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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알리바이

Bollnow 2024. 3. 22. 17:27

내 생의 알리바이

공선옥

 

태림에 대한 진술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애기를 하게 됐는지의 발단을 밝혀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지금 하는 애기는 말하자면 태림에 대한 나의 진술이 시작되기 전의 서두인 셈이다. 이 서두는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아니, 이 글 모두를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것은 읽는 사람의 자유다. 내 이글에 냉담하게 고개 돌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나는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과 나는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리고 나는 아직도 끝없이 '민중'을 동경하는 '소 부르주아'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태림과 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 또한 나는 내 이 어눌한 진술이 절대로 90년대식(?) 어법에는 맞지 않을 거라는 영악한 생각도 한다. 그러고 보면 '눈치도 좀 보아가며 살 일'이라는 명제에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하루 전이었다. 태림과 내가 그렇게 어이없는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기 바로 하루 전날 나는 태림이에 대한 소식을 수남에게 들었다. 태림은 애가 셋이라고 했다. 수남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렁주렁하게도 말이다. 나는 '창밖이 아름다운 커피전문점'에서 근 두 시간을 기다려 수남을 만났다. 시끄러운 찻집에서의 두 시간짜리 독서의 맛은 그런대로 개운했다. 그래서 약속시간을 못 지킨 수남에게 그다지 화나는 것도 없었다. 수남은 외려 내가 화내지 않음을 미안해했지만.

"너와 약속했던 걸 깜빡 잊었어. 수술대 위에 딱 누우니까 니 생각이 나는 거 있지."

"괜찮아?"

"물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남과 나는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두 시간 술을 마셨다. 수남이 낙태수술을 한지 딱 두 시간이 지난 시간이었다. 태림은 수남과의 그 두 시간짜리 술자리에서 등장하였다. 나는 태림을 잊은 지 오래였다. 잊은 지 오래였던 그가 그 두 시간의 술자리에서 우리가 안주로 먹고 있는 명태포 속에 잠복해 있는 가시처럼 내 폐부 깊숙한 어느 한 곳을 자꾸만 찔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내 폐부 깊숙한 곳이 찔리건 짓이겨지건 상관없이 수남을 위로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잊어버리자."

얼마나 무책임하고 방자한 말인가. 잊어버리자는 말 따위는 두 번은 하기 싫었다. 아무 말 없음의 관계. 말 없는 속에서의 대화가 우리 사이에는 가능했다. 말 없는 속에서의 대화가 가능한 한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으리라." 나는 그날, 낙태 수술한 여자가 수술한 지 두 시간 만에 술을 마셔도 몸에 괜찮은지 어쩐지만을 지극히 염려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문제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한눈팔기였다. 그냥 한눈을 팔아버리는 것이다. 본질을 들여다보기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는 서로가 한 눈 팔고 있는 상태임을 잘 알아보았고 그 한눈팔기의 이면에 도사린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수남이 태림이 애기를 한 것도 어쩌면 그런 한눈팔기의 일종이었다. 처음엔 서로가 당황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수남과 태림은 친구 사이이기도 하지만 선생님과 학부모 관계가 아닌가.

"니 학생이면서 그 엄마가 누군지 몰랐어?"

"난 태림이 이름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어. 우리랑 같이 다닌 게 겨우 두 달이었잖아."

병원 로비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태림임을 알아보았고 얘기를 하는 도중에 태림의 아이가 제반 애임을 알았다고 했다.

"잘한다. 선생이."

"얼마나 재밌었는 줄 아니?"

"우리 애 선생님이라고 김태림이가 광고내지 않든?"

"잘해주든데. 애 셋이 주렁주렁이고 요번에 넷째였던걸."

"어떻대? 사는 건."

", 내일이 걔 아들 생일이래. 내가 맡고 있는 애. 집에 초대한댄다. 제 아이 담임이라고."

"그래?"

"네 말도 나왔어. 같이 오라고 꼬옥."

"태림이가 그랬어?"

"."

나는 시종일관 담담했고 수남 또한 시종일관 초롱초롱했다. 조그만 틈새만 있어도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시종일관의 태도는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질 수 있음을 수남과 나는 잘 알고 있었기에 태림이 애기를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태림은 우리가 드러낸 환부 위에 임시처방으로 바르는 반창고 역할을 그 순간 해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지금 이 순간 태림이 그렇게 우리들의 반창고 역할만을 해내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명태포 속에 잠복해 있는 가시로서의 태림이 지금 내 속의 어느 한 곳을 찌르고 있음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찌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렇다면 나는 아직 태림을 영영 잊지는 않았다는 뜻인가. 태림의 첫번 남편은 죽었다. 그 사이 재혼을 했던 것일까.

