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향기
숲의 향기
한성천
1
팔월의 정오를 가르며 달리던 시내버스는 남포동 깊숙한 정류장에 사내를 내려놓았다. 냉방 장치를 투자할 가치조차 없어보이는 낡은 버스는 차창마다 숨구멍을 터놓고 타 주기를 기다려 보지만 정류장 앞에서 더위에 축 축 늘어선 승객들 가운데 누구도 다가서거나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달랑 사내 하나만 태우고 다녔을 것 같은 낡은 버스는 투덜거리는 소리에 이력이 났는지 정류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아직도 저런 게 굴러다니냐"
"맞아, 재수 없어.."
사내는 내려선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쓸데없이 굴러다니는 낡은 버스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버스를 기다린 데 대한 배신감의 화살이 사내를 꼼짝할 수 없도록 묶어 놓았다. 낡은 버스는 불러도 들리지 않을것 같은 거리까지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었다. 덧 포장을 위해 타르를 뿌려놓은 아스팔트 위를 쩍쩍 소리가 나게 걷고 있었다. 걷다가 구두 밑창이 바닥에 달라붙으면 맨발로라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달아나 있었지만 정작 몸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를 목격한 얼마 전에 모습이었고 그 후로 여러 곳에서 마주쳤다. 쇼윈도 안에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진열된 상품처럼 탐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한 가족이 들어 앉아있는 점포는 전체가 커다란 선물 상자 같았다. 투명한 유리 속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조율해보는 동공 안으로 유리밖에서 머뭇거리던 사내가 들어왔다. 무심하게 흐르던 인파들 사이로 고여있는 물웅덩이 같은 사내..
목욕하는 여인을 훔쳐보다가 들켜버린 민망한 순간처럼, 사내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보, 그렇게 계시지 말고 어디 여행이나 다녀오세요."
P의 아내는 모처럼 일거리를 구하고부터 제법 생기가 도는 모습이었다. 실직한 이후로 잦은 사업의 실패와 마지막이라고 쏟아부은 동업에서도 날 것 좋아하는 사기꾼의 뱃속으로 털어 버릴 그때까지 P의 아내는 아이들의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살림이 천직이라고 믿어왔던 그의 아내는 마음의 정리와 자신이 선택했던 깨어진 참담한 미래와의 타협점을 찿고자 한동안 장고를 치러 냈을 것이다. P의 앞으로 첫 월급이라며 봉투를 건넸다.
"삼년정도 적금을 부어 우리 여행을 떠나자"
P가 첫 월급을 받아든 날 P를 위해 고등어찌개를 끓이고 있던 아내의 등 뒤로 다가가 허리를 감으며 그렇게 얘기했던 기억이 났다. 아무것도 묻지를 못했다. 집안에만 있었던 당신이 어떻게 일을 할 생각이 났으며 무슨 일로 벌어온 돈이며 차마 이 돈을 쓸 수 없노라고 단 한마디의 말조차 목구멍을 통해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P는 전쟁에서 돌아온 패배자의 심정으로 타성에 젖어들고 있었다.
숲이 보이는 곳에 창을 열고부터
나의 푸르름은 시들기 시작했다.
창을 열면 목울음이 들이치고
숨 쉬는 공기마다 번뇌가 메케하다
회색의 숲에서 졸고 있는
비둘기의 꿈도
회색일 것이다.
한참을 탁자 위에서 잠들다 깨어난 P의 앞으로 "야 씨방세야 손님이 호구냐!"라고 주먹이 날라왔고 술에 젖은 머리카락이 손아귀에 잡혀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결이 예쁘다고 말했던 것 같았다. 손님이 뜸하기에 같이 한잔하자며 앉은 것도 같았다. 건너 테이블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 탁자가 쓰러지는 소리 눈두덩 어딘가에서 별꽃이 번쩍거렸던 것도 같았다. 소란이 그치고 청년들이 달아난 입구로부터 제복 차림의 경관 둘이 들어섰던 모습 조서를 꾸미고 피해자 진술을 마친 후 부서진 집기들을 변제할 의사가 조금은 있다는 싸인을 하고나서야 경장의 계급을 단 자가 해장국을 한 그릇 시켜 주었고 아니 두 그릇으로 정정해야 하는 건 증인으로 동행했던 술집 종업원이 탁자에서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봐요 아가씨 다 끝났으니 집에 가야지..."
"저 아가씨 아니었으면 아저씨가 뒤집어 썻을걸요."
