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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Bollnow 2024. 3. 23. 16:05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박인홍

 

우리들 자신이 지금까지 개척이 안 된 가장 높고 가파른 산에 올라간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우리가 전례 없는 어려움과 위험을 극복했고, 먼저 도전했던 어떤 사람보다도 더 높은 곳에 이르는 데에 성공했으나 아직 정상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그가 선택한 길을 따라가기가 어렵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올라가기가] 불가능한 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마 되돌아 내려가는 다른 길을 찾게 되겠지만, 주위에서 그를 정상으로 인도해 줄 사람도 찾아보게 될 것이다. 그의 앞에 아무도 없는 높은 곳으로부터의 하강은, 우리의 상상의 여행에서 볼 때, 등반보다 더욱 위험하고 어려울 것이다. 미끄러지기 쉽고 발판을 택하는 것도 쉽지 않다. [……] 그리고, 천천히 아래를 향해, 정상으로부터 멀어져서 내려가야만 한다. 또 이처럼 극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하강이 끝나는 곳을 알지 못하지만, 정상에 더 똑바로 더빨리 올라갈 수 있는 보다 안전한 우회로가 있을지도 모른다.

레닌, <선집> 33권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 고 그는 생각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의문부호가 갸우뚱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끝났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윗몸을 일으켜 앉았다. 도시는 오래 전에 그의 발밑으로 완전히 떠올랐다.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두렵기는커녕,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고, 평화롭기까지 했다. 평화로움.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거의 삼십 칠 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런 그의 감정은 진정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이 세계 전부를!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세계를 용서했다. 그것은 차라리 우주와의 화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끝난 것이었다! 그는 다른 무엇이 더 남았으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그런 상태로 지워져 버리기를, 진정을, 원했다. 조용히, 고요히, 안개가 사라지듯이, 그냥 그렇게 없어지기를……. 그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그 간절한 바람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가슴속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마치 우연인 듯 갈색 나뭇잎 하나가 그의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부장이 이유를 물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이렇다 할 이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잘못이라도 했다는 듯이, 사실 이유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터였는데, 테이블 모서리만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대학 선배이기도 한 부장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피운 다음, 그에게 승진이 안 되어서 그러냐고 물었다. 승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긴 했었다.

반년쯤 전에 그의 입사 동기들 가운데 한 명이 차장으로 승진을 했었다. 그런데 사내의 많은 사람들이, 전무까지도, 그가 차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들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인사는 놀라운 것이었다(그렇게 된 것은, 사장 부인의 조카와 중학교 동창인 그의 입사 동기의 아내의 '적극적인 내조'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사내에 파다했었다). 그렇지만 그때 놀랐던 것은 그의 주위 사람들뿐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그런 인사의 결과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위의 요란한 반응들을 귀찮게만 생각했었다. 그는, 그 자신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불행해졌고 위로받아야 했으며, 그를 대신해서 분개하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은 그를 피곤하게만 할 뿐이었다. "내 월급은 지금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무렵 어떤 술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었고,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는 정년퇴직 때까지 과장의 명패가 놓인 자리에서 그대로 일하게 된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누군가가 그의 책상에서 그가 과장임을 알려주는 명패를 치워 버리더라도 그는 불평을 거의 하지 않을 터였다. 적당한, 그러니까 그가 아내와 둘이서 궁색하지 않게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의 월급만 받을 수 있다면(결혼한 지 오 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결혼한 그해에 아내는 아이를 가졌으나 네 달만에 유산을 하고 말았는데, 그때 의사는 아내의 신체 조건이 아이를 갖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었다. 그는 실망한, 아니 죄스러워하는 아내에게, 우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신체 조건이 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이가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굳이 아이를 키워야만 한다면 입양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위로를 해주었으며,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사실 자리를 바꾸고 월급을 몇 푼 더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특별히 중요한 다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승진 문제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했고, 한참 만에야 장사나 해볼까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러자 부장은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능력 있는 중견 사원' 등등의 용어들을 사용하며(부장이 사용한 수식어들은 거의, 또는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표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내년에는 그가 틀림없이 승진이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으며, 그가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능한 인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열심히 하면 이사, 아니 그 이상까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또 휴식이 필요하다면 해외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외국에 가서 한 달쯤 쉬고 오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사람아, 말이 쉬워 장사지, 장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그는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침을 먹고 나서 아내에게 자신이 어제 사표를 냈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아내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그가 담배 한 대를 피우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내는, 그가 담배를 끄자,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왜 사표를 내었느냐고 물었다.

