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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땅 1-1

Bollnow 2024. 3. 16. 15:37

황금의 땅

이원호

 

1

1. 두 사나이

"문 열어! 문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갈 테다!"

문을 주먹으로 치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최대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침침한 눈을 비볐다.

"이 망할 자식아! 너 문 안 열래!"

사내는 잔뜩 독이 오른 모양이었다. 잇사이로 씹어 뱃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 비키쇼. 내가 문을 부숴버릴 테니까."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얼거리는 말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면 사내들은 세 명쯤 되었다.

"이봐 최대광씨, 이제 그만 문 열어! 이 사람들 화내게 해서 이로울 것 없으니까!"

주인아주머니가 앙칼지게 소리쳤는데 사내들이 문을 부수지 못하도록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양이다.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치고 난 최대광은 목을 한 바퀴 돌려 보았다.

온몸이 찌뿌드드하면서 옆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어젯밤에 소주를 일곱 병쯤 마신 것 같다. 방바닥에 구르고 있는 술병들을 피하여 최대광은 문 쪽으로 발을 떼었다.

", 이 자식아! , 정말 승질 돋우게 만들 거야."

바같의 사내가 이젠 악을 쓰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것을 보면 늦은 아침이다. 여관의 뜨내기손님들은 모두 방을 비웠겠지만 태평장 여관에 남아 있는 모든 숙박객들은 이 소동을 듣고 있을 것이었다. 최대광이 철그렁거리는 쇳소리를 내면서 잠긴 쇠사슬을 풀자 바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리를 푼 최대광이 문을 잡아당겨 열었다.

쏟아지듯이 세 명의 사내가 그를 밀치고 들어왔는데 문에 기대고 있었으므로 밀린 것 같았다. 거친 동작이었고 생김새도 삼류 영화에 나오는 깡패 모습이다. 아줌마가 돈을 주고 모셔온 사내들이다. 우르르 몰려들었던 사내들은 우선 최대광의 거구에 숨을 들이마시는 기색이었다. 1미터 90의 신장에 체중이 140킬로이므로 어지간한 사내의 두 배는 되었다. 사내들도 건장한 체격이었으나 몸무게는 반 정도쯤 될 것이다.

"아침부터 웬 지랄들이여?"

문을 가로막고 선 최대광이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이 소동 중에 처음 하는 말이다.

"어떤 놈이 승질 난다고 그렸어? 나와 봐."

사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줌마한테 용역을 받을 적에 구체적인 인적 사항을 듣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아줌마는 아줌마대로 수고비를 줄이려고 얼렁뚱땅 넘겨 버렸을 것이다.

"아니, 적반하장이네. 엇다 대고 큰소리이? 큰소리가!"

그래도 구면인 아줌마가 최대광에게는 익숙했다. 날카로운 목청으로 소리치면서 손가락으로 최대광의 아랫배를 가리켰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손가락이 가슴을 겨누게 될 것이었다.

"여관비만 내놔! 지금 당장! 석 달분 여관비 150만 원하고 밥값 80만 원, 어서!"

아줌마는 손바닥을 벌렸다.

1미터 50이 조금 넘는 키에 가슴과 허리가 일자형으로 빠진 통통한 그녀는 마흔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이, 자네 경찰서에 가고 싶은가?"

사내 한 명이 나섰다. 짧게 깎은 머리에 다부진 얼굴을 한 사내였다. 나이는 스물일곱이나 여덟쯤으로 최대광보다는 서너 살 위로 보였다.

"체격만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젊은 놈이 석 달이 넘도록 무전취식을 해?"

사내가 마음을 다져 먹은 듯 목에 힘을 주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기만 해? 갖은 거짓말로 밥값도 내지 않고 있는데?"

아줌마가 나섰다.

"이젠 거짓말 듣기도 싫어. 이 사람들하고 당신 고향집에 가서 세간살이라도 가져와야 되겠어. 누군 흙 먹고 장사하는 줄 알아?"

최대광은 방바닥에 널려 있는 술병들을 한쪽 발로 밀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 이 자식 봐?"

사내들은 다시 기세가 오르는 모양이었다. 사내 한 명이 최대광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아줌마."

아줌마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가 머리를 저었다.

"난 싫어 거짓말을 또 할 텐데 듣기도 싫어. 어서 일어나! 전라도 장흥이라고 했지? 이 사람들하고 같이 가서 돈 보내!"

"아줌마, 집에 가도 돈 없어요,"

느릿한 최대광의 말과 표정에 아줌마는 심장마비라도 걸린 것처럼 입을 혀 벌리고 숨을 멈추었다.

"아이고, 이 사기꾼! 강도! 이 도둑놈!"

말 한마디마다 아줌마가 머리를 끄덕이며 악을 했다.

"그렇다면 콩밥을 먹어라, 이놈아!"

"어허, 차근차근 이야기를 합시다."

앞에 섰던 사내가 털썩 방바닥에 앉아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어린놈인 것 같은데 낮가죽이 두껍구만,"

"내가 제명이 풀리기만 하면 이까짖 여관비는 이자까지 합쳐서 드린다는데 아줌마가 이해를 못하시는 거여."

"이놈아, 거짓말 좀 그만해! 내가 씨름협회에 전화를 안 해본 줄 알아? 넌 끝났대여! 앞으로는 씨름판에 못 나간다더라!"

"어허, 모르는 소리."

최대광은 방바닥에 세워져 있는 소주병 하나에 술이 반쯤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고가 술병을 들어 꿀걱이며 마시는 동안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들은 최대광을 둘러싸듯 앉아 있었다. 아줌마가 지친 듯 벽에 둥을 기대면서 스르르 주저앉는다. 그녀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앞으로는 영영 씨름판에 나설 수가 없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와 실업팀 소속이 되었을 때까지 8년 동안 씨름밖에 모르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넉 달 전에 씨름협회에서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것이다.

"심판을 두들겨서 영구 제명된 놈이 어떻게 씨름을 다시 한단 말이냐?"

아줌마의 입 술끝이 비틀렸다.

강옥기 심판은 한 달 동안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는데 갈비뼈가 두 개 부러졌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었다.

"네가 다닌다던 신안산업 씨름단에도 전화해 보았어. 넌 그곳에서 나올 돈도 없어. 이 뻔뻔한 거짓말쟁이 같으니."

최대광은 방바닥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피부가 검은 편이었으므로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술을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표시가 나지는 않는다. 그의 끓은 눈썹 밑의 부리부리한 눈이 아줌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뭉특한 콧날 밑의 입술은 앏은 편이었으나 단정했다. 그것이 그를 잔인하게도 보이게 한다.

넉 달 전에 백두장사의 8강에까지 오른 최대광은 4강전에서 오재술과 마주치게 되었다. 오재술은 잔기술에 능했으나 힘과 중량에서 최대광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와의 전적에서도 62패로 최대광이 앞서고 있었다. 시합 바로 전에 탈의실로 강옥기가 찾아왔다.

"대광이, 너 재술이한테 다리 내쥐라. 네가 한 번만 먹고, 21패로 해줘,"

그의 옆으로 다가온 강옥기가 소곤대며 말했다.

"너도 잘 알지? 이회장이 8강전부터 관전하고 있다는 것 말이야. 이번만 분위기 맞춰 줘. 끝나면 1천을 줄 테니까."

이동수 회장은 오재술이 소속된 영남산업의 회장이었고 또한 이번에 선임된 씨름협회 회장이었다. 영남산업의 선수로는 오재술 한 명만이 8강에 오른 것이다. 최대광은 첫판을 밀어젖히기로 가볍게 이겼다. 둘째 판은 오재술에게 밭다리 후리기로 졌다. 셋째 판에서 그들이 어깨를 맞대었을 때 머리를 숙이고 있던 오재술이 헐떡이며 소곤대었다.

"다리를 줘, 빨리."

그때의 감정 상태를 자세히 표현할 수는 없다. 최대광은 슬쩍 다리를 내밀어 주었다가 달려드는 오재광의 중심을 잡아당겨서는 모랫바닥에 코를 박게 해주었던 것이다. 관중들은 환호성과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최대광이 휴게실로 돌아오자 강옥기가 따라 들어왔다.

"이 새끼, 너 앞으로 어떻게 되나 두고 봐라."

최대광 옆에 선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소곤거렸다. 선수들이 대여섯 명 있었으므로 큰 소리로 말할 입장은 아니었다.

"이 새끼야, 넌 끝났어. 알겠니?"

최대광이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강옥기는 왕년에 선수와 코치 생활을 해온 씨름인이다. 최대광보다 15년쯤 선배가 되었다.

"아니, 이 자식이 쳐다보는 것 좀 보게?"

눈을 부릅뜬 강옥기가 최대광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최대광이 시선을 내리지 않자 강옥기의 손바닥이 날아와 그의 뺨을 쳤다.

"이 새끼가 어딜!"

선수들이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에 최대광은 강옥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옷장으로 집어 던져진 강옥기는 갈빗대가 두 개 부러지고 허리를 삐었던 것이다.

", 가져갈 것도 없구만 그래?"

최대광의 바로 앞에 앉은 사내가 방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옷가지 몇 벌하고 라디오 한 개뿐이야. 시계도 고작해야 몇만 원밖에 안 되겠고‥‥‥‥"

그의 시선이 최대광의 시계에 머물렀다.

"아줌마 말대로 전라도 장흥까지 모시고 가야겠는데 쌀가마라도 날라 와야지. 물론 우리 수고비는 별도로 받아야겠고."

방안에는 사내들만 밝아 있었다. 아줌마가 손님 때문에 아래층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최대광은 절의 대웅전 기둥 같은 몸을 흔들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멀뚱한 표정으로 사내들을 바라보곤 했다.

"넌 친구도 없어? 돈 얻을 친구 말이야. 아니면 친척이든지."

사내가 묻자 최대광이 머리를 저있다.

"없어."

"같이 씨름한 놈들을 알 것 아니야?"

"몰라."

몇몇 친구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나 차라리 굶어 죽고 말 것이지 그들에게 손을 벌릴 생각은 없다. 넉 달 동안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공사장에도 나갔고, 영어 테이프를 팔려고 아파트를 돌아다니다가 쫓겨난 적도 있었다. 나이트클럽의 주차장관리원 생활도 10여 일간 해보았다. 그러나 아는 것이 씨름이었고 씨름꾼들뿐이어서 적당한 직업은 생겨나지 않았다.

"이 자식, 이상한 놈 아냐?"

사내가 좌우에 둘러앉은 다른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아주 돈을 떼어먹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인데, 야 임마, 우리는 이런 일에 도통했단 말이다."

"어이, 네 집은 장흥에서 뭘 하고 있어? 농사짓는 거야?"

벽에 기대앉아 말없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긴 얼굴의 사내가 물었다.

"전화를 해. 내려가니까 돈을 준비해 놓으라고 말이야."

최대광은 그에게로 머리를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논 5백 평과 밭 7백 평으로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씨름꾼으로 나선 최대광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집에서 돈을 타 쓴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농협에 빛이 6백만 원이 있었는데 해마다 빛이 늘어 간다고 걱정이었다. 바로 밑의 여동생인 최금옥이 고등학교를 즐업하고는 장흥의 배차장에서 경리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월급을 쪼개 고등학생인 남동생 둘의 학비를 보태주고 있다. 이제까지 최대광은 부모에게 돈을 송금시켜 준 적이 지난 음력 설 때 한 번밖에 없었다. 내려가

지 못하는 대신 백만 원을 보냈던 것이다. 최대광은 머리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몇 달 전부터 한 달에 백만 원씩은 송금해 드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월급제로 먹고 살기가 빠듯했었다. 그러나 4강에까지 오르면 매달 보너스가 지급되기 때문이다.

", 우리 말이 안 들려?"

벽에 기대앉은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화 못 하겠어?"

"못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난한 살림이었고 마을 사람들이나 친척들도 모두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다. 어머니는 일하다 말고 허겁지겁 마을 밖으로 달려 나와 읍내로 가는 버스를 탈 것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금옥이 이름을 팔면서 버스를 공짜로 탄다. 어머니는 배차장에 내려서는 금옥이를 붙들고 사정을 한다. 아마 두 모녀는 배차장 구석에서 함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최대광은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정신을 차렸다. 긴 얼굴의 사내가 쥔 칼날이 자신의 귀밑에 닿아 있었다.

"역도산도 한 방에 갔어, 이 새끼야. 느글느글하게 굴지 말란 말이다. 그저 확 쑤셔 버리기 전에."

사내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귀밑이 시원했으므로 최대광의 두통은 어느덧 사라졌다.

", 전화할 거야, 안 할 거야? 딴말하면 아예 죽여버릴 테니까 대답만 해."

세 명의 사내는 몸을 굳히고 최대광의 대답을 기다렸다.

"못해."

"뭣이?."

"되 말대로 확 쑤셔버려라, 거그를."

"어서 쥑여 버리란 말이다."

"이 새끼가!"

앞에 맞았던 사내가 한팔로 방바닥을 짚는가 했더니 발을 들어 최대광의 턱을 차올렸다. 덜컥하고 위아래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최대광의 머리가 뒤로 훌떡 젖혀겼다. 팔굽으로 방바닥을 짚어 넘어지는 것은 면했으나 머리가 건들거렸다. 눈앞에서 하얀 불꽃들이 튀었다. 다시 발길이 날아와 그의 옆구리를 찍었다. 옆구리의 피부가 오그라드는 듯한 고통으로 최대광은 다시 옆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목덜미를 쇠몽둥이로 치는 듯한 충격이 왔다. 사내 한 명이 수도로 내려친 것이다. 쿵 소리를 내면서 최대광의 이마가 방바닥에 부딪혔다. 세 명의 사내는 이제까지 억제시키고 있던 감정을 발산하는 모양이었다. 무수한 발길질과 주먹을 온몸에 맞으면서 최대광은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들이 칠 때마다 하마 같은 몸뚱이가 출렁이며 이리저리 혼들렸으나 그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

", 이제, 그만. 이 새끼가 전화를 하려면 숨은 붙어 있어야 하니까."

사내 한 명이 헐떡이며 말했다.

", 이 새끼야, 일어나. 일어나서 네 에미나 애비에게 전화를 하란 말이다. 돈 준비해 놓으라고 해, 집을 팔든지 해서."

그는 다시 최대광의 허리를 발길로 찼다. 방바닥에 한쪽 볼을 붙이고 엎드려 있던 최대광이 얼굴을 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사내들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흐려 있었다.

"하아!"

입을 벌리고 한숨 같은 탄식을 짧게 뱉은 최대광의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벌려진 입안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죄 안 짓고 살려고 혔는디."

머리만을 든 채 그가 띄엄띄엄 말했다.

"인자는 헐 수 없고만."

사내들은 멍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사내 한 명이 그에게로 다가가 발을 들었다.

"이 새끼야, 잔말 말고‥‥‥‥"

그러나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엎드려 있던 최대광이 팔을 들어 사내의 발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무니가 무신 죄가 있다‥‥‥"

발목을 움켜쥔 채 최대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발 하나만 방바닥에 겨우 붙이고 있다가 벌렁 거꾸로 뒤집혀서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었다.

"이노무 시키들!"

두 손으로 사내의 발목을 움켜쥔 최대광이 투 해머를 하듯 휘익 상체를 틀었다.

"퍼억!"

쇠줄에 달린 해머 꼴인 사내의 머리통이 벽에 부딪혔고 최대광은 두 팔을 떼자마자 선뜻 몸을 돌렸다. 고릴라가 성이 나서 공격하는 것처럼 두 팔이 반쯤 들어 올려졌고 손가락은 갈퀴처럼 벌어졌다. 마악 달려들려던 사내들이 주춤하였으나 그들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긴 얼굴의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떼면서 싱긋 웃었다.

"질긴 놈이군. 어디 네놈의 뱃가죽에 철판을 깔았는가 보자."

길이가 20센티는 되어 보이는 칼이 최대광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좁은 방안이어서 피하기도 힘든데다가 최대광의 면적은 다른 사람의 두 배가 된다. 사내가 껑충 뛰어서 최대광을 향해 다가왔다. 언뜻 안겨 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같이 죽자는 것이다. 최대광이 상체를 비끼면서 면적을 줄이고 괄을 휘둘러 사내의 팔목을 쳤다. 사내가 헛칼질을 하였으나 칼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옆으로 비껴서던 최대광의 자세가 갑자기 균형을 잃었다. 쓰러져 있는 사내의 몸에 발이 걸린 것이다. 벽에 상체를 부딪치며 주저앉던 최대광이 중심을 잡으려고 방바닥을 짚은 손에 술병이 잡혔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사내가 성큼 한 걸음을 내딛더니 발길로 그의 턱을 찼다. 최대광이 머리를 옆으로 피했으므로 발끝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을 쥔 사내가 중심을 잡고는 옆쪽에 서 있었다.

", 비켜. 내가 처치할 테니까."

칼 쥔 사내가 소리를 치자 최대광은 그를 향해 술병을 던졌다. 가까운 거리였다. 술병이 날아오자 그가 손을 들어 막았으나 칼을 든 손이다. 칼의 손잡이에 술병이 맞아 부서지는 바람에 유리가 튀었다. 다른 사내의 발길을 가슴에 받으면서 최대광은 튕기듯 일어났다. 한걸음에 칼 쥔 사내에게 다가가자 사내는 서슴없이 그의 배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전에 최대광의 한 발이 사내가 중심을 잡고 있는 앞쪽 발목을 가볍게 잡고 중심을 잃은 사내의 칼이 최대광의 가승 부근의 옷을 일자로 찢어 놓았다 최대광의 발이 무게를 싣고 사내의 턱을 올려 찼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머리가 벌떡 뒤로 젖혀졌다. 최대광의 어깨에 무딘 충격이 왔다. 뒤에 있던 사내가 소주병을 주어 최대광의 뒷머리를 겨누어 친 것이다. 그러나 최대광의 신장이 컸고 사내가 내려친 각도가 적었다. 소주병은 스편지에 친 것처럼 최대광의 어깨에서 튀어 올랐다. 최대광은 힐끗 그 사내에게 시선을 주고는 머리를 흔들며 주저앉아 있는 사내에게 허리를 굽혔다. 주먹이 잔뜩 뒤로 젖혀져 있다. 곧 최대광의 주먹이 사내의 두 눈 사이를 쳤다. 주먹이 켰으므로 주먹의 범위 안에는 콧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퍼억!"

바가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꺾었다. 뒤쪽의 사내가 아수라처럼 달려와 그의 상체를 뒤에서 안았다. 등의 위쪽을 무엇으로 긁는 느낌이 들었는데 입을 한껏 벌리고 물어뜯으려고 모난 곳을 찾는 모양이었다. 최대광은 머리를 숙여 자신의 배를 움켜쥔 사내의 두 손을 보았다. 그는 사내의 손가락 한 개를 찾아 쥐었다.

'따악' 하면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사내가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방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주저앉은 사내가 입을 따악 벌린 채 한 손으로 다른 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가운뎃손가락 하나가 손등 위에 눕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눈과 입을 벌어질 듯 크게 벌린 그의 얼굴에서 금방 진땀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이놈아, 너 죽고 나 죽자!"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최대광은 처음으로 흠칫 어깨를 세우면서 머리를 돌렸다. 아줌마가 분노와 공포에 범벅이 된 얼굴로 서 있었다. 붉은 루주를 칠한 입술을 한껏 벌리고 있었는데 최대광의 피범벅이 된 입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아줌마."

주춤거리며 최대광이 다가가자 두 손을 갈퀴처럼 구부린 아줌마가 달려들었다.

"이놈아! 사람 살려!"

죽일 듯 달려들면서 아줌마는 행동과는 다른 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맛살을 찡그린 최대광이 줘고 있던 주먹으로 달려드는 아줌마의 턱을 가볍게 쳤다. 휘익 머리가 한쪽으로 틀어지면서 아줌마는 손목을 움켜쥐고 앉은 사내의 무릎 위에 엎어졌다. 빨간색 팬티가 훤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어이, 형씨, 같이 갑시다."

뒤쪽에서 누가 부르고 있었다. 최대광은 못 들은 척하고는 사거리를 건너 조그만 샛길로 들어섰다. 태평장 여관하고는 이제 꽤 떨어졌다.

"형씨, 저 좀."

사내는 큰길 입구에서 다시 부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오후의 햇살이 밝게 쏟아지고 있었다. 멈춰선 최대광은 사내의 모습을 보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마 몸무게는 자신의 절반도 안 나갈 것이다. 키는 170센티 정도로 보였으나 이쪽은 그보다 20센티는 크다. 그러나 군살이 없는 단단한 체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대광의 마음을 놓이게 한 것은 그의 웃음이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어 웃고 있었는데 금방 호감이 갈 정도였다. 옷차림도 말쑥했으므로 저런 놈이 여자 잘 먹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나 불렀는데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웃음 띤 얼굴로 사내가 다가왔다.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어서 언뜻 나이 들어 보였으나 다가선 그의 얼굴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 같았다.

"왜 불렸는데?"

다시 배에 힘을 준 최대광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이것‥‥‥‥

사내가 손에 쥔 옷가지를 들어 보였다. 최대광의 점퍼였다.

"방에다 이걸 놓고 가셨더구만."

"고맙군."

최대광은 점퍼를 낚아채서는 들고 있던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형씨,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그건 알아서 뭘 해?"

인상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쩐지 꺼림칙했다. 그리고 갑자기 친한 척 달라붙는 것도 징그러웠다. 최대광은 몸을 돌렸다. 놈은 세 녀석들과는 상관이 없는 녀석이지만 여관의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방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와 입에 양말이 틀어박히고 사지가 묶여 있는 여편네도 보았을 터였다.

"돈도 없을 텐데 어딜 간다고 그래요? 우리 어디 가서 해장국이나 먹읍시다. 나도 아침밥 안 먹어서‥‥‥ 내가 살 테니까 말이오."

최대광의 뒤를 따르며 사내가 말했다.

"난 신용만이라고 합니다."

해장국집에 마주 앉자 사내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것도 인연이니 알고 지냅시다."

"난 최대광이여."

최대광은 팔을 내밀었다가 그가 잡고 흔들고 나자 다시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듣자 하니 씨름을 하셨던 모양인데‥‥‥ 여관 아줌마가 하도 떠들어서 말이오."

최대광이 머리를 돌렸다. 마침 해장국이 날라져 왔으므로 그들은 수저를 들었다. 오랜만에 먹는 밥이었고 국물 한 수저를 입에 넣자 최대광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턱을 들었다. 신용만도 식성이 좋았으므로 그들은 순식간에 한 그릇씩을 치우고 다시 한 그릇씩을 더 시켰다.

"아줌마, 여기는 아예 두 그릇을 가져다줘요, 곱배기로."

신용만이 최대광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줌마가 최대광을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릇을 비울 때까지 그들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오직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최형, 나는 스물다섯인데 최형은 나이가 몇이오?"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면서 신용만이 물었다. 최대광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나도 스물다섯여. 그런데 생일은 언제요, 거기?"

"8."

"8? 나는 정월이니까 내가 형님이구만."

신용만이 힐끗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이 유달리 차갑게 느껴졌다. 최대광이 길게 트림을 했다.

"최형, 갈 곳이 없으면 나하고 같이 갑시다. 내가 있는 곳으로."

신용만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관에서 최형 사정을 대충 들었어요. 여편네도 너무 악을 썼지만 최형도 어지간하시드만"

"서울 인심이 그래. 우리 고향 여관들은 돈 있으면 받고 없으면 그냥 재워주는데."

"허어, 요즘도 그런 데가 있네. 허긴 시골은 모두 친척들이 모여 사니까."

"그런데, 신형은 직업이 뭐요? 난 아줌마가 많이 떠들어서 나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구만."

"글쎄, 난 뭐랄‥‥‥ 자유 직업인이라고 할까. 그래요, 어쨌든."

"자유직업인?"

신용만이 이쑤시개를 던지고는 허리를 세웠다.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 조금 있으면 알게 됩니다. 열심히 일해서 먹고사는 직업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신용만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어 계산을 했다. 최대광은 그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선 최형의 옷을 한 벌 사야겠는데. 양복은 맞는 것이 없을 것 같고‥‥‥ , 저기 옷가게가 있구만."

해장국집을 나온 신용만이 턱으로 길가에 있는 옷가게를 가리켰다.

"저기서 한 벌 빼 입읍시다."

"신형, 나는‥‥‥‥"

"이거 왜 이러시오? 가만히 있어요."

이맛살을 찌푸린 신용만이 힐끗 최대광을 바라보더니 앞장을 섰다.

"신형, 이러지 말어, 내가 무슨‥‥‥‥"

그의 뒤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지나가린 사람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신용만이 몸을 돌려 찬찬히 그를 바라보더니 다가왔다.

"옷값은 조금 있다가 갚게 되니까 자존심 상할 거 없어요."

"어떻게 말이여?"

"나하고 당분간 동업하는 건데 그런 차림으로는 폼이 안 난다니까."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본 최대광이 머리를 들자 이미 신용만은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다시 화사하게 웃었다.

"어서 와요, 최형."

눈을 치켜뜬 최대광은 어금니를 지근지근 씹으면서 신용만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이만큼 다가서자 신용만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여우에게 꼬임을 당하는 곰처럼 최대광도 안으로 들어섰다.

놀이터의 나무 벤치에 기대고 앉자 최대광은 온몸이 나른해졌다. 저녁밥으로는 갈비 10인분을 먹었으므로 당장에 체중이 10킬로는 늘어난 기분이었다. 더구나 새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사 신고는 사우나에 들러서 이발까지 했다. 방배동의 이 깊숙한 빌라까지 신용만이 자신을 끌고 온 것이 꺼림칙은 했지만 이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할 일도 없다.

"최형, 나도 곡절을 많이 겪은 놈이여."

