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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한 사랑 4

Bollnow 2024. 3. 15. 05:39

동굴 속으로

"맙소사, 그날 밤 당신이 겨우 손전등 하나를 들고 동굴에 들어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최소한 하나는 더 준비했어야 하잖소. 두 개라면 더 좋고. 하나뿐인 손전등에 건전지라도 다 되면 어쩔 뻔했는지 알기나 한 거요?"

제드는 에이미와 함께 거실 바닥에 늘어놓은 잠수 장비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공기통, 호흡 조절기, 잠수용 손전등, 밧줄, 얼레, 오리발, 잠수용 칼, 부력 조절기, 그밖에 몇 가지 장비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그의 마지막 점검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든 사건이 있고 이틀 뒤였다.

글레이즈는 꼼꼼한 성격답게 마룻바닥에 놓인 장비를 벌써 두 번 째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두 번 다 에이미와 함께 하나하나 물건을 챙겼고, 세 번째 점검에서도 역시 그녀와 함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제드 글레이즈는 다이빙을 할 때 자신의 장비는 물론 동료의 장비까지도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고 철저하게 믿는 사람 같았다. 다이버의 생명은 함께 잠수하는 동료의 장비 상태에 달려 있다는 오랜 격언을 그는 명심하고 있었다. 에이미는 그의 나무라는 듯한 질문을 들으며, 재미있다는 생각과 함께 괴로운 악몽의 편린이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제드, 나도 알고 있었어요."

"물속에선 손전등이 수시로 꺼질 수 있소."

"알아요."

"불빛 없이 동굴 안을 헤엄쳐 다니는 건……."

그가 느닷없이 말을 끊었다.

에이미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무덤 안을 헤엄치는 것과 같죠. 나도 그날 밤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했었어요, 제드."

"게다가 당신은 반밖에 차지 않은 공기통을 메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소. 여유분도 전혀 없이 말이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더라면, 당신은 공기가 부족해서……."

"알아요."

그는 잠수용 칼을 집어 들더니 칼집에서 칼을 빼내며 허탈한 신음소리를 냈다.

"왜 내가 당신한테 설교를 하고 있는 거지? 당신한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텐데 말이오. 하지만 에이미, 당신은 그날 밤 정말로 위험했었소."

"르페이지가 나한테 들이밀었던 총구멍보다는 그래도 동굴이 더 나아 보였어요. 동굴이 무섭게 느껴진 건 그 다음이었죠. 상자를 숨겨야 한다고 결심하고 나서는, 한동안 나 스스로 신경계로 통하는 부분을 차단시켰었나 봐요. 그래서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죠. 하지만 나중에 악몽에 시달렸던 건 총 때문이 아니라 동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어요."

제드는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 에이미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강렬했다.

"나 혼자 들어가도 괜찮아요. 당신은 입구 웅덩이에서 기다려요. 당신 설명대로 혼자서 상자를 찾아보겠소."

에이미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절대로 그러면 안 돼요. 당신 혼자 동굴에 들어갈 수는 없어요. 동굴 다이빙은 반드시 동료와 함께 해야 하는 거예요. 게다가 어떻게 해야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여러 갈래로 갈라진 동굴을 두세 개쯤 지난 다음에 상자를 숨겼던 것 같아요. 지금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 넓은 중앙 터널이 약간 굽어져 있었다는 것뿐이에요."

갑자기 그녀는 정말로 제드가 염려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내가 겁에 질려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까 봐 걱정되나요?"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하오? 르페이지가 당신한테 총을 겨누던 날 당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다 들었는데, 겁이 날 리가 있겠소? 당신은 배짱 있는 여자요. 위급한 상황에서도 당신은 겁에 질릴 사람이 아니오. 언제라도 난 당신을 믿을 수 있어."

그의 인정을 받고 나니 에이미는 기분인 우쭐해졌다.

"우리가 처음 바다에 들어갔을 때는 제대로 처신하지 못했잖아요."

"그때는 8개월 전의 사건 이후로 처음 물속에 들어간 거잖소.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게 당연하지. 폭격기를 보러 들어갔을 땐 괜찮았잖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좀 더 쉬웠어요."

"이번에도 당신이 불안해지면 밖으로 나와서 긴장을 푼 다음 다시 들어가면 되오. 서두를 것 없소. 상자는 그리 깊지 않은 동굴 속에 있을 거요. 시간도 별로 없었고 공기도 멀리 갈 만큼 넉넉하지 않았을 테니까."

에이미는 그날 밤 공기가 떨어졌을 때 느꼈던 두려움을 떠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제드가 화를 낼 것이 뻔했기 때문에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동굴 입구 웅덩이로 나왔을 때쯤엔 공기가 이미 바닥나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동굴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공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린 이번에 동굴 다이빙을 위한 안전 수칙을 그대로 따를 거요. 동굴에 들어갈 때 공기 양의 3분의 1 이상을 소모하면 절대 안 되오. 나올 때 필요한 3분의 1과 혹시 모를 응급 사태를 대비해 나머지 3분의 1을 남겨 둬야 하니까. 우리 둘 중에 한사람이라도 공기를 3분의 1 이상 소모하게되면 함께 돌아 나오는 거요. 알겠소?"

제드는 일어나서 다시 장비를 살피기 시작했다.

에이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마지못해 미소를 짜냈다.

"이번 다이빙에서 당신이 대장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아마도 내가 세부 사항 챙기는 걸 잘하기 때문일 거요. 이젠 입 다물고 정신 바짝 차려서 들어요."

", 알겠습니다."

제드는 그녀의 장난스런 대꾸를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우린 호흡조절기, 손전등, 기타 모든 장비의 여분을 가져갈 거요. 칼은 덜 걸리적거리도록 다리 대신 팔에 차야 하오. 혹시라도 장애물에 걸릴지 모르니까 오리발 끈도 접어서 고정시킬 거요. 그밖에도 걸리적거리거나 튀어나오는 부분은 테이프로 붙여야하고. 동굴 안에서 장비가 장애물에 닿거나 걸리면 절대 안 되니까 말이오."

"알겠어요."

에이미는 줄지어 놓인 잠수 장비를 둘러보았다.

"그날 밤에 내가 제일 걱정했던 것도 침전물을 발로 건드리지나 않을까 하는 문제였어요. 시계는 좋았어요. 그건 확실히 기억해요. 물은 아주 깨끗했어요. 그렇지만……."

그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오리발이나 공기통이 천장에 닿게 되면 침전물이 떨어져, 시계는 다시 0으로 떨어질 수도 있지. 그땐 손전등을 잃어버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장님이 되는 거요."

그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젠장, 에이미, 그 생각만 하면……."

"생각하지 말아요. 정말이에요. 조심할게요."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괜히 쓸데없는 말을 꺼내 제드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자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조심하면 될 거예요. 이번에는 교과서대로 모든 규칙을 잘 따를 거잖아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심하면서, 당신이 책임자를 맡으면 되겠죠."

"아무래도 나 혼자 하는 게 좋겠소."

"그 얘기는 벌써 끝냈잖아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 말이 맞아. 좋소, 기본 원칙대로 하는 거요. 이 밧줄 마음에 드는군. 상태도 좋고, 색깔도 선명하고, 둥둥 뜨지도 않을 거요. 시계가 100센트라고 해도 우린 언제나 이 밧줄에 의지해야하오. 물은 순식간에 흐려질 수 있기 때문에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줄을 잡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니까."

"걱정 말아요, 절대 밧줄을 놓지 않을 테니까."

제드가 먼저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사용할 나일론 밧줄을 다루는 일은 그의 책임이었다. 밧줄 끝은 동굴 입구의 바위에 묶어 두고 제드가 통로를 따라 수영해 들어가며 밧줄을 풀어야 한다. 밧줄은 입구로 이어지는 길을 표시해 줄뿐만 아니라 일이 심각하게 잘못되었을 때 유일하게 입구를 찾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에이미는 맨 처음 동굴에 들어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르페이지가 사용했던 밧줄을 따라 들어갔었다. 그녀는 동굴 입구로 헤엄쳐 나오기 위해서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하며 그 줄을 생명줄처럼 움켜잡았었다. 제드가 웅크리고 앉았다.

"동굴 내부에 대해서 당신이 기억나는 대로 그림을 그려 줬으면 좋겠소. 르페이지가 그날 밤 가지고 있었다는 지도에 대해서도 말이오. 그 지도를 혹시 가지고 있소?"

에이미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에메랄드, 편지, 사진과 함께 지도도 상자 안에 집어넣었어요. 모든 증거를 숨기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별로 정교한 지도는 아니었어요. 중앙통로의 입구 몇 미터 정도만 그린 것 같았고, 양옆으로 두어 개쯤 옆길이 표시되어 있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게 다였어요. 처음 위먼이 상자를 숨겼을 땐 입구에서 가까운 첫 번째 동굴 안에 뒀었나 봐요. 적어도 지도로 봐선 그랬어요."

"그런데 당신이 상자를 숨긴 건 그곳이 아니란 말이오?"

"그래요. 난 될 수 있는 대로 동굴 깊숙이 숨기고 싶었어요. 영원히 숨겨져 있기를 바랐으니까요. 그날 밤에는 그 생각뿐이었어요."

에이미가 그를 쳐다보았다.

"제드, 이번에 상자를 찾으면,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모두 없애야 해요. 편지와 사진, 모두 다요."

"위험한 물건들은 처리해야 하겠지. 이번 일을 하는 목적도 거기에 있잖소."

두 사람 모두 여섯 개의 에메랄드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에이미 생각으로는 보석 역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나머지 물건들과 연관이 있었고, 당연히 '위험한 물건'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제드 역시 같은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제드는 다시 일어나서 며칠 동안 새장을 설계하던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집어든 뒤 샤프펜슬과 함께 에이미에게 건넸다.

"동굴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그려봐요. 입구에서부터.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공기가 통하는 공간이 조금 있다고 했었지?"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종이와 샤프펜슬을 받았다.

"불과 몇 미터 정도밖에 안 돼요. 게다가 동굴의 각도가 아래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에 금세 물로 차 버리거든요."

그녀는 걱정스럽게 제드를 올려다본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난 이런 거 잘 못하는데. 그림 말예요. 표현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미술 수업을 받은 게 중3때라구요."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번 해봐요."

그녀가 동굴 입구 앞에 있는 웅덩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제드는 그녀의 옆에 앉아 열심히 관찰했다.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 입구를 대충 그리자마자 샤프심이 부러졌다. 제드는 침착하게 샤프를 받아들고 심을 조절한 뒤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말없이 에이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드는 잠시 동안 그녀를 지켜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각도로 그리지 말아요. 당신은 지금 동굴로 들어가는 방향에서 그리고 있소. 단면도를 그려봐요. 옆쪽에서 말이오."

그는 그녀에게서 샤프를 빼앗아 들고, 자신의 말뜻을 그림으로 보여 주었다.

"그림 그리는 건 잘 못한다고 얘기했잖아요."

에이미는 불평을 하며 샤프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완만하게 아래쪽으로 경사가 지다가 갑자기 오른편으로 굽어진 동굴이 대강 모습을 드러냈다. 제드의 시선을 불편하게 의식하며 에이미는 기억나는 대로 그날 밤 보았던 갈래 길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얼마나 헤엄쳐 들어갔을 때 첫 번째 사이터널이 나타났소?"

"기억 안 나요.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거든요. 왼쪽으로 시커먼 동굴 입구가 보였다는 것과 별로 멀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날 뿐이에요. 조금 더 헤엄쳐 가니까 또다시 작은 동굴이 나타났구요."

"얼마나 걸렸소? 몇 초? 몇 분?"

"제드, 기억 안 난다니까요! 난 계속 헤엄쳐 들어가며 상자를 숨기려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어요."

"알겠소, 알겠어. 화내지 말아요."

"화내는 거 아녜요."

그녀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대꾸했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계속 그려요. 동굴에 대해서는 달리 기억나는 게 없소? 종유석이나 석순 같은 건 보지 못했소?"

에이미는 뭔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듯한 동굴 천장과 평평하지 않았던 바닥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있었어요. 중앙 통로는 제법 넓었지만 내부는 무척이나 울퉁불통 했어요. 동굴은 용암이 흘러나와서 생긴 건데, 나중에 바닷물이 차 오른 거예요."

제드가 종이를 톡톡 두들겼다.

"그렇다면 장비가 긁히거나 장애물을 발로 차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로군."

에이미는 악몽처럼 떠오르는 기억을 물리치며 스케치에만 열중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두 번째 사잇길을 지나고 나서는 별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어요. 공기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거든요."

제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굳이 상기시키지 말아요."

"두 번째 사이터널을 지나자마자 바로 세 번째 동굴이 나타났어요. 그 안으로 들어갔죠. 그리고 멀리 가지 않아서 상자를 내려놓고 돌아 나왔어요."

"상자를 숨긴 동굴로 들어가기 전에 사이터널을 두 번만 지나갔던 게 확실하오?"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동굴이 어떤지 당신도 알잖아요. 한밤중처럼 깜깜 하죠.작은 샛길이 더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상자를 다시 꺼내 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을 위해 정확하게 기억해 둘 필요 따윈 없었다 구요."

그는 에이미의 목소리에 담긴 짜증을 모른 체했다.

"알겠소. 그럼, 당신이 기억하는 대로 사이터널을 두 번 지난 다음부터 나타나는 동굴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동시에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준비됐소?"

"얼마든지요."

그는 잠시 동안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돌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닥에 놓여 있는 장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에이미는 울퉁불퉁한 바위 위로 기어올라 물속으로 내려가며 깊은 웅덩이를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너무도 선명한 기억과 상상력이 혼합되어 그녀의 뇌리를 괴롭혔고, 르페이지의 시신이 놓여 있던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끔찍했던 그날 밤 불빛에 비치던 그의 싸늘한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치며 지금 눈앞에 닥친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이빙을 하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그녀의 생명은 물론이고 제드의 목숨까지도 좌우될 수 있었다.

환한 낮이었기 때문에 웅덩이 바닥까지 잘 보였다. 물에 들어가는 것도 밤에 들어가는 것만큼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리발을 끼우고 입을 벌린 동굴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따스하고 환하게 내리비치던 햇빛은 더 이상 그들 곁에 없었다. 밤처럼 짙은 어둠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안으로 헤엄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어둠이 더욱더 음산하게 느껴졌다. 손전등 불빛만이 깊은 밤을 뚫고 지나가는 한줄기 구원처럼 물속을 비췄다. 에이미가 양옆과 아래, 뒤쪽을 흘끔거리는 사이 빛의 기둥이 사라졌다. 끝없는 물속의 어둠뿐이었다.

에이미는 제드가 내민 나일론 밧줄을 꽉 움켜쥐었다. 밧줄 끝은 입구 웅덩이의 바위에 묶여 있었고, 만일을 대비해 다시 한 번 동굴 안쪽에 묶어 놓았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는 듯, 제드는 헤엄을 치면서 무척이나 자주 밧줄을 묶었다. 동굴 안의 물체를 만질 때마다 그의 손길은 대단히 조심스러웠고 동굴 표면의 특성을 아는 사람답게 몸놀림도 신중했다. 에이미는 자신이 호흡하는 속도와 숨소리가 비교적 정상이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다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아직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분석력을 동원하여 통로의 생김새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동굴에 들어가면서 맨 처음 깨달은 것은 동굴의 생김새에 대한 그녀의 기억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끝이 날카로운 종유석과 석순이 있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10월의 그날 밤보다 동굴의 입구도 훨씬 더 넓은 것 같았다. 물론 이번에는 빛이 더 많아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좀 더 환한 느낌이 주는 착시인지도 모른다.

빛의 기둥을 따라 시계는 완벽할 정도로 좋았다. 가끔씩 작고 투명한 생물들이 에이미의 손전등 불빛 속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적응된 작은 새우이거나 바다 생물일 것이다. 에이미는 그 생물을 잡아서 조사해 보면 보나마나 눈이 멀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어둠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시각보다는 다른 감각이 더 중요할 것이다.

앞장섰던 제드가 갑자기 멈춰 섰다. 에이미는 그가 또다시 밧줄을 묶나 보다고 생각하며 속도를 늦췄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가 다가가자 그가 불빛으로 왼쪽 벽에 나타난 구멍을 가리켰다. 다른 동굴로 통하는 입구였다. 제드는 에이미가 기억해 낸 사잇길 중에서 첫 번째 인지를 묻는 듯 손가락을 하나 들어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는 돌아서서 다시 앞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에이미는 헤엄치면서 왼쪽으로 나타난 통로 안으로 빛을 비추어 보았다. 몸서리가 쳐지는 것은 겨우 참았지만, 그녀는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고 긴장을 풀려고 애썼다. 그녀는 여전히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간 제드가 또다시 멈춰 서서 두 번째 동굴임을 표시했다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가 다시 생명 줄인 나일론 밧줄을 풀며 앞으로 전진했다.

제드가 세 번째 사잇길 앞에서 멈춰 서자 에이미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기억대로라면 이곳이 그녀가 상자를 숨긴 동굴이었지만, 어딘가 달라 보였다. 입구가 약간 더 좁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구부러진 통로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제드를 보며 확실하지 않다는 뜻을 전달했다. 제드는 알았다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공기통을 멘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에이미도 제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비좁은 입구를 지나치자, 통로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넓어졌다. 쉽게 몸을 회전할 수도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에이미는 손전등을 켜고 둥근 천장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낯설었다. 그토록 악몽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에이미는 동굴 통로를 그럭저럭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인 것 같았다. 그날 밤엔 이 좁은 동굴 입구를 못 보고 지나쳐 다음 번 갈랫길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그녀가 제드에게 이 동굴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려는 찰나, 동굴의 천장을 비추던 그녀의 손전등 불빛이 이상하게 반사되었다. 울퉁불퉁한 천장 대신 은색 거울처럼 평평한 표면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녀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제드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그녀는 위로 헤엄쳐 올라갔다. 에이미는 조심스럽게 평평한 표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고,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물표면 위로 떠올라 있었다. 그녀를 따라 올라오는 제드의 손전등 불빛이 아래에서 일렁거렸다. 제드가 곁으로 떠오르자 에이미는 호흡기를 빼고 마스크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동굴 안의 공간에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여길 좀 봐요, 제드."

