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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약(眼藥)

Bollnow 2024. 3. 25. 18:04

안약(眼藥)

곽학송

 

1.

종수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은 반년만이었다. 후방이란 곳에 오게 되면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으레 뒤골목 하꼬방을 찾아다니던 그가 이번이라고 별나게 할머니를 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발길이 이 집으로 옮겨진 것이다.

할머니는 반년 전과 마찬가지로 위층 다다미방에 누워 있었다. 짐승 껍질을 벗겨 놓은 것 같은 이부자리, 그리고 머리맡에 물그릇 하나…… 반년 전과 다름이 있다면 그 양은 그릇에 담긴 물이 얼어붙지 않았고, 할머니가 퍽 노쇠하였을 뿐이었다.

그래도 저번에는

"종수냐?"

하며 손목을 잡는 손에 제법 힘이 있었고,

"너 지금 어디 있느냐? 군인에 들어갔다지?"

"."

"배고프지 않느냐?"

"."

"밥 먹었느냐?"

"."

"어디서 먹었느냐, 집에서 먹지 않구."

대답할 사이도 없이 묻는 말씀이 노망이라 하기에는 너무 똑똑했으며 몹시 반가와하는 눈치였는데 이번에는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누운 채로,

"종수냐!"

하는 말씀이 모기 소리만 하고 또 손에 맥이 하나도 없으며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가엾지도 않았고 겨울이나 여름이나 할머니를 외딴 위층 구석에 모시는 이 집 사람들이 미워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할머니의 눈치가 귀찮아 언젠가처럼 술이나 잔뜩 마시고 올 걸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는 것은 종수가 할머니에 대한 정을 절실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본래 할머니는 둘째 아들인 삼촌이 모신 까닭에 종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도 큰아들의 집이랍시고 기껏해야 일 년에 몇 번 올 뿐이었는데 와서는 으레 종수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였다.

"종수 애비는 무슨 술을 또 그렇게 마셨노!"

"어머니는 작은 아들 술 먹는 건 곱구, 나 술 먹는 건 그다지도 밉소?"

"누가 언제 그렇다더냐? 술일랑 작작 마시고 살림 잘하라는 게지."

"내 살림 못 하는 게 뭐란 말이요? 작은아들처럼 돈을 못 모았다구 어머니 오시면 굶겼단 말이오?"

"쯧쯧 그래라, 네가 옳다."

종수는 도무지 할머니와 정을 통하지 못했다.

물론 할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를 타고난 손자가 애처로왔을 게고, 또 아버지가 죽은 후는 그러한 아비나마 없는 손자를 더욱 불쌍하게 여기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러나 종수는 암만 술이 취해도 끔찍하게 자기를 사랑해 주었고 잘 때에는 꼭 껴안다 주던 아버지가 할머니만 오면 아무 말 없이 열흘이고 한 달이고 어딜 그렇게 싸다니다가 반드시 할머니가 돌아간 후에야 거지꼴이 되어 가지고 들어오곤 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오는 것이 도리어 싫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죽은 것도 꼭 할머니 탓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종수가 두 살 때 홀아비 된 후 꼬박 십 년간, 밤낮 술만 미사고 살면서도 누구에게나 <허허> 하던 아버지가 할머니에게만은 생트집 잡기가 일쑤였고, 또 아버지가 서소문(西小門) 후미끼리(건널목)에서 자살하기 전날 바로 할머니가 와서 아버지와 말다툼을 몹시 한 까닭이다.

"그래, 아들마저 잡아 먹을랴구 자꾸 와서 성화요?"

"그게 에미보구 하는 소리냐! 내가 누굴 잡아먹었단 말이냐?"

"며느리 귀신 무섭지도 않소? 며느리 귀신?"

"……"

시집올 때 치장을 잘못해 가지고 왔다고 삼 년간을 두고두고 짜증을 부리는 시어머니 등살에 참다못해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어머니 얼굴을 모르는 종수는 처음엔 아버지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차차 자라면서 모든 것을 짐작하고는 할머니가 미워졌다기보다 그런 아버지가 한없이 그리운 나머지 술을 마시게 되었고 나중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예 술주정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 종수는 할머니를 만나면 할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 어머니와 할머니와의 관계를 꼬치꼬치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으레 괴로워지는 까닭에 할머니를 만나려 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손목을 잡고 있던 할머니가,

"너 안약 가지고 왔느냐?"

하는 소리에 종수는 귀가 번쩍 띄었고 어리둥절하다가 지난 겨울에,

"너 안약 가지고 있느냐?"

"지금은 없는데요."

"……"

실망하는 눈치이기에,

"요다음 올 때 가지고 오지요"

"너 있는데 안약 있느냐?"