수남은 새로워지고 싶다고 말했다. 십여 년 연애의 마지막을 산부인과 병원에서 결산한 수남은 이제 정말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새롭지 않으면, 않으면 길은 막다른 길일 것이기에. 우리는 갈림길에서 헤어져 각자의 앞에 놓인 어두운 길을 따라 걸어갔다. 헤어지기 직전 내일 창밖이 아름다운 커피전문점에서 만나 커피집 맞은편 빵가게에서 생일케이크 하나 사기로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일이 토요일이군, 하고 새삼스레 뇌었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을 하지 않은 지 내일로 열여섯 주일이 된다. 그 열여섯 주일 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빚뿐인 출판사를 인수해준 편집장에게 고마워하며 보낸 열여섯 주일이었나. 출판사를 인수해준 그가 있음으로 해서 나는 채무자의 신분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 빚에서 나를 해방시켜준 그가 고맙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거미줄 같은 욕망의 그물로부터도 나는 벗어났다. 다 그 덕분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 점들을 나는 후배 편집장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출판사를 인수한 후배는 빚이 거진 꺼져간다고 몇 번 전화를 해왔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 두어 달 며칠에 한 번씩 편집장이 기획했던 책광고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만둔 뒤 그들은 좀더 열린 시각과 자유로운 토론의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을 주고자" 출판된 그 책은 물론 내 손에서는 탄생될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책은 꼭 나 같은 사람이 보라고 출판된 듯도 하다) 판매고는 그런대로 괜찮은 모양이었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앤디 워홀의 미소는 모호하게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지금에 와서, 그들이 말하는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의 보수성"이란 것이 확실히 있긴 있는가 보았다. 최신 유행 음악이나 최신 사조들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 반응이 나의 그런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의"를 증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들에게 제때 임금을 주어본 적이 없었다. 한때, 90년대가 되기 직전 어느 한때 잠시 내게도 약간의 호경기가 있었다. "현 시기 노동운동의 진로와 전망"에 관한 논문 모음과 한두 편의 번역 노동 소설이 내 호경기의 이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일생 단 한번의 호경기였던 때로 기록될 것이다. 그때 한 번이었던 것 같다. 임금을 제때 제대로 줬던 적이. 그리고 나서 이제 나는 손을 털었다. 내 청춘의 한때와 나는 결별했다. 나도 새롭고 싶다. 정말이지 간절하다.

태림이 생각이 난다. 오래 잊고 지냈다. 낙태를 했단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애가 셋이라는데. 넉넉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골목에서 막바로 통하는 방, 함부로 버려지는 개숫물과 늘상 치워지지 않는 쓰레기더미와 악다구니. 그리고 그런 악다구니와는 상관없이 태평무사로 피어나는 장다리꽃들. 나는 그가 그곳을 벗어나려 얼마나 애쓰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곳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님도 조금은 알고 있다. 그의 첫 남편은 막일꾼이었고 태림은 막일꾼의 아내였었다. 십여 년 전 일이다. 막일꾼은 죽었다. 칠 년 전 일이다. 태림은 재혼했던 것일까.

출판사를 그만두고 이 도시에 내려와 내가 한 일이라곤 이따금 수남과 만나 두어 시간 요량 취하지 않을 만큼, 술을 마시는 일뿐. 뭔가 일을 시작해보고 싶다. 팔리지 않을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를 경영했던 서른셋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마음이 자꾸만 어려져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하고 자문자답해본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싶다. 그것은 사실이다. 수남이 일 때문에 나는 혼자서 눈물을 좀 훔친다. 가여운 것! 노파같이도 뇌어본다. 지극한 단순성. 태림이 생각을 한다. 한 번은 보고 싶었던가.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지금 처음으로 그를 보고 싶어 한다. 태림이 이야기를 하자.

 

진술 1

태림이는 삼월에 우리 곁에 왔다. 그의 어머니가 노동능력을 상실한 아버지와 그들 형제들을 이곳 도시로 데리고 들어왔다고 언젠가 태림이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태림은 그렇게 시골 여자고등학교에서 남녀공학인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그해 삼월에 학도호국단장을 직선했다. 교련 사열 때면 연대장으로도 불리던 직선 학도호국단장은 잘생겨서 나는 한때 그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연대장이었던 만큼 그가 진학할 학교는 오직 육군사관학교뿐임을 그와 우리는 철석같이 여기고 있었다. 그는 당연히 육사를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학도호국단장이 육사에서 낙방했음을 안 우리는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왜냐하면 그는 육사에서 떨어지기엔 너무나 잘생긴 용모를 지녔던 것이다. 찢어지는 가슴으로 우리는 우리의 호국단장을 잊어갔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우리의 위대한 직선 호국단장을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해에 맨 처음 실시하는 대학 입시에서 떨어진 맨 처음의 낙방생이었던 것이다. 대학 초년 때까지 나는 그를 잊지 못해 육사가 있는 태릉을 지나칠 때마다 가슴 찔리는 통증을 맛보아야 했다.

태림을 애기하자 하면서 나는 내 사랑, 학도호국단장만 떠올린다. , 다시 시작하자. 태림은 삼월에 우리에게 왔다. 처음 우리 교실에 들어서던 그의 얼굴에 아직 갯바람에 그을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태림은 열아홉이었는데도 갯바람에 그을린 자국 때문이었는지 마치 신산스런 삶의 한가운데 있는 삼십대 여자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때 그것을 신산스럽다고 느끼지 않고 촌스럽다고 느꼈다. 후에 나는 그런 색깔의 얼굴빛을 가진 촌여자를 미국 여류 사진작가 도로디 어 랭이 찍은 이주민 어머니라는 제목의 사진에서 보고 견딜 수 없이 감동한 적이 있었다. 내가 감동했던 그 얼굴빛이 그러고 보니 촌스러웠던 그해 삼월의 김태림의 얼굴빛이었음을 나는 지금 깨닫는다.

