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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반의 연정(At daggers drawn) 2

Bollnow 2024. 3. 16. 07:34

6

베리는 몹시 후회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

테리는 멸시하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역시 키엘의 말이 옳았어요. 베리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면이에요."

"두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하겠어."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죠?"

테리는 그와 조심스럽게 유지하면서 물었다. 이젠 그의 낯짝만 쳐다봐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사과만 하면 모든 게 원상대로 회복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자신이 그를 용서하게 되려면 오랜 세월이 지나야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말이야"

그는 천천히 변명을 했다.

"테리가 너무나 아름다왔기 때문이었어. 테리는 이제 단순히 내 친구의 여동생만은 아니야. 아름다운 처녀지."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게 당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무슨 이유라도 된단 말인가요?"

테리는 신랄하게 그를 공격했다. 그녀의 자주색 눈동자가 태양 아래에서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그는 괴롭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테리. 그땐 단지 잠깐"

"잠깐 뭐였죠?"

"어쨌든 우리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고 싶진 않아, 테리."

"이미 깨졌어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우린 결코 원래대로 돌아가진 못해요."

베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래대로 돌아가길 원하는 게 아니야, 테리. 나는 테리가 나의 연인이 돼주기를 바라고 있어."

그녀는 넋이 나가 버린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로라는 당신 애인이 아니었던가요?"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로라는 나의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베리는 기회만 있으면 놓치지 않고 그녀를 쫓아다녔잖아요? 그건 왜죠, 베리?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 때문인가요? 더러워요!"

그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화를 내며 소리쳤다.

"키엘이 테리의 마음을 비뚤게 만들어갔군. 틀림없지?"

"그전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이젠 믿어요."

그녀는 머리를 도도하게 쳐들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그 위스키 때문에 그랬겠지요. 그러나 그 이유야 무엇이었든, 당신의 그러한 행위는 그동안의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말았어요."

"그렇지 않아!"

그는 우기듯이 그녀의 말에 반발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그는 달래듯이 말하면서 테리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녀는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손대지 말아요!"

그녀의 태도에 그는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그 정도로 나빴어?"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당신은 짐승이나 다름없었어요. 나는 당신의 그 행동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결코!"

베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술 때문이었어. 위스키가 저지른 일이야. 나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 어쨌든 그게 나를 아주 딴사람으로 바꾸어 버린 모양이군."

"술은 당신을 망쳐 놓을 거예요."

"누가 그래? 키엘이? 테리는 갑자기 그의 신봉자가 돼버린 모양이군."

"그게 어때서요?"

그녀는 일부러 반항하듯이 턱을 높이 쳐들고 노려보았다.

"어리석다는 뜻이야. 키엘은 결코 테리의 결혼상대자가 될 순 없어."

그녀는 기가 차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결혼한댔어요? 그를 만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 속보이는 소리. 그렇다면 왜 이 집에서 떠날 생각도 않고 있는 거지?"

"떠날 거예요, 때가 되면. 하지만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난 부끄러워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구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래, 얼마나 더 이곳에 있을 거야? 키엘이 새 간호사를 채용할 때까지? 아니면 그가 너를 지겹다고 말할 때까지?"

"당신은 구역질 나요!"

그녀는 더 이상 보기도 싫다는 듯이 내뱉었다.

"내가 왜 그것까지 당신에게 설명해야 하죠? 하지만 꼭 알고 싶다면 말하죠. 난 이곳이 좋아요. 이곳 생활을 아주 즐기고 있다구요. 여기는 아주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에요. 그러니 떠나는 날까지는 이곳에서 마음껏 즐길 작정이에요."

그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그는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키엘은 지금 나가고 없잖아? 그러니 나랑 함께 오늘은 놀러나 가지?"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그런 짓을 하고서도 정말 내가 자기를 쫓아 나서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미안해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나를 더 이상 못 믿겠다는 거로군?"

테리는 딱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이 편치 않아요. 당신이 전처럼 느껴지지 않구요. 당신이 나한테 한 행위는 잊어버리기가 어려워요. 아마 영원히 못 잊을 거예요."

그는 입술을 깨물고 아래만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말이지, 한순간의 실수로 나는 한평생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뜻이로군. 그래, 리차드에게도 그걸 얘기할 작정인가?"

"그럴 생각은 없어요."

그녀는 조용히 위엄을 가지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는 다시는 방문하지 말아 줬으면 해요."

그는 바지 주머니에다 손을 질러 넣고는 말없이 발끝으로 땅을 후벼 파고 있다.

"나를 아파트까지 태워다 주지 않겠어?"

그는 한참 만에 조용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가 그렇게 나오는 데야 테리로서도 거절한 재간이 없었다. 그를 아파트까지 걸어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몰인정한 처사같이 느껴졌다.

"바네스 부인에게 내가 가는 곳을 일러 두고 오겠어요."

차 있는 데로 돌아오니 그는 이미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녀가 운전석에 올라서 그의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차를 멈추자 비로소 그가 입을 열었다.

"테리는 나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고 있어. 나의 조그마한 실수를 가지고 말이야."

"조그마한 실수라구요!"

그녀는 찢어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그걸 조그마한 실수라고는 보지 않아요. 만약 그때 키엘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나는 그렇게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어."

"그랬을까요? 자신이 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에요? 그만둬요, 베리. 난 이 문제로 더 이상 떠들고 싶지 않아요.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어요. 우리들의 우정을 악용한 당신에게 구역질나는 혐오감을 느꼈구요. 지금 기분대로라면 나는 앞으로 당신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예요."

"테리!"

그는 몹시 충격을 받은 것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앞으로는 절대로 네 몸에 손가락 하나도 안 대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럴 기회도 주지 않겠어요!"

"정말 너무하군."

"내가 말예요?"

그녀는 경멸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키엘의 말이 역시 옳았어요. 당신이 나에게 노린 건 육체적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는 눈꼬리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는 나를 비판할 자격이 없어."

"하지만 항상 진실을 말했어요."

"그렇게 믿고 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믿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가 항상 옳다는 걸 바로 당신이 스스로 증명해 줬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이가 나쁘면서도 왜 그와 함께 일하고 있는 거죠?"

"이젠 떠날 때가 된 것 같애. 그와 함께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어.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결과가 이 모양이 됐군."

그는 쓰디쓰게 내뱉었다.

"키엘과 헤어지면 아버님이 상심하시게 되나요?"

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수련을 쌓아도 되잖아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텐데"

"그걸 몰라서 내가 이러고 있는 줄 알아?"

그가 언성을 갑자기 높였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 돈 때문이지. 돈이 있어야 내 병원을 세우지."

"그러면 키엘은 어떻게 해냈어요?"

"그는 황금의 손을 가졌으니까."

"그게 아니라, 내가 보기엔 키엘이 일에 열중하는 동안 당신은 여자에게만 미쳐 있어서 그래요."

"너는 완전히 그에게 세뇌를 당해 버렸군! 이젠 내가 건달로 보이는 모양이지?"

그가 화를 벌컥 내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어요. 어서 내리기나 해요."

그가 차에서 내리자 그녀는 곧 차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가 차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그녀에게 제안했다.

"옛정을 생각해서 점심식사라도 함께 하는 게 어떻겠어?"

테리는 말 대신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군!"

그가 체념조로 말했다.

"바네스 부인에게 곧 돌아오겠다고 말했어요."

테리가 차를 막 출발시키려고 하는데, 키엘의 차가 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반가운 생각에 얼굴이 환해지며 키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다.

"도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요?"

그의 노기를 띤 목소리에 테리는 깜짝 놀랐다.

"베리가 내 차를 갖다 줬어요. 그래서 그를 아파트까지 태워다 주느라구요."

하필이면 꼭 이 시간에 맞춰서 그와 마주치게 된 게 영 기분 나빠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서, 그 녀석이 뭐라고 했소?"

"사과를 했어요. 그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말예요."

"그랬겠지, 항상 그런 식이니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겠지. 하지만 헛일이야."

물론 베리가 자신에게 한 행위를 용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와의 오랜 친분을 하루아침에 몰라라 지워 버릴 수는 없다.

"그는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있는 게 몹시 거북한 듯이 말했어요."

"그러면 언제라도 떠나면 되지, 말리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속 시원하지."

"그렇다면 당신이 그의 아버지를 좀 설득해 주면 어때요? 베리는 이곳에서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지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 그 녀석이 당신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라도 했소?"

그가 화를 내면서 말했다.

"아니예요, 난 베리를 이해해요. 그에게 독자적인 수련을 쌓아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봤어요."

키엘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림도 없어요. 녀석은 한 곳에 꾸준히 머물러 있지를 못해요."

"그에겐 기회를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건가요? 당신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잖아요?"

", 꽤나 열성이시군. 그렇게나 그를 극진히 생각한다면, 그와 함께 가지 그래?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을 이곳에다 잡아 둘 생각을 했는데, 오히려 나를 이용하려고 했군."

테리는 그의 말투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나쁘게만 듣고 있고, 어제 베풀어 주었던 친절마저도 다 잊어버린 것같이 싸늘하게 대했다.

"그게 아녜요. 당신의 친절에는 나도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난 아직 베리를 용서한 적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뭐요?"

키엘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가서 당신 소지품을 모두 챙기도록 하시오. 그리고 마음내키는 대로 해요.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테리는 더 이상 그와 다툴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다. 키엘이 한 말은 진심이리라. 그의 회색 눈은 싸늘하게 빛났고, 얼굴엔 경멸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녀는 차를 출발시키며 그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돌처럼 굳은 얼굴이 무심하게 자신을 보고 있다. 자신의 짧았던 행복은 이제 끝난 것 같았다. 이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런던으로 돌아가는 일뿐이다.

키엘의 집으로 돌아오는 테리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바네스 부인이 점심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테리는 그녀의 성의를 생각해서 먹히지 않는 점심을 억지로 먹었다. 목이 막혀왔다.

"저는 런던으로 돌아갈 거예요."

바네스 부인은 눈이 둥그래졌다.

"브레이든 박사님은 그런 말씀이 없으셨는데요? 여기서 며칠간 묵으실 것 같더니 웬일로 갑자기?"

테리는 설명하기가 좀 난감했다.

"나는 임시 간호사로 왔었는데, 그가 이젠 필요없다고 하더군요."

바네스 부인은 더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가씨는 박사님의 새 간호사이었나요? 몰랐어요. 나는 그의 친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한번도 이 집에 여자를 데려온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아주 특별한 사이인 줄 알았어요."

그 특별한 사이이기를 자신은 얼마나 원했던가!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되어가는 것처럼 느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끝나게 될 줄이야. 한낱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끝나게 될 줄이야.

"그런 사이가 아니예요."

그녀는 쓸쓸하게 말했다.

키엘의 집을 떠나면서 그녀는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리차드에게 전화해서 런던으로 돌아가겠다고 전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말하겠다고 했다.

그녀의 차가 병원 앞을 지나려 할 때 베리가 차를 세웠다. 그녀는 속력을 차츰 늦추다가 그 앞에서 정차했다.

"테리를 기다리고 있었어. 키엘은 테리에게 가라고 할 권리가 없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가라는 거야?"

그는 흥분한 얼굴로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도대체 나는 왜 테리가 그의 말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어서 내려. 잠깐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같이 생각해 보자구."

그의 제안에, 테리는 그가 아직도 자기를 유혹할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절대로 그런 행동을 반복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한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도 역시 내키지는 않았다.

"리차드가 기다리고 있어요. 난 그냥 이대로 가고 싶어요."

"그러면 이 호수지방과 영 결별하겠다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갑자기 이곳이 싫어졌어요."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에게도 책임이 있어. 그렇지만 한 시간만 테리와 함께 있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

테리는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오랜 세월을 그와 함께 친하게 지내왔다. 그가 자신에게 한 행위는 한때의 격정이 빚어낸 악몽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가 지금 내게 바라는 것에 다른 비열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 기분으로는 런던까지의 긴 여행을 떠난다는 것도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녀는 자기 차에서 내려서 그의 차로 올라탔다.

10분쯤 달려가다가 갑자기 그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를 한번 만나보지 않겠어?"

그건 너무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2, 3분만 더 가면 아버지와 계모가 살고 있는 집이 있어. 그냥 가보자는 말이지 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키엘이 워낙 호수 근처에서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님은 이곳에서 따로 사셔. 나는 매주마다 이곳을 방문하고 있지."

"그런데 내가 왜 거길 가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어때서? 두 분 모두 테리를 잘 알고 계셔. 내가 노상 리차드와 테리 얘기를 했거든. 테리를 만나면 두 분도 기뻐하실 거야."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중앙도로를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얼마 안 가서 차는 산기슭에 있는 작은 촌락에 당도했다. 그는 어느 아담한 농가 앞에 차를 멈췄다.

두 사람은 뜨락으로 난 좁다란 길을 지나서 현관으로 갔다. 길 양쪽에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문이 열린 채로 있어 여름날의 햇빛이 현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테리는 갑자기 자신이 런던 집에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베리가 부르자 그의 계모가 안에서 나왔다. 그녀는 뚱뚱하고 키가 컸으며, 머리카락은 쥐색이었다. 나이는 60대 중반쯤으로 보였으나, 워낙 영양상태가 좋아선지 한결 젊어 보였다. 그녀는 금테안경 아래로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겨 맞았다.

