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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어(廣魚)

Bollnow 2024. 3. 21. 05:54

광어(廣魚)

백가흠

 

횟감은 오자마자 회 쳐지는 놈도 있지만, 물을 다시 갈아줄 때까지 사는 놈이 있다. 아니 한 번도 수족관이 텅 빈 적이 없으니 줄곧 운 좋게 살아온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회를 친다. 면장갑을 낀 다음 공들여 숫돌에 칼을 갈고, 뜰채를 들고 수족관 안을 들여다본다.

회를 치려면 칼이 제일 중요하다. 모든 것은 내 손이 하는 것이 아니라 칼이 한다. 살을 바를 때는 칼의 느낌이 중요하다. 가시, 그놈들의 뼈 위로 살짝 살을 남겨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시에 칼을 붙이고 살을 바르면 그놈들도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살을 살짝, 아주 살짝 남겨 놓아야 한다. 그러면 그놈들 대부분이 자기가 회 쳐지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그것들의 살만 바른다면 말이다. 그 느낌, 살만 들춰내는 칼의 느낌이 중요하다.

놈을 고르지만 선뜻 눈에 들어오는 놈이 없다. 칼이 자기 몸을 후비는 것을 느끼는 놈들도 있다. 그놈들은 내장을 다친 경우이다. 내가 칼의 느낌이 좋지 않은 날, 살짝, 아주 살짝 내장을 건드린 경우에 그놈들은 칼의 느낌을 안다. 그러면 그놈은 나를 노려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쉰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내장 밖으로 바람이 새는 소리가 가냘프게 느껴진다. 그런 경우에는 무채를 수북히, 깊숙이 쌓아준다. 나는 바람 새는 내장이 차가운 접시 바닥에 닿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아주 살짝이지만 그래도 그놈들은 곧 죽는다. 나에게 있어 살짝은 그놈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당신과 몸을 섞은 날 이후로 내 몸에도 그 바람이 지지 않는다. 나약 한 바람, 물고기들이 죽기 전에 내뱉는 그 바람이 내 몸 위를 떠다닌다. 간혹 나뭇가지에 앉거나 공지천 물 위로 스미고, 중도에 가서 되돌아오는 바람이 말이다. 그것은 내게 서늘함을 준다. 대금에서 떠도는 소리와 같은 서늘한 바람을 말이다. 당신은 대금과 같다. 거대하고 새까만 구멍을 지니고서 그곳을 지나야지 소리가 나는 대금과 같다. 하지만 당신은 방금, 당신의 자궁 속으로 스쳐간 바람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얇게 발라낸 살점위에

레몬즙을 살짝 바르자

당신의 흰 얼굴이 떠올라

회를 치려면 칼도 중요하지만 면장갑이 꼭 필요하다. 펄떡이는 심장을 벗어나지 못하게 떨어지는 살점이 미끄러지지 않게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살과 살은 언제나 미끄럼이 있다. 한 손에는 뜰채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수족관의 물을 휘휘 저어본다. 곧 물을 갈아야 할 것 같다. 수족관 속의 물도 고여있기는 이곳, 춘천의 많은 호수나 댐과 마찬가지이다.

물이 쉽게 썩는 것은 아니지만 고기들은 때때로 민감하다. 수족관은 이단으로 되어있는데, 위에 있는 어항의 물이 관을 타고 밑으로 떨어져 아래 어항의 밑바닥에서 다시 솟구치고, 떨어진 물은 다른 관을 타고 다시 위로 올라간다. 수족관 속의 물은 고여있지만 끊임없이 안에서 돌고 돈다. 그나마 물이 돌고 있기 때문에 고기들이 제법 살아주는데, 대부분은 그곳이 어항인지 알아차리고서 오래 살아주지는 않는다. 어류에 따라서도 제각각인데 성질이 사납고 활동적인 놈들이 제일 먼저 죽는다.

나는 계속 수족관 안을 들여다보며 회쳐질 놈을 고르고 있다. 뜰채로 한 놈을 건져 올렸다. 우럭이다. 몸에 상처가 많은 놈이다. 물 안에서 상처는 곧 죽음이다. 이 놈은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 우럭은 성질이 사나워서 어항 안에서도 제일 먼저 죽는다. 손님에게 주문을 받을 때도 우럭의 상처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손님은 신선하고 싱싱한 우럭을 회로 떠서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상처투성이 우럭을 회로 떠서 먹는다. 상술이 생각나니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다시 고민스럽다. 당신은 이 한 마리를 통째로 삼킬 줄을 모르니 말이다. 이놈은 반을 회 치기 전에 죽을 놈이고, 물을 갈아주기 전에도 죽을 놈이다 .

