 흐릿하게 지워져 버리고, 대신 내 마음속 지옥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나는 다시 한번 강을 건너서 서쪽 하안을 걸었다. 이미 강에는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는데, 그 고적한 풍경이 실제로는 내 내면을 늑대처럼 물어뜯고 있었다. 홀로 있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나는 까닭 모를 불안감과 착잡함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었다.
덥고 깊은 이국의 밤에,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끈끈한 땀에도 불구하고 덜덜거리는 에어컨 소리로 인해 내내 오한으로 덜덜 몸을 떨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나는 그 부근에 나일로 미터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여행 책자에 나와 있는 대로 아스완 박물관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얼마 후에 그곳에 이를 수 있었다. 나일강이 범람할 때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고대인들은 강에 90개의 계단을 만들고, 그 계단의 벽에 눈금을 새겨놓았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수면 위로 올라와 있는 그 눈금들을 살펴보려 했다. 그때 계단 뒤쪽에서 언뜻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좀더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다시 보니, 그곳에는 차도르로 몸을 감싼 이집트 여인과 아마도 그녀의 자식들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 여인은 양손에 두 아이의 손을 잡고서 꼼짝도 않고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돌 위에 올라서 있는 아이와 허리까지 물속에 잠겨 있는 남자아이도 어머니로부터 무언의 명령을 받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로서는 나 또한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곳에 각기 하나의 눈금처럼 새겨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계단의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는 강의 수위와 눈금이 만나는 부분을 눈으로 가늠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존재의 수위가 너무 높구나. 물론 그것은 나 자신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그 말 그대로, 내 존재의 수위가 너무 높다는 자각에 뼈가 저리는 아픔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강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나는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면서 천천히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상태로 조금만 몸의 균형을 잃으면 머릿속의 뇌수가 흘러넘쳐 수면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세상의 물결은 한 길이 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온몸에 눈금이 새겨진 채 막대기처럼 세워져 있었다.
내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세 명의 이집트인들이, 어머니와 딸과 아들이 몸을 돌려 천천히 내게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나는 두고 온 나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바로 내 몸에 칼침처럼 새겨진 눈금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존재의 수위가 너무 높았다. 그로 인해 세상이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물결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내 속에서는 채널이 걷잡을 수 없이 뒤바뀌고 있었다. 내 몸이 토막토막 잘려 나가고 있었다.
12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춘 다음 날은 무엇을 했던가. 나는 새벽녘에 숙취로 인한 두통과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한 호텔 방에서 눈을 떴다. 어떤 괴물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그 괴물이 토악질을 하여 나를 세상에 다시 뱉어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완전히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는데, 옷들이 침대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서랍장 위에 신용카드와 영수증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서 전원이 꺼진 티브이를 바라보았다. 전원을 얻지 못하여 먹통이 되어 있는 티브이는 커다랗고 각지고 새카만 눈을 가진 외눈박이 괴물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 첫 가출 이후로 나는 자주 여관방에서 새벽에 눈을 뜨곤 했다. 잠이 덜 깬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예외 없이 어떤 남자나 여자가 흐트러진 옷차림과 방자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잠자는 사람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하릴없이 티브이 쪽으로 다가가 전원을 켜고서, 팬티 차림으로 쪼그리고 앉아 드르륵드르륵 채널 조정기를 돌린다.
순간순간 화면이 바뀌고, 그때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어두운 방 안으로 초록색, 회청색, 진회색의 빛이 쏟아져나온다. 빛의 요동 속에서 독재자나 정치가들의 박쥐처럼 튀어나온 눈알이 클로즈업되기도 하고, 애국가 소리, 국기가 펄럭이는 소리에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와 벌거벗은 남녀의 신음소리가 겹쳐지기도 하고, 쇳물이 펄펄 끓는 용광로를 원경으로 하여 화면 전체에서 땀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 모든 장면이 물귀신처럼 서로 얽혀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잠깐씩 수면에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늑대떼처럼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물리고서 원을 그리며 돈다. 나는 장딴지가 저려오는 것을 참으며 쉬지 않고 드르륵드르륵 계속하여 채널을 돌린다. 그 소리는 맷돌을 돌려서 콩을 갈 때 나는 소리와 너무도 흡사하다.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며 나는 부드득부드득 이를 간다. 윗니와 아랫니가 맷돌처럼 맞물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내 머리 위에서 맷돌이 돌아간다. 내 머리가 맷돌처럼 돌아간다. 그때처럼 나는 리모컨을 찾아들고서 침대 위에 벌거벗고 누운 채 함부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의 고통을 무릅쓰고 분노를 억누르며 채널을 바꾸는 일이었다. 화면이 달라질 때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의 은근한 기운이 움찔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털이 긴 시추가 리모컨을 물고서 달아나고, 달리던 자동차가 미끄러지다가 불 꺼진 건물의 진열창에 부딪히는 바람에 그 안의 대형 모니터에 터져나가고, 임팔라를 놓친 표범이 폐병 환자처럼 여윈 가슴을 들먹이며 헐떡거리고, 한 중년 여자가 푸른색 소파 위에 앉아서 자기 살을 연신 살살 쓰다듬으며 쉬지 않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늦은 밤이든 새벽녘이든, 나의 방에서든 호텔 방에서든, 내가 쉬지 않고 리모컨의 버튼을 누를 때, 정작 내가 돌리고 있는 것은 내 속의 채널이었다. 채널이 끊임없이 돌아갈 때, 정작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것은 내 속의 채널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티브이가 없는 곳에서도 내 속의 채널은 계속하여 돌아간다.
내 속의 채널의 수가 모두 몇 개인지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그 수가 때에 따라 엄청나게 늘었다 줄었다 하여,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서 있기조차 불안하여 쉬지 않고 돌아간다. 돌고 있는 한 넘어지지 않는 팽이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팽이처럼 핑핑 돌아가고, 내 온몸은 과열되어 더욱 민감해지고 불안해진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그것이 원리이자 운명이다. 내 몸이 돌면서 내 속에서는 채널이 돌아갔다. 채널이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면서 나는 차츰 공중으로 떠올랐다. 거울에 비친 나의 살찐 몸이 점점 더 둥글어지고 있었다.
