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아카시아
안석영
영섭이 도시락을 싸들고 이 길을 오간 지가 벌써 몇 해째인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좁은 길가에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다 헐리고 커다란 길이 트이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변화라 할 수 있는 것은 길 가장자리의 콘크리트를 쌓은 언덕 위로 새로운 문화주택들이 들어서고 있는 점이었다. 번식력이 뛰어난 아카시아 나무들이 문화주택의 성곽처럼 숲을 이루게 된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벚꽃이 한껏 꽃망울을 환하게 터트린 뒤 사그라들고 나면 곧 아카시아 향기가 무성해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카시아 가지가지마다 한 아름 하얀 꽃다발을 안고 있는 계절. 아침마다 아카시아 숲길을 지나는 영섭은 그 향기에 온몸이 사로잡힐 듯했다. 영섭은 짧은 꽃길이 아쉽기라도 한 듯 코를 벌름거리까지 하며 꽃향내를 들이마셨다. 이 자연에서 만끽할 수 있는 순수한 향취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았고, 마음껏 마신다 해도 불안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영섭은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언제나 상반된 두 개의 감정을 안고 있었다. 꽃향기에 취해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다가도 자신이 얼마나 밑바닥의 존재인가를 새롭게 깨닫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콘크리트 담 위에 떡 버티고 선 주택들을 휘 둘러보면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있을 때만 해도 매일의 일상처럼 마주치던 핏기 없는 얼굴들과 초라한 차림의 이웃들은 그래도 영섭 자신의 초라함까지를 덮어 주는 듯했었다.
하지만 이제 문화주택이 들어서고 그 집의 새 주인으로 이사 온 사람들은 그의 초라함을 더욱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를 가장 주눅 들게 하는 것은 문화주택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산뜻하게 단발머리를 한 소녀들과 양복 반바지 차림의 사내아이들이 나란히 학교로 향하는 모습을 볼 때,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영섭은 이들의 풍경이 자기와는 아주 동떨어진 세대처럼 느껴졌고, 그럴 때마다 정겹기만 하던 아카시아 그늘도, 꽃향기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런 순간, 어느 집에선가 개 짖는 소리라도 터져 나오면, 그는 그것이 마치 자기에게라도 짖어대는 것인 양 깜짝 놀라 마음이 줄달음치려 하였다.
영섭은 요즘 자기 스스로가 생각해도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데 이어 아내마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나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경이 변화된 까닭이었다. 그는 늘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옆을 따라 걷는 듯한 아내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귀밑에 속삭이던 아내의 가냘픈 목소리도 듣는다.
그때도 이맘때였으리라. 아카시아 꽃망울은 빗줄기에 촉촉히 젖어들고 있었다. 아내와 우산 아래에서 장래에 대한 화려한 꿈을 설계하며 걷던 옛일이 떠올랐다. 왜 부질없이 지난 일에만 붙잡혀 있는 건가 하고 자신의 약한 마음을 나무래 보지만 이 땅에 여전히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있음에 가슴속에 새겨진 추억의 계절은 영원히 지워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섭이 살아서 이 땅의 흙을 밟고 푸른 하늘을 우러를 동안은 일생에 단 한번뿐인 그 추억도 영원하리라.
영섭은 지난 추억에 대해서 지나치게 고통을 느끼는 자신이 병적이란 생각이 들었고, 아내에게는 죄스러웠다.
그는 나날이 수척해져만 가는 얼굴을 볼 때나, 걸음을 옮길 때 다리의 피가 마르는 듯한 느낌에 닿을 때, 자신이 어떤 깊은 병에라도 사로잡혀 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그를 아는 친구들은 요즘 그를 보면 깜짝 놀라며 몹시 걱정을 해 주곤 한다. 돈이 여의치 않아 이제나저제나 병원에 가보는 것을 미루는 동안, 그는 스스로에게 결핵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폐병! 그는 두렵기보다는 자신이 애처로워졌다. 자신의 골격으로 보나 딱 벌어진 가슴을 보면 폐병 같은 것과는 무관하리라 싶었지만, 아내를 생각하면 신경은 자꾸만 예민해져 갔다.
아내가 산후에 세상을 떠난 것은 심장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지만, 아내는 평소 자신의 폐에 대해서 무척 염려를 하면서 살았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녀의 불그레한 두 뺨, 굽은 듯한 가슴, 가냘픈 몸매는 폐가 약한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했다.
영섭은 불안감을 느낄수록 아내에게 혐의를 두었다. 만약 아내가 폐병으로 죽었다면 자신에게도 전염될 가능성이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다가 그는 공연한 신경과민이라며 도리질을 쳤다. 내 몸이 이렇듯 고단한 것은 업무에 찌들고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기를 펴고 사는 날에는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토록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파먹는 듯한 옛 추억이 자신의 의식이 없어지기 전에는 지워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영섭은 조금 전 자신의 기대가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영섭은 회사에 출근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머릿속이 어지럽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출근시간을 어겨 본 적은 없다. 이것은 윗사람에게 건실하게 보이려고 한데서 나온 버릇이 아니요, 자기가 마땅히 지킬 것은 지킨다는 것, 특히 요즈음 같은 때에 정신을 한 곳으로 통일하여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이 출근시간부터 지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장이 늘 말하는 시간 엄수에 대한 장황설과는 달랐다. 과장은, 생산능률에 있어서 시간을 잘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이 큰 관계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영섭은 순전히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 엄수가 정신 통일에 도움을 주리라 생각하면서도 이것이 도리어 자기를 신경질적으로, 더 나아가서 신경쇠약에까지 이르게 하는, 자기모순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간혹 깨닫고 영섭 스스로 자기를 향해 비웃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이유를 영섭에게 솔직히 고백하라 한다면 그것은 늘 자기의 폐를 의식하는 까닭에 아침 공기, 그 상큼한 아침 공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영섭이 모자를 걸고 자리에 앉자 급사 아이가 차를 따라 놓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영섭을 흘끔 올려다보면서
"오늘은 어째 안색이 더 좋지 않으신데,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으세요?"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이 급사 아이는 아마 이 회사 안에서 영섭을 위하여 마음을 쓰는 단 한 사람일 것이다. 비가 오면 묻지도 않고 영섭의 집에서 우산을 갖다주고, 담배 심부름으로 마코를 사 오라고 구멍 뚫린 오 전짜리 한 푼을 주면 제 돈을 보태어 십 전짜리 피죤을 사다가 슬쩍 놓고 자리를 비키는 때도 있다. 이런 때면 영섭은 그 아이를 불러
"자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면, 그 아이는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웃으며
"아녜요."
하고 달아난다. 영섭은 또 이것이 미안해서 하루를 무거운 마음으로 지낸다. 급사 아이에게까지 동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는가 싶으면 그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것은 꼭 그 아이로 인해서가 아니라 이렇듯 자신이 이 세상에서 큰 모욕을 당하고 사는 듯해서였다. 이렇게 옹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자신의 본디 타고난 성격 탓도 있지만 가난으로 하여 생긴 자존심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오늘은 들어오자마자 그 아이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것으로 미루어, 심상치 않은 둘 사이이기에 그 아이가 바로 본 것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섬뜩하였다.
"정말 그래보이나?"
영섭의 음성은 공허하게 들렸다.
"아니에요, 그저 좀 안색이 안 되어 보이셔서요."
하고 급사 아이는 싱긋 웃고 가 버렸다.
이때에 과장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얼굴 생김은 크나 그 눈이라든가 귀의 생김, 콧날의 모양은 언뜻 보아도 신경질적으로 생긴 사나이이다. 안경을 써서 얼굴이 나이보다 아래로 보이고 눈이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친근하게 굴 때면 그 눈이 가물거리는 것과 제비 꼬리같이 가느스름한 수염 밑에 약간 두터운 듯한 입술을 가볍게 놀리는, 그러한 그의 눈과 입이 그의 출세에 큰 역할을 한 것이리라. 윗사람에겐 점잖으면서 공손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겸손하면서도 잔소리가 많고, 비록 부드러운 말투지만 바늘 같은 경구로 슬그머니 상대방을 누르는 것으로써 그는 이 회사에서 정평이 나 있다.
