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
부용산
최성각
그때 은미가 앵콜을 받아서 노래를 몇 곡 더 부르면서 그사이에 부용산도 슬그머니 끼어넣어 불렀다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무슨 노래야 슬프고 좋은데...'
마침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수에게 내가 물었다. 처음 들어 보는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얼렐레 저 녀석 저 노랜 잘 안 부르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은미의 선배인 경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쥑인다 쥑여 앵콜.'
국회의원에 나왔다 떨어진 두엽이 플라스틱 소주 됫병을 들고 버스의 좌석 난간에 걸터앉아서 소리쳤다. 노래라면 사족을 못 쓰는 두엽이었다. 앵콜을 외치면서도 두엽은 들고 있던 소주병으로 사람들에게 소주를 따르느라 정신이 없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소리쳐 은미에게 앵콜을 청했다. 은미는 마지못해 한 곡을 더 불렀다. 이번에도 흘러간 뽕짝이었다. 미아리 고개 어쩌구하는 노래였던 듯싶다. 머리를 뒤로 묶은 은미는 노래를 부를 때에는 목에 가느다란 핏줄이 돋곤 했다. 이상하게도 목의 가느다란 힘줄이 노래 부르는 그녀에게 어울렸다. 어딘가 처연하면서도 그 처연함이 낯설지 않았던 것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청바지에 체크 무늬의 푸른색 나방 그리고 두껍지 않은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던 은미는 어떻게 봐도 서른이 넘은 노처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대개 산삼 심기 행사는 1박 2일로 진행되었고 성루를 빠져나갈 즈음 사람 소개가 끝나면 소주잔이 오가고 노래들이 터져나오곤 했는데 그때 강원도 정선 산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농심마니 패들에 합류한 은미에 대한 소개는 면목동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경수가 맡았다. 은미는 경수의 한의과 후배로서 아직 학생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처녀라는 것이 경수에 의해 특별히 강조되었다. 그러나 한의과에 다니는 아리따운 노처녀보다도 그녀가 강압에 의해 부르게 된 노래로 인해 은미는 더 시선을 끌었다. 전날 정선으로 내려올 때에도 은미는 앵콜을 받았었다. 은미가 부르던 노래는 한결같이 노래가 생긴 지 오래되었건만 여전히 되불려지고 있는 노래 그러니까 흘러간 트로트였다. 비내리는 고모령 울고 넘는 박달재 황성옛터... 는 물론이었고 나중에는 심수봉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 뽕짝이 예사로운 뽕짝이 아니었다.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어김없이 흐르는 메들리 뽕짝 가수들은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던 게다. 음정과 박자도 정확했고 끌 때에는 끌었고 당길 때에는 당겼고 넘어갈 때에는 꼴가닥 넘어갔으며 알던 가사도 잊어버리는 노래방 시대에 가사도 너무나 정확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배로 부르는지 목으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렇잖아도 노는 일이라면 모두 내로라 하는 농심마니 패들이 은미에게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가관이라면 가관이었다.
농심마니란 산에 산삼을 심는 사람들이라는 말로서 산삼을 캐는 사람들을 뜻하는 심마니와 달리 그 말이 생긴 지 10여 년이 조금 넘는 조어였다. 국운 쇠퇴와 참혹한 일제 강점 그리고 미증유의 동족상잔 그 후 미완의 혁명을 깔아뭉갠 5월 쿠데타를 필두로 길고도 긴 군부 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가 공교롭게도 산삼의 씨가 마르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는 다소 엉뚱스러운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산삼 심기는 자연을 잡아먹으면서 건강을 사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라 산삼을 심음으로써 우리 땅의 정기를 되찾고자 하는 취지에서 발상된 작은 문화운동이었다. 독서회 친구들과 가까운 산꾼이 중심이 되어 나 또한 모임의 시작부터 관여하고 있는 농심마니는 산삼의 묘삼을 산에 심되 심은 자가 캐먹지는 않는다는 이타적인 정신을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환쟁이 글쟁이 얼론인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 산악인 농사꾼 장사꾼 전교조 교사 일반 직장인들...로 구성된 모임은 봄가을 벌이는 두 차례 산삼 심기 행사에 한 번이라도 참여하면 그대로 정식 멤버가 되어 버리는, 말하자면 까다롭지 않은 열린 모임이었다. 워낙 모임의 들락거림이 수월해 장안의 내로라 하는 날건달과 술꾼들이 다 기웃거리다 보니 산행 언저리에 술로 인한 잡음도 더러 있었지만 산삼 심기가 어언 10년이 넘도록 지속되자 이제는 단순한 임의 모임이 아니라 산삼을 심는 그 행사가 제법 사회적 의미도 띠게 되었다. 그 동안 스물세 차례의 산삼 심기를 통해 농심마니패들이 전국 골골샅샅에 심은 산삼의 묘삼만도 수만 뿌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는 것은 산삼의 묘삼이지만 보이지 않게 심어지는 것은 그것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은미가 선배를 따라 처음 참여했던 그때의 산삼 심기 장소는 정선 하장의 야산이었다. 숙박과 식사는 동면 몰우대 언저리 숲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강원도 친구가 준비했다. 도착한 날 밤에도 장작에 불을 붙이고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졌는데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은미는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별로 말이 없었다. 대개는 선배인 경수 옆에 붙어 있었지만 가끔씩은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곤 했다. 일부러 말을 붙여보지는 않았지만 한마디로 인상이 깨끗한 아가씨였다. 그러나 그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 누구나 자세히 보면 의당 느낄 수 있는 그늘도 언뜻언뜻 느껴지는 아가씨였다. 어떤 젊은인들 그늘이 없으랴.
