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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나무

Bollnow 2024. 3. 25. 17:43

아내의 나무

박희주

 

힘없이 내 손을 잡은 아내는 애처로운 눈길을 오래도록 거두지 않았다.

가슴이 미어졌다.

그 손길과 눈길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아내의 삶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산소호흡기와 모르핀과 영양제에 의지하는 하얀 명태 같은 몸뚱어리.

이런 것도 삶이랄 수 있을까.

어찌하여 암세포는 육체만을 갉아먹고 정신은 또렷하게 남겨두는지.

그리하여 극심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지.

죽음의 시간을 선택할 순 없지만 나의 기도는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고통이 더 심해지기 전에, 배에 구멍까지 뚫어 지저분한 호스를 주렁주렁 매달지 않고서,

죽음의 빛깔이 드리워지지 않은 얼굴을 간직한 채로.

그러나 그건 나의 희망사항일 뿐.

올 데까지 와버린 것이다.

티끌만한 기적마저 바랄 수 없도록.

아내는 목숨을 부지하는 기구를 가지가지 매단 참담함으로 내 마음만 모질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그만 미련의 끈을 놓아버려!’

아내가 죽는다는, 끝내 우리 곁을 떠나간다는, 몸서리쳐지는 슬픔이 다가올지라도 그게 낫지 않겠는가.

아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지칠 만큼 지쳤다, 아내나 나나.

수빈 아빠, 내 소원 알지?

아이들 꿋꿋하게 지켜주는 거?

그러려면 앞으론 술도 마시지 말고 담배도 끊어.

당신이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잖아.

그리고 독불장군 없는 법이야.

내 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원만하게 좀 살아. 조금 손해 본다 치고, ?”

아내는 자신의 죽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부터 수시로 내 얼굴만 보면 미덥지 못한 내일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믿음을 주지 못했으면 이럴까.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으면 그럴까.

당신이 있어 나는 안심하고 갈 수 있다는 말은 어찌 듣지 못할까.

여보, 걱정하지 마. 내가 우리 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잖아.

당신 몫까지 잘하며 살 테니까.”

나의 노래는 진부했다. 그래서 감동을 주지 못하는가.

아이들을 사랑만 하면 뭐해. 느끼게 하고 실천이 돼야지.”

교회 좀 열심히 다녀라. 어떤 사람은 멀리 하라.

여기는 받아야 하고 저기는 줘야 하고. 이것은 이렇고 그것은 그렇고.

, 그 얼굴, 죽음의 그늘이 잔뜩 드리운 아내의 처참한 얼굴. 그런데도 부아가 치밀었다. , 제발 이제 그만.

그렇게 못 믿겠으면 죽지 말고 훌훌 털고 일어나!’

단세포적인 나의 사고가 문제였다. 아내는 내 얼굴에서 짜증을 보았는지 그 고통 속에서도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난소로부터 시작해 간이며 폐까지 암세포가 온몸을 점령한 아내의 회복 가능성은 거의 제로.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인터폰이 울렸다.

한보경 씨 보호자 분 간호사실로 와 주세요.”

날 부른 것이다. 간병인으로부터 주치의가 보았으면 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아내의 손을 힘 있게 쥐어주고 병실을 나섰다.

간호사실 둥근 탁자에 주치의가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황급히 일어나 의자를 권했다.

지난 5년 동안 아내를 담당했던, 난소암에 관한한 국내 최고권위자라는 의사.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음을 다지고 계실 줄 믿습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짐작하시겠지만 현재 한보경 씨는 저희들로서 해볼 도리는 다 한 상태입니다.

결과가 이렇게 되어 저희들도 착잡한 마음입니다.”

최후통첩인 것이다.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얼마나 견뎌낼까요? 아니 언제쯤 죽게 되는 건가요? 그런 뜻으로 의사를 빤히 쳐다봤다.

언제라고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며칠 후가 될지를 요.

다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건 분명합니다.

혈관을 타고 도는 암세포가 뇌나 심장을 때렸을 경우 그 순간에 숨이 멎는다고 봐야지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라는 말씀이고요,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심장을 압박한다거나 전기충격으로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날 부른 이유였다. 그런다고 얼마나 더 살 것인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생명을 연장시킨들 고통만 더 안기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특히 한보경 씨에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심지어 갈비뼈가 나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참담했다. 아내가 죽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 본다는 것이.

그래서 저희가 보호자께 받는 서류가 있습니다.”

의사는 서류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읽어보지 않아도 심폐소생술이 필요치 않다는데 동의한다는 내용이 분명했다.

이름 쓰고 사인만 하면 됩니까?”

그렇게 해서 나는 혹시 모를 몇 시간, 아니면 하루 정도가 연장될 수도 있는 아내의 의식을 잠재웠다.

내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복도를 서성거리며 한참이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병실로 돌아가니 간병하는 아주머니가 아내의 다리를 주물러주고 있었다.

아내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래요?”

, 아무것도 아냐.”

그러나 아내는 짐작했으리라. 병실에 더 머물러 있을 자신이 없었다.

