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깊은 강
정찬
1
사람은 저마다의 삶이 있다. 사물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삶의 모습 역시 천태만상이다. 이 천태만상 속에 아름다움은 숨 쉬고 있다. 아니 천태만상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똑같은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은 숨을 쉬지 못한다.
그런데 기계문명은 천태만상의 삶을 끊임없이 유형화시켜왔다. 도시인의 삶을 보라. 출근길의 샐러리맨들은 자신과 흡사한 표정을 가진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너와 내가 비슷하다는 생각은 만남의 욕구를 시들게 한다. 눈에 빤히 보이는 사람에게서 무슨 흥미를 갖겠는가.
그런데 최근 나는 참으로 희귀한 만남을 결정했다. 희귀하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한두 마디 말로 설명하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펜을 들고 기억의 길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2
비바람 휘몰아치던 3월 어느 날 나는 주막에서 지우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인지라 손님이라곤 우리 일행과 창가 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사내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않게 가끔씩 힐끔힐끔 보곤 했는데, 종이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혹자는 내 말에 병색 짙은 얼굴을 상상할지 모르지만 그건 결코 아니다. 뭐라고 할까.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얼굴은 병든 얼굴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병의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아이 피부처럼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으나 뭔가 차이는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는 건 그의 얼굴이 주는 느낌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난감하기 때문이다.
그때 지우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취기가 꽤 올라 있었고, 기분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다시 한번 사내를 힐끔 보았는데, 이마의 흉터가 눈 안에 들어왔다.
3월이라지만 강한 비바람으로 바깥 날씨는 몹시 추웠다. 우리들은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에 섰다. 빈 택시 잡는 건 아예 틀렸고 행선지를 물어 합승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우들은 한 사람씩 택시를 잡아 타는데, 내가 타야 할 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덧 지우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고도 10분쯤 지났을까. 내 앞에 택시가 미끄러지듯 섰는데, 놀랍게도 빈 차였다. 그런데 무슨 변덕이었을까. 나는 택시를 슬며시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 사이 다른 사람이 차를 잡았고, 나는 어슬렁어슬렁 조금 전 그 술집으로 향했다. 사내는 여전히 구부정한 자세로 자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아 소주를 시켰다. 소주 한 병을 거의 비웠을 때 나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걸음이 약간 비틀거렸을 지도 모른다. 지우들과 마신 술만 해도 내 주량을 넘어서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사내에게 무슨 말을 하고 합석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사내는 나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곧 잔을 주고받고 했으니 말이다.
"선생은 영혼의 모습을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좀처럼 말이 없던 사내가 잔을 건네면서 물었다. 무척 맑은 목소리였다. 가까이서 보니 이마의 흉터가 묘했다. 제법 깊게 패인 그것은 반달의 형상이었다.
"글쎄요... 영혼에도 모습이 있을까요?"
나는 오히려 되묻고 있었다.
"형태 없는 존재가 있을까요?"
사내 역시 되묻는 바람에 나는 난처해져버리고 말았다.
"먹고 살기 바쁘다보니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허허."
"무슨 일을 하시는지요."
나는 적당히 넘어가기 위해 억지 웃음소리까지 냈는데, 사내는 더 난처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고지식하게 소설가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정말 웃을 것 같았다.
"작은 사업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만 뭐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쑥스럽군요."
"소설도 사업인 모양이지요."
사내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얼굴까지 확 붉어졌는데, 아마도 거짓말하다 들킨 아이의 모습과 흡사했을 것이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적막한 밤이다보니 선생 일행의 말소리가 잘 들리더군요."
"아, 그렇군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었다.
"옛날 사람들은 새라고 생각했지요."
"네?"
"영혼의 모습 말입니다."
"새의 모습을 한 영혼이라... 그럴 수 있겠군요."
"왜 새의 모습으로 생각했을까요?"
"비상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생명의 모습은 언제나 경이롭지요."
"역시 소설가다우시군요."
"허, 뭐..."
나는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신화의 시대에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날 수 있었지요."
"사람이 날 수 있었다구요?"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영혼이지요. 육체에서 이탈한 영혼이 새처럼 하늘을 날았던 게지요."
"그래서 영혼의 모습을 새라고 생각했겠군요."
"그랬을 겁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황금빛 길 속으로 비상하는 새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황금빛 길을 까마득히 잊고 있지요. 만일 제가 작가라면..."
나는 긴장했다. <작가라면>이라는 말보다 두려운 게 있을까. 작가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가 "만약 내가 작가라면"이라고 했을 때 그 다음 나올 수 있는 말을 생각하면 소름 끼친다. 마찬가지로 작가를 선지자적 존재로 보는 이들이 똑같은 말을 했을 때도 역시 소름 끼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인 동시에 선지자적 존재다. 진실이란 언제나 두려운 법이다.
"제가 만약 작가라면..."
사내는 다시 한번 그 말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잊어버린 황금빛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나는 적이 당황했다. 그것이 호언장담이었다면 나는 가볍게 받아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 어디에도 허황의 표정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황금빛 길을 보여주지 못하는 작가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표정 앞에서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말이 끊어졌을 때 술 마시는 게 제격이다. 내 기억으로는 여기서부터 술잔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던 것 같다.
"자신도 볼 수 없는 황금빛 길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보여줍니까."
꽤 오랜 침묵 끝에 나는 비죽이 웃으며 말했는데,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전 황금빛 길을 보았습니다."
나는 할 말을 잊고 멍청히 그를 보았다.
"황금빛 길은 강 너머에 있습니다. 그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합니다. 날개 없는 존재는 건널 수 없는 강이죠. 왜냐하면 그 강은..." 여기서부터 기억이 없다. 기억이 점차 흐려진 것이 아니라 아예 툭 끊겨버렸다. 앞서 말했지만 그와 합석하기 전에 이미 취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술을 마셔댔으니 정신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눈을 뜨니 집이었는데, 어떻게 사내와 헤어졌는지 또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내가 집에 들어간 경위는 이렇다.
나를 기다리다 잠이 든 아내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는데,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저 사람은 왜 벨을 누르지 않고 요란하게 문을 두드릴까.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그렇지 고요한 이 새벽에 어떻게 저런 추태를 부릴 수 있나. 아래층 사람들도 어지간하구나. 잠귀가 얼마나 어두우면 소리가 저렇게 요란한데 깨지도 않나.
이런 생각을 하던 아내는 불현듯 허전한 느낌이 들어 옆을 보았다. 텅 빈 옆자리가 남편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신경을 곤두서게 하던 소리가 뚝 그쳤다. 문 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소리나 발짝소리도 들리지 않았음에 비추어볼 때 두드리다 지쳐 잠시 쉬는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면 또 두드리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조금 전의 불안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남편의 빈 자리에 시선을 놓고 있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 복도로 나왔다. 주위는 괴괴했다. 새벽의 냉기가 옷 밖으로 삐쳐 나온 살에 차갑게 닿았다. 그녀는 소리를 죽이며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남자의 두 발이 보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발의 모양을 살폈다. 확실히 낯익었다. 바지 색깔도 낯설지 않았다. 두 계단 거푸 내려간 그녀는 복도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당신 정말 생각나는 게 전혀 없어요?"
아내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거듭 물었고, 나는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녀를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글쎄 도무지..."
"어라연이 어디예요?"
"어라연?"
"네, 어라연."
"난 모르겠는데."
"당신이 어라연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내가?"
"그것도 여러 번씩이나."
"언제?"
"오늘 새벽에요."
"기억이 전혀 안 나."
"아래층 현관문 요란하게 두드린 건 생각나세요?"