그해 사월, 4() 기념식을 학교 몰래 치렀다. 그해 사월, 하면 기억은 그것뿐이다. 오월에, 정확히 말하자면 오월 상반기 중간고사일을 하루 앞둔 일요일부터 학교 교문이 닫혔다. 우리는 유월도 그냥 보내고 다른 지방이 방학을 하는 칠월에야 학교에 나올 수 있었다. 대학에 딸린 부속고등학교였으므로 우리는 대학생들과 나란히 교문을 쓰고 있었다. 그해 내내 대학 교문을 군인이 지켜 서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카키색의 군복과 어깨에 멘 소총은 이제 마악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해에 반사되어 검은색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 검은색은 어찌 보면 비장한 엄숙미가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소리 없는 미소를 나눴다. 나중에는 소리내어 인사했고 우리들 중 몇은 그들을 어느새 좋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못할 우수 같은 것이 서려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런 말못할 서러움이 우리 전부에게 있었다. 대학생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교문을 통과했으며 군인들은 고개 수그린 대학생들을 외면했다. 외면한 군인의 시야에 새처럼 초롱한 우리들이 보였고 그들은 허공에 떠 있는 시선으로 우리에게 슬픈 미소를 보냈다. 나중에야 진단한 것인데 어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신군부 정권과 친해졌던 것이다.

우리는 그해 오월, 우리들의 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를 까맣게 잊어가고 있었다. 등하교 때 마주치는 그 잘생긴 헌병 때문에 가슴 설레며 학교를 다녔다. 그해 칠월에서 팔월이었다. 가을이 왔을 때 우리 중의 몇은 실습 나온 교생 선생님과 일시적인 사랑에 빠졌고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우수 어린 교문 앞 군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그해 구월과 시월을 보냈다. 입시가 가까워올 무렵 군인들은 철수했다. 군인들이 없는 교문 앞 광장에 간혹 비둘기가 날아와 앉았다 가곤 했다. 아무도 그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다. 먹이를 찾던 비둘기는 빈 부리만 콘크리트 바닥에 몇 번 훔치고 나 서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수남은 교육대학을 가겠노라고 말했다. 정말로 좋은 시골 국민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안이 어려우므로. 나는 수남의 꿈이 원래는 국민학교 교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의 꿈은 패션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수남이 자신의 꿈을 수정하며 그래야 되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바로 그 가난한 수남의 현실이 가슴아팠다.

그럭저럭 입시를 치르고 졸업사진을 찍고 학교생활도 한가해진 초겨울이었다.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방학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대학도 일찌감치 종강을 했는지 학교 전체가 텅 빈 것 같은 햇빛 밝은 초겨울 오후 나는 그날, 태림을 만났다.

우리는 정신이 없었던 것일까. 그해에. 그해에도 위층 사는 새댁은 아이를 순산했고 누군가는 실연을 비관하여 음독자실을 기도하려 했었다는 기사가 지방신문 똑딱이란에 실렸다. 우리 중 에 몇은 실습 나온 예비 선생님과 사랑했으며 나를 포함한 몇몇은 교문 앞 말못할 우수를 사 랑하지 않았던가. 겨울이 다가올 무렵 군인들이 철수한 그 자리에 날아온 비둘기를 우리는 오래 바라보기도 하지 않았던가. 왜 사람들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을까. 그러면 추운 겨울을 저 비둘기는 어찌 사노.

그리고 우리는 무사히 입시를 치러냈고 친구의 눈물겨운 진로 수정에 대하여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으며 정옥아, 수남아, 불러가며 졸업 사진도 박았다. 그러고도 정신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러느라고 정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해, 오월에서 유월 사이에 실종되어버린 미술 선생님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미술 선생님을 잊고 있었으니, 김태림이야 당연했던 것일까. 그는 우리가 기억 할 만큼 예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그와 우리가 같이 있었던 기간이 삼월에서 오월까지뿐이라서였나.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우리 중에 아무도 태림의 부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고등학교 삼학년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이윽고 다가올 입시가 촉박하여 출석을 부르지 않고 막바로 수업부터 들어갔으며 우리들 중 몇은 일류대반 교실에 따로 불려나가 합숙을 하며 공부해야 했다. 또 몇은 특별과외를 받느라 미술학원으로 음악학원으로 나갔고 몇은 체육특기자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에 남은 고삼(高三)들은 잔류자였다. 그들 중 대다수는 조만간 잔류자에서 패잔병이 될 것이었다. 잔류자들 중 몇몇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잤고 몇몇은 책상 밑 무릎에 놓인 순정소설에 푹 빠져 있었으며 나와 수남이와 그 외의 몇몇은 도무지 해득되지 않는 수학 선생의 소음을 멍청히 경청했다. 입시가 끝난 초겨울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해 초겨울, 우리들은 각자 자신들의 앞에 놓여 있는 운명의 길이 어느 쪽인지를 알고 있었다. 몇은 대학을 갈 것이었다. 몇은 생산직 노동자의 길로 갈 것이고 몇은 백화점의 점원으로 몇은 사무실의 사환으로 몇은 집으로 돌아가 식순이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몇은 본인들조차도 믿어지지 않게시리 일찌감치 시집을 갔다. 본인도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을까 하며 시집 을 간 친구를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마침 갓 스물에 시집을 가서 낳은 아이가 그 곁에 있었는데 그 아이는 코밑이 벌써 꺼뭇꺼뭇해 있었다. 그의 엄마, 봉님이는 말하자면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안 하고 건너편 건물의 남학생과 눈이 맞았던 것인데 수염이 꺼뭇꺼뭇한 봉님의 아들은 영락없이 3학년 1반의 그 남학생을 닮아 있었다. 김기철이. 봉님이 남편인 김기철이는 학 교 다닐 때 늘 모자를 삐뚜름히 쓰고 배꼽바지를 즐겨 입고 다녔다. 봉님이와 헤어져 걸어가면서도 봉님이 남편 옛 모습이 떠올라 나는 자꾸만 비식비식 혼자 웃었다.

