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3-9
39. 타국의 하늘 아래서
이른 아침인데도 더위는 변함없이 후덥지근했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달리 근로자들은 작업복 대신 가지각색의 남방셔츠를 걸치고 샤워장으로 잇따라 가고 있었다. 그들의 거동은 한가로웠고. 진한 흑갈색으로 그을린 얼굴 얼굴마다 웃음과 흥겨움이 담겨 있었다. 확성기에서도 단조롭고 건조한 <새마을 노래가> 아닌 감미롭고도 축축한 애상조의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콧소리나 휘파람으로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침마다 작업장으로 빨리 나가기 위해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던 분위기하고는 전혀 달랐다.
“어이 최 씨. 어젯밤에 딸딸이 잡고 생고생시키더니 거긴 깨끗이 씻었어?”
어떤 사람이 샤워장에서 막 나오는 사람에게 말을 던졌다.
“얼씨구. 딸딸이 잡고 용을 써댄 건 누군데 그래. 난 아무리 마누라 궁뎅이가 그리워 환장하겠어도 설 전날 밤엔 그따위 짓 안 해. 조상님 뵐 면목을 차려야지. 양심도 없이. 이래 뵈도 최 씨가 양반인 것 몰라?”
그 남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맞대거리했다.
“거 말 한번 쌈빡하게 하네. 허긴 어젯밤에 딸딸이 잡고 흔들어댄 놈들은 사람도 아니다. 제삿날 앞두고는 몸을 정히 해야 하니까.”
샤워장 앞에 줄을 서 있던 다른 남자가 받았다.
“아이구. 왜들 이래. 차례상에 절 올리려면서 딸딸이 타령이나 해대는 그 입들은 뭐지?”
또 다른 남자가 퉁을 놓았다.
“아이고 그렇네. 에퉤퉤. 이빨 세 번 닦아야겠다.”
“으흐흐흐....... 그거 말 되네.”
“히히히....... 조상님들도 우리 애로 잘들 아실 거라.”
“그나저나 이렇게 샤워해대면 물 모자라지 않겠어? 중간에서 끊어져 버리면 그거 김새잖아.”
“글쎄.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리 되면 볼 거 있나. 급수조는 몰매 당하는 거지.”
“별걱정들 다 하고 앉았네. 급수조는 물탱크마다 이빠이(가득의 일본말)로 채우고도 물차에는 물차대로 이빠이로 채워두는 것 몰라서 그래?”
“아이고. 뉘 집 아들인지 잘났다.”
“허허허허.......”
“좌우지간 오늘 기분 째지네.”
음력설이었다. 그래서 휴일이었다. 회사에서 휴무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근로자들 스스로가 이틀간의 휴일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들은 음력설을 쇠려고 하루에 두 시간씩 8일 동안 야근을 자청했다. 하루에 여덟 시간 근무. 이틀간의 일을 앞당겨 한 것이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근로자들은 옷을 차려입고 식당으로 갔다. 그들은 차분하고 숙연하기까지 했다.
식당 한 쪽이 넓게 치워지고. 벽면으로는 보통 차례 상보다는 대여섯 배나 큰 차례 상이 차려져 있었다. 차례 상의 크기만큼 제물들도 제각기 모양 갖추어 푸짐했다. 그 차례 상은 회사에서 일삼아 차려준 것이었다. 음력설이면 기를 쓰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 지닌 뿌리 깊은 관습이었다. 그 관습은 어찌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연어가 사생결단하며 제가 태어난 하천으로 되돌아오는 귀소본능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고향에 가지 못하는 근로자들의 그 마음을 위로하려고 신경 써 차례 상을 차린 거였다.
“이거 지방을 써 붙여야 하는 거 아니겠어?”
“어쩌지? 지방은 어른들이 쓰셨는데.”
“솔직하게 말해. 무식해서 한문을 쓸 줄 모른다구.”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한문에 유식한가?”
“우리 노가다들 중에서 지방 척척 쓸 줄 아는 것들이 몇이나 되겠어?”
“그거 한글로 쓰면 안 될까?”
“이런. 격식이라는 게 있지. 가만있자. 사무실 직원들 보고 좀 써 달랠까? 그 사람들은 다 대학물 먹었잖아.”
“그렇잖아도 무시당하고 사는 판에 곱빼기로 무시당하고 싶어서 그래? 어차피 약식이니까 그냥 하자구. 지방이야 고향에서 어른들이 근사하게 써 붙이시지 않겠어?”
“맞어. 맞어. 괜한 걱정할 것 없어. 마음만 정성스러우면 되는 거야.”
근로자들의 수군거리는 말이었다.
“근데 말이야. 차례 상에 술이 없어서야 되나? 이건 앙꼬 빠진 찐빵이지.”
“그야 그런데. 여긴 사우딘데 어쩌겠어.”
“우리 싸대기를 살짝 따르면 안 될까?”
“이거 왜 이래. 당장 비행기 타고 싶어서 안달 났어. 지금?”
“그래. 조상님들도 우리 딱한 처지 다 아시겠지 뭐.”
근로자들은 합동 차례 상 앞에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식당에는 근로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지만 여느 때와는 다르게 분위기는 고즈넉했다. 한 사람이 끄익끄익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손등으로 이쪽저쪽 눈을 훔치며 차례 상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그 이상한 소리는 울음을 참아내느라고 짓눌리다 못한 소리가 삐져나오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저 친구 왜 저래? 남들 다 심란해 지게스리.”
“응. 저 사람 그럴 만도 해. 과부로 다섯 자식을 키운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미처 1년이 안 됐다거든. 자기가 장남인데 타국에서 이 꼴을 하고 있으니 그 심정이 어떻겠어.”
“그거 참 고약하네.”
두 사람이 속삭였다. 근로자들이 모두 차례를 마친 다음 나온 아침 식사는 떡국이었다.
“이거 참. 사람 환장하겠네. 떡국 보니 고향 생각 더 간절해지네.”
“그러게 말야. 눈물이 나려고 해.”
“별수 있나. 이놈의 가난을 면하려면 눈물의 떡국을 먹을 수밖에.”
“허. 그거 그럴듯한 유행가 가사 같네.”
“그나저나 이 떡국은 어떻게 된 거야? 여기서 만들었나?”
“여기에 떡국 빼는 기계가 있어? 비행기 타고 온 거겠지.”
“비행기? 그럼 이놈 이거 세계에서 젤 비싼 떡국일세.”
“그러고 보니 맛이 더 삼삼한데 그래?”
“좌우간 떡국 먹으니까 설 기분은 좀 나네.”
“이거 가지곤 안 돼지. 이따가 싸대기 한잔씩 살짝살짝 걸치고 화투판이 벌어져야 기분이 제대로 돌지.”
“거럼. 거럼. 명절 때 술하고 화투판 없으면 명절 기분 나나. 어디.”
떡국을 맛있게 먹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는 어느덧 명절 기분이 돋고 있었다. 날마다 백광 쏟아지는 폭염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근로자들에게 가장 즐거운 때가 음력설이고 추석이었다. 그들은 그때만은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일을 하지 않고 쉬려고 들었다. 공기 단축을 위해 일요일도 별로 없이 일을 몰아대는 회사에서도 그 기세만큼은 꺾지 못해 큰 차례 상을 마련해 주고는 했다. 집에 갈수 없는 근로자들을 위해 명절에 대형 차례 상을 최초로 차린 것은 포항제철이었다. 공기 단축을 위해 밤낮은 물론이고 일요일도 없이 사력을 다하고 있는 형편에 명절 휴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공사 현장에 대형 차례 상을 차리고 사장부터 큰절을 올리게 되었다. 그것이 화젯거리가 되어 이제 사우디아라비아에 나와 있는 모든 회사들이 음력설과 추석이 오면 당연한 것처럼 차례 상을 걸게 차리고 있었다.
“김 부장. 나 오늘 관리부장하고 제다 좀 나갔다 올 테니 캠프 잘 부탁해요. 저쪽에서 눈치 없이 우리 둘만 초대를 했으니 어쩌겠소.”
소장이 미안한 척 말했다.
“예. 전혀 신경 쓰지 말고 다녀 오십시요. 저는 원래 서양식 초대 같은 것이 어색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잘됐습니다.”
김기돈은 흔쾌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저쪽에서 눈치 없이’ 한 짓이 아니라 눈치가 너무 빨라 두 사람만 부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원 제한은 어쩌면 소장이 직접한 것일 수도 있었다. 관리부장에 비해 공사부장은 돈과 거리가 멀어 공사만 차질 없이 해내면 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신 김 부장은 내일 제다 구경을 나가도록 해요. 근로자들 단체 쇼핑을 인솔할 겸해서요.”
“예. 알겠습니다.”
김기돈은 언뜻 기분이 상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내가 노무과에 지시해 놨지만 김 부장도 이 점을 좀 신경 써주면 좋겠소. 오늘만은 밀주단속과 화투판을 적당히 눈감아 줘도 좋지만. 외출은 절대 금지요. 그놈의 싸대기 마시고 제다 시에 나가는 날에는 우린 망쪼 들어요. 술기운에 차를 마구 밟아대면 제다 시까지는 한 시간 반밖에 안 걸려요.”
“예. 염려 마십시오.”
“그리고. 쥐약 생각나면 저기 있어요.”
소장은 눈을 찡끗하며 돌아섰다. ‘쥐약’이란 관리직과 대사관 직원들 사이에 통하는 술의 은어였다. 현장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는 소장은 대사관의 노무관이나 건설관과 긴밀하게 통하는 사이였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그들은 또 하나의 잘 어울리는 악어와 악어새였다. 노무관이나 건설관은 격려라는 이름으로 현장 사무실을 주기적으로 순회했고. 그들이 거쳐 가면 ‘이번에는 얼마를 걷어갔다’는 수군거림이 직원들의 귀를 간지럽히고 쑤석거리고는 했다. 소장이 알뜰하게 간수하며 어쩌다가 관리직원들에게 딱 한 잔씩 맛보여 주는 양주는 바로 그들의 손을 거쳐 왔다. 대사관의 면책특권이 부리는 마술이었다. 특히 명절 때 위로의 뜻이라며 사무실에 양주 선물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었다. 실무자 선에서 소장이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빈틈없이 뒷바라지하는 인물이 관리부장 이었다. 김기돈은 술을 한 잔씩 얻어 마시는 것으로 족할 뿐 두 사람의 은밀한 업무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돈을 가지고 요령부리는 일들이 비위에 맞지 않았고. 자신의 공사부장 일만을 추슬러나가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김기돈은 소장의 캐비닛에서 양주병을 꺼내 학처럼 목이 긴 유리잔에 술을 따랐다. 양주 특유의 황갈색이 입 안에 물큰 군침이 돌게 하면서 집 생각을 몰아왔다. 집 생각은 언제나 그리움과 외로움을 함께 자극했다. 그는 술을 조금만 입에 넣고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양주의 진하고 독특한 향기와 독한 기운이 혀를 알알하게 하면서 입 안에 두루 젖어들고 있었다. 싸아한 독한 기운과 함께 코로 나오는 향기를 다시 음미하며 그는 눈을 사르르 감았다. 입 안에 화아하게 번진 술은 거의 별다른 느낌 없이 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술이 보약처럼 귀한 곳에 와서 한 잔을 오래 그리고 맛있게 ‘먹으려고’ 개발해 낸 방법이었다. 여기서 술은 확실히 ‘마시는 것’ 아니라 ‘먹는 것’이었다. 씹어야 하는 밥도 그렇게 오래 입에 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김기돈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연기를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뿜자 술맛은 더욱 깊어지고 아련했다.
‘그래. 산다는 것은 참 복잡 미묘하지. 국내에서만 권력과 재력이 얼크러지고 설크러지는 줄 알았더니 수만 리 밖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야. 소장은 노무관이나 건설관을 상대하고. 사장은 대사나 영사를 상대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로 잘들 돌아가는 거지. 그런데. 딴 나라에서 권력과 그렇게 유착해서 사업상 얻는 게 뭐가 있지? 공사를 따낼 때 사우디 쪽에 무슨 작용이라도 해주는 걸까? 들리는 말로는 기름을 한 푼이라도 싸게 사다 써야 하는 한국의 대사관은 늘 사우디 눈치를 보는 입장이지 별 힘이 없다고 하던데. 그런데도 회사들이 꼼짝을 못하는 이유가 뭐지? 약점이 많기 때문인가? 권력이면 무조건 굽실거리는 속성 때문인가? 권력에 밉보여 좋을 것 없고. 권력에 잘해서 손해 볼 것 없다는 한국식 풍조 때문일까? 그런데 한 가지 묘한 현상은 있었다. 대사관에서 사람이 나오면 소장은 더욱 위세 등등해졌고. 근로자들은 표 나게 조심스러워지고 움츠러들었다. 권력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아니.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근로자들은 자기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도 어찌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공사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덕으로 외롭고 힘든 타국에서. 그것도 술을 엄금하고 있는 나라에서 심심찮게 술잔을 얻어 마시며 고달픔을 풀고 있으니 산다는 것은 참 복잡 미묘했다.
김기돈은 다시 술을 조금 머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모를 것이 있었다. 왜 사우디에서는 술을 금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여자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고. 버스. 식당. 상점.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비행기에서도 남녀의 자리를 따로 구분하는 엄격함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사악한 인간들이 품고 있는 간음의 충동을 미리미리 막아 사회의 기본질서를 똑바로 세우고자 하는 이슬람의 율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십 년 전에는 남녀 칠세 부동석이 엄연히 살아 있었으니 그 이해는 더 쉬웠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금하고. 짐승들의 내장을 먹지 못하게 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무슨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땅에서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와 더러운 것이 많이 낀 짐승들의 내장은 그만큼 빨리 부패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술은 왜 그리도 철저하게 금하는 것인지 그들 자신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른 것들은 분명하게 이유를 밝히면서도 술에 대해서는 그저 ‘알라신의 뜻’이라거나 ‘율법’이라고만 했다. 더위가 심한 기온에서 술은 인체에 피해를 심하게 끼치는 것인지? 아니면. 술은 마시기 시작하면 으레 과하지 않기가 어렵고. 그리 되면 엄한 이슬람의 율법을 어기는 실수를 하기 때문인지? 과한 술은 곤란하지만 알맞게 마시는 술은 얼마나 좋은가. 술을 자유롭게 마실 수 없으니 술이 더 그리웠다.
김기돈은 또 술을 핥으며 언뜻 유일민을 생각했다. 유일민은 참 좋은 술벗이었다.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실 줄 알았고. 술을 많이 마시고도 술주정하는 일이 없었다. 거기다가 불행한 처지도 같으니 흉금을 털어놓기가 더없이 좋았다. 그가 옆에 있으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편지를 보냈었다. 자신을 특채해 준 선배한테 얘기해 관리부에 자리를 언질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일민은 사양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집안 사정이 불안한 점이 있고. 플라스틱 사업이 사회적으로 차츰 나아지고 있으니 그 기반이나마 키워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사우디에 오지 않고 사업이 튼튼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갑자기 밖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리고 고함치는 소리와 함께 여러 개의 작업화들이 뛰어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놀란 김기돈은 반쯤 남은 술을 입에 왈칵 붓고 잔을 책상 서랍에 숨겼다. 그리고 다급하게 공사부장실 문을 열어젖히며 넓은 사무실로 나갔다.
“무슨 사고 난 모양인데. 빨리 좀 나가보시오.”
막 일어서고 있는 네댓 명의 직원에게 김기돈은 일렀다.
“예. 나가는 참입니다.”
직원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다. 김기돈은 혀를 차며 담배를 빼물었다. 자신이 책임자가 된 터에 하루가 무사하게 지나가지 못하게 되어 입맛이 썼다. 술을 한잔했으니 혹시 표가 날지 몰라 직접 나가보기도 거북했다. 그리고 에어컨 바람 시원한 사무실에서 열기 끼치는 밖으로 나가기도 싫었다. 외출은 금지되어 있고. 노무과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으니 무슨 큰 사고는 아니리라 싶었다. 또 사소한 일로 싸움을 벌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김기돈은 연거푸 담배를 빨아댔다.
이상하게도 근로자들은 주먹다짐을 자주했다.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는 싸움도 정작 그 이유를 따지고 보면 하찮기 일쑤였다. 양말을 슬쩍 가져다가 신었다거나. 세탁을 하다가 비눗물을 튀겼다거나. 샤워를 하다가 그 물건이 작다고 놀렸다거나. 마누라 흉을 보았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농담까지도 주먹을 휘두르는 싸움거리가 되고는 했다. 서로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고. 걸핏하면 다투는 게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무더위를 참아내야 하고. 힘겨운 일을 참아내야 하고. 그러면서 또 술을 마시고 싶은 것을 참아내야 하고. 여자를 품고 싶은 것을 참아내야 하고. 그러다 보니 근로자들은 욕구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가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폭발시키고는 했던 것이다. 그런 증상을 그들은 ‘사막병’이라고도 했고. ‘사우디병’이라고도 했다. 근로자들은 자기네가 앓고 있는 병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고치지는 못했다. 하긴 그 병은 근로자들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기도 했다. 사우디를 떠나 귀국을 해야 나을 병이지 사우디에 있는 한 점점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근로자들을 매일매일 말썽 없이 다스려나가야 하는 것이 관리자들의 고충 중의 하나였다.
“이 새끼들. 똑바로 못 걸어!”
노무과장이 세 남자를 앞세우고 사무실로 들어서며 외쳤다. 그들 셋 중에 한 남자는 코피를 흘려 입 언저리가 피범벅이었다. 다른 두 남자도 헝클어진 머리에 싸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김기돈은 버티고 서며 엄한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공사부장님. 이 새끼들을 당장 비행기 태워버려야 합니다. 이 새끼들이 글쎄 싸대기 퍼마신 것도 죄고. 화투 친 것도 죈데. 패를 속였다고 패싸움까지 했다니까요. 요런 것들은 더 둘 필요 없이 쓴맛을 보여야 합니다.”
노무과장이 결기 세워 말했다. 장교 출신인 그는 군대식 말버릇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알았소. 처벌에 대해선 이따가 소장님 돌아오시면 결정할 거요.”
김기돈은 노무과장의 말을 무지르듯이 말했다. 그는 노무과장이 자랑하듯 하고 있는 상스러운 군인 티에 언제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오랜 군사독재의 그늘 아래서 터무니 없이 특권계급 취급을 받으며 위세를 떠는 모든 직업군인들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고. 제대를 하고 나서도 취직의 특혜를 누리며 군대식 통솔을 팔아먹고 있는 꼴들이 영 마땅찮기도 해서였다. 그런 감정의 밑바닥에는 신원 때문에 계속 불신을 받아가며 군대생활을 남들보다 몇 배 고달프게 해야 했던 지난날의 아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건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일벌백계.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질서가 안 섭니다.”
노무과장이 마땅찮은 듯 기를 세웠다.
“노무과장. 당신의 임무는 끝났소. 처벌과 징계는 부장 이상에서 논의. 결정한다는 것 몰라요? 나가서 당신 임무를 계속 수행하시오.”
김기돈은 한껏 상급자인 것을 과시하며 사무적으로 잘랐다. 노무과장은 주춤하더니 불쾌한 얼굴로 돌아섰다.
‘단세포 같은 놈! 또 제대 계급을 따지고 싶겠지? 그래. 나 병장 제대했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육군 중위께서 병장한테 당하는 맛이 어떠셔? 이놈아. 세상이란 이렇기도 한 거다.’
화가 나서 꼿꼿하게 선 노무과장의 뒷덜미를 바라보며 김기돈은 이렇게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노무과장은 말썽을 부린 근로자들을 다룰 때면 으레 ‘너 제대 계급이 뭐냐!’ 하고 따지고 들었다. 대학 나온 사람이 전무하듯이 근로자들 대답은 하나같이 ‘병장입니다’였다. 그러면 노무과장의 입에서는 ‘이 새끼. 그럴 줄 알았어. 신성한 육군 중위의 맛 좀 봐!’ 하는 말이 터져나가며 거침없이 ‘쪼인트를 깠다’. 노무과장의 육군 중위 위세는 이상하게도 잘 먹혀들었고. 언제부턴가 그의 별명은 ‘제대 계급’이 되고 말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요?”
김기돈은 고개 떨구고 있는 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공사부장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코피범벅인 남자가 느닷없이 시멘트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울음 터지는 소리로 말했다.
“공사부장님. 저희들도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다른 두 남자도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니. 아니. 왜들 이래요. 다들 일어나요. 잘못은 잘못이고. 이럴 것 까지 없어요. 빨리들 일어나요.”
김기돈은 당황스럽게 말했다. 노무과장이 아까 한 말에 겁먹은 그들은 이제 자신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근로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비행기 태운다’는 말이었다. 그 강제 귀국 조처를 당하게 되면 돈벌이를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항공료도 본인이 내야 하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손해는 막심했다.
“공사부장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요.”
그들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자. 자. 어서 일어나요. 일어나서 얘기해요. 딴 나라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찌 되겠어요. 어서 일어나요.”
김기돈은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을 잡아 일으켰다. 자기들끼리는 피가 터지게 주먹다짐을 하면서도 회사의 힘 앞에서는 그리도 허약한 그들이 딱하고 안쓰럽기만 했다.
“자아. 여기 앉아서 시말서들을 쓰세요. 아까 노무과장이 말한 대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들을 숨김없이 쓰고. 끝에다가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것도 쓰세요. 설이면 기분 좋고 즐겁게 놀 일이지 어린애들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김기돈은 혀를 차며 세 사람에게 종이와 볼펜을 나눠주었다.
“저어....... 시말서만 쓰면.......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요?”
코피 범벅인 사람이 잔뜩 움츠린 채 더듬거렸다.
“그건 아직 몰라요. 소장님이 출타 중이시니까 이따가 돌아오시면 회의를 해야 돼요. 빨리 시말서나 똑바로 쓰도록 해요.”
