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도 4
8
꼭지딴을 졸지에 잃은 종로 패들은 구심점이 없어 여러 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동안 부두목으로 격으로 김봉춘이 하대치의 뒤를 잇기는 하였지만 지도력이 약해 두목다운 면모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밑의 것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오로지 힘만 장사일 뿐이지 일자무식에다가 미련하기는 곰과 다를 바 없었고, 풍월이나마 하대치처럼 학식이나 지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막이도 되지 못할 위인이라, 도무지 믿음성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조직 자체가 와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꼭지딴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도 파리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판에 이런 짝으로는 당장 사분오열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대치가 죽자 다른 지역의 꼭지딴들이 종로를 넘보기 시작했고, 언젠가는 그들에게 습격을 당해 장안의 노른자위인 종로를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될 판이었다. 종로에 욕심을 제일 많이 내는 일당들이 바로 동대문 패거리였고, 그들은 하대치가 종로를 장악하기 시작할 때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대치가 꼭지딴으로 있는 한은 다른 패들이 종로의 흙을 한치도 밟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하대치의 영역은 확고했었다. 게다가 하대치가 장안의 세도가들과 줄이 닿아 있어 종로 일대는 철옹성과 다름이 없었다.
하대치의 심복들이 두목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핏대를 올려도 김봉춘은 왠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포도청에서 이미 방을 붙여 범인을 찾고 있으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청계옥에 의심을 두고 간짜를 놓은 패도 하대치의 심복들이었다. 김봉춘과는 상의도 없이 그들 독단으로 결행한 일이었다. 그러자 김봉춘은 심사가 뒤틀려 그들을 휘하에서 제거할 궁리까지 하고 있었다.
"이놈들아. 내 명령도 없이 함부로 날뛰고 다녀? 포도청에서도 잡지 못하는 범인을 네놈들이 중뿔나게 나선다고 잡힐 것 같으냐? 동대문 꼭지딴이 어떤 놈인데...... 이럴 때일수록 똘똘 뭉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돌아가신 형님의 원수를 갚지 말란 말이우?"
"내가 언제 형님 원수를 갚지 말라구 했어? 함부로 날뛰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구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우."
"그럼, 내가 개 꼴이 된단 말이냐?"
"포도청에서 하는 꼴이 너무 한심해서 그러는 거유. 방이나 몇장 붙여 놓구서, 나무에서 감 떨어질 때만 기다리는 꼴이 아니우. 동대문 꼭지딴이 변장술에 능하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잖수. 방에다 드 따우 쌍판을 붙여 놓을 바에야 차라리 놈의 백일 때 낯짝을 그려 넣는게 나을지 모르지."
"이놈들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동대문 꼭지가 어디에 숨었는지, 네놈들은 그것부터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놈이 있는 곳을 알아내서, 포도청에 밀고나 하란 말이우?"
"그래야지, 같은 거지끼리 꼭 피를 봐야 되겠니?"
"누가 먼저 피를 냈는지, 몰라서 그러우? 놈들이 감히 우리 형님을 죽였단 말이우. 우리 형님이 누굽니까. 형님이 어떤 분인데. 그까짓 것들한테 당한단 말이우? 봉춘이 형님은 뭐가 무서워 썩 나서지 못하는 거유? 형님은 대체 어느 편이우?"
"이놈아, 그 썩은 아가리 좀 닥치지 못해? 내 손에 죽구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구나."
"하도 답답해서 그러우."
"아가리 닥쳐, 이놈아. 또 한 번 주절거렸다가는 고 조둥이를 짝찢어 놓을 테니, 알아서 해라. 건방진 놈 같으니. 이제는 내가 꼭지딴이다. 내 앞에서 함부로 나불댔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마음 단단히 먹어."
김봉춘이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뛰자 하대치의 심복들이 비로소 기를 접어두는 듯싶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새겨듣거라. 포도청에서 동대문 꼭지딴을 잡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한동안은 나댕기지 말고 얌전히 쳐박혀 있어. 그래야 개죽음을 면할 것이다. 소분에, 포도청에서 잡아들인 놈들을 마치 개 잡듯이 패는 모양이더라."
"아무런 방비도 않고 있다가, 동대문 패한테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쩔려구 그러우? 놈들이 종로를 먹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데."
"이 김봉춘이 살아 있는 한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이놈들아. 돌아가신 형님이랑 내가 이 바닥에다 말뚝 박느라고 써렛말 친 공이 얼만 줄이나 알구 하는 소리냐?"
"그럼, 동대문 놈들이 종로를 먹겠다고 눈에 불을 켠다는 소문을 형님두 알고 계슈?"
"나는 귀를 틀어막고 있다든?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 네놈들은 자기 맡은 구역이나 잘 지켜.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만약 우리 구역에 발 들여 놈이 있거들랑 불문곡직하고 나한테 끌고와야 한다. 요절을 내도 내가 낼 것이다. 내 명을 어기고 멋대로 싸움질을 했다가는 그놈도 함께 요절을 낼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제서야 하대치 심복들이 입을 봉하였다. 김봉춘이 곰처럼 미련하고 아둔하기는 해도 평소 이 바닥에서 의리 하나만큼은 철석같이 지키고 있어 더는 가타부타 따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대치처럼 세도가들과 손이 닿아 행세할 수 있는 격이나 머리가 없는 것이 불안하였다. 이 점을 능히 간파하고 있는 동대문 꼭지딴이 지금은 비록 숨어다니는 신세가 돼 있지만 장차 무슨 술수를 써 종로를 손아귀에 넣을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평소 하대치 말에 의하면 동대문 꼭지딴이 잔인하고 포악한 것은 차지하고 꾀가 서 말이라, 장차 그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대치 자기가 사라지면 장안은 모두 그의 수중에 들어가기 십상이라도까지 우려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김봉춘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 믿고 있어, 휘하의 것들이 불안감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해가 떨어지면서 주위가 어둑어둑해지자 피마골의 잡화점과 선술집들이 저마다 마늘 등이나 접 등을 내걸어 골목을 훤히 밝혀 놓고 있었다. 불 밝힌 선술집을 지나갈 때마다 너비아니와 생선, 산적 따위를 굽는 냄새가 진동하여 옷에 밸 지경이었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이 시각의 피마골에는 상인들이나 술꾼들 말고도 거지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국밥집이나 선술집을 기웃거리며 코를 벌름대던 것이 갑자기 자취를 감춰 눈을 씻고도 볼 수가 없었다. 포도청에서 거지들을 보는 족족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있고부터 일제히 코빼기를 감춘 탓이었다. 그러자 피마골에는 거지들이 사라진 대신 술라군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죄도 짓지 않은 상인들이나 천민들이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멀찌감치 피해 다녔다. 재수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고, 명이 짧은 놈은 접싯물에 코를 박아 죽는 수가 있어 되도록 순라군 눈길에 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었다.
청계옥과 같은 기방들과 색주가까지 입구마다 홍등을 걸어놓기는 했어도 한량들의 발길이 갑자기 뜸해지면서 골목은 매우 한적하고 쓸쓸하였다. 전 같았으면 홍등 아래 유구분면을 한 여자들이 나와서 눈꼬리를 요염하게 흘길 텐데, 사내들 왕래가 줄어드니까 저희들끼리 붙어 서서 희희덕댈 뿐이었다. 그러다가 순라군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눈꼬리를 세워 냅다 원성을 쏟아 놓았다.
"이 골목에, 뭐가 있다고 순라를 돌아? 젠장, 순라군 때뭉네 장사를 해먹을 수가 있어야지."
"포도청에서는 가렴주구하는 벼슬아치들이나 잡아들일 일이지, 왜 애먼 사람들한테 방망이를 휘두른담."
"우리같이 천한 것들한테도 목구멍이 있다는 걸 몰라? 도대체, 남정네들을 구경할 수가 있어야, 장사를 해먹지."
"이봐요, 그렇게 순라만 돌 것이 아니라, 사타구니 좀 적시고 가지 그래?"
"순라군은 홍두깨도 아니 달고 다니남?"
"흥. 순라군은 고자라지 아마."
그리고는 저희들끼리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쏟아 순라군들의 얼굴을 홍당무로 만들어 놓았다. 순라군 중에는 여자들을 아예 무시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육모방망이로 겁을 주거나 혹자는 삐딱하게 서서 마주 농지거리를 하는 치들도 있었다.
"네년들 장사 안 되는 것이 왜 우리 탓이란 말이냐. 봄 씹은 도랑을 건너면 쪽 한다더니, 좆부리 맛을 하루 건넜다고 발광이냐?"
"봄 씹은 세 번 하고도 늘어진다더니, 참말이구먼."
"이 사람아. 계집과 숯불은 쑤석거리면 탈난다는 것두 모르남?"
"이것들아. 열 서방 만지작거린 계집, 늙어서는 한 서방도 못 섬긴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지만, 그 밑구녕두 쉴 날이 있어야지. 허구헌 날 지겹지도 않어?"
"물장수 십 년에 엉덩이 짓만 남는다고 했으니, 제까짓 년들이 별수 있나."
장사가 안 되어 가뜩이나 약이 올라 있는 판에 밉살스러운 순라군한테까지 희롱을 당하고 보니, 여자들은 열방망이가 목구멍에까지 치올라 마음 같아서는 그들 얼굴에 똥물이라도 냅다 끼얹고 싶었지만 명색이 포도청에서 나온 자들이라 차마 실행은 할 수가 없었다.
"사내들 양기가 입으로 오르면, 홍두깨가 솜방망이가 된다는 것두 모르나? 그래보라지. 여편네 바람나기 딱 좋지."
"사위 코 보니 외손자 볼 것 같지 않다구, 순라군 나으리들 코가 드래서야 어디...... 불쌍두 하지. 하긴, 고자가 하룻밤에 열두 번 오른다고 했지?"
천한 계집들을 말로는 당해 낼 재주가 없어, 결국 순라군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막돼먹은 계집이랑 유곽 계집은 피하는 게 상책인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청계옥을 나선 승업이 약정으로 가기 위해 골목을 빠져나가던 중에 마침 유곽 여자들과 입씨름하는 순라군들을 발견하고는 급한 김에 가까운 유곽 문턱을 넘어 재빨리 몸을 숨겼다. 순라군들이 장안 거지들을 보는 대로 잡아들인다는 소문을 이미 들은 터라 은근히 마음이 켕겼다. 거지들처럼 비록 입성은 남루하지 않지만 그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판단에 순라군을 보는 순간 겁이 더럭 났다.
천한 계집애들한테 봉병을 당한 순라군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연신 군시렁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업은 바싹 쪼그리고 앉아 숨을 죽였다.
"게 누구냐?"
"도둑놈 아녀?"
순라군들 호령에 승업은 설마 자기를 지목했으랴 싶어 못 들은 척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러자 그들이 문턱을 넘어 바로 등 귀에 와 섰다. 뒤이어 머리꼭지에서 방망이가 통통 튀었다.
"건덕지가 없어 심심하던 터에, 마침 잘 걸렸다. 어여 일어나 이눔아."
그들의 방망이가 사정없이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승업은 엄살을 떨어 비명부터 질렀다. 그러자 그들 중의 하나가 승업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도둑이 분명하렸다?"
"도둑이 아닙네다."
"그런데, 이 밤중에 왜 문간에서 그러구 있는 거여?"
"...... 기냥 앉아 있댔시오."
"아무래두 수상쩍어. 일단 포도청으로 가자."
순라군들이 승업의 양쪽 겨드랑이에 서둘러 팔을 끼었다. 바싹 겁이 난 승업이 엉덩이를 빼고 발버둥을 쳤다.
그때 안에서 여자들 서넛이 불을 밝혀 우르르 몰려나왔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승업은 여자들을 향해 재빨리 구원의 애소를 보냈다.
"이 집에 약 심부름 왔댔시오. 기렇다구 말 좀 해 주시라요."
"이놈이 둘러대기는...... 웬 약 심부름?"
"내래 종로통 변 약전에서 일하고 있습네다. 님자들, 내 말 맞디요?"
그러자 여자들 셋이서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승업의 변명에 일제히 맞장구를 쳤다.
"이 사람 말이 맞아요."
"이놈 말이 맞아?"
"그렇다니까요. 우리 아씨 마님이 갑자기 곽란이 났어요."
"그런 놈이 왜 문간에 쪼그리구 앉았어? 제놈이 곽란이 났나?"
"......급히 뛰어오느라 숨이 차서 기랬시오."
"그래요. 급히 뛰어오는 걸 우리도 봤어요. 얘들아. 너희들도 봤지?"
"그렇구말고, 허겁지겁 달려온걸."
순라군들이 저희끼리 몇 마디 주고받더니 그제서야 승업을 놓아주었다. 그래 놓고도 속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고갯짓을 하며 한참을 중얼거렸다.
"가제는 게 편이라고, 이것들이 작당을 하는지 누가 알아?"
"포도청 나으리들은 속아만 살았나 봐."
"개 눈에는 똥이라고, 순라군한테는 모두 도둑으로 보이는 모양이지?"
"조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마라. 덜컥 잡혀가는 수가 있으니까니."
순라군들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겨우 물러갔다. 그제서야 승업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들이 승업을 둘러쌌다.
"대제, 댁은 누구에요? 누군데,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 있어요? 혹시, 도둑 아네요?"
"글세......? 입성이 도둑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도둑 아입네다. 정말 변 약전에서 일하고 있시오."
"정말예요?"
"기렇다니까요. 님자들이 저엉 의심나면, 나를 따라오시라요."
"둘러대는 품이 거짓은 아닌 성싶은데...... 그런데, 왜 순라군을 피했지요? 죄지은 것 있어요?"
"없시오. 순라군들이 거렁뱅이들을 마구 잡아들인다구 해서, 피했시오."
"그럼, 거지예요? 방금 약전에서 일한다구 해 놓구서......"
의심을 풀지 못한 여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승업한테 줄을 들이대고 위 아래 모양새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내 꼴이 거렁뱅이나 다름이 없으니까니, 의심받기 십상이디요."
"하긴 상투가 없는 걸 보니, 아직 총각인 모양인데."
"총각이믄 뭘 하니. 모양새로 보아 화대도 못 치를 텐데."
"화대는 없어두, 부실하지 않다면 하룻밤쯤 어떻겠어. 성님, 안 그래요?"
"나는 싫다. 마음이 동하면, 애향이 너나 품으렴."
"성님 뜻이 그렇다면......"
그들 중에 나이가 제일 어려 보이는 여자가 웃음을 흘리며 치마꼬리를 바싹 여미고는 궁둥이를 흔들면서 승업에게 다가섰다.
"이봐요, 총각. 오늘밤 나랑 만리성을 쌓으면 어떠하겠수?"
"기거이 무슨 소리야요?"
승업이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나 그녀의 표정을 멀뚱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여자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장난기를 뿌리며 승업의 주위를 돌았다. 갑자기 낭패에 빠진 승업이 자신도 모르게 여자들을 따라 빙그르르 맴을 돌았다.
"내 말뜻을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의뭉을 떠는 건지, 알 수가 있나...... 나랑 정분을 나누자는데, 모르겠수?"
애향이가 궁둥이를 요리조리 흔들며 승업의 주위를 또 돌았다. 그제서야 겨우 눈치를 챈 승업이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혔다.
"대답 좀 해 보우. 화대 치르라는 소리는 아니 할 테니."
애향이 얼굴을 빳빳이 세워 승업의 턱 밑으로 바싹 파고들었다. 승업이 또 뒷걸음질 쳤다.
"내래 기럴 수 없시오. 약전으루 날래 가야 해요."
"그럼, 아녀자의 호의를 거절하겠다는 말이우? 사내대장부가 이렇게 얼떠서야 원...... 혹시, 고자 아니우?"
"여자래 별걸 다 묻습네다."
승업이 비로소 등을 돌려 문턱을 넘으려 하였다. 그러자 여자들 셋이 승업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냥은 못 간다는 것이었다.
"기럼, 내래 어떡하라는 말입네까?"
"몰라서 묻는 것이요? 순라군한테 잡혀갈 걸 구해 줬는데, 어찌 이대로 간단 말이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들 중 나이가 제법 든 여자가 마치 아랫것 훈계하듯이 표정을 굳혀 따지고 들었다. 승업이 슬그머니 겁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 은혜는 잊지 않갔시오. 기러니, 기냥 가게 해 주시라요."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애향이 승업의 소매 끝을 잡아 흔들었다.
"저엉 그러하면, 이름 석 자나 남기고 가구료."
"나같이 천한 것, 이름은 알아서 뭐 하갔시오."
"이 아이가 원하는 것이니, 남기고 가구료. 이름이 무엇이오?"
"......승업이라고 합네다."
"성씨는 없수?"
"베풀 장이야요."
"장승업이라......장승업?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정말, 약전에서 일을 하우?"
"기래요."
"장승업, 장승업...... 가만 혹시, 그림을 잘 그린다는 그 장승업이우?"
"설마, 이 사람이 그 장승업일라구. 아니지요?"
"......맞습네다."
"어쩌면 좋다니.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화가를 이렇게 만나다니. 애향아. 네 눈이 보배로구나. 이런 인연은 다시 없을 것이다. 얘들아 안 그러냐?"
"그렇다마다요."
여자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손뼉을 치며 감탄하였다. 비록 매음하는 처지이기는 해도 소문난 화가를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됨을 신기해하였다.
"애향아. 아니 되겠다. 오늘밤, 이분을 놓쳐서는 평생 후회할 것이니, 잠시나마 안으로 모셔야 될 것 같구나. 이봐요, 화가 나으리. 아니, 도령. 아무리 갈 길이 바쁘시더라도 잠시만 안으로 드심이 옳을 듯하구료."
"기건 곤란합네다. 약전에서 머슴 하는 처지라. 더는 지체할 수가 없시오. 이해하시라요."
"하지만, 우리 애향이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잠시만 머물다 가우."
나이 든 여자가 두 여자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승업의 팔을 끼었다. 당황한 승업이 엉덩이를 뺐으나 여자들이 짓궂게 굴면서 결코 놓아 주지를 않았다.
그렇게 납치당하듯 끌려들어간 승업은 야릇한 향기가 가드하고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침구가 깔린 방으로 안내되었다. 유곽의 여자들이 기거하는 방을 난생처음으로 보게 된 승업은 신비로움에 앞서 무서운 생각부터 들었다. 마치 여우한테 홀린 듯싶었다. 방 안 가구도 화려하거니와 짙게 화장한 여자들을 곧 닿을 듯이 가깝게 마주 보고 있으니 머리가 혼미하고 가슴이 뛰어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넋이 완전히 나가 있는 승업을 앉혀 놓고 여자들이 부산하게 들락거렸다. 누구는 승업을 앞에 수건과 함께 대야를 내려놓고 손을 씻도록 하는가 하면, 누구는 꿀물을 받쳐 들고 왔다. 승업은 계속 멀뚱한 표정으로 내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여자 둘이서 주안상을 맞들고 왔다. 갑자기 차린 상이지만 승업이한테는 산해진미처럼 보였다. 여자들이 주안상을 승업 앞에다 내려놓자 겁을 먹고 얼른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승업의 마음쯤은 전혀 헤아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애향아, 그러고 있지 말고, 화가 도령한테 술 한 잔 따르려무나."
"제가 어찌......"
조금 전 짓궂던 것과는 달리 애향이 매우 수줍어하였다. 가까이 보니, 고운 얼굴과 음전한 자태가 도무지 유곽 여자로는 볼 수가 없었다.
"어서 술을 따르라니까. 장안에 유명한 화가를 모셔 놓고 그렇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을 거냐?"
그제서야 애향이 술병을 들었다. 그러나 승업은 잔을 들지 못하고 여자처럼 수줍어하며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나머지 여자 둘이서 승업이를 향해 사내대장부를 들먹이며 잔 들기를 채근하였다.
"내래 술은 마실 수가 없는 몸이외다."
"술을 마실 수 없다니? 나이가 제법 든 얼굴인데, 왜 술을 못 마셔요? 원래 술을 못해요?"
"기거이 아니라......"
승업은 이미 어린 나이에 술을 마신 셈이다. 부모를 잃고 거지로 떠돌던 시절,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얻어먹으면서 재강도 못먹었고, 때로는 짓궂은 주막 사내들이 탁주까지 먹여 술에 취해 널브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용후를 만났고, 그 후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가고부터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머슴살이 하는 몸이 어드렇게 술을 마시갔습네까."
"어머? 머슴이라고 해서 술을 마시지 말라는 법도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그럼, 머슴은 여색도 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요?"
"더구나 에미나이는 가까이할 수가 없는 법이야요. 생각을 해 보시라요. 거렁뱅이로 떠돌던 놈한테 배곯지 않게스리 밥 멕이고, 옷주고, 재워주는 어른들한테 어드렇게 그 꼴을 보입네까. 기건 도리가 아닙네다."
"사내대장부가 딱도 하구나. 술과 여색을 마다하다니. 그럼, 평생을 남의 집 머슴으로 살 생각이우?"
"꼭 머슴 일만 하는 거이 아니야요. 그림을 익히는 중에 있시오. 기래서, 아직은 술과 여자를 가까이할 수가 없는 기야요."
"참으로 딱헌 도령이구먼. 잘 차린 밥상을 마다하다니 원......"
그러자 승업의 사정을 내내 듣고 있던 애향이 눈시울을 적시는가 했더니 갑자기 자리를 떠 휭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를 어쩌누. 애향이가 몹시 서러운 모양이야. 이봐요, 화가 도령. 저 아이가 지금은 비록 유곽에 몸담고 있기는 해도, 원래는 뼈대 있는 가문의 출신이라우. 그러니, 행여 저 아이를 업신여길 생각은 하지 마시우."
