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꿈을 깨고
현란한 꿈을 깨고
Susan Alexander
1
데이지는 등을 끄고 문을 꼭 닫은 뒤 사무실에서 나왔다. 가느다란 금줄 손목시계가 여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며칠 동안 계속 밤늦게까지 잔업을 한 후에 겨우 찾아온 자유로운 밤...... 미리 생각했던 대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텔레비젼 앞에서 식사를 해야지.
그녀는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를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층 빌딩의 대리석 계단에 발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갑자기 피로와 우울이 데이지를 엄습했다. 언제나 그렇다고 데이지는 생각했다. 한 가지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인간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또 필요하다면 주말도 무시한 채 전력 질주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계를 느낀다. 그러면 의기소침과 피곤으로 음식과 수면도 귀찮을 정도의 허탈 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피곤한 몸에 채찍질을 하고 있는 힘을 다 짜낸다.
이것이 데이지의 생활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그녀는 좋아한다. 포스터 패터슨 광고 회사에 근무한지 2년이 되는데, 최근 일년 가까이는 제이크 험프리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다. 제이크는 지금은 회사의 광고 담당 중역이지만, 전무이사인 마크 포스터가 은퇴하면 그 자리를 잇게 될 사람이다. 중요한 일은 거의 모두가 제이크 험프리와 그가 인솔하는 팀에 의해 처리되고 있다
그날 오후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을 위해 준비가 완료된 중역실을 체크했을 때, 데이지는 몇 주일이나 열심히 준비해 온 보람이 있다는 감개를 맛보았다. 잘닦여진 마호가니 테이블이 7층으로 비쳐든 햇살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고, 그 주위엔 가죽을 씌운 의자가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제이크가 준비한 광고 활동 계획의 카피가 자리마다 놓여 있고, 주위 벽의 게시판에는 일괄된 아이디어나 색채, 슬로우건, 레터링의 보기 등을 나타내는 표와 레이아웃 및 스케치 등이 게시되어 있었다. 또 TV 커머셜용 포스터 옆에는 잡지와 광고용 실물 크기 사진이 핀으로 고정되어 잇었다.
신제품의 광고 계획을 제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광고주는 이쪽에서 그 일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납득이 갈 때까지 끈질기게 버틸 심산이었다. 회의는 지체 없이 진행되었다. 제이크는 모든 것을 암기하고 있어서, 한 번도 메모에 시선을 보내지 않고 유창하게 설명해 나갔다. 그는 자기 연구 결과를 보고하고 제품의 이미지를 어떻게 부각시킬 것인지를 요약해서 설명한 뒤, 매체 부문과 제작 부문의 가가 과장에게 자기 부문의 활동 계획을 자세히 설명하게 하고는, 끝으로 여기에 소요되는 경비를 분석하고 브리핑을 마무리 지었다.
두 시간 후, 완벽한 브리핑에 크게 공감한 광고주는 제이크를 칭찬하고 관계자 일동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돌아갔다. 그러나 결정을 암시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아직 어떤 기대도 가질 수 없었다. 다른 몇몇 회사에서도 입찰에 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틴에이저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향수는 그리 큰 제품은 아니지만, 패터슨 회사로서는 오늘 있었던 브리핑을 통해 신제품의 선전을 담당할만한 신뢰를 광고주한테 주었는지의 여부를 꼭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포스터 부부는 상대방 사장을 오늘 만찬에 초대하기로 했다. 제이크도 미인인 애인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을 동반하여 그 자리에 참석할 것이라 생각하고 데이지는 잠시 미소 지었다. 그 검은 머리와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안드리아 템플일까? 최근의 상대는 언제나 그녀였다. 지금가지의 어느 누구보다도 관계가 오래 계속되고 있었다.
데이지는 때마침 수위실에 나타난 야근 수위에게 살며시 웃어 보이고는 시원한 바깥 공기를 쐬었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검은 색 소형 피아트의 문을 열면서 위를 흘끗 쳐다보니, 방금 나온 빌딩의 불빛이 피곤한 눈에 눈부시게 빛났다. 청소부들이 청소하기 위해 텅 빈 오피스에 다시 불을 켜고 있었던 것이다. 현관의 스윙 도어 바로 위에 <포스터 패터슨 광고 회사>의 네온사인이 어스름 속에서 빛나는 것을 보며 데이지는 주차장에서 나와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하고 그녀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일도 그렇고 아파트도 그렇다. 멋진 양복과 지난번 생일에 마음먹고 산 이 금시계도 모두 마음에 든다.
그녀는 19살 때 사랑하고 정들었던 모든 것을 스스로 버리고 낯선 도시인 런던으로 왔던 것이다. 그때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건 유스호스텔의 예약표와, 타이프라이터와 속기 실력을 보증하는 자격증뿐이었다. 그러나 비관하지 않겠다는 결심만은 확고했다. 아침 일찍 신문을 사서 직업 소개 난을 찾아 ㅇ표를 했고, 점심때는 이미 임시직을 구했다. 이처럼 임시직을 찾아 돌아다닌 끝에, 6주일 후에는 마침내 포스터 패터슨 회사의 말단 타이피스트로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주거도 지금까지 살던 빅토리아 거리의 스산한 지하실 셋방에서 떠나 험스테드에 있는 브라운 부인의 집 제일 위층-밝고 햇빛이 잘 드는 아파트로 이사해 있었다. 슈퍼마켓과 시장에서 깔개나 그림, 꽃병 같은 것을 사들이고 서서히 가재도구를 늘려 나갔다. 그리하여 자기 방같이 되었을 때는 그곳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고, 주말에는 쇼핑이나 산책을 즐기게까지 되었다. 직장에서도 얌전하고 겸손하여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비서 자리가 비었을 때도 그 직책을 탐내거나 하지 않았다.
말랐던 몸에 살이 붙어 보기 좋게 되자, 오피스의 젊은 상사로부터 유혹의 손길이 뻗쳐오기도 했다. 이런 경우 그녀는 때로는 받아들이고 때로는 정중히 거절하면서 적당히 어울리고, 자기편에서 앞장서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앗다. 자기가 응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상대가 요구하면 그때부터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이 같은 그녀의 태도에 화를 내는 사나이도 두서너 명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에게 하마터면 차 안에서 욕을 당할 뻔한 일이 있은 뒤부터, 그녀는 누구와도 두 번 다시 외출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에게 갑자기 인생의 방향을 바꿀 만한 일이 생긴 것은 그 후 얼마 안 되어서였다. 어느 날 아침 평소와 같이 출근했더니 상사가 그대로 5층에 올라가서, 쉬고 있는 비서 대신 조안나 워드 밑에서 일을 하라고 했던 것이다.
5층.....그곳은 회사의 유능한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특별한 플로어라는 것을 데이지는 잘 알고 있었다. 501호실 앞에 이르자 큰 글자로 <제이크 험프리>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노크했더니 안에서, "네" 하고 호감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들어서자 데스크 두 개가 눈에 띄었다. 갈색과 베이지색이 조화를 이루어 부드럽고 침착한 분위기가 감도는 실내에는 카핏이 깔려 있었고, 화려한 옷걸이와 벽의 색깔과 조화를 이루는 파일 캐비닛이 놓여 있었다. 또 방 한구석에는 칸막이로 구획 지어진 자그마한 주방도 있었다.
조안나 워드로 여겨지는 여성은 나이가 30세쯤 되어 보이고 키가 훤칠하게 컸는데, 흰 블라우스에 회색 플란넬 슈트로 우아하게 단장하고 있었다. 곱슬곱슬한 금발은 짧게 커트하고, 화장은 아주 엷게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데이지를 그 푸른 눈동자가 바라보았다.
"데이지 리처드 씨죠?" 그녀는 손을 내밀며 데이지에게 다가왔다. "자아. 이리 와요.... 사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럴 수가 없군요. 갑자기 큰일을 맡기는 것 같지만, 힘을 내 줘요. 일의 요령은 곧 터득하게 될 거예요. 멀지 않아 천천히 이야기할 시간도 있겠죠."
이때 데스크의 벨이 울렸다. 조안나는 곧 인터폰의수화기를 들었다. 초조한 듯한 남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안나, 가련한 아가씨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나?"
데이지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얼굴을 붉히자, 조안나는 그녀에게 눈을 깜빡거려 보였다.
"네 제이크, 지금 막."
"왔나? 그러면 대강 이야기를 끝내고 이리 와요, 알겠지?" 인터폰이 뚝 하고 끊겼다.
조안나가 데스크에 있는 파일을 집어 들었다.
"이것이 제일 급한 일이에요. 이 문서를 오늘 중으로 타이핑해 줘요. 견본은 여기 있어요. 어떤 식으로 정리할 것인지는 이 견본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아가씨 데스크에 용구와 그 밖의 것이 다 준비되어 있어요. 제일 아래 서랍은 백이나 다른 소지품을 넣으라고 비워 두었어요. 그리고 커피는 마음대로 마셔도 좋아요. 내가 없는 동안 전화가 오면 책상 위에 메모해 두세요. 점심은 아가씨가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 하세요. 또 다른 질문은?"
"아니, 없습니다.."
"그럼 부탁해요. 여기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조안나는 생긋 웃고는 파일과 노트를 들고 데스크 뒤쪽에 있는 구석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데이지는 완성된 원고의 마지막 체크를 끝내고 눈을 들었다. 벽시계는 이미 일곱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커피만 마시며 계속 일을 했기 때문에 무척 피곤했다. 그녀는 휴우 숨을 내쉬고 조안나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원고를 쌓아 놓았다. 네 시 이후에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 그녀는 전할 말을 메모해 놓고 코트를 집어든 다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고 불을 끈 뒤 문을 열었다.
이때 갑자기 구석방의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어떤 사나이가 서 있었다. 데스크 위의 스탠드 불빛을 등뒤로 받고 있어 얼굴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누구지, 아가씨는?" 성난 음성으로 사나이가 물었다.
"데이지 리처드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 조안나씨를 도우러 왔습니다..... 꾸중을 들어야 할 까닭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데이지는 쌀쌀하게 말하고 방에서 나가려 했다.
"잠깐!" 그는 이렇게 명하고 방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이것이 제이크 험프리와의 첫 만남이었다.
덩치가 큰 사나이였다. 단순히 키가 큰 것만이 아니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다리도 길었다. 와이셔츠에 바지 차림이었으나, 유력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햇볕에 탄 얼굴, 튀어나온 턱, 가볍게 냉소를 띤 크고 모양 좋은 입, 우뚝한 콧날, 짙고 굵은 눈썹, 잿빛 눈-내 눈빛과 비슷하군, 하고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넓은 이마 위로 빗어 올린 검은 머리가 묵 언저리에서 약간 꼬부라져 있고, 약간의 은발이 섞여 있었다. 자신만만한 사람이란 바로 이 사나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은 느낌이었다. 데이지는 그 사나이의 강한 체취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 시선이 목에 감겨 있는 적갈색 머리에서 호리호리한 몸을 거쳐 늘씬하게 뻗은 디리로 옮겨지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다시 얼굴로 돌아와 커다란 잿빛 눈동자와 끝이 뾰족한 코와 매끄러운 입술에 와서 멎었다. 데이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가에 그의 시선이 고정된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턱을 끌어당겼다.
"아, 미안하게 됐군. 아무 소리도 나지 않기에 이곳이 비어 있는 줄만 알았지. 그런데 어째서 타이프라이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타이프라이터는 오래 전에 끝났어요. 그 뒤 두 시간쯤 원고를 체크하고 있었어요."
"타이피스트실에서 온 아가씨로군?" 사나이가 당돌하게 물었다.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럼 월요일에 다시 봐요. 실례!" 그는 홱 등을 돌리고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다음 주부터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안나의 비서는 계속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달이 지나자 데이지는 험프리 팀의 정규 멤버로 끼게 되었다. 내성적이고 호리호리한 체구의 광고 매니저 마이크 데이비스. 데이지는 곱슬곱슬한 금발에다 조용한 목소리의 소유자인 그를 한눈에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팀의 젊은 간부 후보생이며 눈초리가 예리한 야심가인 찰리 클라크. 또 조안나와 그녀의 남편인 넬리. 그는 광고업계에서 매스컴 관계의 컨설턴트(consultant)로 활약하고 있었다. 2, 3개월 지나자 데이지는 이러한 사람들과 완전히 친숙하게 지내게 되었다.
일에 있어서는 제이크 험프리가 진두지휘를 하고 잇었다. 그는 팀 전원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라고 엄하게 명령했으며, 질이 높은 일을 요구했다. 따라서 여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자연 팀에서 탈락하여 다른 팀에서 다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팀의 멤버는 회사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선망과 원망을 함께 받고 있었다.
데이지는 팀에 들어간 지 6주일 후에 <입회식>이란 것을 경험했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조안나를 대신하여 제이크와 함께 프레젠테이션에 동행할 것을 명령받았다. 이때 그의 오피스에서 저 유명한 <제이크 심사>라는 것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자아, 돌아 봐요. 안 돼, 그게 아니야. 좀 더 천천히 돌아야 해."
"제이크, 좀 부드럽게 다루세요. 데이지에게는 전혀 생소한 첫 경험이니까요." 조안나가 주의를 주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군." 제이크는 신경질이 난다는 듯이 데스크에서 일어나 데이지 곁으로 다가왔다. "우선 이 머리...." 그는 손을 뻗어 데이지의 머리를 가볍게 만졌다.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피했다.
"음. 그러면 안돼. 그렇게 물러서지만 말고 좀 더 우아한 느낌이 들도록."
"앙트완느 미용 연구실로 데려가는 것이 어떨까요? 그 사람이라면 훌륭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조안나가 제안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문제는 그런 세부적인 것에 있지 않아. 요는 좀 더 자신을 갖는 일이지.... 걷는 태도, 몸가짐...." 그러다가 깜짝 놀란 듯이, "아가씨는 무척 아름답군. 그런데 자신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군." 하고는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그런 옷은 벗어버려."
데이지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일 때문에...."
"응....?" 의아스러운 듯이 데이지의 얼굴을 바라본 제이크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잿빛의 눈과 눈이 마주쳐,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의 불꽃이 튀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제이크는 곧 머리를 곧바로 세우고 평소의 자세로 돌아갔다.
조안나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요. 두서너 시간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데이지는 거울 앞에서 변모해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잇었다. 앙트완느는 그녀의 머리를 약간 커트하고, 머리 모양에 대해 여러 가지로 충고하면서 보기 좋게 마무리해 주었다. 그동안 매니큐어 담당자가 손톱 모양을 다듬고 엷고 투명한 핑크빛 네일 에나멜을 칠하여 매력적인 여자의 손으로 완성시켰다.
다음으로 조안나가 데려간 곳은 고급 살롱이었다. 여러 가지 옷을 입어 본 후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웨이스트라인을 강조한 엷은 갈색 샤넬 슈트와 짙은 갈색 실크 블라우스, 그리고 여기에 어울리는 키드 가죽의 펌프스였다.
마지막으로 갔던 본드 거리의 뷰티 살롱에서는, 얼굴 마사지를 받으면서 숙련된 미용사로부터 자기 얼굴에 맞는 화장법을 배웠다.
모든 것이 끝난 뒤 조안나에게 인도되어 등신대 체경 앞에 선 데이지는, 거기 비친 전혀 다른 사람 같은 자신의 모습에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그 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날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본 순간, 바싹 마르고 불품 없는 여자 대신 침착성과 자신감을 가진 한 여성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제이크의 사무실로 호출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오전의 일이었다. 그녀와 단둘이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보스한테 단독으로 불려갈 이유는 오직 한 가지-<배치이동>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잘못을 저질렀음에 틀림없다고 속단하여 식은땀이 배어난 손의 감촉과 목이 죄어드는 것 같던 가슴 답답함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제이크는 뜻밖에도 조용하게 사무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조안나가 임신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후임자가 되라고.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가했다. 다음에는 몸이 굳어졌다. 그런 뒤에야 겨우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동료들의 응원도 컸다. 벌써 이로부터 약 일 년이 지났다. 데이지는 지금 하는 일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현관문을 열자 홀의 테이블에 놓인 한 통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2년 동안이나 보지 못했던 필적. 그러나 봉투를 보는 순간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늘이란 하루가 편지로 마무리되다니........
데이지는 방에 올라가자 그 봉투를 뜯지도 않고 옆에 놓았다. 뜯으면 싫어도 읽게 된다. 그 순간이 무서웠던 것이다. 우선 목욕부터 하고 무엇을 먹고 나서 읽어야지.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내용이 씌어 있건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이다.
한 시간 후 그녀는 편지를 무릎에 놓고 앉았다. <장녀 모니카 앤이.....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뢸 말씀은.....왕림의 영광을 받고자 안내드리는 바입니다.> 정중한 서두의 문장이 데이지의 눈에 띄었다. 다음 토요일--일주일 후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서서 초청장을 맨틀피스 위에 세워 놓았다. 그때 카드 뒷면에 씌어 있는 어머니의 필적이 눈에 들어왔다. <데이지, 꼭 오기를 바란다. 모두 기다리고 있다.> 모두라는 글자 옆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데이지는 벽난로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2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제이크 험프리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자 데이지는 곧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시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머뭇거리는 음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음. 좋아." 제이크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눈 밑에 생긴 그림자를 깨달았다.
"저어, 이번 금요일 하루를 쉬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요.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데이지는 시선을 손에 떨구었다. 어느새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하고 황망히 대답하고는 그녀는 방에서 나가려 했다.
"데이지!" 제이크가 날카롭게 불러 세웠다. "아직 휴가가 좀 남아 있지 않아? 좀 더 쉬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아, 금주는 별로 바쁠 것 같지도 않으니까. 사실은 나도 주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휴가를 얻을 생각이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금요일 하루만 쉬면 될 것 같아요." 데이지는 애써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면서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날 듯한 것을 참으면서,
"알았어."
제이크가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으므로 데이지는 그와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면서 거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에서 나왔다. 자기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문득 괴로운 주말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차라리 이번 주 내내 휴가를 받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하루 종일 그 일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리자의 명랑한 목소리에 데이지는 현실로 돌아왔다. 젊고 발랄한 여비서가 들어왔던 건이다. 다갈색 고수머리가 얼굴을 감사고 있었다. 생기 넘치는 명랑한 이야기로 언제나 지루함을 덜어 주는 아가씨였다.
"안녕, 리자. 커피가 끓고 있는 것 같은 데 한 잔 주겠어요?"
"좋아요." 리자가 코트를 벗었다.
그 주일은 데이지가 생각할 수 있는 한 최악의 나날이 되었다. 전할 말을 잊기도 하고, 회의가 있는 것을 알리지 않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안드리아 템플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잘못하여 중도에서 끊기까지 했다. 이때만은 제이크도 화를 내며 데이지의 방에 대고 소리를 쳤다.
이런 실수를 계속 저지르면 곧 쫓겨나게 될지도 몰라, 하고 그녀는 멍청히 생각했다. 그 초청장이 원인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들을 만나도 무서울 것이 없다. 그리고 조만간에 한 번은 돌아가는 것이 어버이에 대한 자식의 의무이기도 하다. 주말의 일은 잊어버리고 열심히 일이나 해야지. 이렇게 결심하자 겨우 마음이 편해져서 일이 손에 잡히게 되었다.
목요일 밤, 짐을 꾸리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전화가 울렸다. 그러고는 곧 이어 브라운 부인이 그녀를 불렀다. 수화기를 들자, "데이지?" 하는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그가 집에 전화를 거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데이지 맞지?" 조급한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긴장한 나머지 음성이 높아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저어....." 제이크의 웃음소리. 이번 주에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이번에는 내가 실수를 했어. 신규 계약 서류를 사무실에 놓고 왔어. 주말에 훑어보려 한 건데......미안하지만 그걸 나한테 가져다줄 수 없을 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데이지, 듣고 잇을 테지?" 제이크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네, 듣고 있어요."
"그것은 승낙한다는 뜻인가? 알다시피 나는 미국에서 오는 전화를 기다려야 해. 만일 어렵다면 내일 아침 떠나기 전에 잠시 사무실에 들를 수는 있지만,...."
"아니에요, 제가 가지고 가겠어요."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
"고마와. 그럼 30분 후에 그리로 택시를 보내겠어."
전화가 끊겼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데이지는 제이크 험프리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나이트브리지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맨션의 제일 위층이었다. ㄱ녀는 전에도 사무실 동료와 함께 이 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제이크가 문을 열고 나왔다. 몸에 꼭 달라붙는 검은 바지에 역시 검정 캐시미어 스웨터 차림이었다. 꾸밈없는 평상복 차림 탓인지 키가 더욱 커 보이고 머리도 더 검어 보였다. 눈길이 마주치자 데이지는 왜 그런지 가슴이 뛰었다.
"고마와." 제이크가 한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파일을 건네주고 몸을 돌려 떠나려 하자, 제이크가 얼른 그녀의 팔을 붙들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데이지는 요트 판화로 벽을 장식한 홀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무슨 일일까....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좀 쉬었다 가지 그래?'
"아뇨, 괜찮아요. 저어....나는 돌아가야 해요, 아직 짐을 덜 꾸렸기 때문에."
"나 역시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것을 체크하는 동안 안에 들어가 기다려 주지 않겠어?" 하며 제이크는 데이지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곳은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넓고 천장이 높은, 가라앉은 분위기의 방이었다. 벽 양면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한 면은 오디오 세트와 텔레비젼이 놓여있고, 나머지 한 면은 온통 창으로 되어 있는데 넓은 발코니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푹신한 갈색 융단이 마루에 깔려 있고, 가죽을 씌운 대형 소파 두 개가 난로를 마주 보고 놓여 있었다. 난로에는 장작이 훨훨 타고 잇어서 추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방안은 포근했다.
"무얼 마셔야지? 같이 마시지 않겠어?"
큰 체구에 비해 어쩌면 저리도 걸음걸이가 가벼울까, 하고 데이지는 다가오는 제이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특별히 맞추어 입은 정장 차림의 모습만을 보아 온 그녀로서는 의외의 느낌이 들었다.
"좋겠지, 응?"
비위를 맞추려 하는 그 태도에 데이지는 깜짝 놀랐다. 제이크가 자기 마음을 끌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제이크가! 아니야, 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드라이 셰리를 조금." 데이지는 조용히 웃으며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눈동자에서 발하는 강한 빛으로 얼굴이 빛나고 있다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제이크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잠시 그 얼굴에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그것이 사라지자 제이크는 음료를 넣어 둔 캐비닛 쪽으로 걸어갔다.
"멋진 주말을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군." 제이크는 친숙한 투로 말을 걸었다. "나는 집에 가게 되었어, 최근 아버지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으셔서."
"어마, 걱정되시겠군요. 건강하셔야 할 텐데요."
데이지가 제이크한테서 글래스를 받아 들자,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아버지는 나만 없으면 과음하시거든, 그래서 가능하면 자주 가서 만류하곤 하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즐거우신가 봐." 하면서 소년처럼 웃었다. "그런데 데이지는?" 일단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듣지 않고는 못 배기는 듯한 어투였다. 적당히 말을 끝내야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네, 저도 집을 비우게 될 거예요." 섣불리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집에 돌아가나?"
"네." 짧게 대답하고 그녀는 일어섰다.
"한 잔 더 하겠나?"
"아니에요, 잘 마셨어요. 이제 가 봐야 하겠어요. 택시는 ....쉽게 잡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내가 잡아 주지." 제이크도 일어섰다.
그가 옆에 오자 쉐이빙 로션 냄새가 났다. 그녀 자신도 결코 키가 작지 않았으나, 키가 큰 제이크가 가까이 오자 압도되는 듯하여 뒷걸음질 치고 싶었다.
"데이지, 무슨 일이 있었나? 우리는 모두 데이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로 알고 있어. 모두 걱정들 하고 있어. 말해 준다면 힘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데이지는 깜짝 놀라 등을 돌리고 쏟아질 듯한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번 주에는 실수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마음의 정리가 되었으니까요. 다음 주부터는 전처럼 일할 수 있을 거예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랬어요." 데이지는 요령부득의 말을 내뱉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가?" 바로 뒤에서 제이크의 음성이 들렸다.
저도 모르게 제이크에게서 떨어지려 하던 그녀는 테이블에 발을 부딪고 말았다.
"앗!" 하며 앞으로 쓰러지려 하자 제이크가 등 뒤에서 잡아 일으켜서는 그녀를 돌려 세워 팔로 끌어안았다.
데이지는 놀란 나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제이크는 한 손을 그녀의 머리에 대고 가만히 가슴에 안앗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고 잇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의 태도에는 조금도 비겁하거나 비밀스런 데가 없었다.
"무슨 고민이 있지?" 제이크가 조용히 속삭였다.
데이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 벌어진 가슴에 안겨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제이크는 조용히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 먹을 것과 커피를 가져올 테니까." 데이지는 놀라서 얼굴을 들고 거절하려 했으나, 그 전에 제이크가 먼저 말했다. "나도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어. 가정부인 웨버가 돌아가기 전에 뭔가 따뜻한 것을 만들어 놓았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데이지는 의자 등에 기댄 채 따뜻한 난롯불의 온기에 젖어서 그만 꾸벅꾸벅 졸았다. 눈을 떠 보니 제이크가 이미 왜건을 끌어다 놓고 있었다. 따뜻한 음식에서 먹음직스런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데이지는 얼른 일어섰다.
방 안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도자기로 된 두개의 큰 테이블 램프의 부드러운 빛이 카펫과 책과 벽을 비추고 있었다. 제이크는 등을 보이며 저물어 가는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어쩌죠, 깜빡 졸아 버렸으니! 미안합니다. 깨워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별로 서두를 일도 없는데 뭐." 제이크는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돌렸다.
무서운 얼굴--데이지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불쾌한 듯 보였다. 노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방이 더워서 그랬을 테지. 나도 가끔 그런 식으로 잠드는 일이 많아." 그는 가까이 와서 데이지 건너편에 앉았다. "음식은 모두 데워 놓았어. 식당보다 여기가 편하지 낳을까 해서...." 제이크는 음식 위로 몸을 굽히며 "자아, 무엇을 먹어야지." 하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친밀감 있는 침묵 속에 식사를 ㄲㅌ냈다. 제이크가 억지로 말을 시키지 않는 것이 데이지는 고마왔다. 식후의 커피를 마시면서 제이크는 일과 요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데이지는 춤추는 난롯불을 바라보며, 요트 타는 것이 취미인데 아버지 집에 요트를 두고 왔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흘끗 시계를 바라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이젠 가 봐야겠어요."
"그렇군. 나도 짐을 꾸려야지. 하지만 데이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가능하다면 힘이 되어 주겠어. 이야기만 해도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질 텐데."
순간 데이지는 망설였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관심에서도 아니다. 일에 미치는 영향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걸 이야기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지."
고개를 들자, 제이크의 눈이 데이지를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니만,,,,,, 너무 늦었어요."
