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공룡은 어디로?

Bollnow 2024. 3. 21. 05:51

공룡은 어디로?

서정빈

 

그 여자는 양손으로 티라노사우루스의 입을 쫙 벌렸다. 날카로운 세 개의 이빨이 마저 완성되면, 티라노사우루스는 비로소 백악기 말에 군림했던 아주 강력한 육식공룡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15 미터나되는 커다란 몸체를 지녔다던 그 공룡의 이빨은 얼마 만했을까를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았다. 한 팔뚝만큼은 될까? 그 여자는 18 센티미터 짜리 파란 형광 색종이 두 장으로 접어, 두 동강이로 나뉘어져 접힌 티라노사우루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빨 세 개가 만족스럽게 뾰족하다. 주둥이를 입 안으로 접어 넣자 이빨은 더욱 날카로와 보이기 시작했다. 갈리미무스같은 작은 공룡 따위는 한 입에 넣어 우물거리면 그대로 뼈가 으스러져버렸을 것이다. 길다란 꼬리와 긴 다리를 지닌 뒷 몸의 다리 사이로 앞 몸체를 집어넣자 총 쉰 일곱 가지의 긴 공정을 거쳐 드디어 한 마리의 육식공룡은 완성되었다.

색종이로 접은 공룡을 처음 본 것은 동네 상가에서였다. 오래된 재래 시장 한 가운데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한 현대식 상가였지만 어쩐지 그것은 처음부터 버려진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정확한 경제 예상 지표였지도 모른다고 그 여자는 생각해보았다. 층마다 권장 품목을 정해 분양한다며, 백화점처럼 화려하고 편리한 쇼핑 명소가 될 것이라는 애초의 광고 문구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상가는 다 차지도 않았다. 그저 주부 혼자서 간단하고 깨끗하다고 유아복 대리점을 시작했던 아줌마도 관리비도 못 낼 지경이라며 한참 동안 세일을 한 뒤 그만 두었다. 그 자리를 금방 다시 채우면 덜 을씨년스러울 터인데 빈 진열장과 옷걸이만을 남겨둔 채 늘 비어 있었다. 일 층조차 빠진 이빨처럼 서너 군데가 비어 있었는데, 이 층으로 올라가면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마치 화려하고 거대한 왕사를 끝내자마자 그대로 몰락해버린 어떤 왕조의 이끼 낀 궁전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신문 사이에 그 상가 지하 수퍼에서 세일을 한다는 전단이 끼어있었다. 그 가운데 두루마리 휴지 한 묶음이 딴 데보다 한 오백 원 쯤 쌌다. 그래서 세포의 활기가 죽어버린 것같이 기운없는 몸을 일으켜 정말 모처럼 그 지하 수퍼를 찾아 나섰던 길이었다. 한참 제멋대로 걸음을 옮기는데 재미를 붙인 작은 아이가 작동이 멈춰 있는 에스컬레이터에 다가서더니 기어가는 듯한 걸음으로 이 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 한참 점심 시간 정도에서 어차피 서둘러야 할 일도 없었다. 집은 늘 똑같은 분위기에 똑같은 장난감뿐이어서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었는데 좋은 놀이터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큰 아이는 여름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힘이 넘치기 시작해서 계단같은 곳도 얌전히 올라 다니는 법이 없었다. 솟아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하겠는지 온 몸을 흔들어대며 막 지그재그로 달리기를 하듯 뛰어올랐다. 저만치 올라가는 아이들은 그 여자가 우울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기운 없이 지내는 동안에도 제법 많이 자라 있어 대견했다.

이러다 갑자기 작동을 다시 시작해 걸어 오르던 에스컬레이터가 밑으로 주르르 내려가지 않을까. 이런 의구심으로 작은 아이 옆에 딱 붙어 저절로 긴장했지만 그런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앞과 오른 쪽에 있는 재활용 가구점은 필요 이상, 썰렁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넓직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혹 골동품 수준의 좋은 가구를 거의 헐값에 살 수 있을까 하는 환상을 잠시 품어보았다. 하지만 너무 낡았거나, 촌스럽게 구형이거나, 애초에 싸구려로 조잡하게 만들어졌거나, 하는 한계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들 뿐이었다. 이런 가구를 따라 돌면 앞쪽 왼편엔 재활용 가전제품 가게와 오른쪽인 상가의 가운데 쯤엔 컴퓨터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아까 상가 입구에서, 2 층 재활용품 상가, 가전 제품, 컴퓨터, 가구라고 2 절지 쯤 되는 모조지에 매직으로 적어 붙인 것을 본 기억이 있는 것도 같았다.

