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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고, 묽고 희박한

Bollnow 2024. 3. 26. 09:17

잃고, 묽고 희박한

남문석

 

", 지금 뭐하고 있지?"

"그냥 쉬고 있어요."

"잘됐다. 담배 한 대씩 피면서 잠시 휴전하자." 일한이 공중전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일한은 쪼그려 앉으려다가 수화기 선이 짧아 다시 일어선다. 시계를 보았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저 차 따라갑시다"라고 말하고, 이놈을 추격하기 시작한 지 네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꼭 잡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지친다. 하루종일 놈을 쫓아다녔더니 다리가 다 아플 지경이고, 다행히 수금 전이라 가방 안에는 현찰도 얼마 없다.

"좋죠." 진수가 핸드폰을 손으로 더듬어 안테나를 뽑은 뒤,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조금씩 주저앉았다. 진수는 추적자의 전화 목소리가 아까 통화할 때보다 한층 부드러워졌음을 느낀다.

이번에 끈질긴 상대를 만나 여러 번 잡힐 뻔했다. 재수 없이 잡힐 수는 없다. 진수는 자신이 뱉은 담배연기가 허공에서 묽어지고 희박해지더니 오후 햇살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본다.

상념에서 깨어나 진수가 말했다.

", 딸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딸하고 전화로 무슨, 스무고개 하세요?"

"TV 흉내 내는 거야. 요즘 함께 놀 시간이 없어서 말야."

"증권회사에서도 전화 왔었어요. 아저씨, 주식 하지 마세요."

"그래?"

일한은 길고도 이상한 하루를 보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놈이군. 쫓기는 주제에 들치기한 핸드폰으로 주인 전화까지 다 받아 주고..

"이 자식이, 언덕에 자빠진 호박이 평지에 자빠진 호박 걱정하고 있네." 일한은 욕이라도 해주려다가 말았다. 놈을 구슬리기로 했지 않은가.

", 지금 어디야?"

"몰라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어디예요?"

"나도 몰라."

일한은 수화기를 통해 녀석이 후, 하고 담배연기 내뱉는 소리를 들었다. 묘하게 말하는 놈이다. 어디에 있든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공중 전화박스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했다. 그놈이 있는 곳에도 햇볕이 내리쬐겠지. 이솝우화에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햇볕과 같이.. 그래, 나도 햇볕정책이다. 일한은 동조하는 어조로 말했다.

"나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우린 공통점이 있군."

그리고 되도록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 현찰은 빼고 나머지는 돌려줘. 어디에 장소를 정하든지 우체통에 넣든지 하면 되잖아."

"신용카드, 핸드폰, 가방, 현찰까지 돌려 드리죠. 주민등록증만 빼고."

"주민등록증만 빼고? 그럼, 처음부터 신분증이 목적이었어?"

"아아, 아이덴티티만 목적은 아니었죠. -, 그러니까," 진수가 말을 더듬자, 진수의 말을 일한이 도중에 자르고 부탁 조로 말했다.

"차라리 반대로 해라, ?"

그러다가 주민등록증만 달랑 줄까 싶어 덧붙였다.

"카드, 핸드폰, 가방은 돌려주고, 현찰은 너 가져. 모레 법원에 갈 때 꼭 있어야 돼, 임마."

그리고 일한이 진수에게 물었다.

"돈세탁하거나 여권 위조하려고 그래?"

"아뇨."

"그럼?"

"그냥 제가 갖고 다녀요."

"자식, 사고치고 수배 중이구나."

"아뇨.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녀요. 내일부터 전 김일한이 되는 거죠."

"미치겠군. 별 이유도 없이 그냥?" 일한이 자신의 주민등록증에 놈이 자기 사진을 붙인다고 생각하니 꺼림칙했다. "사진도 갈아치울 테지?"

"아뇨. 저는 그냥 벽돌에 갈아요. 사진과 글자가 희미해질 때까지 벽돌에 대고 갈아요."

"맙소사."

일한은 공중 전화박스에 이마를 가볍게 처박았다. 돌아이 중에서 상돌아이를 만났구나. 잠시 뒤에 일한이 말했다.

"네가 그럴 시간에 네 또래들은 벽돌에 청바지를 갈아."

공중전화 수화기에서 갈매기 우는 것 같이, 놈이 웃는 소리가 났다. 끼힉, 끼힉, , ..

녀석, 웃는 것도 희한하게 웃는군.

"아저씨가 슬슬 좋아지는데요."

"나도 슬슬 소름이 돋기 시작했어."

녀석이 다시 웃었다. 일한이 말은 그리했지만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참 단순한 놈이야.

"요즘은 시장에서 일하는가 보죠?" 진수가 수금가방에 '동대문시장 상인 야유회'라고 적힌 것을 보고 말했다.

"청바지 다리는 하청 일을 하다가 요즘은 청바지 찢는 일을 하지. 너는 청바지를 어떻게 찢은 거야? 가위나 사포를 사용한 것 같지는 않던데?"

"염산이 튄 자국이에요. 전 멀쩡한 청바지를 찢거나 하진 않아요."

"그래. 나도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옷을 만들고 있는지 찢어버리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지. 사실 찢어질 만한 일을 하다가 찢어져야 하는 게, 그게 청바지거든.