"음, 늦기는 늦었어. 그러나 상관없어, 데이지가 이야기할 생각만 있다면."
데이지는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저는 집에 돌아가요, 언니의 결혼식이 있기 때문에. 처음이에요....2년 전에 집을 나온 이후...." 그녀는 흘긋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이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가만히 난롯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향은 시골의 작은 마을이에요. 이웃끼리 서로 잘 알고 지내는 그런 작은 마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에는 곧 소문이 나게 마련이에요. 내가 집을 나올 때 우리 집은 마침 남들의 입에 오르내릴 상황에 놓이게 되었어요. 내가 원인이 되어....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 윈데, 언제나 사이가 좋았어요. 언니는 머리가 좋아서 에든버러 대학에 진학했고, 나는 언니가 대학의 최고 학년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를 나와 속기와 타이프라이터를 배운 후 그곳 유제품 회사에 취직했어요. 그로부터 3개월쯤 지난 뒤 런던에서 온 신임 마케팅 매니저의 배치 하에 들어가.... 이렇게 해서 나는 필립과 알게 되었어요. 그는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집을 빌려 살고 있었어요. 우리는 ......... 저어, 자주 같이 외출하게 되었고, 그리고..."
"사랑에 빠졌군." 제이크가 말을 받았다.
"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필립은 멋진 사람이었어요. 내가 남자에 대해 꿈꾸고 있던 모든 것을 그는 거의 갖고 있었어요......핸섬하고 세련되고 인생 경험이 풍부하고.... 나는 무척 행복했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저의 부모님께서 반대했어요, 나이 차이가 너무 많다고요. 하지만 약혼을 하고 결혼식 날짜도 결정되자, 부모님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 주마고..... 어머니는, 어머니는 모든 것을.....꽃과 음식과 결혼식장과, 피로연 준비 등을 해주셨어요. 그랬는데 나와 필립 사이에 사고방식의 차이가 분명해져서,,,,,, 그때에는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세사 물정을 너무 모른 탓도 있었지만....."
"일 때문에 일주일간 스코틀랜드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어?" 어느 일요일, 필립이 느닷없이 말했다. "데이지는 주말을 이용해서 하루 이틀 와 있으면 돼. 꼭 그래줬으면 좋겠어."
데이지는 망설이다가 용단을 내려 같이 가기로 했다.
에든버러의 아늑한 가족호텔에 도착했을 때, 데이지는 필립이 숙박부에 부부로 사인했다는 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불안을 느낀 것은 안내된 방에 대형 더블베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방을 잘못 들어온 것 같군요" 그녀가 릴립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 이제 우리는 서로를 깊이 알 때가 아닌가 해서...." 필립은 다정하게 말하고 그녀를 팔에 안았다. "데이지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참아 왔지만, 내가 얼마나 데이지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을 테지? 결혼하기로 결정되었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도 없지 않겠어? 제단 앞에서 실제로 맹세를 하기 전에 서로를 잘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데이지의 생각은 어때?"
"안 돼요, 필립. 결혼하기까지 기다려야 해요" 데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녀를 힘껏 껴안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을 강하게 밀어붙이고는, 자기 것이란 듯 두 팔을 데이지의 허리에 감고 부드러운 몸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어. 데이지는 아무 염려 말고 두든 걸 나한테 맡기면 되는 거야" 그는 쉰 목소리로 속삭이고, 머리를 굽혀 목덜미에 키스하면서 그녀의 블라우스의 단추를 끌렀다.
그 순간, 데이지는 이런 것이 싫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데이지는 얼른 필립의 품에서 벗어났다.
"안돼요, 필립. 나는 싫어요. 이런 건, 아무리 결혼을 할 것이라고 해도 이런... 이런 식으로 첫날밤을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또 결혼하고 싶어요. 그리고 나 역시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하지만..." 부끄러운 듯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나 역시 기분은 마찬가지야" 그는 달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남자야. 지금까지 참아 왔어.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면 적당한 선에서 나의 청을 들어 줘도 좋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필립은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드러난 가슴으로 시선을 보냈다. "데이지는 자기가 착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리고 내가 열중해 있다는 것도. 데이지도 역시 그럴 텐데?"
데이지는 등을 돌리고 자기 마음을 확인하려 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큰 실망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바보같이 로맨틱한 꿈만 꾸고, 비현실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것일까?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런 경우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좀 더 일찍 피앙세와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결혼식을 앞두고 이토록 주저하는 것일까?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필립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오늘 밤 어딘가 멋진 곳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로 해. 그러면 데이지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테지. 서로가 바라고 있는 일이니까"
데이지는 불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다시.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절대로 강요는 하지 않을 테니까. 방을 따로 빌리겠어."
이 말을 듣고 그녀는 얼른 돌아서서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역시 이해해 주시는군요!" 안심을 하고 그녀는 웃었다.
필립은 놀라는 기색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데이지의 볼에 가볍게 키스한 다음 방에서 나갔다. 그로부터 이틀후, 데이지는 둘이서 보낸 시간에 막연한 불안을 품고 먼저 에든버러로 돌아왔다. 필립은 다정하기는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으며, 무슨 말을 해도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 뒤 필립은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했지만, 데이지는 완강히 거절했던 것이다.
"데이지!"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은가? 먼 나라를 헤매고 있는 것 같군"
"어마, 미안해요"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어 그렇게 해서 필립과 같이 갔으나" 그녀는 신중하게 말을 선택했다. "함께 지낸다는 것 때문에 의견이 맞지 않아 돌아오고 말았어요" 자기가 말하려 한 의도가 제이크에게 전해졌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자코 몸을 앞으로 내밀어 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어쨌든 그 여행이 끝난 뒤 나는....알았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서둘러 말할 것까진 없어, 데이지" 제이크가 조용히 말했다. 데이지는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필립은 다음 주 금요일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데이지는 쓸쓸해져서, 또다시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는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가에 가책을 받았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온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 불안은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필립은 전과 같이 다정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에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했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언니인 모니카가 와 있었다. 갑자기 집이 그리워서 돌아왔노라고 했다. 어딘지 모르게 침울해 보였다. 그러나 데이지는 자신의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니카가 몇 번이나 긴 전화를 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날 밤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행복한 기분으로 필립과 같이 집에 돌아와 보니, 모니카는 혼자 초조해 하면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지는 모니카가 필립과 하찮은 일로 말다툼하는 것을 보았다. 모니카가 열심히 필립에게 뭔가를 따지고 있었다. 필립은 마침내 화를 내며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커피를 끓여 가지고 거실로 들어가니, 모니카는 그때까지도 성이 가라앉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그 사람은 너한테 맞지 않아"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필립 말이야, 네 피앙세인"
"왜 그렇게 화를 내지, 언니답지 않게? 필립 일이라면 상관하지 마, 그는 내 피앙세고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언니하고는 관계없는 사람이야" 말투가 약간 거칠어졌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문제란 말이야" 모니카가 수수게끼 같은 말을 햇다.
"도대체 왜 그러지, 전에는 노상 칭찬만 하더니?"
"어마, 정말? 내가 돌아온 뒤에?"
"그 사람을 쓸쓸했던 거야"
"그래.... 그리고 원만히 지내지 못했다면 미안해. 물론 내 잘못은 아니지만"
"원만히 지냈어. 지나칠 정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데이지는 언니를 응시했다. 방안이 무서운 정적 속에 휩싸였다. 두 사람 도두 까딱도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지 않겠어?" 마침내 데이지가 입을 열었다, 필사적으로 태연을 가장하면서.
"그럴 필요는 없지 않겠니? 너는 어려서부터 나를 잘 알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쯤은 알 수 있을 테지!"
"두 사람은 서로....끌려서 그만...." 데이지는 목이 메었다.
"응"
"알았어.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는 거지?"
모니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겠니? 그것을 내 입으로 분명히 듣고 싶니?" 모니카의 음성도 떨리고 있었다.
"키스를 하고, 아마 껴안았을....."
"그것만이 아니야! 아아, 숨겨야 소용없겠지,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저어, 우리는 서로 사랑을 나누었어...."
"설마 그럴 리가......거짓말이야!" 데이지가 소리쳤다.
"거짓말이라면 차라리 좋겠어. 하지만 이미 너는 나한테 복수하고 있어" 모니카는 흐느꼈다. "그는 나를 사랑했어....그래, 밤새도록....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나는 완전히 그한테 반해 버렸어. 말도 안 되지? 우습지? 그런데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단순한 불장난이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가하고 있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초조하게 애를 태우고 잇는 바로 너야. 네가 알게 되지나 않을까, 그는 이것만 걱정하고 있어. 나중에 그 사람이 무어라 햇는지 알아? 내가 너하고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그만 마음이 동했다고 했어"
무서운 침묵이 한없이 계속되는 듯싶었다. 너무나 큰 충격에 데이지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버렸고 눈은 짙은 색으로 변햇다. 설마 그런 일이....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언니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데이지는, 마음 한구석에서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립.... 몸이 굳어 들고 있던 컵을 마루에 떨어뜨렸다.
장작이 타며 내는 소리에 데이지는 현실로 돌아왔다. 제이크가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가능한 한 요령 있게 이야기해 보겠어요"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어 보였으나, 누에는 아직 무엇에 사로잡힌 듯한 묘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제이크는 난로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장작불을 헤쳤다. "내가 돌라온 뒤 필립과 언니가 에든버러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서로의 마음이 끌려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튿날 나는 집을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제이크는 계속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모한테는 도저히 사실을 말할 수 없었어요. 너무나 가혹해서. 서로 맞지 않는 점이 많다고만 말했죠. 필립은 그 후 런던으로 돌아왔고, 어니는 대학을 중퇴한 뒤 그 사람을 따라가 런던에 같이 살게 되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데이지는 이야기를 끝냈다. 마음은 텅 비어 이미 울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그래 언니의 결혼 상대자는?" 마침내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물론 필립이에요. 아마 임신한 듯싶어요. 어머니는 내가 돌아가면, 아버지는 언니 때문에 동생이 불행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하고 그 일만 생각하다가...."
"그래서 좋은 방법이라도 떠올랐나?"
"네, 대충은.... 이것이 제 이야기의 전부랍니다.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어쩐지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아요"
"그 방법이라는 것도 말해 줄수 없겠소?"
"네..... 좋아요.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별로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저어, 나와 같이 가서 피앙세인 체해 줄 사람을 에스코트 서비스에 부탁했어요" 데이지는 얼굴을 붉히면서 단숨에 말했다.
"그래?" 제이크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창가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데이지는 그를 사랑하고 있나?"
"네. 그래서 혼자 돌아갈 자신이 없어요"
"분명한가?"
"네. 다른 사람과 교제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하겠어요.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그녀는 일어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잠간"
"아니에요, 이제는 더 이상...."
"피곤한 것은 알고 있지만 조금만 기다려" 단호한 어조에 절박감이 느겨졌다. "데이지, 집은 어디지?" 뜻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데이지는 감짝 놀라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콘월의 세인트 아이브즈 근처입니다마는, 그런데 그것은 왜?"
"내가 힘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자아, 다시 한번 앉아요"
그녀는 문 옆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제이크는 이쪽을 향해 다리를 약간 벌리고 조용히 일어섰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등에 불빛을 받으며, 역시 눈은 그림자가 져 보이지 않았다.
"데이지, 나하고 결혼해 주지 않겠나?" 조용한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3
데이지는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지금 그가 한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단 말인가..... 순간 두 사람은 동작을 멈췄고, 방안은 완전한 침묵이 지배했다. 이윽고 데이지가 예리한 어조로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제의예요!" 그녀는 화를 내고 있었다. "조롱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기에 했을 뿐, 내가 자진해서 말한 건 아니에요"
제이크는 데이지의 갑작스런 분노의 폭발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조롱을 하다니, 데이지는 나라는 인간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이것은 진지한 이야기야. 이제부터 설명하겠어"
"설명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이젠 돌아가겠어요."
"데이지, 부탁이야. 앉아서 내 말을 들어 봐.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서로를 위한 이야기야. 듣기만 하면 되지 않겠어?"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한 나한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세요? 또 그것이 나를 위해서라고요?" 자신도 모르게 음성이 높아졌다.
"물론이지, 데이지가 희망 없는 상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자아, 내 말을 듣겠소?"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크는 다시 냉정하게 말을 계속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데이지와 같은 입장에 놓여 있어"
데이지는 깜짝 놀라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제이크도 희망 없는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안드리아 템플은 미혼일 텐데....
"데이지는 언니의 남편이 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젠 그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켜야만 해. 그래서 피앙세가 필요한 거야. 실은 나도 피앙세가 필요해. 아버지한테 멀지 않아 결혼할 거라는 내 뜻을 알리기 위해서. 어느 경우건 당면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지" 제이크는 잠시 말을 끊고 다시 앉아서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나 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외아들이야. 가족이라고는 홀로 되신 아버지뿐이야. 아버지의 가장 큰 소원은 한시바삐 손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지. 건강이 별로 좋지 않으셔서 수술을 받게 될지도 몰라. 또 연세도 많으시고. 그 전에 꼭....." 제이크는 한숨을 쉬었다. 그 표정이 놀랍도록 침울했다.
"그래서 내 생가엔 데이지가 피앙세를 필요로 할 때는 내가 그 피앙세가 되고, 내가 아버지를 찾아갈 때는 데이지가 내 피앙세가 되면 어떨까 하는데, 데이지 생각은 어때?"
너무나 놀라 데이지는 한순간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해요....그런 거짓말은.... 당신 아버님은 결혼을 바라고 계세요, 단순한 약혼이 아니라"
"데이지, 끝까지 내 말을 들어. 데이지는 도대체 언제까지 아버지한테 거짓말을 할 생각이지? 이번 주말가지? 가령 이번엔 거짓말이 통했다 하더라도 다음에 찾아갈 대는 어떻게 할 생가이지? 또 아버지가 런던에 오실 때는? 같은 남자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데, 만일 그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어 만날 수 없다면? 혹시 싫다고라도 하면? 이 모든 일이 원만히 될 것이라고 데이지는 생각하고 있나?"
"그것도 생각해 보았어요. 최초의 충격이 지나가면, 그 뒤에는 내가 결혼에서 행복을 찾을 타입의 여자가 아니라는 것, 우선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조금씩 납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데이지는 언제까지 아버지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나? 하지만 만일 데이지가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되면 아버지의 상심은 더욱 커지지 않을까? 결국 필립과 언니의 결혼에 충격을 받고 데이지가 연극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지. 그렇게 되어도 좋단 말이지?"
데이지는 대답이 궁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요? 곧 알아차리실 것이 아닌가요?"
데이지가 반격했다. "나는 당신이 언제나 데리고 다닐 그런 타입이 아닌 걸요" 데이지는 자신의 말에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건 사실이야" 약간 웃음을 띤 목소리로 제이크가 말을 이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우리 약혼을 사실이라 믿으실 거야"
"그렇다면 내 일은 어떻게 하고요? 직장에서는 거짓약혼이 통할 수 없어요."
"그렇군" 제이크는 생가에 잠기면서 말했다. "직장에서는 지금처럼 지내야하겠지. 데이지는 회사로서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개인적인 이유로 그만두게 할 수는 없지"
데이지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고 했다. 어째서 안드리아에게 부탁하지 않는 것일까? 학필이면 나한테? 아마 안드리아는 실제로 험프리 부인이 되고 싶어 하는 데 반해, 제이크는 아직 당분간은 누구하고도 결혼할 생각이 없기 대문일 것이다.
"안 돼요. 도저히 그렇게 할 자신이 없어요.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에요.... 내 가족만이 아니라 당신 아버님까지 속이다니...."
"내 아버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쨌든 가족을 속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말한 방법을 쓰면 틀림없이 믿으실 것이고, 또 우리의 모습을 보고 안심하실 거야. 데이지도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나. 아버지를 안심시키려는 것이? 염려할 것 없어. 데이지를 행복하게 만들려는 내 마음을 반드시 아버지가 알게 할 테니까" 그는 흘끗 데이지를 바라보고 천천히 말했다.
데이지는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어디가지나.....저어....합의상의 일이지 사적인 감정은 일체 포함되지 않는 것이죠?" 그녀는 제이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솔직하게 물었다.
"약속하겠어"
"만일 당신이 정말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때는 나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부탁하겠어. 그리고, 당신이 그런 경우가 되면 물론 자유롭게 해 주겠어. 이것은 어디가지나 쌍방의 편의를 위한 일시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알겠어요. 잘 생각해 보겠어요" 너무나 피곤해서 온몸이 쑤셨다.
"5분간 여유를 주겠어." 그가 쌀쌀하게 말했다.
"네?"
"데이지, 시간이 없어.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언제 결정하겠나, 내일 일인데?"
"참, 깜빡 잊었었군요. 역시.... 역시 안 되겠어요. 모처럼의 말씀이지만 훌륭히 해낼 자신이 전혀 없어요"
제이크는 여기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데이지의 집은 세인트 아이브즈에 있고 우리 집은 메바기스니까 50킬로도 떨어져 있지 않아. 차로 가면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야"
데이지는 숨을 죽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일까! 아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피곤해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지. 그 에스코트 서비스 회사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 내가 회사에다 취소 전화를 걸어 주지. 그리고 내일 아침에 차로 마중 가겠어. 함께 차를 타고 천천히 서쪽으로 가는 거야. 만일 마음이 변하거든 데이지는 언제든지 기차로 갈아타면 돼. 그때까지면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차 안에서 좀 더 생각하기로 하지, 어때?"
데이지는 갑자기 이 이야기를 어서 끝내 버리고 잠자리에 들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 되었다. 몸과 정신이 허탈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이튿날 아침, 제이크는 은청색 롤스로이스를 타고 나타났다. 어젯밤의 친밀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딘지 모르게 서먹서먹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는 데이지의 슈트케이스와 모피 재킷을 트렁크에 실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좁은 차 속에 나란히 앉아 있는 상황이 되었다. 제이크에게서 나는 쉐이빙 로션의 향내를 맡자, 어젯밤 그가 자기를 가슴에 품어 마음의 고통을 덜어 주었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무슨 까닭인지 표정마저 굳어 있다. 잠을 잘 자지 못해서일까? 후회하고 있는 걸까? 혼자 있고 싶은 걸까? 아니야, 안드리아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이다. 데이지의 뇌리에 아름다운 안드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오늘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던 건 아닐까?
창밖으로 눈을 돌린 데이지는, 차가 고속도로로 가지 않고 시내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개달았다. 차가 그로브너 스퀘어를 가로질러 코노트 호텔 앞에 서자, 그녀는 순간 깜짝 놀랐다. 여기서 안드리아를 태우고 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제이크가 시키는 대로 차에서 내려 그를 따라갔다.
호텔에 들어가니, 곧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자신이 예약된 손님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데이지는 이미 흰 아마로 된 테이블클로드 위에 은제 포크 등을 준비한 테이블에서 메뉴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조반이야, 아직 안 먹었을 것 같기에. 나 역시 마찬가지야" 제이크가 설명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손님이 많았다. 그녀가 주위의 테이블을 둘러보니, 음식을 먹는 손님도 있었다. 웨이터들은 푹신한 융단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의 아침은 아주 맛이 있지"
이윽고 제이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더운 김이 나고 좋은 향기가 풍겼다. 토스트는 흰 냅킨에 싸여 있었으며, 커피는 묵직한 은제 포트에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잠자코 먹기 시작했다. 집에서 출발할 때 커피를 마시고 온 데이지는 억지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면서 식사를 즐겼다.
다음에 간 곳은 본드 거리에 있는 보석상이었다. 한걸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데이지는 물을 뿌려 놓은 듯한 고요, 번쩍이는 쇼우 케이스, 휘황찬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발밑의 두꺼운 융단에 마음을 빼았겼다. 두 사람은 쇼룸의 구석진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데이지는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아마 누구한테 가지고 갈 선물을 사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잠자코 있었다. 제이크가 설명하려 하지 않을 때는 이쪽에서 먼저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청년이 여러 가지 보석이 박힌 색색의 반지를 올려놓은 트레이를 많이 가지고 나왔다. 이것을 보고야 비로소 그녀는 여기 온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놀람과 당황의 빛을 띠고 제이크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발.....곤란해요.....이런....."
"나한테 맡겨 줘"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나서, 점원더러 자유롭게 선택하고 싶으니 잠시 단둘이 있게 해 달라고 말했다.
제이크는 트레이 하나를 끌어당겨 이것저것 반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이지는 경직된 채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자아, 데이지. 얌전히 있어"
"부탁이에요. 나는 이렇게 비싼 것은 도저히 낄 수 없어요. 내가 산 반지가 있으니까, 그것으로도 충분해요"
"반지에 대해서는 나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텐데"
제이크가 엄한 소리로 말했다. "데이지가 끼고 있는 반지로는 절대로 우리 아버지를 속일 수 없어. 내가 약혼자에게 선물하려는 반지가 아니니까"
약혼자라는 말에 데이지는 순간 눈을 내리깔고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저어.........."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투자라 생각하면 되는 거야. 우리가.....만일 ......약속을 파기할 경우, 데이지가 그렇게까지 싫다면 도로 반환하면 되는 거야.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도 말아 줘"
데이지는 자기 앞에 놓인 눈부신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만일 필립이 주는 것이라면, 하고 문득 생각했다. 필립에게서 받은 반지는 되돌려 주었다. 필립은 반지를 받았다는 것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그 반지는 지금 여기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작은 진주를 박은 금반지였다. 그러나 매우 아끼고 소중히 여겼는데....
"이것이 어떨까?" 제이크가 고른 것은 백금에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여자들은 누구나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는 것 같더군. 그것도 클수록 좋아하거든" 그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제이크는 얼른 그 반지를 데이지의 손에 끼워 주었다. 불안과 혐오로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거의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약혼하는 체하고 있으니. 어째서 이렇게 되었지? 눈물이 치솟고 공포가 엄습해 왔다. 여기서 나가면 제이크와 헤어져야지..... 더 이상 이런 연극을 할 수 없다.
"데이지, 괜찮아?" 제이크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데이지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굳어 버렸다.
"부탁이에요. 제발.....가게 해 주세요..... 나는 도저히....."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일어서려 했으나 제이크에게 제지당했다.
제이크는 웃음도 빈정거림도 완전히 모습을 감운 어둡고도 진지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냉수를 마시고 나니 떨림이 섯거리 진정되었다. 제이크는 반지를 하나하나 집어들어 나지막한 소리로 설명하고는 다시 원래대로 놓으면서 데이지가 침착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데이지는 그의 그런 자상함이 고마왔다. 마침내 불안도 떨리는 몸도 완전히 진정되었다.
"이상하게도 데이지에게 어울리는 건 다이아몬드가 아닌 것 같군. 다이아몬드도 어울리긴 하지만 에메랄드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에메랄드는 아름답고 빛깔이 곱지. 또 다이아몬드보다 부드럽고.... 마치 데이지처럼" 제이크는 그녀를 돌아다보고 빙긋 웃으면서, "어때, 이것이?" 하고 에메랄드 반지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왔다. 백금에 박힌 반투명의 엷은 녹색의 보석이었다.
그 크고 네모진 에메랄드가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을 발했다. 데이지는 그를 바라보며 떨면서도 미소 지었다.
"어디 껴 봐"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손가락에 꼭 맞았다. 그 묵직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나?"
그녀는 수줍어하면서 제이크 쪽으로 돌아서서 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제이크는 반지를 바라보고 나서 자신의 거무스름하고 힘찬 손으로 데이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데이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데" 이렇게 말하고 그는 일어섰다.
롤스로이스로 돌아오자, 제이크는 운전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전속력으로 런던 시내를 빠져나갔다. 파워가 있는 이 대형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더욱 속력을 냈다.
"리딩을 지나서부터는 천천히 달리겠어" 제이크가 감정이 없이 말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면 좀 더 좁은 길로 가기로 하지. 마음대로 질러갈 수도 있어. 뒤에 잡지와 신문이 있고, 좌석을 뒤로 젖혀서 잠을 자도 좋아" 그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데이지에게 미소를 보냈다.
리딩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태양도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흐려 있었으나 차차 구름이 걷히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제이크가 차의 지붕을 열어젖혔다. 데이지는 어느 름에 두서없는 생각에 잠겨 버렸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제이크와 같이 있으면서 이토록 마음이 느긋한 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감탄과 존경심을, 또 때로는 적지않이 경외감마저 가지고 대해 왔던 것이다. 남달리 강한 개성, 단정한 마스크, 넘쳐흐르는 정열에 언제나 근접하기 어려움을 느꼈고, 주눅이 드는 것이었다.
제이크의 애인이 가끔 사무실로 찾아오곤 하는데, 그녀들은 모두 횡설수설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하나 같이 미인인데다 세련되었고, 그에게 반해 있었다. 어느 여자도 그렇게 젊어 보이지는 않았다. 또 별로 오래 관계가 지속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데이지는 결코 자세히 알려 하지 않았고,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그의 사생활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버린 것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시작한 이 미묘한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데이지는 무척 외로왔다. 그렇지만 이 순간은 느긋하고 만족스러웠다. 또한 그 이상의 무언가-사무실에서의 제이크와는 절대로 없었던, 그리고 다른 누구한테도 느끼지 못했던 우정과도 같은 이상한 마음도 느끼고 있다.
"지금 막 세프튼 마레트를 지났어. 그래스튼베리에서 점심을 먹을까?" 제이크의 목소리가 데이지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형식적인 질문....
"네, 그렇게 해요"
"나는 잠시 쉬고 싶군. 필그림즈 인에서라면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을 거야. 드라이브할 때는 배가 너무 부르면 좋지 않지, 졸음이 오니까"
두 사람은 12세기 풍 건물의 뒤쪽 광장으로 들어섰다. 제이크는 낮은 귀틀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오래 된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거무스레한 드보가 낮은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벽을 따라 박달나무로 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벽돌로 만든 난로에서는 벌겋게 장작이 타고 있어서 바깥의 냉기를 막고 있었다.
