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4. 3. 24. 14:28

서유기

고종석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화기의 신호음을 죽여놓는 것은 내 오랜 버릇이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게 되는 것이 끔찍해서다. 전화 코드를 아예 빼어놓는 것이 가장 탐스러운 일이겠지만, 그것은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을 준다. 이 세상 안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동응답기를 통해서라도 바로 그 세상과 통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전날 밤 엉망으로 취해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몇 시간 뒤에나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전날 밤에 엉망으로 취해 집엘 들어왔고, 그래서 전화기의 신호음과 응답기 소리를 죽여놓는 것을 깜박 잊었다. 그것도 운명이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을 때 나는 우선 짜증부터 났다. 그 전화를 건 누군가에 대해서 살의까지 생겼다. 물론 나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제발 전화선 저쪽의 누군가가 마음을 바꿔 수화기를 내려놓기를 바라며, 전화벨이 다섯 번째 울리자마자 응답기가 작동됐다: "봉주르, 주 부 르메르시 드 보트로 아펠. 레세 앵 메사주. 실 부 플레. 안녕하세요. 전화 고맙습니다. 메모를 남겨 주십시오."

비몽사몽간에 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전화기 저편의 누군가가 이제야말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과감히 수화기를 내려놔! 삐 소리가 울렸음에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래, 그래, 전화기를 내려놔. 그러나 그 휴지는 잠시 동안의 망설임일 뿐이었다.

", 내 목소리를 잊은 건 아니죠? 지금 북역 안의 르보레라는 카페테리아에 있어요. 지금이 오전 아홉 시 십오 분인데 열한 시 반까지는 여기 있을 거예요. 한번 봤으면 해서 전화했어요. 잠깐만이라도요. 사실 내가 시간이 없기도 하고요. 열한 시 오십 분 기차로 파리를 떠날 참이에요. 이 메모를 듣게 되면 북역으로 나와줬으면 좋겠어요. 끊어요오."

여자는 수화기를 놓았고, 그 순간 나는 다시 잠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4년 만에 듣는 목소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살을 맞대고 살았다. 우리는 '896월에 결혼해서 '928월에 이혼을 했다. 이혼하기 전 6개월 정도는 따로 살았지만, 결혼하기 전 6개월 정도를 함께 살았으니 세 해 너머를 함께 산 것이다.

나는 윗몸을 일으켰다. 나무 덧창의 틈을 비집고 겨울 햇빛이 침대 위로 세어들고 있었다. 머리는 지끈지끈 아팠고, 목은 뭔가 차가운 액체를 갈구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하스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북역으로 나갈까말까에 대해 잠시 망설였다.

"르펜이 암살당했대?"

내 쪽으로 몸을 돌린 하스나가 내 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24년의 프랑스 체류가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한 그녀의 아랍어 악센트가 그랬더라면 밍밍했을 그녀의 프랑스어에 돋을무늬를 새기며 내 욕정을 다시 자극했다. 여느 때처럼. 그러나 나는 내 몸 속의 짐승을 을러대며 단지 그녀의 왼쪽 귓불만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그 친구는 건재해. 하스나 아야타가 아니면 누가 르펜을 죽일 수 있겠어?"

"실은, 그 자식을 목 졸라 죽이는 꿈을 꾸다가 깼어."

"거꾸로겠지. 아마?"

"아냐, 그 늙은 도살에 비하면 난 아직 젊고 힘세."

"그 늙은 도살자와 상관없이 넌 아직 젊고 힘세."

"그대의 아부는 늘 날 기분 좋게 간지럽혀."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흥얼거렸다. 그녀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이 계속 내 배를 간질이고 있었다.

", 지금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바닥과 등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내가 말했다.

"늦을 거야?"

"그렇지 않을 거야, 아마. 그저 잠깐 동안 내 영혼의 벗을 만나게 될 거야"

"그대 육체의 벗을 버려둔 채 말이지?"

"같이 갈래? 내 영혼과 육체가 둘다 행복해지도록 말이야."

나는 빈말로 물었다. 그 말에 하스나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녕 그러고 싶지만 내겐 잠이 더 필요해."

나는 기지개를 한번 활짝 켠 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정오 이전에 세면을 하지 않는 것도 내 오랜 버릇이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굳이 거울 앞에 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스물일곱 살 때부터 서른네 살 때까지 서울에서 나오는 한 영문 일간 신문의 기자로 일했다. 나는 그 신문사에서 아내를, 아내가 될 여자를, 지금은 전 아내가 된 여자를 만났다. 동료로서, 서울을 떠난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그녀와의 이혼이었다. 결혼했다가 이혼한 사람끼리 한 직장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즉시 직장을 떠났는데, 직장을 떠난 김에 아예 서울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아내가 있는 서울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꼭 그 이유만에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서울을 떠난 것이. 이혼이 그럴싸한 핑곗거리가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이혼 여부를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먼 곳에 대한 동경을 늘 키우고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좀더 밝은 삶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밝은 삶이. 가난도 억압도 없는 삶이. 나 자신의 가난과 억압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가난과 억압 말이다. 다만 얄궂은 것은, 내가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 그 도시가 그 오랜 가난을 말끔히 씻어내고 그 오랜 억압에서 서서히 풀려나기 시작한 뒤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서울의 가난과 억압이라는 것조차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회 전체의 가난이나 억압이라는 것을 떠나서 내게는 개인적인 불행 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불행의 책임이 내게 있든 내가 서울에서 알던 사람들에게 있든 말이다. 나는 어쨌든 내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이혼이라는 것은 그 과거를 지워버리는 계기로서 얼마나 그럴듯한 것인가.

굳이 파리로 오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이래 이 도시에 대해 지니고 있던 막연한 선망 때문이었다. 대학에서의 내 전공도 불문학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프랑스로 유학을 올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런 유혹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내 공부를 더 이상 뒷바라지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혹 다행스럽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공부를 해서 뭐가 될 자신은 없었다는 것이 그런 유혹을 물리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신문사엘 들어갔고, 결국 일곱 해 뒤에야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해서였지만.

일곱 해 동안 영어로 기사를 써서 밥을 먹고 살았으므로, 미국이나 영국으로 갔다면 먹고 살기는 지금보다 더 수월했을 것이다. 사실 파리에서 네 해를 산 지금도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것은 내게 여전히 힘들다.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산다고 하더라도 내 프랑스어가 유창해 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네 해를 영국이든 미국이든 호주든 영어가 쓰이는 나라에서 보냈더라면, 내 영어는 꽤 쓸 만한 것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 생각은 일종의 아쉬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다지 마음이 쏠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케미 슈즈의 텔레비전 광고에서 인상 깊게 보고 들은 에펠탑과 파리의 하늘 밑이라는 노래가 떠올랐고,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과 레지스탕스와, 앞에 신자나 반자가 덧붙은 사학 철학 소설 연극, 그리고 구조주의 해체주의 탈근대주의 같은, 내가 그 실체를 전혀 모르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개선문'이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같은 소설들에 대한 기억도 외국인으로서 파리에 사는 것이 꽤 낭만적이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내게 그럴듯하게 생각된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은 대체로 파리를 거쳐 간 사람들이었다. 나탈리 바니와 에즈라 파운드를 시작으로 헨리 밀러,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토마스 스턴스 앨리엇, 제임스 조이스, 맨 레이 같은 사람들 말이다. 지드니 콕토니 콜레트니 발레리니 피카소니 브라크니 아폴리네르니 막스 자콥 같은 사람들이 그 영미인들과 어울리며 빚어냈다는 1910년대, 20년대 파리의 특히 몽파르나스의 국제적 분위기가 내 상상 속에서 재구성되었다. 내 상상 속의 그 몽파르나스 풍경은 또 '말리서사'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시인 김수영이 아마도 다소 미화해 묘사한, 해방기 서울의 풍경과 포개졌다. 김수영은 그 수필에서 해방기의 서울이 '몽마르트르 같은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김수영이 파리엘 가보지 못한 만큼, 그 몽마르트르 같은 분위기도, 내 몽파르나스 풍경처럼, 김수영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 테지만 말이다.

김수영이 상상한 몽마르트르 같은 분위기, 그가 겪은 해방기의 서울은 '글쓰는 사람과 그 밖의 예술하는 사람과 저널리스트들과 그 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이었다. 김수영의 그 문장 속에서 레이맨은 내게 파리를 사랑하다가 파리에서 죽은 미국 화가 맨 레이를 연상시켰고, 김수영의 그 문장 속에서 저널리스트들이 내게 헤밍웨이를, 그리고 특히 재닛 플래너라는 미국 여자를 연상시켰다. 재닛 플래너라는 이름의 여기자가 '뉴요커'지에 '파리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칼럼을 50년간이나 연재했다는 얘기를 나는 어디선가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파리로 왔다. 헤밍웨이나 재닛 플래너처럼 파리의 영어 사용자가 되기 위해서.

