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도 5
화도(하)
1
포도청으로 끌려온 연홍은 그날로 전옥서에 갇힌 몸이 되었다. 옛날, 전옥서에서 당했던 고초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 마당이라, 연홍은 차라리 혀라도 깨물어 자결하고 싶었다. 지난번 여옥에서처럼 이번에도 똑같은 고초를 당한다면 일찌감치 목숨을 끊는 것이 하루가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인지 지난 경우처럼 일반 죄수들이나 윤상범들이 있는 감방에 넣지 않았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모두가 천주교 신자들인 것 같았다. 신자들만 따로 격리 수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연홍은 우선 그것만으로도 다소 위안이 되었다. 내일 당장 효수를 당할지라도, 지난번처럼 그 마왕인가 뭔가 하는 악독한 여자를 만나지 않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연홍이 갇힌 감방에는 스무 명 남짓한 여자들이 있었다. 늙은이는 세 명뿐이고, 나머지는 연홍이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여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연홍이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서 잡혀 온 신자들이었다.
연홍은 포졸들에게 끌려오면서 밀고자가 누구인가를 계속 캐물었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홍경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연홍이 꾀를 내어 옥수와 동침하게 만든 것을 알아차린 홍경무가 이튿날 청계옥을 나서면서 연홍을 노려보던 핏발선 그 눈빛에 이를 보득보득 가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보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번에 잡혀 왔을 때는 이용후가 구출하였지만 이번에는 그가 어떠한 방법을 쓰든 석방되가 어려울 것 같았다. 천주교인들이 매일 수십 명씩 처형되는 것만 보아도 탄압이 어느 정도인가 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이용후 자신도 몸을 숨겨야 할 처지인데,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 놓고 남의 구명운동을 하겠는가.
그러나 연홍은 이용후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원망은커녕 그 사람만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운명은 천주님한테 맡겨진 것이라 생각해 왔기 때문에, 지난번과 같은 두려움은 없었다. 천주님의 부름에 따른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였다.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 하루라도 빨리 천주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이튿날, 이용후는 먼저 변 주부한테 달려갔다. 연홍의 문제를 터놓고 의논할 사람이 당장은 변 주부밖에 없었다. 그는 이용후 일이라면 곧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변 주부는 이침 일찍 약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용후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음을 보고 그에게 삼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로 꿰었다.
"이 시각에, 어인 일이십니까?"
"너무 일찍 오지 않았나 해서 망설였소이다. 허나, 워낙 화급한 일이라서 예의를 갖출 마음이 아니었소."
"무슨 일이시길래…… 우선, 안으로 드십시오."
이용후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좌정을 하고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무슨 말부터 서두로 삼아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도 아니고 한낱 기생의 일로, 이른 아침에 들이닥친 자신의 꼴이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달려올 때의 기분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앗다.
"화급한 일이라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청계옥의 연호이가 포도청에 끌려갔다 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합니까?"
"연홍이가 어디 죄나 지을 계집이겠소. 결국 나 때문인 것을."
"허면, 진사 어른께서도 연루된 일입니까?"
"연홍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이 내 영향이었고, 그로 인해 포졸들한테 끌려간 것이오."
"연홍이 천주교 믿는 것을 포도청에서 어찌 알았답니까?"
"밀고를 당했다지 않습니까. 주위에, 그런 비루한 인간이 있으니……."
이용후는 홍경무한테 혐의를 두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그저 울분만 씹고 있었다. 어제 밀고자를 물었을 때, 계향이 자신의 느낌을 발설하려다 말고 옥수의 눈치를 살핀 것을 생각하면 그녀 역시 홍경무한테 의심을 두고 있음이었다. 그러나 증거 없이 남을 의심하는 것 또한 죄라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천주교 산자들을 보는 대로 잡아들여 처형한다고 하는데, 걱정 아닙니까."
"해서,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겠소. 연홍이 처형당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주부께 좋은 방법을 구하려고 왔소이다."
"저한테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굳이 방법이라면 포도대장과 다리를 놓는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허면, 다리 역할을 할 만한 인물이 있소이까? 지난번에는 옥장한테 뇌물을 주어 빼냈습니다만, 마침 그 사람이 파직을 당해 나한테는 알 만한 사람이 없소이다."
"글쎄요……? 약전에 자주 오는 사람 중에서 포도청 종사관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사람보다는 혜산 유숙이 어떨까 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혜산이 포도대장과 각별히 지낸다고 합니다."
포도청은 좌우 양 청으로 나누어, 종2품에 해당하는 대장을 각각 1명씩 두고 그 밑으로 종사관 3명, 부장 4명, 무료부장 26명, 가설부장 12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 종사관은 문관으로 종5품의 벼슬이다.
"혜산이 이 같은 사사로운 일에 개입하려고 하겠소? 더구나,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와 연루된 문제인데요. 차라리 종사관이 어떨까 싶소만."
"포도대장이란 사람이 워낙 강직한 성품인데다가, 대원군의 심복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종5품의 종사관 말쯤 귀담아듣겠습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유숙도 어렵지 않겠소이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 사람이 유숙의 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만큼 돈독한 관계가 아닌가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허면, 혜산한테 부탁을 넣어 주시겠소?"
"부탁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기대하였다가 오히려 실망하는 일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일이 성사되든 아니 되든, 그것 하늘의 뜻으로 여길 수밖에요."
"진사 어른께서도 당분간 조시마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대원군이 흉흉해진 민심을 돌려 놓기 위해 온갖 방책을 다 쓰고 있는 데다가 나라의 개방을 매우 경계하는 인물이라서, 서양의 종교와 문물이 발붙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이구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배교할 수는 없지 않소."
"배교하시라는 뜻으로 드린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저들이 천주교 탄압을 멈출 때까지만 조심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충언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겠소이다."
오원(吾園)은 이용후가 약전으로 달려가는 것을 배웅하고 곧장 유숙의 집으로 돌아왔다. 유숙은 마친 도화서에 들어가고 집에 없었다. 만석이가 오원을 보자 왠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다가왔다. 언짢은 일이 있었던 눈치였다.
"만성이 표정이 와 기러네? 꼭 벌레 씹은 낯짝이잖네."
"대체, 어디서 외박을 하고 오는 길이우?"
"청계옥에서 자고 왔어. 와우?"
"그럼, 기생년하고 동침했단 말이우?"
만석은 오원이 기방에서 잤다는 말에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침을 꼴깍꼴깍 넘기면 턱밑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돈냥이나 손에 쥐더니 바람을 피우나 싶었던 것이다.
"민하게 굴긴…… 내래 설마 기생하고 잤갔네. 그 집 연홍 아시래 포도청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걱정이 돼서 있었어야."
"연홍인지 연풍인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기생이 잡혀가는데 형님이 왜 나서서 걱정이우? 정 붙었수?"
"뭐이 어드래? 닙으로 뱉으믄 다 말인 줄 아네? 연홍 아시래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네가 몰라서 기래. 그딴 말 함부로 하디 말라우. 또 기랬다가는 내래 혼내 주갔어."
그래도 만석을 겁을 먹기는 터녕 눈도 꿈쩍 않은 채 여전히 당당하게 굴었다.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는 무슨 소린가 한참을 군시렁거렸다.
"도대체, 와 기러네? 나한테 불만 있네?"
"쳇. 어젯밤, 나으리계서 얼마나 노하셨는지 알기나 하우? 형님이 집에 없다구 나만 날벼락을 맞았잖수."
"나으리께서 와? 나를 찾으셨네?"
"말도 마우. 형님을 찾아오라 하시는데,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알아야 찾아오고 말구 하지. 오늘 아침까지도 형님이 없어 더 노하신 것 같습디다. 어쨌든, 오늘 저녁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유."
"나를 와 찾으셨을까……?"
오원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그림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튿날까지 사람을 찾았다면 뭔가 급히 지시할 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대체, 어드런 일로 나를 찾으셨을까?
경복궁 일은 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언질을 주었으니, 그 일로 찾았을 리는 없고…….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도 마당한 추측은 떠오르지 않앗다.
오원이 점심을 먹고 막 자리를 드는데, 누군가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도화서로부터 전갈을 안고 온 화공이었다. 그는 단청공으로 낯이 많이 익었다.
"무슨 전갈입네까?"
"장 화공을 급히 데려오라는 유숙 나으리의 분부요."
"와 기럽네까?"
"낸들 알겠수? 심부름이나 할밖에. 어여 서둘러야 할 거유."
오원은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화공을 따라붙었다. 어제 일로, 꾸중하기 위해서 사람을 시켜 불러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화공 일을 더 시키려는 뜻이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오원은 갑자기 맥이 빠졌다. 스승이 지시하는 대로 채색만 하는, 그런 무의미한 일에 또 매달려야 한다면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의 분부니 어쩌랴. 도화서 임시 설치소에 당도하자 마침 유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원은 스승의 눈치부터 살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노여움은 볼 수 없었다.
"어젯밤에는 어디에 있었더냐?"
"제가 한때 기숙했던 청계옥에 큰일이 생겨서, 이 진사 어른과 함께 있었습네다."
"그건 그렇고…… 내가 너를 부른 것은 지난번에 했던 일을 더 시키려고 그런 것이다. 마땅치 않겠지만, 나를 도와주어야 되겠다. 이는 내 뜻이 아니라, 대원위 대감께서 특별히 분부하신 일이니라. 대감께서 일월오악도와 쌍룡을 보시자 크게 기뻐하시고, 이번 일에도 네가 관여하도록 지시하신 것이니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야."
"나으리 분부에 따르갔습네다."
"오원은 잔뜩 긴장한 만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만석이가 전하는 대로라면 오늘 밤 혼쭐이 날 일이었다.
"기럼, 일월오악도를 또 그립네까?"
"편전으로 쓰실 사정전에 벽화를 그려야 한다. 이번 그림도 쌍룡이기는 매한가지나, 근정전 것은 조각품에 채색한 것이지만, 이번 것은 벽화이니만큼 채색에 너의 독자성이 있어야 할 것이야."
"기럼, 더욱 좋갔습네다."
오원은 독자성이라는 말에 다소 위안이 되었다. 물론 혼자서 도맡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업을 주도하면서 채색에 자기 생각을 넣을 수 있음은 해 볼 만한 일이었다. 벽화의 도본을 살펴보니, 근정전의 쌍룡처럼 여의주를 가운데 놓고 서로 차지하려는 모양이 비슷하였다. 근정전의 쌍룡은 목조물이라 세밀한 맛이 없어 사실성이 많이 결여돼 있었다. 그러나 이번 벽화의 쌍룡은 용틀임의 여운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함이 매우 돋보이는 그림이었다. 무섭게 부릅뜬 눈동자와 벌린 입의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상대 몸체를 꿰뚫고도 남을 만큼 날카롭게 뻗은 발톱, 갑옷 같은 비늘, 싸움에 휘몰리는 운무 따위가 매우 정교하였다. 근정전 것이 조각으로서는 훌륭했지만, 반면에 용의 기개가 약하게 표현돼 잇어, 역시 그림으로 표현하는 기교를 따르지 못하였다. 색채도 근정전의 것은 거의 황금빛 일생이었다. 그러나 오원은 이번 벽화에서만큼은 여러 색이 고루 어우러져 한찬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드러나도록 채색할 생각이었다. 유숙은 오원의 복안을 듣고 흡족한 쵸정을 지으면서, 혼신의 힘을 넣어 벽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라고 격려하었다.
오원은 그날부터 침식을 다시 경복궁 내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소임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원은 연홍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용후와 변 주부가 과연 그녀를 석방시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침, 이백 냥의 돈은 이용후한테 맡겨 연홍을 구명하는 데 쓰도록 일임하였기 때문에 다소 위안이 되고는 있지만, 돈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있으니만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제 매인 몸이 되었으니 그들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유숙을 찾아간 변 주부는 용건부터 설명하고 연홍을 전옥서에서 빼낼 수 있는 방법을 단도직입으로 제안하였다. 그러자 유숙이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변 주부와의 인간관계를 생각한다면 그의 청을 꼭 들어줘야 옳지만, 천주교와 연루된 문제만은 개입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변 주부가 역관의 직으로 중국을 다녀올 때마다 유숙에게 붓이나 벼루 따위를 사 와서 선물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가의 중국 서화도 서슴없이 내주었다. 그 우의를 생각하면 그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엇다.
그러나 유숙 자신은 도화서에 나가면서 나라의 곡을 먹는 입장인데다가 포도대장의 강직한 성품으로 보아 이미 체포된 천주교인을 빼 달라는 부탁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청을 넣는다고 해도 들어줄 포도대장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럴 만큼 그는 공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겠소, 내가 주부의 청을 거절할 처지가 아님을 알지만, 그분의 강직한 성품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혜산 선생의 입장이 그러하시니, 저 또한 민망할 따름입니다. 인력으로는 아니 되는 것이니, 혜산께서도 도리가 없는 일 아닙니까. 오늘 얘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접어 두십시오."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괘념치 마십시오, 승업이는 어찌하고 있습니까?"
변 주부는 자신이 더 민망하여 재빨리 말머리를 도려 버렸다. 그렇지 않고는 자리가 서먹서먹하여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림이 많이 좋아졌소이다. 그리고, 지난번 근정전 단장 때 내가 데리고 가서 일월오악도의 채색을 맡겼는데, 소임을 훌륭하게 해냈지 뭡니가. 대원위 대감께서도 승업의 솜씨를 칭찬하시고, 이번 사정전 벽화에도 참여시키도록 친히 말씀이 계셨소. 그래서 지금은 궁 안에서 침식하고 있습니다."
"승업이 대감한테까지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니, 매우 기쁜 일입니다. 이 모두가 혜산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리 공을 들여도 재능이 없으면 따라오지 못하는 법 아니겠소, 게다가 그 아이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아니오, 앞으로 기회를 보아, 다른 화풍을 배울 수 있도록 더 좋은 선생을 소개할까 생각 중입니다."
"허면, 누구를……?"
"아직 마음에 둔 선생은 없습니다만, 차후 적당한 기회에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변 주부는 유숙의 처지를 이해할 수밖에 없어, 아무 보람도 없이 헛걸음으로 돌아왔다. 이용후가 목이 빠지게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맥이 빠져 걷기조차 힘들었다. 이용후의 청을 모르는 체할 수도 있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를 생각하면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인영이란 마치 고래 심줄 같아서 좀처럼 끊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오원으로 인해 더욱 가까워진 인연이라 두 사람의 우의는 돈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변 주부한테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이용후는 금세 풀죽은 얼굴이 되어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 당장 그럴듯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담담한 마음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당장은 묘안이 없군요. 마음만 답답할 뿐이오. 정 방법이 없으면, 새 옥장을 찾아가 뇌물로 움직여 볼까 하오만, 그게 통할는지……."
"그러자면 돈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침 나한테 이백여 냥은 있소이다. 내가 마련한 것은 아니지만요."
이용후는 그 돈의 출처를 변 주부한테 설명하면서 오원의 갸륵한 마음을 덧붙였다. 변 주부도 대강은 알고 있는 일이라 오원을 칭찬하는 데 조금도 인색할 필요가 없었다.
"제가 이백 냥을 더 드릴 터이니, 그것으로 힘을 써 보시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만."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겠소? 지난번에는 이백 냥으로 신도 여럿을 구하였소이다."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를 것입니다. 저토록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보아, 예사롭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듯싶습니다."
"허긴…… 그러나, 한 번 부닥쳐 보기는 해야지요. 그래서 아니 되면, 연홍의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소."
"그렇습니다."
이용후는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을 듯하여 서둘러 약전을 나왔다. 그리고는 청계옥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계옥 문지방을 넘어서자 안으로부터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호방한 사내들이 온 모양이었다. 이용후는 헛기침으로 안에다 인기척을 들여보냈다. 그러자 계향이 먼저 듣고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나으리. 어서 오시어요. 연홍 아씨 소식은 들으셨사옵니까?"
"아직은 감감무소식이니라. 헌데, 안에 손님이 왔더냐?"
"네, 나으리. 홍 생원 나으리께서 낯선 손님과 함꼐 계시옵니다."
홍경무가?
이용후는 관자놀이에 힘줄을 세우면서 어금니를 물엇다. 대체 무슨 낯으로 나타났는지 새삼 상판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증거만 있다면 당장 들어가 요절을 낼 수도 있었다.
"나으리."
계향이 갑자기 손님 방 쪽을 흘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비밀리 할 얘기가 있는 눈치였다. 이용후도 따라서 계향이에게 키를 맞추었다.
"왜 그러느냐?"
"생원 나으리께서 아씨를 구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셨사옵니다."
"홍 생원이? 무슨 수로?"
"모르겠사옵니다. 그러시면서, 누구든 생원 나으리께 잘못 보이면 신세를 망치게 된다고 하셨사옵니다."
"허허. 정녕 그리 말씀하시더냐?"
"이 귀로 똑똑히 들었사옵니다. 정말 믿을 말씀이옵니까?"
"그야 낸들 알겠느냐. 헌데, 이를 어쩐다?"
"왜 그러시옵니까?"
"내 오늘도 여기서 유해야 되겠는데, 손님이 있으니……."
"무엇이 걱정이옵니까. 어제처럼 사랑방에 유하시면 되지 않사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어쩐지 홍 생원과 마주치기가 싫구나."
"나으리께서 와 계심을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어서 사랑방으로 드시어요. 제가 주안상 올리겠사옵니다."
"낭패로구나. 마치 숨어있는 것 같지 않는냐."
"그리 생각지 마시어요."
"……그럼, 그리할까?"
이용후는 청계옥에서 밤을 묵고 내일 동이 트는 대로 포도청으로 갈 생각이었다. 집에서 자도 되겠지만, 아내가 특별한 생각을 가질 것이 분명하여 그것이 성가셨다. 아내가 투기나 하는 여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기생의 일로 바삐 나간다면 그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이용후가 사랑방 쪽을 향해 막 걸음을 떼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사내 목소리가 "이 진사."하고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홍경무였다.
"어찌 그냥 가시려고 합니까?"
"그저 잠깐 들었을 뿐이외다. 홍 공께서는 그간 편안하셨소이까?"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이 공께서는 어찌 소일하십니까?"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간 너무 적조한 듯싶으니,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마침 소개할 사람도 있으니."
"글쎄올시다. 오늘은 술 생각이 없어서……."
이용후는 마치 누룽지 훔쳐먹다 들킨 머슴처럼 갑자기 무안하여 한참을 전전긍긍하였다. 그러자 홍경무가 재차 권유하였다.
"계향이는 뭘 꾸물거리느냐?" 나으리를 모시지 않고."
계향이 이쪽저쪽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였다. 홍경무가 또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이용후 앞으로 쭈뼛쭈뼛 다가섰다. 홍경무가 이용후에게 소개한 사람은 뜻밖에도 포도청의 종사관이었다. 조양복이라는 이름의 그는 종사관 세 명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까 변 주부가 말했던 종사관이 바로 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홍경무가 종사관을 소개한 다음 그에게 이용후를 소개하면서 마음에 없는 허풍을 한참 늘어놓았다. 이용후가 듣기에 민망하여 몹시 불쾌하였다.
"홍 공은 사실에 없는 이야기를 어찌 그리도 잘하시오? 듣기에 몹시 민망하오."
"이 공이 이토록 겸손하신 분이외다. 나하고는 근본 붙가 다르지요."
"소개는 그만하시고, 세상 애기나 합시다."
이용후는 그의 실어(失語)가 듣기 싫어 주먹을 쑤셔 넣어서라도 입을 틀어막고 싶어 안달이 솟았다. 그가 생원에 오를 만큼의 학문을 했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선비의 체통은 눈꼽만큼도 엿볼 수 없는 언행을 하고 있었다.
"헌데 이 공, 연홍의 송식을 들으셨습니까?"
"들어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년의 괘씸함을 생각하면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소이다. 허나 옛정을 생각하여 그 계집을 구하기로 하였소이다. 이 공 생각은 어떻소?"
말하는 도중에, 그가 이용후의 안색을 자주 살피는 것으로 보아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이용후가 말을 받기에 따라서 연홍과의 관계를 확인하거나, 천주교에 대한 비난을 노골적으로 내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시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사후에 극락에 간다지 않습니까. 보잘것없는 기생한테 그토록 마음을 쓰시니, 홍 공께서는 틀림없이 극락에 가서 영생을 누릴 것이오."
"허허, 빈 말씀이라도 듣기에 나쁘지는 않소그려."
"헌데, 내가 듣기로는 포졸들 말이 누군가 밀고를 하여 연홍을 잡아간다고 변명하더랍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비열한 인간이 있는 것 같으니, 우선 그놈부터 색출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요? 포졸들이 정녕 그리 말했다 합니까? 세상에, 그런 몹쓸 놈이 있다니……. 애 옥수야. 너도 포졸의 말을 들었느냐?"
홍경무가 갑자기 옥수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눈을 부라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옥수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허면, 계향이 이년의 입에서 나온 것이렷다?"
"홍경무가 특별히 흥분하고 있었다. 마치 계향이 당사자인 것처럼 굴었다.
"홍 공, 우리가 미천한 것들의 귀를 믿어야 옳소이까? 그만해 둡시다. 천지에 비열한 인간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요."
"그러자 종사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이나 들자고 하였다. 그제서야 홍경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술잔을 들었다.
"헌데, 홍 공께서는 연홍이를 어떻게 구하실 수 있습니까? 참으로 재주가 용하시오."