앞쪽의 그네에 앉아 조금씩 흔들거리고 있던 신용만이 입을 열었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라서 놀이터는 비어 있었고 등 뒤의 주차장도 고요해졌다.

"난 호텔에서 일을 했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신바람이 났지. 쪽 빠진 검정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짐을 날라주고 팀을 받는 신용만의 모습을 생각해 보다가 최대광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땐 잘 나갔지, 지배인한테도 귀여움도 받고. 내가 이래 봐도 영어하고 일본어는 제법 하거든."

"어어, 그려?"

서울 생활을 5년이 넘게 해오지만 흥분했을 때나 놀랐을 때 최대광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장흥 쪽의 사투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감탄하는 얼굴로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우리말의 표현도 서툴러서 말보다 행동이 훨씬 쉽고 빠르다.

"한 일 년만 더 있었으면 진급도 하고 미국도 갈 수 있었겠지, 미국에 우리 계열 호텔이 있거든. 거기서 몇 년 일해서 관록이 붙으면 서울로 돌아와서 조그만 호텔의 부지배인 정도는 된단 말이야."

"그런데?"

최대광이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 신용만이 사준 것이다.

"그런데 그년 때문에‥‥‥ 아무튼 여자는 요물이야. 남자 팔자를 바뀌 놓으니까."

"?"

신용만이 시계를 보았으므로 그도 손목을 들어 저녁때 신용만이 사 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열 시 반이었다.

"괜찮았어 호델에 들어서는데 눈이 확 뜨이더라구. 정신이 번쩍 나고."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최대광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년은 제 작은아버지뻘쯤 되는 놈하고 함께 들어왔어. 술에 취해 있었지, 두 연놈이 말이야."

"내가 방으로 안내해 주었지, 더블룸 특실로. 하룻밤에 20만 원이 넘는 방이야."

주차장에 불빛이 비치더니 헤드라이트가 그들을 휘익 출고 지나갔다. 목을 뽑아 그쪽을 바라보던 신용만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연놈들이 어떻게 떡을 치나 궁금했어. 보통 때는 안 그런데, 그년을 보니까 소리도 내지 않고 숨도 헐떡거리지 않고 얌전히, 그 표정 그대로 오입을 할 년 같았거든."

"어떤 표정인데?"

문득 궁금해진 최대광이 턱을 내밀고 물었다. 신용만이 눈썹을 찌푸리며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세웠다.

"그 쥐야, 신문 보는 얼굴, 아니, 월 쓰는 얼굴, 웃지도 않고 태연하게, 그년이 숙박부를 했거든."

최대광이 입맛을 다시면서 옆쪽을 바라보았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연놈들이 방에 들어가고 나서 30분쯤 후에 방 앞으로 갔지. 그때면 시작하거든 대개, "

"그래서?"

"그런데 울음소리가 나는 거야. 제발 살려달라는 소리도 들리고. 소리를 죽이고 우는데 듣고 있던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어, 분하고 원통해서."

"남자는 때리기까지 하는 모양이야. 비명 같은 것도 들리고 해서 변태가 아닌가 생각을 했지.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정상이야. 호텔에서는 별놈의 일이 다 일어나거든."

"그런데 그날은 내가 돌아버렸던 것 같아. 마스터키를 열고 들어갔거든."

최대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차장에서 불빛이 탱그르르 돌더니 사라졌다. 한동안 주차장을 바라보다 신용만이 입을 열었다.

"젠장, 두 연놈이 벌거벗고 그 짓을 하고 있더구만. 놈쟁이는 그년의 뒤에 엎드려 있었는데 기집애는 그때까지도 아우성을 치고. 나는 들어가자마자 놈의 뒤통수를 수도로 내려찍었지. 한방에 엎어져 버리더군."

"기집애는 그것도 모르고 징징대다가 머리를 들더니 기절하듯 놀라더군. 귀신 같았어."

"왜 울고 지랄헌 거여?"

"후장 판 거야. 알고 보니 그년도 좋아했던 거라구."

"허어."

최대광이 담배를 떼 내어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불에 굵은 선이 분명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난 뵈는 게 없었지. 그년은 엎드린 채 덜덜 떨고만 있었고. 그래서 놈이 했던 것처럼 옷을 벗고 그년 위에 엎어졌어. 그년은 다시 살려달라고 난리를 쳤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말이야."

"그것, 강간 아녀?"

"무슨 소리? 화간이지, 그 빌어먹을 놈만 없었으면."

"?"

"그놈이 날 고발했거든. 기집애는 잠자코 있었는데."

"뭘로?"

"이것저것 다. 그래서 튀었지. 그리고 나서 안 한 일이 없어, 나도."

다시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비추자 신용만이 그네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채식 사장은 한동안 자신의 BMW를 바라보았다. 앞쪽 빌라의 경비실에서 홀러 들어온 불빛이 차체에 닿아 반들거리고 있었다. 만족한 듯한 얼굴로 진채식은 몸을 돌렸다.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 자신이 빌라의 거주자로는 제일 늦게 귀가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주차장의 입구로 다가가던 진채식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사내를 보았다. 뒤에 선 사내는 밤눈에도 무시무시한 거인이다. 그들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다가와 그의 결을 스치는 것같이 보였다. 앞장선 사내가 그의 옆을 스치고 거인은 눈앞에 있었다. 그 순간 진채식은 옆구리에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는 휘청거리며 몸을 굽혔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다시 턱이 번쩍 들리는 느낌이 오면서 눈앞에 수백 개의 횐 점이 어지럽게 날았다. 한 손에 들었던 가방을 놓치면서 그는 땅바닥에 엎어지고는 이내 잠잠해졌다.

", 가자."

가방을 주워 든 신용만이 말했다. 그는 숨 한번 헐떡이지 않았다. 최대광은 그를 따라 빌라의 입구를 빠져나왔다. 열두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거리에는 택시를 잡으려고 서성대는 행인들만 서넛 보일 뿐이다. 그들은 다가온 택시의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대림동으로 가십시다."

신용만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무릎 위에 검정색 가죽 가방을 을려놓고는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이게 네 직업이야"

택시가 속력을 내자 최대광이 문득 물었다. 앞자리에는 손님도 앉아 있는 것이다 신용만이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아니, 다른 일도 있어. 내가 그랬잖아? 자유직업인이라고."

창밖에서 여자들이 한가롭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씩 웃음소리도 들린다. 아이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밝고 높은 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다가 저희끼리 재잘거리고 있다.

최대광은 누운 채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옆방의 신용만은 일어났는지 자는지 기척이 없다. 유리창이 환한 것을 보면 시간이 꽤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어날 생각은 없다. 오랜만에 맛보는 편안한 기분이어서 하루종일 이렇게 지내고 싶었다. 태평장에 있을 때는 새벽에 일어나 도망치듯 여관을 빠져 나와야 했다. 안채의 살림집에서 주인아줌마가 나오기 전에 여관을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최대광은 만족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어젯밤 사채업자 한 명을 때려눕히고는 가방을 가져와 집에서 펴보았다. 놀랍게도 현금만 850만 원에 당좌수표 다섯 장은 모두 35백만 원이었다. 어음도 십여 장 있었는데 신용만은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는 당좌와 어음 모두를 쓰레기통에 넣고 불에 태워 버렸다.

"어음이 몇 억 있으면 월 해? 이것 욕심 부리다가 골로 간 놈 많아."

타오르는 불꽃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현금만 먹는 거야. 그리고 그 새끼는 돈이 억수로 있는 놈이야. 이 돈은 시장의 가게주인한테서 일수돈을 받은 것이고. 아마 내일 밤에 그놈을 또 잡아도 이만큼은 갖고 있을 거라구."

말하자면 죄도 아니라는 말투였다.

"그놈이 내 얼굴을 바라보던데, 너는 안 보고."

최대광의 말에 신용만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놈이 경찰에 신고하겠냐? 일수돈을 이렇게 걷었다가 빼앗겼다고? 당장에 세무소에서 달려올 거다. 경찰한테도 그만큼 상납해야 할거고."

신용만은, 돈을 나누더니 그에게 4백만 원을 주었다.

"앞으로 반타작이다. 네가 벌어도 반으로 나누는 거야."

어느 사이에 그들은 말을 놓고 있었다. 최대광도 더 이상 생일이 빠르다는 허튼소리를 내놓지 않는다.

"내가 벌 줄을 알아야지."

방바닥 위에 놓인 들을 바라보며 그가 말하자 신용만이 빙긋 웃었다.

"그건 내가 만들어 줄게. 내일 저녁에 네가 할 일이 있어."

새벽까지 소주를 나눠 마신 것이 열 병가량이나 되었다. 신용만은 지금도 자고 있을 것이다. 방 세 개짜리의 연립주택을 얻어 신용만은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같이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최대광은 두 다리를 길게 뻗고는 마음껏 기지개를 켰다. 저녁 무렵이어서 거리는 패 혼잡하였으나 카페 안은 한산했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일 것이다.

그들이 들어서자 지배인인 듯한 사내가 서둘러 다가왔다. 그들 또래로 보였으나 신용만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최대광이 힐끗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와 있냐?"

신용만이 턱을 들고 차갑게 묻자 그 사내는 손을 들어 안쪽을 가리켰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페는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벽과 가구가 모두 반들거리는 색깔 유리여서 수십 가지의 빛을 내었다. 그들은 안쪽에 붙은 나무 문을 열었다. 신용만의 뒤를 따라 들어선 최대광은 환한 내부 장식에 눈이 부셨으므로 잠깐동안 이맛살을 찌푸렸다.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는 방의 사면은 거울이었다. 그리고 소파에는 화사한 차림새의 여자 두 명이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와요, 신사장."

여자 한 명이 말했다. 짙은 화장에 피부도 팽팽하게 윤기가 흘러서 이십 대인지 삼십 대인지 최대광으로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신용만이 붙임성 있는 웃음을 피우면서 그들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의 옆자리에 않는 최대광에게 여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노골적인 시선이었고, 끈끈해서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 내 친굽니다. 고등학교 동창인데 이놈은 운동으로 출세를 했지요. , 레슬링 헤비급 챔피언을 지내다가 이번에 국제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전임으로 발령을 받았지요."

"어머나."

다른 쪽 여자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헤비급 챔피언, 대단하시네."

"챔피언 벨트를 내놓고 나왔지요. 무적이었거든요. 링에 오르면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친구 특기가 뭐였더라?"

신용만이 최대광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렇지, 누르기였습니다. 힘이 좋거든요. 한번 누르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지요."

여자들은 흘린 듯 최대광의 두름한 콧날과 얇은 입술, 그리고 덤프트럭 같은 몸매를 바라보고만 있다.

", 인사해라. 이분은 양미숙 사장님이신데 큰 회사를 운영하고 계셔."

짧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의 여자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최대광을 향해 입술 끝으로 웃었다. 안경알이 반짝 빛났다.

"이분은 장혜란 사장님이신데 너도 알만한 패션업체를 경영하고 계신다."

이쪽 여자는 이목구비도 뚜렷했을 뿐 아니라 체구도 여자치고는 컸다. 그녀는 최대광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신용만을 향해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정말 멋진 친구를 소개해 주는군요, 신사장."

"저하고는 둘도 없는 친굽니다. 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는데 요즘 와서야 다시 만났지요."

"양사장한테 질투가 나."

"어머나, 언니도 참"

안경 쓴 여자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으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더니 지배인이 들어선다. 쟁반 위에 가득 안주 접시와 술잔들이 놓여 있었다.

"술은 우선 꼬냑 한 병을 가져왔습니다만 더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그릇을 내려놓으며 지배인이 말하자 장사장이 머리를 저었다.

"됐어, 오늘은 한 병이면 돼. 곧 일어날 거야."

"이건 1205호 열쇠다. 기억해둬. 양사장하고 여기서 만나는 거야. 열한 시에 그년이 들어올 거다."

신용만이 최대광의 코앞에다 대고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넌 열시 반쯤 들어가 있어. 열한 시에 그년이 들어오면 한 시간이면 되지?"

최대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한 시간에 마친단 말이냐. 내가 토끼냐?"

신용만은 갑자기 훅을 한 방 먹은 얼굴이 되어서 어, 하는 표정으로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두 시간은 주어야지, 나도 오랜만에 여자 살을 만지는데."

"어이구."

"레슬링 챔피언이라고 했겠다. 매 마디마디를 분질러 주어야지."

"?"

"노골노골하게 짓이겨 주겠단 말이다."

"허어."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최대광을 바라보던 신용만이 갑자가 정신 이 든 듯이 호주머니를 뒤져 다른 열쇠 한 개를 꺼내어 들었다.

"이것은 908호 열쇠다. 너는 새벽 한 시에 장사장을 눌러 줘야 돼."

"새벽 한 시?"

눈을 꿈뻑이며 최대광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시간차를 계산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그년들이 왜 한꺼번에 일을 치르려고 한다냐? 한 년은 내일 만났으먼 허렀는디."

"그것들이 서로 너를 먹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시간을 조절하느라고 내가 진땀을 뺏어."

최대광은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여자들이 서둘러 일어섰으므로 술병은 3분의 1쯤 남아 있었다. 술병을 거꾸로 든 최대광은 콜라를 마시듯 벌컥이며 꼬냑을 삼켰다.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술인데 맛이 그만이었다.

", 그만 마셔."

신용만이 술병을 잡아채었을 때는 몇 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년들은 제각기 저 혼자만 너하고 만나는 줄 안단 말이다. 그러니까 조심해야 돼. 그리고 첫 번에 너무 힘을 빼지 말고."

신용만이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여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간 그는 제각기 바람을 잡아서 약속을 하고, 호텔의 열쇠까지 받아 오느라고 한 시간 동안 동분서주하고 돌아온 것이다.

", 장사장이라는 여자, 네 여자라면서, 이래도 되는 거냐?"

최대광이 목을 내밀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친놈."

신용만이 활짝 웃었다.

"내 대신 네가 하고 돈을 받잖아? 그리고 임마, 돈도 반씩 나누기로 했지 않느냔 말이다. 내가 너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야. 늙은 년들한테 지쳤어."

"도대체 몇 살인데? 내가 보기에는 팽팽하던데."

"내일모레 오십이야."

이번에는 최대광이 장작개비로 머리를 맞은 얼굴이 되었다.

"어했든 한 년당 백만 원은 받아야 해. 그 이하는 안 돼. 그것만 명심해."

신용만이 다짐하듯 말했다.

입맛을 다시면서 최대광은 술병을 들고 흔들어 보았다. 힐끗 신용만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는 알면서도 술을 더 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 아흡 시 반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꼬냑 한 병은 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최대광은 할 수 없이 술병을 내려놓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마른안주를 입에 넣으면서 최대광은 하룻밤 사이에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팬티만 걸친 알몸으로 최대광은 소파에 앉아 문 쪽을 노려보았다. 이것은 마악 샅바를 잡기 직전의 기분과 비슷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양미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경은 싫다. 안경부터 벗겨 던져버려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안경 쓴 상대와는 싸워 본 일이 없다. 술기운이 알맞게 온몸에 퍼져 있었고 이제 곧 닥쳐올 일에 대한 기대로 그의 남성은 단단해져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여자다운 여자를 만나 섹스를 해본 기억이 없다. 대학 때 사귀었던 두어 명의 여자들은 그의 맹렬한 힘에 진저리를 내고는 떨어져 나갔다. 씨름단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주고 여자를 싫을 때는 여자는 짜증을 부리면서 돈을 도로 가지고 가라고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번은 돈 받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화사하고 그럴듯하다.

노크 소리가 들렸으므로 최대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구요?"

문 쪽으로 다가간 그가 물었으나 바깥에서는 대답 대신 다시 노크를 한다. 열한 시가 다 되었으므로 양사장일 것이다. 문을 열자 저쪽을 바라보고 셨던 양미숙의 눈이 활짝 뜨였다. 안경알만큼은 안되었지만 동그랗게 눈을 치켜뜬 채 그녀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빨려들 듯 방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준비가 다 되었어."

허리에 두 팔을 짚고 서서 최대광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샅바 같은 팬티에 머물더니 들러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거그도 빨리 준비혀, 앤경 벗고."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방에 들어오기 전에도 나름대로 분위기를 이끌어 갈 계획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숨에 샅바를 놓쳐 버린 씨름선수처럼 양미숙은 기선을 잃고 서서 침을 삼켰다.

"내가 쥑여 줄텡게, 어서 옷 벗어 "

난데없이 내갈기는 반말도 그의 집채만 한 알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들렸고, 양미숙은 그것을 따질 정신이 아니었다. 말 한마디 못 한 채 양미숙은 안경을 벗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고 가슴이 소리를 내며 뛰었다.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는 손끝이 떨려 지퍼가 팬티에 물렸다. 잘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힘을 주었더니 실크 팬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허리에 손을 짚고 있던 최대광은 생각난 듯 팬티를 끌어 내려 발끝으로 던졌다. 그의 남성이 해방을 만난 기세로 벌떡였다. 옆으로 돌아서서 옷을 벗던 양미숙도 금방 알몸이 되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최대광이 다가왔다. 세 걸음쯤 되었을 것이다. 그가 중중거리며 두 팔을 들고 다가서는 그 짧은 순간에 양미숙은 젖가슴을 두 팔로 가린 채 자지러지듯 온몸을 굳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고 머리끝이 주삣거리면서 가습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의 양손이 어깨와 엉덩이 쪽에 동시에 닿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신의 몸이 종잇장처럼 번쩍 들어 올려지자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강렬한 호기심과 기대가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몸은 침대 위에 던져졌고 벽이 무너져오는 것처럼 최대광의 몸이 덮쳐왔다.

"나는 잔재주는 모릉게, 들어갈 거여."

그의 말소리가 울렸으므로 양미숙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벌렸다. 곧 뜨거운 기둥 같은 그의 남성이 그녀의 몸 안에 가득 찼다. 첫아이를 낳을 때의 느낌이었다. 양미숙은 그의 몸을 끌어안고는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소리로 그 어떤 것이 깨어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 대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자꾸만 솟아오른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이윽고 양미숙은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양미숙은 여전히 자신이 벽에 눌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동안 의식을 잃었는지 아니면 몇십 분이 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깬 거여?"

위에서 최대광의 목소리가 울리자 양미숙은 멍한 시선으로 그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다시 헐 거여."

다시 아랫도리에 감각이 왔고 그것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발가락 끝을 잔뜩 오므린 양미숙이 다시 다리를 들었다.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벌린 알몸으로 양미숙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목이 쉬었고 목구멍이 뜨거웠다. 온몸이 팽개쳐진 걸레 같다는 느낌이 왔으나 그렇다고 비참하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머리를 돌릴 기운마저 없을 뿐이다. 그러나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축제를 끝내고 쉬는 것처럼 여운을 즐기고 있다. 아직도 아랫부분은 뜨겁고 무엇엔가 차 있는 것 같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이토록 뜨겁고, 이토록 거칠고 힘세며 끈질긴 남성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세어 볼 정신도 없었지만 아마 그와의 정사에서 다섯 번은 까무러쳤을 것이다.

양미숙은 힘을 들여 머리를 한쪽으로 돌렸다. 아까부터 옆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머리를 돌리기가 힘이 들었던 것이다. 최대광은 벌써 멀끔하게 옷을 주워 입고 있었다.

"뭘 하세요?"

놀란 양미숙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약속이 있어."

"지금이 몇 신데?"

양미숙이 정신이 든 듯 눈을 깜박였다. 벌어졌던 다리를 오므리고 한 손을 겨우 들어 시트로 하반신을 가렸다.

"한 시."

"어머나."

비몽사몽간을 헤매다 보니 두 시간이 찰나처럼 지나간 것이다. 양미숙이 겨우 머리를 들었다.

"? 거기가 괜찮다면 내가 일 마치고 다시 올 테니까, 다섯 시쯤."

"아녜요, 오늘은 됐어요. 저기 핸드백 좀 집어 줘요."

그녀는 거울 밑에 놓인 검정색 핸드백을 가리켰다. 상반신을 세운 양미숙은 최대광이 건네준 핸드백을 열고는 수표 두 장을 꺼냈다.

"이거, 용돈이나‥‥‥‥"

주저하는 듯한 표정으로 양미숙이 수표를 내밀자 최대광은 낼름 받아들었다.

"2백만 원 아녀?"

"돈을 그것밖에 안 가져와서‥‥‥ 다음에 더 드릴게요."

"고맙구만. 나도 오랜만에 회포를 풀어서 게운허고만. 최끝 더 혔으면 좋렀는디."

"됐어요. 이 정도에서 더하면 죽을 것 같애."

최대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모레 다시 만나요, 이곳에서 저녁때."

시트로 가슴을 가리고 앉은 양미숙이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여덟 시에, 내가 먼저 와서 방에서 기다릴게요."

문고리를 잡은 최대광이 머리를 돌렸다.

"그려, 목욕허고 기다리고 있어."

"하룻밤에 두 년을 잡아먹고 3백을 벌어오는 일이 흔한 일이냐? 대한민국 남자들이 안다면 모두 네가 부러워서 죽으려고 할 거다."

신용만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는 방바닥에 놓인 수표를 세더니 최대광의 앞에 반을 갈라 내려놓았다.

", 150만 원, 약속대로 반을 갈랐다."

힐끗 최대광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는 국그릇만큼이나 크게 입 벌리고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 그나저나 장사장 그년은 짠데. 백밖에 안 주더냐? 양사장은 2백인데."

"."

"뭐가 응이야? 돈 더 내라고 하지 그랬어?"

최대광이 졸음이 가득 찬 눈으로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돈을 더 내라구 혀?"

"."

"에이 잡놈아, 내가 좋아서 혔는디."

이맛살을 찌푸린 최대광이 신용만을 흘겨보았다.

"약헌 여자 등을 치면 못 쓰는 법이여. 너도 명심하그라."

"어이구 젠장."

신용만은 손에 들고 있던 수표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이따가 태평장에 다녀올 거다. 아줌마를 만나야겠어, "

최대광의 말에 신용만이 눈을 치켜떴다.

"태평장에 왜?"

"여관비 밀린 것 줘버려야겠어. 그 아줌마가 처음에는 그렇게 야박하지는 않았어. 내 여관비가 석 달이 넘게 밀리니까 그 지랄을 했던 거야."

"병신, 뭐하러 가? 네가 여관비 안 주면 굶어 죽는다더냐?"

"내가 아까 말혔잖여? 여자 등 치면 못쓴다고? , 내 말 헛들었어?"

최대광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내 호주머니에 5백이 넘는 돈이 있는디."

신용만이 온몸을 굳히고 그를 돌아보았다.

", 거기 가면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돼."

"? 돈 갚으러 가는디? 그 자식이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 아줌마가 내 양말을 빨어 먹고 애가 떨어졌어?"

"그래도 안 돼."

"쓸데없는 소리 말어."

최대광이 고집을 부리자 신용만이 와락 상체를 세웠다.

"내가 너 따라 나을 때 여관 금고를 훑어가지고 나왔단 말이다. 40만 원밖에 안 되었는데‥‥‥‥"

"그러니까 가지 마, 안 보면 돼."

최대광이 물끄러미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아줌마는 내가 돈을 들고 튄 줄 알고 있겠구만?"

그가 중얼거리자 신용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한숨 자야겠어."

", 자야지. 내가 이불 펴줄게."

신용만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셨다.

"새벽 네 시까지 뛰었으니 고단할 거야. 이따 일어나면 삼계탕 먹으러 가자. 몇 마리 고아 먹으면 양기가 충전될 거다."

아침 아홉 시가 되어 있었으나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최대광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최대광의 방을 나온 신용만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음이 떨어졌다.

", 정도 용역입니다."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오사장 바뀌줘요."

그러자 곧 사내가 전화를 넘겨받았다.

", 제가 오종문입니다."

"나다."

"아이구, 형님!"

사내가 반색을 했다.

"그렇찮아도 형님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채권 문제인데요, 15천짜리인데 반반입니다."

신용만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돈을 받아 주면 15백이 떨어지는 것이다.

"서류는 있어?"

"채무자가 백지에 써놓은 영수증만 가지고 있어요. 도장도 없고."

"저런 병신."

신용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정당하거나 합법적인 서류를 갖추었다면 해결사에게 부탁할 리가 없다.

"채권자 얘기로는 채무자가 돈 빌려 간 일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다고 해요. 증인도 없었고. 그런데 돈 빌려 간 놈이 영동의 청산 나이트클럽 사장이랍니다."

"청산?"

신용만이 눈을 치켜뜨고 서너 번 깜박였다. 청산의 유장수 사장은 전라도 출신의 주먹계 대부이다. 그의 나이트클럽에만 기라성 같은 주먹들이 수십 명이 넘는다.

"이런 젠장, 잘못 걸렀군. 그 자식이."

"형님, 무슨 수가 없을까요? 큰돈인데."

신용만이 혀를 찼다.

", 돈 욕심 부리다가 명대로 못 산다. 유장수한테 돈 받으러 갔다가 사라져 버리면 네가 책임질래?"

"서로 친구 사이라는데 유장수 그놈 나쁜 놈입니다. 안 그래요?"

"네가 언제부터 남 욕하게 되었어? 기집애들 등이나 쳐 먹는 놈이."

"아따 형님, 무슨 말을 그렇게."

오종문은 나이도 신용만보다는 세 살이나 위였다. 일 년쯤 전에 룸살롱 마담의 부탁을 받고 오종문을 즉사하게 두들겨 준 적이 있다. 룸살롱에 미성년자가 출입하는 것을 안 오종문이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남자다운 데가 있는 놈이었다. 신용만의 재주와 실력을 간파한 오종문은 그를 해결사로 고용하고 있었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신용만은 입맛을 다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셨다. 건넌방에서 최대광이 코 고는 소리가 이쪽에까지 들려왔다. 한동안 그쪽 방을 바라보고 있던 신용만은 걸음을 떼었다. 이틀째밖에 되지 않았으나 최대광이 곁에 있으니 든든한 것이다

 

 

 

2. 낙오자

6월 초의 아침 일곱 시 반이다.

