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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그녀

Bollnow 2024. 3. 26. 12:41

잠 못 드는 그녀

최대환

 

그녀는 도대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초저녁부터 잠을 청해보려고 불을 끄고는 침대맡의 작은 등만 낮은 조도로 켜놓고 누웠지만, 이리저리 뒤척이며 시간만 보내다가 아직도 눈을 깜박이며 깨어 있다. 이따금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어대기도 하는 것은 자꾸만 떠오르는 어떤 생각을 애써 떨쳐버리려는 듯도 하지만, 어쩌면 그건 다만 잠이 오지 않는 상황이 진저리나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쉰다.

따르릉.

게슴츠레한 어둠 속에서 그녀가 침대맡의 수화기를 든다.

"오늘도 잠이 안 와?"

수화기 속의 남자가 묻는다. 자상하게 들리는 목소리다.

", 어제와 마찬가진걸."

조금 걱정스런 어투로 그녀가 대답한다.

"큰일이네, 벌써 며칠째야. 푹 좀 자야 할 텐데."

"너무 걱정 마. 이러다 보면 잠이 오겠지."

"갑자기 여러 가지로 준비하느라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닌가?"

"아니야, 신경은 무슨. 엄마가 다 알아서 챙겨주시는데."

"그럼 왜 잠을 못 잘까……."

"아마 며칠만 있으면 우리가 같이 살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그럴 거야."

"고맙네, 그렇게 말해줘서."

"자장가 좀 불러줘."

곧이어 수화기 속의 남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모차르트의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썩 좋은 목소리라거나 썩 기교가 있게 부르는 노래는 아니지만, 평온한 느낌이 배어나는 싫지 않은 노랫소리다.

"좋은데. 듣다 보니 조금 졸음이 오는 것 같기도 하고."

", 기쁘다. 빨리 전화 끊어야겠네, 어서 잠들게."

수화기 속의 남자가 정말로 기쁨이 담긴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마워, 노래 불러줘서."

"고맙긴, 잘 자."

다시 방 안은 조용해지고, 그녀는 여전히 잠 못 이룬다. 그렇게 또 한참을 뒤척이는데, 벽에 걸린 나무둥치 모양의 시계에서 뻐꾸기 한 마리가 튀어나와 열 번을 울고 들어간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뒤척임은 더해만 간다. 모로 누워보기도 하고, 엎드려보기도 하고, 옷을 다 벗어보기도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하다. 그녀는 다시,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그녀는 힘없이 몸을 일으켜 오디오로 다가가서는 익숙한 동작으로 LP 음반 한 장을 턴테이블에 건다. 이윽고 나직나직 속삭이는 듯한 음색과 크기의 색소폰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그 음율에 맞춰 몇 번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제 그 움직임마저 멈추고 눈을 감는다. 방 안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빙글빙글 돌아가는 음반으로부터 풀어져 나오는 음악 소리만 낮게 흐르고 있다. 잠시 후면 음반이 다 돌아 음악 소리마저 그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쌔근쌔근 잠자는 그녀의 숨소리가 방 안의 유일한 소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음반이 채 다 돌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눈을 뜬다. 음반이 다 돌고 바늘이 제자리를 찾아가도, 그녀는 여전히 깨어 있다. 그녀가 침대맡의 노릇노릇한 작은 등마저 꺼버린다.

실내는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졌지만, 완전히 암흑이 된 것은 아니다. 비록 먼 거리이기는 하지만 집 바깥 골목길의 외등으로부터 날아온 빛이 희미하게나마 창을 통해 방 안으로 흘러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 안,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째깍, 째깍, 째깍…….

오로지 시계 소리만 방 안을 자잘하게 메아리치고 있다. 그녀는 째깍거리는 소리가 몇백 번이 울리도록 반듯이 눈을 감고 누운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책상 위 벽면에 걸린 나무둥치 모양의 시계로부터 뻐꾸기가 나와 열한 번을 울고 들어간다.

째깍, 째깍, 째깍…….

