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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판타지 1

Bollnow 2024. 3. 15. 06:09

해변의 판타지

N. Robert

 

 

1

경쾌한 오토바이 소리에 캐치는 눈을 들었다. 타고 있는 것은 여자였다. 진바지에 재킷, 푹 뒤집어쓴 헬멧 차림에도 여자다움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흐음

캐치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오토바이는 슈퍼마켓 주차장에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오토바이를 멈추고, 그녀는 가볍게 뛰어내렸다. 키가 컸다. l70센티미터 정도일까. 게다가 상당히 좋은 프로포션을 갖고 있었다.

주스 자동판매기에 기댄 채, 캐치는 흥미 깊은 눈초리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헬멧을 벗은 순간, 그는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움찔할 만큼 미인이었던 것이다.

어깨 언저리까지 기른 긴 머리에 이마에 늘어진 앞머리가 유혹하듯이 하늘하늘 흩날리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는 깊이 있는 브루네트(거무스름한 머리카락)로 햇빛에 닿아 빨강과 금색 빛을 발했다. 계란 형의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선이 깊은 얼굴 생김새. 패션모델이 부러워하며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모델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캐치의 눈은 도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입술에 빨려들어갔다.

엷게 화장을 하고 있지만, 그럴 필요도 없을 듯했다. 무엇보다도 캐치의 눈길을 끈 것은 커다란 눈동자였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도 다크 브라운이라고 알 수 있는 그 사랑스러운 눈동자는 건강하게 뛰어오르는 어린 말을 연상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또한 깊이가 있고 총명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동작에는 난척하는 데가 없고, 천부적인 우아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것도 또한 눈동자처럼 어린 말을 생각나게 했다.

"젊군. 20세 전후일까?"

캐치는 또다시 담배를 빨아들였다.

"안녕, 미건!"

미건은 앞머리를 젖히면서 뒤돌아보았다. 베일리 가의 쌍둥이가 지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 미건은 헬멧을 오토바이 홀더에 건 뒤, 지프 쪽으로 걸어갔다.

테리와 제리는 미건과 같은 스물세 살이었다. 세 사람 모두 확실히 바닷가에서 자랐다는 것을 말해 주듯이 금색으로 탄 피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쌍둥이 쪽이 체구가 작았고, 푸른 눈과 길고 엷은 금발이었다.

곧 쌍둥이의 푸른 눈은 미건을 지나쳐 자동판매기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반사적으로 둘은 등 근육을 긴장시키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그런 다음 둘 다 자신있는 오른쪽 얼굴을 남자 쪽으로 내보였다.

"오래간만이야."

테리 베일리가 한쪽 눈으로 남자를 보면서 말했다.

"시즌 전에는 바빠서 말이야."

미건은 사우스캐롤라이나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건강해?"

"물론이야."

운전석의 제리 베일리가 기어를 바꾸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들 쇼핑하러 갈 참인데 함께 가지 않을래?"

그녀도 역시 눈 끝으로 남자의 모습을 붙잡은 채 떼놓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만 슈퍼마켓에서 살 물건이 있어."

미건은 유감스러운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저기에 있는 굉장한 회색 눈의 남자와?"

제리가 의미 있는 어조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미건은 웃었다.

"저 남자 아까부터 너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어. 그렇지, 테리?"

제리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블라우스 비싸게 산 건데."

둘은 똑같은 핑크색 캐미솔을 입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건은 까닭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뒤야, ."

테리는 머리를 약간 수그렸다.

"자동판매기에 기대서 있는 멋있는 남자, 굉장히 핸섬해."

미건이 돌아보려 하자, 그녀는 당황해서 덧붙였다.

"돌아보지 마."

"그런 게 상관있겠어."

미건은 뒤돌아보았다.

금발의 남자였다. 하지만 쌍둥이의 그것보다 진하고 햇빛으로 굴곡이 생겨 탐스럽고 부드러운 웨이브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키도 훌쩍 커서 색 바랜 진바지가 긴 다리에 잘 어울렸다. 남자는 편안한 자세로 자동판매기에 기대선 채 캔주스를 마셨다. 하지만 얼굴은 그저 그렇군.

미건은 생각했다. 남자는 눈도 깜박 않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리하고 빈틈이 없는 회색 눈, 얼굴 생김새는 말할 수도 없었다. 중앙이 조금 잘린 턱, 굳게 다문 엷은 입술.

확실히 핸섬하지만 눈이 거만하고 거칠은 느낌이 들어.

미건은 얼굴을 찌푸렸다. 한 마리의 이리저 남자는 태양을 쫓아 여성과의 덧없는 인연을 찾아헤매이는 부랑아, 한 마리의 이리야.

그 때, 캔에 입술을 댄 채 남자는 미건에게 뻔뻔스럽게도 윙크를 보내왔다.

뒤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미건은 불현듯 몸을 돌렸다.

"괜찮은 남자잖아?"

"그럴까?"

미건은 머리를 흔들면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하는데?"

쌍둥이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사치하는구나."

제리는 그렇게 말하고 지프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백미러 너머로 미건을 향해 인사했다.

"그럼 나중에 또 보자!"

미건은 콧등에 주름을 잡았지만, 몸을 돌리기 전에 손을 흔들었다. 그런 뒤,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무시하고 슈퍼마켓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점원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미건은 안쪽으로 걸어갔다. 이 마툴 비치에서 자란 그녀에게 할아버지의 유원지에서 반경 8킬로미터 이내의 어떤 상가에서라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솜씨 좋게 필요한 것만을 사는 거야. 카트를 밀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먼저 우유 팩을 선반에서 집어들었다. 첫째, 오토바이로 왔으니까 짐은 적은 편이 좋아. 도대체 트럭의 상태가 이상한 것이 말도 안 돼.

곧 미건은 이것저것 생각해 냈다. 그것은 그녀의 습관이었다.

쿠키 매장에서 미건은 발길을 멈추었다. 점심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쿠키 봉지와 상자에 유혹을 느꼈다.

오트밀 쪽이 더 좋을까

"이쪽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미건은 펄쩍 뛰어올랐다. 등 뒤에서 손이 뻗쳐와 <초코칩이 두 배로 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는 광고 문구가 붙어 있는 쿠키 봉지를 붙잡았던 것이다. 뒤돌아보자 거만한 듯한 회색 눈이 있었다.

"쿠키를 갖고 싶은 건가요?"

남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입 언저리에서 멈추어졌다.

"아니, 천만에요."

그렇게 말하고, 미건은 카트에 올려져 있는 남자의 손을 의미있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손을 떼었지만, 미건의 옆을 떠나려고 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뭘 사는 거지요, 허니?"

남자는 쿠키 봉지를 선반에 돌려 놓으면서 버릇없는 어투로 물었다.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고마워요."

미건은 초조해 하면서 카트를 밀고 참치 통조림을 집었다.

마치 카우보이 같아. 미건은 남자가 대담하게 걷는 것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멋있는 오토바이를 갖고 있더군."

그녀의 거절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은 듯 캐치는 계속해 덧붙였다.

"이 근처에 사오?"

미건은 티팩을 한 상자 집어 값을 매기듯 들여다 본 뒤 카트에 던져 넣었다.

"어떨지?"

"어이쿠!"

캐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건은 그것을 무시하고 다음 통로로 지나갔다. 하지만 빵에 손을 뻗치려고 하는 순간, 남자에게 손을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그것보다는 이쪽 것이 좋아."

미건의 손목을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점점 더해졌다. 미건은 분해하면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것 보세요"

"반지는 끼지 않았군."

캐치는 미건의 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껴 그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성가신 일은 없겠군. 함께 저녁식사 하는 건 어떻소?"

"싫어요."

미건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냉정하게만 굴지 말고. 허니, 당신의 눈은 정말 아름답군."

캐치는 빙그레 웃으며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자신들 두 사람뿐이라는 듯한 눈빛으로 미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때 다른 손님이 미안한 듯이 작은 소리로 말을 건 뒤 라이맥 빵을 집었다.

"저리 가 주세요."

미건은 낮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심 상대의 미소에 홀린 듯한 자신에게 놀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큰소리를 지를 거예요."

"그거야 환영이오."

캐치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겠지, 소동을 부려도 이 남자를 기쁘게 할 뿐이겠지. 점차로 화가 더해져 갔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게다가"

"데이비드 캐처튼."

그는 또다시 허물없는 미소를 지었다.

"캐치라고 불러 주시오. 몇 시에 맞으러 가면 되지?"

"그럴 필요는 없어요."

미건은 딱 잘라 말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재빨리 주위에 시선을 주었지만, 슈퍼마켓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소동을 일으켜도 효과가 일어나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손을 떼요."

"마툴 비치는 친절한 마을이라고 상공회의소는 공언하고 있지 않소, 허 니."

캐치는 드디어 손을 빼주었다.

"당신은 그 공언에 오명을 입힐 셈이오?"

"허니라고 부르는 따위는 이제 그만둬요."

미건은 몹시 화를 냈다.

"당신 같은 사람은 난 모르니까."

발소리도 거칠게 카트를 부리나케 밀어제치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아는 사이가 될 시간은 충분하지."

캐치가 중얼거리는 것이 미건에게 들려왔다.

두 사람의 눈이 또다시 얽혔다. 분노로 불타오르는 미건의 시선과 자신만만한 캐치의 눈 빙그르르 발꿈치를 돌리고, 미건은 걸음을 빨리해 카운터 앞으로 달려갔다.

 

"슈퍼에서 터무니없는 일을 당했어요."

미건은 주방의 테이블에 물건을 탕 올려놓고 조부에게 말을 걸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낚싯바늘을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던 조부는 얼굴도 들지 않고 '아아'라고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조부의 능숙한 손은 바늘과 깃털, 낚시봉을 모아서 훌륭한 바늘을 만들어 냈다.

"남자가요"

미건은 봉투에서 빵을 꺼내면서 울먹이듯 지껄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예의 없는 남자가 귀찮게 말을 거는 거예요. 바로 쿠키 매장에서요."

미건은 티팩을 찬장에 올려 넣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글쎄, 저를 식사에 초대하잖아요."

"오호, 그래?"

티모시 미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낚싯바늘에 노란색 깃털을 붙였다.

"내 안부를 전해다오."

"팜프는 참!"

미건은 비난하듯 머리를 흔들었지만, 입가에는 은근히 미소가 떠올랐다.

티모시 미러는 60대 중반으로, 작은 체구에 깡마른 노인이었다. 주름이 진 둥근 얼굴은 햇볕에 그을렀고, 더부룩한 백발은 풍성하게 기른 턱수염에 연결되어져 있었다. 수염은 구름처럼 포근하고 부드럽게 정성들여 손질되어져 있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도 바래지 않은 푸른색 눈은 주름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노인의 눈은 만들어 낸 낚싯바늘을 들여다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은 듯해도 그는 전부 다 듣고 있었다. 그와 손녀와의 사이는 튼튼한 끈으로 연결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미건은 조부의 머리 정수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내일은 낚시질하러 가세요?"

", 맑으면 아침 일찍부터."

노인은 다 만들어진 낚싯바늘의 수를 센 뒤, 내일의 일정을 재검토해 보았다. 낚시라고 하는 것은 방심할 수 없는 작업인 것이다.

"오늘 밤 안으로 트럭이 고쳐질 테니까, 저녁식사 전에 찾아오마."

미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한 번 조부의 뺨에 키스했다.

조부는 낚시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봄과 가을은 주말만 유원지를 열고, 여름에는 3개월간 두 사람 다 휴가 없이 일을 했다.

여름은 이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여름이 관광객을 불렀고, 관광객은 돈을 뿌리고 가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는 보통은 일만 명이 채 안 되는 이 마을의 인구가 30만 가까이 불어났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여름을 만끽할 수 있는 이 해변의 마을에서 즐기는 것이다.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생활해 나가기 위해 조부는 열심히 일을 했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미건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만약 조부가 이만큼 유원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하지만 그녀 자신에게 있어서도 유원지는 철이 들면서부터 그녀 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미건이 양친을 잃은 것은 그녀가 다섯 살이 된 직후였다. 그 이래 계속 조부는 미건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동시에 친구이기도 했다. 죠이랜드 유원지는 두 사람이 사는 해변의 작은 집과 함께 미건의 집이었다. l7년 전 두 사람은 슬픔 속에서의 의지였다.

지금 두 사람의 애정은 흔들림 없는 탄탄한 지반을 쌓아올렸다. 처음에는 조부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미건도, 한 번 마음을 열자 돌변해서 솔직해지게 되었다. 그녀는 전심전력으로 조부를 돌보게 되었고,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송어가 잡히면 좋을 거예요."

조부를 꼭 껴안은 뒤 미건은 속삭였다.

"오늘 밤은 참치 찌개예요."

"오늘 밤은 외출하는 게 아니고?"

"팜프!"

미건은 가스레인지에 기대어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쓸어넘겼다.

"초코칩 쿠키 한 봉지로 여자를 낚아 올리려는 남자 따위와 내가 식사를 하러 가리라고 생각하세요?"

허리를 돌려 불을 켜고 주전자를 올려놓고서 조부의 앞에 앉았다.

"상대에 따라서 다르겠지."

얼굴을 든 조부의 눈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야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듯했다.

"어떤 남자였지?"

"무뢰한이에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카우보이 같기도 하고."

조부가 깔깔 웃었기 때문에 미건도 미소로 대답했다.

"글쎄, 얼굴은 상당히 괜찮았어요. 스마트하지만 씩씩하고 매력적인 악한이라고나 할까. 멋있게 볕에 타 있었고."

"꽤 재미있을 듯한 남자가 아니냐. 어디에서 만났다고?"

"슈퍼마켓의 쿠키 매장에서요."

"그래서 넌 디너에 가지 않고 참치 찌개를 만들겠다는 얘기냐?"

조부는 무거운 숨을 내쉬고 안타까운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나는 확실히 모르겠구나."

마음에 드는 낚싯바늘을 향해서 말을 걸었다.

"저는 아니꼬운걸요."

미건은 우기면서 팔장을 꼈다.

"게다가 추파를 보내는 거예요. 그런 때 할아버지란 분은 쇼트 건을 갖고 손녀딸에게부터 그런 괘씸한 남자들을 격퇴시켜 주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 총을 들려 그 녀석을 사냥하러 가게 하려는 거냐?"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가 미건의 대답을 막아 버렸다. 홍차를 준비하려고 일어나는 손녀딸을 노인은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좋은 아이다. 사물을 지나치리만큼 진지하게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좋은 아이다. 게다가 출중한 미모를 겸비하고 있다. 모르는 남자가 교제를 신청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쪽이 이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 아이라면 입을 열지 않고도 남자를 격퇴해 버릴 것이다. 차가운 시선을 미건이 던져 주기만 해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움찔움찔 뒷걸음질칠 것이 틀림없었다.

유원지 일과 조각 공부에 바쁜 덕택에 미건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법을 배울 시간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시간을 만들지 않았던 걸까.

노인은 생각에 깊이 잠겼다. 슈퍼마켓에서 만났다는 남자에 대한 손녀딸의 태도가 어느 정도 마음에 걸린다. 자신의 추측이 올바르다면 미건은 재미있어 하고, 조금쯤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손녀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인은 이 문제를 잠시 동안 되는 대로 맡겨 두기로 했다.

"이번 주말은 날씨가 꽤 좋을 것 같구나."

정성들여 낚싯바늘을 낚시 상자에 넣으면서 노인은 말했다.

"유원지도 상당히 혼잡할 거 같구나. 네가 게임 센터에 있어 주겠냐?"

"물론이에요."

미건은 테이블에 찻잔 두 개를 놓은 뒤 앉았다.

"대관람 차의 시트는 조정이 끝났어요?"

"오늘 아침 내가 가서 보고 왔다."

노인은 뜨거운 홍차를 훌훌 불어 식히면서 조금씩 마셨다.

조부를 보고 있는 동안에 미건의 기분은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조부의 소박함, 나서지 않는 태도, 온화한 유머, 그리고 뽐내지 않는 태도는 미건이 항상 감탄하는 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것이 그저 좋은 것이다. 그래서 그 즐거움을 위해 돈을 청구하는 것보다도 더.

