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3-11
48. 붉은 모래언덕
“여보. 그러지 말고 제발 이번 한 번만 오빠하고 동행하세요. 당신이 장인도 싫고 처남도 싫더라도 아내인 내 입장은 좀 생각해 줘야 되잖아요. 당신이 그렇게 무작정 거절해 버리면 난 새중간에 끼어 어쩌라는 거예요.”
또 그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원병균은 그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아내의 말마따나 그 난처한 입장을 생각해서 감정을 눌렀다.
“그래. 당신의 난처한 입장 잘 알아. 그렇지만 내 입장이라는 것도 있잖아. 자꾸 말해봤자 결론은 똑같은데. 내가 이번 일에 끼어들어 할 일도 없고, 장인어른도 계속 그런 식으로 회사를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당신은 좀 괴롭더라도 모르는 척하고 있어.”
“아니. 어찌 그런 속 편한 소리를 하세요? 당신 가게 하라고 자꾸 전화가 걸려오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해요. 그리고 지금 아버지 회사에 난리가 나고 있는데 모르는 척한다는 게 말이나 돼요?”
처음에는 사정조였던 박영자의 어조가 냉기를 품으며 새침하게 변했다.
“당신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로 사리 분별을 잘하다가도 어떤 때는 또 영 말이 안 되게 판단력이 없어진다니까. 이번 문제는 무조건 친정아버지 편만 들려고 하지 말라니까. 좀 어렵더라도 냉정하게 객관적 입장에서 생각해 봐. 사학과를 나왔다는 사람이 왜 그래?”
원병균의 어조에서도 짜증이 묻어났다.
“아니. 왜 갑자기 사학과까지 들먹이고 그래요? 맞아요. 그나마 사학과를 나왔으니까 자유언론 민주투사를 따라 지지리 궁색하고 가난한 것 참아가며 여지껏 살아왔다는 것 알기나 해요?”
박영자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런. 왜 또 말이 그쪽으로 회전을 하나? 가난해도 처자식 밥 굶긴 적 없고. 떨어진 옷 입힌 적 없으니까 당신이 장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야. 투위 회원 중에는 우리보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어머. 당신 그거 말이라고 해요? 당신은 그놈의 투위가 먼저예요? 투위하고 마누라하고 뭐가 더 중하냐구요. 당신은 언제 한번 내 처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여자의 마음이란 걸 생각해 본 적이 있냐구요. 난 애초에 신문기자 원병균하고 결혼했지 민주투사 원병균하고 결혼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갑자기 형편이 변하고 말았어요. 그래도 당신이 옳다. 사회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받아 들였어요. 그렇지만 고생이 오래갈수록 그런 마음은 자꾸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난 당신이 마땅찮아하는 부잣집 딸로 컸어요. 그리고 여자에요. 철따라 좋은 옷 해 입으며 멋도 부리고 싶고. 값진 보석을 달고 친구들 만나 으시대고도 싶고. 분위기 있는 음식점에서 자주 외식도 하고 싶고 그래요. 그렇지만 그런 걸 다 참아왔어요. 친정에서 돈을 가져다가 하려고 하면 다 할 수 있었지만 당신 아내로 살기 위해 참아왔다구요. 그 대신 난 친구들 만나는 걸 포기하고 살았어요. 당신은 그런 여자의 마음을 알기나 해요?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또 저질이다. 천박하다 하면서 경멸하겠지요? 경멸하려면 얼마든지 경멸해도 좋아요. 그렇지만 아무리 이성적이고 유식한 여자라도 속으로 그런 마음은 다 가지고 있어요. 당신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깊이 한번 생각해 봐요. 여자가 자기의 초라하고 궁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친구들을 피해가며 외롭게 사는 게 얼마나 슬프고 눈물 나는 일인지.”
박영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병균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내에게 면목이 없었고. 아내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말은 엇지게 나갔다.
“왜 친정 회사일 얘기하다가 쓸데없는 소리하고 그래. 당신도 4.19때 데모를 했다면 아버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비판해야 돼. 월남에서도 근로자들이 항의 데모를 하게 만들더니 사우디에서 또 폭동을 일으키게 하면 어떡해. 그렇게 회사를 운영해 돈을 벌어 뭘 하자는 거야. 도대체.”
원병균은 신문을 획 밀치고는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참 잘났군요. 당신이나 많이 냉정해 봐요. 난 그렇게 못하니까. 오빠하고 동행 안 하면 이혼인 줄이나 알고 나가요.”
박영자도 남편의 뒤에다 대고 억지소리를 퍼부었다. 남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자 박영자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때 문득 강숙자가 떠올랐다. 아버지에 대해서 냉정하라고 한 남편의 말은 4.19때 자신이 강숙자에게 한 말이었다. 그때 강숙자는 끝내 데모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강숙자가 되어 있었다. 그때는 남의 일이라 그렇게 말했던 것인지. 지금은 타락을 해서 아버지 편을 들고 있는지 잘 구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남편 모르게 계속 친정 도움을 받고 있어서 그러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업들에 대해서도 독재정권에 못지않은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기업들이 근로자들을 착취해 치부를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을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인한테까지 조금도 여유를 보이지 않는 것은 야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도 안타까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어쩌자고 옛날식으로 회사를 운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언제까지 축적이란 말이냐. 이젠 분배를 해야 한다. 하며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사회는 그들의 주장에 호응하는 분위기가 된지 오래였다. 하긴 총리라는 사람이 국민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듯. 지금은 축적의 시기이지 분배의 시기가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라. 한 것이 10년 세월인데도 정부는 전혀 분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거북살스러운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했길래 근로자들이 외국에서까지 폭동을 일으키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보나마나. 그대로 다 굶어죽을 것들을 일거리 줘서 먹여 살려 놨더니 이제 회사 망쳐 먹으려 든다고 화를 낼 것이 뻔했다. 아버지에게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줄기차게 여색을 밝히는 것이었고. 직원이나 근로자들을 종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아버지는 상극 중에 상극이었다. 박영자는 한숨을 토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다. 셋째오빠. 네 남편 어떻게 됐냐?”
전화속의 박준서 목소리는 급한 기색으로 퉁명스러웠다.
“오빠. 내 힘으로 안 되겠어요. 나하고 한바탕 하고 방금 회사로 나갔어요.”
“이런. 답답하기는. 한바탕 해버리면 어떡허냐? 부드럽게 살살 어떻게 했어야지.”
“오빠나 답답한 소리 하지 말아요. 첨부터 한바탕 하자고 대들었겠어요? 하다하다 안 되니까 그리 된 걸 알기나 해요? 나도 속상하고 신경질 나 미치겠다구요.”
박영자는 자신도 모르게 울먹였다.
“알았다. 알았다. 수고했어. 내가 회사로 바로 찾아가 만날 테니까 넌 더 신경 쓰지 마라. 전화 끊는다.”
“거긴 언제 가는데요?”
“응. 오늘밤에 출발해야 한다. 네 남편 비행기 표까지 다 끊어놨어.”
전화를 끊으며 박영자는 또 한숨을 쉬었다. 오빠가 직접 만난다고 될지 모를 일이었다. 남편은 아버지 못지않게 셋째오빠를 싫어했다. 아버지 회사에서 고속 승진을 할 때부터 차츰차츰 금이 가기 시작해 셋째오빠가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자 둘 사이의 우정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셋째오빠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어색하고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셋째오빠가 4.19의 부상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아버지의 욕심과 허영의 산물이었고, 셋째오빠는 거기에 얹혀 어설픈 정치욕을 드러낸 셈이었다. 아버지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 가문을 더 빛내야 한다는 욕심을 가졌고, 경쟁상대인 다른 재벌들에게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허영에 차 있었다. 값비싼 보석을 주렁주렁 단 부잣집 여자가 또 하나의 색다른 보석을 탐하는 격이었다.
원병균은 시내버스 안에서 줄곧 아내생각에 빠져 있었다. 여자의 마음....... 멋 부리고 싶고. 보석을 갖고 싶고. 품위 있게 살고 싶고....... 그런 게 어찌 여자 마음일 뿐이겠는가....... 남자에게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 있다. 그 대상이 좀 다를 뿐이지. 초라하고 궁색한 모습을 안 보이려고 친구들을 피해가며 사는 것....... 그게 어디 슬프고 눈물만 나는 일이겠는가. 그것처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아내는 손꼽히는 재벌 집 딸이 아닌가. 아내가 자신의 속마음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고. 그런 일로 눈물을 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아내의 눈물이 왜 그리 가슴 아프고, 사람을 서럽게 하는지....... 아내는 그동안 잘 참고 견디어온 것이다. 아내가 남달리 이성적이고 슬기롭지 않았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아내가 가엾고 안쓰러웠다. 내 아내로 살기위해....... 그럼 나는 아내의 남편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자유 언론 투쟁.......? 아내한테 더 이상 이성적이기를 바란다는 것은 염치없고. 그것이 바로 비이성적이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성적이면서 본능적이고. 본능적이면서 감성적이고. 감성적이면서 영성적이고. 영성적이면서 이성적이지 않던가. 그 요소들이 혼재해 있는 인간에게 이성적이기 만을 강요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었다. 더구나 형제도 아니고 부모를 대상으로.
그러나 장인은 용납할 수 없는 대목들이 너무나 많았다. 성명서 건으로 우연히 알게 된 그 일도 너무나 충격이었다. 장인이라서 남아있던 한 가닥 정마저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 아까 아내 앞에서 그 이야기가 곧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었다. 장인한테 오만정이 다 떨어져 그 어떤 일도 돕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아내한테 확실하게 이해시키려면 그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딸로서 아내가 무릅써야 하는 창피스러움과 모욕감을 생각해 차마 그 이야기를 뱉어낼 수는 없었다. 지난번 성명서 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을 때 트집이란 트집은 다 잡던 경찰은 마침내 출판사 발행인이 위장이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이상재가 끌려오고. 허미경까지 끌려왔다. 이상재는 오빠 친구로 동업하는 사이라고 허미경이 당당하게 대응해서 걱정했던 그 문제는 쉽게 풀렸다. 그런데 1주일 동안 구류를 살고 나와서 그 이야기를 다시 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은 저의 첫사랑이었는데. 박 사장 비서 때 몸을 망쳐 그렇게 혼자 살아가게 되었죠. 아들을 뺏기고 상처가 크니까요. 제가 군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땐 그냥 변심한 줄 알았었지요.”
“아니. 그럼 허미경씨는 내가 그 집 사위인 걸 알아?”
“글쎄요....... 아마 모를걸요. 제가 그런 얘기한 적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형은 내가 박 사장 사위인 걸 다 알면서도 허미경씨 이름을 빌린 거 아냐.”
“글쎄요. 선배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이것 참 묘하군요. 이 말 듣고 생각해 보니 비로소 그것 좀 곤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 그때는 이상하게도 그 일이 전혀 그렇게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뭐랄까....... 저는 선배님만 생각했고.......그러니까 선배님에 대한 믿음이랄까. 존경이랄까....... 그런 게 전부였지 다른 건 생각지도 않았어요.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이상하긴 이상하군요.”
자신을 그렇게 믿어준 이상재가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반면에 장인이 저지른 잘못이 너무 죄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원병균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아내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사무실에 다다를 때까지 눈물 흘리는 아내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선배님. 변호사한테서 전화 왔었습니다. 그거 하나 작성하는데 굼벵이가 서울부산을 왕복하고도 남도록 질질 끌어대니 원.”
원병균은 세차게 혀를 찼다.
“상고 기일이 급하니까 연락 달라고 하면서도 그 말투가 좀 뜨악하다고 할까....... 맥 풀리게 들렸어요.”
“그럴 만도 하지. 상고해 봤자 또 패소할 거니까. 패소할 사건 맡고 있는 변호사 심정은 우리하고 또 다를 거요. 우린 패소 그 자체를 역사 기록으로 남기려는 거지만.”
원병균이 쓸쓸한 듯한 웃음을 흘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는 그럼 인쇄소에 가겠습니다. 교정지 바꿔와야지요.”
이상재는 바쁘게 사무실을 나섰다. 원병균은 소파에서 신문을 뒤적뒤적하다 말고 책상으로 옮겨 앉아 교정지를 끌어당겼다. 정신을 교정지에 모으려고 했지만 장인의 일과 상고건이 뒤섞이면서 머리는 혼란하기만 했다. 지난번에 고등법원은 해직기자들이 낸 해고처분 무효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전원 패소 판결을 내렸다. 판사마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위협당하는 것이 예사가 된 세상에서 그건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상고는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신문사와 정부를 향한 자유언론 투쟁인 동시에 역사의 기록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똑. 똑. 똑. 손기척이 울렸다.
“예. 들어오세요.”
누가 노크를 다 하나. 생각하며 원병균은 고개를 돌렸다. 이 사무실은 사랑방과 같아서 그런 예의 갖추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박준서였다.
“이거 어쩐 일이야. 아침 일찍부터.”
원병균은 어색스런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어쩐 일이긴. 영자한테 전화하고 오는 길이야. 좀 나가지. 다방으로.”
박준서는 원병균과 달리 활달한 태도로 밝게 웃었다.
“다방은 무슨. 여기서 얘기해도 괜찮아. 내 동업자는 인쇄소에 가서 두 시간 안에는 안 오니까.”
원병균은 낡고 먼지 낀 소파에 주저앉았다.
“딴 사람들이 올 수도 있잖아. 여긴 퇴직기자님들 집합소라며. 오랜만에 다방에서 커피 한 잔해서 나쁠 것도 없고. 어서 일어나.”
박준서의 몸에는 흔히 사교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풍기게 마련인 좀 능글맞고 비위 좋은 세련됨이 배어 있었다.
“이거. 변호사 사무실에도 가야 하는데.......”
원병균은 시간 길게 끌 생각 말라는 듯 이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박준서는 다방으로 들어서면서 바로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꺼냈다.
“야. 병균아. 우리 여러 말하지 말고 떠나자. 너하고 난 친구만이 아니라. 가족이야. 집에 불이 났으면 일단 끄고 보는 것이 가족들이 해야 할 일 아니냐? 불길 놓고 누가 불냈느냐. 어쩌다가 불냈느냐 하고 따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냔 말야. 병균아. 우선 불부터 좀 끄자.”
원병균은 머리가 쿵 울리는 것을 느꼈다. 박준서가 ‘병균아’ 한 호칭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었다. 그 호칭은 처남 매제 사이가 되면서 없어진 지 오래였고. 말투도 친구 때 사용했던 ‘해라’를 버리고 ‘반말’로 올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준서는 말투를 그 옛날의 ‘해라’를 쓰며 백기를 들게 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 불부터 끄는 게 가족의 도리라고 하자.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며 곰곰이 생각해 봤어. 그렇지만 내가 거기 가서 할 일이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안 그러냐?”
원병균은 커피 잔을 들었다.
“알아. 너보고 무슨 일을 하라는 게 아니야. 나 혼자 가는 것 보다는 동행하는 것. 그게 네가 할 일이야. 그것도 못하겠단 말이냐?”
“혼자? 회사 간부들은 아무도 안 간다는 거야?”
“그야. 서너 사람이 가지.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월급쟁이일 뿐이야. 난 마음 편하게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넌 그저 특이한 나라 여행가는 셈 치면 돼. 오늘 저녁 출발이다. 아까 네 마누라한테는 말했어.”
박준서는 그의 아버지 박부길 사장의 스타일 그대로 한달음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너 지금 제 정신이냐? 난 여권도 없는 몸이야. 그리고 참. 요주의 인물이라 여권도 안 내줄 거다.”
원병균은 뒤늦게 떠오른 신통한 생각에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넌 예나 지금이나 순진무구해서 참 좋구나. 여권 벌써 다 냈고. 비행기 표까지 사놨다. 너 이거 무슨 말인지 감이 전혀 안 잡히지? 네 사진은 그저께 영자가 조달했고. 여권은 이틀 만에 나왔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는 꼭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 내의며 거기 가서 입을 옷까지 여행 준비는 완료해 놨으니까 오후 5시까지 바쁜 일 끝내놓고 있어. 내가 모시러 올 테니까.”
원병균은 박준서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금력과 권력이 합해졌으니 여권 아니라 더한 것도 못 해낼 일이 없다는 것을 그는 허전한 마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어쨌거나 더 어떻게 빠져나갈 틈이 없어 그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커피 잔을 드는데 또 눈물 흐르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게 말이야. 일종의 전염병이야. 무슨 말인고 하면. 얼마 전에 항만 공사를 하던 회사의 근로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어. 수천 명이 중장비들을 무기삼아 관리직들을 공격해대고. 공사장 여러 곳을 파괴하고. 사무실까지 떠넘겨버렸어. 그 폭동은 3일 동안 계속되다가 진압됐는데. 그 다음이 문제야. 그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회사 근로자들도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거야. 지금 우리 회사도 그 피해를 입고 있는 거지.”
비행기가 고도를 잡자 박준서가 안전띠를 풀며 말했다. 원병균은 담배를 피워 물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 그거 제일 중요한 게 빠지지 않았어?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흔들릴 것 아냐.”
원병균은 그 말을 참을까 하다가 박준서의 말투가 너무 장인을 닮은 것이 역겨워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야 이유 없는 무덤 없는 법이지. 간단하게 말해서 임금 차별을 한다는 건데. 그건 근로자들이 자기네 푼수를 모르고 설쳐대는 거야. 근로자들은 1년 계약인 임시직일 뿐이고. 관리직이야 엄연한 정식 사원에다가 모두 대졸들이니까 월급이 차이 나는 건 당연하잖아. 어느 회사 어느 업종이나 다 그런 차이가 나는 게 정상인데 폭동을 일으키다니. 그따위 짓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전행위고 파괴행위야.”
얼굴에 감정이 돋은 박준서는 스튜어디스에게 위스키를 시켰다.
“그런 불만은 벌써 국내에서도 일어나고 있잖아. 일은 생산직 근로자들이 뼛골 빠지게 다하는데 관리직들은 편히 책상에 앉아 펜대나 굴리면서 월급은 왜 더 많이 받느냐고. 그거 단순한 불만이 아니니까 경영자들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될 문제 아니겠어?”
“그거 하나도 심각할 거 없어.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는 모든 면에서 엄연히 달라. 학벌에서부터 하는 일까지. 비교가 안 돼. 블루칼라들은 화이트칼라들이 놀고먹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새대가리들의 생각이야. 한마디로 말해 블루칼라들은 손발일 뿐이고 화이트칼라는 두뇌야. 사람이 두뇌가 없는데 손발이 움직일 수 있어? 고작 단순노동이나 하는 블루칼라들이 뭐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시건방을 떨기 시작하는 거야. 그건 일고의 가치도 없어.”
원병균은 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피곤을 느꼈다. 박준서는 철벽같은 경영자 입장이었다. 그와 말을 더 해보았자. 부질없는 언쟁만 될 거였다. 그와 자신은 세상을 너무나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4.19때 함께 데모를 한 입장인데 어디서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한 일도 없이 왜 이리 피곤하지. 나도 술이나 한잔 마시고 한숨 잘까.”
원병균은 스튜어디스를 향해 손짓했다. 공항에는 승용차 두 대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공항 건물을 나와 승용차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원병균은 화끈화끈 끼쳐오는 더위를 느끼며 자동차 범퍼위에서 계란프라이가 된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더위를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어떻게 돼 있소?”
마중 나온 소장과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박준서가 차 앞에 이르러 대뜸 내던진 말이었다. 침묵의 힘으로 한껏 고조된 그의 거만한 위세는 마침내 대포가 되어 소장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예. 예. 주. 중정 요원들이 출동하자 오늘부터 기가 꺾였습니다.”
처음부터 잔뜩 주눅이 들어 허리를 펴지 못하고 걷던 소장은 더욱 허리를 굽히며 말을 더듬었다.
‘뭐라고? 중정!’
원병균은 깜짝 놀라며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중정사람들은 지금 뭘 하고 있소?”
박준서는 차에 몸을 부리며 말했다.
“예에. 주. 주동자들을 색출해 내고 있습니다.”
원병균은 전신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는 한숨으로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데까지 중정이....... 그들이 우리 보다 앞서 온 것인가......?’
더 단호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따라온 것을 원병균은 후회하고 있었다. 또 눈물이 흐르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장은 뭘 하고 있었소. 그런 불순분자들을 미리미리 색출해 내지 못하고.”
박준서가 두 번째 쏘아댄 대포였다.
“예. 예. 죄. 죄송합니다. 막사마다 탐지원들을 두 명씩이나 배치했습니다만.......”
앞자리에 앉은 소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뒤로 돌린 채 한층 더 굽실 거렸다.
“시끄럽소. 두 명이 아니라 열 명을 배치하면 무슨 소용이 있소. 또 노무과는 멋으로 두고 있는 거요? 다 능력 부족이라 그따위 사태가 벌어지는 거요.”
박준서의 낮으면서 차가운 말은 소장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화살이었다. ‘능력 부족’이라는 단어는 ‘파면’을 시킬 수도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최. 최선을 다 한다고 했습니다만....... 그게....... 저어.......”
