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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속의 아리아

Bollnow 2024. 3. 21. 06:57

그늘 속의 아리아

유필영

 

거리는 어느새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건너 편 놀이터의 불빛이 잔잔하게 번져오고 있었다.

낙엽이 하나 둘 부서져 내리며 가을이 스러져가고 있다. 가슴만큼이나 넓은 오동잎이 서서히 퇴색 되어가고, 그 곁에 선 벗나무가 곱게 낙엽을 가꾸고 있었다.

바닥에 누운 은행잎을 밟으며 혜주는 구두 뒷굽이 울리는 소리에 잠시 멈추어 섰다. 등허리를 휘어 감고 지나가는 소슬바람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를 느꼈다. 어쩌면 그 냉기는 외부에서 불어오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스스로의 가슴 속, 뼛속에서부터 밀려나오는 아뜩한 찬바람이었다. 바로 눈앞으로 은행잎이 두어 개 바람에 지고 있었다.

혜주는 현관문을 열었다.

페인트칠과 벽지가 채 마르지 않아 풀냄새와 신나 냄새가 가득했다. 집 안은 대충 정리가 끝난 셈이었다. 찻물을 올려놓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찬바람이 온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혜주는 찻잔을 들고 창밖으로 눈을 던졌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차분한 시간이다. 폭풍과도 같았던 여름을 보내고, 살던 곳을 떠나 이사 오느라 거의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격랑 속을 건너 온 아득한 길이 눈앞에 한꺼번에 번져갔다. 그 길 속에 뒤흔들던 일들이 제각기 포말처럼 부서지고 흩어져가는 것일까 바닷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하얗게 흩어지는 영상이 벽에 걸린 액자 위에 포개졌다.

혜주는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 저에요, 영우는요?"

"영우, 지금 막 잠 들었다."

"벌써요, 그럼 내일 교회로 갈께요."

어머니의 말에 혜주는 안도의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오늘 따라 커피맛이 향기로웠다. 입 속으로 넘어가는 커피가 가슴으로 번지면서 홀로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혜주는 거의 완벽하게 혼자임을 절감한다.

심연의 나락으로 정신없이 매몰되어 갔다. 혜주는 쇼파에 기댄 체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혜주는 교회에 나가던 일이 꿈과 같이 스쳐갔다.

오랫만에 나간 교회이지만, 친정에 온 것과 같이 아늑하고 편안한 것이 놀라웠다. 거기에는 시간의 간격이 없는 만남의 오늘만 있는 것 같았다. 낯익은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모두 그늘진 웃음으로 맞이하는 데는 잠시 마음이 걸렸으나 이내 맑은 웃음으로 변하여 같이 웃고 얘기의 꽃을 나눌 수가 있었다.

"정말 뜻밖인데요, 이렇게 혜주씨를 만날 줄을 몰랐어요."

세준이 아주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마가 훤해지고 말쑥하여 의젓하게 보였다.

"경진이 잘 있어요. 왜 오늘 안보이지요?"

"작은 놈이 열 감기가 심해서요. 낫는가 했더니 새벽에 또 열이 나 혼자 나온 거죠."

"얼마나 귀엽겠어요, 세준씨 닮아 잘 났을 거예요."

혜주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예배가 끝나고 잠깐 차 한 잔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화사하게 바뀌었지만 옛 그대로였다.

"목사님이 새로 온 식구라고 소개하는데 놀랐어요. 집사람을 통해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요."

"갑자기 결정한 일이었어요."

"한 칠 년쯤 됐지요, 결혼하면서 교회를 옮긴 것이. 근데 좀 야위었어요."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좀 아득한 기분이에요. 경진이는 어때요?"

경진의 단정한 얼굴이 앞에 어른거렸다.

"잘 했어요. 정말 잘 돌아온 거예요"

"오랜만에 왔는데도 전혀 서먹하지 않네요. 아마 어려서부터 매일 살다싶이 한 곳이라서 그런가 보죠. 집이 가까워서 늘 교회 마당에 와서 놀았거든요."

혜주는 바닷가에서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던 일이 머리를 스쳤다. 세준이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었다. 몽산포 여름 수양회에서 물귀신이 되는 것을 세준이가 구해 준 것이다. 경진이와 서로 물장난 하다가 발이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허우적거렸다. 경진이가 오해를 할 뻔해서 혜주가 신경을 쓰기도 했다. 혜주는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일에요.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요?

세준이가 찻잔을 놓으면서 혜주를 바라보았다.