미건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죠이랜드 유원지의 경영 이익이 극히 작은 것도 당연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조부는 경영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듯싶었다.

유원지의 경영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오로지 미건뿐이었다. 그 중책 탓으로 조각할 시간이 점점 줄어가고 있지만, 유원지 덕택으로 조부와 둘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미건은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부가 이 유원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맘때가 되면 장부의 대차대조표 치는 급속히 적자를 향해 기울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이 일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고, 바쁜 시즌 중의 개량공사와 부활제에서 전몰장병 기념일의 연휴까지의 기간 중 선전을 어떻게 할까에 관해서 막연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건은 홍차를 마시면서 조부가 여름 한철 동안 일해 줄 사람을 고용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얼핏 흘려들었다. 그 때가 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책임감을 갖고 꼭 해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부는 고장난 기계와 볕에 그을은 관광객을 취급하는 데에는 명인이었지만, 사람을 고용하는 것에는 급료를 너무 많이 주는 데다가 충분히 일을 시키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미건은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올 여름은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으면그녀는 차고 위 자신의 아틀리에에 있는 반쯤 완성된 조각 작품을 문득 생각해 냈다. l2월까지만 기다려 줘그렇게 자신에게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내년이 오면 반드시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언제나 그랬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린 뒤, 혼자서 중얼중얼 말하는 조부 쪽으로 주의를 되돌렸다.

"그러니까 이전처럼 아르바이트를 원하는 대학생이나 떠돌이를 쓰도록 하자꾸나."

"그거야 문제없을 거예요."

미건은 중얼거렸다.

떠돌이라고 하는 조부의 말이 데이비드 캐처튼을 생각하게 했다.

캐치미건은 그의 형상을 그려보았다. 평소에는 그런 류의 남자는 떠돌이로 규정해 버렸을 텐데, 왠지 그에게는 그렇게 해버릴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안목에 관해서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미건도 그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스스로한테 당혹스러워졌다. 그것뿐인가, 자신은 저 건방진 남자와의 바보스러운 만남의 장면도 또다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또 한 잔 어떠냐?"

얼굴을 들자, 조부는 어느 새 가스 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 부탁드려요."

미건은 이 바쁜 와중에 시시한 일을 고시랑고시랑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꾸짖었다.

"슬슬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 편이 좋겠어요. 내일 아침에 낚시하러 가신다면 빨리 주무시는 것도 좋겠죠?"

"역시, 나의 손녀로구나."

노인은 불을 붙이고 주전자를 올리면서 창밖에 눈을 주었다. 그런 뒤 손녀 쪽을 힐끗 보았다.

"식사는 3인 분이 좋겠구나."

그는 슬며시 덧붙였다.

"아무래도 네가 말하던 그 무뢰한인 카우보이가 온 모양이다."

"뭐라구요?"

미건은 일어서면서 의아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렸다.

"여느 때 못지않게 정확한 묘사로구나, 미건."

남자다운 핸섬한 얼굴과 유연한 태도의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노인은 감탄했다. 그리고 창가까지 온 미건을 돌아보면서 끓어오르는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저 남자예요."

미건은 중얼거렸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캐치가 집 뒷문으로 가까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너도 그렇지 않을까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조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렇게 뻔뻔스럽다니!"

미건은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철면피로군요."

 

2

조부가 뭔가를 말하기 전에 미건은 세 발자국도 떨어져 있지 않은 주방문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힌 순간, 캐치는 마침 돌계단에 발을 올린 직후였다. 그의 회색 눈에 희미하게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뻔뻔스러운 사람이로군요."

"자주 그런 말을 듣지."

캐치는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한 시간 전보다 더 예뻐졌군."

그는 미건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밀봉색 볼에 어울리도록 장미빛이 피어나 있군. 아주 좋은 화색이야."

미건의 턱선을 더듬은 뒤 캐치는 손을 내렸다.

"여기에 살고 있나?"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미건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뒤를 쫓아온 거니까?"

캐치는 빙긋이 웃었다.

"기대를 배반하는 건 미안하지만,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리라곤 기대하지 못했소. 나는 티모시 미러 씨를 만나러 온 거요. 당신의 친구인가?"

"할아버지예요."

미건은 한발 앞으로 나와서 캐치와 문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무슨 용건이죠?"

캐치는 자신을 들여놓지 않으려 하는 미건에게 항의하려 했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인이 손녀의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어째서 그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는 거냐, 미건? 나한테 용무가 있어서 온 거잖니?"

"나는 진심으로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이라오, 허니."

캐치는 조용히 말했다.

그 목소리에 미건은 무심코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그런 뒤 어깨너머로 흘깃 조부를 보고 나서 캐치 쪽으로 다시 돌아섰다. 그녀의 눈에는 뚜렷이 경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 남자를 불끈하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하지만 캐치의 눈에는 미건이 생각할 수도 없었던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상냥함이었다. 그것에는 첫 대면에 보았던 거만함보다도 한층 당황하고 말았다. 미건은 안으로 돌아와 문을 누르고 말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캐치는 빙그레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미건의 앞을 지나갈 때, 그녀의 볼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아무렇지 않게 쓸어 올려 주었다. 미건은 그런 행동에 당황해서 선 채로 왜 약간 스치는 정도로 이렇게 동요되어 버리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미러 씨이시로군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한 소리에 미건은 뒤돌아보았다. 그는 조부에게 손을 내미는 참이었다.

"데이비드 캐처튼입니다."

노인은 '음음'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전화한 사람이로군."

캐치의 어깨너머로 미건을 언뜻 보고 말했다.

"손녀 메그와는 벌써 아는 사이인 모양이로구먼."

대답하는 캐치의 눈은 빙긋 웃고 있었다.

"예예, 무척 차밍한 아가씨입니다."

노인은 소리 없이 웃으며 가스 레이지를 향해 섰다.

"마침 홍차를 한 잔 더 마시려던 참이었다오. 어떻소?"

미건은 캐치의 눈썹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홍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야!

"좋습니다. 저도 한 잔 주십시오."

캐치는 서슴없이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와서 의자에 앉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도 같은 태도야. 미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그를 무시하듯이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조부가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에 눈으로 캐치에게 물었다.

"당신이 멋있는 눈을 갖고 있다고, 아까 내가 말했던가?"

캐치는 속삭였다.

그런 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조부의 낚시 도구상자로 눈길을 돌렸다.

"상당히 훌륭한 낚시 미끼를 갖고 계시는군요."

그는 오징어와 닮은 골제 미끼와 작은 개구리와 닮은 목제 미끼를 집어들었다.

"그것도 낚시 중의 한 가지니까."

노인은 홍차 컵을 테이블로 가지고 왔다.

"낚시는 자주 하는 편인가?"

"여기저기서요. 어르신네라면 이 그랜트 스트랜드 일대의 좋은 낚시터는 전부 아시겠군요."

"전부 다라고는 할 수 없고, 그 중 몇 개인가는 알지."

노인은 겸손했다.

미건은 티컵을 향해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일단 낚시가 화제에 오르면 조부는 몇 시간이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 몇 시간이나.

"실은 여기 있는 동안은 바다낚시를 해볼까 생각하던 참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말투이지만 말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그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담겨 있는 것을 미건은 놓치지 않았다.

"그런가."

조부는 이야기에 열중했다.

"하나 둘 좋은 장소를 가르쳐 줄 수는 있네만, 낚시 도구 갖고 있나?"

"아니오,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노인은 화제를 급히 바꾸는 것이었다.

"출신은 어디이신가, 캐처튼 씨?"

"캐치라고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캐치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었다.

"캘리포니아 태생입니다."

과연 바다에서 자란 것처럼 보여.

미건은 납득이 되었다. 그런 뒤 무관심한 표정으로 다 식어서 차가워진 홍차를 마시면서 컵의 테두리 너머로 캐치를 응시했다.

"고향은 멀리 있고."

노인은 완전히 편안한 기분으로 주머니에서 부스럭부스럭 파이프를 꺼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대화를 나눌 때 꼭 필요한 소중한 도구였다.

"마툴 비치에는 잠깐 동안 체재할 예정이신가?"

"사정에 의해서 다릅니다. 저는 유원지 일도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만."

노인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담배에 불이 붙고, 벚꽃나무 냄새가 나는 연기가 떠올랐다.

"그래, 그러셨지. 우연하게도 바로 지금 손녀와 여름 동안 아르바이트할 사람을 고용하자는 이야기를 했다오. 시즌이 시작하기 전 6주일뿐이오만."

파이프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곧 부활절이오. 탈것의 조작이라든가 표를 끊는다든가는 해본 적이 있으신가?"

"아니오."

캐치는 홍차에 입을 댔다.

"그런가"

노인은 어깨를 움츠리며 익숙치 않은 태도를 취해 보였다.

"간단하오. 곧 배울 거요. 보는 바로는 머리도 좋을 듯하고."

다시 캐치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미건은 보았다.

"경험이 없다면 급료는 많이 줄 수 없어요."

미건은 컵을 놓으면서 미안한 듯이 말했다.

어쩐지 이 남자는 마음에 걸린다. 잘하면 이 남자에게 죠이랜드 유원지에서 일하는 것을 체념시키고 어딘가로 다른 일자리를 찾도록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건의 마음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젯트코스타를 움직이거나, 원반 던지기에서 손님들을 불러들이는 일을 하면서 여름을 보내는 그런 류의 남자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얼굴이나 태도에서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캐치는 움찔도 하지 않고 태연히 미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요. 당신도 유원지에서 일하는 건가요?"

미건은 캐치의 허물없는 말투를 따지려고 생각했지만, 꾹 참고 짧게 대답했다.

"때때로."

"손녀는 경영에 능숙하다오."

조부가 끼어들었다.

"이 아이 덕택으로 어떻게든 운영해 나갈 수 있는 거라오."

"에에?"

캐치는 의외라는 듯 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모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델에 안성맞춤인 미모이라서."

그 어조에 경솔한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손녀는 예술가지요."

노인은 만족스러운 듯이 파이프를 흔들면서 말했다.

"흐음?"

캐치의 눈은 살피듯이 미건의 얼굴을 응시했다.

미건은 거북스러운 듯이 앉은 채로 머뭇거렸다.

"주제에서 벗어난 얘기예요."

그녀는 애써서 힘찬 소리를 냈다.

"아르바이트로 오신 거니까"

"그건 틀렸소."

"하지만당신은 분명히"

"그렇지 않소."

다시 미건의 말꼬리를 자르고 빙긋 웃은 뒤 캐치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태도가 약간 바뀐 것을 미건은 알아차렸다.

"유원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미건 씨. 사고 싶습니다."

두 사람의 남자는 서로를 응시했다. 조부는 놀란 듯했지만, 동시에 젊은 사람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 다 미건 따위는 잊어버린 듯이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물끄러미 캐치를 응시했다. 그녀는 바보스러운 농담은 그만두라고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아무리 보아도 진심인 듯했던 것이다.

생각한 대로 이 남자는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지니스 관계이다. 캐치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건은 당황해서 조부에게 눈길을 옮겼다.

"팜프!"

모기 우는 소리처럼 작은 소리였기에 조부에게는 잘 들리지 않은 듯했다.

"놀라게 하는군."

겨우 노인은 입을 열었다.

"왜 우리 유원지를?"

"이 주변의 유원지를 조사했습니다."

캐치는 시원스레 말했다.

"죠이랜드가 제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노인은 크게 숨을 내쉬면서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팔 마음은 없네, 쭉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으니까."

"제가 지불하는 금액으로 달리 얼마라도 생계를 이어갈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노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몇 살이시오, 캐치?"

"설흔하나입니다."

"나는 이 일을 자네 나이보다도 더 오래 해왔소. 유원지 운영에 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시나?"

"어르신네만큼은 모릅니다."

캐치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하지만 훌륭한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곧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조부가 찬찬히 캐치를 들여다보는 것을 미건은 지켜보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조부는 훨씬 잘 빠져 나올 수 있을 텐데.

데이비드 캐처튼은 문자 그대로 보통 사람은 아니야. 그들에게서 소외되어 화가 나긴 했지만, 미건은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서는 안 될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왜 유원지를 손에 넣고 싶은 거요?"

갑자기 조부가 물었다.

그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한 듯했다. 미건의 머릿속에서 경계의 벨이 울려왔다. 조부가 캐치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이 남자는 극히 위험하니까.

"벌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나서 캐치는 대답했다.

"게다가 즐거운 장사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말하고서 미소를 띠웠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과녘을 꿰뚫는 말이었다. 미건은 마지못해 감탄을 하고 조부의 표정에 눈길을 주었다.

"이 건에 관해서 뭔가 생각이 있으시다면 들려주십시오, 미러 씨."

캐치는 계속해서 덧붙였다.

"이삼 일 안으로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흥정을 할까를' 미건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든 생각은 해보기로 하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자네도 또 한 번 잘 생각해 보시게. 나도 손녀와 둘이서 벌써 몇 년이나 죠이랜드를 운영해 왔어. 저건 나의 집이나 다름이 없는 거야."

그리고 나서 둘러대듯이 미건을 바라보았다.

"너는 지금부터 캐치와 식사하러 갈 거냐?"

"팜프!"

미건은 조부에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거야말로 제가 생각했던 겁니다."

캐치는 뻔뻔스럽게 금세 말했다.

", 가지. 메그, 햄버거를 사드릴 테니까."

그는 일어서면서 미건의 손을 쥐고 그대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으려고 했다.

"그런 멋있는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지만"

"그러면 가는 거요."

캐치는 미건의 말을 도중에서 끊어 버리고 노인을 돌아다보았다.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쿡쿡 웃으며 빨리 가 달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상관하지 말고 둘이서 어서 가게. 나는 내일을 위해 낚시 도구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함께 데려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파이프 너머로 노인은 물끄러미 캐치를 보았다.

"아침 다섯 시 반이야."

그리고 조금 놀리듯이 덧붙였다.

"낚시 도구는 여분이 있어."

"고맙습니다."

미건은 어안이 벙벙해서 저항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캐치에게 이끌린 채 밖으로 나왔다.

조부가 낚시에 누군가를 데려간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아침 낚시는 늘 혼자서만 즐기고 싶어해서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을 데려간 적이 없었는데."

미건은 무심코 생각한 바를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그거야! 영광이로군."

미건은 캐치가 아직 자신의 손을 끼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볍게 손가락까지 끼고 있었다.

"난 안 갈 거예요."

미건은 단호하게 말하고 발을 멈추었다.

"팜프는 낚시 이야기로 당신에게 시간을 빼앗겨 버렸지만, "

"적어도 내게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정도의 매력은 있다고 인정해 주는 거로군?"

캐치는 뻔뻔스러운 미소를 띠우고 미건의 남은 한쪽 손도 붙잡았다.

"그런 말 한 마디도 한 적 없어요."

미건은 딱딱하게 말했다.

"어째서 그러는 거요?"

"그것은"

미건은 똑바로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싫기 때문이에요."

캐치의 웃음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당신의 마음을 바꿀 기회를 주시오."

"무리예요."

양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캐치는 손가락에 힘을 더 주었다.

"내기를 할까?"

미건은 마치 끌려나와 기쁘다는 듯한 표정을 긴장시켰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마음을 바꾼다면, 금요일 밤에 함께 유원지에 가 주겠소? , 어떻소?"

"만약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미건은 물었다.

"그 때는 어떻게 하죠?"

"이 이상 당신을 괴롭히지는 않겠소."

캐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미건은 이마를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 도박은 해볼 가치가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은 단지 오늘 밤 나와 식사를 해준다면 그것으로 끝이오."

캐치는 미건의 얼굴을 응시한 채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겨우 한두 시간 정도요."

"좋아요."

미건의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렇게 결정해요."

손가락을 풀려고 했지만, 그는 역시 놓아 주지 않았다.

"악수라도 하고 싶은데 당신이 내 손을 잡고 있으니"

"정말 그렇군. , 아무튼 내 방법대로 합시다."