13
나는 리모컨의 음 소거 버튼을 눌러서 티브이의 소리를 죽여버렸다. 창밖의 세상은 아직 희끄무레했다. 나는 속옷을 걸치고서 욕실 안으로 냉장고 앞으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티브이 앞으로 돌아왔다. 화면 속에서는 한 남자가 샤워를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거실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 다시 누워서 두 개의 베개를 목 밑에 받쳤다. 장면이 바뀌어, 거실의 마룻바닥에 목욕용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벽에 기댄 자세로 죽어 있고, 그 앞에 두 명의 형사와 한 명의 정복 경찰이 서 있었다.
나는 그 죽은 사내를 B라고 부르기로 한다. 실제로 그는 B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형사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G와 H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시체는 말이 없다고? 죽은 자는 침묵한다고? 천만에. 내가 보기에 죽은 자만큼 수다스런 존재도 없어. 시체처럼 많은 걸 말해주는 게 따로 없다구. 물질적으로도 무수히 많은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잖아. 그뿐이야? 죽은 자들은 물질을 초월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지. 산 자들의 꿈이나 상상 속에서 실제처럼 현신하기도 하고, 기억이나 회상이라는 채널을 통해 홀로그램으로 떠오르기도 하는 거지. 그러면서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거야. 단지 우리가 그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을 뿐이지. 죽은 자의 언어고, 시신의 메시지니까.”
G의 말에 H가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
“그건 그래. 그런데, 지금 이자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나?”
죽은 B는 줄곧 발견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베이지색 가운을 걸치고 실내화를 신은 채,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자세였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바닥을 짚고 왼손으로는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있는 힘껏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다. 부검을 해보아야 할 터이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스스로 자기 목을 졸라 질식사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 개의 손톱이 살 속에 깊이 박혀 있어서, 누군가 제 삼자가 그 상황을 연출해놓은 것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졸라 죽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지금 이자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있어. 우리는 이자의 말을 해독하는 게 아니라,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거야.”
H는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B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자살을 한 것일까, 아니면 살해당한 것일까. 그런 수수께끼 말인가?”
“그렇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글쎄, 나로서는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겠어. 자네 말로는 죽은 자처럼 수다스러운 존재가 없다고 했지만, 어떤 시체들은 자기들의 사연을 영원히 비밀로 봉인하여 함께 가지고 떠난다고 할 수는 없을까?”
H의 말에 G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시체가 아무리 많은 말을 떠벌린다고 해도, 그 말이 우리에게 직접 전달되는 건 아니지. 각기 나름대로 그 위에 봉인이 하나씩 붙어 있는 것이고, 말이 많을수록 그 봉인도 더 강력한 것이 되겠지.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 봉인을 뜯을 수 있어.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뭐겠어. 게다가 죽은 자들도 남들이 그 비밀의 봉인을 뜯어주기를 원하고 있는 거야. 그 봉인은 전적으로 죽은 자 자신이 원해서 붙인 게 아닐 테니까 말이야. 이자의 경우는 달리 생각할 여지도 없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자의 왼손이야. 그런데 남의 힘을 빌렸다면 저렇게 완벽하게 목줄기를 움켜쥘 수가 없지. 게다가 손등이나 손가락에 외상도 전혀 없어. 아마도 기도와 식도가 완전히 뭉개졌을 게 분명해. 저 손을 풀어내려면 웬만한 힘으로는 불가능할 게야. 그러니 자살인 건 틀림없을 것 같은데, 어떤 상황이 이자로 하여금 이렇게 불가능한 행동으로 몰아간 건지 알아봐야겠지.”
H는 G의 말을 들으며 B의 오른쪽 다리를 구두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H는 아무 생각 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때 그는 뭔가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때 그는 자기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앳된 얼굴의 정복 순경 J와 눈길이 마주쳤다. 언뜻 보기에 J는 눈을 크게 뜨고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H는 J가 속으로 모종의 격렬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지워버리려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H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그를 응시하는 J의 퀭한 눈도 하나의 수수께끼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답이라는 것이, H가 죽은 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순간, H는 짜증스러움과 더불어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 얼마나 상투적인 질문에 그 얼마나 진부한 답이란 말인가. 네까짓 게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감히 나한테 네 하찮은 감정을 드러내려 하는 거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J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J는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치처럼 동공을 더욱더 크고 희게 열어젖히고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H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J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 침묵의 언어는 너무도 냉랭하고 단호했다. H로서는 J가 처음 현장에서 시신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대해 갑작스레 노골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앞에서, H는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워졌다. 급기야 그는 자기도 모르게 코트 자락으로 펄럭 바람을 일으키며 J 쪽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때 G의 손이 그의 오른손 손목을 움켜쥐었다. G는 H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끌고 B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무릎을 접었다. 그가 죽은 자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길게 비어져나와 있는 혀를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빨리 마무리를 짓자구. 아무래도 우리는 이 손의 불가사의한 힘에 주목해야겠어.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보고서의 규격에 맞지 않으니 정말 난감한 노릇이야.”
G가 짧게 킬킬거리는 웃음을 흘리고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 시간 낭비할 것 없다고, 시간 절약한다고 일찍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자네 아나? 그렇게 해서 아직 남아있는 시간을 아끼자는 거지. 그런데 그 절약이라는 게 결과적으로 제 시간을 단축시키는 거가 되잖아.”
H는 J가 서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J는 막 벽 뒤로 사라지고 있던 참이었는데, 눈으로는 여전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자식이.’
H는 욕이 터져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러니 대체 어떤 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 살 파먹는 식의 결정을 내리게 하는 걸까. 그걸 초인적인 힘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그 힘은 인간 세상의 운명이라는 채널을 관장하고 있을 거야. 그 힘이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운명을 어떤 때는 치명적인 채널에, 또 어떤 때는 갱생의 채널에 맞추도록 명령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자살은 늙어 죽는 것과 달라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이 죽음의 채널에 맞춰진 결과일 뿐이야. 그 초월적인 힘은 계속하여 채널을 돌려서 인간들을 선택하고 말이야.”