물론 내가 헤밍웨이도 재닛 플레너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지는 않았다. 노력해서 나도 그들만큼 다부진 기자가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또 노력해서, 그들만큼 다부진 기자가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또 노력해서, 그들만큼이야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영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국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내가 노력한다면 미국 국적을 얻을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국적이 아니라 내 갈색 눈동자와 누런 피부였다. 그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헤밍웨이도 재닛 플래너도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그러나 물론 파리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소르본 대학 근처 라틴 쿼터에 스튜디오를 하나 얻어 거기다 컴퓨터와 팩시밀리를 비롯한 각종 현대적 장비들을 비치해놓고 프리랜스 기자로 새 출발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썼다. 영어와 한국어로. 정치에서 연예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다 내 취재 대상이 되었고, 나는 그 기사들을 주로 런던과 서울의 신문 잡지에 기고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주간 신문 '더 유러피언'과 서울에서 나오는 시사 주간지 '시사 저널'은 내가 고정적으로 기고하는 매체지만, 그 이외에도 나는 여기저기 기사를 팔았다. 기사 청탁을 내 쪽에서 거절하는 법은 없었다.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그 결과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나는 혼자 몸이므로,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법적으로는 말이다. 아내는, 그러니까 내 전 아내는, 본디 미인이었다. 내가 못 본 네 해 동안에 그녀는 더 예뻐진 것 같았다. 게다가 그사이에 오히려 더 젊어졌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르보레에 앉아 있는 여행자들 가운데 그 누가 그녀의 얼굴에서 서른다섯의 나이를 읽어내랴.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파이낸셜 타임스'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바로 그 모습이었다. 편집국의 자기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는 젊은 여기자의 모습. 나는 여덟 해 전에 바로 그 모습에 홀렸었다. 무언가를 읽으며 담배를 피울 때의 그녀의 표정. 그녀의 손 움직임에는 뭔가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있다. 그녀가 내 앞에 있었다. 그녀가 내 앞에 있다. 그녀를 만나는 것이 어쩌면 어색할지도 모른다는 내 마음 한구석의 걱정은 그녀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처녀였다. 내가 그녀를 허물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지금 뭘 뽐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성적 봉건주의를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섹스라는 것을 그저 심심풀이를 위한 전자오락처럼 생각한다. 그러니 처녀와 잤다는 것은 내게 뽐낼 일도 수치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처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그녀가 담배를 피우며 빚어내는 그 끈끈한 분위기 때문에 그랬다는 뜻이 아니라 스물여덟 살 먹은 여자가 처녀일 거라고 기대할 만큼 내가 엉뚱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와 처음 잠자리를 같이 했을 때 그녀가 처녀라는 걸 알고는 무척 놀랐다.

고백하건대 사실 나 역시 그 전까지는 여자를 몰랐다. 학교에 다닐 때든 군대에 있을 때든 나는 여자를 살 수 있는 그 수많은 기회를 물리쳤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열 살 넘어서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자와 간음을 했지만 말이다. 그것도 가장 전위적이고 불륜한 방식으로. 그렇지만 막상 육체적으로는, 뭔가 사건을 벌일 모험심이랄까, 실험 정신이랄까 하는 것이 내게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아내나 나나, 말하자면 일종의 푼수였던 셈이다. 나는 그것이 온전한 과거형이기를 바란다.

아내와의 그 첫 밤은 후텁지근한 여름밤이었고, 주말이었다. 속초의 한 여관에서였다. 우리는 동해를 보기 위해서 속초로 내려갔고, 바다를 본 김에 서로의 몸을 보기로 결정했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 방을 쓰기로 하고 옷을 벗기로 한 것이. 아마 말없이 느낌이 전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 밤, 우리들은 얼마나 서툴렀던지... 우리는 둘 다 그것을 원했지만, 사실 둘 다 상대편한테 깔보일까봐 두려웠다. 처음이라는 걸 상대방이 알까봐 말이다. 내가 아내의 마음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 서툰 의식이 끝난 뒤에 그녀가 내게 그렇게 고백했으니까. 우리는 푼수답게 서로의 깔봄과 서로의 수줍음을 애끼기로 했다.

우리는 근황을 주고받았다, 라기보다는 주로 그녀가 자기 얘기를 했다. 내가 신문사를 그만둔 뒤 넉 달쯤 뒤에 자기도 신문사를 때려치웠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기도 어지간히 강한 여자지만, 그 개새끼들의 눈초리를 맞받아내기가 곧 힘들어지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차라리 내쪽이 신문사에 남아 있었더라면 덜했을 거라고, 그 개새끼들이 이혼한 남자에 대해서 그런 눈초리를 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게 사내새끼들만은 아니었다고, 계집애들도 마찬가지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아니, 계집애들이 더하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계집애들이 여자 동료로서 자기를 감싸주기는커녕 사내새끼들이랑 어울려 자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뒷얘기를 하는 눈치를 보이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자기가 그런 눈치를 느낀 것은 절대로 무슨 웃기는 자의식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고 그녀는 되풀이 말했다. 군사 파시즘보다 여자들한테 더 무서운 것이 열녀 파시즘이고 정실파시즘이고 백년해로 파시즘이더라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신문에다가는 페미니즘이 어떻구 성의 해방이 어떻구 긁어대는 년들이 알고 보니 죄다 서방 콤플렉스, 순결 콤플렉스, 백년해로 콤플렉스, 열녀 콤플렉스, 정실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년들이더라고 그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년들이 그런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걸 보면 그년들도 행실이 그리 순결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고 그녀는 비웃듯이 말했다. 자기는 그런 콤플렉스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나서 한 해쯤 뒤에 한 보석 세공업자와 결혼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기의 지금 남편인 그 보석 세공업자는 나보다 나이는 다섯 살이 위지만 나보다도 오히려 더 젊어 보이고 나보다 훨씬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남편도 원하는 일이고 자기도 원하는 일이어서 자기가 남편 사업을 거들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사업차 앤트워프에 갈 일이 생겨서 유럽엘 오게 됐는데 날 보기 위해서 일부러 파리행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날 왜 보려고 했는지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막상 파리에 도착하자 내게 전화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이틀을 빈둥거렸다고 그녀는 말했다. 기다란 망설임 끝에 전화를 했고 거래처 사람과의 약속이 내일이어서, 아까 만일 내가 없어서 날 못 만나게 되었더라도 그냥 앤트워프로 갈 생각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서울로 되돌아가는 비행기는 암스테르담에서 탈 터이므로 다시 파리에 올 일은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전화 메시지를 듣고 역에 나온 건 자기한테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게 내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그게 내게도 다행스럽다고 나는 말했다.

"그냥 계속 여기서 살 거야?"

그녀는 아까 전화에서와는 달리, 날 보자마자 우리가 함께 살았던 때의 반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을 트니까, 그녀가 내 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그렇지만 알 수 없는 일이지, .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운명이 결정하는 거니까."

사실이 그랬다. 미래에 대해서 무슨 계획을 세우는 것은 내 성격이 아니다. 그때그때의 충동에 이끌려서 세상을 더듬거리고 있을 뿐이다. 일 분 뒤에, 한 시간 뒤에, 하루 뒤에 어떤 자극을 받아 내 신경이 거기 어떻게 반응할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뭐랄 순 없지만, 그만 서울로 들어오는 게 낫지 않나? 사람이 제 나라에서 살아야지. 얼굴이 상한 것 같아."

"그건 어제 술을 좀 마셔서 그래. 너랑 살 때도 늘상 그랬지 뭐. 술 마신 이튿날이면 얼굴이 반쪽이 됐다고 니가 핀잔을 주곤 했어. 발붙이고 살면 바로 거기가 다 내 나라야. 사람들은 다 똑같아.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교활하다는 점에서. 걸리버 여행기 생각나? 걸리버가 절망하고 혐오한 그 야후들이라구. 불란서놈들이나 조선놈들이나."

우리가 이혼하기 전 얼마 동안 우리는 언쟁이 잦았고, 언쟁을 할 때마다 서로를 야후라고 불렀다. '걸리버 여행기'의 제4'말들의 나라'에 나오는 야후 말이다. 인간의 형상을 한, 그러나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탐욕스럽고 사납고 불결한 동물. 우리는 서로에게 한 마리의 야후였다. 야후는 다른 동물들보다 자기 종족을 더 싫어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아직도 염세주의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시는군."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가볍게 비아냥댄 뒤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당장 세상을 버릴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야후들 틈새에서 살아야 한다면, 조선 야후들이 같이 있기 더 편하지 않나? 나면서부터 함께 살아온 익숙함이 있으니까 말이야."

"나와 똑같은 악취를 풍긴다는 점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어차피 그런 악취가 운명이라면 난 좀더 다양한 악취를 맡고 싶어."

"말장난 좀 그만해. 여기서 아무리 아등바등대봐야 결국 외국인 아냐?"

말장난을 거두라는 그녀의 말은 내게 말장난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어떤 말장난에도 진실이 스며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비록 그 함량이 문제이기는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외국인이야. 아니 그렇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 적어도 나는 어디서나 외국인이야. 이곳 경찰들한테만 외국인인 게 아니라 너한테도, 그러니까 한국인들한테도 외국인이구, 하느님한테도, 그런 게 있다면 하는 말이지만, 외국인이구, 그래, 나 자신한테도 외국인이야."

나는 에밀 시오랑의 어떤 문장을 비틀어서 그렇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 말에 내 진실이 담뿍 담겨 있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내가 한민수 어록을 들으려고 파리에 온 셈이군. 정말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안 변해? 그 청승은... 그렇다고 여기서 죽으 건 아니잖아?"

"아니 그럴지도 몰라. 한 해쯤 전까지는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끔찍했어. 몸이 아플 때면 겁이 덜컥 들면서 서울 생각이 났지. 몸은 서울에 묻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혹시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란서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서울 아닌 다른 데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서울에서 죽어도 죽을 땐 결국 혼자인걸 뭐. 누구나 다 그렇듯이."

"날 때도 그렇지."

그녀가 약간 쓸쓸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나는 담배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서울에 한 번도 안 들어왔었지?"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생각 안 나?"