어느 순간, 그녀가 침대에서 튀어오르듯 벌떡 몸을 일으켜 앉는다. 앉은 채로 무언가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 침대 위로 푹 쓰러진다. 그렇게 또 얼마간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그녀가 침대 위로 튕겨져오르듯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방바닥으로 내려가 우뚝 선다. 열려진 창밖으로부터 나풀거리는 실크 커튼을 통과해 스며드는 희끄무레한 빛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그녀의 몸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허리 조금 위에까지 길다랗게 늘어지는 생머리, 잘록한 허리, 약간 통통해 보이는 듯하지만 그리 짧은 감을 주지는 않는 두 다리. 그러고 있으니 그녀는 꼭 누군가가 방 안에 덩그러니 놓고 간 마네킹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마네킹처럼 완전히 굳어 있지만은 않은 것이, 그녀는 그렇게 우두커니 선 채로 몇 번인가 몸을 움찔거리며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한쪽 벽의 붙박이 옷장으로 다가가 어둠 속이지만 익숙한 동작으로 옷을 꺼내어 입기 시작한다. 하지만 헐렁한 박스형의 반소매 라운드 셔츠를 걸치고 청바지를 다리에 끼워 올리던 그녀는 이내 그것들을 되레 벗어버리고야 마는데, 그건 아마도 자기가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듯하다.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브래지어와 팬티를 주섬주섬 주워입고 다시 옷 입는 일을 되풀이한 그녀는 지갑과 열쇠꾸러미를 챙겨넣은 뒤, 조심스런 손동작으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다.

거실엔 환하게 불이 켜져 있긴 하지만 아무도 없다. 거실을 가로질러 그녀의 방 맞은편, 아마도 안방인 듯한 쪽에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는 얘기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다. 그녀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향하는데, 그건 밤늦은 시간의 외출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빠져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굼뜬 행동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보일 만도 한 것이, 방문을 열고 거실을 지나 현관문으로 다가가기까지 그녀는 주위를 둘러본다거나 하는 등의 움직임은 전혀 없이, 오로지 몽롱한 시선을 발 아래로 향하고만 있기 때문이다.

위아래로 두 개의 자물쇠가 달려 있는 현관문을 열고 그녀가 밖으로 나선다. 풀었던 현관 자물쇠 구멍들에 소리 나지 않게 열쇠를 꽂아 다시 잠그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작은 마당은 밝지 않은 달빛과 담벼락 저 너머 외등으로부터 도달하는 빛이 섞이어 엷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그녀를 보고, 혹은 땅바닥을 스치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마당 한켠의 나무로 만들어진 개집으로부터 큼직한 개가 고개를 내민다. 그 순간 그녀는 개를 바라보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쉿, 하는 소리를 내고, 그러자 개는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밖으로 나오거나 짖는 소리를 내거나 하지 않는다.

대문을 열고 나와 다시 밖에서 잠그고 난 뒤, 그녀는 조금 걸어 집 근처의 골목길 한쪽 담벼락에 일렬로 붙어 서 있는 차들 중 자신의 빨간색 소형 승용차에 오르고, 잠시 후 차는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 스르르 사라져간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진입한 그녀는 차창을 있는 대로 열어젖히고 액셀러레이터를 바닥에 닿도록 밟아 누르며 쏜살같이 어둠 속을 달린다. 늦은 밤 고속도로는 한적한 편이고, 쌩쌩 지치는 차들의 강렬한 헤드라이트 때문에 어둠은 채 도로 위에 고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다.

가끔 핸들을 잡은 채로 담배를 피우거나 이것저것 테이프를 뒤적여 음악을 바꿔 트는 행동 외에는, 그녀는 다만 앞만 보고 달릴 뿐이다. 얼마간 달리다 그녀가 차창을 활짝 열어버리자 휘몰아 들이치는 거센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를 팔락팔락 춤추게 한다. 핸들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입을 꽉 다문 것이 어딘지 결연해 보이는 듯도 하지만, 그런 표정은 다만 굉장한 속도로 인해 맞부딪쳐야 하는 바람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여름밤 한적한 고속도로를 그녀의 빨간색 소형 승용차는 쉼 없이, 날듯이 달린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차츰 속도를 죽이는 그녀의 차 앞유리 너머 높은 곳에 어떤 도시의 이름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 빛을 머금은 그 글자들 밑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느린 속도로 도시의 외곽으로 진입한다.