'무슨 아가씨가 노랠 저렇게 잘해.'
농심마니 대장이면서 산악인인 박인식 선배가 경수에게 물었다.
'저 솜씨가 하루 이틀을 생긴 게 아니라 그래요.'
경수가 박 선배에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다. 같은 연배인 경수와 나는 같은 독서회 회원이었다. 말하자면 농심마니 창설 멤버인 셈이었다.
'아버진 쟤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돌아가신 모양이야. 그리곤 꽤나 어렵게 학교를 다닌 모양인데 저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일 나갔다 돌아온 어머니에게 매일 밤 뽕짝을 불러 드렸다는 거 아냐.'
'어머니에게 뽕짝을 불러 주다니.'
'그것도 이불 속에서 말야. 나도 맨 처음 그 얘기 들을 때 콧날이 징하더라구. 나중에야 사정을 알게 됐지만...'
경수의 말은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은미는 미아리 고개...에 연이어 으악새 우는 사연...을 한 번 더 뽑고 있었다. 박 선배와 나는 말없이 은미의 노래를 들었다. 더 이상 경수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정도 정보만으로도 짐작이 전혀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산동네 어느 사글세방에서 낮의 막일로 피곤에 지쳐 누운 어머니에게 흘러간 뽕짝을 나직이 불러주는 소녀의 모습이. 딸의 노래를 듣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어느 홀로 된 여인의 모습이. 어머니가 잠든 뒤 다시 공부를 좀더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나인 몇이야.'
'서른둘인가 그럴 거야. 무슨 전문대학에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한의과대학에 다시 시험쳐 들어왔으니깐 보기엔 저레 갸냘퍼 보여도 아주 독족이야 독종.'
'지금은 살기 좀 나아졌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리야까도 끌고 막일도 했는데 이젠 영등포 근처 어느 재래시장에 과일 노점사을 하나 가지게 된 모양이야. 그치만 공분 아마 쟤 혼자 벌어서 하다시피 했을 걸. 이젠 곧 졸업이니까 개업도 개업이지만 결혼을 해야 할 테네 말야.'
경수가 말했다. 본디 잔정이 많은 친구였지만 경수의 어투에 은미에 대한 남다른 정이 담겨 있음을 어렵잖게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아가씨로군.'
박 서내가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노래와 거듭 돌아가는 소주잔 귀경하는 버스 속이라는 게 늘 그렇긴 하지만 그런 난장판 비슷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은미가 그때 흘러간 뽕짝 사이에 슬며시 끼워 넣듯이 불렀던 그 노래에 대해 더 이상 경수에게 묻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부용산을 듣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그 다음 농심마니 산행 때였다. 부용산을 들려준 사람은 그 또한 한 사람의 농심마니이면서 한겨레신문사의 논설위원인 김종철 선배였다.