찢어진 청바지 뒤에는 땀이든 싸움이든, 청바지가 찢어지기까지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게 멋있는 거지." 그리고 아쉬운 듯 덧붙였다. "하지만, 요즘은..

카우보이는 사라지고, 패션만 남은 거야." 일한은 자기가 생각해도 멋진 말이라고 생각하자 어깨를 으쓱이며 커다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저는 청바지를 찢진 않지만, 친구들을 이해해요. 아무 스토리가 없어도 가끔 멋있게 보여요. 그건 찢어진 자아를 표현하는 거래요."

그 말을 들은 일한은 전화기를 탕탕 치며 웃었다.

"호치키스 심 빼는 돼지 발톱으로 총알 자국을 만들면서, '이건 우리가 총 맞은 자아를 표현하는 거야, 친구'라고 말할 걸 생각하니 우습군.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네 친구 말대로라면 어른들은 그 찢어진 자아에 편승해 장사를 하고., 나처럼. 그런데 꼭 패션으로 팔아먹지 않아도 빨리 닳으면, 나 같은 사람 먹고살기 좋고. 아무렴 어때, 옷인데."

"맞아요." 진수가 맞장구를 쳤다. "전 아예 벌거벗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옷 없이 살 수 없어. 그런 짐승이야."

"아이덴티티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요?"

"그런가? 잘 몰라."

"저는 아이덴티티 없이도 살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진수는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다른 어조로 말을 꺼냈다. ", 아저씨, 주식하지 마세요?"

"나도 뭐, 그래서 약간 손해보고 팔려는 거야. 그런데 넌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

"뭐가요?"

"너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어딘가 좀 이상해. 그걸 듣는 나까지 이상해져. 지금 이런 말 할 상황이 아니잖아. 너 주식해서 돈 날렸구나? 그래서 깡통 계좌 메우려고 돈 훔치는 거지? 아이데티티, 씨발 발음도 잘 안 되네, 신분증이니 뭐니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고 결국 돈이 목적이지?"

"아니에요. 옛날 아버지가 주식 하다가 망했거든요."

"옛날, 아버지가 아니고 옛날 아버지? 자식 교육 더 어럽게도 시켜 놨다. , 요즘 아버지와 옛날 아버지가 따로 있는 모양이지. 희한한 아들에 희한한 아버지다."

"둘째아버지를 말하는 거예요."

진수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꽁초를 가지고 땅에 원을 그리다가, '2'라고 쓴 뒤 이를 발로 지우고, 다시 ', 3'라고 썼다. 담배를 싸고 있던 종이가 터져 담배가루가 풀어 헤쳐진다. 진수는 발로 문질러 글자를 지워 버린다.

", 너 쫓아다니느라고 담배를 굶었더니만.. 담배 한 대씩 더 빨자."

일한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아이뎃티티, 씨발 대학 물먹어도 소용없다니까, 하여간 신분증은 왜 훔치는 거야?"

"아이덴티티요."

"나도 알아, 아이덴티티."

일한은 어조를 바꾸어 말을 이었다.

"그게 원래 아이덴티티 카- 아드야, 임마. 그래야 우리말로 신분증이 되지, 그냥 아이덴티티라고 하면 양놈들이 신원이나 정체성으로 알아먹어요. 넌 도둑질이나 하다가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인데, 난 검정고시 쳐서 대학물까지 먹은 사람이야, 임마. 졸업장이 시시해서 중간에 때려치우긴 했지만."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도 사실 대학생이에요."

"대학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럼, 이런 말은 나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 나도 교수 할애비야."

일한의 말이 끝나자 전화기에서 갈매기 웃음소리가 났다.

"좋아, 학생이라고 치고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진수가 천천히 말했다.

"첫째 아버지가 경찰이었지만, 전 중학교 때부터 물건을 훔쳤어요. 1 때까지는 현금이 목적이었지만 이후로는 달라졌죠. 지갑을 훔치면 나머지는 돌려주고,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은 제가 가졌어요. 1 때부터, 수험생처럼 야간학습을 시키는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돈 쓸 일도 없고, 용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거든요. 영석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진수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다시는 추적자를 볼 일이 없다고 여기고 진수가 말했다.

"그 친구한테 말하고 아저씨한테 처음 말하는 거예요."

"영광이군."

"제 서랍 첫 칸에는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이 수십 장 있었어요."

"서랍 둘째 칸에 있는 여고생 팬티 몇 장만 나한테 주라. 참고로, 난 토끼 팬티를 좋아해. 여름에 빤스끈 보이는 걸 싫어하거든." 전화기에서 예의 그 웃음소리가 들렸다. 일한은 팬티 수십 장을 모아 놓고 포만감에 젖은 녀석을 상상했다. 말 상대할 놈이 아니다. 슬슬 구슬려 놈에게 가방을 돌려받으면 그만이다. "그래, 행복했겠구나."

"아뇨."

진수가 잘라 말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덧붙였다.

"그건 그때뿐이고, 점점 더 공허해졌어요."

"뜻밖인걸."

