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듀엣
한밤의 듀엣
A. Davidson
1장
데이브는 목을 잔뜩 죄고 있는 풀 먹인 칼러를 늦추려고 손으로 힘껏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나 답답한 기분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불편한 마음만 치솟았다.
콘서트 홀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청중 가운데서 머리 하나가 더 크고 어깨도 배나 되어 보이는 데이브는, 자기가 잘못 온 것 같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열띤 풋볼 게임의 도중이거나 한 것처럼 정장한 옷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루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동행자를 보며 하품을 했다. 아아, 그녀는 말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진짜 금발에 날씬한 몸매, 그리고 긴 다리-그러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모델을 시작한 지 오래 되었나?" 데이브가 물었다.
"17세 때부터예요." 데이브와 동행한 여자는 그가 건성으로 묻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명량하게 대답했다.
청중들이 관객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함으로써 데이브도 겨우 왼발의 통증에서 해방되었다. 자기와 동행인 모델과, 친구인 제리 먼로가 데리고 온 여자 사이에 낀 데이브는, 30분가량이나 심포니 애호가들 사이에서 억지로 서 있었던 것이다. 이 동안 제리가 그 나름대로의 투자에 대한 철학을 피력하여 귀를 즐겁게 해주기는 했다.
좌석에 안내되기는 했지만, 불편하기는 로비에 있을때와 마찬가지였다. 좌석이 좁고 앞줄과의 사이도 완전히 붙어 있다시피 했던 것이다.
불쾌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는 홀의 화련한 장식과 주위의 청중을 돌러보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는 듯 모피 코트를 걸친 채였고, 동행한 남자들은 그러한 여자들 곁에 옹색하게 앉아 있었다. 거실l 텔레비전 앞에서 풋볼 게임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억지로 끌려왔다는 듯한 비참한 표정들이었다.
홀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미와 화려함의 훌륭한 하모니였다. 벽은 연푸른색 천으로 덮여 있었고, 각종 뮤즈의 신들과 음악과 관계가 있는 신들의 조각이 군데군데 장식되어 있었다.
거대한 샹들리에 불빛이 사방으로 퍼져 벽과 마루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밖은 무서운 추위로 발이 굵고습한 눈이 내리고 있었으나, 홀 안은 따뜻하고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 콘서트홀은 시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시대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많지 않은 옛 건물 중의 하나였다. 정화정신이 투철한 개혁주의자들은 이 건물을 대공황 이전의 퇴폐와 방종의 심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애트웰에게 있어서는 이 홀이 지난날의 기념비처럼 여겨졌다. 아마도 지금보다는 평온하고 살기 좋았을 나날들. 사람들이 어려운 결정에 쫓기는 일이 적었던 시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도는 톱니바퀴 같은 세계에서는, 인간들도 그 톱니바퀴 속에서 자신의 거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홀에는 데이브 개인의 어릴 적 추억도 깃들여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풍부한 교양을 지니게 하기 위해 수도 없이 음악회에 데려갔던 것이다.
그들은 어린 자식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고 황홀한 듯한 표정에 만족하곤 하는 것이었으나, 사실 데이브의 마음은, 연주되고 있는 교향곡과는 훨씬 먼 곳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데이브는 측면 패스의 가능성, 스프리트 디펜스에 대한 오프 태클 전술, 터치다운, 엑스트러 포인트 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내셔널 풋볼 리그에 속해서 시합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고향,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묘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일까.......
그러나 이 거리도 다른 거리와 마찬가지로 낯선 거리로 변모해 있었다. 아버지가 은퇴한 후 부모는 플로리다로 이주했고, 형과 누나는 각각 대학 시절의 연인과 결혼하여 서부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뉴욕에서 한시간쯤 걸리는 곳에 있는 이 거리는 데이브에게 있어서는 역시 특별한 곳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공 잡는 법을 배운 것도 이 거리에서였다. 체력과 스포츠맨십을 키우고, 경쟁에서 이길 힘을 배양한 곳도 이곳이었다. 데이브는 바로 이 거리에서 한 남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금발의 동행자가 화사한 몸을 뒤척이며 빨갛게 칠한 손톱으로 유혹하듯 데이브의 옷소매를 만졌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보냈으나, 좀 더 강렬한 반응을 보였어야 했다고 금방 후회했다. 이 여자를 잘 보란 말이다. 데이브. 놀라운 미인이 아닌가! 데이브는 자신이 욕망에 들끓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고자 노력하며 여자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
악기를 조율하던 악단원들이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연주자가 자리 잡고 앉아 악보를 펼치자, 장대한 홀에는 조명이 꺼졌다.
연미복을 우아하게 차려 입은 지휘자가 스테이지에 걸어나와 청중에게 인사하고 오케스트라 쪽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어서 장식 없는 검정 롱드레스 차림의 피이노 독주자가 조용히 등장했다. 그녀는 피아노 앞의 딱딱한 의자에 단정히 앉아 지휘자의 신호를 기다렸다.
저 여자는? 데이브는 피아노 독주자가 스테이지에서는 순간 숨을 죽였다. 모델의 손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가해지는 바람에 그녀는 고통을 호소하여 손을 빼었다. 데이브는 미안하다는 뜻으로 얼굴을 찌푸려 보이며 사과했다.
"미안해, 조지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야....."
데이브는 다시 스테이지에 시선을 돌리고 피아노 앞에 앉은 여자를 응시했다. 그로부터 12년. 정말 그 여자일까? 어둠 속에서 그는 프로그램을 들여다보았다.-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제2번 다단조], 독주자 엘레나 슈버트. 역시 그녀였다. 데이브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프로그램에 인쇄되어 있는 그녀의 이름을 엄지손가락으로 다독거리는 데이브의 가슴에는, 세월의 장벽을 넘어 갖가지 추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홀은 정적에 감싸였다. 깊은 침묵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작곡가의 태어난 슬라브의 깊은 우수의 어두운 고뇌가 차차 청중의 가슴속에 파고들어왔다.
데이브의 가슴은 폭발 직전이었다. 홍수와도 같이 강력한 음조와 능숙한 연주에 감동한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엘레나의 출현이 가슴을 뒤흔들었다. 엘레나는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 그대로 지금도 매혹적이었다. 그녀가 오늘 밤에 연주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스테이지에 가까운 좌석을 구했을 텐데,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엘레나의 생기 있는 얼굴, 투명한 듯한 부드러운 살결, 뒤로 묶은 풍부한 밤색 머리는 데이브의 기억 속의 그녀와 똑같았다.
엘레나는 건반 위에서 물흐르듯 손을 움직이다가 한순간 눈을 감았다. 아아, 그날 밤도 엘레나는 내개 얼굴을 향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완전히 몸을 맡기고 내 살을 쓰다듬던 그 손. 그때 언제나 그녀의 주위에서 맴돌던 청초한 향기가 겨울의 싸늘한 밤공기에 섞여, 건장한 데이브의 온몸에 힘을 넘치게 했던 것이다. 엘레나의 부드러운 얼굴에 달빛이 고즈너기 비치고, 잔물결과도 같은 그녀의 머리가 그의 감각을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자극했었다.
협주곡이 웅장하게, 그리고 노스탈직하게 제3악장으로 흐르는 동안, 데이브는 멍청히 추억에 젖어 있었다.
현재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엘레나의 연주는 아주 자연스럽고도 풍부한 감수성에 넘치고 있었다. 엘레나는 드디어 뜻하던 지위에 올라선 것이다-데이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각각의 꿈이 있었다. 데이브에게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첫사랑.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의 꿈을 좇은 결과 교차되지 않는 각각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협주곡이 끝났다. 우뢰와 같은 박수에 데이브는 공상에서 깨어났다. 엘레나가 일러서서 뜨겁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청중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퇴장했다.
데이브는 잔뜩 긴장했다. 지금 무대 뒤로 찾아가 그녀를 만나 볼 것인가? 최소한 인사라도, 아니면 휴식시간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다! 지금 가는 것이 좋겠다.
데이브는 성한 오른쪽 다리를 폈다. 왼쪽 다리는 그라운드에서 입은 숱한 부상 때문에 안으로 휘어져 있었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동반자와, 친구인 제리 먼로에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입을 열기 전에 둘째 번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비제의 ‘카르멘 조곡’에 나오는 투우사의 노래였다. 데이브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으나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주 중간에는 자리를 뜰 수 없으므로 휴식 시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했다.
오케스트라는 멘델스존의 감미로운 아리아와 스타라우스의 경쾌한 왈츠를 계속해서 연주했다. 뒤 휴식으로 들어갔다. 눈부신 조명이 관객석에 넘쳤으나, 비좁은 관객석에 오래 묶여 있던 데이브는 몸이 굳어져 일어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디 가나, 애트웰?" 제리가 물었다.
"피아노 독주자를 만나려. 아는 사람이야." 흥분 때문에 데이브의 음성이 가볍게 떨렸다. "데기실에 가서 인사를 나누려고. 곧 돌아오겠어......"
"놀랐는데! 우리 모두 같이 가지." 제리가 환성을 지르며 자기 동반자 손을 끌면서 일어났다. 데이브는 당황했지만 할 수 없이 모델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네 사람은 혼잡한 통로를 지나 일직선으로 걷다가, 지휘자를 둘러싼 몇몇 음악가가 무리지어 있는 그룹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엘레나! 데이브는 숨을 죽이고 엘레나 슈버트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녀는 뭇별 속의 유성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데이브는 눈앞에 있는 엘레나와, 자기 기억에 남아 있는 18세 때의 엘레나 모습을 겹쳐 생각하면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티없던 소녀 때의 명랑성은 잃었지만 어딘가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나 다름없이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꼭 다문 입은 끝이 약간 처져서 우울해 보였다. 데이브는 가슴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렇게 하면 텔레파시가 통해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를 것이라 믿기라도 하는 듯이.
엘레나는 자기를 응시하는 사나이의 존재를 깨닫고 문득 시선을 들었다. 청중이 무대 뒤로 돌아와 사인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 엘레나는 기꺼이 그 청을 받아들여 프로그램에 사인을 해주는 젊은 음악도들을 격려하는 것이 상례였다. 자신도 전에는 같은 입장이었고, 병아리 음악가로서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 기회를 찾아 필사의 노력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의 엘레나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피아노의 현처럼 긴장되어 있었고, 손바닥은 땀에 흠뼉 젖어 계속 손수건으로 닦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매니저로부터 경쟁 상대의 존재를 암시받은 후부터 그녀의 자신은 차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의 연주회에서의 성공 여부가 음악가로서의 자기 커리어를 결정할 것이라고 엘레나는 자각하고도 있었다.
엘레나는 주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려 했지만 정신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매니저로부터의 경고를 둘은 이후 앞으로의 연주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엘레나는 그 사니이의 날카로운 응시를 깨달고 그와 그 동료를 다시 흘끔 보았다. 그리고 연주회의 계속에 대한 사소한 변경을 지시하고 있는 지휘자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나 무언가가 엘레나의 마음에 짚었다. 기억의 회로에 전류 같은 충격이 일어나,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것은 신기루가 아니면 망상일 것이다. 운명이 이같이 얄은 해후를 준비할 리 없다.
엷은 녹색 눈이 나를 기억하고 있느냐는 듯이 엘레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전혀 빈틈없이 다듬어진 갈색 머리가, 엘레나가 알고 있던 소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 무렵 그의 머리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빳빳해서 그자신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머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결코 엘레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엘레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데이비드 애트웰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있고 혼자 갈 길이 있어서, 아무리 엘레나라 해도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엘레나가 그제서야 자기를 알아보고 티없는 정열에 사로잡힌 옛날을 돌이켜본다는 것을 깨닫고, 데이브는 그녀에게 미소를 던졌다. 그 미소는 청춘을 같이 보낸 사람의 아련한 추억으로 채색된 젊디젊은 웃음이었다. 엘레나의 마음은 몹시 흔들렸다.
"네?" 알렉세이가 무어라 말하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비로서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합니다. 무어라 말씀하셨어요?"
지휘자가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는 프로코피에프의 곡은 템포를 조금 빨리하도록 부탁했어. 오후에 상의했던 대로 쳤으면 좋겠어."
엘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세이는 그 반응을 미온적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할 자신이 있나?" 그가 위압적으로 물었다.
동료들이 있는 앞에서 그토록 오만한 말을 하다니! 엘레나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충분히 알고 있어요, 미스터 잘코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대답하고 나서 겉치레로 인사했다. "강의가 끝났으면 그만 실례하고 신선한 공기라도 마셔야겠어요." 그녀가 신선하다는 말에 힘을 준 것은, 알렉세이 잘코프의 태도가 진부하고 불쾌하다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엘레나는 데이브와 그 동료가 있는 반대쪽으로 걸어가 초만원을 이룬 관중 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봐! 자네는 그녀를 안다고 하지 않았나?" 엘레나의 뒤를 좇고 있는 데이브의 등에 대고 제리가 큰소리로 말했다.
"엘레나!" 데이브가 그녀의 뒤에서 소리쳤다. 그러고는 그녀의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엘레나가 맞죠? 날 기억하지 못합니다? 데이비드 애트웰입니다." 엘레나의 솔직한 반응을 기대하면서 데이브가 안타깝게 물었다. 아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분명히 자기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다니!
"오랜만이군요, 데이비드. 물론 당신을 알고 있어요." 엘레나는 비록 싸늘하게나마 예의바르게 미소 지었다. 데이브는 그녀의 팔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자신과의 재회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실망을 느꼈던 것이다.
냉정한 얼굴을 유지하면서 엘레나는 햇빛에 탄 사나이의 엄숙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신감에 찬 개성 있는 얼굴이었다. 세월이 소년 시절의 싱싱함을 퇴색시키고는 있었으나, 20세 때의 그 대리석과도 같은 강력함은 지금도 잃지 않고 있었다.
스포츠맨에게 있게 마련인 숱한 육체적 상처 자국을 남긴 얼굴. 그러나 엘레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온화한 녹색 눈이 사랑으로 가득 차 환하게 빛나고, 녹여 버릴 듯한 웃음이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정열의 순간, 그의 거친 얼굴이 얼마나 다정해 보였던가를.
그러나 1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엘레나는 데이브의 기억을 마음속에서 몰아내 버렸다. 데이비드 애트웰과 만났을 때 엘레나는 아직 18세의 소녀였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와의 관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자기 희망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그녀는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또 피아니스트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옛날 연인에 대한 육체적 동경에 사로잡혀 있을 여유가 없었다. 엘레나는 데이브와 교제를 계속하면 어떤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례하겠어요, 데이비드.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밖에 나가는 길이었어요.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기뻐요."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통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차가운 눈발이 그녀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 그녀는 멈춰 서서 문을 닫고 피곤한 듯이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대기실에 돌아가 뜨거운 열기를 견디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체념하고 돌아서는 엘레나를 데이브의 시선이 비난하듯 쏘아보았다.
"인사는 그것뿐인가?" 데이브가 도전하듯 말했다.
"만나서 기쁘다고?"
"뭐라고요?" 데이브가 어째서 노했는지 의아해 하며 엘레나가 되물었다.
"엘레나!" 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는 미주리 대학의 데이비드 애트웰이야. 12년 전 엘레나는 1학년이고 나는 3학교이었어. 우리는........."
"용건이 뭐예요, 데이비드?" 엘레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조용히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데."
엘레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앞을 바라보았다. 연주자들이 스테이지로 돌아오기 시작하고, 알렉세이는 초조하게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미안해요, 데이비드. 스테이지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나는......."
"연주가 끝난 다음에는?" 데이브는 열심히 부탁했다. 그러나 엘레나의 머리는 제2부의 연주로 가득 차 있어서 그의 제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갔으면 좋겠어."
엘레나가 데이브의 여자 친구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엘레나를 노려보면서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엘레나가 대답했다.
"바에서 한잔 마실 예정도 있어. 옛날이야기라도 좀 하지 않겟나?" 데이브가 엘레나의 두 팔을 꼭 잡았다.
"술은 못 마셔요, 데이비드. 마음은 고맙지만." 엘레나는 웃으면서 거절했다. "실례하겠어요, 스테이지로 돌아가야 해요."
데이브는 망설이며 엘레나를 쳐다보다가 손을 놓고 길을 비켜 주었다. 엘레나가 지나갈 때 검은 드레스자락이 그의 구두 끝을 스치고, 인동덩굴의 달콤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엘레나는 알렉세이 곁으로 걸음을 재촉하면서 문득 고독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만나리라 생각지 않았던 그 사나이에 대한 육체적 매력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엘레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추억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그 사나이의 존재 자체였다.
엘레나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자신을 질책했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갈망일 뿐이야, 엘레나. 일시적인 욕망이니까 금세 사라질 거야.
감연히 고개를 쳐든 엘레나는 박수에 대답하면서 지휘자의 뒷좌석에 앉았다. 그곳은 그녀의 인생 자체인 싸움의 터전이었다.
"이 거리의 겨울 추위를 깜빡 잊었었군." 데이브는 깃을 세운 코트에 몸을 움츠리고 호주머니에 깊이 손을 찔러 넣었다.
"여기서 무얼 하세요, 데이비드?" 엘레나가 비난하듯 힐문했다. 붉은색 여우 코트가 그녀의 밤색 머리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콘서트홀에서 보도로 이어지는 넓은 대리석 돌계단에 서 있었다. 엘레나가 두어 계단 위에 있었다.
"엘레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분명히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요?" 엘레나는 냉랭하게 말하고 추위를 참으면서 입을 꼭 다물었다.
"친구들은 이미 돌려보냈어."
"당신 애인은?"
"내 애인은," 데이브는 그녀의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집에 갔지. 친구인 제리가 배웅해서."
"그래요?" 찬바람 때문에 엘레나의 뺨은 빨갛게 되어 있었다. 데이브는 장밋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엘레나, 내 친구는 내가 엘레나를 안다고 한 말을 거짓말인 줄 알고 있어. 나한테 좀 더 예의바르게 대해 줘도 좋지 않았을까?"
"연주회 도중이라서 그랬어요." 엘레나는 그의 얼굴을 돌아다보았으나 시선을 돌렸다. 맑은 올리브 그린 빛 눈을 오래 바라보기가 무서웠던 것이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실 수 없을까? 참, 엘레나는 커피를 안 마시던가?"
그의 말이 진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엘레나는 그의 표정을 얼른 훔쳐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엘레나는 채념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 근처에 올나이트 카페가 있어요."
습한 눈이 바람에 날려 두 사람 주위에서 맴돌며 예리하게 얼굴을 때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엘레나는 그가 약간 발을 절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 어디 살고 계세요?" 빙점 하의 밤공기 속에서 엘레나의 입김을 하얗게 서리로 변해 공중으로 흩어졌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직업을 바꾸고 텍사스에 살고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오기로 결심했어. 일주일에 한두 번 뉴욕으로 출근하게 된 것 같아. 이러나 저러나...."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계석했다. "나이 탓인지 몸도 제대로 말을 안 듣는군. 추위에도 약해지고."
"그럼, 계속 여기에?" 엘레나가 물었다.
"매주 댈라스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를 탈 수도 없으니깐. 내가 여기 살면 무언가 난처할 일이라도 있나?"
"아니에요." 엘레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저 호기심에서 물었을 뿐이에요. 그래, 무슨 일을 할 생각이세요?" 그녀는 태연을 가장하고 물었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하게 될 모양이야." 데이브는 자기 말에 스스로 귀를 기울이면서 말했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 인생으로서, 그 자신도 아직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내가 너무 거드름을 피웠군!" 그는 웃었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하게 될 모양이야." 일부러 영국식 악센트로 반복하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은 스포츠
담당 아나운서지."
"정말 다행이군요." 엘레나는 마음대도 없는 말을 했다. "나는 콘서트 중재 방송은 보지만 그밖에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거의 없어요. 하지만 아마 당신에게는 재미있는 일이 될 거에요." 엘레나는 데이브가 팔을 놓자 얼른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찬바람을 피하려는 듯이 깃 속에 턱을 파묻었다.
옆에 데이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엘레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는 3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마치 동물원에서 도망쳐 나온 동물이라도 바라보듯 엘레나를 자세히 보고 있었다.
"내가 착각했던 것 같아. 거드름 피우는 쪽은 엘레나였어."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엘레나는 부아가 났다.
"나에게 사과할 것은 없어, 엘레나 슈버트." 데이브가 엘레나를 따라와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 위를 덮칠 듯이 막아섰다. 그는 두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하고 천천히 반복했다. "엘--레--나가 거드름을 피우고 있어."
엘레나는 턱을 내밀고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나 데이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과 입이 엘레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해보라고 반반하고 있었다. 마침내 엘레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구두가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죄송해요, 데이비드."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엘레나는 할 말이 궁해 헛기침을 했다. 사실 그녀는 차갑게 대l 생각이 아니었다. 다만 거기 있는 그 존재 자체가 왜 그런지 그녀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마음을 터놓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어쨌든 말투에 조심해야 하겠어. 무어라 해도 데이브는 오랜 친구니까.
엘레나에게 있어서 사과하기는 쓰라린 일일 것이다. 이렇게 느낀 데이브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엘레나의 어깨에 팔을 얹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커피 마실 집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엘레나는 나하고 거리 감각이 전혀 다른 모양이군."
"그렇게 추우세요?" 긴장의 순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닫고 엘레나는 미소 지어 보였다. "나이는 정말 못 속이는 모양이군요. 바로 저 가게예요." 그녀는 거리 반대쪽에 있는 카페의 조명을 가리켰다. "저기까지 걸어갈 수 있겠어요?" 그녀가 재촉하듯 말했다.
"꼭 걸어가야만 하나?"
"네, 꼭 걸어야 해요. 더구나 토니즈에서는 이 고장 최고의 스트로베리 치즈케이크를 먹을 수 있어요."
데이브는 팔로 엘레나의 허리를 감고 그녀를 끌어당긴 뒤 얼어붙은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어릴 때부터 맛있는 치즈케이크라면 눈이 멀 정도였지." 그는 의미 있게 속삭이고 나서,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장밋빛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엘레나는 그의 품속에서 얼른 몸을 빼어 곧장 가게를 향해 길을 건넜다. 그리고 앞장 서서 문을 열고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엘레나는 명치에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 동요는 물론 데이브에게 포옹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입술이 뺨에 닿기 전부터, 그 그립고 마음 설레게 하는 그의 목소리에 억제되어 있던 육체적 욕망이 다시 살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나는 것은 즉시 중지해야 한다. 내 음악가로서의 지위가 위협당하고 있는 지금, 그 이 때문에 집중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육체적 정신적 노력은 모두 피아니스트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경주해야 한다. 정신통일이 필요한 것이다!
엘레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데이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가 바람에 나부껴 흩어져 있었다. 그는 문득 수수께끼 같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엘레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알 수 있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부드러운 녹색 눈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집중력의 한 모서리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데이비드 애로웰은 치즈를 씹듯 내 마음의 한구석을 먹어 들어오고 있다. 엘레나는 자기의 마음의 변화를 깨닫고 있었다.
이런 곳에 앉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엘레나 슈버트! 정말 어이가 없어.
2장
그 까페는 핑크와 그레이 리놀륨 까는 것이 한때 유행했던 50년대의 유물이었다. 노란 나무 의자와 데코라로 된 테이블에는 오랜 세월을 상징하는 상처와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2미터 간격으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구 시설은 미적 효과보다 실용성에 의한 것이었다.
"이곳 실내 장식이 마음에 드는군," 데이브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맛있는 음식과 인테리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세요?" 엘레나는 비꼬아 물었으나 곧 후회했다.
뚱뚱하고 젊은 웨이트레스가 데이브 머리 위에서 풍선껌을 터뜨리면서 주문을 받았다. 차트 위에 주문한 것을 적어 넣으며 그녀는 노상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어요?" 웨이트레스가 가버리자, 엘레나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태연한 어투로 물었다.
"공을 만지고 있었자." 데이브는 테이블 위에 깍지를 끼고 엘레나의 입 언저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입술은 미소 짓고 있었으나 데이브는 속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무엇인가를 고민을 숨기려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공을?"
"응."
"그러니까.....즉........풋볼이라거나?"
"그래, 엘레나. 내가 대학 때 풋볼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 프로 선수가 되려고 했었어. 설마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테지?"
"물론 기억하고 있어요. 다만 그 후에 마음이 변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랬어?" 이때 그는 확실히 분노를 느꼈다. "나도 어른이 되면 공던지기 같은 것은 내던지고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 모양이군?"
"데이비드, 그게 아니에요. 다만......"
"다만, 뭐지"" 대답이 없으므로 데이브는 뒤를 돌아보며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10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아버지의 재촉을 받으며 부끄러운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안해요, 데이비드." 엘레나가 속삭였다. "틀림없이 내 사인이 필요해서 그럴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곧 돌아올 테니까요." 그녀가 소년에게 웃음을 던졌다.
"데이비드 애트웰!" 소년의 청높은 목소리가 존경심으로 떨렸다. "당신은.....당신은.........."
"실례합니다, 미스터 애트웰. 나는 짐 매킨타이어라는 사람인데, 아들 녀석이 당신의 열광적인 팬이어서...물론 나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그래서 아이가 사인을 좀 부탁할까 하는 모양인데........."
"좋습니다." 데이브는 엘레나의 상심한 표정을 흘끗 살피고 나서 미소 지었다. "네 이름이 뭐지?"
"티모시예요. 화아, 학교 친구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 거야, 신난다!"
데이브는 냅킨에다 '귀여운 팬인 티모시 매킨타이어에게 데이비드 애트웰'이라 써서 소년에게 주었다.
"풋볼을 좋아하니, 팀?"
"물론이죠." 팀이 감격해서 대답했다. "나, 나도...당신처럼 카우보이즈에 들어가고 싶어요."
"좋은 일이지. 하지만 먼저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해야 해. 물론 프로 선수는 돈을 벌지만, 인생에는 풋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 돼."
"나도 늘 그런 말을 합니다마는,"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당신이 말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은퇴하다니 정말 유감이군요. 시합이 재미없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매킨타이어씨. 하지만 나는 노병처럼 사라질 생각은 없습니다. 다음 시즌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게임의 실황 방송을 담당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텔레비전에 비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들어서 기쁩니다. 사인은 정말 감사합니다. 팀, 인사를 해야지?"
"감사합니다, 미스터 애트웰."
"천만에, 팀. 연습을 계속하거라. 그리고 공부도."
웨이트레스가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가져왔다. 데이브는 엘레나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난처한 듯 표정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당신이 스타인 줄은 몰랐어요."
"스타가 아니야, 엘레나. 전혀 아니다. 나는 단순히 풋볼 선수, 아니 전직 선수지."
"하지만 당신이 경기를 한곳에서 2천 킬로나 떨어져 있는데, 10세 소년이 알 정도로 유명한 선수가 아니에요?"
"우연이지. 카우보이즈는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대표 팀으로 선발되고 있으니까 선수들은 모두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고 있어. 다른 팀에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야."
"그렇군요."
"그래, 엘레나는 어떻게 지냈지?"
그가 포우커 페이스로 묻자 엘레나는 홱 고개를 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나요? 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예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밤과 같은 일을 하면서 지냈다는 것이로군?" 데이브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내가 전부터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텐데요...."
여기까지 말하고 엘레나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입장이 뒤바뀌고 말았다. 데이브는 그녀가 한 질문을 그대로 되받아 했던 것이다. 그녀는 데이브를 나무라듯 바라보았으나, 그 눈에 장난기가 깃들여 있다는 것을 알고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싫어요, 데이비드."
데이브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 관능을 자극하려는 듯 가만히 쓰다듬었다.
"괜찮아." 그는 테이블 너머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엘레나는 손을 뿌리치고 돌아가야겟다는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도. 그러나 엘레나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프로 풋볼 선수가....당신의 꿈이었죠?" 마음이 산란하여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그랬지."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당신은 매우 뛰어난 선수였어요, 대학 시절에." 그를 바라보면서 엘레나는 당시의 그를 되살리고 있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날씬한 채격이었다. 젊었고, 인생을사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추억을 떨어버리고자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현실의 그가 아직도 당당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단 한 번 시합을 본 것뿐이 아니었어? 도저히 풋볼 팬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엘레나도 따라 웃었다.
"분명히 풋볼에는 지식이 없어요. 하지만 스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어요. 그 시합에서는 틀림없이 당신이 스타였어요."
"기억하고 있나, 그날 얼마나 추웠는지? 나는 그라운드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 스탠드에 있는 엘레나를 바라보았더니 담요로 몸을 꼭 감싸고, 시합 도중 내내 그 큰 눈으로 안타깝게 내려다보고 있더군. 그때 내가 바란 것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의 생각은 같은 곳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먼 옛날, 시합이 끝난 후 얼어붙을 듯한 겨울밤에 단둘이 남았던 일을. 엘레나는 기억하고 있다. 부끄러워하며 호소하는 듯한 그 손의 감촉, 성급하고 미숙했던 사랑의 속삭임을.
두 사람은 데이브의 차 백시트에서 한 장의 담요를 나누어 두르고 서로의 입김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장래를 맹세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철이 없었던 것일까. 엘레나는 생각을 떨어버리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데이브의 타는 듯한 녹색 눈이 그녀의 표정에서 속마음을 읽고자 쏘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렸었어요, 두 사람 모두." 엘레나는 웃으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럴까요?" 엘레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현실이 두 사람 위를 덮어씌우고 있었다. 그녀는 붙잡힌 손을 빼고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케이크를 보았다.
데이브는 그녀를 바라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네가 알고 있는 엘레나답지 않은 말이군."
깜짝 놀라 엘레나는 포크를 떨어뜨렸다.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옛날의 내가 아니에요, 데이비드. 우리는 1년 동안 교제를 계속했어요.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젊은 사람들에게 흔히 그러듯이-서로 사랑한다고 착각해 버린 거예요. 우리는----."
"나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어, 엘레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아, 도저히 그의 힘에서 도망칠 수가 없어, 하고 그녀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데이브는 생각에 잠기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엘레나도 마찬가지일 거야."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데이비드, 그것은 당신과 관계없는 일이에요." 엘레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포크로 케이크를 찍었다.
"어째서였지?" 데이브는 커피가 식는 것도 잊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아도 행복했어요. 남자가 내 마음에 들어올 여지도 시간도 없었어요. 나는 피아노와 결혼했어요, 데이비드. 그것이 내 첫사랑이에요."
"그것은 엘레나가 18세 때 말한 구실이었어. 내 구실은 풋볼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믿지 않아.... 아마 엘레나도 믿지 않을 거야."
"나는 피아니스트로서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에요. 중대한 전환점에 직면했지 때문에, 나는....."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더듬었다.
"계속해." 데이브가 재촉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엘레나는 코트를 들고 코트 소매에 팔을 꿰었다.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데이비드. 만나서 즐거웠어요."
"그만둬!" 데이브가 엄한 소리로 말을 막았다. "엘레나, 그리운 학생 시절의 친구에 지나진 말아 줘."
"데이비드." 엘레나는 코트의 퍼스너를 올리면서 말했다. "만일 이것이 인생의 갈림길이어서, 당신이 우리 사이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애매한 것을 다시 한번 붙잡으려 한다면, 나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해볼 여유가 없어요."
데이브가 일어나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가 잘못되었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헤어진 것이 잘못이라고 후회한 일이 없어?"
"데이비드........"
"아니, 끝까정 들어 줘." 그의 음성에는 초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엘레나는 내게 피아노가 유일한 애인이라고 믿게 하려 했고, 나는 그것을 믿었어. 하지만 엘레나, 나는 이제 와서 그것이 잘못이란 것을 깨달았어.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큰 잘못을 저질렀어." 그의 어투는 차차 내면적인 음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엘레나는 추운 밤공기 속으로 나가면서 반반했다. "하지만 나는 달라요. 나는 내 인생에 만족하고 있고, 단 한 번도.....좀처럼 내 결정을 후회한 일이 없어요."
"좀처럼?" 데이브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방향을 돌려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허리에 팔을 돌렸다. "좀처럼이라고 했지, 엘레나? 그러면 어떤 때 후회하나?"
엘레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어떤 때야, 엘레나?"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 엘레나는 코트 깃으로 귀를 가렸다. "밤중에?" 그의 입김이 뺨을 간질이고 몸에 뜨거운 열기를 전해 주었다. "추운 밤, 침대에 홀로 누워 있을 때인가?"
"내가 언제나 혼자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아세요?" 엘레나는 아직도 그의 품속에서 버둥거리며 예리하게 쏘아붙였다. "정열적인 애인이 지금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허어----." 데이브는 일부러 말끝을 길게 끌며 손을 놓아 주었다. "정말인가? 좋아, 그렇다면 확인해봐야지," 그는 엘레나의 팔꿈치를 꼭 붙잡고 한길로 끌고 가 택시를 잡으려 했다.
"어떻게 할 작정이세요?" 엘레나가 당황해 하면서 물었다.
"엘레나의 집에 가서 애인--아니, 전의 애인을 쫓아 버리겠어."
"거짓말이에요. 잠시 농담을 했을 뿐이에요, 데이비드." 엘레나가 비명을 올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럴 테지.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엘레나만 상관없다면."
"안돼요!" 엘레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란 말이에요, 데이비드."
택시가 멈췄다. 데이브는 문을 열고 그녀가 타기를 기다렸다.
"나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요. 택시는 필요하지 않아요."
"나에겐 필요해. 얼어붙을 것만 같아."
"그렇다면 당신이나 타세요. 나는 걸어가겠어요."
"이미 늦었고, 이 부근은 시끄러워, 그리고 엘레나 체격으로는 불한당들로부터 몸을 지킬 수가 없어."