영섭은 차를 마시다 말고 일어섰다. 술이 아직도 깨이지 않은 탓인지 불에 데인 것처럼 벌건 과장의 얼굴을 힐끗 보며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였다. 과장은 영섭을 옆으로 힐끗 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김영섭 씨, 요새 어디가 불편해요? 젊은 사람이 수염이 길어서 그런지 퍽 어두워 보이는군."
하며 그는 신문을 펴들고 본다.
"네,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수염을 못 깎았습니다."
영섭은 말을 마치고 슬그머니 자리에 가 앉았다. 과장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영섭을 힐끗 돌아보고는 싱긋 웃으며 신문을 다시 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초인종을 친다. 급사 아이가 달려왔다. 그 아이가 과장 옆에 와 섰건만,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그는 건성으로
"인환아!"
하고 불렀다. 인환은 급사 아이의 이름이다. 인환이는 과장 옆으로 다가섰다.
"네, 부르셨어요?"
과장은 그제서야 인환을 쳐다보았다.
"냉수 한 그릇 가져오너라."
인환이 냉수를 떠오자 그는 단숨에 들이키고는 혀끝으로 수염을 훔쳤다. 이때 중역실의 급사아이가 왔다.
"전무님께서 좀 오시래요."
과장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중역실로 들어갔다. 영섭은 급사아이에게도 들은 이야기지만, 과장에게서도 그런 소리를 듣고 나니 맥이 풀려서 일이 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얼마 뒤에 과장이 돌아왔다. 그는 다시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접어서 테이블 옆에 밀어 놓고는 깔쭉깔쭉한 턱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무슨 생각을 골몰히 하더니 영섭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가 권할 것은 못 되지만 술을 좀 마셔 보지 그러나. 술을 마시던 사람이 별안간 술을 끊게 되면 그것도 병이 된다니까."
앞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웃음을 참는 것인지 고개를 숙인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마는 술을 마시면 이젠 머리가 몹시 아파서요."
"그야 누구나 술 마신 그 이튿날은 매일반이지. 그렇다고 술 안 마시는 이들은 너무 졸해 보여서 무슨 일을 같이하기가 좀 뭣하더구먼."
"그건 그렇기도 해요."
영섭이 선뜻 그의 말에 동의한 것은 자신이 제일 맘에 꺼리는 그 화제가 너무 길게 가는 것이 싫어서 피할 생각에서였다. 그런 한편으로 작년 어느 때인가 영섭이 술이 과해서 결근을 했을 때에
"젊은이가 술을 그렇게 함부로 마셔서야 되겠나?"
하던 그때의 말과, 술을 마시라고 권유하는 지금의 말이 다르니 우습기도 하였다. 만일 그의 말대로 앞으로 술을 계속하다가 혹 결근이라도 한번 하면 옛말이 또 되풀이될 것이었다. 어쨌든 과장이 자신을 위하여 걱정해주는 것만은 감사하였다. 저렇게 교활한 사람에게도 따뜻한 정은 있었나보다 싶었다.
오후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도 급사아이의 말과 과장의 말이 귀에 쟁쟁하여 일도 안 되고 마음이 산란하였다. 과연 내가 병이 든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 온몸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시계가 오후 네 시를 쳤다.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영섭의 책상 옆으로 다가왔다.
"이따 나 좀 보고 가시오."
하고서 은근한 눈치로 영섭을 보고는 팔을 걷으며 밖으로 나간다. 세면장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얼마 후 과장은 이마 위의 머리털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왔다.
"아차, 이발을 할 건데 괜히 세수를 했군."
과장은 혼자 중얼댄 말이나, 영섭의 앞에 서서 하는 말이니 그대로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영섭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영섭이 이렇듯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예민한 것도 병이라면 병이었다.
"자, 나하고 같이 나가 봅시다."
과장은 모자를 내려서 쓰고 양복저고리 깃을 바로 고친 다음 단장을 팔에 걸었다. 영섭은 과장이 갑자기 웬일일까, 하면서도 모자를 쓰고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회사를 나서서 전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영섭은 요사이 번잡한 데를 피해 다녔던 터였으므로 너무 번잡한 데면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물었다.
"우선 이발을 좀 같이 하지. 나는 어쩐지 경성역 구내 이발소가 정이 들어서. 어쨌든 거기에서 이발하고 그곳에 식당도 있고 하니 목부터 축이면서 어디 좋은 데를 생각해 봅시다."
영섭은 오늘 과장의 말마따나 그동안 끊었던 술을 마시면 심기가 어떨까 하였던 터였다. 과장이 자기에게 호의를 베푸는 듯하였으므로 아무튼 오늘은 그가 하라는 대로 해 보기로 하였다.
"젊은이가 그게 뭐요? 그 깨끗한 얼굴을 그 모양으로 만들다니! 우리같이 나이 먹은 사람도 하루라도 수염을 밀지 않으면 온종일 맘이 찌뿌드한데!"
경성역 구내 층계를 오를 때까지 과장은 계속 잔소리였다. 영섭은 얼굴이 벌개졌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일깨워 주는 것이 불쾌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였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석 달에 한 번쯤 깎는 머리, 수염도 덥수룩해져서야 면도를 하곤 하는데 그 칼이라는 것도 오랫동안 갈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가죽 혁대에다 썩썩 문질러서 쓰기 때문에 이가 빠지고 날이 무딜 대로 무디어져서 수염을 깎으려다가 제 살을 베기 일쑤였다. 어느 때 정말 보기 흉하면 가위로 추스르기만 하는 것도 요사이는 만사에 의욕을 잃어 그런지 그나마 다 잊어버린 지 오래다. 또 면도칼을 문지르던 혁대도 그 칼에 허리를 잘려 지금은 헌 넥타이로 양복 허리띠를 하니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한참을 쩔쩔매면서, 그 허리띠를 풀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아무래도 혁대를 사야 할 텐데’ 하면서도, 돈이 생길 때면 잊어버리고 해서 이제는 그 넥타이 허리띠로 낡을대로 낡아, 어느 때는 이것이 옹매졌기 때문에 끄를려면 눈물이 나오도록 쩔쩔매는 때가 있다. 지금 영섭이 그것을 떠올려 보니 스스로도 우스워져서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왜 그러나?"
과장은 자기 말끝에 영섭이가 웃은 줄 알고 좀 불쾌해진 모양이다.
"아닙니다. 기침이 좀 나와서요."
영섭은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어째 몸이 그렇게 약하담. 약을 좀 먹어야겠구먼."
과장의 말이 끝날 즈음, 두 사람은 이발소 문 앞에 다다랐다. 마침 이발소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회전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은 옆 거울 뒷거울에 비친 여러 개의 자기 모습을 보고 자신을 입체적으로 관찰하는 행운을 얻은 듯이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 하였다.
과장의 뒤통수는 반들반들하게 머리가 빠져 있었다. 영섭은 그것을 보고 당신도 이미 허물어져 가는 인생이구려, 하고 마음속으로 뇌었다. 그만큼 인생을 살았으면 그렇게 조바심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 법도 한데, 과장은 여전히 삶에 급급해한다. 그로 해서 그의 밑에 있는 미래가 긴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전전하는지 그는 알기나 할까. 그가 생활을 위해 직장에 목을 걸고 있는 거라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다함께 흙 속에 묻혀 썩어갈 몸이건만……, 과장은 왜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걸까. 영섭은 그가 좀 더 너그러워지길 바라며 마음의 소리를 과장의 영혼에게 보냈다.
영섭은 스스로의 생각에 도취되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러는 나는 저 과장보다 앞선 사람일까 돌이켜보았다. 과장도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앞선 점도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아름다운 공헌을 한 것이 있던가 생각하니 자기도 그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인간같이 느껴졌다. ‘아하’그의 마음의 비명이 숨결을 몰아서 탄식이 되었다.