"아니."
"복도에 곯아떨어져 있는 당신을 내가 깨운 것은요."
"그것도 안 나."
"내가 무거운 당신 몸을 끌고 들어온 것은요."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어."
"당신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가려 했어요."
"왜?"
"어라연 가야 한다면서요. 얼굴 표정이 무척 간절하던데요."
"어라연이 어딘데?"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떡해요."
"허참..."
내 머릿속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었다.
"당신 나한테 불만 있어요?"
아내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갑자기 웬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으나 은근히 불안했다. 아내의 표정으로 보아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내 손 뿌리치는 당신의 손길이 매몰찼어요."
"당신이 날 어떻게 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엉뚱한 상상 마세요. 난 그저 나가려는 당신을 못 나가게 잡았을 뿐이에요."
"왜 내가 나가려 했는데?"
"방금 말했잖아요. 어라연 가야 한다고."
"어라연이라..."
나는 깜깜한 동굴 속을 다시 한번 살폈다. 하지만 조금 전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검은 동굴 속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닷새 후였다. 그날 밤 나는 자정이 약간 넘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새벽 2시가 넘도록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가끔 있다. 어느 날인가는 글자 그대로 한숨도 못 자고 꼬박 밤을 새운 적이 있다. 처음엔 답답하고 초조하다가 종내는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몸을 공처럼 오그리다 다시 펴고, 다시 오그리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어떤 자세든 몸이 정지 상태가 되면 날카로운 부리 같은 것이 어김없이 나타나 머리를 콕콕 쫀다. 그 느낌을 아픔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그것에 꼭 끼는 말을 아직까지 못 찾고 있지만 머리를 쪼는 부리의 정체는 알고 있다. 그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왜 잠들지 못하는 내 머리를 그렇게 쪼고 있을까.
그날 밤도 불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이럴 때 술을 먹는 게 상책이다. 술도 독한 술을 먹어야 한다. 나는 먼저 서재에 이불을 폈다. 잠이 올 조짐이 보이면 얼른 눕기 위함이다. 그리고 탁자를 이불 근처로 이동시킨 후 항아리 모양의 둥그런 양주병을 들고 왔다. 안주 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이빨로 무엇을 씹게 되면 양치질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간 오던 잠도 달아난다. 이빨을 닦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난 이빨에 무엇이 끼여 있는 상태에서 잠을 잘 수 없다. 인사불성의 상태라면 모를까.
깊고 푸른 강가에서 한 남자가 나무로 무엇을 만들고 있었다. 쉴새 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했다. 나무를 이엉으로 엮고, 망치로 못을 박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이 꼴을 갖추어 나갔다. 날개 접은 새였다.
-새가 무척 크군요.
내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새는 운명이오.
남자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는데, 얼굴이 묘했다.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했다.
-새가 어떻게 운명이 되지요?
-신이 사람의 목에 줄을 걸어 새와 연결시켰으니까. 그 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새는 운명이오.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새를 갖고 있겠군요.
-그렇소. 헌데 이게 새처럼 보이오?
-새가 아니면 무엇이죠?
-자세히 보시오.
나는 다시 한번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은 새가 아니라 배였다.
-아, 배군요.
-배는 시간이오.
-배가 시간이라구요.
-그렇소.
-이해가 안 가는군요.
-강을 보시오. 저 강 너머에는 죽음이 있소. 배는 사람들을 저 강 너머로 옮기고 있으니 시간이 아니겠소. 누구도 이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소. 다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흐르는 강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 강 한가운데를 보시오. 무엇이 보이오?
-섬이군요. 작은 섬.
-저 섬에서만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소.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의식의 끈이 갑자기 나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들을 수가 없었다. 눈을 뜨니 누워 있는 곳이 엉뚱하게 이불 속이 아니라 소파였다. 탁자 위 양주병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창은 여명의 빛으로 어슴푸레했다. 으슬으슬 추웠다. 나는 소파에서 내려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눈을 감았다. 잠의 손길이 부드럽게 몸을 토닥거렸다. 소리가 들려왔다. 이엉이 사각거리는 소리, 나무가 휘어지는 소리, 못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서 아늑하게 들렸다. 배 만드는 소리였다. 그래, 푸른 강가서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한 남자가 배를 만들고 있었지. 그런데 왜 저 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어둠 속으로 한 줄기 빛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창가의 새벽빛이 아니라 기억의 동굴 속으로 스며드는 빛이었다. 어둡고 텅 빈 주막과 종이처럼 투명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황금빛 길을 볼 수 있습니까?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 강을 어떻게 건너죠?
-둥근 시간의 등을 타야죠.
-둥근 시간의 등을 타다뇨?
-시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의 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시간은 직선입니다. 직선의 시간 속에서는 죽음의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의 시간 속에서는 그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는 죽음과 탄생이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직선의 시간으로 이루어진 이 지상에서 황금빛 길을 본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선생의 생각대로라면 지상에 작가가 존재할 수 없겠군요.
-작가가 존재할 수 없다뇨?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황금빛 길을 보아야 하니까요.
-상상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황금빛 길은 상상의 길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라연을 아십니까?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어라연은 마술의 섬이지요.
-마술의 섬이라면 존재하지 않는 섬이군요.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술의 섬이죠?
-그곳의 시간이 원이니까요.
동굴 속으로 스며든 빛이 꺼지고 있었다. 난 깊은 잠에 빠졌고, 눈을 뜨니 날이 훤했다.
"당신 어제 몇시에 잤어요?"
앞치마를 두른 아내가 기지개를 켜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글쎄, 새벽에 잔 것 같은데... 근데 아이들 아직 안 일어났나?
"학교 갔어요."
"지금 몇신데 벌써 학교 가?"
"열두시가 다 돼가요."
"뭐?"
난 화들짝 놀랐다. 열두시라니. 지금까지 열두시까지 자본 적이 있었던가.
"참 신기하데요. 당신처럼 잠귀 밝은 사람이 아이들이 왔다갔다하는데도 그렇게 곤하게 자고 있으니."
"내가 곤하게 잤어?"
"어찌나 곤하게 자는지 겁이 날 정도였어요."
"왜?"
"혹시 당신이 죽지 않았나 해서요."
술독을 빼기 위해 목욕탕에 온 나는 뜨거운 물 속에서 어젯밤 기억들을 다시 한번 더듬었다. 푸른 강가에서 배를 만들고 있던 남자는 주막의 사내와 흡사했다. 혹시 동일인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것은 꿈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직후 주막의 사내와 나누었던 대화가 홀연 떠오른 건 무슨 조화인지 몰랐다.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던 어라연이 섬이라는 건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오히려 안개가 더 짙어진 느낌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사내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어라연을 사라져버린 섬, 그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섬으로 생각하고 있는 둣했다. 그래서 어라연에 대해 말할 때 그의 표정은 애틋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데 나는 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어라연에 간다고 했을까.
목욕탕물은 적당히 뜨거웠고,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잠을 푹 잔 탓인지 술독에서 오는 피로감도 별로 없었다.
어라연이라... 마술의 섬... 둥근 시간의 섬.
나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어라연이라는 말이 먼 하늘의 작은 새처럼 떠올랐다. 말이 새처럼 떠오를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히 그랬다. 처음에는 점으로 보였는데 조금씩 커지면서 작은 새가 되었다. 그 새는 하늘을 너울너울 날고 있었다.
-새는 운명이죠.
꿈속의 남자는 말하고 있었다.
-겨울의 깊은 잠은 내 몸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요. 심장은 뛰지 않고, 피는 움직임을 멈추며, 살은 싸늘하게 식어갑니다.