여보, 나 그만 가야겠어.”

아내를 보지 않고 가방과 양복저고리를 챙겼다. 맘을 다부지게 먹어야 한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아내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았다. 아내를 봤다.

내일 또 올 텐데 뭐. 지금 집안 꼴이 말이 아냐. 청소도 하고 오랜만에 애들 반찬 좀 챙겨야지.”

그래도 조금만 더---.”

아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왜 이러는가? 여보 나 좀 놓아 줘.

당신이 아픈 만큼 나도 견딜 수 없어. 맨손으로 아내의 눈물을 닦아줬다.

울긴 왜 울어. 맘 편히 가져. 여보, 사랑해. 내일 일찍 올게.”

알았어요. 운전 조심하고---.

그런 아내의 볼을 쓰다듬으며 메마른 입술에 뽀뽀를 했다.

내 입술에 침을 듬뿍 묻혀가지고. 아내는 눈을 감았다. 저 마음을 누가 알아주랴.

내가 헤아리고 내가 달래야 하는 것을.

그렇지만 나는 아내가 눈을 뜨기 전에 매정하게 돌아서서 부리나케 병실을 나왔다. 이렇게 도망만 다녔다.

아주머니, 수고 좀 해주세요.”

내 목소리는 울먹였다.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어떻게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를 찾아 운전석에 앉았는지 모른다.

머리는 텅 비어버린 것만 같고 가슴은 찢어지는데 하늘도, 사람들도, 나무도, 저 너머 한강도 말짱하기만 했다.

아내가 끔직한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도.

차창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5년이다. 국내 최대의 재벌이 운영하는 이 병원을 드나든 지가.

이제 서서히 막이 내리려 한다.

절망 가운데 희망이 있었고 또다시 절망하다가, 희망이 잠시 보였다가, 작년부턴 영영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동안 크고 작은 수술이 몇 번이었던가. 또한 지독한 항암제 투여는 몇 번이었던가. 그러기 위해 입원한 것만 마흔 번이 넘는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골인지점을 바라보는 마라토너에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만족감과 영광의 박수가 기다리고 있지만 나와 아내의 지난 5년의 마라톤은 허망한 죽음을 향한 고통스런 질주에 불과했다.

친구들 가운데 최고의 부인을 얻었다는 무성한 찬사가 있었다.

어디를 가도 외모로나 착한 마음씨로나 내 아내가 으뜸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이게 무엇인가. 아내는 죽어가고 아이들은 어리고 가정경제는 파탄이 났는데 나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시동을 걸었다. 어디든 가고 싶었다. 목적지도 없이. 일단 아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막막한 서울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서울 톨게이트를 지날 때 시간은 오후 여섯 시였다.

당신은 행복한 줄만 알아요. ? 내가 안 아프니까. 은애는 또 입원했더라고요. 5년 전.

친구의 잦은 잔병치레에 빗대어 병원 한 번 가지 않은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던 아내.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 아내와 교유했던 누구 하나의 원망을 산 일 없이 너도 나도 가까이 사귀기를 바랐을 정도로 주변의 인기가 높았던 사람. 당연히 아내의 병실은 문병객으로 넘쳐났다.

친척들은 물론이고 친구들, 후배들, 제자들, 이웃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져 꽃은 병실 가득 피었으며 과일과 건강음료는 쌓여만 갔다. 그때마다 아내는 한번쯤 아파볼 일이라고 농담까지 하며 행복해했다.

그런 가운데 아내와 내가 들어 기분 좋은 말들의 잔치가 이어졌지만. 아니나 다를까, 내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난소암 3기말.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찾아온 전혀 상상도 못했던 불청객.

환의를 입은 아내는 그 끔직한 병을 가진 환자라고 보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치렁치렁한 머리, 뽀얀 살결, 뚜렷한 이목구비, 처절하도록 환한 미소.

아내는 수술에 들어갔고 나는 일곱 시간 동안 꼬박 대기실 의자에 앉아 간절하게 기도했다.

아내를 살려 주십사. 우리 아이들에겐 아빠보다 엄마가 절실하다고.

수술이 끝난 후 집도했던 의사는 아주 잘되었노라고 얘기했지만, 전이된 부분까지 깨끗하게 긁어냈다고 자신했지만,

사람 좋은 미소까지 지으며 날 안심시키려 노력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암세포가 언제든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불길했다. 의사는 희망을 더 강조했지만 내가 들은 건 아득한 절망이었다.

환자가 회복되는 대로 항암제 투여가 시작될 겁니다.”

그러면 완치가 가능합니까?”

나는 쓸 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암이 어찌 완치가 가능하겠는가. 더군다나 다른 장기에 전이가 된 상태에서.

글쎄요, 그렇게 되길 빌어야죠.”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재발된다면 얼마나---?”

2? 의사는 혼자 말하듯 내뱉고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가 말한 2년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 분명했다.

지루한 투병의 시작이었고 내 절망의 시작이었다.