그녀는 물위로 올라와 있는 동굴 부분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3미터쯤 떨어진 곳에 물 밖으로 선반처럼 평평하게 튀어나온 바위가 보였다. 에이미가 그쪽으로 헤엄쳐 갔다.

"당신이 상자를 숨겨 둔 동굴이 아니잖소."

제드의 목소리가 못마땅한 듯 높아졌다.

"물론 아니에요. 하지만 근사하잖아요? 이 안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동굴이 처음 뚫렸을 때 생겼나 봐요. 이곳까지 물이 차 오르지 못한 거죠. 냄새도 별로 나쁘지 않아요. 위쪽에 있는 바위틈에서 신선한 공기를 내려 보내주나 봐요."

"에이미, 우린 여기 동굴을 탐험하러 들어온 게 아니오. 어서 갑시다."

제드가 마스크를 내렸다.

"잠깐만요. 저기 바위 위가 얼마나 넓은지 보고 싶어요."

바위까지 헤엄쳐 간 에이미는 손으로 바위 모서리를 잡았다.

"조심해서 잡아요. 위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소."

"아무 것도 없어요."

에이미는 바위 모퉁이를 붙들고 물 밖으로 조금 더 몸을 들어올렸다. 간신히 바위 너머의 평평한 부분이 보일 것 같았다.

평평한 바위 위로 손전등을 비추어 보았다. 그녀는 퀭하니 눈구멍이 뚫린 사람의 두개골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에이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동굴 벽에 메아리치며 으시시하게 울려 퍼졌다.

"에이미! , 이런……."

제드가 재빨리 다가와, 풍덩 떨어지다시피 물속으로 내려온 에이미를 붙잡았다.

"에이미, 왜 그래? 무슨 일이오?"

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물위에 떠 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나머지 한 손을 휘저었다. 그가 손전등으로 바위를 비췄다.

"해골이에요, 제드. 바위 위에 있어요. 위먼일 거예요. 틀림없어요."

에이미가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소?"

에이미는 넋이 나간 듯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제드가 그녀를 놓고 바위 쪽으로 헤엄쳐 갔다. 한 손으로 바위를 잡고 몸을 들어올린 그가 바위 표면을 살폈다. 에이미는 공포에 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끔찍한 장면을 제드는 어떻게 저토록 침착하게 관찰할 수 있을까 경이로웠다. 그녀는 한 번 흘끔 본 것만으로도 충격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바위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돌아온 제드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에이미는 자신의 질문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를 바라며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제드?"

"누군진 모르지만, 시체가 동굴 입구로 떠내려올까 봐 걱정을 한 것 같소. 조류에 떠밀려 시체가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바위 위에 둔 거요. 저기 벽에 해수면이 보이오? 만조 때에도 바위는 물에 잠기지 않소."

", 제드, 정말이었어요, 그렇죠? 르페이지가 말한 대로예요. 우리 어머니가 그 사람을 죽여서 여기에 시체를 숨겨 놓은 거예요. 이제 어쩌면 좋죠?"

"해골 말이오? 내버려둬야지. 저건 25년 동안 저기에 누워 있었소. 영원히 저기에 누워 있을 수도 있을 거요. , 우린 달리 할일이 있으니 갑시다."

제드는 마스크를 쓰고 나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에이미는 바위 쪽을 불안하게 돌아본 뒤 호흡기를 물었다. 그리고는 마스크를 내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불빛을 비추자 금세 제드가 보였다. 그는 중앙 통로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일론 밧줄을 따라 돌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어느새 선두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에이미는 해골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밧줄을 움켜쥐고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제드가 밧줄을 감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에이미는 비좁은 동굴 입구에 이르자 속도를 늦추고 넓은 중앙 터널로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갑자기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물이 부르르 떠는 것 같았다. 손에 잡힌 밧줄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자갈과 파편들이 떨어져 내리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굴 벽의 파편이 그녀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물속이 먹구름처럼 흐려졌다. 에이미가 들고 있는 손전등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빛은 짙은 안개처럼 소용돌이치는 희뿌연 찌꺼기를 희미하게 비출 뿐이었다. 에이미는 밧줄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토록 흐린 물속에서 줄을 놓치면 다시는 찾지 못할 것이다. 밧줄을 놓친 다면그녀는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중앙 터널로 틀었던 방향이 어느 쪽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줄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도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눈앞에서 겨우 몇 센티미터 정도밖에 볼 수가 없었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약해진 동굴 벽을 지나치느라 물의 압력을 조금만 변화시켜도 위험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끈에서 떨어진 자갈 더미가 바닥에 쌓인 침전물을 엄청나게 일으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밧줄을 당겼을 때 제드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손에 잡힌 밧줄은 아직도 팽팽했다. 에이미는 떨어져 내린 자갈 더미 너머에서 제드가 아직도 밧줄을 잡고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밧줄이 떨어져 내린 자갈에 깔려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제드는 갇혀 있는 셈이었다. 에이미는 동굴 내부가 또다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밧줄을 따라 되돌아갔다. 별로 소용은 없었지만 손전등도 켜 두었다. 끔찍하게 전신을 압도하는 어둠 속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하얀색밧줄에 희미한 손전등의 불빛을 비췄다.

그녀가 빠져 나왔던 비좁은 동굴 입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좁은 동굴 입구는 떨어져 내린 자갈과 여러 가지 파편으로 막혀있었다. 또다시 부스러기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밧줄을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또다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만일 제드가 떨어지는 돌멩이에 정통으로 맞았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서 파편에 갇혀 있다면 공기를 다 소모하기 전에 구해내야 했다. 지금쯤이면 이미 두 사람 모두 메고 있는 공기통의 3분의 1은 소모했을 것이다. 제드는 3분의 1 이상 공기를 소모하면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고 했었다. 동굴에서 빠져나가려면 들어올 때 소모한 만큼의 공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길을 뚫고 제드를 살리는 데 쓸 수 있는 공기는 나머지 3분의 1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벽이 무너질 위험에 대해서는 점점 무감각해졌고, 바로 해야 할 일에 착수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무모한 짓인 것 같았다. 흐린 물 사이로, 좁은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는 작은 돌 더미가 간신히 보였다. 그녀는 손전등으로 동굴 바닥을 비추었다. 한 손은 계속해서 밧줄을 잡은 채 그녀는 나머지 한 손으로 떨어진 돌멩이들을 미친 듯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탁한 물이 그녀를 휘감고 돌았지만, 천장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에이미는 공기통의 압력계를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공기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쓸데없는 일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덩이 밑에서 밧줄을 빼내, 제드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내야 했다. 그녀는 남아 있는 의지력을 모아 한 가지 생각에 매달렸다. 그는 분명히 살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갈 더미를 헤치는 일에만 열중하던 그녀는 밧줄이 희미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곧 그녀가 밧줄을 당겨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는 반응이 확실했다. 제드가 살아 있다. 에이미는 손놀림을 더 빨리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줄이 이상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제드의 신호가 아니었다. 줄을 누르고 있던 뭔가가 들려진 것 같았다. 에이미는 줄어든 자갈 틈으로 밧줄이 사라진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여전히 눈앞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돌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넣는 게 좀 더 수월해 짐을 느끼며 그녀는 용기를 얻었다. 몇 분 뒤, 그녀의 장갑 낀 손이 제드의 손과 만났다.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제드의 손가락이 스친 순간 에이미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드가 살아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은 에이미는 손놀림을 늦추고 보다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제드 역시 반대편에서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힘을 모아서 제드가 빠져 나올 수 있도록 구멍을 넓혔다. 에이미는 손전등을 켜고, 곁으로 헤엄쳐 나오는 제드의 커다란 몸집을 비추었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금속 공기통만 살짝 보였을 뿐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만졌다. 그의 손은 동굴 입구 쪽으로 돌아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녀는 밧줄이 아직도 팽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도 밧줄이 감긴 얼레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제드 글레이즈다운 행동이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사소한 부분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에이미는 밧줄에 매달려 헤엄치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시야가 어두워 훨씬 더 느리게 진행되었다. 또 다른 장애물에 부딪혀 다시 천장이 무너지는 재난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손전등 불빛에는 먹구름처럼 피어오른 침전물이 끝없이 비춰졌다.

물속으로 햇빛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에이미는 동굴입구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속은 아직도 흐릿했지만, 동굴 안의 끝없는 어둠과는 달랐다. 에이미는 맨 처음 밧줄을 묶어 놓았던 곳을 찾아 수면 위로 올라갔다. 굳이 공기압력계를 보지 않아도 공기통에 남아 있는 공기가 앞으로 몇 분의 여유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몇 초 뒤 제드가 물위로 솟아올랐다. 에이미는 길게 흐트러진 숨을 들이마셨다.

"제드 글레이즈, 내 평생 이렇게 겁이 났던 것은 처음이에요. 다시는, 절대로 이런 일 만들지 말아요, 알겠어요?"

"알겠소. 나도 당신에게 똑같은 설교를 하려던 참이었소."

그가 마스크를 들어 올리며 입 꼬리를 살짝 들었다

"이 지겨운 웅덩이에서 어서 빠져나갑시다. 집으로 돌아가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거요. 지금은 상자를 찾으러 들어가도 소용없소. 물이 다시 맑아지려면 하루나 이틀은 걸릴 테니까."

그는 덫에 걸려 있었다. 유골이 천천히 에이미를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제드는 뻥 뚫린 동공에서 섬뜩하고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해골의 입 부분은 조롱하듯 웃음 짓는 모습이었고, 뼈만 남은 파리한 손이 검은 물속을 휘젓고 있었다. 길다란 다리뼈가 천천히 흐르는 물속에서 유유히 떠다녔다.

에이미는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바위와 파편에 갇혀 있었다. 위먼의 유골이 접근했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다리가 바위에 깔려 있었다. 그녀는 이미 공기가 바닥난 상태였지만, 죽은 자의 하얀 손가락이 그나마 남아 있는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하도록 그녀의 목을 졸랐다. 에이미는 해골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간절한 시선은 말없이 도움을 요청하듯 제드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제드 역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밧줄과 호흡기의 호스, 장비의 끈들이 모두 엉켜서 그의 몸을 휘감았다. 허리에 감은 웨이트 벨트에는 납이 너무 많이 들어 있는지 그를 끊임없이 가라앉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칼을 꺼내 밧줄을 끊고 에이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에이미에게 가야 했다. 그러려면 우선 자신의 몸부터 자유롭게 풀어야 했다. 하지만 에이미의 도움 없이는 엉킨 줄들을 풀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이미는 위먼의 유골에 잡혀 있는 상태였다.

"제드! 제드, 일어나요. 꿈을 꾸는 거예요. 제발 눈을 떠 봐요."

제드는 에이미의 손이 어깨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악몽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지만, 그의 몸 한 구석은 아직도 동굴 안의 어두운 물속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울림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제드, 다 꿈이에요. 눈을 뜨고 날 봐요."

제드가 눈을 떴다. 그는 달빛이 비쳐 들어오는 에이미의 침실에 누워 있었다. 에이미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드럽게 그를 흔들며 말을 걸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걱정 어린 그녀의 눈빛이 보였다. 제드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신음을 하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가 심호흡을 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당혹스러웠다.

"미안하오. 당신 원고를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오."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에이미에게 다가가던 해골의 영상을 지워 버리기 위해 손으로 눈을 비볐다.

"<은밀한 악마>말예요? 그걸 언제 봤어요?"

"칼립스베이를 떠나오기 전에 일부를 읽었고, 아까 당신이 적어 놓은 메모를 봤소."

그가 고백했다. 그는 괴로운 꿈의 마지막 흔적을 없애려고 애쓰며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에이미를 올려다보았다.

"싫소?"

"아뇨, 그냥 좀 놀랐어요. 내 원고를 미리 읽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잖아요."

"칼립스베이에서 당신이 악몽을 꿨던 날 밤에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었소. 당신이 나쁜 꿈을 꿀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그 내용 안에 들어 있는지 알고 싶었거든. 하지만 당신이 악몽을 꾼 이유는 거기에 쓰여 있지 않았소."

그녀가 한숨을 쉬며 그의 옆에 누웠다.

"맞아요. <은밀한 악마>는 내 마음속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도 몰라요. 당신이 악몽을 꾼 이유도 내 책 때문은 아닐 거예요. 오늘 오후에 동굴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죠. 그렇지 않나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니오. 일부분은 관련이 있겠지만."

그는 난처한 대화에서 벗어날 방법을 재빨리 찾아냈다.

"나쁜 꿈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다는 말, 기억하오?"

그녀가 팔베개를 하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헝클어진 머리가 유혹하듯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제드는 잠들기 전에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었다. 그녀는 그 이후에 잠옷을 찾아 입은 것 같았다. 제드는 잠옷을 반드시 입고 자는 그녀의 습관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몹시 매력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사랑스러우면서 섹시했고, 순진해 보이면서 동시에 도발적이었다. 또 그녀는 여성 특유의 강인함을 지녔다. 남자가 편안하게 기댈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한 정신력이었다. 제드는 또다시 육체가 기분 좋은 긴장감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항상 그렇듯 그는 에이미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거칠게 소유하고 마음을 느끼곤 했다. 에이미도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동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 봤어요."

"그러지 말아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생각도 좌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못해요. 사실대로 얘기해 봐요. 내 잘못이었나요?"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 말이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에이미의 근심 어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아니오, 당신의 잘못은 절대 아니었소. 사실 내 잘못도 아니오. 그건 단지 수중 동굴 안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불과하오. 동굴 다이빙이 치명적으로 위험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잖소. 동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자책하지 말아요."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오후부터 저녁 내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렇지만 당신은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소, 에이미."

"좁은 통로를 빠져 나올 때 말인가요? 내가 걱정한 것도 바로 그거예요. 동굴 벽에 공기통을 부딪히거나 스친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 때문에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나 봐요."

그는 에이미의 몸 위로 올라가 엎드리며, 자책하는 듯한 그녀의 말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막았다. 그의 손위로 커다래진 그녀의 눈동자가 의아스럽다는 듯 반짝였다.

"위험할 뻔했단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오. 나를 구출하기 위해서 당신이 너무 오래 버텼다는 얘기요. 당신은 안전을 위해 남겨두어야 했던 공기 여분을 모조리 쓰고 말았소. 동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비축해야 할 나머지 3분의 1마저 사용했지. 몇 분만 더 늦었더라면 당신도 무사히 빠져 나오지 못했을 거요."

그녀가 입에 얹혀져 있는 그의 손을 밀쳐냈다.

"당신을 거기 그냥 두고 나올 수는 없었어요. 난 당신이 파편에 갇혔을까 봐 두려웠어요. 당신이 그 바위까지 다시 헤엄쳐 갈 수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죠."

그는 진심 어린 그녀의 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 에이미, 당신이 나한테 무엇을 했는지 아는 거요?"

"당신한테 뭘 하다뇨?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건 당신 생각이지."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그리고는 부풀어 오른 자신의 남성을 에이미가 느낄 수 있도록 뒤로 몸을 젖혔다. 그녀가 고혹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당신이 화제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드네요."

"어떻게 알았소?"

"여자만의 직감으로요."

"정말이오? 감격했소."

그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허벅지를 느끼며 다시 한 번 몸을 밀착시켰다. 그가 천천히 애무하듯 입술을 움직였고, 마침내 에이미가 입술을 열어 주었다. 그녀의 희미한 신음소리를 들으며 제드는 흥분과 기대감이 빠르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언제나 반응이 빨랐다. 제드가 그 사실을 기쁘게 감지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에게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는 지금껏 에이미처럼 즉각적이고 진심 어린 반응을 보이는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차츰 그는 에이미에게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제드는 그 사실을 직시하고, 이제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의 따스한 온기에 몸을 파묻고서, 사랑을 나눈 후에 언제나 그의 마음에 깃 드는 달콤한 평화를 맛보고 싶었다. 제드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져 목덜미를 지나 가슴을 향해 뜨겁고 촉촉한 키스의 세례를 이어갔다.

", 제드……."

에이미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움켜쥐며 자신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가 혀끝으로 가슴의 높은 봉우리를 간지럽히다가 입술로 부드럽게 유두를 일으켜 세우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손바닥을 그녀의 배에 대고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부드럽게 곱실거리는 숲 속으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당신은 벌써 뜨겁고 부드러워졌소."

"당신은 부드럽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경이로운 유혹에 빠져 있는 듯 거칠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와 등허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그의 은밀한 부분에 닿았다.

"어느 한 군데도 부드러운 곳이 없어요."

"당신 옆에선 언제나 그렇소."

그는 이미 타오르는 갈망으로 온몸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 결국엔 만족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달콤하고 뜨거운 고통이었다. 한동안 그는 혼미한 쾌락의 고통을 즐겼다. 잘근잘근 씹는 듯한 그의 입맞춤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귀여운 그녀의 배꼽을 거쳐 허벅지까지 그의 입술이 그림을 그리듯 지나갔다. 그는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열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몸 한가운데로 움직이자 에이미가 숨을 죽였다. 그녀의 손톱이 그의 피부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놀란 듯 다리를 들어올렸다.

상상을 초월한 은밀한 접촉에 그녀는 약간 몸을 뒤로 뺐지만, 새로운 경험에서 물러나고 싶은지 아닌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제드는 그녀의 몸에 일어난 즉각적인 반응을 눈치 챘고, 그녀가 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어떤 확신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그는 기꺼이 에이미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제드는 그녀의 동그란 엉덩이를 양손으로 감싸며 그녀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붙들고 계속해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녀를 애무했다. 에이미의 가냘픈 몸매에 힘이 들어가더니 쾌락의 신음소리가 노랫가락처럼 흘러나왔다.

