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강 2-6

Bollnow 2024. 3. 14. 17:48

33. 쇠기둥과의 씨름

교실 두 배쯤 되는 탈의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소란스러웠다. 피부 색깔과 얼굴 생김이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사복을 벗고 채탄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독일 사람과 한국 사람은 피부 색깔이나 얼굴 생김이 확연하게 구분되었고, 터키나 모로코사람들은 그 중간쯤으로 보였다. 그들의 피부 색깔은 한국 사람에 가까운데 얼굴 생김생김은 독일 사람에 가까웠다. 서양과 동양의 중간지대에서 태어난 사람들다웠다. 스페인사람들도 더러 섞여 있기도 했지만 한국 사람의 눈에는 그들이 독일 사람들과 똑같이 보였다. 흑인만 끼여 있었더라면 광산의 탈의실은 완전한 인종 전시장이 될 수 있었다.

"정 씨, 이거 왜 이렇지요? 조금 다치기만 하면 이렇게 푸릇푸릇 멍이 든 것처럼 돼버리니. 이게 무슨 병일까요?"

한 남자가 이발사 노릇도 하는 정수남 옆으로 다가서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팔뚝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팔뚝 여기저기에는 마치 점 찍기 문신을 한 것처럼 크고 작은 푸른 점들이 대여섯 개 찍혀 있었다.

"병은 무슨 병. 그거 하나도 신경 쓸 거 없어요. 탄광 밥 먹은 관록이니까."

정수남은 시큰둥하게 대꾸해 버렸다.

"이게 상처에 탄가루가 묻은 채로 상처가 아물어서 이리 되는 모양인데, 다음에 무슨 병이 되는 건 아닐까요?"

그 남자는 계속 시무룩한 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봐요 김 씨, 폐가 시커멓게 되도록 날마다 탄가루 마셔대는 신세에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걱정하고 그래요. 초짜 때는 누구나 다 그리 겁먹고 그러는데,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슈. 탄가루로 폐가 썩어 죽을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자아, 이거 보슈."

정수남이 상의를 벗더니 두 팔을 김 씨 앞으로 쑥 내밀었다. 소매 없는 러닝셔츠를 입은 그의 두 팔에는 푸릇푸릇한 크고 작은 점들이 수없이 찍혀 있었다.

"아이고, 이렇게나 많이. 관록은 관록이네요. 그런데, 덧나거나 곪거나 한 일 없으세요?"

김 씨는 두 팔에 찍힌 많은 점들과 정수남을 번갈아 보며 눈을 꿈벅거렸다.

"그래도 석탄이라는 게 땅속 깊이 들어 있는 물건이라 깨끗한 모양이오. 아무 탈이 안 나는 걸 보면 빌어먹을, 타국에서 광부 노릇 해먹는 것도 서러운데 이거 꼭 문신을 한 것처럼 표가 나서 지워지지 않으니 원. 아이고 모르겠다, 이 처량한 신세."

정수남이 한숨을 쉬며 바지를 벗었다. 그 푸릇푸릇한 점들은 광부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흉터였다. 광부들은 지하 1천 미터에 이르는 갱내에 들어가면 평균 35도를 웃도는 지열 때문에 팬티바람으로 작업을 했다. 그런데 갱의 천장은 파낸 지 얼마 안 되는데다 석탄을 캐내는 기계의 진동으로 잔돌들이 떨어져 내렸다. 머리가 멍하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심한 지압 때문에 잔돌들은 광부들의 몸에 부딪치며 꼭 상처를 냈다. 그러나 지압의 마술로 광부들은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1미터 앞이 침침할 정도로 석탄가루가 가득찬 속에서 팬티바람으로 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광부들의 몸뚱이는 먹물을 뒤집어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잔돌들이 낸 상처에도 석탄가루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광부들이 갱에서 나올 즈음에는 상처에 피막이 생기게 되고, 밖으로 나와 바로 샤워를 하지만 피막 속에 들어 있는 석탄가루는 씻겨지지 않았다. 상처가 그대로 아물어 낫게 되면 어김없이 푸릇푸릇한 흉터가 되고 말았다. 그건 광부들만 지니게 되는 '석탄 문신'이었다.

채탄복을 갈아입은 정수남은 물병과 밥을 옆구리에 차기 전에 코담배를 챙겼다. 갱내에서는 술과 담배는 절대금지였다. 광부들은 여덟 시간씩 담배를 참아낼 수 없어서 코담배나 입담배를 구입했다. 정수남은 입에 넣고 씹는 입담배가 너무 독해 콧속에 가루를 조금씩 찍어 바르는 코담배를 쓰고 있었다. 교대시간에 맞추어 노란 모자를 쓴 광부들은 흰 모자를 쓴 감독을 따라 샤프트(승강기)장으로 이동했다.

"오늘 마늘 준비 누가 했소?"

샤프트를 기다리며 정수남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 여기 준비했습니다."

누군가의 조용한 대답이었다. 마늘을 다져 병에 담아오는 것은 '후진'들의 몫이었다. 기한을 연장한 정수남은 '선진' 중의 선진이라 자연스럽게 선배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참이니 신참이니 하는 군대용어를 피해 선진과 후진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마늘 다진 것은 누가 먹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교대시간이 되면 광부들은 한시라도 빨리 갱에서 벗어나려고 서로 기를 쓰고 갱차로 몰려갔다. 지열과 지압만이 아니라 미세한 석탄가루들이 가득 떠도는 속에서 80킬로그램짜리 쇠기둥인 스탬펠을 평균 80개씩 세워 갱의 천장을 떠받치느라고 여덟 시간을 시달린 그들은 오로지 밖으로 빨리 나가야 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한발 늦어 한정되어 있는 갱차를 놓치면 꼼짝없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떻게 하면 자리를 쉽게 차지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해 낸 것이 마늘 바르기였다. 교대시간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다진 마늘을 갱차 한 칸에 발라두었다. 그 마늘 냄새는 서양 사람들을 딴 칸으로 쫓는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굴릭 아우프! (무사히 올라오게!)"

"굴릭 아우프!"

샤프트에서 나오며 출광하는 광부마다 대기하고 있는 광부들을 향해 외치듯이 인사를 보냈다. 피부 색깔을 알아볼 수 없도록 석탄가루를 시커멓게 뒤집어쓴 얼굴에 비해 그들의 목소리는 생기에 넘치고 있었다. 그 생기는, 탄광 고유의 인사인 굴릭 아우프를 상대방에게 보내기보다는 ', 살았구나!' 하며 자기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는 환희 같았다.

샤프트가 덜컹 작동하기 시작하자 정수남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어김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그 느낌은 샤프트를 타던 첫날 머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샤프트를 탈 때마다 틀림없이 떠오르고는 했다. 그 생각이 불길하기도 해서 떼쳐내려고 애를 쓰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한을 연장한 지금까지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샤프트만 타면 첫날 그대로의 느낌으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그건 자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며 속마음을 털어놓다 보면 한국 광부들은 너나없이 똑같은 마음고생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출광 때는 입광 때와는 반대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고는 했다.

갱내에서 일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감독이 정수남을 찾았다. 감독은 무작정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급하게 걸어갔다. 세월의 덕으로 간단 간단한 독일 말을 할 수 있게 된 정수남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따라갈 도리밖에 없었다. 갱내에 들어오면 감독이 왕이었다. 감독이 발을 멈춘 곳을 본 정수남은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의 건넌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송 씨가 전화기를 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 여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독일 말을 할 줄 아는 헤어 정을 데려왔으니 얘기하세요. 잠깐 기다리세요, 헤어 정을 바꿀 테니까."

감독이 송 씨한테 전화기를 뺏어 말하고는,

"당신의 집주인 할머니요"

하며 전화기를 정수남에게 불쑥 내밀었다.

"아니, 무슨 일이요? 여기까지."

정수남은 깜짝 놀랐다.

"직접 들어보시오. 내가 말을 전하겠다고 해도 소용없으니까. 그 할머니 굉장히 화가 났소."

감독이 양쪽 검지손가락을 세워 머리 위를 두어 번 찌르는 손짓을 하며 돌아섰다.

"여보세요, 헤어 정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헤어 정, 똑똑히 들어요. 헤어 송이 출근하면서 전깃불을 안 끄고 갔어요."

전화기에서 여자 노인네의 화난 목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그래요? 그거 잘못된 일입니다. 미안합니다."

정수남은 독일 사람들의 무뚝뚝하고 강직한 기질을 생각하며 재빨리 대응했다.

"내가 안 봤더라면 하루 종일 불이 켜져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우리 집에 더 둘 수 없으니깐 당장 내보내겠어요. 헤어 정은 왜 그런 사람을 소개했어요. 헤어 정도 책임져요."

", , 잘못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는 그런 잘못 안 하도록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헤어 정이 책임지고 내보내요. 더 전화 길게 하면 일에 지장이 있으니까 그만 끊어요."

더 대꾸를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정수남은 쓴 입맛을 다시며 송수화기를 전화통에 걸었다.

"무슨 일이지요? 뭐라고 막 소릴 질러대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송 씨가 불안한 얼굴로 다가섰다.

"아침에 나오면서 방 전깃불 안 껐지요? 그것 땜에 잔뜩 화가 나 있어요."

정수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방에 세들 때 미리 다 주의를 시켰는데 그런 실수를 한 것이 마땅찮아서였다.

"글쎄요, 끈다고 껐는데 ..... 잘 모르겠는데요."

송 씨는 어물어물했다.

"자기가 보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 전기가 켜져 있었을 것 아니냐는 것때문에 할머니는 잔뜩 화가 난 거요. 송 씨를 당장 내보내겠다고 할 정도로."

"예에? 내보내요? 그럼 어쩌지요?"

그까짓 것 뭐 ..... 하는 기색이었던 송 씨는 그제서야 당황했다.

"우선 내가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이따가 나가서 송 씨가 직접 또 사과해요."

", , 알겠어요."

송 씨는 고개를 꾸벅꾸벅하고는,

"근데 말입니다, 그런 일로 이 땅속까지 전화를 하다니, 참 지독한 데요"

하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말이오. 나도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리벙벙해요."

정수남은 안전모를 고쳐 쓰며 돌아섰다.

"전화를 한 할머니도 그렇지만, 이 깊은 막장까지 전화를 바꿔주는 회사도 또 이상하네요."

"그게 독일 사람들이오. 그렇게 철저한 게."

정수남은 이렇게 대꾸하면서도 지하 1천 미터 가까운 막장까지 그런 전화가 걸려온 것이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낭비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 독일 사람들의 몸에 밴 절약과 검소에 다시금 어떤 숙연함을 느끼고 있었다. 갱내 작업이 시작되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석탄은 거의 기계로 캐내기 때문에 광부들이 주력하는 일은 스탬펠 세우기였다. 그건 막중한 지압으로 갱이 붕괴되거나 함몰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광부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작업이었다. 석탄을 캐내고 운반하는 것은 기계화되어 있었지만 스탬펠을 세우는 일은 기계로 할 수 없어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다. 한국에서 통나무를 들여다가 갱의 높낮이에 맞춰 잘라 쓰는 것에 비해 쇠로 제작되어 높낮이를 조정할 수 있는 스탬펠이 기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양인들에 비해 몸집이 작은 한국 광부들에게 스탬펠이라는 쇠기둥의 무게는 애초에 너무 무리였다. 한국을 떠날 때 광부들의 몸무게는 평균 60킬로그램 정도였다. 그 몸들이 독일에 와서 육식을 많이 하고 매끼 배부르게 먹어 불었다 해도 날마다 팥죽 땀을 흘리며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거의가 65킬로그램 미만이었다. 그런 몸으로 자기 몸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80킬로그램짜리 쇠기둥을 일정 지점까지 운반해야 하고 그리고 지형에 맞추어가며 세워야 했다.

역도에서 기본동작은 선 자리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는 용상이었다. 그리고 역도선수가 될 수 있는 1차 자격은 자기 몸무게의 바벨을 아무 하자 없이 용상으로 들어 올리는 것부터였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자기 몸무게의 절반도 쉽게 들어올리기 어렵고, 몇 개월 숙달을 시킨다고 해도 자기 몸무게를 들어 올리려면 다리가 흔들려 중심을 잃고 팔이 떨려 균형을 잃어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 광부들은 지상도 아닌 갱내에서 지압과 지열에 시달리고 석탄가루로 숨을 헉헉거리며 날마다 80킬로그램짜리 쇠기둥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감독이 어제 세운 스탬펠들을 점검하며 휘어진 것부터 교체하라는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쇠기둥은 지압을 견디지 못해 밤사이에 휘어진 것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낙반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컸다. 광산에서의 낙반사고는 바로 광부들의 죽음이었다. 정수남은 코담배 외에도 피로회복제로 준비한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스탬펠 작업을 시작했다. 한국 광부들이 점심으로 대개 김밥을 싸듯이 사탕도 상비품이었다.

탄맥을 따라 석탄을 캐내는 만큼 갱도는 새롭게 생겼고, 그 길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스탬펠 작업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수남은 스탬펠을 어깨에 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끄응 힘을 썼다. 언제나 가벼워질 줄 모르는 쇳덩어리의 무게가 전신을 눌렀다. 이것을 120개씩이나 치다니! 정수남은 이 생각을 또 했다. 게딩게(도급제)에 따라 하루에 한 사람이 세워야 하는 스탬펠은 80개였다. 그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보수가 깎이고, 더 많아지면 보수가 불어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80개를 대여섯 개 초과한 것도 아니고 날마다 40개씩이나 초과해 120개씩을 세운 한국 광부가 있었다. 그가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벌어 기한을 연장하지 않고 귀국했음은 물론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스탬펠 왕자', '스탬펠 영웅'이라는 칭호와 함께 루르 지역과 아켄 지역에 연달아 있는 노벨, 발슘, 함본, 벨셈피어르켄, 에쎔 캄프린트보틀, 노이키어르켄 같은 한국 광부들이 있는 탄광마다 전설처럼 퍼져나갔다. 광부들은 충격 속에서 그 말을 믿기 어려워했고, 김 씨 성을 가진 그 사람이 씨름꾼 같은 장사가 아니라 보통 체구일 뿐이라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광부들 사이에서는 그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바람이 일어났다. 정수남도 그 얼굴 모를 사람처럼 왕자나 영웅은 될 수 없더라도 100개씩은 채우리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덤벼들었다. 그러나 열 개를 더 세우다, 못 세우다 하며 1주일을 보내고 열이 펄펄 끓고 전신 구석구석이 조근조근 결리고 쑤시는 몸살로 앓아 눕고 말았다. 과로 진단을 내린 의사는 5일 동안 입원 결정을 내렸다. 의사의 진단이 있으니까 일을 안 해도 임금의 80퍼센트는 받을 수 있지만, 아픈 것에다가 임금이 20퍼센트 없어진 것은 이중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끙끙 앓으면서 대충 계산을 해보아도 초과한 양으로 받을 돈이 깎인 20퍼센트를 벌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스탬펠을 하루에 80개씩 치는 기준은 서양 사람들의 체구에 맞춰진 것이었다. 그 기준을 그대로 한국 광부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니 그 양만 일을 해내도 체구 작은 한국 광부들로서는 무리인 셈이었다. 그 다음부터 정수낭은 스탬펠을 더 세울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루 일을 시작하며 첫 번째 스탬펠을 어깨에 올리기만 하면 곧장 그 생각이 떠오르고는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을 마음에서 깨끗하게 싹 지워버리고 싶은데도 왜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것도 같고, 자기 마음이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마음인 것도 같고,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일단 작업이 시작되면 그 누구의 일손에나 불이 붙었다. 자기 작업량을 다 채우려면 한눈팔거나 게으름을 피울 틈이 없었다. 감독은 스탬펠의 수량만 세는 것이 아니라 작업불량의 스탬펠까지 가려내기 때문이었다. 땀은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연신 물을 마시고, 고무장화에 차오르는 땀을 쏟아내며 광부들은 쇠기둥으로 갱의 천장을 받쳐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자연히 국적별로 모여 앉았다. 점심 먹는 자리는 채 탄지점에서 쾌 떨어져 있었지만 미세한 석탄가루가 날아다니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미로처럼 뚫려 있는 기나긴 갱도에는 석탄가루가 가득 차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점심을 펼쳐놓았다. 거의가 다 김밥인데 가끔 샌드위치인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후진으로 회사 기숙사에 있으면서 식당에서 주는 점심을 받아온 거였다. 한국음식 중에서 한 그릇 단위로 치자면 영양이 가장 고루고루 갖추어진 것이 비빔밥이고, 비빔밥을 휴대용으로 간편하게 변형시킨 것이 김밥이었다. 한국식 샌드위치인 김밥은 광부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점심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김밥은 제조원가가 꽤나 비싼 편이었다. 한국 배추나 무는 이미 씨를 가져다 심어서 현지 생산이 되고 있었지만, 김을 만들어낼 도리는 없었다. 김은 저 머나먼 한국에서부터 꼭 비행기를 타고 오는 귀한 몸이었다. 그들은 석탄가루가 날아다니는 속에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석탄가루는 코를 통해 폐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밥에 묻어 위로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씨라는 사람이 다시 돌아온 건 남의 일 같지가 않아."

한사람이 밥을 씹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야. 국내 물가가 왜 그렇게 정신없이 오르는 거야? 집값이 배로 뛰었다니, 우리가 이렇게 뼛골 빠지게 고생해 봤자 말짱 헛것이고 도루묵이 잖아."

"니기미, 정말 맥 빠져서 못 살겠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다고 떠들어대면서 박정희는 도대체 정치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알게 뭐야. 우리가 이렇게 죽어라고 고생해서 벌어 보내는 딸라로 즈이들이나 배 터지게 잘먹고 잘사는 것 아니겠어."

"글쎄 말이야. 정치를 제대로 잘하면 물가가 그렇게 될 리가 있겠어. 박정희 아랫것들이 얼마나 부정을 해먹으면 그 소문이 여기까지 퍼지겠어."

"박정희는 귀가 먹었나? 우리도 듣는 소문을 못 듣고 있는 거야, 뭐야. 그런 놈들은 제때제때 잡아서 다 총살을 시켜버려야지."

"괜히 열 내지 마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라구."

"그건 또 무슨 소리 야?"

"그 쉬운 걸 몰라? 그런 걸 모르는 척 눈감아줘야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할 것 아니겠어?"

"그게 그리 되나? 허 참, 자알들 논다. 옘병헐, 우리 같은 놈들만 바보 쪼다지 뭐."

"그나저나 한 씨라는 사람도 이상해. 일단 귀국을 했으면 어떡하든 거기서 비벼볼 일이지 이 굴속은 왜 또 찾아오나 그래. 치가 떨리지도 않아?"

"오죽했으면 또 왔겠어. 그래도 거기 벌이보다는 몇 배 더 나으니까 또 왔겠지."

"아이고, 일단 돌아갔다면 나 같으면 다시는 안 오겠어, 모르고 한 번 당하는 일이지 거지 노릇을 해도 두 번 당하고 싶진 않아."

"다들 잘 생각해야지. 갔다가 다시 오는 것보다는 여기서 바로 연기하는 게 기분 상으로나, 비행기 값 안 없애는 것으로나 훨씬 나으니까."

"아이고, 모르겠어, 이 드런 놈에 팔자들."

정수남은 그런 이야기에 끼여들지 않고 그저 밥만 먹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오후 일이 시작되고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고야 사고! 큰일 났어 !"

어디선가 갑자기 한국말 외침이 터졌다. 갱내에서는 소리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수신호를 해야 했다. 그러나 형편이 워낙 급해 소리를 지른 모양이었다. 스탬펠을 세우려던 정수남은 외침이 울린 쪽으로 재빨리 몸을 돌렸다.