H가 B의 혀를 놓고서 일어섰을 때, 그의 얼굴에는 아까와는 달리 적이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J는 벽 모퉁이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뻔뻔스러움과 어리석음을 느꼈다.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저 사내, 엉터리 수다를 떨고 있는 저 사내는 자기 말마따나 엉터리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로 인해 그는 동시에 답답함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 목을 파괴한 힘, 그 힘을 불러일으킨 파괴적인 힘, 그 파괴적인 힘을 창조한 궁극적인 힘, G와 H는 실제로 그 힘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세상은 위험 수위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 힘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사람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B는 자기 손으로 죽은 것인 동시에, 다른 손에 죽은 것이었다. 신고가 들어오자마자 J가 가장 먼저 사건 현장에 달려온 것도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이런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며 온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J는 그 보이지 않는 손이 턱 끝을 차갑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14
한낮이 다 되어 D와 E가 방문을 두드렸을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땀을 흠뻑 흘리며 아까 티브이를 보던 자세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몸에 묻어 있는 땀이 죽은 자의 피처럼 끈끈하게 느껴졌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봐야겠다는 말을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그러자 그들은 기왕에 어제 신세를 졌으니, 호텔 부사장인 자기들의 선배를 잠깐 만나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나이트클럽에서 B의 친구라는 남자와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났다. 그 F라는 사내가 우리 테이블에 술과 안주를 보내주었고, 그가 건넨 명함은 나의 셔츠 주머니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구강 세척제로 가글을 하고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D와 E는 왠지 의기소침해 보였다. 자기들끼리도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줄곧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전날과는 실로 대조적이었다. 나로서는 전날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에 행동이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수많은 문들이 열려 있거나 닫혀 있는 어둠침침한 복도를 걸었다. 그때 나는 문득 어렸을 적에 학교 실험실에서 본 원심 분리기를 떠올렸다. 여러 개의 시험관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꽂혀 있고, 분당 5천에서 1만 회의 고속 회전을 하는 모터에 의해 그 시험관들이 한꺼번에 돌아가고, 그 원심력에 의해 시험관 속의 액체를 구성하는 성분들이 비중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는 모습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특히 혈액에서 혈장을 분리하는 과정이 그러했다.
호텔 건물이 곧 하나의 거대한 원심분리기였고, 이 수많은 방들은 거기에 꽂혀 있는 시험관들이었다. 이제 곧 원심 분리기가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었다. 아니, 이 호텔이라는 원심 분리기는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은밀한 소용돌이에 의해 각 방마다 감추어져 있던 욕망과 정염의 실체가 벌겋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승강기를 타고 맨 위층으로 올라가서 F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D가 먼저 다가가서 몇 마디 말을 건네자, F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러면서 B와 절친한 사이라면 자기와도 그렇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어제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은 기억해도 그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호텔의 부사장이니 지배인이니 하는 직함을 가진 사람답지 않게 옷차림이 수수했고, 비교적 지적인 얼굴에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때 나는 실내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꽤 넓은 사무실 안에는 우리 세 사람과 F 말고도 네 사람이 더 있었다. F는 우선 우리를 창가 쪽의 응접용 탁자에 앉게 하고서 여종업원으로 하여금 커피를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골치 아픈 일이 한 가지 생겼는데, 얼른 처리할 테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가 앉아 있는 사무용 책상 앞에는 이십대 초반의 남녀 둘이 죄인처럼 서 있었고,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그 곁에 붙어 서서 약간 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야. 아침부터 누구는 사무실에서 울고 있지를 않나. F의 말에 내게 커피를 타다 준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젊은 남녀 중에 여자 쪽은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 쪽은 자기는 본래 주의가 산만하다는 듯이 간간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거나 노려보듯 F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F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가는 제풀에 맥이 빠진 듯 말을 멈추곤 했다.
두 남녀는 옷을 비교적 세련되게 차려입은 편이어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당돌하고도 엉뚱한 일을 벌인 모양이었는데, 나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새벽까지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 7시경에 추위에 떨며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특급 호텔인 그곳에서 방을 얻을 수 없었고,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접수대를 지나 승강기를 타고서 위로 올라갔다. 아무 층에서 내리고 보니 8층이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복도에서 서성대기도 하고 승강기 옆의 안락의자에서 잠시 졸기도 하다가, 마침 한 쌍의 나이 든 관광객이 방을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그들은 청소부를 겸한 객실 담당 여자가 올라와서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체크아웃을 하는 동안 방 안과 냉장고 안을 점검하기 위해서였을 터였다. 그녀는 곧 방을 나오면서 나중에 청소를 하려는지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녀는 복도 끝으로 걸어가기 전에 두 남녀를 힐끔거렸고, 그들은 짐짓 딴청을 피우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두 사람은 문이 열려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문 손잡이에 ‘방해하지 마시오. 취침 중’을 매단 뒤에,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서 훌훌 옷을 벗어 던졌다. 청소부가 와서 문을 열려 하면 뭐라고 말할지 미리 준비도 해두었다. 그러나 청소부는 오지 않았다. 그들은 샤워를 했고, 육포 따위의 안주와 더불어 냉장고 속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얼었던 몸이 풀렸던 데다가 피로에 지치고 술에 취한 나머지 그들은 곧 잠에 떨어졌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한 번 청소를 하러 왔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아섰던 청소부는 두 번째 왔을 때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두 젊은 남녀가 완전히 발가벗은 채 침대 위에 엉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탁자와 바닥 위에는 빈 술병과 뜯어진 봉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돌아섰다가, 언뜻 짚이는 바가 있어서 다시 몸을 돌렸다. 그들은 불법 투숙객이 분명했다.
그녀는 전화로 남자 직원들을 불렀다. 결국 두 남녀는 잠과 술이 덜 깬 채 간신히 옷만 걸친 후에 방에서 끌려나와 지금 F의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F는 그 일을 크게 문제삼으려 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먹고 마신 것에 대해서는 변상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수중에 돈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더욱이 아직 술이 덜 깬 탓인지 몰라도, 그들은 전혀 미안해하거나 죄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들 쪽에서 만사가 귀찮으니 어떤 식으로든 빨리 마무리를 짓자는 식이었다.