"글쎄…… ,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냥…… 회사에 더 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나는 그저 당신이, 그러니까 뭐랄까, 이해라기보다는…… 이건 이해를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냥 받아들여주면 고맙겠어."

"당신, 뭐 잘못했어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으면 좋겠어?"

"아뇨, 난 당신을 믿어요. 그렇지만…… "

"당신이 나를 정말 믿는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얘기하지 말아주길 바래. 그리고 더 할 얘기도 없고."

이렇게 해서 그는 일 년쯤 전에 십 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다. 물론 회사에서는, 그리고 아내도, 그가 다시 출근해 주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물론 회사에 다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자신이, 어떻게 보면 꽤나 무모하게, 사표를 낸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사표를 냈어야만 했는지는 그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였지만.

직장을 그만둔 그가,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가장 먼저 한 일은 잠을 자는 일이었다. 사표를 냈다고 아내에게 말한 그 자리에서 그는, ", 지금부터 잠 좀 잘 테니까 회사에서 전화가 오면 없다고, 여행 갔다고 그래 줘" 하고 아내에게 부탁을 한 뒤에 무려 나흘 동안이나 잠만 잤다. 물론 간간이 깨어나 밥을 몇 술 뜨거나(그것도 아내의 성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는 시늉만 하는 정도였지만) 화장실에 다녀오기는 했지만, 그는 낮이고 밤이고 밤이고 낮이고를 가리지 않고 내처 잠만 잤으며, 땀까지 뻘뻘 흘리며 잤기 때문에 아내는 그가 병이 난 것이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그는, 마치 잠을 자기 위해 사표를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또는 회사에 다니는 동안 미뤄두었던 잠을 한꺼번에 자기라도 한다는 듯이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해서 잠을 잤고, 그토록 깊고 깊은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평생의 과업을 그제서야 겨우, 아니면 마침내, 달성하고야 만 것 같았다.

그가 그 어이없는 잠에서 깬 것은 새벽녘이었고, 그는 목욕을 했으며, 목욕을 하고 나와서는 아내와 뜨겁기 그지없는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는 고당에 오른 초회왕이었고 아내는 구름으로 변한 무산의 선녀였다. 그는 아내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고 아내 또한 열과 성의를 다해 그를 받아들였는데, 두 사람이 그토록 진하게 몸을 섞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은 뒤, 그는 아내와 함께 집에서 나와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피서철이 지나서 한적해진 바닷가의 한 호텔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돌아왔다. 아내는 신혼 여행을 다시 하는 기분이라고 했는데, 그도 아내의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신, 사표 낸 거, 잘한 일인 거 같아요." 분명히 반 이상이 농담이었겠지만, 아내는 그런 말까지 했다. 물론 아내는, 어느 날 밤 모래밭을 거닐며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왜 사표를 내었느냐고,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다시금 묻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사표를 낸 데에 특별한 이유랄 것은 정말 없으며, 앞으로는 그 일에 대해 두 번 다시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되풀이했으며, 살림을 꾸려나갈 일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다. 아내는 알겠다고 했는데, 아내가 알겠다고 한 것은, 벌이의 문제까지 포함해서, 사표 문제로 그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그는 그저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거나 비디오로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빈둥거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 그의 책읽기는, 빈둥거린다는 표현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두서없는 것이었다. 아내 덕분에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시인이 되고 싶어했던 아내는, 그의 친구 동생의 소개로 그를 만났을 때,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이라는 책들을 펴내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다. 아내는 결혼을 한 뒤에도 한동안 직장 생활을 했지만, 아이를 갖게 되자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아내는 가만히 앉아서 살림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집에서 번역을 하기 시작했고(그는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는 아내가, 비록 세상이 엄청나게 변했다고는 하더라도, 대중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책들을 번역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물론 그는 그런 일로 아내를 비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심정적으로 동조는 하지만, 사회 개혁 운동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이가 유산된 뒤에는 더 열심히 번역에 매달려, 그때까지 영어로 씌어진 소설들을 열 권 가까이 우리말로 옮겨놓았었다.집에는 책들이 꽤 있어서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한 권씩 뽑아 읽었다. 마르크스 전기를 읽고 나서는 추리소설을 읽었고, 무슨 문학상을 탄 베스트 셀러라는 삼류 소설과 <러시아 혁명사>를 차례로 읽었으며, 홍명희의 <임꺽정>과 스탕달의 <적과 흑>을 차례로 읽었다. 그리고, 하루에 거의 한 편 꼴로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다 보았는데, 그것 또한 장르와 질이 들쭉날쭉이었다. 그러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아내가 번역을 시작한 뒤부터 그의 의무처럼 되어버린, 아내의 번역 원고를 읽어야 했다(그는 영어를 아내만큼 잘하지 못했고 글쓰기도 아내에게 못 미쳤지만, 아내는 '보통 독자의 검열'이 필요하다면서 그에게 원고를 봐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일을 했고, 어쩌다가 어색한 문장을 지적하기도 했으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노을이 비껴드는 거실에서 그는 반쯤 누운 자세로 아내가 곧 번역을 해야 할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바네사 아르망?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싱크대 앞에서 찬거리를 다듬고 있던 아내가 되물었다.