"제드, 기분이……. 너무 좋아요. 견딜 수가 없어요."

"얼마나 좋은지 내게 보여 줘."

그는 혀끝으로 계속해서 그녀를 간지럽히며 천천히 손가락을 촉촉한 틈새로 집어넣었다. 에이미가 그의 아래에서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을 감싼 그녀의 몸에 작은 떨림이 느껴지자, 제드는 자신의 타오르는 욕구를 더 이상 억제하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몸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그녀의 촉촉한 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를 깊숙이 받아들였다. 그의 반응은 거의 순식간이었다. 몇 초 뒤 그는 에이미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야만스럽게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가 천천히 힘을 빼자 에이미가 그에게 매달렸다. 제드는 눈을 뜨고, 꿈결처럼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에이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당신은 내가 당신한테 무언가를 했다고 했지만, 난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너무나 진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으므로 말대꾸할 생각도 못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마지못해 에이미의 따뜻한 몸에서 내려와 그녀의 곁에 누웠다.

"다시 자도록 해요. 우린 둘 다 휴식이 필요해. 혹시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둘 다 힘든 하루를 보냈소."

"잊지 않았어요."

흥분에 떨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제드는 쓸데없는 얘기를 꺼낸 자신을 마음속으로 저주했다. 그가 달래듯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어서 자요."

"제드, 난 해골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니까."

제드의 말투는 필요 이상으로 거칠었다. 그의 뇌리 속에 아직도 악몽의 장면이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골은 잊어버려요. 25년이나 묵은 유골이 당신을 해치지는 않을 거요."

그는 무엇이든 그녀를 해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다른 사람이 발견하면 어쩌죠?"

"25년이나 지난 죽음에 대해 조사하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에이미. 그리고 그 시체가 위먼이라고 추측해 낼 사람도 없고. 그는 바다에서 실종되었소. 아무도 그 얘길 의심하지 않아요. 누군가 해골을 찾는다고 해도, 동굴에 들어갔다가 불행히도 길을 잃은 다이버라고 생각할 거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는 공간과 몸을 누일 바위를 찾았지만, 돌아 나올 길은 없었던 거지."

에이미는 그의 품속에서 진저리를 쳤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그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까 그곳에서 내가 생각해 낸 시나리오요.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엔지니어치고는 꽤 쓸 만하지 않소?"

"그래요. 아무래도 당신은 <은밀한 악마>를 너무 많이 읽은 것 같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에이미가 잠들 때까지 부드럽게 그녀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도록 잠 속으로 피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품안에서 잠들어있는 여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의 인생이 새로운 축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는데,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 8년 동안 그는 임무가 주어지는 대로 그때그때 살아왔을 뿐, 뒤를 돌아보거나 멀리 앞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긴 영화에서 잘려 나간 필름 같았다. 영화 중에서 과거와 미래 부분은 그가 없이도 잘 돌아갔다. 커터는 그의 임무가 중요하다고 부추겼고, 어느 정도까지는 제드도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직도 살벌한 정글의 법칙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있으므로 그의 존재와 투쟁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얘기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제드는 타고난 약탈자였다. 처음부터 그의 감각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술들을 쉽게 받아들였다. 너무 쉬운 게 탈이었다.

처음에 그는 정의감에 불탔다. 앤디 형을 죽인 자를 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임무를 성공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는 결코 벗어나지 못할 치명적인 덫에 걸려든 셈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임무를 맡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기다려 줄 가족도, 위험을 걱정해 줄 약혼녀도 그에겐 없었다. 임무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일은 그의 세계에서 중심이 되고 말았다.

에이미가 그의 인생에 들어오기 전까지 잘려 나간 필름은 그 혼자만을 위해 계속 돌아갔다. 에이미는 그를 친구로 받아들였고, 어느새 그녀는 그의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에이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에이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는 좀 더 깊숙이 그녀의 인생에 끼어 들게 되었고, 좁고 잘 정돈된 그의 세계가 점점 더 범위를 넓혀 갔다. 그는 지금껏 안주해 왔던 고립의 껍질이 마침내 터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신이 없었다. 그는 덫에 걸려 있었다. 그는 자유로워져야만 에이미를 보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미 만이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덫에 걸려 있었다. 제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복잡한 문제를 끌어안고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에 제드는 눈을 떴다. 그는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간신히 눈을 뜨며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그의 옆에서 에이미가 몸을 뒤척이다 기지개를 켰다.

"전화 왔어요."

그녀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알아."

"어서 받아요."

그녀는 이불 아래로 파고들며 말했다.

"내가 뽑힌 거요?"

제드는 못마땅한 듯 일어나서 바지를 걸치고는 맨발로 문으로 향했다.

"그래요, 당신이 뽑혔어요."

에이미는 하품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곧 뒤따라 일어날 가라는 사실을 제드는 알고 있었다. 에이미는 아침 체질이었다. 그들이 올리애너에 도착한 뒤로 알게 된 그녀의 특징 중 하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역시 아침 체질이었다. 제드는 계단을 내려가며 바지 단추를 채웠다. 여섯 번인가 일곱 번째 벨이 울렸을 때 그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런 젠장, 이제 막 포기하고 끊으려던 참이었네. 자네는 파라다이스에서 잘 지내고 있나?"

제드가 하품을 했다.

"잘 있었나, 팩슨. 일찌감치도 전화했군."

", 기껏 전화했더니 불평부터 하는군."

"불평불만을 들으려고 사는 사람도 있잖아."

"글쎄, 하긴 언제나 불평을 늘어놓으려고 태어난 사람도 있지. 멀거니 앉아서 컴퓨터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봐야 하는 우리 같은 신세 말이야. 마이클 J. 위먼에 대해서 흥미로운 사실을 몇 가지 들어 볼 텐가, 아니면 정부가 내는 비싼 전화 요금으로 불평만 늘어놓을 텐가?"

"정부 돈을 좀 축내는 것도 재밌긴 하겠지만, 지금은 우선 첫 번째를 택하겠네."

제드는 길다란 전화선을 끌고 창가로 걸어갔다.

"위먼에 대해서 알아낸 걸 말해 보게."

", 우선은 그자가 죽은 것으로 보이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팩슨이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안다구? 그런데 왜 진작에 말 안 했지? 나한테 전화했을 때는 그런 얘기 비치지도 않았잖아. 누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록을 찾아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나?"

"미안하네, 팩슨. 내가 실수했네."

"자네가 내근을 못하고 계속 현장으로만 나도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구."

팩슨이 투덜거렸다.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나머지 얘기나 좀 해보게. 숨도 쉬지 않고 들을 테니."

계단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에이미가 가운을 졸라매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통화 내용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침에 보는 그녀가 너무나 근사하다고, 제드는 생각했다.

팩슨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자네 말대로 그자는 슬레이터와 동업으로 서부 해안에서 항공기 사업을 벌였는데, 정부와도 접촉이 많았네. 몇몇 프로젝트는 1, 2급 극비 문서로 구분되기도 했었지. 위먼과 슬레이터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사원의 신원 조회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더군. 옛날 신원 조회 기록을 찾아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나?"

"아니. 나한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겠지만, 나도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 결과만 얘기하게."

"그게 자네가 현장으로만 나도는 또 하나의 이유일세. 자낸 언제나 마지막 데이터에만 관심이 있지. 그 자료를 뽑아내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단 말이야."

"커터한테 내가 자네 월급을 올려줘야겠다고 하더라고 전하게."

"그러지. 그런데 커터가 자네한테 전하는 말이 있어. 전화 끊기 전에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 주게."

제드가 갑자기 신경질을 부렸다.

"이건 자네와 나만 아는 일이야. 사적인 일이란 말일세.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 일들을 커터에게 보고했나?"

"아니. 그냥 자네가 인사차 전화해서 상처가 잘 낫고 있다고 전하더라는 말만 했네. 그뿐이었어. 정말이야. ? 이번 일이 그렇게 민감한 문젠가?"

"그렇진 않지만, 정부와 상관없는 일이니까 연방 정보부에서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계속하게."

팩슨이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슬레이터는 신원 조회를 당당히 통과했네. 그런데, 군대 복무경력이 좀 흥미롭더군. 태평양에 주둔했을 당시 중앙정보부를 위해서 조금 일했었네. 중요 임무는 아니었지만, 적절한 훈련도 받았고, 일 처리도 믿음직했어. 반면에 위먼은 좀 얘기가 달라."

제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이미를 향해 한쪽 눈썹을 찡긋해 보였다.

"듣고 있네."

"이자는 두뇌가 아주 명석했어, 아마 천재였던 모양이야. 스포츠 광이기도 했지. 요트, 스쿠버 다이빙, 스키, 비행기 조종, 서핑, 못하는 게 없었어. 신원 조회 내용에 따르면, 사랑에도 운이 따랐었나 봐. 여자 친구들이 끊이질 않았더군. 그래도 돈 때문에 문제가 좀 있었어."

"무슨 문제가 있었는데?"

"계속해서 빛을 졌더군. 하지만 결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팩슨이 너그럽게 되물었다.

"그런데 위먼은 좀 드문 경우이긴 하네, 신원 조회를 맡았던 부서에서는 잠재적으로 위험 가능성이 있다고 기록해 두었더군. 요트에다 개인전용 비행기, 여자들까지 거느리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테지. 문제가 제기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문제는 없었어. 위먼이 신용상 위태위태하게 살아왔다고 해도 그건 그가 걱정할 문제였으니까."

"알겠네. 어쨌든 그자도 신원 조회를 통과했으니 위태위태한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 없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전과는 없었나?"

"내가 알기론 없었어. 자네 말대로, 어쨌든 신원 조회를 통과했으니까."

"그럼, 사생활에 대해서 알아낸 걸 말해 보게. 여자 관계는 어땠나?"

"신원 조회 기록에서는 별로 도움을 받지 못했네. 하지만 내가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지. 자네도 의무라는 미명하에 보다 더 훌륭한 정보를 기대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알아냈나?"

팩슨이 신음을 했다.

"불행히도 난 자네한테 크게 신세진 일이 있으니 빛을 갚아야겠지. 그래, 알아냈네. 기록에 있는 옛날 주소와 기타 정보를 이용해서 평범한 사항들을 알아봤지. 출생증명서, 결혼 증명서, 병무 기록 같은 것 말이야."

"결혼은 했었나?"

느닷없이 제드가 물었다.

"아니. 하지만 비비안 앤 르너라는 여자와 제법 오랜 관계를 가졌더군. 그 여잔 1년쯤 전에 죽었네."

"아이는?"

"아들이 하나 있어."

제드가 조심스럽게 생각에 잠기며 눈을 감았다.

"이름은?"

"이름은 다니엘이네. 나이는……. 가만 있자……."

팩슨이 컴퓨터를 작동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지금 스물여섯이야. 출생증명서에 아버지 이름이 위먼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니엘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더군. 이미 얘기했지만, 그 친구 부모는 결혼한 적이 없어. 위먼이 죽은 시기로 볼 때 그 청년은 아마 아버지가 있었는지도 몰랐을 걸세."

"비비안 르너는 어떻게 죽었나?"

"알코올 중독에다 약물 남용."

"그럼, 아들은?"

"그 친구는 LA에 있는 증권 중개사에서 일하고 있네. 그 청년에 대해서 조사한 건 그게 다야. 그쪽으로 자네가 얼마나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지 몰라서 말이야."

"위먼에 대해서는 더 알아낸 게 없나?"

제드는 한 손을 창틀에 올리고 몸을 기댔다. 에이미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통화 내용을 한쪽만 들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못내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잘 모르겠네."

팩슨이 천천히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잘 모르겠다는 뜻이지. 큰 문제없이 신원 조회를 통과했다는 얘긴 했지만, 재확인 프로그램을 띄워 보니 올리애너 프로젝트라는 게 나타났네. 자네가 머물고 있는 섬 이름이라 들어가 봤지. 프로젝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조회를 해봤는데, 답을 얻을 수가 없었네. 컴퓨터로 접근이 어려운 자료인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지?"

제드가 성급하게 물었다.

"그 자료를 아직 아무도 컴퓨터에 입력시키지 않았다는 말일세."

팩슨은 아직도 문서로만 작성된 자료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넌덜머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가 꿈꾸는 세계에서는 모든 정보가 컴퓨터화 되어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접속이 가능해야 했다.

"그 말은, 그러니까 누군가의 중앙 파일 안에 서류상으로만 남아 있다는 의미지."

"그게 누구의 파일일까?"

", 비싼 질문이군. 그건 좀 더 뒤져봐야지. 컴퓨터는 깔끔하고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친구지만, 진짜 사람들을 추적하기 시작하면 비밀을 보장할 수 없네. 그건 자네가 결정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좀 더 알아보길 바라나?"

제드는 머뭇거렸다.

"아직은 아니네. 꼭 필요하다면 부탁하겠지만, 가능하면 피하고 싶네. 그럼, 커터의 전갈이나 말해 보게."

"우리의 고명하신 보스께서 지난번 자네가 맡은 임무에서 뭐가 잘못됐는지를 알아냈다고 전하라더군."

"늦긴 했지만, 못한 것보다는 낫군."

제드가 투덜거렸다.

"지난번엔 자네가 정말 위험했었다는 말 들었어."

팩슨이 헛기침을 했다.

"설마 달려 있는 물건은 제대로 움직이겠지?"

제드가 에이미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럼 나머지 소식을 전해 주게, 팩슨."

"물론이지, 간략하게 말하면, 지난번 골목에서 자네를 잡을 뻔했던 두 녀석한테 자네를 팔아넘긴 자에 대해서 커터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하더군. 우리가 제대로 지목했는지 자네가 가서 확인을 좀 해줬으면 하는 모양이야. 확인이 끝나면 자네가 마무리를 지어야 하네. 당연하겠지만, 커터는 가능하면 빨리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해. 배신자는 골칫덩어리거든. 커터는 자네가 시작한 일을 언제 끝낼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하네."

제드는 야릇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에이미의 의아스런 눈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팩슨이 한 말을 그녀가 엿들었을 가능성은 없었지만, 대화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쯤은 그녀도 짐작하는 것 같았다. 제드가 그의 일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으리라.

"커터에 게 전하게……."

제드가 말을 시작했지만, 팩슨이 말문을 막았다.

"커터가 이번 일은 자네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고 전하라더군. 자넬 팔아넘긴 작자가 지난주에 또 일을 저질렀어."

"이번엔 누가 당했지?"

"램지하고 디킨슨일세."

"제길, 둘 다 빠져 나왔나?"

제드가 수화기를 세게 움켜잡았다.

"아니, 둘 다 죽었네. 커터 말로는, 자네가 관심 있어 할 거라던데."

"커터 말이 맞아."

제드는 여전히 에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덫에 걸려 있었다.

'에이미,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당신이 날 어떻게 만든 거야?'

"그럼, 노친네한테 자네가 계획보다 조금 일찍 돌아올 거라고 말할까?"

"커터한테 내가 그 세일즈맨 건을 해결하겠다고 말하게. 하지만 파라다이스에서 며칠 더 머물 시간이 필요해."

"커터가 좋아하겠군, 그 동안에 나한테 더 부탁할 건 없나?"

팩슨이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됐네. 컴퓨터나 가지고 놀게."

제드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에이미는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전에 그를 다그쳤다.

"지난번 그 친구예요? 위먼을 조사해 주기로 한 사람인가요?"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커터에 대한 얘기는 뭐죠? 세일즈맨이라뇨?"

"그건 신경 쓰지 말아요. 중요한 건 위먼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오."

"아들이라구요?"

놀란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그렇소. 위먼은 비비안 르너라는 여자와 관계를 가졌소. 그가 죽기 직전에 그 여자는 다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지. 비비안은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붙여 주긴 했지만, 르너의 출생증명서엔 마이클 위먼이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소."

"그 금발 머리 매춘부예요!"

"뭐라구?"

"금발 머리 여자가 우리 아버지를 유혹하려 했다고 로지 아줌마가 그러셨어요. 무슨 이유에서든 위먼이 그렇게 하도록 여잘 부추겼을 거예요. 단순히 문제를 일으키려고 그랬을지도 모르죠. 로지 아줌마 말로는 위먼이 우리 아버지를 시기했대요. 어디서든 문제를 일으키는 걸 좋아하는 타입의 남자였다고도 하셨구요."

에이미는 돌아서서 넓은 거실을 초조하게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르너는 위먼의 아들이었군요.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그 사람이 올리애너에 나타났어요.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너무 수상쩍어요."

"나도 같은 생각이오."

제드가 걱정스럽게 대꾸했다.

"이제 우린 어떻게 하죠?"

"동굴에서 그 빌어먹을 상자를 어서 꺼내 와야 하오."

"물속에 떠다니는 침전물은 어떻게 하구요?"

"조심할 수밖에 없소. 물이 적당히 맑아지면 다시 들어갈 거요. 그 동안에는 우리를 위해 보호막을 좀 쳐야겠소."

그가 전화기를 찾았다.

"무슨 보호막이요?"

"'행크 앤 로지' 전화번호가 몇 번이오?"

그녀는 번호를 알려준 뒤 다시 물었다.

"뭘 하려는 거죠?"

"행크에게 부탁을 하려는 거요."

제드는 이미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에이미가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제드 글레이즈입니다. 도움이 좀 필요해서요."

"어서 말해 보게. 전에도 얘기했지만, 슬레이터의 친구는 곧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행크가 선선히 대답했다.

"댄 르너와 그 친구 거티를 유심히 감시해 주십시오. 그자들이 시내를 뜨면 저한테 전화 주시구요."

"쉬운 일이군. 그런데 무슨 일인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베이든이 그날 밤 혼자서 일을 저질렀다는 켈소 보안관의 말이 믿기지가 않아서요. 르너와 거티의 행동거지를 살피는 게 현명할 것 같습니다."

"염려 말게. 그자들이 시내를 떠나면 곧 연락해 주지."