"옛날 생각이 나서요. 세준씨와 경진의 눈빛말이에요."

", 눈빛을요?"

"우리는 다 알고 있었지요. 2 때부터죠. 두 사람의 눈빛이 달라져가는 것을요."

". 2 때부터요?"

"그럼요. 놀리고 싶기보다 모두 부러워했어요."

"다 지나간 추억이 되었네요. 혜주씨는 물에 빠진 생각나지요."

세준이가 쑥스러운지 수줍게 웃으면서 반격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죽는 줄 알았어요. 그 뒤에는 영영 물에 못 들어가요. 언젠가 수영장에 끌려 갔다가 혼이 났어요."

"이제 황홀한 옛날이 되고 말았네요."

"경진과 승희와 셋이 말괄량이같이 뛰어 다녔지요."

"삼총사 공주들이라고 유명했지요. 승희씨 소식 들었지요."

"승희요, 무슨 일이 있어요?"

혜주의 말에 세준의 얼굴이 어두워져 갔다.

혜주는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걸었다. 발끝이 무겁게 보도에 부딪쳤다.

어느새 환한 단풍이 거리를 매우고 있었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플라타나스가 아직 푸른 잎을 드리우고 있었다.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어요. 전혀 몰랐다는 거예요. 게다가 노골적으로 갈라서자고 졸랐대요. 그 여자가 죽이고 싶다고, 하나님만 안 계시면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대요. 결국 승희씨가 못 견디고 목숨을 끊고 말았어요. 아침밥을 짓다가, 밤새 남편을 저주하면서 까스렌지의 밥솥이 숯이 되도록 타고, 냄새가 진동하여 일어 나 보니 베란다 문이 열리고 ."

세준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걸로 끝나는 일이 아닌데 .

승희가 사랑에 흠뻑 젖어 있을 때 한 말이 스쳐갔다.

"언제까지구 그를 바라다 볼 수만 있었으면 좋겠어 ."

두 눈에 가득 눈물을 담고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었다.

바보처럼 하지만,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승희의 결단이 오히려 정면 돌파인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누군가를 특별히 바라보기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닐까! 언제나 나를 쳐다보던 사람이 눈길을 돌리고, 그래서 서로 마주 보며 함께 살아갈 줄로만 믿었던 사람을 잃게 되면 온갖 희망은 깨어지고 마는가 보다. 누군가와의 특별한 관계는 언제나 그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일로 시작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서로 보이고 보여주면서 살아야 하는지.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을 받는 즐거움, 그것을 승희는 영원히 가지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가슴 속에 다른 여인상을 새겨둔 사람과 같은 방을 쓸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배반에 대한 절망 대신에 우뚝 설 수 있는 오뚜기가 되었어야 되는 것을 억울하게 이승을 하직하다니, 다 주어 버리고 잿더미 위에서 피러리게 출발할 수도 있었는데 .

혜주는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는지 승희의 눈물어린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하나 둘 떨어진 낙엽이 바시락 바시락하고 밟혔다. 밟히는 가랑잎이 소슬한 기분을 더했다.

동네는 많이 변해 있었다. 영신 슈퍼가 24시간 편의점으로 변하고 김포쌀상회 옆의 연탄가게는 자취도 없어지고 그 자리에 비디오 대여점이 서 있었다. 종합 화장품 가게와 문방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주 드나들었던 만화가게도 보이지 않았다. 세탁소만이 주인이 바뀌지 않은 채 여전했다.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빨리 돌아간다고 해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태어나서 30년 가까이 살았던 낯익은 골목이 정다왔다. 붉은 벽돌 위를 담쟁이 넝쿨이 초록으로 뒤덮고 있었다. 낯익은 벽돌색과 초록이 어울린 조화가 가슴이 뭉클하도록 반갑다.

초인종을 눌렀다. 찌르릉 소리가 맑게 울렸다.

"엄마야?"

"그래 엄마다. 영우야 어서 문 열어."

"엄마 왜 이렇게 늦었어. 외할머니는 벌써 오셨는데 ."

영우가 반갑게 뛰어나왔다. 혜주는 안겨오는 영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영우가 기다렸구나. 친구 만나서 얘기 좀 하느라고 ."

"친구? 누군데 ."

"엄마가 학생 때에 같이 교회에 다니던 옛날 친구지."

"외할머니도 알구 ."

"그럼, 집에도 놀러 오구 했는데 ."

"재미있겠다. 집에 놀러오고, 엄마 나두 친구 데리고 올꺼야."

