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드와나
곤드와나
주정미
그는 해안의 자갈밭에 서 있었다. 낮게 드리워진 운무(雲霧) 속에서 수평선은 거무스름할 뿐 선명하지 않았다. 뿌연 수면 위로 연한 햇빛 몇 가닥만이 가물가물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푸스스 날리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작은 수첩을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바람에 종이 갈피가 넘어가면서 지난 날짜와 그 아래 몇 자 적어놓은 글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6월 14일 산티아고 도착. 6월 17일 푼타아레나스, 호텔 까보데오르노스…. 8월 28일 N기지로부터 ‘곤드와나호’ 잔해 발견 통보, 서북 해안 1.6마일 지점….
그가 도착한 곳은 남극만 부근 S기지였다. 체류 기간은 12개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한을 다 채우기도 전에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다. 어쩌면 그 불안한 조짐은 벌써 나타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박 하나가 좌초된 일이 있었다. 그것도 보통 배가 아니라 최신 시설과 연구 장비를 갖춘 탐사선이었다. 바다 밑의 유빙(遊氷)과 충돌하면서 선체가 부서지고 든든한 이중 갑판이 갈라졌다고 했다. 배의 옆구리가 길게 찢기는 바람에 칸칸이 물을 가두도록 되어 있는 방수 장치마저 소용이 없었다고 들었다. 최초의 대륙 이름을 따서 명명된 ‘곤드와나호(號)’는 그 대륙의 운명처럼 뿔뿔이 흩어져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모든 일들의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그는 이곳으로 선발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며 군대와 같은 단체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이 버거웠다. 그러나 결국 그의 차례가 돌아왔고 그는 아직 정식 연구원은 아니었으나 한 몫을 해야 했다. 연구센터의 부장은 이미 두 차례나 남극기지의 대장을 역임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고생물학이라면 극지에서 연구해봐야 되지 않느냐고 운을 뗐다. 하긴 고생물이라는 것에 매달린 덕택에 큰 어려움 없이 연구센터에 자리를 얻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장이 그렇게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 사정은 진작부터 좋지 않았다. 해안 저지대의 기지들이 하나 둘 폐쇄되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남극행을 기피하고 있었다. 부장은 예전에는 꽤 인기 있는 지역이었다고 늘어놓았지만 그럴수록 무슨 유배지처럼 느껴졌었다.
때아닌 폭풍이 들이치던 날, 그는 귀국 날짜를 두 달여 남겨두고 있었다. 바람이 어찌나 몰아치는지 땅 위의 모든 것들을 날려버릴 기세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눈발 때문에 1미터 앞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한겨울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지독한 날씨였다. 전화며 팩시밀리가 불통된 것도 그날이었다. 일시적으로 간혹 그런 경우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때처럼 통신을 중계하는 인공위성에 장애가 있든지 위성 주변의 대기 상태에 어떤 이상이 생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폭풍이 가라앉고 며칠이 지나도록 본국과의 연락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상치가 않았다. 대장은 계속 햄(HAM) 통신장비로 교신해볼 것을 명했다. 그런 강풍에 안테나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원 몇이 철탑에 기어올라가 여러 차례 안테나의 방향을 돌려놓았고, 통신담당은 출력을 올리고 주파수를 옮기며 전파를 타고 나타날 누군가를 끊임없이 불러댔다. 하지만 잡음만 일 뿐 교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뭐야, 햄도 되지 않는다고? 아직도 말인가?”
대장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심심치 않게 목소리를 내던 햄마저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모두가 불안감에 바짝 조이기 시작했다. 대장은 핏발선 눈으로 통신장비를 붙잡고 있던 대원을 노려보다가 다른 나라의 기지로 무전을 넣었다. 대답은 급박한 몇 마디뿐이었다.
“스트롱 타이들 웨이브, 베리 스트롱 원 (Strong tidal wave, very strong one).”
