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강 3-6

Bollnow 2024. 3. 15. 04:55

25. 집을 떠나갑니다.

칵테일 파티장에는 여자들의 이야기꽃이 만발해 있었다. 같은 직업의 여자들만 모여서 그런지 웃음소리도 거침없이 터져 오르고는 했다. 저마다 한껏 잘 차려입은 옷치장으로 보면 그 여자들은 그저 돈 많은 집 부인네들 같기만 했다. 그들은 하얀 가운을 벗으면서 환자들 앞에서 보이던 근엄함이나 위엄도 벗고 자유스러워져 있었다.

안경자는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가만가만 발끝걸음을 뒤로 옮겨놓고 있었다. 모임의 중요한 대목은 끝났으니까 살살 자리를 뜰 심산이었다. 영화에서 보는 이런 서양식 파티에 더러더러 참석하면서도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밤 외출을 하면 혼자 있는 아들에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낮에 떼어놓는 것도 안쓰럽고 가여운데 밤에까지 혼자 있게 하는 건 꼭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물론 보살피는 식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이에게 식모는 타인일 뿐 엄마는 아니었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건 엄마였다.

아니. 안 박사님. 왜 뒷걸음질을 치세요? 벌써 가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는데.”

한 여자가 안경자에게 다가서며 끌어잡듯 하는 어조로 말을 걸었다. 허릿매 도드라지게 화사한 원피스를 차려입은 그 여자는 노화자였다.

아니 뭐 ...... 좀 피곤해서 ...... ”

안경자는 억지로 웃음 지으며 어물거렸다. 그런 그녀의 신경은 순간적으로 곤두섰다. 노화자를 대하면 어쩔 수 없이 김선오가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피곤하시면 술을 한잔하시지 왜 주스를 들고 계세요. 이 진토닉. 소나무 향기도 좋고 독하지 않으니까 한잔하세요. 그럼 피곤 푸는 데 도움이 되지요.”

노화자는 붙임성 좋게 말하며 술잔을 들어 보였다.

저는 술 못해요.”

안경자는 고개를 저으며 김선오의 생각을 떼쳐내려고 했다. 그가 여의사와 결혼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또 떠올랐다. 검사라는 지위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여의사를 고르려고 들면 어려운 일일 리 없었다. 그런 일을 척척 해결하는 마담뚜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가 자신하고 결혼하려 했던 것도 사랑이 아니라 조건 때문이었다. 그건 박영자를 사귀면서 또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어느 만큼 드러났었다. 그런데 그는 양쪽 다 잃게 되자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의사를 아내로 삼은 것이다.

네에. 피곤하실 만도 하지요. 소문나게 환자가 많으시니. 산부인과는 내과나 소아과 환자하고는 달리 거의가 수술환자잖아요. 그 여성지에 글 쓰신 지 몇 년 되셨지요?”

글쎄요. 몇 년은 아니고 ...... 2년이 돼가는군요.”

안경자는 노화자의 말에 박힌 가시를 느끼며 2년도 안 되었음을 확실하게 했다.

그 잡지에 잘 아는 사람이 있으신가 부죠?”

아니요. 학위를 받게 되자 그쪽에서 요청이 왔었어요. 여성지니까 독자들에게 친밀감을 주기 위해 여 의사가 쓰는 게 좋다면서요.”

시샘의 가시가 더 돋친 그 말을 무지르려고 안경자는 더욱 분명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동안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는 의사들은 똑같은 투로 묻고는 했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고. 남 잘되는 꼴은 못 본다는 말은 어찌 그리도 명언인지 몰랐다. 동업자끼리의 질시와 헐뜯음은 살벌할 지경이었다.

. 그러시군요. 그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딴 여 의사가 많지 않으니까요.”

노화자는 안경자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은 기색으로 대꾸하고는.

저도 가끔 읽어보는데. 어찌 그리 글 쓰는 솜씨까지 겸비하셨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대목은 부러운데. 무슨 비결이 있으세요?”

그녀는 표정을 바꾸며 아주 사교적으로 웃었다.

여성지까지 다 읽으시나요?”

여성지는 과를 불문하고 우리 병원의 상비품이잖아요. 남자들이야 자기가 아플 때만 병원에 오지만 여자들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 비위 잘 맞춰야지요.”

. 그렇기도 하군요.”

저어 ...... 안 박사님은 지금 거래하시는 제약회사들하고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으신가요? 인간적으로나. ...... ”

안경자는 노화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무슨 특별한 관계는 없지요. 개업할 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은사님들께서 당신들이 약을 써보신 경험을 토대로 소개해 주신 거지요. 관계라면 은사님들과의 관계가 깊은 거지요.”

안경자는 노화자의 요구를 처단할 의도로 그냥 선생님들이라고 하지 않고 그 뜻을 더 강조해서 은사님들이라고 했다.

. 그 정도시군요. 선생님들 소개라면 지금까지 약을 써준 것만으로도 예의는 충분히 갖춘 셈이 되겠군요. 안 원장님도 학위까지 다 따셨겠다. 개업한 지가 언젠데 무한정 선생님들 그늘에서 살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안 그런가요?”

물러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이고 나오는 노화자의 말에 안경자는 아연했다. 그 말이 너무 노골적이고 상스러워 혐오감까지 느껴졌다.

글쎄요. 은사님들이 무슨 강압을 하는 게 아니니까 그늘이라고 하면 곤란하지요. 저는 은사님들께 입은 은혜가 부모님의 은혜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안경자는 노화자를 떠밀어내는 기분으로 말했다.

호호호 ..... 공부만 소문난 우등생인 줄 알았더니 사고방식도 우등생이시군요. 그러시지 말고 생각을 좀 바꿔 보세요.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이 틀림없다는 걸 보여드릴 테니 ...... 어떠세요. 우리 아버지 제약회사 약들을 써보시는 게.”

노화자는 안경자 옆으로 더 다가서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글쎄요. 우리 병원 하나가 쓰는 게 얼마 되지도 않고 ...... 기존 거래 회사들 제품에 특별히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 ”

안경자는 사교적으로 웃고 있었지만 그 말 내용에 걸맞게 분명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양이 문제가 아니라 고객의 질이 문제거든요. 안 원장님 병원에서 우리 제약회사 제품들을 쓴다는 것은 우리 제약회사 자존심을 세워주는 역할을 해주거든요. 우리 여 의사 모임이 이 호텔에서 열리고 칵테일파티를 하고 하는 게 이 호텔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약들이 어디 꼭 하자가 있어야 바꾸나요. 동종의 약품들이야 효과가 다 비슷하고. 일단 제조가 허가된 의약품에서 하자가 생긴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요? 다 이렇게 인연 따라 바꾸기도 하고 새 회사를 만나기도 하고 그러지요. 우리가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자고 만나면서 우리 아버지 회사 제품을 전혀 안 쓰는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한테 제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그동안 제가 오래 기다려온 것 아시죠? 처음부터 다 바꿔달라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항생제 한두 가지부터 시작해 보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고 잘 바꿨다고 생각하게 해드릴 거에요. 영업부장이 일차 찾아뵙도록 조처할게요.‘

아니. 그건 좀 ...... ”

아니. 무슨 얘기들이 그렇게 흥미진진해요? 진료과가 같아서요?”

그때 다른 의사가 이렇게 다가오는 바람에 안경자는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네에. 안 박사님이 매달 여성지에 쓰는 글 있잖아요.? 글 솜씨가 너무 좋은 게 부러워서 그 비결을 좀 배우려구요.”

노화자는 환한 웃음을 피워내며 둘러 붙였다.

그래요. 나도 그거 가끔 읽어보는데 아주 쉽게 읽히고 재미있어요. 표현이 무척 문학적일 때가 많은데. 그런 재주까지 타고난 안 박사가 부럽긴 하지요. 우린 편지 한 장을 쓰려고 해도 서너 줄 쓰면 막히고 마는데. 근데 그게 배워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니까요. 우린 소질도 없는데다 딱딱한 의학서적만 달달 외우다시피 하며 청춘을 다 보냈으니 문학 냄새가 풍기게 글을 쓰긴 다 틀린 거지요.”

노화자는 천연덕스럽게 이런 대꾸를 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경자는 강숙자를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자신의 글에 그 문학적 냄새를 가미하는 건 강숙자였다. 처음에 글을 쓰라는 제의를 받고 엄두를 못 내고 망설이고 있는데 무작정 뒤를 떠밀어댄 건 강숙자였다.

일반 여성들한테 의학 상식을 쉽게 전해주고. 돈 안 들이고 병원 선전하고. 환자들 많이 와 돈 벌면서 유명한 의사로 출세도 하고. 일석삼조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데 왜 안 하니? 남들 같으면 빽 쓰고 돈 써서 할 판인데. 연애소설 많이 읽은 실력으로 내가 도와줄 테니까 쓸 작정해. 이런 기회에 그동안 병원비 공짜로 한 것 갚아야지 언제 갚니. . 나 글 쓰는 실력 우습게 알지 마.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하고. 날 미친 것 취급할까 봐 내놓고 말은 못 하는데 말이지. 섹스피어고 톨스토이고 다 읽어보면 별것 아닌 것 같고. 나도 그 정도는 쓸 것 같은 생각이 든다니까. 그래서 나도 연애소설을 한두 편 써보지 않았겠니. 근데 책이 되도록 길게 쓰는 게 자신 없고 귀찮아서 소설가 되는 건 포기한 거 너 모르지? 내가 그 실력 유감없이 발휘해 줄 테니까 꼭 써.”

그래서 시간 넉넉하게 글을 써 남편 따라 대전으로 이사를 간 강숙자에게 부쳤고. 강숙자는 그 글을 부드럽고 매끄럽게 고쳐서 서울로 보내주는 일이 시작되었다. 미안하고 고맙게도 강숙자는 그 일에 너무 열성이었다. 보낸 글을 읽어보고 나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었고. 전체적으로 고칠 부분을 살피고 나서는 또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하게 고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다 고쳐가지고는 또다시 전화를 해서 쭉 읽고는 불만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 . 조금도 미안해하고 고마워할 거 없어. 난 지금 내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절을 살고 있으니까. . 나의 이런 심정 이해하니? 고교 시절의 후라빠 강숙자가 우등생 안경자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되어 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이니 글쎄. 내가 너보다 잘 하는 일이 있다니. 세상에 이보다 더 살맛나는 일이 어디 있겠니. 난 죽을 때까지 너한테 열등감만 느끼고 살 줄 알았는데. 내 열등감을 풀어준 너한테 내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야.”

강숙자가 아무 구김살 없이 토로한 말이었다. 강숙자의 글 솜씨는 참 신통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글이라는 것이 묘하고도 신기했다. 단어 몇 개를 바꾸거나 끼워 넣고. 새 문장 하나를 삽입시키면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하던 글이 금세 윤기가 돌고 부드러워지고는 했다. ‘멘스는 계절에 따라 ......’ 하는 대목이 멘스는 이런 낙엽 흩날리는 계절이면 ......’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그전부터 강숙자를 보면서 영어. 수학 같은 성적만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고는 했었는데 그 일을 시작한 다음부터 그런 생각은 신념으로 굳어졌다. 강숙자는 균형 잡힌 교양인인 데 비해 자신은 교양이 불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전문인일 뿐이었다. 그 일로 강숙자는 자신한테 느껴왔던 열등감에서 벗어났다는 데 자신은 강숙자에게 뜻하지 않은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다.

안경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파티장에서 벗어났다. 혼자가 된 아들을 생각하자 또 강숙자가 생각났다. 강숙자는 아이 둘을 낳아 가정도 잘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이없게도 아들을 형제가 없는 외톨이로 만들고 말았다. 물론 그게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 가정이 불행하게 된 것은 틀림없었고. 아들에게 그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도 없이 혼자 자라야 될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그게 무슨 죄가 있다고 ...... 안경자는 또 가슴 벽이 눈물로 젖으며 호텔 로비를 빨리 걸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안 박사님!”

어머!”

다가서고 있는 남자는 김선오였다.

안녕하십니까? 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소식은 종종 듣고 있었지요. 역시 크게 성공하셨더군요. 그런데 어찌 혼자 내려오십니까?”

큰 키에 적당히 살이 오른 김선오는 매끈하게 멋을 부린 것에 걸맞게 언행도 세련되어 있었다.

. 전 좀 급한 일이 있어서 ......”

안경자는 김선오에 비해서 무척 당황스러운 몸짓을 지었다.

. . 저는 내무부 장관을 모시러 왔습니다. 허허허. ...... ”

김선오는. 세간에서 흔히 아내를 내무부 장관으로 부르는 것을 그대로 끌어다 쓰며 여유롭게 웃었다.

.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안경자는 서둘러 돌아섰다.

. 안녕히 가십시오. 종종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선오는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느릿한 어조로 말하며 쫓기듯 멀어지는 안경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 이상해라.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 ’

택시를 탄 안경자는 숨을 몰아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눌렀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김선오 쪽이었다. 그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만나 놀라고 당황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보고 피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알은체를 하며 다가섰다. 그 심보는 무엇인가. 네가 날 찼어도 난 이렇게 건재하다는 표시였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묻지도 않았는데 내무부 장관 운운했을 리가 없었다. 그 뻔뻔스러움과 유들유들함이 역겹고 비위 상했다. 박영자를 어디서 만나면 또 똑같은 제스처를 쓸 것 아닌가? 징그럽고 끔찍스러웠다. 그런 사내와 인연이 멀어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싶었다. 안경자는 서서히 감정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의식 속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노화자를 생각했다. 노화자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염치없도록 끈질기고 집요했다. 마치 제약회사 외무사원처럼 덤비는 노화자의 우격다짐이나. 자기 잘못을 뒤집어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김선오의 뻔뻔스러움이 부부로서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따라 그 친목 모임이 영 싫어지는 것을 느끼며 안경자는 택시에서 내렸다. 노화자가 그런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그건 친목이 아니라 불화가 될 소지가 컸다.

상하는요?”

안경자는 언제나처럼 아파트 철문이 열리자마자 이 말을 던져다.

기다리다 자는구만요.”

입 찢어지게 하품을 하는 식모를 뒤로하고 안경자는 안방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그녀는 늘 아들 생각을 하면 눈물 나고. 아들 앞에서는 다급해지고. 아들을 품으면 서러워지는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안경자는 이불 위에 무릎 꿇어 앉으며 아들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온몸으로 보듬었다. 국민학교 1학년이건만 아직 덜 가신 젖비린내가 물큰 풍기는 것을 그녀는 욕심껏 들이켰다. 어쩌면 그건 그녀가 맡는 환각적 냄새인지도 몰랐다.

엄마 ....... 엄마 왔쪄?”

아들이 잠과 어리광이 섞인 소리를 냈다.

으응. 엄마 왔어. 우리 상하 오래 기다렸지?”

안경자는 아들을 더 꼭 끌어안았다.

. 나 졸려서 .....”

그래. 엄마가 늦어 미안하다. 우리 상하 이빨은 닦았어?”

으응 ...... ”

아유 착해라. 우리 상하 푹 잘 자거라 응.?”

으응. 엄마 안녕.”

아들은 눈을 감은 채로 엄마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래 습관되어 온 잠자리 인사였다. 안경자는 아들의 작은 입술에 뽀뽀를 했다. 그 보드라운 감촉은 변함없이 꽃잎 같았다. 그녀는 이불을 다독거리며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유일한 슬픈 행복이었다.

며칠이 지나 강숙자가 병원에 불쑥 나타났다.

어머 얘. 어쩐 일이니? 미리 전화도 안 하고. 병원은 쉽게 찾았어?”

놀란 안경자는 연달아 물었다.

아이고. 말도 마라. 어쩌자고 시내에 잘 있다가 여의도도 아니고 한강을 빨딱 건너 이런 영등포 촌구석까지 이사를 해서 사람을 이 고생을 시키니. 영등포라도 대로변이라면 또 몰라. 큰길가 다 놔두고 왜 또 골목길을 찾아드냐. 골목길을. 이래 가지고도 장사 잘 된다는 게 묘하다. .”

강숙자는 고생한 분풀이라도 하듯 한바탕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그러니까 고생하지 않으려면 미리 전화를 했어야지. 그까짓 것 병원하나쯤 내가 못 찾아 하고 자신만만하게 나섰겠지. 너 같은 헛똑똑이는 고생해도 싸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니?”

안경자가 놀리며 웃었다.

그 잘난 친정이지 어디야. 근데. 너 정말 이래 가지고 병원이 잘된다는 건 맞긴 맞는 말이니?”

아버지의 첩살림이 마땅찮아 친정 앞에는 꼭 그 잘난을 붙이는 강숙자는 미심쩍은 눈길로 안경자를 쳐다보았다.

. 눈치 빠른 애가 척 보면 모르겠어? 연애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고 쓰기까지 했으면서.”

안경자가 의사가 아닌 여고 시절의 얼굴로 샐샐 웃었다.

아니. 가만있어 봐. 듣고 보니 그 말 아주 묘하네? 산부인과하고. 영등포하고. 골목길! 산부인과하고 골목길은 뭔가 잡히는 게 있는데 ...... 영등포는 왜 또 끼여들었지? 영등포에 소문난 환락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봐야 살벌한 공장들뿐인데...... 이상해라 ...... 이거 금방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네.”

강숙자는 골똘하게 생각하느라고 미간이 찡그려진 채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산부인과하고 골목길 관계는 알아냈어? 그건 연애소설에 더러 나오지?”

그야 뻔하잖아. 속도위반한 처녀들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낙태시키려고 음침한 데 있는 산부인과 찾아드는 거.”

저거 꼭 경험자처럼 말하는 것 좀 봐. 영등포에 대해서도 네가 아까 말한 것에 답이 들었어.”

안경자가 손수 탄 커피를 저어 강숙자에게 잔을 내밀며 장난스레 웃었다.

뭐라구? 공장들 말이니? 그럼 공순이들 찾아 욜로 왔다 그거냐?”

아이구. 저 귀신. 근데. 너 여공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니? 바로 공순이야. 공순이. 공돌이 하는 말을 이 영등포에서 함부로 잘못했다가는 봉변당해. 공장에서 일하는 남녀 근로자들은 그 말을 자기네들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든.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하고.”

그래. 그 말이 하도 유행이라 나도 모르게 그냥 나와 버린 건데. 사람 차별하는 말인건 분명하잖아. 이젠 조심해야지 큰일 나겠다. .”

강숙자는 혀를 내밀며 문 쪽을 재빨리 살피고는.

근데 얘. 여공들 속도위반이 그렇게 많니?”

그녀는 고개를 빼며 속삭였다.

공장이 많아 그 여자들 수도 워낙 많거든. 그리고 남자공원들 상대하는 술집이고 사창가도 많아.”

어머 얘. 너 어떻게 그런 걸 그렇게 콕 찍어내서 알았니? 그건 공부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고 말야. 너 언제부터 그렇게 돈독이 들었어? 손님 찾아 병원을 옮길 정도로.”

강숙자가 이상하다는 듯 안경자를 쳐다보았다.

돈독 ...... 그런지도 모르지. 불쌍하고 가엾게 된 우리 상하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어야지. 돈이나 많이 벌어주는 것 밖에는.”

얼굴이 어두워진 안경자는 하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니? 혹시 상하 아빠하고 ......”

강숙자는 쏟아지려는 말을 여기서 멈추었다. 안경자의 오래된 상처를 잘못 건드려 덧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 나 그 사람 완전히 단념했어. 완전히 미국사람 됐으니까.”

세상에! 어쩜 좋으니. . 어떻게 된 건지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 네 성질에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혼자 끙끙 앓기만 했을 텐데. 그런 일 속으로 앓아봤자 고름만 되니까 어서 털어놔.”

강숙자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다그쳤다.

....... 얘긴 간단해. 내 동생 종원이가 작년에 미국으로 박사학위 하러 갔거든.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걔가 그 사람을 찾아갔었나 봐. 편지가 왔는데 누나 다 잊어버려. 돌아갈 사람이 아니야이 한마디였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동생이 최종적으로 결말을 내려준 거지 뭐.”