그해를 생각하면 그렇다. 봉님이와, 봉님이 남편 김기철이는 생각난다. 감회어린 선명함으로. 김태림이 애기가 나왔다. 수남이 입에서 나온 소리다.

애가 주렁주렁 셋. 이번에 넷째를.

초대한댄다.

너도 오라고 꼬옥.

태림이 소식을 수남이에게 들었을 때 왜 나는 명태포 속의 가시에 입천장 어디를 찔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미리 말해두건대, 나는 힘들었다. 내 생은 악화일로의 길이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흔한 말이면서 좋은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있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 한 분은 모든 조건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옳고 좋은 말이다. 나는 태림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거나 싫어한 적도 없다. 아니, 내가 태림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감정 따위들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어느 한때나마 우리 관계가 긴밀했던 적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태림과 나와의 관계를 그렇게 느꼈다. 한때나마 긴밀한 관계에서만이 그 속에서 애증 따위 감정들도 파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애증의 감정이라든가 기타 다른 감정들이 생겨날 수 없는 선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런 만남조차도 오 년 전 여름이 마지막이다. 또 한 번 말하지만 내 생은 쭈욱 악화일로의 선상에 있었다.

 

진술 2

초겨울에 태림을 만났었다고 말했다. 그 초겨울 애기를 하자. 입시도 끝나고 우리는 책가방 대신 옆구리에 헤르만 헤세나 앙드레 지드의 문고판 소설책을 끼고 학교에 다녔다. 오전에는 주로 교양강좌를 들었으며 오후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축축한 대기 사이로 늦은 아침해가 서서히 퍼지곤 하는 그런 날씨가 이어졌다. 오전 한두 시간의 의무적인 교양강좌 시간이 끝나면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텅 빈 도서관에서 나는 농밀한 적막과 축축한 한기를 헤세와 함께 즐기고는 했다. 햇빛은 사선으로 열람석에 꽂혀 있었고 나는 이제 내 인생의 비밀스런 장막 하나가 걷혀지는 것을 그 햇빛 속에서 보았다. 눈물이 났던가, 어쨌던가. 하기야 눈물이 흔할 수 있는 나이이고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사방 어디를 가나 나는 눈물 날 일 하나씩을 오버코트 주머니에도 줏어담고 치마 호주머니에도 줏어담을 수 있던 때였다. 그렇게 줏어담아서는 하루 종일 울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나는 학교를 나왔고 교문을 나서는 순간 태림을 만난 것이다. 나는 신산스런 얼굴의 그를 향해 조금 웃어 보였다. 그 동안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조금 웃어 보이는 것조차도 어색했다. 태림은 달랐다.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이 글썽했다. 그랬으므로 나는 그의 곁에서 금방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사실 태림에게 적당히 웃어주고 그 자리를 떠날 셈이었다. 멋진 계획이 내게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만의 은밀한 준비긴 하지만 나는 오후에 옷을 사러갈 셈이었다. 옷을 산다는 것이 왜 그렇게 가슴 설레는 일이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때 나는 옷을 산다는 그 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나는 그 옷을 사서 내 방 거울 앞에서 나 혼자 은밀히 입어 볼 심산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꼭 드는 사복 한 벌을 입고 헤세를 한 권 들고 이제 올겨울로써 마지막이 될 이 도시에서의 겨울 해를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는 공원에 나가볼 것이었다. 그래서 공원에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을 각별하게 바라볼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이번 겨울로써 이 도시와 안녕을 해야 할 운명이므로. 그랬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운명이었다. 새로 산 그 옷을 입고 나는 이 고장에서 마지막 보는 비둘기들에게 먹이도 부려줄 것이었다. 몇 방울의 투명한 눈물과 함께. 멋진 계획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태림을 만난 순간에 나는 깨달아야 옳았다. 그가 내 그 모든 정다운 것들과의 눈물 겨운 이별연습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 옷을 입고 코끝 싸아한 바람을 맞으며 나를 사랑했지만 내가 사랑하지 못했던 이 도시에게 고할 정중한 이별의 순간이 태림을 만난 그때 산산조각나 버렸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는 그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해 겨울도 예외 없이 갓 스물들이 그 도시를 빠져나갔다. 천부적으로 우수한 두뇌, 가상했던 노력파, 유학을 해도 가계에 별 타격이 없는 집의 자제들, 가계가 파탄나도 서울행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처절한 스물들이 그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부모님 몰래 내 손으로 산 모직 투피스(지금은 촌스럽기 한량없는)를 입고 서울행 야간열차를 탔다. 나는 정들었던 도시와 이별했다. 나의 부모는 내 서울 유학을 보낼 만한 여력이 없었고 나는 죽어도 유학에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처절한 스물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해 겨울에.

"태림을 만난 것이 초겨울이었다."

똑같은 진술을 나는 지금 몇 번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 애기를 하자. 태림이 애기. 하지만 무슨 애기를 한단 말인가. 나는 태림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그다지 없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미워한다거나, 싫어한 적도 없다. 그와 나는 친교의 기회를 그다지 많이 갖지 못했다. 그러니 문제다. 내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르는 이 가시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을 밝히자면 맨 처음 그와 내가 만났던 날부터 차근차근 애기를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제야말로 정색을 하고 태림이 애기를 해보기로 하자.

