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는 싫어(Asking for Trouble)
혼자는 싫어(Asking for Trouble)
Miranda Lee
1
세리나는 그가 식당에 들어오는 순간 알아보았다.
일순 심장이 멎는 듯했다. 애런 킹슬리야...
언젠가 그를 만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긴 했다. 중부 해안지대에 돌아와 살고 있었으니까. 고스퍼드는 애런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은 고스퍼드가 아니다. 그곳에서 몇 킬로 떨어진 투운 만의 고층 모텔 레스토랑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몇 달간 웨이트리스로 일해 왔다. 그런데 하필 이런 곳에서, 그것도 지금 일하는 중이라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잠깐 인사만 하고 헤어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도 없으니 괴롭다.
그녀는 그가 식당안을 들러보자 긴장했다. 다행히 그의 시선은 바 뒤에 숨어 있는 그녀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안심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가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하게 되면 그에게 다가가 뭘로 한잔하시겠느냐고 물어야 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다.
그가 비어 있는 식탁들 중 하나로 안내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알아볼까? 그녀는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매달렸다.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눈에 띄게 큰 키에 늘씬한 몸매, 금발머리,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브리지트 바르도를 방불케 하는 앞으로 쏙 나온 두툼한 입술.
그 입술이 얼마나 싫었던가! 그 입술을 떼어낼 수 있었으면 그렇게라도 했을 것이다. 몸매는 옷으로 가리고 머리는 자르거나 염색을 할 수도 있다. 눈도 화장으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입술만은 도리가 없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바에서 나왔다. 긴장으로 가슴이 뛰었다. 다행히 애런은 신문을 펼쳐 들고 있다. 운이 좋으면 그가 주문할 때 고개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세리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애런이 정장을 하고 〈시드니 모닝 해럴드〉를 읽으며 혼자서 점심을 먹는 것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에 자신의 긴장도 잠시 잊었다.
11년 전 그 괴로운 밤 이후 그의 인생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해졌다.
물질적으로는 많은 풍요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의 완벽한 잿빛 정장과 성공한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전처럼 모양 좋은 머리를 덮고 있는 짙은 갈색 머리칼도 한올 삐진 흔적이 없다.
하지만 저렇게 나이 먹은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 그는 ... 몇 살 이더라? 그녀는 지난달에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 그는 그녀보다 5학년이었으니까 지금 서른세 살이 된다. 아니, 서른네 살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보다 1년 일찍 학교에 입학했고 그때 애런은 졸업반이었으니까 그녀는 그에게 반해 있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른 여학생들 대부분이 그랬으니까. 애런은 학생회장이었고 축구와 크리켓 팀의 주장이자 웅변반 반장이었다.
그리고 육상 챔피언이자 전 오스트레일리아 학생대표 인명구조원의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매력적으로 그은 몸매와 섹시한 푸른 눈은 모든 여학생의 인기를 독점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나오미에게만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그와 같은 반의 아름다운 갈색 머리의 여학생으로 둘은 열여섯 살 때부터 한 쌍이었고 서로에게 빠져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나오미가 졸업반이던 해에 임신을 해서 학교를 떠나자 모두들 놀랐다. 애런이 졸업하는 대로 결혼식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던 사람들은 두 사람이 1년이 지나서야 결혼을 함으로써 또 한 번 놀랐다.
그 후 몇 년간 애런은 지역적으로나 전국적으로 메스컴을 크게 타는 인물이 되었다. 상금이 많은 인명구조 대회마다 그가 휩쓸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수 킬로 수영한다든지 서핑보드 젓기, 해안 달리기 등이 포함되어 있는 대단히 탁월한 육체적 힘이 요구되는 대회들이었다.
세리나는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그의 활동을 지켜보았다. 그에 대한 기사나 사진마다 오려서 서랍에 감춰 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향을 떠난 직후부터 그의 확약상도 자취를 감추었다. 1년 전쯤인가 그녀는 어머니에게 그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시드니 어디선가 일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궁금했다. 그에게 직접 물어 보면 되잖아. 그가 앉은 식탁으로 다가가는 그녀에게 이성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하지만 궁금증보다 당혹스러운 심정이 더 강했다. 그를 모른 체하는 것이 급선무다.
"하잔 주문하시지 않겠어요, 손님?" 세리나는 그가 고개를 들지 않길 바라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들고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분명 알아본 기색을 보였다. "아니, 세리나.마치먼트 아닌가." 그는 신문을 접어 식탁에 놓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 밑의 그늘도 지쳐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매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설마 나를 몰라보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가 도저히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난 별로 변하지 않았잖나! 그리고 당신도 별로...."
그의 놀란 푸른 눈이 가늘어지면서 그녀의 위아래를 천천히 냉소적으로 훑었다. 세리나는 평범한 검은 스커트에 흰 셔츠, 검은 나비넥타이의 제복에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는 말총처럼 가지런히 묶은 자기 모습이 지극히 평범하리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애런이 눈길로 자기 옷을 벗겨 내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가슴 속에 낯익은 분노가 서리는 것을 느꼈다. 왜 남자들은 날 보면 곧 섹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을 터득한지 오래다.
"애런?" 그녀는 차가운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런 옷을 입고 있어서 몰라봤어요. 방금 시드니의 증권회사에서 빠져 나온 것 같군요."
그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렇지, 오늘 아침 증권시장이 문을 열었을 때 거기 있었고 지금은 기쁘게 빠져 나왔지. 망할 놈의 그 정신병원을."
그녀는 애써 놀라움을 감추려고 했지만 실패한 모양이다.
"그렇지." 애런도 딱딱하게 말했다. "때때로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니까. 애런 킹슬 리가 세무사이자 투자 상담가라니. 어쨌든 내 명함에는 그렇게 써 있소. 파도타기 하던 시절하고는 거리가 멀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당신 얼굴을 보니 지친 눈에 위안이 되는군. 잠깐 앉아서 이야기 좀 할 수 없나?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 좀 해봐요. 지난번에... ." 문득 그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부터."
애런이 무슨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1년 전 그 괴로웠던 날 밤에 일어났던 사진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때 세리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철없던 풋내기, 반명 애런은 20대 초반으로 행복한 결혼을 하고 있었고 크게 성공했었다.
그날 밤의 수치스러운 일들을 떠올리자 그녀는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날 밤 학교에서 열리는 디스코 파티에 가지 않았던들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애런이 마침 그 자리에 후원자 자격으로 참석하지 않았던들, 그녀가 그의 주의를 끌어 그의 눈앞에서 춤을 추지 않았던들.. 재즈 발레교습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훌륭한 춤꾼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볼륨 있는 몸매의 동작은 무척 관능적이었다.
물론 순진했던 세리나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가 수반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이 파티장에 있는 다른 남자들의 달갑잖은 눈길을 끌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평소에 그녀를 쫒아 다니던 남자아이 2명이 그녀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사춘기의 욕정에 불이 붙고 말았다. 몰래 맥주를 마시고 있던 터라 그들은 더욱 대담해졌다.
그들이 그녀를 댄스홀 뒤에 창고로 유인했고 막 한 녀석이 그녀를 덮치려는 순간 애런이 들어와 세리나를 구해 주었다.
애런은 녀석들에게 적당히 매를 안긴 다음 입에 못담을 욕설까지 퍼부어 내쫒고는 눈물을 흘리며 풀죽어 있는 세리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에게 감사를 하긴 했어도 그녀는 그의 얼굴에 얼룩진 조롱 섞인 표정이며 그녀의 책임도 있다고 질책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그의 태도를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는 그 뒤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가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는지 의아해했다. 애런은 아버지의 분노를 감지하고 사태를 희석시켜 전하려 애썼다. 하지만 애런이 무슨 말로 얼버무리든 아버지의 분노를 삭힐 수는 없었다. 그녀의 찢겨진 드레스도 아버지의 분노를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아버지는 길길이 뛰며 그녀를 믿지 않는 건데 그랬다며 분노를 퍼부어댔다. 열세 살 때부터 남자애들이 꽁무니를 따라다녔다는 둥 품행이 좋지 못한 여자로 타고 나는 여자들이 있는 법이라는 둥 하며 그녀를 못 말리는 골칫덩이라고 낙인찍었다. 누구나 그녀를 한 번만 봐도 안다고, 너 같은 여자들은 꽁꽁 묶어 가둬야 한다면서 졸업시험까지 6개월 간 집에 가두겠다고 했다. 여자 친구 집에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애런은 눈앞에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에 고개를 흔들며 가버렸다. 세리나는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세리나는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비난하는 그런 여자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자애들과 있으면 오히려 수줍어하는 편이고 남자들 시선을 끄는 조숙한 몸매 때문에 더욱 당혹해했다.
그녀는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싫었고 그들의 눈길을 바라지도 않았다. 애런의 눈을 끌려고 한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남자친구도 없었다. 아버지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남자애들과 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디스코 파티는 그녀의 어머니가 고지식하고 완강한 아버지를 설득해서 어렵게 승낙을 얻어낸 덕분에 가게 된 것이다.
돌아보니 그녀가 애런에게 그렇게 속절없는 마음을 바친 것도 아버지의 지나친 과보호 때문이다. 사춘기의 그녀는 어디다 정열을 쏟을 데가 필요했던 것이다.
소녀들이 팝스타를 동경하듯 그녀는 파도타기 챔피언을 그렇게 동경했다.
십대 시절에 겪은 괴로움을 떠올리자 그녀는 가슴이 아파 왔다. 아버지를 대할 때 겪었던 갈등과 괴로움이 떠올랐다. 왜 아버지는 다른 여자 친구들의 아버지와 다를까? 왜 늘 그녀를 나쁘게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애런을 보면서 그때 애런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그녀에 대한 아버지의 비난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아마 믿었을 것이다. 그녀는 비참한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날 밤 그는 분명 그녀가 역겹다는 표정이었다.
"그간 많은 세월이 흘렀지?" 그가 말했다. 그녀는 그의 차갑고 조소 어린 눈길과 말투에 놀랐다. 그녀의 등골 위로 한기가 흘렀다.
여전히 애런은 따스하고 당당하다. 그런데 지금의 애런한테서는 어디닞 황량한 어둠이 느껴진다. 그녀는 문득 그의 아내는 그의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그와 나오미가 아직도 부부라면 말이지만.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그이 왼손으로 갔다. 손가락에 아직도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녀의 마음속에 상반되는 감정이 일었다. 안심이 되기도 하고 실망이 되기도 했다.
그 순간 알았다. 십대 시절에 그에게 반했던 감정이 지금도 여차하면 다시 불붙을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결혼한 남자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을 작정이다. 그녀는 그와의 대화를 최대한 짧게 하기로 했다.
"미안해요, 애런. 앉을 수 없어요. 규정이 그래요."
그는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텅 비었는데 뭘."
화요일 2시 15분이니 그럴 만하다.
"그냥 여기 서서 당신 식사가 올 때까지 이야기나 하기로 하죠." 속으로 혼란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애써 가볍게 말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로 자꾸 시선이 갔다.
그의 매혹적인 눈이며 포크를 나른하게 돌리고 있는 우아한 손가락으로 , 자신의 뺨에 심상찮은 홍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색한 상화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렇게 멍청히 서 있는 대신 얼른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고 있으면 그의 오해를 살 뿐이다.
남자들은 섹스 문제에 조금만 눈치를 주어도 금방 반응한다. 결혼한 남자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녀는 터득했다. 희한한 일이다. 애런이 나오미 말고는 다른 여자를 쳐다보지 않았던 때도 있었는데, 디스코 파티장에서의 그날 밤도 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 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고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애런은 예전의 애런과 다르다.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지금 어리석게도 그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는데 여기 있는 애런은 그러한 관심을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하는 데에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남자 같다는 생각이다.
"좋을 대로."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얘기해 봐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당신 아버지가 결국 당신을 퀸즐랜드로 보냈을 텐데. 놀란 표정은 짓지 말아요. 당신이 고향을 떠났고 당신 아버지가 다시는 집에 얼씬도 말라고 명령한 일은 고향사람들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세리나는 흠칫했다. 작은 마을은 그래서 싫었다.
사람들이 소문을 주고받고 이리저리 왜곡시킨다. 몇 년 후에 오빠들에게서 당시 그녀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부남과 도망쳤다는 둥 별의별 흉측한 소문이 많았다.
실은 그녀는 졸업시험이 끝난 후 친구들과 함께 북쪽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돌아오면 2월에 사범대학에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집에 전화를 하던 중에 아버지와 언쟁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같이 떠난 친구들 중에 남자아이들이 몇 몇 있는 것을 알아내고 그녀가 남자아이들 중 하나와 어울리는 줄 알고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계집애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맞섰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얌전한 소녀인데 아버지의 편협함과 자신에 대한 편견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떠나겠노라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그녀의 처사에 대한 노여움으로, 앞으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도 말라고 선언했다. 퀸즐랜드에서 일자리나 찾아보라는 것이다. 배은망덕하고 타락한 딸자식 따위는 거둘 마음이 추호도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충실히 지켰다. 퀸즐랜드에서 사귄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던들 그녀는 살아나갈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학업을 계속해 그럴 듯한 직업을 가질 기회가 사라졌으니 보수가 하찮은 일자리만 전전해야 했다. 나름대로 노력해서 보수가 더 나은 일자리를 얻기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꼭 남자들이 나타나서 일을 망치곤 했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추근거리면 그녀는 그 일자리를 떠나 다른 일자리 혹은 다른 도시로 가야 했다.
고된 인생이었다. 정말로 고달펐다. 그녀는 어머니가 그리웠고 가족이 그리웠다. 별로 가깝지도 않았던 두 오빠까지 그리웠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외로운 시절 어머니와 나눈 편지들을 보석처럼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몇 년 전, 어머니가 그녀에게 크리스마스에 오라고 초대한 뒤로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초대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와 있는 동안 아버지는 결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종종 그녀는 아버지가 괴로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 보면 아버지는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아버지는 올해 초에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애런에게 건조한 어투로 일러주었다. "그래서 내가 집에 돌아온 거예요. 어머니 역시 몇 달 뒤에 심장마비로...."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그녀는 목에 주먹 같은 멍울이 치받쳐옴을 느꼈다. 어머니와 같이 지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랬군." 애런이 동정 어린 얼굴을 지어 보였다. "미안하군. 난 몰랐소. 그건 그렇고 당신은? 당신 같은 여자는 이미 결혼을 했겠지?"
할 만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당신 같은 여자〉라는 말에 자동적으로 분노가 끌었다. 아버지도〈너 같은 여자〉라고 내뱉곤 했다. 다른 남자들도 종종 그런 소리를 했고 그것은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세리나는 그 말을 들으면 늘 언짢았다. 이러고 감수성이 예민했을 무렵에는 금발의 뇌쇄적인 모습을 바꾸려 노력했다. 머리를 잘라 보기도 하고 염색도 해보았다. 하지만 갈색 머리나 붉은 머리는 정말이지 보기 흉했다.
지금도 그녀는 남들의 눈길을 끄는 몸매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한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에게서 성적 매력만 읽어내려는 사람들에게 차갑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예전의 수줍고 자신 없는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뇨."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혼 안했어요. 저, 이만 돌아가야 해요, 애런.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뭘 마실지 정했어요?"
"맥주로 하지."
"좋아요 곧 가져올게요."
그가 뒤돌아서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목덜미가 근질거린다는 것 말고는 .카운터 뒤에 안전하게 숨자 그녀는 그가 있는 곳을 건너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녀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애런 역시. 그녀는 뺨에 홍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돌렸다.
애런이 알 수 없는 눈길을 한 번 보낸 것만으로도 자신이 이렇게 동요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면 그것은 흥분이었을까? 성적인 흥분? 그래, 그러겠지, 이 바보야. 그녀는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그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제일 비슷한 흥분을 느껴 본 것은 애런 앞에서 춤을 추었던 그날 밤이다. 하지만 창고에서 남자아이들에게 습격을 당한 다음부터 그녀는 남자들을 경계하며 멀리하게 되었다.
특히 공격적으로 그녀에게 추근대는 남자들에게는. 그런 남자들 대부분은 첫 번째 데이트에서부터 그녀와 잠자리를 하려고 하기 일쑤였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자 그녀는 이상형의 남자를 만날 기회가 영 없는 것이 아닌가 해서 절망했다. 그런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싶었다.
가족에게서 배척당한 처지인 만큼 그녀는 더욱더 따스하고 다정한 남자를 만나 자신의 가족을 이루고 싶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폴에게 더욱 마음이 쏠렸고.
폴은 다정하고 상냥하고 친절했다. 그를 만날 당시 그녀는 스물여섯 살 이었다. 그때 폴이 나타나 그녀를 감싸 주었다. 그녀는 폴의 사랑을 돌려주려 무진 애를 쓰며 그가 바로 그녀의 결혼할 남자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설득했다. 그와 잠자리까지 해가며 그의 부드러움이 결국은 자신의 오랜 껍질을 깨어 주리라 자신했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폴과의 잠자리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매어두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세리나는 애런을 힐끗 보다가 가슴이 덜컹했다. 애런과의 잠자리는 아무것도 아닐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고말고, 그녀의 속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냐하면 애런은 내 꿈속의 남자잖아. 언제나 그랬어. 알잖아.
하지만 그런 기쁨은 이내 분노 어린 실망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애런이 내 꿈속의 남자가 될 수 있어? 결혼한 남자인데! 그와 관계된 어떤 것이든 상상하는 것만도 말썽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소동을.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바에 앉은 손님이 주문한 위스키소다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마워, 달링." 그녀가 잔을 건네자 손님이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직업적인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남자는 그 미소를 오해하고 애런의 맥주를 따르는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의 뺨에 오른 홍조가 그의 오해를 산 모양이다. 그녀는 애런의 맥주를 가지고 갈 핑계가 있어서 차라리 기뼜다.
"여기 있어요." 그녀는 애런의 식탁에 잔을 놓고 서둘러 가려 했다.
"가지 말아요."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녀가 돌아섰을 때 그의 눈빛은 달랐다. 두 눈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고고 있었다.
"난... ."
그는 싱긋 조소를 날렸다. "설마 저 손님한테 빨리 돌아가고 싶지는 않겠지? 당신이 잘 다루기는 했지만 말썽거리잖소. 당신이 이리로 올 때 저자의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자, 앉아서 당신 이야기나 해요." 그는 옆의 의자를 당겼다. "말썽은 없을 거야. 새 손님이 오면 내 일러주지."
마음속에선 앉지 말라는 경고의 소리가 울렸지만 그녀는 앉았다. 허약해 빠진 계집애 같으니! 그녀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뭘 알고 싶으시죠?" 그녀는 무심한 척 물었다.
"모두 다. "
"모두 다?"
애런의 입술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심했나? 그럼 당신이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정도로 만족하지. 남자친구가 있는지도. 없다면 언제 여기 일이 끝나서 나와 같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성미가 대단히 급하시군요."
그가 쓴 미소를 띠었다. "시간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소. 그리고 내가 다시 이 근처를 지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오. 출장차 온 길이니까. 난 아주 바쁜 사람이오."
"그렇겠죠." 그녀는 실망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우러러 보던 남자가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흥미를 보인 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뛰는 것도 유쾌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에 유혹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한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지?" 애런이 채근했다.
그녀는 마음을 다졌다. "난 고스퍼드에 있는 내 고향집에 살아요. 그리고 지금은 남자친구가 없어요. 하지만 언제 이곳 일이 끝나는지는 알 것 없어요. 당신하고 나가지 않을 거니까."
잘했어! 드디어 이기고 말았어. 하지만 의기양양한 대신 그녀는 바보 같게도 가슴이 허전했다.
애런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왜지?"
그녀는 분노가 솟았다. 솔직히 대답해 주라구. 안 그러면 곧 후회하게 될 테니까."난 결혼한 남자하고는 외출하지 않아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거친 웃음이었다. "아주 도덕적이군, 세리나. 그리고 난 정말 멍청하고. 당신이 모르는지는 몰랐소. 난 지금은 결혼한 몸이 아니오." 순간 이혼했나 하고 생각하는데 애런이 덧붙였다. "나오미는 작년에 암으로 짧게 투병하다 죽었지."
세리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름다운 젊은 아내와 암이라니. 하지만 충격 너머로 느껴지는 것은 기쁨이었다. 애런은 이제 결혼한 몸이 아니다. 더 이상 금단의 열매가 아니다. 그녀의 꿈 속의 남자였던 애런이...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인정해야 해. 그는 이제 더 이상 꿈 속의 남자가 아니다. 그의 상황은 달라졌다.
나오미의 죽음을 전하는 태도에서도 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예전의 쾌활하던 청년에서 지금의 그는 냉소적이고 외로운 홀아비가 되었다. 슬픔과 절망에서 나온 조소 어린 태도로 세상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데이트 신청이 뭔가 색깔이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안 그런가? 그가 내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조소 어린 생각에 그녀는 스스로 화가 났다. 과거의 남자 경험을 갖고 모든 것을 색안경 쓰고 볼 필요는 없잖을까? 남자라고 다 섹스에 미쳐 있는 것은 아니다. 애런은 외로워서 친구가 필요한지 모른다. 이야기를 나누고 학창시절을 같이 회상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때때로 즐거운 일이다.
하길 세리나의 학창시절이라는 것이 회상할 만큼 신통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녀 자신의 너무나 평범한 성적도 학교생활을 성공적으로 만드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빠들이 우수한 할생인데 비해 그녀는 오빠들 같은 재능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녀가 늘 신통하지 못한 남자애들에게만 관심을 가진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였다. 그녀의 관심은 애런뿐이었으니까. 당시 그는 남자애가 아닌 어엿한 남성이었다.
그 생각까지 이르자 당장 당명한 문제가 떠올랐다. 애런 킹슬리...
"너무나 안됐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무척 힘드셨겠어요."
"그랬지, 그리고 크리스틴에게도."
"크리스틴? 아, 당신 딸 말이군요. 다른 아이들은 없나요?"
"그렇소?"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더 이상 어두운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 그의 미소가 씁쓸했다.
"난 오늘 옛친구를 만나서 같이 외출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예정이오. 당신도 내가 실없는 난봉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
그녀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애런이 실없는 난봉꾼일 수도 있다. 그동안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 게다가 냉소 어린 눈을 한 애런은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그동안 어떤 일들이 그를 이렇게 변모시켰을까.
하지만 속으로 이렇게 왈가왈부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란 것을 그녀도 마침내는 인정했다. 결국은 그와 외출을 하게 될 테니까. 그가 나쁜 남자든 좋은 남자든, 아니면 위험한 남자든.
"오늘 오후는 안돼요." 그녀는 설명했다.
"고스퍼드로 가야 하거든요. 우리 가족이 살던 짐을 내놓았어요. 오늘 오후 늦게 부동산 소개업자가 살 사람을 데리고 올 예정이에요. 시드니에서 오는 사람이니 어쩔 수가 없군요. 하지만 오늘밤에는 일을 안하니까... ." 그녀는 애런이 희한한 것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는 바람에 말꼬리를 흐렸다. "왜... 왜요?"
"믿을 수 없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요. 내가 살 사람이오."
"당신이오?"
"그래, 나요. 적어도 내 생각에는. 내가 볼 집을 설명들은 것이 전에 내가 당신을 데려다 주었던 집하고 아주 비슷하오. 2층짜리 식민지 시대풍 집이지, 흰 셔터가 달린?"
"그래요!" 그녀는 경악했다.
"그리고 부동산 소개소 이름이〈센트럴 코스트〉주택 상담소고?"
"그래요. 맙소사, 믿을 수 없네요!"
"그렇군. 이건 우리 둘을 이어 주는 운명인 것 같군."
그는 여전히 냉소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위험해. 저 미소에 씌어 있다. 위험해!
그녀는 애런하고 외출하면 어떤 위험이 뒤따를까를 생각해 봤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가 그녀와 긴 관계나 심각한 대화를 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아직도 아내의 죽음으로 마음에 멍이 들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아까 생각했던 대로다.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던 대부분의 남자들처럼 애런은 섹스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고 뒤탈 없는 섹스, 하룻밤의 불장난. 그가 과거에 그녀의 행실에 대해 내렸을 결론에 덧붙여 지금 그녀가 아직 미혼이라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횡재를 만났다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 생각에 그녀의 온몸이 흠칫했다. 그녀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일어섰다. "미안해요, 애런."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데이트는 나중에 해야겠군요. 방금 기억했는데 루퍼트 오빠가 어머니의 부동산 문제를 의논하러 이따가 오기로 했어요. 하지만 부디 와서 집을 둘러봐 주세요."
마침 애런의 식사가 온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분명 입씨름을 할 태세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그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가늘어진 입술은 이 뜻밖의 사태를 타개하겠다는 결심을 보여 주고 있었다. 늦은 저녁 식사나 그 비슷한 유혹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세리나는 음식을 가져온 웨이트리스가 서 있는 틈을 이용해 도망쳤다.
"또 봐요, 애런." 그녀는 식탁에 의자를 밀어 넣었다.
"부동산업자한테 4시 30분 넘어 집에 가 있겠다고 했어요. 당신이 안 오리골 해도 이해할게요. 시드니까지 여행 잘하고 너무 과로하지 말아요."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바로 행했다.
애런이 식사를 마친 후 그녀에게 건너올 줄 알았다.
하지만 대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묘한 얼굴로 그녀를 건네다 본 뒤 그녀 쪽으로 차갑고 예의 있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식당을 나갔다.
그녀는 억눌렀던 한숨을 토해냈다. 자신이 얼마나 긴장해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애런이 집을 보러 온다면 이번에는 적어도 부동산업자하고 같이 올 것이다. 그것만이 지금은 위안이 되었다.
2
하지만 애런은 세리나가 집 앞에 그녀가 타고 온 오토바이를 세우고 난 지 10분도 안되어 혼자 나타났다.
그녀는 2층에서 막 샤워를 마치고 난 참이었다. 밖에서 차가 서는 소리가 들렸다. 속옷 차림으로 창으로 다가간 그녀는 애런이 엷은 푸른색 BMW에서 내려 현관으로 걸어오는 것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애런이 그리 쉽사리 물리쳐질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는데.
그녀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희 ㄴ 진 바지에 짧은 상의를 재빨리 입었다. 긴 금발이 젖고 헝클어진 채로 등에 늘어져 있지만 얼른 뒤로 빗어 넘길 시간밖에 없었다. 초인종 소리에 놀라 그녀는 맨발인 채로 2층을 달려 양탄자 깔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밑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얼굴을 차분하게 꾸몄다.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리고 그녀는 문을 열었다. "왔군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부동산업자는 어디 있죠?" 그녀는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가 혼자인 것을 모르는 척했다.
그는 푸른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불필요한 소갭를 낼 것은 없지." 그는 매끄러운 어조로 말했다. "집이 내 맘에 들면 우리끼리 사적인 계약을 하면 되잖소."
사적인 계약이란 말에 그녀는 등줄기로 한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나친 상상은 말라고 도리질했다.
"집이 맘에 안 들지도 모르죠." 그녀는 약간 신랄한 말투로 말했다.
애런이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불안을 느꼈다. 그 불안에는 뭔가 별로 좋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대꾸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밖에 세워놓으면 맘에 드는지 어떤 지도 모르잖소."
"아... ." 그녀는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차분하게 호흡을 하고 뒤로 물러나 애런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보다시피 개방식으로 된 집이에요.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거실과 식당이 있고 왼쪽으로 계단이 있어요. 그리고 게단 밑에는 물건을 보관해 놓는 선반이 있고요."
그는 집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녀에게 눈을 돌려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그녀의 젖은 머리칼과 아직도 붉은 뺨을 훑더니 마침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
세리나는 몸이 굳었다. "이쪽은 좀 더 편한 곳이에요."