고영무는 전철역에서 내려 지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회사까지는 걸어서 십 분 거리이므로 여덟 시 출근 시간에 알맞게 댈 수 있을 것이다.

"어이, 고영무씨 같이 가세."

뒤쪽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낯익은 얼굴이 옆으로 다가왔다. 상품 2과의 김진섭 대리였다

"대리님하고는 자주 만나는군요."

고영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늘은 내가 늦었어. 간부회의가 일곱 시 반부터 있는데."

그는 서두르며 걸었다.

"어제 술을 한잔했더니 아침까지 뻗어 버렸단 말이야."

고영무는 잠자코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그는 입사 4년으로 올봄에 대리 진급이 되었다. 입사 3개월째인 고영무에 비하면 새까만 선배인 셈이다.

"대리님, 상품 2과에서는 몇 명 이 개척 요원으로 빠집니까?"

아침 시간이어서 사람들이 차도에 가득 들어차 있다. 근처에 사무실 빌딩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글쎄, 그것은 나도 몰라. ?"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그는 고영무의 대학 선배이기도 했으므로 제법 이것저것 직장 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편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에 채용된 우리들은 모두 개척 요원으로 빠진다던데‥‥‥‥"

"글세."

사람들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그에게 바짝 다가붙었으나 그에게는 더 이상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일성전자는 전자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로 재벌그룹인 일성그룹의 핵심 회사였다. 고영무는 81의 경쟁을 통고 입사한 것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룹의 사훈에 쓰여 있는 것처럼 평생직장에 들어온 것이고 이제는 그룹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난 자네 경우가 되었을 때, 그것이 3년 전인가? 입사 일 년도 안 되었을 땐데, 오사카에 떨어졌어. 죽을 고생을 했지."

사람들을 헤쳐 가면서 김진섭이 큰 소리로 말했다.

"석 달 동안 TV 150대하고 PC 30대를 팔았어."

"그거 좋은 실적입니까?"

"그때는 A급이었지 다른 사람은 백 대도 팔지 못했으니까 물론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고영무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룹은 신입사원의 적극적인 자세를 고양시키고 해외시장에 대한 견문과 정보를 습득시키려는 의도로 신입사원들을 외국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른바 개척 요원이다. 개척 요원들은 매달 본사로부터 숙박비와 활동비만을 지급 받고 제품을 판매해야만 했다. 해당 지역의 일성그룹 지사는 제품의 입출고를 맡아 주고 필요한 정보만을 줄 뿐 더 이상의 도움은 없다.

"석 달이라면, 빨리 끝내신 셈이군요. 어떤 사람은 일 년을 있었다는데."

고영무의 말에 김진섭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고영무씨는 잘할 거야, 체력이 좋으니까. 나가면 제일 중요한 것이 체력이야, 몸을 움직여야 하니까."

체력이라면 자신이 있다. 185센티미터의 신장에 95킬로그램의 거구였고 군대 시절에는 격투기의 교관 노릇도 한 몸이다. 앞쪽에 회사 빌딩이 보였다. 28층짜리 거대한 건물의 유리창에 아침 햇살이 반사되고 있다. 고영무는 저도 모르게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이곳에서의 자신은 아직 샛노란 병아리인 것이다

상품3과는 과장인 이태규와 두 명의 대리가 있고 사원들은 여직원까지 모두 열네 명이었다. 그중에서 신입사원은 고영무와 박정환, 김강섭, 그리고 여직원인 이자영이다. 열 명의 사원 중 남자는 일곱 명, 여자는 세 명이었는데 작년에 입사한 2년 차가 세 명, 3년 차가 네 명, 그리고 4년 차가 세 명이다. 그렇다고 2년 차가 호락호락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3년 차나 4년 차보다 더 시어미 노릇을 하고 텃세를 부리는 축도 있었다. 고영무가 문 쪽에 있는 자신의 책상에 앉자 옆자리의 이자영이 책상에서 머리를 들었다.

"고형, 오전에 공장 갈 거야?"

"봐서 조대리가 가라면 가야지."

"갈 때 나하구 같이 가. 양대리가 나한테 시제품 뽑아 오라구 했어."

이자영의 직속상관인 양기식은 고영무의 상관인 조정수와 라이벌 관계이다. 이태규 과장이 부장 진급을 앞두고 있어서 둘 사이에는 눈에 띄는 경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장에서 이번에 새로 개발된 탁상용 T.VTB -52형의 판매에 두 대리는 살벌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겠어. 한쪽이 무슨 일을 하면 다른 쪽은 가만히 있지를 못해."

소곤거리듯 그녀가 다시 말했다.

"고래는 무슨‥‥‥‥"

고영무는 머리를 돌렸다. 재학 중에 군대에 갔다 온 관계로 똑같이 입사한 동기지만 이자영과는 우선 3년의 차이가 있다. 거기에다 대학을 1년 재수해서 들어갔으므로 나이로 치면 네 살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스물셋짜리가 스물일곱 살 난 자신에게 입사 동기랍시고 언제나 반말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 고영무씨, 어제 기안해 보라고 한 것, 다 했어요?"

2년 차인 장용구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와는 나이가 동갑이다. 장용구는 재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아직, 지금 하겠습니다."

"빨리 해요, 내가 봐줄 테니까."

장용구가 이자영을 바라보았다.

"이자영씨, 바빠요?"

", 바빠서 정신없어요."

이자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이 보였다.

"바쁠수록 천천히 해요."

", 선배님."

그가 돌아서자 이자영의 시선이 고영무와 마주쳤다. 그녀가 입술을 슬쩍 삐죽해 보였으나 고영무는 머리를 돌렸다. 눈치 빠르고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는 이자영이었다. 성격이 밝고 활발하기도 했으므로 과장도 눈여겨보고 있는 눈치였다. 사무실은 활기에 차 있었다. 툭 터진 공간에 상품1부에서 5부까지와 관련 부서까지 2백 명 가까운 직원이 모여 있는 것이다. 고영무는 장용구가 지시한 보고서를 써 내려갔다. 그는 장용구가 자신의 행동이 더디다고 다른 팅의 직원에게 불평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런 놈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 놈에게도 나름대로 친해지는 방법 이 있을 것이다. 이태규가 손에 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앞쪽에 앉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신입사원이었을 때는 지금처럼 신입사원 연수 교육이라든가 개척 요원 파견 같은 것도 없었어. 그저 선배들 뒤만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지. 어쩌다가 눈먼 일이라도 넘겨져 오면 신바람이 났지, 흥분했었다구."

그는 옛날을 생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들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단 말이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일에 대한 정열과 패기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목표와 성취감이네. 이해가 가는가?"

",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영무의 왼쪽에 앉은 박정환이 선뜻 대답했다. 오른쪽의 김강섭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고 있다.

"나는 능력은 모두 비슷하다고 믿는 사람이야.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일하는 자세야- 회사가 바라는 것은 성실한 사람이지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야."

고영무는 잠자코 자신의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틀린 점은 하나도 없다. 교훈이 될 만한 선배의 말이었다.

"내가 한 가지 묻겠는데, 여담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해. 될 수 있는 한 솔직하게 말이야."

이태규가 그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오후 두 시가 가까운 나른한 시간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한 시간씩 신입사원들은 과장인 이태규로부터 업무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한 달째 받아 오던 매일 한 시간의 교육도 오늘로서 끝이 난다. 좀처럼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던 이태규도 교육을 마치는 날이라 다소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고영무는 다른 세 명의 신입사원들과 함께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만일에 말이야. 물론 이런 일은 있으떤 안 되겠지만‥‥‥‥"

이태규가 얼굴에 웃음을 띄웠으나 듣는 쪽은 긴장을 풀지 않는다.

"상사가 또는 선배가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켰을 때, 업무시간에 말이야, 그런 때는 어떻게 하겠나?"

이태규가 테이블의 한쪽 끝에 앉은 박정환을 바라보았다

"박정환씨, 말해보게, 허심탄회하게."

", 상사라면 대개 어떤 직급인지 그걸 알려 주실 수 없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박정환의 말에 이태규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자네 대답은 대강 짐작이 가는데, 그래, 예를 들어서 내가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켰다고 하지. , 어떻게 하겠나? 일을 하고 있는 자네가 말이야."

"일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해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너무 원칙만을 따지면 삭막해집니다."

"."

웃는 얼굴로 두어 번 머리를 끄덕이던 이태규가 고영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영무씨, 자네는 어때?"

"저는‥‥‥‥

고영무가 옆에 앉은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과장님이 만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이 사람아. 만에 하나 생겼다 하고 말해봐."

"저는 안 할 것 같습니다. 그때 가서 봐야 알겠지만."

"이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내가 망신을 당할 참이로군."

이태규가 다시 웃었으나 그들은 따라 웃지 않았다.

"자네는 어때?"

김강섭을 향해 묻자 그가 힐끗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는 박정환씨 생각과 같습니다."

"그래? 이자영씨는?"

홍일점인 이자영은 이미 대답을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그를 향해 웃음을 띄워 보인 그녀가 대답했다.

"해드리겠어요. 아무래도 그때의 과장님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조금 고달프더라도 하겠습니다. 회사가 가족 집단이라는 사훈도 있다시피 형이나 오빠처럼 생각하면 거부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명답이군. 대단해."

이태규가 만족한 듯 그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답들이 모두 나왔어."

"과장님, 혹시 인사고과에 오늘 이야기를 참고로 하실 것은 아니지요?"

박정환이 웃으며 물었다.

"이 사람아, 무슨 주제로 쓴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밝은 얼굴로 이태규가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것으로 교육을 끝내세."

"수고하셨어요, 과장님."

이자영이 그들을 대표한 듯 머리를 숙여 보였다.

", 너 왜 그래? 강섭이처럼 나하구 같은 생각입니다, 하면 될 것을."

이태규가 회의실을 나서자 박정환이 고영무에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인공을 이과장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심부름을 안 한다고 해버리다니."

"나는 진담이야. 속으로는 하기 싫은 일 겉으로 웃으면서 해주기 싫다. 마침 여담이라면서 물어 봐주었길래 말한 것인데‥‥‥‥"

고영무의 얼굴을 바라보던 박정환이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저었다.

"남이 들으면 한 차원 높은 점수 따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수작으로 말이야."

머리를 돌리던 고영무가 이자영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의 시선을 잡은 이자영이 천천히 머리를 젓더니 입을 열었다.

"엊그제 보니까 이과장이 접대비 타가지고 나가서 오부장의 밀린 외상값을 갚아 주던데. 오부장이 시키지도 않은 일이었어."

모두들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 특히 부하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신경을 세우고 있을 거야."

"과장이 어디 이태규 과장 하나뿐인가?"

고영무가 그의 말을 잘랐다.

"배울 게 따로 있지. 무조건 따라서 하란 말이야?"

이자영이 웃는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사원이시군."

김강섭과 박정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커피나 한잔하지."

박정환이 말하자 이자영이 턱으로 김강섭을 가리켰다.

"어제는 내가 가져왔으니까 오늘은 김강섭씨가 가져와."

"내가 가지."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할 필요 없어.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관두는 거지, 이렇게."

그가 성큼거리며 회의실을 나가자 박정환이 입맛을 다셨다.

"저 자식, 찍혔어."

"? ? 아까 이과장한테?"

김강섭이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자영은 볼펜을 주먹 위에서 템글템글 돌리고 있다.

"아냐, 아무래도 과장이 우리 조대리나 장용구한테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한 거라구."

"무슨 이야긴데?"

"장용구가 고영무를 데리고 있기 힘들다고 조대리한테 말하는 모양이야."

이제는 이자영이 상체를 기울이며 박정환을 바라보았다. 장용구는 2년 차로 고영무의 직속 선배지만 나이는 같다. 이자영과 김강섭은 양기식 대리의 팀이므로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었다.

"장용구가 언젠가 심부름을 시켰어. 아래층 식당에 가방을 맡겨 놓았는데 내려가는 길에 가져다 달라고. 그런데 고영무가 거절했어."

"젠장, 내려가는 길에 가져다주면 어때서? 저 자식은 군대생 활을 3년 꼬박했다면서, 그것도 교관으로."

"내려갈 일이 없었거든. 장용구는 고영무가 밋밋하니까 길들이려고 그랬던 모양이야."

"저놈은 사귀기가 힘이 들어. 하지만 방법이 있지. 난 요즘 알았지만."

"뭔데?"

김강섭이 다시 물었다.

"밋밋한 놈한테는 기가 죽지 않지만 내가 무슨 부탁을 하거나 사정을 하면 두 팔을 걷어붙인단 말이야."

", 고영무한테 돈 자주 빌리지?"

문이 열리며 고영무가 쟁반 위에 커피잔을 들고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제각기 머리를 돌렸다.

공장행 버스는 본사에서 두 시간 간격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수원에 있는 공장까지는 국도를 이용하므로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고영무는 버스의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각기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월 그렇게 보고 있어?" '

이자영이 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고영무씨는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이 아닌가 봐."

고영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짧게 자른 머리칼 때문인지 목의 부드러운 선이 보였다. 밝은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시선은 곧장 이쪽으로 향한 채 흔들리지 않는다. 도톰한 입술은 꼭 닫혀 있었다.

"어울리다니? 어떻게?"

고영무가 겨우 그렇게 묻자 이자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항상 선배들한테서 떨어져 있지? 윗사람들한테서 말이야."

"떨어져 있다니?"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 주어야 돼."

고영무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굳어졌다. 그녀는 입사 동기로서 충고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선배들이 고영무씨를 어렵게 생각하면 회사생활 힘들어져."

"난 그런 적 없는데."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봐."

고영무는 머리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윗사람한테 손바닥이나 비벼대는 2년 차나 3년 차들과 어울렸던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정환이나 김강섭은 선배들을 모시고 여러 차례 술자리를 같이했다지만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

"이제 곧 개척 요원으로 떠나게 돼 좋은 데로 배치받으려면 점수를 많이 따야지. 안 그래?"

고영무가 머리를 돌렸다.

"좋은 곳에 가려면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이야?"

이자영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윗사람한테 잘 보여서 인사고과 점수가 좋은 사원을 전쟁하는 나라나 상황이 좋지 않은 곳에 보내겠어?"

"난 남한테 뒤떨어지는 것이 싫어 상대방이 여자건 남자건."

"사람들은 어떻게든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어. 안 그래?"

"그거야‥‥‥‥"

입맛을 다신 고영무는 다시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녀가 입사성적도 우수했다는 이야기를 박정환한테서 들었다. 재치 있고 활달한 이자영은 7층의 상품본부에서 제일 인기가 있는 여사원일 것이다. 버스는 영등포의 교차로에서 한동안 멈추어 있다가 덜컹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영무씨는 나한테 거부감을 느껴?"

이자영이 다시 물었다. 그녀의 어깨와 팔이 자신의 몸에 닿아 있었고 옅은 화장 냄새도 풍겨 오고 있다.

"그러고 보면 조금‥‥‥‥"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영무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난 널 여자로만 느꼈지 경쟁 상대나 또는 친구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띄엄띄엄 말하는 고영무의 얼굴을 이자영이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너하고 나는 네 살 차이가 나는데도 입사 동기가 되어서 너한테 반말을 듣는 것도 어색하고. 너한테 이런 충고, 고맙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말이 안 나오고 오히려 부끄럽고 화가 나기만 해서. 그리고 그 선배 놈들이라는 것들도 그렇지, 저희들한테 알랑거리지 않는다고 이상한 이야기나 하고." 이자영이 머리를 저었다.

"고영무씨 직장 생활하기 힘들겠어,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예를 들어 고영무씨보다 나이 적은 사람이 상관이 되면 배겨나지 못하겠네. 참 답답한 사람이야."

힐끗 이자영을 바라본 고영무가 다시 머리를 돌렸다. 이자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불쾌해, 날 여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둥 그런 얘기. 고영무씨한테는 여자란 남자의 종속물이고 성의 상대이고, 그런 사고밖에 없지? 난 고영무씨를 남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어쩌지? 입사 동기일 뿐인데. 그것도‥‥‥‥ 기껏 생각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나이 위세나 하고. 누가 군대 갔다 오라고 했어? 남들처럼 일 년 방위로 때우든지, 아니면 아예 안 가는 사람도 많던데."

"그만두지. 말해 보았자 쓸데없는 소리가 될 텐데."

이자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영무는 스쳐 지나가는 건물과 사람들을 바라본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는 이제 시외로 향하는 넓은 길로 들어서서 속력을 내었다. 고영무는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라이터를 켰다. 길게 한 모금을 내뱉자 누군가가 어깨를 했다.

"금연이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삼십 대 중반의 사내였다. 회사 직원일 것이고 나이로 보면 과장급의 사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 잊었습니다."

고영무는 서둘러 담배를 껐다.

"그럴 수도 있지."

사내는 딱딱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고영무의 시선이 뒤쪽에 앉아 있는 이자영의 얼굴을 스쳤다. 여직원 한 명과 함께 앉아 있던 그녀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머리를 돌렸다.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결재서류를 받으면서 조정수 대리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컨디션 이상 없습니다."

고영무가 머리를 젓자 조정수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런 얼굴이 아닌데 그래,"

"공장에 다녀와서 즘 피곤해 보이는 모양이지요."

조정수는 마지못한 척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서른네 살로 입사 7년 차이고 대리 3년을 달고 있으므로 내년이면 과장 진급 서열이 된다. 양기식 대리와 서열이 똑같으나 그가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것이다.

"기운 내, 고영무씨가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올 거야."

조정수가 서류를 넘겨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 회사도 연공 서열이나 근태성적, 또는 상급자의 인사고과에 의해 좌우되던 진급의 벽을 깰 때가 되었어.“

그것은 신입사원 연수 교육 때도 들었던 소리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무디어져 간다. 연공의 벽은 갈수록 두껍게 보이는 것이다. 고영무는 책상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으므로 사무실은 외출했다가 귀사한 직원들로 소란스러웠다. 박정환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짚었다

"다행히 오늘은 야근도 없고, 윗놈이 한잔하자는 이야기도 없어. 어때? 우리끼리?"

"저녁에 약속이 있어, 집안일로."

"허어."

박정환이 입을 벌리면서 턱을 들었다

"회사에서 집안일을 이야기하다니, 아직 군기가 덜 잡혔구만."

고영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개인 사정으로 일과 후에 빠져나간 적이 없는 것이다. 과장은 자리에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담당 대리인 조정수는 옆쪽의 상품 3과장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었으므로 뒤쪽에 앉아 있던 과장급 중에는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도 보였다.

"이자영은 개척 요원에서 빠질 것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냥 눌러있는 모양이야."

의자를 끌어당겨 옆쪽에 붙어 앉은 박정환이 소리죽여 말했다.

"그 기집애, 보통이 아냐. 어떻게 손을 썼는지 부회장 비서실로 옮길 모양이야."

고영무가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부회장 비서실로?"

", 입사성적도 상위권인데다 대리하고 이과장이 추천했다고 하더구만. , 우리 동기 중 1등으로 입사해서 비서실에 들어간 놈 있지? 김오택이, 그놈한테 들었어, "

"빌어먹을, 우린 어디로 떨어질지 눈앞이 캄캄한데 저년은 부회장 비서실로 가다니."

박정환이 힐끗 옆쪽의 책상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이자영의 책상은 비어 있었다. 그는 고영무보다 한 살 어린 스물여섯이지만 성격이 밝고 활발해서 그를 대하면 부담이 없다. 그는 다소 둔한 것같이 보이는 고영무에게 회사의 바닥 정보를 자주 알려주고 있었다.

 

", 너 미쳤어? 유사장은 우리 선배의 션배의 선배보다도 위에 있는 사람이야.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하필 그 사람한테 간단 말이냐?"

최대광이 펄쩍 뛰듯이 놀라 말했다.

"난 못해, 너 혼자서 할 테면 해봐."

그리고는 돌아앉아 버렀으므로 신용만은 입맛을 다시면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밖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조무래기들의 소리였다. 지금이 오전 열한 시이니까 오후 서너 시가 되어야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임마, 사람이 욕심을 너무 부리면 못 쓰는 법이여. 그걸 명심혀,"

잡지를 뒤적거리던 최대광이 마침내 잡지를 방구석으로 던지면서 말했다.

"우리가 뭐가 부족혀 가끔가다 오종문이한테서 일거리를 받고, 용돈 모자라지 않겠다, 배불리 먹고 잠잘 집 있겠다, 대주는 여자 있겠다"

"돼지 같은 놈."

신용만이 불쑥 말을 뱉었으므로 최대광은 눈을 껌벅이며 말을 멈추었다.

"너 같은 생활은 돼지가 먹고 자고 돈 받고 교미하는 것하고 똑같다. 어쩌면 생긴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돼지하고 똑같냐?"

"이런 빌어먹을 놈이."

최대광이 눈을 부릅딘다. 꾹 다문 입술이 부풀어 있는 것이 단단히 열이 받힌 모양이었다.

"내가 돼지면 너는 똥개 새끼다, 이 자식아. 아무것이나 주워 먹고, 아무한테나 꼬랑지를 치고."

", 너는 양사장한테 한 달에 5백 정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마 그럴 거다. 조금 있으면 네놈이 임신했다면서 양사장한테 손 내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뭣여?"

이맛살을 찌푸린 최대광이 턱을 내밀고 신용만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여? 내가 임신을 허다니?"

"언뜻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다. 양사장이 너를 들어앉힌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래서."

"이런 씨발놈이."

"흐흐흐‥‥‥‥

제 말을 되씹어 생각하던 신용만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최대광이 물끄러미 그를 건너다보았다. 불문곡직하고 한 방을 날릴 표정 같기도 했고 어쩌면 생각에 잠긴 얼굴같이도 보였다.

"돈벌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가지. 너도 요즘 느껴 봐서 알 거라."

웃음을 거둔 신용만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사채업자를 털거나 밀린 월부 값 받아 주는 일로는 평생 가야 얼굴 내밀고 살 수가 없어 임마. 그러고 네가 좋아하는 그 일, 몸 팔아서 돈 버는 일, 오래 갈 것 같으냐?"

"몸 팔다니? 내가 무슨."

냉큼 말꼬리를 잡았으나 최대광은 길게 말을 잇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신용만한테는 말발이 먹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큰돈 만지는 기회가 자주 있을 것 같으냐? 사채업자 두들기고 잘못 걸리면 너나 나나 꼬박 10년은 살고 나와야 돼. 다른 일도 마찬가지야,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 못 들었어? 10년쯤 살고 나와 봐라, 네 가운및다리 힘이 남아 있을 것 같냐? 나도 지금처럼 몸이 통통 필 것 같고? 천만에 말씀이야, 그때 우리는 깡통 차야 돼."

"이 자식이 갑자기 약 먹은 모양이네."

"유장수 돈은 떳떳하게 받아낼 수 있는 돈이란 말이다. 그놈은 약한 사람의 등을 친 놈이야. 내가 돈 빌려준 사람을 만나 보았는데 15천에서 5천만 받아도 한이 없겠다는 거다. 우리는 1억을 챙길 수가 있단 말이야."

"1억 가지고 땅속으로 가, 임마. 둬지면 1억이건 10억이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비겁한 놈, 나는 너를 그렇게 안 보았는데 배짱도 없고, 희망도 없고"

신용만은 말을 마치지 못했는데 그것은 최대광이 불쪽 손을 뻗쳐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이 씨발놈을 그냥!"

신용만의 몸이 방바닥에서 5센티쯤 떠올라서 흔들거렸다.

"참자 참자 했더니만 이놈의 시키가!"

눈을 부릅뜬 최대광이 잇사이로 으르릉거렸다.

"돼지 같은 놈,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구만. 열을 받는 걸 보니까."

신용만이 흔들거리는 와중에도 그렇게 말을 뱉자 최대광은 끙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를 내려놓았다. 한동안 방안은 최대광의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밖에서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에 엄마인 듯한 여자의 밝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들은 그 소리에 집중한 듯 귀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철제 대문은 단단히 닫혀져 있었지만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은 열려 있었다. 일하는 아줌마가 심부름을 다녀오는 모양인 남자들이 심심치 않게 쪽문을 드나들고 있다. 저택은 담장이 높아서 도대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없었다. 2층의 창문이 저만큼 있는 것으로 보아 대물에서 건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신용만은 담장 위의 감시용 카메라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몸을 돌렸다. 감시용 카메라는 이쪽의 가게를 비추고 있을 것이다. 가게 안쪽의 냉장고 옆에 선 최대광은 우물거리며 합을 세고 있었다.

"엄청나다. 안 그러냐?"

침을 삼킨 그가 앞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몇 억 가겠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신용만이 그를 바라보았다. 몇십 억이 넘을 것이다. 이쪽은 땅 한 평에 15백만 원이다. 실제로 팔린다면 2천만 원이 넘는 지역이었다.

"쪽문으로 들어가면 되겠구만. 안 그러냐?"

다가온 최대광이 말했다. 아직도 한 손에는 먹다 만 카스텔라가 들려 있다.

"클럽에서 심부름 온 것처럼 하고 쪽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는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거지. 그런 다음에 안에 있는 연놈들을 몽땅 묶어놓고."

일을 하기로 작정하고 나자 최대광은 몸살을 앓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활기를 띠었는데 오히려 신용만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단순한 성격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번 일이 끝나면 5천을 챙겨서 먼 곳으로 떠난다고 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유장수의 패거리들이 당장에 들이 내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몸을 돌린 최대광은 냉장고에서 콜라 한 병을 꺼내어 들었다.

", 들어가기는 쉽단 말이다. 나을 때만 걱정하면 돼."

가게에서는 채소와 과일 종류도 팔고 있어서 부근에 사는 여자들이 쉴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신용만은 길 건너의 유장수 집에서도 이 집과 거래하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아주머니, 앞집에 과일을 가져가려는데, 글쎄 식구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묻자 뚱뚱한 주안 여자가 허리를 폈다.