이번에는 꿈속의 남자가 아니었다. 어둡고 텅 빈 주막에서 사내는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죽음에 닿은 잠은 내 몸을 변화시킵니다. 피를 갈고, 뼈를 다시 세우며, 새살을 만듭니다. 놀랍게도 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여기서 그쳤다. 새는 점차 멀어져갔고, 다시 작은 점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점마저 사라지자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 텅 빈 머릿속에서 말 하나가 용수철에 튕기듯 뛰쳐나왔다. 참으로 돌연한 사태였다.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퍼덕거리는 그것은 영월이라는 말이었다. 처음 나는 그 말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영원이 아닐까. 아니었다. 느낌은 그 뜻을 완강히 밀어내었다. 밀어낸 자리에서 말의 몸이 또렷이 보였다. 말 그대로 영월이었다. 강원도에 있는 작은 도시 영월. 그 순간 내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라연과 영월이 한 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라연은 영월에 있는 섬이었다.
나는 또다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영월은 높고 험한 산이 겹겹이 솟아 있는 산악지방이다. 물론 산악지방이라고 해서 섬이 없는 건 아니다. 강이 있으면 섬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자리잡은 어라연은 큰 강이 있는 섬이었다. 그런데 영월에는 큰 강이 없다.
목욕탕에서 황급히 나온 나는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지역번호 안내를 통해 영월 군청 전화번호를 알아낸 후 다이얼을 돌렸다.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그곳에 어라연이라는 섬이 있는지 물었다.
"아, 있지요. 그런데 어라연은 섬이 아니라 연못인데요."
"연못이라고요?"
"정원에 있는 연못이 아니라 강의 한 부분인데 여기서는 연못으로 통해요."
"무슨 강인데요."
"동강이에요. 정선에서 흘러와 영월을 거쳐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강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라연을 어떻게 가죠."
"영월 시외 터미널에서 버스 타시면 됩니다. 한 시간도 안 걸려요."
기분이 묘했다. 주막의 사내는 분명 섬이라고 했다. 그것도 전설의 섬이니, 하면서 한껏 신비화시켰는데 섬이 아니라는 소리에 맥이 빠졌다. 그러자 술에 취해 함 헛소리에 그동안 내가 홀려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게 해서 어라연에 대한 내 관심은 시들해져 버렸다. 물론 아주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안개에 싸인 듯한 사내의 몽상적인 얼굴이 가끔씩 떠오르곤 했는데, 거기에 붙잡혀 있기에 나는 바빴다.
어라연과 다시 조우하게 된 건 이듬해 4월이었다. 문예지 편집장과의 점심식사 자리에 시인 P씨가 합석했는데, 그는 낚시광이었다. 이런 저렁 얘기를 나누다 낚시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낚시에 전혀 취미 없는 나는 주로 듣기만 했는데, P씨 입에서 동강이 튀어나왔다. 물론 처음 나는 무심코 들었다. 문예지 편집장이 동강이 어디냐고 물었고, P씨는 정선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어라연이 떠올랐다.
"혹시 그 강이 영월로 흘러들지 않습니까?"
"영월뿐이겠습니까. 옛날엔 서울 가는 뗏목 띄운 물길이니까요. 정말 맑은 강입니다. 혹시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 보셨어요?"
"아, 봤어요. 낚시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더군요."
"동강도 그 강 못지 않게 아름답습니다."
"혹시 어라연이라고 아십니까. 동강에 있다고 하던데."
"가보진 않았지만 이름은 들었습니다. 작은 섬인데 주위에 고기가 무척 많다더군요."
"섬이라구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네."
"정말 섬입니까?"
"가보지 않아서 확실히 모르겠지만 뭐 손바닥만한 섬이겠죠. 전 정선 쪽으로 들어갔으니까요."
사흘 후 나는 배낭을 등에 지고 청량리역을 향했다. 기차가 영월역에 도착했을 때 해는 서산마루에 있었다. 세 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혹시 사내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그날 밤 일들을 차근차근 되새겨봤으나 소득은 없었다.
택시는 금방 시외버스 터미널 앞에 도착했다. 매표소 아가씨에게 어라연 가려고 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연이 어딘데요?"
"동강에 있다던데."
"그렇게 말하면 몰라요. 강가 마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나는 당황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 타면 된다던 군청직원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저 가게 할아버지께 물어보세요. 영월 토박이분이라 어디든 훤하니까요."
나는 그녀가 가르쳐준 가게로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돋보기로 책을 보고 있었다. 무슨 책인지 모르지만 무척 낡아 있었다.
"뭐 좀 여쭈어보겠습니다. 어라연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응, 알지. 근데 지금 어라연 가게?"
노인은 나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네."
"어두워져서 안 될 텐데."
"여기서 멀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내일 가는 게 좋아. 근데 영월을 처음이지?"
"네."
"그런 것 같았어. 영월의 산은 깊어. 얼마나 깊으면 정공권이라는 고려시대 무관이 칼 같은 산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고 썼겠어. 그 칼 같은 산의 골짜기마다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맑은 물줄기가 곳곳에 흐르고 있다고 했지. 대표적 물줄기가 수캉 암캉이라고도 하는 동강과 서강이야. 청령포라고 아나?"
"네, 알아요. 어린 단종이 유배된 곳이죠."
"그렇지. 그 청령포를 곡류하여 흐르는 강이 암캉, 즉 서강이야. 물이 맑아 영월 팔경의 하나로 꼽혀. 수캉인 동강은 정선과 평창의 깊은 산자락을 적시며 협곡을 휘돌아 영월로 내려오는 강이야. 동강 주위에 번잡한 마을이 없기 때문에 청정한 물이 고스란히 살아 있어. 자네가 가려고 하는 어라연은 동강에 있어."
"네, 그건 압니다."
"어라연 가는 길 가르쳐줄 테니 잘 들어. 문산리행 버스를 타고 거운리에서 내려. 거기서부터는 줄창 걸어야 해. 먼저 산길이 나오는데 길이 워낙 오르락내리락해서 무척 힘들어. 강이 보이면 수월하지. 길도 평평하고, 강만 따라 걸으면 되니까. 어라연 뜻은 알지?"
"죄송합니다. 잘 모릅니다."
"고기 어자에 비단 라자, 연못 연자야. 그러니까 물고기가 비단처럼 보이는 연못이지. 그만큼 물고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해. 신선 사는 데가 따로 없어."
"아, 그래서 어라연을 연못이라고 했군요."
"뼝대가 물길을 막고 있어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래서 연못이라는 글자를 넣었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지만 연못은 아니야. 옛날 떼군들이 거기서 한숨 돌렸지. 근데 뼝대가 뭔지 모르는구먼."
"처음 듣는 말이라서..."
"바위절벽을 뼝대라 그래. 동강에는 뼝대가 첩첩이 병풍을 치고 있어."
"어쨌든 어라연은 섬이 아니군요."
"섬이라고도 할 수 있지."
"네?"
"보기에 따라 섬이 될 수 있으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어라연 물길이 갈라지면서 중간에 섬을 만들어놓았거든. 그 섬을 가리킬 때도 어라연이라고 해."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연의 마을은 큰가요?"
"거긴 마을이 없어."
"마을이 없다뇨?"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강 깊숙이 있어 차가 들어가지 못해. 사람 살기 불편한 곳이지. 지금도 집이 두 채밖에 없을걸. 거기 아는 사람 살고 있어?"