"정 씨, 빨리 와봐요. 방 씨가 스탬펠에 치였어요."

저쪽에서는 연달아 소리치고 있었다. 감독과 말이 통하는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안 정수남은 그쪽으로 내달았다. 다른 사람들도 일손을 놓고 그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물러서! 다들 물러서!"

감독이 광부들을 제지했다.

"나 헤어 정이오. 내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볼까요?"

정수남은 앞으로 나서며 감독에게 말했다.

"아 헤어 정, 지금 찾고 있던 참이오. 빨리 사태를 일아 보시오."

감독이 정수남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어떻게 된 거요?"

", 나도 잘 모르겠어요.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라. 방 씨가 이렇게 허리를 굽히고 있는데 저 스탬펠이 갑자기 넘어지면서 허리를 여지없이 쳐버렸어요."

바닥에는 한 사람이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스탬펠이 나굴어져 있었다. 정수남은 그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다급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방 씨, 방 씨, 정신 차려요. 방 씨, 정신 차려요."

그러나 엎어진 사람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스탬펠이 넘어지며 저 사람 허리를 쳤대요. 정신을 잃었어요."

정수남이 일어나며 감독에게 말했다.

"정신을 잃어? 이거 중상인지도 모르겠소.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 헤어 정까지 네 사람을 뽑으시오."

감독이 다급하게 말하며 손바닥을 맞비볐다. 들것에 실려 밖으로 나을 때까지 방 씨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감독의 연락을 받고 사무실에서는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앰뷸런스가 방 씨를 싣고 떠나자 사무직원이 그들에게 말했다.

"수고들 했소. 오늘 일은 더 안 해도 괜찮아요."

탈의실로 들어선 정수남은 담배부터 꺼내 불을 붙였다.

"허리를 많이 다친 모양이지요?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면."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게 하필 허리를 쳤으니 원.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두고 봅시다."

정수남은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이틀이 지나 방 씨 소식이 전해졌다. 허리가 부러져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1주일 뒤에 한국으로 보낸다고 했다.

"보상은 얼마나 받나?"

"평생 병신 됐으니까 3천 마르크 받겠지 뭐."

사망자에 대한 보상이 3천 마르크였다.

"그까짓 것 받으면 뭘 해 평생 병신인데 3만 마르크도 말이 안 되지."

한국 광부들은 우울하게 이런 말을 나누며 또 일을 나서고 있었다.

 

"배 박사님, 배 박사님."

부시시 눈을 뜨던 배상집은 '배 박사님'이라는 소리를 퍼뜩 되짚으며 정신을 차렸다. 겨우 석사 과정을 하고 있을 뿐인 자신을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누구세요?"

바지를 꿰입으며 급히 문 쪽으로 가면서 배상집은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예어, 작년에 왔던 각설입니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배상집은 어서 오세요를 두 번씩 할 정도로 반가움이 넘쳐 정수남과 박갑동을 맞이했다.

"해가 넘어가게 생겼는데 웬 늦잠이세요?"

박갑동이 보자기를 배상집의 눈앞에 디밀듯 하며 물었다.

"예 빨리 읽어야될 책이 좀 있어서요 이건 뭐예요 또?"

"주방장이 폼 잡을 게 뭐 있나요. 김치 담가온 거지요."

정수남이 낚아채듯 재빨리 말했다.

"힘드신데 오실 때마다 그러시면 어떡해요. 자아, 어서들 앉으세요."

배상집은 입에 신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힘들긴요. 요새는 우리나라 배추에 고추 마늘까지 다 있으니까 초기에 비하면 거저먹기죠. 김치 맛도 제대로 나고. 근데, 공부는 잘되세요?"

보자기를 흔들며 박갑동이 제 집인 것처럼 부엌으로 들어갔다.

", 몸 편하고 딴 걱정 없으니까요 우선 커피나 한잔씩 하실까요?"

앞서 부엌으로 들어선 배상집은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들의 몸놀림에는 홀아비 아닌 홀아비로 혼자서 살아온 생활의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

", 커피 좋지요. 이거 무식한 놈 막 나가는 소리지만, 좌우간 저는 공부로 한평생 살려고 하는 분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그 맘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정수남도 부엌으로 따라 들어오며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야 더 말하면 잔소리지. 자네나 나 같은 인간들이야 백 번 죽었다 깨나도 흉내 못 낼 일 아닌가. 어찌 인연이 묘하게 되느라고 우리 같은 놈들이 배 박사님하고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게 된 거지 이제 진짜 박사 따셔봐. 떡하니 대학 교수님 되시면 그때야 우리 같은 것들은 감히 만날수도 없게 된다구. 지금이 좋은 땐 줄 알어."

김치 잘 담그는 박갑동이 보자기를 풀어 큼직한 김치 병을 옮기며 말했고,

"그야 당연하지. 배 박사님 체면 생각해서라도 그땐 우리가 알아서 미리미리 피해야지. 그나저나 머리는 이따가 손질해 드리면 되구, 뭐 설거지할 것 없나요?"

이발 솜씨 좋은 정수남이 설거지거리를 찾느라고 연신 두리번거렸다.

"아이구, 무슨 말씀들을 그리 하세요. 나갑시다, 나갑시다. 할 일 아무 것도 없으니 나가서 커피나 탑시다."

배상집은 팔을 벌려 두 사람을 몰아내듯 했다.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달라진다 해도 그들을 대하는 마음이 절대 변하지 않을 진심으로 그는 말하고 있었다. 2주일에 한 번씩 놀러오는 그들은 너무나 고마운 친구였다. 박갑동은 꼭 김치를 담가왔고, 정수남은 잊지 않고 이발 기구들을 챙겨가지고 왔다.

"저어, 박씨가 한 가지 의논할 일이 생겼는데요. 딴사람들처럼 미국으로 뜨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수남이 담배를 빼들며 박갑동 대신 말을 꺼냈다.

"미국이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누가 함께 가자던가요?"

배상집은 박갑동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니 뭐, 누가 꼭 가자는 것은 아니고 미국이 사람 사는 천국이라고 하고, 여기서 미국으로 빠지면 한국에서 이민수속을 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이리 잘사는 나라에서 몇 년 살다 보니 우리나라에 들어가 온갖 것에 다 찌들려가며 살기도 겁나고 그래서 ....."

박갑동은 배상집의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그 나름으로 많이 생각했는지 말이 꽤나 조리 정연했다.

"예에. 일리가 있는 말씀이기는 한데..... 그런데 미국엔 어떻게 가서 살 수 있는 거지요? 단속이 심할 텐데."

배상집은 잠시 생각할 여유를 가지려고 말머리를 딴 데로 돌렸다.

"그건 하나도 걱정할 게 없나 봐요. 우리가 가진 독일 체류 여권으로 카나다는 쉽게 갈 수 있고, 카나다에서 몇 달 살면서 줄을 대면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서류를 만들 수 있대요. 비용은 1만 달라 정도라니까 그리 비싼 것도 아니죠 뭐."

"아니, 미국도 그래요?"

"차암, 미국은 뭐 사람 사는 데 아닌가요? 다 그렇고 그렇지요."

박갑동이 코웃음을 쳤고,

", 돈이면 귀신도 부리고, 개도 멍첨지가 된다잖아요. 원리원칙 잘 지킨다고 뽐내는 이 독일 사람들한테도 와이로 써보면 다 통하잖아요. 그런데 양키들이라고 별수 있겠어요?"

정수남은 인생사에 통달한 것처럼 대꾸했다.

"그럼 두 분이 함께 가시게요?"

"아닙니다. 이 정 씨는 어떻게 간호원하고 결혼해서 독일에 그냥 눌러 앉을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박갑동이 대신 대답했다. 배상집은 느리게 커피 잔을 기울였다. 그들의 그런 계획이 뜻밖일 것은 없었다. 이미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고 있었다. 다만 자신만이 그런저런 삶의 선택에 별 관심 없이 그저 박사학위를 빨리 따서 귀국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 지금도 해외개발공사 간부들이 광부나 간호원들을 떠나보내면서 여러분들은 외국에 나가서 국내의 쌀을 축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애국자다. 그런데 귀하고 귀한 딸라까지 벌어들이니 애국자중에 애국자다 하고 말한다면서요. 그렇지요, 나라는 작고, 인구는 많고, 자원도 없고, 식량도 모자라는 판이니 외국으로 나가 사는 건 권할 만한 일이지요. 그게 다 국력을 키울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두 분이 그렇게 하는 건 환영입니다."

배상집은 급하게나마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들이 선택한 삶의 진로에 국가적 차원의 의미까지 부여해 격려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이국생활의 고달픔에 시달리게 될 그들이 딱해 울적하고 스산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힘이 납니다."

박갑동이 고개를 꾸벅했다.

"고맙긴요. 근데 언제 떠나시게 됩니까? 계약기간 연장한 게 많이 남았는데."

", 몇 사람 팀이 모아지면 곧 떠나야지요. 계약기간은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사람 다시 뽑으면 되고, 올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근데 저어 미국에 가서 공부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자유 진영에서는 미국이 제일 쎈데 앞으로 미국 박사가 더 끗발 날리고, 알아주는 것 아니겠어요?"

"글쎄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 지금도 미국 박사가 더 행세한다고 봐야죠. 그렇지만 미국에 가면 독일에 비해 학비가 엄청나게 비싸서 공부할 도리가 없어요. 미국은 한 학기에 수천 불씩 하는데 독일은 한 과목에 2마르크씩 밖에 안 해요. 그저 돈 받는 시늉만 하는 건데 그냥 공짜지요 뭐. 독일의 모든 사회복지 제도는 참 부러워요."

"그야 천국이 따로 있나요, 어디."

독일에 살고 싶어하는 정수남이 얼른 말을 받았다.

뜨거운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목이 간질거리며 기침이 나오려 했다. 배상집은 기침을 하면서 솟기는 가래를 뱉어냈다. 가래에는 아직까지도 검은 석탄가루가 조금씩 섞여 나왔다. 갱에는 처음 1년을 들어갔을 뿐이고, 그 후 2년은 통역으로 밖에서 그리고 1년은 탄광에서 완전히 벗어나 학교에서 보냈는데도 석탄가루는 여태껏 몸속 깊숙이 남아 있었다

"사귈 여자는 물색해 봤어요?"

배상집은 정수남에게 물었다.

"찍긴 찍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어요."

정수남은 쑥스럽게 웃으며 얼굴이 붉어졌다.

"정 씨, 피아노 기술적으로 잘 쳐서 배 박사님한테도 참한 여자 하나 소개해 드려."

박갑동의 말이었고,

"정말 소개해 드릴까요? 박사님 같으면 최고 인기지요 뭐."

정수남이 정색을 하고 들었다.

"아니오, 아니오. 난 그럴 시간이 없어요. 탄광생활 하느라고 난 딴사람들에 비해 3년이 늦었잖아요. 그 시간을 벌충할 방법이 없으니까 1, 1초를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배상집은 손까지 내저었다.

"근데 말이죠, 미국으로 뜰 생각을 하니까 한 가지 서운하고도 억울한 게 있어요. 여기 독일까지 와서 그 좋다는 파리하고 로마를 한번 구경하지 못하고 떠나다니 말예요."

박갑동이 말했고,

"참 꿈도 야무지네. 가까운 독일 도시들도 구경 한번 못하구선."

정수남이 퉁을 놓았다.

"참 그렇군요, 다들 어찌나 정신없이 살았는지..... 이리 고생들하고 살다 보면 언젠가 구경할 날이 오겠지요."

배상집은 쓸쓸하게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34. 나는 누구냐

"이 사람이 빽이 없나요, 돈이 없나요, 실력이 없나요. 남들 눈이 있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잠시 잠깐 내려가 있었던 거지요. 낼모레 곧 대검으로 올라오게 돼 있습니다."

이규백의 장인 안석중 사장은 허풍스러운 웃음을 말끝에다 껄껄껄 매달았다. 이규백은 사교적인 웃음을 세련되게 피워내고 있었지만 속은 편치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이 거북스러운데다가, 장인의 즉흥적인 과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너 달이나 남은 지방 근무가 장인의 입에서는 낼모레로 둔갑하고 있었고, 근무처도 장인 마음대로 대검이 되고 있었다.

"아 네에, 그러시겠지요. 안사장님 능력에다 사위의 실력이 합해졌으니 그야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금상첨화 아니겠습니까. 참 부럽습니다."

은행장이 형식적인 덕담을 하며 정종 잔을 들었다.

"부럽긴요. 은행장님께서도 검사 사위를 하나 보시면 되는 거지요. 대학 다니는 따님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졸업이 다 되지 않았나요?"

이규백은 그만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장인이 듣기 좋게 화답하려다가 괜히 헛짚어 될 일도 안 되게 망칠지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아니 안 사장님, 그런 걸 어찌 다 기억하십니까? 금년 졸업반입니다. 허허 참, 대단하십니다."

은행장은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환하게 웃으며 반색을 했다. 이규백은 안심을 하기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장인의 철저한 사업가 기질을 자신이 순간적으로 혼동한 거였다.장인은 사업에 관한 한 거의 초인적이다시피 계획도 추진력도 기억력도 철저하고 지독하고 정확했다. 그 모든 것은 당연히 돈을 모으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다. 장인에게 돈은 태양이고 신이었다. 장인은 많이 배우지 못한 열등감을 돈으로 만회하려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게 된 경멸감이 가끔 장인을 염려하는 쪽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원 별말씀 다 하십니다. 좌우간 그 따님이 졸업하면서 검사사위 보시면 딱 좋겠구먼요, 예 좋지요."

은행장의 반응이 좋아서 그런지 안석중 사장은 자기 말에 스스로 장구를 치며 신명이 나고 있었다.

"글쎄요, 그게 어디 바란다고 뜻대로 되는 일인가요. 은행장 자리라는 게 권력으로도 약해지고 금력으로도 약해지고..... 아시다시피 우습게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은행장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가시가 여러 개 돋쳐 있었다. 정부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외국 차관에 대해 지급 보증을 해주고, 또 특혜금융권까지 행사하게 되면서 은행장들은 허수아비가 되다시피 한 지 이미 오래였다. 거기다가 5,16 이 일어나고 나서 은행원들의 처우는 계속 하향 조정되어 나빠져 왔던 것이다. 은행은 월급 많고, 보너스 많고, 부수입 많아 특등 직업으로 최고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군사정권은 그 특권에 수술의 칼을 들이댔던 것이다. 꽤나 타당성 있는 그 조처에 대해 상당히 악의적이면서도 헛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 소문인즉, 박정희가 군인이었을 때 어떤 은행지점장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군인에 비해서 은행원들이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고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전에 비해서 약간 좀 서운하게 변한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아직도 한 은행의 은행장이시면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왕이고 호랑이시고, 사회에서도 높게 보지요. 그럼요, 대단한 자리고말고요. 정말 원하시기만 하면 검사 사위 열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제게 맡겨두십시오."

안석중 사장은 정종 잔을 홀짝 비우고는,

"여보게, 자네 후배들 중에서 인물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을 책임지고 하나 골라. 알겠지?"

그는 느닷없이 손가락까지 뻗치며 사위에게 지시했다.

"예에, 알겠습니다."

이규백은 얼떨결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 안 사장님 덕에 일이 그리만 풀린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일이 그렇게 성사되기만 하면 제가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은행장은 자식 문제 앞에서 욕심이 동해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던 공적 입장을 와르르 무너뜨리며 야할 정도로 사적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겠다'는 것은 이번의 특혜융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봐주겠다는 확언이었다. 이규백은 아버지로서의 은행장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그 태도가 좀 지나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장인의 태도도 조금도 나을 게 없었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느닷없이 검사 사위를 얻어주겠다고 장담하는 장인이나, 그 말을 믿고 은행 특혜를 계속 베풀어주겠다고 하는 은행장이나 참 눈치들 빠르고 편리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규백은. 그럼 나는 뭔가! 하는 물음에 부딪쳤다. 과장도 축소도 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검사라는 직위를 내세워 장인의 일이 쉽게 풀리도록 슬슬 압력을 가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그런 압력용이나 시위용으로 동원될 때마다 입장이 곤혹스럽고 자신을 경멸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건 거역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길이었다. 가정형편이 최악의 조건이었는데도 장인이 자신을 사위로 삼았던 목적은 분명했고, 몇 년에 걸쳐서 처가 덕을 보아온 자신은 이미 노예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럼 저는 기름 걱정 같은 건 할 것 없이 새 차를 몰아대겠습니다."

안석중 사장은 제법 재치를 부리며 은행장을 향해 술잔을 들었고,

"그런 아들이 하나 있는 것도 아니실 테고, 어찌 그리 땅 짚고 헤엄치듯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물론 안사장님 말씀을 천금처럼 믿습니다만, 허허허허 ....."

은행장도 안 사장 못지않게 너스레를 떨며 서로 술잔을 부딪치고, 흔쾌한 듯 웃음이 얼크러졌다.

"하여튼 안 사장님 욕심도 대단하십니다. 섬유사업이 24시간 공장을 돌려대도 옷감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재미가 기막히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뭐가 모자라서 또 딴 사업을 시작하려고 그러십니까? 괜히 사업체만 많으면 말썽 많아지고 골치 아픈 것 아닙니까? 더구나 전자사업이란 자본금도 엄청나게 들고, 전문기술도 필요한 특수 분야라서 말입니다."

",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요. 허나 세상은 급변하고 있고, 새 사업도 자꾸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라에서는 믿을 만한 큰 기업체들이 새 사업을 시작하면 적극 지원해 주고 있잖습니까. 사업가한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문기술이라는 것도 돈만 들이대면 다 해결됩니다. 너무나 잘 알고 계시지만 돈힘, 그것 얼마나 무섭고도 신통합니까. 솔직히 말해서 어디 야바위판만 돈 놓고 돈 먹깁니까. 이 세상 판이 다 그게 그거지요. 외국돈 빌려오는 데 나라가 보증 서주고, 수출해서 돈벌이하는 데 애국자라고 우대해 주고, 이런 좋은 기회에 사업체 맘껏 늘리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바보멍텅구리지요. 돈이 많을수록 좋듯이 사업체도 많을수록 좋습니다. 말썽 조금씩 일어나는 거야 까짓것 돈 벌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좌우지간 잘 좀 해보십시다. 껀 수마다 월척 낚게 해드릴 테니까요."

안석중 사장은 끝말을 은행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니 뭘 ..... 그야....."

은행장은 담배를 빼드는 척 우물쭈물하며 안 사장과 눈길을 맞추고 있었다. 이규백은 장인과 은행장의 뜻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면서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크든 작든 은행에서 융자를 하면서 '커미션'이라고 하는 뒷돈 거래는 교통경찰의 돈거래만큼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장인은 어마어마한 돈을 융자받을 것이고, 은행장은 엄청난 뒷돈을 챙길 것이다. 거기다가 검사사위까지 얻어줘야 하다니 ..... 이규백은 세상살이의 얄궂음에 쓴 입맛을 다셨다.

"잠깐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은행장이 샅을 훔치며 일어섰다. 그는 무심코 한 행위인지 모르지만 그 무교양함에 이규백은 역겨움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저분이 돌아오시면 자넨 적당히 자리를 뜨게."

안석중 사장이 사위에게 일렀다.

", 알겠습니다."

"헌데, 요샌 어떻게 좀 괜찮아졌나?"

"예에.........."

이규백은 어색스럽게 일그러지는 얼굴로 어물거렸다.