"고맙습니다. 보안관은 아직도 베이든을 잡아 두고 있나요?"

"내가 알기론 그렇다네. 음주와 소란 죄로 며칠은 가둬 둘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잘됐군요. 그럼,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드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동굴에 들어가서 물을 좀 살펴봅시다."

"아침도 먹기 전에요?"

"서둘러야 하오."

"알았어요."

에이미는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첫 번째 계단에서 멈춰 선 그녀가 돌아서서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커터 얘기는 뭐고 세일즈맨 건을 당신이 해결하겠다는 얘긴 또 뭐죠?"

"아무 것도 아니오. 나중에 다 설명해 주겠소. 어서 움직여요, 에이미."

그녀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지만, 결과적으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동굴 안의 물은 그날 저녁까지 맑아지지 않았다.

 

 

 

10월의 그날 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면 정말 안 되겠어요?"

에이미는 웨이트 벨트를 채우며 물었다. 그녀는 제드가 마음을 바꾸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실망하지도 않았다. 제드는 잠수용 장갑을 꼈다.

"안 돼요. 모든 일이 너무 빨리 벌어지고 있소. 왠지 불안해. 어제 상자를 꺼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이클 위먼의 아들이 섬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영 불편하오."

"거티와 베이든이 그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에이미는 이미 그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 입구의 음산한 웅덩이를 내려다보며 10월의 그날 밤에 보았던 광경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달빛은 8개월 전과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구름에 가려져 스산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멀리 바다에는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엔지니어로서 난 가장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생각하고 준비하는 경향이 있소.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언제나 잘못 되게끔 되어 있소. 그래요, 난 베이든과 거티, 르너가 모두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베이든은 감옥에 갇혀 있고, 거티와 르너는 행크가 감시해 주기로 했소. 운이 좋으면, 섬을 떠날 때까지 우릴 건드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기꺼이 험한 일을 대신해줄 텐데 무엇 때문에 힘든 일을 직접 하려 하겠소?"

"당신 말이 옳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섬을 빠져나가죠?"

"아주 조심스럽게 하면 되오."

그가 오리발을 집어 들었다.

"준비됐소?"

습관적으로 그는 에이미의 장비를 다시 한 번 더 점검했다.

"준비됐어요."

그녀는 밤에 하는 다이빙이 작년 10월의 끔찍했던 밤을 상기시킨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바위를 타고 넘어가 웅덩이에 몸을 담그며 에이미는 어차피 동굴에 들어가면 24시간 내내 밤이나 마찬가지라고 자신을 달랬다. 입구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태양이 빛나고 있으리라고 상상하면 그뿐이었다. 그녀의 곁에서 제드가 오리발을 신고 마스크를 제대로 썼다.

"갑시다."

'완전히 사무적이군.'

에이미는 손전등을 켜고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며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는 하루 종일 사무적이었다.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순간은 잠시도 없었다. 말장난도, 새장을 스케치하는 여유로움도 없었다. 제드는 매 시간마다 웅덩이로 내려가 물의 맑기를 확인했다. 그 사이사이에는 거의 침묵을 지켰다. 에이미는 그가 조바심과 차디찬 긴장감을 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는 사냥을 눈앞에 둔 거친 한 호랑이가 굴속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녀는 제드가 끔찍한 임무를 수행할 때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아닐까 궁금해졌다.

그들은 숨 쉴 공간이 있는 동굴 입구를 지나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전등불에 비친 물속은 거의 완벽하게 맑아져 있었다. 에이미는 밧줄을 잡고 제드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오늘 아침 엿들은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팩슨은 위먼과 르너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 컴퓨터 천재였다. 그녀는 맨 처음 제드가 통화를 할 때부터 커터의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제드는 커터에게 곧 돌아가겠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팩슨에게 말했었다. 커터는 제드의 상사인 것이 분명했다. 제드는 커터에게 '세일즈맨 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에이미는 그 말을 하며 싸늘한 냉기를 풍기던 그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드가 옳았다. 모든 일들이 너무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그의 일이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에이미는 전처럼 그가 잦은 출장에서 돌아와 공항에서 전화를 걸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난번처럼 부상당한 그를 위해 대신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결코 계획을 세우지 않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는 그의 미래를 그녀는 가만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에이미는 생각했다. 제드는 그녀에게 미래를 되찾아 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었다. 그는 그녀가 꼼짝없이 얽매어 있던 시간의 고리를 부수어 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에이미는 그가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었듯이, 그를 자유롭게 해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엇이라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자유를 원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제드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잠재적인 폭력에 대해서도 그는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한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현재에만 모든 것을 맞추며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에이미와의 사랑마저도 자신의 인생과 별개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세계를 바꾸려 하다니, 대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에이미는 하얀 밧줄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천장에 매달려 있는 섬세한 종유석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헤엄쳐 나갔다. 제드에 대해 생각하면 적어도 얼마 전에 있었던 동굴 사고에 대해서는 잊을 수 있었다.

제드는 전날 자신을 가두었던 작은 자갈 더미를 지나치며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파편 더미 위로 불빛을 비추었다. 에이미는 유골이 있던 동굴로 통하는 입구가 한 사람이 빠져나갈 정도로 좁게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5년간 웃고 있었을 해골의 치아와 퀭한 눈구멍이 떠올라 그녀는 몸을 떨었다. 에이미는 제드가 중앙 통로를 따라 앞으로 헤엄쳐 나가자 안심이 되었다. 파편이 쌓여 있던 부분을 몇 미터 지나자마자 터널이 오른쪽으로 굽어졌다. 둥글게 굽은 동굴 벽이 에이미의 뇌리에 친숙하게 느껴졌다. 제드는 멈춰 서서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는 에이미를 쳐다보며 낯익은 광경인지를 소리 없이 물었다. 그녀는 동굴 벽에 불빛을 비춰 보며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가고있는 게 확실했지만, 동굴 생김새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희미했다.

그러나 제드를 따라 구부러진 동굴을 조금 더 헤엄치자 몇 가지 더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좀 더 세게 발길질을 해서 앞으로 다가가 제드의 다리를 만졌다. 그가 의아스럽다는 듯 돌아보자 에이미는 이곳이 확실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이 손전등을 동굴 옆벽으로 비추자 작은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에이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이번 터널이 자신이 상자를 숨겨 두었던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입구를 가리켰고, 제드는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금속 상자는 8개월 전 그녀가 두었던 대로 놓여 있었다. 상자는 동굴 벽에 난 작은 틈에 가만히 숨겨져 있었다. 눈먼 작은 물고기와 보금자리를 나누어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드가 바위틈에 손을 넣어 상자를 꺼내자 투명한 생물체가 놀라 도망을 쳤다. 에이미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동굴과 관련된 끔찍한 장면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두 남자가, 위먼과 르페이지가 저 상자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바로 그 순간에도 위먼은 자신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동굴 안을 떠돌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바로 저 상자 때문에 그녀 역시 죽음을 당할 뻔했다. 저 상자로 인해 그녀는 죽은 사람의 눈을 쳐다봐야 했다. 저 상자 때문에 되살아난 과거가 올리애너 섬의 평화를 깨뜨리려 하고 있었다.

에이미는 넋을 잃고 있다가 간신히 제드의 손짓을 알아보았다. 마스크 너머로 그는 그녀에게 상자를 가지고 동굴에서 빠져나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제야 에이미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드는 손전등과 밧줄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상자를 옮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들고 들어왔으니, 가지고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이미는 제드한테서 상자를 받아들고 몸을 돌려 좁은 터널을 벗어났다. 몇 분 뒤, 그녀는 다시 중앙 터널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서는 제드가 힘차게 헤엄을 치며 밧줄을 되감고 있었다.

상자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여섯 개의 에메랄드와 편지 한 묶음, 사진 몇 장이 과연 얼마나 무게가 나가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살아 있는 뱀이라도 들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하얀 밧줄을 따라 열심히 헤엄쳐 나갔다. 상자가 자신의 손안에서 폭발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동굴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심하게 구부러진 중앙 터널을 돌자마자 에이미는 멀리서 쏘는 듯 비춰진 불빛에 눈이 머는 느낌이었다. 한 순간, 그녀는 다가오는 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기차 터널 안에서 다가오는 기차끼리 서로 전조등을 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상황을 깨달은 순간, 제드가 그녀의 다리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에이미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앞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그 역시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다리를 잡아당기자, 에이미는 그제야 해골이 숨겨진 동굴 입구로 들어가라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끔찍한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진 않았지만, 에이미는 자신의 친구이자 연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제드 글레이즈가 명령하면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에이미는 어느새 작은 구멍으로 헤엄쳐 들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동굴이 무너져 내릴지 몰라 잔뜩 긴장했던 그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보니 제드도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앞으로 밀치며 밧줄 얼레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제는 그녀가 선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대신 상자를 받아들었다.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에이미는 침착하게 어둠 속을 헤엄쳐 나갔다. 평평한 거울처럼 보이는 공기층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침입자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그녀는 그들의 손전등 불빛을 보긴 했지만, 물속에서 거리를 가늠하기 란 어려운 일이었다. 물속에서는 모든 사물이 25퍼센트 정도 크게 보였고, 실제보다 더 가깝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침입자가 좁은 구멍으로 갑자기 사라진 하얀 밧줄을 발견하는 일은 시간문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드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동굴 안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한시바삐 올라가려는 생각인 것이다. 논리적인 결론이었지만, 에이미는 또다시 수십 년간 해골이 누워 있던 바위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공기층을 찾아 물위로 올라갔다. 곧이어 제드가 그녀 곁으로 떠올랐다.

"바위 위로 올라가요, 어서."

"당신은 어쩌려구요?"

그녀는 유골이 있는 바위를 향해 헤엄치며 숨차게 물었다.

"환영 준비를 해야지."

"제드, 누굴까요?"

"내가 어떻게 알겠소? 거티일 수도 있고, 르너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행크 아저씨가 둘 다 감시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녀의 손이 바위벽에 세게 부딪혔다.

"아야, 다 왔어요. 나더러 올라가라는 말인가요?"

"가능한 한 빨리, 어서 움직여요."

그는 상자를 물속에서 들어 올려 바위 위로 집어던졌다. 에이미는 금속 상자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여유 공간이 있는지 뼈에 부딪히는 소리는 아니었다. 에이미는 심호흡을 한 뒤 바위 위에 손전등을 올려놓고 양손으로 바위 모서리를 붙잡았다.

"머리 조심해요."

제드는 물위로 그녀를 힘차게 들어 올려 주었다. 에이미는 자신이 유골의 갈비뼈 부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전등에서 나온 불빛이 복강을 둘러싼 앙상한 뼈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몸을 돌려 물속에 다리를 늘어뜨린 채 바위 모퉁이에 걸터앉았다. 제드는 그녀의 옆으로 올라와 아무렇지도 않게 유골을 발로 차 버리고 공간을 만들었다. 에이미는 해골과 뼈가 바위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이젠 어떻게 하죠?"

그녀가 속삭였다.

"이젠 전등을 꺼야 해. 우리의 위치를 알려줄 필요는 없잖소. 준비됐소?"

"아뇨, 난 절대로 준비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 당신이 해요."

에이미는 순식간에 내려앉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동굴 안의 어둠은 이 세상 어느 어둠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림자도 없었고, 달빛은 물론 흐릿한 빛의 흔적조차 없었다. 끝도 없이 완전한 무의 세계였다. 에이미는 제드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바로 그 순간, 물 아래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올라왔다. 침입자가 좁은 터널로 들어선 것이다.

"물속에서 다리를 빼내요."

제드는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앉은 자세를 고치는 것이 느껴졌다. 물 밖에서 잠수 장비를 모두 갖추고 움직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이미가 차고 있는 웨이트 벨트만 해도 10킬로그램이 넘었다. 공기통과 기타 장비의 무게를 생각하면, 물 밖에서 거동하기가 무척이나 불편한 게 당연했다.

바위 위로 올라앉으려면 유골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에이미는 위기에 강했다. 제드는 그 사실을 여러 번 느낀 적이 있었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한 다음에 감정적인 혼란은 나중에 걱정하기로 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이성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남자들과 일을 함께 했던 경험이 많았다. 그들에겐 에이미가 품고 있는 내면의 힘 같은 것이 부족했다. 에이미는 그의 등뒤를 맡겨도 좋을 훌륭한 친구였다.

제드는 물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불빛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팔뚝 윗부분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빼들었다. 시간이 정확하게 맞아야 한다. 침입자 역시 은빛으로 빛나는 표면이 숨쉴 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운이 좋다면, 머저리 같은 작자는 그가 손을 쓸 때까지 공기층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침입자는 목표물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제드는 곁에서 에이미가 숨을 죽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는 그녀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제드의 계획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에이미가 칼집에서 칼을 빼는 소리였다.

"칼을 사용하게 되면, 희생자가 누군지 먼저 확인하는 것 잊지 말아요. 난 칼에 찔리는 건 정말로 지긋지긋하니까."

그가 속삭였다.

", 제드, 날 믿어 봐요."

그는 어둠 속에서 씨익 웃음 지었다. 물속에서 불빛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바로 지금이다. 제드는 호흡기와 마스크를 썼다. 그리고 나서 그는 침입자의 바로 위쪽을 겨냥해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침입자는 첨벙거리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다. 제드는 손전등이 미친 듯이 자신을 향해 비춰지는 것을 보았지만, 침입자에겐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남자의 위에 있었고, 칼로 호흡기의 호스를 자르고 있었다. 요란한 물거품이 일었고, 침입자는 당황했다. 사내의 손전등이 물속으로 튕겨지더니 동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불빛은 바닥을 희미하게 비출 뿐, 두 남자는 어둠 속에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제드는 미친 듯이 발버둥치는 침입자를 내버려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바닥에서 희미하게 비치고 있는 불빛으로 방향을 잡은 다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불을 켜."

그가 물위로 올라오자마자 에이미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즉시 그의 명령을 따랐고, 수면 위로 불빛을 비추었다. 제드가 그녀를 향해 헤엄치며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줘요."

그녀는 손전등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고, 제드는 돌아서서 몸부림치는 침입자를 비추었다. 운이 좋았는지, 불빛의 도움을 받았는지 침입자도 공기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의 머리가 수면으로 떠오르자마자 제드가 그를 향해 빛을 쏘았다. 그는 절박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개자식!"

베이든이 씩씩거렸다.

제드는 베이든이 물속에서 뭔가를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손전등을 끄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 순간, 베이든이 쏜 작살이 물위로 날아왔다. 작살은 제드의 허벅지를 살짝 비껴 동굴 벽에 부딪혔다.

"젠장, 사람들이 내 성생활의 근원을 노리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군."

제드는 손전등을 켜고 베이든의 뒤쪽으로 다이빙했다. 그리고는 손전등을 움켜쥔 채 한 팔로 베이든의 목을 감고서 칼끝을 목덜미에 댔다. 베이든이 몸부림을 멈추었다.

"그날 밤 널 죽였어야 하는 건데 후회막심이다, 글레이즈."

"넌 그다지 빠르지 않았어. 널 고용한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제대로 돈 벌긴 글렀으니, 넌 싸구려일 거야."

제드가 그를 바위 쪽으로 이끌었다.

"에이미, 비켜요. 베이든에게 우리의 조그만 보금자리를 보여줘야 하니까."

그녀는 다른 손전등을 켜 들고 가능한 한 옆으로 물러났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하려구요?"

"밖에 무슨 일이 있는지 살펴보러 나가는 동안 해골 아저씨와 함께 내버려둬야지. 물속으로 들어와요, 에이미. 상자와 밧줄도 함께 가지고."

그녀는 제드가 시킨 대로 바위 모서리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에이미가 안전하게 물속에 들어오자 제드는 베이든의 칼과 호흡기, 잠수 장비를 동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네 잠수 여행은 여기서 끝이다, 베이든. 바위 위로 올라가."

"무슨 짓을 할 생각이이야? 날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어."

"누가 나를 막지?"

제드가 농담하듯 물었다.

"이 멍청한 자식아, 넌 이제 끝장이야. 네가 동굴에서 나가면 저들이 덮칠 거라구."

베이든은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가며 씨근덕거렸다.

"넌 내가 죽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걸.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기를 쓰고 숨을 참아도 넌 아마 중앙 터널까지 가지도 못할 거야. 동굴 입구 중간쯤에서 아마 죽고 말겠지. , 그러니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해 보시지? 내가 돌아와서 널 구해 주길 바란다면 가능한 한 자세히 얘기해야 할 걸."

제드가 짐작한 대로 베이든은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몇 초 후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는 말투이긴 했지만, 정보는 충분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제드는 그가 한 얘기가 거의 정확하리라고 믿었다.

"거티가 르너와 함께 있어."

베이든이 중얼거렸다.

"무기는?"

제드가 물었다.

"거티는 내 357 구경 소총을 가지고 있는데, 솜씨가 좋아. 르너는 작은 베레타 권총을 가지고 있지만,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폼 잡느라고 샀을 테니까. 꼴에 이탈리아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차림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겠지. 이봐, 글레이즈, 너와나, 둘이서 함께 일을 해보자구. 여자의 공기통을 나한테 주면 널 여기에서 안전하게 내보내 주겠어. 우리 둘이면 거티와 르너를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을 거야. 여자를 여기에 두고 가자. 네가 나중에 돌아와서 데려가면 되잖아."

제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일을 하고 싶거든. 네가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돌아섰다.

"좋아, 에이미, 갑시다."

"제기랄! 잠깐 기다려! 불빛도 없이 날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다구!"

"네 전등은 저 아래 있어. 원한다면, 잠수해서 꺼내 보지 그래."

제드는 물속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비치고 있는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에이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제드에게 밧줄 얼레를 건넨 다음 상자와 손전등을 양손에 나누어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중앙 터널로 통하는 입구에 도달하자 제드는 가만히 그녀에게 상자를 내려놓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순순히 응했다. 상자가 바위틈에 안전하게 가라앉자 두 사람은 중앙 터널로 빠져나가 동굴 입구로 향했다. 제드는 밧줄 얼레를 에이미에게 주고 앞장섰다.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거티가 동굴로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드는 양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했다.

