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니
김말봉
남순이는 누더기가 다 된 옷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는 플랫포옴으로 밀리며 밀리며 바깥 광장으로 나왔다. 오래간만에 보는 고향의 풍경은 사변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지프들이 주욱 늘어섰는가 하면 살빛 다른 외국 군인이 바쁘게 지프를 몰아 들어가고 나가고.
그래도 남순이에게는 고향이 있다. 길바닥에 서성거리는 지게꾼들의 배고픈 얼굴하며. 새까만 손을 내미는 거지아이들하며, 뚜우 울리는 뱃고동소리며.
"고향에 왔구나."
남순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고향에 오기까지 거의 일년이나 되는 세월을 꼬박 길에서 보내면서 갖은 풍상을 겪은 것이다.
남순은 6, 25전까지 남편과 함께 용산에 살고 있었다. 남편은 경사였다.
인민군이 들어오는 새벽, 남편은 한 걸음 먼저 한강을 넘어갔다. 쏟아져 나오는 피난민에 휩쓸려 남순도 한강을 건넜다. 기차를 타려고 가는 사람들을 좇아 수원까지 걸어왔으나 지붕까지 허옇게 올라앉은 사람을 태우고 기차는 떠나버렸다. 남순은 다음 기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본래 약간 모자라는 남순이었다. 어릴 때 바람 병으로 몹시 앓은 까닭인지 그는 스물세 살 지금에도 해가 동에서 떠서 서에서 진다는 사실을 알 뿐 어느 것이 남쪽이고 어느 것이 북쪽인 것은 똑똑히 모른다. 팔 년을 다녀 겨우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러나 남순은 어여쁜 여인이다. 그는 바느질도 서투르고 음식솜씨도 능란하지 못하건만 언제나 남편에게서 귀염을 받았다. 남편이 상처를 하고 서른두 살에 남순이를 데려온 까닭도 있겠지만 남순은 봉실봉실 피어나는 복사꽃같이 아름다왔다. 잔잔한 눈시울이 항상 다정스럽게 웃고 오똑한 코며 보오얀 이맛전이며 팡파짐한 엉덩이---- 이 모든 조건은 남편에게 있어 무한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아침부터 수원역 대합실 밖 시멘트벽을 기대고 섰는 남순은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파왔건만 가진 돈이라고는 백원 한 장도 없다. 남편이 사흘 전에 들여온 월급 봉투는 절반 나마 돈이 남아 있는 것을 미처 가져나을 생각도 못하고 뛰쳐나온 남순이다.
"어디꺼정 가시지요?"
해질 무렵 젊은 남자가 남순의 곁으로 온다. 우람스런 두 팔뚝이 노출된 소매 짧은 노우타이를 걸친 사나이의 얼굴이 인정스럽다고 생각하며,
"부산 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 남순은 벽에 기대 섰던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동행이 없거던 추럭을 타시지요. 내가 운전하는 추럭 찻삯은 받지 않을 테니."
남순은 다만 방그레 웃는 것으로 고맙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운전사의 뒤를 따랐다. 모든 사람의 부러워지는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남순은 태산같은 보퉁이를 싣고 사람도 이십여 명 타고 있는 트럭으로 갔다. 남빛 하늘에 별이 드문드문 박힐 무렵이 되어 트럭은 구르기 시작하였다.
훠언하니 밝아오는 새벽, 어느 지점인지 트럭은 와서 대었다. 사람도 얼마 내리고 보퉁이도 줄어들었다. 이튿날 낮에도 트럭은 달린다. 가끔 트럭이 설 때마다 사람들은 언덕이나 밭고랑에 대고 소변을 한다. 남순이도 오금을 펴서 내려와서 소변을 하였다.
이틀째 새벽. 트럭이 설 때였다. 남순은 약간 후미진 곳으로 가서 뒤를 보고 막 일어서는 때이다. 뒷덜미를 낚아채는 사나이가 있다. 트럭 운전사다.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었다. 미처 당겨 입지 못한 속바지 허구리가 사나이 손길에 휘감기고……
싱그레 웃고 일어나는 사나이가 품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주며,
"이따 정거하는 곳에서 떡이나 사 먹우."
하고 운전대로 간다. 남순이는 트럭에서 누가 보지나 않았나 하고 걱정이 되었으나 그는 그다음 정거하는 데서 인절미를 사먹을 때는 벌써 그 걱정은 잊어버렸다.
트럭이 대전까지 올 동안 남순은 운전사에게 두 번 몸을 맡기게 되고 그리고 주는 돈으로 떡과 밥을 사 먹었다.
