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땅 4-1
4권
출정 전야
5월의 이른 아침이었다. 아침 운동을 끝낸 고영무는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네
바다의 특수훈련장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가 되는 날이다. 바닷바람이 얼굴에 와 닿았고 가슴 가득히 신선한 공기가 들어차고 있다.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의 고된 훈련이었으나 42명의 대원 중 낙오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스무 살에서 마흔다섯 살까지의 다양한 체격조건과 연령, 그리고 교육수준과 기능의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훈련본부 측은 그룹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훈련을 시켰는데 정보 연락 조직과 행동 조직이었다. 정보 연락 조직은 삼사십 대의 장년들이었고 행동 조직은 이십대가 대부분이어서 훈련의 방법이 달랐다. 땀에 젖었던 얼굴의 피부를 바람이 시원하게 훑고 지나가자 고영무는 만족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아직 아침 해가 뜨려면 30분쯤 지나야 할 것이다.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보스, 전화가 왔습니다."
무선전화기를 손에 쥔 산토스가 그의 앞에 서 있다.
"앨버트씨인데요."
고영무는 잠자코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앨버트가 두 번 찾아왔었다. LA에서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앨버트와 지미 두 사람밖에 없다.
"앨버트, 무슨 일이오? 아침 일찍부터."
전화기를 잡은 고영무가 대뜸 물었다.
"이 시간이면 운동을 마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고."
그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첩보위성이라도 띄우고 있는 모양이군."
"부하들은 모두 휴가를 보냈나?"
"닷새간 휴가를 주었으니까 사흘 후면 돌아올 거요."
"일주일 후로 결정이 되었어. 놈들, 휴가 잘 보낸 거야."
고영무는 머리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산토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족이 콜롬비아에 있었으므료 돌아갈 집이 없어 휴가를 가지 않았다.
"점심때 클리프들 카페 옆의 안드례아라는 조그만 식당이 있는데 거기서 식사나 같이 하지."
"알았습니다, 앨버트."
전화기를 건네주자 산토스가 물었다.
"보스, 커피 더 드릴까요?"
"됐어, 산토스. 그런데 네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칼리 근처입니다, 보스. 저는 강가의 조그만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검은 눈이 고영무를 쪽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브루노의 추천으로 고영무의 부하가 되었는데, 나이는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영어가 유창하고 체격이 건장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밀항선을 타고 LA에 도착하여 2년 동안 갖은 일을 다한 모양이었다. 입이 무거운 산토스는 묻는 말 이외에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고영무의 마음에 들었다.
"고향에 가족이 있나?"
고영무가 묻자 그는 눈을 깜박였으나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보스,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가족이 있는지는. 제가 떠나올 때만 해도 어머니가 동생들과 함께 집에 계셨지요."
"아버지는 정부군의 소령이었습니다. 라파엘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카스틸로의 부하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고영무가 잠자코 있자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더 이상 말을 하기 싫다는 몸짓으로도 보였다.
"브루노를 불러와."
"알았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본채의 입구로 다가왔다.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고영무는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뒤쪽에서 희미하게 태양의 빛살이 드러나고 있었으므로 바다 색깔이 검푸른 빛에서 점점 옅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출렁거리는 파도의 끝이 가끔씩책 빛을 잡아 반짝이고 있다. 산토스의 아버지는 아마 처형당했을 것이고 그의 가족들은 반역자의 가족으로 몰려 추방을 당했든가 수용소에 구금되었을 것이다. 브루노나 짐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보다 더한 참상들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보스, 부르셨습니까?"
브루노가 다가와 물었으므로 그는 몸을 돌렸다. 네바다에서 있은 훈련으로 그의 검은 얼굴이 더욱 검어졌고 몸짓은 생기에 차 있었다.
"브루노, 짐은 집에 가 있나?"
"네, 보스. 집에 있습니다."
브루노는 그의 앞쪽 자리에 앉았다. 짐 버클리는 이민 온 지 15년이 되었다. 두 남매였는데, 그는 이름도 미카엘에서 미국식 이름인 짐으로 바꾸고는 이쪽 생활에 적응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민선 대통령이었던 라파엘이 카스틸로의 쿠데타로 밀려나자 LA에서 가장 적극적인 카스털로의 배척자가 되었던 것이다. 5년 전에 밀항해 와서 이제 겨우 영주권을 얻고 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 브루노는 나이가 사십 대 초반으로 비슷했으나 경력도 환경도 모두 달랐다. 만나면 언제나 다투지만 그들 둘은 조화를 이루는 단짝이었다. 짐이 사려가 깊다면 브루노는 성격이 급했다. 이번 훈련에서 짐은 정보업무를 맡게 되었고, 브루노는 기계를 잘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히 최대광, 신용만과 함께 행동 조직의 리더가 되었다.
"짐에게 연락해서 오늘까지 휴가를 마치라고 해. 간부급들만이야. 간부급들은 내일 아침에 모두 모이도록!"
"알았습니다, 보스."
"최나 신에게도 이야기하고."
"네, 보스. 그럼 날짜가 정해진 모양이군요?"
"일주일 후야."
브루노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얼굴의 잿빛 눈이 긴장한 듯 잔뜩 좁혀져 있었다.
눈을 뜬 최대광은 머리를 돌려 옆에 누운 홍성희를 바라보았다. 홍성희는 머리칼을 볼 위로 늘어뜨린 채 입술을 조금 벌린 얼굴로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코에 닿자 멜론에 살구를 섞은 것 같은 입 냄새가 맡아졌다. 최대광이 침대를 짚고 상체를 세우자 시트가 벗겨지면서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흠 한 점 없는 매끈한 피부였고, 침대에 닿은 젖가슴은 누르면 손가락이 튕겨 나갈 것처럼 탄력이 있어 보였다. 홍성희가 눈을 떴다. 초점을 잡으려는 듯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일어났어요?"
그녀의 팔이 뻗어 나와 그의 허리를 안았다.
"지금 몇 시예요?"
"6시야."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는군요."
"버릇이 되어서 그래 ,"
"여행 다니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드는 모양이네."
그녀가 얼굴을 그의 하반신에 붙여 왔으므로 최대광은 얼떨결에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쥐었다. 홍성희한테는 두 달 동안 미국의 각 지역을 사업관계 차 돌아다닌다고 말해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전화를 했지만 그녀는 미국에 있으면서 두 달 동안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이 서운하고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룸살롱은 이제 돈 자랑하고 싶어 하는 한국인이나 미국인들은 물론 한국에서 출장 온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곳이 되어 있었다. 사내들은 엄청난 술값을 호기 있게 지불하고 백 달러짜리를 팁으로 뿌렸는데 홍성희에게 치근대는 사내들이 자주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던 홍성희는 최대광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화를 내었다. 어젯밤에도 그것을 가지고 앙탈을 부리다가 최대광과의 격렬한 정사를 끝내고 나서야 만족한 듯 잠이 든 홍성희였다.
"참, 며칠 전에 지미씨가 다녀갔어요. 홀에서 위스키 몇 잔만 마시고 갔는데"
그의 하체에서 얼굴을 든 홍성희가 말했다.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뭐하러 왔는데?"
시트로 하반신을 가린 최대광이 묻자 그녀는 다시 시트를 걷었다.
"그냥 놀러 온 모양이던데, 그 사람 FBI요?"
"글쎄."
지미 골드는 힐튼 호텔에 묵고 있던 김종무를 잡아다가 며칠간 가두어 두었는데, 김종무는 단단히 혼이 났는지 마약부에서 풀려 나오자마자 귀국해 버렸다. 최대광은 그가 미국에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홍성희는 다시 그의 하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쓸던 최대광은 이윽고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뒤로 젖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받지 말아요."
얼굴을 든 홍성희가 말했다. 붉어진 얼굴에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최대광은 팔을 뻗어 수화기를 쥐었다.
"여보세요."
"나다."
신용만의 목소리였다.
"내일 아침까지 소집이야. 간부급들만. 그런 줄 알고 실컷 파."
홍성희가 자극을 주었으므로 최대광은 움찔 하체를 떨었다.
"야, 인마. 알아들었어?"
"알았어."
"너 ‥‥‥‥"
그러는데 최대광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침대 위로 거칠게 누였다. 홍성희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 눈의 초점은 다시 풀려 가고 었었다.
신용만이 룸살롱 희에 들어섰을 때는 오전 11시가 되었을 때였다. 점심시간의 식사 손님을 받으려고 종업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홍성희는 보이지 않았다. 최대광과 함께 아직도 침대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셨어요?"
안쪽에서 다가오면서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여자가 있다. 이은영이었다.
"아직 나오지 않으셨는데, 조금 있으면 나오실 거예요."
신용만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바쁘시다면 제가 연락을 할까요?"
"아니, 바쁘지 않습니다."
"차 드릴까요? 아니면 가벼운 술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본 신용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맥주를 주세요."
이은영이 몸을 돌려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용만이 머리를 돌렸다. 고영무가 시내에 나가는 길에 같이 나온 것이었지 특별한 용무는 없었다. 그는 룸살롱 회에 들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홍성희는 물론 최대광까지 이은영과 자신이 가까워지는 것을 은근히 바라는 눈치를 보인다. 그리고 이은영도 그것을 싫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머리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최대광이 나타나면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맥주와 마른안주를 쟁반에 받쳐 들고 이은영이 다가왔다.
"두 달 동안 여행을 다니셔서 그런지 얼굴이 야위신 것 같아요."
탁자 위에 술과 안주를 벌려 놓은 이은영이 그의 앞자리에 앉아 잔에 술을 채웠다.
"힘드셨던 모양이죠?"
"네, 조금."
"최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전화를 주시데요. 부러웠어요."
"왜, 이은영씨는 남자친구 없습니까?"
"있어요.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신용만은 술잔을 들고 두어 모금 마셨다. 최대광은 홍성희에게만 전화하는 게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고향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배차장에서 아직도 근무하고 있는 금옥이에게도 전화를 했다.
"신선생님은 친구 있어요? 여자친구."
이은영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여자친구뿐만이 아니라 남자친구도 최대광 하나뿐이라는 것은 최대광이 홍성희에게, 그리고 다시 이은영에게 전달되었을 터였다.
"네, 있습니다. 고향에."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자 이은영이 시선을 내렸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은영씨보다 미인은 아니지만,"
"초청하시지 그러세요? 미국에 오래 계실 거면."
"그럴 입장이 못 됩니다."
잠자코 앉아 있던 이은영이 옆쪽에 놓여 있던 잔을 앞에 놓고는 맥주를 채웠다.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언니가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요."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눈이 가늘어지면서 입술 끝이 양쪽으로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겪어 왔던 한국 남자나 미국 친구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남자였어요, 신용만씨는."
"어딘가 무겁고 무서웠어요, 첫인상이 차갑기도 하고."
"나는 어떻게 보이는가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한테서 그런 말 듣는 것도 거북하고."
잠자코 신용만을 바라보던 이은영이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귀찮으신 모양이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제가 일어날게요."
그녀가 돌아서서 다시 주방 쪽으로 향했으므로 신용만은 술잔을 들었다. 이른 점심 손님들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고 홀 안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주방 쪽에 있던 이은영이 그를 지나쳐 카운터로 다가가는 것을 본 신용만은 자리에서 일어셨다.
"아니, 가시게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같이 오실 텐데. 어제도 그랬지만 점심은 여기서 잡수시거든요."
이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신용만이 머리를 저었다.
"그냥 들러 본 거예요. 아침에 전화를 했어요. 그럼."
"자주 들르세요. 시간 있으실 때."
신용만이 현관을 나서자 이은영은 쥐고 있던 볼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왜 쥐었는지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시간에 고영무는 안드레아 식당에서 앨버트 존슨과 마주 앉아 있었다. 조그만 식당이었으나 모두 예약 손님인 듯 빈 테이블 위에는 하나같이 예약표시가 되어 있었다.
"고, 자네는 콜롬비아에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야. 카를로스 정권이 자네를 잡으면 당장에 처형할 거네."
앨버트가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으로 쥐고 식탁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이 일은 드러내놓고 시작할 일이 아니지만 자네는 행동에 신경을 써야 돼."
"앨버트, 내가 그런 혐의자이기 때문에 당신들이 나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고 하던데."
"지미 그놈은 입이 너무 가벼워."
앨버트가 입맛을 다시고는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잘랐다.
"쓸데없이 주가를 올려놓는단 말이야."
미국개입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그들로서는 고영무의 범죄사실이 클수록 작전의 당위성이 커질 것이다. 콜롬비아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한국인이 카스틸로를 제거하는 라파엘 측의 용병을 지휘하게 된다는 것이 각본이다. 그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한국으로도 귀국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라파엘 측의 용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곧 작전 계획서를 받게 되겠지만 보고타에 도착해서는 자네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없네."
고영무는 끄덕이며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는 그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쪽은 콜롬비아인이 아니므로 최악의 경우 카스틸로 측에 붙어 배신을 할 수도 없다. 더욱이 범죄자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네바다에서 훈련시킨 부하들이 철저한 암살과 테러 훈련을 받았지만 훈련장 어디에서도 미국 정부가 개입하고 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교관들은 군복을 착용하지도 않았고 훈련장은 사막에 급조된 것이었다. 교관들은 고영무가 마치 보수를 주고 고용한 것처럼 만들었는데 그것은 만약을 위한 미국 측의 철저한 계산이었다. 부하들이 잡혀 고문을 당하더라도 본 것만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브루노나 짐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들이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과정이야 어떻든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자네들은 일주일 후에 화물선을 타고 부에나벤투라로 가게 돼. 그곳에서 칼리가 가깝고 보고타도 마찬가지야. 부에나벤투라에 내리면 베니토라는 안내자를 만날 거야. 그 친구가 안내를 할 거네. 그리고 연락업무도 맡을 것이고."
앨버트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베니토는 CIA 요원이야. 어쩔 수 없이 CIA의 워렌에게 이야기를 해야만 했어. 하지만 이 일은 워렌과 베니토 외에는 CIA 내부에서도 비밀에 부치기로 했으니까‥‥‥‥"
"베니토는 콜롬비아인이지. 현지 CIA요원이라고 할까? 워렌이 신임하는 부하인 모양이야."
"안내인이 필요했는데 잘되었어요, 앨버트. 물론 우리 측에도 지리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지만 콜롬비아를 떠난 지가 꽤 오래되어서."
"작전의 지휘는 자네야, 고. 그것만 알면 돼."
앨버트가 빙그레 웃었으나 고영무는 그를 바라본 채 따라 웃지 않았다. 앨버트와 헤어진 고영무가 빌트모어 호텔의 라운지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3시가 되어 있었다. 입구에 서서 안쪽을 둘러보던 그는 곧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박정환을 보았다.
"야, 여행 다녀왔다더니 얼굴이 까맣게 됐구나. 바닷가에서 즐긴 것 같은데?"
다가온 고영무를 향해 그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고영무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박정환을 만나면 그의 밝은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젖어드는 것이다.
"그래, 회사일은 잘 되어 가냐?"
고영무가 묻자 그는 금방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말도 마. 두어 달 동안 실적이 안 올라서 미치겠어. 회사에서는 눈치가 보이고."
박정환은 파견 기간이 끝나자 미국에서의 실적을 인정받아 LA 지사 발령을 받고 눌러있게 되었다. 운이 좋은 셈이었다.
"그래도 제 갈 길 변하지 않고 곧장 가는 네가 부럽다."
고영무의 말에 박정환이 머리를 저었다.
"그건 모르는 소리야. 용기가 없어서 뛰쳐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
"자식아, 뛰쳐나오는 사람은 모두 용기 있는 사람이 나처럼 도망다니는 사람을 봐."
"네가 어디 도망을 다녀? 널 잡으려고도 하지 않는데,"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주문을 하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 네 애인은 잘 있어? 서울에서 왔다는 여자."
고영무가 묻자 박정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서울 갔는데 곧 올 거야."
"결혼할 작정이냐?"
"글쎄, 그것이"
"왜? 무슨 일이 있어?"
"아니, 별일 아냐. 여자 측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그래. 그래서 한국에 간 거야."
머리를 끄덕인 고영무가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꺼내어 그의 앞에 밀어 놓았다.
"이거 받아 넣어라."
"이게 뭔데?"
"바하마 은행의 구좌번호야. 전에 너에게 신세 입은 것도 있고 해서 네 결혼축의금으로 입금시켜 봤어. 받아 주면 고맙겠다."
"야, 거창하게 이게 뭐야? 현금으로 줘 버리지,"
고영무가 빙그레 웃었다.
"얼만데?"
궁금한 듯 종이쪽지를 집어 들여다보면서 박정환이 물었다.
"그건 나중에 확인해 봐. 내가 당분간 또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어디로 말이야?"
"이곳저곳."
고영무는 박정환을 향해 밝게 웃었다.
밀리카는 머리를 들어 먼 쪽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위쪽으로 지는 태양이 걸려 있었는데 바다의 물결이 불꽃을 뿌린 것처럼 빛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래쪽의 백사장 위를 서너 명의 아이들이 가로질러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잿빛 털을 가진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아이들 주위를 맴돌다가 저만큼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이 부근에 사는 아이들인 모양이었다. 이곳은 파도가 높지 않을 뿐 아니라 백사장이 넓지도 않은 바닷가여서 근처의 주민들만 간혹 바닷가에 나을 뿐 서핑족이나 피서객들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다. LA의 훨씬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 마을로 옮겨온 지 벌써 두 달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주변의 부하들이 지난번 집행자들에게 대부분 살해당했으므로 이쪽 저택에 살고 있는 것은 페르난도와 부하인 프란시스, 그리고 밀리카 세 사람뿐이었다. 옆쪽의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페르난도가 다가왔다.
"밀리카, 고영무가 돌아온 모양이다. 시내에 나갔다 온 프란시스가 소문을 들었다는구나."
밀리카가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라파엘의 일을 하는 및 놈들도 다시 나타났다는데 함께 여행을 다녀온 모양이야."
페르난도가 대답이 없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페르난도가 머리를 돌렸다.
"네 기분은 알아, 밀리카. 어쩌면 오빠인 나보다 네가 더 강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페르난도, 난 잊지 않고 있을 뿐이에요. 그놈한테 구차한 목숨을 건졌다고 그 일을 잊을 수는 없어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밀리카가 말했다.
"이제 우리가 그놈에게 복수할 힘을 잃었다고 포기할 수도 없구요."
"자신을 망치는 일이야, 밀리카."
페르난도는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너와 나의 비중을 따지는 건 우습지만, 난 남자로서의 모든 것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놈에게 목숨을 구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너는 내가 살고 있는 것마저 부끄럽게 만든다."
"페르난도, 포기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저는 그것이 살아가는 데 힘을 준다고 믿어요."
"아니다, 밀리카."
페르난도가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능력이 닿지 않는 욕심은 그 사람을 더욱 좌절시키는 거다. 난 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잊게 될 줄 알았다."
"오빠는 날 위로해 잊게 만들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어요."
밀리카의 눈이 물기에 젖어 가는 것을 바라본 페르난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돌렸다.
"페르난도, 나는 오빠가 그럴수록 가여워요. 자꾸 잊었다고 말할수록, 자꾸 다른 이야기를 할수록. 오빠가 TV를 보면서 웃는 것을 보면 죽이고 싶다가도 안아 주고 싶어요. 난 오빠를 위해서라도 놈에게 복수를 할 거예요."
페르난도는 바다 쪽을 바라본 채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이제까지 고영무의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 금기로 되어 있었다. 가르시아 등으로부터 처형당하려는 순간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해 받고는 고영무의 일당을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시체가 즐비한 그쪽 저택을 그날 밤 뛰쳐 나와 이쪽으로 옮겨야만 했고 그때부터 은둔 생활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밀리카."
가라앉은 목소리로 페르난도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럴수록 내가 비참해진다는 걸 아니? 난 이제‥‥‥‥"
밀리카가 머리를 들어 페르난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카를로스의 공공연한 배신자가 되었다. 카를로스는 그를 처형한 사람에게 백만 달러를 주겠다는 현상금까지 걸어 놓았다. 카를로스는 페르난도가 집행자인 가르시아 일당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콜롬비아의 세 개의 조직 모두로부터 쫓기는 몸이 되었다. 카스틸로 정권이나 라파엘의 세력들도 그를 잡아 카를로스에게 호의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페르난도, 전 결심했어요."
이윽고 밀리카가 입을 열었다.
"오빠는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절 말리지는 마세요."
페르난도는 그녀를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앉았다.
회의를 마친 고영무가 2층의 서재에서 내려오자 산토스가 다가왔다.
"보스, 정문 앞에서 웬 여자가 보스를 찾습니다."
"누구야?"
그렇게 물은 것은 함께 내려온 신용만이다. 산토스가 머리를 한쪽으로 누였다.
"밀리카라고 했습니다. 보스를 잘 안다고."
"밀리카?"
신용만이 고영무를 돌아보았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이름이다. 한동안 산토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들여보내라, 산토스. 그렇지, 바깥 테라스로 안내하도록."
"형님, 누굽니까?"
신용만이 묻자 고영무가 입술 끝으로 웃었다.
"페르난도의 동생이다. 너도 그날 밤에 보았지?"
"아, 그 여자."
그러고는 신용만이 다시 찬찬히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형님, 저도 함께 있을까요?"
그가 묻자 고영무는 머리를 저었다.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온 모양이다. 그런 인사는 나 혼자 받겠다."
"그럴 리가요? 여자치고는 대담한 것 같습니다. 혹시 뭐라도 숨겨온다면."
고영무가 웃으며 몸을 돌렸으므로 신용만은 입맛을 다셨다. 옆쪽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간 고영무는 정문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다가오는 밀리카를 보았다. 산토스와 나란히 걸어오던 밀리카는 그를 바라보았으나 얼굴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옅은 회색 투피스 차림인 그녀의 곧은 몸매를 바라보던 고영무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모시고 왔습니다, 보스."
산토스가 다가와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는 몸짓으로 고영무 앞쪽에 놓인 의자를 잡았다. 힐끗 산토스를 바라본 밀리카가 자리에 앉았다.
"차를 드릴까요?"
그들의 중간 부근에 시선을 준 산토스가 물었다.
"그래, 커피 둘을 가져와."
산토스가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이렇게 찾아오다니 뜻밖이군."
고영무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밀리카."
"당신 옆에 있고 싶어서 왔어요."
밀리카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내 옆에서 나를 죽이려고?"
"그럴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내가 그렇게 해 줄 것 같았나?"
"무슨 짓이든 할게요. 당신 옆에 있게 해줘요."
밀리카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는 것 같았고 얼굴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난 혼자 있으면 안 돼요. 제발."
"혼자 있으면 왜 안 돼? 매린 대신 내가 있어야 한단 말이냐?"
"내 무엇이든 가져가요. 내 몸도, 내 영혼도."
"그 대가는 내 목숨인가?"
고영무가 입술 끝으로 웃었다. 그리고는 똑바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내 옆에 있어라. 어차피 너나 나나 목숨을 담보로 일을 하는 사람들. 떨어져 있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고영무가 내던지듯 말하자 밀리카는 이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고, 산토스가 다가오자 제각기 머리를 돌려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한낮의 태양이 바다를 비춰 바다 색깔은 옅어져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형님."
신용만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어린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저 여자를 집에다 두다니요. 더구나 내일모레 콜롬비아에 들어갈 참인데."
"어차피 이곳에 남겨 둘 여자야. 그리고 이 집은 빈집이 된다. 상관없어."
앞쪽 소파에 앉아 있던 최대광이 옆에 앉은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상관없잖아. 제 발로 걸어 들어왔는데 오히려 잘됐지 뭘 그래?"
신용만은 그에게 얼굴도 돌리지 않았다. 짐 버클리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보스, 거실에 있는 저 여자, 페르난도의 동생이 아닙니까?"
그도 눈을 치켜뜨고 있는 것이 산토스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 밀리카라고 전에 보고타에서 같이 일했던 여자지."
고영무가 가볍게 말하자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최대광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왜 왔습니까? 몸수색은 시켜 보았나요?"
"나하고 같이 있고 싶다는 거야. 목숨을 구해 준 보답을 하겠다는군,"
"어이구, 그럴 리가?"
짐이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페르난도가 보냈을 겁니다. 그놈은 어떻게든 명예를 회복하려고 했으니까요."
"이젠 날 죽여도 회복이 안 돼, 그걸 알 만한 사내야, 그는."
"그렇지만 저 여자는 제 남편을."
짐이 힐끗 고영무를 바라보고는 말을 멈췄다.
"내쫓아야 합니다."
신용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잡아 놓으면 우리가 감시할 수 있다는 생각, 어림도 없습니다."
그가 한국말을 하였으므로 짐이 멀뚱한 얼굴로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아예 죽여서 바닷속에 넣어 버립시다."
최대광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비겁하게 여자 하나를 가지고. 더군다나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여자한테."
"그럴수록 위험한 거야. 독한 년이다."
단언하듯 말하는 신용만을 고영무가 힐끗 바라보았다.
"보스, 저 여\자에게 페르난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 제 오빠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준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하시지요."
짐이 상체를 들고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도는 지금 카를로스나 카스틸로 양쪽에서 쫓기고 있습니다. 카를로스가 현상금을 백만 달러나 걸어놓아서 우리 측 정보원들도 아마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겁니다. 페르난도의 거처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머물게 하겠다고 하시면 여자는 틀림없이."
"말해 주었어."
고영무의 말에 세 사람 모두가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고영무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제각기 옆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LA 북쪽의 파커스란 마을에 살고 있다. 여기서 50킬로쯤 위쪽이지."
"그렇다면 놈을 잡아야겠군요. 아니면 정보를 흘려 주거나."
