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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의 사랑(Beyond Ransom)

Bollnow 2024. 3. 16. 06:02

혁명가의 사랑(Beyond Ransom)

 

1

나이트클럽의 음악은 플로어쇼가 끝나는 순간부터 더욱 요란해졌다. 줄리아 레녹스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살짝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12시도 안 되었다.

줄리아의 동작을 보고 래리 데이비드슨이 상체를 가만히 기대왔다. 클럽의 호스티스들을 희롱하고 있는 초대객들은 누구 하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싫증이 났습니까?" 래리가 가만히 속삭였다.

줄리아도 순간적으로 래리의 말을 인정했다. 고되고 지겨운 하루였다. 오전 내내 신경을 쓰면 교섭에 임했는데도, 이제 와서 보면 거의 성과가 없었던 것과 같다.

피로로 머리가 아픈데다가, 이 도시에서 제일 비싼 나이트클럽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 묻혀 있으려니 기분마저 침울해졌다. 하지만 이것도 일의 일부였다. <테크니카 연합>과는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통고를 정식으로 받기 전까지는 줄리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니에요. 끝까지 버티겠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이것은 좀체로 겪어 보기 힘든 경험이기도 하니까요"

"좋을 대로 하시오" 래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줄리아는 그를 쳐다보았다. 이 교섭의 보좌역이기도 한 그는 줄리아와는 달리, 중앙아메리카에 대해서는 전문가이므로 스페인어도 능숙했다. 이 나이트클럽은 재무부 관리들이 좋아하고, 프로젝트를 팔려는 업자로부터 접대를 받고 싶어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탐지해낸 것도 래리였다.

래리는 지루한 듯했으나, 초대객들이 모두 즐기고 있으므로 참을 수밖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기름진 요리와 수입위스키가 계속 나오고, 아름다운 호스티스들은 한시도 웃는 낯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관들도 줄리아가 동석하여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으나, 스카치 덕분에 대담해졌는지 지금은 호스티스들과 명랑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줄리아가 참석하면 분위기가 굳어진다고 래리는 말했으나, 상당한 액수에 달할 접대비에 사인할 입장에 있는 줄리아로서는 호스트 역할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여성게에는 결코 즐거운 장소가 못될 것이라는 래리의 말은 옳았다. 그러는 그녀는 섹시한 호스티스들에 대해서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동지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줄리아 자신도 약간 취한 초대객의 한 사람으로부터 춤을 추자는 청을 받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댄스플로어로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목덜미가 간지러운 듯하여 뒤를 바라보니, 출입구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출입구를 가리고 있는 벨벳 커튼 앞에서 코트와 흰 스카프를 급사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그는 나이트클럽의 남자손님들과 같이 디너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장갑을 건네주던 손을 멈추고 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줄리아도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상대는 줄리아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뚫어져라 훑어보고 있었다. 싸늘하고 약간의 경멸까지 섞인... 그러나 그것만이 아닌 눈초리. 어디서 본 듯한 눈초리였다. 그렇다. 대학에서 교수가 망원경으로 매력적이면서도 징그러운 곤충을 관찰하는 그런 눈초리다. 그 남자도, 싫지만 눈을 돌릴 수가 없다는 듯한 눈으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줄리아도 주위를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동행한 사람보다 어깨 하나는 더 크고 몸맵시도 있었다. 다만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 있어 악마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었다.

", 돈 로베르토가 왔군요" 갑자기 줄리아에게 춤을 청한 고관의 목소리가 변했다. "그를 아십니까?"

"아뇨" 줄리아는 천천히 대답했다.

"로베르토 마다리아가란 사람입니다. 유명한 변호사이자 큰 부자죠. 국제적인 회사 일을 맡아 하고 있는데, 정말 그를 모르십니까?"

줄리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저는 이름조차 들은 일이 없어요"

", 그렇습니까? 하기야 변호사도 워낙 많으니까요" 상대는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돈 로베르토는 최근..."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흥미가 다양해진 모양입니다. 어쨌든 소문으로는 그렇습니다"

고관은 줄리아의 팔을 잡고 플로어로 인도했다. 줄리아눈 더 이상 시선을 키 큰 남자에게 보내고 있을 수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끊어진 것 같았다. 어째서 그럴까? 평소의 나답지 않게. 아마도 이 소음과 어두컴컴한 조명 때문일 것이다.

고관은 춤을 추면서 에절 바르게 대화를 계속했다. "알토리오에는 처음 오셨습니까?"

""

"이왕 오셨으니, 좀 더 우리나라를 자세히 보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래리나 저나 관광을 할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유감이로군요. 하기야 오아하칸에서는 아직 관광산업이 활발하지 못합니다마는, 더구나 산악지대라는 조건도 겹쳐, 이 나라에 온 외국인들은 고산병에 걸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그래요? 그렇다면 저는 행복하군요.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도 않아요, 이 알토 리오는 산악지대라 할 수 없습니다. 겨우 2,700미터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산악지대란 오지를 말하는 것인데 4,500미터 내지 5,000미터나 되는 곳에 마을이 있습니다. 전통공예며 콜럼버스 이전의 유적이 남아 있어 흥미진진합니다마는, 관광객들은 고산병이 무서워 찾아가지 않습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줄리아의 대답은 건성이었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자연스럽게 클럽 입구 쪽을 바라보니, 그 남자는 아직도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묘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줄리아는 턱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저쪽에서도 이 동작을 보고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줄리아는 통증과도 같은 전율이 등줄기에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먼저 저신을 되찾은 것은 돈 리베르토였다. 친구 뒤를 따라가면서, 그러나 시선은 줄리아한테서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크고 표정이 풍부한 입술은, 정열적으로도 장난스럽게도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줄리아는 오싹했다. 춤의 상대는 이것을 느끼지 못했으나, 사나이는 분명히 깨달은 것 같았다.

줄리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무서워졌다. 그녀는 이러한 자기가 싫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놀라서 눈썹을 치켜 올리기는 했지만, 낭패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댄스플로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친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흡사 친구이상으로 깊은 사이인 상대에게 보내는 미소인 듯했다. 그리고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동행자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돈 리베르토가 당신을 아는 것 같군요" 재무부 관리도 이제야 깨달은 듯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면, 최소한 알고 지내고 싶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가씨"

"넌센스에요. 아는 사람과 착각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렇게 조명이 어두우니 무리도 아니겠지만"

줄리아가 테이블로 돌아오자, 래리는 초대객에게 아메리칸 풋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지루함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수영복 차림의 여자 담배장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줄리아가 자리에 앉는 순간, 댄스 상대가 심한 사투리로 말했다.

"마다리아가가 여기 왔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야"

"누구를 찾고 있을까? 설마 우리는 아니겠지?"

상대는 분명히 놀라는 것 같았다. 줄리아는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사업상 스페인어를 모르는체하고, 래리에게 얘기하도록 하는 것이 유리했던 것이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습니까?" 래리도 그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알아듣고 넌지시 물었다. 줄리아의 댄스 상대를 했던 연상의 관리가 재빨리 평정을 되찾았다.

", 알토 리오는 뉴욕과는 다르니까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죠. 여기서는 아는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죠. 가령 저기 있는 사람은..."

고관은 클럽에 와 있는 명사들의 이름을 말했다. 래리와 줄리아는 자세히 귀를 기울였다. 장래를 위해 명사들의 이름을 기억해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계약이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언제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지고 이 나라를 다시 방문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유명인사를 알아 둔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관은 마다리아가에 대해서만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명인사의 이름을 말하고 그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래리의 질문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남자는 물론 클럽 안에 있었다. 스테이지와 오케스트라를 둘러싼 약간 높은 장소의 테이블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석한 남자는 둘이었다. 그리고 벨벳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도 같이 있었으나, 그녀는 매우 지루한 듯한 표정이었다.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고, 마다리아가는 잠자코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줄리아의 자리에서는 옆얼굴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근엄하고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3의 사나이는 초조한 둣 담배를 마구 빨다가, 반도 더 남은 것을 비벼 끄고 다시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가끔 말을 꺼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지고 음악이 끝났다. 디스트 쟈키가 만장의 박수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뒤이어 밴드가 다시 등장해서 삼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솜씨가 대단히 놀라웠다.

"아아!" 젊은 관리가 기대에 찬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마다리아가가 온 이유를 알겠어"

"플로리타 말인가?" 나이 많은 관리가 의아한 듯 말했다. "자네 말이 옳을지 모르지만, 혹시..."

! 하는 소리가 웨이터와 다른 손님들의 입에서 나왔다. 작은 무대를 푸른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기 시작하고, 간단한 무대 장치가 떠올랐다. 손님들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웅성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시작되죠?"

줄리아의 물음에 연상의 관리가 대답했다. "플로리타가 춤을 춥니다. 국제적으로 이름난 무용수로서, 귀국했을때는 가끔 여기서 춤을 추죠... 늘 이 나라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클럽에서는 예고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플로리타의 춤을 볼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라 할 수 있죠. 오늘밤도 마다리아가씨가 오지 않았다면 춤을 구경할 수 있었을지..."

갑자기 음악이 그치고,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플로리타가 무대로 걸어 나왔다. 햇볕에 탄 날씬한 몸, 사자의 갈기 같은 황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 첫인상으로는 놀라운 미인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몸에 벤 듯한 우아함과 관능을 풍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했다. 물론 그녀의 몸매는 놀라워, 열광적인 박수가 그칠 줄 몰랐

.

"화려하군요"

래리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국제적인 비즈니스맨처럼 행동하고 있으나, 대학을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티가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보기 드문 미인이에요" 줄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용수가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순간 마다리아가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린 듯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줄리아의 머리에 떠올랐다.

플로리타는 날렵하게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자기자신에게 타일렀다... 걱정할 것 없어.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다. 어쩌면 마다리아가와 플로리타가 정열에 사로잡혀, 출연계약을 포기하고 사랑의 도피를 할지도 모른다. 약간 멜로드라마 같은 냄새가 풍기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나는 오늘 오후 대통령을 만나 계약체결에 실패했으니까, 내일 아침 비행기로 뉴욕에 돌아갈 몸이 아닌가.

플로리타는 즉흥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으나, 분명히 목적이 있는 듯이 보였다. 무용수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속에 흘끗 마다리아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지 갑자기 플로리타가 담배장수의 주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웨이터와 관객, 그리고 플로리타도 모두 웃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아의 눈에는 플로리타가 아주 심각한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어쨌든 아주 놀랍고

멋진 춤이었다.

플로리타는 담배장수에게 굵은 담배 하나를 집어 라벨을 벗긴 뒤, 담배 끝을 금빛 매니큐어를 칠한 손끝으로 잘랐다. 밴드가 소리를 죽이고, 드럼만이 고조된 리듬을 유지했다.

스포트라이트 속에 라이터가 나타났다. 플로리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몇 모금 빨았다. 그리고는 관능적인 춤을 계속 추면서, 마침 스포트라이트 속에 떠오른 마다리아가 쪽으로 접근해 갔다. 두 사람은 서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무도 입을 연 것 같지는 않았으나, 줄리아는 그들 사이에 무슨 뜻이 전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마다리아가는 그녀가 내민 담배를 빨아 한 모금 빨고 연기를 그녀의 얼굴에 뿜었다.

플로리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동양식으로 가만히 합장을 한 뒤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떠나갔다. 플로리타가 발코니를 돌기 시작하자 음악이 높아졌다. 그녀는 이 테이블에서 신사의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저 테이블에서 와인 한 잔을 받아 마시는 등 손님을 뇌새시키면서 춤을 추고 다녔다.

줄리아는 문득 그녀가 자기네 테이블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 몸을 긴장시켰다. 왜 그런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플로리타가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 나이트클럽에서 빠져나가야지... 본능은 이렇게 속삭였으나, 다른 세 사람이 그녀의 춤에 열중하고 있으므로 혼자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플로리타는 분명히 담배 놀음을 다시 한번 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래리가 앉아 있는 장의자를 가볍게 건너뛰어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테이블 위에 올라가, 술병과 글라스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스텝을 밟았다.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플로리타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스커트 대신 입었던 요란한 색깔의 띠 리본이 갈색 허벅지에서 늘어졌다. 그녀는 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담배를 내밀었다. 그러나 래리가 이것을 받아들려고 하자 얼른 몸을 움츠리고, 담배를 무릎에서 허벅지로 굴리기 시작했다. 이때 장난감 권총을 발사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번쩍 섬광이 일어났다. 동시에 스포트라이트도

꺼졌다.

놀람의 고함소리가 박수와 웃음의 소용돌이로 변했다. 그러나 줄리아는 숨을 죽인 채로 있었다. 이 소란을 틈타 래리가 유괴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다시 불이 켜지자 래리는 양간 멍한 듯한 표정으로 플로리타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플로리타는 아주 체구가 작았다. 그녀는 일어나서 박수에 답하여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다시 래리 곁에 앉았다. 밴드가 댄스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화가 나신 건 아니겠죠?" 플로리타의 목소리는 맑고 아름다웠으며, 맨해턴 액센트가 섞여 있었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보는 것처럼 이국적인 얼굴도 아니다. "새로운 묘기여서 시거를 빼앗지 않을 상대를 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불꽃 묘기는 이번이 처음인가요?" 줄리아가 양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 <칼멘 광시곡>은 처음이에요" 플로리타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가씨도 즐거웠겠지?"

래리의 질문에 플로리타는 어깨를 으쓱했다. "즐거워요?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하면 끝장이에요. 취한 사람이 담배를 뺏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이 나요. 나는 무용수지 마술사가 아니거든요" 플로리타는 일어나서 가만히 래리를 내려다보았다. "잠깐 기다려주세요. 다시 와서 제가 어떤 무용수인지 보여드리겠어요... 파트너와 어떻게 춤을 추는지 말이에요"

플로리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사뿐 걸어갔다. 재무부 고관 두 사람은 선망의 눈길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플로리타가 손님과 춤을 춘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젊은 쪽 말에 연상의 관리가 빈정대듯 대꾸했다. "혹시 마다리아가와 싸우고 보복하려는 생각에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마다리아가는 담배를 피우면서 태연한 모습이었다. 플로리타가 자리를 뜨기 전에 이쪽을 힐끗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래리가 질투심 강한 애인의 분노를 살 염려는 없다. 줄리아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언짢은 마음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을 때, 줄리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가씨" 돌아보니 마다리아가였다. 싸늘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춤을 한 곡 부탁해도 될까요?" 그리고는 래리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물론 허락해 주시겠죠?"

줄리아는 직감적으로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래리가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는 화가 나서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결코 여권론자가 아니었으나,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은 듯 다루는 그들의 태도가 괘씸했던 것이다. 줄리아는 단호하게 거절하려다가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장사를 하러 이곳에 왔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습관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가 잠자코 일어서자 마다리아가가 손을 내밀었다.

알토 리오에서 마이애미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면 래리에게 실컷 설교를 하기로 하고 오늘밤만은 웃는 낯으로 이 고장의 습관 대로 해야지...

음악은 부드러운 리듬이었으나 꿈꾸는 듯한 곡은 아니었고, 마다리아가가 손을 잡는 폼도 판에 박은 격식을 차린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줄리아는 자신이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상대방을 의식치 않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것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싸늘한 어조로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은 자주 첫 대면의 숙녀에게 춤을 청하나요, 마다리아가씨?"

줄리이가 이름을 알고 있는데도 상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지... 흥미를 느낀 여성에 대해서만이죠, 아가씨"

흥미란 말을 하기 전에 잠시 망설인 것은, <마음이 끌리는>이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둔 때문일 것이다. 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당신을 화나게 만들었습니까?"

그 허스키한 속삭임은 상황에 따라 여자의 마음을 녹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줄리아는 왜 이 남자기 자기에게 접근해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언짢은 예감만은 지워 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그는 그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정말 화가 나셨나요?"

"아뇨,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화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줄리아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그건 어째서죠? 내가 춤을 청해서입니까?"

"제 동행에게 허락을 받으려 하셨기 때문이에요"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동행한 사람에게 심한 모욕을 주는 것이 됩니다. 단순한 예의상의 문제지만, 물론 아가씨의 나라에서는 이런 예의를 심한 남녀차별이라 여기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나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그것뿐입니까?"

"아니에요. 무용수에게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남성도 나는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플로리타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말이군요?"

"마다리아가씨,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하건 저와는 상관없어요. 저한테도 똑같은 행동을 할 가능성만 없다면 말이에요"

마다가리아의 연한 갈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겨울비처럼 싸늘하게 빛났다. 그러면서도 줄리아의 말을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내가 플로리타를 다루듯 아가씨를 취급한다면 미음이 언짢겠소?"

줄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자기 자신에게 부아가 났다. 여자 다루는 데는 백전노장일 상대방의 노골적인 조롱 따위에 얼굴이 붉어지다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어요, 마다리아가씨. 저는 당신이 어떤 취급을 하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아가씨" 그는 달콤한 미소를 띠며 녹일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남자도 아가씨의 미모에는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줄리아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 눈만 크게 떴다. 공치사인 줄은 알지만 너무 도가 지나쳤다. 마다가리아가 뜨거운 한숨을 쉬어 보였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마다가리아가 두 팔에 힘을 주어 줄리아를 끌어당겼다. 탄력 있는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웃죠? 내가 입에 손가락이나 물고 미인을 바라보는 남자로만 보입니까?"

비난 비슷한 말투였으나, 역시 재미로 그러는 것 같았다.

"아뇨, 당신은 여자를 들뜨게 하는데 놀라운 재주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아가씨, 그것은 지나친 말이군. 내가 공치사를 하는 줄 알고 있소?"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마음을 갖게 하려고 애쓰시는 것 같군요"

마다가리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으나, 눈빛만은 로맨틱한 행동과 반대라는 것을 줄리아는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가씨는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고 있군...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그는 줄리아의 오른손을 쳐들고 여러 번 키스한 뒤 그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줄리아도 크게 한숨을 쉬어 보였다.

"마다이라가씨, 저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 말은 믿을 수 없어요, 공치사로 여기다니 어의가 없군... 아가씨는 남성들이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공주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이 촉감..."

그는 한쪽 손으로 줄리아의 등을 리드미컬하게 쓰다듬었다. "마치 꿈을 안은 채로 눈을 뜬 것 같소"

줄리아는 약간 몸을 떼면서 비어 있는 손을 상대의 가슴에 대고 떠밀었다.

"그 손이 제게는 지나치게 압도적이에요. 알게 된 지 몇분도 지나지 않은 분으로부터 찬사를 받다니, 저는 그런 일에 익숙치 못해요. 소름이 끼쳐요"

두 사람은 몇 초 동안 잠자코 춤을 추었다. 얼마 있다가 마다리아가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아가씨가 이토록 지적인 여자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윤기 있는 이 푸른 눈을 들여다볼 때미나 거기에 싸늘한 아가씨가 있다니 몹시 당황하게 됩니다"

"미안해요" 줄리아는 웃음을 감추고 예의바르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성격인 것 같군요. 그러니 테이블로 돌아가는 것이..."

마다리아가는 이맛살을 찌푸렸으나 곧 미소를 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용남할 수 없는 생각이라니, 단 한번의 댄스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아마도 내가 아가씨보다는 이런 경험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한 내가 우리는 성격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거든요"

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은 아직 살아 있으나, 매혹의 불꽃이 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대화의 유희를 계속하고 있으면, 그 이상 자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아가씨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욕망을 일깨우는군.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있는 탑 속의 공주처럼" 줄리아는 이말에 놀라 의아하다는 듯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

줄리아는 꿀꺽 침을 삼키고, 상대방의 말이 자아내는 마술의 실을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마다리아가씨. 당신은 지금 내게 모션을 걸고 있나요?"

마다리아가는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춤을 멈출 뻔했다. 그러나 얼른 스텝을 바로잡고는 전혀 분노나 망설이는 기색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천만에, 만일 내가 아가씨를 안고 싶었다면, 그 뜻이 아가씨한테도 분명히 전해졌을 거요. 아무리 내가 영어에 서툴다 해도"

마다리아가의 영어는 억양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했다. 이것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줄리아는 그의 겸손에 넘어가지 않고 눈을 빛내면서 대꾸했다.

"그럼, 저두 그런 생각이 들었으면 똑같이 당신에게 전해줬을 거예요"

줄리아를 내려다보는 마다리아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마치 그렇게 해보이겠다는 듯이 조용하게 대답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오."

 

2

테이블로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어디서인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줄리아의 팔꿈치를 받쳐든 마다리아가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어느 틈에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단순한 정전이니까... 알토 리오에서는 흔히 이런 일이 생기거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라는 뜻에서 일부러 정전을 시킨다는 것까지 있을 정도니까. 하기야, 때로는 기계도 기계 대로의 사정이 있겠지. 매니저도 이것을 잘 알고 있을 테지. , 저것 봐"

종업원실 문에서 웨이터들이 쟁반에 촛불을 받쳐 들고 차례차례 나타났다. 그들은 정확한 걸음걸이로 홀 안을 돌면서 테이블에 하나씩 촛불을 놓았다. 손님들도 이런 일에 익숙해 있는지 아무 불평도 하지 않는다.

"솜씨가 아주 놀랍군요" 줄리아의 말에 마다리아가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고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솜씨가 놀랍다고? 과연 아가씨다운 표현이로군! 촛불도 아가씨에게는 로맨틱하기보다는 솜씨의 문제가 되다니..."

"당신은 로맨티스트인가요?" 줄리아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마다리아가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싶었다.

"아니, 평소에는 로맨티스트라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아가씨에 비하면 그런지도 모르지"

"틀림없이 그런 것 같군요" 줄리아는 자리에 앉아 친간감 있는 미소를 떠올렸다. "춤 상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할 말이지, 아가씨. 나중에 다시 부탁하겠어... 전기가 들어와 밴드 연주가 시작되거든"

마다리아가는 테이블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고 일행한테로 돌아갔다. 그가 사라지자, 래리가 와인을 따르는 체하고 얼글을 가까이 가져왔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 사람들은 저 남자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장관에게 보고할 것인지 아닌지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오늘밤 안으로 전화를 할지도 몰라요. 겁을 먹은 듯해요. 줄리아에게 마음이 있으서 댄스를 청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모양이에요"

마지막 말은 줄리아도 동감이었다. 그리고 줄리아가 마다리아가의 주의를 끈 것이 초청객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뉴스는 크게 흥미가 있었다. 그는 도대체 누구있가? 단순한 국제 변호사 이상의 존재일까? 어쩌면 전 세계의 정보기관과 관련을 가진 국제적 조직체의 일원으로서, 나에게는 정보를 빼내려는 것이 아닐까? 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정보는 가지고 있었으나 이야기 할 생각은 없었다. <테크니카 연합>이 앞으로도 중앙 아메리카와 거래를 할 생각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적정한 거래를 한다는 내 평판에도 금이 간다. 나로서는 지금의 사업이 전부인데, 그것마저 잃게 될지 모른다. 휴 해밀턴이 여상속인과 결혼한 이후 그녀는 사업에 목숨을 바쳐 왔던 것이다.

"저는 너무 피곤해요" 줄리아는 초청객들에게 매력에 넘치는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재가 먼저 실례해도 오늘 저녁의 즐거움이 수포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죠?"

재무부의 고관이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예의상으로는 유감스러운 체했으나, 속으로는 좋아하고 있었다. 이제야 미국회사의 손으로 실컷 즐기게 되었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계산은 내가 처리하겠어요. 하지만, 앞으로의 계산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줄리아는 래리에게 빠른 말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당신만 괜찮다면 차는 내가 쓰고 싶은데...?"

그 차는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으로서, 대통령이 스위스 은행구좌에 수수료룰 불입할 의사가 <테크티카 연합>에게는 없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에, 레녹스와 조수전용으로 내준 것이다.

"좋아요, 저는 택시를 타죠" 래리는 씁쓸하게 웃고 불평하듯 말했다. "잘못 말려든 것 같군요. 이 사람들은 밤새 마시고 놀 생각인 모양이에요. 내일 아침 호텔로 수트케이스를 가지러가서, 그 길로 비행장에 직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비행기표는 내가 마련하겠어요" 줄리아도 미소를 되돌렸다. "당신은 그만한 일을 하니까요"

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낯으로 초청객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제발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녀는 웨이터가 다시 술을 날라오는 것을 보면서 입구로 향했다.

데스크에서 24번 테이블의 계산서를 부탁하자, 상대는 깜짝 놀라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잠자코 계산서를 내밀었다. 줄리아는 얼른 훑어보고 크레디트 카드와 함께 건네주었다.

"코트를 가져올 동안 내 차를 불러 주시겠어요? 나는 레녹스에요"

데스크의 아가씨가 웨이터와 시선을 교환했다. 줄리아는 그것을 알아챘으나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피로가 한꺼번에 겹쳐, 저녁 무렵부터 따라다니던 나쁜 예감마저 삼켜버렸다.

줄리아는 머리를 빗고 검정 벨벳 코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보관소의 아가씨에게 팁을 준 뒤 계산서에 사인하고 영수증을 받았다.

운전사는 입구의 화단 곁에 서 있다가 줄리아를 보자 클럽의 유리문을 열고, 이어서 리무진의 뒤쪽 문을 열었다. 시내 전체가 정전이 된 듯, 거리는 캄캄하고 차 한 대도 다니지 않았다.

줄리아는 뒷좌석의 푹신한 쿠션에 깊이 파묻혀 앉았다. 리무진의 내부에는 담배, 그리고 고급 남성용 화장수... 또 다른 향기로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호텔까지 10분만 참으면 되니까. 그녀는 되도록 깊이 숨을 쉬지 않으려고 했다.

운전사가 으시시 춥다는 듯 몸을 움추리고 자리에 앉았다. 차의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엔진을 걸었는 데도 두 번 씩이나 까딱하지 않았고, 세 번째는 갑자기 차가 전진하는 바람에 급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여기 오기까지는 운전이 그토록 능숙했는데, 아마 취한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차가 도로를 가로지르듯 왼쪽으로 꺾이고 둔탁한 브레이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강한 빛이 비쳐, 줄리아는 눈이 부셨다. 리무진은 다른 차에 부딪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엎어졌다.

줄리아는 바닥에 쓰러졌다. 밖에서 문이 뜯겨지고 흥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줄리아는 일어서려 했으나, 침입자들은 그를 틈을 주지 않았다.

