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칠환(1964~ )
가뭄
가정 방문
갈대
갈 수 없는 그곳
갈치 조림을 먹으며
감
감꽃
결석
고요
공무도하가
공범
구두와 고양이
기적
김밥 천국, 라면 지옥
꽃뱀의 목에 꽃무늬를 두르는 시간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나무서점 방문기
날개
낮달
냄비보살 마하살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노랑제비꽃
노래하는 모자
노스트라다무스의 별
누나야
눈길
눈물의 국경일
다국적 똥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두엄, 화엄
둥근 시집
등용문 역 4번 출구
때
먹은 죄
멸치에 대한 예의
목격
목숨
무
무인도
물결
바람
바퀴
박꽃
벚꽃 생선
봄
봄꽃의 주소
봄 펜팔
사라진 동화 마을
사마귀
사슴의 뿔에 대한 전설
산사 개구리 음악회
삶
상여 소리
새
새 길을 가기 위해 모든 길을 멈추자
새와 그림자
새해 첫 기적
생명, 그 아름다운 천형(天刑)
생명이 끝나지 않는 이유
서울에서 부산까지
소금쟁이
수평선
시치미
신과 인간
싱싱한 질투
아라비카 당산나무
어느 날
어떤 기구(祈求)
어떤 채용 통보
어린이날
어머니
언제나 지는 내기
여생
오천 년의 포옹
외국 꽃
외딴 유치원
웃음의 힘
움켜쥔 주먹을 펴라
월식
유모차와 할머니
은사시나무
은행나무 부부
이기주의
자벌레
장미와 찔레
장어
전쟁광 보호구역
젓국 가게
제비꽃
주름 농법
주산지 왕버들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
지킴이의 노래
지퍼와 단추
참새와 홍매
킬리만자로의 표범
통째로
팔자
포장육의 가계사
풋감
하나님보살마하살
한 걸음
한평생
한 해를 보내며
해일
호두나무
호랑이 잣 까먹는
호수의 손금
확인 못한 이야기들
가뭄
반칠환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가 없어졌다
가정 방문
반칠환
이 일을 어쩌믄 좋아, 저기 저기 감낭구 아래 담임 선생님 가정 방문 오시네. 오늘 낼 넘기믄 안 오실 줄 알았지. 뒤란에 숨으까 산으로 가까, 콩밭에 숨으까 수수밭에 숨으까. 마음은 동서남북 사방팔방 첫서리하다 들킨 것처럼 뿔뿔이 달아나는데 몸은 왜 이리 고구마자루 같으까, 옴쭉달싹 못 하고 가슴은 벌렁벌렁, 선생님 벌써 사립문 없는 삽짝에 들어서시네... 선생님 오셨어유? 치란아, 어머니 어디 가셨냐, 밭에 가셨나 봐유. 지가 불러올게 잠깐 기다리세유... 엄마, 엄마, 선생님 오셨어. 열무밭 매던 엄마, 허겁지겁 달려 나오시는데, 펭소에 들어오지 않던 우리 엄마 입성이 왜 저리 선연할까. 치마 저고리 그만두고, 나무꾼이 감춘 선녀옷 그만두고, 감물 든 큰성 난닝구에, 고무줄 헐건 몸뻬바지 넥타이허리띠로 동여매고, 동방위 받는 시째 성 깜장색 훈련화 고쳐 신고 달려나오시는데, 조자룡이 헌창 쓰듯 흙 묻은 손에 호멩이는 왜 들고 나오시나.
양푼에 조선오이 삐져놓고, 찬물 한 대접 곁들여놓고, 엄마 옆에 붙어 앉았지만 선생님 말씀 듣기지 않고, 기름때 묻은 사기등잔이, 구멍 난 창호지가, 흙 쏟아지는 베름짝이, 쥐오줌에 쳐진 안방 천장이, 잡풀 돋는 헛간 지붕이 용용 죽겠지 눈 꿈쩍이며 선상님 나 여깄수 소릴 치네. 주고개 이정골 통틀어 제일 외딴집,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지기 집에 담임 선생님 오신 날, 나 이날 잊을 수 없었네. 잊을 수 없어서 선생님 오신 다음 다음날 일요일 날, 나 뒷산에 올라 대낭구 장대로 참낭구 시퍼런 누에고치를 두들겨 털었다네. 이놈 따다가 우리 엄마 참낭구 새순처럼 은은히 푸른 비단 치마 저고리 해드려야지. 털고 또 털어 대소쿠리 그득 고치 찼지만, 그러나 엄마는 그 고치 내다 팔았고, 나 울면서 그 돈 타다 공책 샀다네.
갈대
반칠환
저마다 갈대인 갈대들이
수런수런
어깨를 기대거나
잎새를 스친다
서로가 서로를 베어도
오히려 따뜻하다고
서걱서걱
갈 수 없는 그곳
반칠환
그렇지요,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상의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다는 그곳은 도대체 얼마나 험준한 것이겠습니까.
새벽이 되기 전 모두 여장을 꾸립니다.
탈것이 발달된 지금 혹은 자가용으로, 전세 버스로, 더러는 자가 헬기로, 여유치 못한 사람들 도보로 나섭니다.
우는 아이 볼기 때리며 병든 부모 손수레에 싣고 길 떠나는 사람들, 오기도 많이 왔지만 아직 그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도복을 입은 도사들 그곳에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그곳,
그러나 바늘귀도 오랜 세월 삭아 부러지고 굳이 더 이상 통과할 바늘귀도 없이 자가용을 가진 많은 사람들, 벌써 그곳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건너가야 할 육교나 지하도도 없는 곳, 도보자들이 몰려 있는 횡단보도에 연이은 차량,
그들에게 그곳으로 가는 신호등은 언제나 빨간불입니다.
오랜 기간 지친 사람들,
무단 횡단을 하다가 즉심에 넘어가거나 허리를 치어 넘어지곤 합니다.
갈 수 없는 그곳, 그러나 모두 떠나면 누가 이곳에 남아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둡니까.
아름다운 사람들, 하나둘 돌아옵니다.
모두 떠나고 나니 내가 살던 이곳이야말로 그리도 가고 싶어 하던 그곳인 줄을 아아 당신도 아시나요.
갈치 조림을 먹으며
반칠환
얼마나 아팠을까?
이 뾰족한 가시가 모두 살 속에 박혀 있었다니
감
반칠환
머리 위에 흰서리를 이고 북풍을 생각한다 살아낸 봄날과 여름 비바람 없던 날 몇 날이던가 벌떼가 날아와 귓가에 닝닝거리는 영화로운 날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감꽃 지듯 어제는 형제가 죽고 풋감 듣듯 오늘은 친구의 부음을 듣는다 만고풍상 겪었지만 세상은 아직도 낯설어라 형제들도 옛날 칠순 노모의 뺨이 나리꽃처럼 붉은 까닭을 생각해보았을까 까치밥처럼 남아 경로당 담벼락에 볕 바라기하는 친구들아, 주름골마다 저승꽃 만발하지만 한나절 살아 았음은 아직 설렘이다 북풍은 어서 가지 끝을 놓아라 재촉하지만 한 떼의 잠자리가 늙은 볏잎에 매달리는 저녁 나는 평생을 깨우쳐 홍조(紅潮)를 알았다
감꽃
반칠환
장독대 위에 감꽃이 지네
투욱 -
이승에서 저승으로
장맛이 익는 사이
결석
반칠환
흙 속에,
얼음 속에,
바람 속에,
살아 있던 것들 모두 다 꼼지락거린다만
가으내 약숫물 뜨러 다니던 그 할머니,
봄날이 저물도록 보이지 않는구나
고요
반칠환
메밀묵 팔러 시내 가신 엄마, 앞들에 땅거미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섬돌에 앉아 목 빼어 고갯길 바라보노라면
외딴집 외딴 마당은 아득히 고요해
건너 마을 저녁연기도, 개 짖는 소리도 그치면
빈 묵판 달각이는 엄마 발자욱 소리 들려오도록
세상은 너무나 고요해
집 나간 강아지 검줄이 집도 고요해
빚 대신 팔려 간 중송아지 없는 외양간도 고요해
장작불 사위어든 쇠죽솥 고래도 고요해
이태 전 돌아가신 아버지 기침 소리도 나지 않는,
학교 간 누나도 돌아오지 않는 두 칸 방도 고요해
달이 먼저 뜰라나, 엄마 먼저 오실라나
토옥---- 톡!