나는 그날 옷 사기를 포기하고 김태림이와 함께 있었다. 최초의 알리바이가 이것이다. 우리는 그 날 대학 후문 옆에 있는 호숫가를 한시간 가량 거닐었다. 짧은 겨울해가 호수 저쪽으로 지고 있었다. 호수 안쪽에 있는 섬에서 물새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김태림이는 지난 여름에 이 호수에서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했다.

"정말?"

"."

"누구누구가 봤는데?"

"나 혼자."

"신고했어?"

"안 했어."

"?"

"실은 내가 빠뜨렸거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서 학교엘 나오지 않았구나."

"아아니, 나갈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안 나왔어?"

"나갈 수 없었어."

"나올 수 있었다고 아까 그랬잖아."

", 그래."

나는 지금 김태림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보았노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을 자신이 빠뜨렸다고 했다. 학교에 나올 수도 있었고 나올 수 없었다고도 했다.

", 그래"하는 태림의 무심한 대답이 시나브로 호수면 위로 떨어져 내렸다. , 그래. 나는 그 날, 태림의 응, 그래 하는 대답에서 무심함 이외의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단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말과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를 쉽게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진술 3

밤도망을 쳐서 서울로의 유학을 감행했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기생했다. 사월에 과사무실 우편함에서 태림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 뜻밖이었다. 자신은 지금 목하 연애 중인데 남자가 멋있는 사나이이긴 하지만 돈이 없는 청춘이라고 씌어 있었다. 답장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치솟았다. 이왕이면 정성을 다해 썼다.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짧은 겨울 해가 잔잔한 호수 위에 부서지던 날 만났던 친구여!"

사실 나는 이왕 편지를 쓸 바에야 이렇게 쓰고 싶었다.

"어느 초겨울의 호숫가에서 단 하루 만났던 친구여!"

나는 그날, 호수의 안쪽 섬에서 물새가 울어쌓던 그날 단 하루만 태림을 만났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잊어버렸던 것이다. 편지는 다소 의외였고 편지의 내용 또한 의외여서 나는 좀 어리벙벙한 기분으로 답장을 쓰긴 썼다. 답장의 말미에는 이성부 시인의 "가을 사람에게"라는 시도 한 편 적었다.

만날 사람도 없이 머물러야 할 장소도 없이 깊은 거리에 따라 들어가서 진흙투성이인 마음이 되어 나온 그대 참담해진 그대 (……)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어떤 의미로 답장의 말미에 "가을 사람에게"를 적어 보냈는 지.

태림에게서 온 두번째 편지를 나는 구월 첫째 주 화요일 날 과사무실 우편함에서 발견했다. 소인은 칠월로 찍혀 있었다. 다양한 내용이긴 하지만 요약하면 두번째 편지의 사연인즉 생활이 무척 어렵고 취직이 안 되고 있으니 친구인 네가 태림이 저를 좀 도울 수 있으면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약간의 귀찮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태림의 편지 말미에는 또 이런 내용도 씌어 있었다.

"나는 사실 너의 답신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막상 답신을 받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여 견딜 수 없이 떨리기도 하였다. 특히 너가 정성 들여 첨부해준 이성부 시인님의 "가을 사람에게"를 읽고 나는 눈물을 쏟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이번에 너가 나에게 자그마한 성원이나마 아낌없이 보내준다면 나는 이 세상 어떤 힘보다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뒷문장을 읽고 나자 귀찮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가시고 나는 쿡 웃고 말았다. 쿡 웃으며 아르바이트로 받은 일당 2만 원을 답장과 함께 흰 봉투에 집어넣었다. 나는 눈물겨운 고학생이었으 며 부모님은 서울바람 난 딸년에게 죽어도 학비를 보내주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절 학교 앞 식당의 주방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최하급의 아르바이트로 서울에서의 목숨을 연명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태림과 관련된 기억 중 대학에 들어와서 첫 번째 맞은 그해 겨울 어느 한 밤중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내가 기생하고 있는 친구의 자취방 집 대문을 세차게 두들기고 있었다. 공기가 땡땡 얼고 휘영청 달 밝은 밤이었다. 문을 열자 거기 놀랍게도 김태림이가 히죽 웃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태림에게 답장을 쓸 때 그냥 의례적으로 서울에 오면 한번 들렀다나 가라고 주소와 주인집 전화번호를 적었었는데 태림은 기어코 그 주소를 가지고 찾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태림은 그런대로 예쁘게는 차려입었고 방 주인인 친구에게도 상냥하게 굴었으므로 나는 기생하는 자로서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주눅이 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림의 방문은 내일 아침이면 끝날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묻지도 않았다. 왜 어떻게 무 슨 일로 따위는 일체 묻지 않고 대신 나는 되도록이면 먼 길을 온 그에게 잘하려고 노력했다. 친구가 태림에게 잘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였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을 때 나와 친구는 서둘러 학 교에 갈 준비를 하였다. 우리는 그해 겨울방학서부터 본격적인 "학습"을 시작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사, 해방전후사의 인식, 페다고지등이 그때 우리의 학습목록이었다. 그러나 태림은 방 주인인 우리가 나갈 채비를 하여도 이불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모든 채비를 완료해두고 마지막으로 양말을 꿰신으며 어쩔 수 없이 내 입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떡할 거야?"