영우가 부러운 듯이 말을 하면서 현관 안으로 혜주를 끌었다.

"엄마! 외할머니가 칼국수 하고 있다. 어서 들어가. 먹고 싶단 말야 ."

"칼국수를! 영우도 좋아하지. 어서 가서 먹자 ."

혜주는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옛날로 돌아간 기분에 휩싸여 갔다.

"힘들게 칼국수는 미셨어요!"

"뭐 힘들 게 있니. 우리 영우를 보면 힘이 저절로 난다."

엄마가 칼국수를 해주던 옛날 생각이 스쳤다. 일요일의 점심때는 자주 칼국수를 해주셨다. 연호박을 쓸어 넣은 국물 맛이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 맛이 생각나서 해보면 그 흉내도 내지 못했다. 손끝의 솜씨가 아무나 따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느끼고는 엄마의 얼굴을 되새기곤 했다.

"엄마! 칼국수 맛이 어쩌면 이렇게 좋지요. 엄마 솜씨는 여전하네요. 엄마 뒤를 따라 갈 수가 없어요."

"벌써 몇 년을 해온 거니. 다 너희들 먹이는 재미로 하니깐 그러는 거다"

엄마의 말에 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어린애가 꼭지를 문 채 엄마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세월의 연륜을 뛰어 넘은 엄마의 정이 가슴이 저리게 다가왔다.

"엄마, 혜영이와 같이 오지 ."

혜주는 혜영이가 같이 올 줄로 알았다.

"놓아 두어라. 친구 만난다고 나갔다. 얼른 짝 지워서 보내야 할 텐데. 시집 갈 생각은 통 안하고 있으니. 저러다가 노처녀 될까 걱정이다."

"서두르지 말아요, 엄마.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요. 요새 애들은요, 제 앞가림을 암큼하게 챙기거든요."

"그러기나 하면 오죽이나 좋겠니 ."

엄마의 얼굴에 회의의 빛이 서렸다.

"두 노인이 쓸쓸한데 영우가 곁에 오니 사람 사는 것 같다. 아주 집으로 들어오라니까 넌 여전히 고집이 세구나 ."

"혜영이가 있잖아요. 올케도 자주 드나드는데 따루 사는 게 서로 편해요. "

"그 애가 집에 붙어 있는 줄 아니. 잠이나 자는 집이지. 끼니 한 끼 같이 먹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혜영이가 그렇게 바빠요? 그 봐요. 혜영이가 얼마나 깜직한 데요."

"말만 그렇지 아직 철부지다. 너에다 대면 어림없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혜영이가요 나보다 백배는 나으니까요."

"아서라. 칼국수나 더 먹자. 네 얼굴이 밝으니 이제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 다 이게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니까."

엄마의 얼굴에 가느다란 어두운 빛이 스치고 있었다. 영우가 혜주 앞으로 다가 오면서 외할머니를 힐긋 쳐다보았다.

"외할머니 집이 가까워서 좋다, 엄마."

"저놈 봐라. 할머니 두고 너 어디로 가는 거냐. 영우야 이리 오너라!

엄마가 웃음을 섞으면서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외할머니가 유치원에도 데려다 주신댔다. 나 외할머니 손 잡고 유치원에 갈 거야."

"오 그렇지. 이 할머니가 날마다 영우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 줄게. 자 할머니의 손을 잡아 봐라."

엄마가 일부러 손을 들어 영우를 맞이하는 시늉을 했다.

"엄마 우리 아빠 있는데 언제 갈 거야. 빨리 아빠 있는데 가자."

"그래 영우야. 아빠한데 빨리 가자. 영우 손을 잡고 가면 되지 ."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아빠라는 말에 가라앉았던 앙금이 되살아나는지 몰랐다.

"우와 신난다! 할머니한테 가면 사슴도 있고 바둑이도 있어서 좋다구. 안 그래 엄마!"

영우는 벌써 시골에 간 기분이었다. 아빠를 찾아 시골 할머니네 집에 가는 것이 그렇게 좋은 모양이었다.