강력한 해일이 들이닥쳤다는 거였다. 도대체 어디에, 어느 나라에, 어느 대륙으로 해일이 덮쳤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숨죽이고 있던 대원들 역시 침통하게 그의 움직임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능한 일이야…. 바닷물이 50센티미터만 올라가도 거기에 강한 폭풍이나 만조가 겹치면 해일이 일어나지. 문제는 그 규모가 크다는 건데, 당장은 확인해볼 길도 없고…. 기상담당인 박과 몇 마디 주고받던 대장은 말을 맺지 못했다. 대략 10센티미터 안팎에 그치던 해수면 상승이 머지않아 50센티미터에 이르리라는 것은 일찍이 우려되던 바였다. 기온 상승으로 극지방의 얼음 녹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 아래 땅이 점점 더 드러났고, 토양이 검은빛을 띤 탓에 많은 태양 광선이 흡수되면서 빠르게 얼음이 녹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오래 전 남서쪽 빙벽이 일순간에 무너져버린 사건과 관계된 일이기도 했다. 한때 그곳엔 높이 수백 미터에 이르는 빙벽이 낭떠러지 형태로 해안에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그 무거운 얼음 기둥을 떠받치는 지반이라고 해야 해수면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어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고 했다. 마침내 그것이 무너져 내리자 그 일대의 해안선이 연속적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거기서 떨어져나간 숱한 얼음덩이들이 계속해서 바다 속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탐사선 ‘곤드와나’가 좌초된 것도 바로 그 얼음 때문이었다
교신이 두절된 후 보름이 지나도록 기지 사람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통신장비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상담당인 박의 실종사고였다. 전에도 그는 가끔 말없이 기지를 이탈해서 대장으로부터 핀잔을 들었고 그때마다 사진을 찍었다거나 바람 쏘였다거나 하는 핑계를 대곤 했다. 그런데 그즈음 그의 행동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제멋대로 뛰쳐나가 휑하니 바람을 안고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박이 보이지 않았을 때 또 그런 모양이라고 여겼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밟혔다. 부서지고 마모된 돌 조각들이 다시 파도에 쓸리고 있었다. 검거나 황토빛 자갈이었다. 멀리, 그는 자갈을 힘껏 던졌다. 돌 조각은 검푸른 수면 속으로, 그 거대한 아가리로 삼켜졌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막막한 발걸음을 돌리던 그가 흘낏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웅웅대는 소리가 밀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점차 빈 공간을 흔드는 듯한 울림을 남기고 지나갔다. 그는 소리의 방향을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산의 정상이나 내륙 쪽에서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또 해안의 빙벽이 무너지는 소리도 아닌 듯했다. 뭔지는 알 수 없어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주위에 소음이라곤 거의 없기 때문에 종종 어떤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청각이 예민한 편이어서 다른 이들에게 잘 들리지 않는 것도 감지하곤 했었다. 짧은 낮시간이 지나면 긴 밤이 이어졌고 까마귀 날개처럼 드문드문 허연 빛살이 비끼는 검은 하늘에 별은 얼음 조각인 양 차갑게 빛났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해서 별이 흐르고 빛이 움직여 가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었다. 그는 다시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육지가 아니라면 바다 쪽인가. 그렇다면 무엇일까. 혹시 바다 밑에 커다란 고래라도 와 있는 걸까. 언젠가 대원 몇이서 고무보트로 해안을 지날 때였다. 바닷물 위로 거무스름한 몸체가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접근하자 보트 크기의 서너 배나 될 듯한 머리가 다가왔고 그 주름지고 투박한 입에서 물줄기가 뿜어졌다. 향유고래 무리였다. 그들을 뒤로하고 돌아올 즈음 어떤 진동이, 낮고도 웅숭깊은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것은 어떤 진동음, 이를테면 무겁고 커다란 악기의 낮은 음색을 떠올리게 했고, 그 긴 여운 때문에 안개 낀 날 습한 대기 사이로 멀리 번지던 뱃고동 소리도 연상케 했었다.
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일단의 굉음과 함께 저 앞의 거무스름한 수평선이 크게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 율리아나라는 이름이 새어나왔다. 어떤 움직임이 발 밑을 훑고 지나갔고 그는 순간적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가 마음속에 붙잡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때 노를 젓듯 활을 저어가던 그녀의 몸 동작과 그에 따라 울려나오던 저음의 진동을 기억해냈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 발붙이고 있는 땅이, 눈앞의 공간이 서서히 배처럼 움직여가고 있다고. 그런 그에게 무언가 신기루처럼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미지의 나라, 드넓은 땅과 곳곳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과 짙은 빛으로 자라나는 나무들의 모습이었다.
멀리서 봉우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눈 사이로 솟아난 검은 바위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자락은 멀리 자갈밭이 끝나는 곳에 내려져 있었다. 그 경사면을 올라가면 계곡이 보일 것이다. 그 안쪽 어딘가에 울창한 숲이라도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깊은 계곡이었다. 나무나 숲이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누군가 있었다. 그녀였다.
전에 그는 그녀가 속해 있는 N기지의 대원과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외부와의 교신이 끊어진 바로 얼마 뒤였다. 그 대원은 얼음을 연구하러 온 여자 대원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불쑥 이런 소리를 했다. 그 커다란 악기를 어쩌자고 들여왔는지 알 수 없지만 요즘 들어 밤낮으로 거기에 매달려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 악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대원은 지나가듯 이런 말도 남겼다. 본국에 그녀의 가족이 있으며 여기에 발이 묶이고 나서는 본 기지보다 주로 은신처에서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봉우리까지는 자갈밭이 넓게 이어져 있었다. 눈 아래로 수많은 자갈들이 들어왔다. 그는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골짜기 안쪽에서 작은 은신처를 발견한 것도, 거기서 그녀를 처음 대면한 것도 다름 아닌 박 때문이었다. 박을 찾으러 나선 길에 그 또한 실종될 위기에 놓이지 않았던가.