이용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묻자 홍경무가 낯빛을 바꿔 술을 연거푸 털어 넣는 것이었다. 이용후의 의중을 알아차려 심사가 꼬이는 눈치였다.
"내 힘이라기보다는, 여기 계신 조 공께서 힘쓰시는 일이오."
"허면, 조 공께서는 연홍이라는 계집을 틀림없이 빼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글쎄올시다. 홍 공께서 하도 부탁을 하시길래 포도대장한테 청을 넣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오. 그년이 혹 배교를 한다면 일이 쉬워질 수는 있지만."
"배교를 하지 않는다면 구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지금으로서는 그리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자 홍경무가 갑자기 낭패한 얼굴이 되어 옥수를 시켜 술과 안주를 더 가져오게 하였다. 이용후는 자신 없는 그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홍경무가 갑자기 화살을 이용후에게 돌렸다.
"듣자 하니, 이 공께서도 천주교를 믿으신다지요?"
"이용후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종사관이 끼어들어 사실이냐고 물었다. 이용후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그 계집한테는 곧 전교자(傳敎者)가 되겠습니다?"
"그렇소이다."
종사관이 왠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 술을 따라 연거푸 마시는 것이었다. 홍경무가 당황한 얼굴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오늘, 이공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소이다."
그리고는 한숨을 거푸 내쉬었다.
2
이용후는 청계옥에서 아침을 뜨고 바로 포도청으로 달려갔다. 계향이가 따라나서겠다고 애원하는 것을 간신히 떼어 놓았다. 포도청에 가서 연홍이를 만날 수 있다는 포장이 없어, 울고불고하면 낭패스럽기만 할 것 같았다. 그동안 두 여자가 맺은 정분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의 정분에 묶일 여유가 없었다. 화급한 것은 연홍이를 포도청에서 빼내는 일이었다.
어제, 홍경무가 연홍이를 구할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은 종사관 조양복을 믿고 한 소리지만 결국 흰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종사관의 의중을 짐작하건대, 그의 힘으로도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홍경무가 그에게 향응을 베풀어 코를 꿰겠다는 술수였지만 이용후가 보기에는 그 정도에 넘어갈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포도청 앞에는 안에 갇힌 사람들을 면회하기 위해 그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개중에는 연홍이처럼 잡혀 온 죄수들을 만나기 위해 온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천주학쟁이는 절대 면회할 수 없음을 아예 방으로 붙여 놓았다.
이용후는 포졸에게 다가가 대뜸 옥장을 만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포졸이 이용후를 훑어내리며 용건을 대라고 하였다. 그 어투가 매우 퉁명스러웠다. 지난번에는 약조가 돼 있다고 둘러대어 그냥 통과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림도 없는 분위기였다.
"옥장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네."
"드릴 말씀이 무엇인지, 용건을 대라고 하지 않았소?"
"어허. 이런 무례가 있나. 사사로운 애기를 포졸한테 고한단 말인가?"
"허면, 옥장과 약조가 있었소이까?"
"그렇지는 않네."
"용건도 대지 않고 약조도 없었다면, 들어갈 수가 없소이다. 포도대장 나으리께서 출입자를 철저히 통제하라 하셨소이다. 그러니 돌아가시오."
지난번, 옥장을 쉽게 만났던 경우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포졸들이 일반 죄수들의 면회자를 들여보내면서 낱낱이 기록하는 것을 보아도 전과는 사뭇 달랐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용후 처지로는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포졸들이 너무 완강하여 특별한 수를 마련하지 않고는 출입이 불가능하였다. 그들에게 돈냥을 쥐여 주는 방법도 한순간 생각하였으나, 주위 이목이 많은데다가 괜히 허튼수작이 되어 양반 체통만 깎이는 꼴이 될 것 같아 금세 기가 죽어 버렸다.
이용후는 맥없이 서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등청할 시간이 되었는지 관원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이용후는 어제 만났던 종사관 생각이 났다. 그 역시 이 시간에 등청할 것이 분명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고 잡는다고, 친분은 없지만 이 판에 그라도 붙들고 사정을 해 보는 편이 옳을 듯싶었다.
이용후는 등청하는 관원들 틈으로 조양복을 찾아내기 위해 목을 이리 뽑고 저리 뽑고 하였다. 웬일인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등청을 한 것인지 아니면 더 늦게 등청할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 애간장만 탔다. 잠시 후 마지막인 듯싶은 관원 하나가 바쁜 걸음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이 조양복이었다. 이용후는 급히 그에게 다가가 길을 가로막았다.
"안녕하시오. 어제 인사 나눈 이용후올시다."
"이 공께서 여긴 웬일로……? 오오라. 연홍인가 뭔가 하는 그 기생을 보러 오셨구료."
"그것이 아니라, 조 공께 부탁이 있어 왔소이다."
"어제 얘기를 다 하지 않았소? 아직 포도대장을 뵙지도 못했소이다."
"허면, 그분께 청을 넣으실 생각이십니까?"
"실은 어려울 것 같소이다. 홍 생원이 간곡하게 부탁은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리일 것 같소. 나라에서 엄히 다스리는 문제라서 함부로 입을 열 일이 아닐 것 같아서요."
"조 공께 부탁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옥장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달라는 것이외다. 포졸들이 굳이 용건을 대라면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요. 해서 조 공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그 문제라면 옥장도 만나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예상한 대로 그의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이용후는 입에 뜨거운 숯덩이를 물고 있는 것처럼 침이 모두 말라 버렸다. 조바심이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조 공. 옥장을 만날 수 있게만 해 주시면,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공, 혹시 옥장한테 뇌물을 줄 생각이시오? 만에 하나, 그런 뜻이라면 생각을 거두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포도대장께서 각별한 훈령을 내리신 바 있어 옥장도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이 분명합니다. 자칫, 이 공의 체통만 깎이는 일이 될 것이오. 뿐만 아니라 이 공이 천주교를 믿는 걸 눈치채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하옥시킬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그거야 숨기면 되지 않겠소?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볼 일 아닙니까?"
"어제의 그 당당함은 어찌하고요? 그건 배교가 아니던가요?"
이용후는 조양복의 어조가 충고인지 비아냥인지 얼른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제 이용후를 앞에 두고 서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그의 마지막 얘기를 떠올리면서, 방금 그가 뱉어낸 여러 말들이 가슴을 압박하였다.
"이 공과의 연을 생각해서 말씀드리오만, 이 일에서 손을 떼심이 좋을 듯싶소이다. 그리고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대를 잘 읽어야 될 줄로 압니다."
"조 공의 충고 고맙소이다. 그러나……."
"저는 길이 바빠서 이만……."
조양복은 말을 싹뚝 잘라먹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이용후는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올려다보는 격으로 그의 뒷모습만 망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물 위의 수결(手決, 서명)이로구나.
이용후는 타박타박 되돌아가면서 눈물을 꾸역꾸역 밀어냈다. 오로지 절망적인 생각만이 앞을 가려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연홍아. 너와 함께 죽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연홍이 천주학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그의 생각을 막았어야 옳았다. 그랬더라면 그녀가 천주교에 입교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 같은 불행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잉ㅇ후는 자책감에 빠져 가슴에 천근 쇳덩이를 안고 가는 마음이었다. 홍경무가 정말 밀고자라면, 연홍이만 밀고할 것이 아니고 차라리 자신도 포함시켰더라면 이보다는 덜 괴로웠을 것이다.
이용후는 변 주부 약전을 저만치 바라보면서 더욱 맥이 풀어졌다. 두 사람이 정성과 노력을 다했는데도 아무런 보람도 얻지 못했으니, 이젠 기댈 곳이 더 없게 돼 버렸다. 조선 천지에 변 주부만큼 매사 우호적이고 배려가 세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과 힘을 합쳤음에도 보람을 얻지 못했으니 이제 무슨 희망이 있으랴 싶어 절망 또 절망이었다.
연홍아. 천주님의 뜻으로 접어 두기에는 너무 안타깝구나.
연홍이 포도청에 끌려간 지 닷새가 지났는데도 종무소식이라. 계향은 애를 바작바작 태우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용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자꾸 불길한 생각 속으로 파묻혔다. 연홍을 꼭 구해 내겟다고 홍경무가 큰소리 뻥뻥 쳤으나 계향은 처음부터 믿지를 않았다. 허풍쟁이에다가 기회만 닿으면 계집 치마 들추는 일에만 몰두하는 그를 미덥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양반 가문에도 그런 말증(末症)의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런 양반이라면 심지 깊은 천민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한 주제에, 기생을 천한 여자라고 함부로 대하는 꼴이 더없이 가소로웠다.
이런 와중에, 어쩐지 옥수만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계향을 비롯해서 찬모와 어린 상노까지도 연일 침울해 있는데, 오작 옥수만이 태연자약하였다. 계향은 그 속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의심스럽기까지 하였다. 옥수는 연홍이 그리된 것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는 잘된 일인 것처럼 여기는 낯빛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치 자기가 연홍의 자리를 일러바친 것처럼 행새하며 전에 없이 당당하게 구는 것이었다.
저년이 흉계를 꾸몄는지도 몰라.
계향은 얕은 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추리를 하였다. 홍경무가 연홍이 천주교 믿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옥수와 특별히 밀착된 이후였고, 그래서 그가 연홍에게 노골적으로 협박하기 시작했고, 홍경무가 술상을 받을 때마다 오로지 옥수만 끼고 있었다. 그렇게 둘이만 붙어서 온갖 흉계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쯤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옳아. 그럴지도 몰라.
계향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면서 볼을 바르르 떨었다. 이때 옥수가 계향의 모습을 한참 동안 훔쳐보고 있었다.
"비 맞은 중놈처럼 혼자서 뭘 그리 중얼거리니?"
계향은 옥수에게 속내를 들키기나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냉큼 등을 돌렸다. 그러자 옥수가 다가와 계향의 손목을 낚아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도 좀 알자구나."
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요년이 속이 켕기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어요. 연홍 아씨 불쌍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걸요."
"정말?"
"미덥지 않으면 내 속을 까 보구료."
"내가 왜 계향의 말을 믿지 않겠니. 우리가 한솥밥 먹은 햇수가 그새 얼만데. 안 그러니?"
"그렇구말구요."
"헌데, 연홍 아씨가 그리도 보고 싶니? 기특도 하구나."
"그럼, 옥수 형님은 아씨가 그립지 않아요?"
"얘는? 낸들 왜 보고 싶지 않겠니. 그러나 형님의 운명인 걸 어쩌겠니. 형님이 이렇게 된 발단이 이 진사 어른한테 있다는 걸 너도 알아야 해. 그분만 아니었더라면 형님이 왜 천주학쟁이가 됐겠으며 포도청에는 왜 갇혀 있겠어. 너도 아다시피 홍 생원께서 형님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니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동안은 내가 머리니까,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요년아. 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계향은 어금니를 잔뜩 깨물어 찬 바람이 일 만큼 록수로부터 휭하니 등을 돌렸다. 그러자 옥수가 계향을 다시 불러 세웠다.
"내달부터 급을 올려 줄 터이니, 손님들을 더 잘 모셔야 한다. 손님들 중에서도 홍 생원 나으리는 특별한 분임을 잊어서는 안 돼. 알았지?"
"급을 옥수 형님 마음대로 올려도 되는 거예요? 연홍 아씨도 아니 계시는 마당에."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니 너는 손님 접대나 잘 하면 되는 것이다."
"급 올려서 마다할 사람은 없겠지만 연홍 아씨가 아니 계시니, 그다지 기쁘지가 않네요."
"어쨌든, 너는 내 말만 따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짐해 둘 것이 있다."
"뭐예요?"
"형님을 밀고한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공연히 나를 의심하거나 생원 나으리를 마음에 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증거도 없으면서 남을 의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언제 옥수 형님을 의심했다고 그러세요? 더구나 언감생심 생원 나으리를 의심하다니요? 나는 그런 적 없어요."
"……그러면 됐다."
저년이 제 발이 저린 거야. 떡갈나무에 회초리 나고 바늘 간 데 실 따라간다는 속담도 모르는 모양이지? 똥 싼 주제에 매화타령 한다더니…….
계향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냉수를 독째로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옥수의 음흉한 속을 홀랑 까 보았으면 평생 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매일 화증이 나서 명대로 못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 급을 올려 주겠다구? 이 떡 먹고 말 말아라 이거지? 이년아. 속 그린 년 개가 먼저 안단다.
오원은 사정전 벽화를 그리면서도 마음은 온통 연홍한테 가 있었다. 이용후의 노력으로 지금쯤 집에 와 있는지, 아니면 여태 포도청에 갇혀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벽화가 완성될 때까지는 대궐을 떠나지 못한다는 도화서의 엄명이 내려져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구든 그녀의 소식을 전해 주면 좋으련만 그럴 만한 사람도 없었다. 있다면 유숙뿐인데, 그가 기생 따위의 소식이나 물어다 줄 사람은 아니었다. 밤을 틈타서 살짝 빠져나가면 되겠지만 그래봤자 순라군한테 잡힐 것이 뻔하니 궁금해도 도리가 없었다. 대궐에서 청계옥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장안의 중심지라 순라군이 특별히 순찰을 돌고 있어 나가면 걸리기 십상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잠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유숙이 다가왔다. 놀라서 발딱 일어서자 유숙은 오원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 벽화 쪽으로 가 진척 상황만 확인하였다.
"힘이 드느냐?"
"아닙네다. 잠시 쉬고 있었시요."
"그런데, 승업아."
"네, 나으리."
"한때 청계옥이라는 기방에 머문 적이 있었다고 했느냐?"
"어릴 적에 잠시 있었시요. 와 기러십네까?"
오원은 청계옥이라는 말에 혹시 연홍의 소식을 들을까 싶어 귀가 솔깃하였다. 가슴을 졸이며 유숙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며칠 전에 변 주부가 다녀갔느니라."
"주부 어른께서 와 다녀가셨습네까?"
"음…… 청계옥에 연홍인지 무었인지 하는 기녀가 있었더냐?"
"네, 나으리."
유숙의 입에서 연홍의 이름이 떨어지자 오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연홍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입 안이 바작바작 타기 시작했다.
"그 계집이 천주학쟁이더냐?"
"네, 나으리. 기래서 포졸들이 와서 잡아갔습네다."
"변 주부가 나를 찾아온 까닭은 그 계집을 포도청에서 빼낼 방법을 강구해 달라는 것이었느니라. 허나,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고 있으니 낸들 무슨 수를 내겠느냐."
"기래서 어드렇게 됐습네까?"
"변 주부의 부탁이 매우 갈급한 것 같았지만,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느니라. 담담하지만 그냥 돌아갈 수밖에."
"기럼, 연홍 아씨래 아직도 포도청에 갇혀 있습네까?"
"글쎄다. 다른 사람한테 줄을 대지 못하였다면 아직 갇혀 있겠지."
"천주교 믿는 사람은 잡아다 모두 죽인다고 했시요. 기렇다면, 연홍 아씨도 죽게 됩네까?"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계집 역시 죽을 수밖에 더 있겠느냐? 어쩌다가 천주학쟁이가 되어 고초를 사서 하는지 모르겠구나."
오원은 그만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유숙이 어안이 벙벙해 오원을 물끄러미 내려보고만 있었다. 오원은 벌써 눈물을 흘리며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네가 애태울 일이 아니잖느냐? 비록 한때 연을 맺기는 했어도 한낱 기생에 불과한 계집인데 왜 그리 마음을 쓰느냐."
"나으리. 연홍 아씨래 제가 배를 곯고 있던 시절에 은인입네다. 밥 배불리 먹게 하고 따뜻한 잠자리까지 준 은인이야요. 제가 어드렇게 마음을 쓰지 않갔습네까."
"네 충정은 이해한다만, 나라에서는 중죄인으로 보고 있음을 알아야 해."
"나으리. 연홍 아씨를 구할 방책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라요."
오원은 유숙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애걸하였다. 그러자 유숙이 오원으로 부터 등을 돌려 혀만 차고 있었다.
"나으리. 제 소원을 한 번만 들어주시라요."
"어허. 이런 변이 있나. 이놈아, 방책이 없었으니까 변 주부가 그냥 돌아가지 않았겠는냐."
"안 됩네다, 안 됩네다. 연홍 아씨래 죽으면 안 됩네다."
"허면, 따라 죽을 작정이더냐? 미욱한 놈 같으니라구."
"나으리……."
오원은 무릎을 꿇은 채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화공들의 시선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원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울음을 멈추렸다. 어찌 된 놈이 계집이 죽을 때마다 초랭이 방정이냐. 몇 해 전에도 이 부사 딸이 죽자 이 꼴이더니, 또 그 짝 났구나. 당장 눈물을 넣으렸다. 잠시 후면 대원위 대감께서 행차하실 것이야."
"대감이래 중요치 않습네다."
"어허 이놈이? 입을 잘못 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야. 네놈이 감히 대감을 능멸해?"
유숙이 소리를 크게 내지는 못하고 눈만 호랑이처럼 부릅떠 오원을 곧 삼킬 듯이 노기를 품었다. 그러나 오원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으리. 제발 연홍 아씨를 살려 주시라요."
"어허, 그래도? 큰 변 당하지 전에 냉큼 벽화앞에 섰거라."
그제서야 오원이 마지못해 일어나 벽화 앞으로 어기적어기적 다가섰다. 그러면서도 울음을 멍추지 못하고 계속 어깨를 들썩댔다.
"미욱한 놈 같으니…… 정이 많은 것도 탈이로다."
유숙은 오원의 꼴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얘기를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오원이 그토록 마음 쓸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저놈 성격에 일이나 저지르지 않을지…….
몇 해 전, 이응헌 부사의 딸이 죽었을 때를 상기하면서 유숙은 마치 맷돌에 눌린 것처럼 가슴이 담담하였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큰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날 밤.
오원은 그동안 아무 뜻 없이 안면을 익혀 온 한 포졸에게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는 나이가 비슷하여서 접근하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밤마다 고생이 많습네다."
"하는 수 없지 않소. 화공도 고생이기는 마찬가지 아니오?"
"기래도 김 포졸보다는 고생이 덜하디요. 우선 이것 받으시라요."
오원은 다짜고짜 그의 주머니에 돈 다섯 냥을 쑥 넣었다. 이용후한테 이백 냥을 건네주고 남은 돈 중의 일부였다. 그가 주위를 살피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얼마 되지는 않디만,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시라요. 그동안 낯도 익었고 성품이 좋아서 거냥 드리는 거야요."
"그렇다고 이렇게 큰돈을……."
그는 누가 볼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매우 흐뭇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오원은 이때가 좋은 기회다 싶어 본론을 꺼냈다.
"실은, 김 포졸한테 부탁이 하나 있시요."
"말씀하시오. 어렵지 않은 거라면 들어줘야지요."
"내래 근정전 작업 때 전염병을 앓았댔시요. 기런데 또 머리가 아프고 설사를 자꾸 하디 뭡네까."
"어허. 돌림병이라면 빨리 약을 드셔야 되겠소."
"여기 약은 잘 듣디 않아요. 기래서 부탁하는 기야요. 종로에 가면 아주 용한 약전이 있는데, 이 시간에 내래 혼자 나가면 순라군한테 낭패를 당할 것이 뻔하니까니, 김 포졸이 약전까지 동행 좀 해 주시라요."
"글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화공은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잖소."
"밤인데 누가 알겠습네까?"
"허긴, 잠잘 시간이니까. 그럼 빨리 다녀오도록 합시다. 나도 마음을 놓을 처지는 아니지만, 장 화공의 부탁이니……."
"고맙습네다. 나중에 사례는 톡톡히 하갔시오."
"사례까지야 뭐……."
이렇게 해서 오원은 포졸을 대동하고 변 약전으로 달려갔다. 변 주부한테 가면 연홍의 근황과 전망을 알 수 있을 것 갔았다. 위험하지만 이렇게 꾀를 쓰지 않고는 연홍이 죽었다고 해도 소식을 듣지 못할 것이다. 도중에 순라군을 두어 차례 만났지만 포졸을 대동했기 때문에 그들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약전의 문의 굳게 닫혀 있었다. 오원은 예의 갖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사동이 부시럭대며 나와 문도 열지 않은 채 누구냐고 짜증을 부렸다.
"내래 승업이야. 급한 일이니까니, 날래 문 열라우."
"남 곤히 자는데……."
비로소 문이 열렸다. 오원은 포졸을 세워 둔 채 안채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러자 사동이 한밤중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투덜거렸다.
"나으리, 나으리."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도 안에서 응답이 없었다. 변 주부가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서너 차례 연거푸 불렀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 변 주부가 불을 들고 나왔다. 오원은 대뜸 큰절을 올리고 찾아온 까닭을 말했다. 변 주부는 기가 찬 듯 엎드려 있는 오원을 멀거니 내려보기만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밤중에 숨어 나와?"
"용서하시라요. 허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시요."
"네 마음은 알겠다만,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느니라. 진사 어른께서도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계시니까, 가서 기다리거라. 무슨 소식이 있으면 내가 전하도록 하마."
"나으리. 제발 연홍 아씨를 구해 주시라요."
"내가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느냐? 허니, 어여 돌아가거라. 사람들이 알면 중죄를 면치 못할 것이야."
"기럼 나으리만 믿고 가갔습네다. 안녕히 계시라요."
3
연홍이 결국 처형된다고 한다. 그 정보나마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종사관 조양복이 날짜를 미리 알려 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홍경무가 연홍을 빼내겠다고 장담한 것은 허풍이었고, 조양복 또한 포도대장을 만나지도 않았다.