데이지는 야채수프에 막 구운 빵과 샐러드를 먹고, 제이크는 특제 스테이크에다 키드니 파이를 먹었다. 잘 냉각된 백포도주가 나오자 제이크는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데이지와 같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군." 그러고는 이 장소-필그림즈 인에 관해서 데이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베네딕또 대수도원은 전 유럽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일 년 내내 순례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사들의 거처에는 이들을 숙박시킬 여분의 방이 없었으므로 이 인이 여행자의 단기 체류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인의 각 방은 지금도 옛날과 같은 유명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점심 후 두 사람은 수도원 터를 둘러보기로 했다. 제이크는 걸으면서, 성배가 어떻게 해서 아리마타야의 요셉에 의해 영국에 반입되었나에 대해 설명했다. 후대의 연대사가에 따르면, 요셉은 성배를 묻고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성배가 묻힌 장소는 요셉의 제자가 표시해 두었는데, 거기서 장미가 자라나서 그로부터 4세기 후에 크롬웰 일파가 잘라 버리기까지 해마다 크리스마스에 꽃을 피웠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옛날의 장엄함을 연상케 하는 수도원의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풀밭을 걸었다.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건물은 원장의 주방뿐이었다. 이 네모진 기초 부분에 돔을 올려놓은 석조 건물의 오랜 연대를 생각하니,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다음에 제이크는, 수도사가 아더 왕과 왕비 기네비아의 무덤을 발견했고, 원탁의 기사와도 관련된 전설이 깃들인 아발론 골짜기라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옛날에 유명했던 지하실 유적으로 내려갈 때, 데이지는 발을 헛디뎌 몸을 바로잡으려 하다가 마침 뒤를 돌아다본 제이크에게 쓰러지고 말았다. 두 팔에 꼭 껴안기는 순간, 제이크의 체온이 그의 엷은 실크 셔츠를 통해 전해져 왔다. 호흡이 흩어지고 예리한 전류가 온몸에 흘렀다. 제이크는 얼른 몸을 떼고 앞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군"
두 사람은 자동차 있는 데로 향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조금 전까지 느끼고 있던 포근함이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차는 세인트 아이브즈를 우회하여, 데이지가 가리키는 대로 콘월만으로 향했다. 낡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자 교회가 눈에 띄었다. 차는 그 앞에서 커브를 돌아 천천히 사잇길을 달리다가 마침내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아담한 석조 건물 앞에 멎었다. 집 앞에는 갖가지 봄꽃이 만발해 있었다. 데이지는 치솟는 회포와 불안-싸늘한 공포-에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꼈다.
"안 되겠어요.....나는....."
"데이지! 이미 도착했어. 이젠 도망칠 수는 없는 거야. 자아, 마음을 굳게 가져" 감정이 섞이지 않은 제이크의 싸늘한 어투가 그녀를 침착하게 만들었다.
제이크가 차의 트렁크 쪽으로 갔을 때,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모습을 나타냈다.
"데이지, 아아 정말 너로구나!" 어머니는 이렇게 외치며 데이지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아아, 너를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구나. 잘 왔어!"
"엄마...." 데이지의 목소리는 떨리고, 미소는 눔물과 범벅이 되었다.
"잘 돌아왔어. 정말 고맙다. 어디 얼굴이나 다시 한번 보자"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녀는 딸의 몸을 떼어 놓았다. "저런, 완전히 어른이 되었구나. 아주 여자답고 예뻐졌어"
이때 제이크가 데이지의 슈트케이스와 재킷을 가지고 왔다.
"엄마" 데이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이쪽은 제이크....제이크 험프리예요......" 목이 메어 말이 끊어졌다.
"결혼을 승낙 받은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려서"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데이지의 어머니에게 미소를 보냈다.
"어머나, 놀랐는데!" 그녀는 안도와 기쁨,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이 깃들인 표정으로, "정말 넌 못된 아이로구나. 어째서 편지로 알리지 않았니?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자. 정말 두 사람 모두 잘 왔어" 하면서 두 사람을 홀로 안내했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데이지는 겁을 먹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모니카와 필립이 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아버지는 아마 일을 나가셨을 테지.
"마침 잘 됐다, 아무도 없어서. 혼자서 차를 마시려던 참이었어" 데이지의 기분을 알아챈 어머니가 말했다.
집 안은 전보다 좁은 듯했으나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였다. 홀의 카펫이 전보다 약간 낡았고, 거실의 소파 커버는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가꾼 화분이 옛날처럼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주방은 언제나 데이지가 좋아하던 방이었다. 큰 창문과 뜰로 통하는 문이 남향으로 달린, 옛날 농가의 주방과 비슷했다. 잘 길든 목제 테이블이 놓여 있고, 벽을 온통 차지한 찬장에는 아름다운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부지런히 케익과 컵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제이크는 열린 문에 기대 서 있었다.
이윽고 세 사람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았다. 제이크는 완전히 마음을 놓은 듯, 어머니가 손수 만든 프루츠 케익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어머니, 데이지가 아름다운 이유를 알았습니다." 제이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데이지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어머니 비위를 맞추려 하고 있었다.
"엄마, 제이크는 말솜씨가 아주 좋아요" 그녀가 쌀쌀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이크가 얼른 말을 받았다.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정말 행복합니다."
"제이크, 부탁이에요!" 데이지가 초조하게 말했다.
제이크는 그 사려 깊은 입을 약간 벌려 어머니한테 미소를 보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기쁜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족의 일화를 들려주려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그러니까 이 애가 태어난 것은 어니인 모니카가 여섯 살 때였어요. 모니카는 데이지라 부르지 않고 줄여서 데즈라고 불렀어요. 그것이 어느새 이 애의 애칭으로 바뀌고 말았어요. 이 애가 데이지로 불리는 것은 꾸중을 들을 때뿐이었어요."
"아마 그런 경우는 벼로 없었을 것 같군요"
"제발 그만두세요, 두 분 모두" 데이지는 들거운 듯이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어색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있나요?" 홀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4
데이지가 두려워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제이크가 얼른 데이지 곁의 의자에 옮겨 앉아 팔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바로 이때 모니카가 입구에 나타났다. 이어서 필립이. 데이지는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무릎 위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동생을 보는 찰나, 모니카의 몸이 굳어졌다. 얼굴이 긴장되고 미소가 사라졌다.
제이크가 일어섰다, 엄연히 자기 것이라는 듯 데이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리처드 부인이 긴장을 깨뜨렸다.
"어서 오너라"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때마침 잘 돌아와 주었어. 보다시피 데이지가 돌아왔어. 깜짝 놀랐지?" 그러고는 제이크 쪽으로 돌아섰다. "이쪽이 언니인 모니카 앤이에요. 그리고 이쪽이 약혼자인 필립. 모니카, 놀라지 말아라. 이쪽은 제이크 험프리씨, 데이지의 약혼자란다."
필립이 방으로 들어오자 제이크는 자세를 고쳤다. 순간, 두 사나이는 서로 마주 보았다. 누구도 먼저 말을 하지 않고 우뚝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전원이 테이블에 앉았다.
"축하합니다. 행복을 빌겠습니다." 하면서 제이크는 데이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축하드려야 할 차례군요" 어머니의 소개에 이상할 만큼 안도의 빛을 보였던 모니카가 방긋 웃었다.
데이지는 자기 정면에 필립이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불타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언니가 있는데도..... 데이지는 당황해서 모니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 고수머리를 내일의 결혼식을 위해 유행하는 스타일로 빗었으며, 임신했는데도 불구하고 몸은 여전히 날씬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매력적이고 생기 있게 보였다.
갑자기 모니카가 얼굴을 들었다. 데이지의 시선이 자기한테 쏠려 있는 것을 깨닫자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거의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떠올랐다. 데이지는 흠칫하며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제이크의 손이 뻗어 와 그 손을 가만히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목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손의 따뜻한 온기가 싸늘한 손끝에 스며들었다. 데이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이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필립의 눈길이 자기한테 못박혀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양쪽 눈은 어둡게 불타고 있었다.
아아, 더 이상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니와 약혼하여 앞에 앉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은 이처럼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있다니....
필립은 전혀 변한 데가 없었다. 그 금발을 보자 어루만져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여전히 핸섬했다. 활모양의 뚜렷한 눈썹, 그 밑의 짙은 청색 눈동자, 우뚝한 콧날, 희고 가지런한 이. 입꼬리만이 전보다 약간 처진 듯했다.
어머니는 혼자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열심히 얘기를 계속했다.
"식은 마을 교회에서 두 시에, 그 뒤 호텔에서 피로연, 잠시 휴식하고 밤에 다시 호텔에서 필립의 양친이 주최하는 댄스파티, 예정은 대개 이상과 같아요. 그때 제이크를 모두에게 소개하기로 하겠어요. 그러면 나는 아직 일이 남아 있어서 이만 실례해요. 사이좋게 이야기들 나누세요"
어머니가 가 버리자 곧 제이크가 일어서서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나도 이제 가 봐야지"
"원기가 있어 보이는군, 데이지" 필립이 느닷없이 말했다.
"고마와요. 당신도요" 데이지는 얼굴을 들고 조용히 필립을 쳐다보았다.
"아마 런던의 물이 데이지에게 맞는 모양이군"
"네, 아주 좋아요. 친구도 일자리도 아파트도 무척 마음에 들어요"
"아니, 그렇다면....아직 같이 있지 않나?" 놀란 듯이 필립이 말했다.
제이크의 몸이 굳어졌다.
"우리는 약혼은 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어요."
"런던에서는 그 점에 관한 한 개방적인 줄 알았는데" 필립이 쌀쌀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 따로 있죠."
"어마, 그것은 우리를 빗대어 하는 말 아닌가요, 네?" 애교 있는 목소리로 모니카가 말했다.
제이크가 데이지를 일으켜 세웠다.
"실례지만 저는 가야 하기 때문에.... 자아, 데이지, 나를 밖에까지 배웅해 주지 않겠어?"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이 가해졌다.
"네, 그렇게 해요"
데이지는 그와 함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모니카의 큰 소리에 멈춰 섰다.
"필립, 저것 보세요! 저 큰 반지!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데이지, 어디 좀 보여 줘"
모니카가 손을 잡자 데이지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나, 진짜 에메랄드 같아" 그녀는 데이지의 손을 필립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되면 내 반지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어디 상점 이름을 좀 보여 줘"
제이크가 아주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서며 모니카에게서 데이지의 손을 빼서 그 손을 꼭 쥐었다.
"반지를 빼는 데 대해서는 데이지가 미신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상점 이름은 남한테 보이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모니카에게 미소를 던지며 데이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데이지는 제이크의 손을 뿌리쳤다.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에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이런 값비싼 반지가-그것도 남의 반지가 무슨 소용이람? 언니와 처지를 바꿀 수만 있다면 당장 영혼을 팔아도 좋다. 데이지는 갑자기 찾아온 고민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면 안 돼. 알겠나? 데이지는 지금 나하고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여야 하는 거야. 그런데 데이지, 그를 볼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으니, 우리의 약속을 잊은 거야?" 제이크가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흔들었다.
"알고 있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롤스로이스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그들에게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방 안에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레이스 커튼이 흔들리고 있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이런 일은 처음부터 안 해야 했는데....."
"내 말은 말이지, 만약 필립에게 데이지가 약혼한 것같이 보이게 하려면 좀 더 훌륭한 연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야. 현재로서는 영점이야. 나는 훌륭히 맡은 바 역할을 해내고 있어. 내가 그 연기를 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데이지의 어머니는 아주 좋은 분이야. 하지만 조금은 협력해 주어야만...."
"당신은 이 일을 즐기고 있는 것 같군요. 혼자만의 자기만족, 그것이 당신의 연기에 나타나 있어요" 데이지는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 "가족 전원이 당신을 좋아하도록 하게 해 달라는 부탁은 한 기억이 없어요.... 이 연극이 끝나면 그 뒤처리는 나 혼자 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마치 나를 미끼로 즐기러 온 듯하군요. 그런 것은 조금도 고맙지 않아요!"
"저런, 그 냉정하고 침착한 데이지 리처드가 드디어 신경질을 부리는군" 제이크는 이렇게 말하고 데이지의 홍조 띤 얼굴과 분노에 타는 눈을 바라보았다. "시든 백합꽃 흉내는 별로 오래 가지 못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이것봐, 내 말을 잘 들어. 데이지에게는 자신을 비하시킬 이유가 전혀 없어. 데이지는 아름답고 총명하며 젊음이 넘쳐흘러. 어리석은 것은 데이지가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지난날의 약혼자 그 사람이야. 데이지는 자신을 잃고 일생을 무가치하게 만들려고 하다니. 데이지는 지금 긴 꿈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어. 데이지의 인생은 이제부터야. 그러니 뒤를 돌아보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돼. 그에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제이크는 데이지의 분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승리에 도취된 듯 높은 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유 모를 기묘한 흥분이 데이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흔쾌한 환희-그것은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러면" 그는 손을 내밀고 부드러운 어조로 "관객을 위해 연기를 계속해야지" 하고는 데이지를 끌어안고 손으로 턱을 약간 쳐들어 입술에 키스했다.
데이지는 놀란 나머지 한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가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제이크는 몸을 날려 차에 올라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가고 말았다.
"어때, 좀 쉬었니? 잠시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왔어" 손님용 침실의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풀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들어왔다. "오늘밤 남자들은 남자들만의 파티에 갔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거울 속에서 눈과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애써 명랑해지려고 결심한 듯싶었다.
"우리 막내가 이렇게 멋진 여성이 되다니, 하지만 그렇게 머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여기서 나갈 때 그대로야...." 갑자기 목이 메었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흐느꼈다. "네가 여기 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리처드 부인은 웃옷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정말 긴 세월이었어. 얼마나 쓸쓸했는지. 원 이런, 절대로 울거나 하지는 않으려 했는데.... 자아, 제이크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렴. 어디서 알게 되었지? 약혼은 언제 했니?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냐? 모두 이야기해 봐"
"네 좋아요, 엄마.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어요.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엄마와....아빠에 대해서"
어머니는 흘끗 딸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뜻이지? 모니카가 무어라 하더냐?" 그녀는 동요하고 있었다.
"아뇨,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엄마는 아빠가 걱정되지 않으세요? 내가 돌아왔기 때문에 건강이 안 좋으신 게 아닌가요?" 데이지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아니다, 나쁠 것까지는 없지만 의사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어. 심장이 약간.... 하지만 크게 흥분하지만 않는다면 과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그래요?"
"하지만 많이 변하셨어, 지난 2년 동안에....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네가 집을 나간 뒤 몹시 실망하셨지. 언제나 너를 자랑으로 생각하고 계셨으니까.... 결국은 이런 모양으로 식을 올리게 되다니. 그때 나는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한데 아버지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지. 그런 만큼 우리보다 더 고민하셨을 거야"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네 경우도 처음에는 아버지가 반대하셨지 않니-'너는 아직 어려서 자기 마음을 몰라 필립에게 속은 거야' 하시며,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후 필립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셨어" 어머니는 딸의 눈치를 보며 불안한 듯이 입을 잠시 다물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네가 제이크와 약혼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 했어. 사실은 청첩장을 보낼 때만 해도 모니카와 나는 전혀 알지 못했어....저어, 네가 필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청첩장을 보내도 아마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아직 필립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여기고...." 어머니는 잠시 미소를 띠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미 아무래도 좋지 않니? 제이크를 본 순간 분명히 깨달았어-너와 어울리는 사람이고, 또 그가 너한테 열중해 있다는 것을. 그러니....너는 행복한 거야. 그렇지 않니, 데이지?'
"네, 엄마. 물론이에요> 그런데 아빠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데이지의 목소리는 초조해져 있었다.
"그래.... 필립이 너하고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는 정말 크게 놀라셔서.... 왜냐하면 필립이 너를 버렸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야. 그 뒤 필립과 만나 그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를 아시고는 몹시 충격을 받아...."
데이지는 움찔했다.
"어쨌든 네가 먼저 파기했다는 것을 납득하셨어. 모니카도 그게 사실이라 말씀드리고. 그로부터 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셨어.... 집에 들여놓지도, 네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하셨어. 편지는 물론 일체의 연락도 끊으라고 맹세시키셨어." 어머니는 소리를 내어 울고 계셨다. "그 기세가 대단하셨어. 처음에는 일시적인 격정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어. 누군가가.... 그렇게, 숙모님께서 오셔서 네가 잘 있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낯빛을 바꾸고 호통을 치시면서....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어."
침울한 표정으로 잠자코 듣고 있던 데이지는 갑자기 격한 고통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필립과 상의한 끝에 파혼했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파기한 줄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이상의 것도 알고 있는 것일까? 알지 못했으면 하고 바라는 동시에, 이번 주말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결심했다.
사태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렇다면 제이크와의 연극도 전혀 무의미하다. 아버지는 내 행복 따위는 전혀 염두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디까지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문득 의문이 생겼다. 2년 전의 그날 밤, 모니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머니는 알고 있는 것일까? 왜 그런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이 무슨 구렁텅이란 말인가.
"내가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사실은 아빠도 너를 필요로 하고 계셔. 모니카가 결혼해 버리면 더욱 그래. 두 사람이 솔직하게 대화를 해서 화해해야만 해. 그런 뜻에서도 나는 제이크와의 일이 아주 기뻐. 제이크와 결혼하게 되어 네가 행복해 하고, 필립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면 아버지 마음도 아주 달라지실 거야. 아마도 아직은 약간의 불안...저어...필립이 아직도 너한테 끌리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모니카도 역시 그것을 염려하고 있어. 그러나 이런 것이 모두 기우라는 것을 알게 되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모니카가 가고 나면 쓸쓸해서...."
아래층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벨 소리가 그치는가 싶자, 홀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없나?" 그러고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아버지께서 돌아오셨어. 나는 그만 나가 봐야지"
어머니는 문 쪽으로 가다가, "너....아빠의 말을 참을 수 있겠지?" 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엄마. 괜찮아요. 나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에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방긋 웃었다.
우선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데이지!" 모니카의 음성이었다. "너한테 왔어" "누구지?" 데이지는 층계참으로 내려갔다.
"모르겠어. 이리 와서 받아 보겠니? 나는 지금 엄마를 돕고 있는 중이야"
"응, 물론.... 지금 내려갈게!"
갑자기 평소의 상태로 돌아온 모니카의 목소리를 듣자 데이지는 마음이 놓였다. 역시 돌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모두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하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밝아졌다.
"여보세요? 아, 누군가 했죠"
제이크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실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실은 내일 아침 결혼 선물을 사러 같이 갈 수 없을까 해서 전화한 거야. 느지막이 열한 시경에"
"제이크, 그들은 선물 같은 것은 기대하고 있지 않아요.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해요"
"그래도 무언가 부담스럽지 않은 것으로.... 만일 오늘 밤 안으로 데이지가 이미 들어온 선물을 한 번 훑어보아 준다면 도움이 되겠는데"
"그야 어렵지 않지만, 글쎄요..." 하고 그녀는 승낙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제이크는 왜 이렇게 열심일까?
"좋아, 그러면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가겠어"
"나는 아직 승낙하지 않았어요"
"데이지는 망설이고 있을 뿐이야, 좀 더 화끈하게 유혹해 주지 않나 하고"
"어마, 말이 너무 심하군요!"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제이크는 농담하듯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데이지!"
돌아보니, 아버지가 입구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데이지는 갑자기 기쁨이 치솟아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도중에서 멈추어 섰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두 팔을 벌리고 맞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셨어요, 아빠?"
"무척 건강해 보이는군. 완전히 어른이 되고 또 예뻐졌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버지와 나란히 거실로 걸어가면서, 그녀는 실망한 기색을 필사적으로 감추려 했다.
"중요한 날에 네가 돌아와서 기쁘구나" 형식적으로 내뱉는 듯한 말에 데이지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소파에 앉았다. "너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 이번에는 전보다 옅어졌을 테지?"
"무슨 뜻이에요?" 데이지는 괴로와하며 물었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 하는 그 성격 때문에 행복이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지난번에 너는 결혼식 날 밤까지 기다리지 못했어. 필립은 너를 무척이나 사랑했어. 그러나 너는 그를 버림으로써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어. 끈기 있게 참았던 거야. 이번에도 네가 그런 짓을 하면 또다시 실패로 끝나고 말거야"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가 필립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그런 뒤에 내가 그를 버렸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누가 그런 거짓말을? 모니카일까? 필립이....아버지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불현듯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런 말씀을....자기 딸에 대해서.... 아빠는 실제로 무얼 아신다는 거예요, 그때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으면서? 도대체 누가 그런 거짓말을 했어요? 내 마음과 내가 한 일을 아빠가 어떻게 아신다는 거예요?"
"너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지, 그 마지막 날에"
"그건 불공평해요. 내 말을 믿었어야 했어요. 그때 내가 시실을 말했는데, 어째서 믿지 않으셨어요?"
"믿으라고?" 고함 소리처럼 음성이 높아졌다. "너를 믿고 하마터면 말려들 뻔했어. 그러니까 더 나쁜 거야. 너는 나의 신뢰를 배반했어....엄마의 신뢰도, 그리고 필립의 신뢰도. 필립은 너를 믿었었지 않니? 이번 일은 너에게 당연한 보답이야"
"여보,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여보" 어머니가 달려와 아버지를 끌어 안았다.
"미안해. 당신의 부탁을 들어 이 애를 부르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데이지를 용서한 건 아니야"
갑자기 억누르고 억눌렀던 분통이 터졌다.
"너무해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다니. 그렇다면 왜 불렀어요? 하지만 걱정하시지 않아도 좋아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테니까요. 그리고 두번 다시 나처럼 더러운 존재는 여러분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겠어요!"
"안 돼, 데이지! 안 돼!" 방에서 뛰쳐나온 그녀의 뒤에서 어머니의 절박한 목소리가 쫓아왔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뺨을 적셨다. 데이지는 이미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5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를 방황하고 있었을까... 데이지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황혼 속에서 혼자 모래밭을 거닐고 있었다. 발길은 저절로 자연의 은신처-어려서부터 괴로운 일이 생기면 숨곤 하던 비밀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작은 동굴로 들어가 키 큰 풀로 덮인 급경사를 내려가면, 만조 때마다 바위 위에까지 파도가 들이치는 작은 모래사장으로 나오게 된다. 그 백사장은 관광객의 주의를 끌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에 제철에도 한산히기만 했다. 그래서 여름에 일광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어서, 데이지는 자주 바위나 모래위에 누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 장소는 모니카도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것을 필립뿐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여기서 만나 마음 느긋하게 고요를 즐겼던 것이다.
데이지는 마음에 드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파도소리, 바람 소리, 새 울음소리에 몸을 맞기고 있었다.
가족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진 것 같았다. 이보다 더한 고독이 있을까? 런던에서 동료들과 있을 때 느끼게 되는 고독감도 쓰라렸으나,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고독은 더욱 고통스럽다.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 그러나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옛날대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두번 다시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아버지는 멋대로 생각하여 결코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언니가 모든 걸 밝힐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집에 남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머니가 없다면 당장.... 데이지는 지금 당장 런던의 아파트로 달려가고 싶었다.
만일 제이크와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식이 끝나는 즉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괜히 그의 계획에 말려들어, 일요일에 그의 아버지를 방문해야 하다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도망칠 방법은 없다.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길 수도 없는 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구태여 제이크와 연극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아직도 필립을 사랑하건 말건 아버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만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남자와 언니의 결혼을 목격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약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제이크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을까? 그는 뭐라고 할까? 이미 약혼했다는 것을 아버지한테 이야기했을까? 아마....
데이지는 생각을 계속했다. 무슨 좋은 해결책이 없을까? 그러나 아무 생가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에도 구원의 길은 없었다. 데이지는 피로에 지쳐 바위에 대댄 채 눈을 감았다.
"데이지....."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누굴까? 주위는 이미 캄캄했다. 몇 시간이나 그대로 잠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조수는 이미 밀려나가고, 바위 주위에서는 바람이 우는 소리만 들렸다. 저리던 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춥고 축축했다. 데이지는 몸을 떨며 간신히 일어났다. 조수가 밀려나갔기 때문에 모래밭을 따라 걸으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바위를 기어오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데이지!" 훨씬 더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젖은 모래밭을 걸어오는 발소리.
갑자기 데이지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필립의 목소리였다.
다음 순간, 작은 만 어귀에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데이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구름을 몰아내고 머리 위에 밝은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필립.... 그 그리운 모습에 데이지의 시선이 멎었다.
필립은 성큼성큼 다가와 데이지의 두 손을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아무말 없이 그녀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아아, 얼마나 이때를 기다렸던가!"
데이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쩐지 그 말이 불길하게 들렸던 것이다.] "냉정한 사람이야, 데이지는. 아아, 사랑하는 사람" 옛날과 다름없는 우아한 목소리가 데이지의 가슴을 쳤다. 필립은 자기 코트 속에 그녀를 감싸서 언 몸을 녹여 주려 했다. 데이지도 두 팔을 필립의 허리에 감았다.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나요?"
"당연하잖아!"
"아아, 필립!" 목소리가 정다운 웃음으로 변했다.
"당신,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
"응, 하지만 데이지는 이제 어른이 되었군" 귓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데이지는 놀아요ㅏ,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야. 아아, 사랑하는 사람!" 그는 이렇게 속ㄱ이며 데이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허둥지둥하면서 눈을 감고 얼굴을 그의 머리에 묻었다. 꼭 껴안기자 까칠까칠한 턱의 감촉이 피부에 느껴졌다. 머리칼이 뺨을 간질였다. 데이지는 한 손으로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필립이 속삭이고 있었다.
"데이지가 없어서 얼마나 쓸쓸했는지 몰라. 만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어. 데이지, 어째서 날 버리고 떠났지, 어째서?"
데이지는 그에게 몸을 맡기고 안겨 있을 때는 어제나 그랬듯이 말할 수 없는 충족감에 젖어 버렸다. 필립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가를 느꼈다. 필립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필립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키스하려고 몸을 굽혔다. 처음에는 살며시. 그러나 여기에 그녀가 응하는 것을 깨닫자 키스는 격렬해졌다. 이렇게 하고 있노라니, 데이지의 마음에 그 무렵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던 그 무렵과 똑같은.... 마치 시간이 정지하여 두 사람이 서로를 재발견하도록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곧 현실로 돌아왔다. 데이지는 몸을 비틀어 그의 포옹에서 벗어났다.
"안 돼요, 필립. 안 돼요! 부탁이에요, 제발 그만두세요"
"왜 안 되나? 데이지를 사랑하고 있어. 무척 좋아하고 있어. 계속 그랬어.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어. 데이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아마 모를 거야. 더 이상 나를 거절하지 말아 줘"
데이지는 다시 한번 그의 품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체온을, 사랑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특히 증오와 분노로 날뛰는 세계에서 오직 두 삶의 사랑만이 유일하고 확실할 것으로 믿어지는 이때이기에.... 그러나 데이지는 꾹 참았다. 두 손을 맥없이 늘어뜨리고 멍청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을 경시하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체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이 늦었어요, 필립.... 그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요. 자아, 이제 돌아가요"
"아니야, 데이지. 잠깐 기다려. 내 말을 들어 줘. 부탁이야, 응?"
데이지는 갑자기 말할 수 었는 피곤을 느꼈다.