"아뇨. 그곳에서 며칠 묵을까 해서요."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안성맞춤이지. 어쨌든 지금 거기 간다는 건 무리야. 십 리 길을 걸어야 하는 데다 도중에 집은 한 채도 없어. 장정 걸음으로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야. 캄캄한 산길 혼자 걸을 자신 있으면 가도 되구."
"아무튼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가게를 나왔다.
버스가 거운리에 도착했을 때 날이 저물고 있었다. 집들이 논밭 사이로 드문드문 있을 뿐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노인 말대로 지금 어라연까지 간다는 게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마음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산길을 따라간다는 노인의 말을 떠올린 나는 주위를 살폈다. 길의 오른편에 낮은 산이 있었다. 버스길 따라 조금 올라가니 산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 나왔다.
산길은 점차 가팔라졌다. 나는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걱정스레 쳐다보다 걸음을 재촉했다. 소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언덕이 보였다. 저 언덕이 서면 강이 보일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이 맞았다. 언덕에 올라서자 강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강폭은 어림으로 10미터 정도 될 것 같았는데, 물살이 또렷이 보였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노인 말대로 강가의 길은 산길과 달리 평탄했고, 흙은 잔모래처럼 부드러웠다. 이제 주위는 깜깜했고, 하늘의 별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강물은 황금색 별빛 속에서 끊임없이 너울거렸다.
얼마를 걸었을까. 길 저쪽에서 얼핏 작은 불빛이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나는 불빛 사라진 쪽을 눈으로 가늠하며 걸었다. 길 위쪽 산중턱에 집의 형체 같은 것이 보였다. 집이 두 채뿐이라는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집은 산을 비스듬히 깎은 곳에서 별빛을 이고 있었다. 집으로 오르는 흙계단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집 안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계세요?"
제법 큰 소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이번에는 더 큰 소리를 냈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고, 키가 껑충한 남자가 나왔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하룻밤 묵었으면 합니다만..."
"방은 있는데 추워서... 불을 피우지요."
"불을 피우다뇨?"
"손님을 냉방에 재울 순 없잖습니까. 여긴 밤에 무척 춥습니다."
남자는 도로 방으로 들어가더니 플래시를 들고나왔다. 마당 건너편 산 쪽으로 지붕 낮은 방 한 칸이 오똑 있었다. 본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산 쪽이라 외딴집처럼 보였다.
"여기가 주무실 방입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조금 후 그는 나뭇가지를 한 아름 가지고 와 아궁이 앞에 놓고 익숙한 솜씨로 불을 지폈다.
"아카시아나무입니다. 불에 아주 잘 타지요."
잠시 후 불길이 치솟으면서 주위가 환해졌다. 마흔쯤 되었을까. 남자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그는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큰 바위처럼 불룩 튀어나온 게 보이죠. 거기가 샘입니다. 비누도 있습니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아직..."
"밥 남은 건 있는데 찬이 시원찮아서..."
"괜찮습니다. 뭐든지 잘 먹으니까요."
저녁 먹으러 오라는 남자의 말에 나는 배낭을 뒤져 술을 꺼냈다. 처음 만난 이와 얘기할 때 술처럼 좋은 게 없다. 다행히도 남자는 술을 무척 반겼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꽤 늦게서야 상을 물렸는데 여기서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김영식이고 나이는 서른여덟, 고기잡이와 약초 재배로 먹고 살고 있다는 것만 밝혀 두고자 한다. 하지만 아주 입을 닫으려는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뜻밖에도 김영식으로부터 주막 사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실마리는 조그마한 사기호롱에서 나왔다.
김영식은 동강에서 잡히는 물고기 이름들을 신이 나서 얘기하고 있었다.
"꺽치, 메기, 참마자, 모래무지, 돌고기, 갈견이, 쇠리, 동자개, 누치, 퉁가리, 어름치. 아, 어름치 아세요?"
"잘 모르겠네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긴데 여긴 아주 많아요. 하여튼 제가 아는 고기 종류만 해도 서른 종류는 돼요. 순토종고기들이죠. 참 맛있습니다."
그때 내 시선 속으로 사기호롱이 불쑥 들어왔다. 선반 위에 있었는데, 조그마한 것이 무척 예뻤다.
"저 호롱 참 이쁘네요."
나는 눈짓으로 호롱을 가리키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탐이 났기 때문이다. 탐나는 물건 앞에서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게 사람의 심리다. 사라져가는 사물에 애착이 가는 건 그렇다치고 몇년 전부터 생겨난 수집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난감하다. 나는 수집 취미도 지나치면 탐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직까지 탐욕이라고 말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기호롱을 보자마자 욕심이 동한 건 사실이다.
"아, 저거요. 전에 쓰던 거예요."
김영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에 호롱불 썼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기 전기 들어온 지 이 년밖에 안 됩니다. 그전에는 호롱불 켜고 살았어요."
"네?"
나는 김영식의 말이 믿기지 않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가구밖에 없으니 전기가 못 들어온 거죠."
"언제부터 여기 사셨지요?"
"72년에 들어왔어요."
"그동안 죽 여기서 사셨어요?"
"스무 몇 살 무렵 도시에서 떠돌이 생활 몇 년 했지요. 그러다 도시 생활이 제게 안 맞는다는 걸 깨닫고 다시 들어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었어요."
그러면서 김영식은 씁쓸히 웃었다.
"여기서만 15년 살았어요. 그러니까 13년 동안 전기 없이 산 셈이죠."
"불편하지 않았어요?"
"불편할 게 뭐 있습니까. 호롱불 켜놓으면 다 보였는데. 어둡다고 촛불을 몇 개씩 켜놓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저한텐 촛불 하나만 해도 대낮 같았습니다. 전기 맛을 잊어버렸으니까요."
"촛불이 호롱불보다 밝아요?"
"비교가 안 되죠. 엄청나게 밝아요."
"그러다 전기 들어오니 어땠어요?"
"그저 그랬어요."
김영식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나 얻으면 하나 잃게 마련이죠."
"뭘 잃으셨는데요."
"냉장고다 텔레비다 들어오니 우선 돈이 많이 들데요."
그러면서 그는 피식 웃었다.
"이 김치만 해도 그래요. 전에는 김치를 샘물에 담가놓고 먹었는데 냉장고에 넣어두니 맛이 틀려버려요. 자연적으로 삭는 것과 냉장고 속에서 삭는 것이 다릅디다."
"그렇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담배를 입에 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전기가 들어오니 시간이 틀려집디다. 뭐라고 해야 될까요. 전에는 시간을 몸으로 느꼈어요. 해의 위치라든가, 빛깔, 살에 닿는 공기의 감촉으로 시간을 알게 되지요. 그러니까..."
그는 무엇을 기억해내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공기의 느낌이 시간마다 달라요. 아, 이 말부터 해야겠네요. 제가 말하는 시간은 지금의 시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루를 스물네 등분으로 쪼개 그 한 조각을 한 시간으로 정해놓고, 또 그것을 육십 등분으로 쪼개 분이니 초니 하는 그런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땐 시간이 그렇게 세분된 것이 아니었어요. 어떤 덩어리라고나 할까."
"덩어리?"
"꼭 맞는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덩어리라기보다는... 아무튼 시간에도 모양과 부피가 있었어요. 모양과 부피가 달라지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겠군요."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잠들지 못하는 내 머리를 콕콕 쪼는 시간의 날카로운 부리가 선명히 떠올랐다.
"아, 또 있어요. 전기가 들어오니까 잠이 줄어들데요. 전기 없을 땐 참 많이 잤어요."
"얼마나 주무셨는데요?"
"겨울에는 저녁 여섯시만 되면 잤으니까요."