이발사는 영섭의 그 기다란 머리털을 무자비하게 깎기 시작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이발사는 털이면 깎을 줄만 알았지 그 사람의 얼굴 생김새라든가 그 머리 생김을 보아가며 깎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고머리면 누구나 일본 상인 머리같이, 갈라붙이는 머리면 꼭 똑같은 자리를 가르곤 하였다. 이발소에 붙여 놓은 이발 견본화를 일종의 법전같이 믿는 자들이 이발사이다. 영섭이 이발을 잘 안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에도 있었다.
과장은 깎지 않아도 좋을 머리를 깎고 있는 듯했다. 으레 그만한 나이의 사람들이 하는 짓이지만 이발 기계로 바짝 밀고서 위만 가지런하게 남겨서는 갈라붙인다. 그것은 희게 센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묘방인지도 모른다.
영섭의 머리가 다 깎여지고 면도가 시작되었다. 더운 수건으로 입과 턱을 찜질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잠시 후 이발사는 수건을 치우고 커다란 칼로 텁수룩한 수염을 밀기 시작하였다. 면도가 끝난 뒤 머리를 감기고 얼굴에 화장수를 발라 주는 등 안마까지 받고 나서야 영섭은 이발사에게 빼앗겼던 자유를 되찾았다. 거울 앞에 선 영섭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기분이 저으기 상쾌해졌다.
"어떻소, 정신이 나지? 나도 기분이 아주 상쾌한데."
과장이 이발료를 치르며 말하였다.
"네, 한결 마음이 상쾌하군요."
"그럴 거요."
과장이 앞장을 서고 영섭은 그 뒤를 따라서 어느 술집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식당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김 군은 아마 삐루쯤은 한 박스 이상은 할 걸? 나도 삐루를 좋아하지만 요즘은 삐루를 많이 마시면 신경통이 생겨서……."
"저야 얼마 마시겠습니까? 마시는 데도 풋술이지요. 그런데 독일 같은 데는 삐루를 차 대신 마시기 때문에 알콜이 적게 들어서 그런지 취하지 않는다는데 여기 것은 알콜이 많다더군요. 삐루가 속에 들어가면 더운 것하고 찬 것하고 잘 안 맞아서 그럴까요? 제 생각엔 아마 그래서 신경통 같은 게 생기는 것 같은데."
"글쎄, 어쨌든 시원한 맛에 마시니까. 사실은 술이라는 게 그리 좋은 것은 아니래도 만약 이 술이 없었더라면 인생의 절반은 무의미했을지 모르지. 나도 사실 건강을 생각해서는 먹지 말자 하지만, 고민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것을 잠시라도 잊으려면 이것이 있어야 하거든. 김 군도 아이를 낳고…… 참, 김 군에게 아이가 하나 있다구 했지? 그래, 아이나 많이 낳고 집안 살림이 점점 커져가고 하면 남모르는 고민도 그만큼 늘지. 몇 십 명 식솔이 나만 쳐다보고 있다 보니 혹 내가 술에 너무 취해서 들어가면 집안사람들이 나를 위해 걱정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 술로 패가망신하고 나면 저들의 밥줄이 끊어질 것을 생각해서들 그러는지 알게 뭔가. 불쌍한 것들이지. 나 한 사람에게 생활은 물론 운명까지도 내맡기고 있으니 딱하기도 하지만 가엾단 말이야…… 자, 어서 들지."
과장은 영섭의 잔에 삐루병을 기울인다.
"참 어려우시겠습니다. 과도기에 있어서는 모두가 희생이죠. 얼마 동안은 하는 수 없지요. 자, 드십시오. 저만 마시는 것 같습니다."
영섭이 과장의 잔에 술을 따랐다.
"어두워져야 아무 데라도 갈 것이니까 여기서 조금 더 마시고 이야기나 하지! 그런데 월급생활로 그래도 집칸이나 장만하고, 비록 손바닥만 한 것이지만 전답도 있고 한 이는 나뿐인 것 같은데. 사실 월급 가지고 그만한 식구를 거느릴 수 있겠나? 자네도 지금부터 그런데 유의를 하지 않으면 그저 월급쟁이로 밤낮 그 턱일 테니……. 그런 일로 어떤 때는 자네뿐 아니라 우리 과에 있는 이들 걱정에 내가 밤잠을 못자며 근심하는 때도 있다네. 누가 들으면 거짓말 같다고 웃을 이도 있을지 모르나 남의 윗사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그 자리에 앉아 보면 누구나 될 것 같지만 첫째는 포용력이 있어야 하고, 또 우두머리 될 만한 배짱이 있어야 되지 않겠소? 남의 일은 다 쉬워 보이기도 하겠지만, 김 군, 나를 믿으시오. 피차에 믿읍시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나는 어디고 다른 자리에 옮겨갈 것 같아 하는 말이네만 만약 후임자를 생각한다면 중역들이 다른 데서 데려오기 전에 내가 보기에는 김 군밖에 적임자가 없다고 보네. 혹 중역들이 자기 사람을 쓰려고 우긴다 하더라도 내 자리에 둘 사람이면 내게도 의향을 물어보고 결정할 것이니, 그렇다면 일이나 그곳 공기를 모르는 사람보다는 김 군이 나을 것 아니겠소? 김 군이 내 팔이 되어 애써 주어야겠소. 별사람이 있겠소? 누구나 자기 일만 잘 알면 되지. 자, 한 잔 더 드시지."
과장은 의기양양해져서 술을 따르며 영섭을 보고 벙글벙글 웃는다. 영섭 자신도 과장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과장이 그 동안 자기를 볶아대기는 하였으나 속마음으로는 자기를 버리지 않은 것 같아서 고마웠다. 두 사람은 어지간히 술기운이 돌았다.
"자, 이제 그만 나가볼까?"
과장은 손수건으로 수염에 묻은 삐루 거품을 훔치고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그러시죠. 저는 오랜만에 마셨더니 어찔합니다."
영섭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아서 눈을 감았다 떴다. 온몸에 술기운이 퍼져서 그런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으나 과장이 서두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일어섰다.
"그럭저럭 일곱 시가 되었군. 술 마실 때는 이야기를 두어 마디만 해도 이렇게 시간이 가는구려!"
과장은 카운터에 가서 돈을 치뤘다. 두 사람은 역 구내를 빠져나왔다. 해가 긴 까닭에 저무는 햇살이 아직도 동편 빌딩들을 눈이 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요리 집을 갔으면 좋겠으나 무슨 흥미가 있어야지, 기생 시간 대주러 가는 셈이니까. 또 요새 기생들은 얼굴만 반반하면 일류라니까 김 군도 아마 그런 데는 비위가 맞지 않을게요. 젊은이에게는 그래도 모던한 게 좋을 테지? 어디 산뜻한 데를 구경해 봅시다. 가만, 카페 같은 데는 우리가 갈 데가 못 되고, 어디 젊은이 덕에 나도 젊은 기분 좀 내봅시다그려. 빠 ― 가 좋지. 가만있자, 옳지. 저번에 어느 시골 친구가 오는 바람에 한번 가본 데가 있는데, 그곳이 조용하고 마담도 소위 인테리라는 것이 김 군이 퍽 좋아할 것 같군. 자, 가지."
과장이 앞서서 전차 정류장을 향하여 갔다. 영섭은 과장이 자기의 의향을 물어보는 것 같으면서도 영섭의 의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혼자 자문자답하며 결정하는 폼이 우스웠다. 젊은이 덕에 젊은 기분을 내보겠다는 것이 가벼운 말이지만 재치 있는 말도 같았다. 그리고 나이 먹은 이들의 비애가 풍기는 것 같아 씁쓸했다.
이들은 전차에서 내려 본정통으로 들어섰다. 상점들이 늘어선 곳을 못 미쳐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서 붉은 등에 ‘빠 ― 출입구’라고 쓴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집 마담이 조선 여자인데 아주 세련되었어, 영어까지도 곧잘 알더구먼. 그런데 나는 나이가 먹어 이런 곳에 오기가 체신이 없어 보여 그러니 김 군이 앞서 들어가게나."