세상에! 무슨 그 따위 ......”

강숙자는 욕이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보다 더 불쌍한 것이 우리 상하야. 나야 내가 남자 하나 잘못 고른 죄라도 있지만. 우리 상하는 아무 죄도 없이 애비 없는 반고아가 되어 외롭고 쓸쓸하게 살게 되었으니 ...... 내가 에미로서 상하한테 진 죄를 다소라도 면하는 길은 돈을 많이 벌어주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안경자는 휴지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래. 그거 잘 생각했다. 미국 년 얻었는지 한국 년 얻었는지 모르겠다만. 신지훈 그 인간 빠다 실컷 쳐 먹으면서 잘살아 보라고 해. 그래봤자 흰둥이들 세상에서 노란둥이는 별 볼일 없을 테니까. 너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힘내서 살아. 그래야 상하 앞길도 잘 열릴 테니까. 네가 근심에 빠져 있고 한숨이나 쉬어대고 하면 상하도 기 없고 맥 못 쓰는 사내가 된다는 것 잘 알지?”

그래 고마워. 나도 명랑하려고 애쓰고 있어.”

근데 얘. 네 맘먹은 대로 돈을 벌 만큼 환자는 많은 거니?”

. 아주 잘돼. 다 네가 도와주고 있는 덕이야.”

내가? 그 글 쓰는 게 효과가 있기는 있는 거니?”

그럼. 있고말고. 사람들한테 믿음을 주는 데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지. 동업자들이 질투를 할 정도니까. 의사들이 글 잘 쓴다고 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게 꼭 죽겠어.”

그럴 것 하나도 없어. 내가 영원히 비밀을 지킬 거니까. 좌우간 나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그 일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 우리 상하를 위해서 말야.”

“ ....... ”

안경자는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하고 강숙자의 손만 잡았다.

원장 선생님. 저 또 임신한 것 같은데 어쩌죠?”

강숙자가 갑자기 환자인 것처럼 말하며 얼굴까지 찌푸렸다.

. 농담이라도 그런 말하지 말어.”

아니야. 그게 두 달째 안 비쳐. 재수 없게 걸렸나 봐.”

강숙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정말? 어떻게 피임을 했길래 그래?”

안경자도 의자를 책상 앞으로 끌어당기며 의사의 얼굴이 되었다.

주기를 맞춘다고 맞췄는데 빗나갔어. 더는 안 낳을 테니까 확인해 보고 틀림없으면 수술해 줘.”

수술? 그거 안 좋은데. 기를 능력 있으니까 그냥 낳는 게 좋지 않겠니?”

아이구 맙소사. 셋씩이나? 난 지금 둘로도 지겨워. 너 몰라?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이것아. 그럼 피임을 철저하게 해야지. 원래 주기법은 안전성이 약하다고 했었잖아. 어떻게 영구적인 방법을 택해야지.”

영구적?”

. 남자가 정관수술을 하는 게 가장 간편하고 최선이야.”

그거 남자들이 딱 질색이잖아. 정력 감퇴된다고 말야.”

그거 다 헛소문이야. 여러 나라 통계가 전혀 이상이 없다고 나와 있어. 다 우리나라 남자들의 이기주의지.”

정말? 그렇다면 당장 홍석주를 수술시켜야지. 더 이상 나 혼자 고통당할 수는 없지.”

강숙자는 화들짝 반색을 하며 바로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그치만 강압적으로 해선 안 돼. 남자들의 성감이란 여자들하고 좀 달라서 신경에 예민하게 좌우되니까. 필요하면 내가 통계자료들을 줄 테니까 본인이 확신을 가지고 결정하도록 옆에서 도와야 해. 더 좋은 방법은 비뇨기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는 거고. 자의로 수술을 하고도 정력이 감퇴된다고 우울증에 빠지고. 의처증이 생기고. 아내를 구타하고. 가정 파탄까지 생기는 경우가 더러 있어. 그건 대부분 정신력이나 의지력이 약한 경우에 생기는 증상인데. 그래도 신중해야 해.”

정신력이나 의지력이라면 홍석주가 A급이니까 염려할 것 없어.”

그래. 홍 판사는 강한 데가 있지. 홍 판사는 잘해 나가지?”

모르겠다. 경상도도 아닌데다 서울대도 아니니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어찌 될런지 모르겠어.”

그 대신 아버님이 계시잖아.”

우리 아버지 힘도 이젠 예전 같지가 않아. 몸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 나이 따라 권세도 약해지나 봐. 당에서도 자꾸 뒤로 밀리는 눈치거든.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닦달을 해대는데 뜻같이 잘되질 않아. 남동생이 돈 쓰기만 좋아하고 건들건들하거든. 내가 남자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히히 ......”

강숙자는 어깨를 흔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럼. 너 수술은 꼭 하겠다는 거야?”

안경자가 볼펜을 집어 들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임신이면 오늘 당장 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왔어.”

고집하고는. 가자. 진찰실로.”

강숙자는 마취에서 깨어났다가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들어 두어 시간이 지나 눈을 떴다. 친구 병원이라 마음이 한없이 편했던 것이다.

곤히 자길래 안 깨웠다, 자는 게 회복에도 좋거든. 넌 지금 애 낳았을 때보다 몸이 훨씬 안 좋은 상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 염증 생기지 않게 약 꼭 시간 맞춰 먹어야 하고. 매끼 영양식을 하고 샤워는 좋지만 목욕탕 안에는 들어앉지 말어.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하혈을 하면 즉시 연락하고. 앞으로 열흘은 조심해야 돼.”

안경자는 한마디. 한마디 엄하게 말했고.

. . 박사님.”

강숙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집에는 언제 내려갈 거니?”

열흘은 조심하라며? 그때까진 서울에 있어야지. 시골 의사 못 믿어.”

이런. 몸은 또 되게 위하네. 그동안 남편은 어떡하구?”

홍석주야 내일모레 당장 불러올려. 봐라. 내가 수술했다. 날 또 이런 꼴 만들고 싶으냐. 날 사랑한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당장 행동으로 보여라. 해서 그 수술을 시켜야지 뭐. 아까 말한 통계자료 주고. 홍석주를 꼼짝 못하게 설득시킬 수 있는 비뇨기과도 소개해 줘.”

. 아까 한 말 다 잊어버렸니? 그렇게 다그치지 말고 남자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 시간 여유를 줘야지. 어떻게 옛날 성질이 하나도 안 변했니 그래.”

안경자가 눈을 흘기며 혀를 찼다.

타고난 성질 변하면 사람 죽는대드라. 쇠뿔은 단김에 빼야지. 뭘 꾸물거리고 그래. 내가 수술하고 있는 이 기회를 놓쳐 봐. 얌체 같은 남자들이 말 듣겠어?”

글쎄. 그렇기도 한데 ...... 하여튼 후유증 안 생기도록 잘해야 해.”

알았어. 내가 요리를 잘해서 해결할 테니까 너는 구경만 해.”

병원을 나온 강숙자는 큰길에 이르러 병원을 뒤돌아보았다. 의학박사 안자경 산부인과ㅡ 세로로 쓴 돌출간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간판이 이상하게도 쓸쓸해 보였다. 촌스러움을 면하자고 장난삼아 이름자를 앞뒤로 바꾸었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부러워했던 우등생 안경자가 아들 하나 데리고 생과부가 되어버리다니 ...... 강숙자는 갑자기 자신의 행복이 소중해졌다.

닷새쯤 지나자 몸이 수술 전처럼 가뿐해진 것을 느끼며 강숙자는 집을 나섰다. 수술했다는 전화를 받고 남편이 밤 고속버스를 타고 득달같이 올라온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아무런 주저 없이 그 일을 해결해 버린 남편의 결단은 더욱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정관수술? 그거 나도 생각해 봤지. 향토예비군 훈련장에서 무료로 시술해 주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사랑의 척도가 된다? 그렇다면 당장 해야지.”

남편의 그 흔쾌함이 몸을 더 빨리 회복시켰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강숙자는 콧노래를 부르며 유일표의 재건대로 들어섰다.

아니. 언제 올라오셨어요? 온몸에 촌티 묻혀가지고.”

유일표가 반갑게 웃으며 첫마디부터 농담을 던졌다.

아이구. 넝마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서울이라고 폼 잡는 것 보게. . 점심 먹으러.”

강숙자는 곱게 눈흘김을 하며 시계를 보았다. 그녀는 일부러 밥 때에 맞춰 온 것이다.

서울도 어디 그냥 서울인가요. 서울의 중심 중에서도 중심인 남산 아래. 명동이 바로 코앞인 요지지요.”

유일표는 때 꼬질꼬질한 목장갑을 벗으며 벙글거렸다.

그래. 나 괄시 많이 해. 명동 그리워 안달난 촌년 다 됐으니까.”

강숙자도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그녀는 유일표를 바라보며 또 가슴 아린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유일표가 명랑한 척 농담을 하며 웃고 있는 모습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고기 많이 먹어. 고기.”

강숙자는 불고기를 연상 유일표 앞으로 옮겨놓았다.

서울로 언제 올라오세요? 올라오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유일표는 식욕 좋게 밥을 먹으며 물었다.

모르겠어 글쎄. 모두가 서울만 노리고 있으니 그게 어디 쉬워야 말이지. 그리고 갈수록 경상도 판이 돼가면서 국회의원 빽 같은 건 맥도 못 쓴대.”

강숙자가 쓰게 웃으며 코웃음을 쳤다.

국회의원 빽이 안 통하면 그럼 ......?”

그야 뻔하지 뭐.”

강숙자는 저 위를 가리키는 눈짓을 하고는.

즈네들끼리 짜고 잘들 해보라고 그래. 그럴수록 나라는 망조 드는 거니까.”

하며 또 코웃음을 쳤다.

학생들 데모는 다시 시작되고 있는데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위기를 느끼니까 그럴수록 각 분야마다 자기네 사람들을 배치해 단단히 성벽을 쌓아올리자는 건지 어쩐지. 세상사람들의 불평불만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데도 그런 짓 계속하는 걸 보면 그 배짱이 참 감탄스러워요.”

학생들 데모는 어찌 될까?”

글쎄요. 4월 들어 새 판으로 시작하고 있으니까 점점 심해지지 않겠어요? 4월이 괜히 4월이 아니니까요.”

아이고. 모르겠어. 골치 아파. 그 착한 부인 죽고 나서 권력을 내놓을 줄 알았더니 더 심해지니 원. 권력이 그리도 좋은가. 나가. 커피 마시게.”

유일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미루어온 말을 꺼냈다.

저 곧 결혼하게 됐어요.”

어머!”

강숙자는 깜짝 놀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가슴 한쪽이 쿵 울리는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잇따라 무너지는 것 같고. 텅 비는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

참 이상하네. 그동안 계속 결혼하라고 해놓고는 정작 결혼한다고 하니까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허전하고 서운하지? 내 마음 나도 모를 일이네.”

강숙자는 두 손으로 양쪽 볼을 감싸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세요? 저도 옛날에 그랬어요. 이규백 형하고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괜히 화가 나고. 이규백 형하고 결투를 하고 싶은 심정 이었어요.”

유일표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어머머. 그랬었구나. 그럼 우린 서로 사랑했었나 부지? 맺을 수 없는 사랑.”

강숙자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한쪽 마음에 담긴 진심이기도 했다. 가끔 농담 삼아. 나이만 어리지 않았더라면 갖고 싶은 남자였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축하해. 진심으로 축하해.”

강숙자는 손을 내밀었다. 유일표는 강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악수했다.

날짜는?”

보름쯤 남았어요.”

어떤 여자야?”

대학생 때 우리 야학에 와서 봉사했던 여자에요.”

오오. 그냥 평범한 여대 출신은 아니네. 그럼 일표네 가정 사정 같은 건 다 알고?”

. 다 이해했어요.”

잘됐네. 참 잘됐네. 근데 일표는 결혼하고도 계속 재건대에 있을 건가? 그건 좀 곤란하잖아?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다니던 출판사에 계속 다니며 맞벌이를 하기로 했으니까 그냥 재건대에 있어도 가장 노릇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요.”

그렇지만 재건대 수입이라는 게 그게 얼마나 돼? 남자란 돈벌이가 시원찮으면 남자 노릇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 괜히 기죽고 여자한테 무시당하고 말야. 그러지 말고. 그전에 형 사업 때문에 내가 알선했던 그 일 다시 알아봐 줄까?”

아니. 괜찮아요. 재건대에선 야학만 맡고 있는 게 아니라 또 하는 일이 있어서요.”

? 무슨 일인데?”

돈 생기는 일은 아니고. ...... 각 기업체의 공장 노동자들을 돕는 일이에요. 조직적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해 나가는 일이지요.”

노동조합? 그거 기업체도 정부도 싫어하는 일이잖아.”

물론 싫어하지요.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언제까지 착취만 당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GNP 80불에서 시작한 경제개발이 15년이 된 지금 600불이 넘었어요. 이렇게 경제가 발전한 건 누구 때문인가요? 박 통 때문인가요? 기업주들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지요. 그건 그동안 모든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과 형편없이 적은 임금에 시달리면서도 뼛골 빠지게 일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기업주들은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정당한 보수를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들 배만 더 불릴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정부는 또 아직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자본을 더 키워야 한다면서 기업들 편만 들고 있어요.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돼요.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공장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싸워야 해요.”

유일표는 더없이 진지하고 심각해져 있었다.

그렇지만 박 통이 경제개발을 일으켰잖아. 그리고 기업주들이 돈을 대서 공장을 세우지 않았으면 노동자들이 어떻게 먹고 살았겠어. 일표가 너무 잘못 생각하는 것 아니야?”

강숙자가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

. 박 통이 경제개발의 깃발을 들어 올리고 전국민적 단결을 이루어낸 공은 인정해야지요. 그리고 기업주들이 공장을 세운 것도 인정해야지요.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듯 경제도 노동자들과 국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발전시킨 겁니다. 특히 기업주들이 세운 공장이란 그 돈이 대부분 외국에서 빌려온 돈입니다. 그 돈은 결국 국민들이 일해서 갚는 것이지 그들이 갚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기업들은 서로 결탁해서 기업주들은 갈수록 배가 부르고. 정부는 갈수록 독재를 강화 시키면서 노동자와 국민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잘 모르겠네. 그렇잖아도 미운 털 박혀 있으면서 왜 나라가 싫어하는 일하려고 그래? 그러다가 덤터기 쓰면 어쩌려고?”

강숙자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틀린 인생 사람답게나 살아야지요.”

유일표는 담담하게 웃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부인 될 사람도 일표가 그런 일하는 것 알아?”

. 적극 찬성인걸요.”

. 여자치고 대단한 사람이네. 일표하고 잘 어울리는 짝인 것 같은데. 험한 세상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구. 일표가 이렇게 사는 것도 마음 아파 죽겠는데 더 불행해지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니까. 그럼 청첩장 꼭 보내줘.”

강숙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일표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일표의 마음속에서는 오후 내내 강숙자가 떠나지 않았다. 정 많고 솔직하고 마음씨 고운 여자 ...... 그 여자와 정을 나누며 가깝게 지내온 것이 어느덧 16년 세월이었다.

그럼 우린 서로 사랑했었나 부지? 맺을 수 없는 사랑.”

강숙자가 장난처럼 농담처럼 한 이 말이 마음속에 야릇한 파문을 일으키며 맴돌고 있었다. 서로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 감정은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의 이끌림으로 16년 세월을 절친하게 지내왔던 것인지도 모르고. 자신은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강숙자에게 부탁했고. 그녀는 언제나 웃으며 해결사 노릇을 해주었다. 누나도 아니었고 연인도 아니었던 여자 ...... 고등학생 시절에 만날 때마다 자신의 배고픔을 빵으로 풀어주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자신의 가정적 불행을 타인으로서 가장 잘 이해하고 아파해 준 여자 ...... 강숙자의 정이 새삼 가슴 절절해지고 있었다.

어이. 유일표 잘 있었어?”

뒤에서 들리는 컬컬한 소리에 유일표는 퍼뜩 강숙자의 생각에서 깨어나며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자신에게 그런 말투를 쓰는 사람은 정 형사 한 사람뿐이었다. 유일표는 간추리던 넝마를 놓고 천천히 몸을 돌리며 오늘이 또 15일인 것을 알았다.

어서 오세요.”

유일표는 모자 창을 들어 올리는 시늉만 하며 무표정하게 인사했다.

그동안 별 일 없었어?”

바짝 말랐으면서도 몸에서 탄력이 느껴지는 남자가 빠른 눈길로 유일표를 훑었다.

. 아무 일 없습니다.”

유일표는 찌그러진 나무상자에 주저앉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이봐. 담배 좀 권해 봐.”

정 형사님은 이런 나쁜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유일표는 정 형사가 괜한 트집을 잡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매달 15일과 30일에 도장을 받아가면서 겁을 주자는 것인지. 멋쩍어서 그러는지 그는 꼭 한 번씩 그런 식의 언사를 썼다.

. 죄송합니다. 제가 빨리 돈 많이 벌어 좋은 담배로 바꾸면 권하지요. 여기 좀 앉으세요.”

유일표는 얼른 말을 둘러대며 억지웃음을 지어냈다.

괜히 아니꼽고 티껍게 생각하지 말라구. 이게 다 애국이고. 자넬 보호하는 거니까. 정말 아무 이상 없는 거야?”

형사가 싸늘하게 말하며 담배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는 필터가 달린 고급이었다.

. 아무 이상 없습니다.”

좋아. 서로를 위해서 아무 이상 없어야지. 요새도 간첩은 계속 내려오고 있으니까 방심하지 말어. 언제 자네한테 그 마수가 뻗쳐올지 모르니까. 알겠어?”

. 알고 있습니다.”

여기 야학에 나오는 대학생들은 어때? 데모하는 놈들은 없나?”

. 다 공부만 하는 얌전한 학생들 아닙니까?”

괜히 날 속일 생각하지 말어. 정보는 한두 군데서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속이다니요. 섭섭하게 ...... ”

유일표는 형사의 말이 꼭 공갈이나 위협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시로 아이들에게 알아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야학에서 정치나 노동자 이야기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섭섭하게 생각할 것 없어. 말이 그렇다 그거지. . 개인적으로 자네를 좋게 생각하고 있어. 누구나 출세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 이런 데 박혀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오래도록 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자아. 여기 도장 찍어.”

형사가 종이를 내밀었다. 유일표는 혁대께에 달린 바지의 새끼주머니에서 목도장을 꺼냈다. 언제나처럼 형사가 휴대용 인주의 뚜껑을 열었다. 유일표는 아무런 표정 없이 종이에 도장을 눌렀다. 그 목도장은 한 달에 두 번씩 동향 이상 무를 확인해 주는 데 쓰일 뿐이었다. 재건대를 나가는 형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유일표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난 다음부터 시작된 그 도장 찍기는 담당형사가 몇 번씩 바뀌면서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었다. 매달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는 그 일은 이상하게도 익숙해지지도 않았고 둔감해지지도 않았다. 도장을 찍을 때마다 마음이 심하게 상했고. 도장을 찍고 나면 전신의 맥이 풀리면서 더 살고 싶지가 않았다.

유일표는 담배연기를 한숨으로 내뿜으면서 형을 생각했다. 감정을 수습하는 데 형은 특효약이었다. 형이 어렸을 때부터 당해온 것에 비하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한 형도 지금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하고 있었다. 다만 서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자신이 도장 찍기를 되풀이하면서 형이 정말 얼마나 대단한지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끝없이 좌절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지금까지 버티어오고 있는 형은 ...... 흔히 말하는 불사조는 바로 형이었다. 형이 발휘하는 그 끈질긴 힘은 형이 강해서라기보다 장남이기 때문일 거였다. 유일표는 어금니를 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형이 집안을 위해서 없는 힘까지 내고 있다면 자신은 그런 형을 뒷받치기 위해서라도 꿋꿋해야 했다.