집안은 아직도 어수선 했다. 채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구는 대개 정리를 했으나 서재는 엉망이었다. 이삿집 센타에서 책장의 그 자리에 책을 꽂아 놓았다고는 하지만 제멋대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어서 다시 정리를 해야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혜주는 잠이든 영우를 한참 쳐다보고 앉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재의 문을 밀었다. 서재라는 말을 부칠 정도는 아니라도 정든 책들이 꽂아 있는 방이었다. 책이 이리저리 꽃혀 산만하게 보였다. 혜주는 먼저 자기의 책장을 정리했다. 왠지 남편의 책장과 악기들은 먼 나라의 것같이 가까이 보이지 않았다. 책들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정리되어 갔다. 모두가 손 때가 묻은 정든 책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줄을 긋고 무어라고 옆에다 써넣은 책들도 있었다. 혜주는 정리하는 손놀림을 멈추고 잠시 그 낙서에 빠져들어 가기도 했다.

대충 자기의 책장을 정리하고 난 혜주는 남편의 책장 앞으로 다가섰다. 뭐 급한 것도 아닌데 내일이나 모래 정리해도 되는 데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킨 김에 대충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뒤를 따라 와 흩어진 책들을 제자리에 바르게 꽂아 갔다. 방을 같이 쓰던 남편 세일(世逸)의 책은 주로 음악과 예술에 대한 책들이다. 악보도 꽤 많이 됐다. 책을 정리하던 손이 한 책에 시선이 멈추었다. 생의 철학의 시조인 독일의 철학자 딜타이의 <체험과 문학>이었다. 혜주는 그 책을 그대로 책장에 꽂을 수가 없었다.

"이건 외우도록 독파해야 할 책이라구요, 혜주씨가 이 책을 독파하면 난 혜주씨의 품 안에 안길 거예요."

세일이 애띤 미소를 띠우면서 권하던 책이었다.

"그럼 읽지 않고 놓아두면은요?"

혜주는 세일의 심리를 대충 읽으면서도 딴전을 부리고 있었다. 세일은 신진 연주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갓 교단에 선 교사이면서도 자존심은 대단했다.

"그런 사람과는 더불어 말이 안 되는 거지요"

단호하면서도 포용력 있게 말하는 세일에 혜주는 벌써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혜주는 그날 밤으로 그 책을 독파하여 오히려 세일이 몰릴 판이었다. 세일이 열을 올리고 혜주에 가까이 오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혜주는 묘한 심정으로 그 책을 들고 이리저리 펼쳐봤다. 여기저기에 줄이 그어져 있고 무어라고 적어 놓기까지 했다.

- 문학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보다 높고 보다 강대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문학 작품은 재체험을 시키면서 그에게 적합한 심적 과정의 경과 속에 그의 온 자질을 활동하게 만든다. 이때 그의 활동은 음향, 율동, 감성적인 관조성 등에 대한 기쁨에서부터 시작하고 끝에 가서는 사건의 삶의 전 진폭과의 관계에 의해서 가장 심오하게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 대목을 세일은 강조하면서 줄을 몇 번이고 긋게 했다.

혜주는 그 자리에서 잠시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열정 어린 세일의 바이얼린 연주가 끝난 뒤 잠깐 만나서 넘겨준 책, 줄을 치면서 다 읽은 것을 보고 얼굴이 훤해지던 모습이 잠시 스쳐갔다.

밤이 으슥한 것 같았다. 마구 울어대던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혜주는 창을 열고 몇번 심호흡을 했다. 시원한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막혔던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아파트의 불빛도 거의 꺼져 있었다. 하늘에도 별들이 희미하게 졸고 샛별만이 유난히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은 아니었다.

혜주는 후련하던 가슴이 다시 조여 드는 것 같아 창을 밀고 다시 돌아섰다.

-아니 이건 .

이상한 책이 눈에 탁 들어왔다. 혜주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을 빼어 드는 순간 혜주의 가슴이 오싹하는 것 같았다.

세일의 일기였다. 전혀 일기를 쓰는 기색이 없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데나 펼쳐봤다.

아내를 용서할 수 없다. 가증스러운 여자. 그 여자는 나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몸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허수아비만 남고 다 임시헌한테 가 있다.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다.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혜주는 얼굴의 핏기가 싸악 하고 가시는 것 같았다. 남편 세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일기밖에 쓴 일이 없는데. 그럼 일기를? 아냐 일기를 볼 수는 없지. 학교에 그것도 열쇠를 채워 놓았는데 혜주는 뒤쪽을 넘겨봤다.

