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4
18. 그 험난한 길
7월의 짙푸른 들녘을 가르며 기차는 남쪽으로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뙤약볕을 받으며 푸르름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들녘은 또 하나의 여름바다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초록빛 바다는 자연의 바다가 아니라 인공의 바다였다.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의 손이 벼 한 포기, 한 포기를 심어 이루어낸 바다 그 사실을 입증하듯이 먼 들녘에는 농부들의 모습이 하얀 점으로 띄엄띄엄 찍혀 있었다. 객차의 위아래로 여닫는 창문들은 다 열려 있었다. 냉방장치가 전혀 없는 객차 안으로 기차가 일으키는 바람이 계속 몰려들고 있었지만 별로 시원한 느낌은 없었다. 그 바람도 쨍쨍한 불볕에 익을 대로 익어 있었다.
"참말이제 디젤이란 것이 좋기는 좋네 그려. 굴을 뀌는 디도 석탄 내 안 맡으고."
"하먼. 거그다가 빨르기도 빨라졌응께 그놈의 칙칙폭폭에 대겄어. 개명 시상이 좋기넌 존 것이여."
"잉,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여. 여름에 그놈의 칙칙폭폭 타고 서울 걸음허먼 석탄가리로 콧구녕이 씨컴해진 것이 엊그제 아니여."
기차가 굴을 벗어나자 두 남자가 신기해하며 나누는 말이었다. 작년에 경부선부터 디젤기관차로 바뀌기 시작해 금년 들어 호남선에도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객차의 한쪽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것에 비해서 다른 쪽은 조용하기만 했다. 전혀 말이 없는 쪽에는 젊은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30여명의 그들은 남천장학사의 기숙생들이었다. 마치 수학여행이라도 가듯이 단체승차를 했는데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겁고 침울해 보였다. 그들이 이렇듯 한꺼번에 고향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선거일은 7월 29일이다. 이번 선거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는 머리 좋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옛 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다. 더 이상 긴말하지 않겠고, 강요도 하지 않겠다. 모두 자유의사로 결정하면 된다. 출발은 모레다."
강기수 의원의 정치인다운 말솜씨였다. 그의 말에는 모두 선거운동에 나서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더구나 강요하지 않겠다고 했고, 자유 의사로 결정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더없이 무서운 강요고 폭력이었다. 그는 선거운동에 나서지 않으면 장학사에서 내쫓겠다는 말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대표에게 기숙생들 수와 딱 맞는 기차표를 보내 자신의 의사를 명백하게 표시했다. 그들은 서로 벙어리가 되어 기차를 타야 했다. 그 긴 침묵은 기차가 대전을 지났는데도 전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각책임제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그 위세 높던 자유당은 8년 만에 해체의 운명을 맞이했다. 그들은 신정당이라는 새 간판을 내걸었지만 막상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에는 대부분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있었다. 신정당에서 풍기는 자유당 냄새로 손해를 볼 필요가 없다는 계산속들이었다. 그들은 그만큼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몸 달아 있었다. 강기수도 무소속으로 나서면서 이번에야말로 생사의 기로라고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리고 형편이 다급하다 해도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이번에는 출마하지 않고 쉬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야, 부정선거 원흉이라고 지탄받으며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 옥중출마를 하는 판이니 내가 너무 센티멘털한 생각을 하는 거지. 문제는 나 자신이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걸 거부하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으니......, 내일의 꿈을 위해 참아야 한다? 그럼, 데모는 왜 했는가? 죽어간 사람들의 의미는 어찌 되는가? 어차피 낙선할 거니까 선거 운동하는 시늉만 해? 아니 우리가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새 뜻을 가진 민주당 후보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 더구나 강 의원이 또 당선되어 버리면? 아......, 그놈의 사라호 태풍만 아니었더라도......이걸 어쩌면 좋은가...... ’
이규백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무 결론 없이 맴돌이 질하는 갈등 속에서 기차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괴로움은 커지고 있었다. 아니 결론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결론대로 따르자면 바로 닥치는 것이 서울에서의 생존과 공부의 위협이었다. 그렇지만 데모에서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건 치졸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 죽음의 뜻을 살리고, 살아남은 자로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선거운동을 거부하고 장학사를 스스로 걸어 나와 고생을 무릅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비겁한 굴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규백은 동료들도 자신과 똑같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의식하며 깊은 한숨을 또 가슴에 되묻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말이 안 된다 불구덩이에 빠진 여우새끼 꼴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들까지 선거운동원으로 써먹으려는 것은 너무 뻔뻔하고 염치없고 야비한 짓이다. 그동안 기숙생들을 볼모로 잡고 그 가족과 친척들까지 동원해 가며 선거에 얼마나 잘 이용해 먹고 덕을 보았는가. 그런데 형편이 다급해졌다고 우리들까지 주구로 삼으려고 해? 엄밀하게 따지면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다 부정선거의 공범자이고 척결의 대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모두 감옥에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번 선거에만은 출마를 못하게 정부가 규제했어야 했다. 그게 4 .19 데모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고,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도정부에서도 민주당에서도 그런 건 발의조차 하지 않았다. 과도정부는 힘도 없고 자유당과 한통속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굴러온 떡을 거저먹게 된 민주당의 하는 꼴이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다. 이제 그건 다 틀린 일이고, 이 일을 어째야 좋지? 선거운동을 다같이 거부해 버리면 강 의원 제놈인들 어쩔 거야. 그런데...... 데모를 안 한 그 비겁한 놈들이 절반이니 말야......그 약은 놈들이 또 합세를 안 할 테니......이거 사람 미칠 일이네.’
홍석주는 한숨을 토해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머리 왼쪽에는 손가락만큼 길고 큰 상처가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고 있었다. 깽패들의 고대생 습격 때 입은 상처였다. 그들 기숙생들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네 사람씩 마주보며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뚜렷한 구분이 지어져 있었다. 데모를 한 축과 하지 않은 축이 통로를 분리선 삼아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 누구도 의도한 일이 아닌데 4 .19 이후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전에는 대학별로 모여 앉거나 고등학교 선후배끼리 모여 앉거나 했었다.
"자아, 맛좋은 울릉도 쑤루매(오징어) 있어요, 심심풀이 땅콩 있어요."
"여그 삶은 계란 사씨요."
"배 불르고 맛난 개떡 사랑께라."
객차 안을 오가는 장사의 한가한 목소리에 비해 열차 밖에서 외치는 행상 아주머니들의 소리는 한결 억셌다. 그 사투리는 기차가 전라도 땅 어느 역에 멈추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고향 말을 듣자 김선오는 속이 더 답답해져 담배를 빼 물었다.
‘......이상한 일이야. 왜 데모한 애들은 반대를 하고 나서지 않지? 개개인이 당장 당하게 될 피해 때문인가? 그들이 뭉치고 나서면 다같이 합세를 할 텐데. 그리 되면 강 의원인들 별수 있겠어. 아무리 정치 위기에 몰렸다 해도 강 의원의 처사는 부당하다. 돈이라는 건 참 더럽고도 무섭다. 가난한자들에게 돈은 권력 이상이고 폭력 이상의 괴력을 발휘한다. 동료들 중에서 단 한 명도 강 의원의 강요에 맞서지 못하는 건 돈의 그 괴력 때문이다. 나는 학업생활의 안정이 파괴되는 것이 두려워 데모를 피했다. 그런데 데모를 하고서도 강 의원의 횡포에는 맞서지 못하는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서너 시간을 더 달린 기차는 광주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버스를 갈아타고 두어 시간을 더 가면 그들의 고향이면서 강 의원의 선거구인 장흥과 강진이었다. 여전히 침울한 얼굴인 그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기차를 내렸다.
한인곤은 남재구와 함께 멀찌가니 떨어진 2층 다방에서 고등학생들의 데모를 지켜보고 있었다. 천안역 광장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우렁찬 구호에 맞추어 힘차게 팔을 뻗쳐가며 아주 드센 기세로 데모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정연하고 기운 넘치는 동작은 마치 연습 많이 한 매스게임을 펼치는 것 같았다.
"독재원흉 선거원흉 김규태는 사퇴하라."
"4 .19 학생정신 김규태가 다 망친다."
"김규태의 앞잡이들 다같이 타도하자."
"김규태의 등록을 지금 당장 취소하라."
학생들이 외쳐대는 이런 구호에 끌리듯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자꾸 모여들어 큰길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저건 참 뜻밖의 원군인데."
남재구가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직 병색이 다 걷히지 않은 누르께한 안색에 비해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렇지 백만 원군이란 바로 저런 것 아니겠어."
한인곤의 목소리도 조심스럽게 낮았지만 어쩔 수 없이 흥분된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일세. 저 학생들은 투표권이 없으니까."
남재구가 다시 데모대에게 먼 눈길을 보냈다가 커피 잔을 들었다.
"물론이지. 김규태가 사퇴할 위인도 아니고. 저런 것에 밀려 사퇴할 인간이었으면 아예 옥중출마를 하지 않았겠지."
한인곤은 스스로의 말을 되새기듯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부정선거 원흉'이란 죄목으로 체포바람이 일었다. 수십 명이 끌려 들어가는 속에 김규태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내각책임제의 정치 일정이 확정되자 그들 중에서 네댓 명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고 나섰다. 아직 죄인이 아니고 혐의자일 뿐이니까 출마 자격에서 법적 하자가 없기는 했다. 김규태도 새로 생긴 말인 '옥중출마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유념할 게 있네. 우리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앞으로 몇 차례 데모를 해주면 그보다 더 좋을 게 없잖겠나. 그런데 적들은 우리와 반대겠지. 이 점에 대비해야 해."
"그 점에 대비......?"
한인곤은 언뜻 말뜻을 잡지 못했다.
"큰 복병을 만난 적들은 당장 오늘부터 데모를 더는 하지 않게 하는 공작에 나설 거란 말일세. 직접 학생들을 회유하기 어려우면 주동 학생들의 부모를 돈으로 매수하거나 또는 그 선배들을 회유해 앞세우거나 모든 방법을 총동원할 거 아니겠나."
"응, 그거 기막힌 생각이네. 김규태야 물에 빠진 놈이고, 그놈이 돈을 앞세워 무슨 짓을 못하겠나. 그럼 우리도 보고만 있어선 안 되잖아."
"당연하지. 학생들이 더 열렬하게 데모를 하도록 극비리에 작용해야해."
"그 방법이 뭔가?"
한인곤은 역시 남재구를 선거본부장에 앉히기를 백 번 잘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우선 생각나는 건 두 가지야. 주동 학생들의 선배를 동원해 그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서 더욱 열렬하게 데모를 하도록 하는 거고, 또 하나는 김규태의 구체적인 비리를 신속히 제공해 학생들이 알게 하는 거야."
"맞았어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야. 우리 운동원들 중에도 그 학교 출신들은 많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절대 극비리에 해야 된다니까. 우리 운동원인 게 드러나면 완전히 역효과야. 학생들이 순수해서 엄청난 반감을 사게 되고, 적들은 지금 저 데모도 우리가사주해서 일어난 거라고 덮어씌우고 싶어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
"하 이거 , 내가 완전히 유치원생이네. 자네 어찌 된 일이야?"
한인곤은 거듭되는 놀라움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글쎄...... 자네보다 몇 년 앞서 먹은 사회 짠물 덕이라고 해두지."
남재구는 씁쓰름하게 웃으며 담배를 빼들었다.
"하긴 군대물은 평생 먹어봐야 맹물이야. 그동안 나도 많이 배우고 느꼈어."
한인곤이 라이터를 켜서 남재구의 앞으로 디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게 말야, 분위기로는 완전히 이긴 싸움인데......, 그자의 뿌리가 워낙 깊은데다, 여기가 시골 도시라는 게 주의해야 할 점이야. 변두리로 갈수록, 배운 게 없는 사람일수록 4 .19에 관심이 없고 인정에 약하거든. 그런 사람들한테는 돈의 효력도 크단 말야. 그게 적들의 공략지점 아니겠어?"
"정확하게 봤어. 이런 상황에서 김규태가 옥중출마를 하는 것도 그 동안 투자하고 다져온 기반을 믿는 거고, 또 하나 돈의 힘을 믿는 거지. 아마 이번에 돈을 엄청나게 뿌릴 거야. 생사가 달렸으니까. 그리고 날 햇병아리로 우습게 본 대목도 없지 않겠지 . 그렇지만 김규태에 대해선 나보다 우리 아버지 원한이 더 커. 아버지는 김규태가 날 틀림없이 장군 만들어줄 줄 알았거든. 4 .19 전에 벌써 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아버지는 내 등을 밀어 민주당에 자리를 만들었는데 4 .19까지 일어난 이 기막힌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나. 더구나 김규태가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으니 이건 상대방을 묶어놓고 하는 권투시합 아니냔 말야. 이런 싸움에서 지면 목매달아 죽어야지. 우리 군대 용어로 확인 사살하는 기분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최선을 다해야 해. 그냥 당선이 아니라 전국 최다득표 당선을 목표로 말야."
한인곤은 남재구를 응시하며 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각오면 됐어. 모든 조건이 우리한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니까."
남재구는 한인곤의 주먹을 감싸 잡았다.
이튿날 오후에 학생들의 데모는 규모가 더욱 커졌다. 전날 데모에 자극 받아 다른 학교 학생들도 나선 거였다. 한인곤네는 그 파급효과에 소리 없는 박수를 뜨겁게 보내고 있었다.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는데도 경찰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건 4 .19이후 사기가 떨어져 맥을 못 쓰고 있는 경찰의 모습이기도 했고, 달라진 정치 판도에 눈치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경찰의 속성이기도 했다. 다음날 데모대가 김규태의 선거사무실 앞에서 농성을 하도록 은밀하게 작전을 짜둔 한인곤은 거기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를 돌며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위원장님, 위원장님 어디 계시나?"
남재구는 허둥지둥 선거사무실로 뛰어들며 외쳤다.
"변두리로 가셨는데 지금 어느 동을 돌고 계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유인물을 접거나 도표를 그리고 있던 대여섯 명의 눈길이 일제히 남재구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불안한 눈길은 무슨 큰일이 생긴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남재구는 그 눈길들을 의식하며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일깨웠다. 그는 숨을 들이켜며 담배를 빼들었다. 급박한 상황일수록 침착하라. 지휘관이 동요하는 빛을 드러내는 순간 부하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전의를 상실한다. 그런 병사들이 하는 전투는 백전백패다 남재구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군대에서 숙달시킨 침착함을 곧 회복했다.
"일들 해. 별일 아니니까."
남재구는 빙긋 웃음까지 띄우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일은 터져도 크게 터지고 말았다. 후보등록 마감일인 오늘 한인곤과 공천 경합에서 밀려났던 자가 그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똑같은 민주당 이름으로 느닷없이 등록을 한 거였다. 그건 개인적인 돌출행동이 아니라 민주당의 뿌리 깊은 신구파의 대립에서 비롯된 구파의 반격이었다.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벌써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 동안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은 게 이쪽의 불찰이었다.
"뭐라구? 그 자식이 미쳤나! 그놈을 당장."
"진정해, 진정해. 수습책을 찾아야 해. 아직 안 늦었으니까."
남재구는 불을 내뿜듯 흥분하는 한인곤을 붙들어 앉히며 등을 두들겼다.
"민주당 표를 둘이 갈라 먹으면 좋아지는 놈은 누구야. 요런 망할 자식!"
한인곤은 거친 한숨으로 분을 토해냈다. 남재구는 한인곤에게 담배부터 권했다. 그게 복병치고는 치명적인 복병이었다.
강기수는 열흘 넘게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추진해 온 공작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당의 신파 낙천자인 오구열을 쥐도 새도 모르게 회유해서 후보 등록 마감 날 등록하게 하는 공작을 펴온 것이다. 그 계획만 성공하면 선거는 거의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서 민주당이 득세하는 판이라고 해도 저희들끼리 이전투구하며 표를 반분하게 되면 당선은 자신의 것이었다. 강기수는 급변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번의 선거비용을 전보다 두 배로 늘려 잡았다. 이번에 낙선하면 정치인생이 영원히 끝날지도 모르는 중대하고도 중대한 고비였기 때문이다. 두 배로 늘린 선거비용의 절반을 그 공작에 투입하기로 작정했다. 오구열을 향한 공작은 그가 믿을 만한 사람들을 계속 보내 출마를 충동질하는 거였다. 자신의 공작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세 다리, 네 다리를 거쳐 사람을 물색했다. 거기에는 오구열의 문중 사람도 있었고, 이름깨나 난 유지도 있었고, 학교 선생도 있었고, 경찰 간부며 군청 간부도 있었고, 학교 사친회 간부며 청년회 간부도 있었고, 여러 구장이며 반장도 있었다. 그들 열댓 명이 번갈아가며 오구열을 찾아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대도록 만들었다.
"의원님, 의원님 쪼, 쪼깨 전에 드, 등록을 마쳤구만요."
사무실로 뛰어든 선거사무장이 숨을 헐떡거리며 보고했다.
"어허, 점잖찮케."
강기수는 환호하고 싶은 감정을 꾹 억눌러 하찮은 일처럼 해버리며,
"본부장은 어디 있나?"
무뚝뚝하게 물었다. 전혀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담배를 빼드는 그의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안도와 감격으로 벅차고 있는 가슴의 떨림이기도 했다.
"예, 본부장님도 곧 올 거구만요. 지가 먼첨 뛰어왔응께요."
선거사무장이 자리로 가 앉는데 본부장이 부산스럽게 들어섰다.
"본부장, 나 좀 봐."
강기수는 자기 방으로 앞장섰다.
"의원님 뜻대로 일이 잘돼 갑니다."
손을 모아 잡은 본부장이 굽신거리며 비위를 맞추었다.
"아니야. 이건 1단계일 뿐이야. 앞으로 더 중요한 2단계가 남았어. 거기 앉게."
강기수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의자를 가리켜 턱짓했다.
"2단계라니요......?"
"그전에 할 일이 있어. 이번 일에 수고한 사람들한테 약속한 대로 쌀 50가마니 값을 틀림없이 쳐서 내일 중으로 자네가 직접 전달하도록 해."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비밀을 철통같이 지키는 것 알겠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2단계란 말야......오구열의 중도사퇴를 막고 끝까지 맹렬하게 뛰게 만드는 일이야. 무슨 말인고 하니, 저희들끼리 협상하고 절충해서 오구열이가 포기할 수도 있다 그 말이야.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번 일에 나섰던 사람들이 계속 돕는 척하면서 당선은 틀림없다고 바람을 넣어 오구열이가 찰떡같이 믿게 해야 해. 그리고 저희들끼리 감정싸움이 심해지도록 서로 욕하고 모함하는 말을 마구 퍼뜨려 부채질을 해대라구. 무슨 말인지 알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자금문젠데...... 선거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오구열이가 틀림없이 자금이 궁해질 텐데, 그걸 눈치껏 알아내서 집이고 땅이고 담보만 잡히면 우리 돈줄을 대주란 말야. 물론 누구 돈인 줄 모르게 하고, 이자는 2부야. 이번에 폭삭 내려앉게 해서 다시는 정치판에서 설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딴 문젠데, 기숙생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예, 열심히들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이봐, 허튼소리 말어, 겉만 보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니까 그놈들 뒤에 다 감시를 붙여. 그래서 열성 없이 시늉만하는 놈들을 가려내."
강기수의 말에서는 찬바람이 일었다. 풀잎도 나뭇잎도 맥을 못 쓰고 후줄근해지는 7월 중순의 폭염을 무릅쓰며 선거전은 뜨겁게 치달아가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은 남부 해안지역인 강진과 장흥의 불볕 폭염은 더욱 유별났다. 그런데 동네마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요란하고 걸찍한 술판이 벌어져 사람들은 삼복 보신을 즐기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그런 술판에 어울리게 촌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정치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또, 장날이면 장날대로 식권이 풍년을 이루었다. 강진의 첫 번째 합동연설회는 농고에서 벌어졌다. 강진농고의 그 독특하게 생긴 반원형의 두 갈래 교정 길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날씨도 무덥고 농번기인데도 사람들이 그리 많이 모여드는 것은 세상이 달라져 정치적 관심이 높아졌다기보다는 선거전이 그만큼 치열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뙤약볕을 피해 교정 길을 따라 울창하게 선 나무의 그늘을 차지하다 못해 나무들을 타고 올랐다. 나무를 보호하려고 확성기에서는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건 쇠귀에 경 읽기였다. 운동장을 에워싸고 도는 반원형의 운치 가득한 두 갈래 길을 따라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은 사람이 함부로 올라가 상하게 해서는 안 될 귀물이고, 강진농고만의 고유한 개성이었다. 거의 모든 학교가 교문을 들어서면 바로 운동장인 데 비해 이 학교는 교문을 들어서서 30여 미터를 가면 거기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양쪽에 숲 우거진 그 길을 따라가면 학교건물 쪽의 운동장 끝부분에 이르면서 넓게 펼쳐진 운동장을 보게 되었다. 땅 아까운 것을 개의치 않고 그런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설계해 낸 사람의 심미안에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학생들의 정서를 위해서가아니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그 학교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신사를 들어앉혔고, 등교하는 학생들은 어김없이 신사에 경배를 하고서야 교실로 갈 수 있도록 짜여진 구도였다.
제비를 뽑아 결정한 연설 순서는 김영출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가 된 강기수는 쾌나 심사가 뒤틀리고 있었다. 자기가 첫 번째로 하고 일당 500환씩을 줘서 동원한 사람들을 다 빼내 판을 싹 깨버릴 계획이 약간 어긋난 때문이었다.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 우리는 왜 이 삼복염천에 새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이 아니라 거룩하고 위대한 4 .19혁명으로 그동안 독재정치로 나라를 망쳐왔던 이승만 도배들을 몰아내고 살기 좋은 새 나라, 자유로운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해섭니다. 여러분, 우리는 4 .19혁명, 4 .19혁명 합니다. 그럼 혁명이란 무슨 뜻입니까. 혁명이란 때 묻고 더럽고 잘못된 모든 것들을 부수고 쳐 없애 새로운 세상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의 눈앞에 반드시 쳐 없애야 할 때 묻고 더럽고 추한 죄인이 또 국회의원 해먹겠다고 앉아 있습니다. 강기수! 그가 누구입니까! 또, 강기수의 아버지 강남호는 누구입니까! 이들 두 부자는 2대에 걸쳐서 철저하게 친일을 해온 악질적인 친일파고 민족반역자들이 아닙니까. 강기수의 아버지 강남호는 타관에서 이 땅에 굴러 들어와 생선 장사를 하던 미천한 인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놈들 경찰서가 들어서자 그 인종은 서장 놈 집의 대문에다 왜놈들이 환장하게 좋아하는 크고 싱싱한 도미를 매달아놓았습니다. 출근을 하려고 대문을 나서던 서장은 도미와 코를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기막힌 아부를 며칠 계속해서 강남호는 경찰서장을 만나게 되었고, 더욱 아부를 잘해 어판장 실권에 어업권까지 장악하고, 정미소며 양조장을 독점하고, 서장은 물론이고 군대에까지 헌금을 잘해 왜놈들 천황 생일의 경축단으로 뽑혀 동경까지 왕래하고, 총독부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승승장구 출세까지 했습니다. 그 아들 강기수는 아버지 덕에 징병을 피해 경찰관이 되어 남자는 징용에 내몰고 처녀들은 정신대로 내모는 온갖 못된 짓을 다 했고 6 .25전쟁 통에는 경찰서장자리에 앉아 수많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습니다. 그런 죄인이 이승만 정권 아래서 국회의원을 해먹으며 또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까. 그런데 혁명의 세상에서 또 국회의원을 해먹겠다고 저렇게 뻔뻔스럽게......."
