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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편지(To bring you joy)

Bollnow 2024. 3. 15. 06:54

행운의 편지(To bring you joy)

Ash Summers

 

1

모니크는 스탠드의 장식이 떨어지려는 찰나 황급히 양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등골이 오싹한다. 고가의 골동품을 다루는 시간에는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사적인 생각에 시간을 뺏겨서도 안 된다. 애머벨 숙모님도 상당히 짓궂은 데가 있는 분이다. 저런 조건부 선물을 보내시다니!

숙모님의 배려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큰 소동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하긴 무엇보다도 그것이 숙모님이 바라는 일이겠지만. 애머벨 숙모님은 언제나 가족 모두가 모니크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건 숙모님이 보낸 편지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특이한 선물을 받고 이상하게 생각지는 말아라. 이 선물이야말로 너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안겨 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부담을 주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제 동생들에게도 자립심을 가르쳐 줄 시기라 생각한다. 그들은 네가 이 선물을 거절하리라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네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얼마 뒤에 난 그들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테지.

"숙모님이 하시는 일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군. 그 나이에 결혼하시질 않나...."

라는 등의 비난 말이다.

, 그건 그렇다 치고, 넌 내가 주는 일 년이란 시간과 약간의 돈을 꼭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간과 돈으로 반드시 네가 좋아하는 일만을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고 명심하거라.

장난을 좋아하는 애머벨 허스트

그리고 두 번째 장에는 추신이 씌어 있었다.

너무 성급하게 새 이름으로 사인한다고 웃지 말아 다오. 이 이름은 정말 마음에 든단다. 허스트 부인이라니 정말 꿈만 같구나. 허스트, 이보다 더 근사한 이름은 아마 없을 거다. 은퇴한 후에 그레고리가 살고 있는 집은 나무들이 빙 둘러 있어서 마치 천국처럼 아름답단다. 그 사람도 이번 일에는 대찬성이고, 네가 기꺼이 받아 주기만을 고대하고 있단다. 가족에 대한 의무감에서 벗어나 그레고리와 더불어 제 2의 인생무대인 이곳에 오지 않겠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두 손으로 꽉 붙잡기만을 바란다.

인생의 즐거움이라...? 그러나 숙모님의 제안은 일주일 동안 모니크에게 불편만을 안겨다 줬을 뿐이다. 물론 숙모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호화 여객선을 타고 뉴질랜드를 떠나 자유를 만끽하고 모험을 즐긴다!

낭만을 찾아 세상을 떠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가보고 싶은 곳은 따로 있다. 그녀가 가보고 싶은 곳이 크라이스트처치에서 100km도 더 떨어져 있는 곳이라면 숙모님은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 토지야말로 그녀의 조상이 비옥하게 만들었고, 또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 담긴 할아버지의 향수를 맡을 수 있는 곳이다. 골동품을 산답시고 아카로아나 반도의 다른 곳들은 수시로 드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트보샹을 방문한 일이 없었다는 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까지도 선연히 남아 있다. 낡은 창고 안에서 가치가 있을 만한 책들을 찾고 있다가 분명 할아버지의 필적으로 보이는 기록을 발견했다. 일레어 보샹, 보샹이란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들>이란 뜻.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청산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영어로 이름을 바꿨을 것이다. 벨필드라고.

그러나 지금은 그때 일을 회상하거나 숙모님의 선물에 대해 고민하고만 있을 수가 없게 됐다. 금발의 남자가 상점에 들어와 프랑스 제 골동품 시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모니크는 손님에게 다가갔다.

"그 시계에 흥미가 있으신 것 같군요. 프랑스 왕정시대의 것으로 아직까지도 시간이 잘 맞는 아주 진귀한 물건이죠. 물론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 남자는 얼굴을 돌리고 암울한 시선으로 모니크를 쳐다보았다.

"이것과 비슷한 시계를 본 적이 있어요."

그 눈동자에는 의심하는 빛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건...."

"손님께서 보신 것은 다른 시계였겠죠."

모니크는 밝게 웃어 보였다.

"만약 이 시계가 내가 본 것과 같은 거라면, 망가진 것을 사들여 손질한 후 비싼 값으로 다시 파는 것은 아닐는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다는 건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여러 해 동안 화로 위에서 똑딱거리고 있던 시계를 내가 직접 사온 거니까요."

"지금 당장은 전혀 이상 없는 물건처럼 보이지만, 내가 이걸 사서 집에 가져간 후 멈춰 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혹시 아카로아 근처 프랑스인 거주 지역에서 사온 것 아닌가요?"

"프랑스제 골동품이 뉴질랜드에 있다는 게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닐 테니 이것을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인 거주 지역에서 사온 것이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모니크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래요, 아카로아 근처에서 사왔어요. 내 친구가 그곳에 살고 있는 어느 노부인을 잘 알고 있는데, 그 부인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죠. 그래서 그 부인에게 보탬을 드리기도 할 겸해서 그쪽에 간 일이 있었어요. 그 노부인은 오래 된 저택에서 연금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더군요. 그런데 지붕이 망가져 그 수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이 시계를 팔았던 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부인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흔쾌히 처분할 수 있었을까요?"

이 손님은 이상스럽게 비판적이다. 매사에 비비 꼬여 있다.

"모든 재산이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 그 댁 주인은 골동품 수집가로서 창고에는 그가 사모아 둔 물건들이 즐비하게 있었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보관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지 않은 거랍니다."

손님은 모니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을 꺼냈다.

"이 가격으로 파는 걸 보니 무척 싸게 사셨겠군요."

모니크는 발끈 화를 내면서 반문했다.

"노부인의 무지를 이용해 좋은 물건을 헐값으로 샀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악랄한 방법으로 장사를 하진 않습니다. 이 시계를 팔 경우엔 수리비 일체를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떠맡은 걸요."

그 남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모니크의 갈색 눈동자에 노여움이 서려 있는 것을 눈치 채고는 급히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 같군요."

모니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긴 했지만 아직도 조금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 있었다.

"골동품상은 대개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가격으로 팔게 돼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님처럼 생각들 하죠. 여러 해 동안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손님과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분을 보는 게 처음은 아녜요."

"오랜 기간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리 오래 했을 것 같진 않은데요? 당신은 고작해야 23, 4살로밖엔 안 보이는데?"

"27살이에요. 그리고 이 일은 18살부터 시작했어요."

"그럼, 당신이 그 유명한 모니크라는 분입니까?"

어떻게 이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전에 상점에 들렀다가 클린트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제가 모니크예요. 하지만 유명한 것과는 거리가 멀죠."

"망머렌시의 모니크, 과연!"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골동품상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뉴질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들과는 달리 빨리 와 닿질 않는군...."

"모니크 벨필드가 본명이죠. 상점주인 망머렌시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성실한 점원을 둔 주인이 무척 부럽군요.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당신은 행운을 붙잡고 있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크라이스트처치에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아요. 오클랜드에 있는 본점으로 갔기 때문이죠. 나도 5년 전까지만 해도 본점에서 근무했어요."

손님은 모니크를 다시금 쳐다보고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화난 표정을 지어 보여 주시겠습니까? 어디서 본 듯한 것 같아서...."

"손님이 잘못 보셨겠지요. 한데 꼭 그래야 하나요?"

그는 쿡 웃었고, 모니크는 왜 그런지 상대방의 그런 요구가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래 맞아, 그 얼굴이야."

남자는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려는 것처럼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당신은 이 상점의 매니저입니까?"

"아니에요, 난 사들이는 것만을 전문으로 하고, 이 가게 매니저는 클린트 우드라는 사람이죠."

"이 시계를 수리비만 받고 판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상당히 관대한 매니저일 것 같군요."

모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문제에 있어선 클린트와는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기야 매니저로서 상점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단한 야심가란 점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클린트는 유능한 매니저일뿐더러 함께 일하는 상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사람이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때는 상대방에게 위화감을 조성시킬 때도 있긴 하지만.

그가 날 가까이하는 것은 주인인 클러드 망머렌시가 나를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그것 역시 자기가 이곳을 그만두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색다른 손님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 챈 모니크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관대하다고 하는 것엔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무의식중에 주제 넘는 말을 한 것 같군요."

그는 조용히 웃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군요."

"아녜요, 오히려 제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모니크는 조용히 웃었다. 순간 틀에 박힌 듯한 사무적인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변화가 있는 게 좋잖아요? 그래 봤자 언제나 곧 제자리로 돌아오긴 하지만... 어쨌든 저것이 손님이 알고 계신 시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겠죠? 결국 그걸 살 작정으로 보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안 그런가요?"

모니크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꺼내고는 당황했다. 남자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푸른색 도자기 그릇을 가리켰다.

"저장용 그릇을 주겠소? 어머니가 수집하시기 때문에...."

값을 치른 후 그는 말했다.

"지금은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라 돌아오는 길에 가져갔으면 하는데, 괜찮겠죠?"

모니크는 조심스럽게 그릇을 싸고 쪽지를 붙이면서 손님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에드워드 퍼거슨."

그 사람은 스펠링을 불러주고는 손을 흔들며 상점을 나갔다. 모니크는 에이번 강둑에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 레스토랑은 너무 혼잡해서 싫었다. 차라리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싶을 때는 에메랄드 빛 녹색 잔디 위에서 식사를 하면서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낫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해 둬야 한다. 우선 첫째로, 오늘 저녁 클러드 망머렌시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다음은 가족들에게 내가 내린 결정을 알리는 것이다.

케리는 나 대신 이미 가족을 돌볼 수 있는 나이가 됐고, 실비도 자신의 일은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나이가 됐기 때문에 집안일을 거들 수 있을 거야. 노엘은 벌써 대학교 2학년이다. 그리고 의붓아버지는 이해심이 많으니 다소의 불편은 참아 주실 것이다.

세 번째로... 이것이 문제다. 클린트에게 이제부터의 계획을 얘기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못 박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의 사이에 유쾌하지 못했던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족할 만한 감정을 느낀 적도 없다.

네 번째, 이것은 전혀 망설이지 않아도 될 문제다. 보샹 하우스에 전화를 걸어 그곳에 살고 계신 두 분의 노자매를 위해 한 사람이 그곳으로 갈 거라고 전하자. 애머벨 숙모님 덕분으로 사랑하는 대숙모님들-당연히 두 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에게 힘이 돼드릴 수만 있다면 그 이상 즐거운 일은 없다.

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결정한 이상, 더 이상 에이번 강가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어. 이미 마음은 결정했으니까. 그래도 점심은 강변에서 먹고 싶다

모니크는 뒤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식사하러 가지."

클린트가 책상에서 얼굴을 들었다.

"서둘러 돌아올 필요는 없어. 내가 있으니까 천천히 들고 오도록 해요. 점심식사는 느긋하게 하는 게 좋지. 요즘 들어 당신은 예전의 당신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어."

모니크는 약간 뒤가 켕겼다.

"아녜요, 난 언제나 똑같아요. 집안일로 약간 문제가 있긴 했지만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혼자 부담을 지고 있을 건가? 그런 게 오히려 가족들에게도 좋지 않을 텐데?"

모니크는 사무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몇 주일 전부터 그녀는 클린트와 자신을 연인 사이로 생각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아니다. 이상형의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강대강 꿰맞추듯 사람을 고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생애의 반려자가 클린트가 아님은 분명하다.

모니크는 급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럼 먼저 갑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돌아오도록 할게요."

"천천히 먹고 와도 괜찮소. 난 언제나 당신을 믿으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콜롬보 거리에 있는 두 개의 벽돌담을 지나 호화로운 우스터 거리를 돌아서는 길에 샌드위치를 샀다. 옥스퍼드 테라스를 향해 걷다가, 모니크는 아까 가게에 들렀던 손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어머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치려는 모니크를 그가 불러세웠다.

"아까 본 그 시계를 살 수 있을까요? 왠지 꼭 사고 싶군요. 그리고 그걸 팔려고 내놓은 부인도 현금이 급하실 것 같은데, 몇 시에 가게로 가면 좋겠습니까?"

모니크는 심프슨 부인의 시계가 이 남자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기뻤다.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물론 팔아 버리면 서운하겠지만...."

"누군가와 식사 약속이라도 하진 않았나요?"

모니크를 어깨를 들썩이고는 샌드위치 포장을 펼쳐 보였다.

"이걸 <캡틴 스콧> 상 앞에서 먹으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가게로 돌아가야죠. 사실은 그 시계에 대해 매너저와 분명한 얘길 하지 못했답니다. 만약 내가 없으면 그 사람 맘대로 처리할 거예요. 그 시계는 꼭 내 손으로 팔고 싶었거든요."

"나 때문에 가게로 돌아간다면 점심식사는 어떻게 하죠? 당신께 점심을 대접하고 싶지만 당신네 매니저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군요."

"아녜요,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두 사람은 상점 입구에 도착했다. 모니크는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면서 말했다.

"약간 좁긴 하지만 일부러 이리 들어가는 거예요."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클린트는 가게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에 있었다. 잿빛 유리창 너머로 빨강 머리 여자와 그가 포옹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니크는 깜짝 놀랐고, 손님은 당황한 나머지 발걸음을 멈췄다. 얼마 후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니크에게 말해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요. 그렇게 할 거죠?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거잖아요. 그녀에게도 그게 좋을 거예요."

클린트는 그녀를 달래듯이 대답했다.

"글레니스, 약속은 했지만 그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다음 달에 망머렌시가 이곳으로 온다구. 그 사람이 얼마나 모니크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알아? 그녀를 내쫓는다면 망머렌시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그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밖엔 이곳에 오지 않으니까. 알았지?"

에드워드 퍼거슨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니크를 문 쪽으로 끌고 가 그녀에게서 열쇠를 받아들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시 열쇠를 채웠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고, 인적이 없는 골목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에드워드 쪽이었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니크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녜요, 아무튼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다음 순간 모니크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놀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실은 나도 이제 그만 이곳을 그만두려던 참이었어요.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퍼거슨 씨. 당신 생각처럼 상처받은 건 아니니까요.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 다소 클리트에게 미안한 감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죠. 가게엔 그녀가 돌아간 후에 다시 오도록 하죠?"

"그럽시다. 시계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까. 점심은 내가 맛있는 것으로 대접하겠소. 나 때문에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내가 사드려야죠. 당신 같은 여자를 버리고 그런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는 클린트라는 사람이 좀 이상한 것 같군요. , 갑시다. 빨강머리 여자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내가 자물쇠를 열고 있을 때 그녀가 하던 말 들었어요?"

", 만약 클린트가 곧 내게 얘기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직접 내게 얘기하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전에 내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얘기해야겠죠. 그렇게 하면 그녀도 기뻐할 테고, 클린트도 미스터 망머렌시에게 의심받을 필요가 없게 되겠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소."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쨌든 시내로 갑시다."

그는 모니크를 재촉하여 쇼핑센터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주위에는 야자나무 잎이 무성하게 자라 밑으로 처져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얘기하기에는 적격이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번뜩였소. 무슨 얘긴가 하면, 매니저가 놀랄 만한 일을 꾸미는 겁니다. 일단 상점으로 돌아가서 초인종을 눌러요. 그러면 그가 나올 게 아니겠소? 그러면 우리는 연인 사이로 가장하는 거요. 내가 갑자기 오스트레일리아에 가게 돼 3주일 동안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점심시간을 연장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거요. 그러면 그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반지를 끼지 않은 걸 보니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군요?"

"물론이에요. 난 그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은 나와 그의 약혼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고... 지금은 설명할 여유가 없어요. 그리고 또 이런 일에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구요."

"아니오, 괜찮다면 내게 맡겨 봐요. 어떻든 간에 오늘 오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출발합니다. 휘말리진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뭐가 뭔지 몰라 얼떨떨했지만, 모니크는 에드워드의 권유에 못 이겨 의자에서 일어났다. 몇 발자국 걸어가자 화원이 보였다. 그는 화원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가 하늘색 포장지에 제비꽃을 한 다발 사들고 나왔다. 처음엔 차갑게 느껴졌던 그의 눈동자가 지금은 아주 온화하게 보인다.

"나는 일주일 전에 당신을 만났고, 첫눈에 반했소. 그리고 장기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변함없는 사랑을 맹세하며 이 꽃을 바치는 거요... 어떻소, 멋지지 않소?"

모니크는 뜻밖의 일로 가슴 한구석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상점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사무실 쪽에서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바지단이 튿어져 갑자기 뒤로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회색 줄무늬 셔츠에 연녹색 넥타이를 매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클린트였다.

"클린트, 아까 점심시간을 충분히 써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죠?"

모니크는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꼭 그래서 그러려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에드워드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갈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 그와 함께 식사라도 했으면 해서요."

그녀는 매우 행복한 것처럼 보랏빛 제비꽃 다발을 꼭 쥐었다.

", 소개해 드리죠. 이쪽은 에드워드 퍼거슨 씨. 에드워드, 이쪽은 매니저인 클린트 우드예요."

뜻밖의 일을 당한 클린트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 줄 몰랐지만, 곧 침착해지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안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에요."

즉석 파트너는 클린트와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모니크 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답니다. 아카로아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번 여행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될 줄은 몰랐지요. 농무성의 일로 3주간에 걸쳐 캔버라와 빅토리아, 그리고 남부 오스트레일리아를 돌고 올 예정입니다."

에드워드는 자신감에 넘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우드 씨, 실은...."

"실은...?"

클린트가 앵무새처럼 말을 받았다.

"모니크는 당신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워낙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에 반대했습니다만, 가능하다면 공항까지 그녀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싶거든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클린트는 말을 하지 못했다.

", 그렇게 하십시오. , 난 가까운 식당에서 시켜 먹으면 되니까. 모니크,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갖다오도록 해요."

"그리고 모니크, 아까 그 그릇 포장해 놓았소? , 그리고 우드 씨, 그 프랑스제 골동품 시계는 마치 날 위해 갖다 놓으신 것 같더군요. 어머니가 크라이스트처치에 살고 계시니 모니크 편에 보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때 빨강머리 여자가 커다란 틈새로 엿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런, 손님이 계시는군요, 우드 씨.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는 게 좋겠군요."

클린트는 무슨 말인가를 입안에서 중얼거리며 우물쭈물했다.

", ... 그 사람은 별로 중요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빨리 서두르는 게 좋을 듯싶군요. 택시 정류장은 어딘지 아시죠?"

택시에 올라탄 후 모니크는 처음으로 에드워드의 여행준비에 신경을 썼다.

"짐은 어디에 있나요?"

"어머니 집에 있어요. 공항까지 어머니가 전송하러 오시겠다고 해서, 헤어우드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 직접 공항까지 갖다 주십사 하고 부탁을 했소. 그때까지 식사를 하며 천천히 얘기나 합시다."

"그럼, 어머님께서 이 일을 알게 되시잖아요? 아아, 알았어요. 식사를 마친 후에 난 곧 자리를 뜨면 되겠군요."

"아니오, 꼭 우리 어머닐 만나 뵙고 가십시오. 전부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어머니께 사실대로 얘기할 작정이에요. 어머니껜 미리 망머렌시에 들를 거라고 말씀드렸소. 또 어떤 이유에서인진 몰라도 아카로아의 아는 분께서 당신을 만나 보라고 하더란 얘기도 말이오. 내가 일생 독신으로 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신 뒤부터 어머니는 여성의 이름만 들어도 귀가 솔깃해지시나 봅디다. 어쨌든 진실을 말씀드릴 작정이오."

"정말 놀랍군요! 당신처럼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분도 없을 거예요."

"그럼 같이 우리 어머닐 만나는 겁니다."

에드워드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2

벚꽃과 자두꽃 봉오리는 입을 한껏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피어 있고 노란 개나리가 폭포처럼 피어 있는 9. 택시는 크라이스트처치 교외의 거리를 신나게 질주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남자는 택시 운전사와 정신없이 지껄이고 있다. 사무실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모니크에게 휴식을 주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모니크는 클린트와 헤어졌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날 해고하면 미스터 망머렌시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지독한 겁쟁이로군!

모니크는 속으로 비웃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공항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오스트레일리아 행 비행기가 이륙한 후에 모니크를 다시 시내까지 태워다 줄 것을 운전사에게 부탁했다. 그리고는 항공회사의 카운터에 들러 도착을 알리고는 짐이 도착했나 알아보러 갔다.

"난 배가 몹시 고픈데, 당신은?"

이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에드워드는 메뉴를 보면서 물었다.

"약간의 모험이 식욕을 증진시킨다는 건 미처 몰랐는데?"

모니크는 불가사의한 감정이 자신의 전신을 감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럴까? 가사와 일만으로 세월을 보낸 단순한 생활에서 멋진 사건이 일어나려는 징조일까?

모니크는 낮게 웃었다.

"지금까지 난 당신의 정체가 뭔지도 파악하지 못했어요. 세인트 조지?"

에드워드는 메뉴에서 시선을 떼고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뭐라고 했소? 세인트 조지? 영국의 수호신 말이오?"

", 지금까지 몇 번 정도나 궁지에 빠진 여자를 구해내셨나요? 아무런 경험 없이 그런 기막힌 연기를 소화해낼 수는 없죠. 농무성의 일로 오스트레일리아엘 가신다고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었는지 정말 궁금해요."

에드워드는 슬쩍 웃어 보였다.

"글쎄요, 뭐 특별히 경험이 있었다거나 해서 그랬던 건 아니오. 그냥... 뭐랄까,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고나 할까? 당신의 굳어진 모습을 본 순간 난 내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요."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젠 괜찮아요. 뜻밖의 일로 잠깐 놀랐을 뿐이죠.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만큼 놀라지는 않았어요."

두 사람은 앙트레(생선과 고기요리의 중간에 나오는 요리를 칭함)로 버섯을 넣어 만든 팬케이크를, 그리고 식사로는 양고기를 주문했다. 에드워드는 미소 띤 얼굴로 얘기했다.

"양 목장을 하고 있으면서 양고기를 주문하는 게 우습죠? 가끔은 양고기 이외의 요리를 먹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양 목장이라고 하셨어요? 농림 관계라면... 당신이 농부란 말인가요?"

"그렇소, 사실 난 링컨 대학의 협조를 얻어 일종의 실험 농장을 하고 있어요. 주로 양 사육에 관한 연구로 꽤 괜찮은 일이지요. 당신은? 가게를 그만둔다고 했는데, 새로운 일은 결정했소?"

모니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확실하게 결정한 게 없기 때문에 아직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실례지만 당신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겠소? 가게로 전화를 걸어 물어 본다 해도 매니저가 가르쳐 주지 않을 게 아니오? 만약 가르쳐 준다고 해도 애인 전화번호도 모르나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거요."

모니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 겉으론 괜찮은 척하지만 클린트는 여자에게 딱지맞는 건 못 참는 사람이죠. 그러니 제 쪽에서 허점을 보일 경우 좋은 소릴 들을 리는 없을 게 뻔해요. , 그런데 시간은 괜찮으세요? 어머님이 오실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로비에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주문한 앙트레를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모니크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갑자기 밝은 세상으로 나온 듯한 해방감과 유사했다.

식탁 위에 놓인 제비꽃 향기는 아름다운 숲, 깊은 계곡, 대지를 뒤덮고 있는 이끼, 새소리, 그리고 파란 물이 흐르는 강 등을 연상시켰다. 그 세계는 그녀가 앞으로 걸어 들어갈 세계인 것이다. 깊은 강, 절벽 위, 바다 가까이에 있는 넓은 대지, 정적이 감돌고 전통이 떠받치고 있는 오래 된 저택...

커피를 거절하고 디저트만을 시켜먹은 다음 두 사람은 로비로 내려갔다. 에드워드가 걱정스러운 듯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앳된 모습의 여자가 조그마한 여행용 가방을 실은 손수레를 밀면서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4살가량의 사내아이가 종종걸음으로 그녀를 따르고, 손수레 위에는 꼬마 여자 아이가 타고 있었다.

"프랜신!"

에드워드는 가방을 받아들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가 나오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알아요!"

에드워드의 누이동생인 듯한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3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학교 동창생들이 이 근처까지 와서 어머니를 만나 보러 집에 오신대요. 그리고 3시간 후에는 퀸스타운을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게 대신 나가라고 부탁하셨어요. 이 애들 좀 보세요. 모래사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씻기지도 않고 그냥 데리고 나왔더니, 원 참! 짐도 없이 출발할 작정이었어요?"

"이유를 설명한다 해도 믿지 못할 거다."

에드워드는 웃었다. 그리고는 모니크 쪽을 돌아보았다.

"소개하지, 프랜신. 이쪽은 모니크."

", 그래요?"

프랜신은 미소 지어 보이고는 곧 오빠를 쳐다보았다.

"모니크 뭐예요?"

"맙소사! 아직 이름도 제대로 물어 보지 않았군. 실은 그녀를 궁지에서 구출해내느라고 바빴단다. 세인트 조지도 비슷한 실수를 했던가?"

프랜신은 영문을 몰라 멀뚱하니 오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일사병이라도 걸리셨어요?"

"모니크 벨필드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모니크는 자기소개를 했다.

"정말 오빠의 도움을 받았답니다. 게다가 충격에서 빨리 벗어나라고 점심까지 사주셨죠."

"그다지 극적인 표현은 아니군요."

에드워드는 약간 불만 섞인 투로 말했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그렇겠군요."

"점점 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프랜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들려주지 않을 테죠? 오빠는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은 절대로 입 밖에 내는 법이 없으니까. 어머나! 오빠가 타야 할 항공편에 대한 방송을 시작하네요."

출입구 쪽에 서 있던 에드워드는 어린 조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라고 잔돈을 쥐어 주고 난 뒤 여동생에게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나선 예고도 없이 돌연 모니크의 입술에 키스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돌아오는 즉시 전화하겠소. 새로 시작하는 일이 잘됐으면 좋겠군. ,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에드워드가 떠나 버리고 난 뒤 프랜신이 미소를 지어 보였고, 모니크도 조금은 불안해하며 미소 지었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주시했다.

",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죠?"

프랜신의 웃는 모습은 에드워드와 무척 닮았다.

"전 에드워드가 택시 운전사에게 부탁해 놓았기 때문에 그 차를 타고 가면 돼요."

모니크는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이걸 어머님께 전해 주시겠어요? 퍼거슨 씨가 어머님을 위해 산 그릇이에요."

프랜신은 <망머렌시 골동품>이라고 씌어진 하늘색 포장을 쳐다보았다.

", 그래요?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고마워요, 벨필드 양. 언제 한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게 된다면 좋겠네요."

"안녕히 가세요, 프랜신."

모니크는 택시에 올라타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대리석 시계도 곧 보내 드리겠어요. 어머님 주소는 오빠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상점에 돌아와 보니 몇 사람의 손님이 있었고 모니크는 곧 일을 시작했다. 클린트와 마주쳤지만 문을 닫을 때까지는 입을 열 생각이 없다.

"사무실에서 얘기 좀 하지."

셔터를 내리면서 클린트가 말했다.

"당신이 내게 설명해야 할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럴 권리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모니크는 잠자코 있었다. 사무실에서의 광경을 목격했다는 사실도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죠."

모니크는 가능한 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꾸했다.

"필요가 없다니? 좀 이상하군."

모니크는 냉정했다.

"클린트,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서로가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나 나나 서로에게 자유스러웠죠."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던 클린트에게 그토록 감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 당신이 다른 남자와 나가는 걸 내가 좋아하리라 생각했소? 마치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 같군. , 그럼 바꿔 생각해 보자구. 만약 내가 다른 여자와 외출한다면 당신은 어떻겠소?"

어쩜 이토록 능청스러울 수가! 글레니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모니크는 깜짝 놀라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을 거예요, 클린트. 나는...."

"그럴 리가 없어!"

"그렇지만 클린트, 난 그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어요. 결국 우린 결혼을 전제로 만나진 않았잖아요? 무용 공연이나 음악회에 간 일은 즐거웠었지만 그 이상은... 만약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아마 당신은 날 귀찮아했을 거예요."

클린트는 당혹한 나머지 침묵을 지켰다. 단지 물끄러미 모니크를 쳐다볼 뿐.

"클린트, 일시적인 감정으로 이러는 게 아녜요. 당신도 날 사랑하지 않았죠. 그렇지 않나요?"

"모니크, 당신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지금까지는 우리들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잖소. 그런데 왜 갑자기 딴 사람처럼 변해 버린 거지?"

"별다른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도 만족스럽진 못해요."