"그것 참..... 여잔 다 남자가 하기 나름이야. 좋은 머리 뒀다 어디다 쓰나? 자네가 남자답게 맘 넉넉하게 먹고 머리를 좀더 잘 써봐. 애들은 자꾸 커나가는데 부부간이 그리 냉랭해서야 쓰나. 알겠어?"

"예에....."

이규백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느낌 없이 그저 대답했다. 아내와의 관계, 그건 장인과의 관계처럼 언제나 서먹한 간격과 어정쩡한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부부는 한마음 한 몸이라는 것을 일깨우며 밀착되고 한 덩어리가 되려고 애썼지만 그게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부장검사들과 약속이 좀 있어서 저는 먼저 실례를....."

은행장이 돌아오자 이규백은 이렇게 말하며 곧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꾸며대고 있는 자신에게 그는 실소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과시에 충실하는 자신이 가소로웠고, 그런 식의 거짓말을 꾸며내고 둘러대는 데 이제 이골이 난 자신이 어이없었다.

"아 예에, 잘 부탁합니다. 그거 농담 아니니까 실천을 못하시면 벌이 돌아간다는 걸 명심하세요. 어허허허 ....."

은행장은 이마보다 턱 부분이 더 넓고 두껍게 보이도록 살이 찐 얼굴로 웃어댔다. 그 기름진 얼굴에 잘 어울리고 있는 진득진득한 탐욕을 외면하며 이규백은 방을 나섰다. 은행장과 호흡을 맞춰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장인의 얼굴도 탐욕이 넘쳐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규백은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도 그들 못지않은 탐욕의 덩어리였다.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도 훨씬 더 추한 탐욕적 인간이고 파렴치한인지도 몰랐다. 사업가란 두말할 것 없이 인생의 목적이 돈벌이인 사람들이었고, 은행장도 말이 좋아 은행가지 돈 장사해서 돈벌이하기로는 매일반이었다. 그들이 자기네 목적을 위해 서로 얼크러지고 설크러지는 것이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의 직업은 법을 다룬다는 검사였다. 검사가 그런 야합과 협잡을 부추기려고 동원되고 있으니 ..... 이규백은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 나 결혼해. 서울 여자고 의사야 아버지는 제약회사 사장이고."

이만하면 어떠냐는 듯 김선오가 한 말이었다. 김선오가 굳이 자신을 찾아와 그렇게 말한 것은 일종의 과시고 시위였다. 그건 경쟁심과 과시욕 강한 김선오의 성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그런 행위는 자기 부탁을 성의 있게 들어주지 않은 상대에 대한 보복감도 합해져 있었다.

"난 많이 생각했는데 결국 안 되겠더라구 그런 부잣집과 가난한 우리 집, 그리고 우리 형제들..... 도무지 어울리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난 아무리 생각해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나도 편코 우리 형제들도 편한 여자를 골랐어."

동료 검사 홍이섭이 술 취한 기분에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와 고향 홍성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

"어떤 때는 불쑥 손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 허지만 마누라나 처족들에게 짓눌려 사는 친구들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구."

홍이섭의 말은 진실하고 솔직했다. 그는 가끔 손해 본 것 같은 생각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잘한 셈이었다.

"아내는 성실한 교육자답게 동생들을 아주 따뜻하게 감싸고 다독거리면서 잘 거느려. 동생들도 별 탈 없이 아내를 잘 따르고 해서 마음이 편해."

마음 편하게 사는 홍이섭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집안의 불화 속에서 살아갈수록 마음 편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규백은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고등고시 합격자들은 부잣집이나 권력자 집안으로 혼처가 생기는 것을 무슨 보너스라도 받는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 기득권 의식은 일류대학 법대생이 되면서부터 벌써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고등고시 합격을 최고 출세로 여기는 사회풍조, 권세와 부를 동시에 누리고 있는 선배들의 손쉬운 출세 행로, 그런 출세를 능력 있는 것으로 은근히 부러워하는 학교 전체의 분위기, 그런 것들에다가 머리 좋고 공부깨나 한다는 자만이 뒤섞이면서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의식은 자연스럽게 굳어져 갔다. 그건 일순간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가난에 찌들면 찌들수록 그 방법은 옳게 여겨지고, 그 길은 목말랐다. 그런데 그런 풍조는 사회적으로 인기가 있는 법대나 의대생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대학생들은 부잣집 딸들을 하나씩 물거나 낚아야 한다는 말을 예사로 했고 취중진언이더라고 농담 비슷하게 하는 그 말들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가난한 시골 학생들이 부자 많은 서울로 유학 와서 그런 유혹적인 세태에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욕심에 눈이 어두워 일으키는 착각인 경우가 많았다. 자신도 그 덫에 걸린 한심스러운 인간이었다. 아내가 시집 식구들이 서울로 이사 오는 것을 거부하고 생활비를 보내기로 했으면 그것이나마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매달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그 말썽은 아내와 장인이 함께 만들고 있었다. 아내는 매달 보내야 할 돈의 액수와 날짜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리 알아서 부치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꼭 자신이 말을 해야 사르르 냉기를 내비치며 생각난 척하고는 했다. 아내의 그런 태도도 굴욕스러웠고, 그 돈을 매달 아내가 타가게 하고 있는 장인의 처사도 못내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어쩌면 장인은 그렇게 해서 자기가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의도인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혼자 점심을 먹을 때는 자장면으로 때우는 것을 자랑하는 장인으로서는 매달 나가는 그 돈이 거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아내가 시집 식구들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게 두 번째 말썽이었다. 아내는 형제들이 어쩌다 발길 하는 것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서로 신경 쓰고 힘들게 살 것 뭐 있어요. 모두가 편하고 자유스러운 게 좋은 거 아니에요? 괜히 한 집에 살다간 돈보다 더 많은 손해를 보게 돼요."

그래서 빈방이 있는데도 동생 규상이는 하숙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형편이니 친척들이 서울에 올라왔다가 집에서 자고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아내와는 한마음, 한 몸일 수가 없었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는 찬바람이 일고, 그건 살얼음이 되고, 살얼음은 점점 두꺼운 얼음벽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의 냉기는 그대로 몸의 간격이 되었다. 함께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불현듯 타인처럼 느껴지는 생경함, 한 이불 속에 누워서도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거리감. 그런 감정들이 심해지고 반복되면서 부부로서의 몸의 간격도 자꾸 벌어져갔다.

"금방 올라올 거 아니에요. 귀찮게 이사하고 어쩌고 할 거 없잖아요."

아내는 거침없이 말했고,

"그럼, 그럼, 서울서만 살아왔는데 시골생활을 어찌하누. 애들도 괜히 촌애들 만들 필요 없잖아. 자네가 주말에 오르내리도록 하게."

언제나처럼 장모가 명령조로 말하며 결정을 내렸다. 아내가 말하는 '금방'은 아무리 짧아야 1년이었다. 남편이 하숙집 밥을 먹으며 보내야 하는 1년을 '금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내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 앞에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장모는 결혼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자신의 집안을 지배해 온 제왕이었고 무법자였다. 아내는 그 보호막 속에서 남편을 맘껏 희롱도 하고 짓밟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쾌락을 즐기고 있었다.

"아 참 부럽습니다. 하숙생활로 땜질해 낼 자신이 있다니."

"역시 소문대로 막강한 모양이군요. 그리 골라잡기도 쉽잖은데 잘해 보시오."

질시와 야유가 섞인 동료들의 이런 말을 들으며 바라보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특정 부류의 그런 결혼행태는 이미 사회적인 지탄거리가 되어 있었다. 여러 문필가들의 글 속에서 조건과 타협해서 결혼한 판검사나 의사들은 '속물들'로 조롱당하고 있었다. 이규백은 가끔 그런 글을 대하며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그들이 지적하는 속물근성이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 저 앞에 내려주세요."

이규백은 집과 반대방향으로 달리던 택시에서 내렸다. 눈에 익은 술집 간판을 올려다보며 그는 2층 계단을 밟았다.

"어머, ....."

화사한 차림의 여자가 얼른 입을 가리더니,

"어서 오세요. 언제 올라오셨어요?“

그녀는 검사라는 말이 나올 뻔했던 실수를 화들짝 반가워하는 몸짓으로 감추었다.

"빈방 있어?"

이규백은 붉은 조명으로 흐리게 가라앉은 실내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우수에 찬 흐느낌처럼 배호의 노래가 비안개 퍼지듯 저음으로 깔리고 있었다. 이규백은 그 저음의 노래가 가슴으로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 좋아하시는 저쪽 별실로 가세요."

육감적으로 생긴 여자가 이규백을 감싸듯 하며 걸음을 옮겨놓았다.

"장사가 더 잘되는 모양인데?"

양쪽의 칸막이 방들에서 흘러나오는 왁자한 소리들을 들으며 이규백이 여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월남 경기가 역시 뜨끈해요. 월남 미망인들한테는 안됐지만 우리한텐 월남이 와따예요."

여자가 눈을 찡긋하여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월남전이 오래 끌수록 국내 경기는 좋아지고 있었고, 경기가 좋아지는 만큼 월남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월남 미망인'은 그래서 생긴 말이었다.

"조니워카 한 병 따."

이규백이 구석진 방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드시던 거 남았어요."

"3분의 1도 안 되는 거. 그냥 애들 마시라고 해."

"어머, 멋지셔.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으셨어요?"

여자가 색정이 지르르 흐르는 눈웃음을 치며 벽에 붙은 초인종을 눌렀다.

"글쎄, 별로....."

"참 검사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저기 저 남서울인가 강남인가 하는 데 땅 좀 사면 어떨까요? 누구나 술자리에서 그 얘기들뿐인데요."

여자가 이규백의 손을 감싸 잡으며 속삭였다.

"그거, 남서울계획 발표한 게 서너 달 되지 않았나?"

이규백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갸웃갸웃하고는,

"글쎄, 난 땅에 대해선 백지니까 나한테 묻지 마."

그는 팔각의 성냥통에서 성냥개비를 꺼내 무심코 반으로 부러뜨렸다.

"한 발 늦었다 그런 말씀이시죠? 아마 그럴 거예요. 지금 서울의 돈이란 돈은 다 그쪽으로 몰렸다는데, 그게 다 뒷북치는 거라는 소문도 있거든요. 저 그냥 얌전히 술장사나 할래요."

여자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뭐 꼭 그런 뜻은 아니고.....그런 데서 사기사건들이 많이 생기니까 미리 조심하는 건 좋지."

그때 손기척이 울리고 나비넥타이를 맨 젊은이가 들어왔다.

"여기 있잖아, 조니워카 새것으로 따고, 전에 드시다 남은 건 너희들한테 주신댄다. 과일하고 마른안주, 그리고 미스 전 빨리 데려와."

아가씨가 술보다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셨어요 ....."

주인 여자하고는 다르게 풀잎 같은 인상인 아가씨가 두 손을 모으며 나붓이 절을 했다.

"그래, 안 불러낼 테니까 귀한 손님 잘 모셔라 응?"

주인 여자가 아가씨의 등을 토닥거리고 나갔다. 아가씨가 얌전하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는데 술과 안주가 들어왔다. 이규백은 술을 따르는 아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그렇게 쳐다보심 어떡해요, 떨리게 ....."

아가씨가 술병을 세우며 부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주 온순해 보이는 얼굴은 화장을 한 듯 만 듯 화장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미스 전은 언제 봐도 얌전하고 깨끗해서 좋아."

이규백은 아가씨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술잔을 들었다. 이쪽의 신분을 알고 있는데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깨끗하긴요, 술집 계집앤데 ....."

황송하다는 듯 입을 가린 미스 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괜한 소리 ....."

이규백은 가늘고 긴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괜한 소리를 하는 건 자신인지도 몰랐다. 미스 전은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이 방, 저 방 드나들며 손님을 접대하는 술집 여자였다. 그리고 또..... 그런데, 그런 불결한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일어나는 충동,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매담 언니가 백 형사 얘기하시던가요?"

미스 전이 술을 따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백 형사? , 인상 바꾸고 나오나?"

", 검사님 떠나시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는데, 요샌 매담 언니 봐주는 것 별로 없이 깡패들 설치는 것도 내버려두고 있어요. 언니가 애 먹어요."

"그 친구 그래도 오래 참았군."

이규백은 피식 웃더니 또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언니보고 백 형사에게 말하라고 해. 길어야 두 달 있으면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더라고."

그는 미스 전에게 잔을 불쑥 내밀었다.

"어머머, 그거 정말이세요?"

미스 전은 잔을 받을 기미는 없이 두 손을 맞잡고 기쁨이 넘쳤다.

"그래, 미스 전 자주 보고 싶어서도 빨리 와야지."

이규백은 술잔을 쥔 미스 전의 손을 감싸잡고 다정하게 술을 따랐다. 미스 전은 고개를 약간 돌려 술을 한 모금 넘기더니 진저리를 쳤다. 이규백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저어 한 가지 여쭤봐도 돼요?"

"? 그래 말해 봐."

"한 가지 이상한 게 있는데요, 검사님은 이 세상에서 안 되는 일이 없고, 부러운 것도 아무것도 없으시잖아요. 근데 왜 그렇게 외로워 보이세요? 오늘은 아주 심해 보여요."

".....!"

이규백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나며 미스 전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겁먹은 듯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

이규백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이런 감격에 휩쓸리며 자신의 속마음을 짚어낸 그녀가 더없이 기특하기도 했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심사를 들켜버린 것이 쑥스럽기도 했고,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하고 이 술집에 드나들게 된 자신을 의식하자 그는 자신의 꼴이 초라해지고 외로움이 더 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규백은 그런 칙칙한 생각을 떼치며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자신의 깊은 속을 볼 줄 아는 그녀를 향해 일어나는 남자의 감정에 더 불을 붙이고 싶은 욕구가 뜨거웠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고 다녀요, 그래!"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식모에게 부축을 받으며 현관으로 비틀비틀 들어서는 이규백을 향해 그의 아내가 내쏘았다.

", 누구시라구 우리 집의 황제 안서정 여사! 죽을죄를 졌으니 목을 치사이다. 예에, 당장 치사이다."

이규백은 몸을 가누지 못해 곧 허물어질 것 같았고, 곧 술이 흘러내릴 것처럼 술기운이 흥건한 눈은 풀릴 대로 다 풀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아유, 술 냄새 ! 신경질 나! 안방에 들어올 생각 하지도 말아요."

안서정은 거실의 마룻바닥이 울리도록 발을 굴러대며 안방으로 가버렸다.

"좋아, 좋아, 그게 나도 편해."

이규백은 식모의 손을 뿌리치며 입 속에서 구르는 소리로 꿍얼거리고 있었다.

목이 조이고 타드는 갈증 속에서 이규백은 눈을 떴다. 사발에 물을 따를 여유도 없이 주전자 꼭지를 입에 틀어넣었다. 물을 실컷 마시고 나서야 그는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은 채로 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되어 안방 아닌 건넌방에서 자게 되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없었다. 이규백은 시계를 보고서야 오전 10시가 넘은 것을 알았다. 그는 아내의 냉대로 안방에 들어가지 못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리 되기를 자신이 더 바라 곤죽이 되도록 술을 마시는지도 몰랐다.

"진현아, 진현아 -."

이규백은 담배를 끌어당기며 아들을 목청껏 불렀다. 다섯 살짜리 아들은 이런 상황에서 아내와의 사이를 이어주는 아주 좋은 교통수단이었다.

"아빠, 왜 또 진현이만 불러!"

먼저 방으로 뛰어들며 빠락 소리를 지른 것은 주란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인 딸년은 제 동생에게 사랑이 가는 것을 유난스럽게 질투하고 들었다

"아빠, 아빠, 나 여깄어."

아들 진현이가 장난감 총을 겨누며 뛰어들었다.

"비켜, 너 비켜 !"

주란이가 동생을 떠밀며 아빠의 책상다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허, 동생을 그렇게 밀어대면 쓰나. 그러다가 넘어지면 또 코피 나잖아."

이규백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아들을 얼른 붙들었다.

"코피 나면 어때. 난 더 콧쌤이야."

주란이가 야무지게 대꾸했다.

"어허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니까. 동생을 예뻐하고 사랑해야 누나지."

이규백은 딸을 한쪽 다리로 옮겨 앉히며, 어찌 이리 성깔이 지 에미를 빼박았나, 하고 생각했다.

"아빠, 누나는 맨날맨날 나 때려."

아빠의 빈 다리에 앉으며 진현이가 일러바쳤다.

", 고자질하지 말어. 말 안 듣고 까부니까 내가 버릇 잡는 거야."

주란이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쥐어 동생을 겨누었다.

"안 돼, 안 돼. 넌 동생을 때리면 안 되고 말로 해야 하고, 진현이 넌 누나 말 잘 듣고 그래야 해. 알겠어?"

이규백은 아침 공기를 마시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으로 두 다리를 힘껏 흔들어 아이들을 얼렀다.

"근데 왜 아빤 진현이만 이뻐해?"

주란이가 또랑또랑하게 말하며 아빠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아빤 너희들을 둘 다 똑같이 이뻐하고 사랑해. 주란이 너 그런 말 자꾸 하면 못써."

이규백은 이렇게 대꾸하면서도 가슴이 뜨끔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둘 다 똑같이 사랑하는 건 분명했지만 아들이라는 것과 딸이라는 것에 대한 느낌이 다른 것 또한 분명했다.

"피이, 거짓말. 진현이는 아들이라 많이 이쁘고 난 딸이라 덜 이쁘잖아."

딸아이의 입술이 삐죽 돌아가며 눈을 희게 흘겼다.

"아니야,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누가 그따위 못된 소리 하든?"

이규백은 당황스럽게 고개까지 저으며 딸을 끌어안았다.

"어른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 여자애들은 다 알아."

"뭐라구? 너희들끼리 그런 말을 해?"

주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눈에 언뜻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아니야, 아빠는 절대 그렇지 않아. 자 약속 걸어 약속!"

이규백은 더 당황스럽게 말하며 딸의 새끼손가락에다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며 딸을 더 꼭 끌어안았다. 국민학교 1학년짜리들이 남녀차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들의 이름을 불러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여기 꿀물 가져왔는데요. 사모님은 가회동에 가셨어요."

식모아주머니가 쟁반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말했다. 이규백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가회동이란 아내의 친정이었다.

"얘들아, 나가자 아빠 꿀물 드시게."

식모아주머니의 손짓을 따라 두 아이가 눈치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규백은 방을 나가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아내는 친정에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사흘거리로 친정 걸음을 할 때마다 아이들을 떼어놓고 다닌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장인장모의 친손자, 손녀처럼 되어버렸다. 어떤 때는 문득자식을 빼앗겨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허약한 경제능력에 비례해서 아내에게 가정 경영권을 처음부터 빼앗겨버렸는지도 몰랐다. 딸의 이름부터가 아내의 전권으로 결정된 작품이었다. 아내의 안서정이란 이름은 철들어 바꾼 것이었고, 호적에 올라 있는 본명은 미자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 촌스럽고 유치한 이름에 치 떨었다는 아내는 딸아이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세련된 것으로 고르고 골라 주란이라고 했던 것이다. ''자 돌림의 이름을 가진 어머니들의 한풀이인 듯 예쁜 이름 짓는 것이 새 풍조를 이루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외쳐대는 가족계획협회의 선봉대처럼 자식을 둘 이상 더 낳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린 것도 아내였다. 자신도 동생들과 조카들에 시달리느라고 자식 욕심은 전혀 없었지만 그런 일방적 결정은 서운하고도 기분 나빴다. 가장으로서 자신의 존재는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경제력이란 희한하고도 묘한 것이어서 그런 괴력까지 발휘했다.

", 여기 왔다가 오늘 곗날이라구 돈 챙겨가지고 나갔네. 그냥 떠나게나." ,

이규백은 전화통에서 울리는 장모의 말을 듣고 기차를 탈수밖에 없었다.