한인곤은 구파 출마자와의 타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낙천자들이 당의 결정을 무시하고 출마를 감행한 것이 전국적으로 100명이 넘었다. 이런 사태에 당황한 당에서는 제명을 단행하겠다고 결정했다. 한인곤은 그 결정에 힘입어 막판 타협을 시도했다.
"그런 으름장에는 어린애도 안 놀래요. 제명할 테면 하라지요. 재력지원도 없는 판에 무소속으로 나오면 손해볼 것 뭐 있나요. 그래서 당선만 돼 보시오. 그땐 언제 제명했냐 하며 못 모셔가서 안달이 날 텐데."
상대방의 이런 태도에 타협의 이런저런 조건들은 다 무용지물이었다.
"허어, 그 사내 배짱 한번 쓸 만하구나.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한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건 남자로서 당연한 거야. 그런 사내와 싸워 이기는 게 더 당당한 거니까 더욱 힘을 내라. 더 들 비용일랑 걱정 말고."
한인곤은 아버지의 이런 격려로 마음을 깨끗이 정리했다.
"참 자네가 부럽고 또 부럽네. 저런 어르신을 모시고 사니."
일찍부터 홀로였던 남재구의 말이었다. 데모 소식을 전해듣지 못한 것이 아닐 텐데도 김규태는 끝내 후보 사퇴를 하지 않고 오히려 학생들이 지쳐 데모는 흐지부지되었다. 선거전이 가열되어 가면서 한인곤은 차츰 당황하기 시작했다. 김규태는 아예 안중에 없었고 적수는 집안싸움이 된 홍찬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김규태 쪽의 다각적인 공세가 엄청났고, 민심의 흔들림이 묘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흉'이란 흉한 죄목에다 몸까지 묶여 있는 김규태가 그 불리함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돈을 엄청나게 써대리라는 건 예상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쪽에서는 돈을 얼마나 퍼부어대는지 선거전이 중반일 뿐인데도 김규태네 술 세 번 얻어먹지 못한 것은 사람 축에도 못 든다는 말이 퍼지고 있었고, 고무신표며 비누표를 개도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그런 물량공세보다 고약한 것이 김규태 가족의 발 벗고 나선 모습이었다. 김규태의 아내와 아들 셋, 딸 둘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역전이며 차부 같은 길목 길목에서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다. 특히 김규태의 아내와 딸 둘이 여자들을 상대로 하는 눈물작전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여자 노인네들은 함께 눈물짓기가 예사였다. 그 현장들을 지켜본 남재구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것 참 골치 아픈 일이야. 노인네들은 아무 판단력 없이 그저 인정에 끌리고 있으니 참......."
"참 기가 차군. 그런 얼띤 인간들한테도 투표권이 하나씩이라니 민주주의가 그게 문제야. 어쨌든 그 처자식이란 것들도 김규태만큼 뻔뻔스럽고 낯짝 두꺼운 인간들이야. 아무리 형편이 급하다고 어떻게 길바닥에 나서서 또 찍어달라고 눈물을 짜나 그래. 도무지 어처구니가 없어."
한인곤은 짜증스럽게 부채를 부쳐댈 뿐 마땅한 대응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게 사람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하지 않던가. 어쨌거나 그 사람들을 주저앉힐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런 노인네들이 다 표로 연결된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너무 염려할 건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야. 동네마다 여자 노인네들을 강화시켜서 그들하고 눈물 짜는 짓이 얼마나 못나고 소갈머리 없는 짓인가를 흉보고 욕하게 하는 거야. 그리고 전 운동원들에게도 그 점을 역설하게 하고."
"도리 없지. 우리가 표를 다 먹을 순 없는 일이니까."
한인곤은 쓴 입맛을 다셨다. 선거전이 가열되어 갈수록 남재구는 혼란스럽고 초조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세상은 분명이 변했는데도 돈 선거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기승을 부리 있었다. 그건 권력욕에 사로잡힌 돈 많은 후보가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짓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유권자들이 그 부당한 행위를 부당하다고 외면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근히 기다리고 즐기고 있는 점이었다.
"아, 그래도 역시 김 의원이 기마이가 좋다니까."
"그럼, 그럼. 원래 김 의원이 선거철 기분은 제대로 나게 하는 사람 아닌가."
"맞어, 선거철에나마 우릴 사람 대접해 주니 그것 참 쓸 만한 사람이야."
"어허, 술 한 잔씩 얻어 걸쳤다고 너무 인심 푹푹 쓰들 말어. 우리한테 한잔 주고 표 얻어 국회의원 되면 그 열 곱 챙긴다는 말 듣지도 못했어?"
"그런 놈의 해괴한 소리는 가서 엿이나 바꿔 먹으라고 해. 술 안 낸 놈들이 괜히 모함하느라고 입방아 찧는 소리지 우리 돈 언제 열 배로 뺏긴 적 있어?"
"그 말 맞어. 우리 같은 것들이야 그저 그 타령으로 사는 거고, 선거철에 공짜 술 마시는 재미도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사나 그래."
"헌데, 세상이 달라져 그런지 어쩐지 김 의원이 부쩍 친일파로 몰리잖아? 어째 영 찜찜해."
"거 다 지나간 얘기 또 끄집어내 뭘 해. 이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나. 일정 때 얘기 듣기도 싫어."
"그놈이나 저놈이나 다 별수 없어. 권력 잡으면 다 그만 아닌가."
술 취한 사람들의 이런 말들을 들으며 남재구는 자신이 날마다 목 쉬게 외치고 다니는 일에 회의를 느끼며 암담해졌다. 그리고 친일파들의 승리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술 취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동안 친일파들이 사회를 장악해 오며 수없이 되풀이하고 퍼트려 온 말들이었다.
‘지나간 얘기 또 꺼내면 뭘 해. 그 시절에 크든 작든 친일 안 한 자가 누가 있느냐. 반공으로 뭉쳐야 하는데 분열 조장이냐. 그때 너도 글줄이나 배워 출세하려면 별수 있었을 것 같으냐. 그런 걸 따지는 건 다 촌놈들이다.’
이런 친일파들의 말과 글에 대중들은 고스란히 최면당해 길 잘 들여진 앵무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남재구는 그 벽 앞에서 초조감이 자꾸 심해져 갔다. 그런데 미처 예기치 못했던 엉뚱한 사건이 터졌다. 홍찬영의 운동원들이 밤에 테러를 당했는데, 그게 한인곤 쪽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가해자들이 떨어뜨린 물증이고, 또 가해자들은 폭행을 가하면서 다된 밥에 재 뿌리고 덤빈다느니, 뒷다리 잡고 함께 망하자고 늘어진다느니 했다는 거요. 그런 증거로 홍 후보 쪽에서 한 후보를 고발했으니 경찰서로 갑시다."
형사는 한인곤네 유인물 서너 장을 흔들어대며 영락없는 범인 취급이었다. 직감적으로 한인곤의 머리를 친 것은 김규태 쪽의 음모라는 것이었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보고 겪었던 그 많은 음모와 술수들. 김규태 쪽에서 노리는 건 민주당끼리의 감정싸움을 격화시켜 선거운동도 망치고, 민심도 잃게 하고, 이중 삼중의 효과를 보려는 흉계였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이쪽에 덤터기를 씌우는 홍찬영네의 자작극이었다.
"우린 그따위 짓 한 적이 없어요. 이건 두 쪽 누군가가 꾸민 음모요. 우리가 한 일이라면, 우리가 바보 천치가 아닌데 그따위 증거들을 남겼을 것 같아요?"
남재구는 열이 올라 형사에게 대들 듯했다.
"자아, 우리 본부장님 말 똑똑히 들었지요? 내 말도 저 말과 똑같소. 난 우리 아버님의 존함과 목숨을 걸고 말하겠는데, 그따위 더러운 짓 하지 않았소. 벽보에 적힌 내 이력을 봐서 알겠지만 나와 우리 본부장님은 명색이 왜놈과 싸운 광복군 출신이오. 누가 죽여도 그따위 파렴치한 짓은 안 해요. 괜히 경솔하게 실수해서 담에 후회하지 말고 주먹패 왕초부터 낚아채시오. 거 잘 알잖소. 역전 패거리며 차부 패거리들."
형사를 노려보고 있는 한인곤의 눈에서는 계속 불화살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발사건이라......."
형사는 완연히 풀이 죽었다.
"그건 염려 마시오. 내가 당장 홍찬영 후보를 만나겠소. 이 사건은 홍후보한테도 하나도 유리할 게 없으니까 곧 오해를 풀 거요. 갑시다. 본부장님!"
여름밤의 별들은 하늘이 휘어지고 처져 내리도록 풍년을 이루며 흐드러지게 빛나고 있었다. 겨울밤의 별들이 성글고 멀면서 빛이 약한 데 비해 여름밤의 별들은 곧 쏟아져 내릴 것처럼 촘촘하고 금세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저마다 다채롭고 풍성한 빛으로 번쩍거렸다. 특히 은하수의 그 휘늘어지고 넌출진 긴긴 흐름은 여름밤을 현란하게 장식하는 빛의 잔치였다.
반딧불도 스러지고 모깃불도 사윈 늦은 밤마다 이규백은 평상에 몸을 부리고 누워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탄식으로 가득 찬 그의 가슴에 별들의 반짝임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슬픔과 비애였다. 이미 그 별들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무한한 꿈도 상상의 설렘도 아니었다. 삶의 괴로움이고 절망스러움이고 허무였다. 태풍이 형을 삼켜버린 이후 한시도 의식에서 떠난 적은 없지만 막상 눈앞에 대하게 되는 집안의 참담함이 덮씌우는 삶의 무게는 그를 질식 상태로 몰아넣었다. 어머니와 세 동생, 형수와 세 조카, 그 현실은 지식인의 양심이며 사회적 정의며를 단숨에 무력화시켜 버렸다. 강기수가 감시원들을 따라 붙이지 않았더라도 선거운동을 안 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혀도 규상이넌 핵교럴 작파혀야 되겄다. 일찌감치 농새 갤치고, 장남인 니 한나 잘되먼 된께."
어머니의 쓰라린 결심이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학비는 제가 댈 테니 걱정 마세요."
그건 새롭게 생긴 삶의 무게였다.
김선오는 선거운동을 빙자해 밤마다 술에 취해 아무데서나 쓰러져 잤다. 어머니의 근심 짙은 한숨과 다섯 동생들의 풀죽은 모습만 가득한 집안에 들어가는 것이 끔찍스러웠다. 가장 없는 집안에서 머슴이 짓는 농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머슴은 주인의 지청구 없이는 거름지게 지고 일어나는 데 한나절을 보내고, 여자 말은 동네 개 짖는 소리만큼도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곡식은 농부의 피땀을 빨며 자란다고도 했다 머슴이 짓는 농사가 소출이 표 나게 줄고, 고리채가 늘어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요대로 가면 집안 망혀. 애당초 대학 못 갈 것, 나 농고로 전학헐랑만."
남동생의 태도는 완강했다.
"광주 나가 취직혀 야간학교를 댕길 거여. 오빠가 해결헐 수 없으면 간섭허덜 말어. 난 촌구석에 처백혀 평상 엄니맹키로 살고 잡덜 안 혀."
여동생의 기 세운 항변이었다. 동생들 앞에서 자신의 꼴은 초라해질 뿐인데 어머니까지 동생들에게 기울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한 가닥 생각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장남으로서의 책무감인지도 몰랐다. 그 대책 없는 책무감의 괴로움이 술을 마시게 했다.
투표가 끝난 다음날 기숙생들은 단체로 고향을 떠났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버스에 흔들리며 그 누구도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동안 땡볕 속을 돌아다니느라고 검게 그은 그들의 얼굴은 더욱 침울할 뿐이었다. 광주에서 기차를 갈아타면서 그들은 문교부가4 .19를 '4월 혁명'으로 공식 결정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그들은 아무 감정 없이 그 기사를 지나쳤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 벌써 언제인데 새삼스럽고도 더딘 결정이었다.
이틀이 지나 신문에 나기 전에 장학사에 강기수의 당선 소식이 왔다. 차점자와 자그마치 4만 표의 표차였다. 환호하면서 벌렁벌렁 춤을 춘 것은 수위 영감 혼자뿐이었다. 그 날 밤 기숙생들 태반은 제각기 술이 취해 돌아왔다.
한인곤은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차점자인 김규태와는 겨우 2천여 표 차이였다. 한인곤은 2만여 표 차이가 아닌 것이 너무 황당해서 당선의 기쁨이 아닌 심한 배신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배부른 소리 말어라. 그게 세상인 게야 강원도에서 옥중출마자가 당선된 걸 봐라.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그의 등을 두들겼다.
19. 그냥 그리움이게
유일민은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이상한 인기척을 감지했다. 그 순간 소름이 쭉 끼치며 가슴이 섬뜩해졌다. 누구에겐가 뒤를 밟히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함과 두려움이 덮쳐왔다.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려는 마음과는 반대로 걸음이 빨라지려고 했다.
‘내 꼴에 뭘 털어갈 게 있다고......, 아직 대낮이나 마찬가진데 깡패가 설마......, 혹시 동철이가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유일민은 4 .19 이후 경찰력이 허약해진 것을 틈타 번창하고 있는 깡패들의 횡포를 생각했고, 한 달쯤 전에 서울로 돌아와 이젠 자기 조직을 만들겠다고 기세를 올리던 서동철을 생각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마음에 꼭 짚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수상한 인기척은 계속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유일민은 임호태네 집에 이르는 마지막 꺾임목을 돌아섰다. 그때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또 실패하고 말았다. 불길함과 두려움은 아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임호태네 집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민의 걸음은 한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임호태네 집이 바로 보이는 지점에서 유일민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주춤했다. 임호태네 집 앞에 잠바 차림의 한 남자가 담배를 빨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담배를 팽개치며 거칠게 내달아왔다. 유일민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반대 쪽에서 또 한 남자가 깃 세운 독수리 같은 모습으로 빨리 걸어오고 있었다. 유일민은 자신이 빈틈없이 미행당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의심받을 짓을 해선 안 된다. 그 생각과 함께 유일민은 본능적으로 일어났던 방어 자세를 풀었다. 한 남자가 유일민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유일민이지? 우리 형산데, 같이 좀 갈까?"
그 말이 아니었어도 유일민은 그들이 형사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넓은 어깨, 위압적 인상,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많이 시달려오면서 그들만이 풍기는 냄새를 맡는 촉수는 너무 예민해져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이건 저항이 아니었다. 그냥 순순히 따라가면 그들이 노리고 있는 바를 시인하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건 미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다 알 텐데."
팔을 잡은 형사가 싸늘하게 웃었다. 다른 형사는 만일에 대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자 하나가 그들을 힐끔거리며 옆걸음질로 피해갔다.
"뭘요?"
유일민은 힘껏 부정의 뜻을 드러냈다. 그러나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괜히 쇠고랑 채우고 어쩌고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얌전하게 따라와, 꼭 유병국 건이라고 말해야 되겠나?"
"예? 우리 아버지가 뭘 어쨌는데요?"
유일민은 다시 한 번 자기 방어를 시도했다.
"됐어, 할 얘기 있으면 가서 하라구."
형사가 유일민의 팔을 억세게 잡아끌었다. 유일민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더 버틸 수도 없었고, 임호태네 집 앞에서 어서 떠나야 했다. 골목을 두 번째 꺾어 돌았을 때였다.
"어머, 오빠!"
정면으로 마주친 것은 책가방을 든 임채옥이었다. 유일민은 가슴이 쿵 울리는 것을 느끼며 눈길을 떨구었다.
"오빠, 어디 가요? 왜 그래요?"
안색이 달라진 임채옥이 대담하게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집에 가서 경찰서에 갔다고 전해."
유일민의 팔을 잡지 않은 형사가 임채옥을 가볍게 밀쳐내 버렸다.
"오빠, 안 돼요. 오빠, 오빠......."
뒤에서 들려오는 임채옥의 애타는 목소리는 벌써 울음이었다. 유일민은 불현듯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형사들은 시발택시를 잡았다. 그들에게 밀려 택시에 오른 유일민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모습과 어머니의 얼굴과 4 .19이후 간첩들이 대량 남파되고 있다는 신문기사들과....... 한기 드는 공포감 속에서 그의 의식은 어지럽게 휘돌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유일민은 가슴 미어지는 아픔으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그건 어머니에게 의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또 당할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고 싶도록 괴로웠다.
유일민은 형사들이 임호태네 집에까지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해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지난2월부터 월북자 가족 명단을 다시 작성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서울로 유학을 오면서 벌써 감시가 시작되었을 것은 뻔했다. 한 달에 두 번씩 어김없이 서약서에 도장을 받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타나는 담당형사가 서울 주소를 관할 경찰서에 안 알렸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성북동으로 오지 않고 하필 임호태네 집 앞이었을까......? 그나마 가정교사도 못 해먹게 하려는 고의였을까....... 이미 임호태의 아버지에게 알린 것은 아닐까....... 유일민은 진저리를 치며 눈을 떴다. 택시는 세종로를 달리고 있었다. 중앙청 앞을 지나친 택시는 내자호텔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다 왔어. 내려."
형사 하나가 유일민의 팔을 끼었다.
"여긴 경찰서가 아니잖아요?"
유일민은 차창 밖을 빠르게 살피며 거부의 몸짓을 지었다.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생소한 길인데다가 경찰서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거물들을 경찰서로 모실 수 있나. 경찰서야 잡범들이나 끌어들이는 데지."
형사가 거칠게 팔을 낚아챘다. 그다지 크지 않은2층 건물 정문에는 아무런 간판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마당의 담 옆으로 초소가 있었고, 그 앞에 사복 위에 권총을 찬 두 사내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초소 옆에는 그야말로 송아지만한 세퍼드가 묶여 있었다. 건물 안은 어두컴컴했고 빈 것처럼 조용했다. 유일민은 2층으로 끌려 올라가서야 복도의 모든 창문들이 두꺼운 질감의 검은 종이로 가려진 것을 알았다. 그 검은 종이가 방음도 겸하고 있으리라는 느낌도 들었다. 유일민은 자꾸 숨을 깊이 들이켜며 시멘트복도를 걸었다. 어머니도 당하는 일인데 겁먹지 말자고 벌써 수십 차례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 안은 파삭 마르고 몸의 부분 부분이 푸드득 경련을 일으키고는 했다. 잇따라 있는 열서너 개의 방 중에서 거의 끝부분에 이르러 두 형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유일민의 팔짱을 낀 채로 노크를 한 형사가 말했다.
"임무 완료해서 왔습니다."
"들어와."
형사 한 사람만 유일민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처럼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는 역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창문이라고는 없는 방 안의 공기는 탁했다. 아무런 치장이 없는 직사각형의 방에는 의자가 양쪽으로 놓인 큼직한 책상 하나와 미군 야전용 침대 하나 뿐이었다. 그 의자 하나에 사복 윗도리를 풀어헤친 남자가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저를 본 순간 도주하려다가 박 형사한테 앞이 막히자 포기했습니다.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형사의 보고에 유일민은 아차 싶었다.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말자고 했었는데 그 반사적인 몸짓마저 혐의점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수고했어."
형사는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섰다.
"거기 앉어."
수사관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펜대 뒤끝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마른편인 그 남자의 얼굴은 견고하면서도 싸늘해 보였고 눈은 날카로웠다. 유일민은 또 숨을 깊이 들이켜며 작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았다.
"성명, 생년월일."
수사관이 백지를 끌어당기며 펜촉에 잉크를 찍었다.
"예, 유일민, 1940년 5월 14일생입니다."
유일민은 고개를 떨구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이미 경험한 것이지만 고개를 떨구거나 눈길을 피할수록 의심을 사게 되어 있었다. 유일민은 그때서야 책상 오른쪽에 검도봉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몸이 바짝 오그라들며 폭력의 공포가 덮쳐왔다. 유일민은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어머니도 당하는 일이다!
"아버지 성명."
"유병국입니다."
"아버지 언제 만났나?"
"예에......?"
"최근에 언제 만났느냐구."
그동안 억양 없던 목소리가 팽팽해지며 수사관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런 일 없습니다. 그때 헤어지고 나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유일민은 침을 삼켰다. 그러나 넘어가는 침은 없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네가 좋은 대학에 다니고 고생해서 공부하고 있으니까 나도 신사적으로 하고 싶어. 우리한테 정보가 있으니까 순순히 불어."
수사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게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함정인 것을 유일민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만난 일 없습니다. 전 이런 일 당하는 게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유일민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지긋지긋해? 그래서 남한 체제에 치가 떨린다 그런 뜻이로군."
수사관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하며 냉기를 풍겼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런 일을 당하는 게 고통스럽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 뜻밖의 칼날에 유일민은 허둥거리며 대꾸했다. 수사관의 그 말은 그러니까 넌 빨갱이야, 하는 올가미고 비수였다. 유일민은 깍지 낀 손 비틀며 불현듯 나와 버린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그럼,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런 뜻인가?"
수사관의 그 예기치 못한 역공에 유일민은 또 당황했다. 그 수사관은 날카롭고 기민하기가 그동안 겪어온 사람들과는 딴판이었다.
"예, 가족을 이렇게 만든 게 원망스럽습니다."
유일민은 '미워한다'는 말을 피했다. 아버지를 미워한 적은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원망이 극대화하고 있는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원망스럽다......, 원망스럽다......, 그래, 그동안 이런 일 몇 번이나 당했나?"
"이번이......, 여섯 번쨉니다."
"여섯 번......."
수사관이 미간을 찡그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만 퍼질 뿐 방안은 갑자기 침묵에 싸였다. 천장 가운데 길게 늘어진 알전구의 흐린 불빛 속으로 담배연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4 .19 때는 뭘 했나?"
수사관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동생 찾으러 다녔다는 말이 또 어떤 문제로 연결될지 몰라 이렇게 둘러붙였다.
"데모를 안 했다고? 왜지?"
"평생 정치행위를 하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정치행위? 대학생으로서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런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그건 제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건 아버지 때문에 생긴 보신책인가?"
"어머니의 당부고, 어머니하고의 약속입니다. 저도 정치 같은 게 생리에 맞지 않고요."
"그래서 대학에서 써클활동도 전혀 안 한다 그건가? 좋아."
유일민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미 뒷조사를 다 했다는 엄포였다.
"만약에 아버지가 나타나면 어떡하겠어?"
수사관은 펜대 뒤끝으로 유일민의 눈을 찍듯이 하며 물었다.
"......자수하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안 들으면?"
"......신고를 해야지요."
"그게 진심이야?"
"예......, 네 식구를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잖습니까."
유일민은 모범답안대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동안 조사를 받을 때마다 묻는 말이었고, 대답도 언제나 똑같았다.
"아 참 담배 피우나? 자아, 담배 피워."