뜰쑥날쑥한 크기의 냉장고가 뒤쪽에 두 줄로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세탁기가 한 줄로 나란히 서있었다. 열심히 닦아 놓았는지 헌 것 치고는 반짝거렸지만 군데군데 조금씩 찌그러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디자인과 성능이 칠 팔 년은 더 지나보이는 물건들이었다. 그 옆으로는 장식대에 가스레인지가 삼 단으로 모여 있었다. 가전 제품 가게 중년의 주인은 배달된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비볐고 컴퓨터 가게의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모를 젊은 남자는 길다란 책상 위에 컴퓨터를 드라이버로 분해해 나란히 늘어 놓고 있었다. 인쇄회로기판 위로 솟아오른 전자 칩들이 마치 수학 여행에서 봤던 거대 규모의 중화학 공업 단지를 연상시켰다. 아이들은 맘에 드는 놀이터를 발견한 것처럼 큰 아이는 와아, 하는 소리를 질러대며 계속 지그재그로 뛰어다녔고 작은 아이는 작은 아이대로 깔깔거리며 아장아장 뛰었다. 다행히 면적이 넓어서인지 방음 장치가 되어서인지 아이들의 소리가 울리지 않고 잠겨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컴퓨터 가게 저쪽에서야 이 층에 올라온 뒤 처음으로 손님 둘을 발견했다. 방학을 맞은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진열장 위에 나란히 진열해 놓은 구형 컴퓨터들 가운데 새 것처럼 깨끗해 보이는 컴퓨터를 이리저리 조작해보고 있었다. 그래도 재활용 매장이니 아마 누가 잠시 사용했겠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작은 이름표에는 Pentium II 프로세서, 330MHz, 64MB, 4.0GB, AGP2x(8MB), 3D Soung, 56K, 32배속, 17",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 컴맹에 가까운 그 여자에게는 무슨 암호처럼 읽혔다. 맨 끝에 붙은 백팔십만 원 쯤의 가격만이 현실로 느껴질 뿐이었다. 이제 한참 사춘기를 맞았을 아이들은 그 컴퓨터가 마음에 꼭 드는 모양이었다. 아마 오래 전부터 거기 서 있었고 앞으로도 한참을 그곁을 못 떠날 것처럼 푹 빠져 있는 듯한 얼굴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가격의 유효 수요는 어쩐지 못돼 보였다.

아이들은 컴퓨터 매장의 왼쪽으로 꺽어 뛰어가고 있었다. 오른 쪽에는 몇 세트의 싱크대가 원목색과 빨강, 초록, 아이보리, 이런 색색으로 놓여 있었다. 그것은 개수대 옆과 위 턱에 모조 대리석까지 박힌 새 것이었지만 주인도 없이 한 쪽에 방치된 것처럼 세워져 먼지가 뾰얗게 앉아 있었다. 뭐 사람이 앉을 쇼파나 책상같은 것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싱크대 매장 주인은 아예 나오지 않고 물건만 그냥 쌓아 놓은 모양이었다.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가구점 주인이 나서서 팔거나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거짓말처럼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어서야 그것도 어째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싱크대들은 화려한 옷이 입혀진 채 길거리에 버려진 미아같은 느낌을 일으켰다.

어느 순간 그 여자는 이 상가 분위기가 자신의 내면처럼 황량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이 회식을 마치고 좀 늦게 들어온 며칠 전이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남편과 딱 마주쳤는데도 정말 아무 느낌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하얀 백지 한 장이 드리워져 있는 것같았다. 한때 그가 도맡아 과 수석을 하던 수재였다는 것을 애써 기억해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느낌조차 백지처럼 아무것도 없다는데 그 여자는 절망하였다. 하다 못 해 남편이 한참 사춘기 때 아버지라는 그늘을 잃고 어렵게 컸다는 것을 떠올려 보아도 그랬다. 출세해서 고생한 어머니에게 효도도 해야 하고 여동생들에게도 아버지처럼 기둥이 되고 싶어 하는, 그에게 드리워져 있는 엄청난 채무 의식을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우리 가족에게 끼친 경제적 손실로 인한 절망적인 현실을 떠올려봐도 그랬다. 내가 아니라 한때 남편을 좋아했던, 부유한 집 딸이었고 이재에도 밝아 잘 살고 있다는 그애와 결혼했다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머물었다. 그제서야 겨우 맞아, 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기계가 사물을 01로 혹은 ONOFF로 파악하는 것처럼 아주 단세포적인 느낌만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에게 그 여자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절실하게 물었다. 당신 나 사랑해? 남편은 자신의 느낌보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끌려 그래,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그 여자에게 어떤 울림이 되지 못했다. 감기에 걸려 코가 막혔을 때 물맛과 커피 맛을 구별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코가 아니라 마음에 병이 든 모양이었다. 마음속에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은 모두 고갈돼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여자는 미치도록 절망스러워졌다. 이 머릿속에 든 백지는 언제나 걷힐 것인가? 누군가 결혼은 3, 6, 10년을 주기로 위기를 맞는다고 했는데 결혼한 지 만 6년이 막 지나가고 있었을 때였다.