"그려, 껕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헌다고 혔니라. 남자는 여자허고 달버서 기가 살아야허는 것인디 .....참말로 니 존 재주가 아깝다."

어머니의 탄식이 변함없는 가슴의 계곡 계곡을 울리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허고 달버서 기가 살아야허는 것인디.....'

이 예사로운 것 같은 한마디의 의미가 살수록 속 깊이 감겨오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가장으로서의 위신이나 체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남자가 기가 죽으면 밤에 그것마저 제대로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35. 복수하게 만드는 사회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마철의 폭우라서 그 기세가 거칠고 억셌다. 확확 쏟아지는 빗소리만 캄캄한 천지간에 가득할 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억센 비 때문에 방범순찰의 발길도 끊어지고 없었다. 그런데 그 어둠 속 빗줄기 속에서 움직이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들은 대문 옆의 담 안으로 무엇인가를 던졌다. 요란한 빗소리 속에서 개의 끙끙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림자 하나가 대문 옆 쓰레기통 위로 올라가고, 아래에 선 그림자가 올려 주는 것을 받아 담을 향해 던졌다. 돌돌 말렸던 것이 확 펼쳐지며 담에 걸쳐졌다. 높은 담 위에는 유리병 깨진 것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그 위로는 가시철망이 원형을 이루며 두 겹으로 쳐져 있었다. 그림자가 던진 것은 그 가시철망 위에 걸쳐졌다. 그림자 하나가 그것을 타고 담을 넘었다. 또 하나의 그림자도 거침없이 담을 넘어갔다. 집이 자리 잡은 지대가 높아서 밖의 담 높이에 비해 안의 담 높이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두 그림자는 집 뒤로 돌아갔다. 어느 창문에 쳐진 철망을 무슨 기계로 자르기 시작했다. 철망은 가는 철사가 펜치에 끊기는 것처럼 쉽게 잘려나갔다. 가끔씩 쇳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그 소리는 전혀 표도 나지 않고 묻히고 말았다. 얼마 오래가지 않아 철망은 뜯겨졌다. 그림자 하나가 창문을 질벅이다가 옆으로 밀었다. 창문이 스르르 밀렸다. 그림자는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변소였다. 두 그림자는 변소 문을 열고 소리 없이 거실로 나섰다. 그리고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 쪽으로 이동했다. 그림자 하나가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방문은 소리 없이 열리고 있었다. 두 그림자가 안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남자와 여자가 짧은 여름용 잠옷 바람으로 잠들어 있었다. 두 그림자가 서로 마주보는가 싶더니 제각기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남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과 동시에 한 발씩으로 가슴을 짓밟았다. 남녀가 억 소리를 내는 순간 그림자들은 그들의 입에다 무엇을 틀어넣었다. 남녀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두 그림자는 남녀를 엎어 팔다리를 연결시켜 묶기 시작했다. 재빨리 그 일을 끝낸 그림자들은 요의 홑청을 찢어 남녀의 입을 친친 동여맸다. 남녀는 방바닥에 엎어진 채 꼼짝을 하지 못했다. 두 그림자는 손전등을 켰다 빛의 발산을 막느라고 불투명 유리를 끼운 손전등 불빛은 겨우 발밑을 밝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불빛에 흐리게 드러난 그림자들의 얼굴에는 복면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손전등을 비추며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경대며 문갑의 서랍이 다 열리고, 장롱의 짐들이 다 흩어져 나왔다. 문갑의 안쪽에서 나온 조그만 상자에서 금붙이며 보석들이 쏟아졌다. 장롱의 이불 속에서 돈다발들이 쏟아졌다. 그것을 다 챙겨 넣은 두 그림자는 남자의 손목을 풀었다. 그리고 남자를 무릎 꿇어 앉히고는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게 했다. 두 그림자는 남자의 손등을 하나씩 밟았다. 그리고 남자의 확 펴진 손가락 하나에 칼을 들이댔다. 남자가 몸부림을 쳤다. 방바닥에 엎어진 채 여자도 몸부림을 쳤다. 몸부림에 비해 그들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림자들이 칼질을 했다. 남자의 양쪽 새끼손가락이 잘렸다. 남자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림자들이 다시 칼질을 했다. 남자의 양쪽 네 번째 손가락이 잘렸다. 방바닥에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이 또다시 칼질을 했다. 남자의 양쪽 가운뎃손가락이 잘렸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흥건한 피 가운데 뒹굴고 있었다. 그림자들이 다시금 칼질을 했다. 남자의 양쪽 검지손가락이 잘렸다. 방바닥에 머리를 찧어대던 여자가 혼절을 해버렸다. 그림자들이 마지막 남은 엄지손가락을 자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개가 요란스럽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밖에 불빛이 환해지면서 외침이 들려왔다.

"우리는 경찰이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빨리 손 들고 나와라. 반항하면 쏜다. "

두 그림자는 방을 뛰쳐나갔다. 그런데 거실에는 총을 겨눈 경찰들이 서 있었다.

"안 돼 ! 안 돼 ! 안 돼 !"

나복남은 마구 소리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또 꿈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을 쓸었다.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었다. 그는 긴 숨을 토해내며 이마에 내밴 식은땀을 훔쳤다. 밖에서는 주룩주룩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복남은 담배를 더듬어 찾아가지고 방을 나섰다. 비가 내리고 있는 깊은 밤은 꿈속에서처럼 켜켜이 짙은 어둠이었다. 그는 어둠을 바라보며 쪽마루에 주저앉았다. 꿈이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의 벌떡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빼들었다. 그러나 담배는 손에 잡히지 않고 헛손질이 되고 말았다. 엄지손가락 하나만 남고 나머지 네 개는 겨우 한 매듭씩밖에 없는 오른손은 담배 한 개비도 뽑을 수가 없었다. 오른손이 그 지경으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행동을 하고 나서야 깨닫고는 했다. 오른손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고, 병신이 되었다는 생각은 그 다음 순간에 떠오르고는 했다. 오랜 습관이 된 오른손의 동작은 지금도 오른손이 성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언제나 그 착각이 없어지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복남은 왼손으로 어설프게 담배를 뽑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성냥 통을 누르고 왼손으로 성냥에 불을 붙였다.

"또 무신 험헌 꿈 꿨드라냐?"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그의 어머니가 쪽마루로 나섰다.

"....."

나복남은 어둠에 눈길을 보낸 채 담배만 빨고 있었다.

"워쩐 꿈이 그리 니럴 못살게 볶으고 그런지 몰르겄다. 이 굿을 헐 수도 읎는 일이고. 다 맘 묵기에 달린 것인디, 복남아, 이 에미럴 불쌍허니 생각혀서라도 싸게 맘 잠 잡어라,"

갈포댁은 쪽마루에 쪼그리고 앉으며 어둠보다 더 검은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맘 다 잡았으니까 들어가 주무세요."

나복남은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매냥 똑같은 어머니의 말에 짜증이 솟았다. 어머니 말대로 혼자 된 어머니가 온갖 고생을 다하는 불쌍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는 복수심 때문에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니가 이리 애럴 낄이는디 나가 무신 잠이 오겄냐. 니 젊은 맘 다 안다. 얼매나 분허고 원통절통허겄냐. 그 맘 풀라고 펄펄 뛰기로 허자면 땅이 다 꺼져 내래앉고 하늘이 다 뻥뻥 구녕 날 판이제. 근디 그것이 워디 사람 맘대로 다 되디냐? 이 시상은 무정허고 무정허고 또 무정헌 것이여. 이 시상에 그리 분허게 당헌 사람이 니 혼자가 아닝께 ..... 지발 적선헌다고 맘 돌려묵고 살자. 다 참음서 사는 것잉께."

빗소리에 섞이는 갈포댁의 호소는 간절했다.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들어가 주무세요. 어머니가 이러면 나 더 화난다구요."

나복남은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는,

'난 안 참아요. 난 그놈한테 틀림없이 복수하고 말 거예요. 있는 놈들 편만 드는 요런 드런 놈에 세상에 반드시 원수 갚고 말 거라구요

하는 말을 외치고 있었다.

"그려, 그려, 니 맘 다 알어. 그려도 워쩔 것이냐. 배운 것 읎고 가난헌께 당허는 설움인디. 사람 사는 것이 이래도 한시상, 저래도 한시상잉께 참음서 살자. 에린 동상덜 생각혀서 참음서 살자."

갈포댁은 한숨과 울음처럼 느껴지는 이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복남은 비에 젖고 있는 어둠을 응시한 채 담배를 깊이깊이 빨았다. 험한 꿈을 자주 꾸는 것은 마음 탓이라는 어머니의 말은 족집게 점쟁이였다. 아까 꾼 꿈은 자신의 마음 그대로였다. 아니, 사장의 손가락을 네 개까지 자른 것이 자신의 마음이었고, 갑자기 개가 짖고 경찰들이 나타난 것은 자신의 마음과는 정반대였다. 어떻게 된 것이 꿈은 꼭 막바지에서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뒤집어지고는 했다. 개는 청산가리 묻은 고깃덩어리를 먹고 죽었어야 했고, 경찰이란 사장이 전화할 틈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타날 리가 없었다. 개가 영리해서 잘 구워진 고기를 안 먹고 경찰서로 달려가 경찰들을 불러올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개는 배가 고픈 새벽 1-2시 그 시간에 벌써 이쪽에서 던져주는 고깃덩어리를 네 댓 차례나 받아먹고 길들여져 있었다. 처음에는 컹컹거렸지만 두 번째는 잠잠했고, 세 번째부터는 제가 먼저 이쪽의 인기척을 알아채고는 고기를 달라고 끙끙거렸다. 그런 놈이 청산가리 묻은 고기라고 안 먹을 리 없었다. 개를 이쪽 편으로 만들려고 길들였듯이 사장네 집의 구조도 샅샅이 파악해 두었다. 그리고 집 안으로 쉽게 침투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다. 그런데 왜 꿈은 꼭 막판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꿈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궁리하고 있는 것들이 다 꿈으로 나타났다. 중학생인 사장의 막내딸을 유괴하는 것, 외출이 잦은 사장 마누라가 집을 비우고 식모 혼자 있을 때 우체부나 동회 직원으로 가장하고 집 안을 덮치는 것, 밤중에 집 안에 휘발유를 부어넣고 불을 질러버리는 것, 밤에 술이 취해 돌아오는 사장을 기다리고 있다가 해코지하는 것. 그런 것들은 꿈에서 착착 잘되어 나가다가 꼭 막판에서 뒤집어져 험한 꿈으로 돌변하고는 했다.

내가 겁먹고 있어서 그런가 .....?’

나복남은 새 담배에 연달아 불을 붙이며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보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겁이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들 중에 어느 것 하나를 철저하게 준비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실수해서 잡힌다면 여지없이 콩밥신세가 될 것은 뻔했다. 그러나 그게 무서워 보복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가슴에서 들끓고 있는 사장에 대한 분노는 너무나 뜨거웠다. 사장은 자신의 인생을 다 망가뜨려버렸다. 손가락이 네 개나 잘려나가 버린 손으로는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사장은 아무 보상도 하지 않고 외면을 해버렸다. 일이 잘못될 것을 무서워해 그런 놈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못난 인간이 어디 또 있는가. 자기 자신이 그렇게 못난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은 그런 못난 인간이 아니었다. 자기 나름으로 성깔도 있고, 오기도 있고, 배짱도 있었다. 자신이 당한 만큼 원수를 갚아야 했다. 콩밥을 먹을 때 먹더라도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했다.

퇴원하고 사장을 만나려고 했을 때 많은 돈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많이 달란다고 줄 리가 없어서, 5년 치는 너무 많은 것 같고 그 절반쯤인 2년 치의 월급을 쳐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 돈을 밑천삼아 무슨 장사라도 하면서 살아갈 길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장은 생각보다 훨씬 더 냉혹했다. 사장이 마음 놓고 그럴 수 있는 것은 전에부터 쭉 그래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치료비를 물어주는 것으로 더는 법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일하는 동안에만 똑같은 사고를 당해 회사에서 내몰린 사람이 대여섯이었다. 그럼 그전에 당한 사람들까지 다 합하면 피해자는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피해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사장은 자신에게 한 것처럼 인정사정없이 무질러가며 점점 더 부자가 되어갈 것이다. 사장이 그렇게 마음대로 악질 노릇을 해댈 수 있는 것은 법에 안 걸리고, 경찰이 있는 사람들 편을 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해자들이 당하고도 덤비지 않고 병신처럼 굴기 때문이었다. 앞서 당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야무지게 보복을 했더라면 사장은 그렇게 몰인정하고 악질적으로 굴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의가 따지고 들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신처럼 나섰더라도 경찰에 끌려가는 것으로 겁먹고 기죽어 그만 물러서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당한 만큼 사장의 못된 행투를 고쳐야 했다. 자신마저 병신짓을 해서 주저 물러앉으면 사장은 더욱 가관이 되고 피해자는 갈수록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일에 뜻을 합칠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게 문제였다. 하필 오른손이 병신이 되고 보니 어떤 식으로 보복을 하든 혼자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그동안 당했던 사람들을 모아 힘을 합치는 것이었다. 똑같은 원한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치면 그만큼 마음도 잘 통하고 힘도 세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꿈에서 사장 집에 함께 숨어들었던 양성팔은 꿈에서처럼 그렇게 용감하지 않았다. 어떤 공원이 어림짐작으로 가르쳐준 동네를 뒤져 그를 어렴사리 찾아냈다. 국민학교 담 아래서 연탄불에 구워낸 설탕물로 여러 가지 동물들을 찍어내 어린애들을 상대로 '또 뽑기' 장사라는 것을 하고 있는 그는 남자다운 기라고는 전혀 없이 풀죽어 있었고, 세상살이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게 밑천이 제일 적게 드는 거라서 시작한 건데, 이 손가락 잘린 게 이런 장사에도 지장이 많아. 애들이 무서워하고 싫어하니까. 이런 병신은 어른들도 눈살 찌푸리고 싫어하는데 애들이 안 그럴 리가 없지. 그래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댔지. 이 아저씨가 월남전에서 빨갱이 베트콩들과 용감무쌍하게 싸우다가 부상을 당한 거라구. 그리고 애들 구미에 맞춰 용감하게 싸운 얘기를 멋대로 자꾸 꾸며대고 있어. 그러니까 애들이 좋아하게 되고, 단골도 생기고 그러더라구. 참 한심한 신세 됐지."

양성팔은 넷째, 다섯째 손가락 두 개와 그 아래 손등 일부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자신에 비하면 그는 손가락 세 개로 어지간한 일은 그런대로 해내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 데도 취직할 수가 없어서 코흘리개들을 상대로 푼돈벌이를 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아직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는 못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데다가 그가 너무 의기소침해져 있어서 속마음에 보복감을 가지고 있는지 어쩐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좀 더 친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복남은 머리를 판자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좀 약해진 듯싶은 소리가 무슨 슬픔처럼 가슴을 적셔왔다.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면 한정 없이 내리는 장맛비처럼 온 가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니 이리 허송 세월 혀서는 안 된다. 이리 날마동 술 취해 댕기다가 요 판잣집할라 날래묵을 판인 것이여? 각다분허고 캄캄헌 니 맘 다 아는디, 그려도 싸게 맘 공그리고 나서서 살길 찾어얄 것 아니겄어? 사람이 한 평상 살다 보면 오만 험헌 일 다 당허게 되야 있는 법이여. 두 다리 읎는 사람도 타이야 쪼가리 배에 붙이고 기어댕김서 동냥허고 사는 것 못 보냐? 그에 비허면 니넌 몸이 성헌 사람이여. 사내자석이 맘이 철통 같애야 이 험헌 시상 살아가는 것잉께 쓰잘디 읎는 생각 다 털어뿔고 싸게 날 따라나스란 말이다. 니넌 이 집 가장이여, 가장!"

그동안 천두만 아저씨가 몇 차례나 찾아와 한 말이었다. 그 아저씨가 고맙고, 그 아저씨의 말대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돈벌이를 따라나서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들끓고 있는 분함과 억울함과 복수심을 가라앉히고 삭일 수가 없었다. 사장 같은 놈을 그대로 잘살게 내버려둔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제놈이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하려면 사장 놈은 손가락이 스무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은 접어두더라도 자신이 당한 것만큼 사장 놈의 손가락 네 개를 자르지 않고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집안 사정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벌써 몇 달째 여동생 혼자서 벌어오는 것으로 꾸려가고 있으니 궁기가 심해진 것은 오래였다. 어머니는 행상 노릇도 힘겨운데 밤에는 봉투 붙이는 일까지 다시 시작한 형편이었다. 당장 급한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무슨 벌이든 가릴 것 없이 나서야 하고, 사장 놈의 피도 눈물도 없는 행투를 생각하면 끝끝내 원한을 갚아야 하고, 날마다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복남은 잠을 설치다가 다음날도 늦잠에서 깨어났다. 윗목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고, 집 안은 비어 있었다. 그는 갈 곳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된 서글픔과 암담함을 느끼며 밖으로 나섰다. 비만 그친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몰려가는 구름떼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장마가 끝나가는 기미가 느껴졌다. 나복남은 변소로 가며 그만 장마가 끝나기를 바랐다. 비가 오지 않아야 양성팔을 만날 수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날품팔이나 막노동꾼들만 공치는 날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양성팔도 꼼짝없이 공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나복남은 항아리에 가득 담긴 빗물을 떠서 세수를 했다. 처마 밑에 놓인 찌그러진 양철통이며 큰 그릇들에는 빗물이 가득가득 차 있었다. 물 귀한 산동네에서 장마철이면 보는 덕이었다. 나복남은 밥상 앞에 앉다가 멈칫했다. 밥그릇 밑에는 접힌 돈이 또 반쯤 물려 있었다. 어머니가 나가면서 두고 간 것이었다.

"제발 오빠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오빠 심정은 오빠밖에 몰라요. 얼마나 기가 막히고 미칠 것 같겠어요. 옆에서 자꾸 뭐라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말을 자꾸 할수록 오빠를 괴롭히고 속상하게 만드는 거라구요. 오빠는 누가 말을 안 해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다 아는 사람이에요. 오빠가 분한 것 삭이고 마음 돌릴 때까지 엄니는 그냥 기다리세요. 오빠 모르게 용돈 내놓으면서 기다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그날 아침에도 술기운으로 목이 타 자리끼를 마시려고 눈을 떴는데 밖에서 여동생이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다음부터 어머니는 며칠 간격으로 밥그릇 아래 용돈을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동생 윤자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는 눈길을 돌리고는 했다. 그 눈에는 슬픔과 함께 어머니의 말보다 더 절실한 애원이 담겨 있었다. 나복남은 그 돈을 밥그릇 아래서 빼내 방바닥으로 옮겨놓았다. 자신도 모르게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죄책감이 다시금 가슴을 쓰리게 했다. 무위도식하며 그 어렵게 번 돈을 축내고 있다니 ..... 그 생각만 하면 당장 천두만 아저씨를 따라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손가락 네 개가 뭉텅 잘려나가 자신이 보기에도 섬찟하게 흉한 손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곧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동안 그 갈등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아침을 대충 먹은 나복남은 막내 여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집을 보았다. 저녁 끓일 쌀은 없어도 도둑이 훔쳐갈 물건은 있더라고 못사는 산동네에는 좀도둑이 심해 집을 비울 수가 없었다. 집을 비우면 된장, 간장까지 퍼가는 것이 산동네였다. 그는 쪽마루에서 꽁초를 까서 말아 피우며 또 그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1차로 양성팔을 끌어들여야 하고..... 서로 손이 성치 않으니까 일을 빈틈없이 해내려면 한둘을 더 찾아내 힘을 합쳐야 하고..... 모두가 그 집 구조며 가족들에 대해서 샅샅이 알아야 하고..... 드라이버 하나로 창문이나 방문 따는 기술을 완전히 익혀야하고..... 필요한 장비들을 구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려면 서로가 최소한의 돈벌이를 해가며 자금을 모아야 하고 ..... 기왕 나선 김에 딴 스텐공장 사장들도 골라내 쓴 맛을 보여야 하고.....