검은 헝겊이 얼굴에 덮어지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겨우 클로로포름이란 것을 깨닫고 얼굴을 덮은 것을 벗기려 했으나, 그녀는 차차 혼수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줄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대낮이었다. 눈가리개의 틈으로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클로로포름의 냄새를 맡게 하고 눈가리개를 씌운 모양이었다. 어디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는 느낌이 들지 않으므로 차 안긴 것 같지는 않았다. 차 안이라 해도 정지해 있을 것이다.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고 멀리서 사람의 음성의 들리는 듯했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인 것 같았다.

몸을 가만히 움직여 보았다. 두 손을 느슨하게 묶여 있었지만, 두 다리는 자유로웠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딱딱한 것이 위에 가로놓여 있었다. 다시 몸을 움직이자, 무언가가 떨어지면서 큰 소리를 냈다.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젊은 여자의 음성이 스페인어로 말했다.

"정신이 들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죠?"

대꾸가 있었으나, 너무 작은 소리여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 손이 줄리아의 몸에 와 닿았다. 능숙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거칠게 다루지는 않았다. 일으켜지는 순간 머리가 아찔했다. 줄리아가 정확한 스페인어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토할 것 같아요"

젊은 여자는 깜짝 놀라 눈가리개를 벗기고 세면기를 들이댔다. 줄리아는 크게 토했다. 그녀는 겨우 다 토하고 나서 힘없이 벽에 기대고 몸을 떨었다. 땀으로 흠뻑 젖었는데도 몹시 추웠다.

"괜찮으세요?"

"모르겠어요"

"몸에 질병이라도 있나요? 가령 심장이 나쁘다거나..."

줄리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본 젊은 여자는 갑자기 거친 말을 뱉었다.

"다행이야! 그 바보 녀석들이 최소한 환자를 데려오진 않았군"

"나는... 지금 어디에 있죠?" 줄리아는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상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직 알토 리오에 있는 것은 아니겠죠?"

"필요할 때 가르쳐 주겠어요"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래요?" 아직 기분은 나빴으나 머리는 명료했다. "유괴인가요?"

이 질문이 잚은 여자를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았다. 어째서일까?

"팔이 아파요. 풀어 줄 수 없을까요?"

젊은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 니아프로 손을 묶었던 밧줄을 끊어 주었다. 줄리아는 시퍼런 칼날을 보고 섬찟했으나 애써 동요를 참았다.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된다. 용기 있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길지는 않겠지만, 기다려야 할 거예요. 커피라도 마시겠어요?"

젊은 여자가 물었다.

독약이 들었을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의 위험은 각오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입안의 이상한 냄새를 가시게 하고 싶었다.

", 부탁해요"

"그러면 잠시 여기서 기다리세요" 젊은 여자가 줄리아를 자세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기서 움직이면 안된다는 것은 잘 아시겠죠, 아가씨? 당신을 헤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역시 결사적이에요"

젊은 여자는 밖으로 나갔으나 좀체로 돌아오지 않았다. 줄리아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좁고 긴 방이었다. 양쪽 벽에는 판자로 막은 창이 하나씩 있고, 한쪽 벽엔 캐비닛이 놓여 있었다. 맞은편 벽에는 큰 지도가 압정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전쟁 중의 사령실 같군. 줄리아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씁쓸히 웃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것이 사실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게릴라가 활동한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테크티카 정보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은 지방의 소집단에 지나지 않아 산악지대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기 때문에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줄리아는 손목을 만져 보았다. 밧줄이 스쳐서 아프고 속은 아직도 메스꺼웠다. 화사에 돌아가거든 토니에게 말해서 정보부원 모두를 해고시켜야지!

이때 밖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리고 몇 사람이 서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거운 가구를 걷어차는 듯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줄리아는 겨우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이렇게도 상시기 없다니!"

채찍질을 하는 듯한 소리에 줄리아까지 놀라고 말았다. 저토록 화가 난 남자와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때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반론을 제기했다.

"우리는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여자를 잡아오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어!"

젊은 여자가 달래듯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줄리아가 만났던 바로 그 여자인 듯했다.

"우리는 레녹스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실행을 했을 뿐이에요"

"그대로 실행한 게 아니야. 너무 빨랐어. 레녹스는 아직 클럽 안에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은 그 여자의 차를 습격했어... 더구나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고, 30분 후에 군대가 출동했어.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 행동에 옮기기 전에 거기까지 생각했느냐 말이야?"

"운이 나빴어요..."

"운이 나빴다고? 이 형편없는 얼간이야! 페페, 너는 왜 그렇게 어리석은가!" 그러나 사나이의 음성에는 피로가 섞여 있었다. 화를 내기에는 지친 듯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 여자가 정신을 차리면 내가 만나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이미 정신이 들었어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지만요"

유머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웃음소리가 거기에 대한 대답이었다.

"토했나? 클로로포름을 남새 맡게 하기 전에 그 정도는 생각했어야 하지 않아?"

"괜찮은 모양입니다" 페페라 불린 젊은이가 말했다. "커피를 부탁했을 정도니까요"

줄리아는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딱딱한 의자에 깊숙이 앉아 어떻게 해서라도 냉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입술을 꼭 깨물고 떨리는 두 손을 꼭 마주잡았다. 무서워한다는 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줄리아는 놀란 나머지 공포도 잊은 채 입을 멍청히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로베르토 마다리아가였다. 그 표정은 굳어져 있고 노기를 띠고 있었으나, 놀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누구를 만날지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줄리아는 마음에 분노가 치솟았다.

"안녕하세요, 세뇨르?"

친절한 인사에 마다리아가는 더욱 부아가 들끓는 모양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줄리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바보 같은 아이들이 아가씨에게 무슨 짓을 했지?"

"당신이 명령한 대로 했겠죠" 줄리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쌀쌀하게 말했다.

"정신을 잃게 하라고 명령한 기억은 없어"

"약냄새를 맡게 하고 유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나요?"

"유괴하라는 명령은 내렸지" 그도 줄리아와 마찬가지로 싸늘한 어투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아가씨는 아니었어. 술직하게 말하겠는데, 아가씨는 잘못 걸려들었어...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 그리고 클로로포름은 그들이 생각해낸 것이었어. 도대체 그 사용법조차 모르고 있었어. 지프에서 클로로포름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대통령의 차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정말 미숙했군요" 줄리아가 가만히 말했다.

"적어도 불필요한 일이겠지"

마다리아가는 어느 정도 침착을 되찾은 듯했다. 그는 줄리아 맞은편에 있는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부츠를 신은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상대방이 어제와 전혀 달리진 것을 처음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어젯밤에 마다리아가가 매력적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아침의 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야성적이었다. 검정색 데님과 사파리 재킷은 모두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고, 턱수염이 마구 자라나 있었다. 눈은 조심스럽고, 길다란 손가락은 오일로 더려워져 있었다. 줄리아는 아직 속이 메스꺼웠는데도 불구하고 마다리아가가 발산하는 자력을 느끼고, 그 때문에 점점 더 부아가 났다.

"아가씨의 동료를 유괴할 생각이었는데... 교섭의 리더인 줄리오 레녹스라는 남자 말이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줄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의 정보에 혼란이 일어난 모양이군요. 당신은 부하들을 꾸짖을 자격이 없어요"

"무슨 뜻이지?" 마다리아가가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은 나와 내 동료 중에서 누구를 유괴할 것인지 분명히 명령했어야만 했어요. 교섭의 리더는 나... , 줄리아 레녹스에요"

마다리아가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발레타 대통령과 교섭하는데 회사가 여성을 파견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군"

"하지만 분명히 파견했어요!" 줄리아는 기분이 상했다. "나는 테크니카 창립임원의 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는 주로 아프리카 대륙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이반에 라틴 아메리카를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사를 겸해서 찾아온 거예요. 보통의 경우에는 래리가 교섭을 하고, 나는 사인할 때나 가곤 했어요"

마다리아가의 핸섬한 얼굴이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바람직하지 못한 새 정보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분명히 우리는 중역들을 노리고 있었어. 그래서 다른 외국기업이 아니라, 테크니카에 눈독을 들렸던 것인데... 그 대상이 여자라니" 마다리아가는 눈을 감았다. "이래 봬도 나는 이 나라에서 최고의 두뇌를 가진 몇몇 사람을 정보활동에 투입하고 있는데..."

다른 경우라면, 마다리아가의 절망적인 어조가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아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클로로포름의 영향 때문인지 긴장 탓인지 모르나 이를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얼른 말했다.

"여성은 안 된다고 미리 알려 주었어야 했는데 그랬군요?"

"그랬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어, 계획을 바꾸는 수밖에 없겠어"

줄리아는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마다리아가의 싸늘한 시선을 대하자 서둘러 말했다.

"<테크니카 연합>은 몸값은 지불하지 않아요. 그것이 회사의 방침이에요. 세계 도처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으니까 정치적 분쟁이 있는 나라도 많아요. 예외를 인정할 수 없거든요"

"중역도 그런가? 분명히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내 정보망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니... 1등 중역도 그렇다는 것인가?"

"물론이에요. 더구나 몸값을 지불하지 말자는 방침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중역은 말할 나위도 없어요"

"가족은? 가족이 몸값을 지불하라고 압력을 놓지 않을까?"

"나는 가족이 없어요"

"없다고?" 마다리아가는 의아해하는 눈길을 줄리아에게 던졌다. "어쨌든 좋아.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아가씨를 미끼로 몸값을 요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어"

줄리아의 눈에 공포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마다리아가가 무뚝뚝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폭행할 생각도 없어. 그러니 안심해도 좋아. 이 나라 국민이 잔인하다는 소문이라도 있건가?"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에서 게릴라에게 유괴당한 사람이 있다면 신문은 좋게 평하지는 않을 거예요... 휴가를 보내는 경우에도 이곳이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상대는 줄리아의 어조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동정하는 듯이 바라보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현대사 강의를 간단히 해야 할 것 같군. 이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레녹스양?"

줄리아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인구는 800. 인구가 과밀한 중심도시가 두 군데, 드러나 대다수는 지방에 사는 농민이죠. 산이 많은 대신 오지가 많고, 띠 모양으로 이루어진 연안은 너무 낮아서 자주 홍수의 피해를 입어요. 땅은 기름지지만 강우량이 불안정하고 수로가 변하기 쉬워 농업도 여기에 좌우되죠"

마다리아가는 깜작 놀랐다. 줄리아는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놀라는 것을 보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농업 경제학자인가?" 그는 조용히 말하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밖에도 다른 직함을 가지고 있나?"

"당신네 대통령에게 농업관개 프로젝트를 팔려고 했던 교섭자에요... 그것은 좋은 프로젝트였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깃들어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대통령이 살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다른 누가 사게 되겠지. 분명히 고지대는 손을 보아야 할 테니까. 오랫동안 너무 무시되어 왔지"

여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이었으나, 줄리아는 잠자코 있었다. 마다리아가라는 인간은 파악할 수 없었다. 텔레비젼 뉴스에서 본, 자유투사의 동료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냉정했다. 그러나 유괴하는 수법이나 의문의 여지가 없는 감금상태로 미루어 보면 그들의 일당임에 틀림 없다.

"지리에 대해 밝다는 것은 인장하겠어, 레녹스양. 하지만, 난 역사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야"

"지난 4년 동안 군사정권 밑에 있었다... 이것밖에는 몰라요"

"그럴 테지" 마다리아가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바깥 세계 사람들은 거의 그것밖에 모르고 있겠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닌데..."

마다리아가는 일어서서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줄리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등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사실 오아ㅎ하칸은 몇 십 년 동안 명목상의 국가에 지나지 않았지. 호족들의 사유지가 결합된 형태로 유효하게 관리되어 왔어... 전례적으로 보면 나쁜 관리가 아니었지. 적어도 굶어 죽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이 지역에서는 환경의 밸런스가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구폭팔이라거나 그밖의 사태가 발생했나요?"

"아니지. 원래 이 나라는 인구말도가 낮고 출생율도 그리 높지가 않아. 그런 것이 아니라, 나쁜 정치가 한없이 계속된 결과였어. 의식수준이 높은 호족들은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지. 옥스퍼드와 소르본 대학을 졸업한 자식들이 귀국하여 민주주의 선거에 의한 정부, 참정권의 평등을 부르짖어 마치 벌집을 쑤여놓은 듯한 소란이 일어났어"

"당신은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나요?"

충격을 받은 줄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마다리아가가 돌아섰다.

"이론적으로는 신봉하고 있지... 이론상으로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식량과 집과 올바른 생활을 부여할 수 있는 제도라고 믿고 있어.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데 있어" 그의 입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으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다른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일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세계의 강대국들은 모두 신흥국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 아마 선의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 나라에는 문맹자가 90%나 되고 있어. 정치적 논의도 고립된 산간벽지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해. 그들은 옛날처럼 여러 종족으로 분열되어 있어... 누구 한 사람 그것이 좋다고는 생각지 않아. 외국인이 보건 지배계급이 보건, 또 마을사람 자신이 그것을 보아도 그것은 좋지 않아"

"그래서요?"

"이 나라에는 마르키스트의 마을이 몇 군데 있고, 트로츠키의 마을도 몇 군데 있어. 또 주로 남부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우익이 더러 있지. 알토 리오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최소한 7개소의 게릴라 지역을 통과해야 하지. 여행은 불가능하고, 폭력도 다반사지. 강대국이 아낌없이 보내 주고 있는 것은 오직 무기뿐이야. 그 때문에 이 나라에서는 내전상태가 20년이나 계속되고 있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런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녀는 몸이 오싹했다.

"때로는 몇 달 동안 지속되어 상당한 지역을 지배하는 정부가 약간의 사업을 하기도 하지.. 예컨데 도로의 보수같은 것 말이야. 그러다가 다시 혁명이 일어나 내전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거야. 이 나라의 어린이들은 한 번도 평화스러운 시대를 살지 못했어, 레녹스양"

"하지만 군사정권은 이미 4년이나 계속되지 않았어요? 몇 달 동안이 아니잖아요"

"그것이야말로 이 나리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는 증거지. 군부는 대도시 두 군데를 지배하고 있는게 지나지 않아. 수도와 항구가 그 전부지. 물론 외국과 제법 무역도 하고 있어. 그러나 이 나라의 나머지 지방에서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어. 군사정권은 전국을 지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어. 그리고 국민은 서로 싸우고만 있는 형편이지"

"당신도 포함해서 말이겠죠? 이곳 역시 제릴라 활동의 사령부이지 않겠어요?"

황갈색 눈이 가늘어지고 위험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마다리아가가 겨우 중얼거렸다. "정말 용감하군, 그리고 무모해"

"무슨 뜻이죠?"

"이 나라의 역사와 정치에 대해서는 어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나한테 그런 말을 하기 때문이지!"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분노가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줄리아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에 침을 발랐다.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죠?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마다리아가는 줄리아의 눈에 시선을 못 박은 채 날카롭게 말했다. "나도 지금 그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는 중이야"

줄리아는 무서웠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싸늘한 공포가 시시각각 엄습해 왔다. 신중하게 행동하도 상냥하게 대화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의 말투와 태도 때문에, 그만 자신의 생사를 마다리아가가 장악하고 있가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아는 모기소리 만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죠?"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글ㅆ, 지난 24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 보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대통령과 거래를 할 생각이었지. 레녹스씨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몇 가지 양보를 받을 생각이었어"

"그렇다면 레녹스양과는 왜 안 되나요?" 줄리아가 다그쳐 물었다.

"남자답지... 않기 때문일까?" 마다리ㅏ가는 웃었다. "그것보다는, 여성을 그런 목적에 이용하는 것이 유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웃어도 좋아. 오늘 아침에 나는 아가씨를 알토 리오에 보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었지만이라뇨?"

"레녹스양, 내난 아가씨 ㄸ문에 남녀 차별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어. 아가씨라면 여성이라고 해서 다른 대우를 받기를 원치 않을 거야.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아가씨를 감금해 두고 대통령에게 통고를 보내기로 했어"

"만알 대통령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죠?"

"그때는 아가씨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하겠지... 아가씨가 어떤 방법으로 내 일에 공헌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미 몇 가지 계획을 갖고 있겠죠?"

"계획?"

"나에 대한 계획 말이에요"

"정말 눈치가 빠르군! 그가 웃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어서 이야기해 주세요"

마다리아가는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계획의 세부사항까지 이야기할 생각은 없어, 세뇨리타 레녹스양. 지금까지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지만 한두 가지는 비밀로 해두어야 하지 않겠나?"

"무슨 뜻이죠?"

마다리아가는 방에거 나가려 하고 있었다. 아무 대답도 않고 그냥 나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가 문께에서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거래에 응하지 않으려 했을 때는... 그것도 즉시 응하려 하지 않았을 때는" 그가 말을 끊고 히죽 웃었다. 줄리아는 소름이 끼쳤다. "아가씨를 유용하게 쓸 방법을 나 나름대로 한 가지 생각했어"

"유용하게 쓴다구요?" 너무 뜻밖의 말이었다. 마치 가정부나 타이피스트로 쓰겠다는 말투 같았다. "당신의 작전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요?"

"아니지, 나 자신에게 유용하게 쓰겠다는 뜻이야"

마다리아가는 빙긋이 웃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3

마다리아가가 나간 뒤에야 겨우 커피가 나왔다. 블랙인데 아주 뜨겁고 이미 설탕이 넣어져 있었다. 줄리아는 한 모금 마셔 보고는 도저히 마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컵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손을 녹였다. 커피를 가져온 여자가 양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몸이 불편한가요?"

"아니에요. 하지만, 몸시 추워요"

"산에 어울리는 복장이 아니군요"

줄리아는 산에 올 작정이 아니었거든요... 하고 말하려다가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잃어버렸는지도 몰라요"

젊은 여자는 고개를 가로젖고 마루에서 검정 벨벳 코트를 집어 들었다.

"이건 예쁘긴 하지만 따뜻하지는 않겠어요. 언니가 좋아할 코트로군요... 당신도 언니를 어젯밤이 보았을 거예요. 언니는 무용수인 플로리타에요"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이 여자는 아름다운 무용수와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구겨진 진 바지 차림의 그녀에게서는 우아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전혀 닮지 않았더라도 사이좋은 자매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혹시 도움이 될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 줄리아는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언니가 당신과 같이 지낼 때도 있나요?"

"언니가 산촌에서 길쌈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나요, 아가씨? 하지만 로베르토와는 같이 일하고 있어요. 어젯밤의 작전만 해도 두 사람이 생각해 낸 거예요. 플로리타는 아주 유명하고 크게 인기가 있어요. 로베르토도 언니가 없다면 어떻게 일할 수 있겠느냐고 노상 말하고 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줄리아는 맞장구를 치고 컴정 벨벳 코트를 어깨에 둘렀다.

"추워 보이는군요. 저어... 저쪽에 도착하면 진 바지와 따뜻한 셔츠를 구해 주겠어요"

"고마워요" 줄리아는 당황했으나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여기서 다른 곳으로 데려갈 모양이군. 아마도 수도에서 더욱 멀어지겠지. "저어... 오래 걸릴까요?"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녀는 줄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빌문은 안하는 것이 좋아요. 로베르토는 기분이 안 좋아요. 더 이상 그를 화나게 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 화난 이유는 단 한가지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것뿐이에요. 그건 내 책임이 아니에요"

"하지만 로베르토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어요, 아가씨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로베르토를 화나게 만든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는 좀체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에요. 평소에응 변호사 직업 그대로 아주 부드럽고 분별이 있는 분이거든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인가요?" 줄리아가 물었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였어요. 오빠처럼 여기고 있었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형부가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엄마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죠. 하지만 플로리타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엄마는 그것은 존경받는 직업이 못되니까 공인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로배르토도 결코 플로리타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플로리타의 동생은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줄리아가 자기네 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런 것은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나는 이제 그면 이동준비를 하러 가겠어요"

줄리아는 혼자 남게 되자 손발을 쭉 펴보았다. 다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마치 긴 병에서 회복기에 접어든 것처럼 기분은 상쾌했다.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으나 경치에서는 별로 알아낼 것이 없었다. 이곳은 아마 포장되지 않은 도로 곁의 오두막인 듯 차 2대와 중형 트럭 1대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인기척은 없다. 도로 너머에는 관목이 우거지고, 그 위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줄리아는 코트를 몸에 걸쳤다. 이브닝 드레스는 아름답기는 하나 그 대신 옷감이 얇았다. 호텔의 수트케이스에는 재킷이 많이 있는데... 래리가 가지고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직 계산을 못했기 때문에 호텔에 잡혀 있는 것일까?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토니는 이 상황을 무어라 말할 것인가? 그틑 평소 테크니카의 사업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몹시 가혹하다. 토니의 말에 따르면, 유괴당하는 것은 본인의 부주의나 방신 탓이며, 따라서 몸값을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줄리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부주의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깜짝 놀라 돌아서니 처음 보는 젊은이였다. 그는 혐오의 눈으로 줄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말씨는 정중했다.

"나와 같이 나가 주십시오, 레녹스양. 괜찮으시다면 지금 곧"

줄리아는 공포심을 진정시켰다. 마다리아가는 무서운 적일지 몰라도, 적의를 나타낸 애숭이를 상대로 겁을 먹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알았어요. 하지만 그전에... 손을 씻고 싶어요"

한순간 그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곧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좋습니다. 마르타에게 안내라하고 하죠. 하지만 서둘러야 합니다"

마르타는 벌써 이동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두꺼운 모직 핀초를 두르고 캔프용 백을 들고 있었다. 줄리아가 안내된 곳은 소박한 카페였다. 테이블 세 개에 카운터가 있었다. 카운터에 뚱뚱한 여자가 금니를 드러내 보이면서 웃고 구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줄리아는 냉수로 얼굴을 씻으면서, 왠지 모르게 카운터의 여자가 겁을 먹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모두 겁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젯밤의 플로리타나 운전사도... 마다리아가 이외에는 모두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줄리아는 지프에 올라타고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삼거리에 이르자, 지금까지 지프를 운전하고 있건 페페는 트럭으로 가고 마르타가 지프의 핸들을 잡았다.

마다리아가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게릴라로서, 법률 밖의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겁을 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마다리아가 한 사람만은 자유롭게 알토 리오 시내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마르타는 반감을 갖기는커녕 호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마르타의 침묵은 운전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지, 적의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우기에 차가 다닌 탓인지 바퀴자국이 크게 나 있다.

줄리아는 도망칠 때의 일을 생각하고 도로를 관찰했다. 차는 계속 언덕을 올라갔다. 작은 길과 교차하는 일은 있었지만,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한 길은 지금 이용하는 도로뿐이므로 길을 잃는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도중에 만난 사람은 없었다. 가끔 숲사이로 경작지가 보였으나, 일하는 오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차소리에 놀라 마을 사람들이 모습을 감춘 것일까?

이윽고 차는 도로를 벗어났다. 지프가 비틀거리는 바람에 줄리아는 숨을 죽였다. 지프는 커브를 돌아 돌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마르타가 흘끗 눈길을 돌렸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가씨. 이곳은 우리 고장이니까 당신을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기억해두겠어요."

"당신이 우리와 같이 있는 동안 되도록 편하게 해드리겠어요... 오랜 시일은 아닐 테지만"

줄리아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지프 옆에 꼭 붙어 있지 않으면 언제 골짜기 밑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마르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무시무시한 커브길을 능숙한 솜씨로 운전하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흥미가 있을지고 몰라요. 마을 뒤에는 유적이 여러 군에 있고, 전통공예도 남아 있으니까요"

"카메라를 안 가져온 것이 유감이로군요"

줄리아의 유머를 마르타는 그냥 흘려보냈다. 가엾은 포로라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겨우 마을에 도착했을 때, 줄리아는 그야말로 가엾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메슥메슥하다가, 지프에서 내리자 울컥 토하고 말았다.

"고산병이야"

누군가가 놀란 듯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줄리아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에는 묶여 있지도 않고 혼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 위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훈훈한 기운이 싸늘해진 몸에 천천히 전해져 왔다.

", 가엾어라,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강한 액센트의 스페인어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보니, 담요로 어깨를 감싸 준 여성이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듯 가만히 어깨를 두드렸다.

"곧 나을 거예요"

줄리아는 그 여성의 말을 믿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팔꿈치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지 옆에 있던 여성이 가만히 줄리아를 도로 뉘었다. "아직 안돼요! 잠시 누워서 기운을 되찾아야 해요. 혼이 난데다 아직 고지대에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줄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주름투성이인 얼굴에 다정한 표정이 깃든 것을 보자 그만 울어 버리고 말았다. 몇 년 만에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늙은 여자는 곧 긴의자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줄리아를 두 팔로 안고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히 어깨를 토닥거렸다.

",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이제 다 끝났어요. 당신은 안전해요" 늙은 여자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가엽게도 떨고 있지 않아? 돈 로베르토도 수치를 알아야 해. 페페 같은 풋나기가 아니잖아? 본인은 어떻든지, 가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해. 도냐 엘레아노라가 무슨 말씀을 하실지 생각만 해도 무서워. 가엾은 아이야... 괜찮아, 괜찮아!"

가엾은 아이라고 불린 적이 한 번도 없는 줄리아는, 동정심 많은 사람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사이 잠시 몸을 맡겼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갑자기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편해졌나요?" 늙은 여자가 물었다.

줄리아는 침을 끌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마르타가 입을 옷을 가지러 갔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난 안젤리나라고 해요. 손자들이 고산병에 결렸을 때 마시는 뜨거운 음료수를 만들어 주겠어요. 하지만 갑자기 몸을 움직이면 안돼요. 이 고지대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말이에요. 당신이 할머니한테 돌아가든, 내가 어떻게 시중을 들었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안젤리나가 나가 버리자, 줄리아는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끼고 의자에 기대었다. 이토록 강항 가족적인 유대를 줄리아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어머니는 생각도 나지 않고 아버지를 만난 일도 없었다. 조부모 중 한 분이 살아 있다고 해도, 어디로 찾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쓰라린 추억만이 남아 있는 소녀시절...

제프리 숙부는 줄리아를 원치 않는다는 내색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양육할 경제력이 있는 친척이 있는 한 고아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숙부가 직원에게 대들며 하던 말은 아직까지 줄리아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자식이 필요하면 우리가 낳겠소. 이렇게 추한 아이가 아닌 예쁜 아이를!"

그 생각이 떠올라도 아제는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아니, 줄리아도 숙부를 싫어했기 때문에, 진실한 의미에서는 상처를 받았다고 할 수 없었다. 줄리아는 얌전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태도를 배웠다. 몹시 내성적이 어린아이가 되어, 어머니로부터 강한 의지와 저돌적인 성격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강한 의지 덕분이었다.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바값과 책값, 식비를 벌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몸은 허수아비처럼 바싹 말랐다.