"기렇지 않습네다. 제 처지에, 감히 누구를 업신여깁네까. 내래 거렁뱅이였댔시오. 누구를 업신여길 처지가 아니야요. 기런데,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믄서 와 이런 데 있습네까?"
"아비가 역적으로 몰린 탓이지. 가문 있는 집 자식이라 그러지 행동거지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문자도 있는 아이라우. 저 인물에. 참으로 박복한 아이지.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리지만 않았다면 어찌 이리 되었겠수."
"정말 안됐구만요."
"이를 말이겠수. 허나, 굳이 저 아이를 취하지 않겠다고 하니, 서러워하는 저 아이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림이나 한 장 남기고 가시우. 그림이 싫으면 문장이라도 남기듣가. 그것이 사내대장부의 도리라는 생각이 드는데...... 내 생각이 어떻수?"
"문자는 배운 적이 없는 몸이야요."
"그럼, 그림을 남기면 되겠구료."
"굳이 그림이라믄......"
승업이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쾌히 승낙하였다. 곧 이어 여자들이 서둘러 지필묵을 내놓았다. 그때까지도 애향은 다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나이 든 여자가 애향을 억지로 불러들였다. 비로소 애향이 느럭느럭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승업은 애향이 정말 양반집 규수 출신인지를 확인하려는 듯 그녀의 얼굴을 흘끔흘끔 곁눈질하였다. 얘기를 듣고 보니, 두 여자가 번갈아 가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고운 자태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처럼 천한 사람만 박복하게 사는 줄 알았댔는데, 실은 기렇지 않은가 봅네다."
승업이 얘기 끝에 갑자기 한숨을 쏟아 놓자 애향이를 비롯해서 여자들이 승업의 속내를 몹시 궁금해하였다. 그러나 승업은 그 사연만큼은 차마 말할 수 없다며 또 한숨을 지었다. 애향이 양반집 규수였으면서도 아비가 역적으로 몰린 탓에 멸문지화 할 뻔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이응헌의 딸 운옥을 떠올렸다.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운명을 달리한 그녀를 새삼 안타까워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향아, 너무 애달퍼 하지 말아라. 화가 도령이 너를 취할 수 없는 사정을 듣고 보니, 어쩔 수 없겠구나. 그 대신, 너에게 그림을 남기겠다고 하니 더 큰 뜻으로 받으려무나."
애향이 얼굴을 잘 익은 복숭아 빛으로 물들이며 화선지를 승업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화선지를 받아 놓은 승업이 입을 굳게 봉하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갔다. 화재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세 여자가 한결같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애향은 바위처럼 미동도 않고 있는 승업의 모습을 안타까운 눈길로 훔쳐보며 자주 한숨을 내쉬었다.
승업이 정적을 깨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촌각의 머뭇거림도 없이 마치 문자를 써내리듯 일필휘지로 붓을 휘둘렀다. 그 붓끝이 이리저리 옮겨질 때마다 마치 신이 들려 춤을 추는 것같았다. 애향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시샘하는 귀신이 왔다가도 혼비백산하여 꼬리를 감출 것이 분명하였다. 숨을 죽여 몰아지경에 빠져 있는 승업의 모습을 비켜보고 있던 애향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승업이 붓을 놓자 화선지에는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는 매화 나무가 아주 선연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당장 문이라도 열면 바람결에 잎이 한꺼번에 사르르 지고 말 것처럼 위태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새 한 마리가 앉을 가지를 찾지 못해 안달을 부리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안스럽게 하여 곧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여자들 셋이 벌어진 입을 한참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감탄사조차 새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향은 그림을 보며 뒤늦게 눈물만 글썽일 뿐이었다.
"어쩌면! 애향아. 어찌 사람의 손끝으로 저리 그릴 수 있단 말이냐. 아무래도, 우리네 같은 사람이 아닌 듯싶구나. 어쩌면, 매화가 저리도 고울 수가 있을까. 게다가, 저 새는 금방이라도 화선지에서 빠져나와 우리들 머리 위로 말 것처럼 보이는구나."
"성님, 저는 마치 꿈속에서 머물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마다. 어쩌면!"
"자꾸 기러지들 말라요. 내래 부끄럽습네다."
"부끄럽다니요? 화가 도령은 틀림없이 신이 내리신 분이구료."
"그렇구말구요. 신이 내리셨어요."
"애향아. 내 생각에는 그림을 그냥 받을 것이 아니라, 네가 이 그림에 맞는 화제를 넣는 것도 뜻이 깊겠구나. 화가 도령 생각은 어떻수?"
"내래 글을 모르니까니. 기거이 좋은 생각입네다. 기렇게 하시라요."
"애향아. 마침 화가 도령도 좋다고 했으니, 그리하려무나."
"성님두 별말씀을...... 이처럼 훌륭한 그림에, 저같이 천한 것이 손을 대다니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
"그렇지 않다. 팔자가 사나워 비록 유곽에 처박혀 있는 몸이기는 하지만 너의 재주 또한 뛰어난 것이니, 그렇게 해라. 그러는 것이 오늘의 인연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다. 화가 도령, 아니 그러우?"
"기렇습네다. 화제를 붙이시라요."
"제가 어찌......"
"화가 도령도 승낙하지 않았느냐. 애향아. 어서 붓을 들으렴."
그런데도 애향은 선뜻 붓을 들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승업이 흘끔 곁눈질한 그녀의 자태는 마치 매화나무 아래에서 수줍음을 먹고 있는 선녀처럼 보이기도 하여 자시도 모르게 가슴을 떨었다.
두 여자가 애향에게 붓 들기를 재촉하자 그제서야 그녀가 마지못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의 승업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더니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틀림없이 화제를 찾는 중이리라. 소매 끝을 여미어 잡은 애향이 붓을 잡는가 싶더니 이어서 붓끝이 미끄러지듯이 흘러내렸다. 승업은 그녀의 단아한 자태를 지켜보는 동안 내내 감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곧 흠모의 정이 싹트고 있는, 의미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새 한 마리 짝 잃어 외롭게 홀로 나니
네 짝 찾을 제면 나도 님 보련마는
짝 잃고 그리는 한은 너나 내나 다르랴
붓을 사뿐이 내려놓은 애향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진하여 시를 읊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청아하여 승업은 마치 꿈속에서 듣는 것 같았다.
"애향이는 매화보다 오히려 이 새한테 마음이 가는 모양이구나. 네 시를 듣고 보니, 새가 가지에 앉으려는 모습은 마치 제 짝을 기다리위 위해서인 듯싶기도 하구나. 화가 도령이 보기에는 어떻수?"
"그림은 보는 사람 마음에 따라 뜻이 다를 수 있으니까니...... 아주 좋은 문장입네다. 그림을 더욱 빛나게 했시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우? 그린 사람의 뜻이 그러하다면, 아는 애향이와 마음이 서로 통한다는 뜻이 아니겠니? 애향아, 네 생각도 그러하지?"
"아이, 성님두 원......"
얼굴이 붉어진 애향이 수줍게 눈을 흘기더니 이내 방문을 열고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유곽에 있는 것이 저리도 수줍음을 타다니! 네 나이 참으로 좋을 때이건마는, 무슨 놈의 팔자가......"
나이 든 여자가 갑자기 한숨을 내뿜으며 눈물을 꾸역꾸역 밀어냈다.
승업이 혜산 유숙의 집에 당도한 것은 해질녘이었다. 약전에서 출발한 시각은 아침나절이었으나 유숙의 집이 저만치 보이는 길목에서 오랜 시간 배화하느라고 늦었다. 승업의 심정으로는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삼 년 전, 이응헌의 딸 운옥의 죽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는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뜻으로 스승을 떠났던 그로서는 당연히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변 주부가 다시 다리를 놓아 주고 유숙 또한 승업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안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겠으나, 부끄럽고 쑥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승업이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주뼛주뼛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을 때 마침 만석의 눈길에 잡혔다. 아직 내막을 모르고 있는 듯 만석이 다가와 승업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승업을 발견한 눈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만석아."
"이게 누구여......? 형님 아니우?"
"기래 나야. 그간 잘 있었네?"
"내 꼴이 늘 이렇수. 그런데, 형님이 갑자기 웬일이우?"
만석을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놀란 표정을 얼른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승업의 변한 모습을 찾아내려고 연신 눈을 두룩두룩 글렸다. 승업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나으리 안에 계시네?"
"보퉁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니, 형님이 다시 오게 된 모양이우. 내 생각이 맞수?"
"기래. 나으리한테 그림을 다시 배우기로 했어, 나으리는 어디께 계시네?"
"지금, 저녁 진지 드시고 계시는데......"
"기럼, 조금 있다가 뵈야 되갔구나. 만석이는 어드렇게 지낸?"
"늘 이렇수. 어쨌든 안으로 드시우. 이게 꿈인지 생신지 원......"
만석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승업의 보퉁이를 빼앗아 들고 성큼 앞장을 섰다. 어깻짓이 요란한 것으로 보아 반가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승업이 왔음을 알리러 간 만석이 돌아와 유숙이 사랑채에서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승업은 선뜻 일어서지 못하고 또 한참을 머뭇머뭇하였다. 만석이 얼른 가 보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비로소 엉덩이를 떼었다.
승업은 유숙의 방 앞에서 무릎부터 꿇었다. 인기척을 느낀 유숙이 두어 번 기침 고리를 냈다.
"나으리, 승업입네다."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선 승업이 이마를 마닥에 붙이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러나 유숙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헛기침만 해 댔다.
"나으리, 그간 옥체 만안하셨습네까?"
"그래,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왔더란 말이냐.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면서, 감히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고?"
그의 목소리는 승업을 엄하게 꾸짖기를 눌러 참고 있는 듯 떨리는 기색이면서도 내심 반가운 마음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나으리께 죽을죄를 지었습네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느니라."
"어드런 벌도 달게 받겠습네다."
"그 입은 죽지 않고 여전하구나. 입만 살아 가지고...... 네놈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사람다움을 먼저 익혀야 될 놈이야. 재주만 믿고 경거망동하는 놈은 결코 좋은 그림을 생산치 못하는 법이거늘."
"네, 나으리."
"그동안 네놈 솜씨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우선 봐야 되겠구나. 거기 지필묵이 있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려봐."
그래도 승업이 고개를 들지 않고 엎드려 있자 유숙이 소리를 벽력같이 내질렀다. 지엄한 분위기로 보아 곧 재떨이가 날아올 것만 같았다.
"왜 꾸물거리고 있는 게야? 어여, 붓을 잡으래두."
"네, 나으리."
그제서야 승업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지필묵 앞에 앉았다. 눈앞이 캄캄하여 무엇을 그려할 할지, 어떠한 소제도 떠오르지 않았다. 화선지를 생전 처음 대하는 것처럼 그저 막막하기만 하였다.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상을 그려 봐."
"네, 나으리."
다행히도 유숙이 소제를 정해 주는 바람에 막혀 있던 생각을 비로소 열 수 있었다. 땀이 등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승업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갈대가 우거진 늪을 향해 기러기 한 마리가 하강하는 모습의 노안도를 그려 냈다.그러자 유숙은 그림이 못마땅한 듯 혀를 연신 찼다.
"네놈 눈에는 그것이 기러기로 보이더란 말이냐? 늪을 향해 내려오는 형상이 꼭 화살을 맞고 떨어지는 참새 꼴이 아니냐. 목이 죽은 닭 모가지처럼 비틀거리고, 영모는 그게 뭐냐. 마치 개 털을 꽂은 것 같지 않느냐."
유숙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림을 마구 구겨서는 승업의 얼굴을 향해 냅다 던져 버렸다. 승업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사납게 구겨진 그림을 집어 들었다.
"다시 그리갔습네다."
"다시 그린다고 해서, 네놈 재주가 나아질 것 같으냐? 네놈은 붓 잡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이야."
"네, 나으리."
"물러가렸다."
유숙의 방을 나온 승업은 눈앞이 캄캄하여 바로 턱 밑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붓 잡는 것부터 새로 시작하려는 스승의 질타에 그만 숨이 탁 막혔다. 그동안 온 세월이 얼만데...... 암담한 절망만이 가슴을 꽉 채웠다.
그러나 지은 죄가 너무 커 감히 스승을 야속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운옥이를 흠모한 죄로 한때 그림을 팽개쳤던 자신의 경솔함이 자꾸 후회가 되었다. 어쨌든 중도에 그림을 멈춰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기래, 스승님 말씀이 맞아. 쥐뿔도 없는 놈이 재주만 부렸댔어.
9
이용후가 외출할 치비를 서둘러 집을 나서자 그의 아내가 따라나서며 급히 가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용후는 장아네 볼일이 있다고만 할 뿐 행선지는 밝히지 않았다.
"동이 트자마자 급히 나서시니, 궁금하여 그럽니다."
"별일 아니니, 궁금히 생각지 마시오."
"나으리께서 혹시......"
무엇인가 짐작이 가는 데가 있는 듯 그의 아내가 얼굴에 근심을 잔뜩 발라 가지고 남편의 발목을 잡았다.
"혹시라니, 무슨 뜻이오?"
"......아니옵니다. 조심하여 다녀오십시오."
"조십하라니요? 내가 전쟁터에라도 끌려간단 말이오?"
"......그냥 드리는 말씀입니다."
순간, 이용후는 아내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남편이 천주학에 빠져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몇 해 전, 그의 누이가 머슴 박 서방 편에 아내한테 서찰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남편이 천주학쟁이가 된 듯하니, 이를 못하게 말리는 것이 아내의 도리일 뿐만 아니라 멸문지화를 막는 길임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아내가 겁을 잔뜩 먹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매사 조신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라 그 당장 아는 체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적당한 기회를 노려 만류의 뜻을 비칠 것으로 이용후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운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용후가 청계옥 골목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 앞에서 서성대던 계향이 해사한 얼굴로 허리를 다소곳하게 굽혔다.
"왜 나와 있느냐?"
"어서 오시어요, 나으리.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나를?"
"그러하옵니다."
"내가 올 줄을 어찌 알았더냐?"
"언홍 아씨께서 드리 말씀하셨사옵니다."
"그랬구나. 연홍이 안에 있느냐?"
"나으리 오시기를 고대하고 게시옵니다."
계향이 앞서 들어가 안채에 대고 이용후가 왔음을 큰 소리로 전했다. 그러자 연홍이 이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계향이가 마중 나온 것을 보니, 나를 많이 기다린 게로군."
"당도하실 시각이 다 되어서...... 그리고, 계향이한테 다른 뜻이 있는 듯싶습니다."
"계향이한테 다른 뜻이?"
그러자 계향이 몸을 꼬며 옷고름을 입에 물었다. 그러는 자태가 제법 여자로 무르익은 듯 보였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차차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연홍이 문을 열어 주고 비켜서자 이용후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연홍이와 계향이 따라 들어왔다.
"계향이 나한테 할 말이 있었더냐?"
"네, 나으리."
"어서 말해 보렴. 궁금하구나."
그러자 연홍이 계향에게 눈짓을 보내며 아뢰기를 재촉하였다. 두 여자가 이미 약속을 한 듯한 눈치였다.
"저어......, 나으리."
그러고도 계향이 한참을 주시하는 것으로 보아 서두 꺼내기가 꽤 어려운 눈치였다. 답답한 쪽은 이용후였다.
"어서 말을 하래두."
"나으리께 감히 말씀을 여쭤도 되는지요."
"이런 답답한 노릇이 있나. 주저치 말래두."
"......소녀도 천주님을 믿고 싶사옵니다."
"네가 천주님을?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부모도 동기간도 없는 처지라, 천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너한테는 사내 동생이 하나 있지 않느냐."
"동생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누이가 기방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의를 끊은 아이옵니다."
"그야 한때 먹은 생각이 아니더냐. 천지간에 형제가 의를 끊는 법은 없느니라."
"그 아이는 여느 아이와 다르옵니다. 그러니, 소녀가 어찌 외롭지 않겠사옵니까. 하오니, 제 청을 들어주시어요."
"허긴, 천주님을 믿는 일에는 부모와 동기간이 있고 없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천주님을 믿고 의지하기에는 힘에 부칠 것이다. 너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나라에서는 금하는 일이라, 앞으로도 박해가 더욱 심할 것이야."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염려치 말라니?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인데?"
"사람이 언제 죽어도 한 번은 죽을 것이 아니옵니까. 저같이 천한 것이 천주님을 의지하다가 죽는 일이라면 한이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허허. 말은 듣기 좋다마는...... 이보게, 연홍이. 혹시 자네가 은연중 교화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계향이 스스로 청한 일이옵니다."
"연전에, 연홍 아씨가 포도처에 글려가 고초를 당한 이후부터 천주님에 대해서 생각하였사옵니다."
"너도 그같이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될지 모르는 일이야."
"소녀도 무서운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하오나 아씨께서 그 같은 고초를 당하고도 천주님을 멀리하지 않는 것은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사옵니다. 천주님이 대체 무엇이길래 아씨로 하여금 저토록 마음을 굳게 하였는지......후에, 그것이 곧 사람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천주님의 힘인 듯싶었사옵니다."
"허허. 계향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로구나. 매양 천방지축 어린것으로만 보았더니......"
이용후는 계향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녀를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던 그로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도 없는 천한 계집아이로 기방에 들어와 상노와 하인 노릇으로 잔뼈가 굵은 터라, 생각 또한 천박할 것으로만 여겨 아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사려가 있었고 신앙으로 장래를 예비하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나으리를 모시고 예배드리러 간다고 했으니, 저도 함께 가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옵니다. 어찌하면 좋을는지요."
"글쎄......? 내 생각에는 좀더 두고 볼 일이 아닌가 싶네만. 신앙을 갖는 일이란 일시적인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어서 하는 말일세. 그러니, 계향은 좀 더 깊이 생각한 연후에 따르는 것이 좋은 듯싶구나. 허나, 천주학의 교리 몇 가지를 일러 줄 것이니, 내가 하는 얘기를 깊이 생각하고 깨달은 바에 이르면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지꾸나."
"......네, 나으리 분부에 따르겠사옵니다."
계향은 지체 높은 사람의 분부를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서운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냈다. 그래도 진사 어른이 자신의 마음을 마다 않고 받아주려는 뜻이 보여,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어서 계향은 마치 구름이 몸을 실은 것처럼 황홀하고 기쁘기 한량없었다.
명례동으로 가기 위해 이용후와 연홍이 함께 청계옥을 나서자 옥수가 계향에게 쪼르르 다가와 방에서 셋이 나눈 얘기를 궁금해하였다.
"계향아. 나으리랑 대체 무슨 얘기를 그리 오래 나누었니?"
"아무것두 아녜요. 그저 나으리 말씀을 훈계로 들었을 뿐이에요."
"내 잠깐 들으니, 너도 무슨 말인가 나으리께 여쭙는 것 같던데? 혹시, 천주학 얘기가 아니었니?"
"......"
계향이 선뜻 대답을 않고 머뭇거리자 옥수가 바싹 다가앉으며, 어떻게든 수긍을 받아 내려고 안달을 했다. 한솥밥을 먹는 처지인 데다가 계향이보다는 훨씬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만 제외된 듯한 소외감 때문인지 서운한 기색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다. 눈치 빠른 계향이도 그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학에 관한 것만큼은 함부로 놀릴 수 없는 일이어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이 맞지? 천주학 얘기였지?"
"알고 있다면서, 왜 물어요?"
"그럼, 계향이 너도 그 천주님인가 뭔가를 믿을 셈이니?"
"그러면 안 돼요? 옥수 형님은 부모 형제 다 있어 외로운 것을 모르겠지만, 나는 처지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그 서양 귀신을 믿겠단 말이지? 나라에서 금하는 일인데두?"
옥수가 서양 귀신 운운하자 계향이 갑자기 눈꼬리를 끌어올리며 볼에 바람을 넣었다. 남의 다리에 딴죽을 치는가 싶어 은근히 부아가 솟았다.
"형님은 모르셔도 돼요. 서양 귀신이라니요? 천주님은 귀신이 아녜요. 세상 천지만물을 지어내신 유일한 분이세요. 귀신이 만물을 지어냈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어머머? 얘 좀 봐. 그새,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정말 큰일 저지를 아이네. 너는 소문두 못 들었니? 그 서양 귀신이 특별히 조선의 아녀자들만 잡아먹는다는 소문 말이다."
그러자 계향이 갑자기 숨이 넘어가듯 까르르 웃으며 박장대소하였다. 너무 웃어 눈물까지 흘렸다. 너무 뜻밖의 반응이라 옥수는 뒤로 나앉으며 계향의 무릎을 흔들었다. 계향이 정말 서양 귀신에 넋을 빼앗겼는가 싶어 겁이 더럭 들었다.
"얘, 계향아. 정신차려라."
"형님 하는 소리가 하도 어이없어 그래요. 사람들이 말하는 서양 귀신이란 천주님이 아니라, 서양의 신부님들을 두고 하는 소리예요. 그러나 신부님들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아요. 그들도 사람인데, 어찌 사람을 잡아먹겠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사 나으리나 연홍 아씨가 어찌 멀쩡하겠어요?"
"나으리야 남자니까 잡아먹지 않았겠지만, 연홍 아씨는 아녀자니까, 차차 잡아먹지. 누가 아니?"
"그렇지 않아요, 옥수 형님."
"낸들 알겠니. 홍 생원께서 그러시니까, 그리 알 수밖에."
"홍 생원님두 소문만 들어 아시는 거예요."
"그나저나, 계향이 너는 어찌 그리 잘도 아니? 너는 아직 진사 어른을 따라나선 적도 없잖니."