나복남은 그 계획을 되풀이해 가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기 사장에서 끝나지 않고 보복 대상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좀 개는 것 같았던 하늘에는 다시 먹구름이 차며 빗방울이 후둑거렸다. 나복남은 자신의 가슴처럼 어두컴컴하고 칙칙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김두봉의 성공을 생각하면 자신의 신세가 더욱 한심하고 비참해졌다. 김두봉에게 군대에 가서 수송병과를 따내는 요령들을 가르쳐줄 때만 해도 그가 운전기술로 그렇게 성공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김두봉이 자신을 찾아온 것은 어엿하게 택시 한 대를 지닌 차주로서였다. 자기 택시 한 대를 가지고 직접 운전을 하는 것은 단순히 차주가 아니라 스페어 운전수까지 하나 부리며 실속 있게 돈벌이를 하는 당당한 사장님이었다. 자기 집 갖기만큼 어려운 자기 차를 갖게 되었으니 김두봉은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긴 셈이었고, 앞으로 두 대, 세 대, 네 대로 불려나가기는 한층 쉬운 일이었다. 그는 운수회사 사장님이 될 길로 들어서 있었다. 김두봉은 수송병과를 따내 그 누구보다도 운전을 열심히 배웠고, 운전이 날로 늘어가는 것이 신바람 나서 군대생활이 고달픈 줄을 몰랐다. 언제 손가락을 잘리게 될지 모를 스텐공장에서 벗어나게 해준 군대가 너무 고마워 열성을 다 바쳐 일했다. 그러다 보니 운전기술을 인정받게 되고, 사단장의 표창까지 받으며 제대하게 되었다. 트럭운전도 하고 택시운전도 하며 돈벌이를 하다가 만나게 된 기회가 월남 군수물자 수송이었다. 사단장의 표창장을 이력서 뒤에 붙인 덕이었는지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월남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돈을 착실하게 모아가지고 와 바라고 바라던 택시 한 대를 사들였다. 날마다 혼자서 운전을 다 할 수가 없으니까 교대할 운전수가 필요했다. 차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자신의 길을 열어주었고, 스텐공장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나복남과 함께 일하면 고마움도 갚고 믿을 수도 있었다. 김두봉은 이런 이야기 끝에 말했다.

"내가 한발 늦어버렸군요. 내가 좀 더 빨리 왔거나 형이 좀 더 늦게 다쳤어야 하는 건데."

사람의 팔자가 그렇게도 수월하게 필 수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김두봉을 보고 나니 자신의 신세가 더욱 참담해지고, 사장에 대한 원한은 더 한층 커졌다. 막내 여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나복남은 집을 나섰다. 그는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버스를 탔다. 한참을 달려 시가지에서 벗어난 버스에서 내려 그가 찾아간 곳은 사장네 집이었다. 그는 밖에 나올 때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사장네 집을 찾아갔다. 나복남은 대문 가까이에 이르러 언제나처럼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를 휘파람으로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담 너머에서 어김없이 개가 짖는 것이 아니라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쪽의 기척을 알아채고 어서 먹을 것을 달라고 친근감을 표시하는 소리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건빵 서너 개를 꺼내 침을 뱉었다. 그리고 그것을 담 너머로 던졌다. 곧 개의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래, 넌 이제 꼼짝없이 내 포로가 된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잘 구운 고깃덩이를 먹여줄 날이 올 테니까.’

나복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건빵에 침을 뱉는 것은 개가 자신의 냄새에 익숙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눈에 익을 대로 익은 사장네 집을 멀찌가니 떨어져 살피며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그 집은 어젯밤 꿈에 나타났던 그대로였다.

저 겹철조망을 끊어 없애야 할까, 꿈에서처럼 무엇으로 덮고 타넘는 게 나을까..... 철조망을 제거해도 그 밑에는 또 깨진 유리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지? 유리를 피하려면 어차피 덮을 것이 필요한데 ..... 저 철조망 위에다 덮을 것을 걸치면 담 높이가 그만큼 높아지는 것 아닌가.....?’

먹구름이 꿈틀거리는 하늘에서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나복남은 양성팔을 찾아가려고 발길을 서둘렀다. 양성팔은 나와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좌판을 벌렸던 흔적도 없었다.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몰라 안 나온 것 같았다. 긴 장마철이 그나마 양성팔의 장사를 망치고 있었다. 코 묻은 돈을 버는 그가 끼니나 제대로 때우고 있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장사치고 안 남는 게 없더라고, 이게 보기는 한심해 보여도 이익은 쏠쏠해. 10원어치로 치면 원가는 2원도 안 들거든. 코흘리개들 상대라 액수가 크지 않아서 그렇지 하루 벌어 하루 먹기는 심심찮아."

양성팔이 햇볕에 그을은 꺼칠한 얼굴로 기운 없이 웃으며 한 말이었다. 나복남은 장마가 완전히 걷혀야 양성팔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무겁게 발길을 돌렸다.

"다 운수소관이지 뭐. 내가 배운 것 없고 가난하니 어쩌겠어."

"세상인심이 다그리 야박한데 어쩔 수 없잖아. 그럭저럭 한평생 살다 죽는 수밖에."

"나는 뭐 사람 아닌가?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야 말로 다 할 수가 없지.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어. 그저 참고 살 수밖에 없지."

"나도 꿈이 있었어. 돈을 열심히 벌어 내 자식들은 꼭 대학까지 가르치고 싶었던 꿈이. 근데 이젠 고등학교까지도 가르치지 못하게 생겼으니 다 틀려버린 인생이지."

"? 사장네 집을 찾아갔어? 어쨌든 깡 좋으네. 난 그런 생각 하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속은 좀 시원했겠네."

"거 봐. 경찰도 다 있는 놈들 편이지. 이 세상에 우리 같은 놈들 편들어 줄 사람들이 어딨어. 우리같이 못난 것들은 등을 비빌래야 비빌 데가 있어야 어찌해 보지. 당하고만 사는 이놈의 신세 참 비참해. 새끼들이나 없어야 죽고 말지."

그동안 차츰차츰 변해온 양성팔의 말이었다. 자신은 양성팔의 마음에서 분이 끓어오르고 복수심이 일어나도록 살살 부채질을 해왔다. 사장이 얼마나 잘 사는지 거듭 들으며 양성팔의 태도는 처음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씨팔, 그런 새끼들한테 왜 벼락은 안 치지.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 깔아뭉개면서 탱자탱자 잘사는 그런 놈들이 진짜 날강도들인데 말야."

얼마 전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런 놈들을 어떻게 해버릴 수 없을까?' 하는 식의 말이 나올 수 있었다. 그때가 기회였다. 그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할 작정이었다.

끈질긴 독감처럼 장마는 며칠을 더 비를 질금거리다가 물러갔다. 아침부터 날이 활짝 갠 것을 보며 나복남은 안달이 났다. 막내 여동생이 돌아오자 어서 양성팔을 만날 욕심으로 그는 사장네 집 거치는 것을 빼 먹었다. 개라는 것이 영리해서 며칠 건너뛰어도 휘파람 소리를 용케 알아차렸다.

나복남은 사잇길로 접어들면서 길 건너편 저쪽에 볼품없는 좌판을 벌여놓고 또 뽑기 설탕과자를 만들고 있는 양성팔을 금세 알아보았다. 그는 너무 반가워 길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하면서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있던 오른손을 빼 두 팔을 흔들었다가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그리고 오른손을 얼른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발이 뛰는 것에 맞추어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빼게 된 것이다. 밖에 나오면 언제나 오른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달리 쓸모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는 것이 싫어서였다. 시내버스나 사람 많은 데서 오른손을 내놓고 있으면 사람들은 으레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불량스러운 사람을 피하듯 슬금슬금 멀어지고는 했다. 그런 것을 느낀 다음부터 밖에 나을 때는 오른손을 꼭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장마 끝나는 건 제때 알았네?"

나복남은 인도로 올라서며 인사를 건넸다.

", 왔어? 굶어죽지 않으려고 하늘만 보고 살았으니까."

고개를 치켜든 양성팔이 나복남을 올려다보며 서글픈 느낌의 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장마 땜에 공치는 날이 너무 길었는데 괜찮아?"

나복남은 양성팔의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담뱃갑을 꺼냈다.

"굶어죽으면 안 되니까 구슬 꿰기를 했지 뭐."

양성팔은 나복남이 내민 담배를 뽑았다.

"구슬 꿰기?"

", 그런 게 있어. 여자들이나 들어앉아서 하는 골 빠지는 돈벌인데, 비에 갇혀 날마다 그냥 빈둥거릴 수는 없잖아. 난 그래도 손가락이 세 개는 남았으니까 구슬 꿰기는 해먹을 수 있는 거지. 여자들 핸드백에도 달고, 옷에도 달고 하는 자디잔 구슬을 꿰는 건데, 일도 고되지만 벌이도 드럽게 적어. 나 형은 어떻게 지냈어?"

"나야 뭐 없는 돈에 쐬주나 까면서 날마다 사장한테 통쾌하게 보복하는 꿈만 꿨지 뭐."

나복남은 양성팔을 힐끔 쳐다보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통쾌하게 보복하는 꿈?"

양성팔은 담배를 빨며 나복남을 빤히 쳐다보았다.

", 양 형도 만날 수 없고, 집에서 노닥거리기 답답하고 해서 동시상영관에서 영화 두 편을 봤거든. 근데 한 편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복수전을 펼치는 영화였어. 그 사람은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방을 해치우고 돈까지 엄청나게 차지해서 어디로 사라지는 내용인데, 처음서부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해. 특히 그 영화가 근사하고 멋들어진 건 말야, 대개 그런 영화들은 신나게 잘 나가다가 끝에 가서는 꼭 범인이 경찰에 잡히고 말잖아. 근데 그 영화는 정반대로 주인공이 복수에 완전히 성공하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유유하게 사라져버리는 거야. 그게 얼마나 통쾌해, 글쎄. 그래서 우리 그런 식으로 복수하면 되겠구나 하고 날마다 그 생각만 하고 지낸 거야."

나복남은 미리 준비한 말을 그럴듯하게 엮어냈다.

"그게 영화니까 그렇겠지 뭐."

양성팔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나복남은 그만 맥이 빠지고 몸이 달았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이런 말 못 들었어? 경찰이 범인을 잡아 해결하는 사건보다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이 훨씬 더 많다고 말야. 준비가 엉성해서 그렇지 준비만 철저하면 절대로 실패하는 일은 없어."

나복남은 양성팔의 입에서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속마음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말 이따가 딴 데 가서 해."

양성팔이 주위를 빨리 둘러보고는 나복남을 응시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눈빛을 보며 나복남은 재빨리 대꾸했다.

", 알았어. 내가 쐬주 한잔 살게."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저쪽 교문에서 몰려나오고 있었다.

"저기 손님들 몰려오니까 나 길 건너에 가 있을게."

"그래, 기다리던 대목을 봐야지."

양성팔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나복남은 길을 건너가며 어금니를 맞물고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오른손은 잡히는 것 없이 허전하게 텅 비어 있었다

 

 

36. 군대식 날림

"어머나, 할머니! 난 몰라, 난 몰라 할머니!"

허미경은 소리치며 헐레벌떡 거실로 뛰쳐나왔다.

"아니 왜 그러세요?"

마루를 닦고 있던 식모아주머니가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안돼, 안돼, 할머니..... 할머니....."

허둥지둥 현관으로 내닫던 허미경은 안방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지갑을 들고 나오는 허미경에게 아주머니가 다시 물었다.

"아줌마, 라디오..... 라디오 들어봐요. 큰 탈 났어요."

"라디오요? 어디 가세요?"

식모아주머니가 걸레를 던지며 황급히 뒤따라 나갔다. 그러나 허미경은 벌써 대문을 나서고 있는 중이었다

"왜 저리 정신이 하나도 없는고..... 홀몸도 아닌데 조심해야지. 사장님이 아시면 펄쩍 뛰실 텐데."

혼자 흔들리는 철 대문을 바라보며 식모아주머니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마포 와우아파트 빨리 가주세요, 빨리."

허미경은 택시에 올라타며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4월 초순인데도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골목에서 큰길까지 마구 뛰어나온 탓이었다.

"예에 좋시다. 빨랑 가봅시다. 비싼 택시 타는 거야 급하니까 타는 건데, 그래도 타는 사람마다 빨리 가자, 어서 가자 야단이니 이거 참 몸이 열둘이라도 모자라요."

젊은 운전수가 차를 거칠게 몰아대며 타령조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허미경은 앞자리의 등받이를 꼭 붙들고 앉아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할머니와 동생들이 ..... 그녀는 애가 바작바작 타고 있었다.

"긴급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긴급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던 와우아파트가 갑자기 붕괴되었습니다. 산비탈에 서 있던 아파트가 갑자기 무너진 것은 부실공사가 그 원인으로 추정되는 바, 현재로서는 자세한 피해상황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피해실태가 드러나는 쪽쪽 신속하게 소식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허미경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소리를 다시 듣고 있었다.

안 돼 ! 안 돼 ! 안 돼 .....!’

허미경은 속으로 부르짖으며 온몸이 비비꼬이고 있었다. 할머니와 동생들이 일을 당했으면 ..... 택시는 와우산 초입에서 통제되었다. 경찰들이 깔려 아파트로 가는 차들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아파트가 다 무너졌어요?"

택시에서 내리기 바쁘게 허미경이 물었다.

"아니오."

경찰이 차를 향해 손짓하며 호루라기를 문 채 대답했다.

"몇 채나 무너졌어요?"

"나도 잘 모르니까 그건 저쪽으로 가서 물어봐요."

경찰이 아파트 쪽으로 가리켰다. 허미경은 월남치마를 거머잡으며 뛰기 시작했다. 아파트로 오르는 비탈길은 사람들로 어지러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왁자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앰뷸런스와 소방차들이 사이렌을 울려대며 소란을 더 부풀리고 있었다. 허미경은 아파트까지의 중간 지점에서 발길이 막히고 말았다. 일반인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경찰이 막고 있었다.

"아파트가 몇 채나 무너졌어요?"

눈물로 핏발이 성성해진 눈으로 허미경이 물었다.

"한 채요."

"몇 동인데요?"

"거 참 라디오 좀 들을 일이지. 15동이오, 15."

", 하느님!"

허미경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다행히 15동이 아닌가 보군요?"

경찰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에, 할머니는 13동이세요."

가슴께에 두 손을 맞잡고 있는 허미경의 얼굴에는 마침내 감격의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눈에서는 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편, 경찰과 소방대로 꾸려진 구조대 말고도 붕괴 현장까지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 신문사의 기자였다.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데. 얼마나 엉망진창 날림으로 지었으면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이 저런 식으로 폭삭 무너져버릴 수가 있나 그래."

"글쎄 말야, 명색이 콘크리트 건물인데 건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군. 저건 돼지가 장화 신고 지나간 군대의 국처럼 시멘트가 장화 신고 지나간 모래건물이었어."

". 바로 그거야. 우리가 여기서 그냥 보아도 푸석푸석해 보이는 게 시멘트 배합기준이 전혀 안 지켜진 게 표가 나잖아."

"언젠가는 이런 대형사고 터질 줄 알았어. 원칙과 기준을 무시하고 무작정 군대식으로 적당적당, 빨리 빨리로 몰아댔으니 결과가 뻔하잖아. 기세 좋던 '부르도자' 시장님께서 결국 자기 부르도자에 치이셨어."

두 기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옆에 서서 원병균은 묵묵히 아파트 붕괴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기자의 말마따나 콘크리트 강도가 얼마나 약했던지 무너진 5층 아파트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원병균은 연달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구조작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파트가 심하게 파괴되면 파괴될수록 그 안에 있었던 주민들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파트는 하필이면 아침 630분께 무너졌다. 그 시각은 주민들 거의가 막 잠에서 깨어나거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두어 시간만 늦게 무너졌더라도 어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를 갔을 테니 인명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 14가구 사람들은 한순간에 날벼락을 맞아 참혹하게 부서진 콘크리트더미 속에 묻히고 말았다.

원병균은 여러 가지 정황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말을 잃고 있었다. 산비탈은 45도가 족히 될 만큼 경사가 심했다. 그런 급경사에 단층짜리 주택도 아니고 5층이나 되는 아파트를 세운 것이다. 최신 장비나 최신 기술이 있더라도 신경 쓰고 조심해야 할 난공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모든 자재들을 등짐으로 져 올리고, 콘크리트 반죽도 삽으로 적당적당 해치우는 형편에 그런 난공사를 한 것이다. 땅값 비싼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평지보다 몇 배 더 강하고 튼튼하게 공사를 하도록 규정을 정하고, 감시했어야 한다. 그러나 산동네마다 솟아오르는 시민 아파트들이 너무 졸속이고 날림이라는 비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르도자' 시장은 그런 우려와 비판을 그야말로 불도저처럼 깔아뭉개며 일을 몰아붙여 왔던 것이다.

"원 기자, 어떡할 거야? 난 사진 다 찍었으니까 빨리 들어가야겠는데."

사진기자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 송 기자 먼저 들어가서 사진작업 해가지고 넘겨. 1차 취재해서 전화로 기사 불러대고, 구조작업이 어떻게 되는지 지키고 있다가 또 기사를 보충해야지."

원병균은 사진기자에게 빨리 가라고 손짓했다.

"알았어 . 구조작업도 담아야 하니까 딴사람 또 내보내라고 내가 전화부터 걸고 회사로 들어갈게."

"그거 좋겠어. 어서 가."

구조작업에 동원된 장비라는 것이 삽과 곡괭이, 들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 볼품없는 도구들은 콘크리트더미 속에 묻힌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었다.

"저래 가지고는 구조가 빨리 되기 어렵겠는데. 지금까지 취재한 걸 가지고 먼저 기사 긁는 게 어때?"

기자 하나가 원병균을 쳐다보았다.

"석간에 기사 띄우자면 그럴 수밖에 없지 뭐. 근데 시청 쪽에서는 뭐 더 캐낼 게 없을까?"

원병균은 그쪽을 한번 더듬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눈치를 보였다.

"그야 밑져봐야 본전이니까 한 번 더 만나서 나쁠 것 없겠지."

다른 기자가 수첩을 꺼내며 대꾸했다. 그들은 사고대책본부로 갔다. 그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죽고 풀죽어 있었다. 거만하고 불친절하기로 중앙부서 공무원들 뺨칠 정도라고 소문난 시청 직원들은 비로소 공무원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공사를 재하청 받은 토목업자 연락처는 알아냈습니까?"

안경 낀 기자가 추궁하듯 물었다.

"아니 아직 ....."

"공무원들 전매특허가 '안 된다', '모른다'인데, 이것도 알려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오리발 내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키 껑충한 기자가 더욱 노골적으로 불신감을 드러냈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자가 빨리 잡혀야 우리 입장이 이렇게 난처해지지 않는걸요."