모니크는 상대방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애머벨 숙모님으로부터 <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떠나는 것>을 조건부로 일 년 동안 자유를 얻게 됐다고 얘기했다.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면 미스터 망머렌시에게 전화를 걸어 2주일 후에 여길 그만두겠다고 말할 작정이에요. 그리고 일 년 동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로 했어요."

"그렇다면 호화로운 여행을 하시겠군? 런던, 파리, 뉴욕 등으로 말야."

"아녜요, 뉴질랜드로 갈 거예요. 실은 이곳에서 160km나 떨어져 있지만 매우 이상적인 장소를 물색해 놨죠. 언젠가 꼭 하려던 일을 할 작정이에요."

"160km... 티머루인가?"

"아직 결정하진 못했지만, 아마 아카로아로 갈 거예요."

"아카로아엔 당신이 관심 가질 만한 골동품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골동품상을 할 계획은 없어요. 아카로아 시내에 들어가지도 않을 거고. 아카로아의 변두리만으로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클린트,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렇게 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어요. 당신은 이해하리라 생각해요. ,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어요. 오늘밤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거든요."

돌아가려고 하는 모니크를 클린트가 불러 세웠다.

"아까 그 남자는 아카로아에서 왔다고 했소? 이번 계획은 그 남자와 관계가 있겠군."

"아녜요, 이런 생각은 그와 만나기 전부터 한 거예요. 그는 단지 아카로아에서 나와 만났다고 얘기했을 뿐이에요."

갑자기 모니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에드워드가 어디에서 목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그는 그저 아카로아의 아는 분한테서 나를 만나 보도록 권유받았다는 말뿐,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어쨌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얘기일 것이다. 십중팔구 아카로아의 어느 골동품상에 들렀다 자신이 찾고 있는 물건이 크라이스트처치의 망머렌시에 가면 있을 거라는 소리를 들은 게 틀림없다.

 

모니크는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먼저 어떤 방법으로 가족들에게 자기는 집을 떠나기로 했다는 걸 얘기하면 좋을까? 식후의 평온한 분위기에서 말하는 게 좋겠지?

식사는 샐러드를 만들고 후식은 어제 저녁에 만들어 놓은 것을 냄비에 넣고 삶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좋을지, 문제는 그것뿐이다.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좋을까? 그렇잖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지나치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모니크가 주방 쪽으로 돌아서려고 할 때 창에서 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언니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애머벨 숙모님의 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었지?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해서든 들어 볼 수도 있겠지만, 언니는 꼭 다문 조개처럼 좀처럼 말하려 들지 않을 거야. 종종 언니를 보고 있노라면 꼭 꿈속에 있는 사람 같아. 아카로아에서 돌아온 날도 바로 지금 같은 얼굴에 이상스러울 정도로 안절부절못했었지."

"잘못 본 거야, 케리."

노엘이 말했다.

"내 생각엔 모니크 누나가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상대는 매니저인 클린트인 것 같고."

실비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런데 우드 씨가 모니크 언니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언니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 같진 않거든. 언니를 구제하는 마음으로 갑자기 청혼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가 계속 해오던 가사일을 내게 떠맡기진 않겠지. 모니크 언니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나로선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거고, 또한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만약 언니가 결혼한다 해도 내가 대신 가사 일을 떠맡게 되리란 생각은 절대 안해. 더군다나 우드 씨가 청혼했을 것 같지도 않고."

모니크가 창밖에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케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한 번 추리를 해볼까? 애머벨 숙모님은 아마 상당한 액수의 돈을 모니크 언니에게 주셨을 거야. 그 집은 꽤 비싸게 팔 수 있거든. 만약 모니크 언니가 돈을 받으면, 언니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나눠 줄 거고, 또한 우리들은 그걸 받을 권리가 있지. 그렇잖니? 어쩌면 차를 사줄지도 몰라. 아니면 멋진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을 시켜 줄지 누가 아니? 여하튼 변호사를 만나러 가는 건 돈 문제 때문일 거야."

"나는 여행하는 게 더 좋아."

실비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실컷 쇼핑을 할 거야!"

"아휴, 한심해!"

노엘이 가로막았다.

"만약 누나가 돈을 받았다 해도 어떻게 우리를 위해 그 돈을 쓰라고 누나에게 말할 수 있겠어? 내가 누나 입장이라면 이렇게 말할 거야. <모두 나를 위해 쓸 거야. 난 나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라고."

"그래, 맞아."

노엘의 말에 힘을 얻은 모니크는 창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고맙구나, 노엘. 난 애머벨 숙모님한테서 일 년 동안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만한 충분한 돈을 받았단다. 이미 가게를 그만둔다고도 얘기했고."

세 사람 모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들처럼 깜짝 놀랐다.

"문 좀 열어 주겠니?"

모니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지만 좋은 기회인 것 같구나."

케리와 실비가 급히 문을 열었다. 모니크는 천천히 문지방을 넘어섰다.

"미안해, 언니."

케리가 종알거리듯 말했다.

"... 우리들이 얘기한 것, 기분 나빠하지 마...."

"상점을 그만둔다고?"

실비가 끼어 들었다.

"그럼 집안일에서도 손떼겠다는 거야? 만약 그렇잖다면 그 돈은...."

"두 사람 모두 조용히 하고 누나의 말에 귀 기울여 봐. 이번에야말로 누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배로 여행을 할 수도 있고, 예산이 허락한다면 유럽에도 갈 수 있지. 어쨌든 우드 씨가 누나에게 어울리는 상대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노엘, 이제 너도 집안을 꾸려 나갈 만한 능력이 있는 것 같구나."

"다 메릴 덕분이야. 메릴이 날 이 정도로나마 철이 들게 해준 거라구."

노엘은 모니크를 쳐다보았다.

"누나, 참견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애머벨 숙모님께 돈을 받았다면 누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모니크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잖아도 그렇게 하려고 해."

나머지 세 사람 모두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니크를 쳐다보았다.

"애머벨 숙모님은 조건부로 내게 돈을 주셨거든. 일과 집을 떠나 일 년 동안 자유로운 몸이 된다는 조건으로 말야."

노엘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으면서 웃었다.

"역시 애머벨 숙모님이셔!"

모니크의 마음은 하늘을 훨훨 날고 있는 기분이다. 이젠 마음이 가볍다.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됐다.

"오늘은 아주 굉장한 날이었어!"

몹시 흥분한 투로 모니크가 말했다.

"굉장하다기보다는 자극적인 하루였다고나 할까? 식사하기 전에 홍차를 마실 수 있을까?"

케리와 실비는 아무 말 없이 나갔고, 모니크는 노엘에게 웃어 보였다.

"고맙다. 노엘. 오늘은 특히 여러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 같구나... 네가 그 두 번째 사람이지."

"두 번째라고? 첫 번째는 누구야? 혹시 가게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다만 가게에 오신 손님이 나를 도와주었을 뿐이야."

모니크의 뺨이 붉어지는 것을 본 노엘은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그 사람은 백마 탄 기사가 분명한 것 같군. 그렇지?"

"함께 상점을 나와 공항에서 같이 점심을 먹었어. 내가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 손님은 내게 휴식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한 것 같아."

"매우 좋은 사람o1. 그런데 왜 공항까지 가야만 했지?"

"그 분이 캔버라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캔버라? 오스트레일리아?"

"맞아."

"그래, 뭐하는 사람이야? 직업이 뭐래, 누나?"

"링컨 대학의 협조를 얻어 실험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더라. 양 목장을 가지고 있고."

"점점 더 좋은 느낌이 드는데? 장소는?"

"그것까진 물어 볼 시간이 없어서 듣지 못했지만, 내 추측으론 뱅크스 반도 근처가 아닐까 싶어."

"낯선 남자랑 점심을 먹으러 공항까지 가고, 상점을 그만둔다고 선언했다니... 클린트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보지 않아도 훤하군.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은 딱지를 맞은 거야. 그렇지, 누나?"

"클린트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정직하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어. 물론 달가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낙담하는 것 같지도 않더라."

"나로서도 무척 안심이 돼. 누나가 클린트와 결혼해서 행복해지리라곤 생각지 않았거든. 그건 그렇고 그 백마 탄 기사는 어때?"

"그분과의 재회는 아마 없을 거야. 잠시 지나가는 배가 나를 해안에다 구출해 놓고 떠나 버렸을 뿐."

모니크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 그 얘기는 이제 그만 하자. 애들이 돌아올 거야."

케리와 실비는 냉정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쓸데없는 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 같았다. 둘은 은빛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곳저곳을 여행할 계획은 없어."

케리가 갖다 준 홍차를 마시면서 모니크가 말했다.

"그보다는 늘 바라던 꿈을 실현시키고 싶어. 난 아카로아의 포트보샹으로 갈 거야. 그 곳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역사적 가치를 찾아내서는 입장료를 받고 일반인에게 공개할 수 있게 될 날이 오게 될 거야. 이게 바로 내 꿈이야. 보샹 하우스엔 지금까진 멋쟁이 노자매가 살고 있지만 그 두 사람에겐 자녀도 없고, 일할 사람을 고용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없어. 애머벨 숙모님 덕분으로 난 아무런 염려 없이 그녀들의 힘이 돼줄 수 있게 됐어."

"그렇다면 일 년 후엔 다시 돌아올 거야?"

케리는 그녀의 생각을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니 정도의 경력이라면 크라이스트처치에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그리 어렵진 않을 거라 생각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

노엘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뱅크스 반도는 매우 매혹적인 곳이야. 누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때 실비가 핸드백 옆에 있는 제비꽃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어머, 예뻐라! 꽃병이 어디 있지?"

"공항에서 점심을 사주신 분의 선물일 거야."

노엘은 누나를 놀려댔다.

"그래, 맞아."

모니크는 얼굴을 붉혔다.

"예쁘지? 향기도 참 좋아."

케리와 실비는 매우 놀란 듯 잠시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뒤 동시에 모니크를 쳐다보았다.

"점심 먹으러 공항까지 갔었다고? 그럴 시간이 있었어?"

모니크는 케리가 묻는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클린트가 점심시간을 여유 있게 주었거든."

"설마?"

실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우드 씨가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단골손님?"

"그렇진 않아."

노엘이 아는 체했다.

"하지만 공무수행 차 캔버라에 갈 정도로 상당한 사람이래."

모니크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노엘이 너무 지나친 게 아닌지... 동생들에게 더 이상 상세하게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케리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

"아니,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이래."

노엘은 득의만만하게 충실한 누나의 대변인이 돼주었다.

"다만 클린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대."

케리는 노엘을 무시한 채 모니크에게 물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야?"

"에드워드 퍼거슨. 이제 더 이상 묻지 마.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설사 얘기하고 싶다 해도 모니크 자신이 그에 대해 그 이상 아는 것이 없었다.

 

3

일단 결심을 하고 나면 거기에 따르는 자잘한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식사 후 모니크는 의붓아버지에게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며 아주 자그마한 서재로 들어갔다. 애설 레스브리지는 모니크가 7살 나던 해에 그녀의 어머니와 결혼했고, 그 이후 친아버지처럼 그녀를 돌봐 주었다.

"누군가가 널 곤경 속으로 몰아넣었나 보지?"

소파에 앉은 의붓아버지는 친절하게 물었다.

"오늘 저녁엔 직장 동료와 약속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구나. , 얘기해 보렴."

모니크는 우선 포트보샹을 방문했던 일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아름다움과 역사적인 정취에의 감동, 그리고 그 오래 된 저택에 살고 있는 깨끗한 성품의 노자매 이야기, 그리고 그 노자매가 보샹 하우스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싶다고 자신에게 상의해 온 일 등.

그러나 그 토지야말로 어렸을 때 가족과 결별한 친아버지의 아버지가 태어났고 성장한 곳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 다만 작고하신 아버지 쪽의 계보를 찾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친아버지처럼 자신을 사랑해 주신 애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모니크는 애머벨 숙모님으로부터의 조건부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씀드리고, 일년간 보샹 하우스를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설명했다.

"모니크, 우리들 걱정은 하지 말아라."

애설은 일어서서 그녀를 껴안았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네게만 의지해 왔어. 특히 요즘은 케리의 난잡한 생활태도에 늘 신경이 쓰여 왔는데, 어쩌면 이걸 계기로 그 애가 철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고. , 이만 일어나야겠구나! 지금 곧 미스터 망머렌시에게 전화를 해봐라. 우물쭈물하다간 통화를 못할지도 모르니까."

애설은 모니크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곤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수염을 깎아야겠군."

그래, 직장 동료라고 해서 약속상대가 반드시 남자란 법은 없지! 클러드 망머렌시에게 얘기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당신이 그만두다니 무척 섭섭하군. 나도 전부터 언젠가는 당신이 다른 일을 하기 위해 그만둘 거라 생각해 왔었지만, 만약 어제 얘기했더라면 머리가 꽤나 아팠을 거요. 그런데 오늘 아침 우연히 어떤 부인이 크라이스트처치 지점에서 나올 거라는 얘기를 들었소. 그녀는 영국인으로 골동품에 대해선 상당한 지식이 있는 것 같더군. 아들 부부가 뉴질랜드에 있는 회사에 근무하게 돼. 오클랜드에서 연수를 받고 난 뒤 크라이스트처치에 배속되게 돼 있다더군. 그래서 그 부인도 가능하다면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 다행히 오늘 아침 그녀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하진 않았으니 그런 사정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겠군."

모니크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타이밍이 제대로 들어맞은 것은 그 여자 덕분이고, 망머렌시에게도 그다지 의심은 사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모니크는 보샹 하우스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나, 모니크."

앙리에트 부인이 수화기를 들었다.

"당신에게 전화가 걸려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오다니! 우리들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어 골동품 전문가인 당신에게 어떻게 조언을 받을 수 있나에 대해 테레사와도 의논을 해보았죠. 올베스턴 하우스처럼 보샹 하우스도 꼭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싶답니다. 여행자들이 아카로아에서 꽤 멀리 들어와 있는 이곳 보샹 하우스까지 걸어와야 한다는 게 좀 문제긴 하지만...."

"그건 염려 없어요, 앙리에트 부인. 개인손님은 뒤로 돌리고, 우선 단체손님을 대상으로 선전하면 손님들이 점점 늘어나게 될 거예요. 팸플릿을 정성껏 만들어 많은 단체에 보내면 어떨까요? 대학이라든가 여성단체, 교회 또는 문인 협회나 라이온스 클럽 등 말예요. 우리들 계획은 눈 깜짝할 사이에 널리 알려지리라 생각해요."

앙리에트는 소녀같이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우리들이라고 말씀하셨나요? 그럼 당신도 이 계획에 동참해주신다는 의민가요? 테레사도 나도 당신에겐 무척이나 친근감을 갖고 있죠... 그렇지만 망머렌시 씨 밑에 있을 때처럼은 대우를 잘해 드릴 수가...."

모니크는 애머벨 숙모님의 선물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는 덧붙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일 년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아름다운 아카로아에 가서 유서 깊은 보샹 하우스를 재건하는 데 내가 보탬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고 생각했죠. 이건 늘 꿈꿔 오던 일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급료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구요."

", 그랬군요. 어쨌든 너무 고맙고 미안해요. 그런 호의에 꼭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만약 그게 당신 진심이라면, 그리고 당신의 숙모님과 의논이 된 일이라면 우리들은 쌍수를 들어 당신을 환영해요."

갑자기 앙리에트 부인은 목소리를 낮췄다.

"토지는 거의 처분해 버렸기 때문에 6천 평 정도밖엔 남아 있지 않아요. 얼마 안 있어 이 집에서도 나가야만 할 것 같구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와 집을 망가뜨리고, 필립 보샹이 심어 논 나무들을 베어 버리는 걸 보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근처 이 집이 보일 수 있는 곳으로 이사 가려고 했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처럼, 신이 당신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군요."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게 우습지만... 우리 아버지는 마음 한구석에 악마와 친한 면이 있었나 봐요. 때때로 아버지 맘속에 악마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했죠. 알 수 없는 요상한 면이 많았거든요. ...이런 얘기 우습죠?"

모니크는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물론 앙리에트 부인은 그 웃음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모니크가 그들 오빠인 일레어의 손녀인 것을 안다면 그녀가 그처럼 그를 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모니크, 당신 이름은 프랑스식으로 읽나요? 성은 영국 이름 같던데, 어머니가 프랑스 분이신가요?"

"아니에요, 어머니는 오스트레일리아 분이시죠. 외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 계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모니크라는 이름은 어떤 분이 지으셨나요?"

"스코틀랜드에선 장남에겐 할아버지의 이름을, 장녀에겐 할머니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있나 봐요. 그런데 어머니에겐 사촌형제들이 많아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집안이 시끌벅쩍했지요. 그래서 어머니 대부터는 그 전통을 따르지 않기로 하고 자녀들의 이름은 자신들이 직접 지었던 거죠. 내 여동생들은 케리, 실비, 그리고 남동생은 노엘이라고 하지요."

모니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앙리에트 부인, 괜찮으시다면 이번 주말 그곳에 갔으면 하는데요. 신관광지를 소개할 팸플릿을 준비했으면 해서요."

 

애설이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모니크 방엔 아직까지 환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창문 쪽으로 가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안 자니?"

"."

모니크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 언젠가 어머니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모니크는 방에 들어와 침대 끝에 앉은 의붓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상의하셔서 우리 집안에는 없었던 이름을 새로 지으셨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케리, 실비, 노엘이라고 지으셨나요? 제 이름도 그런 이유에서 모니크라고 지으셨어요? 어머니로부터 무슨 얘기 들으신 적 없으세요?"

"그래, 맞아. 나도 언젠가 한번 들었던 것 같구나. 영어로는 <모니크>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긴 하지만 왜 모니크라고 했을까? 그건 아마 네 할아버지가 원하셨던 일일 게야. 학창시절 그분은 모니크라는 아가씨에게 홀딱 반해 있었다고 한다. 매우 낭만적이지 않니?"

애설은 가볍게 웃어 보이며 일어섰다.

", 이제 그만 자거라."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사랑했던 모니크를 만날 수 있다면... 그 여자도 그 아름다운 해변 학교에 다녔을까? 할아버지는 생전에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알 수 없는 누명을 쓴 상태였고 당신의 부친한테서도 신뢰를 받지 못했다. 그런 쓰라린 과거를 할아버지는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날 믿지 않으셨지.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 그러시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누구보다도 존경했던 아버지가 날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펐던지. 그러나 어떤 여자가... 단 한 사람, 나를 믿어 준 사람이 있었단다. 시드니 시내에서 그녀를 만날 때까지 난 25년 동안 그것을 느끼지 못했었지. 그때는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었단다."

할아버지는 흥분하면서 모니크에게 말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버지에게 신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내 마음은 조금씩 멍들어 가고 있었단다. 형님이 돌아가신 뒤 늙으신 아버지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단다. 내 아들, 다시 말해 네 아버지를 상속자로 계승시키고 싶으셔서 오셨을 거야."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 의지대로 처리해 버렸지, 완고하게 말야. 생각해 보면 나도 우리 아버지와 마찬가지였어. 사랑하는 자식을 권위적인 할아버지에게 맡길 수는 없었단다. 네 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예술적인 재질을 물려받아 상업 예술가로 활약했던 건 너도 잘 알 거다. 만약 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삽화가로서 성공했을 텐데. 그런 네 아버지를 그 땅과 할아버지의 지배하에 묶어 둘 수는 없는 일이었지."

할아버지는 장수하셨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행복한 일생을 사셨을 것이다. 좀 전에 할아버지의 누이인 앙리에트 대고모님의 말씀처럼, 그녀가 할아버지의 집에 간다는 사실은 신의 도움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회색의 거리를 지나 다음 모퉁이를 돌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의외성이야맡로 인생에 있어서 묘미를 안겨다 주는 것이리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진실을 볼 수 있었다는 것, 이 사실이 모니크에겐 참으로 즐거운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오늘 하루 동안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에드워드 퍼거슨을 만났다는 사실 또한 그러했다.

이틀 후, 망머렌시가 말했던 영국인 부인 안젤라 프리먼이 상점에 왔다.

"아직 계약하진 않았지만, 도와 드리고 싶은데요? 상점 분위기에 빨리 적응할 수고 있을 테고."

당연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클린트는 불친절하게 그녀를 대했다. 만약 착실한 점원을 그 자신이 해고시켰다면 망머렌시와의 사이가 불편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하지만 더욱 이상한 일은 클린트의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클린트, 얘기 좀 해요. 우리 둘 사이의 얘긴데, 당신과 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이 가게를 그만둘 때까지 우리 서로에게 부담 주지 않도록 해요.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피차 어색할 뿐이에요."

클린트는 뚫어지게 모니크를 쳐다보았다.

"그런 생각은 아카로아에서 온 남자를 안 후부터인가?"

모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뚜렷한 이유를 댈 수가 없었다. 또한 에드워드가 아카로아에 살고 있는지 어떤지 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클린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모니크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좋아, 더 이상 캐묻지 않겠어, 당신에겐 우리들 사이를 끊을 만한 용기가 있는가 보군. 아마 그러는 게 내게도 좋은 일일는지 모르지."

글레니스가 있어서겠지. 모니크는 마음속으로 대꾸했다. 그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시브라이트 양이 그녀를 부르러 왔다.

"여동생이 찾아왔어요. 가봐야죠?"

카페에 들어서자 케리가 손을 흔들었다.

"선물 사러 왔어. 아는 사람 아들의 생일인데, 그 애의 생일선물을 대신 사러 왔어. 말 타는 데 필요한 것을 사야 하는데 뭐가 적당할까?"

생일선물에 대해 의논하고 있을 때 꽃가게 배달부가 들어왔다.

"벨필드 양에게 온 선물입니다."

모니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초록색으로 포장된 커다란 물건을 받아들었다.

"제게요? 생일도 아닌데...."

"캔버라에서 주문이 왔어요. 빨간 장미꽃과 꽃봉오리를 섞어 한 다발을 당신께 보내라고 말예요. 하지만 이곳은 아직 철이 일러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북쪽 지방에서 가져왔지요."

청년은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었다. 그 안에는 아주 예쁜 바구니에 빨간 장미꽃이 하나 가득 있었다. 눈부실 정도였다. 세 사람 모두 감탄의 숨을 들이쉬었다. 꽃가게 청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모니크가 멋진 봉투를 열어 카드를 꺼내들자 케리가 어깨너머로 슬쩍 넘겨다본다.

<다시 만날 때까지. 당신의 로비 번스로부터>

케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비 번스? 정말 그 사람이야?"

모니크는 동생을 무시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어디 가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는데, 어디가 좋을까?"

 

커피잔 옆에 놓여 있는 바구니를 프리먼 부인과 시브라이트 양은 황홀한 듯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고, 사무실에 들어온 클린트도 그것을 보자마자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캔버라에서 온 거래요."

케리가 곧 보고를 했다.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어요. 이런 꽃을 보낼 정도의 사람이라면 굉장히 멋있을 거예요. 나이는 몇이나 됐을까? 돈은 많을까?"

"그런 타입이 아니란 것만큼은 확실하지."

클린트가 말했다.

"나이는 32, 3살 정도고. 그렇잖소, 모니크?"

"클린트, 당신은 그를 만난 적이 있나요?"

케리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가 네 언니를 사모해 이곳까지 왔더군. 만약 실비가 그 사람을 봤더라면 <무시무시해>라고 표현했을 거야. , 그만 일들이나 하시지."

", 그렇지만 오늘 난 이 가게의 손님이에요. 언니, 세 개만 더 싸줘."

응접실에 언니와 둘이 남게 되자 케리는 낮은 목소리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언니도 꽁생원은 아니네. 몇 년 동안 틀에 박힌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하다니. 더군다나 딱지맞은 쪽은 클린트라. 클린트가 그를 <무시무시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니, 쯧쯧! 언니가 그런 곡예를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로비 번스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할지 알 것 같아, <오오 나의 사랑, 당신은 빨간 장미꽃...> 의미심장하군. 어쩌면 언니는 오래 전부터 그 사람을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지!"

"도저히 네 상상력엔 따라갈 수가 없구나."

모니크는 말끝을 돌리듯이 말하고 나서 거스름돈을 건넸다.

"9달러 55센트니까 45센트, 자 여기. 돌아갈 때 가구용 왁스하고 아이스크림 좀 사가지고 가, 알았니? , 그럼 이따 보자."

토요일 이른 아침, 모니크는 혼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 트렁크에 큰 가방을 넣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시동을 걸었다. 애머벨 숙모님 덕분으로 차를 맘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모니크는 막 잠에서 깨나기 시작하는 거리를 달려 잠깐 동안 머물러야 할 구릉지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뱅크스 반도 남쪽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 아카로아, 그곳은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개척된 아름다운 곳이다. 그녀의 조상도 이 땅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반구에 광활한 프랑스식 농장을 만드셨던 것이다. 골동품상의 단골손님에게 이 땅을 맡기기 훨씬 전부터 모니크는 프랑스인 거주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녀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흰색 대문을 통과하여 식민지 양식의 보샹 하우스에 다다랐을 때 차소리를 들었던지 노자매가 베란다로 뛰어나왔다. 모니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본인들이야 아직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모니크가 좋아했던 할아버지의 친누이들인 것이다!

차에서 내려 돌계단을 밟는 순간 모니크는 운명의 다리를 건너 강을 뛰어넘는 듯한 감격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테레사 부인이 반갑게 맞으며 모니크를 포옹했다.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아차, 주말이 벌써 지나 버렸군요, 눈 깜짝할 사이에. , 나 좀 봐, 아가씨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렇게 세워 두다니. , 집안을 구경시켜 드리죠. 마치 크리스마스 전날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는 꼬마아이 같은 기분이에요. 전에 왔을 때는 충분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대충 안내했었죠. 우선 커피 한 잔 어때요?"

커피를 마신 뒤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모니크를 이층으로 안내했다. 몇 세대에 걸쳐 사용했던 계단, 이 집을 세운 필립 보샹이 몸소 범선을 이용해서 북아일랜드에서 운반해 왔다는 카우리 (소나무의 일종) 재의 천장과 침대, 이 모든 것이 모니크를 매료시켰다.

앙리에트 부인은 복도를 돌아 정면으로 보이는 문을 가리켰다.

"저곳이 우리들의 침실, 그리고 저 구석의 작은 계단 위에 있는 것이 당신이 묵게 될 방이랍니다."

"어머나! 정말 근사해요!"

모니크는 방문을 열고 산뜻한 식민지 양식의 방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프랑스 풍 천장이 있는 방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침실과 거실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마치 모텔 같은 분위기다.

여닫이창 너머로 무수한 다이아몬드가 태양빛을 흠뻑 받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는 강, 작은 배가 고요한 물결을 가르고 있는 아름다운 선창 부두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층 거실에는 안락의자, 필립과 루이스가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이 틀림없는 의자들, 원형 탁자, 그리고 새로 산 지 얼마 안 될 듯한 책장 위에는 워털루 전쟁에서 사용된 듯한 장식용 총이 놓여 있다. 아름다운 정밀화, 영국 섭정시대 사용했던 카우리 재로 만든 책상-책상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지만 그러나 책상인 것 같다-도 있었다.

이것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것보다 더 오래 된 것 같다.

"편지를 쓸 때 이것은 매우 편리하죠."

책상을 살펴보고 있는 모니크에게 앙리에트 부인이 설명했다.

"우리 오빠 일레어의 책상이었죠. 오빠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친절했답니다."

부인은 옛날을 회상하며 카우리 재 책상의 나뭇결을 어루만졌다.

"지금도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에 앉아 우표 수집을 하거나, 새들을 그리던 오빠의 모습이 생각나지요."

모니크는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일레어의 책상!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리운 할아버지의 책상인 것이다. 한달 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그것이 모니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노자매는 누명을 쓴 오빠에 대한 얘기를 했다. 같은 피가 흐르는 대고모님들에 대한 사랑이 모니크의 마음에 가득 피어올랐다.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손녀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안다면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4

"이곳은 일레어의 방이었나요?"

모니크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물었다.

", 존 오빠 에밀과는 달리 일레어 오빠는 독서를 무척 좋아했었죠. 에밀 오빠는 복도 끝에 보이는 방을 사용했고. 그 방에는 직접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 계단이 있지만. 에밀 오빠는 언제나 초저녁이 되면 말을 타고 언덕으로 달려가곤 했지요. 그때 아마 아버지는 75살이셨고... 그 이후 아버지는 변했답니다. 모가 생겼다고나 할까... 마음이 약해지셨지요."

"일레어는?"