나는 잊지 못한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날 주사액을 매단 뽈대를 밀어주느라고 따라 들어간 여자 화장실에서 허겁지겁 서로의 모든 걸 빨아들일 듯이 나누었던 그 달콤한 키스를. 그 얼마나 간절했던가. 그 얼마나 아쉬웠던가.

우리 사랑의 절정이었다. 아내는 기필코 이겨내리라 다짐했고 나는 그래주길 바랐다.

그런 아내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아내가 너무 불쌍했다.

그토록 흘리고 흘렸건만 눈물은 마르지도 않는지 언젠가부터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가눌 수 없는 슬픔이 요동쳐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차를 갓길에 세우고 펑펑 울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고 거리낌도 없어 아내를 부르며 통곡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라던 아내의 애끓는 하소연이 귀를 울리고 그 안타까운 모습이 계속 어른거려 울고 또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여보. 결혼 후 지금까지 웃음보다는 한숨을 더 안겼던 나의 못된 행태.

하나에서 열까지 미안한 일뿐이라 운전대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내가 원인이다. 아내의 병은 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내게서 나도 모르게 뿜어 나오는 나쁜 기운, 나의 악마(惡魔), 나의 독기(毒氣), 나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내의 악종을 키웠으리라. 그런데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무책임하게 바라만 볼 수밖에.

나는 이 지독한 무력감으로부터 어디로 도망치고 있나. 들판 저 멀리 붉은 해가 산으로 숨으려 하고 있었다.

모든 빛 다 뿌리고, 모든 열정 다 바친 안식이 분명할진대 나는 한 일도 없이 어디로 숨으려 하는가.

이제 고등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들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장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민감한 시기에 엄마가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 없이 잘 자라고 있다.

그 어린 마음엔들 어찌 상처가 없으랴만 나보다도 더 꿋꿋이 잘 견뎌내고 있으니 참으로 대견스럽기만.

나만 못나빠졌다. 남편으로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고 아내가 아픈 만큼 절망하고 비틀거렸다.

아니 아내보다도 더 아파 쩔쩔맸다. 그때마다 술은 내 절망의 알파였다. 취하고 또 취했다.

나는 나를 변명했다. 내가 비틀거릴수록 살아야겠다는 아내의 오기가 발동할 것이라고.

이렇게 형편없는 남편을 두고 아이들은 어쩌라고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으랴, 그럴 것이라고. 수빈을 휴대전화로 불렀다.

아빠가 엄마 병원에서 나오는 길인데 일이 생겨 늦을 것 같다. 추빈이 잘 챙겨서 밥 먹고 자고 있어라.”

걱정 마, 술은 마시지 말고?”

수빈인 정말 내가 아무 걱정이 없도록 해맑게 얘기했다. 고맙다, 딸아.

네가 딸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그러나 아이들아, 우리에겐 너무나 무서운 일이 닥쳐오고 있단다.

해는 이제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그렇지만 싱싱한 샛덩이로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인지,

고단한 흔적인지, 하늘엔 붉은 노을이 진하게 여운으로 남았다.

평일이라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을 지나 논산까지 이어지는 민자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아직도 나의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정안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다람쥐공원으로 가 커피를 빼고 전화를 열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정인. 그녀가 있었다. 바로 받았다.

나야.”

내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 , 상현 씨?”

그래.”

, 어디야?”

웬 일이냐고 묻는 게 당연하건만 정인은 어디냐고 물었다.

나 전주 가고 있어.”

그래?”

나올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온다는데 나가야지. 어디쯤 오고 있어?”

정안휴게소.”

두 시간이면 충분하겠네?”

만나는 장소는 서로 알고 있었다. 어쩌다 만나더라도 으레 가는 곳을.

내 사춘기뿐만 아니라 대학시절까지 온통 내 영혼을 흔들었던 여인.

나의 첫사랑. 이루어지면 걸레가 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보석이 된다는 그런 첫사랑.

지금은 공직자의 아내가 되어 있는. 우리의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었다. 열병처럼 나 혼자서만 그녀를 그리워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1학년으로 갓 들어온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나의 전부였다.

속으로만 끙끙 앓기를 몇 년.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서도 그녀의 자취집을 애오라지 얼굴이나 볼 요량으로 수많은 날에 얼쩡거렸고.

밤이나 낮이나 머릿속은 오로지 그녀 생각뿐이었으니.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정작으로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심전심으로 내 맘을 알아주기만 고대했던 나는 엉큼한 숙맥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꼬드겼을까. 대학 시절 간절함으로 떠난 속리산 여행에서 그녀는 어렴풋이 내 사랑을 알았으리라.

허름한 민박집에서 보낸 둘만의 밤. 떨림이 고동으로, 격동으로 치달아 애가 탔을지라도 하얗게 밤을 지새운 우린 순수했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정인과 나를 비교했다.

무슨 놈의 자격지심이었을까. 그녀가 나를 좋아할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으니. 사랑은 진전되지 못하고 4학년.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나기로 어렵게 약속을 잡았는데. 나는 나가지 못했다.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 전화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 결정적인 실수는 그녀를 다시 볼 자신이 없게 만들어 나는 제풀에 나가떨어진 꼴이 되었다.