입구가 거의 가까워지자 제드는 손전등을 껐다. 그의 뒤를 따르던 에이미도 신호를 받은 사람처럼 똑같이 행동했다. 그들은 밧줄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물 위,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공간으로 다가갔다. 제드가 먼저 높이 솟아 있는 동굴 부분에 도착했고, 조용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에이미도 그의 옆으로 솟구쳤다. 입구에서 몇 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어둠은 별로 짙지 않았다. 제드는 웅덩이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폭풍이 섬 쪽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오랫동안은 아니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몹시 강한 바람이 불 것이다. 강한 바람과 함께 비마저 퍼부어 그들의 은신을 도와줄 것이다. 고즈넉한 자연의 소리를 뚫고 르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이든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이? 지금쯤은 둘을 찾아서 글레이즈를 해치웠어야 하는 시간이잖아. 그런 일에 뛰어나다고 했었잖아. 돈도 충분히 주었다구. 그런데 이게 뭐야, 도무지 되는 일이 없으니……."

"진정하쇼. 시간을 좀 줘요. 글레이즈와 여자를 찾으려면 얼마나 깊숙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잖소."

거티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염려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다 들통 나 버렸어. 내가 직접 해결했어야 하는 건데."

르너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직접 해결하고 있잖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당신이오."

거티가 조롱하듯 말했다.

"젠장, 대관절 글레이즈는 어떤 놈이야?"

르너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로 보아, 거티에게 그 질문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말했잖소, 나도 모른다구. 내 짐작으로는 르페이지와 아는 사이라, 그자한테서 정보를 입수한 것 같소."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어."

르너는 자신의 짐작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르페이지를 통해서 에메랄드에 대해 정보를 입수한 청부업자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겠소? 걱정 말아요. 지금쯤은 끝장났을 거요. 베이든이 해치울 수 있다고 말했잖소."

손전등 불빛이 웅덩이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제드는 그 뒤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르너가 초조하게 물가를 서성이고 있는 듯했다.

"베이든이 벌써 글레이즈를 해치우고서 상자를 열어 동굴 안 어디엔가 숨겨 두었으면 어쩌지?"

르너가 화난 듯 말했다.

"이제 알 것 같아 상자를 가지고 나와서는 열어 본 뒤 비어 있는 척할 게 틀림없다구."

제드는 에이미를 뒤로 물러서게 한 뒤 조금 더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바위 뒤로 조심스럽게 몸을 숨겼다. 거티와 르너가 전등을 비춘다고 해도 동굴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제드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르너의 조바심이 거티를 점점 자극하고 있었다. 그들은 베이든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당신도 같이 갔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

르너가 구시렁거렸다.

"누군가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잖소. 베이든이 작살 총을 가져갔으니 염려 말아요."

"작살은 사정거리가 2, 3미터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잖아. 게다가 정확성도 떨어지고 치명적인 상처도 주지 않는다고 말야."

"2,3미터 거리면 베이든한테는 충분해요. 걱정 마쇼, 아까 글레이즈가 물속에 들어갈 때 베이든과 내가 보았으니까. 손전등하고 밧줄 말고는 가지고 간 게 없어요."

"하지만 저들은 둘이잖아. 글레이즈와 여자 말야."

"나만 믿어요. 여자는 신경 쓸 것도 없소. 우리가 걱정해야 할 상대는 글레이즈 하나뿐이오."

"좋아. 그러니까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 거라구 이제부터 당신은 어떻게 할거야? 베이든은 들어가서 나오질 않고 있어.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구."

거티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베이든이 그들을 처치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쯤이면 글레이즈와 여자의 공기가 다 떨어졌을 거요. 베이든이 따라 들어가기 전에 이미 15분에서 20분 정도 동굴 안에 있었으니까. 공기통도 하나씩만 메고 들어갔소. 내 눈으로 직접 봤소."

"그런데 무슨 일이냐구. 베이든이 나타날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거야?"

거티가 물가를 따라 걸었다. 제드는 그림자 모양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몇 분이 더 흘러갔다. 거티가 손전등으로 손목시계를 비추는 것이 보였다.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베이든도 지금쯤이면 나와야 할 시간이오. 글레이즈와 여자는 공기를 다 써 버렸을 테구. 어쩌면 당신 말대로 베이든이 실수를 했는지도 모르지. 글레이즈가 그 친구를 해치웠는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셋 다 죽었다는 의미요."

거티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상자는 아직도 저 안에 있지."

르너는 베이든이 상자를 들고 나타나기를 바라는 듯 동굴 입구를 이리저리 비추었다.

"우린 그 상자를 꺼내야 해, 거티. 난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구. 난 상자를 가지고 와야 해. 상자를 손에 넣기 전에는 섬을 떠날 수 없단 말야."

"내가 들어가서 한 번 보고 오겠소."

제드는 거티가 잠수 장비를 채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로 동굴 입구의 그림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는 에이미가 조용히 자신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감히 소리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물가에 있는 두 남자 쪽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빗방울이 물위로 거세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티가 웅덩이로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거티! 날 속일 생각 마, 알겠어? 내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거라구. 나한테도 총이 있어. 르너가 물속으로 들어간 사내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 발끝이나 쏘지 않도록 조심하쇼."

거티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제드는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거티의 손전등이 좁은 불기둥을 이루는 것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몇 초 뒤면 그가 제드의 곁을 지나쳐 갈 것이다. 불빛이 제드의 바로 앞까지 비쳐들었다. 그는 거티의 등뒤에서 그의 목에 올가미를 씌웠다. 짧고 낮은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칼을 사용했을 때보다 빠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드는 조금 전에 베이든에게 칼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거티의 목을 따고 싶지는 않았다. 제드는 에이미가 보는 앞에서 손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제드는 거티가 사지를 축 늘어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위로 그의 몸을 끄집어 올렸다. 제드가 등 뒤로 손을 결박하자 거티가 무의식중에 신음소리를 냈다.

"이자의 머리를 물 밖으로 붙잡아 줘, 에이미. 안 그러면 익사하고 말 거요."

"거티!"

르너는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함을 질렀다. 불빛이 어지럽게 동굴 입구를 비췄다.

"무슨 일이야? 안에 있는 거야?"

"거티는 손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해. 하지만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겠지. 당신과 내가 거래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제드가 소리쳤다.

"글레이즈냐? 어디에 있는 거야? 어서 나와라. 속임수 쓸 생각은 하지 말고. 여자는 어딨지?

 

 

 

서로 맞지 않는 퍼즐 조각

"거래를 원한다구, 글레이즈? 물론, 거래할 수 있지. 내 조건대로라면 말이야."

르너의 목소리가 몹시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이미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치도록 화가 났거나 히스테리를 부리기 직전의 목소리였다. 제드의 등뒤에 숨어서 거티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며, 에이미는 르너가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다. 두려움에서든, 아니면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좌절감에서 생겨난 분노 때문이든, 르너는 일을 저지를 자질이 충분했다.

"에이미와 난 에메랄드가 있는 곳을 알아. 하지만 상자를 가지러 가려면 공기를 다시 채워야 한다. 우린 둘 다 공기가 바닥났어. 공기 압축기는 슬레이터 저택에 있다."

"네가 에메랄드를 꺼내 오겠다는 거냐?"

"그래."

제드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동굴 입구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대신에 네가 원하는 건 뭐지?"

르너가 고함을 쳤다.

"보석을 공평하게 나눠 갖는 거다."

에이미가 제드를 쳐다보았다. 입구에서 스며드는 흐릿한 빛으로는 그의 형체밖에 보이지 않았다.

"넌 누구냐, 글레이즈? 어떻게 이 일에 끼어 들게 됐지? 여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고? 동굴에 대해서는? 젠장, 모든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냐구."

"그 얘긴 거래가 성사되고 난 다음에, 나중에 하지. 어쩌겠나? 덤으로 주는 선물도 있다."

"무슨 선물?"

"벌써 하나는 주었잖아. 네 대신 베이든을 처치했지. 여기 거티도 해치워 줄 수 있다."

"아직 안 죽었나?"

"아직. 네 대신 지저분한 일을 하도록 베이든과 이자를 고용한 모양인데, 네가 돈을 퍼들여서 얻은 게 뭔가 생각해 봐라. 세상은 온통 엉터리 투성이지. 하지만 이 모든 문제를 내가 깨끗이 해결해 주마. 보석을 가지고 몸 성히 돌아가고 싶으면 나와 거래를 하는 게 좋을 거다."

에이미는 르너가 거래를 거부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아연 긴장했다. 그녀와 제드는 영원히 동굴 속에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바닷물이 흘러 들어와 물은 따뜻했지만, 그렇다고 체온과 같은 온도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은 그들의 체온을 빼앗아 갈 것이다.

제드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일단 르너를 설득해서 동굴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에메랄드를 꺼내려면 제드와 에이미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르너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좋아, 글레이즈. 둘 다 물 밖으로 나와라. 나와서 얘기하자."

제드는 머릿속으로 가능성을 따져 보며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가 조용하게 에이미에게 말했다.

"좋은 기회요. 해봅시다. 저 녀석은 신경이 곤두서 있기는 하지만, 아직 방아쇠를 당길 정도는 아니오. 적어도 당분간은. 게다가 아마추어요. 이런 일은 처음일 거요. 지저분한 일을 대신 시키기 위해 베이든과 거티를 고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누군가를 고용해서 시키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요. 어서 나가요. 당신은 안전할 거요. 르너는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아. 거티는 내가 데려가겠소."

에이미는 다시 한 번 제드를 쳐다보았다. 그림자 속에서 그의 눈빛을 읽어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녀는 제드에게 거티를 넘겨주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비는 아직도 가늘게 흩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구로 헤엄쳐 나가며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웅덩이 한쪽에서 불빛이 날아왔다. 르너가 총을 겨눈 채 전등을 비추고 있었다. 르너는 그녀가 오리발을 빼고 바위 위로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계속해서 그녀에게 불빛을 비추었다. 그가 갑자기 손전등을 움직여 다시 동굴 입구를 비췄다.

"천천히 나와라, 글레이즈. 왜 거티를 물속에 버리지 않았지?"

"의식을 잃었다. 그냥 두면 물에 빠져 죽을 거야."

"그래? 나를 위해서 처치해 주겠다면서?"

르너가 다그쳤다.

"그건 거래의 일부지. 하지만 지금 해치우면 너무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라서 말야. 당분간은 거티를 살려 둬야겠다."

에이미는 일어서며 어깨너머로 돌아보았다. 제드는 축 늘어진 거티를 앞으로 안은 채 천천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는 르너를 가만히 살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제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에이미에게는 별로 위험 비중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르너는 그녀와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게다가 불빛도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이미는 그의 모습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비가 그의 머리카락과 셔츠를 흠뻑 적셔 놓고 있었다. 그림자가 진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총을 쥐고 있는 그의 손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이와 비슷한 상황과 맞닥뜨린 건 한 번뿐이었지만, 그녀는 르너가 위험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누군가가 그를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그는 이성을 잃고 말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마도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정글 속에서 뭔가에 꽉 막힌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려와 에이미의 주의를 끌었다. 자동적으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땅 위에 거대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결박당한 채 입에 재갈까지 물려있었다.

"행크 아저씨!"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르너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냥 내버려둬. 어리석게도 우릴 따라왔으니 베이든과 거티한테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행크는 에이미를 향해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고 제드가 웅덩이에서 빠져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수 장비를 갖춘 상태에서 거티를 끌고 나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그렇지만 제드는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거티와 체중 차이가 별로 없을 텐데도, 제드는 놀라울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서둘러."

르너가 독촉했다.

"서두르길 원한다면, 날 도와서 거티를 옮겨 보지 그래."

제드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는 물 밖으로 반쯤 몸을 드러냈다.

"잠깐만. 거기에 서라. 거티를 바위 위에 올려놓고 더 이상 가까이 오지마. 생각할 게 있다."

르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에이미는 새롭게 긴장하는 르너를 지켜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르너는 보이지 않는 바위 끝으로 발을 옮겼다.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잠수 장비를 벗었다. 그리고는 공기통을 내려놓은 뒤 무거운 웨이트 벨트를 한 손에 쥐었다. 르너는 그녀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생각할 게 뭐가 있나? 에메랄드 말고 중요한 게 또 있어?"

제드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는 웅덩이 가장자리로 올라오던 동작을 멈추었지만, 아직도 거티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래, 에메랄드가 중요하지, 하지만 뭔가 답이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아."

르너가 에이미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너도 동굴 다이빙에는 제법 쓸 만하잖아, 그렇지? 그리고 에메랄드가 있는 곳도 알고 있구. 그렇다면 글레이즈를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단 말야. 저 놈보다는 너를 다루는 게 나한테도 훨씬 쉬울 테니까."

에이미는 르너의 얘기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웅덩이 쪽에서도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르너의 논리를 반박할 만한 생각을 해내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그녀는 소설을 쓰면서 줄거리를 대강 엮어 보듯 머릿속에 여러 장면을 떠올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보석을 손에 넣으려면 굳이 글레이즈가 필요 없겠죠. 하지만 그를 죽이기 전에 글레이즈가 누구인지 알아두는 게 좋을 거예요.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잖아요?"

"저놈이 누군데?"

르너는 웅덩이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제드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르페이지의 친구인가?"

에이미는 가능한 한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정확히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 비슷하죠. 르페이지는 보석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을 뿐이에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제드는 거티나 베이든처럼 고용된 사람에 불과해요. 하지만 제드는 그자들과 질이 틀려요. 제드는 최고의 실력자죠."

"그럼, 누가 저자를 고용했지? 제길, 어서 말해. 저자를 고용해 보석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이 누구야?"

르너의 목소리는 안달이 나서 그런지 몹시 흔들렸다.

"이제야 제대로 진상을 파악하는군요."

그녀는 무심한 척 웨이트 벨트를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어둠 속이었으므로 그녀의 움직임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제드는 커터라는 신사분을 위해 일해요. 커터 씨는 귀중한 보석을 수집하는 보석 애호가죠. 특히 에메랄드에 일가견이 있어요. 커터 씨는 수십 년간 보석을 수집했어요. 부자에다 권력도 있고,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위치에 있죠. 당연히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도 많구요. 그래서 제드 같은 실력자를 고용할 능력이 되는 거예요. 문제는, 당신이 에메랄드에 솔을 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거죠. 제드가 당신에게 보석을 반씩 나누자고 한 얘기는 커터 씨를 대신해서 한 거예요. 커터 씨는 제드에게 거래를 맡길 만큼 그를 신뢰하니까요. 그분이라면 한 번 한 약속은 분명히 지킬 거예요. 하지만 완전히 보석에서 손을 떼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몹시 화를 내겠죠. 커터 씨는 당신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으니까요."

르너가 잠시 동안 에이미를 쏘아보다가 다시 재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에이미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 얘길 다 알고 있지?"

"제드가 잠꼬대를 했다고 해두죠. 제드에게 일을 맡기는 게 당신한테도 이로울 거예요. 이 모든 난리법석을 깨끗하게 해결해줄 수 있을 테니까요. 커터 씨의 도움만 있으면, 당신이 에메랄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거예요. 아무도 모를 거예요. 예를 들면, 당신이 마이클 위먼의 아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말이죠."

"염병할, 그걸 어떻게 알았지?"

"커터 씨가 알아내서 제드한테 알려주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어요. 말했잖아요, 커터 씨한테는 친구들이 많다고. 커터 씨가 본격적으로 당신에 대한조사를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닥쳐!"

르너는 혼란에 빠져 미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누구를 겨누어야 할지 모르는 듯 작은 베레타 권총이 춤을 추고 있었다.

"제드가 제안한 거래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텐데요. 그렇게만 하면 모든 게 다 잘될 거예요."

에이미가 말했다.

"아니야!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어. 모든 게 엉망이 될 거라구! 보석과 사진을 손에 넣는 대로 너희들 모두를 죽여 버리겠어. 이번 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모두 없애 버릴 거야!"

"커터 씨는 어쩌구요?"

에이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자하고는 내가 직접 거래를 하면 돼. 그래, 그거야. 내가 직접 거래를 할 거야, 글레이즈는 필요 없어."

르너는 자신의 결정에 감동이라도 한 듯 뻐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흔들리던 권총이 제드를 향해 고정되었다. 에이미는 자신의 얘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르너는 제드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제드를 죽일 것이다. 르너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무거운 웨이트 벨트를 들어올려 르너의 손을 내리쳤다. 총성이 울리고 르너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비명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에이미는 납으로 가득 찬 벨트를 다시 휘둘러 그의 머리를 갈겼다. 르너는 양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옆으로 몇 걸음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휘청거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머리부터 물속에 빠졌다.

"안 돼! 그렇게 죽으면 안 돼! 또다시 그런 일을 겪을 순 없어!"

에이미가 소리를 질렀다. 10월의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에이미는 멍하니 르너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시 그녀는 재빨리 그가 떨어뜨린 손전등을 집어 들고 웅덩이 가장자리를 비췄다. 그리고는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를 살펴보았다.

"에이미, 걱정 말아요. 르너는 괜찮을 거요."

제드는 거티를 내려놓고 이미 르너를 꺼내기 위해 물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자는 살아 있소, 에이미. 보이오? 움직이고 있잖소."

제드의 말이 옳았다. 르너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물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머리가 물 밖으로 빠져 나온 순간, 제드가 그를 붙잡았다. 에이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더 험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또다시 이 웅덩이에서 사람이 빠져죽는 장면을 목격하고 싶지는 않았다. 르너는 입 속에 들어간 물을 뱉어내며 납덩어리로 얻어맞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쁜 놈들! 너희들은 전부 다 개자식이야. 에메랄드는 내 거라구. 우리 아버지가 거래를 하고 받은 거야. 그러니까 내 거란 말야, 알겠어?"