"제 담임 선생님 걸 훔친 적이 있었죠. 그분은 제가 훔쳐 간 걸 아셨어요. 종례 시간에, 죽으면 아이덴티티도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죠. 저는 정년퇴임을 몇 년 앞두고 계시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몇 달 뒤에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저런."

이번에는 일한이 진심으로 동조했다.

"그분이 그랬어요. 죽으면 죽어서 아이덴티티가 필요 없지만, 살아서도 그것 없이 사는 세계가 있으니 우리더러 젊을 때에 꼭 찾으라고 했죠."

"그 세계는 토끼팬티만 입고 살았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자 일한은 전화를 하며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토끼팬티를 입고 버스를 타고, 토끼팬티를 입고 쇼핑을 하고, 토끼팬티를 입고 청바지를 찢고, 토끼팬티를 입고 놈에게 전화를 한다.

"꿈속에서 전화하는 기분이군."

일한이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였는데 꽤 고통스러웠어요."

"포경수술했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이었어요."

"성병 걸린 줄 모르고 포경수술했구나?"

"농담 마세요."

잠시 뒤에 진수가 다시 말했다.

"무슨 말을 할지 까먹었잖아요"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들어온 데까지 이야기했어."

일한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면 가방을 돌려주지, 그래?"

일한이 그렇게 말하면, 어디에 둘 테니 가방을 찾아가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좀 생각해 보고요."

"?"

일한은 순간 이유가 분명치 않은 막연한 배신감을 느꼈다.

", 끝까지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지?"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날 심사하니?"

일한은 꿈에서 깨듯이 아까 화장실에서 수금 가방이 없어질 때가 생각났다.

"아까 화장실에서 소주 처먹은 걸 보고 알아봤어."

일한이 말했다. 한참 뒤에 진수가 말했다.

"아저씨는 말이 원래 거친 편이네요. 아저씨가 화장실에 들어와서도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기억나요?"

일한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진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동대문상가 화장실이었다. 아버지 제수를 사러 갔다가 제수 1호로 소주를 샀다. 첫째 아버지, 둘째아버지, 셋째 아버지-친아버지인 첫째 아버지만 돌아가셨지만- 모두 제사를 지낼 작정이었다.

막상 소주를 사고 나자 생각처럼 기분이 흔쾌하지 않았다. 갑자기 미치도록 훔치고 싶어져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했다. 2년간 용케 잘 견뎠지 않은가. 깨진 거울 속 진수는 세수를 하고 나자 제수로 산 소주를 마시고 싶어 했다.

흠뻑 취해 한숨 자고 일어나면, 새로 부팅한 컴퓨터처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주 한 병을 단숨에 비우고, 조금 토했다. 변기 위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을 때에 옆 칸에 추적자가 들어왔다. 어떤 미친놈이 대낮부터 변소에서 소주를 처먹고 지랄이야.

화장실을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고, 그 말은 진수의 비위를 건드렸다. 심사가 뒤틀린 눈에 수금 가방이 들어왔다.

시장 점포에서 탈의실 대신으로도 쓰는 화장실인데, 일한이 들어왔을 때는 옷을 사는 손님이 바지를 입어 보고 거울에 뒷모습을 비춰 보는 중이었다. 화장실에는 변소가 세 칸 있었는데 문들이 닫혀 있었고 인기척이 없었다.

가운데 변소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소주 악취가 지독해서 물을 내리며 욕을 좀 한 것 같다. 한참 용변을 보고 있는데, 빈 줄 알았던 변소 옆 칸에서 딸칵,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설마 하고 칸막이 위를 보았을 때는 수금가방이 없어진 뒤였다.

"너 자꾸 쫀쫀하게, 욕 좀 한 것 가지고 그럴 거야?"

일한이 말했다.

"단지, 저는 상황을 설명하려던 것뿐이에요. 아저씨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진수는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니가 날 언제 봤다고 아저씨답기는 아저씨다워?"

"아저씨는 위악적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진수는 말을 잘못한 것 같다고 느꼈다.

"위악 같은 소리하네. , 말끝마다 징그럽게 아자씨, 아자씨 하면서 존댓말을 꼬박꼬박해가며. 예의 바른 도둑은 도둑이 아닌 줄 알아?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알아. 친절하고, 겉으론 멀쩡하지만 속에 온갖 이상한 생각들로 가득 찬 변태들이지. 불탄 시체 위에 앉아 하품하는 파리처럼 엽기적인 놈들이야."

"그 파리가 아저씨가 좋아하는 토끼팬티를 입었으면 좋겠네요. 끼힉 끼힉.."

진수가 기묘하게 웃고 나서 말했다.

"제가 아니라고 말하진 않았잖아요. 아저씨는 위악적이지만 맑은 영혼을 가졌다는 걸 전 알 수 있죠."

"오줌이 맑은 걸 택하겠어."

"-, 하지만 아저씨는 그 그거, 거기까지가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악의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 개인에게는 위선도 위악도 미미미, 미숙한 것에 불과하고,"

진수가 말을 더듬으며 어눌하게 말했다.

