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 - 돌아오다
바리 - 돌아오다
송경아
귀향
하늘 모퉁이를 나풀나풀하게 장식한 하얀 깃털구름을 바람이 밀어내고 있었다. 이미 발목까지 올 정도로 무성해진 풀과 여린 초록빛 더미를 인 나무들 사이로 따뜻한 봄 햇볕이 내리쬐었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채 산과 들판이 맞붙어있는 곳 어딘가에서 토끼 한 마리가 물을 찍어 먹고 있었고, 슬슬 깃을 단장하기 시작한 봄새들이 여러 가지 목소리로 지저귀었다.
산비탈에 빽빽한 나무들 중에서도 유난히 키가 큰 떡갈나무 위에 작고 하얀 점 같은 것이 찍혀 있었다. 가까이에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것이 어른 한 뼘 크기의 사람, 그중에서도 조그만 여자아이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힘들다. 반투명한 몸 안에서 유백색 빛이 환히 비쳐 나오고 있어서 옷을 입었는지 입지 않았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등에는 두 쌍의 커다란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이 돋아 있었다. 자칫하면 찢어질 것 같은 그 가냘프고 투명한 날개로 이토록 높은 나무 위에 올라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녀는 날아서 올라왔다. 때로는 위로 불어 오르는 바람을 타고, 굵은 나뭇가지 위에서 쉬어도 가면서, 작은 날개를 힘차게 움직였다.
이제 그녀는 떡갈나무 꼭대기에 앉아, 푸른 하늘과 녹색 땅이 맞닿아 보이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점 같은 것이 지평선에 아른거렸다. 웬만큼 눈이 날카로운 사람도 놓칠 법한, 정말 조그만 점이었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고 그 점을 응시했다. 한참 지나자 점은 두 개로 갈라졌고, 다시 한참이 지나자 새들의 지저귐이 멀리서부터 잦아들기 시작했다. 토끼는 바스락거리며 수풀 속을 헤치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소녀는 일어서서 날개를 파닥거렸다. 내려갈 때가 온 것이다.
그녀는 남자 어른의 어깨쯤 되는 높이까지 내려왔다. 그 아래로 내려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은색 날개는 아무리 저어도 지치는 법이 없는 듯, 계속해서 눈부시게 움직이며 그녀의 몸을 공중에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여행자들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그 두 여행자는 그녀 바로 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한 여행자는 몸집이 크고 얼굴이 희었다. 피곤과 먼지에 더러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하얀 얼굴, 강인해 보이는 턱 아래에는 갈색에서 빛을 잃은 금색으로 바랜 턱수염이 붙어 있었다. 여행자가 걸을 때마다 회색 옷 아래에서 커다란 젖가슴이 물결쳤다. 그녀는 다른 쪽 여행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두 번째 여행자는 대조적으로 까무잡잡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이었다. 햇빛과 바람이 윤기를 앗아간 얼굴은 피로하고 공허해 보였다.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오고만 있었다. 그녀는 날개를 움직여 그들 앞으로 날아갔다. 두 여행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에서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 분들이신가요?"
"그대가 공기의 정령이신지, 숲의 수호자이신지는 모르겠으나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태어났던 곳을 떠나 먼 여행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혹시 이 근처에 불라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얼굴이 흰 여행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저는 공기의 정령도 숲의 수호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불라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대들은 불라국 아주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사실 여기도 예전에는 불라국의 일부였지요. 그러나 지금은 자연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일찌기 모든 것이 조화있고 아름다왔던 곳을 무질서와 혼란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자연, 불라국에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무자비한 자연의 영토가 되어버린 이곳엔 이제 어떤 불라국인도 오지 않습니다. 저를 제외하고는요. 저는 무질서와 혼란에 겁내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는 유일한 불라국인입니다. 그런데, 여행하시는 분들은 대체 누구신가요?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불라국을 떠나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검은 여행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떠날 때에 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때 그대 같은 존재가 있었더라면 우리는 굳이 길을 떠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구 대왕과 길대 부인의 일곱 번째 딸, 바리입니다. 옆에 계신 분은 나의 언니, 여섯 번째 딸 석금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는 약을 찾아 기나긴 길을 여행했고, 다시 고향에 오는 길을 찾아 그만큼의 길을 헤매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신가요?"
소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소녀는 그 놀라움을 애써 감추려 들지 않았다.