"왜요? 식구 수에 맞춰서 과일 사시게?"

별일을 다 보았다는 얼굴로 웃는다.

"집에 사는 사람만 열 명이 넘을걸요? 가만있자‥‥‥‥"

아주머니는 손가락을 좌악 졌다.

"주인 부부에다가, 할머니, 가정부 아줌마, 심부름하는 미옥이, 그리고 저 집 자제가 두 명, 한 명은 미국 유학을 갔으니까‥‥‥‥"

펴졌던 손가락이 오므라졌다가 다시 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운전사 김씨, 바깥채에서 먹고 자는 청년이 서너 명, 그쪽에서 일하는 아줌마‥‥‥‥"

양손에 먹을 것을 든 최대광이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모르겠어, 수시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깐. 댁들도 저 집 회사에서 일하슈?"

머리를 젓던 아줌마가 물었다.

", 일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들어가서 바깥채 사람들한테 물어요, 그럼,"

"젠장, 우리 둘 가지고는 어렵겠어. 집으로 쳐들어갔다가는 시끄럽기만 하고 일이 안 될 거야."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최대광이 말했다. 유장수의 집은 도로에서 2백 미터쯤 떨어진 주택가에 있었는데 차 두 대가 겨우 비껴 지날 수 있는 길이 뻗쳐져 있다.

"클럽에서 할 수도 없고, 그랬다가는 아마 칼침을 백번은 맞을 거다."

최대광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잠자코 걷고 있는 신용만에게 머리를 돌렸다.

"야 임마, 너는 나보다 머리가 좋다면서? 머리를 짜보란 말이다."

"지금 생각하고 있어."

"그럼 말해봐."

"조용히 해, 임마."

신용만은 짜증을 내었다. 입맛을 다신 최대광은 머리를 돌렸다. 오후의 햇살이 제법 따갑게 그들의 어깨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술집 안은 자욱한 연기에 덮여 있었다. 박정환은 소주잔을 비우고 나서 김강섭에게 내밀었다.

", 잔 받아. 이렇게 삼겹살에 소주 마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젠장, 스테이크에 소주 먹으면 어때서? 소주 없으면 양주도 좋지."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김강섭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도무지 어디로 떨어지는 줄이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건 알아서 뭘 해? 괜히 마음만 상하지."

이자영의 말에 박정환과 김강섭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럼, 이자영씨는 아무렇지도 않아?"

소주잔을 내려놓은 박정환이 물었다.

"그저 그래, 발령이 나면 따를밖에."

"작년에 2과의 직원 하나는 나이지리아에 떨어졌다가 강도를 만났다더군. 그리고 1과 여직원은 도쿄에 가게 되었는데 한 달 만에 사표를 내버렸다는 거야."

"나도 들었어. 그 사람, 도쿄 같은 곳에서 사표를 내다니, 잘 그만두었지."

이자영은 잔을 들고는 한 모금 술을 삼켰다. 양쪽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여자 때문에 1과 과장님이 사유서를 써냈다고 해. 웃기는 여자야."

"웃기는 여자라니?"

김강섭이 이자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회사 그만두는 것이 뭘 웃겨?"

"도쿄에서 회사에 전화를 해서 울고불고 했다고 그래. 그리고는 귀국해서 회사에도 나오지 않았어."

"한 달 동안에 TV 2대 팔았다는군. 그것도 오사카에 있는 아는 사람한테."

"이봐, 이자영씨. 남의 일 말하기는 쉬운데, 이제 곧 우리가 당할 일이야."

김강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6개월 기한으로 한다던데, 그래서 그동안의 실적으로 평가를 한다던데 어때?"

박정환이 이자영을 바라보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작년처럼 지역별로 목표량을 정해주고 목표 달성한 사람은 5개월 만에 귀국시킬지."

이자영은 빈 잔을 박정환에게 건네주었다.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대학 다닐 때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한 학생들, 그 사람들한테는 형이라고 했지? 여학생들이 말이야."

"그건 그렇지, 나에게도 같은 과 여학생들이 그렇게 불러주더군."

박정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강섭은 ROTC였으므로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지금 내가 박정환씨나 김강섭씨한테 형이라고 하면 듣기 괜찮겠어?"

"아아, 젠장 형은 무슨 얼어 죽을. 똑같은 들짜 신세에."

김강섭이 손을 저었다. 소주를 세 병째 마시고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박정환이 안주를 씹으면서 물었다.

"아니, 그냥."

"? 우리한테 말놓는 것이 미안해서? , 이자영이 갑자기 사람되었는데."

"웃기지 마라. 우리한테는 형이라고 하고 2년 차 새끼들한테는 선배님이라고 하면 이자영이가 무슨 낙으로 살겠어? 군대 안 간 것이 무슨 죄냐고 당장에 회장실에 뛰어갈 여자야, 이 여자는."

김강섭이 붉어진 얼굴로 이자영을 바라보았다. 이자영이 활짝 웃었다.

"역시 자네들은 말이 통해, "

"이봐, 자네란 말만은 빼자. 그건 남자끼리나 쓰는 말이란 말이다."

김강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다행이야, 이자영이 하고 업무를 같이 하지 않아서."

술잔에 술을 채우며 박정환이 말했다.

", 여자로서는 어때? 매력이?"

이자영이 상체를 세웠다. 머리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인 모습이었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루주를 칠하지 않은 입술에는 붉은 윤기가 흐른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박정환이 길게 한숨을 쉬면서 김강섭을 바라보았다.

"그래, 섹시하다, 그 말 듣고 싶었겠지."

김강섭이 덕을 들며 말했다.

", 건방진 말버릇만 빼면 점수를 더 줄 텐데."

"건방지다니? 김강섭씨 또 그럴 거야? 도대체 몇 번 얘기해야 알아들어? 그런 선입견 버리라구."

"젠장."

같은 업무를 하고 있어서 그들은 번번이 툭탁거린다. 김강섭은 머리를 돌리고는 술잔을 쥐었다.

"나도 똑같은 시험문제를 풀고 입사한 사람이란 말이야. 업무도 같고. 내가 여자라고 해서 특전 받는 게 있어? 내가 여자라고 뒤떨어진 것 있어?"

"젠장."

이번에는 박정환이 입맛을 W.

"그래, 누가 뭐래? 너 잘난 줄 알아."

"다른 것 있으면 말해봐."

이자영이 틱을 쳐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박정환이 머리를 들었다.

"있지."

"뭔데?"

"넌 앉아서 일보고 우리는 서서 갈기는 것."

"그래, 잘났다."

"너도 서서 갈겨 봐."

"시끄러, 유치하게."

눈을 흘긴 이자영은 박정환의 빈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익숙한 태도였다.

 

이자영이 다가오자 이태규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옆에 앉은 상품 2과의 김진섭 대리가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말씀하신 자료를 뽑아 왔습니다."

탁자 위에, 서류를 내려놓은 이자영이 조심스럽게 그의 앞쪽 의자에 앉았다. 서류를 집어 든 이태규는 잠자코 한 장씩 넘겨보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자영씨, 요즘 바쁘더군. 옆에서 보니까."

김진섭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과장님의 칭찬이 대단해."

이자영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자코 시선을 내렸다.

"됐어, 수고했어."

서류를 덮은 이태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자영씨는 석 달밖에 안 되었는데 업무 요령을 익혀 버린 것 같구만."

"감사합니다."

이자영이 환한 웃음을 띠우며 머리를 숙였다.

"저 애,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군요. 과장님의 비위를 척척 맞추는 걸 보면."

이자영이 자리로 돌아간 후에 김진섭이 말했다.

"소문으로는 저 애는 개척 요원으로 빠지지 않고 비서실로 올라간다던데. 부회장실이라던가?"

"글쎄 ."

이태규는·이자영이 툴고 간 서류를 들쳐 보면서 머리를 들지 않았다.

"글쎄라니요? 과장님이 모르시면 누가 압니까? 비서실로 간다면 소속 부서장인 과장님의 추천서가 필수적인데."

"위에서 오더가 내려오는 경우도 있어. 입사성적이니 그런 걸 봐 가지고. 더구나 이자영이는 입사성적이 최우등이야."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

김진섭이 이자영의 책상 쪽으로 사선을 주었다. 그녀와 옆자리에 앉아 있는 고영무가 보였다.

"고영무는 어때요? 일 잘해요?"

이태규가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왜 갑자기 고영무는?"

"그냥 궁금해서요."

이태규와 김진섭은 이태규가 상품 3과장이 되기 전에 상품 2과에서 3년 동안이나 같은 팀으로 일해 온 관계였다. 서로의 약점이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친하다고 볼 수 있었다.

"조금 문제가 있어."

이태규가 입맛을 다셨다.

"문제라니요? 애가 진득하지 않습니까?"

"행동이 느려, 재빠르지 못하고. 그리고 윗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한 것 같아. 이자영이 하고는 대조적이지, "

"어제 아침에 양대리한테서 들었는데 고영무가 이자영한테 반말을 한다고 뭐라고 했다는 거야. 그놈은 그런 성격이라구."

이태규가 풀색 웃었다.

"또 이것저것 불평불만을 쏟아놓은 모양인데 이자영이가 자리 좀 바꿔달라고 했다는군. 얼마 후에는 여기를 떠날 테니까 내버려 두었지만."

"하긴 나이 차가 꽤 나는데 입사 동기라고 여자가 반말로 지껄이면 자존심 상하겠지요."

", 그런다고 싸잡아서 조직에 대한 불평을 하면 돼?"

이태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놈은 제 바로 선배인 장용구의 지시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고 그래. 조대리가 시켜야 꾸물꾸물하는 시늉을 하고, 이제는 입사 동기하고까지."

"다른 동기들, 이를테면 남자들하고는 어떻습니까?"

"난 바쁜 사람이야. 신입사원 한 놈 뒤만 따라다닐 수가 없다구. 적응하지 못하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

김진섭은 입맛을 다시고는 한동안 딴전을 피웠다. 이태규는 겉으로는 호탕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가 않다. 꼼꼼하고 소극적인 사람이다. 엄격하게 위아래를 가리면서 불평하는 사람을 보면 곁에 두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고영무가 조직에 대해서 불평했다는 사실이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겁에 질린 장용구가 이젠 터져라고 비명을 질러대었다

"이 자식아, 여기는 네 어리광 들어줄 놈도 없어."

고영무는 그의 목덜미와 허리춤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불끈 들어 올렸다. 장용구의 몸이 배꼽 부근까지 들어 올려졌다. 고영무는 ''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튕기면서 역도의 인상 선수처럼 장용구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아이고오!"

장용구가 28층의 옥상에서 한층 더 높게 띠 있었다. 그의 비명 소리가 하늘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사람 살려."

그는 떨어질 장소가 두려운 모양이었다. 고영무가 조금만 몸을 틀던 아래쪽은 28층 아래였다. 그는 온몸이 굳은 듯 발버둥도 치지 않았다.

"고형, 고형, 살려줘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장용구가 말했다.

"고형, 제발, 나는 고소공포증이 ‥‥‥‥"

고영무는 그를 헬리콥터 착륙장에 내려놓았다. 아마 회사에서 헬기 착륙장에 착륙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 될 것이다. 어쨌든 착륙은 착륙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아침 시간에는 거래선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많다. 대부분의 전화가 생산에 관계된 것이어서 서류를 펼쳐놓고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에 대비해야 했다. 고영무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고영무씨, 나야, 김대리."

"아아 네, 김대리님."

머리를 돌려 우측 후방에 있는 그의 책상을 돌아보았으나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 아래층 커피숍에 내려와 있는데, 자네 잠깐만 내려와. 이야기할 것이 있어."

", 알았습니다."

"옆 사람들한테 나 만나러 간다고 하지 말어, 알아듣겠나?"

고영무 힐끗 옆쪽 책상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를 쓰면서 이자영은 전화를 받고 있었다. 회사 빌딩의 아래층은 은행과 여행사, 커피숍이 모여 있어서 사람들로 혼잡했다. 고영무가 다방으로 들어서자 문 옆자리에 앉아 커피잔을 쥐고 있던 김진섭이 한 손을 들었다.

"어서 와, 커피 한잔해."

그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앞으로는 바빠질 것 같아서 말이야."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난 김진섭은 한동안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아침 시간이어서 커피습은 한산했다. 종업원 한 명이 물걸레로 안쪽을 닦고 있었다.

"고영무씨는 상품부에 있는 유일한 내 대학 동문인데."

김진섭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네한테 관심이 많았어. 학교 동문 관계도 있어서 신경도 쓰였고."

"자네가 다니던 경제학과에 아는 교수가 있지. 그분한테 자네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성실한 학생이었다고 하더군. 리더십이 강하고. 김재권 교수, 알지?"

", 압니다."

일성그룹에 입사할 적에 추천장을 써준 교수였다.

"그 양반은 자네가 직장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계셨어."

"이제 곧 개척 요원으로 나가게 되는데, 자네 동료 직원들하고 융화가 잘 안 되나?"

아마 이 문제가 핵심인 모양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김진섭의 얼굴에서 고영무는 시선을 떼었다.

"직장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곳이야. 윗사람들한테서 불신임을 받는다면 곤란해. 그것이 생명이나 마찬가지인데."

"저는 잘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도무지."

"입사 동기들하고도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났던데."

고영무가 머리를 들었다.

"그건 이해가 안 가는데요. 저희과 동기들하고는 친합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입맛을 다신 김진섭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가 잔을 내려다보더니 내려놓았다.

"이자영이가 자네하고 나란히 앉아 있기 싫다고 자리를 바꿔 달라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 있나?"

고영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다니요? 도무지 저는‥‥‥‥"

며칠 전에 버스에서 말다툼한 일은 문제라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일 이후에도 서로가 할 이야기가 있으면 했고 그녀의 태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알아보았는데, 자네에 대한 소문은 대개가 이자영이한테서 나오고 있어. 자네가 윗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다는 것도 걔를 통해서 이과장한테 들어가 있네."

"이자영이가 양대리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야. 장용구도 자네하고는 일을 같이 못하겠다고 했다는군."

"회사에는 비밀이란 것이 없어, 그리고 비정한 곳이야. 어떤 사람이 역경에 처해 있다든가, 또는 눈에 띄는 과오를 저질렀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고영무는 잠자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용기를 북돋워 줄 친구를 회사에서 찾기는 힘들다네. 모두 치열한 경쟁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 사람의 업무와 연관이 없는 부서의 친구가 나서서 위로해 주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도움인 안되네. 그저 일시적으로 마음만 편하게 해줄 수는 있겠지."

"이자영이 자네와 책상을 나란히 않기 싫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라. 자네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제스처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김진섭은 히죽 웃었다.

"영리한 애야. 그놈은 자네가 코너로 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 그리고 그 분위기를 타고 자신을 내보이는 거야. 출세할 거야, 그놈은."

"대리님, 어쨌든 고맙습니다."

탁자 위를 내려다보면서 고영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어깨를 낮게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으므로 거북이 목을 뽑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대리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신세는 잊지 않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이맛살을 찌푸린 김진섭이 머리를 저었다.

"내가 금방 말했지 않는가? 다른 부서 사람의 이야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내가 도와줄 일은 이런 이야기뿐이야. 헤쳐나갈 사람은 자네 혼자이고."

", 뭔 놈이 뭐라고 해도 저는."

"첫째, 바로 윗사람과 잘 사귀어야 돼. 장용구 같은, "

"."

"그럼 나는 이만 올라가야겠어. 내가 찻값 내겠네."

자리에서 일어서며 김진섭이 말했다. 먼저 찻값을 내겠다는 것은 고영무더러 조금 있다가 나오라는 말이다. 고영무는 한동안 우두커니 빈 커피습에 앉아 있었다. 걸레로 바닥을 문지르던 종업원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초조해하던 고영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열한 시 가깝게 되었으므로 아파트의 주차장에는 승용차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자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어두운 주차장의 앞쪽을 지났다. 박정환과 김강섭은 지금쯤 포장마차에서 2차를 하고 있을 것이다. 달아오른 얼굴에 밤바람이 기분 좋게 와닿았다. 비가 내릴 듯이 습기를 떤 서늘한 바람이었다. 이자영은 이마 위로 흘러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어이, 이자영씨 ."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이자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주차장의 나무 그늘 아래서 사람의 기척이 보이더니 곧 화단을 넘어 다가왔다. 고영무였다. 이자영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다시 가슴이 내려앉았다.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선 이자영이 겨우 입을 열었다.

"고영무씨, 여긴 웬일로‥‥‥‥

"이자영씨 보러 왔지."

그는 이자영의 앞에 다가와 셨다. 아파트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뿐 주차장 앞 공터에는 인적도 없었다.

"술 마셨구만."

고영무가 입을 열었다

"난 한참을 기다렸는데."

"도대체 왜? 무슨 일 있어?"

놀람이 가라앉자 이자영의 가슴은 이제 부글거리며 끊었다. 화가 난 것이다.

"회사 이야기야, 널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기가 막혀, 그래서 밤늦게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지?"

이자영의 목소리가 팽팽해졌다.

"그리고 내 말에 틀린 것 있어?"

"아냐, 네 말은 맞아. 남녀평등이야, 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입사 동기인 주제에 윗사람 대접받는다는 것이, 그래, 우습지."

그의 느려 터지고 더듬거리는 말투에 이자영은 짜증이 났다.

"알았다면 비켜, 집에 들어가야겠으니까."

"그런데, 네가 만일 남자라면, 남녀평등이라니까 말인데, 어떻게 했을까 생각을 해봤어. 네 또래의 남자가 나한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면 ‥‥‥‥

"아마 두들겼을 거야. 가만둘 수가 없는 일이지."

이자영이 눈을 치켜뜨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인적이 없다. 50미터쯤 앞쪽 아파트의 현관 경비실에 경비가 있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멀었다.

"난 신세를 꼭 갚는 성질이어서 한 대 칠 테니까 너도 대들어라."

고영무가 한 걸음 다가서자 그녀는 그만큼 뒤로 물러선다

"영화나 TV처럼 귀뺨 때리는 것이 아냐. 네 배나 턱을 쳐서 땅바닥에 자빠뜨리게 될 거야."

", 이런, 야만인."

"? 여자한테 폭력 쓰면 모두 야만인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자빠졌어. 내가 잘하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와락 한 손을 뻗은 고영무가 그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자영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이내 굳어졌다.

"이것 놔."

두 손으로 그의 팔을 풀려고 기를 썼으나 숨이 막혀 왔고, 이제는 온몸이 그의 팔에 매달린 셈이 되었다.

"망할 년, 멀쩡한 내가 군대를 빠져서 3년을 벌라구? 돈 써서 복무기간을 단축해야 네 눈에는 똑똑한 놈으로 보인단 말이냐?"

아랫배가 터지는 듯한 충격이 오자 이자영은 눈을 부릅떴다. 입에서는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혔으므로 그녀는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로 주저앉았다. 고영무는 그녀의 허리를 한팔로 끼어 안고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자영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닥쳐, 한 방 더 맞기 전에. 이번에는 턱을 돌려버릴 거야. 이빨이 대여섯 개 부러질 거다."

이자영이 입을 다물고 신음 소리를 죽였으나 이제는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창자가 끊어진 듯 아팠으므로 말을 할 기력도 없었다. 이자영은 자신의 몸이 승용차의 뒷자리에 처박히는 것을 알았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쥔 채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고영무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치마 벗어."

그의 말에 이자영은 다시 소스라쳤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으나 고영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이자영은 머리를 저었다.

"안돼, 제발‥‥‥‥"

겨우 그렇게 말이 떨어져 나왔다.

"찢어 버리기 전에 어서, 이 짓이 처음은 아니겠지. 안 그래?"

"고영무씨, 제발."

다시 주먹이 날아와 옆구리를 쳤으므로 이자영은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의 치마가 벗겨 내리는 것을 알았으나 두 손으로 허리를 움켜쥔 채 가늘게 신음 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치마가 벗겨지고 곧 팬티가 그의 손에 잡혔다. 그의 차가운 손이 아랫배에 닫자 이자영은 몸서리를 쳤다.

"고발할 거야, 두고 봐."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창틀에 얼굴을 댄 그녀가 겨우 말했다. 이윽고 팬티가 다리 밑으로 끌어내려지자 이자영의 하반신은 알몸이 되었다.

 

"이자영씨 오늘 안 나왔어?"

옆에 앉은 박정환이 옆의 빈자리를 보며 물었다.

"하루종일 안 보여."

"안 나온 모양이야."

책상 위의 서류를 치우며 고영무가 힐끗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술 마셨니?"

", 자네 빼놓고 셋이서."

점심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저 여자는 소주 한 병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우린 2차 갔지만 말이야."

"다른 일 때문일거야."

조정수 대리가 뒤쪽에서 다가왔다.

"점심들 안 해? 점심 먹으러 가자구."

", 가시죠. 저희들도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박정환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고영무도 펜을 내려놓았다. 힐끗 이자영의 빈자리를 내려다본 그는 잠자코 조정수의 뒤를 따라갔다. 조정수가 그들을 데려간 곳은 회사 근처의 조그만 한식집이었다. 점심시간이어서 음식점은 근처 사무실의 직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에 인사이동이 있었어, 부분적이기는 한데."

나무젓가락을 쪼개면서 조정수가 말하자 그들은 움직임을 멈쳤다.

"저희 상품 3과에도 말입니까?"

박정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나하고 양대리 소속 직원들이 한 명씩 빠져나가게 되었어."

식당이 소란스러웠으므로 그들은 식탁 위로 상반신을 기울이고 조정수를 바라보았다.

"우리 그룹의 김찬얼씨, 그 친구가 아래층 배송부로 전출이 되었고."

"배송부로 말입니까?"

박정환이 큰소리로 물었다.

"그래, 배송부로."

조정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할 수 없지, 실적이 좋지 않아서."

김찬일은 3년 차 사원이었는데 말이 없는 사내였다. 따라서 박정환이나 고영무는 그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실적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노상 조정수에게 잔소리를 듣는 사내였다.

"또 한 사람은 누굽니까?"

설렁탕 그릇이 앞에 놓여졌으나 숟가락을 대지도 않고 박정환이 물었다.

"이자영이야, 양대리 소속의. 이번에 부회장 비서실로 올라가. 잘된 일이지."

"허어,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소문이라니?"

조정수가 씹는 것을 멈추고 박정환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부터 이자영이 비서실로 올라간다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그랬었나? 양대리가 흘린 모양이구만."

고영무는 잠자코 설렁탕 국물을 입에 떠넣었다.

"그렇다면 이자영이는 개척 요원으로 파견 나갈 필요가 없겠군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무튼 똑똑한 사람이야, 남자 못지않아."

"남자를 우습게 보는 여자지요."

박정환의 말에 조정수가 풀씩 웃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코를 빠뜨리고 있어? 자네도 비서실에 가고 싶은가?"

"에이, 저는 싫습니다."

"그럼 왜 그래? 시기하는 얼굴로?"

"시기라니요? 대리님이 잘못 보셨습니다."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난 고영무가 조정수를 바라보았다.

"파견 요원은 언제 출발합니까?"

"7월 초야. 난 그것밖에 모르네."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그것도 난 몰라."

조정수가 웃는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자네들한테 말해 줄 수 있어. 외국에서 자네들이 보내게 될 시간은 자네들의 인생에 커다란 도움이 될거 야. 개안한다고나 할까, 어쩌면 인생의 전환기가 될지도 모르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개척 요원으로 파견되는 기간이 자네들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면 돼."

박정환와 고영무는 잠자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던 소리였다.

 

 

 

3. 사나이의 길

"운동 삼아서 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인상 좀 펴라구."

신용만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재미있잖냐? 너한테도 맞는 일이고."

최대광이 힐끗 그를 바라보고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건너편의 화단가에 앉아 있는 여자는 30분이 지나도록 움직이는 기척이 없다. 앉아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대체 여자를 주먹으로 치는 놈이 어디 있어? 안 그러냐? 손바닥으로 때려도 넘어질 텐데."

무료함을 때우려고 하는 소리였다. 신용만이 남녀를 구분하여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최대광은 잠자코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도 오종문의 하청을 받은 것이다. 전화번호부를 보고 여자가 연락을 한 모양이었고 조건은 자신을 폭행한 사내를 두들겨 달라는 것이었다. 듣자 하니 두 사람 사이는 애인이나 친구 사이도 아닌 회사 동료의 관계였다. 남자는 의견 다툼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으슥한 곳에서 여자를 무자비하게 때렸고 여자는 그것을 회사에 하소연할 수도 없었던 모양이다. 신용만은 여자로부터 약소하지만 백만 원을 받았고 오종문은 50만 원을 챙겼다. 이제 남은 일은 놈의 집 앞에서 그리고 여자가 보는 앞에서 놈을 두들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약한 여자나 두들기는 그 병신에게 힘이 약해서 두들겨 맞아야 하는 그 원통함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오늘의 과업이다. 여자는 남자가 느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심산인지 그의 집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당찬 여자였다. 신용만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한 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화단가에 앉은 여자도 그의 기척을 보고는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시계를 보는 모양이었다. 아파트는 끝동이었고 이쪽 길은 막혀 있어서 차들도 들어오지 않았다. 두어 명씩 아파트의 현관으로 들어서던 사람들도 이제는 발길이 끊어졌다. 아파트의 경비실은 오른쪽 길로 떨어져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어서 이쪽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신용만은 장소도 미리 봐두었다. 놈이 현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화단 근처에서 불러내어 아파트와 담 사이의 공간에서 일을 치르는 것이다. 마침 담 위에 등 하나가 켜져 있을 뿐이고 반대쪽은 아파트의 옆 부분이라 내려다볼 창문도 없다. 신용만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떼고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엉거주춤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신용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내는 최대광보다는 못했지만 큰 체격이었다. 걸음걸이는 가벼웠고 몸의 움직임에 탄력이 있어 보였다. 최대광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저거 꽤 큰데."