젊은 날의 자신을 생각해 보니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저러나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던가! 작은 전기 스토브 하나도 마련하지 못해 스웨터를 몇 겹이나 껴입었던 것이다.

그러나 행복했다. 비로소 제프리 숙부한테서 자유롭게 되어 공부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런 줄리아의 맹렬한 공부를 비웃는 사람이 휴였다. 휴 해밀턴의 배신을 생각하면, 이미 10년이나 지난 옛날인데도 아직 가슴이 아팠다.

줄리아는 엄하기보다는 쌀쌀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의심을 모르고 자신의 모든 사랑을 휴에게 바쳤다. 육체의 요구에 응한 것도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기쁨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휴는 내 정열에 놀라고 이끌려서 잠시 손을 댔을 뿐이었다. 휴는 실험실에서나 독서실에서 나를 설득하여 밖으로 끌어내다가 정사를 거듭했다...

젊은 줄리아는, 상대방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열중해 있지 않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더구나 부자집 딸과 약혼하고 결혼날짜까지 받아놓았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녀는 사랑을 나눈 후의 수면에서 눈을 떴다. 이때 휴의 약혼자인 캐롤라인이 방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휴는 충격을 받은 줄리아에게, 캐롤라인은 관대하므로 이런 일로 약혼이 파기되지는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줄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없이 옷을 입었다. 이런 엄청난 상처를 받지 않았더라면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휴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휴는 지도교관이었으므로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캐롤라인 사건이 있은 후부터 줄리아는 절대로 그와 잠자리를 같아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휴는 친절히 대해 주고 힘이 되어 주려고 무척 노력했다.

줄리아는 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에서의 교사 자리를 모두 거절했다.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묻는 휴에게 줄리아는 딱잘라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살겠어요"

이 모험은 성공했다. 줄리아는 직업에 만족했다. 남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여러 곳을 여행하며 그 고장의 생활을 익히는 것이 즐거웠다. 지금도 맨해턴에 호화로운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나, 거기서 생활하는 것은 1년을 통털어 10주 내지 12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시간은 개발도상국의 이국적인 수도에서 관리들과 회담을 하거나 현장에 나가 현지 조사

를 하는 것이다.

현지 조사를 하면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한 마을을 돌아다니며 작물의 종류를 조사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줄리아는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작은 방은 여전히 컴컴했으나, 문틈으로 스며들던 햇살이 사라지고 있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가 놓고 갔는지 자극성 있는 음료가 든 작은 도자기 컵이 있었다. 지금은 미지근하지만, 처음 가져왔을 때는 김이 나고 있었을 것이다. 줄리아는 미안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고, 긴 의자에서 내려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날이 완전히 저물고 작은 집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어느 집이나 문을 열어놓은 채로 있었다.

길은 급커브로 꼬부라진 것이 하나뿐이었다. 물론 포장은 되어 있지 않았다. 집들의 입구 옆에는 딱딱한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나이 많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다른 주민들은 2열로 늘어산 집 사이를 한가롭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노인, 소년, 젊은 여자, 그리고 개와 고양이와 닭들, 조용한 이야기 소리가 주위를 감쌌다. 줄리아는 그 광경을 문에 기대어 지켜보고 있었다.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인지, 이 따스하고 친밀한 정경은 줄리아의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레녹스양?" 줄리아가 돌아보니 마르타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당신이 입을 것을 가져왔어요. 나는 키가 작기 때문에 플로리타의 것을 가져왔어요... 블라우스만은 내 것이에요. 당신에게 맞았으면 좋겠는데"

"고마워요... 그런데 나는 어떻게 애햐 하죠?"

"좋도록 하세요. 이곳은 평범한 마을이지만, 당신을 크게 환영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죠?" 줄리아가 머뭇머뭇 물었다.

"여기에는 당신을 가둘 감옥 같은 것은 없어요" 마르타는 밝에 웃었다.

"이 마을에 있는 동안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하지만 이곳은 안젤리나의 집이지 않아요? 그 사람을 쫓아내고 싶지는 않아요"

"인정이 많군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안젤리나는 저기 있는 큰 사각형 집에 살고 있어요. 옷을 갈아입은 뒤 이야기하러 오겠다고 했어요"

"아무도 아니에요. 이 집은 빈 집이에요. 상속은 했지만 이 마을에는 살지 않는 사람의 것이에요. 안젤리나는 여기와서 청소를 해준 것 뿐이에요" 마르타는 줄리아의 팔에 손을 얹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사용하세요, 레녹스양. 모두의 축복을 받고"

줄리아가 살게 된 집은 방이 하나뿐인 수수한 오두막이었다. 구석진 곳에 큼직한 침대가 있고, 창가에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키나 큰 장롱이 하나 있었다. 벽과 돌을 깐 마루에는 아름다운 천연염료로 염색 된 융단이 덮여 있었다.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청소가 잘되어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은 오직 취사 도구 한 가지 뿐이었다.

하지만 곧 취사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줄리아는 그날 저녁 안젤리나와 마르타 등 8명과 식탁에 마주앉게 되었다. 무척 친절한 사람들로서, 기꺼이 이 고장의 농업과 공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금지된 이야기는 정치문제 뿐이었다.

돈 로베르토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얼마 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안젤리나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줄리아가 여기 오게 된 것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돈 로베르토가 그녀를 여기 데려온 것은, 뜨거운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줄리아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도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줄리아가 재미있게 여긴 것은 돈 로베르토의 비행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였다. 줄리아에 대해 미안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을 보면, 마치 사랑하는 자식이 이웃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친데 대해 사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만 돈 로베르토에게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도, 내심으로는 거역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젊은 혈기에 놀아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성질이 과격한 정열적인 사나이이므로 다소의 실수는 눈감아 줄 수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잇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일에는 돈 로베르토를 비난할 수 없어요" 안젤리나는 줄리아가 당황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천사처럼 아름다우니까요"

줄리아로서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젖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수트나 드레스를 입으면, 가령 바레타 대통령 앞에 나선다 해도 꿇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아주 옛날에 휴에게 배신당한 말라빠진 처녀와 다를 것이 없다. 주근깨가 있는 길다란 얼굴에 유난히 큰 눈, 그리고 플로리타의 진 바지를 빌어 입었기 때문에 유난히 말라 보이는 몸.

그러나 로맨틱한 안젤리나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이 문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어느 날, 안젤리나가 갑자기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양치기 소년인 토니오가 돈 로베르토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렸던 모양이다. 안젤리나는 줄리아의 손을 끌고 차가 나타날 길로 나갔다.

"어서 서둘러요! 돈 로베르토는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할 거예요"

이윽고 로베르토가 나타났다. 그는 마치 안젤리나의 감상적인 꿈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마르타를 보자 제일 먼저 이렇게 물었다.

"그녀는 어디 있지?"

마르타가 미처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안젤리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줄리아를 재촉하며 앞으로 나왔다.

"여기 있네, 돈 로베르토. 자네를 위해 모든 사람이 잘 돌봐 주었다네"

마다리아가는 홱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줄리아가 얼굴을 붉히고 노려보는 것을 깨닫자 조롱하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는 성큼성큼 줄리아 앞으로 다가와 두 어깨에 손을 얹고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뒤에서 안젤리나가 만족스러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마다리아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 돌봐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군요, 안젤리나.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군요"

그는 줄리아를 끌어안고 축복을 하듯 이마에 키스했다. 이번에는 마을 사람 전부가 감상적인 한숨을 쉬었다. 줄리아는 그들을 발길로 걷어차고 싶었다.

"대통령을 만났나요?" 마르타가 그에게 물었다.

", 만났지" 마다리아가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줄리아의 팔을 잡은 채 차 쪽에서 걸어나왔다. 줄리아로서는 웃는 낯으로 친구들과 악수하고 다니는 마다리아가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마르타도 나란히 걸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마르타가 다시 물었다.

"대통령은 지금 심각하게 생각하는 중일 거야"

"기한은 말하지 않았나요?"

"아니, 말했어"

"언제까지죠?"

"공포를 일으킬 정도로 이르지 않고, 흥분에서 재기할 정도로 늦지 않을 때라고나 할까... 녀석은 잠못 이루는 2주일을 보내게 될 거야"

잠자코 듣고 있던 줄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2주일이나? 그럼, 나는 어떻게 되죠?"

"거기 대해서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거야. 하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는 말하기가 곤란하고, 또 지금은 드라이브로 피곤해서..."

줄리아는 그의 손에서 팔을 빼었다. "미안합니다"

"걱정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어.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히가로 하지"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서는 비명을 지르거나 따귀를 때려주고 싶었다. 또 와락 울어버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잠시 동안의 기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로베르토 마다리아가를 상대로 해서는 그런 충동에 몸을 맡기고 있을 겨를이 없다. 당장에라도 장기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방은 이미 어떤 계획을 세워 놓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자고 하는 것은 설득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줄리아는 한걸음 물러섰다. "나도 잠시 볼일이 있으니 집에 가야겠어요"

"그 집에 가는 것이라면 나도 같이 가겠어.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나는 내 집에 가겠다고 말헀어요!" 줄리아가 쏘아붙였다.

마다리아가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은 일그러져 있었다.

"레녹스양, 그 말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자신에게 할당된 집을 말하겠지?"

"할당된 집이 아니에요. 이버 있는 거예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집 임자는 이 마을에 없기 때문에 기꺼이 나에게..."

혹시나 하는 가능성 때문에 줄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마다리아가는 빙긋이 웃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옳아. 하지만 지금 그 집의 주인이 돌아왔으니까 같이 살 수밖에 없겠어... 적어도 잠시 동안은"

 

4

줄리아는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마다리아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팔을 븥잡고 이 오두막에 끌고 온 이후 두 사람은 한 마디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눈부신 바깥에 있다가 들어왔기 때문에, 실내는 마치 지하실처럼 캄캄했다.

"생활공간을 나하고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충격 상태에 빠지고 말았나?"

조롱하는 듯한 어투였다. 줄리아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는데도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줄리아는 목이 깔깔하여 침을 삼켰다.

", 그래요"

"무척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로군"

그는 웃으면서 재킷을 침대 위에 내던지고 셔츠의 단추를 끄르려고 했다 줄리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키고 되도록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생활공간을 간수와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나는 간수가 아니야"

그 목소리에는 노기가 깃들어 있었다. 마다리아가는 셔츠마저 벗어 침대로 내던졌으나 셔츠는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융단 위로 떨어졌다. 그는 이것을 힐끗 마라보았으니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하인을 부리는 생활에 익숙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죄수같이 생각되나? 마다리아가가 아가씨를 가두어 놓기라고 하던가? 다른 사람들이 아가씨를 굶기거나 학대하던가?"

"아뇨, 마을 사람들은 아주 친절했어요"

"나도 좀 더 친절히 대해 주려고 생각하고 있어" 그는 조롱하는 말투로 돌아가, 줄리아에게 다가서서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가씨는 나에게 친절히 대했다고 생각하나, 레녹스양?"

"그래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마다리아가는 줄리아게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으나, 시선으로 옷을 벗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줄리아는 애써 용기를 내어 그를 노려보았다.

기가 죽거나 낭패해서는 안된다. 나에게는 자립한 여성의 자제심이라는 것이 있다. 저런 악당에게 굴복한다면, 수치스러워 거울조차 보지 못할 것이다.

"진심으로 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것은..."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가만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나의 자유에요"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지" 이번에는 그의 손이 줄리아에게 와 닿았다. 손가락이 어루만지듯 빰에 닿자 그녀는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펄쩍 뛰며 물러섰다.

이것을 보고 마다리아가가 웃었다. "내 생각에는 자유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있을 것 같은데, 레녹스양?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에게는 함께 어울리고 있을 틈이 없어"

약간의 경멸이 깃든 싸늘한 어투에 줄리아는 움찔했다. 저 사람이 무엇이 정열적인 나이란 말인가? 그는 솔직한 감정 따위는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는 것이다. 나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지는 아까 그 눈길로 알 수 있다. 내가 그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다면, 기꺼이 내 육체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좋아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

"그럼, 당신은 다시 여기서 떠나나요?" 줄리아가 물었다.

"아니, 나는 여기 있겠어. 그리고 나의 귀여운 죄수인 아가씨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나는 쉬려고 온 것도 아니고 아가씨를 내 것으로 만들 기회를 노리고 온 것도 아니야... 아가씨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모르지만, 요컨대 나는 매우 바빠"

이런 작은 신촌에서 국제적인 변호사가 바쁘다니... 아니, 그 다음은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나가야 하겠군요. 일을 방해하면 안될 테니까요"

줄리아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아가씨가 이 집에서 나가면 내 일이 방해되지 않을 줄 아나? 그리고 여기서 나가면 둥굴 속에서 야영하는 수밖에 없어. 달리 갈 데가 없으니까. 산 속은 매우 춥기 때문에 곧 동상에 걸리고 말아"

"모든 것을 다 생각하고 있군요, 돈 로베르토? 그래, 당신의 제안은 무엇이죠?"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야" 갑자기 그가 피곤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발레타 대통령은 몹시 고민하고 있으나 현재까지는 어떤 조건에도 동의하지 않고 있어, 따라서 나의 매력적인 거래재료인 아가씨는 여기 머물 수밖에 없어. 적이 알지 못할 안전한 장소에. 아가씨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처럼 있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이 집을 청소하고 내 옷을 빨래하며 음식을 만드는 등 심부름을 해야 할 거야. 알겠지, 레녹스양?"

"알았어요, 하지만 너무 일방적이 아니에요? 나는 그 대가로 무엇을 받게 되죠?"

"나의 보호지"

줄리아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얼굴을 똑바로 들고 대들었다.

"보호라고요? 무엇으로부터 나를 보호한다는 말이죠?"

"독사와 산사태로부터지. 그리고... 이 고장 젊은이들의 눈길로부터. 물론 동상으로부터도 보호해주겠어."

"나는 당신과 같이 자지는 않겠어요"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분명히 말하지만 아가씨는 잘못되어 있어"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줄리아는 겁을 먹고 얼른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의자 뒤로 돌아가 장롱의 서랍을 열었다. "세탁된 내 셔츠는 모두 여기 들어 있어. 저기 있는 셔츠도 세탁이 끝나면 같이 넣어 줘. 외출복과 평상복의 구별은 물론 할 수 있겠지?"

마다리아가는 줄리아가 성난 눈으로 노려보는 앞에서 새로운 셔츠로 갈아입고 집을 나갔다.

혼자 남은 줄리아는 방 안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럴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은 이미 받은 바 있다. 문제의 소지를 파악하고, 거기에 알맞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로베르토 마다리아가처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뻔뻔스런 악당에게 무슨 대책이 통한다는 말인가? 화를 내면 재미있어하고, 반항을 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내가 저항하건 어떻게 대하건,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인간에게... 그는 하고 싶은 것은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줄리아는 여려 차례 심호흡을 하고 문제의 분석에 착수했다. 심호흡을 하자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마다리아가에게 공포감을 느껴 생각을 분명히 정리하지 못했을 뿐이야. 대책은 반드시 있을 거야...

첫째로, 그는 나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살아있어야만 대통령과의 거래가 가능하니까.

둘째로, 마을 사람들은 돈 로베르토가 나에게 반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나를 로베르토로부터 지켜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도망치려고 한다고 하면, 애인 사이의 다툼 때문일 것이라 믿고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실로 악마와 같은 교활한 수법이다.

그렇다면, 돈 로베르토는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아무리 노력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돈 로베르토의 협박이 때로는 짓궂은 장난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는 자립한 직업여성을 아주 싫어하므로 협박을 하면서 즐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정복할 생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싸늘한 눈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리라. 휴의 품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 줄리아는 누구와도 관게를 맺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마다리아가 따위에게 마음이 산란해질 수는 없다. 이것은 단순한 예감에 지나지 않으나, 만일 로베르토에게 한 번 안기는 날에는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헤어지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지난날의 한 번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는 한... 줄리아의 마음속에 호랑이처럼 자기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마다리아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긴장한 나머지 히스테리를 일으키거나, 굴복하게 될 것이다.

줄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에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책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마다리아가가 돌아오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녀가 밖에 나가자 외줄기 길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득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비록 적의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의아한 눈으로 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간선도로로 나가려던 생각은 버리고, 몰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현지 조사의 경험을 통해, 산양이나 라마가 지나는 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줄리아는 운동을 위해 산책하는 체하고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은 도망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으나, 2시간쯤 계속 걷자 괘한 일을 하지 않았나 하는 불안이 줄리아의 마음에 떠올랐다.

길은 자갈이 깔리고 울퉁불퉁했다. 내리쬐는 햇볕이 자갈을 뜨겁게 달구어, 줄리아의 얇은 구두바닥을 통해 발바닥을 태울 것 같았다. 원래 등산에 적합하지 않은 그녀의 구두는 이미 망가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몹시 피곤했다.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이미 도망칠 기운도 없었다. 그녀는 땀에 젖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로베르토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고, 피로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지칠 줄 모르는 사나이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줄리아는 멈춰선 채로, 고지의 건조하고 희박한 공기에 숨을 헐떡이면서 로베르토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체력이 엄청나군, 축하해, 레녹스양" 러베르토 마다리아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고마워요" 줄리아가 내뱉듯이 말하자 그가 웃었다.

"물론 생각이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체력과 용기가 대단한 것만은 분명해. 싫어도 감탄할 수밖에 없어, 레녹스양"

"사람을 놀리는 건가요?"

"그 말이 싫다면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 이런 데를 기어오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 구두는 또 뭐야? 그리고 밤이 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얼어죽고 싶은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 길은 산꼭대기로밖에 통하고 있지 않아! 이 산악지대를 벗어나 자유롭게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나? 이건 마치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 같군"

"당신도 내가 무슨 수를 쓰리란 것쯤은 알고 있었을 거예요" 줄리아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내뱉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그는 빙그레 웃으며 시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줄 알았죠?"

"여자만이 가진 교활한 꾀를 부릴 줄 알았지" 그는 줄리아의 팔을 붙잡고 홱 끌어당겼다. 줄리아는 갑자기 전신의 힘이 빠져 다리를 비틀거렸다. "지쳤나?"

그녀는 팔을 뿌리쳤다. 공포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러리스트처럼 산에서 이러면 안돼요"

"내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내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당신은 진실을 싫어하는군요, 돈 로베르토" 줄리아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아가씨가 진실을 안다면 나도 대화할 생각이 들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아가씨는 무지해.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 나라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당신이 나를 유괴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긴장된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로베르토는 불타는 눈으로 줄리아의 눈을 쏘아보았다. 줄리아도 필사적으로 공포를 억제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 말을 잊지 않도록 해" 그가 홱 잡아당기는 바람에 줄리아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로베르토는 입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곧 마을로 돌아가는 거야. 저항하면 끌고라도 가겠어. 도망치려 한다면 묶어서라도 끌고 갈 거구. 아가씨도 그것을 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

마을로 돌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줄리아가 발을 헛디딜 때마다 그는 손을 붙잡아 주었으나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안젤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달려왔다. 로베르토는 걱정스럽게 묻는 안젤리나에게 짤막하게 대답했다.

"나중에 찾아가죠, 안젤리나. 이 아가씨는 약간의 모험을 한 끝이라 피곤해서 오늘 저녁식사는 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 소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줄리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유유히 집안으로 데려갔다. 누군가가 석유 림프에 불을 켜놓았기 때문에, 방 안은 이상할 정도로 가정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줄리아는 눈물이 치솟으며 떨리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로베르토는 문을 닫고 창가로 걸어가서 덧창을 내렸다. 줄리아는 침묵이 신경에 거슬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도망치려고 했으니 나를 때릴 생각이에요? 마을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나요?"

로베르토가 그녀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때렸을 거야. 어쩌면 그토록 무분별한 행동을 했지? 잘못 산에 오르면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지 않았나? 목뼈가 부러졌을지도 몰라"

"당신은 거래에 필요한 재물이 시체로 변했을 경우를 생각지 않았나요?" 줄리아가 빈정댔다.

"전혀 생각지 않았어"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죠, 돈 로베르토?"

"말할 나위도 없이 살려두겠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나는 지금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거예요"

"지금? 안젤리나는 아가씨를 휴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 대답이기도 하지"

줄리아는 로베르토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도전하듯 노려보았다. "만일 네게 손을 댄다면 골짜기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르겠어요!"

"그렇다면, 내 명성은 더욱 높아지겠지"

"폭력적이라는 명성 말인가요?"

로베르토는 큰 소리를 내고 웃었다. "아가씨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화나게 만들려고 하는군. 그렇지 않은가, 레녹스양?"

"나는 단지 내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뿐이에요"

"그야 이미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 아닌가? 아가씨는 나의... 인질이야. 나는 아가씨의 안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어. 이 말이 언짢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이야"

"나의 안전이라고요?" 줄리아가 경멸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가씨의 육체적 안전과 편안함, 그리고 가능하다면 즐거움까지도" 그가 대답했다.

줄리아는 숨을 몰아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한가?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산책이 좀 지나쳤어"

"나는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줄리아의 두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줄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겁을 먹지? 지금까지 죽이지 않안던 것처럼, 앞으로도 죽이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겁을 먹은 게 아니에요" 줄리아는 거짓말을 했다.

"겁을 먹지 않았다고?" 그는 가만히 줄리아의 턱을 손으로 받쳤다. "그렇다면 왜 떨고 있지? 내가 해치기라도 할 것 같은가?

"모르겠어요"

"그럼 이렇게 말하면 안심할 수 있겠나? 폭행은 내 취미가 아니라고 말이야"

줄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존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폭행이 두려웠던 게 아니다. 사정은 좀 더 복잡했던 것이다. 그런데 로베르토는 줄리아의 침묵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나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가씨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자신을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두 번이나 여자를 때릴 뻔했어. 그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좀처럼 생각지 못한 일인데..."

"당신이 화를 내는 것이 내 탓이란 말인가요?"

줄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하자, 로베르토는 놀랍게도 얼굴을 붉히며 두 손을 내리고 옆으로 돌아섰다. "아가씨는 내가 가진 최대의 약점을 노출시키게 하려고 했어" 그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 내 탓인지 아가씨 탓인지 나도 모르겠어"

"모른다구요?"

"글세, 아마 알고는 있겠지. 아가씨나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우리는 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줄리아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단지, 타이밍이 나빴을 뿐이야"

"무슨 뜻이죠?"

"모르겠나? 그렇다면 말하겠어. 이 이상 더 나쁜 타이밍도 없을 거야. 온 나라가 동요하여 언제 폭팔하게 될지도 몰라. 정직하게 말해서, 이미 폭발했는지 아닌지도 나는 몰라... 지난 24시간 동안 어느 방송국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 유일하게 전파를 내보내고 있는 군인방송도 음악만 내보내고 있어"

"그러니까 혁명이 일어난다는 말인가요?"

"틀림없을 거야... 그것도 지금 곧. 어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이렇게 이야기 하는 동안에라도..."

"무서운 일이로군요!" 줄리아가 몸을 떨면서 말했다.

"우리한테는 그다지 무서운 일이 아니지. 이미 몇 차례나 진짜 혁명을 겪으며 살았으니까. 지금이야말로 결말을 내, 가련한 조국에 정치다운 정치를 소생시킬 기외이기도 하지"

로베르토는 낭패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혁명에 정열을 불태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어조였다.

"당신은 어떤 일에 말려들게 되나요? 싸우게 되나요?" 줄리아가 숨을 삼키고 물었다.

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싸운다는 것이 무슨뜻이지? 아가씨도 경쟁상대와 싸우지 않나? 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거나 리베이트를 지불하거나 하면서 때로는 뇌물을 바치기도 하고"

줄리아는 그 말을 듣자 발레타 대통령의 제안이 생각났다. 테크니카가 프로젝트 자금의 일부를 자기 명의의 구좌에 넣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자금을 일부를 유용하여, 스위스 은행의 구좌에...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문에 난 것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겠죠?"

"그럴까? 아가씨는 필요하다고 인정했을 때도 뇌물을 주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의 음성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예를 들어, 내가 댐 공사 계약을 줄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하면, 아가씨는 나를 설득하려 들지 않겠나?"

"그야 물론 설득하려 하겠죠" 줄리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훌륭한 프로젝트인데다 당신 나라에도 필요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뒷거래 같은 것은 아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아가씨의 경우 설득방법은 다른 형식을 취한다는 말인가? , 빈틈이 없군"

그의 불쾌한 웃음소리에 줄리아의 입속이 바싹 말랐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알고 있을 텐데? 아가씨는 매우 머리가 좋으니까"

줄리아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말하겠어. 아가씨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아가씨가 탐나. 아가씨는 그것을 무기로 삼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만일 그 무기를 사용하려 한다면 나는 책임지지 않겠어"

줄리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나, 목소리만은 부드러웠다. "당신은 마치 이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틀린 이야기에요"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여기라면 아가씨는 안전하지. 그래서 아가씨는 여기 있어야 해"

"여기라면?"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 쪽을 돌아다보았다. 로베트로의 입이 일그러졌다.

"안전하다고 말했잖아? 나는 손을 대지 않겠어. 폭행이 취미가 아니란 것은 별도로 치고라도, 나는 몹시 바빠질 몸이야. 내가 바라는 것은 아가씨가 가사를 돌봐 주는 것이 전부야"

로베르토는 의자에서 사파리 재킷을 집어들고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돌아섰다. "물론 그밖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아가씨가 원할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지만"

그는 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5

로베르토는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줄리아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때까지 자지 않고 벼텼으나, 마침내 낮에 입었던 옷 그대로 빛바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방은 아직 어두웠지만, 밖에서는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멎어 있었다. 창을 보자 덧창이 내려진 채로 있다.

로베르토의 흔적은 없었다. 침대에서 잔 자국도 없고, 쿠션이 없으므로 의자에서는 제대로 잘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에 들어왔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젯밤에 걸치고 나갔던 사파리 재킷이 의자에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어제 입었던 평상복이 놓여져 있었다.

빨래를 하라는 뜻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니 줄리아는 화가 났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자기가 입고 있는 셔츠에서도 땀 냄새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줄리아는 신경질적으로 셔츠를 벗어 던지고 장롱을 살폈다. 여성 방문객이 남기고 간 블라우스가 있을지도 몰랐다. 만일 그런 것이 없다고 해도, 남자의 면 셔츠를 입고, 마르타가 빌려 준 가죽 밸트를 매면 될 것이다.