도시는 언뜻 보아서도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좌우로 키 큰 나무들이 서 있는 외곽 도로를 따라 얼마간 달려 이윽고 나무들 대신 불 켜진 간판들이 좌우로 늘어선 도시의 내부에 이른다. 이미 늦은 시각의 거리에는 드문드문 불이 꺼진 간판도 있고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진 않지만, 술에 취한 사람들이 자아내는 거리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부산스럽다. 그녀의 차는 그 번화한 거리의 이면, 이 차선의 좁은 도로인 어둠침침한 뒷길로 돌아 들어가서 천천히 미끄러진다.

어둑한 길 좌우로 그녀가 두리번거린다. 아까의 큰 거리보다 불 켜진 간판들과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뜸하다. 누군가 길 한쪽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다. 그녀가 그쪽을 돌아보자 전신주에 기댄 한 남자가 간헐적으로 음식물 덩어리를 게워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남자의 뒤에 서 있는, 노출이 심한 차림을 한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껌을 씹어가며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다. 이따금 술에 취해 혼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남자나 여자가 보이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함께 길가의 쓰레기통들을 넘어뜨리며 지나가는 십대들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광경들에는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찾는 고갯짓을 계속하며 천천히 차를 몰고 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고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녀의 차가 길가로 붙어선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이차선 도로를 건너 맞은편의 건물 앞에 가 서서,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의 위쪽에 붙어 있는 간판을 한참 동안 올려다본다. 간판에는

Club Junk

클럽 정크

라고 씌어진 두 줄의 네온 글씨가 윗줄은 초록색으로, 아랫줄은 빨간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마치 그리 밝지도 않은 그 빛에 홀린 듯 묘한 표정이 되어 한참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이제 고개를 내리고 입구를 들어서서 계단을 내려간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라 그런 것인지 실내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홀의 테이블들 중 하나에 서른 살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 하나와 그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여자 하나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고, 실내의 맨 안쪽 둥그렇게 둘러쳐진 바의 오른편 끝자리에 중년의 남자 하나가 앉아 양주병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스피커에서는 "The Mamas & The Papas"I Call Your Name이 꽤 큰 소리로 흘러나오고 있다.

멀리 한켠의 빈 테이블에 앉아 피곤한 얼굴로 시간을 보내던 종업원 여자가 문을 들어서는 그녀를 향해 뭐라고 말을 한다. 음악 소리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여자의 입 모양으로 보아, 어서 오세요, 하고 말하는 듯하다. 그녀는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고 테이블 사이를 가로질러 가서 바의 왼편 끝자리에 앉는다. 바 안에서 일하는 여자는 돌아서서 컵을 씻고 있기에 그녀가 와 앉은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그녀는 주문을 하기 위해 여자를 부른다든가 하지 않고, 그냥 앉은 채로 실내를 한번 훑어본다.

실내의 안쪽 구석 자리 바로 위의 벽면에 두 가지 색 신호등이 위아래로 깜박이고 있다. 그걸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도 빨강, 파랑의 두 가지 색이 깜박거린다.

홀의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남자와 여자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은 채 얼굴을 가까이 하고 그윽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남자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여자의 귓불에 잠깐 대었다가 여자의 얼굴 앞에서 손을 펴 보이자 조그만 선물 상자가 나타난다. 순간 여자는 너무나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이 남자가 자기에게 선물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가 선물을 주되 자신의 귓속에서 선물을 꺼내는 듯한 마술적 행위를 보여주어서인지 확실치는 않다. 여자가 선물 상자를 열자 금빛으로 반짝이는 반지가 나온다. 혹 지금 남자는 여자에게 청혼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지 않은 의례적 선물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녀가 앉은 바의 맞은편 끝자리, 양주를 앞에 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The Mamas & The Papas"의 노래를 눈을 감은 채 따라 부르고 있다. 특히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I Call Your Name"이라는 가사를 읊조릴 때에는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남자가 정말로 누군가 이름을 부르고 싶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노래를 부를 때면 감정이입이 잘되는 편이라서 어떤 노래를 불러도 그런 정도의 간절함이 묻어나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셨어요?"