"당신도 나를 노리는 사람 중의 하나인가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꼬았다.
"나는 14세 때부터 러닝 백으로서는 실력이 있었으니까 엘레나를 붙드는 것쯤은 문제없지. 그러나 아마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겠지. 자아 어서 타."
택시는 히터를 모두 가동했는지 무척 답답했다. 엘레나는 간단히 길을 가르쳐 주었다. 택시는 폐허가 된 빌딩 사이를 누비며 달렸다. 시당국으로서는 빌딩을 헐어 버릴 만한 예산도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엘레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남자는 필요치 않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 다짐했다.
"저기예요." 엘레나가 빅토리아 시대 건물이 늘어선 한 모퉁이를 가리켰다.
택시가 멎자 데이브는 다리의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자아, 그러면 엘레나의 애인인가 하는 놈의 뼈를 추리러 갈까?" 그는 엘레나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의 가슴에 손을 댄 앨레나는, 그 심장의 고동이 자기 못지않게 빠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침통하게 울렸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다음엔 언제 만날 수 있을까?" 그의 입술이 귀에 와 닿자 빰이 뜨거워졌다.
"다시는 만날 수 없어요, 데이비드.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내가 아니지 않아요? 우리는 마치........"
"한밤중의 배와 같다는 것인가?"
"그래요. 좀 더 정확한 말을 찾으려 했지만, 역시 그 말이 맞군요." 엘레나는 신중히 말을 선택하여 이야기를 계속했다. "인생의 한 시기를 우리는 같이 보내 왔어요. 하지만 때는 이미 지나가 버렸어요. 어린 시절의 때는 지나갔어요, 데이비드."
엘레나는 눈앞에 있는 뚜렷한 윤곽의 사나이를 바라보면서 자기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끝난 것이 아니다. 결코 끝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는 미완성 심포니로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되고, 마지막 화음은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연주될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이야, 엘레나." 데이브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는 듀엣이야. 각각 다른 파트를 연주하는 운명이지만, 서로의 선율이 결여되면 불완전한 것이 돼."
데이브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표현할 멜로디를 생각하면서 엘레나는 가만히 웃었다. 눈동자는 그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였다. 연한 녹색 눈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빛나고, 드뷔시의 [월광]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안녕히 가세요, 데이비드." 엘레나는 최면술과도 같은 그의 포옹에서 몸을 빼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데이브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잘 자, 엘레나." 그의 음성은 너무 낮아 엘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홈을 찾게 될 것 같군."
엘레나는 문을 닫아 걸고 가슴의 고동을 진정시키고 자 유리 패널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는 허탈한 듯 코트를 벗고 클로짓의 낡은 유리제 손잡이를 쥐었다. 문득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나날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6년 이상이나 살아온 이 집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방황하는 엘레나의 심적 균형을 회복시켜 주었다. 7년 전에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얼이 빠진 두 여성, 즉 그의 아내와 딸만이 뒤에 남았다. 엘레나는 어머니에 대해 별로 친근감을 갖지 못했으나, 그런대로 두 여성은 서로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레나에게 있어서는 아버지가 인생의 지배자요 견인력이었다. 그녀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무렵 집에 있는 피아노를 치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 피아노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가사를 돕는 일 같은 것도 일절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엘레나의 연주를 가장 기뻐한 사람도 아버지였다.
엘레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쉬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녀는 완벽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를 위해서.
그러나 슈버트 부인은 마치 수도원에 있는 것 같은 딸의 생활에 대해 고민했다. 엘레나가 오로지 음악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안타까왔다. 엘레나에게 친구가 없는 것을 걱정했고, 딸이 거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자 더욱 난감해 했다.
그러나 부인은 딸을 사랑했고, 동시에 가엾게 생각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즐거웠던 23년간에 걸친 결혼 생활의 종말을 한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엘레나가 비탄에 빠진 나머지 생전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함께 나누어 가졌던 생활에 점점 더 깊이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엘레나는 전보다 더 피아노 속으로 도피했고, 죽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연주
에 열을 올렸다.
슈버트 부인은 엘레나와 함께 이 집으로 이사하여 숙련된 가정부로서의 역할을 계속했다. 그러나 5개월쯤 전에 그녀는 재혼하여 캘리포니아로 옮겨 갔다. 이 때문에 엘레나는 가사와 주변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어머니 자신의 인생이 있다고 생각한 엘레나는, 어머니의 재혼을 자신에 대한 배반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추억을 중단하고 클로짓의 문을 닫은 후 낮익은 보금자리를 다시 확인하듯 리빙룸으로 향했다. 그녀는 음악 다음으로 이 낡은 집을 무엇보다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던 피아노 쪽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화재로 폐허화된 극장터에서 4년 전에 발견한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는 극장에서 몇 년 동안이나 보드빌을 비롯하여 봅 포시에 이르기까지 온갖 불멸의 멜로디를 연주헤온 것이었다.
그녀는 이 피아노를 몇 겹이나 와니스를 칠하고 윤을 내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닦고 기름을 칠하고 조율하여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친구인 마릴라와 함께 소비한 긴 시간을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잘 훈련된 손으로 말을 걸면, 피아노는 풍부한 음색의 리플레이션으로 여기 대답하곤 했다. 이처럼 오랜 교류가 계속된 결과 피아노는 엘레나에게 있어서 단순한 악기 이상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엘레나는 쿠션을 깐 의자에 앉아 키에 오른손 엄지를 얹어 놓고 크레센도를 시도해 보았다. 왼손도 곁들여 쇼팽의 녹톤을 쳤다.
갑자기 엘레나는 두 손으로 건반을 때리며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어쩌다 그와 재회하게 되었을까! 데이비드 애트웰!
엘레나는 맥없이 일어나서 램프의 불을 차례로 꺼나갔다. 작은 불빛이 하나하나 사라지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의 기분과도 같이. 그러고 나서 엘레나는 심한 피로를 느끼며 침실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욕조에 더운물을 채우고 검정 드레스를 벗었다. 연주회를 위해 하였던 짙은 화장을 천천히 지우고 욕조에 인동덩굴 향내가 나는 향유를 뿌린 뒤 뜨거운 물속에 몸을 잠갔다.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해, 엘레나. 과민해진 것인지도 모르니까. 내일이면 데이브는 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자신을 속이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과민해진 것이 아니야. 데에브는 진지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엘레나는 마음이 소리를 떨쳐 버렸다. 피로감만이 남았다. 욕조에서 나와 몸을 말리고 파우더를 바른 뒤크림빛 코튼 가운을 걸쳤다.
머리를 묶었던 고무줄을 풀었더니 숱 많은 머리가 허리까지 늘어졌다. 엘레나는 컬을 펴려고 50번이나 솔질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놋쇠 침대에 깨끗한 시트, 수면만이 혼미한 정신을 되살려 줄 것이다. 그녀는 고풍스런 퀼트를 턱까지 끌어올리고 레에스로 가장자리를 두른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잠을 자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다. 머릿속에서 드뷔시의 ‘월광’이 인상파의 그림 같은 소리의 색채를 띠고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 옛날 어느 날 밤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것은 미주리의 겨울, 그해 처음으로 큰 눈이 내린 추운 밤이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큰 눈송이가 데이브의 차 주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백시트에서 데이브의 가슴에 몸을 맡기고 있던 엘레나는, 뒤에서 끌어안은 강력한 그의 팔을 의식하면서 그 심장의 고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불규칙적으로 되어가는 듯했다.
엘레나의 목덜미에서 뺨으로 다정한 키스를 퍼붓고 있던 데이브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겹쳐지자 더욱 정열적으로 불탔다. 그녀에게서 새로운 감각을 이끌어내려는 듯이.........
엘레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결이 거칠어지고 손바닥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안 돼! 그런 일은 허락할 수 없어, 절대로! 누구한테도 정신 집중을 방해당할 수 없다. 나의 커리어에 노력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되니까!
"어떤 사람이라도 나를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릴 수는 없어." 엘레나는 도전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신도요, 데이비드 애트웰. 우리가 듀엣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에요. 나는 솔리스트에요. 12년 전에 헤어진 이후 나는 줄곧 솔리스트예요."
3장
엘레나는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그러나 아침 일곱시에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토우스트한 조각으로 조반을 대신하고 피아노 앞에서 차를 마셨다.
엘레나는 6세 태부터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규칙 바른 생활을 계속해 왔다. 어렸을 때도 아버지와 피아노교사는 하루 네 시간의 연습을 그녀에게 강요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연습 시간이 여섯 시간으로 늘었다. 졸업 후에는 부모의 수입이 허락되는 한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의 지도를 받았고, 국내의 모든 대회에 참가했다. 몇 번이나 입상했으나 우승한 일은 없었다. 엘레나는 자기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하여, 언제나 최종 판정에서 근소한 점수 차이로 독특한 연주 스타일의 소유자에게 패배하곤 했다. 대체로 피아니스트는 25세경이면 그 일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어느 시의 오케스트라에 고용되거나 교사의 길을 택하게 된다.
마릴리 혜네시는 그런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의 하나였다. 그녀와 엘레나는 피아노 교사의 스튜디오에서 알게 되었다. 마릴리는 명문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성격적으로는 매우 강인한 아가씨였다. 엘래나와 마릴리가 어떵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의문스럽기도 했다. 아마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성격 속에 자신에게 결여됩 장점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엘레나에게는 마릴리가 갖지 못한 성실성이 입었고, 마릴리에게는 옐레나가 갖지 못한 분방함과 경박하기까지 한 행동력이 있었다.
그러한 마릴리도 드디어 25세가 되자 사립학교의 음악교사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무대는 일이 끝난 뒤의 사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릴리와 같은 인생철학은 자기에게 결코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앨레나는 자각하고 있었다. 자기 인생은 연주하는 데 있고, 연주가 바로 그녀의 인생인 것이다.
다행히도 엘레나는 29세 때 많은 응모자 가운데서 뽑혀 현재의 오케스트라에 채용되었으나, 30세가 된 지에도 같은 세대 중에서 가장 걸출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 매일 아침 조반이 끝나면 피아노 앞에서 네 시간을 보내며 몇 곡이나 협주곡을 연습했고, 그 작품에 대해 여러 가지 각도로 해석하며 연주해 보았다. 낮에는 짧은 휴식을 취하고 오후가 되면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함께 리허설을 한다. 연주회가 없는 밤이면 저녁 후에도 피아노 앞에 앉아 몇 시간이나 작곡과 편곡에 열중한다. 이것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간 이후 8년 동안에 걸쳐 그녀가 하고 있는 생활의 전부였다.
전화가 온 것은 열 시쯤, 엘레나가 생상스의 콘체르토를 연습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렉세이였다.
"여어, 나의 작은 비둘기." 그는 언제나 유행에 뒤떨어진 인사로 말을 시작한다. "오늘 아침 그 미스 푸른 눈이 우리 오케스트라의 이사 앞에서 연주하게 됐다는 것을 전하려고 전화했어. 이런 멋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겠지, 헬레나? 지금 듣고 있나?"
"네." 그녀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결코 엘레나익 연습을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저 용기를 좀 북돋워 주고 싶었을 뿐이지."
"당신은 정말 짓궂은 사람이군요, 알렉세이."
"저런,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군. 어쨌든 그녀의 연주는 열 시 반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 주겠어, 나중에."
알렉세이가 전화를 끊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엘레나는 그대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잠시 후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이 순간이 오리라고는 몇 주일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순간이 오자 역시 견딜 수 없었다.
티나 볼코프스키는 이 교향악단의 어느 이사의 조카로서 19세의 처녀였다. 그녀는 7세 때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뒤에 왼손이 세 군데나 골절을 당하는 등 사고를 만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의 길이 막히는가 싶었다. 그런데 몇 년에 걸친 철저한 기능 회복 훈련과 레슨의 결과, 다시 정상을 목표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티나는 매우 뛰어난 피아니스트임에는 틀림없겠지만, 만일 백모의 영향력이 없었다면 이처럼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하고 옐레나는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전에 알렉세이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했을 때, 그는 애매하게 어깨를 추슬러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주일 동안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아, 엘레나는 연주할 때마다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감시받고 있다-주의 깊이. 엘례나는 자기가 이 어린 재원과 비교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연주는 그녀의 생활 바로 그것이다! 만일 지금의 지위를 잃으면 이미 갈 곳이 없다. 30이 넘은 경험자를 고용할 오케스트라가 있을 리가 없다. 지금 교향악단이 구하고 있는 것은 달걀에서 막 나온 신선한 병아리들이다.
엘레나는 알렉세이의 전화 따위에 일과가 방해될 수는 없다고 여기며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녀는 몇 페이지에 걸쳐 콘체르토를 쳐 보았으나 계속해서 실수만 거듭했다. 마침내 단념하고 악보를 닫았다. 가보아야지, 알렉세이는 내가 갈 것이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단 것이다.
그녀는 빛바랜 데님 진즈와 스모크를 벗어버리고 페이즐리 무늬의 개더스커트와 어깨애서 가슴까지 드레이프가 있는 푸른 스웨터를 입었다.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그녀는 결국 깨끗이 화장을 하고 둘로 묶은머리를 뒤에서 서는으로 매었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향수병에 손을 내밀었다.
엘레나는 찬 바깥 공기로부터 몸을 보호해 줄 긴 청색 케이프를 두르고 콘서트 홀로 향하면서,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해 볼 여유를 찾았다. 고 처녀에게도 역시 도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사들은 동료의 조카가 연주하는 것을 할 수 없이 듣는 처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뿐이다-동료의 의리에 불과할 것이다. 알렉세이는 그 비뚤어진 흥미 때문에 엘레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지, 결코 진심으로 그녀가 나를 대신하리라고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홀이 가까와짐에 따라 엘레나는 마음이 홀가분해져 발걸음이 가벼웠다. 잿빛이 감도는 싸늘한 겨울 거리를 바라보니, 푸른 하늘과 햇빛이 찾아올 봄이 성큼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짧은 봄날과 같이 엘례나의 명랑한 기분으로 순식간에 흐려지고 말았다.
티나 볼코프스키의 연주가 진행됨에 따라 옐레나는 낮빛이 변했다. 홀은 텅 비어 있고 이사들만이 앞쪽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엘례나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뒤에 앉아 있었다.
티나는 베토벤의 제5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피아노에서 넘쳐흐르는 풍부한 음색에 홀의 벽이 떠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차차 불안해졌다. 이 아가씨는 망가지기 쉬운, 등근 얼굴의 인형 같다고 옐레나는 씁쓸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치 15세 소녀처럼 꾸몄기 때문에, 스테이지에 신선한 맛을 보태 주고 있었다.
엘레나는 클라이맥스 부분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자기도 이제 끝장이 왔는지 모른다고 비로소 실감했다. 이것은 자존심이 강한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는 타격이었다.
그녀는 지금 오케스트라에서 맡고 있는 위치에 오르기까지 갖은 노력을 다해 왔던 것이다. 우정을 마다하고 젊은이로서외 여러 가지 활동도 단념하면서, 오직 피아니스트로서의 자리를 다지기 위해 나날을 바쳐왔던 것이다.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그녀에게서 현재의 포지션을 뺏다니 정정당당하지가 못하다. 이제 와서 단념하기에는 자신이 지불한 회생이 너무 크다.
심포니의 마지막 코드가 연주되기 직전, 옐레나는 몰래 빠져나와 넓은 석조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갑자기 추위가 맹렬한 기세로 엘레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보도를 가로질러 건물과 반대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초점이 흐트러진 어두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세계는 발밑에서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어째서? 자기처럼 오랜 경험을 쌓지 못한 나 어린 애송이가 어떻게 자신보다 악단에 더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 엘레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뿐이고, 그것만이 옐레나의 소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릴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도. 또 데이비드가 어제 한 말을 미루어, 그 역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모두 음악만이 그녀의 인생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엘레나는 벤치에 앉은 채 자기가 처해 있는 입장을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데이비드라는 것을 깨닫자 더욱 난처해졌다.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내 앞에 나타나다니!
데이비드가 엘레나 옆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겨울 하늘과도 같이 잿빛이 감도는 그의 푸른 눈과, 언제나 변치 않는 억제된 표정을 바라보았다.
"여어! " 데이브의 음성은 싱싱한 기대를 자아내고 있었다.
"일이 없나요?" 엘레나는 어서 그가 가버리고 혼자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냉정하게 말했다.
"일은 있지만 틈틈이 놀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데이브군은 멋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거든. 그런데 엘레나 웬일이지? 저기서 상아 건반을 두드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엘레나는 쏟아질 듯한 눈물을 억제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일을 생각하면 안 돼. 이야기해도 안 돼. 이야기하면 티나에게 빼앗길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돼. 이것은 내가 부닥친 사소한 장애에 지나지 않는 거야. 이런 장애 따위는 곧 극복할 수 있어. 그런 애송이한테 지다니, 절대로 안 돼!
"풋볼 선수는 은퇴 후의 지워가 보장되어 있어서 좋겠어요." 옐레나는 이렇게 말했으나, 이때 그의 입가가 굳어진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은퇴 후의 지위? 농담이겠지?"
옐레나는 긔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억제된 표정 뒤에 숨은 감정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그래요. 어쨌든 다음 일자리가 곧 생겼지 않아요?" 엘레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질투가 섞여 있었다.
"자기가 소중히 여가는 것을 단념하기란 괴로운 일이지." 데이브는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그 때문일까? 피아니스트를 그만두고 난 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데이브는 이것을 확인하고자 입을 열려 했으나, 옐레나의 마음을 닫아 두고 있는 표정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옐레나와 같이 연주하는 동료들인가?" 데이브는 홀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몇 사람은요." 그가 화제를 바꾸어 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나머지는 콩쿠르에 나을 학생들인 것 같아요."
"야아, 저 사람들은 트워들램과 트워틀티에 틀림없어." 옐래나가 그의 시선을 쫓았더니, 첼로 케이스를 옆구리에 끼고 홀로 들어가는 키가 작고 뚱뚱한 2인조가 보였다.
"날씬해 보이죠?"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한집에 살고 있어요, 아주 화목하개. 사실은 또 한 사람이 있지만. "
"음, 단출한 세 식구로군. 저 사람은 누구지?" 이번에는 그가 바싹 마른 여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자베드 콘브라예요. 제 5바이올린을 맡고 있어요." 엘레나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그 씩씩한 모습을 보니, 그녀는 그랜드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식 모델 같군." 몹시 침울해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데이브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그녀를 웃길 수 있었다. 대학 시절에도 그녀가 까다로운 음악 이론에 짜증을 내고 있을 때나, 다가오는 리사이틀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을 때, 그는 언제나 용기를 심어 주었던 것이다. 엘레나는 옛날을 생각하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의 친구였다.
"오늘은 여기서 무슨 연주가 있지?" 그의 우울해 보이는 목소리가 엘레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앙리 버먼트의 플루트 독주예요. 원래 이름은 헨리인데 누구나 다 그럴게 불러요,"
"언젠가 한밤중에 그 친구의 방안을 들여다보아야겠군."데이비드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발가벗고 연습을 하고 있다면 무슨 내기를 할까? 물론 목의 금사슬은 재외하고."
"아마 그렇게 하고 있을 거예요." 엘레나가 웃었다.
데이비드가 껄껄 웃었기 때문에 엘레나가 그의 시선을 좇았다. 코넷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남자의, 표주박형 체격을 보고 엘레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지 사람을 알지. 휴가 때 어느 볼링장에서 핀 대신 아르바이트를 한 사나이야."
"저 사람은 우리 악단의 히피예요." 엘레나는 롤러스케이트로 눈 쌓인 언덕을 넘어오는 사람을 웃으면서 가리켜 보였다. 그 음악가는 육군에서 불하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제법 귀엽군 그래." 데이비드가 놈담 삼아 말했다.
"그녀가 아니라 그예요."
데이비드가 천천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제 나는 싫증이 났어. 그리고 엘레나는 자기 동료 악단원을 그렇게 헐뜯고도 부끄럽지 않은가?"
"내가요?" 엘레나는 화를 냈다. "당신이 먼저 시작해 놓고서도."
데이비드가 손을 내려 허벅다리를 문질렸다.
"왜 그러세요?"
그는 얼른 손을 땠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추워서 약간 굳어졌을 뿐이야. 좀 움직이는 편이 좋갰군. 같이 걷지 않겠어?"
엘레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집에 돌아가 연습을 해야 해. 처음부터 이처럼 데이비드와 헛된 시간을 보낼 작정은 아니었다. 그는 무엇하러 여기 왔을까? 도대체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피아노에 정신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티나의 도전을 의식해야 한다. 앞으로 두세 차례의 연주가 결정적인 고비가 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연습을 단련시켜 두어야 한다. 경쟁에 대비하여 몸과 마음을 충분히 단련시켜 두어야 한다.
"모처럼이지만 연습이 있어요, 데이비드." 그녀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오늘 아침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딱지 막기 위해서가 아니야. 엘레나, 말해 두겠지만 나는 딱지맞는 데는 취미가 없어." 데이비드는 미소 짓고 있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매력에 압도당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옐레나는 그의 매력에 저항하듯 계속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는 엘레나의 두 팔을 잡고 얼굴이 잘 보이도록 자기 쪽으로 돌렸다. "어째서 옐레나가 짓밟힌 꽃잎처럼 힘이 없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군, 아까는 마치 장송곡인라도 부르려는 듯한 표정이더군."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뿐이에요." 엘레나는 화가 난 어투를 유지하려 했으나, 데이브가 자신의 모습을 비유하는 바람에 눈이 빛났다.
"지금 그 모습이 좋군." 그는 엘레나와 꽃과 같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봄의 꽃과 같아. 다만 음식물과 애정이 깃들인 슨질이 필요하겠어."
"데이비드." 엘레나는 난처한 듯 한숨을 쉬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우리는 어쩔 수가 없어요. 나는 결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단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때에, 제겐 그럴 틈이 없어요."
데이브가 엘레나의 케이프 속으로 손을 넣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데이비드, 안 돼요‥‥‥부탁이에요."
데이브는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진 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옐레나."
"시간이 없어요." 옐레나가 외쳤다. "정말 제겐 시간이 ............"
엘레나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데이브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의 두 팔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격렬하게 허리를 죄었다.
뜨겁고 촉촉한 데아브의 입술이 벨벳처럼 부드러운 엘레나의 입술을 탐했다. 억센 품에 안겨 그의 따스한 입술이 닿자, 사리 분별을 몰아내는 듯한 관능의 물결이 밀려 들었다.
데이브는 몸을 떼고 옐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먼 옛날의 어느 1월 달 밤의 것처럼 황홀하게 감겨져 있었다. 그가 12년 전에 끝낸 것을 다시 한번 시작하려 하고 있다고 옐레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브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옛날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어제 엘래나를 재회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같은 톤의 발라드가 흐른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적당한 터치와 무드만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정열의 랍소디가 될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도 같은 헬레나의 잿빛 눈이 매력에 넘친 그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도저히 그를 제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엘레나는 새로운 구실을 대려고 입을 열었으나, 데이비드가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입애 손을 대어 말을 가로막았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지."
"연습이 있어요, 데이비드." 그녀는 딱 잘라 거절할 작정이었으나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이것 봐, 무엇을 먹어야 해. 같이 식사하고 냐서 보내 주겠어. 약속하지."
그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어차피 식사는 해야 하니까요." 그녀는 냉정을 가장하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치 않아 그런 자신이 싫어졌다.
"여기 오는 도중에 티크아우트 가게를 보아 두었어." 그는 엘레나를 보호하듯 어깨를 안고 차 있는 데로 데려갔다.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의아스러운 듯 그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발을 끌고 있군요, 데이비드. 어제도 그랬어요."
"잘 낫지 않는군." 그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디펜스의 라인맨들이 달려들어 나를 저지하려 할 때 다쳤어."
"골절인가요? "
그녀의 순진한 질문에 데이비드는 그만 웃고 말았다.
"아니지. 그러니까 프레첼처럼 비틀어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선수 생활을 그만두었나요?" 다크블루의 메르세데스 벤츠 앞에 이르자, 데이비드는 몸을 후드에 기대고 아픈 다리를 감쌌다. 그는 엘레나의 어깨 너머로 콘서트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스테이지 생명은 끝이 난 셈이지."
"당신에게 있어서 풋볼은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나요? 스테이지에 지나지 않았나요?"
데이비드는 엘레나에게 눈을 돌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뿐이었지." 한 마디로 대답하고 그는 차에서 떠나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대신 운전해 주겠나. 추위로 다리가 굳어 버려서. "
"운전이오?"
엘례나는 눈을 크게 뜨고 데이브를 보았다. 데이브도 의외라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운전을 못한다는 말인가?"
"몇 년 전에 배우기는 했지만, 면허를 딸 시간이 없었어요." 자기가 사과라도 하는 것 같아 엘레나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30이나 된 사람이 아직 운전도 못하다니! " 그는 우습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운전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아요." 엘레나는 자신을 변호했다. "홀엔 걸어 다니면 되고, 그밖에는 차를 탈 일이 없는걸요. "
"하지만 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엔 어떻게 하지?"
"계속 연주할 생각이에요!" 데이브가 깜짝 놀랄 정도로 강한 어투였다. "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예요. 다른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는 엘레나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그녀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까? 아니다, 이렇게 겁을 먹고 있을 때는 솔직히 대답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기다려야지. 엘레나가 먼저 입을 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보다도 지금은 좀 더 절박한 문제가 있다.
그는 자기 차에 도전하듯 손을 얹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내 새로운 메르세데스 벤츠! 금빛이 곁들인 아름다운 칠! 감히 이 차로?
"어서 타." 약간 망설이면서도 명령했다. "이제부터 운전 레슨이야. "
"데이비드, 나는 그런‥‥‥‥"
그는 단호하게 차를 가리켰다. 그녀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한숨을 쉬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러면," 시트 벨트를 죄고 나자 그가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자 우선 시동을 걸어. 그리고 키를 오른쪽으로 돌려 봐, 엘레나."
모터가 삐걱거리고,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비명을 올렸다 .
"이것 봐, 이미 걸렸어, 옐레나. 이미 시동이 걸렸다니까!"
엘레나는 키에서 손을 떼고 언짢아하는 얼굴을 그에게 돌렸다.
"이것 보세요, 그렇게 계속 소리칠 작정이라면 직접 운전하지 그러세요. "
"알겠어, 미안해." 그는 달래듯이 옐레나의 팔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워낙 참을성이 없어서." 그는 심호흡을 했다. "자아, 다시 한번 해보지. 우선 명심해야 할 것은, 백미러로 뒤를 잘 보면서 신중하게 운전하는 일이야. 난폭하게 운전하는 친구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데이비드, 생각이 변했어요. 운전 같은 건 배우지 않아도 돼요."
"엘레나, 발을 빼려 하는 모양이지만 이제 와서 그렇게는 안 돼."
"하지만 난폭하게 운전하는 사람이! "
"침착하게 행동해. 엘레나라면 그들도 건드리지 않을 거야. "
"그렇게 봐 주어서 영광이군요."
"자아, 기어를 드라이브에 넣고, 이제 천천히 차를 몰아 봐."
"드라이브라니요?"
"운전을 배웠다면서?"
"네. 하지만 그것은 10년 전의 일이에요."
"알았어." 그는 한숨을 쉬면서 손의 땀을 닦았다. "D라는 문자가 있지? 그것이 드라이브의 약자야. 기어를 D에 넣어. 그게 아니야, 그것은 뉴트럴의 N이잖아? 그래그래, 천천히 악셀을 밟고."
차가 맹렬한 기세로 길로 달려 나갔다. 엘레나는 숨이 끊어질 정도로 놀라고, 데이브는 공포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브레이크야, 엘레나. 브레이크를 밟아!"
두 사람 모두 대시보드에 고꾸라졌으나 시트 벨트 덕으로 뇌진탕은 면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데이브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델리커테슨까지의 드라이브는 불과 몇 블럭 되지 않았으나, 두 사람에게는 마치 영원한 여행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차는 경련과 역주를 거듭하면서 목적지까지 달려갔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 비록 말로는 하지 않았으나 긴 한숨이 두 사람이 얼마나 놀랐던가를 역력히 말해 주고 있었다.
"당신이 쓸데없는 말을 꺼냈기 때문이에요, 데이비드 애트웰." 차에서 내리며 엘레나가 불평을 말했다.
엘레나는 가게 카운터에서 데이브의 주문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퍼테이토우 샐러드 큰 상자, 산더미 같은 스모크 핸, 큰 킬바사 소시지, 그리고 302그램이나 되는 페퍼 치즈.
"큰 시련을 당하고 나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군." 그가 핑계를 대듯이 말했다.
엘레나는 입을 꼭 다물고 모른 체했다.
차에 돌아오자 데이브가 얼른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아픈 다리가 상당히 좋아졌어."하고 말했으나, 엘레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게에서 차 있는 데로 가는 동안 그가 가볍게 발을 끄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엘레나의 집에 가서 먹어도 괜찮을까? " 그는 엘레나의 집을 향해 차를 몰면서 말했다. "나는 아직 집을 못 구하고 호텔 신세를 지고 있어."
엘레나는 떨리는 손을 그가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를 집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너무 가까이하면 그가 자기 인생의 일부가 되고, 자신의 독립된 세계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데이브는 옐레나를 홀끔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별로 상관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엘레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자기의 고독한 보금자리로 그를 안내했다.
데이브는 복잡한 심정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특이한 무드와 자연스런 장식이 매력적이기는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현실과 동떨어진 수도원 같은 느낌이 들어 답답해졌다. 도처에 매달려 있는 식물! 양치식물, 아이비, 잎이 가느다란 관엽식울. 장롱이나 엔드 테이블위에는 아프리카 제비꽃.
데이브는 그를 피하듯이 하며 부지런히 음식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있는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18세 때의 자기가 아니라고 했으나, 그의 눈에는 역시 예전 그대로였다. 12년이란 세월이 그녀의 눈언저리에 굳은 결의를 새겨 놓고는 있었지만, 자신을 인간 사회의 현실에서 유리시켜 꿈속에 살고 있다고 마음으로부터 믿고 있는 이상주의자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데이브도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달랐다. 예전에는 풋볼만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진실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데이브는 엘레나가 자기 자신을 위해 창조해 놓은 왕국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과거의 나라, 1년 내내 푸르름이 가시지 않는 식물의 동산, 끝없는 음악의 세계. 그것은 분명히 폐쇄된 세계였다.
엘레나는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데이브가 바라본다는 것을 깨닫고 잿빛 눈으로 그를 되바라보았다. 내 품안에 껴안고 거친 현실 세계에서 영원히 지켜 주고 싶다. 엘레나는 그녀 자신의 폐쇄된 세계에 너무 오래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먹었다. 엘레나는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고, 데이브는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역시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고, 그 생활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었다. 한 인간에게 정해진 장소에 있어 본 일이 없었다. 풋볼이 인생의 전부로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 왔었다.
대학 졸업도 어떤 직업이나 커리어를 재공하지는 않았다. 데이브는 처음부터 풋볼 설수가 될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인생이 될 것이고, 그는 자신의 장래를 이 풋볼을 중심으로 설계했던 것이다.
정말 어이없는 바보였어.
데이브는 테이블 너머로 엘레나를 바라보면서,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두 사람이 십자로에서 작별을 고한 12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렸으면 하고 절실히 바랐다.
"어째서 미주리를 떠났지, 엘레나?" 데이브는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놓고 굳게 다문 그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꼭 물어 보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이었다. 엘레나는 포크로 접시에 담은 퍼테이토우 샐러드를 찔렀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행한 선택에 대해 생각하거나, 과연 그것이 옳았는지에 대해 되새겨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 엘레나가 말한 이유는 기억하고 있어." 엘레나가 대답하지 않으므로 데이브가 입을 열었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서 클래식의 기초를 닦겠다고 했었지?"
"네, 그래요." 시선을 내리깐 채 엘레나가 대답했다. 차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애트웰은 그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을 하면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데이브가 엘레나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 그녀의 손이 별안간 뜨거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묻겠어. 엘레나, 왜지? 왜 미주리를‥‥‥그리고 나를 버렸지?"
엘레나는 겨우 고개를 들었으나, 그 눈은 이미 젖어있었다.
"야속해요, 데이비드. 당신 탓도 있었어요. 자기 장래밖에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당신의 인생 속에 녹아들 수가 없었고, 당신 역시 내 인생 속에 융화될 수 없었어요. " 엘레나는 그가 애무하는 손을 난폭하게 뿌리쳤다. '어째서 옛날은 옛날, 지금은 지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세요? 두 사람이 한때 교제한 일이 있었다고 해서, 12년 후 그것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이미 그것을 알 때가 되지 않았어요‥‥‥?"
"옳은 말이야." 데이브가 말했다. "다시 시작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끝난 것이 아니니까."
"당신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 엘레나는 큰소리로 말하고 주방으로 가서 먹다 남은 것을 버렸다. 그러고는 성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계속 나를 사랑했다는 것인가요? 12년 전에 버린 것을 다시 주울 생각으로 계속 기다렸다는 것인가요? "
데이브가 일어나 엘레나가 서 있는 카운터 앞으로 왔다. 그는 엘레나의 몸을 두 팔로 감싸듯이 하며 카운터에 손을 짚었다. 엘레나는 머리를 돌리고 그의 얼굴을 바로 가까이에서 올려다보았다.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이 자기가 부인돼 온 내용이기를 바라면서.
"아니야, 엘레나. 계속 사랑해 온 것은 아니야." 데이브는 엘레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실망의 빛을 나타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엘레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한 일도 없었어." 그녀의 얼굴에서 드디어 기대했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데이브가 미소 지었다.