유일표는 남은 일을 서둘러 마치고 서경혜와 약속한 다방으로 나갔다. 결혼 날짜를 잡은 다음부터 서경혜는 퇴근길에 매일 만나기를 바랐다. 결혼 준비로 의논해야 할 것이 많고. 그동안 재건대에서 부실하게 먹고 살았으니까 영양보충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그저 내세우는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날마다 만나고 싶은 그것이었다.

저 노래 어떠세요?”

어느 날 서경혜가 갑자기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다방 안에는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 ’ 하는 노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귀에 익은 노래는 자신에게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새겨져 있었다. 하나는 군대생활을 할 때 사병들 사이에서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가사가 바뀌어 군대에 갇혀 있는 젊은이들의 성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사가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같으면서도 10월 유신과 함께 박정희의 권력욕을 야유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달라진 거였다. 그런 의미 변동을 겪으며 그 노래의 작곡자 신중현을 알게 되었고. ‘귀신같이 기타를 잘 친다는 그가 정말 신들린 것처럼 기타를 치는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켜보고는 했었다. 그러나 서경혜는 그 두 가지 의미와는 전혀 다른 노래 본래의 의미를 묻고 있었다. 그 노랫말이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으음. 좋아.”

정말요? 저 노래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맘이 변했어요.”

서경혜는 어깨를 움츠리며 부끄럽게 웃었다. 사랑을 하면 유치해진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이 맞는 것인지 자신도 그 솔직한 노래가 아주 좋았다. 그 노래처럼 서경혜가 보고 또 보아도 자꾸만 보고 싶었다. 유일표는 다방에 들어섰다. 서경혜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매번 야학 시작하기 전에 대가기가 바빴다. 약속시간보다 10분쯤 늦게 온 서경혜는 자리에 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지요?”

괜찮아. 천천히 다녀. 그러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넘어지긴요.”

서경혜는 부끄럽고 고운 눈흘김을 하고는.

퇴근 직전에 회사 심부름을 시키잖아요. 이번에 소설집을 내는 작가가 이 근방 다방에 나오니까 교정지를 좀 전해 주라고요. 근데. 그 분이 늦게 나오셨어요.”

그녀는 바삐 해명을 했다.

그 출판사에서도 소설집을 내나? 주로 역사나 철학 관계의 책을 내는 줄 알았는데.”

. 얼마 전부터 소설집도 손대기 시작했어요. 요새 출판사들이 소설집 내는 경쟁이 붙었거든요.”

경쟁? 소설집이 잘 팔려서 그러는 건가?”

. 보통 책이 3천 부 팔린다면 그 열 배 3만 부 팔리는 게 소설책이거든요. 작가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어떤 작가는 글쎄 10만 부까지 팔렸다니까요. 10만 부가 상상이 되세요? 글쎄. 서울운동장에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을 때가 3만 명이에요. 3만 명이 책을 한 권씩 들고 흔들어댄다고 생각해도 엄청난 숫잔데 그보다 세 배가 넘는 게 10만 분데. 그렇게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글쎄. 그거 이상한 일이네.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잘 안 읽는 것으로 아는데.”

그랬는데 글쎄 몇 년 사이에 달라진 거래요. 출판사에서 하는 말이. 살기가 좀 좋아져서 그렇다는 거에요. 그거 아주 좋은 현상 아니겠어요?”

그럼. 좋고말고. 책 많이 읽는 것처럼 좋은 게 없지. 사는데 여유가 생겨서 그렇다. ...... 그것 참 다행스러운 일인데.”

시간 없는데 빨리 나가서 저녁 먹어요. 내일 양복 가봉하는 날인 거 아시죠?”

서경혜는 큰 손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일어났다.

벌써 그렇게 됐나. 경혜 씨 예물 사는 건 2~3일만 기다려. 형이 곧 돈을 준다고 했으니까.”

유일표는 담배를 챙겨 넣으며 말했다.

어머. 그런 것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요. 시계는 여기 있고. 반지는 18금으로 똑같이 하나씩 해 끼면 된다고 했잖아요.”

서경혜는 따지듯이 똑바로 섰다.

알았어. 알았어. 나가면서 얘기해.”

유일표는 달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경혜는 앞서 나가 커피 값을 치렀다.

정말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반지만 18금으로 하나 하면 돼요. 뭣 땜에 괜히 무리하고 그래요.”

다방을 나와 유일표의 팔짱을 끼며 서경혜가 말했다.

알았어. 나도 형한테 그렇게 말했는데 형 생각은 달라. 호화롭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신부의 예물을 마련해도 형 입장에서는 전혀 무리하는 게 아니고. 신부의 예물은 신부 당사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돈댁에 대한 예의고. 이쪽이 지켜야 할 자존심이니까 나보고는 절대 개입하지 말라는 거야. 그리고 형편이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형의 능력으로 내 결혼 비용을 댈 수 있게 됐으니 그건 형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라는 거야. 나도 형한테 폐를 끼치는 게 미안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형의 그런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해. 우리가 이 정도나마 살게 되리라고는 형이나 나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괜히 형 자존심 다치게 하지 말고 경혜 씨는 모르는 척하고 가만히 있어.”

그렇지만 형님 먼저 결혼하는 것도 죄송스러운데 ......”

그것도 부담 느끼지 말어. 형도 결혼할 마음을 먹고 있으니까.”

형님도 그렇지만 선희 언니 결혼도 또 급하잖아요.”

아이고. 우리 경혜 씨 걱정 많아 큰일 났네. 우선 귀하의 일만 생각하세요.”

유일표는 팔짱을 풀어 서경혜의 손을 잡았다. 서경혜가 손을 빼려고 하며 부끄러움을 탔다.

누가 봐요.”

괜찮아. 날도 어두워지고. 여긴 명동이잖아.”

이틀이 지나 유일표는 집에 가서 형을 만났다.

자아. 이걸로 빨리 준비해라. 늦지 않았나 모르겠다. 함에 넣을 채단은 경혜 씨가 알아오게 해서 함께 가서 끊고. 어머니가 안 계시니 우리가 뭐 알아야 말이지.”

유일민은 동생 앞에 봉투를 내놓으며 말했다.

형 사업도 힘드는데 이거 참 ...... ”

유일표는 미안하고 열적은 얼굴로 뒷덜미를 쓸었다.

조금도 마음 쓰지 말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업은 이제 다 기반 잡혔다. 이문이 박해도 일본 것을 더하게 되면서 형편이 아주 좋아졌어, 물량이 많으면서 지불 기한이 짧으니까.”

차암. 우리가 일본 덕 보고 살게 될 줄은 몰랐네.”

그래.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우리나라 인건비가 워낙 싸니까 별의별 것들이 다 바다를 건너오고 난리다. 공해산업들까지 밀려드니 일본산업의 쓰레기통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해.”

그런데 그 공해산업은 좀 문제 아닌가? 노동자들 건강에 직접 피해를 입히게 되는 건데.”

글쎄. 배고픈 형편에 더운밥 찬밥 가릴 새가 없는 거지. 진폐증에 걸릴 줄 뻔히 알면서도 광부들이 탄광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냐.”

. 사람 사는 게 뭔지 ......”

유일표는 혀를 차며 돈 봉투를 집어 들고는.

그럼 이 돈 잘 쓸게. 형 고마워.”

하며 고개를 꾸벅했다.

고맙긴 무슨. 더 많이 못 줘서 미안하다. 빨리 서둘러라.”

유일민은 동생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여유로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형 노릇을 하게 된 것이 더없이 기뻤고.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게 낯을 들 수 있어서 그지없이 다행스럽기만 했다. 함을 가져가는 날 함진아비는 이상재가 되었다. 첫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 이거 다 늙어서 지각 장가가는 놈이 뭐가 잘났다고 사람 차별하고 이러냐. 이거. 딸 낳은 것도 김새는데 이거 영 기분 잡쳐 못살겠네.”

최주한이 화난 척 내질렀고.

늦장가가면서 아들은 낳고 싶은 모양이다. 아들 낳는 놈들은 다 도둑놈 심보니까 더 말할 것 없어. 우리처럼 딸을 낳는 게 인간성 좋은 거지. 딸을 낳아 시집보내는 것. 그보다 더 큰 사회봉사가 어딨어.”

허진이 최주한의 등을 두들겼다.

이 못난 놈들아. 그게 얼마나 부실하면 딸을 낳냐. 딸을. 너희들 함도 이 형님이 졌으면 아들을 낳는 건데.”

이상재는 과장되게 어깨를 흔들며 키들키들 웃었다.

좋아. 일표 네놈도 아들 많이 낳아라. 난 오늘 돈이나 많이 뜯어내 홧술이나 왕창 마셔야겠다. 가자!”

최주한이 앞장서 나갔다. 신혼여행지는 제주도가 단연 인기였다. 그러니 유일표는 비용을 줄이려고 설악산과 경포대 쪽으로 잡았다. 날짜도 1주일이 아니라 34일로 줄였다. 서경혜도 아무런 이의 없이 그 뜻을 따랐다. 둘이는 설악산 비선대의 옥빛으로 투명한 물을 손 바가지로 떠 마시며 서로의 마음이 그 맑은 물처럼 하나가 되기를 무언으로 약속했고. 장엄하고 우람한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서로에게 그런 믿음과 사랑을 주기를 기도했고. 경포대 앞바다에서 까마득하게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신들 앞에 펼쳐진 인생의 바다를 함께 노 저어갈 것을 다짐하며 다시금 서로의 손을 마주잡았다. 너무 짧게 지나간 34일을 보내고 그들은 행복에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큰일났다.”

그런데 유일민은 침통한 얼굴로 동생에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큰오빠. 작은오빠 보세요. 오빠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하세요. 저는 집을 떠나갑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떠나고 싶었는데 ...... 작은오빠가 결혼을 했으니 이제 마음 놓고 떠납니다. 언젠가 만날 수 있게 될 그날까지 안녕히 ...... 선희 올림.”

 

 

26. 다혈질. 동키호테들

여보. 아버지한테서 또 전화가 왔어요. 벌써 세 번인데 오늘은 좀 가 뵙도록 하세요.”

박영자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 당신이 잘 말씀 드리라니까 그러네. 딴 동료들과의 입장도 그렇고. 내 체질로도 그렇고. 아버님 말씀을 따르기가 어려워.”

남방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는 원병균의 대꾸에서는 짜증이 묻어났다.

당신 참 이상하네요. 왜 짜증은 내고 그래요? 내가 말씀드렸는데도 소용없으니까 그렇잖아요. 아버지는 당신 말을 직접 듣고 싶어 하시는데 왜 당신은 자꾸 피할려고만 해요?”

얼굴이 변하며 박영자의 말에도 날이 섰다.

피하긴 누가 피해. 취직자리 필요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말을 분명히 해.”

원병균이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 아버지를 싫어한다고 그럴 수 있어요? 다 당신 위해서 그러는 건데. 싫건 좋건 장인은 장인이라구요. 어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되잖아요.”

화가 난 박영자의 목소리도 커졌다.

나 생각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딸 안 굶겨죽일 테니까.”

원병균이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가며 내쏘았다.

어머. 무슨 큰소리가 큰소리에요? 당신 월급 안 가져온 게 벌써 일곱 달인데. 그 돈 믿고 살았으면 우리 식구들은 진작에 다 굶어죽었어요.”

박영자는 남편을 뒤따라 나오며 더 카랑한 목청을 맞쏘아댔다.

당신도 그따위 생활태도 당장 뜯어고쳐. 남들은 그 월급으로 적금 들며 살아. 앞으론 김치. 깍두기만 먹을 각오해.”

어머. 어머. ......”

박영자는 혀끝까지 밀려나온 그 잘난 민주 투사하는 말을 가까스로 되삼켰다. 아무리 서로 감정이 상한 부부싸움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까지 가리지 않고 쏟아낼 수는 없었다. 그건 비록 홧김에 하는 소리라 하더라도 남편의 자존심을 짓밟는 몰지각한 짓이었고. 신문사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유신정권에 맞서 언론자유를 지키려고 한 남편의 행위는 옳은 것이기도 했다. 원병균은 다른 날과 달리 다녀오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나갔다. 박영자는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답답해졌다.

남편은 결혼 초기부터 장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난잡한 여자관계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주호 사장의 사건을 알고 난 다음부터 장인의 얼굴을 대하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다. 그즈음 장주호 사장처럼 일이 신문사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도 새 여자 문제로 또 집안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위의 그런 감정도 모르고 당신 회사에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몸이 달고 있었다.

박영자는 안방으로 들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남편은 장인 회사에 안갈 것이 분명했다. 준서 오빠가 아버지 뜻에 따라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자 남 보듯 해버렸고. 그런 심지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 신문사를 쫓겨나면서까지 벌인 언론자유 투쟁이었다. 자신도 남편이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는 그 이상한 꼴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날이 갈수록 불안은 커져가고 있었다. 남편이나 동료들은 다같이 복직을 믿고 있었다. 자신들이 쫓겨난 것은 정치 탄압 때문이니까 시간이 좀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지면 원상복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 일곱 달이 가고 있는데도 복직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걸핏하면 화를 내는 것도 그 불안감의 표현인지도 몰랐다. 복직이란 쫓겨난 사람들의 일방적인 희망일 뿐 전혀 가망 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정치적 압력을 피하고 싶은 사주의 입장에서 볼 때 언론자유를 내세우는 그들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골치 아픈 존재들일 수 있었다. 박영자는 자신의 이런 생각이 방정맞다 싶어 고개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점점 굳어져가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

그녀의 얼굴이 그늘지며 괴롭게 신음했다. 그건 생활 때문만이 아니었다. 신문기자란 월급 이전에 직업의 특수성에 따른 그 어떤 의미가 더 컸다. 월급이래야 큰 회사 사원들의 절반이 될까 말까 하는 박봉이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신문기자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남편은 조간 때문에 밤샘을 하고. 사건을 쫓아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도 언제나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도 남편이 이 세상을 밝혀나가는 작은 등불의 하나라는 긍지감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그 직업을 잃게 된다는 것은 너무 황당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매달 친정에 가서 돈을 받아 오면서도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은 친정이 부자라서가 아니었다.

기자 노릇 당당하게 하려면 집안이 돈에 쪼들려서는 안 되는 게야. 기자가 촌지라는 그 푼돈에 눈독들이다 보면 사람 꼴도 안 되고. 기자 노릇도 망친다. 돈 때문에 여자가 자꾸 바가지 긁어서는 부부 사이도 금가게 되고.”

아버지는 이런 말과 함께 매달 생활보조비를 대주기 시작했다. 물론 아버지가 돈을 대주는 데에는 딸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돈을 대주면서도 그동안 사위에게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박영자는 몸 무거운 근심에 눌리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앞으로 기자직을 아주 떠나게 되면 친정에서 그 돈을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전에는 기자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지만. 기자직을 잃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구걸이었다. 남편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초라한 짓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시집에서 무슨 도움을 받을 형편도 못 되었다. 아버지는 그런저런 것을 다 생각해서 당신네 회사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 눈치였다.

당신도 그따위 생활태도 당장 뜯어고쳐. 남들은 그 월급으로 적금 들며 살아. 앞으론 김치. 깍두기만 먹을 각오해.”

남편의 말이 아직도 의식 속에서 메아리 치고 있었다. 박영자는 얼굴을 감싸며 한숨지었다. 남편의 말은 다 맞았다. 자신은 그동안 친정 돈에 기대 기자 마누라답지 않게 살아왔었다. 시집오기 전과 별로 다를 것 없이 먹고 살았고. 철따라 옷치장도 할 수 있었다. 보통 월급쟁이 집안에서는 과일을 한 쪽씩이나마 매일 먹는다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고. 직장 다니는 남자들이 단벌신사이기 예사인데 그 아내들이 몸치장을 바란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적금을 들며 살았다. 그런데 자신은 적금 같은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그저 돈을 찾아 쓰는 저금통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결혼하면서 아버지한테 30평짜리 아파트 하나를 얻었고. 매달 부족한 생활비를 받는데 굳이 애써가며 적금을 들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앞으로 김치. 깍두기만 먹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김치. 깍두기만 먹을 각오를 하라니 ....... 참 기가 막힐 일이었다. 여태껏 김치. 깍두기만 먹고 살아본 적이 없었다. 김치. 깍두기만 먹고 사는 것은 먼발치의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 고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이면 도시락 반찬으로 정말 김치나 깍두기만 싸오는 애들이 숱했다. 도시락 뚜껑들을 열면 지독하게 코를 찌르는 김치 냄새도 역했지만 김치 국물이 흘러 불그죽죽하게 물든 밥은 이상하게도 비위를 거슬리고는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어떻게 김치. 깍두기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인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자신이 김치. 깍두기만 먹고 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갈 작정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은 그 사건이 일어난 뒤로 웃음도 잃고 말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에이. 쯧쯧쯧 ...... 나이가 들었으면 세상사는 요령이 있어야지 그게 뭐냐 그래. 언론자유도 좋고. 기자들 마음대로 써 갈기는 것도 좋은데 어쩌자고 당치도 않은 싸움을 벌이냐 그거야. 각하가 어떤 분이신데 감히 거기에 대들어. 대들긴. 각하가 끄덕이나 하실 것 같애. 누구나 덤비면 백전백패지. 기자라면서 왜 그 뻔한 걸 몰라 그래. 그러고 더 답답한 것은 지금 세상 사람들한테 중한 게 언론자유냐. 어서 빨리 잘사는 것이냐? 그야 두말할 것 없이 어서 빨리 잘사는 것 아니겠어? 우리가 더 잘살려면 각하가 꽉 틀어쥐고 있어야지. 뭘 어쩌자는 거야?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다 각하 덕이 아니고 뭐야. 한참 잘 달리고 있는 열차의 기관사를 갑자기 바꿔봐. 그 열차가 어찌 되겠어. 배고픈데 밥을 먼저 먹어야지. 언론자유가 밥 먹여 주냐? 언론자유 좀 없다고 불편한 국민 몇이나 되느냐 그거야. 이런 뻔한 이치 앞에서 세상을 요령껏 살 줄 알아야지. 대학생도 아니고 처자식 거느린 놈이 직장에서 쫓겨날 정도로 데모를 하다니. 에이 쯧쯧쯧 ...... ”

아버지의 이런 말에 다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싸움의 상대로는 너무 거대한 산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남편과 그의 동료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선 것일까? 그건 생각할수록 답답한 일이었고. 답답한 만큼 신기하기도 했다. 자신은 4.19데모에 나섰던 때의 마음이 거의 다 사라지고 없는데 남편은 신기하게도 그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영자는 짐작할 수 없는 앞날의 암담함을 느끼며 또 한숨을 쉬었다. 두 아이에게 김치. 깍두기만 먹일 수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원병균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길 건너 신문사 쪽으로 뻗어갔다. 오래도록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신문사는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건 겉모습일 뿐이었다. 그 속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기자들을 쓰레기 치우듯 폭력으로 내몰아버린 그곳은 이제 속 빈 강정이었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고 한 것은 기자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최소한의 직분이었다. 그리고 신문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 다음이 사회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신문사는 그 기자들을 남김없이 몰아내 신문사이기를 포기해 버렸다. 저건 이제 신문사가 아니라 신문사 간판을 붙이고 있는 겉껍데기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쪽에서는 다시 속을 채울 뜻이 없이 보이지 않는 거부의 손을 단호하게 내뻗고 있었다. 유신헌법의 비방. 반대. 개정 주장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자 저쪽의 태도는 더욱 싸늘해졌다. 긴급조치 9호는 이쪽 기자들의 활동도 즉각적으로 위축시켰다. 당장 유인물을 배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동안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해 왔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것은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그것을 위반하면 줄줄이 끌려가 시범쪼로 당할 판이었다.

원병균은 아내의 말을 떼치지 못한 채 신문을 사들었다. 장인은 자기 나름대로 선을 대서 복직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보았을지도 몰랐다. 사업하듯이 세상사에 치밀한 그 양반이 그런 것도 알아보지 않고 그냥 당신네 회사에 자리를 마련했을 리가 없었다. 아내의 말은 옳았다. 싫건 좋건 장인이고. 어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그러나 장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 전혀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싫었고. 우격다짐이 심한 그분이 취직을 밀어붙이면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원 형. 그까짓 신문은 뭐 하러 사.”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원병균은 고개를 돌렸다.