신용만의 말에 최대광이 혀를 찼다.
"에이, 도무지 각박해서 세상 살맛이 안 나는구만. 아, 가만히 있는 것들을 가지고 왜들 난리야. 대들기라도 하면 모가지를 뚝 분지르면 그만이지 웬."
최대광은 큰 덩치를 왼쪽으로 돌리자 짐과 마주 보는 형국이 되었으므로 다시 이쪽을 향해 고쳐 앉았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우리가 페르난도인지 베르난도인지 그놈을 잡아다가 상을 탈 만큼 쪼들립니까? 옛말에 품 안에 든 새는 잡는 법이 아니라고도 했는데."
"밀리카는 이곳에 두기로 결정했다."
고영무가 자르듯 말했으므로 최대광은 입을 닫았다. 고영무가 말을 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제 목숨을 담보로 이곳에 뛰어든 그 여자의 집념이 좋게 보이기도 했고 그 여자에게 죽지는 않는다는 자신감도 있다. 내버려 두어라. 난 여자에게 죽을 사람이 아니다."
모두들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둘러보던 고영무가 문득 빙그레 웃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라는 걸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크링거가 특별 주문한 링컨 콘티낸털에서 내리자 빌딩의 현관에서 그를 향해 지미 골드가 다가왔다.
"크링거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지미, 갑자기 웬일이오?"
이맛살을 찌푸린 크링거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난 지금 약속이 있는데."
"도쿄에서 온 하라다씨를 만날 예정이시죠? 그 사람은 한 시간 전에 도쿄로 돌아갔습니다. 날더러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사과해 달라고 합디다."
"지미, 당신."
크링거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당신 그러고 나서 몸이 성할 것 같아? 도대체 누굴 믿고 이러는 거야?"
"하라다가 당신의 마약을 2킬로그램 구입하려고 돈을 준비해 두었더군요. 모두 녹음해 두었습니다."
허리를 숙인 지미가 그의 차를 들여다보았다.
"안에서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크링커씨. 이곳이 저쪽 호텔의 시끄러운 분위기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한동안 말없이 지미의 얼굴을 바라보던 크링거가 콘티넨털의 문을 열었다. 지미는 가죽 냄새가 풍겨 오는 내부로 들어가 않자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과연 소문만 듣던 들 콘티넨털이로군. 대통령의 리무진보다 낫다고 하던데. 하긴 내가 대통령의 리무진을 타 봤어야지."
잠자코 그의 수선스러운 몸짓을 바라보던 크링거가 앞쪽에 놓인 선반을 잡아당겨 안에서 시가를 꺼내었다. 그리고 왼쪽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 물고는 길게 앞쪽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뒷좌석은 서로 마주 보고 앉도록 시트가 배열되었으나 크링거는 앞쪽 자리에 선반과 책상, 냉장고를 들여놓았고 왼쪽의 의자를 앞으로 떼면 침대가 되었다. 모든 가구와 배열된 상태가 고급인데다 품위가 있었으므로 지미는 불현듯 짜증이 났다.
"크링거씨, 너무 노골적으로 나다니시는 것 같군요. 하라다 같은 조무래기를 직접 상대하시는 걸 보면 자금 사정이 안 좋으신 것 같기도 하고."
지미가 크링거를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2킬로그램쯤의 거래는 전에는 크라우스한테 시키셨는데, 아직 믿을 만한 부하가 나타나지 앉아서 그런가 보지요?"
"으음."
크링거는 시가의 연기를 그를 향해 내뿜었다.
"날 잡아넣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거 다 알아. 지난번에는 페르난도가 보낸 가짜 증인을 모시고 법석을 떨었지. 너희들은 지금까지 그놈이 페르난도의 부하였던 것을 모르고 있었을걸?"
"천만에, 알고 있었어, 크링거. 그땐 마악 당신을 처넣을 참이었지."
"지미, 너 같은 조무래기는 네 보스인 로스만이 왜 그 증인을 보내고 사건을 잊으라고 했는지 모를 거야."
"너희들은 사건에만 집착하지만 우리쯤 되면 국가를 생각하게 되지, 지미. 국가적인 사건이야.·"
지미가 빙그레 웃었다.
"마약쟁이 놈이 별 개 같은 소리를 다하는군."
크링거가 퍼뜩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CIA의 워렌 국장하고 무슨 국가적인 사건을 맡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만 해. 나는 그래서 너에게 내 일을 말해 주려고 온 거야."
"지금 LA에서 일어나는 일, 특히 고영무의 동태에 네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들었어. 잘 들어, 크링거"
"너는 마약쟁이일 뿐이야, 이 개자식아. 이런 냄새 나는 차 안에서 거드름을 피우다간 다시 수류탄 공격을 받아 갈가리 찢어진단 말이야."
크링거가 퍼뜩 눈썹을 치켜세웠다.
"고영무에 대해 네가 입을 벌렸다는 사실만 드러나도 넌 이제 고영무 집단의 공격을 받을 거야. 그땐 경찰도 마약부도, FBI나 CIA도 모두 다른 일로 바쁜 때일 거야. 네 시체는 걸레같이 찢겨서 네 부하의 몸뚱이에 네 머리가 없어져 관에 넣어질지도 모른다."
"입조심 해야 돼, 크링거. 널 이렇게 놔두는 것은 네 말대로 국가적인 사업 때문이니까. 그런 네가 그럴 필요가 없게 되면 개처럼 죽게 돼."
말을 마친 지미가 문고리를 잡아당겼으나 어찌된 셈인지 열리지가 않았다. 서너 번 철컥거리던 그는 가슴 안쪽의 권총걸이에서 선뜻 리볼버를 뽑아 들었다. 그 순간 크링거가 스위치를 눌렀으므로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지미 쪽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지미가 힐끗 크링거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권총을 가슴 속에 다시 꽂았다.
수선스러운 분위기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오가는 남자들의 표정은 대부분 활기에 차 있었다. 들떠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밀리카의 출입이 허용된 곳은 응접실과 주방, 그리고 주방 옆쪽의 거실이었다. 음식에 약이라도 타서 독살을 시킬까 봐 겁이 났는지 마리아라는 삼십 대 여자 한 명이 그녀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주방에 들어선 그녀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는다.
"헬레나, 산초코 다섯 사람분을 바닷가로 가져가라 했더니 뭘 하고 있어?"
마리아가 팩 소리를 치자 풍만한 몸매는 마리아하고 비슷하지만 얼굴이 한창 피어오르는 이십 대 전후의 여자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금방 2층 회의실에 일곱 사람분을 가져다주고 왔잖아. 누구더러 와서 가져가라고 해요."
"내가 가져다주지요. 어디로 가면 되지요?"
그러자 마리아와 헬례나가 일제히 일손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밀리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산토스! 산토스!"
갑자기 마리아가 입을 따악 벌리고 고함을 쳤으므로 밀리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슴이 울리는 진동이 느껴지고 있다.
"무슨 일이오, 마리아?"
산토스의 미끈한 얼굴이 나타났다. 주방 안으로 들어선 그는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산토스, 산초코 다섯 사람분을 바닷가 사람들에게 가져다줘. 빨리."
입맛을 다신 산토스가 커다란 쟁반을 받쳐 들었다.
"일을 하고 싶으면 이곳에서 그릇을 씻어 줘."
그녀에게서 몸을 돌리면서 마리아가 말했다.
"내 눈앞에서 일해. 내가 보는 데서."
"왜요? 내가 음식에 독이라도 탈까 봐?"
밀리카가 그릇을 손에 쥐면서 묻자 헬레나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마리아가 몸을 돌려 밀리카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손바닥이 날아올 것 같은 표정이다. 웃음을 멈춘 헬레나가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고 밀리카는 그릇을 손에 든 채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내 동생 타마요는 집 앞 거리에서 정부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마리아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애는 열네 살에 개처럼 길에서 죽었어.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밀리카의 말에 마리아가 와락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년. 그놈은 마약을 나르다가 죽었단 말이다. 마약중독이었어. 너희들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었어."
"죽인 건 정부군이지 우리가 아니야."
그녀의 팔목을 움켜쥔 밀리카가 소리쳤다.
"네 동생이 마약중독이 된 것이 왜 우리 책임이야?"
주방의 소란을 듣고 사내들이 달려 들어와 여자들을 뜯어말렸다.
"네년도 마약을 먹어 봐야 돼, 이년아."
마리아가 바락바락 악을 쓰는 주방에서 끌려 나온 밀리카는 한동안 응접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일은 안 해도 돼, 밀리카."
옆쪽에서 말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고영무가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도 주방 쪽의 소란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이곳에서 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밀리카는 천천히 소파에 앉아 두 손을 무를 위에 올려놓았다. 온몸의 기력이 발밑으로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 문제로 오늘 낮에도 한바탕 논쟁이 있었어. 누구는 널 내쫓자고 하고 누구는 또 널 죽여서 바닷속에 묻자고도 그랬어, 네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모두 아니까. 페르난도가 널 보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그가 이 정도로 무모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돌아가도 잡지 않겠다. 그리고 너회들 거처도 비밀로 지켜 줄 거야."
밀리카가 머리를 저었다.
"여기 있겠어요."
"마음대로."
고영무가 입술로만 웃었다.
"그것도 말리지 않겠다."
자리에서 일어선 고영무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도 각오하고 왔겠지만, 오늘 밤 내 침실로 올라오는 게 어때? 2층 한가운데에 있는 방이야. 너야 그런 일이 보통 아닌가? 전에는 마약을 싣기 위해 그랬지만 지금은 네 애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몸을 맡겨봐.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고영무가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갈 때까지 밀리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공항 대합실에 서 있던 박정환이 손을 번쩍 들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김영지가 밝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비행기가 한 시간이나 연착했어요, 기다리셨죠?"
"아니, 나도 차가 막혀서 늦게 나왔어."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든 박정환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대합실을 나와 주차시켜 놓은 차에 올랐다.
"어머니는 괜찮으셔?"
시내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박정환이 물었다.
"네, 조금."
앞쪽을 바라본 채 김영지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아지신 거야?
"네, 조금 나아지셨어요."
"심장이 나쁘시다고 했지? 병원에서는 뭐래? 괜찮대?"
"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죠? 아파트로 가는 길이 아닌데."
"잠깐 들를 데가 있어."
"어딘데요?"
머리를 돌린 김영지가 박정환을 바라보았다.
"산타모니카에 잠깐 들렀다 가."
"안 돼요, 정환씨."
김영지의 목소리가 딱딱해졌으므로 박정환이 얼떨결에 차의 속력을 늦추었다.
"정민씨, 잠깐이면 돼. 영무한테 이미 이야기를 해놓았는데"
"그래도 안 돼요. 차를 돌려요."
"아니, 도대체 왜? 영무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정환씨의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런 것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지금 몸이 좋지 않아요."
"몸이 왜?"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김영지가 울상을 지었으므로 박정환은 우측 깜박이를 켜면서 갓길로 차를 불였다. 돌아가려는 것이다.
"미안해요, 정환씨.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다음에는 꼭."
"그놈은 2, 3일 후에 다시 여행을 떠나. 그놈 말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거야. 영무가 나한테, 아니 우리한테 결혼축의금으로 백만 달러를 주었어. 내가 그놈이 궁할 때 몇천 달러를 주었다는 보답으로. 결혼식에 참석 못 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꼭 인사를 시켜 주고 싶었는데."
이맛살을 찌푸린 박정환은 회전 도로가 나타나자 차를 꺾었다.
"몸이 아프다나 할 수 없지. 하필 오늘이 또 그날 아냐?"
김영지는 앞쪽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이틀 후면 콜롬비아로 내려가는 배를 타게 된다. 대원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콜롬비아를 정복하러 가는 스페인의 병사들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암암리에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사기도 높았다. 고영무는 2층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검은 바다는 이제 발아래까지 물결이 밀려와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내었다. 밤바람에 뒤쪽의 커튼 자락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평선 근방에 번쩍이는 불빛이 보였다가 곧 사라졌다. 바람이 일고 있었으므로 하늘의 별들이 깜박이며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고영무는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콜롬비아의 부패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것에 대한 사명감은 없었다. 정의를 실현시키겠다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지미 골드도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 뻔한 줄 알고는 일의 결과에 대한 소득 문제만을 진지하게 말해 주었다. 고영무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어떻게 되었건 맹렬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쪽 다리가 빠진 수렁을 뛰어 건너려고 마구 달리다 보니 다리가 점점 깊게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고영무는 커튼이 펄럭이는 순간에 희미하게 풍겨 오는 향내를 맡았다. 그가 머리를 돌리자 밀리카가 커튼 사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방의 불을 꺼놓아 그녀의 자태를 보는 순간은 섬뜩하였으나 고영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왔군."
바람에 잠긴 그의 목소리가 옆쪽으로 흘러갔다.
"여기가 시원해. 여기 밝아."
고영무가 옆쪽 의자를 가리키자 그녀는 잠자코 의자에 앉았다. 밤눈에 희게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깨와 종아리가 드러나 있다.
"이틀 후에 어디로 떠나세요?"
밀리카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콜롬비아 아닌가요? 모두 30명 정도 되는 모양이던데."
"많이 알수록 위험해져. 알더라도 모른 척하는 것이 나을걸?"
"내가 카스틸로 정권에 밀고할 처지가 아니니까 이렇게 들어오게 했겠지요?"
"넌 날 죽이기 위해서는 그런 짓도 할 여자야. 크링거를 인질로 했을 때에도 네가 마약부에 정보를 주었었지."
"그랬나요?"
"매린은 죽어 마땅한 놈이야, 밀리카."
밀리카가 퍼뜩 눈을 들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제 약혼자의 몸도 이용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 얼핏 들으면 대단해 보이지만. 그래, 대단한 기회주의자지, 비열한 놈이다."
"닥쳐, 고영무."
밀리카가 나지막했으나 후려치는 듯한 말투로 소리쳤다.
"죽은 사람을 조롱하지 마라."
"죽은 놈은 듣지 못해, 밀리카."
담배를 튕겨 아래쪽으로 떨어뜨린 고영무는 밀리카를 돌아보았다.
"너도 나쁜 년이지. 여자의 몸 구조가 본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고 하지만, 나와의 정사에서 몸부림을 치며 신음소리를 내던 너는."
베란다는 어두웠으므로 그녀의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고영무는 바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너는 매린과 나는 물론 네 자신까지 속여야만 했을 것이다. 너희들, 콜롬비아인들의 정조 관념이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너와 매린과의 결혼생활도 행복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게 한국식인가?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밀리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내가 당신하고 섹스할 때의 장면이 언제나 머릿속에 박혀 있는 모양인데, 사랑 없이도 섹스가 가능하다는 건 알 나이 아닌가?"
"내 이야기는 가치 있게 써야 할 것을 더럽게 써버린 너희들이 나까지 오염시켰다는 거야. 물론 나는 돈을 주고 창녀와 섹스한 셈 치면 되겠지만. 자아, 일어나자, 네가 원한다면 하룻밤에 백 달러건 천 달러건 주마. 네 그것이 필요하다, 오늘 밤엔."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세 걸음만 앞으로 나가면 된다, 밀리카. 아래쪽은 바위니까 죽기에 딱 적당하지. 머리가 조각나 오징어들이 달라붙을 게다."
밀리카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는 몸을 돌려 앞을 가로막는 커튼을 들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최대광은 술잔을 내려놓고 다시 안쪽의 룸을 바라보았다.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자의 놀란 듯한 외침 소리가 들렸는데 사내들이 여자에게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입맛을 다신 최대광은 양주병을 들고 빈잔에 술을 채웠다. 11시가 넘어 있었으나 룸에 있는 사내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출장 온 사장들이라는데 씀씀이가 큰 모양인지 술병과 안주 접시가 쉴새 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홀은 두어 명이 앉아 있는 구석 쪽 테이블 외에는 손님이 없었으
므로 룸에 있는 놈들만 나가면 문을 닫아도 될 것이다. 룸살롱에 11시가 넘어서 오는 손님은 드물기 때문이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이은영이 다가와 앞자리에 앉았다. 최대광의 무료한 시간을 때워 주려는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면 끝날 거예요. 지금 위스키가 다섯 병째 들어갔는데 네 사람이 그만큼 마셨으면 일어날 때도 되었어요."
그녀가 힐끗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두 병의 양주가 거의 비워져 가고 있었으나 최대광의 얼굴은 물도 안 마신 듯한 얼굴이었다.
"신 선생님은 바쁘신 모양이죠?"
최대광이 퍼뜩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쁘기는 뭘, 집에서 잠이나 자겠지요."
그가 입술을 찌그리며 말했다. 신용만이 같이 가자는 최대광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하여 이쪽을 무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신 선생님은 애인이 있으시다면서요? 좋아하는 사람이."
이은영이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누구요? 신용만이가?"
눈을 껌뻑이며 최대광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럽디까?"
"신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미친놈, 겉으로는 기가 죽기 싫은 모양이구만."
최대광이 코를 한번 불리면서 배를 떨었다.
"애인은커녕 애견도 없는 놈이여, 그놈은. 생긴 걸 보시오, 생긴걸."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룸에서 노닥거리는 사장 놈들이 대상일 순도 있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는 홍성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은영이 그와 신용만의 생긴 것을 비교하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놈은 이제까지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 본 놈이여. 기껏 해봤자 그의 머릿속에 양미숙 사장과 장혜란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 신용만의 소개로 알게 된 여자들이다.
"기껏 뭔데요?"
재미있다는 듯 이은영이 웃으며 물었다.
"회사 사람들."
"회사 사람들이라니요?"
"옛날에 회사 다닐 때 알게 된 사람들 말이오. 그저 인사나 나눌 정도였지."
"그런데 신선생님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시던데."
"글쎄, 거짓말이라니까. 그놈은 알량한 자존심이 세서 없다는 소리를 못하는 놈이오."
"‥‥‥‥"
"내가 보증해요. 그놈은 여자를 보면 이상하게 실실 꽁무니를 뺀다구 그렇지 않으면 아주 싫어하거나."
룸에서는 소란이 그치고 있었다. 가끔씩 혀가 꼬부라진 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이 끝날 때가 된 모양이었다. 이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룸에서 홍성희가 나왔다.
"대광씨, 미안해요."
다가온 그녀가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곧 끝나요."
최대광은 어깨에 놓인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어이, 홍마담. 잠깐 나 좀 봐."
룸에서 나온 사내 중 한 명이 소리쳐 홍성희를 불렀다. 그는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넥타이가 느슨하게 내려지고 몸집이 비대한 사십 대의 사내였다.
"우리 김회장 호텔에서 2차로 한잔하자는 것, 약속 어기면 안 돼."
홍성희가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김회장님 모시고 어서 나오세요."
잠자코 술잔을 쥐고 앉아 있던 최대광이 힐끗 홍성희를 올려다보았다.
"어휴, 꼴보기 싫어. 저희들이 무슨 브이아이피(VIP)라고."
사내의 뒷모습을 향해 홍성희가 종알거리자 최대광이 물었다.
"2차 가다니? 무슨 말이야."
"여기 끝내고 호텔 클럽에 같이 가자는 거예요."
"애들만 클럽까지 데려다주고 올게요. 30분이면 돼요."
사내들이 왁자지껄 룸에서 몰려나오자 홍성희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잠시 탁자 위의 술잔을 내려다보던 최대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카운터에 맞아 있던 이은영이 물었으나 최대광은 머리만 끄덕여 보이고는 현관을 빠져나왔다.
빌딩의 현관을 빠져나오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 뒤로 여자들이 따르고 있다. 최대광은 빌딩 앞의 택시 주차장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네 명 모두 한국에서 제법 소리깨나 친다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풀린 걸음걸이로 떠들썩하게 지껄이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노란색 몸체의 택시는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밤이 늦었으므로 정류장에는 최대광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홍성희가 보였다. 입던 옷 그대로에 핸드백만을 걸친 차림새였다. 그녀도 이쪽을 보았는지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어, 홍마담. 어서 와."
거의 이쪽으로 다가온 사내 한 명이 홍성희를 향하여 소리쳤다. 사내들이 최대광의 주위로 몰려 싫다. 모두들 술에 취한 모습들이다.
"김회장님, 오늘 끝을 내시오."
아까 홀에서 보았던 사내가 머리가 희끗하고 네모난 얼굴의 사내에게 말하자 사내들이 일제히 다가오는 홍성희를 바라보았다. 여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최대광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사내들의 이야기 소리가 뚝 그치더니 최대광을 힐끗거렸다. 홍성희가 다가왔다. 그녀는 최대광을 향해 흰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었다.
"여보,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사내들이 최대광을 바라보았는데 홍성희와의 정사를 기대하던 흰 머리의 사내는 주춤 한 발짝 최대광으로부터 떨어졌다.
"정 사장님, 제 남편이에요."
최대광은 턱을 쳐들고 서 있었는데 그를 가리키며 홍성희가 말하자 중신 애비 노릇을 하던 사내가 힐끗 최대광을 쳐다보더니 머리를 돌렸다. 홍성희가 다가와 최대광의 팔짱을 끼고 선다. 그러자 정류장 안의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여자들은 여자끼리 서고 남자들은 제각기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서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택시 한 대가 노란 등을 반짝이며 다가와 섰다.
"아, 너회들은 그냥 돌아가,"
문득 사내 한 명이 택시에 오르려는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김회장과 홍성희를 묶어 주려고 했던 정사장이다. 여자들이 주춤거리며 홍성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르바이트로 현지에서 고용한 여자도 있지만 그중 두 명은 한국에서 온 여자였다.
"어이, 탑시다."
정사장이 문고리를 잡고 사내들을 향해 말하고는 홍성희에게 머리를 돌렸다.
"홍사장, 우리는 오늘 그냥 갈 테니까."
"안 돼."
최대광이 성큼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10달러짜리 한 장을 꺼내어 운전사에게 던져주고는 발을 들어 문을 닫았다. 그가 가볍게 손을 젓자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택시는 정류장을 떠났다.
"일단 데리고 나왔으니까 1인당 500달러씩 내라, 지금."
최대광이 사내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어서."
"아니, 홍사장."
정사장이 높아진 목소리로 홍성희를 불렀다. 그는 최대광과는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어떻게 되기는? 너희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따라가서 받아 낼까? 아니면 대사관에 신고를 해서 받아 낼까? 아니, 그것보다도 LAPD에 연락해서 배상을 해달라고 할 수도 있지."
"이것 봐요, 당신은 누구요?"
마침내 정사장이 어깨를 피고 최대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자 하니까 젊은 친구가 말을 함부로 하는구만. 여기가 미국이라고 말을 막 하는 거이? 공갈을 치는 거야 뭐야?"
"내가? 너희들한테?"
최대광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홍성희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이, 여보."
"놔."
세차게 그녀의 팔을 뿌리친 최대광이 팔을 뻗어 사내의 멱살을 쥐었다. 세차게 쥐자 사내는 입을 딱 벌렸고 나머지 세 사내들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어이, 돈 내겠소. 낼 테야."
사내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거기 팔 놓아. 왜 이러는 거야?"
제법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선뜻 다가서지는 않는다.
"500달러씩 1,500달러 여기 있소."
김회장이라는 사내가 지갑을 꺼내더니 어지럽게 지폐를 세면서 말했다. 최대광은 한 손을 내밀어 지폐를 받자 정사장의 멱살을 놓아 주었다. 목을 움켜쥔 그가 기침을 하더니 헐떡이며 가쁜 숨을 쉬었다.
"오입을 해도 사람 봐가면서 하는 법이여, 이 자식들아."
최대광이 그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네놈들 뿌리를 뽑아 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혀, 이런 놈의 새끼들."
그가 으르렁대며 하나씩 다시 보았으나 시선을 마주치는 사내는 없다. 최대광이 휘적이며 정류장을 떠나자 홍성희가 뒤를 따랐고 아가씨들이 다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여섯 걸음 가다가 멈춘 최대광은 앞장선 여자에게 주먹 안에 든 지폐를 건네주었다.
"아저씨, 우린 300달러로 계약했어요."
그녀가 소곤대듯 말하자 최대광이 그제야 만족한 듯 웃었다.
"200달러는 내 팁이여,"
옆으로 다가온 홍성희는 잠자코 서 있었다.
2. 보고타 진군
리버티 호가 공해에 떠 있었으므로 고영무를 비롯한 대원들은 저택에서 내일 새벽의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주변을 정리하는 데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고영무는 작별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관계로 저택에만 머무르고 있었는데, 최대광은 쥐가 풀 방구리에 드나들듯 뻔질나게 시내에 들어갔다 돌아왔다. 지금은 전원이 저택에 머물며 내일 새벽의 출발에 대기하고 있어서 2층의 거실에 앉아 있어도 아래층의 갖가지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 왔다. 웃는 소리와 부르는 소리, 뛰듯이 누군가가 걷고 커다랗게 말하는 소리. 응접실 쪽에서는 의자를 옮기는 모양이었다. 브루노와 짐, 최대광, 신용만을 중심으로 한 27명의 대원이 떠나게 되고 커크를 비롯한 여덟 명은 저택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지금 저택에 모여 있었으므로 소음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다. 고영무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5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저녁때는 어제 지미 골드가 보내 온 작전서류를 간부들과 함께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비행기로는 LA에서 보고타까지 여덟 시간의 거리였지만 부에나벤투라까지 배로 9일간 항해해야 하고 그곳에서 보고타까지 다시 사흘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칼리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대원들을 재정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5월도 중순에 접어들었으므로 한국은 지금 이른 더위가 시작될 환절기일 것이다. 고영무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끌어당겨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다이얼을 누르고 난 그는 상체를 곧게 세웠다. 누구보다도 먼저 아버지에게 미국에서 떳떳하게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고진호씨는 그의 미국 초청을 거절했다. 한국의 신문에서도 고영무가 인질 소동을 벌였으나 크링거의 부인으로 사건이 유야무야되었다는 것을 꽤 상세하게 보도해 고진호씨는 고영무의 동향을 알고 있었다. 신호가 가자 곧 수화기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 접니다. 영무예요."