나는 그들의 태도에 흥미를 느꼈다. 그때 F와 나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는 그다지 관대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미간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실제로 겉으로는 짐짓 화가 난 척하면서도 사실은 그 자신도 무척이나 흥미로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10여만 원 상당의 손해를 내세워서 그들을 경찰에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그냥 순순히 보내주기에는 왠지 아쉬움이 남는 터였으니, 그에게는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좀더 극적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일 따름이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F가 다소 거칠고 딱딱한 어조로, 그리고 반말로, 두 사람은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남자 쪽은 여전히 기가 꺾이지 않은 자세로 뻣뻣이 서 있었다. 그때 여자 쪽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할게요.”
그 말에 나는 물론이고 실내에 있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할 사이라는 말도 아니고 결혼하겠다는 말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젊은 사내도 자기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을 흘렸고, 그녀 자신도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방금 그 말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나온 말이 아닌 듯했다. 그와는 반대로 상대방이 장난을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서 역시 장난조로 응수를 한 것이었다.
웃지 않은 단 한 사람은 F였는데, 그는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대뜸 크게 소리쳤다. 그래, 결혼해라. 서로 죽이 맞아 상습적으로 이따위 짓이나 벌이고 다니는 걸 보니 결혼할 자격이 충분하겠다. 내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주례를 서주랴. 결혼이라는 게 허영심의 증거다. 모든 부부는 허영심으로 맺어지는 거다. 허영심이 없다면 어찌 감히 결혼할 생각까지 할 수 있겠냐.
F의 말은 내게 귀에 익은 것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고 실제로 아직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B가 반 농담 삼아 자주 입에 담던 말이었다. 그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엉뚱하게도 F의 입을 통해 들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계속하여 소리쳤다. 너희들 어젯밤에 처음 만난 사이지? 같이 자고 싶었는데 잘 곳이 없었던 거지? 내 말이 맞잖아? 그러니 어쩔 거야. 나는 니들을 오줌 함부로 싸고 돌아다니는 개처럼 취급할 수 있어. 그러나 이제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젊은 남자는 턱을 쳐들며 킁 하고 코웃음 소리를 냈고,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로써 게임은 끝나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각기 원심 분리기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시험관이었다. 그 시험관들이 맹렬하게 돌아간 뒤, 뇌수인지 정액인지 모를 끈끈한 액체가 바닥에 가라앉아 천천히 응고되고 있었다.
결국 F는 그들을 보내주었다. 그들은 문을 나서면서도 끝내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이 싱겁게 끝나서 김이 샜다는, 기왕에 이렇게 될 거였으면 왜 그따위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냐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힌 후에, 나는 F에게 고맙다는 말과 더불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 F는 내 말에 조금 기분이 상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사업가답게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금방 활달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D와 E와도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서 방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 때, 이번에도 그들이 뒤를 따라왔다. D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내게 말했다. 방금 연락이 왔는데, B가 쓰러져서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지만, 함께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그가 떨떠름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서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제 빨리, 내 자리로, 내 채널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 하마터면 나한테는 B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으로 족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런데 차라리 그 말을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여하튼 그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나를 지나쳐 먼저 승강기 쪽으로 걸어갔다.
15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나 자신에게도 놀랍게도, 나는 이틀을 더 그 호텔에서 머물렀다. 분명 나는 서둘러 호텔을 나와서 서울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그곳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이틀 간에 벌어진 일들은 단편적으로만 기억날 뿐, 나머지는 흐릿하게 지워지거나 아예 공백으로 남아 있다. 아무리 곰곰이 돌이켜보아도, 마치 채널이 비워져 있거나 수신 주파수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온전한 영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몰고 호텔을 나왔고, 도중에 누군가를 태웠던 듯하다. 그리고서 가까운 포구로 갔고, 비가 많이 내렸고, 나는 흠뻑 비에 젖었으며,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방을 잡았던 것 같다. 술을 꽤 마셨는데, 그 때문에 기억이 훼손된 것 같지는 않다. 채널이 정확히 맞지 않고 자꾸 옆으로 미끄러지고 있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날 나는 고열에 시달리며 다음날 늦게까지 잠을 잤다.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나 보니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A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그동안 꺼놓았던 휴대폰을 켰다. 그동안 나는 한 번도 회사 업무와 관련하여 개인 사정으로 차질을 빚은 적이 없었던 터라 자꾸 부아가 치밀었다. 휴대폰에는 여러 개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는데, 그중에 몇 개는 A부장과 C에게서 온 것이었다. A가 오전에 시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해 점잖은 목소리로 남긴 음성 메시지를 듣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전혀 엉뚱한 생각 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 달 전쯤에 실내 운동 기구 위에서 마침내 천 번의 기록을 세우던 날, 리모컨이 고장 났다. 채널이 바뀌지 않았고, 리모컨 위쪽 끝의 작은 램프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부터 나는 잠정적으로나마 그 리모컨을 P라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겠다. P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그러나 건전지를 교체하기 위해 꺼내보니 손에 미끈거리는 액체가 묻어났고, 시큼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새 건전지로 교체하면서 흘러나온 액체도 깨끗이 닦아냈으나, 여전히 P는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날 오전에 나는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걸어 위치를 파악했다. 택시를 타고 가서 작은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보니, 작은 사무실 하나를 차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사십대의 여사무원이 접수를 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 후에, 한참 있다가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의 땅딸막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양복은 누가 보아도 작업복과 별반 다를 게 없을 만큼 초라했던 터라, 나로서는 왜 그가 굳이 정장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한쪽 어깨를 약간 뒤로 젖히고 삐딱하게 앉은 자세로 드라이버를 돌려서 P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건전지가 불량품이어서 전해액이 흘러나와 칩을 망가뜨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P가 구형 모델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러니 새 제품을 따로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까부터 그의 말투와 행동에 불쾌감을 느꼈는데, 그는 조심하려 하기는커녕 말과 행동을 점점 더 함부로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격하게 언쟁을 벌였다. 여직원이 울상을 지으며 우리를 힐끔거렸다. 티브이를 살 때 거기에 P가 포함되어 있었고, 아직 나는 한 번도 건전지를 바꾼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내가 P를 과도하거나 불량하게 사용한 탓이라 교환해줄 수 없다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극도로 화가 치민 나는 고장 난 P로부터 조종되는 기계처럼, 아니 고장난 P 그 자체처럼 변해버렸다.