퉁명스럽게 가리키며 집 뒤쪽으로 걸어갔다. 아치형 입구를 들어서면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는 주방 겸 식당이 나왔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애런은 서재를 보러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게단 맞은편에 있는 아담하고 매력적인 방으로 통풍이 잘되는 커다란 창문 너머로 양치식물이 자라는 작은 뜰이 내다보였다.
그녀는 주저하며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너머로 방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가 재봉실로 쓰던 방이에요."
"예쁜 방이군." 애런이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녀의 물기가 젖은 눈을 보았다. "어머니가 그립군?" "그래요." 그녀는 간신히 대꾸하고 눈물이 터질까 봐 몸을 돌렸다.
그녀가 주방으로 가자 이번에는 애런이 따라왔다. "찬장은 진짜 원목이에요."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붉은 삼나무 원목이죠."
"아주 근사하군." 그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리나는 맥박이 뛰는 것을 무시하고 말했다. "위층으로 가서 다른 방들을 볼까요?"
"좋도록... ." 애런이 대답했다.
그녀는 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조롱의 기미는 없었다.
하지만 계단을 오를 때 그가 뒤에 바짝 걸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 괴롭게 의식되었다. 상의 가 헐렁해서 그나마 엉덩이를 덮으니 다행이었다.
"위층 양탄자는 좀 더 섬세한 색깔이에요." 그녀는 긴장을 감추려 말했다. "각 침실도 방마다 다른 색채로 꾸며져 있고요."
그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처음 두 개의 침실을 보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세 번째 침실을 보자 그의 입술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당신 침실이겠지?"
그녀는 레이스 침대 깔개며 꽃무늬 커튼으로 장식된 분홍색 침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어머니 취향으로 꾸며진 방이다. "그래요."
애런은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위에 놓인 은테 두른 액자를 집었다. 한 식당에서 사진사가 찍은 것으로 루퍼트 오빠의 스물한 번째 생일 모임을 담고 있었다. 가족들 모두 미소 짓는 얼굴로 식탁에 삥 둘러앉아 있는 사진으로 열 세 살이던 그녀는 분홍빛 태프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애런이 그 사진을 계속 내려다보자 그녀는 불안해졌다. 옆에 가서 그의 시선을 따라 사신 아래쪽을 보았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사진 속에 있는 자신의 둥근 가슴이 드레스 위로 봉긋이 솟은 것을 보았다.
때마침 그녀의 가슴 한쪽이 그의 팔에 닿은 것을 알고 그녀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떨리는 손을 목에 갖다 댔다.
애런은 어깨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사진을 찍을 때가 몇 살이었소?"
"열세 살이었어요... ."
"열세 살이라." 그는 찬찬히 사진을 보다가 다시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이렇게 성숙하다니 이 때문에 괴로웠소?"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 쉽지는 않았어요."
애런은 이해가 간다는 듯 혀를 찼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나도 어린 나이에 꽤 성숙했었지 열 세 살에 벌써 192cm였소. 더군다나 마른 체격도 아니었지. 하지만 행동도 욕구도 완벽한 성인 남자이면서 내실은 그렇지 못했지. 그래서 많은 실수를 거듭했소."
"당신이요, 애런?" 그녀는 놀랐다. 그가 말하는 실수란 나오미와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녀를 임신시킨 일을?
그는 입가를 찡그렸다. "그렇소, 내가. 당신은 내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으리라고 생각했소? 유명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오. 천만에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요. 이젠 유명인사 같지 않으니까. 공인이 아닌 사인으로 있을 수 있겠네요 ."
그의 얼굴에서 황량한 표정이 사라지고 아까 보았던 차갑고 딱딱하고 단호한 표정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겁이 났다. 애런의 구석구석이 그녀를 겁먹게 했다. 쉽게 변하는 그의 기분에서부터 자신의 몸이 그에게 보이는 반응까지 모두. 어떻게 조종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다.
"좋고말고." 그가 대꾸했다.
마침 전화벨이 울려 다행이었다.
"금방 올게요." 세리나는 얼른 복도를 달려 전화가 있는 큰 침실로 갔다. 수화기를 들고 올려다보던 그녀는 애런이 그녀의 뒤를 따라와서 욕실을 둘러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녀는 그가 바닥에 놓인 젖은 수건을 접어 수건걸이에 걸어 놓고는 그녀의 화장품 병들을 손으로 쓰다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때 전화기 속에서 초조한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그녀는 얼른 돌아섰다.
"세리나, 듣고 있니? 젠장, 대답해."
맙소사, 루퍼트 오빠! 조금 있다 만나기로 했는데...
"아, 나예요." 그녀는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 조심하며 대답했다.
"왜 그래, 전화선이 잘못되기라도 한 거야? 잘 안 들리니까 좀 크게 말해. 그래, 어제 왔던 사람은 어떻게 됐어? 사겠다고 했어?"
"아뇨. 뒤뜰 나무들 위에 아치형 정자가 있어서 풀장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가버렸어요."
"이런 망할. 어머니가 왜 그놈의 정자를 거기다 세웠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네가 말렸어야지. 그거 만들 때 네가 어머니와 살고 있었잖아?"
"말도 안 돼." 그녀가 대꾸했다. "그 나무들은 엄마에게 너무나 소중한 거라구요. 크리스마스 때마다 엄마가 나무가 자란 것을 재보던 일들 생각 안 나요. 루퍼트?" 오빠 이름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고 그녀는 아차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냐? 감상일 뿐이야."
"감상이 중요한 사람들도 있어요." 그녀는 신랄하게 말했다. 하지만 루퍼트에게는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 사치스런 아내가 고급스런 생활을 해나가는 것뿐이다. 아이라든가 든든한 가족 간의 유대 따위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잔소리를 늘어놓지 말아. 정말 못 말리는 애라니까!"
"나 끊어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 집을 사려는 손님이 와서 둘러보고 있어요. 누가 알아? 오빠가 오면 좋은 소식을 들려주게 될지." 그녀는 애런에게 오빠가 온다는 눈치를 보이려 말했다.
"못 간다. 전화한 이유도 그거야. 필립네하고 동부인해서 크리스마스 휴가 여행을 떠나러 유람선을 예약해 놨어. 그러니 넌 크리스마스에 다른 계획을 짜라고 이야기 하려고 전화한 거야. 넌 죽어도 전통을 지키는 얘잖니?"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네가 작년에 선물이며 크리스마스트리를 끌고 오던 모양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쨌든 크리스마스에 혼자 지내지는 않겠지. 너 같은 애하고 하루 지낼 남자들은 쎄고 셌을 테니까."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루퍼트가 한〈너 같은 애〉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말은 이미 익숙해졌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혼자 지내다니 - 더구나 올해 같은 해에...
가슴이 미어져 왔다.
"그래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하지만 걱정 말라구. 가서 즐기기나 해." 그녀는 신랄한 투를 감출 수 없었다.
갑자기 짧은 침묵이 흐르더니 초조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런 식으로 나오지 마. 젠장... 감정으로 위협해 봤자 소용없어. 넌 네 인생을 살고 난 내 인생을 사는 거야. 알았지. 그럼 끊는다. "
"안녕." 그녀는 수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루퍼트 오빠가 온다는 핑계를 무산시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천천히 돌아서다 애런의 담담한 얼굴과 마주쳤다. "루퍼트가 오지 않는 거로군."
"그래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럼 나와 같이 외출할 수 있겠군?"
"아뇨." 그녀는 너무나 화가 나서 에의를 차릴 여유도 없이 쏘아붙였다.
"왜지?"
"맙소사. 또 시작이군요. 이봐요, 애런. 난 당신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데이트를 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믿든지 말든지 그런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구요. 자, 그럼 이만 당신의 우아한 지체로 걸어 내려가서 우아한 차를 타시고 원래 계셨던 대로 돌아가시죠. 난 원치 않으니까... 그런 데이트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설움이 가득 차서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방 안에 찡 하니 침묵이 흘렀다. 애런이 너무나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보고 그녀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가엾은 애런.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아마 하룻밤의 사랑 비슷한 것으로 육체적인 위안을 얻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그녀의 취미가 아니다. 바보 같다고 해도 좋고 자존심 세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애정이나 배려 없이 이용당해도 좋은 물건이 아니다. 애런에게 이끌린 것은 사실이고 그녀 자신도 전에 없이 동요되고 있지만 그런 동요에 승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안해요." 그녀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렇게 무례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하지만 난 나를 보고 괜찮은 낚시감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질렸어요. 그러니 제발 부탁하는데.. 그만 가줘요."
그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자 그녀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러지 말아요." 그녀는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는 손을 놓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자 앞에 완강한 몸이 가로막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들자 사과의 표정을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나 역시 미안하오. 당신 말을 들으니 수치스럽군. 정확히 보았기 때문이야. 당신하고 오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침대로 끌고 가고 싶었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하룻밤의 섹스만을 원했지.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 당신이 꺼려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소."
그의 노골적인 고백에 그녀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제 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군."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런 여자가 아니었어. 그리고 아주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난 안심했소. 하룻밤 사랑은 당신에대한 내 기대와는 맞지 않을 테니까. 난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소."
그는 그의 혼란한 심중을 틈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녀는 저항 없이 끌려갔다. 그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혼란에 떠밀려서였다. 하지만 그의 팔에 안겨 단단하고 따스한 가슴에 닿으니 그녀의 감각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애런이 키스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핏줄 속에서 피가 요동을 치면 내 드높은 자존심을 다 동원한다 한들 맞설 수 있을까.
"늘 당신을 원했소, 세리나." 그가 중얼거리며 그녀의 머리칼과 등을 쓰다듬었다. "그걸 알고 있나? 당신이 학교 디스코 파티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 난 당신을 원하는 내 반응에 충격을 받았지. 홀에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소. 당신을 덮친 그 녀석들에게 가볍게 대한 것도 그 녀석들이 한 것 역시 나도 바랐지만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었을 뿐이었소. 아니, 움직이지 말아요!"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내 말이 그 녀석들이 한 짓에 대한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난 지금 왜 당신 주위에 남자들이 그렇게 많고, 당신은 아버지가 왜 그리 화를 내고 , 또 내가 오늘 왜 그런 혐오스런 행동을 하려 했는지 설명하려는 거요.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유혹적인 여자인지 알고 있나, 세리나? 아니, 끝까지 들어요. 그런 다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요. 당신은 선천적으로 관능적이야. 무의식적으로 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구. 당신은 아무 몸짓 없이도 남자들이 당신을 원하게 할 수 있어. 하지만 오늘은... 당신도 날 원했어. 당신이 나를 보았을 때 그것을 느낄 수 있었어. 그걸 부정하면 당신은 거짓말을 하는 거야."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몸을 떨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거의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나와 같이 침대로 뛰어들지 않으려는 거 이해하오. 그랬다간 내가 당신을 존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존중할 만한 생각이오. 하지만 사실은 아니오. 우리는 어른이지, 사춘기 소년소녀가 아니니까."
그는 그녀를 떼어놓고 내려다보았다. 이해한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소원이르 들어주겠소. 우선 서로를 알아가기로 하지. 그런 다음에...." 그는 짓궂은 미소를 날렸다.
그녀는 그의 자신 있게 미소 짓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산이 왜 그에게 대꾸하지 않는지, 왜 놀라고 대답하지 않는지, 왜 그럴 것 없다고 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그와 자신이 서로를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서로 사랑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래층에 가서 나한테 커피 한잔 대접하는 것이 어떻소?" 그가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지금 우리는 저 침대에 불편하리만큼 가까이 있소. 그리고 당신이 커피를 끓이는 동안 나한테 아까 들은 정자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겠소. 난 이 집이 맘에 들지만 우리 딸은 풀장을 원했거든."
3
세리나는 그날 밤 자정이 넘었는데도 눈이 말똥말똥 한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애런은 저녁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본 다음 11시에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현관 앞에서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한 다음 곧 연락하겠는 약속만을 남기고 가버렸다. 차로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애런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녀는 곰곰 생각했다. 그는 날 하룻밤 상대 이상으로 원한다고 언뜻 이야기하며 서로를 더 잘 알아야 했다. 그녀는 그가 진심으로 그러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속절이 없었다.
오늘 저녁 애런은 그녀를 더 잘 알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 개인에 대한 것을 한마디도 물으려 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기 자신에 대한 결혼생활이나 딸 이야기, 사업 이야기 등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는 음식과 포도주에 대한 화제만을 계속했고 영화관에서는 배우들 이야기만 했다.
그녀는 결국 자신들이 시간을 떼우고 있을 뿐이며 애런은 다시 한번 그녀를 공격하려 기다리는 영리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원래 품었던 의문이 되살아났다. 그는 대체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래, 단순한 불장난이겠지.
그것을 깨닫자 가슴이 옥죄어 들었다.
왜 현실은 꿈처럼 되지 않을까? 그녀는 속으로 신음했다. 왜 남자들은 내 섹시한 얼굴과 몸매 너머 진짜 여자다운 매력은 보지 못하는 것일까?
폴만이 그녀를 그녀 자체로 사랑해 준 유일한 남자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폴에 대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관계를 끊자고 선언했을 때 그의 눈에 떠오른 고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최선의 길이었다. 괜한 연극을 해보았자 그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편하게 해주려고 그가 소유한 모텔의 일자리를 떠나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곳에 계속 머물면서 그녀를 볼 때마다 상처를 입는 폴의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단순히 섹시한 금발머리 여자가 아니고 완전한 여자로 받아들인 남자를 떠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애런이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애런처럼 세상에 대해 적대심을 갖고 있는 부류의 남자는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
1년쯤이 지나면 애런도 책임 있는 관계를 가질 준비가 될지 모른다. 결혼으로 끝나는 관계를 , 문제는 세리나가 보기에 그가 그녀를 유혹하려고 그렇게 오래 기다려 줄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솔직히 말해 과연 자신도 애런이 기다려 주길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저녁 내내 그를 아프게 의식했다. 특히 어두운 영화관에서 그의 옆에 앉아 있을 때는 영화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의 에프터세이브 냄새를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그가 작별 키스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상상뿐이었다. 그가 집에 대려다 주었을 때 그녀는 그가 키스하길 너무나 바랐다. 그의 입술을 느껴보고 싶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댔을 뿐이었고 그녀는 새삼스레 실망을 느꼈다. 그의 행동은 고의적이었을까? 그녀는 불안했다. 경험 많은 유혹꾼의 영리한 게교였을까? 그는 내가 그를 원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내가 좀 덜 저항하리라 믿은 것일까?
그녀는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놀라 기검을 했다.
베개 위로 몸을 기울여 수화기를 집었다. 애런의 매력적인 낮은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그녀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챌 수 있었다.
"세리나?"
"네...." 그녀의 등으로 전율이 흘렀다.
"방금 시드니로 돌아왔소."
"내가 잠들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았죠?" 그녀는 비난조로 말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당신도 나와 같은 기분이라면 잠들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채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낮은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맙소사, 그런 짓 말아요."
"내일 일이 끝난 뒤에 차로 가지."
"아, 아뇨1 난.. 내일 밤에 일을 해야 해요."
"밤새 하지는 않을 것 아니오." 그가 투덜댔다.
"또 나를 다그치는군요, 애런." 그녀는 두려워 쏘아붙였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럼 이번주 어느 날이 비번이지? 부담 가질 것은 없소. 단지 데이트일 뿐이니까."
"일요일까지는 밤에 시간이 없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일요일이라,. 일요일 밤에는 우리 누이네 집에 가야 하는데. 식구들끼리 저녁을 먹는 거요. 마침 당신 집 가는 길에 살고 있지."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이봐요6, 당신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떻소? 그러면 당신도 안심할 테고, 설마하니 내가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당신을 덮치지는 않을 테니까. 적어도 질리언의 집 테이블에서는." 그는 조소어린 어조로 말했다.
정말 짓궂은 남자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 때문에 엉뚱하게 야릇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저녁 테이블 위에서... 맙소사, 못 견디게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가족들끼리의 저녁에 청하는 그의 말에 그에 대한 우려가 다소 씻겨지는 반가운 마음을 느꼈다. 아니, 솔직히 흥분을 느꼈다. 상대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다면 어떤 남자도 그 여자를 집안 식구들에게 인사시킬리는 없을 것이다. 그를 너무 불신했나 보다. 그녀는 기쁨과 안도의 감정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좋아요." 그녀는 그가 자신과의 진실된 관계를 원한다고 생각하며 기쁨을 감추려 애쓰며 대답했다.
"좋아, 그럼 일요일 저녁 7시가 어떨까?"
"괜찮아요."
"준비를 하고 있어요. 난 정해진 시간 내에 준비 안해 놓고 있는 사람은 질색이니까."
"그러죠. 참, 애런 ...." 그녀는 그가 전화를 끊기 전에 생각나 불렀다. "우리 집에 대한 생각은 어떻죠? 마음을 정했나요?"
"아니오. 일요일 밤에 크리스틴을 만나면 그애하고 의논해봐야지."
"그럼... 딸하고 같이 살지 않나요?"
"지금은 그렇소. 그애는 기숙사 학교에 가고 휴일이면 우리 누이ㅘ 같이 지내지. 난 내가 살던 집으 팔고 시드니에서 작은 셋집에 살고 있소 중부 해안가에 집을 살 때까지. 난 크리스틴이 지방 학교에서 평생 친구들을 사귀게 하고 싶소. 원래 기숙사 학교에 보내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지. 하지만 나오미가 그러자고 고집을 부렸소."
세리나는 그가 이름을 들먹일 때 그 어조에 깃들어 있던 거친 음색에 놀랐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그녀는 그들 부부의 완벽하다던 결혼 생활이 그렇게 완벽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괴로운 결혼 생활을 겪은 사람은 흔히 평생 삐뚤어지기 쉽다.
"이 집은 당신에게 너무 크겠죠?" 그녀는 슬쩍 물었다. 그가 언젠가는 재혼을 하려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였다.
"아니오. 난 방이 많은 것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크리스틴이 친구들을 데리고 올 수 있게 하고 싶소." ."
"그렇군요."
"당신은 무척 그 집을 팔고 싶어한느군, 세리나. 돈이 필요한가?"
"루퍼트와 필립 오빠는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가 제일 가난했다. 저금도 별로 없다. 그래서 그녀는 오빠들이 당분간 자신을 이 집에 살게 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오빠들은 부동산 경기가 더 떨어지기 전에 팔려고 안달이다.
"만일 돈이 필요하다거나 하면 말만 해요." 애런이 부드럽게 말했다.
세리나는 몸이 굳어졌다. 남자에게서 돈을 받는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한 가지 의미였다. "괜찮아요, 애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피곤하군요."
애런은 한숨을 쉬었다. "알아듣겠소. 그럼 잘 자요. 일요일에 봅시다. "
일요일 저녁 6시 35분에 세리나는 욕실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치장을 하느냐가 문제였다. 애런의 누이 집에 초대를 받아 가면서 성숙하고 세련된 본래 모습을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지나친 화장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했다. "푸른 아이섀도 약간, 마스카라 약간 그리고 엷은 주홍 립스틱을 바르는 거야. 유혹적이거나 섹시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금물이라구."
화장을 하고는 뒤로 돌아서 마지막 점검을 했다. 이마가 살짝 접어졌다. 화장은 괜찮았다. 하지만 머리를 들어 올리고 어머니의 보라색 수트와 진주를 걸치면 좀 더 효과가 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입은 모습과 그녀가 입은 모습은 달랐다. 훨씬 더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상의로 가슴을 감추려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신통치 않았다.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화장과 머리 모양은 우아하고 은은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흰 가죽백을 들고 스타킹을 신은 발을 무늬 있는 구두에 넣었다. 그리고 나서 산호 빛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놀라 펄쩍 뛰었다. 손목시게를 보니 이미 7시 정각이었다. 이렇게 정확한 행동에는 익숙지 않은 그녀지만 애런은 시간 엄수하고 으르렁거린 터였다.
그녀는 매니큐어를 빨리 마르게 하려고 손을 휘저으면서 문으로 나갔다. 가슴이 뛰어 심호흡을 해 진정시킨 다음 문을 열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방금 매니큐어를 칠했어요, 애런." 그녀는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래서 문을 못 열어요. 그냥 들어와요. 잠그지 않았으니까."
문이 안으로 느닷없이 열리는 바람에 그녀는 뒤로 재빨리 물러서야 했다.
"미안." 애런은 중얼거리고는 뒤로 돌아서 문을 닫았다. 그 덕에 세리나는 그의 모습을 눈치재이지 않고 살필 수 있었다.
그가 격식 차린 정장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는 안심했다. 그는 캐주얼한 황갈색 바지에 목이 열린 검은 셔츠 그리고 지퍼 달린 크림 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걱정도 되었다.
애런은 내가 자기에게 얼마나 몰두해 있는지 알고 있을까? 차라리 모르길 빌었다.
그녀는 애써 정신을 수습하고 차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봐요, 세리나, 문을 늘 잠그고 있어야지. 요즘 강도 사건 통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소? 성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목소리가 사그라들며 푸른 눈이 거북하게 그녀의 모습을 훑었다.
그녀는 입 안이 말라오고 뱃속이 긴장으로 조여왔다. 하지만 무심히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있게 눈을 들어 쓴 미소를 보냈다.
"안녕, 킹슬리 씨. 당신의 그런 걱정이 나와 내 집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곧 당신 집이 될지도 모르는 집에 대해선지 물어도 될까요?"
애런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며 여전히 이말르 접고 있다가 천천히 미소를 떠올렸다. 그의 매혹적인 푸른 눈동자에 유혹적인 따스함이 떠올랐다.
세리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 일이나 알아서 하라는 말이겠지?" 그가 쿡쿡 웃었다.
"남자들은 우스운 잘못을 많이 하더군요." 그녀가 대꾸했다. "걸핏하면 여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죠. 해달라고 하지 않았을 때도 말예요. 그런 것을 못마땅해 하는 여자들도 있어요."
그는 딱딱하지만 재미있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소? 기억해 두지, 미스 독립여성. 아니면 미즈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손톱을 보는 체했다. "미즈는 그만두세요. 그 소리를 들으면 병 속에 갇힌 파리 같은 기분이 드니까."
애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들어보는 행복한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 어때요, 애런 킹슬리 씨. 난 침대 밖에서도 좋은 상대가 될 수 있다구요. 그걸 깨닫게 해주겠어요.
"손톱은 말랐소?" 그는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모두 한정 없이 저녁을 기다리지는 않을 거요. 질리언은 특히 더. 알잖소? 누이들이란 어미닭 같아서, 원."
"그래요? 그럼 시간 엄수하라고 안달한 것은 당신 누이였군요? 난 또 당신이 어떻게 하다 그렇게 정확한 사람이 되었는지 궁금해 했죠."
애런의 변화는 놀랄 정도였다. 얼굴이 굳어지더니 분노로 눈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다 약점이 있게 마련이오." 그가 쏘아붙였다.
그녀는 놀랐다. "가서... 열쇠하고 핸드백을 가져올게요."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스커트가 다리 주위에서 물결쳤다. 주방으로 백을 가지러 가면서 그녀는 애런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아마 일로 인한 스트레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가 시간에까지 그럴 것은 없는데 애런에게는 조금 늦게 약속시간에 도착한다고 해서 세상이 끝장 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현관으로 돌아갔다. 애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스트레스에 대한 염려는 그가 다가오는 그녀의 몸매의 움직임을 열띤 눈초리로 바라보는 바람에 잊혀지고 말았다. "정말 사랑스럽군, 세리나." 그는 아까 화를 냈던 것을 금방 닞고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하지만 머리를 내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나중에 내가 하지."
세리나의 가슴이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차리고 차갑고 비난하는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상기시키는 데요, 애런." 그녀는 수년 간 다른 남자들을 물리칠 때 썼던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밤은 그저 부담 없는 데이트라고 했죠?"
그는 차갑게 그녀의 표정에 응수했다. 그녀는 그의 눈이 그렇게 차가운 결심을 안고 돌변하는 것을 보고 겁이 났다. 저게 날 좋아한다는 남자의 표정이야?
"내가 그랬나?" 그가 낮게 말했다.
"그래요."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따스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할 수는 있지. 당신에게 달렸소."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집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세리나는 애런의 약속에도 별로 안심이 되지 못했다.
아니면 그의 마지막 한마디 때문일까? 그의 말뜻은 다시 날 유혹하겠다는 것일까? 그럴 것이란 괴로운 직감이 들었다. 그녀가 항복하길 바라면서 유혹을 할 것이다. 괴로운 것은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오만한 예상에 그녀는 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인내... 그녀는 현관문을 잠그면서 속으로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애런 같은 남자는 인내심을 배운 적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쉽게 자신의 차지가 되었으니까. 사랑, 여자, 성공... 세계는 그들의 먹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의 죽음을 떠올리지 그녀는 죄책감이 들었다. 애런은 최근 분명 쉽지 않게 살아왔다. 그렇다고 오늘밤 애런에게 그녀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달라지지 않겠다는 결심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심술궂게 굴지 말자는 결심을 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져녘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만들자는 결심도.
그녀는 열쇠를 백에 넣으며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다 됐어요. 자, 당신 누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사전지식도 없이 가기는 싫으니까. 몇 살 위의 누나죠?"
"거의 스무 살이오. 남은 가족은 누나뿐이지. 참 미리 경고하지만 당신을 보면 누나는 좀 충격을 받을 거요."
세리나는 놀랐다. "충격? 왜?"
애런의 눈에 장난스런 빛이 떠올랐다. "내가 홀아비가 딘 후로 질리언은 이혼녀나 과부란 과부는 다 갖다대면서 날 중매시키려고 했소. 모두 30대 후반이고 기숙사 사감 같은 여자들이었지. 누나는 내게 행복하게 안정을 찾게 해주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누나에게는 남자가 행복하게 안정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즉 살림을 잘하는 아내를 얻는다는 뜻이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누나와 나는 행복에 대한 관점이 다르오...."
그는 의미가 다분한 미소를 띠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세리나는 그가 자신을 살림하고는 거리가 먼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에 화를 내야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기쁨이 물결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뜻은 그녀라면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녀 쪽이 더 좋다는 뜻이다.
그것뿐이 아니라 애런은 언젠가는 재혼할 생각이라는 투다. 안 그러고서야 그의 누나가 그에게 자꾸 재혼 상대를 골라 줄 리가 없잖은가.
"아주 상냥한 누나 같군요. 하지만 내가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을 거예요. 나도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가정적이거든요."
"가정적이리고? 당신이?"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가정적이라는 것은 전화를 걸어서 중국음식을 시키는 정도겠지." 그는 그녀의 팔에 팔짱을 끼며 차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놀랄걸요." 그녀가 대꾸했다. "하지만 솔직히 당신 누나의 중매가 맘에 들지 않으면 왜 그걸 감수하고 있는 거죠? 신붓감은 결혼을 할 생각이 들면 직접 고르겠다고 하지 않고?"
그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맙소사, 내가 세상에서 제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재혼이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평생 처녀로 살지 않을까 두려워하다가 간신히 요즘 결혼생활의 행복에 젖은 여자에게 그런 말해봤자지."
"그래요? 누님이 오랫동안 미혼이었군요?"
"몇 년 전에 했지. 아버지의 투병생활을 지킨 의사하고. 제럴드는 30년 결혼생활을 하다 최근 이혼하고 돌봐줄 여자를 찾는 처지였소. 그렇다고 매부가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오. 분명 사랑하고 있지. 하진 누나는 그 나이치고는 아름다운 여자니까."
차에 이르자 애런은 세리나의 팔을 놓고 차문에 열쇠를 넣었다. 세리나는 침묵을 지키며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애런이 재혼을 안한다는 말은 진정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절대 남자의 성적 만족의 대상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한 터다.