"정말인가요? 피와 살을 나눈 언니들, 처음 뵙게 되는군요. 저는 길대 부인의 여덟 번째 딸, 미금(微金)이어요."
"내…… 동생? 그렇다면 아버지는 병이 나으셨다는……?"
바리와 석금은 모두 멍한 얼굴로 미금을 바라보았다. 미금이 수줍게 웃으며 바리의 어깨에 날아앉았다.
"언니들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불라국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요. 구세주를 기다리듯 언니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불라국을 구원하기 위해 두 여행자가 떠났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옛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버지는 낫지 않았고, 하루하루 병이 깊어지고 있어요. 불라국 주변에 이렇게 아무에게도 통제되지 않는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병이 점점 심해지는 것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수근거리죠. 아버지가 낫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제가 태어날 수 있었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천상금 언니는 어머니가 누워계신 아버지의 정액을 받아 마법으로 저를 만들어냈다고 했어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제가 호기심이 많다고도 해요."
"우리가 길을 떠난 후에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바리가 석금을 돌아보며 말했다. 석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금은 석금의 태도가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동생을 대하는 그-그녀의 태도에는 어려워하는 존경심 같은 것이 내비쳤다. 두 사람은 원래부터 이런 사이였을까? 그렇다면 석금은 왜 바리를 따라 길을 떠났을까? 동생을 존경하는 언니와 동생이 함께 하는 여행은 조금 서먹서먹하고 어려운 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상념에 빠지다가 미금은 퍼뜩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흩어버렸다.
"언니들에 대한 궁금증에 빠져 길 안내를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길고 긴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 틈이 있겠지요. 불라국에 가는 길을 안내할까요, 아니면 제가 먼저 날아가 언니들 소식을 전해놓고 영접을 나올까요?"
"될 수 있으면 조용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궁 안에 들어가고 싶구나, 낯선 동생아."
"네. 그럼……"
불라국의 영토가 많이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변경에서 궁궐까지 가는 것은 여전히 먼 길이었다. 숲길을 지나고 불라국을 둘러 흐르는 강을 지나고 시장과 거리를 지나 마침내 그들이 궁궐의 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미금의 몸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 그들이 갈 길을 인도해 주었다. 경비병이 막아섰지만, 미금이 그의 귀에 몇 마디 속삭이자 아무 말 없이 비켜섰다. 철벽같은 문이 천천히 열렸고, 바리와 석금은 그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어머니와 만남
길대 부인은 불을 환히 밝혀 놓은 방에서 그들을 맞았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간소한 방이었다. 하얀 옷을 입은 길대 부인의 커다란 눈은 변함이 없었지만, 눈가에 깊어진 주름과 희어진 머리가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바리와 석금은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방을 둘러보고, 다음에 그들의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길대 부인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바리는 처음에 그것이 환히 밝혀진 불빛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그것이 어머니의 눈에 서린 물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리의 눈시울에도 뭔가 뜨끈한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어머니, 많이 약해지셨고 많이 늙으셨군요."
"너희가 떠나 있던 세월은 긴 시간이었단다. 둘 다 의젓해져서 돌아왔구나. 미금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너희가 떠난 뒤로 아버지의 병은 점점 깊어졌다. 너희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몇 번이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단다. 너희 둘을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불효자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결국 길대 부인은 고개를 떨구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리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석금이 그녀에게 다가가 들먹거리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낯선 곳의 바람에 휘말릴 때, 우리가 가야 했던 험한 길을 걸어가다가 발이 부르텄을 때, 우리가 몇 번이나 이 방을 생각했는지 어머니는 모르세요. 이 방이 우리 마음속에 얼마나 큰 불빛을 밝혀 주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그 불빛에서 힘을 얻어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만 울음을 그치세요."
한참 지나서야 길대 부인은 울음을 그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먼 길을 여행해서 피곤한 아이들을 더욱 괴롭게 했겠구나. 푹 쉬고 내일 아버지를 만나뵈렴."
"어머니는, 여행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어왔는지는 묻지 않으시는군요."
"모르겠다, 얘들아. 묻지 말아달라고 너희 눈 속에 씌어있는 것 같구나. 너희가 아무것도 얻어오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걸 탓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니. 불라국 전체가 서서히 무너져갈 운명이라면, 너희가 그것을 막지 못했다고 괴로워하지는 말아야겠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아버지를 고칠 영약을 가져왔어요. 지금이라도 당장 고쳐드릴 수 있어요."
