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3-10
43. 블랙리스트<2>
“환자가 아닌 사람은 밖에 나가 기다리세요.”
눈을 내리깐 원장 안경자의 목소리는 하얀 가운에 서린 근엄함과 싸늘함만큼 건조하고 냉정하게 들렸다.
“죄송합니다. 원장선생님. 제가 대신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얘가 차마 말을 못 꺼내서.......”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 잡은 처녀가 떨듯 더듬거리듯 말했다.
“뭐지요?”
안경자의 눈길은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저어....... 수술을 하게 되면 표는 안 나나요?”
처녀는 더 말을 더듬거렸다.
“결혼할 사이 아니라면 몸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지 임신해 놓고 그런 말은 왜 물어요?”
안경자의 말은 더 차가웠고. 처녀를 쏘아보는 눈길은 매서웠다. 그녀는 두 처녀가 여공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처녀가 아닌 것을 두려워 해 그런 말을 묻는 여공들이 너무 많아 그럴 때마다 안타깝고 속상해 화가 났다.
“그게 아니라 당했어요. 연애한 게 아니라 노조 만들려고 한다고 두 남자한테 번갈아가며 당한거라구요.”
그 처녀는 억울하다는 듯 이번에는 더듬지 않고 한달음에 말했다. 그 눈에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지요? 강간을 당했다 그거에요? 노조를 만드는데 어떤 남자들이 그따위 짓을 해요?”
안경자가 놀라는 반응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세를 고치며 두 처녀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회사 편드는 생산계장하고 작업반장이 얘를 망쳐놨어요.”
그 처녀는 친구를 끌어다 의자에 앉히며 목이 메었다. 정작 본인은 줄곧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 했어요?”
“경찰이요?”
처녀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고도 신고를 안 해요? 경찰이 왜 있는데.”
안경자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물었다.
“원장선생님은 모르셔서 그러세요. 경찰은 우리 같은 것들 편이 아니에요. 더구나 노조 만들려고 한 공순이 공돌이는 원수 대하듯 하는걸요.”
세상 물정 모르면 말을 하지 말라는 듯 처녀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스쳤다.
“아니......”
안경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 문득 강숙자의 말이 떠올랐다.
“직공들 등쌀에 이젠 사업이고 뭐고 맘 놓고 못해먹어. 노조라는 것을 만들어 즈네들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들거든. 나라에서 적극 막는데도 그것들이 어찌나 극성스럽고 억센지 날이 갈수록 노조가 늘어나는 회사들이 많아지고 있어. 노조 생겨나면 회사 망하고. 회사들 망하면 이 나라 경제발전도 망치는 건데 경찰들을 바보같이 뭘 하는지 몰라. 싹싹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작년에 강숙자가 한 말이었다. 강숙자는 자기네 아버지의 회사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공원들의 월급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여공들을 환자로 받다 보니까 자연히 그녀들의 월급을 알게 되었다. 낙태 수술비가 모자라 애달아하고 사정하는 일을 더러 겪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숨김없이 털어놓은 월급이란 하루 14시간 노동에 잔업비와 야근비를 다 합해보아야 초보자는 2만 원이 못 되었고, 숙달된 기능공이라도 2만 5천 원을 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수술비는 너무 비싼 것 같아 가끔 수술비를 모자라게 내놓아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보푸라기가 일고 곧 구멍이 날 지경으로 낡고 낡은 그녀들의 팬티는 안쓰럽기 그지없었고, 시장에서 금방 사 입고 온 것이 분명한 새 팬티를 어쩌다가 대할 때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쪽에서 수술비는 받았나요?”
안경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처녀에게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그녀의 정수리에 곧게 뻗은 희고 정갈한 가르마를 보며 안경자는 애처로움을 느꼈다. 그 가르마와 가랑머리는 자신의 처녀 적 모습이었다.
“수술비라니요. 회사까지 쫓겨나고 말았는걸요.”
그 처녀의 입 언저리에는 아까보다 더 진한 쓴웃음이 어렸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요?”
“원장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다 그렇게 되게 돼 있어요. 노조 만들려고 앞장서는 공순이나 공돌이들은 무조건 다 회사에서 모가지 당해요. 나라에서 그렇게 하라니까 사장들은 신나고, 우리 공원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죠 뭐.”
그 처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원장선생님. 수술하면 어떻게 되나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그 대답이나 하라는 듯 그녀가 물었다. 안경자는 그만 민망해졌다. 자신은 공원들의 생활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고, 나라에서는 왜 기업들의 편만 드는 것인지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일하는 것에 비해 월급이 너무 적은데, 그래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평균 2만 원 정도의 돈으로는 혼자 자취를 한다 해도 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거 아무 걱정할 거 없어요. 아무 표도 안 나니까. 의사인 나도 수술을 했는지 안 했는지, 처녀인지 아닌지 전혀 구별을 못해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안경자는 웃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저어....... 보면 금방 표가 난다는 말도 있는데요......”
“그건 남자들이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애를 낳으면 배가 트니까 표가 나지만 수술을 해서는 절대 표가 안나요. 의사인 내 말을 믿어요.”
“그치만 첫날밤에....... 그 처. 처.......”
그 처녀는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처녀막 말인가요? 그것도 다 옛날 얘기에요. 아무리 깨끗한 처녀라도 요새 첫날밤에 피 비치는 처녀는 얼마 안돼요. 왜냐하면 처녀막이란 운동을 좀 심하게 해도 쉽게 파열, 터져버리기 때문이에요.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높이뛰기. 넓이 뛰기 같은 운동을 하고, 자전거도 타고 그러잖아요? 그런 걸로도 처녀막은 얼마든지 파열돼요. 그러니까 첫날밤에 피 안 비쳤다고 처녀 아니라고 따지는 시대 아니니까 아무 걱정 말아요.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렇게 당한 사실을 깨끗하게 잊어버리란 말이에요. 나는 처녀가 아니다 하는 생각을 마음에서 깨끗이 지워 없애라 그거에요. 나도 여학생들처럼 높이뛰기하고 뜀틀 뛰기 했다 하고 그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면 그때부터 자기는 처녀가 되는 거예요. 이 말 명심하고 오늘부터 마음 편히 먹으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고맙습니다. 원장선생님. 고맙습니다. 원장선생님.”
그 처녀는 책상에 머리를 찧을 정도로 꾸벅꾸벅 절을 하고는.
“복실아 너 들었지? 걱정 마. 아무 걱정 마. 너 살아났어.”
그녀는 친구의 팔을 흔들어댔다.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처녀의 두 손등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서 복실이가 마취에서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복실이는 눈을 뜰 듯 말 듯하면서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집애. 괜히 야학은 다녀가지고 노조다 뭐다 이상한 물들어 결국 이런 꼴까지 됐지. 내가 뭐랬어, 나서지 말고 적게 먹고 가는 똥 싸자고 했지. 봐라. 당하는 사람만 원통하고 서럽지 이런 생고생 누가 알아주기나 하니. 헛똑똑이 기집애.”
그녀는 간호원이 이른 대로 복실이의 다리를 주무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엄니이....... 엄니이.......”
눈을 반쯤 뜬 복실이가 희미하게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반가워 얼른 복실이의 어깨를 붙들며 말했다.
“얘. 복실아 깨났구나. 나 알아보겠니? 나 미자야 미자.”
“엄니이....... 엄니이.......”
목소리가 조금 커졌을 뿐 안개가 낀 것 같은 복실이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복실아. 정신 차려. 나 미자야. 수술은 잘됐대.”
미자는 복실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엄니이....... 아. 아퍼.......”
복실이는 상을 찌푸리더니 눈을 스르르 감았다. 미자는 허둥지둥 병실을 나갔다. 아까 간호원이 깨나면 바로 알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녀는 복실이가 다시 눈을 감는 것이 겁나기도 했다.
“깨나긴 했는데 아직 정신이 다 든 것 같지가 않아요. 나를 못 알아보고 눈도 도로 감았어요.”
미자는 숨차게 말했다.
“됐어요. 가서 기다리세요.”
간호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미자는 또 다급하게 병실로 돌아왔다. 더위 가득한 온돌방 병실에 복실이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미자는 덜컥 겁이 나서 복실이의 코에다 귀를 갖다 댔다. 숨소리가 먼 바람결처럼 귀에 담겨왔다. 미자는 안심하며 허리를 펴고는 복실이의 이마에 내밴 땀을 닦아냈다. 간호원은 복실이의 맥을 짚어보았다. 그리고 이불을 들춰 아래를 살피고 나서 양쪽 엉덩이에 주사를 놓았다.
“잠들었으니까 안심하고 쉬세요. 어차피 두 시간쯤 있다가 가야 해요.”
간호원이 나가자 미자는 다시 복실이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몸을 망친 것은 복실이만이 아니었다. 복실이와 함께 앞장섰던 동희도 똑같은 변을 당하고 회사를 쫓겨났다. 그런데 동희는 다행히 임신을 하지 않았다. 그런 분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고도 몸을 망친 것이 알려질까 봐 그 누구한테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복실이가 노조를 해야 한다고 나섰을 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렸었다. 회사에서는 노조를 하는 것들은 무조건 자른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간부들은 눈을 부릅뜨고 감시를 하고 있었다. 노조를 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니까 괜한 짓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자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러나 복실이는 듣지 않았다. 복실이는 야학에 나다니면서 고집불통으로 변해 있었다. 미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더위에 지쳐 꾸벅 졸다가 깨고는 했다.
“미자야. 나 괜찮아 주무르지 마.”
이 말에 미자는 정신을 차렸다. 잠이 깬 복실이의 눈에는 안개가 걷혀 있었고 목소리도 분명했다.
“복실아 잠 깼구나. 걱정 마. 수술은 잘됐대. 많이 아프지?”
미자는 복실이의 손을 잡았다.
“아니. 괜찮아.”
그러면서 그녀의 얼굴은 아픔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얼마나 아프겠니. 그래도 참 잘됐다. 그 무서운 것 떼 내버렸으니. 이젠 다 잊어버려.”
“....... 그만 가자.”
복실이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얘. 안 돼. 안 돼. 두 시간은 눠 있어야 한댔어. 이제 겨우 한 시간밖에 안 됐어, 좀 더 자거라.”
미자는 복실이의 어깨를 누르랴 시계를 보랴 정신이 없었다.
“나 잠 안 와. 어서 집으로 가고 싶은데.......”
“집? 어떤 집말이냐? 이런 몸 해가지고 고향 가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미쳤니? 그나저나 네 고생이 너무 많다.”
“그래 고생스러워 아주 죽을 지경이다. 이 은혜 어떻게 다 갚을래?”
미자는 눈을 흘기며 퉁을 놓았다.
“왜 이리 엄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복실이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그래. 나도 아까부터 고향 생각이 자꾸 떠오르더라. 고향 떠나와서 10년인데도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이 이런 꼴이 돼서 그런가 부지? 그래. 천두만 아저씨 말 듣고 따라나선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몰라. 우리 나이 벌써 스물여섯이니 어쩌면 좋으냐. 서울생활 10년에 먹은 건 나이밖에 없어.”
미자는 어깨를 추슬러 올렸다가 늘어뜨리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 생각하지 말어. 그래도 남동생들은 고등학교까지는 보냈잖어. 우리 아니었으면 여동생들처럼 국민학교에서 끝났을 건데.”
“그것도 글쎄 잘한 일인지 어쩐지 모르겠어. 그것들이 우리가 얼마나 고생고생하면서 즈네들 학비를 댔는지 알기나 하겠어? 칫솔 하나 사서 털이 다 모지라지도록 5년 넘게 쓰고, 양말 한 켤레를 깁고 또 기워가며 10년씩이나 신고, 고향에 가는 추석이나 설 때 빼놓고는 고기 한 점 못 먹고 죽기 살기로 모은 돈이란 걸 알겠냔 말야. 행여나 행여나 하면서 살았는데 세상 좋아질 기미는 없고, 월급보다 물가는 먼저 뛰고,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고 10년 헛고생한 것만 같아 너무 허망해.”
미자는 눈물을 찍어냈다.
“헛고생은 무슨. 동생들도 알건 다 알아.”
“복실아. 우리 그만 고향으로 내려갈까?”
미자가 불쑥 말했다.
“난 싫어. 여기서 끝까지 버틸 거야.”
복실이는 그런 말이 나올 것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 지체 없이 대꾸하며 고개까지 저었다.
“기집애. 너 왜 그렇게 독해졌니. 그럼 더는 노조 할 생각은 마라.”
“안 돼. 노조 안 하려면 여기 있을 필요도 없어. 그 말 더 하지 말어.”
복실이는 단호하게 말하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또 그런 험한 꼴 당할 건데도?”
“그런 일 당했으니까 더 해야지. 그런 일 당했다고 물러나면 그놈들만 살판나. 난 기왕 버린 몸이니 끝장을 보고 말거야.”
“어머 무서워라. 이 기집애 야학에서 그러라고 시키던?”
“쓸데없는 소리 말어.”
“근데 말야. 노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긴 올까?”
“그럼. 당연히 오지. 근데 너같이 벌벌 떨어서는 영원히 안 와. 너. 숟가락으로 밥을 뜨지 않고 밥이 입으로 들어갈 수 있니? 우리 생산라인에서 한 사람이라도 잘못하면 기계가 조립되든? 노조도 그런 거야. 일 한 만큼 자기 밥 제대로 찾아먹고 사람답게 살려면 모두가 힘을 합해 싸워야 해. 그럼 그런 세상은 금방 와.”
“기집애. 그런 생각은 어떻게 또 했니. 사람 기죽게.”
미자는 고개를 움츠리며 곁눈질을 했다. 그들은 한 시간을 더 머무른 다음 병실을 나섰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자의 부축을 마다했던 복실이는 신을 신으며 비틀했다. 그때 퉁을 맞은 복실이는 미자에게 의지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느리고 불편한 걸음걸이는 천상 병자였다.
“수술비는 안 내셔도 돼요.”
간호원이 돈을 내미는 미자에게 말했다.
“아니. 왜요?”
미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 돈으로 몸조리 잘하라구요.”
“어머나.......”
“주의사항 똑똑히 들으세요.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하혈이 있으면 금방 와야 해요. 그리고 닷새 정도 힘든 일 해선 안 되고, 목욕도 삼가 하세요. 특히 목욕탕 안에 들어가면 큰일 나요. 그리고 이 수술은 애 낳는 것보다 몸이 더 축나 있으니까 몸조리를 잘해야 해요. 이 약 시간 맞춰 먹으세요.”
간호원은 약 봉지를 내밀었다.
“저어....... 원장선생님께.......”
약봉지를 받는 미자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고, 그 옆에서 복실이는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원장님 방금 수술 시작하셨어요. 인사는 담에 드리도록 하세요. 오래 서 있으면 안 좋으니까 어서 가서 눕도록 하세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자는 허리가 반으로 접히도록 연거푸 절을 했다. 고개를 떨군 채 손으로 입을 가린 복실이의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그들은 택시를 탔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처음 타보는 택시였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이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택시를 내려 셋방에 들어설 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미자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요를 깔기에 바빴다.
“너 여기 꼼짝 말고 누워 있어.”
“어디 가게?”
“아까 주의 사항 못 들었어? 빨리 몸조리 해야잖아. 얼른 시장에 댕겨 올게.”
“관둬. 시장은 무슨.......”
“넌 잔소리 말고 누워 있기나 해. 난 보호자고, 원장선생님께서 지키라는 걸 난 지킬 책임이 있어.”
미자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셋방이 서른 개가 넘는 ‘벌집’은 오가는 사람 없이 조용했다. 방마다 공원들이 세 들어 있어서 낮에는 언제나 빈집이 되었다. 그 빈집의 대문은 늘 열려 있는데도 도둑이 드는 일이라곤 없었다. 방마다 채워져 있는 자물쇠가 위력을 발휘해서가 아니었다. 공원들의 방에 들어가 봤자 헛수고라는 걸 도둑들이 먼저 알았다. 미자는 공동수도가 있는 시멘트 깔린 좁은 마당을 가로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복실이를 생각하며 자기네 방으로 몸을 돌렸던 것인데 눈에 들어온 것은 벌집 전체의 모습이었다. 빨간 벽돌의 3층집. 그건 이제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소름끼쳤다. 그건 집이 아니라 감옥이고 지옥이었다. 거기서 벗어날 가망이 없어질수록 감옥이고 지옥 같은 생각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둘이 살기에도 편치 않게 좁은 방에 대게 넷씩이 비좁게 살아야 했다. 보증금 20만원에 2만원 월세를 둘이 감당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집에 120여명이 들끓었다. 그런데도 변소는 남. 여 하나씩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도도 마당에 하나뿐이었다. 아침마다 변소 앞에서, 수도를 에워싸고 벌어지는 소란이란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런 벌집들이 구로공단 주변에는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미자는 또 고향생각을 하며 육교를 건너 가리봉동 시장으로 갔다. 고향집이 한없이 그립기는 하지만 막상 고향에 내려가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내 난감해지고는 했다.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어머니처럼 살 것을 생각하면 정떨어지고 무서웠다. 농부의 아내로 고생하며 한평생을 살 자신이 없었다. 벌집은 어서 벗어나고 싶고, 시골에서 살 마음은 없고....... 결국 서울에서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은 것인데 그 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 길이란 딱 하나 남자를 잘 만나야 하는데, 그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었다. 배운 것 없고 가난한 공순이가 기껏 골라봐야 공돌이일 뿐이었다. 공돌이하고 살아봤자 평생 가난에 찌들려 허덕일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나이는 먹어가고, 앞날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암담해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미자는 한숨을 쉬며 건어물상을 찾아갔다. 깎고 깎아 미역을 샀다. 그리고 정육점으로 가서 쇠고기 반 근을 샀다. 몸을 보하는 데는 쌀밥에 미역국 당할 게 없다는 말은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들어온 것이었다. 미자는 시장을 나오는 길목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순대도 좀 샀다. 복실이는 순대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어느 때 한번 맘 놓고 먹어본 적이 없었다. 미자는 골목으로 들어서다가 흠칫 놀랐다. 돌아설까 하는데 저쪽에서 먼저 말이 날아왔다.
“아니. 8호 색씨 아냐!”
“네에....... 안녕하셨어요.......”
미자는 다가오는 여자의 눈길을 피하며 어물어물했다.
“안녕 좋아하시네. 날 안녕하게 안 만들어주니까 이러고 다니는 거 아냐. 어떻게 됐어. 방세!”
여자는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네. 그거 곧.......”
“잔소리 말고 당장 방 비워. 벌써 두 달 치나 밀렸는데. 누군 땅 파서 그 집 진줄 알아? 들 사람들 얼마든지 있으니까 단장 비우라구.”
여자의 기세는 점점 사나워졌다.
“이틀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번엔 틀림없이 해드릴 테니까요.”
“잔소리 말어. 싸가지 없이 노조 하다가 쫓겨난 느네들은 더 볼 것 없어. 다시 취직 못할 것들을 왜 둬.”
“아주머니. 무슨 말을 그렇게 싸잡아서 하세요. 셋은 멀쩡해요. 좋아요. 내일 당장 오세요. 돈 드릴 테니까.”
미자는 맞대거리를 하고 나섰다.
“뭐라구?
“아. 내일 오시라구요.”
“누구 놀리는 거야. 지금?”
“안 믿을라면 관두세요. 나 가요.”
미자는 그 여자를 획 지나쳤다.
“거짓말이었단 봐라. 경찰서에 처넣고 말테니까.”
‘도둑년. 세금 도둑질한 돈으로 셋방놀이 해먹는 주제에 경찰서 좋아하고 자빠졌네.’
뒤에서 들리는 여자의 외침에 맞서 미자는 이렇게 욕을 해대고 있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세무공무원이었다. 벌집 주인들은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은행원이나 변호사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목사도 끼어 있었다. 미자는 성질나는 대로 하자면 당장 돈을 꺼내 그 여자의 얼굴에 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복실이의 몸조리가 먼저였고, 방세에 대해 서로 의논해야 했다. 방세가 밀린 것은 복실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복실이처럼 앞장서 나서지 못한 대신 수술비는 셋이서 힘을 합해 도와야 했다. 복실이가 그렇게 당한 것은 혼자 잘 사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모두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미자는 대문으로 들어서며 또 한숨을 쉬었다. 복실이의 취직이 큰 걱정이었다. 회사에서는 복실이를 쫓아낸 것만이 아니라 이름까지 그 무시무시한 블랙리스트에 올려버렸다. 그래서 복실이는 큰 공장에 취직을 못하고 월급이 절반 가깝게 줄어버린 구멍가게 공장에 임시로 발을 걸고 있었다. 복실이 말로는 야학에서 어떻게 해서 곧 큰 공장에 취직하게 될 거라고 했지만, 그게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복실이가 장해 보이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영 종잡기 어려웠다.
44. 먹구름
달구지나 다니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자동차가 나타났다. 자동차도 보통짐차가 아니라 초가집 한 채는 거뜬히 실을 만큼 크고 길었다. 그리고 그 큰 몸체에다 온통 홍시감 같은 붉은색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산골 사람들의 눈길을 일시에 사로잡았다. 그 차는 일정한 간격으로 시멘트 전봇대를 하나씩 내려놓으며 느리게 마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부들이 목도소리에 맞추어 힘 끙끙 써대며 전봇대를 내릴 때면 아이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호기심어린 눈을 굴리며 구경을 했다. 그러다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앞다투어 차 꽁무니에 다붙어 뛰었다.
“야 이 새끼야. 인자 나 잠 맡으자.”
“좆만 새끼. 니 까불래!”
“그려. 고따이(‘번갈아’의 일본말)로 혀. 심 쪼깐 씨다고 니 혼자 다 맡는 법이 어딨냐.”
“긍께 말이여. 지만 회 있가디. 우리도 회 있단 말이여.”