모니크는 다그치듯 물었다. 테레사 부인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 곳에 일하러 온 사람들 중에 아주 작은 체구의 아가씨가 있었죠. 그때 그 뮤리엘이라고 하는 아가씨는 임신 중이었답니다. 누군가 그 뱃속의 아이가 일레어의 자식이라고 아버지에게 고했던 거지요. 물론 우리들은 믿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일레어 오빠를 질책하고는 돈을 주면서 이곳을 떠나 결혼하도록 강요했었다는군요."

부인은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매우 천박스럽고 행실이 나빠 아버지는 그녀를 며느리로서 집안에 들여놓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셨지요. 아버지의 체면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설사 상대가 일레어의 아가씨였다 해도 본인이 착실한 아가씨였다면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일레어 오빠는 결혼을 거부했고, 아가씨는 우리 아버지에게 많은 돈을 얻어내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는군요. 일레어 오빠도 집을 떠나 배를 탔지요.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는 앙리에트 언니와 내 생일날에는 꼭 선물을 보내 주셨지요. 언니와 난 두 살 차이로 생일이 같아요. 일본에서는 기모노, 미국에서는 카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부메랑, 타히티에서는 진주 목걸이, 그렇지만 언제나 배편으로 보내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오빠의 주소를 알았다 해도 그땐 이미 또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뒤였죠."

"부자지간에 화해할 기회는 없었나요?"

모니크는 초조하게 물었다.

"한 번 재회할 기회가 있었지만...."

앙리에트 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화해하진 못했다고 들었지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에밀 오빠가 돌아가신 후 보샹 가의 호주 상속자가 필요했던 아버지가 그를 찾아갔었지만 만날 수가 없었답니다. 아카로아에 사시는 분이 시드니에서 오빠를 만나 부자간에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고 해놓고선 일레어 오빠의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았대요. 그때 우리들은 이곳에 없었죠. 난 선장인 남편을 따라 항해에 올라 있었고, 테레사는 오클랜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없었지요."

앙리에트 부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에밀 오빠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 앞으로 유언장이 날아들었는데, 그 유언장엔 뮤리엘의 뱃속에 든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었음을 고백하는 말이 씌어 있었답니다. 아버지가 뮤리엘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에밀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려운 나머지 동생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얘기였지요. 아버지가 많은 돈을 줄 것이라 예상하고 뮤리엘과 말을 맞췄던 거예요. 불쌍한 일레어 오빠...."

앙리에트는 눈을 깜박거렸다.

"모든 것이 작은오빠에겐 불리했었답니다. 그는 농장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숲에 들어가 새를 보며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지요. 웃는 올빼미가 멸종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밤이면 그 울음소리를 찾아 숲을 헤맬 정도로 열심이었죠. 반면 에밀 오빠는 다른 목적으로 바깥 계단을 사용했어요."

"아버님과 일레어의 얘기를 어떻게 아셨나요?"

"아주 나중에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시더군요. 일레어 오빠는 아버지를 용서했고 진실이 밝혀진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답니다. 그러나 시드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오빠로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거절한 거죠. 노쇠해지신 아버지는 말년에 당신이 뿌린 씨앗은 당신이 거두셔야만 한다고 곧잘 말씀하셨어요. 아니 모니크, 울고 있잖아요?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닌데...."

모니크는 당황해하면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원래 잘 울어요. 텔레비전에서 꼬마들이 캐롤송을 부르는 것만 봐도 곧잘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곤 한답니다."

모니크는 당황한 나머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지금의 눈물은 처음에 할아버지가 겪었던 고통 때문에서만이 아니라, 조상이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넘어 손에 쥘 수 있었던 보상의 땅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됐던 증조부 프랑수아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다.

앙리에트는 손바닥을 모니크의 뺨에 갖다 댔다.

"눈물은 따뜻한 마음이 녹아나오는 거죠. 우리들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어머니 역시 곧잘 눈물을 흘리거나 웃기 잘하시는 매우 감상적인 분이었답니다. 매우 상냥하셨지만 자식들에겐 엄격하셨죠. 언제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 드리죠. 오늘 아침, 푸른색 세일러 칼라 원피스를 입고 있는 당신을 본 순간 어머니를 떠올렸지요."

모니크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작은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원피스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세 사람은 방을 나왔다. 앙리에트 부인은 에밀이 사용했던 침실을 가리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저쪽은 우리 땅을 산 사람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일반인에겐 공개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 사람은 이 넓은 저택에 우리들만이 있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걱정해 주었지요. 옛날엔 범죄와는 인연이 없는 곳이었지만, 언젠가 아카로아에 강도가 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난 후부터 맥은 가축우리 위에 있는 방에서 기거했답니다. 그는 줄리에트드 쿠르시라고 하는 친한 친구의 손자인데, 매우 좋은 사람이지요. 지금은 출타중이지만, 밤엔 도둑을 지켜 주죠. 그리고 그의 식사는 그의 모친이 해주고, 나갈 때는 바깥 계단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다지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아무튼 기뻐요. 그건 그렇고 선전을 시작하기 전에 문이랑 창문의 안전장치를 확인하고, 꼼꼼하게 보완해야만 하겠군요. 거기에 드는 경비는 얼마 뒤엔 회수할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에 흘렀다.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여러 단체에 보낼 안내장의 원고를 살펴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러나 모니크는 처음부터 모든 안건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토산물 판매에는 관심들이 많겠죠. 그러나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와주신 보답으로 차 대접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고가의 골동품을 전시할 경우에는 로프를 설치하고, 바닥에는 융단을 깔고 그 위에는 비닐을 덮도록 하죠. 포트보샹에서 시간제로 일하실 분이 있을까요?"

"물론 있어요. 농장 노동자의 부인들은 부수입에 대한 욕심이 많지요."

"처음에는 샌드위치와 차를 대접하고, 만약 집에 들어오시는 분이 있다면 초콜렛이나 옥수수, 크림이나 잼을 바른 빵을 내놓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차양이 쳐진 베란다에 식탁을 내놓으면 어떨까요?"

일요일, 팸플릿에 대한 사전 준비가 오늘 안에 완성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니크는 클린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강머리의 여자겠지. 모니크는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우드 씨 계십니까?"

"당신은 누구세요?"

상대방은 노골적으로 유쾌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 때문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클린트는 나가고 없는 것 같아 모니크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나가셨습니까?"

그때 밖에서 들어온 듯 클린트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클린트? 모니크예요. 개인적인 용건이 있어서... 이쪽 일이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아 가능하다면 오늘 하루 쉬었으면 해서요. 화요일에 팸플릿을 복사할 수 있도록 빨리 완성해 놓아야 하기 때문에...."

클린트도 모니크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 오전 중에 가게로 전화를 해주시겠습니까? 그럼 10시에. 자세한 것은 그때 얘기했으면 좋겠는데요."

"고마워요, 그렇게 하죠. 그리고 클린트, 여기 팸플릿에 <골동품을 구하시고자 하는 경우에는 크라이스트처치의 망머렌시로>라고 광고를 넣어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광고는 매우 중요한 거지요. 어쨌든 내일 10시경에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가엾은 클린트! 그는 아마 귀 기울이고 있는 글레니스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모니크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그가 자신의 회색빛 과거 속에서 빨리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그 아찔했던 순간 나를 구출해 준 건 에드워드였다! 모니크는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번호부를 펼쳤다.

만약 그가 아카로아에서 양 목장을 경영하고 있다면 이쪽 전화번호부에 적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퍼거슨, 퍼거슨... 비슷한 이름은 있었지만 에드워드 퍼거슨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고, 아름다운 장미꽃과 로비 번스의 시를 인용한 낭만적인 사람... 모니크의 가슴에 기쁨이 넘쳤다. 그는 재회를 약속했다. 그는 꼭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다음날 아침 10, 전화를 받은 클린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모니크, 당신이 그만두는 것은 아쉽지만, 미스터 망머렌시가 추천해 준 부인이 하루라도 빨리 가게에 나오고 싶다고 하더군. 당신도 그쪽 일이 바쁜 것 같고 하니, 목요일까지 가게 일의 인수인계를 끝내 줬으면 하는데... 그러면 당신도 일에서 해방돼서 좋잖아, 어때?"

모니크는 생각지도 않은 웃음이 나왔다. 과연 클린트로군! 글레니스에 대한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면 한시라도 빨리 성가신 점원을 제거해야 할 테지.

모니크에게 변화가 있음을 모르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매우 기뻐했다. 세 사람은 팸플릿을 만드는 데 온힘을 기울였고, 화요일 아침 모니크는 크라이스트처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금요일, 모니크는 커다란 스케치 그림을 차에 싣고 사랑하는 포트보샹에 도착했다. 출발 전 그녀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드워드 퍼거슨 씨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오면 전화를 할지도 몰라. 만약 전화가 오면 내가 가 있는 곳을 알려줘. 내가 가게를 그만둔다는 걸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모를 거야. 그를 만났을 때는 이렇게 빨리 가게를 그만두리라곤 생각지 않았거든."

에드워드는 약 열흘 후에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정신없이 바쁜 것이 좋다. 이토록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다.

 

포트보샹의 주인들은 모니크를 환영했다. 후계자가 없는 보샹 하우스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다면 아름다운 강촌은 그 독특한 개성을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 땅의 역사마저 바람에 휩쓸리듯 사라져 버릴 거라고 어떤 교사가 말했다.

그 교사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보샹 하우스의 간판을 대문 옆에 만들어 놓겠다고 했다. 게다가 모니크가 안내용 카드를 고딕체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더니 그림 그리는 학생들에게 부탁하겠다고 제안했다.

"학생들도 이 토지를 지키는 데에 동참하는 것을 매우 기뻐할 거예요."

"그래요,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모니크의 눈이 반짝였다.

"여러 가지를 해야겠지만 딴것은 그다지 급한 것은 아니에요. 우선 골동품 애호가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고르는 일이 제일 중요해요. 나는 골동품 감정이라든가 연대를 추측하는 일, 그 제조 양식에 대한 식별에는 약간의 식견을 갖고 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이곳까지 운반돼 왔는지에 대한 역사까지도 추측할 수 있어야만 해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에게 조금은 들어 알고 있지만, 두 사람은 계속 이곳에서 사셨고 이곳 생활에 젖어 있었으니 옛날부터 내려오는 유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드물지요. 역사나 골동품에 대한 지식이 있는 분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런 일이라면 맥이 적임자지요."

앳돼 보이는 교사 에럴이 말했다.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는 골동품에 대해선 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모니크, 내 아내 진도 이곳 문을 여는 데에 무엇인가 도와드릴 게 있을 거예요. ...이봐 진, 그럴 수 있겠지?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면 모니크도 훨씬 덜 힘들 거야."

그는 웃었다.

"아내는 내성적이지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 이곳 역사를 아는 사람이 와 준다면 마음 든든할 거예요. 버스가 여러 대 오면 나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요."

진은 뺨을 붉히면서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프랑스 하녀들이 입는 의상을 입고 차 나르는 일이야 잘할 수 있겠지만 안내는 잘 못해요. 창고에서 꺼낸 것들을 닦기도 하고, 물건들을 고르는 일은 할 수 있어요. 꼭 도와드리고 싶어요. 자랑 같지만, 이곳이 일약 유명해질 만큼 최상의 예술품이 나오리라 생각지 않으세요?"

최상의 예술품이 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창고에는 그럴 만한 것이 없었다.

", 곧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에럴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구름 몰리는 것을 보니 곧 비가 올 것 같아."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런 정도의 천둥번개를 모니크는 본 적이 없었다. 기분 나쁜 검은 구름이 바람에 쫓기듯 질주하고, 음산한 정적이 순간 아카로아 향을 휩쓸었다. 금빛 번개가 회색의 하늘을 산산조각 냈고 계속해서 천둥을 치면서 계곡을 넘어 언덕에서 언덕으로 향했다.

테레사는 멍하니 쳐다보면서 검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저럴 수가! 난 뱅크스 반도의 천둥번개처럼 무서운 것은 본 적이 없어."

"테레사는 항상 겁쟁이라니까."

앙리에트가 웃었다.

"그렇지만 그 심정은 잘 알 수 있어. 모니크, 이곳의 폭풍우는 즘 독특한 식으로 불죠. 이 구름은 동북쪽을 향해 가고 있는 걸 거예요. 곧 그 구름이 바다 위로 밀려가면 돌연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폭포처럼 쏟아지던 빗줄기는 태평양상에 오묘하게 걸려 마치 휘장처럼 보이죠. 그렇지만 이 때는 창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요. 벽지가 더러워지면 큰일이거든요. 맥이 나가기 전에 홈통을 청소해 주고 갔어요. 이렇게 가까운 곳에 나무숲이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몇 번인가 아버지께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고개를 흔드셨고,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무를 베어 버리지 않으셨을 거라고 말씀하셨답니다. 필립 할아버지는 이 곳 경치가 매우 좋다 하시면서 이곳에 집을 지으셨지만, 반면에 강한 바람을 견뎌내야만 했어요. 방풍림이 자랄 때까지 루이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 정원을 가려야 한다고 하셨죠."

모니크의 목구멍에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앙리에트 부인은 내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대고모님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년의 이들 자매에게 필요 이상의 충격을 줄 필요는 없다. 또한 내가 한 가족의 일원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지 않은가. 창고에서 본 노트에 씌어 있던 문장이 옛날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얘기와 일치한다는 사실과 벨필드를 프랑스어 식으로 하면 보샹이라는 사실만으로 혈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출생증명서라든가 정식 이름 변경서의 복사본을 가져올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니크는 문득 며칠 전의 일을 생각했다. 맥의 방으로 들어가는 바깥 계단 위에 인접해 있는 이층 지붕 차양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 그것은 마치 보리짚을 말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 둥우리일까? 그것을 본 순간 친화성 물질을 왜 저런 곳에 놔뒀을까 나중에 조사해 보자고 생각하며 그냥 내려왔었다.

급경사로 된 지붕에서 흘러내린 빗물은 출구가 없어 괴다 못해 넘쳐흘렀다. 그 물이 집안까지 스며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비는 그치고 태양이 나뭇잎이랑 가지, 그리고 짚에 달려 있는 물방울을 수정처럼 반짝이게 하고 있었다. 모니크는 뒷 베란다로 해서 알루미늄 계단을 내려왔다. 비 때문에 슬레이트 지붕에서 흘러내린 솔잎이랑 이끼가 잔뜩 쌓여 있다.

돌아보길 잘했어. 모니크는 맨손으로 홈통을 청소했다. 숨통이 트인 듯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홈통이 연결된 부분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맥의 방에 물이 샐 게 틀림없다. 침대 위에나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을 텐테...

주인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이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망설일 수만은 없다. 모니크는 알루미늄 계단을 내려가 밑으로 가서 바깥 계단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갔다.

침대까지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옷장이 놓여 있는 벽면 위가 눅눅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저걸 움직인담! 대고모님들께 도움을 부탁한다 해도 어려울 것이다. 옷장을 혼자 옮기려면 안에 든 것을 전부 끄집어내고, 밑에 있는 서랍을 빼내는 수밖에 없다.

모니크는 옷장을 열어 그 안에 걸려 있는 옷들을 침대 위에 늘어놓고, 밑에 있던 가죽신을 침대 앞으로 꺼내 놓았다. 다음은 서랍이었다. 놋쇠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삐걱거리기만 할 뿐 전혀 열리지 않았다. 대패로 밀어야 할 것 같다.

서랍 안이 간신히 들여다보일 듯 말듯 조금 열려 손을 넣어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책이 몇 권 나왔다. 왠지 옛날 출납장인 것 같다.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듯 책표지는 거미줄로 잔뜩 덮여 있다. 그 밑에는 갈색 종이에 싸인 장방형의 상자 같은 것이 보였지만 모니크는 무엇보다도 출납장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그것을 베개 위에 놓고 옷장을 옮기기 시작했다.

온힘을 다해 옷장을 옮겨 놓고 젖은 물건을 벽 쪽에서 멀리 떼놓은 다음, 욕탕 세면대 밑에서 오래 된 세수대야를 꺼내들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세수대야를 비가 많이 새는 곳에 놓았다. 홈통을 청소한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모니크는 그릇을 가지고 이곳저곳에 괴어 있는 물을 떠내서는 밖으로 버렸다. 쉴 새 없이 물을 계속 퍼냈기 때문에 온몸이 축 늘어져 힘을 쓸 수가 없다.

빗물이 잠자리에 흐르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모니크는 이층에 있는 청소함을 열어 걸레를 꺼냈다. 먼지투성이인 출납장을 도로 서랍 속에 넣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시간이 있을 때 그것을 읽어보리라. 드문드문 글자가 씌어 있는 밑에 프랑소와 보샹이라는 사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필립 보샹의 이름이...

모니크는 간신히 잡아당겨 반쯤 열린 서랍 안의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액자에 끼우지 않은 그림이 몇 점 있었다. 이건 뭘까? 의아해하면서 모니크는 조금 찢겨져 있는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무슨 그림일까? 그것은 풋내기가 손장난 삼아 그려 본 것이 아닌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같이 보인다.

유화로 미완성 작품인 것 같다. 유명한 화가가 그린 것이라면 미완성 작품이라 할지라도 완성작에 가까운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모니크는 야릇한 감정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골동품 애호가가 생각지도 못한 진귀한 물건을 찾아냈을 때의 그런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잡동사니 속에서 발견해내지 못했다면 영원히 매장돼 버렸을 이런 아름다운 예술품을 발굴해낸다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림 위쪽에 <뉴질랜드>라고 씌어 있고, 아래에는 프랑스어로 <아카로아의 프랑스인 식민지 영토에서의 풍경>이라고 씌어 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박물관에 아마 이것과 비슷한 구도의 동판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대개 그것은 찰스 메리언의 작품이었다. 모니크는 그 그림을 창가에 기대 놓고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찰스 메리언> 틀림없이 그렇게 씌어 있다.

그림 중에는 사인이 없는 것도 몇 개 있긴 하지만, 이 그림들은 분명 찰스 메리언의 것이다. 이 그림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모니크는 이런 생각에 깊이 빠진 채 이따금씩 힐끗힐끗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림을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전문가의 감정을 받을 때까지 두 사람에게는 잠자코 있기로 마음먹었다. 모니크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 빗물이 방안에까지 들어왔다는 얘기를 했고, 그 피해 정도를 보기 위해 노자매는 그녀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설마 이것들을 혼자서 옮기지는 않았겠죠?"

테레사 부인이 놀랍다는 듯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었다.

"안에 있던 옷들은 어디 있나요?"

모니크는 침대 위에 널려 있는 옷과 침대 옆에 흩어져 있는 구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밑에도 잡동사니들이 가득 쌓여 있었죠? 맥이 오래된 출납장들을 모두 이 밑에 쑤셔 넣어 버렸기 때문에."

앙리에트가 말했다.

"옛날 마부가 살았던 마구간 방을 맥이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그 안에서 나온 모양이에요. 그가 어째서 그런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원래 옛날 것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금화라도 지갑에 두둑이 채울 수 있을까 해서 그러는 건지... 누차 그에게 물었지요. 그러나 맥은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뿐...."

가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 그림을 보고 가치가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특히 맥이라는 사람은 골동품에 대한 식견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사람은 정말 믿을 수 있는 남자일까? 보샹의 땅을 사는 데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할 것이다. 노자매를 보호하겠다는 말은 구실이고, 그로서는 한 지붕밑에 살면서 고가의 골동품을 찾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비싸게 팔 수 있는 골동품을 찾아내어 몰래 가지고 나가 파는 것...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차를 마시면서 모니크는 맥에 대해 물었다.

"맥이란 분은 뱅크스 반도 출신인가요? 아니면 다른 지역 사람인가요?"

"모친이 아카로아의 드쿠르시 가 출신이죠. 부친은 한때 은행원이었는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사장이 됐다는군요. 맥은 주로 어머니 쪽의 피를 이어받아 은행원보다는 농장경영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요. 드쿠르시의 농장은 외가 쪽의 외삼촌들이 물려준 것이기 때문에 맥은 자신의 토지를 손에 넣어야만 했지요. 다행히 그는 그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는군요.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곤 해요.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맛있는 음식을 해먹지 않는다고 늘 걱정을 해준답니다."

어쩐지 맥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 추측이 너무 비약된 걸까? 저녁식사 후 전화벨이 울려 모니크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머, 당신이 벨필드 양인가요?"

산뜻한 목소리다.

"나는 로시뇰 탄의 마고 라베루라고 합니다.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지요. 주인과 둘이서 모텔을 경영하고 있는데, 이제 곧 매종 로시뇰을 개장할 예정이랍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운이 나쁜 건지, 여성단체에서 내일 방문한다고 하는데 글쎄 비가 새지 뭐예요. 만일 손님들이 빗물에 젖어 있는 카펫 위를 걷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라베루 부인은 상태가 어느 정토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쪽 준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질 스티븐스 씨에게 당신 얘기를 듣고는 어쩌면 내일 오실 손님의 반 정도는 받아주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 손님들의 입을 통해 보샹 하우스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면 돈 들여 광고를 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두지 않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니크는 곧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하죠. 말씀하신 바처럼 완전하게 준비돼 있진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이 왜 있어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정통 프랑스 다과를 준비할 수는 없지만, 내일 하루 꽃을 꽂고 안내용 카드를 부착하고, 샌드위치와 비스킷 정도는 준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 되겠죠?"

"아주 좋은데요. 그런 건 생각지도 못하고 벌써 프렌치 페이스트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내일 샌드위치 용 빵과 프렌치 페이스트리를 동생 편에 보내 드릴게요. 애써 만들어 놓은 페이스트리를 버릴 순 없지요."

 

보샹 하우스가 이 정도로 휘황찬란한 곳인지는 몰랐다. 에럴은 간판을 세우고 마고는 레이스가 달린 테이블보를 하나 보내 주었다. 앙리에트와 테레사는 가구를 반짝반짝할 정도로 윤을 내놓았다. 케빈은 정원의 잔디를 깎고 진은 식기를 정리했다. 오후 2시 그들 모두는 처음으로 손님을 맞기 위해 현관 계단 위에 섰다.

전날 밤, 노자매는 모니크를 위해 구식 드레스를 한 벌 가져다주었다.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전에 어머니가 20살 되던 생일날에 입으셨던 거랍니다.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어머니는 마리 로즈라고 하죠."

모니크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본 테레사 부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의 다른 이름도 로즈라고 하거든요...."

모니크는 당황해서 얼버무리듯 말했다.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눈을 반짝이면서 흰 목면 드레스를 펼쳤다. 목 부분이 분홍빛 리본으로 장식돼 있고, 양끝에 술이 달려 있다. 테레사 부인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열어 그 안에서 진주 목걸이를 꺼내들고는 드레스를 입은 모니크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마치 사진에서 본 어렸을 때의 어머니 모습 같군요!"

앙리에트 부인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양손을 꼭 쥐었다.

"얼굴형 하며 둥근 턱... 어쩜 이렇게 빼닮을 수가!"

"드레스가 참 예쁘네요."

모니크는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언젠가는 두 사람에게 진실을 얘기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보샹 하우스에 도착한 단체는 첫눈에 이 저택에 매료된 것 같았다.

"이렇게 훌륭한 곳이 있을 줄이야!"

한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른 한 사람은 짙은 푸른빛의 강을 바라보면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계절에 따라 이곳 경치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군요."

버스 운전사가 모니크 쪽으로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우리 회사 팸플릿에 이곳의 안내문을 넣으면 어떻겠습니까?"

진과 모니크가 등나무 아래로 차를 내왔을 때, 한 대의 승용차가 버스 뒤에 멈춰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안에서는... 아니, 놀랍게도 에드워드 퍼거슨이 나오다니. 모니크는 어리둥절해하며 일어섰다. 어떻게 이곳에...? 집에 전화를 걸어 이곳 주소를 들은 것이 틀림없다. 모니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얼굴을 붉히고는 그를 향해 몇 발자국 걸어가서 멈췄다.

에드워드는 순간 깜짝 놀라는 것 같았지만, 곧 기계적인 발걸음으로 그녀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머, 맥이잖아요. 일찍 돌아오셨네요."

옆에서 진이 말했다.

"왜 그러세요? 당신의 얼굴은 마치...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집이라도 빼앗긴 사람 같군요."

맥이라고? 그렇다면 노자매와 함께 이 집에 살고 있고 골동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남자가 에드워드 퍼거슨이란 말인가? 비싼 가격의 그림들을 몰래 숨겨 놓았던 것도 그 사람...?

갑자기 겁에 질린 모니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와 맞닥뜨리기 전에 피해야 한다. 주방에 있는 창문으로 잠깐 밖을 내다보았다. 맥이 에드워드라면 그림 사건을 속일 리가 없어, 절대로!

배신감 같은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모니크는 등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뒤로 돌아다보았다.

"이곳에서 뭘하고 있소?"

에드워드의 그 한 마디 물음이 순간 모니크의 미소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말았다.

 

5

"이젠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셨으리라 생각하는데요? 당신이... 그럼 당신이 맥이세요?"

"몰랐소?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날 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에드워드라고 부르기도 해요. 맥은 어렸을 때의 애칭이기 때문에 에드워드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소. 당신이 모르리라 생각진 않는데?"

"정말 몰랐어요!"

모니크는 화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알았다면 기뻤을 거예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는 충분히 얘기할 시간이 없었지요. 당신이 포트보샹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도 얼마 뒤에 그곳을 방문하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전 이곳에 오는 것이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해질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사실대로 말씀하지 않으셨죠? 아아, 알았어요. 그날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인가요? 그렇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꽃을 보내셨어요?"

"별다른 의미는 없었소."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신 아닌 누구에게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소."

모니크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묵묵히 침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망머렌시의 모니크가 이 아름다운 저택을 파티장으로 바꿔버렸다는 건...."

모니크는 감정을 누르기라도 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정도 모르고 내 멋대로 변형시키진 않았어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이 보샹 하우스를 어떤 모양으로 변형시키든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당신이 친척이라도 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당신도 친척은 아니잖소?"

모니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당신은 이 아름다운 집을 가구를 정리하는 것쯤으로 완전히 개조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아무 계획 없이 몇 주일이 걸릴지도 모를 일을 벌여 놓은 걸 보면 말요. 이런 일을 시작하려면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우선 손님에게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를 경우에 대비해 상당한 액수의 보험에 가입해야만 하고, 또 광고도 내야만 하오. 그리고 집안을 관람할 수 있도록 정비할 필요도 있을 테고. 개인 침실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다면 이곳에서의 생활 전체가 흔들리게 될 거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씀이 뭔지 알겠어요. 이곳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을 어지럽힐 생각은 없어요. 독신남성은 자기 스스로 침대를 정리하기도 하고 식사준비도 해야 하겠지만, 이곳에 있는 한은 그러지 않아도 되죠. 편안하게 지내세요. 그렇게 하세요, 에드워드 퍼거슨 씨. 어쨌든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이 지적하신 문제는 크라이스트처치에 가기 전에 곧 해결하겠어요. 필요한 조언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구요. 보험에도 가입하죠. 적당한 기회에 말씀드려도 되겠지만, 문에는 도난방지용 자물쇠를 달고, 소화설비 등의 안전대책도 해야죠. 도대체 날 몇 살로 생각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감상적인 18살 소녀가 아니라구요."

"그렇게 한다면 안심이오. 하지만 만약 관광객을 실은 버스가 뜸하다면 당신이 망머렌시에서 받았던 이상의 급료를 받을 순 없으리라 생각하는데?"

"당신은 지레짐작을 무척 잘하시는 분이군요. 급료를 받을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수입이 없이 어떻게 하려고...?"

"우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숙모인 애머벨 허스트가 결혼해서 캐나다로 이주하게 됐는데, 집 판 돈의 일부를 내게 선물로 주셨지요. , 일 년 동안 집과 일을 떠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지낸다는 조건으로요. 그래서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께 도움이 돼드렸으면 하고 이곳에 오게 된 거예요."

"그 돈으로 여행을 간다든가 새 차를 구입하든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돈을 어떻게 쓰든 그건 내 자유니, 당신의 지시를 받을 필요는 없지요."

"그건 그렇소만...."

회색빛 눈동자에는 상냥함이라곤 전혀 없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의 일을 계속 지켜볼 작정이오."

여행객들은 모두 버스로 돌아갔고, 모니크는 후미진 곳에 있는 응접실에서 쉬고 있었다.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마음이 들떠서 쉴 새 없이 지껄여댔다.

"첫날부터 이렇게 대성황일 줄 대관절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요? 모두 즐거워하면서 친구들에게 많이 선전해 주시겠다는군요."