가으내 바싹 마른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
공무도하가
반칠환
머리가 허연 숫새가 날아간다
공은 강을 건너지 마시오
아내가 좇아오며 외친다
숫새가 마침내 강에 떨어져 죽는다
아내가 강바닥에 주저앉아
공후를 켜며,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 다음
숫새가 들어간 강물로 걸어간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사공이
강물을 명주필처럼 걷는다
울음이 여울지는 강물 한 폭을 잘라서
지게에 지고 더 큰 강으로 들어간다
사공의 아내가 좇아오며 외친다
공은 강을 건너지 마시오
사공이 마침내 강에 떨어져 죽는다
사공의 아내가 강바닥에 주저앉아
공후를 켜며, 노래를 부른 다음
집으로 돌아와 울면서 밥을 짓는다
그녀의 나 어린 딸이 영문도 모르고
제 앞날 같은, 뜨거운 국 그릇을 쏟으며 운다
공은 강을 건너지 마시오
복개된 강둑에 세워진 전설을 읽으며
젊은 남녀들이 깔깔거린다
무시로 강을 건너간다
공범
반칠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사람이 노래하자
제초제가 씨익 웃는다
구두와 고양이
반칠환
마실 나갔던 고양이가
콧등이 긁혀서 왔다
그냥 두었다
전날 밤늦게 귀가한
내 구두코도 긁혀 있었다
정성껏 갈색 약을 발라 주었다
며칠 뒤,
고양이 콧등은 말끔히 나았다
내 구두코는 전혀 낫지 않았다
아무리 두꺼워도
죽은 가죽은 아물지 않는다
얇아도 산 가죽은 아문다
기적
반칠환
1
여름장마가 휩쓸고 갔어도
계곡에 버들치 한 마리 떠내려 보내지 못했구나
3
강풍에 먹구름 쓸려가는데
못도 안 친 달이 하늘에 박혀 있다
김밥천국, 라면지옥
반칠환
시속 물정 모르는 스님 하나
김밥천국 들어오신다
원야김치 참누모 ? 이 뭣고 ?
조채치즈 치드듬 ? 이 뭣고 ?
김김김김 김김김 ? 이 뭣고 ?
밥밥밥밥 밥밥밥 ? 이 뭣고 ?
1 1 2 2 2 2 2 ? 이 뭣고 ?
0 5 0 0 0 0 8 ? 이 뭣고 ?
0 0 0 0 0 0 0 ? 이 뭣고 ?
0 0 0 0 0 0 0 ? 이 뭣고 ?
어려운 천칠백 공안 다 풀어봤지만
저잣거리 분식집 이 난해한
칠언절구와 난수표, 다 뭣고?
세로쓰기를 가로로 읽으며
이 뭣고? 거듭하다 몰록 깨달아
법열에 겨워 소리친다
‘보살님? 떡라면에 원조김밥 추가!’
터진 옆구리
라면 가닥 같은 골목길
김밥천국 유리창에 나부낀다.
‘삶은 계란’도 있어요
꽃뱀의 목에 꽃무늬를 두르는 시간
반칠환
구불구불 길 위로 길 하나 가는 걸 보았느냐. 아무리 곧은길도 굽어가는 천형을 보았느냐. 평생을 달아나도 제 몸의 길 벗어날 수 없어 서럽게 울며 흰 길 위로 달아나는 한 발 초록 길을 보았느냐. 지팡이 하나 봇짐 하나 미투리도 없이 온몸이 나그네인 발바닥을 보았느냐. 가시덤불 헤치고 사금파리 넘어 가까스로 신작로 오르면, 우르르 쏟아지는 죄 없는 햇살이여 돌팔매여, 머里 지나 허里 지나, 꼬里 이르도록 마디마디 고통의 눈금 새겨지는 가늘고 긴 줄자를 보았느냐. 아픔에서 아픔으로 가는 삼거리, 눈물에서 눈물로 가는 네거리를 재고 또 재는 슬픔의 측량사를 보았느냐. 문득 네 앞에 서린 무서운 한 모퉁이, 꼿꼿이 목을 세운 한 타래를 보았느냐. 꽃이 될까, 독이 될까. 꿀꺽, 기쁨에서 슬픔으로 가는 지름길에서, 슬픔에서 기쁨으로 가는 벼랑길에 한 움큼 붉은 독 이겨 바르는 꽃뱀을 보았느냐. 이름은 꽃길이라도 온몸의 바탕은 지루한 암록인 우리네 구절양장을 보았느냐.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하는
힘으로 다시 걷는다.
나무서점 방문기
반칠환
숲은 신간으로 그득하다. 봄비가 가장 먼저 초록 시집을 읽는다. 전생 과거시험 심사관이었는지 잎눈마다 물방울 방점 찍으며 읽는다. 여름바람은 전직 은행원이었는지 돈 세듯 읽고 다른 서점으로 사라진다 태양은 제 빛에 눈이 나빠졌는지 돋보기로 읽는다 오래 읽으면 책이 타들어간다 자벌레 청년은 고시 공부하던 습관인지 중요한 구절을 우물우물 삼킨다 거위벌레는 신갈나무 백과를 대놓고 절취하니 곧 가위벌레라 불릴 것이다 가을서리는 열렬한 독서광이다 읽는 책마다 노랗게 붉게 형광 빛으로 칠한다 형편이 어려운지 읽기만 하고 사지는 않는다 가을바람은 그 해의 신간을 몽땅 사지만 한 장도 읽지 않고 폐지상에 넘긴다 겨울 눈도 진시황의 후예인지 문자를 지워 백지로 만든다 그러나 폭설의 분서焚書 속에도 언제나 맵푸른 활자가 눈뜨고 있는 법이다
날개
반칠환
저 아름다운 깃털은
오솔오솔 돋던 소름이었다지
창공을 열어 준 것은
가족이 아니라 무서운 야수였다지
천적이 없는 새는 다시
날개가 사라진다지
닭이 되고, 키위가 된다지
낮달
반칠환
울 어매 얇게 빗썰어 놓은
무 한 장
냄비보살 마하살
반칠환
허름한 시골 함바 집 식탁 위
처억 이름 모를 냄비가 앉았다 간
검은 궁둥이 자국을 본다
손으로 쓸어보지만
검댕은 묻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바쁘고 속이 타도
궁둥 걸음밖에 할 수 없었을
어떤 아낙의 모습 선연하다
눈물 나게 뜨거워 달아났다가도
가슴 시리면 다시 그 불판 그리워
엉덩이부터 들이댔을 서러운 조강지처
평생 끓이느니 제 속이요
쏟느니 제 창자였을
저 아낙의 팔자는 어느 사주에
적혀 있던 걸까
팔만사천 번 찌개를 끓였어도
죄다 남의 입에 떠 넣고
빈 입만 덩그라니 웃었으리라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반칠환
겨울 양재천에 왜가리 한 마리
긴 외다리 담그고 서 있다
냇물이 다 얼면 왜가리 다리도
겨우내 갈대처럼 붙잡힐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냇물이
말미를 주는 것이다
왜가리는 냇물이 다 얼지 말라고
밤새 외다리 담그고 서 있는 것이다
노랑제비꽃
반칠환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노래하는 모자
반칠환
그는 창고를 짓지 않았을 때에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 나를 들여 양치기로 삼았다. 그는 내가 노래할 때마다 모자를 하나씩 씌워준다. 나는 점점 높아진다. 노래를 들은 양들은 하나씩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 노래하는 나는 입이 있지만, 반짝이는 별들은 항문조차 없다. 노래를 할 때마다 모자는 높아지고 나는 점점 납작해진다. 나는 그의 창고에 매혹되어 종종 그를 잊지만, 그는 때마다 나를 불러 찬미하라 한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그가 모든 것이 부족한 나를 찾는다. 어디에나 있어도 안 보이는 그가, 어디에 숨어도 보이는 나를 찾는다. 처음엔 목이 쉬도록 노래 불렀지만 이제는 허밍으로 노래한다. 절창으로 부른다고 그의 영광이 높아지고, 음치로 부른다고 광영이 낮아질 리 없기 때문이다. 늘지도 줄지도 않는 잔칫상에서 그가 왼손에 든 것을 가져다 오른손에 쥐어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제는 그의 기쁨을 노래했지만 오늘은 나의 슬픔을 노래한다. 마지막 양이 사라지고 모자가 발목을 덮으면 나도 별이 되리라.