아이들은 느리게 움직이는 차가 내뿜는 푸른 색조의 배기가스를 서로 맡으려고 다투고 있었다. 그건 자동차 구경을 자주 못한 시골아이들이 드러내는 호기심만이 아니었다. 냄새 야릇한 그 푸르스름한 것을 들이 마시면 뱃속의 회충이 없어진다는 말을 아이들은 어디선가 들어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어떤 어른들은 회충을 없앤다고 붉으스름한 색깔의 휘발유를 한 종지씩 마시기도 했던 것이다. 그 자동차가 동네에 다다르기도 전에 산골 마을은 들뜨기 시작했다.
“어이 보소. 우리 동네에도 인자 전기가 들어온다네.”
“그 무신 뜬금 읎는 소리여? 자네 시방 눈뜨고 꿈 꾼가?”
“얼랴. 도깨비헌테 속고만 살았능가? 워째 그리 사람 말을 못 믿는댜?”
“음마. 그 무신 생뚱헌 소리여? 전기 들어오게 혀 준다는 말 한두 해 속고 살았간디? 벌써 30년이여. 30년.”
“금메. 나도 그런디. 요분에는 참말이란 말이시. 나 말 못 믿겄으면 싸게 신작로로 나가보드라고. 큰 차가 전부상대 늘핀허니 내래놓고 있는 참잉께.”
“전부상대! 글먼 참말인갑제?”
“항. 금세 전기 들어온다드랑께.”
“하이고메. 요 무신 천지개벽이랴? 근디 말이시. 국회의원 선거바람도 안 부는디 워째 요런 기맥힌 일이 다 벌어지고 그런댜?”
“그야 나가 알어. 자네가 알어. 좌우간에 전기 들어오면 우리 새끼덜 공부 잘허게 생겼응께 살판난 것이제.”
“하먼. 하먼. 살다 봉께 벨 요상시런 일도 다 생기네 이. 워디. 전부상대 잠 봐야 쓰겄네.”
뒤늦게 소식을 안 마을사람들은 사립 밖으로 뛰쳐나가기 바빴다. 마을 사람들이 30년 속아왔다는 것은 과장도 허풍도 아니었다. 그동안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어느 마을에나 전기가 다 들어오게 하겠다는 것은 단골 공약이었다. 그 귀 솔깃한 말에 앞장서서 부채질을 해대는 것은 이장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전기를 끌어와 아이들이 그 침침한 등잔 신세 면하고 밝은 전깃불 아래서 공부할 수 있게 하려면 어느 당 후보를 찍어야 하겠느냐. 그야 보나마나 기호 ×번 아니냐.’ 반딧불보다 좀 나을 뿐인 석유등잔 앞에서 공부 한다고 코밑 검게 그을리고 눈썹이며 머리카락을 태우곤 하는 아이들이 짠한 부모들로서는 그런 충동질에 금방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장이 눈앞에다 손가락을 세우며 염불 외우듯 한 기호 밑에다가 정성스럽게 붓대롱을 눌렀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당선되자 그들은 마치 자기네 경사인 것처럼 어깨춤을 추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전기 들어온다는 소식은 없고. 국회의원이 되어 떠난 그 사람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불평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불평들은 철이 바뀌고 해가 바뀔수록 점점 심한 원성으로 변해갔다. 그럴수록 입장이 옹색해지고 곤궁해지는 것은 이장이었다. 이장은 그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나려는 듯 이따금 읍내의 선거사무소를 다녀오고는 했다. 그런 다음날이면 그는 아직까지 전기가 들어올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하고 다니기에 바빴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다 믿지 않으면서도 차츰 입을 다물어갔다. 전기가 영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어려운 형편이 좀 풀릴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데는 달리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국회의원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또 입후보자마다 자기가 당선되면 틀림없이 전기를 끌어오겠다고 목이 터지도록 외쳐댔다. 이장도 이번에는 틀림없다면서 지난번과 다름없이 열을 올리고 다녔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속인 게 괘씸했지만 그래도 전기를 끌어오려면 권세 있는 쪽이 났다 싶어 또 이장이 손가락으로 표시한 기호 밑에 붓대롱을 눌렀다. 그러나 전기구경을 못하고 헛김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속고 또 속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침침한 등잔불 앞에다 국민학교 1학년 책을 펼쳤던 아이들이 장가를 가서 애아버지들이 되고. 그 자식들이 다시 등잔불 앞에다 책을 디밀어야 하는 세월이 흘러갔으니 몇 번을 속았는지 계산하기도 어려웠다. 속기를 거듭거듭 하다가 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지쳐버렸는데 느닷없이 전기가 들어온다니 마을사람들로서는 천지개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른들도 체면이고 뭐고 없이 아이들과 함께 길가에 길게 누운 시멘트 전봇대를 쓰다듬어보고 어루만져보고 하기에 부산스러웠다.
다음날 고무신 닳아지는 것 아까워하지 않고 동네 고샅고샅을 신바람 내며 휩쓸고 다닌 것은 이장이었다.
“인자 늦잡아도 한 달이면 우리 동네가 밤에도 훤헌 대낮이 된당께로. 요것이 다 우리 강기수 의원님이 힘쓰신 덕이여. 요 은혜가 얼매나 큰 것이여. 글씨. 참말로 요리 고마울 디가 워디 또 있겄어. 하느님이 따로 없는 일 아니여? 요 은혜 죽을 때꺼정 잊어부러서는 안 되제 잉. 안 긍가?”
이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입 꼬리에 침버캐 끼도록 열을 올리며 한 말이었다. 세월 따라 이장들이 바뀌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강기수 의원을 떠받들고 돌았다.
“하먼이라. 하먼이라.”
“그라제. 두말허먼 잔소리 아니겄어.”
사람들은 이장의 귀에 달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속으로는. 홍시감 떨어질 때 된께 떨어진 것이제. 하면서도 세상살이 눈치코치가 재빠른 사람들은 그런 미운 털 박힐 소리는 싹 감추었다. 전기공사는 책임자가 놀랄 만큼 빠르게 진행되어 나아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을사람들 거의 모두가 동원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장이 시킨 것도, 전기회사에서 도움을 청한 것도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전기를 켜고 싶은 마음에 너나없이 추수 일손의 틈을 내어 공사를 거들고 나섰다. 남자들은 가장 힘이 드는 전봇대 세울 구덩이 파가며 전봇대 일으켜 세우는 일에 힘을 모았고, 아낙네들은 돌아가며 먹을 것을 장만해 기술자들을 대접하기에 바빴다. 손쉽게 일하면서 공기 단축까지 하게 되었으니 책임자는 싱글벙글 이었고, 기술자들은 날마다 배부르게 대접을 받으니 신명나게 일손을 놀렸다. 서로 도와가는 분위기 속에서 새참을 먹을 때면 기술자들과 마을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야기판이 어우러지고는 했다.
“아. 참. 경치가 기가 막히네요. 평생 이런 경치 구경하면서 살면 신선이 따로 없겠어요.”
“금메요. 사시사철 쌀밥만 묵는 놈은 쌀밥 맛난지 몰르드라고 우리야 맨날 이 속에 묻혀 산께 벨라 존지도 몰르고 사는구만이라.”
“저 울긋불긋한 단풍들하고 저 솜털 같은 흰 꽃들하고 저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어요. 참 기가 막혀요. 저 흰 꽃들이 갈대꽃이지요?”
“저어. 갈대꽃은 따로 있고 저것은 억새꽃이구만이라.”
“그래요? 저게 갈대꽃인 줄 알았는데. 갈대꽃하고 억새꽃은 어떻게 달라요?”
“야아. 그것이 긍께 설핏 보기로는 모양새가 서로 비스름혀서 그것이 그것으로 뵈는디, 그것을 숼케 알아묵는 방도가 있구만요. 저것이 저리 산에서 피면 억새꽃이고, 바닷물 드나드는 갯가에서 피면 갈대꽃이구만요. 긍께 그것이 서로 사춘간인 심인디, 저 억새꽃은 저리 소복헌 것맨치로 희디 희고, 갈대꽃은 바닷물 먹고 피어서 긍가 어쩐가 희기는 흰스롱도 푸르스름헌 기가 도는구만이라.”
“아는 체하다가 괜히 무식 탄로 났잖아. 자넨 그 아는 체하는 게 탈이야.”
“이 사람아. 무식은 무슨 무식이야. 이런 때 확실하게 배워두는 거지. 사람은 여든까지 배운다는 말도 몰라? 안 그래요 아저씨?”
“하먼이라. 몰르는 것이야 손자헌테 배와도 숭이 아니란 말이 있응께라. 우리가 그런 것 아는 것이 유식혀서 알간디요. 촌구석지서 농사나 짓고 산께 지절로 알게 된 것이제. 사람이란 것이 지가 보고 듣고 허는 일 말고야 몰르는 것이 천지 백 가지제라. 무식허기로 치자면 우리 농사꾼덜이 질이겄지요. 그저 땅 파고 농사짓는 것 말고는 이 전기란 것이 워떤 이치로 그리 밝은 것이지. 아무 선도 R음시롱도 라지오에서 워찌 그리 소리가 나는지. 몰르는 것이 태산잉께라.”
“예. 아저씨 말이 맞아요. 서울 애들은 글쎄 벼를 몰라서 쌀 나무라고 하니까요. 쌀을 과일 따듯이 나무에서 따는 줄 알고 있다니까요.”
“야아. 그런 말 듣고 웃었는디. 서울서 낳서 나락 한 분도 본 일 읎이 크면 그리 되기도 허겄제라. 방학 때 여그 할아부지 집에 놀로 왔다가 비암이고 깨구락지 생전 첨보고 경기 나게 놀래 자빠지는 국민핵교 2~3학년짜리들이 많은 판잉께라.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겄소. 우리 촌것들은 서울 가서 놀래 자빠질 것이 많을 것잉께.”
“아이고. 공자님이 아저씨 말씀 들으면 형님 하겠어요. 어쨌거나 단풍하고 억새꽃이 저렇게 아름답게 어울리는 경치는 첨 봤어요. 정말 멋있어요.”
기술자들이 감탄을 연발하는 경치는 이 지방 산골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가지가지 색깔로 물든 단풍과 함께 지천에 넘실거리는 새하얀 억새꽃의 물결은 가을의 막바지에서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의 극치인지도 모른다. 형형색색의 단풍들은 억새꽃 무리의 티 없이 하얀색을 바탕삼아 더욱 선명하고 화려하게 돋보이고, 억새꽃들은 마지막 생명을 태우는 단풍들의 현란함으로 그 순백의 청아함과 우아함이 한층 살아 올랐다. 단풍과 억새꽃은 서로를 북돋워주는 조화 속에서 가을 산을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그들이 시샘이라고는 모르고 그다지 사이가 좋은 것은 머지않아 서로에게 닥칠 똑같은 운명을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북풍을 타고 겨울이 닥쳐오면 그들은 어찌할 수 없이 삶을 마감해야 한다. 곱고 고운 단풍들은 낙엽이 되어 어디론가 휩쓸려가야 하고. 순백으로 풍성하게 부풀었던 억새꽃들은 거센 바람에 꽃씨들을 날려 보내며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된다. 단풍들은 한해살이를 끝내는 마지막 삶이라 노을처럼 그리도 찬란한 것이고, 억새꽃들은 긴긴 날들을 오래오래 참다가 꽃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피는 꽃이라 들국화처럼 청초하면서도 쓸쓸한 것인지도 모른다. 억새꽃의 아름다움은 혼자 피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는데 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고 쓸리고 나부끼고 출렁이면서 하얀 꽃들의 파도를 이루는 데 있었다. 억새들은 그 가늘고 긴 키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서로서로 의지해 가며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거나 꺾이는 일 없이 낭창낭창한 허리로 바람결을 타며 오히려 더 환상적인 군무를 이루어냈다. 굽이치고 솟구치고 자지러지고 너울거리는 억새꽃들의 하얀 춤사위는 그 어느 꽃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 이었다.
“이리 좋은 경치 속에서 농사나 짓고 살면 얼마나 신간이 편할까. 나도 다 때려치우고 농사나 지어?”
“아이고메. 속 터지는 소리 마씨요. 농사지어서는 앞날이 캄캄허요. 우리는 못난 쫌팽이들이라 도시로 못 나가고 죽도 사도 못혀서 이러고 앉었제. 요것 사람이 못헐 짓이요.”
“아니. 왜요?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살기 좋아졌잖아요.”
“하이고. 선하품 나오는 소리 허덜 마씨요. 도시사람들은 아무 물정도 모르고 그리 말해쌌는디. 재작년보톰 새마을운동은 헌마을운동 되야부렀소.”
“헌마을운동? 왜요?”
“말을 다 허자면 속에서 천불이 올르는디. 막말로 인자 대통령도 안 믿소. 아 금메 우리 농촌사람들 다 죽이기로 작정혔는지 농산물 값이 해마동 똥값이 되는디다가. 돼지 값도 똥값이 되는 판에 워쩔라고 나라가 사딜이는 미곡수매가꺼정 말뚝 박어 묶어뿌냐 그것이오. 근디다가 그 빌어묵을 놈으 주택개량인가 집 껍데기 뒤집어 바꾸긴가를 억지로 몰아대서 글 안 해도 찢어지게 가난헌 살림에 집집마동 빚더미에 올라앉게 혀부렀단 말이오. 판이 요리 각다분 허니 되야뿐께 땅 파묵어 갖고는 앞날이 캄캄허다 생각헌 사람들이 보따리 싸 짊어지고 줄줄이 도시로 나가기 시작혔소. 도시에 나가 막노동에 등짐을 져도 세 끼 밥 편케 묵고 새끼덜 공부 갤칠 수 있다고 험서. 인자 처녀 총각들만 도시로 내빼는 시상이 아니다 그것이오.”
“이거 듣고 보니 헌마을운동이란 말이 맞네. 이러다가 박 통도 볼장 다 본 것 아닌가?”
“어허. 그런 입 바른 소리 말어. 그만들 일어나. 너무 오래 쉬었어.”
농부들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해마다 탈농과 이농으로 농촌을 등지는 수가 40여만 명씩을 헤아리고 있었다. 온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오게 된 날 밤 돼지를 잡는 잔치가 벌어졌다. 그 흥겨운 잔치의 상좌에는 기술자들이 앉혀졌다. 어른들이 술에 취해 가는 동안 아이들은 돼지비계나 부침개를 우물거리며 불 밝은 동네를 사방으로 들뛰고 다녔다. 잔치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동네에는 두 가지 일이 생겼다. 이장과 새마을지도자들이 앞장서 일으키는 선거바람이었고, 양복을 미끈하게 빼입은 청년들이 뚜껑 덮인 짐차를 몰고 나타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선거바람에는 시큰둥했다. 이미 전기가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가설되고, 그건 한 달 뒤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선심 쓰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닌장맞을. 전기 놔줘도 한나도 고맙덜 안 혀. 어디고 다 놓는 것이고, 전기 킨다고 묵고 사는 것이 나사지는 것도 아닝께.”
“그라제. 우리 살기 에롭게 맨글어놓고 무신 초친 맛으로 전기 인심이여. 전기가 밥 먹여주가니?”
“고것이 다 우리럴 홍어좆으로 알고 허는 짓거리들이여. 전기 놔주면 또 표 쏟아질 것이라고 턱 믿는 것인디. 나는 인자 내 좆을 짤라도 표 안 줄 것이여.”
사람들은 이장이나 새마을지도자들의 등 뒤에다 대고 이런 소리들을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양복 입은 낯선 청년들은 금방 마을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마을회관 마당에 차를 세운 그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차 옆구리에 높은 쇠막대를 묶어 세웠다. 그 쇠막대 끝에는 잠자리 날개 모양으로 굽어진 또 다른 쇠줄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서 물건을 꺼내 차위에 올려놓았다. 네모난 그 물건은 텔레비전이었다.
“와아. 테레비다. 테레비.”
환성을 터뜨린 것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읍내에 퍼져있는 텔레비전이 얼마나 재미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읍내에 사는 아이들이 부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텔레비전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거였다.
“자아. 낮에는 방송을 안 하니까 지금은 테레비가 안 나오고. 이따가 저녁부터 하니까 너희들 저녁밥 먹고 모두 나오너라. 아주 신나는 것 다 보여줄 테니까.”
청년은 나긋나긋 정답게 말하며 아이들의 가려운 데를 살살 긁고 있었다. 다른 청년들은 이미 이 고샅. 저 고샅으로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들은 도시와는 다리 사립문들이 다 열려있는 집들로 맘놓고 드나들며 텔레비전 선전에 침이 마르고 있었다.
“자아. 전기가 들어왔으니 이제 안방에 극장을 하나 차리셔야지요. 텔레비전 .이게 바로 안방극장 아닙니까. 한번 틀었다 하면 밤 12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가지가지 재미있는 것들을 골고루 다 볼 수 있는 신식 안방극장. 값은 하나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것을 축하하는 의미루다가 우리 회사에서 특별히 반값에 드려요. 그것도 일시불. 아니 한꺼번에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월부로. 다달이 조금씩 받아가요. 그러니까 푼돈으로 근사한 안방극장을 차리는 셈이지요. 자아. 더 긴말은 이따가 더 하기로 하고. 일찍 저녁 잡수시고 회관 마당으로 나오세요. 거기서 텔레비전을 한바탕 틀 테니 구경부터 해보세요. 그럼 이따가 만나요.”
청년들은 텔레비전이 인쇄된 울긋불긋한 선전지를 여자들의 손에 쥐어주고 다음 집을 향해 양복 깃을 펄럭이며 사라졌다. 여자들은 너나없이 가슴이 울렁이고 두근거렸다. 읍내 출입에서 더러 눈여겨보았던 텔레비전. 발목을 틀어잡는 것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했던 그 희한한 기계를 맘껏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신세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 요술 상자 같은 기계가 바로 눈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집집마다 빠짐없이 돌고 온 청년들이 차 옆에 모여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검정 지프 한 대가 나타났다.
“야. 사장님 떴다.”
“이런. 빨리도 오네.”
청년들은 담뱃불을 끄고 일제히 일어났다.
“여긴 어떻게 돼가고 있어?”
지프에서 내린 남자가 청년들을 휘둘러보았다.
“예.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선전을 다 마쳤습니다.”
한 청년이 군대식으로 대답했다.
“그것 말고. 몇 대나 먹일 수 있을 것 같으냔 말이야.”
그 남자는 마땅찮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아직....... 저녁 먹고 다 나오게 해 놨으니까.......”
“다들 정신 똑똑히 차리고 반 이상은 먹여야 해. 이건 월부 책하고는 달라서 찍으면 넘어가게 돼있는 나무둥치야. 안 사고는 못 배기게 썰을 삼삼하게 풀란 말야. 월부책 시장 한물가고 있는 판에 이것으로 왕창 한 몫 잡지 못하면 자네들 인생도 삼류 된다는 것 잘 알아두라구. 힘들 내. 다른 동네들 돌아서 다시 올 테니까.”
청년들에게 거친 기세로 말을 마치고 다시 지프에 오르는 남자는 다름 아닌 윤 사장이었다. 월부 책 조직을 운영했던 그는 언제부터인지 품목을 바꾼 것이었다. 텔레비전바람이 한바탕 불고 지나가자 선거바람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때와 달리 무소속이 세 명이나 입후보한 것에 마음 느긋해하며 강기수는 선거구에 도착했다. 무소속이 많이 나설수록 야당 표를 깎아 먹게 되니까 자신한테는 그만큼 유리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의 선거구에는 전기가 안 들어가는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완벽하게 조처를 했으니까 이번 당선은 더 쉽도록 되어 있었다.
“다들 알지? 이번에는 우리 선거구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전기 가설 문제를 내가 완전하게 해결했으니까 그 점을 적극 선전하고 환기시키라구. 그 사실 앞에서 야당이고 무소속들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돼 있으니까.”
강기수는 선거참모들에게 여유만만하게 일렀다. 그의 옆에는 아들 강길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선거운동을 돕고 실습도 시킬 겸해서 데려온 거였다.
“여러분 절대 속지 마십시오. 전기 가설은 강기수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어차피 전국적으로 하게 되어 있던 일인데 여당이 선거에 이용해 먹으려고 일부러 선거 직전으로 시기를 맞춘 것이고, 강기수는 그걸 자기 힘으로 한 것처럼 여러분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기가 별것입니까! 남들을 거짓말로 속이는 것이 사깁니다. 그러니까 강기수는 여러분들을 속이는 사기꾼이다 그겁니다. 여러분. 절대 속아선 안 됩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강기수가 그동안 한 일이 뭐가 있는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따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기수는 그동안 국회의원만 편케 해먹었지 여러분들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습니다. 그동안 모든 농산물 값은 똥값이 되고, 돼지 값도 똥값이 되어 여러분들을 헛고생만 시켰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추곡수매가격을 묶어버려 여러분들은 농비도 못 건지고, 자식들 공부도 못 가르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게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 바로 권력 쥐고 있는 정부와 여당의 잘못이고, 여당국회의원인 강기수의 잘못입니다. 강기수는 여러분들이 뽑아준 국회의원 자리에 올라앉아 떵떵 권세만 부렸지 여러분을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강기수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철저하게 그 책임을 따져야 합니다. 그 책임을 어떻게 따지느냐! 여러분들이 한 표도 찍어주지 말고, 다시는 국회의원을 해먹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못하면 여러분들은 더욱더 가난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야당과 무소속 후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런 내용으로 선거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강기수는 4대1의 협공을 당하는 셈이었다.
“피래미들이 파닥거려 봤자 잉어를 어찌 당해. 제놈들이 한 표라도 더 얻어 보려고 용을 써대는 거지. 그따위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말한 대로 계속 밀어붙여.”
강기수는 그런 보고를 받고도 여전히 느긋하게 대꾸했다. 평생 선거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다운 여유였다.