그 여자는 버려진 왕궁과 같이 쓸쓸한 주변을 무심코 둘러보았다. 저만치서 아이들은 컴퓨터 매장을 따라 벌써 두 바퀴나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구를 의자로 막아 놓은 곳에 멈춰 섰다. 감춰진 다락방처럼 한쪽 끝에 조명도 없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머뭇거림도 없이 작은 아이는 의자 밑으로 빠져 들어갔고 큰 아이는 의자의 등받이를 돌려서 넘어갔다. 이리 나오지 못해. 사내아이만 둘을 키우다보니 자연히 거칠어진 어투가 자신의 귀에조차 낯설게 들려왔다. ? 큰아이는 요즘 들어 이렇게 이유를 묻는 횟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싫어. 작은 아이는 이렇게 대꾸했다. 엄마, 맘마, 우유, 아빠, 그리고 싫어 그 여자는 머릿속으로 작은 아이가 말할 수 있는 단어를 헤아려보았다. 큰아이를 말로 설득시키는 데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지치도록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소모되어갔고 작은 아이는 아직 그렇게 해볼 만큼 자라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한 대 맞아 볼래, 같은 거친 반응을 나타내 볼 터였다. 그런데 그 여자의 머릿속에는 다시 하얀 백지 한 장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절망스러워졌다. 차라리 조금 전에 황량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더 나아, 라는 외침이 저절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입구에 커다란 토기 재질로 된 커다란 화병이 양쪽으로 있었다. 한쪽에는 종이로 접은 반짝이는 연분홍색 장미꽃이 꽂혀져 있었고 다른 쪽엔 남보라색 창포꽃이 꽂혀 있었다. 상가 전체의 조명이 밝아지면 금방 생화와 같은 생명력이 솟아오를 것처럼 정성껏 능숙한 솜씨로 만들어진 꽃들이었다. 아치 모양으로 뚫린 나무로 된 출입구 위에 작은 연등 같기도 하고 색색의 모빌같기도 한 것이 세 개 걸려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실내에는 커다란 탁자가 있었고 벽에는 양쪽으로 진열장이 있었고 그 위에 크고 작은 액자와 바구니, 가방, 인형같은 종이로 접어 만든 것들이 색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문득 출입구 오른 쪽에 작게 붙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종이접기 교실 물, , , , , . 개인 지도를 해드린다며 핸드폰 번호가 백지에 컴퓨터 글씨로 찍혀 간판 밑에 붙어 있었다. 동화 속에는 과자로 만든 집이 있듯이 벽이나 기둥, 지붕, 바닥까지 색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작은 액자 속에는 가득 쌓인 낙엽 더미 위에서 도토리와 밤을 까먹는 한 쌍의 다람쥐가 있었다. 액자 속의 낙엽 하나하나는 손톱보다도 작았다. 거기다 잎맥까지 자잘한 주름으로 나란히 접어 표현되어 있었다. 다람쥐 하나도 손가락 하나 크기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질식할 것 같은 섬세함이었다. 그런 종류는 그 여자의 성격하고는 맞지 않아서 지금 생각하면 색깔이며 크기, 위치까지 꼼꼼히 신경 써 장식된 그곳이 그다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었다.

커다란 액자에는 코발트색 바다와 분홍색 산호와 초록색 해초와 색색의 물고기 떼와 한 마리 갈색 해마가 살고 있었다. 그 옆의 액자에는 청회색 하늘 끝에 버드나무 잎만이 상징처럼 드리워져 있고 남보라색 제비가 회색 빌딩과 가로수 위를 날아 세 명의 가족이 남아 있는 둥지로 먹이를 물고 가는 모양이었다. 둥지에서 기다리는 세 마리 제비는 입을 짝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남보라색 제비가 남편같이 느껴졌고 둥지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가족은 아이들과 바로 자신 같다고 여겨졌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제비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고도 느껴졌다. 새의 둥지보다 더 견고한 집을 갖기 위해서 낱알 같은 먹거리보다 더 맛있는 먹걸이를 위해서 거기다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철철이 바꿔 입어야만 하는 모양이 각각 다른 옷을 위해서 남보라색 제비를 닮은 남편은 한시도 제대로 날개를 접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유리 진열장의 아래쪽에는 커다란 스티로폴 상자가 있었고 그 위에 어떻게 종이로 접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만큼 정교한 동물같아 보이는 것들이 서 있었다.

어머 이건 공룡이잖아.

이런 외침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그 여자는 느꼈다. 상자는 황토와 모래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어느 곳에는 주먹만 한 바윗돌이 흙 속에 밑둥을 묻고 바위산으로 솟아 있었다. 그 옆에 먹이를 찾아 길을 나선 것같은 느낌이 드는 한 마리 티라노사우루스가 뾰쪽한 이를 드러낸 채 서 있었다. 한쪽에는 역시 종이로 접은 나무들이 숲처럼 푸르게 솟아 있었고 아파도사우루스와 테코돈토사우루스가 다정한 이웃처럼 마주보고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쪽에는 날렵한 디노니쿠스 두 마리가 달리기나 사냥을 누가 빨리 하나같은 내기라도 할 것처럼 나란히 앞 다리를 들고 서 있었다. 한 마리 프테라노돈은 날개를 접고 한쪽에서 휴식에 빠져든 상태였고 한 마리 트리케라톱스는 모래 한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방랑자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이빨 하나 발 하나 뿔 하나, 벼슬 하나까지 이렇게 정성껏 접었을까. 화석이라는 실체가 남아 있는 줄은 알지만 공룡들은 왠지 상상의 동물처럼만 느껴왔었다. 그런데 종이접기 작품 하나로 갑자기 강아지나 고양이, 병아리, 사슴이나 원숭이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의아했다.