나는 우럭의 상처가 안타깝기도 하지만 당신에게 상처 많은 놈을, 신음에 겨워 죽음을 눈앞에 둔 놈을 당신에게 주고 싶지 않다. 물속으로 살짝 우럭을 놓아주고 어항 구석에 배를 깔고 모른 척, 죽은 척 가만히 엎드려 있는 광어를 잡는다. 유유히 한 번, 두 번 그물을 벗어나지만 그래봤자 고여있고 좁은 물인 것을, 곧 광어는 쉽사리 뜰채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물 밖으로 광어를 꺼내어 부엌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얌전하고 묵직했던 광어는 부엌 바닥을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난감해 하지 않는다. 굵은 칼등으로 녀석의 정수리를 살짝 친다.

녀석은 꼬리를 휘었다가 곧 기절한다. 나는 칼로 광어의 꼬리에 상처를 살짝 내둔다. 꼬리를 자르면 광어도 같이 죽으니까 끊어지지 않게 살짝 흠집을 내야 한다. 그래야 회를 뜨기가 수월해지고 먹기도 좋아진다. 처음에 나는 이것을 알지 못했다. 기절한 얌전한 놈을 회 치다가 깨어서 펄떡거리는 놈들 때문에 애를 먹은 경우가 여러 번이다. 손님 밥상 위에서 깨어 펄떡거린 적도 있다. 그 우스웠던 광경을 생각하니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고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저항과 힘은 꼬리에 있다. 이 힘을, 꼬리를 제압하면 그다음은 칼이 한다. 내 손이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칼이 모든 것을 해치운다.

미끄러진 칼이 내 검지를 베고

물속으로 번지는 시뻘건 안개

당신이 마취에서 깨어 방바닥을 뒹굴고 있지 않을까 마음이 조급해진다. 칼로 광어의 등선을 따라 선을 긋고 그 선 사이로 칼을 집어넣는다. 광어의 하얀 살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시에 살짝 살을 남기며 살과 가시 사이를 점점 벌린다. 칼의 느낌이 좋다. 이놈은 꽤 오래 살아 줄 것 같다. 한쪽 살을 다 바르고 뒤쪽의 나머지 살도 바른다.

내장을 건드리지도 않았고 보기 흉한 피도 한 방울 살점에 묻어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가시와 머리와 잘린 꼬리만 남은 광어를 접시에 담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신경 쓸 부분이 남았다. 비늘을 벗겨내는 일이다. 비늘 쪽을 도마에 붙이고 꼬리 쪽 살을 흠집 내어 비늘 위에서 칼을 멈춘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비늘 위로 살짝 살을 남겨 놓아야 한다. 살점에 비늘이 묻어나면 피가 한두 방울 묻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먹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 칼을 비스듬히 뉘이고, 꼬리 쪽에 붙은 살점을 잡고 당긴다. 기분이 좋아진다. 한 번에 껍질이 모두 딸려 나왔다.

비늘이 있었던가 의심스럽게 살점이 투명하고 하얗다. 오늘은 칼의 느낌이 더없이 좋다. 당신에게 빨리 달려가고 싶다. 접시 위에 머리와 꼬리만 보이게 하고 횅한 가시는 무채로 덮어 버린다. 한쪽 살을 아주 얇게 칼을 뉘어 썰고 무채 위로 보기 좋게 담는다. 녀석이 입을 벌리고 힘겹게 숨을 쉰다. 초밥을 주무르고, 타원으로 주무른 초 밥 위에 살점을 얹어 다시 한번 꼭 쥔 다음,다른 접시에 담는다. 녀석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 레몬즙을 살짝 바르자 창백한 당신 얼굴이 하얀 살들과 겹쳐진다. 당신이 보고 싶어진다.