혹시 방심하거나 지레짐작을 할지 몰라 김기돈은 엄한 표정으로 말하며 냉정하게 외면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일단 사고를 냈으니까 전체의 질서를 위해 그냥 넘길 수는 없고. 설날인 것을 빙자해서 한 이틀쯤 ‘보약을 먹이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술주정. 싸움. 노름 같은 사고를 저지르면 대개 3일에서 5일 동안의 작업정지 징계를 내렸다. 그 작업정지를 흔히들 ‘스탠바이 먹는다’고 했다. 작업정지를 당하면 일당 계산이 안 되니까 그만큼 월급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야근까지 못하게 되니까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되었다. ‘나 스탠바이 먹었어’ ‘그거 몸에 좋은 거니까 많이 먹어라’ 이런 말이 오가다가. 언제부턴가 작업정지 징계는 ‘보약 먹는다’는 말로 변하고 말았다.
“.......이들 세 명은 싸대기를 마시고. 노름을 하고. 싸움까지 벌였습니다. 세 가지 죄를 한꺼번에 저질렀으므로 이들은 당장 비행기를 태워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어제가 설날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선처하여 5일 동안 보약을 먹이는 것으로 조처했습니다. 세 사람은 오늘 제다 시 외출도 금지됩니다. 여러분들도 이들 세 사람의 처벌을 명심하여 오늘 외출에서는 처음서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질서를 지켜 아무 말썽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고. 특히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행동하기 바랍니다. 만약 오늘 사고를 낸 사람은 나라 망신을 시킨 죄로 무조건 비행기를 태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두기 바랍니다.”
다음날 아침 근로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소장이 한 훈시였다. 말썽을 일으킨 세 근로자는 앞으로 끌려나와 고개를 푹 떨구고 서 있었다. 작업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절반이 좀 넘었다. 단체 쇼핑을 나가면서도 작업복을 입게 하는 것은 사고 방지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국 근로자라는 표시를 해서 보호받을 수 있는 이점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일한 결과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무척 좋아 상인들이 친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들도 ‘꼬리’라고 하면 검문소를 무조건 통과시킬 정도였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한국 사람들은 이슬람 율법을 거의 어기지 않는 사람들로 소문나 있었다.
다섯 대의 버스는 서부해안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김기돈은 멀리 뻗어가고 있는 산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산은 산이되 그 산들은 한국의 산과는 사뭇 달랐다. 나무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뼈대가 억세게 드러나 있었다. 강우량이 너무 적어 나무들을 키워낼 수 없는 산들은 강렬한 태양열에 오랜 세월 동안 부대끼면서 푸석푸석 풍화되어 가고 있었다. 평지가 반사막 상태의 황무지인 것처럼 산들도 강한 암석층이 뼈대를 형성하며 이 땅 특유의 풍광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짙푸르고 맑은 홍해와 맞닿은 서부해안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수 천 리 뻗어내리고 있는 산줄기는 헤자즈산맥이었다. 태백산맥이 동쪽에 뻗어내려 한반도의 등뼈 노릇을 하듯이 헤자즈산맥은 서쪽에서 1천 개가 넘는 산봉우리들을 거느리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등뼈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라비아산맥이라고도 부르는 그 산악지대는 동쪽을 향해 차츰차츰 낮아져 황량한 대평원을 이루어내면서 세 개의 거대한 사막지대를 품고. 동부해안에 이르러 드넓은 목초지대와 함께 유전지대를 펼쳐놓고 있었다. 마치 석유는 높은 지대에서 흐르고 흘러내려 낮은 지대에 모여 고인 듯 했다. 그 동부해안에서부터 내륙을 거쳐 서부해안까지 한국의 근로자들은 넓은 길 닦기에 나서고 있었다.
김기돈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이 불볕의 나라에서 자신이 팥죽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 기이하고도 새삼스러웠다. 자신은 불온시되는 신원 때문에 평생토록 딴 나라는 구경조차 못하고 한국이라는 땅이 감옥이 될 줄 알았었다. 그런데 나라에서는 경제활동에 한해서 그 족쇄를 풀어준 것이다. 말이 좋아 경제활동이지 가장 솔직하게 말하면 다급하니까 어서어서 밖에 나가 외화를 벌어오라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말해 나라도 가난을 면하기 위해 법을 느슨하게 풀었고. 자신도 가난을 면하기 위해 낯선 땅으로 뛰어든 것이다. 가난이라는 것. 그것은 잘살고 싶은 욕구에 불을 붙이고. 그 욕구는 목숨을 내거는 힘을 발휘하게 했다. 한국의 근로자들은 하나같이 그 욕구에 사로잡혀 살이 타는 백광 속에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억척스럽게 일을 해대는 한국 사람들을 보고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에 뒤따라 ‘철인들’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철학하는 사람들이란 뜻이 아니라 쇠로 만든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사우디인들의 그런 평가는 기술과 성실을 인정하는 신뢰의 표현이니까 그지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더없이 서글프고 가슴 아픈 칭호이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이 쇠로 만들어졌을 리 만무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뚜렷한 땅에서 나고 자랐으니 더위에 강할 수 있는 체질도 아니었다. 더위에 강하기로는 더운 나라 태국이나 필리핀사람들일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구덩이를 서너 개 팔 때 태국사람은 구덩이를 한 개밖에 파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이 일하는 식으로 필리핀사람들에게 시키면 하루 일하고 사흘을 앓아 눕는다는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태국이나 필리핀사람들은 대개 대만 회사들에 고용되어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오로지 가난을 면하겠다는 일념으로 사우디사람들조차 피하는 살인적인 더위를 무릅써가며 사생결단 일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허약해져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비행기에 실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석회 성분 많은 물 때문에 담석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공사부장님. 저기 순찰차가 세우라는 신호를 하는데요?”
운전수가 김기돈에게 눈길을 보내며 빠르게 말했다.
“아. 젯다에 거의 다 와서 그런 모양이오. 천천히 잘 세우시오.”
김기돈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된 발음을 잘해서 그런지 누구나 제다를 ‘젯다’라고 했다. 버스가 순찰차 앞에 멈추었다.
“쌀람 알라이쿰! 하우 아 유? 위 아 꼬리. 투어 젯다.”
차창 밖으로 상체를 내민 김기돈은 경찰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며 말했다.
“오. 꼬리! 쌀람 알라이쿰!”
교통경찰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하고는 곧 통과신호를 보냈다.
“땡큐. 인샬라!”
김기돈이 다시 거수경례로 인사했고.
“해브 굿 타임. 마이 프렌드. 인샬라!”
교통경찰도 거수경례로 인사를 받으며 외쳤다. 김기돈은 손을 흔들며 ‘쌀람 알라이쿰’과 ‘인샬라’ 두 가지 말이 나타내는 신효한 효과에 또 빙그레 웃고 있었다. 13억 이슬람교도들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그 한곳을 향해 기도하는 성지메카에 있는 알라신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필히 익혀야 하는 두 가지 말이 ‘쌀람 알라이쿰’과 ‘인샬라’였다. 그 두 가지 말만 잘 활용하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밥 굶을 일 없고. 사업도 술술 잘 풀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다른 종교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알라신만이 유일무이한 거룩한 신앙이었고. 그 말씀을 담은 코란은 교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통치하는 국법이기도 했다. 그런 종교의 나라에서 알라신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최고의 경구가 여러모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특히 외국 사람이 그 경구로 인사를 했을 때 이 나라 사람들이 반색하고 환대하는 것은 알라신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코란은 알라신께 경배하는 자들은 모두 형제요 벗으로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쌀람 알라이쿰’은 ‘그대에게 알라신의 가호가 있기를’ 또는 ‘그대에게 알라신이 내리는 평화가 있기를’ 하는 뜻으로 첫인사를 할 때 썼고. ‘인샬라’는 ‘신의 뜻대로’ 라는 뜻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회로애락과 온갖 일들에 폭넓고 다양하게 쓰이고 있었다.
김기돈은 이 나라에 오기 전에 회사에서 주는 영문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그건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와 종교. 문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말의 쓰임새와 효과는 이곳에 와서야 실감 있게 체득했다.
“이 사람들이 열 번 인샬라 하면 우린 스무 번 인샬라 하는 훈련을 해야만 감정 교류가 이루어지고 여기에 적응할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집 계약을 하기로 시간을 정했는데 안 나왔어요. 다음날 만나니 인샬라 하고 그만이에요. 다시 시간 약속을 했는데 또 어겼어요. 그런데 또 인샬라 하고 그만이에요. 그럼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보나마나 벌컥 화를 내고 싸우고 관계를 끊어버리지요. 그래선 사우디에서 못 살아요. 사업할 자격이 없는 거지요. 그 사람은 세 번까지도 약속을 어기고 태평스럽게 인샬라인 겁니다. 그건 시간관념이 없어서도 아니고 신용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이곳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그래요. 모든 게 신의 뜻대로. 그 시간에 못 나온 건 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 거니까 그건 다 신의 뜻이고. 집 계약은 내일 해도 되는 거니까 그것도 신의 뜻이다. 하는 의미라는 걸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한국식의 빨리빨리로 서둘러댔다가는 여기서는 아무 일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백전백패에요. 2년 전에 어떤 회사에서 공사 잔금을 받으려고 간부가 왔었어요. 그 사람은 호텔 커피 샆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지 15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어요. 한국 사람의 급한 성질을 그대로 부려 상담이 깨지고. 잔금 받기를 결국 포기해 버린 겁니다. 그때가 마침 오후 6시쯤으로 그 사람은 배가 고프던 참이었고. 상대방이 자꾸 인샬라 인샬라 하면서 확실한 말을 안 하니까 그 급한 성질이 그만 폭발해 버린 겁니다. 그 사람은 사우디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지요. 한국 사람은 오후 6시면 지칠 시간이고. 사우디사람들은 낮잠 두세 시간 푹 자고 나서 점심 두둑하게 먹었으니까 한참 일할 시간이었단 말이죠. 그 사람이 알백이나 샤르망을 배불리 먹고 가서 질기게 버텼어야 하는 건데. 알아야 면장을 하지요.”
여기 와서 첫날 소장이 한 말이었다. 알백은 사우디 빵에 닭고기튀김과 채소를 섞어 싼 것이었고. 샤르망은 사우디 빵에 닭고기구이와 콩 찧은 것을 싼 고유음식으로 일종의 샌드위치였다. 이 나라의 문화가 한국과 다른 것이 너무 많은 가운데 김기돈은 특히 두 가지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사람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순박하고 인정이 많은 점이었고. 공무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뜻밖에도 영어회화가 유창했던 것이다. 유럽이 가깝고 영국과의 오랜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회화 위주의 영어교육 결과라고 했다. 김기돈은 뒤늦게 회화 공부에 열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인 감리를 상대해야 되는데다가. 가끔 사우디 관리들과도 공사에 대해 얘기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기돈은 아까 교통경찰이 했던 ‘마이 프렌드’라는 말이 정겹게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말을 미국이나 서양 사람들이 했을 때는 형식적인 예의를 갖추는 상투적인 어구일지 모르지만 사우디사람들의 경우에는 ‘우리는 형제’라는 뜻과 같은 신뢰와 절친함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우디사람들에게 ‘형제’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보다 훨씬 더 큰 수확이고 고마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신뢰는 바로 미래의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사우디가 추진하고 있는 국가적 현대화는 이제 시작의 단계에 불과했다. 고속도로 건설이 1단계라면 그 뒤로 항만시설. 도시개발. 공장건설 같은 사업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요르단.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 같은 우리의 주변국들이 한국 회사들의 능력에 대해 문의해 오고 있어요. 그래서 기술이나 성실성이 아주 믿을 만하다고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사회범죄를 거의 저지르지 않고. 복종심과 책임감이 강한 한국 사람들은 역시 아시아의 일등국민이라 다른 나라에도 마음 놓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믿는 형제국가가 된 것은 두 나라의 축복입니다.”
어떤 고위관리가 한 말이었다. 거의 같은 내용의 말을 어떤 신문사의 부장한테서도 들었다. 이슬람의 중심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런 인정을 받은 것은 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인정은 바로 다른 중동국가들로 뻗어나가는 데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보증서였다. 우리는 사우디의 석유를 팔아주고. 사우디는 우리 기술진으로 현대화 건설을 하고. 그거야말로 서로를 돕는 ‘경제적 형제’ 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잘해 중동 여러 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면 한때 요란했던 ‘월남경기’는 비교도 안 될 거였다.
“공사부장님. 다 왔는데요.”
운전수의 말에 김기돈은 그런저런 생각에서 깨어났다. 버스는 제다 시내의 중심상가 앞에 멈추어 있었다. 김기돈은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다섯 대의 버스에서 내린 근로자들은 각 버스에 탔던 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몸 빠르게 정렬을 해나갔다. 그들은 군대식 통솔에 완전히 숙달되어 있었다.
“여러분이 다 잘 알고 있으니까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만 명심하고 쇼핑 잘하면서 즐겁게 하루를 보내기 바랍니다. 출발은 오후 5시 정각입니다. 이상!”
김기돈은 간략하게 훈시를 마쳤다.
“우 화아. 자유다. 자유!”
“가자. 전파상으로.”
“젯다는 나올 때마다 확확 변하네.”
“그래. 꼭 서울처럼 정신 못 차리게 변한다니까.”
근로자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상가로 흩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씩 짝지어 사고 없도록 살피시오. 너무 표 나게 하지는 말고.”
김기돈은 직원들에게 일렀다.
“예.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부장님도 쇼핑하실 거지요?”
직원들이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자 김기돈은 담배를 빼물었다.
“우선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하실까요?”
옆에 선 공사과장이 작업모를 벗어들며 말했다.
“커피보다는 까와가 어떻소? 그거 위 강장제에다 맛도 꽤 괜찮던데.”
“예. 그러시죠. 근데 그게 정력제이기도 하니까 마시고 난 다음은 책임질 수 없습니다.”
공사과장이 킥 웃었다.
“그런 무책임이 어딨소. 예쁜 아가씰 대령해야지.”
김기돈은 농담을 받으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젯다가 하루가 다르게 멋진 도시로 변해가고 있군요. 여기 미화공사를 맡은 삼환기업은 아주 신바람 나겠어요. 한 가지 공사를 따내 10년 넘게 하면서 떼돈 벌고. 기후 좋고 생활여건 좋은 해변도시라서 일하기 편코.”
공사과장이 시가지를 둘러보며 부러운 듯 말했다.
“그래요. 삼환기업 안 부러워하는 회사들 없지요. 그러나 사우디 진출 개척자로서 삼환기업은 애 많이 썼고. 삼환이 세운 공을 알아주는 사우디 정부도 고맙고 그렇지요.”
김기돈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제다의 신시가지는 구시가지를 에워싸면서 사방으로 개발되어 나아가고 있었다. 현대도시를 탄생시키고 있는 그 변모는 가끔 보는 근로자들이 놀랄 만큼 속도가 빨랐다. 그런데. 각양각색의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데도 색깔에 있어서는 어떤 동질적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건 우아하고도 고상한 상앗빛의 흐름이었다. 그 상앗빛은 바로 이슬람 사원들의 색깔이었다. 제다는 상앗빛의 도시였다. 그 은은한 색깔들의 다양하고 미묘한 조화는 종교적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게 해 제다를 인상 깊게 만들고 있었다.
계절로 우기인데도 햇볕은 따갑고 날씨는 땀이 끈적일 정도로 더웠다. 이곳에서는 35도 정도로 시원해진 날씨였지만 한국으로 보면 한 여름이었다. 그들은 호텔로 들어가 로비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까와라는 고유차는 아주 고급이라서 아무데서나 마실 수가 없었다.
“아유. 살 것 같네요. 저는 돈 모으기는 틀렸어요. 더위에는 영 병신이거든요.”
공사과장은 작업모를 벗으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금방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호텔에는 냉방장치가 잘되어 있었다.
“더위 앞에서 어디 장사 있겠소? 다들 이 악물고 참는거지.”
김기돈은. ‘그래도 근로자들에 비하면 우린 신선놀음 아니겠소’ 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호텔 종업원은 정종잔만한 찻잔에다 까와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엷은 젖빛의 까와가 앙증맞은 잔에 차오르고 있었다. 최고로 귀히 여기는 손님에게만 대접하는 고급차라서 잔도 작은 것인지 몰랐다. 김기돈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생강 맛 비슷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그 향은 목을 넘어가면서 더 선명해지며 더위 가득한 속을 뚫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부장님은 이 맛을 아십니까?”
공사과장이 떫은 얼굴로 물었다.
“글쎄....... 맨날 마시는 커피보다는 낫지 않소? 사우디 고유 차 맛을 익혀두면 나중에 추억도 될 거고.”
그뿐이 아니라 까와는 더위를 다스리는데 신효하다고 했다. 그러나 김기돈은 과장이 믿을 것 같지 않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종업원은 예쁘고 작은 바구니에 담은 팜츄리 열매 말린 것을 놓고 갔다.
“예. 이건 먹을 만하지요.”
공사과장이 얼굴이 밝아지며 그 대추야자를 얼른 집어 들었다.
“많이 먹어요. 하루에 세 개씩만 먹으면 무병장수한다니까”
김기돈도 진갈색의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열매 하나를 집었다. 사우디 대추라고도 부르는 그 열매의 맛은 곶감 맛과 흡사했다. 그 열매는 부드럽고 졸깃졸깃 씹히면서 단맛이 진하고 깊게 느껴졌다. 그것을 까와에 곁들여 먹으면 더 맛이 좋아졌다. 그것은 영양이 풍부해서 옛날에 사우디사람들은 주식의 하나로 먹었다고 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종업원은 빈 찻잔에 다시 까와를 따랐다. 차를 더 마시기 싫으면 찻잔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어 보이는 것이 사우디 고유의 의사 표시였다. 그렇지 않으면 잔이 빌 때마다 차를 계속 따랐다.
“부장님. 부장님. 저 친구 또 나타났네요.”
공사과장이 무슨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갑자기 생기 도는 소리로 말했다. 김기돈은 얼결에 고개를 돌렸다.
“아. 초록색 신사.”
김기돈이 씩 웃었다. 그들의 눈길이 머문 로비에는 위아래 초록색 양복을 빼입은 남자가 바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는 양복만이 아니라 넥타이까지도 초록색으로 매고 있었다.
“참. 구두는 왜 초록색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머리야 어쩔 수 없지만.”
공사과장은 어이없다는 것인지 희한하다는 것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초록색 가죽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만약 그런 가죽이 있었으면 저 사람이야 당장 초록색 구두를 맞춰 신지 않았겠소?”
김기돈이 찻잔을 들며 웃었다.
“아. 그랬겠는데요. 좌우간 저 사람은 배짱한번 좋아요. 저렇게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사우디 큰 도시들을 누비고 다니니.”
“내가 보기엔 저 사람이야말로 남들이 못 따라갈 기발한 아이디어를 지닌 천재적인 상사원이오. 물건을 파는 건 질이 좋고 나쁘고 이전에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고.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저 사람은 사우디사람들의 급소를 찔렀고. 그래서 성공한 거 아니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발한 아이디어. 그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저 사람이 잘 보여주고 있는 거요. 어쨌든 저 사람 참 대단해요.”
김기돈은 담배를 빨며 호감어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초록색의 남자는 저쪽 자리에서 사우디 고유 의상인 새하얀 소읍을 입은 두 남자와 친근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한국의 어느 무역회사 직원인 그 남자는 제다 시내를 드나드는 근로자들 사이에서 ‘사우디 명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넥타이까지도 초록색으로 치장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 모두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초록색이라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라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집에 손님 오는 것을 좋아해. 반갑고 귀한 손님에게는 마누라를 잡아서라도 고기를 대접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손님보다 더 반기고 환호하는 것이 비였다. 비가 귀하고 귀한 땅에서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짙푸르고 울창한 초록색 숲을 늘 그리워하고 꿈꾸고 있었다. 그 소망이 얼마나 절절하면 국기의 바탕이 온통 초록색일 것인가. 손님이 오면서 뒤따라 비가 오면 최고의 경사라고 해서 그 손님은 특별히 우대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 그들의 심상에 초록색 양복을 입고 나타난 상사원. 그 상담(商談)이 잘 풀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김기돈은 종업원이 다섯 번째로 잔을 따르려고 하자 찻잔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공사과장에게 말했다.
“그만 슬슬 나가봅시다. 정오 쌀라(기도)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예. 그러지요. 일한 것도 없는데 배가 출출하군요.”
그들은 다시 상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햇살은 더 강렬해져 있었고. 사우디 남자들의 길고 하얀 옷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특이한 남자 의상인 소읍은 머리에서부터 발목까지 하얗게 치렁거렸다. 그 흰색 속에서 머리에 두른 두건인 구트라를 고정시키는 두 줄의 테인 이깔만이 검은색이라서 유난히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상앗빛 사원들과 새하얀 옷들은 강렬한 햇살 속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며 종교적 경건함과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얀 천에 빨간 실로 무늬를 수놓은 두건인 시마그를 쓴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오늘 또 여기 동대문시장 됐군요.”
아까보다 훨씬 많이 불어난 버스들을 보며 공사과장이 말했다.
“공사장마다 휴일일 테니 여기밖에 올 데가 더 있겠소.”
김기돈도 버스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주일 동안에 사우디아라비아의 휴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금요일 이었다. 그 휴일이나 오늘처럼 특별히 노는 날에는 상가 앞에 스무 대에 이르는 버스가 멈추어 있기 예사였다. 몇 백리 밖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단체로 모여드는 거였다. 그 나들이가 근로자들에게는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었다. 그리고 사우디 상인들에게는 그 단체 쇼핑객들이 엄청남 고객이기도 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콜라병을 들고 있는 네댓 명 중에 한 사내가 김기돈에게 인사를 했다.
“.......?”
김기돈은 알 듯 말 듯 한 그 사내를 보며 ‘누구더라......?’ 하고 생각했다.