캐치는 재빨리 미건을 끌어안았다. 스마트하고 마른 듯한 외견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건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항의를 하기도 전에 그는 미건의 입술을 빼앗았다.

키스는 격렬하고 교묘했다. 미건은 자신이 스스로 유도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캐치가 교묘하게 이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이 닿은 순간 미건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되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캐치의 품속에서 황홀해졌다. 가슴에 닿는 그의 튼튼한 가슴그의 달콤한 입술,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자그마하게 항의의 소리를 낸 뒤 겨우 그녀는 몸을 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캐치의 눈은 어두운 색이었다. 그의 눈은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어째서 이 눈에 떠오르는 표정을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어째서 이 남자를 간단하게 받아넘겨 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걸까? 완전히 자신을 잃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미건의 숨결은 떨렸다.

"무척이나 열렬했는데."

캐치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떠밀려 나다니, 무정하군."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미건은 격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제발 진정해. 하지만 가슴속의 고동은 높게 고동칠 뿐이었다.

"당신은 열렬했소."

캐치는 말했다.

"열렬하게 키스해 왔소."

그는 애정을 담고 미건의 양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차 쪽으로 향했다.

완전히 공포 상태에 빠져 버린 미건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고작해야 키스 정도가 아닌가. 아무 일도 아니야. 단지 나는 순간적으로 붙잡혀 버렸을 뿐이야. 하지만이만큼 열렬하게 정신이 아득해질 듯한 키스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곤혹과 불안, 그리고 희미한 떨림이 일순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역시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캐치는 차문을 열고 웃는 얼굴을 돌렸다.

"내기는 내기야, 메그."

 

3

차는 검은 포르셰였다. 확실히 그답군. 미건은 캐치가 흔히 있는 차에 타리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었다. 데이비드 캐처튼이란 사람은 최고급 용품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재력이 있는 거겠지. 그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아마 유산이라도 상속한 걸거야. 은회색 시트에 편안히 기대어 앉으면서 미건은 생각했다. 이런 남자가 자력으로 재산을 쌓아올렸을 리가 없어. 그녀는 캐치의 빈틈없는 손의 감촉을 생각했다. 분명 스포츠맨일 거야, 테니스를 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요트로 항해를 한다든가, 뭐 그런 거겠지. 그 이상 훌륭한 일을 하고 있을 리는 없어. 여가가 남아돌아 도락에 재산을 쏟아 넣고 있을 거야. 그리고 이번 도락은 유원지와 나라는 거겠지. 미건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면서 캐치 쪽으로 눈을 주었다. 굴곡이 깊은 옆모습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짙은 금색의 곱슬머리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디가 마음에 들지?"

미건은 얼굴을 붉혔다. 훔쳐본 것을 들켜 버려서 난처했던 것이다.

"수염을 깎는 편이 좋겠어요."

자신의 감정을 감추듯이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그녀의 비평을 점검하듯이 캐치는 백미러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과연 그렇군."

넓은 도로의 자동차 흐름에 주의하면서 캐치는 빙그레 웃었다.

"다음 데이트 때를 위해 기억해 두지. 아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미건이 옆에서 움찔한 것을 느끼고, 캐치는 덧붙였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교육받지 않았소?"

미건은 튀어나오는 말을 꾹 눌러 참았다.

차의 흐름을 타고 달리면서 캐치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이곳에서 산 지는 어느 정도나 되었소?"

"계속 여기서 살았어요."

미건은 창을 열었다. 밖의 소음이 크게 들려왔다. 수많은 차에서 라디오 소리가 섞여 기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이 까닭을 알 수 없는, 무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소리를 그녀는 좋아했다. 겨우 긴장이 풀어지자 등을 쭉 뻗은 뒤 또다시 캐치 쪽을 보았다.

"그런데, 당신의 직업은 뭐죠?"

캐치는 미건의 말소리에 섞인 경멸의 빛을 알아차렸지만, 한쪽 눈을 볼 뿐이었다.

"많지. 여러 가지를 갖고 있소."

"정말? 어떤 것을?"

캐치는 붉은 신호등에서 차를 멈추고 미건 쪽으로 몸을 돌려 똑바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갖고 싶은 것은 뭐든지."

신호가 바뀌고 솜씨 좋게 차를 주차장에 넣었다.

"여긴 들어갈 수 없어요."

거기가 고급 레스토랑인 것을 보고 미건은 말했다.

"왜 그렇지?"

캐치는 엔진을 껐다.

"이곳의 요리는 맛있는데."

"알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제대로 차림을 갖추지 못했어요. 게다가"

"당신은 언제든지 정장 차림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인가, 메그?"

이 말에 미건은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이 남자는 나를 바보 취급하고 있는 걸까. 진지하게 캐치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올바른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캐치는 차에서 내려 창으로 안을 엿보았다.

"그렇군, 잠시 동안 생각해 보지. 곧 돌아올 테니까."

캐치의 모습이 멋진 레스토랑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미건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쫓겨나는 것이 다음 순서라 생각은 했지만 그의 자신감에는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캐치의 자신에는 뭔가 근거가 있는 듯이 보였다. 미건은 팔장을 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야."

그녀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15분이 지났다. 미건은 초조해져 왔다. 저런 남자가 다 있어! 그녀는 화가 치밀어 차에서 내려 부서져라 문을 쾅 닫았다. 이런 곳에서 쭉 기다리게 하다니!

바로 옆의 전화 박스를 발견하고, 조부에게 데리러 와 달라고 전화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지와 재킷의 주머니 어디를 찾아봤지만 일 센트도 없었다. 그녀는 더욱더 화가 치밀었다. 미건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레스토랑 안을 흘겨보았다. 잔돈을 빌리든가 안의 전화를 사용하든가 할 수밖에 없다.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다.

마침 레스토랑 문을 열었을 때 캐치가 나왔다.

"고마워."

캐치는 유들유들하게 말하고 미건의 앞을 질러갔다.

미건은 캐치의 뒷모습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본 적도 없을 만큼 커다란 피크닉 용 바스켓을 안고 있었다. 그는 차의 트렁크에 바스켓을 넣고 미건을 돌아보았다.

"자아, 가자구. 배가 고파 죽겠군."

그는 트렁크를 꽝 닫았다.

"뭐예요, 그건?"

미건은 수상쩍은 듯이 물었다.

"디너요."

캐치는 차로 돌아오도록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미건은 조수석 쪽의 닫힌 문 앞에 섰다.

"어떻게 해서 그런 것을 가져올 수 있었죠?"

"부탁한 거지. 당신은 배가 고프지 않은가?"

"물론 배가 고파요. 내가 묻는 것은 어떻게 해서"

", 갑시다."

캐치는 운전석에 올라타 엔진을 넣었다. 그는 미건이 옆에 올라타자마자 쏜살같이 달렸다.

"당신 마음에 드는 장소는 어디요?"

"마음에 드는 장소?"

미건은 앵무새처럼 되물었다.

"여기에서 쭉 살았다면서 마음에 드는 장소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캐치는 차를 바다 쪽으로 몰았다.

", 어디요?"

"모래밭의 북쪽 끝."

미건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별로 사람이 없는 곳이에요. 시즌 때는 경우가 다르지만."

"좋아, 당신과 단둘이 될 수 있겠군."

더 이상 솔직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말투에 미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으면서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미건은 천천히 또 한 번 캐치의 얼굴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라도?"

캐치의 웃는 얼굴이 돌아왔다.

대담하지만 친근감이 있는 웃는 얼굴에 미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젯트코스타의 산을 처음으로 올라섰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

"아니에요."

미건은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해변에는 사람의 모습이 없고, 갈매기가 울고 있을 뿐이었다. 미건은 잠시 동안 기울어 가는 저녁햇살에 빠져 있었다.

"하루 중 이 시간이 제일 좋아요."

미건은 조용히 말했다.

"정말로 조용하군요. 마치 하루가 숨을 죽인 것처럼."

어깨에 손이 놓여지자 미건은 펄쩍 뛰었다.

"편안히."

캐치는 중얼거리고, 미건의 뒤에 서서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어깨너머로 저녁 해를 바라보았다.

"나는 밤이 열리기 직전을 좋아하오.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고, 햇살이 아직 부드러운 순간을."

두 사람은 말없이 바다를 응시했다.

"당신은 좀 더 편안히 지내는 쪽이 좋겠소."

잠시 지나 천천히 손가락으로 미건의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면서 캐치는 말했다.

미건은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격하게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 몸을 끌어당기려는 그녀를 캐치는 자기 쪽으로 돌렸다.

"싫어요."

순간적으로 미건은 큰소리로 말했다.

"그만둬요. 안 돼요."

캐치의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며 그녀는 말했다.

"알았소."

캐치는 손의 힘은 늦추었지만, 그녀를 떼어 놓지는 않았다. 그런 뒤, 바스켓에 몸을 구부려 새하얀 테이블클로드를 꺼냈다.

"빨리 식사합시다."

캐치에게서 테이블클로드를 건네받은 미건은 그것이 최고급 린넨인 것을 알고는 놀라웠다.

", 이것도."

몸을 구부린 채 캐치는 글라스 두 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고상해 보이는 와인글라스는 눈도 어칠해질 듯한 크리스탈의 반짝임을 발하고 있었다. 그 다음은 본차이나, 그리고 은 제의 포크와 나이프.

"어째서 이런 것까지 빌려 주었죠?"

"종이류는 없었기 때문이지."

"샴페인이에요?"

캐치가 글라스에 따르는 병의 상표를 보고, 미건은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 미쳤어요?"

"내가 어떻게 되다니?"

캐치는 부드럽게 되물었다.

"샴페인은 싫어하오?"

"그야 굉장히 좋아하죠. 우리나라 것밖에 마셔 본 적이 없지만."

"이건 프랑스 제요."

캐치는 글라스를 내밀었다.

미건은 우선 한 모금 마셔 보았다.

"맛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또 한 모금.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미건은 너무나 비싸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햄버거를 먹을 기분이 아니어서 말이야."

캐치는 샴페인 병을 모래 속에 꽂아 세웠다. 그리고 테이블클로드 위에 작은 용기를 하나 놓고, 또다시 바스켓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건 뭐죠?"

미건은 용기 뚜껑을 열고 물었다.

안에는 광택있는 검고 딱딱한 것이 들어 있었다. 의심스러운 듯이 눈썹을 찌푸리는 미건을 옆눈질하며, 캐치는 접시에 토스트를 올려놓았다.

"이건"

미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캐치를 보았다.

"캐비어예요?"

"그렇소. 조금 나눠 주겠소?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오."

캐치는 미건에게서 용기를 받아들고 토스트에 듬뿍 캐비어를 얹었다.

"당신은 필요 없소?"

캐비어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물면서 캐치는 말했다.

"모르겠어요."

미건이 망설이자, 캐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입가에 토스트를 내밀었다.

", 한 입 먹어보시오, 미건."

"짜군요."

두려워하면서 토스트를 베어문 미건은 놀라 말했다.

그녀는 아예 캐치의 손에서 토스트를 받아들고 또 한 입 먹었다.

"하지만 맛있어요."

"나에게는 남겨 주지 않을 모양이로군."

미건이 토스트를 전부 먹어 버리자, 캐치는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으며, 또 한 장의 토스트에 캐비어를 얹어 건네주었다.

"어떨까 하고 생각했었지."

캐치는 토스트를 받았지만 눈은 미건의 얼굴을 응시한 채였다.

"뭐가요?"

미건은 아직껏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에 묻은 캐비어를 핥았다.

"당신의 웃음소리, 웃음소리도 얼굴처럼 매력적일까 생각했지."

캐치는 미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토스트를 먹었다.

"생각했던 대로요."

미건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웃음소리 정도라면 일부러 캐비어나 샴페인 따위로 도발시키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어깨를 움츠리며 그녀는 캐치의 손이 닿지 않을 거리까지 피했다.

"나는 자주 웃으니까."

"그럴까."

미건은 놀라 캐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죠?"

"당신의 시선이 언제나 신중했기 때문이오. 당신의 입도."

캐치는 미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무리를 해서라도 웃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도 몰라."

"이상한 사람이로군요."

미건은 정좌를 하고 캐치의 눈길을 받았다.

"나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것이 그렇게도 문제인가?"

캐치는 다시 바스켓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미건은 로브스터와 신선한 열기가 나와도 이미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캐치에게로 가까이 갔다.

"나도 돕게 해줘요."

두 사람이 식사하는 동안 어느 새 태양은 가라앉고 달이 떠올랐다. 엷은 달빛이 바다에 쏟아져 내렸다.

마치 꿈과 같다고 미건은 생각했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도자기나 은기, 혀에 남은 환상적인 맛, 귀에 익은 파도 소리, 옆에 있는 알지 못하는 이 남자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남자에 대해 하나 하나 알기 시작하고 있었다.

캐치가 웃을 때의 얼굴의 움직임, 자신에 넘친 목소리, 그것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의 귀에 걸린 곱슬머리 형도, 달빛과 샴페인의 마법에 걸려 버린 걸까. 미건은 캐치의 곱슬머리를 만져보고 싶었다. 감촉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는 것이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치즈 케이크는 안 먹겠소?"

캐치는 포크에 찌른 케이크를 미건의 입가로 가까이 가져갔다가 얼른 자신의 입 안으로 넣었다.

"이젠 배가 불러요."

미건은 가슴에 무릎을 껴안고 턱을 갖다대었다. 그리고 캐치가 맛있다는 듯 디저트를 먹어치우는 모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먹을 수 있죠?"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오."

캐치는 마지막 한 입을 먹었다.

"무슨 일이나 열중할 것. 그것이 나의 신조지."

"이런 피크닉은 정말 처음이에요."

미건은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다음 뒤로 양팔을 지탱하고 발을 뻗어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았다.

"이렇게 맛있는 만찬을 먹은 것도 처음이고."

"당신이 칭찬을 했다고 리카르도에게 말해 두지."

캐치는 미건의 옆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머리끝부터 날씬한 목덜미 곡선으로 눈길을 주었다. 미건은 위를 향해 별을 보았다.

"리카르도란 누구?"

미건은 멍하니 물었다.

귀에 걸려 있는 머리카락을 캐치가 손가락 끝으로 장난해도 화내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요리사요.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녀석이지."

캐치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그것이 마음에 들어 미건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알고 있어요?"

"내가 시카고에서 불러왔으니까."

"불러왔다고요? 어떤 의미예요?"

미건은 놀라서 캐치를 응시했다.

"저 레스토랑의 주인이 당신인가요?"

"그렇소."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미건을 보며 캐치는 빙그레 웃었다.

"이 년쯤 전에 사들인 거지."

미건은 얇은 도자기와 무거운 은식기가 널려 있는 새하얀 테이블클로드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면, 저 레스토랑은 한 번 파산한 적이 있었다. 요리가 너무 비싼데다가 서비스도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뒤 한 번 개장을 해서 내부 공사를 하고 거울을 붙인 천장이 자랑거리였었다. 그리고 새롭게 개업을 한 후부터는 질 높은 레스토랑이 많기로 유명한 이 마을에서도 최고급이라는 평판을 쭉 유지해 왔다.

미건은 캐치에게서 주의를 되돌렸다.

"당신이 그것을 사들인 거예요?"

"그렇소."

캐치는 빙그레 웃었다. 어느 틈엔가 그는 미건과 마주보이는 위치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놀랐소?"

미건은 그의 얼굴에 구멍이 뚫어질 만큼 유심히 바라보았다. 더부룩한 머리, 무릎이 닳아 하얗게 된 진바지수완 있는 실업가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끼를 갖춰 입은 양복이나 양옆으로 딱 달라 붙인 머리형은? 하지만캐치의 얼굴에 그것을 믿게 하는 무언가가 스며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에요."

천천히 미건은 입을 열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미건은 눈썹을 모았다. 캐치가 자리를 바꾼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바다 쪽을 보고 있었다.

"당신이 레스토랑을 사들인 것은 죠이랜드가 갖고 싶은 것과 같은 이유겠죠."