그러나 애런이 그녀에게서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마음속으로 그렇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속여 왔지만, 애런이 그녀에게 추근댔던 다른 남자들하고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한 가지 더." 애런은 차문을 열며 말했다. "그래야 당신이 얼떨떨하지 않지. 오늘 가족 모임은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갖는 자리요. 오늘 난 거창하게도 서른네 살이 되었지."
"당신 생일이라구요." 그녀는 신음을 했다. "애런,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선물이라도 샀을 텐데. 아니면 카드라도...."
그녀는 화가 나 투덜거렸다. 정말 누가 남자 아니랄까 봐! 이런 상황에 내가 당황해할 것을 몰랐단 말인가?
더구나 난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성격인데!
애런의 한 손이 그녀의 턱을 쥐더니 그의 시선에 고정시켰다. "생일 축하 키스로 만족하기로 하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목구멍이 말라 왔다.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 하지 말아요." 그는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숙여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볍고 스치는 듯한 키스에는 억눌린 정열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관능이 담겨져 있었다. 세리나는 심장 고동이 멈추는 듯했다. 애런은 그녀의 놀란 눈을 들여다 보았다. "망할, 당신한테는 저항할 수가 없어." 중얼거리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훨씬 세찬 힘으로 그녀의 입술을 점령했다.
그녀는 무릎에 맥이 풀리려 해서 그의 재킷을 잡았다.
손에서 핸드백이 떨어져 콘크리트 바닥에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모든 감각은 애런의 뜨거운 키스와 그 키스가 뒤흔드는 영향력에 쏠려 있었다.
핏줄 속에 뜨거운 것이 흐르고 그것이 머리끝까지 올라가 미친 듯 그녀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키스가 가져다 준 흥분으로 마지막 남은 의식마저 가물거렸다.
하지만 그는 금방 입술을 떼었다. 황량한 실망감이 그녀의 가슴을 매섭게 후볐다. 신음을 하며 눈을 감은 채로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황홀감이라니... 그녀는 얼이 빠졌다.
애런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애런의 입이 그녀의 입을 다시 덮쳤다. 그리고는 세차게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녀는 거친 동작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포옹과 키스에 황홀히 빠져 들었다.
그때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애런은 얼른 몸을 뺐고 세리나는 아쉬워 그에게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휘파람이 다시 들리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홱 돌아서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른 곁눈질로 보니 열다섯 살쯤 되는 이웃소년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가며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멋져요!" 그는 어깨너머로 소리쳤다.
"자." 애런은 그녀의 핸드백을 들어 건넸다. "이 동네를 몽땅 놀라게 하기 전에 빨리 가는 것이 좋겠소."
세리나는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애런을 따랐다. 차에 오르자 안전띠를 매고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지 않으면 애런은 그의 키스로 받은 영향을 눈치 채게 딜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약한지 알리는 것은 자신을 쟁반에 얹어 그냥 내주는 거나 다름없다.
세리나는 시동을 거는 그를 힐끗 보았다. 그의 얼굴에 오만한 기색이 너무나 뚜렷해 모른 척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는 내가 마음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가 원하는 섹스에 내가 청신호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잔인하도록 정직한 진실이 그녀를 후려쳤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녀는 절망감으로 눈을 감으며 좌석에 몸을 묻었다.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자신이 애런에게 육체적으로 끌리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자신의 강렬한 반응에는 그녀 자신도 넋이 나가고 말았다. 조금 전에 자신은 흥분한 정도가 아니라 이성을 잃을 만치 흥분해 있었다.
길거리가 아니고 실내였다면 틀림없이 끝장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유혹과 강한 자기보호본능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유혹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자존심은 잊어버리고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아니, 경험해 보리라고 꿈도 꾸지 못한 정적인 쾌락을 경험해 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성의 목소리가 그에게 굴복하지 말라고, 굴복한다면 이제까지 겪은 것보다 훨씬 더한 비참함을 맛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28년 동안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희망하며 살아왔다. 섹스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꿈의 실현을, 동화를 바랐다. 하지만 애런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해도 그런 동화 같은 것은 믿지 않은 지 오래인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신음을 하며 빌었다. 나중에 그가 자기를 집에 바래다 줄 때 자신에게 용기가 생기기를 . 해야 할 일을 하는데 필요한 용기가.
4
세리나는 애런이 번화가를 지나 퍼시픽 하이츠로 가는 모퉁이를 돌았을 때에도 긴장 속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결심을 다지며 끝까지 침묵을 지키고 싶었지만 애런이 고스퍼드로 이르는 고속도로로 나서지 않고 좁은 뒷길로 해서 한적한 마을에 이르자 호기심에 굴복하고 말았다.
"대체 집이 어디죠?"
"포리스터 해변 근처요. 이 길이 지름길이지. 하지만 길 좀 봐요. 저런 웅덩이에 차가 박히면 찾지도 못하겠어. 요즘 비가 많은 곳인데." 그는 투덜댔다.
세리나도 동감이었다. 중앙해안지대는 워낙 우림이 많아서 열대 같은 풍광인데 더구나 요즘엔 평균치 이상 비가 내려 흡사 정글같이 보였다.
"이 차를 만든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소." 애런은 바퀴가 다시 웅덩이에 빠지자 투덜거렸다.
"고스퍼드로 돌아서 갈 걸 그랬나 봐요."
"흐음." 그는 그녀를 힐끗 보았다. "이젠 늦었소. 난 어떤 일을 시작하면 돌아서지 않는 성미지." 그 말에 대꾸하는 것도 맞장구치는 것도 이미 불필요했다. 그 순간 차는 부르르 진동을 하더니 무너진 포장도로를 비껴나가 웅덩이에 처박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차안의 두 사람은 굳이 창 너머를 내다보지 않고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왼쪽 뒷바퀴가 진흙탕에 완전히 빠져 버렸을 것이다.
애런은 얼굴을 찡그리며 운전대를 탕 쳤다. "이런, 빌어먹을!"
"걱정 말아요." 세리나는 그를 위로했다. 그녀는 여행길에 도통한 터라 도중의 이런 사고쯤은 가볍게 여겼다.
"망가진 데는 없으니까. 여분의 타이어가 있죠? 내가 도울 게요." 그녀는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애런도 따라 나오더니 보닛 위로 그녀를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짓 말아요. 당신을 이 진흙탕 속에 서성거리게 할 수는 없소. 차 안으로 들어가요."
"들어가긴요1 트렁크 안에 바퀴 밑에 깔 만한 것이 있나요? 낡은 담요나 방수외투 같은 것 말예요."
그는 그녀가 무력한 숙녀 역할을 거부하자 이마를 접었다. "있을 거요."
"비상 등을 켜세요." 세리나는 구름 때문에 어두워지는 주위를 의식하고 말했다.
애런은 냉소를 띄었다. "충고를 하지 말라면서 남한테는 잘도 하는군."
"미안해요. 그럼 불안한 얼굴로 서 있기나 할까요?"
"아니 예쁜 얼굴이면 되오."
그녀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의 몇 마디가 이렇게 영향을 미치다니 심히 마음이 번거로웠다. 너무 유혹적이고 흥분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내 분노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운명은 왜 이리 잔인한가. 꿈속에 그리던 남자를 다시 만났지만 그 남자는 이미 과거로 가슴이 얼룩져 있으니. 그녀는 진정한 사랑과 결혼과 가족을 원했다. 자기파멸적인 관계에 세월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를 원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일시적이고 목표 없는 정사일 뿐이다. 제일 분노가 치미는 것은 자신이 그 제안에 동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완전히 찌부러졌군요." 그녀는 괜시리 열을 내며 타이어를 찼다.
"정확한 표현이야." 애런은 비상등을 켰다. "자, 당신이 할 일이 있소. 내 재킷을 들고 있어요." 그가 상의를 벗자 떡 벌어진 상채가 드러났다. 세리나는 재킷을 넘겨주고 소매를 걷는 그를 눈으로 쫒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잭으로 차를 들어 올리고 너트를 풀기 시작하자 등을 돌린 그의 몸에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그의 바지가 탄탄한 엉덩이와 단단한 근육질 허벅지에 달라붙은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의 셔츠도 등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순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의 남자다운 체격을 음미하고 ....
"한번 해볼 테요?" 애런이 갑자기 홱 돌아보며 말하는 바람에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그런 뜻은...
"뭐... 뭘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다.
"웅덩이에 걸려 바퀴가 꼼짝하지 않소." 그는 일어나 목덜미를 마사지했다. "내가 쉬는 동안 당신이 한 번 해봐요."
세리나는 겉보기와 다르게 힘이 세어 많은 병뚜껑을 열어젖힌 전력이 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몸을 숙여 있는 힘을 다해 들어올렸다. 바퀴는 대번에 빠져나왔다.
"맙소사, 해냈어!" 애런이 경악했다.
그녀는 어때요 하는 얼굴로 몸을 펴고 렌치를 그에게 건넸다. "당연하죠. 여자들도 차 끌이는 것 따위는 말고도 많은 걸 할 수 있다구요."
"흐음... 정말 그렇겠군." 그의 눈이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그녀는 몸이 굳었다. 한적하고 어두운 골짜기에 두 사람은 너무나 가까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이 욕망으로 어두워졌다. 지금 있는 곳이 언제라도 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 위만 아니면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을 거냐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돌아서서 바퀴 가는 일을 끝냈다. 세리나는 덜컹하는 심정으로 서 있었다. 이 밤이 끝날 무렵 애런이 나와 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무슨 수로 그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무슨 수로 다스릴 것인가.
"다 됐소." 애런이 말하며 일어서서 펑크난 바퀴를 굴려 트렁크에 넣었다. 그녀도 양탄자를 집어들어 트렁크에 넣었다.
"저녁에 늦겠군요." 차분히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걱정 말아요. 가까운 정비소에 가서 질리언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알리지."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래도 8시까지는 갈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다시 출발하고 나서도 여전히 나오는 웅덩이들과 중간에 내리는 갑작스러운 열므 소나기 때문에 속력을 내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지름길이 끝나고 해안으로 향하는 큰 길이 나오자 그녀는 안심했다.
"저기 정비소가 있네요." 그녀가 가리켰다. "전화도."
15분 후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섰다. 질리언은 그들의 사정 설명에 안심한 눈치였다.
"남들은 늘 이런 식으로 당신을 보나?" 애런이 차를 몰며 느닷없이 물었다.
"그런 식이라뇨. 누가 말이에요?" 그녀는 이마를 접었다.
"정비소 기술자 녀석 말이지. 당신이 신발을 터는 동안 계속 당신을 바라보고 있더군."
"아...." 세리나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젊은이가 종이수건을 건네줄 때 웃어 보이지 않는 건데 그랬나 보다. 하지만 애런이 그 젊은이를 나무라는 것은 뭐가 뭐 나무라는 격이 아닌가.
"남자들이 나를 쳐다보는 거야 내 탓이 아니죠." 그녀가 항의했다. "가끔 짜증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해요. 회교도처럼 감싸고 다니나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일지 모르지."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어디 더워서 살겠어요?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남자들의 음란한 머릿속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해요?"
애런의 이마가 어둡고 당혹스럽게 접혔다. 그의 침묵에 그녀도 불편했다.
"난 우리가 포리스터 해안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요." 그녀는 차가 지선도로를 지나치자 말했다.
애런은 그녀를 심상찮게 힐끗 살폈다. "당신은 내가 정신 집중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녀는 속으로 화가 나는 것을 누르고 차갑게 그를 보았다. "그렇다면 날 데리고 외출하지 않았어야죠. 당신 누나가 선보였다는 과부들 중 한사람하고 오지 그랬어요."
"맙소사, 싫소! 따분하게 옷 입는 모양새들이라니!"
"하지만 적어도 정신 집중은 할 수가 있잖겠어요? 그리고 정비소 기술자가 쳐다보지 않았을 테고."
그는 천천히 싱긋 웃었다. "훨씬 안전하지. 하지만 끔찍하게 따분해. 당신은 결코 그렇지 않을 거야. 사람을 초조하게 하고 안달나게 하기는 하지만 따분하다? 아니, 결코 아닐 거야."
"안심이군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늘 그렇게 냉소적이오?"
"일요일 저녁에만 그래요."
"아하, 그렇군. 그래서 지난번 화요일에 가엾은 당신 오빠 루퍼트한테 전화를 할 때 그렇게나 상냥하셨군."
"흠... ."
"반격 안하나?" 애런이 조롱했다.
"일요일은 참거든요."
애런은 차를 곁길로 몰더니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시작했다. "누나네 집에 닿기 전에 당신 오빠들 이야기를 해봐요. 윌가 오랜 친구라면서 당신 오빠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루퍼트는 지금 서른여섯 살로 시드니에서 잘나가는 변호사예요. 비비언이라는 사교계의 총아격인 여자하고 결혼했죠. 아이는 없구. 필립 오빠는 컴퓨터 전공이에요. 프로그래머인가 봐요. 서른 두 살이고 모델인 이본느하고 작년에 결혼했어요. 역시 아이는 아직 없구요."
애런은 안전띠를 풀고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훌륭해 당신한테 내 보고서 서류 쓰는 일거리를 맡겨야겠는걸. 간결하면서도 충분히 전달하고 있어. 자, 다 왔군. 내 맘 같아선 당신하고 여기 같이 있는 것이 좋겠지만 우린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오. 지금쯤 수프를 세 번째 데우고 있을 거요."
"누나가 매우 화났던가요?" 세리나는 집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집은 첫눈에도 매우 사치스럽고 컸다.
"화났다기보다 걱정하고 있지. 크리스틴이 정말 화났을 거요. 그애는 나하고 자주 만나지 못하니까 내가 정각에 오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지."
"이해할 수 있어요." 세리나는 중얼거리며 그제서야 처음으로 애런의 딸아이에 대해 어느 정도 깊게 생각을 기울였다. 가엾은 아이 같으니. 십대에 벌써 어머니를 잃다니. 애런이 서른 네 살이면 크리스틴은 열여섯 살일 것이다. 그리고 기숙사 학교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그다지 좋은 곳은 못된다.
"그 애는 학교를 좋아해요?"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불평한 적은 없소. 하지만 불평할 애도 아니지. 아주 착하거든. 당신도 그 애를 좋아할 거요."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탕 열렸다.
"아이구, 고마워라, 마침내 왔군!"
쉰다섯 살쯤 되는 둥그렇고 유쾌한 얼굴에 잿빛 머리칼이 벗겨진 남자가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나왔다.
"미안해요, 제럴드." 애런이 사과했다.
"자네 잘못이 아닌걸. 하지만 음식을 데워 놓고 전체만 먹고 있기가 힘들었다구." 제럴드는 세리나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이제야 자네가 요전날 밤에 전화로 이야기하려던 요점을 알겠네. 자네 누나가 지난주에 대준 여자에 바하면 하늘과 땅이군 그래. 세나나라고 하시죠?"
"셀리나 마치먼트예요." 세리나는 질리언의 남편이 너무나 유쾌하고 친절한 남자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애런이 전화로 이야기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내가 데려오는 여자를 볼 때까지 기다리라구요, 매부. 36-24-36에다 머리는 텅 비었어요〉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마음속으로 오늘밤이 끝날 때 강하게 나가자는 결심을 굳혔다. "제럴드라고 불러야 하나요, 의사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신상에 좋고 싶으면 제럴드라고 불러요, 아가씨!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제럴드가 활짝 읏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야죠?" 애러닝 조금 딱딱하게 말했다.
그는 제럴드가 노골적으로 세리나에게 감탄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안됐군요. 그녀는 속으로 분노와 함께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어요, 애런. 나 같은 여자하고 외출하면 이런 것쯤은 감수해야죠.
그들은 넓은 홀 안으로 들어섰다. 아끼지 않고 돈을 들여 치장한 화려한 홀이었다.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서부터 샹들리에까지.
그때 왼쪽으로 난 이중문 하나가 탕 열리며 여자가 나타났다.
질리언은 윤곽이 강렬한 잘생긴 여자였다.짧은 밤색 머리에 날카로운 잿빛 눈동자, 위압적인 몸매가 붉은 리넨 드레스로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그녀는 세리나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고는 애런의 뺨에 키스했다. "생일 축하한다, 얘. 그리고 이 사람이 세리나로구나." 그녀는 딱딱한 미소를 떠올렸다. "네 말이 맞구나, 애런. 아주 예뻐."
세리나는 자기를 인형 취급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질리언이 자신에게 직접 이야기를 한 듯이 대꾸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저를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우선 입이 너무 크거든요."
제럴드는 헛기침을 했고 질리언은 남편을 노려보았다.
"밖에 무슨 일이야?"
모두 돌아보니 남자 한 사람이 홀로 나왔다. 마흔 살 쯤 된 듯한 얼굴에 단단한 체격, 조금 단정하지 못한 고수머리와 나른한 갈색 눈이 다소 퇴폐적으로 보였다.
"저런, 애런." 그가 말했다. "자기 생일에 늦었으면 빨리 빨리 들어오기라도 해야지."
그는 세리나의 눈과 마주치자 얼른 그녀의 몸매를 훑고는 눈썹을 치켰다. 그는 애런의 곁에 다가와 섰는데 세리나는 그가 슬쩍 애런의 옆구리를 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네 마침내 내 충고를 받아들인 것을 보니 반갑군."
세리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가 하여 몸이 굳었다.
"그래?" 애런이 낮게 쏘았다. "세리나, 이 신사로 가장하고 있는 위인은 내 사업동료 크레이그 에벌리라오. 아마 곧 내 예전 사업동료가 될 판이지." 그는 크레이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신 말도 한 가지는 맞군. 안으로 들어가야겠어. 그래, 내 딸은 어디 있지?"
"아빠, 어디 계시다 이제 오는 거에요?"
청바지에 커다란 흰 셔츠를 입은 십대 소녀가 달려와 애런의 품에 안겼다. "생일 축하해요!" 소녀는 애런에게 요란한 키스를 했다.
애런 역시 소녀에게 열렬한 포옹을 했다. "고맙다, 내 귀염둥이야. 우선 우리 손님을 만나 본느 것이 어떻겠니? 세리나, 여기는 크리스틴이오. 내 왈가닥 딸이지. 크리스틴, 이분은 내 학교 동창인 세리나 마치먼트 양이란다. "
"동창요? 아빠,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는데요? 주름살 제거 수술을 받으셨다면 모르지만."
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와 어깨까지 오는 곱슬거리는 갈색머리를 한 예쁜 소녀였다. "아직은 그런 수술 안 받았어." 세리나는 애런의 딸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기숙사 학교도 그 애를 수줍거나 내성적으로 만들지 않은 모양이다. 한 가지 조금 특이한 것은 말을 대단히 빠르게 한다는 점이다. 케이크 구운 이야기며 아버지 선물을 기막힌 것으로 골랐다고 아버지를 향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질리언이 실례해야겠다면서 제럴드와 함께 방으로 물러나자 크레이그는 세리나와 일행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수단 좋게 세리나를 자기 옆에 앉혔다. 크리스틴이 아빠 옆에 앉고 싶을 거라는 핑계와 함께. 애런은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세리나는 개의치 않았다.애런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바람직하다.
자리를 잡자 그녀는 커다란 방 안을 둘러보며 질리언의 취미에 감탄했다. 녹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방은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정교한 벨벳 벽지며 원화임에 틀림없는 벽화들. 그림은 이곳 풍경들을 담고 있었다.
질리언은 남편이 포도주를 따르는 동안에 수프를 내왔다. 세리나는 자기 잔에 담긴 술이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이그와 애런은 그녀가 제럴드와 함께 포도주 이야기를 박식하게 나누자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놀란 표정을 무시하고 속으로 잔인하게 흐뭇함을 만끽했다. 그리고는 크리스틴에게 아버지가 집 이야기를 하시더냐고 물었다.
"네!" 소녀는 반색 했다. "전화로 했죠. 아주 근사한 집 같아요. 사실 나도 수영장이 없는 것쯤은 마음 쓰이지 않아요. 해변이 더 좋으니까. 언제 가서 구경하죠? 내일?"
"크리스틴." 애런이 꾸짖었다. "내일은 아빠가 일을 하러 가야하잖니."
"너 혼자 오는 것은 어때?" 세리나가 말했다. "난 월요일에는 일을 안해. 내일은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고 지내려고 했거든. 하지만... ."
"저런, 저도 쇼핑을 할 것이 있어요. 세리나 아줌마가 아빠 선물 사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겠네요. 아빠 선물을 사는 것은 힘들어요. 하지만 세리나 아줌마는 남자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실 거예요."
잠깐 정적이 흐른 뒤 애런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뭐, 세리나가 괜찮다면...."
"괜찮고말고요." 그녀는 얼른 대답했다. "고스퍼드 도서관을 아니?"
"네."
"거기 바깥 벤치에서 9시에 만나자. 일찍 가야 붐비지 않지. 그런 다음 우리 집을 보여 줄게 . 그리고 나서 내가 오토바이로 데려다 주지 ."
"오토바이라구요!" 질리언이 경악을 했다.
"저...." 애런이 자연스럽게 나섰다. "내가 일찍 퇴근을 해서세리나의 집으로 마중을 가기로 하지."
세리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달리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오토바이라면 걱정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애런도 자기 딸이 있는 앞에서는 유혹을 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수프가 치워지고 메인 코스가 나왔다. 스테이크와 굴 요리였다. 모두들 대화를 그만두고 먹음직스런 식탁을 맞았다. 아마 늦은 저녁이라 잔뜩 시장했나 보다.
문득 차분한 음악이 그치자 제럴드가 일어나서 테이프를 갈았다.
"아, 쇼팽이군요." 세리나는 쇼팽의 인기 있는 폴로네이즈 중 하나를 알고 있었다.
애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쇼팽을 알아 듣소?" 그의 어조에는 영락없는 놀람이 담겨 있었다.
솔직히 세리나는 클래식광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폴이 그랬고 특히 쇼팽을 좋아해서 늘 쇼팽만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저 거만한 남자한테 내가 클래식 전문가라고 생각하게 해야지!
"쇼팽곡 전부는 몰라요." 그녀는 매끄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A장조 플로네이즈〉는 내 애창곡이에요. 피아노 소나타는 별로 좋지 않더군요. 셋 다 단조라서. 쇼팽은 장조 곡이 훨씬 좋아요. 좀 더 밝고 감동적이죠."
"아, 그래." 애런이 중얼거렸다. "당신 말이 맞아."
"세리나는 얼굴만 예쁜 여자가 아니야, 그렇잖아?" 제럴드가 의미심장하게 끼어들어 그녀에게 공범자 같은 미소를 보냈다.
"물론 그렇지." 크레이그는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어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세리나는 그에게 수프를 뒤엎고 싶었다.
"내가 보기에는 예쁘지 않아요." 크리스틴이 말했다.
"아름다워요."
너무나 진지한 칭찬에 세리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할 말을 찾아 당근과 콩으로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하셨느나고 물었다.
"마늘 다진 것하고 크림이 비결이에요." 질리언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세리나도 요리 이야기를 했다.
"요리도 잘 아는 것 같네요, 세리나." 제럴드가 말했다. "직업이 뭐에요?"
세리나는 식탁 너머로 애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자 망설였다.
"너무 많은 직업을 가져서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실은 좀 떠돌며 살았거든요. 퀸즐랜드 해안을 따라가며 관광업소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죠. 몇 년 전에는 칵테일 기술 훈련을 받았어요. 그 방면 일을 좋아하지만 그밖에도 접수계원, 웨이트리스, 주방장 보조, 에어로빅 강사 등을 했죠. 한때는 벽돌 나르는 일도 했어요." 그녀는 그 생각을 떠올리며 웃었다.
"맙소사!" 크리스틴이 소리쳤다. "어떻게 그런 일을 했어요?"
"보기보다 강하거든." 애런이 씁쓸하게 말했다.
세리나는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바퀴 사건이 생각나 눈으로 웃었다.
애런도 천천히 입가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숨은 재주덩어리지, 안 그렇소?"
"어떤 재능은 숨겨지지도 않았고." 그녀의 왼쪽 귓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낮은 소리라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세리나는 참고 넘기지 않을 작정으로 마주 속삭였다.
"또 한 번 그런 소리를 하면 정강이를 차고 당신 바지 앞에 잔을 퍼부을 거예요. 알아들었어요?" 크레이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도 같이 웃을 수 없을까?" 애런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세리나는 눈을 들었다. 애런의 딱딱한 푸른 눈에 분명 질투가 보였다. 그녀는 놀랐다. 내가 애런을 잘못 생각한 걸까? 애런이 내게 욕망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걸까?
오늘밤 그녀는 그녀의 여러 가지 면을 보여 주었다. 때문에 애런도 그녀를 욕심내는 것 외에 뭔가 알고 싶은 흥미 있는 면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세리나가 나더러 팔꿈치를 집어넣으라고 일러주었던 것뿐인데." 크레이그가 노련하게 받아넘겼다. "농담하고 있던 게 아니야."
"과연." 애런이 딱딱하게 말했다.
"후식 먹을 사람?" 제럴드가 말했다.
후식을 먹으면서도 애런은 그녀와 크레이그를 의심어린 눈초리로 계속 바라보았다.
이제 커피를 마시러 거시로 나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럴드가 제의하자 애런은 놀랄 만큼 민첩하게 세리나의 팔을 끼고 그녀를 2인용 의자로 끌었다. "당신을 감시해야 하는 이유를 알겠군." 그는 낮게 속삭였다. "못 말리는 바람둥이야."
그녀는 화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에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런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숨막힐 만큼 바싹 끌었다. "그래, 그냥 바람둥이는 아니지. 기분 상 희롱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마다 계획적이지. 눈에 보이는 남자마다 다 당신을 바라게 하는 거야."
세리나는 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당장 일어나 나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선물을 잔뜩 안고 바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아이의 밤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애런에게는 나중에 따끔하게 한마디 해줄 작정이다.
"선물 시간!" 크리스틴이 외치고는 꾸러미들을 탁자 위에 놓았다.
질리언이 마침 커피 쟁반과 생일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세리나는 어쩔 수 없이 웃고 선물을 푸는 순서와 케이크 먹는 순서를 참아내야 했다
애런이 받은 선물은 다양했다. 질리언은 금장 만년필 세트, 제럴드는 악어가죽 지갑, 크리스틴은 새로 나온 탑 클랜시의 소설 장정본 그리고 크레이크는 진귀한 위스키 한 병이었다.
"세리나는 뭘 주었지?" 크레이그가 물었다. "아니, 물어선 안 되는 것인가?"
세리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는 다시 만난 지 아직 얼마 안돼서... ." 애런이 유연하게 끼어들었다. "세리나에겐 선물을 기대도 안했지. 내겐 세리나가 와준 것 자체가 선물이야."
"어머, 아빠, 너무나 달콤해요!" 크리스틴이 말했다.
"모두 세리나를 당황하게 하는군." 제럴드가 한마디 했다.
"괜찮아요." 세리나는 크레이그를 향해 얼음 같은 시선을 던지고 역시 차가운 눈길을 애런에게 돌렸다. "저, 흥을 깨고 싶진 않지만 난 이만 피곤해서... ."
애런은 눈썹을 치켰다. "신데렐라를 집으로 모셔야 할 것 같군. 그럼 내일 내가 몇 시에 크리스틴을 마중가면 되지? 4시면 될까?"
잠시 후에 세리나는 애런의 차에 앉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애런이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입 다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밤 내가 당신 집에 초대받긴 글른 모양이오."
"아시는군요." 세리나가 대꾸했다.
