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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의 여자(The pirate's woman) 2

Bollnow 2024. 3. 15. 06:18

7장 시를 읽는 해적

아담의 분노에 마치 마술처럼 군중들이 흩어져 버렸다 그들은 가게와 집 속으로 들어가거나 골목이나 해변을 따라서 사라져 갔다.

그제야 아담이 다이아나에게 몸을 돌렸다. "당신은 마치 거리의 개구쟁이처럼 사납게 싸우더군요. 맙소사, 아가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는 다이아나를 끌고서 거리를 따라 걸어갔다.

"당신을 방 안에 가둬 두겠소. 그리고 이번에는 열쇠를 그대로 던져 버릴 생각이오. 당신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거리의 중간쯤 왔을 때 다이아나는 발꿈치로 버티면서 애써 그의 속력을 줄여 놓았다.

"당신은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세요? 나는 칼을 맞을 뻔했다구요. 내가 매일 매일 그런 짓을 할 것 같아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를 뿌리쳐 버렸다.

"나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아요. 난 내 발로 당신 곁에서 걷겠어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아담은 그의 팔을 놓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갔다.

"당신의당신의 여자 친구가 날 죽이려고 했단 말이에요!" 다이아나가 그의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하지만 그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난 미친 여자에게 공격을 당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마치 내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나를 대하고 있어요."

아담은 발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나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마치 내가 고약한 범죄자라도 되는 것 같군요!" 그녀가 뒤에서 다시 소리쳤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희생자를 비난하다니당신은 나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그들은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아담이 발길질을 해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다이아나를 위해서 길을 비켜 주기도 전에 그녀는 그를 지나쳐서 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가다가 그녀는 몸을 돌린 다음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당신이 아직 모르는 사실이 있어요." 그가 다이아나를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소리쳤다. "난 이길 수 있었어요! 난 칼이 없이도 그 여자를 쓰러뜨렸다구요! 난 이길 수 있었어요!"

다이아나는 출입구의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전보다 더 흥분했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녀는 싸움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방어하고, 거의 승리를 할 뻔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모르는 건 없는 줄 알아요?" 그가 놀리듯이 말했다. "당신도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을 거요."

그 역시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다이아나 옆의 벽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녀를 홱 돌린 다음 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대고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그의 몸에 갇히고 말았다.

"당신의 조급한 성격이 나를 몹시 화나게 만들고 있소."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눈빛에서 읽은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라 펄라 같은 여자에게 그처럼 무모하게 덤비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당신은 알고 있소?"

그녀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존재는 그녀를 압도해 버릴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그 여자를 그렇게 흥분하게 만든 건 바로 당신어에요."

다이아나의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번져 가고 있었다. 아담의 존재가 그녀를 위협하고 있다. 그의 곁에 있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엄청난 혼란과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소, 마이 레이디." 그가 대답하면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바람에 그의 무릎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나는 당신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어요. 내가 걱정을 한 건 바로 당신이오."

"나는 스스로를 잘 보살필 수 있어요. 오늘 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증명했어요!"

아담이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지금 이 남자는 나에게 일부러 생색을 내려고 하는 거야.

"난 이 지겨운 섬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다이아나는 이 남자의 육체에서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라 펄라와 싸워서 이겼어요."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내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에요. 당신이 나를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내가 이겼을 거예요. 그리고 난 당신과 싸울 수도."

"지금 당신은 나와 싸우고 있는 중이오."

"그렇다면 당신이 이기도록 내가 잠자코 있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아요."

그녀의 가슴은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공허한 협박을 가하는 동안 그녀의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

"다이아나, 이건 전쟁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두 사람의 문제요. 번개처럼 끓어오르는 불꽃 때문이오."

"번개."

그녀는 다른 세상의 다른 세기에 있었을 때 그와 처음으로 키스를 나누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에도 번개가 치고 있었다.

"그래요, 번개내가 당신을 끌어안을 때면 어김없이 번개가 울려요."

"아담, 그건 그날 밤에도 있었어요."

"그래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덮쳐왔다. 뜨겁고 격렬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를 뚫고 들어와 탐색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나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 다른 시대를 다시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의 아담 때문에 과거의 추억은 금방 흐릿하게 지워져 버렸다. 지금 이 순간, 이 남자와 나누는 키스의 느낌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열정은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녀는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다리가 그의 힙에 감겼다. 그들은 둘 다 정신없이 서로에게 빠져들고 있는 중이었다. 둘 다 뜨겁게 타올랐다.

다이아나는 수많은 감각을 한꺼번에 느꼈다. 느리고도 집요한 욕망의 떨림이 그녀의 혈관을 따라서 번져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에 닿았고 그녀의 블라우스 천에 닿았다.

"우리는우리는침대에서 사랑을 할 수는 없나요?" 그녀의 말이 억눌린 채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아니오, 마이 레이디. 오늘 우리에겐 침대가 없을 거요."

그는 다이아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이아나가 양팔을 들어 올려서 그를 끌어안았다.

다이아나는 밑에서 대리석 바닥의 차갑고 단단한 타일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도 잠시뿐이다. 다음 순간 그녀는 그들이 아담의 집 복도에 있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생각이 오직 육체적인 것과 황홀한 사랑의 행위에만 사로잡혀 욕망과 갈망으로만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그곳은 그들의 성전과도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옷이 벗겨지고 있었다. 스커트가 그녀의 허리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블라우스는 그녀의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담은 다이아나가 그의 반바지 단추를 푸는 걸 도와주었다.

이제 그녀의 피는 뜨거운 와인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조금의 주저함도, 순간의 망설임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곧 하나가 되어서 뜨거운 욕망을 서로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뜨겁고 격렬하게 서로를 소유했다.

그 사랑의 행위에 꿈과 같은 요소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다이아나에게 환상이었다. 이제 그는 피가 통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열기와 불꽃이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대단히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떠오르는 태양처럼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들이 품어내는 환희의 신음소리가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그 기쁨은 다이아나가 여태껏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는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원하면서도 그것이 곧 끝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녀는 엄청난 핵분열과 같은 느낌과 마주쳤다. 그녀의 내부를 타고 흐르는 환희의 떨림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숨도 쉬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영원히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담, 나에게 키스해 줘요." 그녀가 속삭였다. "지금 키스해 줘요. 영원히 그 키스를 멈추지 말아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으면서 그의 팔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키스를 하면서 그는 그녀를 들어서 복도를 따라 걸어간 다음 그의 침실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그는 다이아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은 후 그녀 곁에 누웠다. 그는 크고 강하고 따뜻한 남자였다. 다이아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다이아나, 당신은 떨고 있소."

"그래요."

"괜찮아요? 나 때문에 혹시 상처를 입은 건 아니오?"

", 아니에요. 아담, 그렇지 않아요."

그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사랑의 행위로 인해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다이아나, 이처럼 엄청난 기쁨을 느껴 본 건 처음이오."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에게 아주 많은 기쁨을 주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떨고 있소."

그녀가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담, 난 겁이 나요."

"설마 내가 겁이 나는 건 아니죠?"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고서 부드럽게 키스해 주었다.

"그래요. 당신이 무서운 건 아니에요. 내가 두려워하는 건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 때문이에요. 난 당신을 너무나 절실히 원하고 있어요. 그 갈망이 너무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아요."

"죽을 것 같다구?"

다이아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단지 하나의 표현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난 여전히 두려워요."

"다이아나, 그건 미친 생각이오."

그가 그녀를 들어 올려서 그의 무릎 위로 잡아 끌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의 옷이 다 벗겨졌다. 그는 한 손으로 다시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런 다음 그는 껄걸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실제로 재미있는 건 아니오, 그런데도 나는 웃고 있소. 아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가볍게 만들고 싶기 때문일 거요."

"무슨 감정?"

"나 역시 조금조금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소."

그녀는 얼굴을 들어서 그에게 아주 오래 키스를 해주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을 두렵게 만드는 게 있다는 사실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두렵지 않소. 머스킷 총이나 칼 같은 건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녀가 그의 시선을 응시했다.

"레이디 다이아나 트레몬트의 길들일 수 없으면서도 항상 매력적인 영혼 말이오. 그 여자는 귀신일지도 몰라요. 한 번도 내가 기대한 대로 하지 않았소."

"귀신이든, 아니든." 그녀가 그의 귀를 애무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날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을 거요."

"사실은 그래요."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진짜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오." 그의 눈동자가 웃음으로 반짝였다. 이어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린 다음 그녀의 어깨를 따라 움직였다. "다이아나, 당신은 귀신이오?"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실이 나를 두렵게 만들고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요. 아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소."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쪽으로 내려가면서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나는 그에게 그대로 용해되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대신 당신은 우리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손으로 그의 몸을 쓸어가면서 물었다.

"레이디, 다이아나, 당신은 나를 놀릴 수 있겠소?"

"물론이에요, 선장님. 그럴 수 있어요." 그녀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아담이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뜨겁고 축축하게 부딪쳐 왔다. 그들은 둘 다 미스터리와 신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아담과의 사랑의 행위에 문을 열었을 때 다이아나는 오직 신비의 세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밖이 어두워지고 있어요." 다이아나는 한쪽 팔로 자신을 괴고 일어선 채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나요?"

"불가사의한 일이오."

"불가사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귀신에 관한 이야기도?"

"그래요,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그 대신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해요. 지금 우리들에 대해서당신과 나에 대해서."

"그럼 당신에게 쉽게 이야기해 주겠소, 사랑하는 다이아나. 두 사람이 낮 시간의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냈을 때 밤이 오게 되지."

"너무나 대담한 짓이었어요."

다이아나의 입술이 치켜 올라가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와 아담은 서로를 탐험하면서 너무나 대담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애무했다. 다이아나는 그의 몸을 만지는 게 좋앗다. 그의 육체는 마치 자석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의 행위를 나누는 것은 운명적인 것이라는 말을 그녀는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게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집착하는 것은 인간을 약하게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담과 함께 있기 전에는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육체적 욕구 이상의 것을 느끼고 있다. 다이아나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를 갈망했다. 그는 환상 속의 연인이었다. 아무도 아담처럼 그녀를 만족스럽게 만들어 준 사람은 없었다.

동시에 그는 그녀의 생명줄이기도 했다. 그녀가 빠져든 이 새로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현실이기도 했다.

아담 역시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인정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처럼 이상한 상황에 몹시 혼란을 느끼고 있소. 처음엔 당신이 나의 인질일 뿐이었소. 하지만 지금 당신은 인질 이상의 존재가 되었고 우리가 처한 상황은 대단히 복잡하게 변해 버렸소."

다이아나는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몸을 움찔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녀는 자신의 소위 대부라는 사람이 그의 치명적인 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아직도 당신의 인질이에요." 다이아나가 커버를 들추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옷을 찾으면서 말했다. ", 아담, 정말 이상해요." 그녀는 블라우스를 입었다. "당신도 이 상황이 얼마나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거예요."

"알고 있소."

"난 정상적인 인질이 아니에요, 그렇죠?"

아담이 미소 지었다. "그건 확실히 알 수가 없어요. 당신은 내가 처음으로 인질로 붙잡은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요. 우리가 이 딜레마를 해결할 묘안을 찾아낼 수 없는 한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나도 동감이오. 그럼 그 이야기는 접어 두기로 합시다." 그가 양초에 불을 붙인 다음 조용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가 반바지를 입는 동안 다이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몸을 굽히고 반바지를 잡아 올리는 동안 양초의 불빛이 그의 넓은 가슴과 어깨, 그리고 그의 허리를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역시 그는 대단한 남자야!

"그런데 이제 나는 우리의 딜레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아요." 다이아나가 그에게 말했다.

그가 몸을 굽혀서 그녀의 머리 위에다 키스했다. "기쁜 일이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세요?"

그가 몸을 펴고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어떻게 감히 그걸 알아맞힐 수가 있겠소?"

다이아나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그럼 나는 반바지의 단추를 다시 잠글 필요가 없는 거요?"

다이아나가 깔깔 웃어댔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 그럼." 그가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에겐 정말 블러디 메어리가 필요해요."

"그것도 당신이 사용하는 욕설 중의 하나요?"

"아니에요, 그건 토마토 주스, , 후추, 우스터 소스, 타바스코, 그리고 샐러리 가지를 넣어서 만든 음료수예요."

아담은 약간 혼란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는데."

"걱정할 거 없어요."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난 좀 더 쉬운 음료수를 생각해 냈으니까요. 집에 럼주가 있겠죠?"

"물론이오. 질 좋은 자마이카 산 럼주요."

"냉동 대커리!"

아담이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구운 물고기나 새우 튀김 요리는 어때요?"

"다이아나,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뇨. 하지만 우리는 마틸다에게 부탁할 수가."

", 안 돼요. 마틸다를 부를 필요는 없어요."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함께 주방으로 가요. 당신에게 대커리 만드는 법을 알려 줄게요. 우리는 즉석에서 그걸 만들 수 있어요."

"즉석에서?"

"아담, 아주 간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30분 후에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서 다이아나가 만든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이 음료수의 이름이 뭐요?" 아담이 물었다.

"대커리."

"재미있군." 아담은 남은 음료를 쭉 들이마신 다음 다시 잔을 채웠다.

"나는 자주 이걸 마셔요."

"나는 이처럼 훌륭한 음료수를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소."

",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만드는 게 아주 쉬워요. 약간의 럼주와 라임 주스, 그리고 설탕만 있으면 돼요. 거기다 얼음을 넣으면 더 맛있어요. 그게 바로 냉동 대커리라는 거예요."

다이아나는 갑자기 올랜도의 집에 있는 냉장고의 구체적인 모습을 떠올렸다. 하얗게 빛나고, 아주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내는 그 냉장고의 문에는 작은 윈도가 있어서 항상 얼음을 꺼낼 수가 있다. 입방체의 얼음이나 잘게 분쇄된 얼음어느 것이나 가능했다.

갑자기 다이아나는 슬픔을 느꼈다. 20세기가 만들어낸 그 빛나는 기적들과는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대 지방에 어떻게 얼음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아담이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렇군요." 다이아나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사실 그녀도 냉장고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옛날에는 물건을 차게 만드는 아이스박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있다고 해도 어디서 얼음을 가져온단 말인가?

"엔지니어에게 그 원리를 설명할 수 있으면 좋았을 거예요." 柳析?아담에게 말했다."내가 현대식 기술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는 플러그를 꽂고 스위치를 돌리는 일뿐이에요. 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어. 젠장!"

"또 험한 말을 사용하는군."

"기분이 상했어요?"

"천만에! 오히려 신선한 기분이 들어요."

강렬한 자마이카 산 럼주로 만든 대커리를 반 잔쯤 마시고 난 후 다이아나는 저녁식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마틸다가 석탄 위에 데운 생선 스튜를 남겨 주었다. 다이아나는 그릇과 국자를 찾아서 스튜를 담았다. 하지만 포크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를 넣어 두는 서랍을 샅샅이 뒤졌다. "아담, 포크가 어디 있어요?"

그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마치 장원의 영주라도 되는 것처럼 대단히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그만 갈래가 있는 외국의 부엌 용구 같은 걸 말하는 거요?"

"그래요. 그렇게 생긴 거예요."

"스푼과 나이프만 있으면 충분해요. 필요하다면 우리는 신이 주신 포크를 사용해도 돼요. 우리의 손가락 말이오."

"그럼 포크는 생략하기로 해요." 다이아나는 손가락으로 식사를 한다는 생각을 애써 밀쳐 버린 채 말했다. 그녀는 아담에게 생선 스튜를 가득 담은 그릇을 건네주었다. "여기 스푼이 있어요."

그녀는 그가 스푼을 사용해서 스튜를 떠서 맛있게 먹는 걸 바라보았다.

", 이제 모든 게 제대로 된 것 같군요." 다이아나도 스튜를 잔뜩 퍼서 입에 넣었다. "사실 포크보다 훨씬 잘 담기는 것 같아요."