"말했을 텐데, 그것이 나의 일이라고."

"하지만 단지 자신의 소유로 하고 싶다는 것만은 아니겠죠?"

미건은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캐치의 무뚝뚝한 대답만으로는 미건은 만족할 수 없었다.

"사들인 것을 번창시키는 것이 일이겠죠?"

"그거야 그렇지."

캐치는 인정했다.

"번창하면 더 이상 좋은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지 않소?"

미건은 캐치 쪽으로 고쳐 앉았다.

"하지만 죠이랜드는 안 돼요. 팜프의 삶의 보람이니까요.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캐치는 솔직히 인정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오늘 밤은 그만둡시다."

그는 미건의 손을 쥐었다.

"오늘 밤은 사업 이야기는 제외시키지."

"하지만, 캐치"

"저걸 봐, 메그."

캐치는 하늘을 가리켰다.

"세어본 적은 있나?"

미건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릴 적에는. 하지만"

"별을 세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은 아니오."

유머가 섞인 따뜻한 소리로 캐치는 말했다.

"밤에 여기에는 오지 않소?"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별은 밝고 무척이나 가깝게 보였다.

"가끔 와요."

미건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작품이 잘 안 돼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경우라든가, 혼자만 있고 싶을 때에."

"당신의 전문은 뭐지?"

미건의 손등을 캐치의 손가락이 어루만졌다.

"해변의 풍경화? 그렇지 않으면 인물화?"

미건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틀렸어요. 조각이에요."

"헤에!"

캐치는 미건의 손을 들어올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군. 어쩐지 당신의 손은 강한 힘이 있었소. 훌륭한 재주가 엿보였소."

캐치는 미건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충격의 파도가 그녀의 전신에 퍼졌다.

미건은 천천히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서 가슴에 무릎을 당겨 양손으로 안았다. 보지 않아도 캐치가 웃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재는 뭐요? 점토, 나무, 그렇지 않으면 바위?"

"전부 다예요."

캐치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그녀는 다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디에서 공부했소?"

"대학에서요."

미건은 어깨를 움츠리고 애매한 대답을 했다.

"충분한 시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요."

그녀는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오늘 밤은 달이 저렇게도 밝군요. 이 같은 만월의 밤에 오는 것을 좋아해요. 빛이 은색이니까요."

캐치의 입술이 귓가에 닿는 것을 느끼고, 미건은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팔에 어깨가 붙잡혀 있었다.

"편안하게, 메그."

캐치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볼을 스쳤다.

"달이 있고 바다가 있소,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 우리들 뿐이야."

볼에 캐치의 입술을 느끼면서 미건은 그의 말에 사로잡혔다. 손발이 나른해져 힘이 쭉 빠졌다. 샴페인 탓이야. 게다가 캐치의 입술의 마법 때문에. 이윽고 그의 입술은 목 근처까지 내려왔다. 심장이 높게 울리고, 미건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캐치는 미건의 턱을 작은 키스로 덮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미건은 희미한 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캐치는 속삭이며 미건의 귀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훨씬 뒤에."

"안 돼요. "

캐치 쪽으로 얼굴을 돌린 순간 미건은 말이 끊겼다.

캐치의 입술은 미건의 입술까지 거의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크게 눈을 뜨고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직 입술은 닿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닿을 듯했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미건은 낮은 소리를 내며 캐치가 애태우듯 천천히 가까워져 오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그는 미건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피부와 닿은 것은 입술과 숨결뿐 손은 멀리하고 있었다.

미건은 저항할 자신의 이성과 지력이 한꺼풀씩 벗겨져 가는 것을 느꼈다. 뒤에는 단지 순수한 욕망이 남아 있을 뿐, 앞으로의 일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단지 이 순간만이 전부였다. 미건은 무의식중에 캐치의 입술을 찾았다. 이미 주저함도 부끄러움도 없이 단지 안타까운 요구만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키스에서 경험했던 그 무아의 상태에서 감미로운 순간과 감각만의 정열의 세계

그럼에도 캐치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내 미건은 스스로 양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안았다. 심장의 고동이 무거워지고 파도 소리가 멀어져 가는 거의 희미하게 들렸다. 이윽고, 미건은 겨우 입술을 떼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캐치 쪽에서 그녀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조용한 소리였지만 그것은 밤의 정적 속에서 크게 울려퍼졌다.

"안 돼요"

하지만 미건의 목소리는 떨리는 몸과 마찬가지로 미덥지 못했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그에게 맡겨 버렸다.

그녀의 저항은 욕망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뜨거운 환희로 바뀌었다. 피부의 바로 아래 정열이 갇혀 있어 지금이라도 폭발해 진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을 원하오."

캐치는 입술을 겹친 채 중얼거렸다. 소리에는 유머가 아닌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과 사랑하고 싶소."

미건은 이내 자제심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캐치를 원하는 욕망이 항거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부풀어 올라 그에게 안긴다면 하늘에라도 오를 것 같은 기분이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미건은 어쨌든 현실로 돌아오려고 노력해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내려고 했다. 두 사람의 이름이나 입장, 책임거기에는 달과 바다 이상의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캐치는 모르는 남자인 것이다. 미건에게 있어서 그는 아직도 모르는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안 돼요."

미건은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섰다.

"안 돼요."

그녀는 떨리는 소리로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서 어색한 손길로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캐치도 놀라 일어서며 그녀의 셔츠 소매를 붙잡았다. 미건은 놀라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캐치의 시선 속에 냉정함은 없었지만, 목소리는 무서울 만큼 차가웠다.

"어떻게 된 거요?"

미건은 꼴깍 삼켰다. 지금의 캐치에게는 사람을 얕보는 듯한 거만함은 없었다. 하지만 무정함이 느껴졌다. 미건은 그에게 무정함이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훨씬 더 강렬하게 여겨졌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거짓말쟁이."

"맞았어요."

미건은 수긍하고 그의 말을 인정해 버렸다.

"당신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이에요."

캐치는 머리를 끄덕였지만 셔츠 소매를 끌어당겨 미건을 안았다.

"곧 알게 될 거요."

그는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키스를 했다.

"햐지만, 당신이 정말로 나를 알기까지 기다리지."

미건은 숨결을 진정시키고 동요를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원하는 것은 언제라도 반드시 손에 넣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건 스스로가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자 차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아!"

캐치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이오."

"낙담할 때가 반드시 있을 거예요."

미건은 몸가짐을 바로 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는데 움직임이 영 불안하게 느껴졌다.

"죠이랜드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예요. 나도, 어느 쪽도 사고 팔 물건이 아니니까."

팔을 거칠게 잡아당겨져 미건은 캐치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여자는 사지 않아."

그의 눈은 분노로 어두워졌고, 목소리는 딱딱하고 냉혹했다.

미건의 예술가로서의 눈은 그의 얼굴의 음영에 쏠렸고, 여자로서의 시선은 그의 목소리의 엄격함에 떨고 있었다.

"나는 그럴 필요는 없어. 오늘 밤도 당신은 확실히 내 소유로 했소. 당신도 그것은 인정하겠지."

미건은 캐치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내려갔다.

"오늘 밤의 일은 특별히 당신에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에요. 그것 역시 당신도 알고 있겠죠?"

그녀는 단번에 재킷의 지퍼를 끌어올렸다.

"다시 한 번 말해 두겠어요. 죠이랜드는 절대로 넘겨 주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바다를 등지고 달빛을 받고 서 있는 미건을 캐치는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이윽고 서서히 당돌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퍼졌다.

"나는 두 가지 모두 손에 넣을 거요, 메그."

그는 조용하고도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는."

 

4

오후의 화사한 햇살이 아틀리에로 비쳐들었다. 하지만 미건에게는 햇살도,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에는 양손으로 이기고 있는 점토더 정확히 말한다면 부분적으로 도깨비 영상을 갖추고 있는 길밖에는 없었다.

지금까지 손질하고 있던 작품을 그대로 놔두고, 미건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좀체로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테마가 밤 사이에 쭉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미건은 데이비드 캐처튼을 머리에서 떨쳐 버리기 위해 그의 흉상을 만들기로 했다.

지금부터 만들려고 하는 상은 확실히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세심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부드러운 표정 뒤에 강인함과 결단력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을

미건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젯밤의 캐치가 솔직히 두려웠다. 완력의 위협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그가 폭력을 휘두를 듯한 인간이 아닌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의 강렬한 개성이 두려웠던 것이다. 화가 난 듯이 미건은 점토를 찔렀다. 확실히 그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는 형의 남자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의 생각대로는 안 되도록 하겠다. 내가 조부 이외의 인간에게 마음을 열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오야. 천천히 자잘한 것에까지 마음을 쓰면서 미건의 손가락은 캐치의 얼굴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를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그녀는 일종의 기쁨을 느꼈다. 비록 그것이 대역의 점토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아무 생각도 없이 무심코 미건은 높고 빼어난 이마에 자연스럽게 늘어진 곱슬머리 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서서 전체 형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만들어 냈는데도 캐치의 개성 일면이 확실히 포착되어져 있었다. 무뢰한! 낡은 표현이긴 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딱 알맞았다. 부츠를 신고 권총을 허리에 찬 그가 시소의 술집에서 포커 카드를 나누는 모습을 미건은 머릿속에서 세밀히 그려보았다. 그리고 사벨을 한 손에 하고 바아바리 해안에 들어오는 배의 갑판에 서 있는 것을

미건의 손가락은 멍청히 점토의 곱슬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는 약탈한 보물과 여자들을 향해 높게 소리내어 웃는 것이다. 여자들미건의 생각은 어젯밤에 생긴 일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입술의 감촉, 피부를 미끄러지던 그의 손의 감촉, 누웠을 때 모래의 껄끄럼도, 파도의 소리도, 바닷물의 향내도, 미건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 달빛이 내리비치던 것도, 만져보았던 그의 머리카락의 감촉도, 그의 머리카락은 윤기 있고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그리고

미건은 움찔 손길을 멈추었다. 점토의 캐치 머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만지고 있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무심코 욕설이 튀어나왔다. 거의 끝난 부분에서 흉상이 뭉그러진 도깨비 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건은 일어나 만들다 만 흉상으로부터 뒷걸음질쳤다. 시시한 일에 구애받아 창작에 집중할 수 없다니, 말도 안 돼. 그래, 캐치와 지낸 밤의 일 따위는 단지 시시한 일에 불과한 거야. 그런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 미건? 캐치는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인물이라고 직감하고 있잖아. 나에게 그는 보통의 지나쳐 가는 이방인이라고는 할 수 없어. 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남자야.

미건은 긴 한숨을 내뱉고 세면대로 달려가 손에 묻은 점토를 씻어냈다. 분별을 되찾는 거야, 미건 미러! 그래, 분별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 돼. 누군가가 조부의 옆에 붙어 있으면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손을 닦으면서 미건은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때때로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조부가 자신을 돕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자신 쪽이 조부를 도와주고 있다는 쪽이 사실에 더 가까울 듯했다.

어린시절 미건은 조부를 의지해 왔다. 이윽고 성장함에 따라 그녀는 조부가 귀찮아 하는 수지계산이나 은행과의 거래와 같은 실무를 인수해서 도와주었다.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참아야 하는 적도 간혹 있었다. 그래서 숫자를 맞추거나 빼는 로맨틱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일에 매달리는 한편, 미건은 예술이라고 하는 환상 세계에 빠져들었다. 조각 작업에 몰두하면 매일의 생활 계획을 위해 만든 갖가지 규칙을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미건은 자신이 두 개의 방향으로 찢기워져 가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데이비드 캐처튼에 관한 일을 빼고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너무도 많이 산재해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해 온 자신의 세계가 이제는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왜 품는 것일까. 그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자. 그보다도 이 흉상을 완성시켜서 내 마음에 잠재해 있는 초조함을 쫓아내 버리자. 이것이 완성되면 분명 있는 그대로의 캐치의 모습이 보이겠지. 미건은 창작에 몰두했다.

순식간에 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캐치가 조부와 함께 낚시질하러 간 것에 대해 품고 있던 초조함을 그녀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침실 커튼 틈으로 허겁지겁 기쁜 듯이 나가는 캐치를 보며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 뒤 미건은 꾸깃꾸깃한 침대에 누워 뒹굴며 음울한 눈빛으로 한 시간 정도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면서 보냈다. 새벽녘의 정적 속에서 캐치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인 울림이었던가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양손 아래에서 캐치의 얼굴이 겨우 형태를 갖추었을 때 차 소리가 났다. 캐치의 웃음소리와 그보다 조금 더 우렁찬 조부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아틀리에는 차고 위에 있었기 때문에 미건은 본채와 현관의 차고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캐치가 픽업 트럭의 뒷문을 열고 아이스박스를 꺼내고 있었다. 그는 싱글벙글하면서 무언가를 말했지만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는 않았다. 조부는 새하얀 머리를 흔들며 기분좋은 듯이 큰소리로 웃고, 친근감을 담고 캐치의 등을 탁 두드렸다.

저 두 사람 완전히 의기투합해 버렸군! 미건은 왠지 발끈했다.

그들이 낚시 상자와 낚싯대를 차에서 내리는 것을 미건은 침묵을 지키고 계속해서 응시했다. 캐치의 차림새는 어제처럼 편안해 보이는 것이었다. 가슴에 문자가 들어간 엷은 청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지만, 거리가 너무 먼 데다 문자 색깔이 닳아 엷어져 뭐라고 쓰여 있는지를 읽을 수 없었다. 게다가 조부의 낚시용 모자를 자기 것인 양 쓰고 있었다. 미건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이 화기애애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연령도 체격도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그녀의 눈에는 어느 쪽도 비범하고 남자답게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당당하고 허식이 없었던 것이다. 미건은 두 사람 사이의 유사점, 상통하는 점을 생각하는 데에 열중했다. 그래서 캐치가 창가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에도 그녀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캐치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낚시 모자를 뒤로 넘겨 미건이 확실히 보이도록 했다. 그녀가 서 있는 창은 좁고 길어서 아래 틀은 미건의 무릎 근처까지 내려왔다. 그 창틀 탓으로 그녀는 마치 액자에 든 등신대의 인물화처럼 보였다. 게다가 머리를 한데 모아 묶었기 때문인지 얼굴이 한결 어려 보였으며, 눈도 보통 때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작업복 대신으로 입고 있는 낡은 셔츠는 그녀를 작아 보이게 했다.

문득 미건의 눈길이 캐치를 포착했다. 순간 캐치의 눈 속에서 무언가가 번쩍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젯밤에 달빛 속에서 얼핏 보였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캐치는 다시 대담한 미소를 띠웠으며 그 눈은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내려오지, 메그."

캐치는 손짓하고 나서, 몸을 구부려 아이스박스를 들어올렸다.

"선물이 있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집 옆으로 사라졌다.

"에메랄드 쪽이 좋아요."

미건은 소리 질러 대꾸했다.

"그건 이다음에."

캐치는 시원스럽게 받아들였다.

 

캐치는 혼자서 낚시해 온 생선을 다루고 있는 중이었다. 미건을 보자 그는 빙긋 웃으며 손에 든 칼을 놓고, 그녀를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 미건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것은 정열에서 나온 키스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은 나의 것이라고 다짐하는 듯한 키스로 미건은 자신도 놀랄 만큼 격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미건은 떨리는 손으로 캐치를 떼어 놓았다.

"그만둬요"

"벌써 끝났소."

캐치는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조각을 하고 있었소?"

방금 전의 타오르는 듯한 키스를 퍼부은 것은 어디의 누구인지, 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태연한 어투였다.

"당신의 아틀리에를 보고 싶군."

캐치의 보조에 맞추어서 자신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을 해두는 편이 좋으리라고 미건은 생각했다.

"팜프는 어디에 있나요?"

아이스박스 뚜껑에 손을 얹으면서 물었다.

"팜프라면 안에서 낚시 도구를 정돈하고 계시지."

조부의 친구들은 전부 그를 티모시 미러가 아니라 팜프라고 불렀다. 하지만 미건은 캐치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상당히 빠르군요."