"이런 추세로 계속 나간다면 예약이 점점 많아지겠어요."

모니크는 에드워드를 의식하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봄을 맞이할 테고, 계절적으로도 나무랄 데가 전혀 없어요."

에드워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금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노자매를 상냥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내가 3주간 나가 있는 동안 보샹 하우스는 여행객들의 대기실이 돼 있었습니다. 내가 여행 가기 전부터 계획됐던 건가요?"

테레사 부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때는 아직 정식으로 결정하지 않았었지요. 확실한 걸 알기도 전에 상상으로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건 좋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몰랐구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두 분께서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에드워드는 계속했다.

"나라면 사전에 충분한 조사를 하고...."

"물론 알고 있었죠...."

테레사 부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은 단호히 반대하셨겠죠. 그러나 이런 일에 있어선 모니크가 전문가고, 당신이야 농장 경영 쪽에 전문가니, 각각 자신의 분야를 지키는 게 좋겠죠."

"전 그저 제 소견을 말했을 뿐입니다."

에드워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앙리에트 부인을 보았다.

"나에 대해서 모니크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왜 그러셨나요? 두 분은 날 맥보다는 에드워드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습니까?"

모니크는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두 분은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었어요. 나도 당신과 만난 사실을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께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요."

앙리에트는 낮게 웃었다.

"에드워드, 당신이 우리의 의견을 따라 모니크를 만나러 갔었는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모니크도 당신 얘긴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고... 우리들도 얘기하지 않을 수밖에."

"그럴 듯한 설명이군요."

"나도 전혀 몰랐어요."

모니크도 맞장구를 쳤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번에는 테레사 부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자고 얘기했다면, 에드워드 당신은 그런 계획은 우리들 힘에는 부칠 거라고 반대하셨겠죠? 그리고 만약 모니크의 힘으로 이곳이 관광명소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신은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겠죠. 그러나 아무런 선입관 없이 모니크를 만난다면 그녀가 얼마나 착한 아가씨인지 당신도 곧 알게 되리라 믿었어요."

에드워드는 힘겨운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망머렌시에 가보도록 내게 권유하셨군요. 어머니가 수집하고 계신 푸른 경질 도기가 있을 거라고만 하셨기 때문에...."

"우린 당신이 모니크를 만나러 망머렌시에 가든 안 가든 그건 당신 맘일 테지만,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당장에 호의를 갖게 되리라 믿었어요. 어머,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말이 좀 길어졌군요."

"왜 날 에드워드라고 소개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에드워드는 차갑게 말했지만 곧 손을 저었다.

"아니, 이제 이 얘긴 그만둡시다. 정신만 산란해질 테니까...."

앙리에트는 젊은 두 사람에게 다정스레 웃어 보였다.

"그게 좋겠어요, 에드워드. 당신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계획에 이것저것 신경 쓸 여유가 없었죠. 모니크는 급료도 받지 않고 도와주신다고 했고, 모든 것이 잘될 거예요. 집을 평온하고 아담하게 고쳐 놓기만 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죠."

젊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리고는 곧 떨어졌다. 잠시 후 모니크는 계단 위로 올라갔고 에드워드는 이층에서 내려오면서 멈춰 섰다.

"모니크 벨필드 양,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을 위해 우리들도 풍파를 가라앉히고 화기애애하게 지냅시다. 그분들에겐 평온한 가정이 필요하니까."

"지금까지 우리들은 매우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죠. 풍파가 일어난다면 그건 당신에게 원인이 있지 않겠어요? 두 부인은 그렇지 않은데 유독 당신만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내게 신경을 쓰는군요. 왜 그러세요?"

"그것은 내가 그녀들보다 조심스러운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죠."

모니크는 뾰로통해 있었지만 조용한 투로 말했다.

"대단히 의심이 많군요. 설마 내가 돈 때문에 일한다곤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내 경험에 의하면, 의심 많은 사람은 대개가 그 사람 자신 안에 꺼림칙한 면이 있게 마련이죠.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아름다운 고장의 역사와 전통이 깃들어 있는 집에서 살아 보고 싶은 예전부터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 그 이상의 목적은 없어요."

에드워드는 모니크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런 일은 일시적인 기분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오. 나이 든 두 분에게 희망을 잔뜩 걸게 해놓고선 일년 후엔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는 건 아닐는지? 당신이 급료를 받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일임에 틀림없소. 하지만 싫증난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손을 떼는 건 곤란합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고 신기하기만 할 거요. 그러나 점점 당신을 의지하고 있는 두 분의 존재가 귀찮아질 때가 있을 거요."

"난 그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이 아녜요."

"지나친 이상은 좇지 않는 게 좋을 때가 있소."

에드워드는 음흉한 투로 말끝을 돌렸다.

"언젠가 이곳의 후계자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갈지도 모른 일이니까."

"그렇지만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에겐 자녀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어쨌든 나로선 번영을 기원하고 이곳에 들어온 필립 보샹을 위해, 그리고 역사를 함께 나눠 온 아카로아 인들을 위해 이 집을 보다 더 좋은 상태로 보존시키고 싶을 뿐예요."

그런 뒤 모니크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 당신 방에 비가 샜어요. 아세요?"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손수 치워놓았더군. 그렇죠? 목장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수리하도록 합시다. 얼룩이 옷장 뒤까지 번졌소. 그것을 움직이기 위해 옷장 안에 있는 옷들을 꺼내 놓았다는 얘길 앙리에트 부인한테서 들었지만, 밑에 있는 서랍은 열지 않았더군?"

에드워드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은 잘못된 것일까?

", 책을 조금은 꺼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어요. 가장자리를 대패로 약간 밀어야겠던데요."

에드워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분명히 그는 뭔가에 대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모니크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무릎 위에는 낡은 노트가 한 권 놓여 있다. 처음 이곳에 왔었던 운명적인 그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 노트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할아버지가 쓴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에드워드 퍼거슨, 마음 착하고 편안한 사람. 처음 만난 날을 생각해 보면, 자신을 궁지에서 구출해 준 세인트 조지가 보샹 하우스에서 재회한 기분 나쁜 목장 주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세인트 조지? 우스꽝스러운 믿음을 허공에 날려 버리며 웃어 봤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슬픔이 가시지 않는다. 그녀 스스로 그의 이미지를 제멋대로 부풀려 놓았던 것 같다.

장미빛 꿈을 좇는 소녀처럼! 그렇다면 그날 일은 대체 어찌된 일인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클린트를 대하던 다정하고 고마왔던 에드워드는? 아름다운 제비꽃 다발, 공항에서의 키스, 그리고 아름다운 꽃이 담긴 선물은? 그 에드워드는 환상의 인물인가?

모니크는 새삼스럽게 차에 실려 온 꽃이 놓여 있던 탁자 근처로 가보았다. 물론 장미꽃은 이미 시들어 버렸지만, 지금은 그 바구니 안에 산사나무 꽃이 피어 있다. 바구니 밑에 있는 카드를 집어 들고는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다시 만날 때까지. 당신의 로비 번스로부터>

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에드워드는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의미심장한 글을 써서 보낸 것일까? 그리고 전화번호를 물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모니크는 그와 다시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귀중하게 여겼던 카드를 휴지통에 버리고는 양손을 탁탁 털었다. 에드워드의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할아버지의 노트를 읽자.

이 노트를 발견하던 날, 잡동사니로 가득하던 창고에서 테레사 부인이 이렇게 말했었다.

"보세요, 이곳에 있는 것은 잡동사니들일 뿐, 거의가 이곳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교과서나 노트들이죠."

"이런 것들을 소홀히 봐서는 안돼요, 테레사 부인."

모니크가 말했다.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집에는 대개 영웅의 아이들을 위한 교실이 있게 마련이죠. 그러한 저택을 수리해 일반인에게 공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 시대의 교과서는 정말로 욕심 나는 것이죠. 게다가 이곳에 있는 교과서에는 보샹 가 자녀들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에, 만약 이 집을 공개할 경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거죠."

그때 앙리에트 부인의 머릿속에선 지금까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것이 현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살기 전부터 우리들은 보샹 하우스를 역사관처럼 꾸며봤으면 하는 꿈을 꿔왔지요. 그렇지만 너무 나이가 들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답니다. 당신처럼 젊고 지식이 있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또 몰라도...."

모니크는 문득 애머벨 숙모님의 선물을 생각했다. 일 년 동안의 자유, 어쩌면 사랑하는 노자매의 힘이 될 것이다.

다음 순간, <하고 싶어><꼭 그렇게 하리라>라는 결심으로 굳어졌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손에 쥐고 있던 낡은 노트에서 할아버지의 어렸을 때 필적인 것 같은 이름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레어 보샹 할아버지는 힐러리 벨필드라는 영국식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꿔 버렸지만, 일레어는 힐러리의 프랑스식 발음이고 보샹은 영어로는 벨필드- 이것이 우연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노트 한 장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아버지는 집에는 가훈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라도 내 자신의 좌우명을 세워 그것에 맞는 행동을 할 계획이다.

<두려워 말고 전진하라>

오늘 저녁 나 혼자 웃는 올빼미를 찾으러 산으로 가자, 어둠도 두렵지 않다.

 

시드니 집에서 할아버지는 뜰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린 모니크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태어나고 자라난 고장의 이름은 결코 얘기하지 않으셨지만, 언젠가 무심코 말씀하셨던 말이 있다.

"옛날에 나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지. 그때 당시 난 매우 좋은 좌우명을 생각해냈었단다. 지금의 난 그걸 잊고 살지만 말이다. 그러나 너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매우 의미 있는 좌우명이 되리라 생각한다. <두려워 말고 전진하라> 인간은 모두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단다. 그러나 진짜 두려운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전진한다면 길은 열리게 마련이지."

이 정도의 우연이 겹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틀림없이 일레어 보샹은 나의 할아버지일 것이다. 깊은 상처를 준 과거와 벽을 쌓고 이름을 바꾸고, 마음 착한 아가씨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이룬 할아버지. 그러나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은 비극이었다.

딸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하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아버지를 생각하자 모니크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몇 주일 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니크는 일레어의 유년시절의 필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려워 말고 전진하라>

 

6

다음날 아침 모니크는 깊은 상실감을 안은 채 눈을 떴다. 매력적이고 중세 기사의 화신인 줄로만 알았던 에드워드 퍼거슨이 의심 많고 불유쾌한 남자라는 것을 안 이후의 실망감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 삼지도 입에 담지도 않았다. 늘 꺼림칙하게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었지만 고민하지는 않았다.

부친에게 신임 받지 못했던 일레어 할아버지도 상처받지 않았다. 그는 배를 타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던 것이다. 시드니의 작은 항구에서 페리 호를 타고 다니면서 평범한 일상에도 만족하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자식이 태어났다.

그 아들-모니크의 부친이 죽은 후, 그가 남기고 간 미망인과 모니크는 아름다운 시드니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9개월 후 모니크의 어머니는 뉴질랜드 사람과 재혼하여 오클랜드로 이주했지만, 그 어머니도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그리고 지금 모니크는 과거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리운 할아버지의 옛집에 차 있는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난 모니크는 몸에 꼭 맞는 파란색 꽃무늬 바지를 입었다. 망머렌시에서의 일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좋을 것이다. 모니크는 핑크 빛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샌들을 신었다. 그리고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의 방문을 노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제 저녁 얘기로는 에드워드는 누구보다도 항상 먼저 일어나 아침식사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그가 식사를 한 흔적이 없었다. 긴 여행으로 피곤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보샹에 생각지도 않은 침입자가 들어온 것을 알고는 맥이 풀린 것일까? 여하튼 모니크는 관심 없는 척하고 그와 함께 식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크루아상을 데우려고 오븐 스위치를 넣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아름다운 도자기 꽃병을 준비한 다음 모니크는 베란다에 나가 분홍색 꽃을 두 송이 따왔다. 주방으로 돌아온 모니크는 문 쪽으로 향하는 에드워드의 발소리를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가는 모양이다. 문을 연 그는 코르덴 승마복을 입고 칼라 없는 셔츠에 두툼한 파란색 스웨터를 걸친 모습이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느낌이다. 동쪽 창문에서 비쳐드는 햇살이 금발을 반짝이게 하고, 역광을 받은 그의 표정에는 그늘이 져 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모니크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여행의 여독으로 아직 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괜찮으시다면 아침식사 같이 하시겠어요?"

"마틀렛이 부르러 왔기 때문에 바깥 계단으로 나가려고 했었소. 모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글쎄, 새끼양의 머리가 꼬여 있는 줄 사이에 끼여 어미가 새끼를 꺼내려다 뿔로 받아 버린 것 같소. 몇 사람이 간신히 새끼를 꺼냈지만, 녀석이 어깨관절을 다쳤다고 하더군. 몹시 고통스러울 거요. 나도 옛날에 학교 체육관에서 어깨를 다쳐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알죠. 곧 낫겠지만, 부어오르면 큰일이오. 그렇지만 머지 않아 부기도 빠지겠지."

에드워드는 금발을 쓸어 올렸다.

"이것저것 일은 많아도 집에 돌아오면 안심이 돼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넓은 연못보다는 적은 물이 괴어 있는 곳이 더 좋더군. 이곳은 일종의 나의 피난처 같은 장소요."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에도 비난의 투가 젖어 있었다. 포트보샹의 주인들이 아무리 모니크를 좋아한다 해도 이 남자는 그녀를 자신의 안식처에 무단침입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에드워드는 아침식사 준비가 돼 있는 식탁에 눈을 돌렸다.

"꽃까지 있다니, 대단한 서비스로군."

노자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지. 모니크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오븐을 열어 따뜻해진 크루아상을 꺼내 둥근 바구니에 담았다.

"크루아상 아니오?"

에드워드는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누가 만들었소?"

모니크는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요."

"아하, 이런 이유로 두 분이 당신에게 홀딱 반해 있군. 인건비가 싸서 노동력이 남아돌던 그녀들의 모친 시대에는 직접 빵을 불에 구워 만들었소. 그런데 요즘은 오븐에 넣고 굽기만 하면 되는 인스턴트 크루아상도 있소?"

"아니에요, 만드는 방법은 옛날과 같아요. 손으로 직접 만든 거예요. 우선 밀가루를 반죽해서 2시간 정도 냉동해 두죠. 그리고 나서 둥근 그릇에 기름칠을 하고 반죽한 것을 그 그릇에 담아 30분 간격으로 두 번 구운 뒤, 10cm 정도로 4쪽을 내고, 그걸 돌돌 말아요. 마지막으로 계란과 우유를 위에 덮으면...."

에드워드는 놀랍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오래 걸려야 하는 건가? 넓은 저택을 혼자 도맡아 관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보나마나 얼마 못 갈 거라고 얘기하고 싶은 거죠?"

모니크는 화난 투로 말했다.

"매일 크루아상을 만들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한꺼번에 만들어서 냉동해 두었다가 먹고 싶을 때 꺼내 오븐에 구우면 간단하죠."

"만드는 방법은 누구에게 배웠소?"

"할아버지한테서 배웠어요."

"당신 할아버지는 빵 가게 주인이셨소? 아니면 주방장?"

"아니에요."

모니크는 처음으로 웃었다.

"할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 빵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어요. 직업은 선원이셨고, 배가 정박할 때는 시드니에서 관광용 보트를 운전하셨어요."

"휴가철에 할아버지가 사시는 집에 가서 크루아상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은 거요?"

"그렇진 않아요. 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 잠시 조부모 밑에서 기거했었죠. 그러나 아버지가 뉴질랜드 사람이셨기 때문에 이곳으로 돌아온 거예요."

그 이상 얘기할 생각이 없어 모니크는 입을 다물었다.

"...."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크루아상에 눈길을 돌렸다.

"언젠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크루아상의 맛을 보고 싶군."

그는 웃었다.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소. 언젠가도 얘기했듯이, 아침식사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까."

2인분의 아침식사를 이층에서 가져온 후 에드워드는 미리 구워 놓은 베이컨을 접시에 담아 그걸 빵 사이에 기워 넣었다.

"단단한 것, 아니면 부드러운 것? 양쪽 다 구운 거요, 아니면 한쪽 면만 구운 거요? 당신은 뭘 좋아하오?"

"부드러운 것에 한쪽 면만 구운 것을 좋아해요. 그렇지만 아침식사는 토스트와 커피 한잔으로 족하죠."

", 오늘 아침은 예외요. 망머렌시에 있을 때보다도 상당히 여윈 것 같소. 뭐 고민하는 일이라도 있는 거요?"

"아니에요, 이곳에서의 일이 정신이 없는데다 많은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에드워드는 식탁 위에 접시를 놓았다.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군. 클린트 우드의 일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오."

"아녜요, 그렇지는 않아요. 사무실에서의 광경을 목격하기 전부터 가게를 그만두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오해를 풀기 위해 불필요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에드워드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까지의 냉정했던 얼굴은 사라지고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보았던 그런 표정이 되살아났다.

"실례했소. 그런 질문을 하다니, 내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군."

"제가 정말로 클린트의 일로 고민을 한다면 당신에게 마음 쓰지 않았을 거예요. 그날 일은 잊어버리기로 해요. 클린트와는 싸우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여기 팸플릿에 망머렌시의 광고를 실어 줄 수도 있다니까 그는 즉각 협조해 주더군요."

모니크는 잠시 망설였지만 두 사람 사이의 자욱한 연기를 불어 버리고 싶은 생각에서 말을 꺼냈다.

"퍼거슨 씨, 당신이 친아들처럼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을 극진히 모시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이곳에 온 건 당신의 입장을 침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샹하우스를 공개함으로써 경제적인 기반을 잡고 그 두 분이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되게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에요. 아카로아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간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어요. 그렇지만 만약 두 분이...."

모니크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그쳤다.

"두 분이?"

에드워드는 말을 재촉했다.

"왠지 이런 얘기를 할 때면 괜히 감상적으로 되기 때문에...."

"얘기해 봐요. 어떤 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는 게 사실이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오는 건, 때론 경솔해 보이지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하튼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에 관한 일이라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 없으니까."

"만약 그 두 분이 이곳을 떠난다면 파도에 부서진 배처럼 의기소침해질 텐데...."

뜻밖에 에드워드는 진지한 태도로 모니크를 대했다.

"그녀들의 일이라면 사소한 것에서부터 잘 알고 있답니다. 두 분 모두 결혼해서 이곳을 떠났었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가 다시 조상의 땅으로 돌아온 거요. 그녀들이 헌신적으로 돌봐 주셨기 때문에 부친 프랑소와는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이 토지를 떠나지 않으셨던 거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사실 겁니다. 요즘 사정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 이제 이런 얘기는 그만두는 게 좋겠군요."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니크도 그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널려 있던 접시를 식탁 한쪽에 모아 놓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무엇을 말하려 했든지 간에 그가 나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 그만! 이해할 수 없는 에드워드의 일은 잊어버리기로 하자. 그것 말고도 생각해야 할 일이 태산 같다.

오래 전 옛날, 그러니까 10살쯤 됐을 때였던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달랬는가에 대해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때 창밖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한 가지 일에만 노심초사할 여가가 없었단다. 생활고 때문에 일을 해야만 했지. 게다가 성장기에 있는 너의 옷을 수선해야 했고, 필립의 소망처럼 훌륭하게 너를 키워야 했다. 할아버님의 집이랑 정원 그리고 배 등도 손질해야 했고, 네 숙제도 돌봐줘야 했어. 또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너를 달래기 위해 같이 놀아 주어야 했지. 아이들에겐 행복하게 자랄 권리가 있단다. 부여받은 일에 전력을 다한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다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거란다."

"뭘하오?"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모니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만 언젠가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생각했죠. 어머니는 내가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걸 기뻐하지 않으시리라는 생각을... 내게는 아직 개운치 못한 일이 많이 남아 있어요. 어제 왔던 그 단체는 갑자기 방문하게 된 것이고, 그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곳의 준비가 완전히 정비됐다고는 할 수 없어요. 피곤하시겠지만 저녁때 이곳에 있는 골동품 분류나 정리를 도와주시겠어요? 어쨌든 아카로아 사람들도 이곳을 방문할 테니, 분류를 정확하게 해놓지 않으면 안 되죠.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이곳의 역사도 공부해 둬야 해요."

"실은 나도 다락방에 들어가 잡동사니들을 정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소. 그 중엔 귀중한 골동품도 섞여 있을 거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이 악독한 골동품 상인의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 귀중한 물건을 헐값에 팔아 버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 물론 당신은 예외지만."

모니크는 문득 그의 옷장 서랍 속에 있던 그림들을 생각해냈다.

"그래요, 함께 분류하는 것이 좋겠어요. 밤에도... 어머,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이 들어와요."

두 사람 모두 소녀처럼 상기된 얼굴로 주방에 들어왔다.

"에드워드, 모니크는 아직 농장 전부를 둘러보지 못했어요. 괜찮으시다면 차로 우리들과 함께 안내해 주시지 않겠어요? 일단 한 번 죽 둘러보고 나면 이전의 보샹 소유지가 어떻게 돼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요?"

모니크는 당황했다.

"오늘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퍼거슨 씨. 여행 후에 일이 너무 많은 것 아녜요?"

"마고와 케빈이 잘해 준 덕분에 돌아와서 급히 일을 시작해야 할 필요는 없었소. , 부인들은 모자를 쓰세요."

보샹 하우스의 주위도 물론 아름다웠지만, 소유지 전반에 걸친 아름다움은 모니크를 질식시킬 정도였다. 프랑스에 가본 적은 없지만 여러 가지 작물이 심어져 있는 넓은 전원 풍경 등은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프랑스의 분위기와 흡사했다. 그곳은 캔터베리 평원, 혹은 고지대의 광활한 양 목장과도 달랐고, 전에 자주 가보았던 오클랜드의 녹음이 푸르른 웨이카토의 농장과도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생울타리로 빙 둘러싸인 목초지 안은 양들이 새끼를 낳을 때는 적당한 그늘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만큼 숲이 우거져 있고, 푸르디푸른 풀잎이 온통 지면을 덮고 있다. 그리고 새로 단장한 담장에 둘러싸인 밭도 보였다. 한데 그 옆에 팻말 같은 것이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데, 저기엔 뭐라고 씌어 있나요?"

모니크는 눈을 굴리면서 거기에 씌어진 글자를 읽으려고 애썼다. 에드워드는 뽐내듯이 대답했다.

"이곳에선 링컨 대학을 위해 연구를 하고 있소. 귀중한 목초인 워나 칵스풋의 실험적인 재배지."

"워나 칵스풋이오? 그건 일반 칵스풋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스페인 칵스풋의 개량종으로 건조한 구릉지대에서 잘 자라고, 회복력도 강하다고 말할 수 있죠. 아카로아 칵스풋보다 질적인 면에서도 좋고. 그 외에는 근처 해안 절벽에서 자라는 클로버의 생육상태를 실험하기도 하는데, 그쪽 토양은 토박하고 냉한 경사면이지만 흰색 클로버는 오히려 그런 조건에 잘 어울린답니다."

"연구 대상은 칵스풋과 클로버뿐인가요?"

모니크는 열심히 물었다.

"아니오, 그 외에도 우리들은 현재 C.G.S를 개발하고 있소. C.G.S<최신 방목 관리 시스템>으로 자문기관을 통해 구릉지대의 목장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는 방식이오. 목초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전동기를 이용해서 가축을 이동시키죠. 목초의 개량과 C.G.S의 실용화가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예상 하에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는 거요."

에드워드는 듣는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인지 계속 말을 이었다.

"실은 1, 2년 사이에 과수의 실험재배도 시작하리라 생각해요. 아카로아의 호두는 유명하지만, 우리들은 그 외에도 땅콩이나 개암, 포도, 오렌지 등의 감귤류, 또한 링컨 대학에서 개발한 페퍼노스라고 하는 새로운 과일에도 주목할 거요. 가능성은 무한한 셈이오. 아카로아에 살고 있는 어떤 남자가 전형적인 양 사육과 수선화 재배를 조화 있게 해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 아마 부부가 같이 해냈던 모양이오."

구릉지대의 한쪽에는 수선화가 피어 있고, 그 향기가 바다 내음과 소나무의 향기와 어우러져 모니크의 코를 간질였다. 그들은 소유지 전체를 한바퀴 돌아본 후, 돌아오는 도중에 마틀렛의 집 앞을 지나쳤다.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는 나무, 뽕나무, 호두나무 등이 빙 둘러선 프랑스식 지붕의 이층집은 이 아름다운 농장과 더할 나위 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틀렛 일가가 와주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됐소."

에드워드가 설명했다.

"이 댁의 막내는 링컨 대학에 입학했지만 졸업하면 이곳에서 일하리라 생각해요. 케빈도 작년에 대학을 졸업했고, 두 사람 모두 내 사업에 협조해 줄 거요. 장남은 자신의 배를 가지고 어업을 하고 있다는군. 양친 모두 이곳 사람들로 딸들은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중이고. ,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소."

네 사람은 일제히 지붕 위를 바라보고는 열려 있는 창문에서 헝겊 같은 것을 흔들고 있는 부인에겐 손을 흔들었다.

"마리 로즈 부인이군요."

앙리에트 부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운전석 옆에 앉아 있던 모니크는 뒤를 돌아보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마리 로즈라고 하셨어요?"

", 우리 어머니의 이름을 땄죠."

앙리에트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아주 오래 된 일이지만, 어머니는 아직 어린 나이의 마틀렛의 어머니를 도와준 적이 있었지요. 그때 어머니는 말을 타고 언덕 위를 오르고 있었대요. 그런데 절벽에 인형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득히 먼 곳에서 살려 달라고 하는 비명 소리가 났던 모양이에요. 아이가 부상을 입고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는군요. 우리 어머니께서 그 아이를 발견했던 거지요.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말만을 집으로 돌려보냈답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본다면 틀림없이 수색대를 보낼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앙리에트 부인은 자랑스러운 듯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곳에는 새둥지를 찾으러 다니는 소년들이 내놓은 듯한, 겨우 어린 꼬마 하나가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승마복 치마를 입고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당장에 치마와 페티코트를 벗어던져 버렸지요. 그리고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부인용 속옷을 입은 채로 소녀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절벽 밑으로 내려갔어요. 검정색 승마 재킷, 흰색 스타킹... 전통적인 승마복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은 매우 늠름하고 우아해 보였겠지요. 그때의 옷은 아직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어요."

부인은 자세를 바꾸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관목이랑 무거운 바위에 꽉 짓눌려 있던 아이의 다리를 간신히 꺼내긴 했지만 발가락이 심하게 다치고 팔과 다리에는 여기저기 긁힌 데 투성이였나 봐요. 어머니는 열심히 소녀를 달래 주었답니다. <얘야. 이제 곧 돌아갈 수 있어. 너를 도와주러 올 때까지 꾹 참아야 해. 착하지?>하고요. 베로니크는 그 말을 듣고는 꾹 참았다더군요."

모니크는 증조모의 용감한 행동을 듣는 순간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앙리에트 부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먼저 손이 닿지 않는 벼랑에서 소녀를 끌어올려야 했지요. 베로니크의 다리는 골절상을 당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근처에 버려져 있던 널빤지와 나뭇가지 등을 주워다가 다리에 갖다 대고는 스타킹과 핀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나뭇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모아의 뼈였대요. 혹시 모아가 뭔지 아시나요?"

모니크가 머리를 젓자 앙리에트 부인은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다.

"모아라는 건 아주 오랜 옛날에 멸종됐다는군요. 타조 비슷한 뉴질랜드 산 새죠. 그때의 뼈는 지금까지도 박물관에 있어요."

", 그래요?"

모니크는 눈을 반짝였다.

"우리 언제 한 번 보러 갑시다."

앙리에트 부인은 살며시 웃고는 마리 로즈의 얘기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아이를 안아다가 바위 위에 올려놓았죠. 수색대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베로니크가 무사하기만을 기도했을 거예요. 말을 위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각설탕을 주기도 하고,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몹시 놀라 있는 베로니크가 안심하고 잠들 때까지 노래를 계속해서 부르고 또 부르고 했던 거죠. 아버지는 곧잘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절벽 위에 흩어져 있던 어머니의 옷과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던 노래소리는 일생 동안 잊을 수가 없어>라고...."

테레사 부인이 언니의 말을 받았다.