"응, 영무냐."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침에 나간 그가 을지로에서 하는 전화를 받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환절기에 건강은 어떠세요?"
"난 괜찮다. 넌 어떠냐?"
"저야 염려하실 거 없습니다, 아버지."
"영철이는 곧 제대하겠네요."
"내년 초에 나온다."
"아버지."
"왜?"
고영무는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저 내일 아침에 여행 떠납니다."
"얼마 동안 연락드리지 못할 것 같숩니다."
"미국에서는 네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다만."
아버지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고영무는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네 회사에서 널 명예훼손과 공금 유용으로 고발을 했더구나. 집으로 통지서가 왔다."
"내가 너희 회사 박주경 회장을 만나려고 찾아가 보았는데 만나지 못했다. 비서실 직원들의 말로는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구나."
"너에게 세상이 이렇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이야기한 거다. 너희 회사는 너를 고발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한다. 공금을 유용한 것이 있으면 내가 갚아 주겠다고 했지만 네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야."
공금을 유용한 것은 없다. 김강남과 함께 차액을 나눠 가졌을 뿐이다.
"아버지, 그것은."
"이야기 안 해도 안다. 넌 공금을 유용할 자식이 아니다. 네 회사는 네 이름이 자주 좋지 않게 나오니까 그런 방법으로 너와 회사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떳떳하게 이름을 내거라."
"네, 아버지,"
"너, 유영미라는 여사원 전에 보고타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다던데."
고영무는 눈을 껌벅이며 벽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아버지."
"그 애가 자주 와서 말동무가 되어 주고 간다. 나도 처음에는 경찰에서 보낸 여자가 아닌가 했는데 겪어 보니까 아녀."
"유영미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참하게 생겼다. 그 애도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에 있다."
"너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어. 영무야, 서두르지 말고 떳떳한 일을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내 걱정은 말고."
"예."
"여행 잘 다녀오너라."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보스, 손님이 오셨습니다."
산토스의 말소리에 고영무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오후 6시가 넘어 있었다.
"여자 손님이신데요. 미스터 박의 여자 친구분인 미스 리라고 합니다."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아래층 응접실로 모셔."
박정환의 애인인 이정민일 것이다. 어제 서울에서 도착한 그녀와 박정환이 이곳을 방문하기로 했다가 그녀의 몸이 좋지 않아서 약속이 취소되었었다. 그것에 대한 사과를 하려고 왔는지도 모른다. 고영무는 윗도리를 걸쳐 입고 아래층의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에 자리 잡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앉아서 바깥쪽 문이 열리더니 산토스의 안내를 받은 여자가 들어선다. 약간 긴 머리에 얼굴에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곧은 콧날과 확 다문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정환이는 오지 않았습니까?"
그녀를 향해 일어선 고영무가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네, 저 혼자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으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앉으시지요. 뵙고 싶었는데 잘 오셨습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산토스가 다가와 물었다.
"차는 무얼로 드릴까요?"
"난 커피."
"저도 커피 주세요."
산토스가 발소리를 죽이며 방을 나갔다.
"어제 도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영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항에서 오시다가 아프셨다던데. 괜찮으십니까?"
"예."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두 손으로 무를 위에 놓인 핸드백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마치 면접시험을 치르는 신입사원 같은 모습이다. 고영무는 짙은 안경알 속의 눈은 볼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입술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고영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는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여자는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벗었다.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
눈을 치켜뜬 고영무가 턱을 젖히자 김영지가 핸드백에서 권총을 꺼내어 그를 겨누었다.
"김영지야, 내가."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고 눈에서는 아직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러나 두 눈은 커다랗게 치켜뜨고 있었고 이제는 두 손으로 소형 권총을 움켜쥐고 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널 죽이려고 왔어."
고영무가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영지가 끄윽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치켜올렸다가 내렸는데 딸꾹질을 한 것이다.
"아버지와 오빠의 원수, 그리고 우리 엄마는 이제 폐인이 되었어."
"난 네 오빠를 죽이지 않았어. 그렇지, 네 오빠를 죽인 여자가 이 집에 있군. 밀리카를 알지?"
고영무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웃음이 떠올랐다.
"그 여자를 불러서 물어보면 될 거야. 그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확실한 것을 알고 죽이든지 어쩌든지 해야 하지 않겠나?"
"거짓말, 난 안 속아."
김영지가 불쑥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으므로 고영무는 입맛을 다셨다.
"난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비겁하게 책임회피도 안 한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사고였다. 무조건 날 죽이려고만 하셨어. 나는 변명할 여유도 없었다. 내가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는데 아래로 떨어진 것이지"
"이 살인자."
두 손으로 움켜쥔 권총이 고영무의 가슴에 겨눠진 채 심하게 떨렸다.
"어때? 밀리카를 불러 확인을 받는 것이?"
그러자 응접실 문이 열리며 산토스가 쟁반을 받쳐 든 채 들어섰고 김영지는 휘익 몸을 돌려 그쪽을 겨누었다. 그 순간 상체를 일으킨 고영무가 수도로 그녀의 팔목을 내려쳤다. 쟁반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김영지의 권총도 바닥에 떨어졌다.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온 산토스가 그녀의 몸을 뒤에서 움켜 안았다.
"산토스, 놔둬라."
권총을 집어 든 고영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밀리카를 데려와."
산토스가 헐떡이며 두 팔을 풀자 김영지는 잡혔을 때도 반항을 하지 않았지만 풀려났을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으로 블라우스의 깃을 움켜쥔 채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산토스가 서두르며 방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최대광이 문을 박차듯이 열고 들어왔다. 그는 엎질러진 커피잔을 성큼 뛰어넘어 김영지의 앞에 와 섰다. 산토스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얼레, 어디서 본 년인디?"
그가 버럭 소리치듯 말했으므로 김영지가 퍼뜩 눈을 들었다가 내렸다.
"확실히 어디서 본 얼굴인디. 요즘에."
그러다가 생각이 나지 않는 듯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로 고영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대체 형님은 웬 여자들 웬수가 이렇게 많아요? 여자를 밝히지도 않으면서?"
저도 모르게 이마가 좁혀지면서 고영무의 입에서 쓴웃음이 번져 나왔다. 방으로 들어선 밀리카는 김영지를 보고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김영지가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밀리카, 그쪽에 앉아."
고영무의 말에 그녀는 잠자코 김영지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바탕 설치고 나서 최대광이 나갔으므로 방에는 이제 세 사람이 정삼각형의 끝점 부근에 앉아 있는 모양이 되었다. 고영무는 바깥에서의 소음이 갑자기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제각기 일들을 하고 있지만 모두 이쪽 방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밀리카, 미스 김을 잘 알 거야."
김영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고영무가 말하자 밀리카는 얼굴에 옅게 웃음을 띠었다. 그녀는 고영무가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자 침대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마주치지 않았던 것이다.
"잘 알아요. 오빠의 원수를 갚으려고 온 김영지씨지요."
밀리카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김영지는 불안하고 조바심을 내는 표정으로 두 눈을 자주 깜박이는 반면 밀리카는 턱을 조금 쳐들고 가슴을 내민 당당한 모습이었는데 대조적이었다.
"나에게 월 물어 보려는 거예요?"
밀리카가 고영무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당신이 김강남씨를 죽이지 않았어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고영무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김강남씨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김영지씨."
"밀리카."
고영무가 그녀를 불렀으나 밀리카는 그쪽으로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김영지씨. 고영무씨가 이렇게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사는 이유도 모르고, 수십 명의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유도 몰라요."
"네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구나, 밀리카."
고영무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네가 네 약혼자를 네 눈앞에서 살해한 나에게 복수하려고 이 집에 온 이유 말이다. 그것도 잊은 모양이구나."
밀리카가 머리를 돌렸다.
"네가 마약을 담은 TV를 김강남이 모르고 집어갔을 때 너희들은 김강남의 입을 막기 위해 죽였지. 그것도 내 사무실에서 내가 자는 동안에 말이야.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고영무는 김영지를 향해 돌아앉았다.
"나는 마약 조직인 카를로스 일당의 돈을 빼앗았어, 김영지씨. 여기 밀리카의 오빠인 페르난도의 돈이지 나에게 누명을 씌운 보상으로 나는 이 여자의 애인을 쏴 죽였어. 당신은 나를 믿어야 돼, 김영지씨."
"믿지 말아요, 김영지씨. 그는 나를 잡고 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고영무는 입을 다물고는 의자에 상체를 기대었다. 한동안 방 안에 침묵이 흘렸는데 바깥에서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문이 열리더니 산토스가 들어섰다.
"보스, 회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김영지가 퍼뜩 눈을 들어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를 데리고 나가라."
고영무가 밀리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다."
"보스, 그러시면 죽일까요?"
산토스의 말소리는 커피 한 잔 더 드시겠느냐는 억양과 다른 점이 없었는데 고영무에게도 섬뜩하게 들렀다. 밀리카는 애써 태연한 듯 턱을 들고 있었으나 몸이 굳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 앉은 김영지의 시선이 힐끗 이쪽을 스쳤다. 고영무가 입을 열었다.
"그냥 방에 데려다주도록."
"알았습니다, 보스."
산토스의 손이 어깨에 닿자 그것을 떨구면서 밀리카가 일어섰다. 그들이 방을 나서자 고영무는 김영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내가 증인을 잘못 골랐어. 저 여자도 나한테 원한이 있는 여자야.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 줄 줄 알았는데. 바르던이라는 신부님을 만났었지. 그분은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 상황을 보셨는데‥‥‥‥ 난 저 여자와 저 여자의 애인에게 이용당했지. 마지막 순간에는 배신을 당하고 살인자의 누명까지 했어. 그래서 그들을 찾아 여기에 온 거야."
김영지는 치켜뜬 눈으로 꼼짝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놈들이 나를 이용해서 빼낸 마약 판 돈을 빼앗았지. 그리고 사내를 죽이고.그랬더니 저 여자가 나한테 찾아왔어. 내 옆에서 나를 죽여 복수할 기회를 잡으려고. 박정환이는 내 친구야. 그놈한테는 당신 이야기를 하지 않겠어. 곧 결혼한다니 잘 살기를 원해. 그렇다면 어머니가 아프신 건가? 어머니는 그럼 서울에 계시고?"
"날 보내주실 건가요?"
갑자기 김영지가 입을 열었으므로 고영무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보내고말고. 보내야지."
고영무가 다시 말하자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잠시 휘청거리던 그녀가 몸을 바로잡고는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박정환씨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세요. 난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미안하다고, 정말 잘못했다고."
따라 일어선 고영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접근하기 위해 박정환써와 가까워졌었어요. 당신 부친에게도."
"그것은 당신이 책임져 주셔야 되요. 당신이 우리 오빠와 아버지를 죽였든 안 죽였든, 어쨌든 그런 책임은 져야 돼요."
"난 힘이 없어요. 당신을 어떻게 할 힘도, 그리고 살아갈 힘도."
몸을 돌린 김영지는 응접실을 가로질러 문 쪽으로 다가갔다.
"기운을 내, 김영지씨."
그녀의 등에 대고 고영무가 말하자 잠시 주춤하던 김영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태평양 남쪽을 향해 내려가던 리버티 호는 일주일째 되던 날 적도를 통과한 후 선수를 좌측으로 돌려 이제는 곧장 남미 대륙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선미 쪽의 2층 베란다에서 항적을 바라보고 쳤던 고영무는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몸을 돌렸다.
"형님, 이틀 후면 콜롬비아에 도착하겠구만요."
얼굴의 피부가 뱃사람처럼 검붉게 탄 최대광이었다. 그는 이제 영락없는 메스티조 거인의 차림새였다. 판초와 중절모는 거추장스러웠으므로 벗어 놓았으나 그의 헐렁한 바지와 긴 머리, 뭉특한 얼굴을 보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형님 덕분에 저는 별 경험을 다 합니다."
그의 옆에 선 최대광이 그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저한테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여서 개척자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제가."
"나도 그렇다."
고영무가 따라 웃었다
"그 옛날 남미 대륙으로 들어가던 스페인 군사들의 마음도 이랬을 것이다."
"황금의 땅이라고 불렸다면서요?"
"그래, 잉카제국은 황금이 많았지. 지금도 이곳 바다 밑에는 황금을 가득 실은 스페인 군함이 여러 척 가라앉아 있을 거야."
고영무는 손가락으로 검푸른 바다를 가리켰다.
"하지만 황금을 쥐고 저 땅을 빠져나온 사람은 드물었어. 질병과 전쟁, 동료끼리의 싸움, 그리고 저주까지도 끼어들었지."
고영무는 앞쪽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직 대륙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저 땅에서 무언가를 꼭 찾아내겠어. 설령 황금이 아니더라도."
"마약이 있지 않습니까, 형님. 그것이 금덩이보다도 더 값이 나가는데."
고영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버티 호는 본래 연안경비정이었던 것을 마약부가 사서 개조한 배였다. 2백 톤급이었으나 속력이 제법 빨라서 평균 시속 20노트를 내었고 첨단장비까지 갖추고 있었다. 긴 항적을 내며 배는 검푸른 바다를 일직선으로 달려 나갔는데 일주일 동안 풍랑 한 번 받지 않는 잔잔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선장은 로버트라는 이름의 미국인이었는데 군인인지 정부 기관원인지 고용된 뱃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고 본인도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십여 명의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배에 탄 30명에 가까운 사내들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나 이미 배에 각종 화기와 준비물을 싣고 고영무의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약부가 아니면 CIA에라도 끈이 닿는 사람들일 것이다. 구명보트 쪽의 모퉁이를 돌아 선장인 로버트가 다가왔다.
"고, 무전 연락이 왔습니다."
고영무는 난간에서 손을 떼고 로버트의 뒤를 따랐다. 항해실 옆의 무전실로 들어선 고영무는 이어폰을 귀에 대고 스위치를 눌렀다. 찌직 거리는 잡음이 금방 귀에 들렸다.
"여보세요, 여기는 고."
"고, 여기는 카스티. 잘 들리는가?"
"잘 들린다, 카스티."
지미 골드의 암호였고 목소리였다. 특별한 경우에만 연락을 하기로 했던 터라 고영무는 긴장하여 이어폰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고, 정보가 누출되었다. 어디서 누출되었는지는 지금 조사 중이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고영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스위치를 눌렀다.
"그럼 어디로 가는가?"
"B 지점으로 가라."
그가 짧게 말했다.
"그리고 안내원은 없다. 너희들이 독자적으로 들어가도록! 고, 다시 말하지만 이제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K와 B와 Q밖에 없다."
그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이제 연락처는 한 곳이다, 고. 명심하도록! 알아들었나?"
"알아들었다, 카스티,"
그러자 무전은 끊겼다. 이제는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무전실을 나오자 로버트가 다가왔다.
"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부터 모든 무전을 금지시키도록 해요, 로버트."
그러자 조타석 옆에 서 있던 짐 버클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적지는 산타마르타요. 그쪽으로 갑시다."
로버트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 우리는 당신 명령을 따르도록 지시받았습니다."
산타마르타에 발을 디뎠을 때는 새벽 1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28명의 사내들은 모두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안에는 각종 총기류와 그동안 써야 할 생필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브루노와 필리페가 가방을 매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브루노의 먼 친척이 이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신세를 질 작정인 것이다.
"보스, 그럼 저희들은 먼저 가겠습니다."
브루노의 굵은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이곳은 제방의 끝 쪽이라 연안의 감시초소도 없는 곳이다.
"그럼 사흘 후에 보고타에서 만나자. 연락은 그때 하기로 하고."
브루노와 동행하는 11명의 사내에게 한 명씩 작별을 하고 난 고영무는 땅바닥에 놓인 가방 위에 앉아 있는 후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고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3년 전에 밀항한 사내였다. 영리하고 몸이 재빨랐으므로 알폰소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후안, 이젠 네 차례다."
뱃멀미에 지친 듯한 후안이 가방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보스, 몸조심하십시오."
"너도 몸조심하고, 부하들 잘 관리해,"
"그럼 사흘 후에 뵙겠습니다."
그가 인솔하는 여러 명의 사내들이 제방길 위를 걸어 어둠 속으로 묻혀들어 갔다.
"보스, 보스가 아신다는 성당의 관사는 이곳에서 3킬로 떨어져 있습니다."
짐 버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바닷바람이 휘몰려와서 그들의 피부에 끈끈한 공기를 묻혀 놓고 밀려갔다. 우기가 끝나 가는 5월 중순이었으나 저녁때 비가 한바탕 뿌린 모양이었다. 어둠에 묻힌 제방의 이곳저곳에는 빗물에 고인 웅덩이가 있어서 발들이 젖었다.
"자, 우리도 가자."
고영무의 말에 나머지 사내들이 이곳저곳에서 몸들을 일으키는 기척이 들렸다. 28명의 대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보고타로 진입하려는 것이다. 고영무는 최대광과 신용만, 짐 버클리와 산토스를 포함한 아홉 명의 대원을 인솔하고 있었다. 그는 전에 마르틴 신부가 자신을 재워 주었던 성당의 기숙사로 대원들을 데려갈 작정이었는데 짐 버클리도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해 주었다. 짐 버클리가 앞장선 아홉 명의 대원은 한쪽으로 눅눅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제방길을 걸어 내려왔다. 문득 고영무는 머리를 들어 옆쪽을 바라보았다. 야적장이 보였는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은 석탄 더미였다. 이쪽 어디에서인가 호세 김이 나타났었고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저쪽 어느 구석으로 떨어져 내렸었다. 그곳으로 다시 온 것이다. 이제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보여 발길이 드러났지만 그들의 걸음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이제부터는 만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군이나 경찰, 그리고 밀정들이 주변에 숱하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대원들 사이의 간격을 벌렸으므로 짐의 일행 서넛과 고영무의 일행 대여섯으로 나누어졌다. 그들은 이제 불이 꺼진 시가지로 들어섰다.
"형님, 이곳을 잘 아십니까?"
신용만이 그의 옆에서 나지막이 물었다.
그들은 문이 닫힌 상점 앞을 지나고 있었다. 길 건너편으로 두 명의 메스티조가 바쁜 걸음으로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쪽도 판초를 걸치고 중절모를 둘러쓴 메스티조의 차림이었는데 제각기 보따리나 가방을 들었으므로 집을 떠나 헤매는 유랑민 무리처럼 보였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밀항선을 탈 때 한 번 와 보았을 뿐이야."
앞쪽에 신경을 쓰면서 고영무가 말했다. 비가 많이 왔는지 도로의 파인 부분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습기에 젖은 땅은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보스, 저쪽에 성당의 십자가가 보이는군요."
앞장서 가던 짐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저 성당 아닙니까?"
"그렇군, 바로 저곳이야. 가서 산타밀라의 마르틴 신부 이름을 말하면 재워 줄 거야."
"꽤 큰 성당이군요."
그들은 걸음을 빨리하여 성당으로 향하는 돌길을 걸었다. 좁은 골목길이어서 가로등도 켜있지 않았으나 정면으로 보이는 성당의 한쪽 창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개인지 고양이인지 구분이 안 가는 짐승 한 마리가 그들을 가로질러 벽에 들린 구멍으로 들어갔다. 늙은 신부의 안내를 받고 커다란 숙소를 배정받은 그들은 들고 있던 집을 내려놓고는 긴장이 풀린 듯 모두 어깨를 늘어뜨렸다. 숙소는 사방 10여 미터쯤 되는 정사각형의 방이었는데 한쪽에 나무 침대가 10여 개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열흘 동안이나 배에서 흔들리며 살아왔던 대원들은 딱딱한 나무 침대라도 반가운 모양인지 얼굴들이 풀어져 있었다.
"보스, 마르틴 신부라는 분은 영향력이 있는 신부인 모양이지요? 군소리 않고 방을 내주는 걸 보면 말입니다."
짐이 판초를 벗으며 말했다.
"조그만 마을의 신부야. 성격이 조금 특이하기는 하지만."
고영무가 마르틴 신부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의 성당은 지금도 증축 중일 것이다.
"성당에 들어와서 잠을 자보기는 난생처음이로군."
거대한 체구를 늘어뜨리고 침대에 앉은 최대광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콜롬비아에서의 첫날밤인데 말이야."
"왜, 호텔 생각하고 있었냐?"
저쪽에서 신용만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는 그의 얼굴도 심란하게 보였다. 나무 문이 열리더니 산토스가 광주리에 과일을 가득 담아 들고 들어왔다. 그는 광주리를 고영무의 앞에 내려놓았다.
"보스, 돈을 좀 주었더니 과일을 주더군요. 먹을 건 이것밖에 없답니다."
대원들이 과일 바구니에 몰려들어 사과와 오랜지, 바나나들을 제각기 집어 들었다. 저녁을 리버티 호에서 먹었지만 출발 전의 긴장 때문에 몇 술 먹다 만 대원들이 많았던 것이다.
"브루노나 후안은 잘 들어갔는지 모르겠군."
귤 한 개를 집어 든 고영무가 말하자 짐이 바나나를 우물거리고 씹으며 대답했다.
"보스, 이제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팀이 경찰이나 순찰대를 만나지 않은 것도 운입니다."
귤의 껍질을 벗기며 고영무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후안은 시장의 입구를 지나치면서 뒤쪽을 바라보았다. 일곱 명의 동료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그를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중절모에 판초 차림이어서 겉모습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모두 미국에 밀항해 오기 전에는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들리고는 시장의 옆쪽 길로 들어줬다. 이곳은 낮에 야채 시장이 열렸었는지 길바닥에는 물에 젖은 야채가 잔뜩 깔려 있었다. 어두운 길가에는 늘어진 빈 천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천막의 가운데 부분이 묵직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빗물이 고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가는 행인들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이 길이 끝나는 근방에 구몬의 가게가 있을 것이다. 구몬은 그의 친구의 동생이었는데 이곳에서 장사를 한다고 들었으므로 오늘 밤에는 그에게 신세를 질 작정이었다. 그의 친구인 알도는 보고타의 같은 학교에서 일한 사이였고 들리는 소식으로는 시외의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여덟 명의 발자국 소리만 빈 길을 울리고 있었다. 가끔씩 철벅거리며 물이 튀는 소리도 났고 누군가가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마악 지저분한 시장의 옆길을 벗어났을 때였다. 후안은 오른쪽 길에서 다가오는 세 명의 순찰병을 보았다. 지휘자인 듯한 한 명이 앞장을 서고 두 명은 나란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도 똑같이 이쪽을 발견했는지 철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정지, 정지하라!"
앞장선 사내가 소리쳤는데 습기가 낮게 깔려 있는 탓인지 목소리가 아래쪽으로 덮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쪽은 여덟 명이다. 후안은 자신의 부하들이 벌려 서는 것을 느꼈다.
"신분증."
휘익 플래시로 이쪽의 얼굴들을 훑으면서 앞장선 사내가 말했다. 콧수염을 기르고 어깨에는 상사의 견장을 달고 있는 깡마른 사내였다. 이쪽의 숫자가 많았으므로 뒤에 선 두 병사는 M-16 총구를 이쪽으로 겨누고 있다.
"세뇨르, 우린 잘 자리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허리를 굽히면서 후안이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산에서 내려와서 아는 집을 찾느라고."
"모두 짐을 내려놔. 손을 들고."
이젠 앞장선 상사도 허리에 찬 권총을 때어 들었다.
"한 손에 신분증을 들어라! 어서!"
어두운 밤이었고 이쪽 거리는 상가가 아니었으므로 불빛도 드물었다. 화물차 한 대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그들 옆을 지나갔다. 신분증을 꺼내려면 판초 속에서 꺼내어야 한다. 후안은 판초 속으로 손을 넣고는 소음기가 끼워진 리볼버를 꺼내었다. 꺼내 들자마자 바로 코앞에 션 상사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상사는 미처 권총을 쓸 겨를도 없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놀란 병사들이 미처 조준하기도 전에 다시 후안의 권총이 빛을 뿜었고 이어서 서녀 명의 부하들도 일제히 권총을 쏘았다. 물주머니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여러 번 났고, 이윽고 세 명의 병사는 길바닥에 시체가 되어 넘어졌다.
"자, 가자."
그러면서 서둘러 땅에 내려놓은 가방을 든 후안은 바로 옆쪽 건물에 씌어진 간판을 보았다.
'구몬의 그릇 가게'라고 흰 페인트로 칠해진 글씨가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다. 이맛살을 찌푸린 후안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야단났어. 여기야."
그는 턱을 들어 간판을 가리켰다.
"시체를 치우자. 야채 시장 안쪽으로 옮겨놓잔 말이야."
사내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짐가방을 길가에 세워놓고는 두 명씩 달려들어 시체를 들었다. 그리고는 야채 시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후안은 그들이 시체들을 멀찍이 옮겨놓는 것을 확인한 다음 구몬의 닫힌 가게로 몸을 돌렸다.
카를로스는 1미터 85가 넘는 키에 체중이 백 킬로쯤 되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나이는 마흔다섯으로 아직도 얼마든지 힘을 쓸 수 있 는 한창때였고 크고 날카로운 눈매와 곧은 콧날, 그리고 조금 얇은 듯한 입술 위에는 검고 가지런한 콧수염이 나 있었다. 그는 마약왕이 아니더라도 어디에 내놓아도 눈에 띄는 사내였다. 그는 보고타 교외에 있는 별장의 호화로운 응접실에 맞아 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쌍꺼풀이 졌으나 눈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간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는 사람은 드물다. 앞에 앉은 사내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선을 내려 탁자를 바라보았다.