컵을 씻어 정리하는 일을 마친 바 안의 여자가 그녀에게 마치 자주 보는 사이인 양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다. 인사를 받아주고, 맥주를 주문한다.

그녀는 이제 거의 움직임이 없다. 바에 웅크리듯 앉은 채로, 가끔 병을 들어 맥주를 들이켜는 일과 담배를 한 개비씩 피우는 일을 제외하곤 그녀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만약 이른 저녁쯤이라면 바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면 혼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라도 했을 법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녀 주위의 가라앉은 공기를 흩뜨리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세 병째 마시고 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 병째 맥주를 주문하려 그녀가 손짓을 보내자 맥주를 가져다 주며 바 안의 여자가 묻는다.

"……일 년 전이요."

그녀가 그렇게 대답하자 바 안의 여자는, 네에, 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하지만 여자의 그런 반응은 잘 알겠다는 의미보다는 그만 물어보겠다는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여자는 그녀의 일 년 전에 관해 더이상 묻지 않는다.

 

늦은 시각의 실내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녀는 바의 왼쪽 끝자리에 혼자 앉아 있고, 멀리 오른쪽 끝자리에 남자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남자는 아까부터 책 한 권을 펼쳐놓고 꼼꼼히 읽어가며 맥주를 마시고 있다. 가끔 둘은 서로를 쳐다보지만,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지는 않는다. 음악이 흐르고, 시간도 흐른다.

안녕?

우두커니 바의 내부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남자가 옆에 와 서 있다, 한 손에는 마시던 맥주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읽던 책을 들고.

, 안녕.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긴 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대답한다.

앉아도 될까?

.

그렇게 해서 둘은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신다. 그녀는 남자에게 혼자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다고 응답하고 나서,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인다. 그녀는, 자긴 다만 혼자 여행하는 중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설명한다. 둘은 얘기를 나누다가 딱히 할 말이 없어지면 맥주를 들이켜고, 그러다가 할말이 생기면 다시 얘기를 시작하곤 한다. 시간이 흐른다.

실은, 나 스스로에게 내기를 걸었어.

그가 말한다.

내기?

그녀가 묻는다.

. 내가 이리 와서 말을 건네면 받아줄까, 하고.

재미있네. 그럼 그 내기에 뭘 걸었는데?

순간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 그늘을 미소로 바꾸며 입을 연다.

만약 받아주면, 어떤 여자를 잊어버리기로.

여자가 떠났구나.

, 그런 셈이지. 그 여자, 죽었거든.

그랬구나.

―…….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결계를 치고 있었나 보다, 그 일 때문에.

결계라……, 적당한 표현이네.

그가 쓸쓸한 얼굴로 맥주를 들이켜자 그녀는 그에게 얘기하기가 힘들 것 같으면 그만두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이미 오래 전 일이라 이젠 괜찮다며,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여자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사실과, 여자가 유서 같은 것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의 동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실상 자기의 책임이라고 이야기한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찾아들고, 그 침묵은 담배와 맥주로 메워진다.

왜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는.

그녀가 마치 자기 일에 대해 항변이라도 하듯 그에게 묻는다.

아니, 난 알아. 그 여자는 사실 날 만나기 전부터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어. 하루에도 오십 번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처음 둘이 만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기까지 우린 둘 다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그 우울증이 치유되었다고 믿고 있었어.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여자의 증세는 다시 나타났고,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갔어. 오랜 시간을 거쳐, 나중에는 내 존재 따위는 있으나마나 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면 더더욱이나 책임을 느낄 이유가 없잖아?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거든.

―…….