담배를 끈 수사관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담배 못 피웁니다."
"흠, 아주 모범생이로군."
수사관은 묘하게 웃으며 의자를 끌어당기고는,
"좋아, 지금부터 시작하자구. 지난 두 달 동안 무엇을 했는지 하루 단위로 진술해. 차근차근 자세하게."
유일민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지나버린 두 달 동안의 생활을 낱낱이 기억해 내야 하는 것도 암담한 일이었지만, 그러자면 괴로운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 것인지 그만 가위가 눌렸다. 이런 취조 방법도 전에 겪지 않은 것이다. 이러다 가정교사 자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동생은 또 얼마나 몸 달아 하며 기다릴까......, 동생? 동생은 무사할까?
"저어,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제 동생도 조사를 받고 있습니까?"
유일민은 다급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동생? 왜, 걱정되나? 염려 말어, 미성년자는 제외니까."
수사관은 법의 윤리성을 퍽 잘 지키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건 조사할 가치가 없으니까 제외한 것일 뿐이었다. 자신은 동생보다 훨씬 어린 나이인 중학생 때부터 경찰서에 끌려 다녔었다.
"자아, 7월 1일부터 진술해."
수사관이 앉음새를 단단히 하며 펜촉에 잉크를 찍었다. 두 달이라고 하더니 갑자기 보름이 더 불어났다. 그러나 유일민은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한 달이 더 불어났다고 해도 그건 수사관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일이었다. 유일민은 굳이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쓸 것도 없이 나날의 생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생활이라는 게 무미건조하고 변화가 없었다. 막히는 것 없이 풀려가던 진술이 방학이 되어 보름 동안 집에 내려갔던 대목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눈초리가 더욱 날카롭게 곤두선 수사관이 자꾸 말을 막거나 되묻고 캐묻고 했다.
"이봐, 얼렁뚱땅 발라 맞추려고 하지 말어. 혼자 머리 좋은 척했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 진술이 일치해야 된다 그 말이야."
수사관은 얼굴만큼 냉혹하게 협박했다. 진술의 일치란 어머니도 수사 받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유일민으로서는 그건 너무 괴로운 협박이었다. 어머니가 또 고초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유일민은 정말 더 살고 싶지 않은 고통으로 전신이 비비 꼬였다. 수사관의 추궁에 했던 말을 다시 또 하고, 자세하지 못하다는 지적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하며 유일민은 빠작빠작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목이 너무 타서 물 한 잔이 간절했지만 그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진술을 하면서 목 타는 기색을 자꾸 보였지만 수사관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눈치 빠른 수사관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계속 묵살해 버리는 것은 그것 자체를 일종의 고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유일민은 뒤늦게 깨달았다.
유일민은 그동안 서동철을 두 번 만났던 것은 진술에서 빼버렸다. 그 말을 했다가는 손수 주먹패를 만들어 설치고 있는 서동철을 경찰에 밀고하는 꼴이었고, 더구나 같은 성분의 자식끼리 결속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 새로운 말썽이 될 소지가 있기도 했다. 가까스로 두 달 반의 진술을 끝냈다. 유일민은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몇 시쯤 되었는지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 이거 벌써 9시 반이 됐나. 이거 미안하게 됐군. 저녁 대접할 걸 잊어버려서. 뭘 먹겠어?"
얼핏 손목시계를 본 수사관이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별로 생각 없습니다."
유일민은 정말 전혀 식욕이 없었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으며, 그 말은, 다 끝났으면 어서 보내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부장님, 이거 죄송합니다. 깜빡 잠이 들어서 그만."
한 남자가 꾸뻑거리며 책상 옆으로 다가섰다. 두꺼운 어깨가 떡 벌어졌고 인상이 험상궂었다.
"됐어. 이 학생 저녁 시켜주고, 변소에 데리고 갔다가 와."
"예, 뭐가 좀 잡혔습니까?"
"별로........"
"이 새끼 이거 대가리 좀 좋다고 오리발 까는 것 아닙니까? 호되게 몇 바퀴 돌려야 되지 않겠어요?"
"이봐, 내가 시키기 전까지는 절대 딴 짓 할 생각하지 말고 이거나 다시 꼼꼼하게 확인해."
수사관이 엄하게 말했고,
"예, 그러지요 뭐......." 어깨 벌어진 남자가 머쓱해져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야, 일어나, 썩은 물 빼야지"
하며 유일민의 의자 다리를 툭 찼다. 유일민은 몸이 한정 없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 남자를 따라 변소로 갔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낙담이 걷잡을 수 없도록 의식을 허물어 뜨리고 있었다. 유일민은 변소로 들어가기 바쁘게 수도꼭지를 틀어대고 물을 벌컥거리기 시작했다. 숨차게 물을 들이켜다 말고 가슴 아릿하게 슬픔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있는 자신의 꼴이 너무 서글프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남자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의식한 탓인지도 몰랐다. 유일민은 수도꼭지에서 입을 떼고 말았다.
"새끼, 애비 팔자 그리 타고나서 좋은 대학만 다니면 뭘 해."
어깨 넓은 남자가 담배연기와 함께 내뱉은 말이었다.
"......."
유일민은 심한 모독감을 느끼는 동시에 어머니를 떠올렸다.
"부모 팔자가 반팔자라는데......."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어머니가 탄식처럼 토해내다가 그치고 마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삼켜버리곤 했던 말을 그 남자가 한 셈이었다.
‘그래, 애써서 좋은 대학만 나오면 뭘 하겠느냐. 난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깔려 죽는 개미새낀지도 모르지.......’
유일민은 평소에 언뜻언뜻 했던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두 개의 수레바퀴는 경쟁적으로 굴러가고, 자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서로가 적을 가차 없이 무찔러대는데, 자신은 그 수레바퀴 아래 깔려 죽는 한 마리 개미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오줌이 잘 나오지 않았다. 기운을 썼지만 오줌은 찔찔거리고 요도 끝이 매웠다. 오줌이 덜 나온 무지근한 느낌인 채로 유일민은 변기에서 물러났다. 혼자라면 정말 더 살고 싶지 않은 절망감에 눌리며 다시 그 남자를 따라 시멘트복도를 걸었다.
"밤샘해야 하니까 많이 먹어둬."
야전용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가 담배연기를 풀풀 날리며 말했다. 책상 위에는 곰탕 한 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숟가락을 들긴 했지만 유일민은 전혀 식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 마치 짐승이 되어버린 것처럼 굴욕스럽고 처참했다.
"살아야 한다, 이것저것 다 참고 견디며 살아 있어야 이기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말이 어서 밥을 뜨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이긴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건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식들을 실망이나 좌절에서 구하려는 모성의 힘이고 의지였으리라. 어머니....... 어머니는 이런 상황일수록 더 억세게 밥을 잡수실 건데.......’
유일민은 밥을 떠서 입에 넣었다. 목이 아프도록 넘어가는 것은 밥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평소에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데 어머니도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가득 눈물이었다. 억지로 먹으려고 애를 썼지만 유일민은 곰탕을 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어깨 넓은 남자는 새로운 수사관으로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자아, 처음부터 다시 진술해."
"예에......?"
"귀먹었어!"
수사관은 버럭 소리치며 책상을 걷어찼다. 유일민은 다시 두 달 반 전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 가면서 이것도 사람 사는 것인가 하는 굴욕스러운 회의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야, 야, 이 새끼 너 순 구라풀고 있잖아. 넌 술도 통 안 마신다 이거야?"
"예, 그럴 돈이 없습니다."
"뭐야? 친구들한테 얻어 마시는 일도 없다 그거야?"
"예, 가정교사 하느라고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하 이거, 계속해."
수사관은 몸집과 인상에 비해 전 수사관과 별다를 것 없이 치밀하고 예리했다.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꼬치꼬치 캐고 들거나 윽박질렀다.
"얌마, 넌 빠구리도 안 트고 살아?"
"......?"
유일민은 어리둥절했다.
"이게 어느 나라 국민이야. 이거. 아, 종3 같은 똥치들하고 한 번도 안 붙었느냐구."
"예, 그럴 돈도 없습니다."
귓등으로 듣기로는 그 돈이 하룻밤에 3천환이라고 했다. 그 액수는 자신에게 엄청난 거금이었다.
"아서라 말어라. 손 고생만 죽어라 시켰다 그거지. 계속해."
또 목이 타드는 고통에 시달리며 12시가 넘어서야 확인 진술이 끝났다.
"일어나. 변소 갔다 와야지 ."
또 새로 나타난 수사관이 말했다.
‘지치지 말아야지 어머니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당했는데. 어쩌면 지금쯤 구타당하고 있는지도 몰라.......’
유일민은 소변을 보면서 지치고 있는 자신을 일깨웠다. 오줌 줄기는 여전히 시원치 않았다.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처음부터 다시 진술해."
유일민은 다시 이야기를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했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고도 자신에게 숨겼을 리가 없는 터에 아무 쓸모도 없는 두 달 반 동안의 이야기를 백 번이라도 더 반복해 줄 수 있다는 오기가 돋아 오르고 있었다. 세 번째 반복 진술이 끝난 것은 새벽 4시경이었다. 다시 변소를 다녀와서 네 번째로 진술이 되풀이되었다. 그동안 야전침대에서 코를 골며 자고 일어난 어깨 넓은 남자가 조서를 넘겨받았다.
"졸지 말어. 졸면 이게 날아가."
그 수사관은 책상 위의 검도봉을 번쩍 치켜들었다.
네 번째 되풀이가 끝난 것은 아침 8시 30분쯤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수사관들의 대화로 알게 되었다. 다시 곰탕그릇을 받았지만 유일민은 또 반도 먹지 못했다. 시험공부로 밤샘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피곤으로 몸이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9시쯤에 첫 번째 수사관이 나타났다.
"뭐 좀 추가사항이 있었나?"
"머리가 좋아서 우릴 물먹이는 건지 어쩐지 쪼로록 빈틈이 없습니다."
어깨 넓은 수사관이 불만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됐어. 빨리 확인 작업시켜."
"뺑뺑이 한 번도 안 돌려보구요?"
"시키는 대로 해. 수사 마무리가 급해."
어제 그 형사들에게 인계된 유일민이 첫 번째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자취집이었다. 두 형사는 조사를 넘겨가며 주인여자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확인해 나갔다. 주인여자는 두려움에 떨며 자꾸 유일민을 흘겨보았다. 유일민은 미안하고 부담스러워 그 눈길을 피해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학생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래요?"
확인이 다 끝나자 마침 주인여자가 물었다.
"아주머니도 정신 바짝 차리고 어떤 수상한 자가 이 학생을 찾아오면 즉시 신고하도록 하시오. 이 학생 아버지가 이북으로 넘어간 자요."
"어머머 그, 그럼......."
주인여자는 소스라치며 두 손으로 황급히 입을 가렸다. 유일민은 눈을 질끈 감으며, 이 집에 더 살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남천장학사였다 학교공부보다 고등고시에 더 몰두하고 있는 이규백과 김선오는 제각기 방을 지키고 있었다. 사건 내용을 알게 된 그들은 주인여자만큼이나 얼굴이 질렸다. 그런 그들은 자기들과 만났던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해 주지 않고 얼버무리거나 발뺌하려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 당혹감과 그 참담함...... 유일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고, 끝내는 자기가 먼저 눈길을 돌렸다. 모두 뿌리치고 떠미는 힘에 밀려 자기 혼자뿐이라는 고립감에 유일민은 견딜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선배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그 절망의 깊이는 끝도 없이 깊었다.
세 번째 목적지로 가면서 유일민은 간첩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 지를 자기 자신에게 일깨우려고 애썼다. 목숨을 좌우하는 것, 죽음 그 자체......, 그 일깨움은 선배들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힘겨운 노력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우릴 감쪽같이 속이고, 우린 공산당이 철천지원순데, 나가요, 당장 나가!"
식모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임호태의 어머니는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유일민은 진정 미안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큰길로 나을 때까지 호태와 채옥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지고 있었다. 사실 확인을 마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 것은 오후 7시 경이었다
또다시 보충 수사가 시작되었다. 또 꼬박 밤을 새웠다. 첫 번째 수사관이 10시쯤 나타났다.
"그동안 수고했어. 자네나 가족을 위해 천만다행이야."
유일민은 가방을 들어 올릴 기운이 없어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는 불빛이 번쩍 일었는데 몸은 와르르 허물어져 내렸던 것이다. 유일민은 동생의 학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생의 학교가 가까웠고, 한시라도 빨리 안심시켜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제발, 제발 내려오지 마세요. 만나서 당하는 비극보다 만나지 않고 그냥 그리워하며 사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북에서는 왜 자꾸 사람들을 내려보내는지 모르겠어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선가요? 그건 남쪽을 너무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6 .25를 겪고 난 남쪽 사람들은 공산당이나 사회주의를 너무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나라에서 감시하고 처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6 .25를 통해 북쪽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며 공산당을 싫어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 사람들을 내려 보내 무슨 효과를 보자는 겁니까. 여기 있는 가족들만 더더욱 비참하게 만들뿐입니다. 2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월북자 가족이 감시와 시달림에 견디다 못해 외딴 섬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에 그 월북자가 내려와 그 섬까지 찾아갔습니다. 결국 경찰에 발각되었고, 그 사람은 항복을 하지 않고 총질을 해대다가 가족과 함께 여섯 명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이런 무모한 짓을 왜 합니까. 최근에는 현직 차관의 동생이 내려와 형의 자수 권유를 안 듣다가 결국 형의 신고로 체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4 .19는 독재정권을 물리치려는 것이지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남파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까. 그런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제발 내려오지 마십시오. 그냥 그리워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20. 고단한 삶
내리 석 달을 비구름 한 번 볼 수 없는 하늘이었다. 개울도 다 말라붙어 송사리들이 배를 뒤집고 죽고, 개울가의 풀들마저 시들시들 꼬여들고 있었다. 그러니 논이란 논들은 쩍쩍 갈라져 거북등이 된 지 오래였다. 8월 말까지만 해도 농부들은 벼포기가 타드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발싸심을 다 했다. 불볕 속에서 무자위를 밟아 물을 퍼올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밤마다 모기떼에 뜯겨가며 용두레질이나 쌍두레질로 밤을 밝혔다. 그러나 그런 애면글면한 몸부림도 둠벙에 물이 있거나 물길을 찾아 새 둠벙을 팠을 때까지 뿐이었다. 개울물마저 말라붙는 지경에 이르면 농부들은 벌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낙담하고 메마른 논두렁을 치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산봉우리마다 기우제 지내는 푸른 연기가 피어 오른 것도 8월 말까지였다. 마지막 기대였던 기우제의 효험도 없이 9월 가뭄이 더 극심해지자 농부들은 지칠 대로 지쳐 탄식마저 잃어버렸다.
"아, 요것이 무신 변괴랴. 샘물도 요리 바닥이 나니 하늘이 쌩사람꺼정 다 보타 죽일 작정 아니라고?"
"금메 말이시. 연 이태럴 워찌 요리 고랑탕얼 믹이는지 몰르겄네 웨. 작년에넌 물이 망허게 허등마 금년에넌 가뭄으로 망허게 허니 말이여."
"참말로 예삿일이 아니랑께. 묵을 물도 요리 보타드는 판이니 올 삼동에 우리 다 굶어죽게 생겼네."
"음마, 태평시런 소리 허고 앉았네. 시방 쭉찡이만 걷게 생겼는디 삼동언 무신 삼동 타령이여. 찬바람 일기 전에 다 굶어죽을 판잉마."
"글씨, 그렇탕께로. 우리가 무신 못쓸 죄럴 졌다고. 하늘도 무심허시제."
머리에 쓴 삼베수건을 벗어 또아리를 틀며 아낙네가 짙은 한숨을 토했다. 네댓 명의 다른 아낙네들도 두레박질을 하고 물을 동이에 쏟고 하면서 너나없이 한숨들을 토했다. 그녀들의 검게 탄 얼굴은 잘 먹지 못해서 꺼칠하게 메말라 있었다. 가뭄이 너무 심해 이른 아침인데도 우물가에는 촉촉한 기운이라곤 없이 둘레의 나뭇잎들도 시들거렸다.
"어이, 어이, 또 탈나 부렀구마."
빈 물동이를 인 여자가 부산스럽게 걸어오며 수선을 떨었다.
"탈언 무신 탈이여. 엊저녁에 누가 샛서방질이라도 혔능감?"
"하이고, 요 징허고 징헌 가뭄에 삭신 다 늘어져 뿌렀는디 가운뎃다리 슬 남정네가 있어야 서방질이라도 허제."
"얼랴, 그 무슨 방자놈 헛방구 꾸는 소리여 남자야 백지장 한 장 들 기운만 있어도 그것 헌다는 말 듣지도 못혔어."
"음마 염병덜 헌다. 그 야그 나옹께 꿀 본 개미새끼덜맹키로 다덜 신짝을 벗어붙이네 그랴. 빈 속에 기운덜도 좋다."
"하이고, 공자님 가운데 토막이 여그 있네 그랴, 그 야그 나오면 부처님도 웃는다는디 워재 초 치고 그려?"
"잉, 이 사람이야 본시 춘향이 찜쪄묵을 열녀 아니시여."
"힝, 얌전헌 개 부뚜막에 먼첨 올라가고, 소문난 열녀 똥구녕으로 호박씨 까는 법이여."
"하먼, 하먼. 그 속맘얼 쪼개봤으니 알어 뒤집어봤으니 알어. 깨 쏟아지게 재미럴 봤어도 사리살짝 뒷물혀뿐 담에야 냄편이 알 것이여. 경찰 서장이 알 것이여."
"워메, 참말로 염병덜 하고 앉었다 와. 가뭄으로 땅이 타는 판에 염치라고는 읎이 요것덜 밑은 추져지는 모냥인디, 요것은 또 무슨 변괴랴아."
"큭큭큭큭......."
"히히히히......."
한바탕 입장단을 맞춘 그녀들은 서로 허물없이 웃음을 나누었다.
"근디 탈언 무신 탈이랑가?"
"말 안 헐라마. 넘 말에 짐 다 빼뿔고 나서는."
"안 할러먼 냅둬부러. 그만헌 말에 짐빠질 일이면 벨라 큰 탈도 아닌 갑는디."
"어따, 들어보도 않코 척척 삼천린디, 참 잘난 판관이시. 어지께 고리채 낸 배샌이 밤중에 깨끔허니 야반도주 혀부렀어. 요래도 큰 탈이 아니여?"
"머시여? 배샌이? 고리채럴 을매나 냈는디?"
"아이고메 으쩌끄나! 우리 보리쌀 두 되도 날라갔능갑네."
"누구, 누구헌티 고리채럴 냈는디?"
아낙네들의 관심은 일제히 그 사건으로 쏠렸다. 농사가 영 가망 없어 앞날 걱정이 태산인 그들 형편에 고리채를 내서 밤중에 온 식구가 감쪽같이 고향을 등졌다는 것은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공동우물을 먹는 신세인 그들도 고리채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살림이 궁색하기는 배 서방네나 별다름이 없었다.
"아조 단단허니 작심허고 고리채럴 냈구만 그랴."
"배샌네가 그간에 땡겨다 쓴 고리채가 솔찮을 것인디, 을매나 손에 쥐고 떴을랑고?"
"근디, 그 식구 델꼬 워디로 갔을꼬?"
"위디 도회지로 갔겄제. 도회지서 지게품을 폴아도 농새짓는 것보담 낫다는 것이 요새 부쩍 이는 바람 아니여."
"그려, 지게품을 폴아도 새끼덜 갤치기도 수월코, 요런 눔에 미꼬미(가망) 읎는 농새짐서 해마동 느는 고리채에 치여 죽느니 그리라도 내빼는 것이 똑똑헌지도 몰르제."
"그 뚱한 배샌이 강단진 속맘은 따로 있었구만 이. 사람 벌로 볼 것이 아니랑께."
"긍께로 열 질 물속은 알아도 한 질 사람 속은 몰른다고 안 혀. 우리 남정네덜언 멀 허고 자빠졌는 제겐덜이여."
"하이고, 무담씨 짐치국 마시덜 말어. 아그덜할라 주렁주렁 딸래갖고 낯설고 물선 타관살이 고상이 을매겄어 어찌어찌 젼딜 수만 있음사 고향땅이 질이제. 배고파 아그덜 뱃속에 회 동허고, 빛쟁이 들으먼 경칠 것잉께 인자 싸게들 가드라고."
나이 지긋한 여자의 말막음으로 아낙네들은 우물가의 푸념을 거두고 제각기 물동이를 이었다. 이규백의 형수 해남댁도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를 벗어났지만 다리는 후들거릴 지경으로 맥이 없었다. 남편이 험한 물길에 쓸려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다음부터 생긴 증상이었는데, 올해 들어 살림이 더 쪼들리고 가뭄까지 겹쳐 애를 끓이게 되자 그 증상은 한층 심해지고 있었다. 그건 풀릴 길 없이 가슴에 켜켜이 쌓이기만 하는 시름이 키우는 병이었다. 또한, 시어머니 앞에 전혀 내색은 못하지만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사무쳤다. 밤마다 짓는 속울음 속에서 외로움은 살을 훌고 뼈를 갉았다. 남편이 차지했던 하늘이 그리도 넓고, 남편이 드리웠던 그늘이 그리도 도타웠던 것을 느낄수록 홀로 남겨진 세월이 너무 막막하고 무서웠다. 남편은 아이들 셋을 흔적으로 남겨놓고 떠났지만 그 세월은 고작 7년이었다. 열아홉에 시집와서 얼떨결에 보낸 그 세월은 남편 없이 보낸 지난 1년에 비하면 너무 짧고도 안타까웠다. 몸만큼 마음도 실했던 남편은 남부럽지 않게 살 가지가지 꿈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논에는 피 하나 피어나지 못하게 했고, 빈 지게를 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술주정을 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고, 노름에 손을 댄 적도 없었다. 그리고 시어머니 눈을 피해가며 텃밭농사도 거들어주었으며, 정을 나눈 밤이면 머지않아 양단 치마저고리를 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양단 치마저고리를 받쳐 입고, 금 쌍가락지를 끼고, 동백기름 바른 머리에 금비녀를 꽂고 친정 나들이를 가는 게 시집올 때 간직한 꿈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황홀감에 젖어들며 남편의 품에 안겨 있을 때면 그 넓은 가슴팍은 바윗덩이 산인 월출산만큼 튼실하고 듬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허망하고도 허망하게 떠나가 버리고 이제 남겨진 것은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논바닥 같은 세월뿐이었다. 배 서방네가 끝내 야반도주를 했지만, 차라리 남편 따라 떠난 마점댁이 부러웠다. 해남댁은 물동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뿌리며 고샅을 돌아섰다. 그때 어떤 남자가 불쑥 다가서며 적삼 아래로 드러난 젖을 움켜잡았다.
"워메, 엄니!"
"사람 미치게 허지 말고 나랑 도망갑시다."
지게를 진 송촌댁네 머슴의 입김이 뜨겁게 끼쳐왔다.
"나 소리 질르고, 요 물 확 찌끌어 뿔라요."
그의 손아귀에서 젖을 빼내려고 해남댁은 상체를 심하게 요동쳤다. 그 바람에 물동이의 물이 왈칵 넘쳐났다.