노스트라다무스의 별
반칠환
한때 이 별은 소리의 창고였지
곳간 그득 쟁쟁한 소리들이 넘쳐 흐르던
소리의 왕국이었네
살아있는 모두가 악기였던 이곳 백성들이 왜
소리를 잃고 사라졌는지 몰라
쉰 목소리로 불러보지만
아무도 대답 없네
뻘흙에 묻힌 피리처럼, 물속에 잠긴 나팔처럼
잠깐, 이 별을 망태에 담기 전에
귀를 기울여야 해
혹시라도 작은 풀무치 하나, 휘파람새 하나
풀잎 하나의 떨림이라도 남아 있으면
큰일이니까
그렇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네
연인을 부르던 떨리는 음성
짝짓기철 들씨근한 수소의 콧김
아이를 재우는 자장가 소리
봄나무들 팔뚝 그득한 물소리
아무것도 이제는 없네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메아리는
누구의 울음이었을까
나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
두드려봐도 소리가 나지 않는 이 별을 건지려네
이제 누군가 이 별로 오는 이정표를 지워야 하리
누나야
반칠환
누나야
다섯 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 갔다가
땀 뻘뻘 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참대처럼 야무진,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
국민학교 때
'코스모스 꽃잎에 톱날 박혀 있네
톱질하시던 아버지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동시를 지어 백일장에 장원한 누나야
나이팅게일이 되겠다고, 백의 천사가 되겠다고
간호대학에 간 누나야
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마을
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
부임 첫날 다급한 소식 듣고 찾아간 곳 다름 아닌
냄새나는 축사, 난산의 돼지 몸 푸는 날이었다고
다섯 마린지 여섯 마린지 돼지 새끼 받아내느라
혼났다던 스물두 살 누나야
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머리 쓰다듬던 누나야
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친정 달려와
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
이제 곧 큰 길이 나고 사라진다는 고향마을 중고개에
아직도 나를 업고 가느라 깍지 낀 손에
파란 힘줄 돋는 누나야
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눈길
반칠환
저 순백의 눈길을 밟지 않으면 생명이 없고 밟으면 죄가 되니, 죄를 멈추어 생명을 부정할 것인가, 죄를 얻고 눈길을 걸어갈 것인가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생각느니 누가 죄 없이 꽃 필 수 있으며 죄 없이 노래할 수 있는가 저 아름다운 붉은울새의 노랫소리도 방금 산란하던 풀여치를 덥석 삼킨 입술 아니던가 천진한 저 아기는 눈 하나 깜빡 않고 붉은 꽃목을 떼어버리지 않는가 잃어버린 낙원을 아파하는 사람들아, 죄보다 삶이 크니 나는 저 눈길 걸어가야겠다 이브는 아이를 낳고, 나는 땀을 흘리며 저 눈길 건너야겠다 뚜벅뚜벅 새기느니 진흙 발자국뿐일지라도, 꽃을 보면 웃어주고 가시를 보면 아파하며 가야겠다 낙원 대신 얻은 밝은 눈 있으니 숫눈길 밟더라도 네 아픔 골라 딛을 수 있을까 경계를 넘어 날아가는 새들아, 삶이 계율보다 앞서니 아침에 저질러 피운 꽃잎 저녁에 회개하며 떨굴지라도 살아서 저 눈길 건너야겠다
눈물의 국경일
반칠환
세상 모든 생명들이 한날한시 일제히 울어버리는 국경일 하나 갖고 싶다 뎅뎅- 종소리 울리면 토끼를 잡아채던 범도 구슬 같은 눈물 뚝뚝 흘리고, 가슴 철렁하던 토끼도 범의 앞가슴을 두드리며 울고, 포탄을 쏘던 병사의 눈물에 화약이 젖고, 겁먹은 난민도 맘 놓고 울어 버리고, 부자는 돈 세다 울고 빈자는 밥 먹다 울고, 가로수들도 잔잔히 이파리 뒤채며 눈물 떨구는, 세상 생명들 다시 노여워지려면 꼭 일 년이 걸리는 그런 슬픈 국경일 하나 갖고 싶다
다국적 똥
반칠환
또 배탈이군. 한때 돌조차 삭이던 위장이었는데. 그렇지, 장모가 전라도 배추를 경상도 고춧가루로 버무린 탓일 거야. 아냐, 맥도널드 햄버거에 우리 밀빵을 함께 먹은 탓인지도 몰라. 아니, 방부제와 잔류 농약이 십이지장, 소장, 대장을 방제하는 날일까? 쯔쯧, 세계화 시대에 이렇게 편협한 국수주의자의 내장을 가지고서야. 신토불이? 우린 모두 지구촌 읍민이니 지구에서 나는 모든 음식이 신토불이인 거야. 저녁엔 다시 캘리포니아 쌀에 중국산 콩을 놔 먹어보자. 끄억 --. 미제트림에 중국산 방귀를 뀌어볼까나. 비록 제3세계의 셋방에살지만 오늘도 난 다국적 똥을 눈다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반칠환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두엄, 화엄
반칠환
모든 꽃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핀다
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절벽이다
온 산에 참꽃 핀다
여리디여린 두엄 잎이 참 달다
출렁, 저 황홀한 꽃 쿠린내
모든 존재가 아름다운 건
꽃잎의 날보다 두엄의 날들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둥근 시집
반칠환
나무의 나이테 속에 벼려 넣은
여름이 있고 겨울이 있다
천 개의 손끝에 송이꽃을 들고 불타는 햇빛을 연모하던 기억도 있다
뭇 바람의 제국주의자들이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박수를 치던 치욕의 기억조차 새기어놓았다
나이테는 그 여름의 연서이자
그 겨울의 난중일기이다
나이테는 밑동 잘린 고목의 유고 시집이다
천년 고찰은 저 둥근 시집을 읽으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천년 불상조차 한 번도 저 시 낭독이 싫어 외출한 적이 없다
풍경을 두드리는 바람은 견디기 힘든 유혹이지만
붓다의 처음 깨달음도 저 나이테의 그늘 아래서였다
나이테는 제 가슴에 새긴 목판 경전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좀벌레가 기어간다
저 느린 것들이 나이테의 경전의 마저 읽고 나면
곧 새로 늙은 젊은 기둥이 또 한세월을 받치라
등용문 역 4번 출구
반칠환
그 역에는 잉어들이 산다 검은 복개천에서 쏟아져 나온 희디흰 잉어 떼들 폭포처럼 수직으로 걷는다 무릎이 까진 잉어와 발톱이 빠진 잉어도 있다 통발 부츠에 끼이거나 검은 망사 스타킹에 걸린 장딴지들도 한사코 달려 나온다 '여보? 등용문 역 4번 출구예요' '아들? 무조건 등용문 학원 종합반이다' '자기야, 어서 잉어를 잊고 용이 되어야 해!' 싱싱한 잉어 떼들 일란성 쌍생아처럼 저벅저벅 걷는다 더러 먼저 승천한 왼쪽 잉어 대신 목발을 짚은 오른쪽 잉어가 껌을 팔기도 하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앟는다 잉어 두 마리를 모두 승천시킨 무릎이 고무 지느러미를 끌며 노래 부르기도 한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아흔아홉 단 에스컬레이터 폭포엔 물 한 방울 없지만 잉어들 스스로 눈부신 물줄기로 솟구친다 '뛰거나 장난치거나 섣부른 희망에 기대지 마십시오' 미니스커트를 손가방으로 가린 잉어가 있는가 하면, 대파 꼬리가 튀어나온 비닐 봉투를 든 하지정맥류도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하늘이 환해진다 마침내 땅 위로 솟구친 잉어들 뿔뿔이 흩어진다 수족관 같은 집마다 불이 밝아온다 '여보, 엄마, 아빠, 얘들아, 오늘도 용쓰느라 고생 많았다' 퉁퉁 발목 부은 잉어들 여전히 잉어인 채 교대로 족열기에서 보글보글 끓는다.
때
반칠환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 걸 보았을 때
굽히며 경배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때를 가리지 못함이 무릇 몇 번이던가
먹은 죄
반칠환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 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속의 일이다
멸치에 대한 예의
반칠환
큰 생선은 머리 떼고, 비늘 떼고, 내장 발라내고, 지느러미 떼면서 멸치를 통째로 먹는 건 모독이다 어찌 체구가 작다고 염을 생략하랴 멸치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
목격
반칠환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목숨
반칠환
그럴 분이 아닌데
손가락도 열 개
발가락도 열 개
이빨도 젖니 한 벌
영구치 한 벌
참 꼼꼼하신 분인데
가장 소중한 목숨이
하나뿐이라니
무
반칠환
이렇게 속없는 놈도 사는구나
탁, 탁, 탁―
깍둑썰기를 해도
날 상하게 할 뼈가 없다
착, 착, 착―
채썰기를 해도
손 물들일 피 한 점 없다
칼로 무 베다 보면 속 부끄럽다
이렇게 속 깊은 놈이 사는구나
난도질하고 남은 목
던져놓으면 수채 속일망정
파랗게 웃으며 되살아난다
숙취를 지우는 무국을 뜨며
속없이 속 깊는 법을 생각한다
무인도
반칠환
오직 사람 하나 없어
무, 인, 도
경전도 사원도 없으니
죄도 없다고
끼루룩 끼루룩
아무도 신을 경배 않으나
신의 뜻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물결
반칠환
그랬구나! 가슴의 통증이 가시고 눈앞이 환해진다.
어리석고 아둔한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굽은 어깨와 허리가
매화 등걸처럼 휘영청 내걸리고 가슴마다 꽃이 핀다.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끌마저 모두 꽃핀다.
가장 아프고, 가장 못난 곳에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걸려 있다니,
가슴에 박힌 대못은 상처인가 훈장인가?
언제나 벗어 던지고, 달아나고 싶은 통증과 치욕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으며,
가슴 속 잉걸불에 묻어둔 뜨거운 열망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을 것인가?
봄날 새순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피며,
손가락 잘린 솔가지는 관솔이 되고,
샘물은 바위의 상처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내 근심이 키우는 것이 진주였구나,
네 통증이 피우는 것이 꽃잎이었구나.