그 스튜는 맛있는 양념이 어우러져 근사한 냄새를 풍겼다. 맛 역시 먹음직스런 냄새처럼 훌륭하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어요. 빵이 없다는 거예요."

다이아나가 일어서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딘가 빵이 있을 거예요! 어머!" 그녀는 신선하게 구워진 빵 반 덩어리를 찾아냈다. 빵은 바삭바삭했다. "우리 20세기 사람들은 빵을 자르고 포장해서 오히려 맛을 이보다 덜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다이아나가 테이블 위에 빵을 갖다 놓으면서 말했다. "스튜에 적셔 먹으면 맛이 아주 근사할 거예요."

아담이 티 없이 활짝 웃었다. "그렇게 오만하고 성미가 급한 아가씨, 레이디 다이아나 트레몬트가 내 주방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면서 생선 스튜와 빵을 갖다 줄 거라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소."

다이아나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빵을 잘라 그걸 스튜 속에 적셨다. "그런 일이 매일매일 일어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요. 나는 오늘 밤 기분이 아주아주 좋아요."

"그 기분이 어떤 것이든 나는 앞으로도 그런 상태가 계속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소. 아주 신선해요."

"이번에도 신선해요?"

"그래요. 다이아나, 당신의 모든 것이 신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오늘 시가지에서 벌인 내 행동도 신선하다는 뜻인가요? 당신은 나에게 몹시 화를 냈잖아요?"

"그리고 당신도 나에게 화를 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난 남자에 의해 지배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전에도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 텐데요."

"당신은 자신을 위험 속에 빠뜨리고 있었소. 나는 내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뿐이오."

다이아나는 아담 옆자리에 앉아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담, 당신을 정말 괴롭히는 건 무엇인가요? 당신은 나의 안전에 대해서 불안했던 건가요? 비록 내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이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나요? 아니면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걱정됐나요?"

그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그는 그 문제를 슬쩍 비켜 갔다. "당신이 그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소. 라 펄라는 선천적으로 성미가 고약한 여자요. 그리고 그 여자는."

"아담, 당신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마이 레이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소?"

"시대가 변해도 전혀 변치 않는 게 있어요. 정말 재미있어요. 남자들은 항상 애매한 언어를 쓰거든요."

"그럼 여자들은?"

"그들은 여전히 그걸 그대로 참아 줘요."

"그렇다면 당신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겠소. 당신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소. 당신이 영리하고 엉뚱한 여자이긴 하지만, 아무도 당신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때문이오. 당신은 나의 인질이오. 그리고 당신은 나의 아버지의 자유에 관한 한 아주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오. 오늘 오후 내가 걱정을 한 건 당신의 안전 때문이었소."

그녀가 반쯤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인가요?"

"정말이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난 정말 견딜 수 없었을 거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매혹당하고, 당신에게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오." 그가 손을 뻗쳐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물론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완벽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오."

"나는."

"아니오, 다이아나. 내 말을 들어 봐요. 당신은 마치 폭풍우처럼 내 인생에 뛰어들어와서 날 넘어뜨리고 말았소. 나는 당신을 나의 인질로서 대접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당신을 내 침대로 끌어들였소. 그 순간만큼은 나도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소. 또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소. 그녀는 미친 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일까? 아니면 집시처럼 거리에서 싸우려는 것일까?"

"그건 두고 보면 아실 거예요."

아담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다시 유혹하는 여자가 되어 버렸소."

"변덕쟁이로군요."

"그래요, 변덕쟁이요. 마치 걸음이 빠른 신의 메신저 같아요."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의 말이 옳아요. 로마 신들의 심부름꾼인 머큐리죠."

"당신은 내가 그 단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고 있군요?"

"아니에요. 그건 충분히 짐작했던 일이에요. 당신은 바다를 호령하는 배의 선장이잖아요?"

"다이아나, 날 그렇게만 정의하지 말아요."

"당신도 매우 변덕스런 사람이에요. 당신은 금방 화를 내요. 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화가 풀어지죠."

"당신 말대로 나는 선장이오. 그래서 언제 휴전을 해야 나에게 유리한지 잘 알아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라 펄라는 어때요?"

그가 아무 말 없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녀는 아주 아름다워요. 그리고 나를 칼로 공격할 만큼 당신에게 반해 있어요." 다이아나가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나에 대한 그 여자의 감정은 크게 과장된 거요.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아요. 다이아나, 그녀는 당신과는 아주 달라요. 당신은 불과 얼음이오. 그리고 신비와 마법의 여자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다이아나는 만족감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웃어 버리는 것으로 대신 표현했다.

", 아담, 이건 정말 미친 짓이에요. 우린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라 펄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고 해서 난 행복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지금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일을 당신과 함께 보내기를 원하고 있어요. 이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에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검게 변해 갔다.

"나도 알아요. 때가 되어서 당신이 속해 있던 세상으로 당신이 돌아가 버리면 나는 변절자가 되어 있을 거요."

다이아나는 아담이 말하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 바로 선장과 지체 높은 레이디 다이아나의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물리적 의미 그대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후에는 우린 아마 다시는 서로 만나는 일도 없을 거요." 그가 말했다.

다이아나는 실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1990년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도 알아요." 다이아나는 자기도 그 남자를 이해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밤에."

"그래요. 엄청난 우주의 원리 속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변해 버릴 기회를 갖게 될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오, 다이아나?"

그녀는 테이블에서 일어서서 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니까 전혀 예기치 못하고, 믿을 수 없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뜻이에요. 정말 아이러닉한 일이에요."

아담이 그녀의 뒤로 다가가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난 알아요."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건 정말 재미있어요. 난 아주 많은 시간을 미래를 걱정하면서 지내 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과거에 속해 있어요."

"마이 레이디, 차라리 현재에 대해서 걱정하는 게 어때요? 우린 아쉽게도 아주 빠른 시일 내에 헤어지게 될 거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내가 당신을 보살피고 보호해 주겠소." 그가 그녀의 목을 애무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있을 거요."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는 몸을 돌려서 그에게 안겼다. "당신은 내일 일하러 가야 하나요?"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배를 타고, 선원들을 감독해야 하느냐는 뜻이에요."

"그렇소, 한동안은 그래야 해요."

"일찍 집에 돌아오세요. 그럼 우리는 낮 동안에 함께 있을 수 있어요. 함께 해변에 가서 소풍을."

"?"

다이아나가 큰 소리로 웃었다. "이런 경우에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소풍이라는 건야외에서 파티를 여는 거예요. 음식을 먹으면서 짧은 여행을 즐기는 거예요. 와인과 치즈, 그리고 빵 같은 걸 갖고서." 그녀는 간신히 그 의미를 정의했다.

"빵 한 덩이, 와인 한 병, 그리고 당신."

다이아나가 그를 바라보면서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당신은 오마르 카얌을 알고 있군요!"

"난 책을 읽고, 때로는 시까지 읽는 선장이오."그가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난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은 부류는 아니오."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그의 뺨을 만졌다. "정말 아주 특별한 해적이에요." 다이아나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17세기의 시를 인용할 수 있는 18세기의 해적과 소풍 계획을 짜다니난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난 지금 시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당신과 함께 소소풍을 즐기면서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사실이오. , 마이 레이디, 우리 사이에 장벽이 없어져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소. 가식이나 환상이 없다는 게 정말 좋아요. 인생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순간을 부여했소."

다이아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아주 길고 격렬한 키스를 해주었다. ", 아담, 당신이 그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8장 만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 정말 아름다워요!" 다이아나가 소리쳤다. "너무나 완벽한 곳이에요!"

"소풍을 즐기기에 완벽한 장소로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았소?" 아담이 보트에서 소리쳤다.

"당신은 보석이예요!"

"다이아나, 남자는 보석이 될 수 없어요."

"내 말 뜻은 그런 게 아니라, 상관하지 말아요. 난 밖으로 나갈 거예요."

다이아나는 배의 옆을 뛰어넘어서 스커트를 움켜쥔 채 해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좀 기다려 줘요. 나도." 하지만 아담의 음성은 다이아나가 해변을 달리는 동안 미풍 속에 사라져 버렸다.

바닷물이 그녀의 종아리에 마치 실크처럼 부드럽게 잠겨 왔다. 앞에 펼쳐지는 하얀 모래밭은 마치 초승달 같은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다. 모래는 마치 발이 고운 설탕처럼 섬세했다. 야자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고 멀리서 굽이치는 언덕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곳은 호젓한 곳이었다. 그리고 원시시대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다이아나의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그녀는 그 아름다운 장소에 매혹되어 버렸다.

"아담,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이에요."

그녀는 몸을 돌려서 바라보았다. 아담이 배에서 뛰어내려 작은 돛단배를 해변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아직도 배에 앉아 있었다면 그는 땅에 배를 묶어 둔 다음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마음껏 행복해진 다이아나는 얕은 물을 헤쳐나가 마른 모래가 있는 곳으로 왔다. 해변을 따라서 마음껏 달려보기도 했고, 미풍을 맞으면서 까르르 웃기도 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자유로움 때문에 그녀는 정말 행복했다. 다이아나는 다시 바다 쪽을 돌아보았다.

아담은 배를 물에서 완전히 끌어내어 그걸 모래에 단단하게 고정시켜 놓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가 커다란 바구니와 와인 병, 그리고 돌돌 말아 놓은 깔개를 들어올리는 걸 보았다. 그는 그걸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 균형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외침소리에 그는 잠시 균형을 잃고 몸을 흔들었다.

"선장님! 어서 와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모래를 헤쳐서 야자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발이 고운 모래밭에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는 신선하고 강렬한 모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마치 처음으로 그 나무 사이로 들어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모래밭에도 처음으로 착륙한 사람처럼 느꼈다. 마치 신천지를 탐험한 개척자가 된 기분이다.

야자나무 숲 가장자리에서 그녀는 잠시 멈춰서서 가장 가까운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래,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왔던 사람이 있었겠지만 이처럼 눈부신 하얀 모래에 햇빛이 부서져서 아름다운 파노라마를 일으키는 모습은 결코 보지 못했을 거야. 잠시 그녀는 그 경치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서 아담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래를 가로질러 물건을 질질 끌면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다이아나가 경험하고 있는 자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아담, 어서 이리로 와요! 소풍을 즐기기엔 그만인 장소예요!"

그가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소풍이라는 것이 노동의 일부인 것 같소. 당신은 기쁨에 들떠서 명령이나 내리고 있지만 난 그런 팔자가 못 되는 것 같군." 그가 투덜거렸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은 배 위에서 많은 명령을 내리잖아요? 삼각형 돛을 짧게 해. 닻을 들어 올리라구! 그리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돌려!갖가지 명령을 다 내리잖아요?"

아담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바닥에다 깔개를 펴놓았다. "아가씨, 당신에게 항해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소. 당신은 그걸 배우고 싶다고 했잖소?"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름다운 경치에만 몰두해 있고 싶어요." 다이아나는 다시 짭짤한 해풍이 부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양팔을 활짝 펼쳐 보았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흐트려 놓았다."정말 멋진 날이에요. 로빈슨 크루소의 기분을 알 것 같아요. 그의 완벽한 섬에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몇 명이나 있었소." 아담이 그녀의 옆에 있는 모래 위에 물건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누구죠?"

"나의 선원들이오. 그리고 나 자신도 이곳에 왔었소."

"혼자? 아니면 라 펄라와 함께?"

"혼자."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신결쓸 것 없어요. 누구의 발자국이 모래에 새겨져 있든 내가 이곳에 처음 침입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니까.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해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능한 일이오." 그가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해변에 가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배를 끌어내 항해를 해야 할 거요. 그리고 난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녀 역시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당신 곁에 남아 있겠어요. 그게 행복하니까!"

"마이 레이디, 당신은 매사가 즐거운 것 같소. 이 소풍이라는 것은 항상 당신을 즐겁게 만드나요?"

"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 상황에 따라 달라지죠."

다이아나는 그의 무릎에 몸을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모습은 완벽한 뱃사람의 모습이었다. 적당하게 자란 턱수염과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의 모습이 영락없는 바다 사나이의 모습이다. 그의 셔츠는 단추를 풀어헤친 상태였는데 가슴의 근육이 햇빛 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만약에 다른 세상, 그러니까 다이아나가 살고 있는 20세기였다면 그녀는 그가 멋을 내기 위해 일부러 단추를 잠그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1724년의 시대에서는 결코 그런 의심을 할 필요가 없다. 하얀 셔츠 밑에 그는 느슨한 하얀 바지를 입고 있는데 그 바지는 무릎 바로 아래로 내려와 있다. 그는 신도 신지 않았다.

"그리고 선장님, 또 한 가지 할 이야기가 있어요." 다이아나가 입을 열었다. "난 선장님의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어요."

그가 그녀에게 더욱더 가까이 다가와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게 현재에 살라고 충고해 주었어요."

", 그랬소. 그리고 과거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오늘은 정말 그렇게 할 거예요. 난 아주 근사한 시간을 가질 거예요."

"근사한 시간." 그가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다이아나가 웃었다. "내가 무슨 뜻으로 이야기했는지 알겠죠?" 다이아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시대의 단어를 써야 할지, 아니면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단어를 사용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알고 있소. 그러니까 당신은 아주 특별하다는 뜻으로 말한 거요." 그가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바로 당신처럼 말이오. 당신은 아주 특별한 여자요."

"당신도 특별한 사람이에요." 다이아나가 그를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다이아나는 그가 아주 특이한 눈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생각했던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태양 소에서 좀 더 밝은 황금빛으로 변한다. 그 눈동자에는 초록색 반점들이 있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의 눈가의 주름살을 만져 보았다. 그녀는 아담이 삶에 대한 위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남자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매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남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야 아담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우리는 단둘뿐이에요, 그렇죠?" 그녀가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나 선원들이 나타나진 않겠죠?"

"." 그가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갔다. "마이 레이디,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요?"

다이아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그저 궁금해서." 그녀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우리 단둘뿐이오. 내 선원들은 다른 곳에 있어요."

"블러드 앤드 거츠에 있나요?"

"블러드 앤드 보운즈요. 사실 그들은 바람이 부는 쪽에 있는 섬에서 블랙 호크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작업을 하느라고 아주 힘이 들었소."

"한쪽으로 기울인다고요? 매우 위험할 것 같아요."

"천만에그건 그저 배를 좌초시켜서 문질러내기 위해 한쪽으로 돌리는 것뿐이오."

"선장이 감독하지 않아도 되나요?"

"러셀이 모든 걸 감독할 거요. 그가 내 오른팔이오."

"그런 친구를 갖고 있다니, 당신은 정말 행운아예요."

"배에 관한 문제에서는 그를 신임하고 있어요. 선원들이 배의 바닥을 문지르고 청소한 다음 타르와 우지를 거기에 바르는 동안 그가 감독을 할 거요. 바다 위를 다니는 동안 배는 엄청난 손실을 당하게 돼요."

"특히 목선의 경우는 그렇겠죠?"

"그럼 목선 말고 무슨 배가 있겠소?"

"언젠가는 목재 이외에 다른 재료로 건조된 배가 나올 거예요."

"나는 그걸 상상할 수가 없소. 아무튼 그 배는 곧 다시 항해에 적합한 상태가 될 거요."

"? 그럼 당신은 또 다른 항해를 계획하고 있단 말인가요?"

아마 그 항해는 그녀를 아담의 부친과 교환하기 위해서 윈스턴 경에게 데려가는 항해가 될 것이다. 다이아나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이 레이디, 그렇게 금방 항해를 하지는 않을 거요. 블랙 호크 같은 크기의 배에 타르를 칠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려요. 서두를 필요는 없소."

그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불안감이 금방 사라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을 쏟아내고 말았다. "나이윈스턴 경에게서는 소식이 없나요?"