난 또 누구라고. 그리 말하는 사람이 들고 있는 신문은 쓰레기통에서 주운 건가? 다 고질병 못 버리지.”

원병균은. 다른 신문사에서 자신과 똑같은 이유로 쫓겨난 최 기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신문사를 쫓겨나서 그 병이 고쳐지는 게 아니라 더 심해지니 어쩐 일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키 크고 삐쩍 마른 최 기자가 말아 쥔 신문을 보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마음은 그대로 있어서지 뭐. 어떻게 만드는지 걱정도 되고.”

걱정? 미련이나 관심이 아니라 걱정 ......? 그래. 걱정이 더 나은 것 같군.”

최 기자는 걸음을 떼어놓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 형. 원 형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말야. 내가 신문사를 내쫓기고 나서 가장 당황하고 허망했던 때가 언젠 줄 알아? 그 다음날 신문을 펼쳤을 때였어. 내용이야 어쨌든 간에 빈칸 없이 신문이 쫙 만들어져 있는데. 그 순간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묵살되어 버리고. 흔적도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는데. 참 참혹하더라구. 그때 난 복직은 가망 없는 것이라고 확인했던 거야.”

그는 원병균을 쳐다보며. 너는 어땠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래. 최 형이 실감 나게 말하는군. 난 그런 심정이 최 형보다 네 배쯤 심했다고 해둘까.”

원병균은 담뱃갑을 꺼내 최 기자 앞으로 내밀었다.

네 배쯤이라 ...... 그럴 수도 있었겠군. 그러면서도 지금도 걱정을 해?”

최 기자가 담배를 뽑으며 코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한심스러운 고질병인 거지.”

원병균이 헛웃음을 흘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말한 네 배란 쫓겨난 기자들의 수였다.

원 형. 사무실에 나가서 별일 없으면 저 다방에서 커피나 한잔하지. 우리 패거리가 나와 있을 텐데.”

그러지. 무슨 약속들 했어?”

약속은 무슨. 갈 데 없으니까 모여 앉는 거지. 나이가 젊으니 탑골공원으로 갈 수가 있나. 그쪽처럼 여관방이나마 사무실로 쓸 수가 있나. 애꿎은 게 다방 차지지 뭐.”

나 참. 다방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누가 아니래. 다방 고마운 거 이제 알겠다니까. 벌써 7개월이 다 가고 있는데 큰일이야. 쌀 떨어진 친구들도 있거든.”

최 기자가 다방 문을 밀치며 혀를 찼다. 원병군은 아내의 화난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 우리 식구들은 진작에 다 굶어 죽었어요.”

월급 없이 보낸 일곱 달. 거의 다 생활고에 봉착해 있었다. 언론자유라는 이상과 ...... 점점 심해지고 있는 생활의 어려움과 ...... 원병균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그래도 처가 덕에 아직까지도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있으니 유리한 특례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런 식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구. 이런 고등실업자들. 뭐 나올 게 있다고 신문들은 그리 열심히 파고 있어?”

최 기자가 네댓 명이 앉아 있는 구석자리로 가며 퉁을 놓았다.

구인란 보고 있다 어쩔래? . 원 기자가 오셨네.”

한 사람이 일어나며 원병균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병균은 돌아가며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아직 커피들 안 마신 모양이지? 내가 재벌님 사위 모셔왔으니까 맘 놓고 마셔.”

최 기자가 농담조로 말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봐 최 형. 제발 그놈의 소리 좀 하지 말어. 커피 사려다가도 안 사게 되니까.”

원병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어. 그냥 농담이잖아. 여기서 원 형이 장인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한 소리라구.”

최 기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냥 커피 얻어먹기 미안하니까 한 마디 한 거지요.”

다른 사람이 웃으며 거들었다.

하긴 나도 병은 병이요. 그 말만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니. 자아. 커피들 합시다.”

원병균이 언짢았던 기분을 털어내듯 말하며 아가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빌어먹을. 마침내 서울대 총장까지 갈아치웠어. 총장들이 데모하라고 부추기는 것도 아닌데 왜 총장들 목을 날리고 이래? 총장들 갈아 치운다고 학생들이 데모 안 할 것 같애? 새대가리들.”

한 사람이 신문을 구겨댔다.

. 그게 오늘의 빅 뉴슨가? 연대. 고대에 이어 서울대 총장까지 손을 보셨으니까 다른 대학 총장들은 군기가 바짝 들었겠군. 그나저나 총장들을 날파리 잡듯 해버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학자라는 것들이 그 자리를 냉큼냉큼 차지하고 앉는 꼴이야. 지식인이란 것들이 아무 배알도 없이 허겁지겁 그 꼴들을 하니까 독재자가 더욱 기고만장해 지는 거야. 지금까지 이 정권이 제대한 군바리 천국이라고 하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여기에 빌붙은 지식인들 숫자가 더 많다는 걸 알아야 해. 결국 지식인이란 것들이 권력에 기생해 가면서 이 나라 다 망쳐먹고 있는 거야.”

최 기자의 얼굴은 말을 해갈수록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그래. 그거 공자님 말씀이야. 유신헌법 만들어 바친 것도 거룩하신 법학자님들 아니신가.”

자아. 그런 철없는 소리 그만들 하고 커피나 마시자구. 그런 분네들이나 지금 신문사에 자리 지키고 있는 분들께선 우리 보고 뭐라는지 알아? 다혈질이라고 해. 커피 마시면서 반성들 하라구.”

원병균이 좌중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뿐이면 좋게? 불평분자들이라고 해.”

한 사람이 커피에 설탕을 타며 말을 받았다.

. 또 있어요. 사회 부적응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제일 그럴듯한 게 빠졌는데요. 동키호테요.”

여태껏 말없이 앉아 있던 이상재가 불쑥 말했다.

그래. 약삭빠르게 빌붙고 눈치껏 몸 사리고 귀 간지럽게 아첨해야 출세하는 세상에서 우리 같은 것들은 다 다혈질이고 불평분자고 사회부적응자고 동키호테들인지도 모르지. 약아빠진 출세주의자나 보신주의자들 눈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보일거야. 인간사란 끊임없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 왔으니까.”

최 기자가 헛웃음을 치며 커피 잔을 들었다.

조 기자가 전세를 줄여 옷가게를 낸다던데. 원 선배님. 아세요?”

그래? 그거 처음 듣는 말인데.”

원병균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놀라 잔에서 입을 떼고는.

경험도 전혀 없으면서 어쩔려고 장사를 시작하지? 어떻게 취직을 해 봐야지.”

그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그야 취직을 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지요. 근데 기막힌 일이 벌어졌어요. 학벌 좋고. 성적 좋고. 다 좋은데 경력에서 꼭 걸리고 말았어요. 신문사에서 투쟁한 걸 위험시한 겁니다. 그래서 경력을 안 썼더니 이번엔 무능자 취급을 해버렸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생겼으니 어쩌겠어요. 처가고 어디고 손 벌릴 데는 없고. 돈은 바닥나고. 먹고 살기는 해야겠고. 장사로 나선 거지요. 세상이 그렇게 살벌하고 무서운지 첨 알았어요. 저도 무슨 수를 써야 할 형편에 처했는데 조 기자가 당하는 걸 보니까 엄두가 안 나요.”

원병균은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자기네 신문사 후배의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미안함만이 깊어지고 있었다. 투쟁위원회의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개개인의 사정에는 소흘해진 거였다. 그러나 자신이 그 일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힘이 될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에 그는 비참해 지고 있었다.

이거 참 문제는 문제야. 박정희 말마따나 민생고는 시급해지고. 복직은 글렀으니 무슨 일을 해서든 밥벌이들을 해야 될 판인데 앞뒤 다 막혀 막막하니 말이야. 나도 여기저기 취직을 부탁해 놨는데 나이도 그렇고. 할 일도 그렇고. 영 가망이 없어. 참 드러워서.”

최 기자가 재떨이에서 담배꽁초를 집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원병균은 아가씨를 불러 담배 한 갑을 가져오게 했다.

저어 원 선배님. 제 말씀 기분 나쁘겐 듣진 마십시오. 하도 답답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장인 영감님 회사에 후배 한둘쯤 밀어 넣을 수 없을까요? 대기업 홍보실에서 발행하는 사보 편집에는 우리들이 제격이잖아요. 물론 빈자리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한 사람이 원병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나도 그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양반 대하기가 싫어서 이러고 있는 거지. 한 사람이라도 자리 잡는 게 급하니까 어떻게 해보긴 해봐야 되겠어.”

원병균은 그 생각을 얼핏 했던 참이라 진작부터란 말을 덧붙여 선배로서의 체면을 살리고자 했다.

. 그렇게 해주시면 그보다 더 고마울 게 없지요. 누가 들어가든 빨리빨리 안정이 돼야 싸워 나갈 기운이 생길 테니까요. 어차피 싸움은 장기전이 됐잖아요.”

그는 자기가 취직이 된 것도 아닌데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원 형이 장인네 회사 하나를 맡아 우리가 전부 취직을 하면 그 회사 망하겠지?”

최 기자가 씩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미안하지만 나도 안 뽑아줘. 다혈질에 불평분자고 사회부적응자에 동키호테들을 떼거리로 모아다가 어디다 써먹게.”

이런 원병균의 대꾸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형은 무슨 계획이 섰어?“

최기자가 이상재에게 물었다.

글쎄요 ...... 아직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재는 어색스럽게 웃으며 담배를 빼들었다.

거 출판사 차려볼까 한다는 생각은 어찌 됐어?”

글쎄요. 그게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출판사 사장들을 몇 사람 만나봤는데. 어떤 사람들은 해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돈 까먹기 딱 좋으니까 아예 손대지 말라고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거든요. 판단이 설때까지 출판 전반에 대해서 좀 더 차근차근 알아봐야 되겠어요.”

자본만 좀 있으면 출판 그거 괜찮잖아? 우리 경험을 활용할 수 있고. 우리가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인접 분야니까 말야. 그리고 근자에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기 시작해서 어지간한 책만 내면 기반 잡기도 어렵지 않은 모양이던데?”

그 어지간한 책이라는 게 쉽지가 않고. 영업이라는 것도 아주 복잡한 모양이더군요. 책이 팔려도 영업이 잘못되면 망하게 된다니까요.”

영업 ......? 그거 우리하고는 거리가 멀지? 제기랄. 세상에 수월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기자생활이 제일 어려운 줄 알았더니 떠나고 보니 제일 쉬운 일이었어. 이 세상의 모든 직업이 존귀하고 숭엄하다는 말을 이제 알겠어.”

최 기자가 쓴 입맛을 다시며 물 컵을 들었다.

늦게라도 철들어 다행이군. 자아. 난 그만 가볼 테니 또들 봅시다.”

원병균이 몸을 일으켰고.

제길. 오라는 사람 없는데 뭐가 그리 바뻐? 내친김에 짜장면까지 사고 갈 것이지.”

최 기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이고 최 선배님. 양심 좀 있으세요. 우리 거지 떼 만나 원 선배님 점심 굶게 생겼잖아요.”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내 주머니 다 털어놓고도 저리 뻔뻔하니 강도가 따로 없지. 실직 7개월에 저 꼴 됐으니 사람 버리기 잠시 잠깐이라니까.”

원병균이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저 원 선배는 장인 회사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요? 전혀 그런 눈치가 안 보이는데.”

취직 안 해도 그 덕으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몸 달 것 없잖아.”

이 사람아. 말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저 선배 겪어보고도 몰라? 자존심 상하는 일은 절대 안 하는 사람이야.”

최 기자가 후배를 꾸짖는 눈길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괜히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해본 소립니다.”

저는 좀 나가봐야 되겠습니다.”

이상재가 큰 봉투를 들고 일어났다.

이봐 이 형. 그걸 막연하게 알아보는 것보다 어떤 출판사든 임시로라도 취직해서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는 게 어떨까? 몇 개월이라도 그렇게 하면 큰 경험이 되지 않겠어? 어떡하든 출판사를 차릴 여력만 있다면 그걸 옷가게에 비하겠어? 출판도 어떤 의미에서는 언론이기도 하니까 말야.”

최 기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패해서는 안 되니까요. 또 뵙겠습니다.”

다방을 나서던 이상재는 눈부신 햇살과 함께 상쾌한 계절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내뿜는 숨은 한숨으로 변하며 자신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런 감정이 마음에 도사린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할 일이 없어져 버린 것. 조직에서 이탈해 버린 것. 그것은 뜻밖에도 당황스럽고 허전했으며. 사람을 기죽게 만들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은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게 했다. 그런 감정이 생길 때마다 자산은 독재에 맞서고.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명분을 스스로에게 일깨우고는 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초라함은 씻겨 지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아무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된 입지도 그렇지만. 생활의 어려움까지 닥치면서 그런 감정은 더 심해지고 마음을 괴롭혔다.

이기 우짠 일이고? 넘들은 고향이 경상도에 학벌이 니만 몬해도 승승장구 출세허는 판에 니는 실업자가 됐시니 이 무신 곡절이고? 깨미가 황소 발등 물기고. 계란으로 바우 치긴 거를 그리 모르겄드나? 니가 홀몸이기를 하나? 처자식 데불고 인자 우얄 기고?”

울음이 섞인 듯한 아버지의 말은 절절했었다. 출세하는 아들 바라보는 것이 제일 큰 희망이고 자랑인 아버지께는 참 면목 없고 죄송했다. 아버지는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을 텐데도 다음 달부터 생활비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복직이 가망 없으면 취직을 하든 무슨 일을 시작하든 해보세요. 이 나이에 아버님한테 생활비 받아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돈을 헐어 쓰기가 너무 조마조마하고 힘들어요.”

아내가 눈치 보아가며 하는 말에는 아버지의 뜻도 들어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새롭게 체험하고 있었다. 매일 세 끼를 먹어야 한다는 것. 그 기본이 깨졌을 때 인간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이 되었다.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어갈 사람 없다는 옛말은 먹는 것의 절실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박봉이었던 기자 월급은 저금 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게 했고. 그들이 내몰리기 바쁘게 굶어야 하는 위협을 가해왔다. 하루하루 쪼들림이 심해져 온 7개월은 긴 시간이었고. 먹이를 구하는 것이 다급해진 상황에서 그들의 투지는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상재는 장기화된 싸움을 위해서도 안정된 돈벌이를 해야 한다고 진작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출판사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은 막연한 생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유일표의 아내 서경혜가 출판업이 안정되고 전망도 좋다고 적극 권했던 것이다. 필요한 것들을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고도 했다.

이상재는 큰길로 나서며 원병균이란 사람에 대한 선입관을 완전히 지웠다. 그가 후배들의 취직을 약속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장인을 싫어하면서도 그 일을 맡고 나선 것이다. 원병균이 박부길 사장의 사위인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일어난 반감은 박부길에게 품고 있는 증오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부잣집 딸을 골라 정략결혼을 한 더럽고 치사한 자식. 이렇게 인상이 박히고 말아 어디서 마주쳐도 외면을 해버리곤 했었다. 그런데 그가 자유언론 투쟁에 나섰고. 그것도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뜻밖의 사태에 어리둥절해 그쪽 가까운 기자들에게 알아보니 그는 꽤나 신뢰를 받고 있는 존재였다. 4.19 때부터 싸워온 경력이나 기자로서의 능력보다는 처가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이 먼저 귀에 들어왔고. 그것 또한 뜻밖이라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다같이 신문사에서 내쫓기고 나서 가까이 지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시청 앞에 이른 이상재는 그만 얼굴을 찌푸렸다. 광장 한가운데 높게 솟은 사면 구호탑에 적힌 문구가 눈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상기하자 월남패망 이룩하자 멸공통일

월남의 패망은 이미 넉 달 전인데도 이 땅의 반공의식을 고취하며 아직도 펄펄 살아 있었다. 월남이 패망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 땅이 들끓어 오른 것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신문이란 신문들은 며칠이고 그 기사로 온통 지면을 뒤덮으며 수선을 떨어댔고. 대통령은 북쪽에서 곧 쳐내려오는 것처럼 위기를 조성하며 특별담화문을 발표했고, 잇따라 전국적으로 총력안보궐기대회가 벌어졌고, 국회에서는 오랜만에 여야가 만장일치를 이루어 안보결의문을 채택하는 소란을 일으켰다.

월남의 패망. 그것은 미국의 패배였다. 미국의 패배 ...... 이상재는 입이 비틀리도록 쓰게 웃었다. 황색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질주하는 차에서 괜히 들판을 향해 총을 난사해대고. 온갖 마실 것. 먹을 것 싸게 파는 간이식당까지 차려놓고 남지나해의 바닷물에 느긋하게 해수욕을 즐기고. 안전이 확보된 도심의 거리를 활보하며 아무 여자한테나 푸른 돈을 흔들어대던 미군들은 마치 월남의 주인 같았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패배해 그 슬픈 역사의 땅에서 밀려났다. 미국의 패배는 단순히 공산 월맹의 승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건 공산주의 이전에 월남 민족의 승리였다. 기나긴 식민지 역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월남 민족의 열망과 희생이 이루어낸 승리였다. 다만 공산주의는 그런 민족의 의지를 효율적으로 무력화한 국가적 체재였을 뿐이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의 무력도 일치단결된 한 민족의 결의는 꺾지 못하고 오히려 패배의 굴욕을 맛본 것이다. 세계 어느 전쟁에서나 져본 적이 없다는 미군의 불패의 역사는 막을 내린 셈이다.

길을 건넌 이상재의 얼굴이 또 찡그러졌다. 구호탑의 다른 면의 구호가 그를 맞이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

이상재는 박정희의 끈덕진 구호정치에 진저리를 치며 허미경의 양품점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잘 잤어?”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양품점으로 들어서며 이상재가 한 인사는 이랬다. 실업자가 되고 나서 날마다 들르는 탓이었다.

네에. 어서 오세요.”

이상재를 맞이하는 허미경의 얼굴에 정겨운 웃음이 환하게 피어났다. 이상재의 말이 정다운 낮춤말로 변한 것처럼 허미경의 얼굴에도 애정의 윤기가 화사하게 번져 있었다.

저게 무슨 꽃인가? 벚꽃도 아니고.”

이상재는 꽃을 보는 척하며 허미경의 손을 슬쩍 잡았다.

매화꽃이에요.”

허미경이 살짝 맞잡고는 손을 뺐다.

매화꽃이 저리 고운가? 봄 날씨가 기막힌데 둘이서 어디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질항아리에 가득 꽂힌 꽃을 바라보며 이상재는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이것 넣어두세요.”

허미경이 작은 봉투를 유리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자꾸 이러지 마.”

이상재가 역정 내듯 말했다.

담에 다 갚으시라니까요. 이자까지 계산하고 있으니 그런 줄이나 아세요.”

허미경이 봉투를 반으로 접어 이상재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여자 손님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이상재는 어물어물 밖으로 나섰다. 허미경에게 용돈을 받은 것이 벌써 네댓 차례였다. 그녀는 미리 돈을 준비했다가는 요령좋게 내밀고는 했다. 쑥스럽고 면목 없고 미안하고 고맙고 눈물겹고 ...... 그 심정을 뭐라고 다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용돈을 받아쓰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참 장하세요. 이 무서운 세상에. 일제시대의 독립투쟁과 뭐가 다를 게 있어요.”

실직된 연유를 알고 나서 허미경이 한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멋쩍어지면서도 할아버지를 마음에 담고 살고 있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하지 않은 그런 의미 부여가 내심으로는 고맙고 무슨 보상을 받은 기분이기도 했다.

이상재는 남산을 올려다보며 골목길을 빨리 걸었다.

. 실업자 되니까 자주 보겠구나.”

일손을 쉬고 있던 유일표가 먼저 말을 던졌다.

새끼. 속 시원하다는 말투네.”

이상재가 퉁명스럽게 대질렀다.

당연하지. 난 좋은 직장에 다니며 뻐기는 놈들한테 다 원한을 품고 있으니까.”