바리가 말했다. 길대 부인은 의심스럽게 바리를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그런데 왜, 네가 그 말을 할 때 네 눈은 그렇게 어두워지지? 왜 너는 빛을 두려워하듯 고개를 외로 꼬고, 내 얼굴을 마주보기를 피하면서 그 말을 하는 것이냐? 괜히 늙은 어미를 위안하려고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단다, 아가야. 나는 아직 진실을 받아들일 정도의 힘은 남아 있단다. 그런 힘마저 없었더라면 벌써 무덤의 흙을 덮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어요, 어머니. 저도 바리도, 고향에 돌아온 첫날부터 어머니께 거짓말을 할 정도의 용기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럼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이냐?"
바리가 분명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재빨리 말했다.
"내일, 내일 할께요. 어머니. 저희가 돌아온 이상 아버지는 내일까진 돌아가시지 않아요. 내일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내일까지는, 언니들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저희가 돌아온 것을 비밀로 해주세요."
길대 부인이 거기에 대답하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길대 부인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미금이 부드러운 빛을 뿜으며 날고 있었다.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큰언니한테서 전갈이에요. 먼 길에서 돌아오신 언니들이 피곤하신 건 알지만, 큰언니가 언니들을 보고 싶어 해요. 언니들이 어머니와 이야기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았나요?"
천상금과 만남
천상금은 커다란 홀의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바리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불라국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로 그 홀이었다. 미금이 바리와 석금을 데려오자, 그녀는 미금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미금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명랑하게 나갔다. 천상금은 바리와 석금에게 그녀 앞에 놓인 의자를 권했다. 그들 셋은 삼각형으로 둘러앉았다.
천상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오랜만에 보는 자매들을 관찰했다. 석금은 조금 더 냉소적으로 변했고, 조금 더 철이 든 것 같았다. 석금의 입가에 생긴 주름은, 삶의 그늘을 힘겨운 조소로 이겨내려던 자가 지니게 된 훈장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석금은 여전히 석금이었다. 그것은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바리는 달랐다. 그녀의 눈에는 떠날 때 보이지 않던 그늘이 어려 있었다. 그 그늘이 천상금을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떠날 때의 바리를 회상했다. 어리고 총기 있고, 동요하는 감정에 머뭇거림 없이 몸을 내맡기면서도 언제나 희망에 차 있던 귀여운 바리 - 그 바리는 여기에 없었다. 대신 인생의 어두운 면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것 같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미지의 힘을 마른 체구 안에 감춰놓은 낯선 사람이 그녀 앞에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그래, 드디어 어린 동생들이 돌아왔구나.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다."
"우리도 언니를 다시 보게 되어 기뻐요. 언니는 많이 변한 것 같군. 전에는 볼 수 없던 힘과 성숙과 재치가 언니의 얼굴에 빛나는데,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바리는 아무 말도 않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석금의 공격적인 질문보다 그 침묵이 천상금의 신경에 더 거슬렸다.
"보다시피. 이제 어머니 대신 내가 정무를 보살피지. 어머니는 아버지와 너희 걱정을 하느라 너무 늙고 지치셨어. 너희가 예측했던 대로 불라국은 나날이 무너져가고 있어. 누구든지 일을 떠맡아야 할 때였어."
"그래서 언니는 바라던 대로, 어머니 대신이 되었구려."
"네 말투는 이상하게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석금아. 우리는 어차피 모두들 누군가의 대신, 어떤 원형(prototype) 대신 세계에 자리를 차지하고 점점 자기의 비중을 높여나가는 존재잖니. 어쩌면 어머니의 원형이 아버지였을지도 모르고, 그 반대였을지도 모르지. 나의 원형이 어머니라는 사실에 네가 그토록 분개한다면, 네 원형은 도대체 누구니? 내가 어머니 대신이 되는 걸 네가 싫어하는 건 네가 내 대신이 되어야 할까봐 그런 건 아니니?"
이상하게 여섯째 아이와 말을 하면 늘 싸움이 되어버리고 만다. 천상금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석금은 뭐라 대꾸하려 했으나, 바리가 잠자코 손을 뻗어 만류하듯 석금의 왼손을 잡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준 아름다운 아이는 진짜 우리 동생인가요?"
설전이 오갈 동안 침묵하던 바리가 물었다. 천상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묘한 방법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저 애도 우리 동생이야."
"어떻게 태어난 거죠?"