"그 동안 연홍 아씨한테도 들었고, 오늘 진사 어른한테 말씀을 들어서 자세히 알게 되었지요. 실은, 나도 옥수 형님처럼 소문 듣고 무서워했지만, 알고 보니 모두 헛소문이었어요. 그러니, 형님도 무작정 경계만 하지 마셔요."
"그래도, 있지도 않은 천주님이니 뭐니 하는 걸 나는 믿지 않을란다. 자기 조상한테 제사도 지내지 못하게 하는 걸 뭐 하러 믿겠니. 그건 상것들이나 하는 짓이란다."
"나야, 어차피 조상도 모르고 자란 아이 아닙니까."
"너는 그렇다만, 나는 다르다."
옥수가 조상을 들먹이며 결론을 내리는 바람에 계향은 더 대거리하기가 싫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녀하고는 얘기를 터놓고 할 수 없는 처지로 단정을 지어 버리자 계향은 혼자서 괜히 마음이 흐뭇하고 편안하였다.
그러고 나서 한식경쯤 지나자 마침 홍경무 생원이 찾아왔다. 계향은 그를 보자, 옥수에게 천주를 서양 귀신으로 일러 줬다는 조금 전의 얘기가 떠올라 대뜸 심사부터 뒤틀렸다. 계향은 입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나타난다더니...... 양반이긴 하나 때를 못 맞추는 양반이구나."를 중얼거리며 옥수를 불러냈다.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특별히 정분을 나누고 있음을 알고 있는 터라 그라 비록 손님이긴 해도 계향은 그들 사이에 일부러 끼지 않았다. 게다가, 홍생원이 비록 양반이라고는 하나 언행에 의젓함이 없어 늘 꺼리는 중이었다. 기생 신분이 천하다고 하여 사람을 업신여기기 일쑤여서, 술자리에 들어온 기생의 치마를 멋대로 들추거나 젖가슴을 제멋대로 움켜쥐는 상스러운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감히 이용후와 비교해서, 양반과 상놈의 차이를 스스로 꿰차는 위인이었다.
홍경무는 술상을 받자마자 옥수를 옆에 앉혀 대뜸 허리끈부터 풀었다. 그러나 옥수가 몸을 비틀어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러자 무안해진 홍경무가 안색을 바꿔 옥수에게 눈을 부라렸다.
"새삼 왜 그러느냐?"
"나으리께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여쭐 말씀은 차차 듣기로 하고, 우선......"
홍경무가 재차 옥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래도 그녀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자 홍경무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대신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새삼스럽구나. 내 의중을 뻔히 아는 네가 아니었더냐."
"아옵니다. 그러하오나 제 말씀부터 들어 보옵소서."
"대체, 무엇이관대......"
"서양 귀신이 아녀자를 잡아먹는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사실이다 마다. 잡아먹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느니라."
"어머, 어찌 먹습니까?"
"그러니까... 마치, 고기를 뜯어 먹듯이 하더구나. 헌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 서양 귀신이 너를 보자구 하더냐?"
"나으리께서는 어찌 그리 끔찍한 말씀만 하시옵니까. 제가 어찌 서양 귀신과 마주하겠습니까."
"더 이를 말이겠느냐. 천주학 따위에는 아예 근접을 말아야 하느니."
"여부가 있사옵니까. 그런데도 연홍 아씨는 서양 귀신이 무섭지도 않은가 보옵니다. 이제는 계향이까지 물이 들었다지 뭡니까."
"어허, 이런 변이 있나. 그것이 모두 이 진사 탓이야. 공연히 무지한 기녀들만 골라서 바람을 넣고 있으니... 연홍이도 그렇지. 문장줄이나 꿴다는 계집이 부화뇌동하다니 원... 말세로고."
"나라에서 금하는 일을 무슨 낙을 보겠다구 굳이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귀신에 홀린 것이 한편 딱하기도 하고... 장차, 어찌 될 것 같사옵니까?"
"어찌 되긴, 모조리 잡아서 하옥시킬 것이 명약관화한 일인데, 양반은 멸문지화할 것이고, 연홍은 사지가 찢길 것이니라."
"참말로, 연홍 아씨가 그리 되옵니까?"
"그렇다마다. 그러니, 너는 귀도 눈도 닫고 있어야 하느니라."
"에그 끔찍하여라. 우리 계향이도 그리 되겠습니다요."
"그러니, 네가 계향이 년을 만류토록 하여라. 불쌍하지 않느냐."
"제가 그리 타일렀는데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귀신이 붙어도 단단히 붙은 모양입니다."
"내비둬라. 그래도 듣지 않음은 그년 팔자니라. 너나 조심하여라. 자아, 이제 알았을테니 그만 허리를 풀어라."
"아이이, 술 좀 더 드시어요."
그러나 홍경무의 손이 이미 옥수의 젖가슴이 출렁 드러나도록 고름을 풀어젖혔고, 다른 한 손은 고쟁이 속으로 들어가 두더지처럼 헤집고 있었다.
10
혜산 유숙이 마침 그의 집을 방문한 손님과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정학교라는 화가로, 호는 향수, 몽인, 몽중이라 한다. 본관은 나주이고, 한때 군수를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 고루 능하였고 특히 기암괴석을 소재로 한 석화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1831년 신묘생으로, 유숙이 그보다 네 살 위였으나 서화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어서 늘 정답게 예우하였다.
"혜산께서 귀재를 맡아 가르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글쎄요, 과연 귀재로 보아야 하는지..."
"서화를 고루 갖추었습니까?"
"웬걸요. 까막눈인지라, 글은 아예 없어요."
"저런... 그림을 그리면서 글이 없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글을 배워 볼 사이도 없이 부모를 잃었는가 봐요."
"혜산께서는 그러한 청년을 어찌 맡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약전을 하고 있지만, 한때 역관을 지낸 바 있는 변씨 성의 주부한테 부탁을 받았어요. 그 사람의 전언에 의하면..."
유숙은 승업의 출생과 한양으로 오게 된 경위를 간추려 들려주었다. 정학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승업의 천부성에 대해 매우 탄복하는 눈치였다. 승업의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은 그의 그림이 과연 놀랄 만한 것인가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유숙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제가 그 청년의 그림을 한 번 보았으면 합니다만..."
"아직은 습작에 지나지 않지만, 보시는 거야 어려울 것이 없지요."
유숙은 그 즉시 만석이를 불러 승업을 불러오라고 일렀다. 그러자 왠지 만석이 우물쭈물하며 선뜻 대답을 못하였다.
"왜 그러느냐?"
"실은....."
"어허. 답답하구나. 승업이 집에 없느냐?"
"네, 나으리."
"어디를 갔더란 말이냐."
"나무하러 가겟다구 했습니다요."
"나무하는 것은 네가 할 일이 아니더냐."
"제 일이라고 했는데두, 굳이 지게를 지고 나갔습니다요."
"답답하기는... 오는 대로 들라 이르거라."
"네. 나으리."
유숙은 만석이를 내보내고 연상 밑에서 두루마리 화선지 서너 장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그 아이가 습작한 것이오만..."
"마침, 보관을 하셨군요."
정학교는 유숙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아 한 개씩 펼쳤다. 산수도와 영모도와 기명절지도 등이었다. 정학교 입에서 탄복하는 소리가 자주 터져 나왔다. 섬세함도 그러려니와 붓을 힘차게 뻗어 친 독창성까지 가지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일자 배움이 없음에도 이 같은 솜씨를 발휘함은 귀재 소리를 들어도 과함이 없을 듯합니다."
"기교는 있으나, 사물에 생명이 없는 듯하여 아쉬워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제 배우는 중에 있는 그림치고는 탄복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향수께서 너무 과찬하시는 것 같소이다."
"아닙니다. 우리끼리 얘깁니다만, 비천한 출생에서 어떻게 이러한 재주가 숨어있었는지, 놀랍지 않습니까."
"제 생각도 향수와 같습니다. 재주를 좀더 갈고 닦으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것입니다."
"어쨌든 신통한 일입니다."
이때 만석이가 달려와 승업이 돌아왔음을 아뢰었다.
"입성을 단정히 하고 들라 이르라."
잠시 후 승업이 문전에 와 엎드렸다.
"나으리. 승업입네다."
"들라."
승업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학교가 그의 얼굴에서부터 행색까지를 낱낱이 훑어내렸다. 승업은 낯선 손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유숙의 분부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렸다.
"나무 하는 일은 어째서 네가 맡아 하느냐?"
"실은, 산수를 관찰하고 싶어서 갔댔습네다."
"그래, 어디를 다녀왔느냐?"
"자하문 밖에서 북한산을 보았습네다."
"북한산이라... 그건 그렇고, 인사 여쭙거라. 이분은 향수 정학교 나으리시니라. 향수, 이 아이가 바로 장승업입니다."
"나으리, 인사 올리갔습네다."
"혜산 선생께 자세헌 얘기 들었네. 마침 자네 그림도 보았네만, 훌륭한 재주를 가졌어."
"재주라 하시오니, 부끄럽습네다. 평생을 배워도 부족할 것입네다."
승업은 머리를 바닥에서 떼지 못한 채 마냥 엎드려 있었다. 그러자 정학교가 승업을 바로 앉게 하였다.
"혜산께서 이 젊은이로 하여금 한 작품 그리게 하심이 어떠실는지요. 솜씨를 직접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습니다만... 승업아, 이분 앞에서 그려보겠느냐?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화에 조예가 깊으실 뿐 아니라 특히 석화에 일가를 이루신 분이니라. 허니, 차후로도 스승을 대하듯 해야 해."
"명심하갔습네다. 나으리 그림을 익히 알고 있습네다."
"허긴... 마침 내 방에도 걸려 있으니, 그러하구나."
유숙의 방에 정학교의 서화 한 작품이 걸려 있어 승업은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유심히 보아 두었다. 글을 몰라 그저 그림으로만 익혀 왔다. 승업은 그의 서화 속에 들어앉아 있는 괴석의 장엄한 모양을 볼 때마다 그 솜씨를 늘 부러워하고 있던 중이었다.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특이한 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훌륭한 화가 앞에서 보잘것없는 솜씨를 보이라 하니 승업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여 또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자 유숙이 턱을 들어 어서 그리라 하였다.
"무엇을 화재로 삼아야 좋을지 막막합네다."
"방금, 북한산을 보고 왔다지 않았느냐."
"네, 나으리."
"그렇다면, 네가 본 북한산을 그려 보는 것도 좋으니라."
"네, 나으리."
비로소 승업은 화선지를 길게 열어 놓고 붓을 들었다. 화재를 정리하느라 잠시 눈을 감더니, 이어서 한 번도 멈추지 않은 그의 붓은 마치 독수리가 날 듯 거칠게, 어느 때는 나비가 춤을 추듯 사뿐하게 이쪽저쪽을 왕래하며 산의 장려한 모습을 만들어나갔다. 승업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유숙과 정학교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기를 마친 승업이 붓을 내려놓고 다시 낮은 자세로 엎드렸다. 다 그렸으니 평가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유숙과 정학교는 그림만 내려볼 뿐 오랫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한참 만에 유숙이 입을 열었다.
"향수. 어떻습니까? 들으신 소문만합니까?"
"글쎄요... 당장은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무슨 뜻입니까? 기대했던 것보다 못 미친다는 뜻인지, 아니면 언급할 값어치조차 없다는 뜻인지..."
"혜산께서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남의 작품을 놓고 어찌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선 탄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젊은이, 참으로 장하오..."
"허허. 향수께서 결국 칭찬이라니..."
"과연, 듣던 대로입니다. 기억을 되살려, 즉석에서 이렇게 그려 낼 수 있다고 함은 훌륭하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어허, 향수. 한창 배우는 아이한테 너무 과찬을 하시는 것 같소이다. 방자해질까 염려되는구료."
"허나, 사실을 감추는 것이 꼭 옳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보게, 승업. 앞으로도 혜산 선생께 열심히 배워서, 후세에 길이 남을 수 있는 작품을 생산토록 게을리하지 말게."
"소인, 나으리 말씀에 따르갔습네다."
유숙의 분부로 승업이 물러나고 다시 유숙과 정학교만 남았다. 정학교는 승업의 그림을 다시 보며 칭찬을 거듭하였다.
"젊은이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배우는 중이니 유순하오만, 글쎄요... 자고로 예능에 능한 인물이 대체로 괴팍한 법이 아닙니까. 내가 보기에는 저 아이도 장차 그리될 듯싶소만, 사람의 일을 어찌 함부로 점칠 수 있겠소이까. 두고 볼 일이지요."
"어찌하였든, 저런 귀재가 조선에 있음은 장차 화단을 위해 퍽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도 향수의 생각과 같습니다만, 좀더 두고 볼 일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앞지를 만한 인물로 성장하는 것이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니, 혜산의 책임이 더욱 크십니다."
"저 아이가 그리되기만 한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지요. 향수께서는 그리 칭찬을 해 주시니, 나도 조금은 보람을 느낍니다."
유숙의 방에서 나온 승업은 정원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정학교가 내린 칭찬을 되새기며 기분이 매우 흡족하였다. 더구나 평소에 칭찬에 인색하고 오로지 질책만 거듭하던 유숙까지도 오늘은 향수에게 공감을 표시함으로써 승업의 마음이 더욱 기뻤다. 지금까지 자신의 그림을 놓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누누이 칭찬을 들어 왔지만 그들 대개가 화가가 아닌, 그저 깊은 안목만 가진 사람들이어서 자신의 재주를 가늠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화단의 두 거목으로부터 직접 평가를 받고 나니, 승업은 비로소 자신의 그림에 조금 자신이 붙는 것 같았다.
이 진사 나으리, 그리고 변 주부 나으리, 참말로 고맙습네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내래 어드렇게 여기까지 왔갔습네까. 정말 고맙습네다.
이때 만석이가 고양이 걸음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승업을 놀라게 하였다. 승업이 넋이 빠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형님, 비 맞은 중놈처럼 혼자 뭘 그리 중얼거리우? 나으리한테 또 꾸중 들었수?"
"기런 게 아니야."
"그런데, 왜 웃다가 중얼거리다 하우? 아무래도, 혼이 빠질 만큼 야단을 맞은 것 같수. 나으리께서 형님한테 상을 내리셨을 리는 만무하고..."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 내래 혼자서 생각 좀 하고 있었으니까니."
"그건 그렇다 치고... 나무 해 온건 어디다 뒀수?"
"나무? 그만 까먹었어."
"까먹다니? 산에 간다더니, 혹시 백년 먹은 여우한테 홀린 거 아니우?"
"이보라우. 사람이 여우한테만 홀리는 줄 아네? 산자수명한 곳에 한 번 가보라우. 넋을 홀랑 빼앗기고 말아."
"아무리 넋을 빼앗길 만큼 경치가 좋다고 해도, 지게 지고 간 사람이 어떻게 나무하는 걸 잊는단 말이우."
"그림에 미치면 기렇게 되는 기야."
"젠장. 무식한 놈한테는 도무지 모를 소리유."
기래. 차라리, 무식한 거이 속 편할지도 몰라야.
통행금지 시간이 훨씬 지나 이젠 야경을 돌던 순라군의 발길마저 뜸한 시간에 아까부터 청계옥 뒷담 밑에 몸을 납작하게 숨기고 안의 동정을 살피는 사내가 있었다. 작은 체구에 몸놀림이 도둑고양이처럼 날래고 민첩한 것이 서툰 도둑은 아닌 듯싶었다. 그는 턱을 담에 걸쳐 놓고 집안의 구조를 익히느라고 눈을 살쾡이처럼 번뜩였다.
이때 순라군의 발소리가 저만치서 들려 왔다. 그러자 개들이 집집마다 짖어댔다. 사내가 바람처럼 가볍게 담을 넘었다. 방마다 불이 꺼져 있어 사위가 온통 숯가마처럼 어두워 한 치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내는 주위가 눈에 익을 때 를 기다려 몸을 웅크린 채 한동안 숨을 죽였다. 순라군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가 앞마당 쪽으로 조금씩 이동하였다. 안채와 사랑채의 위치는 대충 알 만하였다.
동네 개들이 또 한바탕 짖어댔다. 그 소리게 경계심이 든 것처럼 갑자기 행랑채에 불이 밝혀지면서 한 남자가 헛기침을 내며 문을 열고 나왔다. 마당으로 쏟아진 불빛에 청계옥의 구조가 확연하게 잡혔다. 행랑채에서 나온 남자는 보나마나 머슴일 것이 분명하였다. 정원을 휘둘러 본 머슴이 헛기침을 두어 번 더 하더니 담 모퉁이로 가 소피를 보았다. 머슴이 바지를 여미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안채 방 하나에서 불이 밝혀지고 여자 하나가 하품을 하며 나왔다. 사내는 배를 바닥에 붙이고 그녀의 다음 동작을 지켜보았다. 손에 사발을 든 그녀가 신을 대충 꿰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누이.
틀림없다. 옷차림은 옛날 같지 않으나 걸음걸이가 틀림없이 누이였다.
아직 있었구나.
그는 몸을 날려 그녀가 방금 내려선 마루로 기어가 방의 동정을 살폈다. 다행히도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 혼자 쓰는 방이 틀림없었다. 그가 마루 밑으로 내려가 몸을 숨김과 동시에 그녀가 부엌에서 나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불이 꺼졌다.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방에 잠입하기 위해서는 잠이 들기를 기다려야 했다.
누이가 결국, 기생이 되었어.
그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개 짖는 소리마저 끊긴 천지는 칠흑처럼 깜깜했다. 그가 비로소 몸을 털고 일어나 그녀가 자고 있는 방을 향해 고양이처럼 기어들었다. 다행히 문고리는 걸려 있지 않았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도 그녀는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방의 구조가 눈에 익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가 몸을 엎드려 있는 곳이 마침 그녀의 발치였다. 그녀의 머리맡을 향해 살금살금 기어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녀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그러자 몸부림을 치며 버둥거렸다. 그는 입 틀어막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속삭였다.
"누이. 나 미욱이야."
그래도 그녀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누이, 나라니까. 미욱이가 왔어."
그제서야 그녀가 정신을 수습한 듯 몸부림을 멈추었다.
"쉿, 조용히 해."
잠시 후 입에서 천천히 손을 떼자 그녀가 허리를 세워 재빨리 벽으로 가 붙었다.
"소리 내지 마. 담 넘어 들어왔으니까."
비로소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왜 담을 넘어와? 죄를 지었구나. 그렇지? 너 정말 미욱이가 맞아?"
"그렇다니까."
"가만있어 봐. 불 좀 밝히고."
"안 돼. 사람들이 보면 어쩔라구? 그냥 이대루 있어. 나는 곧 가야 해."
"뭐라구? 대체, 이게 무슨 짝이니? 도둑놈처럼 담 넘어 들어왔다가, 도둑놈처럼 도망을 가야 한다니... 어디, 얼굴 좀 만져 보자. 정말, 내 동생이 맞는지... 깜깜해서 알 수가 있어야지."
"안심해. 누이의 동생이니까."
"그런데, 왜 피해 다니니? 너 정말 큰 죄를 지었구나. 그렇지?"
"실은..."
"실은 뭐니? 사람을 죽였어?"
"그게 아니라..."
"누이 애간장 태우지 말구, 어서 말해."
계향은 동생의 얼굴이며 손이며를 더듬어 만지면서 이미 얼굴에는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거의 십년 가깝게 보지 못한 얼굴이라 긴가민가하였다. 그러나 남자가 잠입하여 여자한테 욕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틀림없이 도둑은 아닐 텐데도, 동생으로 믿기에는 사방이 너무 어두웠다.
"나는 지금 쫓기고 있는 몸이야."
"무엇을 잘못했길래 쫓겨다녀?"
"...동학군에 가담했어."
"뭐라구? 하필이면..."
"자세한 얘기는 지금 할 수가 없구. 다음에 또 올게. 누이가 보구 싶어서 잠깐 왔어.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몸 성히 잘 있어."
"그게 언젠데?"
"곧 우리처럼 천한 것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와. 그때 다시 올 테니까, 몸 보전 잘해. 알았지?"
"도대체 무슨 소리니? 좋은 세상을 임금이 만드는 것이지, 네까짓 것이 무얼 한다구..."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동이 트기 전에 가야 해."
"이런 법이 어디 있니. 천지간 피붙이라고는 달랑 너랑 나뿐인데, 이렇게 또 헤어진단 말이니?"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니, 할 수 없잖아. 어쨌든, 잘 있는 누이를 봤으니 이젠 마음이 놓여. 아프지 말고 몸 보전 잘해. 알았지?"
"이렇게 쫓기다가 잡히면 어떻게 되는 거니? 죽는 거지?"
"염려하지 마. 나는 절대 안 잡혀."
"네가 무슨 수로...."
"그럼, 잘 있어."
이런 경우를 두고 '아닌밤중에 홍두깨'라고 해야 할지, '아닌 밤중에 차시루떡'이라고 해야 할지, 계향은 동생이 바람처럼 사라진 문 쪽을 망연하게 바라보면서 끄억끄억 눈물만 짜내고 있었다.
세상 천지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니. 망할 녀석 같으니라구.
계향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동생을 만난 것이 반가운 것인지, 서러운 것인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망할 녀석. 차라리 죽어서 돌아왔으면 앞으로 속이나 더 상하지 않지.
게다가 쫓겨다닌다고 하니, 잡히면 사지가 찢겨 죽을 일 아닌가. 계향은 마침 자신의 몸이 육시를 당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기 시작했다. 도대체, 동학군에는 왜 가담을 했단 말인가. 작년 언젠가 동학쟁이 우두머리가 잡혀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해서 장안이 한참 떠들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가 그 일당이 되었으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계향은 동이 터 닭이 홰를 칠 때까지 눈을 붙이지 못하고 눈두덩이 달라붙도록 울기만 하였다.