작년 이맘때 여기로 떠나오던 일이 눈에 선했다. 그의 옆에는 박이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자다 깨다 하면서 두 사람은 간간이 말을 주고받았다. 박은 이젠 여름에 해수욕하기도 어렵게 됐다느니 죽은 바다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연일 방송에서 녹화테이프 돌리듯 내보내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기상 변동과 홍수, 가뭄에 관한 뉴스도 빠지지 않았다.
언젠가 몇몇 도시가 태풍과 해일로 침수되었을 때 그 속보가 연일 티브이 화면에 올라왔었다. 거기에 덧붙여 수십 년 전 태평양의 산호초 섬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언급되면서 그 도시들도 산호초 섬과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물에 잠기게 되리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내려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때 많은 곡식이 열리던 땅들이 누렇게 타들어가 사막처럼 변해버린 곳도 적지 않았다. 땅과 바다 모두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형편이었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그는 몇 날을 오가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켜야 했다. 비행기의 이륙이 자꾸 지연된 때문이었다. 지독한 연무(烟霧)로 인해 저녁이나 한낮이나 하늘은 내내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울외투처럼 두껍고 무거운 대기를 뚫고 날아오르기 전까지 일정은 불투명하기만 했었다. 그런 어려움 끝에 그들은 가까스로 중간경유지인 엘에이를 거쳐 산티아고에 닿았다. 그와 일행을 태운 소형 비행기가 바야흐로 남미 최남단을 향해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박은 이런 말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야, 지구 끝으로 간다니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말하자면, 세계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의 낙원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박은 남극이야말로 지상에 남아 있는 최후의 낙원이며 자신은 1년이 아니라 10년이라도 있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는 멍하니 박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더럽혀지지 않은 땅으로 가고 있다는 설렘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역사 이전의 낙원이라느니 10년이라도 있고 싶다느니 하는 말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박이 그보다 네 살 위였고 각자 맡은 분야가 달랐지만 연구소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이나 그 연배로 보나 서로 비슷한 처지였다. 하지만 그때 박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졌다. 박은 기상 연구를 할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지로 떠나는 순례자처럼 보였다.
일요일마다 기지 식당에서는 모임이 있었다. 종교집회였다. 박도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렇긴 했어도 종교라는 것에 매여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때로 무료함도 달랠 겸 박의 말에 귀기울이곤 했다. 그 중에는 바다 밑으로 사라진 나라에 관한 내용도 있었고 가이아며 우라노스 같은 신화 이야기도 있었다. 예전에 언뜻 들은 것도 같았지만 대부분 황당한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거인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신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었다. 그러나 박은 마치 사실인양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적어도 오래 전, 씨앗이 땅에 묻히고 싹틔우는 일이 처음 시작되던 때의 역사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박이 하도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는 트집도 잡지 못하고 묵묵히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면 박과 마주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평소의 생활은 지극히 규칙적이었다. 아침마다 기상과 식사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고 8시에는 연구동에서 미팅이 있었으며 그 뒤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주된 일은 연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다든지 탐사작업을 나간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자신의 분야가 아닐 경우에도 한 조를 이루어 여러 가지 일, 이를테면 지의류(地衣類)와 조류(藻類), 해변에 밀려온 고래의 뼈 혹은 특이한 물고기 같은 것들을 채취하거나 멀리 나가 빙벽, 암석 따위를 조사하는 작업을 거들곤 했다. 하루하루는 그렇게 지나갔고 그는 때때로 돌아갈 날짜를 꼽아보았다. 그럴 때면 무언가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그것은 간절히 솟아오르다가 출렁 엎질러질 듯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광경이, 머나먼 도시의 불빛과 그가 마주보고 있던 얼굴이 가만히 되살아났다.
그가 진아를 본 건 출발하기 일주일쯤 전이었다. 그는 전처럼 재즈클럽 아래 2층 커피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통유리 밖으로 거리 모습을 새삼스럽게 내다보았다. 6월인데도 한여름처럼 날이 무더웠다. 늦은 오후의 탁하고 번잡한 거리에는 행인들로 넘쳐났고 도로에는 오가는 차량들이 내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나간 일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대학가 근처의 카페였다. 만나기로 했던 친구 녀석이 나타나지 않던 차에 그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휴대폰 화면을 연방 들여다보는 것을 보니 그쪽도 사정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영화를 보았고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저녁식사 정도로 가볍게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티니 잔이 몇 번이나 채워지면서 그는 그녀에게서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말을 들었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그런 동안 둘 사이에는 어떤 공기의 흐름이, 한여름의 열기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윽고 커피숍 입구에 진아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손짓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긴 해가 넘어가면서 어둑해진 거리를 따라 불빛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에게 불만이 있다면 진아가 저녁에도 거의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느라 서너 번 6층의 클럽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키보드를 맡고 있는 그녀는 보통 피아노를 치지만 가끔씩 전자오르간이나 전자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겉옷을 의자에 걸치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 연주가 길어지는 걸 겨우 빠져 나왔다니까. 진아는 어깨가 뻐근한 듯 윗몸을 뒤로 젖히더니 그에게 새초롬한 눈초리를 던졌다. 그 동안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인지 그에 대한 책망인지 알 수 없었다. 연수며 출발 준비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지난번 함께 야외로 드라이브 간 후로는 짬짬이 전화로 통화하거나 메일을 주고받았을 뿐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돌아오면 두 달간의 휴가가 있으니 그녀와 지낼 시간도 많을 것 같았다. 가고 싶다는 곳으로 같이 여행도 가고, 그러면서 좀 더 신중하게 그녀를 대하리라 생각했다.