“어이. 이 사람들아. 거 야당이나 무소속 후보들 말 찬찬히 들어보면 그것이 다 우리 씨리고 애린 속 콕콕 찍어내는 공자님 말씸 아니여?”
“잉. 고것이 다 우리가 허고 잡은 말이었제. 속이 다 씨언씨언혀.”
“그려. 우리야 들어줄 디 읎응께 속으로 끙끙 앓기만 혔는디. 그런 말 대신 해준께 3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기분이랑께.”
“그나저나 요분에는 으째야 쓸까?”
“으쩌기는 머시럴 으째. 우리 요 꼴로 맹근 여당헌테 쓴맛을 뵈야제. 우리가 그간에 덮어놓고 여당만 찍어준께 그것들이 우리럴 핫바지 저구리로 보고 즈그덜 꼴리는 대로 혀분 것 아니여?”
“옳여. 씹주고 따구 맞는다는 말이 공연시 있는 것이 아니랑께로. 다 지에미 붙어묵을 놈들이여. 여러 말헐 것 읎이 요분에는 강기수가 밥 쉽게 묵게 혀서는 안돼야.”
“그려. 강기수 우리 위허는 일헌 것이 머시가 있어. 혼자 배터지게 잘 묵고 잘 살았제. 인자 우리도 사람이란 것을 뵈줘야혀.”
가을걷이도 다 끝나버려 한가하게 모여 앉은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선거에 쏠리고 있었다. 추수된 벼는 곧바로 추곡수매가 동결로 이어져 있는 판이라 농부들의 여당 성토는 날이 갈수록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민심 돌아가는 게 영 좋지가 않아요. 남자들은 그렇다 쳐도 여자들까지 여당을 욕해대고, 운동원들을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아요. 빨리 무슨 조처를 취해야 될 것 같은데요.”
며칠 동안 선거구를 돌아본 강길천은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 사내 녀석이 겁이 많기는. 초장에는 야당 충동질에 귀 솔깃해 다 그러는 법이다. 그러다가도 중반. 종반을 거치면서 점점 잠잠해지고 결국은 여당을 찍게 된다. 가난하고 힘이 약한 것들일수록 눈치 빠르고 약아빠진 법이거든. 내가 단계적으로 조처를 취해나갈 테니까 넌 아무 걱정 말고 잘 배우기나 해라.”
강기수는 사랑스럽고 기특하다는 눈길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강숙자는 선거전이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 고향에 내려갔다. 사나흘 선거구를 돌아본 강숙자는 당황했다. 다른 때와 다르게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여당을 내놓고 욕해대고 있었다. 여자들까지 거침없이 아버지를 욕하는 것은 민망해서 들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운동원들은 면박을 해대고, 손을 내젓고 외면을 해버리는 유권자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풀죽어 있었다.
“헹. 비누 한 장, 고무신 한 짝으로 또 우리 표 묵겄다는 생각은 인자 그만 혀야 될 거이다.”
“하먼. 우리가 그런 싸구려도 아니고, 우리도 인자 그런 밑지는 장사는 안 혀. 우리가 이리 쪽박 차게 된 손해 다 물어내기 전에는 강기수 찍으면 안 돼야.”
“두말 허먼 잔소리제. 우리 농촌 잘살게 허겄다고 큰소리 뻥뻥 쳐서 국회의원 된 인종이 우리 요리 망쳐놨으면 한강 물에 빠져 죽어야제 무신 낯짝으로 또 끼대와서 표 찍어도라는 것이여. 가당찮은 소리 허지도 말라고 혀.”
여자들은 오히려 이런 말로 운동원들을 몰아세웠다. 강숙자는 뒤늦게 ‘농촌경제 파탄’이라는 것을 주목했다. 솔직히 말해서 평소에는 별 관심 없이 지나쳐버렸던 문제였다. 고향이래야 아버지 선거 때나 겨우 발걸음 하는 곳이었고, 서울에 살다보니 농촌이 마음에서 멀어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도대체 농촌이 얼마나 살기 어려워졌길래 민심이 그토록 험하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숙자가 더 놀란 것은 아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박자 맞춰 흥얼거리거나 외치고 다니는 소리가 모두 아버지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번에는 갈아보자 강기수 장기독재.”
“기호 셋 강기수 3등이다 강기수.”
“강기수 오리알 낙동강 오리알.”
선거 때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거나, 아이들이 싫어하는 사람은 꼭 떨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강숙자는 너무 불안하고 불길해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빠. 제가 며칠 동안 여러 동네를 돌아봤어요. 민심이 어떤지 자세히 알고 계세요?”
강숙자는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앉아 따지듯이 물었다.
“왜. 그놈의 추곡수매가 동결로 말들이 많든?”
강기수는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담배를 빼들었다.
“가능하면 아빠 신경 자극하는 말은 피하려고 하는데. 중대한 사태는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말들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상태예요.”
“그래. 그거 별 걱정하지 마라. 추수해 놓고 속상하던 김에 선거하게 되니까 옳다 잘됐다 하고 화풀이해 보는 거다. 그러다가 제풀에 잠잠해져.”
“아빠.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다간 큰일 나요. 저도 벌써 선거 여러 번 치러봤잖아요, 그때마다 제가 한 말 틀린 적 거의 없었잖아요. 제 말 똑똑히 들으세요. 이번 형편은 전번들하고는 아주 달라요.”
“그렇긴 하다만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다 되게 돼 있다.”
강기수는 뚱뚱한 몸을 굼뜨게 움직이며 피식 웃었다.
“아빠 참 답답하시네요. 제 말은 돈 많이 타내서 중간에서 즈네들 배 채우려고 사태를 과장하는 운동원들 얘기가 아니라구요. 이런 말씀까진 안 드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어요. 국민학교 애들까지 뭐라고 떠들고 다니는지 아세요?”
“뭐? 애들이?”
강기수는 딸의 말을 무지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예. 너무 놀라진 마세요. 기호 셋 강기수 3등이다 강기수. 강기수 오리알 낙동강 오리알.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다녀요.”
“이런. 이런 빌어먹을. 재수 없게 왜 애새끼들까지 그러고 나서지? 참모라는 것들은 왜 여태 그런 보고도 안 하고 자빠졌어.”
강기수는 얼굴이 잔뜩 구겨지며 담배에 거칠게 불을 붙였다. 그는 아이들의 입질에 오르내리면 마가 낀다는 불길함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건 미신도 속설도 아니었다. 어른들이 집안에서 드러낸 속마음이 아이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아빠. 참모들 나무랄 것 없어요. 참모들은 그런 말까지는 차마 못하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빨리빨리 대처해 나가는 거예요. 아빠한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잖아요.”
“알았다. 이러고 있다간 큰코다치겠다. 내가 사태를 더 정확히 알아보고 발동을 걸어야겠다. 너도 더 열심히 해라.”
“예. 알았어요. 홍서방도 내려오라고 전화할까요?”
“그건 좀 기다려봐라. 공무에 너무 지장을 주면 안 되니까.”
강기수는 긴급명령을 내려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요즘 아이들이 나를 험담하는 노래인지 타령인지를 하고 다닌다는데, 그건 야당이나 무소속 쪽 놈들이 조직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악질적인 행위야. 오늘부터 그런 악질들을 당장 색출해 내. 그리고 애들이 그따위 노래를 흥얼거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해. 그런 놈들을 그때그때 잡아 부모가 누군지 확인하고, 그 부모들한테 선거 방해. 후보자 비방으로 경찰서에 쳐넣겠다고 공갈을 쳐. 나도 경찰서장을 만나 적극 협조하게 만들 테니까. 다들 똑똑히 들어! 앞으로 3일 이내에 그따위 노래가 싹없어지도록 일소시켜. 내가 암행반을 풀어 조사할 텐데, 만약 3일후에도 그런 소리가 나돌게 되면 그땐 그 지역장은 단단히 각오해. 알겠나!”
강기수는 비대한 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열을 토해냈다. 그가 그렇게 화가 났을 때 잘못 걸리면 요절이 난다는 것을 잘 아는 참모들은 잔뜩 몸을 사린 채 굽실거렸다. 강기수는 곧바로 경찰서로 차를 몰았다.
“서장. 지금 애들이 날 비방 모략하는 말에 가락을 붙여 노래로 부르고 다니는 걸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강기수는 다짜고짜 경찰서장을 다잡고 들었다.
“아니.......”
서장은 눈치 빠른 고급관료답게 애매모호하게 우물쭈물했다. 안다고 해도 덫에 걸려들게 되고 모른다고 해도 덫에 걸려들게 될 형편이었다.
“서장. 이거 서운해서 되겠소? 내 문제는 바로 여당문제고, 여당문제는 바로 각하의 문제 아니오? 헌데. 서장이 선거관리를 이렇게 해서 되겠소? 서장 자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요?”
강기수는 잠시도 쉴 틈 없이 서장의 심장을 향해 독 묻힌 화살을 날려대고 있었다.
“예.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불찰이 있었으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당장 만족하실 만큼 시정 조처하겠습니다. 의원님 일이 바로 제 일인 것을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정말 면목 없고 죄송스럽습니다. 곧 일소시키겠습니다.”
경찰서장은 강기수가 더는 화를 내지 못할 정도로 재빨리 대응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알았으면 됐소. 우린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시오.”
“예에. 항상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잘 끝내면 서장이 원하는 데로.......”
강기수는 실눈을 떠서 경찰서장을 제압하고 들었다.
“예. 의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항상 감읍하고 있습니다. 분골쇄신하겠습니다.”
경찰서장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강기수는 그런 식으로 군수, 읍장까지 다 만났다. 선거에 관한 한 그 촉수가 동물적으로 예민한 그는 어떤 위기감을 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사흘 동안 차를 몰아 선거구를 샅샅이 돌았다. 그가 놀란 것은 전기 가설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기 가설은 추곡수매가 동결에 떠밀려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기 가설로 추곡수매가 동결에 대한 불평불만을 상쇄할 수 있다고 계산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공업화가 사람 잡는구나.’
강기수는 새로 세워진 시멘트 전봇대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추곡수매가 동결에 대해 농촌 출신 의원들은 누구나 불안해하고 불만이었다. 그러나 국가적 대세인 공업화 정책에 따라 실시되는 것인데 반대하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추곡수매가 동결은 물가 안정과 직결되어 있었다. 각 도시미다 집결되어 있는 공장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려면 물가가 안정되어야 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려면 물가에 가장 영향이 큰 주식인 쌀값을 안정시켜야 하고, 쌀값을 안정시키려면 추곡수매가를 동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추곡수매가를 동결하는 효과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조처로 농촌 살림들이 어려워지자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농촌을 떠난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고,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손쉬운 일자리를 찾아 공장들로 들어가고, 인력 구하기가 쉬우니까 노동자들의 저임금은 계속 유지되고, 노동자의 저임금은 공업생산품의 원가를 줄여 수출을 신장시키고, 수출시장은 공업화를 촉진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에 대해 일부에서는 ‘농민들의 일방적 회생’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조국 근대화의 물결과 공업입국의 대세 앞에서 그런 소리는 흔적도 없이 묻히고 말았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이 추석이나 설에 공원들을 고향에 내려 보내며 친구 한 사람을 데려오면 한 달 치 월급을 보너스로 준다고 할 정도로 일손이 달리고, 정부에서는 작년 말에 수출 100억 불을 달성한 다음에 다시 그 목표를 1천억 불로 내걸고 더욱 기세를 올리고 있는 판이니 농촌출신 의원들은 그저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 참. 생각보다 심각하네. 야당이나 무소속 놈들은 살판났다고 날뛰어대고. 이걸 어쩌지.......’
강기수는 또 한숨을 쉬며 몸 무겁게 차에 올랐다. 밤이 늦어 강기수는 선거사무장을 불렀다. 심통 사나워진 그의 얼굴을 본 사무장은 미리부터 움츠러들어 옆걸음질을 쳤다.
“내일부터 고무신이고 타월을 풀어.”
“저어. 그건 아직.......”
“여러 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예에.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약효가.......”
“약효고 뭐고, 지금 선거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나 알고 그따위 걱정하고 있는 거야? 이대로 판세 굳어진 다음에 그런 것 풀면 무슨 소용 있어. 기차 떠난 다음에 손 흔들어대기고.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하루라도 빨리 풀어서 판세를 흔들어야 돼. 일단 흔들어놓은 다음에 또 풀어대는 거야. 약효를 계속 지속시킨다 그 말이야. 알아들어?”
“예. 알겠습니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그리고 밤이면 사랑방마다 이장이나 지도자들 앞세워 술통 디밀어. 한두 번으로 끝내지 말고 사흘거리로 퍼 먹여. 그리고 이 일 감시 똑바로 해! 약아빠지게 중간에서 삥땅쳐서 일 망쳐놓는 놈들을 잡아내란 말이야. 그따위 사기꾼 놈들은 요절을 내고 말테니까. 알겠어?”
“예. 명심 하겠습니다.”
“괜히 듣기 좋게 예. 예. 하지 말고 벼락 맞기 전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이번 싸움은 목숨을 내건 사생결단이라는 걸 알아야 해.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불리한데다가, 상대해야 될 놈들은 넷이나 돼. 이번에 자칫 잘못되면 자네신세도 어찌 되는지 알지? 죽을 각오를 하고 뛰어.”
“예.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강기수는 엄포나 과장으로 ‘목숨을 내건 사생결단’ 운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속내를 다 털어놓지 못해서 그렇지 혼자서는 그만큼 심각하고 절실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번을 끝으로 아들에게 선거구를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잘못되었다가는 그 꿈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평생 닦아온 기반을 아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는 이번 싸움은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생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애로사항이나 뭐 할 말 없나?”
“예. 조직원들이 총력을 다 하도록 몰아대겠습니다만, 가능하시면 의원님께서 유권자들을 좀 더 많이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운동원들이 열 번 절하는 것보다 후보자가 한 번이라도 직접 대면하는 것이 훨씬 더 낫고, 후보자하고 직접 악수를 한 사람은 틀림없이 찍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알았어. 나도 내일부턴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는 현장을 전부 누빌 거야. 이 사실도 모든 조직원들에게 빨리 알려. 그저 운동하는 척하면서 농땡이치거나 데데하게 구는 놈들은 눈에 띄는 대로 박살을 내고 말테니까.”
“예. 엄중 시달하겠습니다.”
강기수는 정말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유권자들을 찾아 차를 몰아댔다. 밤새 사무장의 지시를 받은 데다 강기수의 차를 본 운동원들은 먼발치에서도 몸을 사리며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거 운동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강기수가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 불길한 소문을 선거사무실의 참모들은 쉬쉬하며 덮기에 바빴다. 강기수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딸 숙자를 통해서였다.
“뭐가 어쩌고 어째! 우리 운동원 놈들은 도대체 뭣들하고 자빠졌는거야.”
선거운동에 지쳐있던 강기수는 화낼 기회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성질에 불을 붙였다.
“아빠. 지금 화내실 때가 아니잖아요. 냉정하게 대처할 방안을 찾아야지요.”
선거운동으로 얼굴이 수척해진 강숙자는 싸늘한 기색으로 아버지를 응시했다.
“그래...... 그렇긴 하다만 화를 안 낼 수가 있냐. 다른 때보다 돈도 훨씬 더 많이 쓰고 애도 더 많이 쓰는데도 이 모양이니 이걸 어쩌면 좋으냐.”
강기수는 딸의 기세에 밀리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치 잘못해 인심 다 잃은 건 어쩔 수 없구요. 어쨌거나 아빤 당선이 돼야 되잖아요.”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럼 제가 생각하기로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하나는. 남천장학사 출신들은 고시에 붙었거나 안 붙었거나 아빠가 직접 전화해서 다 불러 내리세요. 그 사람들이 모두 내려와 뛰면 판이 달라져요. 그리고 또 하나는. 돈 아까워하지 말고 더 쓰세요. 돈을 쓰더라도 구식으로 고무신 사주고 막걸리 사주고 하지 말고. 부동표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잘 골라내 현찰을 주세요. 그럼 틀림없이 효과가 나요.”
“현찰? 지금까지 쓴 돈만도 지난번보다 훨씬 더 많은데.”
“아빠! 지금 돈이 문제예요? 한 표 차로 당락이 결정돼요. 아빠가 만약 100표나 200표 차로 실패하면 어떡하실 거예요? 그 반대로 지금 수백 표 앞서있다 해도 돈을 써야 돼요. 이겨도 표차가 크게 이겨야 체면이 서잖아요.”
“허어.......”
강기수는 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저게 사내 두 몫 하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강기수는 서울로 전화 걸기에 바빴다. 선거 막바지에서 돈이 더 많이 풀리는 기미를 알아챈 송동주는 때는 이때다 싶어 신바람이 나고 있었다. 그는 이런 모임 저럼 모임을 꾸려가며 돈을 타내기에 분주했고, 그럴 때마다 사람 수를 부풀리는 것은 예사였고, 어느 모임에는 절반이상의 사람이 며칠 전과 중복되기도 했다. 더구나 부동표를 상대로 은밀하게 현찰을 건네는 일이 시작되자 그는 남모르게 환호성을 올렸다.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하는 그 일은 돈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안 전해졌는지 위에서 확인할 리가 없었다. 그는 받아낸 돈의 절반 이상을 먹어치우고 말았다. 강기수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남천장학사 출신들은 줄지어 내려왔다. 고시에 합격해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시에 실패해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은 모두 시골사람들의 눈에 서울에서 출세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대거 고향에 나타난 것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강기수가 고향의 인재들을 길러낸 공을 입증하는 살아 이는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집안을 비롯해서 동네로부터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강숙자의 생각대로 그들의 움직임은 선거 막판을 흔드는 새로운 바람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남천장학사 출신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열 명 남짓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중에는 김선오도 끼어 있었다.
강기수가 현찰을 돌렸다고 말썽이 되는 가운데 투표가 끝났다. 개표 결과는 1천표를 조금 더 넘겨 강기수의 당선이었다. 다른 때 압도적인 표차를 보였던 것에 비하면 가까스로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이 빌어먹을. 겨우 1천표 차이가 뭐야.”
강기수가 벌컥 화를 냈다.
“아빠. 이번의 1천표는 다른 때 1만 표보다 많다구요.”
강숙자가 쏘아대듯 말했다.
“짜석. 말하는 것하고는.”
강기수는 나무라는 표정을 짓다 말고는 껄껄 웃으며 딸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야당인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집권 공화당을 앞지르고 있었다. 각 신문들이 보도한 당선자 명단에서 천안의 한인곤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45. 피신하라
겨울 강은 적막했다. 강변 양쪽 가장자리로 살얼음이 잡혀있는 강줄기는 흐름을 감지할 수 없는 채 그 자태처럼 기나긴 외로움을 드리우고 있었다. 강변 백사장에 찍힌 여름의 흔적들마저 매서운 북풍에 부대끼며 시나브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강의 침묵 속에서 이따금 날갯짓하는 철새들의 모습이 춥고 서글펐다. 얼핏 보아서는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강줄기는 그 양쪽 끝이 아시무락하게 멀고 멀었다. 그 먼 한쪽 끝의 하늘에 노을이 연하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도 추위를 타는 것인가. 여름의 노을처럼 야하고 강력하게 불타오르는 기세는 느낄 수 없었다. 거리가 먼데다가 빛이 약해서 그런지 이쪽 강물에는 노을기가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강변은 더 춥고 쓸쓸한지도 몰랐다.
유일민은 먼 노을을 바라보며 한사코 느리게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강둑에 줄지어 선 미루나무들은 활엽수의 겨우살이가 어떤 것인지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 잎 하나 달지 않고 송두리째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멀쑥하게 키가 큰 그 나무들의 실가지들은. 투명하게 맑아 더 시려 보이는 겨울 하늘에 박혀 추위를 타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서 유일민이 느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들이 밟히는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그러나 그 연약한 소리는 독음이 아니었다. 그의 발길을 따라 또 다른 발길에서도 그 소리가 나며 복음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강줄기를 따라가는 강둑도 길었다. 강둑을 따라가는 발걸음은 낙엽 밟히는 소리만 낼뿐 두 사람의 침묵도 길었다. 유일민은 먼 노을이 변색해 가며 사위어가는 것을 보면서. 피우지 않는 담배 생각을 했다. 이런 때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담배보다 더 생각나는 것이 술이었다. 술을 마시면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가리라 싶었다. 물론 어떤 분위기 좋은 술집을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술 마시면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도 그렇지만 채옥이의 마음을 생각해서도 좀 더 색다르고 의미 있는 장소를 골라야 했다. 먼 노을이 암청색에서 암회색으로 변하면서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철새들도 보금자리를 찾아가는지 끼리끼리 날갯짓하며 강위로 낮게 날아가는 모습들이 분주했다. 유일민은, 이제 그만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또 자신을 채근했다. 어두위지기 시작하는데 채옥이를 더 춥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찌도 그리 꺼내기가 어려운지 몰랐다. 채옥이도 다 눈치 채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동안 뜸을 들일만큼 들였으니 한마디로 결론을 말해 버리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채옥이의 의견을 묻는 식으로 해야 할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망설임은 자신의 뜻을 채옥이가 뜻밖에도 거절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채옥이는 병적이리만큼 두 아이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반면에 두 아이가 조금이라도 불행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 그녀의 정신 상태였다. 그러나 유일민은 그동안 뜸을 들여온 결과를 믿기로 했다. 몇 번이고 조심스럽게 되짚어본 바로는 이제 솥뚜껑을 열기에 적합한 때였다. 유일민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서 고등학교 선배들을 따라 처음 수영을 하러 온 곳이 여기였어. 난 그때 저 한강 물 속에 머리까지 깊이 박고 간절하게 기도했었어. 나의 앞길이 잘 풀리게 해 달라고.”