“저 모르시겠어요? 몇 달 전에 여기서 만났잖아요. 그때 콜라까지 사 주셨잖아요.”
그 사내가 눌러쓰고 있던 운동모자를 벗었다.
“아. 그래. 조국근대화의 기수. 전기 기능사! 이렇게 사복을 입고 있으니 얼른 알아볼 수가 있나. 그간에 얼굴도 더 많이 탔고. 그래. 그동안 잘 지냈어?”
김기돈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네. 부장님도 안녕하셨어요?”
환하게 웃는 그 사내의 얼굴은 뜻밖에도 앳되어 보였다. 나이를 많이 잡아야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했다.
“응. 덕택에 그럭저럭 지내지. 함께 일하는 친구들인가?”
김기돈은 그 젊은이 뒤로 선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예. 새로 온 신참들이 있어서 구경시켜 주려고 나왔어요. 야. 느네들 인사드려라. 우리가 부러워하는 공과대학 나오신 공사부장님이시다.”
젊은이의 말에 사내들이 모자를 벗으며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스무 살이 못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었다. 김기돈은 그제서야 두 사내의 제복에 새겨진 빨간 기계 수 글씨를 보았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 그 빨간 글씨는 어깨에도 박음질되어 있었다. 김기돈은 몇 달 전처럼 또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끼며 그들 둘이 신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 자네들도 전기 기능산가?”
김기돈은 인사를 받으며 제복을 입은 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전화 기능삽니다.”
키가 좀 큰 사내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웃는 그 얼굴이 더 어려 보였다.
“아. 전화 기능사. 좋은 기술 가졌군.”
김기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런데 어쩌지? 벌써 콜라를 마시고 있으니 오늘은 콜라를 사줄 수도 없고”
하며 처음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부장님한테 콜라를 사드릴게요. 더운 사우디에서 시원한 콜라 마시는 건 와따잖아요.”
그 젊은이는 돈을 꺼내려는 듯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린 지금 차 마시고 오는 길이야.”
“그거 정말이세요? 제가 콜라 사드리려고 알은체한 건데.”
젊은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사줘. 더위에 몸조심하고.”
김기돈은 작별의 손을 내밀었다.
“예. 부장님도 건강하세요.”
김기돈은 나머지 세 젊은이하고도 차례로 악수를 했다. 그때마다 더위에 몸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이 어린 그들이 건성으로 듣건 어쨌건 간에 그로서는 진정 염려해서 한 말이었다. 김기돈은 상가로 들어서 한참이 지나도 어린 그들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공업고등학교 과정에서 기능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졸업을 하자마자 이곳으로 오는 거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국가적 특전이 주어져 있었다. 병역 면제가 그것이었다. ‘조국 근대화’라는 큰 짐은 어린 그들의 어깨에까지 실려 있었다. 상가는 아까 공사과장이 말한 대로 동대문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상점마다 한국 근로자들이 바글거렸고. 풍선 부풀듯이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는 소란도 전부 한국말이었다.
“안 비싸. 안 비싸!”
“더 깍지 마.”
“일제 최고야.”
“이거 이태리 금 저거 사우디 금.”
“거울 저기.”
“잘 어울려. 선물용?”
“영수증 가짜 해줘?”
사우디 상인들이 흥겨워 외쳐대는 이런 말들도 소란을 더욱 부풀리고 있었다. 돈은 귀신도 부리더라고 사우디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데 필요한 짤막짤막한 한국말들을 수십 가지씩 익힌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그들은 가짜 영수증 해주는 것 까지 알고 있었다. 그건 관리직원들이 회사명의의 선물을 사면서 돈을 슬쩍 하느라고 가르쳐준 것이었다. 알라신의 나라에서까지 한국식 버릇을 못 고치고 오히려 나쁜 물을 들여놓은 셈 이었다.
“쌀라. 쌀라!”
“쌀라 시간 장사 안 해.”
“쌀라 가. 이따가 와.”
이 상점 저 상점에서 이런 외침이 퍼지고 있었다. 기도하러 가니까 장사를 중단한다는 거였다.
“자아. 나갑시다. 나갑시다.”
“자아. 밖에 나가서 시원한 것 마시며 잠깐들 쉬세요.”
몸을 바삐 놀리며 상점에서 근로자들을 몰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 회사에서 나온 관리직원 이었다. 김기돈도 제복으로 자기회사 근로자들을 구별하며 빨리빨리 밖으로 나가도록 하고 있었다. 하루에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지키는 것은 이슬람교도들의 어김없는 철칙이었다. 그런데 상인들은 가까운 사원으로 기도하러 가면서 상점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열어두었다. 수많은 외국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도둑 없이 살아온 오랜 습관이 바뀌지 않은 거였다. 그건 또한 도심이 없는 자기네들 마음처럼 외국 사람들을 믿는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견물생심이라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각 회사마다 단체 쇼핑을 나올 때는 직원들이 미리 경찰관 노릇을 해오고 있었다.
상가 밖 그늘복도로 밀려나온 근로자들은 다투어 콜라를 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콜라는 근로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청량음료였다. 그런데 사우디에는 펩시콜라뿐이었다. 코카콜라는 무엇이 서툴렀는지 사우디 시장을 잃고 있었다.
“부장님. 이거 한 병 드시지요.”
어떤 직원이 김기돈에게 콜라병을 내밀었다.
“이런. 내가 선수 놓쳤네. 고맙소.”
김기돈은 콜라병을 받아들고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사람들은 구트라와 소읍을 펄럭거리며 사원으로 황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달리던 자가용들이 멈추며 운전석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택시들도 예외 없이 정거하고 운전수들이 사원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외국 손님을 태웠더라도 쌀라 시간에는 운행 정지였다. 손님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든지 간에 무조건 2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은 이 경우에 잘 들어맞는 말이었다. 사원은 쌀라하기에 편하도록 시내 도처에 수없이 많았다. 쌀라 시간이 되면 그들은 가까운 사원으로 달려가 알라신 앞에 엎드렸다. 김기돈은 건너편 사원으로 달려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무작정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김기돈은 책에서 읽은 코란의 한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당한 가르침이고. 지고한 일깨움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면서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일은 없다고 했다. 20여분 동안 알라신께 죄 짓지 않고 살겠다고 약속하고. 더불어 화평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해야 할 코란의 구절구절을 염송한다고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다섯 번씩 기도하며 평생을 살다보면 이마에 군살이 박힌다고 했다. 그런 지극정성의 신앙심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악조건의 기후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지. 김기돈은 풀 수 없는 의문을 또 되짚고 있었다. 그전에 이슬람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어 궁금증이 많았고. 교도들이 결코 기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근로자들은 그동안에 산 물건들을 다시 풀어보느라고 분주했다. 그들이 산 것은 녹음기 겸용인 일제 트랜지스터가 가장 많았다. 그것을 어찌나 많이 사가지고 오는지 김포공항에서 규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퍼져와 있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 물건을 더 사게 만들었다. 규제당하기 전에 사가지고 가야겠다는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정오 쌀라 시간이 끝나자 근로자들은 다시 상점으로 들어가지 않고 식당을 찾아가기 바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배는 정확하게 시장기를 부르고 있었다. 김기돈은 서너 명의 직원들과 함께 아구살을 먹으러 갔다. 생양고기에 소금을 쳐서 쇠꼬챙이에 꿰면서 그 사이사이에 양파와 피망을 섞어 꿰어 이글거리는 불에 구워내는 음식이었다. 흔히 양고기는 누린내가 난다고 하는데 그 꼬챙이구이는 전혀 냄새가 없이 노릿노릿 익은 고기가 짭조름하면서 연하고 고소해 감칠맛이 그만이었다. 그 고유음식은 레바논식이라고 했다.
“여기다 소주 한잔 카악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한 직원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소주 맛 어린 얼굴로 말했다.
“괜히 사람 미치게 만들지 말어.”
다른 직원이 김기돈의 눈치를 보며 쏘아붙였다.
“그래. 참는 것도 수양이랬지. 석 달만 참으면 웬수 갚을 날 오니까.”
“그런데 부장님. 여기 젯다에다 한국음식점 차리면 재미 보지 않겠어요?”
다른 직원이 불쑥 말했다.
“글쎄. 그것도 괜찮긴 하겠지.”
김기돈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맘에 있어?”
“아니 뭐. 그렇다 그거지.”
“그보다는 우리나라 배추와 무를 길러 각 회사마다 납품하는 게 훨씬 낫지. 지금 여기와 있는 사람들 숫자가 얼마야. 대충 15만원은 될 텐데. 그 많은 일들이 삼시 세 끼를 먹어대 봐. 떼돈을 버는 거지. 떼돈.”
“좋아하고 있네. 이런 땅에서 우리나라 무. 배추가 되기나 한대?”
“물만 잘 주면 되는 거지 왜 안 돼. 날씨가 더우니까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쑥쑥 잘 자라겠지. 그렇지요. 부장님?”
“글쎄. 그거 알쏭달쏭하네. 토양에 안 맞을 수도 있고. 뜻밖에 잘 될 수도 있고. 실험 재배를 해보지 않고선 그 누구도 뭐라고 장담하기 어렵겠는데.”
김기돈은 또 빙긋이 웃었다.
“괜히 헛꿈 꾸지 말어. 떼돈 벌 망상에 사로잡혀 알거지 되는 수가 숱하니까. 그저 시키는 일이나 하고 월급 받아먹는 게 제일 안전빵이야.”
“헛꿈이라고 그렇게 단정하지 말어. 인생은 기발한 아이디어 경쟁이야. 삼환기업을 보고. ‘초록색 신사’를 봐. 여기 나와 있는 모든 회사들이 삼환기업을 부러워하는데. 삼환이 횃불을 켜들 아이디어를 내지 않았으면 오늘의 도약이 있었겠어? 그리고 그 상사원이 초록색 양복을 입을 기발한 착상을 하지 않았으면 월급쟁이들 중에서 최고의 월급에 계속 특별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겠느냐구.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 위대한 말씀 몰라?”
“그래서 채소장사 해보겠다 그거야?”
“어떻게 자본만 좀 있으면 생각을 달리 해볼 수도 있겠는데....... 빈털터리라 파이야.”
“이런 참, 그러니까 결국 헛꿈이잖아. 안 그렇습니까, 부장님?”
“글쎄. 그런 생각을 해보는 건 나쁠 게 없지. 실현이 되든, 안 되든 그런 남다른 생각은 우선 흥미롭고 사람을 즐겁게 해주니까. 오늘 얘기도 소화제치고는 아주 좋은 소화제니까 말야. 그리고 그런 아이디어는 내가 직접 못하면 능력 있는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
김기돈은 채소를 기른다는 것이 꼭 허황한 것 같지는 않아 아이디어 처리 방법을 넌지시 일깨웠다.
“예, 그것도 한 방법이겠네요.”
그 직원은 반색을 했다.
오후 쇼핑을 끝내고 그들은 모두 5시에 버스에 올랐다. 다른 회사 버스들도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보퉁이를 한아름씩 안은 근로자들은 하나둘씩 잠이 들어갔다. 하나같이 햇볕에 검게 그을리고 기름기 없이 마른 그들의 얼굴은 풍성해 보이는 보퉁이들과 이상하게도 슬픈 대조를 보이고 있었다.
김기돈도 아내와 아이들 꿈을 꾸다가 언뜻 잠이 깼다. 그는 눈을 비비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는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고, 해는 어느덧 먼 산줄기 뒤로 넘어가 자취가 없었다. 그의 눈길은 저 앞쪽 한곳으로 모아졌다. 한 남자가 자가용을 고속도로 옆으로 바짝 붙여놓고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이마가 닿는 부분에는 머리에 썼던 빨간 두건 시마그가 깔려 있었다. 마을도 없고 사람도 없는 허허벌판 고속도로 옆에서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고 있는 한 남자, 그의 모습이 그렇게 경건하고 순수할 수가 없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김기돈은 새롭게 긴장하고는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말고 기도시간에 꼭꼭 맞추어 땅바닥에 엎드리는 그들의 견고한 신앙심이 볼수록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럽기만 했다. 그 외롭고도 진지한 모습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독특한 인상으로 가슴에 담기고는 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이 시간부터 명절 기분은 깨끗이 털고 오늘 밤에 일찍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 바랍니다. 노무과에서 밤새도록 막사마다 감시한다는 것을 미리 알립니다. 만약 불미스러운 짓들을 하다가 적발될 시는 가차 없이 비행기를 태운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소장이 전체를 모아놓고 한 훈시였다. 소장의 말은 지나가는 엄포가 아니었다. 노무과 직원들은 새벽 2시까지 수시로 막사들 문을 열어젖히고는 했다. 명절 뒤끝에는 으레 취하는 강경조치였다. 김기돈은 다음날 아침부터 작업 현장으로 나갔다. 이틀 동안 일이 중단된 현장을 단속하고 근로자들을 긴장시키기 위해서였다. 공사부장의 출동은 직원들의 행동부터 민첩하게 만들었다. 젊은 기사들이 눈을 빛내며 이리저리 뛰고, 능구렁이로 소문난 십장들도 눈치 빠르게 작업을 서둘러대고, 근로자들도 어물거릴 틈 없이 재빠르게 각자의 일을 맡고 나섰다. 김기돈은 점심시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이 작업장, 저 작업장으로 차를 몰아댔다. 긴장이 풀렸던 다음날에는 사고가 잦기 예사였다.
그늘 집에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김기돈은 땀으로 척척하게 젖은 옷을 여기저기 잡아당겨 몸에서 떼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황량한 벌판에 쏟아져내리는 햇살은 누부시고, 더위는 여전히 사나운데 그래도 우기라고 거친 황무지에는 낙타 먹이인 헤나가 드문드문 자라나고 있었다. 김기돈은 인적 없는 황무지에 눈길을 던진 채 푸르른 한국의 들판을 생각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김기돈은 소스라쳐 잠이 깼다.
끼아악, 끼아악.
쇳소리를 내며 몸집이 꽤 큰 새가 낮게 날아가고 있었다. 들쥐나 뱀 같은 것을 잡아먹고 사는 이곳의 새들은 이상하게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울었다. 김기돈은 하품을 하며 시계를 보았다. 그늘 집의 기둥에 기댄 채 한 20분 잔 것이다. 기분이 상쾌하고 몸이 가뿐했다. 낮잠이 발휘하는 효능이었다. 낮잠은 5분만 자도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내고 새 기운을 돋게 하는 신통한 효과를 나타냈다. 이곳에 와서 느끼게 된 낮잠의 가치였다.
근로자들이고 직원들이고 모두 단잠에 빠져 있었다. 땀을 쏟으며 일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어느덧 사우디 체질이 되어 있기도 했다. 낮잠은 사우디의 기본생활 패턴이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꼭 낮잠을 잤다. 양들은 낮잠 잘 시간이 되면 아무리 때리고 끌어도 눈을 딱 감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 베두인(유목민)들도 양들이 깰 때까지는 자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다. 낮잠은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혹독한 더위를 이겨내게 하는 자연의 섭리인 셈이었다. 김기돈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포크레인 작업장으로 차를 몰았다.
“들어갔어, 들어가!”
“빨리 막아. 철망 가져와!”
“여기, 여기, 어. 어. 놓칠라!”
김기돈이 포크레인 작업장에 도착하자 대여섯 사람이 낮잠을 자지 않고 불볕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야단법석이었다. 그들이 또 무엇을 잡고 있는 것을 안 김기돈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눕혀놓은 드럼통이었다. 김기돈은 도마뱀 사냥이라는 것을 알았다.
“됐어, 철망 막았어.”
“철망 잘 묶어, 이게 기운이 엄청 세서 튀는 수가 있다구.”
“히야, 아주 대짜네, 우리들 몸보신하긴 넉넉하겠구먼.”
“쭈아, 쭈아. 이게 개고기는 저리 가라 아닌가. 맛본 지 꽤 됐으니까 잘 걸렸어.”
근로자들은 신바람이 나고 있었다.
“어디 봅시다. 나도 좀 얻어먹을 만한가.”
김기돈은 큰소리로 농담을 던지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아이쿠, 공사부장님!”
“지, 지금은 근무시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고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예, 괜찮아요. 어서 저놈을 달아나지 못하게 해놓고 낮잠들 좀 자세요. 낮잠 못 자면 오후에 너무 피곤하잖아요.”
“예, 예.”
김기돈은 웃으며 드럼통 안을 들어다보았다. 두 개를 연결시킨 드럼통 안에는 1미터가 넘는 살찐 도마뱀이 툭 튀어나온 눈을 디룩거리며 기운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드럼통 저 안쪽에는 썩는 냄새 지독하게 풍기는 닭고기가 매달려 있었다. 도마뱀은 그게 함정인 줄 모르고 구미당기는 닭고기를 먹으려고 드럼통 속으로 들어갔다가 꼼짝없이 잡히고 만 것이다. 이렇게 드럼통을 용접해 붙이고, 닭고기를 썩히고 해서 사냥도구를 만든 것은 꽤나 머리를 쓰고 정성을 들인 것이었다. 이런 준비가 없이 도마뱀 굴을 발견했을 때는 굴에 차의 배기가스를 뿜어대거나 물을 마구 퍼 넣었다. 그러면 도마뱀은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몸집 큰 도마뱀은 기운이 엄청나게 셀뿐만 아니라 몸놀림도 어찌나 재빠른지 생포하느라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는 했다. 그 큰 도마뱀을 근로자들은 사족사(四足蛇)라고 불렀다. 그건 몸보신으로 개고기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근로자들은 생포해 온 도마뱀을 전깃줄로 목을 졸라 죽인 다음 배를 갈라 내장을 다 버리고 펄펄 끓는 물에 넣었다. 고기가 상하지 않게 하려고 꼭 생포를 했다. 그리고 내장은 다 버렸지만 두 가지는 소중하게 챙겼다. 쓸개와 허파 양쪽에 붙은 하얀 기름덩이 두 개였다. 기름덩이는 끓는 물에 넣었고, 쓸개는 약효가 크다고 해서 서로 먹으려고 다투었다. 절반으로 자른 드럼통 솥에서 푹푹 고아진 도마뱀은 노란 기름 둥둥 뜨는 사족사탕이 되었다. 그 국물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한 사발씩 마셨고, 연한 고기는 찢어서 소금에 찍어 먹었다. 국물은 시원하고 담백했고, 고기를 닭고기 맛이었다. 도마뱀을 보신용으로 삼은 것은 사우디 산모들이 산후조리고 그 탕을 끓여먹는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폭염 속에서 팥죽땀을 흘리며 몸무게가 줄어드는 근로자들은 몸보신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썼다. 그들이 보신용으로 삼는 것은 도마뱀만이 아니었다. 뱀과 개가 빠질 리 없었다. 다행히 이슬람교에서는 개와 뱀을 악마로 취급하고 있어서 근로자들이 개와 뱀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악마 퇴치에 기여하는 셈이었다. 사우디사람들은 개를 집에서 기르는 일이 없으니까 사우디의 개들은 전부 황무지를 떠도는 야생 들개였다. 네댓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는 그놈들은 낮에도 소형차를 공격할 정도로 사납고 거칠었다. 근로자들은 일을 하다가도 들개를 보았다 하면 이쪽저쪽에서 차를 몰아댔다. 들개가 날쌔기 때문에 무지막지하게 차로 치여서 잡는 것인데, 그 일만은 작업 감독을 하고 있는 시가들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모든 근로자들이 보신탕 먹기를 바라고 있는데 괜히 제지했다가는 큰 반발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다 많아 보신탕을 맛있게 끓이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들이 들개 사냥에 얼마나 극성인지 한국 근로자들이 일하는 현장의 사방 4킬로미터 이내에서는 들개를 찾아볼 수 없게 된다는 말이 사우디사람들 사이에서 오갈 정도였다.
야근 두 시간까지 끝내고서야 김기돈은 근로자들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같은 쇼핑의 즐거움을 위해 근로자들은 휴일 다음날 곧바로 실시된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들어선 김기돈은 하루를 아무 탈 없이 보낸 것에 안도하며 의자에 허물어져 내렸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별들은 더 많이 돋아나고, 그 반짝임은 한층 싱그러운 생기로 빛나며 현란한 불꽃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사우디 밤하늘은 어찌 된 일인지 별들이 유난히 많고, 유난히 크고, 유난히 맑고, 반짝거림도 유난했다. 그 어떤 꽃밭도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고, 그 어떤 보석들도 그보다 더 찬란하게 빛날 수는 없었다. 명멸하는 별들로 휘늘어진 하늘은 신의 존재를 가리려는 듯한 휘황찬란한 커튼인지도 몰랐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에......”
적막한 어둠 속에서 슬픈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그 노래는 이미 “사우디 주제가”로 이름붙여져 있었다.
“어이, 이봐. 그만 내려오라니까! 지금 몇 시인지나 알아? 새벽 1시야, 1시. 내일 일 안 나갈 거야!”
어둠 속에서 울리는 외침이었다.
“......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외침은 아랑곳없이 노래는 구성지게 계속되고 있었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는 곳은 숙소의 어느 곳보다 어두웠다. 정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중장비정비고 옆에 부근에는 누구나 밤에 발길을 할 필요가 없는 탓이었다. 정비고 옆에 높게 쌓아둔 자재더미 위에서 한 남자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아래서 경비 두 사람이 내려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저 친구 저거 매일 밤 왜 저래?”
경비 한 사람이 투덜거렸다.
“저건 예삿일이 아닌데. 하는 꼴이 저러다가 비행기 타게 생겼어.”
“저 친구 의무실에도 데려갔다면서?”
“저게 무슨 배탈인가? 마음병은 제가 알아서 해야지.”
“왜 가끔 저런 친구들이 생기지? 마음 약하면 이런 델 오질 말아야지. 저 친구 얼마나 됐나?”
“5개월쯤 됐대지, 아마.”
“아이구. 이대로 비행기 타는 신세 되면 왕복 비행기 값 물어내고 집안 쫄딱 망하겠네.”