"문도, 카스틸로의 수하들 중에서 충성심을 가지고 그를 보좌하는 놈은 한 놈도 없다."
카를로스가 입을 열었는데 정정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카스틸로의 측근 중에서 내가 만들어 준 비밀 구좌를 안 가진 놈이 없지.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조리 외국으로 달아날 놈들이야."
문도가 머리를 들었다.
"카를로스, 그렇다고 이 일을 덮어 둘 수만은 없습니다."
그는 잿빛 머리에 우박이 떨어진 것같이 울퉁불퉁한 얼굴을 한 사내였다.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나 털이 굵고 길어서 입술 위로도 함부로 털이 나왔다. 겉으로는 힘만 쓰는 사내같이 보였으나 문도는 카를로스의 일급 참모였다.
"계엄사령관인 에르난데스에게라도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에르난데스에게?"
카를로스가 턱을 들면서 눈을 가늘게 줬다.
"그놈에게 알려 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았나?"
"전국의 공항이나 항구는 말할 것도 없고 도로마다 검문소를 증설해 야단법석을 떨 것이다. 라파엘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은 별도로 하고라도."
"우리에게 다시 통행료를 요구하겠지, 편의를 봐주겠다고. 놈은 그놈들을 잡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겉치레만 요란한 놈이야. 카스틸로에게 잘 보이려고 아마 애꿎은 인디오 몇 명을 잡아서 처형시키겠지. 잡았다고 하면서."
"카를로스, 어쨌든 에르난데스는 계엄사령관입니다."
"내가 카스틸로를 만나겠다."
문도가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여러 차례 깜박이고 있다. 이제까지 카를로스와 카스틸로는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이 만나는 것이 알려진다면 카스틸로는 내부에서는 물론 외국 정부의 집중적인 규탄을 받을 것이다. 미국 정부는 그것을 확인하면 즉시 라파엘을 지원할지도 모른다.
"카를로스, 그것은 위험합니다. 카스틸로도 만나 주지 않을 것이구요."
"만나 줄 거야. 내가 직접 전화를 해서 약속을 하지. 카스틸로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를 직접 들어야 돼. 난 이렇게 이야기하겠어. 직접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라고."
카를로스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을 이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할 거야. 그러면 즉시 카스틸로는 움직이게 돼. 의심이 많은 놈이니까. 항상 부하들을 의심하고 있지. 아마 에르난데스나 다른 측근들이 나한테서 얼마만큼 뜯어가는가를 듣고 싶어 할 거야."
문도는 탁자를 내려다본 채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놈들이 어디로 갔을 것 같나, 문도?"
카를로스가 말머리를 돌렸다.
"부에나벤투라에는 상륙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위쪽으로 올라갔을 겁니다. 카르타헤나나 산타마르타 쪽으로. 에콰도르 쪽으로 갔을 리는 없습니다. 국경을 넘으려면 두 배로 힘이 드니까요."
"미국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라파엘 쪽은 어때? 그놈들을 쫓으면 그 한국 놈 일당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문도가 머리를 한쪽으로 누였다.
"라파엘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오르쿠에 쪽에 있는데요."
"강에서 고기 잡고 있나? 알폰소도 거기에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부카라망가를 한 번 다녀갔다고 합니다."
카를로스는 손을 들어 콧수염의 끝부분을 꼬았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보였다. 그의 전속 미용사가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다.
"라파엘은 아직 카스틸로를 전복시킬 힘이 없어. 군사력이나 자금, 그리고 민심도 마찬가지야."
카를로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카스틸로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나아. 새로운 정권의 새로운 놈들에게 새 구좌를 열어 주려면 두 배의 돈이 들어가."
"카를로스, 그 한국 놈은 페르난도를 바보로 만든 놈입니다."
"페르난도가 바보였다는 표현이 맞아, 문도."
카를로스의 이맛살이 와락 찌푸려졌으므로 문도는 시선을 내렸다.
"그놈을 용서할 수가 없어. 이제는 공공연히 나에게 도전을 해왔단 말이야."
"가르시아의 목을 부러뜨려 죽이다니, 나도 놈을 그렇게 죽일 테다."
카를로스의 말소리가 방을 울렸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구몬은 발을 멈추고는 눈을 치켜떴다. 도로의 양쪽이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좌우로 뻗은 도로는 시장의 후문을 지나게 되어 있었는데 양쪽 끝에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일렬로 서서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늘린 야채 시장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예 군인과 경찰들이 붉은색 끈을 가로질러 쳐놓고는 득실거리고 있었다.
"구몬, 이거 야단났어, 이거 장사 못하게 되었는데."
어느 사이 다가왔는지 옆집의 음식점 주인인 바철이 말했다. 그의 찌그러진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어젯밤에 군인 세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거야. 시체가 야채 시장 천막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저쪽에 피가 있었다는군."
그는 턱을 들어 끓은 줄이 쳐진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서 죽이고 시체를 옮겨놓았다는데, 야단났어. 통행을 금지시켜서."
머리를 끄덕여 보인 구몬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가 몸을 돌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아이를 안고 안채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안으로 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지 말고."
구몬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내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구몬은 가게의 옆쪽 문을 열었다. 그릇을 쌓아 두는 넓은 창고였는데 패 넓었으므로 사내들이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울 여유가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일어나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구몬을 바라보았다.
"구몬, 무슨 일이 있어?"
후안이 다가와 물었다.
"밖에 야단이 났습니다. 군인들과 경찰이 확 깔렸는데 도로를 봉쇄해서 통행이 금지됐어요. 어젯밤에 군인 세 명이‥‥‥‥"
말을 멈춘 구몬이 눈을 치켜뜨고 후안을 바라보았다. 얼굴색이 점점 하얗게 굳어져 갔다.
"우리가 여기서 나가야겠군, 구몬"
후안이 차분하게 말했다. 사내들은 어느 사이에 모두 일어나 짐을 꾸리고 있었다.
"자네 가족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후안, 내가 나가서 다시 보고 오겠습니다. 아직 집 수색은 하지 않는 것 같던데."
구몬이 정신을 가다듬은 듯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그러나 어깨가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을 하는 데에도 힘이 드는 것 같았다.
"뒷문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지?"
후안이 문 앞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다.
"옆집의 뒷마당이 나옵니다. 그쪽으로 대여섯 집을 넘어가면 도로가 나오는데, 바깥 도로지요. 시장의 정문 앞으로 들린 도로인데‥‥‥‥"
"집 사이에 문이 있나?"
"그건 그렇게 가보지를 않아서 모릅니다, 후안."
"알았네, 구몬. 우선 바깥 사정 좀 다시 알아봐 주게."
구몬의 두 눈이 다시 둥그랗게 되었다. 안쪽에 있던 사내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짧고 뭉특한 기관총이었다. 기다랗게 튀어나온 탄창이 보였다. 그들은 구몬의 시선을 무시한 채 제각기 탄창을 점검하거나 허리춤 사이에 끼워 넣고 있었다.
기차를 타면 보고타까지는 14시간 거리였으나 도중에서 검문 검색이 심하기 때문에 고영무는 버스를 타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버스도 도중에서 수시로 검문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가끔씩 지난번처럼 강도를 만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차처럼 일정한 노선을 달려 상대방에게 기다릴 여유를 주는 것보다 버스는 다소 융통성이 있었다. 산타마르타에는 수십 개의 버스 회사가 있었는데 회사라고 해서 몇십 대씩 버스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털털거리는 버스 두 대를 가진 회사도 있었고 짐차와 같은 버스 한 대를 가진 회사도 있었다. 짐 버클리가 새벽부터 나가 거래를 한 것이 바로 버스 한 대를 가진 마르비오 버스 회사였다. 마르비오 버스 회사의 사장은 마르비오씨였는데 그는 운전사 역할도 하고 있었다. 오십 대 중반으로 인디오의 혈통이 스페인계보다 훨씬 많이 포함된 것 같은 검붉은 얼굴이 억세어 보이는 사내였다.
아침 8시에 마르비오는 성당 옆쪽 골목 입구에 버스를 세웠다. 그는 운전석에 앉아 틱을 들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꾸욱 다물고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만족할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두어 명의 견습 사제가 버스를 힐끗거리며 성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 마르비오는 더욱 흐뭇해져 턱을 치켜들었다. 버스는 30인승이었으나 30명 외에 철근 기둥을 받쳤으므로 지붕 위에도 50명을 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싣지 않아도 된다. 성당에서 나오는 신부 아홉 명만 싣고 보고타로 가면 되는 것이다. 새벽에 찾아온 참으로 점잖고 신사다운 신부는 버스를 대절하는 값으로 백 명분의 요금을 내놓았다. 이윽고 마르비오는 허리를 펴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부님들이 성당의 뒤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성당 뒤쪽의 잡목 숲에서 나오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곳에는 성당의 묘지가 있었으므
로 누구를 참배하고 오는 길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신부들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제각기 짐가방들을 들고는 차를 향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신부님."
마르비오가 정중히 말했다. 신부는 언제나 존중받아야 할 것이고 돈 많은 신부는 더욱 그렇다. 신부들은 그의 인사에 가볍게 대답하고는 차에 올랐다.
"마르비오, 됐소. 출발합시다."
이제는 낯익은 마르코 신부가 점잖게 말하자 마르비오는 기분 좋게 기어를 쥐었다. 시내로 들어서서 시장 앞을 지나가는데 차가 막혀 조금 머뭇거렸으나 그곳을 벗어나자 이젠 길이 훤히 뚫렸다.
"마르비오, 오늘 밤 늦게는 보고타에 도착할 수 있겠소?"
마르코 신부가 다시 물었으므로 마르비오는 힐끗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다.
"안 됩니다, 신부님. 오늘은 매데인에서 자고 내일 보고타로 들어가셔야 됩니다. 보고타 지역은 저녁 9시부터 통행금지가 되어 있거든요."
"그렇군. 할 수 없지."
"제가 매데인의 좋은 호텔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마르비오. 당신의 숙박비는 우리가 부담하겠소."
그것은 아침의 계약에도 없었던 조건이었으므로 마르비오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일이 다섯 번만 더 생긴다면 50인승 버스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마르비오는 어깨에 힘을 주고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산타마르타 외곽의 검문소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검문소 앞에 차를 세우자 낯익은 치노스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르비오,오늘은 버스가 텅 비었어. 마누라한테 빈손으로 돌아가겠구만그래,"
마르비오가 눈을 치켜뜨며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봐, 치노스, 신부님들만 태웠어. 성당에서 모시고 오는 길이야."
치노스는 위병 조장이었으므로 머리를 들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군."
"보고타의 프리마다 대성당에서 큰 미사가 있어."
치노스는 손을 들어 버스 안으로 들어서려는 위병들을 세웠다.
"내가 돈 많이 별게 기도나 해달라고 부탁해 줘."
"알았어, 치노스. 내가 부탁할게."
치노스는 부하에게 손짓하여 차단 기둥을 들어 올리도록 했다.
"망할 자식,"
기둥을 빠져나온 마르비오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투덜거렸다.
"영창에 가라고 축원을 드리마."
뒤쪽에서 두어 명의 신부님들이 웃었으므로 마르비오도 빙긋 웃었다. 룸미러로 올려다본 신부들은 각양각색이었다. 동양인과 인디오의 혼혈 같아 보이는 신부가 있는가 하면 그야말로 메스티조의 거인 같은 신부도 있었다. ㅜ마르비오는 거인 같은 신부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빙긋 웃었다. 버스가 수렁에 빠져도 염려 없을 것이다.
"준비해라, 나간다."
후안이 판초 속에 기관총을 넣으면서 말했다.
"우선 나하고 레몬이 먼저 나간다. 2분 후에 반시오하고 세 명, 다시 2분 후에 나머지다. 모이는 곳은 시장의 정문. 그곳에 문제가 있으면 각자 흩어져서 선착장의 대기실에서 만난다."
"후안, 선착장까지 못 가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하지?"
반시오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물었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모두 판초 속에 매거나 집어넣었으므로 손에 든 것은 없다. 사격하기 쉽도록 준비를 한 것이다.
"선착장에 못 오게 되면 보고타로 가라. 힐튼 호텔의 로비에 가면 대원들을 볼 수 있을 거야."
갑자기 후안은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에서 다급한 소리가 나더니 구몬이 들어선다.
"후안, 군인들이 집을 수색하고 있어요. 길 건너 집들을 수색하는데 곧 이쪽으로 올지도‥‥‥‥"
"우린 떠난다, 구몬."
구몬의 어깨를 끌어안은 후안은 재빠르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떨어졌다. 후안은 앞장서서 안채로 들어가 마당으로 향한 문을 열었다. 마당은 비어 있었고 뒷집으로 연결된 문이 보였다. 그는 마당을 건너뛰어 뒷집으로 향한 문을 열었다. 레몬이 헐떡이며 다가와 그의 옆에 셨다. 뒷집의 마당은 비어 있었고 옆쪽의 담을 넘으면 다시 옆집의 마당이 된다. 숨을 들이마신 후안은 문을 열고 옆집의 마당을 뛰어 건넌다. 뒤에서 레몬이 따르는 기척이 들렸다. 담장은 돌로 쌓여 있었고 높이는 2미터 정도였다. 그는 두 손을 담장 위에 짚고는 뛰어올라 상반신을 걸쳤다. 사내 한 명이 마당에 서 있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후안은 서슴없이 담장을 뛰어넘었다.
"소리 내지 마라!"
그를 보면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 후안은 사내를 스쳐 지나갔다. 사내는 삼십 대로 보이는 인디오였다. 손에는 약에 쓰려는지 한 아름 나무뿌리를 안고 있었다. 그가 마악 옆쪽의 담장에 손을 대었을 때였다.
"도둑이야!"
나무뿌리를 내동댕이친 인디오가 소리를 질렀고, 마악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던 레몬이 허리춤에 끼워 놓은 권총을 뽐아 그를 쏘았다. 퍽 소리가 나며 어디에 맞았는지도 모르게 인디오가 땅바닥으로 넘어졌다.
"레몬, 넘어가. 빨리!"
주춤거리며 서 있는 레몬을 향해 후안이 말하면서 담장에 등을 기대고 섰다.
"후안, 당신은?"
담장 위로 몸을 솟구친 레몬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난 나중에. 거긴 괜찮냐?"
"괜찮아요, 후안. 골목인데 저쪽에 시장 입구가 보입니다."
그리고는 레몬이 골목 안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안채에서 사내 두 명이 달려 나왔다. 쓰러진 인디오가 질렸던 비명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모두 인디오였는데 한 사람은 손에 나무를 자르는 뭉특한 칼을 쥐고 있었다. 입맛을 다신 후안은 판초 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그들에게 겨누었다.
"당신들을 해치고 싶지 않아. 제발 우리를 내버려 둬."
인디오들은 권총을 보자 섬뜩한 모양이었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특히 칼을 든 인디오는 젊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소음기가 끼워진 권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퍽. 후안의 권총에서 무엇인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인디오는 손에 든 칼을 떨어뜨렸다. 그는 멈춰 서서 어깨에서 솟구치는 피를 이상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이 든 인디오가 몸을 돌렸다. 후안은 그의 다리를 향하여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이 조금 높았는지 사내가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감싸 쥐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옆쪽의 담장을 뛰어넘어 반시오와 그의 동료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쓰러진 세 사람을 스쳐 다시 이쪽의 담장에 달라붙었다.
"후안, 당신은?"
반시오가 숨가쁘게 물었다.
"어서 먼저 가. 나는 이곳을 지킬 테니까."
나머지 두 사람이 오려면 아직 2분이 남아 있었다. 반시오가 골목 안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 후안은 어디선가 고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것은 오른쪽이었다. 인디오들이 뛰어나온 곳이다. 어깨에 총을 맞은 인디오는 땅바닥에 앉아 피가 흐르는 어깨를 누르고 있었고 엉덩이를 맞은 인디오는 누워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가족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갑자기 안채의 입구에서 군인들이 뛰쳐나왔다. 계엄군이었다. 두 명의 병사가 M-16을 겨누고는 그를 향해 쏘았고, 후안도 그들을 향해 권총으로 마주 소았다.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병사 한 명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으나 다른 한 명은 허공에 대고 수십 발의 총알을 쏘아댄 다음 뒤로 넘어졌다. 그러자 저쪽 담장을 뛰어 넘어오는 두 명의 대원이 보였다.
"후안."
그들의 커다랗게 부릅뜬 눈이 보였다.
"빨리 넘어가."
후안이 그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 대신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호흡이 멎어 있다는 것을 후안은 알았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옆의 담장을 가리켰다.
"후안."
다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으므로 그는 눈을 부릅떠 보였다. 그러나 이제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하얘졌고 검은 불똥이 여러 개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는 감각이 달아났고 자신이 서 있는가 앉아 있는가도 알 수 없었다.
"후안!"
대원 하나가 다시 소리쳐 부르다가 그의 몸이 앞으로 넘어지는 것을 보고는 담을 뛰어넘었다.
버스는 산악 지역으로 들어서더니 곧장 바위 사이의 포장도로를 달려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심한데다가 2차선의 좀은 도로여서 앞쪽에서 내려오는 차가 있을 때에는 서로 멈춰 서서 넓은 길을 찾아 슬금슬금 다가가는 형편이었다. 고영무는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돌려 앞쪽에 앉은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버스에 탄 지 대여섯 시간이 지났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으나 최대광만은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가끔씩 산비탈의 바위를 올려다보거나 아래쪽의 능선들을 내려다보았다. 산은 고원지대여서 나무가 별로 많지 않았으나 커다란 바윗덩이들이 많았다. 바위 한 개라도 떨어지면 도로는 금방 막힐 것이다.
"형님, 카스틸로를 죽여 버리면 정권은 라파엘이 잡습니까?" -
문득 머리를 이쪽으로 돌린 최대광이 물었으므로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게 되겠지. 미국 측에서 라파엘에게 연락을 하겠지."
"카를로스는 카스틸로와 함께 넘어지는 것 아닙니까?"
"문제가 바로 그거야. 지미의 이야기로는 카를로스와 은밀히 내통하고 있는 카스틸로 정권이 문제라는 것이지. 마약을 근절시키지 못한단 말이다. 이대로라면."
"형님,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
문득 고영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건 왜 물어?"
"이 사람들은 라파엘 측이니까 카스틸로를 잡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요? 형님하고 저하고 용만이 말입니다."
자는 줄 알았던 신용만이 머리를 돌려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도 궁금한 듯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고영무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들에게조차 미국과 합의했던 내용을 말해 주지 않았다. 버스는 가파른 산길을 허덕이며 오르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가지고 있는 마약을 갖는다. 그것을 크링거에게 넘기는 거야."
"크링거에게 판단 말입니까?"
"그래, 제값을 받고."
"그렇다면 카스틸로 정권이 전복된 다음에 카를로스도 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물어본 것은 신용만이었다.
"그렇지. 아마 그때에는 라파엘의 정부군이 미군의 지원을 받아 전면공격을 하게 될 거다. 이제까지 하고는 다르게. 거기서 탈취한 마약은 모두 우리가 걷는다. 그리고 크링거에게 넘기는 거지."
"형님, 만일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신용만이 아예 몸을 이쪽으로 돌리고는 소곤대듯 물었다. 한국말이었으나 주위를 의식한 듯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신부 복장을 한 대원들은 대부분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그것까지 안 믿을 수가 없지. 믿어야지 다른 수가 없었어."
고영무의 말에 신용만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머리를 돌렸다.
"아, 젠장. 약속 안 지키면 지미나 앨버트의 목을 분질러 버리는 거지 뭘."
최대광이 말했으나 고영무와 신용만은 머리를 들지 않았다. 버스가 멈춰 셨으므로 그들은 머리를 돌려 앞쪽을 바라보았다. 자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깨어 일어났다. 마르비오가 투덜거리면서 운전석 옆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길에 바위가 굴러 있어요. 산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앞쪽에 앉아 있던 짐 버클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나가서 치워야 할 것 같은데요."
"저기, 저것!"
갑자기 대원 하나가 소리쳤으므로 모두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산의 바위틈에서 군복 차림의 사내 세 명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위 옆쪽에 서 있는 한 명까지 합하면 모두네 명이었다.
"산적입니다."
대원이 낮게 소리쳤다. 모두들 옷자락 속이나 가방 속에 넣었던 무기들을 꺼내 들었으므로 철커덕거리는 금속 소리가 버스 안을 메웠다. 마르비오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화가 난 듯 두 팔을 허리춤에 짚고는 무어라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산적들을 여러 번 만났는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가 버스를 손가락으로 연방 가리키며 떠드는 것으로 보아 신부님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모양이었다. 산적들은 모두 M-16으로 중무장한 차림이었고, 어떤 사내는 가슴에 주렁주렁 흔들리는 수류탄 대여섯 개를 매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에 권총을 든 마른 몸매의 사내가 마르비오를 밀어젖혔다. 그러자 나머지 산적들은 버스를 향해 다가와 안으로 들어섰다.
"신부님들, 가지고 계신 물건들을 모두 내놓으십시오. 우린 라파엘 대통령의 부하들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린 물자가 부족합니다."
앞장선 사내가 M-16을 이쪽으로 겨누면서 유창하게 말했다. 여러 번 연습을 했는지 아니, 써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 신부님들. 가방은 모조리 통로로 내놓으시고, 귀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서."
짐 버클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셨다.
"친구들, 우린 성직자라 가진 것이 없네. 가진 것은 옷이 든 가방뿐이야."
"그 옷이라도 내놔. 이야기 길게 하지 말고."
앞장선 조그만 사내가 잇사이로 말을 뱉었다. 그는 총구로 짐의 아랫배를 두어 번 찔렀다.
"신부라고 해서 사정 봐주지는 않아.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그러지."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문으로 들어선다. 조그만 눈이 반짝이는 삼십 대 후반의 사내였다.
"빨리빨리 걷어. 시간이 없다."
사내들이 통로의 안쪽에 일렬로 늘어섰으므로 최대광은 옆에서 총을 겨누는 이십 대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총구를 이쪽으로 향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갑자기 터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짐의 옆에 서 있던 지휘관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최대광은 손을 연어 옆에 선 사내의 총신을 움켜쥐고는 힘껏 옆쪽으로 잡아당겼다. 사내가 와락 이쪽으로 쓸려 들어오는 순간 M-16의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 드르륵 하는 연발사격이다. 다른 한 손으로 사내의 멱살을 움켜쥔 최대광은 이마로 사내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다시 차 안에서 두어 발의 묵직한 발사음이 들리더니 이윽고 조용해졌다. 산적들은 모두 통로에 쓰러져 있었다.
"자, 시체들을 치우자."
짐이 일어서자 대원들은 시체들을 끌어내렸다. 머리를 흔들며 통로에 주저앉아 있는 사내는 최대광에게 얼굴을 들이받힌 사내였는데, 곧 대원에게 목덜미를 잡혀 통로로 끌려 나갔다.
"아니, 이거 어떻게 된‥‥‥‥"
마르비오가 입을 떠억 벌리고는 대원들과 시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느님이 먼저 데려오라고 명령하셨소."
짐이 자르듯 말했다. 그들은 사내들을 그들이 나왔던 바위 사이의 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곳은 비도 피할 수 있는 우묵한 동굴이었는데 자리까지 깔려 있었고 먹다 만 음식 찌꺼기와 담배꽁초들이 바닥의 이곳저곳에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시체 한 구를 바닥에 던져놓은 최대광은 짐이 권총을 받아 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직도 머리를 건들거리며 살아 있는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퍼억 하고 조그만 동굴 안이 올렸다.
"살려 놓으면 안 돼요. 우리가 탄로 나니까. 이놈들은 정부군이오. 우리 쪽의 산적행세를 하도록 카스틸로가 전략을 왔다고 들었습니다. 국민들의 원성을 돌리기 위해서지요."
최대광은 잠자코 손바닥을 털면서 동굴을 나왔다. 마르비오는 버스 앞쪽에 서 있었는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마르비오, 이 바위들을 치웁시다."
그는 짐의 말에 놀란 듯 머리를 돌려 바위를 바라보았다.
"네, 치워야지요."
"마르비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우리를 신부로만 생각하면 돼요."
"네, 신부님."
그러나 그의 신부님이라는 말은 조금 움츠러들어 있었다.
3. 네이바 분기점
다운타운에 있는 하야트 리겐시의 로비 라운지에 박정환과 김영지가 마주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어서 주위의 테이블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활기가 느껴졌으나 그들은 제각기 시선을 따로 한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김영지는 박정환과 일주일째 만나지 않다가 오늘에야 전화를 해서 그를 불러내었다. 그리고는 결혼할 수 없으므로 헤어지자고 말한 것이다. 찻잔을 내려놓은 박정환은 머리를 들었다. 시야에 김영지의 얼굴이 가득하게 들어 왔고 그 순간 가슴이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더 이쪽의 가슴을 매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
"정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정환씨에게는."
김영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가 두려운 듯 박정환이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꼭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무 말도 없이 헤어질 수는 없어요."
"날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면 왜?"
쓸데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마침내 박정환이 물었다.
"고영무를 죽이기 위해서였어요."
놀란 박정환이 머리를 들었다. 그는 눈을 껌벅이며 그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고영무가 제 오빠와 아버지를 죽였어요. 정환씨도 신문을 보셨을 거예오."
박정환이 '아!' 하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으나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놈에게 복수하려고 콜롬비아에서 서울로 갔어요. 어머니는 그 일 이후로 폐인이 되셔서 지금도 말을 하지 않으세요. 전 고영무의 집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LA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LA에 박정환씨가 계시라는 것도."