오오, 천주님.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 동생을 보살펴 주옵소서. 세상천지에 부모도 없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나이다. 부디, 보살펴 주옵소서.
이때 방문이 열리며 뜻밖에 연홍이 들어섰다. 그럴 때까지도 계향은 우느라고 그녀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얘, 계향아. 너 울고 있지 않느냐."
비로소 연홍임을 깨닫고 계향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덮었다. 그리고는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얘가 갑자기...? 계향아.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연홍이 이불을 젖히자 계향이 그녀의 품으로 와락 파고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지 말 좀 하려무나."
그래도 계향은 마냥 흐느끼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11
1866년 고종 3년.
한동안 뜸했던 천주교 박해가 뜻밖에 정초부터 시작되어 외국의 신부를 비롯한 조선의 신도들이 상당수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는 프랑스 신부인 베르뇌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의 배교와 밀고로 인한 것이었다. 베르뇌 주교는 마침 교우 홍봉주 집에서 기거하던 중에 습격한 포졸들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뒤이어 전교회장 정의배, 우세영, 남종삼 등의 신도와 외국 신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와 포도청에 수감되었다.
이같은 박해가 갑작스럽게 재개된 것은 첫째 러시아의 통상 압력에 기인하였다. 러시아 사절단이 두만강의 얼음을 타고 조선 땅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는 국서를 전하고 회답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에 부사 윤 협이 사절단을 그 즉시 퇴거시키는 한편, 이 사실을 함경도 관찰사를 통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때에 천주교인들이 비밀리에 대원군에게 이이제이 정책을 건의하였다. 즉 프랑스의 세력으로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한다는 전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이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와 우선 수교를 해야 하고, 그 일을 조선에 들어와 있는 프랑스 신부들이 주선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건의문을 좌승지 남종삼이 들고 대원군을 찾아갔다. 남종삼은 한때 충주 목사를 지냈던 남상교의 양자가 되고부터 천주교인이었다. 남종삼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까지 올랐고 대원군과도 교제가 있었으며 주로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맡았다.
남종삼이 가지고 들어간 건의문은 마침 러시아 문제로 고심에 빠져 있던 대원군에게 깊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은 이 일이 성사되기만 하면 대원군에게 천주교를 이해시키는 계기가 될뿐더러,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어느 날, 남종삼을 다시 불러들인 대원군은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이것저것 묻고는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의 저의를 물리칠 방책에 대해 확인하였다.
"이 교리가 좋은 점도 있는 반면에, 좋지 않은 것도 있소이다. 어찌하여 조상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오?"
이에 남종삼이 설명하려고 하자 대원군이 재빨리 말을 가로막고는 다시 물었다.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려는 것을 불란서 주교가 금할 힘이 있다고 생각하오?"
"그럴 만한 힘이 있다고 봅니다."
"허면 주교는 지금 어디에 있소? 장안에 있소?"
"아닙니다. 지금은 교우들을 만나러 황해도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급히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하시오."
그때 베르뇌 주교는 황해도에서, 다블뤼 부주교는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 중이었다. 대원군은 만나고자 하는 날짜에 신부들이 도착하지 않자 초조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서서히 분노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충북 괴산의 만동묘 철폐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항의가 대궐 앞에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침 러시아인들의 협박도 뜸해진 데다가, 청국에서는 서양인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이때, 마침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입경하여, 남종삼은 이 사실을 알리고 약속한 면담을 주선키 위해 운현궁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왠지 급한 일이 아니므로 다음에 만나자며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대원군의 태도가 이처럼 달라지면서 끝내 만동묘 철폐를 반대하는 유생들을 조 대비 명으로 회유하여 돌려보냈을 때, 마침 천주교인을 사악한 무리로 매도하는 유생들의 이 같은 움직임이 조 대비 일파에게 천주교 박해의 빌미를 제공해 준 셈이 되었다.
둘째로는 경복궁 중건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납전까지 거두었던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겠다는 저의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지난해 흉년으로 동요가 끊이지 않는 민심의 방향을 돌려 보려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가장 극심했던 병인년의 난교로 인해 순교한 신부가 아홉 명이었고, 전국 8도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신도들과 그 가족의 수가 무려 12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박해는 그 후 6년간이나 계속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 사상 4대 박해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박해였다.
밤새 잠을 설친 연홍은 동트기 전 오경 즈음에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마음이 설레어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정월 한겨울의 삭풍이 위잉윙 문풍지를 뚫고 들어와 어깨를 오들오들 떨게 하고, 머리맡 자리끼에는 이미 살얼음이 유리처럼 덮여 있었다.
연홍은 발소리를 죽여 대청으로 나갔다. 어제 온종일 내린 눈은 쓸어 낼 사이가 없어 방금 내린 것처럼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그 위로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건너와 대청 구석구석을 낱낱이 훑고 사라졌다.
부엌에서 나는 소리로 보아 찬모가 이미 일어나 상 차릴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머슴이 장작을 안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이 사랑방에 군불을 지피고 있는 것 같았다. 연홍이 부엌으로 들어서자 솥에서 물이 설설 끓고 있어 김이 앞을 분간 못 할 만큼 잔뜩 서려 있고, 그 속에서 찬모가 반찬을 만드느라 분주하였다.
"이른 새벽에 어디를 가시려구요?"
"찬모는 몰라도 돼. 국은 끓였수?"
"벌써 끓여 놨구먼유. 진사 나으리도 아씨랑 함께 가시남유?"
"그러니까 해장국을 끓이라구 했겠지. 반찬 간은 잘 맞췄수?"
"늘 하던 손인데유 뭐."
"그럼, 세숫물 떠서 사랑방 마루에다 갖다 놔요."
"알었시유."
"서두르고."
연홍은 그 길로 사랑방으로 건너가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이용후는 아직도 깊은 밤인 듯 인적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연홍은 불부터 밝혀 놓고 침병을 살며시 걷었다.
"나으리."
그래도 그는 잠에서 깨지 못하였다.
"나으리. 그만 기침하셔요."
연홍이 이용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그제서야 그가 눈을 떠 연홍을 올려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으리, 이미 오경이 지난 듯싶습니다."
"벌써 그리됐나?"
이용후는 놀란 몸짓으로 이불을 젖히고 허리를 세웠다. 그러자 연홍이 세숫대야를 들어다 그의 앞에다 놓았다.
"세수하시고 아침 드셔야지요. 바깥 날씨가 몹시 춥습니다."
"겨울 날씨가 추울 수밖에."
"이용후가 양치를 하고 얼굴을 씻는 동안 연홍은 수건을 받쳐 들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대야를 들고 나간 연홍은 잠시 후 찬모를 앞세워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밥상을 내려본 이용후가 밥그릇과 국그릇이 하나뿐인 것을 알고 갑자기 혀를 찼다. 그러자 연홍이 긴장하여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아. 먼 길을 가려면 속을 든든하게 채워야 하네. 그러니, 자네도 함께 들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닐세. 우리가 비록 동침은 하지 않았어도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인데, 어찌 신분과 남녀를 구분할 것인가. 어여 같이 먹도록 하세."
"아닙니다. 나으리부터 어서 드시어요."
"어허. 내가 이르는 대로 하게."
그제서야 연홍이 밖으로 나가 제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 연홍으로서는 이용후와 겸상을 한다는 사실이 천부당만부당한 짓이었다. 신분도 그러려니와 부부도 아닌 마당에 감히 겸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용후가 몇 차례 청계옥에서 자고 간 적은 있어도 한 번도 동침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용후의 성격이 유별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교인으로서 천주 십계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연홍이 천주교에 입문하기 전에는 늘 사모해 왔던 이용후가 매우 서운하였으나 차차 그 뜻을 알고부터 마음을 편히 가지게 되었다.
"연홍이. 정말 따라나설 수 있겠는가? 날씨도 추운데."
"그 말씀은 어제도 수없이 하셨사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음 놓으십시오. 저는 이미 마음의 무장을 하였사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용후와 연홍이 나설 차비를 서두르는데 뜻밖에 계향이 따라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왜 이러니?"
"아씨. 저도 데려가 주세요."
"내가 가려는 곳이 어딘 줄 알고?"
"나으리랑 함께 나서는 것이, 천주님한테 예배하러 가시는 것 아니어요?"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것이야. 나으리를 모시고 특별히 갈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떼쓰지 말아라."
그래도 계향은 연홍의 말이 믿기지 않은 듯 이용후를 향해 돌아서며 같은 말로 또 물었다. 이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배는 다음 좋은 기회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는 먼저 대문을 나섰다. 이때 옥수가 등잔불을 받쳐 들고 대청 섬돌을 내려섰다.
"모두들 나와 있으니, 무슨 일이 생겼수?"
"왜들 이리 소란인지 모르겠구나. 아무 일도 없으니, 어여 들어가라. 나는 갈 길이 바쁘다."
연홍이 그들을 어르고 대문을 나서려는데 옥수가 또 발목을 잡았다. 그녀 역시 계향의 생각처럼 이용후와 연홍이 천주한테 예배하러 가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형님. 동도 트지 않은 이 시각에, 대체 어디를 가우?"
"너희는 알 필요 없대두."
"...천주님 만나러 가시는구료."
어쩐지 옥수의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배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홍은 한마디 꾸짖고 싶은 것을 눌러 참고는 서둘러 문 밖을 나섰다. 그러자 옥수가 그녀 뒤에 대고 "조심하우, 형님. 천주학쟁이들을 모두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니까." 하였다. 그녀의 의중은 연홍이 잘못될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딴죽을 걸겠다는 뜻이 다분하였다. 평소 연홍이 천주교에 입문한 것을 늘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그녀였다.
망할 것 같으니라구.
연홍은 볼을 부르르 떨며 이용후를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왜 이리 지체하였는가."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구는 통에 늦었습니다."
"정세를 봐서, 계향이도 명동에 데려감이 어떨까 싶네."
"하오나..."
"왜 그러는가."
"저는 옥수 그 아이가 마음에 걸립니다."
"옥수가 어떻길래?"
"그 아이가 원래 천주님이나 신부님을 사악한 것이라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홍 생원님까지도 생각을 같이하고 있는 듯하옵니다."
"그래서?"
"계향이가 귀띰하기로, 옥수가 저러는 것이 다 홍 생원님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옵니다."
"조선 천지에, 천주님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그들뿐인가. 너무 괘념치 말게."
"그런 뜻이 아니오라, 홍생원께서 저에게 천주교를 배교하라고 자주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간혹 잔망스럽게 구는 옥수 저 아이가 혹시 밀고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돼서 그럽니다."
"옥수도 한솥밥을 먹는 처지인데,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천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걸세."
새남터가 저만치 가까워지자 사위가 밝아지면서 비로소 해가 돋기 시작하였다. 새남터로 가기 위해서 길을 나선 사람들이 그들 두 사람 말고도 수십 명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처형당하는 자기 일족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서 나선 사람들도 있고, 그들이 서로 나누는 얘기로 보아 주교와 신부들의 처형 장면을 구경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동원된 사람들도 있는 듯하였다.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하는 조정의 술책이었다.
원래부터 사형터였던 새남터는 일명 사남기라고도 하였다. 죽은 영혼을 달래서 좋은 세상으로 보내는 굿을 '지노귀굿'이라고 하는데, 새남터에서 지노귀굿을 하게 되면 이곳이 곧 죽은 자가 저세상에 가서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곳이 되므로 새남터라 하였다.
여기 새남터는 이미 세조임금 때, 성삼문 등의 사육신을 처형한 것을 비롯해서, 1801년의 신유교난 때에도 많은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던 곳이다. 장안의 사형터는 이 새남터와 서소문, 그리고 절두산 등이었는데 특히 중죄인은 주로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해가 중천을 향해 비스듬히 떠 있을 즈음, 여러 대의 수레 끄는 소리가 언덕을 요란하게 넘어왔다.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잠시 후, 100여 명이나 되는 군졸들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죄인을 태운 수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장에는 이미 400여 명의 군졸들이 정렬해 있었고, 한쪽에 마련된 단 위에는 포도대장과 고관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흰 기가 펄럭이는 장대가 높이 세워져 있었다.
주교와 신부들이 수레에서 내려지자 400여 명의 군졸들이 에워싼 가운데 장대 밑에서 형리들이 주교와 신부 네 사람의 옷을 벗기고 속바지 하나만 남겨두었다. 형리들이 성직자 중 먼저 베르뇌 주교에게 다가와 팔을 뒤로 묶고는 두 귀에다 화살을 사정없이 꿰었다. 주교의 비명이 구경꾼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연홍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눈밭에 주저앉아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이용후가 함께 쪼그려 앉아 귀엣말로 속삭였다.
"이보게. 어떤 일이 있어도 겉으로는 성호를 그어서는 안 돼.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만 성호를 그어야 해. 여기에는 신자들을 감시하는 눈초리가 사방에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알았는가?"
"너무 끔찍하옵니다. 주교님이 불쌍해서 어찌하옵니까."
"그렇기는 나도 마찬가질세."
이용후는 속으로 성호를 수없이 그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솟는 눈물을 닦아 냈다. 그 사이에 군졸 둘이서 주교의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회를 뿌려 기괴한 형상으로 만든 다음, 나무막대를 두 겨드랑이에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군졸 둘이서 막대 끝을 각각 어깨에 메고 군졸들이 겹겹이 둘러서 있는 곳으로 가 몇 바퀴 돌았다. 주교를 다시 중앙으로 메고 나와 꿇어 앉히고는 머리를 앞으로 숙이게 하였다. 그리고는 머리채를 말뚝에 단단히 잡아매었다. 연홍이 주교를 비스듬히 지켜보며 이용후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이용후가 주위를 둘러보며 재빨리 식지를 입에 갖다 붙였다.
"목소리를 더 낮춰야 하네."
"너무 무서워서 그만..."
"끔찍한 일이지만, 군졸들이 목을 자르기 좋게 하기 위함이야."
"에그머니. 정말 목을 자르옵니까?"
"그렇다네. 자세는 돌아서 있게. 참혹한 장면이라, 아녀자들을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곧 여섯 명의 군졸들이 칼을 들고 나와 망나니처럼 날뛰면서 차례로 주교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나 목이 단칼에 떨어지지 않아, 결구 세 번째로 찍은 칼날에 피가 콸콸 뻗치며 목이 땅에 떨어졌다. 너무 끔찍하여 군졸들과 구경꾼들 할 것 없이 모두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주교의 목이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둘러서 있던 군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다 되었나이다."하고는, 절차에 따라 젓가락과 주교의 머리를 상에 올려놓아 포도대장 앞에 바쳤다. 포도대장이 고개를 끄덕여 지휘봉을 높이 쳐들자 군졸이 주교의 머리를 분리된 몸통 쪽으로 가져가 높은 장대에 꿰어 매달았다.
이런 식으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볼리외 신부, 그리고 도리 신부가 차례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홍봉주와 남종삼은 같은 날 서소문 밖 형장에서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어 순교하였으니, 이날이 바로 병인난교가 시작되는 정월 스무하루였다.
새남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용후는 입을 봉한 채 한숨만 내쉬었고, 연홍은 내내 눈물을 흘렸다. 참혹한 처형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두려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주교와 신부들의 순교 정신에 한없이 경앙하였다. 처형이 너무 끔찍하여 배교하고 싶은 마음을 잠깐 가졌던 순간을 깊이 뉘우치고 천주님께 용서를 빌었다.
"나으리,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온지요."
"내가 자네한테 묻고 싶은 말이네. 오늘 새남터에 갔던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가? 너무 참혹해서..."
"참혹하기로 말씀드린다면, 세상천지 어디에 그 같은 일이 또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포도대장이나 형리들도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 같은 형벌을 내릴 수 있사옵니까. 인두겁을 쓴 흉악한 짐승이 아니고서는 그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네. 우리네와 그들 모두 천주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도 잔인한지..."
"그래도, 우리의 천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회개하면 모두 용서하실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그러하다네."
"참으로 천주님의 뜻은 알 듯 하면서도 모르겠사옵니다."
겨울 해가 되어 청계옥이 저만치 보일 때쯤에는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종로에서 새남터까지 눈밭을 오래 걸은 탓에 발을 물론 온몸이 꽁꽁 얼어버렸고, 게다가 허기까지 올라와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 중에도 이용후와 연홍은 끊임없이 기도를 하며 걸었다.
승업은 아침을 뜨자마자 외출할 차비를 서둘렀다. 승업의 처지로 외출할 때 입는 옷이 따로 있을 리 없고, 그저 머리에 쓸 휘양이나 챙기는 것뿐이다. 유숙은 마침 처가가 상을 당해 경기도에 가 있기 때문에 집안에 굳이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은 없었다. 만석이 따라 나오며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변 약전에 볼일이 있다 하고는, 어쩌면 오늘 못 들어올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남겨 놓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리 급히 나서는 거유? 나도 좀 압시다."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
"형님, 무식하다구 너무 괄시하지 마슈. 나도 눈치가 뻔한 사람이유."
"야가 갑자기 와 이러네? 오랜만에, 변 주부 어른께 문안 인사드리러 가는 기야."
"종로가 여기서 지척인데, 오늘 못 들어올 일이 아니잖수. 괜히 나를 속여먹을 생각일랑 마슈. 나도 상세하게 알어야, 혹시 나으리 마님께서 물으시면 사실대로 아뢸 게 아니우."
"기래, 네 말이 맞다. 실은 약전에 갔다가, 동대문 밖 이 진사 어른께 인사 여쭙고 올 생각이야. 내 뜻 알간?"
"진작 그렇게 말했으면, 내가 답답하지 않았잖수."
"기래, 내래 잘못했어야. 기런데, 내래 언제 만석이를 괄시핸? 내래 기런 적 없어."
"아니우. 괜히 해 본 소리니까. 마음 쓰지 말고 어여 댕겨오슈."
"야가 사람 놀리누만."
승업은 만석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쥐어박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만석이한테 말한 대로 변 주부 얼굴 본 지도 오래되어 당연히 그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이용후의 근황이 누구보다 걱정되어 애써 길을 나선 것이다. 며칠 전 서양 신부들이 처형됐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 있는 데다가, 천주교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인다는 얘기가 돌아 며칠 잠을 설쳤다. 이용후가 천주교를 믿고 있음은 진작부터 알고 있는 터라 누구보다 걱정이 되었다.
약전에 당도하였으나 시간이 일러서인지 아직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승업은 문 두드리기가 미안해서 그냥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았다. 멀리 눈 덮인 북한산과 도봉산의 설경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승업은 아침 바람의 추위도 잊은 채 설경에 취해 넋을 잃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 설경 한가운데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불기둥처럼 솟았다.
이때 포졸 10여 명이 동대문 쪽에서 몰려오는 것이 눈길에 잡혔다. 가만 눈여겨보니 그들은 사내들과 여자들을 호송하고 있는 중이었다. 짐작에 죄인들을 포도청으로 압송하는 것 같았다. 마침 방향이 동대문 쪽이어서, 순간 이용후를 떠올렸다. 혹시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이는 중에 그가 끼인 것은 아닐까 싶어 겁이 더럭 솟았다.
승업은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발딱 일어나 그들 가까이로 달려갔다. 포승에 묶여 있는 사람은 남자 셋과 여자 둘이었다. 다행히 이용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승업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미처 단속할 새도 없었는지 남자나 여자나 모두 흐트러진 옷차림에 머리가 쑥대강이처럼 뒤엉킨 사나운 몰골이었다. 그 뒤를 자식들인 듯한 아이들이 울며불며 따라붙고 있었다.
승업은 구경 나온 사람들에게 다가가 무슨 죄를 지은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 하나가 대뜸 "아아, 보믄 몰러?" 하고 핀잔을 주었다.
"모르니까 묻지 않습네까. 도둑놈들이야요?"
"저것들이 죄다 서양 귀신한테 홀린 천주학쟁이라니까. 제 조상헌테 제사도 안 지내는 불쌍놈들이야."
노인은 입에 거품을 물고 죄인들을 향해 욕을 마구 퍼부었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따라서 주먹질을 해 대며 있는 욕 없는 욕을 나오는 대로 쏟아부었다. 승업은 슬그머니 몸을 빼 약전으로 돌아왔다. 마침 사동이 약전 문을 열고 있었다.
"잘 있었네?"
"어어? 아침 일찍 화가 선생이 웬일이셔유?"
사동이 비를 동댕이치고 승업이 손을 덥썩 잡았다. 아이는 승업을 볼 때마다 맏형 대하듯 반겼다. 승업이 역시 그를 항상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나으리 기침하셨네?"
"벌써 일어나셨시유. 아마, 진지 드시고 계실 거구먼. 약 지으러 오셨시유?"
"나으리께 안부 여쭈러 왔어."
"이른 시각이라, 깜짝 놀랬구먼유. 추운디 어여 들어가셔유."
승업이 약전으로 들어서자 마침 변주부가 어험 어험, 헛기침을 내며 나왔다. 승업이 마루로 성큼 올라가 넙죽 엎드렸다. 변 주부 역시 놀란 표정으로 승업을 반겼다.
"나으리. 그간 옥체 만강하셨습네까?"
"오냐. 이렇게 일찍 웬일이더냐?"
"나으리께 안부 여쭈러 왔시오."
"그렇게 한가하더냐? 이 시각에 안부인사라니... 혜산 선생께서도 무고하시더냐?"
"선생님 처가댁에 조문하러 가셨습네다. 기래서 잠깐 틈을 냈시오."