봄가을 일 년에 두 번 치뤄지는 산삼 심기는 지난번 정선행에 이어 이번에는 정읍 내장산 언저리로 잡혔다. 이번 산삼 심기에는 서울을 들락거리며 10여 년쯤 전 우리 땅에 산삼을 심자고 처음 제창한 울릉도 사람 고 이덕영이 발해의 해양활동 탐사라는 기치를 내걸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뗏목을 타고 부산으로 흘러 내려오다 태풍으로 일본 오끼 섬 근처에서 조난 당한 데 대한 위령제도 곁들여졌다. 고인이 서울에 오면 동식서숙하던 패들이 바로 박 선배를 포함한 산꾼들이었던 것이다. 나야 산꾼은 아니었지만 10여 년 전 잡지사 시절부터 박 선배와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고 고인 또한 그렇게 흐르던 인연 속에서 마침내는 한겨울남의 나라 앞바다에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더욱이 고인이 뗏목의 난간에 한쪽 다리를 묶어 배가 전복될 때 정강이뼈 언저리가 절단되어 두 동강 났다는 뒷이야기는 그 비장함이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바 있었다. 위령제와 산신제가 함께 올려졌고 지난해에만 해도 같은 산행에 있던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게 된 분위기 때문에 이번 산삼 심기 산행은 전에 없이 무거운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무겁다기보다 지인의 비장한 죽음이 가져온 숙연함으로 인해 타성적으로 살며 켜켜이 쌓인 마땅히 벗겨져 내려야 할 때가 벗겨진 듯한 씻긴 감정도 어쩌면 없지 않았다 해야 할 것이다.
'부용산이라는 노랠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 전라도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 노래를 거의 다 알지. 오랫동안 빨치산 노래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내가 이 노래를 알게 된 것은 쫓겨다닐 때부터였는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얼마 전에 한국일보 김정우 선생 칼럼에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으니 서울 가면 한번 찾아보도록.'
버스의 앞쪽에 앉아 있던 김 선배였다.
낮고 분명한 목소리도 그렇지만 또박또박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그대로 글로 옮겨도 문장이 되는 김 선배 특유의 방식은 언제나 듣는 이들을 새삼스럽게 긴장시키곤 했느네 이번에도 그러했다. 이음씨나 어찌씨조차 그는 매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발음하곤 했는데 사실 그런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쫓겨다닐 때부터라는 말은 그의 언론민주화 활동과 그로 인한 수난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말이었다.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의 순정성이 그들의 이력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에 문학평론도 한 언론인인 그가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세상을 보고 읽겠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게 느껴지곤 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일요일 밤시간이라 귀경하는 밤 버스의 속력은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었다. 김 선배가 버스의 앞쪽을 향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노래 도중에 간간히 마이크의 잡음이 더러 섞였지만 노래는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애상이 가슴을 찌르고 있었지만 틈이 없는 격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랫말에서는 빨치산 노래라는 노래의 위명과는 달리 뚜렷한 사상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가버렸는데 그의 존재가 안타깝게도 결실을 맺지는 못한 모양이라는 것 그리고 부용산 오리길의 숲과 거기 푸르디푸른 하늘은 노랫말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의 처연한 비극미가 강조되어 있는 듯했지만 흔들리는 버스에서 들은 김 선배의 딱 한 차례 노랫소리로는 그러나 곡의 이해에 만족할 만큼 가까이 갔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노래가 왠지 처음 들어 보는 노래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노래를 마친 김 선배는 이번 모임에 처음 참여한 뒷자리의 젊은이들에 의해 그가 전날 정읍으로 내려올 때 불렀던 노래 꽃밭에서나 내가 만일 따위의 지정곡 앵콜로 들어갔다. 뒷자리의 젊은이들은 빨치산 노래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김 선배는 마지못해 앵콜 곡 중 내가 만일을 한 번 더 부르기 시작했다.
'귀에 익어 왠지.'
옆자리에 있던 세경에게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난 번 은민가 그 아가씨가 불렀었잖어. 거 왜 경수 후배 한의과 다닌다는 노처녀 말야. 이번엔 안 왔네 그 아가씨.'
농심마니 산행에 거의 빠지지 않는 출판업을 하는 세경이 말했다. 세경은 은미가 이번 산행에 빠졌음을 이미 확실하게 짚고 있었던 터였다. 그 순간 나는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려 경수를 찾았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앞쪽으로는 경수가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수는 내가 앉은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를 찾는 눈치이자 그 또한 내 쪽으로 몸을 당겼다.
'바로 저 노래야.'
경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종이컵속의 소주를 비운 뒤 내가 컵을 건넸다.
'저번에 은미가 불렀던 노래가 저 노래지.'
소주를 받으면서 내가 물었다.
'응 부용산.'