신용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키는 너만 하지만 체중은 팔구십 가겠구만. 저린 놈이 여자를 치다니."

여자가 남자를 막아섰으므로 그들은 아파트 앞의 공간으로 나왔다. 여자를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웬일이야?"

사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의 시선이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다.

"고영무씨, 나하고 저쪽으로 가. 좋은 말할 때."

여자가 나지막하지만, 힘이 들어 있는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신용만과 최대광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신용만은 최대광의 얼굴에 희미하게 스치는 웃음기를 보았다. 그도 이제 이 일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허어."

사내가 턱을 들면서 활짝 웃었으므로 아파트의 희미한 불빛에 그의 하얀 이가 드러났다.

"내가 안 가면 어떻게 할래? 뒤에 서 있는 남자들을 소개시켜 줄래?"

그가 웃음 띤 소리로 말했으므로 신용만이 성큼 한 걸음 나아가 그녀 옆에 섰다.

"형씨, 남자답게 저쪽 담가로 가지. 아파트 사람들 깰 테니까."

"이 사람들은 누구야?"

신용만의 말을 무시한 채 그가 묻자 이자영이 대답했다.

"너하고 어울리는 사람들이야. , 갈래? 아니면 도망칠래?"

최대광이 다시 신용만을 돌아보았다. 그는 부쩍 이 일에 흥미를 나 타내고 있었다.

"도망치면 쓰나? 남자가 사내답게 나서야지. 안 그려?"

최대광이 나서자 고영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가지. 저기냐? 봐둔 곳이?"

그가 앞장을 섰으므로 그들은 그의 뒤를 따라 담장 쪽으로 들어섰다. 담장과 아파트의 사이라지만 째 넓다. 배드민턴 터가 놓여져 있을 정도였다. 사내가 공터의 한가운데 서자 신용만은 더 이상 말장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후닥닥 손을 봐주고 무릎을 꿇게 해주면 끝나는 일이다. 그는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이자영이 벽 쪽으로 물러서는 것이 분위기를 알아챈 것 같았다.

", 병신은 안 만들 테니까 걱정 말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왼발에 중심을 잡고 몸을 휘익 돌리면서 오른발로 사내의 면상을 걷어찼다. 태권도가 3단이라는 오종문도 이 발길 한 번에 나가떨어졌던 터였다. 신용만은 합기도 2단에 태권도 3단이다. 그리고 실전을 수십 번 겪었으므로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응용력이 뛰어났다. '터억' 하고 발뒤꿈치에 반응이 와서 순간적으로 신용만은 맞은 것이 놈의 면상인 줄 알았다. 다리를 회전시킬 때 머리가 숙여지므로 잠깐이나마 자신의 다리를 볼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그러자 중심을 잡고 있던 왼쪽 다리가 무엇엔가에 걸려 휘청하였고 두 다리가 들린 신용만은 땅바닥에 상체를 부딪치며 넘어졌다. 그제서야 신용만은 자신이 번개 같은 반격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에 최대광은 신용만의 온몸이 전부 허점투성인데도 사내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엎어진 신용만의 머리나 옆구리를 발끝으로 차올렸다면 그것으로 당장에 치명상이 된다.

"제기랄."

온몸이 수치와 분노로 불덩어리가 된 신용만이 튕기듯이 일어난다. 그는 껑충 뛰어오르더니 공중에서 다시 한번 몸을 솟구치면서 발끝으로 고영무의 얼굴을 찍었다. 그러나 상반신은 허공에서 일직선이 되어 있었고 허리를 틀면서 오른쪽 주먹이 고영무의 얼굴로 휘둘러져 온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차례의 섬뜩한 공격이었다. 반대쪽에 서 있던 최대광은 입을 쩍 벌렸다. 신용만의 공격 때문이 아니었다. 사내는 신용만이 몸을 띄우자 뒤로 벌렁 자빠져 버리고는 떼구루루 몸을 굴렀다.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운 곳은 신용만이 몸을 띄운 자리였다. 이번에도 신용만의 등이 완전히 허점으로 노출되었으나 사내는 공격하지 않았다. 신용만은 씨근거리며 몸을 돌렸다.

"이 새끼, 널 죽여버릴 테다."

이를 부드득 갈고 난 신용만이 두 발에 힘을 주었다.

", 세 번째에는 나한테 맞는다."

둘째 손가락으로 고영무가 신용만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대광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신용만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고영무의 앞으로 몸을 던지듯이 와락 뛰어 들어오면서 어지럽게 주먹과 발길을 날렸는데 이것은 두 대를 맞더라도 한 대는 치겠다는 의도였다. 이를 악문 그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자세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처절했으므로 이자영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최대광은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뚫어질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치는 것과 막기를 서너 번 하였고 몸을 틀고 비끼기를 두어 번, 발길질을 다시 서너 번 했다가 주먹이 자주 나는 편인 신용만의 왼쪽 주먹이 고영무의 배를 쳤다. 그리고는 이어서 오른쪽 무릎이 그의 옆구리를 찍었다. 고영무가 주춤 반걸음쯤 취로 물러서는가 했는데 기세를 올리고 다가서는 신용만의 배를 고영무의 주먹이 찍었다. '허억' 하면서 주먹 한 방에 신용만이 허리를 꺾었다. 최대광은 한 걸음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거리는 오륙 보 떨어져 있어서 늦다. 신용만은 고영무의 주먹이나 발길질의 마무리 한 방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다시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고영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것이다. 그리고는 얼굴을 돌려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어때? 너도 한바탕 해볼래?"

그가 한 걸음 다가서던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최대광은 힐끗 이자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주먹을 입에서 떼고 허리춤 근처에 단단히 쥐고 서 있었다.

"좋다, 해보자, "

최대광이 앞으로 나서자 신용만이 찡그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한 손으로 배를 싸안고 있다.

"용만이 넌 물러서, 내가 저놈을 뭉개줄게."

최대광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최대광은 놈만 잡으면 끝난다고 믿었다. 녀석의 주먹 한두 대쯤 맞아도 견딜 수는 있을 것이다. 맞더라도 일단 잡기만 하면 나무젓가락 분지르듯 팔이건 다리건 딱 소리 나게 부러뜨릴 작정이었다. 성큼거리며 다가가던 최대광은 걸음의 속도를 늦추더니 그의 앞에 섰다. 고영무는 잡으려면 잡아 보라는 듯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더럭 의구심이 일어난 최대광이 기둥 같은 팔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쳤다. 건드려 보는 것이다. 고영무가 머리를 젖히며 그의 주먹을 피하더니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레슬링 했니? 아니면 씨름이냐?"

약을 올리는 듯한 말투였으므로 최대광은 와락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에 물컹한 감촉이 닿자 최대광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는 된 것이다. 이제까지 손에 잡힌 놈을 무사히 놓아준 적이 없다. 최대광이 한 걸음 다가서며 다른 한 손으로 사내의 허리춤을 쥐었다. 이제 허리를 틀면서 벽 쪽으로 놈을 태질을 치든지 아니면 다리를 걸어 놈을 깔면서 넘어져도 좋다. 태질을 당하면 시멘트 담장에 온몸이 부딪혀 개구리 꼴이 될 것이고 놈을 깔고 넘어지면 놈은 창자가 뒤집혀 어제 먹은 라면까지 몽땅 토해놓을 것이다. 마악 허리를 틀려던 최대광은 자신의 허리도 놈에게 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놈의 옆구리가 이쪽에 너무 밀착되어 있다. 갑자기 중심을 잡고 있던 오른쪽 다리가 땅을 떠난 느낌이 들었고 이어서 몸이 그에게 업혀진 것 같았다. 그리고는 온몸에 격렬한 충격이 왔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무수한 흰 점이 오가고 있었는데 어느덧 자신은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너희들 잠깐 여기 있어. 난 이 여자한테 할 말이 있으니까."

신용만은 멍한 얼굴로 서 있었고 최대광은 땅바닥에서 상체를 일으켜서 앉은 참이었다. 그들에게 말하고 난 고영무는 아파트의 벽에 기대고 선 이자영에게 다가갔다 이자영이 눈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고영무가 다가가 한걸음쯤 앞에 서자 바람 부는 날 나뭇가지가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찌푸린 그가 목을 내밀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를 악물고는 있었으나 그녀의 이빨이 꼭 다문 입술 속에서 부딪치고 있는 소리였다. 고영무는 손을 들어 이자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놀란 그녀가 입을 딱 벌렸다가 이제는 신음을 떨었다. 그녀를 끌고 사내들에게 돌아온 고영무가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맞으면 이 여자가 너희를 우러러볼 것 같니? 아냐, 천만에 말씀이다. 이 여자는 우리 모두를 비웃고 있다."

땅바닥에 앉아 있는 최대광이 눈을 껌뻑이며 고영무와 이자영을 번갈아 보았다.

"형님이 그 여자를 쳤다면서요?"

"그래, 쳤지. 그리고 먹었다."

"아하, 그래서 원한이 맺혔구만요."

"남자를 우습게 보는 여자야. 남녀평등도 아니야.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었는데. "

"형님, 저희들은 돈을 받았는데 돌려줘야겠습니다."

최대광이 사촌 형님을 만난 것처럼 사근사근 대답했다.

"너희들이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니? 이 여자를 말이다."

"형님, 데리고 가셔서 한 번 더 주무시지요. 그러면 아마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최대광이 말하자 이자영이 두 손으로 고영무의 손을 움켜쥐었다.

"고영무씨, 제발."

"여기 돈 있소, 가져가요."

최대광이 호주머니를 뒤져 수표를 꺼내 이자영에게 내밀었다. 잠자코 있던 신용만이 한걸음 다가와 셨다.

"형님, 어쨌든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신용만이라고 하고 얘는 최대광입니다."

"나는 고영무라고 한다."

고영무는 이자영의 옷깃에서 손을 떼었다. 이자영이 옷깃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한걸음 물러섰다.

"당분간 당신의 원한은 풀리지가 안됐구만. 하는 수 없는 일이지."

이자영이 뒷걸음질 쳐서 다시 아파트의 벽에 붙어 섰다.

"나는 둔해서 여자의 분위기를 맞출 줄도 모르고 또 그럴 생각도 없어. 당신한테 그 짓을 한 것은 화가 나서 화풀이를 한 것이 아니야. 좋아서 했어."

세 남자의 시선을 받고 선 이자영은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고영무가 몸을 돌려 신용만과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한 가락씩 하는데, 성격도 화끈해서 마음에 든다. 동생 삼는 기념으로 내가 술 한잔 살 테니까 가자."

"그러지요."

신용만이 끄덕였고 최대광은 서둘러 이자영에게 다가갔다. 돈을 되돌려 주려는 모양이었다.

 

", 한잔 들어."

고영무가 술잔을 들었다.

"실컷 마시자. 운동 끝나고 마시는 술맛은 그만이지."

그들은 아파트 근처의 음식점에 앉아 있었다. 밥도 팔고 밥반찬에다 술까지 끼워 파는 집이었다. 열두 시가 넘어있었으므로 주인아줌마는 문고리를 안에서 걸어 잠그고 고영무의 일행만을 손님으로 받고 있었다. 물컵에 소주를 따라두어 모금에 마시고 난 최대광이 술잔을 내밀었다.

"형님도 한잔 받으쇼."

곧 쿨쿨거리며 소주가 물컵에 가득 채워졌다. 고영무는 술잔을 들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뭘 하고 있니?"

최대광과 신용만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신용만이 입을 열자 최대광이 상체를 세웠다.

"강도질도 하고 도둑질, 해결사, 그리고 우유 배급도 합니다."

눈을 끔뻑이며 최대광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영무가 신용만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너는 싸움을 제법 하던데, 오래 뛰었으면 나도 여러 차례 얻어맞았을 거다. 그런데 주먹에 독기가 없어서‥‥‥‥"

"독기가 없다니요? 형님."

신용만이 궁금한 듯 턱을 들었다.

"네 주먹은 싸움용일 뿐이란 말이다. 쳐서 죽인다는 식으로 훈련을 받지 않아서 그래. 난 군대 시절에 사병이었지만 육박전 교관이었다. 맨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교육을 시켰어."

"어쩐지,"

신용만이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띄웠다.

"형님이 저희들 둘하고 동업을 하신다면 몽땅 휘어잡을 수가 있겠는데."

"무엇을 말이냐?"

고영무가 묻자 그는 서둘러 머리를 저 었다.

"아닙니다, 그냥 한 말입니다."

"세상에 ."

이맛살을 찌푸린 최대광이 식탁 위에 두 손을 짚고 고영무를 쳐다보았다.

"그런 주먹으로 여자를 쳤단 말이오? 약한 여자를? 그러고 또"

고영무가 빙그레 웃었다.

"머리 좋고, 말 잘하는 여자야.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남자들을 거느리기만 했던 여자 같았다. 건방지고 당돌했지, 그래서 남자보다 못한 점을 알려준 거다."

"아닌 게 아니라 똑똑하더군요."

신용만이 말했다.

"형님을 단단히 버릇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두들기라고 말입니다."

"나는 형님이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지요."

최대광이 말을 받았다.

"허지만 그년 덕분에 형님을 만나게 되었지 않습니까?"

고영무는 술잔을 들어 벌컥이며 마셨다. 서로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지만 이렇게 마주 앉아 보니까 오히려 같은 세상을 살아오던 사람들보다 더 부담이 없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쪽은 힘이 달린다고 생각하면 생판 낯모르는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금방 형님이 되고 동생의 관계가 된다. 이제까지 고영무가 지내왔던 계급과 지성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애시당초 싸움부터 일어나지를 않는다. 길고 긴 말과 생각, 그리고 절제와 인내를 이성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어서 주먹이 나가면 그것은 야만이다. 고영무는 시선을 들었다.

"난 한 회사의 신입사원이야. 하지만 너희들을 동생으로 삼았으니까 어려운 일 생기면 내가 발 벗고 나서주마. 약속한다."

최대광과 신용만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도 형님이 무슨 일 있으면 돕지요."

신용만의 말을 최대광이 이었다.

"형님, 여자가 필요하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닭 먹고 계란까지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이자영과의 관계를 아까부터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외국에 나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개척 요원이냐? 판매사원이로구나."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모처럼 일찍 들어온 고영무를 앉혀 두고 그녀는 못다 하고 못 물어보았던 이야기를 마음먹고 꺼내는 참이다.

"출장을 간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외국 지사 근무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녀. 그럼 잠은 어디에서 자고?"

"회사에서 지정해 준 숙소가 있어요."

"기숙사?"

"아니, 호텔이나 아니면 합숙소."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녀?"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앞쪽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고 있던 아버지가 신문 사이로 얼굴을 내놓았다가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가렸다.

"여기 아파트에 들락거리는 가정 판매 같은 거냐?"

"필요하면 그렇게도 해야지요."

"길거리에다 쌓아 놓고 팔지 그러냐."

"어떤 선배는 그렇게도 했다고 하던데."

", 그만둬."

어머니가 자르듯 말하며 몸을 고쳐 앉았다.

"세상에, 알고 보니 한국도 아니고 외국에 나가서 가두판매를 하다니, 그 회사가 통일교 재단이라면 또 몰라. 선교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 펄‥‥‥

아버지가 신문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외국에서 고생하는 것도 큰 공부가 되는 거야. 젊어서 하는 고생은‥‥‥‥"

", 그만두세요. 얘는 지금 회사한테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원 이런 여편네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눈썹을 치켜뜬 아버지가 보자 어머니는 한풀 꺾였다.

"그렇다고 치고,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나가 있어야 한다는 거냐? 그리고 어디로 나가고? 일본? 미국?"

"그건 곧 알게 될 거예요."

"한 달 남았다면서 아직도 몰라?"

"며칠 내로 통보가 와요."

"그렇다면 결혼은 다녀와서 하든지 아예 눌러있든지 해야 하겠네."

혼잣소리처럼 어머니가 말했다.

김영순 여사는 말이 없고 꼼꼼한 고진호씨와는 달리 매사에 활동적이고 수다스러운 편이었다. 그러나 동네가 떠나갈 듯이 수다를 떨다가도 아버지의 기침 소리만 들려도 입을 다문다. 그것이 고영무나 동생인 영철에게도 불가사의한 일 중의 하나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말썽을 일으켜 온 고영무에게 어머니는 한시도 속이 편해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다. 예를 들어서 싸우다가 사람을 쳐서 다치게 했을 경우가 있었다. 고영무는 선배를 동원하여 합의를 거의 끝냈는데 어머니가 뛰어들어서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은 경우이다. 울고불고, 다친 사람한테 뒤늦게 사과하고 절하고, 그러다 보니까 상대방은 턱을 세우고 돈을 더 내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고진호씨는 그가 팔이 부러진 채 집에 돌아오건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를 강물 속에 빠뜨리고 들어오건 힐끗 한번 보고 나면 그만이다. 좀체로 야단치지도, 그렇다고 칭찬하지도 않았다. 고영무는 그런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 존경해 왔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군대에 들어간 세 살 터울의 동생인 고영철과 함께 그들은 어머니의 각별한 보호와 육성 아래 자라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너는 잘할 것이다."

문득 아버지가 입을 열었으므로 고영무는 머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넌 어디에 던져 놓아도 일어설 놈이다."

"세상일이 참하는 것하고 같아요? 어디?"

그러다가 어머니는 아버지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닫았다.

"나는 은행일 하나밖에 모르고 세상을 살았는데, 그것이 이제 와서 생각하면 후회가 돼. 다른 기회도 많았는데."

어머니가 긴장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영무로서도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아들이라도 넓은 세상에 나가서 능력껏 뛰게 해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아버지는 다시 신문을 펼쳐 들었으므로 상반신이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

"저 양반이 갑자기."

혼잣소리처럼 신문을 향해 어머니가 중얼거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아버지의 한마디면 끝이 나는 집안이었다.

 

침대에 누워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섰다

"내일은 회사 출근할 수 있겠니?"

""

이자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젠 괜찮아?"

어머니가 이마 위에 손을 얹었으므로 그녀는 머리를 틀었다.

"얘가, 가만있어. 아직도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어머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몸살이야. 과로해서 그런가 보다. 내가 준 약 자기 전에 먹어라."

"알았어요, 엄마."

"조금 있다가 응접실에 나가서 아버지한테 인사드리고. 어젯밤 네가 늦게 들어와서 걱정 많이 하셨어."

이자영은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알았니?"

문고리를 잡으며 어머니가 다짐하듯 물었으므로 이자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자영은 책을 던지고는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누웠다. 고영무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문 이자영은 눈앞에 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를 돌렸다. 그에게 차 안에서 강간당한 것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다. 소용돌이치고 있는 마음을 아직 분석할 계제는 아니었지만 그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속수무책이었던 자신이 우선 부끄러웠다. 흉악한 놈이었다. 말수도 적은데다가 큰 몸집에 행동도 느려서 이쪽 딴에는 호의적으로 도와주려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놈은 결코 우둔한 놈도 아니었다. 그렇게 일을 저지르고 나도 이쪽에서 회사나 경찰에 고발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는 놈이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른 이자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로 나서자 장선일 박샤는 신문을 보고 있다가 머리를 들었다.

", 자영이 일어났구나. 어때? 몸은 괜찮니?"

", 이젠 괜찮아요, 아버지."

"다행이다. 과로하지 말아라. 일도 좋지만 건강이 제일이다."

"."

이자영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장선일은 그녀의 양아버지이지만 친아버지 이상 가는 정성으로 자신을 보살펴 주고 있다는 것을 이자영은 잘 알고 있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이자영이 세 살 때였다 역시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는 그녀가 다섯 살 때 병원의 원장이었던 장선일을 만나 재혼했던 것이다. 장선일은 이혼남이었으므로 이자영은 배다른 오빠 한 명과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 한 명이 있다.

"그런데 넌 부회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긴다면서? 영전 아니냐?"

장선일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머리는 백발이 반쯤 섞여 있었으나 얼굴은 윤기가 반들거리는 홍안이었다. 끊임없이 체력 관리를 해오고 있었으므로 오십 후반의 나이였으나 장선일은 십 년쯤은 젊어 보였다.

", 영전이에요."

비로소 이자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어쨌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머니가 실내복 차림으로 다가와 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60평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은 두 부부와 이자영, 장혜주, 그리고 일하는 아줌마의 다섯 식구였다. 결혼한 오빠는 인천에 살고 있었다.

"쟤가 입사성적이 10위권 안에 들었거든요. 처음부터 비서실에 갈 수 있었는데 그땐 자리가 없었어요."

정민숙 여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마침 얼마 후에는 쟤들 동기들이 개척 요원으로 외국으로 나간대요. 때맞추어 잘되었지 뭐예요?"

"개척 요원이라니? 시장개척을 하는 것인가?"

커피잔을 들며 장선일이 물었다.

"그래요. 세계 각 지역에 신입사원들을 떨어뜨려 놓고 제품을 판매시키는 것이래요. 뭐래나 시장정보도 얻고, ‥‥‥‥"

어머니가 이자영을 바라보았다.

"자사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도 조사하고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을 주입시킨다는 의도예요. 그리고 더불어서 판매도 촉진시키고."

이자영의 말에 장선일이 빙그레 웃었다.

"훌륭하군. 자영이가 남자라면 내가 재촉해서 내보냈을 텐데."

"제가 남자라고 해도 나가지 않을 거예요,"

장선일과 정민숙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건 왜? 너도 모험심이 강한 줄 알고 있었는데?"

장선일이 묻자 이자영이 생글 웃었다.

"6개월이 될지 1년이 될지 개척 요원의 외국 생활은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실적이 뛰어났던 사원도 귀국해서는 다시 똑같은 급수의 사원으로 되돌아가더군요. 인사고과의 별첨란에 조그맣게 기록될 뿐이고, 본사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기회가 많아요. 더욱이 비서실 같은 경영진 측근에서."

"훌륭하군, 우리 자영이."

장선일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네 꿈은 무어냐? 무엇을 할 작정이야? 아니, 무엇이 되고 싶어?"

웃는 얼굴로 이자영은 머리를 저었다. 찌뿌드드했던 가슴도 어느덧 가라앉았고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어느덧 온몸에 기운이 났다.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기회가 올 거예요. 틀림없이, 무엇이건."

 

"이봐, 회식에 참석 안 할 거야? 왜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어?"

박정환이 다가와 어깨를 했으므로 고영무는 머리를 들었다.

"? 벌써 여덟 시가 되었구만."

"내 참, 사람이 둔하기는‥‥‥ 이 친구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단 말이야?"

고영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위에 걸쳐 놓았던 저고리를 들었다.

"그럼 가지 뭐."

박정환은 아래층까지 내려갔다가 일부러 올라온 모양이었다. 혀를 몇 번 차더니 그와 함께 텅 비어 있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과의 전출자 송별연이 있는 것이다. 배송부로 전출되는 김찬일과 비서실로 올라가는 이자영이 주빈이었다.

"빌어먹을, 이자영이 그년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어, 우린 내일모레 파견지가 할당되는데."

회사의 현관을 빠져나오면서 박정환이 투덜거렸다.

"잘되면 본전이고 잘못되면 거덜나는 거야. 몸 버리고 두고두고 기록에 따라다닐 거야. 전과자 기록처럼."

고영무는 잠자코 그를 따라 걸었다.

"도쿄나 오사카, 그것이 안 되면 홍콩이라도 좋겠는데

사람들을 헤쳐 가면서 박정환이 말했다.

"가까우니까 슬쩍 한국에 다녀갈 수도 있을 것 아냐? 보고 싶은 사람도 보고."

"애냐? 엄마 찾아오게?"

고영무가 빙긋 웃었다.

"까짓것, 알래스카에 떨어지면 어때? 앙골라에 떨어지면 또 어때서?"

앙골라는 지금 내란이 일어나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에 전쟁이 치열하다고 했다.

"이봐, 말이 씨 될라.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해, 난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표 낼 거야. 젠장, 이곳 아니면 밥 먹을 데 없나? 어느 놈이 목숨을 걸고 다른 놈 위해서 일해?"

"다른 놈이라니? 큰일 날 소리."

"젠장, 이 회사가 내 회사야 그럼? 말이야 바른말로 일성그룹이 박재룡 회장과 그 장남인 박주경 부회장의 재산이지. 우리는 고용원이고. 내가 죽으면 내 자리를 채울 놈이 수만 명이야."

박정환은 제 말에 열이 받쳤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고영무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회식 장소인 갈빗집의 널찍한 방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술잔이 두어 차례 오간 후였다. 방안은 웃음 소리와 이야기 소리로 시끌벅적했고 고기를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사람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조정수가 눈을 치켜떠 보이다가 이내 앞쪽에 앉는 고영무에게 술잔을 건네주었다.

", 잔 받아. 우리는 벌써 한 잔씩 돌렸어. 마시고 잔 돌려."

고영무는 그가 건네준 술잔을 들고는 한 모금에 삼켰다. 상석에 앉은 과장의 좌우에 오늘의 주인공인 김찬일과 이자영이 맞아 있는 것이 보였다. 십여 명의 직원들이 제각기 그럴듯한 말로 김찬일을 격려하였을 것이고 이자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식탁 앞에는 서너 잔씩의 술잔이 놓여 있었다.

"이봐, 거기 고영무씨. 이리 와. 내 술 한잔 받게."

이태규 과장이 소리쳐서 그를 불렀으므로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빙글거리며 웃는 사람도 있고 물끄러미 건너다보는 시선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고영무는 엉거주춤 상석으로 다가갔다.

"자네가 술을 잘한다는 소문 들었어. 나하고는 처음 마시던가?"

잔에 술을 채워 주면서 이태규가 물었다.

"아닙니다. 신입사원 환영식 때‥‥‥‥"

엉거주춤 선 자세로 잔을 받으면서 고영무가 대답하자 이태규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 , 어서 마시고 잔은 이쪽으로 돌려, 자네 입사 동기한테."