"습작은 열심히 하느냐?"
"네, 나으리. 밥먹고 하는 일이 그것뿐입네다."
"아암, 그래야 하느니라."
"나으리. 진사 나으리께서도 무고하십네까?"
"설마, 별고 있으시겠니. 실은 요즘 와서는 나도 뵙지 못하였느니라."
"얼마 전에, 서양 신부들이 새남터에서 효수를 당했다고 합네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시오. 방금 전에도 천주학쟁이들이 포졸한테 잡혀가는 걸 봤습네다."
"나도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다만...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잖느냐. 네가 천주교를 믿는 것도 아니고."
"실은, 진사 나으리가 걱정돼서 기럽네다."
승업은 한숨을 내쉬며 변 주부한테 좋은 방도가 있기를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변 주부 역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뾰족한 수가 없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만 있자니 승업의 마음만 더 답답하였다.
"진사 나으리께서 무고하신지, 다녀오갔습네다."
"무슨 변이야 있겠냐마는, 그리하는 것도 좋겠구나."
"기럼, 냉큼 다녀오갔습네다."
"안부 여쭙고 가는 길에, 나한테 다시 들러야 하느니라."
"네, 나으리."
승업은 약전을 나와 그 길로 이용후 집을 향해 내달렸다. 동대문 바까 지봉길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여태 녹지 않은 채 그대로 쌓여 있어, 여기저기 짐승의 발자국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 승업은 이용후 안부가 걱정되면서도 이 적설에 뗄나무나 있는지 궁금하였다. 저만치 납작하게 들어앉은 이용후 집이 마치 눈에 파묻힌 것처럼 지붕만 겨우 보였고, 허물어진 돌각담에 얼기설기 엮은 삽짝문은 그 사이 풍우에 시달려 곧 없어지고 말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겨우 지탱만 하고 있었다.
승업은 열고 자실 것도 없는 삽짝을 밀고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들어섰다. 안에 사람이 없는 듯 적막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순간 겁이 더럭 났다. 혹시 변을 당한 것이 아닐까 싶어 가슴에서 마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나으리, 승업입네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다. 어른들이 출타 중이라면 아이들이라도 있을 텐데, 누구 하나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나으리, 나으리."
찬 바람만 몰려와 인사할 뿐 여전히 고요하였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관통하였다. 승업은 성큼 마루로 다가가 다시 불렀다.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가족이 모두 잡혀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승업은 섬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으리. 대체 어디메 계십네까.
승업은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꾸역꾸역 밀어 냈다. 오직 불길한 예감만이 머리를 가득 채워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삽짝문 밖 멀리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 왔다. 승업은 발딱 일어나 소리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이구, 나으리.
멀리 눈밭을 헤치며 이용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 경과 딸 원이 저마다 나무를 지거나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승업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귀하신 어른이 나무를 하시다니... 더구나 나약한 아녀자까지 손수 나무를 해 오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승업은 냅다 달려 나가 이용후 앞에 대뜸 무릎을 꿇고 이마를 눈밭에 박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먹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우선 그토록 걱정했던 이용후가 무사하여 기뻤고, 손수 나무를 해야만 하는 그의 처지가 안타까워 울었다. 이용후는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엎드려 있는 사내가 승업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그대는 누구시오?"
"나으리. 승업입네다."
"뭐어? 승업이가...? 대체, 여긴 웬일로 왔느냐?"
"나으리. 우선 나무짐을 벗어 놓으시라요. 아씨 마님께서도 내려 놓으시라요. 제가 가지고 가갔습네다."
승업은 이용후가 묻는 말에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들에게서 나뭇짐을 빼앗듯이 내렸다. 그리고 원의 머리에 얹혀 있는 것도 내렸다. 식구 모두가 해 온 나무가 지게로 한 짐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어허. 얘가 왜 이리 설치누."
이용후가 엉거주춤 서서 승업의 날랜 몸놀림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승업은 네 사람 몫의 나무를 지게에다 올려놓고 가뿐하게 걸머지었다.
"어찌하여 왔는냐?"
"안부 여쭈러 왔습네다."
"이런 변이 있나. 내 안부가 궁금해서 예까지 왔단 말이냐?"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까, 무고하신지 궁금하였습네다. 마침, 주부 나으리께서도 안부 여쭈라고 하셨지요."
"약전에 들렀다 오는 길이더냐?"
"네, 나으리."
"변 주부는 어떻게 지내시더냐?"
"무고하신 듯합네다."
"허면 되었고... 정말, 내 안부가 궁금하여 왔단 말이지?"
"참말입네다."
승업은 가족들이 듣는 데서 천주교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어서 그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였다. 당장은 그의 신변에 별일 없는 것같이 보여 다행이지만, 신자들을 마구 잡아들인다는 장안의 소문과 특별히 조심하라는 당부를 전하지 못하는 것에 아까부터 조바심이 났다.
승업은 나무를 차곡차곡 쌓아 놓고는 지게를 다시 지고 말없이 문밖을 나섰다. 그러자 이용후가 다급한 목소리로 승업을 불러 세웠다.
"어디 가느냐?"
"나무 좀 더 해 가지고 오갔습니다."
"그만 됐느니라. 오늘 해 온 것만 가지고도 며칠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금방 다녀오갔시오."
승업은 감히 이용후의 뜻을 거역하고 내빼듯이 눈밭으로 뛰어나갔다. 이용후가 거듭 부르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용후도 혀만 내찰 뿐 더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승업의 충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만류해도 기어코 제 고집대로 할 사람이었다. 이용후가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 사이에 승업이 나무를 잔뜩 해가지고 돌아왔다. 식구가 모두 나서서 사나흘을 해도 그렇게 못할 분량을 단김에 지고 왔다. 힘도 장사려니와 결기와 뚝심 또한 보통이 아니어서 일을 쉽게 하였다.
승업이 이용후와 마주 앉아 그간 있었던 얘기를 하는 동안 밥상이 들어왔다. 점심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식사였다. 승업이 물려나려고 하자 이용후가 억지로 잡아 앉혔다.
"오늘은 나와 겸상을 하는 것이다."
"제가 어찌 나으리와 겸상을 하갔습네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네다. 저는 밖에서 먹갔습네다."
"어허. 오늘은 내 집에 온 손님이야. 어서 앉거라."
"저는 기럴 수 없시오. 벌받습네다."
"이렇게 답답하기는... 내 말벗이 되라고 이러는 것이니, 고집부리지 말거라. 어여 앉어."
승업이 그제서야 비스듬히 꿇어앉았다. 그러자 이용후가 편하게 앉도록 눈을 부릅떴다. 승업이 마지못해 다가앉아 주인이 수저 들기를 기다렸다.
"혜산께서는 잘 가르쳐 주시더냐?"
"네, 나으리.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따르지 못할 뿐입네다."
"힘이 드느냐?"
"힘은 들지 않지만 갈수록 어렵습네다. 작년에는 정학교 나으리께서 자주 오셔서 지도를 해 주셨습네다."
"그 사람한테는 무엇을 배우느냐?"
"석화를 배웁네다."
"그거 좋은 일이로구나. 네가 글을 깨우쳤으면 좋으련만..."
"글을 몰라 답답할 때가 많았디만, 새삼 글을 배우기보다는 그 노력으로 그림을 더 열심히 그리갔시오."
"허긴... 사람의 일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니라. 허니, 네 뜻대로 하려무나."
"나으리. 실은 나으리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네다."
"...무엇이냐?"
승업은 한참을 망설였다. 올 때 생각과는 달리, 어른한테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용후가 누군데, 천박한 신분에 감히 그의 신변을 걱정하는가 싶어 갑자기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왜 말을 아니 하느냐?"
"나으리..."
"어허, 답답하구나. 걱정거리가 생겼느냐?"
"기거이 아니라... 나으리. 감히 말씀드려도 괜찮습네까?"
"어허. 무슨 일인데 사람을 이리 답답하게 하느냐."
"나으리. 요즘 천주교 믿는 사람을 마구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합네다. 나으리께서도..."
"그 얘기를 하러 예까지 왔더냐?"
"네, 나으리."
"허면,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기걸 어드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갔습네까. 저는 거저, 나으리께서 옥체를 잘 보전하시라 말씀드리려고..."
"네 뜻을 잘 알았느니라. 그러나, 승업아. 사람은 자기 의지가 단단하면 세상 무엇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만약, 그림 그리는 일을 나라에서 금한다면, 너는 그림을 포기하겠느냐?"
"아닙네다."
"그 뜻과 같으니라. 사람은 자기가 걷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뜻을 굽혀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조선 사람들이 천주교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지, 근본을 알면 그리하지 못할 것이야. 내 너한테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할 생각은 없느니라. 그것은 본인이 차차 깨달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조정에는 세상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대신들이 많아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한다만, 그건 우물 안 개구리 생각이야. 서양국에서는 과학이라는 학문이 있어서 백성이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이용후생하고 있는데, 조선은 생각이 막힌 위정자들 생각대로만 하니, 어찌 나라가 발전할 수 있겠느냐. 나라 일을 맡고 있는 조정 대신이란 오로지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줌이야. 그러나, 이 나라는 자기 일족의 영화만을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오늘날 백성들의 생활이 날로 피폐하는 것이야."
이용후의 어조는 매우 격앙된 것이었다. 승업으로서는 그러한 모습을 처음 대하였다. 보잘것없는 천한 신분 앞에서 이토록 열변을 토하는 것이 갑자기 두렵기까지 하였다.
"조선은 하루빨리 개화해야 하느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 것이야. 서양 신부들은 자기 목숨을 내걸고 남의 나라에 와서 미개한 사람들을 깨우치려 하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서양 귀신이네 어쩌네 하면서 잡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돼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니냐."
이용후는 중간중간에 울분을 삭이지 못해 볼을 부르르 떨기도 하였다. 승업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그의 정열에 감동하면서도 그 깊은 뜻을 자세히 이해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나으리의 깊은 뜻을 어찌 알갔습네까. 저는 다만, 나으리 옥체가 염려돼서 기럽네다. 다른 사람이 다 고초를 겪어도 나으리만큼은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네다."
"사람의 목숨이란 하늘이 준 것이니, 내 목숨이 다할 지경이 되면 그것은 곧 하늘이 나를 부르심이야."
"하지만 나으리. 나라에서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만 잡아들이는 것이 아니오라 그 식솔까지 잡아간다고 합네다. 만에 하나, 나으리께서 봉변을 당하시게 되면 내당마님은 물론이고 도련님과 아씨까지 고초를 당할 것이 아닙네까. 내당마님과 도련님, 그리고 아씨를 생각해서라도 각별히 조심하시라요."
"네 충정을 알았으니,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하자꾸나."
"그리고, 나으리."
"할 얘기가 아직도 남았더냐?"
"여게서 이틀 밤만 유하게 하여 주시라요."
"...어인 일로?"
"겨우내 땔 나무를 해 놓갔습네다."
"그럴 필요 없느니라. 내가 운동 삼아 조금씩 해 오면 될 것이다."
"나으리께서 어드렇게 나무를 하십네까. 기런 일은 머슴들이나 할 일입네다. 저는 기운이 넘치니까니, 나무 하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야요."
"너야말로 몸을 잘 보전하여 후세에 남을 그림을 많이 그려야 하느니. 너에 대해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습작을 게을리 해서는 아니되느니라."
"절대 습작을 게을리 하지는 않겠습네다. 기러니까니, 이틀만 유하게 허락하시라요."
"원, 이런 고집이 있나."
승업은 겨우 허락을 받아 냈다. 그는 이틀을 머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나무를 해다가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겨우내 때고도 남을만큼 뒤쪽 처마 밑을 꽉꽉 채웠다. 가난한 사람한테는 엄동설한이 닥쳐도 겉보리 양식이라도 있고 땔나무만 있으면 걱정이 없는 법이다.
이용후는 승업의 충정이 기특하고 고마워 마음이 매우 흐뭇하였다. 사람이 좋은 인연으로 만나, 그 연을 죽을 때까지 끊지 않고 살 수 있는 것도 크나큰 복이라 생각하면서 법구경의 일절을 떠올렸다.
부처가 '가사굴' 산에서 정사로 돌아오다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보고는 비구니에게 어떤 종이냐고 물었다. 마침 향내가 나는 고로 향을 쌌던 종이라고 비구가 대답하였다. 부처가 더 걷다가 길에 있는 새끼를 보고 무엇에 소용했던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생선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생선을 꿰었던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사람은 원래 깨끗한 것이지만,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가고,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에 이르는 것이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내가 나는 것이고, 저 새끼는 생선을 가까이해서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2
연홍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난번 베르뇌 주교와 신부들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본 이후 그때의 끔찍한 정경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잠을 이룰 수 없을뿐더러, 깜빡 잠이 들어도 효수당한 신부들의 흉악한 몰골이 갖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나나타 그때마다 가위에 눌리곤 하였다. 게다가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인다는 장안의 화제로 인해 불안과 공포와 갈등에 휩싸여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이럴 때, 진사 어른이라도 옆에 계셨으면 좋으련만...
이용후는 그날 이후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연홍의 불안은 더욱 깊었다. 그도 장안의 소문을 듣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은신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이르러서는 당장 포졸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아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이용후와 함께 김후안 사제 서품식에 갔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끌려가 전옥서에 갇혔던 기억이 생생하여 두려움이 더 컸다. 그때 당한 고초를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몸이 한 줌으로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형리들의 고문도 못 견딜 노릇이었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여옥에서 당한 갖가지 수모였다. 자칭 마왕이었던 고참 죄수의 악독한 사형을 떠올리면 지금껏 치가 떨렸다.
이번에 잡혀가면, 나도 주교님처럼 효수를 당할 텐데...
해가 이미 중천에 있어, 연홍은 자리를 걷고 일어나려고 했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누워 버렸다. 만사가 귀찮아 어떠한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이때 문이 열리며 계향이 들어왔다.
"아침도 아니 드시고... 많이 편찮으셔요?"
"아니다. 몸살기가 조금 있을 뿐이야."
"제가 약을 지어올까요?"
"약은 무슨... 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보다, 옥수는 어찌하고 있느냐?"
"지금 몸단장하고 있어요."
"벌써 웬 몸단장이냐?"
"오늘 홍 생원 나으리께서 일찍 오시기로 약조하셨답니다."
홍경무가 온다는 말에 연홍은 갑자기 짜증이 솟았다. 기방에는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일이고, 더구나 홍경무는 단골손님으로 매상도 제법 올리는 축에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반갑지가 않았다. 첫째 언행이 양반답지 않았다.
"찬모도 알고 있느냐?"
"옥수 형님이 일러 놓은 것 같았어요."
"그럼 됐구나. 생원께서 오시더라도 나를 불러낼 생각일랑 말아라. 들라고 하면 몸져누웠다고 하고."
"그런데, 아씨."
"왜 그러느냐?"
"며칠 전, 진사 나으리와 함께 가셨던 곳이 어디어요?"
"몰라도 되는 일이야. 굳이 알아서 너한테 이로울 것도 없고."
"그날이 서양 신부들 효수당하는 날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어요?"
"누가 그러더냐?"
"옥수 형님이 누구한테 들은 모양이에요."
"홍 생원 나으리한테?"
"제 짐작에 그런 것 같아요. 사형장이 새남터라고 하던데, 혹시 그곳에 다녀오셨어요?"
"너도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으니, 애써 숨길 필요가 없겠구나. 옥수가 다른 말은 아니 하더냐?"
"천주교 믿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들여 죽인다고 그랬어요. 사실이에요?"
"... 그렇다고 하는구나."
"에그머니. 이를 어쩌나."
"계향이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아직 천주교를 알지도 못하잖니."
"저는 아씨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아씨는 두렵지 않으셔요?"
"...낸들 왜 두렵지 않겠느냐. 허나, 천주님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다."
"정말, 그렇게 믿으셔요?"
"천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느냐. 그러나, 계향이는 생각을 좀더 깊이 한 연후에 천주교를 믿도록 해라. 지금은 시기가 마땅치 않아서 하는 말이다. 내 말 알아듣겠어?"
"어찌하면 좋을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연홍은 한창 어수선한 시기에 계향이를 끌어들여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잘못하면, 조기 두름 엮는 데 황석어 새끼 덤으로 얹히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리 오너라." 하는 일갈과 함께 홍경무가 호기 있게 들어섰다. 연홍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명색이 생원이라는 사람이 학문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계집에만 탐욕스러우니, 참으로 한심하구나. 연홍은 그가 이리저리 사람을 귀찮게 할 것이 벌써 부담스러웠다. 어찌 된 위인이 한 번도 술을 점잖게 마시고 간 적이 없었다. 출신은 양반이지만 천성이 짓궂어 양반 체통은 조금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곧이어 옥수가 나가 반기는 소리가 들리고, "연홍이 안에 있느냐?" 하는 그의 음성이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그러자 몸이 편찮아 누워있다는 계향의 변명이 이어졌다.
"어찌 된 계집이 내가 올 때마다 출타 중이거나, 아프다는 말이냐. 내 오늘은 기어코 볼 것이니, 서둘러 몸단장하고 나오라 일러라."
"정말 많이 편찮으셔요."
"허튼소리 그만하거라. 천주를 믿는 사람은 결코 아플 수가 없는 법이니라. 천주가 밤낮으로 보호할 터인데, 어찌 아플 수가 있느냐."
홍경무는 연홍이 들으라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비아냥거렸다. 연홍은 열방망이가 가슴을 지지는 것같이 분하였지만, 신분이 양반이라 감히 대항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가 곱게 물러설 것 같지가 않았다. 계향이 한숨을 내쉬며 들어섰다.
"아씨, 어쩌면 좋아요? 생원 나으리께서 저리 성화시니..."
계향은 마치 제가 당할 일을 걱정하듯이 맥없이 풀썩 주저앉으며 울상을 지었다. 그녀도 홍경무의 짓궂은 손버릇을 경험한 바 있어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나도 다 듣고 있었다. 그러나 하는 수 있겠니. 기생 신분이라 어쩔 도리가 없겠구나. 나가서 세숫물이나 떠 오렴."
연홍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단장할 차비를 차렸다. 마음에 없는 손님한테 술 시중 드는 일이란 죽는 것만큼이나 싫은 일이지만, 간도 쓸개도 다 빼놓고 사는 여자가 기생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이용후와 짝을 이루어 천주교를 믿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어떠한 해악을 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연홍이 자기에게는 무관심하고 이용후한테만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 늘 불만인데다가, 전부터 동침하기를 수없이 애걸하였지만 한 번도 뜻을 받아주지 않고 있어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결국 옥수가 걸려들었지만, 아직도 그 음흉한 속을 버리지 않고 있는 듯하여 늘 긴장하고 있었다.
몸단장을 마치고 느럭느럭한 걸음으로 방에 들어서자 홍경무가 이미 거나해진 낯빛으로 옥수와 수작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연홍이 들어옴을 보고 옥수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홍경무가 짐짓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연홍에게 보이는 시위였다. 옥수만이 연홍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였다. 연홍으로서는 보기 민망한 장면이지만 그녀 또한 홍경무를 무시할 양으로 태연하게 그들 앞에 마주 앉았다.
"나으리께서 오늘은 마음이 흥겨우신 것 같사옵니다."
"실은, 심기가 매우 불편하니라."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셨사옵니까?"
"어허. 이 천하의 홍경무가 봉변이나 당하고 다닐 사람인가. 다만, 조정이 새로 들어섰는데도, 나 같은 인재가 썩고 있음에 울화가 치미는 것일세."
제 얼굴 못난 년이 거울 깬다더니, 그 짝이로구나.
제 분수는 깨닫지 못하고 나라 탓으로 돌리는 그의 허영심이 하도 가소로워 연홍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비위 좋게 그에게 붙었다.
"원래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 하지 않습니까. 허나, 조정에 그럴만한 인물이 없으니, 그 안력으로 어찌 나으리 같으신 분이 보이겠습니까."
"그래도, 천지에 연홍이만한 견식을 가진 사람도 드물 것이네. 그런 뜻에서 내 잔 받게."
홍경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팽개치듯 옥수를 무릎에서 내려놓고는 연홍에게 잔을 건넸다. 비로소 숨통이 트인 듯 내내 진땀을 흘리고 있던 옥수가 슬그머니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홍경무는 눈치 빠른 옥수가 자리를 비켜 준 것으로 아는지, 매우 홀가분한 빛을 보이며 얼굴을 야릇하게 일그러뜨렸다.
"계향이 말로는 몸이 아프다고 하던데, 웬만한가?"
"나으리를 뵈니, 씻은 듯 나았습니다."
"허허. 그거 다행이로구나. 원래 내 손이 약손이라, 그 훈기만 쐬어도 아픈 부위가 낫는 법이야. 그래 아픈 곳이 어딘가. 내 진맥을 봐줌세."
흥. 수작 부리려구 용을 쓰는구나.
연홍은 그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는 중이라 그의 음흉한 마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이리저리 궁리하였다.
"딱히 아픈 곳은 없는 듯하옵니다. 그저, 나으리처럼 마음이 다소 불편할 따름이옵니다."
"허면, 연홍의 마음을 읽어 주는 사내가 없더란 말이냐?"
"그런가 보옵니다."
"어허. 매우 섭섭하구나. 전부터 이 홍경무가 있지 않았더냐."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그것이 아니면...? 연홍의 마음을 이제 알겠느니라."
"...무엇이옵니까?"
"자네 마음이 지금 근심과 불안에 싸여 있음이야. 그렇지?"
"무엇을 헤아리셨는지, 저로서는 깨달을 수가 없사옵니다."