트럭은 대전까지 오고 그 이상 더 가지는 않았다. 남순은 다음 편을 기다려야 한다. 운전사의 안내로 대전 역전 어느 허술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내일 부산으로 간다. 모레 부산으로 간다 하는 운전사의 말을 믿고, 운전사와 함께 여관에서 거의 한 달이나 살았다. 꼭 한 달 되는 아침, 트럭을 가지고 데리러 온다 하고 밖으로 나간 운전사는 영 돌아오지 않았다.
남순은 두 사람이 먹은 한달 밥값을 위하여 여관에서 두 달을 고용살이를 해야 됐다. 고용살이를 하면서도 남순은 지프를 태워다준다는 군인에게, 기차를 태워 준다는 중년 사나이에게, 닷새 혹은 열흘씩 몸을 맡기고 고향 갈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영동에서 두 달을 살았다. 약목에서는 스무날을 살았다. 그리고 대구에 와서 고스란히 넉 달을 살면서 고향 갈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남순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그의 가장 지루하였던 노정(路程)들이다.
남순은 그렇게 오기 힘들고 그리웁던 고향땅에를 인제야 찾아왔다. 길바닥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하꼬방이며 너절하게 차린 전재민들이 대구보다 훨씬 더 많다 생가하며, 그는 영주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해가 저녁때가 되었는지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가 자욱하다.
정든 자기집 대문. 있다! 분명히 있다! 꿈에서만 볼 수 있던 어머니가 마루를 훔치다 말고 질겁을 해서 쫓아 나오며,
"아이구 이게 누구냐?"
하고 소리를 친다.
"아이구, 남순아. 내 자식아, 니가 살아 왔구나!"
이 말을 들은 식구들은 모두 맨발로 뛰어나왔다. 오빠며 올케며 남동생이며 여동생이며 저마다 남순의 손목도 잡아당기고 어깨도 끌어안고 등도 쓰다듬어주고, 식구들은 남순을 안다시피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네 남편은 사변 나고 며칠 안돼서 내려왔더라. 복장은 벗어서 한강에 던지고 맨 몸으로 언덕에 기어올라서 어떤 영감님의 고의를 얻어 입고 영등포꺼정 왔더란다. 너만 남아서 오즉이나 고생을 했겠니, 어이구 내 자식아."
어머니는 기름한 모가지 위에서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너를 버리고 혼자 도망쳐온 게 미워서, 난 지금도 권서방(사위)만 보면 들볶아준다."
어머니는 딸의 두 손목을 꽈 쥐어도 보고 흔들어도 보고,
"내사 네 팔이 한 개 떨어지고라도 네가 살아만 왔으면 했다. 네 다리가 한개 잘라지고라도 아니 앉은뱅이 가 되고라도 살아만 오기를 얼마나 축수했는지. 명천 하느님께."
남순의 어머니는 일어서서 춤을 둥실둥실 추다가,
"이게 다 돌아가신 네 아버지 혼령이 돌보아주신 거다…… 고맙심더. 고맙심더, 영감님 고맙심더. 남순이가 살아 왔심더."
하고 엉엉 울기도 하였다. 앞집의 돌이 어머니며 뒷집의 창남이 할머니가 남순을 보러 왔다. 모두들 살아온 게 장하다고 인사가 지극하다. 남순이도 그 지긋지긋한 고생살이를 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온 것만은 역시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순은 우선 헌털뱅이를 벗어버리고 어머니가 꺼내주시는 새 옷을 입었다. 올케가 차려다 주는 밥상을 받았다. 남순은 지금까지 지내온 고난과 설움이 꿈인가 싶었다. 고향이 제일이고 내 집이 제일이고 하늘 아래서는 내 어머니가 제일이란 것을 느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청관에서 비단 장사하는 고모님이며 초량 사는 외숙모 내외가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왔다. 고모님은 소리를 내어 울고, 모두들 남순을 가운데로 밤늦게들 이 야기를 하다가 돌아갔다.
이날 밤 남순은 오래간만에 어머니 곁에 발을 뻗고 누웠다.
"어이구 내 자식이야, 얼마나 얼마나 고생을 했노."
어머니는 딸의 어깨며 등어리며 허리를 두루 만걱보고, 다리와 발도 주물러보고 손바닥으로 딸의 뺨을 쓸어보기도 한다. 어머니의 손이 두 번째 남순의 허리로 갔을 때다.
<굼틀 벌떡.>
분명 태동(胎動)이다. 어머니는 눈이 둥그래서 또 한번 딸의 허리를 더듬었다. 어머니는 금시로 목구멍이 말라오는지 켁켁 잔기침을 하여 침 삼키고 딸의 귀에 입을 댔다.
"너 아이 뱄구나?"
남순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 아이냐?"
겁을 집어먹은 어머니의 눈이 촛점을 잃고 두리번두리번 양미간에 굵다란 주름살이 아로새겨 진다.
"아이 애비는 어디 있느냐?"