유일민은 말을 끊으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임채옥은 고개를 숙임 막한 채 발걸음만 옮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아무 효험이 없었어. 채옥이가 잘 알다시피 모든 일이 꼬이고 어긋나고 했으니까. 물론 내 인생은 기도로 풀릴 일이 아니었지.”
유일민은 또 신음하듯 한숨을 쉬었다. 어둠살을 타고 불어오는 찬바람에 미루나무 가지들이 울고, 임채옥의 머리에 두른 스카프가 나부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기도가 딱 한 가지 사실을 들어주었어. 그건 내 인생에 가장 중대한 일이기도 하지. 그래서 굳이 여길 찾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유일민은 걸음을 멈추며 한강을 바라보았다. 한강은 안개처럼 퍼져 내리고 있는 어둑발에 잠겨들고 있었다.
“채옥아. 우리 결혼하자!”
유일민은 이 말과 함께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격렬한 목소리만큼 강하게 임채옥의 양쪽 팔을 붙들었다.
“오빠아.......”
임채옥은 당황스럽게 유일민을 올려다보았다.
“나 그동안 오래 기다렸어. 백일 탈상이 지나고 바로 말하고 싶었지만 채옥이 마음도 그렇고, 아이들 감정도 생각해서 해가 바뀌기를 기다렸던 거야. 이제 백일 탈상이 세배쯤 지났으니까 우리 결혼하자구.”
유일민의 목소리도 눈길도 뜨거웠다. 그건 그가 최초로 보이고 있는 열정이었다.
“오빠, 전 그럴 자격이.......”
“아무 말 말어. 아들 말 들었지? 아저씨가 우리 아빠면 좋겠다고 한 말. 그것이면 충분해. 애들이 날 받아들이는 마당에 자격이고 뭐고가 어딨어. 채옥이 자식은 바로 내 자식이야. 아무 걱정하지 말어.”
“오빠!”
임채옥은 와락 유일민의 가슴에 안겨왔다. 유일민은 임채옥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 순간 폭설 퍼붓는 강원도에서 첫날밤을 보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와 다를 것 없는 욕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오빠....... 우린 저 한강 같은 운명인가 봐요. 남한강 북한강이 끝내 합해 흐르는 것같이.......”
임채옥은 유일민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를 들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래. 그런 운명이야.”
유일민은 시를 유난히 좋아했던 처녀 시절의 임채옥을 다시 느끼며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의 뇌리에는 그녀가 시집가기 직전에 보냈던 이별의 편지 구구절절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임채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함께 제주도에 좀 가 주세요.”
“제주도? 왜?”
“가서 말씀드릴게요.”
“언제?”
“빠를수록 좋아요. 오래 안 걸리고 1박2일이면 되니까 토요일 날 오후에 갔다가 일요일 날 돌아오면 회사 일에도 별로 지장이 없을 거예요.”
“애들도 데려가야지?”
“아니요. 하룻밤이니까 애들은 친구 집에 맡기면 돼요.”
“알았어. 그럼 이번 주말에 가지.”
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심해져 있었다. 그들은 발길을 돌렸다. 올 때와는 다르게 임채옥의 오른손은 유일민의 왼손에 잡혀 오버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유일민은 자신이 언제 임채옥의 손을 잡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먼저 잡은 것인지, 임채옥이 먼저 잡은 것인지. 아니면 서로 함께 잡은 것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그 일이 믿을 수 없도록 신기하기만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채옥의 손을 잡는데 이제 아무런 장애도 없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임채옥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현실이 아니고 꿈인 것만 같았다. 형사들을 가로 막으며 자신을 지켜주려고 했던 최초의 타인.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임채옥의 그 모습이 유일민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더 바라지 않습니다. 무사하도록 지켜주십시오.’
그 옛날 한강 물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일민은 하늘을 향해 마음을 모두었다. 그는 얻을 것을 다 얻은 것 같은 벅찬 만족감으로 숨쉬기조차 거북했다. 유일민은 다음날 바로 비행기 표를 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왜 제주도에 가려고 하는 것인지 짚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지만 그저 나쁜 일이 아닐 거라는 믿음으로 다소 불안스러운 궁금증을 다스렸다. 유일민은 나흘 동안 결혼식과 새살림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스스로 쑥스럽고 계면쩍어 그런 생각을 애써 피하려고 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결혼식장을, 결혼 선물을, 새 거처를 생각하고 있고는 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날마다 가슴속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찬란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새 기운이 용솟음치는 감정은 난생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임채옥의 이별 편지를 받았을 때의 참담함과 절망과 어둠이 그렇게 뒤바뀌고 있었다.
“제주도에 가본 적 있으세요?”
공항에서 만난 임채옥은 꽃처럼 환한 웃음을 피워냈다. 그녀의 얼굴은 다른 때와 달리 화장이 좀 더 화사했다.
“마음뿐이었지. 언제 사람처럼 살아봤어야 말이지.”
유일민은 임채옥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1박2일이라면서 제법 큰 여행 가방을 흘끗 쳐다보았다.
“제주도는 참 좋은 곳이에요. 경치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순박하고 정직하고, 육지하고는 너무 달라서 갈 때마다 여기가 우리나라인가 착각이 생겨요. 제가 제일 살고 싶은 곳이 제주도예요.”
“그런가.......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가끔 신문 나는 걸 보면 외부사람들이 땅 투기를 해대서 문제가 되곤 하더군. 서울 재벌들 돈이 그렇게 몰려가면 제주도의 좋은 점이 남아날까?”
“그게 큰 문제긴 해요. 제주도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인심도 변해가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까진 천국이에요. 그 좋은 섬을 어떻게 좀 잘 살렸으면 좋겠는데.”
“글쎄....... 돈이란 괴물 앞에서 모든 건 변하고 망가지게 돼 있어. 자본주의란 게 원래 그렇고. 우린 더구나 잘살기 위해 누구나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유일민이 씁쓰레하게 웃음 지었다.
“어서 가요.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비행기 첨 타니까 겁나죠?”
임채옥이 유일민의 팔짱을 끼며 놀리듯 생글 웃었다.
“응. 겁나 죽겠는데. 채옥이가 나 좀 업고 가.”
유일민은 어깨를 떠는 시늉을 했다.
“어머머. 그런 농담 첨 듣네요.”
임채옥은 좀 과장되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일민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도 얼굴에도 어떤 생기 도는 빛처럼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있었다.
“아....... 이렇게도 곱고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유일민은 가슴을 휘도는 야릇한 열기에 감기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었다. 문득. 내가 너무 유치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유치해도 그만 이라는 엉뚱한 배짱이 생기는 걸 느꼈다. 비행기에는 사람이 절반이나 찼는지 어쩐지 빈자리가 더 많아 보일 지경이었다.
“겨울이라 이래요. 여름철엔 표를 못 구해서 야단인데.”
임채옥의 눈치 빠른 설명에 유일민은 자리 잡고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겨울에 바다의 고장을 찾아가는 게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유일민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한라산이었다. 한라산을 보는 순간 유일민은 이상스러운 놀라움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 그렇게 가깝게. 한눈에 보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높은 산들이란 으레 깊고 깊은 첩첩의 산들을 지나야 볼 수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한라산은 전혀 높아 보이지도 않았다.
“한라산 보고 놀라셨지요? 곧 손에 잡힐 것 같고. 금방 한 걸음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고요. 그치만 여기서부터 걸어서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까지 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린대요. 거기서 백록담까지가 또 하루구요. 다른 봉우리들 없이 한라산 혼자서만 솟아있어서 저렇게 보이는 거래요. 그러니까 제주도는 한라산 하나인 셈이에요. 저 보세요. 산줄기가 양쪽으로 서서히 뻗어 내려서 해변에 가 닿고 있지요. 사람들은 저 한라산의 모습을 소가 편안하게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들 하는데 제가 보기로는 그렇지 않아요. 여자가 폭넓은 치마폭을 끝까지 다 펼치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한라산을 어머니의 산이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한라산을 보면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이 아늑하고 편안해져요.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임채옥은 그런 한라산에 마치 무엇을 고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것처럼 먼 봉우리를 우러르듯 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응. 채옥이 생각이 더 그럴듯한데. 사진으로 한 부분만 본 것하고는 영 다르게 참 특이하고 묘하게 생긴 산이야. 더구나 저 정상에 물이 담겨 있다니.......”
유일민은 신비감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백록담을 꼭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기도를 드리면 소원 성취가 다 된다거든요. 근데 제주도 사람들도 저 상봉에 올라가 본 사람들보다 못 올라가보고 죽는 사람들이 더 많대요.”
임채옥은 차례가 온 택시 문을 열었다.
“그게 본래 그런 거야. 정작 서울사람들이 남산 구경 못하고 살잖아.”
유일민이 택시에 앉으며 말했다. 임채옥이 유일민에게 바짝 붙어 앉으며 쿡쿡거렸다. 호텔에 방을 정하고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도 한라산이 바라다보였다. 그러나 창문 크기에 잘려 그 산줄기의 유연하고도 여유로운 긴 흐름을 볼 수는 없었다.
“이제 여기에 온 까닭을 들을 차례 아닌가?”
유일민이 커피 잔을 들며 임채옥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좀 더 있다가요. 커피 빨리 마시고 바다 구경 나가요. 제주도 바다는 참 기막혀요. 우리나리에서 제일 깨끗한 바다라서 그런지 그 물 색깔이 층층이 다른 게 보석이 따로 없어요.”
임채옥은 상그레 웃으며 말을 피했다.
“제주도에 완전히 반했군.”
유일민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왜 여기에 온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짚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성급하게 신혼여행을 온 것도 아니고....... 임채옥의 깊은 속내를 헤집어낼 도리가 없었다.
“함덕 해수욕장으로 가주세요.”
임채옥이 택시 운전수에게 말했다. 택시는 이내 시가지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밭들과. 왼쪽으로 바다가 펼쳐진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겨울바다는 짙푸르렀고, 겨울 밭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유일민의 눈길은 그 밭들과 밭 가장자리마다 둘러쳐진 나지막한 돌담에 머물렀다. 밭의 흙이며 돌들이 모두 검정색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는 차 안에서 보아도 그 돌들은 마치 벌집처럼 숭숭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저 돌들이 왜 저렇지?”
유일민이 무심결에 한 말이었다.
“돌이요? 검고 구멍 뚫린 것 말인가요?”
임채옥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는.
“오빠 같은 사람은 척 보면 알아차려야지요. 지리책에 나오잖아요. 한라산이 어떤 산이라는 거. 이것 못 알아맞히면 오빠가 일류대학 나왔다는 것 안 믿을 거예요.”
하며 그녀는 샐샐 웃었다.
“지리책? 글쎄에.......”
유일민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알았어요. 오빤 수학. 영어는 박사지만 지리는 엉터리였나 봐요. 한라산은 화산이 폭발했던 사화산이잖아요.”
“오라! 화산 때문에 색깔이 저렇고. 저 돌에 뚫린 구멍들은 기포라 그거지? 그래. 그래. 내가 엉터리야.”
유일민은 제 이마를 치며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 검은 화산토와 화산석들은 유일민을 맞이한 제주도의 두 번째 인상이었다. 겨울 해변에는 물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없이 넓은 겨울 바다에는 배 한 척 떠있지 않아 더 아득하게 넓어보였고, 머나먼 수평선도 더욱 숨 자지러지게 멀어지고 있었다. 싸한 추위를 품고 있는 하늘도 쪽빛이었고, 무한의 무게를 담고 있는 바다도 쪽빛이었다. 서로를 닮은 하늘과 바다는 저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맞닿으면서 수평선이 하늘인지. 하늘이 수평선인지 분간할 수 없게 하며 그 깊이를 모를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 정적은 쉼 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실려와 해변에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파도는 슬픈 노래 같은 소리를 앞세워 새하얀 물꽃을 피워내고는 백사장에 스러지곤 했다. 유일민은 그 장엄한 자연에 압도당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겨울바다가 이처럼 숭엄하고 경건하다는 것은 생애 첫 경험이었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속에서 사랑을 맹세하려는 것이 아닐까....... ’
그 생각이 들자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싶었다. 임채옥은 감상적인 데가 있기도 했고. 자신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다른 곡절이 많기도 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랑을 맹세하고자 하면 흔쾌히 따르리라 생각했다. 삶이란 수많은 사건들의 연결이고. 그때마다 어떤 형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 형식은 그저 겉치레가 아니고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된다. 그 형식은 곧 충실한 내용을 이끌어내고 인생이란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며 가꾸어가는 자기 자신들의 나무다. 더구나 결혼이란 인생사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아닌가.......
“저는 바다에 오면 죽고 싶어져요.”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임채옥이 이윽고 침묵을 깼다.
“.......”
유일민은 바다를 바라본 채 임채옥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한참 생각하다 보면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요. 그건 알 수 없는 바다의 마력이에요. 그래서 저는 바다에 자주와요. 중대한 일이 닥칠 때마다.......”
“.......”
유일민은 바다를 바라본 채 임채옥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빠. 그런 제 맘 이해가 되세요?”
임채옥은 두 팔로 유일민의 허리를 감았다.
“그래....... 이해할 수 있어. 아니....... 나도 동감이 돼. 바다를 보니까 무언가 경건해지고....... 새로운 삶의 의욕 같은 것이 생겨나.......”
유일민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그리고 모자람 없이 담아내려고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했다. 임채옥이 굳이 바다를 찾아온 의미를 되새기면서.
“정말이에요. 오빠? 정말 오빠도 그런 감정이 생기세요? 전 유치하다고 흉잡힐 줄 알았어요.”
임채옥은 유일민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들어 유일민을 올려다보았다.
“흉잡히기는. 그런 게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감정일거야. 그런 감정을 유치하다고 하는 게 시건방지고 덜된 것이지.”
유일민은 임채옥의 눈을 어느 때 없이 깊이 들여다보며 웃었다. 그는 그 눈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오빠. 우리 저 백사장 좀 걸어요.”
임채옥은 유일민의 눈길이 눈부신 듯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반달형의 백사장에는 파도소리만 자욱했다. 휘어져 감기며 밀려온 파도는 깊은 흐느낌 같은 소리와 함께 몸부림치듯 백사장에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했다. 물 머금은 모래톱은 바다 색깔에 젖은 듯 마른 모래밭의 새하얀 색과는 달랐다.
“이 모래는 저 바다에서 밀려와 그렇겠지만. 모든 게 검은 데서 이런 흰 모래가 있는 게 신기하군.”
“오빠. 멋없이 그렇게 과학적으로 말해 버리면 어떡해요.”
임채옥이 유일민을 때리는 손짓을 지으며 눈을 흘겼다.
“과학적.......?”
“네에. 이 모래가 왜 희냐면 말이죠. 원래는 검었는데 저 바닷물에 길고 긴 세월동안 씻기고 씻겨서 하얗게 된 거예요. 이렇게 말해야 문학적이고 운치가 있잖아요.”
“호오. 그것 참 기막힌데? 난 채옥이 감각을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 그래. 자기도 모르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말하는 버릇은 그게 다 어설픈 유식이나 지식 때문이야. 참. 멋없이 말야.”
유일민은 감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렇게 감탄 하시면 제가 민망해요. 그건 모방이거든요.”
“모방?”
“네에. 어떤 시인이. 바다는 왜 그리 푸르른가. 파도로 끝없이 바위에 부딪쳐 멍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썼거든요. 그걸 살짝 이용해 먹었어요.”
“아니야. 그런 모방은 아무나 하나? 난 그 시를 읽었더라도 채옥이 같은 생각은 못 해내. 그리고 그건 모방이 아니라....... 뭐랄까? 응. 응용이야 응용.”
“오빠. 너무 관대하게 봐주지 마세요. 그렇게 사적으로 치우치면 국가 발전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돼요.”
“뭐야!”
임채옥은 깔깔거리며 백사장을 뛰었고. 유일민은 그 뒤를 쫓았다. 임채옥은 백사장을 벗어나 아까 왔던 길로 뛰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한라산의 의연하고 수려한 자태가 먼 배경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한라산의 품으로 안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한라산과 어우러진 그 모습이 자신의 인상에 남아있는 그 어떤 영화 장면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유일민은 뛰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냥 이대로 호텔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미심쩍음이 고개를 들었다.
“오빠. 빨리 오세요. 빨리. 저기 마침 택시가 있어요.”
임채옥이 뒤돌아서서 다급하게 외치며 손짓했다. 유일민은 장난삼아 뛰고 있던 다리에 힘을 가했다.
“어머 아저씨. 아까 우리 태우고 왔던 아저씨 아니세요?”
택시를 타려던 임채옥이 운전수를 보고 놀랐다.
“예. 맞습니다. 어서 타세요.”
운전수가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또 손님 태우고 오셨어요?”
“아니오. 겨울이라 택시도 잘 없고 해서 그냥 기다린 겁니다. 빈 차로 시내 들어가 봐도 손님이 별로 없고 하니까요.”
“어머. 고마워요. 그럼 대기료 드릴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 좋아서 한 일인걸요. 피곤한 김에 한숨 자면서 잘 쉬었어요.”
운전수는 손까지 내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임채옥은 운전수를 가리키며 유일민에게 눈짓말을 했다. 그녀의 눈은. 이 봐요. 제주도사람들은 이렇다니까요. 하는 말을 담고 있었다. 그 의미를 알아 새긴 유일민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유일민을 맞이한 제주도의 세 번째 인상이었다.
“아저씨. 저녁 먹고 이따가 이 차 대절할 수 있어요?”
임채옥이 손거울을 꺼내며 운전수에게 물었다.
“그럼요. 어디 가시게요?”
“네. 여기 와서 밤바다를 구경하고 싶어요.”
“예. 좋지요. 밤에 고깃배들이 불을 밝힌걸 보는 건 구경거리 중에 일품이지요. 몇 시쯤 차 대기시킬까요?”
“8시가 어떨까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차의 속도를 따라 가까운 경치는 계속 바뀌는데도 해가 그렇듯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초연하게 솟아있는 한라산을 바라보다가 유일민은 불현듯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어딘가 이국 풍경이 느껴지는 제주도를 생각하다가 이곡의 특산물인 귤을 떠올렸고. 귤이 생각나자 대뜸 그 정치인이 떠올랐던 것이다. 심술과 욕심이 얼굴에 맥질된 그 사람이 떠오르자 유일민은 대번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그는 제주도에 어마어마하게 큰 귤 농장을 가지고 있다고 진작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귤은 가장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제일 큰 귤밭을 차지하고 앉아 막대한 치부를 일삼고 있었다. 그가 대규모 귤 농장을 갖게 된 것도 권력의 힘을 이용한 것이라는 말이 자자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임채옥이 방싯 웃으며 유일민 옆으로 다가앉았다.
“아니. 괜히 이곳과 연관된 어떤 정치인이 떠올라서.......”
“아유. 정치는 생각지도 마세요. 기대할 것 아무것도 없이 다 틀렸잖아요.”
임채옥은 싸늘한 어조로 몸서리치는 시늉을 했다.
“그래. 골치 아파. 근데 말야. 제주도가 이렇게 좋을지는 몰랐어. 채옥이가 반한 마음을 알겠어.”
“그렇지요? 제주도는 우리나라 보물이에요. 이 아름다운 섬에 사람이 산다는 게 아까울 정도에요. 사람이란 아름다운 자연을 자꾸 망치기만 하잖아요. 육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여기 인심도 경치도 자꾸만 망가지고 있다니 걱정이에요.”
“그래. 사람. 그게 문제지.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만큼 골칫덩어리도 없을 거야. 그렇지만 어쩌겠어. 그게 다 인간이 사는 방법이니. 제주도 망가지는 것도 너무 애석해 하지마.”
유일민은 임채옥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겨울 밤바다의 정적은 더 깊고 은밀했다. 어둠 속에 번지는 파도의 슬픔 음조만 더욱 애절하고 간절해지고 있었다. 어둠 짙은 밤바다 저 멀리 작은 불빛들이 모둠모둠 빛나고 있었다. 별들이 바다에 빠져 빛나고 있는 것 같은 그 작은 불빛들은 밤바다를 치장한 유일한 장식이었다.
말없이 모래밭을 걷던 임채옥은 물가에 가까워져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이 짙어 가까이 있는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오빠......”
가늘고 낮은 임채옥의 음성이 파도소리에 묻혀 버리는 것 같았다.
“응......”
“저는 이 깨끗한 바닷물에 몸을 씻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요.”
임채옥의 목소리는 또렷해져 있었다.
“아니.......”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잖아요. 저는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요.”
임채옥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했다.
“......”
“오빠도 빨리 옷을 다 벗으세요. 이제 우리 인생이 새롭게 시작돼요.”
임채옥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으며 유일민은 ‘감기 들면 어쩌려고’ 하는 말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 말을 한다고 임채옥의 기세가 꺾일 리 없었고.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 그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객쩍은 소리일 뿐이었다. 유일민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과거를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싶어 하는 임채옥의 심정....... 옛날을 새롭게 회복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 그건 어쩌면 자신이 더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알몸이 된 임채옥은 먼저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파도소리가 굽이치고 있었다. 유일민도 곧바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머리끝이 쭈뼛해지며 머리가죽이 바짝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찌르르한 오한이 전신으로 퍼지며 온몸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유일민은 어금니를 맞물며 가슴을 폈다. 바다는 경사가 완만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닷물은 조금씩 차올랐다. 유일민은 바닷물이 차오를수록 추위가 가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바닷물이 유일민의 배꼽께에 이르렀을 때였다. 임채옥이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손잡아요.”
유일민은 임채옥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걸음을 더 옮겨 놓으면서 임채옥도 아무 말이 없었다. 바닷물이 유일민의 가슴께에 차올랐을 때였다. 임채옥이 걸음을 멈추었다. 바닷물은 유일민보다 키가 작은 임채옥의 목에 이르러 있었다.
“오빠. 오늘부터 제 과거는 완전히 없어졌어요.”
임채옥이 유일민의 다른 손을 마주 잡고 마주서며 말했다.