졸업과 함께 이어진 군 입대로 나의 사랑은 골병이 들고.

시간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데 군대 기간 동안 편지 한 장 보내지 못하고 제대하고 보니 결혼해버렸던가? 나는 통탄했었다.

아내와 정인. 나름대로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는 두 여자. 하나는 나를 비켜가 그 나이에 어울리는 세계에 살고 있고,

하나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죽어가고 있다.

정인이 결혼하고 나서 한동안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정인만한 여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아내가 내 눈에 띄었다. 서울의 한복판 시청 앞에서.

홀리듯이 그녀를 따라가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정인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양으로

온갖 관심과 열정을 퍼부은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라면 아내와 정인뿐.

정인은 결혼을 하고 몇 년이 흐른 후 부담 없이 전화통화가 이루어져 아쉬움을 토로했다. 많이 좋아했었노라고.

용기가 부족했다고. 그런 후론 간혹 전주에 볼일이 있거나 여행 중에 지나칠 때 몇 번을 만났다.

서로의 행복을 기꺼워하며. 덕진 연못이 바라보이는 조용한 카페에서.

그런데 왜 나는 아내의 심폐소생술을 거부하는 서명을 하고선 미친놈처럼 정인을 만나러 가는가.

내 이 참담한 심사를 위로받고자? 내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위로받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일찍이 나는 순탄치 못할 내 생의 질곡을 어렴풋이 예감했으면서도 그대로 밀고나간 고집불통이었다.

조금만 양보하면 아내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었으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고단한 길을 걸어왔다.

전주 덕진 연못가에 도착한 게 밤 9. 정인은 벌써 나와 있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앉았던 그 자리에.

얼굴이 안 됐네? 하긴 부인이 그러니 좋을 리가 없겠지.”

잘 지냈어? 여전하네?”

정인은 나보다 한 살 아래지만 아직도 예쁘고 매력적이다. 내가 만약 너와 결혼했다면 너는 어찌됐을까.

너도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 이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그걸 묻고 싶었다. 아니 정인에게 묻는다기보다 그게 의문이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이면 나와 같이 산 여자는 죽어야할 운명인가하고. 내게서 뿜어 나오는 독기로, 내가 주는 스트레스로.

아내는 정인보다 네 살이나 어린데도 죽어가고 있잖은가. 내가 정인과 결혼했다면, 아내가 나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면,

아내는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줄곧 떠나질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독기, 내가 주는 스트레스는 내 의지가 아닌 내 팔자? 내 운명? 얄궂은 신의 장난? 도대체 무엇인가.

왜 그렇게 빤히 쳐다 봐? 얼굴 뚫어지겠어.”

정인은 행복하구나. 얼굴에 쓰여 있네. 고마운 일이야.”

상현 씨 몹시 힘들구나, 그치?”

그래, 힘들다, 무척.”

언젠가부터 내 팔자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처가식구들은 아내가 나를 잘못 만나 몹쓸 병에 걸렸다고 원망하는 눈치였다.

암의 주된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막연한 의학상식을 밑바탕으로. 그 얼굴에, 너 정도에, 뭐가 모자라 그 따위를 만나 이 고생이냐고. 고생만 하다 이게 뭐야? 어처구니는 그들에게도 내게도 없었다. 결국 아내의 병은 나만 죽일 놈으로 몰았다.

그래서 훌쩍 떠나왔어?”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어.”

부인은 어때?”

쉬운 병이 아니잖아.”

정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림표를 펼쳤다.

밥 안 먹었지? 나는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안 먹었는데.”

그래, 먹어야지.”

술도 약간 마셨다. 정인이 시키는 걸 막지 않은 것이다. 남자에게 좋다는 복분자술이었다.

상현 씨 힘들어하는 거 보니 내가 마음이 안 좋아. 내가 어떻게 해줄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여기 아니라도 어디든 훌렁 떠나고 싶었어. 부담 갖지 마.”

정인은 반찬 이것저것을 내 앞으로 당겨 놨다.

만약에 정인과 내가 결혼했다면 정인도 집사람처럼 죽어갈까?”

나의 말에 정인은 얼토당토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말짱한데 내가 왜 죽어? 상현 씨는 부인이 상현 씨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것 같아.”

아이고, 상현 씨 바보야?”

아니야, 정인도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라.”

정인은 웃고 말았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우린 식사를 끝내고 연못 주변을 걸었다. 별 말이 없이. 앞이 캄캄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번번이 어긋나고 말았지만 나름의 감동적인 삶을 살고 싶었는데, 아내가 무너지니 모든 게 덧없이 느껴지다니.

누가 뭐래도 아내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행복했다. 그 행복이 너무 분에 겨웠던 걸까.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양이 그만큼밖에 없는가. 알 수 없었다. 결국 내 인생에 동참한 아내는 희생물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아내의 인생은? 아내의 인생에 동참한 나는 가해자? 참으로 알 수 없었다.