주문한 레몬티가 나왔다. 빨대로 레몬티를 넘기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너, 한 반년은 밤만 있고, 반년은 여름인 데 가보고 싶지 않니?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며 조명 아래 그림자 드리워진 눈매를 응시하다가 레몬티가 담긴 유리컵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다란 유리컵에는 투명한 얼음이 들어 있었다. 나, 남극엘 가. 한 일 년 동안…. 그들은 거리에 내려섰다. 밤바람에 하루의 후텁지근한 기운이 어디론가 떠밀려 가면서 푸른빛 도는 대기가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가로수 사이로 건너편의 네온사인이 점멸하는 것이 보였고 거리를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가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어둑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타래에서 민트향을 조금씩 풀어내고 있었다. 그는 검은 너울 속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밤이, 짙은 밤이 내렸다.
그는 밤 같은 적요함 속에서 문득 깨어났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여전히 땅과 바다, 한겨울이나 다름없는 무채색의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계절로 보자면 초여름이었다. 떠나온 저곳은 별일만 없다면 지금쯤 자정을 조용히 넘기며 또 하루를 시작할 테고 그렇게 나날이 가을의 색조가 짙어갈 것이었다. 머나먼 거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스라한 낭떠러지가 가로놓인 듯한,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였다.
쌀 20킬로그램, 사과 2킬로그램, 감자 반 박스, 양념 약간, 경유 40리터, 아스피린 2통.
이것이 오늘 아침의 목록이었다. 대장은 매일같이 남아 있는 물자들을 점검하고 나서 그 내용을 알렸다. 지금까지도 예정되어 있던 물자가 들어온다거나 본국과 연락이 된다거나 하는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전 몇 마디의 말이 전파에 실려온 적은 있었다. 무선통신을 시도하던 어느 햄이었다. 그러나 잡음이 일더니 그것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기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정말 돌아갈 수나 있을지 하는 의문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었다.
연락이 끊어진 지 벌써 46일 째였다. 저쪽이라고 무사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불어난 바닷물이 강한 해일을 타고 불쑥 밀어 닥쳤다면 평평한 땅이나 강가, 해안의 저지대는 안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륙 곳곳까지도…. 하지만 먼 수평선 너머로는 지금껏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침묵만이 두꺼운 안개처럼 이곳과 먼 저곳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모두가 뿌연 입김 속에 놓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더께가 씌워진 듯 시야가 어슴푸레했다. 바다는 그 가운데서 비릿한 내음을 머리칼처럼 풀어내고 있었다. 그 냄새는 묘한 느낌을,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주었다. 말하자면 그를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것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곧장 바다 속 물길 아래로 침몰할 것 같았다. 그는 멈춰서서 핏발이 서도록 눈을 비벼대고는 앞에서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쫓아 높은 파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어떤 모습이 저쪽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비볐다. 저 앞에서 비쩍 마른 형체가 보였다. 망망한 해변을 따라 그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텁수룩한 얼굴로. 그는 두려움으로 흠칫 물러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형체는 파도에 부서지고 없었다. 검푸른 빛으로 넘실거리는 물결만이 주위에 가득했다. 돌연 지금 발붙이고 서 있는 여기가 어딘지, 또 저 흐릿한 수평선 너머는 어딘지 모두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건넌다는 강, 결코 빠져 나올 길 없는 그 물줄기에 다다른 그런 느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다가와 허우적거리다 죽음을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얼핏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남서부 해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옛 전함의 흔적이었다. 통나무와 나뭇조각의 파편들 그리고 심하게 부식된 닻…. 식민지 시대의 것이라고 했다. 해변으로 인양되어 찌그러진 몰골로 누워있던 ‘곤드와나’의 잔해 위에 비운의 난파선과 표류자들의 윤곽이 겹쳐졌다. 그 옛날 갑판 위에서 휘날리고 있었을 법한 원색의 깃발이 눈앞에서 뒤엉키더니 구둣발 소리가 쿵쿵 울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은 낯설지가 않았다. 어쩌면 이곳에 도착하던 순간부터 성큼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는지 모른다.