과장이 영섭의 등을 슬그머니 떠들었다.
"저도 이런 곳이 처음이라서 좀 서먹서먹한데요."
"허허, 무슨 소리. 젊은이가 이런 데서도 용기가 없다면 말이 되겠나."
영섭은 속으로 이런 것에 무슨 용기가 필요한가 싶었지만 어쨌든 들어가 보기로 하고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밖은 아직도 해가 있는데 빠 ― 안은 이미 밤이었다. 푸르스름한 전등 불빛이 어디서 비추는 것인지,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사람을 끌어들이는, 더구나 술기운 있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그 무엇이 그 안에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아까 과장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하던 그 마담은 없었다.
"얘, 마담 어디 갔니?"
과장이 카운터에서 접시를 훔치는 아이에게 소리쳤다.
"네, 목욕 갔어요."
그 아이도 조선 아이였다.
"간 지 오래 되었니?"
"네, 한참 되었어요. 곧 오실 거예요."
과장은 저으기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우선 차라도 가져오너라. 무엇을 드시겠소? 아이스커피나 한 잔씩 할까? 얘, 아이스커피 두 잔만 가져와."
과장은 영섭의 의사를 존중하는 듯하면서도 이렇듯 모든 게 독단이었다.
‘나는 이런 조그만 일에도 남의 의사를 존중하는 사람이오’ 하는 듯이 그 눈치만 살짝 보이고는, 물론 너는 내 말에 복종할 테지, 하는 식으로 해치우는 그 버릇이 이 빠 ― 에서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얘, 그 레코드나 좀 틀려무나, 심심하구나. 김 군도 음악을 좋아하시겠지? 우리는 베토벤이니 모차르트니 슈베르트니 하는 악성의 이름은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그들의 음악을 조선 가곡이 귀에 젖은 사람들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사실 너무 고상해. 재즈나 한 곡조 틀어라."
과장의 그 떠드는 모양으로 보아 그는 꽤 흥겨운 모양이다. 아이가 레코드를 틀고는 아이스커피를 가져왔다.
이때에 문이 열리며, 금방 도가니 물에서 빼낸 유리 항아리 같은 마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목욕 기구를 넣었을 듯한 고무주머니가 들려 있다.
"안녕하세요."
하고 마담은 환호하면서 과장 앞으로 뛰어오다가 낯 설은 영섭을 보고는 주춤했다. 그 여자는 영섭을 옆 눈으로 슬쩍 보고는 과장 옆에 와 앉았다.
"그동안 왜 통 안 오셨어요? 다른 데 좋은 일이 있었던가 보군요?"
마담은 과장과 꽤 친분이 두터운 듯 보였다. 만약 낯 설은 영섭만 없었으면 과장에게 응석이라도 부릴 것 같이 둘 사이가 허물이 없으면서도 은근해 보였다.
"천만에. 바쁜 몸이, 게다가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이런 데를 자주 다니면 되나? 어쩌다가 기분도 낼 겸 스트레스도 풀 겸 다니는 게지. 참, 내 좋은 친구를 한 분 소개하지. 이분은 우리 회사에 같이 계신 분인데, 김 군, 자, 이 마담은 샬리라는 이 빠의 마담인데 인사하시지."
과장은 샬리라는 여자와 말을 더 주고받으면 영섭이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일 것 같아서 그랬는지 슬쩍 영섭과 인사를 시키면서 그 거북한 대화의 끈을 흐트려 버렸던 것이다. 과장은 말을 마치고는 너털웃음을 웃어 보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샬리에요. 많이 사랑해 주세요."
샬리는 금세 수줍은 표정으로 두 뺨이 붉게 타며 고개를 숙여 영섭에게 인사했다.
"네, 그러세요? 저는 김영섭이라 합니다. 퍽 좋으신 이름이시군요. 샬리템플과 친척지간은 아니십니까?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좋은 이름이십니다."
움츠렸던 영섭의 마음도 오랜만에 여자를 대하니 풀리는 듯했다. 그는 샬리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죽은 자기 아내와 마주 앉아 그 아내의 이름을 가지고 논란하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그 아내의 이름은 천주교에서 세례명으로 받은 마리아였다. 그래서
"나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아도 그건 내 아들이 아니겠군요. 하느님의 아들이지?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낳았다 했으니까 말이오"
하고서 두 사람이 웃던 생각이 났다.
"호호호……. 김 상은 처음 뵙지만 말씀을 퍽 잘하시는 게 재미있으신 분일 것 같아요."
샬리가 흥겨워진 모양이었다.
"이제 알았지만 김 군도 농담을 잘하는군. 그런데 샬리는 김 상을 처음 보자마자 반한 모양인가? 어쨌든 좋구먼, 젊은 사람들의 정열을 막을 수가 있나. 두 분이 앞으로 잘 친해보시지. 두 분이 다 외로운 모양이니까."
"그러면 김 상은 아직 결혼을 안 하셨어요? 저런, 그럼 너무 늦으셨군요. 아니지 서양 사람들을 보고 말하자면 지금이 제일 좋으신 때이군요."
샬리는 흑진주 같은 눈자를 반짝 빛내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민감하기도 하지, 외로운 몸이라는 것만 듣고도 결혼을 안 했다는 의미로 생각을 하다니. 어쨌든 두 분이 친해보시오. 그렇다고 속되게 사귀면 안 되고 피차에 인격적으로 사귀는 것이 좋아요. 자, 심심하구먼. 술 좀 가져오지. 김 군, 삐루로 할까? 삐루를 마신 끝이라 다른 술을 섞어 마시면 위를 버릴 테니, 그래, 삐루를 가져와. 안주는 야채 사라다가 좋겠군!"
과장이 담배를 물자 샬리가 성냥을 그어 대었다. 과장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담배 갑에서 다시 한 개피를 꺼내어 제 입으로 피어서는 영섭에게 건네주며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깐 실례하겠어요."
샬리는 일어서서 두 사람에게 예를 하고 나서 다시 영섭에게 생긋 웃어보이고는 카운터 뒤로 갔다.
"여자는 저만하면 괜찮지 않소? 그래도 미인축에 들걸?"
과장은 담배 들은 손의 새끼손가락으로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좋군요."
"김 군 눈에도 그렇게 보일 줄 알았어. 내 눈이 아직 무디진 않군!"
두 사람은 시원스레 웃었다. 아이가 삐루를 가져오자 한 잔씩 따라 놓고 바라만 보았다. 십 분쯤이나 지난 뒤에 샬리가 화장을 하고 나왔다. 목욕을 갓 한 얼굴에 새로 한 화장이 잘 먹어서 함박꽃같이 고왔다. 두 팔과 가슴과 등덜미를 드러낸 양복 사이로 보이는 윤택한 살결이 무척이나 고혹적이었다. 윤기 흐르는 단발의 까만 머리가 백옥같은 이마에서 나풀거렸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웃으며 그녀가 이편으로 올 때에 과장은 정신을 잃고 바라보았다. 샬리가 그들 가까이 오자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조금은 고급스러운 향기가 영섭의 후각을 자극하였다. 그 향기는 영섭이 집에서 회사로 가는 길에서 맡던 아카시아 향기 같았다. 영섭은 그 길에서 늘 하던 버릇처럼, 이 여자의 고운 육체에서 풍기는 향취를 숨소리 없이 들이마셔 보았다.
"자, 드세요."
샬리가 과장과 영섭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영섭을 슬쩍 보며 권한다. 영섭은 샬리의 눈을 보면서 무엇인가 자기를 얽어매려는 듯한 야릇한 매력을 느꼈다. 영섭은 술을 반쯤 비우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처음 뵙는데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김 상(선생)은 예술가 같으세요?"
샬리는 굳게 다문 영섭의 입에서 어떻게든 말을 터뜨리게 하려는 수작이다. 영섭은 쓸쓸히 웃었다.
"요새 젊은이들은 모두 예술가 같다는 표현을 잘 쓰는데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대체 샬리는 김 상의 무엇을 보고 하는 말이지?"