", 제대로 된 히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몰라요. 아저씨는 이 위선적인 세상에서 지지진실을 추구하다가 위악적으로 튄 거죠. 농농농농농구공처럼. -, 하지만 아저씨가 그토록 싫어하는 위선적인 세계와 형태만 다를 뿐, 아안티세계의 다른 울타리 속에 아안, 안주하고 있어요. 무기력이죠. 분주한 무무.."

진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뱉어내기 위해 애쓸 때 일한이 말을 잘랐다.

"어유, 답답해. 아까부터 이 새끼가 왜 이래? 병신같이 말까지 더듬으면서, 들치기한 주제에 나한테 훈계까지 하는 거야? 다 좋은데, 그건 내가 내 친구한테 들어야 할 말이지 도둑놈한테 들어야 할 말이 아냐."

"그그런가요? 아저씨가 조금만 너너그럽다면 상관없지 않아요. 만약에 제가 아저씨한테 '세상 살다가 보면 도둑이 수금가방을 훔칠 때도 있고, 그렇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 기운 내세요'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고고, 고양이가 쥐 생각하듯이 아저씨를 로로, 놀리는 게 되겠죠."

진수는, 일한이 자주 말을 끊어서, 아까 하다가 만 이야기가 생각났다.

"피핑계처럼 들리겠지만."

"핑계야."

진수가 일어나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었다. 이제는 슬슬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맞아요. 피피, 핑계죠. 하하하,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그게 핑계라는 거야, 이 자식아. 니가 현실을 뭘 알아?"

"세금을 내는 일을 해야만 사삶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전 아저씨가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거거거지같은 학교지만 학교 안에도 사사사사, 삶이 있습니다. 중간에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누누, 누구나 들지 않는 줄 아세요? 학교를 때때,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그 삶을 매매, 매번 서서선택했어요. 제도교육을 마치는 사람도 아저씨와 다른 방식으로 다른 걸 배울 뿐이지 배배, 배우고 서성장합니다."

진수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지만, 계속 말했다.

"당신이 학교 밖에서 두드려 맞을 때 미술시간에 파파파, 파란색이 따뜻한 느낌을 준다고 해서 두두두두두들겨 맞는 학생도 있어요. 그 학생에겐 제도라는 끈이 당신과는 전연 으으, 의미가 다릅니다. 제도 바바밖에서만 얻을 수 있는, 당신에게 필요한 어떤 걸 두두드려맞아가며 배웠다면, 당신은 어째서 학생도 제도 아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두두두두, 두들겨 맞으며 배웠다는 걸 모르죠? 당신은 학교를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당신이 학교를 다닐 다당당, 당시의 서서, 선택방식일 뿐이죠."

진수는 핸드폰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 들며 걸어갔다. 자신이 더 심하게 말을 더듬을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아까 하다가 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좋아요, 대학생이라고 치고, 아니 고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놓고 말하죠.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수수수, 수능시험 전날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학교 시험과 모의고사 때 예옛날아버지가 유리창을 바바바바, 박살내곤 했어요. 어수선하고 전쟁터 같은 불안 속에서 공부를 했지요. 저한테 있는 도도, 도벽이 발동할 때는 세 번 중에 한 번은 훔?, 훔쳐야 했고 나머지는 참았어요. -. 어어,어떻게 참는지도 모르고, 어쨌든 차참,참아야 했죠. 따따,딸딸,,딸딸이를 쳐가며 말예요."

"이 새끼가.."

일한이 욕을 할 때에 약간 더듬는 듯하더니, 목소리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넌 한심한 청춘이야. 니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기나 했어?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적이 없으면 인생을 논하지 마라."

",여보세요. 듣고 있나요? 이이,이십일세기입니다. 아저씨는 으으,의무와 고고고,고독과, 끝까지 마맞서본 적이 있나요? 여보세요. 당신은 누눈물 젖은 따딸,,딸딸이를 쳐 본 적이 있나요? 눈물 젖은 따,딸딸이를 쳐본 적이 없으면 이이십일 세기 처청춘을 논하지 마세요."

"보보, 보자보자 하니까 더는 못 들어주겠군. 씨씨씨발놈, 너 땜에 나까지 말을 더듬잖아."

일한은 진수가 어눌하게 말까지 더듬으며 말하지만,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딘가를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인지 녀석을 몰아붙이던 조금 전과 달리 처지가 역전되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차리자. 일한은 호흡을 가다듬고 난 뒤 말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빵꾸 난 청춘, 아니 빵꾸 난 온실의 화초야."

"빠방, 빵꾸 난 온실의 화초라고요?" 말은 더듬지만 화난 목소리였다. "하하,함부로 규,규정하지 마세요."

"이 자식이, 끝까지 이기려 드네. 그래도 규정 당하니, 싫긴 싫은가 보지. 넌 부모 핑계나 대고 하늘을 원망하며 평생 징징거리며 살 거야."

"아아,아저씨가 시,싫어졌어요. 이젠, 아저씨와 전 나나,남남이에요."

"이런, 돌아이 같은 놈. 그럼 언제는 내가 니 친구였어?"

일한이 말해도 응답이 없었다.

"선생님이었어?"

그렇게 말해도 응답이 없었다.

한참 만에 진수가 대꾸했다.

"아저씨는 자신의 몸을 벌레가 먹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고, 벌판에서 애꿎은 바람하고 싸움을 거는," 이라고 말했다.