"베리! 귀여운것! 오늘 올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이 귀여운 아가씬 또 누구냐?"

"테리 데닝이에요, 리차드의 동생이죠."

", 그래. 잘 알고 있고말고. 이곳에 일자리를 구했다고 들었지. 참 잘 왔어요. 어서 들어와요."

파멜라 알렌 부인은 테리를 전부터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반겨 주었다. 그녀의 눈은 키엘의 그것과 똑같다. 바로 키엘의 친어머니인 것이다. 키엘의 냉정하고 이지적인 그 눈매는 그의 엄마를 닮았던 것이다.

베리가 설명했다.

"유감스럽게도 키엘은 테리가 그 일에 적합치 않다고 판단했나 봐요."

"저런! 그럼 헛걸음을 하게 했군."

그녀는 끌끌 혀를 차며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테리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키엘이 좀 무책임한 것 같아. 일단 채용을 했다가 그렇게 마음이 변했다는 건 좀평소의 키엘답지가 않은데 그래."

그때 마침 그녀의 남편이 방으로 들어왔다. 키엘이 그의 어머니를 닮은 것과는 달리, 베리는 그의 아버지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알렌 씨의 체구는 왜소하고, 머리칼은 놀랄 만큼 희며, 얼굴은 길고 묘하게 생겼다.

"아버지, 별일 없으세요?"

"그래, 별일이 없구나. 근데 웬일이냐?"

베리는 테리에게 돌아서며 그녀를 소개했다.

"테리 데닝이에요."

제임스 알렌 씨는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와요. 새 직장은 어때요?"

그의 손은 따뜻하고 힘이 들어 있었다.

"키엘은 이 아가씨가 적합치 않다고 돌려보냈대요, 글쎄."

알렌 부인이 테리를 대신하여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래서 런던으로 돌아가려구요."

테리는 겸연쩍은 듯 그에게 말했다.

알렌 씨는 이마를 찌푸렸다.

"오늘 당장 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곧 출발해야겠구먼. 밤길을 운전하기가 싫다면 말이오. 우리 집엘 방문해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오만"

"제가 억지로 데려왔어요."

베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랬겠지!"

그의 아버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좌우지간 여기까지 왔으니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는 게 좋겠구먼. 파멜라, 주전자를 올려놔요. 우리는 정원에 있을 테니. 금년엔 장미가 아주 탐스럽게 피었어요."

베리가 테리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선 장미 애호가셔. 다들 아버님의 장미를 부러워하지."

그의 말대로 장미는 정말 멋있게 가꾸어져 있었다. 테리는 아름답게 손질되어 있는 그 꽃들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발했다. 갖가지 종류의 장미들이 화단마다 울타리마다 풍성하고 화사하게 피어서 여름날의 햇빛을 쬐고 있다. 장미를 둘러보고 난 그들은 안뜨락에 놓여져 있는 테이블에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던 사이에 시간은 벌써 5시가 되었다. 테리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가봐야 해요. 리차드가 걱정하고 있겠어요. 전화 한 통 해도 되겠죠? 늦어진다고 말해 줘야겠어요."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알렌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오늘밤은 여기서 지내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게 어때요?"

", 안 돼요. 오늘은 그냥 인사차 들른 것뿐인데"

"테리는 베리 친구잖아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테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물론 오늘 꼭 가야 되는 건 아니지만요"

"그럼 더 다툴 것도 없군요."

알렌 부인은 기쁜 듯이 말했다.

"그렇게 허둥지둥 서둘러서 돌아갈 필요가 없다면, 아예 여기서 며칠 푹 쉬었다가 가요. 그러면 테리의 기분도 한결 나아지지 않겠어요?"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테리는 부인의 제안에 약간 마음이 끌렸으나 고개를 살레살레 저어 보였다.

"내 집에서 부담이라니?"

알렌 씨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베리야, 네가 대신 설명 좀 하렴."

베리가 웃어 보였다.

"괜찮아, 테리. 그렇게 하도록 해."

"그리고 베리 너는 어떠니? 시간을 좀 낼 수가 있니?"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다.

"저는 안 돼요. 다음 주말까지는 좀 바쁘거든요."

테리는 이젠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너무 친절해 이상하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며칠 동안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된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 그럼 결정됐어요."

알렌 부인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문득 테리는 자신의 옷가방 등을 차 속에 그대로 두고 온 게 생각났다.

"내가 가져오지."

베리가 그녀의 말을 듣고 선뜻 말했다.

"내가 번개같이 가서 가져올게."

그가 떠나고 난 뒤에 테리는 그와 함께 가서 자신의 차를 여기로 끌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차가 그곳에 있으면 자신이 아직 이 지역을 떠나지 않은 걸 키엘이 알게 될 것이므로 꼬투리 잡힐 일이다.

그녀는 리차드에게 전화해서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했다. 테리는 오빠가 자신들의 신혼생활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그의 말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한 시간쯤 후, 베리는 그녀의 가방을 가지고 돌아왔다.

"키엘을 만났어요?"

그가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알렌 부인이 재빨리 눈치를 채고 테리를 안심시키려 했다.

"내 아들이 혹시 뭐라고 할까 봐서 그래요? 걱정 말아요, 그는 오히려 좋아할 테니까. 그애가 테리에게 그런 말을 할 때는 정말 그애 자신도 싫었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베리가 병원으로 다시 떠났을 무렵엔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습격할 위험이 없는 침실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모처럼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침실은 작고 안락해 보였다. 적당한 장식물과 예쁜 융단이 조화를 이루며 파멜라 알렌의 살림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테리는 잠자리에 누워서 키엘을 생각했다. 그는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불현듯 그가 그리워졌다.

"키엘"

가만히 소리내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의 따스하던 키스가 되살아났다. 눈물이 한 방울 베개 위로 소리없이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는 푸른 하늘이 창밖으로 환하게 펼쳐져 있었다. 가벼운 솜 같은 구름이 아주 느린 속도로 나무 위를 지나고 있었다. 마을에서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오고, 온갖 새들의 합창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갔다.

욕실에도 알렌 부인의 솜씨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손으로 짠 욕실의 매트가 테리의 눈을 끌었다. 그녀는 이 아담한 집이 좋아졌다. 알렌 부인의 순진하고 태평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자 그 순간 문득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자신은 언제나 마음의 평안을 되찾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 넓은 세상에 자기 혼자뿐인 것처럼 고독하다. 마음에 상처만 입고 이곳을 떠나가야만 하는데, 막상 반갑게 맞아 줄 사람이 없다. 키엘이 원망스러웠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알렌 부인이 혼자 주방에서 바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행복한 표정으로 테리에게 말했다.

"키엘의 전화를 받았어요. 이따가 늦게나 이곳엘 오겠대요. 멋지잖아요? 그 애를 본 지도 꽤 오래 됐거든."

"제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어요?"

테리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져서 물어보았다.

부인은 그녀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은 안했지만 아마 알고 있겠죠. 베리가 얘기했을 테니까 말예요."

정말 베리가 그에게 얘기를 한 모양이라고 테리는 생각했다. 그래서 키엘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거야. 이 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키엘과 다시 다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차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별수없이 그를 만날 수밖에 없다.

나를 보면 그는 자기 부모 앞에서 나에게 마구 화를 낼까? 그러면 창피해서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의 어머니에게 사전에 얘기를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얘기를 한담? 베리와의 관계를 의심해서 그가 나를 런던으로 돌려보내는 거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어. 또한 베리의 부모들은 그가 알콜중독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베리가 그렇게 많은 여자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정말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다.

"별로 기쁘지 않은 모양이군요?"

알렌 부인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나는 테리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아. 키엘이 오면 내가 한마디 하려고 해요. 그애는 테리를 돌려보낼 권리가 없어."

"정말 그러시지 마세요. 그이는 내가 여기 와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할 거예요."

"걱정 말라니까. 내 아들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런나 테리는 키엘의 태도가 염려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얼마나 냉정하고 무자비한지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사전경고를 해준 셈은 된다. 알렌 부인은 테리의 말을 일단 참작할 시간적 여유를 가진 것이다.

그들은 뜨락의 테이블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테리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키엘의 차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키엘이 정작 도착한 시간은 그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방으로 들어오다가 테리를 발견하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여기 와서 뭘하고 있소?"

테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알렌 부인이 가로막고 나섰다.

"테리는 우리 집 손님이야, 키엘. 베리가 데려왔어."

"역시 그랬군!"

키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래, 테리에게 너무 미안한 것 같아 우리 집에서 며칠 간 쉬었다 가라고 했다."

그의 계부가 옆에서 거들었다.

"자기의 슬픈 스토리를 아버지께 말씀드리면서 애원하던가요?"

키엘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재빨리 말했다.

", 앉거라. 좀 더 일찍 올 줄 알았구나."

"여기 오기 전에 베리와 함께 있었는데, 테리가 여기 와 있다는 말은 비치지도 않았어요."

기특한 베리. 테리는 고맙게 생각됐다. 그러나 그는 키엘에게 자신을 돌려보낸 것에 대해 신랄하게 따지고 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베리가 왜 얘기를 안했을까?"

알렌 부인이 키엘에게 물었다.

"내가 용납하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키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뭘 용납 안해?"

그의 어머니가 따지듯이 물었다.

키엘은 귀찮은 듯한 눈빛을 그의 어머니에게 던졌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요. 그만 해두겠어요."

그는 의자를 당기더니 테리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 앉아 식어 버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거의 키엘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테리를 한번 노려보고는 말했다.

"베리가 따로 독립해서 병원을 운영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테리가 말하지 않던가요?"

제임스 알렌 씨가 흰 눈썹을 치켜뜨면서 키엘에게 반문했다.

"베리가 그러길 원하고 있나?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하던데?"

테리는 키엘에게 도전하듯이 말했다.

"베리에게 자금만 대주면 그는 일약 유명한 의사가 될 거예요."

"그래요?"

알렌 씨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엘이 머리를 흔들며 화를 냈다.

"공연히 승산 없는 일에 돈을 쓸어 넣지 마세요. 그 애는 지구력이 없어요."

"모르겠군."

노인은 천천히 말했다.

"어쩌면 그도 독립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해. 이제까지 너와 같이 일했잖니, 키엘? 넌 알 것 아니냐?"

마지못해서 키엘은 말했다.

"그가 유능한 의사임에는 저도 이의가 없어요. 그런데 도무지 열의와 인내력이 없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알렌 씨는 말했다.

"하지만 그건 너랑 함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니냐? 나는 바보가 아니야. 너희들 두 사람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베리도 막상 독립하면 달라질 거야. 그 녀석은 충분히 해낼 거야.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망쳐 버릴 미련퉁이는 아니야."

"그래요, 베리도 독립만 시켜 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거예요."

테리도 한몫 거들었다.

키엘이 그녀에게 불쾌한 눈길을 던졌다.

"그래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자신의 일자리를 만들려고 말이오?"

"키엘!"

알렌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그를 제지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어머니를 무시해 버렸다.

"그렇소? 그래서 베리를 여기까지 끌고 와서 우리 부모님까지 설득하려 한 거요? 물론 부모님은 당신과 베리와의 오랜 우정은 알고 계시지만, 지금 어떤 관계라는 것까지도 알고 계시나요?"

테리는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반발했다.

"당신은 치사하고 남자답지 못해요, 키엘!"

"내가?"

그의 눈엔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다.

"베리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는 그 일과는 아무런 상관 없어요."

그녀는 야무지게 잘라서 말했다.

"옳은 말이야."

그의 어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은 좋은 친구야. 그러니까 함께 일해서 안 될 일도 없지 않겠어?"

"친구라구요?"

키엘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의 어머니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래, 친구보다도 더 깊은 사이라면 또 무슨 문제가 있지? 나는 테리를 좋아해. 베리의 좋은 아내가 될 거라고 믿어."

"아내라구요?"

키엘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이다.

"어머님은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씀을 하세요?"

"글쎄다. 요즘 젊은이들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베리와 테리가 함께 동거한다고 해도 구태여 말릴 생각은 없다."

키엘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나는 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통 모르겠구나."

"테리는 알고 있을 거예요.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을 받았을 테니까요."

그의 목소리는 증오에 가득차 있다.

테리는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키엘은 이곳에도 못 있게끔 자신을 몰아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기 부모와 친해지는 것마저 방해하고 있다. 나로 하여금 이 호수지방에서 완전히 떠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부질없이 베리에게 설득당하여 이곳으로 끌려온 게 후회스럽다.

"이젠 그 얘기는 그만 하지."

알렌 씨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베리에 대해서는 키엘이 너무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베리에 대한 감정을 테리에게 풀려고 하고 있어."

그의 말에 키엘은 아무 대꾸없이 잠자코 음식만 씹고 있다. 뭐라고 반발을 하고 싶지만 꾹 참고 있는 표정이다.