"주인이 아저씨를 지목 했었거든요."
P는 술이 덜 깼다는 핑계를 대고 싶었었다. 종업원을 흔들어 깨우던 경관이 구급차를
부르라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었다. 경관 서 넛이 달려들어 종업원의 손을
부비거나 볼을 소리가 날 정도로 두드리는데도 종업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P도 꿈쩍할 수 없었으며 잠시후에 구급차가 도착해서 종업원을 실어 가고 그때까지 꿈쩍하지 않고 서 있던 P를 힐끔 쳐다보고는 가보라고 했었었다. P는 여전히 꿈꾸다 벌어진 헤프닝으로 생각하고 싶었었다.
숲속엔 향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숲속으로 나 있는 오솔길로 인해
숲의 향기는 길을 찿기 시작했다.
"왜 그랬니?." "(.........)" 대답 대신에 시계를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나가자고 했다. 구석에서 노랑머리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야 그냥 가냐?."
P는 지금의 모든 일들이 자신의 인생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서 누구도 그녀를 구속할 권리가 없다고 느껴졌다. 그녀도 지금의 현실이 실감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장을 고치는 일이 많아질수록 단호하게 말하곤 하였다. 거울 속에다 그녀는 자신을 꼭꼭 숨기고 있었다. 끝내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 없는 질문만 수없이 떠올려 보는 원점이었다. 왜 그래야만 했니?..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니?..하는 따위의 자신에게로 돌아갈 메아리 같은 질문만 되뇌이곤 하였다. "왜 그랬니?."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냥 그렇게 울고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생을 그렇게 얼버무리다가 더 큰 문제가 닥친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P는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로 작정했다.
어둠의 품이 고맙기만 한
쟂빛 처녀는 화장을 한다
미끈한 다리 사이로
휘이 감긴 침낭 속 변명
체온, 입술, 오르가즘
반복과 반복의 연속성
고음과 저음의 연속성
스스로 지르는 함성이다
메아리에 섞인 半人半馬
사각의 링 위에서
쓰러지고 말것이다.
2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성호는 더 이상 망설이다 자신에게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십 년이란 세월, 어둠의 자식으로 서출처럼 불안한 생활에서 탈출시켜준 그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뜻하지 않게 듣고 난 후 가족들의 얼굴을 눈에 넣는 날이 많아지는 자신에게 거듭해서 다짐을 받아내고 있었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택배가 날라왔다. 여름휴가를 위해 방송광고를 통해서 주문했던 아이들 수영복과 텐트를 택배로 보내온 것들이었다. 몇 년 동안 미뤄왔던 여름 휴가에 가족들은 들떠있었다. 성호는 현관을 나서려다 몸을 돌려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드라마에 열중하는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돌발적인 남편의 행동에 놀란 아내에게 배달해온 물건들을 살펴보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 나왔다.
배수지 입구에서 택시를 세웠다. 시간을 재 보니 후배와 약속한 시간이 제법 남기도 했지만 성호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영도를 잇는 두개의 다리가 가로등을 켜고 길을 밝히고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등 뒤로 거친 숨소리를 세고있는 음흉함을 숨기듯 서서히 안개를 내리고 있었다. 내일쯤 비라도 뿌릴 참이다.
남포동 일대의 오락실 절반을 소유한 그 자를 수소문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여러가지 상황이 머릿속에서 그림처럼 뒤섞이고 예전의 감각을 되살려 보려고 집중을 하고 있었다. (황제를 만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으리라..)
"헤임요 어뎁니꺼?."
"아 덜 모이씸더"
"퍼뜩 나오이소"
"(.......)"
"그라고 예..."
"(......)"
"여보세요?."
"말해라"
"헤임요 걱정 마이소 일마덜 물만났다꼬 신났씸더 그라이까 헤임은 가마 있으믄 됩니더. 지가 알아서 할테이까네 그라고..."
"알았다 금방 갈끼다"
녀석은 성호의 의중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제 말만 늘어놓았다.
녀석들에게는 색다른 게임에 불과할 것이다. 고액의 머니가 걸려있는...