그가 턱으로 가리킨 것은 이자영이었다. 이자영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적거리다가 그 말을 들었는지 이태규를 향해 웃음을 띄워 보였다.

"과장님, 잔이 적습니다. 조금 큰 걸로."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 큰 걸로? 하하, 알았어."

잔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아니므로 이태규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엽차잔을 들었다가 힐끗 고영무의 위아래를 바라보았다.

"자네 체격에 맞는 걸로 주지."

이태규는 동치미가 담긴 사기그릇을 들어 올리더니 동치미를 옆의 대접에 쏟아부었다.

"이봐, 술병."

그러자 누군가가 금방 뚜껑을 깐 소주병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주위에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렀고 여직원 두어 명은 짧게 놀라는 소리를 내었으나 만류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치미 그릇에 소주 한 병이 다 담겼다

", 여기 큰 걸로."

이태규가 잔을 내밀며 말했다.

"괜찮겠나?"

잔을 받으려고 허리를 숙이자 그에게 이태규가 살짝 물었다. 고영무는 여기서 포기하면 직원들은 물론이려니와 이태규도 자신을 실없는 놈으로 취급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셔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식 술이 세더라' 하고는 그만이지 인사고과에 주량에 대한 난은 없다. 만일 내일 지각이라도 했다면 그때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보다도 인기나 평가가 떨어진다.

직원들은 모두조용히 있었다. 최소한 고영무가 벌컥이며 한 대접의 소주를 깨끗이 비울 때까지 그들은 흥미 있게 지켜봐 주었다. 잔을 입에서 떼자 남자 직원 서너 명이 손뼉을 쳤다.

"허어, 대단하군. 끄떡없구만 그래."

이태규는 감탄한 얼굴이었다.

"잔을 돌릴까요, 과장님?"

눈을 껌벅이며 고영무가 묻자 이태규는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 야지, 잔을 돌려."

소주 서너 잔에 이태규의 얼굴은 붉게 물이 들어 있었다. 그는 모처럼 흥이 난 것같이 보였다. 고영무는 동치미 그릇에·다시 소주를 가득 채웠다. 그가 서 있는 바로 옆쪽에는 이자영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상반신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직원들은 다시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웃는 소리를 내었으나 그들의 신경이 온통 이쪽으로 쓸려 있다는 것은 고영무가 술잔을 앞으로 내밀자 갑자기 고요해진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이자영의 상반신이 돌처럼 굳어졌다.

"저 과장님, 이거 안 되겠는데요."

술잔을 든 고영무가 갑자기 말했으므로 이태규가 대뜸 물었다.

"아니, 무엇이? ?"

"여자에게 이것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무리입니다."

이자영이 머리를 들어 고영무를 올려다보았다. 눈살을 찌푸린 냉랭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제가 이놈을 마저 마셔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이자영씨 대신."

"그래, 마저 마셔!"

그렇게 저쪽에서 대답한 것은 양기식 대리였다.

"과연 남자다, 고영무씨."

"무슨 소리, 이자영씨 의견을 들어 보지도 않고서는 웬."

반박해 나선 것은 조정수 대리이다. 직원들은 갑자기 두 무리로 나뉘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대체적으로 조정수 대리의 그룹은 이자영이 마시든지 어쩌든지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양기식 대리 그룹은 고영무가 제멋대로 동치미 그릇의 술을 마셨으니 제가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만!"

이태규의 일갈에 좌중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눈을 부릅뜨고 좌중을 훑어보던 이태규의 눈길이 이자영한테서 멈췄다.

"이자영써, 마실 거야?"

고요해진 방안에 그의 말소리가 울렸다.

"싫어요."

밝은 목소리로 그녀가 금방 대답했다. 고영무한테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자네가 마셔."

이태규가 머리를 들고 엄숙하게 말하자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여자한테는 무리라니깐요."

벌컥이며 한 대접의 술을 마신 고영무는 이태규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끝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우둔한 친구."

조정수가 그를 향해 눈을 흘겼으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밤 열 시가 조금 지났으나 택시 정류장은 한산했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가 서 있을 뿐이었다. 이자영은 정류장에서 걸음을 멈추고 는 몸을 돌렸다.

"이봐,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목소리가 조금 컸던 모양으로 부부가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저쪽서 10분만 이야기를 하자."

고영무가 인도 안쪽의 빌딩을 턱으로 가리켰다. 셔터가 내려진 은행의 입구가 보였다.

"난 너한테 들을 이야기도, 할 이야기도 없어. 돌아가."

고영무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중년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제각기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 이런 기회가 와서 한마디만 해주겠는데‥‥‥‥"

힐끗 중년 부부를 바라본 이자영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날 밤의 일로 난 구애받지 않아, 그러니까 그 일,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야. 난 너 같은 쓰레기하고는 다른 사람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니까."

빈 택시가 다가와 중년 부부를 실었다. 남자 쪽이 아쉬운 듯 이쪽을 바라보고는 차에 올랐고 이내 정류장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 섹스가 너한테는 무기인 모양이더라. 애들이 물총을 쏘는 것처럼."

이자영이 큰 컵의 소주는 마시지 않았지만 시나브로 마신 술이 한 병은 넘었을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단내가 풍겨왔다.

"더러운 놈, 네 열등의식이 그 짓으로 해소가 되든?"

"난 이제까지 한 번도 남한테 무시당한 적이 없었어."

고영무의 차분한 말소리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자극시킨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이자영이 고영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도 한 가지 너한테 알려줄 것이 있는데, 그건 내가 마음 먹은 것은 꼭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자영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는데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과 함께 보면 비웃는 표정이다.

"그리고 난 조금도 열등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아. 네가 착각한 거야."

"미친놈, 평가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야. 잘 알면서 그래 ,"

"난 너 같은 계집이 질색이야. 오만하고 분수를 모르는 너 같은.."

"난 너보다 나아. 개같이 아무 데나 물총을 쏘지도 않고."

이자영은 머리를 틀고는 다가오는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빈 택시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너한테 반말하는 것이 불쾌하다는 네 유치한 생각은 여자가 남자의 종속물이라는 사고방식이야. 지나가는 강아지가 웃겠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난 너하고 똑같은 문제를 풀고 회사에 들어왔어. 성적도 너보다 월등하게 높고. 그리고 조직 생활에서도 너보다 더 인정을 받았지. 넌 이것저것 딴말을 하지만. 네가 내세울 것은 힘뿐이야. 무식한 힘, 소나 돼지를 잡을 때 쓰는 힘 같은. 그래, 그렇게 하고 나니까 성취감을 느꼈어? 너 혼자 말이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자영이 웃었다.

"기를 써도 안 될 거야, 너 같은 놈은. 나는 이미 평가받았고 그리고 곧 너도 평가를 받겠지, 개척 요원으로 발령받을 때."

머리를 끄덕이며 고영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내 앞에 닥쳐온 일을 피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네 말대로 무식하게 부딪쳐 나갔었다."

이제 더 이상 듣기도 싫다는 듯이 이자영이 목을 뽑아 차도를 바라보았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고, 그리고 한 번도 누구를 이용하거나 배신해 본 적이 없었다."

이자영이 어깨를 한번 움찔 올렸다.

"난 네가 동료이기 이전에 여자로 보았던 잘못을 저질렀어.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야. 그래서 나중에는 억지로 내 여자를 확인한 것이었는데."

"망할 자식!"

이자영이 손을 휘둘러 고영무의 뺨을 때렸으나 고영무가 머리를 젖히는 바람에 헛손질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발을 들어 고영무의 정강이를 찼다. 그러나 그것도 고영무가 다리를 옆으로 틀자 구두의 뒷굽이 고영무의 종아리에 걸려 벗겨져 버렸다.

"이 개새끼"

이자영이 악을 쓰자 노란불을 켠 택시가 다가와 멈추었다. 운전사가 목을 빼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고영무는 그녀의 수족에 신경을 쓰면서 차도로 굴러 털어진 구두 한 짝을 주워들었다.

"결국은 너도 폭력을 쓰는구만 그래. 비록 헛발질을 하였지만."

발 한쪽을 맨발로 기우뚱하게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영무가 웃었다. 이 시점에서 나을 것은 욕밖에 없었으므로 이자영이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보였다. 고영무는 택시의 문을 열고 들고 있던 구두 한 짝을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오후 여섯 시가 지나 있었으나 아직도 햇살의 잔영이 남아 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유장수 사장은 잠깐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아파트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아파트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차에서 따라 내린 운전사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서 있었다.

"열두 시에 다시 와."

운전사인 김시구는 머리를 끄덕이고 다시 차에 올랐다. 아파트의 현관으로 향하던 유장수는 문득 머리를 들었다. 6층의 베란다에 서 있는 홍성희가 보였다. 횐색의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으므로 금방 눈에 띈 것이다. 흰색은 그가 좋아하는 색깔이었다. 그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옷을 갈아입었을 것이다. 현관에 들어서자 경비가 장군을 만난 위관급 장교처럼 경례를 올려붙였다. 머리를 끄덕인 유장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CF 촬영하러 싱가폴에 가자고 하는데 가도 괜찮아요?"

홍성희가 주스 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보이지 않았으나 미끈하게 윤기가 흘렀다. 크고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한 눈과 도톰한 입술의 그녀는 지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2년 전만 해도 홍성희는 청산 나이트에서 솔로춤을 추는 이름 없는 삼류 무용수였다. 그녀가 유장수의 눈에 뜨인 것이 행운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유장수는 그녀를 정부로 삼고 나서 친지를 동원하고, 실력자들을 매수해서 홍성희를 톱모델로 키워 놓았다. 그것은 유장수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국은 홍성희 자신에게도 바라던 일이었다.

"어디 광고야?"

유장수가 무쪽쪽한 얼굴로 묻자 홍성희는 그의 옆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대한식품의 음료수 광고예요."

"가고 싶은 거냐?"

"가지 말라면 안 갈게요."

스물세 살이었으나 홍성희로 말하면 쉰다섯인 유장수와 겨를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자였다. 열아홉 살 때부터 혼자 떠돌기 시작했는데 살롱의 지배인에서부터 나이트클럽의 사회자,부동산업자와 비디오가게 사장 둥 동거한 사람도 일곱 명이 넘는다. 수없이 부침을 겪고 나서 정착한 곳이 이제 목련아파트가 되었다. 60평형의 고급 아파트에 혼자 사는 여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톱모델이 되어 있었다. 홍성희는 남자를 다루는 요령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

"임마, 난 네가 가고 싶으냐고 물었어."

유장수가 눈을 치켜떴으나 그것이 허세라는 것도 홍성희는 안다.

"좋든 싫든 당신이 가지 말라면 안 간다구요."

"허어, ."

마침내 유장수가 턱을 쳐들고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요 여우 같은 기집애."

"당신은 여우 남편이니까 암놈 여우."

엄연히 처자식이 있는 유장수에게 남편 행세를 시키는 것도 그가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장수는 횐색 원피스 아래로 삐어나온 홍성희의 미끈한 맨다리를 보았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발가락이 꼬물거리고 있고 살색의 발톱에는 아무것도 칠하지 않았다. 모두 유장수의 기호에 맞춘 차림이고 치장이었다.

"가고 싶으면 가, 가란 말이다."

홍성희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표정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정말?"

떠보는 듯 그녀가 묻자 유장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저녁 준비할 게요."

홍성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스 잔을 든 유장수는 창가로 다가가 섰다. 저녁 무렵의 아파트는 조금씩 부산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든 여자들이 슈퍼를 오가고 아이들을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가 여러 곳에서 났다.

", 저 자식, 저기 나왔네,"

신용만이 밖을 내다보며 놀란 듯 말했다.

유장수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창가에 서 있는 것이 최대광의 눈에도 보였다. 와이셔츠 차림의 한가한 모습이었다.

"팔자도 좋다. 안 그러냐? 홍성희 같은 년을 굴리고. 저 아파트가 얼마나 나가는 줄 알아? 7억이나 8억이야."

신용만이 유장수를 올려다보면서 열심히 지껄였다. 최대광은 창가에 서 있던 홍성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렀다. TV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들어가자."

신용만이 차 문을 열면서 굳은 얼굴로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저런 놈이 15천을 떼어먹다니, 나쁜 놈 아니냐? 안 그러냐?"

"그려."

찌그덕거리는 승용차의 문을 열고 나오면서 최대광이 대답했다. 승용차는 중고차 매매센터에서 며칠 전에 산 것이다. 신용만의 말대로 작업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그들이 아파트의 현관으로 들어서자 경비가 손을 저으며 다가왔다. 오십 대의 나이 든 사람인데 얼굴이 반들거렸다. 경비 생활을 오래 한 모양으로 사람을 가려 볼 줄 아는 모양이었다.

"어디 가시는데?"

최대광을 올려다보면서 그가 물었다.

"아따, 이 양반이 사람 골라서 잡나? 왜 이래?"

신용만이 버럭 인상을 졌다.

"우린 610호에 가는 거요. 사장님한테 뭘 드리려고. 610호에 전화 좀 해줘요."

그들은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눌렀다.

"누구시라고 말할까요?"

경비가 소리쳐 물었다.

"청산에서 왔다고 하쇼."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최대광이 입맛을 다셨다.

", 문을 안 열어 주면 어떡허지?"

"월 어떡허긴? 그냥 돌아오는 거지 뭘,"

어쨌든 들어가기만 하면 반은 성공했다고 보아도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은 610호 앞에 서자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신용만은 최대광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최대광은 신용만이 전혀 딴사람처럼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곧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세요?"

여자였다. 홍성희가 틀림없을 것이다.

", 심부름 왔는데요. 유사장님을 뵈려고요."

신용만이 공손하게 말했다. 잠시 안에서 기척이 없다가 누군가 문 앞으로 다가왔다.

"누구냐?"

유장수였다.

"사장님, 저 웨이터로 있는 김대호입니다. 지배인님이 급하게 가져다드리라고 한 것이 있는데요."

"지배인이?"

유장수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무언데?"

"돈입니다. 여기 돈하고 편지가 함께 있습니다."

문에 뚫린 구멍으로는 신용만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 신용만은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들고 있었다.

"난 그 친구한테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장규식이 그놈 지금 어디 있어?"

화가 솟구친 모양으로 유장수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건 잘‥‥‥‥"

신용만이 얼굴에 가득 두려운 표정을 띄워 보였다.

"아까 비행장에서 저한테 이것을 주셨기 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비행장?"

그가 얼굴을 바곽 문에 들이댄 모양으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

"언제?"

"한 시간쯤 전입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문 옆쪽의 벽에 붙어 서 있던 최대광이 눈을 치켜떴다. 문이 열리더니 유장수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이리 내라, 편지."

손을 내밀며 그가 재촉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옆쪽에 서 있는 최대광의 시선과 마주쳤다. 둘의 눈동자가 제각기 커다랗게 뜨였다. 신용만은 와락 그의 멱살을 잡으면서 문 안으로 밀어젖혔고 열린 문으로 최대광이 따라 들어왔다.

"어머나!"

응접실에 서 있던 홍성희가 입을 딱 벌리고는 몸을 굳혔다.

"이 새끼들!"

유장수는 오십이 넘었지만 왕년에는 주먹으로도 날린 사람이다. 성격이 혹독해서 주먹으로 밀렸을 때 낫이나 도끼로 상대를 죽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두어 걸음 신용만에게 안으로 밀려 들어온 유장수가 와락 신용만의 어깨를 잡는가 했더니 박치기를 올려붙였다. 아차 하면서 신용만이 머리를 옆으로 틀었으나 유장수의 이마는 그의 한쪽 볼을 찍었다. 눈에서 불이 번쩍인 신용만이 유장수의 배를 쳤으나 떨어지지 않는다. 느릿한 동작으로 아파트의 문을 안쪽에서 잠근 최대광이 신발을 신은 채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머나, 어머나‥‥‥‥

한동안 굳어져 있던 홍성희의 입에서 비명 같기도 하고 외침 같기도 한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용만은 주먹으로 유장수의 배를 서너 번 쳤으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그를 쉽게 떨구어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밀고 밀리다가 응접실의 소파에 몸이 걸려 멈추었다.

"어머나!"

홍성희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최대광이 그들에게 다가선 것이다. 유장수도 물론 벽장처럼 눈앞에 서 있는 최대광을 보았다. 그의 한 손이 나와 그의 목을 쥐는 것도 보았다. 유장수는 눈을 튀어나올 듯이 부릅뜨고 입을 벌렸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두 손으로 최대광의 한 손을 움켜쥐었으나 풀리지 않는다. 그 서슬에 신용만의 몸이 풀렸다. 그는 몸을 틀어 한쪽으로 비키면서 넥타이를 바로잡는 시늉을 했다. 홍성희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최대광이 한쪽을 치켜들었으므로 유장수는 목을 잡힌 채 한동안 공중에 떠 있었다. 얼굴이 금방 새빨갛게 되었고 두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입은 쩌억 벌렸으나 소리는 없다. 두 다리가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처럼 열심히 허공을 밟아대었다.

"아악!"

홍성희가 두 손으로 입을 감싸 쥐면서 주저앉자 그 소리에 놀란 듯 최대광이 유장수를 벽 쪽으로 밀어 던졌다. 책장에 등과 머리를 부딪힌 유장수가 눈을 치켜뜨더니 머리를 옆으로 끌었다.

", 이년아, 조용히 못 해?"

주저앉아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홍성희에게로 다가간 신용만이 낮게 소리쳤다

"꼼짝 말아, 이년. 요절을 내기 전에."

"살려 주세요."

온몸을 떨면서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창백해진 얼굴에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최대광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응접실 한쪽에 대형 스크린이 쳐져 있는 것이 집안에서도 영화를 보는 모양이었다. 한쪽의 벽에는 양주가 수백 병 세워진 선반이 붙박여 있었다. 응접실의 바닥은 흰색의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으므로 최대광은 발을 비벼 신발을 벗었다.

"대단허네, 대단허게 사는고만."

흰 벽에는 홍성희의 대형 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었는데 창 옆에 있는 것은 수영복 차림의 사진이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는 최대광을 향해 신용만이 소리쳤다.

", 그놈 묶어, 어서."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최대광은 유장수에게로 다가갔다. 부딪친 머리가 아픈 듯 유장수가 얼굴을 찡그리며 가늘게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15천을 가져오라고 하시오, 유사장. 우리는 그것만 받아가면 되니까."

신용만의 말에 유장수가 머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안상규가 너희들을 시켰단 말이지? 돈 받으려고?"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이 빌려 간 돈 아냐? 우리는 그 돈만 받으면 떠날 테니까, 죄 될 것이 없어,"

"이런 철모르는 놈들"

두 팔을 등 뒤로 묶인 채였으므로 유장수는 어깨를 흔들면서 턱을 세웠다.

"네놈들이 우리 둘을 모두 죽일 수는 없을 게다. 경비실에서도 너희들을 봤으니까 말이야. 경비까지 처치하지는 못하겠지. 사람들이 많아서 증인이 또 여러 명 생길 테니까. 이것 풀어라. 그러면 내가 용서해주마. 나도 남자다. 나도 너희들 같은 때가 있었어."

신용만이 힐끗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용돈이 필요하면 내가 주마. 지금 천만 원쯤 있을 게다. 그걸 나눠가지고 돌아가거라. 만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유장수가 그들을 쏘아본 채 입을 벌리고 웃었다. 하얀 이만 드러난 웃음이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열흘이 못 가서 나한테 잡혀. 경찰이나 우리가 함께 찾아나설 테니까. 그리고 너는"

최대광이 머리를 돌리고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유장수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 고향이 전라도지? 남도 쪽인 것 같은데, 너만한 체격이라면 흔치 않을 테니까 아마 몇 시간이면 네 집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 부모님 계시냐?"

최대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형제들도 있겠지?"

두 눈을 부릅뜬 최대광의 시선이 옆에 앉은 신용만으로 흘렀다가 구석에 펑그리고 있는 홍성희에게서 머물렀다. 눈동자를 반짝이며 앉아 있는 홍성희는 얼굴에 화색이 돌아와 있었다. 두 손이 등 뒤로 묶였으므로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치우려고 머리를 한쪽으로 휘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걸 풀어 그리고 용돈 받아서 돌아가. 내가 덕이 없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버릴 테니까. , 마지막 기회다."

유장수가 턱을 세우고 그들을 둘러보았다. 묶이지만 않았다면 아마 유장수가 그들을 취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신용만이 헛기침을 하면서 상체를 세우는데 최대광이 불쑥 나셨다.

"좇까는 소리 말고 돈 내여, 씨발놈아."

유장수가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최대광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린놈한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나를 죽여라. 그것이 너를 위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좇같이 이해할 수가 없는 말만 씨부리고 있고만. 돈만 주면 가겠다."

최대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져서라도 15천어치만 가져가면 되겠지. 야 임마, 월 해?"

"네놈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배를 하나하나 분질러 주마, 너회들 가족들도."

안방으로 들어가던 최대광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본 유장수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내 가족?"

몸을 돌린 최대광이 다가왔다.

"이런 비겁한 놈이 돈 없고 힘없는 우리 가족을 어떻게 하겠다구?"

손을 뻗쳐 유장수의 멱살을 잡은 최대광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래, 때려죽여라. 차라리."

이를 악문 유장수가 머리를 내밀며 눈을 감았다.

저금통장이 다섯 개 있었는데 모두 홍성희의 것이었고 합쳐 보니 35백만 원쯤 되었다. 최대광이 머리를 저었다.

"이걸 가져가면 안돼. 이걸 가져가면 강도질한 것이 된단 말이다."

"강도는 무슨 강도, 저놈 돈이나 마찬가지인데."

신용만이 응접실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방안에는 홍성희의 패물들도 꽤 있었으나 그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

"어쨌든 저놈은 지독한 독종이구만 죽는 것도 겁이 안 나는 모양인데."

신용만이 입맛을 다셨다.

"기집애 돈 35백을 떼내 가려고 목숨을 걸다니."

"이 자식이 이제 와서 무를!"

최대광이 눈을 부릅떴다.

"임마, 이 돈은 안 돼. 그리고 무순 목숨을 건단 말이냐? 병신같이!"

"아니, 그면떤 맨손으로 나간단 말이냐? 저놈한테 얼굴 좌악 팔리고"

최대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셨다. 응접실로 나오자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유장수가 머리를 돌렸다. 얼굴의 한쪽이 부어 있었는데 조금 전에 최대광한레 얻어맞은 자국이다. 그는 최대광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맛살을 찌푸린 채 시선을 비끼지 않았다.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던 것이다.

"네놈이 그렇게 독기를 부린다면 할 수 없지. 나도 막판이다."

응접실의 복판에 선 최대광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러닝셔츠를 입지 않았으므로 금방 육중한 상반신이 드러났다. 유장수의 눈이 조금 더 커지더니 두어 번 깜박였다. 반대쪽에 앉은 홍성희가 입을 반쯤 벌린 얼굴로 최대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대광은 바지를 벗어 내리고는 발끝으로 구석으로 밀어 던졌다. 그러자 당장 샅바만 차면 씨름판에 나설 차림이 되었다.

"이년이나 밤새도록 눌러 줄 테여."

팬티 차림으로 홍성희를 향해 돌아서자 짧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온몸을 오그렀다.

"아아, 살려주세요."

그녀의 입에서 이가 마주치는 소리가 났다.

"내가 너한테는 돈도 받지 않고 해줄 거여. 밤새도록 홍콩을 열 번쯤 오락가락하게 해주마."

최대광은 팬티를 끌어 내렸는데 아까부터 기세를 부리고 있던 그의 남성이 드러났다. 신용만은 문지방에 기대어 서서 최대광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아, ‥‥‥

최대광이 다가서자 홍성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괜찮여. 조금 있으면 너도 허리를 움직이게 될 거다, 틀림없어."

원피스의 옷깃을 움켜쥔 최대광이 두 손에 힘을 주자 원피스는 단숨에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두 팔은 뒤로 묶여 있었으나 다리는 묶이지 않았다. 최대광은 한팔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안고는 다른 손으로 팬티를 잡아 내렸다. 무릎까지 내려왔던 흰색 팬티가 찢어지면서 벗겨졌다. 두 무릎을 한사코 오므리려고만 하면서 홍성희는 입을 따악 벌리고 있다. 소리도 지르지 않는다. 두 눈만 찢어질 듯 홉뜨고 있을 뿐이다.

"가만있어 이년아, 곧 좋아서 죽여 달라고 할 거다."

소파에 그녀를 누이고 두 다리를 거칠게 벌리자 홍성희는 흐느껴 울었다 최대광은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다.

"그만 그만해, 이놈의 새끼!"

악문 잇사이로 유장수가 말했다.

"그만두란 말이다."

최대광은 머리를 돌렸다. 이미 그의 몸은 홍성희의 벌린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참이다. 짜증 난 얼굴로 최대광이 물었다.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해. 너도 보다시피 이런 때 그만둘 남자가 어디 있어?"

그의 남성이 홍성희의 부분에 닿아 있는 것이 신용만의 눈에도 보였다. 유장수가 다시 잇사이로 말했다.

"좋아, 돈 주마. 돈 주겠다, 이 새끼야."

유장수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최대광에게는 그가 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4. 외로운 결단

벽에 걸린 뻐꾹 시계의 뻐꾸기가 열 번쯤 울었을 때에 전화벨이 울렸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운전사다. 12시에 데리러 온 거다."

유장수가 말하자 신용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유장수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은 산용만은 벨이 울리고 있는 전화기를 든 채 한동안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그들 둘 사이의 볼에 끼워 넣었으므로 그쪽의 말이 함께 들렸다.

"여보세요."

유장수가 대답하자 사내가 말했다.

"사장님, 모시러 왔습니다."

"난 오늘 못 간다."