테리는 식사시간이 끝난 게 무엇보다도 기뻤다. 그런 자리라면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더라도 도무지 먹힐 것 같지가 않았다. 키엘은 자신의 계부와 함께 정원으로 나가서 장미를 살펴보고 있었다.

"키엘이 좀 이상해진 것 같아."

알렌 부인이 접시를 씻으면서 테리에게 말했다.

"베리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가씨를 왜 미워하는지는 참 이상해요."

테리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면서 우울하게 말했다.

"알렌 부인,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부인은 매우 동정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뭐라든 신경쓸 것 없어요, 곧 가버릴 테니까. 아가씨는 그냥 이곳에서 며칠간 푹 쉬었다 가기만 하면 돼요."

그러나 알렌 부인의 이 생각은 어긋나고 말았다. 저녁식사 도중에 키엘은 오늘밤을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말한 것이다.

테리는 그가 어떻게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만들 속셈이란 걸 알았다.

전화 벨이 울리자 키엘이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받지요."

그러나 전화를 받고 돌아온 얼굴은 벌레를 씹은 표정이었다.

"테리 양, 전화 받아요."

테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는

"베리요."

하고 쌀쌀하게 덧붙였다.

테리는 마음속으로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등 뒤로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될 수 있는 대로 한껏 명랑한 목소리를 가장하여 전화통에다 대고 애교를 떨었다.

"여보세요, 베리?"

"키엘이 거기서 뭘하고 있지?"

그는 다짜고짜로 그것부터 물어왔다.

"그는 점심식사를 하러 들렀댔어요. 난 처음엔 당신이 그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얘기한 줄 알았어요."

"내가 그럴 사람이야?"

그가 큰소리를 질렀다.

"나는 테리의 차를 차고 속에다 넣어 놓고, 그가 모르게 하려고 했어. 그런데 어떻게 눈치를 챘나 봐."

"아니예요, 그는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그런데 그는 오늘 여기서 자고 가겠대요."

"뭐라고?"

베리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때문에 그러는 거야. 조심해, 테리. 키엘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내일 아침 일찍 네 차를 몰고 그곳으로 가지. 돌아올 때는 키엘의 차를 태워 달라고 하면 되니까. 키엘이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그래요, 내 차를 좀 갖다 줘요. 나도 키엘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아마도 내가 여기 있는 게 못마땅한가 봐요. 그리고 부모님과 친해지는 것도 싫은 모양이고. 아주 분위기가 나빠요."

"내가 또 실수를 했군. 나는 항상 테리를 곤경에 빠뜨리기만 한다니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몰랐잖아요. 그가 여기로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그녀의 위로에 그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내일 만나. 네 기분이 어떤가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키엘만 안 왔으면 기분이 좋았을 거예요."

그녀는 서글프게 말했다.

"부모님은 아주 친절하세요. 꼭 집에 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세요."

"그야 당연하지. 잘 자, 테리."

"고마와요, 베리."

아파트에서 그가 자신에게 저지른 행위를 이렇게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다는 사실이 테리로서는 놀라왔다. 지금 자신의 마음에는 베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자기와 가장 친한 남자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로 돌아오니 모두가 테리를 기대에 찬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녀는 약간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전화한 거래요. 내일 아침에 제 차를 이곳으로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어요. 키엘 씨가 베리를 병원까지 태워다 줄 수 있겠죠?"

"미안하군."

키엘은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 작정이니까. 그래도 괜찮겠죠, 어머니? 베리는 내가 아니라도 잘 해결할 테니까."

 

7

알렌 부인은 즐거운 듯이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며 환영했다.

"좋고말고, 키엘!"

제임스 알렌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했다. 그러나 테리는 키엘의 속마음을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 속셈이야. 나를 이곳에서 빨리 런던으로 쫓아 버리는 게 목적이겠지.

"실례하겠어요."

테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일찍 자고 싶어요. 시골 공기 때문인지 피곤하군요. 안녕히들 주무세요."

그녀의 방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엔 장미꽃 외에도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어서 바깥은 환한 상태다. 그리고 사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피곤하다고 말한 건 단지 키엘이 있으므로 해서 빚어지고 있는 그 고약한 분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 자리에 더 앉아 있다가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테리는 정말 키엘의 속마음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얼마나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접근하려 했던가? 그리고 또 그의 집에 자기를 데려갔을 때에도 얼마나 친절하고 은근했던가? 그때 느낀 감정은 단순한 호의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에게 끌린 것처럼 분명히 그도 나에게 끌리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와의 관계가 좀 더 의미있는 것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을까? 자기의 동의 없이 내가 베리를 용서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니면 내게서 느끼는 호감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기가 싫어서? 그래서 나를 이 호수지역에서 아주 쫓아 버림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유혹에서 탈피시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일 베리가 이곳에 오는 게 그의 꺼져가는 불길에 기름을 부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리의 전화는 키엘로 하여금 더욱 나와 베리 사이를 의심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이제 키엘은 결코 나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테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랫동안 천장만 보고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무슨 얘기를 저렇게 오래도록 하고 있을까? 나에 관한 얘기도 하고 있을까?

테리는 이리저리 몸을 뒤채다가, 이윽코 계단을 올라오는 키엘의 발자국 노리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에 관한 것이라면 숨소리 하나라도 세밀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그가 자기를 경멸하고 박대해도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맥박이 빨라지고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이다.

키엘이 이 집안에 함께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녀는 잠을 못 이루고 뒤채기만 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는 자신의 계획을 행동에 옮길 것이다.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그에 대처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또한 그의 부모님에게도 실례를 범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그들은 단지 친절을 베푸는 마음에서 나를 이곳에 머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키엘과 대립해서 그들의 생활을 혼란하게 만든다면 그들도 좋아할 리가 없다. 참으로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그들의 호의도 뿌리치고 내일 아침 베리가 차를 몰고 오면 곧 여기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키엘은 이미 아침식사를 끝내고 계부와 함께 정원에 나가고 없었다.

"저 양반은 지금 백 번째, 저애에게 장미 재배법을 설명하고 있을 거야."

알렌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테리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빛이 안 좋은데?"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테리는 겸연쩍게 말했다.

"그럼 오늘은 집에서 한껏 게으른 시간을 보내도록 해봐요."

그녀가 충고를 했다.

"하지만 너무 미안해서 그럴 순 없어요."

"여기서 푹 쉬고 즐기라고 붙들어 둔 거예요. 그러니까 염려 말고 쉬어요. 알았죠?"

알렌 부인은 단단히 다짐을 두었다.

그러나,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키엘이 이 집에 있는데 말이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신경을 긁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내에게 자기가 사랑에 빠져 있다는 건 참으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알렌 부인이 차 한 잔을 들고 테리의 옆에 앉았다.

"오빠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지?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들을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다시 자리를 잡을 동안까지는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신혼중이니까."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여기에서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건 정말 유감이야. 그런데 왠지 그 이유를 알아요? 난 도무지 키엘이 그런 무책임한 짓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아요."

"사실은 말예요."

그녀는 마침내 알렌 부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키엘은 제가 베리 때문에 이곳으로 왔다고 믿고 있어요."

", 그랬군. 이제야 알았어. 그 아이들은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이니까. 어쩐지 어젯밤 키엘의 얘기가 좀 이상하더라니. 오해하고 있군. 얘기해 줘서 고마와요. 하지만 런던으로 서둘러 떠나지는 말아요. 편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있을 만큼 있어요. 제임스와 나도 그애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으니까. 이젠 아예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우."

알렌 부인은 한숨을 길게 쉬고 나서 다시 계속했다.

"키엘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그래요. 그의 아버지는 제임스와는 또 달랐지요. 성격이 불 같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면 무엇이든 거침없이 해버리는 사람이었지요. 베리의 인생관이 키엘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둘은 만나기만 하면 늘 으르렁거리지요."

"전 우연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어요. 베리가 사전에 주의만 주었더라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말예요. 나는 베리에게 그런 형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닥터 브레이든은 베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알렌 부인이 천천히 말했다.

"베리를 독립시킨다는 건 멋진 생각이야. 제임스와 나는 어젯밤 단둘이서 그것을 의논했어요. 처음엔 키엘과 베리가 서로 멋진 파트너가 되기를 희망했었지요. 하지만 이젠 틀렸다고 생각해요. 둘은 점점 더 앙숙이 돼가는 것 같아요. 문제는 베리가 키엘처럼 야심이 없다는 데에 있지요. 키엘은 쉴새없이 무언가를 이루어 내려고 애를 쓰고 항상 정상이 되려고 계획을 세우곤 하지만, 베리는 그런 면이 전혀 안 보이거든요."

알렌 부인은 말을 중지하고 싱긋 웃었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나? 미안해요, 보통때는 그렇지가 않은데"

그녀는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내가 치울 테니 정원에나 나가 봐요."

"아니예요, 제가 치우겠어요."

테리는 식탁 위의 접시들을 모으면서 말했다. 지금 혼자 정원으로 나가서 키엘과 마주치고 싶지는 않다.

베리가 그녀의 차를 몰고 도착하자, 집안의 분위기는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렵게 되었다. 두 형제의 적대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심했다. 마침내 제임스 씨가 베리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버리자, 테리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어느 새 키엘이 옆에 와 있었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뾰족하게 대꾸했다.

"당신의 눈이 베리만 따라다니고 있는데, 그래? 그애와 아버지가 무엇을 의논하고 있는 줄 아오?"

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완 관계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베리가 자신의 병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 기분내키는 대로 생각해요. 나는 아무 상관없으니까."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관없지도 않지. 잘되면 베리로부터 일자릴 제공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남의 집안 일에 참견을 해요? 하지만 베리가 내게 요청해 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어요."

키엘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직도 베리를 모르고 있군. 그렇게 그에게 당하고서도 벌써 잊었소?"

"그의 지난 허물은 자꾸 들추고 싶지 않아요. 그는 나에게 사과를 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구요.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었어요. 그뿐이에요."

"참 쉽게도 풀리는군. 그냥 친구 사이라면 그렇게 쉽게 용서될 리가 없지. 처음부터 친구는 아니었던 거야."

테리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결코 두 사람 사이를 친구로 인정하지 않을 모양이다. 그렇다면 제멋대로 생각하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 남의 신경을 긁고 그럴까?

"당신은 구제불능이에요. 남의 병을 고칠 생각은 그만두고 자신의 병이나 고칠 생각해요."

",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밝혀질 거요."

그가 거칠게 내뱉었다.

테리는 알렌 부인이 열린 주방 문으로 걱정스럽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의 어머님이 우릴 보고 있어요."

"상관없소."

"부모님 앞에선 좀 점잖아져요. 쓸데없는 일로 다투어서 그분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나한테 지금 훈계를 하고 있는 거요?"

그는 벌컥 화를 냈다. 그의 회색 눈이 불을 뿜고 있다. 그가 화를 내는 모습에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테리는 그의 화난 얼굴을 올려다보며 묘한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계속 이러면 나는 이곳을 떠날 수밖엔 없어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죠? 내가 당신네 가족과 함께 어울리는 게 싫은 거죠?"

"그렇진 않소. 난 베리만 문제삼고 있는 거요. 부모님은 상관이 없어."

그 순간 그의 어머니가 쟁반에다 마실 것을 담아 가지고 들어왔고, 뒤따라 제임스 씨와 베리도 합석하는 바람에 얘기는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테리는 가급적 베리와도 얘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키엘이 그럴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베리를 태워다 주기 위해 차를 끌어내올 때까지, 잠시도 테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베리가 떠나고 나자 그는 담배를 사러 간다고 말한 뒤 마을로 나갔다.

알렌 부인이 즐거운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테리에게 말했다.

"즐거운 하루였어. 정말 오랜만에 아들들과 함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군. 두 형제 사이에 별 말썽도 없었고. 키엘과 테리 두 사람 사이만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지만 말이야."

"두 형제는 항상 그렇지는 않죠?"

"유감스럽게도 그래요. 하지만 테리와 베리가 함께 독립을 한다면 만사는 좋아지리라 믿어요."

"알렌 부인."

테리는 더 이상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이 문제를 바로잡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베리와 저는 단순한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그도 늘 나를 여동생으로만 대해 왔어요. 그 이상은 아니예요."

", 미안해요. 내가 오해했군요. 베리가 아가씨를 보는 눈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지 뭐예요."

"괜찮아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하죠. 키엘도 그렇게 믿고 있는걸요. 그분은 제가 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질 않아요."

"그래요? 키엘은 베리의 여자친구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하기야 베리가 여자다운 여자를 데리고 온 적이 없었거든. 하지만 아가씬 달라요. 그래서 나는 키엘을 이해 못하겠어요. 내 아들인데도 말예요."

테리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키엘의 태도에 대해서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건."

알렌 부인은 계속했다.

"키엘은 이전엔 한 번도 여기서 자고 간 적이 없어요.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겠는데, 테리 때문인 것 같애.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베리가 아가씨에게 무슨 얘기라도 할까 봐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잖아요?"

"그랬어요?"

"분명히 그랬어요."

그때 키엘이 돌아오는 인기척이 났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방안에 들어서며 유쾌하게 말했다.