제드가 르너를 붙잡고 웅덩이 가장자리로 나오자, 에이미는 불현듯 행크 아저씨를 떠올렸다. 그녀는 잠수용 칼을 빼들고 달려가 그를 풀어주었다. 행크는 에이미가 재갈을 풀어주자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앉았다.

"미안하구나, 에이미. 내가 일을 다 망쳐 왔어, 그렇지?"

"사과드릴 사람은 저희예요. 아저씨를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어요."

에이미가 그의 손발을 풀어주며 말했다.

"에이미 말이 맞습니다. 일을 망친 사람은 저예요. 르너와 거티를 감시해 달라고 한 부탁 때문에 아저씨가 위험해지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르너를 데리고 나오며 제드가 말했다. 행크는 손목을 문지르며 껄껄 웃었다.

"감시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좀 더 끼어 들려다가 문제를 일으킨 거야. 거티와 르너가 오늘 저녁 여관을 나가기에 켈소한테 전화를 했지. 베이든을 얼마나 더 붙잡아 둘 건지 물어 보려고 말이야. 그런데 그 바보 같은 보안관 녀석이 어제 벌써 풀어줬다는 거야. 더 이상 잡아둘 구실이 없었다나. 베이든에게 섬을 떠나라고 명령했다지만, 그자는 어젯밤과 오늘 아침까지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자네에게 전화를 했더니, 받질 않더군."

"벌써 이곳으로 출발한 다음이었나 보군요."

제드가 말했다. 행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든이 거티와 한패거리인지도 모른다는 자네 얘기가 생각나더라구. 그래서 르너와 거티를 미행하기로 결심했지. 그것도 부두에서 어부들이 보았다기에 간신히 따라잡았다네."

행크는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영웅 놀이는 하지 않는 건데 그랬어. 옛날처럼 젊지도 않은데 말야. 한때는 나도 거티와 베이든쯤은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었는데, 이젠 아닌가 봐. 내가 미행한다는 걸 눈치 채고 저들이 창고건물에다 날 잡을 덫을 놓았던 거야. 난 그대로 걸려들었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리로 오고 있더라구, 르너가 날 살려 둔 이유는 내가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네."

"어떻게 저들이 이곳을 알았을까요?"

제드가 손전등을 집어 들고 나직이 물었다.

"베이든이 감옥에서 나온 뒤부터 줄곧 에이미의 집을 감시했던 것 같아. 베이든이 어제 오후에 자네 둘이 동굴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르너한테 보고하는 걸 들었지. 어젠 뭔가가 잘못되었나 보지?"

"동굴 벽이 무너졌어요. 그래서 물이 흐려졌죠. 오늘밤 까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르너는 자네와 에이미가 에메랄드를 가지고 동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지만, 베이든과 거티가 자기네 방식으로 처리하겠다며 그를 설득했어. 베이든이 개인적으로 자네한테 앙심을 품었던 것 같네. 며칠 전 자네한테 당한 게 억울했겠지. 그자는 거티에게 동굴 입구를 감시하라고 한 뒤 자네를 뒤쫓아 안으로 들어갔어. 다들 자네가 무장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더군. 그런데 오히려 자네가 그놈을 놀래켜 줬나 보지?"

"아직도 놀란 가슴을 달래고 있을 겁니다."

제드가 말했다. 행크가 짙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정말? 너무 오랫동안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은데."

"다행히 동굴 속에 숨쉴 공간이 있었어요. 그자는 지금 수면위로 솟아 있는 바위에 앉아서 누군가 꺼내 줄 사람을 기다리고있을 겁니다. 에이미가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자는 아마 아주 오랫동안 거기에 갇혀 있어야 했겠죠. 언제나 전 에이미의 상상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제드가 어둠 속에서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른손도 아주 맵던데 그래. 웨이트 벨트로 속임수를 쓰는 건 어디에서 배웠니, 에이미?"

행크가 감탄조로 덧붙였다.

"전 소설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에요, 아저씨. 교육의 효과가 아주 높다고 봐야겠죠."

"르너한테 했던 얘기는 정말 그럴듯했다."

"좋은 소설은 언제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법이에요."

에이미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할 말 없구나. 하지만 제드가 정확하게 어디까지 연관된 건지 알고 싶은데……."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쩌다가 이 일에 끌려든 순수한 방관자에 불과합니다. 그건 그렇고 아저씨는 어디까지 관련되신 겁니까?"

제드가 침착하게 되물었다. 행크는 한숨을 쉬었다.

"25년 전에 마이클 위먼의 배를 가라앉힌 사람이 바로 나야."

그는 에이미의 충격적인 표정을 흘끔 쳐다보았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단다, 에이미. 네 아버지는 도움이 필요했어. 나와 네 아버지는 그때도 이미 오랜 친구 사이였지. 옛날에는 함께 다이빙도 자주 했었단다. 너는 기억하지 못할 거야. 네 아버지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다이빙을 그만두었으니까 네 아버지는 애초부터 별로 다이빙을 좋아하지 않았어. 몹시 좋아한 사람은 네 어머니였지."

에이미는 너무나 뜻밖이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서서 행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진전시키는 사람은 제드였다.

"집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이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할지 의논하는 게 좋겠습니다. 에이미의 창의적인 상상력의 도움을 좀 더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면 술이라도 말입니다."

"베이든은 어떻게 하구요? 거기에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공기통에 공기를 다시 주입시킨 다음에 그자를 데리러 가야 할 것 같소."

제드가 진지하게 말했다.

한참 뒤, 에이미는 샤워를 마친 뒤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제드와 행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제드가 그녀에게 백포도주 잔을 내밀었다. 그는 카키색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은 뒤였다. 그가 에이미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소?"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뒀어요?"

그녀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행크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제드와 난 르너, 베이든, 거티를 모두 다 당분간 네 엄마의 찬방에다 가두어 두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켈소에게 들려줄 얘기를 지어낼 때까지 말이오. 어서 앉아요. 시간이 좀 걸릴 거요."

제드가 덧붙여 설명했다. 에이미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홀짝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행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전 알아야 해요. 제 머릿속엔 제대로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 너무 많아요. 진실을 찾아내지 못하면 전 미치고 말 거예요."

"상상력이 너무 뛰어난 데서 오는 문제죠."

제드가 끼어 들었다. 행크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못할 이유도 없는 것 같구나. 올리애너 프로젝트에 대해 정부에서는 극비에 붙였지만, 친구끼리 비밀이 어디 있겠니. 그 문제가 지금까지 거론되지 않았던 이유는 네 아버지가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몹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결정을 존중한 게 아니라, 난 네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줬던 거야. 하지만 너도 벌써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모두 털어놓으마."

"아버지와 마이클 위먼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둘은 친구이자 동업자였단다, 에이미. 적어도 성공을 거두기 시작할 때까지는 그랬어. 위먼은 네 아버지의 사업 수완 때문에 회사 규모가 커지고 넉넉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야. 그 친구는 성공의 영광을 나누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지. 위먼은 자신이 스타처럼 떠받들어지길 바랐어. 그림도 완성되기 전에 엄청난 값을 매겨 주길 바라는 예술가 같다고 해야 할까. 그 친구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단다. 돈도 마구 쓰기 시작했어. 좋아하는 스포츠도 많았으니까."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어요?"

행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모하게 폭풍을 잠재우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먼이 얼마나 위험하고 사나운 녀석인지 네 아버지는 제대로 몰랐던 거야. 또 네 아버지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도 몰랐지. 어느 날 정부 요원이 네 아버지 집에 찾아왔어. 위먼이 러시아 첩자들과 내통한다는 의심이 간다고 말했지. 돈이 연관되어 있었어. 그것도 아주 큰돈이 말이다. 기관 안에도 내통을 돕는 스파이가 있는 것 같다고 했어. 위먼은 새로 개발한 비행기 날개 디자인을 파는 대가로 하와이에서 에메랄드를 받기로 했다 더구나. 정부에서는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네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했어. 비행기 설계 도면을 바꿔치라고 부탁했지. 네 아버진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덫을 놓아서 위먼을 잡는 데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슬레이터 씨는 마이클 위먼이 정말로 뒷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믿으셨습니까?"

제드가 묻자 행크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믿지 않았던 것 같아. 믿고 싶지 않았겠지. 하지만 정부요원은 더글라스에게 위먼이 러시아 스파이와 몰래 만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증거로 보여 줬어. 더글라스는 물건 교환이 있을 즈음에 하와이로 날아갔지. 그 친구는 위먼이 정말로 거래 현장에 나타나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정부요원들이 현장을 덮치는 데 실패하고 말았어. 너무 늦게 출동 했다더군. 간신히 러시아 첩자는 공항에서 잡았는데, 위먼은 놓치고 말았지. 사실, 더글라스는 위먼이 탈출한 걸 내심 기뻐했어. 사건이 폭로되고 나자 더 글라스는 하와이에 더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올리애너로 돌아왔지."

"그런데 위먼이 에이미의 아버님을 기다리고 있었겠군요?"

제드가 물었다. 행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는 에이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위먼은 절박했단다, 에이미. 그자는 정부 기관에서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자신을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에메랄드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팔기 전까지는 별 도움이 되질 못했지. 하지만 그는 일선에 나서서 에메랄드를 팔 만큼 안전해질 때까지 오래 숨어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거야. 그자는 도움이 필요했고, 옛친구에게 돌아왔지."

"우리 아버지 말이군요."

"더글라스는 친구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위먼은 차츰 고약하게 변해 갔어. 네 아버지를 협박하기 시작했지. 그자가 무슨 술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물어 보지는 않았어. 보나마나 저질스러운 방법이었을 거야. 거기까지가 네 아버지가 참아 준 한계였다.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이기 때문에 무던히 참았지만, 자신을 모함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지. 동굴 앞에서 몸싸움이 벌어졌어, 위먼은 총을 들고 있었단다. 싸우던 도중에 총이 발사되었고, 위먼이 죽었어. 싸움이 벌어졌을 때 왜 위먼이 더글라스를 동굴까지 끌고 갔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아버지 얘기로는 위먼이 그곳으로 끌고 나왔다는데, 이유를 묻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고 하더라. 더글라스가 협조하지 않으면 죽일 생각이었던 것은 틀림없어. 위먼은 더글라스의 죽음을 다이빙 사고로 위장하려 했겠지."

행크는 말을 끊고 테이블 곁에 놓인 금속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위먼이 왜 더 글라스를 데리고 동굴로 향했는지 알 것 같다. 그자는 벌써 상자를 동굴에 숨겨 놓고, 어떤 증거를 이용해서 더글라스를 협박하려 했던 거야."

"그런데 일이 그 사람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군요. 위먼은 동굴 안에 숨긴 상자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죽고 말았으니까요."

제드가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에게 얘기한 게 틀림없어요. 르너가 상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잖아요."

에이미가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맞아."

제드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여자 친구에게 얘기했는지도 모르지. 그 여자의 이름이 뭐였지? 비비안이었던가?"

"비비안이라……. 나도 그 여잘 기억해. 위먼이 섬에 한 번 데려왔던 섹시한 금발 머리 여자였어. 그래, 바로 그 여자야. 비비안. 그 여자의 성은 들어 본 적이 없지만……."

행크가 말했다.

"얘기를 마무리하시죠."

제드가 다리를 앞으로 곧게 뻗고 술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더 얘기할 것도 없어. 위먼이 죽던 날 밤 더 글라스가 나한테 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했어. 우린 하와이에서 작전을 맡았던 요원에게 연락을 하기로 했지. 그 당시에는 올리애너에 전화가 많질 않았어. 다행히 몇 안 되는 전화가 우리 집에 있었지. 더글라스는 맨 처음 협조를 요청했던 정부 요원이 주고 간 번호로 연락을 했어. 정부 요원은 자기네들이 도착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더군."

"행동보다는 그래도 말이 쉽죠. 도대체 위먼의 시체는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렇게 뜨겁고 습도 높은 날씨에 얼마나 끔찍하셨을지 상상이 갑니다."

제드가 씁쓸하게 말했다. 에이미가 움찔 몸서리를 쳤다.

"정말 끔찍해요. 어떻게 하셨어요?"

행크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네 엄마의 냉장고에서 얼음을 잔뜩 꺼내다가 옷안에 채웠지. 그날 밤은 정말 대단했다. 다행히도 정부 요원들이 다음날 아침 일찍 도착했어. 그들은 네 아버지에게 모든 일을 완전히 불문에 부치라고 말했어. 그리고 위먼이 사라진 걸로 하면 좋겠다고 했지. 네 아버지도 동의했어."

"언론에 알려지는 게 걱정되셨을 거예요. 회사에 악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도 힘이 드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위먼이 모함을 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우셨겠죠. 기자들이 한 번 조사를 시작하면 어떤 스캔들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에이미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어머니의 편지를 떠올렸다. 사진들도 있었다.

'위먼이 사용하려 했던 증거는 둘 중에 어느 것이었을까?'

에이미는 편지였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행크에게 어머니의 편지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맞습니다. 위먼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라지도록 처리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겠죠. 바다에서 실종된 걸로 말입니다. 하지만 바다에 시체를 버리는 건 언제나 위험한 일이죠. 시체는 때로 해안으로 밀려오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이런 경우에는 시체에 생긴 총구멍을 해명해야 했을 테죠. 위먼의 시체가 떠오르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얘기는 끝장이 날 테구요. 그래서 슬레이터씨는 시체를 동굴에 숨기신 거군요."

"맞아. 그 동안 나는 배를 준비했지."

행크가 에이미를 쳐다보았다.

"그 때문에 네 아버지는 동굴 근처에 사람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 거야. 결국 그 땅은 네 아버지 소유였으니까. 정부 기관사람들은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겠다고 맹세하고 섬을 떠났다."

"에메랄드는요?"

에이미가 물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

"왜요? 큰 재산이 됐을 텐데요."

"초록색 유리 가격이 25년 동안 올라 봤자 얼마나 올랐겠니?"

행크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유리라 구요?"

행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그렇단다. 정부 요원 중에도 거래에 관여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 기억하니?"

". 그런데요?"

"그자 얘기로는 러시아 첩자들이 위먼을 속이기로 계획했다는 거야. 유리를 에메랄드처럼 세공해서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말이지. 위먼은 완벽하게 세공 된 초록색 유리알을 소중히 품고서 하와이를 떠났던 거야. 정부 요원들은 그가 상자를 숨겼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찾아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야."

"이제 우리가 상자 안을 들여다볼 때가 된 것 같소."

제드가 말했다. 그는 에이미가 상자를 열지 못하도록 만류할 논리적인 구실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천천히 일어나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제드, 열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냥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려요."

그녀는 편지를 생각하며 간절히 부탁했다.

"내가 한 말 기억나지 않소? 깨끗하게 마무리를 해야 하오."

그가 잠겨진 상자를 살폈다.

"르너가 가지고 있던 열쇠는 어딨소?"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에이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져올게요."

10분 뒤, 제드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에이미는 그의 팔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행크는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는 조용히 위스키를 들이키며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편지들은 방수 봉투 안에 여전히 밀봉되어 있었다. 제드는 상자에서 편지를 꺼내지 않았다. 보석이 들어 있는 주머니와 사진만을 끄집어냈을 뿐이었다. 게이미는 그가 테이블 위에 사진을 펼치자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여덟 달 전에 그녀가 처음 상자를 열었을 때 보았던 아버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제드, 제발……. 모두 다 없애 버려야 해요."

에이미가 간청했다.

제드는 사진을 집어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사진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소, 에이미. 다 조작된 거요. 기술도 형편없소. 위먼은 이 사진을 만들 때 몹시 서둘렀던 모양이오. 봐요, 아직도 오려붙인 흔적이 남아 있잖소."

그녀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위먼이 우리 아버지가 스파이들과 얘기하는 모습으로 조작했다는 건가요?"

"그것도 아주 형편없는 솜씨로 말이오. 누구라도 속아넘어가지 않을 거요."

"한밤중에 손전등으로 비춰 보지 않는 한은 속지 않겠죠."

에이미가 10월의 그날 밤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말했다. 제드는 사진을 행크에게 건네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조명에서 보면 진짜처럼 보일 거요. 게다가 다른 생각으로 정신이 꽉 차 있을 때는 더욱더 그렇겠지."

그는 편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그대로 둔 채 상자 뚜껑을 덮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크가 사진을 감상했다.

"자네 말이 맞네. 형편없군. 하지만 이것으로 위먼이 더글라스를 모함했다는 사실이 증명되겠지."

그가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켈소한테는 뭐라고 얘기하지?"

"맨 처음 이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정부니까,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일도 워싱턴 D.C.에 의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 상관인 커터에게 전화하겠습니다."

제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행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커터라구? 자네 상관이야? 자네가 커터라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얘기는 에이미가 지어낸 건 줄 알았는데."

"현실은 때로 소설보다 훨씬 간단할 때가 있는 법이죠."

제드는 씩 웃으며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내년 봄을 위해

르너와 베이든, 거티 일당이 올리애너의 작은 감옥으로 이송되고 난 지 두세 시간 뒤, 에이미는 금속 상자를 앞에 두고 앉아서 어머니의 편지를 꺼냈다. 행크 헐리데이는 집으로 돌아갔고,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로지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켈소를 비롯해서 호기심 많은 섬사람들에게는 커터가 생각해 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르너와 베이든, 거티 일당은 슬레이터 저택을 털기 위해 섬에 잠입한 도둑들이었다. 섬 주민 몇몇은 올리애너 섬이 점차 유명한 관광지로 되어 가면서 겪게 되는 문제점이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모든 것이 옛날과는 달라졌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옛날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난 잘 모르겠어요. 25년 전에도 이곳에선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거든요."

에이미는 손에 들린 작은 봉투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제드는 그녀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글로리아 슬레이터가 마이클 위먼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고, 활짝 열린 창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편지들을 어쩔 생각이오?"