그 여자는 무엇에 씌운 것처럼 간판 옆에 붙은 핸드폰 번호를 외웠다. 그리고 일 층 현관문 옆 공중전화를 찾아 다이얼을 꼭꼭 누르게 되었다. 잠시 후 내일이 바로 강습날이니 한번 나와보라고 자기 집을 찾기 쉽게 일러주는 낮고 교양있는 중년 여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여자는 다음 날 오후 두 시에 맞춰 강습에 가려고 아이들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이웃에 미리 해두었고 빨래며 반찬 같은 일도 서둘러 했었다. 모처럼 그 여자는 온몸의 죽어 있던 세포들이 살아나는 것같은 활기를 느꼈었다. 하지만 그날 밤 갑자기 열이 솟고 기침을 시작한 작은 아이 때문에 결국 강습을 포기하고 말았다.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 강습에 가지 못했을 거라고 그 여자는 생각해보았다. 내 형편에 무슨 종이접기는 뭐며 공룡은 또 뭔가.

그 여자는 한 번도 손에 만져보지도 못한 채 날려버린 돈들을 떠올렸다. 하다 못해 밍크코트라던가 고급 승용차, 가구라던가 하는 종류의 물건이라도 남아 있다면 상황을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해외여행이라거나 고급 식당이거나 하는 기억이라도 남아 있으면 덜 절망스러울 것이라고도 늘 생각했었다. 누구 손으로 옮겨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빚이라는 실체만이 너무 생생한 남편의 좌절된 꿈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날 증권회사 이름으로 된 독촉장 한 장으로 날아들었다. 하루종일 아파트 기둥이 내려앉고 바닥이 꺼지는, 그래서 그동안 가꾸어온 삶이 모두 그 안에 갖히는 환상에 그 여자는 시달려야 했다. 이게 뭐에요.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에게 독촉장을 내밀며 비명처럼 소리를 냈다. 온 집안은 불길한 환상에 눌려 꼼짝도 못 했던 하루를 고스란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싱크대에는 음식 찌꺼기가 그대로 붙어 있는 그릇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림책, 블록, 크레파스, 퍼즐 조각은 손대기 끔찍할 만큼 마구 뒤엉켜 흩어져 온 집안에 나뒹굴고 있었다.

남편의 대답은 거의 담담해서 온종일 그 여자가 느꼈던 불안감이 오히려 허구 같았다. 이보다 더 주식 가격이 내려갈 수는 없다고 나름대로 증권 시장을 파악한 남편은 신용 거래로 주식을 샀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닥을 모르고 계속 주가는 추락했고 결국 독촉장을 받는 현실에 이르르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삼천만 원을 날렸다고 해도 다만 몇 푼이라도 떡고물처럼 남은 돈이 있을 거 아냐. 그 여자는 갑작스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무척 힘들어 하며 남편에게 추궁했다. 하다 못 해 퇴출이 되거나 부도가 났다고 해도 휴지 조각 같은 증서라도 남아야 되는 거 아냐. 남편은 계속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미안하니까 오히려 더 그런 표정밖에는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우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분양받은 데도 적지 않은 대출을 이미 받아 원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물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다 한 번도 실체를 느껴보지 못한 채 꼬박꼬박 이자까지 내야 한다면 그 원금은 또 어떻게 갚어야 할지 막막한 형편이 되었다. 어쩌면 이자만 물다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만조의 바닷물처럼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차라리 아파트라도 팔아 모두 청산해버리고 새 출발을 시작한다면 마음이 더 가벼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완전 헐값이 아닌 다음에야 집이 팔리리라고 기대하기 힘든 요즘이었다. 그 여자는 보이는 벽마다 모두 차용 증서, 독촉장, 마이너스 통장, 크레디트카드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듯한 환상에 가위 눌려 잠시 쇼파에 누웠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앉고는 했다. 그러면서 이미 잃어버린 돈보다도 더 빨리, 더 많이 가난해져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때 남편을 나날이 새로운 그리움으로 떠올리며 껌을 싼 은박지를 모아 천 마리의 학을 접은 일이 있었다.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나에게 들려주며 울먹이던 너. 못다 했던 우리들의 사랑이...... . 이런 노래의 유행 때문인지 한때 왜색이라는 말이 있기도 했지만 학을 접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띄였다.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세월은 빨리 흘러가 아이들은 쑥쑥 자랄 것이고, 천 마리의 학을 접어 이루고자 했던 사랑은 이미 화석같이 되어버렸고, 남편과 나는 빨리 늙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 여자의 뇌리를 아프게 스쳐 지나갔다.