"소리 질르면 누가 손핸디. 허송세월 말고 팔자 고치는 게 상수요."
넘치는 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젖을 놓친 머슴이 능글맞게 웃었다. 해남댁은 누군가 본 사람이 없나 몸이 달며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누가 보기라도 해서 소문이 나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시어머니를 어찌 대할 것이며 , 동네 입방아는 또 어찌 견딜 것인가. 그런데......, 그 머슴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가 심상치 않은 눈길을 보내오고, 들길에서 말을 걸고 한 것이 벌써 몇 달 전부터였다. 그는 반공포로로 흘러 들어와 머슴살이로 서른 나이를 채워 가고 있었다. 서너 사람이 함께 왔다가 다른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그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뿌리내리고 살겠다는 듯 이북 말씨도 차츰 고쳐갔다. 그러나 고향이 이북인데다가 가진 것이 없는 그에게 혼인발이 설 리 없었다. 해남댁은 왼쪽 젖퉁이에 그의 화끈하던 손길이 그대로 찍혀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젖을 잡히는 순간 불두덩 저 깊이로 짜르르 일어났던 그 뜨거움도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 느낌이 남편이나 시어머니에게 너무 죄스러우면서도 다리에 기운은 더 풀리고 있었다.
"시암에 물이 딸리드냐?"
너무 늦은 것을 책하는 시어머니의 말이었다.
"야아. 물은 딸리고 사람은 많고......."
해남댁은 시어머니의 눈길을 피하려고 이렇게 얼버무리며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늦은 변명삼아 배 서방네 일을 곧바로 전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와 얼굴을 맞대하면 그 일을 금방 들킬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탈은 큰 탈이다. 인자 묵을 물도 그리 보타드니 모도가 산 목심덜이 아니다. 아이고, 규상이 월사금 땀세 논얼 한 마지기 폴든지 고리채럴 내든지 혀얄 것인디......."
이규백의 어머니 영암댁은 마루를 건성으로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무님, 서울 되련님헌테서는 무신 소식이 없는게라?"
논을 팔든지 해야겠다는 말에 놀라 해남댁은 엉겁결에 부엌에서 나오며 물었다. 남편은 생전에 논을 자기 육신처럼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금메, 지 한 몸 고등고시 공부허기도 피가 보틀 판인디 또 무신 심으로 동상 학비꺼정 벌어 보내겄냐. 애가 탄께 말이사 그리 혔겄지만 쉰 일이 아니제. 우리 집안 필라면 갸가 어서 고등고시 합격혀서 판검사 나리가 돼야 헝께, 우리는 그간에 무신 수럴 써서라도 집안얼 꾸려가야 써."
영암댁은 또 한숨을 물었다.
"근데......논얼 폴면...."
해남댁은 차마 남편을 입에 올리지는 못했다.
"그려, 논이 우리 목심인 것이야 다 아는디. 글 안 해도 사람 잡든 고리채 이자가 가뭄 들자 하늘 높은지 몰르고 치솟아댄께 어쨌그나 손해 덜 보는 쪽으로 차근허니 따저봐야 쓰겄다."
7부에서 8부 하던 고리채 이자는 가뭄을 타고 벌써 1할을 넘고 있었다. 다른 해 같았으면 급전을 돌리려고 돈 많은 미곡 도매상에 입도선매가 성행할 시기였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으로 농사가 다 망쳐져 그 길마저 막히자 사람들은 고리채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저어 어무님, 우리 야담 식구 묵고 사는 것이 우선에 급헌디 논도 지키고 고리채에 더 치이지 않을라먼 큰 되련님이 판검사 될 때꺼정 작은 되련님이 핵교럴 잠 쉬는 것이 어쩔랑가......."
"머시여? 고런 소리 허덜 말어라. 공부는 때가 있는 것이고, 논얼 다 폴아서라도 자석덜언 갤칠 것잉께."
영암댁은 부르르 떨듯 말했다.
"아이고메 엄니이이, 엄니, 엄니!"
김선오의 막내 동생 선진이는 엉덩이를 까 내놓은 채 쪼그리고 앉아 숨 넘어가게 어머니를 불러댔다.
"머, 머시냐. 워째 그려?"
막내둥이의 외침에 놀란 월하댁은 부지깽이를 든 채 부엌에서 뛰쳐나왔다.
"어, 엄니......, 회, 회덩어리가......."
겁 질린 얼굴로 선진이는 앉은걸음을 치며 말을 더듬었다.
"머시여? 회가 나왔다고? 산또닝잉가 머신가 묶었응께 회 나오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머시메가 돼 갖고 짜잔허게 멀 그리 놀래고 그냐. 나넌 비암헌티 붕알이라도 물린지 알었다."
월하댁은 한숨을 돌리며 막내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아니여, 비암보담 더 무섭단께로. 얼렁 엄니도 보소."
선진이는 여전히 겁 실린 얼굴로 눈망울을 굴렸다.
"워메, 요것이 뭐시다냐!"
막내 옆으로 다가서던 월하댁은 질겁을 하며 물러섰다. 큰 감만한 것, 그것은 회충의 덩어리였다. 희읍스름한 회충들은 서로 뒤엉켜 느리게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어찐가? 비암보담 더 무섭제?"
어머니도 놀란 것에 만족한 선진이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쌕 웃었다.
"워따, 시상에나 징허고 징해라. 저것이 다 니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여? 글 안 해도 잘 묵도 못하는 속에 저런 잡것들이 들앉어 진기럴 뽈아내니 항시 히놀놀 해갖고 지대로 크기럴 허냐, 지대로 피기 럴 허냐, 개잡녀러 컷들!"
월하댁은 저주하듯 세차게 침을 내뱉고는 돌아섰다.
"엄니, 그냥 가지 말고 저것이 전부 멧 마린지 시알라 줘야 혀."
쪼그려 앉은 선진이는 얼굴 벌겋게 힘을 쓰다 말고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저 징하고 드런 것을 멀라고 시알라야. 국 끼레 묵을라냐?"
월하댁이 되돌아서며 어이없어 했다.
"선생님이 시알라 오라고 혔어. 조사혀서 우게 보고헌다고."
"옳여, 숙제로구만 그려, 산또닝 빼돌리지 않고 잘 믹였다는 표시로 그런 조사럴 허기넌 혀알 거이다."
월하댁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깽이로 아직도 서로 뒤엉켜 꿈지럭거리고 있는 회충 덩어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한나, 두울......, 열시, 열니......, 시물, 시물한나......, 워메, 징허고 징혀라. 시물네 마리다. 시물네 마리!"
월하댁은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냈다.
"화아, 시물네 마리! 나가 1등이겄다."
선진이는 감물 들인 삼베반바지를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아이고 요런 철딱서니 읎는 것아! 1등 헐 것이 따로 있제. 인자 묵는 것이 살로 가고, 니 꼴이 잠 피겄다."
월하댁은 안쓰러운 얼굴로 막내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니, 나 머리가 어질어질허고 눈앞이 노란허네."
선진이는 어머니의 후줄근한 삼베치마를 붙들며 막내다운 어리광을 피웠다.
"아이고 내 새끼, 워째 안 그렇컸냐. 밥할라 굶고 두 차례나 산또닝 묵니라고 약기운에 에린 몸이 을매나 홀태질을 당했을끄나. 회가 그리 어벌이 쑥 빠지게 헐 만치 독헌 약인디. 어여 가서 눴거라. 엄니가 얼렁 밥 해 줄팅께."
월하댁은 끌끌끌 혀를 차며 막내둥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엄니, 금숙이 누나도 회 나왔을랑가?"
"이, 누나도 약 묵었응께 나왔겄제, 아까 통시깐서 나오든디."
"을매나 나왔을랑가?"
"몰르제. 가서 물어봐라."
"나보담 많을랑가? 히히히......."
선진이는 국민학교 3학년에 어울리는 몸짓으로 까불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금숙이 누나, 회 멧 마리 나왔능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를 보고 있는 금숙이는 동생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귀 먹었능가!"
선진이는 빠락 소리치며 만화책을 뒤집어버렸다. 다 헐어빠진 만화는 박기당이 그린 [해당화]였다.
"이 머시메가 왜 또 이려?"
금숙이가 만화에 취한 멀뚱한 눈으로 동생을 쳐다보았다.
"나넌 회가 시물네 마리나 나왔는디 누나는 멧 마리나 나왔냔 말여."
"워메 징상시럽고 드러라. 니 시방 고것 자랑허잔 것이여? 빙신이 넘세 시런지도 몰르고."
동생에게 눈을 싸늘하게 흘겨댄 금숙이는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지랄허고 있네, 가시네새끼가. 지까징 것이 6학년이면 다여? 선생님이 시알라 오라고 혔응께 그렇제."
시무룩해진 선진이는 방구석의 책보를 끌어당기며 꿍얼거렸다. 월하댁은 허드렛물을 버리려고 장독대 옆의 수채로 나오다가 사립을 들어서는 작은아들과 마주쳤다.
"멀라고 또 나갔드냐, 애만타제. 근다고 하늘이 비 나래줄 것도 아닌디."
작은아들은 아무 대꾸 없이 텃밭 쪽으로 걸어갔다. 결국 2학기에 농고로 전학을 한 작은아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논으로 나갔다.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논을 걱정하는 그 모습에서 월하댁은 문득문득 남편을 느끼고는 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얼굴이며 뒷모습까지도 그렇지만 농사에 정성을 바치는 것은 영락없이 남편 그대로였다. 작은아들의 꿈도 형과 같은 판검사였다. 그런데 농고로 전학을 하고 말았으니 그 속이 얼마나 쓰리고 아릴 것인가. 작은아들의 그런 철든 마음 씀씀이가 한없이 고맙고 대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엄니, 너무 속상허지 말어요. 성이 곧 판검사 되면 집안 필 것이고, 공부는 그때 가서 혀도 안 늦은께요. 우선 성이 맘 놓고 공부허게 허는 것이 중허구만이라."
이런 작은아들의 말을 생각하며 월하댁의 눈길은 장독대로 옮겨졌다. 제일 큰 장독 위에 언제나처럼 하얀 사발이 놓여 있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신님 전 비나이다. 성은 김이요, 이름은 선오, 우리 선오 하로빨리 고등고시 합격혀서 으리번쩍 판검사 되게 삼신님께서 굽어살펴 주십소사. 우리 집안에 생광이 일게 삼신님, 삼신님, 굽어 살펴 주십소사.’
월하댁은 또 자신도 모르게 간절하게 빌어올렸다. 그 정화수는 큰아들이 서울로 떠난 뒤로 단 하루도 빼먹은 일 없이 올려온 것이었다. 둥그런 밥상에 식구들이 둘러앉았다. 칠이 벗겨지고 흠이 많이 난 밥상처럼 반찬에서도 가난이 흐르고 있었다. 깡보리밥에 호박잎 뜯어 넣은 된장국 고춧가루를 뿌린 시늉만 한 푸성귀 김치와 멸치젓, 간장 한 종지가 전부였다. 작은 접시에 조금 담긴 멸치젓은 그나마 작은아들 선태 앞으로 치우쳐 있었다. 계절이 지나고 있는데다가 가뭄까지 겹쳐 텃밭의 푸성귀마저 동나는 판이었다.
"엄니, 저어......, 그 대답 낼 토요일꺼정 혀야 허는디......."
둘째딸 명숙이는 흘금흘금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입엣소리로 겨우 말했다.
"요 가시네가 또 그 소리여? 니 속창아리가 있나 읎냐!"
월하댁이 느닷없이 소리치며 눈을 부릅떴다.
"엄니, 나도 사람이여!"
명숙이는 오히려 기를 세우며 울음 섞인 소리를 질렀다.
"누가 니보고 즘생이라고 허디냐. 언니가 작년에 고등핵교 중도서 작파허고, 작은오빠가 사내대장부 꿈 접치고 농고로 전학허는 요 화급헌 사정이 니 눈구녕에는 안 뵈냐? 가시네가 중핵교꺼정 나오면 과거급제 허는 폭이제 시건방구지게 더 무신 상급핵교여, 상급핵교가. 이 에미넌 낫 놓고 기역자도 몰라도 시상살이 요렇타께 잘혔다. 더 주딩이 놀리덜 말어."
말을 해가면서 차츰 성질이 돋은 월하댁은 숟가락을 든 손으로 마구 삿대질까지 해댔다.
"되얏어. 인자 죽어도 말 안 혀. 나도 졸업허먼 광주 언니헌티로 갈 것잉께 그리 알어. 목 매달어 죽었으면 죽었제 요런 촌구석에넌 안 살 참잉께."
입술을 깨무는 명숙이의 얼굴은 말만큼 다부지고 강단져 보였다.
"얼랴, 얼랴, 느그 언니도 안직 취직을 못허고 발싸심얼 허는디 니까징 것이 도회지로 나가 워쩌겄다는 것이여. 존 말 헐 직에 안 듣고 헛바람 들어 나대기만 혀봐라. 다리 몽뎅이럴 작씬작씬 뿐질러놀 것잉께."
밥만 떠 넣고 있던 선태가 어머니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 눈짓 말을 알아차린 월하댁은 하르르 한숨을 휘며 숟가락 끝에 간장을 찍었다. 젓가락을 입에 물고 군침을 흘리고 있던 선진이는 형의 눈길이 딴 데로 돌려진 틈을 타 멸치 한 마리를 냉큼 찍어왔다. 그러자 옆에 앉았던 금숙이가 동생의 다리를 질벅거렸다. 그러나 선진이는 모른 척하며 멸치를 한입에 넣어버렸다. 금숙이는 동생의 허벅지를 꼬집어 비틀었다. 선진이는 누나의 팔을 잡고 사정없이 쳐내고는 숟가락이 넘치도록 보리밥을 떠서 입에 몰아넣었다. 그때까지 입 안에 담고 있던 멸치와 밥을 씹기 시작했다. 멸치와 밥이 섞이면서 멸치젓의 짜면서도 고소한 맛이 제대로 살아나고 뚝뚝한 보리밥도 부드러워지며 달착지근해졌다. 통통하게 살찐 멸치 한 마리를 뼈가 발라지게 반으로 찢고 그걸 다시 절반씩 나눠 김치에 걸치면 보리밥 반 그릇을 맛나게 먹을 수 있는데 누나 때문에 그러지 못한 것만 선진이는 억울했다.
선태는 여동생 명숙이의 일로 하루 종일 공부가 되지 않고 우울했다. 그건 어쩌면 자신이 겪고 있는 갈등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신은 어찌할 수 없어 농고로 전학을 하긴 했지만 마음의 절반은 인문학교에 걸쳐진 채 우울하고 괴로웠다. 법관이 되려고 했던 꿈을 포기해야 하는 패배감이나 좌절감도 컸고,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는 데도 자신감이 서지 않았다. 평생 고생만 한 아버지의 삶을 되풀이 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앞섰고, 농고의 분위기도 그 두려움에 부채질을 할 뿐이었다. 대부분의 농고생들이 인문학교 학생들에게 열등감을 갖듯 자신들이 농부가 된다는 것을 암담해 하거나 풀죽어 있었고, 선생들도 그저 교과서에 있는 것을 가르칠 뿐 장래에 대한 그 어떤 희망이나 자신감도 주지 못했다. 그나마 공부를 좀 하는 애들은 읍 면사무소에서 펜대를 굴리는 공무원으로 살 궁리를 하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었다. 선태는 무거운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며 또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가르쳐 출세시키는 일념으로 살았다. 자신이 농고로 전학을 한 것은 아버지의 그런 뜻을 그르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버지가 살아 계신 것과 돌아가신 것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농토를 지키면서 그 일을 해냈겠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상태에서 자식들이 계속 공부를 하자면 논밭을 차츰 팔아치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농사짓는 데 얼마나 열성이고 억척스러웠던지 논을 매면서도 놉을 사는 일이 없었고, 퇴비를 많이 해 비료를 거의 사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머슴이 농사를 지으면서 부터는 논을 매는 데는 말할 것도 없었고 피를 뽑는 데도 놉을 사대라고 했고, 퇴비는 아예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농비는 몇 갑절 더 들면서 소출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집안이 기우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다 또 가뭄까지 겹쳐왔으니 집안 거덜 나는 길로 무턱대고 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힘이 부치고, 동생들은 어리고, 자신이 꿈을 뒤로 미루는 도리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힘이 그리도 막대한 것이었음을, 아버지 없는 집안에 식구들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야, 선태야, 인자 학교 파했냐?"
김선태는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돌렸다. 한동네에 사는 형의 중학교 동창인 송동주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읍내넌 먼 일로......?"
김선태는 마지못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니넌 젊은 놈이 워째 그리 맨날 맥아리 읎고 근심에 찬 쌍판이냐?"
송동주가 김선태의 어깨를 툭 쳤다.
"날이 요리 개지랄인디 무신 기운 나고 웃을 일이 있겄능가."
하늘에 침이라도 뱉듯 하며 김선태는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어허 농부가되기로 맘묵었으먼 그리 일희일비(一喜一悲)해서는 안 되는 것이제. 농사야 숭년 들 때도 있고 풍년 들 때도 있는 법잉께 하늘에 뜻 따라 진득허니 참고 기둘릴 줄 알아야 진짜배기 농분 것이여. 글안 혀?"
김선태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송동주가 굳이 문자를 써대는 것도 귀에 거슬렸고, 농사꾼으로 도통한 척하는 것도 비위 상했다. 농고 출신인 그는 대학을 못 다닌 열등감에서 그러는지, 아니면 무식한 다른 농사꾼들에 비해 농고 출신인 것을 과시하느라고 그러는 것인지 유난히 문자 쓰기를 즐겼다. 그러나 농사꾼은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수리시설을 잘한다고 해도 저수지 바닥까지 쩍쩍 갈라지는 가뭄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 농사의 숙명이었다.
"성은 무신 존 일이 있는 게비제?"
읍내 걸음을 한 것도 그렇고, 어딘가 화색이 도는 느낌도 그렇고, 김선태는 슬쩍 떠보았다.
"아니여, 존 일언 무신 존 일."
송동주는 입을 훔치고는,
"니 인자 4H 클럽에 들어야지야?"
그는 얼른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4H클럽이 밥 믹여주간디. 나 학교에 있는 4H클럽에도 안 들었네."
무언가 숨기는 눈치가 분명해 김선태는 이렇게 것질렀다. 동네 4H클럽 회장인 그는 무슨 영문인지 회원 수를 늘리려고 안달을 하며 그동안 벌써 서너 차례나 입회를 권했다.
"니 여그서 농사짓고 살라면 나 말 듣는 거이 좋을 것인디? 나가 느그 성 선오럴 봐서도 니헌티 손해날 일 권허겄냐? 쩌그 그늘에 잠 쉬었다 가자. 동백나무 그늘이 아깝다."
송동주는 네댓 그루가 벗하고 있는 동백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김선태도 동백나무들이 드리운 짙은 그늘에 자리 잡았다. 더운 철 그늘치고 가장 볼품없는 것이 소나무 그늘이라면 그 반대로 풍성한 것이 감나무 그늘이었다. 그러나 감나무 그늘이 당하지 못하는 것이 동백나무 그늘이었다. 그만큼 동백나무는 잎이 두껍고 촘촘해 그 그늘이 짙고도 깊었다. 강진에 감나무보다 많은 것이 동백나무였고, 이른 봄에 핏빛으로 피어나는 꽃과 함께 여름철의 그 그늘은 강진이 지닌 특유함이었다.
"4H클럽 들어서 존 것이 뭔디?"
"그야 차차 알게 될 것이고."
송동주는 묘하게 웃고는,
"이 용개라이타 사준 년은 딴 디로 시집을 가불고. 잡년, 후회헐 날이 있을 거이다."
그는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용개라이터'란 말에 김선태는 픽 웃었다. 그 라이터의 심지덮개가 꼭 남자 물건의 그 부분같이 생겼고, 용개란 용두질의 전라도 말이라 생겨난 이름이었다.
"근디, 가뭄이 요리 심헌디 나라에서 무신 방도럴 잠 안 세울랑가?"
"나라? 니 시방 자다가 봉창 뚜딜기냐? 정권 잡은 민주당 놈덜이 허는 꼬라지럴 봐라 신파니 구파니 갈라져 서로 붕알 잡고 쌈박질 허니라고 나라가 흥허든 망허든 정신이 없는 놈덜 아니냐. 죽은 학생들만 불쌍허고, 민주당 놈덜 가망 읎다. 요런 땔수록 지 실속 지가 채우는 것이 질인 것이여."
"지 실속?"
"그려, 요새 논 값이 똥값 아니냐. 나 오늘 논 닷 마지기 샀다."
"엉? 닷 마지기나? 돈은?"
"둘렀제."
"고리채 내서 논을 사?"
"미쳤냐? 2부 이자다."
"아니, 그리 싼 빚돈이 어딨어?"
"긍께로 니넌 안직 철이 안 들었어야 내년에 논 값이 지 자리럴 잡으면 이자 제허고도 남는 장사제 짜아 가자."
김선태는 송동주를 따라 일어서며 머리가 띵하고, 송동주가 전혀 딴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4H클럽 회장이라는 감투와, 너무 싼 이자의 빚돈과, 논 장사를 하고 나선 수완과......, 그 아리송한 의문들이 뒤엉키며 김선태는 그를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21. 배신과 불신
가로수 이파리에 가을이 스미고 있었다. 초록빛이 바래 누르스름하고 불그레하게 단풍 들어가는 잎사귀들이 소슬한 바람결에 스산함을 자아냈다. 어떤 잎새들은 벌써 낙엽 져 도심의 보도나 차도에 흩날리고 있었다. 나뭇잎들보다 계절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더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흰색에서 검정색으로 바뀐 학생들의 교복이었다. 그리고 길거리마다 연탄 실은 마차들 오가는 게 부쩍 늘어났다. 길목 길목에 자리를 잡았던 그 많은 냉차장수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군밤이나 군고구마 냄새가 어스름 깔리는 거리에 퍼지기 시작했다.
지프를 개조한 검정색 자가용에서 내린 강기수는 헛기침을 하며 호텔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8층짜리 반도호텔의 끝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흥, 장면이가 여길 좋아한다더니 이젠 신파 놈들이 아지트로 삼는 모양이구나. 그래, 자알들 논다.’
강기수는 콧방귀를 뀌며 넥타이를 고치다가 양복을 스치고 떨어지는 낙엽을 구두로 짓밟았다. 그리고 잽싸게 앞선 비서가 열어주는 호텔 문으로 들어섰다. 훈김과 함께 왈칵 끼쳐온 것은 야릇한 담배 냄새였다.
‘아, 이 양농 냄새!’
강기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 향 짙은 시가 냄새는 미국사람을 맞대했을 때와 같이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미국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어깨를 폈다. 하지만 이런 거북한 데다 약속장소를 정한 상대방에게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드글거리는 이런 데보다 방석 깔고 노닥거리는 요정이 한결 운치 있고 마음 편했다.
‘세상이 확 달라졌으니 영어란 걸 익히긴 익혀야 되는데 말야.......’
강기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커피숍을 찾아가고 있는 비서를 따라갔다. 느닷없이 해방이라는 것이 되고 미군정이 실시되었을 때 영어를 배우려고 했었다.