“그래.......”
“오빠의 좋은 아내가 되겠어요.”
“그래.......”
“오빠. 절 안아주세요.”
유일민은 안겨오는 임채옥을 힘껏 감싸 안았다. 그 순간 그는 눈물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오빠. 사랑해요.”
“그래. 나도.”
일순간 그들의 입술이 하나가 되었다. 물에서 나온 임채옥은 정신없이 서둘러댔다.
“오빠. 타월 여기 있어요. 타월. 빨리빨리 몸 닦으세요. 감기 들면 큰일 나요.”
임채옥이 유일민의 어깨에 걸쳐준 건 전신이 다 감길 만큼 큰 수건이었다.
“내 걱정 말고 채옥이나 빨리 닦아. 난 이래뵈도 군대생활 할 때 강원도 추위 속에서 냉수마찰하며 끄떡없이 견딘 몸이야.”
“제 수건은 여기 따로 있어요. 빨리 몸 닦고 내의 갈아입으세요.”
“내의?”
“네. 새것으로요.”
유일민은 그제서야 왜 여행 가방이 큼직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서로를 껴안고 바다를 등졌다. 밤바다의 파도소리는 정적 속에서 쉼 없이 울리고 있었다. 호텔방으로 들어서자 임채옥이 유일민을 끌어안았다.
“오빠. 우리의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뜨거웠다.
“그래. 찾아야지.”
유일민의 목소리도 뜨거웠다. 그들은 서로의 옷을 벗기며 침대로 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유일민은 동생과 마주앉았다.
“나 곧 결혼해야 되겠다. 집 문제 때문인데. 난 새 집을 장만할 테니까 이 집 명의를 네 이름으로 바꾸도록 해.”
“결혼?”
유일표는 깜짝 놀라다가.
“그거 참 잘됐네. 어떤 여자야? 근데 왜 이집 명의를 내 이름으로 바꿔? 우리가 딴 데로 나가야지.”
그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물었다.
“아무 말 말고 그대로 해. 내가 너한테 해 줄게 뭐가 있냐.”
“아니. 형 사업도 힘 드는데 그러면 안 돼지. 우린 어디서 전세살이를 해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무리하는 것 아니니까. 그동안에 그 정도 돈은 벌었다.”
유일민은 동생을 바라보며 웃었다.
“형. 그거 정말이야?”
유일표의 눈에도 목소리에도 물기가 번져있었다.
“그래. 난 무리하는 사람이 아니잖냐. 내 사업은 그런대로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어서 명의 변경하는 절차를 밟어.”
“그럼 이 집에 내 문패를 붙여도 된다 그 말인가? 이거 통 믿어지지 않는데. 맨주먹 붉은 피로 서울에 올라와 내 문패를 단 집을 갖고 재산세를 내게 되다니. 마침내 완전한 서울특별시민이 되는 건데. 형. 우리 성공했네! 아니지.......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우리가 아니라 형이 성공했네.”
유일표는 상기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왜에. 성공이라면 우리의 성공이지. 너도 그동안 몸 고생.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나저나 60퍼센트가 넘게 집이 없는 서울에서 우리가 집을 하나씩 갖게 됐으니 성공이라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네 말 듣고 보니 완전한 서울특별시민이 된다는 게 감동적인 면도 없진 않구나. 어떤 사람은 13평짜리 아파트를 갖게 된 날 아내와 얼싸안고 울었다고도 하더라.”
유일민은 지난날을 더듬는 듯한 감회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어떤 여자야.......?”
유일표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도 기억할 사람인데.......”
유일민은 임채옥이 홀로 된 사연을 간추려 이야기했다.
“잘됐네. 형. 결혼 축하해.”
유일표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그리 밝지 않았다. 형에 대한 인사로 ‘잘됐네.’ 했을 뿐 진정으로 ‘참. 잘됐네.’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연치고는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지만. 무언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였다. 그건 처녀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두 아이가 딸려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가족 구성이 복잡해질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머나. 어머나. 우리 아주버님 정말 멋지셔요. 항상 침울하시고. 통 말도 없으시고 해서 아무 멋도 없는 분이신 줄 알았는데 진짜 멋쟁이에요. 정말 너무 멋지고 근사해요.”
유일표의 말을 전해들은 그의 아내 서경혜는 두 손을 모아잡고 흔들며 수선스럽다 싶은 반응을 나타냈다.
“갑자기 왜 그리 수다를 떨지? 그게 뭐가 그리 멋지고 근사해?”
유일표는 아내에게 눈총을 쏘며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어머. 요새 세상에 얼마나 기막힌 러브스토리예요. 그보다 더 멋진 순애영화의 주인공이 어디 있겠어요.”
“괜히 감상적으로 그러지마. 앞으로 가정이 복잡해지고, 시끄러워질 수도 있으니까.”
“가정이.......?”
서경혜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새 애가 태어나면 가정에 불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건가요?”
그녀는 남편을 향해 똑바로 눈길을 모았다.
“눈치 하나 빨라 좋네.”
“아이구. 누가 형제애 없다고 할까봐서 그런 걱정 하고 있어요. 지금? 당신은 철학과 나왔다면서 인생의 기본도 모르는 엉터리예요. 남자 자식들은 후처가 못 키우지만. 후처 자식들은 남자가 얼마든지 잘 키운다는 말도 못 들었어요? 엄마가 같으면 아무 탈 안 생기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아요. 그리고 아주버님이 애인을 그토록 사랑하는데 그 애들을 차별하실 분이세요?”
“글쎄....... 그게 듣고 보니.......”
유일표는 어물거리며 담배를 빼 물었다.
“그분이 누군지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게 부럽네요.”
서경혜는 아까의 분위기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 말로 괜히 나 화나게 만들지 말고 형이 주는 선물이나 받을 생각해.”
“선물이요......?”
“선물도 엄청난 선물이야. 이 집을 내 이름으로 명의 변경하래.”
“네에?”
서경혜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까지 벌어졌다.
“너무 놀라지 말어. 몸 상해.”
“안 놀라게 됐어요. 갑자기 돈 벼락을 맞은 것이나 마찬가진데. 그럼 아주버님은 어떡하시구요?”
서경혜는 눈을 훔쳤다.
“새 집을 장만할 거래. 그동안 모아둔 돈이 있어서.”
“아주버님 참 대단하시고 고마우세요. 아무 표도 내지 않고 그렇게 사업 잘 끌어가시고. 꼭 부모처럼 마음도 그리 쓰시고.”
서경혜는 또 눈물을 훔치며 목이 잠겨들었다.
“형이 고생 참 많이 했는데......”
유일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유일민은 20일쯤 지나 결혼식을 올렸다. 임채옥이 예식장을 원하지 않아서 백운대의 도선사에서 조촐하게 치렀다. 그리고 신혼여행이라는 것도 가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공장을 잠시도 비울 수 없는 급한 일이 밀렸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신혼여행을 다녀온 셈이었던 것이다. 또. 임채옥의 아이들을 며칠씩 떼어놓을 형편도 못 되었다. 형의 결혼식이 끝나자 유일표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동안 결혼하지 않은 형과 함께 살면서 얼마나 입장 옹색하고 마음의 짐이 컸는지 몰랐다. 형이 떠나고 나니 아내와의 잠자리도 편해졌고, 아침에 눈을 뜨면 괜히 신명이 나고는 했다. 형과 자신의 인생이 음지에서 양지로 바뀐 것 같은 묘한 기분이 가슴에 감돌고 있었다.
유일표는 그런 생기 속에서 그 일을 적극 추진했다.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ㅡ 그건 단순히 기도회가 아니었다. 노동운동을 하다 생존권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고, 노동조합 조직을 강화시키고, 노동자들을 더 일깨우고자 하는 또 다른 형태의 노동운동이었다. 기도회는 성황이었고 효과가 컸다. 참가한 노동자들은 상기된 호응으로 결속을 다짐했다. 착취에 대항하고, 억압에 저항해야만 사람다운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노동자들은 한 마음을 이루었다. 유일표는 흡족한 마음으로 재건대로 돌아와 야학을 시작했다. 첫 시간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빨리 전화 받아 봐요. 박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위급한 일이래요.”
이용진 대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여보세요. 박 목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유일표는 불길한 예감으로 이렇게 물었다.
“아. 유일표 씨. 큰일 났어요. 빨리 몸을 피하세요. 수사기관에서 우리 간부 셋을 체포했어요. 계속 체포할 테니까 빨리 피해야 돼요. 오늘 밤부터 집에 들어가지 마세요. 절대 잡히면 안 되니까 명심해요. 그럼......”
“목사님은......”
“내 걱정은 말아요. 그럼......”
전화가 끊겼다. 유일표는 송수화기를 든 채 어금니를 맞물었다. 불안해했던 사태가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그는 앞이 어둠으로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머릿속도 어둠이 가득할 뿐이었다.
“무슨 일 생겼어요?”
이용진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예. 빨리 피신하래요. 오늘 일로 체포가 시작 됐다고.”
유일표는 송수화기를 놓았다.
“그래요? 그럼 지금 당장 피해요. 내빼는 게 대통령 빽 보다 더 쌔다니까. 내가 감옥살이하면서 귀 아프게 들은 말이오. 참. 돈이 있어야 되겠지. 잠깐 기다려요.”
이용진이 나가자 유일표는 형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거의 날마다 야근을 하기 때문에 형이 있을지도 몰랐던 것이다. 형은 야근을 함께하는 사장이었다.
“형. 피신해야 될 일이 생겼어. 집에 연락 좀 해줘야 되겠어.”
“무.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게 좋아. 혹시 형한테 내 행방에 대한 조사가 나오면 지금 전화한 것도 없었던 일로 해야 해.”
“......”
“형. 미안해. 사상 문제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할 일 한 거니까. 어디 정한 데는 있냐?”
“아니. 아직......”
“선희한테로 가라. 아무도 모르니까. 돈 없지? 지금 빨리 이리 와.”
“아니. 여기서 해결됐어.”
“됐다. 몸조심해라. 어서 끊자.”
유일표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려움 한편에서 분노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결국 올 것이 온 거였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다 못해 노동운동의 뿌리를 도려내려고 나선 것이었다. 노동자들을 적으로 삼는 정권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봐라. 그는 어금니를 맞물어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았다.
“자아. 이것 넣고. 빨리 떠요.”
이용진이 돈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오. 남들이 못하는 장한 일 한건데. 빨리 서울을 벗어나요.”
“예. 그럼......”
“참. 집에 연락 못했지요? 전화가 없으니까. 지금 내가 가겠소.”
“아닙니다. 형한테 전화했어요.”
“아. 잘됐군요. 장기간 피해야 될 텐데 돈 떨어지면 바로 연락해요. 가명으로 짤막하게 안부 편지를 보내요. 그럼 그 주소로 송금할 테니까. 나한테 편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편지할 때마다 이름을 바꿔도 그게 유 선생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어요.”
“예. 감사합니다.”
“한곳에 오래 있지 말고. 몸이 아파 요양 다니는 것으로 적당히 둘러대요.”
유일표는 재건대 뒷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어둠을 밟으며 서울 역으로 가야 할지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서울역이 가깝기는 했지만 모든 행선지가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곳에 수사망이 퍼져 있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함정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는 고속버스터미널로 방향을 잡고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46. 피땀으로 뭉친 돈
폭염은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푸른색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광막한 황무지에는 백광만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근로자들은 쉴 새 없이 땀을 흘려 옷이 흡사 물에 빠진 형상이었다.
“어이. 저기 저건 뭐야?”
“어디? 개새끼라도 한 마리 나타났어?”
“아. 저사람 초짜라 회오리바람 첨 보는구만? 조심해. 저기 휘말리면 황천객 되는 수도 있으니까.”
“아니. 저 왼쪽을 봐. 저기서도 일어나는데?”
“뭐. 놀랄 것 없어. 여기 회오리바람은 사방에서 동시에 일어나니까.”
한 사람이 말을 꺼내자 근로자들은 그게 더위를 이기는 방법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잇대었다.
‘새끼들. 더럽게 떠들고 자빠졌네. 좆심 못 쓰니까 양기가 모두 주둥이로 올라붙었나.’
문태복은 그들을 향해 눈을 째지게 흘기며 욕을 해댔다. 그전 같았으면 자신도 한마디 걸치고 들었겠지만 요즈음에는 이상하게도 자꾸 짜증이 나고 걸핏하면 신경질이 솟고는 했다. 그러나 그건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밥을 먹고 한참이 지나도 꼭 체를 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고 메슥거렸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도 피곤이 풀리지 않고 몸이 찌뿌드드하고 묵지그리 했다. 의무실에 가서 소화제를 타먹어 봐도 체한 느낌은 가셔지지 않았다.
“어. 어. 정말 회오리바람이 사방에서 일어나는데?”
“이러다가 오늘 또 샌드스톰(모래바람) 몰아쳐 일당 작살내는 것 아니야?”
“이런. 무식하긴. 회오리바람이 일어날 때는 우박이 쏟아지는 일은 있어도 샌드스톤이 불어대는 일은 없어. 사우디 밥 2년차 똥구멍으로 먹었어?”
“아이구. 유식해서 좋겠다. 국회의원 출마해라.”
회오리바람은 나선형으로 휘돌아 오르며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수직으로 곤두서 빠르게 이동하는 그 바람기둥은 거대했다. 어지럽게 휘돌면서 드높게 솟는 그 위세에다가 황무지의 모래까지 감아올리기 때문에 회오리바람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억센 바람기둥이 멀리 있을 때는 신기한 구경거리였지만 가까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일제히 일을 멈추고 차밑 같은데 납작 엎드려 피신을 해야 했다. 어물거리다가 그 바람에 휘말리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내동댕이쳐지기 십상이었다. 그런 봉면으로 머리가 깨지거나 골절상을 입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회오리바람보다 훨씬 더 사납고 위협적인 것이 모래바람이었다. 난데없이 불어 닥치는 거친 모래바람은 그야말로 광대한 황무지의 무법자였다. 반사막지대를 휩쓰는 세찬 바람 은 모래를 수평으로 흩뿌리며 삽시간에 허공을 모래먼지로 뒤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해버렸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면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1~2미터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모든 근로자들은 일을 중단하고 재빨리 보안경을 끼며 허둥지둥 몸을 피했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편으로 차량에 다붙어 수건으로 코까지 막고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밀가루같이 미세한 모래먼지로 콧속이 따끔거리고 입 안은 서거서걱했다. 그렇지만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땀 잔뜩 밴 옷과 몸에 모래가 파고들고 달라붙은 것이었다. 그 모래들은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해야 제거되는 것이지 그냥 옷을 벗어 털고 수건으로 닦아낸다고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근로자들은 모래를 대충 털어내고 일을 다시 해야 했고, 미세한 모래들이 묻어있는 몸에 또 땀이 나면 온 몸은 가렵고 따끔거리고 쓰라렸다. 사람이 휘청거리거나 쓰러질 정도로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은 곧잘 마술을 부리고는 했다. 평평했던 곳에 왕릉 몇 배나 되는 모래 산을 만들어놓고 가는가 하면, 도로 왼쪽에 있었던 모래 산을 오른쪽으로 옮겨놓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래바람을 ‘귀신바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 왜 이리 어둠침침해져?”
“저것 봐. 갑자기 먹구름이 끼잖아?”
“그거 보나마나 아냐? 회오리바람이 데려온 거지.”
“그거 잘됐다. 비나 한바탕 퍼부어대라. 그래도 구름 끼니까 좀 살겠네.”
문태복은 비가 오기를 바라는 말을 들으며 찌푸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오리바람의 기둥들이 무리지어 지나간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뒤엉키고 꿈틀거리며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회오리바람도 느닷없었지만 두꺼운 먹구름이 기세를 펴는 것도 느닷없었다. 사우디의 기후 변화는 언제나 그렇게 갑작스럽고 난데없이 일어났다. 까마득하게 먼 지평선 저쪽 하늘에서 구름 떼가 뭉클뭉클 피어오르는가 싶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이 울려대고. 30분이 못 되어 하늘이 온통 새까매지며 한바탕 비가 쏟아지는 것이 사우디였다. 그러나 그런 소나기는 집이 불타는데 바가지 물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먹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이글거리며 쏟아지는 백광의 위세 앞에서 물기는 금세 흔적도 찾을 수 없이 되고 말았다.
‘그래. 비나 좀 퍼부어대라. 이놈의 답답한 속 좀 뚫리게.’
문태복은 목을 늘여 헛트림을 하며 오목가슴을 쓸었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이 찜찜하고 자꾸 신경이 쓰였다. 혹시 ‘사우디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함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근로자들이 부르는 ‘사우디병’이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흔한 것이 담석증이었고. 그 다음이 머리가 멍해지는 두통이나. 얼굴 반쪽이 굳어지는 안면마비였다. 담석증은 석회석 성분이 너무 많은 물 때문에 생겼고. 두통이나 안면마비는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기후 때문에 생기는 거였다. 그리고 흔한 것이 피부병이었다. 피부병은 땀을 너무 많이 흘리다 보니 생기기도 했고. 파리나 모기에 물려 생기기도 했다. 심한 더위의 영향인지 사우디의 파리나 모기는 특히 독해 피부병을 자주 일으켰다. 어쩌면 땀 때문에 피부가 약해져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근로자들 사이에는 그런 병들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이 퍼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담석증이 심해 사우디에서 치료를 받다가 안 되어 귀국해서 수술을 받느라고 1년 6개월 동안 번 돈의 절반을 까먹었다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귀국해서도 두통이 자꾸만 심해지면서 기억력까지 없어져 반편이 노릇을 한다고도 했고. 다른 어떤 사람은 사우디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귀국해서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해 여러 병원을 다 찾아다녀도 낫지 않아 고생고생 한다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특별한 병도 없이 기운을 못 쓰고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마음은 들떠 오르는데 그게 잘 서지를 않아 애태우다가 결국 이혼을 당했다고도 했다. 먼 바다를 건너오는 그런 소문들은 근로자들을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어. 이게 뭐야!”
누군가가 놀라 소리쳤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박이다. 우박!”
“빨리 피해라. 우박이다!”
공사장 여기저기서 다급한 외침이 터지고. 우박이 자동차 범퍼를 치는 소리가 우당탕 쿵쾅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문태복은 재빨리 장비 작동을 멈추고 차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아 야야야.......”
누군가 우박에 얻어맞았는지 저쪽에서 비명이 울렸다.
“거기 누구야? 얼띠게 우박에 얻어터지고 죽는 소리하는 게.”
“허. 정씨로구만.”
“그럴 줄 알았어. 신참 초짜는 군대서나 어디서나 표를 낸다니까. 어디. 머리야?”
“아니. 한발 늦어서 엉덩이를 얻어맞았어.”
“그나마 다행인 줄 알어. 머리통 얻어맞았으면 처자식하고 빠이빠이 하는 판이었으니까. 그게 다 알라신의 덕인 줄이나 알라구.”
“아니. 고참들이라고 누구 약 올리는 거요. 지금? 남은 엉덩이가 깨지는 판에. 에이 시팔. 무슨 놈에 우박이 이렇게 커. 이건 야구공보다 더 크잖아.”
“흐흐흐흐......”
“히히히히......”
그들은 제각기 자기 차 밑에 납작 엎드려 목청 높여 떠들고 있었다. 우박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점점 거칠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더욱 야단스러운 것은 상상할 수 없도록 큰 우박들이 중장비들에 사정없이 부딪치기 때문이었다. 우박은 차 밑으로까지 굴러 들어왔다. 문태복은 느긋한 마음으로 엎드렸던 몸을 천천히 돌려 눕혔다. 그리고 탁구공만한 작은 것은 치우고 사과만큼씩 큰 우박을 골라 안전모에 담았다. 그것을 베게삼아 베었다. 그건 폭염 속에서 익은 머리를 식히기에 최고였다. 그리고 다시 큰 우박을 양손으로 들고 얼굴부터 문지르기 시작했다. 우박은 대게 30분 정도 쏟아졌다. 그 시간은 그야말로 알라신이 내려주시는 최고의 휴식시간이었다. 우박으로 전신을 문질러 시원하게 식힐 수 있었고, 요령 좋게 번갯잠의 꿀맛을 깜박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런 여유는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을 여러 차례 경험한 고참들이 갖는 것이었다. 신참들은 우박의 크기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어리둥절하다 보면 땀 끈적거리는 몸에 흙까지 묻히고 차 밑에서 기어 나와야 했다.
“어이 문 씨. 빨리 나와요. 우박 다 지나갔어. 그 동안에 마누라하고 한판 화끈하게 돌아가고 있는 거요!”
이런 외침에 문태복은 어렴풋이 들었던 잠을 깼다. 마누라는 아니었지만 정말 어떤 예쁘고 육체미 좋은 여자하고 한참 신나게 그걸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것은 어김없이 빳빳하게 곤두서 있었다. 그런 꿈은 사우디에 와서 수없이 꾸고 있었다. 생시와 다를 것이 없는 그 생생한 정사는 자신만 꾸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를 전혀 상대할 수 없는 근로자들은 누구나 그런 꿈을 꾸었고, 몽정은 그들 사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예쁜 여자와 색다르고 멋진 정사를 한 몽정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인기였다. 그들이 성적 욕구를 일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몽정이고, 그 다음이 수음이었다.
“거 우박 녹을 때까지 좀 내버려두면 어디 덧나나. 제길.”
문태복은 굼뜨게 몸을 뒤집으며 투덜거렸다.
“세상에 이렇게 큰 우박이 있다니, 이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집에 돌아가서 이런 말을 하면 거짓말이라고 할 텐데요.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신참 근로자는 걸음걸이가 뒤뚱거리는 어린애처럼 우박 속으로 발을 옮겨놓으며 들떠 있었다. 우박은 그의 무릎 깊이로 쌓여 있었다. 그 크고 작은 얼음덩이들은 강렬하게 내려쬐는 햇볕을 받아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햇빛을 반사하며 빤짝거리는 우박들은 그대로 영롱한 보석이었다. 그런데 우박들은 금세금세 작아지며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강렬한 햇볕에 급속도로 녹고 있는 것이었다.