줄리아는 장롱 쪽으로 걸어가려 하다가 다리가 거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낌짝 놀라 침대에 걸터앉으니 오른쪽 장딴지가 시큰시큰 쑤셨다.

줄리아는 이런 상태로 바의 틈에서 눈을 떴을 ㄸ의 일을 상상해 보았다. 거의 몸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걸어서 알토 리오로 도망치려 했다니 환상이라 해도 너무 지나쳤다. 얼어죽었을지도 모를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아무리 불쾌하고 오만불손한 야만인이라 하지만 감사하다는 말 정도는 했어야 옳았는지도 모른다.

다리를 꼿꼿이 펴고 허리에서부터 움직이면 겨우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줄리아는 한참 동안 애쓴 끝에 장롱 앞에 도착했다. 장롱의 맨 위에는 책과 서류와 지도, 그리고 소형 무선 송신기가 들어 있었다. 이번 일은 자기와 로베르토의 개인적인 대결이 아니라, 이 나라의 혁명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사상자도 많이 나올 것이다.

나로서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줄리아가 생각에 잠겨서 남자 셔츠를 입고 있을 때 등뒤에서 조롱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멋있군"

줄리아는 목이 뻣뻣하고 아팠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로베르토가 반쯤 열린 문 앞에 서 있고, 밖은 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멋있다구요?" 줄리아가 팔을 들어 보였다.

"내 셔츠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다니 놀랍군. 옷이 없어서 곤란하지? 그런데 나이트클럽에 갔을 때 입었던 그 화려한 드레스는 어쨌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마르타가 진 바지와 셔츠를 갖다 주었으니까, 그녀가 어디로 가져갔겠죠" 그녀는 쓸쓸히 웃고 말을 이었다. "이번 경우는 마르타도 최악의 거래를 한 셈이 되는군요"

로베르토가 웃으며 말했다. "체념이 아주 빠르군. 아마 그럴 테지만. 드레스는 다시 돌려주도록 하겠어"

"괜찮아요, 내버려 두세요. 마음에 드는 드레스도 아니고, 고칠 수도 없어요"

"찢어졌나? 어째서?" 갑자기 그가 어두운 표정을 지어 줄리아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지프에 걸려서 찢어졌을 거예요. 그리고 기름이 묻어 얼룰이 졌고요... 잘라서 걸레로나 쓰는 것이 좋겠어요"

"걸레?"

로베르토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줄리아가 씁쓸히 웃었다. "스코틀랜드의 오랜 습관이에요. 나는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옷을 입다가 헤지면 정방형으로 잘라 유리창을 닦거나 가구를 닦아요. 그러니까 걸레지 뭐겠어요?"

", 그래?"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아가씨도 유리창을 닦고 가구를 닦았나? 자신이 직접?"

"물론이에요. 그러니까 당신도 가사를 아마추어에게 맡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점점 더 잘됐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는 줄리아의 드러난 다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도발하듯 눈길을 들었다. "내가 돌아온 것은, 페페와 이웃 마을에 간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야. 아마 밤늦게 돌아올 것 같아. 그리고 경고할 일도 있어. 만일 다시 도망치려고 하면, 여기 있는 동안 계속 묶어 두겠어. 그러니까 마지막 기회가 되겠지"

줄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위협이라기보다는 놀리는 듯한 어조였으나, 로베르토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입장이 바뀌면 줄리아 역시 그랬을 것이다.

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토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다시는 도망치려 하지 않겠지?"

",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얼마나 위험한 모험을 하려 했는지 이제는 똑똑히 알겠어요. 나는 이 고장의 지리에 익숙치 못하고, 도저히 도망칠 체력이 없다는 것을..."

"몸이 아픈가?" 그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말을 받았다. "몸을 움직이면 굳어진 근육이 풀릴 거야. 그래도 안 되면 안젤리나에게 바르는 약을 달라고 해. 가슴이 메슥거리고 냄새가 나기는 하겠지만... 그 냄새 때문에 모기도 달려들지 못할 정도니까"

"멋지군요, 그 냄새로 사람도 접근해 오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줄리아가 빗대어 말했다.

"그러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로베르토는 웃는 대신 우울한 얼굴이 되어, 줄리아는 그를 피하면서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알 수 없을 거야. 설명하기도 용이하지 않으니까"

로베르토는 걱정스러운 듯 침묵에 잠겼다. 왜 그런지 줄리아는 그 모습에 마음이 동요되어, 가까이 가서 위로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곧 이 생각을 억제하고 오히려 싸늘하게 말했다.

"이야기해 주세요"

"우선 이 나라의 현실을 이해해 주기 바라겠어. 동란이 몇 년이나 계속 되고, 도처에서 당파가 난립하고 있어. 무슨 일을 하려면 여러 당파와 결합하지 않으면 안돼" 그는 여기서 말을 잠시 끊었다. "그러므로 같이 일하는 동료라 해도 반드시 마음이 맞는 것만은 아니야. 여기까지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지?"

줄리아는 전날 밤, 마을에서 낯선 사나이를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그중 몇 사람이 자기를 빤히 바라보던 기억이 되살아나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겠는 모양이군" 로베르토의 목소리는 건조해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요?"

"사실이야. 나는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또 지금까지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나와 내 동료들도... 그러나 다른 당파의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협력자와 동지라 해도 책임을 질 수가 없어. 그러면서도 그들이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렇다면 그들이 나를 해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들은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 따라서 아가씨가 그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면, 나로서는 크게 부담이 줄어들게 되는 셈이지"

"그러면 왜 나를 이곳에 데려왔죠?"

공포를 감추려고 했으나,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로베르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의 계산착오였어"

"계산착오라뇨?"

"그렇다니까. 혁명이 이처럼 임박한 것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가씨를 어머니에게 데려다 주었을 거야. 자꾸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나 역시 인간의 아들이야. 어머니도 있어... 물론 아가씨가 나를 언짢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어머니도 나를 좋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까"

"당신 어머니는 나에 대해 알고 있나요?"

"어머니는 거의 모든 일을 알고 있지... 그것이 어머니의 특기니까. 하지만 내 입으로 아가씨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태연한 어조에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줄리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로베르토를 바라보았다.

"만일 어머니가 알았다면 아가씨에게 자기 집 방을 주었을 거야. 내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라 여기고, 그 뒷처리가 자기 역할이라 생각했을 것이 뻔해. 그것이 싫어서 나는 아가씨를 여기 데려온 거야. 그 때문에 나는 아가씨의 안전에 신경을 쓰게 됐어. 나로서는 자업자득이지만, 아가씨로서는 불운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아가씨의 책임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줄리아의 부드러운 어조에 로베르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미 나는 여기 와 있는 몸이니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가르쳐 주세요... 나의 안전과 당신의 심리적인 고민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것은 사실이야"

"그러니까..."

"아가씨의 상식이 가장 큰 도움이 될 거야.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 꼭밖에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안젤리나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하기를 바라겠어. 하지만, 너무 두려워할 것은 없어.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라도 다 쓸 테니까" 마치 맹세하는 말 같았다.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다. "나를 믿어 줘"

줄리아는 자신이 그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성과 본능이 그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속삭이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군.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지만"

줄리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전부가 아니라고요? 나한테 바라는 것은 복종이 아니었던가요?"

"내가 바라는 것을 모두 말하면 서로의 입장이 어색해지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언젠가는 이야기하게 될 테지만.... 이제 나는 나가야겠어. 벌써 늦었으니까" 로베르토는 이렇게 말했으나 머뭇거리고 있었다. 마치 작별의 키스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리고 줄리아도 망설임 속에 몸이 굳어졌다. 작별의 키스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 로베르토가 그것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고.

"오늘 밤에 돌아오겠어" 그는 등을 돌리면서 말했다. "조심해야 해"

로베르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줄리아는 몸과 마음이 다같이 아팠다. 순간적인 일이지만, 로베르토는 나에게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나 자신도 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다. 빨래라도 해야지.

안젤리나에게 상의하자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호베르토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으나, 안젤리나는 몹시 즐거운 듯 비누를 간자 주고, 시냇가의 세탁장에 안내해 주었다. 빨래를 한 뒤 키가 작은 관목에 걸쳐놓으면, 두꺼운 대님 빨래도 몇 시간이면 마르는 모양이었다.

줄리아는 안젤리나가 가르쳐 준 대로 빨래를 하고, 나중에 가져온 워브 냄새가 나는 세탁물을 헹구고 있으려니, 자기네 회사가 건설한 수로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는 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줄리아는 돌아오는 길에 마르타를 만났다. 마르타는 가뭄이 들어 바싹 마른 옥수수밭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밭에서는 두 남자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옥수수의 키는 겨우 사람의 어깨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보기에도 덜 익었지만, 이미 시들어가고 있었으므로 베어내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줄리아는 흙을 조사해 보았다. 자갈이 섞여 있고 끝기가 없었으나 토질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해마다 옥수수를 심나요?"

"내가 알기로는 그래요. 우리 주식은 거의 옥수수 가루로 만들어요" 마르타가 대답했다.

"마을의 식량은 자급자족이 가능한가요?"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어요. 많은 사람이 마을에서 떠났는데도 말이에요"

"가령 로베르토처럼 말인가요?"

줄리아의 질문에 마르타는 웃었다.

"돈 로베르토는 한 번도 이 마을에서 산 적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돈 로베르토의 것이 아닌가요?"

", 그래요. 이 근처의 땅은 모두 돈 로베르토 일족의 것이에요. 대부분의 집도 그렇구요. 당신이 지금 있는 집은 돈 로베르토의 유모가 오랫동안 살았는데, 그녀가 죽은 뒤에는 비밀기지로 쓰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너무 알려졌는지도 몰라요"

"너무 알려졌다뇨?" 줄리아는 머리를 똑바로 들었다. "그건 누군가가 돈 로베르토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뜻인가요? 그가 위험에 빠져 있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우리는 누구나 여러 차례 위험을 겪었어요"

줄리아는 유괴되던 날 밤, 마르타가 취했던 냉정한 태도를 다시 상기했다. 지금도 그 냉정함은 변함이 없다. 줄리아는 왠지 소름이 끼쳤다. 마르타는 친절히 대해 주기는 하지만 일단 위급한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인질을 처분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아니에요" 줄리아는 이렇게 말했으나 마르타는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줄리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위험할 리가 없어요. 왜냐면 나는 당신네 정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위험의 씨앗이 될 수는 있어요" 마르타의 목소리는 쌀쌀했다.

"어째서 그렇죠?"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수도의 비상사태를 생각하면 불안해서 못 견디겠어요. 사람들이 모두 돈 로베르토를 찾고 있어요... 사태의 진전이 너무 빨랐어요. 벌써 방어태세를 취해 놓았어요"

"그것이 내 탓이란 말인가요? 그런 말은 옳은 것이 아니에요!"

"공정하지 못한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여기 오게 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에요. 사실 우리가 남자들 대신 당신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돈 로베르토는 계획을 무시하고 위험을 범했으며 충동적인 행동을 하고 있어요. 우리 동료 중에도 돈 로베르토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해요"

"그것도 내 탓이라는 말인가요?" 줄리아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수 있겠어요? 만일 당신의 동료인 남자가 유괴되었더라면 돈 로베르토가 계획보다 한 달이나 일찍 산에 들어와 인질의 안전을 도모했겠어요?"

"당신은 나를 증오하나요?" 줄리아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요?" 마르타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천만에요! 돈 로베르토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고, 미인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난 믿어요. 다만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만일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돈 로베르토는 지금보다 훨씬 안전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되죠?" 줄리아는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아까 당신이 한 말을 들으니 작물에 대해 잘 아는 것 같군요. 그 일에 전념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일이 무슨 도움이 되죠?"

마르타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면, 돈 로베르토가 당신을 여기 두는 건 마을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남들이 생각할 거예요. 단순히 그의 잠자리를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줄리아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그리고 따귀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뒤로 물러섰다. 마르타의 목소리에는 악의가 없었다. 돈 로베르토와 애인관계라는데 대해서는 아무 의심을 하지 않으면서도 반감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녀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돈 로베르토의 신용뿐이었다.

줄리아는 마르타의 말을 그냥 냉정하게 흘려 버릴 수가 없었다. 마을사람들의 눈에는 애인관계로 보일지도 모른다. 다만 거기까지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돈 로베르토의 애인이라 여겨진다는 것만으로도 줄리아는 크게 당황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아가씨 문제는 이 고장의 리더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거예요. 그리고 돈 로베르토의 일족도"

"일족이라뇨?"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마다리아가 일족은 대재벌이고 손꼽히는 유력자이면서도... 매우 불행해요. 도냐 엘레아노라와 돈 펠리페는 몇 년 전부터 별거중이고, 자식들... 돈 로베르토의 동생과 여동생은 정신이 교란된 상태에 있어요. 도냐 엘레아노라는 돈 로베르토가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모두가 같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것을 희망하고 있어요"

"그런 일이 나한고 무슨 관계가 있죠?"

"물론 관계가 없겠죠. 다만 도냐 엘레아노라의 이야기에 따르면, 돈 로베르토는 곧게 약속했다는 거예요. 이번 긴급사태가 수습되면, 정부가 어떻게 되든 결혼하겠다고 말이에요"

"그래서요?"

"돈 로베르토의 품행이 방정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확실히 도냐 엘레아노라에게 약속했어요...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하겠다고"

"마다리아가 집안에 대해 아주 상세히 아는군요?"

"그야 당연하죠. 돈 로베르토와 플로리타 언니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나왔었으니까요.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두 사람 모두 당장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돈 로베르토가 당신을 마음에 두게 되면서 모든 것이 아주 파탄이 났지만 말이에요"

줄리아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마르타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제 알겠죠? 당신이 우리들의 용감한 리더보다 작물에 흥미를 가져 주는 것이 여러 사람을 위해 좋다는 것을 말이에요. 위쪽에 있는 밭에 가는 것이 더 눈에 안 띄게 될 거예요... 이곳 사람들은 마을에서 멀리 가지 않으니까요"

"알았어요" 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마을로 흐르는 강줄기를 가르쳐 주겠어요?"

"알았어요"

마르타는 친근감 있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나 줄리아는 마을과 주민에 대한 마르타의 설명을 들으면서 긴장하고 있었다. 로베르토의 집 앞에서 마르타와 헤어지자, 줄리아는 얼른 문을 닫았다. 마르타의 이야기는 몹시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로베르토가 집에 돌아왔었다는 흔적은 없었으나, 마치 그가 아직 이 집에 있는 것 같았다. 만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크게 변모될 것이다. 나의 일부가 상실되고, 지금까지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도 마음의 평화도 잃게 될 것이다.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사는 바삐 움직여야 할 것이다. 로베르토와는 되도록 얼굴을 마주치치 않는 것이 좋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작은 농가에서 같이 지내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로베르토는 밤늦게 돌아왔다가 새벽 일찍이 집을 나서므로 거의 만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로베르토는 잠이 많은 줄리아를 보고 웃었을지는 모르지만 개의치는 않았기 때문에, 줄리아에게 있어서는 그가 비몽사몽간에 만나는 꿈속의 인물로 변해 있었다. 몹시 다정히 대해 주는 것도 로베르토답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안아 준 것도 그답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아침에 문밖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머리에 가볍게 키스해 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꿈이기는 하나, 왜 그런 꿈을 꾸게 되는지 걱정스러웠다. 자기를 유괴하여 가두어 놓은 사나이에게 그런 애정의 표시를 바란다는 것은... 줄리아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줄리아는 점점 더 수로조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져도 로베르터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히스테리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되도록 로베르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안젤리나 때문에 불가능했다. 돈 로베르토가 줄리아를 뜨겁게 사랑한다고 믿는 안젤리나의 신념은 어떤 변명이나 설명으로도 바꿀 수가 없었다. 안젤리나는 줄리아가 크게 마음에 들어 여러 가지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모두 로베르토와 결혼하여 살 깨에 필요한 지식들이었다. 안젤리나는 말끝마다 이런 대사를 덧붙이곤 했다. "돈 로베르토는 이런 것을 좋아한답니다"

줄리아는 그런 말을 자주 듣게 되나 참을 수 없었다. "안젤리나, 내가 여기 오래 머물지 않으리란 것은 당신도 알잖아요? 돈 로베르토는 대통령의 회답이 오면 곧 나를 수도로 데려다 줄 거예요"

안젤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당신은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나는 내 일이 바쁘고,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는 몸이에요"

"하지만 돈 로베르토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예요"

"안젤리나, 내 말을 분명히 들으세요" 줄리아는 화를 냈다. "내가 여기서

떠나게 되면 다시는 돈 로베르토를 마나지 않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걸 누가 장담하겠어요?" 안젤리나가 조용히 대답했다.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이때 뜻밖에도 로베르토가 나타났다. 줄리아는 깜짝 놀라 껍질을 벗기던 감자를 떨어뜨리고 얼굴을 붉혔다. 안젤리나는 그것 보라는 듯이 눈을 생긋하고 로베르토에게 고개를 돌리며 끄덕여 보였다.

"레녹스양에게 할 말이 있는데요" 로베르토가 말했다.

", 알겠어요" 안젤리나는 점점 더 상냥했다. 줄리아는 아무 말도 않고 땅에 떨어진 감자를 주워 솥 위에 올려놓았다. 로베르토의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동요되다니, 나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야.

"지금 바쁜가?" 로베르토가 줄리아에게 물었다.

"아뇨, 하지만 옥수수밭을 보러 가려던 참이에요"

"그래? 그러면 내가 안내하지" 로베르토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줄리아는 집을 나서려 하다가 안젤리나의 다정하고도 감상적인 눈길을 느끼고 다시 얼굴을 붉혔다. 로베르토와 함께라는 것이 어색했다. 로베르토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척 놀란 모양이군. 얼굴이 빨걔졌어"

"아궁이의 불 때문에 그래요. 이 마을 사람들이 낮에는 음식을 만들지 않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요"

", 그래? 이곳 생활에 적응하려고 무척 애쓰는군, 레녹스양. 아주 관대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계획이 있어서 그러는지 나로서는 짐작이 안 가지만"

지난 며칠 동안 로베르토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고작 두세 번이었으나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세레명으로 친근감 있게 불러 주었었다. 그런데 다시 레녹스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나쁜 징조임이 분명했다.

줄리아는 새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말에는 대꾸할 필요가 없겠군요. 무슨 말을 하건 믿지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내가 마을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다고 해도, 당신은 그것을 계산된 연극이라 생각할 테니까요"

"너무 똑똑하군. 그러면 어무런 도움도..."

"아무런 도움도 ... 안 되나요?"

"아가씨 일로 내가 결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럴지도 모르죠"

줄리아는 감정을 억제하고 대답했으나, 묘하게 마음이 아파 묵묵히 걸었다. 가파른 고개길이었으므로, 그녀는 머리를 앞으로 떨구고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 후 로베르토가 갑자기 침묵을 깨뜨렸다.

"예를 들면, 이 수로조사라 그것이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어"

"내가 물에 독이라도 넣었을지 모른다는 뜻인가요?" 줄리아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천만에" 로베르토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는 웃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라면 속셈이 다를 것이라 생각해"

"어머, 그래요? 지나가는 비행기에 횃불을 들어 신호를 보내거나, 1km에 걸쳐 도와달라는 글자라도 써놓을 줄 아세요?"

"아니지, 그런 비현실적인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아주 냉정한 사람이니까. 처음부터 눈물도 흘리지 않고 히스테리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아가씨만큼 이지적인 사람이라면, 어떤 위험이 신상에 닥쳤는지 잘 알고 있을 거야. 이제 나는 어느 정도 아가씨를 알 수 있게 됐어, 줄리아 레녹스. 아가씨는 냉정하고 현명하며 용기가 있어. 그러기에 나는 아가씨를 믿을 수 없어. 내가 자칫 기회를 주면 지체 없이 그것을 이용할 거야"

줄리아는 로베르토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반면, 몹시 상처를 받기도 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가령 이 수로조사만 해도 그래. 아가씨는 마을사람을 돕기 위해 전문기술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 마을의 관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가씨가 처음은 아니야. 하지만 시간을 들여 조사한 전문가는 아가씨가 처음이지. 한편 아가씨는 조사할 때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어. 이 고장의 지도까지도 생각만 있으면 만들 수 있어. 만일 그렇게 신중하게 계획한 탈출의 준비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어" 로베르토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하리라 생각하세요?"

"글세, 내가 알고 있는 건 아가씨라면 가능하다는 것뿐이지. 어떤가, 줄리아?"

"아까도 말했지만. 그 질문에는 대답해도 의미가 없어요"

"알고있어" 로베르토는 한숨을 쉬고 나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대책이라뇨?"

"아가씨가 혼자 나다니는 것을 금지시켜야겠어. 밭에는 별로 사람이 나가 있지 않으니까.. 아가씨를 감시하기가 어려워"

"그러니까 수로조사를 금지시키겠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아가씨를 늘 누구하고 같이 있게 해야겠어"

"당신은 정말 나를 믿지 않는군요?" 줄리아는 움찔했다.

"전혀 믿지 않아" 그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그래요? 그래서 당신은 지금 나를 안내하고 있나요? 당신이 나의 감시자가 되었나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로베르토는 줄리아를 노려보고, 줄리아는 화가 나서 두 손을 불끈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윽고 로베르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나는 당신을 낮에는 거의 만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낮에 만나게 되니, 앞으로는 당신이 나를 감시하겠다는 뜻이 되잖아요? 물론 무장도 했을 테고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로베르토의 얼굴은 가면처럼 표정이 없었다.

줄리아는 화가 나서 숨을 죽이고 얼굴을 붉혔다. "당신은 정말 몹쓸 사람이군요!"

"나도 그 사실을 인정해"

가면과 같은 그의 표정이 비로소 무너지면서 얼굴의 근육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것을 보고 줄리아는 얼른 후회했다.

"미안해요.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어요. 하지만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수 있을 거예요"

"나는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돼. 결코 그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나는 지금 올바른 정신이 아니에요.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서 자기 손만 들여가 보고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 거예요.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을 정도의 혼돈상태니까요"

"그것이 아가씨한테 매우 중요한 일인가?" 로베르토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더 안전한 것은 아니에요" 줄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대꾸했다.

", 안전... 물론 그럴 테지. 그렇다면 대책이 있어. 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위험하다고 여겼었지. 아마 내가 착각했던 것 같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너무 외출이 잦아서, 아가씨는 하루종일 혼자 있어야 했어" 로베르토가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는 염치없이 아가씨를 혼자 내버려 두거나 하지 않겠어... 그래, 아가씨도 나와 같이 가는 거야"

 

6

로베르토는 자신의 말을 곧 실천에 옮겼다. 이튿날 아침 로베르토가 흔들어 깨웠을 때, 줄리아는 꿈속에서 에딘버러 학창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는 졸린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왜 그래요, "

"나는 휴가 아니야" 싹둑 자르는 듯한 냉정한 소리다.

줄리아는 얼른 눈을 떴다. 침대 옆에 옷을 갈아입은 로베르토가 서 있었다. 반바지 차림에 승마용 부츠, 갈색 면셔츠를 입고 목둘레에는 검정 손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마치 카우보이 같군요" 줄리아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니면 그 휴란 녀석이 말인가?"

경멸이 깃든 어투에 줄리아는 깜짝 놀라 눈을 더 크게 떴다. 그리고는 홑이불을 덮은 채 상반신을 일으켰다.

", 미안해요. 깜짝 놀랐어요. 나는 반쯤 자고 있었다구요. 무슨 볼일 있어요?"

"아직도 그런 말을 묻고 있나? 지금쯤은 일어나서 옷을 입고 있어야 하잖아? 우리는 어서 가야 해"

"어머, 그랬군요" 줄리아는 대답했으나. 로베르토가 지켜보고 있으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가르쳐 준다고 해도 알지 못할 거야. 그리고 아마 모르는 것이 좋을 거야. 그래야 비밀을 유지하는데 유리할 것 같아"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군요?"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존심이 상한 것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로베르토는 갑자기 거친 어투로 내뱉었다.

"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더구나 침대에서 나한테 눈을 깜빡여 보이는 여자에게는.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나? 아니면 내가 옷을 입혀 줘야 하겠나?"

줄리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면 곧 일어나겠어요"

"뜻하지 않은 말을 하는군!" 로베르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알아서 해. 10분 후에 나오지 않으면 내가 들어와 옷을 입히겠어!"

로베르토가 밖에 나가 문을 닫자, 줄리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갔더니 로베르토가 말 두 마리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답기보다는 튼튼해 보이는 말이었다. 싸늘한 아침공기에 줄리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고작 그것밖에 입지 않았나? 좀 더 놓은 곳으로 가야하는데, 그 정도의 옷으로는 얼어 죽게 돼"

"하지만 이것밖에 입을 것이 없어요. 이것도 모두 마르타한테 빌린 거에요"

로베르토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고 집으로 들어갔다가, 곧 크림빛 담요 같은 것을 가지고 나왔다.

"판초야, 멕시코의 것처럼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추위는 막을 수 있을 거야"

로베르토는 재빨리 줄리아에게 판초를 걸쳐 주었다. 판초는 히프까지 내려오고 두 팔을 완전히 덮었기 때문에, 죄우로 움직일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따뜻하기는 했다.

"고마워요" 줄리아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잠시 팔짱을 끼고 줄리아를 바라보다가 말 쪽으로 돌아서면서 말했다.

"아가씨도 말을 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을 차지 못하면 고생을 하게 되겠죠?"

"타건 못 타건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지. 우리가 가는 곳은 산길이지, 승마학교의 연습장이 아니니까"

두 사람은 아직 잠들어 있는 마을에 말발굽 소리를 남기면서 길을 떠났다. 줄리아가 물었다. "당신은 승마를 학교에서 배웠나요?"

"승마를 배운 기억은 나지 않아. 서서 걷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내 말이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승마를 좋아했었거든. 그리고 우리 땅 가운데는 말을 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데가 많았어"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았나요?" 줄리아는 부러운 마음에서 물었다. 그러나 로베르토는 탐색하듯 줄리아를 돌아보았다.

"좋은 친구 였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지. 우리 가풍에는 사이좋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 어머니는 자식들을 모두 멀리 있는 학교에 보냈어. 독립심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그래서 독립심이 강해졌나요?" 줄리아가 물었다.

"나는 독립심이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오히려 어떤 사람은 쌀쌀해지기만 하지... 우리 어머니처럼, 그리고 아마도 아가씨처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럴지 모른다... 쌀쌀하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독립적이라고. 줄리아는 이렇게 생각했으니 역시 슬펐다.