"왜지, 내가 한 말 때문인가? 아니면 크레이그가 더 좋아졌기 떄문인가? 식탁에서 당신과 수다를 떨 때 그가 당신에게 자기가 이혼한 몸이라고 말을 하던가? 나중에 다시 그가 들를 예정인 모야인지도 모르지. 그래서 일찍 나온 건가?"
세리나는 귀를 의심했다. "우리가 일찍 떠난 것은 ...." 그녀는 내쏘았다. "당신이 참을 수 없게 모욕적으로 굴었기 때문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애런은 이를 갈았다. "설마 크레이그가 저녁을 먹으면서 당신에게 추근거리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닐 테지? 그게 흐뭇하지 않았다는 소리도 아니겠고."
세리나는 화가 치밀어 한숨을 쉬었다. "크레이그는 내게 추근대지 않았고 나도 흐뭇하지 않았어요. 꼭 알고 싶으면 말해 주지만 그 사람이 내 가슴에 대해 지저분한 농담을 하길래 다시 그런 소리를 하면 정강이를 차겠다고 한 것뿐이에요."
애런은 숨을 훅 들이쉬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젖히고 마구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맘에 들어! 아주 맘에 든다구!"
"난 안 들어요." 그녀가 내쏘았다. "지겨웠어요. 내 가슴을 한 번 보고 성의 화신이나 본 듯 여기는 남자들에게 이젠 신물이 나요. 당신도 그 부류에요. 좀 더 다른 것을 기대했건만. 당신은 지성 있고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아니, 내 생각에는 늘 그랬어요. 하지만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겠네요."
애런은 엄숙한 얼굴이 되더니 그녀의 말을 심각히 생각하는 듯했다. "미안하오, 세리나. 정말로. 당신한테 몇 가지 선입견을 가졌던 것은 인정하오. 오늘밤 그 선입견 중 몇 건에 대해 수정하게 되기는 했지만 . 물론 그렇다고 ... 당신 가슴이 무척...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녀는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한 마디만 더하면... 정말 한 마디만 더하면 당장 이 차에서 내리겠어요!"
5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집으로 차를 달렸다. 애런은 그녀의 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는 시동을 끄고 세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재미있다는 미소를 띠고 있는 그를 보고 놀랐다.
"오늘밤 커피를 마시러 들어오라는 초대는 글렀겠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이고 다른 날 밤이고 안돼요, 애런. 당신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공통점이 없어요."
애런은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아." 긴장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당신을 설득하지는 않겠소. 내일 크리스틴을 데리러 왔을 때 다시 이야기하지. 하지만 당신이 안전하게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봐야겠소."
그녀는 불안이 솟았다. "그럴 것 없어요... ."
"아니 , 안 되오. 지금 집은 불이 꺼져 있소. 그리고 이곳은 한적한 곳이고.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난 편히 자지 못할 거요."
그녀가 다시 항의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같이 현관 쪽으로 걸어가면서 세리나는 무척 긴장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서 집안을 점검한 뒤에 다시 불이 켜진 홀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등 뒤에서 문을 닺자 놀랐다.
"뭘... 뭘 하려는 거예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에게 밤 인사로 키스하려는 거요. 이번에는 아무한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난.... ."
"그냥 키스일 뿐이오, 세리나." 그는 이미 그녀의 몸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세리나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면서 애런에게 〈그냥 키스〉같은 것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입술을 대기 전에 입술을 꼭 물었다.
그는 곧 입술을 떼더니 비난하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 자." 낮게 달랬다. "당신 솜씨가 고작 그건가. 잊지 말아요. 오늘은 내 생일이란 것을."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맙소사. 그녀는 그의 입술이 장난하듯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쓸자 속으로 탄식했다. 눈을 꼭 감고 다른 것을 생각하려 했다. 몇 초 뒤에 끝나겠지.
하지만 몇 초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몸속에 변화가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입술에 실린 힘도 격해졌다.
결국 그녀도 저항하지 않고 입술이 부드러워지며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애런의 목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가쁜 숨을 쉬려 입을 떼더니 다시 입술을 눌러왔다. 이번에는 그냥 가벼운 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듯 그이 혀가 그녀의 입 안 깁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그녀는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처음에는 불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그의 손이 그녀의 등에서 가슴으로 돌아오기 전까지였다.
불길은 걷잡을 수 없게 타올랐다. 가슴에서 짓눌린 신음이 터지고 머릿속에서는 요란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몸을 떨며 겁이 나서 애런의 단단한 가슴을 밀쳐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그는 그녀를 밀어 문에 붙이고 양손은 그녀의 상의 밑에 가 있었다. 미친 듯 그녀의 맨몸을 어루만지다가 그녀의 속옷 안에 단단해진 가슴을 찾았다.
그는 속옷의 고리를 찾다가 안 찾아지자 신음소리를 내며 속옷을 위로 밀어 올렸다. 그의 손이 맨 가슴에 닿는 감촉은 믿어지지 않게 자극적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맹렬하게 뛰었다.
"당신 가슴은 너무나 아름다워." 애런이 숨가쁘게 말하며 그녀의 가슴을 손으로 희롱했다.
"당신을 원해, 세리나. 당신을 사랑하게 해줘. 제발... 안된다고 하지 마."
그녀는 곤혹과 쾌감이 얽힌 신음소리를 냈다. 이런 격정에 휩쓸린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계속되는 애무에 곧 목이 졸린 듯한 소리로 동의하고 말았다.
그는 곧 그녀를 두 팔로 들어안고 한 번에 두 계단씩 올라갔다. 그런데 2층 복도 중간에서 갑자기 멈췄다.
"약을 먹고 있겠지?"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아... 아뇨."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럼 집안에 다른 피임기구가 있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애런은 신음을 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고 눈을 떴다. 쓰디쓴 실망이 어린 눈이었다.
세리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조금 전의 격정은 어느새 물러가고 당혹감만 남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미안하오, 세리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리석었소. 그리고 당신에 대한 내 선입견도. 난 바보같이 당신이 약을 먹고 있는 줄만 알고. 진작 물어 본 것이 천행이지. 맙소사, 당신을 임신시키기라도 했으면... ." 그녀가 돌아보자 그는 몸을 떨었다.
잠시 그의 행동에 놀랐으나 그녀는 그제서야 이해했다.
그는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생각에 겁을 먹은 것이다. 이미 그는 옛날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친구에게 임신을 시킨 적이 있다. 당시 그가 어떤 곤경을 겪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지난주에도 그는 어렸을 때 실수에 대해 쓰디쓴 말을 하지 않았던가.
"다음번에는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군." 그는 중얼거렸다.
애런의 노골적인 말에 세리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번이란 없을 거에요." 그녀는 차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애런. 당신의 욕구를 채워 줄 다른 여자를. 솔직히 당신에게 끌리긴 했지만 난 이런 관계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에게 진작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난 남자에게서 성적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해요."
그는 괴로운 한숨을 쉬었다. "오늘밤 내가 정말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군. 처음에는 크레이그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이일로."
그는 그녀의 몸을 다시 끌어당기려 했지만 세리나가 저항했다. "아뇨, 애런.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날 달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룻밤이면 됐어요. 당신을 믿고 집안에 들어오게 했는데 당신은 그 믿음을 배신했어요. 그리고 전날 밤에도 당신은 우선 서로를 알자고 하면서 나를 속였어요. 당신은 나를 아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성적인 것 말고는."
그는 이마를 접었다. "그건 틀린 생각이오."
"아뇨." 그녀는 떨리는 소리로 반박했다. "진정한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질문을 하는 법이에요. 그리고 상대에게 자기 과거며 고민, 희망 등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건 당신이 나와 침대에서 말고는 관계를 이룰 생각이 없기 때문이에요."
애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소, 세리나. 내가 내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괴로운 것이라 입에 올리기 싫어서였소. 해서 달라진다면 이야기하지, 젠장!"
그는 분노한 얼굴로 돌아섰다. 저쪽까지 갔다가 돌아서서 걸어오며 이야기를 했다.
"내 결혼생활이 행복했는지 아오? 내가 열여덟 살에 결혼하고 싶어서 한 줄 아오? 나오미는 날 옭아매려고 일부러 임신을 한 거요. 난 그녀가 그것을 공공연히 알렸을 떄도 저항을 해보았지. ㅎ하지만 그 뒤 크리스틴이 태어났고 난 그애를 사랑했소. 그래서 결혼한 거요. 맙소사, 그 무슨 비극이람! 나오미는... ." 그는 그녀 앞에 서서 그의 머리를 긁어올렸다. "봐요, 미안하오. 하지만 정말이지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소. 나오미는 죽었소. 이제 와서 옛이야기를 했댔자 무슨 소용이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장래요. 그리고 그 장래에는 당신이 있어 줬으면 하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하고 사랑을 나누고 싶소. 너무나 간절히 원해." 그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 대한 내 감정에는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오. 난 당신이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하오. 당신을 무척 좋아해. 당신은 매력 있고 영리하며 같이 있기에 즐겁소. 사실 지금 내가 여자에게서 바라는 그 모든 것이오. 당신이 하룻밤 사랑으로 인생을 꾸려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건 당연하오. 나도 역시 그러니까.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오. 나와 관계를, 일대 일의 지속적인 관계를 맺자는 거요. 그게 그렇게 몹쓸 생각이오? 당신은 나를 원하오. 오늘밤 당신이 보여 주었다. 난 당신을 다치게 안할 거요. 당신에게 잘할 거요. 제발 날 거절하지 말아요. 당신이 필요해, 세리나."
그녀는 차츰 그의 말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어떻게 거절하랴. 누군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만큼이나 바라는 일인데.
하지만 그런 관계에 동의하다니... 지속적인 관계라 해도 그렇다. 결혼과 가족에의 꿈을 미루다니. 차선에 만족해야 하다니.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가 말했다. "난 모르겠어요."
그는 그녀가 이미 승낙이나 한 듯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주저하는 대답은 단지 불가피한 것을 미루고 있는 것뿐이라는 듯.
세리나는 그의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을 바라보고 가슴이 덜컹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물론 그의 생각이 옳다. 자신은 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할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의 육체적 욕구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침내 깨달았다. 더 이상 시간이 필요할 것도 없다.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을. 오래전에 여학생다운 심정으로 반했던 것이 이제는 성숙한 사랑으로 꽃피워진 것이다. 그런 사랑과 더불어 정열과 욕망에 가득 차서.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도 불길한 생각은 없었다. 기분이 좋았다. 자연스런 느낌이었다. 애런은 오랫동안 그녀의 꿈 속의 남자였으니 이제 기회를 잡은 터에 그를 놓아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은 그가 자신을 욕망으로 대할 뿐이었다. 시간이 가면 욕망은 사랑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인이 되리라 작정했어도 너무 성급하게 달려드는 인상을 주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쉽게 얻은 것에 고마운 줄을 모른다.
"당분간 우리 그냥 외출만 하는 것이 어때요?" 그녀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애런은 딱딱하게 재미있다는 얼굴을 했다. "해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장담은 할 수 없소.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오늘밤도 난 다그칠 생각은 없었소. 당신이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작별 키스를 하려고 한 것뿐이오. 하지만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구."
"그럼 키스도 하지 말아요." 그녀는 장난스레 말했다.
"일주일간."
애런은 신음소리를 냈다. "좋아, 일주일간. 하지만 더 이상은 안돼. 이런, 시간 좀 보게! 시드니로 돌아가면 녹초가 되겠군."
"누나네 집에서 자지 않을 건가요?" 같이 계단을 내려가면 그녀가 물었다.
"맙소사, 월요일 아침에 그 끔찍한 교통지옥을 겪으라고? 난 싫소."
"당신 집이 있는 곳은 어딘데요?"
"더블베이."
그녀는 휘파람을 불었다. "아주 고급주택가군요."
"너무 황홀해하지는 말아요." 애런은 문가에 서서 말했다. "회사 사택으로 , 투자 목적으로 사서 교외에 사는 고객들에게 빌려 주는 거요. 난 그곳 사람들하고는 어울리지 않소."
"그런데 난 당신 집에 가서 시드니의 사교게와 어울릴 꿈을 꾸고 있었다니."
그는 딱딱하게 웃었다. "우리 집에 오는 것은 당신이 말한 일주일이 지나야 좋을 텐데, 안 그러소?"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애런과 마찬가지로 그를 원하고 있는 것을 그가 눈치 챘나 싶었다. "다음 주 언제 당신 집에 가서 내가 저녁을 요리해 줄게요."
"처음은 칵테일로 하고? 칵테일에 전문가라고 하던데."
그녀는 코를 찡긋했다.
그러자 애런은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가볍게 쓸었다.
"귀엽군."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쓸자 그녀는 가슴이 출렁였다. 마음이 달라졌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대로 있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좀 더 긴 행복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욕망을 눌렀다. 그리고 애런의 존경심을 얻고 싶은 강한 마음도 한몫 했다.
"그럼 내일 네 시?" 그는 묻을 닫기 전에 다시 확인 했다.
"그래요."
"문 잠그고 자는 것 잊지 말아요." 그는 어깨너머로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녀가 잠이 든 것은 오랜 뒤였다.
6
다음날 아침 세리나는 기차 편으로 고스퍼드에 갔다.
오토바이라고 하니까 질리언이 보인 반응이 생각나서 크리스틴을 뒤에 태울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도서관 앞에 도착하자 5분 전인데 크리스틴이 벌써 와서 책을 읽고 있었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얼른 얼굴을 들었다. 기뻐하면서도 수줍은 얼굴이었다. "이런! 제럴드 고모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들켰네요. 조금 전에 샀어요."
"걱정 말아." 세리나는 안심시켰다. "나도 늘 그러니까. 책 선물을 사서는 내가 먼저 읽지. 이르지 않을게."
크리스틴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줌마는 질리언 고모와는 다른 세대군요. 고모가 이걸 알면 질색을 하셨을 거에요. 저런, 아주 근사해요. 그 셔츠 맘에 드네요. 청바지도."
"고맙다, 너도 아주 세련돼 보이는데." 크리스틴은 짧은 팬츠에 어울리는 톱을 입고 있었다. "자, 이제 네 아빠 선물을 사기로 할까?"
"그러고 싶지만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돈을 예산하고 있니?"
"50달러까지는."
"셔츠는 어떠니?" 세리나가 말했다. "그 가격이면 아주 좋은 것을 살 수 있는데."
크리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안 살래요. 작년에도 하나 사드렸는데 입으시는 것을 못 봤어요. 아빠 취향은 달라요."
"그럼 책은 어떠니? 아참, 어제 생일 선물로 드렸지. 만년필도 지갑도 위스키도 안 되고."
"뭐 워낙 술을 많이 안 하시니까요."
"담배도 안하시고?"
"네."
"성인이시로구나, 그렇지?" 세리나는 빈정댔다.
크리스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약점은 있으시다구요."
두 사람은 가까운 상가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어떤?"
"내가 수학 점수를 형편없이 받을 때는 정말 화를 내세요. 아빠는 왜 사람들이 아빠처럼 머리가 좋지 않은지 이해가 잘 안 가나 봐요."
"똑똑한 사람들은 그런 법이지." 세리나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오빠들도 수학에는 탁월했었다.
"그런 이야기는 마세요."
"무슨 이야기?"
"마치 아줌마는 안 똑똑한 사람 같잖아요. 똑똑하시면서. 음악이며 포도주며 음식이야기를 하시는 걸 보면...."
세리나는 기뻐 가슴이 설렜다. "게속 이렇게 비행기 태울 거니? 내가 친절하고 옷도 멋있게 입는데다가 똑똑하기까지 하다니. 수상후보에라도 나설까?"
"나서시면 내가 뽑아 드리죠. 아빠도 그럴 거구요."
세리나는 웃었다.
"그런데 생각하니까 아빠는 자신이 수상이 되는 것을 더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러니 아줌마는 퍼스트레이디로 만족해야죠. 그거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 세리나는 쿡쿡 웃었다. "그럼 넌 뭐가 되고?"
"누이가 되겠죠."
"누이?"
"아줌마가 아빠와 결혼하면 아기가 생길 것 아녜요. 아줌마는 젊고 건강하고...."
"크리스틴...."
두 사람은 작은 가게가 늘어선 상가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세리나는 크리스틴이 아빠와 그녀에 대해 잘못된 희망을 품을까 봐 우려가 되었다.
애런의 사랑을 원하고 결국에는 그가 재혼에 대한 마음을 바꿀 것을 바라고 있긴 해도 그녀는 현실주의자였다.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내 생각에는 아직 네가 신부들러리 드레스를 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왜요? 아빠와 결혼하기 싫으세요? 아줌마가 아빠를 정말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물론 좋아하지, 아주... 좋아한단다. 하지만...."
"그리고 아빠도 아줌마를 좋아해요! 알 수 있어요. 어제 저녁 먹을 때 아빠는 아줌마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던 걸요. 제럴드 고모부와 질리언 고모도 눈치 챘어요." 세리나는 초조한 한숨을 쉬었다. "아마 아줌마 생각엔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는데 아빠가 재혼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크리스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1년이 자났고 아빠도 아직 젊고 잘생겼잖아요. 그리고 나도 2년 후면 졸업하고 대학에 갈 거에요. 아빠 곁에 누군가 있지 않으면 무척 외로우실 거예요. 하지만 질리언 고모가 소개하는 아줌마 중 한 사람이 새엄마가 되는 것은 싫어요.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아요. 난 아줌마처럼 젊고 재미있는 사람이 좋아요. 아빠의 생활에 즐거움을 안겨다 줄 사람. 아빠는 오랫동안 아주 의기소침하게 지내셨어요."
"하지만 네 아빠는 재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어. 내게 그러던데."
크리스틴이 그 앞에 손을 휘저으며 들은 척도 안하는 것을 보고 세리나는 놀랐다.
"아빠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귀담아 듣지 마세요. 질리언 고모 말에 의하면 아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른데요. 나도 동감이에요. 아빠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밀어 주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늙은 과부한테로는 안돼요. 아줌마가 훨씬 나아요."
세리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모두들 애런을 잘 모르고 있다. 그는 이렇게 하라고 하면 순전히 오기로 반대로 나갈 사람이다.
"선물이나 사는 게 좋겠다. " 그녀는 얼른 말했다. "아참 좋은 것이 생각났어."
크리스틴의 커다란 갈색 눈이 밝아졌다. "그래요? 뭔데요?"
세리나는 앞장섰다. "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그들이 간 곳은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였다. "설마 코알라 인형을 사려는 것은 아니실 테죠?" 크리스틴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해에는 아니야. 자, 들어가자. 지난주에 이 가게를 지나쳤는데 서핑하는 장면이 그려진 멋진 타월이 있더라. 섹시한 아가씨가 파도를 타지. 네 아빠는 바다를 무지 좋아하시지?"
"아주 푹 빠지죠."
세리나가 점원에게 부탁하자 곧 타월이 왔다.
"어머, 멋있어요!" 크리스틴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왜?"
"70달러인걸요."
"내가 남은 20달러를 줄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리나는 그런 제안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저금해온 것이 어머니의 장례비용으로 푹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주에 그녀 몫으로 어머니의 저금4천 5백달러가 명의 이전되었다.
"하지만 아줌마에게 어떻게...." 크리스틴이 말했다.
"아빠는 남에게 돈을 빌리는 문제는 아주 엄격하시거든요. 알면 날 가만 두지 않을 거에요."
"모르면 되지." 세리나는는 타월의 가격표를 떼었다. "이거 싸주세요. 자,이젠 카드를 사야지."
크리스틴은 가게를 나오며 한숨을 쉬었다. "아줌마처럼 자신이 있으면 좋을 거에요."
"너도 수줍은 아가씨는 아닌걸."
크리스틴의 말에 세리나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자신의 자신감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이.
"나도 실은 수줍지 않아요." 크리스틴이 말했다. "하지만 어떨 때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 마구 지껄일 때가 있어요. 지금처럼. 하지만 아줌마는 안 그래요."
세리나는 이해하겠다는 미소를 보냈다. "내가 스물여덟 살이라는 걸 기억해야겠지. 나도 네 나이만 할 때는 자신이 없었어. 아주 수줍었지."
"믿을 수 없어요!"
"사실이야. 사람들은 세월따라 변해." 그녀는 잠시 애런을 생각했다. 그도 역시 변할 것을 바랐다. 모두가 그에게 원하는 것을 그도 원하게 되길 바랐다. "자, 들어가서 시원한 거라도 마시자." 두 사람은 작은 커피 휴게실로 들어가서 초콜릿 밀크 세이크를 두 잔 주문하고 앉았다.
"저, 세리나." 크리스틴이 쉐이크를 마시고 말했다.
"내 머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더 짧게 자르고 금발로 염색을 하고 염색하고 싶은데 아빠는 못하게 하세요."
세리나는 크리스틴에게 잘 어울리는 짙은 고수머리를 보면서 질색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글세... 네 머리색 같은 소녀들이 금발로 물들이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다 끔찍한 생강빛이 되고 말더라. 그러니 금발은 추천하지 않겠어. 하지만 짧게 자르고 퍼머를 하는 것쯤이야... 아냐, 그것도 솔직히 권하고 싶지 않아."
"왜요?"
"나도 어느 해에 아자 짧은 머리가 유행일 때 그렇게 해봤는데 당장에 후회했어. 결국 3년이나 걸려서 다시 길렀잖니. 다시는 짧게 자르지 않는다고 맹세했지."
"그럼 소용돌이 퍼머는요?"
"넌 머리숱이 너무 많아. 얼굴은 작고. 퍼머를 했다가는 머리에 눌려 버릴 거야."
"저런." 크리스틴은 잔뜩 실망한 눈치였다.
"네 머리칼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워. 망치는 것을 보기가 싫어서 그래."
소녀의 뺨이 발그스레해졌다. "정말 내 머리가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근사해."
"우리 엄마도 나 같은 머리칼이었어요."
"네 엄마는 아름다운 여자였지." 세리나는 엄마 이야기가 크리스틴을 당혹하게 할까 봐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죠?" 크리스틴은 이마를 접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아빠는 엄마와 결혼해서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에요. 틀림없이 사랑하셨어요. 엄마가 아팠을 때 아빠는 너무나 잘해 주셨어요. 사려깊고 친절하고... 하지만... 아, 모르겠어요." 크리스틴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리나는 소녀의 근심을 덜어 주고 싶었다 "네가 부모님의 관계에 걱정할 것은 없단다. 세상에 완벽한 관계는 없어. 나도 어렸을 때 왜 엄마가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과 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단다.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독재적이고 고집스러운 분이었거든.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두 분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의 결점까지 받아들이신 거지 싶단다. 네 아빠도 엄마와 정말 불행하셨다면 계속 사시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실 거예요."
"그럼. 자,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저 사야지? 다른 사람들 것은 모두 샀니?"
"네. 질리언 고모에게는 요리책을 샀어요."
"아, 그럼 너는 됐구.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고마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우리 오빠 둘과 거만한 올케 두 사람 선물을 살 차레구나."
"남자 형제가 계세요? 아, 나도 한 명 있었으면."
"우리 오빠 같은 사람이면 그렇지 않을걸."
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서 유쾌하게 쇼핑을 했다. 루퍼트 오빠에게는 공 같은 자명종 시계를 샀다.
신경질나면 벽에 던져 소리를 끄라고. 루퍼트 오빠의 성질하고도 잘 어울리 것 같았다. 필립에게는 간이 골프세트를 샀다. 짓궂은 선물이었다. 필립은 솜씨가 형편없는 골퍼였기 때문이다. 올케들은 향수를 샀다.
쇼핑을 끝내자 세리나는 우체국으로 가서 선물을 부치자고 했다. 보통 때라면 시드니로 가서 직접 선물을 전할 그녀였지만 오빠들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자기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친 것에 화가 나 굳이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체국에는 크리스마스카드 부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하지만 세리나는 폴에게도 카드를 부치자는 생각이 들어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드디어 우체국에서 볼일이 끝나자 이제는 정말 시장기가 느껴졌다. 세리나는 늦은 점심을 크리스틴과 함께 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세리나가 사는 집으로 돌아와 언덕길을 올랐다. 오후는 뜨겁고 습해서 둘 다 헉헉거렸다. 모퉁이를 도니 애런이 벌써 도착해 차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조끼까지 입은 양복차림으로 잔뜩 화가 난 모습이다.
"아직 4시가 아닌데!" 크리스틴은 아버지가 시계를 보자 항의했다.
"대체 너희 아버지의 저 시간을 따지는 버릇은 어디서 온 거니, 크리스틴?"
세리나가 투덜댔다. 하지만 애런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저 남자는 화가 잔뜩 난 모습도 매력적이다.
"엄마 버릇이었어요. 그 바람에 아빠도 전염됐나 봐요 ."
"내 흉은 그만들 속닥거리지?" 애런은 다가오는 그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세리나에게 은근히 윙크를 보냈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고 뭐라 대꾸하려 하는데 크리스틴이 비명을 지르며 집 앞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게 그 집이에요? 아빠, 너무 멋져요. 흰 셔터도 좋아요. 그리고 저 큰 앞뜰을 보세요. 뒤뜰에 풀장을 만들 걱정을 안 해도 되겠어요. 여기다 풀장을 만들면 되잖아요. 매들레인 파슨도 앞뜰에다 풀을 만들었는데 기차다구요."
애런은 세리나를 향해 딱딱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 집 매매가 끝난 것 같군."
"내가 달라는 값에 줄 수 있으세요?" 그는 냉소를 띠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두 배라도 내야겠는걸."
그녀는 뱃속이 조여왔다. 등골에는 찬 기운이 흘렀다.
자신이 내세운 일주일이 기한이라는 것도 유명무실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번에 그와 같이 있는 날에는 끝장일 것이라는 것도. 애런은 모든 것을 원했고 진심으로 그것을 차지할 생각이다.
순간 느닷없이 긴장이 엄습해 왔다. 폴과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성적으로 미숙한 상태이다. 애런을 미친 듯이 원하기는 해도 과연 만족스럽게 행동으로 꽃피울 수 있을까 의심이 갔다. 애런을 실망시킬까 두려웠다.
애런은 그녀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는지 갑자기 얼굴이 굳었다. "설마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아뇨, 실은... 일주일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어요." 애런의 흥분은 손에 잡힐 듯 너무나 세찼다. 그녀를 갖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의미를 지닌 싶었다. 때문에 그녀는 그것이 다른 것을 압도할 것 같은 , 두 사람의 관계에서 다른 것들을 모두 밀쳐 버릴 것 같은 걱정이 잠시 들었다.
"아빠, 세리나!" 크리스틴이 외쳤다. "내 방을 보고 싶어요."
애런은 세리나의 팔을 잡고 집 앞으로 이끌었다. "조금 아까 심장마비라도 오는 줄 알았소. 그럼 오늘밤 머물러도 되나?"
오늘밤? 그녀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에 흠칫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시간이 있어야."오늘은 안돼요, 애런." 그녀는 억지로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쁘거든요. 내일 전화를 줘요. 그리고 계획을 짜죠."
그는 한숨을 쉬고는 감탄하는 눈길을 보냈다. "대단히 계획성 있는 여자로군. 그리고 독립심이 대단하고."
"그럴 거에요.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으니까요."
"내가 이 집을 사면 당신은 어디서 살 작정이오?"
세리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이집을 떠난다는 생각은 싫었다. 이기적인 오빠들 같으니라구! 갑자기 화가 났다. 정말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여기저기 정처없이 살아온 그녀에게는 이 집에 사는 것이 너무나 의미 깊은 일이건만.
"걱정 말아요." 애런이 속삭였다. "내가 근처에 아담한 곳을 찾도록 도울 테니까. 우리가 가능하면 많이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을."
세리나는 그의 말에 마음 상하지 않으려고 기를 섰다. 하지만 그는 왜 나와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의 생활과 딸을 곁에서 같이 돌봐 달라는 말을
왜 몰래 숨겨둔 정부로서만 원할까? 결혼한 몸도 아니면서.