“어. 어. 이거 왜 이래. 이거 왜 이래.”
신참은 우박의 높이가 푹푹 꺼지는 것을 보면서 얼떨떨해서 우왕좌왕했다. 고참들은 담배를 빨며 그저 웃고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순식간에 이럴 수가 있는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신참은 우박이 다 없어져버린 것을 보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헛소리하듯 하고 있었다. 그가, 우박이 녹아 땅에 스밀 새도 없이 증발해 버린 것을 ‘순식간’이라고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큰 우박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미처 5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도 다 있는가. 꼭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아요.”
그는 고참들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그리 놀라지 마셔. 이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앞으론 그보다 더 희한한 것도 볼 거니까. 지금 저 땅에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안 보이시지. 근데 땅이 푹 젖도록 비가 많이 쏟아져 봐. 꼭 거짓말처럼 그 다음날부터 여러 가지 풀들이 돋아나고, 깜짝 놀랄 만큼 빨리 자라나는 거야. 씨가 비를 기다리면서 땅속에 숨어있었던 거지. 그러다가 불볕이 계속 쏟아져 내리면 풀들은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구. 꼭 거짓말 같은 구경 앞으로 많이 하게 될 테니까 너무 그리 놀라지 마셔. 많이 놀라면 심장 나빠지니까.”
어느 고참이 담배연기를 풀풀 날리며 놀리듯 어르듯 말했다. 그렇게 한바탕 우박이 쏟아지고 나면 이런저런 피해가 적지 않았다. 특히 승용차들의 피해는 컸다. 앞뒤의 차창이 깨지는 것은 예사였고, 범퍼와 지붕 그리고 트렁크도 우글우글해지고는 했다. 일과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서도 문태복은 오목가슴을 계속 쓸었다. 그러나 무엇이 얹힌 것 같은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샤워를 해도 전처럼 몸이 개운하거나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는 소변을 보다 입을 딱 벌리며 몸을 움츠렸다. 요도가 뜨끔하더니 그 아픔이 속으로 깊이 찌르르 퍼지고 있었다.
담석증!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며칠 전부터 그런 느낌이 스치고는 했지만 애써 외면하고 피해왔던 생각이었다. 오줌 나오는 것이 시원찮은 것 같고. 뒤끝이 깨끗하지 않고 오줌이 좀 남은 것처럼 께름칙한 느낌이 들 때부터 담석증의 불안이 마음에 서리기 시작했었다. 체한 것 같은 느낌도 그 임시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니기미. 재수 옴 붙게 담석증이면 어쩌지.’
문태복은 신경질적으로 가래를 돋우어 내뱉으며 바지 지퍼를 올리고 돌아섰다.
“이보쇼 문 씨. 오늘 밤에 화끈한 판이 벌어지는데 어찌 한 다리 껴 보시지.”
한 사람이 다가서며 귓속말을 했다.
“일 없시다.”
문태복은 고개를 외틀었다.
“이거 왜 이러시나. 하룻밤 잘만 돌리면 왕창 반년 치 일한 걸 잡는다니까. 서울 집값은 1년에 두 배 이상 치솟는데 여기서 쌔빠지게 일해 봤자 말짱 도로아미타불이지. 밤에 몇 탕만 잘 잡으면 팔자 고친다니까. 이거 하고 싶어 한다고 아무나 붙여주는 것 아니라구. 고참으로 믿을 만하니까 붙여주는 거지.”
“나 왕년에 그 빌어먹을 그림공부에 미쳐서 그 좋은 월남 경기 싸그리 조져먹은 놈이오. 그래서 또 이 불구덩이 땅에 팔려온 팔잔데 그 짓 또 해서 되겠소? 내 그 짓 또 하면 손가락을 잘라버릴 결심을 하고 여기 왔소. 아니. 좆대가리를 잘라버릴 참이오.”
문태복은 일부러 끝말을 덧붙였다.
“알았소, 알았소. 평양 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니까.”
그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쓴 얼굴로 돌아섰다.
‘개새끼. 믿을 만한 고참 좋아하시네. 고참한테 돈 있는 것 알고 저 지랄이지.’
문태복은 그 바람잡이 뒤에다 대고 침을 내뱉었다. 노무과에서 단속을 해대는데도 노름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노름은 단속을 피하느라고 막사에서 하지 않았다. 취침시간이 시작되면 살짝살짝 철망을 넘어가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 전짓불을 밝히는가 하면. 전화선이나 가스관 같은 것들을 지하에 함께 매설할 때 쓰는 자재인 커다랗고 네모난 시멘트관 속에 들어가 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노름이 계속되는 것은 야근비를 받아 수중에 돈들을 지니고 있었고, 그 바람잡이 말마따나 국내물가가 폭등하고 있으니까 그 손해를 노름으로 벌충하자는 바람이 일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태복은 화투짝을 쥐고 싶은 유혹을 성욕이나 흡연욕만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화투짝을 쥐기만 하면 곧 한판을 쓸어 잡을 것같이 손끝이 간질간질해지고 전신이 스멀거리면서 정신이 어지러운 듯 어릿거리는 듯 들떠 오르고. 다급한 갈증처럼 허둥거리게 하는 그 유혹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먹을 부르쥐고 몸을 떨면서 그 유혹과 싸워냈다. 또다시 월남 때의 신세가 될 수 없었고. 이제 아내와 아들이 있는 몸이었다. 그리고 월남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자신은 노름에 남달리 재빠른 솜씨나 특출한 재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두 차례씩이나 연장해 가며 2년 반 동안 고생한 것을 망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택시 한 대가 꿈이었지만 아들이 태어나자 집 한 채를 더 장만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꿈이 그렇게 커진 것은 꼭 아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휴가를 가서 보니 생각보다 아내가 알뜰하게 돈을 모아놓았고. 국내 물가는 터무니없이 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물가 오르는 것을 벌충하고 꿈을 키우기에는 사우디밖에 없었다. 문태복은 식판을 놓고 앉았지만 입맛이 돌지 않았다. 배는 고픈데 식욕이 생기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라서 그는 손 무겁게 숟가락을 들었다.
“이봐. 그 소문 들었어? 3호 숙소 이 씨 얘기 말야.”
문태복의 옆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이 씨 얘기? 모르는데. 왜 또 마누라 빵구 났다는 소식 왔나?”
“글쎄 그렇다니까. 여동생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새언니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멋을 심하게 부리기 시작하더니 요새는 자꾸 집을 비우고 밤에도 늦게 들어오고 그런다고 썼더라는 군.”
“그년 그거 탈났군, 그래서 이 씨는 어쩌는 거야?”
“어쩌기는. 눈이 뒤집혀서 당장 귀국 신청했지.”
“그나저나 개 같은 년들이 왜 그리 많지? 즈네 남편들이 얼마나 죽을 고생해 가며 벌어 보낸 돈인데 그 돈을 가지고 놀아나나 그래. 그게 어디 그냥 돈이야? 피를 짜낸 거지.”
“그게 다 여기가 얼마나 더운지 몰라서 그래. 백 번 말하면 무슨 소용 있어. 우리도 말로만 듣고는 여기가 이렇게 더울 줄을 몰랐잖아. 방법은 딱 한 가지가 있어. 마누라들을 모두 여기로 끌어와 열흘씩. 아니 닷새씩만 남편을 따라 다니게 하는 거야. 그리 되면 바람피우는 년 하나도 안 생길 것 아니겠어.”
“그거 기막힌 방법이지만 회사에서 그리 해줘야 말이지. 또 사우디에서는 딴 나라 여자들은 받아들이지도 않잖아. 위문단이 와도 여자 연예인은 못 오는 판국이니. 좌우긴 그 기막힌 돈을 뿌려가며 바람피우는 년들도 죽일 년들이지만. 남편 사우디 간 여자들만 노리는 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 해.”
“그나저나 경찰은 뭐하고 있어. 그런 놈들 다 소탕하지 않고.”
“시장스런 소리 하지 마슈. 데모 막고 도둑놈 잡기에도 손이 모자라는 경찰이오.”
어느덧 이야기는 같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번져 있었다. 그 이야기는 근로자 모두가 분해하고 열을 내는 공동 화제였다.
“그 택시 운전수놈들부터 잡아 족쳐야 돼. 그놈들이 월급 받는 날이면 은행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다가 돈 받아가지고 나오는 여편네들을 꼬신대잖아.”
“그런 못돼먹은 새끼들이 그렇지 않은 운전수들 속에 섞여 있을 텐데. 그걸 무슨 수로 가려 내냐 그거요. 손님 태우는 거라고 하면 그만이지.”
“더러운 새끼들! 여편네들 후리는 건 그놈들만이 아니야. 재작년부터 카바레들이 신바람 나고 있대잖아. 미친년들이 카바레에 가서 돈 뿌리면서 거기 빌붙어 사는 건달새끼들하고 놀아난다는 거야.”
“하여튼 도리 없어. 각자가 제 여편네 꼼짝 못하도록 지키게 하는 수밖에는.”
“그래요. 여자가 정숙하다는 건 말짱 헛소리라구요. 여자하고 사기그릇은 내돌리면 금이 간다는 옛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여자? 그걸 왜 요물이라고 했겠어. 세상에 못 믿을 게 여자니까 다들 미리미리 단속 잘해야 할 거요.”
그들은 다들 시무룩해져 밥맛을 잃은 눈치였다.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분함과 열기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문태복은 억지로 밥을 떠 넣으며 황동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우디 바람이 불기 전에 벌써 자신에게 돈 많은 여자들을 낚는 요령을 가르쳐준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날마다 여자들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별난 정력을 무기 삼아 얼마나 신바람 나게 날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사우디 오는 것을 마다했던 것은 그런 꿍꿍이속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문태복은 아내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아내는 엄한 친정아버지 밑에서 함부로 외출도 못하고 살고 있었다.
“뭐. 여자들이 놀아난다고? 세상 망조로다. 남자들이 그 더운 타국으로 돈을 벌러 갔으면 여자들은 하루 세 끼를 두 끼로 줄여가며 돈을 모으고. 품행을 춘향이처럼 하는 게 도리지 어디서 놀아나길. 놀아나? 자넨 아무 걱정 말게. 내가 꼼짝달싹 못하게 닦달할 테니까 자넨 그저 몸 건강하게 돌아와.”
장인은 딸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돈도 철저하게 간수해 주었다. 그런 장인을 보아서도 다시는 화투짝을 손에 쥘 수 없었다.
해외 근로자들의 아내들이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국내에서도 수많은 소문으로 퍼지고 있었다. 어느 근로자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를 아내가 받지 않고 엉뚱한 남자가 받더란다. 그 근로자는 놀라 ‘당신 누구야?’고 했더니 상대방은 오히려 당당하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하더란다. 어떤 여자는 남편에게 김을 보냈다. 그 남편은 김을 두 친구하고 나눠 먹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죽고 말았다. 김에 청산가리가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어떤 근로자는 3년 만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사글세방에서 굶주리고 있고 아내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아내가 거액 노름판에 끼어들었다가 집까지 다 날리고 쇠고랑을 찬 거였다. 그 남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쥐약을 먹고 말았다. 그런 사태는 소문으로 끝나지 않고 주간지들의 기삿거리가 되면서 사회문제로 등장했고. 마침내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라는 대중가요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아빠가 떠나신지 사계절이 갔는데 낯선 곳 타국에서 얼마나 땀 흘리세요. 오늘도 보고파서 가족사진 옆에 놓고 철이 공부시키면서 당신만을 그립니다. 염려 마세요. 건강하세요. 당신만을 사랑하니까.”
이 노래를 텔레비전과 방송에서 틀어대면서 금방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방송에 자주 나오는 것은 중동에 있는 근로자들이 앞 다투어 신청곡으로 뽑기 때문이었다.
문태복은 날이 바뀔수록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속은 더 더부룩해지고 오줌 누기는 힘들어졌다. 설마설마 했지만 담석증이 거의 틀림없었다.
“어이 문 씨. 내일 쉬는 일요일인데 리야드 나가?”
“빌어먹을. 거기 간다고 뭐 먹을 것 있어?”
문태복은 짜증스럽게 내질렀다.
“됐어. 안 갈 줄 알고 물은 거니까. 내일 개 서너 마리 잡고 한바탕 기분 풀 거니까 싸대기 담을 돈 내놔.”
“씨발. 개고기고 싸대기고 다 싫어.”
문태복은 더욱 신경질을 부렸다.
“아니. 왜 그래? 자네 어디 아퍼? 요새 계속 기운 없어 보이고. 저기압이고 말야.”
“아프긴 어디가 아파. 이젠 날짜 채우기가 넌덜머리가 나서 그렇지. 얼마야?”
문태복은 속내를 싹 감추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의무실에서 진단이 내려질 때까지는 아픈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괜히 남들에게 지는 것 같은 기분이 싫었던 것이다.
“제대 날짜 받아둔 병장 기분이라 그거지? 그 심정 알만해.”
문태복은 다음날 개고기보다는 싸대기를 더 많이 마셨다. 오줌이 잘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거 말야. 개 기르기 시작한 건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야. 이건 첨에 누가 생각해 낸 거지?”
“누가 따로 있어? 싸대기 만드는 것처럼 여러 사람 생각이 이리저리 모아진 거지.”
“오늘 세 마리 잡았으니까 이제 몇 마리 남았나?”
“뭐. 걱정할 것 없어. 그 새끼들 날마다 배터지게 먹고 하는 일이라곤 흘레붙고 새끼 낳아대는 것밖에 없으니까.”
“그나저나 그것들 흘레붙는 걸 보면 열 받친다니까. 누구 약 올릴 일이 있어서 그리 오래 붙나 그래.”
“그래. 개새끼 숫놈 팔자가 왜 그리 부러운지.”
“아이고. 부러울 것도 많겠다. 그렇게 부러우면 암놈 한 마리 끌어내서 한판 붙어봐.”
“그게 쉽게 빠지기만 한다면 당장 붙지. 근데 사람은 거기에 한번 물리면 너무 오래 빠지지 않아 결국 죽게 된다잖아.”
“그게 사실일까?”
“아니 죽은 사람 있잖아.”
“뭐? 우리 근로자 중에?”
“옛날얘기에.”
“치워라. 싱거운 소리.”
“그렇게 시시한 소리 하지 말고 누가 제대로 된 음담 한번 해봐.”
“더 할 게 뭐 있어야지. 그동안에 다 풀어먹어 누구나 밑천 거덜난지 오랜걸.”
“신참들 있잖아. 신참. 거 윤 씨 한번 해 보슈.”
“그래. 신참들은 고참들 덕에 개고기 공짜로 먹었으니까 그 값을 해야지.”
“윤 씨. 술맛 나게 아주 쌈빡한 것으로 하나 해봐.”
“이거 참. 별로 아는 게 없는데요. 그냥 인사로 한 가지 하겠어요. 저어. 고추농사 얘긴데요....... 어떤 마을에 홀아비와 과부가 고추농사를 지어먹고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과부네 고추밭은 잘되는데 어떻게 된 것이 홀아비네 것은 잘 안 되는 겁니다. 과부가 무슨 특별한 거름을 하는 눈치도 아니고. 홀아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홀아비는 그 이유를 꼭 알아내려고 숨어서 망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밤이 되자 과부가 광주리를 이고 그 큰 방뎅이를 마구 흔들어대며 밖으로 나가는 것 아닙니까. 홀아비는, 아니 저년이 이 밤중에 어디를 가나 싶어 살금살금 그 뒤를 밟았지요. 그런데 과부는 고추밭으로 가더니 밭두렁에 광주리를 놓고 거기다가 옷을 홀랑홀랑 벗어던지는 것 아닙니까. 곧 옷을 다 벗어버린 과부는 희고 큰 방뎅이를 더 흔들어대며 밭고랑을 마구 뛰어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고추들이 쑥쑥 커지는 겁니다. 옳지. 옳지. 바로 저거로구나! 홀아비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두 딸을 불러 앉히고 그 이야기를 다 한 다음. 너희들도 당장 오늘밤부터 그리 하라 일렀습니다. 두 처녀는 어쩔 수 없이 밤이 되자 고추밭으로 나가 옷을 다 벗고 밭고랑을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고추농사를 완전히 망치고 말았습니다. 고추들이 커지다 못해 다 터져버렸거든요.”
“으와 하하하.......”
“어 허허허.......”
그들이 개고기를 원할 때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일삼아 개들을 기르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도들은 개를 악마로 취급하는 까닭에 사우디사람들은 집에서 전혀 개를 기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우디의 개들은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들개였고. 생김도 머리가 작고 네 다리가 날씬하게 길면서 가슴이 쫙 벌어진 대신 배는 홀쭉하게 달라붙어 야성을 풍기고 있었다. 그 개들은 반 늑대처럼 사나울 뿐만 아니라 생김대로 어찌나 날쌘지 자동차로 협공을 해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먹이를 끼워 덫을 놓기도 하고. 새끼를 잡아 묶어놓고 유인을 하기도 하고 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사육이었다. 날마다 식당에서 버리는 음식도 많았고. 캠프는 넓어 개들을 기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캠프의 구석지. 식당의 쓰레기들을 내다 버리는 곳 옆에 개 사육장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암수 네 마리였던 개는 배불리 잘 먹으면서 새끼들을 많이 낳았고, 그 새끼들도 잘 먹으면서 쑥쑥 자라났다. 개들이 스무 마리로 불어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쉬는 일요일이면 마음 놓고 개고기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사무실에서는 뒤늦게 개 기르는 것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 했다. 그건 하등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었고. 근로자들의 건강을 위해 오히려 회사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문태복은 다음날 오줌을 누는데 더 고통을 당했다. 오줌이 잘 나오라고 싸대기를 많이 마셨는데 그게 되레 탈이 된 모양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일과를 마치고 의무실부터 찾아갔다.
“담석증이 좀 심해요. 일단 리야드 병원에 입원하도록 합시다.”
의사의 말에 낙담하며 문태복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완치는 되겠습니까?”
“얼마간 치료를 해봐야 알겠는데. 안 되면 부득불 귀국을 해서 완치 시켜야지요.”
문태복은 집까지 장만하려던 꿈이 깨지는 것만 같아 전신의 맥이 풀렸다.
“사무실에 연락해 놓을 테니 내일 입원하도록 준비해요.”
문태복은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며 터벅터벅 의무실을 나왔다. 이튿날 아침 문태복은 사무실의 승용차를 타고 리야드 병원으로 출발했다. 물 값보다 기름 값이 더 싼 땅이긴 하지만 사무실의 그런 배려에 그는 콧등이 시큰해지고 있었다. 물 1리터에는 1리알이고, 휘발유 1리터는 60랄라인 것이 사우디였다. 질주하는 차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문태복은 외롭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왜. 하필 내가....... 걸려도 6개월이 지나 걸릴 것이지....... 가만있거라 보자. 입원을 일주일쯤 하게 되면 어찌 되지? 일당이고 야근비고 싹 공치게 되고, 병원비까지 내게 되면....... 그래서 낫게 되면 모르지만 안 나으면....... 닳아져서 쓸모없게 된 중장비의 부품 꼴이니 보나마나 바로 귀국....... 그리 되면 계약기간을 다 못 채웠으니 항공료는 꼼짝없이 내가 물어야 하고....... 아이고 맙소사. 그 손해가 다 얼마인가....... 그러고 말야....... 담석증을 앓으면 그 힘이 약해진다잖아.......? 그게 사실일까? 하아. 이거 가지가지로 골 때리네.’
문태복은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가물가물 잠에 젖어들었다. 차가 꿀렁거리며 멈추는 바람에 문태복은 잠이 깼다. 병원에 다 온 줄 알고 눈을 비비던 그는 깜짝 놀랐다. 차는 끝없이 넓은 황무지의 한가운데. 고속도로 가장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빌어먹을. 앵꼬 났어요.”
사무원이 주먹으로 핸들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차라리 장가가면서 불알 떼놓고 가는 게 낫지. 이 넓은 땅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문태복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꺼냈다.
“항상 만땅 채워진 줄 알았지 누가 이럴 줄 알았소. 틀림없이 어젯밤에 어떤 작자가 이거 몰고 리야드 갔다 와서 그냥 자빠져 잔거요.”
“뭐. 화낼 것 없시다. 사우디사람들 인심하나 좋으니까 차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름을 좀 얻을 수밖에. 리야드는 아직 멀었소?”
문태복은 느긋하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고속도로에서 고장 난 차를 보면 줄줄이 차를 세우고 고장을 고쳐주려고 마음 합해 애쓰는 것이 사우디사람들이었다.
“한 시간 반 왔으니까 한 30분 정도 남았어요.”
“그럼 기름 얼마 안 얻어도 되니까 걱정 놓으쇼.”
문태복은 여전히 태평스러웠다. 사우디사람들은 기름이 떨어져 멈춘 차를 보면 으레 자기 차 기름을 빼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태워달라고 손을 흔들면 열에 열이 다 정거를 하지 그냥 지나가 버리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차에서 내린 문태복은 뒤로 돌아서 바지 지퍼를 내렸다. 저만치 앞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뼈를 드러내기 시작한 낙타의 형체였다. 낙타의 시체는 물기라고는 없이 바짝 말라비틀어져 아직 가죽이 남은 부분부분도 앙상한 뼈의 모양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불볕 쏟아지는 더위와 건조한 날씨 속에서 낙타의 시체는 썩지 않고 바짝 마른 상태에서 거센 바람이 불때마다 가루로 날아가고 있었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치르고 있는 풍장이었다.