"좋아요."마침내 엘레나가 말했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었어요. 나도 당신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나는 내 인생에 매우 만족하고 있고, 또한‥‥‥‥ ."
데이비드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그의 입술은 다정하게 뺨을 따라 이동하고, 달콤한 키스를 반복하여 그녀의 몸 깊숙한 곳에 있는 감각을 자극했다. 이어서 그의 입술은 엘레나의 목덜미로 옮겨져 떨리는 듯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엘레나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저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젖혔다. 데이비드의 입술이 겹쳐지면서, 어지러운 세레나데처럼 오래 잠들어 있던 두 바람의 관능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묶었던 끈을 풀자 숱 많은 갈색 머리의 물결이 그녀의 등 뒤로 흘러내렸다. 그는 카운터에 기대어 있던 엘레나의 팔을 안고 허리에 손을 받쳐 강하게 끌어당겼다.
엘레나는 감춰져 있던 욕망에 거역하려고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이 두 손이 자연적으로 그의 팔을 따라 올라가 목에 감겼다. 그로 인해 불러일으켜진 감정! 기억! 욕망!
엘레나의 심장은 메트로놈과도 같이 스타카토를 치고 있었다. 상대방에게서도 같은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데이비드의 탄력 있는 어깨에 손을 가져가면서 떨리는 근육을 움켜쥐었다.
그 육체의 감각을 정말 잊은 적이 있었던 것일까? 그만이 불붙일 수 있던 이 욕망을 누가 풀어 준 일이 있었던 것일까?
데이비드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면서 엘레나의 귓전에 뜨겁고 거친 숨결을 토해 냈다.
"엘레나! " 그가 속삭였다. "아까 한 말은 거짓이었어. 엘레나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어. 이처럼 격한‥‥‥흥분을 느낀 일은 처음이야. " 그는 손등으로 엘레나의 뺨을 쓸면서 얼굴을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마음을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그러나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엘레나는 알겠지?"
엘레나는 불타는 눈으로 자신의 영혼을 앗아간 그 강력하고 매력 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 닿았을 때의 떨리는 듯한 감동은 바하의 미사곡처럼 영감에 차고 고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엘레나는 데이비드의 말을 긍정하듯 그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 순간 전화 벨 소리가 요란히 울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섬세한 환상의 실을 끊었다.
"네, 여보세요?" 엘레나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대체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렸나?" 전화에서 알렉세이의 금속성 소리가 들려 왔다.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뒤에 있는 창문을 돌아다보았다. 순간 알렉세이가 두 사람의 행동을 염탐하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네? 무슨 말이에요? "
"무슨 말이라니, 꼭 지켜야 할 스케줄이 있다는 것을 잊었나? 오늘은 정오부터 공개 리허설이 예정되어있어서 내가 악단원들에게 시간에 늦지 말라고 확인하고 있는 중이야. 그래, 엘레나는 무슨 구실을 댈 작정인가?"
아아, 맙소사. 정오에 러허설. 그것도 공개 리허설! 지금 몇 시일까? 어째서 그것을 잊었을까?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한 일은 없는데.
옐레나는 데이비드를 노려보았다. 바로 전 사람 때문이다. 저 사람 탓이다. 그러니 네 생활에서 그를 몰아내야 해, 엘레나.
절대로 화를 내게 해서는 안 될 사람이 알렉세이다. 그는 이사들에게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날이면, 그는 티나 불코프스키를 편들어 이사회에서 그녀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저주스러운 데이비드 애트웰! 내가 18세 때에도 그로 인해 커리어를 빼앗길 뻔했다. 그는 또 같은 일을 시도하고 있다. 그와 같이 보낼 시간은 전혀 없다. 악단에서의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중요한 것이다.
"5분 이내로 가겠어요, 알렉세이." 엘레나는 용서를 구하듯이 말했다.
"3분 이내에 오도록 해." 알렉세이의 명랑인 되돌아왔다.
4장
"시끄러워!" 엘레나는 머리 위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고 있는 연습실의 형광등을 향해 소리치고는, 아까부터 몇 번이나 치고 있던 마지막 4소절을 다시 한번 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계속 같은 대목에서 틀리곤 했다. 어째서 템보가 흩어지는 것일까? 한숨을 쉬며 다시 되풀이했더니 이번에는 좀 나았다. 그래서 곡을 처음부터 다시 쳤는데, 그러자 다른 곳에서 또 막혔다.
엘레나는 티나 볼코프스키를 의식하여 손이 굳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자신율 타일렀다. 내게는 재능이 있다. 경험도 있다. 티나보다는 훨씬 더 오케스트라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다.
피아노 위의 메트로놈을 규정된 빠르기로 조정해 놓고 처음부터 다시 쳤다. 어려운 소절에서도 애써 템포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쳤다. 큰 소리로 박자를 세며 몇 번이나 되풀이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손과 손목의 근육이 아파 왔다.
엘레나는 끝내 신경질을 내며 악보를 덮고 메트로놈을 치운 다음 연습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만나는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콘서트홀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엘레나는 문의 키를 돌리면서 겨우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다. 조응한 성역에 들어서니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찬장에서 퍼테이토우 수프 통조림을 꺼내 왔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찬장에 크래커가 있는 것을 보고 접시에 담아 수프 컵 옆에 놓았다. 그러고는 홍차를 끓여 갸지고 창가의 테이블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태양이 두꺼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식당의 나무를 따뜻하게 해주었고, 테이블 위에 있는 화분의 제비꽃을 시들게 하고 있었다. 옐례나는 바삭바삭해진 훔을 보고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후회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므로 오후에 리허설이 없었다. 음악가 조함의 노동 계정은 주말을 규정하는데 까다로왔다. 오늘은 집안을 정리하는 날로서, 화초에 물을 주고 세탁물을 세탁소에 맡기고 나서 청소를 한 뒤, 몇 주 전부터 손대고 있던 작곡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수프를 마시고 나자 컵과 스푼을 씻어 카운터에 말렸다. 다음에 2층으로 올라가 일주일분의 세탁물을 챙겨 놓고 세탁소에 전화했다. 집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옐레나는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와 같이 살 때는 어머니가 모든 일을 떠맡았고, 엘레나는 오직 피아노에만 열중하여 가사에 관한 일체를 습득하는 데 태만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예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세속적인 관계에서는 결코 생길 수 없는 확고한 생활의 중심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그 결과, 엘레나는 일상생활의 잡일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 여자가 되고 말았다.
시트와 베게 커버를 갈려고 2층에 올라가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주방으로 돌아와 수화기를 드니, 뜻밖에도 어머니한테서 온 전화였다. 평소에는 장거리 요금이 싼 일요일에 걸려 오곤 했었는데.
"네가 걱정이 되어서 전화했어." 의아해 하는 엘레나에게 슈버트 부인이 말했다.
"대관절 무엇이 걱정스럽죠?"
"네 편지를 오늘 읽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것 같아서‥‥‥‥."
엘레나는 3일 전 어머니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데이비드 애트웰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문맥에서 어떤 낌새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럼, 대학 시절에 안 그 청년이 같은 고장에 살고 있다는 거냐?" 슈버트 부인은 이렇게 묻고 하품까지 해보였다. 그러나 엘레나는 속지 앉았다. 엄마는 좀 더 알고 싶어 초조해 하고 있는 거야.
"네, 그는 은퇴한 풋볼 선수예요." 엘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 말만을 했다.
"알고 있다. 한때 너하고 교제하지 않았더냐?"
"몇 번 데이트도 했었어요."
"어마, 그랬니? 그래서, 아직도 데이트하고 있는 거니?" 엘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엄마. 공연히 편지에 그 말을 한 것 같군요. 그와는 두 번 만났을 뿐이에요."
"엘레나." 엘레나는 숨을 죽였다. 어머니의 말투로 보아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지나친 간섭은 하고 싶지 않아, 엘레나. 내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어. 네 일이 언제나 네 자신을 결정해 온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남성이란 내 인생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네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으로 미스터 애트웰을 실망시켰다면, 나는 찬성할 수 없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야. 그런데 거기 날씨는 어떠니?"
엘레나는 세탁물 꾸러미를 현관에 갖다 놓는 동안, 어머니가 한 충고를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당연한 말을 인정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엘레나는 피아노용 의자에 앉아 작곡 중이던 곡을 펼쳤다.
2,3주일 전에 시작한 작업은 이제 제법 악상이 전개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순수한 클래식조였는데, 어느 틈에 현대적인 사운드로 변해 있었다. 때때로 멜랑콜릭하고 향수를 휴발시키기도 하는 곡은, 난로 앞에서 브랜시를 마시며 듣기에 알맞은 곡이었다.
정열적인 멜로디가 날개를 단 듯 가볍게 흐르는 경괘한 악장 도중에, 엘레나는 문득 데이비드 생각을 했다. 음악 탓일지, 또는 그가 없는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곡의 이 부분은 마음속에서 그와 함께 작곡한 것과도 같았다. 이 곡을 치고 있노라면 데이브의 품안에 있는 자신을 느끼고 그의 달콤한 입술을 맛보며 그의 강력한 육체를 느낄 수가 있었다.
갑자기 건반에서 손을 떼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데이비드에 대한 욕망이 온몸에 물결치고, 그의 애무를 찾아 감각이 용솟음쳤다. 어째서 한시도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 이런 욕구를 느낀다는 것은 원치 않은 일이었는데. 엘레나는 눈앞에 있는 악보에 정신을 집중하려 했으나, 마음의 동요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데이비드에게 전화를 해보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하지만 아마 그렇게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안기면,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중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벼려야 해, 헬레나! 잊어야 해! 마음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눈물이 넘쳐 시아를 가리고, 마침내는 뺨을 따라 흘려 내렸다.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에는 확고한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숲에 버려진 미아처럼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엘레나는 맥없이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다시 홍차를 한 잔 마셨다. 일주일 동안 데이비드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을 그토록 다행스럽게 여겼는데, 지금은‥‥‥지금은 그를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오늘은 토요일, 호텔에 전화하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엘레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곧, 오늘은 내셔널 풋볼 리그의 시합이 있다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이 시합을 중계하기 위해 피츠버그애 가 있을 것이었다.
엘레나는 홍차 잔을 놓고 휴대용 텔레비전을 둔 거실의 캐비닛을 열어 블라우스 소매로 화면을 닦은 뒤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러나 스위치를 넣으려다 잠시 망설였다. 데이비드에게 이끌리는 것은 다만 육체적인 것이고 쉽게 잊을 수 있다고 자부해 왔으나, 만일 그의 생활이나 행동에 깊이 관여하면 그와의 관계를 간단히 끓어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인생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가 부여해 주는 육체적 만족만을 바라는 것일까? 엘레나는 가볍게 눈을 감고 스위치를 넣었다,
그가 중계하는 것은 피츠버그의 어느 팀이 출전하는 홈 게임이라는 것밖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채널도 알지 못했다. 채널을 돌리자 풋볼 장면이 비쳤다.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나 데이비드의 음성이 아니었다. 다시 채널을 돌리자 볼링과 피겨 스케이팅 중계가 비쳤다. 또다시 채널을 돌렸을 때 마침내 그녀가 훤하던 풋볼 시합치 비쳤다. 마침 하프타임이었기 때문에, 엘레나는 스코어보드와 코미션을 바라보면서 시합이 속개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부터 관전하시는 분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단연 피츠버그가 우세합니다. 80미터를 독주한 프랭크 해리스를 선두로 스틸라이즈는 겨우 4회의 터치다운을 얻은 데에 불과 합니다." 데이브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때, 엘레나는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후반이 시작되면 피츠버그가 킥오프할 것 같은데, 클리블랜드 브라운즈가 이 시합을 만회하려면 이것을 커트해야 할 것입니다. "
잘 울리는 목소리와 명쾌한 어조로 보아 데이비드가 분명했다. 그는 이렇게 일자리를 얻고 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엘레나는 시합의 경과엔 흥미가 없었으나, 선수들의 모든 동작을 전해 주는 데이비드의 음성을 듣는 것은 즐거웠다. 선수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전하는 데이브의 멋진 해설에 엘레나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눈은 텔레비전의 화면을 좇고 있었으나,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12년 전의 그라운드였다.
추운 날이었다. 그녀는 휵심한 추위를 담요로 달래고,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시합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옐레나가 처음 보는 시합이었다. 풋불에 흥미가 없었지만, 데이비드가 그녀의 관전을 희망했기 때문에 갔던 것이다. 게임의 기본은 간단했다-공을 그라운드 양끝에 있는 H형 골문에 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합의 룰이나 자세한 점에 이르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데이비드 위에 열 명 이나 되는 선수가 겹쳐지는 것을 보고 몸을 떨었으며, 그가 공을 잡고 주위의 관객이 박수를 보낼 때마다 자신도 정신없이 손뼉을 쳤다.
어느 날, 엘레나는 꽃피는 소녀의 한결같은 마음에서 자기가 데이비드률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이를 웃도는 분별력을 가졌던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는 있으나 그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가지 꿈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선택에 쫓겼다.
엘레나는 결단을 내리고 음악을 택했다. 장래를 같이할 것은 음악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12년 후인 지금, 그녀는 다시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이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엘레나는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스위치를 껐다. 여기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를 얽매고 있는 것 데이비드의 음성, 자신의 피아노, 그리고 고독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엘레나는 옷장에서 퀄팅 웃도리를 꺼내고 털모자와 장갑을 챙겨 알렉세이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에 대한 엘렉세이의 고자세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라면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엘레나가 바라는 것은 충고와 지도였다. 물론 오케스트라 동료를 찾아가거나 마릴리에게 전화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알렉세이가 좋았다. 그는 오만하기는 하나, 사물을 객관적 ․논리적으로 보는 능력이 있고 왕겨 속에서 한 알의 진실을 찾아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티나 볼코프스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엘레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의 아파트로 향하면서,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운명에 맡기자고 다짐했다. 알렉세이의 격려를 받으면 자기를 되찾을 수 있으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알렉세이가 제발 집에 있어 주었으면, 현관에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서 엘레나는 기원했다. 닫혀진 문 너머로 특이한 중동풍의 선율이 올려 퍼지는 것이 들렸다.
몇 번 벨을 누른 끝에 겨우 문이 열리고 알렉세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의 귀여운 엘레나." 눈이 휘퉁그레지고 숨결에 독특한 향내가 있었다. 그는 시판되는 담배보다 더 독한 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 순간에 엘레나가 나타나다니, 이 무슨 우연일까."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마 세리."
엘레나는 그가 서투른 프랑스어를 하는 것이 싫었다. 알렉세이의 조상은 동유럽 출신으로서 부모는 대전 중 프랑스에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에 건너와 살았다. 그는 대화중에 간간이 프랑스어를 섞음으로써 세련된 유럽풍의 인상을 주고 있다고 멋대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렉세이가 문을 활짝 열였기 때문에 얄은 새틴 가운을 입었을 뿐인 그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실내에는 마리화나의 냄새가 가득했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시타르 소리에 사고력도 마비될 것 같았다.
"스테레오의 볼륨을 좀 낮추 수 없을까요, 알렉세이?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 엘레나는 손으로 귀를 막으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알렉세이가 보이지 않는 모습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자, 엘레나는 그가 신호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티나 볼코프스키가 동그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짧은 가운과 맨발의 모습으로 스테레오 있는 쪽으로 가서 볼룸을 내렸다.
엘렉세이는 엘레나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고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왜 그러지, 아가씨?"
엘레나도 얼마 동안 망연히 알렉세이를 바라보면서, 가슴의 동요를 애써 진정시키려 했다. 티나 볼코프스키가 알렉세이의 방에 있다니! 하지만 어째서? 엘레나, 정신 차려야 한다. 이유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티나는 자신의 가장 유효한 무기를 사용하여 솔리스트로서의 길을 쟁취하려 하고 있는 거야.
엘레나는 통곡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제했다. 알렉세이를 노려보고 나서 티나에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히스테릭한 말이 튀어나올 것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야지! 이 악몽에서 눈을 깨야지!
알렉세이, 어쩌면 이런 일을! 방에서 뛰쳐나와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엘레나의 등 뒤에서 알렉세이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엘레나는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갔으나, 한가로이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씻으려고도 하지 않고 차도에 내려가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택시의 문조차 제대로 열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꿈일 것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해, 엘레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직도 모른다는 말인가? 내동댕이쳐진 거야. 모든 것이 끝장이야. 티나의 승리야. 티나의 싱싱한 육체가 네 미리를 사장시켜 버렸어.
아니야! 엘레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티나가 거기 있었던 것은 우슨 정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엘레나는 자신을 위로했다. 오케스트라와는 관계없는 용무가 있었을 거야, 분명히‥‥‥‥
택시 운전사는 애써 정면만 보려고 했으나, 뒷좌석에 있는 미친 듯한 젊은 여자에게 신경이 쓰여 자주 백미러률 들여다보았다. 손님은 제정신이 아닌 듯 혼자 울거나 지껄이거나 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손! 떨리는 가느다란 손이 마치 피아노를 치듯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백을 두드리고 있었다.
데이브는 황혼 속을 달리는 열차 좌석에 기대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기차로 돌아을 애정이었으나, 마음이 변해 그날 저녁에 돌아오기로 했던 것이다. 왜 그토록 서둘러 출고 매정한 고장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일까? 엘레나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어느 정도 분명히 나타내고 있었다. 어째서 그 심정을 이해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살며시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데이브는 기억하고 있다---그날 엘레나의 집에서 본 그녀의 눈동자, 두 사람이 느낀 정열, 불처럼 타오르고 있던 그녀의 육체를 그렇다, 그것이 이유다.
데이브는 엘레나와 같이 보낸 과거의 관계를 생각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고자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두 사람을 태워 없앨 것만 같았다.
데이브는 창밖에 시선을 돌리고 손바닥의 땀을 진즈에 닦았다. 엘레나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긴 세월을 보내며 여성 체험을 거듭했는데도 불구하고, 20세 때와 같이 땀을 흘리면서까지 가슴 설레며 마음에 아픔을 느끼는 것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토록 엘레나를 원하고 있는 것은 육체적인 것을 훨씬 초월한 무언가가 그녀에게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는 차차 짙어가는 황혼에 시선을 옮기면서 혼자 미소 지었다. 그렇다, 무엇 때문에 내일이 아니라 오늘 돌아갈 생각이 났는지 굳이 자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5장
현관 포치에 선 데이브에게 있어서 벨 소리는 아침햇살을 받고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같이 들렸다.
그러나 침대 속의 엘레나에게는 자명종의 시끄러운 소리로 들렸다.
엘레나는 졸린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두터운 퀄팅 가운을 걸치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떨면서 포치에 서 있는 데이브의 모습이 문의 3각창을 통해 보였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깊이 찌르고 있는 그는 아침 추위를 막으려는 듯이 깃을 세우고 체중을 왼발에서 오른발로 옮겨 가며 서 있었다.
엘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신과 육체가 밤새도록 싸우다가 아직 결론도 내리지 못했는데, 한편에서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밖에 세워 두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어제 알렉세이의 집에서 받은 타격을 잊기 위해 그의 육체를 두 팔로 껴안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적어도 인생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갖는 것, 현실의 편린에 접하는 것이 현재의 그녀로서는 필요한 것이었다.
천천히 문을 열자 데이브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낯익은 미소에 얼마나 용기가 북돋아지는 것일까-말은 필요치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가 말했듯이, 이것이야말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다.
문이 열린 순간 데이브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눈은 슬피 운 뒤처럼 충혈되고 검푸른 그림자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기색이 이상했다. 정확히 지적할 수는 없으나, 그를 맞는 태도부터 달랐다. 연습이 있다거나 홀에 가야 한다며 그를 따돌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던 것이다.
"안색이 아주 나쁘군." 문을 닫으면서 데이브가 말했다.
"여전히 정직하군요." 엘레나가 쓸쓸하게 웃었으나, 데이브는 그 어투의 변화를 깨달았다. 그것은 운명론자와 같은 어투로서, 마치 오래 전부터 씌어져 있는 것을 낭독하는 것과도 같았다.
엘레나는 결정적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일생에 단 한 번 정신보다는 육체를 우선시키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가운의 벨트에 손을 대었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당신 목소리를 들었어요." 엘레나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그쪽으로 돌아섰을 때에는 가운의 벨트를 풀어 놓고 있었다.
데이브의 놀란 시선이 그녀의 눈과 가운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왜 시합을 보았을까, 그의 해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밖에 질문하고 싶은 것은 한없이 많았으나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엘레나의 드러난 가슴을 바라보았다. 목덜미가 갑자기 뜨거워지고 심장이 리드미컬하게 약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와 같이 2층에 가주겠어요, 데이비드?" 엘레나의 얼굴이 태양을 향한 해바라기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고동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아아, 얼마나 이 시간을 기다렸던 것일까. 그러나 어쩐지 이상했다.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제기랄, 왜 이토록 어지러워지는 것일까?
엘레나가 그의 손을 잡고 2충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인도했다. 그녀가 두어 계단 올라갔을 때 데이브가 그녀를 만류했다.
그는 엘레나의 허리에 팔을 돌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높이가 되도록 방향을 돌려놓고 말했다.
"왜 이러지, 엘레나? 어째서 이제 와서?" 이 질문을 한 순간, 그는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엘레나의 뒤를 따라 올라가 그 뜨거운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유도 모르고 그럴 수는 없었다.
엘레나는 두 팔을 그의 목에 감고 데이브의 가슴에 안기면서 입술로 그의 입을 가만히 애무하며 날개처럼 보드라운 입맞춤을 뺨과 이마로 좡 나갔다. 다시 입술로 돌아온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그 옛날 데이브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혀로 그의 입술을 애무했다.
데이브는 엘레나의 허리에 돌린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관능적인 유혹에 응답하면서 손을 그녀의 옆구리에 깊이 찔러넣었다. 조금 전의 의혹 따위는 이미 염두에도 없었다. 현재의 그는 욕구 충족을 위해 물결치는 말초신경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데이브는 엘레나를 품속에서 밀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엘레나의 뜨거운 눈물이 뺨에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떼고 확인하려 했으나, 엘레나는 히스테릭하게 울면서 그의 목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데이브는 그녀의 마음이 진정되기까지 껴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괜찮아, 허니. 울면 못써."
엘레나는 그의 등에 손을 꼭 대고 그의 강력하고 조용한 애정에 매달렸다.
고뇌의 몇 분이 지나고 눈물이 마르자, 엘레나는 얼굴을 들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수줍은 듯 데이브 곁에서 떠나 가운의 앞자락을 여미면서 긴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무릎을 굽혀 등의자에 앉자, 데이브도 옆에 있는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데이브는 무릎 사이에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민 자세로 가만히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엘레나의 설명을 기다려면서.
엘레나는 가운 포켓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풀었다. 그러고는 무릎에 손을 얹고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만지작거렸다.
"미안해요, 데이비드. 언제나.....당신에게는 사과만 하게 되는 것 같군요." 엘레나가 씁쓸히 웃었다.
데이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오직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정말 알고 싶은지도 그는 잘 몰랐다.
너무 오랫동안 엘레나가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엘레나는...그러니까 엘레나는 끝까지 유혹을 계속할 생각이 아니었다나?"
"물론 그럴 생각이었어요." 엘레나가 외쳤다. "나는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는데다, 남자를 애타게 만드는 재주도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이유를 모르겠어."
꺼림칙하게 데이브를 바라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던 엘레나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어요, 데이비드. 정말이에요....한번 사랑을 나누고 나면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리라 생각했던 거예요. 당신에 대한 마음은.....단순히 육체적인 것이라 생각했었어요."
데이브가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진즈의 뒷주머니에 찌르고 창가에 갔다. 엘레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가까이 가서 그 억센 두 어깨며 등에 손을 미끄러뜨리며 허리에 매달리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엘레나는 방종한 충동을 머릿속에서 떨어버리며 무릎 위에 꼭 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데이브가 입을 열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엘레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다.
"나를 도구로 사용하려 했느냐고 물었어. 사실이지?"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목소리에는 타는 듯한 분노가 깃들여 있었다.
"데이비드, 나는......"
그는 홱 돌아서서 엘레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언제나 엘레나를 생각하고 있었어. 엘레나를 사랑하며 밤새도록 이 품에 안고 있었으면 하고 바라왔었어." 그는 씁쓸히 웃었다. "그런데도 엘레나는...내게 대한 욕망을 떨쳐 버리기 위해 나를 인간의 모양을 한 바이브레이터로 이용하려 했어." 그는 분노에 타는 눈으로 여전히 엘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방에서 뛰쳐나가려다 말고 엘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등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머리가 이마에 흘려 내려와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엘레나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저것 탐색해 볼 필요도 없다. 어째서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데이브는 고통스럽게 한숨을 토하고 주먹으로 문을 쳤다.
"어째서지, 엘레나?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겠나?" 그는 엘레나 곁으로 와 비로서 코트를 벗어 던졌다.
"나는 무서워요, 데이비드." 엘레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데이브는 좀 더 자세히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시 한번 말해 주지 않겠나?"
엘레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겠어요.
마음과 몸이 산산조각이 났어요."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리며 외쳤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속 피아노를 치리라 생각하고 있었지. "데이브는 애써 태연한 어조롤 대답했다. 그러나 아까처럼 냉담한 태도를 취하기란 불가능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웃으려 했지만 엘레나의 입은 일그러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직장을 잃게 될 것 같아요."
"그것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아까 그 일과 데이브의 어투가 다시 신랄해졌다.
엘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데이비드. 정말 모르겠어요." 엘레나가 두 팔을 뻗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는 경계하여 몸을 경직시켰다. 그러나 엘레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는지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사실 그와의 대화가 필요했다. 앞서 두 사람은 서로 대화가 통했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데이브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장래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기억하고 계세요? 우리의 희망은 혼자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기억하고 있지."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둘이서 나란히 앉아 그들에게 약속된 장미빛 장래를 꿈꾸고 있던 미주리 시대의 나날을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정말 천진스러웠다! 그때는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다.
"데이비드, 나는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한 일이 없어요. 그 밖의 것은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없어요." 엘레나는 그가 웃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걸어온 인생이 어떤 것이었고, 얼마나 평온했는지 그가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데이브에게 있어서 엘레나의 고백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불과 5 개월 전에 이와 똑같은 말을 그 자신이 하지 않았던가. 풋볼 선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고, 어떻게 하면 다른 직업을 택할 수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피아니스트한테 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 같다는 말인가?" 대이브는 이렇게 물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지금까지의 분노를 잊고 있었다.
"그럴 것 같아요. 그녀는 악단 이사의 조카에요. 그리고.....재능도 있고."
"엘레나 역시 재능이 있지 않아?"
"그녀는 젊어요." 엘레나는 젊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자리를 구할 수 없나?"
"여기서 그만두면 아무데서도 채용해 주지 않을 거예요. 매니저가 내 나이로는 새로운 계약이 무리라고 말했으니까요. 무서운 이야기예요."
"정말이야." 데이브는 손을 그녀의 무릎에 얹고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인생이란 불공평한 거야, 엘레나.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우리가 잘못이지. 부모가 좀 더 우리를 엄하게 가르쳤어야 했어. 어쨌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어."
엘레나는 그가 자기의 말을 정확히 이해해 준 것이 고마웠다. 그는 비웃기는커녕 모든 것을 이해해 준 것이다. 그 자신이 엘레나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나 역시 영원히 풋볼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어. 제2의 조지 브랜더가 될 수 있으리라고."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웃었다. "풋볼은 내 인생 그 자체였어, 엘레나. 나는 재수 없는 돼지가죽 공을 끼고 경기장을 달리는 것밖에 몰랐어."
엘레나는 웃으면서 데이비드의 딱 벌어진 어깨를 만졌다.
"왜 은퇴했어요?"
"몸이 마음보다 먼저 늙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너무도 여러 번 상처를 입어서, 의사가 풋볼을 그만두지 않으면 병신이 된다고 했어."
"하지만 당신은 다른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지 않아요?"
"농담은 그만둬."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어떤 지위도 얻은 기억이 없어- 이 아나운서의 일은 어쩌다 걸려든 거야. 전혀 생소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봐. 그렇지, 나는 보험회사 외무원이나 중고차 세일즈맨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런 가능성을 떨쳐 버리려는 듯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내셔널 리그에서 뛰고 있을 때는 여러 회사에서 상당한 포스트를 주겠다거나 쾨머셜에 출연하자는 교섭을 해왔지. 나는 은퇴한 후에 결정하려 했었어. 그런데 막상 은퇴하고 보니 그런 제의는 한 건도 없었어. 나는 과거의 인간이 되었어. 아무도 낙오자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지."
"당신은 결코 낙오자가 아니에요." 엘레나가 분연히 부인했다.
"지금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얼마 동안은 나 자신도 나를 진심으로 낙오자라 믿었었지." 데이브는 어깨를 으쑥했다.
"텔레비전 일은 어떻게 구했어요?" 엘레나는 자신들을 가까이하게 하여 우정의 실로 결부시킬 공통된 운명에 마음을 뺏기면서 이렇게 물었다. 마음속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우정이 아니란 것을 느끼고 있었으나,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모든 감정을 천천히 정리해 볼 생각이었다.
"이 일이 생겨났을 때 나는 저금을 O아 가지고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텔레비전의 스포츠 담당자를 모조리 만나 보았어. 이야기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면서 말이야. 엘레나도 내 애기 솜씨는 잘 알고 있잖아." 그는 수줌어하듯 웃었다.
엘레나는 웃음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자기 분석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지껄였지. 드디어 나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것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어. 하지만 이제 겨우 발판은 디딘 것 같아. 물론 이것은 이번 시즌만의 테스트에 지나지 않아. 잘하면 내년에도 예약을 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중고차 세일즈맨을 할 것인가요?" 엘레나가 농담을 하며 웃었다.
"가능성이 있지, 만일의 경우를 위해 연습해 볼까?" 그가 빙그레 웃었다.
"가능성이 많지. 만일의 경우를 위해 연습해 둘까?" 그가 빙그레 웃었다.
엘레나의 뺨을 적시고 있던 눈물은 어느 틈에 마르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유쾌히 웃고 있었다. 데이브는 그다지 그녀의 고통을 순간적으로나마 잊게 할 수 있었다. 그를 제외하면 어느누구도 엘레나를 그녀의 소우주에서 끌고 나오는 데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 엘레나는 자기가 그것을 데이브에게 감사하고 있는지, 또는 인생의 목표를 성실하고 동요하고 있는지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의 하나는," 데이브가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인생에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야."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기는 하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낼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인내심이 별로 강하지 못하니까요. 더구나 그녀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은 대개 억지로 공부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어미니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호텔의 칵테일 라운지에서도 일할 수 있어, 엘레나가 연주하고 있으면 술 취한 사람들이 엘레나 주위에 우우 모여들 걸." 데이브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 곳은 있는지도 몰라요." 엘레나는 감연히 말하고 나서, 생각난다는 듯이 말을 계속했다. "데이비드, 정말 내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쇼룸에서 어프라이트식 소형 피아노라도 팔아야 할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는 웃었다.
"적어도 엘레나는 웃을 여유는 갖고 있군. 그것이 제일보지, 좋은 징조야. 문제는 엘레나가 너무 오랫동안 세상과 동떨어져 살았다는 데 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
"하지만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
"그것은 엘레나가 다른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지." 데이브는 일어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자아, 우선 할일은 옷부터 입는 일이야. 그동안 나는 아침이라도 만들고 있겠어. 그리고 밖에 나가 하루를 같이 즐기도록 하자구."
"하지만 연습을 해야 하는데." 엘레나는 약간이나마 남아 있는 자존심을 잃기가 무서워 거절했다.
"오늘은 일요일, 휴식하는 날이야. 그리고 이 속에는 하루를 즐길 능력이 잠자고 있을 거야." 데이브는 엘레나의 머리를 가리켰다.
"안돼요, 데이비드. 연습이 있어요." 엘레나는 주먹을 허리에 대고 끝까지 거부할 결심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데이브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딱 잘라 말했다.
"한 시간만, 엘레나. 한 시간만 연습을 하도록 해. 그다음에는 내가 이.....묘지에서 끌고 나가겠어."
"묘지라고요!" 엘레나가 분개했다. "여기는 내 집이에요."
"글쎄, 어떨까." 데이브가 말했다. "평범한 말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궁궐도 묘지와 같을 때가 있지. 자아,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의무를 다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연습을 게을리 하면 벌 받을 것은 분명하다. 내 일과는 다하도록 해야지. 음악가란 그러한 것이다. 내 일과는 다하도록 해야지. 음악가란 그러한 것이다. 연습을 게을리 하면 5선지 어딘가에서 보복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의 엘레나로서는 데이브와 말다툼하기가 싫었다.
얼른 계단을 올라가 격자무늬 스커트와 네이브 블루 스웨터를 꺼내 의자 위에 놓고 욕실에 가서 세수했다. 가볍게 화장을 하고 있으려니까, 데이브가 찬장 문을 요란하게 닫고 무어라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나!" 계단 밑에서 데이브가 소리쳤다. 엘레나는 마스카라 막대로 하마터면 눈을 찌를 뻔하면서 난간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데이브가 어째서 저토록 신경질을 내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대관절 먹을 것은 어디 있지? 냉장고도 찬장도 텅 비었지 않아!"
"아마 냉장고에 빵이 있을 거에요. 어제 본 기억이 있어요."
"빵이라고! 빵밖에 없지 않아!"
"또 무엇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데이비드?"
"내가 아침을 짓겠다고 하지 않았어? 아침 식사에는 보통 베이컨 에그와 토우스트, 그리고 해시브라운이나 맷돌에 간 옥수수 정도는 있어야지."