“다 팔자소관이야. 자아. 올라가자구. 오늘도 끌어내려야지 소리질러봐야 우리 목만 아퍼.”
“제기랄, 더러워서 경비도 못해먹겠네.”
경비들은 자재더미 위로 올라갔다. 그 남자는 경비들에게 끌려 내려오며 더 슬프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열흘쯤 지나 김기돈은 소스라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장님, 빨리 일어나세요. 사람이 죽었어요.”
직원이 김기돈을 흔들어 깨우며 토해낸 말이었다.
“무, 무슨 소리야? 왜 죽어?”
잠이 덜 땐 김기돈은 허둥거렸다.
“아마 심장마빈 것 같습니다. 긴장이 풀리고 너무 흥분해서 말입니다. 그 사람 이틀 뒤에 귀국할 참이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김기돈은 바지를 꿰입으며,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는 듯 내쏘았다.
“예, 제가 여기 3년 있었는데 전에도 그런 일이 서너 번 있었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죽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첫아들 돌에 맞춰 휴가를 받아 놓고 죽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도 너무 좋아하면서 며칠 전부터 통 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
김기돈은 그만 무색해져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더구나 그런 허망한 죽음도 있다는 것이 더 말을 잊게 했다. 그는 긴 한숨을 쉬며 막사를 나섰다.
40. 블랙리스트 <1>
젊은이들은 지하도에서 솟아올랐다. 동. 서. 남. 북 네거리의 골목골목에서 나타났다. 사방으로 뻗은 넓은 도로에는 차들이 분주하게 달리고 있었고, 인도마다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 번잡 속에서 젊은이들은 그저 길을 가는 행인일 뿐이었다. 네거리 한복판에 선 두 명의 교통순경은 지친 자동인형처럼 무겁고 느린 팔놀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종문화회관 쪽에서 갑자기 플래카드가 펼쳐졌다. 하얀 천에 빨간 글씨로 적힌 여덟 글자.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그 여덟 글자는 빨간 색깔의 충동성과 함께 선명하게 돌출되어 보였다. 그 구호 아래는 검정 글씨로 ‘서울대학교’라고 적혀 있었다.
“와아ㅡ.”
갑자기 여기저기서 함성이 일어나며 젊은이들이 플래카드를 향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행인들과 학생들이 분리되었다. 학생들은 플래카드를 에워싸며 한 덩어리가 되고 있었고, 행인들은 플래카드에서 멀어지며 흩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건너편 길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다른 것은 플래카드에 적힌 대학 이름이 ‘고려대학교’였다.
“와아ㅡ.”
“나가자아ㅡ.”
양쪽에서 서로 힘을 돋우고 격려하듯 함성이 터져 올랐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한쪽에서 구호를 외쳐댔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다른 쪽에서도 화답하듯 구호를 외쳐댔다. 수백 명의 젊은 목소리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느닷없는 외침에 대낮의 광화문 네거리는 일시에 한밤중의 정적을 맞은 것 같았다. 뒤로 물러난 행인들이 두려움에 찬 얼굴로 굳어졌고, 자동차들도 갑자기 굴러가기를 멈추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양쪽의 대학생들은 더욱 크게 구호를 외쳐대며 차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제서야 교통순경의 호루라기 소리가 숨가쁘게 허공을 찢기 시작했다. 행인들은 두렵고 겁 실린 얼굴들이면서도 갈 길을 가지 않고 대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행인들은 자꾸 불어나고 있었다.
“저러다가 어쩔려고 저러나. 이 무서운 세상에.”
“역시 대학생들밖에 없어. 믿을 건 대학생들뿐이야.”
행인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중얼거림이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양쪽의 대학생들은 계속 우렁차게 구호를 외쳐대며 도로의 중앙선께에서 한 덩어리로 뭉쳐지고 있었다. 삽시간에 그들은 700여 명의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 교통순경들의 행동도 학생들 못지않게 기민했다. 광화문 쪽에서는 차들을 차단시키고 있었고, 네거리에서는 태평로로 차들을 빼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교통순경들이 학생들에게 데모 장소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대학생들의 외침은 더욱 뜨겁고 어기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느새 대열을 이룬 그들은 청와대를 향해 서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외침은 청와대까지 퍼져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교통순경들만 동작이 빠른 게 아니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네거리에 이르는 그 넓은 도로가 텅 비게 되었을 즈음 양쪽에 버스들이 밀어닥치며 데모진압대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방패와 몽둥이로 완전무장한 진압대들이 네 겹으로 도열했다. 그동안 양쪽 인도에 빽빽하게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침묵의 긴장이 끼쳐왔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진압대가 앞뒤로 나타난 것을 안 대학생들은 더욱 결연하게 구호를 외쳐댔다. 그들의 기세는 곧 청와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펑! 펑!
펑! 퍼벙!
양쪽에 포진한 진압대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최루탄 발사였다. 연발로 발사되는 최루탄들은 데모대를 향해서만 날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양쪽인도에도 마구 떨어지며 푸르고 매운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최루탄 공격을 받은 행인들은 갈팡질팡 흩어지고 있었다.
“저놈들이 어디다 대고 쏴. 저거 순 시로도로구만.”
“모르는 소리 마슈. 사수치고는 명사수요. 우리 구경꾼 쫓으려는 건데.”
어지럽게 흩어지는 행인들 속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학생들 쪽에는 최루탄 연기가 더욱 진하게 자욱한 안개 밭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흩어지지 않고 한층 더 기운 뻗치는 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최루탄 발사가 멈추는 순간 양쪽에서 학생들을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굳세게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그 외침은 최루탄의 푸른 연기 속에서 슬프고 처연한 노래가 되고 있었다. 대학생들을 포위하듯 한 진압대는 몽둥이들을 무차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대학생들의 대열이 무너졌다. 맨주먹인 대학생들은 무지막지하게 휘둘러대는 몽둥이를 맞으며 나뒹굴고 고꾸라지고 쓰러져갔다. 몸이 날랜 학생들은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도망치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데모진압대가 추가로 투입되었다. 학생들은 완전히 포위상태에 빠지고, 몽둥이들의 난무는 더 심해졌다. 눈물을 닦고 코를 풀면서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행인들도 적지 않았다. 데모대가 완전히 진압되기까지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학생들 절반은 진압대에 끌려 버스에 태워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고 옆구리를 싸잡고 허리를 못 펴고, 다리를 절룩거리고 하는 학생들이 꽤나 많았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처음부터 전모를 지켜보고 있었던 유일표는 손수건에 코를 풀며 발길을 돌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는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건 경이와 분노가 뒤섞여 있는 감정이었다. 대학생들의 그 기발한 기습데모가 그렇게 경이로울 수 없었고, 진압대의 그 무자비함이 견딜 수 없이 분노를 치솟게 했다. 그동안 학교 안에서만 데모를 해왔던 대학생들이 기습적으로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에서 데모를 벌인 것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어느 때 없이 살벌한 상황이었다.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해도 학교에 상주하는 기관원들에 의해서 무더기로 구속이 되는 판이었다. 그런데도 대학생들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거침없이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쳐댄 것이다. 감옥 가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단행할 수 없는 과감함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4.19 그때처럼 자신도 뛰어들고 싶은 용솟음을 느꼈다. 그러나 끝내 그러지를 못했다. 왜 그랬는지 한마디로 간추릴 수 없는 심정은 복잡했다. 다른 시민들처럼 구경꾼으로만 서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울수록 진압대에 대한 분노는 자꾸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는지도 몰랐다. 그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만드는 힘은 따로 있었다. 유신 이후 대학생들의 끈질긴 투쟁은 눈물겹도록 장하고 고마웠다. 더구나 갈수록 살벌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더 강하게 광화문까지 뛰쳐나왔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가슴 저린 희생이 유신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 유일표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빼 물었다.
“.......”
유일표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멈칫 섰다. 서너 발짝 앞에서 버스에 실리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그는 이규백이었다. 유일표는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눈길을 모았다. 옆얼굴에 세월이 묻어있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틀림없는 이규백이었다. 유일표는 넘치는 반가움으로 이규백을 부르려다가 주춤했다. 저 사람이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규백이 형!’ 하려는 호칭이 목에 걸렸다. 그 호칭을 스스럼없이 쓰기에는 그동안의 세월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 있었다. 그와 대면하지 않은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언뜻 꼽아지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 검사님.”
유일표는 이규백 옆으로 다가섰다.
“어. 이게 누구야!”
이규백은 유일표를 금세 알아보았다.
“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유일표는 이규백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야. 도대체 이게 몇 년 만이지?”
이규백은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며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있었다.
“바쁘실 텐데 여긴 어쩐 일로.......”
“응. 지나가다가 그저. 우리 어디 가서 시원한 거나 좀 마시도록 하지. 6월 말인데 벌써 덥군.”
이규백이 끄는 대로 유일표는 가까운 다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자넨 어떻게 지내? 형은?”
이규백은 자리에 앉으며 연달아 물었다.
“예. 형은 조그만 플라스틱 제품공장을 하고요. 저는 재건대 넝마주입니다.”
유일표는 씩 웃었다.
“뭐. 넝마주이?”
이규백은 담뱃갑을 꺼내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넝마를 직접 줍지는 않고요. 낮에는 분류 작업을 돕고 밤에는 넝마주이 애들 야간 학교를 맡고 있습니다.”
“으응. 그렇겠지. 그런데....... 그 일을 해서 생활이 되나?”
이규백은 담배를 권하며 의아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니. 저어.......”
“괜찮아, 피워. 서로 편하게 하는 게 좋은 거야.”
유일표는 조심스레 담배를 뽑으며 입을 열었다.
“마누라도 맞벌이를 하니까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응. 다행이네. 애들은?”
“이제 임신 중입니다.”
“결혼이 좀 늦었던 모양이지? 형이 하는 사업은 어때?”
“이제 좀 기반이 잡힌 것 같습니다.”
“그래. 잘 돼야지. 애들은 몇이나 뒀나?”
이규백은 쉴 새 없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아직 결혼 안했어요.”
“아니. 왜?”
이규백은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일부러 피하는 건가?”
무슨 생각이 잡히는 지 얼굴이 침울해졌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결혼 같은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힘들게 살아오기도 했고.......”
“그래. 자네 형제 같은 사람들한테 뭐라고 할 말이 없지. 참 고약하고 못된 세상이야.”
이규백은 혀를 차며 냉커피 잔을 들었다.
“검사생활은 어떠세요? 그동안 많이 승진하셨죠?”
“응. 내가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나 검사 그만 뒀어.”
“예에?”
유일표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사무실이 여기서 얼마 멀지 않으니까 가끔 놀러오고 그래. 검사 때 하고는 달리 변호사 사무실은 출입이 자유로우니까.”
이규백은 명함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가 부죠?”
유일표는 이규백의 이름위에 올라앉은 변호사라는 한자를 한 자. 한 자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응. 그런 일이 좀 있었어. 세상살이란 복잡한 거니까.”
이규백은 담배를 끄며 시계를 보았다.
“바쁘신데 그만 가시죠.”
유일표는 명함을 남방셔츠 주머니에 넣고 조금 남은 냉커피를 후딱 마셨다.
“그래. 그냥 하는 소리 아니니까 꼭 들러. 형한테도 안부 전하고.”
몸을 일으킨 이규백은 유일표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유일표는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이규백을 한참 바라보았다. 광화문 네거리에는 데모대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지고 없었다. 이규백이 변호사였기에 데모 광경을 지켜볼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유일표는 되짚어 생각했다. 아까는, 검사 업무 중의 하나일까. 하는 생각을 얼핏 했던 것이다. 그가 검사일 때보다는 한결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유일표가 재건대로 들어서자 이용진 대장과 함께 넝마를 고르고 있던 두 사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너희들 어쩐 일이냐?”
유일표는 불길한 느낌이 앞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얘들도 해고당했대요. 회사마다 노조 생기는 꼴을 안 보려고 발악을 해대니 이거 어쩌지요?”
이용진이 목장갑을 벗고 담뱃갑을 꺼내며 괴로운 듯 유일표를 쳐다보았다. 유일표의 노동운동에 적극 동조하고 있는 그는 책임감을 느낀다는 기색이었다.
“그게 언제지?”
유일표는 멋쩍은 듯 서있는 두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저껩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사내가 대답했다.
“몇 명이나?”
“노조 결성에 나섰던 24명 전원입니다.”
“출근 투쟁은?”
“어제 시도했는데 우리보다 두 배나 많은 구사대가 정문 앞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는 바람에 버틸 방법이 없었습니다. 파출소에서 나온 경찰들도 회사 편이었구요.”
“그랬겠지. 자아. 서 있지 말고 저쪽 그늘로 가서 앉자.”
유일표는 한 그루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느티나무의 풍성한 잎들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회사에는 더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헛일 한 건 아니야. 500명 공원들에게 그들 자신의 권익을 위해, 자기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노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만으로도 너희들은 큰 공을 세운거야. 앞으로 다시 노조를 결성하려고 할 때는 그들은 이번보다 훨씬 쉽게 호응하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 도산(도시산업선교회)에서는 반드시 그 공장에 새 사람들을 넣을 거다. 너희들은 그 동지들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길을 닦아놓은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유일표는 마주 앉은 두 사내를 응시했다.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빛을 내쏘고 있었다.
“예. 평소에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 명심하고 있습니다.”
키 큰 사내가 대답했고.
“저희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사내가 찾아온 용건을 밝히듯 말했다.
“응.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너희들 기술이면 채용하는 회사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다른 회사로 들어가.”
“근데 말입니다 선생님. 공단에 기술자 뽑는 회사들은 많은데요. 노조관계로 해고되면 그 명단이 며칠 안으로 모든 회사마다 쫙 돌려지고 맙니다.”
“예. 기관에서 만든 그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절대 새로 취직을 못하게 됩니다.”
“알고 있어. 너희들은 일단 내일 중으로 회사를 골라 이력서를 내. 그래서 걸리면 그땐 새 방법을 강구할 테니까. 내가 지금 그 문제 때문에 도산에서 회의를 하고 오는 길인데, 기관에서 그렇게 악랄하게 나오면 우리한테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 단단하게 먹어. 알겠지?”
“예. 그리 하겠습니다.”
“자아. 시원한 칼피스나 한잔씩 해.”
이용진이 물에 탄 칼피스에 얼음을 띄워 내왔다. 칼피스는 값싸고 간편해 여름 음료로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아까 말 들으니까 블랙리스트라든가 뭔가가 공원들 다 잡고 노동운동도 발을 못 붙이게 하게 생겼는데, 그거 문제 아닌가요? 나라가 언제까지 배부른 사람들 편들려고 그런 흉한 짓을 하고 그러지요?”
이용진이 칼피스 잔을 유일표 앞에 놓으며 끌끌끌 혀를 찼다. 그런데, 음료수 선전용을 공짜로 모아놓은 유리잔들은 제각기 모양이고 크기가 달랐다.
“그거 별로 걱정할 것 없어요. 일제시대에는 왜놈들 총칼 아래서도 독립운동을 했잖아요? 그따위 야비한 짓 이겨내는 방법은 우리도 다 갖고 있어요. 데모를 아무리 심하게 막아도 대학생들은 끝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정부가 제아무리 악랄한 방법을 써도 점점 단결되어 가는 노동자들의 힘을 꺾을 수는 없어요. 두고 보세요. 틀림없이 노동자들이 이기는 날이 올 테니까.”
“하긴 그렇지요. 어떻게 일제시대에 대겠어요. 느네들도 선생님 말씀 듣고 힘내라. 우는 애한테 젖 주더라고 느네들 밥그릇은 느네들이 힘 모아 대들어야 찾게 되는 게야.”
이용진은 자기가 제일 높게 받드는 독립운동과 비교되자 힘을 얻은 듯 두 사내에게 힘주어 말했다. 넝마주이를 하며 잔뼈가 굵은 그들에게 이용진은 부모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예. 대장님 말씀은 백번 맞는데요. 근데 현장에서 뛰어보면 한심하고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구요. 결혼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아무리 알아듣게 얘기해도 실실 눈치 보며 빼거나 몸을 사리면서 애를 먹여요. 그 약은 꼴들이 너무 한심한데, 노조에 안 들고 그것으로 끝나면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 앞에서는 우리 편을 드는 척 능청을 떨고 있던 치들이 글쎄 며칠 뒤에는 구사대로 몽둥이를 들고 나선다니까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와요.”
“그래요. 사람 속을 알 수가 없고, 사람이 겁나기도 해요.”
“그래. 너희들 고생이 많은 것 잘 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는 다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러나 고생이 클수록 보람도 큰 거야. 그리고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뒤로 제쳐두는 게 좋아.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은 당장 살기 급하니까 노조에 가입하기 어렵고, 또 어떤 사람들은 회사 쪽에서 좋은 자리로 옮겨준다거나 직급을 올려준다거나 하며, 너희들이 잘 쓰는 말로 꼬셔대면 넘어가기도 하지. 그러나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은 그런 짓을 다 이해하고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실망하거나 낙담해선 안돼. 그들도 다 같은 노동자고, 그런 사람들이 잘못을 깨닫고 우리 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게 우리의 운동 목적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알아듣겠어?”
유일표는 공부시간에 무엇을 가르치듯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예. 그렇게 마음먹으려고 애쓰는데도 그런 꼴을 당하면 화가 나고 맥 빠지고 그래요.”
“그야 당연하지. 그렇지만 참고 이해하려고 자꾸 애쓰면 조금씩 나아질 거야. 실망되고 화가 날 때마다 너희들은 그저 스스로 불타 죽은 전태일만 생각해. 그 사람이 누구를 위해 분신자살을 했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대접을 못 받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서 아니냐? 남들을 위해 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버린 사람을 생각하면 못 참을 일이 없지 않겠냐?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동일방직 사건을 생각해 봐라. 노조 대의원 선거를 막으려고 깡패들을 동원해 여공들에게 똥을 퍼부어댔는데, 여공들이 어떻게 했지? 똥 묻은 옷을 벗어 던지고 속옷 바람으로 데모를 나섰지 않냐. 여자들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맹렬하게 싸우고 있는 걸 똑똑히 봐야 해. 동일방직에서는 124명이 해고를 당했어. 해고를 당한 건 너희들만이 아니고 각 직장마다 수없이 많고, 노조운동은 앞으로 갈수록 격렬하게 일어날 거야. 그들이 모두 너희들의 동지니까 너희들도 더욱 힘을 내. 너희들 뒤에는 도산이 있고, 도산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노동자의 승리가 있어. 알겠지?”
야간학교의 제자들을 쳐다보는 유일표의 눈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거 기업주들이 들으면 환장할 소리요. 지금 기업주들은, 도산이 가는 곳에 기업이 도산한다고 생판 난리들인데.”
이용진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예. 그 말이 요새 한창 유행인데, 도산시킬 기업은 도산 시켜야지요. 악질 기업들은 도산시켜서 노동자들이 직접 경영하는 게 사회에 훨씬 더 이익이 되니까요.”
유일표도 웃으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랬다.
“아이고, 그 말 한번 속 시원해서 좋습니다.”
이용진이 손바닥을 맞때렸다.
“선생님.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 힘내고 상황이 달라지면 바로바로 연락해라.”
유일표는 두 사내와 힘차게 악수를 나누며 그들의 어깨를 두들겼다. 부끄럼 타는 그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41. 먹이 사슬
박보금은 오가는 행인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아랑곳없이 길 가운데서 양장점 간판을 눈부신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의 얼굴에는 부러움인 듯 시샘인 듯 묘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루비 김 의상실ㅡ. 밤에는 형광등 조명을 받도록 된 아크릴 간판은 호화스러운 쇼윈도와 어울리게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글씨체도 흔한 간판글씨가 아니라 특이한데다가 두 가지 색깔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사람의 눈길을 금방 끌었다. ‘루비 김’은 정말 루비 색깔을 연상시키는 해맑은 빨강색이고 ‘의상실’은 산뜻한 파랑색이었다. 그리고 어디나 ‘양장점’인데 거기만 ‘의상실’이라고 한 것이 색다르고 세련되어 보이게 했다. 박보금은 그 간판 앞에 설 때마다 감정이 복잡했다. 버스 차장 김명숙이 대한민국하고도 서울특별시 그것도 명동에다 양장점을 차렸다는 것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명동 한복판의 큰길이 아니라 좀 귀빠진 샛길이라는 것이 마음을 덜 상하게 했다. 그러나 샛길이나 뒷길이 따로 없이 온갖 상점들이 제나름의 멋을 부리며 촘촘히 박혀있는 명동은 역시 명동이었다. 멋쟁이란 멋쟁이는 다 모여들고, 최고급 물건은 없는 게 없고, 온갖 최신 유행을 전부 만들어낸다는 그 명동에 김명숙이 자리 잡고 앉았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다.
양재학원을 다닌다고 했을 때 별수 있을라구 해버렸고, 일류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릴 거라고 했을 때 코방귀를 뀌어버렸고, 명동의 양장점에 취직해서는 자기도 이 명동에 양장점을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을 때 꿈도 야무져 하며 비웃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명숙은 제가 말한 대로 하나하나 실천을 해냈다. 참 독하고도 악착스러운 계집애였다. 하긴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술집으로 빠지지 않고 혼자 떨어진 것부터가 예사 것이 아니었었다. 김명숙이 양장점을 차렸으면 자신은 그 대신 술집을 차리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위안하고는 했다. 그러나 살살 배아프고 부럽고 시샘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양장점에 비해 술집이 천한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고, 김명숙이 정말 일류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 자신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술집 주인일 뿐이었다. 일류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하는 김명숙의 꿈은 헛꿈일 것 같지 않았다. 간판을 남들과 다르도록 특색 있게 해단 것이 그렇듯 김명숙이 옷을 만드는 센스는 아주 뛰어난 데가 있었다. 개성이 있으면서도 세련되었고, 특히 신체의 약점이 되는 부분을 용케 ‘캄플라지’ 해 내는 재주는 신통하고 놀라웠다.