", 처음엔 생각이 났지. 고운 생각이든 미운 생각이든. 니 생각하면 미운 생각이었구 다른 친구들 생각하면 고운 생각이었지. 그런데 이젠 별로 생각이 안 나. 사실 서울 생각이라고 해도 그게 서울이라는 공간에 ㄷ나 생각이 아니라 서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인 건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인젠 그 사람들 생각이 잘 안 나는 거지. 고운 기억이구 나쁜 기억이구 점점 희미해져. 그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

나는 파리 시내와 근교의 묘지들을 생각했다. 어디쯤에 내 몸을 묻으면 가장 그럴싸할까를 생각했다. 어디쯤에 내 몸을 묻으면 가장 그럴싸할까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내가 내 육신의 화장이라는 걸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장낸다는 걸. 죽음 뒤엔 쾌락만이 아니라 고통도 사라진다는 걸. 희로애락애오욕이 그걸 느꼈던 내 몸뚱어리와 함께 지워진다는 걸. 내 죽음과 함께 우주도 소멸한다는 걸. 그런데도 내 죽은 몸뚱어리가 불에 태워진다는 건 왠지 찜찜하다. 뜨거움을 느끼지도 못할 텐데. 그것은 늘상 세상이 싫다싫다 하면서도 죽는 걸 두려워하는 내 비겁한 당착과도 비슷하다. 그래, 내 염세는 진지한 염세가 아닐지도 모른다. 행여 그것이 진지한 염세는 또 삶에 대한 징그러운 애착과 등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싫으면서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야후의 냄새를 저주하면서, 야후의 냄새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요컨대 허무라는 걸 받아들일 만큼 내 마음은 크지도 비워지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이 몸뚱어리의 긴긴 존속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 몸뚱어리의.

"결혼은 안 하 거야?"

그녀가 삶 쪽으로 나를 불러내며 물었다. 나는 안도하며 담배를 힘껏 빨았다.

", 너한테 그렇게 질렸는데 결혼은 무슨 결혼이냐?"

나는 웃으며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결혼 비슷한 상태에 있기는 해. 아마 결혼으로 이어지지야 않겠지만."

하스나의 눈동자와 입술과 가슴과 엉덩이가 떠올랐다. 그녀가 내 앞에 있는 여자보다 확실히 덜 아름답다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그러나 하스나가 내 삶 속으로 들어온 건 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녀 덕분에 나는 파리에서, 아니 이 거대하고 고요한 우주 안에서 외로움을 눅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에게 끌릴 때, 그 끄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외모고 지성이고 재력이고 성격이고 뭐 그런 것들이겠지만, 결국 그런 것들은 분위기로 수렴되는 것 아닐까? 그런 것들이 이리저리 조합돼 빚어내는 분위기 말이다. 내 앞에 있는 여자에게 내가 오래 전에 반한 것, 재작년 가을에 하스나에게 반한 것, 그런 것들은 다 내가 그 여자들의 분위기에 반한 것 아닐까? 삶이란, 곧 그 분위기 아닐까?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성격이든 지능이든, 결국은, 인간의 뇌일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 반한다는 건 그 사람의 뇌에 반하는 것이리라. 그 뇌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진으로 본 인간의 뇌는 좀 끔찍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여자의 뇌도, 하스나의 뇌도 결코 보고 싶지 않다. 하기야 인간의 뼈라는 것도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의 내장이라는 것은 죄다 보기에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결굴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육체를 탐할 때 그가 또는 그녀가 몇 밀리미터의 살가죽뿐인 셈이다. 슬픈 일이다.

결혼 비슷한 상태에 있다는 내 말에 아내는, 내 전 아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자신의 결혼에 대해 내게 자상히 얘기를 해준 만큼 내가 거기서 입을 다무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외국 여자야."

"불란서 여자?"

그녀가 용기를 얻은 듯 물었다.

", 말하자면 불란서 여자지. 국적은. 사실은 아랍 여자야, 알제리 여자. 외국 여자라구 말해놓고 보니 정말 외국인이군. 나 같은. 너보다 두 살 어린데, 불행하게도 너보다 더 늙어 보여. 더 불행한 건 너보다 이해심도 없고."

그녀가 살포시 웃었다.

"경제적으론 괜찮어?"

"그걸 왜 니가 걱정하니?"

나는 가볍게 면박을 준 뒤에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덧붙였다.

", 나 혼자 버는 걸로도 두사람 먹는 건 충분한데, 같이 사는 여자도 일을 해. 나 같은 프리랜서야. 물론 보석 세공업자만큼이야 벌지 못하겠지만."

나는 마지막 말은 안 하는 게 좋았을 거라고 얼른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괘념치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보석 세공업자 운운보다 두 사람 먹는 건 운운이 더 인상적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렇게 말을 이었으니까.

"나 두 해 전에 딸아일 낳았어."

"잘됐군."

내가 시큰둥하게 받았다. 우리에게는, 나와 내 앞에 있는 여자 말이다, 아이가 없었다. 특별히 피임을 한 것은 아닌데도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물론 아내나 나나 그것 때문에 병원에 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둘 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으므로, 아이가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이혼을 하게 된 것은 절대 아니다. 시실, 이혼 사우라는 말처럼 우스꽝스러운 말도 없다. 그저 상대방에게 싫증이 났다는 것 말고 무슨 별다른 이혼 사유라는 게 있겠는가? 나는 이 여자에게 싫증이 났고, 이 여자도 내게 싫증이 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싫증이 출구 없이 지속되자 증오로까지 변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혼이 간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이가 있었다면 아내나 나나 헤어지기 전에 더 망설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망설임 끝에 결국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람 사이의 감정이라는 건 늘 변덕에 휘둘리게 마련이니까. 이 여자와 이혼까지 하게 된 것은 길게 보아 내게 다행스러운 일이었을까, 불행한 일이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당시에 이혼은 우리들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내가 재혼해서 아이를 낳은 걸 보니 불임의 원인은 나한테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하스나에게도 아이가 생기질 않는다. 그녀가 피임을 하고 있는 눈치도 아닌데.

"축하해."

내가 정색을 하고 말투를 고쳤다. 그러고는 약간의 질투심을 느끼며 진심으로 말했다.

"넌 그런데 아직도 전혀 아이 엄마 같지가 않다."

"아냐, 화장으로 지워서 그렇지 눈가에 벌써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걸."

그녀는 짐짓 표정을 찡그리며 눈가에 주름을 만들어 보였다. 내가 이 여자를 왜 그리 싫어했을까? 그리고 도대체 이 여자는 날 왜 그리 지겨워했담?

"내가 왜 한민수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방금 깨달았어."

나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아이를 낳았다는 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를 태운 기차는 북역을 떠났다. 그녀가 승강구에 오르기 전에 나는 그녀의 두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럽식으로. 그 감촉은 누이의 감촉이었다. 그녀가 승강구에 올라서 몸을 돌려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맞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은 의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탄 기차는 파리발 암스테르담행 열차다. 그 기차는 브뤼셀을 지나 앤트워프에다 그녀를 내려놓을 것이다.

막 떠나보낸 그녀의 얼굴에 하스나의 얼굴이 겹쳤다. 내가 하스나를 처음 본 것이 바로 이곳 북역에서다. 북역은 파리에 있는 여섯 개의 터미널 역 가운데 하나다. 북역에서 떠나는 열차들은 벨기에를 거쳐 네덜란드나 독일로 이어지거나 도버 해협의 유로 터널을 지나 런던의 워털투 역에 닿는다. 그날, 내가 하스나를 처음 본 날 말이다. 나는 파리에 들른 고등학교 동기생을 런던으로 태워보내기 위해 북역에 있었고, 하스나는 앤트워프로 취재를 갔다가 파리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때가 '95년 가을이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연쇄 폭탄 테러가 있었던 터여서 시내 곳곳에 무장한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좀 과장하자면 그때의 파리는 전두환 시대의 서울 풍경을 닮아 있었다. 물론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았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전두환 시대의 경찰이 검문하고 희롱한 것이 제 나라 대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었던 데 견주어, 그 당시 프랑스 경찰이 검문하고 때때로 굴욕감을 준 것은 주로 외국인 남자들이었다는 것이 우선 겉보기에도 달랐다. 본질적인 데까지 들어가면 그 다름은 커진다. 전두환의 경찰들이 시민들을 겁주기 위해서 시내 곳곳에 서 있었다면, 시라크의 경찰은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내 곳곳에 서 있었던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금방 이 말을 후회한다. 본질적인 데까지 들어가면 그 다름이 더 커진다고 말한 것을 말이다. 그 말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정말 본질적인 데까지 들어가면 전두환의 경찰과 시라크의 경찰이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어차피 체제의 유지를 위한 무력의 일부일 뿐이다. 어느 나라 경찰이든 근본적으론 권력의 하수인일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닮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적, 범죄자들과도 닮았다. 그렇다, 경찰과 범죄자란, 특히 조직 범죄자란, 본질적으로 같은 족속들이다. 단지 그들이 속한 조직이 다를 뿐이다. 탐욕스러운 독재자와 견결한 혁명가가 본질적으로 같은 족속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긴, 견결한 혁명가는 혁명이 성공하고 나면 흔히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변한다.