"."

"그럼 요다음 올 때 꼭 가지고 오너라, ."

이러한 말이 할머니와 자기 사이에 오고 갔다는 것과 동시에 피란 통에 할머니의 두 눈은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다는 삼촌의 말이 생각났으며 빈손으로 왔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손을 놓고 절망의 표정을 짓는 그 순간엔 할머니의 얼굴에서 옛날의 아버지의 얼굴, 혹은 어머니의 얼굴 같은 것을 발견하였다.

이제 와서 뭐 그러한 생각을 되풀이하는 자신의 마음을 꾸짖어 보았으나 그럴수록 가슴이 답답해졌으며 자꾸 할머니가 옛날의 어머니가 되고 삼촌이나 이 집 사람들이 옛날의 할머니가 되기도 하고 할머니가 옛날의 아버지가 되고 자신이 옛날의 할머니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피란 소동을 두 번이나 겪어 몹시 축이 간 주머니가 아쉬워서 삼촌이나 이 집 사람들은 약을 써서 고칠 수 없는 할머니의 두 눈을 위하여 불과 몇천 원짜리 안약 한 병 사지 않는지 그런 것을 종수는 모른다. 다만 할머니가 육개월 동안 기다린 안약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술만 먹을 수 있었던 자기의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이 집 사람들이나 옛날의 할머니보다 더 크나큰 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2.

종수는 실없이 언짢아진 마음이 밉기도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잠든 줄만 알았던 할머니가 앞을 더듬으며 울음소리로,

"벌써 가느냐?"

하는 바람에 다시 앉아 버렸다. 한참 동안 종수도 할머니도 말이 없었다.

그때 커덩커덩 하는 계단 소리와 함께 종현이가 올라왔다. 이름자에 같은 마루종()자가 붙어 있기에 그렇거니 하는 사촌 동생이다.

"형님, 점심 합시다"

종현을 거기 누워 있는 할머니는 아랑곳 없다는 듯이 쳐다볼 염도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는 것이다.

"누가 왔느냐?"

할머니는 이렇게 물으며 다시 종수의 손목을 잡는다.

"형님 손은 왜 잡소!"

종현은 할머니와 종수 사이에 달려들어 할머니 손과 종수의 손을 떼어 놓는다.

종현이로서는 어린애처럼 성가시게 구는 할머니가 귀찮을 것이라고 모처럼 찾아온 사촌형을 위한 호의에 틀림없을 게고, 종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종현의 한 마디에 꼼짝 못하고 도로 누워 버리는 할머니의 심경이 짐작되어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형님, 어서 내려갑시다"

"내 밥은 이리 가져와"

종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무뚝뚝한 말투였다. 종현은 종수의 태도가 의외라는 듯이, 서로 부닥치는 시선을 피하며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내려가 버렸고, 한참 후에 이 집 식모인 듯한 젊은 여인이 밥상을 들고 올라와서 미소를 띠며,

"찬은 없어도 많이 잡수세요."

하고, 가 버리었다.

여인의 말과는 딴판으로 밥상은 훌륭한 것이었으나 그것도 모처럼 찾아온 조카에 대한 숙모의 호의에서라면 숙모가 직접 가지고 올라올 법한 노릇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구미가 당기질 않아 억지로 두어 술 뜨다 말고 앉아 있노라니까.

"맛있느냐?"

하더니, 누었던 할머니가 일어나 앉으며 밥상을 더듬기 시작한다. 종수는 잠자코 할머니가 하는 양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손이 두부찌개에 닿자 할머니는,

"이거 나 하나 먹을까?"

하였다.

"잡수세요."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을 오물오물 놀리며 맛있게 먹는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이 집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음식조차 변변히 대접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에헴."

군기침을 하며 삼촌이 올라왔다.

"종현이냐?"

삼촌을 종현인 줄만 알고 이렇게 묻는 할머니의 말에, 삼촌이 이 위층에 자주 오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한 종수는 돼지처럼 살이 찐 삼촌이 한 없이 미워졌으며,

"무엇을 또 그렇게 잡수? 설사하실라구……"

하는 삼촌의 말에는 가슴속에서 무엇이 위로 치미는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할머니는 이 집 사람들 앞에서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 버릇인 양, 먹다 만 두부를 슬며시 상 위에다 놓고는 돌아눕는다.

"그래 재미는 어떠냐?"

"……"

"참 할머니가 너를 몹시 기다렸단다. 무슨 안약을 갖고 오겠다고 했니?"

"……"

"약을 써두 소용없다고 여러 번 당부해도 네가 가지고 오는 안약으로 꼭 고칠 수 있다는구나."