과장은 이렇게 샬리의 말을 거들면서도, 내심 샬리와 영섭이 만나자마자 벌써 그들의 눈이 속삭이는 것 같아서 좀 서운해하는 눈치다.
"왜요, 김 상의 눈만 보셔도 그렇지 않아요? 얼굴 전체가 예술가가 안 되면 안 될 것같이 생기지 않으셨어요?"
샬리가 이렇게 말하고는 영섭을 보며 실눈을 해 가지고 웃었다.
"예술가가 안 되면 안 될 얼굴이 따로 있나? 그건 난생처음 듣는 말인데, 어쩌면 첫눈에 그렇게 홀딱 반한담. 바른대로 말을 해."
이렇게 다그치며 과장이 웃자 두 사람도 따라서 웃었다.
조금 있다가 과장이 전화를 하러 카운터로 가자 샬리가 영섭의 옆으로 와 앉았다.
"김 선생, 자주 오세요. 오실 때 제가 있는지 전화로 물어보시고 오세요. 내일 오시겠어요?"
그제야 샬리는 비로소 조선말을 내놓았다. 영섭은 샬리의 탄력 있는 팔이 자기의 팔을 휘감고 손까지 잡자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가 왜 이리 서두나 하면서도, 인생의 살 만한 의미가 여기에도 있는 것 같았다.
"내일은 틈이 없는데요. 어쨌든 올 때엔, 전화를 하고 오지요."
"그러세요. 그럼 곧 한번 오세요. 오실 때 혼자 오셔야 해요."
"네, 혼자 오지요."
영섭은 자기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용기 있게 대답을 못 하였다.
샬리는 영섭의 어깨에 그 곱살스런 손을 얹고는 영섭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너무 바짝 보았기 때문에 그녀의 입술은 영섭의 눈 아래서 붉게 움직이며 하얀 이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의 긴 속눈썹 깊숙히 무엇인가 애소하는 듯한 눈동자가 서글서글하게 빛나며 자기의 얼굴 위로 향하고 있었다. 영섭도 웃었다. 그가 웃자 샬리는 금세 고개를 떨구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영섭의 손을 꼭 쥐어주고는 일어서서 자기 자리로 갔다. 이때 과장이 돌아왔다.
"그래, 그동안 재미있는 이야기 좀 나누었나? 군자는 그런 때에 피해 주는 게 예의지. 김 군, 이제 그동안 오래 묵었던 우울증은 좀 풀렸는가? 어느 회사를 다 둘러놓고 보아도 나 같은 과장은 아마 없을 걸세. 부하를 생각하다 나중에는 애인까지 구해 주는 일까지 하니 말일세."
세 사람은 또 웃었다. 이래저래 이들은 취하였다. 영섭과 과장은 밤 열한 시나 되어서야 그곳을 나오게 되었다. 나올 때, 문간에서 샬리는 영섭의 손을 또다시 꼭 쥐어주었다. 그리고 자기의 꽃수건을 영섭의 양복 윗주머니에 반쯤 걸치게 끼워 주었다. 과장은 취해서 이것을 보지 못하였다. 영섭은 얼른 그녀의 손을 쥐어주고 나왔다. 샬리는 이들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문간에 서 있었다.
과장과 영섭은 종로 네거리에서 헤어졌다. 영섭이 조금 걸어오다가 돌아보니 과장은 인력거를 타려고 하고 있었다. 영섭은 오늘 일이 꼭 꿈만 같았다. 과장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돌변한 것, 또는 아무리 그런 곳에서 노는 여자라 하더라도 샬리가 자신에게 애틋한 시선을 주던 일. 여태껏 그가 살아오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이런 모든 일들이 오늘 밤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샬리는 누구에게나 친절히 굴어야 할 처지이나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사랑까지 분배할 것 같은 여자는 아닌 듯 보였다. 혹시 약한 마음 때문에, 혹은 누구의 힘에 의해서 자기의 육체가 더럽혀졌을지라도 자기의 진정한 사랑을 두 번 이상 바칠 수는 없을 것이다. 첫사랑은 경험했으리라. 그러나 그 첫사랑에 실패를 하였다면 다음으로는 거기에 대한 복수라든가 고독 때문에 맺어지는 사랑일 것이다.
영섭은 종로 야시장으로 들어섰다. 야시가 한창이었다. 물건 파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중에는 시골 사람을 붙들고, 물건을 만져만 보고 사지 않는다고 떼를 쓰고 싸우는 사람도 있었다.
술이 취한 영섭은 한참 동안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시골 사람이 달려들어 장사꾼의 뺨을 때렸다. 뺨을 맞은 장사꾼과 시골 사람이 붙어서 싸우기 시작했다. 물건들은 이 두 사람의 발길에 흐트러지고 짓밟혔다. 순사가 왔다. 순사가 오자 싸움은 제지되었다. 사람들이 다 헤어진 뒤 그 장사꾼은 주저앉아 물건을 거두며 울었다. 영섭의 머리는 다시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는 픽 웃고는 활개를 치며 걷기 시작했다.
영섭은 지금 아카시아 길을 간다. 고요한 밤바람이 살랑이는 이 길은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 찼다. 영섭은 언뜻 그 샬리라는 여자의 얼굴 어느 구석인가가 자기의 아내와 닮은 곳이 있는 듯함을 깨달았다. 그 눈이, 그 입이, 그 음성이 묘하게도 비슷했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기의 아내와 닮은 데가 많은지도 모른다. 다만 아내보다 나이가 약간 적은 듯할 뿐이다.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언뜻 그는 아내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아내와 아내의 여동생 두 자매는 외가에서 길러졌다. 그러나 외가가 파산을 하게 되자 그 가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영섭의 아내는 어느 서양 여선교사 집에 있게 되고, 그 동생은 동경으로 가는 외숙을 따라갔다. 그 뒤에 외숙이 그 곳에서 죽자 그 동생의 소식은 지금까지 묘연했던 것이다. 혹 그 여자가 아닐까? 영섭에게는 어떤 영감이 스쳐 가는 듯했다. 자기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 동생과는 닮은 데가 많다고 하였었다. 영섭은 지금 곧 다시 돌아가서 그 진위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가 술이 취하여 환각에 사로잡힌 거라고 생각했다. 요사이 아내를 많이 생각했던 터라 그런 착각도 있을 법했다. 아무리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자매라도 그렇게 닮을 수는 없다. 인류가 아무리 셀 수 없을 만치 많다 해도 다 다른 외모와 골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자기의 착각 아니면 혹 약간 비슷한 데가 있는 것을 보고 그때의 분위기 때문에 언뜻 똑같게 보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혼자 웃었다. 자신이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라 위로하였다. 내가 죽은 아내를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모두가 병이 있는 까닭이다. 신경쇠약증이나 폐병에 가까운 중병일 것이다.
"저는 폐가 약한 것 같아요."
하던 아내의 말이 언뜻 생각이 났다. 그렇다. 내게도 아내에게서 그 병균이 옮아서 그것이 번식하는 것이리라. 그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다면 나의 일생도 그만인 것인가. 그는 불현듯 쓸쓸한 자기의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때 그의 눈앞에 허우적거리며 울고 덤비는 어린 아들이 나타났다. 영섭에게는 귀여운 아들이었다. 그와 아내가 결혼한 지 일 년도 못 되는 사이에 생겨나서 제 어미가 죽던 날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와 아내와의 사랑의 결정체이며 영섭의 모든 소망을 차지하고 있는 아들이었다. 영섭은 그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꾸짖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자기가 그 어린 생명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영섭은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는 지금 그의 어린 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복슬복슬한 아들의 손이 자기의 턱을 어루만지며 코를 쥐고 흔드는 환영이 어리었다. 영섭은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일성아!"
그러자 일성이는 젖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가 고파서 우는 환영으로 나타났다.
"아아! 가엾은 생명아!"
하고 그는 소리를 내어 울며 걸음을 더욱 빨리하였다.