이용후는 변 주부의 전갈을 받고 한달음으로 달려왔다. 사색이 되어 뛰어든 그를 변 주부가 침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눈인사만 나누고는 오랫동안 말없이 천장만 올려보았다. 기막힌 사실에, 무슨 말을 서두로 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한참 만에 변 주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사 어른의 충격이 크실 줄로 압니다."
"지금의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연홍의 운명이 꼭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오로지 자책감만 들 뿐이오."
"연홍이 이리된 것을 어찌 나으리 탓으로만 돌리십니까. 말씀대로 그 사람의 운명이라 여기심이 옳을 듯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ㅁ가 내 탓이오. 내가 전교를 하지 않았다면 연홍이가 왜 목숨을 잃겠소. 다 내 탓입니다."
"이용후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며 도리질을 하였다. 도무지 어떠한 생각으로도 자책감은 지울 수가 없었다. 때로는 천주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전지전능한 천주가 어찌하여 연홍이와 같은 선한 인간을 악마들에게서 구해 주지 않는지 원망스러웠다. 어디 연홍이뿐인가. 김후안을 비롯해서 베르뇌 신부 등 많은 순교자들이 처참하게 죽는데도 아무런 능력을 보여 주지 않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주가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내려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였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용서하였고 누구를 구원했다는 말인가.
"언젠가 나으리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주교인들은 영생한다고 아니 하셨습니까. 허면, 연홍이도 그리 될 것입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아니오 아니오. 다 부질없는 믿음인 것 같소."
"지금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연홍이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심이 옳을 듯싶습니다만……."
"한 많은 인생,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는 일밖에 더 있겠고.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소이다."
"허면, 내일 사형터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당연하지 않겠소? 밤이 되기를 기다려 시신을 거둬야지요."
"나으리 혼자서 그 일을 어찌하시겠습니까?"
"……."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며칠 전에 승업이가 다녀갔습니다."
변 주부는 승업이가 한밤중에 포졸을 대동하고 경복궁을 빠져나왔던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이용후가 놀라 아연실색을 하였다.
"그래서요?"
"연홍이한테 소식이 있을 경우, 꼭 기별을 해 달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억지 약조를 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 아이가 철이 없는 것인지 생각이 깊은 것인지 원……. 지난번 이 부사 딸이 죽었을 때도 엉뚱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연홍이 소식을 알면, 이번에도 그 아이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그 생각을 아니 한 것은 아니지만, 나으리께서 혼자 감당하시기 어려우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승업이를 대동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원군의 최대 사업이 경복궁 중건에 있는데, 중차대한 소임을 맡은 사람이 어찌 자리를 뜰 수 있겠소이까. 큰 화를 당할까 우려됩니다."
"승업이 특별이 정이 많아서 눈앞에서는 차마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연홍이 사후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과히 염려 마십시오. 나름대로 방법을 구할 것입니다."
"제가 직접 나설 수는 없고, 나으리께 무엇을 도와 드리면 좋겠습니까?"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이다."
이용후는 약전을 나와 바로 청계옥으로 갔다. 청계옥 문턱을 넘어서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계향이 쪼르르 달려왔다. 이미 그녀 눈에 눈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이용후는 계향이 새삼 기특하게 느껴졌다. 선머슴처럼 굴던 어린아이가 그새 스무 살이 넘어 이젠 어른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을 다 품고 있는 것이 대견하였고, 한편 가련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이제껏 연홍이만을 의지하며 살아왔던 삶이 그녀가 곁에 없음으로써 깊은 낭패감에 빠져 있을 것이다.
"목이 빠지도록 나으리를 기다리고 있었사와요. 우리 아씨는 어찌 되었사옵니까? 곧 풀려나시게 되어요?"
"글쎄다…… 실은 나도 답답한 중에 있는니라."
이용후는 계향의 초조한 얼굴을 보자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도 계향은 턱밑으로 파고들어 마치 이용후한테 시비라도 걸 것처럼 묻고 또 묻는 것이었다. 이용후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막막하였다. 연홍이 처형된다는 사실을 말했다가는 계향이 혼절할 것이 분명하고, 어차피 알려질 일인데 마냥 숨기고 있을 수도 없고…….
그는 또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황 서방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뒤뜰에서 장작을 뽀개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왜 그러시옵니까?"
"너는 알 것 없고……."
"오라고 이를까요?"
"허면, 잠시 사랑방으로 들라 이르겠느냐? 그리고 너는 주안상 좀 간단하게 차려 오도록 하고."
"네, 나으리"
이용후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서도 벽만을 응시한 채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이젠 청계옥에 더 올 일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출입하면서 있었던 갖가지 추억들이 실바람처럼 불어와 마음을 더욱 울적하게 하였다. 청계옥은 홍경무에게 느닷없이 끌려와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연홍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비록 기생이기는 하지만 인물이 특별히 빼어난데다가 예의범절이나 문장이나 양반집 규수나 다를 바 없어, 사내들 중에서도 특히 한량이면 누구나 그녀를 품고 싶은 마음이 들 만한 여자였다.
이용후는 때로 끼니가 온데간데없을 만큼 가난한 선비 주제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청계옥 출입을 자주 하였다. 그녀의 도타운 인정이 그의 발걸음을 이리로 돌려 놓았다. 그가 주안상을 받을 때마다 화대는커녕 술값도 받지 않았다. 외상값 명목으로 간혹 엽전 몇냥 내놓아도 결코 받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어느 누구도 처가에 가서 그런 대접 받기 어려울 만큼 항상 융숭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 집이려니 생각하십시오." 할 뿐이었다.
연홍이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다니 ……. 천주님. 이리 무심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용후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연홍에 대한 그리움이 엿물처럼 흘러내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으리. 찾아계시옵니까? 황 서방이옵니다."
"……어서 들게."
이용후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황 서방은 문을 열고도 차마 들어오지를 못하고 툇마루 끝에 무릎을 붙인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안으로 들게."
"예, 나으리."
황 서방이 안으로 들어서자 곧 이어 계향이 주안상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술상을 내려놓고도 선뜻 나가지 않고 마냥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무슨 낌새를 차린 것처럼 곁눈질로 이용후 눈치를 자꾸 살폈다.
"계향이는 잠시 나가 있도록 해라. 황 서방과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느니라."
"……네, 나으리."
계향은 매우 서운하고 궁금한 여운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비로소 이용후가 술상으로 다가앉았다.
"내일 저녁에 나랑 갈 곳이 있네."
"어디를 말씀하시는지요?"
"……서대문 밖일세."
"서대문 밖이라 하오면……?"
이용후는 고개를 꺾고 술을 거푸 두 잔이나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잔을 황서방에게 내밀었다.
"사형장이야."
"방금 사형장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렇다네."
이용후는 그제서야 연홍에 대한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황 서방이 놀라서 "사실이옵니까, 사실이옵니까?"만 반문하였다. 이용후는 죄인이 된 마음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 얘기는 당분간 함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지만, 미리 알면 집안이 시끄럽지 않겠나."
"어이구, 불쌍한 우리 아씨."
황 서방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방바닥을 쳐 댔다. 이용후는 그 모습을 바로 볼 수가 없어 눈길을 천장에 걸어 놓았다. 황 서방이 오래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용후로서는 몹시 민망하였지만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들대로 쌓인 정을 생각하면 이용후만 오직 죄인이었다.
오원은 벽화에 채색을 하면서 연신 유숙의 안색을 살폈다. 어제부터 품고 있었던 생각이라, 그에게 털어놓을 기회를 이제나저제나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품을 생각은 뻔한 것이었다. 연홍의 소식이 궁금하여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연홍에게 특별한 일이 생기면 변 주부가 기별하겠다고 약속은 하였지만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유숙이 등을 돌려 자리를 뜰 기미가 보이자 오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으리께 청이 있습네다."
"청이란 게 무엇이더냐?"
"오늘 저녁에 밖을 나가도록 허락해 주시라요."
"어디를 갈 것이냐?"
"……청계옥에 다녀오갔습네다."
"거기는 무슨 일로 가느냐?"
"연홍 아씨가 궁금해서 기럽네다."
"그 아이 일이라면 포도청엘 가야지 거기는 가서 무슨 소용이냐."
"포도청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합네다."
"기방에 가도 소식을 알 수 없을 것이야."
"나으리. 허락해 주시라요. 내일 아침 일찍 돌아오갔습네다."
"생각 좀 해 보자꾸나."
유숙이 일단을 그렇게 미루었지남 마음속으로는 이미 내락하고 있었다. 오원의 성격으로 보아 허락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발을 묶어 놓을 경우, 몰래 빠져나가고 말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응헌의 딸이 죽었을 때를 회상하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해질녘, 유숙이 돌아와 내일 아침에 꼭 돌아올 것을 약속받고 오원의 외출을 허락하였다.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던 오원이 매우 기뻐하였음은 물론이다.
"궁을 빠져나온 오원은 한달음으로 청계옥에 도착하였다. 마침 계향이와 미욱이 툇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화가 선샌이 여긴 웬일로 오셨수?"
계향이 반가운 마음을 짐짓 비아냥으로 드러냈다. 오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대뜸 연홍의 소식부터 다그쳤다.
"나도 아씨 소식을 몰라서 하루하루가 답답해요."
"기럼, 아씨 소식을 아무도 모른단 말이네?"
"그러니까 답답하다는 거 아니오."
"이 진사 나으리께서도 전혀 모르시네?"
"그러신가 보우. 나으리는 지금 사랑방에 계시우."
"뭐야? 나으리래 오셨네?"
오원은 계향의 말을 더 들어 볼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 길로 사랑방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계향이 따라붙어 승업의 소매를 낚아챘다.
"와 기러네?"
"나으리는 지금 주무시고 계시다우."
"기래도 마음이 급해야."
오원은 계향의 손을 뿌리치고 문 앞으로 다가ㄱ다. 계향의 말대로 이용후가 정말 잠이 들었는지 인기척이 전혀 새나오지 않았다.
"나으리, 나으리."
오원은 갈금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그렇게 대여섯 차례를 불렀다. 그제서야 인기척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이용후는 긴가민가하여 오원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오원은 그 자리에 엎드려 인사를 넣었다.
"승업입네다. 그간 옥체 만강하셨습네까?"
"네가 여기는 웬일로 왔느냐?"
"연홍 아씨래 궁금해서 달려왔습네다."
"대궐 일은 어찌하고?"
"유숙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왔습네다."
"그 말이 사실이냐?"
"기렇습네다."
"……왔으니, 들어오너라."
이용후는 다시 마음이 무거웠다. 오원에게 사실을 숨길 일이 몹시 걱정이었다. 변 주부한테 얘기를 들었던 터라 바위를 안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였다. 오원이 사실대로 알았다가는 기절할 것이 뻔하고, 내일 사형터에 따라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다.
"연홍 아씨래 어찌 됐는지, 소식을 모르십네까?"
"아직 포도청에 있느니라."
"기럼, 아씨를 구할 수 없는 겁네까?"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게 아니냐. 답답하기는 너와 매일반이다."
"혹시, 돈이래 모자라서 기러십네까?"
"그렇지 않아. 돈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야."
"기럼 어드렇게 하면 아씨를 구할 수 있습네까?"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구나."
"이러다가 아씨래 죽으면 어캅네까? 지난번에는 뇌물을 써서 구해 내지 않았습네까."
"이번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구나."
"……아씨해 죽으면 안 됩네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게야. 죽는다고 해도 하늘의 뜻으로 알고 있어야 하느니라."
"기래도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네다. 포도대장의 마음만 움직이면 될 것 아닙네까?"
"그것이 어렵다는 게야."
"손을 빨리 쓰디 않으면 연홍 아씨래 죽고 맙네다."
오원은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용후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오원의 말이 사실이라 달리 대안이 없는 한 그를 위로할 말이 없었다.
지체래 높으면 뭐하고, 학문이래 깊으면 뭐 하네. 죄 없이 갇혀 있는 사람 구하지도 못하는 것을.
오원은 이용후와 변 주부가 갑자기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까짓 포도대장쯤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가 싶어 그들의 무능이 새삼 안타까웠다.
"기럼, 연홍 아씨를 볼 수도 없습네까?"
"면회조차 허용이 안 되는구나."
"기럼, 아씨래 죽었다고 해도 못 들을 것 아닙네까?"
"글쎄다……설마 그렇기야 하겠느냐."
오원은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이용후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니 마음만 답답하여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오원이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계향이 조르르 다가오더니 무슨 얘기를 나누었냐고 물었다. 오원은 묻는 말에 대꾸는 않고 다짜고짜 술상을 차리라고 하였다.
"어머머? 술 마실 줄도 아우?"
"내 나이래 몇인데 술을 못 마시네?"
그런데도 계향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오원을 멀뚱히 올려보기만 하였다. 오원이 눈을 부라려 빨리 가져오라고 재촉을 하였다.
"나으리한테 꾸중 들은 게로군."
"하도 답답해서 기래."
"무엇이 답답하다는 거유?"
"잔말 말고 날래 술이나 개져오라우."
오원은 얼굴을 붉히며 주머니에서 엽전을 있는 대로 다 꺼내 계향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는 돈만큼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미욱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계향에게 눈짓을 보내고 오원을 제 거처로 끌고 갔다.
"형님, 왜 그러우?"
"답답해서 기래."
"무엇이?"
"생각 좀 해 보라우. 지체 높은 양반이 돼 개지고 연홍 아씨 하나쯤 구해 내지 못해서야 되갔네?"
"그거야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인 걸, 나으린들 별수 있겠수?"
"기렇다고 연홍 아씨래 죽는 걸 보구만 있갔어?"
"그럼. 형님한테 좋은 수가 있는 거유?"
"없어야, 기러니까 답답하지 않네. 저러다가 연홍 아씨래 죽고 말아."
"설마 죽이기야 할라구. 사람이 무슨 종교를 갖든 제 마음인데, 천주교를 믿는다고 사람을 죽이겠수?"
"야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네? 소문도 못 들었네? 천주교 믿는 사람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고 있어야."
"조선이 아직 개화를 못해서 그래요. 조정에서 나라의 문을 활작 열어야 하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문을 안으로 꼭꼭 잠그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우."
"기래 기래. 그건 미욱이 말이 맞아. 기거이 다 대원군 때문이 아니갔네. 백성들은 여기저기서 굶어 죽는데, 궁궐만 크게 지으면 뭐하갔다는 기야?"
이때 계향이 술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앉아서 두 사람 앞에 각각 잔 하나씩을 나누어 놓았다. 승업은 옥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궁금해 하였다. 그러자 계향은 코웃음을 치며 볼에 바람을 넣었다.
"옥수 아씨가 보고 싶수?"
"야는 무슨 말을 기렇게 하네? 거저 궁금해서 물어 본 거야."
"무슨 얘기를 했갔네. 연홍 아씨 얘기디. 구해 낼 방법도 없다, 면회도 못한다 하니까니, 내래 얼마나 답답하갔네."
그러자 계향이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차마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는 표정으로 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연홍 아씨래 죽으면 안 되는데……. 좋은 방법 없네? 나으리하고 주부 어른만 믿어서는 안 되갔어. 포도대장, 그 사람 마음을 움직일 방법만 있으면 되갔는데."
"우리 같은 천민이 감히 포도대장을……."
"빌어먹을. 양반이 대체 뭐이가. 양반이 뭐인데 우리가 이 따우 취급을 받고 사네?"
"취했수? 나으리가 아시면 어찌할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우?"
"나으리한테 이러는 게 아니야. 거저 마음이 답답해서 화가 나는 기야."
"하긴, 형님 말이 옳수. 천민은 대대손손 천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억울해."
"미욱아.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된다. 너는 동학쟁이로 숨어 살면서 입을 그리 함부로 놀리니?"
그러자 오원이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이미 동학 얘기는 듣기는 했어도 미욱이 바로 그중에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오원이 미욱이와 계향이를 번갈아 바라보자 계향이 자신이 뱉은 말이 염려스러운지 이내 고개를 꺾었다.
"미욱이가 동학쟁이네?"
"그렇수."
그가 서슴없이 시인하였다. 오원이 또 한 번 놀라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계향이 안절부절못하였다.
"기런데, 와 숨어 댕기네? 나라에서 기것도 금하고 있는기야?"
"나라가 썩어서 그렇다우."
"나라 썩은 거야 새삼스러운 거이 아니잖네. 서학이래 있으니까니 동학이 있는 거이 아니갔네. 조정에서는 와 이것저것 다 못하게 하는 기야?"
"권력 잡은 사람들이 백성들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영화만 생각하니까 그렇지."
"기건 기래. 어쨌든 미욱이래 생각이 깊구만. 천자문을 뗀 사람이라 다르구만기래."
오원이 미욱에게 술잔을 건네면서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계향이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라우, 계향이. 똑똑한 동생을 두었어야,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해. 아마 동생이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믄 벌써 출세했을 기야."
오원이 한숨을 쉬면 혼자 고개를 끄덕이자 계향이 눈물을 훔치며 훌쩍훌쩍 울었다. 미욱이도 따라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보라우. 내래 울리자고 기런 게 아니야. 다만 안타까워서 기렇디."
"출생이 서러워서 울었수."
"기래 기래. 알 만해. 자아 계향이도 내 잔 받으라우."
오원이 잔을 계향에게 건네자 미욱이 재빨리 주전자를 들어 그녀에게 술을 부었다. 그러는 그의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누이한테 함부로 한 말 잊어버리우."
"무슨 말?"
"누이가 기생 된다고 했을 때, 내가 마구 욕을 했잖수. 그러구서 누이 곁을 떠나긴 했지만, 후회를 많이 했수. 누이 처지도 불쌍한데 괜히 그랬구나 싶었지.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동기간인데 내가 누이 탓을 왜 하겠수."
"그래. 나도 네 마음 다 알아. 그러니까 너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았니."
"보기 좋구만. 동기간도 없는 나는 얼마나 쓸쓸하갔네. 기래서 미친 사람처럼 그림만 그리는 기야. 이거이 다 진사 어른 덕분이디만. 진사 어른을 뵙지 못했으면 내래 이 세상에 없을 기야."
오원이 한숨을 내쉬면 잠시 추억에 잠기는 표정에 빠지자 계향이 남매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계향이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연신 입을 달싹거렸다.
"누이. 아까부터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수."
"아까 나으리께서 황 서방을 따로 불러 무슨 말씀인가 하시는 것 같았는데, 그게 자꾸 궁금해서 기래."
"무슨 말?"
"그걸 모르겠어. 틀림없이 연홍 아씨에 대한 얘기 같은데, 차마 엿들을 수가 있어야지."
"기럼, 황 서방한테 물어 보지 그랜?"
"물어 봤는데, 통 말을 아니 하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눈치던데……."
"혹시, 연홍 아씨한테 나쁜 일 있는 거이 아니네?"
"그래서, 나으리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했던 거유."
"나한테 특별한 말씀은 안 하셨어야."
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밤이 깊어, 계향은 술상을 들고 나가고 오원과 미욱이만 남았다. 두 사람이 등잔불을 사이에 두고 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미욱이. 연홍 아씨를 구해 낼 방법이 없갔네?"
"글쎄……? 진사 나으리께서 이미 방법을 다 쓰셨는데도 아니 된다고 하시니 우린들 어쩌겠수."
"참으로 답답하구만 기래."
"우리 누이를 보살펴 준 연홍 아씨는 나한테도 은인이우. 나한테 방법이 있으면 내 목숨 버리고라도 구하겠수."
"미욱이도 내 생각과 같구만기래.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먼저 은혜를 갚아야 하는 기야. 기런데 내래 이게 뭐이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는 맙시다. 설마 천주가 착한 연홍 아씨를 죽게 하겠수?"
"기건 기래. 연홍 아씨래 착해서 죽디 않을 기야."
"오원은 그녀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거지꼴로 나타난 오원을 마다하지 않고 등 따습고 배부르게 보살펴 준 연홍의 정이 새삼 그리워 시원하게 통곡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연홍 아씨. 조금만 참고 견디시라요. 절대 죽디 않을 기야요.
4
드디어 경복궁 중건을 끝냄으로써, 3년에 걸친 대역사가 막을 내렸다. 그동안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면서 거뒤들인 원납전 총액이 710만 2,662냥이고 백미가 615석이었다. 그리고 부역한 연인원이 3만 5,881명에 이르렀다.
사정전의 쌍룡도 백화는 이보다 훨씬 앞서 마쳤기 때문에 오원은 벽화에 참여한 다른 화공들과 함께 작업장에서 일찍 철수하였다. 벽화는 그 형상과 동작이 우아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매우 세밀하여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 벽화를 보고 만족한 사람은 누구보다 고종이었다. 이에 대원군이 크게 기뻐하여, 벽화에 참여한 도화서 화공들에게 특별히 포상하여 오원도 5백 냥이라고 하는 거금을 받게 되었다.
오원은 포상금보다는 비로소 작업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음이 무엇보다 홀가분하였고, 다시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어 기뻤다.
유숙은 오원이 경복궁에서 철수한 날 저녁, 그를 위해 특별히 주안상을 차리도록 하여 함께 술잔을 나누었다. 벽화에서 보여 준 오원의 감각이 매우 뛰어나 그의 자질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이 자신의 제자가 되어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대원위 대감께서 벽화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셨음은 물론, 너를 특별히 눈여겨보셨느니라. 오랫동안 습작을 못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다시 습작에 임하도록 하여라."
"저는 오직 나으리 분부에 따랐을 뿐입네다. 이자부터 습작에 몰두하갔습네다. 앞으로도 엄하게 다스리시라요."