방학을 했다고 아내가 밝은 얼굴로 들어섰다. 방학 중에 처리해야 할 일거리를 가져왔다고 하면서 아내는 서재에 들어갔다. 오늘 따라 아내가 멋있는 여자로 보였다. 아내는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영우의 손을 잡고 슈퍼로 나갔다. 나는 책을 찾으러 서재에 들어갔다.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책 속에 이상한 노트가 눈에 띄었다. 또 좋은 시를 옮겨 놓은 것으로 생각하고 노트를 펼치다가 그대로 덮고 말았다. 아내의 일기였다.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뒤집으면서 읽다가 숨이 막히고 말았다. 아니 이런 일이! 피가 꺼꾸로 멎는 것 같았다.

아뿔사. 방학식을 하고 책상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이 서류와 같이 따라 왔다. 즉시 남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간수했는데 이미 남편이 본 뒤였다.

혜주는 숨이 딱 하고 막혔다. 가슴에 성애가 끼는 듯했다. 온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바람이 불던 그 아침에 남편이 거짓말처럼 이 세상을 버렸던 근원이 거기에 있었던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직원실은 파장의 장터와 같이 어수선했다. 제각기 하루 일과를 끝내고 해방감에 조금은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홍선생님! 전화 받아요"

막 나서려는데 동료 선생의 목소리가 혜주의 발을 멈추게 했다.

"전화 바꾸었습니다. 홍혜주입니다."

혜주는 별 호기심도 없이 의례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홍선생 나 임시헌이에요."

"! 임시헌 선생님이세요?"

뜻밖의 전화였다. 혜주는 몹시 당황했다.

"여보! 저에요, 오늘 회식이 있어서 좀 늦겠어요. 저녁 먼저 드시고 영우 좀 돌봐주어요. 오늘 렛슨은 잘 했어요? 미안해요."

서둘렀는데도 이십 분이 늦었다.

임시헌 선생은 담배를 태우다가 말고 소년 같은 웃음으로 혜주를 맞이했다.

담배를 저렇게 맛이 있게 피우는 사람은 별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혜주가 끌려가서면 시작되었다. 그렇게 우울한 모습으로 오직 담배를 피우는 일만이 최고의 위안인 것처럼 깊이 연기를 마시는 모습 때문에.

"좀 늦었어요. 안녕하셨어요. 얼마만이에요? 저 결혼하고 처음이죠."

여전히 임시헌 선생은 그저 순하게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저렇게 말없이 웃는 모습에 혜주가 빠졌었다. 한없이 따뜻하고 끝도 없이 외로워보여서.

"나 자유 얻었어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집을 나왔어요."

"? 집을 나와요!"

혜주는 소스라쳐 놀랄 뻔했다. 더구나 장난하는 아이처럼 웃으면서 말하는데 어이가 없었다.

"본때를 보여주려구요. 어머니께서 여름방학 동안 우리집에 오셔서 쉬고 싶다고 가방까지 챙겨놓고 계시는데 무어라고 했는지 알아요. 더운데 무얼 왔다갔다 하시느냐구. 그대로 시골에 계시라는 거에요. 이건 견딜 수 없는 일이지요. 번번이 불손한데 이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에요. 이번에 버릇을 고쳐 놓든지 아에 갈라서던지 결판을 내야지요."

"그래서 집을 나오셨다구요?"

"더 이상 참고 살 수는 없어요.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평화를 유지하면 ."

임시헌 선생은 쓸쓸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웃는 것이 아니고 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 이것이었던가. 임시헌 선생의 쓸쓸한 모습의 뿌리가 .

"그래두 어떻게 해요. 이제 와서 ."

결혼하기 이 년 전 가슴앓이로 몸부림치던 세월이 한꺼번에 스쳐가 몸이 오싹했다.

그러니까 스물일곱 살 때의 여름, 반주를 맡아 주고 있던 합창반을 인솔해서 이 주일 동안 일본으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 때 임시헌 선생도 아이들 노래를 지도할 겸 몇몇 선생들과 같이 떠났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사이에 가느다란 선으로 휘어감기 시작했다. 말없이 웃는 따뜻한 얼굴 뒤에 항상 배어 있는 그의 쓸쓸한 분위기 속으로 혜주는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그를 찾아 눈동자가 헤매이고, 멀리서나마 그가 눈에 띠이면 마음이 놓이곤 했다. 돌아오기 이틀 전에 바람이 선선해서 낮에 사두었던 쉐타를 꺼내 입었다.

"홍선생님! 그 쉐타 한 개 더 살 수 없을까요? 집 사람 것을 아직 못 샀는데, 체격이 홍선생님과 비슷하거든요."

"보름이 되도록 선물 하나 준비하지 않았어요."