다급해진 소장은 더욱 말을 더듬으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원병균은 박준서의 옆자리에 앉아 그런 소장을 보기가 딱해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영락없이 제왕 앞의 죄지은 신하였다. 그렇게 군림하는 박준서도. 그렇게 굴종하는 소장도 다 마땅찮아 원병균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는 망망한 사우디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캠프는 리야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창이 다 깨진 정문초소부터 폭동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캠프 안으로 들어가자 폭동의 그림자는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관리자들에 대한 근로자들의 불만을 그대로 나타내듯 사무실은 거의 다 파괴되어 있었고. 여러 종류의 건축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가 하면. 승용차가 박살나고 중장비들이 넘어져 있기도 했다.
“이걸 언제까지 이대로 둘 거요?”
상을 잔뜩 찌푸린 박준서가 내쏘았다.
“예에. 중정에서 주모자 색출이 완료될 때까지는 그대로 두라고 했습니다. 처벌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요. 사진도 찍어야 하고요.”
앞으로 모아 잡은 소장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근로자들은 다 어디 있소?”
“예. 조사하는 동안 행동 통제령이 내려서 모두 각자의 숙소에 있습니다. 조사는 차례로 진행되고 있고요.”
“조사는 언제까지 한다는 거요?”
“예. 오늘 중으로 끝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빨리?”
“예. 근로자들이 정치범이 아니라 단순하니까 빨리 끝내는 요령이 있다고 합니다.”
“빨리 끝내는 건 좋지만. 이번 기회에 불순분자는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야 해.”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중정 책임자는 어딨소? 여기 파견된 요원들은 다 온 거요?”
“예. 모두 왔습니다. 곧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어.......”
소장은 연신 굽실거리며 마른침을 삼키고는.
“점심때가 다 됐는데. 근로자들 점심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며 눈을 껌벅거렸다.
“점심? 조사가 빨리 끝나게 할 겸 한 끼 굶겨. 폭동 일으킨 쓴맛이 뭔지 알게.”
박준서는 원병균을 쳐다보았다. 원병균은 박준서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됐소. 시간 맞춰 식사 시키시오. 식당은 피해가 없소?”
“예. 식당은 말짱합니다.”
“허!”
박준서는 원병균을 보며 헛웃음을 쳤다.
“어서 책임자를 만나도록 하시지요.”
소장이 또 허리를 굽혔다.
“난 안 만났으면 좋겠어. 그쪽에서도 거북해 할지 모르고.”
원병균은 박준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럼 저 주차장 그늘에서 쉬고 있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내 생각으로는 처벌할 주모자들을 최소화하는 게 좋아.”
박준서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원병균은 이 말을 잇대었다.
“최소화?”
박준서는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
“주모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제거해야만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허나 그렇지 않아. 이 사람들은 다시는 그러지 못해. 왜냐하면 중정이란 힘 때문이야. 이 사람들은 자기네가 폭동을 일으키면 중정이 이런 식으로 신속하게 진압에 나설 줄 알았겠어? 아니야. 몰랐어. 그럴 줄 몰랐으니까 용감하게 나섰던 거야. 이 사람들도 중정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더는 아무 짓도 못해.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어. 회사가 사우디에서 돈을 버는 것은 일정한 시한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회사를 대를 물려가며 경영해나가야 해. 그런데 회사에 원한 사는 사람을 하나라도 많이 만들어선 안 돼. 잘 알지? 어떤 사업이든 소비자한테 불신당하고. 세상인심 잃어선 해먹을 수 없다는 것. 화도 나겠지만 폭동은 이미 진압됐어. 이젠 냉정해질 단계야.”
원병균은 박준서의 눈을 주시하며 계속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원병균은 돌아서는 박준서의 기색이 별로 나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사무실 앞쪽으로는 쇠기둥들을 세워 위에 슬레이트를 얹어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그것도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원병균은 천천히 걸어 그 그늘로 들어갔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에 양복을 벗고 갈아입은 남방에는 어느덧 땀이 내배고 있었다.
‘이런 땅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돈을 벌다니.......’
원병균은 그동안 소문으로만 흘러들어 온 사우디의 폭염을 실감하며 멀찍하게 줄지어 선 근로자들의 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층민들일수록 산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고통인지 새삼스럽게 비감을 느꼈다.
“저어. 더우신데 이것 좀 드시지요. 저는 여기 총무과장입니다.”
한 사람이 얼음을 채운 콜라 잔을 쟁반에 받쳐 원병균 앞으로 내밀었다.
“아. 예. 고맙습니다. 저는 원병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 박 의원님과의 관계를 말씀 들었습니다. 원로에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원병균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근데 말입니다. 폭동 원인이 관리직과 차별을 받는 불만 때문이라고 대충 들었는데. 다른 이유는 또 뭐 없습니까? 총무과장보다는 근로자한테 물어야 합당한 질문이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요구조건을 가장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총무과장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따가 다 알게 되겠지만. 어디 솔직하게 얘기 좀 해보세요.”
원병균은 상대방이 대답을 피할 수 없도록 몰았다.
“예에. 그게 그러니까....... 어차피 알게 되실 거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말씀드리자면. 그게 네댓 가지가 되는데. 첫째는 임금 차별이구요. 둘째는 식당을 분리해 음식 차별을 한다는 거구요. 셋째는 숙소를 분리해 시설 차별을 한다는 거구요. 넷째는 관리직들이 자기들을 너무 심하게 대한다. 뭐. 그런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다 억지고 트집입니다. 이 더운 데서 적당히 했다간 게으름피우고 개판 쳐서 아무 일도 못하니까요.”
원병균은 콜라를 마시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박준서와 따질 문제였지 총무과장은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는 문제였다.
“여기서 지금 하는 일은 뭐요? 도로공사?”
원병균은 말머리를 돌렸다.
“아닙니다. 리야드에서 건설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건설공사? 도로공사는요?”
“예. 몇 년 동안에 중요한 고속도로공사는 거의 다 끝냈기 때문에 이젠 2단계로 대도시들이 건설 공사로 접어들었습니다.”
“예. 잘 마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원병균은 유리컵을 건넸다.
박준서는 30분쯤 지나 나왔다.
“가지.”
“어디로?”
“리야드로 가서 호텔에서 좀 쉬어야지.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잤으니까 샤워하고 한숨 자면서 수사가 끝나기를 기다리자고. 근로자들 점검은 그 다음이니까.”
박준서는 먼저 차를 탔다. 원병균도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박준서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던 주모자 처벌 말이야....... 20명 선으로 정했어.”
“뭐. 20명씩이나?”
원병균은 박준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그리 놀래? 한 막사에 하나씩인데. 수사관은 이 기회에 뿌리를 뽑으려면 한 막사에서 다섯씩은 잘라내야 한다고 완강했는데 내가 한 명씩으로 줄여야 한다고 밀어붙인 거야.”
더 말하지 말라는 듯 박준서는 뒤로 몸을 부리며 눈을 감았다. 자동차 안은 서늘한 느낌이 들도록 시원했다. 원병균은 차창 밖의 낯선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넓고 넓은 황무지에 가끔 모래언덕들이 나타났다간 사라지고는 했다. 그런데 땅이 침강되어 이루어진 수직의 낭떠러지들이 있는 지역에 이르자 붉은 모래언덕이 나타났다. 원병균은 다시 보았지만 부드러운 곡선으로 서너 개의 언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 붉은 모래였다. 난생처음 보는 그 붉은 모래언덕은 신비스러웠다. 그 언덕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는 문득 이런 생각에 부딪쳤다. 이 폭염의 땅에서 수많은 근로자들이 흘리고 있는 피땀을 농축 시키면 저런 색깔이 되지 않을까.......
49. 고생의 뒤끝
나윤자는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배를 떠안고 힘겹게 걷고 있었다. 폭넓은 임신복을 입지 않아 그녀의 배는 더 표 나게 불러보였다. 생활이 어지간하면 다 사 입게 마련인 임신복도 입지 못한 그녀의 입성에서는 가난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진기 없이 까칠하고 기미 낀 얼굴에서도 궁기가 드러나고 있었다. 나윤자는 식품점 앞에 이르러 몸을 사리며 가게 안을 힐끔힐끔 살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올케가 애를 낳아 가게에 안 나올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올케가 가게 안에 있는지 없는지 눈치를 살피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참 이상하고도 묘한 일이었다. 가게를 차리는 데는 올케의 돈이 땡전 한 닢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왜 그리 올케의 눈치가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올케는 뒤늦게 시집을 와서 가게나 좀 보며 호강하고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마저 갈수록 더 올케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었다.
“엄니. 그러지 말아요. 엄니가 왜 며느리눈치 보면서 살고 그래요? 돈 한 푼 보탠 게 있어요. 무슨 고생을 한 게 있어요. 눈치는 올케가 엄니 눈치를 봐야지요. 안 그래요?”
나윤자는 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이런 식의 말로 오기를 부렸다.
“금메. 고것이 참 요상시럽고 얄랑궂은 거이야. 메누리란 것은 시집올 때 달르고. 첫 아그 낳아서 달르고. 둘째 낳아서 달르고 헌다등마. 그 옛말이 워찌 그리 딱 맞는지 몰르겄다. 메누리는 지 자석덜 밑천삼아 기를 세우는디 시엄씨야 자꼬 늙어감서 차차로 똥친 작대기 돼간께 당연지사 아니겄어. 지 영감이나 살었으면 또 몰르겄는디. 영감도 읎이 혼자면 더 천시 당허는 법이여.”
갈포댁의 시름겨운 대꾸였다.
“엄니. 그것이 무슨 맥 빠지는 소리에요. 엄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살았는데. 이 식품점도 어디 오빠 혼자 힘으로 일으켰어요? 엄니가 죽을 등 살 등 고생고생해서 일으킨 거지. 엄니는 당당하게 호강하면서 살 자격이 있다구요. 엄니. 혹시 오빠가 장가들어 맘 변한 것 아니에요? 내가 오빠한테 한판 따질까요? 엄니 제대로 모시게 올케 언니 길 똑바로 잡으라고.”
“아서. 아서. 니넌 출가외인이여. 니나 메누리 노릇 잘허도록 혀. 나야. 암시랑토 안 혀. 요런 가게 번듯허니 채래놓고 끄니 걱정 안험서 돈 모트고 사는 요것으로 천하를 다 얻은 것이여. 나가 인자 머시럴 더 바래겄냐. 공연시 불란 지기덜 말어. 나라 상감도 심이 덜 차는 대목이 있는 법인께.”
한 가닥이라도 어머니가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 나윤자는 견디기 어려웠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목이 메었다. 어머니는 눈물이고 서러움이고 쓰라림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어머니가 겪은 온갖 고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돈 좀 여유 있게 쓰며 마음 편하게 살지 못하고 며느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분하기까지 했다. 올케가 밉기도 했지만 더 야속한 것은 오빠였다. 오빠가 올케를 확 휘어잡고 어머니를 깍듯하게 모시게 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빠가 손이 그런 것 때문에 계속 한풀 꺾이고 있는 것인가....... 그 생각이 들면 자신도 그만 기가 수그러들었다.
나윤자는 한숨을 쉬며 식품점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복남식품점ㅡ 여기 올 때마다 그 간판을 올려다보는 것도 버릇이 되어 있었다. 오빠의 이름을 딴 그 간판을 보면 그래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무리 변두리 동네라지만 서울에서 버젓이 간판 단 식품점을 차리고 있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오빠가 손가락 네 개를 잘리고 공장에서 쫓겨났던 그때의 암담하고 기막혔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이만저만 잘 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름이 근사해서 식품점이지 속을 들여다보면 그전의 구멍가게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굳이 달라진 것을 찾자면 미국산 음료 냉장고가 자리 잡고. 그 옆에 음료박스가 높게 쌓여 있는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두 개의 미국 음료회사는 치열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네 음료를 서로 많이 팔게 하려고 유리문이 달린 소형냉장고와 함께 간판 붙여주는 일을 앞 다투어 했다. 그 바람에 구멍가게들은 ‘식품점’이라는 새 이름을 얻으며 공짜로 아크릴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간판들의 양쪽 끝에는 두 음료회사의 상표가 선명하게 붙어있었다.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된 그 음료의 톡 쏘는 맛은 금방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들었다. 그 비싼 미제 음료 때문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가난한 냉차장사들은 그나마 살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엄니이ㅡ.”
나윤자는 어머니를 부르며 식품점 안으로 들어섰다. 길게 늘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머니를 향한 안쓰럽고 안타깝고 서러운 온갖 정이 담겨있었다. 다른 말은 다 고쳤으면서도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불렀던 그대로 여전히 ‘엄니’였다.
“이. 니 워쩐 일이여? 몸도 무거움시로.”
다듬고 있던 파를 던지며 갈포댁이 벌떡 일어났다.
“또 뭐하세요? 그저 잠시도 쉬지 않고.”
나윤자는 마땅찮은 얼굴로 파를 쳐다보았다.
“이. 손놓고 있으면 멀 허냐. 노느니 염불허는 거이다. 얼렁 앉어라. 심드는디.”
갈포댁은 쪽마루에 수북한 파 쓰레기를 치우며.
“쬐깐 묵고살 만혀짐스로 시상이 요상시럽게 변해간다. 파고 마늘이고 다듬고 까놓고 허지 않으면 사가덜 않으니 말이여. 여자라고 생긴 것은 다 편차고 작정들 허고 나스는 풍존디. 요러다가는 콩나물꺼정 다듬어서 폴아야 될 날이 올랑가 무섭다. 말 타면 경마 잽히고 잡다는 옛말이 어찌 그리 딱 맞는지 몰라.”
그녀는 구시렁거리듯이 말했다.
“엄니. 벌써 콩나물도 깨끗하게 다듬어서 파는 세상이 됐어요. 여기야 변두리니까 아직 안 그렇지만.”
나윤자는 무겁게 몸을 앉히며 안쓰러운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머시여? 발써 워디서 그런일이 벌어지고 그려?”
“으응. 나도 그냥 들은 얘긴데. 저어기 강남 부자 아파트촌 상점은 다 그런대요. 콩나물만이 아니라 무도 배추도 더 손댈 것 없이 깨끗하게 다듬어서 판다는데요. 뭘.”
“얼랴. 무시 배추꺼정도? 그려. 으쩌겄냐. 돈이 말허는 시상잉께. 그리 편케 한시상 못 살아 보는 것이 빙신이제.”
갈포댁은 한숨을 쉬며 쪽마루에 앉더니.
“니 무신 일 있는겨?”
하며 딸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응. 엄니도 알지요? 묘숙이 언니라고.”
“하먼. 알제. 니 끌어준 사람 아니여.”
“예. 그 언니가 글쎄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 듣고 안 가볼 수가 있어야지요. 그냥 빈 손으로 갈 수 없으니까 여기서 뭘 좀 살 겸 엄니도 볼 겸해서 왔어요.”
“중병이면 무신 병인디? 그 사람도 살기가 에롭다고 안 혔어?”
갈포댁은 계속해서 파 다듬는 일손을 놀리며 걱정스럽게 딸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도. 흰 머리카락들이 희끗거리기 시작한 머리에도 고단한 세월이 담겨 있었다.
“글쎄 말이에요.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중병인지 모르겠어요. 그 언니도 고생만 죽도록 하고 살았는데. 큰일이에요.”
나윤자가 한숨을 쉬며 파를 집어 들었다.
“아서. 아서. 그냥 앉었기도 심드는 몸으로 무신 짓이여.”
갈포댁은 딸한테서 잽싸게 파를 빼앗고는.
“그야 젊은 날 고상고상험서 살었응께 중병이 들지야. 머심살이 20년에 남은 것은 황천길 갈 골병밖에 읎다고 혔니라. 열다섯에 머심으로 지게지고 나섰으면 서른다섯에 발써 황천길 가게 몸이 파삭파삭허니 되야부렀다 그것이여. 사람 몸이란 것이 다 한도가 있는 것인디. 근디. 니넌 요새 워쩌냐?”
말을 하다보니 불현듯 딸 걱정이 되어 그녀의 말꼬리가 다급해졌다.
“그저 괜찮아요.”
나윤자의 두 손이 불룩한 배 위로 옮겨졌다.
“또 아픈디는 읎는겨? 아그 노느 것은 워띠여? 잘 차고 그려?”
일손을 멈춘 갈포댁은 걱정스러운 빛으로 연달이 물었다.
“예.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윤자는 고갯짓까지 하며 웃었다. 그러나 하루에 한두 번씩 눈앞이 아뜩해지도록 현기증이 일어나고는 했다.
“그려. 막달잉께 아무 일도 읎어야제. 워디 아프고 요상시러운 기운이 있으면 금세 말혀라 잉?”
갈포댁은 딸의 손등을 쓸었다.
“예. 오빠는 어디 갔어요?”
“이. 도매상에 물건 허로 갔다. 하매 올 때가 다 되야간다.”
“손도 불편한데 이제 그만 앉아서 물건 받으면 안돼요?”
“느그 오빠 통고집 알지야? 빵허고 콜라 빼놓고는 요 파 한 단꺼정 그냥 앉어서 받는 물건은 하나또 읎다. 자전거로 물건 대는 사람들 물건은 1원이 더 비싸도 비싸고. 같은 물건이라도 오래 되고 그런 것이라고 뿌득뿌득 큰 시장 도매상으로 나간당께로. 허기사 고상이 쪼깐 되드라도 그리 야물딱지게 혀야제. 굳은 땅에 물 괴드라고 그간에 그리 지독시리 두 눈에 쌍불 키고 혔응께 이리 터잡았제. 우선 묵기는 꼬깜이 달드라고 편헌 것 좋아험서 앉어서 물건 받고 흘룽할룽 혔드람사 이리 든든허니 되岵?것이냐. 끔 한 통 폴아야 1원이 안 남는디. 멫 년 동안에 이 가짓수 많은 물건들이 골백번 돌아나감스로 도매상 상대혀서 떨어진 이문만도 얼매냔 말이여. 느그 오빠 겉은 젊은 사람도 읎다. 하먼. 그리 지독시리 혀야제. 요 가게 채린 돈이 워디 그냥 돈이가니. 지 몸땡이허고 바꾼 것인디.”
누가 흉을 보는 것도 아닌데 갈포댁은 아들을 철저하게 두둔하고 있었다. 나윤자는 듣고 또 들은 그 말을 웃으면서 듣고 있었다. 오빠를 장하게 생각하는 그 말을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했고. 자신도 언제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듣기 좋은 노래 같기만 했다. 아무런 가망 없이 망쳐져 버린 줄 알았던 오빠의 신세가 이렇게 펴진 것이 너무나도 다행스럽기 때문이었다. 풀빵하나를 제대로 사먹을 수 없었던 시절에 이런 상점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부자로 보이고 부러웠던가. 지금도 풀빵도 못 먹고 일에 시달리는 공원들이 숱한 것을 생각하면 오빠는 부자가 된 셈이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언제 또 다녀오셨어요?”
나윤자는 상점에만 나오면 생각나는 천두만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 한 열흘 전에 댕겨왔다. 거그 땅이 걸어 농사 잘되는디다가. 농사 지어갖고 식구 수대로 똑겉이 갈라묵은께로 시상에 근심 걱정이 읎다는 것이여. 내외가 살도 올르고. 신간 편케 뵈는 것이 거그 잘 찾어간 것이등마. 그 아자씨는 천상 농사꾼이여.”
“마음 편하게 잘 사시면 참 다행이네요. 근데. 지난번에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다같이 농사지어 식구수대로 똑같이 가른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땅이 개인 것이 아니면 게으름피우는 사람도 있고. 꾀부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영 복잡할 것 같은데. 그러면 아저씨 같이 부지런한 사람만 손해 보게 되잖아요.”
나윤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쩍어했다.
“이. 나도 고것이 요상시러봐 안 물어봤드라냐. 글 안 해도 께을른 사람도 있고. 살살 힘진 일 피허는 꾀살이도 있고. 교회 돈 돌라서 달아나는 숭헌 사람도 있고. 베라벨 사람이 다 있다는 것이여. 워떤 인종은 돈 돌라 달아났다가 멫 달 만에 빈털터리 되야 갖고 금메 거그로 끼대들어 왔드란다. 사람들이 전부 ‘저 못된 놈 경찰에 넴기라’고 야단이 났는디. 그 목사님 허시는 말씸이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디. 그 잘못을 회개허먼 되는 것이라’고 험서 그 사람을 교회로 딜고 가 기도시키고 그대로 받아줬다는 것이여. 근디 또 기맥힌 일이 벌어졌어. 멫 달 있다가 그 사람이 또 돈을 돌라갖고 내뺀 것이여. 그리고 또 얼매가 지내서 그 사람이 빈주먹으로 거그럴 찾아들었던 마다. 근디 목사님은 또 웃는 낯으로 그 사람을 대험서 용서헌 것이여. 그런 목사님을 봄스로 사람들은 감복허고. 일도 열성으로 허게 된다드라. 그라고 목사님 내외간도 딴 사람들허고 똑겉이 농사짓고. 나누는 것도 똑겉이 허고 헝께 아무도 불평헐 것이 읎이 한 덩어리가 되야간다는 것이여.”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분은 아마 사람이 아닌가 봐요.”