정상적으로 의사 표현이 되지 않고, 대신 내 속에서 불쾌한 느낌의 액체가 계속 분비되어 지지직거리며 회로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충동적으로 감정이 들쑤셔지고, 제멋대로 사지가 움직이고, 눈 속에서 미세한 스파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생각대로라면 사내의 넥타이를 움켜쥐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 넥타이는 너무도 낡고 허약해 보였다. 대신 나는 탁자 위에 재조립되어 놓여 있던 P를 집어들어 공중에 쳐들었다가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P는 가엾게도 플라스틱 덮개가 깨지면서 그 속의 부품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자 사내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상체를 잔뜩 뒤로 젖혔고, 여직원은 당장이라도 전화기를 집어들 태세였다.
나는 사무실 문을 소리나게 닫고 건물을 나와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나는 내가 터무니없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간하여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윽고 내가 차에서 내리기 위해 막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 하는데, 운전사가 소리쳤다. 그쪽 문은 고장났으니 안에서 열지 말아요. 그러나 이미 내 손은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긴 뒤였고, 그러자 손잡이가 뚝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차에서 먼저 내린 운전사는 밖에서 문을 열어주며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운전사는 내게서 어떻게든 변상을 받아내려는 듯했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몸을 똑바로 세우고서 말했다.
“괜찮아요.”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다니, 뭐가요?”
나는 무표정한 말로 대답했다.
“괜찮다구요.”
그가 한쪽 손을 들어올리며 뭔가 항의하려는 말을 하려 할 때, 내가 먼저 다시 말했다.
“됐어요.”
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됐다니까요.”
나는 가볍게 말을 던지고서 돌아섰다. 그날 내가 느꼈던 그 과도한 분노의 감정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데 A의 말을 듣는 동안 까닭 모르게 그때의 분노가 되살아나서 나를 들쑤셔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나는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기 그지없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그가 나를 조종하고, 조정하고, 그리하여 뭔가 파행적인 행위를 조장하려 든다고 느꼈던 모양이었다.
분노의 감정은 채널을 바꾸는 데 장애가 되지만, 일단 거기에 채널이 맞춰지면 또한 다른 쪽으로 채널을 돌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법이었다. 나는 기왕 먼 곳에 내려와 있는 마당에 적어도 이번만은 그라는 존재를 내 속에 기억된 채널들 중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기로 했다. 괜찮아, 됐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신 나는 C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음성 메시지 속에서 그녀는 아무래도 당분간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있어야겠다고 말했다. 남편과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며칠째 휴대폰을 꺼놓은 나를 원망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리고서 지금이라도 좋으니 내려오라고 말했다. 그녀는 알겠노라고, 내려가서 조용히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화를 끊었을 때, 나는 내가 뭔가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됐어, 나는 마치 그 말이 비밀 채널에 접속할 수 있는 패스워드라도 되는 듯이 다시금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열 시간가량의 시간이 내 기억 속에는 또다시 공백으로 남아있다. 지워지거나 고장난 채널처럼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광경이 기억 속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접수계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다.
호텔 직원은 내게 C가 슈트룸에 방을 얻었다고 알려주었다. C는 조용히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술냄새와 담배 냄새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베란다 쪽의 통유리창을 통해 바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위의 한 곳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을 잠시 바라보았던 탓에, 시선을 실내로 돌렸을 때 한동안 검고 흐린 그림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녀는 냉장고의 문을 열면서 내게 자리를 권했다.
티브이 앞에는 그녀의 두 아이가 각기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서 동물들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녀도 굳이 인사를 하라고 시키지 않았다. 그 동안 몇 번 만나 얼굴이 익어 있던 큰아이가 잠깐 나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채널 결정권이 없었다. 일곱 살짜리 큰 여자아이는 일인용 소파 위에 앉아서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두 팔로 꼭 껴안고 있었고, 그 아래 다섯 살짜리 남자 아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소파 앞의 탁자에 바짝 붙어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어머니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모습은 마치 각기 하나의 핏줄로 연결된 세 개의 채널이 화목한 동물 가족처럼 하나의 평화로운 영상을 공유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듯 한결같이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어도, 만약 그들 각자의 채널을 티브이 화면에 연결시키면, 아마 전혀 다른 내면의 드라마가 음울하고 칙칙한 색조에 담겨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용히 그들 쪽으로 다가가서 긴 의자 한편에 걸터앉았다. 그때 잠시 나는 그들 어머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채널의 생식과 수태와 번식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아이들의 채널은 모태의 채널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모태의 비극적 정조는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탯줄의 채널을 통해 끊임없이 그들에게 전달되고 있을 것이었다. 아이들은 줄곧 아무 말 없이 티브이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나른한 한낮의 초원 풍경이 사라지고, 밤이 되어 사냥에 나선 하이에나들의 눈알이 작은 전구처럼,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곧이어 굶주린 하이에나 떼와 사냥감을 지키려는 암사자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편과의 이혼을 앞두고 있는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와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매년 여름에 남해안에 있는 한 호텔의 슈트룸에서 휴가를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계절이 늦가을이고, 이곳은 남해가 아니라 서해였다. 티브이 화면 속에서는 마침내 죽임을 당한 하이에나 한 마리가 암사자에게 물려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다른 하이에나들이 암사자가 잡아놓은 먹이를 물고 뒤뚱거리며 달아나고 있었다. 그때 남자아이의 코에서 결국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아까부터 그 아이가 계속 코를 후비는 것을 보고 있었지만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아이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얼굴을 씻기고 화장지로 코를 틀어막은 후에 나왔을 때, 마침 프로그램도 끝이 났다. 여자아이가 리모컨을 집어들었지만, C는 아이의 손에서 그것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빼앗아 들고서 티브이를 껐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몰아 옆 방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하이에나들처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고 딴전을 피우며 천천히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창 쪽으로 걸어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비는 그쳤고, 유리창 가까이에 갈매기 몇 마리가 호텔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으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중에 낯이 익은 갈매기 Y가 내게 말했다.