"정환씨한테는 정말 잘못했어요. 하지만 정환씨의 순수한 마음을 잊지는 않겠어요. 행복하실 거예요, 정환씨는."
"정말 마음대로군."
박정환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때로는 분노가 사랑의 상처를 잊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지금의 박정환이 그런 상황이었다. 그는 이제 김영지가 미웠다.
"당신, 무슨 스파이 작전을 하는 거야 뭐이? 날 이용해서 고영무를 잡겠다고? 내가 그놈 친구니까 말이지?"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나한테 고영무에 대한 것을 꼬치꼬치 물었군. 집에 가자니까 갖은 핑계를 다 대고."
"그래, 이젠 그놈이 여행을 가버렸으니 허탕을 쳤겠군. 죽이는 것 말이야."
그는 김영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죽이는 게 어디 쉽게 되는 줄 알아? 여기가 어디 스페인이나 시칠리아섬이고 3백 년쯤 전의 시대야?"
"죽이러 갔었어요. 권총을 사 들고 가서 죽이려고 했는데."
박정환이 꿀컥 침을 삼키고는 말을 멈췄다.
"총을 빼앗겼어요."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좌악 펴고는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오빠를 죽였다는 여자를 데리고 있었는데."
머리를 든 김영지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박정환의 가슴 쪽에 시선을 주었다.
"머리가 흔란스러워요."
그녀의 머리가 혼란스러운 것은 고영무 때문이지 이쪽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박정환은 다시 심란해졌다. 그러나 직접 권총을 들고 가 쓰려다가 빼앗긴 모양이다. 시칠리아가 어쩌고 했던 자신이 무안해졌다.
"이런 말씀 드리면 더 속이 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나름대로 노력도 했어요. 정환씨를 진심으로 좋아해 보려고."
김영지가 다시 시선을 내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안 돼요. 고영무가 어른거려서 그것이 좀처럼 되지 않아요."
"미안해요, 정환씨. 제 입장을 조금만 이해해 주신다면‥‥‥‥"
"난 이해 못 해. 넌 나를 가지고 놀았어. 철저하게 날 이용했다구."
"용서해 주세요."
그녀가 잘못을 빌면 빌수록 다시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벌어지는 것이다. 박정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를 하건 안 하건 그녀는 애초부터 사랑의 감정은 있지도 않았고 철저한 계산으로 접근해 왔다. 그녀가 이쪽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면서 털어놓아 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런 때 먼저 일어나는 것이 덜 비참하겠다고 느꼈으므로 박정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가겠어.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정환씨!"
그녀를 내려다본 박정환의 가슴이 다시 덜컥 소리를 내었다. 두 눈에 가득 물기를 담고 김영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행복해지시기를 빌겠어요."
"잘 있어."
그녀의 눈물이 자신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으므로 박정환은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영지의 눈에서 이윽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깐동안 눈 밑에 고여 있어서인지 눈물 줄기는 차가웠고 턱의 한쪽에 매달린 방울은 더 찼다. 옆쪽에 앉아 있던 백인 남녀가 이쪽을 힐끗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김영지는 눈물을 그대로 두었다. 김영지는 그래도 박정환은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비교할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고 그것에 분개했을 뿐이었다. 이쪽이 이제부터 생의 목적이나 희망을 잃고 처절하게 견뎌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김영지는 로비를 뛰어나가 그를 움켜잡고 싶었다. 허위였다는 것을 서로가 뻔히 알더라도 다시 사랑을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김영지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영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고 그는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러자 밀리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고영무의 저택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약혼자가 고영무에게 살해되었다고 했다. 물고 물리는 죽음의 게임이다. 복수는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5월 말의 화창한 오후였다. 바람 끝에 나뭇잎의 냄새가 맡아지는 서울 근교의 나무 그늘에 박주경과 이자영이 마주 앉아 있었다. 생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는 주변 분위기와 운치 있게 어울렸고, 앞쪽의 푸른 논에서는 농부가 잡초를 뽑고 있었다. 박주경이 좋아하는 야외 찻집이었는데, 그들은 한동안 아래쪽의 농부와 먼 쪽의 마을을 바라보면서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자영이가 이해해 줘야겠어. 이 일은 아버님이 진작부터 마음에 두고 계셨던 일이라서‥‥‥‥"
이윽고 박주경이 입을 열었다.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날려 몇 올의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흩어져 내렸다. 그는 긴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하지만 자영이에게 보상은 하겠어, 그래서 만나자고 한 것인데 그는 저고리 안쪽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한 개 꺼내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얼마 되지 않지만 새 생활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이자영은 봉투에 시선을 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2억이야. 받아 줬으면 고맙겠어."
그녀가 시선을 들자 둘의 눈이 마주쳤고, 박주경이 입술 끝을 허물면서 웃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바보같이 이제야 그걸 알았어요."
이자영의 말소리가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로 밝고 또렷했으므로 박주경이 눈을 끔벅였다.
"당신은 지난주에 전격적으로 결혼을 치렀다고 했지만, 천만에요, 치밀하게 몇 달, 아니, 몇 년을 계산한 끝에 실행한 거예요. 내가 당신을 잘 아니까요. 우린 서로 이용했어요. 서로 사랑의 감정 없이 나는 당신을 얻는 것으로 내 인생의 격상을 노렸고 당신은 내 몸과 내 역할이 필요했던 거예요."
박주경의 입술 끝에 힘이 주어졌다. 웃음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자영이 말을 이었다.
"그 보상으로 2억은 너무 적어요. 내가 당신의 모든 약점을 쥐고 있 다는 것을 잊으셨어요? 당신이 한 일, 나는 1년 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거든요."
"이봐, 자영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썹을 찌푸린 박주경이 상체를 세웠다.
"날 협박하는 거야 뭐야?"
"큰소리칠 것 없어요, 박주경씨. 나도 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이자영이 이제 찬찬히 박주경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나를 당신의 아버지 옆으로 보내고, 그래서 어떤 일을 시켰고, 동생이나 동생 측근을 제거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시켰으며, 또 회사의 비자금을 어떤 식으로 빼돌렸는지 그걸 당신 아버지나 언론에 알릴 작정이에요, 아마 당신은 신혼 시절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거예요. 우습군요, 당신의 아내인 동부그룹의 셋째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면,"
"이, 이년이 정말!"
박주경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가 눈 주위부터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어림도 없는 소리 하고 있군."
"괜히 큰소리치지 말아요, 박주경씨. 겁이 나면 당신은 큰소리부터 친다는 걸 아니까."
이자영은 등을 의자에 붙이고는 팔짱을 끼었다.
"자, 흥정은 내가 하겠어요. 30억을 내요. 기간은 일주일을 주겠어요. 그 돈이 내 앞에 확실히 놓여질 때 나도 자료를 넘겨주겠어요. 나는 당신이 그룹의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되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믿어요."
탁자 위에 놓인 봉투에 잠깐 시선을 준 이자영이 말을 이었다.
"30억은 당신의 비자금 액수의 일부밖에 안 돼요. 그 내역을 국세청에 보낼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아마 30억의 열 배를 세금을 물어야 된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이 나쁜 년."
"너도 나쁜 놈이야, 이 자식아."
"이년이!"
박주경이 벌떡 일어났으나 이자영은 의외로 빙글거리며 웃었다.
"못난 놈, 화난 걸 보니까 진면목을 보는 것 같군. 어디 때려 봐라."
박주경은 턱을 들고 얼굴을 내미는 시늉을 하였다. 이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손을 뻗어 이자영의 멱살을 쥐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씨, 이게 무슨 짓이오? 여자한테."
놀란 박주경이 손을 풀고는 허리를 돌렸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인상이 사납다.
"우리가 안 왔으면 큰일날 뻔했잖아? 마악 살인하려고 들었는데, 너도 봤지?"
사내가 옆쪽에 서 있는 사내를 돌아보았으므로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던 박주경의 가슴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실감이 펄펄 나더구만."
"오늘은 이만 가겠어요."
옷자락을 매만지며 이자영이 박주경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후에 내가 연락하겠어요. 그때까지 준비해 놓으세요. 더 이상의 흥정은 없으니까 쓸데없는 짓 마시고 남자답게 끝내요, 박주경씨."
그녀가 앞장서자 사내 두 명이 그를 힐끗거리면서 뒤를 따랐다. 가슴이 꽉 막힌 듯했으므로 박주경은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에서 농약 냄새가 맡아졌다.
긴 얼굴의 사내는 상체를 비스듬히 숙이면서 책상 건너편의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박주경이와 만나는 장면을 찍어 달라고 하면서 이왕이면 신변 보호까지 해달라고 했답니다. 출장 사진을 적는 제 동생뻘 되는 놈이 저한테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런데 사건이 컸습니다."
그의 한쪽 입가에 흰 거품 같은 것이 묻어 있었으므로 유장수는 머리를 돌렸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여자가 박주경이한테 일주일간의 여유를 주겠다고 했는데 박주경이는 절절매는 표정이었습니다."
"약점을 잡힌 모양이군."
"네, 사장님. 여자가 무지하게 예뻤습니다."
유장수는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면서 옆쪽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서 있는 오길수는 전과 5범으로 폭력 한 번에 공갈 한 번, 사기가 세 번인 지저분한 놈이었다. 오길수는 어제부터 기를 쓰고 자신을 만나려고 했는데 제 딴에는 큰 건수를 물어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직계 부하도 아닌데다가 떠돌이에 입이 빠른 오길수가 가져온 일이다. 유장수는 입맛을 다셨다.
"다른 데 가서 알아봐라. 난 요즘 바빠서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오길수가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렸다.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다.
"사장님, 일은 간단합니다. 박주경이를 어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여자가 일을 끝내면 그때."
"난 그런 것 몰라."
이맛살을 찌푸린 유장수가 머리를 저었다.
"딴 데 가서 알아봐."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말을 붙일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오길수는 건성으로 허리를 꺾고는 사장실을 나왔다. 사장실 앞에 서 있던 거인은 가슴둘레가 2미터는 되어 보였는데 오길수가 나오자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너어?"
그가 바가지가 깨지는 듯한 목청으로 물었다.
"네, 형님."
"사장님이 뭐라시데?"
"네, 그것이‥‥‥ 사장님이 바쁘시다고, 바쁘지 않으시면 한 번 알아보시겠는데 ‥‥‥‥"
"씨발놈."
으르렁거리듯 거인이 그를 노려보며 말하자 오길수는 입을 닫았다.
"이 자식아! 나까지 사장님한테 체면을 잃게 되었잖여. 이 씨발놈아."
사내가 팔짱을 풀었으므로 오길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폭력으로만 별을 열두 개나 달고 있는 대원수였다. 그것도 어설픈 폭력이 아니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는 빠찡코 사장 납치나 옛날의 민주당사 난입 사건도 그가 한몫했던 일이다.
"에이, 쪽팔려서 이거."
멀찍이 떨어진 오길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강판술은 몸을 돌렸다. 그는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장가도 들지 못한 강판술은 시흥에 어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그가 형무소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유장수가 보내준 생활비로 살아왔었다. 오길수를 내세워 얼굴을 세워 보려고 했던 강판술은 입맛이 썼다.
"강선생님, 잠깐 사장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안쪽의 책상에 앉아 있던 사내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말했으므로 강판술은 걸음을 멈췄다.
오길수가 눈을 번쩍이며 사내를 바라보았으나 사내는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강선생님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오길수는 어깨를 늘어뜨렸고 강판술은 어깨를 세우고는 사장실로 향해 다가갔다.
"거기 앉아."
강판술이 들어서자 소파의 앞자리를 가리키며 유장수가 말했다.
"아까 그 친구는 갔나?"
"네, 갔습니다, 사장님."
소파에 엉덩이만 걸친 강판술은 똑바로 앉아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그놈, 입이 가볍다고 하더군. 물론 자네도 잘 알겠지?"
"압니다, 사장님. 그래서 ‥‥‥‥"
"아니, 됐네. 됐어."
유장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자네가 어떻게든 나한테 신세를 갚으려고 하는 것 알아. 그래서 그놈을 데려왔겠지."
"아닙니다, 사장님."
"꽤 큰일이야. 그렇지 않은가?"
"네, 사장님, 일성그룹이라면 재벌그룹 중에서도‥‥‥‥"
"박주경이 이번에 경영권을 물려받고 동부그룹의 둘째 딸과 재벌간 혼사를 했는데 문제가 많은 모양이구만."
유장수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것 봐, 강판술이 자네도 이젠 결혼도 하고 생활 기반도 잡아야지. 안 그런가?"
"저야 어디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말은 그랬지만 강판술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장수는 박주경의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번 일은 우리가 맡아 하세. 하지만‥‥‥‥"
"네, 사장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상체를 번적 세운 강판술이 그의 말을 잘랐다. 수고스럽게도 그의 입에서 놈의 이름이 다시 한번 나오게 할 수는 없었다.
"오길수는 제가 알아서 이 일에서 손을 떼게 하겠습니다, 사장님,"
"자네가 그것을 맡아 주겠나? 그렇다면 됐네."
만족한 듯 유장수는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모처럼 큰일이 걸렸어. 모두 자네 덕이야."
"아닙니다, 사장님."
강판술은 이것이 오길수의 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놈은 여우 새끼처럼 냄새나 맡고 오면 된다. 그런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도 없는 놈이었다.
이한기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나서 장규식을 향해 머리를 저었다.
"장형, 마약 사업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오. 그리고 한국 시장은 단속이 철저해서 몇 개의 라인을 빼고는 금방 들통이 납니다."
장규식은 입맛을 다시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장형이 유장수의 조직에 파고들 수 있다면 문제가 다르지. 하지만 그건 지금 입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이성철의 끄나풀들한테 넘길 수는 있지 않소?"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진작 손을 썼지."
이한기가 짜증난 얼굴로 장규식을 바라보았다.
"우린 지금 확 막혀 버렸단 말이오. 강사장이 당한 이후로 우리가 겨우 다져 놓았던 기반이 모두 유장수에게 흡수된 데다가 이성철이 자기 세력 안의 보스들뿐만 아니라 다른 보스들도 차근차근 손아귀에 넣고 있는 판이오. 그런데 기반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파고듭니까?"
"난 기반을 잡으려면 마약 장사를 해야 됩니다. 내가 직접 뛰더라도 장사를 하겠소."
상의할 것이 있다면서 이한기를 만난 장규식은 이제 턱을 쳐들고 언성을 높였다. 갈비집의 넓은 정원에 앉아 때늦은 점심을 시킨 참이라 주변에 사람은 없다.
"허 참, 장형은 정말 딱한 분이오."
이한기가 검은 얼굴을 들고 헛웃음을 웃었다. 그는 이제 장규식의 총에 맞은 상처도 나아 검은 피부가 옛날처럼 반질거리며 윤이 났다. 장규식은 장규식대로 유장수를 배신한 충격에서 벗어난 듯 행동에 활기가 차 있었다. 그들은 서로 빚을 갚은 입장이 되었고 이제는 사업을 상의하는 관계로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적이 유장수라는 동질의식 때문이었다. 원수의 원수는 곧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장규식은 지금 마약을 들여와 조직을 벌이자고 이한기에게 제의하는 참이었다.
"이번에 이성철이 보낸 김종무가 미국에 갔다가 단단히 경을 치고 돌아왔어요. 동남아는 말할 것도 없고."
태국이나 홍콩, 중국의 마약 상인들은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지하에 숨어 들어가 있었다. 경작지를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생산량도 적을 뿐 아니라 있다고 해도 가격이 높아서 위험부담을 에면 남는 것도 없다. 이성철이 공급처를 미국으로 바꾸려고 김종무를 보냈다가 마약부에 검거되어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판매조직, 마약 공급, 두 가지가 모두 문제요, 장형. 지금은 어려운 때요. 유장수와 이성철이 서로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 누군가가 들어오면 그때는 두 놈의 견제를 받을 겁니다."
이한기가 차근차근 말했다.
"오죽하면 내가 돈을 쟁여 놓고 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소? 장형, 약은 내가 들여올 테니까 그때 나와 손잡고 조직을 만들어 갑시다."
"그게 어느 세월이오?"
입맛을 다신 장규식이 머리를 돌렸으나 아까보다는 기세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는 숨어 지낸 지가 이제 석 달이 넘었다. 유장수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으나 한때 그의 수족이 되어 움직였던 장규식이라 쉽사리 잡힐 리가 없다. 그리고 아직도 유장수의 부하들 중에 끄나풀이 있어서 정보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홍성희가 미국의 LA에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LA에서 룸살롱을 한다던가. 김종무가 제 눈으로 봤다고 떠들고 다닌다던데."
이한기가 말을 바꿨다. 그는 싱글거리며 장규식을 향해 웃었다.
"홍성희를 살려 준 것이 장형 아니오? 그 여자가 LA에 있다면 최대광이나 신용만이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소."
"장형도 LA나 가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어때요? 그곳에 가면 미국 마약계의 거물인 크링거라는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만 만나면 되는데."
"크링거라면 지난번에 한국 사람인 고 무엇인가에 납치당했다는 사람이 아니오?"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났으므로 장규식이 물었다.
"그래요. 그 사람인데, 그 사람이 콜롬비아나 남미의 마약을 취급하지. 거물이오,"
"납치됐다가 나온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던데, 한국 사람한테."
"한국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합디다. 하지만 어쨌든 그 한국 놈 대단한 놈인 모양이오. 콜롬비아에서 살인을 하고 올라온 놈이라던데. 최대광이도 그놈을 아는 것 같았소."
우두커니 이한기의 얼굴을 바라보던 장규식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빌어먹을! 최대광이나 만나러 가볼까?"
버스가 메데인에 도착했을 매는 저녁 7시경이었다. 대원들은 산길에서의 사건 이후로 모두 긴장해 있었다. 마르비오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다섯 시간 동안 앞쪽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룸미러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마르비오는 시내로 진입하는 검문소에서 차를 세웠는데 이제는 검문하는 병사들한테 쓸데없는 농담도 하지 않았다. 병사 두 명이 버스 안으로 들어서더니 앞쪽에 앉은 짐에게 물었다.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십니까?"
"보고타의 프리마다로 갑니다."
앳된 얼굴의 병사가 머리를 끄덕이며 버스 안을 휘둘러보았다.
"신부님들이 대절하신 모양이지요?"
"그렇소, 내 신도여."
병사는 몸을 돌리더니 우두커니 서 있는 동료의 어깨를 밀었다.
"좋은 여행이 되십시오, 신부님들."
병사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마르비오는 기아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보스, 아무래도 운전사가 문제 될 것 같은데요."
고영무의 옆자리에 앉은 짐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고영무는 마르비오가 룸미러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앞쪽을 달리던 트럭이 속력을 줄이자 뒤늦게 발견한 마르비오가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체가 요동했고 모두들 의자를 안고 균형을 잡았다.
"보스, 저놈이 우리가 신부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제는 짐의 표정도 다급해졌다. 이제까지는 인적이 드문 산길과 고원지대를 통과했고 서너 개 지나쳤던 검문소들은 만약의 경우에도 이쪽의 화력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내로 들어와 있었다.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총격전을 벌일 수도 없고 도처에 경찰과 계엄군들이 깔려 있는 것이다.
"짐, 매수해라. 그 방법밖에 없다."
고영무가 말하자 짐이 찬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스, 아까 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없애고 저희들이 운전하면."
"위험해, 짐, 줘, 우리는 카를로스 측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마르비오가 다시 힐끗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최대광이 고영무의 옆쪽 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형님, 운전사 저놈의 눈치가 수상한데요,"
"짐이 방금 그 이야기를 하고 갔어,"
"소리라도 지르면 야단 아닙니까?"
"그럴 리는 없다. 우리가 가진 총을 보았을 테니까."
짐이 마르비오 옆의 엔진 덮개 위에 맞더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마르비오가 힐끗거리며 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짐에게 매수하라고 했다."
앞쪽 자리에 앉아 있던 신용만이 그의 말을 듣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 제일 좋습니다."
이윽고 마르비오의 얼굴이 번쩍 들리더니 버스의 속력이 줄어들었다. 짐을 노려보던 그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룸미러를 향해 눈을 치켜뜬 채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이쪽을 향해 끄덕이는 것이다. 그것은 고영무가 지휘자인 것을 진작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짐이 다시 이쪽으로 다가왔다. 최대광과 신용만이 그를 향해 머리를 모았다.
"입을 다무는 보상으로 백만 페소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짐의 말에 고영무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만일 이 일을 누설하면 카를로스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걱정 말라고 하는군요."
"됐다, 당분간은."
"신바람이 난 모양입니다, 보스."
마르비오는 다시 활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은 택시를 향해 경적을 울렸는데 가볍고 짧았다. 그는 룸미러로 이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프레지던트 호텔로 모신답니다. 거긴 일급인데다 검문도 없다는군요. 매데인 시장의 매부가 경영하는 호텔이랍니다."
짐이 앞쪽을 향해 돌아앉으며 말했으므로 차 안에 있는 대원들은 물론 마르비오한테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마르비오가 힐끗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시장의 매부는 대령입니다. 메데인 근처에 주둔하는 부대의 사령관인데 통행증도 발급하지요. 호텔에 파견 나온 장교가 있는데 오만 페소만 주면 특별 통행증을 줍니다."
"이봐, 마르비오. 보고타에 들어가는 데 통행증이 있어야 하나?"
짐이 묻자 마르비오가 어깨를 돌렸다.
"없어도 됩니다만, 그 통행증이 있으면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있는 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신부님."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말끝이 흐려져 있었다.
"카를로스의 일당에 필요한 통행증일 겁니다, 보스."
짐이 생각난 듯 말했다.
"마약을 운반하려면 그것이 필요하겠지요."
"그 통행증도 얻어 놔라, 짐."
고영무의 말에 신용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카를로스의 일당이라고 말한 덕분에 경비가 더 드는군요."
버스는 이제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고 주택들은 고풍스러웠다. 돈 에르난데스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방의 한복판에 서 있던 프랑코 대령이 부동자세를 했다.
"그래, 프랑코, 무슨 일이냐?"
저녁때에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하는 에르난데스였다. 저녁에는 밤에 열릴 파티나 모임의 기대에 부풀어 있어야만 한다. 좋은 술과 여자, 그리고 음악이 있는 곳에서 하루 일에 지친 몸을 쉬어야 하는 것이다.
"마간게 근처의 국도에서 저희 파견병 네 명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각하."
프랑코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어차피 시기가 좋지 않은 때였지만 내일 아침에 보고를 하면 왜 어젯밤에 즉각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길길이 뛸 판이다. 에르난데스는 눈을 껌벅이며 프랑코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십 대 초반으로 몸이 비대했고 아랫배가 나왔으므로 정복 밑에는 거들을 차고 있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고 기분이 나빠지지만 파티에 참석할 때는 꼭 거들을 찬다. 어지간한 인내심이 없으면 견뎌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흰 털이 반쯤 섞인 콧수염을 쓸면서 프랑코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산타마르타에서 소동을 벌인 놈들의 소행이겠지?"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각하."
"마간게 근처라면 국도로 올라왔단 말이냐?"
"네, 각하. 고속도로는 검문 검색이 철저하므로 아무래도."
에르난데스는 금빛 수술로 뒤덮인 자신의 제복을 내려다보았다. 흰 바탕에 붉은 덧옷이 있는 좋아하는 옷 중의 하나였다. 어깨에는 육군 대장의 순금 견장이 붙어 있다.
"산타마르타에서 사살된 놈의 신원은 확인되고?"
머리를 든 에르난데스가 차분하게 다시 물었으므로 프랑코는 오히려 점점 더 긴장되었다.
"아직 확인이 안 되었습니다, 각하. 신분증도 없는 데다가 그 근처에 살지도 않는 모양이라."
"병신 같은 놈들, 페리코 그놈은 병신이야."
페리코는 산타마르타 지구의 계엄군 사령관이다.
"페리코에게 연락해서 그놈의 사진과 지문을 즉시 보고타로 보내라고 해라. 이곳에서 직접 수사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보고타에 이르는 모든 국도의 파견병은 물론 검문소에 비상을 걸어라. 철저하게 검문하도록 파견병은 물건만 빼앗지 말고 수상한 놈들을 가려내라고 해."
"네, 각하."
"놈들이 잡혔을 때의 경로를 알아내서 통과시켰던 검문소나 파견병은 엄중히 문책하겠다."
"네, 각하."
에르난데스는 숨이 가쁜지 입을 벌렸다.
"프랑코, 각하의 오늘 일정은 그대로인가?"
그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네, 각하. 변한 건 없습니다."
"카를로스한테서는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지?"
"네, 각하. 있었다면 바로 저한테 보고가 되었을 겁니다."
에르반데스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떼었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유난히 가늘었는데, 그것도 허벅지 부근에 두껍게 습을 댄 바지를 입어서 그나마 그만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인 프랑코는 엄숙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에르난데스가 문 쪽으로 다가가자 그는 재빨리 앞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호위 부관 두 명이 정장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통령궁으로 들어선 검정색 벤츠는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포장도로를 달리다가 우측의 벽돌집 앞에서 멈췄다. 왼쪽으로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대통령 집무실과 가족들이 사는 본관 건물이 있었고, 이곳은 테니스장에 딸린 부속 건물이었다. 벽돌집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사내가 벤츠 쪽으로 다가가자 차의 뒤쪽 문이 열리면서 카를로스가 나왔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운전석 옆에서 건장한 사내 한 명이 따라 내리더니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건물 앞에 서 있던 사내 한 명이 앞장서서 안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카를로스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건물 안은 운동기구가 놓여진 방과 휴게실, 사우나실과 목욕탕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는데 모두 유리벽으로 구분해 놓아서 내부가 편히 보였다. 카스틸로 대통령이 셔츠 차림으로 휴게실의 소파에 앉아 있다가 유리벽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카를로스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십 대 후반의 건장한 체격이었는데 팔과 다리가 굵었다. 반바지 차림이었으므로 다리에 돋아난 무성한 털이 보였다. 따라온 부하를 복도 끝에 세우고 카를로스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선다.