"어머니의 착상이었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불라국을 회생시켜 보겠다는, 아주 묘한 착상이었지. 저애는 호문쿨루스야. 우리는 모두 말렸어. 안 그래도 허약한 아버지의 몸에서 정액을 뽑아낸다는 건 위험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 말을 듣지 않으셨어. 어머니는 달이 없는 밤에서 달이 완전히 부풀어 오른 밤까지 아버지의 정액을 들고 어두운 방에 틀어박히셨고, 그 결과 저애가 나왔어.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노고로 태어났으니 우리 동생은 우리 동생이지. 하지만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저애는 이 불라국을 살려낼 도리가 없었지. 저 가냘픈 날개에 그런 짐을 지운다는 것은 잔인한 짓이기도 했고. 당신이 시도한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아신 어머니는 사흘 밤낮동안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하셨어. 그 후 어머니는 갑자기 늙으셨지. 이제 희망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어머니의 몸에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간 것 같아."
"어머니가 시도하셨던 건, 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이 엇나간 방법은 아니었어요."
갑자기 바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천상금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리야, 네가 이곳을 떠나 있던 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얼마나 현명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일은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단다. 저애가 태어났다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무 것도 없었어."
"어머니가 시도하신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우리 상황에서 유일하게 옳은 길이었을 거예요. 새로운 생명이 세계를 구원하도록 만드는 것. 하지만 어머니에게도 우리에게도, 그 방법을 실현시킬 힘이 없었던 거예요. 최선의 길을 갈 힘이 없으면 차선의 길을 가야 하는데, 어머니는 차선의 길은 보지 못하시고 최선의 길만 보신 거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미금은 새로운 인간이에요. 무너져가는 세계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지 않고, 세계의 생성과 붕괴를 똑같은 호기심으로 지켜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요. 그 애에게는 그늘이 없어요."
"그건 단지 그 애에게 혼이 없기 때문이지."
"그것만은 아니에요. 그애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어요. 그 애의 그 끝없는 명랑함 속에 깃들어 있는 초연함, 대지에 뿌리박고 있는 우리 인간들과 다른, 언제라도 어디든 날아가서 적응할 수 있는 힘, 우리가 감히 통제할 수 없는 존재와 소통하는 능력, 그리고 그 애에게는……."
"그건 그 애에게 혼이 없기 때문이라니까."
천상금은 고집스럽게 자기 말을 되풀이했다. 바리는 힘겹게 말을 끝맺었다.
"그 애에게는 우리에게 없었던, 아니면 우리보다 더 큰 직관이 있어요."
말을 마친 바리는 늙고 피로해 보였다. 천상금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거대한 바위처럼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한참 후에야 석금이 이 어색한 침묵을 깼다.
"언니, 우린 가서 쉬는 게 좋겠어. 소금기 섞인 바람 때문인지, 길에서 묻어온 먼지와 모래 때문인지 굉장히 피곤해요. 그래서 언니에게 날카로운 말이 나가는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어릴 적에 우리에게 글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아직 살아계신가요? 자기 전에 돌아왔다고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아직 살아계셔. 미금에게 안내해 달라고 해라. 너희 방은 너희가 떠날 때와 변한 것 없이 놓아두었단다. 가서 푹 쉬고, 내일 보자. 부드러운 잠이 너희의 피곤을 풀어주고, 말과 성품도 부드럽게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들이 미금의 안내를 받아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천상금은 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이 이방인들은 불라국 밖의 자연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그만큼 불안했다. 그녀는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하늘을 보는 것처럼, 잠시 나타나 사람을 놀라고 섬뜩하게 만들고 사라지는 허깨비를 바라보는 것처럼, 바리와 석금의 그림자가 불빛에 흔들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치료
미금은 둘을 바리의 방까지 안내해주고 나갔다. 석금은 미금의 안내가 없어도 될 만큼 익숙하게 복도를 걸어갔다. 그러나 바리는 생판 낯선 곳에 온 듯 자신 없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불라국 전체가 그녀에게 낯선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가, 다시 궁전에 와서도 사흘밖에 머물지 못하고 길을 떠났던 그녀였다. 스승의 방과 석금 자신의 방을 안내해 드리겠노라고 미금이 석금에게 말했지만, 석금은 사양했다.
"선생님이 살아계시다는 것만 알면 돼. 어디에 계실지는 알고 있으니까. 난 여기서 살았던 사람이니까 안내는 필요 없어."