"도대체 담당 공무원들은 뭘 하고 있는 겁니까? 하청업자가 재하청을 해먹은 것도 모른다. 하청업자가 부도를 내고 도망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담당 공무원들의 임무가 공사가 잘되고 있는지 어떤지 감독 감시하는 건데, 이것도 모른다. 저것도 모른다. 그럼 도대체 아는 게 뭐가 있습니까? 국민 세금으로 월급 꼬박꼬박 받으면서 이런 직무유기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 이 모양이니 아파트가 무너지는 거야 당연한 결과지요."

안경 낀 기자가 속사포로 말을 내갈겼다.

"거 말씀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한 공무원의 어조가 삐딱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나쳐요? 사실 그대로 말한 거지 뭐가 지나치다는 겁니까? 내가 과장을 했습니까, 없는 말을 꾸며대기라도 했습니까? 자아, 말이 나온 김에 딱 깨놓고 어디 한번 따져봅시다. 아까 내 신분은 밝혔으니 어디 댁 신분부터 알고 봅시다. 자아, 대세요. 어느 부서 누굽니까?"

안경 낀 기자가 취재수첩을 펼치고 만년필을 빼들었다.

"아 이거 왜 이러십니까. 우리도 속이 상하고 마음이 급하다 보니까 말이 불쑥 잘못 나간 거 아니겠습니까. 기자 양반들께서 좀 이해해 주십시오. 아파트공사는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벌어지고, 저희들 인원은 모자라고, 여기 공사가 끝난 지는 오래되고 해서 그런 것까지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 저희들 불찰이었습니다."

재빨리 다른 공무원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들었다.

", 애들 말대로 아더메치네, 이거. 공무원이 뭐 즈네들 밥인 줄 알아."

아까 그 공무원이 동료들에게 등을 떠밀려 자리를 피해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김 형 관둬, 관 둬. 그 고질병들 따진다고 고쳐지겠어? 어차피 특효약 없는 형편이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구."

원병균은 안경 낀 기자에게 눈짓했다.

"나도 공무원들 행투에 대해선 포기한 지 오랜데, 잘못했으면 입 닫고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왜 나서, 나서긴. 염치도 양심도 없이 그리 뻔뻔스러운 것을 보면 그만 피가 곤두서."

안경 낀 기자가 취재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장님은 어찌 된 겁니까? 지금까지도 여기 나타나지 않다니, 이거 일부러 피하는 것 아닙니까?"

느닷없는 원병균의 공격이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 이 사건으로 긴급회의를 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곧 나오실 테니 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한 공무원이 재빨리 발라맞추었다.

"뭐 꼭 만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오. 어차피 그 수명 다했으니까."

원병균이 돌아서며 던진 말이었다.

"원 형, 그거 무슨 소리야? 미안하지만 그리는 안 될 걸?"

키 큰 기자가 김칫국 먼저 마시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이 형이야말로 무슨 소리야?"

원병균이 마땅찮아하는 눈길로 뒤를 돌아보았다.

"몰라서 그래? 그 사람에 대해 저 푸른 집의 신임과 총애가 대단하다는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소문이잖아."

"그야 그렇더라도 이번 사건을 그냥 우물쭈물 덮고 넘어가지는 못할 걸. 사망자가 적어도 몇 십 명 나올 판인데, 자칫 잘못했다간 민심 다 잃게 된다구."

안경 낀 기자가 끼어들었다.

"그렇긴 해. 3선 개헌 날치기로 가뜩이나 불신당하고 있는 판에 이런 대형사고까지 터졌으니 박 정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당연하지. 이번 일 잘못 처리했다가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이 당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면 그건 오히려 잘된 일이잖아."

"허나 누구 좋으라고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그쪽에도 머리 잘 굴리는 인물들이 수두룩하니까 정치적으로 손해가 날 장애물은 제때 제거를 하겠지. 부르도자 시장께서는 바로 그 장애물의 운명에 처하게 된 거야."

"근데, 그 사람 물러간다고 군대식의 적당적당, 빨리빨리가 고쳐질까?"

"거 무슨 태평스러운 잠꼬대야? 다시 군 출신이 시장에 앉으면 그게 그 타령이고, 민간인 출신이 앉는다 해도 그 군대식은 벌써 10년 동안이나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해 왔고,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그 적당적당과 빨리빨리에 길들여지고 몸에 배고 해서 습관화되어 있어."

", 이 사람들 정권이 벌써 10년이 됐나? 세월 참 허망하게 빠르네 그래, 붕괴된 이 아파트는 군부정권 10년의 상징 아니겠어? 군인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군 출신들이 국가와 사회의 거의 모든 조직들을 장악하고 무엇이든 서둘러대고 우격다짐이고, 벼락치기 검열 받는 식으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전시효과를 노리다 보니 이런 결과가 오는 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니야?"

", 아주 핵심을 찌르는 건데, 그런 점들을 지적해 가며 기사를 작성하면 어떨까?"

"이거 왜 이래? 기사를 쓰려는 거야, 논평을 쓰려는 거야? 괜히 죽도 밥도 아니게 만들지 말고 사회부 기자라는 직책을 명심하라구."

"그래, 그래서는 사건기사가 안 되지.....그럼, 이런 시도는 어떨까? 이번 사건을 말야, 군사정권 아래서 파급된 그런 문제점들을 논리적으로 지적하고, 시정하도록 하는 계기로 삼으면 말야. 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해서 외부 필자들을 동원하면 권위도 있고 설득력도 있어서 효과가 크잖겠어?"

"지금 달나라에 살고 있어?"

"무슨 소리야?"

"그런 일 중정에서 표창하겠지?"

"빌어먹을, 난 또 무슨 소리라구."

"그건 군부정권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헐뜯는 일인데 중정의 비위가 얼마나 상하겠어. 교수들이고 신문사 간부고 다 눈치 하나는 기막히게 빨라 중정 비위 거스르는 일에는 단 한 명도 나서지 않을 테니까 어서 꿈 깨시지."

"그래, 난 아직 철이 덜 들었어. 가끔 엉뚱한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니 말야."

"아니, 아직 순수하다는 증거겠지. 실행은 못하더라도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건 젊은 사람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지."

"글쎄 ..... 하여튼 그 군대식이라는 게 원칙과 상식을 무시한 악습인 게 분명한데, 이렇게 말을 못한 채 언제까지 가게 될까?"

"그걸 누가 알아. 어쨌든 이런 토론은 다음에 더 하기로 하고 우선 기사부터 작성하자구. 잘못하면 시간 놓치게 생겼어."

"맞어, 시간 없어 !"

그들 셋은 제각기 취재수첩을 꺼내며 등 돌려 앉았다. 저 건너편에서는 구조대들이 분주하게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원병균은 자장면이고 국밥이고 닥치는 대로 사먹으며 현장을 지켜야 했다. 신문사의 지시가 아니라 해도 시체와 부상자들이 줄줄이 잇대어 나오는 현장을 떠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세월 따라 신문기자가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허술한 장비 때문에 구조작업은 짐작대로 밤을 새워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원병균은 동료 기자들과 함께 소주 몇 잔에 설렁탕을 먹고 나서 파출소를 찾아갔다. 설렁탕집에는 웃돈이 너무 비싸 재산 목록으로 취급되는 전화기가 없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밤낮으로 열창해 대는 '잘살아보세'에 맞추어 경기가 출렁거리며 회사들도 수없이 생겨났다. 그러나 전화 설비는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는 개인끼리 사고 팔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서로의 이익을 놓고 뜻이 맞은 사람들 앞에서 법이란 허수아비만도 못한 것이었다.

"여보, 나 여기서 밤새야 해."

"어머머, 또요? 나 곧 갈게요."

전화 속에서 박영자의 목소리가 급했다.

"뭐 하러 와, 복잡하게."

"알았어요. 전화 끊어요."

원병균은 아내를 보듯 송수화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내는 아직도 신혼인 것처럼 당장 밤 추위를 막을 옷을 가지고 나오려는 것이었다. 이게 전화가 있어서 생기는 병통이었다. 기자 월급 타가지고는 전화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고, 아내가 장인을 졸라 얻어낸 선물이니 부자 처가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장인 생각이 나자 또 그 소문이 떠올라 원병균은 얼굴을 찌푸렸다. 장부호색이고, 열 계집 싫어하는 남자 없다고 합리화해 가며 여자놀이 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하필이면 나이 어린 여비서를 건드려 임신시킨 데다 들어앉히기까지 했으니 창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소문은 경제부 기자들을 통해 신문사 안에 퍼졌고, 어떤 기자들은 술 취한 척하며 확인하려 들기도 했다. 아내의 체면과 자존심을 생각해 입도 뻥끗하지 않고 처남 박준서에게 물었었다.

"그냥 모른 척해 둬. 그건 아무도 못 말리는 아버지 주특기니까, 아버지가 뭐라시는지 알아? 앞으로도 아들이 스물은 더 있어야 된대. 이런 식으로 회사가 자꾸 불어나게 되면 그거 하나씩 떼어 맡길 아들놈들이 필요하잖아. 너도 그 쥐꼬리만한 월급 받으며 기자라고 헛바람 일으키고 다니지 말고 일찌감치 폼 바꿔서 실속 차리는 게 어때?"

",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마."

원병균은 가차 없이 무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내용의 말은 이미 장인이 했었다. 아내만이 일절 모른 척하며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구조작업은 밤을 꼬박 새우며 진행되었지만 다 끝내지 못했다. 다음 날 하루 종일을 바쳐 해질녘이 되어서 겨우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사망 33, 중경상40, 73."

원병균이 현장을 벗어나며 취재수첩에 적은 것이었다. 그때 이미 '부르도자' 시장은 사표를 낸 다음이었다.

"2년 전 여의도 개발로 건설의 영웅, 새 서울의 신화가 되셨던 그 위대한 부르도자 시장님께서 마침내 추락하셨군. 이제 심심하고 좀이 쑤셔서 어떻게 살지?"

키 큰 기자가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어떻게 살긴? 수필 쓰며 살지."

안경 낀 기자가 말을 받았다.

"수피일 .....?"

", 수필 몰라, 수필? 꼭 영어를 써야 되겠어? 에세이 말야 에세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그분이 수필가이시니까 수필 쓰시며 살면 된다 그거지."

"이 사람 이거 무슨 헛소리야, 이게."

"이봐, 사회부 기자라고 무식한 소리 작작 좀 하구 문화부 쪽 소식도 들어가며 교양을 좀 넓히라구.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정식회원이시고, 대한민국 문인이시다 그거야."

"뭐야?"

"그래, 몇 년 전에 수필집을 낸 일이 있었던 것 같군."

원병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구 참, 잘들 놀아난다."

키 큰 기자가 침을 내뱉었다. 조사단의 긴급진단에 따르면 서울 시내 서민 아파트의 3분의 1 정도가 날림공사로 붕괴 위험이 있다는 거였다. 공사가 그처럼 날림이 된 원인은 다 짐작했던 대로 업적 과시를 위한 성급한 사업 추진에다가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겹쳐져 있었다. 시멘트 배합 상태가 정상의 2분의 1밖에 안 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예정된 기일 안에 아파트를 준공시키려고 얼음이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도 시멘트 작업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공무원들이 잇따라 쇠고랑을 차는 모습이 신문마다 실리면서 그 사건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청장이나 그 밑의 과장 정도만 쇠고랑을 찰 뿐 정작 시정의 총책임자인 시장은 자리를 물러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원병균은 몇 번을 망설이고 생각을 되짚고 하다가 결국 박준서를 만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믿을 수 없는 소문을 자꾸 들으며 기분 나쁘고 속상하는 것보다는 본인을 직접 만나 확인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7공자라는 것 알지?"

원병균은 술집에 자리 잡자마자 박준서에게 물었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말버릇을 쉽게 고치지 못하고 손위 처남에게 옛날 친구 시절의 말투를 그대로 살고 있었다. 장인 앞에서는 어떻게 어물어물 말을 높이는 시늉을 하기도 하는데 단둘이 있게 되니 옛 말투는 거침없이 나왔다.

", 나한테 취재하려고?"

박준서는 양주잔을 들며 방긋 웃었다.

"그따위 게 뭐 장한 거라고 취재를 해. 한 가지 확인하려는 거야 너 그 크럽에 들었어, 안 들었어?"

원병균은 박준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심각하고 차가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박준서는 원병균을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긴. 말한 그대로지."

"허 참, 미친놈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이냐?"

박준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풀썩 어깨웃음을 흘렸다.

"아니면 다행이야. 신문사 안에서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 속에 네 이름이 오르기도 하고 빠지기도 해서 확인하는 거야."

원병균은 안도하는 것처럼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짜이식, 별게 다 걱정이로구나, 우리 4, 19세대가 엉망으로 변절하고 타락하고 있다고 말들이 많은데, 내가 그런 식으로 개판이 될 수는 없잖니? 명색이 4, 19부상자라는 자존심이 있지."

"너 말하는 거 보니까 그 7공자라는 것들 노는 꼴 다 아는 모양이구나? 떠도는 소문이 사실 그대로냐?"

"소문이 어떤데?"

"영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돈 잘 버는 재벌들 아들 일곱이서 값비싼 외제 승용차 몰고 다니면서 날마다 최고급 유흥업소에서 흥청망청 돈을 뿌려대고, 예쁜 여배우들 골라 사냥을 일삼고, 카지노며 경마며 판돈 큰 노름은 안 하는 게 없고, 두세 명씩 딸린 비서들은 도련님들이 매일 싫증 느끼지 않고 신나게 놀고 즐길 수 있는 스케줄을 짜내느라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서?"

", 꼭 중정이 나서서 조사라도 한 것 같구나. 나하고는 나이 차이가 나서 상대하지 않으니까 자세하게는 모르겠는데, 대충 뭐 그런 식으로 거들먹거리며 설쳐대는 건 사실인 모양이야."

"이런 제기럴. 그 사람들이야 젊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그 부모들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아? 돈으로 아주 자식들 망치기로 작정들 한 모양이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원병균의 얼굴이 구겨지고 있었다.

"기자 나으리 괜히 열 내지 마셔. 벼락부자들한테는 그렇게 써 없애는 돈이 별것도 아닐 거고, 그게 사업가 기질 키우는 공부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하아, 내가 실례했구먼. 그런 고차원의 유희인 것을 모르고. 하여튼 가관이야. 차관이다 융자다 특혜받고 생겨난 졸부들이 노는 꼴이라니. 이 나라 장래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만만세야."

 

 

37. 나를 죽이고 가마

전태일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삼각산 기슭의 임마누엘 수도원에 좀 가 있기로 마음을 정했다. 뭐 한가하게 기도나 하며 지내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기도원 옆의 교회 신축장에서 인부로 일하며 밥을 먹으려는 것이었다. 그건 또한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노동 속에서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아이고 이것 좀 봐요. 이 석유풍로, 헛소린 줄 알았더니 창길이가 약속을 지켰구랴. 이 비싸고 귀한 걸 글쎄."

철거반에 헐렸다가 다시 짓고 하는 무허가 판잣집들이라 서로 울타리도 없이 사는 옆집 아주머니의 신바람 난 목소리였다.

"아이고 참 잘됐네요. 이젠 그 후끈후끈한 연탄 화덕 안 끼고 여름 나게 생겼으니. 효자가 따로 없네요."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쏠려 있는데 어머니의 이런 대꾸로 전태일의 마음은 그만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 효자는요. 효자로 치자면 태일이가 효자지요. 어머니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끔찍한데요."

서로 인사치레로 나누는 덕담에 불과했지만 밖에서 오가는 이런 말을 들으며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진정으로 면목 없고 죄스러웠다. 자신은 인쇄공인 김창길에 비해 돈벌이를 너무 못하고 있었다. 석유풍로는 여름철에는 참 긴요한 물건이었다. 삼복더위 속에서도 화끈화끈 열을 내뿜는 연탄 화덕을 지니고 사는 건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 먹기 위해서였다. 연탄에 불을 붙이기 어려우니 공기구멍을 틀어막은 채 연탄을 계속 피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탄에 비해 필요할 때만 심지에 불을 붙여 쓰는 석유풍로는 간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경제가 좀 나아지면서 그 석유풍로와 석유난로는 3-4년 전부터 일본에서 건너오기 시작해 국산품이 생산되면서 단박에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물건이었다. 석유난로는 겨울 한 철 필요한 것이었지만 석유풍로는 계절을 가릴 것 없이 어느 집에서나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저축이라고는 없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비싼 석유풍로는 텔레비전이나 냉장고처럼 함부로 탐낼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동네 아주머니들은 한창 유행하고 있는 '스텐' 그릇 일습을 갖추어 '호마이카상'에 받쳐 밥상을 차리고 싶어서 '스텐 그릇계''호마이카 계'를 짜듯 '석유풍로 계'도 조직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석유값이 비싼데 이런 호사가 나한테 어울릴라는지 모르겠네."

김창길의 어머니는 이런 말까지 해가며 맘껏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전태일은 귀를 막았다. 김창길의 어머니가 행복을 느끼는 만큼 자신의 어머니는 불행을 느낄지도 몰랐다. 그는 이런 순간이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자신도 그저 평범한 재단사로 살았더라면 지금쯤 25천원의 월급을 받을 것이고, 석유풍로를 진작 어머니에게 사다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운동에 나서다 보니 어머니는 그 흔한 계 하나도 들 수 없는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봐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말 있잖아. 그게 그저 될 일이 아니라구. 눈치껏 요령껏 월급 챙기면서 한 10년 판 익히고 발 넓혀서 자기 사업 시작할 꿈이나 꾸라구. 괜히 아무 실속도 없이 그런 일에 앞장서고 나섰다가는 업주한테 찍혀 밥줄 끊기고, 더 소문나면 그 업계에서 완전히 따돌림당해 발붙일 데가 없게 된다구. 배운 것도 없고, 돈도 빽도 없는 사람은 그저 모나지 않게 적당적당 사는 게 최고야."

전태일은 자신보다 네댓 살이 많은 김창길의 말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인쇄소 식자공인 김창길의 꿈은 보세가공물로 더욱 들뜨고 있었다. 일본 쪽의 보세가공은 봉제품만이 아니라 인쇄물까지 밀려 들어서 인쇄소들은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 덕으로 야근비도 보너스도 제때 제때 받게 되니 김창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김창길만이 아니었다. 평화시장의 재단사들도 거의가 빵틀에서 국화빵 구워내듯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입을 모았고,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니 적당적당 살자고 했다. 그런 말들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당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보니 자신은 바위에 부딪쳐 볼썽 사납게 깨진 계란이었다. 자신이 근로기준법에 맞는 공장을 만들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닌 것이 알려지면서 사장은 그날로 밥줄을 끊어버렸다.

"이봐, 혼자 잘난 척, 똑똑한 척 설치지 마.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더 까불면 이 바닥에서 영영 발 못 붙이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두라구."

사장의 말은 괜한 엄포가 아니었다.

"저 불평분자. 골치 아픈 놈."

"회사 엎어먹을 빨갱이 같은 놈."

이런 말이 사장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그 흔하던 일자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전태일은 너무나 당황했다.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어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사장들의 그 신속하고 냉정한 단결이 너무 놀라워 당황했던 것이다. 사장들은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 재빠르게 한통속이 되어 사정없이 적을 몰아내는 위력을 발휘했다. 사장들의 그런 단결이 바윗덩어리라면 단결을 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공원들은 산산이 흩어져 있는 모래알에 지나지 않았다. 돈은 이 세상에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사장들은 그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강자들이었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공원들은 그 위력 앞에서 꼼짝달싹을 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있었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굶게 되는 그들은 감히 사장을 상대로 근로환경 개선 투쟁이나 임금인상 투쟁 같은 것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다 조금만 이상한 기미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똘똘 뭉쳐 있는 사장들이 가차 없이 몰아내버리는 판이니 공원들은 더욱 주눅 들고 기죽을 수밖에 없었다. 강자와 싸우려면 약자들은 무조건 철통같이 뭉쳐야 한다. 평화시장의 공원들은 사장들의 서른 배가 넘는다. 그들이 일치단결하여 들고 일어나면 모든 걸 일시에 고칠 수 있다. 전태일은 또 속으로 부르짖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흔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평화시장에서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게 되고, 어렵사리 결성했던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 마저 허물어지게 되면서 그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몇 년에 걸쳐서 자신이 해온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했지만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허송세월을 하거나 헛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고, 사회가 어떻게 얽혀 돌아가는지를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그 경험과 깨달음이 새로운 길을 여는 길잡이 구실을 했다.