"……"

한참 후에,

"그런데 요새 전과(戰果)는 괜찮지?"

"."

"설마 또 후퇴야 않겠지?"

"글쎄요"

"적기(敵機)가 일선에는 많이 뜬다는데 정말인가?"

"아니요."

할 수 없이 되는대로 대답하던 종수는 거기서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뒷간에 가는 것을 핑계로 나오려니까 할머니는 반신을 일으키며,

"종수 가느냐? 요다음 올 때 꼭 안약 가지고 오너라, ."

하였고, 그러한 할머니의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던 삼촌은 종수를 따라 계단을 내려오며,

"어머니두 쯧쯧…… 사람은 늙으면 빨리 죽는 것이 제일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3.

밖으로 나온 종수는 한참 미친 놈 모양으로 길거리를 헤매었다.

물론 삼촌은 할머니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 것이다. 사실상 귀까지 먹은 할머니는 당연히 듣지도 못하였지만 옛날의 어머니도 반드시 우물에 빠져 죽으라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할머니가 수건 같은 것으로 목을 매고 도깨비라도 나타날 듯한 그 위층 천정에 늘어지지 않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 종수의 그러한 생각은 한갓 망상이었다기보다 할머니와 삼촌을 딱 마주 앉히어 놓았을 때 발작한 감정의 여독(餘毒)에 지나지 않았으며 어떤 양약국에 들어가 삼천 원짜리 안약 한 병을 사서 주머니에 넣었을 때엔 벌써 두 발이 다시 삼촌 댁으로 옮겨지지가 않았다.

그 집 사람들이 하지 않는 짓을 한다면 삼촌이나 종현은 자기의 행동을 나무랄 것이며,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사나와질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가 아니라, 등골을 먹히고 껍질만 남은 엄지가 거미줄에 늘어져 바람에 나부기는 것을 보고, <야아, 우리 어미 그네 자알 탄다> 하는 <거미>의 세계와도 흡사한 사람의 세계…… 살래살래 꼬리를 치며 따라 다니는 제 새끼를 잡아먹곤 쩝쩝 입맛을 다시며 학학해진 배때기를 자랑하는 <망둥이>와도 방불한 사람의 꼴…… 그것이 덜 좋아 아버지처럼 술만 마시던 종수에게는 역시 할머니가 가엾다든가 삼촌이나 종현이가 마땅치 않다든가 하는 그러한 마음이 썩 부질없어 뒷골목 하꼬방을 찾아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뒷골목 하꼬방의 술맛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 집에서나 으레 양푼에다 막걸리를 철철 넘게 내놓으며 반가이 맞아 주었다. 가난한 종수의 주머니를 탐내어서가 아니라, 종수처럼 군소리 없이 술을 팔아 주는 사람이 시방은 들물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시작하면 저녁까지, 저녁에 시작하면 훤히 밝을 때까지 묵묵히 앉아서 그냥 쭉쭉 들이켜다가 그대로 쓰러져 한잠 자고 나서는 아무 말 없이 술값을 후하게 치르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야 종수도 처음에는 제법 저명한 관을 찾아가 계집을 상대로 노래도 부르고 말이 통하는 계집을 붙잡고 지껄이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남이 건드려 보지도 않는 매춘부의 넓적다리를 꼬집으며 밤새도록 킬킬거리기도 하였으나 그의 주량과 주머니가 용납하지 않는다기보다 어느새 그런 짓 역시 싱거워져서 아주 이 모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남이야 뭐라든 종수는 이렇게 소일하는데 불만이 없었다. 말투에 평안도 냄새가 나든, 경상도 냄새가 나든 노파나 아낙네가 내미는 막걸리 잔을 쓰질 않아 할머니를 잊을 수 있었고, 그렇게 미운 삼촌이나 종현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나타난다면 술잔을 내밀 만한 마음이 될 수 있었기에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코올의 위력이 주는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중수는 차라리 슬프기도 하였다.

십여 일 후, 주머니가 끝장이 난 저녁, 몹시 허전해진 뱃속에 밥을 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배낭 속에 들어 있는 군복을 꺼내 주고 천 원권 몇 장을 손에 든 그는 허망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까짓 생명이 아까와서……

아비처럼 철도 자살을 할 수 없어서……

암만 그래 봤대야 당장 죽어 버릴 용기가 나질 않는 것을 보니 사람이란 임의로 죽을 수 없는 동물이었다. 죽을 수 있다 할지라도 죽는 순간까지는 이 어지러운 공기를, 마음에 차질 않아도 마실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옛날 어머니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은 슬픈 일도 즐거운 일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며, 할머니를 나무라기보다는 아버지를 저주함이 옳았고, 아버지의 그러한 생애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면 아비를 닮은 자신을 꾸짖는 것이 옳았고, 자신의 생활 또한 아비를 닮게 마련이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차라리 죽지 못하는 주제에 <>에 무관심 하려고 술을 마시는 자신의 모순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종수는 다시 할머니 생각이 났고 이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안약 처분에 골몰하여야 했다.