"그럼 당신은 어때요? 어머니가 원하는 독립심을 갖게 됐겠죠? 그리고 냉정함도?"

"나에게 도전하는 것인가?"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 줄리아는 그의 말에 놀라 잠시 균형을 잃었다.

"물론 고의로 말한 것은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가는 그 질문을 다시 상기하게 만들고야 말겠어" 그는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줄리아는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겨우 그의 긴장이 풀린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묘한 방침을 즐겼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여생을 좋아하게 됐던 것이지. 하지만 동생과 여동생은 그렇지 않았어. 어머니도 이제는 잘못을 알아차린 모양이지만, 이미 때가 늦었어"

"마르타에게 대강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리고 플로리타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가정을 갖기로 동의했다는 이야기도요... 로베르토로 볼 때는, 애인들이란 순간적인 흥미를 북돋우는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일까? 이런 생각을 하자 줄리아는 왜 그런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르타가 말했다고?" 그는 그 말이 별로 유쾌한 것 같지 않았다. "마르타 일가는 예로부터 우리 집을 도와 주었지.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 땅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만년에는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였어"

"그래서 마르타도 당신과 같이 산악지대에 들어온 것이군요?"

"그래, 내게도 그 책임이 있어... 그밖의 많은 책임과 함께"

마르타야말로 도냐 엘레아노라의 눈에 들었던 며느리감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자, 줄리아는 왜 그런지 마음이 아파 고개를 들었다. 새벽 햇빛을 받아 동쪽 산맥의 검은 실루엣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만일 유혈사태가 일어난다면, 나는 평생 무거운 짐을 지는 몸이 되겠지" 그는 거의 혼자 말하듯 중얼거렸다.

줄리아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길이 좁아지고 비탈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만 말을 할 수 없었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로베르토의 말발굽에 채이는 자갈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끊은 채 산맥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로베로트는 말을 세우고 줄리아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아가씨한테 누구나고 묻지는 않을 거야. 나하고 같이 온 이상 그런 것을 물으면 실례가 될 테니까. 만일 묻는 경우가 있더라도 가능한 한 대답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스페인어를 잘 모르는 체하고 있으면 돼"

줄리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만일 그들이 내가 누구고 어디에서 왔다는 것을 알면 해치게 될까요?"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뭐라 대답할 수 없어. 만일 그 질문을 3년 전에... 아니, 3개월 전에 했더라면 나는 웃어 넘겼을 거야. 그들은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이라도 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지금은 정확한 대답은 하지 못하겠어"

"사태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나한테 얘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로베르토가 잠자코 있자 줄리아가 재촉했다. "내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에요"

로베르토는 말고삐를 다른 손으로 옮겨 쥐고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줄리아는 비로소 그가 얼마나 피로해 있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긴장의 연속으로 정신의 안정이 한가닥 실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도 단둘이 있을 때만의 일이었다. 저 작은 마을에 들어가,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로베르토는 자신만만하고 성공을 확신하는 듯히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줄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ㄸ로는 나하고 문제를 나누어 갖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로베르토가 경멸의 미소를 던졌다. "깨닫지 못하고 있었나? 문제를 나누어 갖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먹고 있었어. 만일 그렇게 한다면, 아가씨는 지금보다 더 위험한 입장에 놓이게 되는 거야"

"그것은 당신의 생각이지, 확실한 거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어요? 어쨌든 나도 위험을 무릅 쓸 각오가 돼 있어요"

"아가씨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 위험에 대해서도..."

"그래요, 알지 못해요. 그러기에 무서운 거예요"

로베르토는 말을 세우고 그 목을 쓰다듬으면서 줄리아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 아가씨한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고마워요" 줄리아가 조용하게 대답했다.

"감사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우리 어머니는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불쾌한 일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지. 그런데 이것은 불쾌한 일이 아니라, 그야말로 위험한 일이야"

"무지도 위험한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어머니를 기준으로 삼고 나를 판단하는 것도 잘못이에요. 나는 그녀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로베르토가 조용히 웃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야. 어쨌든 아가씨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래요" 줄리아는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의아해하면서도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야기해 주세요. 누가 누구와 싸우는 것인지, 또 우리는 어느 편인지..."

"아가씨는 누구의 편도 아니야. 어쩌다가 여기 있게 된 것뿐이니까"

", 그것은 사실이에요"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 로베르토가 강하게 말햇다. "아가씨는 포로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나와 아무 관계도 없어. 그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

이 말에 줄리아는 몹시 마음이 상했다. 그러나 지적인 여성답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토가 말을 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군부가 정권을 독점해 왔어. 현재의 대통령... 아가씨가 프로젝트를 팔려고 했던 발레티 대통령의 마지막 인물이자 가장 탐욕스러운 사람이기도 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줄리아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작년, 그가 막대한 금액의 돈을 스위스 은행의 구좌에 넣은 것을 알아냈어. 이미 집도 스위스에 사놓았어. 내가 귀국해서 조사해 보니, 거의 모든 국민들이 그를 반대하는데 의견이 일치되어 있더군"

"그렇다면 어째서 그를 몰아내지 않죠?"

"공군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어. 그는 비록 인기가 없지만 충분히 무력을 갖고 있어. 그것으로 인기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스위스 은행에 쌓아 둔 돈이 언젠가는 압류되리라 각오하고 있지 않겠어요?"

로베르토가 눈을 가늘에 떴다. "과연 예리하군. 물론 그도 각오는 하고 있지만, 그건 라이벌 장군이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 목적은... 아니, 우리 편의 목적은 그를 완전히 몰아내고 총선거를 실시하는데 있어"

"대통령이 과연 물러날까요?" 줄리아가 물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이미 각오는 하고 있을 거야. 아가씨도 짐작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야"

"그럼, 무엇이죠?"

로베트로는 얼굴을 흐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자 줄리아는 마음이 아팠다.

"유감스럽게도 문제는 적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에 있어.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작은 토지를 지배하려 하고 있어. 나라 전체를 통치할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아. 또 폭력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비틀린 사람도 있어. 꿈속에서 헤매는 테러리스트도 있을 거야. 그들은 몇 년 동안이나 반정부 투쟁을 벌려 왔지. 그런데 나는 의혹을 받기 쉬은 지주계급의 한 사람이 아니라, 몇 달 전에 외국에서 돌아온 사람에 지나지 않아. 그들의 생각을 모르는 바 아니고, 동정할 수 있는 점도 있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여러 계층을 단결시키는 일이라는 것과 단결을 이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임에는 변함이 없어"

"알겠어요" 줄리아가 말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로베르토는 줄리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알 수 있겠나? 내가 얼마나 위험한 입장에 놓여 있는지 알겠다는 말인가?" 그는 갑자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줄리아의 턱을 손으로 받치고 자기 쪽에 향하도록 했다. "내가 아가씨의 안전도 보중하지 못하겠다고 한 말을 이해하겠나?"

그의 목소리로 미루어 그는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줄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로베르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의 손을 살짝 치웠다.

"덕택에 모든 것을 잘 알게 되었어요. 조심하겠다고 약속하겠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죠? 불안정한 동료둘을 설득하나요?"

"그 말이 맞아" 로베르토는 말고삐를 고쳐 쥐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통령은 회담에 응할 거야. 만일 우리 의견이 통일되지 않으면 다시 쿠데타가 발생하겠지. 다른 장군이 정권을 쥐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탄압정치를 강행할 테지"

"당신은 쿠데타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로베르토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모르겠어. 알고 있는 건, 방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뿐이지."

줄리아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격려하고 싶었다. 그러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은 매우 용감하군요" 그녀가 한 말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로베르토가 조용히 웃었다. "용기라기 보다는 무모한 일이지. 이것은 어머니 말인데, 사실이그래. 하지만 나로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내가 남의 생명까지 걸고 하는 이 일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일까. 내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럴 때마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고 말아"

"더구나 나까지 짊어지고요"

"옳은 말이야. 몇 갑절이나 더 어렵지, 왜냐하면..."

아마도 로베르토는 저주의 말을 내뱉으려다 입을 다문 것 같았다.

줄리아는 움찔하여 굳어진 어조로 말했다. "방해가 되지 않고록 하겠다고 약속하겠어요"

 

줄리아는 약속을 지켜, 회담하는 동안 얌전히 로베르토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인사나 질문에 대해서도, 그녀는 미소가 아니면 일부러 서툰 스페인어로 대했다. 로베르토도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줄리아는 자기 여자로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데리고 다닌다고만 이야기했다. 연극인 줄 알고 있었으나, 줄리아는 결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로베르토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아도 익숙지 못한 말을 탔기 때문에 완전히 피로해지고 마음이 무거워, 로베르토가 안 보이는 곳에서 실컷 울고 싶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줄리아는 말도 하지 못할 상태가 되어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로베르토는 비틀거리고 있는 줄리아를 보고 가만히 앉게 하고는 부츠를 벗겨 주었다.

"무척 졸린 모양이군. 이렇게 만든 것은 내 탓이야"

줄리아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채 고개를 흔들었다.

"일어서" 로베르토가 말했다. 줄리아는 하라는 대로 했으나 자꾸 눈이 감겨 왔다. 로베르토는 한 팔로 줄리아를 부축하면서 옷을 벗겨 주었다. 그는 축 늘어진 인형과도 같은 줄리아게세 새 셔츠를 입혀 주었다. 허브와 태양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멋진 옷이에요" 줄리아가 졸린 목소리로 속삭이자 로베르토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가씨는... 위험해"

그는 가볍게 줄리아를 안다가 침대에 뉘고, 난폭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줄리아는 반쯤 졸면서 로베르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돼. 나는 할 일이 있어" 로베로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나는 휴가 아니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아가씨를 안고 싶다고 해도,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며 쓸쓸해하고 있을 때만은 싫어"

 

그 후의 나날은 무두 같은 패턴으로 지나갔다. 날이 밝기 전에 같이 말을 타고 나가, 때로는 5, 6시간이나 걸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줄리아는 로베르토가 말하는 불안정한 동맹을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로베르토가 이야기하는 상대는 대체적으로 로베르토만은 신뢰하는 것 같았으며, 다른 동료에 대해서는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그들은 어떤 산악 게릴라를 몹시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줄리아는 그 게릴라에 대해서 로베르토에게 물었다. 그러자 로베르토의 포정이 무거워졌다.

"왜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지?"

"사람들이 모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에요. 더구나 모두 그를 무서워하고요"

"놈은 악당이야" 로베르토가 싸늘하게 말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와 상종하지 않겠어. 하지만 북부의 촌장들은 놈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 아우구스토가 그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 한 북부에서는 나를 지지하지 않을 거야"

"언젠가는 당신도 그를 만나야겠군요?" 줄리아가 물었다. 그녀의 마음은 무거웠다.

"최소한 만나려는 노력은 해야겠지" 로베르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몇 번이나 놈의 지배지역에 들어갔었지만 그때마다 외출 중이었어. 아우구스토가 그토록 붙잡기 어려운 몸인 줄은 몰랐어. 평소에는 총을 자주 쏘는 놈이니까 어디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는데"

"그런 일로 농담하지마세요!" 줄리아가 외쳤다.

이 말에 로베르토는 놀란 모양이었다. "알았어. 아가씨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재밌지 않아?"

"아니에요, 전혀 재미있지 않아요" 줄리아가 쏘아붙였다.

마을로 돌아와 추한 잡종말이 안젤리나의 집 베란다에 매어 있는 것을 보자, 줄리아는 점점 더 웃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저런!" 로베르토가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마아 마호멧이 산에 올라온 모양이군"

"무슨 뜻이죠?" 줄리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로베르토는 말에서 내려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환한 미소를 띄웠다.

"드디어 줄리아도 악당을 만나게 됐다는 뜻이지"

그는 천천히 집 쪽으로 걸으면서 줄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줄리아는 순순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안젤리나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세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로베르토는 걸음을 멈추고 웃는 낯을 한 체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이거 반갑군. 잘 있었나, 미구엘? 자네가 환자마저 내버려 두고 올 줄은 몰랐네. 그리고 보르사, 이틀 만에 다시 만나게 되다니 기쁘군. 옛친구 아우구스토,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줄리아는 전에 미구엘 올리바스토와 만난 일이 있었다. 보르사는 아주 몸집이 큰 사나이였다. 아우구스토는 살갗이 검어 인상이 나빴으며, 몸집은 로베르토와 미구엘만 못했으나, 이리와 같은 성질이 줄리아를 겁나게 했다.

"기다렸네. 며칠 전부터 자네를 만나려 했지만, 자네는 외국여자를 데리고 관광을 다니고 있으니 만날 수가 있어야지"

"나도 자네를 만나고 싶었네, 친애하는 아우구스토"

"나는 나대로 힘이 있네. 자네 도움은 필요치 않아, 마다리아가" 아우구스토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길 왔지?"

로베르토는 여유 있는 태도로 물으면서 줄리아의 손을 끌어다 가볍게 키스헀다. 그는 늘 이렇게 하고 있다는 듯이 연극을 했으나, 시선은 아우구스토에서 떼지 않았다.

"알토 리오에서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발레타가 회담에 동의했다고 하는데" 아우구스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실인가?"

"사실일세"

"공군에서도 동의했나?"

"글세, 나는 그들이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게 생각하네"

그러자 아우구스토가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만일에 알았다면 자네를 폭탄으로 날려 버릴 것일세"

"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일세. 그리고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아우구스토는 작은 눈으로 실내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턱으로 줄리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지?"

로베르토는 웃으면서 줄리아를 끌어안고, 자기 것이라는 듯이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자네는 항상 그 모양이라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외국여자인가? 더구나 이런 때에. 그 여자는 누군가?"

그러자 미구엘이 끼어들어 아우구스토에게 물었다. 그는 정직하고, 아마 나이도 제일 어린 것 같았다. "그건 왜 묻죠? 우리가 당신 여자에 대해 물은 적이 있던가요?"

아우구스토는 어깨를 으쓱하고 로베르토에게 협박조로 말했다. "자네는 나를 배반하려 하고 있어, 돈 로베르토"

"나는 전문가를 상대로 그런 게임은 하지 않네" 로베르토가 대답했다. 이 경멸의 뜻이 상대에게 전해졌는지, 아우구스토의 얼굴이 붉어졌다. 로베르토가 말을 이었다. "무엇을 원하나, 아우구스토? 설마 내 사생활을 간섭하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만일 자네가 발레타를 만난다면, 나도 참석할 권리가 있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줄리아는 로베르토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승낙하지 않는다는 듯이 들렸다. 아우구스토를 반드시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나는 반드시 참석하겠네, 마다리아가. 그렇지 않으면, 회담은 열리지 못할 것일세"

"거기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상의해 보겠네.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렇지 않은거, 아우구스토?"

"그야 물론이지. 로베르토 마다리아가는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니까. 그런데 저 여자를 침실로 데려갈 때도 투표를 하나?" 아우구스토가 비웃었다. "좋아, 투표를 하겠다면 하게. 하지만 말해 두겠는데, 나는 꼭 참석하겠네"

"틀림없이 츨석하게 될 것일세" 로베르토가 달래듯이 말했다. "나로서는 대환영일세"

아우구스터는 갑자기 나무의자게 털썩 주저앉았다. "자네는 허약한 사나이야, 마다리아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닐세"

"자네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건가?" 로베르토가 희롱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토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한 듯했다. 로베르토가 말을 이었다. "자네 말이 옳은지도 모르네, 아우구스토. 확실히 나는 하루에 60km나 말을 달리지는 못하니까"

"내가 자네의 잠자리를 방해했다는 말인가, 마다리아가?" 아우구스토는 핼쓱해진 줄리아를 바라보며 비꼬아 말했다.

그러나 로베르토는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그리고는 어깨너머로 내뱉었다. "여러 사람과 상의가 끝나면 보르사를 통해 결과를 알려주겠네. 그 동안 나는 발레타와 교섭을 진행하겠네. 배신할 생각은 아예 말게, 아우구스토. 다른 동료에게도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하게"

로베르토는 인사도 않고 줄리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공기가 살에 와닿았다. 로베르토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까는 미안했어. 안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경고한 일이 생각나나? 아우구스토가 온 것은 줄리아를 인질로 삼아 산악지대로 데려가겠다는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였어. 보르사도 아우구스토의 편을 들겠지.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나는 줄리아가 내 여자라고만 말할 수밖에 없어"

"그런 줄 알았어요. 나도 이제 그런 역할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그것이 사실인데도 왜 마음이 아픈 것일까? 줄리아는 로베르토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줄리아는 놀라운 여성이야" 로베르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입을 열었다.

"새삼스럽게 부탁할 필요도 없겠지? 조심스럽게... 내가 한 거짓말을 지켜 달라는 것을"

"나는 그 거짓말에 내 안전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안심하세요. 만일 남이 묻는다면, 내가 당신에게 열중해 있다고 대답하겠어요"

로베르토는 나직하게 웃었다.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이곳 남자들은 줄리아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내가 줄리아에게 열중해 있다는 편이 훨씬 더 효과가 있어"

오두막에 들어가자 로베르토는 곧 허리를 구부리고 빗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줄리아의 귀에 그의 저주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세요?" 줄리아가 물었다.

"녹이 슬었어. 힘껏 떼밀면 떨어져 나가겠어... 이걸 봐"

줄리아는 그의 곁으로 가서 빗장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빗장은 녹이 슬고 겨우 못 하나로 기둥에 붙어 있었다.

"정말 그렇군요. 하지만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설마 여기에 도둑이 들리는..."

"우리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일은 곧 줄리아를 지키는 일이 돼"

"하지만 누가 들어오기야 하겠어요?"

"아우구스토라면 시도해 보려고 할지도 모르지. 그는 나를 믿지 않고, 더구나 국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외국여성은 신용하지 않아. , 어서 침대로 들어가도록 해. 놈이 무슨 생각을 하건 오늘 밤은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

"그럴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여기 있을 생각이에요?"

"오늘 밤 말인가? 그야 물론이지"

"알았어요" 줄리아는 부끄러워 몸이 움츠러들 듯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럼, 나는 먼저 자겠어요"

"그게 좋겠어. 나는 할 일이 남아 있지만 잠을 방해하지는 않겠어" 로베르토는 등을 돌리고, 마음은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다는 듯이 가볍게 덧붙였다. "잘 자요"

줄리아는 장롱 옆에서 재발리 옷을 벗고 남자 셔츠로 갈아입은 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구러나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로베르토는 책상에 마주앉아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리아는 모로 누워 오랫동안 로베르토를 지켜보았다. 그가 이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핸섬하면서도 타협을 모르는 옆얼굴, 관자놀이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 길고 우아한 손가락...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사랑은 어리석은 자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우지 않았더라면, 비록 한 순간만이라도 이 사람에게서 기쁨과 위안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줄리아는 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고 꿈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렇게 되면 로베르토가 위험하다... 줄리아는 바둥거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로베르토의 경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제발 조용히 해, 달링"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방은 캄캄하고 로베르토가 옆에 누워 있는 듯 한 팔로 줄리아를 침대에 꼭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아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줄리아는 타는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로베르토의 귓전에 속삭였다.

"왜 그러세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소리가 들렸어" 로베르토가 속삭였다. "우리를 감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만일 그렇다면, 나는 바보였어"

"바보라구요?"

"나는 그들에게 줄리아를 잠자리로 끌고 가고 싶어 못 견디겠다고 했어. 그들을 믿게 하려면, 서류 따윈 읽어 있어서는 안됐는데"

"어머!" 줄리아는 소름이 끼쳤으나, 이렇게 로베르토 곁에 누워 있으니 공포가 덜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일을 했죠?"

"설마 아우구스토가 오늘밤에 우리를 엿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지, 자기네 소굴로 곧바로 돌아간 줄 알았어... 내가 바보였어"

줄리아는 위로하듯 그의 검은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는 거예요.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더구나 문도 안전하지 못하고..."

로베르토는 줄리아의 위로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마음을 결정했다.

"지금 그는 어디 있을까요?"

"아우구스토 말인가? 창 밑에 있어. 덧창을 내렸으니까 보이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 놈은 고양이 같은 청각을 가지고 있어"

"그렇다면 무슨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좋겠어요" 줄리아는 부드럽게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당신은 일을 끝니고 침대로 돌아와, 이제부터 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하면 될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아우구스토도 속을 거에요" 줄리아는 로베르토를 껴안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달링... 아아, 달링..."

줄리아는 한 순간 로베르토가 자기를 떠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움찔했다. 로베르토는 숨을 죽이고 항의하려는 듯 했으나, 다음 순간 가만히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아도라다... 이 아모아(그리운 사람... , 내 사랑)"

로베르토는 스페인어로 사라의 말을 속삭였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대가 들으라고 한 말이겠으나, 줄리아는 등골이 짜릿해졌다.

로베르토가 이불을 걷어찼다. 엿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줄리아도 몸을 굳히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로베르토는 나직한 소리로 웃고 줄리아의 입술을 입술로 가만히 애무했다.

이불이 마루로 흘러떨어졌다. 로베르토는 팔꿈치로 짚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는 줄리아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으나 어둠 속이어서 잘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마음 속으로 또 하나의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줄리아는 그 순간, 사랑도 없이 이 사람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했다.

"로베르토..." 줄리아는 머뭇거리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로베르토는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겨 주었을 뿐이다. 잠시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줄리아의 이마와 코, 이어서 입술을 더듬어 내려갔다. 줄리아는 마치 애무당하고 있는 고양이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마침내 그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줄리아는 소리를 죽이고 웃었다. "계속 이렇게 하면 난 고양이처럼 야옹거릴 거예요!"

"그래? 그 울음소리가 듣고 싶군"

줄리아는 로베르토의 애무 속에서 몸이 굳어져 있었다. 로베르토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창밖에서 나는 소리일까?

순간 로베르토는 한숨과 함께 좀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줄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키스했다. 제삼자를 속이기 위한 키스로서는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거칠지는 않으나 단호한 키스였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키스... 몰론 피할 생각은 없다. 밖에서 엿듣는 사나이가 있으니까. 감각이 마비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그녀는 자신을 변명했다.

밤공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싸늘했으나, 로베르토의 뜨거운 몸에 안기자 줄리아는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온몸이 떨려 자신도 모르게 로베르토를 꼭 껴안았다. 로베르토의 입술은 어깨의 선을 거쳐 셔츠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줄리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신의 대담성에 스스로 놀랐다.

"로베르토... 나는...."

관능을 자극하듯 그가 가만히 살을 깨무는 바람에 줄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로베르토는 그녀의 재빠른 반응에 열중해 있는 것 같았다.

"?" 로베르토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줄리아는 몽롱함 속에서도 이런 기분이 든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휴조차도 이런 기분을 맛보게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로베르토, 나는 하룻밤 동안의 상대자는 되고 싶지 않아요"

줄리아는 창밖에 감시자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런지 로베르토의 진심을 알고싶었던 것이다. 로베르토가 나직하게 웃었다.

"아름다운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군! 그리고 나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어"

로베르토의 입술이 그녀의 팔꿈치 안쪽을 한없이 다정하게, 또 뜨겁게 애무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떨었다.

"나는 진심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줄리아가 속삭였다.

"그 말을 믿겠어"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 손등으로 줄리아의 볼록한 가슴을 건들었다. "처녀라고 말하고 싶은가?"

"저어..." 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로베르토는 빙그레 웃고 나서 시니컬하게 속삭였다. "정직한 여자로군... 그런 여자의 가치는 루비보다도 더 귀하지"

줄리아는 움찔했다. 그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로베르토 정도로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은 사람들에게는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환멸을 안겨 주는 것일까?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

"물론이지" 줄리아가 몸을 긴장시키자 로베르토는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갑자기 로베르토의 두 팔에 힘이 가해졌다. 그는 줄리아를 꼭 끌어안고 몸에 키스를 하면서 셔츠 단추를 하나씩 벗겨 나갔다.

"감기에 걸리겠어요" 줄리아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천만에. 절대로 감기에는 걸리지 않을 거야. 내가 약속하지" 로베르토는 가만히 웃으면서 대꾸했다.

로베르토의 애무는 예술이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한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옮겨 갔다. 줄리아는 상대가 바라는 대로 반응할 도리밖에 없었다.

로베르토가 와닿으면 살이 마치 실크로 변하는 것 같았다. 로베르토가 움직이면 몸이 흡사 메아리처럼 그 뒤를 따랐다. 로베르토는 마치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듯 줄리아의 모든 부분을 어루만졌다.

줄리아의 몸속 깊은 곳에서 욕망이 천천히 소용돌이치면서 온몸이 꿈틀거렸다. 그런데도 로베르토는 면밀한 애무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로베르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로베르토는 아직 옷을 입은 채로 있었다. 줄리아는 그의 셔츠로 손을 가져가 단추를 벗기려 했다. 그러자 로베르토가 그녀의 손을 제지하고 냉정하게 물었다. 아치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고 묻는 듯한 어투였다.

"나를 원하나?"

"그래요"

로베르토는 얼른 일어나 옷을 모두 벗었다. 줄리아는 밤의 냉기에 떨면서 가만히 두 손을 내밀었다. 로베르토의 몸이 와닿자 그녀는 신음소리를 냈다.

느긋한 애무가 격렬한 충동으로 변하며, 줄리아는 숨을 죽였다. 로베르토의 억센 정열이 그녀의 마음과 몸을 한꺼번에 용해시켜 나갔다.

눈물이 넘쳐 나왔다. 피가 소리를 내며 역류하여 줄리아를 취하게 만들었다. 줄리아는 마침내 거친 파도에 휘말려 어둠 속에 떠올랐다.

얼마 후 줄리아는 몸 하나 까딱 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음악이 그쳐도 여운이 메아리치듯, 공기가 생명의 숨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줄리아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로베르토가 한 팔을 내밀어 줄리아를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아 주었다. 줄리아는 그대로 몸을 내맡긴 채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깊고 달콤한 잠속에 빠져 들어갔다.

 

7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로베르토는 곁에 있지 않았다. 어디에 가고, 언제 돌아올 것인지 메모한장 남겨 놓지 않았다. 단지 로베르토의 옷과 쌍안경과 지도가 없어졌을 뿐이다.

줄리아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로베르토가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줄리아는 할 수 없이 단념하고 방청소를 했다.

몸 한구석에 약간의 통증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거울을 보아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듯했다. 넌센스야, 하고 줄리아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하룻밤의 쾌락 때문에 몸과 마음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로베르토도 어젯밤의 일 정도로, 자신의 이상이나 신념을 나를 위해 체념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그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자기 감정을 조절하는 훈련쯤은 이미 싫증이 날 정도로 쌓지 않았는가? 숙부와 숙모의 싸늘한 보복도 휴의 잔인한 친절도 이제는 다 잊게 되지 않았는가?