나는 당신에게 가려고 버스를 탄다. 당신에게 가는 길옆으로 춘천의 많은 물들이 펼쳐져 있다. 넓은 호수를 끼고 돌면 미군 캠프가 나오고, 캠프 담 건너편에는 유곽들이 줄지어 늘어 서 있다. 때때로 그곳에서 햇빛을 쬐는 늙은 창녀들을 보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당신의 늙은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간혹 그녀들이 우리 가게를 찾기도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바람 몰아치는 날들이었는데, 그날이 그녀들이 쉬는 날이라고 했다. 그녀들은 비바람이 억수같이 몰아쳐야지 사내들은 자기 들을 잊어버린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광어와 소주를 마시면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라며 맞장구를 쳤다. 비가 오면 회를 찾는 사람이 적다. 아무도 펄떡거리는 생명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데, 유독 그녀들만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당신도 찾아와 초저녁부터 술을 마신다.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매일 술을 먹으니 하루는 쉬고 차를 마시라고 말이다. 당신은 오늘만 당신이 마시고 싶어 마신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내주는 커피도 마다하지 않는다.

유곽 옆으로는 춘천역이 있다.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당신은 나에게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자고 말한다. 당신은 기차를 아직 타본 적이 없다고, 기차를 타면 기찻길 끝까지 가자고 말한다. 나는 당신에게 기차를 태워 주고 싶다. 춘천 위로는 기찻길이 없으니 천상 내려가야 하는데,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울이 나온다. 당신과 나는 그쯤에서 겁을 먹고 기차 탈 생각을 접는다. 당신도, 나도 이곳 춘천 말고는 익숙한 곳이 없다.

춘천역을 지나자 소양 댐으로 가는 샛길이 나타난다. 소양 댐에는 배가 뜬다. 유람선이 아니고 사람과 차를 실어 나르는 배가 말이다. 당신은 언젠가 저 배도 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넘어가고 싶다고 말이다. 나는 호수 건너도 춘천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아니다. 호수를 건너면 산이 가로막고 그 대신 양구로 넘어가는 46번 도로가 나온다. 한여름에 내 기억은 46번 도로를 타고 넘어가 군에서 보낸 그곳의 한겨울에 머문다. 어쨌든 그곳도 막혀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물과 산과 한 가지 더 눈으로 막혀있으니 말이다.

버스는 내가 내릴 정류장에 멈춘다.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취에서 깨면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분다.

나는 천천히 배현수 산부인과의 문을 민다. 간호원이 두 명 있다. 그녀들이 환자의 이름을 내게 묻는데 당신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미스 정, 당신의 이름이 미스 정이었던가 착각이 든다. 나는 당황한다. 나는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하면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이 있다. 상대는 그것이 내가 아둔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둔해 보이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스 정만 외친다.

간호원은 나를 데리고 회복실로 간다. 회복실과 입원실의 차이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회복실 앞 203호 입원 실에서 임산부가 나온다. 그녀의 배가 흥부전에서 나오는 보물이 가득 들어있는 박과 같다. 나는 그녀의 배가 우스워서 고개를 숙인다. 내 어머니가 나를 임신한 배를 상상한다. 그 안에 있었을 나를 상상한다. 웃음이 나오려고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짧은 찰나 나를 아래위로 훑은 그녀의 눈과 마주친다. 결국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나는 회복실 문을 연다. 그러고는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당신을 본다. 보고 싶었던 당신을 본다.

󰡒미스 정.󰡓 목소리가 내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다. 당신을 보니 휘파람도 사라지고 힘이 빠진다. 당신은 벽 쪽을 보며 잠을 자고 있다. 나는 가지고 온 회가 담겨있는 접시를 바라본다. 언제 죽었는지 모르게 광어는 죽어 있다. 가시 위로 덮여진 무채도 색이 변하려고 한다. 아무래도 랩으로 싸고 얼음을 채울 것을, 나는 후회한다. 광어가 죽었다. 오래 살 것 같았던 광어가 죽었다.

회를 칠 때 좋았던 칼의 느낌 이 생각난다. 당신이 입고 있는 하얀색 추리닝을 본다. 하얀 추리닝의 엉덩이 부분에 피가 조금 배어 있다. 하얀 살점에 묻어 나온 피와 비늘과 같다.칼의 느낌이 좋지 않은 날, 광어의 내장에서 묻어 나온 피와 같다. 당신은 꼼짝도 않고 벽을 보며 자고 있다. 당신은 광어와 같다. 죽은 척, 모른 척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광어와 같다.

나는 당신에게 가까이 간다. 제일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귀를 뚫은 구멍이다. 귀걸이를 차는 구멍 말이다. 나는 귀밑으로 내려 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한 가닥도 내려오지 않게 여러 번 반복한다. 당신의 머리가 가지런하다. 나는 가지런한 머리가 보기 좋아 머리 전체를 쓸어 넘긴다. 당신의 머리에서 좋은 냄새가 묻어난다. 다시 휘파람이 나온다. 당신은 뒤척이며 나를 본다. 언뜻 웃는 것도 같다. 당신의 감은 눈을 본다. 당신은 내가 온 줄 아는 것 같다.