네게 나란 존재는 도대체 뭐냐고, 우울증 따위에도 못 미치는 존재가 아니냐고…….

다시 그도, 그녀도 말이 없어진다. 이번에는 맥주도, 담배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시간만 흘러간다. 두 사람 모두 바에 웅크리듯 앉은 채로 시선을 풀고 멍하게 앞만 바라볼 뿐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꿈에서 깨어나듯 먼저 정신을 차린 그녀가 조금은 가벼워진 표정으로 입을 연다.

실은 나도 혼자서 내기를 걸고 있었는데.

―…….

이 도시, 이 바, 내겐 처음이거든, 혼자 여행하다 아무 데나 내린 거라서.

―…….

바에 앉아 줄곧 기다려봤어. 누군가 내게 말을 건네올까.

그 내기엔 뭘 걸었는데?

누군가 말을 건네오면 이 도시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그들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바 안의 여자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이제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서요, 하는 여자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다보자 이미 실내에는 아무도 없고, 바 밖의 홀에서 일하는 여자가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가 앉은 바의 반대편 끝 쪽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술값을 치르고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몸을 돌려 실내를 훑어본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던 남자와 여자도 언제 사라졌는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바에서 일어나서 손짓으로 바 안의 여자를 가까이 오게 한 후, 이제 문 닫으셔야죠, 하고 그녀가 말한다. 아직 조금 더 계셔도 되는데요, 하는 여자의 말에, 아니오, 어디 갈 데도 있구요, 하고 답한다.

술값을 치르고 천천히 문을 나서 계단을 막 다 올라서는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지금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클럽 정크의 간판 불이 꺼지면서 난 것인데, 그녀가 움찔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환하게 빛을 발하던 간판의 네온 글씨들은 이미 그 빛을 거두고

Club Junk

클럽 정크

로 바뀌어 있다.

그곳에서 나온 그녀는 불 꺼진 간판 아래에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얼마간 서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거리는 까만 어둠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고, 인적 또한 더욱 드물어져 조용하기만 하다. 잊을 만하면 한 대씩 차가 지나가고, 그럴 때마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듯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스친 뒤에 더욱더 까만 어둠이 그 자리를 메운다. 드문드문 아직도 불이 켜진 간판들이 있어서 그나마 가로등도 없는 이면도로의 윤곽을 잡아준다.

그렇게 한 오 분쯤 걷다가 문득 그녀가 멈춰 선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방향을 가늠해본다. 하지만 쉽게 길이 떠오르지는 않는 듯, 그녀는 담배 한 개비를 피워물고 허름한 건물의 벽에 기대어 한숨 섞인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조용하기만 한 그녀 주위의 공기 속을 작은 소리가 파고든다. 그 소리는 읍, , 하며 끊기는 어린 여자의 신음과, 하아, 하아, 하는 남자의 거친 신음이 리드미컬하게 섞여 이루어져 있다. 소리는 지금 그녀가 기대어 서 있는 건물과 옆 건물 사이의 어둡고 깊은 틈으로부터 조그맣게 흘러나오고 있다. 여자의 신음이 짧게 끊기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남자는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여자의 입을 막고 있는 듯하다. , , , , 자기야……, 누가 보면 어쩌려구……, 이런 데서…… 조용히 해……, 이런 데서……,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단 말야……, 하아, 하아, 실내는 지겨워……, 너도……, 하아……, 좋잖아……, 하아, 하아…….

소리는 그녀가 담배를 다 피울 무렵까지 계속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억, 하는 남자의 외마디 소리와 어머머, 하는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그와 더불어 소리의 진원지인 깊은 틈으로부터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그녀의 앞을 스쳐 달아난다. 고양이의 돌출에 그녀 또한 움찔 놀라긴 했지만, 이내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몇 번인가 방향을 가늠해보고, 곧 걷기를 계속한다. 어두운 틈을 지나칠 때, 속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다시 한 오 분쯤을 걷던 그녀가 멈추어 선다. 그녀가 멈추어 선 곳은 환하게 불을 밝혀놓은 편의점이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쉰다.