"지금쯤 그는 편지를 받았을 거요. 그러니까 곧 어떤 회신을 보내올 거요. 어떤 경우든 그렌빌은 아주 빨리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오. 물론 당신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거요."

"난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아담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떴다.

"정말 모른다구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이아나, 진정해요. 그렌빌 때문에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을 망치진 맙시다. 이처럼 멋진 날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의 침착한 태도가 그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다이아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스스로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담의 말이 옳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려야 했다.

"마이 레이디, 이제 당신이 나를 가르칠 시간이오."그가 농담처럼 말하면서 대화의 주제를 블랙 호크와 그렌빌에서부터 돌려놓았다. "그러니까 이 소풍이라는 것에 대해 강의해 봐요. 마틸다가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준 음식은 언제 먹게 되는 거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중에."

"나중에? 그거 아주 재미있는 말인 것 같군. 그러니까 무엇을 한 다음이란 말이오?" 그가 눈썹을 치켜떴다.

"수영을 한 다음."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여자들은 수영을 하지 않아요. 특히 숙녀는 수영을 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남자들도 배가 가라앉아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물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수영은 하지 않아요."

"물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구요? 바로 그거예요!"

다이아나의 입가에 서서히 만족스러운 웃음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곳에도 그녀의 시대와 유사한 게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아담에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7살 때 처음으로 수영 강습을 받으면서 오스트레일리아 크롤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20세기가 되어서야 서구에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만약 아담을 꾀어서 시합을 한다면 그녀가 이길 것이다. 그 게임은 참 재미있을 것이다! 해적의 선장이라도 때로는 당연한 응보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나랑 시합할래요?" 그녀가 물었다.

"맨발로 달리기?"

"천만에요! 수영 경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 해변에서 저기 작은 만의 끝에 있는 육지 끝까지 가는 거예요."

다이아나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도움을 주지 않는 한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담이 어떤 종류의 수영을 하는지도 몰라도 그녀의 크롤과 발놀림이 훨씬 빠를 것 같다.

"나는 숙녀가 수영을 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아담이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남해에서는 여자들이 물속에 들어간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 섬 사람들은 몸의 일부가 물고기라고 믿고 있어요."

"나도 수영할 줄 알아요. 하지만 몸의 일부가 물고기는 아니죠. 나는 수영복도 가지고 있어요."

"그건 또 뭐요?"

", 그러니까 수영을 할 때 입는 옷이에요. 그걸 수영복이라고 하죠. 우리의 짧은 나들이를 위해 수영복을 준비했어요."

갑자기 그녀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아침에 마틸다를 그럴 듯한 말로 구슬러서 옷감과 스카프, 그리고 바늘과 실을 얻어내서 수영복 비슷한 것을 대강 만들었을 때도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이제 이 세상의 모든 결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태양 속에 있으니까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익숙한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고, 비키니에 가까운 수영복을 입고 다닐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진다.

아담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수영할 때 입는 옷이라니. 아가씨, 도대체 왜 수영할 때 옷을 입어야 하는 거요? 아마 최고의 의상은 신이 당신에게 선물한 것일 거요. 수영을 할 때는 몸을 옷으로 덮을 필요가 없지 않소?"

"아담, 당신 말이 옳아요. 하지만 해변에 나오면 사정이 달라져요. 우리가 수영을 하거나 일광욕을 할 때면 보통 다른 사람들이 돌아다니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라는 게 누구를 말하는 거요?" 그가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 나와 같은 사람들 말예요." 그녀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나와 같은."

"당신과 같은?"

다이아나는 나와 같은 시대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꿨다."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수영복을 입고, 점심식사를 한 다음 해변으로 가서 수영도 하고, 배구도 하면서 즐겁게 놀아요."

"트레몬트 가의 사람들은 아주 다르군요. 정말 괴상하기 짝이 없는 가족이오 자, 그럼 나에게 당신의 수영복을 보여 줘요."

"내 옷 안에 그걸 입었어요."

그가 눈썹을 치켜떴다.

"내가 그걸 직접 만들었어요."

다이아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발뺌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블라우스를 먼저 벗어야 할까? 아니면 스커트를 먼저 벗어야 할까?

", 어서 보여 줘요." 그가 재촉했다.

다이아나는 정숙함이 마치 바보처럼 보였다. 그녀와 아담은 이미 침대에서 함께 몇 시간을 보냈고, 그들은 아주 친근한 행동에 몰입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의 시선에 얼굴이 붉어지고 있다. 그리고 집에서 만든 수영복을 입고서 그의 앞에 서야 한다는 게 갑자기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이 그녀를 쫓아왔다.

"아담."

"난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좋아요." 그녀가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몸을 돌려서 블라우스를 벗고 스커트를 벗었다. 그리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배에 힘을 준 다음 아담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성한 신의 어머니."아담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마치 먹이를 두고 그 주위를 빙빙 도는 늑대와도 같다. "당신은 이 옷을 사람들 앞에서 입나요?"

"글쎄요, 그런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 앞에서도?"

다이아나는 자신이 입고 있는 비키니를 내려다보았다. 상의는 스카프 한 장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그 중간을 묶은 다음 목에 감아서 양쪽 끝을 묶었다. 그 옷감은 매우 얇았으므로 그녀의 가슴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래도 천으로 몸을 덮은 것이다. 그리고 비키니 하의는 두 개의 다른 스카프를 함께 묶어서 그것을 힙의 양쪽에다 묶었다.

그렇게 만든 수영복은 아주 노출이 심한 옷이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노출이 더 심해진 것 같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무엇이 노출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의를 약간 잡아 끌었다. 하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아담은 여전히 그녀를 응시하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여자들은 항상 이런 수영복을 입어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에요." 다이아나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다시 말했다. "데이토나나 로더데일 항구 같은 데서." 하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아담은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당신은 이런 수영복을 입고 사람들, 그것도 남자들 앞에 나타나 본 적이 있단 말이오?"

그는 다이아나 앞에 단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의구심과 혼란으로 뒤섞여 있었다.

다이아나는 재빨리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담이 그녀의 옷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되고, 심지어는 질투까지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의 대담한 행동과 거리껌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18세기의 남자였다. 하짐나 다이아나는 그를 위한 대답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스카프로 만든 수영복을 입고 남자들 앞에 서 있었느냐구요? , 천만에요! 맹세코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가 미소 지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의심의 안개가 사라져 갔다."나의 선원들이 섬의 저쪽에 있는 게 천만다행이오. 왜냐하면 이런 대낮에 배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이 있다면 난 그대로 죽여 버렸을 거요."

"천만에! 당신은 그렇게 잔인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말한 그대로요. 당신은 아주 소중한 존재요. 내 앞에서만 그런 모습으로 있어야 해요."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의 불빛이 출렁거렸다. 그 불빛이 태양의 열기보다 그녀를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렇소."그가 말했다."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런 모습이오."

아담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목을 쓸어내렸다. 그런 다음 그녀가 만든 수영복의 상의를 쓸어내려갔다. 그의 손이 닿는 부분의 피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흥분하고 있는 것은 단지 근의 손의 움직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음에는 어느 부위에 그의 손이 닿게 될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 수영복이라고 했소?"

", 그래요. 수영복."

"이제 그 옷은 나를 위해서만 입어야 해요."

그가 손을 그녀의 허리 쪽으로 움직여 갔다. 그리고 힙을 따라서 스카프로 감싼 부분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담, 그래요. 당신만을 위해서 입겠어요."

다이아나도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그의 따뜻한 기운을 흡수하면서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운 털 사이를 이곳저곳 어루만졌다. 태양이 그녀의 등 위에 쏟아져 내렸다. 그 햇빛이 두 사람의 열기를 더욱 강렬하게 달구었다.

야자나무에 부는 부드러운 미풍만이 그 열기를 불꽃으로 바꾸는 걸 막아 주고 있었다. 아담은 다이아나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키스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묻어나왔다. 그의 입술은 거칠고 격렬했다.

다이아나는 자기에게 닿아 있는 그의 피부에서도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그의 키스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벌린 채 그녀의 혀가 그의 혀를 찾았다.

그들은 무릎을 꺾고서 서로를 껴안은 채 깔개 위에 쓰러졌다. 소풍에 관한 생각은 다이아나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뜨거운 태양은 그녀가 내부에서 느끼는 있는 욕망의 불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욕망의 열기가 그녀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담이 손을 더듬어서 그녀가 앞에 묶어 두었던 스카프의 매듭을 찾아내어 풀어 버렸다. 그의 손과 입술이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자 그녀는 충동적인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그곳은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였다. 그곳엣 다이아나가 꿈꾸던 환상의 또 다른 막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항상 해변에서 잘생긴 그녀의 해적과 사랑을 나누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내가 꿈꾸어 왔던 환상은 모두 실현되도록 운명지어진 것일까?

하지만 다이아나는 그런 걸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이제 아담이 힙에 매어 놓은 매듭을 풀고서 스카프를 밀쳐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애무는 그녀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었다. 다이아나는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뚫고서 그녀의 깊은 곳으로 침투하는 걸 느꼈다.

다이아나는 깔개 위에 반듯이 누워서 그의 애무를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더욱 깊은 환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수만 있다면." 그녀가 중얼거렸다."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가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제 내 차례예요." 그녀는 손을 뻗어서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내가 당신의 옷을 벗길 차례예요."

다이아나가 그의 셔츠를 벗기고 그의 반바지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한꺼풀씩 벗겨가기 시작했다. 그의 강한 근육질의 허벅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다음에는 단단한 청동빛 종아리가 나타났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남자가 아름답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요."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그의 피부에서 신선한 공기의 냄새가 풍겨 왔다. 그녀는 그의 턱과 목, 그리고 광대뼈를 입술로 애무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은 그의 단단한 가슴으로 옮겨갔다. 그의 혀 밑에서 그가 긴장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달링, 나의 애무가 당신을 기쁘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당신이 나를 기쁘게 해주었던 것처럼."

아담이 그녀의 애무에 신음소리를 내자 그녀의 입가에서 만족스런 미소가 맴돌았다.

"그만 해요, 제발나를 미치게 만들 작정이오?" 그가 소리쳤다.

다이아나는 그의 외침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욕망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욕망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담이 양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순간 다이아나를 괴롭히고 있던 욕망과 긴장감이 꼬이고 꼬여서 터져 나오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드디어 다이아나는 그를 소유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녀가 느끼는 모든 감각이 수천 배쯤 증폭된 것 같았다. 그의 존재가 그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을 만큼 팽배해 있는 그녀의 긴장감을 순식간에 열기의 파편으로 변화시켜 버렸다.

그녀의 몸에 있는 모든 세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 자신의 욕구가 마치 태양처럼 강렬하게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환희와 만족감으로 타오르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의 행위에는 원시적인 격렬함이 있었다. 그가 다이아나를 소유하는 순간 그녀는 머리를 들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들은 사랑의 리듬으로 하나가 되었다.

"다이아나, 당신과 같은 여자는 없소." 잠시 후에 아담이 속삭였다."다른 여자와는 결코 이런 기쁨을 느껴 본 적이 없소."

"나도 알아요." 다이아나는 그에게 부드럽게 키스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이 그의 입술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마치 당신과 나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 같아요."

예정되어 있다니. , 하느님, 결국 우리는 이렇게 만나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인가요? 아담과 내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모든 논리와 법칙을 뛰어넘어서 이렇게 만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인가요?

그녀는 아담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옆으로 누워있었다. 다이아나는 경이에 찬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황혼이 오기 직전 아담은 불을 당겼다. 아담과 다이아나 두 사람은 그 누구도 해변의 평온함에서 서둘러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야자나무에 몸을 기댄 채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무 줄기에서 타원형으로 패인 부분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그녀는 타버린 나무토막의 끝으로 스케치를 하고 있는 중이다.

"디포 씨의 책에다 뭘 그러헥 열심히 그리고 있소?" 아담이 물었다.

"난 책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니에요. 뒤에 있는 빈 페이지가 떨어지려고 해서 그걸 스케치 종이로 사용하는 것뿐이에요."

"."

아담이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다음 깔개 위에 길게 드러누워서 와인을 한 잔 마셨다. 불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의 강한 윤곽을 잔뜩 강조해 놓았다. 반듯한 턱, 곧은 코, 그리고 광대뼈 밑의 공간어느새 다이아나는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과 아담이 어느 순간 이래로 단순히 남자와 여자로만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그들만의 해변에 단둘이 있었다. 그렇다면 두 연인이 하루를 즐기고 바깥세상과는 무관하게 서로의 존재에 만족한 채 지낼 수도 있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하지만 당신 그림의 주제는 무엇이오?" 그가 물었다.

"너무 어두워서 볼 수가 없어요." 다이아나가 책을 그에게 넘겨 주었다."당신을 스케치한 거예요. 대강 그렸어요. 하지만."

아담이 즐겁고 놀란 표정으로 스케치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걸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시 다이아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 그림을 당신이 그린 거요?"

"물론이에요, 아담."

"이건 정말 불가능한 일인 것ㅊ럼 느껴지는데, 여자가 그렇게 빨리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더구나 이렇게 비슷하게."

"여자가?"

"그렇소. 난 여자 화가도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소."

"그래서 놀라고 있군요?"

"정말 놀랐소, 그리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이 원시적인 목탄 대신 진짜 스케치용 연필로 그렸다면 훨씬 훌륭했을 거예요. 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당신이 영국에서 스스로 즐기는 일이 바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오?"

"아담,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나는나는일하는 여자였어요. 영국이 아니라 올랜도예요. 나는 옷을 디자인하고, 내 가게를 직접 운영하고 있어요."

"트레몬트 가가 그들의 일가를 상업에 종사하게 한 거군요! 올랜도라는 마을은 정말 이상한 곳인 것 같소. 당신이 즐기는 일에 대해서 다시 내게 이야기해 줄 수 있소?"

"20세기에서 있었던 나의 이야기 말인가요? 나의 작은 환상이라든가, 아니면 나의 창조적인 일에 관한 것?"

"다이아나, 당신도 인정해야 할 게 잇어요. 당신은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한 여성이오." 아담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신의 이야기는 환상적이오." 그가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처음부터 당신은 아주 멋진 이야기를 꾸며냈소. 때로 나는 당신 자신도 그 이야기를 믿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이아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나무 등치에 좀 더 편안한 자세로 기대앉았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녀와 아담은 아주 편안한 상태였다. 오늘 오후의 시간들이 그들을 더욱 가깝게 밀착시켜 주었다. 그 친근감은 단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도 이어졌다.

아무튼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그가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담, 당신이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당신을 비난하진 않아요.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했던 이야기들이 가당치도 않는 소리처럼 들렸다는 걸 나도 잘 알기 때문이에요. 만약 당신이 20세기에 나타나서 자신이 1724년의 시대에서 온 사람이라고 주장했다면 나 역시 당신을 정신병원에 감금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담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의 진지한 표정은 이전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어쩔 수 없는 곤혹스러움이 함께 묻어 있었다.

"그래요. 난 이시대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난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구요. , 맙소사! 내 말이 너무나 우습게 들리는군요.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녀는 좌절감을 이기지 못한 채 말했다.

그는 말없이 앉아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는 다이아나의 말을 열심히 들어 주고 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런 다음 눈을 감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난 당신을 납득시키고 싶어요. 하지만 도저히 그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군요. 나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에요. 가령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는 있어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는 사람들이 컴퓨터에 그림을 그린다고 말예요. 하지만 그렇게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컴퓨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다이아나, 당신 말이 옳아요."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말은 아주 현대적으로 들리는군요. 어떤 언어 표현은 몇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아무튼 당신에게 컴퓨터라는 단어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건 정말 유감스런 일이에요." 그녀가 신음소리를 냈다.", 내가 왜 열심히 공부해서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되지 못했을까요? 고작해야 난 그림이나 그리고 대커리나 만들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내가 정말 1990년대에 살았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납득시키지 모할 것 같아요."