당신의 쌍꺼풀 없는 눈이 나는 좋다. 당신은 내 눈과 같이 눈꼬리가 밑으로 쳐지지 않아서 슬퍼 보이지는 않는다. 슬프지 않은 당신의 눈이 좋다. 당신의 감은 눈이 퍽 길게 느껴진다.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혹시 당신,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꿈속에서 춘천을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인다. 나는 당신 꿈속으로 끼어들고 싶어진다. 나는 당신이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당신의 이마에 땀방울이 배어 있다.

당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병원에 가겠다고 나에게 말을 한 날이 생각난다. 당신은 진정으로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아이를 지우는 것은 잘 가꾼 머리를 갑자기 미련 없이 자를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내 어머니도 나를 가졌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만 물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당신은 알지 못 할 것이다. 내게서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잠깐 그 아이의 아버지는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냄새를 맡자

나는 엄마의 자궁속이

기억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채 한 달도 안 된 배속의 아이를 상상하고 있었다. 당신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아이의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때의 미묘한 감정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이의 진짜 아버지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니 낳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을 하나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기억한다. 나는 당신이 진정으로 나를 자기 아이의 아버지로 생각하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당신은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사장님과 의논했다. 룸살롱 여사장과 말이다. 그녀는 내가 일하는 횟집의 사모님이기도 하다. 남편은 산 생선을 팔고 아내는 산 여자와 술을 판다. 사모님은 내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사장님은 내 어깨를 토닥였고 당신은 옆방에서 손님을 받고 있었다. 사모님은 내일 당장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내게 고함을 쳤다. 당신이 그곳, 󰡐환희󰡑에 온 지 꼭 두 달만의 일이었다. 사모님에게는 수지가 맞지 않는 당신이었다.

나는 사모님에게 사정을 했다.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결혼도 하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때 옆방에서 당신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와서 사모님과의 대화를 잠깐, 아주 잠깐 끊었다. 당신은 연분홍 치마 어쩌고 하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실제로 당신의 봄날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아직 스무 살이었다. 당신이 깨어난다. 눈을 천천히 한 번, 두 번 끔 벅이고 천장을 멍하니 쳐다본다.

󰡒깼어요? 좀 괜찮아요?󰡓 당신이 고개를 천천히 내게로 돌린다. 당신의 얼굴을 보니 날 보며 웃 는 것도 같다.

󰡒마취에서 깨어날 시간이 지났다고 했는데 너무 열심히 잠을 자서, 안 깨어 날까 봐 걱정했어. 정신이 좀 들어요?󰡓 당신은 내가 들고 온 접시를 바라본다. 당신의 얼굴이 광어의 살점과 같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광어의 살처럼 허옇다. 나는 당신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어진다. 칼의 느낌이 생각난다. 나는 처음으로 내장을 건드려 피를 보고 싶어진다.

󰡒초밥을 가져왔는데 맛 좀 볼래요? 수술 후에는 회가 좋다네요. 상처가 빨리 아문다고.󰡓

나는 접시를 들고 당신의 베개 옆으로 옮겨 놓는다. 베갯잇에 묻은 당신의 눈물 자국이 보인다. 나는 손등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준다. 머리를 쓸어 넘기려는데 당신이 눈을 감는다.

󰡒좀 먹어요.󰡓 당신은 눈을 감고 뜨지 않는다. 나는 의자에 앉아 침대 위로 엎드린다. 좀 전에 불던 휘파람의 멜로디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에 당신의 알몸이 생각난다. 귓불이 생각나고,그 아래로 가는 목 위에 있는 점이 생각난다. 그곳에서 나던 당신의 냄새가 아련하다.