줄리아는 휴의 얼굴마저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당시의 충격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지금도 그런 식으로 로베르토를 마음속에서 몰아내면 될 것이다. 백일몽을 줄 여유를 주지 않고 피로에 지칠 때까지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집에 돌아가는 날까지 로베르토 때문에 울거나 하지는 말아야지.

줄리아는 어깨에 힘을 주고 오두막을 나왔다. 일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우선 북쪽 상류에 있는 밭을 조사하기로 했다. 그녀는 1시간 반쯤 걸려 목적지게 도착했다. 그리고는 메모지를 꺼내 대충의 지형도를 그린 뒤 발걸음으로 거리를 가늠해 경사와 함께 지도에 적어 넣었다.

일에 열중하고 있을 ㄸ 남자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아가 돌아보니 미구엘 올리바도스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한가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안젤리나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죠" 올리바도스가 말했다. "그런데 무얼 하고 있죠? 안젤리나의 말에 따르면, 당신은 옥수수를 잘 자라게 할 수 있다는데요. 당신은 마술사인가요?"

줄리아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나는 다만 토지를 조사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 뒤에도 올리바도스는 여러 가지 일을 물었으나, 줄리아는 그가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우선 일을 끝마쳤다. 그리고는 로베르토의 충고를 되새기며 올리바도스와 같이 마을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로베르토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그러나 줄리아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았다.

줄리아는 안젤리나의 집에서 회식이 끝나자 먼저 오두막으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중에 돌아온 로베르토가 입구에서 빈정대듯 말했다.

"내가 올 때까지 잠들 수 없었던 모양이군"

"안젤리나의 집에서 나온 지 5분도 되지 않았어요. 베게에 머리를 올려놓았다고 곧 잠이 드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잠들려고는 했겠지?"

"그게 무슨 뜻이죠?"

"줄리아, 오늘 저녁에는 마치 내가 페스트 환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피하기만 했잖아? 낮에도 나를 피했고 줄리아는 상당히 경험이 많은 모양이군"

"무슨 경험말이죠?" 줄리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람직하지 않은 애인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경험 말이야"

그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줄리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로베르토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서 눈길을 돌렸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모른다고?" 로베르토는 빈정대듯 웃고 침대 가장가리에 걸터앉아 줄리아의 턱을 손으로 받쳐들었다. "그렇다면 말해 주지. 줄리아는 멋진 육체와 본능을 겸비한 냉정한 여성이지만, 동시에 전 세계를 제트기로 날아다니면서 성공과 기쁨의 나날을 보내고 있어. 따라서 애인도 생겼을 테지. 때로는 마음이 끌리는 남자와 잠자리도 같이 했을거야. 그러나 다른 때는 애인에게 아무런 권리도 허용하지 않을 거야. 거리에서 만나면 친절하게 인사를 하는 것 말고는. 안그런가?"

줄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째서 로베르토가 화를 내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기 것으로 만든 뒤에는, 남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줄리아는 마음이 착잡했다.

"나에 관한 한 당신은 아무 권리도 없어요!"

"그래서 쌀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나?"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를 친구 같이도 대하지 않으면서 용케 그런 걸 기대하는군요. 친밀한 인사조차도 나누기 싫어요!"

"줄리아는 어젯밤에 내 애인이었어"

로베르토는 줄리아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줄리아는 홱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만에요. 나는 애인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애인이란 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애인이 되려면 하룻밤만으로는 부족해요"

자기 말의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순간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로베르토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쌀쌀하기만 했다. 줄리아는 숨을 죽이고 뒤로 물러섰다.

"사실이야, 그 말이 옳아" 로베르토가 속삭였다.

"당치도 않아요. 안돼요!" 줄리아는 애써 부인했다.

로베르토는 그 말을 무시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줄리아는 벽 쪽으로 물러섰다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로베르토가 그녀의 손을 한 손으로 휘어잡고 저항을 봉쇄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줄리아의 셔츠를 잡아당겨 단추를 끌려고 했다. 하지만 줄리아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 손을 멈추었다.

"좋아, 그럼 스스로 벗도록 해" 로베르토가 싸늘하게 말했다.

줄리아는 잠자코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로베르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어"

그는 두 손으로 줄리아의 옷깃을 붙잡고 양쪽으로 확 발렸다. 셔츠가 그녀의 팔꿈치에 걸렸다. 줄리아는 무표정한 로베르토의 눈매에 고개를 돌렸다. 이런 짓을 하다니, 나를 무척 경멸하는 모양이군!

"당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물을 것도 없겠군요"

"내가 줄리아의 애인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뿐이야, 달링" 로베르토는 짧게 웃었다.

"당신이 지긋지긋해요" 줄리아는 그를 노려보며 되도록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말이 너무 심하군, 달링. 하지만 그 육체는 다른 말을 하고 있어. 그렇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만족스럽겠죠? 어쨌거나 내가 그런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어요.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 대답은 노에요"

"그렇다면 우선 그 마음부터 바꿔놓아야겠군"

로베르토는 소름끼치는 미소가 함께 느닷없이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줄리아는 비명을 질렀으나, 로베르토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거역해도 그는 태연하기만 했다.

줄리아는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굴욕과 절망감에 빠졌다. 그의 교묘한 애무가 효과를 나타내어, 줄리아는 로베르토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는 두 손으로 줄리아의 얼굴을 감싸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줄리아가 택한 것이 노라고?"

욕망과 굴욕으로 몸이 갈갈히 찍어지는 것 같아 줄리아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로베르토가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쳐들었다. "줄리아, 나를 봐" 그는 명령조로 말하면서 줄리아에게 무게를 얹었다. 순간 그녀는 몸을 떨었다. ", 무엇을 원하는지 어서 말해!"

너무나 잔혹하여 줄리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몸속에서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로베르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줄리아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부탁이에요...." 그녀의 입에서 겨우 말이 새어나왔다.

관능의 절규가 줄리아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로베르토가 몸을 ㄸ었을 때, 줄리아는 비로소 자기가 흐느끼며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을 삼키려 하자 목이 아팠다.

로베르토의 숨소리가 규칙적인 것으로 미루어, 그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곁에 누운 줄리아는 굴욕에 사로잡혀 눈을 뜬 채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겨우 로베르토가 눈을 뜨고 팔꿈치를 괴었다. 줄리아는 천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크게 한숨을 한번 쉬고 침대에서 내려와 불을 끈 뒤, 벗어 던졌던 셔츠를 집어 왔다.

로베르토는 어둠 속에서 한 팔을 내밀어 줄리아의 가슴에 얹고 조용히 말했다. "줄리아?"

""

"아직 안자는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당신을 증오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줄리아는 몹시 피곤해 이 말을 하는데도 무척 힘이 들었다.

"그 잠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달링. 하지만 증오가 전부는 아니야. 줄리아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그것까지는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로베르토는 다시 자기를 품에 안았고, 자신도 역시 거기에 응하여 기쁨의 비명까지 질렀으니까.

로베르토는 만족한 듯 하침까지 깊은 잠에 빠졌다.

 

그 후의 며칠 동안도 똑같이 지나갔다. 줄리아는 낮이면 밭에 나가 작물의 상태를 둘러보고, 지금까지의 수확량을 조사했다. 대게는 미구엘과 같이 있었다. 미구엘에게 용무가 생겼을 때만 다른 남자와 같이 있었다.

로베르토의 모습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다른 마을이나 시내에 사람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낮에까지 함께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밤이 되면 사정은 달라졌다. 두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정열에 사로잡혀 사랑을 나누었다. 언어도 필요 없고 정다운 눈길도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마치 성이 나서 상대방에게 발톱을 세우는 두 마리 짐승 같았다.

줄리아를 철저한 굴욕 속에서 건져 준 것은, 로베르토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순간에는 열중해 버리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줄리아를 중오하는 것 이상으로, 자제심을 잃은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있었다.

비밀스런 무언의 정열을 제외하면, 로베르토는 되도록 줄리아를 피했다. 그러므로 줄리아는 로베르토가 자기를 몹시 미워하고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의 일이었다. 로베르토가 흔드는 바람에 눈을 뜬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로베르토의 굳어진 얼굴에는 형식적인 친밀성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는 줄리아가 눈을 뜨자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손을 움츠렸다.

"오늘 나와 같이 가야겠어. 아우구스토의 소굴로 가는 거야" 로베르토는 줄리아가 바라보자, 성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미구엘보도고 오라고 했으니까, 줄리아의 이야기 상대도 있어"

줄리아는 비참한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로베르토는 홱 등을 돌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로베르토가 줄리아가 늑장을 부리면 자기가 옷을 입히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줄리아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로베르토는 줄리아에게 벌을 주기라도 하려는 듯 말을 빨리 몰았기 때문에, 미구엘이 한두 번 항의를 할 정도였다. 줄리아는 세 사람 중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따라갔으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세 시간쯤 지났을 때 작은 마을이 눈앞에 보였다.

울퉁불퉁한 내리막길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니, 자갈을 깐 한길이 나왔다. 미구엘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와 있군. 아우구스토가 우리를 배반한 게 아닐까요?"

"아우구스토가?" 로베르토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산너머에 있어. 거기서 내가 몰래 발레트 대통령과 만나고 있는 줄 알고 있을 거야"

"그래요? 하지만 너무 사람이 많아요"

"그럴 수밖에 없지. 콘치타 레베쿠의 결혼식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미구엘이 로베르토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계획된 행동이었군요?"

"지금쯤은 줄리아에게도 이 나라의 전형적인 예식을 보여 줄 때가 된 것 같기에..." 로베르토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줄리아에게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 그렇겠군요. 물론 레베쿠 노인이 당신을 초대했겠군요? 두 사람 모두 변호사이기도 하니까"

"그래, 맞았어"

세 사람은 말을 탄 채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줄리아는 곧 마을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 얼마 후 야자수가 우거진 가로수길이 나왔던 것이다. 길 너머에는 넓은 광장이 있고, 작은 마을로 보이던 것은 사실은 훌륭한 시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가로수 길에는 차도 몇 대 지나갔고, 물을 나르는 노새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죠? 신부의 집으로 가는 게 아닙니까?" 미구엘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로베르토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우선 하숙으로 가야 하네. 레베쿠 부인이 우리를 위해서 전통적인 예복을 준비 해 놓겠다고 했네. 결혼식에 온 손님으로서 유별나게 보이면 좋지 않으니까"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말이군요" 미구엘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에요. 당신의 얼굴은 이 나라에서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지나치게 과장해서 말하진 말게!" 로베르토가 성가신 듯 나무랐다.

"과장이라고요? 당신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신문에 사진이 나고 싶지 않거든 국제적인 스타를 에스코트 하지 마세요"

"입 닥치지 못하겠어!"

로베르토는 신경질적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 뒤 하숙으로 길을 재촉했다. 미구엘이 웃었다.

"호랑이는 꼬리를 건드려도 싫어한다는 말이 있죠" 그는 줄리아의 기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돈 로베르토는 왜 그런지 요즘에 화를 잘 내거든요!"

미구엘은 슬픈 듯이 고개를 흔들었으나, 눈은 춤을 추고 있었다. 줄리아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아래 애매하게 대꾸했다.

작은 하숙에 도착하자, 줄리아는 자기를 위해 준비해 둔 방에 안내되었다. 로베르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침대에는 아름다운 의상 - 검정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스커트가, 긴소매 블라우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옷을 입도록 해"

줄리아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돌아보자 로베르토가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검정 바지에 멋진 수가 놓여진 긴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면도도 깨끗이 하고 검은 머리가 반지르르했다. 아마도 샤워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너무나 핸섬한 모습에 놀라 줄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손님의 정식 의상이야"

재미있어하는 듯한 그의 어조에 줄리아는 가슴이 설레었다. 요즘에 그는 말을 걸어와도 서먹서먹하고 쌀쌀하기만 했다. 웃음이 담긴 말은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줄리아의 눈에 눈물이 괴기 시작했다. 로베르토는 그것을 곧 알아차리고 가까이 다가와서 손으로 가만히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면 못써"

"하지만 나는 참석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걸요" 줄리아는 가만히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나의 숙녀로 여기 온 거야. 참석할 자격이 충분히 있어"

"진상을 알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줄리아보다 진상을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 어서 옷을 갈아입어. 틀림없이 즐거울 테니까" 로베르토가 다정하게 말했다.

놀랍게도 그의 말은 옳았다. 로베르토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결혼식 그 자체의 화려함이 줄리아를 무척 즐겁게 해주었다. 식은 교회와 시청에서 두 번 거행되었고, 그 뒤에는 광장에서 야외 파티가 열렸다. 줄리아는 진귀한 광경을 바라보기에 바빠서, 잠시 동안은 자기 문제도 잊었을 정도였다.

로베르토는 며칠 동안 관심조차 보여 주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줄리아가 좋아할 일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줄리아는 과일주를 두어 잔 마시고 미구엘과 포크댄스를 추었다. 춤이 끝난 뒤 줄리아는 용기를 내여 로베르토에게 물었다.

"왜 나를 여기 데려왔죠?"

"나는 결혼식 구경을 좋아하니까, 줄리아도 좋아하리라 생각해서였지"

로베르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문득 로베르토가 이번 사태가 수습되면 결혼하겠다고 했다는 마르타의 말이 생각났다. 줄리아는 호기심을 감출 수 없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물었다.

"가까운 장래에 당신으 결혼식도 있겠죠?"

그가 빙긋이 웃고 대답했다. "그건 상대방 여성에게 달려 있지"

이 한 마디에 줄리아는 몹시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야. 가령 지금까지 내가 결혼하지 않은 것은, 상대편 여자 때문이 아니었어"

"그것이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독신주의였다는 말인가요?"

"그것도 한 가지 해석이지" 로베르토가 웃었다. "나는 부모의 결혼을 보고 환멸을 느꼈어. 어머니의 행동을 보고 여성에 대한 꿈을 버렸던 거야"

"그런데 왜 마음이 변했죠?"

로베르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상대편 여성 때문이지.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

"하긴 그렇군요" 줄리아는 조용히 웃었다.

"한눈에 반해 버렸어" 로베르토는 다정히 미소 지었다. "책에서는 그런 걸 읽었지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갑자기 나도 그렇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어"

"다행이로군요"

억지로 미소 짓고 있던 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돌렸다. 로베르토가 재미있다는 듯이 쌀쌀한 어조로 물었다.

"줄리아는 사랑을 믿지 않나?"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일이 없나?"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일이 없느냐고?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 줄리아는 머리를 똑바로 쳐들었다.

"사랑의 정의부터 내리고 물어 보세요!"

로베르토는 잠시 화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물었다. "줄리아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로군. 줄리아에게 사랑을 바라던 남자는 모두 손을 들었을 거야"

"그것은 사랑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 그래?"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원하는 것이겠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고, 자기보다도 상대방의 행복을 더 바라는 마음... 이것이 줄리아가 원하는 사랑의 정의가 아닐까?"

", 그래요"

", 그랬었군. 줄리아가 그... 휴라는 사람에게 품었던 감정이"

"무슨 뜻이죠?"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로베르토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빠른 말로 말했다. "내가 잠든 줄리아를 깨웠을 때, 줄리아는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잖아? 휴가 줄리아의 애인인가?"

"애인따윈 없어요" 줄리아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럼, 휴는?"

"벌써 10년 전 이야기에요.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말한 그런 사랑을 믿었던 거예요. 그쪽에서는 믿지 않았는데"

"그가 줄리아에게 상처를 입혔나?" 로베르토가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때 말인가요? ,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어요. 그 나름대로 좋은 교훈이었다고 생각해요"

"교훈? 무엇을 위한 교훈이지? 그 뒤에도 누가 있었나?"

줄리아는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아무도 없어요"

"뭐라고?"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왜 그런지는 모르나, 로베르토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무도 없어요, 휴 이후에는" 그녀가 되풀이했다.

"줄리아는 10년 동안이나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쌀쌀했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어요. 나는 항상 혼자였으니까요. 휴 이전에도 친근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가족이나 친구 중에도 말이에요. 휴에게 환멸을 느꼈을 때, 나는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물론 친구는 있지만, 가장 소중하나 사람이 되었던 일은 없고, 또 그것이 내 희망이기도 했어요.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아니, 이해할 수 있어. 나 자신도 그런 것을 느꼈을 때가 있으니까. 물론 우리 가족은 쌀쌀했던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간섭이 많았던 것이지만, 그러나 남에게 책임지우지 않고 외톨이로 있는 것이 더 해방감을 느낀다는 사실만은 이해할 수 있어"

"정말 그래요"

"하지만 그것조차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어. 줄리아는 지금 행복한가?"

"지금은 결코 행복하지 못해요. 유괴를 당하고 좋아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결코 다른 뜻을 갖고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로베르토의 얼굴에서 갑자기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몹시 기분을 상한 듯했으나, 아마 그것은 줄리아의 지레짐작일 것이다. 로베르토는 여전히 의자에 여유만만하게 앉아서 글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까.

"일반론으로 말하면 나는 아주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요" 줄리아는 감정을 억제하고 말을 끝마쳤다.

로베르토가 뭐라 얘기하려 했을 때, 신랑신부 일행이 오는 바람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로베르토가 일어나서 아름답고 건강한 신부의 빰에 키스헀다. 그녀의 아버지는 몹시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돈 로베르토씨, 큰 영광입니다. 내 사위를 소개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교환하자 어디선지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로베르토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기자들을 끌어들인 것 같아서요"

"아닙니다. 어차피 오늘밤의 피로연에는 오기로 되어 있었으니까요. 우리 콘치타의 결혼식에 당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먼저 온 모양입니다" 세뇨르 레베쿠가 빙긋이 웃었다. "전문가가 찍은 결혼사진을 공짜로 얻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죠"

로베르토도 따라서 웃었다. "하기는 그렇군요"

"비용을 무시할 수 없어요. 달이 하나밖에 없어 큰 다행입니다. 결혼식에 얼마나 돈이 드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돈 로베르토" 그리고는 넌지시 운을 뗐다. ", 소문을 들으니 당신도 곧 그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게 될 것 같더군요"

", 나에게도 시집을 보내야 할 동생들이 있죠" 로베르토는 가볍게 받아넘기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소개를 안했군요. 줄리아, 이분은 폴 레베쿠라고 해. 오랫동안 외국인으로 통하고 있었지만, 이 고장 풍습대로 결혼을 주재했으니까 이제 이 나라 사람이 됐지. 그리고 폴, 이 아가씨는 뉴욕에서 온 줄리아 레녹스라고 하죠"

"정말 영광입니다, 도냐 줄리아" 그가 인사했다. "소문이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군요. 당신의 눈은 분명히 아침하늘입니다"

줄리아는 깜짝 놀라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첫째는 화려한 찬사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었고, 둘때는 누가 자기 소문을 퍼뜨렸을까 하는 의아심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줄리아가 거북스럽게 말했다.

"대환영입니다, 아가씨. 이 나라에서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줄리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일행은 다음 테이블로 옮겼다. 그녀는 겁먹은 시선을 로베르토에게 보냈다.

"레베쿠는 내가 이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이죠? 사실 대로 말해 주세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죠, ?"

"있지... , 있고말고"

"그게 뭐죠?" 줄리아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잘 생각해 보면 스스로 알 수 있을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힌트는 이미 주었어"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죠?"

"미리 말해두었어야 했는데 그랬군. 오늘밤은 줄리이가 그동안 이 나라에서 익힌 풍습과 달라 좀 고생을 하게 될 것 같아"

"결혼 축하연회가 또 있나요?"

"아니, 훨씬 더 지루한 연루행사가 있어. 이 마을의 비즈니스맨들이 중심이 되어 어떤 중요인물을 초대해서 리셉션을 여는 거야. 오늘 밤에는 재무장관도 출석하게 되어있어"

"당신도 거기 참석하나요?" 줄리아가 물었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참석하는 거야" 로베르토가 정정했다.

"그럼, 아우구스토요?"

로베르토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참석하지 않아. 재무장관과의 회합에는 초대받지 않았어. 그 자신도 참석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려면 당신이 이 마을에 오기 전에 어째서 아우구스토를 유인해낼 필요가 있었죠?"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이 마을에 오기 전에 말이겠지?" 로베르토는 빙그레 웃었다. "좋아, 말해주겠어. 재무장관은 아우구스토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달라.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녀석은 내가 초대받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 물론 녀석도 초대객의 리스트를 몇 주일 전에 조사하기는 했지. 하지만 나중에 몇몇 용기 있는 미즈니스맨들이 아우구스토를 제외하고 다시 리스트를 만들었어. 그 대신 내가 리스트에 들어가고. 녀석이 이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거지..."

"그래요?" 줄리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태가 절정에 달해 가고 있군요?" 그러나 로베르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줄리아가 말을 계속했다.

"대통령과의 비밀회담 일정은 짜여졌나요? 그 뒤 당신과 당신의 동지들이 이 나라를 물려받게 되나요?"

"아니, 그렇지 않아" 로베르토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총선거를 실시하게 돼. 잠정내각은 최대한 6주간을 넘기지 않아. 내가 이 나라를 물려받는 것은 아니야"

"오늘밤의 회담은 아주 중요한 것이 되겠군요?"

로베르토가 머리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줄리아도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야.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줄리아는 이 회합에 내... 공식 동반자로 참석하는 거야. 줄리아가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도 되겠지?"

줄리아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하루저녁이기는 하지만, 그의 아내처럼 행동해야 하다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가. 그러나 로베르토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달리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선을 다하겠어요" 줄리아가 대답했다. "두 잔째 샴페인을 마시고 노래가 터져 나오지 않도록 말이에요"

로베르토는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줄리아의 손에 자기 손을 쥐었다.

"고마워. 그런데 유감이로군. 노래와 샴페인을 위해선 다른 기회를 만들어야겠군. 약속하겠어"

로베르토는 줄리아의 손을 들고 손끝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날 밤처럼 로베르토가 당당하게 보인 적도 없었다. 물론 그녀는 알토 리오의 나이트클럽에서 정장한 로베르토를 본 적은 있었으나, 오늘밤의 이브닝 수트처럼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의 이 옷은 자신이 입고 있는 이브닝드레스와 함께 오늘 오후에 그 하숙으로 배달되어 온 것일 게다.

줄리아의 실크 드레스는 초콜릿과 사파이어 빛 프린트 무늬로서, 아마 수백 달러는 나갈 것 같았다.

리셉션에 나가기 전, 로베르토가 납작한 가죽 케이스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줄리아가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묶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어링도 필요할 텐데 깜빡 잊었군"

로베르토는 천천히 다가와서 줄리아를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가 케이스에서 꺼낸 것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였다. 줄리아는 보석의 싸늘한 감촉과 로베르토의 뜨거운 손에 그만 숨을 삼켰다.

"대대로 전해 오는 보석의 하나지. 이것을 걸도록 해"

줄리아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못한 채 로베르토의 말을 따랐다. 로베르토와 나란히 회장으로 들어가자 카메라앵글과 텔레비젼의 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새삼스럽게 이 공식행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로베르토의 중요성이 점점 더 드러났다. 그의 연설은 아주 짧았으나, 누구나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자들이 따라다니고, 다른 초청객도 로베르토와 말을 나누려고 몰려왔다. 로베르토의 인기 때문에 줄리아마저도 여왕과 같은 대접을 받데 되었다.

여성들은 친근감을 나타내면서도 아주 정중했고, 남성들은 그녀를 공손히 대했다. 그리고 그녀의 드레스와 머리모양과 능숙한 스페인어를 칭찬했다. 물론 로베르토도 칭찬했다. 정말 로베르토의 아내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그토록 엄한 명령만 내리던 로베르토까지도 줄리아를 극진히 대하고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는 마치 줄리아가 소중한 존재이고 흥미를 나타내는 많은 남자들로부터 지키기라도 하둣, 좀체로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 안거나 했다.

놀라운 연기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눈에도 로베르토가 줄리아에게 열중해 있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자 줄리아는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 몸의 안전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로베르토는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줄리아는 또 얼마 전에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한눈에 반한 여자와의 결혼을 바란다고 말했던 것이 아닌가.

줄리아는 호텔 로비에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오늘 밤에 로베르토가 방으로 온다면, 나는 슬픔과 마음의 상처를 숨길 길이 없을 것이다. 줄리아는 로베르토를 돌아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부탁이에요, 오늘밤은 나 혼자 있게 해주세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있어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라고?" 그는 놀라는 듯했으나, 곧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그러고 싶다면 좋도록 해"

줄리아는 말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로베르토는 크게 한숨을 한 번 쉬고 줄리아의 이마에 다정히 키스한 뒤 사라져갔다.

 

이튿날, 로베르토는 미구엘과 함께 줄리아를 돌려보낸 뒤 이틀 밤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오자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줄리아를 끌어안고, 잔인할 만큼 철저하게 사랑을 교환했다. 얼마나 줄리아를 경멸하는지, 또 줄리아에게 욕망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얼마나 경멸하는지, 말보다는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듯이.

줄리아는 이제는 두 번 다시 완전한 자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셈인지, 로베르토는 줄리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언제까지나 이것을 로베르토에게 깨닫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그가 깨닫게 된다면, 여기서 빠져나갈 기회마저 잃게 된다. 로베르토는 나에 대한 무기로 내 감정을 이용할 것이 분명하다.

줄리아는 낮 동안만이라도 애써 로베르토를 피하려고 했다. 로베르토 역시 그렇게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줄리아는 로베르토가 아직 오두막에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오늘 아침에는 몇몇 여성에게 권총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로 했어. 옷을 갈아입거든 곧 떠나기로 하지" 로베르토가 말했다.

"권총이라구요?"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만일의 경우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는 힐끗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줄리아는 잠꾸러기군. 10분 안으로 나오도록 해. 그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옷을 갈아입었건 안 입었건 무조건 끌어내겠어."

로베르토는 줄리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줄리아는 그가 어떤 협박을 해서라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을 여자들이 눈부신 햇빛을 받으면서 안젤리나의 집 앞에 모여 있었다. 마르타가 상냥하세 인사했으나, 로베르토는 모르는 체하고 안젤리나의 시누이에게 권총을 쥐어주고 자세히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귄총은 줄리아에게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런데도 줄리아는 잠자코 안젤리나의 집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그동안 마르타와 로베르토는 늙은 여자를 격려하며 권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결국 체념한 모양이었다. 표정을 보면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줄리아의 차례야, 손을 이리 내밀어" 로베르토가 줄리아를 보고 말했다.