"아아, 당신의 할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이시더군, 메그. 낚시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구."

미건은 물끄러미 캐치를 응시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무드를 확인하듯 한 발 다가섰다.

"당신을 신뢰해도 좋을지 어떨지 아직 모르겠어요."

"그만둡시다."

캐치는 다시 빙그레 웃으며 미건의 코를 손끝으로 살짝 쳤다. 그런 뒤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생선을 가리켰다.

"배가 고프오?"

미건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성이 냉정히 경고를 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점을 노출하고 말았다.

"아직 고프진 않아요. 하지만 기꺼이 먹겠어요. 내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되나요?"

"당신은 굉장한 겁쟁이라고 팜프가 사전 지식을 내게 주었지."

"팜프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나요?"

미건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집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 말고 또 무슨 말을 했죠?"

"노란 수선화를 좋아한다는 것과 헨리라는 이름의 봉제 코끼리를 어린 시절부터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

미건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할아버지가 직접 그런 것까지 당신에게 말했어요?"

"그리고 괴기 영화를 본 뒤는 반드시 머리끝에서부터 모포를 뒤집어쓰고 잠을 잔다는 것도."

미건은 성이 잔뜩 나서 얼굴이 붉어졌고, 캐치의 웃음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실례하겠어요."

미건은 새침하게 캐치를 밀어젖히고 문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뒤에서 캐치가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팜프!"

조부는 주방 옆의 좁은 방에서 낚시 도구를 정돈하고 있었다. 그는 미건을 보고 굽혔던 허리를 들고 미소를 보냈다.

", 미건, 저 사람은 낚시질하는 법도 잘 터득하고 있더구나, 확실하게 말이야."

캐치가 마음에 든 듯한 조부를 보고서 미건은 혀를 찼다.

"그건 오늘 들은 뉴스 가운데 제일 좋은 거로군요."

그녀는 방 안으로 급히 들어섰다.

"그렇지만, 어째서 저 사람에게 내가 봉제 코끼리를 갖고 있다던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는 것 따위를 말할 필요가 있었어요?"

조부는 한쪽 손을 들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얼굴에 웃고 있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팜프, 날 마치 작은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어요?"

미건은 정말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나에게 너는 언제라도 어린아이야."

노인은 화가 난 듯이 말하고 손녀의 볼에 살며시 키스를 했다.

"낚시해 온 송어를 보았니? 오늘 밤은 생선 프라이를 잔뜩 먹을 수 있을 거다."

"당연히 저 사람도 함께 먹을 거겠죠."

미건은 불안스러운 듯 팔짱을 꼈다.

"그야, 물론이지."

노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쨌든 메그, 반은 그 젊은이가 낚은 거란다."

"그것 참 좋겠군요."

"우리들은 너의 특별 메뉴인 블루베리 타트 과일을 넣은 파이를 어쩜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를 했었는데 말이다."

미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내가 졌어요.

잠시 지나자 노인의 귀에 냄비랑 프라이팬이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빙그레 마음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방을 빠져 나왔다.

"타트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니."

밀가루에 쇼트닝을 넣어 섞으면서 미건은 중얼거렸다.

"나참, 남자들이란."

미건이 타트 껍질을 오븐에 넣었을 때 뒷문이 꽝 닫혔다. 이상한 예감이 스쳐서 뒤돌아보니 생각한 대로 캐치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당신의 타트 만드는 솜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소."

캐치는 깨끗하게 손질해 토막낸 생선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팜프는 차고에서 할 일이 있으니 식사 준비가 다 되면 불러 달라고 했소."

미건은 스크린 도어 저쪽에 있는 차고를 흘겨보았다.

",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캐치를 돌아보았다.

"좋아요, 만약 당신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에요."

"설마, 내가 낚은 생선을 당신에게 요리시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미건은 캐치의 침착한 얼굴을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노려보았다.

"내 생선은 언제나 내가 요리한다구. 프라이팬은 어디 있소?"

아직 캐치를 응시한 채로 미건은 아무 말 없이 찬장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캐치가 몸을 구부려 안을 휘젓는 것을 보았다.

"당신의 요리 솜씨가 서투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오?"

프라이팬을 꺼내 올리면서 캐치는 계속했다.

"내가 이 생선 양반을 제대로 요리할지도 모른다는 얘긴가요?"

"낚은 생선은 최후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나 할까."

이번에는 그는 그릇장을 뒤적였다.

"생선은 나한테 맡겨 두고, 당신은 샐러드라도 만드는 게 어떻겠소?"

그는 부드럽게 제안했다.

이윽고 튀김 밀가루를 찾아낸 캐치는 기쁜 듯 소리를 높였다.

캐치는 아직도 찬장들을 여기저기 들춰 보며 돌아다녔다. 미건은 쭉 그의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지만 이윽고 입을 열었다.

"빨리 당신의 그 송어를"

그 때 오븐의 타이머가 부 하고 소리를 내었다.

"저건 당신의 타트요."

캐치는 냉장고로 가서 달걀과 우유를 꺼냈다.

미건은 꾹 참으며 타트 껍질을 오븐에서 꺼냈다. 그리고 식히기 위해 망 위에 올려 두었다.

좋아! 이렇게 될 바에야 근사한 샐러드를 만들어 줄 테니까. 캐치의 송어 요리 따위는 거뜬히 이겨 버릴 만큼의 훌륭한 요리 솜씨를.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각각의 음식을 만드는 데에 열중했다. 캐치가 가열된 프라이팬에 옷을 입힌 송어를 넣었다. 슈우슈 하며 식욕을 돋구는 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미건은 양상치를 자르면서 갖가지 야채들을 얇게 썰었다. 그런 뒤 샐러드 용 당근 껍질을 벗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듣고 캐치는 묻듯이 눈썹을 올렸다.

"당신은 분명히 껍질 벗기는 일도 잘하겠지?"

미건은 비웃듯이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익숙한 손길이로군."

캐치는 어깨를 움찔하고, 미건의 손에서 껍질을 벗겨낸 당근을 빼앗아 갔다.

"차라리 안 벗기는 편이 더 나았겠군."

그녀가 당근을 되돌려 받기 전에, 그는 한 입 아사삭 베어 물었다. 미건은 체념한 듯이 고개를 젓고는 또 한 개를 꺼냈다.

"그것들은 휘저어서 엉망으로 만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캐치는 살짝 머리를 흔들고, 소리를 내고 있는 생선을 프라이팬에서 뒤집어 놓았다.

"그것은 칭찬이오?"

미건은 당근을 주사위 모양으로 자르면서 생각에 잠기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면 당신이 그렇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상대하기 수월할지도 모르겠어요."

미건의 경계심이 풀린 틈을 타서, 캐치는 그녀의 어깨를 눌러 자기 쪽을 보도록 했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바요?"

캐치의 손가락이 미건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를 잘 다루는 것이?"

더욱 강하게 끌어당겨지는 것을 느끼고, 미건은 캐치의 가슴에 두 손을 대고 항의하려고 했다.

"내가 두렵소?"

"아니에요. 물론 두려운 것은 아니에요."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캐치는 단지 한쪽 눈을 올려 보였을 뿐, 더욱 미건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래요."

미건은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그에게서 빠져 나왔다.

"그래요, 전부 당신 탓이에요."

냉장고 앞으로 가서 타트에 넣을 블루베리를 꺼냈다.

"그런 만족스런 듯한 표정은 짓지 말아요."

그녀는 자신의 본심을 맞춰 버린 것에 화가 치밀어서 냉장고에 분풀이를 했다.

"무서운 거야 물론 많이 있죠."

그녀는 타트 앞으로 가서 숟가락에 블루베리를 가득 담았다.

"뱀이라든가, 충치라든가, 잘 짖어대는 커다란 개라든가."

킥킥 웃는 소리를 들으며 미건 자신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은 참 이상해요. 당신을 아무리 싫어하려고 해도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질 뿐이에요."

"나를 싫어하고 싶은 거요?"

"그럴 계획이었어요. 좋은 결심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럼 함께 다른 계획을 세워 봅시다."

캐치는 찬장에서 커다란 접시를 찾으면서 제안했다.

"당신은 뭘 좋아하오? 노란 수선화 외에."

"소프트크림."

미건은 재빨리 대답했다.

"오스카 와일드를 맨발로 걷는 것."

"야구는?"

미건은 블루베리를 담던 손길를 멈추었다.

"야구가 뭐요?"

"좋아하나?"

"으음."

미건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굉장히 좋아해요."

"드디어 우리들의 공통점이 생겼군."

캐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프라이팬의 불을 껐다.

"팜프를 불러와 주겠소! 생선이 다 구워졌으니."

 

모두가 한 가지씩 식사 준비를 하고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마음 뿌듯한 일이라고 미건은 생각했다. 동시에 조부와 캐치의 우정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 느껴져 어쩐지 불안하기도 했다. 죠이랜드 유원지를 사들이려고 하는 캐치의 결의가 바뀌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조부는 동료가 생겨 한결 기쁜 듯이 보였다. 미건도 역시 캐치를 무조건 신뢰할 수 없다고는 해도 지금으로서는 캐치를 싫어하게 되는 일도, 그를 자신들의 생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래서인지 그의 존재가 조부의 평화로운 삶 속에서 점점 커져가는 듯해서 두려운 감도 있었다.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

"그렇지."

조부는 빈 접시를 앞에 두고 만족의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에게 식사를 준비하도록 했으니까 설거지는 내가 맡아 하도록 하지."

그는 미건으로부터 캐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둘이서 산보라도 다녀온다면 어떨까? 미건은 원래 모래밭에서 거니는 것을 좋아하니까."

"팜프!"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끼리가 좋겠지."

노인은 넉살좋게 말했다.

미건은 항의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캐치 쪽이 더 빨랐다.

"아름다운 여성과 산책에 나가는 것은 언제라도 대환영입니다. 특히 그것으로 설거지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죠."

"할아버지가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지는 몰랐어요."

미건은 불만스러운 듯 소리를 질렀다.

"사실은 당신의 아틀리에를 꼭 보고 싶은데."

"데려가거라, 미건."

조부가 조용히 명령했다.

"나는 오늘 내내 네 작품을 칭찬했단다. 어서 가서 보여주거라."

잠시 망설인 끝에 미건은 얌전히 팜프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작품을 캐치에게 보이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게다가 둘이서 모래밭을 산책하기보다는 아틀리에를 안내하는 쪽이 더욱 안전할 듯했다.

"알았어요."

미건은 일어섰다.

"안내하겠어요."

스크린 도어로 나오자, 캐치는 자연스럽게 미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로군."

주위에 양진달래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는 작고 아담한 정원을 돌아보았다.

"무척 조용하고 안정돼 있고"

캐치의 팔 무게는 기분이 좋았다. 차고를 향해 걸으면서 미건은 그의 팔을 거부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안정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다니, 도저히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네를 타고 싶을 때가 있으면, 젯트코스타에 타고 싶은 때도 있는 거지."

발길은 멈춘 캐치는 미건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충분히 알아주리라고 생각하는데."

"알아요."

미건은 캐치의 생각대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가는 것을 느꼈다.

"잘 알아요."

미건은 생각에 잠긴 채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갔다.

"아틀리에라고 하긴 해도 아주 자그마해요. 대단한 것은 아니에요. 팜프의 방해가 되거나 신경을 쓰게 하지 않기 위한 장소일 뿐이에요."

미건은 문을 열고 해가 기울어 어두컴컴해진 아틀리에의 불을 켰다.

그곳은 이 집 안의 다른 장소와는 달리 어수선했다. 다른 곳은 여기처럼 어지럽혀 있지는 않았다. 여기는 미건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본채의 어떤 방보다도 사람들을 더 들여놓지 않는 장소였다.

갖가지 도구가 널려 있었다. 캘리파스(콤파스의 일종), 둥근 끌, 여러 종류의 나이프와 줄, 몇 시간 전 캐치에게 불려 내려갈 때 벗어서 의자에 걸쳐 놓은 낡은 셔츠도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자연 목재와 절약해서 사 둔 값비싼 대리석도 있었다. 또 선반 위에도, 몇 개나 되는 테이블 위에도, 마루에도, 어디에나 그녀의 작품이 진열되어져 있었다.

캐치는 미건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왠지 그녀의 가슴은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캐치가 비판적인 말을 한다면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만약, 그가 진부한 인사말이라도 해온다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그녀에게 있어서 작품은 중요한, 다시 말해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캐치가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지 걱정스러워하고 있었다.

살짝 문을 닫고서 미건은 그대로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캐치는 곧장 호두나무를 사용한 습작 앞으로 다가가 섰다. 모래성을 만들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상이었다. 그것은 이미지대로의 무드를 낸 작품으로 아이의 얼굴은 귀엽고 천진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소녀는 자신을 성 안의 왕녀로 보이게끔 했다. 그리고 소녀의 얼굴에 엷게 떠오른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피엔드를 믿도록 했다.

작품은 세심하게 공을 들여 만들어져 있었다. 성의 지붕과 몇 개인가의 탑, 모래를 만지작거리는 소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소녀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고,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것처럼 가는 얼굴에 흘러내려 있었다.

이 습작이 완성되었을 무렵, 미건은 스스로도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캐치가 양손에 들고 방향을 바꾸거나 하는 것을 보자 그 자신감이 흔들리고 말았다. 캐치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눈은 진지하게 작품에만 쏠려 있었다.

"이건 당신이 만든 건가?"

주위에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기 때문에 캐치의 소리를 듣고 미건은 뛰어오를 듯이 놀라웠다.

", 그래요."

미건이 달리 할 말을 찾는 사이에 캐치는 방향을 바꿔 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캐치는 계속해서 작품을 손에 들고 입을 꼭 다문 채 열심히 감상하고 있었다. 일 분, 다시 일 분씩 침묵이 길어짐에 따라 미건의 긴장은 한층 짙어져 갔다. 뭔가 한 마디라도 말해 준다면마룻바닥에 울리는 캐치의 테니스화의 부드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미건은 벗어둔 셔츠를 들어올려서 불안한 듯 주름을 폈다.

"당신은 이런 곳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미건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돌아다보았다. 갖가지 반응을 예상했어도 화내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캐치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분명 분노였다. 그것도 날카롭고 찌를 듯한 표정이었다. 미건은 낡은 셔츠를 강하게 꼭 쥐고 있었다.

"당신이 뭘 말하는 건지 의미를 모르겠어요."

미건의 소리는 안정되어 있었지만 가슴의 동계는 점점 더 빨라져 갔다.

"왜 감추는 거요."

캐치는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미건은 놀라서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특별히 감추거나 한 건 아니에요, 캐치.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해할 수 없다고?"

캐치는 미건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발길을 멈추었다가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건은 멍청히 그런 그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 냈으면서도 차고 위의 작은 방에 감추어 두는 것이 이치에 닿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캐치는 윤이 흐르는 석회석으로 된 작품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팔짱을 낀 남자와 여자의 상반신 상이었다.

"이 정도의 재능을 부여받고 있는 당신에게는 의무라는 것이 있소. 도대체 어쩔 셈이오? 이대로 공간이 없어질 때까지 이곳에 작품을 쌓아 둘 생각인가?"

캐치의 반응에 미건은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그녀는 방 안을 돌아보았다.

"틀렸어요. 나는가끔 시내에 있는 화랑에 이것들을 갖고 가요. 꽤 잘 팔려요. 특히 시즌 중에는. 게다가"

캐치의 격앙된 꾸짖는 소리에 미건은 입을 꼭 다물었다. 이 분노하는 남자가 바로 이전의 캐치로서 기분좋게 송어 요리를 했던 남자와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왜 그런 바보스러운 짓을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미건은 신경질적으로 주름을 잡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셔츠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낭비야!"

캐치는 딱 잘라 말하고 호도나무 상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낭비하는 것을 보면 나는 지독히 화가 나요."

그는 미건에게로 걸어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어째서 훌륭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는 거요?"

캐치는 정면으로 미건을 응시했다. 그의 질문 속에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강한 힘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만큼 간단한 건 아니에요."