"쯧쯧쯧..... 자네가 온갖 고생 다 하고 살아서 밑바닥 인생살이에는 환해도 저 위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캄캄했구먼 그려. 나라가 만든 법이니 공무원들이 잘 지키게 할 거라고 믿었다구? 허허허..... 다 자네 맘 같은 줄만 알았던 게지. 공무원? 그거 당최 못 믿을 인종들인걸. 정치하는 사람들보고 거짓말 밥 먹듯이 하고, 속이 시커멓다고 욕들 하는데, 더럽기로는 공무원들도 그에 못지않을 걸. 남의 돈 안 먹고는 못사는 공무원들이 있는 사람들하고 한통속인 거야 당연지사 아니겠나 그거야.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 온 거니까 서운해 할 것도 없고 분해 할 것도 없는 일이네. 세상은 그리 요지경 속이니 자네도 괜히 헛김 빼지 말고 그냥저냥 살어. 자네 생각이 장하긴 한데, 혼자 힘으로 될 일이 아니야. 괜히 손해만 보고 말이야. 남 먼저 실속은 차리지 못하고 살더라도 손해를 보고 살진 말아야지. 내 말 알겠냐?"

아버지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지퍼상점 아저씨의 말이었다.

"모르겠어요 공무원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부패해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런 일까지 그렇게 잘못 처리할 줄은 몰랐어요. 참 어이없고 기가 막혀요. 정말 너무나 실망했어요."

"글쎄 기막힐 것도, 실망할 것도 없어. 악독한 포주들 돈 먹고 불쌍한 창녀들 몰라라 하는 게 경찰이고 공무원이라니까 "

"알았어요, 아저씨, 교통순경들이 운전수들한테 돈 뜯어먹고, 세무서 공무원들이 아저씨 같은 사람을 등쳐먹는 거야 다 알지요. 헌데 우리 같은 일까지 그렇게 짝짜꿍이 돼서 돌아가는 줄은 몰랐지요."

전태일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게 괜히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나왔겠냐? 돈 있고 힘 있는 것들이 그리 한통속으로 짜고 돌아가니 자네 같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이 될 게 뭐야. 그러니 자네도 이젠 맘 그만 돌려먹어. 자식이나 다름 없는 자네가 헛기운 빼면서 고생하는 것 딱해서 더는 못 보겠구먼."

"....."

", 왜 대답이 없어?"

아저씨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전태일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돈이 좋아도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부려먹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린 기계가 아니에요."

전태일은 속마음을 한풀 감춘 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몇몇 친구에게 하곤 했던 '한두 목숨 없어져야 근로조건 개선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되씹고 있었다.

"그래, 자네 말이야 백 번 천 번 옳다니까. 허나 눈앞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걸 직접 당해봤으니 잘 알잖아. 어쩌겠나, 칼자루 쥔 사람들은 따로 있으니. 우선 당장 목구멍에 풀칠해야 하니까 아니꼽고 더럽더라도 참고 기다리게. 그리 살다 보면 차차 좋아질 날이 있지 않겠나."

", 알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잘 쉬었다 갑니다."

전태일은 꾸벅 인사를 하고 지퍼상점을 나섰다. 그 아저씨하고 이야기를 더 해보았자 같은 말의 되풀이일 뿐이었다. 그는 아저씨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저씨와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기다리면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가 ..... 기다린다고 과연 일이 해결될 것인가.....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일을 해결해 달라고 나서는 사람을 서로 작당해서 발을 못 붙이게 몰아대는 그들이 군소리 없이 일만 하는 공원들을 위해 근로조건을 개선할 리가 없었다.

언제나 번잡하고 소란한 중부시장 골목골목에는 네댓 평이 될까 말까 한 상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저런 상점이나 하나 차리고 살았으면.....’

전태일은 이런 생각이 불현듯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쓸쓸한 심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꿈이었다. 그 볼품없어 보이는 그만그만한 상점들은 모두가 도.소매상이었다. 그들은 도매를 할 정도로 물건도 많고 상점도 값나갔다. 그런 상점을 차리려면 얌전하게 재단사로 몇 년을 살아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길거리에서 고무줄장사에서부터 맨주먹으로 시작했어. 춥고 배고프고..... 그 고생 글로 다 적으면 책으로 열 권은 넘을 거야. 그래도 이만한 상점 차리고는 자식을 다 가르치고 있으니 더 바랄 게 뭐 있나."

지퍼상점 아저씨의 느긋한 말이었다. 어느 순간 그런 아저씨가 더없이 부럽기도 했다.

나도 재단사 노릇 몇 년 열심히 하면 재봉틀 한두 대는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 ’

전태일은 다른 재단사들처럼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재봉틀을 한두 대 장만할 때까지가 어렵지 그 다음부터 직접 일거리를 맡게 되면 열 대로 늘리는 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재봉틀 열 대를 갖추면 그때부터는 규모로나 생산량으로나 아무 거리낌 없이 명함을 내밀 수 있는 당당한 사장이었다. 많은 재단사들은 그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태일은 고생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동생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그런 꿈을 이루고 싶기도 했다. 약한 몸으로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편히 모시고 싶었고, 동생도 대학까지 보내주고 싶었다.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자신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겪어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런 마음은 뒤집어지고 말았다. 자신은 그 사장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유혹에 빠진 자신을 다잡았다. 그는 어떤 때 자신이 그 사장들과 똑같이 공원들을 부려먹을 수 있을까 솔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고, 그런 짓을 해서 잘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못된 짓을 해서 혼자만 잘살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은 언제나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무찔렀다.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을 만나고 와서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다시 노동청을 찾아갔던 것은 그 마음이 시킨 일이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모두가 사람답게 일하고, 다같이 사람다운 대우를 받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이 변함없는 생각이 노동청으로 발길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노동청의 불친절과 냉대도 시청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조금은 나았다고 할 수 있었다. 노동청에서는 '실태조사'라는 것을 한 번 나오기는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실태조사라는 것이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났다. 근로조건을 개선하라는 노동청의 지시는 한마디도 없는 채 평화시장 일대에 '위험분자 전태일'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 소문은 바로 집단 따돌림으로 연결되어 더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전태일은 근로감독관들이 기업주들과 결탁하여 서로서로 돕고 봐주면서 잇속을 챙기는 기묘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사회 상층부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부정부패와 비리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목격한 계기였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영등포나 구로동 같은 데로 발길을 돌리며 그들이 쌓아올린 결탁의 벽이 얼마나 두껍고 높은 것인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에서 만든 근로기준법을 어기는 기업주들을 감시, 감독해야 할 근로감독관들이 오히려 기업주들과 결탁하여 근로자들을 배신하는 행위는 경찰이 도둑놈의 돈을 먹고 도둑놈을 놓아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 배신행위도 말문이 막히는 것이었지만 전태일이 더 낙망한 것은 바보회의 해체였다. 그들의 벽이 두껍고 높을수록 바보회는 더 강해지고 커져야 했다. 그러나 그동안 별다른 동질감이나 결속력을 보이지 못한 채 힘이 붙지 않았던 바보회는 그 사건을 계기로 해체의 위기를 맞고 말았다. 그동안 미온적이던 재단사들은 '위험분자 전태일'한테서 멀어져 가고 말았다.

그러나 전태일은 낙망의 구렁텅이에서 곧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바보회 회원들이 그렇게 흩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애초에 노동운동에 대해서 생각이 남다르거나 굳지 않았다. 대개 공장장을 겸하고 있는 재단사들은 회사에서 사장 다음가는 직위였고, 공장 안에서는 공원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특수공원이었다. 그들은 다른 공원들과 같은 근로조건 속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시다에 비해 월급이 엄청나게 많았고, 제각기 마음속에 자기네 사장처럼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공원들의 애로에는 별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런 그들을 애써서 이해시키고 설득시켜 어렵게 얽어짠 것이 바보회였다. 그동안 바보회를 운영해 오느라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혼자 커피 값이며 회식비를 감당하고, 설문조사며 자료조사 같은 활동비를 대느라고 빚이 어느덧 10만 원 가까이 불어나 있었다. 결국 바보회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것은 비싼 이자의 빚뿐이었다.

정말 나는 바보였는가 .....?’

전태일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몇 번씩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은 헛짓 해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진정으로 바친 마음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

"여러분,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바보입니다. 첫째 우리는 근로기준법에 의해서 당당하게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일할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껐 기계 취급을 당해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만 언젠가는 바보 신세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저는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나이 든 선배 재단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건 가당찮은 일이다. 노동운동 한다고 설치고 나서는 놈은 바보'라고 했습니다. , 좋습니다. 우리가 다 흩어져 있을 때는 아무 힘도 없는 바보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열이 뭉치면 열 개의 힘이 되고, 백이 뭉치면 백 개의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밀고 나가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바보들이 철통같이 뭉칩시다. 그래서 바보들의 힘이 얼마나 큰지 이 세상에 당당하게 보여줍시다."

자신의 말에 그들은 뜨겁게 박수를 쳤었다. 그리고 '바보회'가 탄생되었다. 회원들의 만장일치 뜻에 따라 회장직을 맡은 자신은 모임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회원들의 의식은 쉽게 뜨거워지지 않았고, 상황이 나빠지면서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전태일은 바보회를 통해서 마음이 깊이 통하는 친구 서넛을 얻게 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회원들도 어디에 살든지 바보회에서 결의했던 것들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 그게 다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쓸쓸함과 고립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 한쪽에는 의지로 지울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상층부의 결탁을 부수는 일, 그들이 쌓아올린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을 골똘히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들 중에서 그는 대통령께 편지 쓰는 일을 골랐다. 대통령은 나라의 법을 솔선해서 지키는 사람이니까 자신들이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시정명령을 내릴 것이고, 그들의 결탁을 일거에 부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의 명령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대통령 각하.....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5반에 거주하는 스물두 살의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서 종업원은 3만여 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합니다. 한 공장에 평균 서른 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3만여 명을 넘는 종업원의 90퍼센트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전태일은 정성을 다해 긴 편지를 썼다. 그러나 결국 부치지 않았다. 되짚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잘못 생각한 대목이 있었다. 장관이나 사회의 저명인사라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 같은 데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복지후생 문제는 뒤로 미루어져야 한다고 목청 높여 주장하고는 했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그런 주장을 대통령은 못 듣는 것일까? 못 들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경제발전을 위해' 대통령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확인과 함께 그는 편지 부치기를 단념했다. 이루어진 것 없이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전태일은 한 해가 스러져가는 마지막 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일기를 적었다.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나는 결단코 투쟁하련다. 역사는 증명한다."

그리고 새해를 맞이해서 전태일은 새로운 일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근로기준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대학노트 30페이지에 걸쳐서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세워나갔다.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계통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전태일이 사업계획서 중간쯤에서 다시금 밝혀놓은 사업의 목적이었다. 새 사업체는 미싱 50, 종업원 157, 자본금 3천만 원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종업원들 월급 대폭 인상, 1일 여덟 시간 근무, 한 달 작업 일수25, 주간 작업반과 야간 작업반 편성의 근무규정을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사 다섯 명을 채용하여 직공들을 가르치는 '직장학교'를 개설하고, 매달 직공들에게 위생비와 교육비를 따로 지급하며, 쾌적하고 활기찬 노동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스팀장치, 조립식 탁구대, 도서실 등을 갖추게 했다.

그건 그가 2년 전부터 꿈꾸어 왔던 모범업체였고, 그렇게 운영해도 회사는 얼마든지 흑자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3천만 원에 이르는 돈이었다. 전태일은, 세상이 아무리 살벌하고 몰인정하다고 해도 자신의 순수한 뜻을 이해하고 믿어주는 돈 많은 독지가가 몇 명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3천만 원이란 쌀 6천 가마를 헤아리는 거금이었다.

"꿈 깨게. 이 세상에는 그런 돈 댈 사람은 하나도 없어. 공원들한테 더 맵고 파게 해서 이익을 많이 남긴대도 돈을 댈까말까 한데 그런 식으로 손해를 보이겠다는데 누가 돈을 대? 돈 많은 사람들이 왜 돈이 많은 줄 아나? 모두가 돌깍쟁이라서 그런 거야. 세상 살아가면서 이거 잊어버리지 말라구."

지퍼상점 아저씨의 말이었다. 전태일은 처음부터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밤에 혼자 눈감고 생각하면 곧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밝아 세상을 바라보면 말붙일 사람은 하나도 없곤 했다.

 

B)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 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 친척들 중에도 나에게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댈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나의 가진 것 중에서 사회에 내어놓을 것이라고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즉 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로부터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사업을 꼭 이루고야 말 결심 아래 행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자금주에게 이득이 되는 조건 제시 : 나는 이 사업을 3-5년 간 내가 전 권한을 책임지고 맡는 대신에, 이 사업이 완전한 제도 위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할 시기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전부를 자금주에게 반환할 것이다. 자금주는 나의 온 정열과 한 눈을 바친 알찬 결실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이 좋기 때문에 투자할 것이다. 나는 이 사업이 끝나면 경제계에서 떠나서 주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이다

197031710시 전태일

 

모범업체 계획서 첫머리에 기록한 것이었다. 자신의 한쪽 눈을 바쳐 모범업체를 세우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여 이 세상의 기업인들이 종업원들을 얼마나 가혹하고 악랄하게 착취하는지를 입증하고, 그런 다음 주 예수를 찬양하며 살고자 한 것이 한 점 거짓 없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이 꿈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차가운 현실은 그의 진정한 꿈을 망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삼각산으로 들어서며 전태일은 거대한 바위로 된 두 개의 봉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봉우리의 단단함으로..... 저 봉우리의 굳건함으로..... 저 봉우리의 불변함으로.....’

그는 이 다짐을 스스로의 가슴팍에 새겨 넣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전신이 떨리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히며 절실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게 하여주십시오. 약한 저를 도우소서.’

 

 

38.저 길고 긴 길

", 축하한다. 임신이야."

진찰실에서 나오는 강숙자를 향해 진료카드에 무언가를 쓰면서 안경자가 말했다.

"축하하기는. 징혀 죽겄다."

강숙자는 안경자에게 눈을 흘기며 고향말에 맞추려는 듯 어깨를 과장되게 떨어댔다.

"징하기는, 겨우 두 번째 가지고."

안경자는 앉으라고 눈짓하며 간소한 사무용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 얘 좀 봐. 늙은이들처럼 겨우 두 번째가 뭐야, 겨우 난 첫애가 아들이었더라면 그것으로 깨끗하게 끝냈을 거야. 여자가 애 낳는 기계도 아니고, 자꾸 낳는 것, 그거 얼마나 끔찍해."

강숙자가 소파에 앉으며 또 어깨를 떨어댔다.

"여권신장론자가 앞뒤 안 맞게 그게 무슨 소리야? 딸이면 어떠냐 하고 거기서 끝냈어야지."

하얀 가운을 입은 안경자는 의사라는 직업이 썩 잘 어울려 보였다. 학생 시절에 끼지 않았던 가느다란 금테안경이 의사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얘가 개업하고 앉아 사람들 많이 대하더니 말솜씨만 늘었다니까. 그래, 아직은 어쩌겠니. 어쨌든 남의 집 며느리니까 아들이기를 바라면서 하나는 더 낳아봐야지. 근데 얘, 너 이제 그만 자영이하고 만나면서 사는 게 어떻겠니?"

"글쎄 ..... 서로 거북하게 그럴 필요 있을까? 안 만나고 산다고 그리울 것도 불편할 것도 없는데."

"기집애, 말도 참 쌀쌀맞게는 한다. 김선오가 양다리 걸치면서 어물쩍한 거지 자영이가 잘못한 것은 없잖아."

"됐어. 어쨌거나 난 그 일이 생각나는 게 싫어."

안경자의 얼굴은 웃음을 담고 있었지만 말의 기미는 단호했다.

"넌 애가 왜 그리 융통성이 없니. 자영이네 아빠 사업이 번창일로에 있고, 그런 식으로 가면 재계를 주름잡을 날도 머지않았는데, 그런 뜨르르한 집안 딸 친구로 둬서 손해날 것 없잖아? 남들은 친하려고 해도 어려운 판에."

"난 그것도 거북해. 내 돈 벌어 내가 속 편하게 살면 됐지 괜히 돈 많다는 사람들 턱없이 거드름피우는 거 봐주면서 비위 상할 것 없잖아. 그 말 더 하지 말어."

안경자는 단호하게 잘랐다. 언제나 총기 서려 있는 그녀의 눈빛이 더욱 예리하게 강숙자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고 알았다. 이 고집통아. 근데, 느네 남편은 언제나 와?"

강숙자는 눈을 흘기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 좀 더 있어야지."

"박사학위 따기가 어려운 모양이구나?"

"고생은 고생이지. 그렇지만 대학병원 쪽으로 가려면 미국에서 학위를 꼭 따야 하니까."

"남편이야 고생은 무슨 고생이니? 보내주는 돈 가지고 공부만 하면 되는걸. 고생이야 돈 벌어 보내느라고 너 혼자 다 뒤집어쓰고 있는 거지."

"내가 무슨 고생 ....."

"원장님, 수술 준비 다 됐습니다. "

간호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알았어요."

안경자는 강숙자에게 그만 가라고 눈짓하며 몸을 일으켰다.

"요새도 수술 환자는 많니?"

강숙자는 손가방을 들며 속삭였다.

"." 안경자는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번째니까 다 알지? 적당한 운동에 고른 영양섭취, 그리고 명랑한 정서 생활. 잘 지키도록 해."

그녀는 의사로 변했다.

", 잘 알겠습니다. 원장님 !"

강숙자가 깍듯하게 인사하는 시늉을 했고, 안경자는 빈 주먹질을 했다. 강숙자는 병원을 나서며 소파수술 환자들이 계속 많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 의사 초년생이라고 걱정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낙태수술 환자들이 많아 병원 중에서 제일 재미 보는 것이 산부인과라고 소문나 있었다. 산아제한바람을 타고 임신중절수술을 하는 기혼여성들이 자꾸 불어나는데다 피임술의 미숙으로 임신한 미혼여성들도 소파수술을 예사로 여기는 풍조였다.

강숙자는 택시를 잡아타면서 안경자의 팔자는 천상 가난한 남편 만나게 되어 있는 팔자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김선오가 지지리 가난하더니 의대 선배 신지훈이란 사람도 겨우 먹고 사는 소상인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안경자는 공부밖에 모르던 뚝심을 또 발휘했다. 결혼을 하자마자 개업을 하더니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남편을 미국으로 떠나보냈다. 자기가 벌어서 뒷수발을 할 테니 박사학위를 따오라는 것이었다. 돈벌이만 하는 평범한 의사 부부가 아니라 남편을 권위 있는 의대 교수를 만들고 싶어 하는 안경자의 욕심이었다.

"기집애, 그놈의 우등생 티는 못 버리고 ....."