"맷돌에 간 옥수수요?" 엘레나가 깔깔 웃었다. "놀랐어요, 레트 버틀러 씨. 당신의 말에는 숙녀들도 돌아볼 거예요."
"마음대로 조롱해도 좋아, 양키! 하지만 내가 만든 옥수수 요리를 먹어 보기까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지." 데이브가 집게손가락을 엘레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가까운 식료품 가게는 어디 있지?"
엘레나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히 1블럭쯤 앞에 작은 마킷이 있었어요. 하지만 과일과 야채, 통조림만 조금 있을 뿐이에요."
"식료품점 말이야, 엘레나. 제대로 된 식료품점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아!"
"나는 몰라요."
"엘레나는 평소에 어디서 식료품을 사지?" 데이브는 식료품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대개 외식을 하고 있어요. 가사에는 소질이 없으니까요."
"그럴 테지." 데이브는 실망했다는 투로 말했다. "어서 옷을 갈아입고 와. 그리고 같이 가게를 찾으려 가는 거야. 다른 것은 몰라도 정확하게 먹는 법만은 가르쳐 주겠어."
엘레나는 난간에 기댄 채 유혹하는 듯한 눈초리로 데이브를 바라보았다.
"레드 버틀러, 먹는 법밖에 가르쳐 주지 않겠다면 나는 여기서 나가지 않겠어요."
데이브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는 한 발씩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엘레나는 놀라서 욕실로 뛰어들어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깊이 숨을 내쉬고 처음 데이트하러 가는 소녀처럼 깔깔 웃었다.
"가능하다면, 제가 운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데이브가 가슴을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불쌍한 삼장이 하루 종일 떨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은 나에게 노인이나 연약한 사람을 겁주도록 허락하지 않았도다." 엘레나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손 들었어, 엘레나.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20분 정도 달린 끝에 두 사람은 겨우 식료품점을 발견했다. 차를 세우면서 엘레나 쪽을 바라본 데이브는, 그녀가 마치 미지의 모험에라도 나서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가 식료품점이라는 곳이야." 데이브는 관광 가이드처럼 가게를 가리켰다.
"정말이지 아주 속된 곳같이 보이는군요." 엘레나는 실망했다는 듯이 말했다.
"자아, 서민의 생활에 발을 들여놓는 거야." 데이브는 엘레나를 위해 문을 열어 주면서 재촉했다.
"이것이 4백 그램짜리 베이컨. 원료는 돼지고기지." 데이브는 정육 코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베이컨 덩어리를 그녀에게 쳐들어 보였다.
엘레나가 데이브의 배를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리고 요리가 되자마자 곧 돼지로 돌아가겠어요. 자아, 가사과 수업을 빨리 끝내지 않으면 해가 지고 말겠어요."
"하지만 기초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 5개월 동안이나 어머니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어. 거의 식사다운 식사도 못하고 어떻게 그 정도의 체중을 유지해 왔지?"
"숨을 들이머실 때마다 몸속에 칼로리가 쌓이는걸요." 식료품으로 가득 찬 쇼핑카트를 보면서 엘레나가 말했다. "이것을 다 먹고 나면 피아노 의자가 부서져 버리겠어요."
데이브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먹는 일이지. 엘레나에게는 단백질과 비타민E가 필요해." 그는 정어리가 든 팩을 들어보였다. "여기에는 비타민 E가 잔뜩 들어 있어."
"비타민 E는 어떤 효용이 있나요?"
엘레나가 천진스럽게 물었다.
데이브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엘레나가 자기를 유혹하려 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제 됐어. 엘레나에게는 이것이 필요치 않을 거야." 그는 팩을 도로 선반에 놓았다.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엘레나는 이 도피에 이미 싫증을 내고 있었다. 식료품을 사는 일이 현실 생활의 일부라 하더라도, 무엇 하나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이없었다.
데이브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영양에 대한 강의를 계속하고, 엘레나의 주방에서는 놀라운 양의 조반을 준비했다. 엘레나는 이 쇼핑에 싫증났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요리법도 쇼핑하는 법도 배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이고, 데이브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없다고 했지만 아직 자기 커리어를 단념할 생각도 없었다. 음악의 세계에서 티나 볼코프스키에게 대항할 기회가 남아 있는 한 끝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데이브가 음식을 가득 담은 접시를 내놓았다.
"이런 것을 가리켜 조반이라고 하는 거야."
엘레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접시를 받았다.
아침 식삭 끝나자 데이브는 약속대로 엘레나에게 한 시간 동안 연습을 하게 했다. 그는 등의자에 앉아 두 팔로 머리를 받치고, 피아노 의자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엘레나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페달을 밟으려고 다리를 올릴 때마다 하얀 허벅지가 살짝 드러나 보이곤 했다. 그의 몸속에서 관능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여 차차 억제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는 쾌락과 고통이 뒤섞인 눈으로 엘레나를 응시했다. 풍부한 밤색 머리로 뒤덮인 목덜미와 섬세한 손의 움직임 등 그녀의 모든 부분이 그를 흥분시켰다. 엘레나는 데이브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보다도 부드럽고 매력이 있었다. 그 엘레나가 지금 그의 애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엘레나는 데이브의 열띤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으나, 연주회 청중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와 자신을 유리시키려고 노력했다. 엘레나는 어려서부터 관중을 의식하지 않게끔 훈련되어 있었다. 일류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자신의 음악에만 몰두하고, 가장 냉혹한 비평가인 자기 자신을 위해 연주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청중과의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왜 데이브를 마음속에서 몰아낼 수 없는 것일까? 엘레나는 악보보다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충동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엘레나는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한 다음, 다음 주 대학 오케스트라와 협주할 예정인 ‘페르귄트 조곡’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곡 전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악보를 떼놓지 않았다.
데이브는 눈을 감고 엘레나의 연주를 들었다. 특히 제1 조곡은 그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엘레나가 리사이틀에서 연주한 곳이었다. 그때부터 이 곡이 그에게는 아주 마음에 들었었다.
이것은 입센의 페르귄트를 소재로 한 곳으로서, 일하기를 싫어하고 꿈만 좇는 방랑자 페르귄트와 오직 그만을 기다리는 그의 아내 솔버그의 이야기였다.
데이브는 눈을 뜨고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침 ‘솔버그의 노래’를 치고 있었다. 솔버그는 남편이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믿고, 그 애타는 마음을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비슷하군, 하고 데이브는 생각했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많은 페르귄트와 소수의 솔버그가 살고 있다. 안정되고 신뢰에 찬 결합을 반대하고 자기 본위로 살아왔다. 헛된 꿈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이제 데이브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히고 있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녀도 고향에 안주할 마음이 생긴 것일까? 그것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였다.
6장
데이브가 일어나면서 기지개를 켰다. 엘레나는 눈앞에 있는 악보에 연필로 무엇을 적어 넣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서성거리다가 엘레나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키스했다. 엘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보지 못했으나,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뭐지? " 데이브는 음표, 박자 기호, 속도 기호 등이 적힌 5선지 뭉치를 주워 들었다.
"어마, 아무것도 아니에요." 엘레나는 당황하여 셔머 교본으로 5선지를 감췄다.
"작곡을 하고 있나?" 데이브가 놀라서 물었다. "그렇지?"
"장난으로 해보았을 뿐이에요, 약간의....." 엘레나가 난처하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연주해 주지 않겠나?" 데이브는 엘레나에게 5선지를 건네주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엘레나는 거부하려고 한순간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곧 상대의 눈에 깃들인 열의를 깨닫고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녀는 남 앞에서 자기 곡을 연주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작곡에 전념하는 것도 아닌 만큼 남 앞에서 연주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브는 음악가는 아니라도 누구 못지않게 음악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남의 비판을 듣는 것도 필요하다고, 엘레나는 고쳐 생각했다.
"정직하게 비평해 주겠어요?" 엘레나가 물었다.
"작품은 사회적 평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지." 데이브는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짓고 고매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해 연주하겠어요." 엘레나는 단념했다는 듯이 피아노 위의 5선지로 눈을 돌렸다.
엘레나의 손이 최초의 키를 두드린 순간 데이브는 그녀의 몸에서 발산하는 열기를 느꼈다. 화음, 음계, 음표의 모든 것이 엘레나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데이브는, 그녀의 클래식 연주를 듣게 된 이후부터 그녀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 사운드에는 극히 개인적인, 마치 그녀 자신의 인생을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도중에서 손을 멈춘 엘레나는 마지막 두 소절을 다시 쳤다. 연필을 들고 거기에 수정을 가한 뒤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놀라와, 엘레나." 데이브가 말했다.
"여기다 붙일 가사도 생각해 놓았어요." 엘레나는 자기 작품에 수치를 느끼면서 이야기했다.
연주를 끝내자 그녀는 얼른 악보를 접어 피아노 옆에 쌓아놓았다.
"겨우 이 정도예요." 하고 자신 없다는 듯 어깨를 추슬러 보았다.
데이브는 악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엘레나의 팔을 붙들었다.
"엘레나, 정말 놀라워!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엘레나는 당황하여 시선을 피했다.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나는 장난삼아 해본 거예요. 이것으로 어떻게 되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어째서? 이런 재능을 헛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데이브는 놀라다 못해 어이없게 여기고 있었다.
"데이브, 나는 피아니스트예요. 작곡가도 아니고 송 라이터도 아니에요. 이것은 장난이라 말했지 않아요?"
"오케스트라를 그만두게 되면 무엇을 할 생각이지? 엘레나의 재능을 살릴 길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
엘레나는 홱 방향을 돌려, 오케스트라와의 험악한 관계를 상기시킨 데이브를 분연히 노려보았다.
"나는 아직 단념할 생각은 없어요. 나가 달라고 한 것은 아니니까요."
데이브는 홍차를 끓이려 주방으로 가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결과적으로 불가피하게 될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신념을 갖고, 무분별하게도 그 헛된 희망의 실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희망을 갖고 전진적인 자세를 취하는 일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엘레나가 경쟁에 졌을 때 매우 고통스러워하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날, 오후 엘레나는 대학 시절 이후 처음으로 피크닉을 갔다. 데이브가 고집을 부려서 산 커다란 바스켓에 와인, 치즈, 프랑스빵, 햄 등을 담아 가지고 갔다. 기온은 낮았으나 진즈에 두터운 재킷, 깔개 대신으로 쓸 담요 덕분에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누워서 마른 가지 사이로 하늘을 쳐다봐, 엘레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어떤 기분인지 내게 말해 주지 않겠어?"
엘레나는 자기 마음을 잘 알 수 없었다. 죄악감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내주의 연주곡목인 드보르작의 ‘신세계’ 연습을 게을리 했으니까. 그러나 죄악감 이외에 무엇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시간을 모두 음악에 바치고 있었으므로 즐긴다는 것을 경험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엘레나는 인생을 산 일이 없어." 데이브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아마 그의 지적이 옳을 것이다. 엘레나는 담요에 누운 채 데이브의 손을 잡았다. 그와 이렇게 하는 있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여겨졌다. 그의 옅은 녹색 눈이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넓은 가슴은 엘레나의 손을 유혹하는 듯싶었다. 엘레나가 쥐고 있는 그의 손은 억세기는 했으나 다정했다. 그녀는 이 손으로 애무해 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다.
흐르는 구름 밑에서 오후의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다. 두 사람은 헤어져 지낼 때 생겼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 했다.
데이브는 그가 만났던 사람들과 시합을 위해 갔던 고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엘레나는 연주 도중 삑삑하고 스피커의 잡음이 시끄러웠던 벽지나 작은 마을에서의 연주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음악가들 앞에서 브라암스의 콘체르토를 연주하다가 중간에 기억이 두절되어 30초 동안이나 멍청하게 있던 에피소우드 등을 이야기했다.
돌아오는 도중에 데이브는 어느 호텔 앞에서 스피드를 떨어뜨렸다.
"내 호텔에 잠시 들르지 腑楣? 뉴욕에서 전화가 왔었을지도 몰라. 만일 그렇다면 이쪽에서 곧 전화를 해야 하거든."
"좋아요." 엘레나가 미소 지었다. 와인 탓으로 따뜻하고 쾌적한 기분이었다. 엔진의 단조로운 소리와 히터의 온풍이 그녀를 졸음으로 유인했다. 호텔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자 그녀는 눈을 떴다. 데이브가 시동을 끄고 핸들에 손을 얹은 채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피곤한 모양이군." 데이브는 엘레나의 뺨을 가만히 만지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헛되게 시간을 보내서 피로가 온 것 같아요." 엘레나는 손발을 쭉 뻗으며 하품을 했다.
데이브는 핸들을 탕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졸음을 달아나게 해줄 것이 있어. 이리 와." 그는 엘레나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면서 말했다.
데이브는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로비의 카운터에서 전화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호텔 안의 디스코 클럽으로 향했다.
"이런 복장으로는 싫어요." 엘레나는 필사적으로 거절할 구실을 찾았다.
"넌센스야." 데이브는 한순간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데이브, 나는 춤을 추지 못해요!" 엘레나도 인파속으로 들어가는 데이브를 붙들고 늘어졌다.
"괜찮아. 출 수 있어." 데이브는 그녀를 보려 하지도 않고 엘레나의 두 번째 구실을 물리쳤다.
요란하게 울리는 음악이 귀를 멀게 할 것 같았고, 낮고 리드믹한 드럼 소리가 천장과 바닥을 진동시켰다. 머리 위에서 미러볼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춤추고 있는 커플에게 빛의 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데이브는 엘레나를 댄스 플로어로 데려갔다. 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그가 교묘하고 우아하게 춤추기 시작하자, 엘레나도 그 동작을 흉내 내어 보았다. 그러나 점잖지 못한 것 같아 곧 그만두고 말았다.
"안 되겠어요, 데이브. 바보 같은 생각이 들어요."
"모두들 다 똑같아." 하며 데이브가 웃었다. "주위를 한번 들러보지 그래. 다소라도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어?" 엘레나는 어색하게 웃고 다시 한번 춤추기 시작했다. 데이브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대어 끌어안고 자기 리듬에 맞추어 그녀의 몸을 움직였다.
엘레나는 원시적인 열기가 두 사람을 녹이고 몸을 뜨겁게 하며 얼굴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느꼈다. 와인, 음악, 비트, 라이트, 그리고 두 육체의 울부짖는 듯한 움직임이 그녀에게 관능의 마술을 걸었다. 엘레나는 두 팔로 데이브의 어깨를 감았다. 얼굴을 돌리고 그의 몸에 닿자,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가볍게 와 닿았다.
"내방으로 갈까, 엘레나?" 데이브가 문득 그녀의 귓전에서 뜨겁게 속삭였다.
데이브는 두 손으로 엘레나를 감싸고 눈을 빛내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레나는 그에게 있어서, 또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이 쾌락이 이미 거부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웃으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테이프 레코드를 샀어. 드뷔시와 쇼팽을 들을 수 있어. 가벼운 나이트 뮤직이지."
엘레나는 강렬한 충동에 이끌려 몸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의 방으로 가는 한순간이라도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브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방에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잠시 두 사람의 몸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엘레나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듯이 하며 댄스 플로어에서 빠져나왔다.
귀를 찢을 듯한 디스코 사운드에서 벗어나자 로비의 고요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이 평화로운 정적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은 감각이 생생하게 약동하고 예민해져 있었다. 유리로 된 엘레베이터가 로비를 압도하고 있었으나, 그 주위에는 푹신한 쿠션을 깐 의자와 많은 화분들이 그에 어울리게 놓여져 있었다.
엘레나는 데이브에게 기대고, 데이브는 엘레나를 감싸듯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감고 느꼈다. 엘레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싱싱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엘레베이터 단추를 누르는 데이브에게 방긋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로비를 둘러본 엘레나는, 따스한 본능적 무드가 예리한 칼로 도려내지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이미 자기를 안고 있는 데이브의 팔도,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 타오르고 있던 정열도 안중에 없었다. 엘레나는 방금 호텔로 들어온 일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디렉터 한 사람이 이사들을 위해 문을 열어 주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티나의 백모인 유니스 브캐넌이 끼여 있었다. 여성들은 최신 유행인 밍크로 몸을 감싸고 굽이 낮은 팜프스를 신었으며, 남자들은 조끼를 받쳐 입은 양복에 위체프 구구 차림이었다.
엘레나는 그들 중의 한 남자를 보자 싸늘한 전율과 함께 강한 의혹을 느꼈다.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았음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레나는 무의식중에 데이브의 팔을 잡아당겼으나, 그동안에도 그가 누구이고 어째서 디렉터들과 동행하고 있는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생각났다. 그 사나이는 제럴드 윌리엄즈-발트하임 필하모닉의 유명한 지휘자였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 악단의 간부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렉세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엘레나의 의혹은 점점 더 짙어졌다.
데이브는 엘레나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얼른 방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데이브는 그녀의 급격한 변화, 빛나던 눈동자가 응시로 변한 것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데이브의 당황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데이브에게 있지 않았다. 저 지휘자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회합이 그녀 자신과 오케스트라의 포지션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하는 데만 집중되어 있었다.
"데이비드, 잠시 같이 가주겠어요?" 엘레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고 있었다. "저기 사람들이 있죠?" 그녀가 레스토랑 저쪽의 일단을 가리켰다.
"그래서?" 그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데이브는 언짢게 생각했다. 데이비드의 마음에는 오직 두 사람- 자기와 엘레나에 대한 것밖에 없었다. 더 이상 방해꾼이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저 사람들은 오케스트라의 임원들이에요. 푸른 빌로도 상의를 입은 사람이 제럴드 윌리엄즈에요. 가서 인사해야겠어요." 엘레나가 데이브를 끌고 가려 했다.
"엘레나, 정말 그러고 싶나?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 수는 없을까?" 데이브는 부아를 감출 수 없었다.
엘레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데이비드. 하지만 부탁이에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무언가....묘한 일이 오케스트라에 일어난 것 같아요. 알아보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일분이면 돼요."
엘레나가 눈을 크게 뜨고 호소하는 것을 보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 신경질을 내고 있었으나, 엘레나의 마음이 그것으로 편안해진다면 2,3분의 고통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 엘레나의 뒤를 따랐다.
엘레나는 디렉터들이 레스토랑의 테이블에 닿기 전에 그들 앞으로 가서, 최근에 불신감을 품게 된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아아, 엘레나." 유니스 브캐넌이 고양이 같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만나다니, 기쁘군요."
엘레나는 미세스 브캐넌의 눈에서 입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는 것 같았으나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티나가 나타나기 전까지 엘레나는 그녀가 좋았고, 저쪽에서도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결국 이 여자가 이사들에게 티나의 연주를 듣게 했던 것이다. 엘레나는 불신감이 표정에 나타나지 않게 하려 하면서 미소를 되돌렸다.
"이 쪽은 친구인 데이비드 애트웰이에요." 엘레나는 데이브의 팔짱을 끼고 네 명의 디렉터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윌리엄즈씨죠?" 엘레나는 지휘자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이사들이 불안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아, 그렇습니다." 제럴드 윌리엄즈는 점잖은 어투로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제럴드 윌리엄즈는 결코 매력적인 사나이가 아니었다. 가는 목에 비해서 머리가 너무 켰고, 얼굴에 비해 눈과 코가 너무 돋보였다. 하지만 그 주위에는 카리스마적인 매력이 감돌고 있어서, 바로 그 점이 여성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가 되는 듯했다. 그의 응시는 엘레나를 당황하게 하고 적지 않게 겁먹게까지 했다.
"윌리엄즈씨는 마침 볼일이 있어서 이곳에 오셨어요. 모처럼의 기회라서 무리하게 식사에 나오시게 했어요." 티나의 백모가 청높은 소리로 명랑하게 말했다.
제럴드 윌리엄즈가 눈을 가늘게 떴기 때문에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사들이 이 지휘자를 사교 이외의 이유로 끌어낸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알렉세이는 어째서 이 자리에 없는 것일까? 그의 불참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웠다.
"당신이 피아니스트로군요." 제럴드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엘레나의 사고를 중단시켰다. 그는 엘레나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으나, 그 입술도 목소리와 같이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그의 눈만은 끊임없이 예리한 시선을 쏟고 있었다.
"슈버트양도 같이하는 게 어떨까요?" 제럴드는 데이브의 존재를 전혀 무시하고 엘레나를 식사에 청했다.
엘레나는 디렉터 전원의 표정이 걱정스럽게 긴장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엘레나는 동행한 분과 예정이 있을 거예요." 브캐넌 부인이 서둘러 끼어들었으나 그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엘레나는 제럴드 윌리엄즈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고, 이번 일에 그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강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이 사나이는 내 커리어를 어느 정도나 좌우할 수 있을까? 엘레나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다시." 제럴드는 여전히 단조롭고 무표정한 어투로 말하고 엘레나를 향해 기분 나쁜 미소를 띠어 보였다.
엘레나는 태연을 가장하면서 작별의 인사를 하고 일동이 테이블에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내심은 이 저명한 지휘자와 그 눈에 짓들인 불온한 기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데이브는 간신히 분노를 누르면서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있었다. 그는 이사들이 호텔에 들어온 순간부터 엘레나에게 생긴 변화를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지휘자가 엘레나에게 불러일으킨 커다란 파문도 낱낱이 알고 있었다.
데이브는 결론을 얻기 위해 자기 마음을 분석해 보았다. 엘레나에 대한 감정은 추억에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서, 지금도 이미 상실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엘레나에게 있어서는 그 커리어만이 소중한 것이고, 그녀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내 역할은 과거에 대한 순간적인 회귀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이상하군. 어쩐지 나이트 뮤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음악같이 생각되는군." 데이브는 엄숙한 눈으로 엘레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7장
탁상시계는 부지런히 시간을 새기고, 피아노 의자에 의젓이 자리 잡은 메트로놈은 부지런히 박자를 새기고 있었다. 엘레나는 꺼림칙하게 피아노를 바라보고 나서 친구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결코 음악을 게을리할 생각은 없어."
"한심하군 엘레나! 애인이 생겼다고 해서 다른 모든 것을 단념할 필요는 없어." 마릴라가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애인이 생긴 것은 아니야."
마릴리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미 30분 이상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엘레나. 네가 어떤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음악에 대한 것도 생각할 수 있어?"
"너 같으면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나는 불가능해. 나는 오케스트라에서 목이 잘릴지도 몰라."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말투로군.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니?"
"내가 할일은 아무것도 없어, 마릴리."
마릴리는 홍차를 다 마시고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어떻게 됐지? 그와의 관계는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는데." 마릴리는 망설이다가 입을 굳게 다물 수 없었다.
"남자, 즉 데이비드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내 커리어를 유지하기란 어려울 것 같아. 어느 쪽도 내 에너지를 너무 빼앗는걸. 양쪽 모두 세심한 주의와 헌신, 또 내가 열중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야."
엘레나는 이 사실을 18세 때 깨닫고 일단은 결말을 지었었다. 그때 엘레나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을 택했다. 그녀는 옳았다! 데이브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때 두 사람은 애인 관계를 계속시킬 수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12년 전의 그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여,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일 그들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노력마저 버렸더라면, 어느 쪽도 결코 상대방에게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희망을 실현시켰어, 마릴리. 인생에 만족하고 있어."
마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거짓말은 처음 들어."
엘레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고 얼른 잔과 크림통을 챙겨 주방으로 갔다. 나는 행복해, 정말이야! 마릴리는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데이브도.
엘레나는 설거지를 하고 나서 우울한 마음으로 창밖의 뒤뜰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정직한 인간이었다면 자기 인생이 무엇인가, 아니 누군가가 결여되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이다.
그 의무를 배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육체 관계가 아니다. 엘레나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보다 영속적인 것이다.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길을 택할 생각이니?" 마릴리는 자기의 잔과 크림통을 들고 주방으로 왔다.
"무슨 뜻이지?" 엘레나는 잔을 받아 설거지통에 넣으면서 물었다.
"커리어와 데이비드 중에서 어느쪽을 택할 것이냐고 물었어. 양쪽을 다 택하지는 못한다고 하지 않았니?"
"나는 이미 음악과 결혼했어, 마릴리. 이제 와서 배신 할 수는 없어."
마릴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데이비드에게도 그렇게 말할 작정이니?"
엘레나는 순간 숨을 죽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두 사람에게는 도움이 된다.
"응, 그렇게 말할 거야."
데이브는 살피고 있던 선수의 데이터에서 눈을 들었다. 긴 다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머리를 쿠션에 기댄 뒤 눈을 감았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굴욕에 얼굴을 찌푸렸다.
긴 세월이 지나 엘레나와 재회했을 때, 그녀로부터 흥미가 없다고 거절당한 순간조차도 그녀에게 이끌린 것은 어찌 된 일이었을까? 아마 프라이드 문제였을 것이다. 맺지 않으면 안 될 풀린 실. 엉킨 실을 풀어 매듭을 짓는 일은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엘레나 슈버트는 데이브가 20세 때부터 엉킨 실처럼 그에게 휘감겨 그의 잠재 의식을 자극하고 한밤중의 몽상을 불러일으켰다. 이 실을 끊어 버리는 것이 그의 인생을 정리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나 엘레나와 재회하고는 종지부를 찍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엘레나를 침실로 데려가기만 하면 자신을 이처럼 오래 괴롭힌 실을 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브는 간단히 손을 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엘레나가 그녀의 집 주방에서 궁지에 몰린 시선으로 그의 뺨을 만진 아침 이후, 데이브는 그녀와의 순간적인 육체적 쾌락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데이브는 소파 위에서 거북한 듯이 몸을 움직였다. 제기랄, 사랑이라니! 그따위가 있을 게 뭐람! 사랑에 빠지다니, 더구나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등장했다가 아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여자가 무수히 많았다.
풋볼 팬으로서 내용보다도 팀의 유니폼에 열중한 어린 처녀와, 그보다 나이가 많은 처녀도 있었다. 친구가 데이트를 알선해 준 여자도 있었다. 데이브는 엘레나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여자를 사랑했으나, 마침내는 똑같은 이유로 여자를 증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사실이 하나 남아 있었다. 엘레나가 그와의 영속적인 관계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호텔에서의 사건 이래, 데이브는 어째서 자기가 그토록 엘레나에게 구애받고 있는지 계속 생각해 왔다.
엘레나가 정말 자기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단 일분이라도 믿을 수 있었다면, 그는 엘레나를 혼자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은 단념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살아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레나가 그를 바라볼 때의,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눈초리를 생각하고 있다고 데이브는 확신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겁을 먹고 있다. 그는 엘레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인생이 크게 궤도를 바꾸려 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나라면 도와줄 수 있는데... 뭐니 뭐니 해도 나는 궤도 수정을 극복했으니까. 그러나 엘레나는 고도에서처럼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데이브는 억지로 시합의 통계표를 집어 들었다. 엘레나에게 져서는 안 된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새로운 일을 계속하려면 여러 가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거처도 구해야만 한다. 언제까지나 엘레나를 쫓아다닐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엘레나가 그를 필요로 한다면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다.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데이브는 현실의 무게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날 오후 홀에 도착한 엘레나는, 제럴드 윌리엄즈가 엘렉세이 대신 지휘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다른 단원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엇엔가 흘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엘레나가 그 이유를 물어도 모두 어깨만 추슬러 보일 뿐이었다.
단원들은 대부분 알렉세이의 오만한 태도와 무서운 질책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제럴드 윌리엄즈가 발하는 냉정한 비난에는 누구나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리고 제럴드가 엘레나에게 그 타는 듯한 시선을 보였을 때, 그녀느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이었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제럴드는 택트로 지휘대를 두드리면서 주제와는 관계없는 지시를 내렸다.
"피아노는 콘체르토의 마지막에서 카텐짜를 칠 것. 엘레나, 이 긴 코드에서는 루바토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그리고 아래쪽 3도 음을 늘릴 것." 제럴드는 악보에 시선을 옮기고 있었으나 엘레나는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은 현." 제럴드는 다시 택트로 지휘대를 두드리면서 현의 카르테트 지도를 계속했다.
"제 1 악장의 카텐짜 작전에서 작곡가는 렛제로를 요구하고 있어. 우아하게, 품위있게, 약간 비브라토를 넣고, 관현악에 있어서는....."
엘레나는 말없이 건반에 손을 가져갔다. 제럴드의 지시에 신경을 집중시키려 했으나, 왜 알렉세이 대신 제럴드 윌리엄즈가 여기 있을까 하는 의혹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설마 알렉세이가 사직당한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만일 제럴드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다면, 오케스트라에서의 내 위치에는 어떤 영향이 미칠 것인가?
"미스 슈버트. 엘레나!" 제럴드가 소리쳤다. "내가 당신을 지루하게 만들었나요?"
엘레나는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제럴드의 타는 듯한 분노가 돌변하여 얼음과 같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제럴드가 발하는 무언의 신호를 파악하려 했으나, 호텔에서처럼 그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실패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눈초리와 음성은 소름이 끼칠 만큼 쌀쌀했다.
"마지막 악장을 연습할 동안만이라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까요?"
리허설이 끝날 무렵 엘레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연습 자체가 고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럴드의 가차 없는 요구가 그녀의 신경을 지나치게 소모시켰던 것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내일 오후에는 하이스쿨에서 음악회가 열리고, 밤에는 홀에서의 연주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무엇보다도 휴식이 필요했다.
엘레나는 스테이지에서 물러날 때, 제럴드 윌리엄즈의 뜨거운 시선이 자신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경솔했지." 알렉세이는 그의 대기실에서 사물을 종이상자에 담으면서 말했다. "그 젖비린내 나는 계집이 글쎄...내가 엘레나 대신 자기를 추천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자, 백모한테 달려가 나에게서 난행 당했다고 떠들어댔던 거야. 그 늙은이가 미친 듯이 내게 달려왔지 뭐야."
엘레나는 벽에 기대어 알렉세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해고된 이유를 듣고 있었다. 장식 없는 검정 롱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하이스쿨에서 방금 연주를 끝내고 돌아온 길이었는데, 12분 후에는 다시 이 홀에서 연주해야만 했다. 알렉세이가 대기실에서 짐을 꾸린다는 동료의 말을 듣고 여기 왔던 것이다. 그의 해고에 대해 여러 가지 뜬소문이 나돌았으나, 그녀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알렉세이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확인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당신을 놓아 보내려 하는 건가요?" 엘레나는 같이 일하는 데 있어서 그가 얼마나 좋은 지휘자였는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알렉세이는 그 특유의 비꼬는 듯한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를 놓아 보내려는 것이 아니야. 목을 잘랐어!"
"알렉세이, 앞으로 어떻게 하실 셈이에요?"
"걱정해 주는 건가, 엘레나? 감동적인 순간이군."
"네, 걱정이 되는군요." 엘레나는 그가 내심의 불안을 감추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되면서 정직하게 대답했다.
알렉세이는 경계심을 늦추고 엘레나를 신임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어. 세인트루이스에서 객원 지휘자 말이 나오고 있어. 아마 거기서 일하게 될 것 같아."
"나는 어떻게 되죠, 알렉세이?" 알렉세이가 가버리고 나면, 티나 볼코프스키에 대항하여 지금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될지도 몰랐다.
"엘레나가 어떻게 되느냐고?" 알렉세이는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도 목이 잘리게 될까요?"
"그 미친 것들이 무슨 짓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엘레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엘레나는 티나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녀의 백모가 민다면.... 만일 내가 엘레나라면 티나보다 브캐넌 부인을 더 조심하겠어."
"하지만 브캐넌 부인은 언제나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알렉세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엘레나, 조심해야 해. 누구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것과 의무와는 별문제야. 어쨌든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하도록 해."
엘레나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고마워요, 알렉세이. 같이 일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엘레나는 악수를 하고자 손을 내밀었으나, 그는 뜻밖에도 아버지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지옥과 같았지?" 알렉세이는 엘레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웃어 보였다. "엘레나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웠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해야 좀 더 발전할 수 있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엘레나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웠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해야 좀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엘레나는 분명히 재능이 있지만, 훌륭한 재능을 갖고서도 그것을 완전히 살리지 못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 엘레나는 아마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지는 못할 거야. 그것은 엘레나도 인정해야 해. 그러나 나는 엘레나가 갖고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했어. 그런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생각해." 엘렉세이는 다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처음으로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히 가세요, 알렉세이." 엘레나는 눈물을 닦고 천천히 대기실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오케스트라 멤버가 이미 음을 맞추고 있는 스테이지로 갔다.
제럴드 윌리엄즈가 유니스 브캐넌 및 그녀의 조카와 같이 무대 옆에 서 있었다. 제럴드는 엘레나가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오는군요." 하고 말했다. 티나는 머리를 하나로 묶어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피터팬 칼러와 레이스 커프스가 달린 나폴레옹 시대풍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째서 나이에 어울리는 옷을 입지 않았을까? 엘레나는 티나의 복장을 언짢게 생각했다.
두 여성-권력을 쥔 노부인과 야심에 찬 젊은 처녀가 엘레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엘레나는 눈까지 웃고 있는 것은 브캐넌 부인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만 실례하고 자리를 찾아가겠어요. 미스 슈버트, 티나는 당신의 연주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요."
엘레나는 두 사람이 청중석 쪽으로 가는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왜 그렇게 눈치가 없을까." 제럴드는 엄한 비평을 침착성을 잃거나 하지는 않겠지?"
"어째서요?" 엘레나도 제럴드처럼 오만한 어투로 반문했다.
제럴드가 나직하게 웃었다.
"연주를 끝내고 저녁이라도 같이 할까?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엘레나는 얼굴에 망설이는 빛을 띠고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이것은 내가 직업을 잃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오케스트라에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일까?