“저들이 두려워?”
나는 대답 대신 딴전을 피웠다.
“나는 너를 Y라고 부르기로 했어. 네 모양이 그렇거든.”
내 말에 Y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런 건 신경증만 도지게 할 뿐이지.”
내게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윽고 갈매기는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멀리 날아가버리고, 그 자리에는 이집트에서 보았던 어머니와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지난번처럼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어서 자신들의 모습을 지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C와 나 사이의 인연의 골은 실로 깊었다. 지난 20년쯤의 세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만나고 헤어졌다. 앞으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여하튼 죽음을 맞이할 때 이승에서의 삶을 돌아본다면, 그녀라는 존재가 내게 압도적으로 다가올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가 아직 젊었을 때, 결정적으로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가 나보다 먼저 결혼했는데, 결혼한 지 불과 몇 달 후에 우리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녀는 거의 매일 밤 내게로 달려왔다. 그러나 한 달 후 그녀는 증오와 분노로 차갑게 가라앉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내가 결혼하고 나서 우리는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그 후로 충돌이나 다를 바 없는 만남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별은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때 우리는 ‘왜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 거지?’라는 말을 번갈아 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남편이나 나의 아내는 도저히 말릴 수 없는 우리 관계에 고통을 겪다 못해 혀를 내두르며 두 손을 들고 말았다. C가 아이들을 재우고 돌아왔을 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슬픔과 증오와 질투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형편없이 지쳐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지치지만 않는다면 슬픔이든 증오든 질투든 우리 삶에 나쁠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 불러줘서 고마워.”
그녀가 주스잔을 옆으로 치우고, 둥근 유리잔에 적갈색 액체를 반쯤 따르며 말했다.
“남들이 볼 때는 내가 아이들까지 데리고 도망쳤다고 생각하겠지. 남편한테 사전에 아무런 귀띔도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남편은 내가 조만간 어떤 행동을 취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을 거야.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몰랐을 뿐이지.”
그녀는 내가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당신한테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그냥 내 사정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당신한테서 오라는 말을 듣고 나니, 달리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어. 나 스스로 뭔가를 생각하는 게 싫었어. 그래서 남의 생각으로, 남의 판단으로, 그래요, 당신이 늘 하는 말대로 남들의 채널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어. 내 채널은 닫아버리고, 그저 무연히 남들의 채널을 들여다보면서 그렇게 그 속에서 내 삶의 실루엣을, 나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싶었어.”
술이 천천히 목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감에 따라, 그녀는 점차 안색이 붉어지기 시작했고, 반대로 나는 얼굴에서 점점 더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듯 우리는 조금씩 다른 채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려온 것도 그래서였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당장은 아이들을 곁에 두고서 아이들 눈으로, 아이들 채널로 이 순간을 넘어서고 싶었어.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아이들은 그 순진한 눈길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어. 아이들은 하나같이 내게 채널이 맞춰져 있었어. 그러니 내가 달리 뭘 보고 달리 뭘 생각할 수 있겠어.”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아이들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때로 나는 그녀의 두 아이 중에 하나는 내 피를 물려받은 게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나는 그녀를 깊이 사랑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녀는 내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미지의 채널과 맞물려 있었다. 이렇게밖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이 점은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 불가사의한 채널에 집착했지만 또한 배신했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왔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나는 이제 진정으로 냉혹해졌다. 그녀를 이곳에 내려오라고 하고서 금방 후회를 한 것은, 내가 잠시나마 감상적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나는 그녀라는 채널을, 그것이 아무리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지워버리기 위해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었다. 그녀라는 존재도 하나의 채널에 불과한 터에, 다른 채널들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일전에 함께 동해안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어. 미시령 부근에서 당신이 체인을 감고 풀고 할 때 그 허둥거리던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몰라. 그리고 그 차, 그 작은 차에서 어른들과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자 당신이 당황해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
우리가 함께한 여행은 드물었다. 그녀는 항상 그 점을 아쉬워했다. 나의 눈에 그녀는 하늘 높이 떠 있는 연처럼 보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에 매달린 채 공중에 떠 있는 연, 그러나 실상 그 연은 때로 힘들고 지쳐서 스스로 그 줄을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멋대로 날아가버리고 싶지 않겠는가. 그 끝은 결국 파멸일 테지만, 지금 그녀는 연의 자살을 꿈꾸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구구절절 감상적인 채널이 더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때 나는 마침내 내 속에서 악의적인 채널이 하나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 채널 속에서 나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 채널을 잘 맞추어 필요한 것만 적절히 취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황금 알 낳아주는 거위가 될 수 있다. 나이 차가 얼마나 나든, 상대방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성별이 같든 다르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제한된 부분만을 취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거위의 배를 가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그런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고자 주의했으며, 때문에 내 눈에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오리로 보였다. C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녀는 그 중에서도 특히 귀중한 오리였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그 오리가 더 이상 황금 알을 낳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경우에 오리는 성질이 사나워진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분명히 깨달았다. 그녀는 낡은, 소멸해가는 채널이었다. 나는 그녀를 묶고 있는 줄을 끊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포도주잔을 내려놓고서 나의 왼손을 잡았다.