"그렇게 빨리요?"
"여긴 산이 높아 네시 반이면 어두워집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 해먹고 구 볼트짜리 건전지 라디오 좀 듣다가 자지요. 해는 또 얼마나 늦게 뜨는지 열시 반이 넘어야 해가 보입니다. 그러니 잠이 길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몇시간인가? 가만, 계산해봅시다. 아이쿠 열다섯 시간씩 주무셨구나."
"그렇게 잤죠."
"매일요?"
"네."
"물리지도 않습디까?"
"물리기는요. 하루 종일 자는 날도 있는데요. 뭐."
"에이, 어떻게 하루 종일 잡니까?"
"허허, 실제로 그렇게 잤어요. 물론 가끔이었지만. 그건 약과에요. 그 사람에 비하면."
"그 사람이라뇨?"
"동물이 겨울잠 자듯 잔 사람이 있었어요. 좀 이상한 사람이긴 했지만."
"전 못 믿겠는데요. 어떻게 사람이 짐승처럼 동면할 수 있습니까."
"허허, 제가 손님한테 왜 없는 얘길 합니까?"
"에이 농담 마세요."
"허참 손님도, 정말이라니까요. 물론 다람쥐나 개구리처럼 몇달이고 꼼짝도 않고 잠자진 않았죠."
그의 얼굴은 농담하는 이의 표정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동면하는 사람이 있었다구? 도대체 사람이 어떤 식으로 동면한단 말인가.
"굳이 비유한다면 곰의 동면과 흡사했다고나 할까요."
여기서 동물의 겨울잠에 대해 잠깐 설명하는 것이 이야기 진행상 필요할 것 같다.
순수한 의미의 겨울잠은 몇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은 듯 잠을 자는 상태다. 물론 이런 깊은 잠이 한겨울 동안 계속되는 건 아니다. 가끔 한두 시간씩 잠에서 깨어나 물을 마시거나 덜 추운 것으로 옮긴다. 고슴도치, 박쥐, 다람쥐 등이 이런 겨울잠을 잔다. 늦가을이 되면 이들은 더욱 열심히 먹이를 찾는데 11월이 끝날 무렵이면 목과 옆구리에 두터운 지방층이 생긴다. 그것은 몸무게의 절반이 될 정도로 두텁다. 잠들기 시작하면 몸이 차츰 식어 나중에는 영하의 온도까지 내려간다. 심장박동은 물론 핏속의 혈당량도 거의 절반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개구리나 뱀, 달팽이 등 냉혈동물들의 경우 영하로 떨어지면 얼어 죽는다.
곰의 겨울잠은 다르다. 겨울이 오기 전 곰은 식성을 줄이기 위해 양치식물잎을 먹는다. 그러다 날씨가 추워지면 비탈에 굴을 파고 동면으로 들어가는데 체온이 29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고슴도치나 박쥐처럼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약간의 자극에도 깨어날 만큼 잠은 얕다.
"곰의 동면과 흡사하다?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실 겁니다. 저도 놀랐으니까요. 하여간 좀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주막 사내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겨울의 깊은 잠은 내 몸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요. 심장은 뛰지 않고 피는 움직임을 멈추고, 살은 싸늘하게 식어버립니다.
"혹시 그 사람 이마에 흉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반달 모양의..."
"아니 손님이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김영식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서울서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실 내가 여기 온 것도 그 사람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김영식에게 사내를 만나게 된 과정과 이곳으로 찾아오게 된 경위를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참 세상 정말 넓고도 좁네요. 어떻게 거기서..."
김영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사람 언제 여기 들어왔습니까?"
"6년 전 늦가을이었어요. 단풍이 아주 짙게 물들었고 바람이 무척 차가웠지요. 전 약초 심으려고 씨를 갖고 뒷산으로 막 올라가려던 참이었어요."
"약초를 가을에 심어요?"
"씨로 심는 것은 늦가을이 좋아요. 청궁이나 당귀 목단 같은 것은 눈을 따서 저장해뒀다가 봄에 심지요. 암튼 뒷산으로 가려는데 강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남자 한 사람이 보였어요. 그때만 해도 외지인이 뜸할 때라 웬 사람인가 했지요. 조금 후 여기로 올라오는데 보기에 불안할 정도로 몸이 휘청거리더군요. 무척 지쳐 있었나봐요.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구요. 하진우 씬 여기서 한동안 묵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사내 이름이 하진우인 모양이죠."
"아, 그렇습니다."
"하진우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밤 깊은 주막에서 통성명도 하지 않고 그런 얘기들을 했을까.
"하진우 씨가 묵었던 방이 손님이 주무실 마로 그 방입니다."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우 씬 오자마자 일주일을 내처 자데요."
"한번도 깨지 않고 잤단 말인가요?"
"그럴 리 있나요. 방안에서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는 게 정확하겠네요. 그렇게 누워 있으면서 자다 깨다 했겠죠. 식사도 했어요. 일주일 동안 딱 네 끼 먹었지만. 그것도 아주 적게. 물은 자주 마셨어요. 하루에 예닐곱 번은 마셨을 거예요. 그 외 시간은 번데기처럼 어두운 방안에 누워만 있었죠. 어떻게 일주일씩이나 그렇게 누워 있을 수 있는지 신기하데요."
늦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쪼이는 오후, 방에서 나온 하진우는 신발을 신었다. 김영식은 화장실 가나 보다 생각했다. 물 뜨러 가는 일과 화장실 가는 것 외에 그가 신발 신는 경우가 없었는데, 손에 물그릇을 들고 있지 않으니 화장실 가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강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방안에서 하도 꼼짝도 않기에 저러다 송장 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도 생겨났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강가 바위에 걸터앉은 그는 흐르는 강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김영식은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갔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늘은 웬일이죠. 여기까지 다 나오시고.
김영식의 말에 하진우는 말없이 웃었다. 그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탓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근데 웬 잠을 그렇게 자세요?
하진우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가에는 조금 전과 같은 미소도 없었다. 머쓱해진 김영식은 발로 자갈을 툭툭 건드렸다.
-오래 있고 싶은데 괜찮겠소.
하진우의 말에 김영식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손님이 오래 있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언제까지 계실 건데요.
-지금은 모르겠소. 언제까지가 될지.
"결국 하진우 씬 이듬해 4월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영식은 입을 쩝쩝 다셨다.
"해가 점점 짧아지면서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긴 겨울에 잠을 많이 자게 됩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지요. 저도 열다섯 시간씩 잤지만 그 이상은 못 자지요. 하루 이틀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하진우 씬 안 그랬어요. 거의 하루 종일 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식사도 점차 줄여들었지요. 일주일에 한두 끼 먹었으니까. 어떤 날은 종일 나오지도 않아요."
"왜 그렇게 자는지 말 안 하던가요."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웃기만 해요. 한 번은 짤막하게 대답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뭐라고 했는데요."
"평안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너무나 평안하다고."
"그참 애매한 대답이군요."
"그 사람 정말 평안해 보였어요.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겨울 동안 죽 그렇게 잤어요?"
"그럼요. 글자 그대로 동면이었습니다. 그러다 2월이 되면서 해가 길어지고,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자 그 사람 잠도 차츰 줄어들데요."
"동면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식사 횟수가 늘어나면서 산책하는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특히 섬에 자주 갔어요."