아서라. 천당 갈려면 맘 곱게 써라.”

이상재가 상자 위에 몸을 부렸다. 유일표가 그에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 일표야 그 출판사 문제 있잖냐. 아무래도 경험을 좀 쌓아야 되겠으니까 어디든 몇 개월 임시로 취직을 해야 되겠다. 이 형님 일 빨리 풀리게 하려면 제수씨한테 좀 부탁해봐.”

요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봤나. 형수님이라고 받들어도 도와줄까말깐데 제수씨라니. 말하나마나다.”

월급 같은 건 따지지 않고. 신간을 소개하는 신문사의 섭외는 책임질 수 있다는 조건을 내세우라고 해. 그건 출판사들이 제일 구미 당겨하는 거니까.”

출판사를 차리기로 작정했다 그거지? 그렇다면 잘 생각했어. 직접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지. 마누라 말 들어보면 책 만들고 파는 게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니던데.”

유일표는 장난기 가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짜장면이나 한 그릇씩 하게.”

이상재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실업자가 점심을 사겠다 그거냐?”

취직 부탁했으니까 빽을 쓰려는 거다. ? 맨입으론 안 통하는 세상인데.”

아이고. 참 위대한 진리 터득했다. 실업자한테 짜장면 얻어먹어 봤자 소화 안 되니까 맞벌이하는 내가 설렁탕을 사지.”

식당에 자리 잡고 앉으며 이상재가 물었다.

여동생은 어찌 됐어?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어?”

...... 감감무소식이야. 어디로 찾아 나설 수도 없고 ...... ”

유일표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지며 푹 한숨을 쉬더니.

그 봉투에 든 건 출판사 할 자료들이냐?”

그는 괴로움을 피하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아니. 요새 읽고 있는 책.”

? 그 경황 중에도 책 읽을 정신 있냐? 참 용하다.”

. 좀 색다른 책이라 일부러 정신 차려 가며 읽어보고 있는 중이야.”

무슨 책인데?”

“<전환시대의 논리>라고. 다 읽고 빌려줄 테니까 너도 좀 읽어봐.”

이상재가 봉투에서 책을 꺼내 보였다.

요새도 읽어볼 만한 색다른 책이 있냐?”

 

 

27. 범죄 위의 범죄

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요구가 왔을 때 무슨 수로 거절하겠습니까. 저도 참 많이 괴로웠습니다.”

손진권 사장은 책상 앞에서 1미터쯤 떨어진 의자에 곧은 자세로 앉아 정말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고 있는 그의 경직된 언행은 호화롭게 꾸며진 널찍한 호텔방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꼭 그럴까요?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차례에 걸쳐서 그런 행위를 하셨는데 ......”

조서에서 검정 볼펜을 떼며 이규백은 냉정한 얼굴로 상대방을 주시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 저를 의심하십니까? 제가 솔선해서 그런 짓 한 게 아니냐 하는 뜻으로 ......”

손진권은 빠른 혀 놀림으로 위 아랫입술을 축였다.

그렇소.”

.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저쪽에 알아보시면 금방 들통날건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한테 죄가 있다면 사업상 외국을 많이 드나든 것뿐입니다.”

그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그 큰 보석들을 들여왔는데. 세관에서는 한 번도 적발 된 적이 없었나요?”

말이 끝나는 동시에 이규백은 이 추궁이 잘못된 것을 느꼈다. 잇따라 떠오르는 추궁들 중에서 저쪽을 다칠 만한 것들을 피하느라고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 있었다.

예에. 죄송합니다. 제 소지품은 별로 조사를 받지 않아서 ...... ”

사전에 세관원들을 다 매수해 둔 모양이지요?’ ‘그런 식으로 당신이 따로 들여온 보석은 얼마요?’ 이런 추궁이 연달아 떠올랐지만 이규백은 또 접어 넘겼다.

저쪽에서는 그 부인이 사장님한테 직접 부탁을 해 왔나요?”

이규백은. 최혜경이라는 이름이 곧 나오려고 했지만 멈칫하며 그 부인이라고 바꾸었다. 그는 짜증이 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 집사람을 통해서 부탁했고. 전달도 집사람이 했습니다.”

그럼 일면식이 없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에 모임이 있을 때 더러 인사는 했습니다.”

이규백은 그 대답이 비위에 거슬렸다. 언뜻 들으면 아주 솔직한 것 같았지만 그 반대로 최혜경의 남편과 무척 친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신문에 일부 보도된 것만 가지고도 사회적인 물의가 대단히 큰 것을 아시죠? 정치 상황도 좋지 않은데 이런 사건까지 터졌으니 ...... 사건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면목 없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본의 아니게 저지른 일이지만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손진권은 포마드 자르르 바른 머리를 두 번. 세 번 조아렸다. 포마드 바른 머리처럼 윤기 흐르는 그의 얼굴을 쏘아보며 이규백은 또 비위가 상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 이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빤히 내다보고 앉아서 가식으로 반성하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여우로 수사 검사의 기분이나 나쁘게 하지 않으려고 능란하게 제스처를 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건 자신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었다, 그러나 이규백은 그런 불쾌감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됐습니다. 이거 읽어보고 도장 찍으세요.”

이규백은 조서를 손진권 사장 앞으로 밀어놓고 일어섰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의 커다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맞이한 것은 찌푸린 자신의 얼굴이었다. 이규백은 거울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문득 낯설어졌다.

넌 누구지 ......?’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검사 이규백? 검사 ...... 틀림없이 검사야? 그럼. 검사가 뭘 하는 사람이지? 에라. 그만둬. 그만둬. 새삼스럽게 그런 걸 따져서 뭘 해. 어차피 검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야. 무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나 지배자도 아니고. 넌 직업의 한계가 뚜렷한 일개 검사일 뿐이야.’

그런 자위를 한다고 거울 속의 얼굴이 친숙해지지 않았다. 이규백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눈길을 떨구었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이 흘러내렸다. 수도꼭지를 더 돌렸다.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 거센 물줄기에 두 손을 디밀었다. 손에 닿는 물의 냉기가 일순간에 머리로 전해졌다. 헝클어지고 혼탁했던 머릿속이 산뜻한 물의 냉기로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세상사가 물이 흐르듯 순조롭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건가? 어리석은 건가? 이규백은 신경질적으로 두 손을 문질러대며 자신에게 화가 나고 있었다. 추궁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화를 질러대고 있었다.

주로 다이아몬드를 사들여왔는데 그 돈은 당신이 낸 거야? 저쪽에서 받은 거야?’ ‘당신이 그런 짓을 해주고 그 대신 받은 특혜는 뭐야?’ ‘그 보석들이 국내에서 구매가의 다섯 배가 넘게 밀거래됐는데. 경제인으로서 그게 경제를 망치는 행위라는 걸 생각 못했어?’ ‘당신은 이런 행위를 이번만 한 게 아니라 그전부터 해온 게 틀림없는데. 언제부터 이런 짓을 해왔어?’ ‘세상이 놀랄 만큼 당신 사업이 급성장하고. 당신이 금융계를 귀신같이 잘 요리하는 귀재라고 소문이 난 건 다 그런 짓을 해서 만든 빽을 동원한 게 아니냔 말야.’

그러나 당연히 해야 될 그런 추궁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거 참 난처한 사건이요. 능력껏 신속하게 수사를 종결시키시오. 대학들이 전부 휴교상태이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사건이 휘발유가 될 뻔했어요. 수사발표는 빠를수록 좋으니 적당한 선에서 끊고 ....... 난 세 사람만 믿겠소. 좀 괴롭겠지만 수고들 해주시오.”

또 부장 검사의 말이 떠올라 이규백은 낯까지 씻기 시작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두 검사도 부장의 그런 지시에 아무런 이의도 달지 못했다. 이의를 달기에는 너무 뻔한 일이었고. 서로가 그런 세상사에는 닳아질 만큼 닳아져 있었다.

고개를 든 이규백은 또 자신의 모습과 마주쳤다. 얼굴에 물이 묻은 자신의 모습은 아까보다 더 낯설었다. 얼굴에 묻은 물이 그동안 검사로 살아오면서 묻힌 세상의 오물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 혼자 잘난 척해 봤자 무슨 소용 있어. 자기 인생만 비참하게 끝났지. 그 친구 그거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회부적응자라구.”

이런 말과 함께 김지혁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규백은 그의 모습을 지우려는 듯 얼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김지혁은 대학 동창이었다. 판사생활을 하던 그는 몇 년 전 일어난 사법부파동 때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법복을 벗었지만 젊은 법조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침묵은 사법부까지 지배하고 드는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사람들의 입은 그를 어리석은 자로 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변호사 개업을 해봤자 살아남기 어렵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았다.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것은 두 번째 충격이었다.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차츰 잊혀져갔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그는 느닷없이 세 번째 충격을 가해왔다. 그는 미국에서 식품점을 하고 있다가 흑인 강도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총 맞아 죽은 것에 못지않게 그가 식품점을 경영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미국의 변호사는 말할 것도 없고 국제변호사 자격을 딸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누가 그런 것인지 모르게 그가 사회부적응자아니냐는 말이 오갔고. 사람들은 마치 정답이라도 찾았다는 듯 입 모아 그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사람들은 그 말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규백은 김지혁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김지혁은 평소에는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이런 고약한 사건을 처리해야 될 때면 으레껏 고개를 치켜들었다. 김지혁은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고 의식의 저 밑바닥에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 총에 맞아 죽는 순간 김지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이규백은 또 이 생각에 붙들린 채 화장실에서 나왔다.

여기 ...... 도장 찍었습니다.”

손진권 사장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됐어요. 돌아가세요.”

이규백은 조서를 건성으로 넘기며 말했다.

예에. 고맙습니다. 곧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손진권은 겸손한 듯 하면서도 거만스러워 보이고 가식인 듯하면서도 세련되어 보이는 사업가들 특유의 인사 몸짓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규백은 방을 나가는 손진권의 뒷모습을 노려보듯 하고 있었다. 이규백은 그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느끼고 있었다. 의식 속에서 김지혁은 너도 검사야? 그러고도 끝까지 검사 자리 차고 있겠다 그거야?’ 하며 조롱하고 있었다.

대진이라는 그의 회사 이름처럼 손진권은 단시일 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해 왔다. 그의 눈부신 성공에 신화기적이니 하는 미사여구가 붙은 지 오래였고. 그가 정치적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이규백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진권을 향해 일어나는 분노와 적개심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자기 잇속을 위해 저지른 이번 범죄는 치사하다 못해 역겨울 지경이었다. 그는 보석 밀수만 한 것이 아니었다. 외환관리법 위반에 뇌물 수수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쇠고랑을 채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검사를 한없이 무력하고 무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검사로서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면서 단지 사건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를 취조한 것이 견딜 수 없는 모독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형식적이나마 취조를 하면서도 입에 붙어버린 취조 용어인 당신이란 말은 물론이고 반말 한마디 시원하게 내뱉지 못한 것도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의 그런 말조심은 부지불식간에 재벌 손진권을 의식한 동시에 그 뒤의 배경까지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손진권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기도 했다.

찌르릉. 찌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이규백은 혀를 차며 전화기를 들었다.

이 검사. 나 백이오. 그쪽은 어떻게 됐어요? 난 다 끝났는데.”

나도 다 끝났어요.”

잘됐군요. 황 검사도 다 끝났으니 일단 내 방으로 모이도록 합시다.”

. 곧 가지요.”

이규백은 조서를 챙기며 어서 빨리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어차피 김지혁처럼 단호하게 살 용기가 없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오래 괴롭고 싶지 않았다. 이규백은 취조한 순서대로 양장점 주인여자의 조서를 손진권 사장의 조서 위에 올려 봉투에 넣었다. 양장점 주인여자는 와들와들 떨면서 자기의 결백을 내세웠다. 자기는 양장점 손님을 끌려다 보니 자연히 장소를 제공한 것처럼 말려들게 되었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건 다급한 발뺌이었다. 그 여자는 적극적인 판매책이었다. 손님들 중에서 돈 많은 상류층 여자들을 골라내 유인한 것이 그 여자가 맡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부차적인 것이었고. 그 여자의 취조가 중요했던 것은 주범 최혜경을 재차 확인한 사실이었다. 경찰 수사에서는 주범이 최혜경인지 한정임인지 모호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손진권 사장도 최혜경에게 부탁을 받았음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자아. 시켜놓은 커피부터 한잔씩 하면서 정리해 봅시다.”

백 검사가 설탕그릇 뚜껑을 열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거 참 골치 아파서. 보석을 산 사모님들 말이 다 걸작이오. 그걸 사고 싶지 않았지만 워낙 거한 사람 물건이라 안 사면 미운 털 박힐까 봐 비싼 줄 알면서도 샀다고도 하고. 그걸 사면 물건을 믿을 수 있는데다 그 높은 사모님하고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샀다고도 하고 ...... 세상 요지경 속이오.”

황 검사가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 그래도 두 번째가 솔직하고 순진한 편이오. 첫 번째는 그거 야비하기가 원 ...... ”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백 검사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럼 면도 없진 않은데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샀다고 하는 건 정도의 차이만 있지 다 똑같아요.”

그야 당연한 범죄인 심리 아니겠소? 죄를 모면하려고 무슨 소리든 다 하는 거지. 이 검사. 거기는 어때요?”

백 검사가 이규백에게 눈길을 돌렸다.

양장점 주인과 손 사장이 똑같이 최혜경을 주범으로 지목했고요. 양장점 주인이 판매책을 맡았어요.”

이규백은 조서를 꺼내 백 검사 앞으로 밀어놓았다.

손 사장 그 사람 태도는 어때요?”

글쎄요. 겉으로는 겸손한 척. 잘못한 척하는데 그런 요구가 왔을 때 무슨 수로 거절할 수 있겠느냐며.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어요.”

됐소. 물은 내가 바보지.”

백 검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정임이라는 여자 말이오. 똑똑한 건지 아둔한 건지 모르겠소. 끝까지 자기가 주범이라고 버틴단 말이오.”

하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그거 ...... 자기가 다 뒤집어쓰고 최혜경을 보호하자는 의도일 텐데. 최혜경 쪽에서 엄청난 압력을 가한 것 아니겠어요?”

황 검사가 말했고.

글쎄요. 압력이라기보다는 상호 결탁 아니겠어요? 어차피 당할 바에 둘이 다 당하는 것보다는 한정임 혼자서 당하고. 그 여파로 남편이 별 셋을 달지 못하고 예편 당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최혜경 쪽에서 봐주기로 하는 식의 결탁 말이지요.”

이규백이 받은 말이었다.

그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소. 중요한 건 한정임이 그렇게 완강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점이오. 우리가 골치 아프지 않고 그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는 거니까. 하여튼 뜻밖에도 일을 편하게 처리하게 된 것 같소.”

백 검사가 홀가분하다는 듯 커피 잔을 비웠다.

그렇지만 최혜경을 은폐하기는 쉬워졌다 해도 손 사장과의 연관을 어쩌지요? 손 사장도 노출시켜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

황 검사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중요한 게 해결됐으니까 그건 별로 걱정할 거 없소. 우리 머리로 생각해 보면 그쯤이야 별로 어렵지 않게 해결될 거요. 갑시다. 며칠 수고했으니까 머리도 식힐 겸 한잔해야지.”

백 검사가 조서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규백은 황 검사에게 김선오의 누이동생 김명숙에 대해 물어볼까말까 망설였다. 김선오는 그동안 몇 번이나 전화를 해왔었다. 김선오는 창피하다는 말을 되풀이해 가며 여동생을 잘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창피하다는 말이 여동생이 양장점의 점원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런 사건에 심부름꾼으로 연루되어서 그런지 아리송했다. 어쨌거나 그 두 가지 사실은 젠 체하기 좋아하는 김선오의 체면을 깍는 것이었지 자랑거리일 수는 없었다.

자아. 갑시다.”

백 검사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후문으로 나가야 되겠죠? 기자들이 냄새 맡았을지도 모르니까요.”

황 검사가 담배를 끄며 말했다.

글쎄. 신문사 통제는 중정 쪽에서 책임지기로 했는데 ......”

그래도 기자들 눈치 빠르고 잽싼 건 조심해야지요. 이 사건이 폭로되어 버린 것도 경찰이 기자들에게 보기 좋게 당한 때문 아닙니까.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허술하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런 고생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그도 그렇소. 안전제일이니까 그럼 후문을 이용합시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어. 김명숙이라고 그 양장점 점원은 어때요? 그 비중이나 역할이 ......”

이규백은 황 검사에게 다가서며 속삭이듯이 낮게 물었다.

예에. 루비 김 말하는군요?”

루비 김?”

그 아가씨 아주 맹랑해요. 유명 디자이너가 되는 게 꿈이라 미리부터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더군요. 그 아가씨는 연락책이랄까 운반책이랄까 그런데. 돈을 빨리 벌 욕심으로 그런 심부름을 하게 됐다고 그러더군요. . 아는 아가씬가요?”

그 아가씨가 김선오 검사의 여동생이오.”

뭐라구요? 김선오 검사의 여동생?”

계단의 높은 공간이 울릴 정도로 황 검사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앞서 내려가던 백 검사가 놀라 뒤돌아섰다.

아닙니다. 너무 뜻밖의 말을 들어서요. 내가 취조한 그 양장점 점원이 김선오 검사의 여동생이라는 것 아닙니까.”

아니. 뭐라고? 그게 사실이오 이 검사?”

. 나도 일면식이 없는데 김 검사한테서 몇 번 전화가 왔었습니다. 잘 좀 부탁한다고요.”

이거 참. 세상 요지경 속이라니까. 하필 검사 여동생이 연애를 잘못해 간통 사건에 걸린 것도 아니고 보석 밀수. 밀매에 걸리다니. 그나저나 김 검사 집안이 어찌 그렇소? 평소에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잘사는 집안 같던데. 여동생이 양장점 점원이라니? 김 검사가 허풍을 친 거요. 이 검사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요?”

앞서 걸어 내려가고 있는 백 검사의 목소리가 계속 계단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참 백 검사님도. 이 검사가 그 사람하고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데 잘못 알 게 뭐 있나요. 잘 봐달라고 전화도 몇 번씩 했다잖습니까.”

황 검사가 말을 받았다.

그 사람 참 못 믿을 사람이네. 처가 덕 보며 잘사는 걸 위장하려고 허풍을 쳐댄 모양이군. 그건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어떻게 이해한다 치더라도. 그 여동생을 가르치지 않고 양장점 점원으로 처박아뒀다가 이런 사건에까지 말려들게 한 건 또 뭐지? 이 검사. 그 사람 인간성에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니오?”

글쎄요. 그런 가정 사정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그 여동생이 딱한데 잘 좀 봐 줄 수 있게 궁리 좀 해주세요.”

이규백이 말했다.

. 잘 봐주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심부름꾼인 말단범이니까 사건 조율 과정에서 빼버리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형량이야 그게 그거겠지요.”

뺄 수는 없소.”

백 검사는 황 검사의 말을 내치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규백은 백 검사의 완강한 태도를 보며 마음이 켕기고 있었다. 검사의 동생이 데모 주동자로 잡혀 들어가 있는 것을 알면 뭐라고 할지 모를 일이었다. 막내 동생 규동이의 일을 아직 해결하지 못해 마음이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손을 써놓긴 했는데 아직 수사가 완료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는 통고만 받은 상태였다. 수사기관이 중정이니 더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었다. 검사인 형의 입장을 생각해서 데모를 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학비와 용돈을 주느라고 가끔 얼굴을 대할 때마다 에둘러 알아듣게 말하곤 했는데도 막내 동생은 데모 주동자가 되어 있었다. 목사의 동생이 강간범이 되고. 경찰의 동생이 강도가 된 것처럼 난처하고 거북한 일이었다.

이규백은 아내가 거칠게 깨우는 바람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지난밤에 과음한 술기운이 끈적끈적하게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술하고 무슨 원수졌어요. 일어나지도 못하게 마셔대게. 검사라면 보통사람하고는 뭐가 좀 다른 게 있어야지.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셔대니 본받을 게 뭐 있어. 빨랑 아버지 전화 받아요.”