편의점은 실내의 밝은 빛을 투명한 유리벽을 통해 고스란히 거리로 쏟아내면서 일정한 빛의 사정권을 형성하고 있다. 편의점 건물은 길로부터 안쪽으로 얼마간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앞에 약간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고, 온전히 빛의 사정권 안에 들어 있는 그 실외 공간에는 파라솔이 달린 몇 개의 원형 테이블과 플라스틱 의자들이 놓여 있다. 하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유리문을 열고 환한 실내로 들어가, 차갑게 식혀진 채로 냉장고에 진열되어 있는 캔 맥주 몇 개와 초콜릿 색깔의 크래커 한 봉지를 사 들고 나온다. 몇 개의 테이블들 중 하나에 앉아, , 하는 소리와 함께 캔 맥주 하나를 따서 마신다. 한밤중인데도 후텁지근함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그녀가 이마에 맺혀 있는 땀을 닦아낸다. 캔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켜고, 크래커 조각을 바삭바삭 씹고, 담배 연기를 휘이휘이 내뿜는 반복적인 동작들이 계속되고,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환한 공간,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꼭 연극의 무대 위에 조명을 받고 앉아 있는 여배우의 모습만 같다. 어쩌면 잠시 후에 그녀의 파트너인 남자배우가 어둠 속으로부터 환한 무대 위로 등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끔 그녀의 앞이나 옆으로 비틀거리는 걸음들이 스쳐 지날 뿐 그녀의 무대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고, 결국 여전히 무대 위엔 덩그러니 그녀 혼자다.

아까부터 그녀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 유리문 바깥 어두운 한켠에 덮개가 덮인 커다란 쓰레기통이 놓여 있는데, 그녀의 시선은 웬일인지 그곳에 붙박여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쪽을 보고 있는 동안 한번은 편의점 실내의 점원이 몇 가지 쓰레기를 들고 나와 그 통에 버리고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몽롱히 꿈을 꾸는 듯한 그녀의 눈빛은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녀가 쓰레기통으로 다가간다. 쓰레기통 옆에 걸려 있는 길다란 쇠집게를 든 그녀는, 덮개를 열고 그 속을 조금 뒤적이는 듯싶더니 몇 가지 음식 찌꺼기들을 끄집어낸다. 손님들이 전자렌지에 데워 먹다 남기고 간 햄버거 조각, 피자 조각, 그리고 동글이 소시지. 그녀는 쓰레기통과 벽면 사이의 안전한 공간에 작은 식탁을 차리듯이 그것들을 잘 늘어놓는다. 그리고 테이블로 되돌아와 앉아 그쪽을 다시금 하염없이 바라본다.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도 같지만, 어쩌면 다만 며칠씩이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가 좋을까?

클럽 정크를 나와서 함께 걸으며 그가 묻는다.

?

어디로 가고 싶냐구.

환한 곳이면 좋겠어. 밝고 환한 곳.

그녀의 대답을 들은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이끌어 간다.

클럽 정크로부터 약 십 분 정도를 걸은 후, 그들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편의점 앞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캔 맥주 몇 개와 초콜릿색 크래커 한 봉지를 사이에 두고. 맥주를 마시고 크래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그녀가 입을 연다.

어디 살아?

여기서 멀지 않아.

혼자 살아?

.

그럼 이따가 잠 오면 재워줄 수 있어?

그럼. 졸립거든 얘기해.

둘은 여행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녀에게 혼자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냐고 묻는다. 그녀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런 계획 없이 훌쩍 혼자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가끔 있는 건 사실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여행을 떠나느냐고 다시 묻고, 그녀는 실상 그런 마음이 들어 훌쩍 여행을 떠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답한다.

여행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는 중에 그의 얼굴에 다시금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녀는 그에게 죽은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자기는 정말로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그녀가 조금 궁금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예전의 그 여자도 가끔 혼자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했었지만 우울증이 걱정되기만 하던 그가 혼자 여행을 떠나도록 놓아두질 않았었는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매번 함께 여행하는 대신 한 번이라도 혼자서 여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얘기를 듣고 난 그녀는, 그거야 결과적으로 그럴 수도 있는 거지만,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라도 혼자 여행하도록 보내주지는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후에도 그의 그늘은 가시질 않는다. 침묵과 함께 시간이 흐른다.