아담이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그가 근심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는 바람에 그의 이마에 주름살이 졌다.

"마이 레이디, 나는 당신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다이아나가 그에게 몸을 숙였다. "정말?"

"당신에게는 사실이라는 말이오. 당신의 마음속에서 말이오. 당신은 그 이야기를 너무나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어느덧 사실이 되고 만 거요."

", 아담, 당신은 정신의학에까지 통달했군요!"

"난 정신의학이라는 걸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소.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해요."

다이아나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나의 해적이 이처럼 유머 감각이 뛰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어쩌면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상상 속에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니까."

"물론이오. 당신은 대단히 상상력이 뛰어난 여자요. 그리고 대단히 창조적이오. 나는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곤 해요." 그가 미소 지었다. "오늘 당신은 특별히 창조적이었소."

다이아나는 기운이 빠져서 다시 나무에 몸을 기댔다. "아담, 난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시간을 초월한 우주의 이야기예요. 당신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사실은내가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해도 이 모든 이야기를 지어낼 수는 없다는 사실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요." 다이아나는 다시 그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난 정말 이곳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그녀는 바다에 떨어지는 짙은 보랏빛 일몰을 둘러보았다. ", 여긴 아니에요. 여기 당신과 함께 있는 이 해변은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니에요."

"아니오. 당신은 이곳에 속해 있어요. 우린 여기에 함께 속해 있소. 오늘은 정말 기억해야 할 날이오."

"그래요. 하지만 난 여전히 엄청난 의혹 속에 빠져 있어요.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요. 나는 과거에 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아요. 그들은 다른 인생을 살다가 부활했다고 주장하곤 하죠. 난 결코 그들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 생각하니 그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말도 안 돼요. 아무도 미래에서 살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어요. 영화에서 밖에는.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에요. 1700년대에 사는, 상상력이 뛰어난 여자가 아니에요. 난 그 이상이라구요. 난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온 다이아나 트레몬트예요. 맙소사! 똗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군요. 난 다른 시대에서 살다가 온 사람이라구요!"

그녀는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정중하게 변해 있었지만 거기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도 완벽하게 숨기지 못하고 있다.

"당신에게 앞으로 270년 후에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서 설명할 수만 있다면."

"그때는 여자가 상업에 종사하고 수영복이라는 옷을 입소?"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요.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도 있어요. 식민지들이 영국에 반란을 일으켜서."

"예언자가 아니라도 그 정도쯤은 예측할 수 있소."그가 말을 막아 버렸다. "독재자 조지는 때가 되면 쓰러지게 되어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오. 당연히 그렇게 될 거요."

"아담,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내 말은, 맙소사!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거지? 앞으로 50년이 좀 넘으면 자유의 불꽃이 전세계를 휩쓸고 지나가요. 처음엔 식민지 나라들, 그 다음엔 유럽과 러시아예요. 새로운 나라들이 세워지고 예전의 나라들은 분열되거나 사라질 거예요." 다이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마치 역사책을 읽는 것 같군요."

"다이아나, 당신은 아주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군."

", 그밖에도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하늘을 날아 다니는 배가 있어요. 그리고 인간이 달나라 여행을 했죠!"

아담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양팔을 내밀었다.

", 이리 와요, 나의 아가씨. 당신은 수천 가지 이야기를 더 갖고 있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당신에게 종이와 펜을 줘야겠군. 그것들을 모두 기록할 수 있도록 말이오."

다이아나는 그의 곁으로 가서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니에요." 그녀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내 이야기는 단지 당신만을 위해서 간직하겠어요."

멀리 떨어져 있는 언덕 위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야자나무 잎 사이로 그 달을 바라보았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미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정말이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담의 말이 옳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다. 그의 팔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고, 너울너울 춤추는 달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고,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은 모든 게 행복하고 완벽하게 느껴졌다. 다이아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녀의 감정에는 한 점의 의심도 있을 수 없었다.

비록 그녀의 인생이 이상하게 변해 버렸지만 한가지 사실만큼은 진실로 확인되었다. 그녀는 아담 호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녀가 한 남자에게서 원하는 것을 그 남자가 모두 갖추고 있는데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그녀는 배에 태워진 채 그의 아버지와 교환 조건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아담이 잠시도 그 거래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사이몬 호크를 석방시키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다이아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담은 그녀가 추위 때문에 떨고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

"마이 레이디, 여긴 밤공기가 아무 추워요. 내가 당신을 따뜻한 침대로 데려다 주겠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불을 끄고 짐을 챙겼다. 다이아나는 마을로 돌아오는 동안 줄곧 침묵을 지켰다. 아담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감정이 그녀의 머리를 기쁨으로 빙빙 돌게 만들고, 그녀의 육체를 기대감으로 떨게 했다. 예전에 그녀는 결코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감정이 이토록 격렬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사랑에 대해서 무지하다 할지라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앞으로 그녀의 인생이 훨씬 더 복잡하게 꼬여 갈 거라는 사실이었다.

 

9장 폭우와 분노의 바람 속에서

며칠 후 다이아나는 아담의 집 주방 안을 빙빙 돌면서 빈둥대고 있었다.

"도대체 간장 대신 뭘 넣어야 할지 모르겠군." 지금 다이아나는 그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아가씨,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마틸다의 표정은 항상 그렇듯 오늘도 대단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할머니는 다이아나가 주방에 들어오는 걸 몹시 싫어했다.

"식초를 넣으면 될지도 몰라!"다이아나가 흥분한 어조로 소리쳤다.

마틸다는 다이아나의 외침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일부러 선반 위에 올려놓던 백납의 사발에 힘을 주었다.

"그래, 난 스터 프라이에 식초를 사용했어." 다이아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어떤 비율로 했었지? 그리고 어떻게? 그걸 기억해 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는 엔지니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이제는 요리사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그녀는 자신에게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몸을 돌려서 마틸다에게 말했다.

"난 항상 너무나 바빠서 요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마틸다는 이번에도 역시 못마땅하다는 듯한 신음소리를 나직하게 토해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선장님은 이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할머니가 어떻게 아세요? 난 아직 요리를 시작하지도 않았다구요. 뭘 넣었는지 재료가 떠오르질 않아요. 그런데 요리용 기름은 어때요? 아마 이곳에는 저지방 불포화 식물성 기름이 없을 거예요. 그렇죠? 아무래도 이 끔찍해 보이는 기름을 써야 할 것 같군요. 소의 지방으로 만든 건가요?"

마틸다가 다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다.

"아마 라드라고 하는 것일 거예요. 이건 중국 냄비에 요리를 해야 해요. 중국 냄비가 없다면 그 비슷한 것이라도 사용해야 해요. 나는 이 야채로 할머니의 선장님이 아주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 거예요. 여기에 몇 가지 양념을 넣으면 아주 근사한 요리가 돼요."

"아가씨, 양념을 찾겠다고 나의 찬장을 엉망으로 만들어서는 안 돼."할머니가 명령을 내리듯이 말했다.

"할머니가 저를 마치 매처럼 노려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런 걱정만 없다면 나는 당장 주방에서 나갈 거야. 아가씨만 혼자 남겨 두고."

", 그래요?" 다이아나가 눈을 치켜떴다.

"저기 세탁실에 있는 게으른 촌뜨기 계집애들을 감시해야겠어. 가서 리넨을 삶으라고 지시를 해야 한다구. 그것들은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야." 할머니가 문 앞에서 멈춰섰다.

"할머니의 양념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을게요." 다이아나가 순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이아나는 혼자 남게 되자 양념 찬장을 열심히 찾았다. 그곳에는 작은 병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양념의 종류를 적어 둔 라벨도 없고, 그 모양도 매우 이상하게 생겼다. 그녀가 양념 뚜껑을 열 때면 이상한 냄새가 그녀를 공격하곤 했다.

"어머나!"

그녀는 코를 찡그렸다. 어떤 양념통에서는 죽은 생선 냄새가 풍겨 나왔고, 어떤 통에선 오래된 담배냄새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찾아보았다. 결국 그녀는 생강병과 붉은 칠리 고추를 찾아냈다.

다이아나는 그걸 조리 테이블로 가지고 온 다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계획은 몸에 좋은 중국식 스터 프라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요리의 재료를 기억해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간신히 그녀가 기억해 낸 재료조차 그와 대치할 재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모든 계획은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자신의 세계에 있던 것들이 이곳에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재미있었다. 요리에 사용할 간장 같은 사소한 것마저도 말이다.

그밖에 또 뭐가 있지? 안전핀, 가습기, 그리고 얼음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없어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것들 말이다. 하루에 24시간 동안 나쁜 소식을 지껄여대는 그 문명의 이기 없이 지내는 건 어떻게 보면 아주 산뜻한 일이었다.

다이아나는 신문도 아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은 크로스 워드 퍼즐을 하고 싶을 때가 있긴 했다.

차라든가 버스, 비행기그런 것들도 전혀 아쉽지가 않았다. 그녀와 아담은 집에서 시내가지 길을 따라서 걸어 다녔다. 그 길가에는 나무와 꽃들이 있었는데, 그 식물들은 화학비료나 해충제 같은 것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제멋대로 크고 있었다. 그들 주변의 공기는 항상 맑고 깨끗했다. 물론 오염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바다는 수정처럼 맑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로그스 케이의 삶은 아주 쾌적하고 즐거운 것이었다. 그리고 다이아나의 일상은 세심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마틸다는 수많은 하인들이 아침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쉴새없이 일을 하도록 감시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목욕을 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굶어죽을 염려도 전혀 없었다. 바나나와 망고 같은 게 지천으로 깔려 있었고, 할머니는 빵 굽는 기술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판타지 페어와 가족과 친구들이 몹시 그리웠다. 그들도 틀림없이 그녀를 몹시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게되면 그들의 근심도 더욱 커질 것이다.

아담의 스파이가 윈스턴 경의 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그는 식민지주의에 어긋난 행동에 대해서 크게 화를 내고 질책을 퍼부은 다음 결국은 아담의 조건에 응낙했다는 것이다. 이제 다이아나는 교환조건으로 보내지도록 확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장소나 시기를 알 수 없었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1974년에서 유리된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했다. 어떻게 그 시대와 이별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선은 로그스 케이에서의 생활을 최대한 의미깊게 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책을 읽기도 하고, 해변에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항해하는 법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밤이면 아담이 있었다. 그녀는 매일매일 이곳에서의 생활에 몰두하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려 했고, 아담과의 시간에도 충실하려고 했다.

만약 그녀가 18세기에 감금되어 있다는 이 기상천외한 상황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건 순간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 순간을 최대한 즐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선 기분전환을 위해서 맛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생선 스튜나 절인 쇠고기, 그리고 염소 고기 같은 걸 마틸다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다. 마틸다의 요리법은 다이아나의 20세기식 입맛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 저곳을 뒤져서 구할 수 있는 음식 재료를 구하기로 했다.

그날도 음식 재료를 찾고 있는데 뜰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이 시내에서 일찍 돌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몇 명의 사내들이 뜰의 저쪽 구석에 모여서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 중 몇 마디는 외설스런 말이라는 걸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말들은 전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남자들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남자는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 사내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외침소리는 더욱 격렬해졌다. 다이아나는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아담이 문 앞에 나타났다.

"아담, 사람들이 싸우고 있어요."

"다이아나, 주방으로 돌아가 있어요." 그가 명령했다.

"하지만 아담."

"내가 처리하겠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문 쪽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불안해서 선뜻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대로 서서 그가 뜰을 가로질러서 싸우고 있는 사내들에게 다가가는 걸 지켜보았다. 잠시 동안 그녀는 그 싸움의 결과를 지켜 보기 위해 그대로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담의 말이 옳다. 그들은 아담의 사람들이니까 그가 알아서 할 문제였다. 그녀가 간섭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주방으로 들어간 다음 문을 닫아 버렸다. 하던 일에나 몰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녀와 아담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근사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마틸다가 여기 어디에 마늘을 놓아 두었을 텐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마틸다가 주방으로 뛰어들었다. 그 노파의 행동은 어느 때보다도 다급해 보였다. 그리고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 하느님, 아가씨, 그들은 정말 미쳤어. 아니 나의 선장님이."

"마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는 제정신이 아니야. 정말이야!"

"마틸다, 제발 침착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선장님이 미쳐 가고 있다구. , 예수님!"

"미쳤다구요? 선장이."

다이아나는 마틸다가 제정신인지 확인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재빨리 뜰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쿵 울려대고 있었다. 마틸다는 격렬하게 울면서 다이아나를 따라 나왔다.

다이아나는 문을 쾅 열고서 자갈길로 걸어갔다. 모든 게 조용하기만 했다.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내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단 한 명의 사내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뜰의 가운데에 있는 기둥에 묶인 상태였다. 그리고 몇 피트 떨어진 곳에 아담이 손에 검은 채찍을 든 채 서 있었다.

다이아나는 아담에게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장 그만 두세요!"

그녀는 아담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추상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봐요, 지금 당장 주방으로 들어가 있어요! 이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마틸다, 저 여자를 끌고 가요!"

마틸다가 다이아나의 블라우스를 잡아 끌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할머니나 먼저 들어가 있어요. 난 여기 있겠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틸다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다이아나가 명령을 내릴 차례였다.

"문을 닫으세요."

뜰 한가운데서 아담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문이 닫히자 다이아나는 단호한 자세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담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점차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여태껏 그가 그렇게 화가 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난 지금 내 부하들 중의 배신자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요." 그가 말햇다. "이건 우리 식의 체벌 방식이오.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나는 한 인간이 회초리로 맞는 장면을 그대로 지켜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러면 내가 말한 대로 안에 들어가 있어요."

"이건 잔인한 짓이에요. 그리고 불필요한 체벌이에요."

"아가씨,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소. 이건 바다 사내들의 체벌 방식이오. 이건 수백 년 동안이나 내려온 전통이란 말이오. 아직도 우리는 그 전통을 고수하고 있소."

다이아나는 대꾸를 하려 했지만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이 뜰에 뛰어 들어온 침입자였고, 그들의 세계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뛰어든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의 명령에 복종해서 그 사내에게 벌을 주도록 내버려 둬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주방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바로 그때 기둥에 묶인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죄가 없어요, 아가씨. 나는 결코 아가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어요."

"러셀!"그녀가 소리쳤다. "저건 러셀이야!"

"난 절대로 선장님의 명령에 불복한 적이 없어요."

다이아나는 다시 그 자리에 섰다. 만약 러셀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모든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다시 아담에게 소리쳤다. "러셀은 당신의 친구예요. 당신은 그를 신뢰했어요. 배 문제에서나, 당신의 인생에서 그를 믿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그를 때리고 있는 거예요? 아담, ?"

"하지만 러셀은 배신자요. 그래서 배신자에게 내리는 벌을 가하고 있는 것뿐이오. 다시 한 번 당신에게 경고하겠소. 여기 일은 나에게 맡겨 둬요."

다이아나의 무릎과 다리가 떨려왔다. 그리고 목이 심하게 타고 있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셀이 개처럼 채찍질을 당하게 내버려 두고 들어가 버릴 수는 없었다.

"러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그녀가 큰 소리로 물었다."아담이 나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아가씨를 이 섬 밖으로 데리고 갈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라 펄라가 한 이야기를 믿으면 안 돼요. 난 정말 죄가 없어요."

"나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구요?"이제 다이아나에게서 두려움 같은 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용감하게 앞으로 다가서서 아담과 불과 몇 피트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틀림없이 당신도 그 사실을 믿지 않을 거예요."