미건은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책임이 있어요."

"당신의 책임은 당신 자신에 대한 것이오. 당신의 재능에 대한 책임."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마치 내가 무척이나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

미건은 조심스럽게 캐치의 얼굴을 엿보았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해가고 있을 뿐이에요. 왜 당신이 화를 내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시간이라든가, 돈이라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도요.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찰스톤 화랑에 작품을 갖고 가서 개인전을 열어 달라고 조르는 일 따위는 차마 할 수 없어요."

"여기 묻어 두기보다는 그쪽이 훨씬 나은 방법이지."

캐치는 급히 미건에게서 손을 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첫인상에서 느낀 것보다도 감정이 훨씬 더 격한 거야. 미건은 캐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젖은 타월로 싸둔 점토상에 눈길이 갔다. 그녀는 새롭게 얻은 이 인상이 머릿속에서 번뜩이자, 곧 그것을 상에 담아 두고 싶어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이전에 뉴욕에 간 것은 언제요?"

캐치는 다시 미건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시카고라든지 로스앤젤레스는?"

"누구나 다 온 지구를 돌아다나는 건 아니에요!"

캐치는 모래성을 만드는 소녀를 한 번 손에 들었다가 다시 석회석의 등신대로 걸어갔다.

"이 두 개가 갖고 싶소. 팔아 주겠소?"

분위기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어느 쪽도 그녀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 좋아요. 당신이 갖고 싶다면."

"오백 달러 내지."

미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한 점에 대해서."

"거짓말이겠죠. 설마, 그런 가격은"

"가격은 그보다 더 할 거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

캐치는 석회석 상을 들어올렸다.

"넣어 갈 상자는 있소?"

"네에. 하지만 캐치."

미건은 말을 끊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천 달러라뇨?"

캐치는 두 점의 작품을 놓고 미건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아직도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전해져 오는 것을 그녀는 절박할 만큼 강하게 느꼈다.

"당신은 자신의 가치를 확실히 알기보다도 과소평가하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군."

미건은 말도 안 된다고 대꾸하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그녀는 단지 양손을 들어 올려 어쩔 도리가 없다는 몸짓을 해 보일 뿐이었다.

캐치는 그녀에게서 떠나 스스로 상자를 찾아냈다. 그가 낡은 신문지에 조각 작품을 싸고 있는 모습을 미건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굴을 찌푸린 채 화가 나 있는 캐치를.

"수표를 끊지."

캐치는 조용히 말하고, 그 이상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5

주위에 길고 높은 금속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젯트코스타는 소리를 내면서 레일 위를 달려 급커브를 틀어 돌진해 나가면서 손님들을 옆으로 눕게 했다.

도로변에 나란한 라이트가 점멸하고 주위는 술렁거렸다. 그것은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소란스러움이었다. 여러 종류의 것들이 윙윙 돌거나 끼익끼익 기계 부딪히는 소리, 비디오 게임의 시끄러운 전자음, 라이홀의 빵빵거리는 소리, 매점의 점원이 지르는 손님을 유혹하는 소리.

어디에서부터인지 음악이 들려왔지만, 그것도 곧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들을 수 없었다. 웃는 소리, 환호하는 소리, 말하는 소리, 갖가지 음성의 부르짖음, 그리고 여러 가지 냄새팝콘, 땅콩, 핫도그, 기계의 기름.

미건은 라이플에 새로운 탄창을 장진해서 옆에 있는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토끼는 5, 오리는 l0, 사슴은 25, 곰은 50점이야."

l6세의 명사수는 조준을 맞춰서 오리와 토끼를 한 마리씩 쏘아 쓰러뜨렸다. 그는 경품으로 고무뱀을 선택해, 여자 친구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해서 '아아' 비명을 지르게 했다.

미건은 젊은 커플이 '어이구머니' 하며 깜짝 놀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은 여자 친구와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녀의 얼굴 앞에 뱀을 불쑥 들이밀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배에 철권을 한 대 얻어맞았다.

오늘 밤의 인파는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시즌이 끝나는 날은 대체로 이러한 광경이었다. 특히 다른 유원지가 탈것을 증설하거나, 새로운 흥행을 위하여 비디오 게임을 설치하거나 하는 상황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건은 장사가 부진한 것 따위는 생각하거나 걱정하지도 않았다. 캐치가 아틀리에를 본 밤 이래로 마음은 쭉 다른 데에 가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일째가 되도록 캐치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를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만나서 그가 말했던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미건은 캐치가 한 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계속 무시하고 감추어 왔던 자신의 일부에 관해서 진지하게 고쳐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날이 지남에 따라 캐치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구는 점점 흐릿해져 갔다. 도대체 무슨 권리가 있길래 그는 내가 사는 방식을 비판하는 걸까? 무슨 권리가 있어서 마치 내가 무슨 죄를 범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를 몰아넣는 거지? 그는 멋대로 겨우 몇 분 동안에 나를 도발하고 심리적으로 유죄를 인도했어. 그리고 자기 멋대로 사라져 버린 거야.

3일 동안 새로운 명사수에게 라이플을 건네주면서 미건은 생각했다. 3일 동안 전화 한 통 없다니미건은 눈으로 이리저리 캐치를 찾았다. 이것으로 도대체 몇 번째인 것일까.

자신도 진절머리 칠 정도로 반복되어 왔다. 그녀는 쭉 캐치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날이 지남에 따라 미건은 마음속으로 그를 악한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를 멋대로 비판하고 꾸짖었다. 그것뿐이야, 마음에 드는 조각을 두 점이나 갖고 사라져 버렸어. 천 달러와 바꿔서.

빈 라이플에 탄창을 장진하는 미건의 얼굴은 험악해져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뿐, 내 소원은 단지 그것뿐인데 캐치는 무척이나 화술이 능숙해 다분히 그 웅변으로 저 레스토랑을 사들였을 거야. 하지만 왜? 그 남자에게는 확실한 이유 따위는 필요 없는 거야. 그래, 무엇이든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일 뿐이야.

"남자들이란!"

새로운 손님에게 라이플을 건네주면서 미건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나도 알겠어요."

미건에게서 라이플을 받아 든 손님은 짧은 금발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미건에게 윙크했다.

미건은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 따위를 누가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렇죠?"

여자는 라이플을 어깨에 대고 조준했다.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거예요. 당신, 바로 그 부분이 문제요."

그 여자는 l25점을 얻었다. 미건은 입을 다물고 지켜보고 있다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굉장하군요. 정말 잘 쏘는데요. 두 번째 줄에서부터 마음에 드시는 것을 고르세요."

"그 하마를 줘요. 두 번째 남편과 조금 닮은 것 같으니까."

미건은 웃으면서 하마를 선반에서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다시 한 번 윙크를 하고 그 여자는 하마를 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두 아이가 라이플을 쏘고 있는 동안에 미건은 의자에 앉아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유원지에 오는 사람들이 은밀히 즐기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거야. 미건은 살짝 미소를 띠웠다. 조금 전의 그 여자야말로 완전히 기분이 풀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쾌한 기분은 어느 정도 감소된 듯 여겨졌다. 하지만 그 여자는 캐치를 모르는 거야. 다시 25센트 동전과 바꿔 라이플을 건네주면서 미건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자면 나 역시 그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야.

카운터에 일 달러의 지폐가 놓여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잔돈을 내주었다.

"25센트에 열 발이에요."

그녀는 평상 하는 말을 시작했다.

"토끼가 5, 오리가 10"

25센트 동전을 세 개 건네주려고 했다. 그러자 손님의 손이 동전을 되돌렸다. 그제서야 미건은 손님을 올려다 보았다.

"일 달러 분 탄환을 받겠소."

놀라서 쳐다보는 미건에게 캐치는 말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재빨리 몸을 구부려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운을 붙이기 위해서."

미건이 당황해 몸을 빼내자, 캐치는 말했다.

미건이 잔돈을 집어넣기도 전에 캐치는 곰 전체에, 그것도 한가운데에 검은 구멍을 뚫어 버렸다.

"우와!"

캐치의 옆에 서 있던 두 사내아이는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또 한 번만 해봐요."

한 아이가 졸라댔다.

"오 케이."

캐치는 미건을 돌아보았다.

"새로운 총을 주시오."

말없이 미건은 라이플을 건네주었다.

"지금 바른 향수는 내 취향과 딱 맞는군."

숨소리를 섞어서 캐치는 말했다.

"무슨 향수지?"

"총의 기름 냄새예요."

캐치는 껄껄 웃었다. 그런 뒤 슬퍼 보이는 곰을 한 마리 한 마리 넘어뜨렸다. 사내아이들은 동시에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사람의 무리가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안녕, 미건!"

미건이 얼굴을 들자 베일리 가의 쌍둥이가 카운터에 기대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은 의미심장하게 캐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저 남자"

"그래."

미건은 짧게 대답했다.

미건은 일부러 설명하는 것은 사양했다.

"굉장하잖아."

테리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캐치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잘 쏘는군요."

제리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캐치는 쌍둥이에게 천만에, 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 이게 마지막이에요."

미건은 라이플을 난폭하게 내밀었다.

"고맙소."

캐치는 라이플을 들고 손으로 무게를 달아 보았다.

"내게 행운을 빌어주지 않겠소?"

미건은 정면으로 캐치를 응시했다.

"어째서 내가 그런 걸 하지 않으면 안 되죠?"

"당신한테 홀딱 반했으니까지, 메그."

캐치가 다시 곰들을 차례차례 넘어뜨리는 동안 미건은 그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 자신에게 불러일으킨 동요를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구경꾼들로부터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캐치는 라이플을 카운터에 놓고 미건을 쳐다보았다.

"뭘 받을 수 있소?"

"무엇이든지, 마음에 드는 것을."

캐치는 한순간 빙긋 웃었지만 눈은 그녀를 응시한 채였다.

미건은 얼굴을 붉히고 그런 자신이 싫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옆으로 물러나 경품 선반을 가리켰다.

"헨리를 받을까?"

캐치는 말했다.

미건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코끼리 상."

눈을 올려 쳐다보자, 길이가 90센티미터 가량의 라벤다 색의 코끼리가 있었다. 미건은 선반의 제일 위에서 코끼리를 안아 내렸다. 코끼리를 카운터에 내려놓고 캐치는 미건의 그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나서 당신두요."

"건네줄 수 있는 것은 단지 진열되어 있는 경품뿐입니다."

미건은 새침하게 대꾸했다.

"당신의 그런 말투를 좋아하오."

캐치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그만둬요!"

미건은 작은 소리로 꾸짖었지만, 베일리 가의 쌍둥이가 쿡쿡 웃는 것을 듣고 새빨갛게 되었다.

"내기에 관한 것은 기억하겠지?"

캐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약속한 금요일 밤이오."

미건은 양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캐치의 손가락이 꼭 붙잡고 떼어 주지 않았다.

"내가 졌다고 누가 결정했죠?"

미건은 대들듯이 대꾸했다.

사격대 주위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미건은 소리를 죽여서 말했지만 캐치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보시오, 메그. 확실히 내 승리야.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이오?"

"!"

미건은 캐치의 뒤에서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약속을 지킬 것도 뭐랄 것도 없어요."

화를 내면서도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비록 정말로 내가 졌다 해도물론 졌다고 인정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곳을 떠날 수는 없어요. 당신의 동반자가 되어줄 사람은 분명 어딘가에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당신이 아니면 안 돼."

미건은 침착하게 캐치를 돌아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기를 떠날 수는 없어요. 매표원이 없어서는 절대로 안 되죠."

"리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한 학생이 카운터 아래를 밀고 들어왔다.

"팜프가 교대하라고 해서"

미건은 진저리친 시선을 보냈지만, 학생은 순진한 얼굴로 미소를 보내왔다.

"정확한 타이밍이로군."

미건은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에이프런을 벗어 교대원의 손에 넘겨 주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에요."

"천만에요, 미건."

"이봐요 학생, 이걸 좀 맡아 주지 않겠소?"

캐치는 학생의 손에 코끼리를 던져 주고 카운터를 나온 미건의 양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밀어내자 그는 휙 끌어당겨 미건을 껴안았다.

길고 격정적인 키스 캐치가 미건을 떼어 놓았을 때 그녀의 양손은 캐치의 목에 감겨 있었다. 그 손을 풀지 않은 채로 미건은 캐치의 얼굴을 다시 진지하게 응시했다.

"삼 일 동안 쭉 이렇게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소."

캐치는 속삭이며 미건의 코에 자신의 코를 가볍게 대었다.

"왜 오지 않았어요?"

책망하는 듯한 어조에 캐치는 의아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볼이 어조와는 반대로 붉어진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듯한 의미는 없어."

미건은 양손을 캐치에게서 떼내려고 했다.

"아니야, 잠깐만."

캐치는 아무렇지 않게 미건의 어깨에 팔을 돌렸다.

"모처럼만의 좋은 무드였는데 깨드리지 말아 줘."

그리고 나서 캐치는 유원지를 휙 둘러보았다.

"한 바퀴 돌아볼까?"

"어째서 당신이 우리 유원지를 갖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팔 마음은 없지만."

"그리 급할 것은 없지."

언제나처럼 미건을 발끈하게 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캐치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흥미를 갖고 있소. 당신은 왜 모두가 이곳에 오는지 알고 있나? 왜 이런 곳에 오는지를?"

캐치는 한쪽 손으로 장내를 가리켰다.

"즐기기 위해서겠죠."

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장내를 돌아보면서 미건은 말했다.

"중요한 이유가 두 가지 빠져 있어. 첫 번째는 꿈을 보기 위해서지. 그리고 즐거움을 주위에 과시하기 위해서겠지."

캐치는 미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발을 멈추고 중년 남자가 옷을 벗고 해머를 쳐서 종을 울리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해머가 둔한 소리를 내며 내리쳐졌다. 하지만 볼은 중간까지밖에 올라가지 않았다.

남자는 양손을 딱 울리고 다음의 일격에 대비했다.

"그렇군요, 당신이 말하는 대로예요."

미건은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미소로 캐치에게 말을 걸었다.

캐치는 약간 머리를 숙여 미건에게 말했다.

"저 종을 울려 볼까?"

"나는 카우보이에 흥미없어요."

미건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런가?"

캐치가 미건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유도했다.

"그러면 어떤 것에 흥미가 있지?"

"."

미건은 즉시 단언했다.

"흐음."

캐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뛰어오른 틴에이저 3인조에게서 몸을 피했다.

"그러면 5행시는 어떻소? 유명한 것을 몇 개인가 알고 있지."

"그러시겠죠."

미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만두겠어요."

"겁쟁이."

"뭐라구요? 그러면 젯트코스타에 타 봐요. 누가 겁쟁이인지 확실하게 가르쳐 줄 테니까."

"좋아."

캐치는 미건의 손을 쥐고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매표구에서 그가 멈추어 섰을 때 미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캐치의 얼굴을 보면서 미건은 생각했다. 그와 있으면 즐겁다는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두 사람 분의 요금을 지불하면서 캐치가 물었다.

"당신을 좋아하게 되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했어요. 3년이나 4년에 걸쳐서, 그것도 부족할 정도이지만."

미건은 미소를 지었다.

캐치는 미건의 손을 양쪽 다 쥐고 각각에 키스를 했다. 미건은 움찔하면서 재빨리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것 참 기쁘군."

캐치는 중얼거리며 양손을 쥔 채 눈으로 웃었다.

전신에 밀려드는 격한 감정에 휘말려 미건은 양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에게 깊이 이끌려서는 안 돼! 하지만 그 말은 공허하게 마음속만을 울릴 뿐이었다.

"당신은 내 손을 쥐어줘야만 해."

캐치는 젯트코스타 쪽으로 머리를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높은 곳이 두렵거든."

미건은 웃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위험으로 가득 찬 드릴, 미건은 무서워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캐치의 손은 잡은 채로 놓지 않았다.