"아, 어라연 섬 말이군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섬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가봐요. 처음에는 제가 태워줬는데, 어느 날 노 젓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데요. 전 웃으면서 가고 싶을 땐 언제든지 태워드리겠다고 했더니 앞으로는 혼자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할 수 없이 가르쳐드렸지요. 여기 뱃길,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작은 강이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물살이 무척 세 한강 건너듯 노를 젓다간 떠내려 가기 십상입니다. 하진우 씬 뱃길을 금방 터득하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김영식은 눈을 반짝이며 혀로 입술을 적셨다.
"2월말쯤 되었을 겁니다. 마당 평상에서 햇빛을 쬐고 있는 하진우 씨의 얼굴을 보다 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요?"
"얼굴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요."
"어떻게 달라졌는데요?"
"하진우 씨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땐 고달픈 삶에 지친 얼굴의 중견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하진우 씨의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꼭 어린아이 얼굴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요. 얼굴이 하도 맑고 투명해 그런 느낌이 들었을 거예요. 마술의 물로 얼굴을 씻은 얼굴 같았으니까요."
"그참 신가하군요."
"그러니까 제가 깜짝 놀랐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겨울잠 자면서부터 얼굴이 말갛게 변해갔어요. 그게 차곡차곡 쌓여 얼굴을 그렇게 변하게 할 줄 꿈에도 몰랐죠."
"김영식에 의하면 하진우는 진달래가 활짝 핀 4월에 어라연을 떠났다. 그리고 11월이 되자 다시 나타났다.
"말간 얼굴이 많이 그을려 있데요. 지친 모습도 보였구요."
"다시 나타났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반가웠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손님이 머물고 있으면 무척 힘들어요. 불편했어요."
"왜 불편했지요?"
"남이니까요."
"그건 그렇습니다. 허허. 근데 하진우 씬 편했던 모양이죠."
"참 편했습니다."
"겨울잠 때문이었던가요?"
"바로 옆에 있을 때도 편안했어요."
"그 이유가 궁금하군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잔 어른과 같이 있을 때보다 아이와 같이 있을 때가 훨씬 편해요. 그리고 아이보단 나무가 더 편하고요. 하진우 씬 아이나 나무와 더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나 나무와 가까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하진우 씬 겨울이 오자 다시 동면의 상태로 들어갔어요. 그 전보다 더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았어요. 물론 잠자는 시간도 길어졌지요. 이듬해 2월 그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전처럼 얼굴이 달라졌던가요."
"네. 어린아이의 맑은 얼굴로 돌아왔더군요."
김영식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4월이 오자 그는 떠났습니다. 그리고 11월에 나타났지요. 예전처럼."
"섬엔 여전히 자주 갔나요?"
"그럼요. 아침에 갔다가 해가 져서야 들어오는 날도 심심찮게 있었는걸요."
"거기서 무얼 하는데요?"
"모르지요. 혼자 있는 걸 워낙 좋아하는 분이니. 그런데 이 년 전 겨울에는 잠을 제대로 못 자더군요."
이 년 전 겨울이라면 내가 그를 만난 바로 한 해 전이다.
"왜요?"
"확실히 모르겠지만 전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전기라뇨?"
"그해 전기가 들어왔거든요. 칠흑 같았던 밤이 밝아지니까 우선 제 잠부터 줄어들더군요. 그 전에는 해지기 전에 밥해 먹고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기가 있으니 밥 먹는 시간이 자연히 늦어지고, 또 텔레비도 보게 되고..."
"자연히 그렇게 되겠군요."
"하진우 씬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꾸 바깥으로 나오더군요.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내렸던 눈이 오후가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흐르는 강물 위로 쉴새없이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던 하진우는 혼자 말하듯 중얼거렸다.
-길이 잘 보이지 않소.
목소리가 하도 낮아 김영식은 길이란 말밖에 듣지 못했다.
-뭐라고 하셨죠?
-길을 찾을 수가 없소.
-무슨 길인데요?
-집으로 가는 길이오.
김영식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껌벅거렸다.
-유년의 집 말이오.
-그 집이 왜요?
-내 유년의 집은 오래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소. 난 그 집이 몹시 그립소.
-그거야...
-그 집에 가면 내 몸이 깨끗해지오.
-하지만 어떻게 없어져버린 집으로 갈 수 있습니까?
-갈 수 있소.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가면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이오. 김영식씬 나에게 여러 번 물었지요. 왜 그렇게 잠을 많이 자느냐고. 내 이제 대답 해드리리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였소.
가늘어진 눈발이 다시 드세어지고 있었다.
-방안에 가만히 누워 강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소리가 몸에 닿소. 눈을 감으면 강은 어느덧 내 몸 위로 흘러가고 있소. 몸은 강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세상은 아득히 멀어지오. 세상이 사라지고, 강바닥에 가라앉은 몸이 차갑게 식어가면 길이 나타나오. 집으로 가는 길이. 그 길은 황홀하도록 아름답소. 난 그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없소.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아니오.
하진우는 눈을 감았다.
-그 길 끝에 내 유년의 집이 있소.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너머 마당에 활짝 핀 복사꽃이 있고, 어린 아들을 방금 씻기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어머니가 보이오. 무명저고리를 입은 어머니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이의 몸을 닦고, 아이의 몸은 눈처럼 빛나고 있소. 내 깊은 잠은 눈처럼 깨끗한 유년의 몸을 보러가는 길고 긴 여행이오.
"결국 하진우 씬 여느 때와 달리 이듬해 2월 쓸쓸히 떠났습니다."
그를 주막에서 2월에 만났으니 그가 어라연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조우한 셈이었다.
"그 뒤론 안 왔습니까?"
"아닙니다. 가을에 또 왔어요. 그러니까 작년 가을이지요."
"그땐 어땠습니까?"
"여전히 잠을 못 자더군요. 전깃불 영향이 컸던가봐요."
"그러면 올 가을엔 안 올지도 모르겠군요."
"글쎄요. 두고 봐야죠."
"근데 참 하진우 씬 무얼 하는 분인가요?"
"저도 궁금해 두서너 번 물었지만 대답은 않고 그냥 웃기만 했어요. 어이쿠 시간이 이렇게 됐나. 벌써 자정이 넘었군요. 제가 쓸데없는 소리 하느라..."
"아닙니다. 이야기 정말 잘 들었습니다."
나는 잔에 남아 있는 술을 입 안에 털어놓고 일어났다.
김영식이 가르쳐준 샘으로 가 얼굴을 씻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상쾌했다. 걸레로 방을 대강 훔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폈다. 방은 무척 따뜻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부자리에서 강물소리 들어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눈을 감았다. 강물 흐르는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렸다. 마치 귀밑에서 흐르는 것 같았다. 흐르는 물이 환히 보였다.
눈을 뜨니 창호지 문이 환했다. 집 밖으로 나가면 잠을 설치기 일쑤인데 이렇게 쉽게 잠들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마당에 서자 강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흰 물살이 눈부셨다.
다음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내 일상의 삶은 판에 박은 듯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시간에 쫓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흐린 창을 통해 저문 들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보면 쓸쓸해진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물론 가끔이긴 했지만 어라연과 하진우를 생각하곤 했다. 그가 다시 왔을까, 올해는 겨울잠을 제대로 잤을까, 하고. 그러면서도 그를 조금씩 조금씩 잊었다. 시간의 힘은 어쩔 수 없었다. 해가 바뀌고 추위가 누그러지던 2월 어느 날 나는 하진우의 모습과 다시 한번 조우했다. 삶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우연히.
나는 보름에 한 번꼴로 도서관을 간다. 거기서 내가 보지 못했던 신문을 뒤적이고 잡지를 훑는다. 그러다 마음에 닿는 기사가 있으면 복사를 한다. 앞으로 내가 쓸 소설의 씨앗, 혹은 살이 될 가능성 때문이다.