바람
반칠환
저놈은 대단한 독서광 아니면
문맹이 틀림없다
열흘째 넘기지 못한 서적을
돈 세듯 넘겨놓고,
포플러 잎 팔만대장경을
일제히 뒤집어 놓은 채 달아난다
바퀴
반칠환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박꽃
반칠환
가슴 속에 시인과 도둑이 함께 살아
담을 넘다가도
달빛 시나 짓고 온다
탈탈 털어봐야
이슬 장물 몇 점
벚꽃 생선
반칠환
긴 겨울 건너 친정아버지 오시는가
먼 징용 끝내고 지아비 오시는가
봄 소풍 마치고 아들 돌아오는가
벚꽃 하늘 바다에서 아낙이 건진
생선은 크기도 하여라
흰 비늘 온종일 긁어도
반짝반짝 차르르~
봄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봄꽃의 주소
반칠환
숨어 핀 외진 산골 얼레지 꽃대궁 하나
양지꽃 하나
냉이꽃 하나에도
나비가 찾아드는 건
봄꽃 앉은 바로 그 자리에도
번지수가 있기 때문
때로
현호색이 보낸 꽃가루를
제비꽃이 받는 배달사고도 있지만
금년 온 천지 붉고
내년은 또 노오랄 것은
봄꽃 앉은 바로 그 자리에도
번지수가 있기 때문
가방도 아니 멘 나비 때가 너울너울
모자도 아니 쓴 꿀벌 떼가 닝닝닝
자전거도 아니 탄 봄바람이 돌돌돌
금년 온 천지 붉고
내년 또 노오랄 것은
바로 저 우체부들 때문
봄 펜팔
반칠환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베낀 듯 작년과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 줄엔 아지랑이 모락모락 안부를 묻고, 두 번째 줄엔 호랑나비 흰나비로 올해의 운세 물으셨죠. 그래도 눅눅한 겨울 다음엔 그만 한 위안도 없었습니다. 짐짓 눈 속 매화 한 점의 간결체로 시작된 당신의 문장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개나리의 만연체, 진달래의 우유체, 벚꽃의 화려체 따라 읽노라면 뭇벌과 새들 소리 시끄러워 눈 감고 귀를 막기도 했지요. 젊은 날엔 왜 그리 문장의 배후만 헤아렸는지요. 흰 꽃 속의 검은 빛, 꽃잎 속의 붉은 피, 순결 속의 타락, 환희 속의 비명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그대로 베낀 듯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왜 해마다 다르게 읽는 것인지요. 당신이 그린 봄 편지 속 삽화도 달리 보입니다. 작년엔 절벽에 핀 꽃잎이 금세 천 길 바닥으로 뛰어내릴 것만 같아 애간장 녹이더니, 올해엔 꽃잎이 절벽을 거머쥐고 훨훨 날아오르더이다. 저 꽃 다 날고나면 새로 받을 편지도 한결같은 초록의 문체이겠지요. 당신의 편지는 해마다 똑같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은 내가 늘 새로워지는 탓인가요, 다만 내가 늙는 까닭인가요.
사라진 동화 마을
반칠환
더 이상 불순한 상상을 금하겠다
달에는 이제 토끼가 살지 않는다. 알겠느냐
물 없는 계곡에 눈먼 선녀가 목욕을 해도
지게꾼에게 옷을 물어다 줄 사슴은 없느니라
아무도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갈 일이 없을 것이며
나무 위에 오른들 더 이상 삭은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느니라
흥부전 이후, 또다시 빈민가에 박씨를 물고 오는 제비가 있을 것이며
소녀 가장이 밑 없는 독에 물을 부은들 어디 두꺼비 한 마리가 있더냐
이 땅엔 더 이상 여의주 없음을 알 턱이 없는 너희들이
삼급수에서 비닐 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느냐
자아, 더 이상 철부지 유아들을 어지럽히는 모든 동화책의 출판을 금한다
아울러, 덧없이 붉은 네온을 깜박이는 자들이여
쓸데없는 기도를 금한다
하느님은 현세의 간빙기 동안 취침 중이니
절대 교회 문을 시끄럽게 두들기지 말거라
너희가 부지런히 종말을 완성할 때 눈을 뜨리라
사마귀
반칠환
직업은 망나니지만
모태 신앙이다
방금 여치의 목을 딴
두 팔로 경건히
기도 올린다
사슴의 뿔에 대한 전설
반칠환
나뭇가지처럼 우거진 뿔에 새들이 앉았다 가기도 한다는 거야. 바람이 불 때 조각배처럼 흔들리던 초승달이 쉬었다 가기도 한다는 거야. 처음부터 뿔이 있던 건 아니라는 거야. 사슴들은 나무가 좋아서 여름엔 나뭇잎을 먹고 겨울엔 나무껍질을 먹었다는 거야. 엄마 사슴이 먹고, 아빠 사슴이 먹고 아기 사슴을 자꾸 낳았다는 거야. 사슴들이 몽실몽실 늘어나자 나무들이 점점 사라져 갔다는 거야. 나무 대표가 사슴들에게 항의했다는 거야. 사슴들은 몹시 미안했다는 거야. 나무와 숲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한 뼘 이마를 내어주기로 했다는 거야. 멋들어진 나무 한 쌍씩 자라게 했다는 거야. 사슴이 나무를 이고 쏜살같이 달리게 되었다는 거야. 나무가 사슴을 타고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다는 거야. 숲을 다 벤 벌목꾼들이 톱을 들고 그 나무마저 베러 온다는 거야.
산사 개구리 음악회
반칠환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백로처럼 하얀 바지저고리,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과천 보광사 산사 음악회 가설 무대에 오른 가객 장사익 선생,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소리강물 구성지게 풀어놓다 말고 진땀 닦으며 한 말씀 ‘아, 저놈의 개구리들 땜에 내가 미치겄시유!’ 관객들 참았던 웃음보 터진다. 산사 마당 연꽃 고무 함지마다 들어앉은 개구리들 와글와글 개굴개굴 고성능 확성기까지 동원한 당대 일등 가객의 목소리를 굴컥굴컥 삼키는 게 아닌가. 저보다 목소리 큰 녀석에게 색시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수컷들의 눈물겨운 산사가요대첩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 선생 가까스로 ‘봄날은 가안다아~’ 앵콜 송 부르고 달아나자 보글보글 의기양양 잠잠해진다. 지켜보던 관악산이 껄껄 웃으며 용감한 개구리 가객들 목이나 풀라고 물컹한 노른자 달 하나씩 고무 함지마다 동동 띄워 주는 것이었다
삶
반칠환
벙어리의 웅변처럼
장님의 무지개처럼
귀머거리의 천둥처럼
상여 소리
반칠환
사자가 간다 가젤의 상여다
악어가 간다 누우의 상여다
멧돼지가 간다 도토리의 상여다
제비가 간다 하루살이의 상여다
사자가 운다 상여 소리다
새
반칠환
새들의 조상은 공룡이었다 한다
쿵쿵쿵 무게가 깃털이 되기까지
얼마나 큰 고행이었을까
키위는 날개를 버린 새라 한다
얼마나 자유가 무거웠으면
다시 날개를 지웠을까
새 길을 가기 위해 모든 길을 멈추자
반칠환
한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발을 씻는 사람들아
그 여름의 뙤약볕과 큰물과
바람을 모두 건넜느냐
휩쓸고 몰아치던 그 길
무릎걸음으로 걸어온 이들 한두 사람뿐이랴
한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이마를 훔치는 사람들아
올해도 세상의 한쪽에 빛이 드는 동안
세상의 다른 쪽에는 그늘이 드리웠더냐
여기서 벚꽃이 피는 동안, 저기서 목숨 지는 소리를 들었느냐
어떤 이는 사랑을 잃고 울며, 어떤 이는 사람을 잃고 울더냐
한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땀을 닦는 사람들아
그 더운 땀방울로 하여
어떤 이는 열매를 얻고
어떤 이는 줄기를 얻었지만
어떤 이는 그저 땀방울뿐이더냐
한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눈시울 붉은 사람들아
느리게 이울고 있는 태양의 어깨를 보았느냐
세상을 다 비춘 다음
제 동공에 넘치는 눈물로
저를 씻고 있는 것을 보았느냐
한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돌아보는 사람들아
올해도 잠깐의 평화와 긴 불화가 깃들었더냐
그러나 살아서 평화와 긴 불화가 깃들었더냐
그러나 살아서 평화, 살아서 불화
저 강물들은 어떤 평화에도 오래 쉬지 않고
어떤 불화에도 저를 다 내어주지는 않나니
한해의 노을을 밟고 돌아오는 사람들아
내일은 또 새가 울고, 꽃들은 피리라
비바람 몰아치고 파도는 높으리라
그러나 살아서 꽃, 살아서 파도
우리 모두 오늘에 온 것처럼 내일에 또 닿을 것이니
사람들이여, 새 길을 가기 위해 오늘 모든 길을 멈추자
새와 그림자
반칠환
새가 난다 일직선으로 난다 계곡과 계곡 사이를 난다 그 아래 새 그림자 스친다 저수지에 앞가슴 젖는다 사금파리에 두 날개 베인다 가시덤불에 다리가 긁힌다 새가 나뭇가지에 앉자 새 그림자도 출렁 부여잡는다 시치미 뚝 떼고 새 발목에 스미는 말끔한 만신창이! 새 그림자는 새가 빛나는 황금 깃을 칠 때에 그저 무채색 손뼉이나 쳐댄다 평화가 하늘 높이 날아 오를 때에 천 길 낭떠러지로 몸을 내던진다 자유가 잡아당기는 고삐에 하염없이 끌려다닌다 아니다, 어쩌면 저 자유의 연줄을 잡고 평화의 얼레를 감고 있는 것은 새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울음도 비명도 없이 시궁과 굴형으로 내닫는 새 그림자가 새의 배후라는 소문이 돈다 새 그림자가 알을 낳는다 그 옆에서 새도 함께 알을 낳는다 어미새가 가슴털을 뽑아 새알을 덮을 때에 새 그림자도 어둠의 깃털로 지은 배내옷 한 벌을 착착 개어 넣는다 한날한시 새와 새 그림자가 함께 부화할 것이다 저것 봐라, 새 그림자가 날고 새가 땅을 쓸며 지나간다 빛보다 환한 그림자의 길!