개인 지도를 받는 대신 그 여자는 천 마리나 학을 접었던 기억을 되살려 혼자 기호를 익혀갔고 점점 빠른 손놀림을 갖게 되었다. 주로 색종이 사이에 끼어있는 종이접기 방법을 따라 앵무새와 연필, 열대어, 나팔꽃을 접으며 그 여자는 혼자 기호를 익혀갔고 점점 빠른 손놀림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번호 순서로 나열된 접기 방법의 번호와 번호 사이에 수없이 많은 기하학적 상상력이 숨어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종이를 접어갈수록 제법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점의 한 쪽 끝에서 '공룡 종이접기' 책을 드디어 발견하였다.

과실주를 담았던 커다란 유리병에 티라노사우루스를 집어넣었다. 색색의 공룡이 여러 가지 종류로 스무 마리가 모여 있었다. 그것 말고도 그 여자는 그동안 꽤 많은 공룡들을 접었다. 하지만 마치 '디노 바스터'와 같은 두 아이의 손에 구겨지고 밟히고 찢겨지고 물에 빠트려지고 십 층인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하는 수난을 계속 당한 채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 여자는 잠 안오는 밤에만 아무도 모르게 식탁에 앉아 한 마리씩 공룡을 접어 유리병에 넣고 장식장의 맨 위에 올려 놓고는 했다. 천 마리의 종이학이 사랑을 기원하는 의미라면 만약 공룡을 천 마리나 접는다면 무슨 의미가 될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그 여자는 프테라노돈의 날개를 반으로 접어 완성했다. 팔천 만 년 전에 요즘의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던 익룡이었다. 날개와 같은 살색 색종이를 찾아 이번에는 몸통을 접기 시작했다. 우선 색종이를 삼각으로 반을 접었다 펴고 그 선에 맞춰 양 쪽을 모아 접고 그래서 생긴 선의 끝과 끝을 선으로하여 안 쪽으로 접고...... . 책 속의 기호를 하나 하나씩 따라 접으면 어쩐지 8 미터나 되는 커다란 새에 8천만 년 전이라는 엄청난 시간의 부피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룡들은 모두 멸종했다고는 하나 현존하는 새와의 연관성에 대한 느낌도 떠올려졌고 비행기 모양의 근원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창밖의 불빛이 듬성듬성해짐에 따라 눈 아래 펼쳐진 아파트 단지는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남편은 저 하늘 어딘가를 날아 유럽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시간선을 넘어 계속 서쪽으로 날아간다면 비행기 밖의 낮과 밤은 어떻게 변할까? 제주도까지 밖에 비행기를 못 타본 그 여자로서는 전혀 짐작이 안 되는 부분이었다.

공룡은 인류가 탄생하기 전인 중생대의 트리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에 지구에 살았다 멸종된 동물의 총칭으로 쓰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일억 오천만 년 후쯤 이 땅에 살아갈 인류이거나 이티이거나 에이리언들은 인간까지 코끼리, 독수리, 고래 같은 다른 동물들과 함께 어우러 공룡이나 다른 이름으로 묶어 부를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책에는 공룡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냉혈동물인 파충류가 아니라 온혈 동물이라고도 적혀 있었다. 땅에 몸을 붙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몸이 떨어져 걷는다는 사실이 그 근거라고 했다.

프테라노돈이 팔 미터의 날개로 하늘을 나르면 하늘에 해를 너끈히 가리고도 남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익룡이 날아오르면 세상은 갑자기 잔뜩 구름에 덮힌 것처럼 어두웠졌을 것이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붕()의 등때기는 몇 천리나 된다고 했다. 날개 길이가 8 미터인 프테라노돈은 이 붕에 비하면 오히려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크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쩌면 중국 전국시대 이전의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프테라노돈의 화석을 발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쳐 점점 과장되어 붕으로까지 부풀려졌다고 그 여자는 상상해보았다. 그러다 장자라는 사상가에게 전해져 하나의 사상 체계가 되었다는 상상도 가능할까? 이 상상대로라면 백악기 후기에 등장한 공룡으로 이가 없는 부리와 커다란 뼈의 벼슬을 지녔다는 이 새가 바로 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젯밤 모처럼 그 여자는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했다. 정말 오랫 만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몸의 감각들이 꿈틀거리고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서 되살아난 감각들이 그의 손길이 다가오기를 앞다투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껴두며 곶감을 하나씩 빼먹으려는 듯 영 느릿느릿한 손길로 계속 감질만을 일으켰을 뿐이다. 위에서 누르는 그의 무게만이 갈수록 무척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솟아오르는 것 같던 몸의 감각들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갑갑해. 빨리 끝내. 참지 못하고 그 여자는 소리 질러 버렸다. 한 달 예정의 긴 출장을 앞두고 남편은 서로에게 기억에 남을 만큼 즐거운 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필요 이상, 능력 이상으로 변강쇠처럼 힘을 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경우 오히려 이상하게 관계와 느낌이 겉돌고는 했던 일을 남편은 그새 잊어먹었나 보다. 섹스뿐만 아니라 돈 문제의 경우에도 그랬다. 그 여자는 그런 문제로는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는 결심을 하고 애초에 그를 선택했었다. 그렇게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주식투자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라고 남편은 변명처럼 말했었다.