오원은 유숙이 내린 술잔을 받아 놓고도 차마 마시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유숙이 채근하여 겨우겨우 마셨다.
"네 나이 이미 스물다섯이 되었으니, 이제 대작을 하여도 좋으니라."
"기래도 감히 나으리와 어드렇게 대작을 하갔습네까. 특별히 주시는 잔이니까니 오늘만 마시갔습네다. 기런데, 궁금한 거이 있습네다."
"무엇이냐?"
유숙은 오원이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들어 보나마나 연홍의 소식을 물을 것이 뻔하여 마음이 부거웠다. 연홍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변 주부로부터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변 주부가 오원에게 약속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전해 줄 것을 유숙에게 당부하였다. 그러나 유숙아 숨기고 있었다. 벽화가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중이라 차마 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칫 오원이 발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혹시, 그동안 주부 나으리께서 보내신 전갈이 없었습네까?"
"……있었느니라."
"기럼, 연홍 아씨에 대한 것입네까?"
"……그렇더구나."
"포도청에서 나왔다는 전갈이었습네까?"
"너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으나, 벽화 작업 중에 동요될까 우려해서 슴기고 있었느니라. 안됐다만, 그 기생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다."
"……기거이 정말입네까? 정말 죽었습네까?"
"어이구, 연홍 아씨."
오원은 어깨를 사시나무 떨듯 흔들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유숙은 갑자기 죄인이 되어 오원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오원이 한참 만에 울음을 그쳤다.
"나으리. 내일 잠시 나갔다 오갔습네다."
"가는 곳이 어디더냐?"
"청계옥에 가서 자세한 얘기를 듣갔습네다."
"좋으니라."
이튿날, 오원은 집을 나서자마자 바로 청계옥으로 달려갔다. 마침 미욱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미욱이 오원을 반기면서도 얼굴 한구석이 쓸쓸하였다.
"연홍 아씨 소식은 들었수?"
"어제 들었어.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네. 와 아씨 같이 착한 사람이 죽어야 한단 말이네?"
"그러게 말이우."
오원이 눈물을 글썽거리자 미욱이 따라서 코를 훌쩍거렸다. 이때 옥수와 계향이 나왔다. 계향이 오원을 보자 눈물부터 짜냈다. 그러나 옥수는 왠지 침묵만 하고 있을 뿐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화가 선생이 아침 일찍 웬일이신가?"
"연홍 아씨 소식 듣고 달려왔시오."
"정말 안됐어. 괜히 천주교는 믿어 가지고…… 내가 그토록 말렸건만."
"연홍 아씨래 어디다 묻었습네까?"
"나는 가 보질 않아서 모르겠고…… 계향이랑 미욱이는 알고 있지?"
옥수가 남의 일이라는 듯이 아주 태연하게 굴었다. 그러자 계향이 입을 비죽거리며 옥수를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였다.
"계향이랑 미욱이는 아씨 묻힌 곳에 가봔?"
"누이랑 함께 갔었수."
"계향이는 아씨를 누구래 묻어 드렸는지 알고 있네?"
"진사 어른과 황 서방이."
"도대체, 언제 돌아가셨네?"
"형님 다녀간 그 이튿날이우."
"기럼, 그때 진사 나으리는 알고 계신 거였네?"
"우리한테는 감쪽같이 숨기고 계셨던 거유."
"미욱아, 나랑 아씨 묻히신 곳에 가지 않갔네? 계향이는 아씨한테 올릴 것 좀 장만하라우."
계향이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가자, 오원은 툇마루에 앉아 미욱이한테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잠시 후 계향이 젬루이 든 찬합과 술병을 들고 나왔다. 그녀도 함께 가겠다고 하여 셋이 청계옥을 나섰다. 그러자 옥수가 빨리 오라고 못을 박았다. 옥수를 보는 계향이 눈이 또 곱지 않았다.
연홍이 묻힌 곳은 서대문 밖 공동묘지였다. 그녀의 무덤은 떼도 입히지 않은 채 봉분만 덩그렇게 솟아 있었고, 열 십자로 엮은 막대가 삐딱하게 꽂혀 있을 뿐이었다. 오원은 무덤 앞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계향이와 미욱이도 따라서 끄억그억 울음을 터뜨렸다.
연홍 아씨래 와 죽습네까. 아씨래 잘못한 거이 뭐인데 죽는단 말입네까.
오원은 눈물을 모두 말려 버릴 것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미욱이 그의 겨드랑에 팔을 껴 일으키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저토록 울다가는 결국 기절할 것이 분명하여 계향이도 나란히 쪼그려 앉아 애써 말렸다.
"그만 울어요. 울어서 아씨가 살아나신다면 몰라두……."
"아씨래 우리를 얼마나 많이 돌봐 주셨네. 기렇게 착한 분이 와 죽는단 말이가. 아씨래 천주교만 믿디 않았어두 이렇지는 않았을거 아니가."
"누가 아니라우. 그러면서도 왠지 나한테는 믿으라는 말씀을 선 뜻 아니 하셨어요. 아마 이럴 줄 미리 아셨나 보우."
"거 보라우. 아씨래 기렇게 마음이 깊으신 분이잖네."
아씨. 편히 주무시라요. 아씨래 틀림없이 극락에 가실 기야요. 거기서 부디 영화를 누리시라요.
오원은 연홍의 무덤을 다녀온 이후로, 여러 날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습작도 시작하지 않았고, 곡기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만석이 안달을 부리며 먹기를 권하였지만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길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형님은 어찌 된 사람이 누가 죽기만 하면 혼이 빠지우? 부모상을 당해두 이렇지는 않을 거구만. 내말 듣고 있수?"
"……"
"……만석아."
"어럽쇼? 이제사 정신이 돌아오나? 왜 그러슈?"
"술이나 한 사발 개져오라우."
"방금 술이라구 했수?"
"……기래."
"입에 곡기도 대지 않는 사람이 술은 왜 마시우? 그랬다가 취해서 주정할까 두렸수."
"날래 개져오라우."
"……알았수."
만석이 술사발을 들고 오자 오원은 마치 술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마셔 댔다. 그리고 한 사발 더 가져오라고 하였다.
"더는 아니 되우."
"빨리 개져오지 못하갔어?"
"……알았수."
만석은 오원의 눈빛이 너무 섬뜩하여 뒷걸음질로 비칠비칠 물러났다. 꼭 발광하는 사람의 눈빛이어서 바로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 유숙이 나와 만석이와 마주쳤다.
"승업이는 어찌하고 있더냐?"
"……여전하옵니다."
"허면, 아직도 밥을 먹지 않고 있더란 말이냐?"
"밥은 켜녕 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술만 마시겠다고 함니다요."
"술을?"
"한 사발 갖다 줬는데, 또 가져오라고 저리 강짜를 부립니다요. 어찌하옵니까?"
"……실컷 마시게 하여라."
"참말이시옵니까?"
"마음이 울적할 때는 술이 곧 약이니라."
유숙은 오원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원래 정이 많은 사내라, 충격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목석같이 기름지지 못하면 예술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애써 오원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제 스스로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만석이 술을 병에 가득 담아 가지고 들어가자 오원이 목을 잔뜩 꺾어 놓고 끄억끄억 울고 있었다.
"여기 있수다. 나으리께서 실컷 마시도록 하라고 분부하셨수."
"기래 기래, 나으리께서 내 마음을 아시는 기야."
"이거 마시고 한숨 자슈. 정신을 차려야 그림을 그리잖수. 그리고 하나 물어봅시다. 대체 연홍인가 뭔가 하는 기생이 형님한테 어떻게 했길래 이 난리슈? 혹시 짝사랑한 거 아니우? 아니면 살이라구 섞었수?"
"아새끼래 말하는 것 좀 보라우. 니 대갈통에는 기딴 생각만 들어 있네?"
승업이 눈을 무섭게 부라리는 것이 곧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그러자 만석이 놀라서 재빨리 물러앉았다.
"아니면 됐지, 화는 왜 내우? 너무 이러니까 괜히 해 본 소리유."
"비록 기생이기는 하디만, 여느 기생과는 다름 사람이야. 내래 춥고 배고픈 시절에 꼭 누님처럼 보살펴 주신 분이야. 기래서 기래."
"형님은 보살펴 주는 사람이 많아서 좋겠수. 이 진사도 그렇다지, 변 주부도 그렇다지, 기생도 그렇다지…… 또 우리 나으리는 형님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시우."
"기건 기래. 내래 그분들 은혜 갚으려면 죽을 때까지도 다 못 갚고 말아.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날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기야. 그분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연홍 아씨야. 그 아씨래 죽었단 말이야. 기러니 내 마음이래 어떠하갔네?"
"형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우. 너무 오랫동안 슬퍼하니까,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유."
"나도 모르갔어."
"어쨋든, 빨리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슈. 나으리께서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니 그것도 송구스러운 일 아니겠수?"
"알고 있어야. 허디만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카갔네."
오원은 취기가 몸에 번지면서 자주 눈물을 짜내, "연홍 아씨, 연홍 아씨."를 주문처럼 중얼 거렸다.
계향이 동생과 겸상을 하여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어제 홍경무가 와서 밤이 늦도록 술상을 끼고 앉아 주정을 늘어놓는 바람에 몹시 시달렸다. 어쩌다 그 꼴을 목격한 미욱이 심사가 잔뜩 뒤틀려 밥상을 받아 놓고도 입이 대짜나 나와 있었다.
"어떻게 하면 누이가 기생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겠수? 어젯밤, 홍생원인지 꽁생원인지 하는 작자가 누이한테 구는 짓을 차마 볼 수가 없었수."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인간이란다."
"기생질만 아니 하면 그런 작자한테 시달릴 까닭이 없잖수."
"당장 벗어날 길이 없지 않니."
"차라리 어디 가서 나랑 둘이 농사나 짓는 것이 어떻수?"
"농사를 지으려면 논밭이 있어야 하지 않니. 누가 우리한테 그런 땅을 줄 리도 없고."
"멀리 떠나 주인 없는 산이라도 개간하면 되잖수."
"말은 쉽지만 농사 일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뼈빠지게 농사지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양이면 그다지 보람 있는 일도 아니야."
"그래도 홍 생원 같은 인간한테 시달림을 받으며 기생질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유."
"차라리 장사를 했으면 했지, 농사 일은 못한다."
"내가 돈을 벌어 오면 정말 장사를 하겠수?"
"못할 것두 없지. 허지만 숨어 다니는 신세가 어찌 돈을 번단 말이냐?"
"동학쟁이에서 발을 빼면 못할 것도 없수. 그리고 누이도 돈을 착실히 모으면, 그것과 합해서 조그만 장사를 할 수가 있어."
"좋은 생각이긴 하구나. 어차피 너도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아. 홍 생원이 마음 삐뚤어진 사람이라, 네가 숨어 다니는 사실을 알면 밀고할지도 몰라. 연홍 아씨도 홍 생원이 밀고하여 저리된 거야. 옥수는 절대 아니라고 우기고 있지만 내 짐작이 틀림없어. 그러니, 너 하나쯤 밀고하지 않겠니?"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며칠 수에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디로 간단 말이니?"
"정한 곳은 없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야지."
"그럼, 동학쟁이 노릇은 정말 안 할 거지?"
"그래야지, 사람이 남에게 대접을 받지 못해도 천대는 받지 말아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되지 않겠수?"
"참으로 기특한 생각을 하였구나."
"떠나기 전에 승업이 형님을 한 번 보았으면 좋겠는데……. 어찌 찾아가면 승업이 형님을 만날 수 있수?"
"약전에 가서 주부 어른께 여쭤 보면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런데 승업이는 왜 만나려구?"
"그냥 떠나기가 서운해서 그래. 생각할수록 좋은 사람이거든."
"그럼, 오늘이라두 약전에 가서 물어 보렴."
"그래야 되겠어."
미욱이 유숙의 집에 당도하여 안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마침 만석이 눈길에 잡혔다. 만석이 미욱의 모양새를 훑어내리며 누구를 찾아왔냐고 물었다.
"여기, 장승업이라는 화가가 살고 있수?"
"그렇소만, 댁은 어디서 오셨수? 혹시 그림 그리는 분이슈?"
"아니오, 그저 승업이 형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오."
"안에 있기는 하오만, 누구라고 이르면 되겠수?"
"미욱이라 전해 주슈."
"……잠시 기다리시우."
만석이 고갯짓을 연신 해 대며 뒤뚱뒤뚱 사라졌다. 잠시 후 오원이 궁금한 낯으로 나와 미욱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미욱이 얼굴을 잊었수? 왜 그리 바라보기만 하우?"
"너무 뜻밖의 손님이라 기래. 대체 여게 웬일이가?"
"그냥 형님이 보고 싶어서 왔수."
"반갑구만기래. 날래 들어가자우."
오원은 미욱이 너무 반가워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거처로 안내하였다. 오원이 마침 습작을 하던 중이라 방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그는 화선지와 화구들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미욱이와 마주 앉았다. 이때 만석이가 얼굴을 디밀었다.
"손님이 오셨는데, 맨입으로 있을 거유?"
"대접할 거이 있어야디."
"술 한잔 드실라우?"
"기거 좋디. 개져오라우."
오원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 마음이 둥실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미욱은 오원이 그려 놓은 그림들을 구경하며 벌어진 입을 오랫동안 다물지 못하였다.
"이걸 다 형님이 그린 거유?"
"기렇기는 하디만, 모두 마음에 안 들어야."
"나 같은 문외한의 눈으로는 모두가 훌륭하우."
"마음에 드는 거이 있으면 개져가도 좋아."
"정말이우? 나 같은 사람이 가져도 되는 거유?"
미욱이 오원의 말이 믿기지 않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오우너이 그린 것 모두를 모아 미욱이 앞에다 밀어 놓았다.
"그럼, 이것 하나만 가지겠수."
미욱이 기암괴석 그림을 골라잡으면서 정말 가져도 되는냐고 또 물었다.
"여태 속아만 살았네? 정말 가지래구 기러는구나."
이때 만석이 제법 실한 안주가 놓인 술상을 내려놓고 나갔다. 오원이 상을 끌어당겨 미욱이와 마주 앉았다. 그러면서 연신 웃음을 흘렸다.
"미욱이래 와 줘서 기분이 좋구만기래. 자아, 받으라우."
"반겨 줘서 고맙수. 실은 형님께 인사하러 왔수."
"인사를 하다니, 기거이 무슨 말이가?"
"며칠 있다가 청계옥을 떠날 생각이우."
"갑자기 와 기러네? 연홍 아씨래 안 계셔서 기래?"
"그것도 그렇지만, 하는 일 없이 눈치도 보이고, 또……."
미욱은 계향이와 나우었던 얘기들을 낱낱이 늘어놓으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로 얘기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자 오원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하였다.
"미욱이 말이 맞아. 내래 청계옥에 있어 봤디만, 기생 노릇 매우 고달픈 일이야. 성질 못돼먹은 사내들이 오면 기생들이 여간 힘들디 않아."
"누이도 나이를 먹어 이젠 기생질도 시세가 없어. 기생 나이 스물이면 환갑이라고 하잖수. 그런데 스물다섯이나 됐으니……."
"기런데, 미욱이가 어드렇게 돈을 벌갔네? 머슴 하갔네?"
"머슴 일이든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면, 설마 못 벌겠수?"
"그 세월이 얼마가. 이러면 어떻갔네? 내래 경복궁 중건 때 상금으로 받은 돈이 있어. 기걸 밑천으로 장사하면 되지 않갔네?"
"형님도 참 …… 내가 왜 그걸 갖는단 말이우. 내 힘으로 벌어서 장사 밑천 만들 거유."
"거저 받디 않겠다면 빌려줄 테니까니, 나중에 갚으라우. 장사 잘되면 그때 갚으면 될 게 아니네. 지금 육백 냥쯤 있으니까니, 개겨가라우. 내래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야."
"돈 필요 없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수."
"정말 쓸 데가 없어서 기래."
오원은 발딱 일어나더니 고리짝을 뒤져 돈주머니를 꺼내 왔다. 그리고는 미욱이 품에다 서슴없이 안겼다.
"형님. 정말 왜 이러우? 내가 이걸 받을 이유가 없잖수."
"고집부리지 말라우. 이걸루 술 사 먹으라는 거이 아니잖네. 사이 좋은 남매가 장차 살아가는 방도를 위해서 쓰라는 기야. 내 말 알갔네?"
"내 말귀가 어두워서 이러는 게 아니우. 남의 귀한 돈을 덥썩 받을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거지."
"이보라우. 계향이와는 어릴 적 한솥밥을 먹으며 고생했댔어. 남이기는 해도 남 같은 생각이 안 들어서 기래. 내래 남의 은혜만 입고 살아서 이자는 남한테 은혜도 베풀면서 살고 싶은 기야."
"형님 마음은 알지만……."
"기러면 됐어야. 여러 말 하디 말고 가져가서 장사 밑천 하라우."
"글쎄……? 어쨌든 누이한테 물어봐야 되겠수?"
"물어 볼 필요가 뭐 있네? 장사하는 길이 계향이를 기생 노릇에서 빼내는 길이야. 그 길밖에 없어야."
오원이 미욱의 손을 끌어 잡아 토닥이자 미욱이 눈물을 주르르 쏟았다. 인심 각박한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나 싶어, 새삼스럽게 승업이 존경스러웠다.
"형님. 이 은혜를 어찌하면 갚을 수 있겠수?"
"은혜? 남매가 행복하게 잘 살면, 기거이 은혜 갚는 기야."
미욱이 돈주머니를 가슴에 품고 청계옥으로 달려갔다. 계향이 술 시중에 대비하여 몸치장을 하고 있던 중에 동생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무슨 일인지 미욱이 계향에게 눈짓을 보냈다. 제 거처로 오라는 뜻 같았다.
"승업이는 만났니?"
"만나기는 했는데, 이런 경우 어찌하면 좋을지……."
"무슨 일인데?"
미욱이 한참 만에 입을 열어 오원과 있었던 일을 사족 없이 늘어 놓앗다. 얘기를 다 듣고 난 계향이 대뜸 눈물부터 짜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니. 그 사람 마음이 이토록 넓을 줄 몰랐구나."
"나도 그래. 승업 형님이 보통 사람이 아냐. 돈이 많은 재력가도 이렇게는 못할 거야."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그 사람한테 은혜 입게 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니.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때 모질게 굴지 않았을 것을……."
계향은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오원에게 툭하면 면박을 주며 멸시했던 일들을 후회하였다. 이토록 그릇이 큰 사람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대한 것이 갑자기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누이는 기회를 보아 떠나겠다는 얘기를 옥수한테 해야 되겟수.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녀, 우리가 할 만한 장사를 알아볼 테니."
"그래. 우리가 장사할 거처를 먼저 마련한 다음에 얘기하자꾸나. 아아. 내가 기생 노릇에서 벗어날 날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장사를 잘 해서 승업이 형님 돈을 꼭 갚아야지."
"그렇다마다. 꼭 갚아야 해."
오원은 미욱을 보내 놓고 나서 한참을 흐뭇해 하였다. 그들 남매가 그 돈을 보람 있게만 쓴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돈을 모두 이용후한테 건넬 생각이었으나, 양반 체면에 절대 받지 않을 것이 분명하여 포기하였다. 혹은 그의 술값으로 청계옥에 맡길 생각도 했으나, 연홍이 없는 집에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그만 두었다. 쓰지도 않을 돈을 가지고 있기가 부담스러워 고심하고 있던 차에 미욱이가 나타난 것이다. 미욱이 생각이 깊은 사람인데다가 배움도 있어, 늘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제 누이 장래를 걱정하는 사려가 기특하여 남매의 정을 늘 부러워했었다. 황해도 저잣거리 국밥집을 돌며 천대받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국밥집 문전에서 꽤나 얻어맞았었다. 고작 제강 한 그릇 퍼 주면서, 혹은 개한테나 줄 음식찌꺼기를 내주면서 숱하게 걷어차였었다.
기래. 부지런히 돈 벌라우. 배고픈 서러움이 제일 큰 기야.
오원이 한창 습작에 목두하고 있는데 뜻밖에 양기훈이 찾아왔다. 자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낯선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왔다. 외모로 보아 연배가 승업과 비슷한 사내였다. 양기훈이 한발 앞서 다가와 오원의 손을 반갑게 잡았다.
"오원. 그 동안 적조했수다래. 별고 없었시오?"
"늘상 편하게 지냅네다. 석연이래 그동안 어디어디를 다녔시오?"
"꼭 정처가 있었던 건 아니고, 거저 여게저게 다니며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디요. 그래서 오늘은 오원한테 좋은 화가 한 분을 소개하려고 왔시오."
그가 곧 동행한 사내를 소개하였다. 그는 안건영이라는 화가로, 따지고 보니 오원보다 두 살이 위인 신축년생이었다.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에 이목구비가 수려한데다가 특히 눈매가 매서워, 사물을 관찰하는 힘이 날카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원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차에, 이렇게 직접 만날 수 있어 한량없이 기쁩니다."
"기렇게 말씀하시니 얼굴이 뜨겁습네다. 괜히 석연이래 과장을 해서 기렇디,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멉네다."
"겸손의 말씀이시오."
"서서 이럴 거이 아니라, 누추하디만 안으로 드시디요."