새해 첫 기적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생명(生命), 그 아름다운 천형(天刑)
반칠환
두꺼비가 물안경 껌벅이며 빗방울을 세고 있다
옛날 저 놈 할애비가 세는 것도 보았다
자자손손- 셈은 흐려도
나는 저 두꺼비들이
영원히 빗방울을 세었으면 좋겠다
추워 소름 돋으면 연잎 우산도 좀 쓰고
그 많던 두꺼비들아
생명이 끝나지 않는 이유
반칠환
그대 눈길 달려오시라
금강변 주막에 도리뱅뱅이 되어 있겠소
그대 겨울 주문진 오시라
해풍에 잘 마른 오징어 되어 있겠소
그대 백년손님으로 오시라
마지막 울음 길게 우는 씨암탉 되어 있겠소
그대 남해 바닷가로 오시라
멸치회 수만 마리 가운데 있겠소
그대 몽골 초원을 달려오시라
발굽에 밟히는 풀이 되겠소
그대 개구쟁이 소년으로 오시라
목이 비틀린 풍뎅이가 되어 있겠소
그대 이쁜 아가 복사꽃 입술로 오시라
선량한 암소의 젖이 되어 있겠소
그대 꽃피는 봄산으로 오시라
손목에 꺾이는 꽃이 되겠소
서울에서 부산까지
반칠환
서울에서 부산까지
노란 실선을 긋는 것이 직업인 그 사내는
보았다
길 왼편의 암컷에게 가지 못하고
길 오른편에서 울부짖고 있는
오소리를, 개구리를, 도마뱀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중앙 분리대를 쌓으며 가던 그 사내는
보았다
생명을 싣고 달리는 바퀴들이
생명을 밟고 다니거나
생명을 내동댕이치기도 하는 것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아스콘을 새로 깔며 가던 그 사내는
들었다
수십 번의 봄이 지나갔으나
잎이 되지 못하고, 줄기가 되지 못하고
웅크려 앓고 있는 씨앗들의 음성을
그 사내 어느 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둘둘둘 아스팔트를 말며 간다
젖은 흙살 위로 쏟아지는 저 붉은 햇살!
사내는 다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무를 심으며 온다
발자욱마다 질경이 돋고
민들레 다시 핀다
꼭꼭 숨어 있던 동물과 곤충들
멸종 도감의 원색 화보를 밀치며
하나씩 둘씩 달려 나온다
소금쟁이
반칠환
뼈 무른 나이에 지게질 배웠죠
눈물 몇 되 땀 몇 섬 흘렸지만
비칠거릴 때마다 소금 한 줌 집어 먹었죠
몸도 마음도 치우치면 덤벙 빠져요
발가락마다 고루 힘주고
지겟작대기 알구지 옴팡지게 짚어야 해요
이제 출렁거리는 냇물비단 위에도
소금짐 지고 거뜬히 서 있게 되었죠
날마다 땀 흘려 일하고
때때로 슬프면 목 놓아 울어요
기쁨은 떠올라 물결이 되고
슬픔은 가라앉아 보석이 되죠
가끔 내가 선 곳이 물인지 하늘인지 모르겠어요
진흙탕인 줄 알았는데 흰 구름 둥실 떠다니죠
낮은 신 신고 있지만 높은 신 함께 걸어요
수평선
반칠환
멸치 한 마리 솟구쳤을 뿐인데
일순 수평선은 수평을 놓친다
수평선은 언제나 수평이 없는 채로 수평이다
시치미
반칠환
저 해 맑은 거짓말 좀 보게나
치악산 능선마다
새똥, 곰똥, 달팽이 오줌
다 씻어 내린 계곡물이
맑다
신과 인간
반칠환
신이 말했다
'나는 천하를 내놓았으나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구나'
인간이 말했다
'나는 우주를 훔쳤으나 숨겨놓을 곳간이 따로 없구나'
싱싱한 질투
반칠환
강연이 끝난 뒤
“새임예.”, 내 손목 끌고 간 아주마이
“내하고 점심 무긋다 말하지 마이소.”
왜 그러냐고 물으니
“늙어도 질투는 안 늙거든예.”
꽉 찬 육 학년 벚꽃이 활짝 웃으며
동전지갑 열 듯 뻘 묻은 꼬막을
숟가락으로 연신 까주는 것이었다
생로병사의 몸에서 불로한다?
갓 오 학년에 진입한 나는
진시황처럼 솔깃해진 입술을
꼬막 주름처럼 모으고 있었다.
아라비카 당산나무
반칠환
우리 동네 카페 아라비카에는 당산나무가 있다. 마을사람들은 그 나무 옆에서 서슴없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남자들은 사업 이야기를, 여자들은 자식 이야기를, 아가씨들은 연애 이야기를, 청년들은 취업 이야기를 한다. 자랑과 걱정이 섞여 있다. 당산나무는 말없이 듣는다. 이야기가 심각하다고 우듬지를 떨거나, 가볍다고 이파리를 찰랑거리지 않는다. 섣불리 공감하거나 위로하는 것은 신목의 금기이다. 사람들은 쏟아놓은 만큼 가벼워져서 돌아간다. 영업이 끝나자 청소를 마친 카페 여사장은 당산나무 발목에 물을 부어주고 퇴근한다. 당산나무는 나이가 많지도 거대하지도 않다. 신탁을 전해주는 부엉이나 다람쥐 조수도 없다. 높푸른 하늘 대신 시멘트 천장이, 불타는 태양 대신 형광등이, 깊푸른 땅속 대신 몇 삽 흙이 담겨진 플라스틱 화분에 뿌리를 담그고 있다. 어른 키 높이의 꼭두서니과 상록관목 코페아 아라비카는 에티오피아가 고향이지만 에티오피아를 전혀 모른다. 여사장이 화분에 던져둔 생두에서 문득 발아하자 떡잎 시절부터 카페 아라비카와 아프리카 대륙의 상징목이 되었다. 당산나무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최선을 다해 내색하지 않는다. 창밖으로 햇볕과 바람과 비가 지나가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나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당산나무에 몇 개의 붉은 열매가 달렸다. 사람들은 상서로운 징조라지만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어, 저 자신도 모르는 슬픔에 충혈된 눈동자를.
어쩌면 내가 잘못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
반칠환
아침 창문을 열지 못할 때가 올 거야
아무도 곁에 없을 때가 올 거야
그리운 이름들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올 거야
살면서 진 빚을 다 갚지 못할 때가 올 거야
벌어서 모은 걸 다 나누지 못할 때가 올 거야
세상이 너를 잊고 나가지 못할 때가 올 거야
네가 세상을 잊고 나가지 못할 때가 올 거야
네가 너 자신마저 까맣게 잊을 때가 올 거야
눈물을 닦으러 네 손이 네 뺨까지 올 수 없을 때가 올 거야
늙어도 한 생의 숙제를 다 풀지 못할 때가 올 거야
울어, 한숨 쉬어, 회한 없으면 영혼도 없어
살은 썩고 뼈는 삭아도 곧 손에 쥐게 될 거야,
한 번도 연기해보지 못한 캄캄하게 새로운 대본을
꽃이 될까 곰이 될까, 걱정 대신 설레어 봐
어떤 기구(祈求)
반칠환
제단에 돼지머리를 바치며 빈다
아무도 아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
어떤 채용 통보
반칠환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 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 뼈 두 개 발목뼈 두 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 넣어
꽃씨 하나 묻어 들고 가겠습니다
어린이날
반칠환
공군 3579부대 기동타격대 반 방위병,
무사히 기지 방어 야간 근무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어,
풍년 전기밥솥 열어 김치에 밥 한 술 혼자 뜨는데,
TV 채널을 돌리니 '오월은 푸르구나 - 우리들은 자란다아 -.'
이쪽으로 돌려도, 저쪽으로 돌려도, '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 '에이 재미없어.'
ON/OFF 스위치를 픽 눌러 끄는데,
'우리 막내둥이 오셨나?'
삽짝문 열고 칠순 노모가 들어오시네.
'마실 다녀오셔유?'
'아니다. 아침에 테리비를 보니까 오늘이 어린이날 아니냐.
우리 막내 뭘 슨물할까 하다가 막걸리 한 병 받아오는 질이다.'
'야? 막걸리를?'
어머니, 빙긋 웃으며 빈 스뎅 그릇을 내미신다.