"그래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책이 그 여자 첫 작품이거든요. 당신 요즘 영화를 많이 보더니,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라는 여배우와 혼동하는 거 아니에요?"

"아냐, 분명히 낯익은 이름이야. 책에서 읽은 것 같기도 하구……"

아내가 손을 닦으며 그의 옆으로 왔다.

"책에서요? 이 여자가 소개된 책이 있어요?"

그도 윗몸을 일으켰다.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글쎄 생각이 잘 안 나는데? 나중에라도 생각이 나면 얘기해줄게. 그런데 제목이 희한하네. 이거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가 맞지?"

"그래요. 내용도 특이한가봐요. SF에 추리, 포르노까지 섞인 잡탕인데, 인류의 암울한 전망을 묘사한 걸작이라고, 저쪽에서는 대단한 베스트 셀러래요. 그래도 이 여자가 공부는 좀 한 것 같아요. 뒤에 참고 문헌 목록까지 붙여놨잖아요. 훑어보다 보니까 레닌까지 인용했더라구요."

"레닌? ……가만있어봐, ……그래, 맞아!"

그는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가서 열흘쯤 전에 읽은 책을 가져와 '찾아보기'에서 아르망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그가 알고 있던 이름은 그러나 바네사 아르망이 아니라 이네사 아르망이었다. 프랑스 출신의 혁명가로, 레닌의 애인이었다고 알려진 여자.

"혹시 두 여자가 같은 집안인지도 모르겠네. 아르망이 남편 성을 따른 거고, 애들이 다섯이나 됐다니까 그 집안 후손인지도 모르지. 그래서 레닌을 인용했을 수도 있잖아."

"설마 그렇기야 할라구요? 그리고 이 사람들, 필명을 많이 써서, 바네사 아르망이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럼 이 여자가 바네사 아르망이라는 이름을 이네사 아르망이라는 이름에서 빌려왔을 수도 있겠네?"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

"그렇다면, 우리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이와 유사한 풍경이 두어 달쯤 지속된 뒤에야 그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다 할 이유도, 그리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매도해 버리지 않는다면. 사표를 낸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러니 이제 그는 생계의 대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아내가 당장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게다가 아내의 수입이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물론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아내의 마음이 전제되어야겠고, 그러자면 아내가 일을 훨씬 많이 해야겠지만(실제로 아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그가 사표를 낸 뒤에, 많이 길어졌다)아내가 버는 돈만으로도 생활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책임감이 강한 그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어떤 알 수 없는 불상사로 인해 그가 일을 할 수 없는 끔찍한 지경에 처한다면 몰라도.

그는 사직의 이유를 묻는 부장에게 장사나 해볼까 한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으며, 일주일쯤 지난 뒤에 그는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을 하기로 결정했고, 다시 보름쯤 지난 뒤에는 그의 아파트에서 버스로 네 정거장 떨어진 동네에 있는, 주인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야 하기 때문에 팔려고 한다는 가게의 계약까지 끝냈다(그가 장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내는 그러나 반대를 하지는 않았으며, 나중에는 이런 말까지 했다. "당신, 혼자서 뭔가 해보려고, 그러니까 월급쟁이 노릇이 싫어서 사표 냈던 거 아니에요?" 그는 아내의 물음에 그렇노라는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곧 자신이 사표를 낸 것이 아내가 말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내의 말도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온 세계는 모두 우환뿐인 세상이고,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걱정에 싸여 있을 뿐이며, 이 세상의 뭇 생물들은 모두 죽어갈 것들뿐이다. 푸른 하늘과 넓은 땅이 커다란 도살장이며, 커다란 감옥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 그 결과 이 세상 천지간의 모든 사람과 짐승들은 괴로움과 고뇌를 가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환과 고뇌가 번갈아 찾아오거나 한꺼번에 닥쳐오는데, 대부분 깊고 심각하거나 번잡하고 극악하여, 능히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康有爲, <大同書>에서