“사람의 몸이란 옷을 입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옷을 벗으면 각양각색이야. 우리들의 얼굴이 다 비슷비슷하지만 똑같은 얼굴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몸도 비싯비싯하면서 다 달라. 옷을 만든다는 건 그 다른 몸들에다 천을 잘라 꿰매서 누구한테나 예쁘고 잘 어울리게 해내야 하는 일이야. 그 일을 실수 없이 잘 해내려면 사람들의 몸의 생김생김을 눈으로 척 보고, 그리고 옷 위로 더듬어보고 척척 알아내야 해. 그 구별을 잘못하거나 엉터리로 해서 재단을 하면 가봉을 아무리 해보았자 그 옷은 망치고 말아. 그 요령을 터득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디자인도 멋지게 살려낼 수가 없어. 그래서 난 돈이 아깝지만 날마다 목욕탕에 가. 왠 줄 알어? 거기서는 발가벗은 여자들 몸을 맘껏 구경할 수 있거든. 근데 그냥 구경만 하는 게 아니야. 때밀이 노릇도 해. 거 있잖니. 서로 등 밀어주는 것. 몸이 별나게 생긴 여자들을 골라내 등을 밀어주면서 몸을 만져보는 거야. 가지각색 체형을 그렇게 손에 익혀나가면 옷 위로 슬쩍슬쩍 더듬어도 그 사람 어느 부분이 이상한지 금방 잡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으시겠어?”
언젠가 김명숙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김명숙을 더욱 다르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김명숙은 외국영화를 빼놓지 않고 보았다. 영화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여배우들이 입은 옷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여러 가지 옷 모양을 종이 위에 똑같이 그려내는 것이었다. 그건 무슨 신통한 재주가 아니라 하도 많이 그리고 그려서 한번 눈여겨보면 그렇게 된다고 했다.
그런 일들을 알고 나서 김명숙을 시샘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김명숙의 그 묘한 재주를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화류계생활 10년을 넘기다 보니 남자들을 척 보고도 직업이 무엇인지, 주머니 사정은 어떤지, 성격이나 마음 씀은 어떨 것인지 꿰뚫을 수 있었다. 어차피 김명숙과 자신은 딴 길을 가게 되어 있었다. 진작 그렇게 마음먹었으면서도 김명숙의 양장점 앞에만 서면 왜 배가 사르르 아파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다 팔자소관이지. 이제 와서 엎겠어, 뒤집겠어, 이 명동에서 옷 척척 맞춰입게 됐으면 나도 폼나게 성공한 인생이니까.’
박보금은 기분을 추스르며 양장점으로 들어갔다.
“어머 박 사장님. 어서 오세요.”
무료한 듯 쇼윈도 옆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화들짝 반색을 했다.
“루비 킴 사장님은 뭐하시나?”
박보금은 안쪽의 소파로 가며 목청을 높였다.
“응. 어서 와라. 보시다시피 파리 날리고 있다.”
김명숙이 보고 있던 책을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또 소설책이냐? 넌 그놈의 소설들을 언제까지 읽을 작정이냐?”
박보금이 소파에 몸을 부리며 책에 눈을 흘겼다.
“괜히 책 무시하지 말어. 너나 나나 배운 것 별로 없는 신세에 재미있으면서도 면무식 하기는 소설이 최고라니까.”
“아이구. 시어머니 노릇 그만해. 나도 네 말 듣고, 너 만큼은 지독을 못 부려도 더러더러 읽어서 손님들이 깜짝 놀라 달리 보게는 하고 있으니까 염려 놓으셔.”
박보금은 핸드백에서 양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그 담배도 끊으라니까.”
“또 잔소리. 그나저나 왜 이리 썰렁하니? 가을도 됐는데.”
“글쎄. 여름 내내 파리만 날리고 죽쑤면서 가을 오기만 기다렸는데, 가을 오자 세상이 또 시끌시끌해지니 될 게 뭐야.”
김명숙이 아가씨가 가져온 커피 잔 놓을 자리를 치우며 짜증을 부렸다.
“세상이 시끌시끌해?”
“그래. 대학생들이 또 데모해대고 난리들이잖아. 이런 장사는 세상이 그저 잠잠해야 잘 풀려가는데 말야, 느네 쪽은 괜찮아?”
“글쎄. 난 잘 모르겠어. 하긴 사업하는 사람들은 사업이 잘 안 풀릴수록 빽을 더 쓰느라고 술을 더 많이 산다는 말도 있으니까. 근데 넌 어떡하면 좋으냐. 개업 때 내가 성냥 많이 사다줬는데. 확확 잘 풀려나가야 할 텐데 말야.”
“커피 마셔라.”
김명숙은 커피 잔을 천천히 기울이며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이게 솜씨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야. 무슨 기회를 잘 잡아 화끈하게 유명해져야 하는데 말이지. 그게 영 어려워. 한두 번만 이름을 띄우면 그 다음부턴 손님 홍수가 나게 되는데, 그게 쉽질 않아.”
그녀는 고민스럽게 중얼거렸다.
“얘. 그 무슨 기회란 게 뭐지?”
박보금은 그런 김명숙이 딱하고 안됐어서 소파 끝으로 나앉으며 목을 길게 뺐다.
“넌 몰라도 돼. 너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김명숙은 고개를 저으며 엷게 웃었다. 그 수심 낀 웃음이 쓸쓸해 보였다.
“쌀쌀맞은 기집애. 친구 사이에 꼭 상관이 있어야 말하고 그러니? 속 답답할 땐 그냥 말을 하고 그러는 거지. 난 너하고 상관없는 얘기도 막하고 그러잖아. 그러다 보면 속도 풀리고 말야. 넌 내가 친구로 안 보이는 모양이구나?”
박보금은 커피 잔을 소리 나게 놓고는 거칠게 뒤로 물러나 앉았다.
“기집애. 애들처럼 토라지기는.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말야. 멋진 멜로영화 같은 데 여배우 의상을 한번 맡는 거야. 영화가 히트를 치면 더 말할 것 없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 다음부턴 손님이 밀려들어. 내 옷을 입은 여배우 사진 몇 장만 여기 모셔놓고 보여주면 여자들은 사죽을 못 쓰거든. 그렇게 해서 유명해지고 성공한 사람들이 몇이 있어. 근데 난 그쪽에 줄이 있어야 말이지.”
김명숙은 하르르 한숨을 쉬었다.
“얘. 그런 일은 누가 정하는 거지? 감독?”
“그렇지 뭐. 영화에선 감독이 왕이니까.”
“어머 얘. 그럼 됐다!”
박보금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무릎을 쳤고.
“뭐가.......?”
김명숙은 박보금을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뭐긴. 우리 집에 가끔 오는 감독이 하나 있거든. 그 사람한테 화끈하게 해줘서 내가 꼬시겠다 그거지.”
“그래? 그 사람 유명한 감독이니?”
김명숙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글쎄. 그건 잘 몰라.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큰 손님도 아니라 별 관심이 없었거든.”
“그게, 시시한 사람이면 소용없어. 감독 명함 가진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데. A급은 안 되더라도 B급은 돼야지. C급은 몇 년이 가도 영화 한편 못 찍는 일이 수두룩해.”
김명숙의 얼굴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얘. 알아보기도 전에 실망부터 하지 말어. 내가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그 사람이 뜻밖에도 A급일 수도 있잖니? 안 그래?”
“그리만 되면 얼마나 좋겠니. 내 팔자 피는 거지.”
김명숙은 어깨한숨을 쉬며 커피 잔을 들었다.
“기다려봐. 내가 곧 알아볼 테니까. 근데 말야. 그 일이 뜻대로 잘 풀리면 넌 어떡할래? 맨입으론 절대 안 되고, 나한테 뭘로 은혜를 갚겠어?”
“요런 얌체. 서울내기 다 됐다니까. 그래. 그 일만 착 해내면 한 철에 한 벌씩. 평생 공짜로 옷 맞춰줄게.”
“어머머. 너 그거 정말이지? 됐어. 됐어. 그 일은 나한테 맡겨. 그 사람 아니더라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일을 해결해 줄 테니까. 오만 손님 많은데 맘먹고 덤비면 안 될 것 없어. 이리저리 줄 대서 영화사 사장을 직접 꼬시는 수도 있으니까.”
박보금은 감독을 넘어 한발 더 나가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괜히 큰소리치지 말어. 나 실망하기 싫으니까.”
“얘. 너 술집 우습게보지 말어. 양주나 맥주만 파는 우리 같은 고급은 싸구려 니나노 판하고는 애저녁에 달라. 손님들도 전부 유명짜한 고급들이라구.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돈 많은 사업가, 권세 좋은 판검사에 공무원 나으리들, 다 우리 애들 품에서 놀아. 그 빽이 너 보통 빽인줄 아니? 베겟머리 송사 당할 게 없더라고 그게 안방마님하고만 통하는 줄 아니? 천만에, 술 알딸딸하게 취해 있을 때 뜻 잘 받아줘 가면서 살살 꼬셔대면 그보다 더 잘 통하는 건 없어. 너도 앞으로 세무서 같은 것 상대하다가 일이 꼬이고 골치 아프면 제때 나한테 말해. 쌈빡쌈빡하게 해결해 줄 테니까. 아니 참. 너 내가 이런 말하는 거 더럽고 추하다고 생각하지? 넌 지금까지도 처녀 좋아하니까.”
박보금은 불현듯 창피스러운 생각이 들었는지 김명숙을 쏘아보듯 했다.
“걱정 마. 내가 뭐 지금도 열아홉 순정판 줄 아니? 나도 이젠 세상 돌아가는 것 알 만큼 다 알고, 닳아질 만큼 닳아져 있어. 내가 명동에서 버티는 걸 봐라.”
“하긴 그래. 명동이 어디라고. 너 그렇게 말하니까 아주 철 들어 보이고 더 정이 든다 얘.”
박보금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기집애. 말도 징그럽게 하네. 근데, 쪽발이들 경기 한물갔다는 소문이 있는데, 넌 이제 쪽발이들은 상대 안 하는 거야?”
“얘 좀 봐. 들을 소문은 다 듣고 앉았네. 쪽발이들 이제 별 볼일 없게 됐어. 기생관광이 한풀 꺾인데다가, 쪽발이들도 약아져서 처음처럼 돈을 잘 안 쓰고 짠돌이들이 됐거든, 그 대신 우리나라 하이칼라들이 씀씀이가 커졌으니 애들도 치사하게 쪽발이 상대하려고 안 해. 나도 자존심으로도 그렇고. 기분 상으로도 그렇고. 우리끼리 노는 게 훨씬 정답고 속편해. 외상이 좀 깔리는 게 골치 아프지만 말야.”
“그래. 쪽발이들 상대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좋지. 딴 것도 아니고....... 난 그게 늘 속상했거든. 그건 그렇고 어쩐 행차셔?”
김명숙이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며 말머리를 돌렸다.
“가을이잖아. 새 옷 입고 새 기분으로 손님맞이 해야지. 그래도 나이 먹는 것 가려주는 건 옷밖에 없더라구.”
“당연하지. 의복이 날갠 걸. 일어나라. 옷 재게. 이 옷부터 공짜다.”
김명숙이 몸 가볍게 일어났다.
“뭐라구? 벌써부터 빽 쓰는 거야?”
박보금이 놀라며 몸을 발딱 일으켰다.
“그래. 빽 쓴다. 일이 되게 하려면 미리미리 바쳐야 되는 것 너 몰라?”
김명숙이 줄자를 목에 걸며 딴사람 얘기하듯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이구, 요런 내숭. 세상사는 요령에 아주 도통 했구나.”
“그쯤이야 대한민국 국민 기본 아니니? 자아. 이쪽으로 와서 똑바로 서.”
김명숙은 박보금을 긴 거울 앞으로 끌어당겼다.
“얘. 근데 옷을 맞출 때마다 몸은 꼭 재야 되는 거니?”
“그야 당연하지. 옷을 날마다 해 입는 것도 아니고, 사람 몸이란 자기도 모르게 자꾸 변해가는데, 5년. 10년 전 옷 지금 입어봐. 안 맞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닐 테니까. 옷 폼 나게 멋지게 입고 싶으면 몸 재는 것 귀찮아하지 말어.”
“그래 글쎄. 그 말이 맞기도 해. 나이 먹어가니까 가슴은 줄고 엉덩이는 커진다니까. 허리는 없어지고.”
“그건 나이 때문만은 아니야. 술 때문이니까 넌 특히 조심해.”
“어머. 그렇기도 하겠구나, 그게 술살이야. 안주까지 주섬주섬 먹어대니 살이 안 찔 수가 없지. 웬수들이 술은 왜 자꾸 권하는지 몰라. 즈네들이나 실컷 퍼마실 일이지. 술을 팔자면 안 받아 마실 수도 없고.”
“엄살 떨지 마. 이 정도면 날씬하니까.”
김명숙은 빠른 손놀림으로 줄자를 부리고 있었다.
“됐어. 디자인 고르자.”
김명숙은 줄자를 옆에 서 있는 아가씨에게 건네며 박보금의 어깨를 쳤다.
“어쩌니? 많이 퍼졌지?”
박보금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허리가 좀 굵어졌는데,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허리 굽어펴기 스무 번씩만 해. 그 살 놔두면 금방 아줌마 꼴 되고 마니까.”
“아유 징그러. 시집도 못 가보고 아줌마 꼴이라니.”
박보금이 과장되게 어깨를 떨어댔다. 김명숙은 주문장에 몸 부분부분의 치수를 적고 나서 백지를 꺼내 디자인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볼펜 끝이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날렵한 선들이 그어지고, 그 길고 짧은 곡선들은 서로 이어지고 엮어지며 옷 모양새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팔과 다리까지 매끈하고 날씬하게 그려내는 그 세련된 그림은 미처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세 개의 디자인이 백지에 나타나는 동안 박보금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종이 위에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그건 새 옷의 디자인에 관심을 쓰고 있다기보다는 김명숙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에 압도되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몸을 딱 사리고 앉아 디자인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김명숙은 아까 수다를 떨 때와는 전혀 다른 딴사람이었다. 굳어진 듯한 얼굴, 이상한 빛이 서린 눈, 그녀한테서는 범접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자아. 가을 기분 담은 팻숀이니까 이 셋 중에서 하나 골라.”
김명숙은 종이를 박보금 앞으로 돌려놓았다.
“내가 뭘 알아? 셋 다 예쁘네. 난 셋 다 해 입고 싶은 욕심쟁이니까 밤새 골라도 못 골라. 네가 하나 콕 찍어.”
박보금이 허리를 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누가 여자 아니랠까 봐. 그래 그럼. 이것하고, 이것. 두 벌을 해. 하나는 아까 말한 대로 그냥 해줄 테니까.”
“아니. 너 그것 정말이야?”
박보금의 눈에 빛이 반짝했다.
“넌 그럼 거짓말했어?”
“싫어 얘. 친구 사이에, 일이나 되면 그때부터 해.”
“그건 나도 싫어. 네가 아쉬운 소리하게 될 텐데 내가 너무 부담되고 미안해. 옷 안 받겠으면 그 일도 관둬.”
김명숙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이구. 저 고집통머리는 언제나 좀 수그러들지 몰라. 알았어. 그리 해.”
“가봉은 특별히 빨리 서둘러서 모레 해.”
“그 일 빨리 처리하라고 마구 몰아대는구나?”
“눈치 하나 빨라 좋네.”
“알았어. 말 나온 김에 후딱후딱 해치울게. 그래도 우리 둘이가 이만큼 된 건 성공한 셈인데 서로 도와야지. 그럼. 성공한 거지.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서울바닥에서.”
박보금은 지난 날을 회상하는 듯 얼굴에 슬픈 기색이 스치더니,
“얘. 이게 돈벌이는 좀 되니? 자리는 잡힌 거야?”
하며 걱정스럽게 김명숙과 양장점 안을 둘러보았다.
“어느 판이나 그렇겠지만 이 판은 특히 신참은 서러워. 이게 단골 장사고, 유명세 장사거든, 근데 신참은 그 세 가지 중에 하나도 잡히는 게 없잖아. 그래서 솜씨 좋아도 고전을 면치 못해. 나 좀 심각한 형편이야. 그동안 감추어왔었는데, 조금씩 까먹어온 본전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일을 해도 가게 세나 인건비 같은 게 워낙 많이 들어가거든. 아니. 내가 미쳤어. 이런 소리는 왜 하고 앉았지?”
김명숙은 문득 정신이 든 듯 앉음새를 고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괜찮아 이것아. 사업이라는 게 그리 힘드는 거야. 이 선배님이 환히 아는 것 아니니? 나도 첨엔 죽을 똥 쌌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아니야? 걱정 마. 내가 그 일을 화끈하게 끝낼 테니까. 힘내고. 조금만 기다려.”
“그래. 고생 지긋지긋하게 했는데.......”
입을 꾹 다무는 김명숙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렇다니까. 이 세상에 원수 갚아야 하니까 이 악물고 힘내. 참. 너 그 얘기 들었니? 차장이 버스 안에서 음독자살 한 거.”
박보금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응. 라디오에서 들었어. 나쁜 놈들이 지금까지도 그놈의 몸수색을 해 왔던 모양이지?”
아가씨를 의식해 김명숙의 목소리도 가늘어졌다.
“그놈들이 제 버릇 개 줬겠니? 차장들이 있는 한 10년 후에도 마찬가질 건데, 난 말야.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죽은 그 아가씨가 너무 불쌍하고, 꼭 나 같은 생각이 들어서 며칠 혼났어. 너 그때 생각해서 힘내야 해. 우리도 사람답게 한바탕 살아봐얄 것 아니니?”
“그래. 몸수색당하는 창피를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그런 유서를 품고 자살을 했겠니. 나도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 그때 우리도 죽는 게 났다고 한두 번 생각한 게 아니니까. 어쨌거나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긴 살아봐야 되겠는데, 이놈의 세상이 첩첩산중이야.”
“괜찮아. 여기까지 오기가 힘들었지 이젠 한두 고비만 넘기면 순풍에 돛 달게 돼 있어. 내가 발 벗고 나설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얘, 장사 시간 다 돼서 저녁 같이 못 먹고 그만 가야겠다.”
“그래. 어서 가거라.”
김명숙은 박보금이 사람들 속에 섞여 안 보일 때까지 양장점 앞에 서 있었다. 일이 되든, 안 되든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하나라도 있다는 것에 그녀는 위안 받고 있었다. 그런 속내는 언니에게도 내비칠 수가 없었다. 양장점을 차리기만 하면 금세 일류디자이너가 되고, 떼돈을 벌 것처럼 너무 큰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니는 새로 시작한 간호원 생활을 하면서 YWCA에 발길을 하는 눈치더니 언제부턴가는 여권신장을 내세우는 여성운동에 열중하느라고 양장점에는 관심도 없었다. 언니의 그런 무관심이 오히려 마음 편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생기는 것이 없는 여성운동에 언니가 왜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언니의 독신주의와 여성운동이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언니가 그 일로 세상 살맛이 나는 것 같은 것만은 다행이었다.
“얘. 됐어. 됐어. 내가 알아보니까 그 감독이 A급은 못 돼도 B급 중에서는 알아주는 상질이래, 곧 우리 집에 오기로 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이틀이 지나 가봉을 하러 온 박보금이 신바람 나게 한 말이었다.
“아주 급행열차로구나.”
“당연하지. 친구 의리가 있는데, 그리고 말야, 내가 또 알아보니까 감독만 가지고는 안 된대. 더 빠른 건 제작자를 잡아야 된다는 거야. 영화사는 영화를 계속 만들지만 감독들은 영화사에 뽑혀야 하는 입장이래거든. 그래서 영화사 사장 쪽으로도 지금 길을 뚫고 있어. 양쪽에 다리를 걸면 일이 그만큼 빠르고 틀림없는 거거든.”
“보금아. 아니 혜미야.......”
김명숙은 눈물이 핑 돌며 더 말을 하지 못했다.
“얘. 얘. 가봉 망칠라.”
박보금이 김명숙의 등을 두들기며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돌렸다.
“얘.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그 감독한테 코가 비틀어지도록 술대접을 하며 부탁을 했거든. 좀 두고 보자고 했는데, 느낌이 아주 좋아. 내 감이 거의 틀린 적이 없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내 수완에 지가 안 넘어가고는 못 배길 테니까.”
나흘 후에 옷을 찾으러 와서 박보금이 말했다.
“난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김명숙은 또 말을 어물거렸다. 마음으로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 쉬운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넌 역시 재주꾼이야. 아니, 일류디자이너야. 어쩜 이리 이쁘고 날씬하게 옷을 쏙 뽑을 수가 있니. 그래. 잘 됐어. 참 잘됐어. 루비 킴의 솜씨가 이렇다 하고 그 감독한테 이 옷들을 보여줘야지. 지도 눈이 있으면 꼼짝 못할 거야.”
박보금은 새 옷을 번갈아 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 돌고 저리 돌며 웃음꽃 환하게 흡족해 하고 있었다.
“맘에 드니 다행이다.”
김명숙은 가슴 두근거림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속감정과는 달리 무덤덤한 듯 한마디 했다. 다 된 옷을 손님들이 입어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이 되고는 했다. 그 긴장은 옷을 자꾸 만드는데도 조금도 가시지 않고 처음과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네 옷 맘에 안 드는 사람도 있겠니. 넌 정말 디자인 솜씨는 타고난 모양이야. 어쩜 이리 옷을 멋지게 만들어낼 수가 있니.”
“그렇지도 않아. 어쩌다 맘에 안 들어 하고 트집잡히고 할 때는 너무 진땀나고 나를 믿을 수가 없고 그래. 이것도 쉽게 해먹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야.”
“하긴 그래. 이 세상 직업치고 냉수 마시듯 쉽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니. 다 된 술 그냥 팔아먹는 술장사도 애먹고 속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더구나 양장점은 말 많고 까탈 잘 부리는 여자들만 상대하는 거잖아. 그런 손님들 기죽이기 위해서도 그 일이 빨리 풀려야 하겠지?”