"아니에요, 필립. 당신이 어째서 여기 왔는지는 몰라도, 돌아가야 해요. 그것도 당장.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에요. 모니카가 어떻게 여길지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디 갔는가는 모니카도 알고 있을 거야" 그 내뱉는 듯한 어투에 데이지는 깜짝 놀랐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알고 있어, 내가 데이지에게 열중해 있다는 것을. 나한테 안겨 있을 때도 데이지 대신 애무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어" 고통스럽고,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가련히 여기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데이지는 무서운 나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래?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니카는 잘 알고 있다는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것은 데이지야. 이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아" 문득 말이 끊어졌다가 호소하는 듯한 어투로 변했다. "부탁이야, 다시는 나를 두고 혼자 가지 말아 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데이지가....." 모소리가 굳어졌다. "데이자가 다른 남자로부터 받은 반지를 낀 것을 보고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마 데이지는 상상도 못할 거야. 놈을 죽이고 싶어! 만일 그놈이 데이지를.... 아아,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데이지는 필립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한기를 느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이것은 필립이 아니야. 함부로 무서운 말을 내뱉다니. 내가 사랑하고 지금까지 줄곧 생각해 온 필립일 리가 없어. 여기에는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하지만 당신은 내일 결혼을 해요. 모니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결혼하는 거조?"
"왜 두 사람이 함께 있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이해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녀에게 언제나 정직하게 대했어. 거짓말을 하거나 사랑하는 체한 일은 한 번도 없었어. 절대로 없었어" "하지만 필립, 그렇다면 어째서 아기가 생겼어요?"
"데이지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잖아?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손을 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다른 여자를 그리는 것이 남자에게는 매우 허다한 일이야"
"아아, 그마, 그만 하세요, 필립. 어떻게 그런.... 가엾은 언니!" 데이지는 흐느껴 울었다.
"데이지, 모니카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해. 아직 아기에 대한 것은 확실치 않아. 아무 증거도 없어. 그리고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야. 중요한 건 데이지와 나의 마음이야"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 있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남자가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자신은 지금까지 필립이라는 인간을 잘 모르고 있었나 보다. 사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다, 변한 것은 자기 자신일 것이다. 그녀는 이때 비로소 언니-필립을 사랑하고, 그가 이렇게까지 심한 모욕을 가하는데도 곱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니카-에게 연민을 느꼈다.
"이제 됐어요. 필립. 나는 돌아가겠어요. 더 이상 말리지 마세요. 내일 교회에서 만나기로 해요. 나도 약혼한 몸이에요. 앞으로 당신은 내 형부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필립을 남겨놓고 모래밭을 걷기 시작했다. 필립이 그녀 곁에 바싹 붙어서 따라왔다.
"아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 데이지, 내말을 좀 들어 줘. 데이지가 가 버린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싫어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내 말을 들어 줘. 이야기를 들어 줄 정도의 의무는 데이지에게도 있을 거야, 아무런 해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를 버렸으니까"
데이지는 잠자코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니카의 말만 듣고 떠나 버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으나, 필립은 이젠 그녀에게 몸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후 나는 도망치듯이 런던으로 갔어. 일체의 관계를 끊고..... 데이지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였어, 그랬는데 모니카가 뒤쫓아 왔던 거야. 때때로 만나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은데 어떠냐고 묻더군. 나는 그 정도의 일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서 동의하고 말았지. 하지만 그때 나는 모니카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어. 내가 사랑하는 것은 데이지뿐이고 이 마음은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가 내 말을 믿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어. 어쨌든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어...." 이야기가 웅변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쓸쓸했어, 무섭게 쓸쓸했어. 모니카는 그런 내게 때때로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몰래 빨래도 해주게 되었어.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낮에 청소를 하는 데 편리하다면서 방의 열쇠를 만들어.... 어느 날 밤 집에 돌아왔더니 그녀가 이사해 왔더군. 그때에도 나는 분명히 말했어. 결혼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만 낭비할 뿐이고, 가령 함께 산다 해도 장래가 없다고. 그랬더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잠시 여기 있게만 해 달라, 그러는 것이 자기도 편하고 방값도 절약된다고 하면서..."
"그건 거짓말이에요"
"아마 그랬을 거야. 그때 내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했어. 물론 나중에 말하기는 쉽지만, 그때에는.... 어쨌든 그로부터 반년 동안 그녀는 두 번이나 나한테 임신했다는 말을 했어. 그러나 두 번 모두 거짓말이었어. 그래서 이번에 또 그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믿으려 하지 않았어. 그랬더니 다른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지" 필립은 갑자기 멈춰 섰다. 데이지도 심각성를 띤 목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데이지가 결혼했다고....처음부터 거짓말을 했어. 데이지는 외국에 갔으며, 그리고는 여행 중에 알게 된 사람과 결혼했다고 하더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제는 내가 왜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했는지 알겠지? 단지 아기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야. 이제는 영원히 데이지를 잃어버렸다, 두번 다시 찬스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그 뒤에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아버님을 만났더니, 놀랍게도....아주 기뻐하시더군. 그래서 날짜가 정해진 거야"
"내가 외국에 갔다고 모니카가 말했나요?" 데이지가 속삭이듯 말했다.
"응?"
"그래서 찾지도 않았나요?'
"사실이야. 만일 데이지가 런던에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찾아내고 말았을 거야. 그래서 무릎을 끓고 용서를 빈 뒤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을 거야, 마치 지금처럼" 그가 조용히 말을 마쳤다.
데이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라고는 바닷물에 젖은 모래밭을 걷는 규칙적인 발소리뿐이었다. 그녀는 모래밭에서 도로로 올라와 집 쪽으로 향했다. 추위와 피곤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필립으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받았으나 아무 감동도 없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이대로 사랑의 도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아무런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란 것을 깡그리 잊어버린 듯했다. 너무나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저 잠을 자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잠들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꼭 한 가지 결심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에게는 나 자신의 생활이 있고 일이 있으며, 집도 있고 친구도 있다. 그러나 언니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필립에게 버림받는다면 언니에게 남는 것은 사생아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은 가족과 영원히 인연을 끊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영원히.... 설사 필립이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결심을 해야지, 당장.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데이지는 커브진 길에서 필립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필립, 이제부터는 나 혼자 돌아가겠어요. 당신이 한말... 저어, 좀 더 일찍 들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우리의 사랑은, 당신과 언니가 관계를 가졌을 때 이미 끝난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결혼은 결국 잘된 것인지도 몰라요" 음성이 약간 떨렸다. "나는 이미 약혼한 몸이에요. 당신과 도망칠 수는 없어요. 필립, 그러니까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요. 안녕!" 그녀는 등을 돌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멀어져 갔다.
이튿날, 새벽녘에야 겨우 깊은 잠에 빠진 데이지가 주방에서 늦은 조반을 먹고 있으려니 현관의 벨이 울렸다. 홀에서 제이크의 음성이 들리더니 이윽고 주방 입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고급 모헤어 천으로 만든 엷은 잿빛 슈트와 여기에 어울리는 실크 셔츠에 검은 넥타이로 완전 결혼식 차림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활기에 차 있었다. 그의 사나이다움에 데이지는 숨을 죽이고 한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이크는 곧장 그녀에게로 걸어와 머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녕, 곧 나갈 수 있겠어?" 그가 말했다.
"제이크, 나는 ....저어....혼자 다녀올 수 없을까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오늘 아침 늦잠을 자서 방금 내려왔어요"
제이크는 그녀의 당황한 어조와 창백한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고 토스트에 버터를 발랐다.
"그래? 데이지가 정 집에 남아 있고 싶다면 나 혼자서....."
"당치도 않아요" 어머니가 가로막았다. "제이크, 제발 데려가 줘요, 집에 있으면 내게도 도움이 돼요"
"어머나, 무슨 말씀을!" 데이지가 놀라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아니, 정말이야. 일은 다 끝났어. 어서 다녀오너라. 드라이브라도 하면 마음이 훨씬 개운해질 게다"
"하지만 이런 꼴로는 갈 수 없어요. 당신은 깨끗이 정장을 하고...."
"너무 재촉한다, 이 말이지?" 제이크가 말을 받았다. "그건 사실이지만 너무 신경쓸 것 없어. 그러니 식사를 끝내고 같이 나가기로 해"
"그럼 부탁하겠어요. 하지만 반드시 옷을 갈아입기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세요" 어머니가 말했다.
"약속하겠읍니다." 제이크가 말하자 리처드 부인은 방에서 나갔다.
제이크는 창가로 걸어가 그대로 등를 돌린 채, "심각한 얼굴이군" 하고 낮게 중얼거리고 뒤돌아보았다.
"필립을 만났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봐" 긴장된 음성이었다. "예상 대로 멋진 재회였나?"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보로군, 데이지는. 자신도 알고 있을 테지?"
"네"
"그렇게 토우스트만 만지작거리지 말고 어서 나가자구" 제이크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와서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바로 어제 자기가 선물한 반지에 눈길이 가자 가만히 그것을 만지면서 그 짙은 녹색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데이지의 손을 뒤집어서 그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댔다.
데이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놀란 나머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상한 흥분이 손바닥에서 심장으로 전해졌다. 힘이 빠지는 것 같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제이크가 얼굴을 들고 똑바로 데이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잿빛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감정의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다음 찰나, 제이크는 데이지의 손을 쥔 채 그녀를 테이블에서 잡아끌 듯이 일으켜 방을 나섰다.
데이지는 홀에서 멈춰 섰다. 마침 아버지가 서재에서 나오고 계셨던 것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빠?" 그녀는 불안스러운 마음으로 인사했다.
"아아, 잘 잤니?"
"아빠, 이쪽은 제이크 험프리. 그리고 제이크, 우리 아버지예요"
"처음 뵙겠읍니다." 제이크는 손을 내밀면서 앞으로 나갔다.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버지가 우뚝 선 채 그 손을 잡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므로 제이크는 손을 내렸다. "찾아 뵙고 말씀드리려 생각했지만 지금은 바쁘실 것 같아 그냥 있었읍니다"
"자네와 이 애가 약혼했다는 것은 알고 있네" 드디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미리 말해 두겠는데, 데이지는 결혼같은 것은 바라지 않고 있네. 이 애는 언제나 나이가 많은 남자를 좋아하지. 그러나 결혼은 하지 않아. 지난번에 좋아했던 상대는 자기 아버지만큼이나 나이가 든 남자였었네"
그 말이 무거운 납덩이처럼 홀의 정적 속에 가라앉았다. 데이지는 갑자기 끓어오르는 심한 혐오감을 억누르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죄송합니다마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지 않겠읍니까?" 제이크의 음성이 얼음처럼 싸늘했다.
아버지가 되풀이했다.
"자네는 세상물을 많이 먹었을 테고, 나이도 딸아이 보다는 훨씬 많을 것 같군. 젊은 여자아이가, 여성 경험이 많고 자기보다 훨씬 연상인 남자에게 끌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일세. 데이지는 일찍부터 남자와 관계를 가졌으나 그때마다 오래 가지 못했다네. 곃혼을 약속하고도 오래 가지 않았으니, 자네와도 결혼하지 않을 걸세. 이 애가 전에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는 오늘 그 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네"
"아빠, 제발......" 하다가 데이지는 중도에서 말을 끊었다. 이미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굴욕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모두 깎아 버린 것이다. 당장에라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야지, 누구하고도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무지 발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아, 데이지는 벽에 힘없이 기댔다.
제이크가 조용한 어투로 협박 비슷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두지 않았을 테지만, 나이나 데이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참을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데이지에게는, 그만한 나이의 여성이 갖지 못한 분별력과 성실성이 있습니다. 자기 딸에 대해 그렇게도 모르고 계시니, 불쌍한 분이군요" 숨결이 거칠고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터질 듯한 분노를 필사적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 말씀이 모두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아니라면 나는 당장 데이지를 데리고 가서 사과를 받을 때까지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리처드 부인에게는 크게 경의를 표하고 있으므로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고, 또 데이지도 그렇게는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어쨌든 데이지의 언니 결혼식이므로 참석은 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아까 아버님께서 퍼부으신 중상과 굴욕에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동반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내뱉고는 홱 방향을 바꾸어, "데이지, 차에서 기다리겠어" 하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아 아빠, 어쩌면 그러실 수가 있으세요?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없이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데이지는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앞으로 발을 내디디려했으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아아, 쓰러질 것 같아....도와 줘요.... 제이크가 쏜살같이 달려와 아차 하는 순간에 그녀를 안고 차로 옮겼다. 제이크는 앞좌석에 그녀를 가만히 앉히고 문을 닫은 뒤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아 곧 차를 출발시켰다. 데이지는 뒤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열려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차가 멎었다. 똑딱거리는 시계소리와 조용한 시골길에 울려 퍼지는 새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데이지, 이것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그토록 무서워하던 이윤가?" 제이크가 돌아보고 물었다.
"아니에요. 어젯밤에 처음으로 알았어요. 아버지는 2년 전의....그 당시에 제가 한 설명을 믿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왜 그토록 곡해하게 되었는지는....전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풀이 죽어 있군....데이지" 제이크는 시선을 돌렸다. "또 다른 무엇이....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나?"
"아니에요"
"그렇다면 필립과는 이미 만났다는 얘기로군" 그는 차를 출발시키면서 단정적으로 말했다.
"네"
"그래, 좋아. 어서 가도록 하지"
30분후, 두 사람은 제이크가 묵고 있는 호화스런 콘월 호텔의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제이크가 권한 가벼운 아침을 억지로 먹은 뒤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데이지는, 그에게 아까의 일을 설명하려고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어....아까 일인데요...."
"기운을 되찾았으면, 데이지" 제이크가 재빨리 말을 중단시켰다.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그 기운을 모두 저장해 두기로 해. 그리고 나도 더 이상 흥분하기가 싫어" 어투가 냉정하고 시선은 싸늘했다.
데이지는 갑자기 따돌림을 당한 듯한 마음이 들어 시선을 떨구었다. 이 24시간 동안 그가 계속 감싸 주었기에 견딜 수 있었는데, 갑자기 이토록 냉정한 태도로 나오자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이크는 실내를 둘러보며 주위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에게도 결혼식에도 싫증이 난 거라고 데이지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무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두 손을 포켓에 찔러넣고 긴 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있는 제이크의 세련된 모습은, 방 안에 있는 다른 남자들의 모습을 흐리게 하고, 지나가는 여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려진 옆얼굴은, 엄하고 입은 꼭 다물고 있었으며 턱에는 힘이 들어가 있는데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잠시 내 말을 들어 주시겠어요?"
제이크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쉬었다.
"좋아, 꼭 하고 싶다면. 하지만 짧게 해줘.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으니까"
그 무뚝뚝한 태도에 보복이라도 하듯 데이지는 대번에 말해 버렸다.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어요, 우리 연극을. 저어, 약혼을....즉 식장에 나가는 것과 그 밖의 일을.... 이제는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 같은 위안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식에 참석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시고 싶으시면 그래도 관계없어요. 아버지가 언짢아해서 돌아갔다면 그만이니까요. 약속을 했으니 참석해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모두 이해할 테니까요"
"할 말은 그것뿐인가?'
"네"
"처음부터 그런 말이 나오리라 생각했어. 새삼스레 말할 생각은 없지만, 데이지가 말을 꺼냈으니 해두겠어. 나는 내가 싫은 것을 떠맡거나 약속하는 삶은 아니야. 이번 일도 내가 그러고 싶었기에 한 것이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만일 싫었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기회가 있었어. 알겠나?" 있새로 새어 나오는 듯한 안타까운 어투였다.
제이크가 돌아보았다.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 사이로 배어나온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언니의 결혼식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셔. 그러니까 데이지도 같이 가야만 해. 만일 오늘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방을 열어 놓을 테니 오늘 밤 파티에 올 때 짐을 가지고 오면 돼"
"아니에요. 오늘 밤은 집에서 자겠어요. 어머니가 슬퍼할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하면 아버지 역시...." 데이지가 난처하다는 듯 말을 얼버무리자, 제이크는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테지?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겠지" 하고 분명히 말한 뒤에 "그렇지만 말해 두겠는데, 만일 내가 그러고 싶다고 여긴다면 아버지가 무어라 생각하건 나는 단념하지 않아" 하며 제이크가 일어섰다.
"자아, 가지"
6
콘월 호텔은 결혼식 피로연에 아주 어울리는 곳이었다. 큼직한 프랑스식 창문을 통해 정원과 그 앞의 호수를 바라볼 수 있었고, 높은 천장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피로연회장은 이날의 연회를 위해 나무랄 데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벽면을 따라 늘어놓은 긴 테이블에는 흰 클로드가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생화가 장식되었으며, 글래스 등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배열되어 있었다. 쥐위 테이블에는 갖가지 스낵과 카나페, 작은 샌드위치 등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중앙 테이블에는 크고 흰 3층짜리 웨딩 케익이 놓여 있었다.
부모님은 입구에 서서 마지막 손님을 맞아들이고 있었고, 필립과 모니카는 팔짱을 낀 채 들러리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선물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금발인데다 핸섬한 필립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데이지의 생각은 저절로 교회 결혼식으로 되돌아갔다.
"신부입니까, 신랑입니까?" 조용한 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원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데이지는 잠시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데이지는 제단 위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쳐다보자, 이미 먼 과거가 되어 버린 소녀 시절의 향수가 가슴을 때렸다. 그 무렵은 얼마나 한가롭고 단순한 나날이었던가.
이윽고 작은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큰 오르간 소리가, 성장을 한 마을 사람들과 런던에서 온 신랑 측 친척들로 가득 찬 통로에 울려 퍼졌다.
제이크가 프로그램을 건네자 데이지는 그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순간, 제이크가 어째서 자기와 함께 여기 서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들러리와 같이 제단 앞에 서 있던 필립은 신부가 통로를 따라 걸어오기 시작하자 몸을 약간 돌려 그쪽을 지켜보았다. 데이지도 아름다운 아이보리색 공단으로 된 웨딩드레스 자락을 끌면서 긴 레이스 베일에 싸여 걸어오는 언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기 시작되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말이 교환되었다. 순간 데이지는 현기증을 느껴 쓰러질 것 같았으나 제이크의 부축으로 견딜 수 있었다. 무사히 식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문 밖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삼페인이야" 제이크가 곁에 서서 거품 이는 글래스를 내밀었다.
"고마와요"
그 찬 술을 한 모금 마시니 가벼운 구토증이 일었다. 그래서 마치 구원의 밧줄인 양 글라스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제이크는 그 누구보다도 키가 컸고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얼굴은 엄숙하고 싸늘했으며,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아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야-그 표정은 데이지가 너무도 잘알고 있었다. 지겨워, 마치 사무실에 있는 것 같아,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대관절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이때 어머니가 두 사람을 인파 속으로 끌어냈다. 데이지는 필립의 부모와 친구들을 소개받았고, 어색한 미소를 띠면서 그의 누이동생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 숙모들과 어머니 친구들이 차례차례 두 사람한테 다가와 저마다 칭찬의 말을 했다-데이지의 반지를, 드레스를, 침착한 그 태도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아세인 제이크를.
제이크와 함께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같이 있어 주는 것이 고마왔다. 어쨌든 제이크는 훌륭하다. 모든 사람이 그의 큰 키와 단정한 얼굴 모습과 눈에 띄는 매력에 이끌렸고, 그의 부와 성공을 간파하고는 데이지의 손을 잡고 선 그의 모습에 강한 이상을 받았다. 결혼식 예정은? 하는 엉뚱한 질문을 그는 가볍게 받아넘기고, 대답 대신 데이지를 정답게 내려다보고 그 뺨에 키스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졌다. 시달리다 못한 제이크는 잠시 바깥 공기를 쐬겠다고 사과하면서 데이지를 방에서 끌고 나가 위층의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자아, 이것을 마셔" 제이크가 뜨거운 커피를 내밀었다.
"고마와요"
더운 액체 탓으로 머리가 맑아졌다. 데이지는 의자등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그만 실례해도 되지 않을까요?" 데이지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아직 멀었어. 신랑 신부의 인사와 케익을 자를 때까지는 기다려야해" 또다시 냉정한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데이지는 눈을 뜨고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그는 방의 반대쪽에 서 있었으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젯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이었다. 아버지 일이 걱정되는 것일까? 일 때문에 피로해진 그의 모습은 자주 보았으나, 이처럼 무섭고 감정을 억제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게 화가 난 것일까?
제이크는 고개를 돌리고 창가로 걸어갔다.
"그런데 데이지, 어젯밤 필립과 만난 것 같은데, 두 사람 사이는 완전히 정리되었나?"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크가 창가에서 떠나 다가왔다.
"어떻게 되었지?'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한다는 약속은 한 기억이 없어요....상호간에"
"그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런던에서는 말을 잘 하더니, 지금 와서는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로군. 내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겐 들을 권리가 분명히 있어, 비록 거짓이기는 하지만 약혼중이니까. 만약 데이지와 필립 사이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면 나하고도 관계가 있어. 남의 눈에 띄지는 않았을 테지?'
데이지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어젯밤 해변에서 만난 것을 누가 보지나 않았을까? 제이크가 그곳에? 데이지는 제이크를 져다보았다. 그 눈은 크게 떠지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목이 막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만났어요" 드디어 그녀가 말했다.
"단둘이서?" 제이크가 다그쳐 물었다.
"네, 단둘이서요" 갑자기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것이 어쨌다는 거예요? 당신이 무어라 하건 우리들의 약속은 단순한 연극에 지나지 않아요"
"데이지의 그 소중한 필립에게도 그 말을 했겠지?" 입이 빈정대듯 일그러졌다.
"설마! 말할 리가 없지 않아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그 반대로, 어째서 같이 도망칠 수 없는지 설명했을 뿐이에요" 데이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제이크는 마치 그때까지 숨을 못 쉬고 있었던 듯이 휴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거절한 것인가?"
"당연하잖아요? 오늘이 결혼식인데 달리 어떻게 하겠어요?"
"그것은 이미 데이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인가?'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분명히 제이크를 실망시킨 모양이었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푹 찌르고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가ㅆ다가 다시 돌아와서 걸음을 멈췄다.
"데이지, 어느 때에 가서야 꿈에서 깰 작정이지? 그 필립이란 사람도 데이지 못지않은 몽상가야. 그는 데이지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놈은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남자야. 그런데도 데이지는 언제까지나 달콤한 꿈에 취해 있을 건가?"
"당신이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요?" 데이지가 쏘아 붙였다. "단 한 번, 그것도 2, 3분 동안 만났을 뿐인데, 어떻게 그를 알 수 있다는 건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문이 막혔다.
"그가 데이지를 돌보고, 언제나 성실하며, 데이지와 그 자식들을 위해 좋은 가정을 이룩할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나?" 제이크는 필사적으로 분노를 억제하고 있었다. "지금쯤은 지난 2년 동안 데이지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던 어두운 구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좋지 않겠어? 그리고 진실한 인생, 진실한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용케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데이지가 소리쳤다. 분노가 터져 가슴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에 대해서, 내 마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단지 당신의 여자 친구처럼 놀아나며 경험을 쌓지 못했다고 해서...." 데이지는 자기가 한 말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제이크가 바싹 다가섰다.
"내가 그런 뜻으로 말했다고 생각하나?" 아주 조용한 목소리 였다.
"아.....아니에요..... 당신이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당장 눈물이 쏟아 질 것 같았다.
제이크가 홱 등을 돌렸다.
, "내가 말하는 것은 실제적인 마음이야, 단순한 꿈이 아니라" 제이크의 음성은 다시 감정을 억제한 듯한 절박한 어투로 변했다. "데이지는 지금까지 계속 필립의 환상을 좇으며 살아 왔어. 환상은 안전하지, 상처받는 일이 없으니까. 그러나 환상에는 생명이 없고 피도 통하지 않는 거야"
그 격한 목소리에 데이지는 긴장과 불안을 느끼고 굳어진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치솟는 분노에 몸을 맡기고 있는 듯한 모습의 제이크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제이크가 방향을 돌렸다. 머리를 반듯이 세우고 누을 감은 채 경멸하듯이 입을 일그러뜨렸다.
"현실적인 인생은 데이지한테는 지나치게 괴롭겠지, 너무도 복잡하니까"
데이지는 일어났다.
"나, 밑으로 내려가겠어요."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잠깐 기다려" 제이크가 다가왔다.
"싫어요. 더 이상 이런.... 부탁이에요!"
제이크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했다.
"아마 2년이란 세월이 데이지를 그 어두운 구름에서 끄렁내어, 조금은 혼란된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을 거야" 하면서 그는 데이지의 두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한순간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제이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 돼요!" 데이지는 몸을 비틀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안 돼요, 제이크. 부탁이에요!"
도망치려 하는 필사의 저항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제이크의 두 팔에 감싸여 꼭 껴안기고 말았다. 제이크는 겁먹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머리를 숙여 데이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치고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너무나 격렬했기 때문에 데이지의 몸은 저도 모르게 제이크 쪽으로 기울고, 머리는 입술의 강한 힘에 눌려 뒤로 젖혀졌다.
몸을 비틀고 입술을 떼려 했으나 포옹은 점점 격렬해졌다. 참지 못하여 조금 벌린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격렬함을 더해 왔다. 몸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제이크의 억센 근육이 마치 화라도 난 듯 더욱 강하게 데이지의 몸을 죄었다. 이미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이지는 갑자기 저항을 멈췄다. 그러자 제이크의 몸에서도 분노가 빠져나가는 듯 힘이 빠졌다. 제이크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미친 듯한 포옹이 누그러졌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 언저리에서 관능적인 애무를 시작했다. 데이지는 문득 처음으로 자기 몸의 이상한 반응을 깨닫고 제이크이 품안에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관능이 확 타오르고,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정열적으로 키스에 응했다. 제이크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안고 흔들자 데이지는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자기를 꼭 껴안고 열렬한 키스를 퍼붓고 있는 제이크의 풍부한 고수머리를 손으로 애무했다.
갑자기 몸이 자유로와졌다. 제이크가 천천히 데이지한테서 몸을 뗐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제이크는 등을 홱 돌리고 떨어졌다. 맥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같이 된 데이지는, 뒤로 손을 뻗어 소파를 붙들고 겨우 몸을 앉히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입술이 뻐근하게 아팠다.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몸은 계속 떨렸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침묵이 한없이 계속된 듯이 생각되었다. 제이크가 데이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 눈은 창백해진 얼굴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짙은 눈썹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미안해....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데이지는 긴장 속에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었다. 기분이 언짢아질 것 같았다.
"데이지, 괜찮아?" 제이크가 깜짝 놀라 가까이 오려고 했다.
"부탁이에요....." 하고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크게 울렸다. 데이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이크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아닙니다, 점심때쯤에. 만일 상관없다면......"
데이지는 비틀거리면서 겨우 일어나 제이크 등 뒤에 있는 문을 통해 복도로 나갔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울 앞에 놓인 스툴에 앉아 거기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창백한 얼굴에 크게 뜬 검은 눈동자, 흩어진 머리. 얼룩이 진 화장. 그녀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얼굴을 다듬기 시작했다. 세수를 했더니 한결 머리가 맑아졌다. 머리를 매만지고 향수를 뿌린 뒤 입술연지를 발랐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다음 차로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버렸다.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제이크와 한 일은 깨끗이 잊어버려야 한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생각은 나중에 하자, 지금이 아니라.... 데이지는 이렇게 스스로 다짐했다.