결혼... 새삼스럽게 그녀는 애런의 결혼생활이 어땠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나오미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녀가 임신으로 그를 얽어맨 뒤에도 남아 있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 것 같지 않다. 안 그러고서야 왜 그가 재혼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회의적이겠는가. 크리스틴도 부모가 행복했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나타냈었다. 애런도 간밤에 그 이야기를 잠깐 하면서 무척 우울한 모습이었고. 그래서 더 물어보지 못했지만.
하지만 여자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지금 태도는 그의 결혼생활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 분명하다. 시간이 흐르면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애런에 대한 자신의 육감밖에 믿을 것이 없다. 그는 실은 좋은 남자이며 다정한 남자라는 육감 그리고 그녀에게 상처를 안겨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던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로 하죠."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속에 아직 남아 있는 불안을 의식적으로 무시해버렸다.
7
크리스틴은 집이고 뭐고 다 맘에 들어 했다. 특히 분홍빛 침실이 너무 예쁘다며 아빠에게 당장 사자고 우겨댔다. 애런은 웃으며 변호사에게 알려 최대한 빨리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결국 애런은 변호사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당장 일을 해결하도록 했다. 그리고 세리나는 오빠들에게 전화로 집이 팔렸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애런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들이 내세운 가격을 치르되 가구를 그대로 남긴다는 조건이었다.
세리나는 애런이 자기 집을 팔 때 결혼생활 때 쓰던 가구를 몽땅 팔아치운 것을 알고는 놀랐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전날 밤 애런이 말한 것도 있고 오늘 크리스틴이 말한 것도 있어서 그녀는 비로소 애런의 결혼생활이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십대의 연인들의 꿈같은 결혼생활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악몽에 가까웠을 가능성도 느꼈다.
오빠들은 집이 팔렸다는 소식에 희희낙락이었다. 세리나에게 크리스마스를 잘 보내라는 신사를 할 정도였다.
일을 끝내자 애런은 바다로 수영이나 하러 나가자는 제안을 했다. 자신은 짧은 수영 팬티를 가져왔고 크리스틴의 옷은 질리언의 집에 들러서 가져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후 세리나와 애런은 한바탕 수영을 끝내고 포리스터 해안에서 타월을 깔고 길게 누워 있었다. 크리스틴은 아직 물속에 있었다. 친구 하나를 만난 모양이었다. 하루가 길어져서 해는 7시가 지나서도 창창할 듯했다.
"흐음." 애런이 중얼거리며 배를 깔고 누워서 팔꿈치를 베고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경치 좋은데. 산봉우리가 두 개라...."
세리나는 속으로 움찔했다. 애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찬 바닷물로 딱딱해진 가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속셈도 알았다. 오늘밤 그녀와 같이 보내고 싶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밤은 같이 보내지 못해요, 절대로!"
애런은 신파조로 한숨을 쉬며 다시 드러누웠다. 그 바람에 세리나는 그의 몸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숨을 죽였다. 정말이지 남자가 저렇게 단단한 근육질 팔에 저렇게 완벽한 몸매를 가질 권리는 없다.
넓은 어깨 밑의 청동빛으로 그을린 남자다운 상채와 긴 다리는 서른 네 살의 회게사가 아닌 스무 살 먹은 구명대원에게나 어울릴 것이다.
"그럼 대체 단둘이 있을 수 있는 비번 날 밤이 언제요?" 그는 뚱하니 물었다.
사실 시간을 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일을 대신할 사람만 있으면 언지든지 시간을 낼 수 있는 고용조건이었다. 안 그래도 가끔 그녀와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 할생이 있다.
"수요일은 어때요?"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목요일이나 금요일은 ? 아니면 3일 다. 당신만 원하면 일주일이라도 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내일 가서 일정을 조정해야 해요."
"근사해! 수요일 밤에는 당신을 데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춤추러 가지. 그런 다음에 주말 내내 당신을 우리 집 손님으로 모시는 거야."
애런이 몸을 굴려 그녀에게 키스하려는데 크리스틴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아빠! 아빠!"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크리스틴이 가리키는 바다 위를 보았다.
"저기 저 남자 위험한 것 같아요."
세리나와 애런은 일어서서 파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안전선 너머에서 서핑보드를 타고 흘러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거친 필을 흔들어 구조를 원하고 있었다.
"격랑에 휩쓸린 모양이에요. 어떻게 해야죠, 아빠. 근처에는 구명대원이 없어요. 제대로 서핑보드를 갖고 있는 사람도 없구요."
"맙소사." 애런은 신음을 하더니 곧 달려갔다. 그는 덮치는 파도에 놀랄 정도로 빠르게 달려들어 해쳐나갔다.
세리나는 그의 뒤를 쫒아가 물가에서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파도가 높아져서 애런이 구하려는 남자는 이미 저 멀리로 나가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벌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그중에서 한 부인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 위험하게 됐어요." 한 소년이 대답했다.
"그래서 이 여자분 남편께서 구하러 가신 거에요."
세리나는 소년의 착각을 바로잡아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직 애런에게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가 또 커다란 파도 밑으로 사라졌다. 그가 영영 그녀의 남편이 되지 않을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제 몇 분 안이면 남편이든 뭐든 될 기회마저 영영 없어질지도 모른다 바다는 변덕스럽게 그지없다. 해마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생명을 위협받고...
"제발 하나님, 안전하게 지켜 주세요." 그녀는 빌었다.
"아빠 걱정은 안하셔도 되요." 크리스틴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빠는 젊은 시절 구명대원 챔피언이었어요. 많은 상을 휩쓸었다구요."
"그래?" 누군가 말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애런 킹슬리 씨에요."
"저런, 생각나."
"아빠는 호주 철인상을 열일곱 살에 받고 그 후 7년간 계속해서 받으셨어요."
"하지만 그건 10년 전이야!" 세리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설마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세리나는 소녀의 표정을 보고 얼른 자기 얼굴에서 근심을 지웠다. "물론 아니지. 한 번 철인이었던 사람은 영원한 철인이거든." 그녀는 크리스틴의 어깨에 팔을 돌렸다.
"그... 그럼요."
두 사람은 애런이 한참이나 걸려서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파도가 더욱 세차진 듯 돌아올 때는 더 오래 걸렸을 뿐더러 기진맥진한 채 남자를 다른 사람들 손에 넘겨주었다.
"오, 애런." 세리나는 물에서 일어나는 애런에게 달려가 어깨를 부축했다. 그리곤 그의 눈언저리에서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는 잠시 그녀에게 기대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리나는 자존심도 벗어 버리고 안도의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나 사랑하므로 그의 조건이 뭐든지 그가 원하는 동안은 그의 연인이 되어 줄 작정이었다.
애런은 가슴을 들썩이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봐주기만 하면 매일이라도 저런 멍청이를 구해내겠어."
"아빠, 근사했어요!" 크리스틴이 아빠를 껴안고 키스했다. "내가 세리나에게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아줌마는 걱정했지만 난 안했다구요. 아주 안한 것은 아니지만...."
애런은 웃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헉헉대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운동을 좀 해야겠어 . 정말...."
"정말 지쳤어요." 세리나가 말했다.
애런이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넉다운이라고 하려 했는데."
"타월을 가져다 드릴게요." 크리스틴이 말하고 일어서는데 소년 둘이 달려왔다.
"아저씨, 정말 멋져요!" 한 소년이 외쳤다.
"여오하에 나오는 영웅 같아요!" 다른 소년이 말했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조심해야겠는걸." 애런이 중얼거렸다.
"그보다는 멜 깁슨이죠." 세리나가 말했다.
"저런." 애런이 신음했다. "하필 이런 때에 그런 유혹적인 찬사를, 난 지금 억만금을 준다 해도 당신과 뭘 어쩔 기운이 없단 말이오."
"잘됐네요. 어차피 수요일까지는 기다려야 하니까."
그는 신음을 했다. "조금만 쉬면 기운을 차릴 수 있는데."
"안돼요." 그녀는 단호했다. "난 최대한 완벽을 원해요. 우선 내일 의사한테 가서 몇 가지 상담할 것이 있어요. 괜찮으면 피임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고 싶으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이의 없소." 애런이 기쁘게 말했다.
"아빠, 타월!"
애런은 타월을 받아들고 얼굴을 문지르고는 어깨에 걸쳤다. "그 남자는 괜찮지?"
"네, 멀쩡해요. 벌써 일어나 앉아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있어요."
"그럼 빨리 여기서 나가자." 애런이 말했다. "고맙다는 따위의 인사치레가 나오기 전에."
"인사를 하게 해줘야죠." 세리나가 말했다. "그러지 못하면 그 사람은 괴로울 거에요. 저 봐요, 벌써 이리 오고 있네요."
"아이구, 맙소사...."
"애런이 뭘 했다구?" 질리언이 분노를 터뜨렸다. 놀란 눈으로 애런 일행을 차례로 보다가 다시 애런을 보았다.
"이 어리석은 얘야! 넌 이젠 에전같지 않단 말이야. 너마저 빠져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하지만 안 죽었잖아요. 자, 우선 샤워를 하고 마른 옷부터 입어야겠어요."
"나도요." 크리스틴이 말했다. "세리나 아줌마는요?"
"난 집에 갈 때까지 괜찮을 거야." 세리나가 대답했다.
질리언과 주방에 단둘이 있게 되자 질리언은 재미있다는 시선을 했다. "남자들이란 여자들한테 뽐내 보이려고 어리석은 짓들을 하지."
"애런이 제게 뽐내 보이려 할 필요가 없어요." 세리나가 대답했다. "이미 전 반했으니까요."
질리언은 잠시 놀란 얼굴이더니 싱긋 웃었다. "정말 애런을 좋아하는군?"
"하지만 애런에게 말하지는 마세요. 우쭐해 할 테니까."
질리언은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걸 아니 참 영리하군. 알려줄까요? 난 아가씨가 애런에게 딱 어울리는 여자 같아. 처음 아가씨를 만났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 아까씨가 좀... 매달리는 타입이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렇지 않더군. 애런에게 맞는 그런 아가씨야."
"어떻게 말씀인가요?" 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주적인 여자지. 애런은 나오미를 겪고 났으니 아가씨한테는 신선한 매력을 느낄 거야."
세리나는 이번 기회에 애런의 결혼에 대한 궁금증을 풀자고 생각했다. "나오미 이야기를 해주세요, 질리언. 애런에게 물었지만 그 사람은 그녀나 자기 결혼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않더군요."
질리언은 코를 치켜들었다. "이상할 것도 없어요. 나오미는 너무 애런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고 소유욕이 강했어요. 병적이었지. 미칠 듯이 질투를 했어요. 다른 여자들에게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애의 관심을 끄는 모든 것에 대해서 . 난 심지어 나오미가 크리스틴을 기숙사 학교에 보낸 것이 애런을 독차지하려 해서가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그럴 리가요!" 세리나는 이제서야 궁금증이 해결된 듯한 생각이 들었다.
"뭐가 그럴 리가지?" 애런이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깨끗이 씻은 얼굴에 흰 반바지와 푸른 셔츠를 걸쳐 입은 모습이 무척이나 산뜻해 보였다.
"이 진 한병 값이 너무하단 말이다." 질리언은 세리나에게 공범 같은 눈길을 보내며 얼버무렸다. "그래요." 세리나는 질리언의 재치에 감탄했다.
"난 마실 것 필요 없어요." 애런이 말했다. "세리나를 집에 대려다 줘야 하니까. 음주 운전은 안하는 성미거든. 그런데 매부는 어디 갔지?"
"아직 병원에." 질리언이 말했다. "두 사람 차를 마실 정도의 시간은 있지?"
"시드니로 돌아가야 해요." 애런이 대꾸했다. "하지만 스낵 정도는 먹을 시간이 있는데."
얼마 후 애런이 세리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자 세리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 누님이 좋아졌어요." 그녀는 현관에 서서 말했다. 애런을 들여보내지 않을 결심은 확고했다. "크리스틴도."
"그쪽들도 마찬가지요. 놀랄 건 없지. 당신은 무척 호감가는 여자니까." 그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정말 수요일에 기차를 타고 와도 괜찮겠소?"
세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애런이 힘든 일을 하고 퇴근 후에 자기를 데리러 고스퍼드까지 오는 것은 안 될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요. 기차를 타고 다니며 내 한몸 돌보는 것쯤은 벌써 오래된 일인걸요. 길 잃지 않고 늦지도 않을 거예요." 그를 안심시켰다. "6시에 가죠. 역에 있는 여자 화장실 옆 의자에 앉아 있을게요." "6시. 그때 만나기로 하지."
오, 애런. 그녀는 그의 흥분에 찬 눈빛을 보며 속으로 신음했다. 모든 일에 완벽하길 빌어요. 그리고.... 아냐! 그녀는 속으로 타일렀다. 아직은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을 테야.
애런이 키스하려 하자 그녀는 부드럽게 그의 입에 손을 얹었다. "수요일에요."
그는 신음소리를 냈다. "앞으로 이틀은 지옥 같을 거야. 제발 빨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려요."
잠시 후 그녀는 그의 차가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애런은 아직도 애매모호한 데가 있다.
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은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그의 사랑을 얻으려면 그의 죽은 아내하고는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파악했다. 빼앗는 역이 아니라 주는 역이 되어야 한다. 이기적으로 소유를 강요하는 여자가 아닌 함께 누리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
다행히 그녀가 살아온 인생은 그녀를 독립적이고 여유 있는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 점은 애런도 그의 가족들도 이미 인정한 사항이다. 이제 해야 할 것은 그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낙천적인 꿈에 부풀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었다. 이틀 뒤 같이 침대에 들기로 한 남자라면 애매모호한 점을 더 깊이 캐보고 그에게 아직 모를 구석이 많다는 것을 염두해 둬야 옳은 일이었건만.
8
세리나는 역의 시게를 다시 보았다. 시게를 본 지 정확히 2분 뒤였다. 6시 26분이다.
애런은 어디 있는 걸까.
그가 자기를 기다리며 서 있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사고나 아니였으면.
마침 퇴근시간이라 주변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종종 남자들이 그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차가운 얼굴로 눈을 돌렸다. 이렇게 구경거리가 되다니 초조했다.
게다가 지금 차림새까지 구경거리 아닌가. 물론 애런이 실망할 리는 없다. 그것만은 자신한다. 어제 쇼핑으로 그리고 오늘 시간의 대부분을 완벽한 치장에 쏟았으니까.
지금 입은 검은 리넨 수트는 소매 없이 단추로 앞을 매우고 깃도 없어서 그녀는 풍만한 몸매를 돋보이게 해주면서도 가슴을 두드러지게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으니까.
속옷은 검은 레이스 조각에 불과했다. 그리고 스타킹도 신지 않았다. 더운 이유도 있고 햇살에 그을린 긴 다리는 맨다리라야 더 돋보일 것 같았다. 더구나 황금빛으로 빛나도록 오일을 바른 터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머리와 화장에 좀 골치를 썩었지만 결국은 자연스럽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머리를 내려뜨리고 양쪽에 검은 빗을 꽂아 섹시한 금 귀걸이를 내보였다. 입술에는 청동색 립그로스를 바르고 눈 화장도 역시 아련한 푸른 아이섀도와 긴 마스카라를 칠해 극적으로 연출했다.
하지만 애런이 나타나지 않으면 몽땅 헛수고가 아닌가!
세리나가 이마를 접고 있는데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다가오면서 미친 듯 손을 젓고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달려가다가 문득 자기 행동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세련되지 못하다. 그래서 결음을 늦추고 차가운 미소로 그를 맞았다. "시계가 섰나요, 미남 아저씨?"
그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끌어안더니 요란하게 키스를 했다.
"애런!" 그녀는 항의하며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이 기다리지 않을까 봐 겁이 났지." 그는 중얼거리더니 다시 끌어안았다.
"당신이 정확한 것을 좋아하니 만큼 좀 걱정은 했어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아마 믿지 못할 거요!" 애런은 초조하게 말했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 사무실을 나왔소. 집에 가서 씻고 오려고까지 했지. 다리 위에 차가 막혀 봤자 그저 그런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꽉 막혔더군!"
"사고라도 있었나요?"
"그렇지 않아. 항구 밑 터널 공사 때문에 두 길이 임시로 하나로 묶인 거지. 게다가 하버 브리지 위에서 환경주의자들이 시위까지 벌이고 있더란 말이오. 맙소사, 5시부터 차 안에 갇혀 있었소." "오, 저런... ."
애런은 안심한 미소를 띠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지. 당신이 기다려 주었잖소. 이렇게 화도 내지 않고."
"애런, 당신은 고작 30분 늦은 거예요. 별일 아니라구요." 하지만 그녀는 문득 그녀의 질투 많은 아내 생각을 떠올렸다. 나오미는 남편이 늦으면 달달 볶아댔을 것이 분명하니까."정말이지 당신은 좀 느긋해지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일류가 되려는 사람은 심장마비에 잘 걸리는 사람 후보들인데 당신이야말로 일류지향주의자잖아요."
"그럼 당신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 이류인가?"
그가 그녀의 가방을 들어 주며 농을 던졌다.
"아뇨, 목말라 죽을 삼류에요. 여기는 지독히 더워요."
"그럼 갑시다. 저 길가에 차를 세웠소. 우리 집도 10분이면 가니까. 다서 내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 시원한 것을 마시지. 그런 다음 내가 예약해 놓은 이탈리아 식당으로 갑시다. 작은 댄스 플로어도 있으니까 당신 기분을 돋울 수 있을 거야." 그의 눈이 그녀를 훑었다. "난 돋울 기분도 필요 없지만 ." 그는 굶주린 어조로 말했다.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 멋지군."
"농담도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애썼다. "당신 딸처럼 당신도 농담엔 일가견이 있군요." 그는 쿡쿡 웃었다. "당신도 떄때로 익살 부리는 것이 장기지 . 제인 오스틴이 당신을 보았으면 좋아했을 걸."
"그래요? 그럼 내가 엘리자베스고 당신이 다시란 말이예요?"
그는 눈을 깜빡였다.
세리나는 엄한 얼굴을 했다. "무지렁이 웨이트리스는 <오만과 편견>을 읽어서도 안 된단 말인가요?" 저도 모르게 조롱이 튀어나왔다. "정 그러면 내가 그 영화를 본 것으로 하죠 . 하긴 몇 번 봤으니까."
애런은 자신의 오만한 태도를 깨달았는지 화가 난 얼굴이다. "미안하오. 정말 거들먹거리는 짓이었소. 또 실수했군." 그는 그녀의 한손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용서하는 거요?"
"물론이죠." 그녀는 곧 목소리가 잠겼다. 손바닥에 키스를 받는 것이 그렇게나 흥분되는지는 정말 몰랐다.
"당신 정말 대단한 여자야." 그가 중얼거렸다. "계속 놀라게 하는군. 여러 가지로...."
"빨리 나를 당신 집에 데려가지 않으면 더 놀랄 일이 생길걸요?" 그녀가 대꾸했다. "탈수증으로 당신 발밑에서 기절할 테니까."
그는 싱긋 웃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물론 아니죠."
"당신이 그렇다면야. 차에 다 왔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걸으며 연신 그녀를 보았다. "멋진 수트로군."
"새로 산 거예요."
"흠... 앞판의 단추가 좋아. 아주 크고 벗기기 좋은 단추 같은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저런, 당황하게 했군. 수틀리게 하는 남자 따위는 코끝으로 날려 보낼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화가 나서 물었다. 애런은 날 웬만한 것에 끄떡 않는 철판 같은 여자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차에 다가가자 애런은 문을 열고 그녀를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화내지 말아요."
이젠 안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도가 지나쳤다구. "좀 긴장했을 뿐이에요. 긴장한 것까지 놀랍다고 하면 정말 한방 먹을 줄 알라구요."
그는 웃었다. "알려 줄까? 실은 나도 좀... 그렇소."
그녀는 놀랐다. "그래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전혀 그럴 것 없겠지만... ."
바로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이다. 그의 부드러운 말에 그녀는 사랑이 맥박 쳤다. 갑자기 그녀의 모든 촉각들이 가까이 있는 그를 의식했다. 어깨에 얹힌 그의 손, 바싹 닿은 그의 가슴... 그는 나와 사랑을 나누길 너무나 원하고 있다.
"저녁 먹고 나서까지 기다리지도 말아요, 애런." 그녀는 숨가쁘게 말했다. "지금 당신 집 침대로 데려다 줘요."
그의 손이 잠시 그녀의 어깨를 꼭 쥐더니 눈동자를 빛냈다. "좋아." 그는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차안에 밀어 넣고 운전대에 올랐다. 그리고는 타는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던진 뒤 시동을 걸었다. "한 마디도 하지 말아요. 내가 온전한 몸으로 우리 집에 도착하게 하고 싶으면. 교통이 끔찍한데 당신은 방금 내 정신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잖소."
혼비백산이라. 그녀는 좌석에 기대 눈을 감았다. 혼비백산은 내 쪽이에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전 날 밤에도 그의 키스와 그의 스치는 손길로도 제정신을 잃지 않았던 가. 이제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몸에 손과 입술을 댈 것을 생각하니 온몸이 타올랐다.
그러고 있는데 어느새 애런이 속삭였다. "다 왔소."
애런의 아파트 단지를 보니 충격적이었다. 더블 베이가 아무리 고급 주택가라고 해도 그저 사업상 고객들이 묵다 가는 점잖은 벽돌 건물쯤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애런이 차를 지하주차장에 들여다 놓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초현대적일 뿐 아니라 최고급이었다. 그녀는 애런이 생각보다 훨씬 더 부자라는 생각을 곧 떠올렸다. 그가 현관의 켬퓨터와된 경비망을 거쳐 우아한 승강기를 타고 10층으로 그녀를 이끌자 더욱 그러한 결론이 확고해졌다.
10층에 내리자 붉은 양탄자가 깔린 복도가 나왔다.
그곳의 정적은 특히나 그런 결론을 가능하게 했다. 길거리의 소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런 완벽한 방음 장치를 갖춘 건물은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건물이 주인들은 아주 부자이고 성공한 사람들뿐이다.
세리나도 일하던 관광지에서 부자고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무례하고 거칠고 기막히게 자기중심적이다.
애런이 자기 아파트 문을 여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일주일 전에 그를 만났을 때 처음 만났던 인상이 곧 떠올랐다. 등골 위로 불편한 한기가 흘렀다.
애런은 자기 가족들을 만나게 해서 나를 안심시키고 또 지금은 부드러운 말로 나를 어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어리석고 순진하게도 얻을 사랑도 없는 곳에서 사랑을 얻을 꿈에 부풀어 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애런을 처음 만났을 떄 벌써 난 그가 더 이상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남자임을 감지하지 않았던가? 그 동안 달라진 것이 무엇이길래? 아무것도 없다.
변한 것은 그녀다 .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 그의 아파트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 후면 그가 옷을 벗기게 하고 서로 관계를 가지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우하시면 자신 역시 지금까지 해온 그 어떤 일보다 열중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등 뒤로 조용히 문이 닫히고 애런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와락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전의 생각 때문에 긴장하여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애런은 이마를 접으며 물러섰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고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나 봐요. 잠깐만 시간을 줘요." 그녀는 돌아서서 주위를 돌아보는 척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서 있는 넓은 대리석 홀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골동품 탁자로 다가가 거기 달린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어 넘기고는 한 구석에 있는 대단히 크고 희한할 만큼 싱싱해 보이는 종려나무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싱싱해 보여서 그녀는 가짜 나무인 줄만 알고 살짝 만져 보았다. "어머 , 진짜군요!"
애런이 싱긋 웃었다. "내 솜씨라고 자랑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오. 이 아파트는 화분 가꾸는 서비스까지 포함된 임대 아파트거든."
세리나는 홀에서 L자형으로 된 라운지 겸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우아함의 정수였다. 흰 벽에 베이지 색 커튼, 상아색 가죽 소파, 역시 같은 가죽을 씌운 식탁 의자."대단하군요." 그녀는 칭찬했다. "세금회계사 벌이가 괜찮은가 봐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 크레이그와 난 열심히 일해서 지금에 이른 거요. 그리고 내 개인적인 투자도 운이 따라 주었고."
"우리 집을 판 돈 중에서 내 몫을 갖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당신에게 조언을 구해야겠군요. 어딘가 작은 아파트를 사려는 참이었는데.... ."
"부동산은 좋은 투자지." 애런도 동의하며 그녀와 함께 발코니로 나왔다. "몇 달 뒷면 부동산 경기를 탈 겅요. 하지만 세리나, 아파트라면 내가 사주고 싶소. 당신이 원한다면 세를 물든지."
두 사람은 발코니 난간에 서서 길 저편에 있는 작은 공원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시내의 불빛이 서서히 내리는 황혼 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난 내가 돈을 내고 싶어요." 그녀는 속으로 화가 나고 실망했지만 기색없이 말했다.
하지만 화가 난 것은 그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였다.
뻔한 것을 아닌 척하려는 자신에게. 돈많은 남자가 자신의 성적 유희를 위해 정부를 숨겨둔다는 뻔한 스토리인 것을.
"난 샤워를 해야겠소." 애런이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그동안 긴장을 풀 음료라도 만들어 마셔요. 무척 긴장한 것 같군. 자, 양주장으로 안내하지." 그는 그녀의 손을 끌고 골동품 칵테일 찬장을 가리켜 보였다.
"술잔하고 웬만한 술은 다 있소. 얼음은 냉장고에 있고, 주방은 저 문 뒤요. 손님 화장실은 홀 가까운 문이고. 의사에게 가서 문제는 해결했겠지?"
"네."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애런의 조금 실망한 듯한 한숨이 들렸다. "편히 쉬고 있어요. 금방 올테니."
그가 사라지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칵테일을 만들지는 않고 다시 발코니로 나가 가까운 바다에서 부는 미풍을 맞았다. 실망감이 느껴졌다. 사랑을 하려 오랜 세월 기다렸는데 그 사랑이 물거품이 되려 하다니...
그녀는 난간에 기댔다. 맞은편 공원에서 놀고 있는 한 소녀에게 관심이 끌렸다. 소녀는 미끄럼틀을 타다 흙에 빠지는 바람에 옷이 엉망으로 되었다. 소녀의 엄마가 달려와 야단을 쳤지만 엄마가 돌아서는 순간 소녀는 다시 미끄럼틀에 올라갔다.
세리나는 자기 행동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불현 듯 했다.
애런과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소녀가 자꾸 미끄럼틀을 올라가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 소녀는 그것이 재미있어서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엉덩이를 세차게 얻어맞았으니 눈물밖에는 남는 것이 없겠지...
"마실 것을 만들지 않았군." 애런이 뒤에서 비난하듯 말했다.
돌아보니 애런은 발코니 입구에 푸른 타월지 욕의를 입고 서 있었다. 밑으로는 알몸이 분명했다. 그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주지." 그는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는 술 찬장의 문을 열었다. "뭘 마시고 싶지? 진 토닉? 보드카, 위스키?"
"체리 브랜디." 그녀는 발코니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애런이 찬장 밑을 보러 몸을 숙이는 바람에 그의 옷이 벌어져 맨 허벅지가 드러났다. 세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 여기 작은 병이 있군." 그는 붉은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 "난 버본을 마시기로 하지."
"크리스틴 말로는 술을 별로 안한다던데."
그는 버본을 따르다가 눈썹을 치켰다. "그 애는 수다쟁이지. 그밖에 당신 뭘 알고 있소?"
"당신이 수학에 능하다는 것을요."
"사실이오. 하지만 술 이야기는 맞지 않소. 나도 꽤 마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 딸애 앞에서 마시지 않는다 뿐이지. 당신 브랜디에는 뭘 더 넣을까?"