어머니
반칠환
5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 다니던 산지기 아내
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 바라보신다
칠십 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
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
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
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
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
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
언제나 지는 내기
반칠환
소나무는 바늘 쌈질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 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 구슬을 한 가지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여름 없이 달이 뜬다
여생
반칠환
날개가 해진 잠자리가 가을 하루를 더 날고 있다
알을 슨 방아깨비가 한 나절을 더 풀잎에 앉아 있다
무서리 맞은 호박순이 가으내 담장을 놓지 않고 있다
가을 나비도 다 날았는데 잠시 심장이 더 뛰고 있다
넘어진 택배 맨 오토바이가 부릉부릉 엔진이 멎지 않는다
오천 년의 포옹
반칠환
이탈리아 만바토시 부근 신석기 유허에서 두 남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마가 닿을 듯 마주 누워 네 개의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두 사람의 포옹이 오천 년째라고 밝힌다. 부빌 입술도, 두근거리는 심장도 달아났지만, 오천 년을 속삭여도 처음 듣는 말이 있는지 남자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척추에 꽂힌 화살이 흔들리지만 아픔과 원한 따위 잊은 지 오래. 두개골이 반쯤 무너진 여인은 더 크게 웃고 있다. 천국도, 지옥도, 환생도, 윤회도 관심 없다는 듯 서로 뒤섞인 정강이뼈 차르르- 던져 윷놀이를 하고 있다. 아무리 슬픈 인생이라도 살과 근육과 힘줄만 벗어 버리면 웃지 못 할 해골은 없다는 듯, 걱정 말고 미련 말고 맘껏 살고 오라는 듯, 한 쌍의 주검이 오천 년째 죽음을 홍보하고 있다.
외국 꽃
반칠환
서양금혼초가 봄볕에
앉은걸음으로 노역하고 있다
마이크를 든 정치가가 말한다
외국꽃은 기여한 바가 없다
최저임금을 깎아야 한다
울 밑에 선 봉숭아와
담장 옆 맨드라미와 공원길 코스모스가
깔깔깔 웃고 있다
알고 보면 인도 봉씨,
인도네시아 맨씨,
멕시코 코씨 들이다
외딴 유치원
반칠환
아랫목에 밥 묻어 놨다-
어머니, 품 팔러 새벽이슬 차며 나가시고
막내야, 집 잘 봐라
형, 누나 학교 가고 나면 어린 나 아버지와 집 지키네
산지기 외딴집 여름해 길고,
놀아줄 친구조차 없었지만 나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다네
외양간에 무섭지만 형아 같은 중송아지,
마루 밑에 양은냄빈 왈칵 물어도 내 손은 잘근 씹는 검줄이,
타작 끝난 콩섶으로 들락거리던 복실꼬리 줄다람쥐,
엄마처럼 엉덩이 푸짐한 암탉도 한 마리 있었다네
아아 낯설고 낯설어라, 세상은 한눈 팔 수 없는 곳-
원생은 나 하나뿐인 외딴 유치원, 솔뫼 고개 우리 집
아니 아니, 나 말고도 봄에 한배 내린 병아리 떼가 있었네
그렇지만 다섯살배기 나보다 훨씬 재빠르고 약았다네
병아리 쫓아, 다람쥐 쫓아 텃밭 빠대다보면,
아버지 부르시네
풍으로 떨던 아버지,
마당에 비친 처마 그림자 내다보고 점심 먹자 하시네
해가 높아졌네, 저 해 기울면 엄마가 오시겠지
웃음의 힘
반칠환
넝쿨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웅켜쥔 주먹을 펴라
반칠환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 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들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월식
반칠환
돼지우리 삼은 큰 궤짝 걷어차며
이놈 팔아 나 중핵교나 보내주지
거듭 걷어차던 시째 성 집 나갔다
대처 나간 성들도 소식 없었다
사진틀 끌어안고 눈물짓던 엄마는
묵판 이고 나가다 빙판에 팔 부러졌다
말 없는 니째 성 더욱 말 없고
말 잘하는 누나도 말이 없었다
겨울 바람은 왜 쌀 떨어지고, 옷 떨어지고,
땔감 떨어진 집을 더 좋아하나
연기 솟는 방고래, 흙 쏟아지는 베름짝이
무에 문제냐고 하룻밤 묵어 가잰다
마실 갔다온 엄마가 말씀하신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마실 갈 땐 둥실하던 보름달이
슬슬 줄어들어 그믐처럼 깜깜터니
돌아올 때 그짓말처럼 환하지 않더냐
그게 월식인 줄 대처 나간 성들은 알고 있었을까
얼음보다 더 찬, 멍석보다 더 큰 그믐달이
슬슬 가려주던 우리 집 언젠가
그짓말처럼 환해질 줄 알고 있었을까
유모차와 할머니
반칠환
지하 셋방 혼자 사는 할머니. 유모차 끌고 골목 돌아오신다. 지팡이 짚고 두둠두둠 오던 길 돌돌돌 굴러오신다. 속 깊은 손녀 같은 유모차가 깡마른 어깨 내준다. 왠일로 손주들이 오셨나? 오로로 까꿍 대신 단풍 손바닥 대신 낯선 손주들 까르르 웃음 터트린다. 천원에 세 개짜리 겉늙은 오이 삼 남매가 허리 꼬부리고 웃는다. 앞이마 훤한 장군 애호박이 옹알이한다. 손두부 옆 막걸리 한 병이 출렁출렁 웃는다. 너털웃음 웃던 낮달의 턱이 빠진다. 일용할 손주들 태운 구불구불 할머니 절름절름 가신다. 오물오물 웃으며 자장가 부르신다. 둥개둥개 우리 아기 서울 길로 가다가 암탉한테 채이고 수탉한테 채여서……없는 손주 앞세워 없는 세상으로 가신다. 봄눈처럼 왔다가 가을 서리처럼 가신다. 두부 장수 화물차 딸랑딸랑 마지막 골목으로 들어간다. 숯덩이 같은 그믐밤 요람처럼 흔들린다
은사시나무
반칠환
내가 좌탈하거든 큰오색딱따구리가 날아올 거야. 내 왼쪽 귓구멍에서 귓밥을 퍼내고 알을 낳을 거야. 나는 녀석이 드나들 때 귓바퀴를 활짝 열어젖힐 거야. 비바람이 들이칠 땐 기와층버섯이 처마처럼 막아줄 거야. 내 오른쪽 귓구멍엔 동고비가 진흙으로 입구를 좁히고 새끼를 치겠지. 잔나비걸상버섯엔 달님이 걸터앉았다 갈 거야. 왼쪽 귀에는 알을 뒤집는 큰오색딱따구리 아빠의 부리 소리가, 오른쪽 귀에는 알을 품고 자장가 부르는 동고비 어미 소리가 들리겠지. 나는 점점 가슴이 텅텅 비어가겠지만 알이 깨기 전에는 절대 넘어지지 않을 거야. 내가 좌탈한 지 여러 날 지나 배꼽구멍이 커지면 아마도 하늘다람쥐 가족이 살 거야. 녀석들의 따뜻한 콧수염이 배꼽을 간질이면 단전에 꽉 힘을 주겠지만 장담 못 해. 내가 좌탈한 지 여러 달 지나 포클레인을 새로 산 두더지가 내 엉덩이 밑 땅굴 확장 공사를 한다면 정말 장담 못 해. 배꼽 마개와 방귀 마개가 한꺼번에 뽑힌다면 아무리 해탈한 나도 와르르 웃고 털썩 뀔 수밖에.
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 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이기주의
반칠환
'나는 너, 너는 나 우리는 한몸이란다'
설법을 듣고 난 동승이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내가 스님일 때보다
스님이 나일 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자벌레
반칠환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 정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흩트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영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아륙할 열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살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 느닷업시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지금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매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고 한다.
장미와 찔레
반칠환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장어
반칠환
수족관 장어들이 날렵하게 꿈틀거린다
평생 한 일 자 일획만 긋던 놈들이다
이제 일획도 너무 길어
탁, 탁, 탁
점으로 돌아가리라 한다
마침내 붓마저 버려야 얻는
절체절명의 도마필법을 얻으리라
저마다 설레어 웅성꿈틀거린다
저들이 써 온 일필휘지의 서첩은
고스란히 물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강물에 강물을 찍어서 썼다고 한다
새들이 허공에 허공을 찍어
온몸으로 일획을 남기고 가듯
전쟁광 보호구역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픽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젓국 가게
반칠환
굴젓,
갈치젓,
명란젓,
오징어젓
비린내 가득한 그 옆에 쭈그려
상한 내 마음 한 종지
헐값에 팔고 싶네
제비꽃
반칠환
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주름 농법
반칠환
매끄러운 거울 속에 주름이 산다. 오십 년 화전에 살아남은 눈썹 수풀을 찌푸리자 이마에 끼룩끼룩 갈매기 날고, 미간에 졸졸졸 냇물 흐른다 녹빈홍안 어데 갔노, 손가락 다림질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반백에 늦팔자 핀다더니 돌아가신 어머니 평생 일구던 신전뙈기 상속 찾았구나 무슨 씨앗을 뿌릴까? 오두막 짓고 유기농 직거래를 해볼까? 주름만한 터전이 없구나 큰 처음 신화 속 여신도 산맥의 주름에 산짐승 키우고, 바다의 주름에 물고기 기르고, 논밭의 주름에 곡식 심지 않았던가? 주름에 시름 살지만 시름만한 거름 없으니 주름잡고 늠름하게 살아보자 아가의 주름에 하품이 살고, 청년의 주름에 용기가 살고, 노인의 주름에 지혜가 살지, 여자의 주름엔 문외한이지만 주름뿐인 주름치마에도 신비가 살더군 주름 예찬론자가 되어 소 부릴 것도 없이 갈아놓은 팔자 고랑에 웃음 씨앗을 세 알씩 심으니 한 알은 벌레가 웃고, 한 알은 새가 웃고, 한 알은 내가 웃으련다
주산지 왕버들
반칠환
누군들 젖지 않은 생이 있으랴마는
150년 동안 무릎 밑이 말라본 적이 없습니다
피안은 바로 몇 걸음 밖에서 손짓하는데
나는 평생을 건너도 내 슬픔을
다 건널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은 왜 낙타로 하여금
평생 마른 사막을 걷도록 하시고,
저로 하여금 물의 감옥에 들게 하신 걸까요
젊은 날, 분노는 나의 우듬지를 썩게 했고
절망은 발가락이 문드러지게 했지만,
이제 겨우 사막과 물이 둘이 아님을 압니다
이곳에도 봄이 오면 나는 꽃을 피우고
물새들이 내 어깨에 날아와 앉습니다
이제 피안을 지척에 두고도 오르지 않는 것은
나의 슬픔이 나의 꽃인 걸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즐거운 동티-멸종의 기쁨
반칠환
당산나무를 베고 마을길을 넓혔어. 산을 깎아 산신의 거처를 헐고, 바다를 메워 해신의 궁전을 없앴어.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았어. 별처럼 꽃처럼 많던 신들이 실업자가 되었어. 사람의 땅에는 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어. 얼음 땡! 수만 년 술래였던 빙하가 풀리고, 낮은 자존의 바다가 높아져 뭍으로 넘치고 있어. 투발루 총리가 연설하며 두 발로 힘을 주니 섬 행세 하던 작은 섬이 가라앉고 있어. 목마른 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내리고, 불모의 시베리아 영구동토에 꽃이 피고 있어.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야. 최후의 한 생명까지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군 호모 니르바나스여, 건배!