"요즘, 천주학쟁이들을 마구 잡아들인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 그러는 것이야. 내 말이 맞지? 자네가 천주를 믿고 있음을 벌써부터 알고 있는 터."
"나으리 말씀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옵니다."
연홍은 자신의 마음을 그가 너무 꿰뚫고 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입에서 언젠가는 한 번 나올 수 있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처럼 단도직입으로 정곡을 찌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연홍은 그렇지 않은 듯 말꼬리를 흔들어 그의 예봉을 피해 볼 심산이었다.
"허면, 그것 말고 근심할 일이 또 있더란 말이냐?"
"기생 나이 이십이면 환갑이라고, 나으리께서 늘 하시는 말씀 아니옵니까. 저는 이미 이십을 넘어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여자 마음이 편할 리 있겠사옵니까. 그래서, 인생이 갑자기 허무하기도 하고...."
"저런, 저런, 불쌍하구나. 그러한 연홍의 마음을 내 진작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나 또한 둔하였구나. 자아, 내 잔 한 번 더 받게."
홍경무는 오늘은 뭔가 일이 순조롭게 되는가 싶어서인지 엉덩이 걸음으로 연홍이 곁으로 비스듬히 다가앉았다. 그럴수록 연홍은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는 그가 건네주는 잔을 받아 들었다.
"오늘은 내가 연홍의 마음을 눈 녹듯이 녹여 줄터이니, 우선 마음부터 활짝 열도록 하여라. 내 말뜻을 알아듣겠느냐?"
"무슨 말씀이온지...?"
"어허, 내숭떨기는..."
"나으리. 제 신세가 그러하다는 뜻일 뿐이지, 달리 마음을 가진 것을 아니옵니다. 나으리께서 보잘것없는 한낱 기생을 이토록 어여삐 여겨 주심은 백골난망이옵니다. 하오나, 나으리. 어찌 여자의 한마음으로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을 수 있사옵니까. 그건 기생 법도에는 없는 일이옵니다."
"허면, 몸과 마음을 허락한 남정네가 이미 있었더란 말이냐?"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냐. 나도 눈치는 채고 있었느니라."
그렇게 말하는 홍경무 마음에 이용후가 자리 잡고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것은 홍경무뿐만 아니라, 청계옥 사람들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을 일이었다. 둘이서 동침하는 것을 비록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기회를 마련하여 정사를 나누었을 것으로 단정하고 있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이용후나 연홍이 천주 십계명을 마음에 깊이 박고 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제가 천주교를 믿고 있음은 나으리께서도 대강 짐작하시는 일이옵니다. 천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주님 외에 누구도 마음에 품을 수가 없는 법이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남정네를 받아들일 수 있겠사옵니까."
"잘도 주절거리는구나. 밤낮으로 술이나 마시고 다니니까 이 홍경무가 허깨비로 보이는 모양인데, 네가 누구를 사모하는지 삼척동자도 알고 있어."
"나으리 말씀이 혹 이 진사 어른을 겨냥하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음을 맹세하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저의 결백을 밝히기보다는 지체 높으신 그분의 체통이 깎일까 염려돼서 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분을 감히 저 같은 천한 계집과 연관 짓지 마옵소서."
"어흠. 내 입으로 그리 말하지는 아니 하였다. 이름을 함부로 입밖에 낼 수는 없으나, 연홍의 근황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홍경무가 변명하는 어조로 보아 연홍이 다른 남자와 무관해서 다행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무안해서 슬그머니 발뺌을 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확실한 근거도 없이 입을 멋대로 놀려 망신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나으리께서 그리 보셨음은 그동안 제 행동거지가 여자답지 못했다는 뜻이오니, 심히 부끄럽사옵니다. 앞으로는 매사를 각별히 삼가겠사옵니다."
"이제 됐느니라. 오늘을 술이나 들자."
홍경무는 갑자기 낭패했던지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양반 체통에 말로써 기생 하나를 누르지 못하였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가 갑자기 자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얘, 연홍아. 그 천주님인가 뭔가 때문에, 끝내 나에게 수청을 들지 못하겠단 말이냐?"
"거듭 말씀드리옵니다마..."
"알았느니라. 허나,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내가 이래 보여도, 조정의 실세들과 손이 닿아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즉 무슨 말인고 하니, 만에 하나 네가 포도청에 끌려가 고초를 당할 지경에 이르면 내가 손을 써 쉽게 빼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의 앞날을 모르는 법이라서 일러 주는 것이니라.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법 아니더냐. 내 말을 새겨듣거라."
물동이 인 여자 귀 잡고 입을 맞춘다더니, 내 약점을 잡아 수청을 들라고? 어림도 없다, 이 능구렁아.
"나으리께서 그처럼 걱정을 해 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습니까?"
홍경무가 눈동자에 꼭 명태 껍질을 씌운 것처럼 게슴츠레한 눈으로 연홍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끌어 잡았다. 그 사이에 목울대가 몇 차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보아 연신 침을 삼키는 모양이었다. 연홍은 못 이기는 척 손을 잡히고는 그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다. 홍경무는 연홍의 속도 모르고 일이 잘되어 간다 싶어, 정신을 이미 엉덩이에 깔고 앉았다. 연홍이 눈을 내리깐 척하면서 그의 손길을 흘끔흘끔 경계하고 있는데, 그가 엉금엉금 다가와 팔 하나로 연홍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는 노는 손이 가슴으로 기어올랐다. 그의 입에서 내뿜는 열기가 화덕의 숯불과 같이 뜨거웠다. 연홍이 이를 악물고 몸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계향이 문 앞으로 다가와 "아씨. 술하고 산적 부친 것 가져왔어요."하였다. 연홍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마침 술이 떨어질 참이었다. 어서 들어오너라."
그러자 홍경무가 볼에 바람을 잔뜩 넣어 가지고 헛기침을 연거푸 해 댔다.
"...술은 아직 있지 않느냐."
"어차피, 더 드실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하필이면..."
홍경무가 이미 샐쭉해 가지고 계향이 밉살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눈길로 잔뜩 노려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계향이 눈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연홍은 그들 모습이 너무 우스워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대체, 자네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가."
"아니옵니다. 나으리. 계향이가 놀란 토끼 눈으로 있는 것이 하도 우스워서 그만..."
"젠장. 꼴도 보기 싫은 년이 속곳 벗고 덤빈다더니...계향이 네년은 어찌 그리 눈치코치도 없느냐."
두 여자한테 무안을 당한 홍경무는 분을 삭이지 못해 안달이 솟아, 결국 계향이한테 핀잔을 퍼부었다.
"나으리. 무슨 말씀이온지... 저는 술과 안주를 가져온 죄밖에는 달리 없사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도 죄가 되느니라."
"제가 나으리께 그리도 꼴 보기 싫은 계집이었는지를 미처 몰랐사옵니다. 차후로는 나으리 앞에 얼씬도 하지 않겠사옵니다."
계향이 눈물을 짜내며 울먹이자 홍경무가 또 한 번 무안하여 몸을 휙 돌아앉아서는 비 맞은 중처럼 무슨 말인가 한참을 군시렁대었다. 연홍은 코를 훌쩍거리며 나가는 계향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따라나섰다. 곧 위기에서의 탈출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문밖으로 나온 계향이 갑자기 배를 움켜잡더니 애써 웃음을 참느라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연홍이 영문을 몰라 계향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재빨리 식지를 뻗어 제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는 연홍의 소매 끝을 잡아 부엌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
"아씨. 제가 일부러 그런것이야요."
"일부러 그러다니...?"
"아씨가 나으리한테 곤욕을 당하는 것 같아서 제가 때를 맞춰 들어간 것이었고, 우는 시늉을 한 것도 거짓으로 그런 것이어요."
"세상에... 계향이한테 그런 꾀가 있었더란 말이냐?"
"나으리가 얼마나 짓궂은 분인지, 제가 경험을 해 봐서 잘 알아요."
"그래, 마침 꾀를 잘 냈다. 그렇지 않아도, 어찌나 짓궂게 구는지 진땀을 흘리고 있던 중이었다."
"나으리께서 노염움을 풀지 않으시면 어쩌지요?"
"옥수가 있지 않느냐. 꿩 대신 닭이라 생각하겠지."
연홍은 그 길로 옥수를 홍경무한테 들여보내고 계향이와 둘이서 또 한참을 웃었다.
꼴에 수캐라고, 다리 들고 오줌 눈다?
한편 홍경무는 연홍이와 계향이 괘씸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두 계집이 짜고서 시간을 그리 맞춘 것이라 단정하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계향이 꼭 그 시간에 들어올 수가 없는 법이었다.
어디 두고 보라지. 눈깔에서 피눈물 날 때가 있을 것이다.
이때 옥수가 들어오자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너는 대체, 어디를 갔던 것이냐."
"연홍 아씨와 계시도록 자리를 피했사옵니다. 나으리께서는 오매불망 연홍 아씨를 그리워하시지 않았습니까."
옥수가 눈물을 짜내며 토라지는 것을 보고,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에 잠시 말을 잃고 난망해 있었다.
빌어먹을. 계집 둘 가진 놈의 똥은 개도 아니 먹는다더니, 오늘은 내 속만 썩는 날이로구나.
홍경무는 쓸개 씹은 얼굴로 옥수를 망연하게 바라보며 애써 욕정을 일으켜 세웠다. 옥수한테라도 욕정을 쏟지 않고는 그대로 물러갈 수가 없었다.
이년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야. 이 홍경무가 누군 줄 알고...
홍경무는 혼자 중얼거리며 옥수의 허리를 낚아채 대끔 치마부터 들췄다.
13
눈이 켜켜이 쌓인 한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저자 골목을 구석구석 휩쓸고 다녔다. 행인들은 저마다 휘양이나 장옷을 뒤집어쓴 채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국밥집이나 선술집 주위를 배회하는 거지들도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허기를 달래지 못해 얼굴이 오만상으로 구겨져 있었다.
승업은 동대문 저자를 몰려 다니는 거지들의 행색을 보면서 새삼 격세지감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이 양친 부모 잃고 굶주린 배로 황해도 안악 저자를 누비고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따시고 배부른 세월 속에서 복에 없을 것 같았던 호강에 빠져 있으니, 오직 신기한 생각만 들었다.
이거이 다, 진사 어른 덕분이야.
그가 이용후와 연을 맺어 오늘에 이른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었다. 그때 국밥집에서 이용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미 굶어 죽었거나, 아니면 지금쯤 저들 거지꼴로 지낼 것이 뻔하였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오싹오싹 돋았다.
나으리. 옥체 보전하시라요.
승업은 이용후 집에 사흘을 머물면서 겨우내 때고도 넘칠 나무를 처마에 빼곡하게 쌓아 놓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용후에게 입은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길이 당장 그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약전에 들러 변 주부에게 이용후 안부만 전하고 바로 나왔다. 만석이한테는 하룻밤만 묵게 될 것이라 말해 놓고는 이틀 밤을 자게 되어 집이 궁금하였다. 종로를 지나면서 청계옥 생각도 났지만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용후와 함께 천주교를 믿는 연홍의 안부가 걱정되어 들러 보는 것이 도리겠지만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무심히 유곽 거리를 지나는 순간, 애향이라는 계집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여자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더라면 애향이와 동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그 자리를 빠져나온 것은 잘한 짓이었다. 홀아비가 콩죽 누룽지 맛보면 각시 못 얻는다는 속담처럼, 벌써부터 유곽에 빠져서 이로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승업이 집에 당도하자 만석이 심통 난 얼굴로 연신 볼멘 소리를 해 댔다. 승업이를 꽤나 기다린 눈치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는데도 마음을 쉬 풀지 못하였다.
"기럴 사정이 있었댔어야. 이해하라우."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두, 사흘 만에 오는 사람이 어디 있수. 형님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수."
"기래 기래. 어쨌든 미안하게 됐어. 나으리께서는 아직 아니 오셨네?"
"나으리는 며칠 더 있어야 오시겠지만, 형님을 찾아온 남정네가 있수. 형님이 떠나고 바로 왔으니까, 벌써 사흘째 기다리고 있는 셈이우."
"누구래 나를 찾아완?"
"처음 보는 사람이니, 낸들 알겠수. 행랑채에 유하고 있으니까, 어여 들어가 보우."
나를 찾아와, 사흘씩 기다리는 사람이래 누굴까?
승업은 온통 궁금한 생각에 휩싸여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였다. 그러자 만석이 빨리 가 보라고 성화를 부리며 승업의 등을 떠밀었다.
승업이 두어 번 헛기침을 내며 방문을 열자 웬 사내가 길게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승업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그제서야 사내가 눈을 떠 황급히 등을 세웠다.
"어디메서 오신, 누굽네까."
"어이구, 이런... 깜빡 잠이 들었나 보오. 실례를 했소. 장승업이라는 화가를 찾아왔수다래."
"내래 장승업이야요. 기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습네까."
"형씨래 장승업이야요? 반갑수다래. 내래 피양(평양)에서 온 양기훈이라 하오. 본관은 청구이고 힘 기에, 향기 훈자를 쓰오."
그가 얼른 일어나 승업에게 예를 갖추었다. 영문을 모른 채 승업도 엉거주춤 맞절로 받았다.
"나를 와 보러 왔습네까?"
"형씨의 명성이 피양에까지 자자하여, 인사나 틀까 해서 왔소."
"기럼, 그림 그리는 분입니까?"
"그림이라 할 것까지는 없고, 단지 관심이 많을 뿐이오. 보아하니, 우리래 연배가 서로 비슷한 것 같소만... 내래 계유생이외다."
"나도 계유생이야요."
"우리래 동갑내기오. 앞으로 좋은 동무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갔소만, 형씨 생각이래 어떠하오?"
"내래 출신이 없는 놈인데, 어드렇게 양반하고 동무가 됩네까."
"어허. 무슨 말씀을 기렇게 하오. 예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끼리. 그까짓 신분이 대수란 말이오? 내래 신분 따위는 조금도 괘념치 않으니까니, 앞으로는 마음을 서로 트고 지내는 것이 어떻갔소?"
"...정말, 인사 나누러 왔시오?"
"인사도 나누고, 그림 재주도 직접 볼 겸 해서 왔소."
"님자한테 보여 줄 거이 뭐 있갔시오. 실은, 나도 유숙 선생님한테 배우고 있는 중이야요."
"어찌 되었든, 며칠 유하면서 형씨 습작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오. 허락해 주갔소?"
"스승 밑에 있는 몸이라, 그분의 분부가 있어야 하지 않갔시오? 선생님이 오시면, 여쭤봐야 알갔습네다."
느닷없이 동무하자며 찾아온 양기훈으로 인해 승업은 갑자기 신바람이 솟았다. 그날 밤, 승업과 양기훈은 각자 화선지를 펴 놓고 마치 겨루기를 하듯 그림 몇 장씩을 그려 냈다. 승업은 주로 기명절지와 영모를 그렸고, 양기훈은 기러기 떼가 갈대밭을 날아오르거나 내려앉는 노안도를 주로 그렸다. 노안도는 승업도 몇 번 그렸으나 그때마다 유숙한테 핀잔을 들어 온 터라 자신이 붙지 않은 소재였다. 기러기에 생동감이 없다는 것이 유숙의 지적이었다. 그러나 양기훈의 것은 사실성이 풍부하여, 정말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승업은 양기훈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그의 필치를 배우기도 하였다.
"님자래 누구한테 그림을 배웠습네까?"
"내래 형씨처럼 스승 집에 오래 머물면서 배우지를 못하고, 마음에 둔 스승을 찾아가 며칠 혹은 몇 달을 유하면서 뜨내기로 배웠시오. 그동안 내가 모신 스승으로는 한때 개성에 머물러 계셨던 고람 전기 선생이고, 또 한 분은 강릉에 계신 형당 유재소 선생이었소."
"그분들은 주로 어드런 그림을 그리십네까?"
"고람 선생이래 송나라와 원나라의 남종파 그림으로 산수와 시에 능하시고, 형당 선생도 산수를 많이 그리시는데, 정밀하기가 이를 데 없어 실물을 보는 것 이상입네다. 정밀하지 않은 것은 그림으로 남기지 않는 성품이니까니."
"기렇구만요. 님자는 와 한곳에 있디 않고 돌아다니며 배웁네까?"
"내래 워낙 역마살이 있는데다가, 여러 화풍을 고루 배우고 싶어서, 이렇게 돌아다니외다."
"기것도 괜찮은 공부갔시오."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다가 밤을 꼬박 새웠다. 첫 만남인데도 밤을 하얗게 새울 만큼 얘기가 진지하게 오갔다. 승업은 양기훈의 박식함과 호방한 성격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양반 출신이면서도 그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존재를 만나고자 그 멀리서 찾아온 것만 봐도 그를 알 수 있었다. 승업은 진솔한 그의 인간성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매료당하고 있었다.
유숙은 그로부터 이틀 후에야 돌아왔다. 승업은 문안 인사를 올리고, 양기훈이 찾아와 유하고 있음을 소상하게 고하였다. 그러자 유숙이 양기훈을 만나겠다며 안내하라고 일렀다. 그 길로 승업은 유숙의 뜻을 양기훈에게 전하였다. 양기훈도 몹시 기뻐하며 승업을 따라 유숙의 처소로 갔다. 양기훈은 유숙에게 예의를 갖춘 다음 자기 소개를 스스로 하였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승업이 양기훈의 노안도를 유숙 앞에 펼쳐 보였다. 유숙은 한참동안 그림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업이는 이 그림을 어찌 보고 있느냐?"
"제가 감히 따를 수 없는 훌륭한 그림입네다."
"허면, 이 그림에서 무엇을 느꼈더냐?"
유숙이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지, 승업은 이미 그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노안도에서만큼은 그동안 지적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사물마다 생동감이 넘쳐 흐릅네다."
"옳게 보았느니라. 내가 늘 지적한 것처럼, 승업이 너는 기교는 있으되,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지 못하고 있는 것이 흠이니라."
"네, 나으리."
"저 화객의 사정이 허락된다면, 함께 지내면서 너의 부족한 점을 배우도록 하여라. 배움에는 노소를 따지지 않는 법이니라."
"네, 나으리."
"이보시게, 화객. 갈 길이 바쁘지 않거든 저 아이와 함께 유하면서, 정담도 나누고 그림도 나누면서 여러 날 묵도록 하시오. 비록 집이 누추하고 밥상이 빈약하여도 흉일랑 보지 마시고."
"감히, 어찌 기런 마음을 가지겠습네까. 유하도록 허락하여 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입네다. 하옵고, 저에게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주시면 평생을 스승으로 모시갔습네다."
"어허. 나한테 배울 것이 뭐 있다고."
양기훈도 그날부터 유숙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승업은 또 다른 행복감에 젖어 습작에 더욱 열을 올렸다.
14
병인년 2월.
불과 12세의 나이로 왕의 자리에 오른 고종에게 정사를 맡길 수가 없었던 대왕대비 조씨는 그 동안 수렴청정을 하다가 고종이 즉위한 지 3년째가 되자, 비로소 고종에게 환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고종에게 전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권은 여전히 대원군이 가지고 있었다.
3월에 들어와 고종은 여주에 사는 민치록의 외동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고종의 장인이 된 민치록은 여흥이 본관이고, 종 4품의 사옹원 관직인 첨정을 지냈고, 죽은 후 딸이 왕후가 되면서 영의정과 여성부원군으로 추증된 사람이다. 고종의 왕후가 된 민씨는 친정에 동기간도 없는 외로운 규수였다. 대원군이 굳이 외동딸을 며느리로 간택한 것은 족벌체제로 구축되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막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대원군은 고종이 비를 맞아들인 것을 계기로 자신의 집정을 더욱 확고히 하였고, 그러기 위해 천주교 탄압은 쇄국정책의 일환이면서 만동묘 철폐에 따른 유생들의 항의를 막기 위한 본보기이기도 하였다. 누구든 국시에 역행하는 자는 가혹하게 탄압한다는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국가 시책이나 그 시행을 비판할 수 없도록 쐐기를 박았다.
한편, 경복궁 중건에 박차를 가하면서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원군은 11월에 들어서자 고육책으로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이 화폐의 가치는 당백전 1푼이 종래 사용해 오던 엽전 상평통보 백 푼과 맞먹는 것이었다. 당백전 주조는 병인년 10월 30일 좌의정 김병학의 제안으로 성사된 것인데, 이를 호조에서 사무를 전담토록 하고 금위영에서 주조를 담당하게 하였다. 화폐의 본 명칭이 '호대당백전'이었으나 약칭 당백전이라 하였다. 물론 당백전의 주조는 경복궁 중건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쇄국정책을 고수하기 위한 군사력 강화의 일환으로, 삼군부를 세우고 이에 필요한 군사를 증원해야 했기 때문에 그 재정 염추에 필요했던 것이다.