"카를로스."
"각하."
그들은 서로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는 손을 잡았다가 이내 가볍게 포옹을 했다.
"자, 자리에 앉아요, 카를로스."
"고맙습니다, 각하."
그들이 자리에 앉자 무표정한 얼굴의 경호원이 쟁반 위에 물잔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카스틸로는 금연과 금주를 하는 사람이다. 물잔을 내려놓은 경호원이 물러 나가자 카스틸로가 머리를 들고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을 미국이 안다면 아마 내일 아침에 당장 국교를 단절할 거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각하. 콜롬비아는 남미 제국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우리를 적으로 돌리면 미연방이었던 에콰도르, 베네수엘라도 미국에 등을 돌릴 겁니다."
카를로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각하, 저는 그걸 말씀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카스틸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빙그레 웃었다. 검은 눈동자와 콧날의 중간 부분이 튀어나온 얼굴은 날카로운 인상이었으나 웃을 때의 모습은 천진했다. 시내에 걸린 초상화의 모습은 모두 이 표정이다. 잘 다듬어진 콧수염 밑으로 하얀 이가 보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 미국이 잔뜩 벼르고 있는 것 같던데, 마약의 공급을 당분간 줄이는 것이 어떻겠소?"
"그건 안 됩니다, 각하. 미국은 저만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를로스가 카스털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각하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LA에서 30명에 가까운 특공대가 콜롬비아에 상륙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각하입니다."
"미국 정부가 보냈단 말이오?"
카스틸로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검은 눈이 이쪽을 향한 채 때어지지 않았으므로 카를로스는 시선을 돌렸다.
"미국군은 아닙니다. 콜롬비아인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들었소?"
"LA에 있는 제 마약 거래선입니다. 틀림없는 정보지요."
"나를 제거한다구?"
입술의 양쪽 끝을 올리며 카스틸로가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각하입니다."
"어떻게?"
"그건 모릅니다."
카스틸로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건너편의 운동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파엘과 연락이 닫는 놈들인가?"
문득 그가 다시 물었다.
"아마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해안이나 공항에서는 그런 정보가 없었는데."
"각하, 오늘 아침에 산타마르타에서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10여 명의 사내들이 경계선을 들고 탈출했는데 놈들은 어젯밤에 순찰병 세 명을 사살했고 오늘 아침에는 병사 두 명과 민간인 한 명을 살해했습니다."
카스틸로의 얼굴에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카를로스의 얼굴을 건너다볼 뿐이었다. 카를로스는 그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놈들인 것 같습니다. 놈들은 산타마르타에 상륙한 것으로 보입니다, 각하."
"고작해야 30명이야. 설령 그 말이 정말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들을 보낸 미국의 의도입니다. 그들은 각하를‥‥‥"
카스틸로가 이맛살을 찌푸렸으므로 카를로스는 말을 멈췄다.
"카를로스, 당신 생각은 내가 당신과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면 자연히 당신도 제거되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 아니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카를로스는 선뜻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각하."
"정보, 고맙소, 카를로스."
"당연한 일이지요."
"에르난데스는 당신에게서 돈을 들어내는 데만 바빠서 정보가 늦는 모양이오."
시선이 마주치자 카스틸로가 초상화의 얼굴처럼 빙그레 웃었다.
"각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특별 통행증이라는 것도 만든 모양이더군. 당신들에게 필요하도록. 그것을 라파엘 측도 이용하는 모양이야."
"그놈은 똥배에 거들을 차고 습 넣은 바지를 입고는 지금쯤 여자와 술에 파묻혀 있겠지."
"각하, 그가 각하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내가 그놈에게서 알고 싶은 것은 딱 하나밖에 없소. 스위스 은행에 당신이 준 돈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거요."
"CIA의 워렌을 불러서 따져야겠군."
"각하, 안 됩니다."
카를로스가 당황한 듯 머리를 저었다.
"제가 알아보니까 CIA의 워렌도 이번 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은 마약부 쪽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카스틸로가 노골적으로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좁히고는 카를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손가락 끝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었다.
"제가 놈들의 지휘자를 압니다. 전에 보고타에서 같은 동포를 죽이고 도망친 고영무라는 한국인입니다. 놈은 LA로 도망쳤다가 마약부에 매수된 것 같습니다."
"한국인이란 말이오?"
카스틸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 각하. 하지만 보통 놈이 아닙니다. 전에도 몇 차례 소동을 일으킨 놈입니다."
놈이 부하 중의 하나인 매린을 죽이고 페르난도의 동생을 납치했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크링거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고맙소, 카를로스. 내가 알아서 하겠소. 그리고 이 이야기, 저 돼지 같은 에르난데스에게는 할 필요가 없소."
"잘 알고 있습니다, 각하."
에르난데스는 돼지가 아니라 조금 영리한 언동이라도 보이면 제2인자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다. 카스틸로는 에르난데스를 철저히 무시하고 미워하면서도 2인자의 자리는 지켜 주고 있었다. 그것이 독재자의 허점이었고, 결코 돼지 같지 않은 에르난데스는 카스털로 앞에서 돼지 흉내를 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럼 각하, 저는 이만. 그리고‥‥‥‥"
카스틸로가 시선을 돌렸으므로 카를로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탁자 위에 종이쪽지 한 장을 내려놓았다. 카스틸로는 그것을 보지도 않는다.
"각하, 스위스의 데리히 은행입니다. 이번에는 5천만 달러를 넣었습니다."
잠자코 앉아 있는 카스틸로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카를로스는 방을 나왔다. 부하가 초조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특별 통행증까지 받아놓은 터여서 대원들은 긴장이 풀려 있었다. 마르비오는 어제의 협상 이후로 전보다 더 명랑해져 있었는데 이제는 뒤를 돌아보면서 대원들과 농담을 나누기까지 했다. 물론 신부님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는데 대원들은 오히려 그것이 나은 모양이었다. 점잔째던 표정들을 본래의 모습으로 바꾸고는 편한 모습을 하고 있다. 버스는 아침 일찍 베데인을 출발하여 보고타로 향하고 있었다. 버스는 중앙 안데스산맥을 달려 올라갔는데 곧 평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고원지대로 들어선 것이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였으므로 기온이 서늘했고 차창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마르비오, 이제 검문소가 몇 개 남았소?"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으므로 고영무는 머리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두 개. 1O킬로 좀 앞에 한 곳이 있고 보고타 외곽에 하나야. 이젠 다 왔어."
마르비오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버스는 평지에 물린 깨끗한 포장도로를 제법 속력을 내어 달렸다. 앞쪽에 시멘트로 지은 가건물이 보였는데 검문소인 모양이었다. 도로 양쪽에는 두 대의 탱크가 세워져 있었고, 포자루를 감아올린 벙커가 10여 개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경비 태세가 삼엄해 보였다. 버스 안은 조용해졌고 이제는 엔진이 으르렁대는 소리만 들렸다. 메데인을 출발했을 때부터 도로에는 차량의 통행이 많아지고 있었다. 보고타에 가까워지자 가끔씩 차량 행렬 때문에 버스가 도로상에 멈추기도 했다. 버스는 검문소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검문을 받는 차량들이 밀려 있기 때문이다.
"검문이 심한 모양인데."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대원 하나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다시 차 안은 긴장감에 짜여 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것은 더욱 깊어졌다. 고영무는 산타마르타에 상륙한 이후로 지금처럼 조금씩 조여드는 것 같은 긴장감을 맛본 적이 없었다. 힐끗 뒤를 돌아본 그의 가슴이 소리를 내듯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뒤쪽에는 이미 수십 대의 차량이 밀려 서 있어 위아래로 조여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득 고영무의 머리에 지미 골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이쪽과 작별하면서 행운을 빈다고 말해 주었었다. 제아무리 능력과 수단이 출중하더라도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행운의 요소는 거의 절대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만 극히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내려진다. 고영무는 옷자락 속에 끼워 넣은 기관총을 손바닥으로 눌러 보았다. 금속의 차가운 느낌은 이미 체온과 중화되어 따뜻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믿는 수밖에 없다. 우선은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확률이 높은 수단인 것이다. 행운으로 사람의 운수를 시험해 보는 도박을 할 수는 없다. 그는 이제 혼자만의 몸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는 자신을 제외한 여러 명의 생명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긴장감이 깔려 있는 버스의 문짝을 누군가가 두드렸으므로 모두들 깜짝 놀란 듯 상체를 세웠다. 마르비오가 문을 열자 대위 계급장을 붙인 삼십 대의 군인이 들어섰다. 그는 허리에 권총을 차고 군모를 비스듬히 걸치고 있었는데 버스 안이 모두 신부들로 가득 차 있자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십니까?"
그가 앞쪽에 앉은 짐에게 물었다.
"보고타요. 보고타의 프리마다 성당이오."
"어느 곳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산타마르타 성당이요, 신도여."
두 명의 병사가 들어와 대위 뒤에 선다.
"신부님들, 통행증이 있으십니까?"
"아니, 무슨 통행증 말이오?"
짐 버클리가 나섰다.
"우리가 다니는데 통행증이 필요합니까? 나는 그런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는데."
"저런."
대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버스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보고타로 들어가려면 오늘 아침부터 통행증이 있어야 합니다. 해당 지역의 계엄사령관이 발행한 통행증인데."
"그건 갑자기 왜 그렇소?"
"예, 문제가 조금 있어서요."
"가만, 그렇다면 이건 괜찮을지 모르겠구만."
짐은 주머니에서 베데인에서 산 특별 통행증을 꺼내 보였다.
"이건 어젯밤에 메데인에서 만난 내 고해 신도가 만들어 준 것인데, 이것으로 괜찮겠소?"
대위의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그는 특별 통행증을 낚아채듯 받더니 장수를 헤아리다가 머리를 들었다.
"신부님의 고해 신도가 주었다구요?"
"그렇소, 신도여. 부유한 신도였지만 난 별로 그를 좋아하지 않소."
대위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특별 통행증을 내려다보았다.
"신부님들이 이런 걸 가지고 다니시면 안 됩니다."
"내가 말했잖소? 내 신도가 준 것이라고. 통행증이 필요하다길래 꺼낸 거요."
대위는 눈을 껌벅이며 짐을 바라보았다.
"그 신도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건 모르오. 잘 알다시피 고해 내용은 죽을 때까지 말할 수 없는 것이오. 지금 많이 회개하려고 하는 신도요."
대위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군요."
그는 통행증의 번호를 적고는 짐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신부님들."
그가 병사들을 끌고 버스에서 내리자 어느덧 앞길이 트여 있어 마르비오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차를 발진시켰다.
"휴우, 온몸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습니다."
그가 룸미러를 바라보며 떠들씩하게 말했으나 차 안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버스는 다시 잘 닦인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앞자리의 짐이 고영무에게로 다가왔다.
"보스, 보고타 근처의 검문소에서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통행증이 있어야 된다는데, 놈들이 무슨 눈치라도 챈 것이 아닐까요?"
잠자코 그를 바라본 채 고영무가 머리를 젓자 신용만이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보고타 근처의 검문소에서는 신부복을 벗읍시다."
짐이 머리를 끄덕였다.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를 피해 들어가든지 하는 게 낫겠습니다, 아무래도."
고영무가 앞쪽을 바라보다가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하자. 버스는 돌려보내도록 하고."
짐이 끄덕이며 마르비오에게 다가갔고 뒤쪽을 힐끗거리던 마르비오가 짐을 향해 머리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브루노는 열차의 삼등 객실에 앉아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고원지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콜롬비아를 떠난 지 5년 만에 귀국하는 것이지만 애틋한 감회는 일어나지 않았다. 열차는 역마다 정거하다가 바란카베르메하에서는 다섯 시간이나 정차하면서 기관차를 바꾸고 검문을 했다. 다행히 대원들 모두는 검문에 걸리지 않고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수백 명의 인디오들이 이동하는 대열에 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차는 이제 푸에르토 베리모를 지나 보고타로 향하고 있었다. 옆쪽 좌석에서 인디오 아이 하나가 한 시간이 넘게 울고 있었으나 그 어미 되는 여자는 젖가슴을 드러낸 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뒤쪽에서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고, 다투는 소리와 소리쳐 누구를 부르기도 하는 그야말로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통로까지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므로 마라크가 사람들을 헤치고 겨우 다가와서는 그의 앞쪽에 앉았다.
"브루노, 보고타역에 내리면 통행증 검사가 있다는군. 푸에르토 베필모에서 탄 사람한테 들었어."
그가 얼굴을 가깝게 하고는 소곤대듯 말했다. 앞쪽에 앉은 인디오가 힐끗 이쪽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부터 비상이 걸렸다는 거야. 산타마르타에서 총격전이 있었대, 라파엘 측과 계엄군 사이에."
총격전은 중부 고원지대나 동부지역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있었으나 산타마르타라는 소리에 브루노는 커다란 얼굴을 들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때?"
마라크가 머리를 저었다.
"그 사람도 소문만 들었다는 거야. 자세한 것은 모르겠어."
"통행증을 오늘 아침부터 가지고 다녀야 한다구?"
머리를 끄덕이는 마라크에게서 브루노는 머리를 돌렸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열 명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철길 옆에 써 붙인 거리 표시판을 열차가 스쳐 지나갔는데 보고타까지 90킬로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준비하라고 해. 통행증도 없이 보고타로 뛰어들 수는 없다. 보고타 근처에서 뛰어내린다."
"브루노, 어느 지점에서 뛰어내리지?"
"보고타에서 30킬로쯤 떨어진 곳의 아래쪽에 네이바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있어 그곳에 가면 열차는 속력을 늦추니까 거기서 뛰어내린다."
"네이바 분기점? 알았어."
마라크가 다시 사람들을 헤치고 통로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밝은 판초와 차양이 늘어진 중절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브루노는 깔고 앉았던 보따리를 무를 위에 올려놓았다. 열차는 고원지대를 달리고 있었으므로 열린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휘몰려왔다. 브루노는 보따리 안에 들어 있는 기관총의 촉감을 손바닥 안으로 느꼈다. 산타마르타에서 총격전을 일으킨 것이 보스의 그룹인지 후안의 그룹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답답했다. 라파엘의 일당이 그곳에서 총격전을 벌일 이유는 없다. 오늘 아침부터 비상이 걸리고 통행증을 소지해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열차는 밋밋한 고원을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속력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곧 네이바의 분기점이 다가오는 것이다. 열차의 승강구에 몰려 있던 대원들은 스쳐 지나가는 평원을 초조하게 내려다보았다. 브루느는 아래 계단에 서서 한 칸 건너편의 승강구에 서 있는 마라크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네이바 분기점은 이제 1킬로 밖에 있었다.
네이바 분기점에는 철도수비대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라파엘 측의 철도 폭파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철로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각 보고타와 산타마르타, 네이바로 갈라지는 전략의 요충지이므로 분기점에는 세 방향을 향한 세 개의 초소가 세워져 있었다. 산타마르타 방향 철도의 수비는 1개 소대 가량의 병력을 지휘하는 살바토 중위의 책임이었다. 오후 4시가 가까이 되어서야 살바토는 시멘트 막사 안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군복을 입은 채로 잠이 들어 소매가 구겨졌고 칼라의 한쪽 부분도 안으로 접혀져 있었다. 점심때 포도주를 과음한 것이다. 그는 막사 밖으로 나오자 밝은 햇살에 이마를 찌푸렸다. 6월이었으나 기후는 선선했고 고원지대를 출고 온 바람이 폐에 들어차자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1년간의 수비대 근무가 이제 석 달이 남아 있었고 석 달 후에는 보고타의 경비대 본부로 돌아가게 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고 있었으나 묵고 돌아볼 수도 없다. 그래도 보고타에 집이 있는 자신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메데인이 집인 2소대의 로베르토는 한 달에 하루 특별외출을 받아 집에 다녀오는 형편이다. 그가 뒷짐을 지고 철로와 고원지대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부하인 마글로 상사가 다가왔다. 산타마르타 출발의 완행열차가 지나간 보고를 하려는 것일 것이다.
"소대장님, 검문소 전방 1킬로 지점에 인디오들이 10여 명 있습니다."
의외의 보고였으므로 살바토는 눈을 치켜떴다. 가끔씩 인디오들이 철로를 횡단하여 가기는 한다. 철도 옆쪽 10킬로쯤 떨어진 곳에 인디오들의 부락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원주민인 인디혜나로서 철로에 쇠붙이를 올려놓아 칼을 만드는 문명으로 발달해 가는 단계여서 살바토에게는 귀찮은 존재였다. 살바토는 막사에서 시벤트 벙커가 있는 초소로 다가갔다. 10여 명의 병사들이 벙커 안에서 잡담을 나누다가 조용해졌다.
"어디이?"
벙커를 돌아 앞쪽으로 나아간 살바토는 밋밋한 능선 아래를 둘러보았다.
"저기 가고 있지 않습니까?"
마글로가 가리키지 않아도 그의 눈에 철로를 건너 조그만 능선 쪽으로 다가가는 인디오들이 보였다. 둘씩 셋씩 짝을 지어 그들은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살바토는 입맛을 다셨다. 평범한 인디오들의 이동이었고 마글로의 얼굴에도 그렇게 씌어 있었다. 마글로는 흑인과 인디오의 피가 섞인 삼보였으나 이목구비가 번듯한 미남이었다. 매끄러운 그의 피부와 밝은 눈을 보면 여자들이 오줌을 싼다고 한다. 살바토는 턱을 들었다.
"마글로, 소대원을 무장시키고 인디오들을 정지시켜라. 비상이다."
마글로가 눈을 끔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뭘 해? 마글로, 비상이야!"
그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마글로는 몸을 돌렸다. 그의 태도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살바토가 망원경으로 인디오를 살펴보는 사이 10여 명의 병사들이 주위에 모였다. 마글로도 그를 바라보았다.
"소대장님, 모두 모였습니다."
"좋아, 인디오에게 정지 신호를 보내라. 우리가 그들을 검문한다."
살바토는 앞장서서 인디오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거리는 7, 8백 미터 정도였다. 뒤쪽에서 다다다당 하고 기관총이 발사되었다. 인디오들에게 위협 사격을 하는 것이다. 사정거리가 5백인 M-25였으므로 총알은 날아가겠지만 효력은 없을 것이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평지가 되어 인디오들의 자취가 가끔씩 보였지만 위쪽에서 위협 사격을 한 때문인지 인디오와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인디오들은 앉아 있답니다."
무전기의 수화기를 무전병에게 넘겨주면서 마글로가 말했다. 머리를 끄덕인 살바토는 앞장서서 고원지대를 걸어 내려갔다. 무전에서 알려 준 대로 인디오들은 땅바닥에 제각기 웅크리고 앉아 있었으므로 살바토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모두 그 자리에 있어! 우리가 검문하겠다."
마글로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으나 잠자코 그의 옆을 따랐다. 인디오와의 거리는 50미터쯤 되었으므로 살바토는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아마 이웃 마을의 잔치에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제까지 네이바 분기점에서 사고가 생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몇 년 전 인디오 한 명이 열차에 치여 죽은 다음에는 그들은 쇠붙이를 넓히는 특별한 일 외에는 절대로 철로 가까이 오지 않았다. 인디오들은 풀숲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다가오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살바토의 머리에 아침에 전신으로 보내온 비상명령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반 경계병들에 대한 것이었고 철로 폭파 방지의 임무를 떤 살바토의 부대와는 관계가 별로 없다. 이곳은 검문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훈련을 받은 대로 인디오를 향해 가로로 벌려 서서 다가갔다. 인디오들은 웅크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거리가 20미터쯤으로 가까워졌을 때 살바토는 문득 눈을 껌벅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내들의 얼굴은 인디오가 아니었다. 베스티조가 분명했고 차림새도 판초와 중절모를 모두 제대로 갖춰 입은 것이다. 그가 손에 든 권총을 마악 치켜들었을 때 그것을 신호로 했는지 사내들이 일제히 판초 속에서 검고 뭉특한 것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부근을 울리는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은 겨누고 있었지만 제대로 발사할 상태가 되어 있지 않았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수십 발씩 발사되는 우지 기관 총알 세례를 받고는 순식간에 전멸되었다. 살바토는 맨 처음의 희생자가 되었는데, 번쩍이는 흰 불꽃과 귀에 들리는 요란한 연속 발사의 소리에 놀라 입을 벌리는 순간 가슴과 머리를 한꺼번에 강타당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충격에 비틀거리며 두 걸음쯤 나아가던 그는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로베르토는 장갑차의 포탑 위에 올라앉아 망원경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완만한 구릉지대여서 엄폐물이 없었다. 둘씩 셋씩 무리를 이루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는 옆에 걸린 단전기를 집어 들었다.
"3호 차는 북방의 철로 5킬로 지점에서 안쪽으로 들어와라. 이제 놈들은 우리 손안에 들어왔다."
무전기를 내려놓은 그의 가슴이 뛰었다. 살바토가 놈들에게 사살당한 것은 순전히 실수에 의한 것이다. 1소대 무전병의 말에 의하면 살바토는 부하들을 이끌고 놈들에게 겁 없이 다가갔다가 순식간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장갑차가 달리면서 크게 요동을 치고 있었으므로 로베르토는 단단히 손잡이를 잡았다. 놈들은 이제 여섯 대의 장갑차와 수십 명의 병력에 포위되어있는 것이다. 그는 흔들거리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브루노는 두 명 의 부하와 함께 서쪽을 바라보며 뛰고 있었다. 뒤쪽에서 총알이 날아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구릉 사이의 경사진 곳으로만 달렸는데 경사를 지나면 쪽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때는 어김없이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대원들을 홑어지게는 하였지만 이제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뒤쪽에서 장갑차 소리가 들리더니 옆쪽에서 포탄이 폭발했다. 브루노는 입 안이 바짝 타고 눈앞이 노래졌으나 마악 언덕 하나를 넘자 아래쪽에 있는 인디오들의 부락이 보였다. 부락 뒤쪽은 잡목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저기다! 저기까지!"
앞쪽을 가리키며 브루노는 갈라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제는 내리막길이고 거리는 150미터 정도였다. 브루노와 두 명의 부하는 죽을힘을 다하여 구르듯이 달려 내려갔다. 총성에 놀랐는지 갖가지 옷을 걸친 인디오들이 움집 앞에 모여 있다가 달려오는 이쪽을 보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50미터쯤 남겨 놓았을 때 다시 총알이 주위로 쏟아졌다. 왼쪽에서 앞장서 달리던 필리페가 두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는 시늉을 하면서 달리는 속도를 떨어뜨리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필리페!"
이미 그를 지나친 브루노가 이를 악물고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달리는 속도는 늦추지 않았다. 그의 흐린 눈에 필리페가 머리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브루노는 머리를 돌리고는 인디오의 마을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헐떡이며 앙헬이 따라붙고 있었다.
"숲으로."
앞쪽의 잡목숲을 향해 뛰면서 브루노가 소리쳤다. 이제는 실날 같은 희망이 보였다. 잡목숲을 헤치며 한참 앞으로 나아가자 이젠 장갑차의 엔진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고원에서의 총성은 그치지 않고 들려 왔다. 경비대의 둔탁한 총성 사이에서 짧고 희미한 이쪽의 발사음도 들렸다. 그들은 잡목숲의 가지를 잡고는 헐떡이며 걸음을 멈추었다.
"브루노, 필리페가 죽었습니다."
앙헬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그 무엇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필리페는 스물서너 살로 나이도 비슷했지만 단짝이었다. 제각기 갈라져서 뛸 패에도 자연스럽게 짝이 되어 브루노를 보아왔던 것이다. 필리페뿐만이 아니다. 엄폐물도 없는 고원지대에 흩어진 나머지 대원들도 살아날 가망성이 적었다. 브루노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자, 가자! 서둘러라. 어떻게든 이쪽 지역을 벗어나자."
네이바 분기점의 철로 수비대에 의해 공격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뛰어내리는 장소를 분기점과 너무 가깝게 잡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분기점에 철로 수비대가 있는 줄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다. 5년 전에 콜롬비아를 떠날 때는 없었던 부대였다. 나뭇가지를 잡고 비탈길을 오르면서 브루노는 자책감으로 온몸을 떨었다.
4. 11명의 전사
보고를 마친 에르난데스는 수건을 꺼내어 얼굴의 땀을 닦았다. 카스틸로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하지 못하는 시늉을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카스틸로가 연대장이었을 때부터 그의 부관으로 인연을 맺었던 사이니만치 그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네이바 분기점에서는 아홉 명 전원을 사살했단 말이지?"
카스틸로가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생포하거나 부상을 입고 잡힌 놈은 없나?"
"없습니다, 각하. 워낙 완강하게 저항하다 보니까 우리 측에서도."
머리를 들고 단호하게 말했으나 실제는 다르다. 아홉 명 중 세 명은 부상을 입었는데 이쪽에서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자살해 버렸다. 그런 것을 말해 보아도 이로울 게 없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전원 사살로 보고를 한 참이다.
"각하, 그놈들은 최신형 이스라엘제 우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파엘 측이 이번에 무기를 신형으로 구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놈들의 준동이 심해졌습니다. 며칠 전에도 산타마르타에서 일단의 라파엘 측 게릴라가 충격을 가해서‥‥‥‥"
"라파엘은 지금 어디에 있지?"