나를 위로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안 돼 보였던 걸까, 정인은 팔짱을 꼈다. 3월 하순의 밤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그렇다면 추워서인가? 동물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러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정인은 마주앉기보다 옆자리에 꼭 붙어 앉아 내 손을 잡았다.

무엇하러 나는 전주까지 왔는가. 답답했다. , 나는 솔직해지자. 놓친 고기가 크게 보인다고 했던가.

아내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어째서 정인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는지. 나도 모르게 불뚝불뚝 솟구치는 아련함, 그리움.

나의 인간성은 이중적이라 경멸받아야 마땅한가. 정인을 안고 싶다.

미친 듯이 껴안고서 현실을 잊어버리는, 이 지긋지긋한 불행을 털어버리는 질펀한 정사를 밤새 나누고 싶다.

, 죽어가는 관능이여, 억눌리는 욕망이여.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짓인가. 내 입장만을 바라고 정인에게 강제할 수도 없는 일. 가소로웠다.

기껏 아내가 죽어가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생각해낸 것이 고작 욕망의 허물벗기였을까. 낯이 뜨거워졌다.

환상처럼 빛나는 연못가의 휘황한 네온의 불빛을 바라보기에도 사뭇 부끄러웠다. 그만 올라가야겠다. 현실을 직시하자.

아이들이 보고 싶다. 처참한 몰골의 아내도 그리웠다. 정인의 입장도 생각해야지.

지금 정인은 멀리서 찾아온 나를 차마 어쩔 수 없어 나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내 욕심이었다. 그만 궁상을 떨자.

카페를 나와 주차장에 이르렀다. 나와 정인은 그때까지도 손을 잡고 있었다.

깍지 낀 두 손 사이에는 끈적끈적한 옛정이 오롯이 배어나왔다.

지금 가지 마. 오늘밤 같이 있어 줄 테니까.”

? 전혀 뜻밖의, 여자로서 하기 힘든 말에 나는 당황했다. 간절히 고대한 상황인데도. 나는 솔직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안 돼 보여?”

그게 아니라 솔직히 내가 같이 있고 싶어.”

솔직히? 뭉클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정말로 너를 안고 아내의 죽음을 잊고 싶다. 하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내가 도덕군자여서가 아니다.

그냥 왔듯이 그냥 갈게.”

우리는 어느덧 차 옆에 서서 서로의 허리를 껴안고 마주보고 있었다. 내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옛날 나는 학교 앞 카페에서 상현 씨를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상현 씨의 진실을 알고 있었기에 늦게라도 올 거란 확신이 있었거든. 그런데 내 기대를 묵살하고 상현 씬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 그때의 배신감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더라고. 변명도 안했잖아? 그 모멸감이 지금의 남편을 쉽게 만났는지도 모르지만.

오늘 상현 씨가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데도 그냥 간다면 난 아마도 그때 심정이 될 거야. 남편 걱정은 하지 마. 나도 내 나름의 세계를 갖고 있으니까.”

정인은 지금 행복하잖아. 그때 내가 나가지 않은 게 결과적으로 다행한 일이 되었듯이 오늘 내가 그냥 가는 것도 정인에겐 다행스러운 일일 거야.”

그건 상현 씨의 잣대일 뿐이야.”

나는 지금까지 정인을 처음 본 까마득한 그 옛날부터 단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내 말 들어. 오늘 고마웠어.”

어쨌든 또 당한 느낌이야. 오늘도 확신했는데.”

이런 나를 이해하리라 믿어.”

정인은 아내와는 또 다른 그리움이었다. 나는 정인을 힘껏 안아보곤 차안으로 들어가 시동을 걸고 곧장 출발했다.

죽어 가는 아내를 초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정인의 제의를 사절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설령 정인이 당장은 상처를 입을지 몰라도 내일이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나의 남성은 거의 1년을 침묵한 상태였다.

당연한 노릇이지만. 이제 정인도 잊어야 한다. 잊는다고 해서 쉽게 잊어지는 게 아닌 줄 안다.

그러나 무슨 일 나기 전에, 불행을 몰고 올 나의 악마가 충동질하기 전에, 그만 만나야 한다. 전주에 와 정인을 만난 해답이었다.

비가 한 방울씩 흩뿌리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새벽 1. 전주 톨게이트를 지나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굵어지고 차츰 3월엔 흔치 않는 폭우로 변했다.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술 후 3주에 1번씩 받는 아내의 항암치료는 처절했다.

주사를 맞고 나서 한 열흘은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구토와 식욕부진으로 고생하다가 조금 입맛이 돌아 기운을 차릴 만하면 다시 입원하여 초주검이 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항암 두 번 만에 머리카락은 뭉텅뭉텅 빠져 빡빡 밀어야 했고. 눈썹도 빠지고 심지어 음모까지도 다 빠져버렸다. 그것도 삶이랄 수 있을까.

그래도 항암치료를 하지 않는 기간에는 꾸준히 여행을 다녔다. 동해안으로, 서해안으로, 남해안으로. 그리고 유명한 고찰과 산 깊고 물 맑은 곳이면 수시로 찾았다. 그것도 항암의 한 방법이었다.