", 그럼, 내일 아침에 ‥‥‥‥

", 내일 아침에 집사람한테 가서 돈을 가져와야겠어, 여기로."

", 사장님."

"내가 집사람한테 이야기를 해놓을 테니까 통장 가지고 나와서 은행에서 만 원권으로만 찾아와라, 15천이다."

"15천요? ."

"큰 가방에다 넣어 와."

", 사장님."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11시까지는 와야 된다."

", 사장님"

"집사람한테는 내가 일 때문에 누굴 만나고 있는 것 같다고만 말해, 물어보면."

"염려 마십시오."

신용만은 전화기의 누름쇠를 눌러 통화를 끊었다. 달리 수상한 느낌은 없다.

"만 원짜리 묶음으로 하면 15천은 몇 묶음이나 되냐?"

벽 쪽에 있는 술병 진열장에서 내키는 대로 양주병을 꺼내어 병나발을 불고 있던 최대광이 불쓱 물었다. 얼굴과 목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그는 팬티만을 달랑 걸치고 있어서 우리에 갇혀 있다가 사람 사는 데로 튀어나온 털 없는 고릴라같이 보였다.

"150개다, 만 원권 뭉치로."

신용만이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참인데 유장수가 대답했다. 소파의 구석에 앉아 있던 홍성희가 힐끗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방에 들어가 바지와 긴 팔 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질기고 단단한 진바지로 갈아입은 걸 보면 아까 톡톡히 혼이 빠졌던 모양이었다.

"허어, 150개라."

물끄러미 유장수를 바라보던 최대광이 다시 병을 들어 올려 쿨쿨거리며 양주를 들이켰다.

"카아, 맛 좋네, 기가 막히고만,"

술병에는 XQ 마크가 보였고 손으로 쥐고 있기에는 거북했으나 최대광은 병 모가지 부분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없다."

신용만을 향해 유장수가 말했다.

"너희들, 몸조심해야 할 거다. 난 기어코 너희들을 찾아낼 테니까."

"지금이야 그렇지만 나중에 맞닥뜨리면 사장님도 조심하시오. 그땐 사정없이 손을 볼 테니까."

"어리석은 놈들, 너희들은 아직 잘 몰라. 그래서 이러겠지만."

"늙고 힘없으면 돈으로 때운다지만 너무 큰소리치지 마시오. 볼썽사납게."

", 화장실에 가야겠는데요."

홍성희가 입을 열었으므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최대광도 몸을 돌렀다. 그러자 홍성희의 얼굴이 와락 달아올랐다. 그녀가 신용만을 바라보았다.

"그려? 내가 데려다줄게."

최대광이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일어서자 홍성희는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아녜요, 아녜요."

"갑시다."

신용만이 일어서자 최대광은 다시 엉덩이를 내렸다.

"이봐, 자네 결혼했는가?"

유장수가 묻자 최대광이 입에서 술병을 떼었다.

"? 여자 빌려주려구?"

"결혼 안 했으면 다행이야, 그런 생각이 들어서."

"술 한 잔 줄까?"

"손이 묶여 있으니, 저기 위쪽에 내가 먹다 남긴 해네시가 있네. 그걸 먹여주게."

최대광은 찬장에서 둥근 몸통의 혜네시를 가져왔다. 그가 병의 주둥이를 내밀자 유장수가 입을 벌렸다. 두어 모금을 삼킨 유장수가 더운 김을 입 밖으로 밀어내었다.

"이런 술맛도 별미로군,"

최대광이 헤네시를 들어 서너 모금을 삼키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도 괜찮구만."

시계의 뻐꾸기가 뻐꾹 하면서 밖으로 한번 나왔다가 들어갔다.

", 일어나라, 열 시다."

신용만이 발길로 엉덩이를 내지르는 바람에 최대광은 눈을 떴다. 그의 발치에 유장수가 앉아 있고 응접실의 구석에는 홍성희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뒤로 결박을 지었더니 아프다고 해서 앞쪽으로 묶어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빨리 옷 입어."

최대광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는 하품을 했다. 새벽까지 양주를 세 병쯤 마셨는데 이것저것을 섞어 마셨으므로 머리가 조금 쑤셨다. 바지를 입고 셔츠의 단추를 끼는 최대광을 유장수가 찬찬히 바라보았다. 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난 최대광이 신용만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 너 월 해?"

"보면 몰라?"

흰 장갑을 꺼내 편 그는 두 손에 수건을 들고는 응접실의 이곳저곳을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지문을 지우는 거냐?"

"넌 어서 술병들이나 닦아, 임마."

"어이구, 차라리 불을 지르고 말지."

홍성희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눈은 조금 충혈되어 있었으나 아직도 밝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최대광은 잠자코 그녀에게서 머리를 돌리고는 장갑을 끼었다.

", 여기."

신용만이 던져준 수건을 받은 최대광도 술병들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비꼬는 발을 몇 마디 던질 줄로 예상했으나 유장수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유사장, 운전사더러 돈을 가지고 아파트로 올라오라고 해요."

방문의 손잡이를 닦으면서 신용만이 말했다.

"혼자 올라오라고 하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말끝에 힘을 주면서 신용만이 머리를 돌려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만일 허튼 수작을 하거나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거야."

술병을 닦던 최대광이 수건으로 싸쥔 술병 주둥이를 입에 넣고는 머리를 젖혔다.

"우린 사람 죽여 본 일은 없어.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라. 당신이 끝까지 깨끗하게 군다면 우리도 깨끗이 돈만 가지고 물러나겠어. 그리고 당신하고 숨바꼭질을 하게 되겠지, 죽느냐 사느냐 하면서."

신용만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일이 잘못되면 당신들 둘 모두 죽이고 떠나든지 죽든지 할 거야."

유장수는 그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방안과 응접실을 돌아다니며 대충 닦는 것을 마쳤을 때에 뻐꾸기가 울기 시작했다. 소파에 둘러앉은 네 명은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십 분쯤 지났을 때 전화벨이 울렸는데 홍성희가 벨 소리에 놀라 흠칫하고 머리를 젖히는 게 보였다. 수건으로 수화기를 감싼 신용만이 유장수와 얼굴을 붙이고는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사장님, 김시구입니다."

어젯밤과 같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 왔니? 돈 갖고 왔어?"

유장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사장님."

"혼자 왔니?"

최대광이 일어서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닙니다. 한동칠이하고 같이 왔습니다."

"가방 들고 너만 올라오거라."

", 사장님."

신용만이 서둘러 전화기의 누름쇠를 눌렀고 최대광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 사이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들이 타고 온 낡은 소형차는 주차장의 한쪽에 외롭게 서 있었다. 목을 뽑아 아래쪽을 굽어보자 유장수의 대형 승용차가 보였다. 사내 둘이서 검정색의 커다란 가방을 함께 들고 아파트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두 놈인데,"

문 앞으로 나가면서 최대광은 두 손바닥을 두어 번 부딪혔다. 신용만은 유장수와 홍성희의 결박을 확인하고는 홍성희의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이제는 두 다리도 동여매었으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길었다. 문 옆에 비껴 선 최대광은 놈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드디어 초인종이 울렸다. 신용만이 유장수의 어깨를 흔들자 유장수가 소리쳤다.

"들어와라."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본 최대광은 사내 한 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옆쪽에 자신이 했던 것처럼 붙어 서 있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문의 고리를 풀었다. 문이 열리자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단단한 체구였고 스포츠로 깎은 머리와 납작한 콧날은 주먹깨나 쓰는 사내라는 것을 금방 알려주었다.

"들어오시랍니다."

최대광이 말하며 문을 활짝 열고는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

사내는 아직 사태를 간파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한 손에 무거운 가방을 쥐고 있기도 했다. 최대광의 주먹이 그의 콧잔등을 찍고 두 손으로 코를 싸쥐는 사내의 허리춤을 번쩍 들고는 바로 밑의 현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사내는 금방 정신을 잃고 사지를 늘어뜨렸다. 사내를 끌어들인 최대광은 다시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다른 사내는 엘리베이터 입구까지만 가방을 날라 준 모양이었다.

", 빨리."

신용만이 방에서 꺼내 온 가방 두 개를 응접실에 던지며 말했다. 최대광은 기절한 사내의 몸을 묶고는 입까지 자갈을 물렸다. 그리고 얼굴을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장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잠자코 유장수에게 다가가 입에다 재갈을 물리고는 생각난 듯이 눈도 동여매었다. 가방에는 만 원권 뭉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신용만은 방에서 가져온 두 개의 가방에 돈을 쏟아 나누었다.

", 가자."

가방 한 개를 걸쳐 멘 신용만이 일어섰다.

 

문이 열리더니 이태규가 한 손에 서류철을 들고 들어섰다.

", 제군들. 이것이 여러분의 행로가 적혀 있는 서류일세."

그는 서류를 들어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박정환이 하나도 우습지 않다는 얼굴로 고영무를 바라보았고 김강섭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서류를 노려보고 있다. 이제 파견 날짜는 열흘 후로 다가왔다. 세계 30여 개국의 나라에 70여 개 지역으로 파견된다는 것만 알았지 회사는 철저한 비밀을 지켜 왔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각 개인의 적성과 능력을 컴퓨터에 입력시키고 나서 컴퓨터가 뱉어 놓은 결과이다. 이태규는 서류를 펼치지 않은 채 세 명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상품 3과에서는 세 명이 파견되는 것이다.

"나도 아직 이것을 열어보지 않았네. 컴퓨터가 오늘 아침 뽑아 놓은 것이다. 일성그룹의 1년 차 직원 380명이 이번에 출발하게 돼."

그들은 잠자코 이태규를 바라보았다. 고영무는 문득 자신들이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인 듯 느껴졌다. 전에는 회사에서 그렇게 전의를 불러일으켜 주기도 했었는데 의외로 출발 전부터 기가 꺾이는 사원들이 늘어나자 이제는 외국의 풍물과 신비스러움을 선전하는 방법을 쓴다.

"나는 여러분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 부디 몸이나 건강해서‥‥‥‥"

이태규는 계획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잠자코 있었으므로 이태규는 서류철을 열었다.

", 김강섭씨, 자네는 호주의 시드니로 떠난다. 여기 서류가 있다."

김강섭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사원들은 목적지가 될 10여 개의 지역에 대해서 샅샅이 외우고들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으나 미리 자신들의 목적지가 될지도 모를 지역들의 장점과 단점들을 조사해 놓은 것이다. 시드니는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일급지였다. 지사의 환경도 좋고 생활조건도 훌륭했다. 판매망도 확보되어 있었으므로 주말에는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근사한 여자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이태규는 싱글거리는 김강섭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도 덩달아서 밝은 얼굴로 축하해 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다시 서류 한 통을 꺼내어 펼쳤다.

"이건 박정환씨로군."

그는 머리를 들어 박정환을 바라보았다.

"LA."

"휴우!"

박정환이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 나서는 곧 얼굴을 졌다.

"고맙습니다, 과장님."

"내가 아니야, IBM이야."

"어쨌든요."

LA라면 한국인이 30만 명이나 있다. 그러고 보면 박정환의 누나가 LA에 이민 가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박정환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회사경비로 1년 휴가를 떠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LA에 파견된다면 그의 매형의 옷가게에 전자 계품을 늘어놓고 판매하겠다고 했었다.

", 고영무씨."

이태규가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자넨 콜롬비아의 보고타일세."

김강섭과 박정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들은 긴장한 얼굴로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이태규가 분주하게 서류를 펼치다가 머리를 들었다.

"보고타에 네 명이 가는구만. 우리 전자에서 고영무씨, 그리고 섬유에서 두 명, 자동차에서 한 명."

고영무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보고타는 작년에 쿠데타가 일어나 다시 군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는 숙청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밤에는 전 도시가 총성으로 빠진다고 들었다. 아직도 계엄령 상태였다.

"과장님, 보고타에 저희 지사가 있습니까?"

고영무가 묻자 이태규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멈추고는 한쪽으로 틀었다.

"글쎄, 작년 말까지는 있었는데, 종합 사무실로. 지금도 있으니까 그쪽으로 근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겠나?"

"그렇겠군요."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콜롬비아의 여자들이 미인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느릿한 고영무의 말에 이태규는 입을 조금 벌린 얼굴로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나도 들었어, "

이윽고 이태규는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보고타는 콜롬비아의 수도야, 남아메리카의 꼭대기에 있는 나라이고. 오른쪽에는 베네수엘라, 왼쪽 아래로는 에콰도르가 있어."

고영무가 술잔을 들고 말했다. 그의 앞에는 소주병이 네 개 세워져 있었는데 얼굴은 아직 멀쩡했다.

"콜롬비아는 마약의 산지로 유명하지. 미국에 공급하는 마약의 70퍼센트는 콜롬비아산이야."

그는 트림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쪽에서 포장마차의 주인이 그릇을 씻고 있을 뿐 손님은 그 혼자뿐이었다.

"섬유에 연락해 보았더니 보고타 파견이 결정된 사원 두 명은 사표를 내었다는군. 들리는 말로는 성적이 불량한 놈들이어서 회사 측이 사표를 받기 위해 보고타 파견 명령을 내렸다고 해."

주인이 허리를 펴고 그의 앞쪽 식탁을 넘겨다 보았으므로 고영무는 말을 멈췄다.

"안주 필요하신 것 있어요?"

곱상한 아주머니였으나 남자같이 걸쭉한 목청으로 물었다.

", 닭똥집 하나."

"아니, 거기 있잖아요? 손도 안 댄 것 같은데."

"그럼 꼼장어 하나요."

꼼장어도 두어 점 집어 먹었을 뿐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아주머니는 꼼장어를 씻으려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회사에서 날더러 사표 내라고 그러는 것일까? 장래성이 없는 놈이라구? 콜롬비아에 우리 전자제품을 판매한 실적이 작년에 20만 달러밖에 안 돼, 일성전자의 실적 2억 천만 달러 중에서 20만 달러, 그러면..."

고영무는 노란색 비닐 식탁 위에 나무젓가락으로 25천만을 써보았다. 글씨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동그라미를 각각 때어 보았다. 한참만에 계산이 끝났다. 1,250분의 1이다. 콜롬비아의 실적은 전체 실적의 1,250분의 1이었다. 고영무는 잔에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주머니, 술 한 병 더 줘요."

"아니, 도대체 ‥‥‥‥

아주머니가 허리를 폈다.

"혼자서 소주 네 병을 마시고 이렇게 끄덕없이 않아 있는 사람은 첨 봤네. 그런데 또 한 병 달라니‥‥‥‥"

"줘요, 어서. 술값 잊어먹지는 않을 테니까."

"괜찮겠수?"

술병의 마개를 따 그의 앞에 내려놓으면서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슨 고민이 있수? 왜 혼자서 말하고 그러우?"

"나는 그게 버릇이오. 어서 꼼장어나 줘요."

고영무는 유리컵에 가득 술을 채우고는 다시 꿀꺽이며 마셨다. 머리 윗부분이 무거워지고 있었으나 아직 정신은 말짱하다.

"나는 1,250분의 1 가치밖에 없는 것인가? 일본이 5천만 달러이면 5분의 1이다. 미국은 1억 달러니까 2.5분의 1이고. 그런데 나는‥‥‥‥"

천막의 한쪽 귀퉁이가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아주머니가 허리를 펴고 입을 벌렸다가 닫는다.

"자동차에서 파견될 놈은 갈지 안 갈지 모른다고 하더군. 그리고 보고타 지사는 지사원 한 명만 남아 있다는 거야, 가족들은 모두 철수시키고."

고영무는 젓가락을 들어 식어 버린 닭똥집을 집어 씹었다. 닭똥 냄새가 났다.

"조대리는 날보고 아무 소리도 안 하더란 말이야. 축하한다고는 미안해서 못하겠지만 기운 내라는 말도 안 해, 70개 지역에서 제일 악질적인 곳으로 가게 되었어. 그래, 앙골라보다 더해. 그 나라는 유엔군이나 들어와 있지."

아주머니가 꼼장어 접시를 그의 앞에 내려놓고는 식은 꼼장어 접시를 집어갔다. 데워 줄 모양이었다.

"조대리도 내가 그만두기를 바라는 모양이야, 아무 말도 않는 것이. 다른 놈들도 모두 그래. 날 쳐다보고는 그냥 웃기나 한단 말이야. 꼭 웃기는 하더구만, 괜히 미안해서 그러는 모양인데.“

고영무는 술잔에 남은 술을 채우고는 잔을 기울여 깨끗이 마셨다.

"그려, 너희들은 나를 찬밥으로 내몰았어. 1,250분의 1 지역으로. 알았어."

고영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이구, 괜찮으슈?"

아주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맥주잔으로 냉수 마시듯 쇠주를 마시면 몸에 해로울틴디."

"얼맙니까?"

"25천 원, 꼼장어 한 접시 값은 안 받을라요."

고영무는 셈을 치르고 포장집을 나섰다. 밤 열두 시가 넘어있었다. 아래쪽 아파트의 불빛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으나 좌측에는 신축 공사 중인 아파트여서 곁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고영무는 비틀거리며 불빛을 향해 걸었다. 도로에서 들어간 샛길이었고 차량 통행이 금지된 지역이었다. 발끝에 공사장에서 묻어 나온 함석 조각과 나무판자들이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택시에서 무작정 내려 공사장 사이에 있는 포장집을 보고 들어온 것이므로 위치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아파트 앞의 환한 길로 내려서면 택시가 있을 것이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고영무는 문득 입을 벌려 커다랗게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의 18번이었다. 즘처럼 노래 같은 것을 모르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언젠가 이 노래를 불렀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향은 내륙지방인 청주였다.

"그 파란 무울 눈에 보이네."

고함치듯 노래를 부르던 그의 눈에 빌딩의 안쪽에서 반짝이는 불똥들이 보였다. 담뱃불이었고 서너 개는 되었다.

"좋다."

누군가가 그의 노래에 맞추어 소리쳤고 이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보고파라 보고타."

보고파가 보고타가 되었다. 고영무는 비틀거리면서 웃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네 명의 사내들이 시멘트 부대 위에 앉거나 서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십 대 초반이나 스무 살 안짝의 동네 아이들이다.

"아저씨 기분 좋으셔."

사내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너회들 집에 들어가, 어서."

그들 앞에 선 고영무가 말했다.

"애들은 집에 들어가 자거라."

"뭐 애들?"

담배 불똥이 포물선을 그으며 그의 발밑에 떨어졌고 사내들이 주섬주섬 일어섰다.

", 이 새끼, 손 좀 보자."

고영무는 성큼거리며 사내들의 사이로 들어선다. 그들은 미처 몸을 가누기도 전이다. 그의 발길이 번쩍 들리면서 앞에 선 사내의 배를 찍었고 몸을 돌리면서 그의 주먹이 옆쪽 사내의 관자놀이를 쳤다. 그리고는 두 발로 땅을 짚자마자 껑충 뛰어올라 두 팔을 벌리고 멍청히 서 있는 사내의 턱을 올려 찼다. 순식간에 세 명의 사내가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들의 입에서 꺼져갈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 한 명이 짙은 어둠에 싸인 공사장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야!"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면서 고영무는 두 팔을 내밀며 사내 쪽으로 달려갔다.

"아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사내는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씨근거리며 사내를 내려다보던 고영무는 몸을 돌렸다. 다시 샛길을 내려가면서 고영무는 노래를 시작했다.

"보고파라 보고타."

그는 보고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식집은 점심시간이어서 언제나처럼 북적이고 있었다. 회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근처에 사무실도 드물었는데도 이렇게 북적이는 걸 보면 자신들과 같은 생각으로 원정 온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젠장, 요즘은 식당을 해야 돼. 뭐니 뭐니 해도 먹는 장사가 제일이야."

겨우 구석자리를 잡아 앉자 박정환이 투덜거렸다.

"시드니 가지 말고 식당 하지 그래?"

이자영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난 그녀는 다가온 아줌마에게 초밥 2인분을 시켰다.

"초밥 괜찮지?"

아줌마가 등을 돌리자 이자영이 식탁 위에 턱을 고이고 물었다.

"상관없어, 초밥이나 김밥이나."

박정환은 물수건을 내던지고는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자동차에서 보고타로 파견될 사원은 자동차 측에서 보류시켰다던데, 그렇다면 고영무씨 한 사람뿐이야."

"보고타가 어때서? 물가도 싸고 혼혈 미인들이 많다던데."

"농담할 일이 아냐."

박정환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자영씨는 가만히 보면 고영무한테 감정이 있는 사람같이 보여, 눈치가."

"내가?"

이번에는 이자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왜? 난 그 친구한테 감정이네 뭐네 느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그 친구의 적성에 맞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적성에 맞다니? 계엄령이? 폭탄 테러가? 밤거리의 총격전이?"

"어차피 그곳에도 사람이 살아, 상사원들이 거래를 하고. 회사에서는 그곳에 고영무가 적합하다고 판정했고."

"그건 당신 생각이야."

"나는 다른 사람 일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박정환씨가 이상하게 보여. 그쯤 해두고 이제 웃어 봐."

"웃어? 내 참."

그랬으나 박정환은 결국 얼굴에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까 고영무의 인사고과가 나빴어. 입사성적도 좋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해."

이자영이 물잔의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입사성적이 나쁜 것은 나도 알고 있었는데 인사고과는 그 빌어먹을 놈 장용구가 계속 조대리한테 씹은 모양이야. 같이 일하기 힘들다고."

"얼마 전에 고영무가 장용구를 옥상으로 데리고 갔었어, 근무시간 끝나고."

이자영이 눈을 치켜떴다.

"나만 알고 있었는데, 30분쯤 있다가 둘이 내려오더군. 그 후로 장용구는 고영무에게 말도 건네지 않아. 일도 시키지 않고, 얼굴 마주치지도 않으려고 했어."

"어쩐지."

"내 생각엔 옥상에서 몇 대 두들긴 모양이야, 그 우직한 친구가."

"딱하게 되었어. 조대리나 이과장은 고영무가 안 가겠다면서 사표를 낼 줄 알았던 모양인데 가겠다고 교육을 받으니까 말이야. 사지(死地)에 던져 놓은 것 같아서 이제는 그들이 당황하고 있어."

"그렇게 심해?"

"지금 한 명 남아 있는 주재원도 철수시키느냐 어쩌느냐 하는 형편이래. 시장조사부에 있는 선배한테 들었어."

초밥이 왔으므로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오늘은 이자영이 점심을 사기로 한 날이었다.

"고영무는 열심히 교육을 받고 있어,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책들도 사고. 어제는 점심시간에 태극기를 사러 간다고 나가던데."

"태극기는 왜?"

"나도 몰라."

그들은 한동안 먹는 일에 몰두한 것처럼 보였다. 이자영이 깨작거리던 젓가락을 세우고는 얼굴을 들었다.

"다 제 팔자야, 인과응보라구."

박정환이 입안에 든 음식물을 삼키는 동안 눈을 번들거리더니 겨우 물었다.

"? 갑자기 원 자다가 봉창 뜬는 소리야."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다는 이야기야, 못 알아들어?"

"이건 도무지."

입맛을 다시던 박정환이 더 이상 말을 꺼내기도 싫다는 듯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김학래 사장은 오십 대 중반으로 일성전자의 창립 공신이었다. 30년 전에 일성그룹이 전자 사업을 시작할 때에 말단 사원으로 인부들과 함께 공장의 벽돌담을 쌓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기계의 배열에서부터 신제품의 연구, 시장개척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그는 일성그룹 박재룡 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장 중의 하나였다. 김학래 사장은 서류에서 머리를 들고는 앞에 앉은 오탁근 부장과 이해규 과장을 바라보았다. 눈 밑이 커다란 눈물주머니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래, 이 사람, 보고타에 간다고 하던가?"

그가 굵은 목청으로 물었다.

", 사장님, 지금 열심히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오탁근 부장이 서두르듯 대답했다.

", 그래? 보고타의 사정은 이 사람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과장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김학래가 이태규 쪽으로 머리를 돌렀다.

"이 사람의 인사고과가 좋지 않구만. 동료 사원들하고 불화가 있다구? 선배 사원들하고 말인가?"

", 그것이 ‥‥‥‥"

이태규가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팀워크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선배 사원들이 고영무에게 업무를 시키기를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

이태규가 잠시 말을 멈추고 오탁근을 바라보았다

"그 이유가 원가?"

재촉하듯 김학래가 물었다.

", 고영무가 지시를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지시?"

"업무지시 말씀입니다."

김학래가 이맛살을 찌푸렸으므로 이태규는 당황하여 두 눈을 깜박였다.

"예를 들어서 기안을 올리라고 지시를 했는데도 일부러 늦춘다든가 또는 반발하여 지시를 따르지 않는‥‥‥"

"그래서 그 선배나 대리급의 보고를 받고 이렇게 인사고과를 썼나?"

긴장으로 굳어진 이태규는 숨을 죽였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인 것 같군."

", 아무래도 조직은 엄연히 위계질서가 확립되어야 하니까요."

오탁근이 거들자 이태규는 소리죽여 숨을 내쉬었다.

"보고타로 개척 요원이 네 명 선발되었는데 두 명은 사표를 내었고 한 명은 자동차에서 보류를 시켰어. 대가 약한 놈들이야."

김학래는 머리를 저었다.

"젊은 놈들이 기개가 없어, 용기도 없고. 귀찮고 어려운 일은 싫어하고, 위험한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오탁근과 이태규가 똑같이 머리를 끄덕였다.

"보고타에 주재원이 한 명 남아 있는데, 일성무역의 주재원이야. 그 친구도 다음 주에 귀국한다는군. 무역의 장사장이 그래 ."

"이 친구가 혼자 가서 생활하게 되겠어."

김학래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으므로 오탁근과 이태규는 섣불리 맞장구를 치지 않은 채 잠자코 있었다.

"내막을 알고 보니까 이 사람을 자네들의 상품부에 남겨 두어도 문제가 많겠군. 안 그래?"