스탈린이라는 사람은 히틀러라는 사람과 과연 얼마나 달랐던 것일까? 희극 배우 같은 경박함을 곁들여서 자신의 약을 거리낌없이 만천하에 드러냈던 히틀러보다 동족과 이민족의 유혈-그 피는 대부분 프롤레타리아의 피였는데-위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도 늘상 전세계 노동자의 구세주로 자처한 스탈린이 오히려 내게는 더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히틀러가 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단박에 알 수 있지만 스탈린을 단죄하는 것은 뭔가 찜찜하다는 점에서-모스크바 재판? 실제로 그들은 죄다 간첩이었어, 피고들이 다 자백했잖아! 자기가 안한 짓을 했다고 하겠어? 설령 그렇더라도 죽이기까지 한 건 너무했다구? 이런 순진하긴 쯧쯧, 당시의 국제 정치 상황을 돌이켜보라구,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에 맞서서 우선 러시아의 혁명만이라도 보위했다구, 독소불가침 조약은 불가피한 것이었어, 우선 힘을 비축해놓아야 싸울 수 있을 것 아냐. 폴란드 침략과 분할? 우선 폴란드의 반쪽만이라도 나치즘으로부터 구해놓고 봐야 할 것 아닌가?-스탈린의 악은 더 교활하고 음험한 악이다.

스탈린은 정말로 노동자들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랑한 노동자는 그의 관념 속에 있는 노동자였지, 바로 그의 주변에서 숨쉬고 일하고 핍박받는 노동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현실 속의 비루한 노동자들은 죄다 그의 관념 속에 갈무리돼 있는 위대한 노동자 계급의 적이었다. 얄ㄱ은 일이다. 그의 냉혹한 정치적 리얼리즘이 그의 덜 떨어진 심리적 아이디얼리즘에서 나온 것이라면 말이다.

그의 국제주의는 소비에트 이기주의의 외피였고, 그의 소비에트 이기주의는 그 자신의 이기주의의 외피였다. 소련을 혁명의 조국으로, 모스크바를 혁명의 수도로 생각했던 그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 외국인 혁명가들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짜증스럽다. 미국의 일본인들이 잠재적인 간첩으로서 집단 수용되었듯이, 연해주의 조선인들도 잠재적인 간첩으로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외국인은 야만인이고, 외국인은 간첩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야만인들과 간첩들을 처치할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 경찰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파리에서 폭탄 테러가 이어졌을 때, 경찰의 검문이 외국인에게 쏠렸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당시 외국인 모두가 경찰의 검문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길거리에서 경찰의 경례를 받는 것은 대체로 아랍 사람들이었다. 수사 당국에서 그 연쇄 테러 혐의를 무장 이슬람 그룹이라는 알제리의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혐의는 사실 정당한 혐의이기도 했다. 아무튼 '95년 가을에 프랑스 경찰이 주로 아랍인을 검문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때문에 나는 하스나와 만나게 되었다.

역 한쪽이 소란스러워서 호기심으로 가보니 경찰과 두 사람이 아랍사람처럼 보이는 남녀 둘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그 남자는 경찰관과 이미 드잡이라도 한 듯, 웃옷이 엉망이 돼 있었다. 여자는 새된 목소리로 경찰관들에게 대들고 있었는데 그녀가 하스나였다.

사정은 이랬다. 경찰관들이 기차에서 내린 아랍 남자 한 사람을 검문하면서 그의 가방을 너무 꼼꼼히 뒤지자 검문의 대상이 된 남자가 거기에 항의를 했고, 그러자 경찰관들은 대뜸 그 남자에게 반말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랑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경찰관이 계속 고압적인 태도에 욕설까지 하자 남자가 거기 분개해 맞대들었고 경찰은 그를 공무 방해 혐의로 연행하기로 했다. 남자가 연행을 거부하며 버텼고 그래서 소동이 커지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 옆을 지나던 하스나가 거기 끼어들어 경찰관들에게 거칠게 항의한 것이다.

이 남자에게 테러와 관련된 혐의가 없다면 당신들이 그를 연행할 권리는 없고 당신들이 그에게 반말과 욕설을 한 것은 당신들이 인종주의자들이기 때문이라며 하스나는 이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가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경찰관들에게 그 말이 먹혀들 리 없었고, 그들은 하스나 역시 연행하려던 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끼여들어 경찰관에게 항의하는 동안 역 구내에 있던 다른 경찰관 네 명이 우리를 에워쌌고 결국 우리 셋은 모두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우리들이 연행될 즈음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경찰서로 가는 차 안에서 적어도 그들이 우리를 구타하지는 않았다. 그런 우리 손목에는 어처구니없이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그들은 흥분한 상태로 수틀리면 구타라도 할 기세였다. 그들은 계속 우리에게 반말을 사용했고 물론 우리도 이판사판인 셈이어서 계속 반말로 응수했는데, 나는 실상 분위기를 타고 반말로 대꾸는 하면서도 상당히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이 친구들이 예컨대 한국 경찰들보다 더 점잖을 거라고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스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조금도 겁을 집어먹지 않은 것 같았고, 경찰이 한마디하면 서너 마디는 대꾸하곤 했다. 설령 그 경찰관들 가운데 하나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여자인 하스나에게 손찌검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즉시 그 값을 치렀을 것이다. 하스나는 아나 수갑에 묶인 손을 가지고도 힘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는 그에게 물리적 타격을 가했을 테니까.

경찰서에서도 하스나의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들 줄 몰랐다. 그녀는 우리를 연행한 경찰관들에게 인종주의자라고 계속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고, 다른 경찰관들에게도 그리 곱지 않은 소리들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을 고소해서 철창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식으로 기소되지 않고 네 시간 만에 풀려난 것이 하스나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던 프레스 카드 덕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내가 프레스 카드를 꺼내자 그들의 태도가 사뭇 부드러워졌다는 점이 그걸 증명한다.

반말과 욕설을 먼저 한 것이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또 그 상황에서 수갑을 채운 것이 인권 유린에 가까운 직원 남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뭉개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기자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건 한국이고 프랑스고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녀서 사건을 불편한 방향으로 키울 수가 있으니 말이다 비록 프리랜서이기는 할망정 프랑스 외무부가 발급한 그 프레스 카드가 경찰관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판단을 잘못했다. 그들이 잘못 건드린 것은 내가 아니라 하스나였던 것이다. 경찰서에서의 네 시간은 내게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고,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여들어 하루를 완전히 망쳤다는 후회까지 겹쳤기 때문에, 나는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하스나는 나와는 달랐다. 풀려나자마자 그녀는 인권 단체나 변호사를 찾아가는 대신 '뤼마니테'-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 말이다-편집국으로 달려갔고, 그로부터 이틀 뒤에 하스나와 또 한사람의 아랍인-사건의 처음 당사자였던 말레크라는 모로코 사람-'뤼마니테' 1면 머릿기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머릿기사의 표제는 '바캉스에서 돌아온 경찰. 인종주의로 마수걸이'였고, 우리가 겪은 그 사건 외에도 비슷한 사건들을 묶어서 보도하고 있었다. 왼쪽 하단에는 하스나와의 인터뷰가 따로 상자 기사로 뽑혔다. 그날 치 '뤼마니테'의 사설은 프랑스가 테러를 구실 삼아 경찰 국가로 변하고 있고 특히 경찰이 인종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꾸짖고 있었다.

이틀 뒤에는 '리베라시옹''르 몽드'에도 비슷한 사례와 논조의 기사가 실려, 하스나는 문제의 경찰관들에게 충분히 분풀이를 한 셈이 되었다. 그 기사들이 그 경찰관들에게 실제로 얼마나 아팠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하스나는 내가 '더 유러피언'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우리가 겪은 사건을 기사화하라고 내게 충동질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자신이 당사자 가운데 하나인 사건을 기사로 쓰는 것이 좀 뭣해 그녀의 충동질을 물리쳤다.

하스나는 프리랜스 보도 사진 작가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고향인 알제리의 오랑에서 아홉 살 때까지 자랐고, 그 뒤 부모를 따라 니스로 왔으며, 열세 살 때 파리 근교의 몽트뢰이유로 이사 왔다. 하스나는 아랍어로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그녀는 나중에 내게 일러주었는데, 실제로 그녀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내 옛 아내에 견주면 그저 수수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나이는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인데도 나보다 젊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 하스나라는 이름이 그녀의 몸매를 지칭한 것이라면 그 이름은 정곡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몸매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젊기까지 하다. 특히 그 터질 듯 팽팽한 가슴이란. 그녀의 벗은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 그녀와 껴안고 있는 것만큼이나 좋아한다. 어떨 때는 껴안는 것보다 보는 걸 더 좋아한다. 껴안고 있을 때는 그녀의 몸 전체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 의식을 행하지는 않았고, 또 모스크에도 한 해에 한두 차례 정도나 얼굴을 비칠 뿐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모슬렘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물론 그녀는 코란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남녀 평등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경찰서에서 보낸 네 시간 동안 하스나와 나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공범 의식이 생겼고, 그래서 그 이후로 가끔씩 데이트를 했으며, 다섯 번째로 함께 잠을 잔 날 아침에 우리는 살림을 합치기로 결정했다. 내가 제안했고 그녀가 받아들였다. 이곳 사람들식으로 얘기하자면 자유 결합이었다. 그녀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고, 내 스튜디오는 둘이 살기엔 너무 비좁았으므로, 우리는 내가 살던 스튜디오 근처에 세 칸짜리 아파트를 새로 구해 실질적 부부가 되었다.