"봐라, 시상은 요런 것이다. 해묵은 놈이 또 해묵고, 심 있는 놈이 심 있는 놈을 지 편으로 삼는 것이여. 그렇게 양지만 골라감서 시상 요령 지게 사는 법은 어느 짝이 심 있는가 딱 종그고 있다가 판이 째였다 허먼 넌 먼첨 그짝으로 찰팍 붙어야 혀. 인자 미국 시상으로 결판났응께 니넌 일본말 싹 잊어불고, 옛적에 일본말 배우든 열성으로 미국말 배와야 되야. 이 애비 시절은 다 갔어도 니 시절은 인자 새로 시작잉께로. 알겄지야?"
해방이 되고 두 달 동안 서울로 피해 있다가 무사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해방이 된 다음날부터 경찰서며 주재소는 학생과 청년들 차지가 되어버렸고, 그들의 서슬에 일본과 친했던 사람들은 피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에 숨어 있으면서 그만 세상이 끝장난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산으로 어디로 피신한 경찰이며 공무원 출신들을 찾아내 예전 자리에 다시 앉혀줄 뿐만 아니라 승진까지 시켜주었다. 그 기막힌 새 세상에 맞추려고 애썼지만 영어 익히기는 뜻 같지 않았다.
"강 의원님, 여깁니다. 어서 오십시오."
민주당 신파의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인 정 의원이 반색을 했다.
"이거 원........"
강기수는 마뜩찮은 얼굴로 실내를 획 둘러보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에 안 드셔도 좀 이해하십시오. 남들 눈을 피하느라구요."
상대방은 정권을 잡은 여당의 실력자답지 않게 겸손을 보였다.
"뭐, 괜찮습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강기수도 사교적으로 겸손을 꾸미며 어서 용건이나 꺼내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커피를 시키고 담배를 권하고 하며 뜸을 들였다. 장면 총리는 새 기강을 확립한다고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요정 출입과 양담배를 엄금하고 있는 판인데 그 직속이 권한 것은 팔말이었다. 살렘은 여자나 피우는 것이고, 켄트는 싱겁고, 카멜은 너무 짧고, 팔말은 담배답게 독하면서도 길어서 멋있다고 해서 단연 인기였다.
"뭐......, 보셔서 다 아시는 일입니다만 지난 9월 말에 구파에서 20여 명, 무소속에서 10여 명이 우리 신파로 오면서 대세는 완전히 굳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심사숙고하셨으니 강 의원께서도 그만 결단을 내려주시지요."
강기수는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더 무슨 말을 할 기미가보이지 않았다. 강기수는 그만 기분이 획 상했다. 그냥 민주당으로 옮기려고 여태껏 버티어온 것이 아니었다. 신구파 세력다툼을 이용해 주가를 올릴 대로 올려서 큼직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오늘 그 협상인 줄 알았더니 대세론으로 밀고 나와?
"에에 또......, 대세라 말씀하셨는데, 구파가 신당을 창당할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리 되면 장군 멍군 아닐까요. 다 아시다시피 구파 쪽에서도 우리를 귀찮게 굴고 있으니 나 혼자 어쩔 수 없고 우리끼리 다시 의논을 해봐야지요. 우리도 유권자들의 뜻이 있고 하니까......."
강기수는 성질을 부리는 대신 거만을 있는 대로 부리며 일부러 '우리'를 강조하고 있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 들어오셔서......."
"알겠습니다. 저녁에 우리 모임이 있어서 그만......."
강기수는 상대방의 말을 자르고 벌떡 일어섰다.
"빌어먹을 자식!"
얼굴이 벌겋게 되어 호텔을 나선 강기수는 담배를 사정없이 팽개쳤다.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지 남루한 입성의 노인네가 금세 나타나 연기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를 길고 가는 막대기로 찍어 올렸다. 막대기에 묶인 펜촉에서 담배를 빼내는 노인네의 찌든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 담배는 미처 반도 안 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기수를 태운 차는 정릉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내의 가로수와는 달리 정릉 뒷산에는 한결 곱게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봄은 산을 타고 오르는 데 비해 가을은 산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의원님 가을이네요."
윤 마담이 미모에 어울리는 농염한 웃음을 피웠다.
"가을이나마나 다 왔어?"
강기수가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네에, 네 분이 기다리세요."
나긋한 목소리와는 달리 윤 마담은 강기수의 꼭뒤에다 눈을 흘겨댔다.
"이거, 판이 더럽게 돼가고 있소. 대세가 신파 쪽으로 굳어졌으니 그냥 들어오라는 배짱놀음으로 나오는 판이오."
강기수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참아왔던 화를 터뜨리듯 말했다.
"아니, 그래 뭐랬소?"
최영찬이 다급하게 말을 받았다. 그도 다시 당선이 되었지만 표차가 강기수의 4만 표에 비해 어림이 없었다. 동석한 다른 세 사람도 가까스로 턱걸이한 형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표차가 월등한 강기수가 여당과의 협상에 주도권을 잡고 앞으로 나서게 된 거였다.
"배짱에는 배짱으로 튕기는 것 아니오. 우리 힘을 과시해 주고 내가 먼저 자리를 차고 나와 버렸소."
내 배짱이 어떠냐는 듯 강기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거 참 잘하셨어요."
"암 잘하구말구요."
"그럼요, 몸 다는 건 제 놈들이니까."
그들은 한꺼번에 입을 모았다.
"그런데 말이오......, 대세가 굳어졌다는 게 꼭 공갈치는 것만은 아니잖겠소. 정치란 현실인데, 우리끼리 솔직하게 말해서 그동안 여당생활만 해온 우리가 실권도 없고 또, 야당으로 바뀔 게 뻔한 구파와는 애당초 손을 잡을 뜻이 없었던 것인데, 신파에서 우리의 이런 입장을 약점으로 공격하는 것 아니겠소. 우리 욕심을 좀 줄이고 이 시점에서 차선책을 찾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싶소."
최영찬이 강기수의 눈치를 살피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렇기도 해요. 우리 무소속이 철통같이 단결하지 못하고 지난 월말에 10여 명이 넘어가면서 남은 우리의 입지가 약해졌어요. 더 약해지기 전에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 해요."
한 사람이 동의를 하고 나섰다.
"에에......., 최 의원님 말도 일리가 있으나 꼭 그렇게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오. 만약 우리 다섯 전부가 구파로 간다고 했을 때 신파 쪽에서 얼마나 몸이 달겠소. 다시 말해 신파의 약점도 투시해야 한다 그거요."
강기수는 한쪽으로 쏠릴 위험이 있는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 이들을 이용해 큼직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않은 채.
"그야 그렇지요. 허나 힘은 그쪽이 세고, 우린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다른 사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막말로 노름도 새벽에 끗발 오르는 놈이 이기더라고 이 일도 지금이 고비요. 우리도 저쪽도 두 달이 넘게 이 일로 실랑이질하고 버팅기고 하느라고 지칠 만큼 지쳤소. 허나 우리보다 더 지치고 몸이 달아 있는 건 저쪽이오. 왜냐, 우린 저쪽 하나뿐이었지만, 저쪽은 우리 회유하랴 구파하고 쌈질하랴 상대가 둘인데다. 이젠 구파의 분당이 명백해진 상황이란 말이오. 이 분당 사태야말로 우리의 주가를 최대한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고, 또 우리가 고대했던 바로 그 기회가 아니겠소. 우린 이 막바지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더욱 일치단결하여 우리가 원하는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거요. 그러기 위해서 마지막 강수로 우리 모두가 구파로 간다고 위장술을 써보는 게 어떻겠소."
"그야 밑져봐야 본전이긴 한데, 별효과가 없으면요?"
최영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야 우리 요구조건을 낮춰서 우리한테 필요한 이권이나 톡톡히 챙기면서 들어가면 될 거 아니겠소."
"그거 좋은 방법입니다. 특혜 건을 하나 물어왔는데 일은 안 풀리지, 선거 빚 이자는 불어나지 죽을 지경입니다."
"나도 환장하겠어요. 그리 결정합시다."
"그럼 내가 다시 한 번 몰아붙여도 되겠습니까?"
강기수는 자신의 뜻대로 된 것에 만족하며 형식적으로 물었다.
"예, 좋습니다."
"빨리 잘 좀 풀어보세요."
그들은 다같이 찬성하며 술 마실 채비를 했다.
"거 교수 놈들은 왜 또 떠드나 그래."
"그까짓 것 신경 쓸 거 없어요."
한국교수협회에서는 '민주당 정부와 국회는 집권 이래로 혁명의 정신이나 국민이 지지해 준 선거의 의의를 망각하고 권력의 쟁탈을 위한 파쟁으로 시일만 허송하고 도리어 반혁명세력과 결탁하여 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것이다.
도심의 술집인데도 화단이 있어서인지 가을 풀벌레 소리가 구슬프게 울리고 있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정감이 사무치는 그 가녀린 소리를 반주삼기라도 한 듯 어느 방에선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구성지게 부르는 젊은 여자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영화 주제가는 한창 유행바람을 타고 있었다.
남재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멀리 들리는 노래에 귀를 팔고 있었다. 그 노래의 대상이 여자인데도 어쩐지 자신의 지나온 인생살이를 엮어낸 것처럼 느껴지며 가슴에 잠겨오고 있었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특히 이런 대목은 콧등이 시큰해지도록 감정을 자극했다.
"이봐,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어서 술 마셔."
한인곤이 잔을 내밀었다.
"이런, 무슨 술을 그리 급히 마시나 속상해 하지만 말고 오늘 일어난 일이나 얘기해 봐."
남재구는 축축해진 감정을 털어내며 한인곤이 따르는 술을 받았다.
"참 한심해, 내가 왜 국회의원이 됐는지 모르겠어."
한인곤이 푹 한숨을 쉬며 술 주전자를 상이 울리게 놓았다.
"허! 자네 어르신 말씀마따나 배부른 소리하고 앉았군. 그래도 만년 육군 대령보단 나을 텐데?"
남재구는 담배를 빼들며 이죽거렸다.
"말 마. 오늘 그 일 당하고 나니까 내가 국회의원이라는 게 너무 창피하고, 그동안 참아왔던 당에 대한불만과 실망이 한꺼번에 터져 오르는 게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야."
"글쎄, 그런 자네 심정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말야, 오늘 당한 일이 신문에 난 그대론가?"
"아니야 신문들을 보니까 그래도 국회 체면을 봐주려고 한 건지, 아니면 약게 국회 눈치를 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크기도 별로 크지 않고 내용도 왜 점잖게 쓴 거야."
한인곤은 술잔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남재구는 술잔을 건네며 어이없어했다.
"아니, 회의가 중단되고, 국회의장석을 빼앗기고, 연단이 엎어지고, 학생들이 의장석을 짓밟고 올라가고, 그런 것을 다 썼는데도 점잖게 써? 그럼 도대체 얼마나 심했는데?"
"한마디로 엉망진창 우리 군대에서 흔히 쓰는 말로 개판이고 깽판이었어. 부상학생들이 환자복이며 흰 까운을 입은 채로 목발을 휘둘러대며 파쟁 국회, 만주 반역 국회 해산 하라고 외쳐대지, 분노할 대로 분노한 60여 명이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하면서 연단의 유리란 유리는 다 박살나지, 발포자들이 무죄라면 우리를 다 죽이라고 외쳐대며 유리컵을 깨서 할복을 하려고 옷을 벗어 붙이지, 그걸 말리려고 쫓아나간 의원들이 휘둘러대는 목발에 맞고 쓰러지지, 모든 의원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죄인으로 고개 숙이고 앉았지, 그 창피스럽고 한심한 국회 꼴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 빌어먹을!"
한인곤은 술잔을 왈칵 비웠다.
"이거 좀 뭣한 말이지만, 당연히 올 게 온 거 아닌가."
"암, 당해서 싸지."
한인곤은 얼굴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정신 차려야 해. 이번 사건이 장면 정권과 민주당의 위기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거니까."
"누가 아니래나. 그래도 정신 차리긴 글렀으니 사람 미칠 일이지."
한인곤은 또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4 .19 부상학생들이 정기국회를 열고 있는 민의원 단상을 점거한 사건은 사흘 전에 있었던 혁명재판의 결과에 분노한 때문이었다. '혁명재판'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재판에서는 발포자 다섯 명중에 한 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 처리를 했다. 그리고 악명 높은 반공청년단 간부들이면서 정치깡패인 네 명중에 한 명에게만 5년형을 언도하고 나머지에게는 벌금형과 무죄를 내렸다. 여섯 달을 질질 끌어오던 '혁명재판'의 그 결과에 시민들은 다음날 즉각 데모로 응답하고 나섰다.
마산에서 재판부를 규탄하는 철야데모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날마다 전국의 대도시에서 데모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 기세가 두려웠던 것인지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뒤늦게 '혁명정신을 모독한 법관들을 탄핵 소추해야 한다.' '재판관들의 정실감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공격에 재판관들은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고 이제 와서 비난하는 것은 국회의원들의 무책임'이라고 책임을 떠넘겼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그동안 존재가 없는 것 같았던 대통령도 '그 판결은 민족정기를 무시한 것'이라며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런 와중에서 마침내 부상 학생들이 병원을 뛰쳐나와 국회로 쳐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일부의 비판처럼 그 재판관들이 과거의 정치 부패세력과 결탁한 자들이건, 정신감정이 필요한 자들이거나 간에 어쨌든 모든 책임은 집권당인 민주당에 있었다. 지난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164석(신파 88, 구파 76)을 차지해 의석의 3분의 2 선을 넘었고. 자유당 출신 무소속은 35석, 사회대중당이 3석이었다. 국민들이 그런 엄청난 지지를 해주었는데도 민주당은 집권 두 달 반이 다 되도록 신구파로 갈려 세력다툼만 하느라고 다른 일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혁명재판을 위해 하루가 급한 특별법조차 만들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한 것이었다.
"아니 그럼, 의사당 앞에서 데모대가 시키는 대로 신구파 싸움을 중지하겠다고 악수까지 해놓고 또 싸우겠다는 거야?"
남재구가 너무 어처구니없어 하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야 데모대의 기세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한 거고, 그 싸움은 아무도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야. 고질병.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모르겠어? 그놈의 권력욕이라는 게 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급하고 중한 나라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말야. 이런 꼴 보자고 국회의원 된 게 아닌데."
한인곤은 술을 거푸 들이켰다.
"차암, 그 간부하는 윗대가리들은 다 귀먹고 눈멀었나? 지금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렇게도 몰라? 자유당정권만 무너지는 줄 아나. 한 번 정권을 무너뜨려 본 국민은 두 번째는 더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남재구도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래. 젊은 의원들이 그런 식의 말을 해도 늙은이들은 마이동풍이야. 이걸 그냥 성질대로 때려치울 수도 없고 말야."
"자네, 그런 소리는 말어. 자네가 말했지. 군대 기질 버렸고, 정치는 곡선이라고. 내가 미력이나마 자넬 돕기로 한 건 생활안정 때문도 아니고 감투 때문도 아니야. 광복군 때의 그 마음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데에 감동했고 나하고 똑같은 식으로 당한 자네가 내 몫까지 다해서 이 나라를 바로잡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야. 나도 자네 같은 여건이었으면 정치를 했을 테니까. 그러니 참고 기다려. 기다려야 때가 와."
한인곤은 술기운이 걷히는 긴장감으로 남재구를 응시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속마음이었다. 여건이 같았으면 자신도 정치를 했을 거라는 말이 가슴을 징 울리고 있었다.
"알았어, 자네 말대로 할게."
약속의 표시인 듯 한인곤은 술잔을 건넸다.
"그래, 정동진은 만나봤나?"
남재구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안 내켜."
"허허, 저러고도 곡선인 정치를 해?"
"이 사람아, 생각해 봐. 내가 예편당하니까 인정사정없이 싹 외면했던 놈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니까 득달같이 연락을 했는데, 그게, 그게 어디 인간이야.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도 뻔뻔하고 교활한지, 도무지 사람들 속은 알 수가 없고 세상 살기가 겁나."
한인곤은 고개를 내둘렀다.
"여보게, 인간이니까 그러는 거야. 대개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약아빠지게 살지 않던가. 다 그러려니 생각하고 만나보도록 하게. 손해날 것 없으니까."
"거 무슨 소리야? 인간들 태반이 그렇더라도 친구 사이엔 그러지 말아야지. 그놈이 왜 날 다시 접촉하려는지 모르나? 내 국회의원 자리 이용해 먹자는 수작 아니냔 말야."
한인곤이 참고 있던 화를 터뜨렸다.
"자넨 확실히 나보다 순수해, 사회 물을 덜 먹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자넨 지금까지도 정동진을 친구로 놓고 말하는데, 정동진은 이미 그렇지 않아. 정동진이가 자넬 이용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네도 그렇게 작정하고 만나는 거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지. 자넨 이젠 일개 대령이 아니라 국회의원이란 걸 잊어선 안 돼 국회의원은 자기 나름대로 많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정동진은 명색이 장군이고, 군부는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세력 아니냔 말야. 그보다 더 좋은 정보망이 어디 또 있겠나. 적을 모르고 싸우면 백전백패지만 적을 알고 싸우면 백전백승이다. 자네 알지? 이용 당해주면서 더 크게 이용하라구."
남재구는 술잔을 들며 야릇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차고 매웠다.
"응, 그럴 수도 있겠군. 자넨 역시 훌륭한 내 스승이야."
"그 무슨 소리. 자네의 충실한 참모지."
그들은 마주보고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다음날 한인곤은 국회가 법안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또다시 놀라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는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부랴부랴 '민주반역자 처리 법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그 신속함이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데모를 무서워한 것이었고,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잠정적 조치이긴 하지만 법을 하룻밤 사이에 졸속으로 꾸며대는 것은 더 문제였다. 두 달 반을 허송한 무책임이나 그 벼락치기의 무책임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 참......,이것 참......."
아무 힘도 없는 초선의원 신세의 서글픔에 젖어 한인곤은 연달아 한숨을 쉬고 혀를 차고 했다.
"왜 그러십니까? 뭐가 마땅찮으세요?"
옆자리의 오재섭이 윗몸을 기울이며 낮게 물었다.
"글쎄, 이렇게 서둘러대면 법도 부실해지고, 국민들한테도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수 있고, 좀 곤란하지 않아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이따가 끝나고 얘기하십시다."
전후 유행어인 핸섬보이답게 생긴 오재섭은 눈을 찡긋했다.
"예 그럽시다."
오재섭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당 수뇌부에 속하는 어느 인사의 비서 노릇을 하다가 그 사람이 중병으로 눕자 그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선된 초선이었다. 나이는 서너 살 아래지만 정치학과를 나온데다가 국회 물을 오래 먹어서 아는 게 많았고, 자신에게 색다른 호감을 보여 한인곤은 오재섭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정치란 마술 같은 면이 있고, 특히 기회 포착이 중대합니다. 국민이나 대중들은 순진한 관객이구요. 마술사가 연달아 실수하면 관객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특별법을 지연시킨 건 분명 잘못이고, 그걸 당장 만들 수는 없고, 국민들 마음은 급하고, 그렇게라도 임시방편을 하지 않으면 정말 수습할 수 없는 큰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한 의원님이나 저나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서 따낸 당선인데, 일도 못 해보고 밀려날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이런 오재섭의 말에 한인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이승만 때보다도 더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민심이 뒤숭숭하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정치하는 놈들은 다 틀렸다고 난리 아니오? 근데, 장 총리가 발표한 5개년 기본경제 발전계획이니 농촌 고리채 정리를 한다는 농자금 방출 같은 건 말한 대로 제대로 되겠소?"
"글쎄요, 저도 걱정입니다. 곧 미국에 원조를 요청한다는데, 미국이 어쩔지......"
"남의 떡 가지고 굿하겠다는 건데, 참 아슬아슬한 줄타기요."
"예, 지금이라도 뭉쳐야 하는데......."
그들은 함께 한숨을 쉬었다.
22. 북풍이 부는 계절
"아니 여긴 어떻게 왔어?"
학교를 나서던 유일민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놀라움에는 뜻밖의 사람이 나타난 데다 반가움도 섞여 있었다.
"......."
임채옥은 눈물이 번지는 눈으로 유일민을 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코트를 입은 사복 차림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성숙한 젊은 여성이지 고등학생 티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어이 유 형, 애인인가? 멋진데?"
"미인인데 그래. 잘 어울려."
"학교까지 찾아오다니, 열렬하군."
같은 과 학생 네댓 명이 지나가며 짓궂게 한마디씩 던졌다.
"가지. 어, 어디로 갈까?"
유일민은 당황스럽게 말했다.
"창피하세요?"
임채옥의 또렷한 말이었다.
"아니, 아니야......., 어디로 가지?"
임채옥의 그 당돌한 말에 더 당황한 유일민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둥거렸다. 임채옥의 맹랑한 태도도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경험이 없었다.
"배고프시잖아요. 조금만 가면 빵집이 있어요."
임채옥이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니, 괜찮아......."
건성으로 대꾸하며 유일민도 걷기 시작했다.
"다 알아요. 점심 굶고 사는 거."
임채옥은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뭐라고?"
들켜서는 안 될 것을 들킨 것처럼 유일민은 창피스러움이 왈칵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창피해 하실 것 없어요. 전 그런 오빠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니까요. 그동안 책가방에 도시락이 든 것을 본 일이 없어요. 자취하고 고학하는 형편에 매일 점심을 사먹을 처지가 아니잖아요. 그럼 굶는 거지요."
"......."
그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유일민은 임채옥이가 하나의 여자로 불쑥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겹치는 또 하나의 모습이 있었다. 자신이 형사들에게 잡혀갈 때 대담하게 앞을 가로막고 나섰던 모습이었다.
"저도 일부러 점심을 굶어봤어요. 그렇지만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그 뒤로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아무 맛도 몰랐고, 오빠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았고, 성적이 안 오르는 호태가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임채옥의 말 마디마디가 따스하고 포근한 손이 되어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을 유일민은 느끼고 있었다. 그건 어머니한테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안온함이고 눈물겨움이었다. 그러나 유일민은 그 야릇한 감정에서 금방 깨어났다.
‘내가 왜 이래! 채옥이는 안 돼 다른 여자도 아니고 채옥이는 안 돼!’
임채옥의 아버지 어머니 얼굴이 너무 뚜렷하게 떠올랐다. 유일민은 가슴 한복판으로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호태는 공부 잘해?"
서로가 그 야릇한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고,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유일민은 의식적으로 호태를 끌어들였다.
"그 병신 얘기 묻지도 마세요. 그런 의리 없는 자식은 사람도 아니에요. 딴 말은 다 그만두고라도, 그 선생님 아니면 공부 안 하겠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엄마 아빠도 기가 죽어 꼼짝을 못했을 텐데, 그 병신이 대가리에 든 게 없어서 엄마 아빠가 하는 대로......, 그런 게 동생인 게 창피해요."
가라앉았던 아까의 목소리와는 달리 팽팽해진 임채옥의 목소리에는 동생에 대한 미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말에서 채옥이가 자신을 변호했었음을 유일민은 느끼고 있었다. 그 일로 자신을 변호한 유일한 사람......., 또 형사들 앞을 가로막던 모습이 떠오르며 유일민은 아까보다 더 진한 감정의 흔들림을 느꼈다.