지킴이의 노래
반칠환
1
하-, 그때가 언제였던가. 풍 맞은 늬 애비와 삼십대 초반의 늬 에미가 머잖아 묵샘에 빠져 죽을 늬 큰성을 앞세우고, 다리가 휘도록 포대기 끈을 조른 갓난쟁이 둘째를 업고 이 솔뫼골 산지기 외딴집에 찾아드는 것을 보았다. 하마 사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다만 회초래기 같은 구렁이 새끼였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늬 에미, 산지기 외딴집에서 등잔불에 그을은 칠남매를 내리 낳을 때마다 산파 대신 손 잡아주던 문고리처럼 늬 집에서 지금껏 머물러 살아왔다.
2
패가망신하여 산지기 동생 오두막 열댓 살 뼈무른 조카 등에 업혀온 늬 큰애비가 풍 맞은 애비보다 먼저 타고 가는 상여를 보았다. 이태 후 그 춥던 겨울, 풍 든 애비마저 숨거둘 때 산발한 에미와 감자알 같던 늬 형제들이 오열할 때도 나는 그저 청뜰 밑에서 점점 예민해져 가는 청각을 곧추고 있을 뿐이었다. 뭍짐승들의 소란스런 울음소리 틈에서도 젊은 암구렁이의 목소리를 가려낼 줄 아는 나이라면 이해하겄는가. 그때 나는 다만 늬 누이 한 줌 머리채만큼 자란 구렁이 총각에 불과했다.
3
인간의 나이 스무 살, 헌걸찬 인물의 늬 큰성이 뇌염에 걸려 맥없이 샘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다. 샘골 그득한 푸른 이내 탓이었을까, 안친 쌀보다 턱없이 큰 무쇠솥을 데우고 나온 저녁연기 탓이었을까. 까닭 없이 코끝을 자극하는 재채기를 털어내듯 나는 그저 음산한 울음을 나직이 풀었을 뿐이다. 그때 나는 제법 지겟작대기만큼 자란 청년 구렁이로 세 번째 허물을 벗었다.
4
내남 없이 주려 넘던 보릿고개었으나 사발입보다도 형제들 목구녕이 턱없이 크게 벌어지던 그 시절, 마른 눈물도 없이 술찌게미를 집어넣던, 새 주둥이처럼 빨간 늬 형제들의 목젖을 보았다. 다만, 보았을 뿐이다. 나로서도 살찐 개구리 만나기가 늬 형제 이밥보기처럼 어려운 시절이었다.
5
그 해, 올도토리가 여물 무렵이었다. 나는 다섯 번째의 허물을 벗었다. 허물을 인간의 눈에 뜨게 하는 것은 구렁이 세계의 금기였으니, 칠칠치 못한 나의 허물은 두고두고 구렁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큰 허물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의 실수는 나를 다른 구렁이의 운명으로부터 갈라놓는 것이기도 했다. 흐물흐물 내 근육의 틀림대로 양껏 부푼 내 허물은 실제 몸보다 크게 보였을 터, 마당을 쓸던 누이를 보고 에미가 말했다. '두거라. 이거는 아마도 우리 집 업이 틀림없다.'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에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경건했다. 그 목소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6
나는 곧 이 집으로부터 나직하고 경건하게 불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함을 눈치챘고, 열심히 그 나직하고 경건한 존재의 행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오래잖아 나는 그것이 이 집안의 길흉화복을 당기고, 물리치는 가신(家神)의 역할임을 깨달았다. 나직하고 경건한 존재의 다른 이름이 지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7
늬 에미는 억척스럽고 총명했으며, 형제들은 착하고 똑똑했다. 이것은 나, 지킴이의 말이 아니라 동리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다. 큰성이 명문 중학교에 붙자, 둘째 성과 시째 성이 우등상을 타왔으며, 누이는 글짓기 상을 타고 에미는 장한 어머니 상을 타왔다. 부끄럽지만 큰애비와 애비의 죽음도, 발가락 움이 돋는 양말의 가난도 내 탓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모두 내 탓은 아니다.
8
지킴이가 된 나는 연애도 잊고 이 집에 '내 탓'을 얹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난했으나 스스로 꿈을 세울 줄 알았고, 꿈을 세웠으나 꿈을 위해 남과 다투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나야말로 이 집에서 가장 가난한 지킴이였다.
9
너 막내의 수염이 거뭇해지자 머리 큰 성들은 명절마다 수군거렸다. '도시로 가자!' 나는 찬피동물의 속성도 잊어버린 듯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필시 이 이농 계획은 나를 빼놓은 구상이 틀림없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도시의 아파트에 깃들어 사는 지킴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10
늬 가족이 도시로 떠나던 날, 나는 아침 일찍 슬그머니 건너말 송골로 가서 이삿짐을 옮기는 너희 가족을 보았다. 나직이 울었으나 늬 가족이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관절 빈집을 지켜야 하는 지킴이란 무엇인가. 그해 가을, 겨울잠 준비도 잊고 가으내 굶었다.
11
가끔 소식을 듣기는 했다. 첫째가 장가가고, 둘째가 장가가고, 셋째가, 마침내 너 막내마저 장가갔다는. 형제들 모두 메추라기 흩어지듯 분가해버리자 어지간히 늙은 나는 또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제 첫째네 지킴이가 될 것인가, 둘째네 지킴이가 될 것인가. 그러나 곧 깨달았지. 모두 도시 속에 자리 잡은 그 어느 곳도 내가 갈 곳이 아님을.
12
늬 가족 떠난 지 십몇 년, 마당과 청뜰엔 잡초 무성코, 방마다 들쥐들이 쑤알거리는 빈집이지만 아직도 이 집안엔 늬들은 잊어버린 늬 형제들이 살고 있다. 성들은 부산하게 책가방을 싸고, 오늘도 짱아찌 반찬에 보리밥 도시락을 싸는 에미와 빈집 지키며 처마 그림자를 재는 막둥이가 이토록 선명하거늘, 나는 언제까지나 이들의 유년의 꿈에 귀 기울이며, '내 탓'을 얹기를 희망할 것이다. 어쩌면 오래잖아 이 집을 찾은 형제들 중 하나는 다시는 보지 못할 내 마지막 허물을 집어 들고 나직하고 경건하게 중얼거릴 것이다. '아아, 이것은 우리 집 업이었지'라고.
지퍼와 단추
반칠환
지퍼는 오늘도 이 악물고 살자 하고,
단추는 오늘도 목매러 가자 한다
참새와 홍매
반칠환
어린 날, 신열에 들떠
무서운 곳 헤매다 눈 떴을 때
작은 이마에 얹혀 있던
따뜻한 무게 알고말고
저 꽃나무들, 삼동을
언 꿈 꾸다 문득 눈 떴을 때
가지마다 얹혀 있던
작은 무게 알고말고
겨우내 맥 짚어준 것밖에 없다고
포릉포릉 날아가니
붉은 목젖 다 드러나도록
출렁출렁 되부르네
킬리만자로의 표범
반칠환
사냥도 잘하는 하이에나가 왜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겠는가.
어떤 표범이 나라 잃은 선비처럼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죽겠는가.
하이에나가 갖지 않은 하이에나
표범이 갖지 않은 표범 정신아.
만년 설산이 제 김에 녹겠는가.
셰르파의 주검과 플라스틱아.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진다면 운동이나 명상을 하라.
진실로 귀뚜라미를 사랑한다면,
네가 산 흔적을 남기지 마라.
정말로 라일락을 사랑한다면,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져라.