“말해 뭘 해. 트집 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일수록 유명한 것 앞에서는 꼼짝을 못해. 사람 맘 참 이상하지.”
“간사하고 요사스러운 게 사람 맘 아니니. 똑같은 술도 고급 집에서 비싸게 마시면 더 맛있어하는 게 사람의 얄팍한 마음이라니까. 며칠만 더 기다려.”
김명숙은 날마다 초조하게 보냈다. 내가 왜 이러나 하다가 보면 박보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했다. 손님들을 위해 매달 갖추어두는 여성지들을 뒤적거리다가도 파르르 신경질이 일어났다. 칼라판 화보를 호화롭게 장식하고 있는 이 달의 ‘뉴 팻숀’이니 ‘뉴 모드’니 하는 것들이 어느 때 없이 신경을 자극했다. 이름난 디자이너의 눈여겨볼만한 작품에는 마음이 다소곳해지는데, 어떤 잡지에는 얼토당토않은 옷들이 버젓하게 실려있기도 했다. 그런 것을 보면 그만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상했다. 그 잡지를 펼쳐놓고 으스대며 손님들을 끌고. 손님들은 그 앞에서 수다스럽게 감탄하고 주눅 드는 모습이 눈에 환히 보였다. 그런 화보에서는 빽 냄새가 물씬거렸다.
김명숙은 개업을 한 다음부터 세상의 뒷면을 차츰차츰 알아가면서 신경질이 심해지고 자신감이 없어져가고 있었다. 자기 실력만 있으면 될 줄 알고 자신만만하게 양장점을 차리고 나섰던 것이 철없고 순진한 짓이었다. 그런 너절한 화보를 보면서 짜증이 나고 마음이 상하는 것은 결국 그 분야에 연줄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 대한 짜증이고 속상함이었다. 그동안 큰 오빠의 빽을 몇 번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망설이다가 마음을 접고는 했다. 보잘 것 없는 형제간들을 늘 감추고 싶어 하는 큰오빠가 그 일을 도와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든 일류디자이너로 출세해 그동안 무시당해 온 만큼 큰오빠 앞에서 뻐기고 싶은 오기가 창창하게 살아 있었다.
“얘 명숙아. 아니, 아니. 루비 킴 사장님. 기회가 왔어. 내일 있지. 내일. 그 감독하고 너랑 만나기로 약속했어. 우리 집에서 오후 7시. 쎄련되고 멋지게 뽑아 입고 와. 개성 있고 매력적인 디자이너라고 내가 선전 잘해 놨으니까. 시간 잘 지키고, 나 바빠서 끊는다.”
박보금은 한달음에 쏟아놓고 전화를 끊었다. 김명숙은 오른손에 송수화기를 든 채 왼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가슴은 심하게 벌떡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고대했던 기회인가........ 그녀는 눈물까지 솟구치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보금아.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녀는 송수화기를 바라보며 목이 메이고 있었다. 날마다 기다리면서도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박보금이가 그저 듣기 좋게 빈말을 한 게 아니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차장 시절의 옛정이 이다지 뜨거울 줄을 몰랐다. 그녀는 진정 미안한 마음으로 가슴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박보금에 대한 경멸적 감정을 몰아냈다. 그동안 친구로 지내오면서도 차장의 고생에서 손쉽게 벗어나려고 술집으로 들어갔던 것이 무슨 불결한 찌꺼기처럼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덕을 보게 되다니....... 김명숙은 세상살이의 얄궂음을 또 느끼고 있었다.
“미스 정. 나 미장원에 좀 다녀올 테니까 가게 잘 봐.”
김명숙은 서둘러 핸드백을 들며 말했다.
“어머. 곧 퇴근시간 되는데요.......”
아가씨가 의아하게 김명숙을 쳐다보았다. 손님 발길 잦아질 시간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혹시 맞춤손님이 있으면 어디 디자이너 모임에 갔다거나 적당히 둘러대서 다시 오게 만들어. 맞춤손님 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생겼으니까.”
김명숙은 미장원에 길게 누워 얼굴 맛사지를 맡겼다. 개성 있고 매력적인 디자이너라고....... 박보금의 말이 들리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열다섯 살에 가출을 할 때 막연한 꿈을 품고 있었다. 시골 촌구석에서 평생 찌들려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가위눌렸다. 도시로 나가 돈을 벌어 더 배우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그 정도의 막연한 생각뿐 디자이너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찌어찌 몸부림을 치다보니 오늘에 이르러 있었다. 이건 스스로 생각해도 엄청남 변화고 대단한 성공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를 지키고, 일류디자이너가 될 발판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허물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명숙은 다음날도 미장원에 가서 맛사지에 고대를 하고, 화장도 미용사를 시켜서 했다. 돈 많이 드는 그런 사치를 하기는 처음이었다. 옷도 대여섯 차례나 바꿔 입어가며 잔잔하면서도 세련된 것으로 골랐다.
“어머 사장님. 꼭 새 신부 같애요. 좋은 일 있으신 거죠?”
외출 준비를 다 끝내고 나선 김명숙을 보며 아가씨가 의미 깊은 눈길을 보냈다.
“괜히 넘겨짚고 그러지 말어. 우리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나가는 거니까.”
김명숙은 나무라듯 무표정하게 말했다.
“우리의 생사요......?”
“그래. 우리의 생사. 이따가 문단속 잘하고 가.”
불쑥 나온 ‘우리의 생사’라는 말을 다시 강조하자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김명숙은 박보금의 술집 앞에서 주춤 멈춰 섰다. 술집과 음식점이 많은 그 뒷길은 가끔 오는데도 언제나 낯설었다. ‘나포리’라는 박보금의 술집 간판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나포리....... 나포리....... 김명숙은 속으로 나포리를 뇌어보았다. 나포리가 이태리 어디라는데,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그 이름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양장점이고 술집이고 새로 생기는 것은 외국 이름들을 따오기에 바빴다. 무슨무슨 장이라고 이름 붙은 술집에 나다니던 박보금이 제 술집을 차리고 나서면서는 ‘나포리’라고 한 것이 제법이고 신통했다. 나포리는 그만두더라도 프랑스의 파리와 이태리의 로마는 꼭 한 번씩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세계 패션의 으뜸이라는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갖는 꿈이었다. 그곳의 패션거리를 한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달라지고 생각이 바뀐다고 했다. 그건 백 번 옳은 말이었다. 패션잡지로만 보는 것보다는 직접 옷들을 살펴보고 만져보면 훨씬 더 실감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양장점이 자리 잡히지 않은 형편에 그런 곳은 아득하게 멀고 먼 외국일 뿐이었다.
“어머 사장님. 어쩐 일이세요?”
“누구.......?”
김명숙은 알은체하는 여자를 뜨악하게 쳐다보았다.
“저 미스 오에요. 전번에 인사 드렸잖아요. 여기 나포리에 있어요.”
“아. 그렇든가. 미안해. 못 알아봐서.”
“괜찮아요. 우리 같은 시시한 것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응. 박 사장하고 약속이 있어서.”
“그럼 어서 올라가세요. 저도 지금 나오는 길이에요.”
“그래. 가지.”
김명숙은 2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어....... 사장님.......”
김명숙의 옆에서 걷는 아가씨가 무슨 말인가를 망설였다.
“왜. 무슨 말인데 그래? 어서 해봐.”
“아니에요. 창피해서.......”
“창피? 괜찮아. 흉보지 않을 테니까 해봐.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인 모양인데.”
“네. 그럼 정말 흉보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저어, 다른 게 아니라요. 사장님 양장점에서는 외상은 안 되나요? 그냥 전부 외상이 아니라 월부 책처럼 몇 달로 나눠 갚는 거요. 다달이 시골집에 돈 보내고 나면 명동에서 옷 해 입을 만큼 목돈이 없거든요. 변두리에서 해 입으면 싼 대신 촌스럽게 폼이 안 나고, 쎄련되고 폼 나게 명동에서 해 입으려면 너무 비싸고 그렇거든요. 월부로만 해주면 우리 애들이 전부 맞출 거에요.”
그 아가씨는 창피스러움을 줄이기라도 하려는 듯 숨도 쉬는 것 같지 않게 빨리 말을 해치웠다.
“흥. 떼먹지만 않는다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네.”
김명숙은 모호한 느낌으로 호호호 웃었다.
“네에. 그럴 염려도 있겠네요. 그럼 그걸....... 예. 좋은 수가 있어요. 우리 사장님이 보증 서게 하면 되잖아요.”
아가씨가 눈을 빛냈다.
“응.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건 미스 오가 사장님하고 의논해 가지고 와. 사장님이 오케이면 나도 오케이니까.”
김명숙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사업가의 차가운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다.
“어머. 그렇게만 해주시면 너무 고맙지요. 우린 사장님 밑에서 꼼짝을 못하는 신세니까 사장님이 보증을 서는 건 틀림없거든요.”
아가씨는 신바람을 냈다.
“고향에서는 이런 데서 일하는 것 아시나?”
“아아니요. 그걸 알면 벼락 치게요. 이런 데서 일하는 애들 집에서는 다 회사나 공장에 취직해 있는 줄 알아요.”
아가씨는 불현듯 한숨을 쉬었다. 김명숙은. 아가씨가 유난히 힘을 준 ‘아아니요’ 하는 말이 가슴에 걸리며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했다. 관심을 쓴다는 것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어쩌면 박보금의 집에서도 여지껏 그녀가 무슨 일로 돈을 벌어 보내는지 모를지도 몰랐다.
“어머나. 너 아주 딴사람으로 변했구나! 어쩜 좋으니! 넌 장미꽃이고 난 호박꽃이 돼버렸으니.”
박보금은 김명숙을 보자마자 호들갑스럽게 손뼉을 쳤다.
“애들 보는데 사람 놀리지 말어.”
김명숙이 창피해 하며 눈을 흘겼다.
“놀리긴. 사실인걸.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 내 방으로 들어가자.”
박보금이 저쪽 주방 옆에 붙은 방으로 앞장섰다. 그 술집은 양쪽으로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가운데 꽤 넓은 면적은 통로로만 쓰도록 비어 있었다. 그 바닥에 깔린 새빨간 양탄자와 싱싱한 잎들을 드리운 화초들이 고급 술집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얘. 너는 역시 디자이너답게 쎄련되고 고상한 멋쟁이고. 난 천상 술집에서 굴러먹는 야하고 천한 삼류야. 직업은 못 속이나부지? 최 감독이 첫눈에 너한테 반하게 생겼다.”
박보금이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얘가 왜 자꾸 이래. 거북하게.”
김명숙이 눈을 더 맵게 흘겼다.
“근데 얘. 너 술은 좀 마실 줄 알어?”
“조금. 맥주 두 병 정도.”
“어머나. 그럼 됐다. 근데 너. 저번에 네가 한, 이젠 열아홉 살짜리가 아니라는 말 믿어도 돼니?”
“왜. 촌스럽게 굴까봐 걱정돼서?”
“눈치는 빠르네. 난 말야 사실은 걱정이야. 뭐라고 말하기 곤란한데, 네가 빡빡하게 굴다가 일 파토 날까 봐.”
“네 걱정 알아. 허지만 안심해. 난 지금 숨이 턱에 닿아 있고, 이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만큼 알고 있으니까, 그쪽에서 날 속이지만 않는다면 내가 파토나게 할 일은 없을 거야.”
“됐어. 그럼 안심이야. 아유. 이 말 하기 진땀 난다 얘.”
박보금은 과장되게 휴우 숨을 내쉬며 손부채 부치는 시늉을 했다.
“그 사람은....... 어때?”
김명숙은 눈길을 딴 데로 돌린 채 거북스럽게 물었다.
“이따가 보면 알겠지만 뺀질이가 아니라 털털이야. 멋 부리는 일도 없고, 얼핏 보면 감독 같지도 않아. 근데 사람은 진중해 보이고, 술 마실 때 보면 성질이 날카로운 데가 있어. 그럴 때는 감독 같애. 영화 평할 때 보면 되게 유식하고, 넌 그동안 읽은 소설 얘기만 풀어놔도 점수 딸 거야.”
박보금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글쎄. 그 사람이 아는 디자이너들도 많을 텐데.......”
“너무 걱정 말어. 이 일만 잘해 주면 내가 평생 술 공짜로 주기로 했으니까.”
“어머머......”
김명숙은 박보금을 쳐다보며 어이없어했다.
“왜? 네가 나한테 옷을 공짜로 해줄 판인데 난 공짜 술 못 줄 것 없잖아. 그래도 난 본전으로만 따지면 술값 그거 얼마 안 되니까 염려 놔. 사실 술장사 이거 엄청 남는 거거든, 외상을 떼이지만 않으면 떼돈 벌기는 잠시야.”
“기집애. 차암.......”
콧등이 매워진 김명숙은 더 말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손기척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최 감독님 오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특실로 모셨습니다.”
나비넥타이를 맨 건장한 청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았어. 안주 준비 잘해.”
“예. 신경 쓰고 있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청년이 돌아서자 박보금이 일어서며 말했다.
“긴장 풀고 편안하게 해.”
“몰라. 나 화장실에 갔다 가야겠어.”
김명숙이 울상을 지었다.
“호호호....... 고집 세고 잘난 루비 킴도 별수 없구나. 너 그러니까 아주 여자다워 보인다. 얘. 가자. 나도 화장실 가야 하니까.”
박보금이 김명숙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들이 특실로 들어서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셨어요. 최 감독님. 제가 말씀드렸던 루비 킴이에요. 얘. 인사드려라.”
박보금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고,
“처음 뵙겠습니다. 루비 킴이라고 합니다.”
김명숙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예에. 최라고 합니다.”
그 남자는 엉거주춤한 자세처럼 말도 어물거리듯 했다. 그런데 눈은 재빠르게 김명숙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 눈빛이 텁수룩한 차림하고는 다르게 예리해 보였다. 갈색 홈스펀에 노타이 차림인 그는 곱슬거리는 느낌의 머리가 더부룩했다. 박보금이 자리 배치를 했다. 김명숙과 최 감독을 마주보고 앉게 하고, 자기는 두 사람의 가운데인 탁자의 옆구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술은 감독님이 좋아하시는 맥주로 하시죠. 마시다 맘에 있으면 양주도 좀 하시구요.”
박보금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예에. 뭐......”
최 감독은 담배를 피우며 빠른 눈길로 김명숙을 살피고는 했다. 김명숙은 눈길을 탁자 위 그 어디엔가 둔 채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곧 술과 안주가 나오고, 박보금이 술을 따랐다. 박보금의 잔에는 최 감독이 따랐다.
“자아. 우리 일이 잘 풀리기를 빌면서, 건배!”
박보금이 맥주잔을 내밀면서 카랑하게 목청을 높였다. 세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김명숙은 잔을 기울이며 어찌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반만 마셔야 하나, 다 마셔야 하나....... 주량으로는 다 마시면 힘겹고, 첫잔은 다 마시는 거라는 말이 있고....... 다 마시면 괜히 술고래로 인상이 나빠질 수도 있고, 반쯤 마셨다가는 분위기에 안 맞을 수도 있고.......그녀는 얼른 박보금을 곁눈질 했다. 절반쯤 마신 박보금이 막 입에서 잔을 떼고 있었다. 자신도 거기에 맞추기로 했다.
“난 아무래도 박 사장한테 잘못 걸린 것 같에요. 사람을 꼼짝 못하게 몰아대니 원.”
최 감독이 빈 술잔을 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에. 잘못 걸렸다마다요. 저는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극성이고, 쟤는 내 형제 같은 친구거든요. 쟤 형편이 급하니까 뜸들이고 어쩌고 할 새가 없잖아요. 마구 몰아대는 수밖에.”
박보금은 상글상글 웃으며 농담인 것처럼 말하고는,
“얘. 주도 좀 배워라. 잔이 비면 돌아가면서 제때제때 술을 따르고, 내 잔이 비면 술을 권하고 그러는 거야. 자아.......”
그녀는 술병을 들어 김명숙에게 내밀었다. 김명숙은 얼떨결에 술병을 받아들고 몸을 일으켰다.
“저어........ 제가........”
“예에 감사합니다.”
김명숙은 숨을 몰아쉬며 술을 따랐다. 남자의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이 처음이 아닌데도 이상하게도 손떨림이 심했다.
“술 따르는 폼이 아주 멋지네.”
박보금이 쿡쿡 웃었고, 김명숙은 술병을 놓으며 박보금에게 눈총을 쏘았다. 최 감독은 잔을 반쯤 비우고 나서 입을 열었다.
“박 사장이 뜸들일 새 없다니까 먼저 내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박 사장의 말을 들은 다음부터 박 사장이 입은 옷들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오늘 김 사장의 옷도 눈여겨보았습니다. 우리는 옷을 만들 줄은 모르지만 직업상 약간 볼 줄은 압니다. 내가 보기로 김 사장의 솜씨는 그만하면 연예인들이 입기에 아무 손색이 없어요. 감각적이고 세련되었으면서도 어딘가 품위 있어 보이는 점이 특히 좋아요.”
“어머나. 고마우셔라. 넌 이젠 됐다.”
박보금이 최 감독의 말 가운데 뛰어들며 환성과 함께 손뼉을 쳐댔다. 잔을 비운 최 감독이 빈 잔을 박보금에게 내밀었다.
“에이. 절 주지마시고 루비 킴한테 주셔야지요.”
“초면이니까 차차 돌려야지요.”
“어쩜....... 영국 신사셔.”
박보금에게 술을 따르는 최 감독을 조심스럽게 훔쳐보면서 김명숙은 그가 표 나지 않게 멋을 내는 세련된 멋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양복보다 엷은 갈색의 남방셔츠와 그보다 약간 진한 갈색으로 목을 두른 머플러는 아무니 쉽게 갖출 수 없는 조화였다. 담배를 두어 모금 빤 최 감독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아니, 두 가지라고 해야 되겠군요. 박 사장의 적극적인 부탁을 받고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를 여러모로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첫 번째 문제는 김 사장 사정이 급한 만큼 내가 요새 영화를 찍을 계획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이건 좀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뭐랄까....... 영화 한 편의 의상을 전부 맡기는 김 사장이 너무 무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두 가지 방법이 어떨까 골라봤어요. 하나는 내가 잘 아는 선배 감독들이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 출연하는 조연급 신인배우들에게 옷을 입혀 내보내는 겁니다. 당장은 셈에 차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배우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고, 그들이 갑자기 주연급으로 부상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지요. 또 하나는 여성지 화보를 이용하는 건데, 내가 영화 관계로 통할 수 있는 어떤 여성지 편집장이 한 사람 있어요. 잘하면 거기에 한두 페이지 정도는 올라갈 수 있어요. 죄송하지만 내 능력은 이 정도 밖에 안 돼요.”
최 감독은 정말 죄송하기라도 한 듯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얘. 이걸 어쩌지?”
박보금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김명숙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일그러지며 울상이 되고 있었다.
“감독님. 저는 제가 무명인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첫술에 배부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도와주시면 감독님 체면 깎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김명숙은 박보금의 반응을 묵살한 채 최 감독을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손님의 몸을 재고 디자인을 스케치할 때처럼 진지했다.
“아니.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뜻밖이라는 듯 최 감독이 불그스레하게 술기운 돋아 오르기 시작하는 얼굴을 훔쳤다.
“실망하긴요. 사람이 제 푼수를 알아야지요. 그렇게만 도와주셔도 저로서는 큰 영광입니다.”
김명숙은 곱게 웃으며 나부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머머머. 저 내숭, 저 내숭. 저게 사람 여럿 잡겠네. 저거 아주 맹랑하네. 단수가 보통이 아닐세.’
박보금은 김명숙을 보며 너무 놀라고 있었다. 그러면서, 김명숙이 남자를 대하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이고, 자신만 산전수전 다 겪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 오늘 참 기분 좋습니다. 난 무시당할 작정을 하고 솔직하게 털어놨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 범위 내에서 적극 돕도록 하겠습니다. 허풍 들지 않고 성실한 그 태도가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박 사장. 친구 한번 잘 뒀어요. 오늘 술맛 나게 생겼으니까 지금부터 술 좀 마십시다.”
최 감독이 빈 잔을 김명숙에게 불쑥 내밀었다.
“어머머. 나 어쩌지? 질투 나려고 하는데, 나한테는 그런 칭찬 한 번도 안 해주구선.”
박보금이 콧소리를 내며 최 사장의 어깨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하하하하....... 친구 칭찬이 박 사장 칭찬 아니오.”
최 감독이 목의 머플러를 풀며 고개를 젖혀 웃어댔다.
“그래요. 직접 돈 들이대서 내 손으로 영화 만들 수 없는 형편이니까 그리 라도 해서 차츰 커나야지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니까요.”
“영화를 직접 만들어도 일류 주연급 배우들한테 자기 옷 다 입히기는 어려워요. 일류배우들은 자기네가 믿고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옷이 아니면 안 입으려고 해요. 그건 자기 관리거든요.”
“그런가요? 영화에서는 감독하고 영화사 사장이 왕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배우도 왕이지요. 배우 없이 영화가 되겠어요? 제작자. 감독. 배우가 삼위일체가 돼야 좋은 영화가 탄생하지요. 그러니까 제작자나 감독이 좋은 의상을 배우에게 권할 수는 있어도 특정한 디자이너의 옷만 입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랬다간 영화 망쳐요.”
김명숙은 엉뚱한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어왔던 잘못을 수정하며 최 감독의 방법을 충실히 따르리라 다시금 마음먹었다. 그렇게만 되더라도 손님을 끌고 유명해지기도 하는 두 가지 이익을 요령껏 취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근데 말에요. 감독님....... 이 말을 여쭤봐야 되나 어쩌나......?”
박보금이 최 감독과 김명숙의 눈치를 살폈다.