"어머니의 옷을 본 순간 아버지는 틀림없이 마음을 졸였을 거예요. 아버지는 곧 사태를 파악하고 들것을 갖춘 수색대를 보냈죠. 그런 후 당신께서도 직접 절벽 밑으로 내려가셨던 거예요. 우선 아이가 들것에 실렸고, 다음에 어머니, 그리고는 아버지가 그 곳에서 빠져나왔던 거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바지를 허리에 둘렀고, 아버지는 팬티 바람이었고!"

테레사 부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젖혔다.

"그래서 그 때는 모두 크게 웃었고, 누구 한 사람 웃지 않은 사람이 없었죠. 그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자주 악몽을 꾸시곤 했답니다. 벼랑에 걸려 있는 어머니의 치마를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팍 끼쳤다고 하셨어요."

모니크의 눈동자는 태양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아주 멋진 얘기군요. 바위처럼 무뚝뚝하고 엄한 프랑수아 보샹의 마음속에 그런 상냥함이 있었다니!"

노자매는 부끄럽다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앙리에트 부인이 말했다.

"우리가 너무 수다스럽지나 않았는지... 아버지는 우리들 처녀시절에 이미 우리에게 두 손 드셨답니다."

"아니, 천만에요."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프랑수아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두 사람 모두 극진히 아버님을 보살펴 드렸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앙리에트 부인은 줄곧 침대 옆에 붙어 있으면서 마치 마리 로즈가 곁에 있는 것처럼 하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아버지가 날 어머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앙리에트 부인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병든 사람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앙리에트 언니, 언니는 그때 식사도 않고 우유 한 잔만 마셨을 뿐이에요."

테레사 부인이 말했다.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테레사, 너도 그날 아버지가 천국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가시자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장미꽃을 꺾어 오겠다며 수 킬로미터를 걸었잖니?"

모니크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프랑수아 보샹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정말 마음씨 좋은 분이셨군요. 자식도 믿지 않는 무척 완고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죠."

앙리에트 부인은 후회하듯이 얘기했다.

"당신과 통화할 때, 아버지께선 마음 한구석에 악마와 친구인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었죠.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이제부터라도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아차. 모니크는 자신을 힐책했다.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프랑수아를 전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다니 존경하던 할아버지가 집을 나간 원인이 증조부에게 있다고 믿게 된 이후부터 그녀는 그를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일고 있다.

"악마인지 천사인지, 한마디 말로써 인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속엔 장점과 단점이 함께 들어 있는 경우가 보통이죠."

핸들을 잡고 있는 에드워드를 테레사 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당신에게도 결점이 있죠. 언제나 그 것 때문에 실패하기도 하고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약한 여성을 궁지에서 구출해내는 것까진 좋지만, 그 후가 좀, 도움을 받은 아가씨가 거의 당신에게 반할 거라는 것을 계산에 두는 것부터...."

모니크는 깜짝 놀라 몸이 굳어졌다.

"맘대로 상상하시는 건 금물입니다."

에드워드는 힐끗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는 아무 사심 없이 곤경에 빠져 있던 사람을 도와줬을 뿐입니다. 여자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텐데, 어떻게 모른 체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도와주었다고 해서 영원히 그 사람이 내게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앙리에트 부인은 에드워드를 야유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크라이스트처치의 가게에 있는 여자는 어떻게 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때는 당신들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 나 혼자로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앙리에트 부인은 모니크를 위해 설명했다.

"사장이 가게 여점원에게 혹독하게 굴고 있을 때,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에드워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는군요."

부인은 그때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잠깐 웃어 보였다.

"문제는 점원 한 사람이 우연히 에드워드를 알고 있었고, 그 여자에게 이곳 주소를 알려 주었다는 거예요. 다음 일요일, 그녀는 양친을 모시고 이곳에 왔답니다. 그 후 혼자서 아마 세 번 정도는 왔었을 거예요. 에드워드에게 푹 빠져 버렸던 거죠. 에드워드도 매우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아가씨를 쫓아보내지 못하고...."

"좋도록 생각하십시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시는군요! 어쨌든 내겐 금방 잊혀진 일이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은 그때 우리들 도움을 받았죠. 우린 아가씨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번 주말에 시간이 나면 이곳에 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에드워드의 약혼녀가 오기 때문에 소개해 드릴까 해서요. 물론 그녀는 에드워드를 존경하고 있지만, 당신 일을 알게 된다면 그를 숭배할 거예요> 하고요. 그 아가씨는 당장에 돌아갔죠. 우리의 거짓말은 효과만점이었어요. 그렇지, 테레사?"

에드워드는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그런 말씀을 계속하실 작정이라면 차에서 내려 주시겠어요? 그 사실을 말한다면 굳이 도움까지 받을 필요는 없었어요. 기회가 있었다면 나로서도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앙리에트 부인이 물었다.

"전혀 희망 같은 것이 내포돼 있지 않은 글을 꽃다발과 함께 보낸다든가...."

에드워드의 말 속에는 비난의 빛이 서려 있었다. 모니크는 턱을 치켜들었다. 좋아요! 그게 당신 본심이라면.

"어떤 글을 쓰셨을는지 가르쳐 주실래요? 혹시 <만나서 즐거웠지만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쓰셨겠어요? 아니면 지나가는 배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준 것처럼, <당신을 구해냈으니 이제는 다시 항해를 계속하겠습니다>라는 말? 그렇다고 해도 그 여자가 여전히 당신에게 반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마음 속으로는 끙끙 앓지만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는 사랑도 있죠."

곁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에드워드의 시선을 모니크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암시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진 않소."

"에드워드, 쓸데없는 얘기는 하는 게 아니에요."

앙리에트 부인은 손자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에드워드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낭만적인 얘기는 시간이 가면 흔히 통속적으로 들리는 법이랍니다."

차가 높고 작은 언덕을 오르자 눈 아래에는 새로운 목초지가 넓게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새끼 양들을 뒤쫓는 건강한 어미 양들이 떼지어 있어 마치 에메랄드빛을 배경으로 한 순백색의 눈처럼 보였다.

오늘 아침의 태평양은 더더욱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고, 아득히 먼 수평선은 라벤더 빛의 하늘과 맞닿아 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레이스를 단 것처럼 출렁이고 있다. 바다 위에는 컨테이너선과 짐을 부리기 위해 항구를 향하고 있는 유조선이 떠 있고 작은 트롤선이 이곳저곳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다.

하늘에는 어선을 탐색하는 소형 비행기, 저 멀리 콩알처럼 보이는 것은 일본과 소련 트롤 선단일까? 그리고 저 대형기는 크라이스트처치 상공을 날아 아직 미지의 세계인 남극대륙으로 향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두 사람... 그녀는 지금 이곳, 새사냥을 좋아했던 일레어 보샹의 고향에 에드워드 퍼거슨과 함께 있는 것이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운명의 장난일 것이다. 27년 동안 그 어떤 남자도 모니크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갑자기 모니크의 인생에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그녀 내부에 잠자고 있던 욕망을 일깨운 것이다. 빨간 장미꽃과 함께 보낸 메시지, <다시 만날 때까지, 당신의 로비 번스로부터> ...

그가 인용한 번스의 시는 이렇다.

<나의 사랑이여, 당신은 다홍의 장미꽃...>

희망이 무너지긴 했지만 그것은 마치 재회의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노자매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상냥하지만, 왜 그런지 모니크에게만은 차가운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세인트 소지...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좋아! 난 괜찮아! 그리고 두렵지도 않아!

 

7

보샹 하우스의 명성은 몇 주일 동안 점점 높아만 갔다. 마고와 피에르 라베주는 자신들의 모텔 손님들에게 보샹 하우스까지 걸어가 볼 것을 권했다.

둘째날, 라베루 부처는 9O살을 넘어섰지만 아직까지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로시뇰 부인, 라치우드와 그의 손녀 스재너, 그녀의 약혼자인 모건과 함께 찾아왔다.

이날은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날은 아니었지만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손님맞이할 준비에 분주했고, 에드워드는 농장 일을 쉬어야 했다. 노자매는 자랑스러운 듯이 모니크를 소개했다. 그들은 모두 먼 친척 뻘 되는 사람들이었다. 에드워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카로아 사람들의 친족 관계는 아주 복잡하죠. 당신에게 설명해 줘도 잘 모를 거요. 서로 얽히고 설켜 있어서...."

모니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일레어 보샹의 손녀라구요. 당신들은 지금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뿐...

그러나 이곳에 와서 보샹 가의 골동품들을 정리하는 동안 모니크는 언젠가는 그 사실을 그들에게 털어놓아야 할 날이 올 거라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보샹 가의 손녀가 되면 보샹 가의 상속인으로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재산이란 귀찮은 것이다.

로시뇰 부인이 말했다.

"모니크, 당신이 아까 방에 들어왔을 때 믿기지 않는 점을 발견했어요. 당신의 걷는 그 모습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프랑수아를 연상케 하는... 그래요, 이런 생각을 마음속으로 했답니다. ...어쩜, 마리 로즈를 닮은 것 같네 하고...."

"영광이군요."

모니크는 뺨을 붉히고는 기쁜 듯이 눈을 반짝였다.

"왜 그런지 태어나기 전부터 마리 로즈 부인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에 대해 별로 호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벼랑 밑에서 베로니크를 도와 줬다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부인은 언제나 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지요. 전 유서 깊은 이 집에 머물면서 옛날 일을 상상하고 마리 로즈 부인이 사용했던 식기를 쓰고, 그녀가 사용했던 램프를 닦기도 했어요."

로시뇰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아카로아에서는 과거가 현재와 분리될 순 없는 거죠. 영웅들이 단장해 놓은 해변이나 경작해 놓은 땅 위에 우리들은 고층건물을 세운 거예요. 과거는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있는 거랍니다. 프랑스 혁명 후 유일하게 몸에 달 수 있었던 액세서리 중에 쇠로 만든 귀걸이가 있었어요. 가끔 댄스파티 때 이 귀걸이를 단 아가씨를 볼 수 있었죠. 옛날에는 많이 볼 수 없었는데 요즈음은 골동품을 취급하는 상인들에게 많이 팔리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로시뇰 부인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앙리에트, 테레사, 당신들이 말씀하신 이 아가씨 말예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가 매우 훌륭하군요. 늙은이의 말은 따분할 때가 많은 법인데,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꼼짝 않고 귀기울이는 태도를 보면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마고가 조용하게 말했다.

"로시뇰 백모님의 화술이 좋기 때문이죠. 작은 백모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아세요? <로시뇰 백모님 정도로 화술이 좋은 분도 없을 거야>라고 말씀하셨죠."

"나도 동감입니다."

모건이 맞장구를 치고는 에드워드 쪽으로 갔다.

"괜찮으시다면 아까 말씀하신 걸 보러 갑시다."

두 사람은 함께 나갔다. 모건도 캔터베리 평원의 산기슭에서 목장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아마 양모의 품질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농장 사무실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나온 제초제나 살충제 등에 대해서도 의논할 것이다.

모니크는 이층에서 마리 로즈 부인의 초상화를 꺼내 테레사 부인에게 잠시 맡기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에드워드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그 소리에 멈춰 섰다. 무엇인가를 움직이고 있는 소리였다. 모두들 계단 밑에 있었다. 그렇다면 바깥 계단에서 누군가가 몰래 잠입했단 말인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 사람들을 부르러 간다면 그 사이에 침입자는 도망가 버릴 것이다. 모니크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문 쪽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고는 문을 홱 열어젖혔다. 옷장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두 남자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고, 모니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도둑이 들어온 줄 알았지 뭐예요. 사무실에 가신 줄 알았는데 가구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서... 지금 이 시각에 가구를 움직일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구요."

에드워드가 당황해하며 입을 열었다.

"이 망가진 서랍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어떻소, 모건? 이 서랍을 꺼내 대패로 가장자리를 깎아내도록 하는 게?"

그리고 나선 모니크에게 말했다.

"모건은 이곳에 있는 옛날 출납장에 흥미를 가지고 있소. 과거와 현재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죠."

모니크는 별반 관심 없는 것처럼 말했다.

"서랍이 쉽게 열리지 않는 것은 불편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를 도둑이 듣는다면 놀라서 도망칠 거예요. 일종의 안전장치라고도 볼 수 있죠."

"오래 된 출납장을 갖고 싶어 하는 도둑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소. 잠깐 보고는 아마 집어던져 버릴 거요."

에드워드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모니크를 방에서 몰아냈다.

그날은 하루종일 그 일이 모니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쓸데없는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기 스스로를 타일러 보았지만, 빈손으로 왔던 모건이 그림들을 가지고 차에 오르는 것을 본 순간 의심은 더욱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지만 모니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2. 3일 지나자 모니크는 거의 그 일을 잊게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태도에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보샹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일을 회상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 서먹서먹한 태도는 어찌된 일이었을까? 변화에 대한 남성 특유의 거부반응이거나, 아니면 변덕스러운 여자가 용감하게 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것은 좋지만 결국에는 싫증을 내고 노자매를 실망시킬 거라는 걱정이 들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도움을 준 여자를 다시 만나 그 여자에게 묶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만약 그런 이유였다면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도 곧 알게 될 것이다.

4일 후, 로시뇰 만에서 손님이 온다는 연락이 왔다. 앙리에트 부인이 청소기를 들고 에드워드 방으로 가면서 모니크에게 말했다.

"늘 청소하러 오는 불렌 부인은 눈에 보이는 데만 대충 청소하죠. 종종 우리들이 방 청소하는 것을 감독할 때도 있지만, 에드워드 방만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내 버리곤 한답니다. 마침 오늘은 그녀가 쉬는 날이니 이 기회에 좀 구석구석까지 깨끗이 치워 주시겠어?"

", 물론이에요. 하지만 먼저 에드워드에게 양해를 구한 후 시작해야 하잖을까요?"

"에드워드는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예요."

테레사 부인이 말했다.

"사적인 물건은 이곳에 없어요. 서류 등 중요한 것은 마구간 위의 사무실에 있다더군요. 아직 그곳을 구경해 본 적은 없지만, 우리들이 에드워드를 위해 그 다락방을 제공했지요. 링컨 대학의 공간연구라고 하는 것은 대개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가끔은 그도 수다스러운 늙은이들한테서 해방되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에드워드는 종종 사나운 말을 타고 항구 쪽으로 나갈 때가 있지요. 염려하지 말고 시작하세요. 아주 깨끗이 청소하시리라 믿어요."

청소기를 밀고 다니면서도 모니크는 몇 번이나 서랍에 눈이 갔다. 청소를 끝내고 난 다음에는 청소기의 먼지를 털고 가구용 왁스를 천에 발라서 가구들을 깨끗이 닦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니크는 망설이던 끝에 옷장 근처로 가서 있는 힘을 다해 서랍을 힘껏 잡아당겼다. 순간 그 서랍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쑥 빠져나왔고 그녀는 그 바람에 푹 주저앉고 말았다. 모니크는 속으로 웃었다. 틀림없이 그들이 서랍 가장자리를 깎아 놓은 듯싶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그쳤다. 거미줄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고 출납장들은 깨끗이 정돈돼 있었다. 그러나 그림들이 없었다.

모니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좋을까? 이럴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나? 그러나 아직은 심증일 뿐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경솔한 행동은 오히려 에드워드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다. 하지만 만일 부정이 행해졌다면, 그리고 그것을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이 알게 된다면 이곳에서의 평온한 생활은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이다.

모니크는 괴로웠다. 사랑하는 노자매의 행복을 파괴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 그림들이 어떻게 된 건지는 에드워드에게 물어 봐야 한다. 그렇지만 언제, 어떻게 그런 얘기를 꺼낸단 말인가?

그런저런 생각이 오전 내내 모니크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됐든지 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고 생각한 모니크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꽃병에 꽃을 꽂아 놓고, 보샹 가의 사람들이 몇 세대에 걸쳐 사용했던 계단을 닦고, 그 일이 끝난 뒤에는 베란다의 타일을 닦았다.

"힘들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만류하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에게 모니크는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마루를 닦는 기계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가끔은 이렇게 손으로 직접 닦는 게 좋아요. 덕분에 운동도 되구요."

"운동삼아 일을 한다는 말을 들으니 부럽군요. , 나도 다시 젊음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런데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아 보여요, 모니크."

모니크는 밝게 웃으면서 머리를 저었다.

"아녜요, 그렇지만 걱정해 주시니 고마워요. 저는 늘 다른 사람들한테 매우 수척해 보인다는 얘기를 듣곤 하죠."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사랑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모니크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우리들에게 무척 소중한 사람이에요."

"고맙습니다. 그런 근사한 말씀까지 해주시다니! 조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어요. <마음에 있는 말은 겉으로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두번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지>라고 말예요."

모니크는 기쁜 마음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멋있군요! 빗자루와 걸레에서 얻은 깊이 있는 철학이로군!"

에드워드의 목소리였다.

", 점심은 언제 먹죠? 때가 이르긴 하지만 30분쯤 후에 전화 올 데가 있어서 일을 빨리 마무리지어야 하거든요."

"곧 준비하죠."

테레사 부인과 앙리에트 부인은 일어서서 나갔다. 덕분에 에드워드와 모니크만이 덜렁 남게 됐다. 에드워드도 나가줬으면 좋겠다. 모니크는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에드워드, 왜 그렇게 전화기 옆에 앉아 계시죠?"

"지금 당장 올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러고 있으면 그녀들도 일을 서두를 것 같아서...."

모니크는 걸레질을 한 번 더 한 후에 일어섰다.

"모니크, 안색이 전 같지 않은데,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소?"

에드워드가 물었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모니크는 어색하게 상대방의 시선을 피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녜요."

에드워드는 모니크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검은 눈동자를 자신의 눈을 향하게 했다.

", 내 눈을 똑바로 봐요. 그리고 말해 봐요."

차디찬 손가락의 감촉을 의식하면서 모니크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누구라도 이럴 때가 있을 거예요.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 울고 싶을 때가 있지만,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럴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종종 필요 이상의 것을 입 밖에 내곤 하지요. 한 번 입 밖에 내버린 말은 다시 담을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어요. 난 괜찮아요. 이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요. 다만 어떤 일도...."

"내게 말해 줄 수 없겠소?"

"지금은 아직... 그러나 언젠가는 말씀드릴 날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지금 얘기해도 괜찮지 않겠소? 그러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질 텐데."

"당신이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얘기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아무튼 매우 미묘한 문제라서...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좋소! 그렇게 합시다. 대신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에드워드는 눈썹을 찡그렸다.

"혹시 더 이상 이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얘긴 아닐 테지? 그 일로 두 사람을 슬프게 해서는 안돼요."

"그런 건 절대 아녜요! 보샹 하우스도 마음에 들고 또 난 일하는 걸 좋아해요."

그때 테레사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드, 전화예요. 모건이에요. 지금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다는군요."

에드워드는 집안으로 들어가고, 모니크는 양동이의 물을 장미 나무에 뿌려 주었다. 조금 벌어진 꽃봉오리들이 눈에 띄었다. 모니크는 아름다운 꽃봉오리에 살짝 손을 댔다. 다홍빛 장미꽃....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모니크는 계단 아래 있는 세면장으로 가서 손을 닦고 머리를 감았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자 모니크는 고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한다. 전화 때문일까?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음에 걸려 있던 것을 얘기한 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문제를 간단히 말해 버릴 수는 없다.

모니크는 무심결에 샐러드를 집어들다가 에드워드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모니크,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휴식인 것 같소. 지금까지 보샹 하우스를 위해 달리는 말처럼 일해 왔기 때문에 전혀 쉴 새가 없었죠. 실은 당신의 지나친 일벌레 습관을 고칠까 해서 오늘 저녁 타운홀에서 하는 연극 티켓을 두 장 사 놓았소. 어떻소?"

모니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물었다.

"타운홀이라뇨? 크라이스트처치 말씀이세요?"

"맞아요, 시골구석에 있는 극장 말이죠?"

표정을 보아 하니 노자매도 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순간 모니크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왕복 160 Km의 드라이브라...? 단둘만이 있는 차 안이라면 훨씬 얘기하기가 좋겠지. 모니크는 웃었다.

"고마워요, 기꺼이 함께 가죠."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머나, 근사해라! 무슨 옷을 입고 갈 거죠?"

모니크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고민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파란색 벨벳으로 만든 드레스에다가 밍크 숄을 둘러볼까? 아니면 금실을 섞어 짠 검은 망토를 두를까?"

네 사람은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테레사가 말했다.

"정말 뭘 입고 가지?"

"정장을 해야 되나요?"

모니크가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이 공연 첫날인가요?"

"그렇다는군. 난 이브닝재킷을 입고 가려고 하는데, 당신도 가능하다면 라임 색깔의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가는 게 어떻겠소?"

"라임 빛깔의 드레스요?"

모니크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내게 그런 옷이 있는 걸 어떻게 아세요?"

"맨 처음 봤을 때, 당신은 라임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소."

"아녜요, 그때는 핑크색 긴 드레스에 흰 물방울무늬가 그려 있는 옷이었어요. 사장 취향에 맞춘 제복 중의 하나죠. 에드워드, 혹시 꿈속에서 보신 걸 말씀하시는 건 아닌가요?"

"분명히 처음 봤을 때를 얘기하는 거요. 내가 당신의 가게를 방문했던 날은 이미 구면이었지."

"난 그전에 만나 본 기억이 없는데요?"

"아니오, 언젠가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소. 어느 더운 날 크라이스트처치에서였소. 당신은 아주 작은 물방울 무늬가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소. 한낮인데도 당신은 긴 디너드레스를 입은 채 미나리아재비와 데이지 꽃을 담은 밀짚모자를 가슴에 꼭 껴안고 있었소. 그 모자에는 갈색 리본이 둘러져 있었을 거요. 앞도 보지 않고 정신없이 걷던 당신은 아마 거리에서 마드라스 거리로 가던 중 나와 충돌했고, 그 바람에 모자가 찌그러졌지. 당신은 내게 이렇게 소리쳤었소. <앞 좀 보고 다니세요!> 그리고 나서 당신은 모자를 바로잡아 썼소."

그는 모니크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보냈다.

"그때 내가 막아주지 않았던들 넘어졌을 텐데도 당신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도로를 따라 강가에 있던 교회 쪽으로 사라졌소. 바로 그 아가씨가 두 분이 내게 만나 보라고 권했던 망머렌시의 모니크였다니! 그날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는 길이었소?"

모니크는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긴 했으나 잘 기억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와 부딪치긴 했는데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날은 참 운이 나빴어요. 마치 장애물 경주라도 하는 기분이었죠. 당신도 장애물 중의 하나였지만. 그날 옥스퍼드 테라스 침례교회에서 친구 결혼식이 있었어요. 전 신부 들러리를 서기로 했었구요. 꽃가게에 전화를 걸어 봤더니 배달용 트럭이 고장나서 꽃다발을 직접 교회로 보내 주겠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꽃다발이 도착하지 않아 집을 나설 수가 없었어요. 난 그날 시간을 절약하려고 신부 집에 있었거든요."

모니크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눈을 반짝이면서 노자매에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택시를 집어타고 달리고 있었는데, 글쎄 그 택시마저 도중에 고장이 났지 뭐예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에요. 택시는 좀체 잡히질 않죠, 교회 앞에서 신부를 기다려야는 하죠, 그래 정신없이 마구 뛰었던 거죠. 그런데 그 바보 같은 모자가 바람에 날려 과일 가게 앞에 놓인 오렌지 위에 떨어져 버렸지 뭐예요. 잘 익은 포도 위에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죠. 모자를 주워 다시 쓰고는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어떤 남자와 충돌해 버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당신이었단 말인가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여튼 난 다시 모자를 바로 쓰고 마구 달렸어요. 거의 동시에 신부도 도착했죠. 본당 안으로 들어갈 때도 난 어느 쪽이 신부 쪽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요란스러운 웃음소리가 가라앉은 후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날 사건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망머렌시에서 당신을 보고는 깜짝 놀랐소. 내 말을 열심히 듣던 당신 모습을 보면서 자꾸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그때 난 잔뜩 긴장했었소."

에드워드는 시계를 보았다.

"1시 반까지 선창에 가야 하오. 오후 차 시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요. 어쨌든 모니크, 그날 입었던 드레스는 가져왔소?"

모니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 옷을 입으라고 다시 권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앙리에트 부인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하더니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마치 우리들 아버지 같군."

"무슨 뜻이죠?"

"자기 취향에 맞는 옷을 입도록 일방적으로 명령하다니. 당신은 화 안 나요?"

모니크는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가볍게 웃었다.

"재미있는 분이로군요."

테레사 부인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래요, 어쨌든 우리 여자들이란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죠. 내 남편 로버트는 귀여운 옷을 좋아했기 때문에 특이한 것은 좀처럼 받아들이질 않았어요. 언젠가 방을 달린 화려한 모자가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아세요? 내 것은 특히 방울이 반짝반짝 빛나서 눈이 부실 정도였죠. 침대에 놓인 모자를 보고 로버트는 좀 사치스럽지 않냐고 말했죠. 걸을 때마다 이상스러운 소리가 나는 모자를 쓰고 교회에 같이 갈 수는 없다고 야단이었어요. 30분 정도 말다툼 끝에 결국 내가 졌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그것을 써보지 못했죠. 물론 나도 순순히 물러난 건 아니었어요. 매우 불쾌한 투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아내에게 모자 하나도 사주지 않는 인색한 남편이라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예요."

모니크와 앙리에트 부인은 마주보고 웃었고, 테레사 부인은 계속 과거를 회상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목사님이 신랑신 부에게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들은 쑥스러워 그만 웃어 버렸죠. 로버트는 축사를 읽어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 앞으로 가야만 했답니다. 혹시 가족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지나 않을까 해서 내심 끙끙 앓았죠. 그러나 로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음날 나를 시내에 데리고 나가 가게에서 제일 비싸 보이는 예쁜 모자를 사주었답니다. 물론 소리는 나지 않는 것이었죠."

모니크는 일어나서 식탁을 돌아 앙리에트 부인의 어깨를 잡았다.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니... 이곳에 와 처음으로 태어난 기쁨을 알게 됐어요."

앙리에트 부인은 모니크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말했다.

"고마워요, 모니크. 당신 덕분에 우리들도 다시 젊어지는 것 같아요. , 남은 일은 우리들에게 맡기고 좀 쉬도록 해요. 타일 닦느라 힘들었죠? 드레스를 다릴 거면 우리들에게 부탁해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오늘 저녁 우리 어머니의 목걸이를 하고 가세요. 라임빛 드레스에 잘 어울릴 거예요."

"그러도록 하죠. 그렇지만...."

"자 자, 쓸데없는 걱정은 금물이에요."

그림에 관한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모니크는 30분 정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에드워드도 오래 된 프랑스제 시계를 헐값으로 구입한 게 아닐까 하고 그녀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비가 새던 날, 서랍을 열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아 조급한 마음에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냈었다고, 얼핏 보기에 몇 장의 그림은 가치가 꽤 있는 것 같으니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해 보면 어떻겠냐고 말해 볼까?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에드워드도 상처받지 않을 테고, 그에게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모니크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샤워를 했다. 좀전에 베란다에서의 에드워드는 전보다 휠씬 친절하게 나를 대했다. 그런 모습으로 대해 준다면 별 걱정 없으련만...

오후가 되자 두 사람은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모니크는 전신을 비춰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상기된 뺨에 손을 갖다 댔다. 에드워드가 이 드레스를 기억해 주다니!

거울을 바라보면서 모니크는 냉정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모니크. 첫 데이트에 흠뻑 취해 황홀해하고 있는 17살 소녀가 아니라구!

그때 거울 끝에 미소짓고 있는 에드워드의 모습이 나타났고, 모니크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울을 보면서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재미있군. 그러나...."

조금 열려 있던 문 쪽에서 천천히 다가선 그는 거울 앞에서 멈춰 섰다.

"아주 멋지군. 그런데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소?"

", 조금...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녜요. 그저....."

모니크는 마리 로즈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저라니?"

"아녜요, 그저 그녀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에드워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그 목걸이가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 거요? 아주 작은 액세서리를 좋아하는가 보군."

", 그런 편이에요."

모니크는 그의 통찰력에 혀를 둘렀다.

"그렇지만 상관없어요. 두 분 모두 날 귀여워해 주시는데 굳이 호의를 무시할 필요는 없죠."

"정식 파티도 아닌데 몸치장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는 것 아니오? 타운홀에서라면 아주 썩 잘 어울리는 복장 같은데... 신부 들러리를 설 때는 어떤 걸 했었소?"

"갈색 벨벳에 달린 금장식을 했죠."