그가 짧게 답했다. 그는 지나 번 산행 때 은미의 노래가 끝난 뒤 내 질문에 답하지 못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놀랍다. 김 선배가 어디서 노랠 배웠는지 거의 원형에 가까운 것 같애. 은미 부용산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구말야. 언젠가 한번 송영 선생 노래를 들었었는데 김 선배 부용산이 송 선생 부용산과 거의 흡사한 것 같군. 사실 나도 원형이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말야.'
원형에 가깝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경수의 옆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는 부용산이라는 빨치산 노래에 내가 전에 없이 흥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관심이 노래에 대한 관심이었는지 은미에 대한 관심이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송영 선생이라면 소설 쓰는.'
경수에게 술을 따르며 내가 물었다.
'응.'
경수가 짧게 대꾸했다. 만나 인사를 드린 적은 없지만 송선생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알만한 사람이라면 아는 일이었다. 그라면 충분히 부용산을 접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어렵잖이 들었다.
'송영 선생 말고도 김지하 선생이나 황석영 선생도 즐겨 불렀다는 소리가 있어. 당연한 일이지만 말야. 근데 정곡이 없어 아직. 모두들 악보 없이 입에서 입으로 배웠기 때문일 거야.'
경수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러구 보니 부용산을 부를 줄 알리라고 떠오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로구먼.'
'응 남쪽 사람들은 엔간하면 이 노랠 다 알어. 운동권 애들도 덩달아 따라 부르고...'
경수의 설명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알고 있다는 데에 왠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김 선배가 부른 안치환의 노래가 거의 합창처럼 어우러져 끝나자 함께 노래를 불렀다는 상기된 감정이 김 선배에게 다시 노래를 청하게 했다.
'앵콜 김 선생님 어제 그 노래 있잖아요 정훈희 노래.'
뒷좌석의 젊은이들이 소리지렀다. 어제 그 노래 중의 정훈희 노래라면 꽃밭에서였다.
'무슨 앵콜은 앵콜 다른 사람 노랠 듣지 뭘. 경업이 어디 한번 네팔가나 불러 보지.'
'네팔가라면 언젠가 히말라야 트레킹 때 어디로 갈거나로 시작되는 우리 노래를 보지산 봉알봉에 좃씨를...' 어쩌구 하는 네팔가를 발정난 수캐처럼 그러면서도 구성지게 불러제꼈다.
'은미는 그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됐지 어린 녀석이.'
내가 물었다. 나는 네팔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걔 아버지가 빨치산이었어.'
경수가 대답했다.
빨치산이라는 말은 그 말이 쓸데없이 그리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해도 꼭 써야 한다면 스스럼없는 일상어가 되어 버렸다는 감도 그리 틀린 감이 아닐진대 그럼에도 지루하고 맥 빠지는 일상의 공기에 갑자기 탄력을 실을 정도의 환기력은 여전히 지나고 있었다.
'아하.'
나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 같은 것이 베어 나왔다.
버스가 좌우로 흔들렸다. 갑자기 버스가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만나는 회덕 인터체인지를 지나는 모양이었다. 그 구간은 공사 때문에 급한 커브가 유난히 많은 구간이었다.
'그치만 어떻게 된 거야 나이가 안 맞잖어.'
한참 있다가 내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은미가 빨치산의 딸이라면 그토록 어릴 수가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전향을 하고 나왔거던. 그러니까 은미는 출소한 뒤에 낳은 자식이지. 그게 첫 결혼이기도 했지만 말야.'
경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지난 해 가을 산행 때 무리에서 좀 떨어진 어둠 속에 그녀가 홀로 서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부용산은 빨치산 노래라기보다는 더 정확히는 빨치산들도 부르던 노래라 해야 할 거야.'
경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부용이라면 꽃이름 아닌가.'
세경이 경수에게 물었다.
'음 연꽃이야 연꽃. 그치만 전라도 벌교에 가면 부용산이란 산이 실제 있다나 봐. 그 지방과 관련돤 노래이기도 하구 말야. 목포설 벌교설이 시방 팽팽하지만 말야.'
'도무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네.'
세경이 말했다.
'경수 형 형도 그 노래 부를 줄 알어.'
가만히 경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좌석의 한 친구가 물었다. 장승을 깎는 명덕이었다.
'알지.'
'근데 넌 왜 그 동안 한 번도 안 불렀어.'
내가 물었다.
'아무데서나 막 불러제낄 노래가 아니었어. 금지곡이었으니까. 나야 여기저기 따라다니다가 배웠지.'