“술자리에서 못할 말 뭐있어요? 맨 정신으로 하기 거북한 말하려고 술을 마시는 법인데,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불콰해진 최 감독이 여유롭게 웃으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럴까요. 그럼. 그 조연급 있잖아요. 신인들한테도 옷을 무료봉사해야 하나요?”
“아. 그거 말인가요? 그거 뭐....... 차차 얘기하죠.”
최 감독의 반응이 어색스럽고 떨떠름해졌다.
“얘. 그게 무슨 소리야. 입어주는 것만도 고맙지. 그리고 신인들이 무슨 돈 있어? 나는 옷 선전해서 좋고, 신인들은 옷 얻어 입어서 좋고. 서로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어. 감독님. 얘가 저를 너무 생각하다 보니 그런 말을 한 거에요. 없었던 걸로 싹 잊어버리세요. 저는 몇 백 벌이든 그때마다 새로운 디자인으로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어요.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김명숙이 숨 가쁘게 말하고는 반쯤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잔을 최 감독 앞으로 내밀었다.
“하하하하....... 김 사장은 됐습니다. 사업가로서 완벽해요. 그 정도로 작정하고 있으면 디자인 감각 뛰어나겠다, 틀림없이 일류로 출세할 수 있어요. 앞으로 힘닿는 데까지 밀어드릴 테니까 잘해 봅시다.”
최 감독이 술이 다 차오른 잔을 놓더니 ‘잘해 봅시다’에 맞추어 김명숙의 앞으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김명숙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했다.
‘어머머. 저거 정말 사람 잡는 내숭이네, 남자 다루는 수완이 나보다 훨씬 고수야. 저게 처녀라는 건 거짓말 아닌가? 아니, 마음이 급하다 보니 저런 요령이 생기는가?’
박보금은 술기운과 함께 정신이 헷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최 감독이 먼저 악수를 청할 만큼 일이 잘 풀리고 있어서 마음이 흐뭇하고도 개운했다. 철따라 공짜 옷 얻어 입을 것을 생각하면 더욱 신나기도 했다.
“내가 2~3일 안으로 박 사장과 함께 양장점 구경을 가도록 하지요. 위치도 알아두고 해야 자신 있게 소개를 할 수 있으니까요.”
술기운 거나해진 최 감독은 몸을 편하게 부리며 말했다.
“네에. 언제든지 대환영입니다. 도와주시면 꼭 은혜를 갚겠어요.”
김명숙은 야릇한 눈웃음으로 최 감독을 끌어당기며 이렇게 말했다. 한 번 공짜로 입히고 열 벌을 팔면 그게 어디냐. 또. 옷을 계속 입고 다니며 ‘루비 킴의 옷’ 이라고 해대면 그 선전 효과가 얼마냐.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그 이익 절반은 널 줄 수도 있어. 그녀는 흔들리는 술기운 속에서 이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은혜는 무슨.......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인데 서로 도와가며 사는 거지요. 세상 다 그렇고 그런 거니까요. 박 사장. 우리 다 같이 건배합시다. 화통하고 세련된 사람 소개해서 기분 좋아요. 어서 내가 근사한 작품 하나 찍을 수 있도록 기도하시오.”
최 감독이 술잔을 들었다.
“네에. 좀 기다려보세요. 감독님과 루비 킴을 위해서 영화사 사장님 한 분을 잘 꼬실 테니까요. 나 아직 그 정도 매력은 남았잖아요?”
박보금이 술잔을 들며 야한 눈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좋아요. 아직도 젊으니까 걱정 말아요.”
최 감독이 껄껄거렸다. 김명숙은 일류호텔에서 패션쇼를 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두 사람과 술잔을 부딪쳤다.
42. 세파에 뜬 조각배
“아빠. 우리도 테레비 사.”
“응.......?”
화장실에서 나오던 이상재는 아들의 쨍한 목소리에 엉거주춤했다. 다섯 살인 녀석은 늦잠 찌꺼기를 털어내는 듯 눈을 비벼댔다.
“우리도 테레비 사자니까.”
아들의 목소리가 더 강한 쇳소리로 울렸다.
“테레비는 무슨 테레비?”
녀석이 또 엉뚱한 소리를 한다 싶어 이상재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빤 테레비도 몰라? 내 친구 상규네도 샀단 말야. 우리도 빨랑 사.”
아들의 목소리는 더욱 카랑카랑하게 솟고 있었다.
“얘 주혁아. 아침부터 아바한테 그러면 못 써. 아빠 회사에 나가셔야 하는데.”
그의 아내가 부엌에서 뛰쳐나오며 아이를 나무랐다.
“싫여. 싫여. 우리도 테레비 사. 테레비 없는 집은 이젠 우리 집뿐이라니까. 상규새끼가 막 폼 잡고 놀리니까 난 챙피하단 말야.”
아들은 제 엄마의 앞치마를 잡고 마구 흔들며 울음 섞어 외치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울긴 왜 울어. 우리도 아빠가 돈 벌면 곧 살 거야. 우리 주혁이 착하지. 조금만 기다려 응?”
아내가 아들을 안아 올리며 등을 토닥거렸다.
“싫여. 싫여. 나 챙피하다니까.”
아들은 제 엄마를 떠밀며 떼를 썼다.
“너 이러면 엄마가 맴매할 거야. 매 맞아도 좋아?”
아내의 목소리가 차가워지며 눈을 부라렸다. 아들은 그 서슬에 기가 꺾였다.
“갑자기 왜 테레비 성화야.”
이상재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뚱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 나라 사람 아니에요? 무허가 판잣집에서도 월부로 테레비 들여놓고 있는데. 애비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 창피한 줄이나 아세요.”
그의 아내가 눈을 흘기며 퉁을 놓았다.
“그거 아동 교육에 백해무익이라니까.”
“맙소사. 끝까지 무능하단 말은 안 하고.”
이상재는 애를 안고 돌아서는 아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를 갓 낳았을 때는 신문의 마력에 휘말려 텔레비전은 안중에 없었고. 아이가 커서 텔레비전을 원하니까 생활은 궁기에 절어 있었다. 아내의 말마따나 신문 없이는 못 살 정도로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신문부터 집어 들었다. 그러나 유심히 보는 것은 정치면이고 그 다음은 문화면이었다. 문화 면에 신경을 쓰는 것은 출판사를 한 다음부터였다. 날이 갈수록 볼 만한 것이라고는 없이 닮은꼴이 되어가고 있는 신문들인데도 눈에 보이기만 하면 펼쳐들게 되었다. 정치적 불안이 심해질수록 통제가 강화되고 있으니 신문들은 특종도 없고 특색도 없이 시들시들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문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오래 습관된 신문 중독증인지,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는 신문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재는 밥상을 받고 앉아서도 밥맛이 하나도 없었다. 또 애비로서 체면이 구겨진 게 영 언짢았다. 그동안에도 애비의 체면이 안 서는 일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들이 이웃에 친구를 갖게 되면서부터 그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세발자전거에서부터 가지가지 장난감까지 아들이 사내라는 것은 많기도 했다. 그런데 장난감이라는 것들이 옛날하고는 달리 정교하게 상품화되어 있어서 턱없이 비쌌다. 특히 아들이 좋아하는 앙증맞은 미니카들은 전부 외제라 비싸서 애비 체면 깎기에 딱 알맞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편으로서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일이 그 위에 겹쳐지고 있었다. 가까스로 생활비 갖다 주기도 벅찬 형편에 남편 노릇이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해묵은 옷은 고사하고 헌 구두마저 새로 사주기가 어려웠다. 신문사 기자에게 시집온 아내는 그 혜택을 얼마 누려보지도 못하고 고생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기자들의 월급이 자꾸 올라가고 있으니 아내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그러나 아내에게 면목 없고 미안한 것은 그래도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아내가 남편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리라는 믿음으로 어물어물 넘길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철없는 아들에게 애비노릇을 못하는 것은 그때마다 가슴 아리고 마음을 그늘지게 했다. 특히 유치원에 보내지 못했을 때는 그 괴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불현듯 언론 투쟁에 나섰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었다. 세상은 달라진 것 없이 독재는 건재하고 있었고, 신문사에서는 딴사람들을 받아들여 보란 듯이 신문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런 철벽의 현실 앞에서 자유언론의 깃발을 들었다는 것은 정말 갈 데 없는 돈키호테들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끼 밥 굶지 않으며 어렵사리 출판사를 꾸려가고 있는 자신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취직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이 감시당하고 방해 받아 이런저런 장사로 나선 기자들은 그동안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병들어 눕기도 했고, 망해서 맨주먹이 되기도 했다. 자식들의 입에 밥을 넣어줄 수 없는 애비의 처절함....... 그런 막다른 길에 몰려 있는 동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에 비하면 자신은 가장 노릇을 너무나 잘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철없는 아들의 텔레비전 투정에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사치였다. 아직 텔레비전도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었다.
“당신이 주혁이 좀 잘 달래. 녀석이 일곱 살만 됐어도 말귀를 알아들을 텐데 말야.”
이상재는 아내한테 이르고 집을 나섰다. 아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당연히 ‘알았어요’ 하는 답이 나와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일까. 그럼 아내도 텔레비전 사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그는 울컥 부아가 치밀다가 괜한 일에까지 소심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내는 그렇게 소갈머리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어린 것을 기죽게 키우기는 싫고, 뜻을 들어줄 수는 없고, 아내도 이래저래 속이 상해 그러리라 싶었다. 이상재는 애써 다스리고 단순화시켜 온 감정이 또다시 헝클어지고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회와 정의와 명분과....... 현실과 가정과 궁핍과....... 그 갈등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의지를 꿋꿋이 세우려고 하면서도 생활의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은 흔들리고 허물어지려고 했다.
‘내가 정말 다혈질이고 돈키호테였던가? 우리가 언론자유를 위해 나섰지만 이루어진 것은 무엇인가?’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신문사에서 내쫓겼을 뿐 독재는 오히려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어이없고 비참하게도 자신들의 행동은 독재자들에게 독재를 강화하도록 자극하고 깨닫게 해준 역할을 한 셈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자신들이 내쫓긴 자리를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며칠이 못 가 이런저런 사람들이 메우고 만 일이었다. 그들도 다 배울 만큼 배우고 사리분별을 할 능력을 갖춘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슬슬 피하고 몸을 사리는 눈치더니 차츰 해가 바뀌어가자 기를 세우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맞대면하기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술 한잔하자는 말을 서슴없이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어차피 누군가는 채워야 할 자린데 그나마 저 같은 사람이 들어가 선배님들 뜻 지키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하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희한한 논리에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봐. 어디서 그따위 논리 변조야! 그게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써먹었던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괴변이야. 얻어터지기 전에 당장 꺼져!”
술 취한 원병균 선배가 빈 막걸리 잔을 치켜들며 외친 소리였다. 그런 얍삽한 논리 변조는 소위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또, 그런 괴변이 어물어물 통해가는 것이 세상이었다. 그런데 원병균 선배는 그 합리화를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허둥지둥 술자리를 떴기에 망정이지 만약 무슨 말대꾸를 했더라면 원 선배는 막걸리 잔으로 그의 면상을 후려쳤을지도 몰랐다. 원 선배의 그 단호함 앞에서 술자리의 후배들은 또다시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난들 왜 갈등이나 회의가 없겠어. 성인이나 군자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기 진실을 스스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야. 자기 진실을 더럽히는 것은 자기 부정이고, 자기 부정은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리는 마지막 행위니까. 우리가 권력의 억압에 고립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했던 저항도 어디로 증발하거나 사라진 게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그 저항도 이어지고 퍼져나가고 있다 그 말이지. 대학생들의 저항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는데, 그 힘에는 우리의 성명서 한 장. 한 장도 어떤 힘으로 작용하고 있거든. 모든 사회운동은 직접 간접으로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서로서로 자극하고 의지하면서 그 힘이 배가 되는 거니까. 그리고 생활이 고달프다고 괴로워하거나 의기소침해선 안 돼. 지금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생각해 봐. 그들에 비하면 우린 얼마나 편하고 고통 없이 지내는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망하지 않는 독재는 없으니까.”
원병균 선배는 오갈 데 없는 실직자 동료들에게 자장면이며 싸구려 백반을 지치지 않고 사주는 것처럼 그런 굳은 의지도 줄기차게 지키고 있었다. 원 선배야말로 그런 의지가 흔들리거나 허물어지기 딱 좋은 여건 속에 놓여 있었다. 재벌로 굳건하게 자리 잡은 처가에서는 ‘문어발식 경영’이라는 새 유행어에 어울리도록 해마다 족벌회사들을 늘려 이제 마흔 개가 넘게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 회사가 생길 때마다 원 선배는 고위간부로 자리를 옮기라는 압력을 받고는 했다. 그러나 원 선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장인의 압력에 못지않게 부부 싸움도 숱하게 많이 한 눈치였는데, 결국 지치고 만 것은 원 선배의 아내 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문사에서는 은밀하게 원 선배에게 접근해 온 일이 두어 번 있었다. 직책을 올려 우대할 테니 신문사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이미 서너 명이 어물쩍 뒷손을 써 신문사로 다시 들어간 것에 비하면 그런 제의는 이쪽 입장이 당당해지고 자존심이 서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원 선배는 “너희 신문사가 망하기를 바란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돌아서 버렸다.
그 이야기는 원 선배가 한 것이 아니었다. 신문사 쪽에서 흘러나와 퇴직기자들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놀람과 통쾌함으로 그 사실을 원 선배에게 확인하려고 들었다. “그거 뭐....... 어차피 전원 복직이 안 될 바에야 무슨 소리를 못 해.” 원 선배는 이렇게 말하며 쓰디쓰게 웃고 말았다. 원 선배의 그런 태도는 언제나 그들 모두를 격려하는 힘이었고 뒤를 받치는 버팀목이었다.
‘원 선배처럼 꿋꿋하게 버티자.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까.......’
이상재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샛길로 꺾어 도는데 문득 가전제품 판매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날마다 자주 오가면서도 눈길이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모든 가전제품 상점들이 그렇듯이 그곳의 쇼윈도도 눈길 끌리게 화려했다. 그런데 번들거리는 큰 유리창에 나붙은 붉은 글씨가 사람들을 향해 나 좀 보라고 소리치는 듯 유난히 크게 돋보였다.
“텔레비전 특별 할부판매 실시!”
그 선전문과 아들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이상재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할부라 해도 그것을 사줘 애비의 체면을 세울 여력은 없었다. 남편 노릇이 부실한 것보다 애비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더 속상하다는 것을 그는 또 느끼고 있었다. 철모르는 자식에게 번번이 ‘시시한 아빠’가 되어야 하는 것은 혼자만 알아야 하는 속 쓰린 괴로움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듯 애비가 자식 앞에서 당당하고 싶은 것도 막을 길 없는 욕구였다.
‘그러나 난 배를 곯리진 않으니까.’
이상재는 다른 동료들을 생각하며 그런 감상을 털어냈다. 나날이 끼니 걱정을 하고 있는 동료들에 비하면 그런 감정은 너무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이상재는 사무실로 들어서며 먼저 와 있는 원병균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으레 자신이 먼저 출근하는 입장이라 그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이거 탈났소.”
원병균이 보고 있던 책을 뒤집어놓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상재는 뒤집어진 책과 원병균에게 눈길을 빨리 돌렸다.
“책이 좀 팔린다 싶더니 결국 베껴먹기 하는 놈이 나타났소.”
“우리 번역소설 말입니까?”
“어제 내가 퇴근하기 직전에 도매상에서 전화가 왔었소. 그 소설이 막 베스트셀러가 될 판인데 똑 같은 책이 나왔다고, 자기가 얼핏 보기엔 베껴먹기 한 것 같은데, 빨리 구해서 대조해 보고 베껴 먹은 것이 사실이면 즉각 조처하라고 말이오.”
“빌어먹을. 대조해 보셨습니까?”
이상재는 책상 위에 뒤집어져 있는 책을 다급하게 집어 들었다. 그 책의 표지는 자기들이 낸 책의 표지와 구분이 안 되게 똑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표지는 원작의 표지였던 것이다.
“100페이지 정도까지 대조를 해봤는데 베껴먹은 건 더 말할 것도 없소. 번역이 좀 어색해서 내가 손질한 몇 군데까지 그대로 똑 같으니까.”
“100페이지까지요? 그럼 어젯밤 꼬박 세우셨군요?”
이상재는 어제 인쇄소에서 바로 퇴근했던 것이 미안해 이 말부터 했다.
“그건 마음 쓸 것 없고, 더 대조할 필요 없으니까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되겠소.”
원병균이 소파로 옮겨 앉으며 담배를 빼 물었다.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베껴먹을 책이 없어서 하필 우리 책을....... ”
이를 갈아붙이듯 하며 이상재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수습책은 세 가지 단계가 있지 않을까 싶소. 첫째. 저쪽 사장에게 책을 전량 수거하게 하는 것, 둘째. 신문을 총동원해 기사화시키는 것, 셋째. 법적 조처를 취하는 것, 근데, 베껴먹기 하고 나선 자가 책을 순순히 수거할 리가 없을 것이오. 그러니까 기사화와 법적조처를 동시에 하겠다고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소. 내 생각은 이런데 더 좋은 무슨 방법이 없겠소?”
“글쎄요. 더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선 그 방법이 완벽한 것 같은데요. 그럼 제가 저쪽 사장을 만나볼까요?”
이상재는 궂은일을 자신이 먼저 맡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 형이? 그거 언쟁이 벌어지고 감정이 상할지도 모르는데?”
“예. 그런 일은 원래 쫄병이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거 보나마나 뻔뻔스럽고 낯짝 두꺼운 인간일 테니까 선배님은 만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이 형이 그자를 만나는 동안 난 신문사 쪽을 맡을 테니까. 잠시 틈도 주지 말고 몰아붙입시다. 이거야 원. 책이 좀 팔려 어떻게 숨을 돌리나 했더니, 내 참....... ”
원병균이 꽁초를 비벼 끄며 몸을 일으켰다.
“이 책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러시오. 문장을 고치고 바꾼 데를 다 표시해 놨으니까.”
원병균은 신문사들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펼치고 송수화기를 들며 대꾸했다. 사무실을 나온 이상재는 공중전화로 유일표의 아내 서경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글쎄요....... 출판사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사장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요. 왜. 무슨 일 있으세요?”
서경혜의 눈치 빠른 반응이었다.
“지난번에 낸 우리 소설을 베껴먹었어요.”
“어머나, 그게 요새 잘 나가고 있잖아요? 베스트셀러 될 거라는 말이 있던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뭐가 좀 되나 싶으니까 그따위 얌체족이 나타났지 뭡니까.”
“세상에 베껴먹을 책이 따로 있지. 선생님네 출판사가 어떤 출판사라고. 그래 어떡하실 거예요?”
“예. 복잡하게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해 그 못된 버릇을 고쳐 놀 작정입니다.”
“네. 그래요. 그런 얌체족들이 더는 나타나지 못하게 이번 기회에 아주 혼쭐을 내주세요.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출판계 전체의 문제잖아요.”
“예. 출판계의 큰 병폐지요. 근데, 낭군님께오서는 잘 있습니까? 그 노동운동이 신바람이 나는지 어떤지 요새 통 볼 수가 없어서요.”
이상재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유일표의 안부를 물었다.
“네. 노동운동으로 바쁘기도 하지만, 그이 요새 정말 신바람 나는 일이 한 가지 생겼어요.”
“그래요? 그게 뭐지요? 생남 하긴 아직 이르고.......”
“가출한 여동생이 승려 된 건 아시죠? 그 여동생이 얼마 전에 다녀갔거든요.”
“아. 그래요? 그것 참 반갑고 잘된 일이군요. 일표가 늘 걱정하고 괴로워한 일이었는데, 일표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일 잘 처리되기 바라겠어요.”
전화를 끊은 이상재는 한동안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항시 그늘진 수심과 슬픈 우울에 잠겨 있던 유일표의 여동생 선희. 그녀가 푸른색 감도는 빡빡머리의 여승이 된 모습을 그려낼 수가 없었다. 속세를 등지고 머리를 깎은 대신 얼굴이 밝고 명랑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더 그늘지고 우울해졌을 수도 있었다. 유일표는 여동생이 혹시 못쓰게 되지나 않았는지, 어디서 죽지나 않았는지, 못내 애를 태웠었다. 그나마 여승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그런 다행이 없었다.
이상재는 마포에 있는 그 출판사를 찾아갔다.
“이거 왜 이래요? 우리도 번역료 줄 것 다 주고 책 낸 거라구요.”
다방으로 자리를 옮긴 그 출판사 사장은 대뜸 이렇게 기를 세웠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여기 이렇게 엄연한 증거가 있어요. 이걸 똑똑히 봐요. 이러고도 번역을 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이상재는 성질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책을 그 사람 앞으로 불쑥 내밀어 넘기기 시작했다. 책장마다 빨간 줄이 수없이 그어지고 잔글씨들도 공백 여기저기에 많이 적혀 있었다.
“말조심하시오. 거짓말이라니. 난 모르는 일이니까 따질 게 있으면 번역자한테 따지시오.”
“뭐요? 그런다고 발뺌이 될 것 같소?
군대의. 그것도 월남에서 썼던 욕이 터져나가려는 것을 이상재는 가까스로 참았다. 상대방은 베껴먹기를 태연하게 자행하는 자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며.
“뭐. 그쪽도 큰소리칠 건 없어요. 해적출판 해먹는 거야 다 똑같은 처진데.”
그 사람은 담배를 빼들며 입가에 비웃음을 물었다. 이상재는 그만 울화가 솟구쳤다. 그자는 악랄하게도 이쪽의 약점을 찔러 제 잘못을 상쇄하려고 들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국제저작권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외국 저작물들을 무단으로 번역. 출판하는 것은 분명 해적출판이었다. 그러나 그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후진국들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상재는 숨을 몰아쉬며 화를 눌렀다.