"태워 버릴 거예요. 10월의 그날 밤 태워 버렸어야 했는데, 그때는 생각이 짧았어요."

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꼭 그렇지 만은 않소. 그날 밤 당신은 아주 재빠르게 행동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거도 거의 남기지 않았소. 하지만 불을 피웠더라면 작은 모닥불이라고 해도 나중에 어색한 질문을 피할 도리가 없었을 거요. 어디에다 태운단 말이오? 당신 아버지의 바비큐 화덕에서? 그랬다면 나중에 아버지가 숯불을 피우시다가 타다 남은 봉투를 발견하셨겠지. 상자에 다시 넣어서 동굴에 감췄던 건 최선의 방법이었소."

"최선의 방법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마무리가 깨끗하지 않았으니까요."

"가끔은 그럴 때도 있는 거요."

에이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서 불을 피워야겠어요."

제드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베란다로 나갔다. 그는 바비큐 화덕에 작은 숯불을 피워주었다. 그런 다음 그는 뒤로 물러나 에이미가 편지들을 태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편지들을 하나하나 불 속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한 통이 남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어머니가 마이클 위먼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움켜잡았다.

"그날 밤 나는 편지를 한 통밖에 읽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쓴 편지라는 것과 어머니가 위먼과 사랑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안 것으로 충분했으니까요. 내가 편지를 전부 읽을 권리는 없는 것 같았죠. 하지만 이 마지막 편지는 웬 지 궁금하네요."

"무엇 때문에?"

"모르겠어요. 너무 짧아서 그런지도 몰라요. 한 장밖에 되지 않거든요."

그녀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위먼에게 작별을 고하는 편지일지도 모르잖아요?"

"어머니가 스스로 관계를 청산하려 했다고 믿고 싶은 거요? 에이미, 그분이 당신 어머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분도 인간이오. 쓸데없이 희망을 품지 말아요."

"이 편지엔 뭔가 다른 내용이 있을 거예요. 난 느낄 수 있어요."

"편지를 읽어도 될지 나한테 허락 받을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에이미는 이를 악물고 봉투에서 한 장의 편지를 꺼냈다. 많은 편지를 태워 버렸지만, 이 마지막 편지에 대해서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녀는 짧은 글을 읽어 내리며 안도감에 휩싸였다. 제드가 그녀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좋은 소식인가 보군?"

에이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뒤 마지막 편지를 봉투에 넣어 불길 속으로 던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우리 어머니는 강한 분이 세요. 결국엔 올바른 길을 선택하시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위먼에게 어리석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와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남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족을 떠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어요. 위먼에게 이해해 달라며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은 잊어 달라고 쓰셨어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요."

"알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소?"

"훨씬 나아졌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그래요. 어머니가 그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고 나니까 너무 기뻐요. 그 사람은 나쁜 인간이었어요.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아셨을까요?"

"아내의 일시적인 바람기에 대해서 말이오? 아마 아셨을 거요."

제드는 마지막 편지가 완전히 연소 되도록 숯을 더 집어넣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빠진다면, 난 분명히 알 테니까."

에이미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래요? 어떻게 알죠?"

"확실히 는 모르지만, 그냥 알 것 같소. 우린 서로에게 너무 가까워졌소. 그런 사이에선 비밀을 오래 숨길 수 없는 법이오."

에이미는 그의 고백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가 두려웠다. 제드는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가 지금 무엇을 인정하는지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자신의 감정이나 반응에 대해 분석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남자들은 느낌을 받아들이고 곧잘 행동에 옮기기도 하지만, 그것을 분석해 내지는 못하는 경향이 있다. 에이미가 헛기침을 했다.

"위먼이 아버지를 모함하기 위해서 사진을 이용하려 했을까요, 아니면 편지를 이용하려 했을까요?"

"내 짐작으로는 둘 다 이용했을 것 같소. 편지로 당신 아버지를 조종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을 테니까. 당신 아버지가 부정을 저지른 아내와 헤어지겠다고 말할 가능성도 있잖소. 위먼은 혹시 몰라서 사진을 준비했을 거요. 남자는 여자를 쉽게 버릴 순 있지만, 명예를 쉽게 버리진 못한다는 걸 그자도 알고 있었겠지."

"어머."

제드는 그녀의 불만스러운 감탄사를 듣지 못했는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위먼은 당신 아버지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했던 거요. 그런데 당신 아버지는 다르셨지.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라면 압박감을 받아 일을 그르쳤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난 8년간 올바른 선택을 해왔소. 난 제법 훌륭한 기록을 가진 사람이오."

"당신이 훌륭한 기록을 가졌는지 어떻게 알죠?"

"내가 아직 살아 있으니까."

에이미는 반박할 수 없는 진실 앞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단편적으로 설명하는 말이었다.

"알겠어요. 우리 아버지였다면 모함이라는 압력 앞에서 어떻게 하셨을 거라고 생각하죠?"

"정말로 알고 싶소?"

에이미는 망설이다가 단숨에 대답했다.

", 정말로 알고 싶어요."

제드는 숯불을 휘젓던 꼬챙이를 내려놓았다.

"위먼이 사진을 가지고 협박했다면, 당신 아버지는 위먼에게 당장 섬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을 거요. 하지만 위먼이 편지를 사용했다면 무척이나 화를 내셨겠지. 위먼의 행동을 막기 위해서 당신 아버지는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셨을 거요."

"그래서 그날 밤 몸싸움이 벌어졌겠군요?"

제드는 사그라드는 불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랬을 거요."

"당신은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아주 자신만만하네요."

에이미가 쏘아붙였다. 제드가 고개를 들었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불빛이 반사되어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잘 알기 때문에 확신하는 거요. 당신이 쓴 연애편지를 누군가 갖고 있다면 난 그자를 절대로 편지를 지닌 채로 보내진 않을 거요, 에이미."

그가 그렇게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에이미는 요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팔을 감싸 쥐었다. 두 사람은 불길이 삭으러 드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내일 내가 재를 비우겠소. 당신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셨을 땐 바비큐 화덕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거요."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당신의 가방을 뒤진 사람이 베이든 이나 거티 였다고 생각해요?"

제드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아마 베이든 일거요. 르너를 위해서 그자가 그런 잡다한 일들을 하는 것 같았소. 뒤져 봤댔자 아무 것도 못 찾았을 거요."

"아무 것도 못 찾았기 때문에 더 초조해졌을 거예요."

제드가 싱긋 웃었다.

"이젠 당신도 프로처럼 생각하는군. 그랬을 거요. 그 때문에 아마 베이든이 골목길에서 나를 없애려 했을 거요."

"고마워요, 제드. 모두 다."

에이미는 그의 든든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제드가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요.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살렸잖소. 르너는 히스테리 때문에 위험한 상태였소.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 그리고 동굴 안에서 내가 돌 더미에 깔렸을 때도 당신이 구해 줬잖소. 내가 그 점에 대해서도 제대로 감사 인사를 했던가?"

"내가 애당초 이렇게 일을 어지럽게 벌려 놓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런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됐을 거예요."

"어지러운 일에 뛰어든 건 나 스스로 도 어느 정도 자초한 일이니까 비긴 셈칩시다."

"정말로 커터 씨가 이 어지러운 일들을 모두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오. 커터는 이런 일에 아주 능숙해요. 한 시간쯤 전에 전화해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벌써 대부분 자리를 잡았다고 얘기해 주었소. 팩슨이 거티와 베이든을 오랫동안 감방에 보낼 만한 혐의를 충분히 찾아냈다고 하더군. 둘 다 총기 밀매 혐의로 수배 중이었단 것 같소."

"다니엘 르너는 요?"

"르너는 증권 감독위원회에 설명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좀 바빠질 거요. 팩슨의 자료에 따르면, 불법에 가까운 거래가 너무 많았더군. 과거에는 마약 밀매를 했다는 소문도 있고. 그보다 큰 문제는 현상 수배될 정도로 유명한 총기 밀매업자와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정부 기관에 설명해야 한다는 거요. 르너가 투옥될지 안 될지는 미지수지만, 당분간은 혼쭐나게 바빠질 게 틀림없소."

"그자가 설마 에메랄드 얘기는 하지 않겠죠?"

"가짜 에메랄드 말이로군. 아마 얘기하지 않을 거요. 그의 인생만 더 복잡해질 테니까. 자기 아버지가 러시아 스파이와 내통하며 뒷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겠지."

"그 사람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그에게 유리 알맹이가 든 주머니를 건네주었을 때 그런 줄 알았소."

"가짜라고 내가 얘기해 주었어요."

그녀는 행크의 의해 끌려가던 다니엘 르너의 허탈한 표정을 떠올렸다. 웬 지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르너의 유산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그러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아까는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걸 뭐라도 가질 수 있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르너에게는 마지막 지푸라기였는데, 내가 너무 충격을 줬나 봐요.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는데, 아버지가 남겨 준 것이 겨우 유리알 몇 개였다는 걸 알았으니 얼마나 허탈했겠어요."

"나라면 그자를 동정하느라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진 않겠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잊어버려요."

제드는 자신과 마주보도록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가 에이미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쓸데없이 연약해지는 건 선천적으로 여자들의 뇌에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인 것 같소. 안달복달하는 당신의 경향과 잘 어울리지. 부모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릴 거요?"

"더 이상 비밀은 남겨 두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한가지는 빼고요."

"편지 얘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얘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결국 아버지는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보지 못하셨어요. 실제로 편지가 들어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셨을 거예요. 위먼이 근거 없이 모함하기 위해서 온갖 얘기를 꾸며냈다고 생각하시도록 내버려둘래요."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먼도 그 편지에 대해서만큼은 비비안 르너에게 털어놓지 않았을 거요. 정부에게 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진 않았겠지. 다니엘 르너가 실토한 얘기를 종합해 보면, 사진 얘기는 했던 것 같소. 르너는 그 사진을 당신 오빠의 정치적인 생명을 위협하기 위해서 사용할 생각이었소. 앞날이 창창한 정치가에게 아버지가 첩자였다는 소문이 돌면 좋을 게 없겠지. 당신 생각이 옳았소. 위먼 이외에 상자에 대해서 알고 있던 사람은 비비안 르너 한 사람뿐이었소. 위먼은 비비안에게 상자를 숨겨 둔 곳을 가리키는 작은 지도를 보냈소. 에메랄드와 사진에 대해서도 얘기한 뒤, 열쇠의 복사본을 우편으로 보냈던 거요. 혹시라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보물에 대해서 여자가 알고 있기를 바랐겠지. 혹시 비비안 르너가 그에게 아들을 낳았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핏줄에게 뭔가 남기려고 했는지도 모르잖소? 어쨌든, 그 여자는 모든 정보를, 지도와 열쇠까지도 일기장에 간직했던 것 같소. 모든 사실은 그녀가 죽고, 아들이 일기장과 지도, 열쇠를 손에 넣을 때까지 숨겨져 있었지."

에이미는 제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기념으로 유리 조각을 하나 남겨 뒀어요. 이상해요. 이번 일이 시작될 땐 기념품 같은 것을 갖고 싶어질 줄 몰랐거든요. 8개월 전에 나는 상자나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절대로 다시 보고 싶지 않았어요. 저주 받은 물건들이 10월 이후 줄곧 나를 따라다녔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상관없어요. 악몽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난 기분이에요."

그녀가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제드의 팔이 그녀를 조여 왔다.

"잘됐군. 나도 밤마다 수중 동굴이나 그 안에서 헤엄쳐 다니는 해골에 대해 악몽을 꾸는 것보다는 더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거든."

"헤엄치는 해골이라고요? 난 헤엄치는 해골에 대해서는 꿈꿔본 적이 없어요."

"잊어버려요. 조금 전에 얘기했던 더 재미있는 일에나 신경 씁시다."

"어떤 건데요?"

"이리 와요. 내가 보여 주겠소."

제드가 그녀를 안아 올리더니 옆에 놓인 소파로 갔다. 그가 에이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헐렁한 원피스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반짝였다. 자신도 옷을 벗고 난 그는 그녀를 굶주린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한동안 서있었다. 에이미는 그의 정신적인 갈망이 육체적인 것보다 강렬하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제드는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에이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이미는 두 팔을 벌려 그를 받아들였다. 그가 다가오는 순간에도 에이미는 자신이 제드의 감정을 잘못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쉽사리 바보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제드였고, 그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그녀가 유일하게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입술이 내려오자 에이미는 제드 글레이즈의 복잡한 느낌과 욕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제드가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 그녀를 안으면, 에이미는 완벽하게 현재에서만 살게되곤 했다. 미래에 대해 걱정할 시간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달콤하고 뜨거운 욕망이 마지막으로 스러져 가자 제드는 에이미의 곁에 누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현실감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그는 베란다 기둥을 내다보며 지금부터 해야 할말을 생각했다. 더 이상 미를 수가 없었다. 커터는 오늘 밤 두 번씩이나 강력하게 그를 재촉했다. 긴급을 요하는 일이기도 했다. 커터는 을리애너에서 벌어진 소란을 정리해 주었지만, 제드는 다른 세상에서 발생한 골칫거리를 해결하러 떠나야 했다. 제드는 될 수 있는 대로 에이미에게 말하는 것을 미루어 왔다. 그의 변화를 눈치챈 에이미가 그의 품안에서 몸을 뒤챘다. 그녀는 몹시 민감했다. 그녀는 언제라도 그의 기분을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그래요, 제드?"

그는 대화를 회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몇 주 전 이었다면, 털어놓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가 험난했던 마지막 임무에서 돌아오기 전이었다면. 그가 에이미의 은밀한 악마에 대해 알기 전이었다면. 그리고 그가 그녀의 연인이 되기 전이었다면. 그때는 그저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면 그뿐이었다. 돌아와서도 전화를 걸어 돌아왔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귀찮은 질문도 없었고, 설명을 요구하거나 부탁을 하지도, 설교를 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간단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단순한 인생에 대한 대가가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지난 8년간 외로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변했다. 적어도 에이미와 함께 있을 때면 그에겐 외로움이 발을 붙일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골칫거리가 있었다. 문제는, 그가 또 다른 임무를 위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난 일을 하러 돌아가야 하오."

제드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치러야 한다. 그는 에이미가 울지 않기 만을 바랐다. 그녀가 운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울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그는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알아요."

그녀의 짤막한 대답에 제드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소?"

"어제 당신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세일즈맨 건을 해결하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오늘 밤 커터와 얘기를 할 때도 그 얘기를 들먹였죠. 난 당신이 전화를 끊을 때부터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으리라는 걸 눈치 채고 있었어요."

"난 내일 떠나야 하오. 호놀룰루에서 출발할 거요.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겠소."

에이미는 결국 울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안도감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요. 그럼, 돌아온 후에 만나요. 나도 내일 칼림스베이로 돌아갈 거예요. 섬 생활은 이만하면 충분히 즐겼으니까요. 그리고 나도 빨리 은밀한 악마한테로 돌아가고 싶어요."

제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와 똑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그는 에이미가 울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가웠지만, 이런 식으로 쉽게 받아들여 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가능한 한 빨리 일을 매듭짓고 돌아오겠소."

그녀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부드럽게 물었다.

"세일즈맨이 뭐죠?"

제드가 이를 악물었다.

"이번 경우엔, 우리 사람들을 적에게 팔아넘긴 배신자를 말하오. 지난번에 그자가 나를 팔아치웠었지."

"그래서 당신이 총상을 입고 칼에 찔렸던 건가요?"

거의 평온하기까지 한 그녀의 목소리가 제드는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의 상처를 얘기할 때마다 안달복달하며 잔소리를 해대던 평상시의 에이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렇소. 이번에 그자가 또 다른 동료 요원들을 배신했소. 그들은 나만큼 운이 좋지 않았지. 그 친구들은 둘 다 목숨을 잃었소."

"맙소사."

이상스레 평온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흐트러졌다. 제드는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내가 그자를 잡아야 해, 에이미. 커터는 배신한 세일즈맨이 누군지 알아냈소. 또 다른 피해를 입히기 전에 손을 써야 하오."

"이 문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에이미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 내렸다. 그녀가 고개를 내려뜨려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그녀의 이가 자신의 살을 살짝 물어뜯으며 장난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제드는 몸을 떨었다. 그는 내일이면 떠날 것이고, 얼마나 오랫동안 떠나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당분간은 오늘 밤이 에이미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다. 에이미와의 마지막 밤. 그녀를 다시 한번 가까이 끌어안으며, 그는 그 단어들이 하나하나 자신의 뇌리 속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에이미에게 돌아오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떠나기도 전부터 이미 그녀가 그리웠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만든 걸까?"

제드는 그녀의 부드러운 애무에 뜨겁게 반응하며 거칠게 물었다.

"내일 얘기해 줄게요."

그는 무슨 뜻인지 의아했지만, 지금은 그녀가 불러일으킨 부인할 수 없는 거대한 욕구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달콤하고 촉촉한 부분을 찾아 들었고,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변하게 만든 자신의 능력에 희열을 느꼈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살갗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몸 안에 불길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살아 있는 불꽃으로 변했다.

"당신은 요술쟁이야."

그녀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덮으며 그가 속삭였다.

"마술을 부리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그녀는 그를 자신의 따뜻한 몸으로 감싸며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제드는 에이미의 몸 안으로 들어가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곤두선 그녀의 유두가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 그녀는 다리를 구부려 그의 몸에 두르며 유혹적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에이미를 필요로 했다. 그는 그녀의 일부가 되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쏟아 부었다. 그녀는 그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나기 전에 에이미도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음날 오후 3시가 되기 조금 전에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비행기를 예약하고 집을 정리하느라 에이미와 제드는 무척이나 바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더 이상 그의 직업에 대해 상의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가방을 들고 공항 터미널을 지나면서 제드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그는 에이미가 좀 더 슬퍼하거나 걱정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별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그도 딱 질색이었다. 에이미는 그를 위해 깔끔하고, 단순한 이별을 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고마워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공항 라운지에서 비행기 탑승 안내를 기다리며 그녀가 너무 간단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이 섭섭했다. 그녀는 마치 그가 정기적인 출장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탈 비행기는 저녁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와이키키로 들어가서 쇼핑이라도 해야겠어요.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거든요."