미금이 나갔다. 석금은 문을 닫고 바리를 쳐다보았다. 바리는 침대에 앉아 꿈꾸는 듯 멍한 눈으로 작은 책상 위에 켜진 황촉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한 불빛과 달콤한 냄새가 방안에 흘렀다. 석금은 바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곁에 앉았다.
"오늘 밤은 쉬려무나."
바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아버지를 치료할 거예요."
"벌써? 어머니는 슬퍼하실 텐데."
석금의 팔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바리의 어깨에 스며들었다. 긴 여행 내내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던 온기였다. 바리는 촛불에서 눈을 돌려 석금을 바라보다가, 석금의 목을 안고 귀 뒤에 입을 맞추었다. 석금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바리의 가냘픈 몸을 힘주어 안았다. 그렇게 안고 안긴 채 바리가 말했다.
"더 이상 있으면 이곳이 나를 얽어맬 것 같아요. 상처받은 양심이 무뎌질 테고, 새로 생긴 동생과 어머니의 눈물이 죄의식을 흐리게 할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촛불 심지가 흔들거리며 타올랐다. 흔들거리는 촛불 그림자에 맞춰,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석금의 손이 바리의 등을 토닥이는 것이 느껴졌다. 바리는 겸연쩍은 얼굴로 포옹을 풀며 물었다.
"언니는 이번에도 저와 함께 갈 건가요?"
석금이 천천히,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난 가지 않아. 이번엔 내가 있을 곳은 여기인 것 같다. 죄의식은 남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인식에 대한 열망도, 구원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지. 난 네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어. 이번에는 여기에 남아 지켜볼 테야. 끝까지."
"……촛불을 잡아주세요. 아버지께 저를 안내해주세요."
바리가 일어났다. 석금은 아무 말 없이 촛불을 잡고 방문을 열었다. 모퉁이를 몇 번 돌아도 제자리인 듯한 길고 긴 복도를 지루하게 지나는 동안, 석금의 한쪽 손은 바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에 섰다. 석금이 바리의 손을 놓고 그녀의 얼굴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마지막이겠구나."
"아마도."
"온 길을 기억할 수 있겠니?"
"언니가 궁전 밖으로 나가는 약도를 좀 그려주세요. 제 방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베개 밑에 넣어주세요."
석금이 촛불을 쥐어주고 멀어져 갔다. 바리는 문을 열었다.
깊은 어둠이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오랜 병을 앓는 병자가 있는 방 특유의 삭은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한쪽에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발을 걷었다.
발 뒤에는 그녀 몸집의 두 배는 될 듯한, 퉁퉁 부어오른 거구가 누워 있었다. 어슴푸레한 불빛에 비친 그녀의 아버지의 몸에서는 약 냄새로도 가릴 수 없는 썩은내가 났다. 오랜 세월을 병과 함께 살아온 그는 이제 인간이라기보다는 병과 죽음 그 자체였다. 거칠게 움직이는 가슴만이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바리는 촛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칼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온갖 기화요초와 이름모를 새들, 낯선 경치가 돋을새김된 칼자루를 잡고 그녀는 우선 자신의 오른 팔뚝에 칼을 꽂았다. 피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왼쪽 손목을 칼로 가르고, 다시 아버지의 오른 손목을 칼로 그은 후 자신의 왼쪽 손목을 아버지의 오른 손목에 갖다 댔다. 할 수만 있다면 움직이지 않게 손목을 묶어놓고 싶었지만, 그녀의 오른손은 이미 무감각해져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지탱하기 어려워지자 그녀는 아버지가 누운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을 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딸아, 도대체 너는 무얼 하고 있는 거니?"
"어머니……."
잠시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바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지 않으셔도 될 것을 보셨군요.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아버지를 치료하고 떠나고 싶었는데."
"네 눈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나를 불안하게 했단다. 그래서 자기 전에 네 아버지에게 들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런데, 이게 네가 아버지를 치료하는 방식이란 말이냐?"
"그래요. 불을 조금 더 밝혀 보세요, 어머니. 그러면 아버지의 피가 제 핏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일 거예요. 그렇게 한 바퀴 돈 병든 피가 다시 몸 밖으로 흘러나가며 사라져 버리는 것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게 제가 여행에서 얻어온 먼 세계의 비밀이죠. 저는 아버지의 병을 없앨 수 없어요."