내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녀가 내게 자신의 이슬람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그 말을 하자, 그녀는 그것이 이슬람교의 관용주의라고 말했다. 이베리아 반도가 이슬람 치하에 있었을 때도, 당시의 통치자들은 기독교도를 비롯한 이교도들에게 세금을 매겼을 뿐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란이나 알제리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생각하면, 그녀의 주장이 꼭 옳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모든 종교에는, 모든 이념에는 근본주의적 속성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내가 종교에도 이념에도 몰두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다소 모호했다. 그녀 자신은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프랑스 언론의 근본주의 사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 언론이 정말 겨냥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 언론만이 아니라 서방의 언론이 죄다 그렇지만 이슬람 근본주의가 아니라 이슬람교 자체라는 것이었다. 특히 냉전이 끝나자 서방의 언론은 공격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됐는데, 예전의 공산권의 대타로 그들이 새로 설정하고 있는 적이 기독교 이외의 문화권, 특히 이슬람권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미국에서 얼마 전에 출간된 책 제목 덕분에 유명하게 된 지하드와 맥월드-지하드로 상징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맥도날드 햄버거로 대표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말이다-의 이분법을 서방 언론이 전술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프랑스 경찰 내의 인종주의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서방의 언론사를-비록 그 신문이 공산당 기관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찾아간 걸 보면 그녀의 그런 주장이 꼭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프랑스 언론이 이슬람 근본주의 비판한다는 구실 아래 이슬람교 자체에 대해서 문화 투쟁을 수행하고 있고, 그 문화 투쟁을 밀어붙이는 동력은 이슬람교에 대한 문화적 적의만이 아니라 백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인종적 우월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프랑스 교육부가 공립학교에서 베일을 쓰기를 고집하는 모슬렘 여학생들을 단속하라는 지침을 내렸을 때, 공인된 극우파 신문 말고도 다른 일부 언론에서마저 교육부의 조처를 거들고 나온 데에 대해 그녀는 분개하고 있었다. 자신은 여성이 베일을 쓰는 데 결코 찬성하지는 않지만, 베일을 쓸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고 베일을 쓰는 것이 근본주의의 표징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또 프랑스 정부든 언론이든 그들이 알제리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퍼붓는 비판의 반만이라도 알제리의 군부 정권에 돌렸다면 알제리의 상황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졌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여자들이 자의든 타의든 살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게 그녀의 남녀 평등주의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가 궁금했고, 정치적 맥락이야 어떻든 알제리를 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 군부 정권의 폭압 이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무차별 테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입을 다물곤 했다.

네 해 만에 만난 여자를 태운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손바닥 하나가 내 등을 때렸다.

"한 형 아니야, 여기 웬 일이야?"

정태하 씨였다.

"정 선배, 정 선배야말로 여기 웬일이세요?"

", 민선이가 집에 왔다가 쾰른으로 되돌아갈 때가 돼서 배웅 나왔다가 막 보낸 참이야."

정태하 씨는 파리에서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파리에 정착하고 얼마 안 돼서였다. 파리 8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던 대학 후배를 통해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한 무역 회사의 파리 주재원으로 일하던 지난 '79년 한국에서 터진 어떤 좌익 조직 사건에 연루된 뒤 귀국을 포기하고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망명은 강요된 망명이었고 내 망명은 자발적 망명이었으나, 나는 그의 지쳐 보이는 얼굴과 서툴러 보이는 처세에서 어떤 동병상련을 느꼈고, 단박 그와 친해졌다. 그는 버려진 자였고, 나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버려진 자였으므로.

그가 한국 나이로 마흔아홉이 되던 '95년에 그는 오랜 가난으로부터 다소간 해방되었다. 그가 자신의 대학 시절과 망명 생활을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해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덕분이다. 그는 그 뒤로 서울에서 나오는 몇몇 진보적 매체들의 단골 필자가 되었고, 내친김에 몽파르나스에 스튜디오를 하나 얻어 그곳을 작업실로 이용하고 있다. 아예 문필가의 길로 나선 것이다 민선은 그의 딸 이름이다. 그녀는 파리 7대학을 졸업하고 쾰른으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독일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근데 정말 한 형은 웬일이야?"

"저도 누구 배웅 나왔다가 막 보낸 참이에요. 서울에서 알던 친구 하나가 파리에 잠깐 들렀었어요."

"그랬구면. 가만있자, 시간도 거진 다됐는데 점심이나 같이하지.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이 밥 먹은 지도 한 달 가까이 돼가네."

사실 그랬다. 나와 정태하 씨는 보통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세상 욕하고 그랬었는데(물론 술을 주로 마시는 건 나다. 정태하 씨는 술자리의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술 자체는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 즈음엔 나도 하스나와 함께 프랑스의 신문과 한국의 신문을 비교하는 책을 한 권 써보겠다고 스튜디오에서 두문불출해 한 달 가까이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물론 전화는 이따금씩 주고받았지만.

나는 속이 느글거려 밥 생각이 없었지만, 그를 본 것이 오랜만이고 해서 그의 제의에 응했다. 우리는 평소에 잘 가는 퐁피두 센터 근처의 일식집 토오쿄오엘 자주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내 탓이다. 정태하 씨는 사실 일식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원체 외식을 잘 하지도 않지만, 그는 굳이 외식을 하더라도 나와 함께가 아니라면 주로 한국 식당엘 가고,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일식보다는 그리스 식당이나 터키 식당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내가 생선회를 워낙 좋아하는 걸 알고는 나와 만나선 대체로 그가 먼저 토오쿄오로 가자고 제안하곤 했다. 토오쿄오는 내가 파리에서 가본 일식집 가운데 가장 음식을 잘하는 집은 결코 아니지만, 가장 식대가 싼 집이다.

나는 장국이나 몇 개 시켜서 마시고 말겠다고 했으나, 정태하 씨가 우겨서 우리는 생선회 이인분과 정종을 시켰다. 술은 말자고 해도 그가 막무가내였다. 내가 안 마시면 자기가 다 마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내게는 매일매일 술몫이 따로 있다는 비감 또는 희열에 빠져 그에게 동의하고 말았는데, 정태하 씨는 정종이 오자마자 정말로 두 잔을 내리 마셨다 . 나도 그에 질세라 한 잔 두 잔 마셨는데, 참 묘한 일이다. 해장술이라는 것에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종이 목구멍을 통해 위로 흘러들어가면서 속이 오히려 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작업이 얼마나 진척됐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정태하 씨가 쓰고 있는 책은 프랑스의 주요 신문들과 한국의 몇 개 신문들의 논조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한 가지일 수는 없는 이상 신문이라는 것도 운명적으로 편파적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정태하 씨 생각으로는 프랑스의 신문들이 이념적 색채를 떠나서 적어도 논조의 일관성은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데 견주어 한국의 신문들은 한 신문의 논조가 오락가락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프랑스에서는 '르 피가로' 같은 신문이 보수주의의 대변지이고 '리베라시옹' 같은 신문이 좌파를 대표하는 신문이라는 것은 그 신문들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한국의 신문들은 그것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지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지면 안에서 정치적 사회적 정황에 따라 정반대의 논조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국 신문에 대한 정태하 씨의 작업은 그러니까 어떤 신문이 보수적이고 어떤 신문이 진보적이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한 신문 안에서 논조가 얼마나 일관되고 얼마나 변덕스러우냐를 따져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서 한 해 전부터 한국의 중앙 일간 신문 다섯 개를 구독하고 있었다. 내가 하스나와 함께 만들고 있는 책은-사실은 하스나가 하는 일을 내가 옆에서 거들고 있다고 해야겠지만-지금까지 하스나가 찍은 사진들 가운데 유럽의 사회 운동에 관한 사진 아흔아홉 개를 추려내 사진마다 짤막한 단장을 붙이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향한 아흔아홉 걸음'이라고 우리가 임시로 표제를 붙여본 이 책에는 그러니까 주로 집회나 시위나 농성을 담은 사진들이 실릴 것이었다. 그 사진들에 붙이는 단장들이 되도록 시적이고 잠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하스나의 생각이어서 우리들은 그 문장들을 다듬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었다.

"한 형, 우리, 보부르에 가서 한잔 더 하지."

풍피두 센터의 별칭인 보부르는 퐁피두 센터 바로 옆에 있는 맥주집 이름이기도 하다. 어느 그리스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그 집은 파리의 비좁은 여느 카페들고는 달리 널찍한 독일풍의 맥주집이다. 서울의 대학로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주집들과 비슷하다.

"괜찮으시겠어요, 정 선배? 벌써 정 선배 정량은 넘어선 것 같은데."

나는 사실 정종 몇 잔에 이미 술 발동이 걸려버린 상태였다. 술이 술을 부른다고 몇 시간 전 그렇게 물에 목말라하던 기억은 어느 때부터 희미해져버리고 이제 술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나의 쾌락 추구는 뒷일에 대한 계산을 모른다. 그렇지만 정태하 씨가 여느 때에 비해 너무 술을 급하게 드는 것 같아 나는 예의로라도 그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냐, 오늘은 좀 마셔야겠어. 원고도 대충 마무리됐고 또 술 마셔본 지도 너무 오래됐어. 그리구 한 형이랑 할 얘기도 있고."