캐치는 젯트코스타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다음에서 다음으로 여러 가지 탈것들에게로 미건을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지혜의 미궁을 헤매면서 나가 깜짝깜짝 놀라면서 유령성을 걷고, 천천히 도는 관람차에 올라갔다.

관람차의 꼭대기에서는 유원지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오른쪽으로 널다랗게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해풍이 불어와 미건의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았다.

두 번째로 관람차가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캐치는 미건의 얼굴에 손을 댔다. 키스는 자연스러웠고, 두 사람은 정열적으로 불타올랐다. 그들의 주위에 있는 것은 관람차와 지나쳐 가는 산들바람뿐.

미건은 긴장을 풀고 어느 틈엔가 캐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그에게 바싹 다가가면 세계가 달라 보였다. 머리 위에는 몇 개인가 별이 떠 있고,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이 구름에 가리워져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했다. 공기는 상쾌하고 희미하게 파도 냄새가 코 끝에 스쳤다. 미건은 완전히 만족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 이런 것을 한 것은 언제였소?"

"이런 것이라뇨?"

미건은 얼굴을 돌려 캐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쳐다보아도 이미 위험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만족감이 있을 뿐이었다.

"유원지에서 논 것 말이오."

캐치는 미건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스러운 표정을 붙잡았다.

"순수하게 즐기기 위해 놀았을 때의 일 말이오, 메그."

""

관람차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이윽고 멈추었다. 손님을 부드럽게 흔들어 주던 상자가 새 손님을 위해 다시 열렸다. 미건은 어린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계원이 안전쇠를 열어 주었다. 그녀는 일어섰다.

캐치와 나란히 걸으면서 미건은 감회어린 눈길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는 얼굴이 상당히 많은 것에 놀라웠다. 주변의 사람들도 즐거운 초저녁을 보내려고 모여든 것이다.

"더 많이 이런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돼요."

유원지의 동쪽으로 미건을 유도하면서 캐치는 말했다.

"웃어 보시오."

미건이 그를 보도록 세워 놓고 그는 계속 말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갖는 거야.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한계를 풀고."

미건은 발끈했다.

"나에 관해서 거의 모르면서 나를 위해 뭐가 좋을지 잘도 아는군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오."

캐치는 매점 앞에서 발을 멈추고, 소프트 크림을 두 개 주문했다.

"당신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알고 있소, 메그."

"대단히 감사합니다."

매점의 소녀가 말했다.

캐치는 한바탕 웃고 미건에게 소프트 크림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뾰로통하지 마시오. 칭찬해 줄 셈이니까."

"어차피 당신은 고상한 여자를 오죽이나 많이 알고 있겠어요."

캐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미건에게 팔을 두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 있지. 이름은 제시카. 내가 아는 여자 중에서도 뛰어난 미인이오."

"정말요?"

미건은 바닐라 소프트크림을 핥으면서 말했다.

"금발이고 고전적인 인상에 피부는 하얗고 음영이 깊은 얼굴에 눈이 블루, 그것도 새파란 색이야."

"그거 정말 멋있겠군요."

"아아, 정말로 그래. 그뿐만이 아니야. 머리도 좋고 유머센스도 뛰어나지."

"그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듯하군요."

미건은 소프트크림을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야. 제시카와 나는 이삼 년 동안 함께 산 적도 있어."

캐치는 태연하게 폭탄선언을 했다.

"그녀는 지금은 결혼해서 두 아이의 어머니이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때때로 만나고 있어. 이삼 일 안으로 이곳에 올 계획이니까 당신도 만날 수 있겠지."

"농담은 그만둬요!"

미건은 화가 나서 멈춰 섰다.

"그 여자와의 사이를 드러내고 싶으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해요. 내가 만나고 싶어 하리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의, 당신의"

"누나요."

캐치는 사실을 밝히고 재미있다는 듯 장난스럽게 콘을 아삭아삭 먹고 있었다.

"당신도 반드시 마음에 들 거요. , 소프트 크림이 떨어져, 메그."

두 사람은 어느 틈엔가 유원지 입구까지 와 있었다.

"정말로 멋있는 유원지야."

캐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작지만 손질이 세부까지 잘 되어 있군. 지긋지긋해 하는 계원도 없고."

그는 주머니를 뒤져 한 장의 종잇조각을 꺼냈다.

"당신에게 수표를 건네준다는 걸 잊었어."

미건은 눈길도 주지 않고 그 종잇조각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눈은 캐치의 얼굴을 응시한 채였다.

"조부는 생애를 이 유원지에 바쳤어요."

"당신도 마찬가지겠군."

캐치는 덤덤하게 말했다.

"왜 사들이고 싶은 거죠?"

미건은 물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잠시 동안 캐치는 침묵했다. 두 사람은 보드 블록을 깐 길을 가로질러서 바다를 향해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그것이 그렇게 나쁜 이유인가? 미건, 당신은 돈을 버는 것을 반대하오?"

"그럼요, 물론이에요. 바보스러운 짓 아닌가요?"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작품을 방치해 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

"틀렸어요. 가능한 것은 하고 있어요.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은요. 일을 하는 데에는 무엇에든지 우선순위라고 하는 것이 있는 법이에요."

"당신은 그 우선순위를 잘못 조종하고 있는 거요."

미건이 대꾸하기 전에 캐치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최신형으로 탈것을 들여오고, 게임 센터를 확장하거나 한다면, 그것이 유원지 경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 같소?"

"우리에게 그런 여유는"

"그런 건 묻지 않았소."

캐치는 미건의 어깨를 눌렀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유원지는 개량되어져 가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이곳에 즐기러 오는 거예요. 설비가 충실하면 충실한 만큼, 멋있는 형으로 탈것이나 속도가 빠른 것들이 늘어나면 늘어난 만큼 모두들 기뻐하겠죠. 그리고 돈도 많이 써줄 거구요."

미건은 대답했다.

캐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탐색하듯 미건의 얼굴을 엿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바요."

"어차피 탁상공론이에요. 우리는 수리에 필요한 돈도 제대로 없는걸요."

"흐음."

캐치는 정면으로 미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의식은 다른 곳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의식을 다시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해요!"

미건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더해졌다.

"당신은 절세의 미인이라고 생각했지."

미건은 홱 몸을 뺐다.

"순 거짓말쟁이!"

"정말이오."

캐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의 양손은 미건의 허리를 꼭 눌렀다.

"처음에 당신을 보았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

"지금 농담하고 있군요."

미건은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거꾸로 끌어당겨져 버렸다.

"나는 자주 농담을 하지. 하지만"

캐치의 눈은 진지했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소."

바닷바람이 미건의 머리카락을 뒤로 날려 얼굴 전체를 드러내 보였다. 그 이마에 캐치는 살짝 키스했다. 부드럽고 상냥한 키스였다. 미건은 무릎의 힘이 빠져 나가 무너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몸을 지탱하려고 캐치의 가슴에 양손을 댔다.

"당신은 예술가요."

캐치는 살짝 미건을 끌어당겨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 당신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다니."

"그만둬요!"

항의의 소리는 희미했다.

미건은 캐치에게 항의할 기력을 잃어갔다.

"무엇을 그만두지? 키스는?"

천천히 장난을 치듯이 캐치는 미건의 피부에 입술을 대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아, 메그."

캐치의 입술이 살짝 미건의 입술에 닿았다. 미건은 심장이 멈추는가 하고 생각했다. 닿았을 때에 느낀 그의 입술의 감촉에는 이겨낼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은 지배적이었다. 미건은 환희의 소리를 낮게 올리며 캐치를 끌어당겼다.

키스가 길어짐에 따라 몸 안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눈이 아찔해서 잠시 동안 캐치에게 기대어 있었다.

욕구, 정념, 그리고 새로운 감동, 그것들이 급격히 밀어닥쳐 와서 미건은 점점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져 갔다. 공포 상태에 빠져 캐치의 팔 안에서 바둥거리면서 가능하다면 빨리 도망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캐치가 양팔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왜 그러지? 지금 메그는 떨고 있잖아."

캐치는 부드럽게 미건의 턱을 눈이 마주칠 때까지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은 커다랗게 열려 있었고, 캐치의 눈은 진지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소. 미안하오."

그 상냥함에 미건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사랑사랑이 서서히 그녀의 자제심을 깨뜨리고 해방시킨 것이다.

미건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말을 하면 눈물이 흐를 듯해서 두려웠다. 꼴깍 침을 삼키고 미건은 태연한 소리가 나오기를 빌었다.

"아니, 괜찮아요나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 폐장할 시간이니까."

캐치의 등 뒤에서 유원지 라이트가 하나 하나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메그."

그 소리에 미건은 발을 멈추었다. 이번엔 명령이라기보다는 간절히 애원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와 함께 식사해 줘요."

"안 돼요."

"아직 언제인지도 말 안했소."

캐치는 부드럽게 지적했다.

"월요일은 어때?"

미건은 딱딱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안 돼요."

"부탁이오."

미건의 결의는 한숨과 함께 무너져 버렸다.

"당신은 정당하지 않아요."

"그런 적은 없어. 몇 시면 괜찮겠소?"

"모래밭에서 피크닉 하는 것이 아니라면."

미건은 타협했다.

"옥내의 식사야. 약속하지."

"알았어요. 하지만 식사만이에요."

미건은 뒷걸음질쳐 캐치에게서 멀어졌다.

"안녕!"

"함께 가겠어."

캐치는 미건의 손을 잡고 거절당하기 전에 키스했다.

"내 코끼리를 가져가야지."

 

6

미건은 캐치의 얼굴에 양손을 댔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얼굴형을 만들어 갔다. 처음으로 이 흉상을 만들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이것을 만드는 것이 좋은 치료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기분은 풀렸다. 아무 일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이틀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습격하던 불안감도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그녀는 이것에 집중하는 것으로 번잡스러운 생각들을 떨쳐내 버릴 작정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양손을 쥐거나 펴서 경련이 멈추어지고, 아픔으로 변할 때까지 근육을 풀어 주었다. 그런 다음 시계를 보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작업했던 것을 알았다. 저녁햇살이 창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경직된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끌어당겨 주면서, 미건은 엄격한 눈으로 작품을 응시했다.

이 정도면 됐어. 생각했던 대로 알맞게 강인함과 지성이 표현되어져 있으니까. 입은 힘있고 관능적이며 눈은 날카롭고 빈틈이 없었다. 새롭게 발견한 그의 성격의 격렬함을 그 이상으로 암시해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양식이나 상식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미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캐치의 점토상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성 관계가 많다는 걸 자랑으로 삼는 남자들이 있다. 여자들을 유혹한 다음 즐기고 내버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남자들. 하지만 그 한편으로는 한곳에 안주해서 결혼하고 가정을 만들어 가는 남자들도 있다. 과연 캐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일어나 손을 씻자. 내가 흥분한 거야. 미건은 생각했다. 단순히 흥분했을 뿐이야. 캐치에게는 타인이라고 느낄 만한 분명한 선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으면 지금까지는 경험해 보지 못했을 정도로 가슴이 설레이고 두근거렸다. 그와 같은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면, 누구라도 두근거릴 거야. 단지 약간 지나치게 반응하고 있을 뿐이야. 타월로 손을 닦으면서 미건은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했다.

상식 있는 인간이라면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아.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얄팍한 사랑이야. 절대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그런 사랑이야. 미건의 눈은 점토상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캐치의 미소는 미건의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건은 타월을 마룻바닥에 집어던졌다.

"이렇게 간단하게 사랑에 빠졌을 리는 없어!"

분노를 캐치의 얼굴에 터뜨렸다.

"이런 식으로 로맨스가 일어날 리가 없어. 그것도 바로 나에게."

캐치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등을 돌렸다.

"그렇게 되도록 결코 나 자신을 방치하지 않을 거야."

그는 단지 유원지를 갖고 싶은 것뿐이야. 미건은 자신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해도 유원지는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걸 알면 체념하고 사라지겠지. 나 같은 건 곧 바로 잊어버릴 것이 틀림없어. 진정으로 바라는 바야. 그는 사라지고 다시 할아버지와 두 사람만의 생활로 돌아올 뿐이야. 미건은 캐치의 팔에 안겨 있을 때 엿보았던 새로운 세계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다.

미건은 머리카락을 묶었던 끈을 풀고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살짝 어깨에 떨어졌다. 내일부터는 목조를 시작하자. 그리고 점토상에는 천을 뒤집어씌워 버리는 거야. 오늘 밤은 매력적인 남자와 디너를 즐길 뿐이다. 단지 그뿐이야.

그렇게 자신에게 다짐하고 미건은 작업복을 벗고 아틀리에를 나왔다.

 

"이제 돌아왔다, 메그."

미건이 돌계단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조부가 차고로 트럭을 몰고 왔다.

운전대에서 내려오는 조부가 피곤한 기색인 것이 미건은 무척 마음에 걸렸다. 조부가 사람에게 걱정을 시키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미건은 아무런 말도 묻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 달려가 허리에 팔을 두르고 반겨 맞이했다.

"어서 돌아오세요. 오늘은 꽤 오랫동안 나가 계셨어요."

"유원지에 한두 가지 문제가 생겼어."

나란히 집으로 들어오면서 조부는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지친 모습이로군요. 미건은 뒷문을 열었다.

"어떤 문제?"

조부가 의자에 앉는 것을 기다렸다가 차를 끓이려고 가스 레인지로 갔다.

"수리 공사야, 메그. 젯트코스타와 옥토퍼스와 소형의 탈것들이 두세 가지"

미건이 머리를 가로젓자 조부는 천천히 의자에 기대었다.

"비용이 어느 정도 들어요?"

조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건에게는 거짓 없이 사실을 확실히 말해야만 한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만 달러, 어쩌면 만오천은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미건은 휴우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만 달러요!"

그녀는 초조한 듯이 앞머리에 가려진 눈썹을 한쪽 손으로 문질렀다. 그 금액은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확실치 않은 것은 조부는 결코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글쎄, 오천 달러 정도는 어떻게든 준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캐치에게서 받은 수표가 머리에 떠올랐다.

"확실한 금액을 계산해서 어느 정도 융자를 받아야 할지 결정하도록 해요."

"나 같은 노인에게 은행에서 대금을 융통해 줄지 그게 의문이구나."

조부가 중얼거렸다.

그가 피곤에 지쳐 낙담한 것을 보면서 미건은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다.

"바보스러운 말은 하지 마세요."

그녀는 가스 레인지로 다가가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괜찮아요. 그들은 반드시 융자해 줄 거예요."

금융수축정책이라든가 고금리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일 몇 사람인가 만날 예정이란다."

그렇게 말하고 조부는 파이프에 손을 뻗쳤다.

"오늘 밤은 캐치와 식사하러 가지?"

"."

미건은 컵과 홍차 잎을 꺼냈다.

"그는 참으로 좋은 청년인 듯싶은데."

노인은 기쁜 듯이 파이프를 빨았다.

"마음에 썩 들었어. 그는 보통 남자가 아니야."

"말씀대로예요."

미건이 퉁명스럽게 말했을 때 주전자가 삐삐 울렸다. 그녀는 주의 깊게 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낚시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어."

"물론, 그래서 그렇게 칭찬하시는 거죠?"

"그럼, 낚시를 아는 인간의 인품을 잘못 볼 리는 없으니까."

조부는 싱글벙글 미건에게 웃어 보였다.

"요전날 밤, 너희들 둘이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단다. 너희들은 정말로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팜프!"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미건은 싱크대로 가서 그릇들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느끼기엔 너도 캐치를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만."

홍차를 마시기 전에 노인은 말했다.

"그의 키스를 받고서도 너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잖니."

그는 홀짝홀짝 맛있게도 홍차를 마셨다.

"실제로 너는 그를 좋아하는 듯이 보여."

"팜프!"

미건은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아아, 메그, 특별히 정탐하거나 한 건 아니야."

노인은 달래듯이 말하고 기침으로 웃음이 끓어오르는 것을 속였다.

"너희들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랑을 속삭인 게 아니냐.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단다. 내기를 해도 좋다. 너희들은 정말로 잘 어울려."

미건은 대꾸할 말도 잊어버린 채 테이블에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키스뿐이었어요."