책상 한구석에 있는 더블 데크 카세트 라디오의 스피커에서는 닐 영의 <러닝 드라이>가 흐느끼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님이 더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는 조금 더 앉아 있기로 했다. 가게 문이 열려 있는 시간과 수입의 비례 관계에 대해서 그는 생각해 본일 거의 없었다. 물론 그도 금요일과 토요일, 휴일 전날 밤 등에는 평일보다 한 시간쯤 늦게 문을 닫기는 하지만, 그런 날도 가게에 앉아 있기가 지겨우면 일찍 들어가곤 했다.

그러므로 그는 책을 읽거나 새로 들어온 비디오 테이프를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멍하니 앉아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듣고 있는 음악은 집에서 녹음을 해온 테이프에 들어 있는 곡들로, 그 테이프에는 뉴 트롤스의 <콘체르토 그로소> 1번의 아다지오와 카덴차, 레오나드 코헨의 <퀸 빅토리아>, 도어즈의 <서버드 가든> 등등의 느릿하고 감상적인 곡들이 들어 있었다. 그가 그런 음악들을 좋아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런 음악들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느릿하게 추적거리는 우라이어 힙의 <레인>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원한 소나기처럼 튕겨 오르는 호세 펠라치오의 <레인>도 좋아하며, 장중하고 절규하는 듯한 드라마틱스의 <인 더 레인>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그는, 매니아도 아니고 음악에 조예가 깊지도 않았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었다.

<러닝 드라이>가 끝나고 정적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순간, 알리스 쿠퍼의 <스티븐>이 악마처럼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카세트 라디오의 데크 안에서 돌아가는 테이프가 멈추면 가게의 문을 닫을 것이며, 가게의 문을 닫은 다음에는 그녀의 집으로 가리라는 것을.

그보다 열 살쯤 어려 보이는 그녀와의 관계, 그러니까 아마도 참된 관계라고 할 만한 관계가 비롯된 것은 그가 듣고 있는 테이프, 테이프에 담겨 있는 곡들, 그 가운데서도, 그대가 없어서 여름도 웃음도 없었으며 마음이 겨울처럼 춥기만 했다는 내용의 노래인, 조안 글래스콕의 <여름이 없었던 해> 때문이었다. 그날, 네 달쯤 전이었는데, 밤늦게, 그가 막 문을 닫으려는 참에, 가게에 들른 그녀는, 술을 한두 잔 한 것 같았는데, 비디오 테이프를 고르다가 느닷없이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 지금 그 노래 제목이 뭐예요?"

그는 잠깐, 아주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내 <이어 위드아웃 써머>라는 제목과 가수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으며, 볼륨도 약간 높였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한번 더 듣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는 테이프를 되감아 그 노래를 다시 들려주었다.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서서 선반에 꽂힌 비디오 테이프들을 바라보고(바라보고? 아니다. 그녀는 그저 눈을 그쪽으로 돌리고 있을 뿐이었을 것이다) 있던 그녀는,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이 흐르는 동안 이탈리아의 여자 감독인 릴리아나 카바니의 <야간 배달부>를 선반에서 뽑아들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이름을 읽을 수 있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안다고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녀가 일주일에 한두 편씩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간다는 것도, 테이프를 빌려가거나 돌려주러 오는 시간대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직장에 나가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해서 결혼을 한 여자 같지도 않다는 것도. 또 그녀가 영화를 고르는 취향이 별로 까다롭지는 않지만, 아무 테이프나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들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사실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가 가게의 주인이었고 그녀가 손님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알게 된, 그녀에 대한 극히 피상적인 정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테이프를 돌려주러 온 것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다음날 낮이었고, 그때 그는 아내와 전화를 하고 있었으며(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통화 내용은 잊었다), 그녀는 가게 밖, 길에 가득한 빛 속에서, 마치 솟아오른 것처럼 나타났었다. 그는 눈이 부셨고, 그래서 잠시 눈을 감았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엷은 미소를 그린 채 카운터 건너편에 서 있었다.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가게 안에는 그와 그녀밖에 없었으며, 그는 그녀의 손에서 테이프를 받아들고는 재미있게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끔찍한 영화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래요, 그렇죠" 하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커피 한잔 하시겠어요?"