나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주고는 왼손을 뺐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갔고, 얼굴에 물을 끼얹고서 한동안 거울 속을 들여다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주춤했을 때, 그녀가 뒤에서 두 팔로 나를 껴안았다. 나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그녀의 팔을 풀고서 앞으로 몇 걸음 걸어나갔다. 내가 창가에 이르러 뒤로 돌아서자 그녀는 얼떨떨해하는 표정으로 의혹의 빛이 어린 눈을 내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 조금씩 변해갔다. 당신은 채널이 수시로 바뀌니까 나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나는 반대로 당신에게서 채널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관계를 지속시켜온 거야. 그녀의 침묵이 내 귀에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곧 찰칵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채널 속 세계로 들어가버린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내 속에서도 그녀의 채널과 방금 전에 생겨난 악의적인 채널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16
요즘 나는 사람들의 육체를 하나의 물병으로 간주하곤 한다. 아마도 존재의 수위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 이후부터일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물병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이 차올라 있는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물의 높이가 무릎 정도인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배꼽 정도까지 이르러 있기도 하다. 그 물의 높이가 곧 존재의 수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물병 속의 수위가 각기 다르듯이, 물병의 종류도 다양하여 서로 크게 다른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병의 크기나 모양은 사람이 성장하고 노쇠하는 동안 계속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물의 높이, 이른바 존재의 수위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한 사람의 성격이 확정된 이후로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수면의 높이가 병목 부근에, 그러니까 존재의 수위가 거의 목젖 부근에 닿아 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병 속에 물이 가득 차서 존재의 수위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수위가 높은 쪽을 긍정적으로, 수위가 낮은 쪽을 부정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수위가 높아서 몸속에 출렁거리는 물의 양이 많을수록 그만큼 몸을 건사하기가 어렵고 매 순간 균형을 잃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물이 가득 찬 풍선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배꼽까지 물이 차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 빈 창자 속에서 꾸르륵거리며 흐르는 물살의 그 탐욕스런 소리처럼 듣기 거북한 것도 따로 없다.
그렇다면 병 바닥에 물이 약간 고여서 발목 부근에서 물이 찰랑거리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나는 그 물병 속의 물이 당장이라도 썩어버리지 않을까, 아니면 당장이라도 모두 증발되어 버리지 않을까 몹시 우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그들 모두와 조금 다르다. 이미 나는 내 존재의 수위가 무척 높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라는 물병 속에 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이 그리 많지 않은 편에 속했는데, 특이하게도 그 물이 수시로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수면의 높이가 너무 높아져서 당장이라도 나 자신이 그 물에 익사하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가 된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물살이 힘을 잃어버려, 그 수위가 좁은 목구멍에서 넓은 뱃속으로, 다시 살찐 궁둥이에서 가는 다리까지 순식간에 내려가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끊임없이 소용돌이를 일으켜서 수위를 높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만히 내버려두어 바닥에 침잠하도록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내 행동을 나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내게는 수위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눈금이 필요한 것인데, 그 눈금들이 곧 각기 하나의 채널인 셈이었다. 그날 C의 방을 나오면서 나는 비로소 그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17
다음날은 날씨가 무척 화창했다. 전날처럼 10시쯤에 눈을 뜨긴 했지만, 다행히 몸 상태가 많이 나아져 있었다. 나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C의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접수계에 문의를 하니, 이미 그녀의 가족은 호텔을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리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 여기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갖춰 입은 후에 나는 건물 맨 위층의 부사장실로 갔다. 꼭 F를 만나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내 기억 속의 공백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신세를 지거나 그를 불편하게 하고서 기억을 못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D와 E는 물론 F도 자리에 없었다. 주인이 없는 사무실에 남녀 종업원 셋이 티브이 앞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를 힐끗 돌아보고는 지배인님은 급한 일로 병원에 갔다고 말했다. 병원이라는 말이 잠시 내 눈앞을 아뜩하게 했다. 나는 어금니에 힘을 주고서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티브이 화면의 한쪽 귀퉁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이 뭔가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화면 속에서는 화질이 선명하지 않은 흑백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 나왔다, 한 사내가 그렇게 소리치자, 모두들 얼굴을 앞으로 바짝 내밀었다. 화면은 약간 위에서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고정되어있었고, 그 속에서 한 사내가 텅 비어 있던 넓은 홀의 한쪽 구석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홀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통해 지난밤에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장면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화면 속 인물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사내가 낯이 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홀 중앙의 조명이 꺼져 있어서 어둠침침하긴 했지만, 유심히 바라보니, 분명 그는 이틀 전에 바로 이 방에서 보았던 M이었다. 그가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에 접수대에 앉아 졸고 있는 직원의 눈을 피해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M은 화면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문의 손잡이를 돌려보고서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가 얼마 후에 나오는 것이었다. 이윽고 한참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M이 다른 쪽 방향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가 뭘 찾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는 아까와는 달리 제법 당당한 걸음으로 현관의 회전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정문으로 건물을 빠져나가려는 것이었다. 그는 회전문을 밀었다. 그러나 문이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있는 힘껏 문을 밀어서 간신히 틈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문을 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문은 밀리지 않았다.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직원들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 문은 전기로 돌아가는 자동 회전문이었는데, 새벽에는 전원을 끊어놓았고, 드나드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접수계의 직원이 직접 문을 열어주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회전문 안에서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야근 직원들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홀에 환하게 불이 켜지면서 두 명의 남자가 회전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그 사내의 흐릿한 얼굴 윤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내가 M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그 사내는 영락없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는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18
나는 접수계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나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란스러움이 가라앉자 비로소 허기가 밀려왔다. 내가 지하 일층의 한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라서 바라보니 낯선 여자였다.
“혼자 먼저 시작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뭘?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밥그릇을 가리키고는 장난기 담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N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기치 못한 채널들의 갑작스런 출몰에 나는 화들짝 놀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이틀 간의 내 행적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동안 그녀는 줄곧 나와 함께 있거나 내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기치 못한 출몰이라기보다는 지워졌던 것들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지금 저 위에서는 선생님을 찾고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 있지요, 나는 먼저 서울로 가신 줄 알았어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는 시늉을 해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유심히 보면 그녀의 얼굴에서는 시시각각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싹이 트고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씨가 맺히고, 다시 그 씨앗에서 싹이 트고, 그 과정이 계속하여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끌린 모양이었다.
그녀와 M이 부사장실을 나갔을 때, 나는 그들을 따라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자동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로 가서 다시는 만나지 않거나 아니면 더욱 자주 만나서 결혼을 할 때까지, 영원토록 그들을 미행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실로 우연히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그들을 보았을 때, 나는 차를 세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이 벌이고자 하는 모종의 음모에 공범이 되었다.