제럴드는 엘레나가 가슴 죄고 있는 것을 깨달고 업신여기듯 곁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깔보는 듯한 말로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제부터 긴 시간 연주해야만 돼, 물론 화장실에는 다녀왔겠지?" 그는 천천히 말하고 나서 울려 펴지는 갈채 속에 스테이지로 걸어 나갔다.
샴페인 병마개 따는 소리가 엘레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엘레나는 제럴드 윌리엄즈의 방에서, 연주회에 따르게 마련인 긴장을 풀고 있었다. 제럴드의 아파트는 하이테크 건축과 디자인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실내에 있는 것은 모두 크롬, 플라스틱, 유리로 되어 있었다. 엘레나는 자기 집의 인테리어와 비교해보고, 이처럼 싸늘하고 무미건조한 공간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엘레나는 데이비드가 그녀의 집을 묘지라 부른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내 취미가 유별난 것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생각만 해도 엘레나의 가슴은 뛰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제럴드의 방을 둘러보았다. 오늘 밤, 제럴드가 아니라 데이비드와 같이 지내는 것이라면...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몽상이라고 엘레나는 고쳐 생각했다.
엘레나는 분명한 결론-데이비드와 커리어를 양립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을 선택한 것이다. 음악만이 인생의 핵이었다.
"자아, 이걸 받지." 제럴드가 샴페인 글라스를 내밀었다. 엘레나가 글라스를 받아들려 했을 때 제럴드의 손이 의미 있는 듯이 그녀의 손을 만졌으나, 엘레나는 그것을 남의 일처럼 냉정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만일 제럴드가 엘레나의 내부에 정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리라 기대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착각이었다. 그녀는 문득 구토를 느꼈다. 도대체 나는 왜 지금 제럴드의 방에 있는 것일까?
제럴드는 엘레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젊음만이 모든 것이라 생각지 않나, 엘레나?"
그 질문은 표면적으로 볼 땐 아무런 악의도 없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그의 어투가 엘레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엘레나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특히 음악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진리지. 철저하게 프레시할 것-이것이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이지." 제럴드는 손을 내밀어 엘레나의 팔을 잡고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엘레나는 아까와 같은 구토를 느끼고 아직 입에 대지 않은 글라스를 테이블에 놓은 뒤 무릎 사이로 두 주먹을 쥐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제럴드?" 엘레나의 목소리는 자신의 마음과 같이 떨렸다. 말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기침을 한 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인가요? 내 생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는 엘레나 앞으로 몸을 내밀고 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의 날씬한 몸과 곡선을 더듬고 있었다'
"오늘 밤 연주회 전에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좋은 소식을 듣게 될 줄로 믿었어요."
"아아, 사실이야." 그는 엘레나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자기의 생기 없는 손바닥으로 관능을 불러일으키려 애쓰면서 교활한 고양이처럼 침을 삼켰다.
"엘레나도 알고 있듯 알렉세이 잘코프는 완전히 내맡긴 것인데, 그야말로 바보처럼 행동했다고 할 수밖에 없어." 그는 엘레나의 손을 들어 자신의 축축한 입술에 갖다 대었다. "나는 엘레나가 티나 볼코프스키나 그녀의 오만한 백모에게 발목을 잡힐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믿어."
제럴드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려오는 듯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도망쳐 나올 수 없는 절망의 심연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짐작하고 있을 줄 알지만, 브캐넌 부인은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두 내 탓이라 생각하고 있을 정도야." 저도 모르게 그를 쳐다본 엘레나는, 말끝마다 스며들어있는 그의 자기도취를 깨달았다. "이사회에 대한 나의 발언권은 절대적이지.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엘레나?" 엘레나는 잡힌 손을 뿌리쳤으나, 얼굴은 패배감으로 굳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만일 당신이 나를 피아니스트로 유임시키고 싶다고 한다면 이사회가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제럴드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엘레나가 자기 영향력 하에 있다는 것에 만족한 미소를 띠면서 반쯤 감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바로 그대로야."
깊이 숨을 들이마신 엘레나는 눈을 감고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거기에는 조건이 있겠죠, 네?"
"조건?" 그는 일어나서 홈 바로 가 또다시 샴페인을 자기 글라스에 따랐다. 그러고는 여전히 야릇한 웃음을 띠고 돌아보았다. "내가 엘레나한테 바라는 것은 약간의 감사 표시, 그것뿐이야."
"만일 내가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될까요?" 엘레나는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 이렇게 물었다.
제럴드는 냉혹한 웃음을 띠고 글라스를 카운터에 놓더니 엘레나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엘레나의 팔을 붙들어 일으켜 세웠다.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것 같군." 그는 다시 한번 음험한 미소를 띠었다.
데이비드, 와서 나를 구해줘요! 엘레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낮선 고장에 막 도착했을 뿐인 고독한 사나이야." 제럴드는 엘레나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약간의 육체적 봉사, 그러니까 내 곁에서 잠자는 부드럽고 따뜻한 육체가 필요해." 그는 엘레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녀는 몸이 굳어졌다. "엘레나는 한눈에 반할만 한 미인은 결코 아니야. 자신도 그 점은 인정하고 있을 거야. 세상에는 젊고 싱싱한 여자를 원하는 사나이도 있지. 하지만 나는 엘레나와 같은 타입이 좋아, 약간 나이가 들고 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여자가. 더구나 엘레나에게는 무언가 마음을 부추기게 하는 분위기가 있어. 엘레나는..." 제럴드는 엘레나의 육체가 이미 자기 것이 되기라도 한 듯 입술로 그녀의 목덜미를 더듬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정신적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결국 그런 것이었던가. 히스테릭하게 치솟는 분노가 숨통을 막아, 그녀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엘레나가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녀의 재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지휘자를 잠자리에서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내 직업의 존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영광과 기쁨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엘레나는 문득,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자가 이와 같은 입장에 처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같은 굴욕을 맛본 여자는 수도 없을 것이다.
"나한테는 정해진 남자가...." 엘레나는 이 저속한 장면에 데이비드를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추악한 상황을 떨어버리기 위해서는 데이비드의 모습, 데이비드의 이름, 그녀에 대한 데이비드이 애정, 그 모든 것이 필요했다.
"엘레나." 제럴드는 얼굴을 가까이하며 위협하듯 속삭였다. "나는 다른 남자 이야기 같은 것은 듣고 싶지도 않아. 분명히 말해 두겠어. 다른 남자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나한테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줘. 그렇지 않으면 알렉세이와 나란히 실업자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될 거야."
엘레나는 사람을 때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제럴드의 뺨을 힘껏 후려갈기면 자기 손이 얼마나 아플지 예측도 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옆에 있는 의자에서 코트를 움켜쥐고 문으로 향하면서, 제럴드가 자신에게서의 일격을 받고 망연히 서서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을 들었다.
데이브는 오락 영화에 혐오감을 느끼고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껐다. 그러고는 등과 팔의 근육을 힘껏 펴서 기지개를 켜고 탁상시계를 보았다. 열 한 시 반이었다. 로비에서의 엘레나의 행위가 아직까지 괘심하게 생각되었으나, 그런데도 엘레나의 오늘 밤 연주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자기 역시 잘못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어쨌든 엘레나를 자기 방으로가 아니라 그녀의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한 것은 자기였던 것이다.
데이브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리고 옷을 벗어 바닥에 쌓아 놓은 빨래 위에 던져 버렸다.
엘레나가 바라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그녀의 커리어를 부수어 버리고 싶다는 것을 그녀가 알아주기만 한다면......그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엘레나를 사랑하고 또 그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다면 하는 것뿐이다.
데이브는 물의 온도를 올리고 머리서부터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엘레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우려가 있다. 지난 주말 시합의 실황 방송에 손을 댄 이래, 처음으로 실제로 선수로서 뛰지 못하는 일이나 라커룸에서 팀메이트와 환담할 기회가 없는 것은 분명히 쓸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단계를 지난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만이 남았다.
데이브는 비누거품을 완전히 씻어 내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 목욕 매트로 발을 닦고 타월로 몸과 머리를 거칠게 닦았다. 장롱에서 브리프와 진즈를 꺼내 입고 머리를 말리기 위해 욕실로 돌아갔다. 드라이어의 스위치를 넣으려 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밤중에 대관절 누가 찾아왔을까?
그는 행거에서 셔츠를 벗겨 입고 얼른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 셔츠 자락을 진즈 속에 집어넣으면서 문 쪽으로 갔다.
아직 젖어 있는 머리를 타월로 닦으면서 그가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따뜻한 식사에 굶주린 방랑아와도 같은 엘레나가 서 있었다.
"데이비드." 엘레나의 목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그녀는 맥이 빠져 있었으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방해를 해도 될까요?"
데이브는 문을 연 채로 그녀가 방에 들어오도록 무언의 의사 표시를 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몇 주일 동안 그녀에게 따돌림만 당하고서도, 그녀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자신으로서는 이상하게 생각해 왔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데이브는 겨우 물었으나, 말끝에 의혹의 뜻이 스며들어 있었다.
"부탁이에요, 데이비드. 더 이상 비참한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누구하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엘레나는 침대 곁에 카세트 테이프에서 클래식 음악이 은은히 흘러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하고 말이지." 데이브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건 좋은 생각이야."
"누구든지 다 좋다는 것이 아니에요, 데이비드. 내게는.......당신이 필요해요."
자기를 바라보는 엘레나의 얼굴에, 데이브는 주의 깊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눈 가장자기는 빨갛게 되어 있고, 눈동자는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듯 흐려져 있었다.
데이브는 다정하게 미소 짓고 두 팔로 그녀를 껴안음으로써 무언의 대답을 했다.
엘레나는 데이브의 따뜻하고 우람한 가슴에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조금 전까지의 저주스런 장면이 사라져 가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인 것이다. 데이브는 인생에 음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게 해주는 유일한 남자다. 아아,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데이브의 힘과 충고, 그리고 우정을 찾아 온 것이다.
엘레나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데이브의 품에서 빠져나와 손으로 가만히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정말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왔어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좋아." 데이브는 한걸음 물러서서 바닥에 떨어져있는 타월을 집었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욕실에 같이 있어 주지 않겠나?"
엘레나는 데이브를 따라 아직 김이 서려 있는 욕실로 들어가, 그가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 동안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드라이어가 멎었을 때 엘레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데이브, 나는 오늘 당신의 우정을 믿고 찾아왔는데, 만일 내가....오늘 밤 사랑을 나눌 수 없다고 한다면 나를 배은망덕한 여자라고 생각하겠어요?"
"배은망덕?" 데이브는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리가 여기나?" 엘레나가 침실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의아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엘레나, 무슨 일이 있었어?"
엘레나는 자신을 지키듯 두 팔로 가슴을 안고 데이브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고 한길을 내려다보았다.
"오케스트라의 자리를 지킬 찬스를 제공받았어요." 그녀는 쉴 새 없이 달리는 차를 바라보며 침울한 어투로 말했다. "지휘자의 말만 들으면 된대요." 엘레나는 데이브의 반응을 확인하고자 돌아보았으나 자신의 기대에 어긋났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여 아무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데이브는 침통한 기분을 얼굴에 나타내어 엘레나를 겁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애써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분노인지 슬픔인지도 모를 강한 충동으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지만, 주먹을 꼭 쥐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는 엘레나 옆으로 가서 이마를 찌푸리고 엘레나를 들여다보았다. 뜨겁게 치솟는 울분과는 달리, 그는 엘레나의 팔을 조용히 붙들고 물었다.
"지휘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으면 목이 잘린다, 이 말인가?"
엘레나가 처참한 모습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데이비드. 정말 모르겠어요."
"언제였지?" 데이브가 힐문했다.
"오늘 밤이에요."
"어디서?"
"그의 방."
데이브가 얼굴을 찌푸리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랬었군, 알겠어." 그는 엘레나의 팔을 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엘레나는 코트를 벗어 소파에 놓고 데이브 앞에 꿇어앉아 그의 두 무릎에 손을 얹었다.
"부탁이에요. 친구로서 내 말을 들어 주세요, 부탁이에요."
데이브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이상한 일이야. 지금 엘레나를 이 침대 속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내가 체내의 모든 근육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나 역시 엘레나의 친구로서만도 충분해. 하지만 엘레나, 엘레나의 소원이 정말 그것뿐이라면 나는 지금.......자신이 없어."
엘레나는 데이브의 무릎에 이마를 대고, 그 큰 손이 머리를 만지며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감촉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겨우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최면술에 걸린 듯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 나는 음계와 화음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있었어요, 내가 좀 더 자라나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나도 연습에 싫증을 느끼고 청중도 지루해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청중 속에서 한 남자가 스테이지에 올라오더니 내 손을 잡고 피아노에서 끌어내렸어요." 엘레나는 말을 끊고 고통과 슬픔이 뒤섞인 얼굴로 데이브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내 손을 잡는 순간, 나는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 그 지겨운 연습과도 인연을 끊게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날 이후 이 백일몽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대학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이 그 사람이 아닌가 하여 무서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데이브가 다음 말을 재촉했다.
엘레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당신은 멋지게 변신했어요.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데이브가 두 손으로 엘레나의 얼굴을 감쌌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지 않아? 엘레나는 직장을 잃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나를 잃어버리진 않을 거야."
"나는 의지하는 타입이 아니예요."
"그걸 몰랐었군." 데이브는 심각한 듯 이마를 찌푸렸으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는 엘레나의 고개를 쳐들어 정면을 보게 했다. "우리가 듀엣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나? 사실이야, 엘레나. 그리고 엘레나는 작곡으로 살아갈 수 있어. 두 사람이 노력하면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어."
엘레나는 이제 퇴폐적인 밤의 중압감에서 해방되어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데이브도 따라 웃으면서 침대에 드러누워 한쪽 팔꿈치로 몸을 받쳤다.
"자아, 오늘 밤 알렉세이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봐."
"알렉세이가 아니에요. 제럴드 윌리엄즈예요." 그녀는 제럴드가 어떻게 해서 알렉세이 대신 지휘자가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데이브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그놈이 엘레나에게 위해는 가하지 않았나?" 그는 지금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제럴드에 대한 분노로 피가 끓어올랐다.
"아니에요,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았어요." 엘레나는 당황하여 부인하고 조용히 웃었다. "데이비드, 내게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공치사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아요." 데이브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녀는 얼른 말을 계속했다. "즉 당신이 내게 끌리고 있다면, 그것은 내 육체의 선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육체의 선이 무너진다고?" 데이브는 영문을 몰라 멍청히 입을 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재빨리 엘레나를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그러고 나서 호기심에 찬 그의 찬탄하는 듯한 시선이 엘레나의 계란형의 얼굴과 가느다란 목, 푸른 실크 블라우스 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는 볼록한 가슴, 잘록한 허리, 벨트 밑의 평평한 복부를 천천히 음미했다.
데이브의 손끝은 엘레나의 부드러운 살을 만져 보고 싶은 욕구로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육체의 선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고?" 데이브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엘레나는 자그마한 금빛꽃이야."
"한 나무에 몇 천 개나 피어 있는 작은 꽃의 하나예요." 엘레나는 데이브의 집요한 시선에 수치와 드릴을 느끼면서 자신 없이 속삭였다.
"하지만 엘레나는 가장 향기로운 꽃이지. 꿀이 듬뿍들어 있다는 것을 안 벌들이 몇 번이나 다시 찾는 꽃이야." 데이브는 엘레나의 손을 놓고 그녀의 몸에 체중을 실었다. "나는 절대로 다른 꽃의 꿀은 원치 않는 벌이야."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레나는 데이브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귀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데이비드, 지난 12년 동안 누구를 사랑한 일이 없나요? 누군가....특별한 사람이 없었나요?"
"몇 명 사귀기야 했지." 데이브가 고백했다. "하지만 특별한 여성은 단 한 사람뿐이었어. 내 꿈속에 나오는, 대학 시절부터 잊지 못했던 18세 소녀지." 애정에 넘치는 데이비드의 눈을 보고, 엘레나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더 이상 캐어 묻지 않았다. "근데 엘레나는 어땠어?"
"꼭 한 번 결혼할 뻔한 일이 있었어요." 데이브의 눈에 고통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자 엘레나는 마음이 아팠다. "별로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여기 대학으로 옮겼을 때의 일이었어요. 음악 이론 클라스에서 그를 만났어요. 그는 음악가와 결혼해서 음악 가족을 이루는 것이 꿈이었어요. 내가 꼭 알맞은 상대라 생각했던 모양이죠."
"그를 사랑했나?"
"사랑하지 않았어요. 당신과 헤어진 뒤로는 두 번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어요. 그리고 그 맹세를 지켰어요."
데이브는 엘레나의 몸을 끌어당겨 그녀의 경동맥을 따라 입술을 옮겨 나갔다.
엘레나는 데이브를 껴안고 그 감촉을 즐겼다. 억센 근육이 피부 밑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겹쳐 오는 육체의 무게는 그녀의 독점욕을 만족시키고, 그의 힘이 피부를 통해 흘려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데이비드, 풋볼을 하지 못해 쓸쓸하세요?" 엘레나는 데이브의 머리에 입술을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따뜻한 입김이 그의 피부에 와 닿았다.
데이브는 머리를 들어 엘레나를 바라보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지난날의 즐거운 추억을 반추하고 있었다.
"때로는 그라운드에 뛰어나가 플레이를 하고 싶어 가슴 아플 때도 있지. 나는 경쟁이나 거친 행동을 통해 성장해 왔어. 그리고...." 데이브는 조용히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관중의 반응에도 흥미가 있었어."
"이해할 수 있어요. 나도 스테이지에서 같은 것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플레이를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내게도 한계가 온 것이지. 인간은 누구나 인생에서 순간적인 영광의 시기가 있을 뿐이야. 흐르는 별이 한때 밤하늘을 빛내듯이 그리고 나머지 긴 인생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이지. 기묘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 인생에는 선택의 가능성이 너무 많지 않나 하고."
"나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너무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면 영광을 목표삼을 수도 없지 않을까요?"
데이브는 엘레나를 꼭 끌어안았다.
"엘레나는 결코 손에 닿지 못할 높은 산의 꽃이 아니라고 말해 줘."
엘레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엘레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데이브의 한 손이 뻗어와 엘레나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입술이 데이브의 뜨겁고 불타는 듯한 입술과 겹쳐졌다. 정열적인 입맞춤에 엘레나의 피가 욕망으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다고 진실로 생각했었나?"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데이브의 손이 실크 블라우스 속에서 그녀의 보드라운 젖가슴을 감싸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레나는 이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관능의 미로를 방황하며 도취한 나머지 출구를 찾는 일조차 번거롭게 생각되었다.
데이브는 엘레나의 블라우스 맨 위 단추에 손을 대었다.
"엘레나, 지금 이것을 바라고 있나?" 그의 숨결이 엘레나의 얼굴에 뜨겁게 와 닿았다.
"당신이 필요해요, 데이비드."
단추는 간단히 끌러졌다. 데이브의 눈은 대리석과도 같은 엘레나의 부드러운 맨살에 못박혔다. 엘레나의 몸을 애무하면서 눈은 그녀의 아름다운을 황홀하게 내려다보았다.
데이브의 손이 엘레나의 볼록한 유방을 애무하여 그녀의 관능을 고조시켰다. 엘레나는 오랫동안 자기를 묶어 놓았던 쇠사슬이 드디어 끊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데이브는 애무를 그치고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고는 그 손을 입에 대고 손가락 관절을 따라 입을 맞추다가 그녀의 두 팔을 내리고 다시 애무를 계속했다.
엘레나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데이브의 손이 그녀를 애무하고 있는 동안 자기도 그를 어루만지고 싶어 손이 떨렸다. 엘레나의 손이 데이브의 셔츠로 뻗어가 떨면서 제일 위의 단추를 끌렀다. 데이브는 영혼을 빼앗긴 듯 애무와 손을 조용한 아다지오로 바꾸고 기다렸다.
"내가 하겠어."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미안해요."
데이브는 엘레나의 떨리는 손을 잡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했다.
"사과할 것 없어. 그리고 서두를 것도 없어. 우리의 심포니를 연주할 밤의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8장
엘레나는 지금처럼 격렬한 관능의 자극을 받고 온몸이 뜨겁게 불타는 것을 경험한 일이 없었다. 데이브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감미로운 하모니가 엘레나의 육체를 꿈틀거리게 했다. 그녀의 손은 데이브의 가슴, 허리,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었다.
두 육체에서 파도처럼 열기가 발산했다. 데이브의 두 손이 엘레나의 몸-가슴, 허리, 배를 애무하고, 손끝이 그녀의 살 위에서 원을 그렸다. 마침내 두 사람은 하나로 녹아들었다.
데이브가 엘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되고 눈은 데이브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두 사람 사이의 황홀한 흥분을 반영하고 있는지 가끔 눈을 감곤 했다.
"사랑해, 엘레나."
이 순간 데이브의 마음과 몸은 엘레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
두 사람은 화산처럼 타오르는 환희에 사로잡혀, 뒤얽힌 손을 아프도록 꼭 쥐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금방 달성시킨 신비적인 정신과 육체의 융합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데이브는 꼭 쥔 엘레나의 손에서 겨우 손을 풀어,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촉촉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엘레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내부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미지의 힘이 마침내 폭발하여 그녀를 변모시켰다.
데이브는 엘레나 곁에 누워 그녀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올려놓았다. 데이브는 그녀의 머리를 애무하면서, 무언중에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엘레나에게는 내가 있고 내게는 엘레나가 있어." 데이브가 속삭였다. 엘레나의 숨결로 미루어 그녀가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는 소리내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도 스스로 잠이 들었다.
엘레나는 문득 눈을 뜨고 테이블 위에 있는 데이브의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반. 커튼은 닫혀 있었으나 그 틈새로 한 줄기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곁에서 평안히 잠들어 있는 데이브를 바라보고 방긋 웃었다. 그의 갈색 머리는 베개 위에 흩어져 있고, 한 팔은 머리 위에 팽개쳐진 듯이 놓여 있었으며, 시트와 담요는 허리 밑으로 흘러내려가 있었다. 엘레나는 그 육체의 윤곽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엘레나의 시선이 시트로 가려진 그의 몸에서 멎었다. 그녀는 데이브가 가져다 준 충족감을 지금까지 맛본 일이 없었다. 지난 12년 동안 엘레나는 그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남몰래 상상해 왔다. 지금 엘레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은 행복하게 빛났다.
엘레나는 데이브의 얼굴에 시선을 돌리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까부터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굿 모닝." 그가 미소 지었다. "계속 그러고 있어도 좋아."
엘레나는 몸 깊숙한 속에서 뜨거운 파도가 밀려왔다. 그녀는 다시금 욕망의 바다로 떼밀려가는 것을 느꼈다.
"피아노 연습이 있어요." 하고 엘레나는 중얼거렸으나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내가 엘레나의 피아노가 되겠어." 데이브가 그녀의 목에 입김을 뿜으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을 이용하여 실컷 손가락 연습을 해도 좋아."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번쩍여, 레스토랑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다. 테이블 하나하나에 린넬 클로드가 덮이고, 중앙에 심어진 한 그루 장미가 세팅을 우아하게 돋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유니스 브캐넌은 백포도주 글라스에 쳐들고, 아는 사람이 없는가 하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시간문제야. 좀 더 참도록 해." 그녀가 달래듯이 말했다.
"참는 일도 이제 지쳤어요." 티나는 잔뜩 부은 얼굴로 아랫입술을 내밀고 눈을 삼각형으로 떴다. "나는 당장 치고 싶어요!"
"그러면 못써, 티나.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거야."
"어째서 그녀를 내보내지 않죠?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무슨 구실로 내보내지?" 유니스 브캐넌도 이 분별없는 조카에 대해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보다 내가 더 능력이 있다구 하면 되지 않아요? 어째서 그 말을 못하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티나가 흠칫하는 것을 보고 브캐넌은 짓궂은 기쁨을 느꼈다. "어쨌든 말이다. 현재 엘레나 슈버트에게는 네가 갖지 못한 오랜 경험이라는 것이 있어. 제럴드 윌리엄즈가 하루 전에 어떤 곳을 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너는 무어라 대답하겠니?"
티나는 턱을 내밀고 자신을 변호했다.
"물론 내 레퍼터리는 엘레나만큼 다양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천사처럼 칠 수가 있어요."
브캐넌은 어이없다는 듯이 조카를 바라보았다.
"그녀을 쫓아내고 싶어요!" 백모에게 무시당한 티나는 악을 썼다.
"가만히 있어, 티나. 너를 보기만 하면 머리가 아파." 레스토랑의 현관으로 시선을 돌린 브캐넌은 교향악단의 전무이사가 다가 오는 것을 보았다. "어머, 리처드 프랜더즈로군. 티나, 입을 다물고 얌전히 굴어야 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유니스 브캐넌은 리처드에게 손을 내밀면서 빨갛게 칠한 입술로 사교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리처드는 임원회의 유력한 멤버인 이 여성에게 미소를 보내며, 아무리 아니꼬운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정중히 대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악단에서의 자기 지위는 임원회의 의향 여하에 달려 있지 때문이었다. 그는 시선을 티나에게 돌려, 애교를 떨면서 웃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이 아가씨에게는 젊은이 특유의 순수성이 없어-그는 당장에 간파했다.
리처드는 이 모임의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다. 브캐넌은 앨레나 슈버트를 해고시키고 자기 조카에게 피아니스트 자리를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리처드 프랜더즈는 가슴속에 혐오감을 무시하면서, 두 여성의 말을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가 디저트 접시를 치우기 시작할 무렵, 유니스 브캐넌과 티나 볼코프스키의 얼굴에는 배부른 소와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시간 이상이나 리처드를 구워 삶은 끝에 겨우 그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는 악단으로서도 인기를 얻으리라 생각합니다마는...." 리처드가 주저하면서 동의했다.
"물론이에요." 브캐넌은 그에게 다시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 했다.
"엘레나 슈버트가 탐탁하게 여길지 걱정이군요."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이것으로 결정이 났어요!" 브캐넌은 리처드의 말을 무시하고 냅킨을 테이블에 놓으면서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을 암시했다. "연주 곡목은 제럴드에게 결정하라고 해죠. 연주회는 금요일 밤으로 정하고요."
"그날 프로그램은 이미 인쇄중인데요." 리처드가 당황해 하며 말했다.
"어마! 그렇다면 변경할 수 밖에는 없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는 상당한 액수의 청구서에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브캐넌의 손이 리처드의 손을 물리쳤다.
"이것은 내가 지불하겠어요, 리처드."브캐넌이 리처드의 손에서 청구서를 빼앗았다.
"그러면," 하며 그가 일어섰다. "매우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만 실례합니다." 그는 피곤한 듯한 미소를 띠고 사라졌다.
브캐넌은 티나에게 글라스를 쳐들어 보이며 음모자다운 미소를 보냈다. 어쨌든 그녀는 대성공을 거운 것이다.
"어째서 엘레나와 공연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티나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왜 그녀를 대번에 내쫓지 않는지 몰라요, 혼자 치고 싶었는데, 나는...."
"입 좀 다물어, 티나." 브캐넌은 부아를 참으며 한숨을 쉬었다.
엘레나는 냉장고를 열고 데이브가 사다 넣어 준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면서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두 시간쯤 전에 그의 방에서 나왔는데도 벌써 그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녀는 데이브의 마음속을 여러 모로 상상해 보았다.
엘레나는 18세 때, 데이브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그에게 쏟아 넣는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일단 그의 것이 되고 말면 자신을 묶고 있는 굴레에서 빠져나오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18세 때의 자신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그녀는 지금 새삼 확인했다.
엘레나는 다음 연주회를 위해 음악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커리어와 데이브를 양립시킬 방법을 빨리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자기라면 그것이 가능하다. 엘레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데이브는 문에 열쇠를 꽂아 넣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풋볼 선수는 모두 백만장자라 믿고 있는 부동산 업자에게 끌려 세 시간 동안이나 집을 보러 다니다가 그제야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코트와 브리프케이스를 침대에 내던지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데이브? 제리 먼로일세. 두 시간이나 자네를 찾아다녔네. 설마 돈이 다 떨어져 일거리를 찾아다녔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데이브는 껄껄 웃었으나, 결코 즐거워서가 아니었다. 인간은 왜 그렇게 속기를 잘하는 것일까. 프로 스포츠 선수는 모두 돈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매스컴의 과장을 그대로 믿고 있다니! 물론 부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부정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다.
제리는 계속 지껄였다.
"다음 주에 친구들끼리 베일로 여행하기로 했어. 내가 아는 녀석이 거기 맨션을 가지고 있는데,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거야. 어때? 크리스틴 린글레도 가기로 했지." 그가 킬킬 웃었다. "그녀는 줄곧 자네한테 열을 올리고 있어."
"어렵겠는데. 요즘 여러 가지로 바쁜 일이 생겨서. 그리고....." 데이브는 하마터면 엘레나 이야기를 할 뻔했다. "다음 주에는 뉴욕에 갈 일이 있어."
"하지만 크리스틴을 밤에 품어 주지 않으면 다른 녀석이 차지하게 될걸."
"아아, 어쨌든 초대해 줘서 고맙네."
"할 수 없군. 그럼 나중에 다시 마음이 변하면 전화해주게."
"알겠네." 데이브는 안도의 숨을 쉬고 수화기를 놓았다. 2, 3주 전의 일이었다면 그는 지체 없이 짐을 꾸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엘레나 외에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여자를 품다니, 그것이 비록 풍만한 크리스틴 린글레라 하지만 상상만 해도 구토가 날 것 같았다.
9장
리허설을 위해 홀까지 걸어갈 무렵, 기온은 10도 정도나 올라가 있었다. 태양은 밝게 빛나고 대기에서는 봄기운이 느껴졌다. 금년 겨울은 유난히 길어서 엘레나는 얼마나 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녀에게 드리워진 유일한 암운은 얼마 전 제럴드 윌리엄즈가 뿌려 놓은 것이었다. 명지휘자가 갖는 권력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굴복할 생각은 없었다. 엘레나는 이 오케스트라에서의 위치를 끝까지 고수할 생각이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데이브가 고통을 함께 나누어줄 것이다.
그런데 제럴드는 오늘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 엘레나가 그에게 따귀를 갈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엘레나는 왼손에 갈색 악보 케이스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은 드보르작을 연습하고 나서 현대 작곡가 시리즈를 위해 시베리우스의 작품 두 곡을 연습하게 될 것이다.
엘레나는 대리석을 깐 로비를 지나 좁은 통로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통로 양쪽에는 연습실과 대기실, 악기 보관용 선반이 늘어서 있었다. 무대 옆에는 이미 많은 음악가들이 모여 악보 준비를 하거나 잡답을 나누고 있었다.
제럴드는 방구석에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제럴드는 화가 났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멜로드라마 같은 장면은 연출하지 않고, 그녀와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할 만한 프로 의식은 갖고 있는 듯했다.
엘레나는 검은 스타인웨이로 걸어가 악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때 무대 오른쪽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몇 명의 무대 담당자가 또 한 대의 피아노를 무대에 운반해 오려 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일까? 제럴드에게 설명을 들으려고 돌아본 엘레나의 눈에 티나 볼코프스키와 같이 걸어오는 지휘자의 모습이 보였다. 엘레나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오만하고 추한 웃음을 띤 또 하나의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엘레나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엘레나는 설명을 요구하듯 제럴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사들이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를 연주곡목으로 정했어." 그의 음성은 냉정하고 초연했으나, 엘레나가 이 결정을 못마땅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금요일에 엘레나와 티나가 피아노를 치기로 했어."
"어떤 콘체르토인가요?" 마음속은 더할 수 없는 분노로 뒤끓고 있었으나, 엘레나의 어투는 놀랍도록 침착하고 강력했다.
"이것이야." 그는 두 사람에게 모짜르트의 악보를 건네주었다. "각자 자기 파트를 정확히 외도록 해." 제럴드는 이 말을 남기고 지휘대 쪽으로 가버렸다.
엘레나와 티나는 잠시 동안 적의에 찬 시선을 교환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어색한 장면을 제럴드가 구했다. 그는 지휘대에서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티나, 리허설을 시작할 수 있게 앉지 못하겠나."
티나는 악단원 면전에서 자기만이 주의를 받았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히고 얼른 피아노 앞으로 갔다.
제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엘레나는 문득, 그가 이러한 사태의 전개에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표정으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엘레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유치한 에피소드는 그것으로 끝나고, 제럴드와 그녀는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라는 관계로 일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럴드는 악보를 펼치고는 지휘봉을 들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두 여자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어버리려 했다. 그는 엘레나 슈버트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표시했던 것이다. 엘레나가 그 일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이 그는 여간 고맙지 않았다
엘레나와는 달리 티나 볼코프스키라면 쉽게 그의 수중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 교향악단에 들어오기 위해 그녀가 어떤 일도 사양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자신이 티나의 불쾌한 태도를 어떻게 참느냐 하는 데 있었다. 어쨌든 이번 연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녀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이다.
제럴드는 눈을 감고 목덜미를 어루만지면서 이 문제를 결말 지으려 했다. 그는 택트로 지휘대를 탕탕 두드리며 그날의 강의를 시작했다.
제럴드가 두 피아니스트에게 주의를 돌린 것은, 엘레나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시간 반 이상이사 드보르작을 연습한 뒤의 일이었다.
"그러면, 엘레나가 제 1피아노를 치도록 해요. 물론 티나는 제 2피아노이고." 그는 티나의 못마땅해 하는 표정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반주부를 치게 된 것이 불만스러운 것이아-과연 티나다운 유치한 반응이 아닌가. "두 사람 모두 철저히 연습해요,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연습실은 비어 있을까요?" 엘레나가 물었다. 티나와 같이 연주해야 한다는 사태를 그녀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 전부터 경쟁이 있으리란 것을 예감했고, 그것이 지금 표면화된 것을 오히려 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대처하고 싶었다.