옥분은 - 느닷없이 쳇바퀴를 돌리느라 애쓰는 햄스터가 보고 싶었다. 야행성인 녀석들은 낮동안 두문불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잠만 자려고 한다. 늘 아이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던 옥분은 녀석들의 단잠을 깨우려 집을 흔들어댔다.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한동안 옥분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녀의 의중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쳇바퀴를 돌리대기 시작하였다. 녀석들은 그렇게 제자리에서 달아나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옥분은 – 일 년 동안에 일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기억해내고 싶었다. 지난 십오 년간 유지해 왔던 결혼 생활에서 유지한 것이라고는 서로의 경계선이었다. 함께 뒹굴던 침대는 비무장지대였었고 그것조차 서로에게 숨기며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쌕스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래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끝이라도 내야겠다는 날카로운 치기가 습관처럼, 몸에 베어버려 닿는 체온이 오히려 마뜩한 부부가 되어있었다.
햄스터 중 암놈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다. 톱밥 더미 사이로 무언가를 열심히 물어 나르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들이었다. 털도 나지 않았고 눈도 뜨지 않은 새끼들이었다. 옥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공연히 집을 흔들어 심술을 부렸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무엇이든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신선한 야채를 주려고 무심코 냉장고 문을 열다가 불에 대인 듯이 놀라며 지체하지 않고 닫아버리고 말았다. 부식도 바닥이 난 상태에서 신선한 야채는 어림없는 호기였다.
옥분은 - 하루가 날마다 돌아올 거라는 사실에 넌저리를 쳤다. 누군가 부도난 달력을 시중에 유통시켰으면 도래하는 생리일, 배란일, 따위를 재보며 기계적으로 성기를 받아들이고 수정하는 일도 모두 부도 처리가 되어있지 않았을까...옥분은 햄스터를 바라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얘들아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혼자 주절거리던 습성이 몸에 벤 터여서인지 그녀의 눈앞에 어떤 존재와도 대화의 상대로 가능할 것 같았다. 결국에 이렇게 자폐증에 걸리나보구나. "얘들아..."
옥분의 - 생각을 따라야되는 결정이 결국은 그리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더욱 실어증까지 될 수도 있다는 타당성까지 고려해보는 순간, 아! 옥분은 머리 끝 정수리에서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숫놈이 새끼 한 마리의 몸을 뜯어먹느라 하얀 털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벌써 몸뚱아리의 절반이 뜯겨져 있는 상태였다.
성호는- 갑자기 방향을 돌렸다. 문득 일하고 있을 늙다리 형님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늙은 사자라도 송곳니만 건재하면 위엄을 인정하는 어깨들…성호는 한물갔다는 후배들의 얘기가 떠 올라서 실소를 머금었다. 청학동 산동네에 백여 대의 작은 택시회사에서 택시 기사로 머문 지 삼 년 성호로 인해서 바닥 생활을 청산한 몇몇이 입사한 곳에 그래도 맞형으로 대접받는 늙다리 형님 그가 아직도 수하에 거느리고 있는 어깨들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 내 수영복만 없어요”
이제 유치원에 들어가서 재롱을 한껏 뽐내는 딸 아이였다.
“응,내일 아빠가 가져오라고 할게 오늘은 일찍 자그라 알았제?”
유치원에 다니고부터 제법 고분해진 딸 아이는 댓구도 하지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아빠 오늘은 술 많이 먹지 말아요?”
성호는- 성급하게 끊었던 전화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무던한 아내는 남편을 전폭적으로 신임을 하는 반면 딸 아이의 눈치는 성호를 늘 가정의 울타리에 묶어 놓는 구심점이 되어 가고 있었다. 늙다리 형님은 서면에서 손님이 내리자 마자 다급하게 돌아온 듯싶었다. 좀처럼 일할 때는 부르지 않더니 왠 일이냐고 의아한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표정에 비장한 모습이 비춰졌으리라 늙은 사자의 아직은 녹슬지 않은 송곳니가 번득거렸다.
“얼마 전에 칠성파 아덜 줄 대고 있냐고 물었던 거…”
“온천장 아덜이 끼서…”
“내 그랄줄 알았다.”
“멀대놈에게 대충 듣고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온천장 일대를 주무대로 기생하는 21세기파가 하찮은 어린이집 잇권에 관여한 일을, 그로 인해서 살붙이보다 더 소중한 분이 난감한 지경에 처한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늙다리라고 불러지면서 스스로 자갈치 상권을 놓아줄 정도로 수하들에게 개인적인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고 어디에서 물러나야 함을 늘 입버릇처럼 털어놓고 간간이 자신의 무용담으로 묻혀 사는 늙은 사자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겹겹이 지나갔으리라.