바리는 어머니를 향해 격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와 석금만이 공유했던 그 무거운 비밀이 이제 어머니를 향해 터져 나올 찰나였다. 핏기없는 해쓱한 얼굴에서 눈만이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짧고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몸에 흐르는 나쁜 피를 정화시키는 건 아무도 할 수 없어요. 세계의 혼란은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기껏해야 제가 배워온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버지의 몸속에 있는 나쁜 피, 그 병균을 다른 데로 보내버리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느 곳에 가서 자리 잡을지 저는 몰라요. 그것이 자리 잡는 곳, 거기에도 버려졌던 일곱 번째 딸이 있어서 그 딸이 다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야 할 거예요. 저는 지금 우리 불라국을 치유한다는 명목 하에 다른 곳에 병을 심고 있는 거예요. 그게 지금까지 감춰져 왔던 불로불사의 비밀이에요, 어머니. 때로는 손을 피로 물들이면서, 때로는 넘어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던 난관을 모두 넘고 기껏해서 찾아온 해답이 바로 그런 거예요. 이미 있던 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은 그 병 이상의 무게를 지닌 죄악이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 불라국의 인간들은 누구도 이 죄를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오, 하느님-"
바리의 탄식을 들으면서, 길대 부인은 조용히 그녀의 지아비 오구 대왕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게 퉁퉁 부어있었던 몸에서 서서히 부기가 빠지고 있었다. 거친 호흡이 점차 가라앉고, 마침내 갓 태어난 아기의 숨결처럼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바리의 오른팔도 바라보았다. 바리가 말한 대로였다. 검은 피가 오른 팔뚝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지는 그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블랙홀이라도 있는 듯 핏줄기가 사라졌다. 처음에 바리가 흘린 피를 빼고는 바닥에 아무 흔적도 없었다.
길대 부인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소리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석금이 한림학사에게 말하다
석금이 문을 두드렸을 때 노스승은 아직 잠들지 않은 채였다. 그는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문밖의 석금이 그 끄덕거림을 보기라도 한 듯 문이 열렸다. 그는 석금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봄꽃 그림자가 연못에 물결치듯 온화한 미소였다. 석금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스승 앞에 대좌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이 나이께 되면 그렇게 놀랄 일이 없어. 게다가 그렇게 버릇없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내가 가르친 아이들 중에서 너밖에 없으니까."
"예, 돌아왔습니다."
"오래 걸렸구나.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겠지."
"다시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요."
"나는 태어나서 이제까지 불라국을 떠나본 적이 없다. 길 위에 있었던 무엇이 너처럼 대가 센 아이를 그렇게 괴롭혔는지 모르겠구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그 일들을 말씀드리고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지필묵을 펼쳤다. 그후 석금이 말을 끝낼 때까지, 그는 손만을 부지런히 움직일 뿐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자를 만나 그를 죽여야 했어요. 신들은 어느 것 하나도 공짜로는 내주지 않습니다. 신들이 가장 즐기는 제물은 눈물과 한숨이고, 악한 일 하나가 행해지고 난 후에야 선한 일 하나를 지상에 허락합니다. 바리는 동대산 동대천의 동수자를 만나 그와 함께 삼 년을 살았습니다. 사실은 삼 일이었는지, 세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 동안 바리는 세 아이를 낳았거나 제웅 세 개를 만들었습니다. 나와 바리와 그의 운명을 상징하는 세 개의 인형. 바리는 그 인형들을 차례로 망가뜨려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서천서역국으로 갈 때 그를 제물로 바쳤어요. 순결하던 우리의 손에 그의 피가 묻고 나서야 서천서역국에 가는 길이 열렸으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심한 일이 아니죠. 살인은 어디서나 저질러지는 일이고, 순수를 잃는 것은 인식을 위한 첫걸음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그다음에 우리에게 과해졌던 일은 어떤 일들이었는지요? 그것은 우리 여린 두 사람의 어깨로는 나누어질 수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신은 홀로만 맞부딪칠 수 있는 존재였던가요? 자, 처음에 우리가 대해야 했던 과업은 '도저히 한 사람으로서는 갈 수 없는 밭을 갈기'였습니다. 사실은 '도저히 두 사람으로서는 갈 수 없는 밭을 갈기'였지요. 밭이라고요? 그것은 우리가 한 사람의 두뇌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정도의 정보량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미쳐버릴 수도 있었고, 범용한 인간들처럼 그것을 '그냥' 통과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 밭이 가지는 함의를 모두 무시해 버리고, 모든 것을 미지의 것으로서 놓아두고 지나쳐 버리는 식으로요 - 당신은 그것을 모르십니다. 당신이 가르치지 않으신 내 여린 동생이 어떻게 그것을 견뎌냈는지, 나도 그것을 모릅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세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도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한쪽 고랑에는 그 모든 슬픔과 아픔과 질투와 굴욕과 죽음을, 그 다음 고랑을 탈 때는 희망과 기쁨과 사랑과 환희를, 그런 식으로, 끝없이……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태어난 자를 조금이라도 사랑해 본 나같은 존재라면 절대로 그것을 요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왕국을 구하는 일이라도, 한 우주를 구하는 일이라도.