그날 당신은 비가 내릴 것 같다며, 오늘은 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신은 맵지 않게 끓인 대구탕을 먹었다. 당신은 회를 먹지 않아서 술에 빨리 취해 버렸다. 그곳에서도 당신은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실제로 당신의 봄날이 가고 있었다. 당신은 비가 내리기 전에 엉망으로 취해버려서 나는 가게문을 닫고 당신과 여관에 갔다. 나는 당신의 봄날과 당신의 자는 모습을 밤새 지켜보았다. 당신은 동틀 무렵에서야 눈을 뜨고 물을 찾았다. 나는 물병을 옆으로 뉘어 냉동실에 넣어 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물을 마시고 당신은 나를 당신의 옆자리에 눕게 했다. 나는 당신의 옆에 누워 당신의 냄새를 맡는 것이 행복했다. 나는 처음으로 행운아라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나를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내게 당신은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와 같았다. 당신은 내 옷을 벗기고 내 성기를 당신의 입에 넣었다. 나는 당신의 알몸을 보았다. 창밖의 가로등에 비친 당신의 몸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뿌연 안개와 같은 당신의 몸을 보았다. 당신의 젖가슴이 손에 닿았다. 젖꽃 판에 돋아있는 작은 유두들을 손끝으로 훑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자궁 속이 기억나는 것도 같았다. 얼굴 없는 어머니의 자궁 속이 말이다. 나는 그곳이 그리워 당신의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처음으로 행운아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당신에게서 들려오는 대금 소리를 들었다. 당신의 시커먼 자궁 속으로 지나는 바람이 보였다. 당신은 당신의 지나간 봄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당신이 춘천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이다. 나는 당신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이제 당신에게는 내가 있으니 괜찮다고 말이다. 아무렴 당신은 아무 걱정 없다. 당신이 내 머리를 쓸어내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당신이 나를 보고 있다. 당신의 알몸이 그리워진다.

󰡒새끼 삼촌.󰡓 당신은 나를 삼촌이라 부른다. 나는 당신의 삼촌일 수 있다. 그런 관계는 세상에 흔하고흔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보다도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혹시 당신이 내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나는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었던가 후회한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괜찮아. 삼촌, 나 물.󰡓 주위를 살펴보지만 물이 없다. 나는 밖으로 나간다. 203호 문을 보니 아까 보았던 흥부의 박 같은 배가 생각난다. 기억나지 않았던 휘파람 가락이 생각난다.

간호원에게 물을 청하자 뽀로통하더니 플라스틱 컵에 물 한 잔을 가져다준다. 그것을 받아들고 가다가 먼저 한 모금 마셔본다. 물이 시원하지 않아서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나는 물을 벌컥 들이켜고 밖으로 생수를 사러 나갔다 온다. 사 온 생수를 플라스틱 컵에 부어 한 모금 마셔본다. 플라스틱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물이 시원하다. 들어와서 당신에게 물을 건네자 당신은 물을 마시면서 눈을 크게 한 번 뜬다.컵 속의 물을 바라보는 당신의 눈이 깊다.

󰡒삼촌, 나 이제 여기 나갈래.󰡓

󰡒갑갑해서? 그렇게 해요. 병원비 내고 올 테니 잠깐 기다려요.󰡓

당신, 당신의 몸값은

팔백만 원이라고 했다

그것도 밑진 장사라고 했다

나는 오늘 사장에게 가불한 월급으로 병원비를 치르고, 아직 이십여만 원이 남는다. 당신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어진다. 당신을 데리고 나는 택시를 탄다.

당신과 내가 처음 갔던 여관으로 간다. 205호에 들어간다. 옆방 203호를 보니 아까 보았던 흥부의 박 같은 배가 생각난다. 205호로 들어가자마자 당신은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든다. 당신은 몸이 아픈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아픈 것인지 궁금하다. 그것이야 어쨌든 나는 당신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다. 당신에게 뭐라도 좀 먹이고 싶어진다. 당신을 재우고서 나는 문을 잠그고 여관 밖으로 나온다. 수족관 속의 물이 생각났던 것이다. 물을 갈아줄 때가 되었다.

사장님은 내가 어디에 간 것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당신이 병원에 간 것을 모르고 있다. 아직 당신의 배속에 아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 당신의 몸값은 팔백만 원이라고 했다. 그것도 밑진 장사라고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횟집으로 간다. 한낮인데도 가게 안은 어둡다.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의 수면이 잔잔하다. 호수는 아무 문제없어 보인다. 담배를 하나 물고 수족관 안을 들여다본다. 수족관은 여전히 물 떨어지는 소리로 요란하다. 이놈들도 시끄러움을 알까 궁금하다. 혹시 떨어지는 물소리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궁금해진다. 당신, 당신은 팔백만 원이 필요하다. 아니 나는 팔백만 원이 필요하다. 통장에 있는 삼백여만 원이 생각난다. 물을 갈아줘야 하는데 나는 망설이고 있다.