"아주 멋진 저녁이야. 산책이나 나가는 게 어때요, 테리? 운동을 좀 해야 오늘밤엔 잠을 푹 잘 수 있을 거요."

그는 이미 내 눈 아래에 드리워져 있는 그늘을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이유가 베리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내가 안식을 잃어버린 그 모든 원인이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키엘은 알 리가 없겠지.

"좋은 생각이야, 키엘."

알렌 부인이 얼른 맞장구를 치고 테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테리는 자신이 키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매정하게 다루어도 자신의 감정은 달라지지가 않았다. 그를 미워하고 그의 태도에 원심을 품었다가도, 그가 가까이만 오면 깊은 마음속에서 저절로 그를 사모하는 느낌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흥분시키고, 깊숙한 곳에다 불을 지르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테리는 아직도 그의 가슴에 안겨서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던 자신의 육체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와요, 키엘. 나도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순한 양처럼 그를 따라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마을을 벗어나서 한적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비록 그와 떨어져서 걷고는 있지만, 테리는 마치 그의 팔에 안겨 있는 것처럼 그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그러한 느낌으로 벌써부터 숨이 찼으며, 맥박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자신의 느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서 걷고만 있다. 온몸의 힘을 뺀 상태로 큰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어깨는 넓고 단단해 보이며, 허리는 날씬하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저녁 미풍에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다. 그는 뒤돌아서 그녀를 보며 큰 걸음걸이로 빙긋 웃어 보였다.

테리가 그의 걸음걸이를 못 따라가고 자꾸 뒤떨어지자, 그는 기다렸다가 손을 내밀었다. 테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통해 짜릿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전과 다름없이 그녀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깜짝 놀라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꽉 잡고 놓아 주질 않았다.

길이 차츰 가파르고 험해져 갔지만 테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자기 옆에 키엘이 있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그에게 이끌려서 자신의 다리는 허공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니, 멀리 집들이 장난감 집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마치 속세를 떠나 자신들만의 세계로 나온 기분이었다. 키엘이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지금 그러한 것은 문제되지도 않는다. 그와의 갈등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호수지역 전체가 축소된 모형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테리에게는 그것도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다.

키엘은 그녀의 손을 놓고, 이번에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테리의 가슴은 금세 불덩이를 품고 있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자신이 왜 이렇게 꼼짝도 못하고, 그가 하는 대로 맡겨 두고만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에게 저항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나지도 않는다. 눈앞이 안 보이고 정신마저 아뜩해지는 느낌이다. 어느 새 테리는 그가 키스해 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얄궂은 감정이었다. 키엘은 전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으며, 아직도 자신을 런던으로 돌려보낼 생각만 하고 있을 터인데, 혼자만 괜히 흥분해서 쩔쩔매고 있는 꼴이라니, 그가 오늘 저녁, 이곳에 자기를 데려온 건 그 나름대로의 작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는 곧 하찮은 친절을 접어 넣고, 본론을 끄집어낼 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가,

"베리 말인데"

하고 얘기를 꺼냈을 때에도 그녀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왜요?"

그녀는 자주색 눈동자를 치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베리에 관해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똑같은 얘기니까요."

"내가 얘기하려는 건 그게 아니오."

"결국 마찬가지예요. 그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 그게 아니면 나는 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뭐 그런 얘기 아니겠어요?"

달콤한 행복은 너무 빨리 끝나 버린 것 같다. 자신 혼자만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그 행복이 순식간에 원망과 증오로 돌변해 버렸다.

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독립에 대해서는 당신이 먼저 제안한 것 아니오?"

"당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를 하겠지요? 베리를 보기조차 싫어하니까. 안 그래요?"

"그애는 내가 좋아할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녀석이니까."

키엘은 체념조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녀석이 그런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애를 신뢰하고 있거든. 그래서 나는 혹시나 그동안 베리를 너무 편협하게 보고 있었지나 않나 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소."

테리는 그를 돌아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죠?"

"그래서 베리의 독립에 관해서 나의 의붓아버지와 의논을 해보았지. 베리는 어려운 일을 싫어하고 쉽게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독립을 하게 되면 당장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소."

"그래서 결국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군요?"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아버지는 그래도 시도해 보자는 것이었소."

"그런데도 당신은 끝내 반대했나요?"

"아니지, 정 그렇다면 차라리 그 자금을 내가 대는 편이 좋겠다고 얘기했지. 그러면 그도 아무렇게나 하지는 않을 게 아니냐는 생각에서 말이오."

테리는 그의 얘기에 눈이 둥그레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를 이제까지 잘못 보았던가? 그건 정말 테리로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엄격한 거래를 의미하지. 베리는 내게서 빌려간 돈을 이자를 붙여서 돌려 주어야 하는 거요."

그러면 그렇지! 그녀의 기백은 금세 사라졌다.

"당신에게서 어떤 자비심을 기대하다니! 당신은 베풀 줄이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그녀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베리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돈을 융자할 생각을 하고 있었소.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엔 융자금을 즉시 갚아야 하기 때문에 개업을 하고 나서도 몹시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될 거요. 그래서 나는 개업 후 2년간은 자리를 잡도록 하기 위해 원금과 이자를 유예해 주기로 했던 거요."

테리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베리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구요?"

"아버지도 그렇게 하는 편이 베리를 위해서도 최상의 방법이라고 동의하셨소."

"그 말씀이 옳아요!"

테리도 즉시 맞장구를 쳤다.

"만약 그가 성공한다면 테리 당신에게 제일 먼저 감사해야 할 거요."

"아니예요, 당신 덕분이겠죠. 정말 고마와요, 그에게 길을 열어 주셔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까치발을 하고 서서 그의 뺨에다 감사의 표시로 키스를 했다. 불과 수초 전의 그 증오심은 어디론지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은 그의 억센 팔에 의해서 힘껏 가슴에 밀착되고, 입술은 그의 입술에 덮여 버리고 말았다. 가슴속에서 불꽃이 일어나며, 열정이 샘물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결이 전에 없이 거칠어지고, 그의 체온이 몸속으로 스며들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뜨거운 욕망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가 더욱 강렬하게, 더욱 뜨겁게 키스해 주기를 열망했다. 들리는 건 새소리와, 나무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뿐이었지만, 그나마 가슴속에서 울리는 고동소리로 희미하게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길고도 숨 막히는 키스였다. 이윽고 고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마치 자신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테리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그에게 더 키스를 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열망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부드러워서 자신이 거부되는 느낌을 받지 않았으며, 단지 다음을 위한 잠시 동안의 휴식으로만 받아들여졌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또한 용암처럼 뜨거운 남자라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기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도무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오늘도 하루종일 자신의 신경을 곤두세웠던 그의 태도가 이제 저녁이 되어 호의적으로 변한 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그를 이토록 가깝게 느끼면서도, 동시에 먼 타인처럼 느껴지는 건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 점이 고통스럽기는 하더라도, 모처럼의 이런 분위기가 테리로서는 무척 소중하고 깨뜨리기 싫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지, 베리를 독립시키는 데는 말이오."

키엘이 말했다.

테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싱긋 웃었다.

"알고 싶지 않소?"

테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게 뭐죠?"

"당신에 관한 거요."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

"나는 베리에게 돈을 빌려 주는 조건으로 당신이 그를 위해 일하면 안 된다는 점을 명백히 했소."

테리는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결국 원위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가 자기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처음에 짐작했던 그대로였다. 물론 자신을 아직 베리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 키엘이 키스를 하고 자기를 열렬하게 포옹했을 때, 그 따위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이렇게 조건을 못박고 나오니 배신감이 울컥 치밀어 올라 와서 그를 쏘아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그건 공정하지 못해요!"

그녀의 태도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당신이 옆에 있으면 베리는 일에 전념할 수가 없어."

"어떻게 그걸 단정할 수 있어요?"

그녀의 눈동자는 폭풍전야처럼 어두웠다.

"베리가 원한다면 나는 갈 거예요. 당신은 나를 막지 못해요."

"그것만은 막을 거야, 테리. 틀림없이 말이야."

"아주 자신만만하시군요."

그녀는 고개를 뒤로 발딱 제치고 대들 듯이 말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베리가 나가 버리면 내가 테리를 내보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거든. 당신은 매우 유능한데다 나는 당신의 솜씨가 무척 마음에 든단 말씀이야. 그러니까 테리는 나한테로 돌아와야 하오, 아주 영원히."

", 키엘! 당신이란 사람은그러면 선택권은 나에게 있는 거죠?"

그녀는 갑자기 숨이 차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원하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경우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얼른 생각나지가 않는다.

그는 양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다 얹어놓으며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를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아니,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어."

"이런 엉터리"

그녀의 목소리는 저절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의 회색 눈동자 속으로 자신이 깊숙이 빨려들어 가는 느낌과 함께 온몸의 저항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처럼 그녀는 그의 품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신은 내게 강요할 권리가 없어요!"

부질없이 고집을 피우는 어린애처럼 앙탈을 부리듯 말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 눌렀다. 그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없다고, 테리? 정말이야?"

그녀는 이미 그에게 백기를 들고 만 자신을 발견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설득해 온다면 자신으로서는 거부할 길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번만은 너무 쉽게 그에게 굴복하고 싶지가 않다. 그녀는 그의 단단한 가슴을 두 손으로 힘껏 밀치면서 저항했다.

"이것 놔요, 키엘. 당신은 내게 이럴 권리가 없어요."

"그건 당신의 본심이 아니야. 당신의 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

"그래서 나의 그런 약점을 이용하는 거예요?"

그는 씨익 웃었다.

"당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또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게 무척 즐거우니까."

"즐겁게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 놔요."

"그래서 화가 났소?"

"그럼, 나도 즐겁다고 말해야 하나요?"

"그러길 바라는 중이오."

"별걸 다 기대하시는군요."

"테리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소."

"나를 그렇게나 학대하지 않았어요?"

"학대라니!"

그는 입을 딱 벌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감히 테리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산 아래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키엘이 우울한 소리로 말했다.

"그건 베리 때문이야. 그애가 아니었다면 내가 당신에게 친절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당신은 베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불친절해요."

"당신을 그에게서 떼놓았기 때문이오? 그가 당신에게 그런 짓거리를 했는데도 그를 두둔하는 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사과를 했어요.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그놈은 필요에 따라 사과 따위는 얼마든지 반복하는 녀석이오. 그래서 나는 아예 믿질 않아."

"그에 대해서 너무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편견이 심한 분이에요."

"그래서 나와 같이 일하기가 싫단 말이오?"

그는 눈에 장난기를 띠면서 웃어 보였다.

"아직 결정 안했어요."

그녀는 화난 척하며 말했다.

"여기서 당신의 부모님과 며칠 더 지내면서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것도 좋겠지. 베리는 장소를 결정하려면 아직도 시일이 좀 걸릴 테니까 금세 떠날 수도 없어요. 나의 또 다른 조건은 내 지역에서 최소한 40이상 떨어진 곳에다 병원을 차리라는 것이니까. 내 환자를 그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거든."

"그리고 그와 내가 만나는 기회도 적어질 테니까요, 그렇죠?"

"그렇소."

그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당신이 미워요."

테리는 약간 장난스럽게 입을 쑥 내밀었다.

"그 반대겠지?"

그는 웃었다.

만약 자기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그가 과연 놀랄까, 테리는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 자신의 마음을 잘 눈치챘기 때문에, 그녀는 얼른 눈길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자기 혼자만의 짝사랑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에 대한 키엘의 감정은 테리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돌아가서 다시 일을 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 결정할 문제지, 결코 그가 강요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자기가 싫다면 아무도 자기에게 강요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가 무언가를 자신에게 요구할 때마다 그것에 저항할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자각된다.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므로 더 이상 자신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는 태도다.

돌아가는 길은 어쩐지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말없이 집에까지 도착한 그녀는 키엘이 차 한 잔 하자는 권유도 뿌리치고 자기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알렌 부인과 제임스 씨도 그녀의 우울한 태도에 놀라는 표정으로 키엘의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혼자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그에게 당당할 수가 없을까? 왜 그가 나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그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키엘이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자기 방식대로 했다. 그렇다고 그와 함께 일하는 게 싫으냐 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랑하고 있는 남자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한결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알렌 부인과 키엘은 그녀의 밝은 표정에 함께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제임스 씨는 벌써 정원으로 나간 모양이다.

"오늘 아침엔 기분이 아주 좋아진 모양이지? 방금 키엘이 좋은 얘기를 해주던데, 그것 때문이야?"

알렌 부인이 기쁜 듯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 그래서 저도 베리가 아주 잘됐다고 기뻐하고 있어요."

"베리가 독립한다는 건 마치 꿈 같은 얘기라우. 제임스도 무척 기뻐하고 있어요."

"베리도 좋아하겠죠?"

"물론이지, 테리 양. 그리고 테리 양도 이곳에서 그냥 일하게 됐으니 정말 잘됐어요."

알렌 부인은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키엘은 테리에게 일방적으로 말했다.

"테리 양, 나와 함께 외출할 준비를 해요."