이렇게 축약된 형태로밖에 이것을 전할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스승이시여. 바리에게 과해진 시련이 그것으로서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천만에!
바리는 혼자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애가 저를 돌아보면서 한 말은 단 한 마디였지요. '둘 중 하나만이라도 정상으로, 최소한 불라국에서 받아들여지는 정상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의미를 찾겠어?' 나는 그 말을 변명과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그 시련에 바리 혼자 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다음에 우리에게 닥친 일은…… 흰 빨래를 검게 빨고, 검은 빨래를 희게 빠는 일이었습니다. 아무 매개도 없이 0을 1로 바꾸고 1을 0으로 바꾸는 일. 그것이 서천서역국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뀔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을 바꾸려 하는 일이 성공해야만 불라국을 구할 수 있다고, 그들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것마저도 시련의 일부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멍청하거나 생각이 짧아서는 아니었습니다. 불라국에서 우리는 그저 자유롭다고 생각되는 대로 규칙에 맞춰 움직이며 커왔으니까요. 그렇게 커나간 유년 시절 이후에, 우리가 아무나 신뢰했다고 해서 우리를 욕하지는 말하주십시오. 그들이 계획한 대로 도망쳐 나오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이 극에 달했을 때 그들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너희들 중 하나만이 그 수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 너희가 생존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그 수치를.' 저는 할 수 있다면 제가 그 잔을 받아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그 무거운 짐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바리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그들의 패리티 검사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면제될 수 있는 시험이었겠습니까? 신들은 그렇게 잔인했습니다.
스승이시여, 우리는 기만당하고 상처받은 채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민담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이 받는 댓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몰랐다면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받고,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패배한 영웅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도둑처럼 살금살금 고향에 돌아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게 여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방인들입니다. 누가 우리의 삶에 책임을 지겠습니까? 아니, 우리의 삶에 책임을 져달라고 우리가 감히 누구에게 요청하겠습니까? 우리가 구원한 그들과 우리와는 실상 완전히 다른 종은 아닌지요? 우리는 여전히 어깨를 찍어누르는 도덕적 중압감으로만 그대들을 구원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당신들과 함께 영원히 살기로, 새로운 가능성을 포기하기로 한 나 자신은 그렇다 치고, 바리는 무엇을 위해서 그 모든 시간들을 포기한 것입니까? 당신은 우리가 떠날 때 말리지 않았습니다. 당신께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비열한 짓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열한 짓을 당한 당사자들입니다. 용기라는 말로 가리기에는 너무 큰 상처와 그늘이 우리의 얼굴에 남았습니다. 당신은 뭐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예?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마지막 말을 끝낼 때 석금의 목소리는 윤기 없이 갈라져 있었다. 스승은 갑자기 막막함을 느꼈다. 스승은 평소에 다변을 무시하던 쪽이었다. 다변은 보통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말이 많은 인간들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직접 길러낸 이 아이는 그렇게 얄팍한 기만 밑으로 도망치는 아이는 아니었다. 한참 대면하지 못했던 세월을 건너뛰어서도, 이 아이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이리저리 서툴게 꿰메어 보려고 어거지로 이치에 닿지 않는 질문들을 얼기설기 엮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 아이가 이제 자신이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물음을 가지고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승은 깊은 현기증을 느꼈다. 아이가 어렸을 때처럼 위엄있게 꾸짖는다고 무마될 문제도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 앞에, 현학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로서 펼쳐진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 문제들을 대면해야 한단 말인가? 한기가 노구에 끼치는 것을 느끼면서, 그가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한 제자의 노기 서린 눈초리가 그를 꾸짖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석금은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섰다. 그때쯤엔 그가 한 번도 가르쳐보지 못한 고아인 바리가 궁을 떠나고 있으리라고 그는 느꼈다. 새로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은 늙은 몸이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기껏해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곱고 운치 있는 글씨로 기록한 이 두루마리를 후세에게 넘겨주는 일일 뿐이었다. 손을 저어 석금을 문밖으로 내쫓고 그가 위안을 느낄 수 있는 일이란 그것뿐이었다. 그는 자기 앞에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으로 만족을 삼았다.