그녀는 "커피요……?" 하고 되물었지만, 그것이 거절을 뜻하는 말이 아님을, 그녀가 되묻기 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길 건너편의 슈퍼마켓 문 옆에 서 있는 자판기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뽑아들고 돌아왔다.

가게를 자주 찾아주는 손님에게 차 대접하는 것을 그는 주인이 갖추어야 할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를 함께 하며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손님의 취향을 보다 정확히 파악해서 테이프를 고르는 데 도움을 주고, 더 나아가 손님의 자질구레한 걱정이나 기쁨을 들어주는 것을 굳이 돈만을 위한 행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영화를 전공한다는 대학원생과는 가끔씩 함께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했는데, 감독이 되어 세계 영화사에 남을 작품을 꼭 만들고야 말겠다는 순진한 대학원생과 그는 영화에 대해 제법 진지한 대화를 하기도 했다(물론 그는 주로 듣는 편이었지만). 그리고 찾는 손님이 얼마나 있느냐와 상관없이, 그가 책을 읽고(그는 영화에 대한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한 테이프나 그 학생이 추천하는 테이프들은 거의 빠짐없이 갖추어놓았다. 그녀가 빌려갔던 <야간 배달부>도 그렇게 들여놓은 테이프들 가운데 하나였다.

카운터 옆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종이컵에 담긴 들척지근한 커피를 마시며 그와 그녀는 <야간 배달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적 변태인 사디즘과 정치적 변태인 파시즘의 동일시, 자기를 고문한 자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여자는 마조히스트일 수밖에 없는가, 가해자와 피해자는 과연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검열하는 자들의 가위로 그들의 손목을 잘라야 한다(그 학생의 말이었다)…… 등등. 그리고 그녀가 본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우연히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정말 아름답고 무서운 동화였어요." "원제가 <이발사의 남편>, 파트리스 르콩트라는 감독이 만든 영화 말이죠? 그래요, 작은 보석 같은 그런 영화죠. 그 사람이 만든 <이르 씨>라는 영화도 <살인 혐의>라는 제목을 달고 비디오로 나와 있어요. 보지 않았으면, 가져다 보세요.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의 얘긴데, 이 영화에서도 중요한 것은 살인 사건이 아니라 남녀의 관계죠. 그리고 <이발사의 남편>처럼 꽤나 섬세하고, 훨씬 아릿한 영화예요." 등등)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나는 왜 슬픈 노래들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그런 노래들을 좋아해요. 다른 노래들도 좋아하지만." 등등)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러다가 그는 그녀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주로 광고 그래픽 디자인을 하며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시간, 아니면 두세 시간쯤 지난 뒤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는 그녀에게 <여름이 없었던 해>가 들어 있는, 지난밤에 그녀가 간 뒤에 복사를 해 둔 테이프와 두어 개의 비디오 테이프를 주었다("이렇게 그냥 갖다 봐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요. 빌려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들이니까"). 만일 그것이 유혹이었다면, 그녀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혹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우리집에 오시면, 제가 맛있는 커피를 끓여 드릴게요."