막 겨울이 시작되던 때였다. 수송기에서 내린 일행 앞에는 넓은 만이 가로놓여 있었다. 고무보트로 바다를 건너오며 가까이에서 유빙을 볼 수 있었다. 수면 위로 1, 2미터 정도의 것도 있었지만 큰 것은 산이나 언덕과 맞먹는 규모였다. 때로 그것들은 행렬을 이루어 당장 덮칠 듯한 기세로 다가오곤 했다. 얼음은 엄청난 힘으로 단단한 암석처럼 굳어져 있었고 안으로 갈수록 퍼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어떤 강한 힘을 가해도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는 특수한 물체 같은, 혹은 이 세상에 없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착각도 들었다. 개중에는 거대한 탁상 모양도 있었고 문이나 성 모양을 닮은 것도 있었다.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이 수면 위에 올라와 있는가 하면 거인이나 괴물의 형상이 문득 다가오기도 했다. 흡사 어느 전능한 존재가 산과 언덕을 빗듯 추상의 얼음 조각을 세워놓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검푸른 바다와 기이한 형태의 얼음에 어떤 엄숙하고도 거대한 존재의 모습이 드러나 있고, 그가 그 너머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카락을 쭈뼛 일어서게 했다.
그는 어느 알 수 없는 나라,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에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의 일이었다. 누군가를 따라 영화관에 갔는데 안으로 들어가자 영화는 이미 상영되고 있었다. 무슨 역사물인 것 같았다. 두어 명이 어느 동굴 아래로 내려가던 장면을 지켜보다가 그는 두 눈을 가리고 말았다. 잔인하다든가 그와 비슷한 내용도 아니었다. 컴컴한 동굴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두려웠던 것은 바로 눈에 가득 들어오는 옷의 색깔이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빨갛고 노란 원색이 너무나 낭자해 보여서 그는 무서웠다. 줄줄이 늘어선 빙산을 지나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어느 검은 동굴 속을 들어가는, 그래서 어느 순간 울긋불긋한 원색의 포목이 그의 주위를 휘두르다가 결국 숨통을 바짝 조여버릴 것 같은 공포가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왔었다.
그는 숨을 푹 몰아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검푸른 파도 위로 망연한 시선을 던지면서 그는 조금 전 저 앞에서 어른거리던, 어쩐지 낯설지 않던 그 형상을 떠올렸다. 가슴이 내려앉는 현기증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박이었다.
껍데기만 남은 나무줄기처럼 너무나 야위고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가 기이하게 굴긴 했어도 그렇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통신이 두절되어 경황이 없던 기지 사람들은 그가 다른 때처럼 주변을 쏘다니다가 불쑥 돌아오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는 계속 나타나지 않았고 기다리다 못해 대장은 다른 기지에 무전을 넣었다. 혹 뜻하지 않은 방문자가 있거나 길 잃은 누군가를 보았는지 해서였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주변을 수색해보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전 같으면 설상차(雪上車)를 끌고 나갔겠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경유를 써버린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도보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장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지목했고 통신담당인 김 기사를 꼽았다. 김 기사는 산악회 활동으로 겨울 빙벽을 오른 경험도 적지 않다고 했다. 두 사람은 언 바다를 끼고 남동쪽 고지대로 이동했다. 박이 한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곳을 찾아나섰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박을 찾아낼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제기랄, 그 인간은 뭣 땜에 뛰쳐나간거야? 그러지 않아도 정신 산란한데. 김 기사는 원망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아무 대꾸 없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뭐, 스키며 피켈 같은 장비를 얼추 챙겼니까 잘못되기야 했겠어? 하고는 묵묵히 앞장서기 시작했다.
바람을 받는 지형이어서 눈이 많이 쌓여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우툴두툴 얼어붙은 곳에 자꾸 발이 걸려 걷기가 힘들었다. 종단 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실종자를 막연히 찾아 나선 참이었기에 더욱 힘이 빠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윽고 눈앞에 하얀 빙원(氷原)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다처럼 끝도 없이 망망하게 펼쳐져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우뚝 솟은 바위틈이며 동굴을 살펴보는 동안 4시간이나 지났고 그 사이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게다가 바람까지 강해져 그들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이 바람에 날리고 쌓이는 바람에 그 흔적은 선명하지 않았다. 얼마쯤 갔을까. 뭐 하고 있어, 무엇이 보이나, 쌍둥이봉인가? 대장의 무전이 들어왔다.
기지에서 빙원 가는 길목에 있는 ‘쌍둥이봉’은 여간해서 나타나지 않았고 한참을 가다보면 겹쳐진 발자국이 나왔다. 늘상 제 자리를 왔다갔다하는 게 빙빙 돌고 있는 형국이었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해가 보이는 둥 마는 둥 날이 저물어버린 데다가 낮은 구름과 날리는 눈 때문에 더욱 시계가 나빠져 있었다. 도대체 얼마만큼 왔는지 알 수 없었고 세상이 온통 희끄무레한 것이 어디가 땅이고 하늘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오직 윙윙대는 바람소리만이 눈발을 어지럽게 날리며 그곳을 마치 죽음의 바다처럼 침몰시키고 있었다. 막막했던 그들은 자신 없는 발걸음만을 무한정 옮겨놓았다. 걷는 느낌도 오지 않았고 머릿속까지 텅 비어왔다.