그날 내가 앉아 있었던 곳은 창가여서 도서관의 형광등 불빛은 햇빛의 위력에 바래져 있었다. 그때가 오후였을 것이다. 세시나 네시쯤? 해가 구름에 가렸는지 갑자기 어두워졌다. 나는 신문에서 시선을 뗐다. 눈도 침침해서 잠시 산책할 양으로 일어서는데, 앞자리 남자가 보고 있는 신문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단지 신문이 눈 안으로 들어왔을 뿐 나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빛살 한줄기가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본능적 감각이라고 말하면 안 될까. 나는 남자가 눈치채지 않게 슬며시 다가가 신문을 엿보았다.
동면 인간-12월에서 4월까지 잠자는 기간
나는 그가 읽고 있는 신문과 날짜를 확인한 후 바깥으로 나왔다. 짧은 산책이었지만 기분은 더없이 좋았다. 살에 닿는 바람의 감촉은 상쾌했고, 들이마시는 공기의 맛은 달았다. 얼마 후 나는 그 신문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었다.
겨울이면 개구리나 뱀처럼 4개월 동안 동면을 하고 깨어나는 사나이가 있어 화제다. 워싱턴 스포케인의 드와이트 플로터(54)는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12월 잠이 들어 이듬해 꽃피는 4월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플로터의 동면은 20대 초반이던 60년대 초에 시작됐다. 추위공포증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비만이었다. 선천적으로 추위에 약했던 플로터는 겨울이면 늘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성은 왕성해 겨울이 지나면 몸무게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결국 플로터는 물 몇컵만으로 겨울 날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이 운동량을 최소화할 수 있는 동면이었다. 물론 잠에 빠지면 외출을 하지 않아 느끼게 되는 갑갑함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됐다.
동면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열여섯 시간 정도밖에 못 잤다. 워낙 식성이 좋았던 플로터는 잠자는 와중에도 일어나 챙겨 먹었다. 몸무게가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플로터는 몸의 신진대사를 점차적으로 줄이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뒤졌다. 동면하는 동물들의 생태도 참고했다.
해가 바뀔수록 플로터의 동면은 완벽해져갔다. 지금은 동면 중 그가 섭취하는 음식은 일주일에 물 한 모금이 전부다. 그의 신진대사는 매우 더디고 소화 계통의 활동도 거의 정지 상태여서 화장실 갈 필요도 없다.
플로터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그가 동면에 들어가기 직전인 12월 초에 치른다. 이들은 동면 기간 동안 플로터를 보살펴 주고 4월 그가 깨어나면 다시 파티를 연다.
지방 대학의 연구 대상이기도 한 플로터는 자신이 장수할 것이라고 믿는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짧고 매년 4개월의 휴식을 통해 육체가 싱싱해지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는 겨울잠에서 깨어나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그 전보다 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동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플로터의 사진을 싣고 있는데, 정말 그 순간에 찍은 것인지, 연출에 의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오른팔을 치켜들어 목뒤를 만지고 있는 플로터의 모습은 하품하기 직전의 자세였다. 검고 두터운 옷을 입고 있는 그는 둥그런 곰을 연상시켰다. 거구의 몸에다 풍성한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에 또렷이 나타나 있는 낙천적이며 선량한 표정이 그런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 신문기사를 보게 된 건 어라연을 다녀온 지 10개월쯤 지나서였다. 이야기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에는 기사의 내용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진우가 동면했다는 건 김영식에게 들은 것이지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다. 나는 술에 엉망으로 취한 상태에서 그와 잠깐 만났을 뿐이다. 게다가 그와 나눈 이야기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김영식을 의심했다. 이 사람이 나를 속이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얼굴 표정을 면밀히 살피기까지 했다. 그 결과 나는 연기의 천재가 아닌 이상 거짓말을 저런 표정으로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김영식이 연기의 천재인지도.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으니까. 어쨌든 하진우의 동면 이야기는 매우 유혹적이었지만 소설로 쓰기에는 내키지 않은 구석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플로터의 동면이 홀연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플로터의 동면과 하진우의 동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플로터는 육체적 건강을 위해 동면했지만 하진우의 동면은 영혼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어라연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그때가 12월이었으니 운이 좋으면 동면에서 깨어나는 하진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몰 무렵 나는 어라연에 도착했다. 김영식은 강가에 돗자리를 깔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십 년 지기를 만난 이처럼 반가워했다.
"어, 술을 꽤 하셨네. 웬 낮술을 이렇게 먹습니까?"
"주위가 하도 적막하다보니..."
"여기 적막이야 김형께서 오랫동안 사귀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김영식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즘 그 적막이 달라진 것 같아요."
"달라진 것 같다뇨?"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여기 김형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없지요."
"그런데 누가 보고 있다뇨?"
"저 외딴 방에 꼭 하진우 씨가 누워 있는 것 같아요."
"올 겨울엔 하진우 씨가 안 온 모양이죠."
"그 양반 죽었습니다."
"네?"
"저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작년에 손님께서 말씀하셨죠. 하진우 씨가 두 해 연거푸 잠을 제대로 못 자자 올핸 안 올지 모른다구요."
"그랬지요."
"그분이 잠을 못 이룰 때 사실 저도 안타까웠어요. 하지만 제가 도울 일이 없었지요. 일부러 전깃불을 일찍 꺼보기도 했지만 소용 없었어요. 그렇다고 들어오는 전기를 안 쓸 수도 없고. 재작년 2월 그분이 쓸쓸히 이곳을 떠날 때 사실 저도 손님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젠 안 올지도 모른다구요."
"그런데 왔나 보군요."
김영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전 무척 반가우면서도 불안했어요. 또 잠을 못 자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럭저럭 자는 것 같았어요. 물론 전기 들어오기 전보다 못하긴 했지만. 그런데..."
김영식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충격 많이 받았던가봐요."
"충격이라뇨?"
"강을 막아 댐을 만든다는 소리 듣고는..."
"댐을 만들어요?"
"동강을 막아 댐을 만들 거래요. 서울 사람들 식수 때문이라나요?"
"댐을 만들면 이곳은 어찌 됩니까?"
"떠날 수밖에 없지요. 설사 수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이 흐르지 않으면 토종 고기 씨가 말라요. 게다가 냉해 습해 때문에 농사도 안 되구요."
김영식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하진우 씨가 그 소식 듣고 충격을 받았단 말이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데, 그 표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한마디 말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사흘을 꼼짝도 않데요. 그렇다고 자는 건 아니었어요. 잠이 깊이 들었을 때의 고요함을 전 잘 알고 있거든요. 아마 지금 이 시간쯤 되었을 거예요. 하진우 씨가 나와 물을 찾아요. 방에 있던 물이 떨어졌던가봐요. 저는 반가워 무슨 말이든지 걸어보려고 애를 썼지요. 내 마음을 알았던지 그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강이 흐르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 없소. 집으로 가는 길을.
평상에 앉은 하진우는 산마루에 걸린 해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김영식은 뭐라고 대꾸해야 될 것 같았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집을 어떻게 갈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잠이 깊으면 꿈을 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다. 집으로 가는 길을 실재의 길처럼 말하고 있는 하진우를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그의 얼굴이 말갛게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강이 흐르지 않으면 왜 길을 찾을 수 없나요?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요. 겨울의 깊은 잠은 나에게 틈이었소.
-틈이라뇨?
-빈틈 말이오. 저 산과 이곳 사이에도 틈이 있소. 무엇이겠소?