당백전 주조 총액은 그 이듬해 5월 15일까지 6개월 동안 1,600만 냥에 이르는 막대한 액수였다. 이의 가치를 쌀값으로 환산하면 당시 한 석이 5냥이었으니까, 300만 석이 넘는 액수였다. 1,600만 냥은 조정의 공식 집계일 뿐이고, 사사로이 주조된 위조화폐까지 가산하면 실로 엄청난 거액이었다. 당시 화폐의 주조는 간단한 공정이므로 조정에서는 이미 통용되고 있던 상평통보와 함께 개인이 당백전을 주조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엄격한 법률을 공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조화폐 주조는 성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금융질서는 매우 혼란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당백전에 대한 불신만 높아져, 조정에서는 상평통보와 함께 당백전을 통용하도록 하였으나 일반 유통에서는 워활하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에서 상평통보는 1냥 이내에서만 사용토록 하고 그 이상의 거래는 당백전을 사용하도록 강경책을 썼다. 그러나 당백전의 가치가 자꾸 떨어져 상평통보의 백 배에 이르러 결국 백성들의 원성만 늘어 가는 가운데 물가 상승률만 높아져, 쌀 한 석에 다섯 냥 하던 것이 45냥으로 폭등함으로써 물가만 올려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그 이듬해인 1867년 5월에 당백전 주조를 중단하고 10월부터 통용을 중지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나라의 경제는 전보다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경복궁 중건 사업은 계속되었다. 지난 3월, 자재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목수간 800여 칸과 다듬은 재목들이 다 타 버리는 불운이 겹치기도 하였으나 대원군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경복궁 건물 중에 근정전과 경회루가 골격을 완전하게 드러내면서 곧 안팎 단장이 시작될 참이었다. 근정전은 상하 2층의 거대한 구조이나 내부는 상하의 구분을 두지 않아 매우 넓고 높다. 이 건물은 문무백관의 조하를 비롯해서 나라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의 사신들을 접견할 목정으로 지은 것이다. 연못 한가운데에 들어앉아 있는 경회루는 48개의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다락식 2층 구조의 대연회장으로, 그 규모 또한 대단히 웅장하였다.
근정전과 경회루의 치장은 도화서 관원인 화원들이 맡는다. 도화서 관원은 예조판서가 겸임하는 제조 1명과 별제 2명, 겸교수 1명, 선화와 선회 각 1명, 화사 1명, 회사 2명 등 약 3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화원은 1년에 네 차례 도화서의 추천으로 이조에서 임명하였다.
유숙도 도화서에서 겸교수로 있었다. 겸교수는 주로 도화의 기술을 가르치는 종 6품 벼슬이다. 근정전과 경회루의 안팎 치장이 시작되면서, 유숙은 건물 내부에 들어갈 그림과 단청에 동원될 화공들에게 그 기술과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날 유숙이 승업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너도 알다시피,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지 여러 해가 되어 이제 근정전과 경회루 건물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마침, 내가 도화서에서 겸교수직을 맡고 있는 터라, 내가 너를 화공으로 천거하였으니 그리 알고 있거라."
"기럼, 제가 할 일은 무엇입네까?"
"근정전 내부를 그림으로 단장하는 일이니라. 근정전은 상감께서 조정 대신들의 하례를 받으시거나, 외국의 사신들을 접견하시는 곳이라, 치장에 특별히 마음을 써야 할 것이야. 그곳에는 상감께서 앉아 계실 어좌가 있고, 어좌를 중심으로 많은 장식물이 들어서느니라. 특히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 병풍 그림이 들어가니만큼, 다른 어느 곳보다 중요한 곳이야."
"기럼, 제가 그 병풍을 그립네까?"
"네가 할 일은 차후로 분부가 있을 것이다."
"나으리 분부만 따르갔습네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승업은 화공이라는 이름으로 유숙을 도와 근정전 단장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건물 외부는 모두가 단청 일이므로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화공들에게 맡겼고, 승업은 어좌 뒤에 들어갈 일월오악도 병풍 그림과 천장에 조각된 쌍룡에 공동작업으로 채색하는 일을 맡았다.
일월오악도는 왕을 상징하는 해와 왕후를 상징하는 달이 떠 있는 밑으로 웅장한 다섯 봉우리의 산악이 있고, 계곡 양쪽으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힘차게 흘러내리는 물굽이, 그리고 포말을 일으키며 튀어 오르는 파도와 그 좌우에 우뚝 솟아 있는 소나무 등의 장엄하면서도 환상적인 도안이었다.
천장의 쌍룡은 나무로 만든 조각품으로, 구름 속에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고 몸을 뒤틀면서 싸우는 형상이었다. 승업은 목공예의 환상적인 예술성에 탄복하여 벌어진 입을 오랫동안 닫지 못하였다.
이때 대원군이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 영건감도의 한승주와 함께 행차하였다. 승업은 천장의 쌍룡에서 아직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중이라 누가 나타났는지 미처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침 승업의 그러한 모습을 발견한 유숙이 당혹한 얼굴로 달려와 무작정 무릎을 꿇게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승업은 그가 시키는 대로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 숨을 죽였다. 오로지 신분이 매우 높은 어른이 왔다는 것만 눈치로 알 뿐이었다.
한승주가 유숙에게 다가왔다.
"혜산, 이 와중에 일은 아니 하고 천장만 올려보고 있는 저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이 자의 이름은 장승업이라 하옵고, 마침 제 밑에서 그림을 배우는 중에 있습니다."
유숙은 대원군이 지켜보는 자리라 매우 당황한 어조로 변명하였다.
"헌데, 여기는 무슨 일로 와 있는 것이오?"
"제가 도화서에 천거한 자로서, 일월오악도에 참여시킬 생각입니다."
"장승업이라...얼굴을 들라."
승업은 스승이 매우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떨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라 하시지 않느냐."
유숙이 불벼락을 치듯 호령하였다. 승업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네가 이용후 선비를 따라 황해도에서 왔다는, 바로 그자더냐?"
"...기렇습네다."
"혜산. 이 자가 그림에 능하다는 그 장승업이라는 자입니까?"
"그렇습니다."
"헌데, 네 소임은 뒷전에 두고, 어찌하여 천장만 올려보고 있느냐?"
"용의 조각이 너무 신비하여 잠시 넋을 잃었습네다."
그러자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던 대원군이 혀를 차며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야."만 내뱉고 돌아섰다.
"예, 대감."
유숙이 저만치 물러가는 대원군 일행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고 승업은 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였다. 곧 떨어지고 말 스승의 불호령을 각오하며 바싹 긴장하였다.
"나으리. 죽을 죄를 지었습네다."
그러나 유숙은 말없이 돌아설 뿐 더는 질책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승업은 더욱 송구하여 한참 동안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사실, 그가 승업에게 지시한 일은 아직 없었다. 그가 참여할 일월오악도가 아직 도안이 완성되지 않아 기다리는 중이라, 승업으로서도 당장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승업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대원군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장안에 퍼져 있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바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주역이었다. 승업은 이용후 얼굴을 떠올리며, 만약 그가 잡혀서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면 방금 눈앞에 서 있던 그 사람 대원군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원납전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바로 대원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승업은 갑자기 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저 영감이래 대원군이라...
승업은 한숨을 내쉬며 임금의 아버지이면서 조선의 최고 권력자의 모습을 뒤로나마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진사 어른. 부디 옥체 보전하시라요.
1867년에 들어와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근정전과 경회루 단장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근정문을 비롯해서 동행각, 사정전과 이에 딸린 천추전 등 10여 개의 부속 건물들이 착착 들어서 경복궁의 위용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영건도감과 도화서 관직들이 아예 궁내에서 침식할 만큼 바쁜 와중이라, 승업도 다른 화공들과 함께 가건물에서 침식할 수밖에 없었다. 건물의 도색과 단청 작업은 매우 복잡하였다. 단청은 건물의 영구 보존이 첫째 목적이고, 둘째로는 나무 재질의 조악성을 은폐하면서 한편으로는 궁전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목재의 부식을 방지할 목적이면서 건물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청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채색할 부분을 꼼꼼하게 닦아 내야 하는데, 이는 먼지가 남아 있거나 곰팡이 등이 끼어 후에 도색이 뜨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렇게 닦아 내는 작업이 끝나면 물감을 아교 끓인 물에 엷게 타서 고루 바른 다음 청록색으로 가칠을 한다. 이것이 마르면 그 위에 또 아교물을 바르고, 이렇게 다섯 차례를 거듭하여 채색의 확실한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공정이 끝나면 가칠 위에다 문양본을 대고 무늬를 떠서 색칠을 한다. 무늬를 뜰 때는 문양본을 송곳으로 촘촘히 찍어낸 다음 분 주머니로 두드리면 분가루가 나와 무늬의 형체를 드러내게 하고, 그 선을 따라서 채색을 시작하는 것이다. 채색작업은 화공들이 각기 한 가지의 색채만 분담하게 돼 있어, 도본에 나타난 색깔의 수대로 그 인원이 배당된다.
승업이 맡은 일월오악도 역시 이와 비슷한 공정이 끝나기를 기다려 유숙의 지시에 따라 채색하였다. 문양본이 있고 그 선을 따라 채색하는 작업이므로, 승업에게 특별히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은 아니었다. 창의성이 필요 없기는 근정전 천장의 쌍룡도 마찬가지였다. 목공이 조각을 끝내면 단청에 필요한 작업이 따르고, 그 위에 도안대로 색을 입히면 그만이었다.
승업이 유숙의 분부에 따라 소임을 수행하고는 있지만 처음 가졌던 흥분과 긴장은 차츰차츰 약화되어, 요즘에 와서는 일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창의성을 조금도 발휘할 수 없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지시에 따라 기계적으로 색깔만 입히는 일이라 나날이 따분하고 고역스러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에게 감히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저 이 작업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다른 화공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그것이 곧 장인의 정신이겠거니 하여도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존경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경복궁 중건이 끝나면 나라에서 후한 상금을 내릴 것이라는 소문이 화공들 사이에 떠돌고 있었지만 승업은 상금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다. 오로지 일이 빨리 끝나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기만을 염원하였다.
이 무렵, 장안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염병이 돌아 도처에서 사람이 죽어 갔다. 이 전염병은 화공들 사이에서도 급속하게 번져 작업장 곳곳에서 갑자기 맥없이 쓰러지거나, 아예 화구조차 들지 못할 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 자들이 늘어 갔다. 당황한 영건도감에서도 끓이지 않은 음식은 절대 먹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지만 전염성이 매우 강한 병이라 속수무책이었다.
승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자기 몸이 나른해지면서 두통이 일고 전신에 열이 용광로처럼 펄펄 끓었다. 혀에 설태가 하얗게 덮이고 목까지 부어 식욕은커녕 금하는 냉수만 계속 찾았다. 뿐만 아니라 며칠이 지나가 가슴과 배 주위에 담홍색의 발진까지 생겨 승업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유숙은 승업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귀가조치를 주선하여 그 길로 승업을 데리고 변 주부의 약전으로 향했다. 진맥을 짚어 본 변 주부가 조제한 약을 서둘러 달이게 하고는 승업을 편히 쉬게 하였다. 유숙과 변 주부는 신이 내렸을지도 모를 천재화가를 전염병쯤으로 목숨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이 상통해 있었다.
승업은 변 주부 약전에서 근 보름이나 있었다. 변 주부는 승업의 병이 완치될 때까지 바깥 출입을 일절 못하게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였다. 그는 승업을 자식 이상으로 보살폈다. 어느 누구도 제 자식이 병을 얻었다 해도 그토록 보살피기 어려울 만큼 정성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뜻밖에 청계옥 계향이가 약전에 나타났다. 변 주부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데도 그녀는 이유를 선뜻 말하지 못하고 한참을 우물쭈물하였다.
"청계옥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왔느냐?"
"그게 아니옵고..."
"허면, 네가 아픈 게야?"
"그것도 아니어요."
그러면서 계향은 자꾸 주위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의 이목을 꺼리는 것이 분명하였다. 변 주부는 눈치를 채고 계향이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여기서는 듣는 사람이 없으니, 자초지종을 얘기해라."
"나으리. 실은 그 동안 소식이 없던 제 동생이 갑자기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반가운 일이 아니더냐."
"그렇기는 하옵니다만, 병을 얻었사옵니다."
"어떻게 아픈 것 같더냐?"
"몸이 불덩이같이 뜨겁고, 음식을 통 먹지 못하옵니다. 나으리, 제 동생을 살려주시어요."
"그놈도 전염병을 앓고 있느니라."
"에그머니. 그럼 염병을 얻은 것이옵니까?"
"내 짐작에 틀림없느니라. 마침 승업이도 그 병을 얻어, 지금 내 집에 머물고 있는 중이야."
"승업이가..."
"정히 궁금하면 안으로 들어가 만나 봐도 좋으니라."
"아니어요. 여자 몸으로 그리할 수는 없는 법이어요."
"허긴... 그런데, 그놈은 어디를 떠돌다가 이제야 나타났더란 말이냐?"
그러자 계향이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사연을 들어보나마나 고생깨나 한 모양이라고 단정하였다. 미욱이 한때 약전에서 사동 노릇을 한 적이 있어 변 주부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을 것이다. 여기서 약이나 썰고 있을 일이지, 쥐뿔도 가진 것이 없는 놈이 호기를 부리더니..."
"말을 통 아니 하옵니다."
계향은 미욱이 동학군에 가담했었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변 주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일로 못 박고 있는 중이었다.
"약을 지어 줄 터이니, 정성껏 달여 먹이고 쉬도록 해야 하느니라. 뿐만 아니라, 당분간 그놈과는 떨어져 있도록 하여라."
"무슨 말씀이온지...?"
"돌림병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잘못하다가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전염이 되는 병이라 이르는 것이니, 각별히 조심하여라."
"나으리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변 주부가 밖으로 나가자 느닷없이 승업이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그는 계향이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으로 겨우 아는 체를 하였다.
"...여긴 웬일로 왔네?"
"약 지으러 왔어요."
"누구래 아픈 기야? 연홍 아씨래 아픈 기야?"
"다른 사람예요."
"기럼, 옥수 아가씨네?"
"...몰라도 돼요. 돌림병에 걸렸다면서, 다 나았아요?"
"나으리 덕분에, 이자는 다 나았어."
"다행이군요. 소문에, 대궐에 가서 그림 그린다는 얘기 들었어요."
"하긴, 그림은 그림인디. 연홍 아씨래 편히 계시네?"
"궁금하면 가서 만나 보지요?"
계향은 갑자기 심사가 뒤틀렸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앞에 두고 그간의 안부는 묻지 않고, 아까부터 없는 사람만 걱정하는 것이 야속하였다. 나이를 처먹어도 미련퉁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배냇병신이 틀림없을 것으로 또 한 번 못을 박았다.
"동생한테는 소식 듣고 있네?"
"몰라요."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가. 하나밖에 없는 누이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 보지? 남매간에 기러믄 못쓰는 기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죽지는 않았겠지요."
"기래 기래. 기렇게 생각하는 거이 마음 편하디. 요즘, 진사 나으리께서 청계옥에 오시네?"
"여러 달째 뵙지 못했어요."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니가?"
"그것도 궁금하면, 찾아가서 여쭤 보지 그래요."
계향은 곱씹을수록 승업이 괘씸할 뿐이었다. 그는 장안에 소문난 화가가 되었고 자신은 천한 기생이 돼 있다 해도, 어찌 그토록 무심할 수가 있는가. 당장 달려들어 손톱으로 얼굴을 박박 할퀴고 싶어 안달이 솟았다. 어릴 적 거지꼴로 나타난 것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것을 생각해서라도 이럴 수 없는 것이다. 자기 같은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유명한 화가가 되더니, 신수가 좋아졌군요."
전염병에 걸려 얼굴이 초췌해진 사람한테 차마 못할 소리지만 그렇게라도 빈정대지 않고는 분을 삭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승업이 갑자기 쿡쿡 웃음 참는 소리로 "너는 기생이 되더니, 제법 여자 티가 나는구나야." 하는 것이었다.
계향은 기생이라는 말이 당장 마음에 걸렸다.
"천박한 기생이 오죽하겠수."
"이보라우. 내래 기런 뜻으로 말한 거이 아니야."
승업이 매우 당황한 낯으로 계향이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계향은 그 꼴이 통쾌하여 가슴속이 다 시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와 비슷한 나이에 있는 동생을 비교하면서 마음이 아팠다. 한쪽은 유명한 화가가 되어 거들먹대는데, 동생은 동학군인지 뭔지에 들어가 피해 다니다가 기껏 전염병이나 얻어 나타난 것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동생은 그래도 천자문을 마쳤음에도 일자무식인 승업이보다 조금 나은 것이 없는 처지가 가련하고 약이 올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여기서 약이나 쓸고 있었으면, 지금쯤 장가도 들었을 거 야냐. 등신.
"동생한테 좋은 소식이래 있었으면 좋갔구만기래."
"걱정해 줘서 고맙수."
승업이 내뱉은 걱정이 그녀한테는 조금도 위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약을 올리는 소리로 들려, 그저 고깝고 서럽기만 하였다.
15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에도 경복궁 중건은 계속되고 있었다. 백성들의 원성쯤은 처음부터 무시하였다. 더구나 6월에 들어서면서 함경도 변방 사람들이 관리들의 착취와 터무니없이 거둬들이는 세금을 견디다 못해 국경을 넘어 도망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 그 소문을 듣고 민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오로지 경복궁 중건에만 전심전력하였다. 그러자 이판사판에 처한 백성들이 지방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켜 관청에 들어가 약탈과 방화를 수시로 하였다. 지난해의 수해와 흉작으로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로서는 당연한 항거였다. 대원군에 대한 원성을 날로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여기에 만동묘 철폐에 항의하는 유생들의 시위까지 연일 그치지 않아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였다.
이럴 때마다 대원군의 복안은 오로지 강경 일변도였다. 그 화살은 늘 천주교가 맞았다. 불만에 가득 찬 민심을 돌려놓은 방법으로 그것밖에는 생각하는 것이 없는 듯하였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즈음 오후, 청계옥에 홍경무가 또 나타났다. 연홍한테는 그가 이제 고객이 아니라 원수였다. 그는 올 때마다 연홍을 못 견디게 하였다. 그의 일념은 오로지 연홍과 동침하는 일이었다. 기생 나이 스물이면 환갑이라는 말을 스스로 해 놓은 자가 연홍 나이 이미 서른이 된 노기임에도 옛날부터 품었던 욕정을 여태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양반에다 돈도 있는 사람이라 동기도 품을 수 있건만, 그는 굳이 연홍을 취하겠다고 저리 안달을 부렸다. 그러한 속셈을 연홍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남자라도 늙은 기생이 아무리 요염하게 굴어도 징그럽게 여길 것이다. 그것은 오직 연홍의 육체를 정복하겠다는 오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한량은 죽어도 기생집 울타리에서 죽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홍경무는 색광을 평생 버리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가 너무 귀찮게 굴어 한때는 눈 딱 감고 응해 줄까도 생각했었다. 남녀 간의 교접이란 '한강에 배 지나가기'로 몸에 흔적이 남을 것도 아니어서 강간당한 셈 치면 굳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천주교 믿는 것에 수시로 협박까지 하고 있어, 그가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적에는 자주 마음이 약해지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일 뿐이었다. 그토록 사모하는 이용후한테도 차마 품을 수 없는 마음인 것을 겨우 그런 불량한 사람한테 몸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홍경무가 얼마 전부터는 술자리에 옥수조차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연홍이만 들도록 하였다. 아마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을 경구처럼 가슴에 새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마음을 돌리겠느냐?"
"나으리. 제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 그리 아셔요."
"젠장. 네 보지에 금테라도 둘렀다더냐?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제가 드릴 말씀인 듯합니다. 이미 노기에 접어든 계집인데, 굳이 저를 취하실 필요가 무어 있습니까. 싱싱한 계집들이 천지에 널려 있는데요."
"어허. 네가 남정네들 마음을 모르는 것이 있어. 쌀밥과 여자는 흴수록 좋고, 씹은 요분질 맛으로 한다고 했다."
"허나, 나으리. 저라는 계집이 평생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어서, 요분질이 무엇인지도 모르옵니다."
"저런 내숭 허고... 그래 좋다. 요분질을 모른다면 내 가르쳐 줄 터이니, 나한테 허락만 하여라."
"양반 체통에 말씀이 너무 과하십니다. 아랫것들이 들을까 염려 되옵니다."
"저리 답답하기는... 열 계집 마다하는 양반 있다더냐? 그까짓 체통이 무엇이관대, 연홍이 같은 미색을 앞에 놓고 수염만 쓸겠느냐. 허니, 오늘은 기어코 너를 품을 것이니라. 알았느냐?"
"정히 그러시면..."
"옳지 옳지. 진작 그럴 것이지, 왜 그리도 사람 애간장을 태우느냐. 어서 내 곁으로 오너라."
"아니옵니다."
"아니라니? 방금 허락할 뜻을 비치지 않았느냐."
"지금은 아니 된다는 말씀이옵니다."
"그럼, 야밤이라야 된다는 말이냐?"
"아랫것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찌 벌건 대낮에 그리할 수가 있습니까."
"네 말이 맞도다. 그럼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오늘 밤, 이경 즈음에 다시 오십시오. 제가 대문 빗장을 풀어 놓을 터이니, 아랫것들 눈치채지 않도록 제 방으로 숨어드십시오. 들어오셔서 불을 밝히라는 말씀은 절대 하지 마셔야 하옵니다. 계향이나 옥수가 궁금하여 들여다볼 것이옵니다."
"젠장. 날보구 도둑놈짓을 하라는구나. 꼭 그리해야만 되겠느냐?"
"나으리. 비록 기생이지만, 제 체통도 배려해 주셔야 하옵니다."
"내 그리할 터이니 약조를 꼭 지키렸다?"
"여부가 있사옵니까."
"허나 이경에 왔다가 돌아갈 수가 없지 않느냐. 그 시각이면 순라군이 다닐 터인데."
"그 점은 염려 놓으십시오. 저를 취하신 연후에, 서둘러 옥수가 거처하는 방으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옥수가 설마 나으리를 마다하겠습니까."
"좋은 생각이로고. 그럼, 나는 이만..."
"하온데, 나으리. 오늘밤 저를 취하는 대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실 것을 약조하셔야 하옵니다."
"...꼭 그래야 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약조를 못하시겠다면, 저도..."
"알았느니라. 하는 수 없지."