진수는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이 밖에서 내쉬는 첫 숨처럼 숨을 한번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겉만 싱싱한, 병든 잡초예요."

"이놈이 약을 처먹었나, 이젠 말도 안 더듬고.. 그래도 내 이름 기억해 둬, 임마. 이런 잡초 같은 사람이 나중에 성공하는 거야."

"기껏해야 실패하면 술집에서, 성공하면 토크쇼에서 거들먹거릴 테죠."

"이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자식이.."

일한이 말하는 도중에 진수가 한결 여유를 찾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저씨야말로 애송이군요.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아저씨는 거기에서 시간이 정지했어요. 아저씨는 과거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되어도 아저씨는 똑같이 자퇴할 겁니다.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비슷한 선택을 할 겁니다. 쩝쩝.."

진수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 큰 도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다른 손에는 빵을 들고 있었다. 씹고 있던 빵을 삼키고 말했다.

"어떤 갈래를 선택하든 철저히 진실하게만 하면, 그다음에는 전과는 다른 더 나은 선택을, 전과는 다른 더 나은 동기에 따라, 쩝쩝., 전과는 다른 더 나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일한이 말 도중에 끼어들었다.

"이 녀석이 처처청산유수네."

일한은 억울하게 놈에게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에잇.."

분통이 터졌지만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놈의 페이스에 말려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런데 방금 수화기에서 난 소리는 놈이 뭔가를 먹는 소리가 아닌가. 뭔가 결단을 내려야겠다.

", 결국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을 거지?"

"돌려줘야죠"라고 진수가 말했을 때는, 이미 전화가 끊어진 뒤였다.

일한은 공중전화기 위에 빵과 우유를 얹어 놓고 재다이얼 단추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좌우로 서성였다. 놈에게 내가 당하고 있다. 이놈은 입만 살아서 그럴듯하게 나불대지만. 맙소사, 지금까지 내가 도둑놈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 자꾸 전화 끊을 거야?"

진수가 전화를 받자마자 일한이 말했다.

"제가 안 끊었어요. 전화가 자꾸 끊어져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이상한 놈이구나. 지금 날 놀리고 있지?"

"도둑질을 했지만. 거짓말은 안 합니다."

"정직하다?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난 처음부터 믿지 않았어. 어디, 믿을 사람이 없어 도둑놈 말을 믿어? 내 핸드폰은 내가 잘 알아. 적어도 너보다 정직해."

"제가 거짓말해서 뭣하겠어요?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하는 건데."

"뭐라고? 넌 오늘 내 손에 잡히면 죽어."

일한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네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그건 너란 놈이 원래 그런 놈이니까. 아니면 음, 넌 지금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도중에 또 전화가 끊어졌다.

일한이 불쑥 말하고 나서 자신이 한 말을 되새겨 보니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놈은 이동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는 붙박이 전화로 통화를 한다. 이놈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징기스칸 부대가 이동하면서 말 젖을 먹었듯이, 이놈은 날 묶어 둔 채 자신은 움직이며 빵까지 먹고 있었던 거야. 고단수야. 처음부터, 햇볕정책이고 나발이고 간에 성질대로 했어야 했어. 놈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죄송해요. 제가 안 끊었어요"라고 진수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가 다시 끊어졌다.

일한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진수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며 상대편 소음을 들었다. 도로다. 계속 소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무의식중에 빵을 베어 물고 고개를 든다. 이때, 큰길을 따라 멀리서 걸어오는 낯설지 않은 청년을 보았다. 청년이 그놈인지 확인하느라 말을 자주 끊는다.

"나한테, , 히면.."

일한은 시간을 끌었다.

", 말이야.."라고 말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소리쳤다.

"전화 끊지 마!" 씹던 빵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진수는 뒤돌아서 달아났다. 추적자는 빨리도 쫓아 왔고, 오르막길이라서 진수는 숨이 가빴다. 굉장히 빠른 아저씨다. 내리막길에 접어들자마자 진수는 옆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보니 막다른 골목이었다.

일한이 옆 골목 입구까지 왔을 때 놈은 사라지고 없었다. 행인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옆 골목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놈이 담을 넘고 있었다. 담을 넘은 진수는 옆 담을 끼고 돌아가서 뒷집 담도 넘었다. 뒷집마당을 가로질러 다시 담을 넘을 때 되돌아보니 추적자가 첫 담을 넘고 있었다.

진수가 큰 도로로 나왔을 때는 뒤돌아보며 뛰었다. 그 뒤에는 일한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평지로 접어들어 오토바이 상사 앞에 세워 둔 자전거에 진수가 부딪혀 비틀거렸고, 자전거는 조금 구르다가 옆으로 넘어졌다.

이때 일한이 그것을 보고 자전거가 잠겨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거의 추격을 포기하려고 하는데, 도망자는 자전거를 두고 그냥 뛰어갔다.

자전거가 넘어진 곳에까지 온 일한이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거기에 올라탔다. 자전거는, 평지를 가다가 내리막길에 이르자 쏜살같이 내리 닫았다. 뒷덜미가 서늘하여 뒤돌아보던 진수는 놀라서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내리닫는 탄력을 이용해 일한은 자전거에서 풀쩍 뛰어 뒤돌아보는 진수를 덮쳤다. ! 하는 소리가 나고 둘은 함께 나동그라졌다.