"이 드레스에 잘 어울릴 것 같군. 그렇다면 그걸 하도록 해요. 주머니에 넣고 가서 차 안에서 목걸이와 바꿔 달면 되잖소."

"그렇지만 그러면 그녀들을 속이는 게 돼요. 그 두 분에겐 항상 성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소. 난 당신의 그런 점이 좋소. 성실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곧은 마음이 말요."

에드워드는 재빠르게 몸을 굽혀 모니크의 립스틱을 바른 입술 끝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 갑시다. 가는 도중에 천천히 당신 얘기를 듣도록 하고. 어서 서둘러 나갑시다."

", 그래요. 그렇지만 그 얘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당신에게 얘기하지 않아도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는 것보단 얘기해 버리는 편이 좋아요."

계단 아래에서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한 뒤, 에드워드는 모니크의 손을 잡았다. 진주 백을 들고 이층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니크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성실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기 안에 조금이라도 꺼림칙한 점이 있다면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그림이 갑자기 없어진 데에는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러한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도저히 그에게 난 당신을 의심하고 있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건 전화예요."

앙리에트 부인이 수화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들이 나가려고 한다니까, 그 사이에라도 잠시 통화했으면 하던 걸요. 무척 급한 일인가 봐요."

에드워드는 수화기를 들고는 빠르게 얘기했다.

"여보세요, 모건?"

그는 잠깐 귀를 기울인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이오? 진짜란 말이오? 영국 박물관에 있는 필적과 같다면 확실합니다. 아직 공표하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귀를 쫑긋하고 있는 부인들껜 말씀드릴 작정이오. ...좋아요, 알았습니다. , 내일 또 전화합시다. 고맙소."

수화기를 내려놓고 난 뒤 에드워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젠가 마구간 이층에서 상자에 들어 있던 옛날 그림을 보았죠. 그게 찰스 메리언의 미완성 작품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답니다. 그러나 가짜일 가능성도 부정할 순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사실을 모건에게 상세히 상담한 후, 그 그림들을 사진복사해 런던 박물관에 보냈고, 감정을 의뢰했답니다. 그 결과, 그 그림들은 진품이라고 알려 온 거지요. 결국 우리들은 프랑스 이주민들의 역사 중 제일 오래 된 한 편을 발굴하게 된 겁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아주 고가의 예술품이랍니다. 아니, 모니크, 왜 그러지?"

에드워드는 모니크의 양어깨를 잡고는 의자에 앉혔다.

"얼굴색이 좋지 않은 것 같군. 내 얘기에 충격을 받았나?"

"아니에요, 나로서도 매우 기쁜 일이죠. 공포에서 풀려날 때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곤 하지요. 지금처럼 굉장한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구요.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 다행이야! 에드워드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

 

8

모니크는 금방 냉정을 되찾고는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저녁 네 사람 모두 크라이스트처치에 가서 멋진 축제를 벌여야겠군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이 웃었다. 모니크는 그처럼 즐겁고 행복한 웃음소리를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모니크는 정말 순진한 것 같아요."

앙리에트 부인이 말했다.

"에드워드가 잘 돌봐 줄 거예요. 우리는 이제 너무 늙어서 왕복 160km나 되는 드라이브는 무리예요. , 즐겁게 다녀오세요. 그쪽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해도 오랫동안의 드라이브를 한 후에는 출출할 거예요. 과자 좀 싸줄 테니 잊지 말고 드세요. 어머, 모니크! 당신 정말 멋있군요! 그 드레스를 에드워드가 잊지 않았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군요. 그리고 그 꿀빛 코트도 멋있고."

 

에드워드가 말을 꺼내기 시작한 것은 뒤보씰 만을 지나면서부터였다.

"힐탑 호텔의 전망대에 차를 세우도록 합시다. 그쪽 경치는 매우 훌륭하지. 당신의 마음을 녹일 수도 있고, 조용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장소로도 적격이오. 당신은 분명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까 모건의 말을 듣고는 당신 얼굴이 새파래지는 것을 보았어.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등의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고백한다면 두 사람 사이에 싹트고 있는 신뢰감이 무너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하튼 에드워드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차는 전망대 주차장에 세웠다. 에드워드는 우수에 젖어 서 있는 모니크를 바라보고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손을 얹었다.

"보샹 하우스에서 당신을 처음 봤을 때는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소. 그러나 나는 원래 따뜻한 사람이오. , 걱정하지 말고 얘기해 봐요."

"사람들 앞에서 내 감정을 속속들이 보여 준 적은 없어요. 내 고민을 남에게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히고 싶지도 않아요."

"상처를 입히다니? 누가 누구를?"

"당신을...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깊은 상처를 받을 거예요. 그리고 기분 나쁠 거예요. ... 당신은 상점에서 내가 프랑스제 시계를 헐값으로 사서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었죠? 그때 나는 무척 기분 나빴었지만, 난 당신을 그보다 몇 천 배 더 오해했었죠. 어머, 에드워드, 죄송해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 너무 두서가 없어졌네요. 만약 내가 당신을 오해한 얘길 듣는다면 당신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는지."

에드워드는 소리 내어 웃고는 모니크의 양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장말 그럴 것 같군. 그런 당신 태도가 불만이지만, 정직한 말을 하는 당신도 과히 나쁘진 않소. 왜 내가 기분 나쁘게 됐는지 자, 얘기해 봐요."

갈색 눈망울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은 라임빛 드레스를 적셨다.

", 당신이 혹시... 찰스 메리언의 그림을 훔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했었어요...."

모니크는 매우 비참한 기분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 당신은 나의 성실성, 곧은 마음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때 당신이 그런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지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고,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었던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유를 듣고 싶어 하고...."

에드워드는 진지한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맞받을 용기를 가까스로 긁어모으면서 모니크는 그의 분노의 폭탄을 받아들일 각오를 했다. 에드워드는 모니크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그 그림을 알고 있었다니! 어쨌든 그대의 인내심도 대단하군."

그는 상냥스러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에겐 대단한 용기도 있군. 모건에 의해 사실이 밝혀진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얘기해 주다니 정말 고맙소. 자 눈물을 닦아요."

그는 손수건을 꺼냈다.

"어떻게 그 그림을 알게 됐는지 처음부터 얘기해 주겠소?"

모니크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울해 있었소?"

그는 진주 백에 눈길을 떨구었다.

"혹시 화장품을 가져왔소? 화장을 고치는 게 좋겠소. 예쁜 얼굴이 다 망가졌군. 뺨에 얼룩하며, 그리고 이쪽 눈썹 끝도 지워져 버렸어."

"립스틱도 지워졌나요?"

"아니, 그건 괜찮소."

갑자기 에드워드는 모니크를 껴안고는 다정함이 담뿍 담긴 회색빛 눈동자로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망머렌시와 공항에서 보았던 세인트 조지의 모습이었다. 따스한 숨결, 애프터세이브 로션의 상큼한 향기, 그리고 그의 건장한 어깨를 모니크는 살갗이 따갑도록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달콤한 입맞춤...

모니크가 본능에 휩쓸리는 순간 시간은 멈춰 버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고, 잠시 동안의 마술을 애석해하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의 낯선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 사람을 차 안에서 머리만 내민 상태로 이렇게 말했다.

"아내보다 먼저 호텔에 온 게 다행이군. 만약 아내가 먼저 와서 당신들의 뜨거운 포옹을 보았다면 아마 내일 중에 아카로아 일대에 소문이 확 퍼져 버릴 거야. 다행스럽게도 난 입이 무겁소. 그 아름다운 부인을 소개해 준다면 오늘 본 건 못 본 걸로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소."

"앙드레!"

에드워드는 모니크를 내버려 둔 채 그에게로 갔다.

"이런!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요?"

에드워드는 창너머로 그와 악수를 하고는 모니크를 소개했다.

"모니크, 이 무례한 사람은 앙드레 드쿠르시요. 앙드레, 이쪽은 모니크 벨필드 양. 이 반도에 있는 모든 명소에 대해 빠짐없이 알고 있는 전문가지. 당신도 대충 들었겠지만 그녀는 망머렌시에서 일했었소."

앙드레는 전형적인 프랑스 청년으로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과연, 당신도 이제 슬슬 찬란했던 독신생활을 청산할 모양이군. 언제 돌아갈 건가? 그런 모습이라면 약혼 축하 식사라도 하러 가야 되지 않나?"

"그런 게 아니에요. 단지 오해를 풀었을 뿐. 지금은 아직...."

모니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두 명의 남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해 보시죠, 아가씨."

앙드레는 짓궂게 얘기하면서 웃었다.

"아직이라뇨...?"

에드워드까지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들었는 걸. 지금은 <아직>이라는 말."

"에드워드! 오해를 푼 의미에서... 결국 화해의 키스였잖아요."

두 남자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앙드레가 말했다.

"아주 멋진 화해 방법이군요. 그래, 오해는 이제 풀리셨나요?"

에드워드는 호텔 입구 쪽을 흘끗 쳐다보며 그의 말을 잘랐다.

"앙드레, 우리는 지금 연극을 보러 크라이스트처치로 가는 길이라네. 서두르지 않으면 늦을 것 같군. 가까운 날에 질과 함께 보샹 하우스에 와보지 않겠나? 가능하다면 공개 일을 피해서 말야. , 다시 만나지."

시동이 걸린 차는 호텔을 벗어나 거리로 나섰다.

"앙드레라는 사람 정말 입이 무거운가요?"

백을 열고 콤팩트를 꺼내면서 모니크가 물었다.

"그다지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오. 질에겐 말하지 않겠지만."

"신경 쓰지 않을래요. 하지만...."

"어떻게 되든 당신이 곤란해 할 필요는 없을 거요.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인 걸.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이오."

모니크가 아무 대꾸로 하지 않자 에드워드는 그녀의 무릎을 톡톡 쳤다.

 

골드스미스의 연극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모니크는 어떤 여자를 동반한 의붓아버지 애설을 발견했다.

"에드워드, 저쪽에 저의 아버지가 있어요. 우리들을 보지 못하셨나 봐요. 반백의 금발에다 키 큰 사람, 저기요.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부인과 함께. 요즘 들어 아버지의 외출이 잦길래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들은 로비에서 만나 인파를 피해 한쪽 구석으로 갔다.

"아버지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모니크는 아버지 뺨에 키스했다.

"이쪽은 보샹 농장의 에드워드 퍼거슨 씨예요. 에드워드, 제 아버지세요. 그리고 이분은...?"

에드워드와 악수를 하고 난 애설은 동행한 여자를 자랑스러운 듯이 소개했다.

"친구인 베스 하딩 씨, 이분은 네가 보샹 하우스에서 하고 있는 일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단다. 모두들 그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아무래도 케리에게 일이 생겨 힘들 것 같구나. 베스, 언젠가 말했던 내 딸 모니크요."

"안녕하세요?"

모니크는 베스에게 살짝 미소를 보낸 다음 살짝 곁눈질로 의붓아버지를 보았다.

"이분이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직장동료>신가요?"

", 그래...."

애설은 깜짝 놀란 듯 모니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최근 아버지께선 종종 동료와 약속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었죠? 그래서 대강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회사에는 분명 아름다운 분이 계실 거라고요."

그 말을 듣고 하딩 여사가 웃었다. 의붓아버지는 다정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네가 없으니까 집안이 허전하더구나. 그래, 그쪽에서 하는 일은 잘돼 가고 있는 거냐?"

", 물론이죠, 아버지."

"하루라도 빨리 널 놓아주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리더구나. 우리들이 얼마나 네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었는지 애머벨 숙모의 얘기가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신경 쓰지 못했을 거야."

애설은 에드워드와 모니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아카로아엔 금방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지? 집에 빈 침대가 있는데, 자고 가면 어떨까?"

모니크는 힐끗 에드워드를 쳐다보았다. 사양해 줬으면 좋겠는데... 돌아가는 길에 즐거운 드라이브를 망치고 싶지는 않다. 에드워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만 오늘 저녁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항구에서 선적할 일이 있기 때문에요. 언제 한 번 두 분이 함께 보샹으로 오시지요."

"식구들 모두의 스케줄을 맞추기는 어렵겠죠, 아버지?"

모니크가 덧붙였다.

"가족 모두가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아버지 먼저 오시도록 하세요. 하딩 부인, 되도록이면 빨리 기회를 만들어 보세요.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베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설을 바라보았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애설."

베스 하딩 여사는 조용하고 심성이 고운 여자 같아 보인다. 이 여자라면 아버지에게 잘 어울릴 수 있을 거야. 모니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쪽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주말에 전화를 해주지 않겠니? 가능하다면 사무실 쪽으로 말이다."

애설은 모니크에게 당부한 뒤 에드워드에게 제안했다.

"식사라도 함께 할 수 있겠소? 맛있는 걸 대접하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곧 돌아가 봐야 해요."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너무 늦으면 집에서 기다리시고 있는 노부인들께서 걱정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모니크도 피곤할 테고요. 오늘 아침 모니크는 베란다가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닦았죠. 오늘 저녁 노부인들께서 깜짝 놀라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모니크의 모습으로 봐서는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실 겁니다. 동화 속의 신데렐라가 여기 있는 셈이죠."

"우리 모니크는 열심히 일하는 아가씨죠."

애설은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로아까지는 꽤 거리가 멀 거요.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운전하도록 해요, 젊은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납시다."

에드워드와 함께 홀을 빠져나가려는데 어떤 사람이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스브리지 씨? 훌륭한 연극이었죠?"

에드워드는 몸을 돌려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사람 누굴 보고 인사하는 거지?"

"우리 아버지예요."

모니크는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제가 얘기하지 않았었나요? 아버지 이름은 애설 레스브리지죠. 7살 때부터 날 키워 주신 고마운 분이랍니다. 제가 소개하는 걸 잊어 버렸나 봐요."

"의붓아버지? 그럼, 그분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신 거지?"

"에이번 이스트뱅크에 사세요. 왜 그런 걸 물어 보세요?"

"가면서 얘기합시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타고 중앙 홀을 빠져나왔다.

"그래서 당신은 동생들과 성이 다른가?"

", 그래요. 남동생 노엘과 여동생 실비, 그리고 케리는 친남매간이죠. 노엘은 대학생인데 아주 귀여운 여자 친구가 있답니다. 실비는 순종적인 아이구요. 그러나 케리는 다소 개성적이기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할 때가 종종 있어요. 내게도 약간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이들을 너무 무르게 다룬 나머지 오히려 그 애의 단점을 내가 조장한 게 아닌가 종종 자책감에 빠지곤 해요."

"쓸데없는 소리!"

페드워드는 갑자기 차를 도로변에 세웠다.

"왜 그래요?"

모니크는 그의 행동이 의아스러워 물었다.

"케리와 무슨 관계라도 있나요? 내 동생들을 본 적은 없을 텐데요?"

에드워드는 운전석에서 몸을 비틀더니 모니크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쳤다. 모니크는 그와의 거리를 아플 정도로 의식하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날 공항에서 긴 얘기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자세한 사정 얘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난 당신 아버님 성도 당연히 벨필드일 거라 생각했었소. 당신은 내게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지. 나는 처음 본 여자에겐 좀처럼 전화번호를 묻지 않아요. 그런 걸 묻는 내 자신이 상상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그는 그때를 회상하듯 자그마한 소리로 웃었다.

"당신이 나와 부딪쳐서 모자를 떨어뜨리던 날, 그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군. 금갈색의 머리, 라임빛 드레스, 미나리아재비와 데이지를 한아름 안고 있던 당신과 맞부딪친 순간 시간이 멈추었고, 그 후로 당신은 내 마음 안에서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아 있었소."

에드워드는 뚫어지게 모니크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당신은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나타냈지. 그때는 무척 놀랐소. 사실 비행기를 타면 잊혀지겠지 생각했었소. 그래서 어쩌면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장미꽃을 보냈던 거요. 로비 번스의 시를 인용한 카드와 함께 말이오. 알고 있었소?"

모니크는 숨을 들이쉬었다.

", 그 사람의 시를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그 한 구절만은 알고 있었어요."

"그렇소?"

에드워드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하여튼 당신을 내 머릿속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었어. 뉴질랜드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의 상큼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거요."

모니크는 얼이 빠져서 눈물을 글썽했다.

"모자를 바로 쓰면서 투덜거렸던 목소리가 상큼했다고요?"

"아니, 공항에서 날 <세인트 조지>라고 부를 때의 그 목소리 말이오."

그렇담 보샹 하우스에서 재회했을 때 그는 왜 그렇게 퉁명스러웠었을까?

"당신이 망머렌시를 그만둘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후 어디에서 일할 생각인지는 분명하게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무척 불안했었소.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망머렌시의 콜린트 우드에게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죠, 당신이 내 애인이라고 가장했었으니, 내가 있는 장소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새로운 일을 시작했으리라 생각하고는, 생각 끝에 캔버라의 당신 집에 전화를 걸었었소. 교환이 이렇게 말하더군. <벨필드 양에게 퍼거슨 씨로부터 온 국제전화입니다>라고. 그리고 난 뒤, 그쪽에서 <그런 사람은 우리 집에 없는데요. 혹시 전화번호가 틀리지는 않았습니까?>라는 대답이 들렸소. 교환이 내게 다시 한번 전화번호를 확인시키더군. 그래서 혹시 그 집에 하숙하는 아가씨가 없냐고 물었더니 더욱더 쌀쌀맞게 한다는 소리가 <우리 집은 하숙 같은 건 안해요!> 그러더군."

"어머나, 정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지금에서야 알겠소."

에드워드는 의심이 풀린 듯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교환에게 다시 여자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부탁했고, 그녀에게 이 전화번호는 본인한테서 직접 들었기 때문에 틀림없을 거라고 얘기했소. 상대방은 잠시 머뭇거리더니만, 곧 뭔지 알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군. <그럴 때가 있지요. 잘 알지 못하는 남자가 귀찮게 따라다니는 경우, 보통 여자들은 전화번호를 엉터리로 가르쳐 주곤 하죠. 안 됐지만 제가 도와드릴 수 없는 일이에요, 죄송해요> 하면서 전화를 뚝 끊더군. 왜 그렇게 됐는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소."

"그럴 리가 없는데... 난 틀림없이 당신한테 우리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는데요?"

"맞아! 수화기를 드는 순간 상대방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었지. 뭐라고 했더라... 아마 그녀는 케리... 그래! 케리 레스브리지라고 했소."

모니크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에드워드는 잠깐 동안 침묵을 지킨 후 모니크의 손을 잡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온 후 곧 크라이스트처치의 전화번호부를 펼쳐 보았지만 벨필드라는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소. 전화번호로 다시 이름을 찾아봤더니만 레스브리지라고 씌어 있더군. 그래선 난 케리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지. 당신이 나를 따돌리기 위해 엉터리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거라고. 그러나 결국은 케리의 심술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군. 설마 우리들이 보샹 하우스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요. 모니크, 이런 얘기 듣고 오늘밤 잠 못 자는 건 아니오?"

"아뇨, 그렇진 않아요. 어떤 땐 케리의 마음속엔 못된 악마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애가 싸워야 할 최대의 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모니크는 살짝 에드워드에게 기댔다.

"그보다 보샹 하우스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가 나로선 훨씬 더 괴로웠어요. 당신은 내게 매우 퉁명스러웠고, 내가 아름다운 집을 파티 장으로 전락시킨다고 비난했었죠?"

에드워드는 모니크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런 얘기는 이제 하지 말도록 합시다. 나도 후회하고 있으니까."

그는 살며시 모니크를 껴안고는 그녀의 머리에 턱을 얹었다.

"당신이 전화번호를 엉터리로 가르쳐 준 거라고 오해하곤 당신에게 보복할 셈이었지. 당신은 어땠소? 내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출발한 후, 꽃과 카드를 보냈으면서도 한 번도 전화하지 않은 것에 대해."

"꽃을 받은 후 전화연락이 없어 정말 불안했었어요. 만약 집을 떠난 후 당신한테서 전화가 온다면 보샹 하우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라고 가족들에게 신신당부를 했었죠. 아카로아의 전화번호부를 들춰 봤지만 당신 이름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크라이스트처치에 계신 당신 어머님께 전화를 한다는 것도...."

모니크는 머리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보샹 하우스를 처음으로 공개하던 날, 당신이 돌연 내 앞에 나타난 것... 마치 기적과도 같았어요. 그런데 옆에 있던 스티븐스 씨가 이렇게 말했었죠. <저기 보세요, 맥이에요.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는군요>라고 말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은 놀람에서 분노로 변해 버리고 말았어요.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매우 불안했고, 그리고는 주방으로 도망...."

"나는 쫓아가서 이렇게 말했지. <대체 이곳에서 뭘하고 있소?> 그때는 정말 미안했었소."

"당신 잘못이 아니었어요. 케리가 나빴을 뿐예요. 많은 오해가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천천히 고개를 든 모니크의 입술을 에드워드의 입술이 살포시 덮었다.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도취감에 자신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모니크는 지금까지 이성에 대해 깊은 감정을 가져 본 적도 없었고, 또한 자신이 정열적이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그녀가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꽃을 피우기 위해선 에드워드의 포옹, 애무 그리고 키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는 다소 공통점이 있다. 옛것에 대한 애착, 프랑스인의 기질... 황홀한 키스에 도취되면서 이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니크는 문득 에드워드의 마음속을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면서 숨을 내쉬었다.

"시내 모퉁이에서 부딪쳤을 때, 우리들이 이렇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소?"

두 사람은 잠시 서로에게 기대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 많은 일들이 있었군 그림이 진품이라는 소식이 날아 들어왔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들 사이의 오해가 풀렸다는 사실이겠지, , 우리들은 이제부터 새출발을 하는 거요."

모니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출발하는 게 어때요?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모니크, 드라이브를 망치고 싶진 않지만 한 가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오. 케리를 그 상태로 놔둔다면 또다시 그런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 당신 아버님은 하딩 부인과 식사하러 가셨으니 늦게 돌아오실 거요. 잠깐 당신 집에 들러 케리를 만났으면 좋겠소. 두번 다시는 그런 행동하지 말라고 충고했으면 해서. 충고해 두지 않는다면 만약 당신 아버지와 하딩 부인이 결혼하게 될 경우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모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행복하셔야 한다.

"한데 당신은 여자에게 호통칠 만한 사람이 못되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알았지?"

에드워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잔혹한 말도 했었는 걸. 안 그렇소? 그렇지만 그것은 마음속 깊이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모니크는 에이번 이스트뱅크로 가는 길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노엘도, 실비도 외출 중이고 집에는 케리 혼자뿐이었다.

"아빠예요?"

모니크가 자신의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서 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모니크야. 네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케리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쇼파에서 일어났다.

"모니크 언니!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오늘 저녁 집에서 잘 거야?"

"아니, 우린 곧 보샹 하우스로 돌아가야 해요."

에드워드가 말했다. 케리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니와 장신의 잘생긴 남자를 깜짝 놀라서 번갈아 쳐다보았다.

"케리, 에드워드 퍼거슨 씨를 소개하마. 상점으로 장미 꽃다발이 배달됐을 때 아마 이름을 들었을 거야. 그렇지? 에드워드, 제 동생 케리 레스브리지예요."

케리는 자세를 꼿꼿이 세웠다.

"퍼거슨 씨도 보샹에 살고 계신가요? 전 본 기억이 없어요."

"그럴 거요."

에드워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만약 안다면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았겠지. 모니크 벨필드라는 사람은 이곳에 살지 않는다고 한 거 기억나지?"

더 이상 시치미를 뗄 수 없었는지 케리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두 사람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눈은 정신없이 멍해 있고. 얼굴빛은 하얗게 질려 있다.

"그건... 그건...."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상대방을 위압하기에 충분했다.

"케리의 행동은 너무 심했던 것 같아. 일 년 동안 자유를 누리게 된 모니크 언니를 시기한 건가? 애머벨이라고 하는 부인이 선견지명이 있으신 것 같군. 내가 보샹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모니크 언니는 몰랐었어. 내가 보샹에 있지 않았다면 케리의 악취미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됐을지도 몰라."

그는 입을 다문 채 케리의 말을 기다렸다. 케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횡설수설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그런 우연이 있다니!"

"보통 우연이 아니지. 아카로아에 함께 살고 계신 분이 크라이스트처치에 가면 망머렌시의 모니크를 만나 보도록 내게 권했었지. 그래서 난 만나러 갔고. 그러나 모니크가 보샹에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온 후 보샹 하우스에서 손님 맞을 채비에 바쁜 모니크를 본 순간, 그 순간만큼은 아직까지도 생생하지."

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니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단치려고 했던 동생이 오히려 가엾어 보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케리가 두번 다시 그와 같은 짓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특히 애설과 베스를 위해서라도.

"어떻게 아셨어요?"

케리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저녁 타운홀에서 케리 아버님을 만났어. 소개받기 전까지 난 모니크에게 의붓아버지가 계시다는 걸 몰랐지."

"그럼, 아빠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아니, 모르셔. 그러나 또 그런 행동을 한다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지. 중앙 홀에서 케리 아버님을 <레스브리지>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난 문득 캔버라에서 전화 걸었었을 때 들었던 목소리를 기억해냈지. 그때 상대방은 첫마디에 분명히 이렇게 얘기했었어. <케리 레스브리지입니다>라고. 모니크에게 그런 동생이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때였던지라... 덕분에 나와 모니크는 지금까지 오해를 하고 있었지. 그러나 사건의 중대함은 차치하더라도 우린 케리를 믿기 때문에 이제 이 일은 깨끗이 잊기로 했어."

모니크는 케리의 시선을 붙잡고 에드워드의 심중을 대신 전하는 것처럼 지그시 바라보았다. 케리는 부르르 떨면서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 언니가 우리들을 버린다고 생각했었어요. 애머벨 숙모님이 모니크 언니만 동정하는 것도 질투했고...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다니 고마워요."

그녀는 눈을 들었다.

"차라도 드시겠어요?"

에드워드는 매우 상냥한 얼굴로 케리를 쳐다보았다.

", 우리들은 아버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아버님은 오늘 저녁 함께 동행한 부인과 언제 한 번 보샹 하우스에 오시겠다고 말씀하시더군. 동생들도 한 번 오라구. , 이제 우린 갑시다. 그럼 다시 만나요."

질주하는 차 안에서 모니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당신 우는 거요? 이제 우리 앞에는 검은 구름이 걷힌 푸른 창공만이 있을 뿐이오."

모니크는 에드워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그때는 두 사람 모두 태즈먼 해협에 검은 구름이 몰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9

돌아오는 길은 순간순간이 즐거웠고 깊은 충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장래를 약속하는 말을 서로 나눈 적은 없지만 그들 사이에는 확고한 신뢰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차가 반도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모니크는 진한 감동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은 고향의 언덕, 또한 할아버지가 사시던 언덕, 그리고 언젠가는 에드워드와 결합해서 나의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될 언덕...

오늘 저녁은 두 사람만의 시간, 마술로 장식된 시간을 사랑하자. 지금은 아직 자신이 보샹 가의 자손이라는 것을 밝힐 시기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얘기해야 할 때가 오리라. 우선은 그에게 먼저 털어놓고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에게는 그후에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달콤한 사랑에 몸을 맡기자.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필립과 루이스가 <작은 살롱>이라고 불렀다는 작은 방안의 둥근 탁자 위에는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이 그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샌드위치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오렌지 색깔의 흔들리는 전등 불빛이 평온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대단히 멋진 분들이야."

에드워드는 웃으면서 모니크에게 키스했다.

"두 분의 기대를 모르는 척하는 건 나쁜 일이니, 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최대한도로 살리도록 합시다."

모니크도 따라 웃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보고할 생각은 아니겠죠?"

"어떤 것들을? 지금 두 분은 주무실 시간이라구. 그렇지만 우리들 일이 궁금해서 아마 잠 못 이루고 있을 거요."

그 시각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말한 것처럼 두 사람 사이가 어느 정도 진전됐는지 궁금해서 잠 못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모니크는 큰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날이 밝을 거예요. 내일 아침 일찍 선적하려면 이제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어요."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편안히 쉬어요."

에드워드는 다정하게 모니크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잠에서 깨어 아침식사가 준비된 주방에 얼굴을 내밀었다.

"어제 저녁 이곳에서 묵었던 케빈은 새벽에 모친 집으로 돌아갔고, 지금쯤은 목장에 나가 있을 것이다.

"두 사람 어제 늦게 돌아왔나요?"

앙리에트 부인이 물었다. 재미있었던 연극 얘기, 극장에서 모니크의 의붓아버지를 만난 얘기 등 아침 식탁은 이런저런 얘기로 시끌벅적했다. 에드워드가 노자매에게 물었다.