특히 2년 전, 속초 부근 진전사지를 돌아 내려오다 본 신비스럽게 펼쳐진 둔전저수지의 장관을 잊을 수가 없다.

수려한 산을 담뿍 담은 짙푸른 물과 둑을 따라 자라고 있던 무성한 억새의 모습.

그 억새밭에서 아내는 활짝 웃었고 나는 그 마지막 행복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내는 선녀 같았다. 그 사진은 모종의 쓰임새를 위해 확대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낙산 일출을 보기 위해 투숙한 해안가에 자리한 그레조아란 모텔에서의 숨 가쁜 정사. 부부가 살아가면서 숱하게 치르는 게 그 일이지만 뚜렷하게 기억할 만한 밤도 있기 마련. 난 열락으로 충만했던 그날 밤의 꿈같은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얼마나 격렬했던지, 얼마나 서로를 탐했던지. 그 후로 나는 아내와 정사다운 정사를 갖지 못했다. 아내는 아름다움에 하강곡선을 그렸고 건강도, 성욕도, 희망과 함께 잃어갔다.

참 죽일 놈의 암세포였다.

지난해 봄, 우리는 서산의 개심사를 마지막으로 찾았다. 개심사엔 결혼 후 몇 번을 갔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갔었다.

아내가 특히 좋아했던 꽃은 벚꽃. 쌍계사 십 리 벚꽃 터널을 걷는 걸 좋아했고 전주 군산 간 백 리 벚꽃 길 드라이브를 즐겼다.

연애시절엔 내가 근무했던 여의도 윤증제를 따라 피어난 벚꽃을 보기 위해 매일 밤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사랑은 만개한 벚꽃처럼 피어나 검붉은 버찌처럼 무르익었다. 벚꽃은 특히 달빛과 환상의 어울림을 이룬다. , 아직도 생생한 그 밤의 그 꽃무리. 당신이 죽으면 나는 벚꽃이 한스러워질 것인가.

개심사를 자주 갔던 이유도 다름 아닌 그곳에만 유일하게(?) 피어나는 겹벚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겹벚꽃은 그야말로 나무 위에서 꽃들이 바글바글, 버글버글,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찌 그리 탐스러운지. 한참을 쳐다보노라면 아예 눈이 아리고 귀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아내는 갈 때마다 새로운 그 벚꽃의 자태와 향기에 취해 오래도록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그 무렵이었다. 아내가 자신이 죽으면 꼭 화장해서 산에다 뿌려달라고 말한 것은. 나는 속으로 어림도 없는 소리라 일축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완고한 매장주의자였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의 육신을 그 끔찍한 불구덩이에 밀어 넣는다는 말인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러나 육신은 매미가 껍질을 벗듯이 한갓 허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눈을 뜨고는 차츰 매장의 의미는 감소되었다.

그래도 아담한 아내의 그늘 집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소망은 여전히 갖고 있었으나 아내는 내가 못미더웠던지 몇 번이나 암세포에 찌든 육신의 화장을 강조했다.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창을 때리며 시야를 가렸다. 올 때는 시속 120킬로미터를 넘나들었지만 80도 내기 힘들었다.

차선도 구분하기 힘들어 화물차의 붉은 불빛만 따라가다 가까스로 정안휴게소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그대로 가긴 무리였다.

의자를 뒤로 젖혀 잠을 청했다.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었다.

아내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일까. 그동안에 나는 아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갖은 상념 속에 얼핏 잠이 들었을까.

아내가 짐을 싸고 있었다. 장롱에서 옷을 꺼내어 방 한가운데 보자기를 펴놓고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아니 아픈 사람이 무슨 보따리야? 그러자 아내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환영이 스치더니 잠을 깼다.

무척이나 쓸쓸한 표정이었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시간은 4시였다. 혹시? 소름이 쫙 끼쳤다. 비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맘이 급해졌다. 빨리 가자.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병원으로 가야할 것 같았다. 꿈이 결코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내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자연히 결혼 후엔 피아노학원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다. 나는 수도 없이 직장을 바꿨다.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를 전전하다 지금은 직접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이라곤 디자인을 맡은 아가씨 하나뿐.

아내가 학원을 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알게 모르게 나의 믿는 구석이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가정경제의 핵은 아내의 학원에서 나오는 수입이 큰 몫을 차지했다. 나는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비난은 그것이었다. 나의 불같은 성격, 어쭙잖은 자존심,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고집은 고쳐지질 않고 내 나이에 걸맞은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자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반골의 싹만 키운 셈이다.

그러나 이제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나는 더 이상 변명할 말이 없다. 당당하지도, 떳떳하지도 못하다.

당연히 믿고 의지처가 되어야 할 내가 더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돌출섭리에 치를 떨면서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켜켜이 가슴 가득 멍울만 만들고 있었으니.

어슴푸레하게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서울의 고층아파트들이 보이자 가슴이 서늘해지며 막연한 불안이 고개를 들더니 서서히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께름칙한 꿈의 여운은 한강변의 병원건물이 보이자 더욱 생생해지고. 나는 이처럼 초조해 하는가.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더 아내의 진이 빠지길 기다리는가. 언젠가는 치러야할 일. 은근히 기다리지 않았는가.