그녀는 깜짝 놀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원치 않는다면요?"

"맞았어, 테레사 양이 말 잘했어요."

알렌 부인이 거들었다.

"키엘은 항상 자기 생각대로만 남들이 모두 따라와야 한다고 믿고 있어. 남의 생각은 아예 무시하고, 무조건 명령조로 말하지."

그러나 테리의 진심은 키엘의 제의를 거절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키엘과 함께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그는 항상 자신이 즐겁게 수락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제의만 했다. 약간의 반발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8

두 사람은 윈더미어로 차를 몰고 가서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키엘은 수많은 빅토리아 시대의 저택들을 가리키면서 그 소유주인 랭카셔의 공장주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저택들은 호수를 안고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증기선은 호수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섬 주변을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멋있어요. 여기로 데려와 줘서 고마와요."

그녀는 그와 단둘이만 있고 싶었다. 주위의 관광객들로부터 어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호수 주변의 경관은 점점 더 장관을 이루어 갔다. 은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건너편 기슭으로 높고 낮은 언덕들이 줄이어 있고, 고색창연한 고딕 식 건물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조그마한 보트들이 수면 위에 무수히 떠 있다. 그것은 분주하면서도 행복에 겨운 풍경이며, 테리는 자신도 그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 기쁘기 짝이 없었다.

증기선 여행이 끝나자, 둘은 트라우트벡 마을로 갔다.

"이곳 호수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오."

키엘이 그녀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테리를 데리고 마을의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는 매우 친절했고, 그녀를 마치 값비싼 보물처럼 소중히 다루어 주었다.

테리는 갑자기 그와 너무 가까와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과 같은 키엘이라면 완전히 그와 마음을 하나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은 그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된 것같이 느껴졌으며, 이러한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다.

"이젠 어디로 갈가?"

그가 물었다.

"힐탑 농장으로 가죠."

그녀는 즉시 대답했다.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테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비트릭스 포터의 팬인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피터 래빗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몹시 궁금했었죠."

그래서 다시 소레이로 건너가서 농장을 방문했다. 그곳 회색 돌로 지어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는 내부의 여러 방들을 구경하고 다녔다. 테리는 그 방에서 비트릭스 포터가 '티기 윙클 부인' 등 수많은 소설을 쓴 것을 생각하면서 혼자 감격해했다.

키엘이 마침내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아직도 떠나기가 섭섭했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정말 유감없이 즐겁게 보냈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황홀했고 행복했던 하루다. 키엘은 더할나위없이 친절했고 예의발랐으며, 그래서 그에게서 보다 끈끈한 어떤 감정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에 테리의 마음은 푸른 창공에 떠 있는 연처럼 가볍고 상쾌했다.

알렌 부인은 저녁을 준비해 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은 그들의 하루가 어떠했는지 무척 호기심을 갖고 듣고 싶어했다. 테리가 힐탑 농장에 대해서 신나게 얘기하자 부인은 시종 흥미있게 듣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테리는 오빠인 리차드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여기에 다시 머물게 됐다고 하면 깜짝 놀랄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겠죠."

리차드는 정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곧 잘됐다고 축하해 주었고, 특히 베리의 병원에 관한 얘기를 듣고는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테리는 리차드와의 통화를 끝내고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의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안에서 키엘의 고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건 제가 좋아서 한 일이 아니예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죠. 함께 일할 사람과는 서로 마음이 맞아야죠. 서로 앙심을 품고서야 뭐가 되겠어요?"

테리는 가슴이 써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나를 데리고 나가서 하루종일 기쁘게 해준 건 단지 자신의 일을 위해서였던 거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완벽한 연기를 해보인 셈인가? 그렇게도 철저히 가장할 수가 있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테리는 키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응할 마음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도 자신의 그런 기분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밝게 하고 거실로 들어가는 데는 상당한 의지력이 필요했다. 그녀는 상처 입은 마음을 간신히 감추고 키엘과 알렌 부인에게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피곤하군요. 너무 즐거운 하루였어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어요."

침실로 올라오며, 테리는 호수고 뭐고 다 팽개치고 런던으로 돌아가 버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키엘의 존재는 이제 자신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되어 버렸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겪어야 할 고통이 얼마만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이곳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됐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키엘은 급한 환자의 호출을 받아서 이미 왕진을 나가고 없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일을 찾아서 돌아간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의례적인 일은 이제 끝났으므로 이곳에서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테리는 씁쓰레한 기분을 되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으로 해서 자신이 최소한 키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계기는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깊숙이 키엘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그것은 참으로 부질없고 허망한 사랑이었으나, 테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조금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 남자에게 불가항력으로 빠져 있었다.

키엘과의 관계만 제외하면 다른 모든 일들은 유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을 유유히 산책하면서, 또는 알렌 부인의 일을 거들면서, 그리고 때때로 제임스 씨의 장미를 감상하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일주일이란 기간이 금세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키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의 설레는 마음은 아랑곳없이 그는 일방적으로 말했다.

"베리는 떠났소. 내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나와 줬으면 좋겠소."

그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테리는 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죠."

그녀가 비참한 기분으로 대답을 하자 곧 전화는 끊어졌다.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알렌 부인에게 말했다.

"키엘 씨가 내일 아침부터 병원에 출근하래요. 저의 휴가는 이제 끝난 것 같군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베리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애. 칼라이로 북부지방에 마침 은퇴하는 의사가 한 분 있어서 그 자리에 들어가기로 했대요. 그래서 일찌감치 그곳에 가서 모든 것을 익히려고 떠났어요."

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엘이 얘기해 줬어요."

부인은 그녀를 쳐다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러우?"

"아니예요, 그낭 베리를 한번 봤으면 해서요."

테리는 알렌 부인에게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가 지구 맨 끝으로 가는 건 아니잖아?"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테리는 요즘 좀 이상한 기분에 빠져 있는 것 같거든. 뭔가 잘못되었어요? 내게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없어요?"

테리는 머리를 저었다. 알렌 부인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결코 없다.

"그냥 약간 걱정이 돼서요. 키엘의 기대를 그르치지나 않을까 하고 말예요."

"저런! 그 일이라면 조금도 염려 말아요. 키엘은 테리의 일솜씨에 아주 감탄하고 있던데, 그래? 다른 간호사들은 테리에게 비교할 수도 없대요."

테리는 쓸쓸하게 웃었다.

"겨우 며칠밖에 일하지 않았는데요, ."

"그 정도면 충분하지. 키엘은 보는 눈이 정확해서 테리가 유능하지 않으면 붙잡지도 않았을 거예요."

바로 그 점이 테리가 가장 비참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다.

다음날 아침 병원에 출근했을 때, 그녀는 키엘의 무뚝뚝한 태도에 다시 한번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지난날 함께 여행하던 때의 그 친절한 마음을 다시 베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은 그를 만난 순간 물거품처럼 꺼져 버리고 말았다.

베리가 떠남으로 해서 그들은 그만큼 더 바빠졌다. 당연히 저녁에 일이 끝나는 시각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테리가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젖은 솜처럼 지쳐 있었다.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는 샤워를 한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잠이 깼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났다. 누군가가 이 아파트로 들어온 걸까? 아래로 내려가서 조사를 해봐야 하나, 아니면 경찰에다 전화를 해야 할까? 공포로 그녀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테리는 숨을 죽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실로 나오면서 창문 밖을 살폈다. 만약에 괴한들이 타고온 차가 있다면 경찰에게 자세히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도로 위에는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하얀 차였다. 키엘의 차가 아닌가! 키엘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시각에 도대체 뭘하고 있는가? 무슨 사고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녀는 실내복을 끌면서 병원으로 달려 내려갔다. 키엘이 깨진 유리병을 빗자루로 쓸어 담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뭣하러 내려온 거요?"

어쩐지 그의 신경질적인 태도가 비위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그를 살펴보느라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고, 옷에도 여기저기 핏자국이 얼룩져 있다. 테리는 그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미어질 것같이 아팠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면서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교통사고가 있었소. 그곳에서 막 돌아온 참이야. 운전수를 끌어내느라고 그의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되었지. 살아난 것만도 다행이었어. 그는 아마 죽을 때까지 오늘을 잊지 못할 거요."

"왜 저한테 전화를 하지 않았죠? 제가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즉시 항의했다.

키엘은 머리를 흔들었다.

"앰뷸런스가 있었어. 하지만 곧 호출이 다시 있을지도 모르니 준비는 해둬야겠소."

그녀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키엘은 잠이 필요하다. 그는 몹시 피곤한 모습이다.

"아파트로 오셔서 샤워라도 하세요. 커피라도 끓여 드릴게요."

그녀는 그가 의료기구를 가방에다 챙겨 넣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게 좋겠군."

그는 커피를 마시는 도중에도 거의 졸고 있었다.

테리는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베리의 방에서 주무셔도 좋아요. 집까지 운전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지치신 것 같아 보여요."

"정말 끔찍한 날이었어. 하지만 잠을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았어."

그의 눈빛이 의미있게 빛나며 그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이리 와요, 테레사."

그의 나지막하고 육감적인 목소리가 등줄기를 타고 전류처럼 퍼졌다. 테리는 그에게 가고 싶었다. 그 유혹은 참으로 강한 것이었다. 모든 걸 다 버리고라도 그의 품속에 안기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욕망을 억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키엘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무시고 가라는 건 그런 뜻이 아니예요."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알아요. 그렇지만 설마 나를 거절하지는 않겠지?"

그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눈동 자는 그녀의 얼굴에 못박힌 듯 고정된 채 눈엔 고뇌의 빛이 어려 있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에 길고도 깊은 키스를 하는 동안 테리는 아무런 생각이나 거부의 몸짓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실내복과 잠옷의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향기로운 피부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가슴에다 힘껏 안았다.

"진작부터 이러고 싶었소. 당신이 천사 같은 모습으로 병원에 뛰어 내려온 걸 본 순간부터 말이오."

그는 그녀의 귀에다 속삭였다.

테리는 온몸이 떨려오는 기쁨 속에서 말없이 그의 가슴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테리, 당신을 원해."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테리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도 그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는 두 팔로 그녀를 번쩍 안아서 그녀의 침실로 향했다.

그제서야 테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키엘에게 모든 것을 허용한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더욱 깊은 상처를 받게 될 것이며, 키엘은 더욱 자신을 경멸하게 될 것이다.

"안 돼요, 키엘! 안 돼!"

그녀는 그의 가슴을 두드리며 숨가쁘게 말했다.

"왜지? 내가 베리가 아니라서 그래? 나를 이곳으로 초대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오?"

"하지만 이런 뜻은 아니었어요. 당신이 너무 피곤해 보여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왜 자신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온몸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서 그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테리, 당신도 지금 나 이상으로 서로를 원하고 있어요. 우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래 왔잖소? 그걸 부인하겠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베리 때문에 이제까지 주저해 왔다면 지금부터는 그 생각을 버려요. 여기엔 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난 당신을 원해요."

테리도 물론 그를 원하고 있다. 그는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혔다. 그가 셔츠를 벗어던지자 단단하게 잘 발달된 그의 가슴이 드러났다.

"키엘 씨, 제발"

그녀는 애원조로 말했다.

"제발 어떻게 해달라는 말이오?"

"제발 이러지 말아요."

"말에 확신이 없는데 그래? 무얼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요?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다른 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요."

그녀는 무시하듯 말했다.

"당신은 여자를 강제로 정복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강제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냐, 테리. 그러면 나를 원치 않는다고 말해 봐. 내 키스를 원치 않는다고 한번 말해 보란 말야. 말해 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자신의 온몸이 열렬히 그를 원하고 있고, 그만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입장이 다르다. 그는 다만 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어느 여자라도 상관없다. 다만 지금의 그로서는 나라는 여성이 우연히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원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거의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 몸에 손대는 걸 원치 않아요. 베리의 방으로 건너가서 자거나 그게 어려우면 집으로 가요. 내 몸에서 손을 떼줘요."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정말이오?"

"진정이에요. 나는 지금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요."

키엘은 훌쩍 일어났다.

"내가 지금 너무 지치지만 않았어도 당신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을 거요. 이제 당신은 안심해도 좋아. 오늘밤엔 당신과 더 싸우고 싶지 않소. 하지만 아주 포기한 건 아니야."

테리는 머리를 흔들며 그에게 물었다.

"왜지요, 키엘? 왜 나에게 이러는 거죠?"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는 피곤한 듯 말하고는 휭하니 나가 버렸다.

테리는 순간적이나마 일말의 후회 같은 감정이 떠올랐다. 키엘은 단지 자신과의 관계를 좋게 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의 말대로, 함께 일하는 사람끼리 서로 사이가 나빠서 좋을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키엘이 베리의 방으로 건너간 뒤에도 테리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가 가까운 방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긴장에서 풀어 주지 않고 있었다.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자신으로서도 매우 간절한 것이었다. 애초에 그를 이 아파트로 불러들인 것부터가 실수였다. 테리는 두번 다시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했다.