", 문제라기보다도‥‥‥

이태규가 용기를 내었다.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직접 고영무를 겪어 보지도 않고 선배 사원들의 보고에만 의존하여 고과를 매긴 책임도 있었다.

"회사 사정이 그렇다면 제가 데리고 있으면서 잘 교육시켜서..."

"보내."

김학래가 잘라 말하고는 서류를 덮었다.

"보고타로 보내, 거기 가면 윗사람도 없을 것이고 말 듣느냐 어쩌느냐 나무랄 사람도 없겠지. 가서 뛰어 보라고 해. 그놈의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잠잠해지면 지금 귀국해 있는 지사장과 주재원들을 다시 보낼 테니까 그때까지 사무실하고 회사 재산을 지키는 일도 큰일이야. 한 사람이라도 회사에 남아 있으면 회사가 남아 있는 것이지. 일성그룹이 보고타에 있는 거야."

"잘 알겠습니다."

오탁근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책상 위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빼내면서 김학래가 물었다.

"어떻게 교육시키겠다구?"

", 긍지를 가지고 회사를 지키도록."

"저런."

이맛살을 찌푸린 김학래가 머리를 젓자 오탁근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부장은 순진하군. 그놈에게 네가 유일한 주재원이니, 네가 일성그룹의 대표자니, 그렇게 말해 주면 안 돼. 쓸데없는 공명심을 넣어 줄 필요가 없단 말이야. 주재원이 마침 임기가 차서 잠시 귀국해 있는 동안 회사를 관리하라고만 해도 돼. 무슨 말인 줄 알겠나?"

", 잘 알겠습니다."

오탁근과 이태규는 동시에 머리를 숙였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문 김학래가 머리를 돌리고 다시 서류를 펼쳤으므로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태규는 어둡고 답답했던 가슴이 사장의 몇 마디 이야기로 시원하게 뚫린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개운한 것이다.

 

", 빨리 보따리 싸."

수화기를 내동댕이친 신용만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초점이 잡혀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무슨 일이야?"

최대광이 베개에서 머리를 떼었다. 머리칼이 부스스 일어나 있었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술을 마신 것이다.

"이 자식아, 빨리, 오종문이가 잡혔어."

최대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 회전이 조금 늦는 그도 오종문이 누구한테 잡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신용만이 다시 방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소리쳤다.

"시간 없다. 오늘 아침에 잡혔다니까 놈들이 전화번호를 추적해서 이곳으로 온다."

최대광은 가방을 끄집어내고는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짐 싸는 것은 금방이었다. 옷가지 몇 벌뿐이었기 때문이다. 가방을 들고 응접실에 나간 최대광은 입맛을 다시며 한동안 서 있었다. 신용만은 이곳에서 일 년이 넘게 살아왔기 때문에 오디오도 있고 비디오도 있다. 얼마 전에는 TV30인치짜리도 바꿔 놓았다. 신용만이 TV도 들었다가 내려놓았는지 한쪽으로 배딱하게 기울었고 코드도 빠져 있었다. 오디오는 이미 응접실 가운데로 이동되어 있다.

", 이 자식아! 옷만 몇 벌 가지고 나와!"

안방에서 우당탕거리는 신용만에게 소리쳤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루를 중중 울리며 최대광은 안방으로 들어가 살림살이를 몽땅 끄집어내고 있는 그의 뒷멀미를 잡았다.

"이삿짐센터를 부를래? 이 미련한 놈아?"

그가 신용만을 미련한 놈이라고 부르기는 처음이다.

"빨리 옷하고 돈이나 챙겨!"

신용만이 핏발선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십 분쯤 후에 그들은 연립주택의 열쇠를 잠그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승용차는 현관 입구에 얌전히 세워져 있다. 그들은 제각기 커다란 가방 한 개씩만 들고 있었으므로 차의 뒷좌석에 가방들을 던져 놓고는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지?"

시동을 켜면서 신용만이 묻자 최대광이 입맛을 다셨다.

"젠장, 어쨌든 이곳을 나가자."

연립주택의 앞길을 빠져나와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나을 때까지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최대광이 머리를 돌렸다.

", 내가 재작년에 LA로 시합하러 갔을 때 한국 돈을 가져갔었단 말이다. 거기서도 쓸 수 있던데, 가게에서도 받아주고." .

신용만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 가져갔니?"

"20만 원, 아니 25만 원인가?"

신용만이 머리를 돌렸으므로 최대광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자식, 어떻게 해서 오종문이를 알아내었지?"

최대광이 생각난 듯 다시 물었다. 오종문은 그들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내였다. 유장수의 집을 나온 지 딱 사흘 밤이 지났을 뿐이다. 그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차는 신호에 걸렸다가 달리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신용만은 아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하지 못했고 다행히도 최대광은 다시 묻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유장수는 돈을 강탈당한 것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돈을 포기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용할 수 있는 모든 부하들을 풀어서 자신의 손으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백번 낫지 그들에게 잡히면 잔인하게 당하리라는 것을 신용만은 알고 있었다. 아마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유장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을 찾고 있었다.

", 그 아줌마한테 전화를 해봐야 하지 않어?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어깨를 늘어뜨린 최대광이 그를 바라보았다.

"안돼, 이젠 위험해."

신용만이 머리를 저었다.

"놈들이 이제 그쪽까지 닿았을 거다."

달러 장수 아줌마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일차로 천만 원을 달러로 바꿨는데 내일은 5천만 원을 바꾸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아줌마의 말대로라면 한 열흘 있다가 10만 달러쯤 여유가 생길 것이라니까 15천을 바꾸려면 앞으로 10여 일은 더 있어야 했다.

", 어쨌든 홍콩으로 가자. 돈을 바꾸건 못 바꾸건."

신용만이 불쓱 말했다.

"아무래도 한국은 위험해. 이러다가 놈들하고 부딪치겠어."

최대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돈은 어떻게 하고?"

지금 그들에게는 현금만 17천이 있었다. 15천에서 5천만 원을 원래의 채권자인 안상규에게 주기로 되어 있었으나 목숨을 내놓고 있는 형편이어서 주지 않기로 둘이는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어디 땅속에다 묻어 두든가, 은행의 비밀금고에 맡기든가 해야지."

"대광이 너, 집에다 돈 보내주었어?"

최대광이 머리를 끄덕였다

", 천만 원. 내 씨름단 퇴직금이라고 했어. 어머니가 울더라."

"더 보내드리지 그랬냐? 3천쯤, 너야 또 벌 수 있는데."

"천만 원이면 돼, 그 돈이면 우리 식구 2년은 살어."

신용만은 차를 한적한 길가에 세웠다. 무작정 달리는 것 같았지만 차는 어느덧 교외로 나와 있었다. 안양 근처의 아파트 지역이었다.

"신세가 처량해졌구만, 갑자기.."

승용차 앞으로 지나가는 동네 꼬마들을 바라보면서 신용만이 말했다.

"그놈이 이렇게 빨리 들이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것도 다행히 아침 일찍 오종문이한테 전화를 해보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은 연립주택이 피바다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오종문의 사무실에 전화를 하자 여직원이 흐느껴 울었다. 30분 전에 사내들에게 끌려갔다는 것이다. 용역회사에 근무하는 여직원이라 경찰인지 아닌지는 금방 구분을 한다. 그녀는 오종문이 조직원들한테 끌려갔다고 했던 것이다.

",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최대광이 한숨 쉬듯 말했다.

"밥 먹으면서 상의해 보자."

 

"너희들이 웬일이냐? 날 보자고 하고?"

고영무가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반팔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 차림이었다.

"어쨌든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

최대광과 신용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형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갑자기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공손한 말은 신용만이 나았으므로 이런 때는 그가 나선다.

"집에서 쉬시는데 방해를 해서‥‥‥‥

"쉬다니, 내가 노인이냐? 아직 열 시밖에 안 되었어, 저기 아파트 앞에 전에 우리가 마셨던 데로 가자."

고영무는 밤 열 시에 집 앞에서 전화로 불러내는데도 그저 반갑기만 한 모양이었다. 최대광은 앞장서서 아파트를 나서는 고영무가 마음에 들었다. 고영무를 생각해낸 것도 자신이었다. 믿을 놈이 한 놈도 없다고 둘이서 낙담하고 있던 차에 최대광은 고영무를 생각해냈던 것이다. 신용만도 고영무를 떠올리자 이의가 없는 모양이었다. 둘이는 안양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자 고영무의 아파트로 찾아온 것이다.

", 마시자."

전처럼 오징어와 국물 한 접시에 소주만을 시키고는 각자의 앞에 물컵을 놓았다. 소주 한 병이면 두 잔이 겨우 된다. 그들의 잔에 술을 따르고 난 고영무가 술잔을 들었다. 전에는 찔끔거리던 신용만도 오늘은 단숨에 물컵을 비웠다.

"용만이가 술이 늘었구나."

고영무가 그를 향해 웃었다

"어쨌든 잘 왔다. 곧 나도 외국으로 떠나게 되어서 너희들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어."

"어디로요?"

신용만이 대뜸 물었고 마악 입을 벌리던 최대광이 그 모습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고타야, 콜롬비아의."

"콜롬비아!"

신용만이 최대광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이내 다시 물었다.

"거기가 남미 아닙니까? 브라질 쪽."

"그렇지, 위쪽이지만."

"언제 가시는데요?"

"일주일쯤 후에."

"형님, 저희들도 따라가면 안 됩니까?"

신용만이 물었고 최대광도 머리를 끄덕이며 고영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희들이 왜?"

그제서야 고영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잔에 술을 따르다 말고 술병을 든 채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있니?"

", 그것이 형님, ‥‥‥‥"

헛기침을 하고 나서 입을 열려던 최대광의 말을 신용만이 가로채었다.

"저희들도 어디 여행이나 가려고 했거든요. 몸도 쉴 겸, 구경도 하고, 그런데 마침 형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까 잘되었지 뭡니까? 따라가서 ‥‥‥‥"

"저희들은 여행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려고 왔는데 참 우연이군요, 형님도 떠나신다니."

"그것 잘됐구나. 하지만 콜롬비아는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내란이 일어나고 있어. 전쟁 중이나 마찬가지야. 여행을 가려면 미국이나 유럽, 아시아 쪽도 좋지,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나아. 요즘 콜롬비아로 들어가는 관광객은 거의 없다."

"그런데 형님은 왜 갑니까?"

최대광이 묻자 고영무가 벙긋 웃었다.

"나야 회사원이고 회사에서 가라고 하니까, 너희들하고는 다르지."

"형님."

신용만이 의자를 바짝 잡아당겨 앉았다.

"저희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짐을 정리한 것이 있는데요, 부피는 얼마 안 돼요. 그것을 형님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상의도 하구요."

최대광이 서두르듯 물컵에 소주를 따르더니 벌컥이며 들이켰다.

"? 그거야 우리 집에 갖다 놓아도 된다. 내가 이야기를 해놓을 테니까, 그런 건 걱정 말아."

"형님, 그것이 ‥‥‥‥"

신용만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당은 주인아줌마도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려서 그들 넷밖에 없다.

"그 짐이 돈인데요, 15천쯤 됩니다."

고영무는 술잔을 내려놓고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 돈, 나쁜 짓 한 돈이냐?"

"아닙니다, 나쁜 것 아닙니다."

머리를 저으며 신용만이 말했다.

"나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고개를 돌린 고영무가 최대광을 바라보았다.

"나쁜 짓은 안 했어요, 형님."

어깨를 늘어뜨린 최대광이 대답하자 고영무가 신용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찰한테 쫓기고 있는 거냐?"

"경찰이 아니라 조직에서."

"조직?"

고영무가 눈을 치켜떴다.

"어떤 조직?"

신용만이 입맛을 다신다. 최대광은 술잔을 쥔 채 머리를 들지 않았다. 신용만이 말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 콜롬비아? 남미에 있는 나라 말이냐?"

어머니는 대뜸 남미의 콜롬비아를 알아맞추었다. 빈 찻잔을 들고 자리에서 마악 일어나려던 참이었는데 어머니는 다시 앉았다.

"그 나라, 쿠데타가 일어났지 않아? 신문에서 보았다, 언젠가."

"끝났어요.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몇 명이 가는데?"

"나까지 일곱 명쯤 돼요."

"살기는 괜찮은 나라야?"

"그럼요, 기후도 좋고 사람들이 착하다고 해요."

어머니 앞쪽에 앉은 아버지를 바라보았으나 아버지는 신문을 펴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동안이라더냐?"

"6개월에서 1년이래요. 실적이 좋으면 6개월 만에 돌아올 수도 있구요. 하지만 1년은 채워야 할 것 같아요."

"1년이나!"

어머니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 안에 휴가 나을 수는 있겠구나?"

"나을 수야 있지요. 그렇지만 조금 멀어서..."

"비행기로 몇 시간인데?"

"아마 열대여섯 시간."

아버지가 신문을 내리고는 고영무를 힐끗 바라보았다. 비행기로 스물대여섯 시간이 걸리는 여정이다. LA와 멕시코시티를 거쳐 보고타로 비행하는 코스가 제일 빠르다. 비행기를 두 번 갈아 타야 하는 것이다.

"에이그, 젊어서 외국 바람 쐬이는 것이 좋다고는 하더라만."

가랑비에 옷을 적시듯이 한 달쯤 전부터 꾸준히 어머니를 세뇌시켜 왔다. 이제 어머니는 고영무가 외국에 나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두운 얼굴로 어머니가 쟁반을 들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고영무는 소리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타가 계엄령 하의 도시이고 해가 지고 나서 거리를 돌아다니면 생명이 위험하고, 대낮에도 시외로는 나갈 수도 없으며 일성그룹의 지사는 폐쇄 직전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알 리가 없었다. 고영무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향해 싱긋 웃었다.

"네가 자원했느냐?"

아버지의 목소리에 고영무는 깝짝 놀라 머리를 돌렸다.

"? 자원요? 아닌데요, 그냥."

"회사에서 발령이 났어?"

고진호씨는 신문을 내려놓았다.

", 컴퓨터가 뽑아낸 것이에요."

"일곱 명이 간다구?"

"."

시선을 비린 고영무가 옆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다 들었을 것이다. 전처럼 아무 소리 안 할 줄 알았는데 오늘은 다르다.

"카스틸로인지 뭔지 군부의 독재자가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모양이야. 지방에서는 반란 세력이 일어나고, 위험한 나라인데."

"하지만 아버지, 그래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그리고 거래도 이루어지구요."

아버지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남들이 안 가려는 데를 가야 돼요. 저한테는 그런 곳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 가려고 하더냐?"

"일곱 명이라면서?"

고영무는 머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속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다.

"네 명 발령 났는데 모두 사표를 내거나 보류시키고 저 혼자 가요."

"한 명 남아 있는 주재원도 제가 가면 저한테 인계하고 귀국할 겁니다. 내란이 끝나면 다시 들어오겠지요."

"회사에서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표 내고 안 갈 줄 알았던가 봐요. 간다고 했더니 놀라는 눈치던데요? 저는 졸지에 지사장 직무대리가 되었어요."

고영무가 빙긋 웃었으나 아버지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서 무슨 일을 한다구?"

한참 만에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그는 주방에 있는 어머니를 의식해서인지 고영무 쪽으로 머리를 조금 숙이고 있다.

"전자제품 판매지요. 시장조사도 하구요. 그쪽은 전자제품 시장이 아직 초급단계여서 한국에서 5년 전에 잘 팔렸던 여러 가지 스타일이 먹힐 것 같다고 해요."

"아버지,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 저는 가겠어요. 문제없어요."

"기회가 있으면 잡아라. 생각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해라."

이윽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는 고영무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절대로 놓치지 말아라. 망설이지도 말고."

", 아버지."

자세를 바로잡은 고영무가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남한테 무시당하지 말아라. 너를 그런 오지로 내쫓은 놈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어라."

"아버지, 그것은 컴퓨터가‥‥‥‥

고영무는 아버지의 눈빛을 바라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내 아들을 제일 잘 아는 것은 나다. 여기 있는 애비야. 너는 남들에게 밀려날 놈이 아니다."

", 아버지."

"몸조심하고."

아버지는 신문을 다시 펼쳐 들었다. 쟁반 위에 과일을 담아 들고 어머니가 다가왔다.

"오늘따라 부자간에 웬 이야기가 그렇게 길어?"

어머니의 표정은 밝았다. 속에 있는 것을 몽땅 뱉어내야 시원해하는 성격이었고 그러고 나면 금방 잊는 어머니였다. 고영무는 힐끗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신문으로 상반신을 가린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보면 아버지한테서 이렇듯 길게 이야기를 들은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출발이 이제 내일로 다가왔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어서 며칠 동안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고 이따금씩 빗발이 쏟아졌다가 그친다. 오늘은 아침부터 가랑비가 뿌리더니 퇴근 시간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고영무는 깨끗하게 치워진 책상 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박정환과 김강섭은 한 시간쯤 전에 인사를 마치고 퇴근해 버렸다.

"고영무씨, 이젠 집에 들어가 봐. 오늘은 가족하고 함께 있어야지."

어느 틈엔지 다가온 이태규가 옆에 서서 말했다. 고영무가 빙긋 웃었다.

", , 그거야‥‥‥‥

"내일 몇 시 비행기야?"

"오후 한 시 반입니다."

"여권하고 비행기표는 받았지?"

", 환전도 끝났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사장에서부터 전무, 부장에 이르기까지 두루 인사를 마쳤다. 이제는 과 내의 선배들에게 인사만 마치면 되는 것이다.

"그림, 저 다녀오겠습니다."

고영무의 책상은 신입사원이므로 맨 앞쪽에 있었다. 몸을 돌리면 모두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그들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꺾자 누군가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서너 사람이 따라 쳤고 옆쪽의 상품 2과나 1과에서도 이쪽을 바라보더니 몇 사람이 따라서 손뼉을 쳤다. 넓은 사무실 안에 잠시 동안 손뼉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은 모두 고영무가 어디로 떠나는지를 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도 있고, 다가와서 어깨를 치는 다른 과의 대리도 있었다.

", 그만, 그만."

이태규가 웃으며 손을 젓자 모두들 다시 하던 일을 시작했고, 이태규와 조정수에게 양쪽 팔이 잡힌 고영무는 사무실을 나왔다.

"고영무씨, 건강이 제일이야. 몸 관리나 잘해, "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이태규가 불쑥 말했다.

"실적에 구애받을 것 없어. 몸조심이나 하고 돌아와."

그는 분명 빗나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것을 느꼈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돌아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친김에 그렇게까지 말하고는 이태규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정수가 힐끗 이태규를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럼, 과장님, 대리님, 안녕히 계십시오."

고영무가 허리를 접자 그들도 따라서 머리를 숙였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고영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인사를 모두 마친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장수는 술잔을 들면서 벙긋 웃었다.

"제깐 놈들이 노는 곳은 뻔해. 조만간에 내 손안에 들어올 거야."

입안에 양주를 털어 넣은 그는 앞에 앉은 장규식을 바라보았다.

"공항 컴퓨터에 그놈들의 신상이 분명히 입력되었겠지?"

"물론입니다."

"놈들은 내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 신문에도 나지 않았고 사건 발생 구역인 강남서에서 찾고 있지도 않으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장규식이 머라를 끄덕였다. 광주 출신인 그는 최대광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후배 하나가 씨름하는 후배라고 데려와 인사를 시켜주었던 놈이었다. 후배의 후배여서 그 후로는 접촉할 기회가 없었으나 막상 이런 일이 터지고 나자 유장수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 것이다.

직 세계의 원로인 유장수의 오른팔인 그로서는 이번 사건을 해결해야만 했다. 더욱이 고향의 후배뻘 되는 놈이 일으킨 사건이다. 그놈이 조직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쪽에 대한 일은 자신의 몫이었다. 장규식이 머리를 들었다.

"놈들은 오종문이하고도 연락을 끊었습니다만, 오종문 옆에 애들 두 명을 붙여 두었습니다."

유장수가 언짢은 듯 입맛을 다셨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장규식이 십여 명의 부하들을 끌고 연립주택에 쳐들어 갔을 때에는 이미 두 놈은 사라져버린 후였다. 집안은 놈들이 급하게 도망친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세간살이를 들어 옮기려다가 모두 팽개쳐두었고 옷가지들도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쪽에서 오종문을 찾아간 것을 놈들이 알았던 것이다. 유장수가 입을 열었다.

"산 채로 잡아야 돼. 그리고 경찰이 채 가면 안 돼. 무순 말인지 알겠어?"

"압니다, 사장님."

장규식은 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체중이 백 킬로가 넘었으므로 움직일 때 땀이 많이 나는 편이었다. 벌써 닷새째 만사를 제쳐놓고 이 일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피로하기도 했다.

"서울과 부산, 제주 공항과 인천, 부산, 제주의 국제선 항구에도 애들을 풀어놓았습니다. 컴퓨터가 찍어내면 바로 애들에게 연락이 됩니다."

"놈들이 돈을 천만 원밖에 못 바꿨어, 나머지는 가지고 있을 거야."

"아마 그럴 겁니다."

"돈이야 찾으면 모두 애들한테 나눠주겠다. 나는 놈들만 있으면 돼."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유장수는 잔에 술을 따르고는 다시 단번에 삼켰다. 온몸을 결박당한 채 유장수가 발견된 것은 오후 두 시가 넘어서였다. 밖에서 기다리던 부하가 기다리다 지쳐서 전화를 했고 대답이 없자 경비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던 것이다. 유장수는 부하들과 홍성희의 앞에서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이런 모욕을 당해 본 적이 없다. 그는 놈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떨렸다. 그리고 곰과 고릴라를 합해 놓은 것 같은 놈을 생각하면 살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지곤 했다. 청산 나이트클럽 안쪽에는 밀실이 있는데 고급손님을 받는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그 밀실 중의 하나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바깥의 홀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놈이 제 에미한테 천만 원을 보내준 걸 보니까 집에는 들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놈 에미나 동생들이라도 잡아 와."

잠자코 있던 유장수가 입을 열었다.

"제놈이 나타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안 그래?"

"그렇습니다. 사장님."

"또 다른 한 놈, 그놈 이름이 뭐했더라?"

"신용만입니다."

"그놈은 가족이 없다면서?"

", 직계가족은 없습니다. 중학 때까지 고모 집에서 자라다가 뛰쳐나와서 고학을 한 놈인데."

장규식은 다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중국집 배달을 하면서 야간대학을 마치고 공무원 생활을 한 놈입니다. 방배동의 동사무소에서 일 년 동안 근무한 것이 그놈의 경력이더군요. 전과는 없습니다."

"나아 참."

유장수는 입맛을 다시더니 술잔을 집어 들었다. 목이 타는지 장규식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 모금에 삼키고는 살며시 잔을 내려놓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에 뚫린 구멍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이쪽을 내다보고 있다.

"나다."

고영무는 구멍을 향하여 웃어 보였다. 문이 열리고 신용만이 한쪽으로 비껴섰다.

"형님, 일찍 오시네요."

", 회사 끝나고 바로 오는 길이야."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자 최대광이 방에서 나오다가 그를 향해 머리를 숙여 보였다. 고영무가 텅 비어 있는 응접실의 바닥에 앉자 그들도 말없이 앞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신축 아파트여서 벽에서는 페인트 냄새가 났다. 고영무의 부친인 고진호씨가 집을 옮기려고 사둔 아파트에 그들은 어제부터 들어와 살고 있었다.

"여기 은행의 비밀금고 열쇠가 있다. 비밀번호하고."

고영무는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열쇠와 종이쪽지를 꺼내어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돈은 이제 안전하다. 그렇지만 너희들의 안전이 문제인데."

"저희들이야 뭐, 어떻게 되겠지요."

신용만이 대답하였으나 표정은 어두웠다. 최대광은 머리를 숙여 응접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난 내일 오후에 떠나는데 너희들이 걱정이 되어서..."

"내가 우리 부모님한테는 잘 말씀드려 놓았어. 가을에야 이사하실 작정이니까 앞으로 두어 달은 이곳에 있어도 돼."

"곧 떠납니다, 우리는."

신용만의 말에 고영무가 머리를 저었다.

"내가 공항에 있는 선배한테 네 여권번호를 불러주어 보았다. 넌 출국금지자로 되어 있어, 기소중지 상태이고."

놀란 듯 신용만이 눈을 치켜떴다.

"대광이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공항에서 잡혀."

"당분간 이곳에 은신해 있거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이쪽 관리실은 우리 가족이 먼저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던 고영무가 최대광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광이 넌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냐?"

"집에 놈들이 찾아왔답니다."

신용만이 대신 대답했다.

"고향 집에 놈들이 내려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갔답니다. 어머니한테만 갔던 것이 아니라 동생들의 직장이나 학교에도 찾아갔던 모양이라‥‥‥‥"

"다행히 저는 가족이 없어서."

"어쩔 수 없지, 부모님한테 별일 아니라고. 안심시켜 드릴 수밖에. 그리고 별일 없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

"형님."

최대광이 머리를 들었다.

"저희들 좀 데려가 주십시오. 어디든 좋습니다. 전쟁을 하는 나라도 좋고 아프리카도 좋아요. 그저 나가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형님이 시키는 일이면."

"임마, 나는 회사의 신입사원이야. 내가 무슨‥‥‥‥"

고영무가 씁쓸하게 웃었다.

"돈은 저희들이 있지 않습니까?"

"글쎄 지금은 안된다,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동안 나도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내가 나가더라도 자주 이쪽으로 연락을 하겠다. 너희들도 연락할 수 있을 것이고."

"될 수 있는 한 밖에 나가지 말아라."

"형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용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이 의지할 사람은 형님밖에 없어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만."

"우스운 이야기다만 난 너희들을 보고 기운이 났어. 왠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너희들을 생각하면 자신감이 생긴단 말이다."

고영무의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나도 너희들하고 같이 있고 싶다. 그것을 알아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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