-글쎄요. 저 산과 여기 사이에 강이 있긴 한데...
-맞았소. 강이 바로 틈이오. 만일 강이라는 틈이 없었다면 이곳에 집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김영식 씬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오. 틈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오.
-이해가 안 되는 군요.
-틈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마시오. 중요한 건 틈을 느끼는 것이오. 삼라만상 어디에도 틈은 있소. 뼈와 살 사이에도 틈이 있고, 사람과 나비 사이에도 틈이 있고, 삶과 죽음 사이에도 틈이 있소. 틈은 허공이오. 한없이 자유로운 무구의 허공이오.
-틈이 허공이라면 저 강도 허공이겠군요.
-틈이 허공이라는 것은 고정된 세계의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오. 틈의 시간은 둥근 원이오. 세상의 질서는 직선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소. 직선의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분리됨으로써 존재하오. 너는 나, 사람과 나비는 분리됨으로써 존재하고, 삶은 죽음과 분리됨으로써 존재하오. 난 오랫동안 틈을 몰랐소. 왜냐하면 세상은 틈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오. 더 많은 업적,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직선으로 치닫는 세상의 눈에 틈이란 쓸모 없는 공간, 해악의 공간일 뿐이오. 그러나 둥근 시간은 부드러운 융화의 세계이오. 그 속에서는 죽음과 삶이 융화되어 초월의 생명이 숨을 쉬오. 그리고 너와 나는 융화된 존재로 살아 있소.
하진우는 는을 감았다.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겨울잠은 나에게 삶과 죽음의 틈이었소. 그 융화의 세계는 나에게 길을 열어주었소. 유년의 집에 이르는 길을.
다음날 아침 하진우는 김영식에게 배를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섬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배를 맡기고 싶지 않았어요.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제가 노를 잡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그랬던지... 하지만 하진우 씬 굳이 혼자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전 내키지 않았지만 배를 내주었지요. 그게 이승에서 마지막일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사고가 났어요?"
"아침에 간 양반이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 봤지요. 물론 전에도 그런 적이 많았지요. 섬에 하루 종일 있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날은 왠지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섬 쪽 강가에 배가 매여있어 소리쳐 불렀지요.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전 옷을 걷어붙이고 강으로 들어갔어요. 외지인이라면 위험한 짓이지만 저는 물길을 워낙 잘 알아... 그런데 하진우 씨가 보이지 않았어요. 작은 섬이라 숨을 데도 없어요."
"사라져버렸단 말인가요?"
"네. 사라져버렸어요."
"죽었다면서요."
"익사했겠지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네."
"그럼 죽었다고 단정할 순 없지 않습니까."
"죽지 않았다면 어디 갔겠어요? 옷과 짐을 고스란히 놔두고."
"그렇긴 하군요. 그런데 시체가 왜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여기도 이제 낚시꾼이 늘어나다 보니 익사사고도 심심찮게 생깁니다.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 가면 찾기 힘들어요. 며칠 후 아주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는 게 예사지요. 물살이 워낙 세니까요."
"경찰에 신고했습니까?"
"물론 했지요. 시체가 발견되면 저에게 연락해주기로 했어요. 그런데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연락이 없어요. 어쩌면 시체가 벌써 발견되었는지도 모르지요. 다른 관할 파출소에서 일방적으로 처리할 수도 있으니까요."
"가족과 연락은 되었습니까?"
"그게 참 답답해요. 짐을 아무리 뒤져도 어디 연락할 데를 찾을 수 있어야지요. 신분증도 없고. 하다못해 전화번호 하나 적혀 있는 게 없으니..."
"김영식은 능숙하게 노를 저었다. 10여 분 정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자 강폭이 눈에 띄게 넓어지는 반면 깊이는 차츰 얕아졌다. 그에 따라 여울물 소리가 점차 커졌는데, 다시 작아진다고 느끼는 순간 섬이 보였다. 강은 두 줄기로 갈라지면서 섬을 에워싸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엄마의 두 팔에 안긴 아기의 형상과 흡사했다. 두 줄기 강은 어머니의 팔이며, 섬은 아기였다.
섬은 모래로 시작되었다. 손에 쥐면 스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부드러운 모래였다. 모래가 끝나자 자갈밭이 이어졌다. 오랜 세월 동안 강물에 씻긴 돌들은 반들반들했다. 자갈 너머는 검은 빛을 띤 바위들이 저마다 다른 형상으로 솟아 있었다. 그 위에 휘어지듯 서 있는 소나무들은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다.
"물가는 봄이 오는 게 빠르지요."
맞은편 산을 보던 김영식이 말했다.
"봄의 따뜻한 기운이 물 따라 오기 때문이지요. 얼음도 빨리 녹아요."
"여긴 무슨 꽃이 피나요?"
"뭐. 여느 강가와 비슷합니다. 찔레꽃, 패랭이꽃, 창포, 진달래가 특히 많이 보여요. 진달래는 산에서 피는 것보다 색깔이 진하지요."
맞은편 숲 속에서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라 두어 번 강을 선회하다 저문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하진우 씨 정말 죽었을까요?"
내 말이 너무 엉뚱했기 때문이었을까. 김영식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 제 말은 그냥..."
나는 슬며시 말을 거두었다. 서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하진우가 저 노을을 보고 있다면 틈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빛과 어둠의 틈. 빛이 어둠을 껴안고, 어둠이 빛을 껴안는 황금빛 융화의 세계.
"작가들이 자살을 많이 한다던데 왜 그럴까요?"
김영식 역시 엉뚱한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진우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 작가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낯선 이에게 작가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지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런데 김영식은 느닷없이 작가라는 말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주막의 사내처럼.
"어, 제가 말 안 했던가요. 그분이 작가래요."
"하진우 씨가 작가라구요?"
"저도 몰랐는데 배를 타기 전에 그러던데요."
"실종되기 직전에 말입니까?"
"네."
나는 혼란스러웠다. 주막에서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만약 작가라면 사람들에게 그들이 잊어버린 황금빛 길을 보여줄 것이라고. 그 말은 자신이 작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는 하진우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는 없다. 물론 내가 모르는 무명 작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막에서 그는 분명 독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작가가 되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힘든 상상이었다.
"정확하게 뭐라고 얘기하던가요?"
"배를 탄 후 노를 잡다가 갑자기 저를 보더니 자신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 지금도 궁금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하진우 씬 잠시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작가라고 하더군요."
"그 말뿐이었어요? 다른 말은 없었어요? 가령 시를 쓴다든가, 아니면 소설을 쓴다든가..."
"없었어요. 그냥 작가라고 짤막하게 말하곤 섬을 향해 노를 저었으니까요.“
3
이제 하진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했다. 주막에서 그와 나눈 대화가 혹시 되살아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으나 지금까지 새롭게 떠오른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기대를 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뇌는 전생애에 걸친 경험을 완전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보존하고 있다는 어떤 신경학자의 주장을 맏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학자에 의하면 우리가 경험의 극히 일부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흥분의 결여와 여러 가지 다양한 억제 요인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자물쇠가 어떤 계기로 열리게 되면 그것과 관련된 경험의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기대를 품는 이유는 하진우의 마지막 말 때문이다. 그가 섬으로 떠나기 직전 김영식에게 무슨 이유로 스스로 작가라고 말했는지 나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주막에서의 대화를 되새겨보건대 하진우에게 작가란 시중에서 흔히 사용되는 작가라는 말과 다른 말임을 나는 느꼈다. 그에게 작가란 궁극의 존재였을까. 그래서 나는 가끔 자문해보곤 한다. 내가 작가인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