태림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친구는 먼저 학교로 가고 나는 좀 화가 난 상태로 태림이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만 멍청히 쳐다보았다.

"이애, 어떡할 거냐구."

내 목소리가 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그때서야 태림의 얼굴이 이불 밖으로 비져나왔다. 나는 그때 태림의 눈자위가 붉게 충혈되어 있음을 보았다.

", 무슨 일이 있었어? 서울엔 언제 올라온 거야? 나 있는 곳은 어찌 알고 찾아왔어? 언제 갈 거야? 어떡할 거냐구."

붉게 충혈되어있는 태림의 눈자위 따위는 절대로 아랑곳하지 말자는 오기 같은 것이 불끈 솟아 났다. 나는 그 순간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네가 온다니? 네가 오면 내가 너 밥 먹여주고 재워주고 해줄 줄 알았니? 그리고 여기는 내 방이 아니란 말야. 나도 이 방에서 기생하는 신세란 말야."

태림은 충혈된 눈을 질끈 한번 감았다 뜨며 말했다.

"나 말야, 나 여기서 좀 살면 안.. "

강원도 출신의 이 방 주인인 친구(그는 나와 같은 과를 다니고 있었다)는 어젯밤 태림 앞에서 조금 흥분했던 것 같았다.

"굉장했지요? 어땠습니까.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드랬어요. 그것은 혁명이었어요. 절대로 폭동이 아니었다구요."

태림과 나는 아무 말 없이 방 주인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난 친구는 더이상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먼저 학교로 가버렸다. 내게서 들을 수 없었던 그 도시 애기를 그는 태림에게 기대했던 것일까. 그는 무엇을 듣고 싶어했던 것일까. 나는 그 도시의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 그리고 태림은 어쩌자고 지금 이곳에 있나.

나는 김태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에겐 겨우 한 번의 만남과 두 번의 편지 왕래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삼월에 우리 곁에 와서 사월을 보내고 오월도 채 다하지 않은 상반기 중간고사일을 하루 앞둔 그 일요일 이후 우리 곁을 떠났음을 나는 떠올린다. 오월에 떠난 그를 아무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무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속에 그는 소리 없이 나타났다. 나는 그가 소리없이 나타난 김태림이임을 아주 천천히 깨달아 갔고 그리고 웃었다.

나는 그날 이전에도 그를 구체적으로 만난 적 없고 그날 이후로도 그를 만난 적 없다. , 그날 하루만 만난 것 같은 태림이, 아니, , 그 하루만 만났던 김태림이 어쩌자고 지금 이곳에 있는가.

태림은 다시 한번 말했다.

", 여기서 조금 살면 안 될까? 남자가, 그 남자가 자꾸만 따라온다. 난 갈 곳이 없어."

나는 방문을 열었다. 말없이 나는 밖으로 나갔다. 학교로 갈 것이었다. 대문을 나서서야 나는 입 안에 고여 있는 한마디를 천천히 내뱉었다.

"나는 너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어. 나에겐 힘이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너랑 나랑은 그다지 친하지 않아."

 

진술4

학교에 가서 나는 친구에게 태림의 애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로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누누이 말했지만 기생자의 입장이란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애가 말야, 남자친구를 사귀었거든. 멋지긴 한데 돈이 없었나봐. 그래서 가만보니 이애가 싫증이 좀 났어. 싫은 남자가 자꾸 쫓아오니까 잠시 "

친구는 의외로 선선하였다. 오히려 지나치게 조심스런 내가 이상하다는 투였다. 기쁜 마음으로 자취방에 돌아왔을 때 태림은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 어디로 갔던 것인지.

대학 말년에 가서야 나는 집으로부터 얼마간의 보조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무렵엔 '강원도 친구'의 방에서도 독립하였다. 한여름의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을 마지막으로 나는 내 독립공간 안에 칩거하였다. 나는 내 독립공간 안에서 앞으로 내 인생이 나아갈 바가 어디인지 곰곰이 생각 했다.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나는 짐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짐을 정리해서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모조리 나눠주리라. 눈물겨운 고학생'들에게. 내 서러운 서울 유학의 남은 잔해와도 같은 짐들은 그렇게 처분하기로 하고 나는 미리 봐둔 공장의 기숙사로 갈 생각이었다.

나는 짐보따리를 들고 학교로 갔다. 구호물자는 유효적절하게 배분되었다. 마지막으로 과사무실을 들러 우편함을 털었다. 수신인이 내 이름으로 된 편지 한 통이 그 우편함 속에서 나왔다. 나는 교문까지 이어진 기나긴 진입로를 걸어 학교를 빠져나왔다. 학교를 다 빠져나와 교문의 돌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편지를 뜯었다. 발신인은 김태림이었다.

"잘 있었어? 나는 이제 너의 염려 덕분에 어느 정도 완쾌되었다. 남편에게도 니 애기 많이 했다. 잘 있었느냐? 내 친구여! 나는 아들을 낳았다. 통실통실하니 퍽도 예쁘다. 언제 와서 한번 보렴. 그러고 보면 나는 너를 사랑했던갑다."

태림이한테서 온 세번째이자 마지막 편지다. 편지에는 그때 강원도 친구의 자취방에서 나가 어디로 갔으며 무슨 병으로 어디가 아팠는데 완쾌가 되었다고 하는지, 어떻게 누구랑 언제 결혼했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내가 나가는 길로 저도 나가 내가 학교로 간 사이 저는 결혼을 하러 갔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너를 사랑했던갑다"라고 태림은 썼다. 그 구절에서 나는 무의미한 감동을 조금 느꼈다.