수족관을 보니 우럭 한 마리가 균형을 잃고 어항 안을 뱅글뱅글 돌고 있다. 아침에 건져 올렸던 놈이 틀림없다. 나는 뜰채를 들고 우럭을 건져 올린다. 우럭은 아직 죽지 않았다. 입을 동그랗게 크게 벌리고 몸을 뒤튼다. 하지만 이놈의 펄떡거림에는 힘이 없다. 나는 면장갑도 끼지 않고 놈을 회친다.

놈이 죽기 전에 회를 치려는 것이다. 꼬리를 자르고, 머리 부분을 칼등이 두꺼운 통칼로 썩둑 자르고 회를 친다. 이제 우럭은 죽었다. 놈의 피가 도마 위에 흥건해진다. 나는 칼질을 서두른 다. 놈의 비늘 때문에 자꾸 손이 미끄러진다. 등선을 따라 가시가 돋아있는 뾰족한 지느러미를 자르고, 그 사이로 칼을 집어넣는다. 칼이 미끄러지며 내 검지손가락을 벤다. 우럭의 피와 내 손가락의 피를 구분할 수 없지만 나는 아무 걱정 없다.

나는 칼을 놓고 수족관 안을 본다. 여전히 광어는 죽은 척, 모른 척 엎드려 있다. 나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행주를 쥐고, 수족관을 보다가 머리와 꼬리가 없는, 우럭의 몸통 토막을 들고 어항으로 다가간다. 나는 오백만 원이 필요하다. 토막 낸 우럭을 수족관 속으로 집어넣는다. 토막 낸 우럭은 서서히 피를 뿌리며 가라앉는다. 물속으로 시뻘건 안개가 피어오른다. 광어의 등위로 우럭은 가라앉지만 그놈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당신은 잠에서 깨어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수족관 안의 물은 다시 아래에서 솟구치고 시뻘건 안개는 걷힌다. 우럭의 몸통은 광어와 같이 죽은 척, 모른 척 움직임이 없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전표 한 장을 꺼내어 본다. 도광일, 그가 아이의 아버지가 확실한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오백만 원이 필요하다. 당신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내게서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전표를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쌀 한 줌을 물에 담가 놓는다.

물차가 도착했다. 고기들을 도매로 파는 사람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바닷물을 차에 싣고 다니며 물을 갈아준다. 이러고 보면 세상의 물은 돌고 돈다. 나는 고기를 받지 않고 물만 간다. 그들 중에 늙수그레한 사람이 우럭 토막을 보고 내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수족관 속의 물 을 빼다가 멈추고, 머리를 긁적인다. 사람들은 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묻는 말에 대답을 피할 때면 나를 아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더 이상 내게 묻지 않는다. 수족관 속의 물이 완전히 빠졌다.

물 빠진 수족관 속의 펄떡거림이 장관이다. 광어는 죽은 척, 모른 척하지 않는다. 수족관 밖으로 튀어 오르는 놈도 있다. 토막 낸 우럭 몸통만이 가만히 있다. 나는 물차에 호스를 꽂고 입으로 호스를 빨아들인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났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물이 호스를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물이 몇 미터 앞까지 올라온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바닷물 한 모금을 내장 속으로 밀어 넣는다. 물이 어항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항 속으로 물이 가득 채워지고 광어는 다시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친다. 나는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탄다. 버스는 잔잔한 호수를 끼고 시내로 향한다. 아무렴 나는 아무 걱정 없다.

나는 도청 문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나는 당신을 보지 않고서 이곳으로 온 것을 후회한다. 도광일, 그는 도시계획국장이다. 수위가 친절하게 그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당신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내게서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도광일 씨 되시죠? ......󰡐환희󰡑에서 왔습니다.󰡓

󰡒어디에서 왔다고?󰡓 그는 키가 작고 깡마른 체구였으나 배만 볼록 나와 어쩐지 맘에 들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는 나보다 키가 작았지만 그의 눈은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환희󰡑를 모르십니까?󰡓 나는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전표를 꺼내 그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가을에나 와봐. 지금 내가 삼백이 어딨어?󰡓 그가 돌아서서 가려는 것을 나는 붙잡는다. 당신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어진다. 나는 조급해진다.