새벽 6시경에, 그녀는 키엘이 일어나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퍼뜩 잠이 깨었다. 그도 역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거실로 나가 보니, 그는 예상 외로 완전히 원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냉장고 속에서 먹을 걸 별로 찾지 못했소. 그래서 그냥 토스트와 커피밖에는 준비를 못했는데"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마와요."

그녀는 기대치 않았던 그의 태도에 반가운 마음이 앞서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가 건네주는 토스트와 커피를 받아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마음이 흐뭇해져서 어젯밤에 그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별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다 먹고 나서 한 시간쯤 더 자도록 해요. 그동안에 나는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

", 몹시 피곤해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그의 갑작스러운 친절에 의아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알고 있소."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밤새 엎치락뒤치락하는 소리가 들리더군."

그렇다면 그도 밤새 잠을 못 잤다는 말이 아닌가! 그건 조그마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가 떠나 버리자, 아파트는 갑자기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온 신경이 곤두섰지만, 이제 그가 곁에 없자 금세 그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커피 잔을 놓고 침대의 시트 사이에 몸을 눕히자마자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다시 잠에서 깨어난 것은 전화 벨 소리 때문이다. 그녀는 키엘이 병원에서 걸어온 전화인 줄 알았다.

"테리?"

귀에 익은 목소리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기억해내는 데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마이클?"

"그래, 마이클이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을까? 자신이 메모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런던을 떠나왔을 때는 그에 대해서 조금도 미련이 없다는 것을 그도 알았을 게 아닌가? 그러나 마이클은 언제나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테리의 태도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는 법이 없이, 그의 사랑은 언제나 일방적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여행은 어땠어요?"

"베네수엘라 얘기를 하자고 전화한 건 아니야!"

그는 소리를 빽 질렀다.

"거기서 뭘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 왜 아무 말도 없이 그런 곳엘 갔지?"

그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한 것처럼 들렸다.

테리도 우울했다.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한 거죠? 당신은 나를 침대에서 끌어냈다구요."

그녀는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만약 상대가 키엘이었다면 자신의 감정은 전혀 달랐을 거다. 아마 지금쯤 맥박은 빨라지고, 가슴은 크게 쿵쿵 울리며 벅찬 기대로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근무시간에 방해가 될까 봐서 그랬어."

그가 변명을 했다.

"오늘밤에 다시 전화하세요."

아니면 아주 나를 잊어버려 주든가 하고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자신은 결코 마이클에게 사랑한다는 시늉조차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도저히 어쩔 수 없게 되기 전에는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남자다.

"그랬다가 테리가 외출하고 없으면 나는 허탕이게? 그러지 마, 내 사랑. 여기 와서 테리가 없으니까 아주 미칠 지경이야. 즉시 그쪽으로 달려갈 테니까 기다려요. 리차드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미치고 말았을 거야."

"미안해요."

그녀는 말했다.

리차드가 그에게 거처를 알려 준 게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그가 돌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몹시 귀찮아질 것이다.

"이곳에 일자리가 생겨서 이리로 오게 됐어요. 마이클이 외국에 가 있었으니 연락도 못했죠 뭐."

아마 마이클은 자신을 이곳에서 끌어내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쓸 것이다. 그는 런던 밖에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는 극장과 파티와 다른 어떤 곳이든 놀러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이곳 호수지방에서 살라고 한다면, 아마 이틀도 안 지나서 온몸에 좀이 쑤신다고 투덜거릴 게 뻔하다.

"설마 나를 피해서 그곳으로 간 건 아니겠지?"

그는 약간 자신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그럼요, 그럴 리가 있나요."

대답을 해놓고도 그녀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회에 아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와 결별을 선언해 버릴걸.

"리차드 오빠가 결혼을 해서 나도 독립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생활 분위기도 바꿀 겸 이곳으로 왔죠."

"내 아파트가 항상 테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잖아?"

그야 테리도 알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몇 번이나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오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건 내가 원치 않는다고 했잖아요? 나는 여기가 좋아요, 마이클. 여긴 아주 평화롭고 조용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는 화난 소리를 질렀다.

"테리, 시골구석에 파묻혀 버리기엔 넌 너무 젊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곳에서 좋은 남자가 생기기라도 한 거야?"

그가 만약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이클. 남자는 없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는 있어도,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는 없는 셈이다. 그제야 마이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방이 외면하는 일방적인 짝사랑은 너무나 쓰라린 고통이다.

마이클을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도와 줄 수는 전혀 없다. 키엘의 나에 대한 마음도 그럴 게 아닌가?

마이클이 내쉬는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난 테리가 그곳의 조용한 생활에 싫증을 느껴서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되겠군. 다시 돌아올 거지, 테리?"

"그래요, 언젠가는"

그녀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키엘에게 달린 문제다. 그의 변덕 많은 성격이 언제 자기를 내쳐 버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연락은 자주 주겠지?"

", 그러겠어요."

"그리고 그곳에 내가 가서 면상을 한 방 질러 줄 녀석이 있다면, 그것도 즉시 알려 줘."

그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진심임을 테리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곳 생활이 무척 즐거워요. 남자 문제로 그 리듬이 깨지는 걸 원치 않아요. 그리고 제발 나를 기다리지 말아요. 내 마음은 전에도 말했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마이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여자를 찾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테리는 내게 불가능한 걸 요구하고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결국 테리가 자기와는 결혼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가 마침내 '안녕' 하고 말했을 때, 그녀는 그가 얼마나 불행한 사람으로 느껴지던지 눈물이 솟아올랐다. 죄스러움을 느꼈지만, 하지만 어떻게 하랴? 자신은 이제까지 한번도 마이클을 고무시킨 적은 없었다. 그도 내 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무난하게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남자였다.

테리는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샤워가 끝났을 때에는 마이클에 대한 생각도 함께 씻겨내려 가고 없었다. 키엘만이 그녀의 마음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키엘에 대한 사랑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이젠 아무도 그 감정을 돌이킬 수는 없으리라. 설사 마이클이라 할지라도.

키엘은 아직도 자신이 베리를 쫓아 여기까지 온 줄로 알고 있다. 그는 나를 아무 남자에게나 자신의 몸을 던져 주는 그런 여자로만 생각했다. 언제 그에게 그런 부도덕한 면을 보인 적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그런 태도가 서운하고 눈물이 나도록 억울했다.

병원의 일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테리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저녁이 되어 마지막 환자가 돌아가고 나자 그녀는 너무 피곤하여 눈을 못 뜰 지경이 되었다. 키엘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같이 저녁이나 하러 갈까?"

그는 테리의 피로한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마음속의 기쁨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곧 준비할게요. 그런데 무얼 입죠? 정장을 할까요, 캐주얼로 할까요?"

그는 말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은 항상 아름답소, 어떤 옷을 입어도 말이오."

그의 말은 그녀의 볼을 붉게 만들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찬사는 정말 기뻤지만, 그러나 너무 좋아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의 찬사는 언제나 찬사로만 끝나니까.

"8시에 당신을 태우러 가지. 그때까지 준비할 수 있겠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그와 데이트한 여자들은 어떤 종류의 여성들이었기에 준비하는 데 한 시간 이상이나 걸린단 말인가? 자신은 5분이면 족할 것 같았다.

"당신은 매우 조용해진 것 같군."

귓전에서 그의 말이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녀는 그가 어느 새 매력적인 남성으로 변신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용암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몸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개왔을 때, 그녀는 눈앞이 아찔해지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9

키엘의 키스는 유감스럽게도 너무 짧았다. 마치 스치고 지나가듯 입술을 살짝 건드렸을 뿐이다. 테리는 와락 그에게 안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좀 더 키스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도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반응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정도에서 끝낸 것이다. 내가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내줄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부끄러운 생각이 볼을 붉게 물들였다. 자신은 키엘에게는 너무 허약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이제 가야지. 이러다간 너무 늦어서 저녁도 못 먹겠어."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다. 그의 표정은 불쾌감도, 승리감도 나타나 있지 않은 무덤덤한 것이다.

아파트로 돌아온 테리는 옷장에서 약간 자극적인 푸른 빛깔의 드레스를 꺼냈다. 그것은 짤막하고 대담하며, 몸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드레스다. 키엘이 자기를 주의 깊게 봐주고, 자신을 열망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소 선정적인 옷을 입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둘러 샤워를 했다. 샴푸로 머리를 감은 뒤, 드라이로 말려서 머릿결이 부드럽고 탄력있게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얼굴 화장은 최소한으로 했다. 콤팩트를 살짝 바르고, 아이섀도는 드레스의 색깔에다 맞추었다. 그런 다음 속눈썹이 약간 짙게 보이도록 마스카라로 칠한 후, 입술에다 엷게 루즈를 발랐다. 향수를 가슴 부분에다 살짝 뿌리고, 터키석으로 된 귀걸이를 매단 그녀는 마지막으로 푸른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아름다왔다. 뺨이 흥분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데이트를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다.

그때 키엘의 차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은 계단을 달려 내려가서 그를 맞이하고 싶지만, 자존심이 조용히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녀를 본 키엘의 눈은 감탄으로 빛났다. 테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넋을 잃어버린 것 같다.

"괜찮겠어요?"

그녀는 약간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자줏빛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답군. 외출을 취소해야겠어.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가 두려워. 당신은 황홀해. 자신도 알고 있소?"

"아첨하실 줄도 아시는군요."

그녀는 가슴이 뛰고 숨이 차오는 것을 느꼈다.

"배가 고파요. 저녁 사주겠다는 약속, 잊었어요?"

그녀는 모처럼 키엘이 만만하게 느껴졌다.

그의 차는 조그마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그의 옆에 거의 닿을 듯이 앉았다. 따뜻한 그의 체온과 함께 남성 특유의 강한 체취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의 체취로 자신의 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차창 밖으로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호수지역의 경치로 눈길을 주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손이 한순간 운전대를 떠나 테리의 무릎 위에 살짝 얹혔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감촉은 한동안 그냥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도 그에게 어떤 표시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가 두려웠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나쁜 인상을 주기가 싫었다. 이제까지 그 어떤 남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욕망을 키엘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좌석은 이미 예약되어 있었다. 시골 풍경이 그림 카드처럼 펼쳐져 보이는 창가 자리에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았다. 높은 언덕 아래론 푸른 목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

"베리가 그립지 않소?"

느닷없는 키엘의 질문에 그녀는 깜짝 놀라서 자줏빛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행복하기만 했던 기분이 약간 망쳐지는 느낌이다. 정말이지, 이런 장소에서 베리에 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아뇨, 왜요?"

그가 어깨를 약간 추스리며 말했다.

"그애 때문에 당신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까."

"그건 아니예요."

테리는 이 특별한 저녁이 망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감정을 억제하고 조용히 말했다.

"베리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럼 베리를 아주 안 만나더라도 상관이 없단 말이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얽혀 한동안 떨어지지가 않았다.

테리는 그가 자기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물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난다면 반갑기는 하겠죠."

그때 마실 게 나왔다. 그녀는 키엘의 주의를 돌릴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마티니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그러니까 결코 애인 사이가 아니었다, 이 말이군?"

"절대로 아니예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끈했으나 다시 감정을 억제하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가정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모욕이에요."

그는 다소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모욕할 생각은 없었소. 다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그날 밤 베리가 당신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게 처음이었소?"

테리는 감정이 끓어올라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는 테리의 얼굴을 돌려서 자기를 바라보게 했다. 그녀의 눈에는 고뇌가 가득차 있다.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군?"

테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충동을 받았다.

키엘은 갑자기 숨이 거칠어진 것 같다. 그는 다급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였소?"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16살 때였어요. 그는 내가 충분히 자랐다고 하면서그래서 인생을 배워야 한다고 했어요.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면서하지만 내가 거절했어요."

"맙소사!"

키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그녀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녀석 아파트에다 넣은 게 잘못이었소. 그놈 손에 제대로 놀아난 셈이지. 나를 용서해 주겠소?"

"이젠 지난 얘기예요. 벌써 잊어버렸어요. 그도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럴 기회도 없을 거구요."

"베리가 당신 오빠에게 이곳의 일자리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는 당신이 반드시 지원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요. 그애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교활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녀석이니까. 그리고 아직도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요. 당신은 녀석의 목표가 되어 있어. 녀석의 손에 걸려서 무사한 여자는 아직 없었소."

테리는 한동안 말없이 마티니만 기울이고 있었다.

"만약 그가 다시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나는 그를 혐오하게 될 거예요. 그를 아직 친구로 여기고 있지만, 그땐 모든 게 끝장이에요."

그녀는 우울하게 말했다.

"그 말을 믿고 싶소. 당신은 베리와는 달라. 이젠 알 수 있소."

그의 회색 눈이 따스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손을 그녀의 손등에다 올려놓고 가만히 움켜쥐었다.

짜릿한 전율이 그의 손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그때 웨이터가 메뉴를 들고 다가왔다. 그로 인해서 자신들의 그러한 순간이 끝나 버린 것에 대해서 기뻐해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 테리는 알 수가 없었다.