그때였다. 바람의 끝자락에 어떤 울림이 끌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끊어지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귓가를 스쳐지났다. 걸음을 옮길수록 그 진폭이 넓게 퍼져오는 듯했다. 그렇다면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어떻게 들으면 새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바닷가에나 사는 갈매기나 펭귄들이 이런 빙원 한가운데에 와 있을 턱이 없었다. 아니, 이거 무슨 소리지? 선글라스 뒤로 김 기사의 휘둥그레진 눈이 보였다. 그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머릿속에 두서없는 생각들이 자꾸 이어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그는 전에 마주쳤던 고래의 낮고 굵직한 울음을 되살렸고 한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 온갖 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음빛 세상에서 언뜻 바람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는 그가 알고 있던 어떤 것과도 닮아 있지 않았다. 그 소리와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두 사람은 무엇에 홀린 게 아닐까 하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한동안 마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언가 현(絃) 같은 것이 내는 소리였다. 나무로 된 몸통, 그 등걸이 울리면서 나지막한 음색을 내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무작정 그 소리를 따라갔다.
다른 봉우리와 언덕이 나타나면서 그 계곡 한쪽으로 작은 건물의 모습이 들어왔다. 기둥이 아래쪽에서 건물을 받치고 있어서 그 몸체가 3미터쯤 위로 들려 있었다. 눈사태를 피하고 찬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렇긴 했어도 건물을 받치는 기둥이 다른 곳보다 높았고 그래서 먼발치에서 봤을 때 집이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건물을 발견하고서야 그는 대장의 말을 생각해냈다. 언뜻 들은 이야기로 이 근처에 은신처가 하나 있다고 했었다. 본기지가 따로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다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N기지의 대원이 말했던 그곳인 듯 싶었다. 그 말을 지금껏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감동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제서야 허옇게 숨죽이고 있던 대기가 서서히 생기를 되찾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혔다. 그리고 차가운 대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몸 속까지 아려왔다. 머리 위로 높고 냉랭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고 검은 언덕들이 그 끝에서 발돋움질하고 있었다. 그는 황량한 모습들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귓가에 와닿는 선율은 어느 오래된 숲가에서나 울려퍼질 법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습기 머금은 토양과 빽빽이 들어선 수백 년 묵은 침엽수, 그 두꺼운 등걸과 삐죽 치솟은 줄기 사이를 휘돌아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는 나무는 고사하고 이끼나 잔디 종류만이 잠깐 잎새를 내미는 정도였다. 그래서 현의 연주는 더욱 생소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어떤 풍경을 그리게 해주었다. 어느 땅엔가 처음 생명이 자라나던 때처럼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그 사이로 풋풋한 나무들이 자라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전에 이곳에서 발견된 화석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아메바나 종벌레 그리고 삼엽충에 대해 공부하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수는 남극의 예전 모습을 추측해 보라는 말을 던지고는 그곳에 존재했던 식물에 대해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남극의 해저 퇴적물 가운데서 발견된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너도밤나무의 화분(花粉)은 신생대3기 초인 이천오백만 년 전쯤의 것이라고 했다. 또 옛 지층인 협탄층(夾炭層)에서 그로솝테리스라는 나무와 잎의 화석이 많이 나왔다고 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생대의 석탄기 말부터 이첩기 중반까지 남극대륙을 포함한 그 일대에는 그로솝테리스들이 울창하게 들어차 있었고, 지금보다 기온이 온화했던 신생대 초반에는 소나무와 너도밤나무 산림이 많았으며 식물도 무성했다는 내용이었다. 무수한 나무숲이 해저 또는 지층 아래 묻혀버린 것이다.