오원이 안으로 먼저 들어가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화구들을 한쪽으로 몰아 놓고 두 사람을 들어오게 하였다. 양기훈과 안건영은 들어서자마자 오원의 습작 그림들을 감상하느라고 한참 동안 입을 봉하고 있었다. 오원의 그림을 처음 대하는 안건영이 매우 감탄하는 눈치였다. 완성된 그림은 별로 없고 거의가 그리다 만 것들이지만, 우락부락한 기암괴석 그림에서는 웅장한 힘이 넘치고, 영모도에서는 섬세함이, 산수화에서는 화려하고 우아함이 매우 환상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안건영은 미완성의 그림들을 모두 안타까워하는 눈치였다.
"어찌하여 오원께서는 그림을 완성하지 않습니까?"
"싫증이 나서 그만ㄷ시오."
"허면, 미완성인 채로 그냥 버리시는지요?"
"기렇다가 마음이 동하면 완성하는 것도 있시오. 여기 있는 기명절지도는 기렇게 해서 완성한 것들입네다. 기래도 마음에 차는 것이 없시오."
이때 눈치 빠른 만석이 술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으리, 사랑채에 계시네?"
"아까 도화서로 가셨잖수."
"참, 기렇구만. 약소하디만 두 분 목이나 축이시라요. 귀한 손님이래 오셨는데 주안상이 빈약합네다."
오원이 술병을 들어 두 사람 앞에 번차로 병을 기울였다. 술이 몇 순배 도는 동안 가벼운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얘기는 성격이 활달한 양기훈이 주로 하고 오원과 안건영은 그저 웃음으로 분위기를 채워 갔다.
"석연. 여기 안 공께서는 주로 무엇을 화재로 하십네까?"
"안 공은 일찍부터 그림을 배워 능하지 않은 것이 없시오. 산수화도 일품이고, 영모 그림도 일품이고, 특히 남종화쪽의 조어도는 뛰어나 감탄하디 않을 수가 없시오."
"아니오. 오늘 오원의 작품을 보고,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별말씀을. 이왕 오셨으니까니, 한 작품 남기는 거이 어떻습네까?"
"남길 것까지야..."
"마침 같은 일을 하는 사람까리 모였으니까, 서로 그림 한 장씩 나위 개지는 것도 좋을 것 같수다."
"이런 낭패가..."
그리하여 세 사람이 차례로 붓을 잡아 안건영은 조어도와 산수화를, 양기훈은 노안도와 괴석도를, 그리고 오원은 영모도와 기명절지도를 그려 서로 교환하였다. 상대방 그림을 각각 받아 든 그들 셋은 매우 흡족하여, 앞으로 교유를 끊지 말 것을 약속하며 정답게 술잔을 주고 받았다.
안건영이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하여 자리를 뜨려고 해서 오원이 하룻밤 묵어 갈 것을 권하였으나, 집안에 우환이 있다고 하면서 그냥 가 버렸다. 오원은 그냥 보낸 것이 못내 아쉬워 큰길까지 그들을 배웅하였다. 마침 해질녘이 되어수 붉게 물든 석양이 취기 오른 오원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하였다. 앞으로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명심할 것이 있다며, 이용후가 오원에게 가르쳐준 공자 말씀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람에게는 이로운 벗이 셋, 이롭지 못한 벗이 셋이다. 정직한 벗, 성실한 벗, 박학한 벗은 이로우나 편벽한 벗, 겉으로만 부드러운 벗, 겉과는 달리 실속이 없는 벗은 해롭다.
이용후가 그때 이 문장을 써 주고는 한자의 훈을 낱낱이 설명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사족까지 달아 이해시켰다. 그리고는 "예술이란 손재주만 가지고 훌륭할 수가 없는 것이니라. 예술은 마음의 깊이가 있어야 해."하면서 또 한 번 오원이 글을 깨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다.
오원은 멀리 사라지는 양기훈과 안건영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들과의 우의가 죽을 때까지 돈독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날 저녁, 유숙이 귀가하면서 왠지 향수 정학교를 데리고 왔다. 정학교는 유숙의 소개로 오원과 이미 인사를 튼 관계였다.
잠시 후 주안상이 들어가면서 유숙이 오원을 불러들였다.
"습작은 많이 하였느냐?"
"네, 나으리. 실은... 조금 전에, 양기훈 화가와 새로 안건영이라는 화가가 다녀갔습네다."
"무슨 일로?"
"화담을 나누러 온 것 같았습네다."
"음... 유익한 시간을 가졌겠구나."
"네, 나으리 앞으로 교유를 자주 갖기로 하였습네다."
"잘 하였구나... 헌데, 이제는 승업이도 새로운 화풍을 배울 필요가 있어. 해서, 오늘 나으리를 모시고 왔느니라."
"무슨 말씀이온지..."
"마침, 향수 선생께서 쾌히 승낙을 하신고로, 한동안 나으리 댁에서 침식토록 결정을 보았느니라. 승업이 생각은 어떠하냐?"
"저는 오직 나으리 분부에 따르갔습네다만, 혹시 제가 습작을 게을리하여 내쫓는 것이 아니십네까?"
"그렇지 않느니라. 화가는 여러 화풍을 익혀서 그 중에 특히 알맞은 것을 제 것으로 삼는 법이니라. 너에게는 재주가 고루 있으니만큼 보다 많은 것을 익히도록 함이야."
"나으리. 하오나..."
"무엇이더냐?"
"아직 나으리께 다 배우지 못한 중에 있습네다. 기런데 어드렇게 다른 화풍을 배우갔습네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권하는 것이니, 따름이 좋을 것이야."
"... 네, 나으리."
오원이 갑자기 고개를 꺾고 바닥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오원이 유숙에게 사사하기 시작한 지 어언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열여섯 나이에 머슴이나 다른 없는 꼴로 들어와 그새 스물다섯을 넘겼으니 꽤나 긴 세월이었다. 있는 동안 꾸중도 많이 들었고 한때 쫓겨나는 곡절도 겪었다. 그러면서도 유숙은 오원을 진실로 미워한 적이 없었고, 출생이 보잘것없다 하여 박대한 적도 없었고, 지나치게 간섭한 적도 없었다. 오원이 간혹 자유분방할 만큼 관대하여 항상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이었다.
오원은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그동안 스승의 덕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점과 그의 밑에서 습작을 게을리한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나으리와 하직할 생각을 하니까니, 지난 세월이 후회될 뿐입네다. 나으리의 은덕을 깨닫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철없이 굴었던 일들이 부끄러워 새삼 얼굴을 들 수가 없습네다. 차라리, 나으리께 종아리라도 맞고 떠나면 송구한 마음이 덜어질 것 같습네다."
"괜한 소리를 하는구나, 누추한 집에 유하면서도 열심히 하였느니라."
"기렇지 않습네다. 나으리, 제발 종아리를 때려 주시라요."
오원은 기어코 끄억끄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 분수를 모르고 스승 앞에서 멋대로 굴었던 일들이 켜켜이 한이 되어 돌처럼 굳어질 것만 같았다.
"울음을 멈추렸다. 자꾸 그리하면 너를 가르치실 여기 향수 선생의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것이야."
"혜산, 가만두십시오. 저리 우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울음을 멈추고 내가 이르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배우는 자는 스승을 항상 제 부모처럼 마음을 써야 하고, 스승이 이르는 말씀은 당장은 마음에 쓰더라도 달게 받아야 하느니라. 뼈를 깎는 고통 없이는 진실로 배웠다고 할 수가 없으니, 스스로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알겠느냐?"
"나으리 말씀, 죽을 때까지 명심하갔습네다."
"그리 작심하면 됐느니라. 그만 물러가도록 해라."
오원은 거처로 돌아와서도 오랬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하였다. 그러자 만석이 따라서 울음을 떠뜨렸다.
"만석아. 내 없어도 나으리 잘 모셔야 해. 알갔네?"
"형님이 가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사우?"
"내래 바다 건너 가는 거이 아니야. 나으리 뵈러 자주 올 테니까니 섭섭해 하디 말아야. 나도 나으리를 떠나기 싫어. 하디만 나으리 분분가 계시니 어쩔 수가 없잖네."
"꼭 자주 와야 하우."
"기래 기래. 어디를 간들 스승님을 잊을 수 있갔네. 자주 오갔어."
5
혜산 유숙이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오원은 유숙의 부음을 받고 망연자실하였다. 그가 몸져누웠다는 만석의 전갈을 받고 달려간 것이 불과 열흘 전이었다. 그때 유숙의 병색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반주를 곁들여 식사도 하였다. 오원은 만석이 너무 호들갑을 떤 것이라 생각하고 안심을 했었다. 그러나 정작 유숙이 죽었다는 소식에, 오원은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갈라지는 충격으로 한참동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만약 만석이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오원도 그 길로 세상과 하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스승의 부음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참말이네? 참말로 나으리가 돌아가셨네? 거짓말이디?"
"감히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수? 오늘 아침 갑자기 그리되신 거유."
"며칠 전만 하여도 괜찮으셨잖네. 기런데 와 갑자기 돌아가시네?"
"그걸 낸들 아우? 나도 청천벽력인데."
오원은 만석을 앞세워 유숙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의 집이 저만치 보이면서 집안의 곡성이 섣달 북풍에 실려 제일 먼저 달려 나왔다. 오원은 비로소 유숙의 죽음을 실감하였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침 변 주부가 침통한 얼굴로 나와 있었다. 오원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에게 다가섰다.
"며칠 전까지도 괜찮았는데, 와 갑자기 돌아가셨습네까?"
"그동안 앓고 계시던 신장병이 악화되셨던 게야."
"아직도 정정하셔야 할 연세에 돌아가시다니, 원통한 일입네다."
"그러게 말이다."
오원은 그 자리에 엎드려 또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스승을 자주 찾아뵙지 못한 불충이 비로소 후회가 되었다. 그때 정학교 집으로 옮겨 2년여 동안 사사하였고, 지금은 누옥 한 채를 구하여 홀로 그림을 그리는 중에 있었다. 그동안 여러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자유분방하게 지냈다. 교유한 화가들 중에는 이미 친교를 맺은 석연 양기훈, 해사 안건양을 비롯하여 형당 유재소, 이용림, 오경석, 홍세섭, 이회수 등이 있었다. 그들과 만나면 당연히 화담이 오갔고 으레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그 통에 유숙을 잠시 잊고 찾지 못하였다. 그것이 이토록 통한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오원이 울기를 멈추자 변 주부가 머뭇거리는 눈치로 입을 열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진사께서도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어드렇게 편찮으십네까? 중병이십네까?"
"글쎄... 기침을 심하게 하시는 것으로 보야 폐가 나빠진 것 같아. 약을 드시고 계시니 좀더 지켜볼 일이지만, 몸이 워낙 쇠약하셔서 쉬 나을 것 같지가 않구나. 허니. 이 댁 장례가 끝나는 대로 찾아뵙도록 해."
오원은 죽은 닭처럼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떨어뜨렸다. 그까짓 그림이 뭐라고, 화가를 만나 술타령이나 하는 통에 사람의 도리를 잊고 지냈으니, 부끄러워 차라리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이용후를 만난지 어느덧 18년의 세월이 흘러 오원의 나이 벌써 서른이 되었다. 까마득한 시절에 맺은 정이 지금껏 변함이 없어 어떠한 아비도 그이만큼 애틋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원에게 있어서 그는 은인의 도를 넘어 인생의 스승이요, 곧 아버지와 같았다. 그 은혜를 죽을 때까지 갚는다고 해도 결코 갚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병을 앓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으리. 용서하시라요. 나으리 앞에서 백번 죽어 마땅한 놈입네다.
생애에 제일 큰 스승을 떠나보내고, 어쩌면 이용후마저 여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유숙의 장례가 끝난 그 이튿날, 오원은 이용후 문병을 가기 위해 먼저 약전으로 갔다. 약을 더 지어 갈 생각으로 들렀다. 그러자 변 주부가 직접 가서 진맥을 하겠다며 동행할 뜻을 밝혔다.
"진사 나으리께서 몸이 쇠약하신 거이 음식이래 넉넉지 못해서 기렇디요? 살림이 궁하니까니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셨을 기야요."
"그렇기도 하거니와, 원래 기가 약한 분이셨어."
"기럼, 저자에 가서 육고기랑 생선 좀 사 가지고 오갔습네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날래 갔다 오갔시오."
"... 그래라."
"오원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자로 달려갔다. 마침 그림값으로 받은 돈이 제법 있어 음식거리를 넉넉하게 살 수 있었다. 오원이 독립하여 거처를 정해 놓자, 어떻게 알았는지 돈 많은 중인들이 몰려와 그의 그림을 얻고자 하였다. 후일을 기약할 것도 없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한 장씩 그려 주곤 하였다.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재료 값이라면서 굳이 내놓고 간 돈이 의외로 많이 쌓였다. 그림에 제법 안목이 있고 재력이 있는 자들은 돈을 아까워하지 않아, 서너 작품 얻어 가면서 꽤 많은 돈을 놓고 가기도 하였다.
오원은 돈이 모이고부터 차츰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하였다. 친교 있는 화가들과 만나면 그날의 술값은 으레 오원이 치르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고, 어느 때는 밤을 새워 마시는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오원이 말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 술집마다 그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하였다.
이용후 집에 당도하자 마침 아들 경이 땔감을 안고 뒤뜰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 열여덟의 청년이 되어 과거 볼 준비 중에 있었다. 그의 누이 원도 혼기를 놓쳐 스무 살이 되었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이용후 누님 집에 기거하면서 마땅한 혼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경이 변 주부와 오원을 보자 황망히 나무를 내려놓고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오원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에게 성큼 다가가 서슴없이 엎드렸다.
"도련님. 안녕하셨습네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네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이런 예가 어디 있습니까. 몹시 민망합니다."
경이 안절부절못하여 재빨리 오원 앞에 마주 무릎을 꿇었다. 비록 신분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오원은 이미 화단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어 신분을 따질 경우가 아니었다. 그 사이에 변 주부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뜰에는 경과 오원만이 남아 예의로 잠시 옥신각신하였다.
"나으리 건강은 어떠십네까? 차도가 있시오?"
"제가 뵙기에는 병세가 여전한 것 같습니다만, 마침 주부 어른께서 오셨으니 알게 되겠지요."
"원이 아가씨는 무고하시디요?"
"누님도 며칠 걱정만 하다가 어제 가셨습니다."
이때 이용후 부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오원에게 다가왔다. 오원은 얘기를 끊고 급히 뜰에 엎드렸다.
"소인, 승업입네다."
"이리 때를 맞추어 찾아 주니 고마울 뿐이네. 그림은 많이 그리시는가?"
"네, 마님. 나으리 환후로 걱정이 많으시갔습네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한 그녀에게서 양반댁 마님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여염집 여편네 꼴로 초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렇기는 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빈곤한 모습이 오원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오원이 경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이용후는 변 주부의 진맥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몸이 너무 말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오원은 그의 몰골을 보는 순간,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었다. 해쓱한 얼굴에 퀭하게 패인 눈자위가 병이 매우 깊어 있음을 단박 느끼게 하였다. 게다가 밭은 기침은 보는 이를 안쓰럽게 하여 오원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말없이 눈물만 닦았다.
"약을 정성껏 드셔야 합니다."
진맥 보기를 마친 변 주부가 한숨을 내쉬며 간곡하게 당부하였다. 그 목소리에 왠지 힘이 빠져 있었다.
"약은 잘 먹고 있소만..."
오원은 두 사람의 얘기가 끝나자 비로소 이용후 앞에 엎드렸다. 눈물부터 앞서 인사말을 선뜻 뱉을 수가 없었다.
"승업이 왔구나. 그래, 그림은 잘 그리고 있는 게야?"
"...네, 나으리."
"와 줘서 고맙구나."
"나으리. 어서 쾌차하시라요. 이 겨울을 넘기믄 곧 봄이 옵네다."
"그렇겠군. 몸이 어서 나아 발전한 네 그림들을 보고 싶은데..."
"나으리. 곧 그리될 것입네다."
"그건 이 사람 말이 맞습니다. 약만 잘 드시면 차도가 있을 것이니, 과히 심려치 마십시오."
"변 주부한테 너무 폐를 끼쳐서 미안하오."
"폐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듣기 민망합니다."
"아니오. 폐가 이만저만 아닌 것을 왜 모르겠소."
"그런 염려는 마시고, 어서 쾌차하십시오."
이용후는 기운이 없는지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하고 곧 자리에 누워 버렸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얘기를 더 나눌 수가 없엇다. 마침 변 주부가 눈짓을 보내 오원도 그와 함께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러자 경이 따라 나왔다. 마당으로 내려선 오원은 이내 뒤뜰로 갔다. 땔감이 얼마나 있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며칠 땔 것밖에 없었다.
"도련님. 조만간 다시 오갔습네다."
"그리 한가한 몸이 아니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네다. 꼭 오갔시오."
오원은 변 주부와 함께 집을 나섰다. 마음이 울적하여 내딛는 다리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변 주부도 입을 봉한 채 자주 한숨만 내쉬었다.
"진사 나으리께서 오래 사시갔습네까?"
"자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던가?"
"왠지 불안합네다."
"실은, 내가 보기에도 그래. 몸에서 기가 모두 빠져나갔어. 저래 가지구선 오래 살 수가 없는 법인데..."
"얼마나 더 사실 수 있갔습네까?"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가 없어."
"더 좋은 약이 없갔습네까?"
"내가 정성껏 처방하고 있는 중이나, 사람의 병이란 약으로 다 고쳐지는 것이 아니야. 불로초를 먹었다는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으니까."
"저러다가 ㄷ로아가시면 어캅네까?"
"...안타까운 일이나, 운명으로 돌릴밖에."
어느새 해가 서산에 걸려 있어, 두 사람은 노을을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변 주부는 오는 동안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잠긴 표정이었다. 오원은 오원대로 이용후와의 인연을 새삼 떠올리며 자주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리 집에 가서 나랑 술이나 한잔 해. 마음이 쓸쓸하여 이대로는 넘길 수가 없겠구먼."
"...네 나으리."
변 주부는 약전에 도착하자마자 사동을 시켜 주안상부터 가져오도록 지시하였다. 술은 아예 동이로 가져오도록 했다. 오원이 말술을 먹는다는 소문이 이미 변 주부 귀에도 닿았기 때문이다.
"나으리. 진사 어른을 완쾌시킬 방법이래 아주 없습네까."
"내 대답은 아까와 같아. 약으로 생명이나 연장시키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음이야. 폐를 상하면 도리가 없거든."
"진사 나으리가 돌아가시면, 저한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네다."
"당연히 그럴 테지."
이때 사동이 주안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술은 정말 동이째로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입을 닫고 한동안 오로지 술만 마셔댔다.
"이 진사 댁에는 언제 또 갈 셈인가?"
"이틀 후에 갈가 합네다. 아까 뒤뜰에 가 보니 땔나무가 별로 없었시오. 가서 나무도 해 놓고, 한동안 드실 식량도 들여놓을 생각입네다."
"...장한 생각이구먼."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것즘은 아무것도 아닙네다."
"나으리 댁에서 매우 감동하실 일이야."
이튿날 오원은 그림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열 작품을 팔아 돈이 제법 모였다. 오원은 그 길로 동대문 저자로 달려가 쌀 다섯 가마에다 생선 두름과 육류 등을 짐수레에 맡겨 이용후의 집으로 갔다. 오원이 짐수레와 함께 뜰로 들어서자 이용후 부인과 아들 경이 보고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오원은 두 사람 앞에 엎드렸다.
"허락도 없이 주제넘은 짓을 하였습네다.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라요."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항상 신세만 입어서 우리 마음이 편치 않네."
"신세라는 말씀은 옳지 않습네다. 나으리께서 저한테 베푸신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갚아도 다 못 갚습네다. 나으리한테는 말씀드리지 마시고, 그냥 받아 주시라요. 기래야 나으리 마음이 편하십네다."
그러자 경이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 오원의 손을 덥썩 끌어 잡았다. 미처 고맙다는 표현은 못하고 한동안 눈물만 흘렸다. 오원은 짐수레를 보내 놓고 바로 뒤뜰로 가 지게를 메고 나왔다. 부인과 경이 기겁을 하여 오원으로부터 지게를 빼앗으려 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는 없네. 나무는 경이 하여도 되는 일일세."
"아닙네다. 도련님은 오로지 학문하시는 거이 옳은 일입네다. 기래서 과거에 꼭 붙으시라요."
오원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빼듯 곧장 산으로 달려갔다. 오원의 민첩한 행동에 부인과 경은 그저 넋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용후 집에서 이틀을 묵어 꼬박 사흘 동안 해다 놓은 나무가 뒤뜰 처마 밑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겨울을 나고도 남을 양이었다. 이 모두를 이용후 모르게 할 생각이었으나 결국 알려지고 말았다.
"승업이 올 적마다 신세를 지는구먼."
"신세라니요... 힘이래 남아서 하는 일입네다. 나으리께서 하루 빨리 완쾌하셔서 전처럼 나들이를 하셔야 합네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마음 같지 않구나."
"마음을 굳게 잡수시라요. 기래야 병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네다."
"그래. 내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일어나야지."
"오늘은 제 거처로 갔다가 수일 내에 다시 오갔습네다. 그 동안 옥체를 보전하시라요."
"고맙구나. 아무쪼록 습작을 게을리하지 말고, 열심히 그리거라. 그것만이 네가 갈 길이야."
"네, 나으리."
오원은 삽짝을 나서며 경을 은근히 불러냈다. 경이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한 낯으로 따라 붙었다. 오원이 따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주저하였다.
"긴히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도련님, 실은..."
오원이 갑자기 괴나리 봇짐을 풀어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대뜸 경의 손에 쥐여 주는 것이었다.