카스틸로가 그의 말을 잘랐다.
"네, 오르쿠에 근방에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오르쿠에를 깡그리 소탕할 작정이다. 서부 지역에 있는 제1군을 빼내어 앞을 막고 오르쿠에에 있는 제5군으로 뒤를 치게 해서 그놈의 도시를 초토화시켜 버리겠다."
카스틸로가 눈살을 모으고 한 마디씩 힘을 주어 말했다. 콜롬비아에 있는 3개 군단 중 2개 군단을 움직이는 전쟁이나 다름없는 작전이다. 에르난데스는 긴장으로 온몸을 굳혔다.
"각하, 그렇다면 이번 작전은 언제 시작하고 지휘는 또 ‥‥‥"
"오늘 저녁에 군사령관과 사단장 전원이 모인 작전회의를 한다. 그리고 기간은 최대한 빨리, 늦어도 일주일 내에 시작한다."
카스틸로는 말을 그치고 물끄러미 앞에 서 있는 에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제1군과 5군을 총지휘하려면 누가 나을까?"
이윽고 그가 묻자 에르난데스는 다시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1군 사령관은 에르난데스와 마찬가지로 카스틸로가 사단장이었을 때 연대장이었던 도밍고 대장이 맡고 있다. 그는 성품이 소탈하고 비교적 청렴한 인물이어서 군과 국민들의 신망이 높았다. 그러나 5군 사령관은 그들과는 조금 격이 떨어지는 프란시스코 대장이었으므로 이번 작전의 총사령관은 도밍고나 에르난데스 둘 중의 하나였다.
"각하, 제 생각으로는 도밍고 대장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는 군대 내의 평판도 좋을뿐더러."
"그럼 자네는 평판이 더러운 모양이군."
카스틸로가 선뜻 말을 자르자 에르난데스는 다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에르난데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도밍고를 질투할 것 같나?"
"아닙니다, 각하. 저는 단지."
"너는 옛날부터 평판이 더러웠어. 구질구질한 것까지 먹어 치워서 네 별명이 쓰례기 차라고 하더군,"
심한 모욕이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손수건을 움켜쥐며 카스틸로를 쏘아보았다. 이래도 명색이 계엄 총사령관이자 수도권 방위를 맡은 제2군단의 사령관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나, 에르난데스?"
표정 없는 얼굴로 카스틸로가 물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시선을 내리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모르고 있었습니다, 각하."
"특별 통행증을 만들어서 얼마나 거둬들였나?"
에르난데스는 오늘은 카스틸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잔잔하여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저 표정으로 정적들을 직접 쏘아 죽이는 것을 보았다. 이럴 때에는 매달려 우는 것이 상책이다.
"각하, 계엄군의 경비가 국가 예산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되었습니다."
"17억 페소쯤 거둬들였습니다."
"제가 모두 국고에 헌납하도록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에르난데스, 라파엘이 정권을 잡았을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말해 봐라."
난데없는 말이었으므로 에르난데스는 눈을 껌벅이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물었다.
"넌 어때? 에르딘데스."
"저는 죽습니다. 아마 총살당할 겁니다."
턱을 들고 어깨를 편 에르난데스가 대답하자 카스틸로가 입술 끝으로 웃었다.
"도밍고는 어떠냐? 프란시스코는? 페리코는? 그리고 카를로스는?"
카를로스의 이름이 불려지자 에르난데스의 늘어진 눈썹이 조금 치켜 올라갔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여기서는 죽을 사람은 살고 살지 모르는 사람은 죽는다. 그것을 섣불리 말할 수는 없었다. 카스틸로는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시선을 벽에 던지고 있더니 서랍을 열고 서류철을 꺼내어 에르난데스의 앞쪽으로 던져놓았다.
"에르난데스, 그 속에 고영무라는 한국인 놈의 사진과 인적 사항이 적혀 있다. 그것을 전국에 뿌리도록.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생포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도 산 채로 잡아라. 그놈의 일당이 있을 테니까 일당까지."
에르난데스가 파일을 펼쳐 보고는 머리를 들었다.
"각하, 이건 누구입니까?"
"작년에 살인사건을 저질렀던 한국인이야. 도망쳐서 아직 잡히지 않았다."
"중요한 증인이야. 전 계엄군과 경찰, 정보부원에게 즉시 지시하도록. 생포하면 2계급 특진에 1억 페소쯤 준다는 방송을 해도 좋다. 신문, 방송, 어느 것이나."
"놈은 라파엘이 보낸 암살자다. 놈의 목표는 나와 너 둘이야, 그렇게 알면 된다."
에르난데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들고 있던 고영무의 사진에 노골적인 증오의 시선을 보내었다. 방금 카스틸로가 한 말이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카스틸로는 그와 한배를 타고 있다고 자신을 지칭해 주었다. 그것은 재신임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영무의 목표가 카스틸로와 도밍고였다면 아마 그는 이 자리에서 끌려 나가 총살이 될지도 모른다. 에르난데스는 마음속으로는 고영무에게 감사하면서 그의 사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와 산타마리아 투우장 옆을 지나던 민기철이 사람들이 모여 선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공용게시판 앞에 모여 있었는데 커다란 사진과 내용이 붙은 현상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눈을 깜박이며 사진의 얼굴을 바라본 민기철은 숨을 들이마셨다. 놈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그리고 밑에 써 있는 이름과 인적 사항을 보자 바로 그놈이었다. 고영무를 잡으면 1억 페소의 현상금에다 2계급 특진이 보장되었다. 엄청난 포상이었다. 콜롬비아에 이민 온 지 30년이 되었지만 이런 현상 포스터는 처음이었다. 고영무의 여권 사진을 확대했는지 입술 끝으로 잔잔히 웃으면서 와글거리는 군중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민기철은 차출 가슴이 가라앉아 갔다. 이제까지 콜롬비아의 한국인 중에서 이만큼 유명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수백 명밖에 되지 않는 이민 사회에서 이놈 한 놈 때문에 콜롬비아 내의 한국인의 존재가 단숨에 부각되었다. 아마 이민을 백만 명쯤 와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얻는 효과와 같을 것이다. 발걸음을 떼면서 민기철은 과연 고영무가 지독한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놈한테 김강남과 호세 김이 겁없이 달려들었으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고영무는 지난번의 살인죄 외에 내란음모죄와 병사를 15명이나 살해한 죄과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를 꼭 생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스틸로 정권이 전력을 다하여 그를 잡으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차 시켜 놓은 차를 타고는 시내를 달려 민기철이 들어선 곳은 시내에서 떨어진 호세 김의 자동차 수리공장이었다. 그는 김영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들어간 이후로 공장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배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고는 수리공장 일에 매달려 있었다. 김영지가 가구를 그대로 남겨 놓고 갔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없었고 몸만 옮겨오면 되었다. 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민기철은 구부정한 어깨를 끄덕이면서 공장을 지나쳐 숙소로 들어선다.
아파트의 베란다 쪽문을 열어 집 안의 묵은 공기를 흘려보내고 난 김영지는 베란다의 난간을 잡고 한동안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5층 아래였으므로 아파트의 현관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고 앞쪽 주차장에서 가볍게 입을 맞추고 헤어지는 남녀도 보인다. 김영지는 몸을 돌려 응접실로 들어선다. 박정환과 헤어진 지 보름이 넘었으므로 그도 차츰 마음을 잡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바쁜 사람이다. 정신없이 회사 일에 매달리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가고 어느덧 잊힐 것은 잊혀진다. 김영지는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는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등을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자 사정없이 외로움이 밀려들었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서울의 외삼촌 댁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으나 말을 잃은 어머니를 보면 이쪽이 더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김영지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한동안 저절로 튀어나올 듯이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저 전화가 박정환의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가 이내 스스로를 꾸짖으며 수화기에 손을 대었다. 그렇다면 그를 두 번 배신하는 것이 되고 만다.
"여보세요."
"아, 영지냐? 나, 민 아저씨다."
보고타의 민기철에게서 온 전화였으므로 김영지는 다리를 내려놓고 상체를 세웠다.
"어머, 아저씨. 안녕하세요? 별일 없으시죠?"
불안해하는 그에게 이곳에서 두 번 전화를 했었고 그때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던 것이다.
"별일이 있어. 큰일이야."
민기철의 목소리가 컸으므로 김영지는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아저씨, 무슨 일인데요?"
"고영무 그놈이 내란음모죄로 전국적으로 수배령이 내렸다. 옛날의 살인죄까지 추가시켰더라. 그리고 이곳에 지금 있는 모양인데, 글째 병사들을 열다섯이나 죽였다는구나. 방송과 신문이 난리다, 난리야. 생포하면 1억 페소에다가 2계급 특진이야. 모두 그놈 잡으러 나설 참이다. 네 오빠하고 아버지의 원수는 이제 앉아만 있어도 갚게 되겠다. 곧 잡힐 테니까 말이다."
김영지는 손가락을 곧게 펴서는 이마 위에 맺힌 땀을 닦았다.
"사필귀정이다. 인과응보라고도 하고. 놈은 이제 죗값을 받게 되었다. 영지야, 듣고 있는 거냐?"
"네, 아저씨."
"거리마다 벽보가 붙어 있고 신문, 방송할 것 없이 떠들어. 한국인 이름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도 내 평생 처음이다."
"그럼 그 사람, 지금 콜롬비아에 있어요?"
김영지가 겨우 물었다.
"그럼. 그러니까 병사들을 죽이고 내란음모인가 뭔가를 했겠지. 도대체 무슨 속인가 모르겠다만."
민기철은 김영지가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는지 한참을 더 떠들다가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영지는 한동안 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이건 크링거의 짓이 틀림없습니다. 놈이 카를로스에게 정보를 준 겁니다."
지미 골드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는데 어지럽게 서류가 덮인 곳을 때렸으므로 종이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놈을 잡읍시다. 망설일 것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그놈은."
"이봐, 지미. 조용히 입 닥쳐."
"당신이나 닥쳐요, 앨버트."
그러나 버럭 욕설을 퍼부을 줄 알았던 앨버트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제는 지미가 금방 초조한 모양이었디. 눈을 껌벅이며 앨버트를 바라보다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지미, 조금 전에 로스만하고 통화를 했는데, 로스만이 포크너하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야."
앨버트가 입을 열었으므로 지미는 몸을 굳혔다. 그들은 거물들인 것이다. 로스만은 마약부의 부장이고 포크너는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이다.
"그런데 로스만은 CIA가 이번 일에 상당히 유감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워렌이 포크너에게 항의를 했다는군."
지미가 곧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은 어떻게 책임을 지구요? 그들이 부에나벤투라에 상륙했더라면 카를로스의 부하들에게 모조리 당했을 겁니다. 문제는 워렌하고 크링거가 유별난 사이라는 거지요."
"이봐, 쓸데없는 추측은 하지 말도록 해. 아무리 워렌이 그와 친하더라도 공과 사를 혼동할 사람이 아니야."
"당신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 표정에는 그를 의심하고 있어요,"
"이런 망할 자식."
"CIA 체제상 워렌 혼자만 알 수도 없는 일이라서 부에나벤투라가 노출된 걸 알고 나서는 CIA는 빠지기로 합의가 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이봐, 고영무가 하는 일은 CIA의 일이야. 빠질 수가 없어."
앨버트도 곤혹스러운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도 포크너의 제의에 동의는 했지만 속으로는 불편했던 모양이야. 이번 사건이 일어나자 노골적으로 우릴 공격하고 있어. 워렌은 국회에 이 일을 보고하겠다고 했다는군. CIA를 무시하고 일을 하다 CIA는 물론 국가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고."
지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교활한 놈, 병 주고 약 주는군. 놈은 일을 망쳐놓고 우릴 공격하는 겁니다. CIA 공작을 우리한테 하고 있어요."
"지금으로서는 로스만이나 포크너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야."
"워렌 그놈이 일을 주도했다면 고영무는 콜롬비아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니, 디디자마자 죽거나 잡혔겠지."
이제 크링거의 이름은 그들의 화제에서 쪽 들어가 있었다. 워렌이 잠자코만 있었더라면 지미나 앨버트는 크링거를 상대로 죽이느니 살리느니 공방을 하다가 어떤 조처를 내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영무의 이름과 얼굴이 콜롬비아 전국에 대서특필되고 거리마다 붙어 있는 시점이 되자 때를 맞추듯이 워렌이 이쪽을 치고 나온 것이다. 그는 이제 곧 고영무가 카스틸로에게 잡혀서 미국 정부가 시킨 일이라고 낱낱이 자백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미국 정부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카스틸로가 무슨 짓을 했건 주권국가의 대통령이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유엔이나 다른 국제기구를 통하여 공정하게 해결해야지 암살단을 보내어 살해하려 했다면 아마 남미 국가의 대부분이 연합하여 미국 정부에 등을 돌릴 것이었다.
"어쩐지 워렌 그놈이 부에나벤투라가 노출되었다고 하니까 순순히 CIA는 빠지겠다고 동의한 것이 수상했었습니다. 놈은 지금 고영무의 인적 사항을 그쪽에다 흘려 주고 나서 우리 등을 치고 있습니다."
지미의 목소리에는 아까보다 열기가 식어 있었다. 어쨌든 지금 이쪽이 수세에 몰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당장의 희망은 고영무가 그저 제발 콜롬비아를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지미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겨우 보고타에 들어갔을 것이다.
부랑자 합숙소의 천막 밑에 앉아 있던 고영무는 머리를 들었다. 산토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는 한 아름의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시내에서 먹을 것을 사 온 것이다. 그의 뒤를 따르는 다른 대원 한 명도 봉투를 들고 따라봤다.
"산토스가 생각보다 빨리 오는군."
옆에 앉아 있던 짐이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보스, 야단났습니다."
봉투를 다른 대원에게 건성으로 넘겨주면서 산토스가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보스의 사진이 거리마다 붙어 있습니다. 잡으면 엄청난 포상을 준다고 되어 있더군요. 신문과 방송에도 나왔습니다."
그는 봉투를 잡아당겨 안에서 신문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고영무가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번에 묵었던 부랑자 합숙소였다. 이번에는 제일 가에 있는 천막 한 채를 그들이 쓰고 있었으므로 다른 부랑자는 없었다. 대원들이 그가 펼치는 신문에 모여들었다. 고영무는 자신의 커다란 사진을 보았다.
"잡으면 1억 페소에 2계급 특진이군요, 보스."
짐이 큰 활자만 읽었다.
"생포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대원들은 모두 신문에 집중해 있었다. 짐이 다시 말했다.
"보스는 내란음모죄에 옛날 살인죄가 추가되었고 병사 15명을 죽였다고도 했습니다."
짐이 머리를 들어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보스, 우리가 처치한 것이 15명입니까? 네 명이었는데,"
"이거, 네이바 분기점에서 라파엘 측의 병사 아홉 명을 전멸시켰다고 하는데, 인적 사항은 없군요."
대원 한 명이 밑단의 기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으나 아무도 말을 받는 사람은 없다. 매일 수십 명씩 정부군과 라파엘 측의 병사들이 죽어 간다.
"이거 내가 꽤 유명인사가 되었군."
턱을 쓸며 고영무가 말하자 우선 최대광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신용만이 따라 웃고 짐과 산토스가 뒤를 따랐다. 모두들 턱을 들고 한 번씩 웃고 나자 시장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누군가 바닥에 신문지를 펼쳐 깔았고 다른 대원들이 봉투에 든 음식물을 쏟아놓았다. 고영무의 얼굴 위에 합 덩어리 한 개가 놓여졌고 이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계획처럼 호텔이나 아파트를 얻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시지가 든 합을 씹으면서 고영무가 말하자 모두 우물거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고 천막 안에는 30촉 전구 한 개가 매달려 있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고영무는 가슴 한쪽이 무거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10여 일 동안 같이 생활해 오면서 이제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따르고 있는 것이 그들의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곳을 알아보아야겠군."
짐이 머리를 한쪽으로 누인 채 그를 바라보았다.
"보스,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가 나갔을까요?"
"그건 아직 모른다."
고영무는 자르듯 말했다.
"곧 알게 되겠지. 브루노나 후안의 그룹이 무사히 도착해야 할 텐데"
"브루노는 열차를 타기로 했고, 후안은 고속도로니까 별일이 없었다면 내일 힐튼 호텔에 나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식사를 서둘러 마친 대원 두 명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경비하고 있는 다른 대원들과 교대하기 위해서였다. 보고타 교외의 검문소에서 2킬로쯤 떨어진 마을에서 내린 그들은 마을의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앞장서서 안내하겠다고 굳이 우기는 마르비오를 앞세우고는 검문소를 우회해서 시내로 들어왔던 것이다. 짐 버클리는 마르비오에게 2백만 페소를 주었는데 약속보다 두 배의 돈을 받은 마르비오는 춤을 추는 듯이 어깨를 올리고 발을 높게 떼면서 돌아갔다. 오후에 보고타로 들어온 그들은 곧장 부랑민 수용소로 들어왔는데 입고 있던 신부복은 모두 태워 버렸다.
"짐, 내일 아침에 네가 LA로 전화를 해라. 내가 번호를 알려줄 테니까."
천막의 기둥에 등을 기대면서 고영무가 말했다.
"무슨 수를 써야지, 이 얼굴로 시내에 나갈 수는 없겠군,"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으며 고영무는 짐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놈은 보고타에 들어왔어. 틀림없다."
카를로스가 문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보고타의 어디엔가에 있다."
인구 4백만이 넘는 보고타에서 그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문도 어쨌든 머리를 끄덕였다.
"카를로스, 놈은 들어왔더라도 꼼짝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놈 얼굴이 도시 전체에 알려졌으니까요."
"방심은 금물이야. 에르난데스 같은 돼지에게 일을 맡기고 구경만 할 수는 없어."
카를로스는 문득 머리를 들었다.
"그놈이 한국인 집에 숨어들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 같은 동포라고 숨겨 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카를로스."
"카스틸로는 이 기회에 라파엘의 뿌리를 물아 버릴 모양이다. 제1군을 움직여서 오르쿠에로 보낸다고 들었어."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1군은 서부 지역에 배치된 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에르난데스와 도밍고 둘 중의 하나가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될 텐데, 지금 카스틸로는 둘을 저울질하고 있어."
카를로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두 놈 다 믿지 않으니까 말이야. 두 놈 중에 더 바보 같고 약점이 많은 놈이 되겠지."
문도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1군을 오르쿠에로 이동시키려면 보고타를 통과해야 한다. 카를로스는 그것이 불안한 것이다. 1개 사단의 말 잘 듣는 사단장과 충성스런 연대장 세 명으로도 대통령궁을 점령할 수가 있다. 경호실이 있기는 하지만 전차와 포를 가진 군대에 대항할 수는 없다.
"고영무는 미국 마약부에서 보낸 놈이야. 카스틸로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안 했지만 마약부는 CIA를 젖혀두고 이 일을 추진하고 있단 말이다."
카를로스가 콧수염을 쓸면서 말했다. 호화로운 응접실에는 향기가 풍겨 나왔다. 은근하고 조금은 습기가 밴 냄새였는데 응접실에 한 시간이 넘게 맞아 있다 보면 저절로 기운이 솟고 즐거워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응접실 구석에 놓인 가습기에서 조금씩 뿜어져 나오는 마약의 기운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이런 독특한 방법을 개발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카스틸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놈은 나를 잡으려고 할지도 몰라. 나를 제물로 해서 궁지를 벗어날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맞습니다, 카를로스. 당연히 그럴 사람입니다."
"카스틸로는 라파엘을 잡는 데 전력을 쏟고, 나는 그놈, 그 한국인 암살자를 잡는 데 신경을 쓰면 우린 손발을 맞추는 거지."
"그렇군요, 카를로스."
문도가 정연한 그의 말에 빙그레 웃었다. 이것은 마약 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를로스의 명석한 두뇌 회전을 보면 절로 경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문도, 부하들을 모두 이 일에 매달리게 해라. 에르난데스는 연합군 사령관이 되든 안 되든 고영무를 잡을 의욕을 잃게 되어 있다.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카를로스."
"카를로스가 목표가 되는군."
신문을 탁자 위에 던지며 페르난도가 말하자 밀리카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페르난도, 그럼 고영무와 그 일당들이 콜롬비아로 들어간 것이군요."
신문에 시선을 준 채로 밀리카가 말하자 패르난도는 머리를 끄덕였다.
"카스틸로가 고영무를 이렇게 대대적으로 찾는 건 정보가 흘러나갔기 때문일 게다. 고영무는 마약부에서 보냈어. 그것을 카스틸로가 알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밀리카는 신문을 덮고 페르난도를 바라보았다. 검은 두 눈을 깜박이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페르난도, 고영무가 나를 받아들인 것은 아예 눈앞에 놓고 감시하려는 것이겠지요?"
"글쎄."
페르난도가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고, 또."
"또 뭘까요?"
그의 말을 받아 그녀가 다그치듯 물었다. 페르난도가 입맛을 다셨다. 밀리카는 고영무의 저택에 머물다가 어제 다시 이곳으로 왔다. 그쪽에서는 오가는 것에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또, 네 행동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이건 내 생각이다만 그러니까 받아들였겠지."
밀리카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도가 말을 이었다.
"우선 내가 고영무한테 적개심을 잃어 가고 있다. 그놈이 갑자기 엄청나게 커진 느낌이 들어서 전의를 잃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런 상황이 되었어."
그는 밀리카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기도 싫었다.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다 보면 좌절감만 깊게 들 것이고, 그리고 그 이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내가 그랬으니까 내 기준으로 너를 판단한 거지. 너는 내 동생이기도 하니까. 너도 이제 다 버리고 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 다 지난 일이니까. "너는 고영무에게 증오와 연민의 감정 양쪽을 가지고 있어. 이제 증오감을 버릴 때다. 솔직해질 때고."
"페르난도."
밀리카가 짧게 그를 불렀으나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시선을 돌렸다.
"오빠인 나부터 그런다고 말해 주었잖느냐? 놈은 차곡차곡 올라가는 놈이다. 은혜와 원한이 분명한 놈이고. 이제 그놈과의 사이에는 빛이 없다. 아무것도. 서로 주고받았어."
"페르난도, 그놈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불쑥 밀리카가 말을 뱉었으므로 페르난도는 턱을 들었다. 그러나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놈의 씨를, 그것도 사내아이를 가지겠어요."
시선을 내리깔았으나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어요."
"왜, 고영무 대신 그 아이에게 보복을 하겠다는 거냐? 아니면 그 아이를 사랑하겠다는 거냐?"
페르난도의 말소리에 차츰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당당하게 부딪쳐라, 밀리카. 이제는 마음을 열고. 그리고 나서 아이를 낳든지 어쩌든지 해라."
그가 밀리카를 찬찬히 바라보았으므로 그녀는 머리를 돌렸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조금 느꼈다, 밀리카. 너의 그에 대한 증오가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미련과 연민이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밀리카. 강한 놈에게 당연히 느끼는 여자의 감정일 것이다. 이제는 너도 당당하게 부딪쳐라. 네 마음을 속이지 말고."
밀리카는 페르난도의 어깨 너머를 바라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공항에서 택시를 탄 장규식은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혹인 운전사가 제대로 말을 알아들었나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어이, 다운 타운의 그랜드 호텔이야. 알아들었어?"
룸미러를 힐끗 올려다본 운전사는 어깨를 한 번 으쓱 추켜올릴 뿐 대답이 없다.
"너 이 자식, 딴 데 데려다 놓았다가는 죽을 줄 알아."
그렇게 한국말로 중얼거리며 의자에 등을 붙이는데 흑인이 입을 열었다.
"염려 마라, 개새끼야."
한국말이었으므로 정신이 번쩍 난 장규식이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
"너 뭐라고 했어?"
이게 서슴없이 한국말이다. 흑인의 나이는 감 잡기가 힘들지만 삼십 대일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개새끼라니, 장규식은 바짝 화가 났다:
"이 씨발놈의 새끼를."
흑인이 힐끗 룸미러를 올려다보더니 다시 한번 어깨를 움칫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기어를 변속시켰다. 속력을 줄였다 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한동안 그의 뒤통수를 쏘아보던 장규식은 이윽고 이놈이 한국말이라고는 '염려 마라, 개새끼야' 밖에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자 저 혼자 흥분해서 냅다 욕지거리를 했던 것이 멋쩍어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이번에 일을 성사시키려고 온 것은 아니지만 초장부터 이 꼴이니 입맛이 썼다. 그날 저녁 새옷으로 갈아입은 장규식이 홍성희가 경영하는 룸살롱에 들어섰을 때 홍성희는 마침 이은영과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서 오세요."
자리에서 일어서던 홍성희가 이내 입을 따악 벌렸다. 그리고는 두 눈을 서너 번 깜박이더니 이윽고 입가에 웃음기가 흘렀다.
"어머나, 지배인님이 왠일이세요?"
그녀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으므로 장규식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저 지나다가 들렀습니다. 궁금하기도 하고."
그에게 자리를 권한 홍성희가 버릇처럼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가 언제나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던 유장수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홍성희는 난데없는 장규식의 출현에 놀랐으나 차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장규식도 유장수와 등을 돌린 사이였다. 최대광의 말을 들으면 장규식과 유장수는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도 따지고 보면 장규식의 정보로 살아난 셈이다.
"정말 반가워요, 지배인님. 오늘은 제가 술을 살게요."
홍성희가 활기를 찾아 웃으며 말하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술 얻어먹으려고 온 건 아닙니다."
"그럼 매상 올려 주실래요?"
"이거 혼자 와서. 길에서 몇 사람이라도 주워 오는 건데."