그가 남극으로 선발되었을 때 썩 내키지 않는 가운데 한 가지 기대를 걸고 있었다면 화석을 직접 발굴해보는 것이었다. 지난가을, 궂은 날씨 탓에 모처럼 탐사를 나갔던 날이었다. 그와 일행은 오래 전 호수였던 지역에서 암석채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진흙 성분의 이암 더미에서 뭔가 발견할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역시 돌을 집어들고 결에 따라 망치질하고 가르기를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갈라진 적갈색 돌 표면에 어떤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자줏빛 가는 테두리 안에 어긋나기로 생긴 잎맥이며 다섯 손 잎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활엽수였다. 정말 이런 것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간 뒤로도 얼마간 말을 잊고 있었다. 그 작은 활엽수 잎의 존재는 경이로움이었다. 그러니까 ‘곤드와나(Gondwana)’라고 불리는 하나의 초대륙이 중생대 쥐라기부터 몇 개의 판으로 갈라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 중 하나인 남극대륙 또한 이동을 시작해 신생대 초반에 지금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 와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무렵만 해도 남극 땅은 활엽수가 자라는 따뜻한 곳이었다는 논리가 눈 아래에서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만년설과 얼음에 뒤덮여 있고 사실상 그 밑에 땅이라고는 몇 개의 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먼 훗날 수많은 시간이 지나면 이곳에도 따뜻한 기후가 찾아오고 울창한 나무숲이 들어설 것인가.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삐끗 문이 열리자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는 커다란 몸체를 부여잡고 좌우로 활을 움직이고 있었다. 첼로였다.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서 흔들렸고 그 아래로 뚜렷한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삼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그렇지만 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큰 몸체를 저어가는 모습에서 어쩐지 단단한 무게 같은 것이 느껴졌고 그래서 더 나이가 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갔다.
여자의 몸동작이 커지면서 선율이 가파른 굴곡을 이루어갔다. 그리고 어느 결엔가 둔중하고 깊은 울림이 강물처럼 굽이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과 그녀 사이를 그리고 실내의 공간과 땅과 빙원과 저 아래 해변까지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 모두를 천천히 움직여가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는 진동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무게가 그 선율, 깊고도 유유한 물결에 실려 있다고 느꼈다. 안개와 구름이 물같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아무 기억도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율리아나였다. 그녀는 뒤늦게 그들이 들어선 것을 보았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있더니 몸을 일으켜 예기치 않은 방문객을 맞아들였다. 그녀는 그들의 복장이며 옷에 새겨진 마크를 보고 어느 기지에서 왔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좀 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그녀는 왜소하다싶은 체격이었다. 160센티미터 가량의 키에 팔이며 몸의 골격이 가는 편이어서 어떻게 그런 연주를 해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대하고 보니 그쪽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고 미처 돌볼 겨를이 없는 때문인지 피부가 거칠어 보였다. 단지 푸른빛 도는 잿빛의 눈동자가 예민하고도 슬픈 듯한 인상을 주었다. 추위에 굳어진 몸이 어느 정도 녹자 그들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실종된 대원 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을 했고 그녀는 박에 관해 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기억 저편에서 박의 모습을 되살렸고, 마치 가까운 이라도 만난 듯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까지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연일 해일에 관한 소식만 돌고 있던 어느 날 그가 깨어난 것은 한밤중이었다. 어두운 가운데 박이 담요를 두른 채 일어나 있었고 바닥에 놓인 랜턴의 불빛이 그 흐트러진 머리칼과 도수 높은 안경알을 비추고 있었다. 랜턴 불빛 때문인지 잠결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대장이 이 광경을 봤다면 경을 칠 일이었다. 물자 공급이 끊어진 상태였으므로 배터리는 물론 연료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기지 사람들 모두가 마치 밀폐된 공간에 갇혀 숨이라도 덜 내쉬며 공기를 아껴보려는 자의 심정과도 같았다. 그러나 박은 무심해 보였다. 안테나 복구 작업을 알려도 방에 처박혀 있기 일쑤였고 그런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주변을 돌아다니곤 했다. 기지에서는 박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혹 정신이 나간 게 아니냐는 거였다. 그 말처럼 박은 정말 넋이 빠져버린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때로 박의 얼굴에서 무슨 생각인가에 골몰해 있는 표정을 발견했다. 그 딴엔 무척 중요한 그리고 쉽사리 풀리지 않는 문제라도 떠안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런 박이 그 시간에 무릎에 책을 펴놓고 랜턴 불빛에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동도 않고 있던 박의 몸이 잠시 기우뚱거리는가 싶더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풍 일어 검은 날개를 넓게 펴서 펄럭이고, 하늘 아래에서 구름을 모두 몰아온다. 그걸 보충하려고 산들은 연무와 시커먼 습한 증기를 위로 방출하였다. 이제 구름 짙은 하늘은 마치 암흑의 전장 같다. 맹렬히 비가 쏟아지고, 땅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된다…. 큰물에 모든 집이 휩쓸리고, 영화와 함께 물 속 깊이 삼켜진다. 가없는 바다, 바다를 뒤덮는다. 해안도 없는 바다.*
간간이 창문에 부대끼는 바람소리 외에 주위는 고요했다. 진공상태와 같이 아무런 잡음도 없는 한밤중에, 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선명한 울림으로 그의 가슴에 꽂혔다.
지금도 박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고 여긴다면 자신의 생각에 불과한 걸까. 사람들은 그가 빙원 어딘가에 묻혀 있거나 짐승의 밥이 되었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실종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 박이라는 자의 존재를 결코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향해 미리 길을 떠났던 것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하게만 비쳤던 박의 행동과 그 속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느새 그 말을 되뇌고 있었다. 가없는 바다, 해안도 없는 바다….