엘리베이터로 이층에 내려가니, 제이크가 로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데이지를 발견하자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고는 가볍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피로연회장으로 돌아왔다.
황혼이 짙어질 무렵, 데이지는 제이크이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관 계단에 잠시 서서 무슨 말을 하려 했다. 데이지는 어둠 속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고마왔어요"
"여덟 시에 데리러 오겠어. 그때까지 좀 쉬어" 무뚝뚝하게 그가 말했다.
데이지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체경 앞에 섰다. 실크 시폰 이브닝드레스는 돈과 시간을 들인 만큼 가치가 있었다. 부드러운 살갗을 드러낸 어깨에서 웨이스트라인까지 잔잔한 주름이 흐르고 있었다. 연한 라일락 빛깔이 방금 감은 밤색 머리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밑에서 천천히 물결치고 있는 스커트의 감촉이 아주 좋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이드 슬릿에서 언더스커트의 엷은 핑크빛이 슬쩍 내다보이곤 했다.
아래층에서 현관 벨이 울렸다. 데이지는 검은 가죽 재킷과 백을 들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다시 한번 보고는 밑으로 내려갔다.
제이크는 홀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데이지는 층계를 내려가면서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턱시도우 차림의 제이크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어쩌면 저렇게도 잘 어울리는 것일까. 검은 웃옷과 나비넥타이를 맨 광택 있는 흰 와이셔츠가 그의 머리와 얼굴빛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데이지는 그들에게 가까이 감에 따라, 제이크가 저녁때 헤어졌을 때보다도 더욱 싸늘한 표정이 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제이크도 돌아보고 웃음을 지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고마와요, 엄마" 데이지는 앞으로 몸을 굽혀 어머니 뺨에 가만히 키스했다.
"얘, 화장이 지워지면 안 된다"
"자아, 어서 가지, 조금 늦은 것 같으니까" 제이크는 어머니 쪽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밖은 어둡고, 맑게 개어 있었다. 집의 겉창이 모두 닫혀 있었다. 두 사람은 잠자코 차에 올랐다.
"저어....." 데이지가 말을 꺼내려 했다.
"가만히 있어" 제이크가 무뚝뚝하게 말을 중단시켰다. "인사라면 필요 없어. 그러니까 잠자코 있어"
데이지는 입술을 깨물고 도로 앞쪽을 비추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시선을 보낸 채 몸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도 바보스럽게 여겨져 좀 더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러면서 데이지는 가만히 제이크를 곁눈질해 보았다. 계기판의 불빛을 받아, 핸들을 가볍게 쥐고 있는 억센 두 손이 분명하게 보였다. 크고 강력한 손-그것이 얼마나 힘 있는지는 오늘 오후에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그리고 손목에서는 금시계가 어둠 속에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애프터 세이빙 로션의 향기. 그 강한 향기는 제이크 특유의 것으로서, 씩씩한 사나이의 체취를 연상시켰다. 얼굴로 시선을 옮기자, 입술의 윤곽이 분명하게 보였다. 아랫입술이 윗입술보다 약간 두꺼워, 그 안에 풍부한 관능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데이지가 이렇게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도, 제이크는 도로 앞쪽을 응시한 채 몸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때 데이지의 몸속에서 무엇인가가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이 일어났다. 목이 답답해졌다. 그녀에게 어떤 예감이 떠올랐다. 무언가 무서운 일이 자기 몸에 닥치려 하고 있다........
토요일 밤이었기 때문에 호텔의 레스토랑은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정기적인 댄스파티로 붐비고 있었다. 입구에 나란히 서서 동료들을 눈으로 찾고 있는 제이크와 데이지는 한 쌍의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두 사람이 홀을 가로질러 혼례 테이블 가까이 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보았다.
"여기야. 늦었구나!" 모니카가 큰 소리로 불렀다. 그녀는 소파의 자기 옆자리를 몸짓으로 가리켰다. "자아, 곧 내 제부가 될 분도 이리 오세요. 데이지, 너는 해리 곁에 앉도록 해. 해리와 그렇게 약속했어"
데이지가 콘월 호텔에서 정식 만찬을 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낮의 그 방과 같이 천장이 역시 높았고, 그 천장에 매달려 있는 큰 샹들리에가 구식 선풍기 바람을 받아 조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핑크빛 커튼과 짙은 장밋빛 융단이 엷은 핑크빛 테이블클로드와 잘 어울렸다. 주위는 하나같이 우아한 야회복에 보석으로 치장한 손님들뿐이었다. 정장을 한 오케스트라가 댄스 플로어보다 한 단 높은 무대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추겠어, 데이지?" 제이크가 그녀의 의자를 끌었다.
플로어로 나간 데이지는 극히 자연스럽게 제이크의 품에 안겼다. 하이힐 덕택으로 키는 그의 턱 밑에 닿았고, 머리카락이 그의 숨결에 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플로어를 미끄러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제이크의 탄력 있는 다리가 허벅지에 꼭 닿았다. 그는 데이지를 꼭 껴안고는 그녀의 한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대었다. 몇 겹의 옷을 통해 그의 우람한 가슴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가만히 그의 가슴을 쓸어 보았다. 제이크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어 가만히 애무했다.
데이지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 너무 몸을 꼭 붙이고 있는 것이 약간 떨리기는 했으나, 그의 품안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심장은 낮의 그때처럼 두방망이질치고, 몸은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고개를 약간 들자, 필사적으로 그녀의 눈을 탐색하려는 제이크의 눈과 마주쳤다. 데이지는 깜짝 놀랐다. 표정은 부드러웠으나 두 눈에는 강렬한 빛이 깃들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는 곧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고 시선을 돌렸다.
데이지는 그 강한 눈길과 그때 받은 충격에 당황했다. 계속 그에게 안겨 있었으면 하는 이 강한 소망-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이 기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이 사랑이란 걸까? 제발 그렇지 않았으면, 하고 데이지는 바랐다. 제이크와 자기는 전혀 이질적이다. 그와 맞설 만한 경험도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어차피 짝사랑일 테니까.... 제이크는 여자의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분대로 상대를 바꾸는 남자다...... 아아, 안 된다!
"저어, 잠시 교대해 주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필립이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둘이서 좀 쉬려 하던 참입니다" 제이크가 싸늘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면 됩니다" 필립은 부탁한다는 듯이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플로어를 한 번만 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설마 안 된다고 하진 않겠죠. 그 후부터는 평생토록 데이지는 당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어?" 제이크가 데이지를 쳐다보며 물었다.
"곧 뒤따라가겠어요, 제이크" 그녀는 제이크의 시선을 피하며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이크는 그녀의 팔을 얼른 놓고 두 사람 곁을 떠낫다.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필립이 그녀를 안자, 두 사람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늘은 한 번도 데이지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줄 알았어, 저 친구가 경찰견처럼 지켜보고 있어서 말이야. 쓸쓸했나?" 필립은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으며 머리에 입술을 댔다.
"안 돼요, 필립! 당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에요. 나를 희롱하면 안 돼요" 데이지는 몸을 약간 뗐다. 그에게 안겨 있는데도 전처럼 무릎이 후들거리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희롱한다고? 내가 그런다고 생각하나?" 목소리가 날카로왔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당신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이미 언니의 남편이에요. 즉 나한테는 형부예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꽤나 시치미를 떼는군. 어젯밤 해변에서 만났을 때 하고는 아주 다른데. 데이지의 마음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아직도 전과 같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렇게 느꼈어-어젯밤 키스했을 때"
"아니에요, 필립. 그렇지 않아요, 어젯밤엔 당신을 만나 깜짝 놀라서 그랬던 거예요. 아마도 그리웠던 마음에서...... 단지 그것뿐이에요" 데이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데. 참, 데이지는 약혼을 했지. 그러나 결코 오래 가지는 않을 거야" 장담한다는 식의 어투였다.
"무슨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친구와 데이지는 너무 차이가 많아. 나이도 그렇거니와 그는 세상을 너무 잘 알고 있어. 데이지와 아기를 집에 내팽개쳐 두고 일 년 내내 돌아다닐 타입이야. 생각해 보니, 데이지는 나한테 감정이 없으니까 그쪽으로 바꾼 것 같아. 특히 상사니까. 비서는 거의 대부분이 보스와 사랑에 빠지게 마련이야. 그러나 결혼에는 이르지 못하지. 그가 일단 다음 여자에게로 옮겨 가게 되면, 데이지는 각성을 하고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될 거야"
데이지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와 같은 일을 그녀 자신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필립이 그런 말을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제이크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유감이지만 필립,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나의......피앙세에 대해서......." 침착하고도 분명한 말이었다.
필립은 놀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데이지는 정말 그에게 열중해 있는 모양이군. 그래서 이 반지인가? 이 정도는 나도 줄수 잉어. 데이지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어. 이 반지도, 그 친구도 잊어버려야 해. 분명히 말하겠는데, 그는 데이지를 농락하고 있을 뿐이야. 절대로 오래 가지 못해"
필립의 말에 데이지는 기묘한 고통을 느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어라 해도 필립은 나를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는 나보다도 앞을 잘 내다볼 것이다. 그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했다.
데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무엇이 변한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도 깨닫고 있던 일이다. 다만 그 말을 남이 함으로써 자존심이 상했을 뿐이다.
"그럴 리가 없어" 필립은 데이지의 귓전에 속삭였다. "데이지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어. 런던에서 만나기로 해. 정말 사랑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겠어. 왜냐하면 난 완전히 데이지에게 열중해 있으니까. 내게는 데이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필립, 머리가 좀 어떻게 되지 않았어요? 언니와 결혼하고서 몰래 만나자니, 진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도대체 나를 뭘로 생각하세요?' 이번에야 말로 정말로 화를 냈다. "이제 나는 자리로 돌아가겠어요."
"데이지, 나는 그런 줄 알고....."
"자아, 필립" 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춤추던 행동을 멈추고 필립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자리에 돌아오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예의 바르게 일어섰다. 문득 눈을 든 데이지는 제이크의 찌를 듯한 시선을 느꼈다.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두 손을 꼭 쥐고 침착하려 했다.
드디어 마지막 댄스였다. 데이지는 이미 지쳐 있었다. 그녀는 신청을 받는 대로 남자 손님 전부와 춤을 추었다. 단 한 사람 제이크를 제외하고. 제이크는 그 이후 한 번도 춤을 추자고 하지 않았다. 그도 쉴 새 없이 상대를 바꾸어 가며 즐거운 듯이 춤을 추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데이지는 도저히 눈으로 뒤쫓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시당해서 의기소침해진 자기 마음을 달래면서, 그리고 지금, 그는 곁에 와 서 있었다.
"자아, 어서" 제이크가 무뚝뚝하게 재촉했다.
플로어에 나가자 제이크는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 방 안은 조명이 꺼져서 어두웠다. 두 사람은 꼭 부둥켜안고 화려한 왈츠 리듬에 맞춰 조용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뺨에 닿았던 입술이 입으로 미끄러져 왔다. 데이지는 가만히 머리를 들었다. 격렬한 입맞춤에 불꽃이 튀고, 제이크를 원하는 뜨거운 열망이 온몸에 줄달음질 쳤다.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꼭 죄면서 키스를 되돌리자, 제이크의 입술은 더욱 격렬하고 정열적으로, 마치 내 것이란 듯이 데이지의 입술을 탐했다. 두 사람은 그러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몸을 꼭 겹친 채, 주위의 모든 것을 잊고.... 이때 갑자기 음악이 멎고 조명이 켜졌다. 제이크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안 듯이 하면서 데이지에게 침착해질 시간을 주었다. 그러고는 나란히 테이블로 돌아와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계기판의 시계가 거의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로는 비다시피 했으므로 차는 순식간에 집에 닿았다. 눈을 뜨고 제이크를 바라보니, 그는 차를 집 앞에 세우고 라이트와 엔진을 켜 놓은 채로 있었다. 데이지는 제이크의 키스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관까지 바래다주지 않아도 될까, 차를 곧 돌리고 싶은데?'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문을 열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이때 제이크가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두 손으로 핸들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을 그녀는 추호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럼 내일 아침 열 한 시 반쯤에 데리러 오겠어......아니, 오늘이군"
"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현관까지 달려갔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그녀의 몸을 스쳐 지나간 다음 순간, 차는 이미 커브길을 돌아 사라지고 없었다.
7
데이지는 얼굴에 내리비치는 했살 때문에 눈을 떴다. 손목시계를 보니 열 시 반! 그녀는 침대에서 뛰어 내렸다. 기분은 샹쾌했다. 오늘 하루를 활기 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잤니?"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 음성에 생기가 있었다. 그녀는 딸의 밝은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나서 다시 베이컨과 토스트를 굽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크게 활약했다면서? 배가 고플 것 같기에...."
"네 고마와요. 무척 배가 고프군요"
"다행이야. 기다리고 있었지, 같이 먹으려고. 어젯밤 파티는 아주 성대했던 모양이지? 오늘 아침 모니카와 출발하기 전에 전화를 했는데, 아주 기쁜 모양이더라"
"네, 훌륭했어요. 그런데 아빠는 어디 계세요?' 데이지는 주위를 둘러보며 무심코 물었다.
"참, 제이크와 같이 나가셨어"
"뭐라고요?" 데이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데이지, 그렇게 큰 소리 치지 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음, 괜찮아.....나도 약간 놀랐지만. 제이크가 아침 일찍 인사 전화를 걸어왔는데, 아빠가 그 전화를 받으셨어. 그래서 둘이 만나자고 한 거야. 골프클럽에서 한잔하자면서"
"아아 엄마, 그 정도로 그쳤으면 좋겠는데. 나는 곤란해요. 제이크에게....."말이 끊어졌다.
"알고 있어, 나도 같은 마음이니까. 애써 말렸지만 워낙 고집이 센 양반이라서. 제이크에게 사과하러 갔을 뿐이야....저어, 어제 일을 말이다.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어머니가 기운을 북돋우듯이 말했다.
데이지는 제이크를 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직감했다. 아버지와 같이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 몹시 불쾌해 보이고 시무룩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친에게 작별을 고할 때는 웃는 낯으로 명랑한 체했으나,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역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데이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침묵을 깨려고 했다.
"제이크, 집에 도착하기 전에 가족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겠어요? 당신의 생활이나 그 밖의 것을 내가 알아 두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그만뒤. 무엇 때문에? 집에 가 보면 모두 알게 될거야. 모르겠으면 그때 물으면 되고, 지금 여기서 내 내력을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어. 되는 대로 맡겨 두면 되는 거야"
그로부터 30분 후, 그녀는 다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저어, 아버지하고? 아버지가 무어라 하던가요?.....또다시 실례되는 말을.....당신을 화나게 하는 말을...."
"아니, 별로. 그러니까 화를 내고 있지도 않아. 데이지 가족의 일로 왜 내가 화를 내겠어" 제이크는 천천히 말하고 나서 잠시 후에 말을 계속했다. "데이지, 이미 이번 주말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야. 데이지에게 있어서 최악의 사태는 지나갔으니까. 남은 것은 우리 아버지뿐이야. 그것이 끝나면 나는 되도록 빨리 런던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데이지는 입술을 깨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이크의 말이 옳다. 자기는 마치 분별없는 소녀와 같다. 그의 기분 따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원래 이것은 모두 제이크가 생각해 낸 각본이 아닌가. 내가 아니다. 만일에 실패하더라도 책임은 그에게 있는 것이다. 일이 조금이라도 스무드하게 진행 되었으면 하는 생각 따위는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데이지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틀 전, 집으로 돌아가던 때하고는 얼마나 많이 달라진 것일까.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떠들어대던 일이 꿈만 같았다.
이 기분.....이 기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불꽃과 같고 방종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한 동경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싶었다. 분명히 제이크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랑해야 좋을 것인가? 나에게 가능한 일일까? 한순간이지만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런 일을 하면 오히려 싫증이 나서 버림받지나 않을까? 런던에 돌아가면 아마 이런 일은 모두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마 친밀해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탓이리라. 그리고 여자에 대한 제이크의 수완과 경험. 역시 그는 연애 유희의 명수인 것이다. 철부지인 나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완전히 녹아 버렸으나, 그는 아무렇게도 생각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서로의 그 농도 짙은 접촉도 아마 완전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런던에 돌아가면 그와는 다시 전처럼 상사와 비서의 관계로 환원될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이 주말의 일을 완전히 잊고..... 결국 서로가 자신을 위해 연극을 해냈을 뿐이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자아, 연기를 해야지. 그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아니었던가.
"데이지" 제이크가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도착이야. 아직 자고 있나? 용케도 잘 자는군"
"미안해요. 하지만 잔 것이 아니에요. 잠시 생각에 잠겼을 뿐이에요"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음...."
제이크의 마음이 조금 풀린 듯이 생각되었다.
메바기스가 가까와지자 제이크는 차를 내륙으로 향했다. 몇몇 도로 표지를 지나쳐 항구가 바라다 보이는 마을을 통과하니 마침내 목표로 삼은 포셀론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종려나무가 콘월 해안의 기억을 되살리게 했다. 눈 아래로 멀리 바다가 바라다보이고, 바위투성이인 벼랑 밑에는 작은 샛강을 사이에 둔 조용한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길은 이미 좁아지고 있었다. 제이크는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달리다가 갑자기 커브를 돌아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자갈이 깔린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고는 흰색과 보라색 라일락 관목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석조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이제 다 왔어"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집 한쪽을 에워싼 잔디밭은 멀리 있는 자그마한 호수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집의 다른 한쪽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집 뒤로 펼쳐져 있는 뜰은 아마 바다에 면해 있으리라. 일층은 조각을 한 묵직한 돌난간이 있는 테라스를 향해 프랑스식 창이 열려 있었다. 담쟁이덩굴이 돌벽을 타고 2층까지 뻗어 올라가 봄의 밝은 했살을 받고 있었다. 갑자기 떡갈나무로 된 육중한 현관문이 열렸다. 순간 한 소녀가 달려 나와 제이크에게 매달리면서 그 입술에 열렬한 키스의 세례를 퍼부었다. 두 사람의 깊은 로옹이 영원히 계속될 것같이 생각되었다. 데이지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선 채, 온몸에 한 줄기 오뇌의 눈물이 치닫는 것을 느꼈다.
제이크는 몸을 풀고 소녀를 보았다.
"잘 있었어?" 그는 소녀에게 물은 뒤 손을 데이지에게 내밀며, "이 쪽은 애니타 울라드, 이웃집 말괄량이지" 하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데이지를 끌어당기며, "이쪽은 내 피앙세인 데이지 리처드야" 하고 말했다.
소녀는 데이지의 화려한 옷차림에 잠시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는 증오의 표정을 지었다.
"네, 그래요?" 이렇게 시큰둥하게 말하고 그녀는 제이크의 비어 있는 팔에 매달려 그리운 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데이지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갸름한 얼굴을 덮고 있는 짙은 갈색 머리와 담갈색 피부, 그리고 커다란 갈색 눈이 앵두 같은 입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레저 팬츠에 스트레치 셔츠, 셔츠의 단추가 봉곳하게 솟은 가슴 위에서 겨우 잠겨 있었다. 모양 좋게 부푼 가슴-열여덟 살쯤 되었을까.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제이크가 물었다. "집에요. 무척 기다리셨어요"
"아가씨하고도 점심을 같이 나눌 수 있을까?"
"안 돼요. 집에 손님이 계세요. 손님을 대접하라는 아빠의 명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제이크, 나도 손님의 마음을 끌 수 있을까요?"
"글쎄" 제이크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처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언제나 심술 사나우시다니까요!"
"미안, 미안. 사과하는 뜻에서 식사 전에 잠시 달리는 것이 어떨까? 승마복 가져왔나?" 그러고는 데이지에게 방햐을 돌려, "데이지, 30분 정도 아버지를 상대해 주겠나? 잠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그래" 하면서 몸을 굽혀 데이지의 뺨에 키스를 했다.
"물론 좋아요" 데이지는 얼굴이 빨개진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이리 와, 말괄량이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지"
밝은 색 목재로 꾸며진 홀에 들어가자,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방의 구석에서 아치형 통로를 통해서 나왔다. 데이지는 그 노인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제이크와 너무나 닮았던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분명히 알 수 있는 큰 키, 넓은 어깨, 긴 다리, 예리한 잿빛 눈, 그 모든 것이 거기 또 있었다. 모양 좋은 입매와 윤곽이 뚜렷한 턱도.
이윽고 노인이 불빛 속에 들어오자 환상은 사라졌다. 머리가 하얗고 코에서 입에 걸쳐 깊은 주름이 패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눈은 아직 강한 빛을 띠고 있으나 초점이 흐렸고, 볼에도 살이 없었다. 그러나 표정은 똑같았다. 제이크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될 것이다. 데이지는 갑자기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그 충격으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문득 등 뒤에 있는 제이크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몸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뇌에 찬 어두운 시선을 데이지에게 쏟고 있었다. 격한 감정-무언가 마음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생각에 사로잡힌 듯이....
데이지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이크 곁으로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고는 발끝으로 서서 살짝 입을 맞췄다. 제이크가 발작적으로 허리를 꼭 껴안았기 때문에 데이지는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대로 가만히 있자, 마침내 그는 팔의 힘을 늦추고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데이지양인가요?'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제이크와 똑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언젠가는 저 애가 소개할 테지만, 내가 바로 저 애의 애비요"
제이크가 허리를 굽혀 아버지에게 키스했다.
"아버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의자를 밀고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은 검은 나무로 천장을 엮은 넓고 나지막한 방으로서, 한쪽 구석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고, 낮은 소파가 벽을 등진 채 배치되어 있었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부터 오후의 햇살이 방 안 가득히 비쳐들어 실내의 갖가지 청색-담청색 벽, 푸른 융단, 청색 벨벳 소파, 담청색 린네르 커튼에 이르기까지--을 반사하고 있었다. 벽에는 군데군데 가족사진이 걸려 있고, 요트 판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데이지는 입구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마음에 들었나요? 자아, 여기 와 앉아요, 아가씨" 험프리씨는 기쁜 듯이 말하고, 휠체어를 능숙하게 조종하여 소파 곁으로 갔다.
잠시 후, 제이크는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애니타와 함께 나가 버렸다.
"자아, 우리는 편히 쉬기로 하지" 험프리씨는 휠체어를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데이지의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음, 아들놈이 열을 올릴 만하군. 정말 아름다와' 하고 그는 숨을 크게 쉬었다.
데이지는 얼굴을 붉혔다.
"저런, 얼굴이 붉어졌군. 귀여운 아가씨야. 지금 세상에 얼굴을 북히는 여성이 있다니, 신기한 일이군. 그러고 보니 아들 녀석을 칭찬할 수밖에 없는걸."
데이지는 시선을 돌렸다. 대관절 이 사람은 나한테 무엇을 물으려 하는 것일까?
"아가씨한테 이것저것 물으려는 것은 아니야.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이 아버지도 아들처럼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같앙ㅆ다. 데이지는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져 의자 등에 몸을 기댔다.
"이 방은 아주 포근하군요. 그리고 전망이 좋아서 부럽기 짝이 없어요"
"그래요. 나는 어려서부터 줄곧, 그러니까 40년이나 여기서 살고 있지. 아내가 죽었을 때, 추억 때문에 더 괴롭지 않겠느냐며 이사를 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사하지 않았지. 다른 데로 이사했더라면 무척 답답했을 것이고, 제이크는 어머니뿐 아니라 집까지 잃었을 거요. 덕택에 아들은 여기서 자랄 수 있었고, 나 못지않게 이곳을 좋아하고 있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아, 이번에는 아가씨 이야기를 좀 들읍시다. 언니가 한 분 계신다면서? 어제 결혼했다고 하던데?"
"네, 훌륭한 결혼식이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신혼여행중입니다. 부모님도 안심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가씨는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인가요?"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상사로서의 아들 녀석이? 마음에 드나요?"
"저는 지금 하는 일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제이크는 우리 사원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끔 해주는 친절한 상사랍니다. 회사에서는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엄하니까요. 하지만 가장 엄한 것은 남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두 그의 밑에서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죠, 잘했을 때는 서슴없이 칭찬을 해줍니다."
"아, 그 정도면 알 만해요. 그런데 아가씨는 계속해서 직업을 갖기를 원하고 있나요? 즉 결혼한 후에도 일을 할 생각인가요?"
이런 질문이 올 것은 미리 예상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 사람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 데이지는 주저했다.
"저는 직업여성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잘 모릅니다마는" 그녀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리는 많은 여성들이 결혼하거나 아이가 생기면 일을 그만두게 되므로 저는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경우에는....그러니까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할지 어떨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 일을 계속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이를 남한테 맡기고 싶지 않으니까요"
"조하요" 하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불만인 것은 아니요. 아가씨 같은 젊은 처녀들은 대부분 아직 그 같은 불안이나 망설임은 갖지 않을 테니까. 제이크한테 아직 듣지 못했는데, 나이는....스물하나 정도요?'
"그 정도예요" 하고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인생을 얘기할 때, 아버님의 경우가 불안이나 망설임이 훨씬 적지 않을까요? 저보다는 훨씬 많은 인생을 걸어 오셨으니까요"
"그것은 그렇지만.... 저 애니타를 좀 봐요. 열두 살 때 이곳에 이사 왔는데, 저처럼 노상 출입하면서 제이크를 목표로 하고 있거든, 아가씨보다 어린데도 무슨 일에나 암ㅇ설임이란 것이 없지. 자기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 시종 일관 제이크뿐이야" 여기서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늙은이가 하는 말이라 신경쓸 것은 없지만, 한때는—그러니까 최근의 일인데-아들 녀석이 그녀와 결혼했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 그 처녀라면 딸과 같고 더구나 이웃이니까.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아들이 걱정하더군. 그러다가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갑자기 마음을 굳히게 된 모양이더군. 아들 자신이 결정한 일이고, 나 역시 기뻐요. 이렇게 나가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손자의 얼굴을 보게 될 것 같군"
데이지는 목이 죄는 듯했다. 당연히 예상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생각하면 그런 여자가 제이크에게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아, 이 거짓과 흔들리는 마음에서 빨리 탈출할 수 있다면! 데이지는 맥이 빠져 의자 등에 기댔다.