그의 아내에 대한 무심이 혜주에게 묘한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그가 맡은 파트의 연습이 있는 주일에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도통 말이 없는 그를 바라다보며 그에 대한 욕구가 억제할 길 없이 자랐다.

언젠가 그와 함께 청평으로 소풍을 간 적이 있었다.

바람이 부는 강가에서 혜주는 강물 위에 비치는 자기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머리 위로 하얀 구름이 정처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 한복판에 물새 한 마리가 물 위에 닿을 듯이 날고 있었다. 제 모습을 비추어 보려는 듯이 살짝 물을 박차고 하늘에 치솟았다가 다시 물 위를 또 날고 있었다. 혜주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한 마리의 새가 되고 싶다고 느꼈다. 날갯짓하며 가고 싶은 어디든지 날아가고, 내려앉고 싶은 곳 어디에든 머물 수도 있는, 아무리 높은 나무 위에라도 서슴없이 날아가 앉을 수 있는 고운 빛깔의 작고 예쁜 새가 되었으면 강물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자꾸만 흐려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가의 버드나무에 기대어서

"임선생님! 만약에 만약에 말에요, 아이들 엄마보다 저를 먼저 만났으면 저랑 결혼할 수 있었겠지요."

라고 형편없이 공허한 말을 하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없이 허공에 연기만 뱉어내는 그를 보며, 자기도 승희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 바라보며 살 수만 있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다.

혜주의 결혼식 때에 부인과 같이 참석하고는 그 후 5년 동안 거의 소식이 없이 지내왔다. 혜주도 영우를 키우면서 학교와 집을 다람쥐와 같이 왔다 갔다 하느라고 정신없이 지내왔다.

그가 전화를 걸어온 날, 그 후부터 혜주는 옛 상처가 도져 밤낮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아문 상처의 어디에 그런 씨가 도사리고 있는지 몰랐다.

일주일쯤 뒤에 그는 집으로 들어갔다. 에어컨을 들여놓고 어머니를 모셔왔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제법 자주 목소리를 들려주어 혜주의 가슴을 젖게 했다. 혜주는 그의 공허함을 채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허허로운 웃음을 행복의 미소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는 어줍잖은 사명감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즈음 새 아파트를 분양 받아 살던 아파트를 내놓게 되었다. 집이 팔리고 새 아파트에 입주하기까지 시간을 메우기 위해 전세를 가기로 했다.

임시헌 선생 바로 그이가 살고 있는 옆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를 그리면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꿈속에서는 언제나 길도 없는 숲 속을 헤매고 무엇인가에 정신없이 쫓기곤 했다. 이사를 하면서 장식장도 들여놓고 열심히 치장을 했다. 그의 취미에 맞는 것을 고르면 왠지 기분이 화사해졌다.

"내 집도 아닌데 왠 살림을 들여놓지. 아주 이사할 때에 그 집에 맞추어 하지 않고 ."

남편은 속도 모르고 자꾸만 제동을 걸었다. 그것으로 혜주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임선생 가족과 우리는 자주 어울려 지냈다. 서로 초대도 하고 야외에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혜주는 김치를 담아도 그에게 먹일 궁리를 하고, 과일을 사면서도 그가 좋아하는지를 생각했다. 주말이면 무슨 구실을 대고 초대를 할까가 즐거운 과제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나마 함께 살고 있다고 느끼며 살고 싶었다. 그를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서, 마음만 보면 그가 나를 볼 수 있는 곳에서 함께 숨쉬며 그저 가까운 곳에 그가 살고 있다는 사실, 우리와 똑같이 생긴 공간 속에서 그가 살고 있다는 것, 어느 시간에 무엇을 하고, 언제 어떻게 외출을 하고, 그런 사소한 일상을 알면서 그렇게 함께 할 수 있기만을 기대했다.

어느날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쓰레기봉투를 들고 내려간 나는 정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보았다. 가슴이 뭉클하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는지 습기가 가득 베인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혜주를 보고 혜주는 쓰레기봉투를 든 채 그를 향해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또 한 대의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해가 마지막 빛을 거두는 순간까지 혜주는 봉투를 든체 그렇게 서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사라지고 이쪽을 향해 있는 실루엣만이 보였다.

담배를 피우려 베란다 쪽으로 나갔다. 나는 요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조차도 아내는 모르는 것 같다. 내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분노가 치민다. 그때 쓰레기봉투를 든 아내가 나타났다. 그런데 한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아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 임시헌 그 자식이 그 곳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그렇게 하고 있었다. 뛰어 가서 두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나에게 총이 있다면 단번에 둘을 처치했을 것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내일 총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알아봐야겠다. 둘 다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 단 한발로 둘을 죽여야 한다. 아아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

남편 세일의 마지막 일기였다. 바이올린 연주가인 남편은 남달리 섬세하고 날카로운 신경을 지닌 사람이었다.