그 여자는 병 속에 든 청록색 아파토사우루스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 22미터나 되는 커다란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본능처럼 먹고 또 먹어야만 했을 것이다. 목뼈가 아주 가벼워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는 긴 목을 이용하여 우둠지에 붙은 나뭇잎이며 상하 전후좌우의 모든 나뭇잎을 훑듯이 모조리 먹어 치웠을 것이다. 그래서 한 무리의 이 거대한 초식 공룡 떼가 지나가고 나면 메뚜기 떼가 파란 하늘을 노랗게 바꾸며 몰려들었다가 지나가버린 논처럼 숲은 삽시간에 삭막하게 색을 바꾸지 않았을까? 목이 길고 꼬리가 긴 이 공룡은 어쩐지 마음씨가 참 순해보였다. 한 쌍의 아파토사우루스가 구름을 위로 얼굴을 내밀고 서로의 입을 찾아 긴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천둥공룡이라는데 천둥같은 소리를 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혹시 그들은 짝짓기의 절정에 천둥같은 신음 소리를 냈을까? 오르가슴의 흐느낌 뒤에 한 쌍의 거대한 공룡은 어떤 우주적인 느낌을 공감했을까? 그 여자는 가만히 한숨을 지어보았다.

 

이번에는 아까 접은 파란 형광색 티라노사우루스를 왼손 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른 쪽 손에는 청록색 아파토사우루스를 다시 집어 들었다. 원래 길이는 아파토사우루스가 티라노사우루스보다 세 곱이나 길었다. 그런데 종이로 접힌 공룡은 티라노사우루스가 오히려 더 커 보였다. 아파토사우루스는 한 장의 색종이로 머리부터 꼬리까지 접어야 하고 티라노사우루스는 색종이 두 장으로 몸 뒤쪽과 앞쪽으로 나누어 접는 방법으로 책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체의 구조도 아파토사우루스가 훨씬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파토사우루스는 30센티미터짜리 제일 큰 색종이 접었는데도 18센티미터짜리 색종이 두 장으로 접은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더 작게 접혀지게 되어 있었다.

공룡은 척추동물의 진화 단계에서 출현한 인간 다음에 가장 성공적인 동물이다. 이렇게 말하는 학자가 있었다. 공룡은 중생대의 가장 진보된 육지 생물체로서 코끼리, 호랑이, 타조 등과 같은 포유류와 조류 등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생태적 위치를 그 당시 차지하고 있었다. 공룡은 효과적이고 빠른 운동을 위해서 다리가 몸통 아래로 이동하였지만 거북이는 공룡의 아주 먼 조상이 가지고 있던 기는 듯한 걸음걸이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이 정상 조건이었다면 발달 정도가 뒤진 거북은 사라졌어야 할 운명이다. 그러나 대격변이 일어나는 조건에서의 생물체의 운명은 비전문가의 손에 의해서 제멋대로 결정되었다. 즉 덜 진화된 상태의 악어와 거북이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생존하고 있는데 진보된 상태의 공룡들이 소멸되었다. 공룡에 관한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학 시절, 과 대항 농구대회를 마친 남편은 땀에 젖은 헐렁한 티셔츠에서도 단단한 역삼각형의 가슴 근육이 느껴지는 그런 남자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잠시 농구 선수로 뛰었다는 그는 혼자만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시합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지능과 행동이 느린 사람들 속에서 그는 홀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처럼 바스켓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는 프로 농구가 아직 없을 때 이미 교내 농구 스타였으며 섹시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전에 이미 섹시했고 터프란 말이 생겨나기 전에도 터프했었다. 같은 과의 몇명 안 되는 여학생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졸업 무렵에 가서 그의 경제적 어려움과 홀어머니의 외아들이라는 것과 올망졸망한 여동생들까지 있다는 조건들이 부각되며 그에 대한 흠모는 줄줄이 막을 내렸다. 그 여자만이 그런 친구들의 세속적인 풍조를 경멸하며 가장 나중까지 그를 슬프게 사랑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남편은 조심스런 말투로 나 사업 좀해보면 안될까라고, 말문을 열고 있었다. 우리한테 자본이 어딨어, 그 여자는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무기력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오히려 더 많이 화가 났다. 돈은 필요 없다고 말하며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이름을 말했다. 자본금은 그쪽에서 다 대는데 엔지니어 출신이라 경영 감각은 없고 연구만 하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경영과 판매만 맡아 하면 되는 월급 사장이라고 했다. 무슨 무슨 전자 부품을 생산하게 되는데 전망이 아주 밝다는 이야기였다. 결혼 전 몇 년 동안 직장을 다녔지만 이미 오래된 일이라 그 여자는 남편의 전망이라는 것에 제대로 동감하거나 비난할 수조차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이성과 논리가 자리했던 자신의 두뇌에 그저 동물적이고 미신적인 불안감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여자는 남편의 퇴직금과 대출금을 머릿속으로 어림잡아 보았다. 남편의 퇴직금으로는 대출금도 다 못 매울 정도였다. 작은 아이도 곧 유치원에 보내야겠고 큰아이는 요즘 들어 날마다 피아노를 사달라 졸라대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관절염을 앓는 몸으로 직장에 다니는 시누이의 아이들을 거두며 살림을 맡아 하고 있었다. 도무지 조금이라도 모험이나 일탈이 끼어들 수 없는 현실이었다. 모두가 선망했던 수재의 삶이 고작 이렇게 답답한 현실이었다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삶의 가능성 모두는 다달이 받아오는 월급 봉투 속에만 머물고 천 마리 학을 접어 이루고자 했던 사랑의 정체가 고작 그 월급 봉투나 챙기는 일이었을까? 그 여자는 남편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낮게 한숨지었다.