나는 그만 수저를 내려놓았다. 입 안에서 밥알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쓴 물이 흘러나오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의 숨어 있는 채널이었다. 그리고 이미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었다. 망각의 채널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내가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에 타자, 내 뒤를 따라오던 그녀가 옆자리에 올라탔다.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인해 빨갛게 충혈된 눈알을 가리기 위해 색안경을 썼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의 자동차는 하나의 차선이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수시로 차선을 바꿨다. 차선이 자주 바뀔수록 사고 위험이 더 커지듯이, 내 속에서 채널이 계속하여 바뀔 수록 나는 점점 더 폭발물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19
자동차가 톨게이트를 지나 서울로 진입하면서부터 그 동안 용케 버티던 N은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립스틱을 붉게 칠한 입술 안쪽으로 갈라지고 터진 살이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벌어진 입과 목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니 살아 있음은 참으로 불안한 상태다.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그리하여 심각하고 치명적인 상태다. 목전에 죽음을 두고 있으니 늘 치명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고,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벌새의 날갯짓처럼 온 존재로 파들거려야 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 세상에는 자살이든 타살이든 치명적인 채널도 계속하여 돌아가고 있다. 온 세상이 온갖 채널 돌아가는 소리로 그득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거기에 중독되고 순화되어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길이 외길이 되었을 때, 나는 N을 잠든 채 내버려두고서 차에서 내렸다.
나는 인적이 드문 길을 택하여 천천히 걸었다. 이제 나는 채널들이 흐트러지고 부서져버린 폐허 위에 서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채널부터 파기해야 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죽음의 채널에 맞춰지는 것이라기보다, 그에게 주어진 모든 채널을 포기했을 때 생기는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 속에서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채널이 거꾸로 돌며 공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므로, 이미 죽음도 더불어 시작된 셈이었다. 그때 저만치 앞에 신축 건물이 서 있고 그 현관에 회전문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면서 그 회전문에게 W라고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내가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저 W를 통과해야 했다.
이윽고 내가 조심스레 W를 밀자, W는 빙글 반 바퀴를 돌면서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아직 입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홀을 가로질러 안으로 걸어들어가다가, 오른편 안쪽에 칵테일 바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아까 W가 나를 유혹했듯이, 이번에는 술의 파멸적인 힘이 나를 유혹했다.
바의 전면은 주로 검은색과 회색의 무채색으로 채색되어 있어서, 어찌 보면 방금 불에 탄 채로 방치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스탠드 위쪽의 전등에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을 열기는 한 것 같았다.
나는 어딘가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 죽을 자리를 찾는 짐승의 심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몇 개와 스탠드가 갖춰져 있는 전형적인 소규모 칵테일 바였다. 나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스탠드 앞의 의자 위에 앉아 안쪽 주방으로부터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아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대신 실내에서는 내가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줄곧 삐삐삐거리는 신호음이 울리고 있었다. 아마도 주인은 잠시 외출 중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기분 나쁘게 귀를 자극하는 저 신호음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웽웽거리는 그 소리는 사방에서 밀물처럼 쏟아져나와 순식간에 실내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문과 창의 틈을 통해 바깥으로 콸콸 쏟아져나갔다. 단지 마지막 자리를 찾으려 했던 내게 이런 낭패가 따로 없었다.
나는 물속에 빠진 사람처럼, 덫에 걸린 짐승처럼 온갖 절박한 생각들에 사로잡힌 채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출입문 쪽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이제 곧 주인이 나타나 경비 시스템용 카드를 꺼내어 이 소리의 진원지에 꽂으면 사태가 해결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의 물결이 내 속으로 흘러들어와서 나를 질식시키기 직전까지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문득 나는 어디선가 감시 카메라의 렌즈가 날카로운 반사광을 번득이며 나를 노려보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달콤한 냄새의 유혹에 빠져서 통발이나 끈끈이주걱에 포획당한 곤충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저 문을 여는 것은 내가 아니어야 했다. 그때 거짓말처럼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는 곧바로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기를 찾기 위해 술병 진열대와 계산대 쪽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전화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전화 벨이 그친 후, 잠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이내 삐삐거리는 신호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 다음 단계는 나로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또다시 그 좁은 공간을 뒤흔들고, 나를 어지럽게 공격해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처에서 감시 카메라들이 내 움직임을 뒤쫓고 있었다. 나는 W를 향해 뛰다시피 서둘러 걸었다.
20
내가 W 안으로 들어선 순간, 갑작스레 요란한 소음을 머금은 세찬 바람이 나의 몸을 휘감았다. 잠시 나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바로 섰다. 그때 나는 W가 나를 가둔 채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처음에 나는 그것 또한 경비 시스템이 작동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회전문이 계속 돌아가면서 원통 안의 공간은 점차 무중력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W는 지난 일주일간의 일들을 주마등처럼 보여 주었다. 나는 M과 같은 처지였다. 나는 전에 폐쇄회로 티브이를 통해 보았던 M의 행동을 헛되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전혀 다른 운명이었다. 나는 내가 만든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때 나는 현란한 도심의 풍경 위로 거대한 바퀴와도 같은 것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처럼 그것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는 순간, 홀연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방금 전의 바로 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있었다. 나는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 거대한 원륜은 풍차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풍차가 실로 위압적인 모습을 하고서, 제 힘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회오리바람과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마구 빨아들였다가 아무 데나 함부로 무질서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이 낡은 사진 속의 형상들처럼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나는 그 거대한 혼돈의 나선 한가운데에 들어 있었다.
나는 내 몸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음을 느꼈다. 체내의 지방질이 맹렬한 속도로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감지되었다. 그때 나는 일찍이 돈키호테가 풍차의 정체를 간파했듯이, 이제 나는 그 원륜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확대된 티브이의 채널 조정기였다. 또한 나를 가두고 있는 회전문은 수많은 채널들로만 이루어진 미로와도 같은 세계였다.
나는 그 속에 갇힌 채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최후의 냉혹함을 잃지 않았다. 그 냉혹함으로 나는 인간들의 욕망, 그 광기 어린 어리석음의 현행범으로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정작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 몸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점점 더 깊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