경수가 말했다. 오리발로도 통하는 경수는 크고 작은 시민운동에 꽤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빨치산들이 불렀다고 해서 입에서 절로 나오는 노랠 못 부르게 해 차라리 숨을 못 쉬게 하는 게 낫지.'
'그러니까 빨치산들이 앉았던 소나무 그늘에 앉거나 빨치산들이 쳐다보던 구름도 보면 안 된다니깐. 그 사람들이 바라보던 노을도 물론이고 그게 다 죄가 된다니까...'
내가 빈정거렸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손치고 어디 한번 불러 봐라. 되게 궁금하다.'
'아직도 그런 시절 아닌가 모르겠네. 그나저나 김 선배만큼 난 못 부른다. 나중에 부르자구.'
경수가 뒤로 뺐다.
이 땅에 전라도는 그토록 길고도 어처구니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에 그런 은밀한 노래 한 가락을 가슴속 깊이 내장하고 그 노래로 서로를 부축하고 위로하고 더러는 깊은 울화를 삭이고 있었구나. 뜬금없이 그런 다소 신파조의 고즈넉한 생각이 들자 나는 들고 있던 종이잔의 소주를 얼른 목구멍 깊숙이 털어 넣었다. 버스는 중부고속도로를 버리고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선 듯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래 나는 곧 김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일보 기사의 출처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통신으로 들어가 김성우 에세이를 찾았다. 기사 검색식으로 잠시 헤매다가 어렵지 않게 나는 정설 부용산이라는 칼럼을 화면에 떠올릴 수 있었다.
김성우 논설위원은 부용산과 관련하여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두 개의 에세이를 썼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하나는 1998년 2월 13일에 게재된 부용산 오리길에이고 다른 하나는 한 달 뒤인 3월 27일에 쓴 정설 부용산이라는 에세이였다.
김 논설위원이 부용산을 처음 들은 것은 20년 전 박성룡 시인이 불렀다고 했다. 노래 끝에 박 시인은 이 노래의 애상의 곡조가 가슴을 찔렀다고 쓰고 있었다. 그 후 노래를 잊고 있던 김 논설위원은 우연히 지난 해 목포 출신의 배우 김성옥 씨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된다. 뜻밖이고 반가운 마음에 노래의 출처를 물었더니 김성옥 씨 또한 모른다고 답한다. 자기만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이 없더라는 말과 함께 김성옥 씨는 그런 채로 그러나 호남 지방 특히 전남 지역에서 언제부터인가 오래 전부터 이 노래가 악보도 없이 구전으로 널리 불려온다고 덧붙인다. 그러구 보니 김 논설위원이 20년 전 처음 들었던 박 시인도 해남 사라이었음을 떠올린다.
호남인이라야 아는 노래가 따로 있다니. 왜 이 아까운 곡조의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지 않았을까. 이런 고운 노래를 왜 어느 가수도 취입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이 노래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김성우 논설위원이 부용산의 내력을 추적하게 된 동기라면 동기였다.
김 논설위원은 목포에 사는 김성옥 씨에게 부탁한다. 김성옥씨는 얼마 후 황급히 상경한다. 서울에 사는 한 여성이 이 노래의 키를 쥐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경기대에서 일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김효자 교수가 그였다. 김 교수의 증언이 계속된다.
광복 직후 김효자 학생이 다니던 항도여중에 안성현이라는 작곡가가 음악교사로 부임한다. 당시 지방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크게 활약하던 조희관 교장이 초빙해 온 것이란다. 안 교사는 월북한 무용가 안막의 조카였다. 안막은 최승희의 남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 교수의 같은 반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이 소녀는 광복 직전 서울의 경성사범에 합격한 천재소녀였다. 광보으로 인해 고향에 내려와 항도여중에 전학한 것이다. 좋은 집안에 성적은 늘 수석이었고 예쁘고 조숙했단다. 책도 많이 읽었고 자작시가 문예지에 당선된 적도 있었단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이 천재소녀는 1948년 여중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죽는다. 온 하교가 울었단다. 이때 시인이었던 박기동이라는 국어선생이 제자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가사를 쓰고 안 선생이 곡을 붙였단다. 이 슬픈 노래는 배금순이라는 노래 잘하던 학생이 발표했고 전교생이 불렀고 이윽고 교문 밖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작곡자 안성현 교사는 6 25 때 월북했다는데 소문에 의하면 북한에서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지내기도 했단다. 부용산이 입에서 입으로 불리면서 차츰 작고가의 정체가 숨어 버린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고 김 놈설 위원은 쓰고 있었다.