자전거도 길 한가운데 넘어졌다. 일한이 진수를 내리치려고 하자 길 가던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진수가 일한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급히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때리지 마세요." 일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주먹을 내리고, 멱살을 붙잡고 진수를 일으켜 세웠다.

"또 도망가면 죽어." 일한이 말했다.

시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가 이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잠시 지켜보더니 안심하고 그냥 지나갔다.

"도망가지 않을게요. 그런데," 진수가 말했다.

손가락으로 일한의 등 뒤를 가리켰다.

", 저 뒤에 자전거.."라고 말하며 급히 움직였고, 일한이 주먹을 둘러치자 진수가 뒤로 쓰러졌다. 빵빵-. 일한이 경적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니, 모래를 실은 덤프트럭이 물을 뚝뚝 흘리며, 넘어진 자전거를 뭉개고 지나갈 기세로 서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 학교 도서관마다 돌아다니면서 물건 훔치는 놈이지?" 일한이 말했다.

일한은, 놈이 앉은 자세에서 갑자기 튀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부좌 자세로 앉히고, 놈의 주머니를 뒤졌는데 학생증이 나왔다.

"다른 학생증도 다 내봐."

"없어요." 진수가 한쪽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대답했다. "그 학생증 제거예요."

"넌 오늘 임자 만난 거야. 여기는 내가 다녔던 학교야. 그냥 꺼낼래, 입에 피 물고 꺼낼래?"라고 일한이 으르며 놈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상이었다.

가부좌 자세로 앉은 녀석의 꼴을 보니 기분이 좀 묘했다. 가부좌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세이군. 아니, 자세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구나. 스스로 하면 보기 좋은 자세가 남을 결박하는 자세로도 쓰일 수 있다니.

"학생증이 너 거라고? 그럼, 학번 한번 대봐." 일한이 학생증을 보며 말했다.

".."

"거봐, 학생일 리 없어. 그럼 좋아, 2차원 평면을 적분하면 어떻게 돼?"라고 묻다가 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한국에선 지나치게 쉬운 문제야. 온 국민이 미적분을 공부하는 이상한 나라니까. 아니, 확인할 필요도 없어. 넌 어차피 도둑놈이니까."

일한은 다시 찾은 수금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바로 경찰을 부르지 뭐."

진수를 힐끗 본 일한은 핸드폰 단추를 눌러보다가 중얼거렸다.

"밧데리가 다 됐잖아."

일한은 핸드폰 폴더를 닫으며 진수에게 말했다.

"아까 왜 밧데리가 다 됐다고 말하지 않았지?"

잠시 뒤에 진수가 대답했다.

"몰랐어요."

그리고 진수가 말을 더듬더듬하며 어눌하게 말했다.

"핸드폰을, 처음 써 봤어요."

"핸드폰을 처음 써 봤다고?" 일한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핸드폰 세상에서 핸드폰 없이 사는 인간이란, 그리고 그 인간이 사는 생활이란 도대체 어떤 거지? 핸드폰을 쓴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생활을 기억조차 할 수 없군.' 중얼거리고 나서

"다른 건 몰라도 내 핸드폰은 밧데리가 거의 없으면"이라고 일한은 먼 산을 보았다.

"아까 때린 건. 자식, 말을 하지. 난 도망가는 줄 알았잖아, 아무튼.."

잠시 뒤 진수의 학생증을 다시 보았다.

"이진수. 환경공학과 구구, 비둘기 학번. 네가?" 일한이 진수를 보며 말했다.

"똥물을 맑게 하기는커녕, 이런 놈들이 이 사회를 더럽히는 거야. 이런 놈들은 소각장에서 환경공학적으로 다뤄야,"라고 말하고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말을 잇기는 했다.

"하는데.."

"."

일한은 진수의 청바지를 보고 있었다. 무릎뿐만 아니라 바지 전체에, 방금 산탄총을 맞은 것처럼 구멍이 나 있었는데, 찢은 것에 비해 비교적 깔끔했고, 그 구멍 속으로 뽀얀 맨살이 보였다. 염산 자국이라고 했던가?

"청바지를 어떻게 염산으로 태웠다고 했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과 실험실에서 매일 실험을 도와주는데, 염산이 튀는 것 같이 험한 일은 저 같은 아르바이트생을 시키죠. 가운을 걸쳐도 소용없어요. 두꺼운 청바지도 뚫을 정도로 독한데요, ."

일한이 손으로 허벅지에 난 큰 구멍을 헤쳐 맨살을 자세히 보니, 과연 불에 덴 자국처럼 피부가 벗겨지고 속살이 발갛게 드러나 울퉁불퉁하니 흉이 굳어 있었다.

해가 지고 주위는 어두워졌다. 일한이 진수에게 담배를 권했다. 진수는 고개를 가로저어 거절하고 나서, 혼자 중얼거리듯 물었다. "죗값은 치러야겠죠?" 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배를 입에 물려다 그냥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진수도 일어섰고, 일한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동안 서로 눈길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언덕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며 뒤따라오는 진수에게 일한이 물었다.