나윤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려. 나도 니허고 똑같은 말을 혔는디....... 거그가 바로 천국이 아닐랑가 몰르겄다. 느그 아부지가 살아 기셨드라면 우리도 거그 가서 말년 보냈으면 좋았을 것인디. 느그 아부지도 천상 농사꾼이었응께.”
갈포댁은 목소리가 잠겨들며 눈을 훔쳤다. 남편을 생각하는 그녀의 눈자위는 붉어져 있었다.
“그래요. 마음만으로도 나도 그런데 가서 살고 싶으네요.”
그곳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어머니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나윤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 있잖아요. 우리 집에 콜라 한 빡스하고. 설탕 3키로 짜리 하나 배달해 주세요.”
그때 손님이 밖에서 목청 크게 말했다.
“예에. 안녕허세요. 곧 배달허겄구만요. 무슨 잔치 있으세요?”
갈포댁은 딸하고 말을 할 때와는 다르게 서울말투를 쓰며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예에. 우리 애 생일이라 저희 친구들을 부른다는데 뭐 특별히 줄 게 있어야지요. 적당히 생일상 차려주고. 애들 좋아하는 콜라나 마시게 해야지요.”
“예에. 애나 어른이나 콜라는 다 좋아헝께요. 곧 배달허겄구만요.”
환한 웃음을 피워내며 갈포댁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녀는 손님을 대하는 게 아주 몸에 익어 있었다.
“니 머 묵고 잡은 것 읎냐?”
물건을 팔아 기분 좋은 기색이 담긴 얼굴로 갈포댁이 딸에게 물었다.
“아니요.”
나윤자는 고개를 젓고는.
“배달 들어왔으면 오빠가 빨리 와야 할 텐데. 나도 온 김에 오빠 보고 가야하고.”
그녀는 중얼거리며 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아나. 요것 갖다가 얄팍얄팍 썰어서 계란에 부쳐 묵어라. 기운 채래야 아그 잘 낳고. 기운 채리는 디는 괴기가 질잉께.”
갈포댁은 빨간 비닐포장이 된 소시지 두 개를 내밀었다.
“엄니. 싫어요. 이 비싼 걸 팔아야지. 오빠도 없고. 물건 그냥 들어내는 것 올케가 딱 질색하잖아요.”
나윤자는 물러나 앉는 몸짓을 하며 손을 저었다.
“하이고 싼지그나. 고것이 배와묵은 보초가 읎어서 그 모냥이제. 나가 날이날마동 허는 일을 품삯으로 쳐봐라. 요까짓 것 수백 개가 당허는가. 여러 소리 말고 싸게 챙겨.”
갈포댁은 우왁스럽다 싶게 딸의 손가방을 뺏어 소시지를 넣었다.
“엄니이.......”
나윤자는 가슴 찡해지며 울상을 지었다.
“애비는 일찍 떠나불고. 오빠는 손꾸락 몽땅 짤리고.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캄캄허고 막막헌 집구석 혼자 띠미고 발싸심험서 고상고상헌 것이 뉘기여. 니 아니었음사 그 숭악헌 시절을 워찌 견뎌냈을 끄나. 그런 공 하나또 몰르고 늦게 시집와서 무신 행짜여. 행짜가. 시상이 드럽고 빌어묵게 되니라고 메누리란 것들이 씨엄씨도 몰라보고. 시누이도 몰라보고. 다 망헐 놈에 풍조제.”
갈포댁은 다듬은 파들을 묶으며 성깔 돋은 푸념을 하고 있었다.
“엄니. 손자들 예쁜 것만 생각하세요. 힘든 일도 차츰 손을 떼구요.”
나윤자는 어머니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야말로 평생 고생에 시달리며 집안을 이끌어 왔는데 아직까지도 궂은일만 해야 하는 것이 속상하고 가슴 아팠다.
“그려. 손지 새끼덜 이쁘고. 세 끼 밥걱정 안 허고 입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천복을 누린다고 생각혀야제. 인간사 내리사랑만 있제 치사랑은 읎다고 혔응께 메누리헌테 위함받고 잡어 허는 것이 물줄기 위로 돌릴라는 욕심이겄제.”
갈포댁은 휘늘어지는 한숨을 쉬었다.
“엄니. 나 왔어요.”
밖에서 들려온 외침이었다.
“음마. 아범 왔다!”
“예. 오빠에요.”
갈포댁과 나윤자의 말이 겹쳐지며 그들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윤자 왔어. 윤자.”
갈포댁이 앞서 밖으로 나가며 말했고.
“그래. 몸은 좀 어떠냐?”
나복남이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어머니를 뒤따라 나온 여동생을 보고 웃었다. 그는 살도 많이 오르고 화색도 좋아보였다.
“응. 그저 괜찮아. 오빠는?”
나윤자도 오빠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기미가 두껍게 낀 얼굴에 드러나는 웃음은 어쩐지 쓸쓸하고 춥게 느껴졌다.
“나야 맨날 이 짓이고. 넌 그저 괜찮으면 어쩌야. 싹 괜찮아야지.”
나복남은 자전거 뒤에 실은 커다란 대바구니에 묶인 굵은 고무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그 대바구니 위에는 밑에 담긴 것만큼의 높이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물건들은 지대로 다 혔어?”
갈포댁은 손 빠르게 물건들을 내리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며 몸짓에서는 조금 전의 수심은 간 곳이 없고 어느새 생기가 돌고 있었다.
“예. 대충 하기는 했는데요. 그나저나 큰일 났어요. 무슨 물가가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이 줄창 올라가기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물가가 오르면 이익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장사만 안 되는데. 빌어먹을.”
나복남이 투덜거리며 침을 내뱉었다.
“당최 고것이 무신일인지 몰르겄다 이. 잘살게 되얐다고 자꼬 나팔이나 불어대덜 말든지. 잘살게 되얐으먼 물가가 잠잠허든지. 참 요상시런 시상 아니여? 누구 애 터져 죽일라고.”
“미친 새끼들. 다 정치를 엉망진창으로 해서 그래요. 위에 있는 놈들은 다 도둑놈들이고 대학생들은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맨날 데모를 해대니 나라꼴이 될 게 뭐예요. 개새끼들.”
“아이고. 누가 듣겄다. 지발 그런 입바른 소리 씸벅씸벅해 버릇 허지 말어. 잽혀가서 졸갱이치면 누구 손해여. 요런 험헌 시상에서는 무신 허고 잡은 말이 있어도 그저 입 봉허고 사는 것이 질이여. 해방되고 정신 읎이 어지러울 적에 이쪽저쪽에서 당헌 사람들은 다 말 자리나 헐지 아는 사람들이었응께. 하먼. 말이 사람 잡는 법이여.”
갈포댁은 질색을 하며 빈 주먹질을 해댔다.
“아이고. 모르겠어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인지. 혼자 죽을 때까지 해먹을라면 물가나 안 오르고 사람 살기 좋게 해놓든지. 물가 이리 오르게 엉망진창 만들었으면 대학생들 말대로 물러가든지. 이건 죽도 밥도 아니니까 사람 열 안 받게 생겼어요. 신경질 나게.”
나복남은 입으로 할 말은 다 하며 손은 부지런히 놀려 물건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아서. 아서. 그런 말 헌다고 들어주는 것 아니고. 시상이 바꽈지는 것도 아닝께 그냥 속으로만 그러려니 혀. 시끌시끌허고 무서운 시상에서는 나 못난이네 험서 입 봉허고 사는 것이 질이랑께로. 나 말 알겄지야?”
갈포댁도 아들이 내려놓는 물건들을 부산하게 옮겨놓으며 할 말은 야무지게 다하고 있었다. 서민들이 물가 오르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은 괜히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경제기획원에서는 지난 10년간 기초 생필품 값이 최고 1.200퍼센트 올랐다고 집계하여 보도하고 있었다. 정부기관의 집계가 그러니 소비자들의 체감 물가가 어떨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니 몸도 션찮응께. 무거운 것 들 생각 말고 요 과자 선물쎄트로 혀라. 보기 좋고. 속 실허고. 가뿐헝께 이보담 더 존 것이 읎다.”
갈포댁은 여러 가지 과자가 든 종이상자를 딸 앞에 내놓았다.
“그래. 중병환자면 밥맛도 없을 텐데. 오래 두고 먹기도 좋겠다.”
나복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럼. 좀 보기 좋게 싸줘.”
나윤자는 오빠에게 말하며 손지갑을 꺼냈다.
“왜. 돈 낼라고? 관둬. 딴 사람도 아니고 전묘숙이 그 사람한테 가는 건데. 우리한테 고맙게 해줬으니 이런 때 한번 갚아야지.”
나복남이 포장지를 꺼내며 웃었다.
“그려. 오빠 말대로 혀라. 장자가 특별허니 맘쓰는 것잉께로.”
갈포댁이 냉큼 말을 받았다.
“이럴라고 온 것이 아닌데......”
나윤자가 멋쩍은 얼굴로 오빠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괜찮아. 그나저나 그 사람도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병이 든 건가. 무슨 병인진 모르지만 중병이라니 큰일이다.”
나복남은 오른손이 불편한데도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해나가며 말했다. 긴 세월에 걸친 숙달로 오른손은 왼손을 보조해가며 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뻐스 올르고 내릴 때 조심허고. 오늘이사 워쩔 수 읎다만 더 나댕길 생각허지 말고. 막달잉께 그저 조심허고 또 조심혀야 써.”
갈포댁은 상점 밖까지 따라 나오며 딸에게 일렀다.
“알았어요. 그만 들어가세요.”
“그려. 핑허니 가.”
갈포댁은 말에 맞추어 빠른 손짓을 했다. 나윤자는 얼른 돌아섰다. 눈물이 솟구치려 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만 대하면 눈물이 나려고 했다. 시집을 가고 나서 생긴 증상이었다. 어머니....... 뜻 모르게 서럽고 눈물 나는 대상이었다. 홀로 외롭게 늙어가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갈포댁은 무겁고 불편한 걸음걸이로 멀어지고 있는 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삼키고 또 삼키는 눈물이 목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불쌍허고 짠헌 것........ 복쪼가리도 잔생이 읎고 징허고 징허게 고생만 허고....... 다 에미 애비 잘못 타고난 것이 죄제. 부잣집에 태였드람사 그 인물에 머시가 모지랜 것이 있었을 것이여. 그나저나 아그나 지대로 잘 낳아야 헐 것인디. 묘숙이만 고상혀서 중병 들었간디. 저것도 겉보기로 표 안 나게 골병 들었응께 그 숭헌 일 한 분도 아니고 세 분썩 당헌 것이제. 삼신할메요. 아무 탈 읎이 아그 잘 낳게 굽어살펴 주십소사. 굽어살펴 주십소사. 굽어 살펴 주십소사.’
갈포댁은 정화수 떠올린 마음으로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그녀는 딸 걱정으로 요새도 늘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딸은 큰아들이 구멍가게를 차리고 난 다음부터 제 월급을 모으고 모아 늦은 시집을 갔다. 그런데 1년이 넘어서야 임신을 한 딸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피를 쏟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몸 간수를 잘못한 실수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두 번째 임신에서도 유산을 했고. 세 번째 임신도 유산이었다. 그제서야 몸이 부실한 것을 알고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는 표 나게 아픈 데는 없는데 몸이 너무 허약하다고 했다. 다시 한약방을 찾아갔다. 어떻게 살았길래 젊은 사람 몸이 맥이 잡히지 않을 지경으로 이 모양이냐며. 몸이 이리 냉하고 종잇장 같으니 유산을 안 할 수 있느냐며 한의사는 한참이나 혀를 찼다. 기를 돋우고 몸을 덥게 하는 보약부터 먹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보약 값이 너무 비쌌다. 몸이 부실해 연달아 유산을 시킨 것도 면목이 없는 일인데 그 비싼 약값을 사위보고 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염색공장에 다니는 사위의 월급은 저희들 살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며느리 모르게 큰아들에게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큰돈이라서 그랬겠지만. 큰아들은 덜 좋은 기색 끝에 보름을 끌어 돈을 내놓았다. 제 마누라 모르게 돈을 마련하느라고 그런 눈치였는데. 그게 그렇게 역정 나고 서운할 수가 없었다. 딸이 집안을 위해 고생한 것에 비하면 며느리는 호강만 하고 살아온 셈이었다. 그런데 왜 큰아들은 제 여동생을 위해 쓰는 돈을 당당하게 내놓지 못하고 마누라 눈치를 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딸은 보약을 먹은 다음 다시 임신을 했다. 조마조마한 가운데 유산을 면했지만 그러나 불안을 떼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딸은 두 번이나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게 몸이 아팠다. 심한 어지럼증도 몸이 붓는 것도 허약한 몸에 애를 가진 때문이라고 했다. 딸을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사위에게 면목 없고. 큰아들에게 옹색스러웠고. 딸에게는 한없이 죄스러웠다.
나윤자는 몇 번씩 다리쉼을 해 가빠지는 숨을 고르며 산동네 비탈을 올라갔다. 전묘숙이 이 산동네의 무허가 판잣집을 장만한 것은 재작년이었다. 그때 그녀는 춤을 출 듯이 좋아했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집 없는 서러움을 면하게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집은 전묘숙의 힘으로 장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전묘숙의 남편은 연탄공장에 다녔다. 그 벌이로는 가난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전묘숙은 시집을 가서도 미싱사 생활을 끝내지 않았다. 은행의 여 행원들을 비롯해서 모든 직장의 여직원들은 시집을 가는 것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듯이 미싱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보세가공이 번창하면서 결혼한 미싱사들도 전보다 월급이 한 급 낮은 하청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전묘숙은 어떤 하청공장으로 들어가 계속 재봉틀을 돌려댔다. 남편의 벌이로는 먹고 살고. 자기가 버는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으고. 그렇게 몇 년 동안 억척스레 일을 해서 무허가 판잣집이나마 장만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으랴. 전묘숙네 판자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나윤자는 좁은 마당으로 들어서며 인기척을 냈다.
“언니. 언니.”
쪽마루 아래에는 여자 신발이 놓였는데 방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언니. 언니. 자요?”
나윤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방문을 질벅거렸다.
“누. 누구세요?”
방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 나예요. 윤자.”
나윤자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어머. 윤자가 왔구나.”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키는 전묘숙을 보는 순간 나윤자는 깜짝 놀랐다. 삐쩍 마른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한 여자. 그건 딴사람처럼 변해버린 전묘숙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그 얼굴. 대여섯 달 동안에 그렇게 변해버린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나윤자는 전묘숙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몸도 무거운데........ 그래도 윤자가 찾아왔구나. 고마워.”
전묘숙이 웃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녀의 눈 가장자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언니. 어디가 아픈 거예요?”
“나....... 오래 못 살아.”
“네에?”
나윤자는 소스라쳤다.
“암이래....... 폐암.”
전묘숙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나. 언니. 어쩜 좋아요.”
나윤자의 목소리에 울음이 젖어 있었다.
“참 기막혀. 살 만 하니까.......”
전묘숙의 병색 짙은 얼굴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좀 안 된대요?”
안타깝게 말하는 나윤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넘쳐났다.
“어쩔 수 없대. 너무 늦어서. 윤자 애기 돌은 못 보게 생겼어. 앞으로 길어야 반년이래니까.”
“언니. 언니. 그건 말도 안 돼요.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살았는데 한 때를 못 보고.......”
둘이는 함께 울고 있었다.
“그래. 고생 많이 하고 살았지. 결국 그 고생이 날 잡아먹은 거야. 그 지독한 먼지 구덩이가.......”
“언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왜 하필 언니가.......”
“어쩔 수 없지.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어떻게 하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을 낳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것들을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애.”
전묘숙은 울음을 추스르며 어깨를 떨었다.
“언니. 어떡해요.”
“나. 윤자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나 떠나고 난 다음에 우리 두 애들 좀 가끔 찾아봐 줘. 새엄마 밑에서 눈칫밥 먹고 살아야 할 텐데. 윤자가 가끔 찾아보면 애들도 의지가 되고. 새엄마도 함부로 못할 것 아니겠어? 그래 줄 수 있지?”
“어언니.......”
나윤자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내가 친정어머니도 없고 여동생도 없는 형편에 윤자한테 이 부탁을 하고 나니 그래도 마음이 놓이네. 그만 울어. 괜히 뱃속 애기한테 해로워. 그나마 윤자가 애 낳는 것은 보고 떠나게 돼서 다행이야. 윤자는 나처럼 되지 말고 한세상 보고 살아야지.”
전묘숙은 다시 나윤자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나윤자도 한 손으로 전묘숙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서로 겹쳐져 있는 그녀들의 손은 보통 여자들의 손이 아니었다. 오랜 미싱사의 생활로 이상하게 휘어져 돌아가는 듯한 손가락 마디에는 군살이 박혀 있었다.
“애 낳기 전에는 더 오지 말어. 힘들어 뵈는데. 애 낳으면 바로 연락 주고. 내가 꼭 가서 축하해 주고 싶으니까.”
대문까지 따라온 전묘숙이 한없이 쓸쓸하고 슬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언니......”
나윤자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전묘숙을 바라보기만 했다. 흔히 하는 ‘몸조리 잘 하세요’나 ‘힘내세요.’하는 말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 조심해서 어서 가.”
“언니이.......”
나윤자는 비탈길을 내려가며 새로운 눈물로 가슴이 젖고 있었다. 전묘숙은 겨우 서른여섯밖에 안 된 나이였다.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하다니.......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래도 금녀는 참 잘됐어. 남편이 사우디에 가서 벌어 보낸 돈 야무지게 잘 모아서 17평짜리 아파트를 샀지 뭐야. 시집갈 때는 운전수라고 마음에 안 들어 하더니 팔자가 폈지. 더 미싱에 안 매달려도 되고. 우리들 중에서 젤 잘된 거지.”
언젠가 전묘숙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강금녀라고 괜찮을 것인가? 불현듯 스친 생각에 나윤자는 깜짝 놀랐다. 그 생각에 겹치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나는 괜찮을까.......?’
이 생각과 함께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이 일어났다. 나윤자는 허둥거리며 어느 집 담을 붙들었다. 곧 쓰러질 것처럼 어지럼증이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떨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고.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한바탕 휘돌아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앞에 빨강. 노랑. 파랑. 색색가지의 별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놀라고 울어서 이리 심한 모양이구나.......’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이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현기증은 배가 불러 오를수록 자주 일어나고. 심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도 미싱사 생활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그때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우리 봉제공장 출신들은 온갖 병으로 골병이 들대로 다 들어 시집가봤자 3년 써먹기 어렵대.”
여공들이 모여앉아 농담처럼 하고는 했던 말이었다. 그때 웃고 말았던 그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쳤다.
‘아니야. 아니야. 설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을라구. 난 보약도 지어 먹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몇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섬Wlt 놀랐다.
피!
그녀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아래가 축축했던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나윤자는 샛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오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살필 겨를도 없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축축히 젖은 팬티 밑을 훔쳐 손을 꺼냈다.
“휴우......”
어깨가 쳐져 내리도록 안도의 숨을 토해내며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는 손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아까 심하게 몰아친 어지럼증을 참아내느라고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왈칵 끼쳐오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얼굴을 감쌌다.
보름쯤 지난 늦은 밤이었다. 행인도 드물고 상점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
“장모님. 장모님. 문 좀 열어요. 큰일 났어요.”
어떤 남자가 이미 문을 닫은 복남식품점의 함석문짝을 마구 두들기며 외쳐댔다.
“자네가 워쩐 일이여? 무신 일이여?”
쪽문이 왈칵 열리며 갈포댁의 다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모님. 크. 큰일 났어요. 집사람이 배가 아파서 정신이 왔다 갔다 해요.”
“고것이 무신소리여. 몸 풀라면 안직 보름도 더 남았는디. 언제보톰 그려?”
“모르겠어요. 야근하고 돌아오니 아파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어요.”
“글먼 시방 집에 있어?”
“예에”
“아이고메. 답답헌 사람아. 급헌 사람 병원으로 옮기고 왔어야제. 가세. 싸게 가세.”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나윤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윤자야. 윤자야. 정신 놓덜 말어. 이 응등물고 정신 채래야 써.”
갈포댁은 딸을 감싸 안고 애가 탔다.
“이거 임신부도 태아도 위험합니다.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의사의 말이었다.
“야야. 얼렁 살려만 주시씨요.”
갈포댁은 떨리는 두 손을 의사 앞에 모았다. 나윤자는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수술동의서에 손도장을 눌렀다.