당신이 하고 싶으면 해봐. 자본금 문제가 아니라면 반대할 명분을 내세우기도 힘들었다. 나도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라고 말하면서 남편은 뭔가 이야기를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근데 말야 원래 대기업 임원만 해도 약간의 회사 지분을 갖고 있거든. 경영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지 뭐 비율로는 의미가 없어. 그 여자는 남편의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문득 감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주식 투자로 돈을 날린 지 채 한 달도 안 됐는데 돈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 친구가 한 삼억을 투자해야 하거든. 나더러는 한 삼천만 내라는 거야. 월급쟁이 십 년 했어도 무슨 돈이 있겠냐며. 결국 남편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처음부터 이 이야기였을 것이다.

당신 왜 자꾸 나를 나쁘게 만드는 거야. 당신한텐 삼천만 원이 그렇게 우스워.

그 여자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천 마리 학에 담아 접었던 많은 기원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백악기 후기의 공룡들 가운데 흥미를 끄는 것은 최근에 발견된 지능이 높고, 큰 눈을 가지고 있는 타조를 닮은 공룡과, 움켜쥘 수 있도록 엄지발가락이 배열된 앞다리와 조화를 이루는 입체적인 시력을 가지고 있는 데이노니처스와 사우로니토이데스(Sauronithoides) 등이다. 이 공룡들은 지금까지 어떤 육지의 생물체보다 행동 능력이 앞서 있었고, 인간과 소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공룡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즉 뇌의 크기 차이가 확실히 다르다. 만약 이런 공룡들이 살아남았다면 신생대 제3기의 시작과 함께 폭발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표유동물이 번성한 시기에도 그들이 살아남았다면 세련된 '새를 닮은' 생물체들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을 것이라고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멋지고, 민첩하며, 새를 닮은 공룡들이 신생대까지 한 종류도 살아남아서 번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소멸 현상이 지구 전체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소멸을 일으킨 현상은 지능이 높거나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공룡에 똑같이 작용한 것이다.

그 여자는 이런 공룡에 관한 책 구절을 읽으며 왠지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은 남편을 떠올리게 되었다. 공룡들이 중생대 이 땅의 주인이었던 것처럼 당연히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었다. 남편처럼 수재까지는 아니었어도 그 여자 또한 많은 꿈과 가능성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10층인 아파트 밑으로 불빛이 하나둘 씩 꺼지고 창 밖은 점점 어둠에 잠겨갔다. 온 몸의 근육이 무겁게 느껴져왔지만 그 여자에게는 잠드는 일이 불쑥 너무 범속하다는 느낌으로 떠올려지고 있었다. 남편은 끝내 사업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요즘 같은 구조 조정의 상황에서 자기 자리를 그냥 지키고 있는 것도 힘겨운 판국인데 연수의 성격이 강한 출장을 한 달이나 보내는 일은 회사로서는 보통 투자가 아니라고 했다. 사업을 시작하려면 출장은 포기해야 한다고 남편은 은근히 다시 이야기를 꺼냈고 그 여자는 애써 그걸 못 들은 척 흘려보냈다.

이제 그 여자는 온기가 모두 날아가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스테고사우루스를 접기 시작했다. 15천만 년 전, 9미터, 등에 있는 두 줄의 뼈를 이용하여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했습니다, 라고 책 위에 적혀 있었다. 종이 접기 책의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공룡으로 모두 6 종류를 창작했다고 직접 머릿글에 밝히고 있었다. 등에 있는 뼈의 모양이 아름다운 데다 커튼처럼 부드러운 주름이 잡히는 꼬리가 다른 공룡들보다 더 조형적인 느낌을 준다고 그 여자는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고 그 여자도 거기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그냥 유럽 출장이라는 당근을 받아먹으며 서로에게 위험인지 기회인지 알 수 없는 하나의 선택을 그냥 통과해버렸을 뿐이었다. 아직도 솜이불처럼 사각거린다는 유행가의 표현을 닮은 그의 단단하고 부드러운 가슴을 쓸어주며 그 여자는 남편을 위로해야 했다.

내년에는 작은 애를 놀이방에 맡기는 거야. 큰 애는 종일반에 다니게 하지 뭐. 나 생활 설계사 하면 잘할 것같아. 이젠 뭐든지 잘 할 수 있어. 오히려 나같이 여리게 생긴 사람이 더 잘한다더라구. 윗층 아줌마는 남편보다도 돈을 훨씬 잘 번대. 나보고도 한 번 해보라구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살아. 지금 이렇게 살림만 하고 살지만 나도 명문대 출신이잖아.