"별 일 없었죠?"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줄곧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테레사 부인이 급히 일어나 토스터 손잡이를 잡아당겼기 때문에 남아 있던 토스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조심해야지. 새 모이가 되겠군."

앙리에트 부인은 테레사 부인이 토스트 줍는 것을 도와주면서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자아, 빨리 나가지 않으면 늦어요."

"어제 저녁,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지금 말할 일이 못돼요. 나중에 하죠."

앙리에트 부인은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두 분 모두 지금 얘기하는 게 좋을 텐데요. 나쁜 소식은 빨리 얘기해 버리는 게 좋아요. 양들에게 전염병이라도 발생했나요? 그래요? 그렇지 않다면 닭장에 족제비라도 들어갔었나요? 아니면 그 그림이 위조품이라고 알려왔어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전화가 왔어요."

앙리에트 부인이 마지못해 얘기했다.

"에밀리라고 하는 여자에게서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당신을 만난 적이 있다더군요."

에드워드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본 모니크는 당황하여 얼른 눈길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전 이만 실례하겠어요. 이번 주 토요일 몇 시에 손님들이 방문할 예정인지 단체 대표자에게 전화를 해봐야 하거든요."

"아니, 괜찮소. 여기 앉아서 내 말을 들어요."

에드워드가 만류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온 이후 언젠가 당신에게 이 일을 얘기하려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그쪽에서 연락도 없었고 해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지. 어제도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그만...."

에드워드가 다소 당혹한 얼굴을 해보였으나 모니크는 짐짓 신경 쓰지 않는 척 웃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언제, 어디서 그녀를 만났나요?"

앙리에트 부인이 심문하듯 따져물었다.

"시드니에서였어요. 나는 어떤 라디오 방송국의 인터뷰를 해야 했었죠. 반도의 프랑스 인 영주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난 농장에 관한 일을 얘기하면서 예전에는 그쪽이 보샹 가의 영지 중 일부였다고 설명했지요. 방송이 끝난 뒤 에밀리라는 여자의 숙모님이 방송국에 전화를 해왔어요."

"그래서?"

"그분은 내게 꼭 자기 집을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주소를 가르쳐 주더군요. 찾아가 보니 양친이 안 계시는 에밀리라는 아가씨와 단둘이 함께 살고 있었어요. 얘기인 즉, 그녀의 조부모 중 어느 한 분이 이 근처 출신이라는 거죠. 숙모 되는 분이 에밀리에게 이곳을 꼭 찾아가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앙리에트 부인은 가시가 돋친 어조로 말했다.

"그 숙모라는 사람 무척 권위적이군. 그래, 당신은 에밀리에게 언제라도 이곳에 와주십사고 초대를 했겠군요? 당신과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카로아에는 아주 깨끗한 호텔이 있어요. 조카님 조상의 뿌리를 찾는다면 포트보샹 사람들이 기쁘게 도와 줄 거예요>라고 말예요. 그녀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고, 또 그것은 개인적인 초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이 사실을 가정부와 의논해 보곤 약간 심술궂은 투로 얘기해 버렸지 뭐예요."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상상이 가요. 그러나 에밀리는 숙모와는 매우 다르죠. 그렇기 때문에 잔소리 심한 숙모에게 질려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전화를 끊어 버리더군요. 그러고 난 뒤 난 어쩌면 당신이 그녀를 이곳에 초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됐지요."

"예컨대 어떤 투의 심술궂은 말씀을 하셨는지 듣고 싶은데요?"

테레사 부인이 겸연쩍게 살짝 웃었다.

"앙리에트 언니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상한 일이군요. 퍼거슨 씨는 누구를 초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랍니다. 그 사람은 우리 집에 하숙을 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죠> 당신이 목장 주인이라기보다는 고용인 같은 느낌을 받도록 얘기했어요, 에드워드."

"테레사!"

앙리에트 부인은 동생을 쏘아보았다.

"그때는 웃을 일이 아니었어. 꽤나 불쾌했던지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퍼거슨 씨가 에밀리를 위해 틀림없이 초대를 해주셨어요>라고 말야.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내 조카 이름은 에밀리라고 해요> 하고 소리를 지르더군. 왜 내가 진작 불쌍한 에밀리의 이름을 몰랐는지 모르겠군요."

"에밀리라는 이름으로 봐서 그녀의 조상이 프랑스계인 것 같아요. 그러나 앙리에트 부인, 에밀리는 불쌍한 아가씨라기보다는 마음씨 착하고 상냥한 아가씨랍니다. 너무 지나친 상상인 것 같은데요? 어쨌든 그녀가 이곳에 올 이유는 없어요. 온다면 그것은 그녀 숙모의 생각에서일 뿐. 만약 정말로 온다면 포트보샹의 누군가에게 그녀가 묵을 수 있는 곳을 안내하도록 부탁합시다. 마틀렛 부인이 적당할 것 같군요. 그러나 내 생각으론 에밀리가 이곳에 올 것 같진 않아요."

"그렇지만 벌써 이곳에 와 있답니다.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호텔에 있대요. 오늘 오후에라도 당신이 와줬으면 하던데. 난 좀 어색하게 <에드워드는 오늘 하루 동안 어떤 여자분과 크라이스트처치에 갔기 때문에 오후 늦게나 돌아올 거예요. 내일은 종일 선적 때문에 바쁠 테구요. 그리고 이번 주는 예정이 꽉 차 있기 때문에 크라이스트처치에 갈 시간이 없을 거예요>라고 말해 버렸어요. 그래서 책임질 수 없다고 했구요. <만약 에밀리 양이 호텔에서 전화를 건다면 퍼거슨 씨는 만사 젖히고라도 당신을 맞으러 갈 거예요> 하고 덧붙이긴 했지만...."

모니크는 에드워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기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에밀리, 그녀에겐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해요.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괴팍한 숙모에게서도 독립할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조상의 고향을 구경하러 왔을 뿐일 테니까."

",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앙리에트 부인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전에도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해서 귀찮아한 적이 있었죠? 동정하는 건 좋지만 에드워드, 지나친 배려가 아닐까요?"

노자매가 나간 뒤 에드워드는 모니크에게 말했다.

"당신이 에밀리를 맞으러 가준다면 좋겠소. 계속 일이 바빠서... 대학 연구진들과 실험을 해야만 하오."

"죄송해요, 그건 무리예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모니크는 내심 심술궂은 기쁨을 느꼈다.

"내일은 <골동품 애호가들의 모임> 등의 단체들이 방문하는 날이에요."

"그렇군. 그렇다면 하룻밤 더 호텔에서 묵고 있으라고 그럽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죄송해요, 모레도 시간이 없어요. 관광객이 오진 않지만 아카로아의 에테베노 박물관 사람들이 와서 골동품을 감정해 준다고 해서. 당신 그녀를 따돌릴 생각이로군요, 세인트 조지?"

모니크의 말 속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도 에밀리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군. 그녀는 권위적인 숙모로부터 자유스러운 몸이 된 것뿐이야."

"그녀들의 관계가 이해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융숭한 초대를 받고는 사양했었다오. 그런데 당신이 날 따돌릴 작정으로 엉터리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것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불쾌했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초대를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요."

그는 웃었다.

"다음 약속시간까진 꽤 시간이 남아 있었지.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무서운 중년부인에게 잡혀 버렸던 거야."

"결국, 용을 처치하려고 나갔던 세인트 조지가 도마뱀을 한 마리 발견한 거죠? 당신은 평생 어린애를 돌볼 팔잔가 봐요! 이번에도 덩치 큰 꼬마를 돌봐야 하니까!"

에드워드는 응석부리는 아이처럼 웃었다.

"당신이 아무리 나쁜 말을 한다 해도 내게는 사랑의 속삭임으로밖엔 들리지 않는구려. 오늘 아침 당신은 전과는 달리 매우 귀엽소. 밤늦게까지 잠 못 잔 건 아니겠지? 어쨌든 내겐 돌봐야 할 아이 따윈 없소. 내게 필요한 것은 상냥스러운 그대뿐."

모니크는 놀려대는 듯한 휘파람을 불었다.

"당신은 칵스풋과 흰 클로버 연구에나 전념하는 게 적격이에요. 여하튼 난 이번 주엔 몹시 바쁘기 때문에 에밀리를 맞으러 갈 수가 없어요."

앙리에트 부인도 에밀리의 방문을 결로 기뻐하지 않는 것만은 확실했다.

", 이런! 나는 그저 에드워드를 궁지에서 구해내려고 덧붙인 말인데, 그걸 신경 쓰다니. 그녀의 조상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저 언제 한 번 조상의 땅을 보러 오라고 얘기했을 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모니크는 감정이 폭발하려는 것을 꾹 참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어쩌면 에밀리라는 아가씨는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에드워드는 집안에서 할 일이 많고, 에밀리라는 아가씬 권위적인 숙모로부터 해방됐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문젠 간단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곳은 그의 집이 아닌 우리 집이에요."

앙리에트 부인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앙리에트 언니, 왜 그러세요? 에드워드에게 이곳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었잖아요? 잊으셨나요?"

테레사 부인이 입을 열었다.

"유진도 프랜신도 가족과 함께 이곳을 다녀갔었잖아요?"

"그것과는 다르지. 그때 그분들은 다른 이유로 오셨던 거잖아."

모니크는 웃으면서 앙리에트 부인을 위로했다.

"그런 말은 부인에겐 어울리지 않아요. 땅을 보러 온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거친 파도가 잠자듯이 평온한 호수처럼 조용해질 거예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았을 때, 에밀리는 마틀렛 여사 집에 머물게 됐다고 에드워드가 전해 왔다. 그리고 그는 금요일에 크라이스트처치에 갈 일이 있기 때문에 케빈에게 그녀를 맞으러 호텔에 가도록 부탁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빴다. 그날 저녁, 평온한 작은 살롱에서 에드워드는 두 사람 사이를 좁히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의 사랑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건지, 모니크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왠지 예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래 된 카우리 재 서랍 안에 버려져 있던 조부의 노트에 그런 모니카의 마음을 대변할 만한 한 편의 시가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은 태고적부터

내 안에서 살고 있었다오.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은 항상 조용히 그곳에 있었고

내 길을 밝게 비춰 주었지.

풀잎에 흔들리는 이슬방울처럼 어머니의 대지를 비춰주었고

나의 걸음걸음마다 금색의 자취로 만들어 준

사랑스런 그대여

당신은 하늘이 보내 준 나의 보석.

 

그것은 에드워드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모니크는 그 사람으로 하여 자신의 인생항로가 변하기를 바랐다. 이제까지 어떤 남자도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했지만, 오직 그만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진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언제나 농장 일로 바빴고, 또 밤에는 서재로 들어가 보고서를 쓰거나 아니면 링컨 대학과 전화연락을 취해야 했다. 에드워드는 수다스러운 노자매를 서재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모니크에게 부탁했다.

"알았소? 앙리에트 부인은 종종 들어와 여학생처럼 수다를 떨 때가 있지. 어떤 때는 지겨울 정도라니까."

앙리에트 부인의 연세로 여학생 같을 때가 있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이렇게도 말했다.

"이제부터 몇 시간 동안은 누구한테서도 방해받고 싶지 않소. 부탁하오."

"걱정 마세요."

모니크는 불쾌한 감정을 감추면서 말했다.

"우리들도 내일 해야 할 일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바빠요. 당신과 얘기할 여유가 없어요."

그때 마침 서재 소파에 앉아 있던 큰 고양이 스모크가 뛰어나가는 바람에 모니크는 뛰어나가 고양이를 따랐다. 때문에 그녀는 에드워드의 얘깃소리를 희미하게밖에 들을 수 없었다.

"이쪽 일 신경 쓰지 말아요, 에밀리 양. 시드니처럼 번화하진 않지만 매우 아름다운 곳...."

링컨 대학의 사람과 얘기하는 건이 아니었다.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에드워드가 에밀리에 전화한 것이 틀림없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데 그 정도로 조심을 해야 했을까? 어째서 그녀는 이 중요한 때에 나타나려고 하는 거람? 그녀가 온다면 이곳 생활은 어떻게 변할까? 희미한 떨림이 모니크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주방으로 가자 앙리에트 부인이 쉴 새 없이 에밀리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에드워드가 자르듯이 가로막았다.

"그녀의 숙모는 분명 기분 나쁜 사람이지만, 그 책임이 에밀리에게 있다고는 말할 수 없잖아요? 프랑수아 보샹이 완고하고 엄격하다고 해서 그 부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에밀리를 만나게 되면 분명히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그녀는 멋진 여자예요."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 다음 말을 꺼내 타고 나갔다.

"앙리에트 언니,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

테레사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를 환영하도록 해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만나 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죠. 언니는 지금 에드워드를 불안하게 하고 있어요. 안 그래요?"

앙리에트 부인은 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기분 나쁜 듯이 웃었다.

"나는 내 아버지 기질을 그대로 타고났나 봐요. 그 아가씨에게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적의를 품고 있는 걸 보면 말예요."

모니크는 앙리에트 부인을 포옹했다.

"기분 나쁘시겠지요. 그렇지만 곧 부인의 마음도 버터처럼 녹으리란 걸 전 알아요. 지금은 좀 속상하시겠지만, 그녀를 만나 보면 변할 거라고 에드워도 말했잖아요? 이제 조금만 더 기다려요."

앙리에트 부인의 주름 잡힌 밤에 키스를 하고 모니크는 주방을 나왔다. 곧이어 "모니크는 질투도 없나봐!"하고 중얼거리는 앙리에트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니크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에 손을 얹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아니, 그녀는 질투를 하고 있었다.

10시경, 에드워드는 매우 기분 좋게 돌아온 후 언제나처럼 앙리에트 부인을 안심시켰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는 부인이 구워 놓은 생강 과자를 집으면서 말했다.

"정각 12시에 점심 먹으러 올 겁니다. 오래 기다리게 했기 때문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에밀리에게 가봐야 해요. 케빈과 함께 나도 크라이스트처치에 갑니다. 그녀도 내성적인 여자라 낯선 남자와 80km의 드라이브는 고통스러울 테니까요."

그가 목장으로 출발한 지 30분쯤 후 에밀리라고 생각되는 앳된 목소리의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 퍼거슨 씨 계세요?"

"지금 목장에 나가시고 없는데요."

"생각 끝에 전화를 했습니다만, 아직 오시지 않아, 전화를 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이 에밀리 양인가요?"

모니크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퍼거슨 씨는 오늘 오후에 당신을 만나러 간다고 했어요. 그 동안 매우 바빴기 때문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 둑이 무너지듯 에밀리는 말문을 터뜨렸다.

"의아해할 것 같아서... 사실 난 갈 수가 없었어요.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나를 맡길 수도 없고, 그런 일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숙모님이 하도 재촉하시길래... 조상님이 어느 곳에서 사셨는지는 아무래도 좋지만... 에드워드는 매우 친절하신 분이더군요. 모두들 싫어하는 숙모님에게까지 잘해 주셨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호의에 넘어간 것은 아닙니다. 숙모님은 노하셨지만 난 오히려 편안한 기분입니다."

수화기 저쪽에서 흑흑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이제는 숙모님에게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서 할 일을 찾겠어요. 크라이스트처치는 굉장히 멋있는 도시더군요. 그리고 더 이상 저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퍼거슨 씨에게 전해 주세요. 모두 날 어린애로 취급하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나도 독립할 수 있어요."

고독과 절망의 소리를 듣는 순간 모니크는 가슴속에 품어 두었던 적의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에밀리 양, 퍼거슨 씨가 갈 때까지 그곳에 있어 줘요. 너무 바빴기 때문에 빨리 가지 못했을 뿐,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실례지만, 당신은 퍼거슨 씨의 누이동생이신가요? 말씀하시는 것이 오스트레일리아 분 같은데...."

", 오스트레일리아인이에요. 그러나 어머니가 뉴질랜드 사람과 재혼하셨기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된 거지요. 최근에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보샹 하우스를 공개하는 일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와 있지요. 당신도 당신의 조상님이 사셨던 토지를 한 번 구경하러 오세요. 이곳은 프랑스풍으로 뉴질랜드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죠.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퍼거슨 씨가 무척 섭섭해할 거예요. 그럼 꼭 그곳에 있어 줘요. 퍼거슨 씨가 틀림없이 갈 테니까."

"알았습니다. ...그럼, 그리고 만약 바쁘시다면 꼭 오실 필요는 없다고 전해 주세요. 전 하숙할 곳과 일자리를 찾아보겠어요. 그러나 혹 곧 오실 수 있다면 당신도 함께 오시겠습니까? 눈으로 직접 보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상냥하신 분같이 느껴지는군요."

", 퍼거슨 씨가 괜찮다면 그렇게 하죠. 어쨌든 기다린다고 약속하세요, 에밀리 양."

"당신이 함께 오신다면요."

수화기를 놓은 모니크는 앙리에트 부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이곳에 올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던데 굳이 오라고 할 필요까진 없지 않았나요? 모니크, 당신은 질투심도 없어요?"

모니크는 앙리에트 부인의 손을 잡았다.

"우리들 사이를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보다 에밀리는 크라이트처치에서 일자리를 찾겠다는군요. 어디로 가버리기 전에 호텔에 가지 않으면 안돼요. 우리 미리 점심식사를 할까요? 에드워드를 불러오죠."

"모니크, 신경 좀 써요.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어요. 호텔로 오라고 하는 건 에드워드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속셈이 틀림없어요. 어찌됐든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 에드워드를 찾아보세요."

언덕길로 차를 몰았다. 저만치서 양떼를 몰고 난 뒤 돌아오고 있는 에드워드가 보인다. 그는 말에서 내려 차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에밀리가 그렇게 말하던가?"

얘기를 듣고 난 뒤 에드워드는 차 안으로 들어와 모니크 옆에 앉았다.

"그녀가 호텔에서 없어진다면 그녀의 숙모가 가만있지 않을 거요. 그러나 그곳에 같이 갈 순 없소."

뭐라고? 모니크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에밀리가 보샹에 온다는 사실이 저토록 중요한 것일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가 가르쳐 준 전화번호가 엉터리였다고 믿고 실망한 나머지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마음씨 착한 에밀리에게 마음이 쏠렸던 게 틀림없다.

입안에는 씁쓸한 감마저 돌았다. 아아, 케리,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그러나 모니크는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에밀리 양은 몹시 난처한 모양이에요. 당신과 함께 나도 와 달라고 말하더군요. 그녀가 호텔에서 기다린다는 조건으로 당신이 좋다면 함께 가겠노라고 약속했죠. 함께 가면 안 되나요?"

에드워드는 얼굴을 폈다.

"그렇다면 좋소. 그렇게 얘기했다면 에밀리도 안심할 거요."

"근사한 역할일 것 같군요."

모니크는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만 해요. 당신에게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아. 앙리에트 부인의 불평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니까, 알겠소?"

", 어떻게 할까요? 내가 협조한다고 해서 그다지 형세가 좋아질 것 같지도 않은데?"

"그만 해요!"

에드워드는 화가 나서 모니크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런 말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타운 홀에서 본 당신의 솔직한 태도는 어디로 간 거요? 어떻게 하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겠소?"

에드워드는 갑자기 자신감에 넘친 태도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이것으로도... 안 되겠소?"

"자신 있군요. 좋아요! 크라이스트처치에 간다고 한 건 당신 때문이 아니었어요. 에밀리 양이 걱정돼서였죠. 매우 겁에 질려 있는 듯했어요."

"그럴 거요."

에드워드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녀는 실제 20살이지만, 15살이라고 해도 모두 믿을 거요. 요즘의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들과는 달리 순종적이고 유순한 전형적인 여자지."

"손 좀 내려 주세요. 어깨가 아파요. 말이 도망쳐 버렸으니, 어떻게 해요?"

"차로 달리면 뒤쫓아갈 수 있을 거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 돌아갑시다."

기분을 바꿔 핸들을 잡으면서 모니크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창고 안에서 오래 된 사진과 초상화를 봤어요. 사진 액자를 다시 금색으로 칠해 이층 복도 벽에 나란히 걸어 놓으면 좋을 것 같던데, 어때요? 집안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건 별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그걸 손질해 걸게 된다면 일종의 초상화 화랑도 되고, 연대순으로 건다면 역사적인 의미도 창출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과연 전문가답군. 좋은 안목을 가졌구려. 당신이 칠해 놓은 액자를 벽에 거는 일은 내가 도와주겠소. 에밀리 양이 도착한 후에 합시다."

에밀리가 도착한다면? 그녀의 방문이 모두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인가?

 

"미스 에밀리 페어리아? 그분이라면 지금 이곳에 없는데요. 택시를 불러 달라기에...."

"뭐라구요? 행선지는?"

에드워드가 흥분하자 호텔 접수계의 안내는 놀라며 얘기했다.

"그건 여쭤보지 못했습니다. 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한 저희들로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드워드는 모니크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밖으로 나왔다. 차는 주차장 안에 있기 때문에 에밀리가 비상구를 통해 나갔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당신은 거리를 살펴보고 있어요. 난 돌아가서 택시 회사 이름을 물어 보고 오겠소. , 저쪽으로!"

그때 택시 한 대가 멈췄고, 소형 가방을 든 나이 어린 여자가 나무그늘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에드워드는 정신없이 호텔로 돌아가려다가 그녀를 보았다.

"에밀리!"

에밀리는 가방을 놓고는 뒤돌아보았다. 에드워드는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다행이오! 대체 어디로 갈 작정이었소?"

택시 운전사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잠깐 기다려요. 어디로 갈 건지는 이 아가씨 자유 아니겠소?"

몇 명의 통행인이 멈춰 서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겨우 주위 상황에 신경이 쓰였는지 에드워드는 목소리를 낮춰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기다린다고 약속했잖소? 모니크도 함께 왔고... 이쪽에...."

"에밀리 양, 당신을 맞으러 왔어요."

궁지에 몰린 세인트 조지를 구할 겸 모니크는 재빨리 택시 가까이로 갔다.

"우리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녀는 실망해 있는 운전사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이분은 우리들과 사촌지간이에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곳까지 왔지만 자신을 맞으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떠나려고 했었던가 봐요. 우리들은 아카로아에 살고 있는데, 사흘 동안 그녀를 기다리게 해서 화가 난 모양이에요."

"정말이오?"

택시 운전사는 에밀리에게 사실을 확인하고는 돌아갔다. 통행인들도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니크는 에밀리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사랑스런 입술, 하얀 피부에 발그레한 뺨, 둥근 턱,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자였다.

에밀리의 시선은 에드워드가 아닌 모니크를 주시하고 있었다.

"재치가 대단하시더군요. 날 위해...."

모니크는 앞으로 내민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나도 아가씨 나이 때는 무척 내성적이었어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니까 저절로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나랑은 정반대로군."

에드워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운전사가 혹시 경찰이라도 부르지 않나 해서 조마조마했었지."

"당신이 잘못했어요. 에밀리에게 달라붙는 당신을 그 운전사는 도망쳐 버린 애인을 쫓아온 남자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세인트 조지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에밀리는 깜짝 놀란 듯이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웃기 시작했다.

"나라면 에드워드에게 그런 말 못해요."

"당신은 상처받은 남자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군요. 모니크는 언제나 날 놀리고는 재미있어하죠."

에밀리는 밝게 웃었다.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당신들을 만나서 참으로 기뻐요."

", 내 누이동생 집으로 갑시다."

에드워드는 소형 가방을 집어들고는 말했다.

"프랜신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케빈이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군요. 그래서 그 집에서 가재도구를 빌려 왔답니다. 3시 반에 프랜신의 집에 도착하기로 했어요."

같이 걸으면서 모니크는 에밀리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취미를 물었다.

"새 사냥이에요. 뉴질랜드에는 많은 새가 있다고 어떤 책에선가 읽었어요."

"그래요, 할미새, 어치, 그리고 지금은 제비가 돌아올 시기랍니다."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새가 있는 장소라면 내가 잘 알죠. 언제 안내해 드리죠. 케빈도 요즘 새 사냥에 빠져있는 것 같던데...."

"나라면 케빈에겐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어요. 아주 높은 절벽까지 기어오르거든요."

"당신도 무서워하는 게 다 있군, 모니크 벨필드."

"벨필드?"

에밀리는 모니크를 쳐다보았다.

"아까 당신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왔다고... 시드니 항에서 관광 페리 호를 운전했었던 노인도 틀림없이 벨필드라고 했었는...."

"뭐라구요, 에밀리? 어쩜! 그 분은 바로 내 할아버지세요. 그분을 어떻게 아세요?"

"그분이 언젠가 한 번 우리들을 페리호에 태워 주셨지요. 그분 말씀에 따르면 해변의 기적은 바다새로부터 온다고 하시더군요. 새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으셨던 것 같아요."

"놀랍군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론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다소 섭섭하긴 했어도...."

"나도 놀랍군요. 우리가 그분의 얘기를 하게 될 줄이야!"

 

케빈은 매우 명랑해 보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에밀리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그는 자청해서 안내역을 맡았다. 자신감에 넘친 말로 에밀리에게 해변의 풍경이나 새에 대해 설명했다.

"에밀리 양, 당신은 정말 화원에서 일하고 싶으신가요?"

",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매우 즐거워요."

"그렇다면 언젠가 아카로아 변두리에 함께 가봅시다. 그 곳에는 꽃시장이 있는데, 꽃이 산더미처럼 많아요. 요즘 난 꽃 재배를 시작하기 위해 어머니를 설득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올리비에 부인은 꽃재배를 할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땅을 빌려주시겠다고 말씀하셨죠. 에드워드는 상당한 토지를 팔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드러내놓고 얘기하질 않아요. 아무튼 그 이유야 밝혀지겠지만, 부친의 유지를 받드는 게 그녀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할 테죠. 그 땅을 빌리는 게 어떨까요? 당신의 의견을 꼭 듣고 싶군요."

에드워드는 모니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제 에밀리가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군. 마틀렛의 집에 그녀를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내일 에밀리를 보샹 하우스로 데려갑시다."

모니크는 노자매에게 에밀리는 마틀렛 부인 집에 있다고 알렸다.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한 아주 귀여운 아가씨예요. 새를 대단히 좋아한다고 하던데요."

"새를 좋아한다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게로군."

앙리에트 부인이 말했다.

"오래 있진 않는다니 다행이지만... 그 아가씨, 도시 아가씨 같던가요?"

앙리에트 부인의 말을 듣고 난 모니크는 미소를 지었다.

"도시 아가씨는 저죠. 시드니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오스트레일리아와 크라이스트처치로 옮겨 다녔으니까요."

"안 그래요, 당신이 이곳을 좋아하는 것은 당신 몸 안에 시골을 사랑하는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럴까요? 하지만 조상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는 걸요."

모니크는 밝게 말했다.

"에드워드와도 얘기를 나눴지만, 이층 복도를 전시장처럼 꾸며 초상화를 연대순으로 걸어 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근사해요!"

테레사 부인은 감격한 듯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 이층에서 일레어의 그림도 가져옵시다."

처음으로 본 그 초상화는 일레어가 18살 때 그린 자화상이라고 했다. 금발에 갈색 눈동자. 이마에는 주름도 없고, 슬픈 그림자도 없다. 터틀네크 스웨터를 입고 대형 보트에 올라타 있는 모습은 틀림없는 모니크가 사랑하는 할아버지였다.

"일레어는 형과 비슷했나요?"

"아뇨, 에밀 오빠는 부친과 비슷했죠. 검은 머리칼에 파란 눈동자. 일레어 오빠의 금발은 어머니 쪽에서 물려받은 거랍니다."

다음날 아침, 에드워드와 함께 온 에밀리는 파란색에 흰 데이지 꽃무늬가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가련한 소녀 같아 보인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는 뒤로 묶었다.

깨끗한 머리 모양이 청순한 얼굴과 잘 어울려 보였다. 차를 마신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탁자에서 눈을 들어 놀란 표정으로 방문객을 쳐다보았다. 모니크가 미리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재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앙리에트 부인, 그리고 테레사 부인, 이곳에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밀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보샹 하우스가 일반에게 공개된다는 건 벌써 알고 있었어요.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없을까요? 세면대를 닦는 일이라든가, 꽃밭을 손질하는 일이라도?"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간신히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에드워드는 안심하는 듯했지만, 모니크는 희미한 불안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에밀리를 소개했다.

", 그럼 난 나가 봐야겠어요. 오늘 아침은 양들을 소독해야 합니다."