‘산신령님. 터줏대감님. 삼신할메요. 우리 윤자. 불쌍헌 우리 윤자. 굽어살펴 주십소사. 삭신 녹아내리게 고상만 허고 산 불쌍헌 우리 윤자 굽어살펴 주십소사. 그 불쌍헌 것이 한 시상 보고 살게 굽어살펴 주십소사.’
복도에 놓인 긴 나무의자 끝에 쪼그리고 앉은 갈포댁은 온 마음을 쏟아 빌고 있었다. 두 시간이 넘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
“애는 무사한데 산모가.......
의사는 굳어진 얼굴을 돌렸다.
“머. 머시라고라?”
갈포댁이 비틀비틀하다가 푹 쓰러졌다.
“장모님. 장모님!”
사위가 허둥지둥 갈포댁을 끌어안았다. 갈포댁은 한사코 멀어져가는 딸의 모습을 보며 가물가물 정신을 잃고 있었다.
50. 보이지 않는 손들
이경열은 호텔로 들어서며 주위를 살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아는 얼굴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커피숍으로 갔다. 누구를 찾는척하며 그는 커피숍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 그리고 화장실로 걸어가며 다시 주위로 빠른 눈길을 돌렸다. 변기 앞에 섰지만 소변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요의는 느껴지는데 오줌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증상. 그건 그를 만날 때면 으레 그랬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변기 앞에서 물러서며 시계를 보았다. 아직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는 세면대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 거침없는 물줄기에 두 손을 적시며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지? 어떤 특별한 일인가? 굳이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게. 세상은 계속 뒤숭숭하고. 무슨 색다른 일인 것은 분명해. 그나저나 대학생들의 유신반대 데모는 왜 이렇게 수그러들 줄을 모르고 극성맞지. 계속 잡혀 들어가는데도 그놈의 기세가 꺾이지 않으니 그 용기들 참 대단해. 그런데 왜 대통령에 대한 나쁜 소문은 계속 퍼지고 있지? 그게 음해를 하기 위해 어떤 조직이 고의적으로 퍼뜨리는 유언비언가. 아니면 소문대로 사실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부인이 죽고 없어서 통제가 안 되는 것인가? 기자인 나도 사실 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 참. 그렇지만 그런 나쁜 소문들은 유신 반대 데모와 겹쳐져 치명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야당 총재가 들고 나온 소리는 또 뭔가. 김일성하고 면담할 용의가 있다니. 외신기자클럽에서 그렇게 떠들어댔으니 세상이 더욱 시끌시끌해질 수밖에. 그게 비록 정치적 제스처라고 하더라도 무책임하게 그따위 소리해 대면 반공주의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것 아닌가.’
그는 손을 다 씻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고개를 들다가 큰 거울에 담긴 자신의 얼굴과 마주쳤다. 이만하면 미남이야. 하며 씩 웃었다. 거울속의 얼굴도 씩 웃었다. 웃는 그 얼굴이 더욱 미남으로 보였다. 이만한 인물이면 부장 아니라 편집국장은 못해? 어디 인물만 근사한가? 실력은 또 어떻고?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을 해 먹어도 모자랄 게 없지. 그때 그의 뇌리에 퍼뜩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윤 기자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서리치며 얼굴을 훔쳤다. 그 일 이후로 윤 기자가 걸핏하면 떠오르고는 했다. 그를 의식에서 지우려고. 깨끗하게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 일로 그가 신문사에서 쫓겨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남과 북을 동급으로 취급해 싸잡아 범죄시하는 그의 언사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능력을 존중하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획일화하는 사회주의보다 우월한 것은 더 말할 것 없이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그런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런데 그는 반공주의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을 가지고 기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어차피 당하게 되어 있었다. 이경열은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했다.
‘신경 쓰지 마. 다 잊어버려. 어차피 인생은 한판 살다 가는 거야. 그리고 인생은 언제나 현실이고. 적자생존이니까. 내 능력껏 내 인생을 빛나게 살다 가야지 왜 아버지 때문에 억울하고 분하고 서럽게 살아야 하는가.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인생을 선택했고. 나는 나의 인생을 선택했다. 아버지가 선택한 사회주의 때문에 내가 불행해지고 비참해져야 할 아무런 이유도 까닭도 없다. 그래서 난 자본주의를 선택한 거다. 인생은 연습도 재공연도 할 수 없는 단 1회뿐인 연극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인생을 내가 바라는 대로 복되고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다. 너. 회의하지 마라. 주저하지도 마라. 어차피 인생은 대결이고, 대결은 힘 있는 자가 이기게 되어있고. 이기는 자만이 옳다. 아버지를 잊어라. 아니. 아버지를 거부하라. 오로지 현실이 있을 뿐이다.’
이경열은 스스로를 최면하는 주문을 새로운 기분으로 뇌었다. 당연한 순서처럼 또 하나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유일민이었다. 함께 잡혀가 고생을 한 때문인지 그의 기억도 의식 깊이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같은 나이 또래였고.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때 우연히 길에서 만난 뒤로 전혀 더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게 벌써 15년이 다 되어 가는가? 더 만날 필요도 없고. 만나서 반가울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잊혀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의 의식이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인가. 잊고 싶은 기억들을 자기 마음대로 지울 수 없는 그것. 좋은 기억 보다는 나쁜 기억들을 훨씬 더 많이 각인시키고 있는 그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이경열은 그런 생각에서 깨어나며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 3분전이었다. 그는 서둘러 화장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우측에 있었다. 그것을 타기 전에 다시 주위를 살폈다. 이경열은 12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34호실을 찾아가 초인종 단추를 눌렀다. 띵똥띵똥 하는 요란스런 쇳소리가 아니라. 딩딩 하는 부드러운 악기음이 연약하고 멀리 들렸다.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발달하면서 초인종소리도 다양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어서 와. 역시 시간 지키는 게 칼이군.”
이경열을 맞이한 것은 지난날 신문사를 출입했던 김이었다.
“인사 드려 나와함께 일하는 분.”
김이 이경열에게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경열이라고 합니다.”
이경열은 소파에 앉은 사람에게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시오. 나 민이라고 하오.”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일어나며 악수를 청했다.
그들 셋은 원탁에 둘러앉았다.
“자아. 커피 마시면서 얘기 시작하자구. 방금 시킨 거니까 따끈해.”
김이 이경열 앞으로 커피 잔 하나를 밀어놓았다.
“에에. 이 기자한테 한 가지 특별히 협조를 부탁할 게 있어서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요.”
민이라는 남자는 커피에 설탕을 타며 말을 꺼냈다.
“에에. 그게 뭔고 하면 말이오. 기자의 신분을 이용하면 별로 힘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오.”
민은 성질 급하게 보이는 생김새와는 다르게 느긋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뽑아 불까지 붙였다.
“그 일이 다른 게 아니라 여기 있는 자들의 거처를 신속하게 알아내는 거요. 기자로서 가족들에게 접근해서 말이오.”
민이 담배연기를 씹듯이 말했고.
“거 있잖아. 비밀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시도하란 말이지. 기자한테는 ‘취재원보호’라는 게 있으니까 그걸 내세워 절대 비밀을 보장하겠다고 안심시키면서 말야.”
김이 말을 거들었다.
“그렇소. 그 방법을 쓰면 우리 일을 돕는 효과가 클 거요.”
민이 종이 한 장을 이경열 앞으로 밀어놓았다. 대여섯 명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슬쩍 보고 이경열은 커피 잔을 들었다. 이건 어떤 대학의 데모 주동세력을 알아내는 것보다 고약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뿜은 다음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떤 사건에 관계된 것인지 알아야 일을 시도하지 않겠습니까.”
“아. 좋소. 말하려던 참이었소.”
민은 이경열의 말을 협조의사로 받아들이는 듯 반색을 하고는.
“이게 바로 그 골치 아픈 도산 배후조종자들이오. 이놈들은 쥐새끼들처럼 잽싸게 몸을 피해 벌써 몇 개월 동안이나 지하에 잠적해 있는데. 그 수법이 꼭 빨갱이오. 이 새끼들 검거가 시급한데 우리 수사로는 한계가 있소.”
그의 어조나 인상에서는 냉기가 끼치고 있었다.
“이 차장. 그 자리 이제 그만 벗어날 때도 됐잖아? 이번 일만 잘 처리해 봐. 그 다음은 내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도산을 도산시키는 건 기업들만을 위해서가 아니잖아? 대국적으로 보면 국가 경제를 위해서고. 그 과정에서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잘돼야 신문사 광고도 빵빵하게 잘 들어올 것 아니겠어. 이 점 사장님께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니까 이 차장의 공이 십분 잘 반영 된다 그런 말이야.”
김이 이경열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걸 100프로 성공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이경열은 커피 잔을 들며 민에게 눈길을 보냈다.
“물론이요. 절반만 넘으면 대 성과요.”
“예. 그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경열이 커피 잔을 놓고 종이를 집어 들며 결연한 투로 말했다.
“아. 화끈해서 좋소. 우리도 화끈하게 하겠소.”
민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경열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이게 그 집들의 약도고. 직코스로 접촉해야 될 사람들의 명단이야.”
김이 007가방에서 묶음종이를 꺼내 이경열에게 넘겼다.
“미안하지만 기왕 수고하는 것 속전속결로 좀 해주시오. 일이 총 정리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오.”
민이 담배를 권하며 말했다.
“예. 그쪽일은 언제나 그렇잖아요.”
이경열은 담배를 뽑으며 씩 웃었다.
“하. 이거 참. 잘 이해해 줘서 고맙소. 이 차장은 역시 애국자요.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 차장 절반만 돼도 얼마나 좋겠소. 아니 그건 욕심이고 반에 반만 돼도 더 안 바래요. 그런데 어찌된 놈으게 삐딱한 생각을 하는 놈들을 보면 전부가 배운 놈들이고. 그치들이 무식한 것들 살살 꼬셔서 못된 물을 들이고 있단 말이오. 나라가 조용하게 잘돼 나가려면 그 삐딱한 놈들의 뿌리를 도려내야 하는데. 그것 참....... 어쨌든 잘해 봅시다.”
이경열은 호텔에 들어갈 때처럼 신경 쓰며 호텔을 나섰다. 며칠이 지나 이상재는 유일표의 아내 서경혜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저어....... 이따가 좀 뵈었으면 하는데요.”
몹시 조심스러워 하는 서경혜의 어조에서 이상재는 직감적으로 유일표를 떠올렸다.
“알았습니다. 제가 다시 전화 드리지요.‘
“네. 알았습니다.”
이상재의 말뜻을 알아차린 기색으로 서경혜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상재는 바로 사무실을 나와 공중전화를 찾아갔다. 서경혜네 출판사는 어떤지 모르지만. 자기네 사무실 전화는 오래 전부터 도청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네 뵙고 말씀드려야 될 것 같아요.”
서경혜의 목소리에는 아까보다 더 불안기가 서려 있었다.
“예. 마침 인쇄소에 갈 참이었으니까 그쪽으로 들르지요.”
“아니에요. 제가 인쇄소로 가겠어요. 여기는.......”
“예. 알겠습니다. 곧 출발합니다.”
일표가 위험하게 되었나? 혹시....... ‘잡힌 것일까?’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버렸는데 또 다른 의식은 한발 늦게 그 생각을 막으려고 하고 있었다. 이상재는 다급하게 사무실로 들어가 교정지를 챙겨가지고 인쇄소로 갔다. 인쇄소에는 서경혜가 먼저 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되고 불안해 보였다.
“일표한테 무슨 일 있어요?”
다방 구석자리에 앉으며 이상재는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그이는 무사한데요. 그이에 관한 일이에요. 혹시 ㅈ일보 이경열 기자라고 아세요?”
“예. 직접 알지는 못하고 무슨 일로 이름은 알고 있어요. 근데 그 사람이 왜요?”
“어제 전화가 왔었어요. 그이하고 극비리에 인터뷰를 하고 싶다구요. 오늘 만나 자세한 얘길 하겠다는 거였어요.”
“극비리에 인터뷰?”
이상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생각 깊어지는 얼굴로 담배를 빼 물었다. 서경혜는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약간 수그린 그를 주시하고만 있었다.
“그거........ 수상해요.”
한참 만에 이상재가 말했다.
“그렇지요?”
서경혜가 자기 생각도 그렇다는 듯 반응했다.
“그게 말이지요. 의심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첫째는. 그자가 아무리 기자라고 하지만 어떻게 일표가 피신중인걸 알았냐 그겁니다. 공개 수배로 전단을 내붙인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기자로서 알려고 들면 알 수도 있어요. 수사기관에 접촉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게 그자가 수사기관과 접촉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왜 그자가 하필 도산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며. 시도하기 어려운 줄 뻔히 알면서 극비 인터뷰를 하려고 하느냐는 점입니다. 신문은. 아니 다시 말해 모든 신문의 사주들은 기업들의 광고로 먹고 살고 치부하는 신문기업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피신중인 도산 관계자들이 단 한마디도 기업인들을 좋게 말할 리 없는 것은 뻔하고. 기업인들을 비판하고 매도하는 도산 관계자들의 발언이 단 한마디도 신문에 실릴 수 없는 것도 뻔한데. 헛수고에 불과한 뻔한 그 일을 왜 하려고 나서는지 의심 안 할 수가 없지요. 셋째는. 왜 하필 일표냐 그겁니다. 다 아시는 대로 일표는 가정사정이 남달라서 그 관계자들 중에서도 특히 수사기관에서 주목하고 노리고 있을 것은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지금 도산에 빨간 물을 칠하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요. 이 정도면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네. 복잡하고 어지럽던 머리가 이제 정리가 됐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요? 안 만나겠다고 딱 잘라 거절을 해 버릴까요?”
“글쎄요....... 그게 작전상의 문젠데....... ”
이상재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무작정 안 만난다고 하면 괜히 일표의 거처를 알고 있는 것으로 의심을 사고. 그게 괜한 탈을 불러 엉뚱한 고생을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쪽에서 그쪽을 의심해서 안 만나려고 한다는 눈치를 보여서는 더욱 곤란한 문제고요. 그쪽이 경계해야 할 대상인 것을 알았으니까. 일단 만나세요. 만나서 일표와 전혀 연락이 안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세요. 전혀 불안해 하지 말고요. 그 사람은 폭행을 가할 수 있는 수사관이 아니라. 기자일 뿐이니까요.” 그는 서경혜를 위로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네. 말씀대로 하겠어요. 근데. 기자들이 수사기관하고도 무슨 관계를 갖나요?”
서경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글쎄요. 가끔 그런 의심이 가는 친구들이 있긴 해요. 특종을 쓸 욕심 때문인지. 출세욕 때문인지. 결국 그게 그거겠지만 수사기관 정보를 남 먼저 빼서 기사를 쓰는 일이 있어요. 그래 봤자 저희들 발목에 스스로 족쇄 채우는 짓들이지요.”
이상재는 쓰디쓰게 웃었다.
“세상 참 너무 무서워요. 기자들은 그래도 양심이 있고 정의의 편인 줄 알았는데......”
서경혜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성직에 너무 기대를 걸듯 기자들한테도 너무 후한 점수를 주신 거지요. 성직자들도 모순투성이의 인간일 뿐이듯 기자들도 그저 그런 인간들일 뿐이거든요.”
“그렇지만 이 기자님이나 원 기자님 같은 분들도 계시잖아요.”
“아닙니다. 우린 이미 세상을 모르고 현실을 모르는 다혈질이고 사회 부적응자들이고 돈키호테라고 낙인찍혀 버렸습니다.”
“아니에요. 그건 다수의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이 자기네 비겁을 은폐하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퍼뜨리는 말이에요?”
서경혜의 말은 매서웠다.
“예. 그레셤의 법칙은 경제학에서만 통용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사회는 끊임없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 왔어요. 일표도 지금 그렇게 당하고 있는 거구요.”
“사는 게 뭔지 나이가 들수록 모르겠어요.”
서경혜가 손가방을 챙기며 시계를 보았다.
“예. 빨리 들어가 보세요. 긴장할 것 없이 일 잘 처리하시구요.”
이상재는 몸을 일으켰다.
배상집은 얼굴을 훔치며 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여전히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서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고 이렇게 지독한 어둠에 갇혀보기는 처음이었다. 지하 1천 미터의 탄광 속에서도 이런 새까만 먹통 어둠을 겪은 적이 없었다. 배상집은 안타깝게 왼쪽 팔목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나 손목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정작 보고 싶은 시침과 분침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계에서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서독에서 시계를 사고 지금까지 초침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방은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잡음 하나 없이 조용하기도 했다.
배상집은 여기가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방에 갇힌 지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꼬박 하루가 지난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공포는 극에 달해 있고. 시계는 보이지 않고. 전혀 시간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어떤 수사기관에 잡혀왔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 수사기관이 어떤 수사기관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붙들려오게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까지 연구실에 있다가 학교를 나서는데 두 남자가 불쑥 앞을 막았다.
“배 교수님. 잠깐 가실까요?”
그들은 양쪽에서 팔짱을 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 왜 이래요. 당신들 누구요?”
“다 아실 텐데요. 조용히 가는 게 좋아요.”
그들은 우악스러운 힘으로 끌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정지프가 옆에 와서 섰다. 그들의 힘에 떠밀려 지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프에 앉혀지는 것과 동시에 눈이 가려졌다. 그리고 이방에 떠밀려 들어왔으니 전부가 알 수 없는 것뿐이었다. 배상집은 또 섬찟 놀랐다. 그 소리가 또 들리는 것 같았다. 아주 멀리서 울리는 것 같은 긴 비명소리. 그 소리는 감감하게 멀고 가늘어 들리는 듯하다가는 사라져버리고. 또 한참이 지나서 들리는 것 같아 귀를 세우면 더 들리지 않고는 했다. 내가 잘못 듣고 있는 것인가? 이게 공포감 때문에 생기는 환청인가? 그때마다 공포감이 자꾸 심해지면서 배상집은 이런 생각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런데 이 먹통방에서 아주 역한 화학약품 냄새가 풍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처음에 이 방으로 떠밀려들었을 때 그 냄새는 왈칵 끼쳐왔었다. 그 독한 냄새는 코가 맵고 목이 칼칼해질 지경이었다.
배상집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무리 더듬어보고 되짚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실력있는 교수. 능력 있는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학교생활을 했을 뿐이다. 이런 데 잡혀 와야 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었다. 교수들이 흔히 하는 정치이야기도 철저하게 피해왔었다. 정치이야기를 잘못했다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이미 한국 정치에 환멸을 느껴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유신이라는 것이 야기 하고 있는 정치 상황뿐이 아니라. 남. 북 기관원들이 밀회하는 정치의 마성을 서독에서 목격한 다음부터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불신은 씻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순간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배상집은 그 빛이 반가움과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불빛이 그렇게 반가운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공포스러운 것도 처음이었다.
“이봐 배상집. 편히 잤어?”
굵은 목소리와 함께 방 안이 확 밝아졌다. 배상집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문을 열었을 때 들어온 복도의 불빛과는 달리 불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이봐. 빨리 일어나 똑바로 서!”
굵은 목소리가 갑자기 소리쳤다. 배상집은 벌떡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런데 목소리 굵은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강렬한 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배상집은 그 남자가 불빛 반대쪽의 어둠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봐. 차렷 자세를 또 다른 말로 뭐라고 하지?”
“옛. 부동자셉니다.”
배상집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건 저 옛날 훈련병 시절에 외쳤던 목소리였다.
“좋아. 지금부터 부동자세로 취조에 임한다. 열중쉬어. 차렷! 열중쉬어. 차렷!”
배상집은 구령에 따라 자동인형처럼 착착 행동했다.
“너 여기 왜 잡혀왔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암. 모르겠지. 교수라는 놈들은 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니까. 너. 네가 쓴 글들은 다 기억하겠지?”
“예. 거의 다 기억합니다.”
배상집의 의식은 순식간에 자신이 쓴 글들을 훑고 있었다. 그 어떤 글에도 조사를 받아야 될 만한 하자는 없었다. 어둠 속에 갇혀서 이미 점검한 것이었다.
“그래. 머리 좋은 박사시니까 당연히 다 기억하겠지. 그럼. 네가 쓴 글 중에서 빨갱이 놈들 돕는 글도 있지?”
“예에? 그. 그런 것 없습니다. 저, 절대로 그, 그런 것 없습니다.”
배상집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이 새끼 이거 어디서 오리발 내밀고 이래? 교수님이라고 점잖게 대해 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완전 누드가 돼서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정신 차리겠어?”
“저, 정말입니다. 저. 절대로 그, 그런 글 안 썼습니다.”
배상집은 자신의 인생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눈으로 들어오는 것은 강렬한 불빛뿐 그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말이 많아. 너 얼마 전에 ㅇㅇ일보에 쓴 글 있잖아. 그따위 글을 쓴 의도가 뭐야! 저의가 뭐냐구!”
“예. 그, 그건 아무 의도가 없습니다. 신문사의 청탁에 따라 서독의 사회복지제도를 있는 그대로 썼을 뿐입니다.”