줄리아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약간 얼굴을 붉히고 할 수 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로베르토가 권총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검고 싸늘한 살인도구였다. 줄리아는 권총을 쥐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안 되겠어요"

줄리아가 권총을 돌려주려하자 로베르토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제발 신경질을 부리지는 말아 줘"

그는 영어로 말하고 나서 스페인어로 지시를 내렸다. 손을 감싸듯이 하고, 균형을 잡는 법이며 겨냥하는 법, 쏘는 법 등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줄리아가 로베르토의 손을 뿌리쳤다.

"못하겠어요!"

"바보 같은 소리 하면 못써!" 이번에는 그가 스페인어로 꾸짖었다.

"지금 전국이 들끓고 있어. 반드시 배워야 해... 자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나 이 마을 사람 모두를 위해서도 배워야 해"

줄리아는 손에 쥔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총신이 짧고 추했으나, 바로 곁에 있는 로베르토를 쏘기란 쉬운 일이다. 탄환이 그의 살을 찢고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이런 생각만 해도 줄리아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아. 로베르토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줄리아가 권총을 던지자 땅에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형편없는 바보로군! 만일 탄환이 들어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로베르토이 눈이 험상궂게 빛났다.

"못하겠어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이런 일은 절대로 못하겠어요!" 줄리아는 안간힘을 쓰고 항의했다.

로베르토가 줄리아의 손목을 잡고 억지고 밑으로 내렸다. "총을 주워!"

"싫어요, 나는 권총 같은 것은 안쓸거예요!"

"총을 집으라잖아!"

로베르토는 억지로 줄리아를 무릎 꿇게 했다. 무릎이 자갈에 박혀서 아팠다. 줄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우는 소리로 말했다. "남을 해치고, 죽이고... 당신들의 머리에는 그 생각밖에는 없군요!" 그녀는 머리를 똑바로 들고 로베르토를 노려보았다. "나까지 끌어들이지는 마세요. 당신이 네게 무슨 짓을 해도 좋아요. 하지만 나는 총을 쏘지는 않겠어요!"

"어서 총을 줍지 못하겠어?"

"죽어도 싫어요" 줄리아는 조용히 말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 짓을 하다니 구역질이 나요" 나만히 눈을 떠보니 로베르토가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화가 났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 "당신을 쳐다만 봐도 구역질이 나요" 줄리아가 분명하게 말했다.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손목이 몹시 아팠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뉴욕의 번잡한 거리에 쓰러졌는데,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짓밟고 지나갔다. 싫어요. 축구공처럼 마구 걷어차지 마세요. 전 세계가 절규하고, 줄리아는 작게 항의의 소리를 지르고... 이마에 싸늘한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가만히 누워 있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에 뉘어져 있었다. 평소의 침대는 아니었으나, 곁에 로베르토가 서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나?" 로베르토의 말에 이어, 그 뒤에서 안젤리나가 작은 소리로 뭐라 속삭였다. 로베르토가 꼭 입을 다물었다. 뺨의 근육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줄리아... 몸이 불편한가?"

"기분이 이상해요" 줄리아는 한 손을 이마에 얹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심한 반발을 하다니. 나 자신도 뜻밖이었어요."

", 권총 말인가? 이제 됐어. 그 일은 잊어버려" 어머, 그래요? 그러면 어째서 그토록 나를 복종시키려 했죠? 단순한 자존심 때문에? 줄리아는 속으로 이렇게 반문했다.

로베르토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회복할 때까지 안젤리나와 같이 있도록 해" 그는 줄리아가 대꾸해 주기를 바라는 듯 말을 끊었다.

"알았어요"

줄리아가 대답했으나 그는 아직도 나가지 않았다.

"혹시 원하는 것은 없나?" 로베르토가 천천히 물었다.

있어요, 그것은 내 자유에요... 줄리아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만은 필요했다. 그리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면도.

"혼자 있고 싶어요" 줄리아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로베르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뜨자 이미 로베르토의 모습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8

줄리아는 오전 내내 누워 있었다. 안젤리나가 주는 물약을 먹었더니 몸이 개운해졌다. 머리가 어지럽지도 않고, 구역질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히 가셨다. 그러나 안젤리나는, 돈 로베르토의 지시라면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줄리아가 항의하려 하자 안젤리나가 제지했다.

"소문에 따르면 아우구스토가 이 산으로 들어왔대요. 부하에게는 남쪽으로 간다고 하면서... 그는 돈 로베르토를 믿지 않았으니까요"

"알았어요" 줄리아는 아우구스토에게 감시당하던 날 밤의 일을 상기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무얼하죠?"

"거기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요" 안젤리나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시누이와 내가 천 짜는 법을 가르쳐 주겠어요"

마치 심심하다고 보채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하는 어투였다. 줄리아는 안젤리나의 호의를 고맙게 여기고 그러겠다고 했다.

줄리아는 천 짜는 일에 열중했다. 무거운 라마의 털을 수직기로 짜는 것이었는데, 여자들은 더운 낮에는 작업실에서 일을 하다가 서늘해지면 밖으로 가지고 나가 작업을 계속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일을 중단하고 모두 안젤리나의 집에 모였다.

하루는 안젤리나의 집 식탁에 로베르토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줄리아는 그가 어디 갔는지 묻고 싶었으나,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베르토에 대해서는 줄리아가 제일 잘 알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토는 아주 늦게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줄리아한테로 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상체를 구부려 입술에 키스했다.

"상당히 좋아진 것 같군. 다행이야. 걱정했는데" 로베르토는 이렇게 말하고 그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때 안젤리나가 스튜가 든 접시를 가지고 오자, 웃으면서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줄리아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동안에도 내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

"그래? 정말 다행이야" 로베르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앞으로 며칠이면 이 사태가 해결 될지도 몰라"

줄리아는 날카로운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영어로 물었다. "싸움이 끝난다는 말인가요?"

"멀지 않아 어느 쪽으로든 결판이 날 거야. 아우구스토가 일을 망쳐놓지 않는 한"

"얼마나 시일이 걸릴까요?"

"그렇게도 빨리 나한테서 도망치고 싶나?"

"당연하지 않겠어요?"

싸늘하게 대답했으나, 로베르토의 눈에 무엇이 떠오른 것 같아 가슴의 고동이 빨라졌다. 로베르토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 그래? 운만 좋으면 금주중이 될지도 모르지. 이미 회담이 시작되었으니까. 문제는 적측의 공군과 우리 편의 아우구스토야. 그들은 모두 이 기회에 권력을 잡으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로베르토가 씁쓸히 웃었다. "더군다나 페페 녀석은 공군에게 방송 차의 주파수를 탐지 당했어. 이젠 페페가 머리를 써서, 차를 도로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게 하고 방송을 중지시키기를 바랄 뿐이야. 차를 마을에 가져오는 날에는 아주 위험한 일이 생길 거야"

"어째서요?"

"공군은 비행기와 군복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야. 그들은 촉탄도 가지고 있어. 방송차가 있는 마을을 지상에서 날려 버릴 수도 있고, 또 그런 정도의 일은 능히 할 거야"

"알았어요"

"줄리아라면 알 것이라 생각했지. 특히 무기에 대한 줄리아의 견해는 분명히 알았으니까"

"거기에 대해선 이미 사과했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사과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나한테도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전에도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어. 줄리아, 왜 늘 나하고 다투려고만 하는 것이지?"

"이유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럴까? 나는 가끔 그 이유를 모를 때가 있어"

"누구나 유괴당하는 것은 싫어해요" 쥐어짜는 듯한 소리였다. "갇히고, 명령을 받고... 또 희롱당하고" 그녀는 빨리 말을 마쳤다.

로베르토는 머리를 뒤로 잦히고 큰 소리로 웃었다. "겨우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나? 로맨틱한 면이라곤 하나도 없군!"

줄리아가 로베르토를 노려보았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띠고 엄지손가락으로 줄리아의 코를 가볍게 찔렀다. 그런 뒤 태연하게 식탁의 대화를 즐기면서 식사를 끝냈다.

로베르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 줄리아와 함께 안젤리나의 집에서 나왔다. 오두막에 도착하자, 로베르토는 줄리아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아까 뭐라고 했지? 누구든지 이렇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고?" 로베르토가 미소를 띠고 속삭였다.

줄리아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그를 피하려고 했다. "나를 혼자 있게 해주세요"

"지금은 안돼" 그가 빙긋이 웃었다. "더러는 그게 전혀 싫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에는"

로베르토는 줄리아의 민감한 부분에 살짝 키스를 하면서 말했다. 줄리아는 저항을 단념했다. 어차피 힘으로는 로베르토를 당하지 못할 테니까. 줄리아는 전처럼 다시 로베르토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날 밤도 이튿날 밤도 전과는 달랐다. 두 사람의 정열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로베르토는 가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점잖게 대해 주었다. 줄리아로부터 무슨 신호나 말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낮에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그에게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밤에는 물론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낮에는 왜 그런지 줄리아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일이 거듭되었다. 로베르토가 몇 번이나 자기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베르토는 단도직입적으로 몸의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니 줄리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딱 잘라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로베르토에게는 걱정거리가 태산같이 많으니까. 로베르토는 줄리아의 대답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었으나, 더 이상 캐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로베르토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장시간 동안 모습을 갖추는 일은 예사이고, 아침에 돌아온 일도 두 번이나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줄리아도 겁이 나서 물어보지 못했다.

마을에는 현저하게 사람이 많아지고 떠들썩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도착했다. 줄리아는 천 짜는 일에 열중하면서, 되도록 그들과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로베르토가 식사시간 직전에 돌아와 느닷없이 줄리아에게 물었다.

"줄리아, 미구엘과 만났었지?"

"그건 왜 묻죠?"

"그와 무슨 말을 했어?"

줄리아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사실 그녀는 미구엘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미구엘이 천을 짜는 줄리아를 찾아왔기 때문에.

미구엘은 줄리아가 상당히 가정적이 되었다며 놀리기도 하고, 로베르토를 변호하기도 했다. 로베르토가 플로리타와 만나는 것은 작전에 불과하며, 두 사람은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자 줄리아는, 플로리타가 로베르토와 결혼하건 말건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닥 잘라 말했다.

"미구엘과 무슨 얘기를 했지?" 로베르토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줄리아는 미구엘과 나눈 이야기를 로베르토에게 보고할 생각이 없었다.

"별로요..."

"20분이나 만났으면서도 별로 한 말이 없었다는 건가?"

"아주 훌륭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군요? 정말 우리가 20분이나 얘길 했어요? 시간을 재 보지 않아서 난 모르겠어요" 줄리아가 비꼬듯이 말했다.

"나는 가끔 줄리아를 때려 주고 싶은 충동을 느껴" 로베르토가 거칠게 말했다.

"지금도 때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잖아요?"

줄리아는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으나, 이미 어쩔 도리가 없었다. 로베르토의 거친 말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로베르토는 그녀를 노려보고는 탕 하고 문을 닫고 나가 사흘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로베르토가 어디에 갔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로베르토의 지시였는지, 아무도 그녀에게 로베르토의 행방을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줄리아는 그가 플로리타를 만나고 있을 가능성을 애써 부인하려고 했지만, 강렬한 질투가 치솟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밤늦게 줄리아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서 바라보니, 문의 빗장이 날아가고 로베르토가 입구에서 몹시 비틀거리며 힘들게 서 있었다.

제일 먼저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로베르토가 부상당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은 핼쓱하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줄리아는 반사적으로 달려가 로베르토를 부축했다. 로베르토가 그녀를 꼭 부둥켜안았다. 그가 떨고 있다는 것을 줄리아는 알 수 있었다.

"꼭 안아 줘"

로베르토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몇 초 종안 경련하는 듯한 포옹이 계속되었다. 줄리아는 싸늘한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 상냥하게 말했다.

"문을 닫아야겠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로베르토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줄리아를 안고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부상을 당했나요?"

"내가? 아니야. 하지만 그와 비슷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줄리아는 위험을 느낀 나머지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그러나 애써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슷하다니, 무슨 뜻이죠?" 줄리아가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로베르토는 잠자코 줄리아를 껴안고 있을 뿐이었다.

"말해 주세요"

"바보 같은 녀석들! 아무 쓸모도 없는 녀석들!"

"페페와 그 동료들 말인가요?"

로베르토는 머리를 끄덕이고 피곤한 듯 한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줄리아는 그를 부축하여 침대에 데려다 뉘고, 두 팔로 그를 껴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죠?"

줄리아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아직도 공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마저도 약간 떨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술에 취해 있었어. 그들은 아우구스토와도 만나고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는 회담장으로 갔아. 이 말은 이미 했던가?" 줄리아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이야기하지 않았지. 이제야 생각나는군... 그건 그렇고, 나는 정부와의 회담을 마련했어. 이것은 비밀이고 또 안전한 것이었어. 그런데 여기에 페페가 방송차를 몰고 왔어. 1주일 동안 공군이 계속 추적하고 있는데도 말이지. 이건 마치 네온사인을 켜놓은 것과 마찬가지야. 비행기 편대가 날아왔지만 폭탄까지는 싣지 않았던 것 같아. 만일 그랬으면 우리는 전원이 모두 죽었을 거야. 그런데도 바보 같은 그 페페 녀석들은 크게 웃고만 있었어.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같이"

줄리아가 그의 두 손을 자기 손으로 가만히 감싸쥐었다. 로베르토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페페가 수류탄을 꺼냈어. 발레타가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으면 모두 날려 버리겠다고 외치면서.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던가? 물론 병사들이 무기에 손을 대었지만, 페페가 수류탄을 마구 휘두르고 있으니 꼼짝도 할 수 없었지"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나요?"

"페페한테 덤벼들었어"

"그를 죽였나요?"

"죽이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로베르,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우선 수류탄을 빼앗아서 힘껏 달리다가 멀리 던졌지. 수류탄은 강에서 폭발했어. 물론 공군에서도 봤겠지.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 우리는 그 장소에서 떠났어... 떠난 것이 아니라 마구 도망쳤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테지만"

"그러면 페페도?"

"아니, 그는 도망치지 않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 판다에 따르면 그는 어깨뼈가 부러졌어. 지금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당신은 정당했어요.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으니까요"

로베르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대신 아무런 합의도 보지 못했어. 아마 군부에서는 두 번 다시 회담에 응하지 않을 거야. 그들이 내 말을 믿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군부를 나무랄 수도 없게 됐어. 공군에서는 혁명파를 섬멸하기 위해 마을마다 폭격을 가하겠지. 다시금 피비린내 나는 혼란이 되풀이 될 거야. 이렇게 되는 것은 오직 야심만만한 산악 게릴라와 허영에 들뜬 일부 학생들 때문이야!"

기운이 다한 듯한 로베르토의 어조에 줄리아는 울고 싶어졌다. 그녀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런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을 거예요. 미리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일러요. 그리고 당신은 몹시 지쳤기 때문에 평소처럼 정확히 판단을 내릴 상태에 있지 않아요. 부츠를 벗겨 줄 테니 잠시 쉬도록 하세요"

로베르토는 순순히 줄리아의 말을 따랐다.

"어서 누우세요. , 음식을 좀 들겠어요? 아니면 음료수라도?"

로베르토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끼고 가만히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줄리아는 가만히 로베르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푹 쉬세요"

"줄리아?" 로베르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

로베르토는 손을 내밀지도 않고 가만히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줄리아가 필요해"

줄리아는 마치 세계가 정지한 것 같았다. 그녀는 마법에 풀릴까 두려워 숨을 쉬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오늘밤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해줘"

물론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줄리아는 정면으로 현실을 직시했다. 동시에, 자신은 로베르토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아깝지 않다는 사실도. 그러나 비록 로베르토가 악몽에서 벗어났다 해도, 그의 앞날에는 유혈과 고통밖에 없는 것이다. 로베르토는 오늘밤 망각을 원하고 있다. 나라면 그에게 망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단추를 끄르는 손이 떨리고 가슴이 아팠으나, 줄리아는 미소를 띠고 로베르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로베르토를 위로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살이 무척 희고 연약해 보이는군, 바닷조개처럼. 자끔 나는 줄리아를 부숴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천만에요. 나는 부서지지 않아요" 줄리아는 셔츠와 진에 이어 양말을 벗었다. "하지만 얼어붙을지는 몰라요. 로베르토, 나를 안아 주겠어요?"

로베르토가 줄리아를 끌어안았다.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옷이 졸리아의 살을 스치고 그가 힘껏 끌어안는 바람에 퍼스너가 그녀의 살을 파고들었다.

"좀 부드럽게 하세요. 온몸에 퍼스터 자국이 남겠어요" 줄리아는 애교 있게 항의했다.

로베르토는 웃었다. 그리고 자기 몸에 줄리아를 얹고는 목덜미에 빰을 가져갔다.

"줄리아는 정말 놀라워... 이렇게 부드럽고, 이토록 인간답고... 아아, 줄리아 오늘 밤만은 다투지 말아 줘.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되찾게 해줘" 로베르토는 웃으며 말했으나, 그 목소리에는 절망이 감돌고 있었다.

줄리아는 그의 머리를 가만히 다정스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이 재난을 막고야 말겠어. 비록 목숨을 잃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로베르토는 잇새로 말하며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줄리아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주저하듯 말을 이었다. "다른 생각은 말고, 나와 사랑을 나눌 일이나 생각하세요"

줄리아는 처음으로 로베르토의 옷을 벗겨주었다. 그런 뒤 천천히 그의 몸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로베르토가 자기 몸에 키스해 주었듯이.

"줄리아는 관능의 베테랑이군"

그 어조에 로베르토가 평소의 보통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줄리아도 이렇듯 느긋한 쾌락은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런지도 몰라요" 줄리아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속삭였다. "모두... 당신 탓이에요"

"놀랐는걸. 나는 그런 재주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몰랐어" 로베르토의 키스와 애무에 힘이 가해졌다. "아아, 줄리아... 줄리아!"

이윽고 로베르토는 피로에 지쳐 깊이 잠에 빠져들었다. 줄리아는 잠시 동안 그의 머리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이런 행복은 난생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절망에 빠져 있던 것도.

 

9

아침이 되었는데도 로베르토는 계속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램프를 켜 놓은 채로 있었기 때문에 방 안은 석유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줄리아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닷창을 조금 열어 석유냄새가 빠지도록 했다. 아직 이른 탓인지 거리에는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으나, 통행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줄리아는 가만히 로베르토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충족감이 느껴졌다. 로베르토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단지 나를 이용한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잿밤에 나는 그를 사랑했고, 낮의 공포를 잊게 해주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줄리아는 로베르토가 일어났을 때를 위해 커피를 끓여 놓으리라 생각했다. 스토브에는 연료가 충분히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난처하게도 주전자에 물이 없었다. 강게 가서 물을 길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줄리아는 주전자를 들고 가만히 오두막을 나섰다. 물을 떠오기에 제일 좋은 곳은 마을 바로 아래로 작은 내지를 강물이 가로지르는 장소였다. 그곳은 처음으로 이 마을에 왔을 때 지프가 멈췄던 장소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차가 없고, 라마나 산양이 몇 마리 풀을 뜯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산길의 커브를 돌아서 보니, 오늘 아침에는 트럭이 정거해 있었다. 게다가 아우구스토의 모습까지 보였다. 이 산악 게릴라의 두목은 급히 트럭에서 벗어나 하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아우구스토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줄리아의 발소리를 들은 듯, 마치 등이 칼에 꽂힌 것 같은 험상스런 표정이었다. 줄리아는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아우구스토가 한 손으로 눈 위를 가렸다.

"인질로 잡힌 미녀로군" 줄리아가 가까이 가자 아우구스토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호색적인 눈을 빛내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돈 로베르토는 행운을 홀로 독차지했군. 몰론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줄리아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도 않고, 아우구스토를 두려워하는 티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산악 게릴라의 두목을 무서워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의기양양해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간파했던 것이다. 만일 이쪽에서 아무 관심도 나타내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의기양양해 있는 이유까지도 지껄여댈 것이다. 적어도 국제적인 비즈니스의 마당에서는 이런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녀석은 무철 놀랄 거야" 자못 만족스러운 어투였다. "마음에 드는 이 작은 마을에 돌아와 보면 그림자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줄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아우구스토가 한 말의 뜻을 탐지해내려고 했다. 분명히 아우구스토는 로베르토가 어젯밤에 돌아온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그밖에 또 무슨 일이 있다.. 천천히 공포가 엄습해 왔다. 줄리아는 트럭이 가진 뜻을 깨달았다. 저것은 페페의 방송차가 분명하다. 더구나 눈에 잘 띄도록 마을 어구에 주차시켜 놓았다. 로베르토가 한 말이 생각났다. 페페는 네온사인을 켠 것과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아우구스토는 네온사인을 켠 것이다. 공군 폭격기를 불러들이기 위해.

줄리아는 가면을 쓴 것처럼 표정을 나타내지 않고 생각을 계속했다. 아우구스토는 줄리아에게 게임을 벌여 놓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의미를 파악했다는 것을 알면, 그는 지체없이 나를 죽일 것이다. 줄리아는 애써 어리석은 채 가장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모르겠다고?"

아우구스토가 돌아서서 줄리아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렇다면 공군이 당장 오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줄리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트럭의 엔진의 키는 그대로 있었다. 아마 그는 키가 두 번 다시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모른다고?" 아우구스토는 줄리아의 눈앞에 서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숨을 토했다. "그래, 알 리가 없지. 여기서 아는 건 단 한 가지밖에 없으니까"

그는 입술을 줄리아의 입술에 밀어붙였다. 줄리아는 혐오감을 참을 수 없었으나, 거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우구스토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혈관에는 밀크가 흐르나? 그 살색과 마찬가지로"

줄리아는 그가 손을 떼고 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 안전한 장소로 피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토는 줄리아의 몸을 훑어보며 양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가씨는 돈 로베르토 같은 신사의 여자가 될 정도니까 무언가가 있을 거야..."

아우구스토는 느닷없이 줄리아를 땅에 쓰러뜨리고, 마치 적에게 일격을 가하듯 위에서 덮쳐눌렀다. 줄리아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흙먼지와 체취로 숨이 막혔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아우구스토의 몸이 위로 쳐들어졌다. 줄리아가 겨우 먼지를 털고 일어났을 때, 아우구스토와 로베르토는 격투를 벌이면서 비탈을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줄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순간 두 가지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하나는 때아닌 난투극에 놀란 새들의 울음소리, 또 하나는 멀리 하늘에서 들려오는 폭음이었다.

아우구스토는 공군을 너무 가볍게 여긴 모양이다. 줄리아는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이미 트럭의 운전석에 올라 차를 발진시키고 있었다. 이토록 무거운 차를 운전하는 것도 차음이고, 바위투성이의 험한 길을 달리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트럭은 기친 듯이 흔들리고 찍찍 소리를 냈다. 그래도 비행기가 하늘에 보이기 시작했을 ㄸ는 큰길에 나와 있었다.

비행기는 폭격기가 아니라 전투기였는데, 트럭을 향해 몇 번 기총소사를 가했다. 차의 죄우에 흙먼지가 일어나고 돌이 차에 부딪쳤다.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자 길이 더욱 사나워졌다. 기어의 조작이 서툴렀는지 엔진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산길 한쪽으로 타이어가 미끄러져 나가 헛돌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트럭은 운전불능이 되어 옆으로 쓰러졌다.

운전석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공포를 느낀 줄리아가 고개를 내밀어 보니 지면까지 6m쯤 되는 공간이 있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충격과 고통이 있었다. 가시와 바위가 몸을 찔렀다. 비행기의 폭음, 총격을 가해 오는 소리... 이런 소리를 마지막으로 줄리아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줄리아는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면서, 지난 몇 주일처럼 자주, 또 극적으로 기절한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을 입밖에 내려해도 목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이제 의식이 돌아온 모양이군, 정신 차려요!"

그것은 영어였다. 그러나 줄리아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다시 깊은 수렁에 빠졌다. 얼마 후에야 다시 천천히 떠올라, 이번에는 수렁 밖으로 머리가 나왔다.

눈을 뜨자 환한 방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낯은 익지 않았으나, 흰옷을 입은 쌀쌀해 보이는 여자였다.

"여기가 어디죠?" 줄리아가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안녕하세요, 미스 레녹스? 기분이 좀 어때요?"

"내가 살아 있나요? 여기가 어디죠? 알토 리오인가요?"

줄리아는 그 다음에 떠오른 의문을 물을 수 없었다. 정치법으로 잡힌 몸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다. 방송기재를 불법으로 싣고 트럭을 몰았으니까.

"아니에요. 여기는 마이애미에요. 헤이버링 진료소에요"

"마이애미라구요?" 깜짝 놀라 일어나려는 순간, 팔에 주사바늘이 꽂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쳐다보니 링겔병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있죠?"

"이틀 전에 비행기로 왔어요" 간호원이 대답했다.

"하지만... 어떻게... 누가...????"

"병원비는 <테크티카연합>에서 책임질 거예요. 사장님이 몹시 걱정하여, 한 시간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있어요"

"토니 말이군요? 알았어요" 줄리아는 힘없이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기억이 없으세요?" 간호사가 물었다.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묻는 것이 아니겠어요?"

간호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닥터 곤잘레스를 만나 보도록 하세요. 의식이 돌아오면 만나시겠다고 했어요"

간호사는 얼른 병실에서 나갔다. 줄리아는 다시 베개를 베고 드러누웠다. 로베로트의 집 베개와는 상대로 되지 않을 만큼 푹신했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 오고... 로베르토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지고... 더구나 지금은 로베르토의 생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때 문이 열렸다.

"미스 레녹스, 의식이 돌아왔다면서요?"

줄리아가 눈을 드니, 흰옷을 입은 자그마한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청진기를 목에 걸고 침대에 앉아 줄리아의 맥을 짚었다.

", 이제 정신이 들었어요" 줄리아는 조용히 대답하고,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을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죠? 혁명이 불붙었나요?"

"이것 봐요" 의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는 겨우 의식을 되찾은 사람이에요. 그런 환자를 상대로 어떻게 세계정세를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그것은 의사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제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말해 줄 수 있죠?"

"좋습니다, 그 일이라면. 당신은 쇳덩어리라고 할 수벆에 없는 낡은 트럭에서 떨어져 산기슭으로 추락했어요. 심한 찰과상이 몇 군데 생기고 늑골이 두 개 부러졌어요. 또 머리에서도 출혈이 심했어요. 하지만 상처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 주일 동안 몸이 쑤시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여기서 있어야 하죠?"