7년 전 봄에 나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라 여기며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도시의 시장 모퉁이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노동쟁의조정법 관련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은 집행유예 기간 중에 있는 범죄자의 신분이었다. 나는 그 시장 모퉁이에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태림과 조우했다. 태림은 아이 둘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큰아이는 태림이 편지에다 썼던, 통실통실하니 퍽도 예쁘다던 바로 그 아이임이 분명했다. 태림은 내 손을 잡고 시장통 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사실 오랜만에 만난 그가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세 번째 편지를 읽고 궁금한 것도 많고 솔직히 그의 사는 꼴을 한번 보고 싶기도 했다. 편지의 내용이 그다지 암울하지 않았고 무슨 병을 앓았는지는 모르지만 완쾌도 되어간다니 좋은 일이었다. 멋지긴 하지만 돈이 없는 청춘이라던 그 남자와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결혼도 하고 통실통실한 애기도 낳았다니 작은 인연이나마 인연이 있는 사람이고 하므로 한번은 들여다도 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던 것이다. 마음은 마음으로만 그쳤을 뿐 세월은 살같이 지나가버렸다.

태림은 내가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보았던 갯바람에 그을린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흙빛에 가까웠다. 신산하다기보다는 절망적인 느낌을 주는 빛이었다. 그런 절망의 빛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랜만에 만났어도 나는 그에게 반가운 내색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이끄는 대로, 그가 풍기는 음산한 절망의 빛에 이끌려갈 뿐이었다. 이끌리면서 나는 어쩌면 선배와의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었다.

동향인 선배는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다가 고향에 내려와 느닷없는 동물가게를 경영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지금 시장통 너머 공지에다 동물가게 터를 다지고 있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태림을 만난 것이었다. 출판사 인수건은 어차피 서울에서 결론지어야 할 문제이긴 했지만 약속은 약속이지 않는가. 하지만 태림이 이끄는 힘에는 뿌리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비장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태림은 한 손에 큰 아이를 걸리고 한 손으로 작은아이를 업고 북적이는 시장통 안으로 잘도 비집고 들어갔다. 이윽고 태림을 따라서 당도한 곳은 순대와 내장을 파는 막걸리집 앞이었다. 태림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쌍소리부터 내질렀다.

"옘병할, 하루 왼종일 걸었더니 막걸리 생각이 웬만큼 간절해야지."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는 순대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사발씩을 시원하게 비웠다.

"살기가 바빴냐?"

막걸리를 연거푸 두 잔째 마시고 나서 태림은 약간 시니컬해져서 내게 물었다.

"미안해. 편지를 받긴 했어. 꼭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네 남편이랑 애기랑."

나는 변명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이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지랄하네."

"뭐라구?"

"내 서방 죽은 지가 언젠데 보러 오냐구우."

태림의 눈에 순간적이지만 살기 비슷한 기운이 잠시 서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태림은 "보러 오냐구우" 하면서 술잔을 끝말인 '구우' 소리에 맞추어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 다.

나는 그런 태림의 모습도 꼼짝없이 앉아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선 사실 "야가 시방 뭔 행팬구" 하는 심정도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태림이 '구우' 소리에 맞추어 내는 술잔의 '' 소리가 내 마음 한구석의 "웬 행팬구"보다 훨씬 강력하여 나는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태림의 큰아이는 눈치가 빤하여 제 어미의 하는 양을 예사로워했다. 순대만 야곰 야곰 먹는 품이 그랬다.

태림은 그의 남편이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다 죽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담담하고 조근조근하게 이야기했다. 제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길 거라고 했다. 젖먹이인 작은아이는 친권을 포기할 것이며 그러고 나면 그 아이는 장차 해외로 입양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큰아이인데 태림은 그애를 아동일시보호소에 일시보호를 시킬 것이며 형편이 닿는 대로 빠른 시일 내에 그 아이를 데려올 것이라고 말했다. 태림은 그런 애기를 눈치가 빤한 큰아이 곁에서 아무렇지 않게 애기했으며 아이는 제 가족이 처해 있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다섯살인 그애는 고아원 운운하며 침을 튀기는 제 어미의 말을 참으로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림은 그들 가족이 처해 있는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친구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덧붙였다.

"너는 나의 보증인이 되어야만 하지."

"그게 어떤 건데."

나는 재빨리 머릿속을 굴려 "나는 지금 김태림이에게 빚보증을 설만 한 여력이 없다"는 사실부 터 확인해두고 그것이 어떤 거냐고 목소리를 착 가라앉혀 물었다.

"내 새끼에 대한 보증이지. 일 년 안에 내가 안 나타나면 니가 내 새끼를 데려다 키우는 거야."

어쩌면 장차 내 새끼가 되어 버릴지도 모를 다섯 살 사내아이를 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이는 병아리털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태림과 나는 다음날 오전 열 시, 시장 앞 큰길 가에 있는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태림이 때문에 선배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는 전화를 걸어 출판사를 내가 무상 인도하는 생각엔 변함이 없으며 내일이라도 한번 선배의 동물가게에 들러 보고 싶으나 나는 내일 오전에 어떤 사람의 새끼 보증을 서야만 하고 오후에는 서울엘 가야 하므로 부득이 동물가게를 방문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겠노라고 말했다.

"새끼 보증?"