“뭐. 아무 의도가 없어? 네놈이 그따위 글을 써 대서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선동하려는 저의를 누가 모를 줄 알아!”
어둠 속에서 터지는 고함과 함께 쾅 울리는 소리에 배상집은 질겁을 했다. 어둠 속의 남자는 몽둥이로 철 책상을 내려쳤던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저, 절대로. 절대로 그런 뜻이 없었습니다.”
“이새끼. 개소리 치지 말어. 귀신은 속여도 우리 눈은 못 속여. 지금 노동자들의 가려운 데를 살살 긁어 선동해 대며 큰 공장마다 노조를 만들어 나라를 망치려고 드는 세력들이 있어. 그 대표적인 게 도시산업선교회 놈들인데, 이 나라 망치려고 흔들어대는 것 제일 좋아하는 게 누구야. 김일성 그 인간이지. 그리고 자본을 댄 기업주 무시하고 노조 만들어 즈네들이 주인 행세하겠다고 날뛰는 노동자들의 생각은 꼭 빨갱이식이고. 그 노동자들을 뒷 조정 하고 있는 도산 놈들은 더 볼 것 없이 빨갱이 집단이야. 이런 상황에서 네놈은 그따위 글을 써서 부채질을 해댄 거야. 그러니까 넌 도산놈들이나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용공 빨갱이라 그거야. 알아들어!”
배상집은 또 질겁을 했다. 교묘하게 얽혀든 빨갱이 누명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어둠 속의 남자는 또 철 책상을 내려쳤다.
“아. 아닙니다. 저는. 저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선봉자입니다. 다른 글들을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배상집은 울먹이듯 하며 두 손을 모았다.
“차려야. 차렷!”
배상집은 똑바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배상집. 뒤로 돌앗!”
배상집은 구령대로 뒤로 돌았다. 불빛이 환한 속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배상집은 흠칫 놀랐다. 방금 들어선 그 남자의 한쪽 손에는 축 늘어진 작은 개 한 마리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큰 통이 들려 있었다. 그 남자는 방구석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개를 내던졌다. 그 구석에는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수채가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죽은 개는 그 수채 가운데 널브러져 있었다. 그 남자는 들고 있던 통의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통에 든 액체를 개 위에 붓기 시작했다.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액체는 개의 사체에 닿자마자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하고 역한 화학약품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액체를 다 쏟고는 밖으로 나갔다. 액체가 맹렬한 기세로 부글부글 끓는 속에서 개의 형체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액체는 죽은 개를 빠른 속도로 녹이고 있었다. 개의 형체가 완전히 해체되어 버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상집은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배상집. 열중쉬어. 차렷! 뒤로 돌아!”
배상집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똑똑히 봤지? 저건 바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럼 티끌만큼도 흔적이 안 남지. 황소도 저것보다 열 배만 부으면 깨끗하게 사라져. 너 여기 잡혀온 것 아무도 모르지?”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나직하면서 느릿했다.
“.......”
“왜 대답이 없어!”
“예에....... 자, 자, 잘못했습니다. 저, 저 정말 잘못했습니다.”
더듬거림이 한층 심해진 목소리는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뭘 잘못했지?”
“그, 그 , 그런 글 쓴 것 자, 잘못했습니다.”
“그럼. 빨갱이라는 걸 자인한다 그런 말인가?”
“아, 아닙니다. 저, 저는. 저는 빨갱이는 아닙니다. 다, 다시는 그런 글 안 쓰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빨갱이가 무슨 표내고 다니는 줄 아나? 빨갱이들은 전혀 빨갱이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고 있으니까 골치 아픈 거야. 바로 너처럼 말이야.”
“아, 아닙니다. 저는, 저는 절대로 빨갱이가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믿어주십시오. 저는 서독에 광부로 가서 고생하며 공부를 한 몸입니다. 저는 박사 학위를 따려고 사력을 다했는데. 용공을 해서 그 노력을 헛되이 할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의 대학교수직에 최고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직위를 망칠 게 뻔한 용공을 왜 하겠습니까. 이런 점을 헤아려 저의 진심을 믿어주십시오.”
“그따위 번지르르한 소리 백 번 해도 소용없어. 빨갱이들일수록 말을 매끈하게 발라맞춘다는 것 몰라? 넌 어차피 교수직은 끝장났어.”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다, 다시는 그런 글 안 쓰겠습니다.”
배상집은 울음 범벅인 목소리로 두 손을 맞비벼댔다.
“이 새끼. 차려야. 차렷!”
어둠 속의 남자가 꽥 소리쳤다. 배상집은 나무토막처럼 빳빳해졌다.
“너같이 겉 다르고 속 다른 놈들 때문에 이 나라가 안 돼. 네놈이 쓴 그따위 글은 노동자들만 간뗑이 붓게 버려놓은 게 아니야. 대학생 놈들까지 선동해서 생각을 삐딱하게 만들고 있어. 대학생 놈들이 왜 끝없이 데모를 하는지 알아? 다 너 같은 종자들이 암암리에 부채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너 같은 악질분자들은 남김없이 쓰레기 청소를 해버려야 돼.”
“아, 아닙니다. 저는. 저는 아닙니다. 저, 저는 결백합니다. 겨, 결백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배상집은 목소리만 울음 범벅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백해? 살려줘? 흥. 그래. 살려준다고 치자. 너의 결백을 뭘 로 입증할 거야? 어디. 살려줄 테니까 살아날 수 있게 결백을 입증해 봐.”
“......”
배상집은 머리가 텅 빈 것을 느꼈다. 어떻게 결백을 입증해야 할 것인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몸이 달고 애가 탔지만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왜 말이 없나? 그 침묵이 바로 빨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거지? 넌 빨갱이야. 더 말할 것 없어.”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너, 너무 갑작스러워 생각이 안 떠오른 겁니다.”
“생각이 안 떠올라? 그래. 너무 긴장해서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아주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주지. 네가 글을 쓴 그 신문에 전번 것하고는 정반대의 글을 써. 우리나라의 실정상 노조란 너무 성급한 것이다 하고. 그리고 중단 없는 경제발전을 위해서 유신은 꼭 필요한 것이다 하는 내용으로.”
배상집은 현기증과 함께 무릎이 휘청 꺾이는 것을 느꼈다.
“왜 대답이 없나!”
고함과 함께 몽둥이가 철 책상을 내려쳤다.
“예. 저어. 저어. 다른. 다른 무슨 일을....... 다른 무슨 일을.......”
배상집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뭐? 그것 말고 다른 무슨 일을 시키면 하겠다 그거야?”
“예에......”
“흥. 그렇게 표 나는 일은 곤란하시다? 그래. 대학생 놈들이 여용교수 물러가라고 데모도 하는 판이니 젊은 교수 체면 구기고 싶지 않다 그거지? 그럼. 표 나지 않는 일은 할 수 있다 그거야?”
“예에.......”
“틀림없어!”
“예에.......”
“좀 생각해 볼 테니까 기다려.”
어둠 속의 남자는 밖으로 나갔다. 배상집은 뼈가 없는 사람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아내와 아이의 얼굴이 밀려들었다. 서독에서 고생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 위에 대학생활이 겹쳐졌다. 그 생각들이 마구 뒤엉키며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면서도 어금니를 맞물며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는. 이 끔찍한 소굴에서 무사히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에만 정신을 모으려고 애썼다.
“이리 나와.”
한 남자가 문을 열며 말했다. 배상집은 튕기듯 일어나 그 사람을 따라 나갔다. 긴 복도를 한참이나 걸었다. 어디선가 숨 자지러지는 비명들이 울리고 있었다. 배상집은 몸이 조여 들며 자신이 먹통방에 앉아 들었던 감감한 비명소리가 환청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서가던 남자가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 앉어.”
배상집은 책상 앞에 놓인 철 의자에 앉았다.
“배고플 테니까 먼저 이것부터 먹고. 그런 다음에 여기다가 자서전을 써.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를 세세하게 써. 거짓말 한마디도 없이. 글 많이 써봤으니까 빨리 쓸수록 좋아.”
그 남자는 곰탕 그릇을 밀어놓고 돌아섰다. 배상집은 고개를 수그린 채 그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생각과는 달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나가자 배상집은 비로소 시계를 보았다. 10시였다. 10시.......? 배상집은 시계가 멈추었나 생각했다. 다시 보니 초침이 돌고 있었다. 어젯밤 10시쯤 잡혀왔으니까 꼬박 12시간이 지난 셈이었다. 아까 먹통방에서 들었던 초침 돌아가는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배상집은 다시 아내와 아이를 생각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전혀 밥맛이 없었지만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데 버티어야 했다. 그리고 먹지 않으며 반항한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배상집은 곰탕을 절반쯤 먹고 나서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까의 방처럼 살벌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화학약품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 독한 냄새를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흔적 없이 녹아 없어지던 개가 떠올랐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책상으로 다가앉았다. 볼펜 아래 놓인 백지는 두툼한 것이 수십 장은 되어 보였다. 그는 종이를 끌어당겼다.
배상집은 세 시간 정도 걸려서 자서전이라는 것을 끝냈다. 그것을 쓰다보니 서독에서 정보원의 협조 요구를 거부했던 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사실을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몇 번 망설이다가 빼버렸다. 비협조로 트집을 잡혔으면 잡혔지 유리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배상집은 두 번째의 곰탕을 먹고 나서 또 자서전을 써야 했다.
“다시 써.”
배상집은 세 번째의 곰탕을 먹고 나서 또다시 볼펜을 잡았다.
“배상집. 아까 말한 것 틀림없지?”
세 번째의 자서전을 챙기며 그 남자가 말했다.
“예에......”
“좋아. 그럼 여기다가 서약서를 써. 극비리에 우리에게 협조하겠다고.”
“저어....... 무슨 일을......”
“이건 쥐도 새도 모르고. 우리하고 당신하고만 아는 거야. 당신 아내도 알면 안 돼. 이 일에 협조를 잘 하면 현재의 당신 신분 보장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의 신분상승에도 적극 도움을 줄 거야. 당신 학교의 학생 조직과 그 동태를 주도면밀하게 파악하는 거야.”
“.......”
“왜 대답이 없나? 못하겠다 그거야?”
“아. 아닙니다.”
“아무 걱정할 것 없어. 이건 무덤까지 가는 비밀이니까. 그리고 당신은 비밀 유지를 위해서 또. 학생들에게 신뢰를 받고. 학생조직에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적당한 선에서 비판적 자세를 취하는 게 좋아. 그런 구체적인 전략 전술은 차차 가르쳐 줄 테니까 신경 쓸 거 없고. 알겠어?”
“예에.......”
“좋아. 여기다 서약서 써.”
배상집은 검정 지프를 타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지프는 집이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추었다. 배상집이 내리자 지프는 곧 떠났다. 그는 전신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비실비실 전봇대에 몸을 기댔다.
“이봐. 한 잔 더 하자구.”
“미쳤어. 벌써 11시 반이 넘었어.”
술 취한 두 남자가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51. 홀로 푸르른 나무
한인곤은 책을 덮으며 저자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임종국. 그리고 책 제목을 한 자. 한 자 다시금 읽었다.『친. 일. 문. 학. 론.』 그는 끄음. 된 숨을 내쉬며 책을 쓰다듬었다. 무어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독후감이 가슴에 꽉 차있었다. 그건 재미난 소설이나 좋은 영화를 보고나서 느끼는 감동이 아니었다. 그런 느낌과는 꽤나 다른 어떤 느낌이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것 같기도 했고. 허전했던 마음에 무언가가 뿌듯하고 그득하게 담긴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그런 일을 이렇게 책으로 쓰는 수도 있구나. 이게 얼마나 좋은 방법인가. 내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허송세월만 한 것에 비해 이건 얼마나 효과가 나는 좋은 방법인가. 한인곤은 이런 깨달음 속에서 책을 다시 쓰다듬었다.
자신이 억지 예편을 당하고 정계로 진출하며 품었던 꿈은 작지 않았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 목표 아래 철도의 두 레일처럼 바탕을 이루었던 것이 이승만 독재의 타도였고. 친일파 세력의 척결이었다. 그 두 가지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라가 잘될 도리가 없었다. 그 일을 이루어내는 데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바칠 각오를 했었다. 그런데 이승만 독재는 야당 국회의원들이 힘쓴 것 아무것도 없이 학생과 시민들의 무서운 분노로 무너지고 말았다. 4.19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건 성난 대중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한 계기였고. 정치인들이 자기들 유리할 대로 입에 올리며 이용해 먹기만 하고 막상 막연한 대상이었던 국민이란 존재를 명확하게 확인한 계기였다. 혁명으로 쟁취한 정권을 영광스럽게 물려받았으니 이제야말로 나라를 잘되게 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얼마나 꿈에 부풀었던가. 그 제대로 된 정치 속에 친일파 세력의 척결이 포함된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없었고. 사회정의가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꿈이 얼마나 순진무구한 것이었는지는 곧 확인되었다. 야당에서 힘 하나 안 들이고 여당이 된 민주당은 그날부터 피 흘린 혁명의 숭고함을 배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혁명의 나라를 강건하게 세우는 올바른 정치를 펼치는 데 총력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서로 권력을 많이 갖겠다는 탐욕을 앞세우며 파벌끼리 진흙탕 개싸움으로 나날을 지새웠다. 같은 여당의 입장에서 그 싸움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참 어처구니없고도 기가 막혔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양족 파벌의 수뇌부 대부분이 친일파라는 사실이었다. 그 뒤늦은 사실 확인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친일파 세력들은 여당과 고급공무원. 경찰과 군대의 상급 지휘관에 몰려있고 야당은 깨끗한 줄 알았었다. 수많은 국회의원들 중에서 한 사람. 그것도 초선인 신참의 힘이 얼마나 하잘것없고 미약한 것인가를 날이 바뀔 때마다 구체적으로 실감하며 의기소침해져가고 있는 판에 당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과거가 그렇다는 것은 이만저만 큰 실망이 아니었다. 자신은 어쩌면 그때 정치판을 떠났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때 이미 자신의 꿈은 그 어느 것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반의반도 안 남게 까먹어가면서 결국은 이렇게 초라한 꼴이 되기 전에 과감하게 정치판을 등졌어야 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라는 것. 그 권력의 자리를 버릴 수 없는 욕심 때문에 자신도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보신하는 그렇고 그런 정치인으로 변해가다 보니 결국은 유권자들에게 버림받고 만 것이다. 흔한 말로 ‘정치무상’이었다. 낙선이 되고나니 그날로 찾아갈 데라고는 없었고. 더구나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은 시체에서는 이도 부산하게 떠나가듯 낙선과 함께 선거참모들마저 발 빠르게 멀어져버렸다. 그러니 지난날 굽실거렸던 관공서 사람들이 고개를 외트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별수 없이 아버지가 남겨놓은 사업을 돌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나마 착실하게 끌어가지 않으면 머지않아 생계문제에 봉착할 판이었다.
스스로 외면하지 못했으니 유권자들에게 버림받은 것을 계기로 더는 정치에 마음을 두지말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나이도 나이였고, 정치에 환멸도 깊었다. 아내도 그 뜻에 동의했다. 사업에 마음을 쏟으며 나날을 바쁘게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분주한 사업도 아니어서 날마다 시간이 남았다. 그 무료한 시간을 메울 방법이 없어서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서점에 발길을 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니 잡생각이 없어지고 시간이 잘 갔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얻는 즐거움도 생겼다. 가능하면 역사에 관계되는 책들을 골라 샀다. 어떤 때는 여종업원이 요즘의 베스트셀러라며 연애소설을 권하기도 했다. 그럼. 그런 책도 사다가 읽었다.
“어머. 당신 이런 책도 다 읽어요?”
아내가 놀라서 물었다.
“왜? 나도 멋진 연애 좀 해 보려고.”
이런 헤식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종업원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의원님. 이 책 어떠세요. 의원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챙겨놨는데요.”
전 국회의원에 대한 예우로 아가씨는 깍듯하게 ‘의원님’이라고 호칭하며 친근하게 웃었다.
“이게 뭐지? 『친. 일. 문. 학. 론』.......?”
제목을 한 자. 한 자, 띄어 읽었던 것은 언뜻 그 뜻이 잡히지 않은 까닭이었다. 입으로 읽기 전에 눈으로 읽은 제목에서 받은 첫 느낌은 ‘아니, 문학으로 한. 일 친선을 하자는 거야?’ 하는 거부감 이었다.
“네. 이게 친일을 한 문인들을 비판하는 책이거든요. 친일한 문인들이 누구누구고, 어떤 글들을 썼는지 다 나와 있어요.”
“아! 그래? 이거 참 중요한 책이네. 새로 나온 건가?”
“아니에요. 나온 지 오래돼서 안 보이다가 이번에 재판이 나왔어요.”
“그래. 이런 책은 사 봐야지. 요새 세상에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다 있네. 뭐 하시는 분인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책에는 시인이고 문학평론가라고 씌어 있어요.”
“오라. 그래서 문인들에 대해서 썼군. 그래. 빨리 싸줘.”
그래서 이틀에 걸쳐 책을 다 읽었다. 그 내용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광수나 최남선이 글로 친일을 한 줄 알았을 뿐이지 그토록 많은 문인들이 줄줄이 친일을 한 줄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알고 보니 이광수나 최남선은 워낙 거물이라서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뿐이었다. 남녀 가리지 않고 그 많은 문인들이 천황만세. 일본군 필승을 외치는 글을 써 댔으면 그럼 친일을 안 한 문인이 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한인곤은 담배를 깊이 빨며 그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 땅에 배치되고, 중경 임시정부를 찾아 부대를 탈출하고. 새로운 광복군으로 총을 잡았던 그 옛날의 기억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본국의 지원이라고는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은 오로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영국군이나 중국군과 합작을 하기도 하고, 단독으로 작전을 펼치기도 하면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던 바로 그때에 수많은 문인들은 천황폐하를 칭송하고 일본의 침략을 성전으로 미화하는 글들을 다투어 써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분야의 모든 친일파들이 아무런 처단도 당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듯이 그 사람들도 또 어엿한 문인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법학자인줄만 알았던 유진오가 소설을 쓴 문인이라는 것이 금시초문이었고, 그런 사람이 일류로 꼽히는 대학의 총장을 지냈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민주당 파벌싸움에서 핵을 이루었던 주요한이 박순천과 함께 친일 경력을 가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시인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 또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인곤은 임종국이라는 세 글자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이 사람은 엄청난 일을 한 것이었다. 그가 한 일은 법적 처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법적 처단이 이미 틀려버린 마당에 그들의 잘못만이라도 이렇게 명백하게 밝혀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제2의 법적처단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런 기록을 남겨놓지 않으면 친일파들이 자행한 매국행위와 민족반역행위는 영원히 덮여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일제시대를 중심에서 몸소 겪었고, 그 누구보다도 친일파 척결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 책에서 접한 내용의 90퍼센트가 전에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하물며 세대가 바뀌면 어찌 될 것인가. 뒤따라오는 세대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것은 책밖에 없었다. 친일파에 대한 법적처단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런 책은 더욱 필요한 것이다.
자신은 친일파들에게 분노와 증오만 가졌을 뿐 국회의원으로 정치판에 몸담고 있는 동안 그들을 척결하는 일은 털끝만큼도 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평생에 걸쳐서 그들에게 당하기만 해왔다. 군대생활에서 진급이 더디며 한직으로만 밀려다닌 것이 그렇고. 계급정년이란 불명예로 예편당한 것이 그렇고. 친일파 못자리판이나 다름없는 여당의 정보정치에 걸려들어 꿋꿋하게 야당생활을 못하고 굴복한 것이 그렇고. 발악적 유신독재가 민심을 잃어가는 판에 야성 강한 지역에서 여당의 탈을 쓰고 나서서 결국 버림받은 것이 그랬다. 그동안 정치를 한다고 없애버린 아버지의 재산이 얼마인가. 그 돈으로 자신도 이런 책 만드는 일이나 했으면 얼마나 성과 있고 보람스러웠으랴.
한인곤은 불현듯 떠오른 이 생각에 어이없이 웃었다. 책은 아무니 쓰나. 하는 생각이 스스로를 희롱했기 때문이었다. 일기쓰기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참 엉뚱하고도 가당찮은 욕심이었다.
‘임종국.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책에 쓴 그 많은 문인들 중에 태반은 살아 있을 텐데. 그 사람들하고는 어떻게 지내려고 이런 일을 하고 나섰을까. 문인들의 사회라고 해서 다른 집단사회와 다를 것이 없을 텐데. 이래 가지고 그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한국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의 잘못만 얘기해도 원수지간이 되고 마는데 더구나 당사자들의 잘못을, 그것도 사소한 흉 거리가 아니라 매국과 민족반역죄에 해당하는 잘못을 샅샅이 들추어냈으니 그들이 얼마나 감정을 품고 원수 대하듯 할 것인가. 시인이고 문학평론가라면 사람들의 그런 마음이나 사회풍토를 모를 리 없는 일이었다. 이 사람은 용기와 배포가 남다른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따돌림 당하거나 무슨 피해를 입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각오를 한 것일까? 도대체 이 사람의 생업은 무엇일까? 시인이고 문학평론가라니까 글을 써서 먹고사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 그게 가능할까? 글만 써가지고는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이 일을 이것으로 끝내고 마는 것인가.......? 문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더 많은 친일파들이 드글드글하지 않은가. 사회적인 영향력에서 문인들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정치계. 법조계. 군부. 경찰. 공무원 집단. 그리고 경제계까지 친일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분야마다 이런 책을 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은 없는 것일까?’