“사장님께오서는 아주 유식하시군요. 그러나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모르고 있소.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가 해적 출판한 것은 국제법도 어쩔 수 없지만, 당신네가 우리 것을 베껴먹은 것은 재산권 침해로 국내법에 걸려요. 여러 말할 것 없이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도매상에 나가 있는 책들을 당장 수거해서 내일까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도록 하시오. 만약 이 말을 듣지 않으면 베껴먹기 한 사실을 모든 신문에 터트려 아예 출판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 것이오. 그뿐만이 아니라 법적 조처도 취할 것이오. 똑똑히 기억해 두시오.”
이상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헹 공갈 한번 삼삼하게 치시네. 신문에 내? 신문이 뭐 즈네 안방인줄 아나? 법으로 한다구? 그래 좋아. 법 무서웠으면 진작 이 세상살이 작파했다. 얼마든지 해보라구.”
그는 다방을 나가는 이상재의 뒤에다 대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상재는 또 치솟는 울분을 애써 참아냈다. 감정대로 하자면 그 나불거리는 주둥아리를 당장 으깨놓고 싶었지만 이건 감정을 앞세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원선배가 안 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다방을 나섰다.
“그럴 줄 알았소. 전화 가지고는 안 되겠으니까 신문사를 나눠서 직접 뜁시다. 이 기회에 우리를 돕고 싶어 하는 눈치들이었으니까. 직접 만나 자세한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소. 우리가 도움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베껴먹기라는 출판계의 악습을 제거하는 계기로 삼게 해야 되겠소. 어서 서두릅시다.”
원병균은 기사가 커지게 할 수 있는 객관적 명분을 일깨우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따위 짓들을 하면 어떻게 망신을 당하는지 꼭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자가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도 호되게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그렇소. 그리고 신문이 이런 사회적 병폐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고, 건전한 독자들의 피해를 외면하는 무책임이오. 이 점도 환기시킬 필요가 있소.”
“예. 알겠습니다.”
이상재는 점심도 거르며 신문사를 돌았다. 입 안이 쓰도록 지쳐 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기자들의 반응이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다음날도 하루 종일 분주했다. 번역자까지 사무실에 나와 신문들의 취재에 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자들의 말로는 저쪽 출판사의 사장은 물론 편집장까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는 거였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허허....... 이거 인심들 한번 후하군.”
원병균은 신문들을 펼치며 흡족해 했다. 크게 다루어진 기사는 문화면 머릿기사로 올라있었다. 그 내용들은, 출판계의 고질적인 악습을 이제 그만 청산하지 않고는 문화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제목의 글씨체만 다른 두 권의 책 사진이 베껴먹기의 행태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신문들이 어쩐 일이야? 아주 화끈하게 봐줬는데 그래?”
“글쎄 말야. 이러다가 초베스트셀러 탄생하게 생겼어.”
“봐주긴 뭘 봐줘. 비겁하게 웅크리고 있는 저희들 죄를 이번 기회에 속죄하느라고 그런 거지.”
“뭐 그렇게 콕 찍어서 말할 건 없지. 우리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기도 하고, 옛 동업자들에 대한 신의의 표현이기도 하고. 두루두루 그런 거지.”
“좋아. 그런저런 의미가 다 뭉쳐진 결과일 거야.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책이나 수십만 권 팔려 사무실 좀 넓게 옮기고, 짜장면이 갈비탕으로, 막걸리가 맥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거, 그거 옳은 말이야.”
신문을 보고 모여든 투위 회원들의 방담이었다. 원병균이 내놓은 화제에 따라 그들의 이야기는 법적조처로 옮겨갔다. 자기 나름으로 논리를 갖추고 있는 그들은 공동 화젯거리가 생기자 허기진 참에 입맛 도는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앞다투어 의견을 쏟아내기 바빴다. 그 의견들을 간추리면 두 가지였다. 내친김에 법적으로 몰아 그런 짓을 뿌리 뽑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쪽과, 그쪽에서도 혼이 났고 출판계 전체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도 거두었는데 그런 식으로까지 몰아서는 우리 사회의 정서상 너무 심하다고 오히려 욕을 먹을 수 있으니 좀 더 두고 보자는 쪽이었다.
“그래. 우리도 피곤하니까 좀 더 두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쪽에서 책을 더 못 찍게 하는 게 목적이지 법정에 세우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원병균이 결론을 내렸다.
“속전속결로 아주 잘하셨어요. 누워서 베스트셀러 되게 생겼으니까 5천부 더 빨리 찍어주세요. 책 끊기면 안 되니까. 급행열차로요.”
다음날 아침 도매상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위복이란 말 생각나는데요.”
이상재는 원병균을 보고 웃었고,
“이거, 저쪽 사장한테 감사장 줘야 하게 되면 어쩌나.”
원병균도 웃으며 오랜만에 농담을 했다. 이상재는 ‘급행열차’를 운전하느라고 종이 집, 인쇄소, 제본소로 사흘 동안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동안 저쪽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허진이라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었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빈소는 살고 계시던 집이라 했소.”
이상재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교정을 보고 있던 원병균이 일에 묻힌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이상재는 문득 놀랐지만, 결국 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놀람을 지워냈다. 허진의 할머니는 노환을 오래 앓아왔다. 허진보다는 허미경의 얼굴이 더 강하게 떠올랐다. 그동안 할머니를 모신 건 허미경이었다. 오로지 할머니에게 마음을 의지해왔던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크랴 싶었다. 이상재는 유일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허진한테서 전화 받았냐?”
“아니. 그 자식이 나한테 전화할 일이 뭐 있어. 잔뜩 유감을 품고 있는 놈인데. 왜?”
“허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 가셨구나. 어디서?”
“사시던 데지 뭐.”
“그래....... 그 할머니도 참......”
이상재는 유일표가 삼키고 있는 것이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허미경의 작은 아파트에 비해 허진의 집은 으리으리한 단독주택이었다. 그리고 허진은 장자였다. 친구들이 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모진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할수록.
“어떡할래?”
“어떡하긴. 가서 밤샘해야지.”
“그럼 우리 사무실로 와. 같이 가게.”
“그래 곧 갈게.”
이상재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허미경이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살려는 것인가. 평생 양품점을 하면서 혼자 살아가려는가. 그렇지 않으면 달리 무슨 방법이 있는가. 그런 과거를 지닌 여자가. 결혼을 하고서도 연애한 과거가 드러나면 이혼을 당하는 세상에서. 단순히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도 용납이 안 되는데 애까지 낳았으니. 기껏 해봐야 후처자리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런 현실을 다 정리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입술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걸 보면 혼자 살기로 단단히 작심한 것이 분명했다. 다시는 상처받을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단호함. 그 차가운 거부 앞에서 자신은 남자의 욕심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내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나와 결혼했을까? 이 말을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거야말로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 물음은 그녀를 더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또. 그녀가 지금이라도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이혼을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는 바에야 그녀와의 사이에는 영영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한 가지 확인한 것은. 한 남자가 진정으로 두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허락하는 것은 여자도 아내 있는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녀와의 사랑은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더 목마르고 안타까웠다.
어느 상가나 그렇듯 허미경의 아파트 문도 열려있었다. 그리고 옆벽에는 상가를 알리는 검은 등이 낡은 만큼 두꺼운 때가 낀 채 걸려 있었다. 돈 벌기에만 눈을 밝히는 장의사의 인색이 그 등에 끈끈하게 묻어있었다. 이상재와 유일표는 그 등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현관에는 구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거실로 앞서 들어가던 이상재는 부엌에서 무엇을 들고 나오는 허미경과 눈이 마주쳤다. 소복을 한 그녀는 주춤하더니 목례를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상재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번지는 것을 보며 가슴이 찡 울렸다. 그녀가 너무 슬프고 외로워 보였다. 이상재와 유일표는 허진의 할머니 영정 앞에 나란히 서서 절을 올렸다. 그리고 동생과 나란히 선 상제 허진에게 예를 갖추었다.
“동생 미경이가 일어나보니 밤새.......”
허진이 중얼거리듯 낮게 말했다.
“주무시다 가셨으니 복 받으셨군. 참 다행이야.”
이상재가 대꾸했고, 유일표는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 고생만 하다 가셨군요.......’
유일표는 이런 속말을 하며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나 허진의 할머니나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의 일생이었다. 다른 문상객이 와서 이상재와 유일표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집이 좁아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냥 나갔다가 이따가 다시오지.”
유일표가 이상재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게 낫겠지? 사람들 발길이 좀 뜸해진 다음에.”
이상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벌써 가시게요?”
당황스럽게 이상재 옆으로 다가선 건 허미경이었다. 눈물로 붉게 젖어있는 그녀의 눈에 새로운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아니오. 지금 복잡하니까 좀 나가 있다가 문상객 뜸해질 시간에 맞춰 다시 올 거요.”
“네에. 죄송해요. 집이 너무 좁아서.”
허미경이 눈물을 훔쳤다.
“편히 가셨다니 다행이오.”
“아니에요. 저희들은 다 불효자식이에요. 아무도 임종을 못 지켰는데. 할머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
허미경의 말은 북받치는 울음에 묻혀버렸다.
“괜찮아요. 할머니가 손자 손녀들 안 괴롭히려고 그렇게 혼자 가신 거니까.”
유일표가 구두를 신으며 말했다.
“예. 이 말이 맞아요. 너무 죄스럽게 생각하지 마요. 미경씨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상재도 구두를 찾아 신으며 위로했다. 허미경은 소리 없이 울며 연이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래도 아파트가 5층짜리라 다행이다.”
이상재가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말했다.
“글쎄 말이다. 그나저나 관이 이 계단을 무사히 돌아 내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유일표가 계단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힘이 좀 들겠지만 어떻게 되겠지.”
“그렇지도 않아. 얼마 전에 우리 재건대 대장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엘리베이터로 관을 옮길 수 없어서 소방차를 동원해 달아 내리는데, 10층 높이에서 관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걸 보니까 끔찍스럽더라. 아파트생활 이거 문제야.”
“그것 참 아슬아슬하고 곤란한 문젠데. 허지만 어쩌겠어. 땅은 좁고 사람은 많고, 차곡차곡 쌓아올릴 수밖에.”
“하여튼 세상이 변해가면서 별일이 다 생겨. 난 촌놈이라서 그런지 어쩐지 아파트는 딱 질색이야.”
아파트를 나서며 유일표는 담배를 빼 물었다.
“나도 촌놈이지만 아파트에 산다. 편리 내세우는 마누라 등살에 시달려봐. 싫고 좋고가 없게 되니까.”
“못난 소리하지 마. 나처럼 양처를 얻으면 만사형통이야.”
“도둑놈. 남 마누라 괜히 악처 만드네. 너, 자식 자랑 반편이고, 마누라 자랑 뭔지 알기나 해?”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헤식게 웃었다. 그들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아예 저녁이 되도록 배도 든든히 채우고 들어가자.”
이상재가 손짓으로 사람을 부르며 말했다.
“새끼. 어떻게 해서든 내연의 처 힘 덜 들게 해주려고 애쓰고 앉았네.”
“짜식. 넝마만 뒤지더니 속까지 지저분해졌네. 아무 관계도 안 맺고 있는데 내연의 처가 뭐냐? 고상하게 연인이라고 해야지.”
“연인? 너. 정신적 간음이 더 음탕하고 무서운 죄인 줄 몰라?”
“병신. 도산에 관계하더니 예수꾼 냄새까지 풍기기냐?”
“얼씨구. 잘 걸고넘어진다.”
그들은 또 마주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상재는 소주에 돼지고기볶음과 감자탕을 시켰다.
“너. 그 일 위험하지 않아?”
첫 잔을 반쯤 비운 이상재는 유일표를 쳐다보았다.
“위험.......?”
유일표는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는 눈길을 보냈다.
“난 아무래도 불안불안해. 넌 자꾸 깊이 빠지는 것 같고, 저쪽의 감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넌 입지가 남들과 다르니까 말야. 잘못하면 엉뚱한 죄 뒤집어쓸 수도 있거든.”
이상재의 얼굴은 신중하고도 진지했다.
“그래서 조심하고 있어.”
유일표의 대꾸도 무거웠다.
“그동안 망설여왔던 말인데 말야. 그만 거기서 손 떼고 야학만 하는 게 어떠냐?”
“글쎄. 네 말도 일리가 있는데.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게 한가하지가 않아. 노예가 중세에만 있었던 게 아니야. 지금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노예야. 노동노예. 죽도록 일을 하고도 최저생활이 안 돼. 의. 식. 주 생활이 해결이 안 된다구. 그러니 자식들 교육을 원하는 대로 시킬 수 없고. 중병에 걸리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기업주들은 떼 부자가 되고 있는 거야. 다 똑같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어? 이런 모순을 몰랐으면 모르지만 알고서야 눈을 감을 수는 없잖아. 나도 내 여건을 많이 생각했지. 그렇지만 내가 야학에서 가르쳐 사회에 내보낸 애들이 나 자신처럼 생각되는데. 그들이 착취당하고 있는 걸 모르는 척 한다는 건 말이 안돼. 그래서 정치성을 피해가면서 몸조심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치성을 피한다고 피해지냐? 정부가 막는 일을 조직적으로 대항하고 나서는 게 바로 정치성이지.”
“넌 역시 너무 유식해 탈이야. 그런 속에서도 얼마든지 몸조심을 할 수 있으니까 내 걱정 말고 넌 출판사나 잘해.”
“참 이놈의 세상이 문제는 문제다. 정치는 점점 더 험악해져 가고, 부익부 빈익빈의 골은 갈수록 깊어지기만 하고. 이러다가 이놈의 나라가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상재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들은 밤 9시가 넘어 다시 아파트의 계단을 밟아 올랐다.
“이것들, 아주 시절 좋네. 벌써 얼큰하게 취해서.”
두 사람을 맞이한 건 최주한이었다.
“형님들 보고 이것들이라니. 아우는 언제 온 거지?”
이상재가 최주한과 반갑게 악수하며 웃었다.
“이 형님을 좀 기다릴 것이지. 동생 놈들이 버르장머리 없기는. 내가오니까 나간 지 한 두어 시간쯤 된다고 하는데. 어디로 간지 알아야 말이지.”
최주한이 유일표의 어깨를 툭 쳤다.
“차라리 잘됐어. 넌 술 잘못하니까.”
유일표가 최주한의 귀를 잡고 흔들었다. 악수를 대신하는 두 사람의 몸짓에는 어린 중학시절부터 이어져온 우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 문상객의 발길은 끊겨 있었다. 영정을 모신 방에는 상제들이 피곤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그 옆방에는 젊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둘러앉아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다. 좁은 그 방에는 더 들어앉을 틈이 없었다.
“회사 직원들인가?”
유일표가 최주한에게 눈짓하며 물었다.
“응. 오늘 밤 밤샘할 팀이래. 우린 저 방에서 허진하고 보내기로 했어.”
최주한이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야. 일표야. 여기 상가인 것 알지?”
이상재가 유일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유일표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이상재를 바라보았다.
“허진 곤란하게 하는 얘기는 꺼내지 마. 사원들도 있는데.”
“내 참. 별걱정을 다 하네. 기대를 해야 입을 열 마음이 생기지. 그 대목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야. 내가 여기 온 것도 허진 때문이 아니야. 할머니가 우리를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던 정 때문이지. 허진 저 새끼. 제 놈이 철공소에서 그 고생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장 족들 편들고 나서는 걸 생각하면 얼굴을 대하고 싶지가 않아.”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해둬.”
이상재가 유일표의 등을 두들겼다. 그들이 둘러앉자 허미경이 술상을 봐왔다. 망자가 고령이라 상가는 호상이라는 분위기인데 그녀 혼자서만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넌 어떠냐? 승진 좀 됐어?”
이상재가 최주한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말도 마라. 지연이 나쁘니 학연도 맥을 못 쓰는 판이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최주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왈칵 술잔을 비웠다.
“아니. 일반 회사에서도 그게 그렇게 심해?”
“너. 화성에서 왔냐? 규모가 있는 회사일수록 관리들 상대하는 일이 많아지잖아. 그때 가장 막강한 빽이 지연이라는 것 몰라? 그러니 나 같은 놈은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그래서 사우디에나 한바탕 나가볼까 어쩔까 한다.”
“사우디? 거긴 공대 출신들이나 활개 치는데 아니냐?”
“상대출신도 필요하긴 해. 관리자가 없어서는 안 되니까.”
“그렇지만 너무 더워서 그거 문제 아니냐? 벌써 더위로 병을 얻어와 앓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소문이던데. 치료 방법도 마땅찮고.”
“그건 폭염 속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경우고, 관리직은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그럴 염려는 없어. 물론 천지가 다 더우니까 여기서보다야 고생이 되겠지만, 거기 다녀오면 경제적으로도 이익이고 경력도 쌓이고, 일거양득이거든. 어떻게 생각해?”
최주한은 유일표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빨리 가는 게 좋아.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유일표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래. 그렇기는 하지. 중동 경기라는 것도 언제까지나 가는 게 아니니까.”
이상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느네들 말 들으면 우리 마누라 좋아서 춤추게 생겼다. 어떻게 된 여편네가 돈이야 하면 사죽을 못 써. 남편은 고생을 하거나말거나.”
최주한이 떫은 입맛을 다시며 쓴웃음을 지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갔다 와. 그게 돌파구가 된다면 좀 좋으냐. 너라도 좀 시원시원하게 풀려봐라.”
유일표는 최주한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래. 가긴 가야겠다. 우리가 한강 건너올 때 이렇게 비실거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최주한은 술잔을 받으며 또 쓰게 웃었다. 그들은 통금이 해제되는 것을 따라 아파트를 나섰다. 밖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허진이 할머니를 안 모신 거냐. 할머니가 신세 망친 손녀딸 데리고 산다고 하신 거냐?”
최주한이 느닷없는 말을 꺼냈다.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안개 속을 걸었다.
“가정사니까 그걸 알 수가 있나. 아마 둘 다일지 모르지.”
이상재가 한숨 섞여 말했다. 보름쯤 지나 이상재는 최주한의 전화를 받았다.
“너 돈 쓸 일 생겼다 이 형님 덕에.”
“돈.......?”
“빨리 송별회 차리라구.”
“송별회?”
“이 새끼.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구나. 나 사우디로 떠나. 임마!”
“뭐야? 이거 번갯불에 콩 볶아먹어도 유분수지.”
“야가 정말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 산다니까. 난 고민 하다가 늦은 거야. 일반 노동자들도 서류내고 1주일이면 사우디 행 비행기 타는 것 몰라? 이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가 아니라 돈이면 최고다 돈을 향해 돌격이다. 하는 세상이야.”
“너도 드디어 외화 획득의 역군이 됐구나. 그래. 송별회 거창하게 해야지.”
“근데 왜 한숨은 쉬냐?”
“모르겠다. 날짜나 불러.”
“부르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내일 당장 해치워야지. 사흘 후면 떠나.”
이상재는 최주한이 떠나는 날 공항에 나가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가 터졌던 것이다.
“잘 나가던 책이 어째 지방에서 시들시들 풀이 죽는 감이 들더라구요. 근데 글쎄 이번에 우리 부장이 지방 출장을 가서 보니까 저쪽에서 책을 왕창 찍어 50프로로 떰핑을 쳐버렸더라는 것 아닙니까. 전에도 그런 일 생기면 한 2만부 찍어 40~50프로로 지방에 쫙 깔아버리면 지방에선 마진 크니까 그 책만 팔고 께임 끝나요. 이쪽에서 신문에 내자 저쪽에선, 그래 좋다. 하고 뒷방 까고 나온 건데, 신문에만 낼 것이 아니라 그놈이 그 짓을 못하게 미리 막았어야지요. 이거 원. 베스트셀러 되긴 그른 것 같고. 창고에 있는 책이나 재고 없이 팔아치워야 될 텐데 골치 아프네요 이거.”
도매상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허. 이거 무법천지로군.”
원병균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토해낸 소리였다. 그 모습이 너무 허탈하고 절망적이어서 이상재는 저쪽을 향해 화를 낼 수도 없었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원병균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말이 없었다. 이상재도 담배를 빨며 생각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러나 울분만 부글부글 끓어오를 뿐 저쪽을 가격할 신통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 변호사한테 좀 가야 되겠소. 늦을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시간되면 퇴근하시오.”
원병균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차게 굳어져 있었다. 이상재는 말없이 원병균을 문 밖까지 따라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런 기막힌 일을 당하고도 분을 억누르는 원 선배가 대단하다 싶었다. 퇴근시간이 지나고 한 시간을 더 기다렸지만 원 선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별수가 없소. 고등 사기꾼한테 사기당한 셈 칠 수밖에. 법으로 해봤자 형사 입건이 되는 것도 아니고 천상 민사라는데. 민사 소송을 하면 시일만 질질 끌어 시간낭비에 정력낭비만 했지 얻는 건 없다는 거요. 이런 풍토에서 출판을 하다니......”
이튿날 아침에 원병균이 한 말이었다. 이상재는 원병균에게 담배를 권했다.
“....... 법으로 한다구? 그래. 좋아. 법 무서웠으면 진작 이 세상살이 작파했다. 얼마든지 해보라구.”
그자의 외침이 쟁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자는 괜히 큰소리를 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법의 허점을 환히 알고 있었던 것이고, 이쪽의 신문 공세를 오히려 책 선전으로 역이용해 가며 덤핑 판매에 열을 올린 거였다. 원병균은 2~3일이 지나도 기분이 회복되지 않고 우울했다. 이상재도 따라서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새 번역물의 교정지가 나와도 교정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시경에서 나왔소. 이 성명서 원병균 당신이 작성했다며?”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 두 명은 이미 원병균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서(暑)로 좀 갑시다.”
그들은 양쪽에서 원병균의 팔짱을 끼었다. 이상재는 밖으로 끌려 나가는 원병균을 보며 허공을 잡는 듯한 빈 손짓만 했다. 그러다가 허둥지둥 돌아서 투위 회원들의 연락처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