에이미가 수다스럽게 말했다. 제드는 수천 명의 관광객들로 가득한, 그것도 관광객 대부분이 남자인 열대의 낙원을 그녀가 혼자서 유유히 걸어 다니는 영상이 갑자기 떠올랐다. 맙소사, 그는 정말로 버릇이 고약해져 버렸다. 그는 열대 낙원에서 에이미와 항상 단둘이 지내던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별로 좋은 생각인 것 같지 않군. 하와이는 예전과 달라졌소. 여기도 이제는 범죄가 득시글거린단 말이오."

"내 걱정은 말아요, 제드. 벌써 여러 번 여기에 와 봤으니까요. 길도 잘 알고, 해변에 있는 호텔 중에서 근사한 식당도 하나 알고 있어요. 비행기 타기 전에 그곳에 가서 멋진 저녁 식사를 해야겠어요."

"비행기 안에서도 식사를 줄 텐데."

그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해변의 젊은 녀석들이 그녀와 함께 식탁에 앉는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요. 하지만 기내식이라는 게 뻔하잖아요. 타기 전에 미리 먹어 두는 게 나아요."

"집에는 자정쯤에 나 도착하게 될 거요. 공항에서 운전 조심해요."

제드가 느닷없이 말했다.

"알았어요."

그녀가 얌전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샌프란시스코에서 밤을 보낸 뒤 다음날 몬티어리로 돌아가는 게 낫겠소."

"돈 낭비예요."

"꼭 그렇지 만도 않아. 당신은 피곤할 테고, 시간도 늦어질 거요. 칼립스베이로 가는 길에 안개가 끼어 있을지도 모르잖소."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에도 안개 낀 길은 운전해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제드."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잘랐다.

"뭐요?"

"잔소리 좀 그만해요."

그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탈 비행기의 탑승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너무 빠르다. 그는 좀 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내가 잔소리를 했소?"

에이미가 그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 그랬어요"

"."

그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그는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탑승을 위해 줄지어 선 승객들이 몇 명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충분히 이해는 가요."

에이미가 명랑하게 말했다.

"뭐가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말이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이미는 그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행동했고, 그는 자신의 감정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드는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부질없어 보이고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당신의 잔소리 말이에요."

에이미가 설명했다.

"무엇 때문인데? 뭐가 이해가 간다는 거요?"

그가 거의 고함치듯 말했다. 사람들 몇 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승객들은 이미 탑승하고 없었다. 에이미는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어젯밤에 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같은 이유 때문에 당신은 올리애너에서 내일에 관여했었고요. 또 같은 이유로 지금 비행기를 타고 싶어하지 않는 거예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죠."

"에이미!"

"아직은 당신이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정말이에요, 제드. 당신이 돌아오면, 그때 그 문제에 대해서 다시 얘기하기로 해요, 우리. 다른 문제들도 함께."

"다른 문제들이라니?"

그녀는 제드를 탑승 구 쪽으로 밀었다.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이번 임무를 끝내기로 이미 약속을 했었다.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러 생명이 달린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 나누어야 할 얘기가 있었다. 에이미가 방금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그는 에이미의 어깨를 그러잡았다.

"에이미, 다른 문제라는 게 뭐요?"

", 우리 둘의 물건을 어떻게 합치느냐 하는 문제가 있죠. 내 집에서 함께 살지, 아니면 큰집을 사서 이사를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해요. 그러고 나선 다른 화랑에 보낼 당신의 새장 문제도 의논해야 하고요. 이젠 당신의 새장을 널리 알릴 때가 됐어요. 칼립스베이에 있는 작은 화랑에만 썩혀 두기엔 너무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라고요. 물론, 우리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려야 겠죠. 그리고 또..."

"아이들이라고!"

"물론이죠.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양보 못할 게 하나 있어요. 아이는 하나나 둘만 낳을 거예요.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가 될 거예요. 새집을 장만하려면 아이들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될 거예요. 또 나는 정원을 가꾸고 싶어요. 돌아오는 봄에는 정원에 꽃씨를 심기로 이미 결심했거든요. 당신도 정원 가꾸는 거 좋아해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소."

그가 나약하게 대꾸했다. 에이미는 그를 탑승 구 쪽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승무원이 그의 손에서 비행기 표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에이미, 잠깐만..."

"걱정 말아요, 제드. 당신이 돌아오고 난 뒤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기로 해요. 기다리고 있을 게요. 사랑해요."

탑승구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으로 엉거주춤 서있는 그를 향해 에이미가 키스를 보냈다. 제드는 간신히 좌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했지만,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머리가 팽팽 돌고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팔걸이를 붙들고 창문을 통해 에이미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여객기는 이미 탑승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엔진의 굉음을 들으며 정원을 가꾸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에이미는 내년 봄을 위해 계획을 세웠고, 여름이면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원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에이미는 아기를 가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의 아기를...에이미는 그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 할 미래를 계획했다.

공항 터미널 라운지에서, 에이미는 제드가 또 다른 임무를 위해 떠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순간부터 참아 왔던 눈물을 조용히 흘렸다.

 

 

 

새장을 벗어나.

에이미가 은밀한 악마의 마지막 장을 막 끝냈을 때, 더글라스 슬레이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자마자 올리애너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이미 행크 아저씨로부터 모든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에이미, 계속해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더구나. 그래서 행크한테 전화를 했었다. 그런 다음에야 네가 칼립스베이로 돌아간 걸 알았지. 솔직히 지금 난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다. 넌 괜찮니?"

"괜찮아요, 아빠."

"글레이즈는?"

"그 사람도 괜찮아요."

"좀 바꿔 주렴. 몇 가지 물어 볼 게 있다."

에이미는 아버지의 말에서 경영자 특유의 어조를 읽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그 사람은 지금 여기 없어요."

"어디 있는데?"

"해외 출장 중이에요. 떠난 지 1주일 됐어요."

에이미는 벽에 걸린 달력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요즘 들어 달력을 쳐다보는 일이 부쩍 잦았다. 그리고 제드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기관에서 자신에게 소식을 알려줄 것인가, 하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그녀는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친구일 뿐이었다. 연인이기도 했지만. 일이 잘못되면 친구나 애인에게도 정부 기관에서 소식을 알려줄까? 그녀는 그 질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에서 몰아내야 했다. 아버지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행크 얘길 들으니, 그 친구 정부 기관 일을 한다면서?"

"맞아요."

"네가 말려든 일을 제대로 처리해 줄 만한 사람이었더구나. 그래, 난 이미 르너, 베이든, 거티 라는 놈들에 대해서 얘기 들었다. 르페이지의 대해서만 어서 대길 해봐라, 이제 와서 비밀로 남겨둘 것도 없잖니."

"아빠, 대서양을 건너서 연결되는 전화예요. 아주 비싸다고요. 제가 다음번에 올리애너에 가서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어요."

"돈은 내가 내니까 걱정 마라. 르페이지가 죽던 날 밤에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얘기해 봐."

에이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모든 것을. 편지에 대한 것만 제외하고.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창틀에 올려 두었던 초록색 유리알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르너의 모조 에메랄드를 작은 유리그릇에 담아 두고 있었다.

"맙소사, 몇 달 동안이나 그런 비밀을 혼자서 감당하며 살아왔다니...네가 섬에 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구나."

에이미는 더 이상 변명할 생각이 없었다.

"행크 말로는, 네가 동굴에서 상자를 꺼냈다면서? 내가 올리애너로 돌아가기 전에 위먼이 숨겨 놓았던 그 상자 말이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약간은 불안한 기미가 느껴졌다.

"맞아요. 러시아 첩자들이 위먼에게 지불하려던 보석이 들어있었어요. 아빠가 러시아 스파이와 만나고 있는 조작된 사진도 있었고요. 제가 모두 태워 버렸어요."

"그랬니?"

아버지가 전화선 너머에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좋은 생각인 것 같구나. 그 자식이 나한테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난 믿지 않았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니? 난 러시아 스파이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는데. 그자가 사진을 조작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못했다. 전형적인 위먼의 수법이긴 하다만."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다 없어졌어요. 그래도 르너에게 유리보석 다섯 개는 돌려주었어요. 기념으로 하나는 제가 가졌고요."

"대단한 모험이었겠구나. 글레이즈가 너와 함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 친구는 제 앞가림 하나는 확실하게 할 사람이다."

", 그래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더글라스 슬레이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진을 태워 버린 건 잘한 일이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건 그게 전부였니? 사진과 에메랄드뿐이었어?"

"그게 전부였어요."

에이미가 확실하게 대답했다.

"알겠다 에이미, 그 상자 안에 혹시 다른 게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말이다, 난 그것도 태워 버렸으면 좋겠구나. 완전히 말이야."

에이미는 숨을 죽였다.

"절 믿으세요. 초록색 유리알 말고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걸 전부 태워 버렸다니까요."

"잘했다. 난 네가 위기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믿음직한 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 글레이즈에게도 말했지만, 넌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면 악마의 목줄이라도 끊으려고 달려들 아이지."

아버지는 이상스레 흡족한 목소리였다. 수화기를 붙잡은 에이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로 제드 한 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럼."

"그랬더니 제드가 뭐래요?"

"그 친구도 동의했지."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 친구도 단도직입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잘 알고 있더구나. 필요하다면, 그 친구도 똑같이 할 사람이야. 벌써 증명해 보이지 알았니? 너한테 좋은 남편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구나. 네 엄마한테도 대충 다 얘기했다. 엄마한테도 인사해야지."

"좋아요. 아빠, 전화 바꾸기 전에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라. 하지만 이번 같은 충격적인 사건은 제발 더 없었으면 좋겠구나. 이런 식으로 놀라기엔 애비도 이미 늙었어. 엄마 바꿔 주마."

글로리아 슬레이터가 전화를 받았다.

"에이미, 그래 얼마나 끔찍했니. 정말로 괜찮은 거니?"

"그럼 요."

"그래도 네 곁에 제드가 있었으니 정말 고맙지 뭐니. 난 그 사람이 정말로 마음에 든다, 에이미."

"저도 그래요."

"그럴 줄 알았다. 머지않아 또 한번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어머니가 조그맣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드는 결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는 걸요. 너무 희망 품지 마세요."

그녀는 며칠 전에 시내에 나가서 비발디의 레코드를 몇 장 샀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희망을 품으면서도 그녀는 그것을 입밖에 내는 것이 두려웠다.

"글쎄 두고 봐야겠지."

어머니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이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지금껏 마이클 위먼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정말 끔찍하구나. 그 인간은 문제를 일으키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모양이야. 너한테까지 손길을 뻗다니, 정말 미안하구나, 에이미. 위먼은 정말 몹쓸 사람이었단다."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걱정 마세요. 런던은 어때요?"

어머니가 여행에 대한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자 에이미는 편안한 마음으로 경청했다.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드는 전화번호를 누르는 자신의 손가락이 조금 떨리는 것을 보며 난감했다. 전화선 저 끝에서 벨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는 눈을 감고서 상냥하고 따스한 에이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녀가 외출 중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을 무렵, 세 번째 벨이 울리는 도중에 수화기가 들렸다. 제드는 눈을 뜨고 전화기의 에이티앤티 마크를 노려보았다.

"에이미? 나요."

"제드, 집에 돌아왔군요!"

"거의 다 왔소. 지금 LA. 몬티어리에는...715분쯤에 도착할 거요."

비행기표를 살피는지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공항으로 나갈게요."

제드는 호놀룰루에서 비행기를 탄 이후로 처음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당신의 그 말을 듣고 지금 내가 얼마나 반가운지 당신은 모를 거요. 보고 싶었소."

"나도 보고 싶었어요, 제드. 몸은...몸은 괜찮아요?"

그가 바보처럼 웃음 지었다.

"아직도 사지는 멀쩡하오!"

"제드!"

"아니, 정말이오, 내 사랑. 괜찮소."

그가 숨을 들이마시더니 단숨에 말을 쏟아냈다.

"떠나기 전에 당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가족을 이루어도 좋을 만큼 아주 건강하오."

"제드, 진심이에요?"

그녀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얘긴 집에 가서 합시다. 뛰어야겠소. 내가 탈 비행기의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어."

"제드, 잠깐만 요. 진심인지 아닌 지만 대답해 줘요. 난 지금 알아야겠어요."

"사랑하오, 에이미. 715분에 봐요."

그는 여전히 웃음 지으며 전화를 끊고는 발 밑에 내려놓았던 여행 가방을 들었다.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기분이 아주 그럴듯했다. 그가 호놀룰루를 떠나면서 그녀의 마지막 말을 내내 되새겼듯이, 그녀 역시 그가 도착할 때까지 그의 마지막 말이 전하는 여운을 곱씹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새장 문이 열렸고, 제드는 자유였다. 제드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다행히 탐스럽고 샛노란 국화를 한 다발 살 수 있었다. 에이미는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40분이나 일찍 공항에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터미널 라운지를 초조하게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제드가 마침내 출구로 걸어 나왔을 때, 그녀는 그가 뭔가에 얻어맞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식간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당신이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제드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알아요, 알아."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는 에이미가 흠칫 비명소리를 낼 정도로 세차게 그녀를 포옹했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제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엔 사랑이 가득했다.

"어서 집으로 가요."

제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날 밤늦게, 에이미는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다 옆 자리가 비어 있음을 깨닫고 눈을 떴다. 제드는 창가에 서있었다. 그의 강인하고 날렵한 몸매가 희미한 달빛에 윤곽을 드러냈다.

"제드? 무슨 일 있어요?"

"아니오."

그가 돌아서서 따스한 눈길로 애무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차 때문인 것 같소. 잠이 오질 않아."

에이미는 조금 전의 격렬했던 정사를 떠올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그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 채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사랑하오, 에이미."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요."

제드가 침대로 돌아와 곁에 앉으며 그녀를 포옹했다.

"당신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소. 당신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깨닫지 못한 내가 바보요."

"속상해 하지 말아요. 나도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괴로웠어요. 우린 친구였잖아요, 잊었어요?"

"잊지 않았소. 에이미, 나 일을 그만뒀소."

그녀의 머리가 느닷없이 들어 올려지는 바람에 그의 턱에 부딪히고 말았다.

"뭐라고요?"

"이번 임무를 마치고 나서 커터에게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소. 그만뒀소.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보지 말아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내가 그만두기를 바랐잖소."

"그래요. 하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만두길 바란 것이지, 날 위해서는 아니었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만둔 거요. 그런 일은 8년간 한 걸로 충분해요. 나도 내 미래를 되찾고 싶소. 그리고 그 미래에 당신이 있어 주면 좋겠고. 내 마음 이해하오?"

그녀가 제드를 껴안았다.

"이해해요. 마지막 임무는 아주 힘들었나요?"

"순조롭게 흘러갔소."

"그렇게 말해서는 모르죠."

제드가 신음소리를 냈다.

"당신이 절대로 질문을 하지 않던 시절도 있었는데..."

"모든 게 바뀌었잖아요."

"그래, 모든 게 바뀌었소. 좋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겠소. 그러고 나면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말기로 합시다. 좋소?"

"좋아요."

"그 세일즈맨을 매수했던 테러리스트에게 그자를 되팔았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 알겠어요. 그자를 매수했던 사람들이 그자가 또다시 배신을 했다고 믿게 만들었군요? 그럼 그들이..."

에이미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들이 우리 대신 그자를 처치해 줄 거요. 모든 게 끝났소, 에이미."

"그렇군요."

"당분간은 경제적으로 좀 어려울 거요. 나한테 저축해 놓은 돈이 좀 있고, 새장으로도 약간은 돈이 들어오겠지만..."

"새장으로 우린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예요. 칼립스베이 갤러리에 가서 내가 모든 새장의 가격을 올렸어요. 그 중에 두 개는 벌써 팔렸고요. 그리고 그 작품들을 샌프란시스코 갤러리에 전시하게 되면 가격은 더 올라갈 거예요."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난 엔지니어 일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소. 자문이 필요한 회사와 계약을 체결해서 프리랜서로 일하면 될 거요. 그렇게 되면 여행도 좀 해야 하고 이사를 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당신만 곁에 있으면 상관없소. 그게 잘 안 되면, 경호 체계나 보안 문제에 관해 자문 일을 할 수도 있소."

"무엇을 하든 당분간은 굶주리지 않을 거예요. 내 소설 인세도 있고, 또 다른 것도 있거든요."

그녀가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거실로 달려갔다. 제드가 의아한 듯 그녀를 뒤따랐다.

"무슨 일이오?"

그녀가 창가에서 초록색 유리알을 집어 들어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당신은 지금 어마어마한 횡재를 손에 잡은 거예요."

그는 손바닥에서 유리알을 굴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횡재라니?"

"5 만 달러에 상당 하는 금액이면 횡재죠. 앨브라이트 씨도 정확한 가치는 잘 모르겠대요."

그녀는 제드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깔깔 웃었다.

"앨브라이트 씨가 누군데?"

"지난 주에 만난 보석 감정사예요. 혹시나 해서 보석을 감정해 봤거든요. 진짜였어요."

그가 에메랄드를 움켜쥐고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농담이겠지."

"아니에요. 러시아 사람들이 위먼에게 진짜 보석을 대금으로 지불한 거예요. 정부 내의 관계자가 잘못 알았던 거죠."

"당신이 르너에게 나머지 다섯 개를 주었잖소."

제드가 안타깝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다니엘 르너는 위먼의 아들이에요. 그 사람도 보석을 가질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하지만 우리 두 사람도 하나쯤은 가져도 될 정도로 수고를 했잖아요."

제드가 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보석을 허공으로 높이 던져 올렸다가 다시 받았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미, 당신과 함께 하는 한, 앞으로 60년이나 70년 동안은 전혀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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