한인곤은 이틀 동안 그런 여러 가지 궁금증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그래서 사흘째 되는 날 서점을 찾아갔다.
“이 봐 미스 정.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좀 수고해 주면 좋겠어.”
“네에. 무슨 일이신데요?”
“저. 『친일문학론』쓰신 임종국 선생님 말야. 그분 주소를 좀 알았으면 좋겠어.”
“아니. 뭐가 잘못된 게 있나요?”
“아니야. 그 반대야. 너무 훌륭한 일을 하셔서 한번 만나뵜으면 해서.”
“아. 그러세요? 그럼 금방 알아드릴게요. 그분도 좋아하시겠네요.”
“어떻게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네에. 책 내용을 트집 잡거나 시비 거는 것이면 곤란하지만. 책을 잘 썼다고 좋아하는 것이면 출판사에서 금방 가르쳐주거든요.”
“그런가. 그럼 바쁘겠지만 좀 부탁해.”
“네. 이따가 오후까지는 알아내 연락드릴게요.”
한인곤은 임종국 그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 궁금증들을 그냥 덮고 넘어가지 못하는 성미인데다가. 여유시간도 늘어지게 많았다. 오후에 미스 정의 전화를 받고 한인곤은 서점으로 갔다.
“전화는 없으신가 보지?”
“주소를 받아든 한인곤이 물었다.
“그럼요. 글 쓰시는 분들 가난하잖아요.”
미스 정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전화 사정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비싼 돈이니까.”
한인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갑자기 서울은 왜 가세요? 서울 쪽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하시구선.”
이튿날 아침 한인곤의 아내가 의아스럽게 물었다.
“물론 쳐다보기도 싫지. 서울 가도 국회의사당 쪽은 안 쳐다보지. 이 책 쓴 분 좀 만나보려고.”
한인곤은 봉투에서 책을 꺼내보였다.
“『친일문학론』? 이게 무슨 책이에요? 갑자기 친일문학 하려구요? 아니다! 당신. 이 저자한테 왜 이따위 책 썼느냐고 따지려는 거지요?”
그의 아내는 금세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니야. 그 반대야. 이 약아빠지고 눈치 빠른 세상에서 이런 책을 쓰셨으니 참으로 장하고 훌륭하십니다. 하고 인사하려고. 이 책은 친일 문학을 하라는 게 아니고 일제시대에 어느 문인들이 어떤 글을 써서 친일을 했는지 상세하게 밝혀 놓은 거야.”
“어머나. 그런 일 해가지고 어쩌려고.......”
그의 아내는 눈이 커지게 놀랐다.
“그러니까 내가 인사 가려는 거지.”
한인곤은 책을 봉투에 넣고 나섰다.
“당신도 참 어지간해요. 세월이 그리 지났는데도 친일이야 하면 정색을 하고 덤비니. 이젠 좀 잊을 만도 한데.”
“당신. 그런 소리 말어. 이 나라가 이 꼴로 엉망진창 되고, 질서도 양심도 없이 이따위로 변해가고 있는 근본 원인이 뭔지 알아?”
한인곤은 정말 정색을 하며 언성이 높아졌다.
“네. 네. 알았어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해방과 함께 일소시키지 못해서 그래요.”
그의 아내는 재빨리 말하며 두 선을 저어댔다. 그건 그녀의 말이 아니라 결혼한 이후로 되풀이해 온 한인곤의 말이었다.
“괜히 혀끝으로만 그러지 말고 마음 깊이. 진심으로 그걸 알아야 해.”
한인곤은 구두를 신으며 쏘아붙였다.
“네. 알았어요. 오래 걸려요?”
“누가 붙드는 놈이 있어야 오래 걸리지. 늦어도 내일은 내려와.”
“그럼 다녀오세요.”
그녀는 가슴이 찡해져 대문을 나서는 남편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붙드는 놈이 있어야 오래 걸리지’ 그 말이 너무 슬프고 서럽게 가슴 저렸다. 그 한마디는 남편을 더 쓸쓸하고 외롭게 보이게 했다. 국회의원을 하면서 남편은 남달리 궂은일도 많이 겪었지만. 그 자리를 잃고 나니 주변이 갑자기 적막강산이 되어버렸다. 남자에게 사회적 지위가 없어지는 것. 그것처럼 초라하고 참담한 일이 또 있을까. 사람이 갑자기 허깨비가 되어버리고. 허수아비가 되어버리는 것은 옆에서 보기도 괴로운 아픔이고 고통이었다. 그러고 보면 남재구는 때에 맞춰 재주를 아주 잘 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지 새삼스럽게 소름이 끼쳤다.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한인곤은 다시 책을 한 쪽. 한 쪽 넘겨갔다. 문인이란 사람들이 왜 그런 글들을 써댔을까. 공갈 협박을 이겨내지 못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출세를 위해서 그랬을까? 그런 글을 쓰고 무슨 혜택을 받은 것인가? 글은 거짓을 쓰는 게 아니라는데. 그럼 그들은 진정 천황을 떠받들며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기를 바라고. 믿은 것인가? 그럼 그들에겐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는 안 보인 것인가? 그 수가 적으니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고 하찮게 여기고 묵살해 버린 것인가? 문인이란 무엇인가? 옛날 말로 하면 선비 아니겠는가? 선비란 지조가 있어야 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 문인들이 그렇게도 많이 매국의 글을. 민족반역의 글을 써댈 수 있는가?
한인곤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을 붙들려고 했다. 언젠가 읽었던 글귀 하나가 스치기는 했는데. 그 뜻만 막연하게 느껴질 뿐 문장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가며. 그러므로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한인곤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싸잡으며 그 글귀를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생각날 듯. 생각날 듯하면서도 답답하기만 했다. 그는 책을 덮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건 아주 옛날 중국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었다. 그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글귀는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했다. 한 번 얼핏 읽고 지나간 것이 시험문제로 나와 떠오를 듯 말 듯 하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는 연달아 담배를 빨아댔다.
‘아아. 내 머리도 이젠 바삭바삭 되어버린 것인가. 기억력 하나는 자신하고 살았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무엇은 어떻고. 무엇은 어떻다 하는 식의 대구로 된 것이었는데....... ’
머리를 짜내다 못한 한인곤은 짜증을 부리며 담배를 껐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쳤다.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말로 지은 원한은 백 년을 가고. 글로 지은 원한은 만 년을 간다.”
바로 이것이었다. 한인곤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글로 지은 원한은 만 년을 간다.......”
한인곤은 기쁨에 넘쳐 이 대목을 소리 내어 뇌었다. 그건 글이 만 년을 가는 것이므로 함부로 잘못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문인들은 이런 경구를 몰랐던 것인가? 그런 것을 모르고 글을 썼다면 문인으로서 기본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렇게 매국적이고 민족반역적인 글을 썼다면 그건 이미 문인일 수가 없었다.
“승객여러분.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차례차례 내리시기 바랍니다.”
유니폼 말쑥하게 입은 여 차장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한인곤은 안전띠를 풀고 일어나며 시계를 보았다. 천안에서 서울까지 40분밖에 안 걸리는 것이 그때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택시를 탄 한인곤은 일단 신설동 로터리에서 내렸다.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무엇을 사야할까 궁리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러 상점들 중에서 식품저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가며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술이었다. 글 쓰는 사람들이 술 좋아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식품점에서 선물용으로 포장되어 있는 정종을 사들었다. 그런데 술만 달랑 사들고 간다는 것이 과히 탐탁하지 않았다. 뭔가 빈약해 보이고 무성의한 것 같았다. 많은 물건들로 가득 찬 식품점 안을 둘러보다가 한인곤의 눈길은 설탕에 머물렀다. 설탕은 언제부턴가 명절 때 선물로 대인기였다. 그것도 선물용으로 포장된 3킬로그램짜리로 샀다.
“이 주소가 어디쯤이죠?”
한인곤은 돈을 내고 나서 주소를 내보였다.
“가만있어라 보자. 여기가 주소가 복잡해서 원....... 예. 저기 저 길 건너로 가보세요.”
식품점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질했다. 한인곤은 책을 든 손에 정종을 들고. 다른 손에 설탕을 들고 길을 건너갔다. 그곳 어느 상점에서 다시 길을 물었다.
“글쎄요. 저어쪽 골목으로 가보세요.”
골목으로 접어들어 쌀가게에서 다시 주소를 댔다.
“이 골목이 아닌데요. 왼쪽으로 돌아 다음. 다음 골목으로 가보세요.”
그 골목까지 가서 또 번지수를 댔다.
“저어쪽으로 가서 찾아보세요.”
그저 막연하게 ‘저어쪽’이라는 말을 앞세워 한인곤은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발길을 옮겨가며 문패에 적힌 주소를 확인하고는 했다. 그러나 한 골목인데도 번지수가 들쭉날쭉이었고. 그나마 문패가 안 붙은 집이 더 많았다. 30분이 넘게 골목골목을 헤매다가 한인곤은 한숨을 토하며 정종과 설탕을 내려놓았다. 그 한숨은 복잡했다. 집 찾기를 쉽게 생각하고 먼저 물건부터 사든 것이 후회스러웠고. 주소를 그 모양으로 무질서하게 해놓고 있는 서울시 행정이 한심스러웠고. 국회의원을 해먹은 게 몇 년인데 그동안 그런 행정 난맥상에 대해 자신부터 무관심해 왔던 것이 더 한심스럽고 그랬다.
정종과 설탕을 30분 이상 들고 다니느라고 묵직해진 팔을 흔들며 한인곤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렇게 헤매 다니다가는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쉽게 찾을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파출소. 동회가 떠올랐다. 그리고 우체부가 떠오르고. 출판사가 생각났다. 우체부는 만나기 쉬운 일이 아니고. 출판사에 전화를 거는 건 번거로웠다. 파출소와 동회 중에서 아무래도 동회가 나을 것 같았다. 다시 큰길로 나와 동회를 찾기 시작했다. 동회를 찾아가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렸다.
“여기서 나가서 말이지요. 왼쪽으로 쭉 가다가 가게가 나오면 거기서 세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쭉 가다보면 쌀가게가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돌아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귀찮은 기색으로 주워섬기는 동 직원의 말을 한인곤은 점잖게 웃으며 제지했다.
“난. 지난번까지 국회의원을 지냈던 한인곤이라는 사람이오. 그렇게 해가지고는 찾아가기 어려우니까 좀 수고스럽더라도 약도를 그려주시오.”
한인곤은 바뀐 명함을 내밀었다. 흥. 국회의원하면서 몸에 밴 것은 명함 내미는 것뿐이군. 하는 생각을 얼핏 했다.
“아. 그러십니까. 존함은 알고 있습니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좀 앉으시지요.”
동 직원은 금방 친절해졌다.
“바쁘지 않으면 제가 모셔다 드려야 하는데 지금 워낙 바빠서요. 그 대신 곧장 찾아가실 수 있도록 약도를 자세히 그려드리겠습니다.”
“고맙소.”
한인곤은 의자에 앉으며 동 직원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러면서. 내가 현직이면 허겁지겁 앞장서겠지? 하는 생각으로 쓰게 웃었다. 그러나 갓끈 떨어진 위인인데도 이만큼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 고맙다 싶기도 했다. 동 직원의 설명까지 듣고 한인곤은 동회를 나섰다. 약도는 아주 자세해서 그 사람이 안내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골목골목을 돌아 마침내 ‘林鍾國’이란 문패 앞에 서게 되었다. 문패도 낡았고. 작은 집은 더 누추해 보였다. 잘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가난해 보였다.
“여보세요. 실례합니다. 임종국 선생님 계십니까?”
한인곤은 대문 앞으로 다가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누구세요?”
곧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임 선생님을 좀 뵈러 왔습니다.”
“예. 들어오세요.”
여자는 아무 경계하는 기색 없이 대문을 따주고는.
“여보. 손님 오셨어요.”
하며 돌아섰다. 한인곤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며 그 여자가 임 선생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여인의 옷차림은 너무 남루해 보였다.
“누구신데?”
그때 오래된 한옥의 아랫방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한인곤은 주춤했다. 그 첫 인상이 너무 특이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인곤이라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친일문학론』을 읽고 뵙고 싶은 마음에 사전 양해도 받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뵙게 되어 생광입니다.”
한인곤은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아이고. 제 책을 읽으셨다구요? 이거 반갑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임종국은 그 특유의 순박하고 꾸밈없는 웃음을 지으며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예. 초면에 실례하겠습니다.”
한인곤은 선물을 마루 끝에 놓고 책 봉투만 가지고 마루로 올라섰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방이나마나 너무 좁아서 원.”
임종국은 서재로 들어서며 방바닥에 널려있는 것들을 치우기에 바빴다. 한인곤은 서재로 들어서며 첫인상에서 받았던 느낌이 비로소 가시고 있었다. 한인곤이 첫인상에서 받은 느낌은 전혀 문인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임종국은 머리모양부터가 바짝 치켜 깍은 스포츠형이었다. 거기다가 기름한 얼굴의 생김생김은 선이 거칠고 주름살이 많아 천성적인 촌티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잘 먹지 못해 기름기라고는 없이 깡말라 있으니 그 얼굴은 천상 농사꾼처럼 보였다.
“방이 앉을 데도 마땅찮고 이렇습니다. 이해하시고 앉으십시오.”
임종국이 또 그 특유의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예. 좋습니다. 그럼 앉겠습니다.”
한인곤은 방안을 둘러보며 자리 잡았다. 네 평이 될까 말까 한 넓지 않은 방은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 벽의 책꽂이에서 넘쳐난 책들은 방바닥에까지 수북수북 쌓여 있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한인곤이라고 합니다.”
한인곤은 명함을 건네고는.
“제가 이렇게 찾아 뵙게 된 연유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임종국은 줄담배를 피우며 한인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그래서 여러 가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아아. 그러니까 한 선생님께서는 그 귀한 광복군이셨군요. 예. 잘 오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임종국은 이까지 드러내며 그 특유의 웃음을 더욱 환하게 피워냈다. 그의 얼굴에는 천성적인 웃음이 담겨 있었고. 말을 할 때면 으레껏 그 웃음이 피어나고는 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순박하다 못해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였다. 성품이 저렇게 착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강단 있는 일을 해냈을까. 아니. 성품이 착하고 진실하니까 아무런 눈치 같은 것 보지 않고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인가. 한인곤은 그 어린애 같은 순진무구한 웃음을 보며 갈피를 잡기 어려운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저어....... 제가 선생님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은....... 저는 문학이나 예술 쪽과는 거리가 너무 먼 무식이라 마땅히 표현을 못하겠습니다만. 뭐랄까.......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충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친일문학론』에서 다루고 있는 친일문인들 중에서 상당수가 현재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예. 상당수가 아니라 80퍼센트 이상이 살아 있고, 그 사람들이 현재 한국 문단을 쥐락펴락 하고 있는 그야말로 실세들입니다.”
“그럼 선생님은 그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고. 엄청난 피해를 입으셨을 텐데요?”
“예. 뭐 그 사람들의 힘이 미치는 잡지나 신문 같은 데는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게 된 것이 오래지요. 그리고 날 미친놈 취급해 버리고요. 그거 뭐 별거 아닙니다.”
이 말을 하면서도 임종국은 이를 드러내며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문인에게 글을 못 쓰게 해버리면 어쩝니까? 그건 문인의 생명을 끊는 것이고. 굶겨 죽이자는 고사작전 아닙니까? 실례지만. 선생님은 다른 무슨 직업이 있습니까?”
“직업이야 글 쓰는 것밖에 없지요. 그래도 세상은 넓어서 그 사람들 영향력이 못 미치는 잡지도 더러 있으니까 원고료 벌이를 하고. 그럴 수 없는 글은 바로 책으로 묶어내서 인세를 좀 받고 해서 굶어죽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어떤 잡지에 글을 쓰고 나면 그걸 뒤늦게 안 그 사람들이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대고, 압력을 가하고 야단이 나지요.”
임종국은 여전히 천진스럽게 웃고 있었다.
“아니. 그런 짓들까지 합니까? 뻔뻔스럽게.”
한인곤의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났다.
“그 사람들 단결력이 아주 대단합니다. 그 사람들이 문단의 실세이다 보니 그런 압력이 통하기도 하고요.”
“자꾸 그렇게 되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럼 책은 많이 팔립니까?”
“흐흐흐흐........”
임종국은 한인곤이 내놓은 책을 집어 들어 맨 뒷장을 펼치더니.
“이 책 초판이 나온 게 1966년입니다. 이 원고는 다른 잡지에 미리 발표할 수 없는 내용이라 원고료 수입 한 푼도 없이 바로 책으로 낸 것입니다. 그때 저는 출판사 사장한테 1만부는 후딱 팔릴 거라고 장담을 했었지요. 그런데 사장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2천부를 찍겠다는 겁니다. 그래 제가 우겨서 3천부를 찍었지요. 그런데 그 3천부가 팔리는 데 10년이 넘게 걸려 바로 이 재판이 나오게 된 겁니다.”
임종국은 웃으며 판권에 찍힌 ‘2판’이란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니. 13년 만에.......”
한인곤은 곧 밀려나오는 다음 말을 황급히 눌렀다.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리 관심이 없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친일파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이 터져나가려 했는데. 그 관심 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 책이 나온 줄도 모르고 세월을 보내다가 이제 와서 재판을 들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인세라는 건 얼마나 받게 되시는지요?”
한인곤은 면구스럽고 죄스러운 기분으로 이렇게 물었다.
“예. 통상 정가의 10퍼센트씩을 받습니다.”
3천부의 10퍼센트. 그리고 13년의 세월....... 그건 도저히 수입이라고 할 수 없는 빈약하고 빈약한 돈이었다. 한인곤은 임종국의 병약해 보이는 몸과. 이 집 전체를 덮고 이는 빈궁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선생님. 선생님의 책이 나온 다음에 혹시 태도가 달라진 문인은 없습니까?”
“혹시 반성하거나 회개한 문인이 없느냐 그런 말입니까?”
“예.”
“참 유감스럽지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인들이 공개적으로 반성하지 않고. 그때 어쩔 수 없었다 하는 식으로 변명하고 발뺌하기에 급급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그들의 제자라는 젊은 문인들이 나서서 그들을 변호하고 옹호해 대는 일입니다.”
“아니. 정의로워야 할 젊은 사람들이 그 무슨 한심한 작태들입니까?”
“그야 뭐 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잇속으로 서로가 다 얽혀있는 관계니까요. 아 참. 딱 한 사람이 반성을 했군요. 소설가 채만식이라고. 제 책 때문이 아니고 해방이 되자마자 그 사람은 민족 앞에 죄지은 붓을 더 놀려 글을 쓰지 않겠다고 절필 선언을 했습니다. 그 사람의 친일은 이광수에 비해 몇 백분의 1도 안 되는데. 친일의 글을 쓴 것은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파렴치하기 이를 데 없는 괴변을 늘어놓으며 끝끝내 반성을 하지 않았던 이광수 하고는 좋은 대조가 되지요. 다른 문인들이 전혀 반성을 하지 않고 온갖 비양심적이고 해괴망측한 변명들을 해대며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데는 이광수가 반성하지 않은 것에 절대적인 책임이 있지요. 왜냐하면 이광수는 친일의 거두일 뿐만 아니라 문단의 최고 원로였으니까요. 이광수가 민족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더라면 그 뒤에 선후배들이 어찌 감히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문인들은 그런 글을 쓰라고 심하게 협박당하거나 신변의 위험을 느끼거나 했습니까?”
“예.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궁금해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으니 어처구니없고 서글픕니다. 거물들 몇몇은 협박과 회유를 동시에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인들. 특히 이름이 별로 없었던 신진들의 경우는 자기네 출세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자발적으로.......”
한인곤은 또 혀끝까지 나온 말을 얼른 되삼켰다. 군대생활에서 입에 붙은 ‘그런 개새끼들!’ 하는 욕이 곧 쏟아지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글만 써가지고 어떻게 사십니까. 자식들도 한둘이 아닐 텐데. 어떻게 안정된 직장. 그러니까 대학 같은 데 자리를 잡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흐흐흐흐.......”
임종국은 소리를 내서 웃을 때는 하하하나 허허허가 아니라 수줍은 듯 흐흐흐 하고는.