아내는 또 한바탕 심통 사납게 바가지를 긁어대고는 용건을 끝에다 매달았다. 이규백은 그 바가지에 귀를 막은 지 오래라 기분 상할 것 아무것도 없이 엉금엉금 기어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접니다.”

. 과음했나 보군. 과음했을 때는 말이야. 내 경험으로는 인삼 달인 물이 젤이야. 그걸 좀 달여 달래서 마시게.”

이규백은 건성으로 예. . 하며 . 당신 딸이 그렇게 현모양처인 줄 아세요? 현모인지는 몰라도 진작에 양처는 아니었어요. 속 편한 소리 그만 하시라구요.’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거 손진권 사장 건은 어찌 돼가나?”

.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곧 결말이 나게 될 겁니다.”

이규백은 짜증스러워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어떻게 결말이 나게 되는 겐가. 다치지 않고 무사하게 되는 거야?”

지금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저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하여튼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만일을 생각해서 말을 빙빙 돌리며 이규백은 짜증이 꼬약꼬약 괴어오르고 있었다. 못된 짓은 혼자 다 해놓고 장인까지 동원하고 있는 손진권이 더 없이 괘씸하고 얄밉기도 했다.

. 자네 입장 어려운지 잘 아는데 그래도 일이 잘 풀리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하네. 손 사장이 아무 탈 없이 잘돼야 내 사업도 잘 풀리게 돼 있으니까. 자네 알지?”

. 잘 알고 있습니다.”

사업 크게 하다 보면 그까짓 잘못 아무것도 아닌 게야. 세상만사 서로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건데 손 사장 대하면 너무 까다롭게 하지 말고 나를 대하듯 잘해 주라구. 그렇게 인연 맺어두면 자네한테도 해로울 것 하나도 없으니까. 알겠지?”

. . 명심하겠습니다. 장인어른. 제 출근시간 다 됐습니다.”

그래. 그래. 그만 끊겠네.”

이규백은 이제 울화가 치밀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속이 느글거리고 머리는 욱신거리는데 장인이 가하는 압력은 너무 역겹기만 했다.

이규백은 국물만 몇 숟가락 뜨고 허둥지둥 출근을 했다. 출근하자마자 부장에게 수사 종합 보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합승택시 뒷자리에 비좁게 끼어 앉아 이규백은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막내 동생 문제와 자가용 문제였다.

그놈을 무슨 조건으로 빼낼 수 있을까 ...... 둘이 타야 적당한 소형차에 셋이 끼어 앉으니 이거야 원 ...... 그들이 나는 믿지만 규동이 놈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믿게 하는 조건이 ...... 편하게 출근을 하려면 장인이 주겠다는 자가용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남들 눈에 ...... 규동이 놈이 다시 데모를 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믿을 수가 없으니 이거야 참. ...... 마누라가 요새 더 성깔을 부리는 건 공짜로 주겠다는 자가용을 안 받기 때문인 게 틀림없는데 ...... 규동이 그놈이 왜 데모를 해야 하는지 내세우는 이유를 내가 논리적으로 격파할 수 없으니 그것부터가 문제란 말야 ...... 남들 눈이 무서우면 직장 앞에 차를 대지 말고 멀찍이 내리면 될 거 아니냐고 마누라는 성화인데 ......’

그 두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되어 이규백은 택시에서 내렸다. 머리만 복잡했지 한 가지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것에 그는 짜증이 일고 있었다. 요즘에 왜 걸핏하면 짜증이 나는지 그것도 기분 나빴다.

수고들 했소. 한정임이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한테 크게 부조하는 거요. 그 선에서 사건을 매듭짓도록 하면 되니까. 아무래도 오늘 오전에 수사 중간발표를 해야 될 것 같소. 기자들 극성을 더 견디기 어렵고. 슬쩍 미끼를 던져 사회적 의혹을 회석시킬 필요도 있어요.”

부장 검사의 말이었다.

이런저런 질문들이 쏟아지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백 검사가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건 나한테 맡겨두시오.”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한 수사 중간발표는 1130분에 이루어졌다.

우리 검찰은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거의 완료 상태에 있습니다. 앞으로 늦어도 5일 이내에 사건 전모를 백일하에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수사에서는 본 사건이 국민총화를 해치고 근면. 자조. 협동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망치는 악성 범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성역도 있을 수 없고. 한 점 의혹도 없이 철저하게 파헤쳐 사회정화의 일대 계기가 되게 할 것입니다. 이 점 유념해 주시고. 며칠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부장 검사의 엄하고 자신에 찬 말이었다.

질문 있습니다. 이번 사건이 상상할 수 없이 높은 권력 실세의 부인과 어떤 재벌회사 사장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수사가 성역 없이 진행되고. 그 진상이 한 점 의혹 없이 밝혀지겠습니까?”

아무 근거 없는 소문을 가지고 질문하는 건 곤란합니다. 우리는 검찰의 기본입장인 엄정 중립을 지키며 수사에 임하고 있음을 재삼 확인해 두는 바입니다.”

검찰이 되풀이하는 엄정 중립을 세상이 믿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기자가 불쑥 물었다.

그 무슨 유감스러운 발언입니까. 검찰의 명예를 훼손하는 그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부장 검사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 순간 이규백은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떨구며 또 김지혁 판사의 얼굴이 쑥 다가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자들은 더 입을 열지 않고 침묵에 싸여 있었다.

기자 여러분들께서 여러 가지로 궁금하시겠지만 며칠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수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부장 검사를 따라 그 양쪽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세 검사도 몸들을 일으켰다.

이거 뭐야.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잖아?”

귀가 먹었어? 알맹이가 수두룩하잖아. 개봉 박두. 성역 전무. 의혹 전무. 엄정 중립. 이만하면 톱기사 감이잖아?”

그럼. 그럼. 그 정도 메뉴면 톱기사로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지.”

뒤에서 들려오는 기자들의 야유에 등 뜨거운 것을 느끼며 이규백은 기자실을 벗어났다. 그 자신도 왜 부장 검사가 그런 식의 수사 중간발표를 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굳이 성과를 찾자면 수사 종료가 며칠 안 남았다는 것을 알린 것뿐이었다. 그 이외의 내용으로는 사회적 의혹을 회석시킬 필요를 느낀 부장 검사의 목적은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어쨌거나 다시 한 번 놀란 것이 부장 검사의 배짱이었다. 부장 검사라서 그런 배짱이 생기는 것인지. 그런 배짱이 있어서 부장 검사가 된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어려운 사건을 맡아 잘 풀어내는 것도 기회라구. 알지? 잘들 해봐.”

사건을 맡기면서 부장 검사는 세 사람에게 은밀한 눈길을 보냈던 것이다. 아직 까지도 속이 메슥거리고 헛구역질이 치밀어 이규백은 남모르게 배를 쓸었다. 어젯밤에 셋이는 오색잡놈들처럼 여자들을 난잡하게 다루며 폭음을 해댔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음담패설만 늘어놓았다. 외과 의사들이 대수술을 하고 나면 으레 폭음을 한다고 했다. 머리통을 뻐개고 .배를 찢고 째고. 썩은 내장을 잘라내고. 혹을 떼 내고 하다 보면 얼마나 더럽고 끔찍하고 비위 상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중병환자들을 다루면서 긴장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 것을 잊고 풀기 위해서 폭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들은 왜 그렇게 폭음을 했던 것인가. 술잔에 여자들의 젖꼭지를 담갔다가 마시는 오색잡놈 질을 하면서 박장대소 속에 감추고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인가. 부장 검사의 은밀한 눈길을 서로서로 말없이 받아들여 덮었듯 음담패설을 안주삼은 폭주로 서로를 은폐하고 위안했던 것이다.

부장은 위에 보고할 게 있다고 발길을 돌렸고. 백 검사는 선약이 있다며 손을 흔들었다. 이규백은 황 검사와 식당을 찾아 나섰다.

어디 시원한 국물 먹을 수 있는 데로 갑시다. 나 아주 죽을 지경이오.”

황 검사가 배를 쓸며 고개를 내둘렀다.

마시고 나면 꼭 이 고생인데 왜 폭음을 하는 건지 원. 어리석기는 유 무식이 없어요.”

이규백도 배를 쓸며 쓰게 웃었다.

그게 인간이고 그게 또 세상사는 재미 아니겠어요. 어리석은 짓 미리미리 안 해버리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어요.”

하긴 그래요. 술이나마 안 마시고 이놈의 세상 어찌 살겠어요.”

이규백은 한숨을 쉬었다. 기자실의 분위기로 마음이 찜찜한데 그 위에 막내 동생의 문제까지 얹혀 있었다.

무를 넣고 생선 대가리로 국을 시원하게 끓이는 식당을 찾아갔다. 이규백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뜨면서 또 한숨을 쉬었다.

아니. 왜 자꾸 한숨을 쉬고 그래요? 그 사건 때문인가요?”

황 검사가 신경에 걸리는 듯 물었다.

그러면 다행이게요? 나 그렇게 순진하지도 순수하지도 못해서 탈이오. 그게 아니고 동생 놈 때문에 그래요. 검사 동생 놈이 데모 주동자로 잡혀 들어가 있단 말이오.”

그래요? 그거 참 똘똘한 동생 뒀군요.”

황 검사가 턱없이 환하게 웃었다.

속 편하게 농담은 원 ......”

농담이라니. 형 그대로 닮은 것 아니냔 말이오. 이 검사도 그렇지. 고시 앞두고 4.19에 앞장선 과거를 좀 생각해 봐요.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자기는 그래 놓고 이제 동생 걱정을 하고 앉았으니 그게 어울려요?”

나야 주동자도 아니었고. 잡혀 들어가지도 않았단 말이오.”

잡혀 들어갔으면 빨리 빼내면 될 일이지 한숨은 왜 쉬고 그래요.”

요새 데모 단속하는 분위기 험악한데 빼내달라는 그럴듯한 명분이나 묘안이 없으니까 골치가 아픈 거지요. 그냥 무작정 봐달라고 하면 망신당하기 딱 좋단 말이오. 중정이 지금 열 받쳐 있는 판인데. 검사가 동생 하나 다루지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냐고 해대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거 간단하잖아요. 다시는 데모 못하게 군대에 보내겠다고 하세요. 그리고 서약서에 보증인 도장 찍어줘요. 그럼 2~3일 내에 특별영장 발부해 줄 건데요 뭘.”

그래요?”

무슨 과에요?”

영문과요.”

그럼 더 잘됐군요. 훈련 마치면 바로 카츄사로 빼주세요. 영어공부나 좀 하게. 동생보고는 미국 유학 간 셈치고 3년 동안 꼼짝하지 말라고 타이르고요.”

예에. 그거 참 기막힌 방법이군요.”

뜻밖에도 좋은 해결책을 찾은 이규백은 무릎을 쳤다.

이만하면 점심 사야겠지요?”

그럼요. 이따가 술도 사지요.”

아이고. 술은 사양하겠습니다.”

황 검사는 손사래를 쳤다.

그럼. 며칠 뒤로 저금해 두지요.”

이규백은 곧 동생 일을 해결하려고 나섰다. 막내 동생 규동이를 생각하면 어이없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긴급조치 9호가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반대하는 데모를 주동하고 나서다니. 용감한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을 쓰지 않고 내버려두면 긴급군재에 회부되어 중형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리고 철없던 막내 동생이 어느덧 장성해 신변의 위험을 무릅써 가며 데모를 주동하고 나섰다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동생들은 단순히 같은 핏줄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대신 동생들을 키우다 보니 자식들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더 많았다. 속물근성인 줄 알면서도 검사를 팔아 부잣집 사위가 되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것도 동생들과 조카들이 짓누르는 무게를 혼자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이 사람아. 미리미리 단속을 좀 할 일이지. 하긴 뭐 공화당 국회의원이나 경찰 간부의 아들도 있는 형편이니까. 자식들도 뜻대로 안 되는 판에 동생이야 더 어렵겠지. 어쨌든 자네가 그런 식으로 확실하게 보증을 한다면 일이 안 될 것도 없지. 우리도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데모를 일소하는 게 목적이니까. 내일은 좀 어렵겠고 ..... 모레쯤 다시 만나세.”

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규백은 선배 검사인 국장 앞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검사님. 김선오 검사님한테서 몇 번 전화가 왔었는데요.”

이규백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사무원 아가씨가 말했다.

알았어.”

이규백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언짢아져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동생 때문에 몸이 다는 김선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죄야 어찌 되었건 간에 형제간의 일이니 그렇게 나서는 건 당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선배라고 해서 조금이나마 마음 쓰거나 정 붙게 하는 일이라곤 없다가 급한 일이 생기니까 정신없이 덤비는 그의 약고 얄팍한 처세가 마땅찮았다. 그는 한 마당에서 일하고 있는 고향의 선후배들과 자꾸 멀어져 갔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과 사귄 덕인지 어쩐지 지난번 인사이동에서도 요령 좋게 지방물 먹는 걸 피했던 것이다. 검사쯤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 그 누구든 욕망이 없을까마는 김선오는 그것을 너무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비위 좋은 너스레며 아무하고나 잘 친해지는 사교적인 성격은 남다른 출세의 요건을 갖춘 것이기도 했다.

김선오 검사님 전화 왔습니다.”

이규백은 송수화기를 들었다.

선배님. 접니다. 오늘 저녁 한잔 어떠십니까?”

정이 넘치는 김선오의 목소리였다.

어쩌지. 나 선약이 있는데.”

아이. 그러시지 말고 시간 좀 내주세요. 그 건도 대충 다 끝났잖아요. 피곤을 푸셔야 되잖아요.”

상황을 다 알고 있으니 발뺌하지 말라는 말투였다.

장인 영감 일로 선약이 있어서 그래. 퇴근길에 잠깐 만나는 게 어떨까?”

김선오도 장인 일에는 꼼짝을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렇게 둘러댔다.

그래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퇴근 몇 시에 하죠?”

이규백은 전화를 끊으며 김선오가 얼마나 애가 탈지 짐작할 만했다. 여동생이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알려지게 되면 그건 김선오에게 더없는 오명이었다. 일시적으로 망신만 당하는 게 아니라 두고두고 앞길의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이 기소되기 전에 그 흔적을 지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규백은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맞추어 다방으로 나갔다. 김선오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어떻게 되겠어요?”

담배를 빨며 앞으로 다가앉는 김선오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수사를 다 끝내고 조서를 부장님한테 넘겼는데. 수사 과정에서 내가 서너 차례 얘길 꺼냈지. 그런데 반응이 좋지가 않아. 아무래도 아래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니까 빨리 위에 부탁해 보는 게 어떨까?”

반응이 좋지 않다는 건 듣기 좋은 말일 뿐이고 그건 곧 반대한다는 건데. 도대체 그게 누굽니까? 백 검인가요, 황 검인가요? 그 사람들 이번 기회에 저를 망하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

김선오는 골격 큰 양쪽 어깨를 치세우며 적의를 드러냈다.

이 사람아. 중대한 일 앞에 놓고 그렇게 감정이 앞서면 어떡해. 급할수록 침착하게 일을 풀어가야지.”

감정이 아니라 선배님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같은 직장의 동료 입장에서 보거나. 우리의 수사 상식으로 보거나 이럴 수 있는 겁니까? 그 사건에서 제 여동생을 뺀다고 해서 그 사건이 성립이 안 됩니까? 제 여동생은 어쩔 수 없는 심부름이나 한 하찮은 종범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작 주범은 수사도 ...... ”

김선오는 점점 더 감정이 뜨거워지면서도 여기서 말을 멈추었다.

김 형 심정 잘 알아. 아직 며칠 여유가 있으니까 최선을 다하도록 해봐. 위에서 결정하는 게 쉽고 자연스러우니까.”

이규백은 팔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알았습니다. 망할 기집애 같으니라구.”

김선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규백은 김선오의 얼굴에 드러난 적대감을 보면서 그가 내뱉은 망할 기집애 같으니라구망할 자식들 같으니라구로 듣고 있었다. 자신까지 싸잡아 그렇게 욕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한 번은 치러야 하는 고역을 벗어난 홀가분함도 없지 않았다. 이틀 뒤에 이규백은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이 검사 꿈이 수포로 돌아갔어.”

국장이 비웃음을 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규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당황했다.

장한 동생 뒀더라니까. 자네가 한 얘기 다 했는데도 서약서에 도장 찍기를 거부했어.”

이런 건방진 자식! 국장님. 제가 좀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규백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해져 있었고. 그 목소리도 떨렸다.

괜히 헛수고야. 동지들을 배신할 수 없다는 건데. 그거 아주 골수야.”

저를 마주 대하면 달라질 겁니다. 잠깐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기 일찍 돌아가셔서 저는 그냥 보통 형이 아닙니다.”

이규백은 곧 빌 것 같은 몸짓을 지었다.

부모나 다름없다는 말인 것 알겠는데. 한번 꼭지가 돌아버린 애들은 구제불능이야. 그런 애들이 꽤나 많다는 거나 알고 만나 보라 구.”

국장의 입가에 쓴웃음이 내뱉다. 이규백은 사무용 소파가 놓인 작은 방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빨았다. 5분이 지나도 막내 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꽁초로 새 담배에 연달아 불을 붙였다. 둘째동생 규상이는 아무런 말썽 없이 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을 했는데 뜻밖에도 막내 동생이 애를 태우고 있었다. 평소에 자주 대하지 않고 소홀히 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두 번째 담배가 꽁초로 변하고 있을 때 막내 동생이 나타났다. 막내 동생의 초췌하고 핏기 없는 얼굴을 보자 가슴이 찡해져 이규백은 자신도 모르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앉아라. 몸은 어떠냐?”

괜찮아요.”

이규동은 눈을 떨군 채 대답했다.

규동아. 너 내말 잘 들어라. 대학생으로서 데모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는 눈도 가질 수 있어야한다. 지금은 긴급조치가 발동되고 있는 상황이야. 군재에 회부되면 중형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난 형으로서 네가 그리 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건 또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나이 많으신 어머니를 생각해 봐라. 넌 그동안 데모로 네 의사는 충분히 나타냈으니까 이젠 형 말을 들어라. 다행히 형이 검사라서 보증을 하면 선처를 해주시겠다고 했으니까 넌 마음을 고쳐먹고 입대를 해라. 그럼 형이 바로 카추샤로 빼 줄 테니까. 거기서 군대생활 편하게 하면서 미국 유학 간 셈치고 영어공부나 착실히 해가지고 나와. 네 전공이 영문학이니까 잘되지 않았니. 알겠지?”

“....... 형님 말씀 고맙지만. 제 일에 더 신경 쓰지 마세요.”

이규동이 눈길을 떨군 채 또렷하게 말했다.

뭐라고? 신경 쓰지 마?”

막내 동생의 대꾸가 너무 뜻밖이고 황당해서 이규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 검사인 형님 입장을 난처하게 해드린 것은 죄송해요. 그렇지만 동지들을 배신하는 파렴치한 기회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한 일은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어요. 이 마음은 그 누가 골백번 말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아요.”

언제부터인가 이규동은 고개를 똑바로 들어 이 말을 하고 있었다.

. ...... 내가 내 입장 때문에 이러는 줄 아냐?”

치솟는 화를 억누르며 이규백은 말을 더듬었다.

꼭 그렇다는 뜻은 아니에요. 더 속상하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세요.”