굵은 빗줄기가 갠 것처럼 실내에는 환한 햇빛이 가득 고여 있었다. 창가의 낡은 목재에는 윤기마저 돌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마치 황량하고 망망한 벌판에서 지치고 추레해진 나그네가 마침내 쉴 곳을 찾은 심정이었다. 그와 마주앉아 한동안 잠자코 있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왔을 때 손에는 넓은 접시가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하얀 물체가 놓여 있었다. 얼음이었다. 으레 얼음을 녹여서 식수로 쓰곤 하지만 그러기에 그것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받쳐들고 있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보통 얼음이 아니라 빙원 2킬로미터 아래로 파 내려간 곳에서 어렵게 채취한 것이었다. 역시 얼음을 연구하는 사람다웠다. 잊었다는 듯 그녀가 덧붙였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빙하기의 것이랍니다.”
얼음인 채로 16만년 동안이나 있었다고 했던가. 하얀 육면체가 유리잔 안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곧 가는 소리와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동그란 기포가 탁탁 소리를 내며 컵의 수면으로 빠르게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긴 시간 동안 아무도 호흡하지 않은 공기라고 했다. 그렇다, 얼음 속에 갇혀 있던 16만년 전의 대기가, 창조의 미세한 숨결이 지금의 공기와 섞였다. 머나먼 시간이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왔다. 그들의 눈동자가 만났다.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그는 첼로 연주 이야기를 꺼냈고 그 곡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아 그거, 하는 표정으로 무반주 첼로곡이라고 말했다. 첼로 한 대로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곡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곡명들이 흘러나왔다. 프렐뤼드, 알르망드, 꾸랑뜨, 사라방드…. 겨우내 얼었던 계곡에서 시냇물이 졸졸 흐르듯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언뜻 듣기에 한 가락이 변주되면서 이어지는 듯했지만 알고 보니 모음곡이었다. 그녀는 이 모음곡이 다 무곡(舞曲)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춤을 추기에 음악은 무거운 감이 있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쪽에 세워져 있던 첼로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그건 육신이 아닌 영혼, 맞아요, 영혼의 춤곡인지 모르지요.”
소리의 진동에서 자유롭게 솟아나는 영상들 그리고 그것을 쫓아 움직이는 영혼. 몇 시간이고 그녀는 첼로를 부여안고 활을 움직였던 것이다. 영혼의 춤을 위하여.
어느덧 하늘엔 불그스름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구름 뒤로 아직 해가 남아 있어서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다. 언덕을 돌아서자 곧 얼음산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것은 바다빛 때문에 검푸른 색을 띠고 잔잔한 수면 위에 산처럼 솟아 있었다. 돌덩이보다 단단해 보이는 그것은 한마디로 얼음 그 자체였다. 거기에는 고통이나 슬픔 같은 감정이 배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종교나 사상과도 무관해 보였다. 그렇지만 어떤 충만함이, 아무 부족함도 없는 충만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모두의 근원이 아니었을까. 물결, 대기 그리고 두 사람과 모두의.
갑자기 생각난 듯 그녀가 박에 관해 물었다. 그는 파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문득 누군가, 어떤 얼굴 하나가 해변가를 달려오고 있었다, 헐벗은 채 땅 끝을 지나가는 이처럼 비쩍 야위고 텁수룩한 모습이었다고….
“강을 건너오는 길이었군요.”
율리아나의 음성이 적막한 여운을 남겼다. 강이라니. 무슨 뜻인가. 흔히 말하는 레테의 강을 말하는 것인가. 이곳과 저곳 사이에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강, 그 물길을 지나면서 모든 기억이 소멸되어버리고 그 무(無)의 상태에서 또 다시 생명이 태어난다는 그 강을 건너…. 그렇다면 이곳이 레테의 안쪽, 사람들이 말하는 저곳인가. 그는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곳과 저곳,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리 분명한 것이었던가.
옅은 햇살이 얼음산을 휘감고 있었다. 섬처럼 수면 위로 드러나 있는 빙산 그리고 땅, 어쩌면 이 모두는 오래 전부터 물위로 움직여가고 있는 게 아닐까, 사람과 새와 동물을 싣고. 그래서 알 수 없는 물길을 건너는 날, 다시금 따뜻한 계절이 찾아들고 숲이 우거진 원시림에서 생명이 살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인가. 두꺼운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보였다. 그것은 선명한 파장을 그리며 수면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빛의 세례였다. 한순간 눈이 부셔왔다. 빛줄기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 빛살 안에서 움직임이 일더니 춤추듯 원을 그리며 무엇인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머나먼 도시의 광경과, 그녀가 그리고 낯익은 얼굴들과 홀연히 사라졌던 이의 미소가 나타났다. 그들은 아침안개처럼 새털구름처럼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율리아나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그 빛줄기를 움켜잡으려는 듯 율리아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빛의 물결에 둘러싸인 채 창공의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