󰡒지금 주셔야 하겠습니다.󰡓

󰡒? 이거 미친놈 아냐? 당장 내가 삼백이 어딨어? 이자식아. 다음에 오라니까󰡓

그의 언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스 정이 선생님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뭐라고? 이거 순 또라이 새끼아냐?󰡓.

그의 음성은 가라앉았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그를 굽어본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목을, 그리고 가슴을 보다가 다시 눈을 본다.

󰡒그런데 이새꺄, 니가 그년 배를 까봤냐? 그 애가 나하고 닯았든?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얘기야. 지금? 난 그년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데. .....󰡓

그는 말끝을 흐리고, 나는 담뱃불을 비벼 끄며 그의 말을 자른다. 나는 그를 굽어본다.

󰡒선생님이 오늘 주셔야 할 돈은 오백만 원입니다. 삼백이 아니고 말입니다. 선생님도 아이를 낳는 것에는 반대하실 것 아닙니까. 물론 선생님 부인께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나는 내가 할 말만 하고 돌아서서 도청을 나온다.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걸음을 바삐 걸어 택시를 잡아타고 여관으로 간다.

침대 위의 당신은 여전히 잠을 잔다. 죽은 척 엎드려 있는 광어같이 말이다. 나는 당신을 여러 번 소리 내어 불러보지만, 당신은 모른 척 잠을 잔다. 나는 밖으로 나온다. 당신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어진다. 나는 여관 앞의 전화부스에서 도광일에게 전화를 건다. 그는 나인지 알고 전화를 받지 않고, 여자 직원이 받는다. 나는 그녀에게 계좌 번호와 시간과 도광일의 집 앞에 있다는 메모를 남긴다. 전화를 끊고 횟집으로 간다. 나는 아무 걱정 없다. 나는 횟집에서 다시 도광일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엔 그가 받는다.

󰡒기회는 오늘 하루뿐입니다. 오늘 돈을 주셔야 합니다. 꼭 부탁 드립니다.󰡓

수화기 저쪽에서는 아무 말이 없다. 옆자리의 사람들 때문인 것 같다.

󰡒다 알아들으신 걸로 알고 전화 끊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죽을 끓인다. 물에 불은 쌀을 건져내어 절구에 넣고 공이로 곱게 빻는다. 생각보다 쌀이 충분히 붇지를 않았다. 도광일이 돈을 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혹시 사모님에게 전화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일이 잘못되면, 일단 삼백만 원을 가지고 사모님에게 사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물을 넉넉히 넣고 약한 불로 죽을 끓인다. 하얀 죽 위에 무엇을 조금 넣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대신에 양념장을 만든다.

부추를 잘게 썰어 간장에 넣고 참기름도 넣는다. 나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와서 도청 앞의 은행으로 간다. 불을 너무 세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통장에 도광일의 돈은 들어와 있지 않다. 나는 다시 도광일에게 전화를 한다.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온다. 나는 그의 부인에게 알릴 생각이 없는데, 그가 그것을 눈치챘는지 걱정된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 죽이 다 타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나는 시계를 본다.

은행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나는 초조해진다. 나는 그에게 삼십 분의 시간을 주며 삼백만 원만 요구하고 전화를 끊는다. 삼십 분이면 하얀 죽이 새까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은 잠에서 깨어났는지 궁금하다. 육백만 원을 사모님에게 드리면 당신을 󰡐환희󰡑에서 놓아줄지 걱정이다. 도광일이 들어 온다. 나는 화장실로 숨는다. 변기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워 문다. 하얀 죽이 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당신이 보고 싶어진다.

계좌로 그는 이백만 원을 입금했다. 나는 오백만 원이 있다. 이것이면 당신이 내게로 오는 것이 자유로울지 가늠해보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다시 도광일에게 전화를 하지는 않는다. 사모님에게 전화를 해보니 그녀는 아직 도광일에게 내가 술값을 받아낸 일을 모르는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전표를 찢어 버린다. 미스 정이 임신한 아이가 내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의 무게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자유롭지는 않다. 당신은 모를 것이다. 내게서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서둘러 횟집으로 간다.

죽은 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끓여야 할 것 같다. 나는 하얀 죽을 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끓인다. 죽이 걸쭉해질 때까지 끓인다. 나는 다 끓인 죽을 보온병에 담고 그릇을 챙겨 여관으로 간다. 병원 갈 때 불었던 휘파람이 나온다.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당신은 언제 잠에서 깨었는지, 일어나 앉아 TV를 보고 있다.