아담의 음성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져 있었다. 그의 음성은 낮고 차가웠다."나는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해 그 정보를 알아냈소. 라 펄라와 러셀이 공모해서 당신을 유괴한 다음 그들이 독자적으로 윈스턴 경과 거래를 하려 했다는 사실을 말이오. 그들은 당신을 보내 주는 조건으로 금을 요구할 생각이었소.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그 지옥 같은 감옥 속에서 죽어가게 내버려 두려고 했소." 아담의 얼굴이 분노와 고통으로 뒤틀려 있었다."러셀은 그런 행동에 대해 당연히 벌을 받아야 마땅해요."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그는 벌을 받아야 해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그리고 당신이 그런 소문에 넘어가다니 정말 놀랍군요."그녀는 아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사실 확실한 증거도 없는 어리석은 소문일 뿐이에요. 그런 소문에 넘어가는 것 역시 어리석은 짓이에요. 당신은당신은 폭군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고 있는 걸 보고서 다이아나는 더욱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그가 했던 말을 상기시켜 주었다.

"당신은 항상 영국을 비난하지 않았나요? 그들이 식민지들에게 몹시 가혹하게 굴고, 독재를 했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게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지 항상 이야기했잖아요? 지금 당신은 그보다 더 심한 행동을 하고 있어요. 이건 훨씬 심해요!"

아담의 차가운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맙소사!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내 부하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은 내 스스로 결정할 거요."

"훈련? 이건 훈련이 아니에요. 이건 너무나 잔인한 짓이에요.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몰라도 당신이 이토록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아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은 러셀에게는 해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어요. 적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는 해야 하잖아요?"

"당신은 내가 내 소유의 배를 마음대로 경영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요? 내가 나의 부하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거요?"

다이아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도 그는 다이아나를 상대해 주고 있기는 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중요한 원칙들이 있는 법이에요. 그러니까실제로 죄가 입증될 때까지는 무죄이며, 적당한 절차에 따라서 배심원들 앞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아담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아가씨, 당신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당신의 말은 미사여구로 치장한 웅변일 뿐이오."

다이아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담이 그녀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미국의 헌법이나 권리 선언은 앞으로도 60년 이상이 흘러야 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지막 시도를 해보았다.

"지금 당신이 러셀에게 하고 있는 짓은 윈스턴 경과 그의 일당이 당신에게 한 짓과 똑같은 짓이에요. 당신은 한 인간의 권리를 마음대로 박탈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도 않아요. 마치 독재자처럼 행동하고 있다구요. 아담, 당신이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러셀은 재판도 받지 않은 채 형을 선고받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구요!"그녀는 아담의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위치는 바로 러셀과 채찍의 중간이기도 했다."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벌을 줄 수도 있어요."

"아가씨, 옆으로 비켜 서요.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담이 채찍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아담, 제발 이러지 말아요. 당신의 판단이 틀렸으면 어쩔려고 그래요? 당신의 친구이기도 한 이 사람을 부당하게 벌을 주고 있다면 어쩔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을 유괴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게 돼요. 당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는 인간이 되는 거예요! 만약 당신이 러셀에게 채찍질을 한다면 당신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아요."

아담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 자리에 똑바로 멈춰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치열하게 부딪쳤다.

뜰에 있는 모든 것이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항상 노래하던 새들도 조용했다. 그리고 집 앞의 부산한 움직임도 멈춰 있었고, 하릴없이 불던 미풍마저도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아담은 욕설과 함께 채찍을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가 어둠 속에서 서 있던 그의 선원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이아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긴장이 풀리면서 자신의 몸이 그대로 늘어지는 것 같았다.

"이 녀석을 묶은 사실을 풀어 주고, 마을에 있는 그의 감방으로 보내."

"안 돼요, 아담."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다이아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가 그에게서 기대하는 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나중에 내가 이 녀석을 심문하겠다!" 그가 부하들에게 말했다."목격자가 있면 누구든 데리고 와."

러셀은 몸을 떨면서도 몹시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사내들에게 끌려갔다."아가씨, 고맙습니다."그가 중얼거렸다."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그는 떠나면서 뒤를 돌아보고 아담에게 소리쳤다."선장님, 난 정말 무죄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그 마녀 같은 여자가 지어낸 소문일 뿐이에요."

"오늘은 그만하자구." 아담이 소리쳤다.

사내들이 떠나고 뜰은 다시 텅 비어 있었다. 아담이 다이아나에게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마이 레이디, 이제 만족스럽소?"

그럴 경우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로 물러서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18세기의 여자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행동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18세기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시대를 초월한 여자였으므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밝히고 싶었다.

"당신은 내가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아담처럼 행동하지 않았어요. 마치 야만인처럼 행동했다구요."

그가 냉소적인 웃음을 터뜨렸다."아가씨, 그렇다면 아마 내가 바로 야만인인 모양이오."

"아니에요."

"내 말이 맞아요. 당신은 나를 대단히 재산이 많은 신사라고 호칭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이제 진실과 마주서야 할 때가 되었소. 나는 내 힘과 기지에 의존해서 살고 있어요. 난 한 무리의 살인자들과 범죄자를 조종하고 있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담,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공포나 무력에 의해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때리는 건 야비한 짓이에요. 그런 행동을 하면 당신의 부하들은 절대로 당신을 존경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어요. 난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절대로 러셀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아담이 강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아가씨, 당신은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소. 전에도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아요."

"난 알고 있어요! 당신은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에요. 난 당신을 믿어요. 우리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요. 이야기를."

아담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표정만큼이나 냉랭했다. "레이디 다이아나, 이제 당신의 설교는 충분히 들은 것 같소. 난 몹시 피곤해요. 이제 이 18세기의 해적은 당신의 시야에서 멀어질까 하오. 내가 언제 돌아오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소."

그는 발에 걸리는 채찍을 발로 차서 걷어 버린 다음 뜰에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분노로 인해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고, 머리는 꼿꼿이 세운 채로 다이아나에게서 사라져 갔다.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 보는 동안 다이아나의 눈동자에 눈물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그가 다이아나에게 이야기했듯이 그는 성공하고 재산 있는 신사가 아니다. 그는 무법자에다 반역자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해적선의 선장이다.

다이아나는 천천히 뜰을 가로질러서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주방에는 마틸다가 있을 것이다.

그는 오늘 하루 동안 아주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녀가 그녀 시대의 포로이듯이 아담 역시 그의 시대의 포로인 것이다. 그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훔쳐낸 순간뿐이었다. 어쩌면 그들 사이에 그 이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오늘 벌어졌던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결코 그 전쟁에서 이긴 게 아닌지도 모른다. 다이아나는 아담을 사랑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사랑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그녀가 아담이라는 남자와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조종하는 것만큼 이 세상을 조종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은 그녀 앞에서 너무나 급히 펼쳐지고 있었다.

아담이 말했던 대로 그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이 검게 변해 있었고 서쪽에서는 구름이 뭉실뭉실 몰려오고 있었다. 달은 그 검은 구름 속에 묻혀 버렸다. 먼곳에서 울려대던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천둥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왔다.

다이아나의 감정도 그 검은 하늘처럼 어두워지고 있었다.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자 다이아나는 발코니로 나왔다. 얼굴에 사정없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담과의 충돌이 대단히 격렬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그 초점을 명확하게 드러낸 셈이다.

 

다이아나는 발코니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혹시 또 한 번 나무 둥치에 머리를 부딪쳐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해야 그녀가 꿈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뜰에서 있었던 일이 아무리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일들이 여전히 그녀의 환상 속에 남아 있었다.

"한바탕의 꿈." 그녀가 중얼거렸다."어쩌면 우리의 상상의 편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꿈인지도 몰라. 아담과 나의 상상이 우리를 이곳에까지 끌고 온 건 아닐까? 그는 결코 내 시대의 남자처럼 행동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 역시 절대로 여기서 살아갈 수는 없어."

그렇지만 과연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일까? 만약 그녀가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녀는 한 번도 본 적조차 없는 대부에게 보내질 것이다. 그건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다이아나는 깜짝 놀랐다. 그 인기척이 아담의 것이기를 바라면서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건 마틸다였다. 그 노파의 늙은 얼굴은 걱정과 조바심으로 깊은 주름이 져 있었다.

"아가씨를 놀라거나 두렵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마틸다, 나는 괜찮아요."

"나랑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자구. 천둥이 몰려오고 저쪽에서 다시 번개가 치고 있잖아. 아가씨, 여기 있는 건 위험해."

"그러고 보니 난 모르고 있었어요." 다이아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번개 때문이었는데."

"안에 들어가서 음식을 좀 먹는 게 좋겠어."

"배고프지 않아요." 다이아나가 고집스런 어조로 말했다.

"이제 뭘 좀 마실 시간이 됐어. 내가 차를 한 잔 만들어 줄게. 아가씨는 차를 좋아하나?"

다이아나는 바람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 할머니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고, 우정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노파는 같은 배를 탄 셈이다. 다이아나는 그 노파가 어렵게 보여 준 우정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마틸다, 고마워요. 할머니가 구운 빵도 함께 갖다주세요.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우리 둘이서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폭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바다를 가로질러 천둥이 격렬하게 몰려와서 커다란 소리로 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번개가 불꽃을 내뿜더니 비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다이아나는 그녀의 침실 창문 셔터를 활짝 열어 두고 그 사나운 천둥과 번개를 방 안에 초대했다. 그녀는 폭우가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걸 즐기고 있는 편이었다.

그 격렬한 폭우는 그 운명적인 날 밤에 다이아나가 갇혀 있었던 폭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하늘이 이런 식으로 폭발하는 건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시 예전의 삶을 떠올리면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쏟아지는 비를 향해 머리를 쳐들고 다이아나는 큰 소리로 기도했다.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하지만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는 번쩍이는 번개의 불빛과 땅이 흔들리는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뿐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수없이 들어 왔던 그 이야기의 의미가 지금 이 순간 다이아나에게 진실로 다가오고 있다. 다시 천둥이 하늘을 뒤흔들고 있다. 그 천둥이 그녀의 갑작스런 결심을 더욱 강하게 다져 주고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드디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방에서 미친 듯이 달려 내려왔다. 이제 그녀의 의지를 방해하고 나설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녀는 마틸다와 부딪쳤다. 다이아나는 그 노파가 바닥에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꽉 붙잡아 주었다.

"아가씨, 아가씨, 제발 이러지 말라구. 이렇게 폭우가 치는 밤에 도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지?"

"집으로 가요." 다이아나는 문을 열어젖히면서 소리쳤다. 바람 때문에 문은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집에 간다구요!"

마틸다가 애원과 저주의 말을 한꺼번에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노파의 말은 번개와 분노한 바람 속에 묻혀 버렸다. 폭우 때문에 다이아나의 드레스는 물에 젖어서 몸에 달라붙었지만 다이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 위에 있는 절벽으로 올라갔다.

이제 비는 언덕을 완전히 적시고 그녀의 발밑으로 길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무 덩굴과 관목을 꼭 움켜쥔 채 타고 올라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에 도달해야만 한다. 번개와 천둥이 사방에서 울려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다이아나는 진흙 속을 헤집고 절벽의 맨 위로 올라갔다. 폭우가 미친 듯이 몰아쳤지만 그녀는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서 있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미친 듯이 헤집고 있고, 차가운 빗물이 그녀를 내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 문제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이아나는 하늘을 향해 양팔을 펼쳤다.

"난 집에 가고 싶어요."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들쑥날쑥한 번개가 검은 밤하늘을 찢어 놓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눈을 감은 채 기다렸다. 이어지는 천둥의 외침소리는 그녀가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큰 소리였다. 그 천둥은 그녀가 딛고 서 있는 땅을 그대로 흔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람 속에 흔들리며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응답이 와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녀는 눈을 떴다. 하지만 놀랍게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똑같은 절벽 위에 그대로 서 있고 그녀가 속해 있는 것도 같은 시대였다.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는 절벽의 가장 자리로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는 마음은 너무도 절실했다. 그 절실한 마음은 심연 속으로 추락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것이었다. 그녀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서 아래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바다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거칠게 불어대는 바람이 그녀를 내리치고 있어서 똑바로 서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녀는 발을 제대로 딛고 서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폭우 때문에 절벽 가장자리에 있는 모래와 자갈이 유실된 상태였다. 다시 번개가 밤하늘을 가르면서 번쩍이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정한 몸짓으로 양팔을 하늘로 향한 채 대담하게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 순간 그녀의 발밑에 있던 흙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이아나가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거칠게 양팔을 휘젓고 있는 동안 바람과 어둠만이 그녀를 삼키고 있었다. 그녀가 붙잡고 의지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어둠뿐이었다. 다음 순간 강한 양팔이 그녀를 붙잡고 가장자리에서 끌어냈다.

", 다이아나, 내 사랑이러면 안 돼요! 이건 응답이 아니라."

그가 다이아나를 품안에 끌어안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가 아담의 얼굴에 내리치고 있었다. 그의 젖은 머리칼은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셔츠는 그의 몸에 그대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검은 망토가 바람에 미친 듯이 휘날리고 있다.

"아담, 괜찮아요." 그녀가 바람소리를 뚫고 소리쳤다."난 절벽에다 몸을 던지려는 게 아니에요. 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 거라구요."

아담이 망토를 벗어서 그걸로 그녀를 감싸 주었다. "다이아나, 내가 당신을 집에 데려다 주겠소. 나와 함께 집으로 갑시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언덕을 내려갔다.

집에 도착하자 아담은 추위에 떨고 있는 다이아나의 보호를 떠맡고 나섰다. 너무나 피곤해서 항의를 할 수도 없었기에 다이아나는 아무 저항 없이 그에게 모든 걸 맡겼다.

"이걸 마셔요." 아담이 명령했다. "럼 토디요."

다이아나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잔에서 한 모금을 깊이 들이켜더니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 이건 너무 강해요."

아담이 다이아나 곁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그건 당신의 환상적인 대커리와는 다른 맛이오."

다이아나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신 다음 낄낄 웃었다.

"추위를 몰아내기 위해선 강한 술을 마셔야 해요."

다이아나는 목욕을 한 다음 가운을 입었다. 그는 가운 틈으로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문질러 주었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것도 감기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거요. 하지만 목욕이 당신의 온몸을 따뜻하게 해주진 못할 거요."

"아담, 내 말을 믿어 줘요. 난 지금 온몸이 훈훈하게 데워져 있는 상태예요."

"지금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 가지는 못해요. 당신은 벼랑 끝에 서 있었소. 더구나 폭풍이 몰아치는 날씨에 말이오. 내 생애에서 오늘처럼 놀란 적은 없었소. 당신이 거기 서 있는 걸 보고서 난 십 년쯤 감수하는 기분이었소. 당신은 바로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소."

"난 자살하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난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다이아나는 같은 말을 다시 반복했다."절대로 난 자살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내 행동이 좀 이상해 봉이긴 했을 거예요."

"좀 이상했다구?" 아담이 그녀를 노려보았다."집에 돌아왔더니 마틸다가 울부짖고 있었소. 그게 그저 이상한 일일 뿐이라는 거요?"

"아담, 미안해요."

"마틸다는 내가 러셀을 채찍으로 위협하는 걸 보고 당신이 충격을 받아서 바다에 떨어져 자살하기 위해 절벽으로 올라갔다고 믿고 있었소."

"마틸다는 때로 조금씩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아담, 당신은 내가 왜 거기에 갔었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 나는 집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하기 위해서 거기에 올라갔던 거예요."

아담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나도 알아요내 행동이 우습게 보였다는 걸. 하지만 번개가 나를 이곳에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번개가 나를 다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줄 거라고 믿었던 거예요."

아담이 그녀의 옆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와 친근하고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렇지 않아요, 다이아나. 내가 당신을 블랙 호크에 태워서 로그스 케이로 데리고 온 거요."

다이아나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다시 예전에 하던 타령을 반복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다이아나."아담이 부드럽게 불렀다."제발 이제는 이 집을 당신의 집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소."

"로그스 케이가 내 집이라구요?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데리고 온 목적을 분명히 밝혔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죠?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와 교환할 때까지만 나를 이곳에 붙잡아 둔다고 했어요. 그런데 로그스 케이가 어떻게 내 집이 된단 말예요?"