이제 그만, 아내여, 편히 잠들어다오. 천사의 이미지를 얼룩지게 한 지긋지긋한 고통의 멍에를 벗어다오.

나는 그 깊은 잠을 결코 깨우지 않으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마음. 병원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내달렸다. 안개비가 차갑게 얼굴을 때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시계를 보니 6. , 왜 이리 떨리는가. 무슨 일이 있다면 벌써 전화가 왔을 텐데---.

5층 복도는 조용했다. 피곤에 지친 간호사실도 일상과 다름없었다. 안도감이 일었다. 그러나 병실 앞에 서니 문을 열기가 겁났다.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슬그머니 손잡이를 밀어 아내의 자리를 보았다. 아내는 자는가? 간병인은 보조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눈은 그대로 아내를 쳐다보며.

아내는 눈을 뜨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보! 나는 이미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떠나간 것을.

그 순간의 느낌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아주 낯선 것이었으므로. 여보! 대답도 없고 움직임도 없어 아내의 가슴에 쓰러졌다.

그새 갔어. 당신은 그렇게 가려고 내게 인사를 보낸 거야. 어제 내가 서둘러 떠날 때 조금만 더 있다 가라며 아쉬워했고, 이 새벽에도 내 꿈을 빌어 나타난 거야.

간병인이 자지러지고, 간호사가 몰려오고, 의사가 헐레벌떡 달려왔어도 아내는 그대로 나의 피울음만 받아내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아내의 눈을 쓸어내렸다. 여보, 잘 자요.

아내의 고통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새로운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제 아내의 애처로운 눈빛도 다시 볼 수 없고 애끓는 목소리도 영영 듣지 못한다.

40년 당신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 당신이 우리에게 주고 간 흔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전라도 저 두메산골에서 태어났고 5년 후, 당신은 서울의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고 당신이 태어난 엄청난 시간 차, 지역 차에도 불구하고 우린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 인연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부부간에 더할 나위 없는 소망이라면 말년까지 해로가 분명할진대 당신의 죽음은 나의 불행인가, 당신의 불행인가.

부부란 무릇 서로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관계인데 내가 당신을 쓰러뜨리고 말았는가.

그렇다고 우리를 그 누가 감히 잘못된 만남이라 매도할 수 있는가. 얼마나 기다리다 외롭게 갔을까, 눈을 감지 못하다니.

얼마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간병인도 모르게 조용히 가버리다니.

내 전화를 받고 달려온 아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속울음의 눈물만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참으로 불쌍한 내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참담함이야 말해 무엇 하리.

우리 형제들이 오고, 처가식구들이 오고, 교회 성도들이 오고.

우리 부부와 연을 맺은 수많은 사람들이 둔전저수지에서 찍은 아내의 모습 앞에 하얀 국화를 수북이 쌓으며 애도를 표했다.

수빈이와 추빈이는 내 곁에서 의외로 담담하게 문상객을 맞았다.

아이들도 이미 충분하게 엄마의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갖췄으리라.

꼬박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날, 벽제 화장장.

아내는 내게뿐 아니라 처가식구들에게도 언질을 주었던지 화장에 대해 별 말들은 없었다.

나는 화장장 앞에서 아내의 마지막 길을 따라온 많은 문상객 앞에서 어젯밤에 쓴 고별사를 읊었다.

행복했던 날보다 고통의 시간이 더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같이 가고자 했으나 나는 벗어나려고만 했고,

당신은 안정을 희망했으나 나는 끝없이 이상을 희구하며 수렁을 헤매었기에, 우리에게 갈등도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당신은 그러한 나의 희생양이었으며, 나는 당신을 썩게 하는 녹이었고, 당신의 영양분을 염치도 없이 빨아먹는 겨우살이였습니다. 당신의 요절은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나는 행복한 남자였지만 당신은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진면목은 어느 환경, 어떤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나의 아내, 한보경.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옛날부터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지요. 하늘이 그 절세가인을 시기한다 하여 생긴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늘의 시샘이 아니라 은총의 초대장을 받은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삶과 죽음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당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과 우리 아이들은 당신을 영원히 사랑의 감정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여보, 사랑해, 안녕.

나도 울고 아이들도 울었다. 흐느낌이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그런 가운데 아내의 관은 불구덩이로 사라졌다. , 인생!

아내는 이 소풍의 감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결코 아름다웠다고는 말하지 못하리라. 돌아가는 길이 너무 처절했기에.

아내의 유골은 곱게 빻아 오동나무 상자에 담겨져 보자기에 싸인 채 내 품에 안겼다. 유골의 처리는 전적으로 내게 맡겨졌다.