이규동은 이제 눈길을 떨군 게 아니라 고개를 외틀어 외면을 했다. 이규백은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앞에 앉은 것은 어리게만 보아왔던 막내 동생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타인이었다. 그는 난생처음 느끼는 그 이상한 감정 속에서 마음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도청이 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더 무슨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말이 번지다 보면 정치적인 얘기가 나오게 되고. 동생이 거침없이 말을 하게 되면 괜히 궁지에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규백은 패배감에 빠져 그곳을 뒤로 했다. 막내 동생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또 다른 속물근성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그 누가 골백번 말한다 해도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 막내 동생은 그때 그 법정의 그 대학생인지도 몰랐다. 민청학련 사건의 선고 공판 때였다.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 한 대학생은 영광입니다하고 외쳤다. 그 순간 법정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데. 그 법정의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학생도 같은 대학의 법대 선후배 사이였다. 그 법정에서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승리자는 그 대학생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비겁한 패배자였다. 그 이야기는 법조계에 금방 퍼져 모든 판검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나흘이 지나 그 보석 밀수 사건의 수사 결과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사건의 주범은 육군 소장의 아내 한정임이었고. 그녀는 부산을 거점으로 하는 밀수조직 하 아무개와 밀착되어 밀수 보석을 공급받아 상류층 부인 30여 명에게 상습적으로 밀매를 해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김명숙은 연락책으로 이름 붙여져 조직 도표의 끄트머리에 붙어 있었다.

 

 

28. 남의 밥그릇

도시의 밤은 푸른 색조의 형광등 불빛을 따라 나날의 짧은 삶을 시작했다. 도시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거리마다 형광등은 그 푸르스름한 몽환적 불빛을 앞세우며 제 임무에 나섰다. 어둠을 사르기에는 어딘가 그 힘이 부치는 것 같은 형광등 불빛은 어둠과 어우러져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둠이 내리면서부터 통행금지까지로 제한된 밤의 삶을 위해서는 그 유혹적인 형광등 불빛이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거리의 여자들이 밤 화장을 하듯 형광등 불빛은 도시의 밤을 몽롱하게 화장 시켰다. 그 은밀함과 유혹이 손짓하는 속에서 도시의 밤은 생동하기 시작했다. 종로를 치장하고 있는 불빛은 화려했다. 하루의 일을 끝낸 사람들이 그 불빛 속에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잰걸음을 치고 있는 것은 갈 길이 바쁘다기보다는 추위 탓이었다. 해가 지면서 더 심해진 추위는 밤바람까지 타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배상집은 그 사람의 물결 속에서 지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무겁게 처지는 가방을 든 그의 몰골은 서독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후줄근하고. 핏기 없이 메마른 얼굴에는 우울한 그늘이 짙게 서려 있었다. 그는 걷는다기보다는 사람의 물결에 떠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상집은 종로서적 쪽으로 길을 건너면서 자신도 모르게 코를 큼큼거렸다. 찬바람과 함께 콧속을 진동하는 냄새. 그건 리어카 행상들이 밤을 굽는 냄새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고리타분하면서도 찝찌름한 냄새. 그건 오징어 굽는 냄새였다. 그 두 가지 냄새는 어금니 사이에서 신 침이 지르르 흐르게 하는 동시에 빈속을 뒤흔들어 더욱 시장기가 동하게 만들었다. 배상집은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군밤 냄새와 오징어 굽는 냄새는 도시의 겨울을 겨울답게 하는 낭만이었다. 그러나 점심을 굶은 자신에게 그런 문화적 효용가치는 없었다. 오로지 경제적 효용가치로 배고픔을 자극하며 자신의 신세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길을 다 건넌 그는 걸음을 멈추며 지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해마다 경제성장이 평균 10퍼센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치선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거리의 불빛들은 색색으로 현란하게 빛나며 손님들을 부르고 있었고. 인도가 비좁도록 넘쳐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활기차 보였다. 그런데 한국이 부러워해 마지않는 경제 기적의 나라 서독에서 박사학위를 따온 경제학 박사는 점심을 굶는 신세가 되어 길거리에서 맥이 빠져 있었다. 배상집은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속이 쓰고도 떫었다. 아무리 독일에서부터 스승들에게 편지를 했다 해도 귀국하자마자 대학에 자리 잡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렇다고 6개월을 허송세월하고. 1년을 꼬박 시간강사로 떠돌며 점심까지 굶는 신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 군데 시간강사의 수입은 오가는 차비로 길에 뿌리면 그만이었다. 그건 수입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임 자리를 얻으려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었고. 발판이었다. 그러나 그 팍팍한 기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 문제였다.

기다려보게. 학교 신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원 증원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뭐라고 말 할 수가 있어야지.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스승들의 말은 이렇듯 막연하고 답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의 엄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박사학위가 없는 교수들이 수두룩했지만 그들은 65세까지 보장받은 요지부동의 말뚝이었다.

집에서는 자신이 점심을 굶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공부를 하느라고 집에 돈을 보내지 못해 가난했던 집안은 여전히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미장공인 아버지는 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느라고 남의 집들만 수없이 지었지 정작 당신은 산동네의 무허가 집 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젠 노동력도 떨어져 버젓한 공사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보수나 수리 같은 잡일을 하는 형편이었다. 자신이 박사학위를 따오자 아버지는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좋아했는데 모자라는 돈을 타 쓸 수는 없었다.

감은 홍시가 돼야 떨어지고. 밥은 뜸이 들어야 먹는 법이다. 교수님 되는 것이야 틀림없는 것이니까 조급해 할 것 하나도 없고. 어서 장가나 들어라. 자식을 셋도 더 둘 나이가 넘었다.”

결혼을 서두르는 아버지의 성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자리 잡기 전에는 결혼할 수가 없었다. 경제력이 전혀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자신의 주가를 반감시키고 싶지 않았다. 교수가 되면 좋은 혼처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을 거였다. 배상집은 무거운 발길을 터벅터벅 옮기기 시작했다. 대학은 꼭 실력만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실력 제일주의를 믿으며 공부에 혼신을 다했던 것은 대학의 실태를 몰랐던 순진함이었다. 실력은 필요조건일 뿐이었다. 거기에 학연. 지연. 혈연. 배경. 금력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충분조건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마치 밀림 속에서 길을 찾아 나아가야 하는 것 같은 난감함 앞에서 자꾸 떠오르는 것은 서독에서 자신은 유혹했던 기관원 한이었다. 귀국하기 전까지 얼마 동안만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더라면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그게 다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막막한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어리석은 후회였다.

배상집은 버스정류장에 이르러 또 거리를 휘황하게 밝히고 있는 상점들의 불빛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누구하고 훈훈한 술집에 마주앉아 술을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상대로 떠오르는 얼굴. 그건 유일민이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그에게 약속한 돈을 보내주지 못한 것이 죄의식으로 남아 있었다. 그를 만나 자신이 처했던 사정을 이야기 하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의 집안 사정이 그렇게 특이했던 것이 충격이었고. 그렇다고 그게 외국을 나갈 수 없는 절대조건이 된다는 것은 더욱 충격이었다. 그리고 서독에서 양쪽 기관원들이 대치하는 상황을 알게 되면서 유일민을 더 자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상집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향해 뛰었다.

뒤로 돌아서서 타요. 뒤로.”

여 차장이 목쉰 소리로 외쳐대며 손님들을 마구 버스 안으로 떠밀어 올리고 있었다. 손님들은 남녀 없이 잽싼 몸놀림으로 등을 버스 안쪽으로 돌리고는 엉덩이로 사람들을 밀어 붙이며 버스를 타고 있었다. 배상집도 허기진 배에 힘을 넣으며 재빨리 뒤돌아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한 팔로 문틀을 잡고 버티며 엉덩이로 뒷사람들을 있는 힘껏 떠밀어댔다.

야 차장. 그만 태워! 사람 터져 죽는다.”

운전수. 뭘 해! 빨리 출발해. 여기 애 깔려 죽는다!”

안쪽에서 이런 고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배상집은 새로 올라탄 사람들에게 밀리는 입장이 되어가며 가방 든 팔은 빼내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가방은 어느새 뒤로 밀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한쪽 팔이 찢어질 지경으로 멀어져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가방을 빼내고는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버스 안은 정말이지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사람들은 서로 몸이 빈틈없이 맞붙어 한 덩어리 짐짝처럼 된 상태로 버스가 출발했다. 출퇴근시간의 시내버스가 콩나물시루라고 하는 건 바로 이것 이었다. 흔히 말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다시 실감하며 배상집은 눈을 감았다. 그때 버스가 한쪽으로 기우뚱하며 사람들이 그쪽으로 쏠리는 순간 버스는 반대쪽으로 기우뚱했고. 그러자 사람들은 버스의 출렁임을 따라 반대쪽으로 휘둘리며 어머머!’ ‘. , !’ 소리를 질러댔고. 버스가 술이라도 취한 듯 다시 기우뚱하자 사람들은 또 짐짝처럼 그쪽으로 휩쓸렸다.

야 이 새끼야. 운전 똑바로 해!”

. 운전수. 죽고 싶냐!”

남자들이 소리쳤지만 운전수 쪽에서는 아무 대꾸 없이 이제 차는 제대로 달리고 있었다. 그건 만원 버스에서 으레껏 하는 조리질이었다. 그 조리질의 효과는 신통해 앞 뒤 양쪽의 문 주변에서 벌어진 사람들의 뒤엉킴을 가볍게 풀어 놓았다. 그건 다음 정류장에서 사람을 또 태우기 위한 준비였다. 그 일이 뻔하게 되풀이되는데도 운전수에게 소리치거니 욕하는 사람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배상집은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아무리 소리치고 욕해봤자 그런 짓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건 어쩌면 삶에 대한 불만이나 고달픔의 폭발인지도 몰랐다. 자신도 아무데나 대고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배상집은 속이 쓰릴 정도로 배고픔을 느끼며 산동네 비탈길을 치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 산동네라면 정나미 떨어지고 넌덜머리가 났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가난이 덕지덕지 묻은 이 산동네는 지금까지도 변한 것이라고는 없이 궁기에 찌들어 있었다.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요란한 소리는 이 산동네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먼 메아리였다. 배운 것 없고 전문적 고급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경제발전이 호화찬란해도 변두리로 밀려나 있는 국외자들일 뿐이었다. 단순노동의 임금이 조금씩 오른다 해도 경제성장에 따른 통화팽창은 인플레를 낳고. 인플레는 물가상승을 부르고. 물가 상승은 단순노동자들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가 되고 있었다. 평생을 이 산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삶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은 중학생 때부터 이 산동네에서 사는 것을 창피스러워했고. 여기서 벗어나는 것을 꿈으로 품게 되었다. 산동네의 가난한 삶은 자신의 열등감의 뿌리인 동시에 노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동안 혼신의 힘을 다 바쳐 노력하고 몸부림쳤지만 아직까지도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 가망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이제 오냐. 배고프지? 어서 들어가거라. 곧 밥상 딜여가마.”

배상집이 들어서자 그의 어머니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그는 밥상을 받자마자 정신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서독에서 신물 나고 질리도록 먹었던 곰국을 먹어 보지 못한 것도 오래였다. 그곳에서 헐값 중에 헐값이었던 우족은 여기서는 살코기 뺨치는 비싼 값이었다.

천천히 먹어라. 체할라. 헌데. 방학이면서도 학교에는 나가야 되냐? 날도 추운데.”

그의 아버지가 뚜벅 물었다.

. 글을 좀 쓸게 있어서요.”

박사가 되고서도 또 할 공부가 있냐? 공부라는 것도 그거 사람 못할 짓이다.”

그의 아버지는 코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쯧쯧 혀를 찼다.

그나저나 세상 참 야속허우. 이리 공부 열성으로 하는 장한 박사님을 안 모셔가다니.”

그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는 어머니의 이런 말에 배상집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위로삼아. 곧 될 거라느니. 좀 더 기다리면 된다느니 했지만 이젠 그런 말하기도 지쳐있었다.

배상집은 자기 방으로 건너와 가방에서 논문 자료들과 원고지를 꺼냈다. 기한이 앞으로 1주일 남은 그 논문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교수가 정부에서 맡은 경제 프로젝트를 자신이 대신 초안을 잡는 것이었다. 아무런 보수도 없는 그 일을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영향력 있는 교수들의 연구를 석. 박사 과정의 학생이나 능력 있는 제자들이 돕는 것은 오래된 관례고. 학문적 미덕으로까지 여겨지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은 학과장인 그 교수에게 앞날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처지였다.

저녁을 먹고 나자 식곤증이 몰려들면서 피곤 속으로 몸이 꼴딱 잠겨 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세차게 문질러대고 고개를 짤짤 흔들어대며 책상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기한을 최소한 이틀 정도는 앞당겨 논문을 마쳐야 했다. 기왕이면 교수를 더 흡족하게 해주는 게 좋은 일이었다. 배상집은 계획대로 이틀을 앞당겨 논문을 끝내가지고 교수의 집으로 찾아갔다. 교수의 집으로 가기 전에 어머니한테 부탁한 돈으로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양주 한 병을 사 들었다. 교수의 집을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 것도 불문율처럼 되어 있는 관례였다.

아니. 벌써 다 마쳤어? 과시 자넨 실력 좋은 내 사람이야. 정부가 제창하는 초과달성을 산업현장만이 아닌 논문 작성에서도 이룩하다니. 초과달성! 그거 좋지. 좋아. 어허허허 ......”

교수는 넘치게 흡족해 하며 어깨 들썩거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교수님께서 즐기시는 죠니워카 ......”

배상집은 포장된 술병을 슬며시 옆으로 밀어놓았다.

아니. 뭘 그런 것까지 사오나 그래. 이런 땐 그냥 와야 그나마 내 체면이 서지. 어쨌든 양반 예법이 몸에 밴 사람이란 이렇게 다르다니까. 어허허허 ......”

교수의 흔쾌함은 절정에 이르고. 배상집은 교수의 내 사람이라는 말을 되짚으며 안도하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자넬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좋은 선물을 하나 주지. 그게 뭔고 하니. ‘한국 경제의 방향전환과 그 전망이란 제목으로 짤막한 원고를 하나 쓰게. 중공업 중심의 경제 전망이니까 물론 긍정적인 내용이어야 되지. 내가 자넬 위해 ㅇㅇ신문사에 길을 뚫은 거니까 아주 맵짜하게 잘 써야 되네. 매수는 8매고. 원고는 나흘 후에 신문사 경제부장한테 갔다주게. 그때 명함판 사진 한 장하고. 자네 박사학위증도 가져가서 보여주게. 그리고 원고 끝에 우리 대학 강사라고 명시하게 알겠나?”

....... 제가 그런 자격이 있을지 ......”

이건 겸손만이 아니었다. 너무 뜻밖의 말이어서 배상집은 어리둥절하고 어질어질한 것 같은 느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어디 아무나 추천하는 사람인가? 좋은 일의 시초가 될지도 모르니 원고나 야무지게 잘 쓰게.”

교수님. 고맙습니다.”

배상집은 큰절을 하듯이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으음 ...... 자네. 사내는 모름지기 입이 무거워야 되는 것 알지?”

교수는 배상집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고.

. 명심하겠습니다.”

배상집은 다시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는 교수의 집을 나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좋은 일의 시초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골백번도 더 곱씹었다. 그 말을 곱씹을 때마다 제발 새 학기에는 전임만 돼라. 전임만 돼라 ......’하는 말을 절절한 기도처럼 덧붙였다. 이력서는 이미 다섯 대학에나 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망이 있는 데는 한 곳도 없었다. 심지어 어느 대학에서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해왔다는 것을 은근히 비꼬고 경원하는 눈치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아무 대학에나 자리 잡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빌며 그는 산동네를 헉헉대고 올랐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신문에 쓸 원고 내용이 거의 다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유일민은 출근해서 신문을 훑어나가다가 깜짝 놀랐다. 눈에 잘 띄게 신문의 왼쪽 상단으로 커다란 상자를 만들어 실려 있는 글. 글의 윗부분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사진과 그 아래 박혀 있는 이름은 배상집이었다. 그리고 이름 뒤에는 박사라는 칭호까지 붙어 있었다. 그 사진과 이름을 보는 순간 유일민은 머리가 화끈 뜨거워지고 가슴이 벌떡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숨을 들이켜며 몇 번이고 얼굴을 훔쳤다. 그러나 충격은 가시지 않고 괴로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동안 대기업 중역으로. 고급 공무원으로 출세한 동창들을 적잖이 만나거나 소식을 들었지만 그 놀라움은 지금처럼 크지 않았었다. 배상집이 언젠가는 목적을 이루고 돌아오리라고 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막상 박사라는 것을 확인하자 그 충격은 뜻밖에도 컸다.

유일민은 배상집의 사진과 이름을 다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순 탄광에서 함께 석탄 가루를 뒤집어쓰며 고생했던 일이 꼭 어제 일처럼 선하게 떠올랐다. 그는 떠나고 자신은 떠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오늘의 차이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경제학 박사인 교수와 볼품없는 플라스틱 제품공장의 사장 ...... 유일민은 신문을 덮었다. 배상집의 글을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은 수습되지 않았다.

사장님. 아무래도 2호기가 안 되겠는데요. 자꾸 불량품이 나오는데 더 탈이 커지기 전에 수리를 해야 되겠어요.”

공장장이 사무실로 급히 들어서며 말했다.

“2호기면 그거 일본 물건 아니오. 일본사람들 까다로운데 빨리 수리해야지요. 부품은 내가 사올 테니 빨리 기술자 불러놔요.”

유일민은 잘되었다 싶어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바삐 일에 쫓기며 배상집을 잊고 싶었다.

. 수리를 해도 또 얼마나 갈지 모르지요. 기계가 워낙 늙어빠져서요. 일하는 만큼 효과 좋게 제품을 착착 빼내려면 새 기계로 바꿔치우는 게 젤인데요 ......”

공장장은 뒤로 갈수록 말을 어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유일민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기계가 낡은 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중고를 사들였으니 그동안 부려먹을 만큼 부려먹은 셈이었다. 그러나 새 기계로 선뜻 바꿀 수 있게 돈이 모아져 있지 않았다. 또 기계를 바꾸려면 일본에 직접 가는 게 좋은데 여전히 신원조회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기계를 국내에서도 구입할 수 있지만 수입상의 중간 마진에다가 소매상의 이익까지 덧붙여져 있어서 값이 턱없이 비쌌다. 그래서 기계구입을 위해 사장들이 일본에 직접 가는 건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 김에 일본 구경까지 할 수 있다는 덤까지 생기는 일이었다. 유일민은 청계천 기계공구 상가로 나갔다. 폭은 좁고 길이가 긴 상점들이 촘촘히 다붙어 있는 기계공구 상가는 언제나 너저분하고 구경거리라고는 없이 살풍경했으며. 쇳소리까지 시끄럽게 울리고는 했다. 쇼윈도가 화려하게 치장된 매끈매끈한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 바로 옆의 종로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공구 상가도 해마다 그 모습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경제의 변화를 따라 온갖 기계공장들이 수없이 불어나면서 군수물자나 팔아먹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헌 냉장고며 에어컨을 고쳐 팔던 옛 모습에서 벗어나 전문적인 기계공구상들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기계의 부품들을 구하지 못하는 게 없다고 소문나 있었다.

유 일민이 서너 곳을 거치며 값을 흥정해서 부품을 샀다.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서는 모든 물건 값을 놓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게 마련이지만 특히 이곳의 부품 값은 들쭉날쭉 이어서 눈치껏 굴지 않고서는 바가지 쓰기 십상이었다. 이제 기계의 속내를 환히 아는 것처럼 유일민은 값 흥정에도 이골이 나 있었다. 기계수리는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수리공은 점심을 먹고 나서 계속하려고 했지만 유 일민은 점심 값을 따로 주기로 하고 일손을 놓지 못하게 했다. 한시라도 빨리 수리를 마쳐야 했고. 점심을 먹으면서 소주잔이라도 걸치게 되면 수리가 잘못될 수도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유 일민은 수리를 하는 동안 한시도 기계 내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런 기회에 기계에 대해 공부를 하려는 것이었다. 기계가 돌아 제품이 제대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유 일민은 점심을 먹으려고 공장을 나섰다.

유 사장 어디 가시오?”

고개를 숙인 유일민은 그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봐요 유 사장. 또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라고 부르는 소리도 못 들으시오?”

한 남자가 다가오며 목소리를 더 높였다.

. ...... 김 사장 ......”

그제서야 고개를 든 유일민은 더디게 웃음을 지어냈다. 그러나 그 웃음이 희미하고 아무 온기가 없는 것처럼 눈동자도 무슨 헛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근심 걱정 생겼소? 또 그치가 찾아와서 괴상한 소리하던가요?”