󰡒일어나 있어도 돼요? 누워있지 않고.󰡓

󰡒삼촌, 고마워.그치만 삼촌이 이렇게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는데.󰡓

󰡒제가 아니면 누가 미스 정을 돌봐요? 배고프지 않아요? 죽을 좀 쑤 어 왔는데.󰡓

나는 죽을 그릇에 담아 그녀에게 준다. 당신은 죽을 보며 웃는 것도 같다.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삼촌, 담배 있어? 나 하나만 줘.󰡓

󰡒죽을 좀 먹지 그래요. 몸이 안 좋은데.󰡓 󰡒담배 피우고 먹을게.󰡓

나는 당신에게 담뱃불을 붙여 준다. 당신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방안을 살핀다. 휴지통에 처박힌 광어를 본다. 살아있을 것 같은 광어를 본다.

󰡒징그러워서 버렸어.󰡓

󰡒괜찮아요. 저는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묻지도 않고 가져온 제가 잘 못이죠.󰡓

가냘픈 바람 소리가

당신을 따라 나간다

엄마가 날 버린 그때처럼

당신은 죽을 먹는다. 양념장을 섞어서 맛있게 먹는다.

오늘 도광일을 만났어요.”

󰡒누구? 그게 누군데?󰡓

󰡒그 있잖아요.가게 가끔 오는 도청에 다니는 공무원 있잖아요.키 작고, 깡마르고 배만 볼록 나온 사람, 생각 안 나요?󰡓

󰡒,그 사람 이름이 도광일이야? 그런데 그 사람을 왜?󰡓

󰡒돈이 필요해서요.미스 정이 환희에 빚진 거 갚으려고......󰡓

당신은 숟가락을 놓고 나를 본다. 당신 눈은 슬프지 않다. 아무래도 당신이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는 나였던 것 같다. 이제야 확신이 든다. 당신이 병원에 가도록 내버려 둔 게 후회된다.

󰡒그 사람한테 왜 돈을 꾸어?󰡓

󰡒돈을 꾼 게 아니고, 도광일이 아이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환희에 빚진 술값도 있고 해서......󰡓

󰡒그럼 그 인간한테 돈을 뜯으러 갔다는 얘기야? 그 인간이 순순히 돈을 내줘?󰡓

󰡒. 그런데 다 받지는 못했어요. 오백만 원을 달라고 했는데...... 󰡓

󰡒오백?󰡓 나는 통장을 꺼내 당신에게 보여준다. 비밀번호도 알려준다. 당신과 나는 이제 춘천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모님에게 내일 당장 돈을 주고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백만 원밖에 안 줬어요. 내 돈 삼백만 원하고 합치면, 그것으로 내일 사모님에게 사정할 테니까. 미스 정은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요. 죽도 마저 먹고.󰡓

나는 놀라는 당신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당신은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춘천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당신은 내 얼굴과 통장을 번갈아 보다가 자리에 돌아눕는다. 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본다. 나는 당신의 엉덩이 사이에 묻어 있는 얼룩을 본다. 나는 옷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나는 당신의 옆자리에 가서 눕는다. 당신의 알몸이 그리워진다. 당신의 머리에 코를 갖다 대고 나는 당신의 냄새를 맡는다. 나는 두 번째로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속으로 휘파람을 분다. 나는 당신의 연한 화장품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든다.

방안이 깜깜하다. 나는 잠에서 깼지만 일어나 앉지는 않는다.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나도 잠에서 깨었다. 방안에는 창밖의 가로등에 비친 당신의 형체만 있다. 나는 모른 척, 이마에 팔을 얹고 당신을 본다.

당신은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하다. 당신은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고 나를 본다. 내가 수족관 안의 광어를 보듯 당신은 나를 본다. 당신은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광어가 죽기 전에 내뱉는 가냘픈 바람 소리가 당신을 따라 나간다. 당신은 당신의 오백만 원이 들어있는 통장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깨우지 않고 말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어머니가 나를 버리던 날이 기억나는 것도 같다. 처음 왔었던 춘천이 기억나는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이 빠져나간 문만 바라본다. 얼굴 없는 어머니가 불쑥 들어올 것 같다. 나는 일어나 불을 켜고 시계를 본다. 서울로 가는 막차가 있을지 궁금하다. 나는 휴지통에 처박힌 광어를 본다. 언제 죽었는지 들키지 않았던 광어를 본다. 벌써 당신이 보고 싶어진다.

나는 광어를 꺼내어 우물우물 씹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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