마늘로 양념을 한 버섯요리는 맛이 일품이었다. 테리는 배가 고픈 김에 허겁지겁 먹었다.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서 정말 기뻐요."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와하는 눈빛으로 키엘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그런 말을 했다면 아마 베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을 거요. 이젠 말해 봐요, 왜 집에서 나왔지?"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말했잖아요? 리차드가 결혼해서 집을 그에게 양보했다고. 그리고 모처럼 런던을 떠나서 여러 곳을 구경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하필 여기요? 호수지역은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아. 결혼은 안할 생각이오? 아니면 다른 남자가 있소?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아. 오빠의 결혼 때문에 이곳까지 왔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소."

마이클의 전화만 없었더라도 테리는 키엘의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바로 아침에 그의 전화를 받았던 그녀로서는 키엘의 눈길을 피한 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말해 봐요."

그가 부드럽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의 눈길은 예리하게 테리를 주시하며, 아무리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마이클은 테리에게 별로 중요한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로부터 도망쳐 온 것도 결코 아니었으며, 런던을 떠나올 때에 그는 해외에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남자도 없구요."

그녀는 명료하게 말했다. 마이클은 나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알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전화하지도 않을 것이다.

키엘은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를 간파하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했다. 한동안 그는 말없이 그녀의 표정만 살피고 있다.

"좋아요."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신중했다.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바이올린 줄처럼 팽팽하던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비로소 풀린 것 같은 기분이다. 그가 손을 내밀어 테리의 손을 잡았다.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녀는 그의 눈에서 자신의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메인 디시가 나와서 식탁 위에 놓였지만 그녀는 식욕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다른 형태의 갈증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그것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에 대한 갈증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베리와의 관계를 비로소 이해하고, 다른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겨우 인정하게 된 이 남자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그녀와는 달리 그의 식욕은 여전히 왕성했다. 그는 순식간에 자기 앞에 놓여진 조가비 요리를 먹어치우며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왕성하던 식욕이 어디로 갔소?"

"배가 불러요."

그녀는 자주색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쟁이!"

그는 짓궂게 웃었다. 그의 미소는 부드럽고 눈빛은 상냥하다.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그의 남성적인 매력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그가 자신의 잔에다 마티니를 다시 채워 주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와 함께 아파트로 돌아가서, 그의 품에 힘차게 안겨 그의 키스를 받고 싶다. 오래고 힘찬 키스, 자신을 희열로 만족시킬 만한 키스를 그로부터 받고 싶다.

키엘은 자신의 그런 감정을 알고 있을까? 웨이터가 그들의 접시를 치워 갔다. 키엘은 커피를 주문했다.

그녀는 커피를 블랙으로 진하게 마셨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다. 그녀는 키엘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는 그런 장소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레스토랑은 매우 유쾌하고 친근미가 있는 장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영혼까지 주고받을 만한 그런 곳은 아니다.

그들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기가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당장에라도 키엘의 품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키엘은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그는 테리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테리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눈동자는 기대에 차 있었다. 키엘의 품안에 안기려는 순간,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가 벨 소리를 무시해 버리려고 하자, 키엘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 봐요."

그녀는 제발 마이클이 아니길 바랐다.

"헤이, 테리! 뭘하고 있어?"

베리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기분이 싹 잡쳤다. 하필이면 지금 같은 시각에 전화할 게 뭐람!

"별일 없어요. 자리는 잡혀 가요?"

"그럭저럭. 키엘은 요즘 어때? 좀 나아졌어?"

"그럼요, 지금 여기 있어요."

그녀는 키엘의 찡그린 표정을 곁눈으로 보면서 말했다.

"그래? 둘이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베리의 말투가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

"키엘을 좀 바꿔 줘. 사실은 그에게 용무가 있어서 전화한 거야. 바네스 부인이 그쪽으로 전화해 보라고 했거든. 테리, 나는"

그러나 테리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당신 전화예요."

그녀가 내미는 전화통을 받으면서 키엘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베리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창가로 걸어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키엘의 차가 아래에 버티고 서 있다. 베리가 모든 것을 망쳐 버린 느낌이다. 그에 대해서 미운 감정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테리가 창가에 서서 혼자 비참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키엘은 전화를 끝내고 다가왔다. 그가 어깨 위에 손을 얹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가봐야겠어. 미안하오, 테리.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일이 생겼군. 아마 늦어지게 될 거요. 내일 아침에 또 봅시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다 가볍게 키스하고는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테리는 멍한 기분으로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스스로 화를 내려고 해보았으나, 아무런 감정도 우러나지 않았다. 신통하게도 키엘이 베리의 전화에 대해서 트집을 잡지 않은 걸 보니, 다른 어떤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의 태도에 기대를 걸어도 좋은 것이 아닌가?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밝아졌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갑자기 친밀해진 것 같았다. 키엘은 거리낌없이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었고, 그녀 또한 주저없이 그의 집으로 따라가서 바네스 부인이 만들어 주는 훌륭한 요리를 함께 즐기곤 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여 결코 지나치게 접근하지는 않았다.

테리는 그의 감정을 정확하게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는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는 확신은 가질 수 없었다. 그는 결코 두 사람의 장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도 불만은 없다. 그의 곁에서 그의 찬사와 감탄의 눈빛을 받으며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했다.

그렇게 두 주일쯤이 흘러간 어느 토요일 오전, 그는 불쑥 그녀에게 물어왔다.

"부모님께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소?"

그 대답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 제의를 거절할 수 있으랴? 그녀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당신은 생각보다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애. 여기에 온 것을 후회하진 않소?"

차가 출발하자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가 지금과는 다른 상황으로 변한다면 그 대답도 달라질 것이다. 만약 키엘이 없다면 이곳의 모든 것이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여기에서 계속 살 거요, 아니면 언젠가는 런던으로 돌아갈 거요?"

그는 계곡의 바닥을 꼬불꼬불하게 이어가는 도로를 조심스럽게 운전해 가며 물었다.

"여기에 머물 만한 이유가 있는 한 계속 머물겠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되니까요."

"어떤 이유? 직장 말이오? 아니면 당신의 남편이 될 사람?"

"아무 거라도 좋아요. 이유가 되기만 한다면."

그녀는 음성을 밝게 하려고 애를 썼다.

"사람을 어떤 장소에다 붙잡아 두는 이유라는 게 다 그런 게 아니겠어요?"

그가 너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얼굴을 흘끗 돌아다보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앞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그 이유를 하나 제공할 수 있겠군. 최소한 내가 여기에 있는 한 당신의 직장은 보장하겠소."

"그럼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야겠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특별히 연구하고 있는 게 있으니까 말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양학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려면 큰 도시로 나가야만 하나요?"

"그래야만 할 것 같소. 그렇지만 나의 진정한 고향은 언제나 이곳이오. 나의 첫사랑이 이 호수니까."

그녀는 호수에 대해서 질투를 느꼈다. 그의 첫사랑은 자기여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가 있을까? 그녀는 우울해졌다.

"테레사는 내가 여기를 떠나는 게 싫은 모양이지?"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 그래요."

"왜지? 내 뒤에 이곳에 올 의사와 잘 해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점은 염려 안해도 돼요. 테레사의 솜씨는 일류니까."

그녀의 마음은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그와의 관계가 아무리 좋아진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한다는 말인가? 그의 말은 그런 뜻인가?

갑자기 키엘이 차를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테레사, 슬퍼하고 있군!"

그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자수정같이 푸른 눈이 가득 괸 눈물로 더 크게 보였다.

"왜 그래?"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듯 속삭였다.

"난 당신과 함께 일하는 게 좋아요.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을 거예요."

"내가 가버린다면 나를 보고 싶어 하게 될까?"

그가 그녀의 눈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척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에게서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으로서는 그의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짧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격정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의 입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애무를 반기며 함께 호응해 왔다. 테리도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두 팔로 그의 목을 힘껏 얼싸안았다. 뜨거운 욕망이 솟구쳐 올라와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다.

", 키엘!"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부림쳤다. 키엘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을 간질이자 그녀는 금세라도 가무러칠 듯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오오, 키엘, 키엘.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의 나에 대한 마음과 똑같은 마음에서지."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그의 머리를 더욱 힘차게 껴안았다. 이제까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막이 활짝 걷히고, 비로소 진실한 얼굴로 마주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녀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이다.

"테레사, 나는 그동안 얼마나 고민했는지 몰라. 당신이 베리의 여자라고만 믿고 있었소. 그동안 내가 당신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던 것을 용서해 주겠소?"

"용서할 일도, 용서를 빌 일도 없어요, 키엘.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녀는 키엘의 머기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파묻으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의 미세한 주름살까지도 세밀하게 보고 있었다. 그의 짙은 눈썹과 근심스러운 회색 눈, 쪽 곧은 콧날과 약간 열려 있는 육감적인 입술을 그녀는 감탄 어린 눈빛으로 보았다.

"당신은 마음씨도 아름다와."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름 아름답진 않아요."

그녀는 미소를 짓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키엘, 당신이 이러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했는지 알아요? 이전에는 누구에게서도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어요. 이젠 정말 나를 믿나요? 아니면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꿈이 아니야, 테레사."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말을 막아 버렸다. 그의 바위처럼 단단한 가슴이 꽉 껴안자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품안에서 푸른 하늘을 본 것만 같고, 마치 폭풍우 속에서 보금자리를 찾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당신이 이런 감정을 갖게 되리라곤 감히 꿈조차 못 꾸었어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다 대고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런 감정을 갖고 있었소. 특히 당신의 독립심이 강한 점에 대해서는 무척 큰 감명을 받았었지. 당신이 베리의 여자란 걸 알고 나서는 얼마나 크게 실망했는지 모르오."

"그의 친구였을 뿐예요."

"그땐 그렇게 생각되지 않더군."

"지금은 정확하게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그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며 큰소리로 말했다.

"만약 베리와 당신이 나 몰래 또 만난다면 정말 가만두지 않겠어! 둘 다 말이야!"

그의 독심을 품은 말투에 테리는 깜짝 놀라며 포옹을 풀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에 고뇌가 어려 있다.

"내가 믿지 못하는 건 베리요. 아주 엉큼한 녀석이거든."

테리는 눈을 감고 말았다. 키엘의 변덕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다. 모든 것이 잘돼간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순식간에 또 모든 것을 잡쳐 놓곤 한다.

이윽고 눈을 떴을 때는 그도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미안해, 테레사. 난 베리만 생각하면 참지를 못해. , 이제 그만 가는 게 좋겠어."

그가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 뒤에야 테리는 비로소 그동안 다른 차량들이 수없이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둘의 뜨거운 포옹을 다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별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키엘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엘의 부모님 집에 가까이 오자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그분들을 전과 같은 기분으로 뵐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키엘은 이미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이미 전 같지가 않았다. 그가 비록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은 안했지만, 그와의 관계는 놀랄 만큼 발전한 것이었다. 당분간은 그 정도로도 만족할 만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 키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알렌 부인이 미소로써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어머니, 손님 한 사람을 우리의 점심식사에 초대했어요, 괜찮죠? 미래의 제 아내예요."

키엘의 말에 테리와 알렌 부인은 똑같이 깜짝 놀랐다. 키엘은 놀라는 테리의 이마에다 정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알렌 부인이 기쁨에 넘치는 환한 얼굴로 키엘과 테리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정말 멋지구나, 키엘! 네가 테리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테리도 모르고 있었어요, 어머니."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테리를 바라보았다.

"어서 들어가자. 제임스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줘야지."

"그리고 샴페인도 준비해 주세요, 어머니. 우리의 약혼을 축하해 주셔야죠."

제임스도 그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했다. 온통 축하하는 기분으로 하루가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나는 저애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낼 줄 알았어요. 아주 포기했었다니까."

알렌 부인은 테리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는 내게 맞는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테리 양을 처음 만난 순간, 나는 마침내 찾았다는 생각을 했지요."

키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테리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알렌 부부는 서로 눈길을 교환하면서 아주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돌아오는 길에 테리는 키엘에게 물어보았다.

"결혼에 관한 얘기를 왜 나에겐 안해 줬죠? 난 너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난 당신이 어떻게 나올지 확신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부모님 앞에서 선언해 버린 거예요? 내가 꼼짝도 못할 걸로 생각하고요?"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건 아니오. 당신은 자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나와 결혼할 생간이 없다면, 나의 부모님 앞에서라도 분명하게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이 정도로 자신의 마음속까지 다 들여다보고 있다면, 더 이상 무는 말을 할 수 있으랴!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제의했다.

"나의 집으로 가는 게 어때? 이젠 우리가 함께 밤을 지낸다고 안 될 이유가 없잖소? 당신도 아파트에서 혼자 있기가 싫을 텐데. 테레사, 제발 좋다고 대답해, ?"

테리도 물론 그걸 원하고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속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키엘. 그럴 순 없어요."

"왜지? 나의 결혼제의를 아직 믿지 못하는 거요? 내가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다. 그의 화난 얼굴이 어스름 속에서 불을 뿜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느껴졌다.