남편은 이렇게까지 다 알고 있었다. 빈틈없이 자상하고 이해심이 많았던 만큼 배심감도 그만치 컸을 것이다.

결국 혜주는 아이 영우의 아버지를, 가엾게도 영우에게서 영원히 떼어 놓고 말았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부자를 영영 갈라놓고 만 것이다.

혜주는 텅 빈 가슴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그의 자세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벤자민이 누런 잎 하나 없이 싱싱한 것도 그의 정성어린 보살핌에서 온 것이다.

연주회 때 축하의 선물로 들어온 화분을 그는 정성들여 보살폈다. 해를 지나 화분이 꽃을 피워내면 그는 어린애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 화분을 보낸 사람이 가까우면 작년에 보내준 화분이 꽃이 피었으니 어서 와서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청하기도 했다.

그런 날을 그리며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은 한 번도 거르는 적이 없었다. 그날도 화분에 물을 주고는 샤워를 한다고 욕실에 들어갔다.

"아빠! 이 권총이 이상해. 고장 났나 봐. 방아쇠가 안 당겨져. 아빠 고쳐 주세요!"

영우가 어리광을 부리며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엄마! 아빠가 이상해. 아빠가 쓰러졌어."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종종 영우와 총 싸움을 하다가 정말 죽은 듯이 쓰러져 애태우곤 했다. 그런데 엎드려 있는 그가 눈을 뜨고 있었다. 넘어지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기절한 것인가? 손끝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에 가볍게 뿌려봤다. 그는 순간 아주 작게 한 두번 코고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의 눈을 쓸어 주었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칠월의 마지막 아침이었다.

온몸이 떨려 왔다. 가까이 사는 영우 고모님께 전화를 했다.

"형님! 저에요. 영우 아빠가 이상해요.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쓰러져 있어요 ."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올케! 119에 연락해. 아니 아니 내가 할께 진정하고 있어. 내가 연락하고 바로 갈께 ."

구조대원이 7분만에 왔다. 7분이 7년만큼이나 길고 무서웠다.

"화장실에서 넘어지면 거의 불가능한데 ."

구조대원의 말이 혜주를 거의 공포 속으로 몰고 갔다. 구급차에 들것으로 옮겨져 가까이 있는 중앙병원으로 갔다. 구급차 안에서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혜주는 이가 마주 부딪치고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응급실의 침대, 청진기를 귀에 대고 가슴 소리를 듣던 의사는 청진기를 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발인 예배가 끝나고 시댁 선산으로 향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영우는 스산한 속에서도 천진했다.

"엄마! 아빠 아픈 것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시면 아빠는 돌아오는 거지. 내가 매일 기도할께. '아빠 낫게 해주세요'라고."

"그래 영우야. 아빠는 하나님 곁으로 가셨으니 편안하고 고통도 모르실 거야"

"그래도 내가 보고 싶은데. 내가 부르면 올 수 있는 거지."

굉장이 더운 날씨였다. 뙤약빛이 마구 비치고 있었다.

하관 때에 혜주는 그가 연주회 때에 입었던 연미복을 넣어주었다. 눈을 감을 때에 옷을 입지 못하고 있었던 일이 가슴에 걸렸다. 오남매 중 막내인 그가 어머님 형님 누나를 앞서서 뒷산에 자리를 잡았다. 장례가 끝나갈 무렵 놀라고 지쳤던 혜주가 불볕 속에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건국대학교 충주 캠퍼스 앞을 지났다.

"엄마! 아직 멀었어? 왜 이렇게 먼데로 가지"

잠 들었던 영우가 일어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다 왔다. 조금만 가면 된다."

좌회전을 하여 우측으로 돌아 달래강을 끼고 달렸다. 10분 정도 지나 살미면에 들어섰다. 15분 정도 더 가면 수안보에 이르는 곳이다. <사슴 농장 향미>라는 팻말이 보였다. 좌측 깜박이를 키며 비탈진 오솔길로 올라갔다.

올 여름은 초록이 유난히도 짙었다.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나무 잎이 한결 푸르고 깊어 보였다.

"영우야! 아빠 먼저 뵙고 할머니께 가자."