그래서 우리는 보부르로 자리를 옮겼다.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파리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노래가 파리의 하늘 밑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다뉴브 가의 잔물결로 바뀌었다. 다뉴브 강을 끼고 있는 동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는 이 노래를 다뉴브 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파리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듣는다. 주로 거리의 악사를 통해서다. 지하철이나 광장 한 모퉁이에서 아코디언이나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켜며 구걸을 하는 그 거리의 악사들 말이다. 그들이 가장 즐겨 연주하는 곡이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다. 그 곡조가 슬프기도 하지만, 그 슬픈 곡조가 걸인들의 이미지와도 포개져 내게는 다뉴브 강이 꼭 가난을 상징하는 강처럼 생각된다. 그러고 보니 악기를 들고 있든 그렇지 않든 내가 파리에 정착한 두로도 걸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기야 프랑스 정부의 통계로도 실업자가 계속 늘고 있으니-경제 활동 인구 여덟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실업자다-, 걸인이 느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파리에는 풍요의 느낌이 없다, 적어도 서울에 견주면 말이다. 쇠락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도시에선 정말 세기말의 냄새가 난다. 정태하 씨는 술이 들어가더니 그날따라 자꾸 서울 얘기를 꺼냈다.

"서울은 많이 변했겠지?"

서울은 그의 고향이다. 그는 서울 한복판 가회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를 종로구에서 다녔다.

"정말 많이 변했죠. 정 선배가 파리로 오신 게 '79년이니까 벌써 17년 전 아녜요? 상전벽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아마 지난 4년 동안에도 많이 변했을 거예요. 종로 쪽이야 변두리에 비해서 크게 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울 전체로 보면 완전히 새로운 도시라고 말해도 될 거예요. 어떻게 보면 과거가 없는 도시라고도 할 수 있죠, 파리오는 달리. 누구한테 들은 것 같은데 파리는 19세기 그대루래며요."

그렇다, 이 도시는 이미 19세기에 완성된 도시다. 우리가 지금 보는 파리는 19세기의 파리다. 파리의 지리와 풍경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파리를 배경으로 한 19세기 또는 그 이전의 소설이나 그 당시의 지지를 들추며 그것들이 한 세기도 훨씬 전에 씌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좀체로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도시는 한 세기 이상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좋게 변한 건 아니군.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역사의 흔적을 다 없애버린 거 아냐."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제 생각엔. 물론 유럽의 도시들과는 다르죠. 역사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그리고 브라질이나 호주의 어떤 도시들처럼 세심한 도시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시도 아니구요. 분명히 어설프다는 느낌은 있어요. 그렇지만 그게 꼭 좋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왜 그렇지?"

"전 개발론자는 아니지만, 어려서 보았던 서울의 가난한 풍경에 무슨 향수 같은 건 없어요. 과거라는 건 대개 미화되게 마련이어서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저는 안 그래요. 비만 오면 장화 없인 살 수 없었던 도시, 천변에 판잣집들이 게딱지처럼 늘어서 있었던 도시가 사실 서울이잖아요. 정 선배한테 차마 드릴 말씀이 아니긴 하지만, 전 때때로 박정희 시대라는 게 전적으로 부정되어야만 할 시대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박정희와맞서 싸우다 30대 초에 국제 미아가 되어버린 뒤 50줄에 이르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박정희 시대라는 걸 긍정적 맥락에서 거론하는 것은 일견 잔인한 짓일 것이다. 그러나 내겐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라는 게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박정희는 박정희고 박정희 시대는 박정희 시대인 것이다. 박정희가 박정희 시대를 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지하의 시와 옥중 투쟁도, 정태하 씨의 반체제적 운동도 박정희 시대의 한 얼굴인 것이다. 박정희의 시를 한국 문학사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 정치사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박정희 시대라고 말해놓고 보니 묘한 감회가 생겼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이념적으로 무색무취했던 터여서 내게 그에 대한 커다란 증오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죽음이 일순 마음을 후련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해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그의 시대는 나같이 평범한 주변인의 마음에까지도 뭔가 무거움을 얹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이승만 시대였지만, 나는 박정희가 죽고 나서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때까지 대통령이라는 직함 앞에 박정희라는 고유명사와 대통령이라는 보통명사는 동의어였다. 80년대 초에 성장기에 진입한 프랑스인들에게 미테랑이라는 이름과 대통령이라는 말이 동의어였듯이 말이다. 최규하 대통령, 최 대통령이라는 말이 처음엔 얼마나 어색하게 들렸던지. 대통령은 박정희이어야만 했고, 박 대통령이어야만 했다. 그 박정희가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결국 개발론자구먼, . 결과적으로 서울의 외양이 변했으니까 다 잘된 거라는 거 아냐. 그 개발의 과정에서 다친 사람들 생각을 해야지.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이 생겼을 거구. 그 아파트에 정작 입주한 사람들은 그런 철거민들이 아니었을 거 아냐. 철거민들만이 아니지. 근대화라는 걸 한다구 박정희가 없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어? 농촌은 피폐해졌고, 농민의 다수가 도시 변두리로 흘러들어와 저임금 노동자가 됐고, 잔업 철야에 시달리는 그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노조를 만들 권리도 없구. 지금 한국 경제가 외형적으로 그럴싸하게 보인다고 해도 그건 결국 그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그리 된 거 아냐? 그런데도 한 형 생각엔 박정희한테도 사줄 만한 점이 있다 이거지?"

"반드시 그런 뜻은 아니에요, 정 선배. 전 생래적으로 군인 정치가들은 찜찜해요. 이쪽 사람들이 숭배하는 드골 같은 사람들까지를 포함해서요. 그치들은 대게 애국심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죠. 더구나 박정희를 드골에 비교할 수야 없죠. 무슨 애국심이구 개인적 이력이구 역사 의식이구를 떠나서 박정희가 정적으로 박해했던 방식은 피에 주린 음모가 이상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정 선배도 말씀하셨듯이 박정희 시대라는 게 박정희 혼자서 만든 시대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경제 개발이라는 것도 결국 노동자들을 포함해서 한국인 모두가 집단적으로 이뤄낸 성과라고 생각하면,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거기에 대해 크게 거부감을 가질 건 없을 것 같아요. 박정희 시대라고 제가 말씀드린 게 잘못된 것 같은데, 그냥 그건 편의상 그렇게 부른 거지. 그게 박정희가 만든 시대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건 궤변이야, 한 형. 사람들이 한국의 경제 개발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건 그걸 박정희가 이뤄서가 아니라구, 그게 낳은 부작용 때문이지. 단지 박정희가 미워서 박정희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란 말이야. 박정희가 그 쿠데타 방식으로 내세운, 하면 된다는 그 성장 제일주의가 지금에 와서는 백화점과 다리를 무너뜨리고 사회 전체를 부패의 늪으로 빠트린 것 아니냔 말이지. 그러니까 박정희의 가장 큰 잘못은 한국 사회를 윤리적 불감증 상태로 몰아넣은데 있는 것 아닐까?"

"분명히 부작용은 있었죠.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60년대 이래 한국 경제의 확장 속도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니까 거기에 따른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었겠죠. 농촌은 피폐해졌고, 공동체적 유대는 옅어졌고, 사람들은 더 그악스러워졌겠죠. 그렇지만 한편으로 보면, 부패는 조금 다른 얘기지만, 도시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이라는 건 피할 수 없는 추세가 아닌가요? 이걸 패배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예요."

"그게 패배주의라면 차라리 낫겠어, 한 형. 그렇지만 한 형의 그런 말투에선 패배자의 자괴감이 아니라 승리자의 폭력이, 힘의 논리가 느껴진다구. 무슨 말이냐 하면 도시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이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 한 형이 말할 때, 거기선 이게 대세다, 이 흐름을 거스르는 자는 파멸이다, 하는 협박 같은 게 느껴진다구. 사회주의 체제의 파산 앞에서 맘에도 없이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정색을 하고는 자본주의 만세, 시장 만세를 부르는 주류 이데올로그들이나 회심한 좌파의 협박 같은 거 말이야."

"제 변명을 하자면 그 시기에 대해서, 우리가 그걸 박정희 시대라고 부르든 또 뭐라고 부르든 말이죠. 그 시기에 대해서 제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도 그리 좋지는 않아요. 아니 사실은 끔찍하죠. 그래요, 저임금, 철야, 잔업, 전태일의 분신, 일본인들의 기생 관광,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철거, 남산의 중앙정보부, 빙고 호텔의 물 고문 전기 고문, 영화 상영 전의 애국가, 대한 뉴스, 국기에 대한 맹세, 박정희의 이름과 함께 소문으로 떠돌던 모모 탤런트들의 이름, 민방위 훈련, 학원 간첩단 소동, 남침 위협, 그래요, 전 중학교 때까지도 이따금씩 전쟁이 터지는 꿈을 꾸곤 했어요. 북쪽 사람들의 전면 남침으로 불바다가 된 서울의 꿈을요, 그것만이 아니죠. 야간 통금, 장발 단속, 치마 단속, 금지곡, 군사 훈련 그저 죄다 그런 것들이에요. 사실 그런 것들을 빼놓고는 저도 박정희 시대를 되돌아볼 수 없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좀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이었다.

"위험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결과론에 불과하지만, 박정희 시대의 한국이 피노체트 시대의 칠레보다는 더 낫지 않았느냐는 거죠."

나는 지금 너무 막 나가는 게 아닐까?

"경제 개발 때문에?"

"아니라고는 말씀 못드리겠어요. 사람들이 정말 가난할 때, 그러니까 거기서 무슨 값싼 낭만을 느낄 정도의 그만그만한 가난이 아니라, 잠자리와 끼니에 대한 걱정을 늘상 해야만 할 때 말예요. 그때도 과연 사람들 사이의 유대라는 게 가능할까요?"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단지 가난하다고 불평을 하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가난하다고, 그러니까 불평등하다고 불평을 하는 거라구. 예전에는, 한국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했던 예전에는, 콩 한 쪽이라도 서로 나눠먹는 인정이라는 게 있었다구. 그런 인간의 심성을 파괴해버린 거야, 박정희는 경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인간다운 점을 말이야."