"왜 아까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지 않았지? 자전거를 타고 도망갔으면 난 널 포기했을 거야."

진수가 대답이 없어서 일한이 다시 물었다.

"어지간히 급했구나?"

"자전거를 못 타요."

"? 다시 말해 봐."

"자전거를 못 타요."

일한은 말없이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아버지가 많으니 자전거를 배워도 많이 배웠겠다고 농담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다. 속으로만 그 말을 뇌까렸다. 이거, 굉장히 미안한데. 전화로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잖아. 배고파서 빵 훔친 녀석을 돌로 쳐죽인 꼴이야.

그동안 아까 자전거가 넘어졌던 곳에 거의 다 왔고, 오토바이 상사 근처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사내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한이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봤다. 일한이 있는 쪽은 어두운 곳에 있어 그쪽을 잘 볼 수 있지만 그쪽에서는 이쪽을 잘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이쪽을 가리키자 사내들이 일제히 이쪽을 쳐다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가운데 누군가가 크게 말했다. "저 자전거 아냐?" "맞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또 누군가는 욕을 했다. 여기저기서 욕이 터져 나오며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언제 자전거를 탔는지, 일한은 자전거 안장에 앉아 진수에게 수금 가방을 던지며 급히 말했다.

"뒤에 타."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

"거기 서!" 뒤에서 사내들이 소리치며 악을 썼다.

"꽉 잡아."

일한은 자전거를 몰아 내리막을 달렸다. 자전거는 두 사람의 무게 때문에 일한이 진수를 추격할 때보다 더 빨리 달렸다. 길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이 놀라서 비켜섰다. 그때 도망쳐 온 언덕에서 오토바이 여러 대가 거의 동시에 시동 거는 소리가 났다. 진수가 소리쳤다.

"아저씨, 오토바이로 쫓아오는가 봐요. 골목으로 빠져요."

일한이 핸들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갔고, 진수와 함께 불 꺼진 집 담 너머로 자전거를 넘겼다. 서로 도와 담을 넘을 때 개집에서 개가 나와 짖었다. 담을 넘은 일한이 손을 털고 개집을 걷어차자, 개는 깨갱거리고 개집으로 들어가 짖어 댔다. 오토바이 소리와 경적 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빵으로 개를 달랬고, 개에게 빵을 조금씩 던져 주며 담벼락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담 너머 골목에서는 오토바이를 타며 골목을 누비는 사내들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들, 잡히면 제삿날이야. 칼치 형님 그랜거를 업어가다니."

누군가 오토바이를 세우는 듯하더니,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투벅투벅..' 일한은 담 너머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한 손에 빵을 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수가 일한의 손에 놓인 빵을 집어 조금씩 떼서 개에게 던져 주었다. 빵을 뗄 때마다 가늘게 손이 떨렸지만 진수는 묵묵히 규칙적인 동작을 반복했다. 이를 본 일한의 긴장한 표정에 잠시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분명 여기 어디서 개가 짖었는데.."라고, 허스키가 담벼락 너머로 들렸다. 그때 다시 일군의 오토바이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꾸물댈 거야? 이 동네 놈들이 아냐.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너희는 저쪽으로, 우리는 이쪽으로!"

일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손을 가늘게 떨고 있는 진수가 어색하게 잠깐 웃어 보이고 개에게 같은 페이스로 빵을 던진다. 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일한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진수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는, 일한이 진수의 손에서 빵을 받아 들자, 진수가 이마의 땀을 닦고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귓속말을 했다.

'아이덴티티 갈아 드릴까요?'

일한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좋아, 기념으로 갈아줘'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넌 왜 굳이 이런 걸 갈아서 뿌옇게 만들어?' 진수가 대답했다.

'탁하게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키힉키힉, 그건 아직 방법이 미숙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죠-희미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전 진하거나 독한 건 별로. 지나치게 자극적이잖아요. 한번 익숙해지면- 키힉키힉.. 사실 전 그 세계에 익숙하지만-빠져 나오기 힘들어서 그 세계에 얽매이기 십상이에요. 싫어하려 해도 싫어할 수 없고, 점점 그 방향으로 가속이 붙죠. 저절로 말예요. , 제가 살고 싶은 세계는, 묽고 희박한 세계예요.'

일한이 생각했다. 이상하고 긴 하루다. 하마터면 몰매를 맞을 뻔하기까지 하며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힘든 줄은 모르겠고, 오늘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날이다.

빵이 떨어지자 개가 으르렁거렸다. 녀석은 자신이 배고픈 짐승일 뿐이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골목은 조용했지만 추적을 완전히 따돌린 것 같진 않았다. 멀리서 이따금씩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슬슬 나가 보자. 여기 계속 있다가는 잡히겠다."

"완전히 따돌린 걸까요?"

자전거 뒤에 앉은 진수가 묻자 일한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다시 진수가 물었다.

"도망가기도 바쁜데 막걸리는 왜 샀어요?"

일한은 페달을 두어 번 젓고 나서 말했다.