남순의 남편이 내려온 지가 열한 달이 되었으니 남순이가 배고 있는 아이는 남의 아이가 분명하다.
"몰라요."
남순의 대답은 지극히 예사롭다.
"이 원수야, 어느 놈의 아이인지 것도 몰라?"
"난 몰라, 그런 거."
어머니는 기가 막혀 잠자코 앉았다. 남순이는 마음으로 생각하여보았다. 트럭에서 내려 소변하는 자기를 낚아채던 운전사나, 지프를 태워다주던 군인인지 순경인지 일행 일곱 사람의 얼굴이며, 그리고 영동 주막집 남자의 모습하며, 대구 XX여관집 보이와 그리고 이번에 부산 가는 차에 올려주던 기차 승무원의 모습을 두루 생각하여 보아도 어느 하나를 꼭 지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순은 멀뚱멀뚱 천장만 치어다보고 누워 있다.
"몇 달이냐? 여섯 달이냐?"
"난 몰라 그런 거."
어머니는 몇 번이나 혀를 차고.
"이 천치 년아, 몸엣것이 언제쯤 없어졌노.?"
"모르겠어, 잊어버렸어."
남순이는 빤히 어머니의 얼굴을 치어다보고,
"권 서방이 밤낮 아이 하나 낳으라 했는데 잘됐지 뭐요."
하고 귀찮은 듯이 눈을 감는다.
"이년아, 이 미련한 년아. 네 서방 아이가 아닌데도 낳아서 기르겠나? 아이고, 이 망신을 어쩌면 좋노."
"……"
"네 서방이 들으면 당장에 이혼이다, 이혼흔--- 아이구 이 망신을 어떻게 하나."
"걱정말어요, 어머니, 권서방을 불러다주어요. 내가 아일 기르자고 말을 할테니."
웬만한 청이면 곧잘 들어주는 남편은 자기의 뱃속에서 나오는 아이를 기르자면 곧 동의할 것만 같다.
"아이구 맙시사, 이 천치 년아……- 어릴 때 진작 뒤어졌더라면."
어머니는 무르팍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담뱃대를 물고 앉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다가,
"이년아, 어느 세상인 줄도 모르고 이년아, 차라리 철로에나 치어 뒤어지고 말께지 무슨 주제로 살아 왔노. 아이고, 이 망신을 어떻게 하노."
잠자코 듣고 있던 남순은 골이 났는지,
"망신은 무슨 망신. 내가 훼냥질을 했나 머 -"
이렇게 중얼거리고 벽으로 돌아누웠다.
"아니. 서방 있는 년이 딴 놈의 아이를 뱄는데도 훼냥질을 안 했다니---개가 들어도 웃을 노릇이다. 사둔댁에서 알면 내 얼굴에 똥물을 안 뿌리겠나."
하고 어머니는 부르르 치를 떤다. 남순은 어머니의 주먹이 머리빡으로 내려칠 것만 같아서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저만큼 물러나 앉으며,
"나는 훼냥년이 아니에요. 나는 단 한번이라도 잡심을 먹고 몸을 내준 일은 없어요. 그들이 날 고향까지 데려다준다기에,,,,,그리고 이틀씩이나 밥도 못 얻어먹고 굶어죽게 됐을 때 먹을 것을 사다주기에. 신발도 없이 돌짝밭이며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 신을 사주기에."
남순은 흑흑 느껴 가며.
"어머니에게 날 데려다준다기에, 그 말만 믿고 몸을 내주었지요.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었어요. 나는 돈도. 힘도.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남순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머니는 담뱃대를 두드리며.
"이년아 남 듣는다. 아니, 밤중에 울기는 왜 울어 ? 개망신을 저질러놓고 변명이 무엇이야. 변명이!"
하고 눈을 부라린다.
"어머니는 너무도 야속해요. 내 사정은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아요."
하고 남순은 구석으로 돌아앉아 눈물을 씻었다. 날이 새었다. 남순의 어머니는 피난민으로 와서 개업하고 있는 산파를 데려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남순의 일을 의논하였다.
아이가 벌써 아흡 달이나 되었다는 말과, 이왕이면 다 자란 아이니 낳아서 자식 없는 사람에게 기르라 주는 것이 적선도 되고 안전하다는 것이다. 아이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첫째 남순이의 생명이 위태하고 다음으로는 법률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산파는 돌아갔다.
그날부터 남순은 초량 산막에 있는 외숙모네 집으로 가게 되고, 그 전 부엌방-겨우 반간 남짓한 좁고 어두운 방으로 감금되었다. 자고 먹는 것은 물론이고, 똥과 오줌도 그 방에서 해야 한다.