"글쎄 저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더 그악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가난 속에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 가난이라는 게 진짜 가난이라면 말이에요. 되풀이되는 얘기지만 그런 적빈 속에서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기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튼 한 형은 개발론자인 거 아냐. 처음부터 자백을 하지. 왜 굳이 아니라구 하누? 자연은 파괴됐고, 공해 물질이 국토 전체를 뒤덮어버린 거 아냐? 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해서 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미리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하면 된다는 생각만 앞섰던 거지."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어요. 확실히 환경은 오염되고 있고, 그것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기주의, 그리고 다음에 올 세대들에 대한 지금 세대의 이기주의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전 근본적 환경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별로 믿음이 안 가요. 그 사람들은 전통사회의 공동체를 그리워하지만, 제가 그런 전통사회에서 이끌어내는 이미지는 질병, 기아, 자연 재해, 노예 노동, 엄격한 신분질서, 더러움, 억압된 욕망 그런 것들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과연 근대화된 사회의 인간이 전근대적 사회의 인간보다 반드시 더 이기적인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요."

"한 형의 서울은 아름다운 서울이군."

정태하 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정 선배. 그렇다면 제가 왜 파리로 도망 나왔겠어요? 서울이 가난하지 않은 도시인 건 확실하지만 자유로운 도시도 아니거든요. 가난하고서는 인간의 존엄이 유지될 수 없지만, 다른 편으론 물질적 여유만 가지고 그 존엄이 획득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어야죠. 그래요, 풍요의 느낌은 서울이 파리보다 훨씬 더 있어요. 파리의 이 촌녀석들을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라는 데 갖다놓으면 눈이 휘둥그레질 거예요. 그렇지만 서울의 공기는 억압적인 공기예요. 요샌 길거리에 담배 꽁초도 못 버리게 한다잖아요. 전 싱가포르 같은 도시는 딱 질색이에요. 파리에 막 와서 지저분한 길거리와 신호등을 무시하는 보행자들을 보고 마음이 후련했어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타레가의 알함크라 궁전의 추억이 채우고 있었다. 나는 알함브라 궁전을 생각했다. 지난해 5월에 하스나와 함께 찾았던 그 아름다운 궁을. 그 궁전 안에 하스나가 있었다. 하스나를 바라보는 나도 있었다. 나도 하스나도 알함브라 궁전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본궁의 아라베스크 문양에 한동안 넋을 빼앗긴 뒤 헤네랄리페 별궁 앞의 정원을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 오월의꽃들과 나무들과 샘들 사이를. 그때 하스나는 알카사바 성에서 그라나다 시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육백 년 전엔 저 거리를 아랍 사람들이 걸었다는 걸 상상할 수 있겠어? 나는 양탄자와 마법의 램프를 지닌 사람들이 말이야."

하스나의 그 말에는 아랍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8세기 이래 이베리아 반도에 지구 위의 가장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던 모로인의 자부심과 15세기 말 지구 위의 가장 아름다운 궁전을 버리고 유럽 바깥으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던 모로인의 아쉬움이.

알함브라 궁전의 빼어난 아름다움이야 말할 나위 없는 것이었지만, 그라나다라는 도시 전체가 아름답기도 했다. 그리고 그 도시는 무엇보다도 이국적이었다. 유럽풍의도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알함브라 궁에서 내려다보는 그라나다는 중세 아랍의 도시였다. 천일야화 속의 도시. 알라딘과 신밧드가 걸었던 도시. 하스나의 말마따나 나는 양탄자와 마법의 램프가 사고 팔렸던 시장의 도시. 사랑과 미움과 탐욕과 술수와 보은과 지혜와 야심과 기적이 배회하는 인간시장. 그 나는 양탄자와 마법의 램프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다시 알함브라로 가볼 수 있으련만. 하스나와 함께 그리고 정태하 씨가 원한다면 그도 함께. 순식간에 날아가 알함브라 옆에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지을 수도 있으련만.

실제로 알함브라에 다녀온 얼마 뒤 하스나와 나는 몽트뢰이유의 벼룩 시장엘 가서 낡은 램프와 양탄자를 샀다. 그것이 나는 양탄자와 마법의 램프라도 되는 듯이. 내 거실의 테이블 위에 노인 그 램프는 이따금씩 하스나와 나 둘만의 오붓한 술자리를 밝히고, 거실 바닥에 놓인 그 양탄자는 침실이 너무 멀 만큼 다급할 때 하스나의 나의 벗은 육체를 떠받친다.

몽트뢰이유도 그라나다가 이국적이라는 의미에서 이국적이다. 즉 아랍적이다. 그러나 몽트뢰이유는 그라나다처럼 단순히 건물들의 분위기가 아랍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악센트 강한 프랑스어를 쓰는 아랍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하긴 파리 주변에야 어디고 아랍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상인들과 고객들이 내지르는 프랑스어의 억센 아랍어 악센트 때문에, 몽트뢰이유 벼룩 시장은 파리 교외의 시장이 아니라 마치 중세 바그다드의 시장 같다. 즉 천일야화 속의 시장이다. 그러니 하스나와 내가 산 그 양탄자가 나는 양탄자이고 그 램프가 마법의 램프라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시장은 어디나 비숫하다. 그것이 이야기 속의 시장이든 현실 속의 시장이든. 그것이 아랍의 시장이든, 유럽의 시장이든, 서울의 시장이든, 시장에서는 자유와 생명의 냄새가 난다.

실제로 내 유년기의 조각난 기억들 가운데 가장 반짝거리는 부분은 시장에 대한 기억이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만 가면 왠지 신바람이 나곤 했다. 그곳엔 세상의 온갖 보화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의 시끌벅적함은 풍요이고 자유이고 활기였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황홀이었다. 내게 서울은 기억은 그러니까 시장의 기억이다. 그 기억은 또 흔히 내 침샘을 자극한다. 신촌 시장의 해장국이나 남대문 시장의 떡볶이 같은 것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늘상 허기져 자란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양탄자가 있다면 그라나다를 들러 서울의 신촌 시장과 남대문 시장엘 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떡볶이와 튀김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하스나와 함께. 그리고 정태하 씨가 원한다면 그도 함께.

"서울이 그리워."

정태하 씨가 침묵을 깼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끝났다.

"그라나다엘 들렀다 가는 거죠. 나는 양탄자를 타고 말이에요?"

나는 얼결에 그렇게 말했으나 정태하 씨의 표정이 여전히 진지했으므로, 즉시 내 몽상의 창을 닫고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그는 서울이 그리웠던 것이다. 언제고 서울이 그립지 않았던 때는 없었겠지만 오늘따라 더 서울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래서 자꾸 서울에 대해서 마땅치 않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울엘 갈 수 없다. 그가 여권 대신 지니고 있는 여행 증명서 행선지란에는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라는 문구가 선명히 박혀 있는 것이다. 아니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적 분위기로 보아서 그가 귀국한다고 해서 큰 고초를 겪거나 하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그의 글이 여기저기 나돌아 다니는 곳이 서울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일단 서울로 들어가면 그의 망명자 지위는 박탈된다. 그러면 그는 17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서울에서 새롭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때 문득 그이 책이 서울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이후 그의 표정이 오히려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사실 그 책의 출간은 그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그 책에다 망명 생활의 설움과 외로움을 토해냈고, 그것은 그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됐을 것이다. 책이 출간된 뒤 그는 수백 명의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고, 그의 책을 읽었든 그렇지 않든 서울의 웬만한 사람들은 이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가 나온 대학의 학보사는 지난해에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동문들 가운데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을 묻는 앙케이트를 실시했는데, 그는 서울의 숱한 명망가들을 제치고 4위에 기록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 책을 통해서 그 오랜 가난의 주름을 조금은 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환해지지 않았다. 나와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그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내 고질적인 시니시즘을, 나에 대한 그의 불만의 가장 큰 이유였던 그 시니시즘을, 예전처럼 그리 책망하지도 않았다. 이따금은 나의 그 시니시즘에 동의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것을 이념의 푯대가 부러져버린 시대에 대한 그의 실망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또는 쉰을 넘겨버린 나이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틀렸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내게 서울이 그립다고 얘기했을 때에야, 미욱한 나는 책 출간 이후에 그의 얼굴이 더 어두워진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근본적 이유가 말세가 돼버린 세상에 있든 천명을 알아버린 그의 나이에 있든, 그는 서울이 그리웠던 것이다. 서울엘 가고 싶었던 것이다.

책이 출간되기 전에는 그는 서울에 돌아간다는 것을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욕망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꼭꼭 눌려 담겨 밖으로 튀어나올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서울 사람들과의 연락이 아예 두절된 터였으므로, 서울의 서울 사람들만이 아니라 파리의 서울 사람들과도 아예 연락이 두절된 터였으므로,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깨어날 여지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아 버린 것이다. 그는 많은 서울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지만, 그래서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활짝 피어났지만, 그는 법적으로 여전히 망명자이고, 여전히 서울에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한 형, 나 말이야... 귀화하면 안 될까?"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에서 그가 그 말을 얼마나 어렵게 뗐는지를, 그 말을 꺼내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를 즉각 읽어낼 수 있었다. 사실 귀화는 그와 가족이 서울을 방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어려운 질문에는 쉽고 단호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침묵은, 그게 잠깐의 침묵일지라도 그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왜 안 되겠어요? 정 선배가 귀화한다고 정 선배한테 뭐랄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정 선배의 세월을 아무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말예요. 게다가 아이들은 어차피 불란서 사람으로 살아야 할 텐데요 뭐."