“그래, 아직까지 내 생활비 보태라고 상납하는 아가 있기는 있다.”
“영도 아덜 데리고 택도 없을 것 같아서요...”
“근데…부딛치면 전쟁인데 그라모 곤란하다”
“형님, 부딛칠 것 같았으면 내 혼자 갑니더.”
“…..”
“안다.... 니 성격에 불 보듯 뻔하지.”
“맞불 만 놓자는 거지요 뒷 일은 내가 알아서 할낍니더.”
핸드폰이 울렸다.
남포동에서 기다리다 지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행니임 안내려 옵니꺼? 아덜 코 구녕 쑤시고 있심더 우짤까 예.”
“내 자갈치 성님 만나고 있으니까 니하고 둘 데리고 그리로 가 있그라”
“그라고, 나머지는 밥 묵이고 돌려보내라 알긋제 끝는다.”
녀석이 말문을 트기 전에 끊고 싶었다. 성호는- 자신의 결정에 문제가 복잡해지거나 혼탁해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숲의 그늘에 그늘이 짙다.
오솔길에 오솔길, 오솔길
덩굴이 짙은 길을 헤집어
길을 내고 싶다.
암흑이 드리운 정글에선
차라리 빛이 두렵다.
3
처음부터 숲이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사내가 공원을 찾는 이유가 단지 몸을 숨기기 위한 이유였을까 스스로 뿌리가 되려던 애초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난 후에 너도나도 숲이 되고자 투신하려는 세상에서 한발 물러나 적당한 자리가 나면 봉분 속에서 웅크리고 자신이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원형의 숲을 간직하고 싶은 별스런 욕망에 P는 사내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사내의 뒤통수에 대고 자신이 풀어내지 못했던 의문점을 던져본다. 사내는 공원 속 깊은 밴취 위에 보던 신문지를 정성스럽게 펴서 곁가지처럼 성성한 팔로 기지개 한 번 펴더니 모로 누워버렸다.
자궁 속에 들어앉은 아이처럼 사타구니까지 머리를 돌돌 말아 넣는 폼이 이미 작정하고 덩굴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듯이 보였다. 차라리 삭정이를 처내야 하는 피곤한 일상에서 사내는 삶의 포기각서 이상의 무엇,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으므로 버릴 것도 없는 무념의 경지까지 올라있다는 경외심이 드는 까닭은 또 무슨 심사인가 이제 막 잠을 청하기 시작했을 그의 겨드랑이를 쿡쿡 찔러보고 반응을 보고 싶은 건 또 무슨 심사인가..
미송나무 모가지에 기댄 채 화끈거리도록 쳐다보던 해가 눈 마주치자 담장 너머로 시선을 깔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개나 물어가 버려라" 성에 받힌 목소리가 공원 입구에서 바람을 몰고 들어온다 그 목소리는 일정한 반복으로 저벅거리며 P가 앉아있는 밴취를 향해서 주저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P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네온이 하나둘 켜지는 서녁 긴 나무의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었다.
"이 자리는 내 자리라고 우길 수 없지만 당신이 잠시 쉬어갈 목적이 다 되었다면 이제부터 양보해야 되겠소"라고 말이라도 한마디 했었다면 누워버린 자 대신에 그의 옆구리를 쥐여 박혔을 것이다. 그자는 안쪽 호주머니 속에서 싱싱한 생선을 꺼내듯이 매끈한 소주병을 꺼내 들었다. 취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만 있다면 거들먹거리며 따라다니는 하루 분량의 치욕들을 잠재우고 말겠는데..그 자는 세상에 믿을 것이라고는 이빨이라는 듯이 맥주병보다 야무진 소주병 뚜껑을 어렵지 않게 따내었다.
"보아 허니 내 신세나 그 신세나 저놈처럼 (그의 손끝에 막 지려는 해가 걸려 있었다.) 그럴 것 같았다.) 할 일 접고 눈치나 보며 대가리 쳐 박고 있는 신세가 비슷할 것 같수"
그가, 빌어먹을 놈들이라고 한 건 그가 빌어먹지 못하게 된 화풀이였을 것이다. 그가, 개나 물어 가버리라는 것은 개나 물어 가버릴 일들을 해 왔을것 같았다. 어디서고 흘레붙는 개들 개들 성호의 입에서도 저절로 사내의 말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개나 물어 가버려라... P는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을 과감하게 짬밥통으로 쏟아 부어버린 기분처럼 몹시도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