'정말 그것만이 낙이지....손자 얼굴을 보는 것이. 지금은 그 애에게만 의지하고 있어요...외아들이니까. 그 녀석이 옛날에는 내 속을 많이 태웠지. 아내가 죽고 내가 아직 몸이 불편해지기 전의 일이요. 그때 제이크는 열 한 살이었는데, 어미를 무척 사랑했다오. 죽어서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밤낮없이 서성거리며 잠을 안 잤어요. 그 애가 불면증에 걸린 것은 그때부터였소. 하교는 결석하기가 일쑤고, 기숙사에 넣으면 뛰쳐나오곤 해서....당연히 공부도 하지 않고, 시험을 안 보겠다, 대학에도 가지 않겠다 하며....아아, 그때는 정말 혼이 났지. 친구도 없고 또 원하지도 않고....언제나 쓸쓸하고 얼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 지금도 가끔 그런 표정-아까 여기 왔을 때 보였던 그런 표정이 되살아나곤 해요. 그런 표정를 짓고 있을 땐, 나는 그 애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요" 한숨을 쉰 뒤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광고 일을 맡게 되면서 그 일이 제이크의 적성에 맞았던 거예요. 그 후부터예요, 그 애가 과거를 돌이켜보지 않게 된 것이. 알다시피 일에 전력을 쏟고 있거든. 그리고 요트. 그 밖에는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거요. 여자에게까지도, 하고 나는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젠 그 걱정도 없어지게 되었군, 이처럼 예쁜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으나까" 그는 갑자기 몸을 세우고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무릎을 탁 쳤다. "아니, 이거 미안하게 됐군. 아가씨 이야기를 들으려 했는데, 나 혼자 지껄였으니. 그런데 무얼 좀 먹어야 하지 않을까?'
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제이크와 애니타가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들어왔다.
"지금 왔습니다." 제이크는 곧바로 캐비닛 쪽으로 갔다. "심각한 분위기로군요.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었습니까? 애니타, 무얼 마시겠어?"
승마 바지에 번쩍이는 갈색 승마 구두 차림의 제이크는 반할 만큼 멋이 있었다. 오픈 셔츠의 앞깃 사이로 했볕에 탄 늠름한 목과 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네, 고마와요." 애니타는 글라스를 받아 들고는, 제이크가 앉기를 기다려 그 발밑에 앉았다.
"앙, 완전히 스타일을 구겼어. 런던에 돌아가거든 좀 더 연습을 해야지. 최근에 좀 게으름을 피웠더니, 원. 하기야 다른 일 때문에 머리가 꽉 차서" 그는 데이지 쪽에 대고 글래스를 약간 쳐들면서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땠읍니까?"
"아주 화기애애했지. 네가 걱정할 것은 없다. 그건 그렇고, 점심을 먹어야 하지 않겠니?'
나른한 오후의 한때였다. 충족된 마음으로 누워 있으려니 눈이 저절로 감기며 스르르 잠이 왔다. 이때 갑자기 애니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크는 어디 있죠?"
"저어......글쎄요. 서류를 체크하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데이지는 긴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이 지겨워. 그렇다면 서재에 틀어박혀 있겠군.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는 언제나 저런다니까. 잠시 들여다보고 올게요" 부리나케 달려가는가 싶자 곧 홀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크.....제이크, 들어가도 좋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이크, 안에 있죠? 다 알고 있어요. 얌전히 있을 테니까 열어줘요, 약속하겠어요. 네, 제이크? 아아....." 그녀는 차차 목소리를 높였다. "싫어요! 이제 난 몰라요!" 하고는 곧 테라스로 돌아옸다. "안에 있으면서 대답도 하지 않아요!"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그래요?"
"듣기 싫어요, 아무 말도 마세요!" 애니타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막으며 어린애 같은 투로 말을 이었다.
"흥! 반지를 꼈다고 그렇게 뽐내지 마세요! 그가 정말 당신하고 결혼할 줄 아세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제이크는 나와 결혼할 거예요. 이미 몇 년 전부터 정해져 있는 일이에요. 지금도 아무 변함이 없어요" 애니타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은 당신한테 열중해 있는지 모르지만, 오래 계속되진 않을 거예요. 좋아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안 돼요. 그가 아내한테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 있다는 듯이 계속했다. "런던에서 많은 여자와 관계하겠지만, 그는 반드시 나한테 돌아올 거예요. 나한테는 다른 남자의 손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결국 다른 남자의 손때가 묻은 당신과 같은 여자를 그는 바라지 않아요."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애니타는 자기가 지나친 말을 한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데이지는 천천히 일어나며 소녀를 마주 보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 눈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의 싸늘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누구한테 열을 올리건 그것ㅇ은 그의 자유야. 하지만 그 순진한 체하는 가면 속에 더러운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군요. 당신은 틀림없이 둔감하고 이기적이며 버릇없는 사람일 거예요. 그러한 당신이 나한테 사랑을 설교하다니, 당치도 않은 착각이에요.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나누어 갖는 일이고, 상대를 생각하는 일이에요. 그것은 때로 웃음이기도 하고 침묵이기도 하며 다정함이나 정열이기도 하지만, 결코 탐욕이나 억지는 아니에요" 그녀는 단숨에 말해 버리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생겼다. "사랑은 당신의 유치한 욕심과는 거리가 멀어요. 알아들었으면 앞으로는 버릇없는 말은 하지 말아요"
소녀의 얼굴에서 돌린 시선이 곧바로 제이크의 시선과 부딪쳤다. 그는 문에 기대어 서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꿈꾸는 듯한 눈초리로. 놀람과 충격으로 데이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응시했다. 순간, 데이지의 마음에서 일체의 불안과 혼란이 사라졌다. 마치 지금까지 시야를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히고 꿈에서 깨어난 듯, 그녀는 분명히 진실을 깨달았다-자기가 제이크를 사랑하고 있다는 진실을.
제이크가 가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목이 죄어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불가사의한 기쁨,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떨림도, 갈증과도 같은 동경도..... 이제 모든 의문이 얼음처럼 녹고, 며칠 동안 그 격심했던 마음의 동요의 원인이 밝혀졌다. 데이지는 제이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기 표정에서 그가 무엇을 읽건, 그런 것은 염두에도 없었다.
이때 갑자기 애니타가 움직였다. 그녀는 흐느껴 울면서 제이크 곁을 빠져나가 호로 사라졌다. 데이지는 소름이 끼쳤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거짓 약혼도, 자기가 왜 여기 있는가 하는 것도, 또 지금 뛰쳐나간 제이크의 젊은 연인에 대한 것조차도...... 그녀는 제이크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비틀거리면서 테라스에서 뜰로 내려갔다, 마음속의 모든 것을 꿰뚫어볼 듯한 그 예리한 시선에서 도망치려 하면서.
데이지는 바다를 향해 있는 돌 위에 걸터앉았다. 태양은 모습을 감추고, 바위에 와 닿는 바람도 찼다. 내가 이렇게도 맹목적이었다니..... 필립도, 언니와 어머니조차도 깨닫고 있었을 텐데..... 눈앞에 놓인 것은 절망뿐이었다. 애니타의 말이 옳았다-제이크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애니타다. 언젠가 결혼하게 될 상대도 애니타인 것이다. 비록, 그동안에 몇몇 여자를 좋아하게 될지는 몰라도.
그런데도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이 사랑과 정면으로 부딪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부딪쳐서 획득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랑일까? 전혀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직장은? 이런 마음으로 같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날마다 얼굴을 대하면서,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생각해 봐야 소용이 없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취해야 할 최선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이크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런던까지의 먼 길을 도저히 같이 돌아갈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되면 곧 눈치 채게 될 것이다.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등 뒤에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제이크가 서 있었다.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면서.
"이제 출발해야지, 늦어질 테니까"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데이지가 제이크를 보고 말했다.
"제이크, 정거장에서 내려 주세요. 저는 기차로 돌아가고 싶어요"
제이크는 이 말을 무시하고 계속 차를 몰았다.
"제이크, 내 말이 안 들리세요?" 그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말다툼이 하고 싶다면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하는 것이 좋겠어" 데이지는 그 말을 듣고 주저했다. "일요일 이 시간에 만일 기차가 있어 곧 탈 수 있다 하더라도 도착하려면 밤중이 되어야 해. 그것을 알고 하는 말인가? 내가 훨씬 더 빨리 도착할 거야"
"미안해요.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이런 드라이브에는 싫증이 났기 때문에 기차를 타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좋아. 데이지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으니까. 아마 서로의 이용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일 테지' 제이크는 한숨을 쉬며 흘러내린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렇지만 기차로 돌아가겠다는 어리석은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을 하고 싶지 않으면 잠자코 있어도 돼. 그리고 자고 싶으면 자도 좋아. 나도 여섯 시간 후에는 잘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다가 제이크는 생각을 바꾼 듯,
"좋아, 정 그러고 싶다면 할 수 없지" 하면서 차를 역 쪽으로 몰았다. 이윽고 그는 역 구내에 차를 세웠다. "데이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기차가 있는지 보고 올 테니까"
데이지는 혼자 남게 되자 지나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앞으로 몇 시간은 같이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런 것을 제이크를 화나게 하고 혼자 돌아가야만 하다니. 같이 가자고 왜 좀 더 강력하게 말해 주지 않는 걸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거야. 아아, 이것이 살ㅇ이라는 것이라면, 사랑 따위는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앞으로 2, 3 분 후면 열차가 들어와요. 서두르면 시간에 닿을 수 있어. 선로를 걸어가, 어서!"
제이크는 한 손에 데이지의 슈트케이스를 들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로를 건너기가 바쁘게 차단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며 맞은편 플랫폼으로 뛰어올라갔다.
"자아, 기차표!"
"네, 고마와요"
"데이지, 저어......." 제이크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 기적 소리에 입을 다물고는 "기차야!" 하고 요란한 기적 소리에 못지않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열차가 멎자, 그는 1등실의 콤파트먼트 문을 열었다. 슈트케이스를 받아들려고 데이지가 돌아보니, "들어가' 하면서 데이지의 뒤를 따라 기차에 오른 뒤 선반에 슈트케이스를 얹었다. 그리고 돌아다보는 바람에 두 사람은 부딪쳤다. 순간, 몸과 몸이 닿았다. 제이크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했다. 그 손이 발작적으로 팔을 꼭 쥐는가 싶자 어느 틈에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데이지는 고개를 들었다.
이때 바로 가까이에서 발차를 알리는 차장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크는 그녀를 놓아주고 재빨리 폼으로 뛰어내렸다. 동시에 차장이 문을 닫았다.
'조심해서 돌아가!" 제이크는 열린 창문을 통해 이렇게 소리치고는 등을 돌려 사라져 갔다.
곧 이어 기차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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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는 아침 일찍 출근했다. 평소의 월요일과 아무 차이가 없었다. 금요일에 리자가 잊어버리고 그냥 간 컵을 씻고 커피를 준비했다. 다음에는 개봉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우편물을 갖다가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을 따로 골라 놓고는 나머지를 다른 주요 서류와 함께 그의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어젯밤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정거장마다 어김없이 정차하는 기차 여행은 한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데이지는 저물어 가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너무나 피곤하고 맥이 빠졌기 때문에 생각할 힘도 없었다. 더구나 모피 코트를 제이크의 차에 두고 왔기 때문에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그리고 열차가 멎거나 라이트가 명멸할 때마다 눈을 뜨곤 하면서 드디어 한밤중에야 패린튼 역에 닿았던 것이다. 운좋게 택시를 잡아타고 아파트로 돌아와 금방 침대에 쓰러졌다. 곧 잠이 들기는 했으나 몇 번이나 악몽에 시달리다가 4시에는 잠에서 완전히 깨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일어나 불을 켜고 커피를 끓였다.
문득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마비되어 있던 감정이 수면과 온기로 갑자기 눈을 뜬 것이다. 마음을 덮고 있던 안개가 걷히고,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제이크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의 곁을 떠나 새로운 일거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비서가 상사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흔히 있지만 결코 결혼은 하지 못한다..... 필립의 말이 옳다.
필립...... 꼬박 하룻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데이지는 깨달았다. 제이크의 말처럼, 필립에 대한 생각이 환상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필립을 사랑했었다. 그 살랑은 지금 제이크에게 향한 것 같은 그런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꿈과 현실......
이번에도 제이크의 외모에 끌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제이크와 항상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웃고 같이 이야기하고 무언지 모르게 보호를 받고 싶고, 내가 그를 필요로 하듯이 그도 나를 필요로 했으면 했다. 데이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고 아이러니컬한 생각을 했다. 여기에 비하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참아야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제이크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 비록 그가 바란다 해도. 더구나 그럴 마음이 있을 리가.... 아마 주말의 순간적인 키스나 포옹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곳 런던에는 안드리아 템플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에게는 마찬가지다.
한시라도 빨리 그의 곁에서 떠나야지. 그리고 런던에서도. 그러면 세월과 함께 고통도 사라질 것이다. 또한 그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될 테지.......
"아녕, 데이지? 오늘 아침은 무척 이르군" 제이크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데이지에게 일별을 던진 채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데이지는 비틀거리는 몸을 책상에 의지하여 자신을 위로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해야지. 해야만 할 일도 산더미같이 있다.
잠시 후, 인터폰에 불이 켜졌다.
"데이지?"
"네?"
"커피를 좀 주겠나?'
"네, 곧 가져가겠어요."
데이지는 커피를 따라 가지고 노크도 없이 제이크의 방에 들어갔다. 컵을 데스크에 놓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고마와" 하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반지는 어떻게 했지, 약혼반지 말이야? 설마 잃어버린 건 아닐 테지?'
"아니에요, 잃어버릴 리가 있어요. 빼놓았어요" 그녀는 강한 어조로 부인했다.
"어째서?"
"잊었나요, 약속했던 일을.....?"
"약속이라니, 무슨?"
"사무실에서는 끼지 않겠다는 약속 말이에요"
"그런 약속을 했었나? 기억에 없는데" 그는 의자등에 깊숙이 기대며 데이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눈 밑에 그늘이 생긴 것을 그녀는 얼른 알아차렸다. "데이지의 코트는 내가 맡아 가지고 있어, 차 안에"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아, 그랬었군요. 그런데 저어......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좋아. 오늘 저녁에 식사라도 같이 하지. 일곱 시 반에 데리러 갈께"
"아니, 저어.....지금 말씀드리고 싶어요. 2. 3분이면 돼요"
"안 돼. 한 시간 뒤에 회의가 있어. 그때까지 산더미같이 쌓인 이 서류들을 훑어봐야 하거든. 그 뒤에는 다른 볼일로 외출하게 되었어. 어쨌든 지금은 얘기할 수가 없어" 냉담한 어투였다.
하지만 저녁에 같이 식사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저어, 오늘 저녁은 약속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데이지와 이야기할......아니,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겠는데' 제이크가 쌀쌀하게 말했다. 데이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봐, 데이지. 우리는 몇 번이나 식사를 같이 했어. 내가 식탁에서 한 번이라도 데이지를 나처하게 한 일이 있었나?"
데이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나 제이크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제이크는 이미 펜을 쥐고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잡으면서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데이지, 오늘 저녁의 약속을 취소할 수 없을까? 데이지가 다른 약속으로 들떠 있는 동안 멍청히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알겠어요" 데이지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고급 레스토랑의 한 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잘 먹었어요, 제이크. 정말 맛있었어요"
"다행이야. 이제야 웃는군" 제이크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데이지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글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제이크가 그것을 빼았아 왼손에 들고 반지를 끼었던 손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순간 데이지는 마음이 어지러워서 손바닥에 키스 당했을 때의 일을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하려던 이야기는 뭐지?' 제이크가 물었다.
아까 여기 도착했을 때, 식사하는 동안만은 일체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제이크가 정식으로 데이트를 신청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아마 최초이자 최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껏 즐겨야지. 그녀는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갖고 부담 없이 한때를 즐겼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이다.
"저런, 그렇게 어려운 이야긴가?' 희미하게 웃음을 띠고 제이크가 물었다.
"네, 약간.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해서요"
"그렇다면 말하지 않으면 되지 않나?'
"아니에요, 이야기해야만 해요"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이야기를 꺼냇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습니다. 후임이 결정되는 대로 사직하겠어요."
"겨우 그 말뿐인가?' 제이크는 안심했다는 듯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이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 거야. 사실은 내가 먼저 그 말을 할 생각이었어."
데이지는 깜짝 놀라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만두기를 바라다니!
"내가 오늘 저녁에 마나자고 한 것도 실은 그 일 때문이었어. 그러니 마침 잘 됐군"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데이지는 호기심에 못 이겨 제이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애무하던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손을 빼려 하자 더욱 꼭 쥐었다.
"데이지, 우리의 약혼을 진짜 약혼으로 생각할 수 없을까? 좀 더 시간을 가졌다가 데이지의 마음이 정해졌을 때 결혼하고 싶어"
데이지는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의 뜻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에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별로 복잡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이 결혼 신청이야. 대답은 예스냐 노우냐, 둘 중의 하나야"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놀리는 듯 웃음을 띠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죠? 농담을 하시는 거죠?'
"지난번에 약혼을 제의했을 때도 데이지는 똑같은 말을 했어"
"하지만......어떻게?"
"다른 사람이 결혼을 결정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지. 우선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많이 있어.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데이지라면 내 일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내 비즈니스를 소중히 여겨 줄 거야. 그리고 서로 끌리고 있다 해도 나의 억측은 아닐 거야. 만일 데이지만 이 생각에 찬성해 준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가정을 갖고 싶어. 자아, 이것만으로도 얼마 전에 결혼한 사람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죄송합니다마는, 나....."
"잠깐 기다려 줘, 데이지. 노우라고 하기 전에 좀 생각해 보지 않겠나, 내일 당장 결혼하자는 것은 아니니까? 이제 곧 데이지도 이것이 좋은 생각이라 여기게 될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지 내 반지를 끼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결코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어. 충분한 시간을 갖자구. 이 생각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또 서로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도" 제이크는 일단 말을 끊고 데이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물론 데이지에게 다른.....다른 사람이 없다면 말이야" 그 엄숙한 말투에 데이지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세찬 소용돌이에 던져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크를 사랑하고 있다, 제이크의 아내가 되어 그의 사랑을 받는 것 이상으로 더 바랄 것이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제이크의 말은 결혼 신청이 아니라 마치 식사를 권유하는 것과도 같다. 그는 결혼을 흡사 자기 아이의 어머니가 되고 모든 것을 맡아 줄 여주인 역할을 해 줄 여성을 고용하는 것같이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순간, 데이지는 공포로 몸이 굳어졌다. 나는 제이크를 뜨겁게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는 항간의 안드리아 템플과 같은 여성들과 멋대로 향락 생활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부부는 때때로 만나 일 이야기나 하고 다음 파티에 대해 상의나 하고...... 아마....하고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생각했다--아내에게도 애인이 있었으면 다행스럽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랑은? 또 애니타는? 애니타라면 그런 생활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여주인 역할이나 어머니 역할을 할 능력이 애니타에게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도대체 그녀하고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 나가려는 것일까?
"데이지, 따로 깊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제이크가 조용히 물었다.
"제이크, 나는...... 그런 말을 들으니 무척 고맙지만, 대답은 분명히 노우예요. 비록 몇 주일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난다 해도 이 대답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슬픈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당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정말 죄송해요"
"알겠어."
데이지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제이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데이지는 백에서 반지 상자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하기 어려운 말을 억지로 꺼냈다.
"그러니까 서로의 가족한테는 우리가.....결국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 이것은 가지고 있어줘. 내 소원이야. 제발 부탁해' 격렬한 어투였다.
데이지는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죄송해요, 제이크. 도저히 그럴 수는 없어요."
"아아, 왜 그러지? 응, 데이지? 어째서......" 그는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상자를 틀어쥐었다.
그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으나 손에 시선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눈의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자기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듯했다.
마침내 제이크는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잘 알았어. 하긴 그럴 거야" 그 음성에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감정의 동요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예스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이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그게 정말인가?" 제이크는 몸을 내밀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도대체 왜? 자기 형부가 된 사람한테 직행할 생각인가? 그래서 나하고 결혼할 수 없다는 건가?"
"천마에요!" 목소리가 격해졌다. "아니에요, 제이크.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마 농담이겠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부탁이에요, 나를 돌려보내 주세요"
"아, 물론이지" 제이크가 카운터를 향해 손짓을 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에이페어의 노상에 있었다. 그는 잠자코 데이지를 차에 태우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집 앞에서 차를 멈추고 라이트를 껐다.
"오늘 밤엔 정말 감사해요, 제이크.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되어 정말 유감이에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제이크는 노한 듯이 말하고는 느닷없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안 돼! 오늘 밤엔 도저히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이렇게 생각한 데이지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그러나 제이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난폭한 포옹에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자, 그는 용서 없이 키스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데이지는 숨이 막혀 몸부림쳤다. 제이크는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빼앗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데이지는 그의 키스에 응했다, 굶주림에 미쳐 버린 듯이. 울부짖으며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와 눈, 목덜미 할 것 없이 키스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단추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드레스의 앞이 열렸다. 어깨에 키스가 퍼부어지는가 생각하는 순간 그의 혀가 뜨거운 불길을 뿜으며 그녀의 입술로 돌아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데이지는 그에게 착 달라붙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싶다는 절실한 생각으로 번민했다.
가슴의 부드러운 살에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데이지는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흐느껴 울면서 제이크로부터 몸을 떼었다.
제이크가 허를 찔린 순간, 데이지는 그 틈을 이용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녀는 차에서 뛰어내려 집을 향해 힘껏 달려갔다, 제이크가 쫓아오지나 않나 하고 열심히 열쇠를 찾으면서. 단숨에 계단을 달려 올라가 방안으로 뛰어들어 문을 잠그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문에 기대어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누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가 움직이는 소리조차도. 아직 그대로 있는 것이다.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들어왔던 것이다. 괜찮을까? 몸을 뗄 때 무슨 상처라도 입은 게 아닐까?
데이지는 방문을 열고 도로에 면한 창가로 갔다. 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리이트를 끈 채로. 아아, 어떻게 할 것인가. 상처를 입은 거야 하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자 제이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옆에 서서 이쪽을 향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제이크, 괜찮으세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데이지, 잠시 이리 오지 않겠나?'
데이지는 곁으로 가서 제이크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말아야 될 것 같아" 그가 나직한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사표를 내지 않아도 좋아. 후임 비서를 쓸 때까지 임시직으로 충당하겠어. 다른 사람한테는 건강이 안 좋아 휴가를 받았다고 하겠어. 그리고 얼마 지난 뒤, 돌아올 생각이 없는 몽양이라고 인사부에 말하겠어. 그렇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여기서 그는 담배를 끄고 자동차 문을 열었다. "다시 나와 주어서 고마와" 그러고는 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데이지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리라는 것은 각오했으나, 이렇게까지 고통이 심하고 짙은 상실감을 맛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처음 하룻밤이 지난 뒤, 그녀는 직장 구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잠시 쉬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휴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잘 수도 쉴 수도 없고, 오직 제이크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 찼다. 정말 잘한 일이었을까? 제이크가 바라는 결혼이 비록 어떤 형태의 것이든, 그 없이 살아가는 데 비한다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는 더 친밀한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새벽녘에는, 아니야, 잘한 일이야 하고 고쳐 생가하곤 하는 난ㄹ이었다. 결혼하여 사랑받지 못하고 다른 여자가 있는 제이크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고통에 비한다면 그 없이 사는 것이 오히려 낫다. 그러면서도 제이크가 없는 쓸쓸함이 가슴을 에는 것 같았다. 낮이나 밤이나 제이크와 이야기하고 제이크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같이 식사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밤에는 더욱 괴로왔다. 특히 첫주는 매일 언제 날이 샐지 모르는 길고 긴 밤의 연속이었다. 밤마다 침대 속에서 제이크를 원했다. 안기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는 뜨거운 염원에 몸이 타들어 가곤 했다. 이토록 강하게 사랑을 갈구하게 될 줄이야....
돌이켜보니, 용케도 지금까지 그 오랜 동안을 태연하게 같이 일을 해 올 수 있었다니,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운명의 사흘 동안에,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감정이 깨어나 완전히 제이크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데이지는 집주인인 브라운 부인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도 전혀 물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미스 리처드가 집에 없고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상대에게 하겠다는 약속을 데이지에게 했다. 그리고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아 주곤 했다. 리자가 몇 번, 또 마이크와 조안나도 전화를 했다. 그러나 데이지는 절대로 전화를 걸어 주지 않았고, 그들이 체념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친구와도 접촉하기가 싫었다.
그녀는 일주일 후에야 처음으로 외출 했다. 기분을 풀기 위해 밤중에 일어나 새벽까지 시내의 이곳저곳을 드라이브하다가 낮에는 실컷 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조금이라도 식욕이 생길까 해서 공원에 산책을 나가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5주째에 접어든 어느 날, 데이지는 했빛이 잘 드는 작은 베란다에서 따뜻한 했살을 쬐고 있으려니, 가슴을 찢는 듯했던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의식했다. 제이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절망은 차차 엷어져 갔다. 그 없이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데이지는 마드렌느 벨을 찾아갔다. 그녀는 직업소개소를 경영하면서 임시직을 구하러 찾아오는 여성들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런던 남쪽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우수한 기능을 지닌 여성들을 모아서 일류 기업에 파견하고 있었다.
명부에 실린 50명의 여자 하나하나에 대해, 그녀들이 안고 있는 문제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파악하고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흠모를 받고 있었다. 또 누구에게든 그녀의 실력에 맞는 시간 단위, 하루 단위, 주 단위, 또는 월 단위의 일을 할당하고 있었다.
데이지도 처음 런던에 와서 포스터 패터슨 회사에 들어가기까지 몇 주일 동안 그녀의 신세를 졌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드렌느는 곧 데이지를 알아보았다.
"웬일이에요?" 마드렌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데이지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남한테 자기 일을 털어놓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봇물이 터지듯,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해 버리고 말았다. 끝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마드렌느는 한마디의 비판도 하지 않고, 동정과 충고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힘차게 장부를 들추며 리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대환영이에요. 휴가가 가까우니까 일은 일 년 중에 지금이 많은 시기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훌륭한 일을 해왔는데, 이제 와서 타이프나 차 끓이기, 하찮은 서류 정리 같은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일이 하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기계적이고 단순한 일이 하고 싶어요."
"그럼 좋아요. 오래 계속될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시험 삼아 해보세요."
"아아, 정말 감사해요"
"남한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과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 이상 좋은 일은 없어요. 그 두 가지를 당신은 다음 주부터 손에 넣게 될 거예요. 멋진 드레스나 백을 가격과 관계없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면, 인생은 아직 즐거운 거예요"
데이지는 그때 이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이리하여 데이지는 마드렌느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데이지가 내놓은 유일한 조건은, 광고 관계 이외의 일을 주 단위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마드렌느는 이 약속을 잘 지켜 주었고, 그녀의 생활도 그 나름대로 새로운 리듬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는 월요일마다 다른 사무실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면서 새로운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일에 익숙해지고 사람들과도 친해질 때쯤이면 어느새 금요일이 다가와 그 직장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일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계절은 이미 여름으로 접어들어 패터슨 회사를 그만둔 지도 석 달 가까이 되었다. 데이지는 다시 잠들수 있게 되고, 식사도 규칙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이크와의 일은 먼 옛날의 추억처럼 생각되었다.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그때의 일을 생가해도 이미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이크에 대한 마음만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같이 생각되었다. 다른 남자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고, 키가 크며 짙은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를 볼 때마다 어쩌면 제이크인지도 모른다고 가슴 두근거리며 기대했지만 그 삶일 리가 없었다.