"여기요, 팥빵 다섯 개하고 곰보빵 다섯 개 주세요. 빨리요."
빵집에 자리 잡기 바쁘게 임채옥은 주문을 서둘렀다.
"뭘 그렇게 많이......."
"저도 배고파요."
임채옥이 얼른 유일민의 말을 막으며 생긋 웃었다. 짙은 눈썹의 눈맵시도 그렇지만 윤곽 선명한 붉은 입술이 야성적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서 빵 드세요. 물 드시구요."
빵이 오자 임채옥은 포크를 잡으려다가 물 컵을 잡으려다가 손짓이 분주했다.
"딴 자리 구하셨어요?"
임채옥이 빵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물었다.
"구해지겠지."
유일민은 빵을 씹으며 웃음 지었다.
"잘됐어요. 제가 자릴 구했어요."
"뭐어?.
"다른 게 아니구요, 저하고 제 친구 둘하고 대학입시 전까지 수학을 가르쳐주세요. 그동안에 오래 있을 자리를 구하면 되잖아요. 수학만 하는 거니까 힘이 좀 덜 들 거구, 보수는 호태 가르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유일민은 임채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메어 빵이 넘어 가지 않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장소는 친구 집으로 하기로 했으니까 신경 쓸 거 하나도 없어요."
"그래, 날 위해 채옥이가 그렇게 마음 쓴 건 참 너무 고마운데, 그건 결국 어머니 아버지를 속이는 행위야. 그동안에도 속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는데 또 그럴 순 없지."
"어머, 오빤 우리 엄마 아빠가 너무 야비하고 인정머리 없다고 생각 안 하세요? 도대체 오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리 야박하게 해요."
"아니야, 어머니 아버지 입장에선 당연한 거야. 서운한 생각이 전혀 없진 않지만, 두 분 심정을 이해하고 있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고."
"아니, 그게 진심이세요?"
"그렇지 그럼."
"참, 오른쪽 뺨 때리니까 왼쪽 뺨 내미는 거네요."
임채옥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저 속 깊고 의연하고, 그러나 상처 큰 외로운 남자 유일민을 끌어안고 몸부림치고 싶은 충동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날 두 번 죄짓게 하지 말고 없었던 일로 해."
유일민은 임채옥의 접근을 막는 것이 급해 그 일을 냉정하게 잘랐다.
"그 친구들 부모하고 우리 엄마 아빤 전혀 모르는 사이라구요."
"그야 채옥이가 그 정도는 머릴 썼겠지. 허지만 어머니 성격에 선생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식 공불 맡기겠어? 어머니가 알려고 하시면 하루아침이야. 그 얘긴 그만해."
"하긴 엄마 극성에......."
임채옥은 어깨를 부리며 한숨을 폭 쉬고는
"그럼 오빤 어떡하구요."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이봐 채옥이, 똑똑히 들어. 채옥이가 그런 걱정해야 할 만큼 난 약하지 않으니까 채옥이는 입시공부에나 열중해. 그리고 더 이상 날 만날 생각도 하지 말어. 이거야말로 어머니 아버지한테 큰 죄 짓는 거니까."
유일민은 임채옥을 쏘아보며 단호한 태도를 지어보였다.
"네, 오빠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치만 그건 안 돼요. 엄마 아빠가 오빨 맘대로 끊고 자르고 할 수는 있지만 저를 막을 권한은 없어요. 전 저의 자유대로 행동해요. 오빠를 그렇게 이상하게 보는 건 엄마 아빠의 자유고, 그렇게 보지 않는 건 저의 자유니까요. 오빠도 제 말 똑똑히 들으세요. 오빤 이제 임호태를 가르치고 돈을 받는 가정교사가 아니에요. 오빠는 자유의 몸이라구요. 오빠 맘대로 오빠의 자유를 행사하세요."
유일민보다 더 단호하게 말하는 임채옥의 눈에서는 묘한 야성의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건방지게, 어디서 읽은 걸 잘도 응용해 먹는구나. 모든 자유는 언제나 구속 속에서 존재하는 거야, 하긴 겁 없이 그런 말하기 즐길 나이이기도 하지."
유일민은 일부러 픽 웃어버렸다.
"절 그렇게 어린애 취급하고 무시한다고 무슨 효과가 있을 줄 아서요? 저도 낼모레 대학생이에요. 오빠 어머님이나 제 엄마가 몇 살에 시집간 지 아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임채옥은 마치 무슨 선언이라도 하듯이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허허 참, 아주 맹랑하다니까."
마땅하게 대꾸할 말이 없어 유일민은 그만 헛웃음을 쳤다. 마치 결혼하자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당황스러웠고, 임채옥은 그런 말들을 하려고 작정하고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깐 앞으론 절대로 엄마 아빠 애긴 꺼내지 마세요. 그 문젠 됐고, 이것 좀 입어보세요."
부드럽게 태도가 바뀐 임채옥은 무슨 꾸러미를 무릎 위로 올리며 상끗이 웃었다.
"그게 뭔데?"
"그렇게 싫은 얼굴 할 것 없어요. 벌써 날은 추운데 그 낡은 작업복으로 되겠어요? 아주 싸구려 군용 스키파카니까 걱정 마세요. 그치만 뜨시긴 무지 뜨시다구요. 제가 입어봤거든요. 그리고 남자다운 멋도 있어요."
"난 싫어."
정색을 한 유일민은 고개까지 내저었다.
"그리 싫으면 관두세요. 필요 없게 됐으니까 여기서 다 찢어버리겠어요."
임채옥은 정말 그걸 찢어댈 것처럼 싸늘한 기세로 변했다.
"이봐 채옥이, 날 난처하게 만들지 마. 그게 날 위하는 게 아니야. 괴롭히는 거지."
유일민은 달래듯 사정하듯 간곡하게 말했다.
"오빤 이기주의자예요. 왜 제가 괴로운 건 생각 안 하세요? 오빠가 점심을 굶는 거나 마찬가지로 추위에 떠는 것도 절 괴롭히는 거예요. 그냥 입기만 하면 되는 건데 절 그렇게 괴롭히고 싶으세요?"
임채옥의 목소리가 울먹이는가 싶었다. 그런데 반쯤 풀어헤쳐지다 만 꾸러미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알았어, 알았어 울지 마, 울지 말어."
너무 당황한 유일민은 황급히 말하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남들 눈에 띈 것 같지는 않았다.
"추운데 지금부터 입으세요."
임채옥은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검정 물들인 스키파카를 내밀었다.
"그래, 나가면서 입지. 그만 가자."
유일민은 복잡한 심정으로 윤기를 내고 있는 검정색 스키파카를 받아들었다. 임채옥은 재빨리 일어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유일민은 뒤쫓아가 임채옥의 팔을 붙들었다.
"나 초라하게 만들지 말어."
유일민은 임채옥을 쏘아보았다.
"오빠아......"
"이 정도 비상금은 있어."
"어머, 정말요?"
임채옥은 활짝 웃더니,
"그 돈으로 저한테 딴 걸 사 주세요, 네?"
하고는 계산대로 내달았다. 밖에는 겨울의 이른 어스름이 번지고 있었다. 바람도 쌀쌀했다.
"너무 멋져요. 이젠 됐어요, 됐어요."
억지를 써서 손수 스키파카를 입힌 임채옥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이래선 안 되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유일민은 마음이 우울하고 무거웠다.
"우리 좀 걸어가요. 어둠은 내리고, 낙엽들은 구르고, 너무 낭만적이잖아요."
유일민은 오른손에 가방을 들고 왼손을 스키파카 주머니에 찌른 채 걷기 시작하며 낭만적이란 말을 되뇌어 보았다. 서먹하고 어설프고 그럴 뿐이었다.
"전 이 계절이 젤 좋아요. 난 길 잃은 에뜨랑제, 페이브멘트 위에 눈물을 뿌리며, 한밤을 홀로 헤맨다. 낙엽을 노래한 이런 시가 얼마나 잘 어울려요."
"그렇군......."
유일민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그 시에 돌출하고 있는 외래어에 비위가 상했다. 시에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는 것도 전후의 유행 중의 하나였다.
"아유, 저 추워요."
유일민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주머니 속의 왼손을 잡은 것은 임채옥의 손이었다. 유일민은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이상재와 최주한, 유일표는 토요일의 시험이 세 시간으로 끝나자 마자 용산 가는 버스를 탔다. 장경식은 허진의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들과 서먹서먹해졌고, 더구나 오늘처럼 허진을 찾아가는 일에는 끼워넣지 않았다. 일본과 친일파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사람이 다 나쁜 건 아니다'는 장경식의 주장에 그들은 너무 놀라고 실망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경식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서는 아이들도 몇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덕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왜놈들을 두둔하는 것은 신종 친일파'라는 유일표의 공격으로 하마터면 패싸움이 벌어질 뻔했었다.
용산의 큰길가에는 그만그만한 철공소들이 잇따라 붙어 있었다. 거의가 10평이 될까말까 한 작은 규모인데도 간판은 무슨무슨 공작소라고 크게 내붙이고 있었다. 공장 안이 좁아 온갖 쇠붙이며 기계 부속품들을 인도에까지 늘어놓아 그 근방에는 사람들이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인도에서 용접기의 불똥을 튀겨가며 용접을 하는 것은 예사였고, 쇠를 자르느라고 억센 사내들이 큰 쇠망치를 휘둘러대 오가는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며 피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더 고약한 것은 귀를 찢는 온갖 소음이었다. 쇠를 갈아대는 소리,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 쇠를 내던지는 소리, 쇠를 마구 두들겨 데는 소리들이 마구잡이로 얼크러지고 설크러져 난리판 굿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셋은 그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울 길을 따라 부지런치 걷고 있었다. 허진이 일하는 삼흥공작소가 멀찍이 보이자 앞서 걷던 이상재가 뒤돌아섰다.
"지금 몇 시쯤 됐을까?"
"글쎄, 아직 오포 안 불었잖아."
최주한이 유일표를 쳐다보았다.
"그런 것 같은데......, 어디 물어보자."
유일표가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들 중에 손목시계를 찬 사람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주인도 참 지독해. 하루에 10시간씩 부려먹으면서 아무 때나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최주한이 가방을 추스르며 투덜거렸다.
"야, 주인이 뭐냐 사장님이시지. 너 그렇게 말했다고 그나마 면회 금지 당한다."
이상재가 과장되게 어깨를 떠는 시늉을 했다.
"그까짓 게 무슨 사장, 겨우 직공 여섯 두고. 남산에서 돌 던져봐라. 머리에 돌 맞는 건 다 김가 이가 아니면 사장이니까."
"얌마, 철 지난 농담하지 마. 다섯 사람이 길을 가는데 뒤에서 김 사장하고 부르면 전부 뒤를 돌아보는 거야. 이 정도는 돼야 신삥(새) 농담이지."
"그거나 그거나."
나날이 서울로 사람들이 밀려들고, 다양한 업종으로 사장 명함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유행하게 된 말들이었다.
"12시 3분 전이래. 가자, 천천히 걸어가면 딱 점심시간 되겠다."
시간을 알아온 유일표가 말했다. 그들이 삼흥공작소에 이르기 직전에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사이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먼저 얼굴을 내밀어 사장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또 왔나!.
그들을 본 사장이 얼굴을 찡그리며 내쏘았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그들은 복창하듯 하며 모자를 벗고 깊게 절을 했다.
"진아, 그만 해라."
마지못한 듯 사장이 쇳소리들 뒤엉킨 속에다 대고 소리쳤다. 쇳가루 먼지 뿌옇게 낀 공장 안에서 나온 허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다 낡은 작업복은 붉은 쇳가루 먼지투성이였고, 양쪽 볼이 패어 광대뼈가 유난히 불거져 보이는 메마른 얼굴에는 먼지에다 검은 기름때까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가자, 밥 먹게."
유일표는 억지로 웃으며 허진의 팔을 끌었다.
"나 도시락 싸왔는데."
"그건 집에 가지고 가서 먹어. 요새는 안 쉬니까."
유일표는 더 세게 허진을 끌어당겼다. 그들은 가까운 중국집으로 뛰었다. 30분인 점심시간을 아껴야 했다.
"여기 짜장면 곱배기 넷이오."
앞장선 이상재가 중국집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너 일이 너무 힘들구나."
지난번보다도 더 상한 허진의 몰골을 바라보며 유일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괜찮아. 기술이 많이 늘었어."
손톱 밑마다 검은 때가 박힌 손으로 물 컵을 들며 허진이 웃었다.
"월급은 좀 올랐니?"
이상재가 가방을 뒤적이며 물었다.
"몇 달 됐다고 너무 불경기라고 우리 사장님 맨날 화를 내는데."
"이거 기말고사 시험지야. 오늘 시험이 끝났거든."
이상재가 가방에서 꺼낸 시험지들을 허진에게 내밀었다.
"매번 고마워."
시험지를 받는 허진의 목소리가 잠기는 듯했다.
"고맙긴 야. 친구 간에 그런 소린 하지도 말어."
허진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하는 유일표는 화가 난 듯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도 틀린 어려운 문젠 뒤에다 풀어왔어."
최주한이 말하는데 자장면이 나왔다.
"빼갈이나 콱 마셔버렸으면 좋겠다."
양쪽 손에 든 나무젓가락을 자장면에 푹 찌르며 유일표가 내뱉었다. 이상재와 최주한은 같은 심정이라는 듯 무거운 얼굴로 자장면을 뒤섞고 있었다. 그들은 억척스럽게 자장면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면발이 끊어질 새 없이 입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었고, 아무도 말을 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면발이 입으로 들어가고, 씹히고, 목으로 넘어가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단무지며 양파 쪽도 면발을 비집고 용케도 입으로 들어갔다. 그런 억척스러운 식욕도 무서웠지만, 그 먹는 기술은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물을 두 컵씩 들이켜고 나서야 어깨를 뒤로 젖히며 포만감에 찬 웃음을 나누었다.
"어때, 동생은 잘 다니냐?"
유일표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물었다.
"참, 지난달에 야간학교에도 들어갔어. 부지런하게 일 잘한다고 회사에서 한 시간씩 일찍 퇴근시켜 주기로 했거든. 모두 네 덕이야."
허진의 얼굴도 목소리도 밝아졌다.
"새끼, 그 소리 하지 말라니까."
허진에게 눈총을 쏘는 유일표의 얼굴에도 밝은 웃음이 피어났다. 일표는 형이 당한 그 사건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강자숙의 친구 박자영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꼈다. 허진의 여동생이 그런 혜택을 받게 된 것은 일을 부지런하게 잘한 것뿐만 아니라 자영이 힘써준 때문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제가 열성으로 일을 잘하면 야간학교를 다니게 해줄 수 있어. 그리고 졸업하면 정식 경리사원이 될 수 있잖아."
허미경을 자기 아버지 회사에 급사로 취직시켜 주며 박자영이 한 말이었다. 박자영은 마치 굳은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 약속을 지킨 거였다. 부의금 걷기를 피했던 독일어선생에 비해 그렇게 독립투사의 가치를 알아주는 박자영이 너무 고맙고 크게 돋보였다.
"너 공부가 좀 되긴 하니?"
최주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 하려고 애는 쓰는데 저녁밥을 먹고 나면 왜 그렇게 잠이 오는지......."
허진이 어색스럽게 웃었다.
"그래, 말하면 뭘 하겠냐. 우린 힘드는 일 아무것도 안 하는데도 밤마다 잠하고 전쟁인데."
이상재가 안쓰러운 얼굴로 허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참, 할머니는 건강하시냐?"
깜빡 잊었다는 듯 유일표가 안부를 물었다.
"응, 막내 동생 결혼시킬 때까지 사셔야 한다면서 매일 열심히 봉투를 붙이셔. 너희들이 둘도 없는 은인이라는 말씀도 날마다 하시면서."
"참 다행이다. 할머니가 기둥이신데 건강하셔야지. 인간은 정신적 동물이니까 할머니는 틀림없이 그때까지 사실 거야."
어디서 보고 들은 유식한 말을 써먹고 싶어하는 그 나이에 어울리게 유일표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또 부의금의 아쉬움을 떠올리고 있었다. 부의금이 좀 많이 걷혀 허진이 할머니와 함께 구멍가게라도 낼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럼 공장에 취직하는 것보다 힘도 덜 들고 수입은 더 많으면서 독학하기도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러나 부의금은 구멍가게를 내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아무리 볼품없는 산동네라 해도 길가의 가게 보증금이나 월세는 너무 비쌌고 물건을 사들일 돈도 있어야 했다. 애초에 너무 크게 부린 욕심이었다. 부의금은 사글셋방을 전세방으로 바꾸는 데 그쳤다.
"세상에,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은인들이 어데 또 있나. 가난은 나라도 구제를 못한다고 했는데, 이 어린 사람들이 글쎄, 이 은혜를 어쩌나......, 이 은혜를......."
허진의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데모 안 하니? 학교마다 금전비리 부정교사 무능교사 척결한다고 데모가 만발인데."
학교 소식이 궁금한 듯 허진이 물었다.
"왜, 우리 학교도 지금 뒤숭숭해. 우리 학교라고 앨범대 부정, 동하복비 부정, 졸업 기념품 비 부정 같은 게 없을 리 없고, 실력 없는 무능교사는 말할 것 없고 자격증이 가짜인 부정교사도 두엇 있다는 소문이야. 그래서 3학년들은 입시로 정신이 없으니까 우리 2학년이 주동이 되어 조사를 하는 중이다."
최주한이 신바람 나게 설명했다.
"이번 기회에 독일어선생 그거 몰아내야 해. 그거 실력 없기로 진작부터 소문났잖아."
유일표가 불쑥 말했다.
"그럼, 민 선생에 비하면 발음도 엉터리고 문법 실력도 형편없다고 3학년 형들이 이미 판정 내렸어."
이상재가 유일표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근데 왜 신문들은 데모로 날이 지새느니, 데모망국이니 하며 나쁘게만 쓰는 거니? 다 할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건데."
최주한이 불만을 터뜨렸다.
"너 그거 몰라? 그 문제에 대해서 한국교수협회가 발표한 시국선언 다섯 번째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있어. '현하 학원의 각종 분규는 민주세력 대 반동세력의 투쟁현상이다. 이 정권지대의 잔재를 청산함으로써 분규의 근본원인이 제거된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쁘게 쓰는 신문들은 뭐라는 거냐? 바로 반동세력 중의 하나라 이거야."
유일표는 이규백 형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었다.
"사회의 목탁이라는 신문들이 반동세력......?"
최주한이 아리송해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가야겠다. 5분 전이다."
벽에 걸린 낡은 불알시계를 보며 허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벌써 그렇게 됐냐. 수학시간에는 그리 지겨운 30분이."
이상재가 앞질러 나가자 그 뒤를 최주한이 급히 따라갔다. 서로 먼저 점심값을 내려는 다툼이었다.
"나 이사했다."
유일표는 허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왜? 세를 올려달래?"
"아니, 그럴 일이 있었어. 어서 가자."
유일표는 갑자기 일어난 충동을 억눌렀다. 형이 당한 그 억울한 일을 허진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형은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 억울함을 누구에겐가 말하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대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저 텅 빈 하늘에다 대고 욕을 해댈 뿐이었다.
"허진아, 힘내."
"그래, 잘 가 고마워."
시험지를 뭉쳐든 허진이 온갖 쇳소리 요란한 길을 뛰어갔다. 그들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해질녘이 되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몸을 더 웅숭그리며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추위에 쫓기는 그 모습들 중에 두툼한 외투를 입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규백은 빵집 구석자리에 앉아서 추위에 떠는 그 가난한사람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영락없이 자신의 몰골이고 식구들의 행색이었다.
"야, (비정의 대서부) 아주 근사하더라. 재미가 숨막힐 지경이야."
"얌마, 공갈 때리지 마. (서부는 내게 맡겨라)에는 못 당해."
"야, 야, 둘 다 잘난 척 마. 서부영화는 뭐니뭐니 해도 총을 잘 쏴야 하는데, 그 맛 최고가 쿠퍼의 (분과 노)야. 케리 쿠퍼는 권총을 뽑아 명중시키는 데 0.5초야, 0.5초."
"새끼들, 영 유치하네. (센티멘탈 쟈니)를 보고 나서 말해. 그거 아주 삼삼해."
"야, 근데 인디안 새끼들은 왜 그렇게 다들 악종들이냐?"
"그러니까 다들 죽여 없애야지. 그 야만인들 참 한심해."
"그래, 인디안들은 왜 그렇게 생김들도 못생겼냐. 사람 같지가 않아."
"거 미국은 역시 멋지고 근사하지?"
"말해 뭘 해. 세계 최고의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는 나란데."
"거길 언제 가보지?"
"난 대학 졸업하면 유학 간다."
연탄난로 가까이에 자리 잡은 고등학생 네댓 명이 빵을 먹어가며 거침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는 이규백의 얼굴은 점점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해마다 서부영화는 극장가에 홍수를 이루고 있었고, 그들이 입에 올리고 있는 영화들은 현재 상영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미국......, 미국......, 이규백은 자신의 의식 속에 미국이 세 가지 모습으로 투영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전시의 막강한 군사력, 전후의 잡동사니 구호물자, 그 뒤를 이어 몰려드는 문화의 태풍이었다. 그 여러 형태의 힘 앞에서 한국 사람들은 주눅 들고 고마워하고 최면당하면서 미국은 그만큼 찬란해지고 거대해지고 선망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규백은 그 심각성을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의식 어딘가에도 미국에 대한 선망이 전혀 없지 않다는 것을 괴롭게 확인하고 있었다. 감색 비로드 두루마기에 여우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빵집으로 들어섰다. 여자라면 누구나 입고 싶어 안달하는 최고 옷감 비로드로 치마저고리가 아닌 두루마기까지 해 입고 윤기 자르르 흐르는 황갈색 여우목도리까지 두른 그 여자의 온몸은 부티를 풍기고 있었다. 이규백은 그 여자가 자신과 약속한 상대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어, 혹시 이규백이란......."
"아 예, 벌써 와 있었군요. 앉읍시다."
그 여자는 빠른 눈길로 이규백을 훑었다. 이규백은 그 눈길을 의식하며 의자 끝에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미안하지만 학생증을 좀 보여줄 수 있나요?"
"아, 예에......."
이규백은 검정 물들인 야전잠바 윗주머니에서 학생증을 꺼내 내밀었다. 몸치장보다 더 부티가 나는 희고 윤기 도는 얼굴에 도도한 기색을 드러낸 여자는 학생증을 유심히 살폈다. 이규백은 대학 면접시험 때보다도 더 힘든 기분이었다.
"법대면 고등고시 공부에 너무 치중해 좀 곤란한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실력 있는 법관이 되려면 기초가 되는 학교 공부를 충실히 해야 되기 때문에 고등고시는 졸업 후로 미루고 있습니다."
"으음........"
여자는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는,
"법대생은 수학이 좀 약하지 않나요? 공대생에 비해"
하며 거만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피웠다.
"죄송합니다만, 수학시험에서 틀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씨가 좀 이상한데 고향이 시골인가 부죠?"
"예......, 호남입니다."
이규백은 가슴이 덜컥하는 것을 느끼며 전라도를 피해 호남이라고 했다.