작사가 박기동 선생은 3년 전까지 서울에 거주하다가 호주로 이민을 갔다고 칼럼은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제자였던 김효자 교수가 안성현 작곡집을 소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칼럼은 그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 사제간의 이런 끈끈한 정이 우리 교육의 사발점이었다. 김 교수는 안성현 작곡집을 소장하고 있다. 여기 부용산이 수록되어 오랫동안 실종했던 악보가 재생하게 되었다. 악보를 찾았으면 곡도 사연도 아름다운 이 노래가 이제 호남만이 아닌 전국의 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곡집에는 명곡들이 많다고 한다. 김순남도 벌써 해금되었으니 안성현의 노래들이 어서 큰 목소리로 불렸으면 싶다.'
이것이 김성우 논설위원이 밝혀 낸 부용산의 목포설 낼력이었다.
이 칼럼이 나간 지 한 달 뒤인 3월 27일 김 논설위원은 정설 부용산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칼럼을 쓰고 있었다.
그 내용은 50년 동안 이 노래가 악보 없이 초야에 굴러다니면서도 끊임없이 불려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여러 독자들의 제보가 끊임없이 불려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여러 독자들의 제보가 끊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TV 드라마였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는 양희경이 이 노래를 부르더라는 제보도 그 중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가운데 볼멘 소리가 터져나왔으니 부용산의 벌교설이 그것이었다. 부용산이 목포의 노래로 주장된데 대해 전남 보성군 벌교읍 쪽에서 쪽에서 이것은 벌교의 노래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작사자 박기동이 벌교 사람인데다 부용산은 벌교에 실재하는 산이라는 것 그리고 노래의 친누이 동생이라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벌교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이면 이 노래를 고향의 노래처럼 합창한다는 계기가 그것이었다. 이른바 제망매가설이었다.
김 논설위원은 다시 부용산의 본향을 찾아 나선다.
광주에서 발행하는 예향이라는 잡지에 전남 순천의 금둔사 주지 지허 스님의 증언이 있다고 한 독자가 알려 준다. 지허 스님은 부용산이 작사자가 16세 때 죽은 그의 누이동생을 벌교의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면서 가사를 지은 제망매가라고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김 논설위원은 지허 스님의 찾기 위해 호주 시드니까지 국제전화를 하면서 작사자를 찾아내 마침내 육성으로 작사자의 증언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 대목을 김 논설위원은 일렇게 쓰고 있었다.
'... 5년 전 호주로 이민 가서 시드니에 살고 있는 박기둥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올해 81세인 그의 육성 증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박씨는 전남 여수의 돌산이 고향이다. 일본의 간사이 대학엣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귀국해 벌교의 남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된 이듬해 벌교상업중학교로 옮겨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아버지가 벌교로 이사왔다. 1947년 박 교사는 새로 설립된 순천사범학교로 전근했다. 이 해에 큰 누이동생인 박영애가 순천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누이동생은 심성이 곱고 얼굴도 예뻐 천사 같다고 소문나 있었다. 1941년 18세 때 벌교로 시집을 갔고 죽은 것은 24세 때였다. 30세이던 박 교사는 벌교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장사 지내고 돌아와 순천에서 부용산이란 시를 썼다.
이듬해인 1948년 박 교사는 목표의 항도여중으로 초빙되어 갔다. 여기서 안성현 음악교사를 처음 만났다. 안 교사는 극단적인 낭만주의자였다. 이때 항도여중 3학년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경성사범에서 전학해 와있었다. 특히 문예 방면에 소질이 뛰어난 천재소녀였다. 조희관 교장 말이 이 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칠 선생이 없어서 박 교사를 모셔 왔노라고 했다. 이 해에 이 아까운 소녀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 교사는 장지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서랍 속에 넣어 둔 박 교사의 시작 노트를 안 교사가 몰래 가지고 가서 곡을 하나 붙여 왔다. 그것이 부용산이었다. 박 교수는 맨 끝 구절인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조언했다.
부용산은 노래를 잘하던 배금순이라는 상급반 학생이 맨 처음 불렀고 금방 전남 일대로 유행해 나갔다. 나중에는 전혀 사상성이 없는 노래이면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기까지 했다.