영섭의 아내는 해산을 하자마자 그날로 죽었다. 어린아이는 암죽으로 며칠을 살렸으나 말라 가기만 하여 유모를 대었다. 영섭의 늙은 어머니가 몸이나 성했으면 모르되 중풍병으로 여러 해 고생을 하다가 끝내 반신불수가 되어 버려 거기에 의지할 수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노모가 성한 몸이어서 며느리의 해산을 잘 도왔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요, 또 어린아이도 암죽을 먹이나마 아무 탈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로 시름시름하는데 영섭은 앞길이 캄캄했다. 이곳저곳 수소문해서 유모를 하나 구하니, 밥 짓는 식모 월급 주랴, 유모 월급 주랴, 어머니께 약을 대랴, 넉넉지 못한 월급으로 근근이 꾸려가자니 식모도 툴툴, 유모도 툴툴, 게다가 식모와 유모가 배가 맞아서 반신 불수된 노인을 은근히 괄시하고 똥오줌 심부름도 하기 싫어서 그대로 내버려 두기 때문에 영섭이 퇴근을 하여 돌아와서는 손수 치우기도 하였다.
사실 식모나 유모도 먹고 살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지만 남의 집 늙은이 똥오줌 받아 내는 것을 좋아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 식모는 한 달에도 두 번 세 번 바뀌는 때도 있었으나, 이번에 들어온 유모만은 늘 찡찡 울면서도 제 것을 먹여 기르는 아이에게 정이 들고, 또 어미 없는 자식이라 가엾게 생각해서 그랬는지 제 친자식같이 길렀다.
유모의 젖꼭지가 어린애의 입에 길이 들자 유모는 아이에게 더욱 애착을 갖게 되었고, 아이는 유모의 젖꼭지까지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어느 틈에 삐쩍 말라가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랐으나 간기(肝氣)가 심하여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게 될 때에는 유모도 짜증을 냈다.
유모는 젊었다. 젊고도 어딘지 여자다운 고운 태가 자르르 흘렀다. 이 여자는 신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박을 맞은 여자로 모양새가 퍽 얌전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젊기 때문에 영섭의 신세를 이해했고 동정했으며, 어는 때는 눈물까지도 흘렸다. 얼마 전 식모가 또 나가게 되었다. 유모는 밥을 짓고, 집안을 치우는 일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어린애의 젖 먹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였다. 아이에게 젖을 몰아서 먹인 탓인지 아이가 간기가 부쩍 심해졌다.
어제저녁에는 너무도 그 간기가 심하여 경기를 했다. 영섭이 밤중에 뛰어나가 약을 사 먹인 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오늘 아침에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는 제 아비의 코를 쥐고 흔들기까지 하였다.
유모는 아이가 죽으면 자기의 큰 과실이 될까 봐 애를 태우다가 아이가 회생한 것을 보고는 저으기 안심이 되었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영섭도 마주 보고 웃었다. 유모와 영섭은 처음으로 서로 바라보고 웃게 된 것이다. 유모에게는 그것이 기쁨을 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영섭이 출근한 뒤 아이를 안고 온종일 혼자 즐거워했다.
그런데 오후 네 시쯤부터 아이는 다시 간기를 시작했다. 유모는 혼자서 쩔쩔매며 애를 태웠다. 기름에 파뿌리를 달여서 먹이는 등, 별별 짓을 다 해도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유모는 혼자 엉엉 울고도 싶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어린애만 두고 나갈 수도 없어 동네에 아는 여편네를 불러서 한의사를 불러오라 하였다. 가기가 싫어서 간신히 갔다 온 그 여자는 의사가 없다는 말을 전하였다. 어린아이의 손끝 발끝이 더욱 새파래졌다.
영섭이 자기 집 앞에 다다랐다. 집에서 어린애 소리는 나오지 않고 흑흑 느껴 우는 여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섭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가슴이 덜컹하였다. 그는 어젯밤 일성이가 앓던 모습을 생각하고는 그것이 그 아이의 죽음을 예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스쳐갔다. 오늘 아침 그 아이가 눈을 초롱초롱 뜨고서 자기를 쳐다보며 코를 쥐고 흔들 때 그는 반가운 마음에 웃기는 하면서도 마음은 서글펐다. 어미 없는 자식이 남의 젖을 물고 사는 처지가 가여워서였기도 했지만 그 아이의 눈빛이 흐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마지막 운명하기 전에 간혹 정신이 또렷해지는 일이 있지만 눈만은 죽음의 빛으로 흐린 법이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도 그랬었다. 이 아이가 멀지 않아 가겠구나, 하고 영섭은 속으로 생각하고 마음이 언짢았으나 어린아이의 간기라는 것은 그렇다가도 깨끗이 낫는 수도 있어 안위하고서 회사에 나갔고 또 과장과 술까지 먹은 것이다.
영섭은 대문을 들어설 때 다리가 무거웠다. 죽었으면 어떻게 하나, 그는 일성이마저 없어지면 미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중병이 들지 모른다. 영섭이 마루 끝에 앉는 소리가 나자 유모가 뛰어나왔다.
"큰일 났어요!"
유모가 부르짖었으나 영섭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유모의 울음을 듣고 만사가 이미 결정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이가 암만 해도……."
유모는 흐느끼며 목석같이 서 있는 영섭의 무섭게 뜬 눈을 보고 입술을 떨었다.
"그럼 죽지는 않았나요?"
영섭은 유모의 ‘암만 해도’란 말에 아직 아들의 생명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조금 숨을 돌렸다. 그는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오늘 종일 아이가 간기가 나서 금방이라도 죽을 듯했어요. 아기 혼자 두고 의사를 부르러 갈 수는 없고 그래서 하도 답답하기에 옆집 사람에게 부탁을 했더니 의사가 없더라지요. 그래 기름을 끓여 먹였더니 조금 나은 모양입니다만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유모는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도 새파랗게 죽은 얼굴이다.
"너무 고생을 시켜드려서 미안합니다."
영섭은 유모가 혼자 애가 탔을 광경을 짐작하자 측은해 보였다. 영섭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쌔근쌔근하는 숨소리가 영섭의 가슴을 때리는 것 같았다. 그는 어린애의 앞으로 가 앉았다. 손을 만지니 싸늘했고 머리는 더웠다. 부석부석한 얼굴은 전등불빛에 더욱 창백해 보였다. 눈은 꼭 감겨 있었고 입술은 경련으로 실룩거렸다. 목구멍에서 가래가 끓는지 숨을 쉬는 대로 가르릉 가르릉 소리가 났다.
"똥, 오줌은 어떻게 누었나요?"
영섭은 등 뒤에 서 있는 유모에게 물었다.
"네, 아까 낮에 푸른똥을 누고 한 삼십 분 전에 오줌을 누었는데 아주 노란 오줌이었어요."
"네!"
영섭은 불안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가서 의사를 불러올 테니 잘 좀 보아 주십시오."
영섭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자기의 피붙이라는 생각을 떠나서 세상에 나온 지 몇 달도 안 된 작은 생명을 죽게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섭은 회사와 거래가 있는 정 의사를 찾기로 하였다. 이 의사는 밤에는 별로 왕진을 안 하는 이로, 요리 집에나 그렇지 않으면 첩의 집에서 밤을 보내는 때가 많았다. 혹시 없으면 낭패라고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뛰어갔다.
밤은 이미 깊었다. 큰길에는 자동차나 기생 혹은 술주정꾼이 탄 인력거가 보일 뿐이었다. 정의사의 집 앞에 다다르니 불이 다 꺼져 있었으나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으나 역시 잠잠하였다. 나중에는 문을 잡아 흔들고 소리를 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필연코 자기가 추측한 것과 같이 알고도 모른 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느 요리 집에서 밤을 새든지 소실의 집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버럭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소리를 치고 싶었으나 그대로 돌아섰다.