“아직 모르고 계시는 모양인데. 한다하는 대학 총장들이나 설립자들 태반이 혁혁한 친일파들입니다. 연대 백낙준. 이대 김활란. 고대 유진오. 중앙대 임영신. 서울여대 고황경. 상명여대 배상명. 성신여대 이숙종 등등. 이들 중에 지금은 총장을 물러난 사람들도 있고. 제가 책을 낼 당시에는 대학이 아닌 중. 고등학교만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찌 됐거나 문단에 국한 되었다 하더라도 친일파들의 뒤를 캐는 저 같은 인간을 그들이 좋아할 까닭이 없지요. 그래서 그쪽으로는 애초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교육계도 그렇습니까? 저는 교육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한인곤은 어깨가 처져 내리도록 한숨을 토해냈다.
“뭐. 구분하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 나라 모든 분야는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는 답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양쪽 끝인 두만강변에서 제주도까지. 일제시대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조선 총독부터 숯장사까지 다 합쳐서 8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빌붙었던 친일파들은 150만 명을 넘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고 고스란히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 있는 곳이 이 대한민국입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친일문학론』으로 문인들만 다루고 끝내실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임종국이 또 이를 드러내며 눈이 감길 듯이 웃었다.
“힘이 드시겠지만 기왕 시작하신 일이니 각 분야마다 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생각으로 계속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 걸친 친일파들의 친일 행적을 담은『친일인명사전』을 내는 것을 제 필생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바로 그 부탁을 드리려고 찾아뵌 것입니다.”
한인곤은 숨김없이 감격스러워하며.
“선생님. 어서 나가십시다. 이런 좋은 날 술 한 잔 안 할 수 있습니까. 그 사전이 나오면 평생 저의 가슴에 쌓이고 쌓인 분함이 깨끗하게 씻겨질 것입니다.”
그는 스스럼없이 임종국의 팔을 잡아끌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점심때가 다 된 것을 느끼며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대낮부터 술을.......”
임종국이 어물어물 일어나며 웃었다.
“대낮이면 어떻습니까. 술은 이럴 때 마시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 한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기도 쉽지 않지요.”
임종국이 윗옷을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약소하지만. 빈손은 인사가 아니라서 사온 겁니다.”
한인곤은 구두를 신으며 부인에게 말했다.
“아니. 그냥 오시잖고. 그럼 이걸 마십시다.”
임종국의 말이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집에서 마시는 술하고 술집에서 마시는 술하고 술맛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건 저를 생각하며 두고두고 드십시오.”
한인곤은 임종국을 끌고 대문을 나섰다. 로터리로 나온 한인곤은 괜찮아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술이 목적이 아니고 듬직한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인곤은 불고기에다가 소주를 시켰다.
“불고기는 무슨. 갈비탕이면 족하지요.”
임종국이 놀란 얼굴로 손을 저었다.
“선생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그만한 여유는 가지고 삽니다.”
“이거 그래도....... 초면에.......”
임종국은 쑥스럽고 계면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흡사 천진한 소년 같았다. 고기가 구워지고. 술잔이 오갔다.
“선생님. 아까 말씀하신 그 사전 만드는 일을 하시려면 일도 힘이 들겠지만. 그동안 생활도 문제 아니겠습니까?”
한인곤은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저 집이 그런대로 값이 좀 나가니까 저걸 처분해서 내년쯤에나 경기도 어느 산골로 옮겨볼까 합니다. 싼 땅을 좀 넓게 골라 움막 하나 짓고. 나머지 땅에다가는 별로 힘 안 드는 과일농사나 지어 그걸 팔아 생활비를 하면 그 일을 하는데 과히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럼 제가 사는 천안으로 오십시오. 천안에서는 호두가 잘되고. 호두농사는 나무를 심기만 하면 손댈 것 하나도 없이 가을에 따기만 하면 됩니다. 천안 명물 호두과자 아시죠? 천안이 딱 안성맞춤입니다.”
한인곤은 직감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토로하며. 그런 생각을 재빨리 해낸 스스로를 신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한 선생님이 천안 사세요?”
“예. 아까 그 명함에........”
“아이고 이런....... 성함만 봤지 아래 주소는 안 보고....... 제가 이 모양입니다.”
임종국은 또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누구나 그러기 예사죠. 선생님. 천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싼 땅을 물색해 볼 수 있습니다. 교통도 편리해 서울까지 40분밖에 안 걸립니다.”
“예. 말씀 듣고 보니 그거 아주 그럴듯합니다. 그쪽으로 적극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종국은 마음이 끌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어. 한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게 남다르신데. 그 역정을 글로 써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건 바로 광복군 출신이 친일파 세력들에게 평생에 걸쳐서 어떻게 당해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록입니다. 그런 살아있는 기록이 책으로 나와야만 친일파들의 문제가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게 됩니다.”
그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아이고. 저 같은 게 무슨 글을 쓸 줄 알아야 말이지요.”
그 뜻밖의 말에 한인곤은 당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적인 글이 아니고 자기가 직접 겪은 수기 형식의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어떤 월간지에서 모집하는 수기에 배움이 많지 않은 공원이나 차장 아가씨의 글이 당선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글들이 좀 서툴고 어색하긴 해도 소설보다 더 감동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독특한 체험을 가식 없이 진실하게 썼기 때문입니다. 글의 힘은 진실에 있습니다. 한 선생님은 충분히 쓰실 수 있습니다.”
“글쎄요. 어떻게 쓴다 해도 아는 출판사도 없고.......”
“그건 걱정 마십시오. 그런 진실한 글을 찾고 있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저한테 친일 야화 같은 것을 내자는 출판사가 있는데. 거길 소개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면 며칠간 생각하신 다음에 연락주세요. 그런 기록은 자식들한테 남기는데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식들에게....... 한인곤은 그 대목에 마음이 확 끌리고 있었다.
“저어....... 실례지만 술은 이제 그만 했으면 합니다. 제가 천식기가 좀 있어서요. 젊어서는 두주불사였는데. 나이 들면서 몸이 뜻 같지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임종국이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아 예. 건강 생각하셔야죠. 낮술이니 저도 이만하면 됐습니다. 고기 많이 드십시오.”
궁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았으니 건강이 상하지 않을 리 있나 생각하며 한인곤은 불고기를 임종국 앞으로 옮겨놓았다.
“빈 말 아니니까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예.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한인곤은 식당 앞에서 임종국과 헤어졌다. 오후 2시인데 갈 곳이 없었다. 한인곤은 동대문 쪽으로 걸으며 정동진과 여동생을 생각했다. 그러나 정동진에게는 초라해진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난데없이 건축회사를 차리고 나선 여동생 내외는 비위가 상해 보기 싫었다. 한인곤은 바로 고속버스를 탔다. 천안에 도착할 때까지 글 쓰는 일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쓰고 싶다는 욕구가 한참 앞질러가고 있었다. 한인곤은 사나흘을 꼬박 그 문제만 생각했다. 쓸까. 말까를 생각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고는 했다. 여유시간 많은데 딱 좋은 일 같았고. 자신의 돈을 들여서라도 책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남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인곤은 닷새째 되는 날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탔다. 임종국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쇠고기 세 근을 사들었다.
“쓰기로 마음먹었다구요? 참 잘하셨습니다. 이렇게 올라오신 김에 출판사에 인사가시지요. 저도 거기 볼일이 있으니 겸사겸사 잘됐습니다.”
한인곤은 얼떨결에 임족국을 따라 광화문으로 나갔다.
“이 출판사는 퇴직기자 두 사람이 하는 건데. 규모도 작고 돈벌이도 별로 못해도 의식이 뚜렷해서 아주 좋습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도 알아주고 하지요.”
임종국이 계단을 올라가며 설명했다. 출판사의 문은 약간 열려있었다. 임종국은 인기척을 내며 그 문을 열었다. 그런데. 쇼파 탁자에 신문을 펼쳐놓고 이상재는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선생님. 뭘 그리 열심히 보고 계십니까?”
“예에? 아. 임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인기척을 냈는데도 못 들으시고. 뭐 볼 만한 기사가 있나요?”
임종국은 신문을 흘끗 보고는.
“아. 남민전 사건 보고 계셨군요? 누구 아는 사람 끼었나요?”
하며 그 선한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워낙 또 거창한 사건이라서요.”
이상재는 속마음을 싹 감추었다.
“난 아침에 신문을 봤는데. 내가 아는 문인이 서넛이 끼어 있더라구요. 간첩 사건이라고 요란을 떨어놨는데. 뭐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반 정부하면 간첩이 되는 세상이니 원.”
임종국이 히물히물 웃었다.
“예. 어지러운 세상이지요.”
건성으로 대꾸하며 신문을 치우는 이상재는 의식에서 김진택을 털어내고 있었다. 출판사를 해보겠다고 찾아왔다가 술만 사고 더는 소식이 없어서 ‘싱거운 친구’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김진택은 남민전 사건의 핵심으로 신문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싱거운 친구’가 아니었다. 이제 알고 보니 그는 출판사를 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접촉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자신이 쏟아놓은 말들을 듣고 쓸모없다고 판단하고 손을 끊은 거였다.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약칭이었다. 왜 그 명칭의 시작이 ‘남조선’이어야 하는지. 이상재는 통혁당 사건 때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 선생님. 여기 좋은 분 한 분을 소개시킬 겸해서 나왔습니다.”
임종국이 한인곤을 소파로 끌었다.
“아 예. 어서 오십시오.”
이상재는 인사할 몸가짐을 갖추었다.
52. 동행에 심은 뜻
깨알만큼씩 한 자잘한 개미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무리를 이루며 뒤엉켜 있는 개미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많았다. 수백 마리를 훨씬 넘고 수천 마리를 헤아렸다. 그 개미들은 일 대 일로 맞물고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가는 다리로 서로 상대방을 밀고 당기고 했고, 어떤 것은 서로 맞물고 뒤잡이를 했고. 또 어떤 놈들은 서로 물려고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실랑이를 하고 있었고. 두 마리가 서로 맞물고 싸우는데 다른 한 마리가 한 쪽의 허리를 물며 협공을 했고. 어떤 놈은 옆으로 쓸어져 그 미세한 다리들을 떨며 죽어가고 있었고. 죽어가는 놈들을 물고 끌어가는 놈들이 있었고. 무엇을 지키는 것인지 싸우지는 않고 한 곳에 몰려 와글거리는 놈들이 있었고, 연락병인 것인지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오가는 놈들도 있었고. 상대방을 이기고 앞다리로 더듬이를 쓰다듬는 놈도 있었고. 싸우다가 뒤돌아서 도망치는 놈도 있었다.
“얘들도 피를 흘릴까요?”
거의 엎드린듯해서 개미들의 싸움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 승려가 뚜벅 말했다.
“그야 우리 눈에 안보여서 그렇지 피를 흘리겠지요. 살아있는 생명이니 피 가 없을 리 없으니.”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옆 승려의 대꾸였다.
“그런데....... 얘들 피는 무슨 색깔일까요?”
“허....... 별생각을 다 하시오. 그려.”
“제가 국민학교 때 이 개미들보다 수십 배 큰 검은 왕개미들을 잡아 싸움을 시키면서 다리를 하나씩 잘라나간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 문득 이 개미들도 피를 흘릴까 하고 생각했고. 피를 흘리면 그 피는 무슨 색깔일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생김대로 검은 색깔일까. 사람처럼 빨간 색깔일까? 그 의문이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거든요.”
“그걸 곤충학자는 아는지 모르겠소. 아마 곤충학자들도 모르기 쉽소. 그 사람들은 곤충의 종류만 모으기에 정신없지 그런 희한한 의문은 안 가질 테니까”
“그렇지요. 그런 의문을 갖는 게 이상하지요. 그런데....... 우리 눈에는 다 똑같아 뵈는데 이놈들이 저희들끼리는 적과 아군이 어떻게 구분이 되겠지요?”
“그렇겠지요. 우리 인간들이 패를 갈라 싸울 때나 마찬가지겠지요. 이 개미들이 우리보다 수천. 수만 분의 1로 작아서 우리가 구분을 못하는 건데 우리 인간들보다 수천, 수만 배 큰 어떤 존재들이 인간들이 이렇게 뒤엉켜 싸우는 전쟁터를 보면 마찬가지로 구분을 못하겠지요.”
“얘들은 왜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지 모르겠군요. 영토 싸움인지. 먹이 싸움인지. 아니면 존족 싸움인지. 가만히 보면 동족끼리도 싸우지 않는 것이 없어요.”
“아마 동종끼리 싸우기로는 인간 당할 게 없을 거요. 종족이 다르다고 싸우고. 색깔이 다르다고 싸우고. 나라가 다르다고 싸우고. 종교가 다르다고 싸우고. 이념이 다르다고 싸우고. 어찌 보면 인간의 역사라는 건 가장 잔인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싸워온 되풀이일 뿐이오. 다른 모든 동물들은 이 개미들처럼 그냥 몸으로만 싸우는데 인간이란 동물만 유일하게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니 갈수록 잔혹하게 살육을 해대는 것 아니오. 지금 미국과 쏘련을 위시해서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원자폭탄이 이 지구의 생명체를 완전히 말살시키고도 남을 양이라니. 인간의 미래가 어찌되겠소. 인간이 위대하다고? 가소로운 일이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장 문제는 문제지요.”
“그런 측면뿐만 아니라 소유욕에서도 사람이란 유일하게 두통거리요. 보시오. 이 세상 그 어떤 동물이 사람처럼 갖고 갖고 또 갖기를 탐하는지.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개. 돼지부터 시작해서 아무리 사납다고 하는 맹수까지 저희들 배를 채우면 더 이상 먹이를 탐하지 않아요. 이 개미들이나 다람쥐 같은 것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먹이를 저장하는 동물에 속하는 데. 그것들이 저장하는 먹이는 꼭 겨울을 날 만큼만 하지 절대로 남아 돌게 욕심 부리지 않아요.”
“예. 그렇더군요. 흔히 우리는 미련한 것을 돼지에 비유하고. 특히 미련스럽게 많이 먹는 사람을 돼지 취급하는데. 어떤 책을 보니까. 돼지가 실컷 먹고 난 상태에서 해부를 해보면 꼭 위의 70퍼센트밖에 안 차 있다는 겁니다. 100년을 산다는 학이나 다른 조류들도 그렇게 소식을 한다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가 돼지를 무조건 미련하게 간주하는 것은 돼지들에게 엄청난 실례를 범하는 거고. 정작 미련한 것은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미련한 표본이 저 로마제국의 귀족들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침략을 일삼아 약탈해온 재물로 호의호식 밖에 할 게 없는 귀족들은 날마다 먹고 마시고 여색을 즐기는 연회를 벌였습니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 더 먹을 수 없게 되면 그들은 하인에게 그릇을 대령시켜 먹은 것을 토해내고는 또 먹고 마시고 했습니다. 그 꼴들을 하다가 로마는 결국 망하고 말았어요.”
“그런 짓들을 한 게 어디 로마 귀족들뿐입니까. 이 땅의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것들도 그에 못지않은 탐욕과 방탕으로 결국 나라를 망쳐먹었고. 지금이라고 뭐 달라요? 유 형이 왜 이렇게 주유천하를 하고 있어요? 자본주의 사회의 신종 귀족인 사업가라는 자들이 저희들 배만 불리고 근로자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기 때문 아니요?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세상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해도 사람이라는 것. 그것 영원히 문젯거리고 두통거리요.”
승려 하나가 밀짚모자를 밀어 올리며 허리를 펴고 돌아앉았다.
“예. 핵심을 찌르셨어요. 어떤 사장은 열 평 넘는 화장실을. 욕조. 세면기. 변기는 말할 것 없고 타일까지 전부 최고급 이태리제로 꾸미고 삽니다. 그런데 글쎄. 그걸 1년에 한 번씩 다 갈아 치운다는 겁니다. 지루하다고요. 헌데. 그 전자회사 근로자들의 월급은 동일업종의 다른 회사들보다 제일 적습니다. 물론 노조 결성이란 절대 용납이 안 되고요. 도대체 인간이라는 게 뭔지.......”
밀짚모자를 벗으며 돌아앉는 승려는 다름 아닌 유일표였다. 옷만이 아니라 그의 머리도 박박 깎여 있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팔레비 왕보다는 낫소. 팔레비는 세면기고 변기고 다 순금이었다니까.”
“그랬으니 쫓겨나서 딴 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지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유일표는 한숨을 쉬며 담뱃갑을 꺼냈다.
“나도 한 대 주시오.”
승려가 손을 내밀었다.
“스님. 이러다가 담배 배우시겠어요. 괜히 파계승 취급당하시려고.”
“아이고. 난 처음부터 땡초였소. 그리고 부처님 계율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건 없소. 괜히 뒷사람들이 덧붙인 거지.”
“그야 당연하지요. 부처님은 2.500년 전에 사셨고. 담배야 콜롬브스라는 자가 아메리카 인디언들한테 배워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으니 고작 200년 남짓인걸요.”
“하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승려가 고개를 젖히며 웃어댔고.
“담배도 음식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다 이해하실 겁니다.”
담배를 내밀며 유일표도 마음 놓고 웃어댔다.
앞에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는 인적 없는 산골에 그들의 웃음소리만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기서 100리쯤이면 여동생이 있는 절이오.”
승려가 저 먼 어딘가로 망연한 시선을 보낸 채 어설프게 담배 연기를 불어냈다.
“거기 안 갈랍니다.”
유일표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작은 돌을 개울 멀리 던졌다.
“왜요. 여동생이 기다릴 텐데.”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거북하고. 머리 깎은 여동생 모습 보는 것도 슬프고....... 안 가는 게 더 낫지요.”
“그래도 유형 걱정하지 않겠소? 이러고 다니는 게 안전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고 하지만. 위험에 처해있는 핏줄의 걱정까지 끊을 수 있는 건 아니오.”
“아이고 스님. 괜히 눈물 나게 만들지 말아요. 그만 일어나세요. 어디 가서 곡차나 한잔하게.”
유일표는 불끈 일어섰다.
“유 형도 이러다가 땡초 되겠소. 불교 용어가 입에서 술술 나오니.”
그 승려도 끄응 힘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글쎄요. 스님이 새벽마다 반야심경을 염송하는 걸 들으면. 참 인생 뜬구름 같은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스님은 스님의 어느 때 모습이 가장 멋진지 모르시지요?”
유일표는 걸음을 떼어놓으며 승려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 같은 중놈한테 무슨 멋진 모습.......”
승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스님이 새벽어둠을 바라보며 목탁소리에 맞추어 반야심경을 염송할 때. 그 모습이 한없이 경건하기도 하고. 한없이 슬프기도 하고. 한없이 외롭기도 하고. 하여튼. 저게 운영(雲影)스님의 참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한없이 멋지게 보여요.”
“참 별소리 다 듣겠소. 그저 부처님 덕에 목숨 부지하고 사니까 밥값 하느라고 하루 한 번씩 하는 것뿐이오. 내까짓 게 그 깊은 말씀을 깨달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실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던데요?”
“그렇게 안 보이면.......?”
승려 운영은 눈동자를 돌려 유일표를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요. 뭐랄까....... 스님의 염송에는 무엇인가를 빌고 있는 간절함과 절실함 같은 게 있어요. 그게 부처님께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고. 최면하고. 그리고 체념케 하려는 것 같은 절실함이라고 할까. 세상을 향해서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세상에 대한 원망을 불태우며. 젊은 가슴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깊이깊이 새기고자 하는 간절함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운영스님의 그런 모습이 그저 경건한 것만이 아니라 슬프기도 하고 외롭게도 보이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보였다니 난 역시 땡초요. 어쩌면 유 형이 정확히 본 건지도 모르겠소. 나는 먹물 옷을 걸치고 있을 뿐이지 그야 말로 중도 속도 아니오. 아직도 가슴에 번뇌가 들끓고 있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몸만 세상을 등졌지 정작 마음은 세상을 등지지 못했으니 천상 땡초 면하기는 그른 것 같소. 은사 스님께서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운영이란 법명을 내리신 건데. 마음이라는 것이 어찌 생겨먹은 물건인지 뜬구름의 그림자처럼 되지를 않아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날마다 입으로만 외워대지 반석처럼 마음을 눌러 부동의 깨달음으로 서지 않으니. 평생 이리 방황하다 떠나는 게 아닌가 모르겠소.”
운영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길게 끌렸다. 깡마른 그는 키가 큰 편이었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얼굴에는 우수가 서려 있었다.
“운영. 그 법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허무하고 공허해요. 뜬 그름도 허망한데. 거기다가 그림자까지 덧붙였으니 텅텅 빈 허무 아닙니까. 생자필멸이고 만상허상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름까지 그렇게 지어버리면....... 그것 참.......”
“대학 철학과에서는 불교도 배워요?”
운영이 불쑥 물었다.
“예. 동양철학을 훑을 때 구렁이 담 넘듯 하고 지나가지요. 그런데. 무식하게 말하자면 불교가 심오한 철학의 세계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한 가지 큰 불만이 있어요.”
“......”