곡이 나오자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박 선생님이 정희의 무덤에 가서 울었단다 하는 소문이 퍼졌다. 박 교사는 그때 아직 총각이어서 여학생들한테 인기 있는 선생이었다. 부용산의 주인공이 정희라는 설은 이래서 와전된 것일 것이다. 박씨의 카랑카랑한 전화 목소리는 여기서 끝난다.
작사자 본인의 토로이니 제망매가설을 정설로 굳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말의 의문은 남는다. 누이동생이 결혼까지 하고 24세에 죽었다면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구절은 어색하지 않은가. 박씨는 시를 미처 다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예향이란 잡지에는 향도여중 때 김정희의 단짝친구로 애제자곡설을 내세운 경기대 김효자 교수의 기고도 실려 있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박 교사가 누이를 묻고 읋은 시가 부용산이라고 해명하는 것을 들은 적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부용산은 우리에게 의당 사랑하는 친구 정희를 애도하는 노래였다. 부용산이 어디 있는들 무슨 상관이랴. 그것은 차마 일찍이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사람이 묻힌 상징적인 살일 뿐이다라고 썼다. ...부용산의 고향이 어디인들 무슨 상관이랴. 차마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노래 하나를 만 50년 만에 살릴 수 있다면 족할 뿐이다.'
목포설과 벌교설이 왜 나왔는지 김 논설위원의 칼럼 두 편을 꼼꼼히 읽어 보면 어렵잖이 이해되는 일이었다. 부용산이 차마 일찍이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사람이 묻힌 상징적인 산으로 불려지면 족하지 않겠는가라는 김효자 교수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김 논설위원 또한 부용산의 고향이 어딘들 무슨 상관이랴 잃어버린 음지의 노래가 다시 양지에서 불려지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라는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두 번쯤 꼼꼼히 칼럼을 살혀본 나는 갑자기 부용산을 듣고 싶어서 환장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다시 정색을 하고 듣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그 일은 어렵지 않았다. 경수더러 은미를 불러 내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처음 우리에게 그 노래를 들려 준 김종철 선배도 함께 불러 내면 더욱 좋은 자리가 될 성싶었다.
'그러지 뭘. 마침 돈용이 선배가 된장비빔밥집을 열었다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거던. 잘됐네. 거기서 모이면 되겠네.'
경수가 선선히 대꾸했다. 송수화기 너머로 이빨 가는 기계음 같은 것이 들리는 듯했다.
'언제.'
'오늘 저녁 때 모이자. 은미한테는 내가 연락할 테니 딴 패들은 네가 해라.'
경수가 말했다.
경수와 모이기로 전화 통화를 한 것이 오후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그 날 저녁 돈용 선배가 개업한 된장비빕밥집에 모일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모인 일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랐다. 좋은 술자리는 빠지지 않는 김종철 선배도 나타났고 박인식 선배나 세경이 명덕이 두엽이... 등이 그들이었다. 누가 불러 주지 않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모인 데 대해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웃어 댔음은 물론이다.
'근데 은미 얜 왜 안 나타나는 거야.'
세경이 말했다.
'글쎄다. 아까 분명히 알았다고 했는데 말야.'
은미와 전화 통화를 한 경수가 미닫이 문 입구께를 뒤돌아 보며 대꾸했다.
이런 저런 식당업을 해오던 돈용 선배는 이번에는 박인식 선배의 어머님이 개발한 된장비빔밥 딱 한 가지 메뉴로 승패를 걸 작정이었다. 식사는 4천5백 원짜리 된장비빔밥 딱 한 가지 떠먹는 걸쭉한 된장이 아니라 비벼 먹을 된장이기 하기 때문에 뚝배기에 짜글짜글 된장을 끓여 내오면 거기에 콩가루를 묻힌 배추나물과 파무침 치커리 등속을 넣고 비벼 먹는 방식이었다. 안주로는 제주도 돼지를 쪄서 도마 채 나오는 돔배보쌈과 문어 석쇠에 구은 너비아니 부추전 따위들을 마련하고 있었다. 식당 위치가 조계사에서 안국동 로터리 쪽이라 회사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 식사를 하러 와야 했기 때문에 내심 불안했는데 음식에 기울인 정성 때문인지 제법 괜찮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구 보니 이 방 저 방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덕담이 오고갔고 과묵한 돈용 선배는 숯불을 피우느라 바쁜 눈치였다.