겨우 말문을 열였다.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요."

조부는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홍차를 마셨다.

"의미는 없었어요."

미건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조부는 천사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지?"

그 질문에 난처해져서 미건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때때로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끔은 좋아해요."

조부는 미건의 손을 쥐고 손녀가 다시 얼굴을 들길 기다렸다.

"마음만 있으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간단한 일이야."

"그에 관해서는 거의 모르는걸요."

"나는 그를 신뢰한다."

노인은 엄하게 딱 잘라 말했다.

미건은 조부의 얼굴을 탐색하듯 응시했다.

"?"

어깨를 움찔한 뒤 노인은 파이프를 물었다.

"느낌이야. 그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 나처럼 손님 상대를 하고 있으면 사람을 보는 눈이 확실해지는 면이 있지.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살려고 하는 강한 의지가 있어. 그게 좋아. 게다가 부정은 하지 않아. 바로 그것이 중요한 부분이야."

미건은 잠시 동안 홍차에 손을 대지도 않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유원지가 갖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나직한 어조로 강조하듯 말했다.

노인은 담배 연기를 통해 미건을 바라보았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처음부터 확실히 말했으니까. 어쨌든 뒤에서 소곤거리는 것은 좋지 않아."

미건의 눈 안을 엿보더니 조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세상은 언제나 변함없이 같을 수는 없는 거야, 메그. 그것을 잘 기억해 두거라."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잘 모르겠군요. 팜프팜프는 유원지를 팔려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건의 목소리에서 그녀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다시 한 번 미건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와서 걱정을 한다 해서 별 도리가 없단다. 우선은 부활제 휴일까지 탈것들의 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란다. 오늘 밤은 내가 좋아하는 저 노란 드레스를 입으면 어떻겠니, 메그? 짧은 재킷이 붙어 있는 것 말이다. 내가 보기엔 봄 기분을 자아낼 수 있어서 좋을 듯하다만."

미건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이야기를 일단 그만두기로 하면 조부의 입은 호두보다도 더 단단해져서 쉽게 깨뜨릴 수 없었다.

"알았어요. 샤워나 하러 가야겠어요."

"미건."

미건은 문 앞에서 돌아섰다.

"즐겁게 지내거라."

미건이 나간 뒤에도 노인은 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생각에 잠긴 듯이 턱수염을 비틀었다.

한 시간 뒤, 미건은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살구를 연상하게 하는 노란색은 그녀의 피부를 한결 밝게 돋보이도록 했고, 세련된 라인은 날씬한 장신의 체형에 잘 어울렸다. 재킷을 벗자 가느다란 어깨끈을 남기고 팔고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다. 미건은 머리카락을 정성들여 브러싱했다. 귀에 단 작은 금귀걸이는 유일하게 갖고 있는 액세사리였다.

"헤이, 미건!"

브러시가 도중에서 멈추었다. 거울에 비친 미건의 눈이 놀라운 듯이 둥그렇게 되었다. 설마 캐치가 밖에서 부르리라고는

"메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미건은 창가로 다가갔다. 캐치가 아래에 서 있었다. 그녀를 보자 캐치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뭘 하는 거예요?"

미건이 물었다.

"손을 뻗쳐 봐."

"어째서요?"

"묻지 말고, 빨리."

캐치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뭔데 그러는 거예요?"

"붙잡아!"

생각보다 빨리 몸이 움직여졌다. 미건은 손을 내밀어 캐치가 던진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한아름의 노란 수선화였다. 선명한 노란색 꽃다발에 미건은 얼굴을 묻었다.

"너무 예뻐요!"

꽃다발을 안고, 미건은 빙그레 웃으며 캐치를 내려다보았다.

"고마워요."

"천만에."

캐치는 손을 흔들었다.

"내려와 주지 않겠소?"

"."

미건은 어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가겠어요. 곧 갈게요."

캐치는 속도를 높여 능숙하게 차를 달렸다. 차는 미건이 생각하고 있었던 레스토랑이 있는 곳으로는 향하지 않았다. 바다 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향했다. 미건은 편안히 시트에 기댄 채 조용한 황혼의 빛과 경쾌한 차의 속도를 즐겼다.

미건이 알고 있는 곳이 드디어 나타났다. 그 주변의 집들은 마을의 바로 근처의 집들보다도 크고, 공을 들인 건물로 울타리도 높고 다른 집들이나 넓은 모래밭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집에나 대체로 깨끗하게 손질되어진 잔디나 버드나무, 꽃이 핀 백일홍이 심어진 아스팔트인 개인 도로가 있었다. 그 중에서 다른 집들과 상당히 떨어져 보라색이 칠해진 낮은 나무 울타리로 구분되어져 있는 도로로 캐치는 차를 몰아갔다.

그 집은 다른 집에 비교해서 작고, 미건이 언제인가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해 오던 것과 똑같은 낡은 느낌의 목조집이었다. 이층 건물로 윗부분이 튀어나와 테라스가 되어 있었다.

"여기는 뭐예요?"

한눈에 이 집이 마음에 들어 미건은 물었다.

"나의 집이오."

캐치는 미건의 앞으로 몸을 내밀고 그녀 쪽의 문의 자물쇠를 열고 자기 쪽 문으로 내렸다.

"여기에 살고 있어요?"

깜짝 놀란 듯한 미건의 소리를 듣고 캐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살 곳은 어딘가에 필요한 거요, 메그."

집으로 이어진 돌길을 걸으면서 미건은 물었다.

"설마, 당신이 이곳에서 집을 사리라고는 생각도 안해 봤어요. 이곳에 안주할 셈인가요?"

"살 곳은 여기저기 있소."

캐치는 말했다.

"마음 편하게 옮겨살 뿐이오."

미건은 집과 넓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나무랄 데가 없는 곳을 선택했군요."

캐치는 미건의 손을 쥐고 힘주어 손가락을 꼈다.

"안으로 들어가지."

"언제 샀어요?"

계단을 한 층 한 층 올라가면서 미건이 물었다.

", 돈을 지불한 것은 한두 달 전이고, 이사한 것은 지난주요. 가구를 갖출 시간도 별로 없었지."

그는 말하면서 열쇠를 구멍에 넣었다.

"여기저기서 몇 개인가 샀고, 나머지는 뉴욕의 맨션에서 갖고 온 거요."

가구는 충분히 갖추고는 있지 않았지만, 세련된 것들뿐이었다. 조립식 소파에는 선명한 색상의 쿠션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 늘어져 있는 도기 화분에는 커다란 관엽의 담쟁이덩굴, 그것과 등의자 한 개, 유리와 구리로 된 장식 선반에는 조개껍질 콜렉션이 장식되어 있었다. 오크 재 마루에는 커다란 사이잘 깔개가 깔려 있었다.

방은 벽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고, 곧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왼쪽 벽에는 돌로 만들어진 난로가 붙어 있었다. 미건은 휙 한 바퀴 둘러보고, 이 큰 방에는 자신의 조각이 놓여 있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캐치는 그것들을 어떻게 한 것일까.

"멋져요, 캐치."

미건은 창가로 걸어갔다. 잔디는 부드럽게 굽이쳐 내려가 있고, 그 끝에는 높은 생나무 울타리가 있어 이 집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있었다.

"이층에서는 바다가 보일까요?"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미건은 캐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 뜨거워서 미건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두려운 것은 노란 수선화 꽃다발을 던져준 붙임성 좋은 그가 아니었다.

미건은 두려움으로 떨면서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동시에 캐치에게 가까이 가고 싶기도 했다. 그의 양손이 가까이 온 것을 느낀 바로 그 순간, 그의 딱딱한 손바닥은 그녀의 볼에 있었다. 캐치는 그녀의 얼굴에 걸린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캐치의 입술은 미건의 입술에 닿기 전에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욕망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키스는 처음부터 깊고 탐욕스러웠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건지, 캐치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신에게 다짐해 두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마음의 동요를 이성이 억누를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을.

캐치의 입술이 멀어졌다. 미건은 그의 가슴에 볼을 대고 양손을 그의 허리에 감았다. 캐치는 잠깐 동안 주저했지만 곧 미건을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머리카락에 닿는 것을 느끼면서 미건은 기쁜 나머지 숨을 내쉬었다. 귀에 캐치의 빠르고 확실한 고동이 들려왔다.

"뭔가 말했소?"

"? 언제?"

"아까."

캐치의 손가락이 미건의 관자놀이에 뻗어와 부드럽게 문질렀다. 달빛 아래 모래밭에서 느꼈던 세계를 기억해 내려고 하면서 미건은 환희에 떨었다.

"2층에서 바다가 보이는지를 물었던 것 같아요."

"아아."

다시 캐치는 양손으로 미건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보게 하고는 타오르는 듯한 키스를 했다.

"보여."

"지금 보여주겠어요?"

얼굴에 댄 손에 힘이 들어가고 미건은 그의 키스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캐치는 미건을 떼어 놓아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을 뿐이었다.

"저녁식사 뒤에."

미건은 빙그레 웃었다.

"여기에서 먹어요?"

"레스토랑은 싫어해."

캐치는 미건을 주방으로 안내했다.

"레스토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더욱 친밀한 장소 쪽이 좋을 경우가 있다는 거지."

"과연."

캐치가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미건은 나무와 스테인레스를 사용한 주방을 돌아보았다.

"그럼, 당신은 누가 요리해 주죠?"

"나와 당신이오."

캐치는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당신의 스테이크는 맛이 있나?"

 

식사를 마치고 유리 테이블을 앞에 하고 앉아 두 사람은 풍미 깊은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뒤쪽의 사이드 테이블 위의 구리 촛대에는 열두 개의 초가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미건의 마음은 와인 탓으로 달콤하게 녹아 왈츠를 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앞에 앉은 남자의 손 안에 자신의 손이 잡혀 있었다. 접시를 닦으려고 그녀가 일어서자, 캐치가 손에 힘을 주었다.

"나중에 하고 멋진 달빛 아래를 산책하지."

주저할 것 없이 미건은 캐치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올라갔다. 카펫을 깔지 않은 계단은 폭이 넓고, 무도장에서 두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캐치는 자신의 침실을 지나갔다. 그곳에는 사이드 보드 두 개와 구리로 된 커다란 침대가 갖추어져 있었다. 통로로 나오자 좁고 긴 유리문이 있고, 거기에서 테라스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건은 난간까지 가까이 갔다. 울타리 저쪽에서 거친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포말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달빛은 엷은 은색이며 수없이 많은 별들이 그것을 보조했다.

미건은 긴 숨을 내쉬고 난간에 기대었다.

"여기는 멋있는 곳이에요. 바다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요."

캐치의 라이터가 찰칵 소리를 내고 파도 향내에 담배 향이 기분좋게 섞였다.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소?"

미건은 갑자기 불안한 듯이 어깨를 움찔했다.

"물론이에요. 지금은 아무래도 무리지만."

캐치는 가느다란 담배를 피웠다.

"어디에 가고 싶지?"

"어디에 가고 싶냐뇨?"

미건은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그래, 만약 가고 싶다면 어디에 가고 싶소?"

담배 연기가 하늘하늘 공중으로 피어올라갔다.

"상상해 보시지. 공상하는 것은 좋아하겠지?"

미건은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취한 듯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뉴올리언즈."

중얼거리듯 말했다.

"뉴올리언즈는 이전부터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파리. l0대 시절에는 위대한 예술가처럼 파리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미건은 눈을 떴다.

"분명 당신은 가 본 적이 있겠죠? 뉴올리언즈도, 파리도."

"물론 있지."

"어떤 곳이에요?"

대답하기 전에 캐치는 손끝으로 미건의 턱선을 어루만졌다.

"뉴올리언즈는 강 냄새가 나지. 여름은 찌는 듯한 더위고, 나이트클럽은 늘 개방되어 있고, 거리 곳곳은 재즈나 블루스 등 언제든지 음악이 넘치는 거리야. 뉴욕과 같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지. 하지만 뉴욕만큼 들떠 있지는 않소."

"파리는?"

미건은 재촉했다.

캐치의 눈을 통해서 진정 가고 싶었던 지역의 광경을 보고 듣고 싶었다.

"얼른 파리 이야기를 해줘요."

"오래되고 우아한 도시라고 할 수 있지. 위엄있는 나이든 귀부인 같다고나 할까. 그다지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제일 멋있는 계절은 봄이야. 당신을 직접 데리고 가 보고 싶군."

불시에 캐치는 미건의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그의 눈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듯 똑바로 미건의 눈을 주시했다.

"당신이 누르고 있는 감정이 해방되어지는 것을 억제할 수는 없을 테니까."

", 억제 같은 건 하고 있지 않아요."

미건이 현기증을 느끼는 것은 와인의 취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캐치는 난간으로 담배꽁초를 던져 버리고 빈손을 미건의 허리에 감아 끌어당겼다.

"그럴까?"

목소리가 약간 초조함이 섞였다.

"당신은 정열적인데도 그것을 스스로 억제해서 지워 버리고 있는 거요. 모처럼 그 정열을 담아 만든 작품도 아틀리에에 묻어 둔 채 말이오. 키스할 때에는 당신의 정열이 밖으로 나오고 싶어서 요동치는 것을 알 수 있소. 언젠가 해방되어질 때가 반드시 올 거요. 그 때에는 내 곁에 있게 하고 싶소."

캐치는 그녀의 어깨끈을 밀어 버리고 입술을 대었다. 그의 키스가 난폭해도 미건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캐치를 어루만지며, 따뜻한 피부를 애무하고 손에 닿는 감촉에 몸을 떨었다. 여기에는 아직 찾아낸 적이 없는 강렬한 힘이 있었다. 미건은 양손을 캐치의 스웨터 밑으로 밀어넣었다. 손길이 움직여짐에 따라 그의 어깨 근육이 딱딱하게 수축되어져 갔다.

캐치의 정열이 미건을 덮고, 그녀 자신의 정열과 섞여 만났다. 이 미지의 힘을 그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랄 것도 없이 격한 욕망이 끓어오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급속히 미건의 온몸에 퍼져갔다. 그녀는 고통스러울 만큼 캐치를 원하고 있었다. 그 격렬함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날카로운 고통이 되어 그녀를 괴롭혔다. 드디어 체념하고 그녀는 캐치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캐치."

미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늘 밤은 쭉 함께 있고 싶어요"

잠시 동안 강한 힘으로 끌어당겨져 미건은 숨도 쉴 수 없었다. 이윽고 천천히 캐치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미건의 어깨에 손을 놓고 캐치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흐린 듯한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미건은 떨었다.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양손을 미건의 피부에 거의 닿지 않도록 해서 캐치는 드레스를 올려주었다.

"슬슬 보내주지."

거절당했다! 미건은 쇼크에 강타당한 것만 같았다. 입이 떨리면서 열렸지만, 이윽고 다시 닫혔다. 갑자기 눈물이 끊어오르는 것과 싸우면서 미건은 어색한 손길로 재킷을 입었다.

"메그."

캐치가 미건의 어깨에 손을 대려고 했지만 그녀는 뒷걸음쳤다.

"그만둬요. 나에게 닿지 말아요."

무겁게 가라앉은 흐느끼는 소리가 나왔다. 미건은 침을 삼켰다.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고 아기처럼 머리를 어루만져 주길 바라진 않아요. 아무래도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소."

캐치가 당황한 듯이 말했다.

"울지 말아 줘, 부탁이야."

"울지는 않아요."

미건은 힘주어 말했다.

"집에 돌아가겠어요."

그녀의 눈은 쇼크로 휘둥그레졌다. 눈이 눈물로 빛나고 있는 것을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합시다!"

캐치가 손을 쥐었지만, 미건은 그 손을 뿌리쳤다.

"그만둬요, 싫어요."

미건은 가슴을 펴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식사는 벌써 끝났어요. 약간 도를 넘은 것일 뿐, 그뿐이에요. 그리고 벌써 끝났어요."

"도를 지나친 것도 끝난 것도 아니오, 메그."

캐치는 미건을 응시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지."

미건은 휙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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