물론, 삼촌의 말대로 안약을 쓴다고 해서 할머니의 두 눈이 밝아지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며 설사 밝아진다 하더라도 어서 죽기를 바라는 아들의 얼굴과 귀찮게 여기는 손자 종현의 얼굴이 두 눈동자에 비칠 때의 실망은, 안약을 가지고 올 자기를 기다리는 초조로움에 비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것이 뭐 할머니에게 기쁜 일이 될 것 같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안약을 할머니 손에 쥐어 준다는 것은 할머니의 유일한 희망을 뺏는 결과가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는 것은 기적적으로 소원이 성취되었다 할지라도 또 다른 희망이 생기지 않는 한 할머니의 짧은 여생이란 허무하기 짝이 없을 것이니 밝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도리어 행복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종수는 할머니와 안약에 대해서 그런 판단을 내리고 그대로 후방을 떠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애당초 아니었다. 눈을 떠서 행복할는지 불행할는지 알 수가 없다고 따지는 것은 자신이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할머니의 심정을 십분 이해 못한 데서 오는 망상일 것이요 안약을 써서 고칠 수도 없는 경우엔 할머니는 쉽사리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도 아니고, 그러한 자기의 태도는 병을 고칠 수 없는 약이 무슨 소용이냐는 삼촌의 태도와 마찬가지라 깨달아서도 아니고 그저 왜 그런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안약을 할머니 손에 쥐어 주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었다.

 

4.

종수는 구구한 생각은 말기로 하고 삼촌 댁을 향해 걸어갔다.

하나, 종수의 그런 조그마한 욕심조차 절대로 용납 될 수 없다는 듯이 삼촌 댁 현관 거기에는 엄연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忌 中]

호열자, 장티푸스 같은 급성 전염병이 유행한다. 치더라도 이 두 글자가 할머니 외의 사람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종수는 당황했다. 구두를 벗을 사이도 없이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할머니의 신체는 벌써 관 속에 결박되어 있었다. 종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종수야! 안약 가지고 왔으문 이리 다우.>

하고, 관 속에서 할머니의 손이 쑥 나올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소용이 없이 된 안약을 삼촌 면전에 내동댕이치고, <할머니> 하며 울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제하고 절을 하는 동안 "아이고 아이고"곡을 하던 삼촌은,

"어머님, 그렇게 기다리던 종수가 지금 왔습니다."

하였다. 종수는 삼촌의 말이 너무나도 의외였으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기와 할머니를 비웃는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삼촌은,

"참 잘 돌아가셨습니다."

"복이 많은 분이시지. 그만치 사셨으면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하는 조상 온 사람들의 말을 조금도 긍정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확실히 종수 이상 슬픈 표정이었으며 새로 들어오는 조객들을 대하는 태도며 곡을 하는 품이 형식이라기엔 너무 정중하였다.

숙모도 삼촌의 곡에 맞추어 울음소리를 높이며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어딜 나갔던 종현은 종수를 보자,

"형님."

하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는 것이었다.

삼 년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 있던 할머니에 대한 바로 사흘 전까지의 이 집 사람들의 태도는 결코 본의가 아니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더 할머니를 부양할 의무가 있는 자기 눈이 잘 못 보았다고 종수는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사흘 전까지 할머니를 미워했다 할지라도 지금 할머니를 잃은 이 집 사람들의 설움이 거짓이라 생각되지 않았고, 아버지와 같은 아들을 낳은 불행은 삼촌과 같은 아들이 있기에 잊을 수 있었고, 종현이 같은 손자가 있기에 자기와 같은 손자는 있어도 없어도 상관이 없었을 할머니의 한평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삼촌은 아무 말도 않다가 할머니를 홍제원 화장터까지 모시고 나서야 비로소,

"너도 이제 술을 고만두어라."

하며, 눈을 감기 직전 할머니가,

"종수두 자기 애빌 닮아서 술 잘 먹지?"

하였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종수는 서러움과 뉘우침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 삼촌과 거기 따라온 사람들을 피하여 밖으로 나와 한참 엎드려 울고 나서 할머니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과 함께 관로(棺爐) 속에 넣으려고 남몰래 오른손에 쥐었던 안약을, 인제는 아무 소용없이 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아무 소용이 없었던 안약을 아무 거리낌 없이 풀밭 한복판에 던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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