동동주를 서로 나누며 이야기는 부용산 이야기에서 자연스레 은미 이야기로 넘어갔다. 경수는 단순히 과 선배라기에는 은미에 대해 지나치게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나중에야 모두들 느꼈지만 경수와 은미 사이는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둘 중의 한 명은 남녀 간에 있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거나 지금도 그러하거나 둘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리 누구도 그런 느낌을 내색하지 않았다.
은미가 행상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피로를 뽕짝을 부르는 것으로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저번에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자연히 이야기는 빨치산이었다는 은미 아버지 이야기로 넘어갔다. 순창이 고향인 은미 아버지는 21세 때인 1949년 연희전문 국문과에 입학한 문학청년이었다는 이야기 해방 후의 혼란상을 목도한 그는 이미 좌익계 전국문학 예술총동맹 순창지부 서기장직을 병행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휘문산에 입산해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은 전쟁이 나던 해 그러나 뜨거운 지성파 빨치산이었던 그는 때로 지도부로부터 혁명적 센티멘털리즘이라는 자아비판을 강요받곤 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가 토벌대에 의해 잡힌 것은 1952년 3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부군 세력이 약화되면서 더욱 깊숙이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갔으나 동상과 열병에 거려 네 명의 환자대원과 함께 지리산 백무골에서 반 주검이 다 된 상태로 체포되자 곧바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광주고등군법회의에서 20년 확정 시베리아라고 불리던 대전형무소 독방에서 2년을 보낸 은미 아버지가 전향서를 제출한 때는 1956년 그러나 가출옥된 때는 1964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일 때였다. 당시 스물넷이던 어머니와의 결혼은 그 이듬해 은미 아버지가 고향 순창고등학교에서 잠시 영어교사를 할 때였다. 빈농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노총각 영어선생이 있다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빨치산 전력이 밝혀지자 학교에서 쫓겨난 그들 부부는 더욱 궁벽한 촌으로 들어가 10년여 채소 농사를 지으며 산다. 은미가 태어난 때는 1966년께. 농사는 잘 지었으나 판매에 늘 실패한 그들 가족은 마침내 은미 나이 열세 살 때 서울로 무작정 상경 영등포역에서 내리자 이리저리 헤매다 도림동 언저리에 사글세방을 얻고 과일상을 하며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북이 버리고 남이 저주한 빨치산 게다가 전향의 원죄의식을 늘 품고 있던 은미 아버지는 마침내 시집 한 권을 이 세상에 남기고 오십이 채 안 되는 나이에 과로와 지병으로 한 많은 분단의 땅을 뜬다. 은미가 어머니에게 흘러간 노래를 불러 주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를 잃고 난 뒤의 일이 되는 셈이었다. 은미가 부른 부용산은 그러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가 부르던 부용산이었던 것이다.
'야 임마 너 너무 소상히 알고 있는거 아냐. 남의 가계를.'
경수의 이야기가 끝나자 내가 물었다.
'뭐 소상히 아는 것도 아니지. 내가 아끼는 후배니까 이 정도야...'
경수가 간단히 일축했다.
'아끼는 후배 그 이상 아냐.'
재차 내가 물었다.
'그분이 시집을 한 권 남겼다는 얘기했지 우연히 은미한테 빌려서 봤는데 이런 구절은 아직 안 잊혀져.'
경수는 이번에도 내 질문을 질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어떤 구절인데.'
'당연한 일이지만 통일을 염원하는 시들이 많았어. 그 외엔 리야까 행상의 생활고가 많은 편이었고. 열심히 리야깔 끌면 돼지보담은 조금 낫게 살 수 있다. 그런 자조적인 시도 기억나는구먼. 오래 전에 봤지만 시들은 아주 밝고 투명했던 것 같애 동시처럼.'
'어떤 구절이 안 잊혀지냐니까.'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그런 전투는 없을까 그런 시였어. 제목이 보루대였던가 뭐 그랬는데 말야.'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그런 전투는 없을까.'
누군가 조용히 다시 읊조렸다.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잠시 기침 소리 하나 없는 정적이 좌석을 훑고 지나갔다. 모두들 자신들이 잠기게 된 침묵의 뿌리를 잘 느끼고 있는 그런 시간이 흘러가자 불쑥 경수가 김 선배에게 요청했다.
'김 선배님 부용산 한번 더 부르시지요.'
'그럴까.'
시원시원한 성격의 김 선배는 주저 없이 부용산을 부르기 시작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아주 늦게 나타난 은미 때문에 은미 부용산과 김 선배 부용산과 우리들 부용산이 막 뒤섞여 불러진 것은 그 날 아주 늦은 시각에나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