드드득, 드득.

무언가를 긁어대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을 향한다. 편의점의 유리문 바깥 어둑한 한켠에 놓인 커다란 쓰레기통,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그 통의 두터운 옆면을 긁어댄다. 아마도 쓰레기통 속의 음식물 찌꺼기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냄새를 맡은 모양이지만, 덮개가 덮여 있는 터라 애가 달고 있는 듯하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는다.

너무 배고프겠다, 그렇지?

그가 말한다.

그래, 생각한 대로 하자.

그녀가 맞장구친다.

두 사람은 조심스런 걸음으로 고양이와 쓰레기통을 향해 다가간다. 하지만 몇 발짝 못 가서 고양이는 둘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후다닥, 튀어 어둠 속으로 달아난다. 둘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성큼성큼 쓰레기통으로 가서 덮개를 열고, 그 옆에 걸려 있는 쇠로 된 집게로 먹을 것을 꺼낸다. 먹다 만 햄버거 조각, 삼각 김밥 찌꺼기, 동글이 소시지…… 쓰레기통과 벽면 사이의 공간에 그것들을 먹기 좋게 늘어놓는다. 제자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쓰레기통을 정면 쪽에 두고 나란히 붙어앉아 함께 바라본다.

녀석이 다시 오겠지?

그녀가 묻는다.

그럴 거야. 배가 많이 고파 보였거든.

그가 대답한다.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워 보이던데.

별수 없을 거야. 저어쪽 골목 모퉁이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걸.

어떻게 알아?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묻는다.

아는 사이거든, 저 고양이랑…….

뭐라구?

아니야.

이제 둘은 나란히 앉아 쓰레기통을 지그시 바라보며, 긴 기다림 속에 캔 맥주를 홀짝거린다. 오랜 시간이 흘러가지만, 고양이의 신중함 또한 그들의 인내심 못지않다. 그녀가 먼저 침묵을 깨뜨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 여자, 왜 죽었다고 생각해?

―…….

생각해봤어. 내가 그 여자라면……, 하고.

―…….

그 여자는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정말로 소중한 당신에게, 당신까지 지치게 만드는 그놈의 우울증을 기어이 이기는 모습을. 방법이 없었던 거야, 그렇게밖에는.

바보같이…….

그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그의 눈물이 마를 때까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오랜 침묵 후에, 이번에는 그가 먼저 입을 연다.

고마워.

고맙긴, 그럼 나도 고맙지, 어차피 서로 내기를 걸었는걸.

잊을 수 있을 것도 같아.

잊을 수 없어도, 자책에 시달리지는 마.

그와 그녀가 입을 맞춘다. 길게, 서로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듯 하고. 그 사이 편의점에 들러 물건들을 사가던 사십대의 한 남자가 그 모습을 얼마간 쳐다보고 섰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거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고, 몇시쯤이나 되었을까, 궁금할 법도 하지만 둘은 긴 입맞춤이 끝난 후에도 시계를 들여다보거나 하지 않는다.

졸리면 들어가자.

풀어진 시선으로 물끄러미 쓰레기통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말한다.

좀더 기다려보고, 고양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그의 어깨에 스르르 기댄다. 그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움찔거리다가 하려던 말을 거두고, 그녀가 머리를 기댄 어깨를 조금 내려 그녀를 편하게 해준다. 얼마 후 그녀에게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그러자 그도 그녀의 머리 위에 다시 가볍게 자기의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얼마나 잠이 들어 있었는지, 그녀가 눈을 뜨자 그가, 잘 잤어, 하고 인사한다. 그녀는 처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만 해도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는지 그를 향해 씽긋 웃어 보인다.

하늘은 저 멀리로부터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고, 거리에는 이른 아침 운동을 나온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과, 리어카를 세워놓고 비질을 하는 청소부의 모습도 보인다.