그런데 그것이 정말 유혹이었던가? 그는 결혼을 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결혼을 한 뒤에는 더구나 여자를 유혹해 본 일이 없었다. 아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물론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여자들이 있는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외박이라는 것을 한 일이 몇 번 있었고, 결혼 전에도 우연히 알게 된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떤 특정한 여자에게 성적인 관계를 갖기 위한 목적으로 접근했던 일은 없었다. 게다가 아내와의 관계도 원만해서 구태여 다른 여자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내와만 잠자리를 같이해야 한다거나, 결혼을 한 사람이 다른 상대와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런 일에 무관심했을 뿐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이 담긴 테이프를 복사해 주고, 좋아할 만한 영화 테이프를 그냥 빌려준 것도, 그러므로 유혹 따위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호의를 보인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날 밤, 그에게서 테이프를 받아간 그날 밤,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것은 아마 명백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전화를 받은 그는 가게의 문을 닫고, '맛있는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자정이 넘은 시각에 과일까지 사가지고, 그러나 특별한 의미는 부여하지 않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그녀는 그의 가게에서 걸어서 오 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는, 방 두 개 짜리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다. 그가 들어가자 그녀는 "여자 혼자 사는 집 같지 않죠?"라고 했는데, 사실 그녀의 집은 집이라기보다 작업실 같았고, 실제로 작업실이기도 했다. 제도대와 물감, , 분사기 등등 그녀의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과 그림이나 포스터, 사진, 미술 서적 따위들이 집 안 가득 널려 있거나 벽에 붙어 있었다. 그가 거실 구석의 조그마한 식탁 앞에 앉자, 그녀는 사이펀으로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고, 커피가 끓는 동안 그가 사가지고 간 딸기를 씻었다. 그렇지만 딸기 몇 알을 삼키고 향기가 짙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와 그녀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색한 침묵과도 흡사한 것이었고, 그래서였겠지만, 그녀가 틀어놓은 카세트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그가 복사해 준 테이프에 담겨 있는 귀에 익은 음악까지도 낯설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마침내 "커피, 잘 마셨어요."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도 따라 일어서서 그의 앞에 마주섰는데, 그때 그는 그녀가(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마치 계획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분명히 깨달았으며, 그러므로 그날 밤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를 껴안았으며 그도 거의 동시에 그녀를 안았고, 그러한 동작에 뒤따르기 마련인 일련의 행위들이, 그 무모하고 어이없는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방안, 그녀의 침대 위에서였다. 둘은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로, 몸을 씻을 생각도 없이 누워 있었고, 허공에서는 둘이 만든 거친 숨소리와 신음의 꼬리가, 사라져가며, 흔들리고 있었다. 자동 반복이 되는 그녀의 기계 속에서 테이프는 꾸준히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때 흐르던 곡은 딥 퍼플의 <랄레이냐>였고, 그렇지 않아도 밤꽃이 필 계절이기도 했지만, 방안에는 밤꽃 내음이 가득했다.

그는 새벽에 그녀의 집에서 나와야 했는데, 그녀가 사는 연립주택에는 그의 가게를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어서, 그들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집에까지 걸어 갔는데, 걷는 동안 우습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우스꽝스러운지는 알지 못했고, 아내에게 할, 구태의연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케케묵은 내용의 거짓말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어쩌구 하는까지 다듬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는, 물론 아내가 모르게, 틈틈이 그녀를 찾아가는 것으로 관계를 지속시켰다(찌는 듯이 더웠던 어느 날 호텔에서 만나 밤을 보내기도 했고, 그가 쉬는 날 도시 밖으로 나간 일도 두어 번 있었지만). 아내 몰래(그러자니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양한 형태의 거짓말들을 창조해야만 했고,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그의 말이 거짓일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여자였다), 그리고 동네의 다른 사람들도 모르게, 그녀를 찾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으며, 그녀 또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혼을 한 사람이, 아내나 남편이 아닌, 다른 상대와 지속적으로 성적 관계를 가질 경우에 왜 그 일을, 특히 결혼을 한 대상에게, 비밀스럽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나 그녀가 단 한 번도 물음표를 걸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그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가끔씩은 아내가 나와 가게를 보는 일도 있었는데비디오 테이프를 돌려주러 왔다가 그의 아내를 본 그녀가 나중에 그에게 한 말은 "부인이 예쁘시던데요"가 전부였다. 그 말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으며, 그 말 속에 무슨 복잡함이 담겨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아내에게 죄를 짓고 있다거나 하는 따위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관계를 그는, 단 한 번도 의심의 눈길을 던지지 않았던 관습에 따라 비밀스럽게 행하기는 했으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와 아내와의 관계도, 그가 그녀를 만나기 이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녀의 신상(특히 혼자 사는 여자의 남자 관계)에 대해서도 부질없는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그녀가 그를 만나기 전에 두세 명의 남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입을 통해 알게 되기는 했지만/물론 그녀는 그런 말을 어쩌다가 한두 마디씩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가 찾아와서 두세 시간 정도 머물고 가는 것 이상을 원치 않았다. 물론 그는 그녀에게 물질적인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는데(그녀의 집에 갈 때 과일이나 술 따위를 사가기는 했지만), 그녀가 애당초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뿐더러(만일 그랬더라면,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벌이가, 썩 많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혼자 생활하기에는 넉넉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와 그녀의 관계는 오로지 성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만큼 순결한 것이었다. 둘 사이에는 사랑소유욕과 질투, 비참함과 잔인함의 무모한 합성물인이니 뭐니 하는 따위의 기만적인, 어처구니없는 관념이 끼여들 여지조차 없었다.