10여분쯤 지나자 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무원은 두 팔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문태복은 어쩌나 보자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차는 어김없이 그들의 차 뒤에 와서 멈추었다. 사무원이 밝아진 얼굴로 뛰었다. 사무원이 그 차에서 내린 남자에게 손짓을 해가며 한동안 말을 했다. 그 남자는 “오케이. 오케이” 하며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우디사람들 인정 많고 인심 좋은 건 참 감탄할만해요.”
다시 차를 몰기 시작하며 사무원이 흡족하게 웃었다.
“초면인데도 물건 값 모자라는 걸 다음에 갚으라고 외상을 주고. 놀이터에서 식구들이 모여앉아 밥을 먹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권하고, 우리나라하고는 영 딴판이죠. 덥지만 않다면 끝내주는 나란데 말이오.”
“그럼 아마 석유가 안 나올걸요. 석유는 석회석 지질에다 기온이 40도 이상 되는 땅에서 나온다니까요.”
“그게 그런가요?”
문태복은 입원수속을 하고 병실 배정을 받다가 깜짝 놀랐다.
“어머. 한국 분 아니세요?”
한 간호원이 다가서며 한 말이었던 것이다.
“아 예. 하. 한국 사람입니다. 어. 어떤 일이십니까. 한국 분이.”
문태복은 너무나 반가워 마구 말을 더듬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까지 솟으려고 했다.
“네. 저희들도 돈 벌려고 왔지요.”
간호원이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예. 그러고 보니 간호원들도 사우디에 왔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도 같군요. 많이 왔나요?”
“네. 리야드에도 꽤 많아요. 제가 좀 바쁘니까 또 뵙도록 하죠.”
문태복은 멀어지는 간호원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느꼈던 외로움이 가시는 것 같았고. 그 간호원이 그렇게 예뻐 보일수가 없었다. 문태복은 일주일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증상이 심해 별다른 효과가 없자 의사는 퇴원결정을 내렸다. 그건 곧 귀국 조처였다. 조마조마 했던 것이 현실로 닥쳐버려 문태복은 낙심의 눈물을 삼키며 가방을 챙겨들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혼자만 당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귀국하시면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 간호원은 밖에까지 배웅을 나오며 말했다. 사무실에서는 귀국날짜를 사흘 뒤로 정했다. 해마다 사우디로 오는 근로자들이 폭증하게 되자 금년부터 우리나라 비행기가 직접 취항하기 시작해서 귀국 비행기 표는 쉽게 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무실에서는 일 못하게 된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떠나보내려고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고도를 잡자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조국 근대화의 역군. 산업전사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미 조국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여자의 그 낭랑한 목소리에 문태복은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울컥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시끌덤벙하던 기내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다른 근로자들도 숙연한 얼굴로 굳은 듯 앉아 있었다.
47. 싱거운 친구
“어떻게 연락은 됩니까?”
이상재의 목소리는 속삭이듯이 낮았다.
“아뇨. 연락은 안 되구요. 아직까진 무사하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재건대 쪽으로 가끔 편지가 오니까요.”
유일표의 아내 서경혜의 목소리도 잔뜩 억눌려 있었다.
“편지가요.......?”
이상재의 눈에 즉각적으로 놀라움이 드러났다.
“너무 걱정 마세요. 돈이 필요할 때면 가명으로 안부 편지를 보내는 거니까요.”
“아. 그렇군요. 그래도 그거 조심해야지요. 이만저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근데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재건대에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모르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이상재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해해 주세요. 모루는 게 약이라는 말 있잖아요. 알면 아는 게 죄가 되는 세상이라.......”
“예. 그렇기도 하지요. 허지만 일표하고는 어디 그냥 그런 친구인가요. 형제나 다름없는 걸요.”
“네. 고맙습니다. 잘 알고 있어요.”
서경혜는 앉음새가 불편한 듯 몸을 무겁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배는 폭넓은 임신복을 입었는데도 표가 나게 불렀다.
“아. 참 그러니까....... 그....... 아기는 언제나........”
이상재는 몹시 어려워하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네. 일정이 얼마 안 남았어요.”
자율 반응인 듯 서경혜의 손이 배로 갔다.
“이것 참. 병원은 정해져 있습니까? 혹시 아니면 내가.......”
“네. 처음부터 다닌 병원이 있어요. 그이하고 친한 강자숙이란 분이 소개해준 병원인데. 원장님이 아주 잘해 주세요.”
“아 예.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병원에 가시게 되면 바로 연락주세요. 집사람이 나서서 돕도록 할 테니까요.”
“네. 고맙습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한테도 손윗동서가 생겼잖아요.”
서경혜는 수줍게 웃었다.
“아. 그렇지요. 그 형님네는 잘 지내십니까?”
“네. 두 분 다 행복해 하세요.”
“그런데....... 그 형님이나 서경혜 씨나 이번에 고통을 당한 것 아닙니까?”
“네. 아주버님도 저도 한 차례씩 조사를 받았어요. 저는 다행히 임신한 몸이라 쉽게 끝났는데 아주버님은 하룻밤을 새우는 고생을 하셨어요. 그렇지만 그 단체가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고 있지는 않아서 아주버님도 별일은 없이 풀려나셨어요.”
그때의 일이 되살아 오르는지 서경혜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지면서 긴장의 빛이 스쳐갔다.
“그만하기 다행입니다만. 고생들 참 많이 하셨습니다. 시일의 길고 짧음과 상관없이 그런 일 당하면 심적 고통이 극심해지니까요. 나도 투위 관계로 서너 번 경찰서에 끌려가 봤는데. 그거 사람이 못할 짓입니다.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요.”
서경혜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가만히 눌렀다. 그때 경찰서에서 풀려난 다음 뱃속의 아이가 이틀 동안이나 심하게 꿈틀거리거나 발길질을 해댔던 것이다. 그리고 배도 뜨끔뜨끔 아팠다. 너무 겁이나 병원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는 대뜸 무슨 충격 받은 일 없었느냐고 물었다. 산모가 받는 충격을 뱃속의 아이도 시차 없이 그대로 받는다는 거였다. 안자경 원장은 정성스레 배를 어루만지며 따스하게 위로를 해주고는. 음악을 들으며 신경을 안정시키고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빨리 그 기억을 잊을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지가 않았다.
“일표가 하는 일은 올바른 일이고, 누군가는 꼭 해야 될 일이니까 힘내세요. 이거 얼마 안 되는데 일표한테 보낼 때 보태서 보내주세요.”
이상재는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이 선생님도 형편이 어려우신데요. 아주버님이랑 재건대장님이 다 알아서 하고 계세요.”
“그렇더라도 이런 돈은 받는 게 예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건 돈이 아니라 마음이잖아요.”
“.......”
서경혜는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며 돈 봉투를 받아 넣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건강 잘 살피세요. 일표 걔. 우리 친구들 중에서 말도 제일 잘하고. 운동도 제일 잘하고. 눈치도 제일 빠르고. 제일 똑똑했으니까 아무 탈 없이 무사하게 견뎌낼 겁니다. 또 들르도록 하지요.”
“그럼.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서경혜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상재에게 인사했다.
“그럼요. 나오지 마세요.”
혹시 감시하고 있을지 몰라 다방 같은 데서 만나지 않고 이상재는 직접 사무실로 찾아든 것이다. 그저 출판사에 드나드는 사람으로 꾸미는 것이 가장 안전할 듯싶었다. 이상재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허진을 찾아가기로 했다. 직위가 올라갈수록 바빠지는 허진과 따로 약속시간을 잡기가 어려워 바로 회사로 찾아갔다. 짤막한 틈새시간을 이용하는 데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허진은 또 긴급회의에 들어가고 없었다.
“회의가 몇 시에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여 비서는 친절하게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기다릴 생각 말고 돌아가라. 는 거부가 매섭게 서려있었다.
“서로 바쁜 몸이니까 온 길에 잠깐 만나야겠소. 가능하면 친구 이상재가 와있다고 메모나 좀 전해주시오.”
대기업들의 사옥이 턱없이 크고 으리으리한 것이 마땅찮고. 출처 불명의 제복을 입은 수위들이 현관에서부터 까탈스럽게 구는 것이 언제나 비위 상하는 이상재는 이렇게 말하며 손님용 의자에 주저앉았다.
“중요한 긴급회의 때는 메모를 전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알았소. 그냥 기다리겠소.”
이상재는 봉투에서 교정지를 꺼냈다. 사무실에서 교정을 보나 여기서 교정을 보나 매일반이었던 것이다. 교정을 열 쪽쯤 보아 넘기는데 허진이 돌아왔다.
“아니. 웬일이야? 오래 기다렸어?”
“차분하게 교정 보고 있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들어가자. 그런데 어쩌지? 지방 공장에 급히 내려갈 일이 생겨서 따로 다방에 갈 시간이 없으니까 여기서 그냥 커피 한잔해야 되겠는데.”
허진이 자기 방으로 앞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러자. 시간 걸릴 얘기 아니니까.”
“앉아라. 요새 출판사는 어떠냐? 살기가 좀 나아져서 그런지 독서 인구는 늘어나는 추세라며?”
“바쁜데 문화면 기사도 읽냐? 그런 추세이긴 한 것 같은데 우리 출판사는 아직 신나는 꼴이 없어. 그저 그렇다.”
“하다 보면 대어가 잡힐 때도 있겠지. 너도 바쁠 텐데 어쩐 일이냐?”
여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이상재는 여 비서가 나가길 기다려 입을 열었다.
“너. 일표를 위해서 돈 좀 내놔야 되겠다. 많은 돈은 아니고 용돈 정도로.”
“왜 무슨 일 생겼냐?”
커피 잔을 들던 허진이 눈치 빠르게 반응했다.
“응. 나도 뒤늦게 알았는데 지금 도피중이다. 그 노동운동 문제로 수배를 당하고 있어.”
“자식 참. 결국 그렇게 됐구나. 지금 어디 있는데?”
허진이 한숨을 쉬었다.
“부인도 몰라. 나 지금 부인한테 돈 좀 전하고 오는 길이다. 돈은 어떻게 전해지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더라.”
“그래. 피해 다니자면 돈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 그나저나 그놈도 어지간히 억세고 독한 놈이야. 가정환경이 그러면 그런 위험한 길은 피해서 좀 편하게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꼭 미련한 곰처럼 그 길을 가다가 이런 일까지 당하게 되니 말야. 그래. 고등학교 때 다른 애들은 별 관심도 없는데 그놈이 나를 돕고 나섰을 때부터 벌써 다른 데가 있었던 놈이지. 그놈이 재건대 야학에 발을 디민 것도 나 때문이었고, 거기서 끝까지 버티면서 노동운동에까지 나서게 된 것도 충분히 이해는 해. 그놈은 날 욕하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기업 자본을 형성시켜야 하는 우리 현실은 또 다르거든. 어쨌든 그놈이 무사해얄 텐데.”
허진은 아까보다 더 진한 한숨을 쉬며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돈을 다 꺼내 이상재에게 내밀었다.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며칠 있다가 다시 한 번 들러줄래?”
“아니. 이것도 너무 많아. 용돈 정도라니까.”
“나 지방 다녀와야 하니까 며칠 있다가 꼭 다시 와줘. 내가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어서 그랬다만. 오늘날 내가 있는 게 다 누구 덕이냐? 일표하고 너희들이 도와준 덕 아니냐? 그걸 잊으면 사람이 아니지. 이런 때 아니면 내가 언제 일표를 도울 수 있겠니. 일표는 나 같은 놈 돈 필요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말야.”
“그래. 고맙다. 너 바쁘니까 이만 가야겠다.”
이상재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일어섰다. 허진의 깊은 속내를 알게 되어 그렇게 마음 흐뭇하고 개운할 수가 없었다.
“새끼. 고맙기는. 고생은 혼자 다하고 다니면서.”
허진이 이생재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가장 괴로웠을 때는 노동자들에게 좀 심하게 하지 말라는 일표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때였어. 여긴 내 회사가 아니라 난 고용인일 뿐이잖아. 그리고 너한테 기업인의 입장만 강변했던 것은 과도기적인 우리 현실도 그렇지만. 더 많이는 나 스스로의 의식을 그렇게 만들고 무장시키려는 일종의 자기 최면이었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선 이 현실에서 버텨나갈 수가 없으니까. 기업마다 노동착취가 자행되고 있고. 제대로 사람대접 못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억울한 것을 누가모르냐. 허지만 그런 말 다 하고 살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괴롭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오며 허진이 한 말이었다.
“그래. 일표도 네 입장 이해할 때가 오겠지.”
“아니야. 이것도 다 변명일 뿐이겠지. 또 보자.”
허진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재가 사무실에 돌아오니 사우디아라비아에 간 최주한의 편지가 와 있었다.
“야 임마. 구멍가게 출판사 꾸려가느라고 너도 허덕거리며 힘들겠지만 편지 좀 자주 하지 않고 이럴 수가 있냐. 넌 그래도 글줄이나 쓸 줄 안다는 놈 아니냐. 형제도 눈앞에서 멀어지면 딴 남이 된다더니 내가 수만리 밖에 와 있으니 친구고 뭐고 싸그리 잊어버린 모양이지? 일표 그 새끼도 편지 따먹는 귀신이 돼 버렸으니. 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역시 명언 중에 명언이다. 이곳 더위는 말로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지경이고 상상을 초월한다. 그대로 불길 속에 들어있다고 할 정도로. 한마디로 살인적이다. 그런데다 술도 여자도 오락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해가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 형님의 유일한 즐거움은 고국에서 날아오는 편지를 읽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작당해서 편지 따먹기 시합을 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 친구냐. 이제 내가 절교 선언하기 일보 직전이다.......”
이런 식으로 엄살을 떨어대고 있는 최주한의 편지를 보며 이상재는 비시시 웃고 있었다. 그동안 편지 답장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적이 미안하기도 했다. 더운 데서 고생하는 걸 잘 알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답장 쓰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는 했다. “술도 여자도 오락도 없고....... 편지 읽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이 대목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최주한은 주량은 크지 않았지만 술을 맛있게 마실 줄 알았다. 술이 취하면 남도 육자배기를 걸직하게 뽑을 줄 아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친구가 술 없는 곳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니 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주한은 허진에 비해 직장 운이 너무 없는 편이었다. 부실공사의 여파로 회사가 부도나 실업자가 되는가 하면. 그 다음에 들어간 회사는 여당에 정치자금을 댄 의심을 사 몇 차례 세무조사를 받은 타격으로 휘청거리다가 다른 재벌 회사로 넘어가게 되자 그만두어야 했고.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껴 자기 사업을 해보려고 벼르다가 여의치 않아 1년 가까운 세월만 낭비하고 다시 취직을 했고. 거기서는 지방색이라는 요상스런 덫에 걸려 고전을 하다가 돌파구를 찾겠다며 결국 사우디바람에 실려 머나먼 나라까지 간 것이다.
참 인생이란 묘하고 야릇한 것이었다. 최주한과 허진은 사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이 사회적으로 출세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꼭 학벌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실력으로 판가름 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 둘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학벌로 치자면 최주한이 허진을 단연 압도하는 일류대학이었고, 수출신장시대에 새로운 무기로 등장한 영어실력에서도 최주한은 카투사라는 이상한 군대에서 3년 동안 익힌 회화로 그 발음의 유창함은 허진이 오히려 딸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허진은 한 회사에서 뿌리박아 사장이 가장 신임하는 중역의 자리에 올라있었고, 최주한은 고작 관리부장으로 사우디의 폭염 속에서 고생고생하며 친구들에게 왜 답장 빨리빨리 보내지 않느냐고 푸념을 늘어놓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상재는 유일표의 일을 알릴 겸해서 긴 답장을 쓸 마음을 먹었다. 유일표의 일을 알면 최주한은 무척 놀랄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동창인 그들의 우정은 또 다른 데가 있었다. 최주한은 자기 사업을 구상하면서 상대 출신도 아닌 유일표를 전무 자리에 앉힐 생각을 할 정도였다.
이상재는 이틀에 걸쳐 편지를 썼다. 일하는 틈틈이 쓰기도 해서였지만. 편지가 워낙 길기도 했다. 어디 너 소원풀이 한번 해봐라. 하는 마음으로 쓰다 보니 편지는 대학노트 석 장의 앞뒤로 빡빡하게 차는 길이가 되었다. 그건 자신이 제일 길게 쓴 편지였다. 그 편지의 상당 부분은 어디를 떠돌고 있을지 모를 유일표에게 보내는 심정이기도 했다. 월남에서 군대의 그 지루한 시간을 죽이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허미경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그렇게 길어진 적은 없었다. 이상재는 편지를 받고 놀라고 흡족해 할 최주한을 생각하며 우표에 침을 발라 봉투에 붙였다.
“이거 사우디까지 며칠이나 걸립니까?”
이상재는 여직원에게 봉투를 내밀며 물었다.
“15일 정도요.”
여 직원은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화난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무척이나 불친절한 태도였다.
“아니. 그렇게나 오래 걸립니까?”
이상재는 한 1주일 걸리리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 이건 빨라진 거예요. 우리나라 비행기가 뜨기 전에는 20일이 넘게 걸렸어요.”
여 직원은 왜 말이 많으냐는 느낌으로 눈을 치뜨며 툭 쏘는 어투로 말했다. 그 태도는 거만하고 도도하고 불친절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공무원의 전형이었다. 이상재는 기분이 획 상하고 말았다. 더러 공무원들을 대할 때마다 기분이 언짢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그리 불친절 하느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고 돌아섰다. 그런 말을 한다고 고쳐질 그들이 아니었다. 자기들이 대단히 높은 자리에나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길들여진 그 못된 버릇은 달리 고칠 도리가 없는 그들의 고질병이었다. 공무원들이란 국민의 세금으로 먹여 살리는 무리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국민에 대한 봉사의 의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국민위에 군림하여 제 나름의 권력횡포를 자행하는 존재들로 둔갑해 있었다. 그것은 군대에서 폭력행사를 당연시하는 것과 함께 일제 식민지시대의 악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못된 행태였다. 총독부 시절에 일본인 공무원들이 조선 식민지 백성들 위에 얼마나 무도하게 군림했던가. 그 못된 버릇이 세월 따라 고쳐지기는커녕 독재권력이 길어지면서 더 심해져가고 있는 양상이었다. 독재 권력은 정권유지를 위한 한 세력으로 공무원집단을 이용하고. 공무원들은 그 우산아래서 멋대로 부정부패하며 횡포를 일삼고 있었다. 그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공생 관계였다. 나라를 위해 독재 권력은 무너뜨려야하고. 썩은 공무원들을 일소시키기 위해서도 독재 권력은 무너뜨려야 했다. 정직하고 양심적인 공무원들도 적지 않았겠지만, 어떻게 된 것이 눈에 띄는 공무원은 다 그 모양이었다.
이상재는 평소의 불신감이 되살아올라 우울하게 인쇄소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이상재는 교정을 보면서 기분이 차츰 좋아지고 있었다. 짤막짤막한 작품들이 개성 있게 감칠 맛 나고, 끝머리에서 어우러지는 반전들이 상쾌한 묘미를 주고 있었다. 지난번 번역물의 베껴먹기 사건으로 원 선배나 자신은 마음이 몹시 상해 연달아 번역물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기획한 것이 국내 작가들의 콩트집이었다. 번역물에 비해 원고료 부담이 좀 있긴 했지만 또 베껴 먹기 당해 속상할 염려는 없었던 것이다.
“물결출판사 이 선생님. 손님 찾아오셨는데요.”
새 콩트를 교정보며 그 재미있는 내용에 빙긋이 웃고 있던 이상재는 고개를 들었다. 사환아가씨가 교정실 문을 반쯤 열고 있는데 그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형. 오랜만이네. 나야. 김진택이.”
김진택......?
그 이름이 귀에 설어 ‘누구지?’ 하며 기억이 깜빡 하는데.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 이상재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상재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 남자와 악수를 했다. 그의 기억의 수첩은 대학생 때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흑 곰....... 그때의 별명이 어울리게 김진택은 여전히 거무튀튀한 얼굴에 듬직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거 얼마만이야. 이 형도 영감 티 나려고 하네.”
김진택은 헤식은 농담 잘하는 옛날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영감 티? 그럴지도 모르지. 살기 고달프니까. 그런데 이거 어쩐 일이야?”
이상재는 그의 웃음에 화답하느라고 웃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학사주점 시절의 장면 장면들이 이것저것 포개지고 엇갈리고 있었다.
“응. 어디 가서.......”
김진택은 교정실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기색으로 좌우로 눈길을 돌렸다. 조용해야 할 교정실은 뜻밖에도 왁자하게 시끄러웠다. 전화번호부를 만드는 사람 여섯이 저쪽 자리에서 둘씩 마주보고 앉아 그들 특유의 시끄러운 방법으로 교정을 보고 있었다. 전화번호들의 활자는 정말 깨알 보다 더 작았다. 그 숫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오자가 생기기 십상이었다. 전화번호부는 1년 내내 쓰는 것이므로 하나가 틀리는 경우에도 여러 차례 항의를 받을 수 있는 우려가 있었다. 만약 그 번호가 사용 빈도가 높은 영업용일 경우 그 항의는 수백 번이 넘을 수도 있었다. 그런 골치 아픈 일을 막기 위해서 그들은 둘씩 짝이 되어 한 사람은 전화번호를 불러대고 다른 사람은 교정을 봐나가고 있었다. 교정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깜박 조는 것을 막으려는 방법이었다. 세 사람이 제각기 전화번호를 불러대고 있으니 교정실의 소란은 가관이었다.
“이렇게 시끌시끌한 속에서 교정을 보고 있다니 대단하군. 나가지.”
김진택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 대단할 거 없어. 자꾸 듣다보면 둔감해지니까.”
이상재는 교정지를 덮어 봉투에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 인간들은 기본 예의도 모르나? 왜 저리 안하무인이야?”
김진택은 계단을 내려가며 더 참을 것 없다는 듯 불쾌감을 드러냈다.