수중에 돈은 없었으나 어린애나 살려 놓고 보리라 생각하고 발을 떼어 놓았다. 아내가 죽을 때, 보아 주던 의사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아직도 그때의 약값을 치루지 못한데다, 이 밤중에 깨워 일으키기가 미안했지만 이때까지 약값을 조르지 않고 돈이 생기거든 내라고까지 하던 무던해 보이는 의사였다. 기왕 자기를 보아 주던 터이니 한 번 더 보아 달라고 간곡히 말해 보리라 생각하고 김 의사에게로 갔다.
그 집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마침 의사는 무엇을 연구하는 중이었는지 영섭을 선뜻 맞이해 주었다. 의사도 영섭이가 이 밤중에 왔을 때는 필연코 무슨 급한 일이 있으리라고 보았던지 먼저 영섭이 온 일을 친절하게 물었다. 영섭이 이 깊은 밤중에 뛰어온 사유를 밝히자 의사가 먼저 서둘러서 자동차를 부르고 하여 영섭과 같이 탔다.
"내가 누구에게 들으니 당신의 가정 형편이 안 되었더군요. 부인을 잃으시고 애기를 유모에게만 맡기셨다니 그게 될 일입니까? 다시 결혼을 하셔야겠군요. 집 안에 주부되시는 분이 안 계시면 그 모양입니다."
"그래요. 그러나 어디 요새 여자들이 어려운 살림을 하려듭니까?"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영섭은 그 동안 일성이가 죽지나 않았을까, 애가 탔다. 차는 영섭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밖에서 멈추었다. 두 사람이 내리자 의사가 요금을 치렀다. 영섭은 창피했으나 의사의 눈치로 봐서 자기가 요금을 낸다 해도 굳이 말릴 것 같았다. 의사가 영섭의 집으로 들어가서 방문을 열었을 때는 다행히 어린아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유모는 영섭이 의사와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일어섰다.
"어때요?"
영섭이 유모에게 물었다.
"글쎄요, 지금 간신히 눈을 떴는데 팔다리가 점점 새파래져요."
"네! 그게 심상치 않은데요!"
의사가 맞장구를 쳤다. 의사는 어린아이의 맥부터 짚어 보더니 기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청진기를 어린애 가슴에 대어도 보고 입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주사를 줄 터이니 깨끗한 물을 들여오라 하였다. 유모가 물을 들여오자 기구를 소독하고 약을 넣어 가지고 어린아이에게 주사를 주었다. 웬만하면 아파서 울겠지만 일성이는 누운 그대로 숨소리만 높을 뿐이었다.
"사실 이 주사가 마지막 시험입니다. 만약 회생을 하면 기적일 것입니다. 곧잘 생겼는데, 거참 가엾군요."
의사는 손을 씻고는 유모가 내주는 수건에 손을 씻으면서 어린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럼 죽겠군요."
영섭의 얼굴에는 경련이 지나갔다.
"글쎄요, 나는 장담 못 하겠습니다."
"저를 어째요!"
의사의 말에 유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모양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일찍 죽고 늦게 죽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에 대해서 냉정해집니다."
의사가 가방을 다시 챙겨 들면서
"과히 실망은 마시지요."
하고 영섭의 팔을 쥐고 흔들었다.
"네."
영섭은 의사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고서 의사를 따라 밖에까지 나갔다.
"아참, 차를 부르는 걸 잊었으니 이를 어쩌지요?"
이렇게 말하며 밖으로 먼저 뛰어나가려 하는 영섭을 의사가 붙잡았다.
"천만에요. 오늘은 좀 피로하기도 하니 머리를 좀 식힐 겸 슬슬 걸어가겠습니다. 여기서 거기가 얼마나 된다고……. 아까는 하도 급한 일이고해서 타고 왔지만……."
의사가 대문을 나갔다.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네!"
영섭은 의사를 보내고 나서 일성이 걱정에 다시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린아이는 여전히 별 차도가 없는 듯 보였다. 영섭과 유모는 어린 것 앞에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아이의 죽음의 고개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은 꺼져 가는 생명에게 숨을 불어넣을 듯이, 아니면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가져가기를 기다리는 것같이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심장의 고동이 얼마나 거대한 소리인가를 이때 처음 알았다. 그들 조그만 심장의 고동은 놀라우리만치 그들의 고막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조그만 심장이 뛰는 동안에만 인간은 역사를 쌓는다. 만약 인류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한꺼번에 듣는다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거대한 것을 낳기 위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힘찬 소리와 같이 들릴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두 사람은 이 인류 역사의 한계의 새로운 별 같은, 말하자면 빛을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이 아이의 생명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거나 자기들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를 듣는 것인지 모른다.
만약 일성이가 죽음의 고개를 넘지 않고 눈을 번쩍 뜨고 살아난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다. 영섭은, 기적은 신화에서나 전설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혹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일성이를 통해서 깨닫고 싶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기적을 신령의 신비라든가, 신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고 해석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일성이는 주사 한 대, 현대과학의 아주 조그마한 힘에 의해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야만 한다. 물론 그 주사 속에도 신의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면 굳이 우기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때는 그런 믿음이 인간의 일생을 기쁘게 하는 때도 있기에……. 어쨌든 일성이는 그 순간 희미하게나마 눈을 뜨며 깨어났다. 그 조그만 코와 입으로 막혔던 숨을 터놓았다. 그리고는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러더니 ‘뿌디딕’하고서 똥을 누는 소리가 났다. 죽을 때만 똥을 싸는 것이 통념이지만 일성이에게는 이러한 일이 살아난 후에 있었다. 일성이는 처음에는 힘없이 눈을 떴다가 나중에는 커다랗게 떴다. 떠서는 두리번두리번하다가 유모를 보고는 방긋 웃었다.
영섭과 유모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휘’ 내쉬었다. 그들은 무한히 길었던 긴장의 연속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그들에게 있어 이렇듯 기쁜 순간은 난생처음이기나 한 것처럼 그들의 웃는 얼굴에는 땀이 흘렀다. 눈물이 흘렀다.
유모는 일성이의 똥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발을 바둥거렸다. 조그맣게 아로새긴 고추 같고 붓끝 같은 어여쁜 고놈 끝에서 오줌이 쪼르르 나왔다. 기적이다! 영섭은 어린 아들의 부활에서 어떤 커다란 진리를 깨달은 것같이 마음속 깊이 감격하였다. 만약 이 기적을 자기 아내와 같이 보았더라면 얼마나 기뻤을까. 그녀는 분명 이런 때에 영섭에게 매달려 몸부림을 치면서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는 저렇게 무서운 체험을 하고 있는 어린 아들을 집에 내버려 두고, 술을 먹고 분향에 도취되어 있던 것을 생각하고서 실로 어린아이를 바라보기가 부끄러웠다. 이 세상에 자식을 둔 무수한 아비들이라면 이것을 생각해야만 하리라.
이튿날 아침, 일성이는 제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다시 그 아비의 싱겁게 내민 코를 쥐고 흔든다. 유모는 부엌에서 밥을 지으면서 이것을 내다보고 웃었다. 그 착한 의사가 아이를 돌보아 준 덕에 일성이 살아났기에 사실 이 모든 공적은 그 의사에게 돌리는 게 당연하였다. 영섭은 침착하고 어질며 이해가 깊은 그 의사야말로 가엾은 무리들의 벗이요, 이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기적을 그 의사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하여 어린애를 유모에게 맡기고 밖에 나가 그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는 자기 일이나 되는 양 기뻐하더니 조금 있다가 영섭의 집으로 뛰어왔다. 의사도 그 아이를 안고 ‘둥게둥게’를 하며 어르다가 다시 주사 한 대를 더 놓아주었다.
"다 선생님의 힘이올시다."
영섭이 의사의 손을 힘 있게 쥐며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무얼요, 우연이라는 것도 있지요.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 하더라도 어디 믿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써 안 것이지요."
두 사람은 웃었다. 이때에 밖에서 영섭이 다니는 회사의 급사 아이인 인환이가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지?"
영섭은 놀라는 기색으로 물었다.
"전무님께서 이것을 갖다 드리라고 해서요."