이런 말이 스스로에게도 위로가 안 되고 희망이 못된 채 서글픔으로 되울려오는 데 남편에게 위로가, 희망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공허한 말을 하고 났을 때의 쓸쓸함만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을 뿐이었다. 밤의 어둠이 아마 무척 절망에 가득 차 있었을 남편의 표정을 가려줘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그 여자가 나중에 오각형의 등뼈로 솟아날 부분이지만 아직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스테고사우루스를 11번까지 접었을 때 어제와 다른 찬 기운이 팔에 와서 다았다. 마치 금을 긋듯 어제는 지겨웠던 무더위의 끝이었고 오늘은 낯설게 느껴지는 쌀쌀함의 시작이었다. 그 여자는 창문을 닫으면서 거의 어둠에 잠겨가는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온몸의 운동 신경들은 반응이 둔감하게 잠들기 시작해 스테고사우루스의 오각형 모양의 등뼈를 커튼처럼 주름이 잡히는 꼬리를 마저 접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찬 바람을 맞은 머릿 속은 오히려 더 맑게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유리병 속의 공룡들을 하나씩 들어올려 보았다. 양서류의 선조인 이크치오스테가, 고래와 비슷한 이크치오사우루스, 24미터나 되는 브라키오사우루스, 작은 머리와 긴 목을 가진 엘라스모사우루스, 목뼈가 가벼워서 긴 목을 잘 움직였던 아파토사우루스, 날카로운 뿔이 있고 코가 높은 모노크로니우스, 6개의 뿔이 달린 스티라코사우루스, 날카로운 이빨의 티라노사우루스, 난폭한 사냥꾼 디노니쿠스, 등에 있는 뼈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했던 스테고사우루스, 육식에서 초식으로 변한 최초의 공룡인 테코돈토사우루스, 8 미터의 커다란 날개를 지닌 프테라노돈, 그리고 코뿔소처럼 생긴 트리케라톱스, 이런 공룡들이 모두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멸종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허구처럼 느껴졌다. 코와 양쪽 눈 위에 궨아 있는 트리케라톱스의 뿔들을 그 여자는 마치 지금 이 땅에 살아 있는 한 마리의 코뿔소처럼 생생하게 떠올려 보았다. 처음에 봤을 때도 트리케라톱스는 외로운 방랑자 같은 모양으로 사막처럼 느껴지는 모래 위에 서 있었다. 실제로도 트리케라톱스는 가장 마지막까지 이 땅에 외롭게 살아 남았던 공룡이라고 책에 적혀 있었다.

트리케라톱스의 화석은 렌스 누충군의 하부에서는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상부 쪽인 제3기 지층으로 가면서 화석은 점점 줄어든다. 트리케라톱스 화석은 공룡의 소멸을 표시하면서 결국은 발견되지 않는다. 트리케라톱스는 가장 강인한 공룡이었다. 트리케라톱스의 가죽 같은 피부는 닥쳐오는 지구의 겨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지만 동시대에 존재했던 어느 공룡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있었기 때문에 백악기 말의 육지의 풍경에서 외로운 생물체로 존재하였다.

공룡은 두개골의 골화나 새끼 공룡들조차도 노쇠한 상태로 태어나거나 알껍질이 너무 얇아져서 제대로 골격을 만들지 못했거나 하는 멸종의 징후를 화석으로 남겼지만 정작 멸종의 원인은 여러 가지 가설만이 분분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소행성과 지구의 충돌이라는 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그 여자는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64백만 년이라는 인간의 역사 또는 선사에서도 아득히 먼 시간 속의 공룡이 어느 동굴 같은 곳에서 지금도 혼자 살고 있다는 상상을 떠올려보았다. 집단을 이루어 대대손손 새끼를 낳아 계속 번성하지 않는 한 홀로 숨어서 그 오랜 시간을 견딘다는 생명의 본질상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여자는 공룡의 완전한 멸종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어린 왕자가 공룡의 알을 주머니에 넣고 장미가 기다리는 작은 별로 돌아갔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공룡은 자신을 살려준 어린 왕자를 사랑하고 어린 왕자는 여전히 장미를 사랑하고 장미는 귀여운 새끼 공룡을 사랑한다. 새끼 공룡은 장미를 질투하고 장미 어린 왕자를 질투하고 어린 왕자는 새끼 공룡을 질투한다. 공룡은 날로 날로 켜져 어린 왕자는 하루 종일 공룡의 먹이를 구해야 했고 그러다가 별 전체가 공룡의 몸으로 가득차고, 장미는 겨우 공룡의 겨드랑이 사이에서 살며, 어린 왕자는 공룡의 몸둥이 위에 집을 지었다.

내가 왜 공룡의 소멸을 믿고 싶지 않아 할까? 그 여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사라진 것은 공룡만이 아니었다. , 사랑 그리고 희망이 쓰러진 폐허 위에 겨우 일상이라는 기우뚱한 집을 하나 지었을 뿐이다. 그 여자는 공룡의 절멸처럼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자신의 내면을 어두움 가운데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