"주방에 가서 뭐가 있는지 돌러 보죠."
주방은 식당 오른편이었다. 역시 전체적인 색조가 은은했다. 크림 색 찬장에 바닥에는 갈색 타일이 깔려 있고 흰 부엌가구 표면은 크림 빛 대리석으로 마무리되었다.
애런은 자기 술잔에 물과 얼음을 넣었다. 세리나는 토닉 워터를 넣었지만 맛은 강하게 했다. 긴장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애런의 벗은 몸을 보자 자신이 여기 와 있는 이유가 떠올랐지 때문이다.
그녀는 긴장과 흥분으로 몸을 떨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갑자기 느껴지는 욕망을 채우려면 술의 힘을 빌려 용기를 얻어야만 했다. 예전의 세리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애런의 사랑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렇게 대담한 욕망이 솟는 것을 성적인 욕구 때문만이 아니다. 그를 기쁘게 해주고 그에게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행동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그녀는 천천히 빈 잔을 놓았다.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빨리 마셨군." 애런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너무나 잘 생기고 강인하고 남자다운 모습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그래, 이거야. 세리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넌 지금 미끄럼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과연 밑에 있는 흙 웅덩이에 빠질 가치가 있는 모험인지 아닌지 재고 있는 거야.
쓴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석은 세리나. 겁재잉 노릇은 하지 마.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머지는 생각말라구!
그녀는 천천히 하지만 결연히 검은 하이힐을 또각이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머리는 당당히 치켜세우고 어깨를 폈다. 그를 경계하는 듯한, 묻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뭐 도울 일이라도?" 애런이 싱긋 웃었다.
"아뇨."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냥 술이나 마시세요."
하지만 그녀가 그의 가운 허리띠를 풀고 천천히 앞자락을 벌리자 그는 술잔을 입에서 떼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에 놓이자 그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의 손길이 그의 허리를 지나 다리로 나아가자 그는 몸을 떨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그녀는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는 그이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욕망이 불붙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기뻤다. 그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기뻤다. 그는 신음을 하고 눈을 감았다.
마침내 그는 술잔을 놓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묻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젠 내 차례요." 그가 잠긴 소리로 말했다.
9
세리나는 천천히 잠에서 깨며 아직 반의식의 세계를 헤매었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며 시트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눈은 여전히 꼭 감은채로. 이렇게 나른한 기분은 처음이다. 침대가 이렇게 편안하게 느껴진 적은 지금껏 없었다.
"아침식사요, 숙녀분."
세리나는 눈을 번쩍 뜨지 않았지만 곧 의식이 돌아왔다.
그녀의 침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방도 아니었다. 애런의 방이었다.
애런....
그와의 믿지 못할 사랑의 장면을 떠올리자 녹녹한 달콤함이 그녀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런 근사한 것은 감히 꿈꾸지도 못했다. 애런도 내게 단지 욕망만을 느낀 것은 아닌가 봐?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을 나눈 뒤에 그는 너무나 다정했다. 그리고 진짜 정감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달링이라고 불러 주었다.
단지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의 행동을 냉소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도 이제 와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아니,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을 나눈 일을 후회하는 것부터가 못할 일이다. 그는 그녀에게서 진정한 여자를 끌어내 주지 않았던가. 그녀도 다른 사람처럼 정열적이고 제약에 구속받지 않는 여자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녀는 새로 성적으로 눈을 뜬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입술에 떠올리고는 몸을 일으켜 앉아 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빗어 올렸다.
애런은 침대 옆에서 출근할 옷차림을 하고 쟁반을 팔에 안고 서 있었다. 그녀의 벗은 가슴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은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몸을 돌려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올려놓는 그의 턱이 굳어 있었다.
"오렌지 주스, 베이컨, 달걀, 호밀, 토스트, 커피요. 그리고 잘 잤소?" 그는 말을 마치고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아주 담백한 키스를 했다.
세리나는 그를 유혹할 수 있는 자기 힘을 시험해 보지 않고는 못 배겼다.
"당신도 잘 잤어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팔을 그의 목에 감고 그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끌어내렸다.
애런은 잠시 저항하다가 신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길고 완벽한 키스에 돌입했다. 그녀의 맨가슴이 그의 가슴에 눌렀다.
이윽고 그의 눈이 어둡게 번들거렸다.
"당신 아주 섹시한 집사군요."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그를 포옹하려 하자 그는 일어섰다.
"이런, 시간 좀 봐. 가야겠소. 크레이그가 오늘 아침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9시에 만나기로 했소. 나중에 전화해서 내가 일찍 퇴근할 수 있는지 아닌지 알려 주기로 하지."
빨리 그녀를 떠나고 싶은 것이 분명한 그의 태도를 보자 그녀는 실망을 느꼈다. 아직 7시 30분밖에 안되었다. 대체 여기서 시드니까지 얼마나 걸린다구. 아무리 걸려도 고작 1시간 반 정도일 텐데.
그는 나 같은 심정이 아닐까? 벌써 나에 대한 정열이 식은 걸까? 방금 열렬히 키스했는데. 하지만 지금 그는 빨리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싶어 안달인 모양이다.
"아, 좋아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상심에 휩싸여 시트를 당겨 가슴을 덮고는 쓸쓸한 눈동자를 시트 아래 묻었다.
애런은 한숨을 쉬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세리나. 내가 가고 싶은 것은 아니오. 가야 하는 거지."
"그래요?"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턱이 미미하게 떨리고 가슴은 심연으로 내던져졌다.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내가 이곳에 있었으면 해요? 정말?" 한 순간 그의 눈이 비친 의혹의 눈빛이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하룻밤 일로 끝내려는 거군요, 그렇죠?" 그녀는 낮게 절망적으로 물었다.
"아니, 물론 아니오." 그는 초조하게 말했다. "난 그냥 ... ." 그는 말을 끊고 한숨을 쉬었다.
"그냥 뭐가요?" 그녀가 재촉했다.
그는 이마를 접었다. "실은 잠이 깨서 당신이 내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그런 기분일 줄은 미처 몰랐소."
"어떤 기분인데요? 모르겠군요. 무슨 뜻이에요?"
"망할, 세리나. 생각을 한번 해봐요. 당신이 고혹적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니 난 다시 당신을 원하고 있었소. 아니, 당신이 또 필요했소. 미친 듯이. 걷잡을 수 없이. 난 나가서 냉 샤워를 오래 해야만 했소."
"하지만... 왜요? 왜 날 깨우지 않았어요?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그걸 모르겠소?" 그가 쏘아붙였다. "그게 문제의 일부란 말이오. 당신의 관능... 당신의 익숙한 기교가. 그건 중독성이 강한 거요.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식으로 필요하지는 않았소." 그의 얼굴에 갑작스러운 분노가 지나갔다. "난 아무도 그런 식으로 필요로 하고 싶지는 않아!"
그녀는 놀라고 황량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인과응보다.
어제 그녀는 너무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 것이다. "내가 가길 원한다면...."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렇다고 이야기만 하세요. 제발, 최소한 정직이라도 해봐요!"
그는 가늘게 뜬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직이라구?" 그의 얼굴이 더욱 거칠어졌다. "언제 내가 당신에게 정직하지 않았지? 간밤에 난 당신을 억지로 침대에 끌어들이지 않았어. 당신은 아무런 사랑의 맹세 없이도, 변치 않은 충성의 맹세 없이도 자진해서 내게로 왔어. 정직이라구!" 그는 냉소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당신네 여자들이 새겨야 할 말이지. 그리고 당신이 변명하기 전에 말이지만 조금 전 당신 행동을 보라구. 내가 일하러 가야 한다니까 당신은 자존심 상하고 심지어는 상처 입은 얼굴이었어. 날 마치 결혼식 다음날 아침에 신부를 팽개치고 가는 신랑 꼴을 만들면서. 그걸 보고 당신을 주말 내내 여기 두어야 하느냐 하는 의혹이 당연히 들었지. 왜야하면 내가 있어 달라고 했던 세리나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입을 쑥 내미는 그런 여자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지. 독점욕 강한 애인 역할을 할 여자가 아닌가 싶었고. 난 그런 조종술은 필요없소.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참지도 않을 거요!" 그는 딱딱하고 가차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런 게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떠나는 것이 좋을 거요."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그의 아내는 도대체 어떤 여자길레 이렇게 심한 상처를 그에게 남겼단 말인가? 더 최악의 문제는 과연 저런 상처가 치유될 날이 있기는 할까 심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를 너무나 사랑하는 만큼 이대로 떠나 그를 팽개칠 수는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나 원했다는 그의 말이 그나마 그녀의 남은 희망을 살려 주었다.
당신 생각이 틀릴 수도 있어요. 그녀는 그의 차갑게 조소를 띤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은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필요로 할지도 몰라요.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공허에서 벗어나 다시 감정을 느껴야 해요. 처음에는 육체적인 것으로 시작한다 해도. 때문에 난 여기 머물면서 당신이 원하는 그런 여자가 될 거에요. 자유롭고 부담 없는 여자노릇을 해야 한다 해도 해낼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당신은 잠이 깨서 내가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된 것을 알게 될 거에요. 그리고 나면 나를 영영 나주지 않고 싶어질 거예요.
"미안해요, 애런." 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 "물론 당신은 일하러 가야죠. 하지만 부디 이해해 줘요. 간밤은 너무나 ... 근사했어요. 그리고 너무 특별했고. 그래서 당신이 날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내가 가길 바라는 것 같아 화가 났던 거에요. 용서하죠?" 그녀는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한순간 그는 영 굴복하지 않을 기세였다. 하지만 갑자기 초조한 신음소리를 내고는 침대에 앉아 그녀를 잡아당기고는 세차고 굶주린 키스를 퍼부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을 떼어놓는 그의 눈은 분명한 걱정으로 번들거렸다. "이래도 내가 당신이 갔으면 한다는 건가?"
"아뇨."
"당신을 원해, 세리나. 그리고 당신과 하고 싶어. 하지만 당신이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몇 가지 원칙을 일러 줘야겠소."
"뭔데요?"
"날 사랑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리라 기대하지도 말아요. 난 흥미 없소. 난 지금처럼 자유롭고 이대로 있고 싶소.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끝을 내는 것이 좋소." "알았어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것은 최초의 시험대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의 꿈을 조각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해하는 척하고 희망을 품어야 하는 첫 시험대였다.
그녀는 놀랍도록 차분한 눈을 들어 그를 보면서 섹시한 미소를 떠올렸다. "자, 이제 해결했으니 키스하고 화해하는 것이 어때요?"
그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그는 뺨을 그녀의 뺨에 비볐다. "당신은 놀라워... 그리고 ... 맙소사, 당신을 가지지 않을 수 없어."
그는 신음을 하더니 물러나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가 셔츠 단추를 벗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늦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가 자신이 일부러 그를 유혹했다고 생각할까 봐 염려가 되어서 물었다.
"그렇게 늦지는 않았소." 그는 셔츠를 벗고 바지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세리나는 그를 바라보며 그를 걱정뿐 아니라 자신의 걱정에도 눌랐다. 그가 옷을 벗는 것을 돕고는 얼른 그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끌어당겼다. 애런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 속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애런은 11시 3분에 전화를 걸어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했다.
"고객 한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정찬을 대접해야겠소. 크레이그가 휴가가기 전에 미리 정한 약속이기 때문에 내가 맡아야지 뭐."
"할 수 없죠." 그녀가 중얼거렸다.
애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 내가 한 시간 전에 간신히 문으로 기어나온 뒤로 당신은 뭘 했소?"
그녀는 쿡쿡 웃었다. "당신이 마련한 근사한 아침을 못 먹었어요. 먹으려고 보니까 너무 식었잖아요. 대신 오렌지 주스만 마시고 샤워를 한 다음 다시 침대로 가서 졸았어요."
"부러워라."
"이제 토스트를 만들어 커피하고 마시고 책을 읽을 참이에요. 당신 책장에는 베스트셀러가 많더군요."
"어떤 것을 좋아하는데?"
"아무 거나 다 좋아요."
"흐음... 얘기 더 해봐요." 애런이 섹시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이런, 다른 전화가 왔네. 가야겠소, 세리나.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가리다. 아마 4시쯤일 거요."
세리나는 주방으로 경쾌하게 들어갔다. 만사가 잘 되고 있다. 애런은 약속대로 전화를 해주었고 정말이지 행복한 음성이다.
당신은 나와 더불어 행복해질 거예요. 애런 킹슬리. 그녀는 맹세했다. 두고보라구요.
그녀가 주방에서 애런의 욕의를 입고 두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현관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벽시계를 보았다.12시 16분이다. 애런이 점심자리에서 빠져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거실로 달려 나가서 보니 크레이그가 돌아서서 문을 닫고 있었다.
그녀가 놀라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듣고 크레이그가 홱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놀라움과 알만하다는 뜻이 담긴 눈길이었다. "저런, 저런, 애런이 오늘 아침 차가 막혀서 늦은 것이 정말이로군." 그가 쿡쿡 웃었다.
"그래도 나한테는 말할 것이지. 운 좋은 녀석 같으니." 크레이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의 맨발에서부터 천천히 훑어 올라갔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운 좋은 녀석이야...."
세리나는 손을 올려 가운의 앞섶을 쥐었다. "당신은 휴가를 떠났을 텐데요." 그녀의 목소리에 단둘이 있는 데서 오는 불안이 담겼다.
크레이그는 청바지와 검은 티셔츠를 입은 캐주얼한 모습이어서 더욱 거칠어 보이고 요전 날 만났을 때보다 더 우람해 보였다. 그는 눈썹을 올리더니 등 뒤로 문을 잠갔다.
"뭐... 뭐 하시는 거에요?" 세리나는 불안으로 목이 죄어왔다.
크레이그는 놀란 얼굴을 했다. "뭘 하다니. 뭘 좀 찾으려고 하는 건데. 내가 아끼는 모자인데 몇 주 전에 여기다 두고 갔거든."
그가 앞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방금... 문을 잠갔잖아요. 왜죠?"
크레이그가 이마를 접으며 뒤로 돌아다보았다. "아, 저것. 아마 습관이었겠지. 나도 이혼수속을 할 때 한동안 여기서 살았소. 애런은 늘 문단속을 하라고 했거든. 애런이 어떤 친구인지 알잖소." 그는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고개를 내저으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세리나, 그렇게 우는 아이 얼굴하지 말라구. 난 성자는 아닐지 몰라도 내 절친한 친구의 여자한테 강제로 뭘 어떻게 하는 일 정도는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으니까. 젠장, 나한테도 조금 이나마 도덕심을 인정해 줘야지!"
그녀가 하도 안심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더욱 이마를 접었다.
"이봐요, 피해망상증세가 좀 있군 그래. 당신에게 수작부린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젠장, 당신이 워낙 남자 눈을 끄는 여자니 별수 있나! 남자들이 모두 장님도 아니고."
그의 거칠고 솔직한 말에 그녀는 놀랐다. 자신이 경험상 피해망상증세도 인정해야 했다.내가 과잉반응을 했는지도 몰라....
크레이그는 한숨을 쉬고는 그녀 옆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가 빗자루를 넣어둔 찬장을 뒤졌다. 그녀는 긴장해서 입구에 서 있었다. "여기는 없군." 그가 중얼거렸다.
"혹시 커다란 밀짚모자 못 봤소? 멕시코 스타일 모자에 술이 달린 것?"
"아뇨, 미안하지만." 그녀는 그가 그의 그런 모자를 쓴 것을 생각하니 우스웠다.
"젠장, 내가 좋아하는 모자도 안 갖고 어떻게 피지 섬에 가지?"
"침실에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찾아볼까요?"
"아니, 내가 하지." 그는 침실로 들어갔다. 옷장 문을 열어봤지만 모자는 없었다.
"애런의 사무실로 전화를 하시지 그래요? 애런이 알지도 모르잖아요."
"소용없소. 지금쯤 사무실에 없을 거요. 시내에서 12시 30분에 약속이 있거든. 늦기 싫어하는 애런 성미를 알잖소. 늘 그렇지는 않지만." 그는 씁쓸한 눈길로 흐트러진 침대를 보았다.
세리나는 얼굴이 요란하게 붉어졌다.
"아, 그렇지!" 크레이그가 침실에서 나오더니 중앙 욕실로 들어갔다. "여기 있군." 그리고는 커다란 모자를 머리에 쓰고 나왔다. 세리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숨을 삼켰다.
크레이그는 싱긋 웃었다. "파리 떼들을 물리쳐 주거든."
그가 머리를 흔들자 술이 마구 흔들렸다. "찻주전자가 끓는 것 같은데."
세리나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크레이그가 뒤를 따랐다.
"나한테도 커피 한잔 주겠소?"
세리나는 애런의 욕의만 걸친 모습으로 그와 단둘이 앉아 있기가 아직도 불편했으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건달이 아님이 밝혀졌음에야...
크레이그는 커피 잔을 쥐고 앉아 입을 열었다. "그래, 애런하고는 오래 되었소?"
"뭐가요?"
"같이 잔 지 말이오."
그녀는 주방 탁자 너머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고, 애런을 행복하게 만들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 내가 상관할 일이지. 그 가엾은 녀석은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하오. 난 오랫동안 그에게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가는 상대가 아니고 섹시하고 말 잘 듣는 금발 아가씨라고 일러왔지. 하지만 그렇다고 돈 밝히는 머리 빈 아가씨가 그에게 달라붙는 것도 싫었소."
크레이그가 그녀의 감정 따위는 개의치 않고 지껄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모욕이라기보다도 차라리 충격을 느꼈다. 하지만 곧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맙소사, 당신이 뭐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거죠? 상처만을 사람은 결국 난데! 어리석고 말 잘 듣는 금발머리... 나 말이에요! 보답으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는 애런인데도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사람은 나라구요! 그래도 내가 돈 밝히는 머리 빈 아가씨인가요?" 분노와 상처가 어우러진 눈물이 그녀의 눈에 넘쳤다.
크레이그는 입이 딱 벌어졌다. "맙소사, 당신 정말 그 친구를 사랑하는군?"
"그렇다 한들 뭐가 다르죠?" 그녀가 쏘아댔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그 귀중하신 친구에게 모자라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데 달라질 것이 뭐죠?"
"세리나, 난 그런 뜻이 ... 난... ."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그 망할 커피나 마시고 빨리 가버려요!" 그녀는 주방에서 나와 침실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자제심을 잃은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크레이그는 더욱 미웠다. 속물에다 둔한 악당 같으니!
걱정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리나, 이봐요, 미안하오. 정말이지 당신을 겨냥해서 말한 것이 아니었소. 하지만 당신이 종종 남들 눈에 어떤 여자로 비치는지 알잖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안해 본 일이 없으니까. 그런데 애런은 한 번 낚을 만한 남자고. 이봐요, 당신이 애런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제발 그에게 말은 하지 말아요. 했다간 애런이 기절해 넘어질 테니까. 젠장, 당신은 어려운 상황에 말려들었소. 그 친구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많아요. 안 그러면 상처를 입을 거요. 자, 나와요. 그리고 잠깐 앉아서 내 말을 들어요. 애런의 결혼생활 이야기를 해줄 테니까. 미리 알고는 있어야지."
세리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과거를 알게 될 기회를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긴장한 채 밖으로 나갔다. 크레이그는 그녀의 어깨에 위로하는 뜻으로 팔을 두르고는 그녀를 주방 간이의자에 앉혔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그는 새로 물을 부은 커피를 그녀에게 내밀고 앉았다. "처음부터 해야겠지. 내가 애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린 대학에서 경영학 코스를 밟을 때 만났지. 애런은 구명대원 챔피언 타이틀로 바빴고 난 회계사 사무실에서 서기로 낮에 아르바이트를 했지. 우리가 끌린 것은 둘 다 너무 일찍 결혼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던 것 같소. 내가 애런하고 같은 이유로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보는 사람은 누구나 크리스틴이 없었으면 그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인상을 받았지. 애런이 나오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소? 나오미는 아름다운 데다가 그에게 헌신적이었으니까. 너무나 헌신적인 것이 탈이었지만."
"그건 나도 알아요." 세리나가 말했다. "질리언이 그러는데 병적으로 질투가 강했다더군요. 아마 크리스틴을 기숙사 학교에 보낸 것도 아이를 방해물로 생각하고 그랬을 거라고 하더군요. 좀 과한 말인 것 같았지만."
"믿는 것이 좋을 거요. 정말 그랬으니까. 애런은 아이를 더 원했지만 나오미가 거절했소. 애런을 아이들에게 빼앗긴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어했거든."
"그래도 결혼생활이 계속되었으니 놀랍군요."
"나도 그렇소. 특히나 애런이 부상을 입고 서핑을 포기한 뒤로는."
"부상을 당했었나요?"
"다리가 두 군데 부러졌지. 뼈가 붙는데 오래 걸렸소. 하지만 나오미는 좋아했지. 그가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을 . 그녀는 애런이 자기 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소. 그가 다른 취미를 갖는 것도, 친구 사귀는 것도 싫어했지. 특히 나를 싫어했소. 내가 애런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그리고 특히 우리가 동업을 시작하고 내가 이혼을 하자 더욱 그랬소. 불에다 기름 붓기였지. 그녀는 매일 몇 번이나 사무실에 전화를 하면서 애런이 어디 있는지 묻기 시작한 거요. 조금이라도 귀가가 늦거나 그녀와 만날 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큰 싸움이 일어났소. 언젠가 그 친구가 사소한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집에 30분 늦게 간 일이 있는데 그녀는 경찰까지 불렀소."
세리나는 애런이 정각을 엄수하는 것에 집착하던 일을 생각하자 가슴이 뒤집혔다. 그가 당분간 아무한테도 시간 늦은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하지만... 애런이 그런 것을 참고 산 것이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는 고집이 센 남잔데."
"오해 말아요. 애런도 싸울 만큼 싸우고 덤볐지. 하지만 늘 어린애 때문에 약점을 잡혔소. 나오미는 딸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이용해 그를 잡아두고 있었지. 하지만 그 작전도 마침내는 소용없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소. 그는 그녀와 이혼하고 양육권 소송을 벌일 작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그렇소." 크레이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럴 작정이라는 말을 내게 한 바로 그 날, 나오미의 주치의한테서 전화가 왔소. 나오미가 말기 암으로 쓰러졌고 잘해야 몇 주일 안 남았다고... 애런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소? 도움이 필요한 그녀를 버리나? 게다가 그녀와의 문제도 조금만 있으면 어차피 풀릴 마당인데. 풀리는 방법이 끔찍해서 그렇지."
세리나는 몸을 떨었다. "끔찍해요."
"아직 약과요. 의사가 나중에 뭐랬는지 알아요? 나오미도 나중에 직접 말했소. 그녀는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는 거요. 유방에 종양이 생긴 지 오래건만 조치를 취하길 거부했다는 거요. 가슴이 없으면 그리고 물리치료를 머리라도 빠지면 애런이 자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는 거지. 그녀는 애런에게 차분히 말했소. 그에게 몇 년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 그리고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에 죽음보다 더한 가치를 두고 있었다는 말이오. 다시 살았다 해도 역시 그랬을 거라고 ." "맙소사, 가엾은 여자 같으니... 그리고 가엾은 애런!"
"그는 절망했지.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오미의 마지막 날들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소. 그러느라 감정적으로 기진해 버렸고 나오미가 죽은 후 이제 한숨을 돌리려나 하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여자에 관한 한 더욱 냉담하고 냉소적으로 변해 버렸소. 뱄기만 하는 남자가 된 거지. 내가 당신에게 걱정하는 것도 그거요. 나오미가 죽은 후 애런이 만난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 아니오. 하긴 하룻밤 이상 머물게 한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지만. 조심해요. 그렇다고 그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니까."
세리나는 말없이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애런은 하룻밤으로 끝내고 날 팽개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정부를 붙박이로 두는 편이 편해서였을까? 아니면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는 날 좋아하기 때문일까?
맙소사,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일이 복잡하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많은 것을 파괴했다. 그녀가 남기고 간 부스러기를 모아 맞출 수 있는 날이 올까? 나오미가 크리스틴을 기숙사 학교에 보낸 것이 그나마 천행이었다. 그냥 있었다면 아이는 극도로 불안한 환경에서 자랐을 테니까.
크레이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나도 애런이 당신하고 사랑에 빠질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소. 하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소. 너무 이르거든. 설사 사랑한다 해도 당신하고 결혼하지 않을 거요. 그러니 당신이 결혼을 바라고 있거든 잊어요. 애런은 적응을 못할 거니까."
문득 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두 사람은 애런이 들어와 문을 닫는 것을 둥그렇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애런은 눈을 크게 뜨지도 않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특히나 크레이그가 아직도 세리나의 손을 잡고 있는 모양을 보았을 때는 더욱 무서운 얼굴이었다.
10
"공항 가는 길에 들른 건가, 크레이그?" 그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세리나는 크레이그가 손을 빼고 그의 모자를 매만지는 동안 숨을 죽였다. "그런 셈이지. 내가 이 모자를 놓고 피지 섬에 갈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 테지? 모자 없이 일광욕을 하면 위험하잖나." "더 위험한 행동도 있지." 경고조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하긴." 크레이그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불편한 웃음이었다.
애런은 곧 벼락이라도 칠 것 같은 얼굴이다. 그가 당장 죽일 것 같은 눈길을 그녀에게 던지지만 않았던들 세리나는 질투가 분명한 그의 행동에 희망을 느꼈을 것이다.
"커피 고마웠소, 세리나." 크레이그가 무심한 척 말했다. "나중에 보자구, 애런." 그리고는 현관을 향해 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참, 피트하고 점심 약속은 어떻게 되었지? 그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나?"
"레스토랑에다 올 수 없다는 메모를 남겼더군."
"아, 그런가 했지. 자, 그럼 아디오스! 3주 후에 보세."
그는 문을 열고 가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사라지자 침묵이 흘렀다.세리나는 뱃속이 조여왔다.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해야 할 지 몰랐다. 크레이그가 온 것을 설명해야 하는지 애런의 불길한 분위기를 무시해야 하는지. 이럴 때 분방한 여자라면 어떻게 할까?
"두 사람이 아주 다정해 보이더군." 애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퉁명스럽고 딱딱했다. 그는 조리대 위에 열쇠를 던진 다음 크레이그의 커피 잔을 집어들었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싱크대에 남은 커피를 쏟았다. "누가 보면 한창 밀어를 나누는 것을 내가 방해한 줄 알겠어."
그녀가 아무런 변명이 없자 그는 돌아서서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때? 아무 말도 안할 건가? 아니면 당신들 두 사람이 시치미 뗀 것을 그대로 믿을 만큼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조리대 양쪽을 손으로 잡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그에게 올가미를 씌울 계획인 것을 크레이그가 몰랐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 요전 날밤 당신은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잖나."
그녀는 어이가 없어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게 당신 계획이었지?" 그는 냉소를 날렸다. "손에 잡히지 않는 척해서 그 가엾은 친구에게 당신이 자기에게 아무 뜻이 없는 거라고 생각하게 하고는 갑자기 뜨겁게 공격하는 거지."
세리나는 말을 잊었다.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는 분노를 참으려 온몸을 떨다시피하고 있다.
"애런." 그녀는 억지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크레이그하고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는 모자를 찾으려 왔던 거고 커피를 마시러 앉았을 뿐이에요."