어느 무덥고 맑게 갠 점심때의 일이었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돌아다보니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리자가 서 있었다.
"데이지, 그렇지?' 리자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리자?'
"어마, 이 무슨 행운일까! 드디어 만났군요. 모두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영문을 모르니 말이에요. 건강하세요?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어요? 지금도 런던에서 직장에? 도대체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춘 거예요, 네?"
데이지는 웃었다.
"어머나, 리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 그런데 무슨 질문부터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마, 질문 따위는 아무러면 어때요? 어떤 이야기부터 해줘도 조하요"
데이지는 주저하며 자신의 손에 시선을 떨구었다.
"네, 하지만....이야기를 하자면 길어질 것이고, 그보다도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마이크와 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일부러 제이크의 이름은 피했다.
"다 잘 있어요. 하지만 찰리는 지금 새 일자리를 구하려고 뛰어다니고 있어요. 그 사람, 그만둘 거예요"
데이지는 깜짝 놀랐다.
"왜요? 그가 탬에서 빠진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모든 것이 변했어요. 전과는 모든 것이 다라라졋어요"
데이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이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만 둔 건 아닐까?
"달라지다니, 무슨 뜻이죠?"
"데이지의 후임으로 들어온 미스 듀이부터가 다라요. 데이지와는..... 어쨌든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리고 웃거나 농담을 하지 않는 사람은 미스 듀이뿐 아니라 제이크 역시 그래요"
그렇다면 제이크는 아직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건강이라도 안 좋은가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공연히 허세만 부리고....우리하고 농담을 하거나 웃는 일은 전혀 없어요. 언제나 일, 일뿐이어서 우리는 두 손을 들고 말았어요. 전처럼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어졌어요.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한때도 불쾌해 하지 않는 순간이 없어요"
"불쾌해 하다니?"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마침내 찰리가 제이크와 충돌하게 된 거예요"
"충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마이크가 현재의 제이크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참으라고 열심히 그를 달랬지만, 찰리는 크게 화가 났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다 같이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어요. 제이크가 안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고 우리끼리 먼저 마시자고 하여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안에서 그가 나와....아참, 그때 우리는 데이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정말 이상해요.....아, 이제 생각이 나는군요. 찰리가 조안나의 아기를 보러 갔더니, 그들이 데이지가 와 주었으면 하더라는 말을 하고 있을 때....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을 거예요. 그러자 제이크가 느닷없이 화를 내며 찰리에게 대들었어요. 그렇게 화가 난 제이크는 처음 보았어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말이에요. 너희들을 무엇 하러 고용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잡담만 하고 있으니까 일이 이 모양이야,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었어요. 사실 우린 그때 아주 조용히 있었거든요" 리자가 데이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몹시 굳어 있었다. "데이지, 괜찮아요? 안색이 나빠 보이는데"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리자.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순간 모두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어요. 제이크는 화가 나서 선 채로 있었고"
데이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리자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결국 찰리가 폭발한 거예요-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커피를 좀 마시면 어떠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겠다면서. 마이크가 필사적으로 만류했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 어떻게 참겠어요? 어쨌든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제이크가 그런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데이지는 그날 오후 내내 멍청하게 보냈다. 기계적으로 일을 계속하면서, 리자가 한 말을 거듭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제이크가 왜 그럴까?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내가 없어져 쓸쓸해서 그러는 걸까? 그럴 리가! 그때에도 나를 만류하지 않았잖은가? 무슨 일이 생겼건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이것저것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고 점점 괴로와질 뿐이었다. 좀 더 강해져야지. 다시 한번 제이크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야지, 이미 끝난 일이니까. 리자와 만나는 순간 그리움이 되살아나 데이지는 불행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마치 낫아 가던 아픔이 처음부터 이겨내야 할 것 같은 고독감을 느꼈다.
현관문을 열자 전화벨이 울렸다. 데이지는 기계적으로 수화기에 손을 가져갔다.
"여보세요'
"데이지?'
"네. 누구시죠?'
"조안나예요. 기뻐요. 드디어 전화가 통했네요.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어요? 몇 번이나 전화했는지 몰라요"
"미안해요, 조안나..... 건강하세요? 아기는요? 넬리는?"
"다 잘 있어요, 고마와요. 그런데 토요일에 와 줄수 없겠어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토요일?"
"세례식이에요. 잊었나요? 초대장을 돌렸는데, 데이지의 회답만 오지 않았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데이지, 와 주겠죠? 싫다고는 하지 마세요. 만나고 싶어요. 아기의 세례식은 그렇다 치고라도....와 주겠다고 약속해 줘요"
"네, 하지만....주말에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데이지는 구실을 만들었다.
"그렇겠죠... 세례식이 끝난 뒤 간단히 점심을 같이 하려고 해요. 잠깐 들러서 얼굴만이라도 보고 가면 어때요?"
그것까지 곤란하다고 할 수 없어서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자 갑자기 두려워졌다. 역시 가겠다고 한 것은 잘못이 아닐까, 가게 되면 틀림없이 제이크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사무실 동료들과도 얼굴을 대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제이크도? 아니야, 바보 같은 것, 하고 그녀는 얼른 자신을 꾸짖었다. 교회와 세례식은 제이크와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가 나타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이렇게 단정해 버렸다.
9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제이크의 모습이 곧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이 데이지의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제이크는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유난히 키가 컸다. 그는 조안나의 아기, 아담의 대부의 한사람으로서 넬리와 나란히 서 있었다.
가족들은 이미 목사 주위에 모여 있었다. 조안나가 아담을 안고 제이크는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가슴 설레게 하는 저 넓은 어깨, 고수머리를 깨끗이 빗어 넘긴 저 후두부.... 의식이 진행되어 대부가 선서할 차례가 되었다. 데이지는 점점 더 강하게 제이크를 의식하기 시작하여, 다른 일은 전혀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대면하지 않고 이처럼 마음을 진정시킬 여유가 주어진 것이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식이 끝나면 오찬회에 참석하지 않고 몰래 빠져 달아날 수 없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면서도 역시 도망칠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점심이 시작될 때까지도 머리가 몽롱하여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 동료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데이지는 시선이 저절로 제이크에게 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에 애써 신경을 집중시키려 했다.
사람들이 물러가고 갑자기 외톨이가 되었다. 소님들은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여어, 데이지"
"안녕하세요, 제이크" 데이지는 똑바로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건강한가?"
"네, 덕택에" 목이 메었다. 그녀는 제이크의 얼굴을 흘끗 쳐다본 다음 마비된 듯 계속 글라스에 시선을 떨군 채로 있었다.
"오늘의 이 파티를 위해 일부러 찾아온 거야, 묵어갈 생각으로?"
"무슨 뜻이에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걸로 생각하고 있을까? 제이크의 옷차림은 전처럼 단정했다. 회색 실크 슈트에 그보다 약간 짙은 회색 셔츠를 입고, 연한 잿빛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약간 여윈 듯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키가 더 커 보였다. 얼굴은 여전히 했볕에 타 있었으나 왜 그런지 피곤해 보였다. 눈 밑에 그늘이 져 있었고,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주름이 그대로 우뚝 선 콧날에까지 이어졌고, 입은 꼭 다물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는 은발이 조금 더 늘었고, 눈의 표정은 엷은 장막 속에 주의 깊게 감추어져 있었다.
"술을 더 따를까요?" 점잖은 말투였다.
"아니에요. 이만 실례할까 생가하고 있었어요"
"그럼 집까지 바래다줄까?" 사이를 두지 않고 그가 말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도 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테지" 순간 그는 기분이 언짢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곧 바로 교외로 나가겠지?'
"네, 그래요. 당신은?"
"아니, 나는 나갈 수가 없어."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어, ....... 아버님은 어떠세요?' 그녀는 이 어색한 대화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 무심코 물었다.
"별로 좋지 않아"
"어마, 그렇다면 걱정되시겠어요. 많이 편찮으신가요?' 데이지는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분위를 잊고 물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문득 제이크의 시선이 열을 띠었다. 데이지는 붉어진 얼굴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는 시내의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을 필요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재 검사 중이지"
"어머나, 아버님께서...."
"아버지는 데이지를 무척 만나고 싶어하셔. 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아주 바빠서 집에 가 있으니까 어려울 것이라고 내가 말했지"
데이지는 불안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만일 아버님이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찾아뵙고 병문안을 드리고 싶어요. 어느 병원에 입원해 계세요?'
"아버지가 기뻐하실 거야" 그 목소리는 이미 싸늘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지금 거기 가 볼 생각이야. 만일 상관없다면 나하고 같이 가는 것이 어떨까? 나중에 여기까지 다시 데려다 줄 테니까 차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성 토마스 병원이라고....여기서 별로 멀지 않아"
제이크는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찰나 긴장의 불꽃이 튀고,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가다듬고 있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당장에라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 것 같은 자기를 의식했다. 제이크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강한 충동이 마음속에서 끓어올랐다. 제이크의 팔에 안겨 이 손으로 그 머리를 거머쥐고 싶다, 그 입술의 감촉을 다시 한번..... 너무나도 격한 자기감정에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니, 두 사람은 식사를 하지 않을 건가요?' 귀에 익은 명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안나가 다정하게 두 사람의 팔을 양옆으로 잡아당겼기 때문에, 데이지는 비로소 제이크로부터 시선을 뗐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필사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했다.
조안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니 제이크가 피우는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차-지금은 타운포르시(스포츠카의 일종)를 갖고 있었다-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지의 마음은 무거웠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데이지가 곧바로 자기 차 있는 쪽으로 가자, 그는 피우던 담배를 내던지고 옆으로 다가왔다.
"같이 병원에 가 주지 않겠어?' 키를 꽂았을 때, 바로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이 감돌았다.
"죄송해요, 제이크"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동시에 손으로는 자동차 문을 열었다. 제이크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와 있었다. "저....못 가겠어요. 미안합니다마는...." 그녀는 말을 더듬거리며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제이크는 느닷없이 그녀의 몸을 차에0 힘껏 밀어붙이고 얼굴을 접근시켜 왔다.
"안돼요, 제이크. 조안나와 넬리가..... 여기선 안돼요" 데이지가 속삭였다.
"좋아, 나와 같이 가는 거야" 제이크는 싸늘하게 말하고 데이지의 한 팔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한쪽 손으로 키를 빼았아 그녀의 자동차를 잠근 뒤 자기 차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소형 스포츠 카 속에 단둘이 앉자, 데이지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제이크를 의식했다. 코에 익은 애프터 세이빙 로션의 향기, 실크 슈트에 감싸인 긴 다리와 늘씬한 허리, 넓은 어깨,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제이크 특유의 남자 냄새.... 핸들에 놓여 있는 손에 문득 시선이 멎자, 약혼반지가 없었다. 순간 살을 에는 것 같은 고독감을 느낀 데이지는, 격렬하게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욕구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마, 이것은 성 토마스 병원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에요" 데이지가 소리쳤다.
"사실이야"
"나를 어디로 데려갈 셈이에요?"
"떠들 것 없어, 유괴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잊은 물건이 있어서 잠깐 아파트에 들르려는 것뿐이야"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싫어요, 안 돼요! 제이크, 그러면 이상하게 되고 말아요...... 저, 병원은 다음 기회에 찾아가겠어요. 그러는 편이 좋겠어요. 아마......" 잦아드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마 그러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다음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이윽고 차는 지하 차고로 내려갔다. 밝은 햇빛을 받은 뒤여서 그 속은 어둡고 축축했다. 데이지는 제이크가 차를 백하여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불안스럽게 지켜보았다.
"자아, 내려, 데이지" 제이크가 돌아와서 문을 열었으나 데이지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같이 올라가.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안고 가겠어....데이지!"
데이지는 놀라서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제이크가 문을 열었다. 그들은 시선을 돌린 채 잠자코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기서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던 일이 생각났다. 먼 옛날의 일만 같았다. 그로부터 너무나 많은 일이 생겼고,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곧 커피를 끓이겠어. 그동안 나는 이 지겨운 옷을 갈아 입고 오겠어. 무얼 마시겠나?" 제이크는 웃옷을 벗고 넥타이를 풀면서 주방에서 나와 시선을 돌린 채 물었다.
"아니, 괜찮아요'
데이지는 창가로 걸어갔다. 런던의 집들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어서 꿈속의 풍경과 같았다. 여기 어렇게 서 있는 것도 꿈만 같았다. 문득 이곳에서의 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데이지는 공포가 치솟는 것을 깨달았다. 제이크가 돌아오기 전에 나가야지.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아, 어서' 이때 제이크가 김이 나는 컵 두 개를 얹은 쟁반을 들고 들어와서 낮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것을 마시면 조금은 기분이 진정될 거야"
그는 앞이 트인 셔츠에 캐주얼한 바지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의 간편한 차림을 대하자 그녀는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다.
제이크는 컵 하나를 집어 들고 여유가 생겼다는 듯이 팔걸이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데이지도 그를 따라 앉아서 뜨거운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 행복하나?' 느닷없이 제이크가 물었다.
"네?....네. 물론" 가느다란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걸"
제이크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어째서 나릉 이곳으로? 추억이 잔뜩 깃들인 이 아파트에서 한시라도 빨리 도망쳤으면....
"제이크, 이제 가요' 데이지가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일어섰다.
"데이지!" 제이크도 따라 일어서서 가까이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쥐고 홱 자기 쪼그로 돌려 세웠다. 데이지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제이크의 부드러운 갈색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봐' 모소리가 쉬어 있었다.
데이지는 잠자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이제 가고 싶어요, 제이크"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에 얹힌 손에 힘이 가해졌다. 데이지는 아픈 나머지 몸을 꿈틀했다.
"놓아주세요, 아파요"
제이크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데이지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그의 힘과 분노에 몸을 떨었다.
"제기랄, 고개를 들어!" 제이크는 한 손을 그녀의 턱에 대고 힘껏 그녀의 얼굴을 쳐들었다. 데이지는 공포로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아파 눈물이 맺혔다. 제이크의 눈은 험상스런 은빛을 띠고 온몸에 긴장이 감돌았다.
'부탁이에요, 제이크. 놓아주세요" 하고 속삭이면서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이제 알겠나? 데이지의 목을 부러뜨리려면 이 손가락 하나로도 쉽게 할 수 있어. 정말 알겠나? 남을 미치게 만들어 놓고!"
제이크가 한 손으로 머리를 쥐고 뒤로 홱 잡아당겼기 때문에 데이지는 아픈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뺨을 따라 제이크의 손에 떨어졌다.
"아, 눈물! 미안하게 됐어"
제이크가 손을 늦추었기 때문에 아픔은 덜했으나 여전히 붙잡힌 채여서 몸이 자유롭지 않았다.
"제이크, 당신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가 났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어요."
제이크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앉아' 이렇게 말하고 그는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힌 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멍청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한없이 바라볼 것 같았으나, 마침내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데이지, 어째서 나와의 결혼을 거절했지?" 무겁고 냉정한 어투로 그가 물었다. 데이지는 무릎 위의 손을 꼭 쥐었다.
"제이크, 왜 그런 말을 꺼내세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그리고......." 데이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다시 울게 될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어째서야? 데이지, 말해 줘. 데이지가 나릉 원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지금도....나에게 못지 않게. 어린아이가 아니니 나도 그쯤은 알고 있어. 그런데 어째서 거절한 거지? 대답해 줘!"
"사랑이 없는 결혼은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그런가, 아니면 데이지가 그런가?'
"양쪽 모두 그래요"
"그렇다면 그때....내가 결혼을 신청했을 때....데이지에게는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나? 결혼을 생각할 만한 사람이......" 질문이 공중에 떴다.
"제이크, 나는 이런 질의응답은 더 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이제 모든 것은 끝났으니까....이대로 내버려 둬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제이크가 옆에 와서 데이지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포켓 속에서 손을 꼭 쥐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제하고 겨우 서 있기는 하지만 언제 다시 폭력을 휘두를지 모른다는 기세였다.
"데이지, 경고해 두겠어. 내 질문에 대답해 줘. 만일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책임지지 못하겠어. 내가 결혼 신청를 했을 때 데이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나?'
"네"
"그 사람이 필립인가?'
"아니에요" 데이지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묘하게도 이때 데이지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제이크의 눈은 오뇌와 고독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전에도 꼭 한 번, 그의 아버지 집 홀에서 이런 눈을 본 일이 있었다. 그 눈을 본 순간, 데이지는 자신의 고뇌를 잊고 제이크의 고민을 달래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얼굴을 돌려 벌린 제이크는 그런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는 지쳐 버린 듯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잘 알았어. 그러면 데이지의 차 있는 데까지 바래다주겠어."
데이지는 떨면서 멈춰 섰다. 격한 감정으로 현기증이 일어나고 긴장으로 목이 메었다. 이대로 제이크를 그냥 두고는 갈 수 없다. 진작 그의 품에 몸을 던져 버릴 것을. 사랑을 받고 있건 말건 그것은 이미 상관이 없다. 그런 마음과는 달리 발은 비틀거리며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제이크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 그녀를 품안에 끌어당겼던 것이다. 떨어지려고 약한 저항을 시도했으나, 제이크의 두 손이 꼭 붙들고 있었다. 제이크의 얼굴이 가까이 왔을 때, 데이지는 이미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겨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그의 몸이 닿는 순간 뜨거운 것이 온몸에 확 퍼졌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빨려들 듯이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꼭 끌어안은 채로. 제이크의 입술이, 자기 것인 양 데이지의 입술을 탐하고, 손이 그녀의 머리를 거머쥐었다. 핀이 빠져 나가면서 머리가 어깨로 흘러내렸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싶었는지 앞아?" 제이크는 데이지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가슴에 키스하면서 두 손으로 드레스를 헤쳤다. "데이지, 데이지가 필요해, 무척. 이제는 아무렇게 되어도 좋아.....다른 일은. 응, 좋겠지?'
그 말이 데이지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의 손놀림과 몇 번이나 입술을 막는 그의 입만이 의식되었다. 그리고 제이크의 몸이 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탄탄한 근육에 꼭 밀착된 부드러운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의 두 손은 드레스 속에서 그녀의 속살을 더듬고 있다.. 데이지는 그에게 안겨 옮겨질 때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셔츠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려니, 그의 뜨거운 피부를 느끼고 두방망이질 치는 그의 가슴의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나중에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지도 않는데 허락해 버린다면..... 이러한 생가이 희미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생각할 힘도 없어서 이성은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직 감각만이 그녀 자신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자기 침대에 데이지를 내려놓고는 뜨거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데이지는 갑자기 수치심을 느끼고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아니야" 그가 얼른 속삭였다. "감추지 마. 내게 보여 줘.... 데이지는 매우 아름다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윽고 데이지는 제이크의 품안에 있었다. 따뜻하고 탄력 있는 몸이 바로 옆에 눕고, 입술이 부드러운 살갗 위를 남김없이 더듬었다. 순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정열의 불길이 그녀의 모에서 타올랐다. 데이지는 불길에 휘말려 열에 들떠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제이크, 부탁이에요. 가만히......"
갑자기 제이크의 몸이 굳어졌다. 그대로 꼼짝도 않는 순간이 면면히 이어질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제이크는 몸을 돌려 데이지에게서 떨어져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섰다.
데이지는 너무나 큰 충격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침대에 그냥 드러누워 있었다. 무서웠다. 뜻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고......
"제이크, 왜 그러세요?" 대답이 없었다. "네, 제이크? 모르겠군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만두기로 하지, 데이지" 이상한 목소리였다. 잠시 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제이크는 로브를 걸치고 허리띠를 매면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말해 주지 않았지?"
"무엇을 말이에요?'
"데이지, 왜 첫 경험이라는 것을....."
"왜냐하면....아는 줄 알고요......"
"아, 이게 뭐람. 그런 것은 생각조차 못했어....."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있나요?" 데이지는 슬픈 듯이 말했다.
"나는 처녀한테는 손을 대지 않기로 하고 있어"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거칠게 말했다.
"손을 댄다고요? 그렇군요, 역시 그랬었군요....." 차차 목소리가 작아지다가 끊겨 버렸다.
"옷을 입어, 집에까지 바래다 줄 테니가"
문이 닫히고 데이지는 혼자 남았다. 영문을 모른 채 데이지는 멍청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제이크는 순간적으로 확 불이 붙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나눌 일보 직전에까지 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남은 것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공허뿐.....
데이지는 오싹 한기를 느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일까? 경험이 없다고? 그렇다면 제이크는 처녀 아닌 여자하고만 상대한다는 말인가?
제이크가 돌아오기 전에 나가야지. 두 번 다시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다, 이젠 영원히. 데이지는 조금 전의 자신의 당치도 않은 행동에 깊은 치욕을 느꼈다. 아아, 이 무슨 악몽일까!
떨리는 손으로 매무시를 고치고 가만히 복도로 낙ㅆ다. 물 흐르는 소리-그의 샤워 소리였다. 조용한 방안이어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제발 들키지 말았으면,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백과 코트를 집어 들고 비틀거리면서 홀로 나와 가만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무시하고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난간을 꼭 잡고서.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순간 밝은 햇빛에 눈이 부셧다. 아직도 낮이었던 것이다, 그 한 시간 동안에 일생이 지나가 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는데. 데이지는 택시를 불러 세우고 어두운 차 안에 몸을 실헜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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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구에 들어가 물어 본 다음 안내 표시대로 걸어가니 찾고 있던 병실이 있었다. 그러나 담당 간호사로부터, 현재 문병객이 한 사람 와 있으므로 기다리라는 얘기를 들었다.
역시 제이크가 와 있는 거야. 데이지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가 회의 때문에 일찍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미리 확인했었지만..... 복도의 딱딱한 벤치에 앉아있으려니, 주위의 이야기 소리와 발소리가 어느새 멀리서 들리는 것같이 되었다.
역시 잘못 온 게 아닐까. 제이크의 아버지만은 만나고 싶다. 하지만 만나서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지? 공통된 화제라고는 오직 한 가지-제이크.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또 상심한 것을 눈치 채이지 않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제이크의 아파트에서 도망쳐 나온 지 겨우 48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겨우 집에 도착하여 침대에 쓰러져 실컷 울었다. 울고 또 울고, 지칠 때까지 울었다.
전화벨이 계속 울리고 브라운 부인이 몇 번이나 찾으러 왔으나 데이지는 응하지 않았다. 제이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날 밤은 무엇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었다. 오래간만에 제이크와 만나 격렬하게 타오른 것도 순식간의 일이고, 눈 깜짝할 사이에 굴욕의 심연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자제심을 잃었던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수치와 혐오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사랑해 달라고 매달린 것과도 같다. 그결과 거절당했던 것이다-육체마저도..... 이렇게 된 이상 두번 다시 제이크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다--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앞에서 다시 한번 몸을 감추고 영원히 그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 뿐이었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으며, 마음은 텅 비고 몸은 옷을 갈아입거나 식사를 하는 등 간단한 일조차도 할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에야 겨우 마드렌느한테 잠시 들러, 외국에서의 일자리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데이지 리처드 아니세요? 어마, 놀랐어요!"
싸늘한 그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고개를 드니, 정면에 세련된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복도는 간호사와 왜건으로 붐비고 있었다. 데이지는 한순간 그 세련된 갈색 머리의 미인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최신 유행의 실크 저지 슈트로 몸을 감싸고 굽 높은 샌들을 신고 있었으며, 아름답게 커트한 머리에 어울리는 시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애니타였다.
"안녕하세요?" 데이지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어요?"
"험프리씨를 문안하려고요"
"아버지인가요, 아니면 아들?'
"그래 병세는 어때요?" 데이지는 애니타의 질문을 무시하고 물었다.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그저 그만해요. 하지만 내가 와서 원기가 좀 회복된 것 같아요. 놀랐어요, 이런데서 당신을 만나다니. 험프리씨 댁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었는 줄 알았는 데요." 애니타는 아무것도 끼고 있지 않은 데이지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깨끗이 끝나 버렸나요? 결국 지난번에 만났을 때 이야기하신 그 멋진 사랑에는 도달하지 못했나 보조?"
데이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애니타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털어놓았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세상일이란 반드시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애니타는 고급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위로하듯 말하고 데이지 곁에 앉았다.
"당신의 손에서 이처럼 빨리 반지가 사라지고, 그 대신 내가 결혼반지를 끼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애니타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다이아몬드 약혼반지와, 거기에 어울리는 백금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데이지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애니타와 제이크는 결혼을 한 것이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평소의 현기증이 재발하여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쥐고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으려니, 이윽고 발작이 멎고 속도 약간 편해졌다.
"축하해요" 데이지는 약하디 약한 소리로 말했다.
"어마, 고마와요. 친절하시군요" 애니타의 목소리에는 승리감이 넘쳐 있었다. "정말 갑작스런 일이었어요. 지난번에 만난 직후예요. 사실 너무나 돌연한 일이어서 허니문도 아직이에요. 하지만 곧 떠나게 될 것 같아요. 마음껏 그를 독점하게 되었어요.... 카리브해로 갈 생각이에요.... 멋지죠, 네?"
데이지는 일어섰다.
"실례하겠어요.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다시 와야겠어요"
"어마, 좀 더 같이 있으면 어때요?" 애니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제이크가 올 거예요. 나를 마중오기로 했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그도 틀림없이 기뻐할 거예요, 오래간만에 만나는 거니까요"
"실례하겠어요." 데이지는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급히 애니타에게서 떨어졌다. 이 어린 여자에게 우는 모습 따위는 절대로 보이지 말아야지.
처음 모퉁이에서 꺾어 돌았다. 어디로 갈 것인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제이크가 아내로 삼은 여자의 눈 앞에서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다만 그 생각뿐이었다. 아아, 얼마나 질투 나는 일이냐! 그의 아파트에서 두려운 한때를 가졌을 때, 제이크가 도중에서 단념한 것은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아내를 배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걸 몰랐을까.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데이지는 제일 가까운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한길에 나가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패린튼까지 가 주세요."
집으로 돌아가야지-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집이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장소.... 런던은 그에게서 몸을 숨길 만큼 넓지 않다.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또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이때 사소한 물건들과 자동차를 조안나의 집에 맡겨 두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음 기차로 집에 돌아가야지-런던을 떠나야지, 하고 결심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세인트 아이브즈 역에서 택시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집은 캄캄했다. 모두 외출한 것일까? 다시 한번 벨을 눌렀다. 그러자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로군!" 입구에 나타난 아버지가 기쁜 듯이 두 손을 벌렸다. 데이지는 아버지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놀랐는데. 어째서 미리 알리지 않았니? 엄마는 외출중이야"
아버지는 딸을 조금 멀리하고 홀의 불빛으로 그늘이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 극도의 피로와 긴장이 감도는 것이 눈에 띄자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데이지는 아버지의 주시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역시 집이 좋군요. 그냥 돌아왔을 뿐이에요. 괜찮죠? 갑자기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어요."