"... 이것이 무엇입니까?"
"몇 푼 안 되지만, 도련님께서 맡아 두시라요. 얼마 있으면 설이 닥칩네다. 기때 요긴하게 쓰시라요."
"별말을 다 하십니다. 이것만은 받을 수가 없어요, 그동안 입은 은혜만도 넘치는데, 어찌 이것까지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어요."
경이 돈주머니를 다시 돌려주려고 하자 오원이 재빨리 등을 돌려 멀리 내뺐다. 경이 따라오며 오원을 불러도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마냥 뛰기만 하였다. 경은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원은 거처로 가지 않고 곧장 남대문 저자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저자 골목을 몇 굽이 돌아 한 국밥집으로 성큼 들어섰다.
"잘 있었네?"
"어이구 형님. 오랜만에 봅니다그려."
"장사는 잘되네?"
"그럭저럭 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발걸음을 아니 합니까?"
"기럴 사정이 있었어야."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섭섭하우."
"기래 기래. 미욱이 마음 다 알아. 우선 술부터 내오라우."
그때 청계옥을 나온 계향이와 미욱 남매가 오원이 준 돈으로 밑천 삼아 국밥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들 남매가 독립하면서 계향이는 기생 딱지를 완전히 떼어 버릴 양으로 이름도 본래대로 미향이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 년 전에 한 사내를 만나 결혼까지 하여 이제는 아이 둘의 어엿한 부인이 되었다. 미욱이도 지난해에 저자에서 여자를 얻어 장가를 갔고, 제법 자리를 잡아 안장된 살림을 꾸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원은 그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여 기분이 좋았다. 그들 남매는 그 공을 모두 오원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원은 그들의 당연한 생각을 항상 부인하였다. 그리고 오원이 장사 밑천으로 건네준 돈을 갚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받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우?"
"이 진사 댁에서 오는 길이야."
"진사 어른은 무고하시우?"
"기렇디 않아. 폐에 병이 깊어 누워 계시디 뭐이가."
"저런. 폐병이 들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데..."
"기래서 걱정이디 뭐이가, 주부 어른께서 좋은 약을 골라 처방을 했는데도 차도가 없으시잖네."
비로소 술상이 놓여지자 오원은 사발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갈증이 꽤 났던 모양이다. 한 사발 술에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는 듯 미욱에게 동이로 가져오도록 하였다.
"장승업 화백이 말술을 즐긴다고, 장안의 소문이 예까지 들리더니... 정말이구료."
"어릴 적에 재강으로 배를 채우던 놈 아니가. 기거이 원수디."
"그렇게 마셔도 탈만 없으면야 무슨 걱정이우."
"누이는 잘 있네?"
"배가 또 남산만 하다우."
"뭔 아를 자꾸 낳네?"
"그러게 말이우. 들도 많잖수. 아마 흥부 마누라 짝 날 모양이우."
"부부간에 정이 좋아서 기런 거야. 좋은 일이디."
"형님 덕분에 우리 남매는 잘살고 있지만, 도대체 형님은 어찌하려우? 평생 혼자 지낼 거유?"
"내래 혼자 사는 거이 좋아."
"혹시, 마음에 드는 처녀가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우?"
"기렇디 않아야. 여자라는 거이 귀찮아서 기래. 짱알대고 투기나 하는 꼴을 어케 보간."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거 아니우. 미운 정도 정이라는데."
"나 혼자 자유롭게 사는 거이 더 좋아."
"죽어서 누구한테 제삿밥 얻어 먹겠수. 처가 있나 자식이 있나."
"죽으면 기걸루 그만이디, 젯밥이 다 뭐이가. 젯밥 먹는 귀신 봤네? 다아 부질없는 생각이야."
"여자 생각이 통 안 나우?"
"생각이야 나디. 허디만 그때뿐이야. 술에 취하면 다 잊어버리고 말아."
오원은 거나해진 얼굴로 걸걸걸 웃으며 안타까워하는 미욱의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오원의 깊은 속을 알 리가 없는 미욱으로서는 그가 어서 가정을 이루며 살기를 바랐다. 그 같은 생각은 오랜 세월 오원을 흠모했던 미향이도 같았다. 오원이 비록 유명한 화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나이 서른이 되도록 상투도 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누이도 형님 걱정을 많이 한다우."
"기래두, 내래 장가는 가지 않갔어."
"그 나이에 상투도 틀지 않고 다니면 사람들이 웃잖수."
"장가 안 갔다고 해서 상투를 틀지 말라는 법은 없어야. 당장 내일이라두 상투는 틀 수 있어. 누가 뭐라 하갔네."
"허긴, 형님의 괴팍한 성격을 누가 말리겠수. 어쨌든 답답하우."
"걱정해 줘서 고맙디만, 나대로 살게 가만두라우."
오원은 흥얼흥얼 노래까지 흘리며 끊임없이 술만 마셔 댔다. 아무래도 앉은 자리에서 술 항아리를 다 비울 참인 것 같았다.
6
오원이 한창 낮잠에 빠져 있는데, 젊은 사내 하나가 뜰에 서서 사람이 왔음을 알렸다. 그래도 안에서 응답이 없자 사내는 마루 끝에 무릎을 붙이고 서서 소리를 높였다. 오원이 그제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누구래 왔소?"
오원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엉금엉금 기어 문을 열었다.
"영표가 왔습니다."
"어이구, 서방님이래 오셨습네까. 어서 드시라요."
오원이 황망히 마루로 나와 사내를 맞아들였다. 사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엎드려 예부터 갖추엇다. 그러자 사내도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이 누추한 곳에까지 운농서방님이래 웬일이십네까?"
"형님이 보고 싶어서 왔지요."
사내는 다름 아닌 바로 유숙의 아들 유영표였다. 어릴 때부터 부친한테 글씨을 배워 산수와 영모, 따위를 아주 잘 그렸다. 그는 임자생으로 오원보다는 아홉 살이나 아래여서 오원을 꼭 형님이라 불렀다. 오원이 유숙의 집에 십여 년을 있는 동안 그와 정이 들어 동기간의 마음으로 지냈다. 지금은 일가를 이루어 상투를 틀고 있지만, 그가 어릴 때는 오원의 등에 업혀 잠이 들거나 간혹 떼를 쓰면 함께 나가 새도 잡고 할 만큼 오원한테 응석을 자주 부리던 아이였었다.
"가내 별고 없으십네까?"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형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서방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시오. 그림 많이 그리시디요?"
"자꾸 나태해져서 잘 안 되고 있어요, 형님은 어떻습니까?"
"저도 마찬가집네다. 기렇디만, 죽을 때까정 할 일을 굳이 조바심 낼 거이 뭐 있습네까. 마음을 바쁘게 가지니까니, 그림이 더 안 됩네다."
"제가 그래요."
"...서방님, 술 생각 있으십네까?"
"형님하고라면 기쁘게 마시지요."
그러자 오원이 문을 열어 '개똥아 개똥아' 하고 누군가를 소리 질러 불렀다. 잠시 후 기억에 없는 웬 소년이 폴짝폴짝 달려왔다. 그리 더럽지 않은 입성으로 보아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꾀죄죄한 몰골에 피골이 상접해 분명 여염집에서 자란 아이 같지가 않았다.
"나으리. 부르셨어요?"
"냉큰 여주댁으로 달려가서 주안상 개져오라고 이르라우. 아주 귀한 손님이래 오셨다는 거 잊디 말라우."
"술은 항아리로 가져올까요?"
"기래"
오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가 다람쥐처럼 빠져나갔다.
"저 아이는 누굽니까?"
"헤헤헤... 소인 아들입네다."
"형님도 참... 농담도 잘 하십니다. 누굽니까?"
"... 주워 왔시오."
"주워 오다니요?"
"며칠 전 약전에서 돌아오던 길이댔는데, 길에 쓰러져 있길래 거냥 데려왔시오."
"뉘집 자식인 줄 알고..."
"거렁뱅이야요. 옷이래 갈아입혔으니까니 그나마 저 꼴입네다. 처음에는 차마 볼 수도 없었시오."
"그런데, 왜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답니까?"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모양이야요. 아새끼래 보니까니 옛날 제 꼬라지 같았지 뭡네까. 기래서 무작정 데려왔시오."
"아이는 똘똘하게 생겼습니다만..."
"오랫동안 거렁뱅이로 굴러먹어서 눈치가 무척 빠릅네다. 기래서 심부름도 시킬 겸 집이나 지키라고 데리고 있시오."
"형님처럼 천재 화가가 또 태어나는 거 아닙니까?"
"글쎄올시다..."
이때 주모일 것이 분명한 펑퍼짐한 여편네가 술동이를 머리에 이고 개똥이와 함께 들어섰다. 오원이 상에 놓은 안주부터 살폈다. 몇 가지 전과 너비아니와 생선 구운 것까지 제법 실하였다. 오원의 입이 헤벌쭉 벌어져 영표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서방님. 누추한 집이디만 자주 오시라요."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왔다가 헛걸음친걸요. 초닷새든가 엿새든가 그쯤 됐을 겁니다."
"어이구. 죄송해서 어쩝네까. 그때쯤이라면 정에 말씀드렸던 이 진사 댁에 갔었구만요. 진사 나으리께서 환후 중에 계셔서 문병 갔댔시오."
"그랬군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몹시 서운했었지요."
"기랬구만요. 그 대신 오늘은 술 좀 많이 드시라요."
그렇게 한참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동이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에 개똥이가 문 앞에 다가와 손님이 왔음을 전하였다. 오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문을 열었다. 뜻밖에 해사 안건영이었다.
"해사, 어서 오시라요... 오늘이 무슨 날인데, 연신 귀한 손님만 오시는지 모르갔습네다."
"누가 또 와 계십니까?"
"운농 서방님께서 오셨습네다."
"그래요? 본 지 오래됐는데..."
영표와 안건영이 긴말로 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들 두 사람은 오원이 유숙 집에 있을 때 이미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오원의 입이 벌써 하마처럼 찢어진 가운데, 개똥이를 시켜 술과 안주를 새로 가져오도록 시켰다. 마음이 들떠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좋은 벗과 술이 넉넉하게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곧 터질 것 같이 즐거웠다.
"해사, 그간 와 발걸음이 뜸했습네까? 어디 아팠댔시오?"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가, 이일 저일로 조금 바빴습니다."
"기런 줄도 모르고, 섭섭하게 대접한 일이 있나 해서 걱정했댔시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래, 오원은 어찌 지내셨습니까? 듣자 하니 요즘 말술을 드신다면서요? 장안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기럽네까? 장승업 그림 좋다는 소문은 어데로 날아가고, 하필이면 술 소문만 무성합네까."
"오원의 그림을 가지고 감히 누가 입 밖에 내겠소. 괜히 농으로 하는 말이지요."
"마침 여주댁이 술과 안주를 새로 가지고 왔다. 그녀가 오원을 흘끔 곁눈질하고는 먼저 가져온 술동이를 들여다보았다.
"술동이에 구멍이라도 났나...? 그새 그 술을 다 드시다니 원..."
"구멍이 나서 여태 주둥이를 대고 있었시오."
"우스갯소리도 잘하십니다."
여주댁이 먼저 가져온 것들을 챙겨서 나가자 오원이 서둘러 빈잔에 술을 가득가득 채웠다.
"내래 아무래도 좋아요. 그림이 시원치 않으면 술이라도 장안에 제일이면 그만 아닙네까. 자아, 오랜만에 술이나 드시디요."
"아니올시다. 나는 건강이 전과 같지를 않아요. 조금만 과음을 해도 며칠을 몸져 누워야 하니, 술이라면 겁이 납니다. 허니, 오늘은 내 몫까지 오원이 다 드셔야 되겠습니다. 어쨌든 오원의 건강은 하늘이 따로 주신 것 같아요. 말술을 마시고도 까딱없다니 원... 지하에서 장비가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아마, 그 시절에는 술에다 물을 탔던 모양입네다. 장비 주제에 감히 말술을 먹다니... 안 기렇습네까?"
"그런 것 같소."
그날도 결국 오원 혼자서 두 동이를 다 마신 셈이다. 영표는 아직 어려서 많이 마시지 못하고, 해사는 건강이 나빠 거의 입에 대지 않았으니 오원 혼자 마실 수밖에 없었다. 술 앞에는 장사 없다고 오원도 두 동이 술에는 기어이 뻗고 말아 앉은 자리에서 벌렁 누워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이튿날 오원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이미 한 뼘쯤 기울어져서야 눈을 떴다. 개똥이가 떠 온 냉수를 한 사발 다 마시고는 마치 물벼락맞은 개처럼 머리를 투르르 흔들어 댔다.
"손님들이 와 안 보이네?"
"나으리도 참... 어제 가셨습니다."
"기럼, 내래 취해서 잤네?"
"나으리 혼자서 술 두 항아리를 다 드셨는걸요."
"기럼, 손님들 가실 적에 배웅도 안 했네?"
"배웅이라니요. 술상 앞에서 그냥 쓰러지셨는데요. 나으리, 아무리 생각해도 신통한 일입니다요."
"...뭘 개지구 기러네?"
"나으리는 그 술을 다 드시고도, 어지 소피를 아니 보십니까요?"
"이놈아. 내 오줌통이 다른 사람보다 세 배가 더 크니까니 기렇지."
"우와... 정말입니까요?"
"너는 기렇게 알고 있으면 되는 기야. 잔말 그만 하고 날래 세숫물이나 떠 오라우. 얼음을 둥둥 띄워서 개져오라우."
오원은 빨리 정신을 가다듬어 이용후 집에 문병 갈 셈을 하고 있었다. 그저께 다녀오긴 했으나 떨어져 있다 보니 자꾸 불안하였다. 자칫 운명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유숙의 경우처럼 부음만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깊이 드는 것이었다. 오늘은 나선 김에 아예 며칠 머무를 생각이었다.
"개똥아, 집에 며칠 먹을 식량 있네?"
"나으리께서 며칠 전에 사 주셨잖습니까요. 진지 지어 드릴까요?"
"이놈아. 네놈이 지어 준 밥을 먹갔네? 밥에 땟국물 떨어질라."
"세수하면 되지요."
"내래 며칠 못 올 것 같으니까니,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우. 혹시 손님 이래 오시면 진사 어른댁에 갔다고 이르아우. 알갔네?"
"알겠습니다요."
오원은 일단 변 주부의 약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혹시 약 지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피마골로 접어들다 보니 저만치 청계옥 지붕이 눈길에 잡혔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겠다 싶어 오원은 일부러 청계옥 앞으로 지나갔다. 마침 황 서방이 지게를 지고 나왔다.
"아자씨, 안녕하셨습네까?"
"어이구, 이게 누구요...? 승업이 아닌감?"
황서방이 서둘러 지게를 벗어 놓고 오원의 손을 덥썩 끌어 잡았다. 그새 더 초췌하게 늙어 눈가에 눈물이 찐득찐득하였다.
"승업입네다. 그간 별고 없었시오?"
"그럭저럭 지내는구먼. 허지만, 연홍 아씨도 안 계시고 계향이 마저 떠나고 나니 마음이 허전혀. 그새 승업이는 신수가 훤해졌구먼."
"기거이 다 아자씨 덕분이디요. 옥수 아씨래 잘 있습네까?"
"옥수도 매일 심란해 있지 뭔가. 손님이 별로 없거든. 꼭 있을 사람들이 없으니까, 자주 오던 손님들도 발길을 끊고 있어."
"... 장사가 안 되느만요."
"그래, 어디를 가는 길인가?"
"약전에 들렀다가 진사 어른 댁에 문병 가는 길이야요."
"얘기 들으니, 진사 어른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나도 한 번 뵈었으면 좋으련만, 매인 몸이 돼서 원... 참으로 후덕하신 분인데."
황 서방이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 사람이 늙으면 지난 일로 서글퍼진다더니 황 서방이 바로 그런 감정인 것 같았다.
약전 문을 열고 들어서자 뜻밖에 이용후 아들 경이 와 있었다. 순간 약전부터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약 지으러 온 것이다.
"도련님께서 웬일이십네까?"
"마침 약 지을 때가 돼서 왔습니다."
"나으리 댁으로 가던 길에 잠시 들렀시오."
이때 변 주부가 약다발을 들고 나오면서 오원을 발견하고는 의외라는 듯이 반가워했다.
"어인 일인가?"
"진사 나으리 댁에 가는 길입네다."
"나도 궁금해하던 차에, 마침 도련님이 오셨구먼."
결국 오원은 경과 우울한 동행을 하였다. 왠지 경이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 걱정하는 것이려니 단정하면서도 혹시 또 다른 근심이 생겼는가 싶어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도련님, 나으리 환후 말고 다른 걱정 있시오?"
"..."
경이 대답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오원이 재차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갑자기 걸음을 날려 저만치 내빼는 것이었다. 눈치로 보아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았다.
"도련님. 말씀하시라요. 승업이 답답해서 죽갔습네다."
"...형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무슨 일입네까?"
"누이가 결혼을 아니 하겠다고 저리 고집입니다."
"좀 상세히 말씀하시라요. 아가씨래 와 결혼을 아니 하십네까?"
경이 또 한숨을 쉬며 오래 뜸을 들였다. 오원만 답답하였다. 그사이에 심각한 의논이 있었던 모양이나, 오원의 입장으로는 깊이 관여할 일이 아니어서 더욱 안타까웠다.
"고모님 댁으로 누이 혼처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남자는 중인자제인데 재산이 많은 집안이라고 합니다. 어머님 말씀이 시집살이로 말하자면 가난한 양반집보다는 나을 것이니 결심을 하라는 데도, 누이는 아버님 병환이 쾌차하기 전에는 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누님 나이 벌써 스물입니다. 이 혼처를 놓치면 혼인을 영영 못 할지도 모르는데, 저리 고집을 부리지 뭡니까?"
"양쪽이 모두 답답한 노릇이구만요. 마님 말씀도 지당하시고 아가씨 마음도 지당하시고...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네다."
"어찌하면 좋지요?"
"남자 쪽한테 혼인을 조금 늦추자고 하면 안 됩네까? 기렇데 되면 나으리 병환도 나으실 테니까..."
"신랑 될 사람 나이도 마침 스물이어서 서둘러야 한답니다."
"남자 나이래 스물이면 과히 늦은 것도 아닌데... 기렇다고 몇 년을 늦추자는 것도 아니잖습네까."
"그러나, 그쪽 처지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아가씨래 댁에 와 계십네까?"
"어제 와서 아직 머물러 있습니다."
"나으리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십네까?"
"가뜩이나 병환이 깊으신 분한테 차마 아뢸 수가 없었습니다."
"...기렇구만요."
정월의 칼날 같은 바람이 볼에 에고 말 것처럼 수시로 몰려왔다. 오원과 경은 입을 꼭 닫고 걸음만 재촉할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경우라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집이 가까워지면서 느껴지는 기운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오원이 갈 때마다 항상 느끼는 감정이었다.
뜰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용후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오원을 보자 고마워하는 마음을 얼굴 가득 담았다.
"나으리 걱정이 돼서 또 왔구먼. 고맙기도 하지."
"나으리께서는 어떠십네까?"
"특별히 좋아지지도 나쁘지도 않으시네. 어여 들어가 뵙게."
오원이 마루에서 예를 갖춘 다음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원이 앉아 있다가 서둘러 일어났다.
"아가씨. 안녕하셨습네까?"
"식구들 걱정을 많이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씀밖에는 더 드릴 것이 없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네다, 아가씨."
이용후가 눈을 힘겹게 뜨고 오원을 올려보며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오원이 무릎을 꿇자 슬그머니 손을 끌어 잡았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먼."
"아닙네다, 나으리. 진지는 드셨습네까?"
"좋은 찬으로 많이 먹었네."
"진지를 많이 드셔야 기운을 차리십네다. 기래야 일어나시디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꼭 기렇게 되실 겁네다. 염려 마시라요."
"승업이한테 부탁이 있느니."
"말씀하시라요."
"네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구먼."
"지금 말씀입네까?"
"그리하면 더욱 좋고. 내 청을 들어주겠는가?"
"여부가 있습네까. 당장 시향하갔습네다."
그러자 경이 서둘러 필가와 벼루를 내놓고 연상에서 화선지를 꺼내 왔다.
"나으리, 어드런 그림이 보고 싶으십네까? 화조를 원하십네까, 아니면 산수를 원하십네까? 나으리께서 원하시는 것을 모두 그려 올리갔습네다."
"허허, 그러면 내가 욕심이 과하지 않느냐. 그러지 말고 정학교 선생한테 배운 괴석도를 보여주게."
"기것뿐입네까?"
"더 그려 줄 것이야?"
"네, 나으리. 말씀만 하시라요. 기쁜 마음으로 그리갔습네다."
"허면, 무엇이 좋을까..."
"나으리, 기러기 떼가 노니는 군안도는 어떻습네까?"
"군안도라... 그거 좋겠구먼. 술 한잔 주련?"
"제가 나으리 안전에서 감히 술을 먹갔습네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네다. 심히 민망합네다."
"술을 마셔야 그림이 잘 된다는 소문이 내 귀에도 닿았어. 허니, 오늘은 괜찮아. 네 나이 이미 서른이 아니더냐? 내가 이리 말하는 것은, 어쩐지 그러한 자네의 기이한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그러자 오원이 갑자기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는 훌쩍훌쩍 울음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경과 원이 등을 돌려 눈물을 찍어 냈다.