처가 쪽이나 우리 형제들이 수빈과 추빈을 위해서 납골당에 안치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향을 비쳤으나 나는 아내의 뜻을 강조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나의 뜻이 너무 단호했던지 아무도 그 일에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나는 화장장까지 따라온 문상객들에게 일일이 예의를 표하곤 서둘러 유골을 안고 아이들과 함께 친구의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아내는 산에 뿌려달라고 했었다. 무슨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랜 투병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우리의 가정경제를 위해 몇 백만 원이라도 아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꿋꿋하게 살자. 그리고 걱정 마라. 엄마 몫까지 아빠가 대신할 테니. 알았지?”

아이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빈인 제 방으로 들어간 후 꼼짝을 안했고 어린 추빈인 내 주변을 얼쩡거렸다.

먼저 아내의 옷가지를 정리하려던 나는 추빈일 끌어안고 아내와 같이 쓰던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창밖이 어두웠다.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물고 바깥 창을 열었다.

낮에는 말짱했던 날이 잔뜩 흐려있다는 걸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너머에 있는 중앙공원은 가로등에도 불구하고 뿌옇게만 보였다.

꼭대기 층인 우리 집에서 맑은 날에는 볼 수 있는 그 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 있는 스티커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 김치찌개를 주문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아내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 차츰 지워지겠지. 억지로 지우진 않으리라.

음식이 와 아이들을 깨웠으나 수빈인 그냥 자고 싶다 하고 추빈인 벌떡 일어났지만 몇 숟갈 뜨더니 도로 침대로 기어들었다.

아빠, 내 옆에서 자야 돼, ?”

추빈의 그 말에 뜨거움이 목울대로 치밀었다. 안쓰러웠다.

엄마의 정을 떼고자하는 무섬증이 어린 마음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미리 준비한 신문지로 똘똘 말아놓은 야전삽을 챙겨 아내의 유골함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떠난 새벽처럼 또 안개비였다.

차들로 빈틈없이 들어찬 주차장을 빠져나와 단지 옆 상가에 들러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사고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과 궂은 날씨 탓인지 거리에는 사람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도 볼 수 있는 그 나무, 내 허벅지 굵기의 벚나무 앞에 섰다. 벚꽃을 유난히 좋아했던 아내.

나의 음모는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주변뿐만 아니라 공원엔 아무도 보이지 않고 희부옇게 빛을 내는 가로등만 불안해 보였다.

잔디를 곱게 떼어내고 벚나무 주변을 에둘러서 30센티미터 정도 팠다. 거기에 유골을 골고루 뿌렸다.

여보, 나의 이 의식이 당신이 원하던 바가 아닐지도 몰라. 그러나 오래도록 생각한 내 사랑의 절박한 행위임을 이해해줘.”

흙을 덮고 잔디를 다시 입혀 꾹꾹 밟았다. 감쪽같았다. 그러면서 나는 진정으로 이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감당할 수 없는 나만의 비애가 다른 사람들에겐 혐오스러운 극단의 이기로 보일 것이므로.

나무에서 스무 걸음쯤 떨어진 축축한 의자에 앉아 나무의 자태를 바라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으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보고 또 보아도 흠잡을 데 없이 잘 자란 나무였다.

무성한 잔가지로 보아 뿌리도 튼튼히 내렸으리라.

저건 바로 아내의 벚나무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싱싱하게 푸를 아내의 나무. 맥주를 따서 나무에 다가가 줄기에 부었다.

아내는 다른 술은 마시지 못하고 맥주만은 좋아했다. 의자로 돌아와선 소주를 따서 병째 들이켰다.

짜릿한 슬픔이 뱃속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비로소 눈물이 흘렀다. 이게 아내에 대한 나의 마지막 눈물이 될 것인가.

아내의 육신은 떠나갔을망정 나는 아직도 아내를 보낸 것 같지 않은데.

4월 중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중앙공원을 찾았다.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았다.

벚나무에 물이 오르고 꽃망울이 맺히는 걸 똑똑히 보면서 가슴 속에 묵직하게 자리한 슬픔의 멍울을 달랬다.

언젠가 수빈이 내게 물었다.

엄마는?”

유골을 어쨌느냐는 것이다.

엄마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줬다.”

그 뒤론 묻지 않았다. 내 딸이지만 속 깊은 아이였다, 수빈은.

드디어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아내의 벚나무는 겹꽃으로 피어나는 게 아닌가.

아내가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던 개심사의 그 겹벚꽃처럼.

나는 작년에 이 벚나무가 어떻게 꽃을 피웠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벚꽃처럼 피었는지 아니면 작년에도 겹꽃으로 피었는지.

공원관리소에 물어보면 알겠지만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믿고 싶었다. 올해부터 겹꽃으로 피어나고 있다고.

공원에서 아내의 벚나무는 유독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탄성을 자아낼 만치 그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수빈과 추빈을 데리고 벚꽃이 최고로 벙글거리던 날 공원을 찾았다. 추빈인 멀리서부터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아빠, 엄마가 좋아했던 그 벚꽃이야!”

수빈인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다 나를 향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집에서도 보이겠네!”

이제 다시 내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내와 같은 향기가 나는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만 그럴 자신도 없다.

만약에 그런 일이 있더라도 내게서 뿜어 나오는 독기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또다시 다치는 게 싫은 것이다.

나의 사랑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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