강숙자는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자신으로서는 안경자의 고생이며 외로움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고, 이해되지도 않았다. 안경자는 임신한 몸으로 남편을 떠나보냈고, 벌써 몇 년째 남편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보내며 외로워하고 있었다. 의사면 됐지 무언가 남보다 잘나고 싶어 하고 색다르고 싶어 하는 그 우등생 기질이 강숙자는 은근히 아니꼽고 비위 상하려고 했다.

강숙자는 가난하기로 치면 김선오나 이규백에 못지않은 자신의 남편 홍석주를 생각하며, 그나마 시집을 제대로 간 것이 박영자다 싶었다. 박영자의 남편은 어디 내놓아도 괜찮은 신문기자인데다. 시아버지는 경기도 어느 지방의 고등학교 교장이었다. 교장선생님이란 직업 중에서 더 없이 고상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퍽 안정된 직업이었다. 강숙자는 돈 때문에 시집에 신경 쓰는 일 없이 사는 박영자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가난한 시집을 도와야 하는 입장에서는 남편이 옹색해 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것처럼 이쪽에서도 눈치 보고 조심스러워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강숙자는 안경자와 박영자를 다시 연결시키는 일을 그만 포기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안경자의 태도가 그리 완강해 가지고는 달리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안경자의 마음에 그런 독한 데도 있는가 싶어 새삼스럽기도 했고, 순진한 우등생의 첫사랑에 상처가 그리도 깊었던 것인가 싶기도 했다.

안경자에 비해 김선오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 같았다. 상처는커녕 사랑의 기억이나마 남아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마치 안경자에게 보복이라도 하듯이 서울 출신 여의사와 결혼을 했고, 가끔 친정에서 마주치면 김선오는 그 허풍기 심하고 세련된 듯한 제스처를 써가며 안경자는 잘 사느냐고 먼저 너스레를 떨고 들었다. 그 언행에서는 진심이라고는 느낄 수 없이 가식만 매끈하게 반들거리고 있었다.

", , 그거 좀 알아봤니? 그거."

강숙자는 손부채를 부쳐대고 소파에 앉으며 수선을 피웠다.

"그거라니? 걷기에 덥지? 벌써 여름이다, ."

박영자가 몸놀림 빠르게 선풍기를 틀었다. 한여름도 아닌데 선풍기를 마음대로 돌려대는 건 신문사 기자 생활로는 좀 과한 것이었다. 원병균의 집안에도 처가 덕이 알게 모르게 배들어 있음을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 더워. 우선 저 콜라 한 병씩 해치우고 보자 대여섯 개는 바로 얼음에서 꺼냈으니까 아주 시원해."

강숙자는 자신이 오면서 식품점에서 배달시킨 콜라병을 집어 들었다.

"넌 이 비싼 걸 한 박스씩이나 사오면 어떡하니? 기집애, 예나 지금이나 손은 커가지고."

박영자는 강숙자에게 눈을 흘겼다. 길거리에서 파는 냉차에 비해 콜라는 엄청나게 비싸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음료가 아니었다.

"컵 씻기 귀찮은데 병따개만 가져와. 병 모양을 이렇게 묘하게 디자인 한 건 원래 병째 마시라고 그런 거라며. 남자들은 여자의 날씬한 허리를 잡은 기분이고, 여자는..... 아유, 징그러."

강숙자는 짓궂게 웃으며 두 팔을 과장되게 떨어댔다.

"아이구, 그런 건 모르는 게 없어."

박영자도 짓궂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들은 콜라병의 잘룩한 허리를 붙들고 콜라를 거침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아유, 시원해 이제 살 것 같네. 이 싸아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최고라니까. 난 아주 이것에 맛 들렸어."

장기간 많이 마시면 이도 삭고 배까지도 삭는다는 것을 모른 채 임신부 강숙자는 차지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 미제는 어쩜 음료까지도 이렇게 맛있니. 왜 미국에 이민 가려고들 그 야단인지 알 것도 같애."

박영자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 그녀는 4, 19데모에 나서던 때와는 꽤나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풍겼다.

", , 그거 누구니? 박이니, 정이니?"

강숙자는 박영자 옆으로 다가앉으며 눈을 빛냈다.

"그건 모른대 ."

박영자는 고개를 저었다.

", 사회부 기자가 모르면 누가 알아? 그 말을 누가 믿니?"

"그걸 아는 건 중정밖에 없을 거래."

"그럼 캐봐야지. 신문기자가 뭘 해?"

"철없긴. 괜히 까불고 설치다간 싹인 거 몰라?"

손바닥을 빳빳하게 편 박영자는 ''에 맞추어 목 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음마 무셔라!"

강숙자는 고향 말을 토해내며 몸을 움츠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했잖아. 떠도는 소문이 절반씩 맞다고 생각하고 더 알려고 하지 마 알아봤자 실망만 하잖아."

"하긴 그렇지. 근데 박이든 정이든 그게 도대체 무슨 짓들이니? 서너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심이 얼마나 나쁘다구. 참 정신 나간 사람들이야."

"그러게 말야. 그렇잖아도 군바리라고 욕해대는 판인데 참 이상해."

두 사람의 한숨이 겹쳐졌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한강변에서 일어난 정인숙 여인의 피살사건에 대해서였다. 미모의 여인이 자가용 속에서 죽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소문이 삽시간에 서울 시내를 뒤덮었다. 그 여자가 대통령의 여자다. 아니다. 국무총리의 여자다. 이 충격적인 소문이 태풍보다 빠르고 거세게 전국을 뒤덮었음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 누구도 감히 내놓고 말 한마디 못했지만 서너 달이 지났는데도 그 소문은 가라앉지 않고 한 달 뒤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 함께 군부정권을 불신하고 위협하는 회오리바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 너가 말한 거 있지? 고속도로 휴게소 건 말야. 침 흘리지 마, 이미 종 쳤어 ."

박영자가 콜라를 찔끔 마시고 나서 말했다.

"어머, 느네 아버지가 벌써 다 처분하셨어?"

놀란 강숙자의 얼굴이 금세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게 아니고 우리 아빠도 힘을 쓸 수 없는 권한 밖이래."

"권한 밖? 그럼 저 위에서 어쩐다는 거니?"

"그래, 눈치 한번 빨라서 좋다. 그 이권 따내려고 박이 터지는 판인데, 아마도 예비역 장성들 차지가 될래나 봐."

"예비역 장성들? , 불평들 못하게 달래야 되시겠지. 어떻게 된 놈에 세상이 군바리 아니고선 되는 일이 없어."

"열 내지 마, . 그게 뭐 하루 이틀 된 일이니. 근데 넌 돈 벌 욕심이 왜 그리 많니? 재력에 권력에, 튼튼한 친정 두고서 느네 남편이 원해?"

", 말조심해. 4, 19의 투사 홍석주를 뭘로 보고 하는 소리야. 그 남자 결점이 정의롭고 정직한 거라서 굶어죽을까 봐 내가 나선 거다 왜. 판사 노릇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라고. 넌 외동딸이라 어떤지 모르겠는데, 난 친정 믿을 수 없어. 우리 아빤 딸 우습게 알아."

"호호호..... 정의롭고 정직한 게 결점이라고? 좀 과하지 않니? 그런 분이 여당 국회의원 따님을 골라 장가를 드시다니. 아유, 낯 간지러워."

"그런 소리 말어. 그 남잘 내가 찍은 거라니까. 그러고 말야, 그 남자가 조건을 보고 나와 결혼했다고 해도 요새 세상에 그 정도 약은 게 흠일 건 없잖아."

강숙자는 정색을 하며 박영자를 쳐다보았다.

"그건 그래. 느네 남편 머리에 있는 흉터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일 때마다 난 섬뜩해져. 내가 너무 타락하고 있지 않나 싶어서. 사실 느네 남편처럼 정직하면 4, 19세대 욕할 게 없겠지. 내 남편 원병균도 나를 선택하는 데 약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 그 유식한 말 있잖아. 금상첨화라구., 사람이 좋은데 여건까지 좋으니까 사람이 더 좋아지는 거야.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람 맘 아니겠어. 하여튼 우리 아빠도 딸자식은 알기를 우습게 아니까 나도 앞날 장담 못해."

"아이구, 어쩌다 여자로 태어났니 그래. 살아갈수록 억울하고 분해 죽겠어. 국회의원에 나서서 법을 고칠 수도 없고, 속상하는데 우리 사교춤이나 배울까?"

"얼씨구, 판사 마누라에 기자 마누라가 땐스홀 출입하다가 잡히면 그 꼴 참 볼 만하겠다. 당장 가자, ."

그들은 마주보며 깔깔거렸다.

한편, 박영자의 아버지 박부길 사장은 직접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완공 단계의 막바지 고비에 이르러 벌써 두어 달째 철야공사를 강행해 오고 있었다. 공기를 하루라도 단축시켜 공사비를 절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속도로 개통을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것, 그것은 사운을 걸다시피 한 중대한 목표였다. 공사비 절감 효과는 부대수입일 뿐이었다.

"에에 또, 현장감독인 여러분들은 군대로 말할 것 같으면 소대장이야. 헌데 그냥 소대장이 아니라 돌격대 소대장이야. 돌격대 소대장! 돌격대 소대장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 소대원들을 앞장서서 제일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어야 되는 거야. 그래야 부하들이 용기를 내서 와아 뒤따를 것 아니냔 말야, 이 철야공사도 마찬가지야. 현장감독인 여러분들이 두 눈 똑바로 부릅뜨고 설쳐대면 아래 인부들이야 다 따라오게 돼 있어. 여러분, 잠이 오면 제 살을 물어뜯어 가며 참고 인부들을 닦달하고 몰아가야 해. 이번에 여러분이 예정된 날까지 공사를 끝내기만 한다면 뽀나쓰 주는 건 물론이고 전원 승진시킬 거야. 이번 공사에 우리 회사 운명이 걸린 것 다 알지? 왜냐! 이 고속도로 공사는 대통령 각하께서 국가 최고 최대의 사업으로 치시며 하루라도 빨리 개통을 보시고자 하신다 그거야. 이런 기막힌 기회에 우리 회사가 딴 회사들한테 져서야 되겠어?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돼 ! 우리 회사는 반드시 1등을 해야 돼. 각오는 단단히 됐겠지 !"

박부길 사장은 현장의 가건물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예엣 !"

열서너 명의 현장감독들이 다같이 목소리를 맞추어 힘차게 대답했다.

"좋았어 ! 빨리들 자기 구역으로 돌아가."

박부길 사장은 마치 전투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처럼 막대기 든 손을 뻗쳐 올렸다. 현장감독들이 앞 다투어 가건물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박부길 사장은 담배를 빼 물었다. 박준서는 UN이라고 쓴 팔각 성냥통을 들어 얼른 성냥을 켰다. 극장의 대한뉴스에서 청와대는 빠질 때가 없었고, 그때마다 대통령 앞의 탁자에 꼭 놓여 있어서 유명해진 UN성냥은 그 선전효과 때문인지 성냥시장을 거의 석권하고 있었다.

"어때, 너 공기를 맞출 자신이 있냐?"

박부길 사장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 뿜으며 물었다.

"열심히 해봐야지요."

박준서는 얼굴을 훔치고 나서 작업모를 고쳐 썼다. 그는 얼마나 오래 현장에 나와 있었는지 얼굴이 까맣게 그을고 꺼칠해 보였다.

"매일 철야를 하면서 어떻게 견디냐?"

박부길 사장의 곁눈질이 빠르게 아들을 훑었다.

", 시간 나는 대로 잠깐잠깐 졸면서 때워요. 밥 먹다가도 졸고, 변소에서도 졸고, 걷다가도 졸고, 그러니까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는 자는 셈이죠."

"핫핫핫핫..... 그 요령 한번 기막히다. 역시 내 아들이로다! 자아, 나가보자."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너털웃음을 토해낸 박부길 사장은 넓적하게 큰 손으로 아들의 어깻죽지를 치며 가건물을 나섰다.

"어떠냐, 저 길고 긴 길을 떡 바라보는 기분이 !"

박부길 사장은 왼팔을 허리에 걸치고 버티어 서며 오른팔을 앞으로 뻗쳤다. 그의 앞에는 짙푸른 벌판을 가로지르며 넓고 긴 길이 하얀 선을 곧게 그어놓은 것처럼 멀리멀리 뻗어나가다가 그 끝이 어슴푸레하게 아산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아스팔트를 하지 않은 길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멀어질수록 희게 보였다. 벼들이 바다를 무색하게 할 만큼 싱싱한 푸르름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들판 가운데로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뻗어나가고 있는 하얀 길. 감탄스럽게 느껴지는 그 길을 사람의 힘으로 닦아낸 것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길 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들을 하고 있었다. 넓고 큰 길이 멀어지고 가늘어질수록 사람들도 점점 작아져 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가슴이 뿌듯하고 벅차기도 하고..... 어떨 때는 우리가 만든 것 같지 않을 때도 있고..... 하여튼 기분 좋고 보람 있고 그래요."

박준서는 복잡한 감정을 이렇게 얼버무리며 가슴 가득 심호흡을 했다. 그는 벌써 두 달이 넘게 현장에서 숙식을 하면서 길을 바라볼 때마다 그 감정이 자꾸 달라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존 국토의 두 배 이상, 이 땅에서 최고로 넓고 최대로 긴 도로가 차츰차츰 완성되어 가고, 거기에 자신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박준서는 신기하고 황홀한 기분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커지고 당당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에 강한 애착이 생기면서, 초기에 원병균과 함께 가졌던 회의론은 깨끗이 가시고 없었다.

"그래, 그래, 이 애비 맘도 똑같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토목공사를 숱하게 해왔다만 이렇게 규모가 엄청난 건 처음이야. 그저 그냥 공사비 받고 일정 구간 공사만 한 우리 기분이 이렇게 묘하고 좋은데, 이 길이 딱 완성돼서 각하께서 첫 번째로 달리시게 되면 그때 기분이 어떠시겠냐. 그때 각하 기분은 말로 다 할 수 없도록 좋으실 게다 각하께서는 경제개발 사업 중에서 이 사업을 제일 크고 중하게 생각하셨는데 결국 이루어내셨으니 그 기분이 얼마나 기막히시겠냐. 역시 각하께서는 위대한 영도자시다. 일본군의 도스게끼(돌진) 정신이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위대한 영도자셔. 조선 사람은 역시 작은 고추라는 말은 과연 명언이라니까."

박준서는 그만 기분이 사르르 상하려고 했다.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처음의 생각이 바뀐 것처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생각도 처음보다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아버지의 시도 때도 없는 박정희 예찬은 그리 듣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듣기 좋은 노래라도 너무 들으면 싫증나더라고 아버지는 그저 기회만 있으면 각하 칭송으로 입에 침이 말랐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 열성적인 예찬과 칭송이 아버지가 흔히 말하는 '사업상'의 이유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가끔 알현을 하다 보니까 그만 너무 감읍하여 누구누구처럼 '박정희교'의 신도가 되어버렸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박정희교'란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경제개발 제일주의를 복창해 대며 충성 다툼으로 그 주위를 에워싸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겨난 말이었다. 그리고 박준서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작은고추'라는 말이었다. 작은 고추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세상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부르는 별명이 아니라 애칭이었다.

"누구 덕에 이만큼 잘살게 됐는데."

"그럼. 그저 조선 사람은 작은 고추야. 그만한 인물 없어."

사람들의 이런 맞장구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엄연히 피땀 흘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모든 공이 박 대통령 차지가 되고 있는 게 그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건 3선 개헌을 해놓고 불안상태에 있는 공화당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말을 사람들이 어리숙하게 되뇌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 형들한테 이길 자신 있냐?"

박부길 사장이 땅 다지기가 한창인 길 위로 올라서며 아들에게 물었다.

"글쎄요, 형들을 어떻게 ....."

"야 이놈아, 그게 무슨 사내답지 못한 소리야. 사업을 해나가는 데는 형 동생이 없는 법인 게야. 내가 왜 진작 말했잖아. 사업이란 부자지간에도 능력 대 능력이라고. 잊어먹었냐?"

박부길 사장은 목소리를 한껏 높여 소리쳤다. 땅 다지는 기계 소리 자갈 쏟아 붓는 소리, 많은 인부들이 내는 소리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니오 ....."

박준서는 저 먼 길 끝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쪽에 형들이 맡고 있는 구간이 있었다. 그의 귀에는 아버지가 형들에게 가서 할 말이 들려왔다.

"동생한테 지면 되겠냐."

아버지는 지금 자식들을 놓고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사업을 가르치는 한편 능력을 평가하고 있었고, 서로를 경쟁시켜 작업능률을 최대한 올리고 있었다. 아버지야말로 자식들한테까지 사업가 기질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다. 박준서는 형들을 의식하자 또 묘한 경쟁심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회사에 몸을 담기 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직책을 갖게 되고, 아버지의 사업이 날로 불붙듯 번창하며 사업체들이 불어나게 되자 이상한 욕심이 생기면서 형들을 의식한 경쟁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업의 맛이 무엇인지도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사업능력이라는 것이 어린 시절에 형들과 했던 팔씨름이 아닌 한 형들에게 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분명했다. 철야작업이 강행되는 속에서 이를 갈아붙이며 잠과 싸우고, 술과 여자의 유혹을 뿌리치며 버텨내는 것은 이번 시기가 형들과 비교 평가되는 결정적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이봐, 이봐, 거기 빨리빨리 일들 안 하고 뭘 노닥거리고 있는 거야!"

기운차게 걸음을 옮기고 있던 박부길 사장이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그가 막대기로 겨누고 있는 곳에는 예닐곱 명이 일손을 놓고 한가하게 서 있었다.

", 예 사장님 나오셨습니까? , 이쪽 노견이 허물어져 여기다 채울 자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나서며 대답했다.

"뭐야! 직책이 뭐지?"

눈을 부릅뜨는 박부길 사장의 외침은 불길이었다. 박준서는 아차 싶었다.

", 십장입니다."

"이 새끼, 어디서 굴러먹던 십장이야. 야 이 덜떨어진 놈아, 노가다 모래밥 어디로 처먹었길래 이따위로 데데하게 굴어. 언제 올지 모를 자갈 기다리며 노닥거리는 동안에 빨리 흙 파다가 땜빵하고 통과해얄 것 아냐!"

박부길 사장이 소리치며 막대기로 허공을 내리쳤다. 그 기운이 얼마나 센지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획 일어났다.

"그렇게 하면 아스팔트 하고 나서 또 무너집니다."

"말이 많아! 너 군대 안 갔다 왔어? 적당적당 요령껏 하는 것 몰라, 요령껏! 77일 개통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돼 , 그 날짜는 각하께서 확정하신 거야. 그래, 77, 칠땡, 좀 좋으냐. 무너지면 그때 가서 또 땜방하면 될 일이고, 지금 중요한 건 요령껏 해서 날짜를 맞추는 거야. 날짜! 얼띠게 굴지 말고 빨리빨리 흙 파와, !"

박 사장은 입 험하게 노가다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해 가며 십장을 곧 후려칠 듯이 막대기를 휘둘러댔다. 그 무서운 기세에 쫓겨 십장이 무슨 소리와 함께 비탈을 뛰어 내려갔고, 인부들도 우르르 그 뒤를 따라 뛰고 있었다.

"아니, 개통식을 미리 정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박준서는 어이없어하며 핏발 돋은 눈을 문질렀다.

"그래, 명심하고 빨리빨리 해서 우린 이틀 전까지 모든 걸 완료해야 한다. , 각하가 납시는 마포대교 개통식 날짜에 맞추기 위해 겨울에 쎄멘트를 빨리 말리려고 연탄 화덕 수백 개를 밤새도록 피워낸 얘기 못 들었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박부길 사장은 다음 구역을 향해 지프에 올랐다. 박준서는 멀어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까라면 까야지' 하고 생각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