"물론 아니예요, 키엘. 내 진심은 당신의 마음과 똑같아요. 나도 얼마나 원하고 있는 줄 알아요? 하지만 결혼을 하기 전에는 안 돼요. 나는 좀 고루한 편인지는 몰라도,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정말 당신은 그래. 요즘 같은 세상에 당신 같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

그는 신경질적으로 내뱉고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한참 후에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당신의 신념을 존중하겠소. 내가 너무나 자신만 생각한 탓이오. 그만큼 당신을 강렬하게 원하기 때문이오. 미칠 것처럼."

"나도 그래요. 하지만 그날이 되면 몇 배의 행복이 되어 돌아올 거예요."

그녀는 그를 달래듯 속삭였다. 그가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화났어요, 키엘?"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다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운전에다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난 거야. 테리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난 다만 당신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만 급했던 거지."

"키엘, 난 이제 당신 거예요. 서두르지 않아도 말예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서 모든 행동을 바르게 하려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당신은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여자야, 테레사. 난 정말 행운아야."

그는 그녀의 손을 아쉬운 듯 놓고는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차가 키엘의 집에 가까와지자 테리는 심한 갈등을 느꼈다. 사랑하는 남자의 갈증을 외면하는 자신이 과연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자신도 그를 열망하고 있지 않은가. 결혼할 남자와 육체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그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자기를 그의 방으로 데려가 달라고 소리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다.

차가 그의 집 앞을 지나치자, 그녀의 위기도 무사히 넘어갔다. 그녀는 역시 자신이 옳았다고 판단했다. 한순간의 유혹을 참고 견딤으로써 더 큰 행복이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키엘은 병원 앞에서 차를 멈추곤 그녀에게,

"잘 자요."

하고 말했다. 운전석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는 그녀가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테리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지금 두 사람의 기분으로는 그가 아파트까지 따라 들어왔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자기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 데 대해서 진심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테리는 행복에 겨워서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의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키엘과 결혼한다는 건 하나의 기적이다. 그날은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의 날이리라.

그러나 키엘이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왠지 불안하다. 사랑 없이 결혼이 가능할까? 육체적인 쾌락을 위해서 결혼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반드시 내게 사랑을 고백하게 될 거야.

 

10

눈을 떠보니 화창한 푸른 하늘이 창밖에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키엘과 함께 호수의 깊숙한 지점까지 들어가 보기로 약속했었다. 테리는 기대에 부푼 가슴을 억제하며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속살이 약간 비칠 정도의 핑크색 여름 드레스였다.

현관의 벨이 울리자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키엘이 아니라 뜻밖에도 마이클이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테리? 내가 반갑지도 않아?"

턱수염을 짧게 기른 그의 얼굴이 싱긋 웃고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다.

"웬일이에요, 여기까지?"

그녀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는 그에게 물었다.

"테리가 보고 싶어서 새벽길을 달려왔지. 그런데 들어오라는 말도 안해?"

그의 섭섭해하는 표정을 보자, 그녀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어서 들어와요. 그런데 왜 미리 전화를 안했어요?"

"테리를 놀라게 해주려고."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충분히 성공한 셈이다.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하필 이런 시간에 나타날 게 뭐람? 이제 곧 키엘이 들이닥칠 참이다. 테리는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먼 길을 찾아온 마이클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신을 설득해서 런던으로 다시 데리고 가려고 왔어, 테리.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알아?"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난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미안해요, 마이클.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난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오랜 세월이 흘렀어, 테리. 이젠 마음을 좀 돌려 줘. 베네수엘라에서도 줄곧 테리 생각만 했었어. 미치게 그리웠다구."

마이클은 고뇌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오랜 기간을 그는 테리의 마음이 변하기만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테리는 곤혹스러웠다.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자신과 키엘과의 사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이클, 당신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잖아요? 나는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그러나 노력하면 될 거야. 아니, 틀림없이 돼."

그는 테리의 어깨 위에다 양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눈엔 슬픔이 가득 담겨 있다.

"네게 잘해 주고 싶어, 테리. 이젠 나와 결혼해 줘, 너를 사랑해!"

"그 여자의 어깨에서 손을 떼시지!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소리난 쪽을 돌아다보았다. 키엘이 하얗게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 키엘!"

테리는 질린 표정으로 하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키엘은 그녀를 한쪽으로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저자가 누구냐고 묻고 있어! 누군데 당신한테 사랑한다, 결혼해 달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거야?"

마이클이 그녀를 대신해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는 테리의 오랜 친구요, 애인이기도 하지. 당신이야말로 누구요?"

"뭐라고, 애인?"

키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테리를 돌아다보았다.

"아니예요, 키엘! 오해하지 말아요."

그녀는 미친 듯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또 오해란 말이지? 어서 이 건달과 함께 런던으로 썩 꺼져 버려! 다시는 보기도 싫으니까."

"키엘, 내 말 좀 들어봐요!"

테리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왔다.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요. 잘못 안 거예요. 당신을 사랑해요, 키엘. 당신 외에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그 커다란 자줏빛 눈동자와 순진한 표정으로 나를 더 이상 속이려 들지 마! 그래, 나를 사랑한다구?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 버리란 말야!"

키엘은 아파트의 문을 밀치고 나가 버렸다

"키엘, 기다려 줘요! 제발, 키엘!"

테리는 미친 듯이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이런 식으로 그를 보낼 수는 없다. 그가 이럴 수는 없어. 그를 붙잡아야 해!

키엘의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테리는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다음 순간,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잃으며 허공을 딛고는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머리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그녀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테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군가가 옆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은 따뜻하면서도 강한 손이다. 그러나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머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 통증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넘나들면서도 그녀는 키엘의 이름을 입술에다 올리곤 했다.

"키엘미워키엘"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키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신히 눈을 뜨고 바라보니, 그는 키엘이 아니라 마이클이었다.

"테리!"

마이클이 그녀의 눈을 보며 불렀다.

"정신이 좀 들어?"

그녀는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를 약간 움직여 보려 했으나 날카로운 통증이 왔다. 손으로 머리에 감겨진 붕대를 만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순간 테리는 생각나는 게 있었다. 키엘의 증오와 결별선언, 그리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자신의 모습

"키엘, 그이는 어디 있어요?"

그녀는 간신히 입을 떼어 말했다.

마이클이 이마를 찡그렸다.

"그를 만나고 싶어?"

"아녜요!"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테리는 다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이 머리의 통증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할 곳은 오로지 깊은 수면뿐이다. 누가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고쳐 줄 수 있으랴?

"난 집으로 가고 싶어요."

그녀는 가느다랗게 호소했다.

"이제 좀 회복되면요."

간호사가 옆에서 말했다.

"얼마나 걸리죠?"

"글쎄요, 이따가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세요."

"의사? 키엘?"

그녀는 간호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이클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닥터 불먼이야."

테리는 다시 눈을 감고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차라리 그편이 좋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떠리의 통증만 심하게 할 뿐이다.

테리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생각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키엘과의 관계는 이제 끝났다. 호반에서의 추억도, 그와의 아름다운 낭만도 이제는 끝장이 난 것이다. 그가 오해를 해서 자신에게 결별을 선언하긴 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자신에 대한 그의 끝없는 불신이다.

"테리, 깨어났어?"

마이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나는 테리가 필요하면 항상 곁에 있어."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너무 친절해요."

그녀는 일어나서 앉으려고 했다. 두통이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나 때문에 일도 못하게 해서 죄송해요."

그는 머리를 저었다.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내게 중요한 건 테리지. 그래, 기분은 좀 어때? 얼굴빛은 많이 좋아졌는데. 정말 걱정 많이 했어."

"내가 여기에서 얼마나 누워 있었어요?"

"꼬박 사흘째야. 인사불성이었어.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나?"

테리는 눈을 감았다. 머리의 통증이 가신 대신, 이번에는 가슴에서 통증이 왔다. 그것은 정신적인 통증이었다. 일생 동안 결코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에서 우러나오는 통증이다. 그녀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 내가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마이클이 풀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테리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런 말 할 필요는 없어요, 마이클. 키엘은 나를 도무지 믿지 않았어요. 그는 또 베리와 내가 서로 애인이라고 제멋대로 단정하고 있었어요. 그는 여자가 순수한 남자친구를 가질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결국 그는 내가 여러 남자와 교제 하는 그런 여자로 단정짓고 말았어요. 내가 감춰 둔 남자가 많을 거라고 믿고 있을 거예요."

마이클은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나는 입을 다물고 있지 못했을까? 나는 그가 바로 닥터 브레이든이라고는 생각 못했어. 그리고 테리와의 관계도 그렇게 깊은 줄 몰랐었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요. 그는 너무 의심이 많아서 같이 살기가 어려운 사람이에요. 변덕은 또 놀랄 만큼 심해요."

그 후 며칠간 마이클은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그녀와 함께 보냈다. 베리도 찾아왔다. 그리고 오빠인 리차드도 아내 라첼을 데리고 와서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돌아갔다. 그러나 키엘의 그림자는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치료비를 키엘이 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호사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고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호의일 거야. 내가 이렇게 된 것도 그의 탓이라 할 수 있어. 그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뭐.

그러나 날이 갈수록 키엘이 곁에 없는 테리의 모습은 풀이 죽어갔다. 비록 마이클 앞에서는 감정을 감추고 명랑한 표정으로 얘기를 했지만, 얘기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곧잘 우울한 표정으로 깊은 상념 속에 빠져들곤 했다.

이윽고 런던으로 떠나기로 한 날, 그녀는 아파트에서 마이클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짐을 하나 하나 챙기면서 그녀는 우울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단 한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는 키엘이 원망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리웠다.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베리와 한번만 더 만나면 둘 다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던 그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마이클이 아파트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짐을 런던까지 옮겨 줄 것이다. 이 호수지방에서 마침내 떠나는 것이다. 이젠 이곳에는 자신을 위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녀가 키엘을 본 것은 아파트 문을 막 나서려고 할 때였다. 그의 얼굴 모습은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었다. 앙상하게 여윈 얼굴에 볼은 창백하게 푹 꺼져 있었다. 눈도 생기를 잃고 있었다.

그는 문 앞에서 자신없는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의 키엘답지가 않다고 테리는 생각했다. 그가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됐다.

"오늘 런던으로 떠난다고 들었소."

그는 간신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테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갑자기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테레사"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한번 보러 왔소. 당신이 나를 용서해 주리라곤 기대하지 않소. 다만 난 내 잘못을 당신에게 용서받고 싶었소."

"당신은 항상 나를 그런 눈으로만 보려 했어요. 나는 당신이 결혼제의를 해왔을 때,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꿈이란 걸 진작 알았어야 했어요."

"그것은 실현되었을 거요. 나의 그 미친 질투심만 아니었어도 말이오. 나는 다른 남자가 당신에게 손을 댔다는 생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어."

그의 말에 그녀는 다시 화가 치밀어서 그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당신은 마치 내가 만나는 남자마다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군요!"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그때는 오해를 했었소. 당신이 마이클에 대해서는 내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가 당신 애인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설명해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럴 기회조차 안 줬잖아요."

"질투심 때문에 내가 미쳐 있었던 거요. 미안하오."

키엘은 천천히 그녀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이클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어요.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어요. 그에겐 정말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었죠."

"이젠 그런 건 문제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순수하고 마음씨 고운 여자란 걸 새삼 깨달았소."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아무런 증오도 적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온 지구를 자신의 어깨에 떠메고 있는 것처럼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동안 내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알고 있소? 정말 길고도 고통스러운 여행이었소. 나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호수지역을 헤매고 다녔어. 어떤 날은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도 먹지 않고 걷고 또 걸었지. 당신의 그림자를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서 말이야."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어. 이미 이 호수지역 구석구석까지 당신의 추억과 함께 당신의 체취가 흠뻑 배어 있었으니까. 이제 이곳을 나만의 고향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어.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오? 내 손으로 당신과의 사랑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니"

그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테리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었다.

"내 사랑은 아직 조각나지 않았어요, 키엘. 난 당신에 대한 사랑을 그친 적이 없어요."

그녀는 그에게 속삭였다.

그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테리!"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은 내가 다친 줄도 모르고 있었잖아요!"

"내 탓이오! 내가 테리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 미친 듯한 질투심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당신을 다치게 만들었어. 당신은 내가 미울 거요. 내가 악마처럼 보이지 않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이 당신처럼 보여요."

"분명히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했소?"

""

부끄러운 듯이 희미하게 그녀는 대답했다.

"날 미워하지 않소?"

"아뇨, 결코!"

"그럼 나와 결혼해 주겠소?"

"당신이 아직 좋다면"

그녀의 커다란 자수정빛 눈동자 가득 사랑을 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나는 자격이 없어. 당신은 나 같은 인간은 발로 걷어차 버려야만 해. 정신 차리라고 말이오."

"정말 그럴 거예요. 앞으로 한번만 더 나를 이렇게 만들면 말예요."

키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약속하겠소. 앞으로는 두번 다시 당신을 의심하는 일은 없을 거요.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오로지 사랑하겠소."

테리는 그의 목에다 팔을 감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오직 당신만을 영원히 원해요."

두 사람 모두 문 밖에서 마이클이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쓸쓸한 웃음을 짓고는 뒤로 돌아서서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테리는 이 호반의 전원에서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행복을 되찾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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