그렇게 해서 연홍은 일단 홍경무를 물리쳤다. 그녀 나름대로 꾀를 짜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연홍은 술손을 접대하느라 술이 많이 취한 옥수를 자신의 방에 불러들여 함께 자도록 하였다. 뜻밖의 제안에 옥수가 이유를 물었다.
"오늘 밤은 유난히 무섭고 적적하여, 혼자 잘 수가 없구나."
"형님 마음이 싱숭생숭하신가 봐요. 나야 아무데서나 자면 어떻수."
"고맙구나. 내 밖을 돌아 보고 올 터이니, 너 먼저 자거라."
연홍은 밖으로 나와 안팎을 둘러보는 척하고 약속대로 대문의 빗장을 살짝 풀어 놓았다. 그리고 방 문고리도 잠그지 않은 채 그냥 두었다. 옥수는 과음 탓에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연홍은 이경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면서 마음이 초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전이 실패할까 두려웠다. 만약 홍경무가 자신의 의도를 알게 되는 날에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연홍은 옥수가 잠귀신한테 붙들려갔음을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몸을 빼 깜깜한 대청 뒤주 쪽으로 가 몸을 숨겼다. 대문 열리는 소리 나기만을 기다리며 연홍은 몸을 잔뜩 옹그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가 정말 욕정을 못 이기는 사내라면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다. 잠시 후, 대문이 삐죽이 열리면서 꼭 도둑의 몸짓으로 사람 하나가 들어섰다. 그는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대청으로 성큼 올라섰다. 틀림없이 홍경무였다. 연홍은 쿡쿡 웃음을 참으며 그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다. 약속대로 홍경무는 방에 들어가 불을 밝히지 않은 채 잠시 옷 스치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여자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옥수가 워낙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방으로부터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비로소 여자가 놀란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조용해졌다. 홍경무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을 것이 틀림없다. 남녀가 격정에 빠져 서로 몸부림치는 소리가 새나오면서 연홍은 귀를 틀어막았다.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낯이 뜨거워지면서 자신의 몸도 열에 들뜨기 시작하여 자주 진저리를 쳤다.
잠시 후, 일을 끝낸 홍경무가 겉옷은 겨드랑이에 끼고 속옷 차림으로 엉거주춤 옥수 방으로 들어갔다. 연홍은 비로소 방 앞으로 가 얕게 기침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도 옥수가 매우 민첩한 몸놀림으로 허둥허둥 옷을 주섬거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형님은 어디 다녀오셔요?"
옥수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목젖 떠는 소리로 물었다. 연홍은 전혀 눈치가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자리로 가 누웠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좀 나가 보고 오는 길이다. 이제는 되었으니, 너는 네 방으로 건너가거라."
"아까는 적적하다고 하잖았수."
"네가 코를 어찌나 고는지, 잠을 잘 수가 없구나."
연홍은 옥수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녀는 영문을 모른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참 군시렁대며 마지못해 문을 열고 나갔다. 연홍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저것들이 눈치를 못 챘을까? 사람한테는 저마다 체취가 있다는데...
경복궁 중건 사업 가운데 근정전과 경회루가 드디어 완성을 보았다. 승업은 전염병이 치유된 다음에도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가 그의 일을 마무리 지었다. 유숙이 몇 차례 만류하였지만 승업은 자신이 맡은 일만큼은 마무리하겠다고 굳이 고집을 부렸다.
일차적인 준공을 보자 소문대로 화공들에게 맡은 일에 따라 각기 상금을 내렸다. 유숙의 손을 거쳐 승업에게도 삼백 냥에 달하는 상금이 내려졌다. 승업은 상금을 받자 이내 유숙한테 도로 내놓았다. 그러자 유숙이 눈을 부릅떠 호령을 하였다.
"이는 내가 사사로이 준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준 것이니, 넣어 두었다가 후에 요긴하게 쓰도록 하여라."
"저는 돈을 쓸 곳이 없습네다. 나으리께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주시는데, 돈을 어디다 쓰갔습네까."
"어허. 나라에서 네게 준 것을 왜 내가 받아 둔다는 말이냐.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네가 알아서 하여라."
"기럼, 주부 어른께 약값을 갚겠습네다."
"약값은 이미 주었느니라."
"나으리..."
"물러가렸다. 그리고 경복궁 일로 오랫동안 그림을 놓았으니, 다시 습작에 힘쓰도록 하여라."
"네, 나으리."
승업은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스승 앞을 물러나왔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거액을 손에 쥐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스승과 변 주부에게 고마움의 표시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용후를 떠올렸다. 승업은 그 길로 푸줏간으로 달려가 오십 냥으로 고기를 샀다. 반은 스승의 밥상에 올릴 것으로, 반은 변 주부에게 줄 것으로 하였다. 변 주부는 승업이 고기 싼 것을 내밀자 웬것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 설명을 하자 대뜸 눈부터 부라렸다.
"나라에서 준 돈을 이리 낭비하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나는 받을 수 없으니, 스승께 올리도록 하여라."
"스승께도 이미 올렸습네다."
"그럼, 너나 구워 먹거라."
"나으리께 입은 은혜를 평생 갚을 길이 없을 것 같아, 늘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네다. 마침 쓸 곳이 없는 저에게 상금이 내려져, 이렇게 하였습네다. 이번만 받아 주시라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갔습네다. 용서하시라요."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약조하겠느냐?"
"네, 나으리."
"네가 나한테 은혜를 입었다고 굳이 생각한다면, 습작을 열심히 하여 장차 훌륭한 화가가 되는 일이다. 내 말을 명심하렸다."
"나으리 말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갔습네다."
승업은 고기를 간신히 내려놓고 도망치듯 약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그 길로 다시 푸줏간으로 가 고기를 사고 어물전에서 생선을 사서는 동대문 밖 이용후 집으로 달려갔다. 이용후 역시 마치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변 주부와 똑같은 말로 꾸짖었다. 뿐만 아니라 변 주부가 말한 것처럼 습작을 열심히 하여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이 은혜 갚는 길이라 하였다. 승업은 선뜻 물러나지 못하고 또 한참을 망설였다. 주머니에 아직 이백 냥이 넘는 돈이 있어, 이용후한테 내놓고 올 생각으로 출발한 것인데, 그의 준엄한 표정 앞에서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양반 신분에 천한 것으로부터 돈냥이나 받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워낙 궁한 살림이라 한때 요긴할 수 있다는 생각에만 그쳤을 뿐 양반의 체통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도리 없이 그냥 돌아선 승업은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머지 돈을 어찌 처분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어떻게든 이용후한테 건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하였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종로통에 들어서면서 청계옥 골목이 저만치 보였다. 순간, 기가 막힌 방법이 번개처럼 승업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승업은 갑자기 신이 나서 청계옥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가 정원을 가로질러 대청으로 향하고 있는데, 웬 낯선 사내가 장작을 부엌으로 나르고 있는 것이 눈길에 잡혔다. 청계옥에 와서 처음 보는 얼굴임에는 틀림없으나, 웬지 낯이 설지만은 않았다. 승업은 등을 돌리다 말고 그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분명히 낯이 익었다.
혹시, 계향이 동생...?
승업은 섬돌에 걸쳐 놓았던 발을 내리고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도 승업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미욱이 틀림없었다.
"이보라우, 혹시 미욱이 아니네?"
"당신은 누구요?"
"나를 몰라보네? 내래 승업이야. 미욱이가 맞디?"
"승업이? 너무 변해서 몰라보겠수. 유명한 화가가 됐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정말 몰라보겠구먼."
미욱은 안고 있던 장작을 내려놓고는 승업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느새 그의 눈에 물기가 자작자작 배기 시작하였다.
"행방불명됐다더니, 죽디 않구 있었구만기래. 네 누이래 얼마나 걱정했는디, 알기나 해?"
"나도 알고 있수."
"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자서 나타났네? 고생 많이 했갔구나."
"우리 같은 천민이 고생 없이 어떻게 살겠수. 형님은 유명해지더니, 신수가 훤하우."
"천하기는 내래 마찬가진데, 무엇이 좋아졌갔네."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연홍이와 옥수가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그들은 승업이 나타난 것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대청으로 뛰어나왔다.
"화가 선생이 기방에는 웬일이신가?"
"연홍 아씨. 그간 무고하셨습네까? 옥수 아씨도 무고하시디요?"
승업은 제 나이 먹은 것은 생각 않고 오로지 옛날 처지로만 머물러 허리를 깊게 구부렸다. 이때 계향이 뒷곁에서 빨래를 걷어 가지고 나타났다. 그녀는 승업을 보자 갑자기 얼굴에 꽃물을 들여 안절부절못하였다. 지난번 약전에서 승업을 대할 때와는 태도가 판이하였다.
"어여 올라오게."
연홍이 승업의 손을 잡을 듯이 반갑게 다가왔다. 그녀가 승업을 반기는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계향의 마음이 금방 샐쭉하였다. 동생과 또 비교가 되어 속이 상했다. 미욱이가 전염병을 얻어 나타났을 때는 마치 무슨 괴물을 보듯 얼굴을 오만상으로 찡그리며 꺼림칙하게 여기더니, 승업이한테는 꼭 제 서방을 대하듯 반기고 있지 않은가. 마침 미욱이 장작을 안고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 그만 눈물이 솟았다.
저 등신은 여태 뭐 했누. 갑자기 나타나, 기생집 머슴질이나 하고.
승업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계향은 대청 끝에 앉아 옷고름으로 눈물을 콕콕 찍어냈다. 이를 발견한 미욱은 영문을 몰라 누이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누이. 왜 그래? 울어?"
"몰라 몰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저리 비켜."
계향은 동생한테 차마 속내를 털어놓지 못해 마냥 가슴만 아팠다. 동생인들 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겠냐만도 승업이와 너무 비교가 되어 심술이 저절로 터지는 것이었다.
"그래. 누이 마음, 내가 왜 모르겠어. 승업이와 비교가 돼서 그러는 거지. 그러나, 어쩌겠어. 나한테는 그림 재주가 없는걸."
미욱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남겨 놓고 이내 뒷곁으로 내뺐다. 그러는 동생이 계향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였다. 계향은 동생한테 미안하여 그를 따라 뒷곁으로 달려갔다. 미욱이 장작더미를 깔고 앉아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미안해, 미욱아. 내가 괜한 마음을 먹어, 네 마음을 아프게 하였구나. 승업이를 보자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 나도 누이 앞에서 머슴질하는 거 싫어. 그렇지 않아도 며칠만 더 묵고 여길 떠날 참이었어."
그러자 계향이 동생의 등에 얼굴을 묻고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미욱이도 따라서 코를 훌쩍대며 울었다.
한편, 방으로 끌려들어간 승업이는 찾아온 용건을 연홍에게 대충 설명하고 돈이 든 주머니를 연홍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용후가 술을 마시러 올 때 좋은 안주로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고마운 표시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홍이 펄쩍 뛰며 돈꾸러미를 승업에게 내밀었다.
"승업의 마음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건 자네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네."
"기거이 무슨 말씀입네까?"
"생각해 보게. 그분 성품에 이걸 어찌 받으시겠는가. 만약 나으리게서 내가 이 돈 받은 사실을 아셨다가는 나한테 호통을 치실 것은 물론, 절교하시겠다고 하실 걸세."
"기러니까니, 나으리래 전혀 모르시게, 주안상만 좋게 차려 주시면 되잖습네까."
"나으리 주안상은 걱정 말게. 그건 내가 다 알아서 챙겨 드리니까."
"기럼, 나으리 술값으로 받아 두시라요. 그리고 비밀로 하면 되잖습네까."
"이보게. 나는 나으리께 술값을 내란 적이 한 번도 없네. 그분은 나한테 천주학을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천주님을 믿게 해 주신 분이네. 그런 분한테 술값을 받다니, 말이 되는가. 그러니, 이 돈은 도로 넣어 두게."
"내래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야요."
"그래도 언젠가는 요긴할 때가 있는 것이니, 간수나 잘하게."
이렇게 몇 차례 실랑이가 더 오고 가는 동안, 갑자기 대문이 우당탕 열리면서 여러 사내들의 거친 발소리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대뜸 "여기 연홍이라는 계집이 있느냐." 하는 일갈이 벽력처럼 터졌다. 연홍과 승업은 뜻밖의 침입을 미처 깨닫지 못해 서로 얼굴만 마주 보며 의아해하였다.
"저 사람들이래 누굽네까?"
"낸들 알겠나. 나가 보면 알겠지."
연홍이 일어서는 것을 승업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다시 앉혔다. 승업의 생각에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무작정 나가시면 아니 됩네다."
"이미 집 안에까지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데, 내가 모르는 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연홍이 승업의 손을 뿌리치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밖에는 포졸 세 명이 우악스런 표정으로 장승처럼 버티고 있었다.
"대체, 누구를 찾아왔길래 소란을 피우시오?"
그러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포졸 하나가 성큼 나서며 손바닥에다 육모방망이를 탁탁 내리치며 연홍의 이름을 들먹거렸다.
"내가 연홍이오만, 대체 무슨 일이시오?"
연홍은 이미 화류계에서 닳고 닳은 여자여서 그런지 조금도 기를 죽이지 않고 당당하게 굴었다.
"네 년이 천주학쟁이더냐? 사실이면, 냉큼 나와서 오라를 받아라."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오라를 받는단 말이오."
"여러 말이 필요없느니라. 오라를 받지 않겠다면, 끌어 내릴 것이다."
"이보시오. 내 죄명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밝히시오."
"그건 관가에 가면, 자연 밝혀질 일이다."
"죄명을 밝히지 않으면, 나는 따를 수가 없소이다. 그러니 죄명부터 어서 밝히시오."
"나라에서 천주학을 금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더란 말이냐?"
"허면, 내가 천주학쟁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한단 말이오."
연홍은 그들에게 당당하게 굴면서도, 순간 홍경무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의 앙갚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밀고가 들어왔느니라."
"나를 밀고한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이오."
"어허. 말이 많구나. 얘들아. 저년을 냉큼 끌어내려라."
이때 승업이 연홍의 앞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연홍 아씨는 천주학쟁이가 아닙네다. 나으리들이 잘못 아셨시오."
"네놈이 누군데, 감히 공무를 방해하느냐?"
포졸들이 주춤하면서 승업의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그러나 행색으로 보아 세도하는 일가로 보아줄 수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내래 그림 그리는 장승업입네다. 얼마 전에 근정전 어좌 뒤의 병풍 그림을 그렸댔시오."
승업은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급한 생각에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도화서 화원인 모양인데, 포도청 일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물러서시오. 그렇지 않으면 공무방해로 함께 엮을 것이오. 얘들아. 저년을 빨리 끌어내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
그의 호령이 떨어지자마자 포졸 둘이 연홍을 대청에서 끌어내려 무릎을 꿇렸다. 그러자 옥수와 계향이 두 포졸의 장단지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우리 아씨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계향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 댔다. 포졸이 다리를 흔들어 계향을 가볍데 떨쳐 버렸다. 이것을 본 동생 미욱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곧 포졸에게 달려들 기세를 하였다. 이를 보고 찬모가 미욱의 허리를 잡았다. 승업이 다시 연홍의 앞을 가로막고서 밀고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라고 대들었다. 그러나 포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연홍에게 오라를 둘러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연홍 아씨. 조금만 참으시라요. 내래 아씨를 꼭 구할 것이야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승업은 그들을 앞질러 어디론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옥수와 계향의 애고애고 울음소리가 멀리까지 따라붙었다. 이 사태를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은 이용후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어 동대문 밖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그는 뛰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였다. 이 여파가 이용후한테까지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이용후한테 과연 연홍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밀고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연홍과 연루된 사람이 바로 이용후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감히 나서서 연홍이를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어쨌든 이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은 이용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봉길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승업은 주저할 것도 없이 사립짝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용후가 거처하는 방에서 불빛만 희미하게 흘러나올 뿐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나으리, 나으리."
헛기침과 함께 이내 방문이 열리면서 이용후가 밖을 향해 목을 길게 빼었다. 그리고는 누가 왔느냐고 물었다.
"나으리. 승업입네다."
"승업이가...? 네가 웬일로 또 왔느냐?"
"나으리께 긴히 아뢸 말씀이 있어서 왔습네다."
"대체 무슨 일이관대, 이리 급히 왔더란 말이냐. 어여 들어오너라."
"아주 급한 일입네다."
"허면, 빨리 아뢰어라."
"나으리. 연홍 아씨래 포졸들한테 잡혀갔습네다."
"무슨 일로 연홍이가 잡혀갔단 말이냐?"
"포졸들 말로는 연홍 아씨래 천주학쟁이라 하여 잡아간다 하였습네다. 누구래 밀고를 했다고 합네다."
"밀고를 했어? 그게 누구란 말이냐?"
"기건 밝히지 않았습네다. 나으리. 어찌하면 좋갔습네까?"
"어허. 이런 변이 있나. 그게 언제 일이더냐?"
"조금 전 일이라, 내래 막 뛰어왔시오. 어드렇게 하면 아씨를 구할 수 있습네까?"
"글쎄다... 연구를 해야 되겠구나."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잡아 죽인다는 소문입네다. 그러니, 연홍 아씨를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습네까."
"이를 말이더냐. 내 외츨 차비를 하고 곧 나올 것이니, 거기 좀 있거라."
이용후는 승업을 마당에 세워 둔 채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불 밝힌 창호지를 통해 이용후가 그의 아내와 얘기 나누는 모습이 그림자로 훤히 보였다.
두 사람은 순라군들이 도는 시간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거의 뛰다시피 하여 청계옥에 당도하였다. 청계옥은 마치 초상집처럼 여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옥수와 계향을 비롯해서 찬모와 머슴들이 이용후를 보자 마치 구세주를 보듯 다가와 전후 사정을 이구동성으로 풀어 놓기 시작했다. 계향은 그새 눈이 퉁퉁 부어 꼭 벌에 쏘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았느냐.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게 방안을 강구해야 하느니라."
"나으리.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잡히는 대로 모두 죽인다 하옵니다."
계향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제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허. 입을 조심하렸다. 침착해야 한다고 이르지 않았더냐."
"너무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사옵니다. 나으리. 우리 아씨를 구해주셔요. 우리 아씨가 무슨 죄가 있사옵니까."
"알았느니라. 대체, 밀고자가 누구라 하더냐?"
"포졸들이 말은 아니 했지만, 제 생각에는..."
계향이 말을 잇다 말고 갑자기 옥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이용후가 대뜸 옥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옥수, 너는 알고 있느냐?"
"나으리. 제가 어찌 밀고자를 알겠사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옥수가 볼을 부르르 떨며 계향을 곧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계향이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고는 몸을 외로 꼬았다.
"내가 언제 형님을 지목했습니까?"
"이년아.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 못쓰는 것이야. 감히 누구한테..."
가만두었다가는 두 여자가 곧 머리채를 잡고 싸울지도 모를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자 이용후가 두 여자에게 호통을 쳤다.
"지금 이 자리가 다툼하는 곳이냐? 포도청에 끌려간 연홍이 지금쯤 고초를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판에, 싸움질이라니 원... 이왕 이리되었으니, 날이 밝는 대로 내가 사정을 알아볼 것이다.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거라."
"모두들 물러가고 방에는 이용후와 승업이만이 앉아 있었다. 승업이 보기에도 이용후도 당장은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으리."
"왜 그러느냐?"
"소문에 듣기로, 포도청에 뇌물을 주면 죄수들을 풀어 주기도 한다고 하옵네다. 정말, 기럴 수만 있으면 좋갔습네다."
"실은, 지난번에도 그런 방법으로 연홍이 풀려났느니라. 허나..."
"나으리. 뇌물을 얼마나 주면 되갔습네까?"
"그걸 네가 알아서 어찌하겠느냐."
"나으리. 실은 저한테..."
승업은 아직도 주머니에 넣고 있는 돈 꾸러미를 꺼내 보이며 대충 설명하였다. 그러자 이용후가 눈을 지그시 감아 한숨을 내쉬었다.
"네 생각은 기특하다만, 이번에도 그것이 통할지 의문스럽구나. 요즘의 천주교 탄압이 전에 없이 강경해서 하는 말이다."
"나으리께 감히 송구한 말씀입네다만, 내일 포도청에 가셔서 방법을 알아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네다."
"실은,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니라."
"만약에, 뇌물을 주어 아씨를 빼낼 수 있다면 돈을 변통해야 하지 않갔습네까."
"그야 더 이를 말이겠느냐. 돈이 얼마가 들든, 우선 사람부터 구하고 볼 일이다. 어쨌든, 승업이 수고가 많았느니라."
"당연한 일이 아닙네까. 그리고, 나으리."
"왜 그러느냐?"
"나으리께서도 조심하셔야 합네다."
"알고 있다. 허나, 내 운명이 그리되면 할 수 없지 않느냐. 이는 곧 누구나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있음이야. 그래서 인명은 재천이라 하는 것이다."
"하오나, 나으리만큼은 아니 되옵니다. 만약에..."
"만약에, 무엇이냐? 너도 따라 죽겠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야?"
"네, 나으리."
"못난 것 같으니라구. 이놈아. 인명은 재천이라고 방금 이르지 않았느냐. 제 목숨이라고 해서 스스로 죽을 수 없는 것도 하늘의 뜻임을 알아야 해."
"기렇디만, 나으리가 아니 계시면 내래 누구를 의지하고 삽네까."
"닥치거라. 어른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차후로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내 앞에 다시는 서지 못할 것이야. 명심하렸다."
"..."
나으리께서 아무리 기러셔도, 내래 따라 죽갔시오.
승업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용후 앞에 엎드렸다. 이용후는 어깨를 들먹이는 승업을 내려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