"나으리. 방금 하신 말씀은 거두시라요. 나으리께서 곧 쾌차하실텐데 어찌 기런 말씀을 하십네까."
"허허. 빈말도 함부로 못하겠구나. 알았느니라. 내 거두면 되지 않느냐."
"오원의 뇌리에 갑자기 이응헌의 달 운옥이 떠올랐다. 운옥이 죽기 직전 자신의 그림이 보고 싶다고 하여 십장생을 그려 준 때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니, 마치 이용후가 운명하기 직전으로 다가섰는가 싶어 마음이 섬뜩했던 것이다.
오원이 화선지를 세로로 펴 놓더니 작두필을 들어 괴석의 산수도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용후가 경에게 시켜 허리를 세우도록 하였다. 오원이 붓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숨소리도 새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영지버섯이 켜켜이 쌓인 듯한 괴석이 용틀임하는 모습으로 오른쪽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그 맞은편으로는 낮은 절벽에 뒤틀어지고 외틀어진 나무를 배치하였다. 그리고는 그 사이로 큰 냇물이 콸콸콸 흐르는 모양을 넣어 평원과 심원구도가 어우러지게 틀을 잡았다. 잠시 후 허리를 구부리더니 세필로 구석구석의 잔잔한 선과 나뭇잎들을 단 한 점도 허술함이 없이 묘사해 나갔다. 붓을 섬세하게 돌리면서도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옆에서 보는 이의 눈이 미처 따라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원이 비로소 허리를 펴고 붓을 놓았다.
"나으리. 채색이 없어 아쉽습네다.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채색 준비를 했을 겁네다."
"아니다. 이 그림만으로도 심히 놀라구나. 경아 그리고 원아. 너희들이 보기에는 어떠하냐? 놀랍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형님의 소문은 이미 자자하지만 이토록 훌륭한 그림은 처음 봅니다. 누님은 어떻습니까?"
"놀랍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어찌하면 저리 그릴 수가 있을까..."
오원이 밖으로 나가 우물에서 물 한 두레박을 떠서 벌컥벌컥 마셨다. 부엌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용후 부인이 슬그머니 오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바닥에 붙은 항아리에다 바가지를 넣더니 뜻밖에 술을 퍼 주는 것이었다.
"마님..."
"괜찮으니 어서 마시게. 자네가 술을 마셔야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어. 나으리 앞이라 마실 수가 없을 것이나, 비록 손님한테 대접은 아니나, 내 마음으로 알고 마시게."
"마님..."
오원은 그녀의 배려가 황송하여 바가지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단숨에 마셨다. 그가 소매로 입을 쓱쓱 문지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군안도를 그릴 차례였다. 이번에는 그가 면상필을 잡았다. 그리고는 갈대밭 위로 수십 마리의 기러기가 멀리서부터 날아와 내려앉는 모양을 같은 원근법으로 구도를 잡았다. 기러기 한 마리 한 마리의 실경이 어찌나 섬세한지 마치 화선지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언젠가 노안도를 본적이 있느니라. 그러나 이번 그림은 놀랍게 발전하였어. 참으로 훌륭하도다."
이용후는 밭은기침을 뱉어내는 상기된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지 못해 매우 안타까운 듯하였다. 그 옆에서 원은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붙이고는 황홀경에 빠진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엇다. 자주 "어쩌면, 어쩌면..." 하는 감탄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잠시나마 근심을 잊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원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여 은근히 기뻤다.
"나으리. 다음에 올 때는 채색할 준비를 해 오갔습네다."
"또 그려 주려고?"
"나으리께서 말씀만 하시믄 하시라도 그리갔습네다."
"오늘은 승업이 덕분에 머리가 한결 맑아진 것 같구먼. 너의 장한 모습을 대하니 기분이 한량없이 좋아. 정말 장하구나... 승업아."
"네, 나으리."
"실은 청이 한 가지 더 있어."
"무엇입네까?"
"언제든,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밖으로 나가서 너의 <긴난봉가>를 한 번 들려줘.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구나."
이용후가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 가지고 오원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오원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옛날, 한양으로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면서 따라붙었을 때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눈이 엄청나게 내렸었다. 이용후가 그 장면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러니까니 날래 쾌차하시라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부르갔습네다."
"정말이더냐?"
"감히 나으리께 거짓을 아뢰갔습네까?"
"...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구먼."
"나으리. 마음을 강하게 잡수시라요. 기래야 빨리 일어나십네다."
"고맙구나. 내 피곤하니 좀 누워야겠어. 그만 물러들 가거라."
이용후가 경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눕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오원은 그 모습을 내려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떨어뜨렸다.
7
이용후가 죽고 말았다. 2월 초닷새, 청빈한 선비가 쉰들의 나이로 포부를 끝내 펼쳐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오원이 그의 집에 며칠을 머물면서 차도가 있기를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각혈을 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족 모두가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 그는 탈진한 상태로 마지막 생명의 끈을 간신히 움켜잡고 있었다. 오원은 이 위기를 알리기 위해 그 길로 변 주부한테 달려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의 시간이라 오원은 약전 문을 거칠게 두드려야 했다. 한참 만에 사동이 문을 열었다 .
"꼭두새벽에 웬일입니까?"
"진사 어른이 위급하니까니 날래 말씀드리라우."
오원이 하도 설쳐 대니까 사동은 더 묻지를 못하고 안채로 들어갔다. 잠시 후, 변 주부가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주무시는데 죄송합네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진사 어른께서 피를 쏟고 계십네다. 기래서 달려오는 길이야요."
"결국, 그 지경에 이르렀구먼."
"어떻게 하면 좋습네까?"
"각혈이 심하시던가?"
"거의 한 바가지나 쏟았시오."
"...명이 다하신 게야. 어쨌든, 내가 봐야 되겠네."
변 주부가 더날 차비를 서두르는 동안 오원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였다. 이용후의 회생이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지만, 그래도 한 줄기 남은 희망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사동이 나귀를 끌어내 오원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고삐를 잡은 오원이 나귀보다 앞서 뛰었다. 2월의 새벽 바람은 마치 얼굴에다 유릿가루를 뿌리는 것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래도 오원은 발이 어는지 손이 어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뛰기만 하였다. 나귀가 먼저 지친 듯 입으로 김을 풀풀 뿜어냈다. 여명이 다가오는 가운데 이용후 집이 저만치 보이면서, 오원은 혹시 곡성이 들리는지를 탐지하기 위해 귀를 한껏 열어 놓았다. 앞을 가로막는 바람 탓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변 주부와 오원은 곧장 환자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명이 붙어 있는 듯 이용후가 숨은 쉬고 있으나, 곧 끊길 듯 말 듯한 위험한 조짐을 보여 주고 있었다. 부인과 두 남매가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다.
변 주부가 진맥을 보는 동안 나머지는 둘러앉아서 숨을 죽여 지켜보았다. 한참 만에 진맥을 마친 변 주부가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부인을 비롯하여 모두가 그를 따라나섰다.
"마님, 아뢰옵기 송구한 말씀이오나,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명이 다하신 듯하옵니다."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까?"
"... 그러하옵니다."
그러자 원과 경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울음을 터뜨렸다. 오원은 그 모습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어 슬그머니 뜰로 내려섰다. 비로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나으리 가시면, 내래 누구를 믿고 삽네까. 나으리. 제발 죽디 마시라요.
오원은 가족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삼키며 눈물만 펑펑 쏟았다. 경이 내려와 오원과 나란히 앉았다. 그 역시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얼굴에 역력했다. 오원이 말없이 경의 손을 끌어 잡았다. 그러자 경이 오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끄억끄억 울음을 끌어냈다.
"도련님. 마음을 굳게 가지셔야 합네다."
"보람도 없이 저리 가시면 어찌합니까."
"나으리 운명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네다."
"구로지은을 생각하면, 불효한 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나으리께서도 도련님의 효심을 알고 계실 겁네다. 이자는 마님과 원이 아가씨 걱정을 하실 차례입네다."
"미력한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형님도 저희와 연을 끊지 마시고 항상 가까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와 도련님과 연을 끊습네까. 염려 마시라요."
이용후는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오원은 장례를 마칠 때까지 남아서 수발을 도맡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이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그들 가족의 생계를 보조하겠다는 결심도 굳게 가졌다.
거처로 돌아온 오원을 그날부터 두문불출하여 닷새를 술독에 빠져 있었다. 음식은 마다하고 술만 마셔 댔다. 이를 보다 못한 개똥이가 울면서 하소연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용후가 세상을 뜨자 꼭 아비를 여읜 것 같아 마음에 균형을 잃고 있었다. 다시 고아가 되었다는 외로움이 매일매일 가슴을 찢어 놓았다. 이용후에게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태어났고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가 싶었는데, 이제 그가 가고 없는 세상이 새삼 무의미해진 것 같았다.
오원은 술 항아리에 바닥이 드러나자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개똥이를 소리 질러 불렀다. 그러자 개똥이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술이 떨어졌다. 날래 뛰어가서 새로 한 동이 개져오라우."
"나으리. 제발 술은 그만 드십시오. 진지는 아니 드시고, 술만 드시면 어찌합니까?"
"아새끼래 웬 말이 그리 많네. 날래 개져오라우."
"나으리..."
"이놈으 아새끼래 맞아야 정신 차리간?"
오원이 목침을 집어 개똥이 앞으로 냅다 던졌다. 개똥이가 용케 피하긴 했지만 오원의 얼굴이 사자상으로 무섭게 구겨져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여주댁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안주 소쿠리를 든 개똥이를 앞세워 나타났다. 오원은 항아리를 보자 금세 입이 환히 벌어졌다.
"곡기는 안 드시고 왜 술만 자십니까? 그러다가 몸이라도 상하면 어찌하시려구요."
"허허허... 기래도 죽디 않고 이렇게 살아 있잖소."
"술 이기는 장사 없다고 했어요. 저엉 곡기를 안 드시겠다면 이 안주라도 드셔야 합니다."
여주댁이 전이며 너비아니 따위를 안주 그릇에 차곡차곡 담아 놓았다. 오원이 그제서야 안주 두어 개를 한입에 구겨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는가 봅니다. 며칠을 술만 드시니."
"아주마니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요. 거저 술만 자꾸 개져오라요."
여주댁이 군시렁대며 나가자 오원이 손바닥으로 항아리를 두드리며 갑자기 노래를 뽑았다.
정방산성 초목이 무성한데
밤에나 울 닭이 대낮에 운다
에-헤에에 에헤요 어림마 둥둥 내 사랑아
이용후가 죽기 얼마 전, 오원에게 이 노래가 듣고 싶다고 했었다. 결국 그는 듣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나으리께서 이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셨잖습네까. 기런데 무엇이 급해서 그리 빨리 가셨습네까.
오원은 이용후와 함께 눈밭을 걸으며 이 노래를 불렀던 옛날을 떠올리며 또 훌쩍훌쩍 눈물을 짜냈다. 그때 오원이 다른 노래가 더 있다고 하자 이용후는 신통해하면서 쾌히 불러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또 한 곡 뽑은 것이 곰배팔이와 다리 병신 흉내를 내며 부른 <병신난봉가>였다. 승업은 술 한 대접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다시 항아리를 두드려 장단을 맞추었다.
병신의 종자가 또 따로 있나
한 다리 한 팔 못 쓰면 병신이지
에-에헤여 어거야 어야어야 디야 네가 내 사랑아
제 노래락도 듣고 가셨으면, 마음이 덜 아프갔시오.
오원은 몸에서 열이 나는지 갑자기 웃옷을 홀렁 벗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누군가 찾아와 "형님, 형님" 하였다. 오원이 방문을 열고 목을 내밀자 뜻밖에 미욱이가 서 있었다.
"이거이 미욱이 아니가? 웬일이네?"
"궁금해서 왔수. 왜 그리 발걸음을 아니 하였수?"
"날래 들어오라우. 기렇디 않아도 심심하던 차에 잘 왔구만 기래."
미욱이 방에 들어가면서 옷을 벗은 채 술동이를 끼고 앉아 있는 오원의 모습에 그만 아연실색하였다.
"대체 그 모양이 뭐유? 이 추위에 옷은 왜 벗었수?"
"몸에서 열이 나디 뭐이가. 기래서 벗었어야."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유? 진사 어른 돌아가신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그러우?"
"...실은 기래"
"원... 따라 죽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수."
"그 말도 맞아. 기럴 수만 있으면 죽고 싶어야. 나으리 없이 어드렇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중에 있어."
"형님두 참... 지하에 계신 나으리께서 이를 아시면 당장 노하시겠수. 형님이 잘 되는 것 보셔야 지하에서도 나으리 마음이 편치 않겠수?"
"기건 기렇다 치고, 웬일이네?"
"궁금해서 왔다지 않수. 형님이 몸져누운 줄 알았수. 누이도 걱정이 되어 나보고 가 보라 하잖우. 도대체 며칠째 먹는 술이우?"
"... 잘 모르갔어. 기래두 죽디는 않았잖네."
"기가 막혀서 원... 어여 일어냐슈."
"와아?"
"오늘이 내 귀빠진 날이라구 마누라가 한 상 차렸지 뭐유. 형님 생각이 나서 혼자 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모시러 온 거유."
"... 기랬구만."
"어여 일어나우. 같이 가서, 생일 음식 좀 드슈. 허구헌 날 술이라니..."
미욱이 서둘러 옷을 챙겨 입히고 억지로 끌고 나왔다. 술에 적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오원은 미욱의 부축을 받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갑자기 훌쩍훌쩍 울기도 하였다. 미욱은 계속 혼자 몸으로 지내는 오원이 새삼 측은하여 콧등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형님은 영영 장가 안 들 셈이우?"
"장가? 기딴 건 가서 뭐 하갔네. 귀찮아."
"그럼 평생을 홀아비로 늙겠다는 거유? 남들처럼 계집 얻어 새끼도 낳아 오손도손 사는 재미도 봐야 하잖수."
"기런 재미는 미욱이나 실컷 보라우. 내래 거추장스러운 건 딱 질색이야. 계집도 성가시고 아새끼도 성가셔. 거저, 혼자 사는 거이 마음 편해야."
"형님은 성미도 참 별나우. 마냥 이리 지내다가는 남한테 오해받기 십상이잖수. 허우대 멀쩡한 사내가 홀아비로 지낸다면, 십중팔구 고자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우."
"남의 사돈이야 가거나 말거나."
"그래도 인생살이란 그런 게 아니우. 하다못해 짚신도 제짝이 있다는데 사람은 말해 무엇 하겠수."
"남이 장에 간다고 거름통 지고 나서갔네? 내래 거저, 여게저게 떠돌면서 그림이나 그리는 거이 좋아."
"어이구 답답해, 형님과 얘기하느니 차라리 소한테 경을 읽어 주겠수."
기래. 너야말로 오손도손 잘 살라우. 내래 이것이 좋은데 어카갔네.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동장군이 2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꼬리를 감추자 온 대지에 봄기운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엿다. 나무에 따라서는 벌써 싹을 틔우는 것도 있고, 냇물을 두껍게 덮고 있던 얼음장도 차차 엷어지면서 물 흐르는 모양을 투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도 생기가 넘쳐 듣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오원은 그토록 지겹게 마시던 술을 며칠 전부터 딱 끊고 바깥출입을 자주 하였다. 그는 주로 산이 아니면 깊은 계곡을 고루 찾아다녔다. 겨울옷을 벗어 버린 바위나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 앉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우짖는 새들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거나, 아직도 잔설이 덮여 있는 음지의 초목들을 요리조리 관찰하였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일로 며칠을 허비하였다. 도무지 서두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걸음이 항상 느려, 아무 곳에서든지 누워 잠을 청할 수도 있을 만큼 여유작작하였다. 오원은 언제부턴가 아침밥 먹는 일이 없어지고 점심과 늦은 저녁을 국밥집이나 주막에서 해결하였다. 끼니를 손수 해 먹는 일이 귀찮을뿐더러, 불알 달고 있는 사내 처지에 차마 부엌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굴뚝에서 아침 저녁으로 연기가 솟는 것은 개똥이가 밥을 짓거나 군불을 넣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 외에는 늘 빈 집처럼 보였다. 낮 시간에 오원이 집을 비우자, 그의 그림을 얻고자 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사람이 꽤 많았다. 매일 대여섯 명은 으레 오는 모양이었다.
"나으리. 오늘도 일곱 사람이나 왔었습니다요. 나으리 어디 계시느냐고 나만 들볶지 뭡니까."
"너한테 저엉 귀찮게 굴면, 사람 꼴이 싫어서 멀리 도망갔다고 하라우. 기러믄 다시 오디 않을 기야."
"그렇게 말한다구 누가 믿는 줄 아십니까요? 어떤 사람은 내 방에서 하룻밤 자겠다고 사정까지 하는걸요. 나으리 그림이 그토록 훌륭한지 미처 몰랐습니다요."
"글쎄다...? 내 그림이 훌륭해서 기러는지, 아니면 그 사람들 허파에 똥물이 들어서 기러는지, 내래 모르갔구나."
"어쨌든, 나으리는 좋으시겠습니다요."
"뭐이가 좋아."
"사실이 그렇잖습니까요. 그림을 그려 주면 돈도 벌고 칭송도 듣고, 얼마나 좋습니까요. 나한테도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한밑천 잡는 건데..."
"요 아새끼래 조둥이 까는 것 좀 보라우. 뭐이 어드래? 다시 한번 지껄여 보라우. 한 밑천 잡겠다고? 이놈아. 내래 돈 벌겠다고 그림 배운 줄 아네? 돈 벌 욕심이래 있었으면 하루에 백 장도 그리갔다. 어른한테 기런 말 함부로 하는 거이 아니야. 알갔네?"
"...잘못 했어요. 다시는 그딴 말 안 하겠습니다요."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발가벗겨서 내쫓길 줄아라우."
"네, 나으리. 그런데..."
"뭐이가?"
"아까 어떤 상인이 와서 좋은 값으로 쳐 줄 것이니, 나으리 그림을 팔라고 졸랐습니다요."
"기래서 팔안?"
"제가 감히 나으리 물건에 손을 대겠습니까요? 무조건 아니 된다고 했습니다. 어찌나 애걸하는지 혼이 났습니다요."
"그 상인이래 도둑이 분명하니까니, 차후에도 절대 들이지 말라우... 아니디. 내래 없을 때는 그림을 몽땅 태워 버려야 되갔구나. 기거이 마음 편하갔구만 기래. 잘못하다가는 상인 놈들이 강도로 변할지도 모르갔어."
"설마 그렇게까지야 할라구요."
"사람 속을 어드렇게 알갔네. 욕심이 과하면 사람도 죽이는 법이야. 기래서 나한테 오는 사람들 중에는 허파에 똥물이 든 놈들도 있다는 기야. 놈들은 내래 죽은 다음에 아주 후한 값으로 팔아 장사를 하갔다는 욕심이거든."
"그렇다구, 애써 그린 것을 불에 태우는 건 옳지 않습니다요."
"도둑을 맞는 건 아깝디 않디만, 그 그림이 나한테 화를 미칠 수도 있는 기야."
"소인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러니까니, 개똥이래 문단속을 잘 하고 있으라우. 아무나 물 열어 주디도 말고. 알갔네? 우리 딥에 오는 사람은 모두 내 그림을 얻으러 오는 손님이니까니, 그중에 도둑도 있다는 기야. 우리 집에 개져갈 거이 뭐가 있갔네. 금이 있네 은이 있네. 솥단지도 변변한 거이 없잖네."
"나으리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요. 그럼, 나으리 그림이 그토록 비싼 값입니까요?"
"기건 내래 죽은 다음에 얘기야. 기런데, 기딴 걸 와 자꾸 묻네?"
"그냥 여쭤봤습니다요."
"개똥아, 너 정말 아바지 오마니래 없네?"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죽었답니다요."
"몇 살 때부터 혼자 돌아다녔네?"
"주막에서 밥 얻어먹다가 쫓겨난 것이 아홉 살 때였습니다요."
"와 쫓겨났네?"
"..."
"대답을 못하는 거 보니까니, 도둑질을 했구만 기래. 내 말이 맞네?"
"억울합니다요. 주모 반지가 갑자기 없어졌는데, 그걸 제가 훔쳤다구 뒤집어씌우잖습니까. 절대 아니라고 대들었더니, 배은망덕한 놈이라면서 마구 때리길래 도망쳤습니다요."
개똥이가 설움에 겨워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절대 훔치지 않았다고 악을 썼다.
"기럼, 누구래 그 반지를 훔쳤네?"
"제가 그걸 어찌 압니까요."
"아바지 오마니래 보고 싶지 않네?"
"얼굴을 알아야 보고 싶지요. 얼굴도 모르는데 어찌 봅니까요."
"만약에 네 아바지나 오마니가 나타나면 어카갔네?"
"죽은 사람이 어지 나타납니까요?"
"죽은 걸 네 눈으로 직접 봔?"
"보지는 못했지만, 죽었으니까 죽었다고 일러 줬겠지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습니다요. 살아 있지도 않은 사람을 보고 싶어 하면 뭐 합니까."
"기건 기래."
"만약 살아 있다고 해도, 저처럼 거지꼴이면 따라가지 않겠습니다요."
"와 안 따라가네?"
"밥을 굶을 바에야 뭐 때문에 같이 삽니까요."
"이놈아. 네 놈이 밥을 얻어다가 아바지랑 오마니 배를 채워야 될 거이 아니가. 기거이 자식이야."
"싫습니다요."
"기럼, 앞으로 어드렇게 살 생각이네?"