"전라도로군요?"
여자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피우며 말했다.
"잘 알았어요. 우리 사장님하고 상의해서 다시 연락하겠어요."
이규백은 해 저문 추위 속을 걸으며 자신에게 심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일이 어긋날 바에 전라도라고 당당하게 말했어야 했다. '호남'이라고 말을 바꾸면서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전라도 하와이'라고 호칭으로 쓰이는 그 '전라도'라는 말을 스스로 하기가 싫었다. 그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그 무조건적인 비칭에 대한 저항감이었을까, 아니면 전라도사람이라는 숙명을 피하고 싶어 한 순간적 자기부정이었을까....... 어쨌거나 다시 연락은 오지 않을 것이다. 미간이 찌푸려지던 것이 그 여자의 진심이었고, 환한 웃음과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은 세련된 거절이었다. 벌써 서너 차례 비슷한 경우를 겪었지만 다시 연락 온 일은 없었다.
이규백은 세상살이가 겨울처럼 춥고 살벌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고등고시가 늦어지더라도 가정교사를 해서 동생들의 학비를 벌어보려고 했었다. 강기수 의원이 알면 당장 장학사에서 내쫓길 일이었지만 집안을 받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은밀한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바심은 이는데 농사를 다 망치게 된 가뭄 소식은 들려오고, 낙엽이 다 질 무렵 결국 논을 팔아야 되겠다는 어머니의 편지가 왔다. 마음만 급할 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논을 팔아서야 되겠느냐는 형수의 편지가 뒤를 이었다.
이규백이 터덕거리며 버스정류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도, 도둑이야, 도둑이야!"
한 여자가 뒷머리를 잡은 채 소리쳤고, 한 아이가 쏜살같이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골목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내 금비녀, 내 금비녀......."
그 여자는 낭자머리가 풀려 내린 채 아이가 사라진 골목으로 뒤쫓아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그 일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거나 심드렁하게 지나치고 있었다 이규백도 멍한 상태에서 그 아이의 민첩함에 놀라고 있었다. 그 아이는 열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금비녀 날치기가 많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직접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국민학생의 스웨터를 벗겨가고, 빨랫줄의 옷들을 걷어가는 세태에서 금비녀가 날치기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부모가 무엇을 할까......, 부모가 없는 아이일까......,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이런 생각에 겹쳐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게 이규백은 퍼뜩 놀랐다. 이규백이 심란하게 장학사로 들어서자 다른 날과 달리 분위기가 이상했다. 모두가 큰방에 모여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강 의원이 또 무슨 무리한 지시를 했나 생각하며 이규백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글쎄, 이건 도대체 말이 안 된다니까. 무슨 이유와 근거로 그런 자격 제한을 하냐 그거야. 법을 제정하든 개정하든 납득이 전제돼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렇긴 한데, 그걸 우리 힘으로 따지거나 제동을 걸 수 없으니 문제란 말야. 법대생들이 다 데모를 하고 나설 수도 없는 일이고."
"지금 우리한테 중요한 건 응시 자격을 대학4년 이상으로 한 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여기에 그대로 머물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겠어?"
‘뭐, 뭐라구......?’
이규백은 핑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대학 졸업 이상으로 자격을 제한하다니......, 그 충격은 작년에 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더 컸다. 금년 아니면 내년에는 반드시 돌파하기로 이를 앙다물고 있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깨지는 것이었다. 이규백은 기둥을 붙들고 마루에 허물어져 내렸다. 그들은 고등고시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기 전에 미리 소식을 들은 거였다. 개정안에는 응시자의 연령을 만 30세로 제한하는 등 여러 가지 조항이 있었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입게 된 치명상은 '대학4년 이상의 자격을 가진 자'라는 규정이었다. 집안 형편들이 이규백이나 김선오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그들의 궁한 주머니를 털어 술판을 벌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울화와 실의를 다스릴 길이 없었다. 모두 독한 소주에 취해가며 중구난방으로 정권을 욕해대고, 의기소침해서 집안 걱정들을 하고, 앞으로의 장학사 변화에 대해 이런저런 예측들을 하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허탈하게 흩어졌다.
며칠이 지나 그 개정안은 국회에 상정되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장학사의 분위기는 영하의 날씨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그들은 모두 책을 덮었고, 그렇다고 다른 방학 때처럼 눈치 보아가며 고향에 다녀올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온통 강 의원 쪽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보름쯤 지나서 마침내 강 의원의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에, 에......,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만 법이 개정됨에 따라 우리 장학사의 설립 취지에 합당하도록 체제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걸 어떻게 개편하느냐! 신학기부터 여러분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장학사는 졸업생에 한하여 숙식할 수 있도록 운영할 것이다. 그런고로 여러분은 이에 차질 없이 만반의 대비책을 세우도록!"
그들에게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나가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데 그 대신 장학금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학비보다 숙식비가 더 많이 드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장학금까지 받고 있었던 이규백이나 김선오 같은 경우는 이만 저만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필 날씨까지 추워 고갯마루를 넘고 있는 그들을 향해 영하 10도의 삼각산 북풍이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23. 겨울 밤벌이
"물건은 물건대로 안 나가고, 수금은 수금대로 안 되고, 이거 사람 미치고 환장할 일이야. 뭐 하나 돼먹는 게 있어야 말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데모하는 놈들은 다 미친놈들이야. 세상 뒤엎으면 금방 살판날 줄 알았겠지만 이 꼴이 뭐야. 이게. 이놈에 불경기가 6 .25 때 뺨치는 판이니 장면인지 짜장면인지 그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물건이야. 그래도 역시 이승만 대통령 때가 좋았어. 나 요새 쥐약 먹고 죽기 일보직전이니까 다들 며칠만 더 기다려."
사장은 얼굴을 잔뜩 구겨가며 이렇게 말을 쏟아내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는 결국 마지막 말 한마디를 하려고 앞에다 긴 사설을 붙인 셈이었다. 공원들은 울상이 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말라 굶주림이 내밴 꺼칠한 그들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가득했다.
"공장장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다 안 되면 반이라도 줘야지 이러다가 우리 굶어죽어요. 지난번에도 며칠만이라고 하더니 보름을 넘겼고, 이제 와서 또 며칠이라고 하는 게 한 달로 밀려가게 되면 어찌 되겠어요. 우리 같은 것들한텐 누가 돈 빌려주지도 않고, 구멍가게 외상도 하루 이틀이지, 그런 형편 공장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재봉틀에 앉은 여자가 재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글쎄 말이야, 나도 죽을 지경인데 이걸 어쩌면 좋지. 불경기 땜에 그렇다는데 무조건 돈 내라고 어거지를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딴 데로 옮겨갈 수도 없고, 나도 참 골치 아프네."
공장장을 겸하고 있는 재단사는 귀에 꽂고 있던 꽁초에 불을 붙이며 얼굴이 구겨졌다.
그 말을 들은 공원들의 얼굴은 더 침울하고 어두워졌다. '딴 데로 옮겨갈 수도 없고' 하는 말에 그들은 기가 꺾이고 있었다. 그 말은 공장장 혼잣말이 아니라 여기가 맘에 들지 않으면 딴 데로 옮겨가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공장장은 똑같은 공원이 아니었다. 재단사 위에 얹혀진 그 감투가 말하듯 그는 어디까지나 사장의 편이었다.
"반달 치가 안 되면 반에 반달 치라도 어떻게 좀 해주세요. 외상이 안 되는 것도 있잖아요."
재봉사가 천 조각을 두 손으로 잡아 뜯으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빨리들 퇴근해. 벌써 10시가 다 됐잖아."
공장장의 서두르는 손짓을 따라 그들은 비좁은 공장에서 빠져나갔다. 재단 보조 하나를 뺀 일곱은 모두 여자였다. 어느 공장이나 재단사들은 전부 남자였고, 그 보조들도 여자라고는 없었다. 그건 무슨 법칙인 것처럼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손재주 좋은 여자가 아무리 재단사가 되고 싶어 해도 그 손에 가위가 쥐어지지 않았다. 식당의 주방장을 여자가 넘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이 추워. 벌써 한겨울이네."
"글쎄 말야. 우리 같은 가난한 것들 죽이려고 또 겨울이 왔지."
그들은 밖으로 나서며 왈칵 끼쳐오는 냉기에 몸들을 움츠렸다.
"난 이쪽으로 가요. 내일 봐요."
재단 보조가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어서 벗어나려는 듯 인사했다.
"응, 잘 가."
그보다 윗자리인 두 재봉사가 인사를 받았고, 다른 여자들은 몸을 웅숭그린 채 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했다.
"아유, 저 군고구마 냄새! 사람 환장하게 하네."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누가 아니래. 뜨끈뜨끈한 저것 후후 불어서 하나만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누군가가 추위에 떠는 소리로 얼른 말을 받았다. 초겨울 추위를 가득 품고 있는 밤 10시의 거리에는 푸른 불빛을 내는 카바이드 등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경찰의 단속이 없는 밤을 타고 벌이에 나선 행상 리어카들이었다. 카바이드를 작은 양철 물통에 담아 불을 켜는 그 카바이드 등의 불빛은 시큼한 냄새와 함께 푸른 색조를 띠면서 화려하게 밝았다. 리어카 위의 좌판을 넉넉하게 비출 수 있는 그 불빛들은 가로등 빈약한 거리에 빛을 조금씩 보태면서 겨울 도시의 야경을 꾸미고 있었다. 그런데 푸른 색조 탓인지 어쩐지 카바이드 불꽃들은 이상하게도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자아냈다.
"아이구, 그런 말 뭐 하려고 해. 기운 빠지고 배만 더 고파지지."
다른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래, 어서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 게 상수지 뭐."
또 다른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오늘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내가 많이는 못 사고 따끈한 풀빵 하나씩만 먹고 가자. 빈속에 덜 추울 테니까."
아까 공장장한테 항의했던 재봉사가 내놓은 말이었다.
"어머, 언니 돈 있어?"
"돈은 무슨. 외상 소 잡아먹는 거지."
"언니 최고야."
"그래, 역시 우리 언니야."
그만그만한 아가씨들이 금세 생기가 돌아 손뼉을 치며 외쳤다. 나삼득의 딸 윤자도 그들 속에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우르르 단골 풀빵장사를 찾아갔다.
"아줌마, 우리 하나씩만 외상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 재봉사가 풀빵장사를 쳐다보며 미안한 듯 쑥스러운 듯 웃으며 눈치를 보았다.
"왜, 아직 월급 안 나왔어? 전번 것도 있는데."
풀빵장사 얼굴이 안 좋아졌다.
"네, 걱정 마세요. 이 전묘숙이 아줌마 돈 떼먹겠어요. 다 똑같이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에. 아줌마, 글쎄 오늘이 약속 날이거든요. 근데 불경기라고 또 며칠 기다리래잖아요. 그러니 얘네들은 맥 빠지고, 날은 이리 썰렁하게 춥고, 어쩌겠어요, 내가 풀빵이라도 하나씩 사 먹여 보내야지."
"그래, 그 맘이 고맙구먼. 그나저나 왜 이리 살기 힘들어지는지 모르겠어. 풀빵장사도 잘 안 되니 말야."
풀빵장사가 익숙한 솜씨로 밀가루 반죽을 빵틀에 부으며 시름겹게 말했다.
"어머, 풀빵까지도 잘 안 팔려요? 세상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전묘숙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혀를 찼다.
"모를 것 뭐 있어? 나라 잘못 다스려서 그렇지. 난 무식해서 속 깊은 데까지는 잘 모르지만, 여기 나앉아서 사람들 말 귀동냥해 보면 다 정치 잘못한다고 욕하고 난리들이야. 그 유식하고 잘난 사람들은 귀도 없나 몰라 자아, 구워지는 대로 어여 하나씩 먹어."
말을 하면서도 풀빵장사의 손놀림은 잽쌌다.
"근데 말야, 공장장은 우리 모르게 월급 받아 챙긴 것 아닐까?"
또 하나의 재봉사가 전묘숙에게 물었다.
"글쎄 말야,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닌데......, 만약 그렇더라도 우리가 그걸 어쩌겠어. 사장하고 공장장은 어차피 한통속이니까 우린 그런 건 모르는 척하고 그저 공장장만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어. 이나마 취직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사장한테 직접 따지고 들 수는 없잖아."
"참 큰일났어. 시골에서는 왜들 그리 몰려드는 거야. 서로 죽이는 것인 줄도 모르고."
그들은 함께 한숨을 쉬었다. 풀빵은 재봉사들부터 차례로 집어 들었다. 그 차례는 공장에서의 직위 순이었다. 잡심부름 꾼에 불과한 시다 윤자는 또 다른 시다 하나와 군침을 삼켜가며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굶고 물로 채운 속에 저녁까지 늦어 이제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쓰리고 아렸다.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 때는 너무 배가 고파 속에서 쓴물이 오르면서 허리는 접히고, 눈앞이 어질어질하는가 하면 귀에서 모기 우는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공장장까지 아홉 중에서 점심을 먹는 건 서너 사람뿐이었다. 월급을 많이 받는 공장장이나 재봉사들은 보리밥이나마 도시락을 싸왔지만 나머지 보조나 시다들은 쫄쫄이 굶었다. 윤자는 두 손을 모아 풀빵을 받아들었다. 뜨거운 풀빵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입 안에서는 신침이 지르르 흘러나왔다. 윤자는 국화 모양의 풀빵을 들여다보며, 이게 붕어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풀빵은 국화빵과 붕어빵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붕어빵은 국화빵보다 배가 컸다. 그러나 붕어빵은 별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값이 비싸 사람들이 잘 사먹지 않는 탓인지도 몰랐다.
"근데 말야, 뻐스 요금, 전차 요금이 진짜 두 배로 오를래나?"
"오른다고 말 나왔으면 오르겠지. 진짜 미쳤어. 그런 걸 올리면 딴 물가 다 따라 오르고, 그러니까 정치 잘못한다고 욕 바가지로 먹는 거지. 서민들 죽어나는지 모르고."
"배 터지게 잘사는 것들이야 뻐스 안 타고 다니는데 30환이나 60환이나 그게 돈으로 뵈겠니. 이젠 뻐스 타기도 글렀다. 얘들아, 기분 잡치는 데 풀빵 하나씩 더 먹어. 전묘숙이가 기마이(기분낸다는 일본말) 쓰는데 이 강금녀라고 기죽을 수 있어."
"와아-."
아가씨들이 환성을 지르며 다시 손뼉을 쳤다. 그들은 풀빵 두 개씩을 달게 먹고 한 바가지의 물을 돌려가며 나누어 마신 다음 헤어졌다. 나윤자는 살 것 같은 기분으로 집을 향해 잰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서울에 올라온 다음부터 점심을 먹을 꿈도 꾸지 않은 것처럼 취직을 하고 나서 공장에 오가면서도 버스라고는 타본 적이 없었다. 가면서 30환, 오면서 30환, 날마다 60환씩을 없애면 한 달 벌이 절반 가까이나 까먹는 셈이었다. 풀빵을 얻어먹고 보니 나윤자는 두 재봉사가 더욱 부러워졌다. 그녀의 꿈은 자신도 어서 재봉사가 되는 것이었다. 재봉사가 되면 일도 하루 종일 종종걸음을 치지 않고 편히 앉아서 할 뿐만 아니라 월급을 지금보다 대여섯 배나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월급을 그렇게 많이 받으면 첫 번째로 풀 소원이 있었다. 세 끼 밥을 실컷 배부르게 먹고사는 거였다. 나윤자가 어두운 움막촌의 비탈길을 더듬어 올라 집의 거적문을 들췄을 때는 통금 예비 사이렌이 울릴 즈음이었다.
"아이고 욕봤다. 얼렁 묵어라."
졸음 찬 눈으로 봉투를 붙이고 있던 갈포댁이 차려놓은 밥상을 재빨리 딸 앞으로 옮겨놓았다. 밥상은 언제나처럼 보리밥에 된장국, 김치 한 가지로 더는 나쁠 수 없도록 궁기가 흘렀다. 나윤자는 허겁지겁 밥을 퍼넣기 시작했다.
"월급 주디냐?"
벽에 등을 기대고 졸고 있던 나삼득이 언제 잠이 깼는지 느닷없이 물었다. 나윤자는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에는 볼이 미어지도록 밥이 들어 있어서 말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오늘도 안 줘? 워째서?"
나삼득이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 질렀다. 그 서슬에 나윤자는 삐쩍 마른 목을 길게 빼며 밥을 꿀떡 삼키고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요새 장사가 안 돼야서 그렁께 메칠 더 기둘리라고라."
"또 메칠이여? 고런 호로새끼 보소. 사람을 아칙보톰 밤늦께꺼정 쌔빠지게 부려묵고 월급이라고는 삥아리 눈물맨치 줌스로 그것도 아까와 뒤로 밀치고 또 밀치고 혀? 베룩에 간얼 빼묵제 있는 놈덜이 사람 잡는단 말이여. 그 사장놈도 삼시세끼 괴기 반찬에 사시사철 쌀밥만 묵고 사는 놈 아니냔 말이여. 요런 개잡녀러 새끼럴 낼 당장 쫓아가서 패대기럴 쳐뿌러야겄다!"
나삼득은 키세 드세게 소리쳤고,
"음마, 아부지! 글먼 아부지 잽혀가고, 나는 쫓겨나고......"
나윤자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울상이 되었다.
"이봇씨요, 울컥 울떡증 난다고 되도 안 헐 소리 되나캐나 허지 말고 딸년 밥이나 편히 묵게 허씨요."
갈포댁이 딸의 등을 쓰다듬으며 남편에게 눈을 흘겨댔다.
"그려, 밥 꼭꼭 씹어 찬찬히 묵어라."
나삼득은 머쓱해져 신문지 쪽에 담배를 말기 시작하며,
"참말로 돈이란 것이 머시다냐. 그 종이쪼가리에 그림 그려놓은 고것이 뭣일 끄나. 고것만 있음사 처녀 붕알도 사고, 산 호랭이 눈썹도 뽑아오게 헐 수 있응께 고것이 요물치고는 상 요물 아니겄어. 근디 고것이 워째 있는 놈덜헌테넌 더 잘 붙고, 없는 놈덜헌테넌 씨가 물르는지 몰라. 참말로 각다분헌 시상이여." 그는 중얼거리며 굵게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국은 말할 것도 없고 김치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운 나윤자는 비로소 배부른 기색으로 잠이 든 두 동생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누더기를 걸친 그녀는 주저앉더니 이내 피그르 쓰러졌다. 꼭 거짓말처럼 그녀는 잠이 들어버렸다.
"그나저나 복남이가 얼렁 제대럴 혀야 어찌 잠 심이 피도 필 것인디......"
나삼득이 한숨 섞인 담배연기를 짙게 내뿜었다.
"몰르겄소, 갸가 무신 심이 될라는지. 갤친 것이 있기럴 허요, 무신 기술이 있기럴 허요. 염병허고, 재수 R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드라고, 군대에 끌려갔으면 넘덜맹키로 차 모는 부대에 떨어져 운전허는 기술이나 배와갖고 나오면 바로 큰 돈벌이 허고 좀 좋은 일이여. 근디 면회 한 분 못 가보게 최전방서 북쪽에 총만 종그고 있다가 나오면 포수질을 혀묵을 수도 없는 일이고, 고것을 워디다 써묵겄소. 또 지게꾼 시킬 수도 읎고."
갈포댁이 신문지에 연상 풀칠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거 무신 재수대가리 읎는 소리여!"
나삼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와따, 기차 화통 삶아 묵었소? 아그덜 놀래 경기 들게 더 크게 소리 질르씨요. 배운 것도 기술도 읎는 신센디 나가 틀린 말 혔소?"
갈포댁은 마뜩찮은 얼굴로 눈을 흘겼다.
"말이 씨 되는 법이여 . 씸벅씸벅 입 놀리덜 말어. 군대밥 묵는 것도 촌놈 때 벗는 것인디 지게꾼이 머시여, 지게꾼이. 워디고 공장에 파고들어가 기술 익혀 기술자가 돼야제. 멫 년 공짜배기로 일얼 혀주고라도 기술 안 배우먼 앞으로 시상 못 살아가."
"금메, 고것을 누가 몰르요? 고것이 말 허디끼 쉴털 안 헝께 걱정이제."
"고런 걱정은 말어. 자꼬 생겨나는 것이 공장잉께. 복남이는 그 이름 턱 허니라고 앞길이 잘 열릴 것이여, 어렸을 적에 팽이고 썰매고 맹그는 것을 보면 손재주도 있고 말이시."
"그리만 됨사 을매나 좋겄소. 우리도 옛말 이름서 한판 걸찌게 사는 날이 와야 헐 것인디."
"그려, 살다 보면 오겄제. 인자 그만 자세."
통금 사이렌이 먼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남편과 딸이 집을 나선 다음에 갈포댁은 행상 광주리를 부산스레 챙겼다.
"복수야. 니허고 성자 오늘 멫 부반이라고 혔냐?"
"엄니는 왜 똑같은 말을 자꾸 묻고 그래. 5학년은 2부 수업이니까 나는 오후반이고, 2학년은 4부 수업이니까 성자는 2부반으로 오전 11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잖아. 엄니는 워찌 그리 머리가 나쁜가."
작은아들 복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보면서 대꾸했다. 그의 말은 서울말과 고향 말이 뒤섞여 있었다.
"저놈 말허는 것 잠 보소. 에미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학년마동 5부 수업이니 4부 수업이니 해감서 다 달른께 아무리 머리 총총헌 사람도 고것을 워찌 다 알겄냐, 그러고 월요일마동 또 변동이 생기니 말이여."
"그러니까 엄니는 아무 걱정하지 말어.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복수는 연필 끝에 침을 묻히며 또랑하게 말했다.
"그려, 글먼 동상 안 늦게 챙게 보내고, 니도 헛눈 폴지 말고 공부 열성으로 혀. 알겄지야?"
"알어, 알어. 크게 출세혀야 헝께로."
"시건방구지게 까불대지 말고."
갈포댁은 눈을 흘기면서도 대견해 하는 웃음을 짓고는,
"참말로, 아그새끼덜 주렁주렁 달고 얼매나 많이덜 몰켜들면 해마동 3부제가 4부제 되고, 4부제가 5부제 되고, 공부 갤치는 시간이 그리 짧아지는고. 그리 짧게 갤치는 시늉만 혀갖고 무신 공부가 될랑가 몰라."
그녀는 근심스럽게 중얼거리며 움막을 나섰다. 움막촌 사람들은 유난히 추위를 탔다. 집들이 허술한데다가 옷마저 헐벗은 처지였고, 막벌이도 시원찮아져 더 굶주리게 된 철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살기 어렵고 고달픈 것이 겨울이었다. 일찍 밀려왔다가 느리게 물러나는 산동네의 겨울은 그 어느 곳보다도 길었다. 천두만은 지게를 진 채로 우체국으로 들어섰다. 남들 보기에 창피스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게를 밖에 벗어놓고 일을 보았다가는 또 그때처럼 도둑맞기 십상이었다. 시골집에 돈을 부치고 나와 보니 우체국 앞에 받쳐두었던 지게가 간곳이 없었다.