장규식은 홀을 둘러보았다. 아직 저녁 8시밖에 되지 않아 서울 같으면 이른 시간이었으나 테이블이 20여 개가 넘는 홀인데도 빈자리가 두어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었다.
"장사가 잘되는군요."
장규식이 말하자 그녀가 다시 밝게 웃었다.
"기분파 사람들 있잖아요. 여기라고 서울하고 다를 것 없죠. 한국 사람들이 몇십만 되니까."
종업원이 쟁반 가득 안주와 술을 가져오더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서울 일은 잘되세요?"
그녀가 장규식의 잔에 술을 채우며 물었다.
"네, 대충 잘 지냅니다. 그런데 어디 가셨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장규식이 묻자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여행 가셨어요. 왜요? 무슨 볼일이 있으세요?"
"네, 조금."
"급한 일이에요?"
"그럼 연락할 수는 있습니까?"
홍성희가 머리를 저었다.
"연락할 수는 없지만 무슨 일인지 말씀하시면 도와 드릴 수는 있어요. 그이가 남겨 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럼 신용만씨 말입니까?"
"아니, 신용만씨도 함께 가셨어요. 그 사람은 우리 그이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에요."
장규식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머리를 끄덕였다. 어쨌든 최대광과 신용만이 여행을 떠나 LA에 없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피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궁금한지 홍성희가 다시 물었다.
"이것저것 사업도 알아보고 홍성희씨 사업이 잘되신다니까 저도 한번 해볼까 해서 구경 왔지요."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는데요?"
장규식이 힐끗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떼었다.
"김종무가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김종무?"
눈썹을 모은 홍성희가 눈을 여러 차례 깜박였다.
"지난번에 이곳에 왔다가 추방당했지요."
장규식의 말에 홍성희가 입을 벌린 채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아, 그 사람이."
"그 친구, 이성철씨라고 아시죠? 그 사람 부하입니다."
"유장수씨도 아마 지금쯤은 알고 있을 겁니다. 홍성희씨가 여기에서 이 사업 하신다는 것."
홍성희의 얼굴을 본 장규식은 눈을 치켜떴다. 당연히 놀라거나 불안해할 줄 알았던 홍성희가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짓, 알면 어때요? 여긴 한국이 아니에요."
홍성희가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전화 한 통이면 돼요, 그런 사람."
장규식은 끄덕이며 술잔을 들었으나 그 전화가 경찰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유장수는 열심히 그의 다리를 주무르는 임희정의 동그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긴 머리를 흩뜨린 채 두 손으로 그의 무릎을 누르던 그녀의 손길이 차츰 허벅지로 올라왔다.
"더 세게 해드려요?"
힘을 쓴 탓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물었다. 동그란 눈에 포도알 같은 눈동자가 밝았고 입술은 도톰했다. 알맞게 선 콧등 위에 조그만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도 귀여웠다.
"응, 조금 세게"
그녀는 유장수가 최근에 발굴해낸 모델이다. 예쁘고 잘 빠진 여자를 찾으라면 한 시간 안에 백 명이라도 찾을 수가 있다. 유장수의 지론은 그중에서 운을 타고난 여자가 유명인이 된다는 것이고, 자신은 그 운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나 당당하게 알려 주었다. 임희정은 운을 믿으려고 유장수의 애인이 된 것인데 그것의 효과는 직통이었다. 하룻밤 동침 후에 그녀는 다음날 유명 음료수의 CF 촬영을 했고 일주일 후에는 대기업의 잠옷 CF 모델이 되었다. 유장수는 점점 그녀의 손길이 아래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잠자코 천장을 바라보았다. 언뜻 홍성희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홍성희가 지금 LA에서 룸살롱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성철이 생색을 내듯이 알려 주었는데, 그놈은 방송국이나 신문의 연예부 기자들에게 생색을 내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유장수가 가볍게 콧바람을 불었으므로 임희정이 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파요?"
"아니, 괜찮아."
임회정의 손끝이 그의 중요한 부분에 닿았다. 그녀는 감질을 내듯이 그 부근의 다리를 주무르면서 손끝으로 그곳을 건드리고 있었다. 유장수는 입가에 조그맣게 웃음을 띠었다.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임희정은 터득할 건 모두 터득해 놓고 있었다. 갖은 세파를 겪고 정상 부근까지 올랐던 홍성희보다도 어느 면에서는 더 숙달되었는데, 가정환경도 고생 없이 자란 집안의 딸인 것이다. 아마 이것도 세대 차이일지 모른다. 홍성희와 세 살 차이인데도 요즘의 3년은 무섭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임회정은 그의 중요한 부분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팽창되자 파자마를 내리고는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유장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쥐었다. 그녀는 상체를 숙여 그의 아랫배에 밀착시켰다. 자신의 숨결이 조금씩 가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유장수는 머리를 들었다.
"야, 인마, 올라와."
임회정은 두 말 않고 얼굴을 들더니 일어서서 잠옷을 끌어 내렸다.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자 티 한 점 묻지 않은 윤기 흐르는 몸매가 드러났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유장수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유장수는 아랫도리에서 후끈한 느낌을 받았고 임희정은 턱을 들고는 억누른 신음소리를 내었다. 방 안은 곧 그녀의 신음 소리와 가쁜 숨소리로 가득 찼다. 유장수는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모든 것을 잊었다.
이자영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0시 5분이 되어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야외 커피숍의 건너편 정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 얼른 얼굴을 돌렸지만 아마도 그는 일을 부탁한 출장사진사 임재학의 동료일 것이다. 이천에 있는 일급호텔은 평일의 아침 시간이었으므로 텅 비어 있었고 야외 커피습도 마찬가지였다. 커피숍의 뒤쪽으로 거대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내부 커피숍이 있었는데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몇 사람 있을지 모를 투숙객들은 아마 술에 만취해서 새벽녘에 찾아온 사람들일 것이고 그들은 이쪽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언젠가 지나치면서 들른 곳이었는데 오늘의 만남에 적당할 것 같아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이다.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자 10시 10분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호텔의 정문을 들어서는 검정색 벤츠가 보였다. 박주경의 차였다. 이자영이 잠자코 앉아 지켜 보고 있는 동안 벤츠는 호텔의 정문에서 멈췄다. 호텔의 보이가 달려 나오기도 전에 뒷문이 열리더니 박주경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꽤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운전사가 그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말을 했다. 박주경이 머리를 젓는 것이 보였다. 그는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이쪽을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왔다. 그가 테이블 옆쪽으로 다가왔을 때에야 이자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고 역시 입을 다물고 있는 박주경이 앉기를 기다려 따라 앉았다.
"그 자료인가 지랄인가는 모두 가져왔겠지?"
박주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입이 험해지셨어요, 회장님,"
"잔소리 마라. 난 바빠. 어서 말해."
"우선 그쪽부터 확인해야겠어요."
"확인해 봐."
자신의 옆 의자에 놓인 봉투를 턱으로 가리키며 박주경이 말했다.
"봉투를 탁자 위로 놓아 주세요, 회장님."
이자영을 美아보던 박주경이 마침내 봉투를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종업원이 다가왔다가 이자영의 조금 있다 오라는 소리에 물러났다. 이자영은 봉투의 뚜껑을 열고는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었다. 1억짜리 CD 몇 장이 가지런히 묶여 있었는데 이자영은 그것을 꼼꼼히 세더니 장수가 맞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어디 있어, 나한테 줄 건."
박주경이 재촉하였으므로 이자영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가져오도록 할게요."
그러면서 그녀가 손을 들었으므로 박주경은 자신의 뒤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벤츠의 운전사 외에는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 나도 연락만 하면 경찰이 오게 돼 있으니까. 너 같은 계집에게 협박당할 내가 아니야."
악문 이 사이로 뱉듯이 말하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내 한 명이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
"저기 있어요, 자료는."
이자영이 틱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이것으로 끝냅시다, 박주경씨, 돈이 아까워 다른 생각 하신다면 난 얼마든지 당신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세요."
사내는 탁자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정원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사내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으므로 이자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방을 움켜쥐고 지퍼를 열려던 박주경도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박주경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기척이 들렸다. 박주경의 운전사와 또 한 명의 사내였다.
"수작 부리지 마, 당신들."
박주경이 이자영의 옆쪽에 서 있는 사내와 마악 다가선 사내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댁은 누구세요?"
이자영이 다가선 사내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운전사와 박주경의 경호원이 그의 양쪽에 섰다.
"우린 가자."
가방을 움켜쥔 박주경이 이자영과 다가선 사내의 눈싸움을 무시한 채 일어섰다.
"그거, 이리 내,"
사내가 이자영이 들고 있는 봉투를 서슴없이 쥐고는 잡아채었으므로 봉투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
"어머나, 이 ‥‥‥‥"
이자영이 가방을 들어다 준 임재학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임재학이 히죽 웃었던 것이다. 힐끗 그녀를 돌아본 박주경이 문득 멈춰 서더니 가방을 들어 올렸다. 지퍼를 열고 안의 내용물을 끄집어낸 그가 버럭 소리를 쳤다.
"이게 뭐야!"
그는 손에 잡지 책 묶음을 들고 있었다. 그러자 임재학이 다시 웃었고 30억 CD를 가로챈 사내도 따라 웃었다.
"이 사기꾼들."
이자영이 소리쳤다. 그러자 호텔 안에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이쪽으로 몰려왔다.
"무슨 일이오?"
사내 한 명이 버럭 소리를 쳤고 이자영이 그를 향해 말했다.
"글쎄, 이 사람이 내 돈을."
"빼앗아갔단 말이오?"
"네."
"너, 이리 와."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임재학과 돈을 쥔 사내를 끌고 갔는데 그때 마침 호텔 앞으로 승용차 두 대가 와서 멈췄다.
"타세요."
사내들이 재빨리 차에 오르며 이자영에게 소리쳤다.
"댁들은 누구세요?"
그러면서 이자영은 그들을 따라 차에 올랐고 저쪽에서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박주경과 두 명의 사내를 보았다. 승용차는 그들 앞을 쏜살같이 지나쳐 국도로 들어섰다.
"댁들은 누구세요?"
이자영이 옆에 앉은 사내에게 다시 물었다. 그의 옆에는 자신의 CD를 가로채 간 사내가 창밖을 보며 앉아 있었다.
"우린 강도요."
사내가 흰 이를 내보이며 말했다.
"당신도 우리와 마찬가진 줄 알고 있는데."
이자영이 입을 벌렸으나 미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차는 넓은 길을 속력을 내며 달리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줄 테니까 집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디 다른 데로 피하는 게 나을 거야. 박주경이 찾을 테니까."
사내가 친절하게 말했다.
"가만, 내가 돈이."
사내가 꾸무럭거리면서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그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석 장을 꺼내어 이자영에게 내밀었다.
"이거, 택시 값이야. 이걸 가지고 가."
이자영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그를 노려보았으나 사내의 얼굴이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유장수에게 임희정이 다가왔다.
"사장님, 응접실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그녀는 흰색 반팔 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고 발은 맨발이었다. 모두 유장수의 기호에 맞춘 것이다. 유장수가 응접실로 나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강판술이 일어선다. 얼굴의 피부가 반들반들한 것이 근처에서 세수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서 따라 일어선 사내는 전우석이다.
"사장님, 일 끝냈습니다."
전우석이 노란색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장수는 자리에 앉아 그것을 힐끗 바라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를 빼온 거야, 그 여자가?"
유장수가 묻자 전우석이 빙긋 웃었다.
"30억입니다, 사장님."
"무엇이? 30억? 허어, 통큰 여잔데."
유장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긴 박주경이를 상대로 하는 여자라면 그럴 만도 하지."
"그리고 여기, 여자가 박주경과 교환하려던 자료가 있습니다. 저흰 잘 모르겠습니다만 꽤 중요한 것 같더군요."
전우석이 검정색 가방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 유장수는 부책 관심을 보이면서 가방을 열었다.
"허어, 이거 대단하다, 대단해."
내용물을 펼쳐 보던 유장수가 활짝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이야말로 보물이다."
그는 힐끗 탁자 위에 놓인 봉투를 바라보았다.
"전실장, 반은 뚝 떼어서 강판술이 주고 나머지는 너하고 애들이 나눠 써라."
"네?"
전우석이 눈을 둥그랗게 떴고 전혀 계산과 어긋났는지 강판술도 입을 꺼억 벌렸다.
"사장님, 저는 그렇게 많이 필요 없습니다."
강판술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이자영이 받아낼 돈을 3억이나 5억 정도로 예상해 자신의 몫을 1, 2억 정도로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됐어, 생활 밑천으로 해. 집을 사든지, 가게를 하든지, 어쨌든 수고들 했어."
가방 속에 다시 서류를 담으면서 유장수가 말했다. 전우석은 그가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 가방은 이자영이 박주경의 약점을 모아 놓은 가방일 것이고 그녀는 30억을 들어내었지만 아마 유장수는 그 열 배는 해낼 것이다. 전우석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양쪽 모두가 만족한 채 강판술과 전우석은 응접실을 나와 서로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유장수도 안방으로 들어가 화장을 고치고 있는 임회정을 뒤에서 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앉은 김영지에게 메스티조로 보이는 운전사가 물었다.
"세뇨리타, 보고타가 처음이신가요?"
생각에서 깨어난 김영지의 시선이 그와 룸미러에서 마주쳤다.
"아뇨, 난 여기서 살았어요. 여기서 태어났고,"
그녀의 유창한 스페인어에 주춤한 운전사는 잠자코 차를 몰았다. 한낮이어서 태양은 머리 위에 떠 있었으나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 6월 중순의 화창한 날씨였다.
"요즘 한국 사람인 고영무를 찾으려고 야단이라면서요?"
문득 김영지가 묻자 운전사는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세뇨리타. 하지만 군사 이동으로 모두 정신이 없습니다. 오르주에 포위 작전이 시작되었거든요.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그를 만나면 잡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림의 떡이지요."
"왜요? 상금이 대단하다던데."
"상금이 문제입니까. 내 목숨부터 건져야지요. 이래도 처자식이 다섯이나 딸린 목숨입니다."
"소문을 들으면 키가 2미터가 넘는 거인이라고 해요. 사람을 죽이는 데도 머리를 한 바퀴 돌려 죽인다고 합니다."
고영무의 저택에서 그런 거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목을 그렇게 돌린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택시는 시내를 빠져나가 그녀의 공장과 집이 있는 거리로 들어섰다. 자신도 모르게 김영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버지인 호세 김이 30년 동안 일으켜 세운 공장이었다. 공장 안의 집에서 그녀의 네 식구는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살아왔었다. 택시가 공장 앞에 멈추자 김영지는 차에서 내렸다. 낯익은 공장 종업원이 그녀를 바라보고는 깜짝 놀란 듯 인사를 하더니 달려왔다.
"세뇨리타, 지금 오시는 길입니까?"
"잘 있었어?"
"가방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에게 가방을 주고 사무실 쪽으로 다가서자 서너 명의 직원들이 서두르듯 다가오더니 인사를 했다. 기름이 묻은 작업복 차림들이다.
"영지야, 네가 갑자기 웬일이냐?"
민기철이 소리치며 다가오자 김영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공장 앞에 내렸을 때부터 억눌러 왔던 감정이 두 줄기 눈물로 흘러내렸다.
"어쨌든 잘 ㅡ왔다, 이놈아. 그동안 말랐구나."
구부정한 어깨를 펴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우고 있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김영지는 응접실에서 민기철과 마주 앉았다.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는 김영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기철이 입을 열었다.
"공장은 잘 된다. 네 아버지가 원체 기반을 잘 닦아놓아서, 그리고 직원들도 성실하고."
"어머니 얘기는 엊그제 내가 서울에 전화를 해서 잘 알고 있다. 여전하시더구나."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걱정 없다. 내 배들은 다른 놈이 맡아서 고기도 잘 잡고 돈도 많이 번다. 그리고 여기도 그렇고."
민기철은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김영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고영무는 이제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거다. 그것은 네 힘으로 될 일이 아니다."
"소식 들으셨어요?"
"소식은 무슨?"
민기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놈 때문에 교민들이 못 살 지경이다. 교민들 집집마다 놈들이 수색하고 있어. 감시가 따라붙고. 여기도 두어 차례 다녀갔다."
"이젠 너도 안정을 찾아야지. 그래, LA에서는 괜찮은 사업이라도 찾아내었니?"
"아뇨, 아직."
"여기 있어라. 그래도 여기가 네 고향이다. 네 친구들도 있고. 내가 도와주마, 내 배를 팔아서라도."
김영지는 소리 죽여 가늘게 긴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직 무어라고 대답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고영무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얼굴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는 했다. 그리고 산토스를 상대로 맹렬하게 스페인어를 익혔으므로 이제는 어지간한 스페인어는 말하고 들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카레라 4번 도로와 독립공원이 마주치는 근처의 허름한 아파트 두 채를 세내어 살고 있었는데, 아파트는 컸으나 내부 시설은 엉망이었다. 물과 전기 공급만 제대로 되었을 뿐 욕조는 깨어져 있고 벽에는 금이 가 있다. 그러나 부랑민 합숙소보다는 백 배 나았으므로 대원들은 그들의 임시 거처에 만족하고 있었다.
"페드로가 늦는구나. 한 시간 전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시계를 내려다보면서 고영무가 말하자 산토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옆집의 짐 버클리를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창가에 앉아 대원과 스페인어를 익히고 있던 최대광이 힐끗 이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머리를 돌렸다. 이쪽 집에는 고영무와 산토스, 최대광, 그리고 다른 대원 네 명이 쓰고 있었고 옆집은 신용만과 짐 등 다섯 명이 쓰고 있었다. 아파트는 빈민자용으로 지어진 것이었으나 소유주는 수도 방위군 소속의 장군이라고 했다. 스물 몇 채가 들어 있는 아파트 한 동 전체가 그의 소유였고, 그는 관리인을 시켜 매월 집세를 받아 내었다. 세입자 중에는 에콰도르에서 넘어온 여권도 없는 도망자도 있었고 남자를 밤마다 끌어들여 사업을 벌이는 여러 종류의 여자들도 있었지만 기관에서 검문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소유주인 장군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영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최대광이 얼굴을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별일 없을 겁니다. 페드로를 후안이 따라갔으니까요."
스페인어로 최대광이 말했다. 마주 앉은 대원이 빙긋 웃었다. 머리를 끄덕인 고영무는 3층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빈민가였으므로 뛰노는 아이들의 차림새가 남루했고, 가끔씩 인디오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페드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브루노와 앙헬이다.
"보스."
브루노의 몰골은 험악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앙헬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브루노?"
놀란 고영무가 그의 뒤쪽을 바라보았으나 맨 나중에 들어온 산토스가 방의 문을 닫는 것을 보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보스, 면목 없습니다."
고영무의 어깨를 껴안고 볼을 가져다 댄 브루노가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뒤쪽에 서 있던 앙헬도 소매를 들어 눈을 닦았다. 고영무는 그의 어깨를 안고 자리에 앉혔다. 브루노를 따라 들어온 짐과 신용만 등의 대원들도 그의 주위에 둘러앉거나 섰다.
"보스, 저희 둘만 때놓고 모두 죽었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방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브루노가 말했다.
"네이바 분기점에서 뛰어내렸습니다만 철로 수비대에게 발견되어서."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본 채 입을 여는 사람은 없다. 암헬이 코를 훌쩍 들이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다면 라파엘 측의 아흡 명을 사살했다는 신문보도가."
짐이 혼잣말처럼 말하면서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고영무는 잠자코 브루노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너회 둘이라도 살아와서 다행이다."
이윽고 고영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쉬어.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하자."
그러나 방 안에서는 한동안 움직이는 사람도, 입을 여는 사람도 없다. 브루노와 앙헬이 도착한 다음 날 오후, 힐튼 호텔의 로비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주요 인사의 파티가 자주 열렸으므로 점심을 함께하는 모임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도 페드로는 신사복 차림으로 로비의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는데 가끔씩 머리를 들어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올해 들어 스물일곱 살인 그는 메스티조였는데 메데인 경찰청의 경찰관이었다가 아버지와 삼촌이 라파엘 일당으로 연루되어 체포되고 자신도 직장에서 해직당하자 곧장 어머니와 두 동생을 이끌고 LA로 밀항해 간 사내였다. 결단력도 있었고 기민했으므로 이런 일에는 적격일 것이다. 아침 10시부터 나와 기다렸으나 후안이 이끄는 그룹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현관 한쪽 구석에 짐 버클리와 신용만이 서서 호텔 내에 있는 옷가게를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그들이 따라 나와 준 것이다. 2층의 계단으로 10여 명의 남녀가 떠들썩한 웃음소리를 내며 내려오고 있었다. 남자들의 대부분은 가슴에 번쩍이는 메달과 훈장을 붙인 영관급 장교였고, 여자들은 풍만한 몸집과 짙은 화장을 한 그들의 부인일 것이다. 은밀한 접선을 하는 데 사람이 적은 곳보다 사람이 많은 곳이 유리하다는 것쯤은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이곳 힐튼은 너무 번잡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페드로는 신문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이 힐끗 이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몸을 돌려 안쪽의 화장실로 다가갔다. 그가 사람들을 헤치며 화장실로 다가가는데 두어 명의 사내들이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페드로는 주춤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사내들과 함께 걷고 있는 자가 아무래도 어디서 본 얼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갈 것도 잊은 페드로는 그들을 따르다가 옆쪽으로 다가갔다. 낯익은 사내가 힐끗 이쪽을 보더니 눈을 조금 크게 뜨는 것 같다가 이내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페드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후안의 그룹이었던 레몬이었던 것이다. 걸음을 늦춘 페드로는 다음 순간 다시 화들짝 놀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레몬이 자신과 아는 체를 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호텔의 현관 쪽에 있던 짐과 신용만은 사정이 달랐다. 우선 짐이 레몬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그는 레몬이 일부러 딴 곳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것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해 그런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짐이 앞장서서 사람들을 헤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페드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들끓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누군지 알아낼 수 없었다. 짐은 레몬에게 다가가다가 그의 좌우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쪽도 이미 이쪽에 시선을 잔뜩 주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짐은 사정을 알아차렸으므로 머리를 돌렸다. 례몬은 체포된 것이다. 그래서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했고 수사관과 함께 힐튼으로 나와 만나기로 한 일행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레몬 쪽에서 먼저 이쪽을 지목해 주리라고는 수사관들도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레몬과 눈을 맞추는 사람을 가려내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 선생."
아니나 다를까, 레몬의 왼쪽에 서 있던 사내가 짐의 어깨를 잡았고 어디에서인지 서너 명의 사내들이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와 짐을 둘러쌌다. 신용만은 짐보다 서너 걸음 뒤로 따라간 것이 다행이었다. 로비는 순식간에 밀치고 밀리는 사람들로 뒤엉겼다. 그때 짐의 어깨와 팔을 잡고 있던 사내 두 명이 입을 쩌억 벌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사내들이 일제히 총기를 꺼내 들었는데 여자 몇 명이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사내들은 총이 어디에서 발사되는지를 몰랐으나 우선 짐을 향해 두어 명이 총을 겨누었다. 그때는 신용만이 권총을 뽑아 들었을 때였다. 그는 사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페드로가 다시 뒤쪽에서 그들을 쏘았다. 로비는 수라장이 되었다. 짐은 현관을 향해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아직도 레몬을 잡고 있는 사내를 향해 한 발을 쏘았다. 총알은 빗나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레몬이 사내의 옆구리를 팔굽으로 치고 몸을 떼는 것이 보였다. 신용만과 페드로는 아우성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권총을 바지춤에 감추었으므로 수백 명의 인파들에 끼어 쏟아지듯이 현관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달리면서 뒤쪽을 자꾸 돌아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편 짐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레몬은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로 돌아온 그들은 고영무의 방에 모여 않았다. 짐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고영무가 물었다.
"레몬이 총에 맞는 것을 보았나?"
짐이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좋을 텐데."
브루노가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보스, 후안의 그룹은 모두 잡히거나 살해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힐튼으로 접선하러 갈 수도 없습니다."
짐이 머리를 들고 말하자 모두들 잠자코 있었다. 고영무는 주위에 둘러앉은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28명이 산타마르타에 도착했지만 이제 보고타에 모인 것은 11명뿐이다. 자신이 이끌고 온 그룹 아홉 명이 모두 무사한 것은 오직 운이 좋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너회들도 잘 알다시피 우린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는 조직이고, 누구에게도 명령을 받거나 지원을 받을 곳이 없다."
고영무가 입을 열었다.
"아마 사로잡힌 동지들을 고문한다 해도 나을 것이 없어. 이 조직은 내 자금으로 내가 훈련시킨 조직이고, 목표는 저놈들도 알고 있겠지만 카스틸로의 제거다."
모두들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알건 다 아는 사람들이다. 고영무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렇게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가 없는 이상 카스틸로 측에 잡혀 고문을 받고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해도 여론이나 국제기관에 내놓을 게 없다. 물론 고영무는 다를 것이다. 그는 한때 미국의 여론에도 오르내렸던 인물이고 마약부와 관계가 있다는 것도 증명할 수가 있다.
"이제 인원은 11명으로 줄었지만 나는 이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갈 작정이다. 이대로 물러나거나 앉아서 개죽음을 당하지는 않는다."
고영무가 한 마디씩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콜롬비아에서 죽겠다."
모두들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따라 죽겠습니다."
브루노가 턱을 들고 말하자 짐이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보스. 하겠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한마디씩 대답을 했는데 최대광과 신용만은 아직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느낀 듯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각기 얼굴을 제자리에 돌려놓고도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고맙다, 따라 줘서."
고영무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면 내일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