"진찰을 위해합니다. 의식을 읽고 있었으니까요"

"의식을 잃은 것은 머리의 상처 때문인가요? 아니면 진통제 탓일까요?"

"글쎄요..."

"그밖에 또 무엇이 있군요? 나쁜 일이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이것이 당신에게 나쁜 일인지 아닌지... 하지만,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겠죠... 안됐지만 당신은 아기를 잃었습니다"

"아기라구요?" 줄리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의사는 의아하다는 듯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나요?"

"그런 것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하도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생겨서... 저는 긴장과 걱정 때문이라고... 또는 고산병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정말 저는 바보였어요"

"아닙니다. 정말 엄청난 고난을 겪었더군요. 당신을 여기 데려온 사람들이 말해 줘서 나도 조금은 알고 있죠"

"어떤 사람들이었죠?"

줄리아는 숨을 죽이고 의사를 쳐다보았다. 의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영사관에서 온 사람들이었죠. 내란이 일어나자 비행기로 탈출한 모양입니다"

".... 알겠어요"

"내 말을 잘 들어요" 의사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육체적으로는...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후유증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2,3일 후 정신과 의사와 상의해 보는 게 좋겠어요. 악몽과 같은 무서운 체험을 했으니까요"

줄리아는 혼자 생각해 보고 싶었다. 이 뜻을 의사에게 전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에서 나갔다.

줄리아는 혼자 남게 되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마치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직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기가 생겼었다니!

"정말 난 바보였어!"

줄리아는 소리 내어 말했다. 가슴에 손을 가져갔더니 늑골이 아팠다. 하지만 아기를 잃은 것에 비한다면 늑골이 부러진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줄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세계의 종말이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베르토의 아기를 낳고 키우는 기쁨, 가정을 꾸려 나가는 즐거움, 그럴 기회가 있었는데도!

절망이 그녀를 엄습했다. 줄리아는 오랫동안 눈믈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두 시간 휴, 간호원이 주사를 놓기 위해 들어왔다가 측은한 듯이 줄리아를 들여다보았다.

"나에게 부탁할 것이 없나요?"

줄리아는 애써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줄리아는 아기를 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기를 낳아 기르는 기회를, 그보다도 로베르토를 원했다. 내일도 모레도, 아니 평생 동안 로베르토의 곁에 있고 싶었다.

"정말인가요?"

"" 줄리아가 쓸쓸히 대답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있으니까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줄리아는 살아 남을 것이다. 아기가 없고, 로베르토가 없더라도 줄리아는 생활력이 강한 여자이므로 좌절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만일 로베르토의 아기를 낳았더라면, 아무리 그가 무정한 사람이라도 가끔은 만나러 왔을 텐데, 그가 만나러 오지 않는다 해도 사랑을 쏟을 아기만은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로베르토와의 유대가 끊어져 버리지 않았는가! 지금의 내 인생은 사막과도 같다...

 

줄리아가 퇴원하여 뉴욕으로 돌아가는 날, 토니가 일부러 꽃다발을 가지고 와 주었다. 애써 그녀를 위로하려는 그의 말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대사였다. "무척 일이 많이 밀려 있어. 그러므로 내년 중반까지는 노이로제에 걸릴 틈도 없을 거야"

그 예상은 들어맞은 것 같았다. 줄리아는 사무실에서 열 시간이나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맨해턴에 있는 아파트에 돌아와서는 두서너 시간 일을 더 해야만 했다.

처음 몇 주일 동안, 줄리아는 편지가 올 때마다 로베르토의 소식이 아닌가 하고 가슴을 설레었다. 또 전화 벨이 울릴 때마다 로베르토의 것이 아닌 경우를 생각하고, 수화기를 들고 싶지 않는 마음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한 통의 편지도 없고, 한 번의 전화도 없었다. 물론 그럴 테지... 줄리아는 자기자신에게 말했다. 로베르토는 노상 나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말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므로 로베르토가 나를 찾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나를 자신의 인생에서 몰아낼 수 있게 된 절묘한 타이밍을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오아하칸의 혁명은 막을 내렸다. 신문에서는 그 사실을 호의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혁명은 평화적으로 달성되고, 전 대통령은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박탈당하는 일 없이 고향으로 은퇴하게 되었다고 했다. 신문에서는 그것이 혁명이라기보다 합의적인 정권교체에 가깝고, 따라서 희생자도 유혈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전정귄 지지자의 대량 망명도 유발되지 않았다면서 새 대통령에게 찬사를 보냈다.

줄리아는 신문기사를 면밀하게 훑어보았으나 로베르토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앉았다.

새 대통령은 퀸타노는 명망있는 가문 출신으로서, 그의 조부는 1940년대에 대통령을 지냈다고 한다. 널리 외국을 여행하여 국제적으로도 평가받는 인물인 듯했다. 입장이 다른 여러 계층의 지식은 그룹을 참모로 삼고 있는 모양인데, 그들 중에도 로베르토의 이름은 없었다.

그렇다면... 줄리아는 새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로베르토가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닐까? 무혈혁명이란 저널리스트들의 과장인지도 모른다. 또 혹시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닐까?

줄리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래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아하칸 정부와의 교섭 책임자였으면서도, 그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로베르토와 만난 일도 없거니와,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정권교체 때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인 듯했다. 그리고 유명한 변호사가 사고를 당했다면 알토 리오의 신문들이 일제히 떠들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래리는 오아하칸에 돌아가면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자신의 의견은 이랬다 - 쿠데타가 성공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국제적은 변호사이므로 틀림없이 외국에 나가 있을 것이다...

줄리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후부터는 편지와 전화 벨 소리만 나도 줄리아는 깜짝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밖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은 바로 래리였다. 물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10

"줄리아, 목욕을 하는 도중에 내가 끌어낸 것은 아닌가요?"

밤이 늦은데다가 장부를 살피고 있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줄리아는 벨이 20번쯤 울린 뒤에야 비로소 수화기를 들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그런데 모슨 일이죠?"

"... 좀 놀랄 일이 생겨서요. 토니가 전화를 하라소 해서"

"대관절 무슨 일이죠?" 줄리아는 호기심이 생겼다.

"다름이 아니라, 카스카다스 프로젝트에 관한 일이에요. 골드크레스트 호텔에서 서명식을 끝내고 곧 파티를 열게 되었다는군요. 텔레비젼 카메라가 동원되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데... 대통령은 비행기로 와서 참가할 예정이랍니다"

"그래서요?"

"그런데 말이야, 줄리아. 상대방이 당신을 지명하며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몇 번이나 왔다고 해요"

"어째서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나는 고객의 의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체념한지 오랩니다. 상대방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추측컨대 화해를 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은 유괴되었던 몸이니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줄리아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로베르토의 뜻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실망스러웠다.

"물론 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당신의 참석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상대가 생각하는 것 같아요"

"상대방으로서는, 내가 용서하는 것을 공개석상에서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군요"

"당신도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듯하군요. 그 나라 새 정부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전 세계에 대해 민주적으로 태어난 정귄이라는 것 선전하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당신이 유괴 당했던 피해자라는 사실을 떠들어대면 여간 난처하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배상금을 받게 될 지도 모르겠군요?" 줄리아가 농담으로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말하려는 뜻은 알았어요. 그런데 파티가 열린다는 날은 언제죠?"

줄리아는 래리에게 날짜와 시간을 물어보고 예정표를 바라보았다. 그 주일에는 워싱턴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마음만 먹는다면 스케쥴 조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참석할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다른 예정이 있지만 조정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래리" 줄리아는 헛기침을 한번 했다. "참석하는 사람의 리스트를 볼 수 없을까요?"

"좋아여. 내일 아침 일찍 당신 비서에게 전하죠" 래리는 줄리아가 참석할 뜻을 비치자 신이 났다. "고마워요, 당신과 함께 일하는 것은 큰 자랑입니다"

래리는 왜 이토록 감사해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튿날 줄리아는 참석자 리스트를 받아 보고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대통령, 재무장관, 상공장관, 광업장관, 중앙 은행 총재... 오아하칸의 권력층이 총동원 되어 있었다. 래리가 줄리아의 참석을 은근히 권유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줄리아는 주의깊게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로베르토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계획부의 M.올리바도스라는 사람이 혹시 미구엘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줄리아는 잠시 망설였다. 나는 미구엘을 만나고 싶은가? 만나도 태연히 있을 수 있을까? 만일, 로베르토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줄리아는 전화를 들었다. 문득 타협안이 생각났던 것이다.

"참석하겠어요. 하지만 그날 안으로 워싱턴에 가야 하니까 도중에 자리를 뜨게 될 지도 몰라요. 당신이 미리 사정을 설명해 주면 상대방도 불쾌하지 않을 거예요"

"고마워요. 당신을 공항에 보내도록 메어리 루에게 차를 준비시키죠"

"그럼, 부탁하겠어요" 줄리아는 농담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청구서는 당신이 지불해야 되요"

 

서명식은 3시에 시작되었으나, 줄리아는 미처 거기에 참석하지 못했다. 중요한 국제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래리의 비서는 줄리아의 사무실 밖에서 10분이나 초조히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줄리아가 호텔이 도착한 것은 공식행사가 거의 끝났을 무렵이었다. 광업장관의 연설을 끝으로 리셉션은 보통 파티의 분위기로 변했다.

줄리아는 래리를 찾으려고 두리버거렸다. 그러나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온 것은 전부타 낯익은 몇몇 저널리스트였다. 그중에는 경제문제에 민감한 여성기자가 끼어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줄리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원한을 갖고 있지 않으십니까?"

"왜 내가 원한을 가져야 하죠?" 줄리아는 미소를 띠고 음료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우리 회사는 그들과 수백만 달러짜리 계약을 체결했는데요"

"유괴에 대해서는요?"

"내 직업에는 항상 위험이 따라다니게 돼요" 줄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자동차 경기에 임하는 드라이버들이 차에 원한을 품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요. 그들은 몹시 위험한 일을 당하는데고 불구하구요"

"그럼, 심하게 취급당하거나 하진 않았습니까?"

여성기자의 눈이 빛났다. 줄리아는 웃는 얼굴로 받아넘겼다.

"간단한 식사와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많은 운동... 사무실의 책상에서 떠나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구요. 당신네들도 이런 일을 위해서 많은 돈을 쓰지 않나요?"

"무섭지는 않았습니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요?"

줄리아는 질문에서 도망치고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보가 아닌 한 무서운 일은 얼마든지 있어요. 뉴욕의 지하철도 무서울 때가 있어요"

"당신은 영국인이기 때문에 그럴 테죠"

"난 스코틀랜드인이에요. 하지만 이 나라에 온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적응되어 있어요. 그래도 지하철은 무서워요"

"그러나 당신을 유괴한 사람들이 무섭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당신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나요? 당신은 그들의 정치적 신념에 공감한 것은 아니었던가요? 아니면, 혹시 그들 중의 한 사람과 어떤 로맨틱한 괸계라도..."

"나는 농업경제학자에요" 줄리아는 시선으로 상대를 얼어붙게 했다. "내가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대상은 살충제에요. 이만 실례하겠어요.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 많으니까요"

줄리아는 예의바르게 거짓말을 하고 물러갔다. 그녀는 뜻하지 않은 방향에서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여 약간의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론 화가 났다.

줄리아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구엘 올리바도스와 눈이 마주쳤다.

스마트한 수트에 고급 넥타이를 맨 미구엘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근접하기 어려운 관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줄리아를 무척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오셨군요. 오시지 않을까 하여 매우 걱정했습니다."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그거리라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지 미구엘의 태도가 차차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싫어하는 것일까? 줄리아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리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죠?"

"걱정이 됩니까?"

"물론이에요! 모두 내게 친절히 대해 주셨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우리에게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기회가 왔다는 듯이 말입니다."

"무슨 뜻이죠?"

"아우구스토가 그 트럭을 몰고 온 순간, 당신은 그 차에 올라 도망쳤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베르토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도" 줄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것을 본 미구엘의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도 이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그는... 상처를 입었나요?"

"아우구스토한테? 천만에요"

"나는 몰랐어요" 줄리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우구스토가 로베르토를 배신한 일이 머리에 가득 차서요. 방송차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게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미구엘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정말입니까? 그럼, 아우구스토가 로베르토에게 단도를 뽑은 것도 몰랐겠군요?"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설마!"

"침착하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로베르토는 무사하니까" 미구엘의 말투가 돌변했다. 짐심으로 그녀를 위로하려는 어투였다. "아직 그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죠?"

"로베르토와 말인가요? 아뇨"

"물론 그도 당신이 도망친 뒤에는 애써 만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줄리아가 항의하려 하자 미구엘은 손을 들어 마갔다. "그는 당신이 도망친 줄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요. 그런데 이렇게 되니 사정이 아주 바뀌고 말았군..."

그러나 미구엘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토니가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 줄리아. 여기 있었군 그래. 대통령 각하, 우리 회사의 농업문제 담당 중역인 미스 줄리아 레녹스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레녹스, 이분은 퀸타노 대통령 각하..."

"난처하게 됐군!"

옆에서 중얼거리는 미구엘의 말이 분명하게 들렸다. 줄리아 역시 동감이었다. 당당한 모습의 대통령은 바로 로베르토 마다리아가였기 때문이다.

줄리아가 망연히 손을 내밀었다. 로베르토는 비웃는 듯한 쌀쌀한 태도로 그 손에 키스헀다. 줄리아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미스 레녹스, 다시 만나에 되어 정말 기쁩니다"

줄리아는 도망치고 싶었다. 애써 미소를 띄웠으나, 토니의 의아한 듯한 시선으로 미루어 그 미소가 어색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대통령 각하..." 줄리아는 손을 움추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구엘이 로베르토의 시선을 포착하고 말을 꺼냈다. "우리가 얼마나 미스 레녹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로베르토가 기계적으로 미소를 되돌렸다. 저 입술에 키스를 했으면... 줄리아는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정신이 아물아물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러 자기 생각이 되살아났다.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로베르토에게 몸을 던지기 전에 도망쳐 버려야지!

"당연한 일이지만, 미스 레녹스가 참석해 준데 대해 큰 감명을 받았네" 로베르토는 미구엘에게 말하고 줄리아 쪽으로 향했다.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 불행했던 시기를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할 텐데 말입니다"

줄리아의 가슴에 분노가 치솟았다. 어쩌면 그는 이토록 시치미를 떼고 나에게 조롱의 말을 퍼붓는 것일까? 마치 불행해진 것이 모두 내 책임이나 되는 듯이 말하다니!

"유쾌했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물에 흘려보내기로 했어요"

"확실히 이지적인 분이군요!"

로베르토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 어투에는 독이 들어있었다. 줄리아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토니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가봐야겠어요... 30분 후에 비행기가 떠나니까요"

"미스 레녹스는 워싱턴에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토니가 설명을 자처했다. "여기 참석하기 위해 회담을 연기했지요"

"점점 더 감명이 깊어집니다"

"지나친 칭찬이십니다. 하지만 애쓴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줄리아는 마음속으로 로베르토를 저주하면서도 환한 미소를 띠웠다. ", 이제 가야겠어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나도 리셉션이 끝나면 곧 워싱턴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 미스 레녹스도 대통령 전용기에 동승하면 될 겁니다" 희롱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면 민간 항공기의 번잡함을 피할 수도 있고, 나하고 옛날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친절은 감사합니다만..."

줄리아가 딱 잘라 거절하려 했을 때, 토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 그렇게 하도록 해요. 내일까지는 중요한 회합이 없고, 스티브와의 저녁식사에도 충분히 시간을 맞츨 수 있으니까"

"그러면 이야기는 결론이 났군요" 로베르토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고 줄리아를 보고 히죽 웃었다. "40분 후에 떠날 수 있게 준비해 주십시오"

로베르토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토니와 함께 사라졌다. 미구엘이 가만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군!"

"로베르토가 어째서...?"

"추측이지만, 그는 몹시 화가 났을 거예요. 당신이 도망쳤을 때 로베르토는... 기분이 좋았다고는 할 수 없죠"

줄리아는 온몸에 아픔이 파고드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미구엘이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경호원에게 예정이 바뀌었다고 전해야겠군...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대통령 전용기에 태우지 않을 테니까"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구엘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마음을 바꾸었다. 그렇게 하면 국빈을 공공연하게 모욕한 것이 된다. 있는 용기를 다 내어 워싱턴에 도착할 때까지 꾹 참아야 한다.

줄리아는 래리가 마련해 준 차로 공항에 도착해 대통령 전용기에 올랐다. 그런데 그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려니, 곧 로베르토가 혼자 나타난 것이다. 스튜어디스는 포도주병과 글라스 두 개를 갖다 놓고 그대로 물러나가 문을 닫았다.

"우리들은... , 당신은...."

"그래, 우리들이지" 조롱하는 듯한 어투였다. "물론 승무원들은 별도지만, 그들은 우리를 방해하지 않을 거야. 이륙하려면 시간에 걸릴 테니 한 잔 하지 않겠나?"

"아니, 괜찮아요"

"좋도록 해"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포도주를 글라스에 따르면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포도주를 싫어하나?"

"비행기를 탈 때는 마시지 않기로 했어요"

"현명하군. 그야말로 미덕의 정수라고 할 수 있어!"

"이 비행기는 당신 전용기인가요?" 줄리아는 반발심을 품고 물었다. "당신네 나라에 이런 여유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 말은 사실이야" 로베르토는 화를 내기는커녕 점점 더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이 비행기는 민간 항공사가 빌려 주었어. 유럽에도 갈 예정이니까"

"그래요? 국제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겠군요?"

"맞았어"

로베르토는 글라스에 다시 포도주를 따르고 좌석에 기대어 정부의 방침을 설명했다. 줄리아로서도 도움이 되는 화제였으므로 흥미 있게 귀를 기울이고 로베르토를 관찰했다.

약간 여위고 얼굴도 좀 창백해진 것 같았다. 눈밑의 검은 그늘은 서류를 많이 읽은 탓일까? 오만한 얼굴이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도 처리하지 못할 일이 너무 많이 밀렸기 때문일까? 로베르토라면 무엇이든 처리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비행기가 이륙하여 수평비행을 시작하다, 로베르토는 줄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로베르토 옆에 있어야 하는 긴장에서 잠시라도 해방되고 싶어, 세면소로 가서 손을 씻었다. 그녀가 돌아오지 로베르토가 고개를 들었다.

"몸은 괜찮아졌나?" 줄리아의 놀란 표정을 그가 읽은 모양이었다. "잠자코 있어도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임신중절의 후유증이었지?" 비행기가 가다가 에어포켓으로 들어간 듯한 충격이었다. 줄리아는 털썩 통로 쪽에 있는 좌석에 주저앉아 로베르토를 쳐다보았다. 로메로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고 싶겠지? 대댑은 간단해...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줄리아는 도망칠 때 임신해 있었어. 그리고 플로리다의 최고급 진료소에 10일간 입원해 있었어"

"무척 소상히도 알고 있군요?"

"당연하지 않을까? 그 뱃속에 있는 아기가 내 자식이었으니까"

줄리아는 갑자기 눈물이 치솟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당신의 아기였어요"

"나한테 의견을 물어 볼 생각은 없었나? 아니면 관심조차 없었나?"

"저어.. 그런 게 아니었어요" 줄리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한 번도 연락을 취해 주지 않아서 내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요"

"내 아기에게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나?"

"당신은 아기에 대해서 모르는 줄 알았어요"

", 저런! 우리는 늘 같이 붙어서 살았어. 그리고 그 정도의 징후가 나타나면, 아무리 줄리아가 비밀에 붙이려해도 내가 모를 리 없잖아?"

그런데 왜 나는 깨닫지 못했을까? 줄리아는 마음이 아파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지? 내가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줄리아에게 무관심했는 줄 아나?"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 오랜 침묵 끝에 로베르토가 쓸쓸하세 말했다. "미구엘의 말에 따르면, 나는 줄리아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모양이더군"

"그렇지 않아요"

줄리아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날 줄리아가 취한 행동을 우리는 자유를 위한 도피라고 오해했었는데, 사실은 공군을 끌어들이려는 방송차를 마을에서 멀리 떼어 놓기 위해서였다면서?"

"..."

"실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어."

"그렇지도 않아요. 만일 내가 가만히 있었더라면, 마을과 함께 폭격 당했을 거예요. 아우구스토의 입에서 분명히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만일 내가 방송차를 멀리 가지고 나갈 수 있다면, 마을도 구출되고 나도 살아남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사실 그렇게 되었지만요"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모르고 있나?" 갑자기 로베르토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만일 그 트럭이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면, 줄리아는 탈출하지 못하고 십중팔구는 죽었을 거야"

"그래요?" 줄리아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마지막 운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한 일이 없었고, 생각을 했다 해도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 속의 사건인지 구별할 도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일인 것만 같아요"

"그래?" 로베르토가 방향을 바꿔 줄리아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라 머리를 든 줄리아는 그가 몹시 긴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 아직까지도 악몽과 같은 그때의 일이 머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고 있어. 줄리아가 다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떻게도 할 수 없었어. 더구나 온 나라에 혁명의 불이 붙었고..." 줄리아의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떨렸다. "줄리아,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만 대답해 줘, 그것도 진실을."

"좋아요"

"줄리아는 언제라야 나를 용서할 수 있게 될까?"

너무나 뜻하지 않은 질문이어서 줄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로베르토는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줄리아에 대해 옳지 못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는 원하는 것을 빼앗은 기분이었어. 거기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어. 하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위험했어.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돌아올 것으로 생각지 않았어. 그러무로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에게도 결코 기회가 없으리란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나?" 줄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로베르토는 말을 이었다. "맹세해도 좋아. 나는 줄리아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은 전혀 없었어. 이것도 믿을 수 있겠지?"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화 나 있는 것만 같았어요"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줄리아에게 대해서는 아니었어"

"그럼 누구에 대해서였죠?"

"시대에 대해서였지. 모든 어리석은 상황에 대해서였어. 그리고 줄리아를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보고 줄리아는 로베르토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로베르토는 기회라는 말을 썼는데, 줄리아가 모든 것을 걸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그에게 거부당하고 굴욕을 맛본다 해도, 아니 그 이상의 깊은 절망을 맛본다고 해도...

"당신은 한 번이라도 나를 사랑한 적이 있나요? 진심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로베르토는 아플 정도로 줄리아의 손을 꼭 쥐었다. 줄리아는 다시 한번 질문을 되풀이할 수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줄리아는 그걸 느끼지 못했자는 말이야? 가까이 사는 양치기 소년들까지 다 알고 있었어. 마다리아가가 아침의 하늘빛 같은 눈동자를 가진 외국여성에게 완전히 열중해 있다는 것을!"

줄리아의 깜짝 놀란 모습을 보고 로베르토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사람들이 줄리아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몰랐나? 나도 처음 줄리아를 대했을 때 그렇게 느꼈어... 아침 하늘빛 같은 눈동자를 가졌다고. 그래서 페페가 데려온 인질이 당신인 걸 알고 알마나 놀랐는지 몰라!"

"나를 보고 당신은 처음에 화를 냈어요"

"화를 냈다고? 그때의 내 기분은 화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약해. 줄리아는 저만치 앉아 있었지. 볼품없는 이브닝드레스 차림이면서도 그렇게 아름답고, 눈에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피곤해 있으면서도 그토록 용감하고... 한데 페페 녀석이 외설적인 짓을 암시하자, 나는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어. 그런데도 나는 점잖고 예의바르며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처럼 처신해야만 했어"

"그렇다면 당신은 겉보기처럼 적의에 넘쳐 있는 것은 아니었군요? 나는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 줄 알고 있었어요.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을 증오했었지만"

"내가 줄리아를 증오한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처음부터 내가 줄리아를 원한다는 것을 잘 알았을 텐데"

"욕망과 증오는 동시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줄리아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어. 내가 원한 것은 줄리아를 안전한 곳에 두고, 언젠가는 줄리아가 나를 사랑하게 되길 기다리는 것이었어"

"언젠가는?"

", 알고 있어. 우리에게는 언젠가라는 시간이 없었어. 그러기에 나는 그토록 내 방식대로 강요했던 거야. 줄리아가 차차 나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줄리아도 처음에는 나에게 끌리고 있었어. 하지만 줄리아를 내 것으로 삼은 뒤부터는 가까이하기가 어려워졌어.안젤리나나 미구엘과는 하루종일 이야기하면서도, 밤에 나와 단둘이 있게 되면 전혀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았어. 나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줄리아에게 상처를 주는 것뿐이 아닌가 여기게 되었지. 그때 안젤리나로부터 줄리아가 내 아기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지..." 로베르토는 갑자기 자리를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줄리아에게 등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나는 줄리아가 그 이야기를 해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언젠가 내가 한번은 미구엘과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어"

"미구엘?"

"미구엘은 의사야"

"난 몰랐어요"

"그때였어. 내가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깨달은 것이. 줄리아가 우리 아기에 대해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 것은, 줄리아가 나를 싫어하고 경멸하는 탓이라고. 줄리아가 도망쳤을 때, 나는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어"

줄리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로베르토의 손을 잡았다. "로베르토... 이런 말을 하면 바보로 여기겠지만... 나는 아기가 생긴 줄 모르고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안젤리나는 징후를 알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전혀 몰랐어요. 내가 그 사실을 안 것은, 의사가 아기를 사산했다고 알려 주었을 때였어요. 난 얼마나 비참했는지 몰라요.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원했는지.. .매일 밤 얼마나 쓸쓸했는지..."

로베르토는 줄리아를 껴안고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줄리아도 뜨거운 키스로 응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지?"

줄리아가 겨우 머리를 들자 로베르토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언제라도 당신이 원한다면요" 문득 줄리아는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웃었다. "그런데 난 당신의 이름조차도 몰라요. 토니 퀸타노 대통령이라고 했지만..."

"내 참모가 생각해낸 이름이지" 그는 줄리아에게 살짝 키스하고 말했다.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지냈기 때문에, 스페인 계통의 성은 어머니와 아버지 쪽을 모두 쓰지. 평소에는 아버지 쪽 성을 많이 쓰지만, 그런데 참모들이 어머니 쪽 성을 쓰는 것이 전통의 무게가 있어서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어. 나도 임기가 끈나고 변호사로 복귀할 때 마다리아가로 다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어. 그것뿐이야. 이제 만족했나?"

"납득했을 뿐이에요" 줄리아는 그에게 바싹 몸을 기대면서 살짝 웃었다.

"만족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