에드워드는 안심한 듯 에밀리를 그들에게 부탁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10

모니크는 에밀리를 안내하면서 집안을 한 바퀴 돌았다.

"이 방은?"

에밀리의 물음에 모니크는 순간 망설였지만, 곧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지금은 에드워드가 사용하고 있죠. 이 방에는 직접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답니다."

"이곳은 보샹 가의 장남이 쓰던 방인가요?"

에밀리는 반대쪽 문을 가리켰다.

"저 계단으로 그 여자를 만나러 나갔고, 결국 나쁜 결과를 동생에게 뒤집어씌운 바로 그 장남의...."

모니크는 깜짝 놀라 에밀리를 쳐다보았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에드워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에밀리와 매우 친하게 지낸 게 틀림없다.

"아버지가 매우 엄하셨기 때문에 장남인 에밀은 거짓말을 한 모양이에요.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하고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한다면 집에서 쫓겨나리라 생각했었을 거예요. 모든 일에는 겉과 속이 있게 마련이죠."

"그렇다고 해도 동생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건 용서하기 어렵잖아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난 얼마나 슬펐던지...."

"그렇지만 에밀리 양, 그렇게만 생각지 말아요. 동생 일레어도 아주 행복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 방을 나와 두 사람은 일레어가 사용했다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죠."

벽을 장식하고 있는 새 그림, 손으로 만든 선반 위에 꽂혀 있는 책, 고풍스럽고 훌륭한 조각, 조개껍질과 화석, 그리고 박제한 새가 진열돼 있는 유리진열장. 에밀리는 그 하나하나에 매료된 것 같았다.

"이 유리진열장은 장남인 에밀이 동생을 위해 조립했다더군요. 그리고 그 새 박제는 아버지인 프랑수아 보샹이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어떤 전문가에게 부탁해서 만든 거랍니다."

에밀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프랑수아 보샹은 완고했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보죠?"

"처음엔 나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모니크는 웃었다.

"그렇지만 차츰 그에게도 한편으론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답니다."

한 달 후, 에밀리는 완전히 아카로아에서의 생활에 젖게 되었고, 앙리에트 부인도 테레사 부인도 그녀가 오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에밀리 자신도 처음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케빈과 함께 꽃재배를 하고 있는 농장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케빈이 빌리겠다던 땅도 조사해 봤으며 꽃 종류에 눈을 돌려 온실이나 물주는 방법에 대해 그와 의논하기도 했다.

마틀렛 부인까지 에밀리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에밀리 양의 또 다른 이름이 나와 같은 로즈랍니다. 물론 로즈라는 이름은 이 부근에도 많이 있지만, 마리 로즈 보샹은 훌륭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여성의 반 정도는 그녀의 이름을 본따 로즈라고 지었죠."

자신도 로즈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모니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 마틀렛 부인이 덧붙였다.

"그녀의 숙모님은 조카에게 요리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내가 가르쳐 준다니까 매우 기뻐했어요. 워낙 소질이 있는지 곧 능숙해지더군요. 언젠가 에드워드가 차를 마시고 싶다면 에밀리가 기꺼이 만들어 드릴 거예요."

모니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앙리에트 부인은 서재에서 통화 중이었다. 모니크는 이층에 올라가서 일을 할 생각이었다. 이 땅에 나무를 심은 필립의 아들과 결혼한 모래그 맥도널드의 초상화를 꺼내 액자를 금색으로 칠하자.

그렇다면... 순간 모니크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번뜩이는 게 있었다. 모래그!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스코틀랜드 미인...

모니크는 이층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벽에 걸려 있던 초상화를 떼어 창가에 기대어 놓았다. 옷만 아니라면 그 그림의 주인공이 에밀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맞아, 프랑수아 보샹은 모친 모래그에게서 흑발과 푸른 눈동자를 물려받았고, 그것을 그의 아들인 에밀이 물려받았어.

그렇다면 에밀리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에밀의 자손인 것이다. 아마 그녀는 에밀의 증손녀가 될 거야. 에밀이 일레어 할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는데, 에밀리는 나보다 훨씬 어리니까.

에밀리는 그녀의 조상인 에밀이 동생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사람이란 사실을 괴로워한 나머지 그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의 숙모나 에드워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이 에밀리에 대해 신경을 쓰고 안 쓰고가 에드워드에게는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에밀리는 이 집에서 따뜻한 온정을 받았고, 그리고 마땅히 친척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의 숙모가 선수치기 전에 무슨 조치든 취해야만 한다.

모니크는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그 자리에 꿇어앉아 버렸다.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족 간에 틈을 생기게 한 에밀의 자손이 돌연 나타난 사실에 당혹한 나머지 에밀리를 거부하지는 않을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에밀리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몹시도 사랑하고 있고, 합법적이진 않지만 엄연히 같은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80살에 가까운 노자매에게 충격을 줘서는 안 될 테고... 이 얘기를 어떻게 꺼내면 좋을까? 모니크는 생각에 잠겨 계단을 내려왔다.

서재 앞에서 불그스레한 뺨으로 밖으로 나오던 앙리에트 부인과 머리를 부딪친 모니크는 생각 없이 호호 웃고 말았다.

"어머, 웬일이세요?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데요?"

"아니에요, 잠시 변호사와 얘기를 나눴을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그것뿐이세요? 부인이 왜 그러시는지 변호사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군요."

"됐어요."

앙리에트 부인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손자뻘 되는 나이죠. 그래도 그는 지금 내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었답니다. , 주방에 가서 테레사를 도와줍시다. 오늘 저녁 에밀리와 케빈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에 케이크를 굽고 있어요. 에밀리는 케이크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모니크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 생각이 뱅뱅 맴돌고 있었다. 직접 에밀리의 일을 얘기하는 것보다 편지를 써서 알려 주는 편이 나을까? 그것이 나이든 두 분에게는 충격을 덜 줄 수 있는 방법일 거다. 그전에 에밀리의 의견을 들어보면 어떨까? 그러나 만약 조카를 이곳으로 보낸 숙모가 쉽사리 사태가 진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먼저 연락할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고, 모니크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설마 에밀리의 숙모가...?

앙리에트 부인이 수화기를 들고는 교환에게 대답했다.

". 누가 지불해도 상관없으니까 연결해 주세요."

모니크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몇 푼 안 된다고는 해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수신인 지불로 전화할 정도의 철면피한 사람이었다니... 그러나 앙리에트 부인의 즐거운 목소리를 듣고 난 모니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핑키! 뉴질랜드에 돌아온 줄 알았는데! ..., 그래,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래, 메종 로시뇰에 묵고 있다고요? 그렇다면 마고와 피에르와 함께 이곳에 오지 않겠어요?"

앙리에트 부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있었고,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에 모니크는 마음을 결정했다. 지금 곧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에게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주방에서 케이크 장식을 돕고 있던 모니크는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예컨대, 혈연이면서도 합법적으로 그 가족의 이름을 물려받지 못한 사람인 경우에... 결국...."

앙리에트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는 모니크를 쳐다보았다.

"결국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로군요. 에밀리가 오빠 에밀의 증손녀라는 것."

모니크는 갑자기 의자를 잡아당겨 앉았다.

"어머나! 어떻게 아셨어요? 저 조금 전에야 겨우 모래그의 초상화를 보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았어요. 에밀리는 모래그를 닮았더군요."

"모래그뿐만 아니라, 에밀 오빠도 닮았지요. 그리고 새를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그림에도 재능이 있던 일레어의 피도 물려받았죠. 우리들은 매우 기뻤답니다. 아버지의 염원이 이뤄진 것이죠. 오늘 저녁 식사 후에 에밀리에게 모든 것을 얘기할 작정입니다. 물론 에밀리 자신도 자기가 에밀의 증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죠. 그렇지만 그 아가씨는 결코 자기 스스로 얘기하진 않을 겁니다. , 당신도 오늘 저녁을 위해 곱게 차려입으세요."

케빈과 에밀리가 도착했다. 에밀리는 흰 드레스를 입고 주홍색 립스틱을 바르고는 상아 헤어핀으로 흑발을 묶고 있었다. 그녀는 마틀렛 부인의 정원에서 꺾어 온 철 이른 장미꽃을 노자매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은혼식 때 필립이 루이즈에게 선물한 것이죠."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장미꽃을 꽃병에 꽂으면서 테레사 부인이 말했다.

"오늘 우리들이 이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루이즈는 매우 기뻐할 거예요. 이렇게 특별한 날에는 특히 백년 전에 이곳에 살고 계셨던 분들이 마치 이곳에 와 계신 듯한 느낌을 받아요."

"특별한 날이라뇨?"

에드워드가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에밀리의 스물한 번째 되는 생일날이에요."

앙리에트 부인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 있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에밀리 자신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들은 유력한 정보망을 손에 쥐고 있답니다."

에밀리는 순간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렇다면 숙모님이 전화라도...."

"아니에요, 그렇진 않아요. 식사가 준비됐으니 식사하면서 얘기합시다."

테레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21개의 양초를 꽂은 케이크를 가져왔다.

"어머나, 너무 예뻐요!"

에밀리는 아름답게 장식된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멋진 생일은 처음이에요."

생일을 축하하는 축복의 노래, 키스, 포옹이 끝난 뒤 앙리에트 부인은 방에서 파란 리본이 묶인 두루마리 같은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에밀리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그녀는 그것을 에밀리 앞에 놓았다. 에밀리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고 선물을 펼쳐 보았다. 그녀는 서류 종이 같아 보이는 것을 한 장 집어 올렸다. 그곳에는 테레사 부인의 편지가 씌어 있었다.

<에밀의 증손녀인 에밀리에게, 필립 보샹 가의 사람을 찾은 것을 축하하며>

에밀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새파랗게 질려 있던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저어... 이건 뭐죠?"

"아니, 이것은 케빈이 꽃 재배를 한다고 해서 빌려 준 것 아닙니까?"

에드워드는 노자매를 보았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많이 망설였지요."

앙리에트 부인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하셨나 보죠? 무리도 아니죠. 그렇지만 우리들은 아버지만큼 완고하지는 않아요. 아버지께서도 만년에는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셨지요. 에밀이 동생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당신이 엄했던 탓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답니다. 아버지께서는 뮤리엘을 찾으셨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지요. 그러나 어딘가에서 에밀의 자식이 자라 언젠가는 이곳에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으시곤 그날을 위해 아버지는 한 구획의 토지를 유산으로 남기셨던 겁니다. 오랫동안 계속 토지를 관리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온갖 정성을 다해 보살피셨고 나무도 심으셨답니다. 그곳이 꽃밭이 된다면 멋질 거예요. , 이건 너의 땅이란다. 에밀리."

"앙리에트 언니, 이제 한 가지 중요한 걸 얘기할 게 있어요."

테레사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언니를 보았다.

"알고 있어."

앙리에트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 혹시 케빈의 청혼을 거절하진 않았겠지? 이곳은 너의 고향이란다. 오랫동안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지. 그리고 그 수익을 전부 저축해 놓았단다. 지금쯤은 너와 케빈의 멋진 신혼생활을 꾸릴 만한 돈이 모였을 거야."

모니크의 귀에는 행복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고 가슴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에밀리와 케빈! 에드워드가 에밀리에게 혹시 맘이 끌리고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다! 에밀리의 푸른 눈동자는 눈물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케빈이 제게 청혼한 사실을... 결국..."

에밀리는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어떻게? 사실은 앙리에트 언니가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군. 언젠가 앙리에트 언니가 건초실에 들어갔는데, 건초더미 위에서 새소리가 들렸다더군. 고령의 노인이지만 앙리에트 언니는 그 위로 올라가셨지. 그때 마침 두 사람이 건초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셨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모두 듣게 됐던 거지."

테레사 부인은 얘기를 하면서 언니를 바라보았다.

"케빈이 너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단다. 우리들은 처음 너를 보았을 때, 무척 내성적이라고 생각했었지. 물론 그렇기 때문에 에드워드가 동정했다고 생각하지만 말야, 우린 에드워드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단다. 한편으론 의심도 하고. 에밀리, 넌 케빈에게 우리들을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슬픔을 안겨 줄 수 없노라고 말했다면서? 숙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이곳을 떠나 자리를 구해 보겠다고도 하고. 우리들은 네가 에밀 오빠와 뮤리엘의 자손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변호사에게 조사를 부탁했었단다."

에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자매의 뒤로 가서 그녀들을 얼싸안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에요."

"오늘이 네 생일이라는 걸 안 것은 변호사가 출생증명서 사본을 보내왔기 때문이지."

"저런, 내가 당신의 생일을 몰랐다니!"

케빈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당신이 그 토지를 물려받기 전에 청혼을 했던 거요."

에드워드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케빈. 상속인에게 청혼할 용기는 내게도 없으니까, 놀라운 일은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모니크도 알고 있었죠. 모래그의 초상화를 보고 알았다는군요. 에밀리, 모니크는 그 사실을 우리들에게 얘기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했단다. 우리들이 법적인 면을 중시한 나머지 너를 거부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서지."

에밀리는 몸을 기울여 모니크의 뺨에 키스했다.

"고마워요, 모니크. 당신 같은 언니가 있다면 좋겠어요."

 

2주일 동안 계속됐던 공개는 휴일 없는 바쁜 나날이었고, 에드워드도 링컨 대학으로 출발할 준비로 몹시 바빴다. 예년처럼 12월초는 학기말과 연말연시의 휴가로 모두가 활기에 넘쳐 있었다. 물론 어떤 집에서나 크리스마스 맞을 준비에 한창이었다.

모니크는 여전히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다. 에밀로부터 4대를 지나 겨우 조상의 땅에 돌아온 에밀리. 케빈과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꾸릴 때까지 그녀는 가족의 사랑을 온몸에 받아야 하고, 혈연의 따뜻한 온기에 흠뻑 젖어 있어야만 한다. 자신이 일레어의 손녀라는 사실을 발표하는 것은 그 후에라도 늦지 않을 거라고 모니크는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보샹 가의 계승자라는 것을 에드워드가 안다면 그는 내게 청혼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은가. 에드워드가 잠시 여행 중에 있을 때 보샹 하우스에는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에밀리가 자단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상자를 안고 와서는 모두가 있는 주방으로 들어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상자에 마리 로즈의 손수건이 들어 있다는군요. 마틀렛 부인의 아버지가 내게 주셨지요. 마리 로즈가 이 상자를 베로니크라는 부인에게 유품으로 남겨 놓으셨대요."

"그래, 본 기억이 나는구나."

테레사 부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맞아, 어머니는 그 안에 손수건을 넣으셨었지."

"지금도 들어 있어요. 그 안에는 마리 로즈 할머니의 편지도 있어요. 수가 놓인 손수건은 절벽에서 떨어진 베로니크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것이라고 씌어 있어요. 그리고 장미꽃 봉오리도 몇 송이 들어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밑에 숨겨져 있던 프랑수아 할아버지의 편지인 것 같아요. 그 편지는 프랑수아 할아버지가 마리 로즈 할머니께 보낸 거예요. 읽어 볼까요? 요양을 위해 잠시 가 있던 캔터베리 남쪽의 옥스퍼드에서 마리 로즈 할머니께 보낸 거지요."

 

사랑하는 마리 로즈

아름다운 편지 정말 고마왔소. 편지를 읽는 순간만큼은 당신이 내 곁에 없어 쓸쓸했던 일을 까맣게 잊곤 한다오. 이때야말로 당신이 내게 있어서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오.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이때까지 당신에게 내 마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했던 것 같소.

아버지로서도 자식들에게 너무 완고한 나머지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로 머물러 있었지. 그 이유로 두 아들은 내게 그다지 마음을 터놓지 못했고, 그래 난 순간순간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던 당신을 질투할 때도 있었소. 그러나 난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었다오.

그러나 당신도 말했듯이 우리들은 많은 기쁨을 나눠가졌었지. 태양같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행운을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오. 아직 덜 핀 장미꽃을 당신에게 보내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는 프랑수아

 

에밀리가 다 읽고 나자 눈물을 흘리고 있던 앙리에트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금년은 굉장히 멋진 해로군. 신은 모니크와 에밀리를 이곳에 보내 주셨고,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편지까지... 에드워드도 이 곳에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도 일요일에는 돌아오겠지. 그래그래, 잊어버린 말이 있군. 일요일 오후엔 마고와 피에르가 핑키 여사와 함께 온다고 했지. 만나 보면 매우 기뻐하리라 생각해요."

손님들이 오고갔고, 에드워드와 모니크 두 사람만이 만날 기회는 전혀 없었다. 타운홀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사랑의 감정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일요일 아침은 눈부실 정도로 화창했다. 강가에는 종소리가 울려 반대편 암벽에 부딪쳤다가는 곧 산울림이 돼 돌아왔다. 그것은 루이즈와 필립의 고향인 프랑스인 마을로부터 1세기 반 동안 계속 울려오는 종소리다. 그 종소리는 포트보샹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을 알려주는 소리이기도 했다.

오늘은 보샹 가의 묘 앞에 에밀리의 귀향을 보고하는 날이다. 교회의 하얀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마틀렛 가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던 에밀리가 모니크 쪽으로 걸어왔다. 에밀리는 모니크가 들고 있던 꽃을 받아 조심스럽게 꽃병에 꽂았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묘 앞에 꿇어앉았고, 모니크는 눈을 감고 묘 앞에 고했다.

"마리 로즈와 프랑수아의 고손녀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나 모니크도... 에밀리는 마틀렛 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케빈과 에밀리는 부활절이 오기 전에 결혼할 것이다. 지금은 미래의 남편과 아내로서 교회의 제단을 걷고 있는 것이리라.

모니크는 야릇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저들이 부러운 것일까? 케빈과 에밀리는 자손을 위해 프랑수아가 심어놓은 나무숲 속에 신혼살림을 꾸릴 것이다. 에드워드는 어떤 기분일까? 그는 에밀리에게 다소 마음이 끌렸었겠지만, 케빈과의 일을 알고는 속상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교회에 들어가 앉았다. 둥근 창으로부터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모니크의 흰 드레스 위에 흔들렸다. 마치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는 듯하다. 가슴에는 수정 목걸이가 빛나고 있다. 저쪽 기도석에 있던 사람이 그녀 옆으로 다가와 앉는다.

에드워드 퍼거슨! 그는 노자매에게 웃어보이고는 모니크를 보았다. 모니크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시간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고 에밀리를 만나기 전, 사랑의 마술에 채색됐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남자다운 우렁찬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회색빛 눈동자가 태양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의 속삭임은 교회 안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두 사람을 떼어놓고 있었다.

"빨리 돌아오려고 노력했었소."

모니크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잠깐 동안 모니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사실은 어제 저녁에 돌아오려고 했었지. 오늘은 방문객이 있다는 것을 피에르에게 들었다오. 몇 주일 동안 지옥에 있었던 기분이었어. ...전혀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던 에밀리의 숙모가 조카의 권리가 어떻느니 떠들어대기 시작해서 그 소식이 뉴질랜드까지 들려왔지. 생각 같아선 몇 번이라도 그녀와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여하튼 간신히 일단락 지었다니 다행이오. 이제야말로 우리들의 일을 생각할 때인 것 같소. 언제더라? 어떤 강사가 감기에 걸려 내가 대신 그 사람의 일을 하게 되는 바람에 당신에게 청혼을 하지 못했었지. 결혼해 주겠소, 모니크?"

모니크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말했다.

"에드워드라면...."

그녀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계속 이었다.

"교회 안에서 자기 아내에게 말하듯이 청혼을 하다니...."

"그게 어때서? 그러던 교회 첨탑 위에서 부르짖을까? 모니크, 아직 목사님이 들어오지 않으셨다구. 결혼해 주겠소?"

", 물론이에요."

그때 앙리에트 부인이 몸을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 조용히 하세요."

두 사람 모두 얌전하게 입을 다물었고, 목사가 들어온 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서로에게 미소를 보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모니크는 예배 중간 중간에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에드워드였다.

예배가 끝난 뒤 모니크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교회 밖으로 나왔다. 지금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착한 사람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저녁 에드워드에게만은 나도 역시 보샹 가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을까.

집에 돌아온 후 테레사 부인이 말했다.

"손님들이 오실 거예요. 오면 같이 식사하도록 하죠. 아마 에밀리도 같이 올 거예요. 핑키는 일레어 오빠를 좋아했었죠."

모니크는 얘기를 들으면서 애매모호한 느낌을 받았다. 핑키라는 여자는 소년시절의 할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 일레어가 나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그분에게 얘기하면 좋을 것 같다! 로시뇰 가의 사람들과 함께 올 그 부인이 내가 진실을 얘기하기 전에 와주었으면 좋으련만.

"모니크, 당신은 갈아입을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앙리에트 부인이 말했다.

"그 위에다 앞치마를 꺼내 입고, 푸딩 좀 만들어 주겠어요? 쇠고기 구이는 오븐에 넣고...."

에드워드는 짜증나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층에서 단둘만의 시간을 빼앗겨서 심술이 났나 보다. 모니크는 앞치마를 꺼내고는 잠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말한 후 밀가루를 꺼냈다.

"그러기 싫은데... 쇠고기 구이와 푸딩을 꼭 당신이 만들어야 하오?"

에드워드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왜요? 도와주시려고요?"

모니크가 놀려댔다.

"달빛이 오늘밤을 낭만적인 밤으로 물들일 거요. 손님이 오신다고 해도 같이 산책할 수 있겠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조용해졌고, 모니크는 서둘러 푸딩을 만들기 시작했다. 앙리에트 부인과 테레사 부인은 몸단장을 하고 난 뒤, 이번에는 케이크를 구워야 한다고 모니크에게 말했다. 모니크는 어깨너머로 에드워드를 보았다.

"그렇게 구경만 하지 말아요. 마치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도와준다면 아주 멋있는 게 될 것 같은데...."

"내가 전부 구워 드리지. 지금 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당신에게 키스할 기회를 찾고 있는 중이라오. 이제 나가도 되나? 좋아요, , 나갑시다."

앞치마를 벗은 모니크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에드워드는 계단 쪽으로 급히 나갔다. 계단에서 두 사람은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인사를 나누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테레사 부인과 앙리에트 부인이 손님을 맞으러 베란다로 나가 있었다.

"그들은 조금 있다 만나도 괜찮겠군."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하고 모니크가 사용하고 있는 일레어의 방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여닫이창에서 흘러 들어오는 햇빛이 오래 된 책상을 비추었고. 일레어가 소년시절 꿈을 꾸었을 침대를 따스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달이 찬 밤에 올빼미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앉아 있었을 창가의 의자를 비추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온종일 이곳에 앉아 부친에게 신임 받지 못했던 사실에 상처받고 괴로와하며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 방에서 아무도 몰래 빠져나가 새벽에 출항하는 배에 몸을 싣고는 고향을 떠나셨던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작은 생물들을 아끼며 어딘가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모니크의 입술에 에드워드는 머리를 숙여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아쉬운 듯이 입술과 입술이 떨어졌고, 모니크는 건장한 가슴에 안기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아아... 에드워드...."

"아직 우리들의 일은 비밀로 합시다.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지만, 일부러 떠들어댈 필요는 없지. 저런! 아래층에서 우리들을 부르고 있군."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왔다. 에드워드는 흰색 줄무늬 셔츠 차림이고, 모니크는 디자인이 단순한 흰 드레스에 맑고 투명한 수정 목걸이를 걸고 허리에는 벨트를 맨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뺨까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님 중의 한 사람이 로시뇰 부인의 앞으로 나왔다.

"핑키, 이분이 보샹 하우스를 지금까지 돌봐주신 공로자, 모니크 벨필드 양입니다. 그리고 모니크, 이쪽은...."

로시뇰 부인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왜냐하면 백발에 키가 크고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던 부인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모니크 벨필드라고? 그러면 보샹 하우스의 자손 두 사람 모두를 보고 있다는 얘긴가요? 아아, 벨필드 양! 이거 굉장한 일이군! 좋아했던 일레어를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로군요. 그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핑키 여사는 모니크를 얼싸안았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당신에 관한 일은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몸을 떼고 모니크의 얼굴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모니크는 긴 숨을 들이쉬고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가 일레어라는 걸 알 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어요. 그렇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고... 난 그저 보샹 하우스를 위해 도움이 돼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는 에밀리가 이곳에 왔죠... 매우 내성적이고 귀여운 아가씨랍니다. 에밀리는 단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그녀에게도 보샹 가의 일원으로서 환영받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 일은 조금 후에 밝히자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죠?"

눈에 눈물이 글썽이던 앙리에트 부인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레어 오빠와 시드니에서 만났다고 했던 분이 바로 이 분이죠. 오빠가 이름을 바꿨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핑키 여사께 부탁했었답니다. 오빠와 아버지가 재회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신 여사는 우리들에게 둘도 없는 친구지요. 일레어 오빠는 여사와의 추억을 위해 당신 이름을 모니크라고 지었다는군요. 핑키는 별명이고, 사실은 모니크가 본명이라는군요."

앙리에트 부인은 모니크를 포옹하고는 뺨에 키스했다.

"오늘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날이란다. 보샹 하우스가 후계자의 손에 돌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테레사, 모니크야말로 우리가 사랑했던 일레어 오빠의 손녀란다!"

피에르, 마고, 로시뇰 부인, 그리고 에드워드가 차례차례로 모니크를 얼싸안고 키스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히 불가사의한 일이 있었지."

테레사 부인이 말했다.

"마리 로즈가 입었던 옷을 모니크가 입었을 땐, 정말 어머니와 똑같았어. 모니크, 언젠가 마음에 있는 말은 표현해야 하는 거라고 할아버님께 들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지? 그것은 어머니가 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던 얘기란다."

모니크는 처음 이 곳에 와서 어릴 적 할아버지의 필적이 틀림없는 기록을 찾아내고는 무척 기뻤었다는 얘기를 그들에게 했다.

"그건 정말로 감격적인 순간이었어요. 그러나 그 사실을 잠깐 동안은 숨기기로 했었죠. 에밀리로서는 따뜻한 가정의 보호와 사랑을 받는 것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결혼해서 가정을 가질 때까지는...."

그때 현관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모두들 돌아봤다. 문에는 데이지 꽃 모양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에밀리가 서 있었다.

"비밀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그녀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는 똑바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모니크, 시드니에서 페리 호를 운전하고 있었던 선장 벨필드 씨... 그는 나하고도 피가 섞여 있나요? 과연 그는...."

에밀리는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에밀리, 무슨 말이야?"

모니크가 재촉하듯이 물었다.

"소년시절 사랑했던 사람이 나와 매우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지만, 그렇지만, 설마...."

"일레어 오빠는 형 에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단다."

앙리에트 부인이 상냥하게 말했다.

"일레어 오빠는 에밀 오빠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했지. 에밀 오빠는 동생에게 등산과 수영, 승마를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운동기구를 주기도 하고 축구를 가르쳐 주기도 했었단다. 그러한 추억은 아무리 나쁜 일이 있었다 한들 잊혀지는 것이 아니지."

"모니크, 우리들이 결혼할 때까지 자신의 일은 숨겨 두려고 했다구요?"

에밀리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일생 동안 잊지 못할 거예요. 고마워요."

"비밀이란 정말 있을 수 없는 거군요."

에드워드가 말했다.

"결혼하는 사람은 당신들만이 아닙니다. 두 쌍의 커플이 식을 올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난 부활절까지 기다리지 못해요. 오늘 아침 모니크는 내 청혼을 받아 주었거든요."

에드리드는 모니크의 손을 잡고 윙크를 해보였다. 모두들 깜짝 놀라 있는데 앙리에트 부인이 말했다.

"그래요? 그게 언제었죠? 푸딩과 케이크를 만드느라고 바빴을 텐데... 에드워드, 앞치마를 두른 모니크에게 청혼을 하셨나요?"

"아니에요, 교회에서 부인이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실은 청혼하던 중이었지요. 부인이 둔하시다는 건 그때 알았습니다."

그날 저녁 보니크와 에드워드는 부르봉가의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정원을 거닐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플라타너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루이즈의 손에 의해 프랑스에서 운반돼 온 자라난 꽃의 향기를 맡았다. 두 사람은 필립 보샹이 처음에 상륙한 작은 항구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과 이 모든 사람들이 살아 숨쉬게 될 이 토지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플 정도로 의식하고 있었다.

"낮은 사랑하는 노인들을 위해...."

에드워드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름다운 밤은 새로 태어난 연인들을 위해...."

그는 모니크에게 키스했다. 밤의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