<여름이 없었던 해>라는 노래 때문에 만난 그와 그녀에게는, 가을이 되었어도, 여름만 있는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으며, 그가 문을 닫고 잠근 다음, 돌아서자마자 그녀가 안겨왔다. 그녀는 혀를 그의 입 속에 밀어넣은 채로 잠옷을 벗어 던졌으며, 그가 오는 날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잠옷 아래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그녀를 안아들고 침대로 가서 내려놓은 뒤에 자신도 옷을 벗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녀는 팔을 괴고 윗몸을 반쯤 일으킨 자세로 옷을 벗는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그가 옷을 다 벗자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으며,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러므로 시트가 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싸늘하기까지 한 가을밤이었지만, 둘은 땀을 줄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둘이 함께 한 것은,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그럼에도 아무런 대가도 없는, 낭비된 에너지가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무상의 행위, 행위 자체의 만족밖에 얻을 것이 없는 자기 충족적인, 순순한 행위였다. 그러므로 둘은 허덕이며, 있는 힘을 다해, 그 일을 끝까지, 그리고 만족스럽게 치러내야만 했다.

그렇고 그런 그 일힘들고, 짜증스러우며, 불쾌한을 끝낸 뒤에도 그는, 그런 일을 끝낸 뒤에는 항상 그랬듯이, 한동안 침대 위에 퍼져 있었다. 그녀도 그와 흡사한 자세로 누운 채, 그녀의 오른손, 손가락들로 그의 왼손을 아주 조그많게, 음미하듯이, 만지작거렸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뿌리치듯이, 그러나 아주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갔으며,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알몸인 채로 욕실에서 나온 그는, 참으로 우연히, 침대와 그녀와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있는 방으로 가지 않고, 제도대 앞의 의자에 앉았다. 제도대 위에는 화장품 광고 레이아웃 시안들과 여자 얼굴 스케치가 몇 장 있었으며, 그 위쪽으로 색연필, 파스텔, 포스터 컬러 물감, 로트링 펜, , 붓통, 필통 등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그런 것들을 바라보다가 필통으로 손을 뻗어 날의 폭이 제법 넓은 노란색 플라스틱 손잡이의 커터를 꺼내들었다. 날을 고정시킬 수 있는 나사까지 달린 그것은, 그녀가 쓰는 것을 한번도 보지는 못했지만(그는 그녀가 일하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두꺼운 종이 같은 것을 자를 때 쓰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방에서 나와 그에게로 다가온 것은, 마침 그가 커터의 날을 오 센티미터쯤 밀어내 고정시켰을 때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알몸인 그녀는 그의 옆에 붙어서서, 한 손은 그의 어깨에 얹고, 그냥 아무렇게나 물었다.

"뭐해요?"

그는 커터를 만지작거리며, 커터에 눈을 둔 채로 되물었다.

"이런 무기도 쓰나?"

"무섭죠? 그걸로 사람도 죽일 수 있을걸요."

그녀는 웃음을 그리며 대답했다. 그는 커터를 손에 쥔 채로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래, 죽이고도 남겠어."