"오후에는 스테이지가 빌 테니 두 사람 모두 여기서 연습하는 것이 좋겠어."
동료 음악가들은 차례차례 스테이지를 떠나면서, 어떤 사람은 동정적으로, 또 어떤 사람은 표정 없이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 같이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몸을 경직시키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티나였다. 그녀는 엘레나 옆에 다가와 피아노에 기대였다.
"그런데," 티나는 자기 손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제럴드를 어떻게 구워삶아서 당신이 제 1피아노를 치게 되었죠?"
엘레나는 혐오감을 드러내고 티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이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잊지 않길 바라오. 당신은 제 2주자에 지나지 않아요. 자아, 연습이나 해요." 엘레나가 명했다. "내가 최초의 6소절을 치고 나면 당신은 오케스타라와 가세해서 치는 거예요. 이것이 템포."
엘레나는 이 작품을 몇 년 동안 치지 않았으나, 그녀는 손끝에서는 저절로 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처음 2,3소절을 치면서 티나를 위해 소리를 내어 가며 가르쳐 주었다.
"3,4.....그리고 1,2.....와 3 과.....여기서 내가 그칠 테니까 당신은 네 번째 비트에서 치세요."
두 사람은 몇 번이나 그 작품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엘레나는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았다. 티나의 솜씨는 아주 훌륭했으나, 지시를 따르지 않아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했다.
연습이 끝날 무렵 엘레나는 인내의 한도에 달하여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보를 닫고 일어서다가, 엘레나는 문득 관객석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한테 다가오는 사람에게 눈의 초점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죠, 데이비드?"
"조금 전부터. 엘레나를 만나는 데 밤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어."
엘레나는 얼굴을 붉히고 악보를 가방에 넣었다.
티나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악보를 든 손을 정지시켰다. 그러고는 야릇한 시선으로 데이브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특히 연상의 남자에게 이끌리기를 잘하는 것이다. 티나는 사나이가 엘레나에게 키스하고자 상체를 구부리는 모습을 피아노 너머로 응시했다. 몸속에 질투의 불길이 타올라, 엘레나 슈버트에 대한 증오가 더욱 격렬해졌다.
어째서 엘레나 따위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녀는 한참 때를 지난 여자가 아닌가. 갑자기 티나의 머리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성공의 찬스를 예상하면서 그녀는 실눈을 뗬다.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엘레나 슈버트는 이 싸움에서 질 것이다. 나는 오케스트라에서의 엘레나의 지위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엘레나의 보이프렌드까지 가로채게 될 것이다.
엘레나와 데이브가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티나의 입술에는 추하고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저녁을 먹으려 가지." 홀을 뒤로 하면서 데이브가 제안했다.
"냉장고에 1년분이 될 식료품이 있어요, 데이비드." 엘레나는 산더미 같은 물건을 사들인 데이브의 기억을 새롭게 했다.
"그렇지 않아. 엘레나를 일류 레스토랑에 데려간 적이 없다는 것을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어."
"어머나!" 엘레나가 웃었다. "술과 식사로 나를 손쉽게 정복했으니까,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군요?"
"농담이 아니야! 누구 누구를 정복했느냐 하는 것은 내 앞에서 말할 처지가 못 될 텐데."
"어머, 그래요?"
데이브는 엘레나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물론이지."
엘레나는 데이브의 억센 육체에 몸을 기대자 가슴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이 사람 없이 어떻게 혼자 살아온 것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어디로 가죠?" 차에 오르면서 엘레나가 물었다.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하나?"
"아주 좋아해요."
"시내 동쪽에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서 최고의 링기니 크림소스를 파는 가게가 있어."
"좋아요. 하지만 우선 옷을 갈아입을 수 없을까요?"
엘레나는 데이브가 화려한 바지와 셔츠를 입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진즈와 코튼 블라우스 차림을 그의 차림과 비교해 보았다.
"물론이지. 엘레나의 집에 들렀다 가기로 해. 하지만 서둘러야 해. 일곱 시에 예약했으니까."
"너무 독단적이군요." 하며 엘레나가 웃었다. 엘레나의 집 앞에서 데이브가 차를 세웠을 때, 그녀는 조수석에서 달려 나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엘레나를 움직이게 할 방법을 알았어." 데이브가 뒤에서 말했다.
"뭐라구요?" 열쇠를 돌리면서 그녀가 뒤돌아보았다.
"링기니 크림소스지."
엘레나는 가볍게 미소를 되돌렸다.
"찬장에 와인이 있을지 몰라요."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급히 올라가며 그에게 말했다.
데이브는 코트를 입은 채 주방으로 들어가 캐비닛을 모두 열어젖뜨렸으나 와인은 없었다. 그는 크게 고개를 내젓고 냉장고를 열어 밀크를 컵에 따랐다.
엘레나는 옷장을 열고 이리저리 찾아본 끝에 겨우 심플한 벨벳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골라 침대 위에 놓고 세면대로 갔다. 풍성한 머리를 포니테일로 하여 뒤로 묶은 뒤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사실은 목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데이브는 그렇게 오래 기다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엘레나는 욕조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아니다! 데이브에게 기다리라고 해야지.
그녀는 욕조에 적당히 더운물을 섞었다. 진즈, 블라우스, 하의를 벗고 탕 속에 향유를 몇 방울 떨어뜨린 후 신중하게 한 발을 담갔다.
욕조에 몸을 담그자 긴장이 물의 온기와 함께 풀리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눈을 감고, 이제부터 시작될 밤을 즐겁게 상상했다.
데이브는 주방에서 거실로, 다시 주방으로 왔다 갔다 했다. 창밖도 내다보았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얼굴을 씻는 데 얼마나 물을 쓰는 것일까? 그는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거실로 가던 데이브의 코에 향료 냄새가 풍겨 왔다. 엘레나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맥박이 빨라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코트를 벗어 신경질적으로 소파에 던졌다.
주저하면서 한 발을 계단 제일 아랫단에 걸쳤다. 천천히 또 한 발을 올려놓았다. 향유 냄새가 어떤 와인보다도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잠시 냄새를 맡기만 했는데도 데이브의 마음은 엘레나에게 대한 그리움으로 마구 설레는 것이었다. 계단을 올라가 향기와 욕망이 뒤섞인 욕실로 향하는 데이브의 피는 끓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눈꺼풀 위에 커다란 그림자가 덮쳐 오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데이브! 엘레나의 온몸에 거역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치솟았다. 곁에 서 있는 그의 존재에 엘레나는 최면술에 걸린 듯이 되고, 그 역시 그녀의 마력에 사로잡히는 것을 깨달았다.
슬로우 모션과도 같은 움직임. 엘레나는 그가 블루셔츠의 단추를 끄르고 잿빛 바지에서 옷자락을 끄집어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지를 벗어 바닥에 던질 때도, 그리고 속옷을 벗을 때도 데이브는 그녀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데이브가 욕조로 다가와 엘레나 옆에 억지로 비비고 들어오려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명랑하게 웃였다.
"이 욕조가 우리에게는 너무 좁지 않아?" 데이브가 숨을 죽이고 나직이 속삭였다.
엘레나가 고개를 들고 경탄의 눈으로 데이브를 바라보았다. 남자와 같이 탕 속에 들어간 것은 생전 처음이기 때문에, 그 자극이 그녀의 감각을 예리하게 곤두세웠다.
"링기니는 어떻게 하죠?" 엘레나의 목소리가 작은 장식음처럼 울렸다.
"링기니라니?" 그의 두 손이 엘레나를 가만히 애무하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크림소스말이에요." 엘레나의 음성은 반쯤 신음하고 있었다. 데이브는 엘레나의 머리를 뉘고 그녀의 목에 입술을 밀어붙였다. 그녀의 목덜미는 촉촉이 젖어 있었고, 젖은 머리가 목으로 흘려내려 있었다.
데이브가 왼손을 그녀의 등에서 떼어 벽에 있는 비누를 잡았다. 그는 이 비누를 물에 담갔다가 천천히 엘레나의 등과 허리를 문지르고 오른손으로 거품을 일게 했다.
"아아, 엘레나는 어쩌면 이다지도 좋은 향기를 풍기지? 이 향내는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혀 왔어."
두 사람은 입술을 겹치고 서로의 정열에 불꽃을 당겼다.
데이브의 손에서 비누가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육체가 환희의 날개를 달고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는데도 그것을 억제하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데이브가 다시 눈을 떴다. 엘레나는 그의 자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레나 자신은 뜨겁게 불타기 시작하는 관능의 불꽃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데이브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죄고 다시금 힘껏 끌어당겼다. 데이브는 엘레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번뜩이는 정열의 증표를 하나 남김없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약간 벌어진 그녀의 입술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 감에 따라, 그 눈이 예리하게 빛을 발했다.
데이브의 뜨거운 입김이 엘레나의 목에 와 닿았다. 그 순간, 엘레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무언가가 폭발한 것처럼 눈부신 광채가 그녀의 시력을 빼앗아 가버렸다. 지금 엘레나에게는 데이브와 완전히 하나가 된 환희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엘레나는 그의 가슴에 쓰러졌다.
몇 분 후 데이브는 엘레나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이렇게 맛있는 링기니는 처음이야." 그는 다정하게 엘레나의 허리를 죄었다.
"크림소스도 꿈만 같았어요." 엘레나도 그의 어깨에 부드러운 키스를 퍼부었다.
"엘레나를 거기 데려가야 하겠어."
두 사람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래요." 엘레나가 웃었다. "아마 15분쯤 지났을 거예요." 그녀는 움직일 힘도 없이 만족한 숨을 쉬었다. 엘레나는 데이브에게 안긴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추운가?"
탕 속은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얼어붙을 것만 같아요. 하지만 조금도 깨닫지 못했어요."
데이브는 욕조에서 나오며 엘레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러고는 로열블루의 큼직한 목욕 타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천천히 몸을 닦아 주었다. 이것이 끝나자 타월을 그녀의 몸에 두르고 가슴 쪽에서 묶었다.
이어서 데이브는 또 하나의 타월로 자기 몸을 닦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그에 대한 사랑의 무게에 압도되어 그만 벽에 몸을 기대었다.
"데이비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나요?"
"없는데." 그는 타월을 몸에 감으면서 주의 깊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데이비드."
데이브는 엘레나 앞으로 다가가 자기 타월로 그녀의 목에 걸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도 엘레나를 사랑하고 있어." 데이브는 그녀의 턱을 쳐들고 아직도 젖어 있는 뜨거운 입술로 키스를 퍼부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듀엣을 연주하도록 운명 지워진 한 쌍이야."
예약한 시간보다는 한 시간 정도 늦어 있었다. 아르망드의 가게는 데이브의 설명대로 훌륭한 곳이었다-로맨틱한 분위기에 맛있는 음식, 벽의 목제 와인래커에는 갖가지 술이 진열되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특이한 촛대에서 발하는 빛이 부드러운 장밋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정말 멋지군! " 데이브가 엘레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멋지다>는 형용사로는 엘레나의 아름다움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고 여기면서.
엘레나는 로열블루의 벨벳 스커트에 연한 하늘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스커트와 조화를 이룬 벨벳 리본에 카메오가 매달려 있었다. 오른손 중지에서는 그녀가 처음으로 피아노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날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작은 에메랄드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캐시미어 코트는 그녀의 의자 등에 얌전히 걸쳐져 있었다.
"그 헤어스타일도 마음에 들어." 엘레나는 머리를 뒤로 모아 실크 끈으로 동이고 있었다. 목덜미와 관자놀이에 몇 가닥 머리칼이 흘러내려 있었다.
"당신 역시 멋져요."엘레나는 데이브의 깨끗이 면도한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그의 우아한 그린빛 눈동자가 엘레나를 애무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셔츠와 바지가 엘레나의 집 욕실에서 좀 구겨졌지만, 내일 어떤 일이 있어도 다리미를 사다 주겠어."
"나를 집에 가둬 놓고 당신 셔츠에 다림질이나 시키려는 것은 아니겠죠?' 엘레나는 반항하듯 턱을 내밀어 보였다.
"농담하지 마! 엘레나가 옷을 태울 때마다 새 셔츠를 살 수는 없어. 엘레나만 좋다면 다림질은 내가 하겠어."
"마음대로 하세요."
식사가 나오자 두 사람의 대확 잠시 끊겼다. 데이브와 엘레나는 모두 한 사람이 2인분을 먹을 만큼 배가 고팠었다.
"사랑을 나주고 난 뒤라서 몹시 배가 고프지?"
"쉿! 남이 듣겠어요."
"상관없어." 데이브는 엘레나의 손을 꼭 쥐었다. "전 세계 사람이 다 들어도 좋아. 엘레나 슈버트, 당신을 사랑해."
엘레나가 미소 지었다. 상대방에 대한 서로의 마음이 절대로, 또 영원히 변치 않기를 남몰래 기도하면서.
레스토랑에서 돌아오는 동안 엘레나는 운전하고 있는 데이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티나 볼코프스키의 일을 잊고 있을 수 있었으나, 차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으려니 티나의 존재가 다시 서서히 생각나기 시작했다.
티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물론 이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스트’ 하나만으로 엘레나와 티나 중 누가 피아니스트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될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 엘레나를 서서히 압박하면서, 연주회 때마다 티나에게 좀 더 중요한 역할을 주려는 이사들의 수단일 것이다. 티나에게 관심이 집중되면 그만큼 엘레나는 눈에 띄지 않고 차차 잊
혀져 갈 것이다.
엘레나는 티나 때문에 걱정스러워 몸을 움직였다.
"연주회 일이 걱정되나?"
"네." 데이브가 자기 생각을 알아맞힌 것에 놀라며 대답했다.
"오후에 나는 엘레나와 티나가 연습하는 것을 보았어. 물론 나는 전문적인 평론가는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걱정할 것이 못 되는 것 같아, 티나에 비하면 엘레나는 샛별이었어."
엘레나는 쓸쓸히 웃으며 그에게 꼭 다가앉았다. 그는 나의 챔피언, 이 위기가 계속되는 한 그의 사람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 두려움과 걱정을 같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그러나 잊으려는 엘레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자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엘레나는 자신을 언제나 현실주의자로 자처해 왔는데, 과연 지금도 그런 것일까?
데이브는 자기 어깨에 기대고 있는 엘레나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엘레나와의 결합은 꿈이 현실화된 것과도 같았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결코 상상도 못했었다. 그는 문득 엘레나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된 일일까? 그의 가슴에 불안이 솟아났다.
데이브는 엘레나의 표정을 지켜보며 걱정했다. 그녀는 자신의 커리어를 근심하고 있다. 티나 볼코프스키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종국을 직면했을 때, 그녀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두 사람에게는 상대방이 있다고 한 것은 데이브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악단에서의 지위를 잃었을 때 그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그조차도 배척해 버릴 것인가?
데이브는 두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심포니에 새로운 악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 악장이 되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10장
"나한테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칠 필요는 없어요, 엘레나 슈버트.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줄리어드 음악 학교에서 배웠거든요." 티나가 눈을 부릅뜨고 빈정거렸다.
"피아노가 아니라, 이 콘체르토를 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티나. 당신의 연주법은 틀렸어요. 연주회는 바로 내일 밤인데도."
"틀리지 않았어요!"
"이곳 탬포는 휠씬 빨라요, 티나." 엘레나는 연필을 들고 티나의 악보에다 문제 된 소절 위에 *표을 했다.
엘레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려고 애썼으나 티나는 그녀의 충고나 조언에 전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호전적이고 완고하며 정말 가증스런 소녀였다. 엘레나는 지겨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10분쯤 쉬고 올게요." 엘레나는 이렇게 말하고 백을 어깨에 걸쳤다. "돌아와서 C의 부분을 다시 연습하기로 해요."
티나는 멀어져 가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꼭 앙갚음을 하겠어. 티나 볼코프스키는 누구에게나, 특히 나이든 그녀에게서는 모짜르트의 콘체르토를 지도받고 싶지 않았다.
"실례합니다마는." 나직한 사나이의 목소리에 티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엘레나가 뻔뻔스럽게도 자기 애인이라 믿고 있는 키 큰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엘레나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까?" 데이브가 예의바르게 물었다. 그녀가 엘레나의 강력한 라이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는 제 3자로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어마!" 티나는 일부러 놀라는 체하면서 크게 외쳤다. "당신은 데이비드 애트웰씨가 아니세요?"
"그렇소만, 아가씨 혹시 모릅니까, 어디에....?"
"나는 풋볼 선수를 매우 좋아해요."
아아, 제기랄! 데이브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속으로 저주했다. 이 못된 아가씨는 누구를 조롱하려고 드는 것일까?
데이브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티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이 사나이는 정말 매력적이야, 데이브를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티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데이브가 매력적이 아니었다 해도, 그녀는 엘레나에 대한 증오 때문에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티나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이 사나이까지도. 엘레나는 30대에 접어든 올드 미스가 아닌가! 이 사나이는 젊고 싱싱한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엘레나와 같이 연습을 하면서 본 바에 따르면, 이 사나이와 엘레나는 서로 뜨거운 사이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뒤엎고야 말 테야. 필요한 것은 사소한 계략뿐. 더구나 이 사나이가 상대라면 그 계략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티나는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올려다보면서 유혹하듯 살짝 웃어 보였다.
데이브는 분노를 꾹 참고 티나의 손을 뿌리쳤다.
"엘레나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실례합니다." 그는 엘레나가 걸어 나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티나는 이 사나이에게 우회적인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에게 제안할 일이 있어요."
데이브가 돌아보았다. 주저하면서도 흥미를 느끼는 듯싶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티나는 다시 그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하는 말은 결코 무시해 버릴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의 소중한 엘레나와 관계되는 일이니까."
데이브도 이번에는 가슴에 댄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엘레나가 이 교향악단에 눌러 있고 싶어 하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티나는 옆눈으로 데이브의 기색을 살폈다. "하지만 나 같으면 여기보다 더 좋은 오케스트라도 얼마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데이브의 목소리는 싸늘하고 엄숙했다. 티나의 등줄기로 불안이 흘렀으나, 그녀는 이것을 참고 점점 더 결의를 굳혔다.
"대가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용의가 있어요...." 티나는 나머지 손까지도 그의 가슴에 대고 그 넓은 가슴의 근육과 늑골을 애무했다. "당신이라면요."
"정말이요?" 데이브는 큰 소리로 웃어야 할지, 아니면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칠 것인지 망설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여자에게 손찌검을 한 일이 없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제안은 그것뿐이에요." 티나가 사무적인 어투로 덧붙였다. 데이브는 티나의 두 팔을 꼭 붙들었다.
"아가씨에게 해둘 말이 있어요, 달링." 속삭이듯 하는 그 말에 티나는 기대로 몸을 떨었다. "그 특이한 제의를 받아들일 마음은 굴뚝같지만, 유감스럽게도 구토가 일어나는군요,"
데이브가 갑자기 손을 놓았기 때문에 티나는 몇 걸음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녀는 그자리에서 떠나려는 데이브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당신의 소중한 엘레나에게서 보상 받고 말겠어요."
마침 이때 휴식을 끝낸 엘레나가 돌아왔으나, 티나가 얼른 피아노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 자리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데이브를 본 엘레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여어! " 데이브는 티나의 추한 연극을 그녀가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을 다행하게 여기며 우아하게 키스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그러나 엘레나가 어떤 상대와 싸우고 있는 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오래 기다렸어, 하고 덧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었어요." 엘레나가 가만히 속삭였다.
"알고 있어. 앞으로 얼마나 연습해야 하지?"
"한 시간쯤이요. 하지만 오후에는 오케스트라와 같이 리허설을 해야 해요."
"점심시간에도 밖에 나갈 수 없나?"
엘레나가 두 팔로 데이브의 목을 껴안았다.
"사주겠다는 약속을 하면 나가겠어요."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그럼, 정오에 다시 오지." 데이브는 엘레나가 처음으로 보이는 애교에 놀라고 또 매혹되어 숨을 죽였다.
"늦으면 안 돼요. 식사할 시간이 없어지니까요."
데이브가 숨을 헐떡이며 정오에 다시 돌아왔을 때, 엘레나는 홀 정면의 계단에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나의 눈에 깃들여 있는 갈망을 한눈에 알아본 데이브는, 두 사람에게는 점심 따위를 먹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얼마나 있지?" 엘레나가 도발하듯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자, 데이브의 몸에 욕망의 불길이 치솟았다.
"한 시간뿐이에요. 풋볼 선수는 재빠른 동작에 익숙해 있겠죠?" 엘레나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디서?" 데이브는 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우리 집."
"자아, 가지."
데이브, 이리 오세요." 엘레나는 데이브를 재촉하여 그의 손을 잡고 계단으로 달려 올라갔으나, 제일 윗단에서 돌아보다 입술을 겹치고 격렬한 정열의 이끄는 대로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이 정열을 향해 치닫기 시작함에 따라 언어는 힘을 잃었다. 꼭 껴안은 채 몇 번이나 쾌감의 파도에 씻긴 뒤에야 비로소 그들은 피로를 느끼고, 따뜻한 해안에 떼밀려 온 연인처럼 만족스럽게 나란히 누웠다.
"데이비드,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엘레나는 그의 촉촉한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데이브도 그녀의 목에 키스를 퍼부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혼자서 참지 않아도 돼."
"네, 세월만 헛되게 보냈어요. 같이 살 수도 있었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표류하고 있었지." 데이브는 엘레나의 입술과 눈에 가만히 키스하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것이 아니지. 표류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빠지려 하고 있었어."
엘레나는 그의 두 뺨을 감싸고 미소 지었으나, 눈에는 약간의 슬픈 그림자가 떠돌고 있었다.
"데이비드, 약속해 줘요. 우리들의 이 사랑은 결코 익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데이브는 다시 엘레나의 입술에 키스하면서, 손으로, 입술로, 또 몸으로 엘레나에게 확식시켰다. 몇 번이나 거듭 되풀이하면서.
연주회 날 아침이 되었다. 엘레나의 신경은 갈가리 찢어질 것만 같았다. 데이브는 어제 오후 엘레나를 홀 앞에서 내려 주고 기차로 뉴욕에 갔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간부들과 스포츠 프로그램에 대한 회의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혼자 남은 엘레나는 리허설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엘레나는 지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아침 햇살이 벌꿀처럼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스스로 묻고 있었다. 오늘은 도대체 어떤 날이 될 것인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이 햇빛이 내 커리어를 소생시켜 줄 것인가, 아니면 일생 동안 추구해 온 무지개의 종말을 마지막으로 채색시켜 줄 것인가?
갈색 코듀로이 팬츠와 베이색 스웨터를 입는 엘레나의 가슴은 나비의 날개처럼 떨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데이브가 하던 대로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보았으나, 딱딱해서 마치 고무를 씹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계란을 버리고 그 대신 토스트 한 장을 구웠다. 그러고는 아주 짙은 다질린 홍차 잔을 들고 거실로 가서 손을 풀려고 음계와 화음을 가만히 쳐 보았다. 연주회 당일은 언제나 다소는 긴장하게 마련이지만, 오늘 아침은 전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엘레나는 워밍업을 하는 셈으로 쉬운 곡을 몇 곡 치고 나서, 그녀가 제 1 피아노를 담당하게 될 모짜르트의 콘체르토로 옮아갔다. 엘레나는 이 곡을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었으나, 자기 혼자만 잘해서도 안 된다. 티나와 지난 일주일 동안 연습했듯이 템포가 어긋나면 연주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오후에 다시 한번 티나와 연습할 기회가 있다. 그녀도 오늘만은 정확히 치게 될
지도 모른다.
엘레나는 모짜르트를 연습하는 데 한 시간을 보내고, 다음에는 역시 금주로 예정된 다른 연주회를 위한 연습을 해보았다. 베토벤의 소나타, 오펜바하의 ‘호프만의 뱃노래’, 바그너의 악극 ‘발키레’ 등을 연습하고 나서 점심을 먹기 위해 휴식을 취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마릴리에게서 전화가 와서 엘레나는 자신의 회복에 큰 보탬이 되었다.
"햇병아리의 오만한 코를 분질러 주라니까." 마릴리는 엘레나의 재능에 완벽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코가 아니라 그녀의 목을 부러뜨리면 안 될까?"하며 엘레나가 웃었다.
"그건 자유야. 네 솜씨를 구경하고 싶지만 마침 직원회의가 있어. 이젠 학교 선생 노릇도 지긋지긋해. 그런데 데이브는?"
"응, 잘 지내고 있어."엘레나가 길게 숨을 쉬었다.
마릴리도 전화 저쪽에서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엘레나는 가벼운 점심을 끝내고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면서 홀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몇 년 동안이나 오늘 오후와 같은 햇볕을 쬐어 왔는데도, 이것을 즐길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얼마나 멋없는 생활을 보냈던 것일까....엘레나가 홀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막 리허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일부러 시간에 맞춰서 오는군, 엘레나." 서둘러 피아노 앞에 앉는 엘레나에게 제럴드 윌리엄즈가 쏘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엘레나와 역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티나를 교대로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이런 분쟁이 있다는 것을 역겹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체념한 듯 텍트를 가볍게 흔들며 두 사람에게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차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 티나가 템포를 잘못할 때마다 엘레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제럴드는 계속 티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두 사람이 연주가 끝나자, 제럴드는 오늘 밤까지 완벽하게 칠 수 있도록 하라고 마지막 경고를 주었다. 타나는 자기 악보를 그러모으며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어딜 가려는 거야?" 제럴드 윌리엄즈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나는.....나는 연습이 끝난 줄 알았어요." 티나는 말을 더듬었다.
"리허설이 모두 끝날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해."
"하지만, 다른 곳은 연주할 게 없는걸요......"
"다른 악단원이 리허설을 끝낼 때까지 남아 있도록 해, 티나 볼코프스키. 거기 않아 손가락 장난이라도 하고 있어. 다만 떠들어서는 절대로 안 돼."
엘레나는 입술을 꼭 깨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얼굴을 붉힌 티나가 적의를 나타내며 피아노 앞에 앉아 엘레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무슨 음모를 생각했는지 그녀의 눈이 번쩍 빛나고 입가에 수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건반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엘레나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리허설이 끝난 것은 네 시였다. 악단원들은 저녁을 먹고 연주회에 대비하여 옷을 갈아입기 위해 저마다 귀로에 올랐다.
엘레나는 집으로 돌아가 레코드 몇 장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2층의 욕실에까지 들리도록 볼륨을 올렸다.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의 우울한 곡조가, 욕실에서 옷을 벗는 엘레나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왜 이다지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것일까? 김이 서린 욕실에 들려오는 슈만의 [트로멜라이]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지난 8년 동안 적어도 2천 회는 청중 앞에서 연주했는데, 하지만 이번만은 사정이 다르다! 티나와의 협연은 도대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음악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인가, 아니면 종말인가? 신생인가, 파국인가? 음악과 데이비드를 모두 손에 넣고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커리어를 잃고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데이비드에게 의지하게 될 것인가?
데이비드는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이고, 두 사람의 결합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매우 자신 있게 말했었다. 그 당시는 엘레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지금, 그녀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데이비드의 말이 틀린 것이라면? 나는 너무나 이상주의자였는지 모른다. 만일 피아니스트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린다면, 23년 동안 내 존재의 핵심이었던 음악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엘레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럴 수는 없다. 이처럼 애써 손에 넣은 지위를 단념할 수는 없다. 물론 데이비드를 원한다. 하지만 그에게 의지하는 신세가 되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자립하여 내 나름의 라이프 스타일은 가져야 한다. 데이비드가 필요해. 그리고 커리어도 갖고 싶다. 양쪽 모두 필요해!
엘레나는 두 손을 꼭 쥐고 욕실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오늘 밤의 실패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내 인생 - 그렇다, 음악은 내 인생의 반인 것이다 -을 이렇게 끝내 버릴 수는 없으니까.
엘레나는 팔과 손을 흔들어 긴장을 풀었다. 향기로운 욕조에 몸을 담그면서 자신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오늘 밤은 멋진 연주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완벽한 연주! 그런 뒤 데이브와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어야지. 문자 그대로 나는 모든 면에서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엘레나는 자신에 넘치며 황홀감에 젖어 눈을 감았다. 그렇다, 나는 희망을 실현시키고야 말겠다!
엘레나는 연주가 시작되기 몇 분 전에야 겨우 모습을 나타냈다. 티나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동석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티나를 피할 수는 없었다.
티나는 입구에서 엘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보이는 솔직한 표정에 엘레나는 한순간 놀랐다. 이것도 티나의 책략이 아닐까? 엘레나는 속으로 의심했으나, 어쨌든 티나가 자기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엘레나, 잠시 이야기해도 될까요?" 티나는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겁먹은 듯 미소 지었다.
"좋아요." 엘레나는 경계했다. 대관절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 것일까?
"저어, 사실은." 티나가 망설이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고백해야 할 일이 있어요. 데이비드가 이미 말했는지 모르지만요."
"데이비드가? 나한테 말인가요? 데이비드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그가 아직 말하지 않았나요?" 티나가 짐짓 놀라는 체해 보였다.
엘레나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고 얼굴은 잔뜩 긴장되었다.
"당신한테서 듣는 편이 좋겠군요." 그녀가 상냥하게 티나를 독촉했다, 이런 곳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자신을 탓하면서. 사실 연주회 직전에 마음을 산란케 만드는 것은 금물이었다.
"나는 데이비드 애트웰을 당신에게서 뺏으려 했어요." 티나의 고백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뭐라고요!" 연주회 직전에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당신은 너무도 행운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어요, 엘레나. 그래서 나는...질투가 났던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 내가 얼마나 바보였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티나는 빠른 말로 계속했다. "즉 데이브와 당신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것을 인정하기란 괴로운 일이었지만. 특히 데이브가 내 몸에 팔을 감고 끌어안았을 때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가 당신을 껴안았다고요?" 엘레나는 분노의 기색을 애써 숨기고자 노력하면서 말했다. 데이브가 티나 볼코프스키를 껴안다니!
"잘 기억이 안 나요." 티나가 순진하게 웃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군요? 어쨌든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어요. 즉 그는 나보다도 당신을 절대적으로 더 좋아한다는 것이 사실이에요. 그래서 나는 그런 면에서는 당신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단념했어요."
"그 말을 왜 지금 하죠, 티나?" 엘레나는 그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면에서는'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 입장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서예요."
"당신의 입장?" 엘레나는 긴장한 나머지 속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티나가 이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게 된 동기가 의심스러웠다.
"잘 생각해 본 결과," 티나는 턱을 앞으로 내밀고 평소의 오만한 태도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한 남자와의 관계에 귀중한 시간을 쪼갠다는 것은 내 재능의 낭비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확실히 남자란 좋은 거예요. 그리고 한 사람쯤은 언제라도 마련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나처럼 재능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모든 시간을 음악에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데이브를 당신에게 되돌려주기로 했어요."
"정말 친절하군요, 티나. 연주가 있기 때문에 그만 실례하겠어요." 엘레나는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엘레나.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았어요." 티나는 다시금 엘레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당신 손에 남는 것은 그 남자뿐일 거예요. 그래서 당신한테서 그를 뺏는 일은 그만두었어요. 당신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으면 불쌍하니까요. 의지할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고......"
"웃기지 말아요, 티나." 엘레나가 강력하게 쏘아붙였다.
"웃길 생각은 없어요. 짓밟아 버릴 것이니까요." 티나의 입에서 심한 소리가 나왔다." 오늘 밤을 끝으로 당신은 이 교향악단이나 다른 악단에서도 일절 연주할 수 없게 될 것에요. 당신을 파멸시키겠어요!" 티나는 내뱉듯이 말하고 생긋 웃으며 가버렸다.
엘레나는 떨면서 두 손으로 가슴을 부둥켜안았다. 도대체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티나의 암시에 겁을 먹는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역시 두려웠다. 이런 협박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티나처럼 자신의 승리를 위해 상대방을 태연히 해치우는 여자를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생각해 봐야지, 하고 엘레나는 자신을 타일렀다. 금주에 들어와 한번도 제대로 연주한 일이 없지 않은가. 오늘 밤이라고 특별히 잘 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스테이지 중앙에서 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엘레나는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었으나, 그래도 티나의 말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티나의 몸을 껴안았다는 데이브의 이미지가 예리한 칼날처럼 엘레나를 괴롭혔다. 어째서 그는 말해 주지 않았을까? 그를 유혹하려는 티나의 시도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엘레나는 상상하기조차 무서웠다.
엘레나는 공포와 의구심을 억제하기 위해 꿀꺽 침을 삼키고 천천히 홀을 가로질러 갔다. 8년 동안이나 같이 일해 온 동료들과 인사를 교환하고 말을 나누는 동안 차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엘레나는 음악가들이 스테이지의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악기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오랫동안 익히 보아 온 마음 느긋한 광경. 이것이 내 인생이다. 이 인생을 그 냉혹한 야심가에게 빼앗길 수 있단 말인가?
엘레나는 누가 자기 어깨에 가만히 손을 짚는 것을 깨닫고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음악잡지 <거장>의 편집자로서 엘레나와 오랜 친교를 맺고 있는 중년 여성이 웃고 있었다.
"어머! 엘레나, 오후에 뉴스를 듣고 정말 놀랐어요. 당신을 못 만나게 되다니 정말 섭섭해요." 편집자는 백발이 섞인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엘레나는 편집자의 말에 놀라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거장>에서 그만두려는 것일까? 다른 잡지사로 옮기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밤이 엘레나의 마지막 연주라니 믿을 수 없어요." 편집자가 자못 유감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마지막....연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녀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을까?