운영은. 그게 뭐냐는 눈길로 쳐다보며 발 옮김은 승려답게 빨랐다.
“너무나 허무를 절대시한 사상이거든요.”
동행해 온 이후에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유일표는 마침내 토해냈다.
“그게 왜 불만이오. 사실이 그런 걸.”
“예. 사실이 그렇더라도 인간과 인간사를 너무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허무를 강조하고, 또 너무 결과론적으로 만사를 정의하며 허무를 입증하다보니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무의 바다에 뒤덮여 인간의 현실이 너무 도외시되거나 묵살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모든 종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현실적 삶의 문제를 위한 창조물인데 불교는 지나치게 무상의 사상에 치우치다보니 현실과 멀어지고 있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 형 입에서 그런 말 나올 줄 알았소. 허나. 그게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문젠데. 나 같은 땡초하고는 백날 얘기해봤자 그게 그 타령이오.”
“알 것 다 아시면서 괜히 얘기 피하려고 하지마세요. 피우시겠어요?”
유일표는 담뱃갑을 내밀었다. 운영은 고개를 저었다.
“알 것 다 알다니.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시오. 난 내 한 몸 다스리지도 못하고 있는 위인이니까.”
“당연하지요. 그 나이에 내 한 몸 다스리게 되었다면 부처님 추월하게요?”
유일표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으하하하.......”
운영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단풍이 엷게 물들기 시작한 어느 나무에서 새가 놀란 듯 푸드득 날개를 털며 날아갔다.
“유 형이 은근히 농담을 잘한다니까요. 유 형과 동행하게 되면서 내가 몇 년 만에 크게 웃을 일이 자주 생겨요.”
“저한테 고마워하세요. 그게 득도의 제일 빠른 길이니까요.”
“하하하하.......”
운영이 다시 시원하게 웃어댔다.
“스님. 저기 저 주인 없는 감나무에 감이 익어가고 있는데요.”
유일표가 허물어진 집터 같은 데에 서 있는 감나무를 가리켰다.
“그거 출출한데 잘 됐소. 하나씩 따 먹읍시다.”
그들은 감나무 가까이 갔다. 폭삭 주저앉은 집의 잔해가 잡초 속에 묻혀 있었다.
“사람이 떠난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어디로 떠났을까요?”
유일표가 잡초를 헤치고 들어가며 말했다.
“보나마나 살기 어려운 판에 새 바람 타고 도시로 떠난 것 아니겠소. 어디로 가나 고해이긴 마찬가질 텐데.”
“그렇지요. 이런데서 땅만 파고 살던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봐야 최하층민일 뿐이지요. 이제 도시에는 최상층과 최하층이 천당과 지옥처럼 완전히 갈라져 있어요. 잘못된 자본주의가 만든 양지와 음지의 세상이지요.”
“그것 참 큰일이오.”
“이거 마침 단감인데요?”
“울안에 심는 거야 다 단감 아니오.”
“그런가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니 원.”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 도시에 오래 살아서 그런 거요. 자아. 하나씩 따먹읍시다.”
운영이 먼저 감 하나를 땄다. 유일표는 감을 따서 승복 자락에다 씩씩 문지르던 손을 문득 멈추었다.
“작은오빠. 한곳에 오래 머무는 건 위험해요. 시골일수록 모르는 사람들은 금방 표가 나고. 조금만 의심스럽다 싶으면 곧바로 신고를 해버려요. 간첩신고 훈련이 어찌나 잘돼 있는 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 옷으로 변장하고 운영 스님하고 함께 다니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에요.”
이 승복을 내놓으며 여동생 선희가 한 말이었다. 유일표는 감을 내려다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감은 감이 아니라 민둥머리가 된 선희의 슬픈 모습이었다. 승려로 변장을 한다고 해도 여승들만 있는 선희네 절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승복 차림으로 객승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것. 그것처럼 안전한 방법은 없었다. 더구나 그 객승이 자기 아버지의 사상문제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돈다고 선희가 첫 편지에 썼던 바로 그 스님이니 더욱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 참. 기묘한 인연입니다. 이런 기회에 중 행세하면서 주유천하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겁니다. 자기 한 몸도 편히 살아갈 수 없게 된 처지이면서도 약자의 편에 서는 고단한 삶을 자청하고 나서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이 못된 세상. 몸 보존 잘해야지요. 이 세상이 언제나 바르게 될라는지 원.”
절 뒷개울에서. 일단 가위로 짧게 잘라낸 머리를 안전면도기로 밀어주며 운영 스님이 한숨 섞어 한 말이었다.
“갑시다.”
운영이 감을 으석으석 씹으며 돌아섰다.
“스님은 역시 해탈을 하셨군요. 하나로 만족하시니. 이 탐욕 많은 중생은 하나로는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이게 아마 200개는 넘게 달린 것 같은데. 다 따서 짊어질 기운은 없고. 최소한 열 개는 챙겨야 되겠어요. 저는 특히 단감을 좋아하거든요.”
유일표는 이렇게 말하며 감을 부지런히 따서 바랑에 넣고 있었다. 그 바랑에는 선희가 마련해 준 세면도구와 내의가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만일을 생각해서 운영 스님이 지어준 법명이 일광(日光)이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단순히 햇빛이라는 뜻은 아닐 거고.”
유일표는. 운영 스님이 막대기로 땅바닥에 쓴 한자를 보며 물었다.
“유 형이 하는 일이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려는 것이잖소. 그 일이 뜻대로 잘 이루어져 이 세상을 태양처럼 밝게 비추라하는. 이 소식(小識)의 축원을 담았소.”
운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거 원. 너무 과분하십니다. 이렇게 도망 다니는 놈한테.”
“아니지요. 나 혼자가 아닌 남들을 위해 고단한 일을 하고 나선다는 것. 그것처럼 장하고 값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바로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향해 평생에 걸쳐서 설파하시고 실행을 당부하셨던 이타행.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것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유일표는 감 열 개를 따 넣고 허물어진 집터에서 벗어났다.
“이 중생이 스님의 간식을 준비한 것이니 너무 탐욕스럽게만 보지 마십시오.”
유일표의 능청스러운 말에 운영은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유일표는 단감을 맛있게 먹어댔다. 속살이 아삭거리며 씹힐 때마다 단물이 나오는 그 향그러운 맛과 함께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다. 날마다 배가 고팠던 국민학교 4~5학년 때 비가 쏟아지는 여름밤이면 으레 풋단감 서리를 나섰다. 빗소리 덕에 들키지 않고 서리를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는 꼭 팬티까지 벗고 알몸으로 나섰다. 흰 팬티가 눈에 띄기 쉬웠던 것이다. 신주머니를 목에 걸고. 온통 비에 젖어 미끄러운 감나무를 알몸으로 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낑낑대며 오르다가 들켜 감나무에서 떨어지고. 아픈 것도 모르고 도망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서리한 풋감은 얼마나 맛있었던가. 단감은 익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퍼런 풋감인데도 이름값을 하느라고 떫은맛이 약간 돌면서도 달았다.
“저쪽 산굽이 돌아가면 쉬어갈 주막이 있소.”
운영이 감꼭지를 던지며 무심한 듯 말했다.
“거기도 스님한테 반한 과부댁인가요?”
유일표는 바랑에서 새 감을 꺼내며 느닷없는 말을 걸쳤다.
“내가 애 배게 한 처녀요.”
“흐흐흐흐....... 스님도 저하고 다니면서 농담실력 느셨어요.”
유일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운영은 이상하게도 절을 피해가며 길을 잡는 눈치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절밥 얻어먹기가 쉬운 줄 아시오? 불을 때주거나 설거지하는 건 좋은 데. 최소한의 출가경력을 대야 해요. 그럼 유 형의 경우는. 난 가짜다 하고 들통 내는 것 아니겠소? 가짜는 아주 엄히 다스리는데. 유 형은 몰매 맞고 그날로 경찰서 행이오.”
“가짜 승도 있습니까?”
“적지 않지요. 동냥하기 쉬우니까 승려 행세를 하며 처자식 먹여 살리는 건 그래도 순진한 거요. 승복 입고 다니면서 절 보물 탐지하고. 훔쳐 내고 하는 전문적인 도둑놈들이 있어요.”
“도굴범들처럼 말입니까?”
“그렇지요. 그런 놈들이 문화재급 소형 불상이며 탱화 같은 것을 닥치는 대로 훔쳐다가 일본으로 팔아넘기고 있어요.”
“예. 사찰의 도난품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된다는 기사 더러 읽었어요. 가짜를 엄하게 다스릴 만하군요.”
그래서 운영은 잠자리를 편히 할 수 있는 주막을 찾아다녔다. 그러다보면 가끔 운영을 환대하는 여자주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승려 행세를 하면서 한 가지 고역스러운 것이 있었다. 사람들 눈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일이었다. 곡차라고 이름을 슬쩍 바꿔 술을 마시는 건 예사롭게 되어 있는데 담배는 철저한 금물이었다. 그 통념의 완강함 앞에서 그야말로 수도하듯이 흡연욕구를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살님. 바람 따라 구름에 실려 소승 왔습니다.”
운영이 주막으로 들어서며 합장했다.
“아이고 스님. 어서 오세요. 벌써 1년이 흘러갔나 보네요.”
반색을 하며 운영을 맞이하던 주인여자가 뒤따라 들어오는 다른 승려를 보고 멈칫했다.
“예. 소승의 도반 일광 스님입니다. 소승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도는 것이 좋은 수도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에 일차 동행하고 있습니다.”
운영이 독경할 때 같은 무게 실린 어조로 말했고.
“나무관세음보살.”
유일표는 이미 숙달된 합장과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예. 관세음보살.”
주인여자가 황급히 합장하며 예를 갖추었다.
“보살님. 우리 저녁 공양은 좀 있다가 하고. 먼저 곡차를 좀 했으면 합니다.”
“네에. 어서 방으로 드시지요.”
“곡차 값은 이 일광 스님이 톡톡하게 낼 것입니다.”
“아유. 스님도 그까짓 거야.......”
운영과 유일표는 문을 닫아걸고 술잔을 들었다. 운영은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얼굴에 서린 우수가 더 깊어 보였다. 유일표는 운영의 기색을 살피며 그 말을 꺼낼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운영은 이쪽에서 말을 꺼내지 않으면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말이 오가면 곧잘 자기 생각을 피력하면서도 말이 없을 때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는 했다. 그래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될 때면 한나절도 서로 말 한마디 없이 걷기만 할 때도 많았다. 막걸리사발이 서울 대포 잔하고는 달라 크기도 했지만. 술도 서울 것처럼 물을 많이 타지 않아 두 사발을 마시고 나자 유일표는 술기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님. 선(禪)만을 중시해서 산속에 묻혀있는 한국 불교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운영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려고 유일표는 일부러 일격을 가하듯 도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
운영은 느리게 눈길을 들더니 할 말 더 하라는 듯 유일표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정신을 계도하여 삶의 태도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탄생했습니다. 그런 본질에 입각해서 본다면 선에 지나치게 치중해 있는 한국 불교는 승려들만을 위한 종교로 존재할 뿐이지 인간들을 너무 도외시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다시 말하면 타 종교에 비해 사회적 실천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겁니다.”
“.......”
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뜻을 반쪽밖에 따르지 못하는 몰이해이고. 스스로의 종교를 불구화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유일표는 술기운에 실려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건 운영의 입을 열게 하려는 자극이기도 했다.
“몰이해고. 불구화라. 일리가 없지는 않은데. 그럼 어찌해야 된다는 거요?”
운영이 표 나게 웃으며 술 사발을 유일표에게 내밀었다.
“예. 제가 대학에서 배운 바로는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은 두 단계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1단계는 성직자로서 기본 자질을 갖추는 수행생활이고. 2단계는 그 생활을 바탕으로 자기네 종교 정신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고 봉사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불교 승려들은 그 1단계인 수행생활에만 머물러 자족하면서 2단계임무를 거의 기피하고 있습니다. 이건 일종의 종교적 직무유기이고. 한국불교의 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 힐난한 비판이신데. 아까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뜻을 반쪽밖에 따르지 못하는 몰이해라고 한 말은 어떤 의미로 한 거요?”
운영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 모호한 웃음과 함께 그가 묻는 말의 뜻을 언뜻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 알고나 떠드는지 보자.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들어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 제가 대충 알기로는 석가모니의 생애야말로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단계가 출가를 해서 고행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전반기이고. 2단계는 사회 속으로 들어와 무리 대중을 상대로 수많은 설법을 해서 인간의 정신을 정화시키고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려고 노력했던 실행의 후반기입니다. 석가모니는 그 두 단계의 균형을 통해서 구도자의 모범을 완성시켰고. 자신을 뒤따르는 승려들도 그렇게 하라고 시범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의 승려들은 그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수행과 실행의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고 확대함으로서 서로 소모적인 갈등을 일으키고. 끝내는 부처님의 숭고한 뜻을 왜곡하면서 불교를 반쪽의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종교든 대중이 없는 종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 중에서 불교는 경전이 제일 많기로 유명합니다. 어느 종교나 경전은 무엇입니까? 종교 창시자들의 설법 모음 아닙니까? 불교가 경전이 많다는 것은 부처님이 그만큼 대중을 중시하여 설법을 많이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선에만 집착하여 승려들이 산중에 묻혀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칠 뿐 대중과의 교류인 언어 소통을 경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성을 상실하고. 사회적 임무를 방기하고. 사회봉사를 하지 않는 반쪽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주제넘고 시건방진 입놀림인가요?”
유일표는 술기운 번진 눈으로 운영을 바라보며 비식비식 웃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건 오늘날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건데. 그렇지 않아도 불교 내부에서 젊은 승려들이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요.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운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실례지만 스님은 어느 입장이신가요?”
유일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운영은 유일표를 이윽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한동안 빈 눈길을 어딘가로 보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유 형이 결국 나한테 그걸 따져 물으려고 그런 말들을 한 것 아니오?”
“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제 앞에는 스님밖에 안 계시고. 가족적인 이유로 스님께서 당하시는 고통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일단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으니 이 위치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생은 결과적으로 허무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현실의 삶이 고달프면 고달플수록 그런 사람들의 나날은 고통스럽고 치열합니다. 승려라는 위치에서 그런 약자들의 편에 서게 되면 사회적 파급력도 커질 수 있고. 부처님의 말씀도 올바로 실천할 수 있게 되고. 스님의 삶도 새로운 의미로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허허....... 내가 유 형한테 설법을 듣고 있는 셈이오.”
운영은 공허한 느낌의 웃음소리를 내고는.
“그동안 유 형이 한마디씩 불쑥불쑥 하는 말을 들으며 오늘 같은 얘기가 나올 줄 알았어요. 나도 내가 이렇게 한정 없이 떠돌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고 있소. 이 길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인지 수도인지도 모르고 있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적 좌절의 끝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걷게 된 마지막 길이었다는 사실이오. 나는 이 길에서 두 가지를 배웠소. 인생은 별거 아니라는 체념을 배웠고. 승려로 한 평생 사는 것이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소.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겉모양만 승려지 속마음까지 승려가 된 건 아니오. 대학 시절의 세속적 욕망을 다 씻어내지 못했고.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하는 설익은 중일뿐이오. 내 마음이 종교적으로 단단해질 때까지 두들기고 다져야 해요. 그리고 유 형과 함께 떠돌면서 유 형 같은 삶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어느 측면에서 종교인보다 더 종교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비춰보고는 했어요. 부처님도 그렇고. 예수도 그렇고. 다 약자의 편에 섰으니까요. 유 형의 충고 새겨듣고. 마음에 깊이 간직해 두겠어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옳은 가치고. 옳은 길이지요. 어디 두고 봅시다. 무위하게 사는 것도 죄니까.”
그는 술잔을 유일표에게 건넸다. 이튿날 아침 유일표는 날이 훤히 밝아서야 잠이 깼다. 바랑 위에 목탁이 놓인 채 운영은 보이지 않았다. 술이 너무 취해 운영의 새벽 예불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운영은 역시 승려였다. 아무리 술을 마시거나 늦게 자더라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목탁을 치며 반야심경을 염송했다. ‘만상의 존재는 무상하며. 산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리고 바른 마음을 가지라. 는 불교정신이 응축된 그 짧은 경전을 염송할 때의 운영은 슬픈 듯 하면서도 더없이 경건해 보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지없이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운영의 바랑에 든 것은 치약. 칫솔과 양말. 목탁뿐이었다. 인적 없는 산골의 나무그늘에 앉아 땅바닥을 칠판삼아 운영에게 들었던 반야심경 강독은 마음에 깊이 새겨진 보물이었다.
며칠이 지나 어느 소읍에 들어섰는데 전파상의 스피커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 부산 지역의 비상계엄령 선포에 이어 오늘부터 마산. 창원 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치안과 질서는 주둔군이 맡게 되었으며.......”
운영과 유일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이거 어디 가서 알아보지요? 신문 구하기도 마땅찮고.”
유일표가 입을 열었고.
“가만있어 봐요. 가장 잘 아는 건 경찰서나 읍사무손데. 관리라는 물건들은 상대할 게 못되고. 됐어요. 약국을 찾읍시다. 약국 없는 데는 없고. 약사들은 다 대학을 나왔으니까 이런 데서는 제일 유식해요.”
운영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거 나라꼴이 어찌 될지 모르겠어요. 유신 철폐하라고 부산에서 대대적인 데모가 그저께 벌어졌고. 그 불이 마산으로 옮겨 붙은 모양이에요. 억지로 대통령 하려고 하니까 벌써 몇 년 동안 잠잠할 날이 없이 나라가 엉망이지요. 욕심이 사람 잡더라고 박 통도 이거 야단났어요. 부인 죽었을 때 그만 관뒀어야 하는 건데. 에이 쯧쯧쯧.......”
중년의 약사는 마구 혀를 차며 모아놓았던 신문을 내주었다. 신문에 난 사진들은 살벌한 부산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험상궂게 생긴 장갑차들이 시내 한복판의 대로 가운데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철모를 쓴 군인들이 칼까지 꽂은 총을 허리에 받쳐 곤두세우고 버티고 있었다. 그들한테서는 또 데모를 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찌르고 쏘아 죽이겠다는 살기가 뻗치고 있었다.
‘다른 데도 아닌 경상도 부산. 마산에서....... 박정희가 믿는 땅에서까지 이러면........ 박정희는 이제 궁지로 몰릴 대로 몰리고 있는 셈인데.......그래도 절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겠지.......? 그러나 이건 심상치가 않아.’
유일표는 이런 생각을 하며 신문을 덮었다.
“저 사태를 어떻게 생각해요?”
약국을 나서며 운영이 물었다.
“글쎄요. 저런 식으로 서울서 또 일어나기만 한다면....... 정권은 종말이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이 어찌 그리 맞는지. 다 탐욕 때문이오.”
“스님. 앞으로 얼마 동안은 신문을 볼 수 있는 데로 발길 하는 게 어떨까요?”
“그럽시다. 이거 중대산데.”
다음날부터 그들은 읍이나 면으로 이어지는 발길을 했다. 며칠이 지나도 서울에서 데모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신문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일표는 저으기 실망하여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피신 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여인숙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아니. 저게. 저게 무슨 소리야! 대통령이 죽다니.”
“뭐. 뭐라구? 박 대통령이 죽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양반이 왜 죽어?”
“누가 총을 쐈대잖아. 총을!”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김일성이가 쳐내려오면 어쩌지?”
“누가 아니래.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야.”
“또 난리가 나면 어떡하게. 이제 좀 살 만해지는데. 총을 쏜 놈이 누구야 그래.”
유일표와 운영은 다투듯 밖으로 나왔다. 라디오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총을 맞아 서거했다는 사실만을 되풀이해서 알리고 있었다.
“정말 북에서 쳐내려오면 어쩌지요?”
운영이 고개를 수그린 채 낮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정말 큰일이지요.”
운영의 첫 번째 걱정이 그렇듯 유일표도 즉각 떠오른 불안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평소부터 줄기차게 북쪽의 호전성을 강조하고 주입시켜온 반공주의 교육 때문인지 어쩐지 따지기 전에 머리를 친 제1감이었다. 누구나 첫 번째로 그 생각에 부딪히는 공통점은 박정희가 북을 막고 있었다는 신뢰가 아니라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공포감과 거부감의 표출이었다.
“스님. 이제 서울로 돌아갈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유일표는 아침을 먹으며 그동안 간추린 마음을 드러냈다.
“이게....... 세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괜찮겠어요?”
“예. 괜찮을 겁니다. 이제 박정희의 시대는 끝났으니까 그 시대에 취해진 수배 조처도 끝날 수밖에 없겠지요. 수사기관들은 이 비상 상황에 대처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글쎄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완전히 안심해서는 안 돼요. 똑같이 군인들이 힘을 쓰고 있으니까요.”
“물론 조심해야지요.”
“예. 그럼 처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럼 이게 이별의 밥상이 되는 건가요? 이별 앞에 곡차가 없을 수 없지요.”
운영이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