길이 갈라지는 한켠에 차를 세웠다. 트렁크를 열고 돗자리와 술병을 꺼냈다. 돗자리를 받아 든 영우가 토끼처럼 껑충대며 올라갔다.

하얀 망초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며 땀을 식혀준다. 숲 속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만큼 떨어진 곳에 주홍빛 원추리꽃 한 송이가 유혹하듯이 피어 있었다.

"절은 두 번 하는 거야."

영우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절이 끝나고 술 한잔을 따라 둘레에 뿌렸다. 다시 한 잔을 따라 살짝 입에 대었다.

-여보! 편안히 쉬어요. 아주 편안히 .

술잔을 든 혜주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뻐꾸기도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새끼 이제 오는구나."

시어머니는 영우를 안으시면서 주름진 눈가에 함박 눈물이 고였다.

혜주는 시어머니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마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막내가 부르면 저승길에서도 돌아본다는데 그 아들이 노모를 두고 앞서 가고 말았으니 그 가슴이 오죽하실지!

함께 잠자리에 누운 큰 동서는 혜주의 손을 꼬옥 쥐고 안쓰러운 마음을 한숨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영우가 커 갈수록 그렇게 서방님을 닮아가나 몰라. 두툼한 손등 하며 정말 한쪽 눈을 심하게 깜박이는 것까지. 동서! 영우 시력 검사 해봤어?"

"아니요. 아직 어린데 ."

"서방님이 한 쪽 눈이 시력이 아주 나빴잖아. 어려서부터 심하게 깜박이셨다는데. 영우가 똑 같네. 저번에 봤을 때도 괜찮았잖아."

"유치원 다니면서 심해졌어요."

"그러면 시력검사를 어서 해봐야겠네. 피가 무섭기도 하지. 어찌 그렇게 닮았을까. 그리구 동서! 여자들은 일찍 혼자되면 왜 그러잖어. 팔짜가 어쩌니 저러니 . 그런 생각 절대 하지 말라구. 알고 있었나 모르겠는데 서방님이 한쪽 뇌신경이 선천적으로 약하셨어. 그래서 그쪽 시신경이 같이 약해서 심하게 한 쪽 눈이 나빴던 거야. 왜 가만히 앉았다가 갑자기 세상 떠나는 경우가 있잖아. 서방님이 그럴 수도 있다고 늘 조심하라구 했어."

혜주는 동서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전혀 몰랐어요. 그저 한 쪽 눈이 안 좋은 줄만 평소에 소화제 한 번 먹는 일이 없었거든요. 병원에 간 일도 없구요."

"어머니는 동서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셔. 그래도 자식이라두 하나 남기고 떠났다고 , 우리는 그래. 영우 엄마 아직도 너무 젊고 곱고, 좋은 사람 만나 잘 살았으면 하구 진심으로 빌어. 만약의 경운데 영우를 우리가 맡아 키울 생각도 있어. 동서를 위한다면 ."

혜주는 깜작 놀라 벌떡 일어났다.

"형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영우를 떼 놓다니요. 그런 일은 절대로 ."

큰 동서도 당황하여 일어났다.

"그래 그래. 동서!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동서 마음 다 알지. 암 알구 말구."

나는 민망하게도 울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건너방의 어머니께서 들으실까 봐 입을 손으로 막고 흐느꼈다.

"영우야! 할머님께 인사드려야지."

시어머니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영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방님 기일-탈상이 얼마 남지 않았지?"

큰 동서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 목사님 모시고 추도예배 올리려구 준비하고 있어요."

"그때 아주버님하고 같이 올라갈게 몸 상하지 않게 잘 먹구 ."

큰 동서의 다정한 정에 가슴이 메었다.

어제 그 자리에 차를 세웠다.

"영우야! 아빠한테 인사드리고 가자."

그의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소리를 내어 울지도 못한다.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달라는 말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을 배신할 만한 어떠한 일도 없었어요'라는 말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는 내 마음 속을 낱낱이 알고 갔으므로, 특별히 약했던 그의 뇌신경이 그 일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우 아빠! 영우 걱정 말구 편히 쉬어요. 영우를 위해 최선을 다할께요."

바람이 숲 속에서 쏴 하고 몰려왔다. 바람을 타고 뻐꾸기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몸이 행여 보일세라 꼭꼭 숨어서 저 홀로 그늘에서 우는 새! 뻐꾸기 울음소리가 혜주 자기의 울음소리같이 들렸다.

그늘 속의 뻐꾸기 울음소리가 번져가는 하늘 위로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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