“다 돈 힘이지. 이 인쇄소에서 최고 고객으로 떠받들거든.”
“최고 고객?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일거리가 돈벌이가 잘 된다 그런 말씀이지. 일반 출판사 조판비보다 저 조판비가 거의 열 배쯤 비싼데다. 출판사에서는 3개월짜리 어음 쪽지 받는데 저 일은 현찰 받고. 다른 정부 간행물 따내는데 저 일은 실적으로 꼽히고. 이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골치 아프군. 오나가나 그놈의 돈. 자본주의 꼬라지는 갈수록 한심해.”
이상재는 문득 그의 끝말이 신경에 걸렸다. 이 친구가 아직도 그때의 생각에 빠져있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마 하며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이상재는 다방에 자리 잡고 앉으며 물었다.
“여기 있는 거야 사무실에서 가르쳐준 것쯤 모를 리 없을 거고, 출판사 하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그거겠지? 이 형은 내가 어찌 사는지 통 몰랐겠지만 난 이 형이 기자 노릇하고, 쫓겨나고 한 것 다 알고 있었지.”
김진택은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권하고는.
“난 그동안 친척이 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에 그만 뒀어. 친척이 하는 회사라고 해도월급쟁이 신세 뻔한 거고. 그래서 내 사업을 하려고 퇴직금 좀 낫게 받아가지고 나왔지. 나도 출판을 해 볼 마음이 있어서 좀 배우려고 이렇게 이 형을 찾은 거야.”
그는 이상재가 물을 것도 없이 이런 말까지 잇대었다.
“배우기는 뭘. 나도 아는 것 별로 없는 초보잔 걸.”
이상재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신경은 딴 데로 쏠리고 있었다. 10년이 넘도록 아무 연락도 없이 지내오면서 그가 자신이 살아온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꼭 감시를 당해온 것처럼 달갑지 않았다.
“초보자긴. 벌써 몇 년이라고. 물결출판사는 유치한 책 안 내고,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쏠쏠하게 팔리는 책들을 갖고 있잖아. 그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다른 출판사들도 출판 잘하고 있다고 알아주던데. 그게 말로 그냥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경험자의 조언을 들으면 훨씬 낫지 않겠어? 옛 우정을 생각해서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좀 도와줘.”
“그야.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지. 그런데....... 출판이라는 것이 과연 할 만한 사업인지 모르겠어.”
이상재는 또 ‘옛 우정’ 이라는 말에 잊고 있었던 그때의 일들이 묵은 사진첩을 빠르게 넘기는 것처럼 스쳐가며 신경이 분산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소득이 증대되면서 출판은 유망업종으로 꼽히던데.”
“글쎄. 그렇게 보는 측면도 있긴 한데. 내가 보기로는 회의가 더 많아. 뭐랄까....... 사업이라는 게 노력을 바치고 세월이 쌓여 가면 축적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출판은 그게 없어. 다시 말하면. 다른 업종들의 특이한 상품들은 그 수명이 10년을 넘어 몇 십 년씩 가는 게 많은데. 책이란 건 국어사전이나 성경을 빼놓고는 아무리 인기 있는 것이라 해도 그 수명이 1년 넘기기 어렵고. 보통 책들은 3개월 정도에서 죽어버려. 그러니까 10년이고 20년이고 바쳐 100종, 200종의 책을 가지고 있어봐야 그건 다 시체고. 언제나 팔리는 새 책을 내려고 쫓기고 허덕거리고 하는 거지. 이런 축적 없는 일이 과연 할 만한 것인지 날이 갈수록 회의하게 돼.”
이상재는 원 선배에게도 하지 않은 내심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난 또 무슨 소리라고. 책이 활명수나 진로 소주 같기를 바랄 수는 없지. 소비자가 특수층으로 한정 되어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출판은 매력이 있잖아? 앞으로 소득을 따라 독자들이 자꾸 불어나면 그 문제는 점차 나아질 거구 말야.”
김진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아주 여유롭게 웃었다.
“음.......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한다면 실망도 적고 해볼 만하겠지. 그렇지만 그런 여유를 가지려면 자금이 꽤나 많아야 할 텐데.......?”
이상재는 ‘영향력’ 이라는 말이 또 신경에 걸렸다. 출판의 영향력이 매력이라 출판을 한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고 무언가 아리송하고 알쏭달쏭했다. 자신은 출판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문. 방송. 텔레비전에 비해 출판의 영향력이란 지극히 미미했던 것이다. 내용 무거운 책일수록 팔리지 않는 풍토에서 그 영향력이란 더욱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자금? 그게 많지 않으니까 이렇게 이 형을 찾아와 그 요령을 배우려는 거지. 좌우간 배우는 건 단숨에 되는 게 아니니까 차차 하기로 하고.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오늘밤 술 한 잔 어때?”
김진택은 붙임성 좋게 거무튀튀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 피워냈다.
“응. 아직 시간이 멀었는데.......”
이상재는 팔목의 시계를 보았다.
“그건 걱정하지 말어. 시간을 다시 정하고 그동안 이 형은 할 일 해. 난 또 어디 갈 데가 있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지 뭐.”
김진택과 헤어져 이상재는 교정지를 다시 잡고 앉았지만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지난날의 기억들로 완전히 점령당해 있었다. 김진택은 농담 잘하면서도 진중했고, 소탈하면서 열성적이어서 학사 주점을 운영해 나가는 일꾼의 한 사람으로 아주 제격이었다. 그는 술심부름을 하면서 재치 있는 농담으로 손님들의 기분을 잘 맞춰냈고. 그가 대학생인 줄 모르는 손님들이 술 취해 하대를 해도 그는 전혀 기분 나쁜 내색 없이 잘 받아넘겼다. 그의 그런 열성적인 봉사는 1주일에 적어도 사흘이라서 회원들 중에 그를 당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점의 운영이 조직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봉사는 곧 조직에 대한 열성이었다. 그는 주점의 봉사에 열성인 만큼 이론도 남들 못지않게 갖추어 회원 토론회에서도 무게 있는 발언을 곧잘 하고는 했다. 그가 남들 에게 좀 빠지는 것이 있다면 대학이 속칭 일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조직은 4.19정신을 이어받아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민중의 삶을 이끄는 지성인의 모임이었다. 그 대상은 모든 대학에 걸쳐 있었지만 회원 가입은 은밀하면서도 까다로운 편이었다. 좋은 대학이라고 해서 가입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불의의 모순에 맞설 수 있는 굳은 의지를 인정받아야 했다. 그 선정 기준은 정의로움을 품고 있는 대학생들의 정서와 잘 부합되었고. 가입의 비밀스러움과 엄격함은 회원들의 자부심과 긍지감을 상승시키는 구실을 했다. 회원으로 먼저 가입한 이상재는 유일표를 추천하려고 했다. 유일표야말로 자신보다 더 그 조건에 합당한 인물이었고, 마음에 들지도 않은 철학과에 다니면서 맥 빠져 있는 그에게 생기를 되찾게 해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유일표의 가정환경이 그런 의욕을 꺾고 있었다. 학사주점이 성업을 이루었던 것은 특별히 술맛이 좋아서도 아니었고, 술값이 싸서도 아니었다. 일반 막걸리 집에서 맛볼 수 없는 특이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대학생들이 무의식중에 갖는 공통점은 스스로 지식인이라는 우월의식이었다. 그런데 그 우월감은 자기보다 나은 지식인들을 향해서는 곧 열등감으로 바뀌게 마련이었다. 지식에 대한 과시욕과 선망이 교차시키는 예민한 감정 변화였다. 학사주점은 상호에서부터 분위기까지 그런 감정을 위로받고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대학생들이 선망하는 신진 지성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술기운에 실린 그들의 유창한 언변은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대할 수 있을 뿐인 그들을 술집에서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대학생들은 자기들도 수준이 한 급 올라가는 기분에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조직이 어느 날 갑자기 통일혁명당이라고 지목되었다. 그와 동시에 대규모 간첩단으로 몰리고 말았다. 그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월남으로 몸을 피해가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건 너무 황당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이었다. 토론회에서 가끔 민족 분단이 의제가 되긴 했지만 통일을 혁명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제가 등장한 일은 없었고. 박정희의 강압정치를 비판한 적은 있지만 간첩 노릇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만약 위에서 혁명적 통일을 위해 이북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낌새라도 보였더라면 단연코 그 조직에 등을 돌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통령일 뿐이면서 황제적 권한을 휘둘러대는 박정희도 싫을 뿐만 아니라 1인 독재로 우상이 되어있는 북의 김도 똑같이 싫었고, 민족 통일에 관한 한 끝도 한도 없이 반목만을 일삼고 있는 남과 북의 정치 집단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사건은 70명이 넘게 기소되었고. 3~4명이 사형. 수십 명이 실형을 받고 마무리되었다. 사형은 감형이 되지 않았고, 실형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옥살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애써 잊으려고 했던 그 조직에 대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았다. 자신은 민족사상연구회에 속했을 뿐인데 수사기관에서 발표한 수사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이 끔찍스러운 내용들로 차 있었다. 민족사상연구회는 통혁당의 하부조직들 중 하나로 되어 있었다. 자신은 그 하부조직들 중에서도 학생회원 이었을 뿐이라 화를 모면한 셈이었다.
이상재는 연달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데....... 김진택은 어찌 되었을까? 그는 학생 중에서도 유난히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그래서 윗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지 않았던가. 그가 나처럼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는 통혁당의 실체를 알고 있었을까.......?’
지난날의 의문에 새로운 의문들이 겹쳐져 이상재의 머릿속은 더 혼란해지고 있었다. 그는 교정보기를 포기하고 새로 나온 교정지를 챙겨가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상재는 그와 약속한 다방으로 나가며 그동안 의식의 저편으로 멀어져 있었던 통일 문제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통일....... 그것은 바쁘고 힘겨운 나날의 삶 속에서 곧잘 잊혀지거나 추상화되기 예사였다. 통일....... 그게 이루어지기는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일까.......? 언제나 그렇듯 또 막막한 회의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쩌면 그것이 통일에 대한 정답일지도 몰랐다. 미국과 소련이 정면대결하고 있는 속에서 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몽상일지도 몰랐다. 그 구도 자체가 통일과는 정 반대였고. 굳이 통일을 하려면 다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전제로 하고 있었다. 다시 전쟁....... 그건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것은 남과 북의 정치세력이었다. 그들은 미국과 소련이 만들어 놓은 구도를 지키는 데 충실했을 뿐 전쟁 없는 통일에 대한 모색은 한 일이 없었다. 지난날 자신이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새삼스럽게 순진무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김진택이 찾아간 술집은 낙원동 뒷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간이2층 집이었다. 그는 그런 술집을 택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듯 경사 급하고 허술한 계단을 거침없이 올라갔다. 대로변에는 큰 건물들이 너무 많이 세워져 무계획 도시개발로 지탄받고 있는데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뒷골목에는 그런 싸구려 술집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건 비정상적으로 팽창일로에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두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진주라고 해요. 술은 뭘로 드시겠어요?”
못생긴 편인 얼굴에 화장을 너무 야단스럽게 한 아가씨가 눈웃음을 치며 술상 옆구리에 앉았다.
“여기도 맥주 있나?”
김진택이 불쑥 물었다.
“그러믄요. 술집인데요. 양주 빼놓고는 다 있으니 염려 놓으세요.”
“그럼 맥주 가져와. 안주는 마른 것 말고 부침개 종류로 하고.”
“어머. 멋진 실속파셔. 맥주홀 가봤자 술값. 안주 값 다 바가지지 뭐. 별것도 아닌 기집애들 팁 값도 왕창 나가고. 여기 잘 오셨어.”
아가씨는 김진택에게 아양을 떨며 흥겹게 아래로 내려갔다.
“출판사들이 갈수록 많이 생겨난다며?”
김진택이 이상재에게 담배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글쎄. 소자본으로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뭐.”
“그게 좋은 현상인가. 나쁜 현상인가?”
“모르겠어. 굳이 나쁘다고 할 건 없지만. 경쟁은 그만큼 치열해지는 셈이지. 책의 수명이 자꾸 짧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고.”
아가씨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술상을 차린 아가씨는 익숙한 솜씨로 맥주병을 따고는 김진택 쪽으로 치우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가씨. 우린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아가씨는 딴 손님 받어.”
김진택이 말했다.
“왜. 내가 맘에 안 드세요?”
아가씨가 금세 토라졌다.
“무슨 딴소리야. 방금 말했잖아.”
김진택이 짜증스럽게 아가씨를 쏘아보았다.
“알았어요.”
아가씨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참 별꼴이 반쪽이야. 여자 있는 술집에 와서 여자 퇴짜 놓는 촌것들 하고는.”
아가씨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큰소리로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뭐 특별한 얘기 있다고 아가씨를 화나게 만들고 그래?”
이상재는 김진택이 따르는 술을 받으며 말했다.
“왜. 아가씨 필요해?”
“이런. 오해하지 말어. 그런 뜻이 아니고. 저 아가씨도 벌어먹고 살아야 되잖아.”
“아. 그런 차원인줄은 몰랐군. 이 형은 역시 그런 속 깊은 데가 있어. 마음에 들어. 나도 그 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데. 허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 우리가 얼마나 오랜만에 만난 건데 조금이라도 우리 얘기 방해받을 순 없잖아. 여자가 끼어들면 얘기가 자연히 그 여자 수준으로 떨어지고, 아까운 시간 괜히 죽 쑤게 되고 하는 게 술자리 꼴들이잖아. 자아. 한잔 쭈욱 하자구.”
김진택은 잔을 내밀었다.
“그도 그렇군.”
이상재는 술잔을 부딪쳤다. 맥주를 대여섯 병 비울 때까지 김진택은 출판에 관해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이상재는 술기운이 퍼져 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충대충 대답해 넘겼다. 그의 머릿속은 낮에 느꼈던 혼란으로 여전히 복잡했다. 그렇다고 그 의문들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야. 이 형은 그때 동지들 중에서 누구하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 있어?”
김진택이 앉음새를 고치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달라져 있었다.
“아니.”
이상재는 고개를 저으며 가슴이 찌릿해지는 긴장을 느꼈다.
“그렇겠지. 다 산산이 흩어졌으니까. 워낙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데다가 수사도 살벌했었으니까. 나도 그동안 소리 소문 없이 움츠리고 사느라고 아무하고도 가까이 지낼 수가 없었어. 그래도 이 형은 대단하다 싶데. 유신에 맞서 투쟁하다 퇴직을 당하는 걸 보면서 옛날의 정의감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어.”
“정의감은 무슨.......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때 김 형은 위가 그렇다는 걸 전혀 눈치 못 챘어? 김 형은 간부급 선배들하고 특히 가까웠잖아. 신임도 받고 말야.”
마침내 이상재는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의문 하나를 꺼냈다.
“그야 물론이지. 내가 일 좀 열심히 해서 이쁨을 받았다 뿐이지 나도 이 형이나 똑같은 학생회원일 뿐이었는데.”
“그런가....... 그거 다 지나간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이상재는 술잔을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 나도 의문이 좀 있긴 한데. 이 형이 느끼는 건 뭔데?”
“글쎄........ 하도 많아서 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술잔을 비운 이상재는 말을 망설이며 고개를 더 갸웃갸웃했다.
“이런 답답하긴. 어디 속 시원히 말해 봐. 우리끼린데 못할 말이 뭐있어. 이제 와서 법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의문 이런 기회에 털어내 버려야지 평생 품고 있을 거야?”
술을 단숨에 비운 김진택은 잔을 이상재에게 건넸다.
“글쎄. 그게 그렇긴 한데.......”
이상재도 잔에 가득 찬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는.
“요새라고 그런 얘기 맘 놓고 해도 되는 세상도 아니고....... ”
그는 떫은 입맛을 다셨다.
“아이구. 걱정하지 마. 이런 술집에까지 귀 달렸나? 아가씨도 없어졌고. 저 떠들어대는 소리 들어 봐.”
김진택은 손가락으로 아래층을 가리키며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아래에서는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들기는 소리에 맞추어 남녀가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말이야....... 먼저 김 형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김 형은 윗사람들이 정말 그런 행위를 했다고 생각해?”
이상재는 차마 ‘간첩활동’ 이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말이 그들을 욕되게 하는 것 같았고. 또 그 말의 위험성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리고 또 하나는. 조직원들에게 무장을 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글쎄. 그거 나도 신문 보도 보고 알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기가 어렵지. 그런 부분은 수사기관에서 과장할 수도 있으니까.”
“응. 그야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은 없어. 한국은 땅이 넓고 넓은 중국대륙도 시베리아 대륙도 아니야. 그렇다고 고엽제가 당해내지 못하는 베트남 정글지대도 아니야. 한국은 손바닥만한 데다가 신고 망이 거미줄처럼 짜여져 있어. 기자가 벽촌으로 취재를 갔다가 신고당해 파출소로 끌려가고. 어떤 소설가가 해변으로 취재여행을 하다가 신고당해 향토예비군들한테 포위당하는 게 한국이야. 이런 나라에서 비밀무장이라는 게 될 법이나 한 소리야?”
“내 생각도 그런데. 다 머리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아.”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럼. 우리는 보지도 못한 최고 수뇌부 몇 명이 월북해서 입당하고. 공작금까지 받아온 건 또 뭐지? 그들이 재판과정에서 그 사실을 시인 했으니까 더 할 말이 없잖아. 그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북쪽을 편들어 통일을 하겠다고? 우리 현실에서 그것처럼 어리석은 망상이 또 어디 있어? 김 형은『6.25전사』읽어 봤는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 미군은 다 철수하고 고문관만 500여명 남은 상태에서 전쟁이 터지자 일본 오끼나와 기지에서 뜬 미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난 것이 불과 사흘만이야. 그 후로 북은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에서 원점으로 되돌아가 전쟁은 끝났어.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첨단무기로 무장한 주한미군만도 수만 명이야. 거기다가 완전히 베일에 싸인 미 C.I.A가 활동하고 있어. 이런 상태에서 북쪽 공작금을 받아 통일할 당을 만들어? 몽상을 해도 어떻게 그런 어이없는 몽상을 할 수가 있어?”
“글쎄. 그걸 몽상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말야....... 그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아? 베트남을 봐. 미군이 두 손 들고 물러났잖아. 그건 미국이 종이호랑이일 수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몰라.”
“그래? 김 형은 베트남에 가보고 나서 그런 말 하는 거야? 나는 베트남에서 군대 말년 보내고, 그 뒤로도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베트남과 우리는 겉보기에는 같은 것 같지만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달라. 외세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었다는 것만 같을 뿐이지 지도자의 성격이나 자연환경은 완전히 다르단 말이지. 호지명은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조국의 독립을 이룩해 낸 그야말로 민족 영웅이야. 그런데 미국이 다시 개입하고 들자 베트남사람들은 자기네 영웅을 따라 다시 한 덩어리로 뭉쳐 끝끝내 독립을 쟁취한 거야. 그에 비해 북의 김은 일제가 폐망해 떠나버린 상황에서 느닷없이 6.25를 일으켜 동족끼리 수백만을 죽이게 했고. 그 결과 남쪽에는 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동시에 미군이 무한정 주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어. 그리고 자연환경이야. 베트남은 고엽제가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나무들이 줄기차게 자라나는 여름뿐인 나라야. 그러나 우리나라는 나무에 잎이 없는 달이 6개월 가까이나 되도록 겨울이 긴 나라야. 그러니 게릴라전이란 아예 성립이 안 되지. 그리고 미국은 국내의 반전 여론과 국제적 압력에 밀리기도 했어. 미국을 과대평가할 것도 없지만. 종이호랑이로 보는 건 더 큰 문제야.”
“응. 듣고 보니 그게 그렇기도 하네. 이 형은 기자 생활을 해서 그런지 아주 논리적이고 주관이 확고하군 그래. 오늘 배우는 게 참 많아. 그나저나 우리가 마음 편케 잘살 수 있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통일이 돼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
“통일? 글쎄. 그거 꿈같은 얘기 아닌가? 양쪽에서 서로 반목을 조장해 대면서 그 위기를 독재 강화에 써먹고 있으니 분단은 갈수록 견고해질 수밖에 없잖아. 한 가지 좋은 예가 있어. 거 김신조 부대사건 있잖아. 난 그 덕에 6개월이나 더 군대에서 썩었는데. 그 사건이 터지자 이쪽에서는 김일성이 곧 쳐내려올 것처럼 난리 법석을 떨며 250만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어. 그걸 보고 저쪽에서는 가만히 있었겠어? 그랬을 리가 없지. 보나마나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 괴뢰도당들이 북침 준비를 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독재 강화의 호기 삼았겠지. 그 맥락에서 통일을 운운하면 어떻게 되지? 재깍 빨갱이로 몰리잖아. 그러니까 어설프게 통일 내세우는 건 바보짓이야. 남과 북이 똑같이 내부의 독재부터 제거해야 돼. 분단을 악용하고 있는 독재 말이야. 내 말 틀려?”
이상재는 술 취한 눈으로 김진택을 쏘아보듯 했다.
“아니. 탁견이야. 술 취하니까 이 형도 아주 달변이네. 오늘 기분 좋게 마셨으니까 이만 갈까?”
김진택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 형. 또 연락할 테니까 많이 좀 도와 줘.”
술집을 나선 김진택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가 아는 건 다 가르쳐줄 테니까 바로 연락해. 다음번엔 내가 살게.”
이상재는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흔쾌하게 말했다. 며칠이 지나도 김진택한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콩트집을 내서 도매상에 넘기느라고 보름 가까이 정신없이 보냈다. 한숨 돌리고 생각하니 그때까지도 김진택한테서는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가끔 생각하며 한 달이 지났다. 그래도 소식이 없었다.
‘싱거운 친구 같으니라고. 출판을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군.’
이상재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를 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