갇혀 있은 지 스무이레 만에 남순은 아들을 낳았다. 하이얀 융적삼을 입고 아르르 떠는 아이를 돌아보고 남순은 눈을 흘기었다.
"강아지 새끼 같은 것. 날 죽도록 고생을 시키고."
그러나 이렇게 중얼거리며 아이를 흘겨보던 남순은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으앵, 으앵."
하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남순의 가슴속으로 스며든 때문이다. 아이의 우는소리는 남순의 혈관 속으로 녹아들고, 그리고 영혼 속으로 감겨들었다. 쪼그르르 주름살 잡힌 작은 이마하며, 바르르 떠는 턱하며 남순의 가슴속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애처롭고 가엾고 아깝고 그리웁고, 이런 여러 가지를 한데 섞어놓은 듯한 감정이 남순의 전신에는 끓는 가마물 같이 넘쳐흐른다. 남순은 전에는 결단코 경험해 보지 못하던 감정이었다.
이튿날 어머니가 왔다.
어머니는 아이를 힐끗 한번 돌아다볼 뿐,
"구포 사돈댁에서는 지금 네가 나쁜 병 (장질부사)을 앓고 있는 줄 알고 널 보러 올려고 발광하는 의 남편을 식구들이 붙들고 있다. 젖만 물리지 않으면 한 보름 몸조리해서 네 남편과 만나고 좋아. 이젠 망신도 면하게 됐으니 한 보름만 더 꾹 참어라."
하고 일어서다가,
"젖꼭지 물리면 안 돼."
한번 당부를 하고.
"내일 말구, 모레 아이를 데릴러 올 거다. 기르겠다는 사람이 있어."
하고 문턱에 걸터앉아 신을 신는다.
"아니, 누가 아이를 데려간대요?"
남순은 어머니의 치마를 붙들었다.
"자식 없는 집에서 갖다 기르겠다니 오즉 좋으냐. 그 집에서 비단 포대기며 새 기저귀 다 준비한다더라."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 남순은 한숨을 쉬고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새까만 기름이 반지르르 흐르는 머리털, 빤히 떠보는 새까만 눈알, 작디작은 입, 아이를 들여다보는 남순의 눈은 차츰 흐려왔다. 굵다란 눈물이 아이의 이마며 뺨에 뚝뚝 굴러떨어졌다.
남순은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이가 가여워졌다.
"이것이 어느 손으로 갈 것인가?"
남순은 흑흑 느껴 울면서 두 팔로 아이를 안았다. 말랑말랑하고 모쫄한 체중을 무릎 위에 느끼며 남순은 젖꼭지를 꺼내 아이 입에 물렸다. 아이는 젖꼭지를 입에 넣자 마구 빨아댄다. 남순은 지금까지 아이에게 물에 적신 솜만 발리고 있은 것이 진정 후회가 되었다. 그는 탈지면을 담갔던 접시를 훌쩍 뒷문으로 던져버리고,
"어머니가 보시면 어때? 난 아이가 좋아. 난 남편보다도 누구보다도 아이가 좋아."
남순의 어머니는 오래간만에 웃음이 나왔다. 그는 감쪽같이 딸의 비밀이 보장된 것이 기뻤다. 사돈을 대하거나 사위를 만나거나 겁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어진 것이다. 자식 낳아보지 못한 최 군수댁이 가져다 기르게 되고, 그들은 난리만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이다. 만사는 다 남순의 어머니의 원대로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최 군수 부인이 왔다. 사십 안팎의 얌전한 이 중년부인은 아기의 포대기와 기저귀를 싼 보퉁이를 옆에 끼고 앉지도 않고,
"가봅시다."
하는 인사가 어지간히 초조하다. 남순의 어머니는 최군수댁을 데리고 초량 산막까지 걸어갔다. 남순이의 외숙모가 막 개울에서 어린애 기저귀 빨아온 것을 마루에 내려놓다 말고,
"성님 오셨습니까? 아이구 손님도 오십니껴?"
하고 군수 부인의 보퉁이를 받아들고 앞을 서서 부엌 방문을 열었다.
"아이고 얄궂어라. 내가 도랑에 갈 때만 해도 아이 울음소리 들었는데."
남순이의 숙모는 어이없는 얼굴로 소리를 친다. 남순의 어머니가 방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다. 남순이도 없고 애기도 없다. 남순이가 덮고 자던 담요도 없어지고. 애기의 누웠던 자리에는 까만 배냇똥이 묻어 있는 기저귀가 한 개 굴러 있다.
방안을 들여다보던 군수댁이 아랫목에서 연필로 쓴 짧은 편지를 집었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망신이 된다는 이 어린것을 데리고 떠나갑니다. 다시는 오지 않겠어요. 아이가 자라서 혹시 나쁜 짓을 하더라도 난 이 아이를 용서하겠어요. 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