아담이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가져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이아나의 허리를 끌어안아서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의 손길은 더욱 강해졌다.

"난 지금 당신에게 화를 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다이아나가 말했다.

그 말에 아담이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누구든 화를 내거나, 내지 않거나둘 중 하나가 아니오?"

"그럼 나는 화를 내는 쪽을 택하겠어요. 당신이 러셀에게 한 행동 때문이에요. 내가 폭우 속으로 뛰쳐나갔던 것도 그 때문이에요. 난 그런 끔찍한 일로부터 도망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건 당신이 옳았소."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이곳을 떠나려 했던 이유를 말하는 게 아니오. 러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뜻이오. 이제 그는 감옥에 있지 않아요. 나는 모든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소."

"잘됐어요. 내게 자세한 얘기를 해주시겠어요?"

"라 펄라가 당신을 유괴해서 그렌빌과 거래를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소. 나의 아버지를 데려오는 조건이 아니라, 금을 요구할 생각이었던 거요."

"그럼 러셀은?"

"그가 사실을 알아냈소. 하지만 그가 나에게 알리러 오기도 전에 그 여자는 상황을 눈치챘던 거요. 그래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비난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요. 그 이야기가 너무 빨리 퍼져나갔기 때문에 나도 순간적으로 그 얘기를 믿었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때문에 당신이 혼란을 일으켰군요."

그가 다이아나를 꼭 끌어안으면서 그녀의 머리에다 대고 아주 나직한 어졸 속삭였다."그건당신 때문이오."

"나 때문이라구요?"

"그래요. 그 계획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거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신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소."

다이아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운명이 라 펄라의 손에 의해 움직여졌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다.

"라 펄라는 나를 해치려고 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러셀은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를 때리고 위협했어요."

"난 화가 나서 내 정신이 아니었소. 하지만 난 단지 그에게 겁을 줘서 그가 알고 있는 음모를 털어놓게 하려던 것뿐이었소. 절대로 러셀에게 채찍질은 하지 않았을 거요. 그는 나를 용서했소. 다이아나, 당신도 나를 용서한다고 말해 줘요."

순간 안도감이 그녀의 온몸으로 번져갔다. "그래요, 아담.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마치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다시 한번 그가 그녀의 머리칼에 대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난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에 반쯤 미쳐 있었소. 사랑이란 우리들 모두를 바보로 만들지."

그 순간 다이아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다시 말해 봐요."

"난 바보요."

"아니, 그 이야기 말고사랑에 빠져 있다는 말."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폭우가 몰아치고 거친 바람이 부는 절벽 위에 서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서 당신을 빼앗아간다는 생각을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거요. 다이아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아주 깊이."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군요." 다이아나가 경이에 사로잡힌 채 말했다."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 있는 고집쟁이에다, 까다롭고 감각적인 여자인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군요!"

그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그들 사이에는 순수한 기쁨과 흥분이 함께 교차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한동안 그 황홀한 행복감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다시 그녀의 마음은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은 항상 환상과 행복을 파괴해 버린다.

"하지만 당신은 나의 대부라는 남자에게 나를 넘겨줄 계획이잖아요? 나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아니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요."

"하지만 당신이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아담이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 아담, 당신은 아버지를 몹시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구출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어요."

"나도 알아요."아담의 얼굴이 굳어졌다."나는 아버지를 석방시킬 다른 방법을 찾아내고, 당신을 안전하게 데리고 있을 생각이오. 다이아나, 도저히 보낼 수 없소. 지금은 안 돼요. 절대로."

아담이 몸을 숙여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다이아나는 베개에 몸을 눕힌 채 그 키스에 빠져들었다. 모든 장애를 뚫고서 그들은 결국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감정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할까? 다이아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눕힌 다음 다시 오랜 키스를 했다. 그녀의 발끝까지 감각이 전해지는 완벽한 키스였다.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녀가 아담의 입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뒤로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이 레이디, 어서 말해 봐요. 그래야 우리는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 아니오?"

"나도 동감이에요."

"그게그게 무슨 뜻이오?"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건나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그가 다시 다이아나에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아주 강렬한 키스였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자신의 말을 끝마쳐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해변에서 그 사실을 알았어요.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예요. 당신이 나를 윈스턴 경에게 보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의 음성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 "레이디 다이아나 트레몬트,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소? 나는 행동을 우선하는 남자요. 그걸 명심해 둬요."

그녀는 그의 가운 밑으로 손을 넣었다."그래요, 선장님. 그 말을 명심하겠어요."

 

10장 예정된 시간은 다가오고

"여자의 시중을 드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오."

다이아나가 베개에 몸을 괸 채 미소 지었다. "난 이게 아주 남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한밤중에 하는 식사일 뿐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아담이 미소 지었다."아무튼 당신이 다시 왕처럼 정중한 영어를 사용하는 걸 들으니 몹시 기쁘오. 그리고 아주 신선한 느낌이 들어요."

"고맙소." 그녀가 정말 왕처럼 위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경이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이 만찬은 어디까지나 경의 아이디어요."

그가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음식을 담은 접시를 내려놓았다."소인이 기억하는 건 단지 조금 시장하다고 말했던 것뿐입니다. 제가 주방에서 음식을 가져와야 한다고 말한 건 바로 전하였습니다."

다이아나는 접시에서 빵을 가져다가 그 위에 잼을 발랐다."내 옆에 앉아요."그녀는 웃으면서 침대에서 그가 앉을 공간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약간의 빵을 준 다음 키스했다."내가 최근에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지난 10분 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소."

"아담,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사랑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이아나는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당신이 나를 보호해 줘서 나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요. 그리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준 것도 고맙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라면 날 다락방에 가둬 두었거나 아니면 정신병원으로 보내 버렸을 거예요."

"정신병원이 뭔지 설명해 봐요."요즘 아담은 이런 식으로 그녀의 언어에 대해 새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친 사람들을 수용하는 집이에요. 당신도 아마 그런 곳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런던에 미친 사람을 보호하는 시설이 있소. 나도 그곳을 알아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더잇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성격이 외곬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여자일 뿐이오. 그리고 당신은 대단히 영리한 사람이오. 당신이 사용하는 어휘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어요. 특히 당신이 배심원에 의한 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누구든 죄가 입증될 때까지는 무죄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러셀에 대한 내 행동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소. 당신이 했던 말을 나는 계속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소."

"그렇다면 당신에게 알려 줘야 할 사실이 있어요. 그건 내가 직접 한 말이 아니에요. 그건 권리 선언에 나오는 말이에요. 금세기 말까지는그러니까 당신의 시대에는 아직 권리 선언이 나오지 않은 상태예요. 권리 선언은 미국의 역사를 바꿔 놓았어요. 그러니까 식민지 민족 말예요." 그녀가 재빨리 단어를 고쳐 말했다.

아담이 다이아나의 손을 잡고 생각에 잠긴 어조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미래의 시대에 대해서 더 이상 전할 말은 없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줄기차게 다른 시대에서 왔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요. 당신의 고집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것 같소. 그런데 당신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은 전혀 변함이 없어요."

"그건 내가 다른 시대에서 왔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난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게 될 지도 몰아요."

"그건 나를 떠나는 일이오. 당신은 한 번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소?"

"그건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 전의 일이에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이전의 일이라구요. 이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이곳으로 보내진 것에 대해 스스로 아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면 다시 돌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아담이 그녀의 손을 입술에 갖다 댄 다음 손바닥에 키스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나 자신도 더 이상의 자제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 같소."그가 짙은 갈색 눈썹을 치켜떴다."20세기의 시대에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연인이라도 있소?"

다이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있어요. 하지만 그 연인은 바로 당신이에요!"

"다이아나."

그가 경고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도 알아요. 전에도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지만 내가 블랙 호크 호에서 깨어났을 때 난 정말 당신이 20세기에 있었던 아담 호크라고 믿었어요. 그는 내가 몹시 끌렸던 남자예요."

"당신은 그 남자를 사랑했소?" 아담의 음성에는 질투심 같은 게 담겨 있었다.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요." 그녀는 아담에게 오랫동안 키스했다."당신이 알아 둬야 할 사실이 있어요. 그건 내가 여태껏 꿈꾸어 왔던 남자는 바로 당신이었다는 사실이에요. 그 남자가 내 환상 속의 남자든 아니든 내가 스완 에 탔을 때나, 아니면 로그스 케이에 있을 때나 난 줄곧 당신을 꿈꾸어 왔어요."

"나를 기쁘게 하는 말이 있다면 당신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할 때요. 내가 바로 당신의 꿈 속에 나타난 남자였다면 모든 게 잘될 거요."

"그래요. 모든 게 잘될 거예요."그녀가 강조하듯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그리고 내일은 밝고 새로운 날이 될 거예요."

밖에는 폭우가 그쳤다. 그리고 천둥소리 역시 아주 먼 곳에 들리고 있었다. 폭우는 바다 건너 저편으로 이동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일은 우리를 좀 더좀 더 그 시간에 가까이 가게 해줄 거예요. 내가 당신 아버지를 구하는 대가로 그렌빌에게 가게 되는 시간에."

아담이 그녀를 끌어당겼다."내 사랑, 걱정하지 말아요. 난 아버지가 안전하게 돌아오는 걸 보증한 다음에도 당신을 내 곁에 둘 수 있는 계획을 짜고 있는 중이오. 일만 잘되면 2주일 이내에 모든 게 해결될 거요."

다이아나가 몸을 떨었다."모든 게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난 윈스턴 그렌빌 경에게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여기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나도 당신을 내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요. 영원히 여기 있어야 해요."

다이아나는 그에게 더욱 가까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대답하진 않았다. 아담이 말하는 영원이라는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아니면 번개가 한 번 내리치는 동안에 끝이날 수도 있다. 그녀가 아담과 함께 로그스 케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몇 년이 될지, 아니면 며칠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이아나는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따뜻한 품안에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오늘 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어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군." 그가 다이아나에게 키스했다. 그런 다음 그녀를 떼어 놓고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어디 가려는 거예요?"

"당신에게 줄 게 있어요."

그는 다이아나에게 궁금증과 호기심에 남겨 둔 채 램프의 불빛을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은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선물이에요? , 보여 주세요."

"다이아나,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요." 그가 여전히 손을 꼭 쥔 채 그녀의 옆에 앉았다."오늘 당신에게 주려고 이걸 샀소. 당신이 러셀에 대해서 정직한 이야기를 해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당신은 나에게 진실을 말하는 걸 결코 겁내지 않았소. 진실을 말하는 건 무척 고통스러운 일인데도 말이오. 당신은 내가 깊은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주었어요. 당신은 아주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줬소."

다이아나는 목이 막혀 오는 걸 느꼈다. 아담의 정직성이 마치 사랑의 소네트처럼 그녀에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절대로 야만인이 될 수 없어요. 야만인은 그런 감정을 갖지 못하니까요." 그녀는 분위기를 밝게 할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하기만 했다."러셀은 당신 때문에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소. 그리고 나 역시 당신 덕분에 이제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소. 당신이 나를 변화시켰소그리고 내 마음도 변화시켰소."

다이아나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만졌다."내 인생도 당신 덕분에 완전히 변해 버렸어요."그녀가 미소 지었다."당신을 알게 된 건 정말 대단한 모험이었어요. 내 인생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 모험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오."

그가 손을 펴고서 손바닥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반지를 드러내 보였다. 금에 루비가 박힌 반지로, 가장 자리는 다이아몬드로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 아담."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정말 아름다워요."

"당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반지를 샀소.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난 그 선물에 내 변치 않는 사랑의 맹세를 담았소. 다이아나, 이 반지와 내 사랑을 받아 주겠소?"

"그래요. , 물론이에요." 그가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동안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의 다이아나,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소. 다른 여성에게는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앞으로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요. 맹세할 수 있소."

다이아나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깜빡거렸다."아담,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을 거예요.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변한다고 해도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가 다이아나를 와락 끌어안았다."마이 레이디, 울지 말아요. 지금은 울 때가 아니오. 지금은 마음껏 즐거워해야 할 때요. 우리는 드디어 짝을 찾아서 서로 사랑에 빠졌어요. 비록 당신이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온 여자이긴 하지만 그 사랑은 영원할 거요. 어쩌면 당신을 내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난 두 배나 더 당신을 사랑해 줘야 할 것 같소."

"당신은 내 말을 믿기 시작했군요, 그렇죠?"

"그런 것 같소. 우리의 사랑이 너무나 위대해서 시간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해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소, 다이아나. 당신도 그걸 알 수 없을 거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소. 당신의 시대나, 아니면 나의 시대 어느 곳에 있든 우리는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이오. 다이아나, 내 말을 믿을 수 있어요?"

"내 사랑, 아담, 난 당신을 믿어요. 진심으로 당신을 믿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그런 약속은 너무나 빨리 시험대에 오르고 말았다. 지금 다이아나는 블랙 호크의 뱃머리에서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창백해진 아침 하늘은 핏빛으로 물든 구름 밑에서 불길한 느낌을 주고 있는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번개가 대서양 위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하지만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이런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와는 다른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녀는 그 날씨가 싫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날씨는 폭풍우가 치던 케이프 커내버럴을 상기시켰다. 그 사실이 다이아나의 신경을 더욱 예민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블랙 호크 호는 지금 플로리다 해안에서 벗어난 작은 만에 정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다이아나가 기억하고 있던 플로리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높은 언덕도 없었고, 콘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기 위해 모여든 관광객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바다와 모래뿐이었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야자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나의 감시원들은 벌써 그들이 항해하는 걸 보았소."

다이아나는 아담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의 옆에서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크고, 강하고, 잘생긴 모습이었다. 그는 해적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정말 그는 그녀의 환상 속에 존재했던 해적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 그는 그녀의 해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와 진짜로 사랑을 주고받은 연인이 되었다.

그의 표정에서 불안감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거칠게 뛰고 있었고, 목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채 꽉 막혀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서 난간을 움켜잡았다. 손의 관절은 핏기가 사라져서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담도 그녀의 초조한 행동을 눈치 챘을 테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이아나를 위해서 짐짓 그렇게 의연한 채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바람이 약하게 불 때 범선을 타고 우리 쪽으로 다가올 거요. 그 배는 아주 빠르고 가벼울 거요. 하지만 블랙 호크가 그보다 훨씬 더 빨라요.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소."

그가 그녀의 허리를 편안하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난 불안해요. 겁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아요."

"다이아나,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천만에요! 난 윈스턴 경이 무서워요. 그리고 당신을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겁이 나요. 그리고."

"아니오, 나의 사랑. 당신이 겁낼 이유가 전혀 없어요. 나에게도 계획이 있소. 나는 반드시 그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갈 생각이오. 맹세할 수 있소."

"아담, 그렇다면 나에게도 그 계획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제발." 다이아나의 음성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에게 알리는 게 우리의 계획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소. 하지만 그걸 알아봤자 당신의 불안감만 더 커질 뿐이오."그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때가 되면 당신도 모든 걸 알게 될 거요. 그러니까 나에게 약속해 줘요.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다이아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시 후에 그녀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아담, 내가 윈스턴 경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면 어때요?"

"다이아나."

"아니에요. 난 그가 생각하고 있는 레이디 다이아나가 아니라는 것만 밝히면 돼요. 그러면 그는."

"이건 파티가 아니오."아담이 감정이 없는 말투로 대꾸했다."그렌빌이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려고나 할지 모르겠소."

"하지만 난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럼녀 우리는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안 돼요, 다이아나. 대영제국의 귀족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거요. 호화롭게 자라온 레이디 다이아나 트레몬트가 불한당 같은 해적과 함께 살겠다는 선택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했다고는 믿지 않을 거요. 아마 그는 여기에 뭔가 트릭이 숨어 있다고 생각할 거요. 그 사실을 명심해요." 아담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하지만 모든 게 곧 끝나게 될 거요. 내 사랑, 그러면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어요."