사실이 그렇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다. 정태하 씨가 북역에서 쾰른으로 보낸 민선이고 파리 4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현선이라는 아이다. 그 아이들이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서울에 대한 기억은 두 아이 모두에게 거의 없다. 정태하 씨의 부인이 그 아이들을 극성스레 한글 학교에 보낸 덕에 한국어를 그럭저럭 읽을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 아이들이 서울로 돌아가 한국인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외국인인 그 아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역시 외국인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가 그리도 서툰 그 아이들에게 외국인이라는 느낌은 여기보다 서울에서 훨씬 더 클 것이다. 정태하 씨의 부인도 그렇다. 생활력이 강한 그녀는 서울에서 사건이 터지고 가족의 망명이 결정된 뒤로 지금까지 줄곧 파리에서 직장 생활을 해오며 살림의 큰 부분을 떠맡아왔다. 그녀가 맺어온 교우의 망은 파리에 있지, 서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정태하 씨와 그의 가족 사이의 다른 점이다. 말하자면 그의 아이들은 국적이 한국으로 돼 있을지라도 정서적으론 이미 프랑스인이 돼버린 상태고, 그의 아내 역시 반쯤은 프랑스인이 돼 있는 상태이지만, 정태하 씨 자신은 아직까지 순순한 한국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정태하 씨가 아이들처럼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내처럼 상근 직장엘 줄곧 나간 것도 아니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정태하 씨는 17년 이상 외국에서 산 사람치고는 너무나 한국인이다. 가족들이 육체는 한국인이되 정신은 프랑스화되었다면, 정태하 씨 자신은 육체고 정신이고 고스란히 한국인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따금씩 가벼운 농담으로 그에게 친불주의자의 딱지를 붙이기도 하고, 그 역시 그와 가족을 받아들인 프랑스 사회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편이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프랑스 사람이 될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그는 이식해서는 잘 재배가 안 되는재래종 식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한국으로 돌아가 살기는 힘들 터였다. 그는 17년 동안 서울을 비웠고, 그러므로 서울에 대한 그의 기억은 17년 전에 멈춰져 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 그 세월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는 이미 서른세 살의 그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서울의 그 17년이란 얼마나 현기증 나는 17년인가? 결국 그도, 그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다. 그렇다면 그가 서울을 방문할 수 있는 방법은 귀화밖에 없다. 그것은 명확한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내게 꺼내기 전에 얼마나 망설였을까? 그 말을 꺼내기 위해서 그에게는 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평소의 그가 잘 감당하지 못하는 술이. 그게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지를 알아챈 내가 얼른 그리 대답은 했으나, 그리고 나 역시 그가 여생을 추방된 한국인으로 살기보다는 귀화한 프랑스인으로 살며 서울을 오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나, 내 마음 한구석엔 뭔가 착잡한 것이 내려앉았다. 상징이라는 것이 늘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는 박정희 시절 이래 유럽으로 건너온 한국인 망명자들 가운데서 아직까지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보다는, 프랑스인으로서 정태하 씨의 삶이 그리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애국자여서,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유별난 애정이 있어서 든 생각은 아니다. 사실 나는 어설픈 몽상가다. 그리고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 대해, 나라에 대해 별다른 애정도 없다. 그리고 아내에게, 그러니까 이전 아내에게 말했듯, 아마 내 삶을 외국 어디에선가 마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난 한국 국적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니 한국 국적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겠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을 생각은 전혀 없다. 다시 한번, 그것은 내가 애국자여서가 아니다. 단지 그 절차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귀화라는 행위는 적극적인 국적 취득 행위다. 그것은 출생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세상에 막 태어나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적을 부여받는 것과는 달리 성인이 되어서 자기 의사에 따라 어느 나라의 국적을 획득한다는 것은 그 나라에 대한 충성의 선서를 전제한다. 내 막연한 짐작으로는 실제로 귀화 과정에 그런 선서식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귀화자에게는 토착인들에게보다 더 큰 충성심을 요구하는 법이니까.

나라면 그것을 결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대해서도 충성을 다짐해본 적이 없는 내가 또 다른 나라에 대해 충성을 맹세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어린 시절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걸 외우며, 오후 다섯시의 국기 하강식 때 울려퍼지는 애국가 앞에서 몸을 정지시키며, 나는 얼마나 굴욕감을 느꼈던가? 나는 어떤 집단에 대해서도 충성을 맹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태하 씨는 나 같은 세계시민주의적 몽상가가 아니다. 그의 기나긴 망명 생활의 원인이 된 조직은 통일 운동을 비밀 결사였다. 그가 그 조직에 가담했다는 것은 나와 달리 그에겐 명백한 조국이 있고, 그 조국은 말할 나위 없이 남과 북을 아우른 한국이라는 것을 뜻한다. 정태하 씨가 지금까지 귀화를 하지 않고 버틴 것은 그가 자기 삶의 그런 삶의 무게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과연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충성을 선서할 수 있을까? 더구나 공식적 방법으로 말이다. 그것은 그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을까?

때도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의 프랑스는 예전의 프랑스가 아니다. 1930년대 이래 인종주의가 최악의 기승을 부리는 사회인 것이다. 그 인종주의는 르펜이라는 자가 이끄는 극우 정당 국민전선만의 것이 아니다. 국민전선의 지지자든 아니든 반수에 가까운 토박이 프랑스인들이 적극적인 또는 소극적인 인종주의를 고백하고 있다. 침체된 경제 사정이 큰 원인이기는 하겠지만 외국인들의 체류 조건이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불법 체류자들은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한 전세 비행기가 쉴 새 없이 뜨는 나라다.

그 인종주의는 또 단순한 정치적 문화적 차원의 외국인 혐오가 아니라 생물적 차원의 인종주의다. 예컨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서 20세기 내내 프랑스인들이 품고 있던 독일인 혐오가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 단순한 외국인 혐오였다면, 지금 프랑스에 만연하고 있는 것은 '인종은 평등하지 않다'는 유사 나치즘 교의에 기초한 진짜 인종주의인 것이다. 즉 국적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 인종주의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국적 여부를 떠나서 백인 이외의 사람들이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외국 국적의 사람들 이상으로 귀화한 비-유럽계 프랑스인들이 그 인종주의의 먹이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여론 조사 결과가 보여주고 있었다. 정태하 씨가 귀화를 한다고 해도 그가 백인이 아닌 이상 진짜 프랑스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단지 하나의 변경에서 또 하나의 변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인데 그 자리 옮김을 그가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그 전날 파리 시내의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시작돼 강베타 광장으로까지 이어진 시위에 하스나와 함께 참가했었다. 최근에 파리 제 20구에 어렵사리 설립 허가가 난 이슬람 사원을 두고 국민전선이 며칠 전부터 대대적인 반대 시위를 조직한 터여서 이에 맞서 일단의 이슬람 교도들과 인권 운동 단체들이 역시위를 조직한 것이다. 세상만사에 시큰둥한 나는 그저 하스나에 이끌려 그 시위에 참가했을 뿐인데, 시위가 끝난 뒤 몇몇 아랍계 프랑스인 친구들과 밤늦도록 가진 술자리에서도 외국계 프랑스인이 이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대한 얘기들이 나왔었다.

그러나 사려를 가장한 내 이런 생각들은 한편으로 얼마나 사려 없는 망상인가? 결국 나는 진정으로 정태하 씨를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처지를 내 처지로 완전히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을 만큼 사려가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내게 그런 사려가 있었다면, 내가 달콤한 환상에 젖어 찾은 파리가 지난 17년 동안 그에겐 감옥과 다름없었다는 걸 실감할 만큼 사려가 있었다면, 마땅히 그가 얘기하기 전에, 한 해 전이든 두 해 전이든, 내 쪽에서 먼저 그에게 귀화를 권했어야 했을 것이다. 도대체 귀화란 게 뭐란 말인가? 종이 쪽지 몇 장 만드는 일에 불과한 일 아닌가?

"아니야, 한 형, 내가 술 탓에 괜한 소릴 한 모양이군. 귀화는 무슨 귀화야. 지금처럼 살면 되지. 아이들이야 이젠 저희들 뜻에 맡겨야겠지만 나랑 여편네랑은 이대로 살 거야."

정태하 씨가 쓸쓸하게 말했다. 그의 눈이 젖어 있었고, 그 젖은 눈이 내 입을 막았다. 짧은 겨울해가 어느새 뉘엿거렸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센 강을 향해 걸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센 강에 거의 이르렀을 때 내가 옆의 행인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게 센 강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물론이죠."

그 역시 호기롭게 대답했다.

"우리 강 건너서 한잔 더 하지."

시테 섬을 걸으며 정태하 씨가 말했다.

"좋죠, 뭐 밤새 마십시다."

내가 기꺼이 약을 써서 받았고, 정태하 씨가 더 큰 목소리로 맞받았다.

"하스나 좀 나오라구 해, 얼굴 본 지 오래됐어!"

생미셸 다리를 건너 카페 데파르 생미셸에 자리를 잡은 뒤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 번 갔을 때, 내 목소리가 들렸다.

"봉주르, 주 부 르메르시 드 보트르 아펠, 레세 앵 메사주, 실 부 플레. 안녕하세요, 전화 고맙습니다. 메모를 남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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