그러면서 그는 그녀의 끈적한 몸을 마주보고 가볍게 안았으며그 순간, 무엇인가가 반짝였을까?, 그리고는 그녀의 몸을 돌려 그녀의 등이 자신의 앞쪽으로 오게 했다. 그래서 그가 등뒤에서 그녀를 안은 꼴이 되었을 때, 바로 그때, 그녀의 목을 감은 왼팔에 달린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으며 머리를 뒤로 당기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손에 든 커터로 그녀의 목을, 왼쪽 귀 밑에서 오른쪽 귀 밑까지, 깊숙이 그었으며, 이어지는 동작으로, 그녀의 왼쪽 젖가슴에, 아래에서 위를 향해, 커터를 쑤셔박았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던가? 버둥거렸던가? 그는 그녀를 뒤에서 안은 자세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던가? 등등의 의문부호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며, 그것도 그의 손에, 그가 쥔 그녀의 커터에 목이 베이고 심장이 찔려 죽었다는 사실이다. 확실한 것은 그것뿐이다. 그는 그녀를 왜 죽였는가? 만일 커터가 없었더라면, 그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까?그러니까 커터의 존재가 그녀를 죽이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부호에 대한 답 또한 어디에도 없다. 그가 지금까지 삶이라는 것을 견뎌야만 했던 이유를 모르듯이, 그리고 굳이 그런 것들을 알고자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그녀를 죽인 이유나 동기를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살아 있었고, 그러므로 그는 그녀를 죽였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아니 한동안 그녀였던 물체를, 거실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혀놓고 다시 샤워를 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 벌거벗은 채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잠이 들었던가? 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그는 아내라는 여자를 잠깐 동안 떠올렸을지도 모르지만, 그 낯선 여자가 왜 자기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는 한밤중과 새벽의 중간쯤에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그를 일으킨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ΩΩΩΩΩΩ…… 전화벨이 스무 번 가까이나 울렸지만 그는 물론 전화를 받지 않았으며, 그런 시각에 누가 전화를 했는지, 전화를 한 사람은 그녀와 어떤 관계이고,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아니면,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자기를 찾는 전화는 아닌지, 또는 그저 잘못 걸려온 전화인지 등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옷을 입고 방의 불을 끈 다음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피가 흥건했고(그때 그는 냄새를 느끼지 못했다), 노란 손잡이가 달린 허여멀건한 낯선 무엇인가가 그 피바다의 한복판에 자빠져 있었다. 그것은 무슨 신표현주의 화가의 그림 같은, 기이한,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도대체 뭘 어쩌겠다고 이런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거실의 불도 끈 그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그녀가 살던 집에서 나왔으며,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열쇠로 현관문을 잠그고는, 그녀가 살던 집이 있는 동에서 나왔고, 드디어는 불켜진 방이 하나도 없는 연립주택 단지에서 유유히 걸어나와, 많은 사람들이 약수라고 하는 물이 나오는 샘이 있는 동네 뒷산으로, 제법 찬 공기가 그를, 온 세상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추운지도 모르면서 올라갔다.

마침내 사람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신선학이 융성한 다음에는 불교가 흥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빛과 전기를 타고 를 조절해서 지구에서 벗어나 다른 별로 가게도 된다. 이것은 대동세의 극치이며 인류의 지혜가 또 한번 새로워지는 때다.

康有爲,<大同書>에서

태양계 밖으로 멀어져 가는 오르페우스호의 스크린으로 보이는 유리디체 기지의 폭발 광경은 마치 하얀 불꽃의 덩어리들이 명왕성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 엄청난 것이었다.

"명왕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아요,"

헬렌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었다.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눈물을 소리없이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살아 남은, 아직은 살아 있는, 아마도 최후의 인간들일, 오르페우스호의 승무원들, 곧 자신들뿐이라는 것을.

그때 킴이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물었다.

"우린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바네사 아르망,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에서

아직 이른 새벽이어서인지 약수터에까지 가는 동안 그가 본 사람은 하얀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가는 노인밖에 없었다. 그는 그 노인을, 두 손으로 목을 조르거나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노인을 앞질러 약수터로 갔다. 약수터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물통에 물을 받아놓고 맨손체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샘에서 물을 받아 마신 뒤, 샘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바위 위에, 샘을 등지고, 걸터 앉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산으로 올라가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누군가가 그에게 일러준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를 동시에 다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럴 수 없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서 그는 어둠에 잠긴 도시의 한 자락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약수터에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결국 그는 바위에서 일어서서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려가는 길이었으니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만 사람들이 길에 가득한 것은 아니어서, 어느 모퉁이에서 그는 드디어,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고, 숲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나무들 사이의 풀이나 낙엽 따위를 밟으며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그의 길을 가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다가 손바닥보다는 조금 넓은 공터와 마주쳤고, 그래서 그는 그의 길이, 산꼭대기에 이르기도 전에, 마침내 드디어 급기야 기어이, 끝나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흔히들 말하듯이, 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은 시작되는 것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야흐로 시작될 여행은 또 어떤 것일까? 그는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고, 그저 공터에, 이슬에 젖어 축축한 풀밭에 드러누웠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으로 떨어져 내린 낙엽을 주워들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러니까 잎사귀가 죽은 것, 곧 잎사귀의 송장이었지만, 낯설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떨어졌다……. 그는 손에 든 낙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열어 다시 떨어뜨리고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지만,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너무나도 짙푸르러서, 상투적으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정말로, 무슨 기적처럼,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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