"오늘 오후 그 뉴스를 들었을 때 스탭 전원이 큰 충격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믿어야 하는 건지 의심했어요. 하지만......"
아아, 하느님! 이것이 내 마지막 연주인 것이다! 이사회가 내 후임으로 티나를 선택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본인이 알기 전에 보도 관계자에게 알리다니 너무 심하다. 엘레나는 눈물로 글썽해진 눈을 편집자에게 돌렸다.
어떻게 할까?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었다. 오늘밤의 연주도 무리였다. 이것이 내 마지막 연주란 것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너무들 하지 않은가!
엘레나는 심하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무대를 둘러보았다. 제럴드는 어디 있을까? 제렐드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피아노를 연주할 만한 심리 상태가 아니니까. 마지막 연주인 줄 알면서 피아노를 칠 수는 절대로 없다. 엘레나는 지휘자의 모습을 찾으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엘레나, 괜찮아요?" 편집자의 안쓰러워하는 목소리가 엘레나를 감싸고 있는 고민의 안개를 통해 들려왔다. "괜찮겠어요?"
"네." 억지로 대답하자, 편집자는 당황하는 모습으로 얼른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이날 밤의 피아니스트인 엘레나를 동요시킬 생각이 아니라, 다만 엘레나가 없어지는 것이 유감이라고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아, 가지. 엘레나." 제럴드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 역력히 나타난 고민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한 사람 엘레나의 고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엘레나는 제럴드의 냉정한 얼굴에서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있는 티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얼굴에는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 독살스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엘레나는 무대 담당자와 상의하고 있는 제럴드와 승리의 눈을 빛내고 있는 티나를 견주어 보면서, 사태의 중요성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끝났다. 내 커리어도 이제 끝장이다. 티나 볼코프스키가 이긴 것이다. 티나를 제외하고는 누구 한 사람 내게 말해 줄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바로 몇 분 전에는 티나를 비웃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한 듯한 티나의 웃음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적개심이 치솟아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이 두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 스테이지에 올라가 연주하자. 이 사람들은 내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잔인한 기쁨을 맛보려하고 있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명지휘자와 두 명의 여성 피아니스트가 스테이지에 올라가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일었다. 그러나 엘레나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박수 소리는 <거장>편집자의 말과 교차되어 있었다. 마지막 연주....마지막 연주......청중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멤버도, 무대 담당자도, 보도 관계자도. 그리고 엘레나가 예약한 중앙석에 앉아있는 데이비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애용해 온 스타인웨이 앞에 앉은 엘레나는 청중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한테 쏠린 것을 깨달았다. 저 사람들은 내 심리 상태를 탐색하고 내 기분을 예상하며 심판을 내리려 하고 있다......
데이브는 자기 자리에서 엘레나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었다. 검은 롱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갈색머리를 부채꼴처럼 어깨에 드리운 그녀의 모습이 데이브의 욕망을 자극했다. 엘레나가 소녀 시절에 꿈꾸었다는 기사가 되어, 그녀를 피아노에서 유괴해 가고 싶었다. 엘레나의 연주를 듣고 싶었다. 데이브는 딜레마에 빠졌다. 엘레나의 놀라운 연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시간과 에너지를 그토록 빼앗아 가는 피아노에 대해 적의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 나는 이토록 엘레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이것이 내 마지막 연주라는 것을 알고 있다-이 통절한 생각이 엘레나의 집중력을 빼앗았다. 건반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쳐들었으나, 그녀의 마음은 음악에서 떠나 헤매고 있었다. 청중의 눈, 악단원의 눈, 그리고 또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의 눈-모든 눈이 나의 마지막 연주를 지켜보고 있다.......
엘레나는 곡에 열중하려고 비트를 세기 시작했는데, 티나가 그녀의 파트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오랫동안 익혀 온 곳을 치듯 자신 있게 연주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이제 와서야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티나는 올바른 연주법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티나는 엘레나를 감쪽같이 속여 왔던 것이다.
엘레나는 통분의 눈물을 필사적으로 억제했다. 손가락이 키 위에서 떨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음표! 지금 키를 두드려야 하는데 음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치기 시작하면 되는 것일까? 오케스트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주를 계속했다. 제럴드가 흘끗 찌를 듯한 시선을 던졌다.
아아, 어째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일까? 엘레나는 키 위에서 얼어붙은 듯 무력해진 손을 보았다. 이때 하늘의 계시인 듯 공기가 흔들리며 다시 멜로디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이 멜로디가 티나의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엘레나는 구토를 느꼈다. 티나는 그녀 자신의 파트뿐만 아니라, 엘레나의 파트까지도 연습했던 것이다. 티나는 오늘 밤, 이 같은 순간이 찾아올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브는 엘레나의 모습에 시선을 못박고 두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엘레나가 도대체 왜 저럴까? 어쩐지 이상하다. 음을 잊어버린 것일까? 데이브는 엘레나를 위해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엘레나, 생각해 내는 거야! 생각해 내야만 해! 아아, 티나가 엘레나의 파트를 치기 시작했다.-. 데이브의 가슴에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근육이 이완되고 패배감이 빠져들었다. 엘레나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엘레나는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면서 티나의 연주를 듣고 있다가, 겨우 체념한 심정으로 자기 파트를 치기 시작했다. 티나는 그녀 자신의 반주부로 홀가분히 되돌아가 있었다.
음을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을 일분도 계속되지 않았으나, 청중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의 실패를 깨달았으리라고 엘레나는 확신했다. 자신의 마지막 콘서트. 그런데도 수치스런 대실패를 저지른 것이다.
콘체르토가 끝나고 박수 갈채가 울려 퍼졌다. 엘레나는 청중의 갈채가 자기에게가 아니라, 티나의 황홀한 연주에 대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청중은 티나를 자기들의 새로운 피아니스트로 인정하고, 우레와 같은 갈채로 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11장
휴식에 들어가자 홀에는 환하게 불이 켜졌다. 비참해진 엘레나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던 스포트라이트도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고 말았다.
무대 뒤로 돌아가 봐야지. 엘레나는 지금 나를 필요로 할 것이고, 혼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데이브는 많은 인파를 거슬러 무대 뒤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악단원들이 일어나 몸을 풀고 있는 동안에도 엘레나는 몇 분 동안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일어나서 무대 뒤로 걸어갔다. 제럴드 윌리엄즈의 얼음 같은 시선과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럴드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엘레나를 맞이했다. 엘레나는 떨리는 손발을 겨우 억제하고 제럴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줄곧 미스 볼코프스키에 대해서만 걱정을 해왔는데, 신경을 썼어야 할 사람은 엘레나였었군."
"이것이 내 마지막 연주라는 것을 왜 말해 주지 않았어요?" 엘레나의 눈에는 한 시간 이상이나 참았던 눈물이 치솟고,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말해 두겠는데, 엘레나가 모짜르트의 콘체르토를 그렇게 망칠 줄 알았다면, 물론 나는 이번이 마지막 연주라고 통고했을 거야." 제럴드의 노기 띤 음성은 로비에 있는 악단 후원자들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목이 잘린 것을 몰랐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엘레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를 해고하고 티나 볼코프스키를 대신 앉힌다는 이사회의 결정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그런 결정을 내린 일이 없어."
"하지만....<거장>지의 편집자가.....그녀가 말했어요.....오늘 밤 연주회 직전에.....그렇다면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인가요?"
"이런 비상식적인 말을 듣기는 처음이군! 그처럼 중요한 결정을 본인인 엘레나에게 먼저 알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나?" 제럴드가 화를 냈다.
"모르겠어요! 몰라요!" 엘레나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음을 잊어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어요, 제럴드. 이것이 마지막 연주라는 말에 완전히 얼이 빠져 버렸던 거예요. 더구나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나뿐인 줄로만 알았어요. 도대체 누가 이처럼 악의에 찬 거짓말을...." 엘레나는 홱 하니 머리를 들고, 이토록 잔인한 함정을 팔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티나는 벽에 기대어 모른 체하는 얼굴로 손톱의 매니큐어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는 흘끗 엘레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손톱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티나! 오늘 밤이 엘레나의 마지막 연주회라고 편집자에게 귀띔한 것은 바로 티나였던 것이다. 전혀 근거가 없는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연주가 되게끔 만든 사람은 엘레나 자신이야." 제럴드는 신음하듯 나직한 소리로 말하고는 엘레나의 팔을 잡고 위협하듯 얼굴을 가까이 했다.
"엘레나의 참된 능력을 내가 몰랐더라면 이 자리에서 해고하라고 이사회에 권했을 거야."
데이브는 인파 속에서 겨우 엘레나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녀는 찌푸린 얼굴을 한 제럴드 윌리엄즈의 시선을 받고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저놈이 엘레나의 팔을 붙들고 있군! 데이브의 머리로 피가 역류했다. 저놈은 지금 피아니스트의 자리를 확보하고 싶다면 자기 말을 들으라고 엘레나를 협박하고 있는 거야.
"없애 버릴 거야." 데이브는 두 사람에게 다가서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엘레나는 제럴드의 분노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시선과 말에서 희망의 편린을 발견했다. 나를 해고하라고 이사회에 제안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내가 사실은 능력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러나 엘레나가 자신을 되찾기 시작한 순간, 희망의 조짐은 그녀의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갑자기 제럴드가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벽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차차 눈의 초점이 모아짐에 따라,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데이브라는 것을 알았다.
"데이비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엘레나는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신경이 쓰였으나, 무엇보다도 제럴드 윌리엄즈의 납덩이같은 안색이 걱정되었다.
데이비드가 지휘자를 향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귀를 기울였다.
"다시 건드리기만 해 봐.....뼈를 부러뜨리겠어....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남자들 몇몇이 데이비드를 지휘자에게서 떼어놓을 무렵 엘레나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어째서 데이비드는 내게 이런 꼴을 보이는 것일까? 지휘자에게 폭행을 가하다니 어쩌자는 것일까?
제럴드는 엘레나 쪽으로 방향을 돌리며 무서운 기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엘레나!" 그는 손가락으로 엘레나의 얼굴을 가리켰다. "엘레나와의 관계도 이것으로 끝났어. 나와 내 오케스트라 앞에서 당장 사라져 버려!"
그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티나를 찾기 시작했다. 티나는 자신 있는 태도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티나, 무엇을 연주할 수 있겠나?" 제럴드가 느닷없이 물었다.
"엘레나가 연주할 예정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치겠어요." 티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잘 칠 수 있겠나?"
"완벽하게 칠 수 있어요." 티나가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들었다.
"좋아, 티나가 치도록 해." 제럴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가들이 스테이지에 돌아오기 시작하고, 티나도 엘레나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안녕, 엘레나." 티나는 업신여기듯 웃으며 흘끗 엘레나의 기색을 살폈다. "저기 있는 타잔이 당신을 잘 돌봐줄 거예요."
엘레나는 티나를 마루 위에 쓰러뜨려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티나가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 무대였던 스테이지에 오르는 것을 힘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달링." 데이브는 엘레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괜찮다고요? 괜찮다니요!" 홱 돌아선 그녀가 저주스럽다는 듯 데이브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방금 모든 것을....모든 것을 망쳐 놓았어요." 엘레나는 내뱉듯 말하고는 코트를 들고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엘레나의 분노에 데이브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째서 저토록 화를 내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고 했는데, 대관절 무슨 뜻일까? 여기까지 생각한 데이브는 얼른 엘레나의 뒤를 쫓아가 팔을 붙들었다.
데이브의 손이 엘레나의 코트에 닿기가 무섭게 그녀는 뜨거운 것이라도 닿은 듯 손을 뿌리쳤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야?" 엘레나의 태도에 놀라면서 데이브가 물었다.
"당신은 방금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엘레나가 외쳤다. "당신이 나를 실직시켰어요."
데이브는 전기의자에 앉은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뭐.....뭐라고? 윌리엄즈가 엘레나를 협박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지휘자로서 당연한 태도를 보인 거예요. 콘체르토를 망쳐 놓은 내게 화를 냈던 것뿐이에요."
"그놈이 엘레나에게 손을 대고 있었어." 데이브가 변명삼아 말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그래서라니? 그놈은 지난번에 엘레나를 폭력으로 뺏으려 했어. 아니면...." 데이브는 약간 몸을 빼고 눈썹을 찌푸리며 엘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거짓말이었는지도 모르겠군. 엘레나가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그의 방으로 찾아간 것인지도 몰라. 계약 조건으로 섹스를 이용하려 한 것은 엘레나이지 그가 아니었는지도 몰라. 왜냐하면 엘레나는 내게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였으니까."
엘레나는 손을 뒤로 가져갔다가 힘껏 그의 바퀴를 갈리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그의 얼굴에 다다르기 전에 데이브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꼭 붙들고 말았다.
"그렇지, 엘레나? 제럴드에게 거절당한 것이지?"
엘레나는 말도 안 나올 만큼 분노에 사로잡혀, 온몸을 떨면서 데이브를 노려보았다.
데이브도 엘레나가 그렇게 비겁한 여자가 아니란 것을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고 있었으나,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엘레나를 도와줄 생각뿐이었는데도 엘레나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게 한 것은 바로 데이브 한 사람만의 책임이란 투가 아닌가.
"엘레나는 이 악단에서 이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비겁한 일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응? 이 일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래요, 그 밖의 것은 모두 무의미해요!" 엘레나는 내일이면 이 말을 후회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외쳤다. 데이브의 얼굴이 고민을 넘어 가면처럼 굳어졌다. 데이브에 대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사랑에 몸을 맡겨 버리면 될 것인데, 왜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이토록 무서워하는 것일까?
데이브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낫고 억제되어 있었으나, 사실은 그녀의 몸을 흔들어 제정신을 찾게 해주겠다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을 때도 엘레나에게는 역시 무의미했나?"
엘레나는 당황하여 시선을 피했다. 현재는 어떤 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커리어를 상실했다는 확신만은 있었다. 이번만은 잘못되지 않았다. 내가 진 것이다. 그것도 데이브의 폭력 때문에 제럴드는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은 젊은이의 세계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한창나이를 지났고....
그렇다고 해서 오래 가꾸어 온 꿈을 버리고 내 사랑과 에너지 모드를 한 남자에게만 쏟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에게만 의존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다.
"엘레나의 대답은 알겠어." 데이브는 엘레나의 가만히 있는 옆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엘레나는 줄곧 나를 속여 왔군 그래." 그는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들의 결합은......."
데이브가 말을 끊었기 때문에 엘레나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두려웠다. 엘레나는 몸을 긴장시키고 기다렸다.
"그동안 즐거웠어. 언젠가 다시 즐겁게 해주었으면 좋겠어." 데이브는 비꼬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엘레나는 혼자 한길에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스테이지의 백도어를 통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피아노곡 ‘인도의 노래’가 엘레나에게까지 들려왔다.
엘레나는 정처도 없이 두어 시간 동안 헤매다가 다시 장려한 홀 앞에 와서 섰다. 연주자와 청중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으나 불빛만은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엘레나는 추위 탓도 있고 하여, 홀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몸을 떨면서 코트의 깃을 세웠다.
지상의 조명이 건물을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대리석 정면과 주랑에 윈통형 빛을 던지고 있었다. 엘레나는 현관을 장식하고 있는 로마 숫자에 시선을 보냈다. 1918년 완성. 그렇다면 이 건물은 대공황과 사회개혁주의의 물결에도 견디어 온 것이다. 엘레나는 몇 해 전에 벌어졌던, 홀을 허물어 버리자던 캠페인을 기억하고 있다. 몇몇 열성적인 부흥주의자들이 그 운동에 반격을 가해, 그 건물이 예전의 영광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엘레나는 피곤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한쪽 문을 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대리석에 칠한 왁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바닥의 광택이 손상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가, 청중석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을 열었다.
통로에 서서 앞서 자신의 경기장이었던 텅 비고 어두컴컴한 좌석을 둘러보았다. 그리스 조각이 음악의 성역에 뛰어든 침입자를 경계하듯 정연히 도사리고 있었다. 청중석은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담황색 조명 속에 가라앉아 있었으나, 스테이지만은 밝게 비춰진 채로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의자와 지휘대는 주인을 잃은 채 정연히 늘어서 있었고, 티나가 좋아하는 볼드윈 피아노가 스테이지 한가운데를 점하고 있었다. 엘레나가 애용하고 있던 스타인웨이는 피아노 2중주가 끝난 뒤 어디로 치워진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의자 팔걸이를 쓰다듬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에드워드 작곡인 ‘협주곡 가단조’의 풍부하고 다이내믹한 선율이 울려 나왔다. 엘레나가 이 악단에서 최초로 연주한 곡이다. 협주곡은 어떤 때는 급템보로, 또 어떤 때는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흘러갔다. 엘레나는 의자에 기댄 채 황홀하게 듣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엘레나는, 아무도 없는 스테이지와 침묵 속의 피아노를 보고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뺨의 눈물을 씻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홀에 작별을 고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날 밤도 데이브는 엘레나와 헤어진 이후 늘 그래왔던 것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서 한 묶음의 서류를 들어 방 한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가져가 이름, 날짜 등 다음 시합에 출전할 선수들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데이브는 서류를 팽개치고 다시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가 이처럼 분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크게 실망한 것도. 그는 엘레나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아아, 역겨워! 엘레나는 내 코를 마음껏 비틀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내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고, 내가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최근 2, 3주일 동안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그녀 없는 인생은 생각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여자는 지옥에나 가버려라! 그리고 너 데이비드 애트웰도 더할 나위 없는 바보가 아닌가!
그는 방에서 뛰쳐나가 지하실의 바에 앉아 버번의 취기로 엘레나에 대한 생각을 떨어버리려 했다. 취해서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엘레나를 고독의 바다로 되돌려 보내야지. 그녀는 거기서 왔고, 거기 있기를 원했으니까. 그녀가 못할 일을 내가 바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녀는 현실 세계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반쯤 빈글 라스를 멍청히 들여다보고 있는 데이브의 어깨를 바텐더가 툭 쳤다.
"손니, 폐점 시간입니다." 그러면서 데이브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말투를 바꿨다. "아아, 낯익은 분이군요. 그렇군, 당신은 풋볼 선수로서 소속 팀은, 저어 무엇이었더라? 얼른 생각이 안 납니다마는, 유명한 선수시죠?"
데이브는 몽롱한 눈으로 바텐더를 쳐다보았다. 풋볼선수, 아나운서, 꼭두각시, 도대체 어떤 것이 진실한 자기일까? 데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바텐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지겨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돌아가세요, 밤도 깊었으니까."
데이브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바를 나왔다. 겨우 엘레베이터를 타고 자기 방에 돌아오자 서랍을 뒤져주소록을 찾아냈다.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뒤적이다가 겨우 찾고 있던 번호를 발견했다.
침대가에 앉아 번호를 돌리기 시작했으나, 정확한 번호를 돌리기까지는 몇 번이나 다시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데이브의 피가 끓어올랐다. 나는 그대를 깨끗이 잊고야 말겠어, 엘레나 슈버트.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크리스틴인가? 데이브 애트웰이야."
"데이브세요?" 그녀는 졸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틴 시트 위에 누워 있을 그녀의 나신이 데이브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그 스키 여행 말인데, 나도 참가할 수 있을까?" 혀 꼬부라진 소리로, 데이브는 겨우 자기 의사를 전할 수 있었다. 엘레나를 잊기 위해서는 다른 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이죠!"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갑자기 생기에 넘쳤다. "당신이라면 언제나 대환영이에요, 데이브. 그런데, 미리 한번 만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우린....여행 계획을 짜기 위해서, 내일 밤이 어때요?"
'음악 이외의 것은 모두 무의미해요.' 엘레나의 격렬한 외침이 수백 번이나 데이브의 가슴에 울렸다. 그는 이것이 그녀의 본심이란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좋아, 그러면 내일 밤에 찾아가겠어."
12장
엘레나는 그 주일처럼 시간이 더디 가는 것을 느낀 적이 없었다. 시간은 마치 납덩이를 짊어진 듯 걸음이 느렸다. 피아노 앞에 앉아 손가락을 놀리고 있으려니, 오랫동안 손에 익어 온 멜로디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 후에 세탁기와 건조기에 손을 댔으나 일이 손이 잡히지 않았다.
얼마 동안이나 일하지 않고 지내도 될지 몇 번이나 재정 상태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초등학생을 상대로 피아노 교습을 할 도리밖에 없다고 여겨, 마틸리와 몇 시간이나 전화로 상의했다.
엘레나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따뜻하고 맑게 갠 날이라도, 자기 마음속의 황당한 겨울을 내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이 커짐에 따라 무력감과 의혹도 깊어 갔다. 이 순간이 있다는 것을 어째서 예측하지 못했을까? 어리석지는 않았는지 모르나,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외부와의 경계가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리석다는 형용사는 적당하지 않다. 맹목적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기 달성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예술가가 빠지기 쉬운 병적인 증상인 것이다.
부모가 나를 잘못 키운 것이 아닐까? 엘레나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아니다, 부모를 탓할 수는 없다. 엘레나는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양친, 특히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에 큰 도움을 주어 꽃피게 했던 것이다. 또 엘레나는 음악 이외의 것에 흥미를 나타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고된 연습도 묵묵히 참아 왔고, 고독을 괴롭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엘레나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녀의 음악은 아버지에게 큰 기쁨과 자랑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엘레나 자신의 기쁨은?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녀는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엘레나의 마음에 문득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이마를 찌푸리고 잿빛 눈을 찡그린 채 엘레나는 뒷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방금 생각난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좋은 생각인지 아닌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정말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일까?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 정직하게 말해 주세요. 어머니는 피아노에 대한 내 헌신을 줄곧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엘레나는 크게 숨을 쉬고 전화기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대답이 어떤 것이든, 지금의 나에게는 제 3자의 조언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어머니 말에 귀를기울인 일이 한 번도 없는 엘레나였으나, 마침내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캘리포니아의 번호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데이브는 크리스틴의 아파트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빨간 저지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풍만한 육체의 선을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었다. 입술과 손톱도 빨갛게 칠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데이브." 크리스틴은 흥분한 고양이같이 달콤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됐어." 크리스틴이 엉덩이를 흔들며 옷장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데이브가 대답했다. 그녀는 검정 실크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것을 어디서 구했을까? 그녀의 봉급으로는 도저히 그런 것을 사지 못할 것이다. 데이브는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밤엔 어디에 데려다 주겠어요?" 크리스틴은 문을 닫고 데이브와 함께 밤공기 속으로 걸어 나가면서 물었다.
"음악회를 제외한 어느 곳이라도." 데이브가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데이브의 옆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가 어떤 음악가에게 열중해 있다는 것은 소문에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 것이므로 그 관계는 끝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실연의 아픔을 달래려고 나를 찾은 것일까? 그의 욕구불만을 해소할 섹스 상대로 내가 선택된 것은 아닐까? 크리스틴은 속으로 방긋 웃었다. 오늘 밤은 멋진 시간을 갖게 될 거야.
"벌써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이탈리아 음식점이 있어요."
아아, 난처한데! 데이브는 가슴이 섬뜩했다. 엘레나를 안내한 그 레스토랑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르망디라는 곳인데, 무척 로맨틱한 곳이래요."
엘레나와 함께 거기 갔을 때는 정말 즐거웠었지.... 데이브는 생각에 잠기면서 크리스틴의 제의에 당혹을 느꼈다. 제기랄! 하지만 그녀를 끌어낸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데이브는 레스토랑에 자리 잡고 앉아 애써 주위에 대해 무시하려고 했다.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아야지,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만 신경을 집중시켜야지, 현재는 이 여자만이 중요하지 않은가.
"여기는 라지니야가 유명해." 데이브가 권해 보았다.
"으응, 하지만 나는 링기니로 하겠어요. 크림소스가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순간, 데이브는 오늘 밤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말끝마다, 또 가는 곳마다 엘레나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다. 데이브는 눈앞에 있는 천한 여자와, 잿빛 눈을 가진 갈색 머리의 우아한 엘레나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엘레나! 웃기는군! 그녀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야지. 하지만 그녀는 12년 동안이나 내 가슴속에서 잠자다가 이제야 겨우 내 것이 되었던 것이다.-그녀를 이 팔로 밤새도록 품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잇을 수가 있겠는가!
그날 밤 늦게 데이브와 크리스틴은 데이브가 묵고 있는 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 제리 먼로 및 그 연인과 합류했다. 크리스틴이 춤을 추면서 데이브에게 몸을 밀착시켜 왔다. 당신만 좋다면 나는 언제든지 오케이예요 하는 투였다. 음악과 술, 그리고 크리스틴이 끊임없이 몸을 밀어붙여 오는 바람에 엘레나에 대한 생각은 데이브의 뇌리에서 차차 희미해져 갔다.
데이브는 춤을 추면서 크리스틴의 몸을 꼭 끌어당겼다. 엘레나만 잊을 수 있다면-오늘 하룻밤이라도. 그는 크리스틴의 목에 입술은 가져갔다. 짙게 풍겨 오는 머스크 향기에 데이브는 저도 모르게 엘레나의 감미로운 인동덩굴 냄새를 상기했다.
그 뒤에도 몇 차례나 글라스를 비운 데이브는, 동료의 제안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기분이 되었다. 제리가 데이브의 방에서 파티를 계속하자고 제안했다. 데이브는 나머지 버번을 마셔 버리고 나서 크리스틴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 데이브에게 있어서 크리스틴은 그의 몸과 마음의 우울을 풀어 줄 하나의 육체에 지나지 않았다.
네 사람은 호텔 매점에서 와인 두 병을 사들고 10층에 있는 데이브의 방으로 향했다.
엘레나는 오늘 밤도 안정을 못 찾고 초조해 있었다. 연주회가 있은 날 이후 그녀에게는 이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이트가운을 걸쳤으나, 잠이오지 않을 것은 뻔했다. 주방에 가서 물을 마셨다. 레코드를 틀었다가 금방 스위치를 꼈다. 피아노에 앉아 몇 곡 쳐 보다가 뚜껑을 닫고 2층에 올라갔다.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다가 뜨다가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아아, 오늘 밤도 같은 일의 반복이다.
어머니 말이 집요하게 되살아나, 엘레나를 어쩔 수 없이 생각에 잠기게 했다. 사랑만큼 네 생활을 충실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엘레나. 아무리 위대한 음악이라도 사랑 없는 허무를 메워 주지는 못해.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고통스러운 대화였으나, 마침내 두 여성이 오랫동안 감추어 왔던 상처를 깨끗이 씻어 주었던 것이다. 엘레나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한 여성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의 꿈, 인생의 계획, 그리고 딸에게 희망을 건 여성으로서,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를-또 아버지를-내 세계에서 몰아내어 왔었다. 엘레나는 이제야 겨우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말이 다시 생각났다. 사랑만큼 인생을 충실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고 어머니는 단언했다. 데이브에게 전화해, 그리고 솔직하게 사과해, 라고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힘든 일로 여겨지는 것일까?
역시 어머니가 옳았다는 것을 엘레나는 시인했다. 그에게 전화해야지, 그에게 지난날의 폭언을 사과해야지. 결코 본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데이브를 사랑하고 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데이브는 나를 감싸고 지켜 주려고 한 것인데, 나는 도리어 당신 따위는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현재의 나에게는 데이브만이 전부다. 그가 이것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마침내 엘레나는 수화기를 들고 데이브의 호텔 전화번호를 돌렸다. 교환원이 전화를 받자 엘레나는 그의 방 번호를 말했다.
"얼음이 없을까요, 달링?" 크리스틴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가져오겠어." 데이브가 아이스박스를 집었다. 자기 집인 양 침대에 누워 있는 이 여자에게서 떠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 이 침대에서는 바로 며칠 전 엘레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데이브가 문을 닫을 때, 크리스틴의 하이힐이 침대 곁 마루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아, 이 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렇게 취했으니, 이 방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조차도 의문이었다. 더구나 이 여자를 만족시킨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복도에서 비틀거리며 걷고 있던 데이브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전화 벨 소리를 의식했다. 머리가 쪼개진 것 같았다. 호텔의 전화가 일제히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긴급사태가 발생한 것이로군, 하고 데이브는 제멋대로 해석했다. 그러나 반드시 얼음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이스머신을 향해 여전히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엘레나는 데이브가 전화에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수화기를 꼭 붙들고 있었다. "핼로."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관능적이었으나, 엘레나의 귀에는 그 여자의 음성이 청 높은 비명처럼 들렸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데이브의 방에 여자가 있다! 전화 교환원이 잘못 연결한 것일까? 엘레나는 다시 한번 수화기를 들고 데이비드 애트웰의 방에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보세요?" 아까와 같은 관능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 미안합니다. 방이 잘못 연결된 것 같습니다." 엘레나는 당황하여 전화를 끊었으나 얼굴은 탈 듯이 뜨거웠다. 남의 방에 침입하여 창문 너머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홀에서의 마지막 밤에 나는 스테이지의 콘서트를 망쳤을 뿐만 아니라, 데이브와 내가 연주하고 있던 사랑의 선율도 완전히 끊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엘레나는 이제 그것을 겨우 깨달았다.
그녀는 욕실에 달려가 몇 번이나 손을 씻었다. 수화기를 들었을 때의 우울한 기분과, 데이비드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하는 자책감을 씻어 없애려고 노력하면서.
5분쯤 지난 뒤에 엘레나는 그런다고 해도 자기 손이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앗다-아무리 좋은 아라비아의 향유를 바른다 해도.
엘레나는 패배감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천천히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고독과 고통의 위안인 피아노 앞에 앉아 무심코 키를 두드려 보았다. 이때 두껍게 쌓아 둔 악보 사이에서 한 장의 보표가 눈에 띄었다.
엘레나는 그것을 빼내어, 언젠가 데이브에게 연주해보여 준 그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날이 먼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이 곡에 대해 매우 감탄을 했었다. 엘레나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오른손만으로 천천히 멜로디를 치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왼손으로 화음을 더했다. 연주를 진행함에 따라 선율이 차차 풍부해지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며칠 동안이나 그녀를 가두어 두었던 얼음의 벽이 드디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작곡을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엘레나는 지난주를 완전히 이 곡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작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주를 살아왔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데이비드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엘레나가 작곡한 소품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작곡을 취미로 여겨 왔으나 앞으로는 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작품이 팔린 가능성조차 있는 것이다.
이 소품이 완성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엘레나는 이미 정해 놓고 있었다. 가사를 곁들여 데이비드에게 보내는 것이다. 자기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사과한다 해도 뒤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최소한 사과의 표시만은 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곡을 찬성하게 되면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는 것을 그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가사도 자신의 마음-오래 전부터 데이비드에게 품고 있던-을 전해 줄 것이다.
전화벨이 두 번 울린 다음에야 엘레나는 연필을 놓았다.
"여보세요?" 아직 머릿속에서 멜로디를 생각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여어, 그리운 엘레나! 여보세요, 여보세요?" 엘레나의 침묵에 사나이는 거듭 불렀다.
"알렉세이? 당신이세요, 알렉세이?" 엘레나는 겨우 상대의 목소리를 분간했다. "어디세요?"
"세인트루이스지. 나는 지금 이곳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있어. 소문은 들었을 줄 알지만."
"물론 알고 있어요. 나도 무척 기뻐하고 있어요."
"나도 엘레나 소식을 들었어. 결코 실망할 것은 없어." 알렉세이가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엘레나를 위해 좋은 찬스가 있어."
엘레나는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려 했으나, 상대가 장거리 전화를 걸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수화기를 놓은 다음, 종이 위에 음표를 적었다 지웠다 했다.
"엘레나! 엘레나!" 엘레나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겨우 의식했다.
"네?"
"엘레나,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미안해요, 엘렉세이. 손을 뗄 수 없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까 무슨 말을 하셨죠?"
"이곳 오케스트라에 엘레나를 위한 찬스가 있다고 했어."
"어머, 어떤 찬스인데요?" 엘레나는 별로 흥미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좀 더 열의를 나타냈으면 좋겠군.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일할 마음은 없나?"
"글쎄요."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이 사실은 역시 충격이었다. 이곳 오케스트라에서 일하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믿어 왔으나, 그것은 큰 잘못이었다. 음악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과 자기도취 탓으로 제일 소중한 것, 즉 데이비드를 잃었던 것이다. 음악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데이비드와 그의 사랑을 경시했기 때문에, 일자리도 데이비드도 잃게 된 것이 지금의 자기 모습인 것이다.
"도대체 엘레나는 어떻게 된 거야?" 알렉세이의 목소리는 다시금 그 오만한 투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엘레나가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좋은 자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감격해 주었으면 좋겠어. '어머나, 알렉세이'하고 말이지." 그는 엘레나가 평소에 하던 말을 흉내 내어 보였다.
"좋아요." 엘레나가 웃으며 동의했다. 지금 이 사나이와 논란을 벌이는 것보다는 그의 기분을 맞춰 두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어머나! 정말 멋진 소식이군요, 알렉세이."
"그러면 됐어. 그런데.....이곳 오케스트라가 다음 주에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의 반주를 하게 되었는데 예정되었던 객원 피아니스트가 캔슬을 하고 말았어. 늑골을 다쳤다는군.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지금 우리는 난처한 지경에 빠져서 악보를 능숙하게 다를 줄 아는 피아니스트를 급히 구하고 있는 중이야."
"수고가 많으시겠군요." 엘레나는 탐탁지 않게 대답했다.
"내 말뜻을 알겠지? 어쨌든 한번 여기 와서 연주해주지 않겠나? 그러면 악단 이사들도 틀림없이 엘레나를 상임 피아니스트로 채용할 거야. 물론 내가 뒷받침을 하겠지만."
"내 희망이 실현되는 셈이군요."