유일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배상집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고 그래요. 얼굴에 딱 씌어 있는데. 그치가 또 뭐라고 공갈치던가요? 세상은 갈수록 시끌시끌해지지. 해는 바뀌지. 이래저래 그치도 공갈 칠 때가 됐어요.”

아니오. 그치 안 왔어요.”

유일민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치란 그들을 담당하고 있는 형사였다. 성격이 괄괄한 편인 김 사장은 형사를 거침없이 그치라고 불렀다. 그 말을 자꾸 듣다보니 유일민도 그렇게 부르게 되고 말았다.

그럼 집안이나 회사에 무슨 일 있소?”

뭐 별일 없어요. 기계가 좀 고장 난 것뿐이지 어디 가는 길이오?”

김 사장의 집요함에 속마음을 비치지 않으려고 유일민은 말머리를 돌렸다.

어디 가긴. 유 사장 만나러 가는 길이지요. 할 얘기도 있고 해서 오늘 밤에 한잔 꺾자고 말이오. 어때요?”

. 그러지요.”

좋아요. 유 사장한테 딱 한 가지 매력이 있다면 생각보다 술을 잘 한다는 점이오. 그럼 이따 만납시다.”

김 사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일민은 곰탕집으로 걸어가며. 술이나마 없었다면 이 세상을 어찌 살았으랴. 하고 생각했다. 술은 세상사의 괴로움이나 고통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망각 제나 도피처 역할은 해주었다. 특히 악몽을 피할 수 있는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감정을 토해내는 것도 괴로움과 고통이 덜어지는 것 같은 착각의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또한 사람의 마음 이라는 것이 묘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끼리 술잔을 나누며 속 깊은 하소연을 하고 나면. 실제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음은 다소 편해지고 또 하루를 살 수 있는 위안을 얻기도 했다. 김 사장. 그는 그런 상대였다. 김 기돈. 그는 어쩌면 자신보다 더 억울한 처지에 놓인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는 외삼촌 때문에 공대를 나오고서도 길이 막혀 이 근방에서 기계제작 공장을 하고 있었다. 말이 기계제작 공장이지 공원들 대여섯 데리고 철판을 자르고 용접하고 두들기는 힘겹고 고달픈 삶이었다. 그의 외삼촌은 대학생으로 좌익을 하다가 월북을 해서 그를 감시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애초에 그와 가까워진 것은 대학이 같았기 때문이다.

난 어디로든 이민을 가버리고 싶은데 이민도 못 가게 꽉 붙들어두고 사람을 이렇게 골탕을 먹이니 이거 사람 미치고 환장할 일 아니오. 이 지랄들을 할랬으면 미리 대학이나 다니지 말게 하든지. 난 인생 다 포기했어요.”

술 취한 김기돈이 한 말이었다. 어디로든 이민을 가버리고 싶은 김기돈의 마음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는 땅. 그 땅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 처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할 거였다. 누이동생 선희가 미리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떠나버린 것도 그런 마음의 표현이었다.

. 너무 걱정 말어. 선희는 절대 나쁘게 되지는 않을 거야. 일을 당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선희는 오래 전부터 집 떠날 마음을 먹고 있었어, 결혼문제를 꺼내니까 남자 쪽에 무슨 피해를 줄지 모르니까 결혼 같은 것 할 마음이 없다고 했고. 국민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신고하는 꿈을 수도 없이 꿔왔고 서로 간첩질을 시켜가며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남도 북도 다 싫으니까 이런 무서운 세상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었어. 그러니까 선희는 아버지를 신고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찾아간 것 같은데. 아마 ...... 수녀가 아니면 여승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

동생 일표의 말이었다. 급한 마음에 일표의 말은 꼭 맞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일표는 선희를 찾아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그건 추측일 뿐이고. 만약 확실하다 하더라도 사회를 등진 것은 선희의 고통스러운 선택이니까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거였다. 사실 어느 수도원이나 절에서 찾아냈다고 해도 억지로 끌어와서 해결될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아버지가 내려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선희의 일을 생각하면 곧바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는 했다. 저세상에서 막내딸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는 끝없이 울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달게 먹었던 곰탕이 영 맛이 없었다. 배상집은 아무리 몰아내려 해도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따오고. 신문에 그리 크게 실리는 정도이니 그의 인생은 마치 고속도로처럼 거칠 것 없이 뚫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배상집의 성취가 꼭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삶을 체념해 버린 줄 알았었다. 그런데 배상집을 보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고. 이토록 오래 그를 떼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욕망의 분출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욕망이 슬프고 괴로웠다. 이제 자신이 해야 될 일은 이번에 드러난 그 욕망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내는 일이었다. 더 서글퍼지지 않고 더 괴로움 당하지 않으면서 식물처럼 살아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 다짐을 하며 입맛 없는 곰탕을 꾸역꾸역 다 먹었다.

이 집 돈 버는 소리 요란하네. 기계들아 고장 나지 말고 돌고 돌아라. 느네들 돌아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은 노래다.”

김기돈이 유일민의 사무실로 들어서며 흥겨운 노랫가락 읊듯 했다.

백날 돌아봤자 뭘 해요. 기껏해야 1원짜리 줍는걸. 앉으세요.”

유일민은 정리하고 있던 장부를 덮으며 말을 받았다.

하긴 그래요. 우리 하청업이란 게 대기업들 발밑에 깔려서 큰돈 만지기는 애저녁에 글렀지요. 앉을 것 없이 그냥 나갑시다.”

김기돈이 술맛 간절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지요. 어쨌거나 결제라도 좀 좋아져야 할 텐데. 시국이 뒤숭숭해서 그런지 어음기간이 더 길어지고 있어요. 김 사장 쪽은 어때요?”

유일민은 검정물들인 미군용 스키파카를 걸쳤다. 그 옷은 검정물이 바래 붉은색이 드러나고 소매 끝은 닳아 실보무라지가 일어날 만큼 낡을 대러 낡아 있었다. 그건 그가 대학생 때 임채옥한테 받은 선물이었다.

보나마나 뻔하지요. 독재를 하지 말든지 데모를 하지 말든지. 둘 중에 하나는 없어져야 하는데. 둘이 계속 박치기를 해대고 있으니 경기도 비틀리는 거 아니오. . 정치에는 무식한 놈이지만 정치가 이 나라 다 망치고 있어요.”

이런. 누구 듣겠소.”

유일민이 사무실을 나서며 눈짓했다.

아이구 무셔라. 입 조심해야지. 사상불온자가 유언비어 유포죄로 걸려들면 그땐 꼼짝없이 황천행이지.”

김기돈은 어깨를 떠는 시늉을 했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용산을 벗어나 종로 쪽으로 나왔다. 마음에 드는 술집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었다. 단둘이 마주 앉았다가 담당형사의 눈에 띄게 되면 무슨 의심을 사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술잔을 부딪치며 유일민은 상대방이 이야기 꺼내기 좋도록 먼저 물었다.

. 일이 있긴 있는데 좀 괴상한 일이오.”

김기돈은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나 외국물 먹게 될 것 같소.”

소주의 독한 쓴맛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그는 불쑥 말했다.

외국 .......?”

유일민은 그를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잠꼬대하는 것처럼 안 믿어지지요? 근데 그게 사실이오.”

김기돈은 빈대떡을 찢어 입에 넣으며 묘하게 웃었다.

그럼. 이민 가는 거요?”

아니오. 돈 벌러 가요. 그게 무슨 일인고 하면 말이오. 1~2년 전부터 중동인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돈 벌러 간다는 말이 슬슬 돌지 않았어요? 그 돈벌이가 아주 좋아 우리나라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어요. 그 바람에 나를 도와주는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공사 현장의 공사부장으로 특채를 할 테니까 고생이 되더라도 한밑천 잡아가지고 오라고요. 여기 부장 월급보다 세 배 이상 준다나요? 사막지대라 날은 덥고 일이 힘드니까 나 같은 놈을 끌어들이는 건데. 아무리 돈이 탐나도 우리가 어디 외국물 먹을 자격이 있어요? 그래서 선배한테 쏘아댔지요. 누구 놀리는 거냐고. 그랬더니 선배 말이 무식한 소리 작작하라면서. 상업용인 경우에는 출국을 허용한다는 거요. 쉽게 말하면 외국에서 딸라 벌어들이는 게 급하니까 돈벌이 하러 나가는 건 안 막는다 그거요. 참 돈이 좋긴 좋소.”

술잔을 비운 김기돈은 술맛 탓인지 어쩐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외국에서 빌려온 돈 갚자면 몸이 달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그게 혹시 중동에 국한된 게 아닌가요? 작년까지만 해도 그럼 하자가 있는 간호원들은 서독에 나가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까진 잘 모르겠소. 어쨌거나 조금씩 이라도 풀려야지 사람이 살 것 아니겠소. 그러다 보면 다 풀릴 날도 올 거고.”

글쎄요. 그럼 언제 떠나게 되나요?”

유일민은 그런 완화조치에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했다. 그건 언제든지 취소해 버릴 수 있는 권력자의 편의이기 때문이었다.

빠르면 다음 달에 갈 것 같소. 공장 그거 해봐야 아무 가망도 없고. 한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고생해서 목돈 잡기로 했어요. 공장은 그 담에 더 크게 차리면 되니까. 근데 유 사장은 그쪽으로 나가볼 마음 없어요?”

글쎄요. 김 사장이야 공대 출신이니까 특채가 되지만 나야 흔해빠진 상대 출신인데 공사장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유일민은 술잔을 비우며 허전하게 웃었다.

왜요. 한 공사장에 수백 명씩 있게 된다니까 거기에 경리업무가 없을 리 없지요. 유 사장이 마음만 있으면 내가 알아볼 수 있어요. 무슨 말인고 하면 내가 이 땅을 벗어나려고 하는 건 돈벌이만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쪽에 가 있는 동안에는 감시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잖아요. 돈도 벌고 자유도 얻고. 그런 일거양득이 어디 또 있겠어요. 내가 알아볼까요?”

아 그거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일표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자신이 피하면 동생이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 말은 고맙지만 난 곤란하겠는데요. 만약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동생이 시달리게 될 텐데 ...... 아깝지만 어쩔 수 없겠어요.”

예에 ...... 그런 어려움이 어려운 점이 있군요. 함께 근무하면 서로 외롭지 않고 좋을 텐데 ......”

김기돈이 아쉬운 얼굴로 술잔을 비웠다.

저어 ...... 김 사장도 친구 중에 공학박사로 교수가 됐다거나 하는. 옛날하고는 영 달라진 사람들이 있지요?”

유일민은 술기운이 의식 속으로 안개 퍼지듯 번져드는 것을 느끼며 그때까지도 마음에 무겁게 얹혀 있는 그 이야기를 꺼냈다.

. 여러 분야에서 나를 비웃듯 놀리듯 출세한 친구들이 많고 많지요. . 유 사장 친구 중에 누가 그런 출세를 했어요?”

김기돈이 눈치 빠르게 대응했다.

. 서독에서 박사학위를 따온 친구의 글이 오늘 아침 신문에 실렸더군요. 몇 년 만에 알게 된 첫 소식인데. 사진과 글이 생각보다 크게 실려서 그런지 어쩐지.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충격이 어찌나 크던지,...... 내가 입으로는 삶을 체념하고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무슨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철이 덜 든 것인지. 그 친구를 질시하는 것인지,...... 그 복잡한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까 그렇게 우울해 보였군요? 우리가 도통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치가 된 것도 아닌데 그런 감정이 생기는 거야 당연한 거지요. 우리 능력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 뜻대로 살지 못하고 병신이 되어 그런 일들을 당하게 되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패배감에 괴롭고 하는 거야 너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나도 그런 일 당하면서 충격도 많이 받고 울분도 많이 느끼고 절망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어쩔 수 없으니까 인생을 포기하고 체념하려고 애쓰는 거지요. 그러나 앞으로도 그런 일 당하면 계속 감정이 상하겠지요. 나를 좀 봐요. 입으로는 인생을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왜 사막의 나라로 갈 작정을 했겠어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나도 다른 방법으로 무언가 이루어보겠다는 꿈인지 오기인지가 발동하는 것 아니냐구요. 이거 오늘 밤 술 마실 이유가 분명해져서 좋군요. 그런 꼴 당하고 술 안 마시면 언제 술 마시겠어요. 갑시다. 2차로 가서 새 기분으로 마십시다.”

김기돈이 앞장서 찾아간 술집에서는 화장품 냄새가 짙게 풍기는 아가씨들이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어머. 멋진 오빠들 오셨네. 어서 오세요. 화끈하게 술맛 나게 해드릴게요.”

멋진 오빠들? 그 말 한번 상 받게 잘하네. 좋아. 좋아. 멋지고 근사한 사나이들인데 시대를 잘못 만나 외롭고 괴로워졌으니까 어디 너희들이 술맛 좀 나게 해봐라.”

김기돈이 술기운 넘치는 몸짓으로 아가씨들을 얼싸안았다.

너무 괴로워하지도 말고 외로워하지도 마세요.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 길인걸요. 어서 올라가세요.”

한 아가씨가 또랑하게 말했고.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이 오빠들도 화끈하게 해줄 테니까 어서 술을 마시자.”

김기돈이 흥이 돋아 아가씨들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짜아.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 길이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다. 그런 개똥철학도 모르는 새끼들이 지배하는 이 드런 놈의 세상을 위하여 다같이 건배!”

우리 오빠 최고. 건배!”

김기돈을 따라 두 아가씨가 거침없이 잔을 들어 올렸고, 유일민도 그 흥에 실려 잔 높이를 맞추었다. 잔이 돌고 돌아 밤이 깊어갈수록 술자리는 흥건하게 넘실대는 술기운으로 격의 없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슬픈 유행가를 더욱 슬프게 불러대고, 김기돈과 유일민은 술과 노래에 흠뻑 취해 상을 두들기며 젓가락장단을 맞추었다.

아 글쎄. 저 유 사장이 총각이라니까.”

피이. 그런 유치한 거짓말.”

어허. 이것들이 사람 말을 왜 이리 안 믿나 그래. 세상이 하도 거짓말만 해대니까 얘들이 이 모양이 된 거라구. 난 유부남이 맞고 유 사장님은 진짜 총각이야. 총각. 이봐요 유 사장! 빨리 그것 좀 내보여 봐요.”

어머머. 거기에 무슨 표시 있나?”

주민등록등본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호호호호,......”

아하. 그런가? 이갈 뭘 로 증명하지? 어쨌든 여태까지 장가 못 간 불쌍한 사나이니까 네가 잘 알아 모셔.”

그럼 진짜 같기도 하네요. 근데 무슨 사연이 있으세요? 실연을 당하셨나?”

그래. 사연으로 치면 많고 많은 사연이지. 유치하게 실연 같은 걸 당한 건 아니니까 잘 모시기나 해라. 하룻밤 풋사랑일망정 한 맺힌 사나이 가슴을 잘 쓰다듬어주라 그거야. 알겠어?”

눈이 풀릴 대로 풀리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김 사장은 유일민 옆에 앉은 아가씨를 다그치고 있었다, 유일민은 목이 타드는 갈증으로 잠이 깼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방이 낯설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상체를 일으키다가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옆에 잠들어 있는 아가씨도 알몸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몸을 눕혔다. 그러면서 그는 어젯밤을 돌이켰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가씨들하고 노래를 부르고 어쩌고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먹통이었다. 술에 먹힐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면 가끔 겪게 되는 일이었다.

기억할 필요 없는 일은 생각나지 않는 게 차라리 잘 됐다고 여기며 유일민은 물을 찾았다. 물주전자와 컵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물주전자를 입에 대고 한참이나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다 보니 김기돈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김기돈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김기돈네 집안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여파로 김기돈이 날개 꺾인 새가 되어 괴로워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다른 공대 출신들이 출세하고 잘사는 것만을 부러워하는 여자였다. 유일민은 김기돈이 사막의 나라로 가기로 한 것이 아내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이 추워라. 어머. 잠 깨셨어요?”

유일민은 주전자를 떼며 여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자가 이불을 끌어올려 어깨를 덮으며 부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유일민은 그 여자가 자기 옆에 앉았던 아가씨인 것을 알아보았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지? 여기가 아가씨 방인가?”

유일민은 술기운으로 무겁게 처지는 몸을 눕히며 물었다.

어머. 기억이 없으세요? 사장님이 외로운 총각이니까 잘 모시라고 김 사장님이 이 여관까지 몰아댔잖아요.”

이런, 김 사장은 어찌 됐어

이 여관까지 같이 들어왔는데 그 담은 모르겠어요.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나세요?”

. 잠이 깨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떻게 술집을 나왔는지도 모르겠어.”

그럼 저하고 그걸 하면서 채옥이. 채옥이한 것도 모른다구요?”

내가?”

유일민은 상체를 절반쯤 번쩍 들었다가 힘없이 부려버렸다.

애인이었어요?”

알 것 없어.”

“...... 저어,...... 있잖아요. 저는 시시껄렁한 술집 여자지만요. 저를 옷 벗겨놓고 딴 여자 이름 막 불러대니까 영 이상하고 기분 좋지 않더라구요. 아무리 하룻밤 풋사랑이라도 저하고 해야 하는데,......”

유일민은 그 아가씨의 말이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 미안해. 내가 술이 너무 취해서 주책을 떨었어.”

유일민은 돌아누우며 아가씨를 안았다.

괜찮아요. 괜히 그 여자 분이 샘나서 그래 보는 거에요. 어차피 우린 걸레걸랑요.”

아가씨가 속삭였다.

아니야. 무슨 그런 소리를,......”

유일민은 아가씨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임채옥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금 남편의 병 수발을 하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사업상 마셔야 하는 술 때문에 간경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시집하고는 무슨 사정이 복잡하고. 친정 식구들은 다 이민을 가버려 그녀는 몸달아했지만 자신이 마땅히 도와줄 일이 없었다. 치료비는 회사에서 나온다고 했다.

 

1월도 마음 춥게 보낸 배상집은 2월로 접어들어 거의 동시에 두 대학에서 전임으로 채용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는 한꺼번에 밀어닥친 그 행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건 그야말로 양쪽 손에 든 떡이고,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황금덩어리였다. 두 대학이 사회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난다면 고민할 게 없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는 새싹이 파릇파릇 돋듯 하는 새 기운이 온몸에서 솟는 것을 느꼈고, 아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 소년 시절에 운동화를 처음 신고 온 동네를 쏘다니고 싶고, 특히 여자아이들 앞에서 뽐내고 싶었던 심정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인사문제는 확정이 될 때까지는 일절 발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수의 말이 아니라 해도 소년 시절처럼 으스대고 다닐 나이가 아니었다.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의 고생을 생각하면 몇 년이고 입 다물어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털끝만큼의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밤늦도록 두 대학을 저울질하며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자족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 대학이 아니라 두 대학에서나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향해 맘껏 소리치고 싶은 뻐근함 속에서 독일에서 겪어낸 온갖 고생들이 현란한 추억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신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최초로 실감하고 있었다. 두 대학에서 거의 동시에 그런 반응이 온 것은 신문에 쓴 그 글의 영향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글 잘 썼더군, 좀 기다려보게나. 그게 힘이 될 테니까.”

교수가 이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두 대학에서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글에 대해서 큰 관심을 나타냈다. 배상집은 이틀을 생각한 끝에 한 대학을 선택했다. 그런 다음에도 입을 열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일괄적으로 확정 발표를 할 때까지 인사비밀을 지켜달라고 학교 측에서 요구했던 것이다. 그는 날마다 입을 열고 싶은 유혹 속에서 본격적으로 강의할 준비에만 몰두했다. 그건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마침내 대학으로부터 확정 통고를 받았다. 세상을 향해 맘껏 자랑할 수 있는 기쁨과 자유를 얻은 거였다. 그러나 배상집은 이틀이 못 가 그 기쁨과 자유가 깨져나가는 충격에 부딪쳤다. 각 신문에서는 문교부가 최초로 실시한 교수 재임명을 통해 전국 98개 대학애서 460명을 탈락시켰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