다이아나는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가슴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깨끗하고 빳빳한 셔츠에서 햇빛의 냄새가 풍겨 왔고 그의 피부에서는 소금기 서린 바다의 냄새가 났다.

그의 벨트에 있는 청동 버클이 그녀를 거칠게 압박해서 각인을 새겨 두었다. 그녀는 그의 벨트를 움켜쥔 다음 그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 묶여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은 항상 내 가슴속에 있을 거예요." 다이아나가 그에게 말했다."당신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렇죠?"

그가 대답 대신 그녀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만약에만약에 우리가 육체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해도 우린 정신적으로는 결코 이별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필사적으로 들렸다. 그녀는 그의 벨트를 더욱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길하고 끔찍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아담이 앞으로 고개를 숙인 다음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의 수염이 그녀의 얼굴에 닿아서 따끔거렸다. 그 감촉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다이아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지금 그는 그녀와 함께 있다. 그는 결코 환상이 아니다. 앞으로도 그들은 계속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요, 우린 함께 있게 될 거요. 우린 함께 늙어가고 우리의 자식들과 손주들이 자라서 나이를 먹는 걸 함께 지켜 볼 수 있을 거요. 다이아나,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나를 믿어요."

"아담, 나도 믿고 싶어요."

그가 계속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그럼 모든 게 잘 되어갈 거요. 그렌빌의 배는 돛을 내리게 될 거요. 나의 부하들이 네 갈고리 닻으로 그 배를 끌고 온 다음 다시 협상을 시작할 거요."

"아담, 당신의 아버지는 블랙 호크에 오르게 될 거예요. 그리고, 아담그런 다음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일도 없을 거요. 내 사랑, 내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것 같소? 그러니 안심해요. 방심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보내지 않을 거요."

 

아담이 말했던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윈스턴 경의 범선인굿 퀸호는 정말 돛을 내리고 조용히, 그리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만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담의 선원이 험악하게 생긴 네 갈고리 닻을 이용해서 두 척의 배를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다이아나는 돛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밖에서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휘감긴 돛 뒤에서는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만에 있는 물결이 그들이 탄 배의 선체에 부딪쳐 올랐다.

한 남자가 굿 퀸 호에 서 있었다. 첫눈에도 그는 아주 멋진 옷차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얀 실크 스타킹을 단정하게 신고, 버클로 된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빨간 비단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출렁이는 가발 위에는 삼각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어김없는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가 윈스턴 경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호크, 내 대녀를 보여 주시오!"그의 음성은 아주 높은 비음이었다. 그 비음이 넓은 바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자기가 숨어 있는 장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담이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건 거기 그대로 있으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그렌빌, 우선 나의 아버지를 보여 주시오!" 그가 소리쳤다.

그렌빌은 이쪽의 요구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노인을 데리고 와!"그가 한 선원에게 명령했다.

배의 갑판에 있는 해치가 열렸다. 그리고 사이몬 호크가 햇빛 속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다이아나는 돛대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경악의 비명소리가 터녀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갑판으로 나타난 사람은 잔뜩 야위어 있었고, 얼굴엔 핏기가 가신 창백한 표정이었다. 누더기를 입고, 수염과 머리칼은 텁수룩하게 자라 있으며, 그의 목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노인이 절뚝거리며 난간 쪽으로 걸어와서 그렌빌의 곁에 서 있었다. 그는 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는 햇빛이 눈부신 듯 눈을 깜빡였다.

다이아나는 아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분노를 억누르느라고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다이아나, 모습을 보여 줘요." 그가 말했다.

다이아나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자기가 숨어 있던 장소에서 걸어나왔다.

"나의 아가야, 다행히도 넌 무사하구나." 그렌빌이 소리질렀다.

아담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다이아나 역시 아담이 미리 지시했던 대로 침묵을 지킨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렌빌은 만족한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넌 모를 거야. 이제 네가 배 위에 올라오기만 하면."

"그렌빌, 나의 아버지를 먼저 보내 주시오!"

"호크, 그건 절대로 안 돼!"

물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는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선원들이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청난 긴장 속의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다이아나는 아담의 곁에 서서, 윈스턴경이 아담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불안감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팽창한 상태였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빨리 터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시나리오가 펼쳐질 때가 온 것이다.

"제발 빨리 조처를 취해 주세요!" 다이아나가 소리쳤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이아나의 말을 듣고 윈스턴 경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는 다이아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드디어 그가 한 손으로 미약하게나마 제스처를 취했다. 그 명령에 경호원 하나가 사이몬 호크를 밀쳤다. 그러자 노인은 난간 쪽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왔다.

두 배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서로 맞닿았다. 바로 그 순간 아담의 선원 중에서도 가장 건장한 사내 두 병이 사이몬을 붙잡아서 그를 블랙 호크 호로 잡아끌었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블랙 호크 호의 갑판 위에 나뒹굴었다.

그 순간 아담이 노인 쪽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선원들이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와 아들이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과 이해의 표정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애틋한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강렬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그런 눈빛은 아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그렌빌도 그걸 알아챌 수가 없었다. 아담이 뒤로 물러서서 다시 예전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아버지를 아래로 모시고 가!"

그 말과 함께 아직도 잔뜩 멋을 부린 채 굿 퀸 호의 난간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렌빌, 이제 숙녀를 거래하기로 합시다."

다이아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담을 바라보았다. 그의 차갑고 냉혹한 음성에는 조금의 감정 같은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그가 세운 계획의 일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무정한 음성에 그녀의 피가 그대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가 그녀의 팔의 위쪽을 움켜잡고 난간 쪽으로 걸어갔을 때 다이아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렌빌, 다가와서 여자를 요구해 보시오. 우리가 서로 합의했던 대로 내 손에서 당신의 손으로 넘겨달라고."

그가 다이아나를 약간 앞으로 밀었다.

다이아나는 몸을 돌려서 아담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조그만 사랑의 빛이라도 스쳐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냈던 그 애틋한 사랑의 눈빛을 그녀에게도 보내 주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하지만 그런 따뜻한 감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직접 이 여자를 넘겨 주겠소. 당신 이외의 다른 사람은 안 돼요."아담이 소리쳤다.

그 순간 다이아나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조여들기 시작했다. 다리도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는 정말로 나를 윈스턴 경에게 넘겨 줄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다이아나는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담은 그녀를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아담."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가 몸을 앞으로 숙인 다음 입술을 그녀의 귀에다 갖다 댔다."내가 지금이라고 말하면 저 한심하고 겉치레 좋아하는 인간의 조끼를 꼭 붙잡아요. 있는 힘을 다해서 붙잡는 거요. 알겠소?"

다이아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음성이 긍정적이고 자신있기 들리기를 바랬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담뿐 아니라 저쪽 배에 있는 윈스턴 경까지도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아담이 블랙 호크의 난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그렌빌, 이리 와서 당신의 상품을 가져가시오. 이 여자를 기꺼이 데려가게 해주겠소." 그리고 아담은 다이아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다이아나는 마치 최면에 빠진 것처럼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자신의 대부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나는 윈스턴 경의 뒤에서 그의 선원들이 머스킷 총을 치켜드는 걸 보았다. 아담의 선원들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다이아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제발 이 일이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빨리 끝날 수 있게 해주세요."

하늘에서는 여전히 으스스한 번개가 치고 있었다. 천둥도 동반하지 않은 그 번개는 정말 기분이 나빴다. 수평선 전체가 노란빛으로 변해 가는 것 같았다. 이 극적인 인질교환의 배경치고는 완벽한 것이었다.

그렌빌이 좀 더 다가왔다. 그의 표정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처럼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이아나는 두려움 때문에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음성이 그의 표정을 그대로 뒤집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경고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그를 향해 양팔을 펼쳤다.

그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바로 그 순간 아담이 소리쳤다. "다이아나, 지금이야!"

다이아나는 그렌빌의 조끼 깃을 잡아서 있는 힘껏 그걸 움켜잡았다. 그 순간 블랙 호크 호가 심하게 삐걱이기 시작하면서 약간 방향을 바꾸었다. 배는 곧 안정을 다시 찾았지만 조류가 몰려와서 두 사람은 균형을 잃어버렸다. 그렌빌이 블랙 호크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다이아나 쪽으로 쓰러졌다.

함께 있던 러셀이 그녀를 붙잡고서 있는 힘껏 뒤로 당겼다. 그녀는 여전히 그렌빌의 옷깃을 죽을힘을 다해서 붙잡고 있었다.

"그를 놓아 줘요." 러셀이 소리쳤다."제발 저 사람을 놓아요!"

그제야 다이아나가 손을 놓았다. 그러자 아담이 그렌빌을 들어 올려서 블랙 호크 호에 내려놓았다.

"친구들, 돛을 올리라구." 아담이 소리쳤다."그리고 키즈를 향해 달리는 거야. 그곳에다 그렌빌을 내려놓은 다음집으로 가는 거야!"

굿 퀸 호에 있는 선원들은 겁을 집어먹고 혼란에 빠졌다. 선원들이 총을 뽑아들었지만 윈스턴 경이 아담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발사하기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선원들이 부랴부랴 돛을 올리자 갑자기 어디선가 천둥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이 거칠게 불더니 파도가 그들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배가 파도를 타고 격렬하게 구르더니 순식간에 아담이 균형을 잃고 말았다.

아담이 잠시 잃었던 균형을 되찾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렌빌이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렌빌은 아담에게서 벗어나자 자신의 선원을 향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총을 쏴! 총을 쏘라구! 이 바보 같은 녀석들아! 이제 장애물도 없잖아! 빨리 쏘지 못하겠어?"

다이아나는 저쪽 배에서 한 사람의 선원이 아담을 발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우선 팔꿈치로 러셀의 갈비뼈를 냅다 쳤다. 그렇게 러셀에게서 벗어난 순간 다이아나는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갑판을 가로질러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달려가는 동안 미친 듯이 번개가 내리치면서 하늘을 그대로 열어 놓고 있었다. 그 번개에 지지 않으려는 듯 천둥소리도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아니면 머스킷 총이 발사되는 소리였을까?

그녀는 치명적인 총탄과 그 총탄의 목표물인 아담 사이에 몸을 던지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따뜻한 기운이 자신의 온몸에 번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하얀 불빛 속에서 모든 것이 폭파되고 있었다.

 

11장 추억 속의 반지

", 제발 내 눈에서 빛을 치워 줘요!" 다이아나가 소리쳤다. 그녀는 몸을 뒤틀면서 돌아누웠다. 하지만 눈부신 빛은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 이제 깨어났군요. 미즈 트레몬트,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해요!"

이제 그녀를 괴롭히던 눈부신 빛의 근원이 그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다시 눈을 깜빡인 다음, 눈을 가늘게 뜨고서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몸을 굽혔다. 그의 머리에는 회중전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다이아나가 가까스로 물었다."그리고 아담은 어디 있나요?"

"나는 닥터 웨브요. 당신은 올랜도 메디컬 센터에 입원해 있는 환자요. 나는 아담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가 누구인지도 몰라요."

"아담 호크지 누구긴 누구예요?" 다이아나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블랙 호크 호의 선장 말예요."

닥터 웨브가 관심이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와 함께 배를 타고 있었어요." 그 순간 갑자기 의사의 말이 그녀의 몽롱한 의식을 파고들었다. "올랜도라구요? 그럼 내가 올랜도로 돌아왔단 말인가요?"

"맞아요."

그 젊은 의사는 부지런히 그녀의 맥박을 재기 시작했다. 원래는 어린애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을 것 같은 그의 얼굴이 맥박을 재느라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잔뜩 지푸려진 상태다.

"내가 여기에 얼마 동안이나 있었나요?"

"3일 동안 있었어요. 새해 전야 이후로 계속 입원해 있었어요."의사는 회중전등을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신중하게 차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난 몇 주 동안이나 로그스 케이에 있었다구요!" 다이아나는 일어나 앉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닥터 웨브가 생색을 내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미즈 트레몬트, 혼수 상태가 끝나면 혼란 증세가 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앞으로 24시간이 더 지나면 당신은 좋아질 거요." 그가 그녀의 차트를 다시 침대의 다리에 걸어 둔 다음 병실을 가로 질러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이제 정맥주사를 제거하고 당신에게 고형 음식을 지급할 작정이오. 이제 곧 여기서 나가게 될 거요."그리고 다이아나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덧붙였다."당신의 담당 간호사를 들여보내주겠소."

다이아나는 다시 베개에 털썩 무너져 버렸다. 혼수 상태, 그녀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야? 어떻게 아담 호크와 로그스 케이, 러셀, 마틸다, 그리고 라 펄라 같은 사람들이 모두 꿈 속에 나타난 사람일 수가 있는 거지?

그녀는 눈을 감고 좀 더 분명히 생각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척의 배가 해변 근처에 정박했었어. 그리고 인질의 교환이 있었지. 거기에 총소리그리고 천둥 소리맨 마지막에는 눈이 멀어져 버릴 것 같은 번개가 치고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거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야? 그 모든 일이 발생하고 있는 동안 나는 혼수 상태로 병원의 침대 위에 누워 있기만 했단 말야? 그렇다면 아담이라는 남자도 단지 내 꿈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갑자기 엄청난 상실감이 몰려왔다. 다이아나는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마인디가 아주 커다란 꽃다발과 캔디 상자를 들고서 병실로 들어왔다.

"나 왔어요! 복도에서 사장님의 부모님들을 뵈었어요. 그분들께서 그러시더군요! 사장님이 이제 곧 퇴원할 만큼 좋아졌다구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모두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하지만 아주 좋아 보여요!"

"난 아주 좋아. 조금 피로하고, 때로 혼란스럽긴 하지만." 조금 피로한 정도가 아니었다. 너무나 피로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럴 거예요. 이해할 수 있어요." 마인디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꽃을 꽂아 둘 꽃병을 찾고 있었다. "이 꽃은 해리가 보낸 거예요. 그리고 캔디는 내가 샀어요. 벌써 짐작하셨을 거예요."

"고마워, 마인디."

"병실에 꽃이 아주 많군요." 마인디가 카드를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 꽃다발은 아담 호크가 보냈군요."

아담 호크그래, 아담 호크였어. 다이아나는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내가 더불어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바로 그 아담 호크는 아니야,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모든 게 허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삼켜 버렸다.

"그는 지금 어디 있지?" 다이아나가 큰 소리로 물었다.

"어딘가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 거예요." 마인디는 다른 아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그는 입원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였어요. 조금 다쳤거든요. 하지만 그는 병실에 아주 많이 왔었어요. 그리고 해리와 나에게 수만 번도 더 전화했을 거예요."

"좀 천천히 이야기 해봐. 우선 처음부터 시작해 봐.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큰 나뭇가지가 나를 향해 떨어졌다는 거야."

"그럼 사장님은 생명이 사그러져 가는 걸 목격했나요?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게 깜깜하던가요?"

"마인디, 질문을 한 쪽은 바로 나야."

"좋아요. 아담이 내게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드릴게요. 폭우가 사방에서 미친 듯이 몰아치고 있었어요. 그리고 해변에는 사장님과 아담 호크, 단 두 사람뿐이었어요. 사장님이 그에게서 벗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커다란 나뭇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사장님을 덮쳤어요. 그때 배 안의 불이 모두 꺼져 버린 거예요. 사방이 깜깜했대요."

"나는 번개가 친 후에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어."

"당연해요. 그때 이미 사장님은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나뭇가지가 사장님을 꼼짝도 하지 못하고 내리 누르고 있었어요. 아마 사장님을 그 아수라장에서 끌어내는 순간이 아담 호크에게는 영원과도 같았을 거예요. 선창에는 비상 전화가 있었지만 불통이었대요. 그래서 그가 사장님을 안고서 차까지 간 다음 병원으로 달려간 거예요. 사장님이 죽는 게 아닌가 하고 그는 몹시 겁을 먹었을 거예요. 사장님은 눈동자가 돌아간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기 때문이죠."