다시 떠남
푸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바리는 여장을 챙겼다. 팔락팔락하는 촛불이 꺼져갔다. 바리는 미련 없이 촛불을 불어 껐다. 그녀가 문을 나가려는 순간, 아주 가벼운 손, 공기처럼 가볍고 물에 젖은 휴지만큼 약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 너머에서 은은한 빛이 빛났다.
"언니, 저를 데려가 주세요."
"아름다운 동생아, 희망 없이 길고 괴롭기만 한 여정에 꼭 따라가고 싶니?"
바리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잠시 침묵이 깔렸다. 바리는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아무 저항 없이 열렸다. 등 뒤에서 떨리는 미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처음 언니를 만났던 그 숲에 자주 가요. 나무들과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저는 생각하죠. 내가 갖지 못한 혼이란 것은 무엇일까? 나무들도 혼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그것을 갖게 된다면, 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삶이 더욱 완전해질까? 나는 어디서 혼을 찾을 수 있을까? 언니, 저는 혼을 가져보고 싶어요. 불라국 안엔 제 혼이 없어요. 7년 전 언니가 떠날 때를 생각해보세요. 언니도 무엇인가 찾아 떠나지 않았나요? 언니, 저와 함께 가요. 비록 제 빛이 희미하지만, 별이 없는 밤에 언니 앞길을 밝혀드리기엔 충분할 거예요."
"아마 네가 지금 그 상태로 혼을 갖는다면,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게다. 내가 갈 길은 너와 다르단다. 나는 이제 내가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잘못을 바로잡으러 떠나야 해. 단지 병을 옮겨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내 희망이란다. 너처럼 완전히 새로운 존재, 죄가 없는 존재를 어떻게 내가 도울 수 있겠니? 내가 길에서 본 것은 환멸뿐이었다. 이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렇지만 언니는 다시 떠나잖아요! 이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을 가르쳐 준 건 언니였어요. 대답해 주세요, 언니. 정말로 언니가 길에서 본 것이 고통과 환멸과 실망뿐이었나요?"
그 말에 처음으로 바리의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몸을 돌려 미금을 바라보았다. 윤곽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미금의 날개와 반짝이는 몸, 열망에 타오르는 눈을 보았다. 미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내가 본 것......그것은 고통이었지. 그렇지만 그 고통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고통을 이길 수는 없었어. 이길 수 있다면 그건 이미 고통이 아니니까. 다만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보았을 뿐이야. 수고와 괴로움에 비해 너무나 적은 댓가야. 그래도 떠나겠니, 어린 동생아?"
"혼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인가요?"
"그렇지. 너의 빛과 새로움조차 그 길에서 퇴색해버릴지도 몰라. 희로애락을 알아가면서 네가 가진 무심함이 사라져 버리고, 빛나는 날개가 꺾이고 어디엔가 뿌리박혀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지. 완전해진다는 것은 동시에 진부해진다는 것을 뜻한단다. 지금 그대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남아 있는다면, 너는 영원한 희망으로 살아가게 될 거다. 그 삶이 더욱 아름답지 않겠니?"
은방울이 흔들리듯 미금이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앞으로 날아갔다. 바리가 열어놓은 문틈으로 빨려들듯이 사라지며 그녀가 소리쳤다.
"오, 아니에요, 언니. 삶이 없는 희망은, 삶이 없는 새로움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요? 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오세요, 언니. 싸늘한 밤이 걷혀가고 아침이 다가와요. 풀들이 자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새로운 것들이 저 밖에 생겨나고 있어요. 이제 불라국은 이대로, 이대로만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더욱 큰 불안과 희망, 더 큰 실패와 성공을 향해 떠납시다. 언니다운 걱정과 우려는 제쳐놓아 주세요. 사실은 언니도 다시 떠나는 걸 즐기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렇죠, 언니?"
창밖에 새벽이 푸르게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불빛이 없어도 복도를 걸을 수 있었다. 바리는 방문을 닫았다. 회색 돌로 된 복도에 발소리가 약하게 메아리쳤다. 복도 끝에서 미금이 외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아직도 고여있는 어둠이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