네가 살고 있는 걸 이십일 세기가
간절히 원했다고 생각해도 좋으나
80억 과대망상과 함께 사는 생명들은
간절히도 생각이 다른 것 같다.
통째로
반칠환
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팔자
반칠환
나비는 날개가 젤루 무겁고
공룡은 다리가 젤루 무겁고
시인은 펜이 젤루 무겁고
건달은 빈 등이 젤루 무겁다
경이롭잖은가
저마다 가장 무거운 걸
젤루 잘 휘두르니
포장육의 가계사
반칠환
자네 선조는 신이었다지. 반신반수 반인반수 사람과 동물과 신이 섞여 구분되지 않았다지. 할아버지 때는 메신저였다지. 불타는 제단에 올라 인간의 목마른 꿈을 먹구름 너머 전해 주었다지. 아버지 때만 해도 인간의 친구였다지. 목동이 등을 타고 피리를 불었다지. 삼촌 때 인간의 머슴이 되었다지. 한평생 무거운 짐수레 끌고 자갈밭을 갈았다지. 아직도 자네 모친은 인간의 유모라지.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그 젖 먹고 자란다지. 위대한 가문의 후예인 자네는 어찌 된 일인가. 멋진 뿔과 두릿한 눈과 윤기 나는 털은 어디 두고 오셨나. 발굽은커녕 목방울 소리도 없이 선홍빛 마블링으로 오셨나. 무에 그리 바빠 삼십 년 긴 들판 두고 이십사개월령으로 오셨나. 도끼질도 칼질도 한 일 없으니 미안할 거 없다고? 뼈 시린 냉동고에서 오셨으니 지글지글 불판 아랫목 그립다고? 잘 구워진 안심 한 점 싱싱한 상추 수의 입는다. 풋고추와 마늘 부장품 데려간다. 질척한 어금니 화장터 지나 삼시 세끼 바쁜 혓바닥 장의차 타고 아리랑 목젖 넘는다. 꿀꺽~ 명치 아래 천하명당에 소무덤 봉분 불러온다. 버클 상석 풀어헤치고, 노련한 장의사들이 불판 앞에 마주 앉아 소주를 따르고 노래를 부른다.
풋감
반칠환
입술이 달개비처럼 파랬지
쌔근거리며 열 걸음마다 주저앉았지
뻐꾸기 같은 아이들 둘러앉아
침 뱉고 모래 뿌리면
눈물 훔치던 네 손톱도 파랬지
감꽃 빠질 때 너도 떠났지
가지마다 파랗게 돋던 심장 보았지
장맛비에 툭툭 떨어지면
무심히 채여 뭉크러졌지
사십 년 전 그 일 이젠 아무도 모르지
하나님보살마하살
반칠환
고향 친구가 휴대폰으로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아이구, 나이가 들어갖고 오늘도 모르고, 내일도 모르고, 시간가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한테 좋은 말씀 들을라구 아무리 정신을 써도 맨날 잊어버린께 명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걸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관세음보살.”
평생 다니던 절 대신 아들 며느리 따라 교회 나가신다는 친구 어머니였습니다. 장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보고 또 보다가, 문득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팔순의 어머니는 오늘도 모르고 내일도 모르신다지만 하나님과 관세음보살이 하나이던 믿음의 본디 거처를 알고 계신 듯했습니다.
한 걸음
반칠환
드물게 나무 아래 내려온 늘보가
땅이 꺼질세라 뒷발을 들어 앞으로 떼놓는다
나뭇잎에 앉아 있던 자벌레가 활처럼 굽은 허릴 펴
삐죽 앞으로 나앉는다
맹수에 쫓긴 토끼가 깡총 뛰어오른다
버섯 조각을 입에 문 개미가 쏜살같이 내닫는다
첫돌 지난 아기가 뒤뚱거린다
보폭은 다르지만 모두 한 걸음이다
한평생
반칠환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도 미뤄 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도 미뤄 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그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한 해를 보내며
반칠환
한 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발을 씻는 사람들아
그 여름의 뙤약볕과 큰물과
바람을 모두 건넜느냐
휩쓸고 몰아치던 그 길
무릎걸음으로 걸어온 이들 한두 사람뿐이랴
한 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이마를 훔치는 사람들아
올해도 세상의 한쪽에 빛이 드는 동안
세상의 다른 쪽에는 그늘이 드리웠더냐
여기서 빛이 드는 동안 세상의 다른 쪽에는 그늘이 드리웠더냐
여기서 벚꽃이 피는 동안, 저기서 목숨 지는 소리를 들었느냐
어떤 이는 사랑을 잃고 울며, 어떤 이는 사람을 잃고 울더냐
한 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땀을 닦는 사람들아
그 더운 땀방울로 하여
어떤 이는 열매를 얻고
어떤 이는 줄기를 얻었지만
어떤 이는 그저 땀방울뿐이더냐
한 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눈시울 붉은 사람들아
느리게 이울고 있는 태양의 어깨를 보았느냐
세상을 다 비춘 다음
제 동공에 넘치는 눈물로
저를 씻고 있는 것을 보았느냐
한 해의 노을이 내리는 저녁 강가에서
돌아보는 사람들아
올해도 잠깐의 평화와 긴 불화가 깃들었더냐
그러나 살아서 평화, 살아서 불화
저 강물들은 어떤 평화에도 오래 쉬지 않고
어떤 불화에도 저를 다 내어주지는 않나니
한 해의 노을을 밟고 돌아오는 사람들아
내일은 또 새가 울고, 꽃들은 피리라
비바람 몰아치고 파도는 높으리라
그러나 살아서 꽃, 살아서 파도
우리 모두 오늘에 온 것처럼 내일에 또 닿을 것이니
사람들이여, 새 길을 가기 위해 오늘 모든 길을 멈추자
해일
반칠환
달의 인력이 아니라
물고기들이 울어서 넘치는 것이다
발목이 젖는 게 두려운 사람들아
제 눈물에 저를 담그고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라
조석간만이 아니라
바다가 울어서 넘치는 것이다
세상의 눈물 콧물 다 훔쳐주던 억척어멈도
한번쯤 제 슬픔에 겨워 넘치는 것이다
뭇 생명들이 처음 태어난 곳도 저 눈물 속이었다
호두나무
반칠환
쭈글쭈글 탱글탱글
한 손에 두 개가 다 잡히네?
수줍은 새댁이 양 볼에 불을 지핀다
호도 과자는 정말 호도를 빼닮았다
호도 나무 가로수 하(下) 칠십 년 기찻길
칙칙폭폭, 덜렁덜렁
호도 과자 먹다 보면 먼 길도 가까웁다
호랑이 잣 까먹는
반칠환
한반도에서 은퇴한 시베리아 호랑이는
시호테알린산맥에서 잣나무 연금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끝없이 펼쳐진 잣나무 순림이
마지막 호랑이들을 먹여 살리고 있단다
‘호랑이가 잣을 먹는다고?’
‘담배 끊은 곰방대로 잣방울을 두들긴다?’
나도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지
잣나무 숲에 고소한 잣이 쏟아지면,
멧돼지들이 간다, 사슴 무리가 간다
호랑이가 소리 없이 뒤좇는다
호수의 손금
반칠환
얼음호수가 쩌엉 쩡 금간
손바닥을 펴보이자
수십 마리 오리들이 와글와글
엉터리 수상을 본다
걱정 말우
봄부터는 운수 풀리겠수
쩌억 쩍 얼음에 달라붙는
제 물갈퀴 발금의 시린 소망이겠지
확인 못한 이야기들
반칠환
참외밭
누나, 누나, 여기 누가 참외 따갔네? 꼭지만 남았어.
아, 그거! 아마 고슴도치가 따갔나보다. 너, 고슴도치가 왜
밤송이처럼 가시가 돋쳤는지 모르지? 이빨로 참외꼭질 갉아서
똑 뗀 담에 등가시로 콕 찍어서 짊어지고 엉금엉금 기어간단다.
증말이야?
뒤란에 다람쥐
성, 니째 성, 나 다람쥐 한 마리만 잡아 주면 얽으미에 넣고 키우지.
임마, 다람쥐를 어뜨케 잡냐. 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다.
장독대 뒤에, 밤나무 밑에 다람쥐 많지? 다람쥐가 밤 줏어 먹느라
정신 없을 때 갑자기 바람 불면 알밤이 떨어져 가끔 다람쥐들이
뒤통수 맞고 기절한다더라. 알밤 맞은 다람쥐 보면
내 주워서 너 주지. 너도 바람 불 때 잘 봐라?
..............알았어!
꿩동산
꿔어꿔꿔 - 엉 -
아부지, 꿩괴기가 닭고기보다 맛있나?
그으럼, 열이 먹다 아홉이 죽어도 모른단다.
아부지 그러면 꿩 좀 잡아오지.
니가 좀 잡아서 아부지 꿩괴기 맛좀 보여주거라.
에이, 내가 어떻게 잡아.
꿩 잡는 건 어렵잖다. 장끼 두 마리가 싸우기 시작하면
한 놈이 죽어야 끝나거든. 넌 가만히 쌈 구경하고 있다가
죽은 놈 한 마리 줏어오면 아부지가 구워주지.
으응............ 근데 어디서 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