급사 아이는 편지를 영섭에게 내주었다. 영섭은 전무가 보낸 편지를 받아들며 가슴이 섬뜩하였다. 불행만 맛본 사람은, 항상 자신에게는 이 세상 모든 일이 불행만 예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듯, 전무의 편지가 마치 영섭에게 어떤 흉보일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한 회사에 있어도 일 년에 한 번이나, 많으면 몇 달에 한 번쯤 마주 앉아 이야기하던 전무가 무슨 큰일이 있기 전에는 자신에게 이렇듯 서신으로까지 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요즈음 회사에서 인원 감축설이 돌고 있어 회사 안 공기가 험악하였던지라 혹 거기에 자기가 끼이지나 않았나 하는 추측이 앞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 편지는 의논할 일이 있으니 지금 곧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다. 영섭은 필시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으리라 지레짐작하고서 급사 아이를 먼저 보냈다. 의사가 돌아가자 영섭은 아침밥도 먹지 않고 회사로 들어갔다.
중역실로 들어가니 전무가 혼자 앉았다가 얼굴에 화기를 띠며 일어서서 영섭을 맞이한다. 전무는 영섭에게 푹신푹신한 의자를 권하고는 자기도 마주 앉았다. 영섭은 전무의 기색이 상상 밖으로 좋아 보여 혹 어제저녁 과장의 말마따나 승진을 시키려는 모양인가보다 하였으나 어느 모로 보든 자기가 지금 과장의 자리에 앉을 만한 배경도 없고 또 본인 스스로도 과장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전무의 입에서 무슨 말이고 나올 터이므로 좌우간 들어보기나 하자 생각하고 전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일찍 들어오시라 한 것은 김영섭 씨에게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는 것도 좋지만 발표하기 전에 먼저 당사자 되는 이에게 알려드리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렇게 실례를 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김 형이 소개하신 도본(圖本)이 다른 전문가들 것보다 낫고 또 새로운 점이 있어서 중역 회의에서는 그것을 쓰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물론 거기에 대한 보수도 있어야 하겠고 해서 전문가들에게 주는 것보다는 김 형이 본사에서 일을 보시고 해서 약소하나마 보수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참 기쁩니다. 본사 직원의 손으로 된 본사 사옥을 신축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누구에게든지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언제 그렇게 건축에 대해서 연구를 하셨나요? 사람은 누구나 가볍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장님께서도 나중에 만나 뵙고 치하를 하시겠지만 어쨌든 이 회사에서 사무를 보시면서라도 그 방면에 연구를 계속하십시오. 회사에서도 앞으로 거기에 조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신축 낙성하는 날 우리 회사에서도 건축을 맡아보는 기관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때는 김 형을 주축으로 하여 일을 맡길 계획입니다. 그것은 아직 발표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것이 안 되더라도 신축 낙성하는 날에는 분명 김 형의 지위도 생각할 것입니다. 그 보수에 대하여는 이렇습니다. 보수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본사 상급사원들을 모아 놓고서 어느 형식 밑에서 사장이 드릴 것입니다. 그럼 아침을 안 드셨을 터이니 우리 집에 가서 찬은 없으나마 같이 잡숫고 들어오십시다."
영섭은 이런 일이 의외였던지라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언젠가 회사에서 사옥을 신축하고자 설계도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낸 적이 있었다. 그때 영섭이 그동안 틈틈히 연구하였던 건축에 대한 지식으로 설계를 하여 별 기대 없이 회사에 내어 본 것이 당선되었다는 것으로 영섭은 이 일이 꼭 꿈만 같이 느껴졌다.
"그 변변치 않은 것이 어떻게……."
영섭이 말을 시작하려니 전무는 손짓을 해가며 가로막는다.
"천만에. 겸손의 말씀이 따로 있지요. 이제 건축만 시작하면 김 형이 총감독을 하셔야 할 것이니까 지금까지 보시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작정입니다. 어쨌든 잘 되었습니다. 김 형도 사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지요. 내가 말할 것은 아니지만 김 형이 일을 남보다 몇 배를 하고 계신 것도 다 알고 있었으나 입이 여럿이고 눈이 하도 많다 보니 기회를 보고 있던 참인데……. 우리 회사에서 김 형은 이제 혜성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집에 얼른 다녀오십시다."
이래서 영섭은 전무의 집으로 따라갔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서야 영섭은 ××관이란 요리 집을 나왔다. 낮에는 전무의 말과 같이 회사원을 모아 놓고 사장 이하 중역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영섭에게 시상식이 있었고 회사원들과 함께 요리 집에서 축하식을 한 것이다. 식장에서 이천 원이란 수표가 든 봉투를 받았다. 영섭은 급사 아이 인환이를 시켜 은행에서 그 수표를 바꾸어다가 인환에게 삼백 원을 주었다. 인환이는 이것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돈을 보고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영섭의 큰마음에 감격하였던 까닭이다.
영섭은 아카시아 숲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였다. 꽃이 질 무렵이 되어서 그런지 향기가 몹시 코를 찔렀다. 만약 오늘 같은 날 아내가 있었더라면 발걸음을 더욱 빨리하였을 것이요, 오늘의 일을 이야기하면 아내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을 생각해서 무엇하랴 하였지만, 기실 이번 그 건축설계를 하느라 밤마다 책상머리에 몸을 구부리고 씨름하고 있을 때 아내의 도움이 컸었다. 중역실의 내부는 어떻게 꾸미고 사장실은 어떻게 꾸미고 하면서 여자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자기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아내와 두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고 보니 그것이 당선된 지금에 있어 그는 마음이 더욱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꼭 당선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조선에서는 최신식이면서도 견실한 건축물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아내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또 그것을 회사에 제출하던 날,
"꼭 당선이 되었으면 좋겠는데요.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이길 수 없을걸요?"
하던, 아내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축원을 마음 깊이 눈물겹게 듣던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영섭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내는 그에게 있어 큰 후원자였었다. 그 큰 힘을 그는 잃은 것이다. 그 잃은 힘을 어디서 다시 찾는단 말이냐. 영섭은 술에 취한 탓도 있지만 옛날 모든 정희가 새삼 끓어 올라와서 엉엉 소리를 내며 울면서 걸어갔다.
영섭은 그동안, 그리고 오늘 하루 온종일 반신불수가 된 자기 어머니의 존재를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제 아들을 위하여 자기의 어머니까지 잊었던걸 돌아보면서 영섭 자신을 기른 어머니는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싶었다. 그는 건넌방 미닫이를 열어 보았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언제나 유모가 깨끗이 치워 놓은 방, 깨끗한 어머니의 이부자리, 그는 유모가 그 북새통에도 잊지 않고 착실하게 자기의 병든 어머니를 돌보아드리는 것을 보고는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저런 여자를 싫다고 이혼한 놈이 있으니……."
하고 혼잣말을 뇌이면서 제 방으로 갔다. 유모는 일성이의 옆에 누워 잠에 취해 있는 그 꼴이 영낙 없는 친자식, 친어머니 같았다. 인기척을 들은 유모는 벌떡 일어났다.
"이를 어쩌나! 아이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는 것도 모르고 잤네."
유모는 눈을 부비며 일어섰다.
"아닙니다. 그대로 주무시지요. 저는 아랫방에서 자지요."
영섭은 방을 나가려 하였다.
"별말씀을 다 하세요. 이 방 주인께서 딴 방에서 주무시다니……. 이따가 애가 울든지 하면 저를 깨우세요."
유모는 나갔다. 영섭은 다시 살아나 쌔근쌔근 평안하게 잠들어 있는 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어느 날씨가 쾌청한 일요일, 유모차를 탄 일성에게 우유 젖꼭지를 물리고 젊은 아버지인 영섭이 유모차를 밀고 아카시아의 꽃길을 가고 있었다. 백화점에서 새로 사 온 양복을 입은 일성이는 옷에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셔서인지 눈을 깜빡거리며 물도 안 나는 우유 젖꼭지를 빨면서 두리번거린다. 영섭이는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영섭에게 병이 있다면 아직도 아내를 잊지 못하는 병밖에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