"한잔하자고, 동문끼리." 일한이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떠 있었다. 진수는 추격을 따돌리고, 느긋하게 자전거 뒷자리에 김치를 놓고 일한과 막걸리를 마시게 될 밤 풍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묘하게도 가슴이 설렌다. 자전거는 긴 내리막길로 내려갔다.

"아저씨가 맞을지도 몰라요. 학교 그만둘까 봐요."

일한은 묵묵히 페달을 밟았다.

"아저씨 말처럼 전 원래 들치기인가 봐요. 학생이기는커녕 도둑질조차 멈출 수 없는걸요."

"넌 원래 들치기지." 일한이 잠시 후에 다시 말했다.

"학생이 들치기를 한 게 아니라, 원래 들치기가 노력해서 학생이 된 거야." 잠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하지 마."

진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자전거 바람이 시원했다. 그 바람은 청바지 구멍 속으로도 들어왔다.

앞쪽에는 야간에도 공사가 한창인지 멀리서 굴착기 소리가 들렸다. 탕탕탕탕.. 진수는 오른팔로 일한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왼팔로는 머큐로크롬과 스포츠 마시지 크림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빨간약하고 크림은 왜, 누가 다쳤어요?"

"자전거 타는 걸 가르쳐 주려고.. 좀 까지고 멍도 들 거야. 각오 단단히 해. , 오늘 밤 안에 자전거를 배우는 거야."

진수는 일한의 널찍한 등에 이마를 댔다. 등에서 전해 오는 체온이 따뜻했다.

"네가 신분증을 자꾸 훔치는 건," 이라고 말하고 일한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바꿔 소리쳤다. "그래, 자전거를 배우면 돼.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일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다시 소리쳤다.

"네가 말한, 묽고 희박한 세계로 가는 거야!"

일한이 외치는 소리가 등에 귀를 대고 있는 것처럼, 일한의 넓은 등에서 울려 진수의 이마로 전해졌다.

"이제 어디, 공터를 찾자고."

공사장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굴착기가 잠시 멎어 주위가 조용했다. 그때 뒤편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두 사람 눈이 마주쳤다. 점점 가까워지는 오토바이들이 전조등을 깜박였다.

"자전거를 버리고 달아나요. 잡히겠어요."

"그럴 순 없어." 일한이 핸들을 고쳐 잡았다.

일한의 표정을 본 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굴착기가 암반에 닿은 듯한 소리를 내며 다시 땅을 뚫기 시작했다. 땅땅땅땅.. 뒤쪽에서는 오토바이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텅텅텅텅.. 길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여서 자전거가 심하게 덜컹댔고, 뒤에 앉은 진수는 온몸이 덜덜거렸다. 그때 저만치 앞쪽에서도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오토바이 여러 대가 나타났다. 그때, 진수가 말했다.

"자전거를 배우고 싶어요."

굴착기 소리 때문에 진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일한이 묻자, 진수는 일한의 귀에 대고 크게 말했다.

"자전거를 배우겠어요." 진수가 크게 말했다.

일한이 속력을 늦추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자 앞에서 오는 오토바이 한 대가 경적을 울렸다. 나머지 오토바이들도 잇따라 경적을 울리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빠라빠라빠라빠라..

"안 들려!" 일한이 소리쳤다.

"자전거를 타겠어요!" 진수도 소리쳤다.

"좋아."

일한은 달리는 앞쪽에서, 길을 가던 여자가 길옆으로 재빨리 몸을 피하며, 손을 잡고 있던 아이를 감싸는 것을 봤다.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따라온 오토바이들이 뒤에서 전조등을 교대로 깜빡이자, 진수는 수십 개의 사이키 조명이 번쩍번쩍 비추는 현란하고 몽환적인 테크노 바에 있는 착각이 든다.

자신을 감싼 엄마의 팔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이들을 지켜보던 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리기 시작한다. 공간이동 도술을 펼치는 것처럼, 섬광이 점멸할 때마다 자전거를 탄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앞으로 성큼성큼 나타나곤 아이 옆을 지나치려 한다. "꽉 잡아!" 일한은 핸들을 잡은 팔에 힘을 주며 진수를 길게 부른다. "이진수-" 진수는 대답 대신 일한의 허리를 껴안는다.

가파른 내리막이었지만 페달을 계속 밟으며 전속력으로 돌진한다. 일한과 진수가 하나가 되고 자전거와도 하나가 되더니 섬광의 점멸이 빨라짐에 따라 뒷모습의 이들이 나타나는 간격이 점점 짧아져 어딘가로 어딘가로 수렴할 때쯤, "우린"이라고 짧게 뱉은 일한이 가슴 부풀도록 숨을 들이마시고, 부셔서 가늘게 눈뜬 진수가 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린 아이가 비명을 지르기 위한 것인 듯 탄성을 지르기 위한 것인 듯 뭔가 소리를 지르기 직전일 때, '타당'하고 돌이 튀며 자전거가 공중으로 치솟고 부릅뜬 일한의 눈에 전광석화 같은 커다란 빛이 지나간다.

돌파한다!

우렁우렁 밤하늘에 그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질 때쯤, 뿜어진 눈부신 불빛 속으로 뛰어들며 허공에서 잠시 정지한 듯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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