사십이 다 된 노처녀인 선배는 웬 느닷없는 소린고 하고 낄낄거렸다. 빚보증 소리는 들었어도 새끼 보증 소리는 첨이라고도 했다. 나는 좀더 자세하게 내가 새끼 보증을 서게 된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선배에게는 희한한 일이 될는지 모르지만 태림에게는 절박한 일이 아닐 수 없 는 일이었다.

다음날, 나는 시장 맞은편 동백다방에서 태림을 만났다. 태림이 일러주는 대로 나는 내 인감도장과 주민등록증을 지참하였다. 장차 어찌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태림이가 제 혼자 몸뚱이조차 거느리지 못하고 제 인생의 파탄을 가져오는 행위를 한다거나 태림이 자신은 절대로 그런 일 은 없을 거라 하지만 반인륜적으루다가 보증인인 나를 믿고 저는 종적을 감춰버린다거나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저 병아리털같이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아이의 오마니가 되어야만 할 운명에 처해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성심성의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택시를 대절하여 시립 아동 일시 보호소로 향하였다. 택시 안에서 나는 어제부터 내가 심사숙고한 끝에 얻은 결론인 내 의견 한 가지를 태림에게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그것은 둘째 아이에 대한 친권을 미리부터 포기하지 말고 우선 큰아이와 함께 일시보호소에서 일시보호를 시킨 뒤 그래도 두 아이 부양이 도저히 힘들 것 같으면 그때 가서 친권을 포기해도 늦지는 않을 거라는 애기였다. 택시 기사가 우리들을 좀 이상한 눈으로 흘금거리는 것을 내버려 둔 채 나는 태림에게 진중하고도 차분하게 내 의견이 이러는데 니 의견은 어떻노, 물었고 태림은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너가 한 아이가 아닌 두 아이의 보증을 서야만 되고 그러면 친구인 나에게 태림이 자신이 너무 많은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이제 장차 제 형과 함께 내 자식이 될지도 모를 태림의 작은아이를 태림으로부터 건네받아 내 가슴에 안아보았다. 아이를 안은 느낌은 좋았지만 어느 하루 아침에 시집도 안 가본 처녀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상상은 사실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데 충분한 상상이었다.

두 아이의 보증을 서고 난 후에 태림과 나는 아동일시보호소의 언덕길을 내려와 태림이 잡아끄는 통에 할 수 없이 그가 살고 있는 집까지 동행을 했다. 할 수 없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지도 모르겠다. 태림은 시립 아동일시보호소 언덕을 내려오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칭기스칸은 말야, 칭기스칸은, 칭기스칸은……"

칭기스칸 부분에서는 태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의 감을 잡을 수는 있었다. 아들을 적지에 떨어뜨려놨단 말이지. 그것도 일부러.

그러나 미제국주의와 핵미사일 부분에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일시보호소의 기인 언덕을 따라오던 장차 내 새끼들이 되어버릴지도 모를 두 아이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태림에게는 들리지 않은 것일까. 나의 울음은 태림이 끊임없이 중얼이는 미제국주의와 핵미사일 앞에 극도의 희화적인 울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미제국주의 앞에서는 인간의 순수한 눈물도 맥을 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핵미사일 앞에서는 그렇다. 모든 것이 깡그리 무화되는 것이다. 아이의 처절한 울음도 내 순수한 인간애의 발로인 눈물방울도.

나는 태림이 사는 집까지 태림과 동행했다. 나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야 하는 것이다. 태림이 사는 방문을 열어 태림을 밀어넣고 몇 마디 위로의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나는 그곳 골목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내가 빠져나온 골목 끝으로부터 무서운 절규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물적인 섬뜩함이 그 울음에 있었다. 나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사태인 것이 확실함을 나는 짧은 순간에 깨달았다. 나는 가파른 골목을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산동네의 길 양쪽에 장다리꽃들이 우 우 키를 세우는 것을 나는 달음박질치면서 보았다.

이후로 나는 태림을 만나지 못했다. 그동안의 내 생은 악화일로의 선상에서 단 한발짝도 비켜나지 않는 삶이었고 나는 그런 내 생에 코를 박고 사느라고 장차 내 새끼가 될지도 몰랐던 태림의 아이들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튿날 '창밖이 아름다운 커피 전문점'에 수남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남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집중적으로 한 시간짜리 독서를 했다. 나는 더 이상의 기다림을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수남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남은 말했다.

태림이 죽었노라고.

모든 조건은 사랑이라는 말이 나는 참 좋았다. 참 좋은 그 사랑이 내게 없었던 것일까. 나는 그랬는갑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랑하지 않았는갑다. 태림아. 나의 친구여!"

내가 장차 내 새끼들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태림의 아이들은 이제는 제법 큰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법 큰 그 아이들 곁에 이제 겨우 아장거리는 또 하나의 아이가 죽은 태림이 곁에서 오물거렸다. 아이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정신과 질환을 앓았나 봐.

80년도부터 앓았는데 오래 됐나봐. 이웃집 아줌마가 그러대.

병원에서 나와 길을 건너다가 그만 트럭에…… 세 번째 남자였는데 애만 배게 해놓고 아마…… 생일이라고 나를 초대한다던 애가 학교를 결석했더라구. 전화를 해서 알았지.

나는 모른다. 나는 정말로 태림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리고 나는 태림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의 태림에 관한 마지막 진술은 이것이다.

후배 편집장에게 물려준 출판사에서는 책이 그런대로 팔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새롭게 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길은 막다른 길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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