"어머니는 늦게야 돌아올 텐데" 아버지는 쾌활하게 말했으나, 지난번에 돌아왔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약간 의아해 했다.
"런던은 정말 숨 막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잠시 도망치고 싶어서....기후라거나 소란으로부터" 자기가 의미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참, 잊고 있었군. 틀림없이 배가 고플 게다. 무엇이든 만들어 줄까?
"아뇨, 괜찮아요. 기차 안에서 먹었어요. 하지만 차는 마시고 싶어요."
데이지는 주방의 식탁에 팔을 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짐은 없니? 무척 서두른 모양이구나" 아버지는 딸을 돌아다보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혹시 몸이라도 불편하니?" 그녀는 약간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좋아, 그렇게 서먹서먹해 하지 마라" 아버지는 바쁜 듯이 컵과 홍차를 꺼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 두는 것이 좋겠어. 나는 제이크 험프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두 번"
"듣고 싶지 않아요!" 억누를 길 없는 감정이 저도 모르게 비명으로 변했다.
아버지가 돌아섰다. 그는 잠시 딸을 바라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딸이 어렸을 때 언제나 그랬듯이.
"미안해요, 아빠. 그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런데 제이크와는 왜 이야기했나요?'
"응, 한 번은 내가 너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회사에 전화했을 때였지. 너는 이미 그만두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제이크를 바꿔 달라고 했지. 그는 분명히 네가 그만두었다고 말했어. 그리고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도 말하더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요,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걱정하셨죠?'
"약간. 나보다는 네 어머니가 더. 곧 너를 만나러 가겠다고 해ㅉ지만, 멀지 않아 연락이 있을 테니까 기다리자고 내가 설득했지. 결국 그대로 되었어-네가 돌아왔으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어. 마음 내킬 때 이야기해 주면 되니까" 그는 딸 앞에 뜨거운 홍차를 놓고 자기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요?'
"지난 일요일이었지. 제이크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어. 네가 여기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야. 없다는 것을 알자 당황하는 것 같더군"
데이지는 컵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렇다면 제이크는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어디 갔는지 찾아내려는 노력 정도는 했었군. 단순한 친절.....그 이상의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람하고 만났니?' 아버지가 물었다.
"아니에요, 만났다고 할 수는 없어요. 우연히....세례식에서 마주쳤을 뿐이에요. 같이 근무했던 친구의 아기 세례식에서. 그는 대부였어요"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조용한 어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나이가 마음에 들어. 그때는 정말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완전히 화가 나게 만들었지만, 속으로 끌리고 있었어. 아주 성실하고, 어디까지나 너를 믿고 있었어. 애비인 나도 그러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러니 제이크가 화를 낸 것도 무리가 아니지. 지금은 내가 크게 오해하여 너나 네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힌 걸 후회하고 있어. 식이 끝나고 여러모로 뒤돌아볼 여유가 생기자 그때 몰랐던 것을 아게 되더군. 언젠가 기회를 보아 제이크한테도 사과할 생각이지만, 정말 미안하게 됐다. 이번 일이 그것과 아무 관계도 없으면 좋으련만" 아버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관계없어요, 아빠. 전혀 없어요" 데이지는 당황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뺨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의자를 끌어다 딸의 머리를 끌어안고 평소처럼 가볍게 흔들었다. "아빠, 제이크는 이미 결혼을 했어요. 나는 몰랐어요!"
아버지의 몸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둘이서 여기 왔을 때, 이미 결혼을 한 뒤였다는 말이냐?'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그때는 아직.... 이웃에 사는 여자와 결혼했어요. 아아, 나는 참울 수 없어요.... 무척 사랑했는걸요....." 데이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원 저런! 도대체 어떻게/ 약혼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고자 20일 전이었는데"
여기서 데이지는 제이크와의 일을 숨김없이 다 이야기했다. 다만 해변에서 필립하고 있었던 일과 제이크의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만은 제외하고. 그것만은 누구한테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음....인생이란 복잡한 것이로군.... 그런데 데이지, 제이크에게서 구혼을 받았을 때 어째서 거절했지?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제이크에게는 결혼이란 것이 편의를 위한 수단에 자나지 않아요. 그리고 그는 나를 그저..... 원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확실하니?"
"네, 물론이에요.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거든요" 데이지가 놀라서 대답했다.
"남자들은 대체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단다. 여자에게는 중요한 듯싶지만...."
"그럴까요? 제 생각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어쨌든 제이크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요. 그는 커튼이나 벽지를 바꾸듯 애인을 정기적으로 바꾸는 생활에 익숙해 있어요. 만일 정말 나를 사랑했었다면 모든 것이 원만했을 거예요. 그가 생가하는 결혼은 사랑이란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어요."
"글쎄다. 그야 물론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지. 어쨌든 제이크가 이미 결혼해 버린 지금에는 모든 것이 지나간 일이야. 아마 네 말이 옳을 테지."
데이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홀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더플코트를 들고 아직 어둑어둑한 밖으로 나갔다.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다. 그녀는 모래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침 앞바다의 하늘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데이지는 하루 가운데서 이 시간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만상이 조용히 잠든 시각에 혼자서 바닷가를 걸었다. 촉촉한 모래가 발밑에서 자박자박 소리를 내고, 바람이 뺨을 스쳐 나나갔다. 머리 위에서는 갈매기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고, 잿빛 바다는 멀리 수평선까지 드세게 물결치고 있었다. 이 거칠면서도 아름다운 경관이, 일주일 동안 매일같이 거기 나가 섯는 데이지의 온몸에 스며들어 체력을 회복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해주었다.
집에 돌아온 이튿날 아침, 그녀는 마드렌느에게 전화를 걸어 외국에 나갈 생각이 없다는 뜻을 알렸다. 마드렌느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마음이 변하면 곧 알려 달라고 말했다.
그 후 데이지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에 힘입어 나날이 원기를 회복해 갔다. 부모가 아무 말도 없이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자고 몇 시간씩 해변을 산책할 수 있었으며, 바위에도 올라가고
조개도 줍는 등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제이크에 대해서도 가끔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은 전과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이크를 사랑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미 그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이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람 없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어떻게 해서든지. 먼 장래에도 결혼하게 될 것 같이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혼자 어디 가서 살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지니고. 그러나 이제는 손에 넣을 수도 없는 것을 원하여 울거나 하지는 말아야지.....
데이지는 런던에 돌아갈 결심을 했다. 이사를 가야지, 이제 고독은 질색이야. 어느 룸메이트와 같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구해서 원하고 있던 광고의 세계로 돌아가야지. 그 세계라면 능력도 재능도 있다. 열중할 수 있는 일을-자존심과 충실한 생활을 부여해 줄 일을 찾아야지. 언젠가는 제이크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자기 자신의 생활이 안정되어 전혀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온몸에 활기가 넘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데이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모래밭을 다리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나부끼며 바람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마음속의 울적함을 나려 보내면서.....
숨을 헐떡이며 얼굴이 빨개져서 집에 돌아오니, 부모는 가운 차림으로 조용히 아침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중에 마드렌느에게 전화해야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전화해서 곧 런던으로 돌아가겠다고 해야지....일하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11
코노트에서 회식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데이지는 화장을 마무리하면서 적잖이 가슴 아픔을 느꼈다. 코노트는 제이크와 조반을 같이 한 장소로서, 영원히 가슴에 새겨져 있을 곳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곧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리고 현재의 행운을 생각했다.
나는 행복하다. 새로운 일자리로 인해 얻은 자신감으로 표정은 부드러워졌고, 기쁨으로 웃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상사인 투비 윈담은 광고업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스타였다. 자기 자신이 직접 회사를 경영하면서 경쟁 상대로부터 서서히 일을 빼았아 지위를 확보해가고 있었다. 면접 때, 그녀는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므로 경험이 풍부한 많은 지원자 중에서 그가 자신을 택해 준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재는 투비 윈담의 개인 비서로서, 에이페어에 있는 훌륭한 사옥 일층에 자기 비서와 방을 가진 몸이 된 것이다. 회사의 규모는 패터슨 회사보다 훨씬 작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스탭 모두가 참가할 각오가 요구 되었다. 그 덕분에 자기 능력에 대해 새삼스럽게 자신을 갖게 되었고, 투비에게는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과 유난히 까다로운 이 업계에서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그리고 투비와 그의 아내 아이린에 의해 사교 생활에도 어울리게 되어 그 방면에서도 데이지는 아름답게 꽃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자기에 대한 관심을 감추려 하지 않는 매력적인 독신 남자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매일 일이 끈나면 곧장 마드렌느의 친구와 같이 세 들어 사는 세이트 존스우드의 아파트에 돌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오자 바로 마드렌느를 찾아갔던 것이다. 마드렌느는 놀라울 만큼 짧은 시일에 일자리와 아파트와 같이 살 친구까지 마련해 주었다. 미셀은 마드렌느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대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침실만이 별도고 나머지 방-주방과 욕실과 거실은 같이 쓰고 있었다. 거실은 여자의 방답게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즐거운 나날-겨우 다시 찾은 행복의 나날이었다.
가볍게 향수를 뿌리고 준비를 완료했다. 엷은 청록색 실크로 된 이브닝드레스가 데이지의 큰 키에 잘 어울렸다. 가는 허리를 강조하기 위해 폭 넓은 은빛 벨트로 웨이스트를 꼭 죄고 보니 스커트가 흐르듯이 펼쳐졌다. 살갗이 내비치는 긴 소매를 적당히 접어 올리고 신발은 드레스와 같은 빛깔의 공단 펌프스를 신었다. 약간 여위긴 했으나 휘감기듯 펼쳐진 드레스가 긴 다릴를 돋보이게 했으며, 그 청록색이 위로 묶은 머리를 돋보이게 했다.
그녀가 오늘 밤의 디너에 초대된 주된 이유는, 회사의 후원자가 아내와 동생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윈담 부부와 함께 런던의 밤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데이지는 런던의 중심가를 향해 질주하는 차 안에서 새삼스럽게 이상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아직까지 제이크와 만나지 않은 것은 기적과 같았다. 처음 출근했을 무렵에는 아침저녁마다 길에서 만나지나 않을까 하여 가슴 죄었고, 낮에는 낮대로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 와서 자기의 소문이 나지 않을까 여겨져 겁이 났다. 왜냐하면 광고업계는 그리 넓은 세계가 아니어서, 서로 얼굴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투비가 패터슨 회사의 마크 포스트와 친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클럽에 속하여 때때로 점심을 같이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끼리의 유대는 발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데이지는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코느트 현관 앞에서 택시를 내려 바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금방 도착한 터여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메뉴를 상의하고 있었다.
오늘 밤 그녀가 상대할 사람은 빌 위너라는 키가 큰 텍사스 출신의 미국인으로서, 나이는 서른 대여섯쯤 되어 보였다. 연한 금발에 눈은 푸른색이었다.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기자 데이지는 주위를 둘러보고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밤의 레스토랑은 붐비고 있어서, 아침을 먹었을 때의 그 조용한 분위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채 요리가 나올 무렵, 테이블을 둘러싼 일행의 화제는 하찮은 것으로 옮겨져 있었다.
커피가 나왔을 때, 데이지는 등 뒤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마치 누가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망상을 떨쳐 버리고자 가볍게 몸을 떨고, 빌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가족사진에 주의를 집중시키려 했다.
"이것은 지난여름....." 빌은 문득 말을 끊고, "추운가요?' 하고 물었다.
"아니에요, 그저 잠시 오싹했을 뿐입니다. 어서 계속해 주세요."
"지나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아가씨 등뒤의 저쪽 구석에서 아까부터 여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이 있군요."
데이지는 굳어졌다. 설마 이런 곳에서, 더구나 오늘 같은 날 밤에 제이크와 만나게 될 이야 없겠지.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목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데이지는 얼굴을 똑바로 들었다. 앞으로도 늘 마주칠까 하여 겁에 질린 채 살아갈 수는 없다. 한 번 만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편한 것이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이제 알겠군요. 어서 말씀을 계속해 주세요."
"그 무렵의 휴가는 정말 즐거웠었죠." 말하다 말고 빌은 흘끗 그쪽을 쳐다 본 데이지의 굳은 얼굴을 보았다. 그는 깜짝 놀라서 테이블 너머의 데이지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하고 힘찬 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손에 매달렸다.
"아가씨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군요, 그렇죠?" 빌이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확실히 하기 위해 내가 설명할 테니까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데이지는 설명을 들으면서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는 바로 제이크였던 것이다.
"데이지." 이때 아이린이 테이블 건너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만 여기서 나가 아나벨 상점에 갈 생각인데, 어때요?"
"네, 좋아요."
"다행이군. 그럼 갈까요, 여보?"
"여성들이 먼저 가지, 우리는 나중에 갈 테니까."
데이지는 제이크를 돌아다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다른 두 사람과 같이 화장실로 갔다. 그런 뒤 코트를 받아 들고 셋이서 로비에 돌아와 보니 마크 포스터와 제이크가 투비 윈담과 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순간, 데이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못 박혀 서고 말았다.
"아이린, 당신은 처음이지? 이쪽은 제이크 험프리 씨야" 투비가 아이린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데이지의 순서대로 소개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보는 제이크. 남달리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대번에 반해 버릴 것 같은 턱시도우 차림의 모습. 그녀는 이런 것들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색은 전보다 창백했고 눈 밑에 짙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제이크는 그 근엄한 표정 위에 형식적인 미소를 띠고 여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미소가 가신 눈으로 데이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데이지, 놀랐는데!" 두 손을 벌리고 가까이 온 것은 마크 포스터였다. "투비, 데이지를 손에 넣다니, 자네는 행운아일세. 왜 데이지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나?" 마크는 그녀의 두 손을 잡고 뺨에 키스했다. "여전히 아름답군. 데이지를 놓치고 후회되지 않나, 제이크?'
"여전하신가요, 포스터씨? 부인께서도 건강하시고요?' 데이지는 침착하게 물었다.
"건강한 것을 보니 기쁘군."
"제이크, 데이지를 꾀어서 데려갈 생각을 하면 안되네, 알겠지? 놓아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지금 우리 회사는 데이지 없이는 유지해 나갈 수 없어." 투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만나게 되어 기뻐." 마크는 아직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별의 인사가 교환되는 동안, 제이크가 데이지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을 꾹 참고 싸늘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활기가 있어 보이는군, 데이지."
"네, 덕택에요. 당신은 어떠세요?'
제이크는 그 질문을 무시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투비의 회사에서 일했지?'
"한 달쯤 됐어요."
"즐거운가?'
"네, 무척."
제이크는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었다. 데이지는 잠자코 그의 곁에서 멀어지려 했다.
"데이지!" 제이크가 한 손을 내밀었다.
이때 빌이 가까이 와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이튿날, 데이지는 하루 종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뜨끔했으나 제이크는 아니었다. 그럴 적마다 자기 마음이 안도와 실망으로 흔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꾸짖으며 겨우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미셀이 오늘 밤에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쪽지를 남겨 두고 나가서 집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핑크색 로브로 갈아입고 머리를 푼 다음, 난로 앞의 소파에 두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빌이 보내 준 노랑장미의 향기를 맡으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쨌든 첫 만남은 끝난 것이다. 다음부터는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마음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두려웠다. 어젯밤에도 역시 바랐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제이크가 자기를 데려가 줬으면 하고. 다시 그의 팔에 안기고 싶었고,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듯이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대관절 언제까지 이런 마음이 계속될 것인가?
데이지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이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내버려 두면 단념하고 돌아갈 테지. 그런데 벨소리는 그치기는커녕 손을 떼지 않고 그대로 누르고 있는지 계속 울렸다. 그녀는 버럭 화를 내며 문을 열었다.
제이크였다. 데이지는 마비된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자기 눈이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여길 알았죠?'
"마드렌느한테 물었지." 제이크는 데이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 데이지의 뺨이 새빨개졌다.
"무슨 용건이죠? 나는 지금 바빠요."
"아, 알고 있어.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
쫓아 버리려면 이 경우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었다.
"좋아요. 하지만 용건이 무엇인지 빨리 끝내세요."
제이크는 그녀 곁을 지나 거실로 들어왔다.
"아늑한 방이로군."
"용건이 무엇이죠?"
그는 방 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아, 저 장미....어젯밤 데이지의 숭배자가 선물한 것이로군. 최대한의 서비스를 한 보답인가?"
데이지는 분노로 몸이 굳어졌다.
"돌아가세요, 제이크. 당신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요!" 제이크는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작은 홀에서 뒤돌아보았다.
"데이지, 부탁이야! 꼭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어."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데이지는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그의 호소하는 듯한, 거의 탄원하는 듯한 눈을 보고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잠깐 기다려 주세요.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아니, 가지 마. 부탁이야."
"그러면 커피라도."
"아냐, 괜찮아."
데이지는 앉아서 기다렸다. 방 안에서 서성거리던 제이크가 마침내 창가에 멈춰 섰다.
"데이지, 그날 밤의 일을 기억하고 있나? 콘월에 가기 전날 밤말이야. 둘이서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는 나직한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네."
"아주 먼 옛날 일처럼 생각되는군, 불과 몇 달 전의 일인데 말이야.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지. 사람은 뻥 뚫린 구멍을 필사적으로 메우려 하지. 그래서 일, 여행, 여자, 자기기만..... 이런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지. 자기 방어벽을 강화해 놓고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만사가 원만히 되리라 믿지. 그러나 어느 날 한순간에 모든 것이 붕괴되고 말지. 어젯밤 데이지는 거기 있었어.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멀리... 바로 그때 나는 몇 달이나 걸려 쌓아올린 것을 한순간에 재로 돌리고 말았어." 제이크는 피곤한 듯 한 손을 머리에 가져갔다. "생각나는 것은 데이지뿐, 보이는 것도 데이지의 얼굴, 데이지의 육체.... 잠을 자려고 해도 불가능했어. 다른 여자를 품어도 내 눈에 떠오른 것은 데이지의 모습뿐이었어. 제기랄! 그 양키 녀석!" 말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그 녀석, 데이지의 손을 꼭 쥐고 있었어. 그때 나는 녀석을 당장 목졸라 죽이고 데이지를 어딘가로....나만이 독점할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어.... 아아,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었는지! 데이지, 알겠나, 이 마음을.... 데이지가 그리운 나머지 얼마나 미칠 지경이었는지......정말 몇 번이나 정신이 나갈 뻔했는지....."
데이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를 사랑한다고? 훨씬 전부터? 그럴 리가! 애니타와 결혼한 당신이 어떻게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농담이 아니면, 그날 도망친 데 대한 복수.......
"이런 데까지 찾아와서 나를 사랑한다고요? 그런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무 의미도!" 데이지의 음성이 높아지고 결이 거칠어졌다. '돌아가서 부인한테 말하세요. 나는 처녀는 안을 수 없다고..... 그래요, 나 역시 결혼한 남자와 잘 수는 없어요. 그러기 위해서 왔다면 시간 낭비예요. 자아, 어서 나가세요. 그러지 않으면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요."
"도대체 데이지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제이크가 소리쳤다. '데이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몇 번이나 그런 말을 했으니까. 하지만 제멋대로 꿈속에 빠져들지는 말아 줘. 부인이라고, 무슨 소리야? 내게는 아내가 없어. 아내로 삼고 싶었던 여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갑자기 무서운 침묵이 방 안을 지배 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긴장이 극에 달했다. 제이크의 꼭 쥔 손이 밑으로 떨어지고 입은 한일자로 다물어졌으며 눈은 맹렬히 불타고 있었다.
"애니타는....." 데이지가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애니타는....당신과 결혼했다고 말했어요. 제이크, 나는 영문을 모르겠어요."
몸이 휘청거렸다. 뒤로 손을 뻗어 소파를 잡으려 하는 순간, 제이크가 데이지의 두 팔을 붙들었다.
"데이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애니타와....결혼한 줄 알았나?"
"네, 나는 보았어요, 반지를....그녀가 내게 말했어요....."
"애니타는 결혼했어. 하지만 나하고는 아니야. 어째서 상대가 나라고 생각했나?"
데이지는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제이크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애니타와 결혼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일까?
"어서 대답해 봐."
"모르겠어요. 그녀가 내게 반지를 보이며, 당신은 반지가 없지만 내게는 있다고 하고, 그리고....당신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어요, 병원에서....."
"그래서 상대가 나일 것이라고 멋대로 결론을 내린 것이로군. 그날의 일은 나도 기억하고 있어. 데이지를 만났다고 그녀가 말하더군. 그것은 내가 데이지와 아파트에서....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려 했던 이틀 후의 일이야. 그렇다면 뭔가? 데이지는 내가 결혼을 하고서도 그런 짓을 할 남자라고 생각했나?" 제이크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 데이지는 소파에 펄썩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로군, 나를 그런 남자로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희망이 없군. 두번 다시 오지 않겠어." 제이크는 그녀 곁을 떠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제이크!" 데이지의 외치는 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부탁이에요, 기다려 주세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사랑해요, 제이크! 오래 전부터!"
"동정은 필요치 않아."
"아니에요, 제이크. 사실이에요. 아아,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거예요. 당신이 눈치 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당신 곁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데이지는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 프로포즈를 거절했어? 그때는 왜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했어?"
"그것은 당신의 프로포즈가 어쩐지.....저어....당신은 결혼을 단지 편의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것으로 내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에요. 손님 접대나 자식 키우는 것 등.... 그래서 나는, 당신이 그런 식으로밖에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믿어...." 데이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런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후 당신이 물었을 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기 때문이에요."
제이크는 갑자기 침묵을 지키며 데이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눈물에 젖은 얼굴로.
"사랑이 없다고? 내가 데이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데이지에게 열중하여 미칠 지경이었는데....."
제이크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두 팔을 벌리자, 데이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품에 뛰어들었다. 제이크는 기쁨에 울고 있는 데이지를 끌어안고 마구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믿을 수 없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하고 부르짖으면서 격렬히 키스를 하고,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데이지를 힘껏 끌어안았다. 데이지도 정열적으로 이에 응했다. 그 없이 지낸 몇 달 동안에 쌓이고 쌓였던 감정이 일시에 폭발했다.
제이크는 데이지를 안아 올려 자기 무릎에 앉히고는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아, 데이지, 데이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그것도 당장. 언제 결혼해 주겠어? 되도록 서둘러 줘. 부탁이야."
"언제든지......" 데이지는 속삭이고 나서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두 손을 뻗어 그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끌어안고, 처음으로 자기가 먼저 길고 짙은 키스를 했다. 두 손을 등으로 미끄러뜨려 스웨터 속의 매끄러운 피부를 애무핮, 그는 희열의 신음 소리를 토했다.
"하지만, 서로 분별을 가져야해. 알고 있겠지, 응?" 쉰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그런가요?"
"그럼." 제이크는 데이지의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 놓고 조용히 그녀의 몸을 놓아 주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릴 수는 없어. 사실이야." 기쁨에 들뜬 그의 목소리에는 만족스런 울림이 있었다, '다음 주 오늘, 데이지를 아내로 맞겠어, 좋겠지? 요란한 결혼식은 그만두고 어느 작은 교회에서....."
"네, 제이크. 그것이 좋겠어요." 데이지는 부끄러운 듯이 속삭이고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제이크, 그날 당신 방에서....왜 그만두었어요?" 하고 씁쓸하게 물었다.
또다시 사납게 껴안는 제이크의 눈에 후회의 빛이 감돌았다.
"정말 부끄러운 일을 했어. 그때 나는 데이지를 소유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어. 직접 그 입으로 말했어. 기억하고 있나? 당시 나는, 데이지가 누구를 사랑하건 알 바가 아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 꼭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기분이었어. 그랬었는데, 데이지가 첫 경험이란 것을 알자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데이지와 몸을 섞고 나면 절대로 남한테 넘겨 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괴로운 듯이 말하고 데이지를 으스러지게 꼭 끌어안았다. "이 기분, 이해할 수 있겠지?" 그는 데이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제이크, 나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어요?" 이윽고 데이지가 속삭였다.
"바로 그날 밤이지, 데이지가 찾아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그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그런 감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엔 분명히 깨닫지 못했어. 하지만 데이지를 잃고 싶지 않다, 단순한 상사와 부하의 관계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하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내가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지."
데이지가 그의 코끝에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차차 지워져 갔다.
"좀 더 계속하세요." 데이지가 졸랐다.
"보석상에 들어갔을 때 분명히 알았지. 데이지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는 순간, 아아, 이것이 내 희망이었구나 하고. 언제나 끼고 있었으면 하고 원했어. 그리고는 그 주말이었어. 나는 질투로 고민했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데이지와 필립의 모습을 볼 때마다....아아, 싫어. 그런 기분은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아. 부탁이야, 다시는 나를 두고 가지 말아 줘, 응?"
데이지는 불가사의한 감개에 젖어 그를 바라보았다. 제이크 험프리라는 사람이, 정말 나를 보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걸까 하고. 그러나 한편으론 그와 같은 고통을 뼈저리게 맛본 데이지는 그의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애니타의 일로 같은 생각을 했어요."
"애니타라니? 바보 같군. 그녀의 목표는 내가 이었어. 보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가 소원이었는데, 그런 사람을 만났지. 아마 만족하고 있을 거야."
'그때 우리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었나요?'
"글쎄.... 애니타가 데이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어. 그 후였어, 사랑하는 사람의 입으로부터 직접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생각을 들은 것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대로 할 생각이야."
"네, 하지만 약간 과장한 것 같아요, 몹시 화가 난 때였으니까." 그녀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렇군." 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는 상당히 고집스런 남편이 될 것 같아. 밤에는 언제나 내 침대에서 자야 해. 아침 식사도 같이 해야 해. 밤마다 한 침대에서 자고 싶어..... 아아, 긴 한 주일이 될 것 같군. 결혼한 후에는 데이지가 없는 잠자리란 생각할 수도 없어. 언제 어디서나 데이지와 같이 있고 싶어. 그래서 일을 계속하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제이크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내게도 걱정이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결혼 후에....지금까지 자주 상대를 바꾸었잖아요....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제이크가 그녀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결코 다른 여자한테 마음이 옮아가진 않을 거야, 영원히. 일단 결혼하면 나는 데이지만의 것이야. 그리고 얼마 동안은 둘이서만 살기로 해, 당장은 어린애도 갖지 말고, 내가 데이지를 영원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길 때까지. 그렇게 하면 나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것은 데이지의 사랑과 육체와 다정함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제이크는 데이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또한 데이지를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주고 싶어."
"아아, 제이크!" 데이지는 이렇게 속삭이며 제이크의 품에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