"마인디,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해줬어?"

"아니에요. 하지만 혼수상태에서는 으레 그런 거 아닌가요?" 마인디는 다이아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무튼 그의 행동은 진짜 영웅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용감한 행동임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아. 그냥 나를 배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놓고 앰뷸런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담은 그렇게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행동파예요. 그리고 여태껏 사장님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나도 그 상황을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어."

다이아나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다시 사고가 혼란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폭우 속에서 구출해 준 아담 호크와 그녀의 연인이었던 아담 호크 선장과 혼돈이 일고 있었다. 두 남자가 모두 대단히 영웅적이고 대담했다. 그리고 두 남자 모두 그녀의 환상 속의 남자들이다.

"난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아."그녀가 마인디에게 말했다.

"좋아요, 사장님. 난 가게로 나가서 해리와 함께 일을 시작해야겠어요. 모든 게 잘되어 가고 있으니까 사장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오늘 오후에 사장님은 퇴원을 하게 돼요. 사장님의 가족에게 내가 집까지 모시고 가겠다고 이야기해 뒀어요. 그곳에는 꽃이 더 많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한두 가지 사장님이 놀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아도 될 것 같아."다이아나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인디의 짓궂은 표정을 놓쳐 버렸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하얀 등나무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항상 즐겨 있던 진한 핑크색 조깅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칼은 오랫동안의 목욕으로 아직 젖어 있는 상태다.

주방에서는 마인디는 냄비와 컵을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익숙한 광경과 익숙한 소음이었다. 다이아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녀는 당연히 만족스러워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무척 사랑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삶의 방법을 바꿔 볼 생각이다. 더 이상 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일에만 빠져 살아온 자신이 후회스럽게 여겨졌다.

"이제 매일매일을 최대한 풍유롭게 살아갈 거야. 아담과 함께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그녀는 혼자서 속삭였다.

아담하지만 그 남자 없이 어떻게 생활이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어떻게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그게 환상이었든 아니든 그녀는 그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다이아나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외로움과 싸우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누린 환희를 다시 맛볼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수백 번도 더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중 한 가지는 이성적이고 대단히 현실적인 방법이다. 그녀가 혼수상태에 빠져서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그녀는 로그스 케이를 상상한 것이다. 물론 해적인 아담 호크와 그 밖의 모든 것 역시 그 상상 속에 등장한 것이었다.

그건 아주 명확하고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 역시 환상이고,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미친 생각이기도 했다.

그녀의 육체가 병실에 누워서 정맥주사를 맞고,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있는 동안 그녀의 또 다른 부분은 로그스 케이에 가서 1724년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생활 속에서 그녀는 아담 호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물론 그건 대단히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이다. 하지만 아담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너무도 생생해서 도저히 환상이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일이 진짜 일어났던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가능성이 없는 일일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서 아담이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 주길 기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온 건 마인디였다. 마인디가 쟁반을 들고서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차와 토스트, , 케이크, 그리고 쿠키를 가져왔어요. 사람들이 찾아와서 모두 사장님의 냉장고를 꽉꽉 채워 두었어요."

마인디는 쟁반을 소파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와 함께 들지 않겠어?" 다이아나가 물었다.

"글쎄요쿠키 한 개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인디가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파에 앉지 않고서 유리창 근처를 서성거리기만 했다.

"마인디,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몹시 초조해 보이는데."

차의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마인디는 즉시 행동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이제 교대를 해야할 시간이 되었어요. 그럼 사장님, 내일 만나요."

마인디가 코트와 백을 집어들고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다이아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마인디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가 그러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아울러 흥분과 기쁨이 온몽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니면 다른 친구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그 방문객이 부모나 친구들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방문객은 바로 아담일 거라고 그녀는 호가신했다.

드디어 그가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잇었던 대로 그는 키가 크고 잘생긴 모습이었다. 그는 짙은 갈색의 웨이브진 머리칼을 머리 위로 쓸어 올리고 있었다. 가죽 재킷에 파란 셔츠, 카키색 바지 차림이다. 그의 옷은 한결같이 현대적인 옷차림이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건 바로 아담이었으니까. 세련된 미소 역시 그녀가 알고 있는 아담의 미소와 똑같았다.

그를 보게 된 충격 때문에 다이아나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움직였다. 단 두 걸음에 거실을 가로질러 와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을 끌어안고 싶었소. 그래서 당신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소."

"어떻게."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마인디에게 드디어 도착했다고 전화를 걸었소. 마인디가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런데 당신 정말 괜찮아요?" 그의 눈동자가 근심으로 인해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난 좋아요. 정말이에요." 다이아나도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실제로 존재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아주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단지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에요.""당신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증상이오."

그가 손을 뻗쳐서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익숙한 감촉 역시 아담과 너무 흡사했다. 그녀의 아담. 다이아나는 얼굴에 피가 몰리는 걸 느꼈다. 그녀의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음성 속에 담겨 있는 떨림을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에게 고맙다고?"

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고서 아담은 다이아나를 소파로 데리고 간 다음 그녀 옆에 앉았다.

"당신은 영웅이었어요. 당신이 날 구해 줬어요."아담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 역시 그의 손길처럼 귀에 익은 것이었다."그건 내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오."

"나에게는 당신이 곁에 있었다는 게 행운이었어요."

"첫번째 데이트치고는 정말 굉장했어요. 그렇지 않소?"

"약간 특별하긴 했어요."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바라보고 말았다. 도저히 그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의 모습은 그녀가 로그스 케이에서 알고 있던 아담과 너무나 닮았다.

아니, 혹시 이 남자가 그 아담이 아닐까? 바로 이 남자 때문에 나는 그 아담을 창조해 낸 것이 아닐까?

"다이아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요?"

"미안해요. 그저그저 우리가 어떻게 만났던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건 내 인생에서 최고의 행운이 따라 주었던 밤이었소. 그때도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소.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소. 그런데 나도 지금은 그걸 믿게 되었소. 운명이 나를 판타지 페어로 끌고 간 거요."

"그날 밤그 이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아요."

아담이 어깨를 으쓱했다."다이아나, 시간이란 상대적인 거요. 나는 어느 시간대에서 다른 시간대로 비행기로 날아다니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를 변화시키지는 않아요. 나는 항상 내 개인적인 시간대에서 존재하니까."

"나는 시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행에 대해서. 특히 요즘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녀는 일부러 시간 여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원래 그녀가 의도했던 단어는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이제 당신은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게 될 거요." 그녀의 눈동자를 열렬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가 말했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이 익었다. 초록과 금빛의 반점이 있는 짙은 갈색 눈동자. 다이아나는 그 눈빛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대단히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아담도 자기와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이아나, 오늘은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소. 내가 너무 주제넘은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싶었소. 우리 둘은 너무나 엄청난 일을 함께 겪었어요."

다이아나는 그의 손을 꼭 움켜쥐면서 말없이 그에게 동감의 뜻을 표시했다. 아담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고무되었는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축제의 밤 이후로 나는 줄곧 당신에 대한 생각만 했었소. 밤에 바다 위를 날면서도 별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았소. 그리고 낯선 호텔에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과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소.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까지 했어요.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아뇨,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당신이 줄곧 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난 당신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당신 생각이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었소. 당신이 내 마음속에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겠소. 잠시만 기다려요." 그가 복도에서 여행 가방을 갖고 들어왔다."난 섬에서 당신에게 주고 싶은 멋진 선물을 몇 가지 찾아냈소."

그가 가방 속을 뒤져서 병을 하나 꺼냈다.

"난 우연히 당신이 대커리를 좋아하는 여자라는 생각을 떠올렸어요."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난 대커리를 아주 좋아해요."

"정말 다행이군. 이건 당신이 맛본 것 중에서 최고의 럼이 될 거요. 카리브 해에서 직접 가져온 거요. 의사가 술을 마셔도 좋다고 허락만 하면 내가 아주 근사한 냉동 대커리를 준비하겠소. 당신과 내가 함께 축배를 드는 거요. 이 세상에서는 맛보기 힘든 술이 될 거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사실은 만들기가 아주 쉬워요. 럼주 조금하고 주스를 조금 섞으면 돼요."

"그리고 설탕을 넣으면 되죠." 다이아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그건 로그스 케이에서 해적 아담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다.

사실 그 대화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대커리를 좋아하고 그걸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다이아나의 가슴은 심하게 방망이질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한 줄기의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소중한 희망을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었다.

다시 아담이 여행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갈색 종이로 싼 꾸러미 한 개를 꺼냈다. 다이아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걸 받아들였다. 꾸러미의 포장을 찢고 있는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담이 그녀를 저지했다. "잠깐우선 내가 그걸 어떻게 찾아냈는지 들어 본 다음에 뜯어 보도록 해요." 그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내가 마지막으로 들른 장소는 로그스 케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작은 섬이었소."

순간 다이아나의 가슴이 속력을 잊은 채 심하게 뛰었다. 미친 듯이.

"전에도 그 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 같군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탐사를 하러 갔어요. 그런데 우연히 절벽위에 있는 아주 낡은 집을 발견하게 되었소. 이제 그곳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여관과 골동품 가게로 변해 있었소. 하지만 그 집은 한때 어느 해적의 은신처였다는 전설이 있어요."

다이아나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엄청난 혼란을 수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신,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녀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 가게에서는 골동품과 여러 가지 기념품 같은 걸 팔고 있었는데 때로는 아주 진귀한 것도 있어요. 거기서 난 정말 소중한 걸 찾아냈소. 낡은 골동품 뒤에 있는 선반 위에 있는 것이었소."

그녀의 귀에 함성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가죽으로 된 장정은 곳곳에 금이 가 있었고, 여기저기가 찢긴 상태였다. 그리고 책의 페이지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듯이 누렇게 변해서 탄력을 잃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그녀가 중얼거렸다."1719."

그녀의 가슴은 희망으로 잔뜩 부풀어서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더잇아 참지 못한 채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싿.

아담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이아나, 정말 괜찮아요? 당신을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소."

"내가 화났다구요? 아니에요.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이건 정말 멋져요! , 얼마나 근사한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모든 경이가 한꺼번에 그녀에게 몰려왔다. 이건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진짜였으면 좋겠소."

다이아나는 책을 펼쳤다. 그 책은 그녀가 로그스 케이에서 본 책과 아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 책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녀는 황급히 맨 앞장과 뒷장을 펼쳐 보았다. 스케치한 흔적 같은 건 없다.

로그크 케이의 그 책에서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녀가 그려 놓았던 스케치 외에는 그 책을 알아볼 만한 근거는 없다. 그런데 그 스케치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이아나는 그 스케치가 일종의 신호가 되어 줄 거라고 믿었는데. 하지만 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담이 그녀에게 그 책을 사다 준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인지도 모른다.

아담은 손가락으로 그 낡은 가죽 장정을 쓸어내렸다. 그는 수심에 잠겨 있는 다이아나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씌여진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흥미진진한 소설이오. 정말 신기하죠?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오. 당신과 나에게는 이 책이 현재 시대를 의미하고 있어요. 우린 현재에 존재하고 있어요. 나는 당신과 내가 함께 있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하고 싶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말을 이어갔다."이 말이 너무 낭만적으로 들린다는 건 알고 있소. 사실 남자들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그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진 다음 손으로 그녀의 목을 쓸어내렸다. 그의 몸짓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너무나 낯익은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그대로 굴복해 버리고 말았다.

"남자들은 항상 낭만적이어야 해요."그녀가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하지만 오늘은 이야기를 충분히 나눈 것 같군요." 그녀는 갑자기 대담해졌다."아담, 내게 키스해 줘요."

잠시 동안 그녀는 과거로부터의 신호 같은 건 깡그리 잊고 말았다.

"물론이오."

그의 입술은 뜨겁고도 달콤했고, 그녀를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 쥔 채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다이아나는 환희의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들의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다이아나는 그의 목덜미의 부드러운 피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애무는 그의 뻣뻣한 머리칼과 등의 단단한 근육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담이었다. 바로 그녀의 아담그들은 뛰는 가슴을 마주 댄 채 서로에게 매달려 있었다. 다이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육체는 따뜻하고 강렬했다. 그리고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기쁨의 물결이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어둠 속에서 따뜻한 햇빛이 비치는 방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품안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아주 오랫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품안에서 다이아나는 완전하고 완벽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렇게 원했던 신호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몇 세기 전에 함께 있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처음 당신을 보았던 순간 나는 당신과 키스를 나누고 싶었소." 아담이 중얼거렸다."그때 나는 당신을 끌어안고 열렬한 키스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꼈소. 당신의 가게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나의 소망은 아주 간절했소."

그가 다시 그녀에게 키스한 다음 그녀를 떼어 놓고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너무 성급하게 굴고 있는 거요?"

"아담,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가 다시 그녀에게 키스해 주었다. 그녀의 윗입술과 뺨, 그리고 턱으로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미지근한 물 위에서 열대의 태양을 받으면서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열기가 그녀의 정맥을 타고 번져 가기 시작했다. 이어 그녀의 온몸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알려 줄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아담이 그녀의 입술에다 대고 속삭였다."내가 병원을 떠나기 직전에 간호사가 이걸 나에게 주었소." 그가 호주머니를 뒤적였다."이건 당신의 반지요."

"반지라구요? 그날 밤에 나는 이어링과 목걸이, 그리고 깃털과 얇은 천으로 된 머리쓰개를 덮고 있었어요. 그밖에 다른 보석은 없었어요. 반지는 끼지도 않았어요."

아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끄집어냈을 때 다이아나는 호기심을 느꼈다.

"글쎄요. 그들은 이것이 당신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소. , 당신의 손을 내밀어요."

그가 봉투를 펼친 다음 그녀의 손에 반지를 올려놓았다. 그건 가장자리에 다이아몬드를 박은 루비 반지였다. 아담이 그녀에게 주었던 바로 그 반지였다!

다이아나의 심장은 행복감을 가누지 못하고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손에 있는 반지를 꼭 움켜쥐었다. 그 차갑고 단단한 돌이 그녀의 살을 파고들었다. 그건 혼수 상태로 인한 환각이 아니라, 사실로 존재한 것이었다!

더 이상 그 사실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한동안 다른 시간 대에 가서 살았다. 거기서 그녀는 아담 호크라는 이름의 해적을 사랑했다. 그들의 사랑의 증표로서 그 해적이 반지를 그녀에게 주었다.

이제 운명은 그녀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를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제 다이아나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눈을 뜩,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때 그녀의 환상 속에서 존재했지만 이제는 현실 속에서 그녀의 진실한 사랑이 되어 줄 것이다.

그가 이마를 약간 찌푸렸다."정말 재미있는 일이오. 사실은 나도 당신이 반지를 끼고 있었던 걸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아주 많아요."

그가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래요." 그가 그녀의 머리칼에 대고 속삭였다."다이아나 트레몬트, 나는 당신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소."

"아담, 난 정말 기뻐요. 나 자신에게 약속한 게 있어요. 이제부터는 나도 변하게 될 거예요. 우선 내 개인 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거예요."

"정말 잘된 일이오."

"모두가 해적 복장과 가게에 들어온 멋진 남자 덕분이에요. 그 남자는 한 여자의 환상 속으로 걸어 들어왔어요." 다이아나는 그에게 천천히, 오랫동안 키스했다."오늘 밤 나와 함께 잠시 있어 주겠어요?"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밤새도록 있고 싶어요.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당신과 함께 밤을 지내고 싶소. , 다이아나." 키스를 하는 도중 그가 중얼거렸다."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당신과 함께 밤을 지내고 싶었소."

다이아나는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소."

"아주 오랜 이야기가 될 거예요."

"다이아나,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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