, 잘 잤네.

기지개를 켜며 그녀가 말한다.

덕분에 나도.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한다.

, 고양이는?

가서 직접 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쓰레기통의 뒤쪽을 살펴본다. 어느새 음식 찌꺼기들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다행이네, 하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그도 따라서, 다행이네, 하고 맞장구친다.

그와 그녀는 조금씩 환하게 밝아오는 거리의 편의점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기만 하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주고받고 각자의 방향으로 멀어진다.

 

이미 하늘은 까만색이 아니다. 서서히 하늘은 저 구석으로부터 밝아지려는 기색을 보이는데, 그녀는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며, 잠이 들지도 않았다. 그녀가 앉은 원형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 캔 몇 개와 삼분의 일쯤 남은 크래커 봉지가 놓여 있다. 그녀의 표정은 전체적으로 무표정하지만, 어찌 보면 무료한 기다림에 지쳐버린 듯도 하고, 어찌 보면 해야 할 무슨 일인가를 끝내고 난 사람에게서 보이는 안도감이 엿보이는 듯도 하다.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맥주 캔들과 크래커 봉지를 집어들고 덮개 덮인 쓰레기통이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덮개를 열어 들고 온 것들을 버린 후에 쓰레기통 뒤편의 공간을 굽어본다. 그곳의 햄버거 조각, 피자 조각, 동글이 소시지 등은 그녀가 식탁을 차리듯 놓아두었던 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것들을 쇠집게로 집어 다시 쓰레기통 속에 넣는다.

터벅터벅 편의점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던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편의점이 있는 쪽을 잠시 동안 바라본다. 그러다가 다시 걷기를 시작해 약 십 분 후에 그녀는 불 꺼진 클럽 정크의 간판 맞은편 길가에 세워진 빨간색 소형 승용차에 이르고, 곧 그녀의 차는 어둠 반 희부연 빛 반으로 이루어진 공기를 헤집고 멀리 사라진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하늘, 그 아래서 막바지 빛을 발하고 있는 도시의 이름 밑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한 그녀의 차가 쏜살같이 달린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차들이 많지 않다. 그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가끔 테이프를 바꾸어 끼우거나 담배를 한 개비씩 피울 때말고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번에는 그녀의 눈꺼풀이 무겁게 감기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곤 한다는 차이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거나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거나 하면서 운전을 계속해나간다.

야광처럼 빛을 머금은 여름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그녀의 빨간색 승용차가 바람처럼 달린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열쇠로 조심스레 대문을 따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이른 아침 저벅대는 발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개가 주인을 알아차리고 나무집 밖으로 나와 연신 꼬리를 흔들어댄다. 그녀가 쉿,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입에 대는 과장된 몸짓을 보여주자 개는 꼬리를 흔들어대면서도 짖지는 않는다. 현관문을 따고, 조그맣게 도란거리는 소리가 안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말고는 아직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마루를 지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들을 방바닥에 벗어던진 그녀는 속옷만 입은 채 침대 위로 몸을 던진다. 쌔근쌔근 잠에 빠져드는 그녀, 침대에 널브러져 눈을 감고는 그대로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는 어렵게 눈을 뜨더니,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이겨내는 듯 힘든 표정으로 침대맡의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나야. 아직 출근 안 했네?"

". 어쩐 일이야, 이렇게 이른 시각에?"

", 그냥."

"또 밤새 잠 한숨 못 잔 거야?"

"……."

"이거 정말 큰일이네. 자장가 불러줄까?"

"아니야, 이젠 괜찮아. 지금 잠이 막 쏟아지고 있거든."

"그래? 잘됐다. 그럼 얼른 자야지 전화는 왜 해?"

"며칠을 자게 될지……, 모를 것 같아서."

"그렇게나?"

"……, 지금 너무너무……."

"정말 다행이네."

"고마…………."

"그 대신 드레스 입는 날 아침엔 일어나야 된다."

"으응……."

"잘 자, 끊을게."

"……."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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