애런의 푸른 눈이 위험스럽게 가늘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당신 손을 쥐고 있을 필요가 있었나? 맙소사!" 그는 홱 돌아서서 거실로 갔다. "날 바보로 아나? 내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당신네 두 사람은 아마 지금 저기 있었을 거야." 그는 침실을 가리키며 냉소 지었다.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가 다물었다. 애런의 맹목적인 질투에 그녀의 참을성도 바닥났다. "그만 됐어요, 애런!" 그녀는 일어나 푸른 눈을 번뜩였다. "무슨 근거로 그런 것을 믿는 거죠? 정 알아야겠다면 말하죠. 당신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크레이그는 당신이 결혼생활 이야기를 하며 내게 당신에게는 상처가 있다고 경고해 주더군요. 그리고... 아, 이건 바보짓이에요." 그녀는 그의 의심 어린 푸른 눈을 보고 중얼거렸다.
순간 알았다. 애런을 사랑하긴 해도 그와 함께 한집에 머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무턱대고 그녀를 왜곡해서 생각하는 고집에 참을 수 없었다.
"난 내 자신을 변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유롭고 싶다면서요? 그럼 자유를 드리죠! 혼자 다 가지세요!"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그의 옆을 지나 침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문을 꽝 닫으려고 하는데 애런이 벌써 문을 발로 차 열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그녀를 잡아 홱 돌려세웠다. "떠나게는 못해."
"그래요?" 그녀가 대들었다. "그래, 어떻게 막을 작정인데요? 때릴 건가요? 묶어두나요? 내가 순순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질투 심한 병자에 대한 기분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 사람은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어 하죠."
그녀는 그의 눈에 경악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충격이 심한 모습이라 그녀는 분노가 녹고 연민이 솟았다. 눈물이 솟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원칙도 세워야 한다는 굳센 결심이 아울러 자리 잡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물러나 천천히 욕의의 끈을 풀고 욕의가 바닥에 흘러내리도록 했다. 그리고는 그의 앞에 섰다.
"이 가슴 보여요?" 그녀가 소리쳤다. "이건 당신 거에요! 그리고 이 몸도 당신 거에요." 그녀는 다가가 그에게 몸을 댔다.
"크레이그의 것이 아니라구요. 다른 어떤 남자의 것도 아니에요. 지난밤은 내겐 아주 특별했어요. 앞으로도 그런 밤을 계속하고 싶다는 내 말을 믿어 줘요. 하지만 당신이 생색내며 내주는 것을 차지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가겠어요. 나도 자유롭고 싶어요. 남자들이 내게 가진 선입견에서 자유롭고 싶어요. 그리고...."
애런은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떨리는 입술에 뜨거운 입술을 겹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하오." 그는 입으로 그녀를 뺨의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 다시는 그런 짓 않겠어. 다시는! 내가 미쳤었던가봐. 맙소사, 나도 질투가 얼마나 파괴적인 것인가 알고 있소." 그의 키스가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몸짓이 되었다. "용서해요... ."
세리나는 금세 용서를 하고 말았다. 지금 원하는 것은 빨리 애런과 사랑을 나누는 일뿐이다.
"당신을 원해, 세리나. 지금... ."
그녀는 자기를 침대에 밀어누이는 애런의 손짓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가 미친 듯 성급하게 옷을 벗어던지는 것을 둥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이번엔 부드러운 애모도 없었다. 그녀는 애런의 힘찬 몸을 활짝 받아들였다.
"맙소사." 광풍이 지나자 애런은 그녀와 나란히 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하고 싱긋 웃었다.
"이렇게 성급하게 끝난 것은 당신 탓이야. 그렇게 섹시하게 굴었으니 안 그렇소. 당신을 늘 너무나 원하다 보니 다른 남자들도 다 그런 줄 안 거요."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용서했지?"
"안해야 되는걸." 그녀는 중얼거렸다. 속으로 깨달았다. 애런을 사랑하는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애런의 팔에 안겨 있으면 제대로 셍각하기가 힘들다.
"내가 보상을 해주지." 애런이 속삭였다.
"그래요? 어떻게?"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당신이 원할 때 언제나 주는 것으로.... ." 그는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약속만 하구." 그녀는 무심한 척 말했지만 몸은 벌써 그녀를 배신하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난 척했다. "날 의심하나?"
"글쎄요. 해변가에서 당신이 그랬잖아요. 이젠 몸이 옛날 같지 않다구요."
그는 쿡쿡 웃었다. "시험해 볼까?"
그녀는 입술을 내밀었다. "난 실망하고 싶지 않아요."
애런의 눈에 짓궂은 기색이 어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날 잘 몰라 난 도전에는 언제나 응하는 사람이라구."
다음날 애런은 출근을 했지만 일찍 문을 닫고 정오에 집에 돌아왔다. 두 사람은 연이어 사랑을 나누며 산책을 하며 지냈다. 세리나는 장래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었다.
애런을 너무나 미친 듯이 깊이 사랑하므로 그가 없는 인생을 생각하는 것만도 머릿속이 횅했다.
그의 의지 아래 완전히 자신을 맡기고 말았다. 결국은 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희망에 희망을 거듭하면서, 희망을 이루어지는 듯도 싶었다. 종종 그의 얼굴에 따스함과 애정이 담긴 놀란 듯한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그녀 없이 살기 어려워지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 여겨졌다.
토요일에도 애런은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기 싫어했다. 하지만 일요일인 크리스마스에 질리언의 집에서 크리스틴과 같이 지내자고 했으니 만큼 그녀는 집에 들러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선물을 사야 한단 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세옷을 입고 싶어 죽겠어요. 평생 이렇게 알몸으로 지낼수도 없고 검은 수트 한 장으로 줄곧 버틸 수는 없잖아요."
"그야 모르지." 애런의 눈에 다시 익숙한 눈빛이 반짝였다. 고속도로 위가 아니었던들 둘은 또다시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애런은 아무리 그녀를 안아도 만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을 말리려 진을 뺏다. "크리스틴하고 트리 장식을 돕기로 했다면서요."
그녀의 말에 애런은 지고 말았다. 애런은 억지로 발길을 돌렸지만 다음날 아침 11시 정각에 질리언의 집 앞에 당도하라는 약속을 시키고 나서였다. 그녀는 그가 데리러 오겠다는 것을 오토바이가 있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만찬을 들면서 즐겁게 건배를 하자면 나중에 그녀를 집에 데려다 줄 걱정이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후회했다. 다행히 가는 동안에는 비가 그쳐 주었다. 도착하자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흰 바지에 붉고 흰 줄무늬 웃옷 그리고 선물이 든 빨간 플라스틱 가방으로 마치 여자 산타 차림이었다.
크리스틴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맞았다. "오토바이 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크리스틴이 설명하며 천천히 나오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세리나 멋지죠, 아빠?"
아빠도 멋지다. 세리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씬한 청바지에 푸른 셔츠를 입은 그의 균형잡힌 몸을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그의 옷을 벗겼다. 사랑을 할 때의 그는 지금처럼 냉정하고 초연해 보이는 남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는 몸을 굽혀 그녀에게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바라오, 세리나." 그는 가방 안을 들여다보려 했다. "산타 할머니가 내게는 뭘 가져왔지?"
그녀는 그의 손을 살짝 때렸다. "안돼요. 선물은 트리 밑에서 풀어야 해요."
"아, 전통을 중히 여기시는 숙녀로군."
"운이 좋으세요, 아빠." 크리스틴은 어리둥절해하는 세리나를 향해 웃었다. "아빠는 아침 내내 집안 곳곳에 겨우살이를 장식하느라 바빴거든요. 그 밑에서 나한테 키스를 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구요."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즐거운 크리스마스 순서가 이어졌다. 찌푸린 날씨는 오히려 뜨거운 칠면조 요리를 더욱 맛나게 해주었다. 질리언은 세리나가 와주어 기쁜 모양이었으나 애런과 그녀가 이미 애인 사이인 것은 모르는 듯했다. 애런은 세리나에게 지나치게 친밀한 기색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남들이 보지 않을 떄 세리나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세리나는 짓궂게도 점심을 마친 후에야 선물을 풀었다. 벌써 포장지가 널려 있는 것을 보니 모두들 선물을 충분히 받은 모양이라고 하면서. 어쨌든 마침내 그녀가 선물을 풀 시간이 왔다.
"켄 돈 디자인의 비키니네!" 크리스틴은 자기 선물을 풀며 소리쳤다. "같이 입는 셔츠하고! 세리나, 정말 맘에 들어요." 그리고는 세리나를 포옹하고 키스했다.
질리언에게 준 우아한 크림 빛 레이스 식탁보도 감탄을 샀다. 제럴드에게 준 멋진 신년 가죽 일기장도.
세리나는 애런이 선물을 풀자 조금 긴장했다. 애런이 마음에 들어 할까? 남자들 선물은 비위를 맞추기가 어려운데.
애런은 포장지를 풀고 엷은 푸른색 스웨이드로 된 안경집을 내려다보았다. 한쪽에 이탈리아 회사명이 금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애런은 놀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세리나, 고맙소... 하지만 이럴 것까지는 없는데."
맙소사, 애런이 고급 브랜드 이름을 알아볼 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하는데. 그녀가 비싼 선물로 그의 사랑을 사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가 의심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선글라스야!" 크리스틴은 아버지가 선물을 꺼내자 소리쳤다. "써봐요, 아빠!" 그는 선글라스를 썼다. 모두들 그를 바라보았다. 날씬한 테가 그를 영화배우처럼 섹시하게 보이게 했다. "와, 톰 쿠르즈 저리가라네!" 크리스틴이 소리쳤다. "아빠, 아빠가 그걸 쓰고 해변으로 가서 내가 준 타월을 어깨에 걸치면 여자들이 줄서겠어요. 세리나, 아빠와 같이 가지 말아요. 질투 나겠어요."
애런은 웃으며 안경을 벗었다. "세리나는 안 그래. 질투를 하는 타입이 아니라구."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리나는 그가 그 말을 하며 얼마나 흐뭇해하는지 볼 수 있었다. 질투 많은 아내 때문에 생긴 후유증은 여전했다. 천천히 차분하게 해나가야 해, 세리나.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세리나에게 선물을 주세요, 아빠." 크리스틴이 졸라댔다.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세리나가 항의했다. "오늘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제럴드가 나섰다.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라구요."
애런은 일어나서 트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가지 뒤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은색 포장지에 위에는 분홍 장미가 꽂혀 있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잘한 것을 주기 보다는 근사한 한 가지를 주기로 했소." 애런이 설명했다. "맘에 들지 않으면 바꿔도 되요."
"맘에 들어 할 거야." 질리언이 말했다.
세리나는 바보처럼 흥분을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열었다. 상자 크기로 보아 보석인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선물은 예쁜 진주 반지였다. 금테에 다이아몬드가 무수히 박히고 커다란 진주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할 말을 잃고 애런을 바라보았다.
애런은 싱긋 웃고 다가와 반지를 꺼내 그녀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잘 맞는군."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워요." 간신히 말했다. "하지만... ."
"하지만은 없기." 질리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애런 말이 세리나가 진주를 몇 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진주를 좋아하는 모양이라더군."
"하지만 이건 너무 비싸요!"
"아이, 뭘요!" 크리스틴이 손을 저었다. "아빠는 그 정도는 능력이 있으시다구요. 그리고 제럴드 고모부도 좀 거들었으니까."
애런이 짓궂게 눈을 빛냈다. "물론 당신이 정 고집하면 되돌리고 같은 실제적인 물건으로 바꿔도 되지."
세리나는 팔 밑으로 손을 감추었다. "뻣어 가기만 해봐요!"
"자, 선물 순서도 끝났으니 포커할 사람?" 제럴드가 말했다,"할 줄 알죠, 세리나?"
"네."
"그보다 500점 놀이가 어때요?" 질리언이 말했다.
"저 그것도 해요." 세리나가 고백했다.
"당신이 못하는 것 있니?" 애런이 카드 테이블에 앉자 놀렸다.
제럴드와 질리언은 마실 것을 준비하느라 주방에 있었고 크리스틴은 이웃 친구에게 비키니를 자랑하러 갔다.
"물에 빠진 사람은 못 구하잖아요?" 세리나가 대꾸했다.
애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할 수 있소. 당신이 해변에 서서 물에 빠진 사람 쪽으로 손만 저으면 벌떡 물에서 뛰쳐나올 거라구."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약속하라구. 입으로 하는 인공호흡만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짐짓 섹시한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한테도?"
애런이 신음하고는 그녀에게 손을 뻗는데 제럴드가 들어왔다.
"나중에 보자구." 애런이 속삭였다.
하지만 그 나중은 없었다. 7시 경이 되자 세리나는 배에 통증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생리 땐 늘 이렇다. 하지만 그것을 숨기고 오빠들에게서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둥 핑계르 ㄹ대고 질리언의 집에서 나왔다.
하지만 오토바이로 가면서 애런에게는 사실대로 말했다. 하루 동안은 미친 듯이 아프니까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애런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며 내일 그녀의 집에 들러 돌봐주겠다고 했다.
세리나는 거절했다. 아플 때 남의 시중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였다. 하지만 애런은 그녀와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애런이 그녀와 살ㅇ을 나누지도 못하는데 같이 있겠다고 하는 것이 기뻤다.
그녀는 오토바이에 오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차를 끓인다 뭐다 수선을 떨면 보내 버릴 거예요."
"그럼 뭘 하란 말이지?"
"위스키하고 비디오테이프나 가져와요. 딴 데 몰두하는 것이 제일 좋은 약이니까."
애런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난 당신이 아픈 몸으로 그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는 어깨를 들썩였다. "견딜 수 있어요."
애런은 빈정거리는 얼굴을 했다. "남자한테 기대는 수단이 정말 보통이 아니군!"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애런은 그녀가 비의존적인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애런도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군. 당신의 그런 점을 기뻐해야 옳은데. 하지만 때때로 난... ." 하다가 그는 묘한 얼굴을 했다. "제 버릇 남 못주나 봐... ." 그는 한숨을 쉬었다. "자, 가는 것이 좋겠소. 내일 점심 후에 봅시다. "
그날 밤 세리나는 몇 번 통증을 겪었는데도 생리는 아직 없었다. 몇 번 화장실에 들락거리고 나서야 그녀는 배탈이 난 것임을 알았다. 오후에 땅콩을 너무 많이 먹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기운은 없어도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복통도 사라졌다. 그녀는 당혹스러웠다. 오랫동안 그녀는 주기가 정확했었다. 임신했을까 걱정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주는 안전한 시기였으니까. 그리고 의사가 준 처방도 잘 지켰지 않은가.
그녀는 11시가 지나서 주방에 내려와 가벼운 아침을 만들어 먹으면서 자기 주기가 한나절 이상 늦은 적이 언제인지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적은 없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을 때 한 번을 제외하고는 어머니 말쯤으로는 긴장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세리나는 한숨을 쉬고 토스트와 커피를 마셨다. 이것도 비슷한 걸까? 하긴 요즘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많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오빠들 문제 그리고 애런이 등장한 일까지. 그 떄문이야. 그녀는 결론 내렸다. 걱정할 것 없어.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애런이 오기 전에 무엇을 입으면 좋을까 등등. 하지만 의심의 꼬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만일 정말 심각한 사태가 벌어져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11
애런은 2시 조금 전에 도착했다. 위스키뿐만 아니라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비디오도 빌려왔다. 다행히 세리나가 보지 않은 영화였다. 그리고 질리언의 선물인 음료며 칠면조 요리, 샐러드 등을 가져왔다.
"누나는 당신이 정말 맘에 드는 모양이오." 애런이 말했다.
"뭐 그렇게 놀란 얼굴 할 건 없어요." 세리나가 싱긋 웃었다. 아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원래 심각하게 걱정하는 타입이 아니다. 걱정은 일이 닥치고 나서 하자는 철학을 깨친 지 오래다.
"그다지 얼굴이 나빠 보이지 않는걸. 좀 창백하기는 해도." 애런은 그녀의 안내로 주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고무줄로 묶어 뒤로 넘겼고 얼굴엔 화장을 하지 않았다. "통증이 있나? 약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서 진통제를 좀 가져왔소."
그의 배려에 그녀는 기뻤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냉장고에 애런이 가져온 병을 넣었다. "기분이 대단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견딜만 해요. 그리고 진통제라면 저것으로 충분해요." 그녀는 위스키를 가리켰다.
"설마 옷장 속에서 몰래 마셔 버릇하는 것은 아니지?" 애런이 놀렸다.
"한 달에 며칠만 그래요."
"그럼 언제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겠소?"
애런의 직설적인 물음에 그녀는 당혹해 했지만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상자를 꺼내 술잔을 채웠다. "당신도 한잔?"
"좋아, 하지만 얼음만 넣어 줘요. 진저에일은 말고."
세리나는 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부러 그의 물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생각하려는 것이다. 실망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애런이 침대에서가 아니라도 그녀와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거라고 여겼는데.
그녀는 엉덩이에 꼭 끼는 청바지에 헐렁한 흰 티셔츠를 입은 그를 바라보았다. 긴장이 그녀의 배를 옥죄어왔다. 오늘은 때가 아니다라고 고백하기란 쉽다. 잘못 알았다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결국 침대에 뛰어들어 이 오후를 마감할 것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욕망과 나란히 다른 욕망이 있었다. 애런이 사랑을 나누지 않을 때면 자기를 어떻게 다루나 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새해 전날이나 되어야 할 거예요." 그녀는 잔을 내밀며 다소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애런은 잔을 입에 가져가며 한숨을 쉬었다. "지독히 길군."
"나하고 시간 보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톡 쏘았다. "다른 여자들도 있잖아요? 아니면 다른 식으로 당신을 만족시켜 줄까요?"
애런은 천천히 잔을 조리대 위에 놓았다. 그의 눈이 딱딱해졌다. "정말 내가 그런 걸 요구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세리나?"
그녀는 시선을 떨구며 그래요라고 속으로 외쳤다. 암만 화난 척 해봐요. 당신이 오늘 온 것은 그래서지 . 당신도 다른 남자들하고 다르지 않아요. 내가 바보였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희망에 희망을 거듭했다니. 당신이 당신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내자고 하고 반지까지 주어서 난 내가 당신에게 목적을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라고 생각했어요.
애런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쥐고 자기를 바라보게 했다. "난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소. 내가 성자가 아닌 것은 하늘도 알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비열하고 이기적인 녀석도 어니오." 그는 그녀의 턱을 놓고 그녀를 끌어않았다. "내가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당신이오. 같이 자든 아니든 간에. 다른 여자가 아니라."
세리나는 목 안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고는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난 생각에... ."
"생각에 뭐지?" 애런은 그녀를 떼어놓고 화가 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은 잠자리뿐인 줄 알았어요."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지? 내 기억에는 당신을 내 여자로 원한다고 한 것 같은데. 그건 침대에서만이라는 것이 아니오. 지금 증명하고 있잖소."
"그래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이마를 접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이봐요... 몇 주 후면 내가 이 집에 들어와 살 수 있을 듯싶소. 변호사가 일을 빨리 처리하고 있지. 내가 이 집에 들어오면...."
"들어오면요?" 오, 맙소사, 애런은 내게 같이 들어와 살자고 하려는 거야.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싸구려 집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소. 내가 괜찮은 집을 사주게 해줘요." 그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오."
그녀는 역겨움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조금 전 그런 소리를 하고선 애런은 다시 이런 수치스러운 제안을 하고 말았다.
그는 실망 어린 목소리를 냈다. "내가 또 실수를 한 모양이군. 당신에 관한 한 난 늘 엉망진창이군." 그는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하지만 당신은 또 왜 그러지? 남자가 자기 여자에게 살 집을 사주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이지?"
"잘못 아니에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같이 살거나 결혼한 경우라면. 하지만 점잖은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제안에 모욕을 느끼지 않을까요? 당신은 내가 당신이 돈으로 주고 사는 정부 같은 기분이 들게 했어요. 양손에 다 떡을 쥘 수는 없어요, 애런. 당신은 마음대로 왔다 가고 있으니 내게도 같은 권리를 줘요. 하지만 당신이 내 집주인이 되어서는 내게 그런 권리가 생기기 어렵죠. 당신은 내가 당신 뜻대로 해주길 바랄 테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돈 주고 자는 여자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애런은 방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아." 그는 으르렁대며 손을 휘저었다. "여기 오면서 난 정말 즐거웠소. 그런데 지금... ." 그는 조리대 가장자리를 쾅 쳤다. "당신을 그런 여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아! 천만에. 당신은 근사하고 아름답고 기백 있고 강하고 섹시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구." 그는 그녀에게 다가왔다.그의 얼굴이 다소 부드러웠다. "하지만 상냥하고 신선한... 다소는 구식인 여자로 생각하지. 당신이 없는 내 생활은 생각도 하기 싫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감쌌다. 세리나는 그의 부드러운 눈길에 최면에 걸린 듯 서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가슴에 있는 말을 하길 애타게 바랐다. 그의 말 뒤에 숨은 말을 하길.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난 당신을 좋아하고 있소. 아주 많이... 내가 아직도 결혼 아니 책임을 바라지 않는 것은 사실이오. 그건 변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도 그런 여자가 아니잖나. 당신이 원하는 것이 결혼이나 아이라면 벌써 오래전에 그 길을 택했을 것 아닌가. 난 당신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생각해. 독립, 자기만의 공간, 하지만 동시에 같이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를 원한다고. 애무하고 키스할 상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세리나는 그의 키스에 떨면서도 그의 마지막 말에 어두운 실망을 느꼈다.
애런은 그녀가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모른다. 그는 그녀가 배우자를 찾아 차선에 만족하며 정착하지 않은 것을 독신으로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 그런 것이라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리다. 너무나 틀리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이 관계도 영 끝일 것이다. 당분간은 그가 하는 대로 연극을 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그가 결혼이나 책임에 대한 혐오를 지울 날이 있으리라 희망하면서.
그가 키스를 끝내고 물러났다. "그럼 이해된 거지?" 그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에게 집을 골라 주게 해주겠지? 해안에서 가까운 곳으로."
그녀는 미소를 떠올렸다. 일단 결정했으니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좋아요."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 조금 전에 난...."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그녀에게 열렬한 키스를 했다.
이번 키스는 길었다. 애런이 다시 물러나며 그녀가 그의 턱을 문지르게 놔두었다. 쓴 미소가 그의 입술에 감돌았다. "새해 전날에, 그렇지?"
"그래요." 그녀는 진심으로 유감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다. 설명하자면 너무나 어색하게 된다.
"자, 그럼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봅시다... ."
얼마 후 세리나는 애런이 하필 이런 영화를 골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주된 줄거리가 결혼의 안정을 원하고 바라는 여자와 책임을 두려워하는 남자와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사한 영화였다. 생각에 잠기게 하고 감동적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떠오르자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남자주인공이 사고로 죽지만 않았으면 여조인공과 결혼했을 것 같아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애런이 반대했다. "그는 너무나 자기 방식에 고정되어 있는 남자요. 어쨌거나 가정을 해보았자 소용없지. 죽었으니까. 듣자니 실화라더군."
"소용없겠죠." 그녀는 다시 입씨름을 하기 싫어 중얼거렸다.
그리고 애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자는 듯싶었다. "차 마실래요?" 그녀가 제안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둘의 기호가 놀랍게 비슷했다. 둘 다 폭력물은 싫어했다.
이윽고 애런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가야겠소. 크리스틴에게 중국식당에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했거든. 당신도 같이 가자고 하고 싶은데 크리스틴은 날 오랜만에 독점하고 싶을 거야."
"물론이겠죠." 세리나는 싱긋 웃으며 차까지 함께 걸었다. "내일 만날 수 있어요?" 그녀는 그가 작별 키스를 하자 물었다.
애런은 차에 올라 싱긋 웃었다. "하나마나 한 소리."
그녀는 가슴이 옥죄어졌다. "언제?"
"6시경. 저녁 먹고 또 영화를 보는 것이 어떻소?"
"좋아요. 그럼 당분간은 누나네 집에 있나 보죠?"
"새해 전날까지지. 그때 시드니로 돌아갈 거요. 그 날은 비워 둬요, 알았지?"
"파티예요?" 그녀가 명랑하게 물었다.
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 당신을 내 늑대 친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데려간다구? 맙소사, 밤새 그 녀석들의 발톱 감시만 해야 할 거요. 내가 말하는 파티는 우리 둘만의 파티요."
세리나는 그의 말을 농담으로 믿으려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가 파티에 데려갔으면 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당당히 내놓아 주길 원했다. 혹시 그는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미소를 보이면 질투로 화가 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자기 눈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만 감춰두려는 것일까? 그의 사랑을 원하기는 해도 그런 식의 사랑은 원치 않는다.
그녀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 몸을 떨었다. "그만 가요. 크리스틴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실 테죠." 그는 시계를 보았다. "그래, 가는 것이 좋겠소. 내일 봐요." 그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세리나는 그의 차가 언덕 아래 모퉁이를 돌아 사리지자 한숨을 쉬었다. 왜 난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남자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원하는 남자를. 결혼, 안정, 가족... 그런 것을. 그런데 자신은 애런과 얽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까? 몇 번째인지도 모를 질문을 던져 보았다. 아니면 아직도 욕망뿐일까?
그럴 거야. 그녀는 쓰게 인정했다. 그럴 거야...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갔다.
12
1월 첫째 주 주말인 토요일 오후에 애런은 세리나가 빌리기로 한 아파트의 계약을 돕기로 했다. 그리고 애런과 크리스틴은 세리나가 집을 옮기는 대로 그녀의 집에 이사하기로 했다.
그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세니나는 주방 식탁에 앉아 손에 머리를 괴고 있었다.
그제서야 현실이 실감되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뺨 위로 눈물이 흘러 그녀의 손가락을 적셨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울어 봤자 나아지는 것도 해결되는 일도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아무것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그녀는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그녀는 24시간 문을 여는 메디컬 센터에 갔다. 아직도 생리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찾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아기를 가졌으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다른 상상만 했었다. 사실 피임에 필요한 조치는 다했고 별다른 증세도 없었다.
구역질이나 어지러운 증세도 없었다. 하긴 아직 그런 것이 있을 때는 아니지만. 그녀는 씁쓸하게 체념하며 생각했다.
의사의 말에 그녀는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했다. 하지만 의사가 보여준 테스트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에 따라 의사는 애런과의 첫 관계에서 임신했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내진 결과 그는 그녀가 사용한 피임기구가 작아 실패했다고 했다.
그녀는 멍하니 병원을 나섰다. 아기... 아기를 가지게 된다. 애런의 아기를...
물론 아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를 낳을 작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애런과 자신의 관계를 끝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설사 애런이 그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결혼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일부러 임신한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피임 문제를 책임지겠다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최근 생리가 있었다고 믿기도 했잖은가?
사실대로 말하고 의사에게 데려다 주면 애런은 그녀 말을 믿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관계는 어차피 끝장이다. 그는 함정에 걸린 기분이 싫을 것이고 원치 않는 책임을 혐오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녀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 세리나는 머릿속이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몰라. 애런은 잘 적응할지도 몰라. 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결혼하겠다고 할지도 몰라. 그녀는 그에게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어떤 여자가 안 그렇겠는가. 애런을 사랑하고 그가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도 없는데.
하지만 애런이 올 시간이 다가오자 세리나는 애런에게 아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여기 눌러 살 수도 없다. 배가 점점 불러올 테니까. 나오미는 그런 수단으로 애런을 옭아맸지만 세리나는 애런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그런 끔찍한 과거를 되풀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짐을 꾸렸다. 그런 다음 필요한 전화를 걸은 다음 현관 가까운 쪽 계단에 앉았다. 무릎에 턱을 고이고 얼굴을 손에 묻었다. 받아들여, 세리나.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끝난 일이야.....
묘하게도 더 이상은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체념조가 되었다. 애런이 오기 전까지는 . 하지만 애런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자 긴장이 되살아나며 아우성쳤다.