"...죽을 때까지 나으리 곁에 있을 겁니다요."
"요 아새끼래 말하는 것 좀 보라우. 누구래 너를 데리고 있갔대?"
"평생 나으리 머슴으로 있을 겁니다요. 제발 내쫓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 시키는 건 다 하겠습니다요."
개똥이가 갑자기 바닥에 이마를 박고는 내쫓지 말라고 애걸애걸하였다. 순간 오원은 한양에 데려다 달라고 이용후한테 떼를 쓰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이용후가 박정한 사람이었으면 자신은 지금의 장승업이 되지 못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울컥 솟았다. 개똥이를 보니 꼭 그때 자신의 모습 같았다.
"개똥아. 너 긴난봉가를 부를 줄 아네?"
"...긴난봉가가 뭡니까요?"
"모르면 그만두라우. 내래 기것 때문에 여태 살아 있는 기야."
"나으리. 무슨 말씀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만두라우. 어차피, 내래 그와 같은 어른이 되지 못할 거니까니."
오원은 개똥이를 외면하고 앉아서 이용후와 같은 후덕한 인물이 되지 못할 것임을 생각하며 한숨만 거푸 내쉬었다. 자신의 한 몸 건사하기도 귀찮게 생각하는 위인이 개똥이까지 돌볼 여유가 있을성싶지 않았다. 장차 술과 그림으로 정처 없이 떠돌다가 죽을 결심을 한 마당에, 어설픈 동정 따위는 차라리 갖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8
1876년(고종 13년) 병자년 2월 26일에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일명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근대 국제법을 토대로 하여 맺어진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여 맺어진 불평등한 조약이다. 소위 운양호사건(일명 강화도사건으로, 1876년 9월에 일본 군함 운양호와 강화도에 포진하고 있던 조선 수병 간에 있었던 포격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강경책을 쓰기로 한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운양호사건에 대한 조선의 사과 및 모든 영해의 자유로운 항해와 강화도 부근의 개항 등 개국을 강요한 조약이었다.
조정에서 서둘러 개국을 결정한 이유는 문호 개방의 세계적 추세, 무력에 의한 일본의 정한론, 쇄국정책을 고수할 경우 대원군의 복귀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민씨 일파의 집권욕, 청나라의 권유 등이었다.
바로 전 해에, 경기도 일원의 수해로 민가 150여 호가 침수되고 수십 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다가, 기아에 허덕이던 백성들의 민란이 끊이지 않는데도 조정에서는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임진왜란의 뼈아픈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백성들로서는 일본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이는 곧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인심이 점점 각박해져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하였다.
어느 주막을 가나 남정네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침통하여 한숨 섞인 푸념만 뱉어 낼 뿐이었다. 그중에는 정치에 관심을 둔 무리도 있어, 구관이 명관이라면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두둔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민시 일파의 개방정책을 옹호하여 언쟁이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기는 여주집도 마찬가지였다. 오원은 그들 무리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 얘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 해사 안건영이 죽었다. 나이가 불과 35살이고 보면 요절한 셈이다. 그는 산수와 인물화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려, 도화서 화원으로 있으면서 고종의 어진을 도사하였다. 비록 과작이기는 하나 그가 남긴 작품 모두가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산수화에 있어서는 안정된 구도로 배치한 사물을 매우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어, 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안건영을 석연 양기훈의 소개로 알게 된 오원은 그와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그가 오원처럼 술은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나 성품이 호방하고 온화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으면서도 화담을 나눌 때만은 촌철살인의 날카로움이 있어 오원을 자주 감동시켰다.
오원은 안건영이 죽자 마치 자신의 팔 하나가 잘려 나간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깊은 고독에 빠져 있었다. 스승인 유숙과 아버지 같은 이용후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중에 있어,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오원을 또다시 외로움에 빠뜨렸다.
주객들이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로 목에 핏줄을 세우고 있어도 오원이 자기들에게 고개 한 번을 돌리지 않자, 건장한 사내 하나가 불쑥 다가서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도 취기가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뉘신 줄 모르지만, 혼자서 쓸쓸하지 않으슈? 웬만하면 우리와 합석하여 세상 얘기나 나눕시다."
어투가 사뭇 시비조였다. 오원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만 마셔 댔다. 그러자 그가 한 발 더 다가섰다.
"이보슈, 형씨. 내 말 안 들리슈? 귀먹었수?"
오원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얼굴 피부가 울퉁불퉁 일그러진 꼴이 매우 천박한 상이었고, 심술과 건달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래 세상 얘기에는 관심이 없으니까니, 님자나 얘기하라요."
"그래도 그렇지, 사람 성의를 이리 무시하면 되겠소? 꽤나 도도하구만."
"이보라요. 내래 혼자 있고 싶으니까니, 날래 가라요."
오원은 귀찮은 표정으로 그를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도 사내는 물러서지 않고서 오원을 잔뜩 노려보기만 하였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어쩌겠수?"
"나한테 시비 거네?"
오원이 술잔을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눈을 한껏 부라렸다. 잠시 그가 흠칫 긴장하는 눈치였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오원을 만만하게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눈동자가 왜 그리 노랗수? 혹시 조상이 서양 오랑태 아니슈?"
"내 눈깔이래 노랗든 파랗든 무슨 상관이네? 니가 밥 먹여 줬네?"
"허허. 나한테 감히 시비를 건다?"
"좋게 말할 때 꺼디라우. 기렇디 않으면 좋디 않아."
"얼씨구. 제법 협박까지 하는군. 어디 그 주먹 맛 좀 볼까?"
"이보라우. 내래 너 같은 건달패하고는 상대하고 싶디 않아야. 날래 꺼디는 거이 좋아."
그러자 사내가 손바닥에 침을 탁탁 뱉으며 팔을 겉어 붙였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여주댁이 황망히 달려와 사내 앞을 가로막았다.
"왜 가만있는 분한테 못 살게 구는 거유? 이분이 뭐라고 했길래. 김씨는 술만 먹으면 아무하고나 시비를 붙지 못해 안달이우? 장안 객주집에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 무시하는 거, 아주머니도 방금 보았잖수?"
"김씨가 먼저 시비를 거니까, 그러지. 저 양반이 괜히 그러우? 어여 김씨 자리로 돌아가우."
"그렇게는 못하겠는걸. 나한테 혼 좀 나야 되겠어."
"뮈이 어드래? 누구래 혼을 내? 아새끼래, 못됐구만기래."
오원이 발딱 일어나더니 사내 얼굴에 술을 확 뿌렸다. 그리고는 그도 팔을 걷어 붙이며 여주댁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어디. 덤벼 보라우."
오원이 바위처럼 버티고 서서 그의 도전을 기다렸다. 사내가 또 손바닥에 침을 뱉더니 오원의 아래 위를 훑어내렸다. 어디에다 일격을 가할 것인지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객들이 모두 일어나 두 사람을 빙 둘러쌌다. 오원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씨. 뭘 꾸물거려?"
"자신이 없어진 모양이지."
"그 돌주먹은 어디로 갔나?"
주객들이 사내를 자꾸 부추겼다. 순간, 사내의 주먹이 오원의 얼굴을 향해 잽싸게 날아갔다. 오원이 슬쩍 피하면서 그의 손목을 도끼자루처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팔을 비틀어 사내의 등짝에 붙이더니 발로 그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 건장한 사내가 힘없이 나가떨어져 부뚜막에다 얼굴을 갈았다. 오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느닷없이 국이 설설 끓고 있는 가마솥 뚜껑을 열더니 사내의 덜미를 잡아 얼굴을 솥에 처박을 직전으로 몰고 갔다.
"네놈의 낯짝을 국에 처박아, 말아? 어카갔네? 기래도 조둥아리를 함부로 놀리갔어?"
"잘못했습니다. 어르신네를 미처 몰라뵈었습니다요."
"정말, 잘못한 줄 아는 기야?"
"물론입죠."
오원이 그제서야 덜미를 풀고는 손을 털었다. 사내 얼굴이 뜨거운 김을 쐬어 벌겋게 익어 버렸다.
"가만 보니까니, 아새기래 천하에 불쌍놈이구만. 마지막으로 내 박치기 맛 좀 보라우."
오원이 사내의 멱살을 바싹 움켜잡는가 싶더니 이마가 그의 얼굴을 향해 정통으로 가 박혔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발랑 넘어갔다. 이내 사내 코에서 선혈이 낭자하였다.
"여주집에 다시는 얼씬하디 말라우. 알갔어?"
"다시는 발걸음을 않겠습니다요."
사내가 코피를 줄줄 쏟으면서 무릎을 꿇고는 손을 싹싹 비볐다. 이때 문이 열리며 개똥이가 헐레벌떡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석연 양기훈이 따라서 들어서는 것이었다. 오원 집에 갔다가 개똥이 안내를 받고 온 모양이었다. 양기훈은 오원의 흐트러진 옷매무시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번갈아 보며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오원. 필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네다...?"
"못된 아새끼래 있어서, 버릇 좀 고쳐 줬시오."
"이놈 말입네까?"
"기래요. 아새끼래 천하에 불한당이구만요."
"이놈. 김가야. 이분이래 누구신지 정말 모르고 대든 기야?"
"미처 몰라뵈었습니다요."
"아새끼래 또 민하게 굴었구만. 이분이 바로 장승업 화백이야. 네놈은 그 알량한 힘만 믿고 깝죽대는 게 탈이야. 오늘 님자 만났구만기래. 날래 엎드려 싹싹 빌라우."
양기훈이 호령을 하자 사내가 다시 바닥에 이마를 붙여 놓고 손이 닳도록 빌었다.
"석연이래 이놈을 아십니까?"
"이놈이래 한때 서대문 밖에서 꼭지딴 노릇 좀 했댔시오. 나한테도 한 번 혼쭐이 났댔는데,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만요. 천하에 망나닙네다."
"해사 때문에 가뜩이나 심란한데, 저놈이래 가슴에 불을 지르지 뭡네까?"
"거렁뱅이 출신이 기렇디 별수 있갔소?"
"기건 기렇고, 석연이래 웬일이십네까?"
"거야 오원이래 보고 싶어서 왔디요. 조금 일찍 왔으면, 좋은 구경 할 뻔했구만요."
"오셨으니 술부터 드시디요. 이보라요, 여주댁 여기 술상 좀 새로 봐 주시라요. 귀한 손님이래 오셨시오."
오원이 비로소 마음을 풀어 술상 앞에 다시 좌정을 하였다. 양기훈이 오원에게 술을 부어 주자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일단 채워진 잔은 절대 나누어 마시는 법이 없었다. 꼭 한입에 마셔 버리곤 하였다.
"해사가 너무 일찍 죽었시오, 겨울 서른 다섯에 죽다니..."
"나도 오원 생각과 같습네다. 앞길이 구만 리나 남은 사람이 허망하게 죽었시오. 그림이래 좋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인품도 훌륭하잖습네까."
"기래서 내 마음이래 더 아파요. 못된 놈들은 빨리 뒈지고 해사 같은 사람이래 오래 살아야 하는데..."
"이미 죽은 사람, 자꾸 생각하면 뭐 하갔습네까. 기런데, 오원."
"말씀하시라요."
"오원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시오."
"...누굽네까?"
"호는 소림이고 조석진이라고 합네다. 원래는 황해도 옹진에서 살았댔는데, 얼마 전에 한양에서 왔시오."
"황해도라면 나하고 동향입네다. 뭐하는 사람입네까? 그림을 그립네까?"
"물론이디요. 임전 조정규 어른이 조석진의 조부입네다. 도화서 화원으로 계시면서 산수와 어해를 잘 그려 화명을 떨친 분이었디요. 기런데, 그분이 한떼 절제사를 지내다가 말년에 황해도 귀향을 가게 됐시오. 조석진을 조실부모하여 조부한테 가학으로 학문과 그림을 전수받았디요. 그 사람이 호를 소림이라 한 것도 작은 임전이라는 뜻으로 다 온 것이라 합네다."
"기런데, 어드렇게 한양에 오게 됐습네까?"
"마침 한양 친척 중에 후사가 없는 사람이 있어 그 짐 양자로 오게 됐다고 합네다."
"기랬구만요, 석연은 조석진을 어드렇게 만났습네까?"
"저희 조부님과 조석진의 조부님 간에 왕래가 있어 알게 됐디요."
"여하튼, 석연이래 발도 넓습네다."
"기래서 마당발이라 하지 않습네까. 조석진이 우리보다 십년 연하이긴 하디만 인품이 있는 사람입네다."
"기렇다면, 한 번 만나고 싶구만요."
"빠름 시일 내에 데려오갔시오. 오원을 꽤 보고 싶어 합네다. 운농은 요즘 어찌 지냅네까?"
"지난달에 왔댔는데, 습작을 아주 열심히 하는가 봅네다. 부친의 화풍을 이어 받갔다고 하드만요."
"유숙의 산수와 영모는 참으로 본받고 싶은 거야요. 오원도 그분께 사사하였으니까니 장치 그분 못지 않을 겁네다."
"내래 어림도 없시오. 아마 죽을 때까지도 따르지 못할 겁네다."
그날, 오원과 양기훈이 술 두 동이를 비운 다음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래도 오원은 술이 부족한 듯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였다. 양기훈이 갈 길이 멀다고 사양하는 바람에 그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다.
오원이 모처럼 집에서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여주집에서 가져온 안주와 술동이가 놓여 있고, 그는 그림을 그리는 짬짬이 술을 마셨다. 지난번 불상놈하고 시비가 있고부터는 주막에 걸터앉아 술 마시기를 꺼렸다. 문자를 모르기는 그런 놈이나 매한가지나, 경우도 없이 사람의 도리를 기본적으로 무시하고 사는 놈들하고는 상종하기가 싫었다. 주막이 주로 그런 인간들로 북적대는 곳이라 경우를 따지고는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오원 자신이 누구를 능멸할 처지는 못 되지만, 그의 아버지가 비록 무반이라도 반열에 들어감을 이용후가 자주 깨우쳐 마음 한구석에서는 간혹 체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구나 유숙과 같은 스승 밑에서 그림뿐만 아니라 인성교육까지 받은 데다가 해사 안건영, 석연 양기훈, 유숙의 아들 유영표 등과 교유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은 바 있었다. 술에 취하면 그와 같은 결심이 자주 깨지기는 하나 이튿날이면 곧잘 후회하였다. 게다가 건달이나 진배없는 양반집 자제들이 와서 거들먹거리는 꼴이 더욱 보기 싫었다.
오원이 잠시 붓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개똥이가 호들갑스럽게 들어와 서찰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웬 서찰이냐고 물었더니 홍세섭 나으리 댁에서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홍세섭의 이름은 오원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임진생으로, 호를 석창이라 하고, 본관은 남양이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의 후손으로 정묘년에 이미 진사가 되었다. 그는 수목과 영모, 절지 등으로 이름을 날리는 중이었고, 담묵과 대담한 농묵으로 감각적으로는 시대를 초월한 듯하고, 그림의 배경은 추상적인 면이 강해 동물의 동작 묘사까지도 간략하고 속도감 있는 필치를 보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화격에 감탄하였다.
오원은 서찰을 펴 보지도 않고 "서찰 내용이 무엇이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개똥이가 글을 배우지 못해 내용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자 오원이 갑자기 눈을 부라려 서찰 가져온 놈을 들여보내라 하였다. 곧 머슴 꼴의 사내아이가 들어왔다.
"서찰 내용이 무엇이네?"
"소인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나으리께서 그냥 전하라고만 하셨습니다요."
"기래? 나으리께 가서 아뢰어라. 내래 글을 몰라 읽을 수가 없으니까니, 네놈 귀에다 서찰 내용을 담아 달라고 말씀드리라우. 알갔네?"
"네, 나으리."
오원은 그를 돌려보내고 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장승업이 글을 배우지 못해 일자무식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홍세섭이 서찰만 달랑 보냈음은 짐짓 우롱하자는 뜻으로 단정하였다.
한참 만에 홍세섭 머슴이 다시 왔다.
"나으리를 모셔오라는 분부이옵니다."
"와 나를 오라고 하시네?"
"소인은 그저 말씀만 전할 뿐입니다요."
"기렇갔구나, 기럼. 돌아가서 아뢰라우. 내래 바빠서 갈 수 없으니 까니, 나한테 볼일이 있으면 친히 오시라고 하라우. 알갔네?"
그리고는 방문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 생각할수록 홍세섭이 괘씸하였다. 비록 양반 출신에 나이가 위라고는 하나, 같이 예술을 하는 처지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처사가 불쾌할뿐더러, 이름자나 겨우 쓰는 장승업이 세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꼴이 가소로워 능멸하고 싶은 저의를 드러낸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원이 아직도 분을 삼키지 못하고 있는데, 그 머슴이 또 왔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사과의 말을 전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와 또 왔네?"
"...나으리께서 좋아하시는 주안상을 마련햇다는 말씀을 아뢰라고 하셨습니다요."
"기거이 정말이가?"
"네, 나으리."
"가서 다시 아뢰라우. 내래 양반집 술은 마시디 않는다고 말하라우."
"허지만 나으리..."
"날래 돌아가라우."
오원이 소리를 버럭 질러 머슴을 쫓아 보냈다. 그리고는 개똥이를 시켜 술 한 동이를 더 가져오게 하였다.
도대체 장승업을 뭘루 보는 기야.
오원은 분이 안 풀려 거의 바닥이 드러난 술 항아리를 들어 벌컬벌컥 들이마셨다. 오원이 글을 배우지 못한 점을 늘 안타까워했던 이용후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오원이 자진하여 글 배우기를 거부하였지만, 만약에 그때 이용후가 때려서라다 글을 배우게 하였더라면 지금쯤 사정이 달라졌을 것 같은 생각이 후회처럼 들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홍세섭이 괘씸하였다. 아무리 술을 좋아한다고 해도, 겨우 술로 사람을 유인하겠다는 발상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때 마침 양기훈이 나타났다. 그가 언젠가 예고한 것처럼 조석진을 달고 왔다. 조석진의 외모는 키가 홀쭉하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다. 굳게 다문 입이 말수가 적을 듯하였으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쾌활한 성품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오원이 본 첫인상으로는 매우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양기훈의 소개로 조석진과 인사를 나눈 오원이 갑자기 표정을 침울하게 바꿨다. 눈치 빠른 양기훈이 오원과 술동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오원, 이 시간에 웬 술입네까?"
"내래 언제 시간 가려서 술 마십네까? 모처럼 습작을 하니까니 술 없이는 허전하디 뭡네까... 사실은 조금 전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시오."
"...뭡네까? 또 건달패가 행패를 부렸시오?"
"기런 게 아니라..."
오원은 조석진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홍세섭 얘기를 사족 없이 간략하게 전하였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양기훈이 뜻밖에 박장대소하는 것이었다.
"석연, 와 기럽네까?"
"오원. 석창이 워내 짓궂은 사람입네다. 일부러 기런 기야요. 그 사람이 오원과 교유하고 싶어서 장난을 친거디요."
"설마..."
"내 생각이 맞을 겁네다. 원체 호방해서 양반 상놈 가리지 않고 농을 잘하는 사람이외다."
"아무리 기렇다 해도, 면식도 없는 사람한테 기러면 씁네까?"
"오원도 석창과 술을 마셔 보면 알게 될 거구만요."
"기럼, 내래 실수한 겁네까?"
"아니야요, 오원답게 잘 하신 거외다. 아마 석창도 지금쯤 배를 잡고 웃을 거구만요. 틀림없시요."
"석창이 몹쓸 양반이구만요. 사람을 기런 식으로 놀리다니..."
"석창을 만나 보면 오원도 마음에 들 겁네다."
"꼭 귀신한테 홀린 것 같습네다. 어쨌든 귀한 손님이래 오셨으니까니, 술부터 시작하자우요. 소림도 술 하시디요?"
오원이 비로소 마음이 풀어져 조석진에게 방향을 돌렸다. 조석진은 처음 대하는 오원을 탐색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선 사람답지 않게 동공이 노랗고 코 밑 수염이 듬성듬성 난 것이 우습기도 하고, 술 항아리를 끼고 앉은 모습에서 금세 친근감을 갖게 하였다.
"황해도 동향이라 반갑습네다. 내래 안악에서 나서 거게서 자랐지요."
"말씀 들었습네다. 앞으로 지도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라요."
"기거이 무슨 말씀입네까? 내래 누구를 지도합네까. 당치도 않아요. 소림이래 조부님께 깊이 배웠다는 얘기를 석연한테 들었시오."
"오원. 오늘은 어리둥절한 날인가 봅네다."
"화풍을 서로 교환하면서, 습작하면 기거이 배우는 거 아닙네까. 어렵게 생각지 마시라요."
"기렇다면 몰라도..."
오원은 홍세섭에 대한 오해도 다소 풀리고 조석진을 새로 알게 되어, 입이 저절로 벌어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조석진과 화담을 나누는 동안 그가 매우 총명하고 그림에 대한 논리가 정연한 데 놀라고 있었다. 어릴 때 조부한테 배운 가학으로는 넘치는 실력을 가진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문장도 꽤 있는 것 같고, 조목조목 캐내는 이론이 매우 박식하였다.
이래저래 오원은 기분이 좋아 술을 마치 물 마시듯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똥이 말마따나 그동안 소피 한 번 보러 간 적이 없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오늘 기분 좋구만요."
"오원이 좋다 하시니, 내래 따라서 좋구만요. 소림은 어떱네까?"
"여부가 있습네까. 이리 환대해 주시니까니, 몸 둘 바를 모르갔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