"엘레나에게는 다시없는 찬스야. 아무데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과는 달라. 나이기에 엘레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엘레나를 잘 알고 있어, 엘레나의 한계와 결점을 포함해서, 하지만 엘레나만큼 믿을 수 있는 피아니스트도 드물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어."
"마지막 연주회 때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아직 모르세요?"
"아, 그 소식도 들었지." 알렉세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가 걱정하지 말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금요일까지 여기 올 수 있겠지?"
"알렉세이, 나는 아직 승낙하지 않았어요."
"뻔한 일이지 뭘 그래. 그것이 엘레나의 인생이야. 엘레나에게서 피아노를 빼앗는다면 도대체 뭐가 남겠나?"
엘레나는 작곡 중이던 악보에 시선을 보내며 한숨을 쉬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알렉세이. 정말 저에게 적절한 질문이에요."
"그럼, 비행기 편이 정해지는 대로 연락해 줘. 공항에 마중 나갈 테니까. 틀림없이 금요일까지 오기를 바라겠어, 리허설이 있으니까."
"알렉세이! 아직 나는 결정하지 않았어요!"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않아? 비행기 편이 정해지면 연락하겠어요, 하고 말해. 그럼 나주에 다시, 엘레나."
"안녕히 계세요, 알렉세이."
13장
여객기는 구름을 빠져 나와 랜버느 평원에 어려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멀리 서부의 입구를 상징하는 미시시피강의 거대한 제방 아치가 보였다.
엘레나가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옆자리에 앉은 백발의 신사가 미소를 던졌다. 그는 엘레나가 손가방에 악보를 넣는 것을 보고 있다가 말을 걸었다.
"음악가이신가요?"
"네."
"놀랍군요. 그런 재능을 가졌다니 당신은 정말 행복합니다."
엘레나는 그 말을 음미하면서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행복? 아니, 그것은 틀린 말이다. 내 재능에 대해 운운하는 경우에도 행복이란 말만은 절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일까? 엘레나는 다시 똑같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세인트루이스에 와서 상처를 더 건드리는 것이나 아닐까?
"음악을 시작한 지 오래 됩니까?" 사나이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철이 들면서부터예요." 하고 대답했으나 곧 후회했다. "하지만 실제로 직업적 음악가가 된 것은 8년 전부터였어요."
"무척 충실감을 느끼는 인생이겠군요." 사나이는 한숨을 쉬고, 문득 자기 브리프케이스에 시선을 보냈다. 자신과 엘레나의 인생을 비교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충실감! 엘레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것이라곤 사랑하는 단 한사람의 남자와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몰아넣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 나는 데이비드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날 밤 콘서트홀에서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직접 작곡도 하나요?" 엘레나가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나이는 아직도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네. 하지만 작곡은 이제 시작했을 뿐이에요." 엘레나는 막 완성시킨 작품을 생각하면서 조용히 웃었다. 만일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한 것이 있다면, 이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엘레나는 이틀 전에 그 소품을 완성시켜 가사까지 붙여서 데이브에게 보냈었다, 데이브가 자기의 마음을 이해해 줄 것을 바라면서.
여객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기체에 가벼운 충격이 일어나고 역추진 제트엔진의 광음이 귀를 찢을 것 같았다. 여객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악보가 든 가죽 케이스를 들고 터미널에 발을 들여놓은 엘레나는, 인파 속에서 알렉세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오만스런 표정. 손을 들어 인사하는 엘레나에게 그는 다만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자아, 곧장 홀로 직행하여 리허설을 시작해야 해. 엘레나를 마중 나온 덕택에 내 스케줄이 엉망진창이 돼버렸어." 알렉세이는 인사도 없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언제까지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법이야-엘레나는 속으로 웃었다.
알렉세이는 엘레나의 여행 가방을 찾으러 화물 터미널 쪽으로 향하면서 이곳의 오케스트라, 이사, 홀, 청중 등에 대해 쉴 새 없이 설명했다.
"여기서는 사정이 달라, 엘레나. 곧 알게 될 테지만 말이야. 이곳 청중들은 재능 없는 음악가에 대해선 동부의 청중들처럼 너그럽지 못해. 중서부의 개척자 친구들은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 적의마저 나타내거든."
"어마, 내가 이 주의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잊었나요?"
알렉세이는 마치 엘레나를 처음 본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자세히 쳐다보았다.
"내가 실수했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꼭 한 가지뿐이에요. 여기에는 음악의 신동들이 우글거리지 않아요?"
"티나와 같은 애송이는 없지. 그 말을 묻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유니스 브캐넌과 같은 이사도 없어."
두 사람이 홀에 도착했을 때, 오페라 가수들은 오후의 의상 리허설에 대비하여 전원이 코스튬(costume)을 입고 있었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흥분에 휩싸였다. 알렉세이는 그녀를 오케스트라 멤버들에게 소개한 다음, 무대 왼쪽에 있는 볼드윈 앞에 앉게 했다.
리허설은 네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뒤 알렉세이는 엘레나에게 몇 가지 템포의 변경을 명했다. 연습이 끝날 무렵 엘레나는 피로에 지쳐 오직 침대가 그리울 뿐이었다.
"바로 가까이에 작은 아파트를 보아 두었어. 스튜디오식 아파트지만 엘레나의 목적에는 부합될 거야. 엘레나가 직접 마음에 드는 방을 찾게 될 때까지는."
내 목적.....엘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목적이란 무엇일까? 다른 도시, 다른 오케스트라-이것이 나한테 남겨진 모든 것일까? 또다시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될 때까지 몇 년이나 이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를 치게 될 것인가? 똑같은 도식을 되풀이하면서 차차 늙어가는 것이 아닐까-고독한 채로? 엘레나는 리무진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녀는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장래에 대해서 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데이브는 아노락을 옷장에 걸고 침대 위에서 슈트케이스를 열었다. 더러워진 옷들을 마루에 꺼내 놓으면서 여행 중의 일을 이모저모 생각해 보았다. 몇 년 만의 스키는 역시 즐거웠다. 그리고 동료들과 지내면서 유쾌한 순간도 몇 차례나 있었다. 크리스틴을 상대하고 있을 때조차도, 오기를 잘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여행하기 전보다 훨씬 더 우울했다.
엘레나와 같이 스키를 타려 갈 수 있었다면......스키를 신는 법, 미끄러지는 법, 리프트 타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 텐데. 데이브는 그 장면을 상상하고 미소 지었으나, 곧 이 생각을 떨어버리고 슈트케이스에 들어 있는 것을 난폭하게 침대 위에 꺼내 놓았다.
데이브는 새 아파트의 방을 불만스럽게 둘러보았다. 그는 끝내 단독 주택을 포기하고 스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파트 계약을 끝내 두었던 것이다. 데이브는 자기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비관적인 생각에 잠기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2주일 전만 해도 미래가 그토록 밝아 보였는데.
데이브는 빈 슈트케이스를 옷장 구석에 넣어 두고 나서 데스크 앞에 앉아 우편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구서와 광고의 봉투를 뜯으면서, 엘레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피아니스트의 직업을 잃고 몹시 우울해 하고 있을까? 다른 도시에 가서 직업을 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그럴 리는 없다! 엘레나는 두 사람의 결합이 자기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단언했으니까.
데이브는 편지 뭉치에서 대형 봉투를 집어 들고 송신인의 주소를 읽었다. 엘레나의 주소였다! 얼른 봉투를 뜯어 클립으로 고정시킨 악보를 꺼냈다. 서명도 없는 작은 종이쪽지가 악보 곁에 붙어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라고만 씌어 있었다.
데이브는 엘레나가 음표 밑에 써 넣은 가사를 읽으면서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단어 한 마디 한 마디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으러니, 그날 엘레나가 자기를 위해 연주해 준 선율이 되살아났다. 가시는 흡사 데이브에게 속삭이고 있던 것 같았다. '당신이 예부터 알고 있던 일을 나는 이제야 알았어요-사랑이 나날을 채워 준다면-다른 무엇보다도.'
데이브는 손에서 떨고 있는 악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엘레나는 이 작품에 자기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일까- 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엘레나를 생각하지 않겠다, 그녀를 사랑할 생각은 않겠다고 나는 스스로 맹세했다. 그러나 이것-그녀의 선물을 받아 든 지금 그의 마음은 일변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봐야지. 이것을 보내 준 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실례가 될 것이다.
데이브는 전화기에 달려가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절망에 빠지면서 벨소리를 세기 시작했다.
"휼륭한 연주였어요, 미스 슈버트!" 교향악단의 전무이사가 빙긋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에 대한 잘코프씨의 비평은 너무 가혹했어요. 실제로 놀라운 연주였어요."
"감사합니다, 미스터 데이비스." 엘레나가 애교 있게 웃었다. 사실은 대단한 감격도 아니었으나.
"이사회는 토요일에 열린 예정입니다마는, 나는 당신을 상임 피아니스트로 추천할 생각이니 안심해요. 물론 자세한 일은 나중에 상의할 것입니다."
엘레나의 입에 허황한 웃음이 떠오른 것을 알렉세이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사의 칭찬에 이처럼 무관심하다니! 이런 찬스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알렉세이는 얼굴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직업을 다시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는데도 엘레나가 별로 기뻐하지 않자 알렉세이는 어쩐지 불안했다.
엘레나는 콘서트홀에서 나와 아파트로 향하면서 전무이사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주말쯤이면 아마 이 오케스트라에서 지위를 약속받을 것이다. 사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행운인 것만은 사실이다.
크게 기뻐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기쁘지가 않았다. 엘레나는 피아니스트의 지위에 열의를 가지려 했으나 그럴수록 냉담해질 뿐이었다.
엘레나의 마음은 자꾸 데이브에게로만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누구와 만나고 있을까? 그의 방에 전화했을 때 대답을 한 그 여자가 지금 그의 생활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이미 데이브의 그 자극적인 애무를 받은 것이 아닐까?
엘레나는 고개를 흔들며 망상을 떨어버리려고 했다. 가슴속에서는 본 적도 없는 여자에 대한 질투가 꿈틀거리고,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의 남자에 대한 억제할 길 없는 동경이 들끓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델리커터슨 가게를 발견한 엘레나는, 데이브에게서 처음으로 운전을 배우던 날의 일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잠시 가게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감상에 사로잡혀 안으로 들어가서 퍼테이토우 샐러드와 햄을 약간 주문했다. 그가 여기 있었다면 산더미같이 물건을 사가지고 피크닉을 갔을 텐데.
엘레나는 스스로 처량한 마음이 들어 한숨을 쉬었다. 쓸쓸하기도 했다. 아마도 평생 동안 혼자 식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녀는 반쯤 체념하면서 카운터 너머의 점원으로부터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점원은 다른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풋볼이 화제인 듯했다. 주말에 여기서 행해지는 시합이 중계될 것이라는 말을 얼핏 들려왔다.
"실례입니다마는," 엘레나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시합을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누군지 혹시 아시는지요?"
손님과 점원이 의아한 듯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하워드대 던인 것 같아요." 손님이 말했다.
"그것이 아니라......" 엘레나가 머리를 흔들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저어, 확실한 이름은 잊었습니다마는 시합장에서 선수들의 모습을 전하는 사람말입니다."
"실황 방송말인가요?" 점원이 물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엘레나는 자기 의사가 전달되어 기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것은 우리도 모릅니다, 부인. 스타디움 사무실에 전화로 알아보면 어떨까요? 거기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엘레나는 실망한 빛을 표정에 나타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그래야겠군요."
엘레나는 값을 치르고 얼른 아파트로 돌아왔다. 식료품 꾸러미를 테이블에 내던지고 스타디움 사무실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사무실의 비서도 식료품점의 두 사람처럼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곧 알아보겠다고 했다. 비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엘레나의 가슴은 기대와 두려움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어쩌면......
"여보세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실황 방송의 아나운서는 데이브 애트웰이에요."
엘레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데이브가 이리 오는 것이다! 세인트루이스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레나는 수화기에 대고 절을 했다.
엘레나가 핑크빛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헤어클립으로 머리를 고정시키면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에는 화가 난 모습으로 알렉세이가 서 있었다.
"오전 중에 어디 갔었지? 몇 차례나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더군."
"산책을 했어요." 엘레나는 백을 열고 표가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세 시간이나 산책을 했다는 말인가?" 알렉세이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요, 알렉세이." 엘레나는 백을 어깨에 메고 한 손을 잿빛 코듀로이 팬츠 주머니에 찔렀다.
"이사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가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 "엘레나의 일로 여러 가지 상의할 것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데리고 왔어."
"일부러 오시게 해서 미안해요, 알렉세이. 하지만 나는 다른 예정이 있어요."
"예정이라고! 도대체 어떤 예정이야? 악단의 이사가 이야기하자고 하는 데 빠질 수는 없어."
"나는 풋볼 시합을 보러 가는 길이에요."
알렉세이는 미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길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농담이겠지?"
"엘레나, 이것은 당신의 장래와 관련되는 중요한 일이야. 이사들과의 대화보다도 풋볼 시합을 우선시키다니 미친 짓이야."
"마치 풋볼이 더러운 것이나 되기라도 한다는 말투군요!" 엘레나는 화를 내며 쏘아 주었다.
"흥, 그 야만적인 스포츠에 미친 네안데르탈인을 보라니까. 그 같은 비문명적인 활동의 어디에 매력을 느끼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이 찬스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엘레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군."
"그 점은 알고 있어요, 알렉세이. 정말 감사해요.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흥미를 가질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이 지위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대도시의 교향악단에서 일할 기회를 거절하는 음악가가 있다니! 알렉세이는 어이가 없었다.
"네, 이미 피아니스트에 대한 흥미를 잃었어요."
"나, 나는 음악이야말로 엘레나의 인생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알렉세이의 오만한 어투에는 불쾌감이 깃들여 있었다.
엘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렉세이에게 지금의 심정을 이해시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엘레나 자신도 자기 마음을 확실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이전의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외줄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깨닫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선택의 길이 열려 있다.
"음악은 언제나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거예요, 알렉세이. 하지만......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어요."
"그밖에 무엇이 있다는 거지? 엘레나가 예술가라면, 그 밖에 무엇이 허용되어 있다는 것이지?" 알렉세이의 말에는 경멸이 깃들여 있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겠어요, 앞으로 찾아야 하겠죠. 하지만 나는 곧 31세가 되는데, 아직까지 내가 누구인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어요."
"아아, 엘레나." 알렉세이는 이제 완전히 정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성숙한 한 여성이 아니라 18세 소녀와 같은 말을 하고 있군. 엘레나가 하고 있는 말은 아주 유치해."
"18세 소녀 같다는 것이죠, 알렉세이? 그래요, 나는 바로 18세 때 음악 이외의 세계로 통하는 문은 닫아 버렸어요. 나는 다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그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돼요. 내가 내몰았던 모든 것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번 일을 거절하면, 엘레나는 두 번 다시 다른 제의를 기대할 수 없을 거야. 그건 각오하고 있겠지?"
"네, 알고 있어요."
알렉세이가 탕 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엘레나는 이때 갑자기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해방감으로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14장
"자선 시합치고는 대단한 것이었어."
"사실이야. 나도 선수처럼 손에 땀을 쥐었을 정도였어."
"이제 생각나는군. 자네는 내게 20달러를 줘야 해, 내기에 졌으니까."
"알았어, 자꾸 말하지 말게."
시합이 끝났을 때 기자석은 시끄러웠다. 아나운서들은 통계표를 구겨, 이미 가득 차 있는 휴지통에 내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류를 잘 정리하여 브리프케이스에 넣고 꼭 닫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기자들은 이러한 그의 태도를 피로 탓으로 돌렸다. 동료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그는 남다른 노력을 해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기자석에 있던 한 사나이가 쌍안경을 눈에 대고 마지막으로 경기장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내일은 청소원이 큰일이겠군. 팝콘 주머니와 프로그램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는 쌍안경을 관중석으로 향해 움직이고 있다가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동작을 멈췄다. "저기 있는 여자는 시합 결과에 몹시 실망한 모양이군." 쌍안경은 경기장 맨 끝에 있는 한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자기가 응원하던 팀이 진 모양이지." 다른 아나운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고 있거나.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말이야."
"나도 어디 한번 볼까." 데이브도 겨우 웃으면서 끼어들어 쌍안경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쌍안경을 눈에 대고 초점을 맞추면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쌍안경을 떼고 멀리 보이는 작은 그림자를 응시하다가 다시 쌍안경을 눈으로 가져갔다.
"여보게, 재미있는 것이 보이거든 나도 좀 보세." 다른 사나이가 옆에 와서 쌍안경에 손을 내밀었다.
데이브는 쌍안경을 눈에 댄 채 홱 등을 돌렸다. 추운 듯 두 손으로 몸을 싸안고 있는 자그마한 모습을 응시했다.
그 여자는 코바늘로 뜬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갈색머리가 잿빛 코트의 어깨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이때 여자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데이브는 분명히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듯 쌍안경을 천천히 카운터에 놓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레나가 이 시합을 보러 오다니!
어째서 엘레나가 여기 있는 것일까? 세인트루이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설마 시합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데이브의 가슴은 뛰었다.
그는 엘레나로부터 작품을 받은 후 몇 번이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한 번도 통화하지 못했다. 그녀의 거처를 알려고 교향악단원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 역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브는 아마 그녀가 캘리포니아의 어머니한테 간 모양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인트루이스에 와 있다니!
"어디 가나 애트웰?" 데이브가 셔츠를 입는 것을 보고 동료가 물었다.
데이브는 그 질문을 무시하고 기자석의 문을 열고 관중석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관중석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면 순식간에 그곳에 이르게 된다. 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기 마음을 정리하고 엘레나에게 할 말을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고 기자석에서 관중석 쪽으로 오고 있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데이브인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발견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무리한 희망이야.
그러나 만일 데이브라면 그에게 무어라 말할 것인가? 사과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만 같다. 왜 여기에 왔느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손 난간을 넘어 경기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데이브의 가슴은 뛰었다. 데이브는 인적이 없는 그라운드를 휘둘러보았다. 깊은 정적이 감싸고 있었다. 그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나는 아웃사이더다. 나는 이제 경기장에 들어갈 인간이 못 된다. 그는 조용한 체념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그라운드가 아니라 기자석이라는 사실을.
손 난간을 넘어 관중석으로 들어서자 데이브는 엘레나를 쳐다보고 미소 지었다. 방금 발견한 사실을 엘레나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생활방식을 바꾸는 일도 결국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그러나 엘레나에게는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엘레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데이브를 응시했다. 기대와 불안으로 가슴이 죄어들었다. 데이브와 이야기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현재의 자신을 이해해 주었으면 싶었다. 나는 변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기 시작했어요. 엘레나 슈버트라는 자기를 확립시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이지만, 적어도 최초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하지만 데이브가 그것을 이해해 줄 것인가? 내 변화를 깨달을 것인가?
엘레나가 있는 두 계단 밑에서 데이브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도 엘레나를 쳐다보고, 엘레나도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웅덩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누구 한 사람이 먼저 그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데이브는 한 계단 더 올라갔다.
데이브는 몸에 닿을 정도로 엘레나에게 접근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엘레나의 풍부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소 지어 보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혀가 굳어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엘레나도 미소 지으려 했으나 입술이 자유롭지 못했다. 오전 내내 생각해 두었던 말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엘레나지?" 이렇게 말해 버리고 나서 데이브는 속으로 후회했다. 아아, 이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한 것일까. 엘레나가 분명하지 않은가.
"어마! 데이비드."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먼저 웃음을 띠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듯이.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제기랄,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이유야 어떻든 상관없다,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데.
데이브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어. 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 하지만 왜 오지 않을 수 없었는지는 분석할 수 없었다.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세인트루이스까지 왔나?"
"사실은 여기 온 지 일주일쯤 됐어요. 이곳 심포니에서 연주했어요."
"아, 그랬었나?" 그렇다면 엘레나는 다른 악단에 고용된 것이로군. 데이브는 그녀를 위해 기뻐하는 체했다. "정말 다행이로군요!"
"그렇지도 않아요." 데이브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엘레나가 대답했다. 그가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사들은 내가 여기 남는 걸 바라는 것 같지만......"
"놀랍군!" 데이브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렇다면 엘레나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시합장에 왔을 것이다. 그토록 알리고 싶었다면 전화로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알렉세이가 알려 주었는데 - 알렉세이 잘코프를 기억하고 계시죠?"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늘 나를 찾아와서, 악단의 이사들이 나에게 피아니스트 자리를 제의했다고 알려 주었어요. 그는 이사들을 만나게 하려고 나를 찾아왔던 거예요. 하지만 나는 풋볼 시합을 봐야 한다면서 거절했어요."
데이브의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여전히 입은 굳게 다문 채로 있었다. 한참만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이사회의 제안보다 시합을 우선시키면 그들의 분노를 사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물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시합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서 어쩔 수 없었어요." 엘레나는 무릎 위에 꼭 쥐어져 있는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무서워서 도저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데이브는 엘레나의 목줄기에서 맥이 세차게 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지금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데이브는 그녀의 말을 희망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이사회의 제의를 거절했어요."
"어째서 그런 일을?"
"당신이 지적했듯이, 나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바다를 표류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모르는 세계를 잠시 보여주었어요. 그리고.....나는 그 세계가 좋아졌어요. 좀 더 보고 싶어졌어요."
"다시는 어떤 교향악단에서도 연주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네, 그래요. 무서운 세계인걸요. 그리고 마지막 연주회 때 심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 일에 대해서는 동정할 여지가 있어, 엘레나."
"연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음악에 몰두한 나머지 나는 심한 잘못을 저질렀어요.....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엘레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저물어가는 석양빛을 받아 번쩍 빛나고 마치 닫혀 있던 마음의 창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다.
데이브는 다시 한 계단 올라가 엘레나 옆에 걸터앉았다.
"엘레나의 지휘자를 협박하다니 나는 정말 바보였어, 엘레나. 그런 실수를 좀처럼 저지른 적이 없었는데."
엘레나는 비참한 표정을 짓는 데이브의 옆얼굴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흩어진 머리를 쓸어 올려 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데이비드. 그 당시에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데이브가 얼굴을 돌려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왜 마음이 변했지?"
"두 사람의 결합에 비하면 내 음악 따위는 하찮은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에요. 데이비드, 내가 나빴어요." 엘레나는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데이브는 엘레나를 껴안고 그녀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묻었다.
"그만 해, 엘레나, 이제 됐어. 엘레나가 혼자 참아나가는 동안 나는 너무 고집을 부렸어." 그는 씁쓸히 웃으며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 만나지 않고 참을 수 있었을까?"하고 자문하듯 물었다.
"그 뒤에 전화를 한번 했어요."
"정말? 내가 집에 없던가?" 스키 여행에 대한 것을 고백한다면 엘레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데이브는 마음속으로 겁이 났다.
엘레나는 두려워한다는 것을 데이브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아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어떻게 그것을 알았지?"
"여자가 전화를 받았으니까요."
"여자? 내게는 여자가 없었는데....."하고 데이브는 말하기 시작했으나, 문득 그날 밤의 일을 생각하고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얼음을 가지러 갈 때 분명히 전화 벨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엘레나의 전화였던가? 그러고 보니 크리스틴이 전화와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참, 그때 여자가 와 있었어. 크리스틴이라는 여자지." 그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아아, 여자 이름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는데! 데이브의 육체를 안고 그를 밤새도록 혼자 독점했을 사람의 이름 같은 것은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엘레나는 동요되는 마음을 감추려고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러나 데이브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눈물에 젖은 잿빛 눈동자에 고통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데이브는 씁쓸히 한숨을 쉬었다.
"엘레나의 육체적 욕구를 만족시킬 도구로서 나를 이용하지 말라고 언젠가 말한 일이 있지?" 엘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긴장한 나머지 머리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그가 말을 이었다. "크리스틴은 내게 있어서 바로 그것이었어, 엘레나. 결코 그 이상은 아니었어."
엘레나가 겨우 입을 열었으나 너무 작은 음성이었기 때문에 그는 얼굴을 그녀에게 가까이 접근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잘못했던 것 같아요, 나를 처음으로 요구한 사나이와 잠자리를 같이 했어야 옳았는지 몰라요."
"누가 엘레나를 요구했나?" 데이브의 목소리가 갑자기 긴장되었다.
엘레나는 그 어투에 놀라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진실을 말했다.
"아무도 없었어요."
데이브는 안심한 듯 다시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전 세계의 남자들은 모두 바보야.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하고 있어." 그가 웃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주의 깊게 말을 선택했다. "내가 엘레나를 원하는 최초의 남자가 되고 싶으니까."
엘레나는 고개를 들려고 했으나 그가 이를 제지했다.
"나한테서 무엇을 원하세요?" 엘레나는 그의 애무에 반응하면서 신음하듯 속삭였다.
그는 겨우 손을 놓고 엘레나의 턱을 쳐들었다. 엘레나의 입술에 다정히 키스하면서 가만히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엘레나의 존재가 강한 와인처럼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의 키스가 깊고 격렬해지면서 두 팔이 엘레나를 힘껏 껴안았다. 그는 입술을 엘레나의 목덜미에 밀어붙이고 속삭였다.
"만나고 싶어 죽을 뻔했어, 엘레나. 나는 견딜 수가 없었어......"
엘레나는 그에게 안기면서 기쁨과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데이비드,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도 몰랐어요. 나는......"
그의 입술이 엘레나의 사과하는 말을 막았다.
엘레나는 그의 머리를 휘어잡고 기쁨에 떨면서 그의 몸에 바싹 안겼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떼었다.
"같이 가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았어."
데이브가 엘레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관중석의 계단을 내려와 넓고 인적 없는 황혼의 그라운드를 가로질렀다.
"사실은," 그는 골포스트 앞에서 엘레나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풋볼 선수를 그만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어." 엘레나가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정말이지, 지금 일이 마음에 들었어. 아직 서투르지만 전력을 다해서 일해 볼 생각이야. 나는 충분한 각오가 섰어."
"저도 그래요, 데이브. 당신이 내 눈을 뜨게 해줬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얼마나 큰 것을 잃었는지 모를 뻔했어요."
주차장에 도착한 엘레나는 그의 메르세데스 벤츠를 보고 놀랐다.
"여기까지 직접 운전해 왔어요?"
"음, 여기서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에 갈 예정이어서, 비행기보다는 차가 더 편하리라 생각했지." 데이브는 말을 끊었다가 어떤 생각이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엘레나도 같이 가지 않겠어? 2주일 정도 예정인데." 엘레나가 그를 쳐다보았다. 강력하고 남자다운 얼굴, 바람에 흩어진 머리, 뜨거운 열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기뻐요, 꼭 데려가 주세요. 안 데려가겠다면 트렁크에 숨어서라도 따라가겠어요."
데이브가 엘레나의 등을 가볍게 쓸면서 다정하게 키스했다. 두 사람 주위에는 황혼이 짙게 깔리고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데이브가 뒷문을 열었다. 놀라서 쳐다보는 엘레나에게 그가 활짝 웃어 보였다.
"12년 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야 완성시키게 됐군." 그는 허리를 굽혀 엘레나의 귓전에서 속삭였다. 엘레나의 등줄기에 흥분과 기대가 달렸다. 그녀는 백시트에 올랐다. 데이브가 키를 꽂고 카세트의 단추를 누르자 나직하고 맑은 ‘월광곡’의 선율이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데이브는 백시트에 미끄러져 들어오면서 문을 닫고 등을 창에 기대며 엘레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는 두 팔로 엘레나의 허리를 감고 세익스피어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천천히 팔을 올려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여기 두 사람이 앉아 은밀한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다. 감미로운 음악과 밤의 고요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도다."
"당신이 시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보니 풋볼 선수로서는 2류였을 거예요." 그의 감촉을 즐기면서 엘레나가 조롱했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연인이지." 그는 엘레나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그것은 내가 판정해야 해요." 엘레나가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입술이 엘레나의 입술을 덮자 그녀는 나직이 신음했다.
"아아 엘레나, 내게는 엘레나밖에 없어. 엘레나는 지금도 나를 20세 때처럼 불타게 하고 있어." 데이브의 뜨거운 입술이 엘레나의 온몸에서 헤매었다.
두 사람의 육체와 정열이 하나로 녹아들었다. 연인들의 입에서 토해 내는 사랑의 속삭임이 밤공기에 파묻히고, 경쾌한 선율이 그들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달빛과 음악과 육체가 하나로 융합된 작은 우주. 두 사람은 구명대에 매달리듯 꼭 껴안은 채 누워 있었다. 팔과 다리가 뒤얽히고 마음은 하나의 굴레로 매듭지어졌다.
"이제 두번 다시 나를 버리지 마세요, 데이비드. 그리고......"
데이브의 키스로 엘레나는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알았어." 그는 키스하면서 그 사이에 말했다. "결코 엘레나를 놓아주지 않겠어. 사랑해, 엘레나. 나는 20세 때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지금 하려고 해."
"그것이 무얼까요?" 엘레나가 웃었다.
"엘레나와 결혼하고 싶어.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생각해 보지 않겠어?" 그가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다. 엘레나가 한 마디로 거절하면 참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엘레나가......" 이번에는 엘레나가 키스로 그의 말을 차단했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어요." 입술을 떼면서 엘레나가 속삭였다. "나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으니까요."
넘칠 듯한 안도감과 애정에 감싸여, 두 사람은 지금까지 별도의 길을 걷고 영광도 누렸다. 그러나 지금 생애를 같이하고 외줄기 길을 손잡고 걸을 결심을 했던 것이다.
"서로 이해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데이브가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리고 넓은 세계를 배워야 할 거예요. 하지만 데이비드, 나는 음악은 버리지 않겠어요." 엘레나는 음악이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부분이란 것을 데이브가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나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 사실은 엘레나의 작품을 친구에게 넘겼어.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프로듀서로 있는 친구지."
"내 작품을? 내가 우편으로 부친 그 곡을 말인가요?" 엘레나는 여학생처럼 흥분했다. "프로듀서를 알고 있나요?"
"이것 봐, 내게도 연줄은 있어." 그가 농담 삼아 말하고 웃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프로듀서의 친구의 친구의 또 친구를 아는 정도이지만, 하지만 연줄은 연줄이잖아."
"어머! 데이비두, 사랑해요!" 엘레나가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서로가 배울 점이 많아요."
"나는 열성적인 학생이지." 그는 엘레나를 바싹 끌어안았다. "엘레나가 알고 있는 것을 죄다 가르쳐 주지 않겠나?" 속삭이면서 엘레나의 목에 입술을 밀어붙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것은 .....음계뿐이에요."
"음." 데이브는 엘레나의 몸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정열에 키를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엘레나는 그가 불러일으키는 기쁨에 몸을 맡기면서 눈을 감았다. 온몸의 감각이 새로운 미지의 심포니를 차차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엘레나가 떨면서 속삭였다.
데이브는 다시 엘레나의 몸에 체중을 실으면서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속삭였다.
"엘레나의 몸속에 있는 음표와 엘레나가 내는 화음을 모두 알고 싶어."
"당신은 열렬한 애호가....음악 말이에요....가 되려면 오랜 시간을 연습하지 않으면 안 돼요."
"나는 철저하고 열렬한 애호가지. 내 연습이 이 정도라면 언제나 시간이 부족할 거야."
"그러면 우선 제 1회 연습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엘레나가 도발하듯 속삭였다.
"물론 그래야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도 있으니까."
"당신은 훌륭한 학생이 될 거예요." 엘레나가 황홀해 하면서 말했다.
"그러면 어서." 두 사람의 완전한 하모니에 엘레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음악을 시작하기로 해요."
엘레나가 손에 든 면허증을 흔들면서 차량국 건물에서 뛰어나왔다. 그러고는 데이브가 기다리는 차 안에 올라타며 큰 소리로 웃었다.
"마치 16세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이것이 내 운전면허증이에요!"
그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차량국 지도원이, 통신 교육으로 운전을 배우지 않았냐고 묻지 않던가?"
"으응." 엘레나는 오만한 태도로 홱 머리를 들었다. "당신에게서 배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엘레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 운전 솜씨가 당신의 풋볼 솜씨보다 뛰어나길 바란다고 그러더군요."
"설마!" 데이브는 일부러 화를 내는 체했다.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엘레나가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데이브는 엘레나의 몸을 확 끌어안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엘레나는 한 손은 그의 넓은 어깨에 놓고 다른 손은 차창에 얹었다. 약지에 낀 결혼반지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혼한 지 일 년 가까이 되는 동안 그녀는 나날이 행복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이것으로," 엘레나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두 가지 축하할 일이 생겼어요. 하나는 당신의 스포츠 중계의 계약이 갱신된 것, 또 하나는 내가 운전면허를 딴 것."
"허니, 계약 갱신은 내가 1년 내내 여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알고 있나?"
"네, 하지만 나도 뮤지컬 때문에 바쁠 것 같아요. 봅 데이비스를 음악을 통해 돕게 되다니 아직 믿을 수 없어요!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허니.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될 거야." 데이브는 엘레나의 재능에 자랑을 느끼면서 빙긋 웃었다. "무어라 해도 나는 엘레나를 사랑하고 또 엘레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그래요. 당신의 반만큼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데이비드." 엘레나의 반짝이는 잿빛 눈은 데이브에 대한 깊은 찬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데이브가 엘레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엘레나 말이 옳아. 나만큼 엘레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엘레나는 그의 깊은 사랑에 젖어들면서 눈을 감았다. 그렇다, 데이브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듀엣을 연주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는 것을, 각자가 자기 파트를 연주하면서 사랑에 찬 지고의 심포니를 창조하게 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해 달빛이 비쳐 드는 밤마다 그 심포니를 반복해서 연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