그는 그녀의 가방 두 개를 집어 올렸다. "벌써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다행이군." 그는 현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제 말할 때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이 고장에 살며 그의 애인노릇이나 하기는 싫다고.
퀸즐랜드로 돌아가 혼자 살고 싶다고 말할 테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긴장 때문에 그녀는 서두도 떼지 않고 토하듯 말해 버렸다.
애런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둥그레졌다.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의 충격 받고 상처 입은 얼굴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일단 말을 하고 나니 이런 일을 좋게 돌려서 말할 방법이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언젠가 그에게 연락을 해서 아기 이야기를 하면 그때는 그도 그 소식을 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해보았자 비참하게만 만들 뿐이다.
그는 마침내 가방을 떨어뜨리고 돌아서서 현관을 탕 닫은 다음에 그녀에게 홱 돌아섰다. "방금 한 이야기 믿어지지 않아. 한 마디도! 내가 모르는 일이 있지? 뭐지?" 그는 다그쳤다. "당신이 옛날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그 망할 편지 때문인가? 폴인가 뭔가 하는 녀석. 놀란 얼굴 말아요. 읽지는 않았으니까. 봉투를 보고 뒷면을 봤을 뿐이야."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용기를 내려 애썼다. "아뇨, 폴은 나더러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에요. 결혼할 상대를 찾았다고 내게 축하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렇군." 애런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당신이 걷어찬 첫 번째 가엾은 사내가 아니로군. 아마 남자와 사랑을 하다가 버리고 가는 것이 오랜 취미였던 모양이야! 맙소사.... ."
그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설마 그동안 벌써 딴 남자를 만난 것은 아니겠지?"
"아니, 물론 아니예요." 그녀는 격하게 쏘아붙였다.
"그럼 뭐지?" 그는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제발 세리나, 말하라구!"
"할 수 없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할 수 없다구?" 그는 거칠게 말했다. "아니면 하지 않는 건가? 설마 내가 설명도 듣지 않고 가게 내버려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그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지 않나?" 그는 꼭 설명을 들어야겠다는 결심인 것 같았다.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니예요." 그녀는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우선 내가 이유에요. 난... 어느 한곳에 오래 정착한 적이 없어요. 초조해지거든요. 그러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죠. 당신을 좋아해요, 애런. 아주 많이. 나 역시 오랜 관계를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았다. "질식?" 믿어지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그래요, 당신은 너무 질투가 강하고 소유욕이 센 남자에요. 애런. 난 그런 것을 견딜 수 없어요. 처음에는 크레이그와의 일이 있었고 또 새해 전날 파티 일도 있었구요."
"파티? 이런 망할, 우린 파티라고는 가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알아요. 그것이 문제에요. 왜 안 간 거죠? 이유를 말하죠. 당신은 다른 남자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싫었던 거에요."
이제야 애런이 그녀를 말을 믿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일말의 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서 서로 같이 지낼 시간이 별로 없어지면 그때는 어떻겠어요? 난 노상 당신에게 잔소리를 들을 거에요. 악몽이라구요."
그녀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충격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라도 그에게 몸을 던지고 사실대로 말할까 봐 스스로 겁이 났다.
"그렇군." 애런이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지 몰랐군. 오히려 난...." 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을 읽겠다는 양. 마침내 그의 눈빛이 딱딱하게 빛났다. "내가 어떻게 하든 당신 마음을 바꿀 수는 없겠지. 내가 뭐란들. 어떤 약속을 하든?"
"그래요."
"망할, 그런 말을 할 때는 제발 쳐다보기라도 해요!"
그녀는 눈썹을 올렸다.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애런은 그 눈물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화난 표정이었다. "당신 내게 어떤 짓을 하는지 알고 있소? 짐작이라도 하나?"
"알아요."
"당신에게 지옥에 가라고 하고 싶군."
세리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둘 다 이미 지옥에 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한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한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녀는 울며 그의 손을 치우고 자기 손으로 뺨을 감쌌다.
침묵이 흘렀다.
"오늘 가는 거요?" 그는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는 어떡하고? 부동산업자에게 계약하지 않겠다고 전화했소?"
"네." 그녀는 토해내듯 말했다. "일자리도 그만두었어요."
"그럼 끝이로군. 질리언에게 인사 전하라고 하겠지? 크리스틴에게도."
"하고 싶으면 하세요."
그의 무심한 척하는 어깨짓이 잔인한 말보다 더욱 그의 괴로움을 알려 주었다. "안할 이유가 뭐 있소? 집 열쇠는 어떻게 하지?"
"주방 식탁 위에 얹어놓았어요."
"정말 기막히게 일을 처리하는군, 세리나."
그녀는 서글픈 미소로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피임 문제 하나 처리 못해 인생을 발기발기 찢기고 있는 걸요."안녕, 애런."
"당신을 배웅하지 않아도 뭐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세리나는 그날 자신이 어떻게 루퍼트 오빠네 집까지 왔는지 모른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가방 두 개를 묶고 출발했다. 뺨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가다 죽어도 상관없을 심정이었다.
가는 길 내내 비참함과 자책의 연속이었다. 일을 잘못했다. 애런에게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애런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 않았어야 했다. 완전한 증오를 담은 눈이었다. 그 눈길만 아니라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몇 번 길을 물어서야 루퍼트의 호화스러운 빌라를 찾을 수 있었다. 산스 수시 교회의 가로수 우거진 집에 들어앉은 집이었다. 지중해 스타일을 얼마간 본뜬 집으로 흰 벽돌과 화분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루퍼트는 TV로 경마를 보고 있었다. 올케는 토요일 저녁의 외풀을 위해 미장원에 가고 없었다. 루퍼트는 세리나를 초조하게 맞아들여 앉히고는 다시 화면 앞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가 전하는 소식을 듣자 홱 돌아앉아 TV를 껐다.
"네가 뭘 어쩄다구?"
"애런 킹슬리의 아이를 가졌다구요."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저런, 네가 그런 정도는 알아서 하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오랫동안 잘 피해왔잖니."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면 일부러 가진 거냐?"
"아뇨, 실수였어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거지? 설마 이제 와서 내가 네 든든한 오빠 역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넌 언제나 네가 아버지를 경멸했던 거나 똑같이 나나 필립을 경멸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잖니."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루퍼트는 정말 놀란 얼굴이었다. "그럼 경멸하지 않았다는 거냐?"
"물론요. 절대 그런 적 없어요!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어요. 오빠하고 필립 오빠는 늘 오만하고 날... 눈 아래로 보았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나한테 신경 쓸 분도 아니었구요. 아버지는 날 그저...."
"내놓은 계집애라고 여겼단 말이지? 그게 아니다. 아버지는 널 아꼈어." 루퍼트는 탁 털어놓았다. "엄마가 너를 아낀 것보다 더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버지는.... ."
루퍼트는 한숨을 쉬었다.
"넌 아버지의 어린 공주였어. 귀엽고 순진한 궁주. 그런데 네가 갑자기 자라 버린 거야. 아버지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지. 남자애들이 그리고 남자들이 모두 너만 바라보는 것을 감당하실 수가 없었던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몰라 화가 나신 거라구. 그래서 네 탓을 하고는 쫒아버린 거야. 그게 무능한 느낌보다는 쉬운 길이었으니까."
"난 몰랐어요... 몰랐어...."
"넌 세상을 겪은 여자치고는 놀랍도록 순진해. 아마 그래서 남자들이 너에게 호감을 갖는 걸 거야. 눈부시게 육감적인 데 순진함까지 깃들여 있거든. 필립은 자기 반 아이들이 너를 보려고 우리 집에 모여드는 것에 미칠 것 같았지. 가엾은 필립, 그 애는 친구도 없는데. 특히 여자친구가. 그래서 그애가 그렇게 뭘 많이 먹는 버릇이 생기고 네게 퉁명스럽게 군 거야. 자기는 못 그러는데 넌 쉽게 이성친구들과 친해지니까 말이지."
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을 그렇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바보가 된 기분이에요."
"걱정 말아라. 필립은 극복했고 그의 아내 이본느는 그를 좋아하니까. 내년에는 아기를 낳을 거라더라."
"어머나, 잘 됐네요."
루퍼트는 초조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게 또 너답지."
"무슨 말이에요."
"넌 필립이 널 오랫동안 손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건만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잖니. 그렇게 후한 인심의 소유자가 주위에 있는 것이 얼마나 초조한지 아니? 자기는 악당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이제 곧 나도 네가 갖고 있는 아이에게 우리 집 판 돈의 일부를 넘겨주는 따위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겠지."
세리나는 놀라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 볼 것 없어. 어차피 누군가 뭘 해줘야잖니. 네 소중한 킹스리라는 작자는 아버지가 된다는 소리에 기뻐 날뛰지는 않았겠지? 네가 여기 온 것도 그래서 일 테고. 그렇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당장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애런은 몰라요. 이야기하지도 않을 거구."
"맙소사, 왜 안한다는 거냐?"
사실대로 모두 이야기하지 않고는 그녀의 결심을 이해시킬 도리가 없었다. 시간은 걸렸지만 놀랍게도 루퍼트는 참을성 있게 들어 주면서 간간히 흐느끼는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럼 정리해 보자." 그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네가 현재 네 애인에게 그가 앞으로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진짜 이유는 애런이 아직은 그런 중대한 책임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사실을 알게 되면 마지못해 책임을 맡을 것 같아서라는 거지."
"그런 거죠." 세리나는 오빠의 말투가 변호사 말투 그대로라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넌 거짓말을 하고 그를 떠났구나. 근본적인 이유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맙소사, 멜로드라마 그대로구나!" 그는 초조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턱이 위험스레 떨리는 것을 보곤 애정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네 가족들이 널 도울 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며칠만 묵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망설이며 말했다. "그 다음에는 퀸즐랜드로 돌아가서 작은 아파트를 살 거예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일자리도 얻고....."
"절대 안돼!"
"안 되다뇨?"
"네가 퀸즐랜드로 가는 거야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그 몸으로 일하는 것은 안돼. 집 판 몫의 일부를 주겠다는 것은 진심이야. 난 별로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면 너도 괜찮은 집을 사고 또 소득원이 있을 수 있잖니."
"하지만...."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오빠한테 어떻게 그렇게까지! 고맙고 가슴 찡하지만 그건 옳지 못해요. 받을 수 없어요."
"과연 너답구나." 루퍼트는 한숨을 쉬었다. "알아줄 만한 독립 정신이야. 그럼 아이가 커서 네가 일을 다시 할수 있게 될 때까지 무이자로 빌려 주는 것은 어떠니?"
"루퍼트 오빠...."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넘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맙다는 말이면 돼." 그는 애써 감정없는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올케는 어떡하고? 올케가 반대하지 않을까?"
"천만에. 네 올케도 식구 중에 아이가 생겨 선물을 사주고 귀여워해 줄 일이 있으면 좋아할 거다. 아다시피 난 아이를 낳을 수가 없잖니...."
"오, 루퍼트 ... 얼마나 괴로울까... ."
그는 헛기침을 했다. "난 별로야.난 그래도 직업이 있으니까. 하지만 비비언은 괴로운가 보더라." "그럼 인공수정이라도 해보지 그래?"
루퍼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비비언도 한 번 그러더라만 난 도저히 남의 것으로 낳은 아이는 키울 수가 없을 거 같다. "
"바보 같은 생각이야, 그리고 이기적이구."
그는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배웠구나?"
"오빠처럼."
두 사람은 싱긋 웃었다. 세리나는 애런을 잃은 일로 머리가 욱씬거리면서도 만사가 그다지 참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13
세리나가 새 아파트 생활에 정착한 지 석 달이 되어가는 데 하룻밤은 필립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은 필립이 전화하는 것도 별일이 아닌 게 되었다. 그는 그 동안 자주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당황한 목소리는 처음이다.
"정말 미안하다. " 그가 거듭 말했다. "정말 말하려고는 하지 않았어. 어떤 일이 있어도 말하지 말라고 루퍼트하고 내게 약속시킨 것은 기억하지만 맙소사, 그자는 화가 나니까 대단하더라구!"
"내가 임신했다고 말했단 말이지." 그녀는 옴몸이 차갑게 식었다.
"그건 아니야!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그는 네 주소를 알고 싶어 했을 뿐이야."
"그래서 가르쳐 줬어? 조금 성이 나 덤볐다고 해서? 필립 오빠, 어떻게 그럴 수가?"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라구. 화가 난 정도가 아니야. 그는 널 추적하기 위해서 사립 탐정을 풀어놓겠다고 하더라. 네가 골드 코스트 근처 어딘가에 아파트를 살 작정인 것을 아니까. 오래지 않아 찾을 수 있을 거라면서 . 기껏해야 한 달이라는 거야. 난 킹슬리라는 자가 기왕 너를 찾아낼 거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지. 네 배가 눈에 띄게 부르기 전에 말이야. 지금이면 가릴 수 있잖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세리나, 왜 그에게 말할 기회를 줘보지 않는 거냐?"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좋아.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여기로 올까? 내 전화번호는 ? 그것도 가르쳐 주었어?"
"아니, 네 번호가 아직 번호부에 나와 있지 않으니까 어차피 그는 가서 너를 직접 만나야 할 거다. 그럴 거구. 내 목을 걸고 장담해. 내 생전에 그렇게 결심 단단한 남자는 보지 못했다. "
"오, 맙소사.... ."
"애런이 사무실을 떠난 직후 너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네가 없더라. 매시간 마다 전화를 했는데 대체 어디 있었니?"
세리나는 직장얘길 하려는 찰나 간신히 멈추었다. 루퍼트 오빠가 돈을 빌려 주고 필립은 오토바이가 임산부에게 좋지 못하다며 차까지 사주는 친절을 보여 주었다. 그런 터에 아직 루퍼트에게서 돈이 오지 않아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곳 호텔 바에 취직했다는 말을 하기가 꺼려졌다.
"오후 내내 나갔어. 애런이 벌써 오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고."
세리나는 전화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손을 봉긋 솟은 배 위에 얹었다. 감정이 뒤죽박죽이었다. 이 정도면 감출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감추고 싶은 걸까? 지금까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할 때가 많았다. 애런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세리나, 괜찮은 거니?" 필립의 목소리가 채근했다.
"아, 괜찮아."
"혹시 곁에 누가 있었으면 한다면 내가 내려갈게."
"아니, 오빠. 정말 괜찮아."
"네가 시드니에만 있었어도 루퍼트하고 같이 보살필 텐데."
하지만 그러면 애런하고 너무 위험하게 가까이 있는 거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할 뻔했다. 하지만 800Km면 안전한 거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애런은 뭣 하러 오는 것일까? 다시 와달라고 할 법하지는 않다. 마지막 날 그가 어떻게 자신을 노려보았는지 잊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어둡고 가차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젠 석 달이나 지나지 않았나. 그가 날 그렇게나 그리워했다면 진작 왔을 것이다.
"자, 네 애인이 나타나시기 전에 정신을 차려 둬라."
필립이 말했다. "노가 통하지 않는 남자 같으니까."
오빠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세리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자꾸 같은 생각으로 회전을 했다. 애런이 왜 오는 것일까. 왜!
마침내 그녀는 일어나 청소기로 집안을 치웠다. 청소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뭔가를 하고 싶어서였다. 일이 끝난 후 집에 오니 애런의 BMW가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자꾸만 상상되었다.
그날 밤 그녀는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아침에는 호텔에 전화해서 오늘은 일을 못하겠다고 말할까 생각했지만 그러면 일자리가 위험할까 봐서 하지 않았다. 그래서 10시에 언제나처럼 출근을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카운터에 앉은 트럭 운전사가 말했다. 그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뻔뻔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몸매를 훑었다. 몸매가 그다지 드러나는 차림은 아니었다. 흰 셔츠를 스커트 허리 위로 흘러내리게 했기 때문이다.
"온 지 석 달 됐어요." 그녀는 잔을 닦기 시작했다. 하품이 나왔다.
"밤에 늦게 잤나?" 사내가 말했다.
"비슷해요."
그는 쿡쿡 웃었다. "혼자 자 버릇해야지."
그녀는 눈썹을 치켰다. 이런 희롱쯤은 대수롭지 않다.
"아가씨는 모델감인데 사진을 한 번 찍고 싶군."
"그래요?"
"그럼... 난 카메라에 능하다구. 다른 일에도 능하지만." 사내의 눈이 그녀의 가슴에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어때? 언제 일 끝나지?"
세리나는 눈을 굴리며 돌아섰다.
"어이, 빼지 말라구. 난 게임할 시간 없어."
"저런 유감이군." 낮게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 자네에게 인생 훈계를 할 참이었는데 말이야."
트럭 운전사 사내와 세리나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아갔다.
"애런.... ." 세리나는 들고 있던 잔을 떨리는 손으로 카운터에 놓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세리나." 애런이 그녀를 향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수염은 깍지도 않고 눈은 충혈되고 옷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어깨를 펴고 찌를 듯한 눈으로 트럭 운전사를 떨게 하는 모습은 대단했다.
"흥분할 것 없다구, 친구." 운전사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야기 좀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아무 짓도 안했다구."
"꺼져." 애런이 으르렁거렸다.
"물론, 물론." 사내는 맥주도 마시지 않고 도망쳤다.
애런은 바의 둥근 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이 세리나의 눈을 찾더니 입술에 마지못한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 주변 분위기는 달라진 것이 없군."
그녀는 이성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마주 싱긋 웃고 말았다. "글쎄요. 맥주 드릴까요?"
"주면 좋지."
"먹을 것은요. 배고파요? 배고픈 얼굴인데."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고프기야 하지... 고픈 이유가 달라도...."
"여기 주인한테 일러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줄게요. 아직 주방장이 오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호텔 주인인 맥스에게 가서 부탁을 했다. 맥스는 애런을 자세히 보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세리나는 돌아오며 애런의 눈길이 자기를 훑는 것을 의식했다. 애런의 앞에 맥주를 놓았다. "여기 있어요." 카운터 위로 미끄러지던 잔은 애런의 앞에 딱 섰다. 애런이 자기 몸매를 뚫어지게 보는 눈길을 돌렸으면 했다.
"아주 전문가다운 솜씨로군." 애런이 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다년간 익혔으니까요."
애런은 잔을 놓았다. "내가 온 것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군. 필립이 전화를 했겠지."
"그래요."
"당신 집으로 먼저 갔지. 이웃사람이 당신 일하는 데를 일러주더군."
"간발의 차이로 못 만났군요. 난 10시에 나왔는데."
애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여기서? 지금? 난 중요한 일인데." 애런은 겉으로는 차분하지만 목소리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조여 왔다. "그래요. 아직 바쁘지 않거든요."
"저기 구석 자리에서 기다리지."
세리나는 잠시 망설였다. 구석까지 걸어가다 보면 애런이 자기 몸매의 변화를 알아챌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걱정은 불필요했다. 애런은 그녀가 마주 앉아 샌드위치를 놓을 때까지 맥주잔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당신 좋아 보이는군." 그는 표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당신한테도 같은 말을 하지 못해 미안해요. 당신은 형편없으니까."
"밤새 차를 달리다 보면 이렇게 되지."
"왜 그랬죠, 애런? 왜 그렇게 서둘렀어요? 혹시... 크리스틴 일에 대한 것은 아니겠죠?" 그녀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속이 덜컹했다.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그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오."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그런 관심을 쏟아 줄지 의문이군. 내가 아프다면 어떻게 할 거요?"
그녀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설마 아니죠?"
"아니, 그렇소."
그녀는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애런의 손이 탁자 위로 뻗쳐오더니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얼굴을 괴롭게 찡그리고 있었다.
"당신이 그리워서 병이 난 거요. 세리나. 일어나서 당신이 없는 것을 보기가 지겨워 병이 난 거요. 거울 속을 보며 내가 당신을 쫒아낸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겨워 병이 났소."
"애런... , 제발... ." 그녀는 자기 귀가 의심스러웠다. 그의 목소리에서 울려 나오고 있는 깊은 감정을 감히 믿기가 어려웠다.
"당신을 사랑하오, 세리나." 그가 토해냈다.
그녀는 호흡이 정지했다. "날... 사랑해요?"
"죽을 지경으로 .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변명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지만 당신도 나를 한때 사랑했던 것을 알고 있소."
그녀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알죠?"
"늘 알고 있었던 것 같소. 당신이 나를 떠났을 때 내가 그렇게 놀란 것도 그래서요. 납득이 가지 않았거든. 크레이그에게도 그렇고."
"크레이그?"
"그렇소. 그 친구가 그러는데 무슨 착오가 있을 거라잖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하고 있더군." 그는 그녀의 손을 가져다가 입을 맞추었다. "사랑했지. 않 그렇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애런은 크게 안도했다. "그럼 왜 나를 떠난 거요. 세리나? 질식할 것 같았다는 둥 내가 너무 질투가 심하다는 둥 그런 말은 믿어지지 않소. 우리는 같이 있어 행복했으니까. 분명히 알고 있소. 나하고 장래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소? 내가 결혼이나 가족은 생각하기도 마다할 것 같아서?"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입이 딱 벌어졌다.
"아무 말도 필요 없소." 그의 얼굴에 더욱 안도감이 나타났다. "당신 얼굴에 씌여 있으니까. 오, 세리나...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지... 당신이 가고 난 후 난 거의 미칠 뻔 했소. 당신이 사라지고 나서야 난 내가 당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알았소.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오. 당신이 웃고 미소 짓고 아무 거라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소. 당신이 빈정대는 것조차 그리웠소.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믿어지지 않았소. 나오미와의 과거 때문에 사랑이나 책임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니 , 그런 것이 없으면... 당신이 없는 난 빈 껍데기인 것을."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세리나, 사람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또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면 무가치한 거요. 난 불현 듯 이 세상 무엇보다도 당신을 내 아내로 원하고 당신에게 내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을 알았소. 당신하고라면 진정으로 주고받는 사이가 될 거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일방적으로 주고 뻇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뿐이오, 달링."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열렬히 키스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요!" 그는 잠긴 목소리로 다그쳤다. "나하고 결혼하겠다고 해요! 내 아이를 원한다고!"
그녀는 눈물이 고인 채 손을 끌어다가 자기 입술에 대었다. 이어 뺨에 그의 손을 대고 숨을 가누었다. "당신을 아직도 사랑해요, 애런.... 그리고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녀의 말에 그는 흠칫하며 불안 으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난 벌써 당신 아이를 가지고 있는걸요."
애런은 그의 손을 홱 빼고는 의자에 풀썩 기댔다. "맙소사.... ." 그는 경악에 차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언제?"
"우리가 같이 잔 첫날인 듯해요."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당신은...."
세리나는 싱긋 웃었다. 가슴이 물결쳤다. 애런은 당황해하고 있긴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다는 기색도 비난의 기색도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래서 그녀는 모두 이야기했다. 그와의 관계 처음부터가 아니고 아주 처음부터. 애런은 그녀가 집을 떠나 외롭게 살다가 폴을 만날 때까지 깨끗한 몸이었다는 것을 알자 그리고 폴 이후에는 자신이 그녀에게 처음 남자라는 것, 또한 그녀를 육체적으로 행복하게 해준 것은 그뿐이라는 것을 알자 흐뭇하고 따스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기가 별 경험이 없는 것을 알리지 않은 것은 자유분방한 여자라는 인상으로 애런을 안심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아이가 생긴 연유를 설명했다. 설명하는 동안 그녀는 애런의 얼굴에서 이해와 신뢰의 표정이 새로이 꽃피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시 새로운 눈으로 경이를 안고 그녀를 보았다.
"그럼 당신이 나를 떠난 이유는 내가 아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내 행복을 위해 당신의 행복을 희생하기 위해서였다는 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찬탄하는 시선 아래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게 옳은 일 같았어요. 크레이그는 당신이 아직은 책임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어요... 그래도 당신에게.. 앞으로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어요."
"크레이그... ." 애런이 숨을 토해냈다. "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 말이 옳아요." 그녀가 항의했다. "석 달 전이라면 당신은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사랑하고 사랑을 잃은 뒤에야 이제 당신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잖아요."
"그렇소." 그는 고개를 씁쓸하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당신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 당신 곁에서 보살펴 주었어야 하는데. 오, 세리나. 날 용서해 줄 수 있소?"
"당신이 한 것도 아닌 것을 어떻게 용서하죠? 당신의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예요. 거짓말로 당신에게 너머나 상처를 주었잖아요. 하지만 그때는 잔인하게 구는 것이 좋은 처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이오. 정말 놀라운 사람이야."
"하지만 당신이 그리워 내 결정을 후회하며 지센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너무나 외로웠어요." 애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는 외로운 날은 영영 없을 거요, 달링... ."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하지만 애런의 짓궂은 미소가 벅찬 순간을 깨뜨렸다.
"당신을 데리고 돌아가서 우리가 결혼한다고 발표를 해야 난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소. 질리언은 나하고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해요."
"맙소사,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세리나는 눈물을 지웠다.
"당신이 떠난 후에 누나 집을 갔는데 이건 북극이 따로 없었소. 가엾은 제럴드가 중간에서 노력했지만 실패했지 . 지난주에야 내가 비로소 대체 왜 그러느냐고 다그치자 질리언은 내가 좋은 여자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비열한 악당이라고 하면서 당신을 찾아서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나하고 말도 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당연히 난 누나 일이나 알아서 하라고 고함치고는 뛰쳐나왔지. 내 대단한 자존심은 당신을 경박한 껍데기 같은 여자라고 . 믿을 수 없고 찾아다닐 가치도 없는 여자라고 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지." 그는 쓰게 웃었다.
"그런데 이틀 전에 난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TV에서 보았소. 당신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크리스틴이 보자고 우기는 바람에 보다가 주인공이 죽는 것을 다시 보았소. 그때 난 내가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지. 당신을 다시 안아 보지도 못하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그 당장에 생각했지. 그래서 당신 오빠에게 간 거고 결국 여기 와 있는 거요."
"오, 애런... ."
그는 입술에 싱긋 미소를 떠올렸다. "아이라... 우리아이." 그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크리스틴이 펄쩍 뛰겠지. 그 애는 늘 남자 동생이나 여자 동생이 소원이었소."
"남자 동생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초음파로 알았어요."
애런의 눈이 빛났다. "아들이라구!"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보자 눈물이 다시 넘쳤다. 그때였다.
"어이, 세리나! 그 친구가 당신을 귀찮게 구는 것은 아니겠지?" 호텔 주인인 렉스가 바 뒤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렉스, 이 사람이 내 아기의 아버지고 장례 내 남편이에요. 물론 나를 귀찮게 하는 것도 아니구요."
"아니, 남편?" 렉스가 신음했다. "오, 설마, 일을 그만두려는 거군!"
애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리나를 부족해 일으켰다.
"유감이지만 그런 것 같소." 애런이 마주 소리쳤다. "지금 당장!"
"어이, 하지만... ."
애런은 지갑에서 2백 달러를 꺼내 바에 놓았다. "술값은 네 앞으로 해요."
그리고는 세리나를 호텔 밖의 햇살로 이끌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리기에 너무나 좋은 날씨군, 그렇지?"
"달리다뇨?"
애런이 싱긋 웃었다. "빨리 사랑을 하려면 집까지 최대한 달려야 하니까."
"아니, 정말 못 말려요!"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팔짱을 끼고 걸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쓰여진 사랑의 언어는 누구 눈에도 보였다. 얼마 후 그들의 결혼식 날도 그랬고 다시 몇 달 뒤에 있은 그들의 아들의 명명식에서도 그랬다.
세리나는 하루도 애런의 사랑을 두고 하늘에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고 애런은 아름다운 아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물결치며 크레이그가 언젠가 심술궂게 한 말을 떠오르곤 했다.
"정말 운 좋은 악당이야, 자네는. 운 좋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