"사람 참 땁땁허시. 눈감으면 코 비가는 것이 서울이라고 안 혀. 액땜 혔다 치고 요 담보톰은 뭣이고 간에 몸에서 띠덜 말어."
나삼득이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리며 한 말이었다.
남의 지게는 빌리는 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냥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놓여 있어도 손대는 일이 없는 시골 인심처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지게도 고물상에 가져가면 돈이 될 물건이 분명했다. 우체국 안에 있던 사람들이 지게를 진 천두만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고개를 떨군 천두만은 송금 창구로 다가섰다.
"돈 잠 보낼라는디요."
천두만은 속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얼마죠?"
여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만큼 딱딱한 소리를 냈다.
"예에......, 만, 만 환인디요."
천두만은 다급하게 대꾸하며 접고 또 접은 돈을 창구로 디밀었다. 그러면서, 여그서나 저그서나 요 공무원이란 잡것들은 워찌 이리 찬바람 나게 도도허고 싸가지가 읎는지 몰라, 하며 또 기분이 잡치고 있었다. 여직원이 재빠르게 1천 환짜리 10장을 세어 넘겼다. 천두만은 돈이 넘어가는 시간이 너무 짧아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 돈을 모을 때의 힘겨웠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점심을 굶어가며 푼푼이 모으고, 잔돈이 5백 환이 차면 가게에서 5백 환짜리로 바꾸고, 5백 환짜리가 두 장이 되면 다시 1천 환짜리로 바꾸고 했던 것이다. 천두만은 여직원이 찍어준 송금환의 동그라미를 뒤에서부터 손가락 짚어가며 단. 십. 백. 천. 만 하고 몇 번씩 확인한 다음 편지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우표에 침을 발라 꼭꼭 누르고 또 눌렀다. 그는 이 순간이 가장 보람스럽고 떳떳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살이의 팍팍함에 맥이 풀리기도 했다. 집으로 부치는 돈은 그대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처자식들이 먹고 살기에도 모자라는 돈이었다. 기를 쓰며 버둥거려 보았자 모아지는 돈이라고는 없이 언제나 빈손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사람 한평생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몸뚱이 하나 믿고 산다는 것은 결국 제 살 파먹다가 끝나는 거 아닐까....... 이런 막막한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다.
"어이, 아조 존 벌이가 생겼네."
며칠이 지나 나삼득이 천두만에게 속삭였다.
"워메, 가뭄에 비 소식이요 이."
천두만의 생기 도는 눈은 무슨 일거리냐고 묻고 있었다.
"고것이 말이시......, 밤에만 허는 알짜 돈벌인디, 우리 심으로 허먼 하로밤에 4백 환씩은 벌 수 있는디......."
나삼득이 이상한 눈치로 말꼬리를 사렸다.
"4백 환썩? 하로 지게질로 2백 환 벌기 에로운 껕보리 숭년에 그리 존 돈벌이가 머신게라? 보름날 찰밥허는 것도 아니고 싸게 말해뿔제 무신 뜸얼 그리 딜이고 그요."
천두만은 군침을 삼키며 다가앉았다.
"고것이 말이시......, 내놓고 헐 일이 아닌디......, 쩌끄 청량리역 옆에 석탄이 산더미로 쌓인 디가 있는디, 그것을 사리살짝 파묵는 것이여. 그것 한 푸대에 2백 환썩 받는다는디, 우리 기운이면 한 탕에 두 푸대는 짊어진단 말이시."
"근디......., 지키는 사람이 읎겄소?"
천두만은 나삼득이 뜸을 들인 이유를 깨달으며 무르춤해졌다.
"구데기 무서와 장 못 담그간디. 경비원도 새벽 두세 시에는 안 자고는 못 젼디는 것잉께. 워째, 맘에 읎어?"
나삼득은 턱을 치켜들며 천두만을 꼬나보았다.
"워디가요. 나야 성님이 허는 일임사 똥이라도 집어묵제라."
천두만은 마음을 다잡으며 야무지게 대답했다. 나삼득이 마음먹은 일을 거역할 수 없는데다, 하룻밤에 4백 환의 돈벌이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그들은 초저녁잠을 자고 나서 한밤중에 전농동으로 갔다. 나삼득이 찾아든 곳은 허름한 판잣집이었다.
"이거 원. 단칸 셋방이라......, 좁게라도 앉읍시다."
그들을 맞이한 남자가 자는 아이들을 돌아보자 그의 아내가 세 아이를 밀어붙이며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그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야 할 만큼 방은 비좁았다.
"돈은 틀림없이 잘 주요?"
나삼득이 담배를 말 채비를 하며 물었다.
"그럼요. 현찰 박치기 아니면 누가 그런 일 하나요. 현찰 쥐는 재미에 무서운 것도 마다 않는 것 아닌가요."
"근디, 한 푸대에 2백 환이면 작은 돈이 아닌디, 그 사람들은 얼매나 남겄소?"
"글쎄요. 거기다가 흙 섞어 연탄 찍어내는 거니까 모르면 몰라도 열 곱 장사는 안 되겠어요?"
"열 곱? 그것도 넘 등치는 알짜배기 장사시. 겨울에야 연탄이 읎어서 못 팔아묵는 판에."
나삼득이 말이 담배에 침을 듬뿍 묻히고 나서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야 별수 없지요. 우리야 그런 자본도 없는 신세들이니까."
그 남자의 대꾸에 그의 아내가 푹 한숨을 쉬었다.
"금메 말이오, 돈 읎는 놈들만 복장 터지는 시상잉께. 워쩐 놈에 것이 돈이 돈 물고 돌고, 큰돈이 더 큰돈 끌어댕기는 판잉께 맨주먹인 놈들은 평상 거렁뱅이꼴 못 면허게 되야 있제라."
나삼득의 입에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두만은, 나삼득이 그 남자를 인사시키지 않아 묵묵히 담배만 빨고 있었다. 혼자 몸이라면 배운 것 없이 지게질을 해서라도 다른 장사 밑천을 장만해 나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처자식이 딸리게 되면 그건 아득하게 가망 없는 일이었다. 목구멍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목구멍들은 사생결단 기를 쓰며 번 돈을 아무 흔적 없이 먹어치우고는 해버렸다.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는 또 그 허망함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통금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 한참이 지나 그 집을 나섰다.
"잘 챙겨. 여그다가 따뿍 채우면 두 푸대 4백 환어친께."
집을 나서기 전에 밀가루 포대보다 두 배쯤 큰 포대와 손잡이가 짧은 삽을 내밀며 나삼득이 말했다. 자신의 것까지 미리 마련해 둔 나삼득이 너무 고마워 천두만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짙은 어둠 속을 발끝걸음으로 재빠르게 걸었다. 통행금지가 된 밤거리에는 인적이라고는 없이 추위만 가득 차 있었다. 가끔 야경꾼들이 치는 딱딱이 소리가 멀리서 들리고는 했다. 그러나 길잡이인 그 남자는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걸음을 멈추는 일이 없었다. 집집마다 순번제로 돌아가는 그 야경은 시늉뿐이라서 별로 무서워할 것이 없긴 했다.
"다 왔소. 저게 석탄더미요."
걸음을 멈춘 그 남자가 몸을 바짝 낮춰 쪼그려 앉으며 속삭였다. 천두만은 앞을 바라보았다. 눈익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는 석탄더미는 마치 산 같았다. 천두만은 그게 돈 덩어리로 보였다. 전에도 가끔 석탄더미를 보긴 했지만 그게 바로 돈으로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경비를 돌 수도 있으니까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면 눈 깜짝할 새에 푸대에 채워야 해요. 절대로 소리 내선 안 되고. 알았소?"
그 남자가 목이 타는 것 같은 소리로 다시 속삭였다.
"알겄소."
나삼득이 대답했다. 천두만은 가슴이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금니를 맞물고 있었다. 이런 일에 배포 크게 먹으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아, 여기가 내 구멍이니까 철조망에 옷 안 걸리게 땅바닥에 몸 바짝 붙이고 기어요. 옷이 걸렸다 하면 철조망에 매단 깡통들이 울려대니까."
그 남자는 철조망 아래를 약간 들어올렸다. 그 작은 구멍으로 나삼득이 먼저 기어 들어갔다. 천두만도 땅바닥에 몸을 찰싹 붙이고 그 뒤를 따랐다.
"이쪽으로 와요. 거기서 바로 퍼 담으면 구멍을 들키게 되니까."
그 남자를 따라 석탄더미를 얼마간 돌았다. 어떻게 해서 석탄을 포대에 채우고, 다시 철조망을 빠져나오고 했는지 천두만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거운 줄도 모르고 석탄 포대를 어깨에 메고 어느 집엔가 당도했다. 터가 넓은 고물상 비슷한 집이었다.
"4백 환씩 주기는 양이 너무 작은데."
흐린 불빛 아래서 몸집 큰 남자가 석탄 포대를 툭툭 차며 말했다.
"괜히 그러지 마세요. 서로 먹고 사는 처지에. 이 짓도 점점 어려워진다구요."
길잡이 남자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좋아, 첫 손님들이 생겼으니 기마이 쓰지. 담부터는 더 가득 채우라구."
4백 환씩을 받아가지고 돌아서며 천두만은 가슴이고 등이 섬뜩한 추위를 느꼈다. 이상해서 옷 속을 만져보니 축축한 느낌이 들도록 옷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하룻밤 4백 환의 힘에 이끌려 그들은 밤마다 어둠을 헤쳤다. 열 나흘째 밤인가......, 정신없이 석탄을 퍼 담고 있던 천두만은 무엇이 느닷없이 몸을 덮치는 충격을 받으며 나가넘어졌다. 몸을 일으키며 보니 석탄더미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질겁을 하며 몸을 굴렸다. 그런데 하체가 석탄더미에 파묻혔다. 그는 허둥지둥 기어서 몸을 빼냈다. 간신히 위기를 피한 천두만은 다급하게 옆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석탄더미에 파묻혀 버둥거리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두만은 버둥거리는 사람의 팔을 잡아 석탄더미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다시 살펴보았지만 나삼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두만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고메, 성님! 성님!"
천두만의 입에서 터져나온 통곡 같은 소리였다.
"죽을라고 이렇게 떠들어요."
그 남자가 천두만의 등을 쳤다.
"아이고 성님 , 어딨소! 성님, 성님, 어딨소!"
통곡이 완연한 천두만의 외침은 더 커졌다.
"갑시다. 못 찾소."
그 남자가 천두만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이고 성님, 아이고 성님!"
천두만은 그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석탄더미로 내달았다.
그 남자는 이내 자취를 감추었고. 천두만은 통곡을 하며 두 손으로 석탄더미 여기저기를 파헤치고 있었다.
"저쪽이야, 저쪽."
두 줄기의 손전등 불빛이 천두만을 항해 곧게 뻗어오고 있었다.
24. 징검다리
두부장수가 울리는 종소리가 강추위로 얼어붙은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시사철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밥 때에 맞추어 울리는 종소리였다. 그 종소리는 주부들의 아침 일손을 서두르게 하고 늦잠 자는 아이들을 깨우는 오래된 풍물이기도 했다.
"새우젓 사아아려어, 명란젓."
두부장수의 종소리가 사라져가자 짝을 이루듯 새우젓장수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쉴 대로 쉬어 패이고 잠긴 그 탁한 외침은 종소리와는 달리 추위에 얼어붙어 있었다. 깊은 겨울밤에 울리는 찹쌀떡장수의 슬픈 가락처럼 그 쉰 외침에는 삶의 고달픔과 힘겨움이 서리서리 엉켜 있었다.
"언니, 언니이, 빨랑 문 열어요, 문!"
이런 다급한 외침과 함께 나무로 짠 대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 바람에 초인종을 대신하고 있는 깡통이 따라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초인종이 귀해 거의 모든 집들은 빈 깡통에다 자갈을 대여섯 개씩 넣어 대문에 매달아 두고 있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온갖 깡통들은 그렇게도 쓰이고 있었다.
"누구 왔어요?"
"언니, 나예요, 나. 빨랑 문 열어요. 나 얼어 죽어요."
"어머, 고모! 웬일이에요, 이 추운 아침 일찍이."
한인곤의 아내는 황급히 한쪽 문에 달린 쪽문을 땄다.
"아이구, 왜 이리 추워. 사람 동태 되겠네."
쪽문을 들어서는 한인곤의 여동생 한정임은 파랗게 얼어 있었다.
"그렇잖구요, 영하 14도라는데. 춘천에서 오시는 길예요. 지금?"
"아니오, 오빠 일어나셨어요?"
"지금 한밤중인걸요."
"무슨 늦잠이에요. 오빠답지 않게."
한정임은 올케가 열어주는 마루문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올라섰다. 유리창마다 성에꽃이 가득 피어나 있었다.
"국회의원 되더니 맨날 술에 취해 통금이고 뭐고 없으니 늦잠보 될 수밖에요, 옛날 오빠가 아니에요."
한인곤의 아내가 입을 삐죽 하며 고개를 저었다.
"치이, 국회의원들이 맨날 술이나 마시고 늦잠이나 자니까 나라가 이 꼴이지. 근데 날씨가 왜 이 모양이야."
"누가 아니래요. 어서 애들 방에 들어가 몸부터 녹이세요. 신혼 재미는 좋으세요?"
"신혼 재미나마나, 육군 대위 따라 사는 게 어떤지 언니도 잘 아시잖아요. 그것도 촌구석에서."
아직 잠들어 있는 조카들의 이불 밑에 발을 넣으며 한정임은 하소연 하듯 올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올케의 동정을 사두는 것도 필요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알아요. 박봉에 셋방살이에, 그 고생은 해본 사람이나 알지요."
한인곤의 아내는 시누이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언닌 시집 잘 와서 시아버지가 뒤를 봐주셨잖아요. 전 그 반대라니까요."
한정임은 동정심을 더 자극하고 들었다.
"그래요, 그 박봉으로 시집까지 도와야 할 처지면 여간 어렵지 않을 텐데. 저어......, 아버님께 좀 도움을 청하면 어떻겠어요?"
"저도 그래저래 천안에 갔다 오는 길인데 아빠도 형편이 어려운 눈치였어요. 선거 때 오빠한테 너무 많은 돈을 썼잖아요."
한정임은 한 번 더 자극을 가했다.
"어머, 천안서 오세요? 아버님 어머님은 다 무고하시구요?"
한정임은 올케가 과장된 표정 속에 감추려고 하는 경계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경제적 도움을 받으려고 온 줄 아는 그 눈치에 한정임은 그만 비위가 상했다. 그러나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네, 다 무고하세요."
"어머, 밥 타겠어요. 좀 벗고 눠서 몸을 푸세요. 곧 오빠 깨울게요."
방을 나가는 올케의 뒷모습을 한정임은 묘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정임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농담이나 하며 속말을 꺼내지 않았다. 밥상머리에서 행여나 오빠의 기분을 언짢게 할지도 몰랐고, 더구나 올케 앞에서 자신이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밥상을 물리고 오빠가 담배를 피워 물자 한정임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저어......, 오빠, 양서방 일 좀 어떻게 해주세요."
한정임은 힘겹게 말을 꺼내면서 오빠가 시집가기 전과는 전혀 다르게 타인처럼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한테 남편 일을 부탁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기분이었다. 부모와 형제의 차이가 이런 것인가 싶어 한정임은 가슴이 오싹해졌다.
"왜 양 서방이 시키던?"
한인곤이 더디게 웃음을 피워내며 여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그 사람 속맘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어요.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
한정임은 불쾌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아까의 거리감에다가 모독감까지 겹쳐졌던 것이다.
"그래, 대위 사모님께서 빽 쓰러 자발적으로 나섰다 그거지."
한인곤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씨익 웃고는,
"정임아, 나도 네 맘 다 안다 허지만 군인으로 당당하게 크게 되려면 전투부대 근무 경력을 쌓아야 해. 그게 직업군인의 정도야."
그는 다정하면서도 무게 있게 말했다.
"그런 원칙이나 상식은 저도 다 알아요. 그치만 안 그러고도 출세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전 그 시골 전방에선 더 못 살겠어요."
"이런, 몇 개월이나 됐다고 그리 엄살이냐? 좀더 참고 지내라. 첫 고비 넘기면 거기도 살 만해진다."
"오빠 남 얘기하듯 하지 마세요. 남들은 없는 빽도 만드느라고 혈안이 되어 편하고 좋은 보직 찾아 떠나는 판인데 저는 있는 빽도 써먹지 못하고 생고생 사서 하라는 거예요? 오빠하고 아빠가 그렇게 떠밀지 않았으면 전 양 대위한테 시집 안 갔을 거라구요."
한정임은 울먹거렸다.
"허 참, 별소릴 다 듣겠구나."
한인곤은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여동생의 말이 찡하게 가슴을 울리고, 전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안쓰럽기도 했다. 더구나 선거 때 얼굴이 새카맣게 타도록 열성을 다 바쳤던 여동생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이거 읽어보세요."
한정임은 손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오빠 앞에 놓았다.
"이게 뭐냐......?"
"애비 보거라. 가내 두루 평안하냐. 큰 변통이 없는 범위 내에서 양 서방 일을 좀 거들어주어라."
한인곤은 그 짧은 편지에서 아버지의 육성을 듣고 있었다.
"이거 참, 대통령 빽보다 더 무서운 빽을 짊어지고 왔구나. 대학 나온 머리 잘 쓰고 있다."
한인곤은 어이없이 웃었다.
"피이, 오빠가 날 무시하니까 별수 있어요. 원리원칙만 찾아대고."
한정임은 그제서야 곱게 눈을 흘겼다.
"국회의원들이 괜히 망가지는 줄 아니? 그래, 도대체 어디로 옮겨 달라는 거냐?"
"육본이든 특무대든, 좋고 편한 자리를 오빠가 더 잘 알잖아요."
"특무대는 4 .19 이후에 없어졌고, 이젠 방첩부대다."
"이름만 바뀐 것, 그게 그거잖아요."
"알았으니까 돌아가서 양 서방보고 편지하래라. 네가 또 구워삶겠지만, 양 서방 의사가 어떤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니까."
"오빤 참 답답해."
한정임은 생끗 웃고는,
"이 정도로 끝나는 걸 고마워하세요. 맨날 돈 도와달라고 덤비면 어쩔 거예요"
하며 손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아이고, 두 번 고마웠다간 사람 잡겠다. 어서 가거라 친정 걸음 자주 해서 좋을 것 없다."
한인곤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것이 혈육으로서 당연한 것인지, 공인으로서 부당한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점심나절이 되어 마다고 하는 여동생에게 차비를 주고 한인곤은 집을 나섰다. 햇살이 퍼졌는데도 날씨는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매섭게 추웠다.
‘이거 가난한사람들 정말 살기 어렵겠는데. 정치 잘못한다고 난리들인데 날씨까지 왜 이 모양인가 그래.’
한인곤은 혀를 차며 택시를 잡았다. 그런 걱정은 군인 시절에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거였다. 어디를 가나 '정치하는 놈들'이란 말이 예사로 오가는 인심 속에서 자연히 그런 데까지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현재의 '정치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보름 전에 실시한 지방의 시. 읍. 면장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40퍼센트가 넘는 곳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집권당을 제치고 무소속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건 단순히 정치 불신만이 아니라 다시 확인하는 민주당의 위기였다. 맨 끝으로 실시된 서울 시장 선거에서도 투표율이 30퍼센트 대에 머물러 금세 '3할 시장'이라는 야유가 시내에 떠돌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당에서는 투표율 저조를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이라고 돌리고 말았다.
"정부가 반년 동안에 한 것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꾼 것뿐이다."
시중에 새로 퍼지기 시작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야유마저 엄밀히 따지자면 그 공은 윤보선 대통령의 것이었지 장면 총리의 것이 아니었다. 새해부터 그 호칭을 바꿔 부르기로 결정한 것은 대통령이었다. 눈을 내려감은 한인곤은 무엇이 얹힌 기분으로 된 신음을 물었다.
"손님은 아주 시절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려."
운전수가 말을 걸어와 한인곤은 무겁게 눈을 올려 떴다.
"왜, 아저씨는 시절이 안 좋으신가요?"
한인곤은 어디 민심을 들어보자 싶어 이렇게 대꾸했다.
"아이고, 말도 맙쇼. 시절이 다 뭡니까요, 죽지 못해 이 짓 하는 거지요."
운전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벌이가 나쁩니까?"
"아, 벌이도 나빠졌지만 더 큰 문제가 택시강도 아닙니까. 매일 밤 세 네 건씩 일어나는 택시강도사건 신문 보셔서 잘 아시죠? 그게 신문에 난 것만 그렇지 괜히 귀찮고 골치 아파 신고 안 한 건 그보다 몇 배가 많다구요. 돈 털리고 거기다 재수 옴 붙었다 하면 목숨까지 빼앗기는 판이니 이게 어디 사람이 해먹을 짓입니까. 이거 갈수록 태산이니 정권 괜히 바꿨어요. 안 그래요?"
"예, 문제는 문제지요. 이거 뭐가 잘못된 건지 원......."
"그야 뻔하잖아요. 정치하는 놈들이 다 고등사기꾼들이니까 그렇지요. 말로만 국민, 국민 해가면서 밤낮없이 제 놈들 권력 싸움이나 해대고 있으니 나라가 엉망진창, 안 망할 수가 있어요. 내가 해도 이보단 잘하겠어요."
"예, 예, 저 앞에 정거해 주세요."
택시에서 내리는 한인곤의 귀에는 고등 사기꾼들이라는 열 받친 말이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한인곤은 '서시오'의 빨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한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교통위반을 적발하는 속칭 '빨간 딱지'를 꺼내든 교통순경이 택시 운전수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운전수가 굽실거리는 고개 짓을 하고 어쩌고 하더니 택시는 곧 떠나고 교통순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빨간 딱지 뭉치를 주머니에 넣었다. 신속하게 거래가 이루어지고, 그 빨간 딱지 사이에는 돈이 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한두 번 보아온 것이 아니라서 한인곤은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그 순경은 분명 현행범이고, 부정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정행위는 그 한 사람의 옷을 벗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에 노선 합승을 상대로 각 경찰서마다 수백만 환씩 갈취한 사건이 드러났다. 그런데 경찰 간부들은, 말단 파출소의 한 달 운영비가 30여만 환씩 드는데 국가에서 나오는 돈은 3만 환뿐이니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대드는 형편이었다. 나라 살림이 그 지경이니 무슨 말을 더 할 것인가.
한인곤은 한숨을 몰아쉬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교통순경들의 부정행위도 그 돈을 혼자서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서의 운영비를 충당하려고 위에서 책임액을 할당하고, 그 액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무능자로 몰려 한직으로 자리가 바뀐다는 사실이 신문에 공공연하게 보도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나라꼴은 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지난 3. 15 부정선거에 동원된 정치자금이 밝혀진 것만 수백억이었고, 그 권력의 비호 아래 활개 친 기업들이 자진 신고한 탈세액만도 또 수백억이었다. 그런데도 새 정부가 혁명재판이란 것을 하면서 '재벌들을 처벌하면 경제 위축이 우려된다'고 그들을 감싸고 나섰으니 나라가 바로 될 리 만무하고, 민심이 등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한인곤은 또 된 신음을 어금니로 깨물며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부터 으리으리하게 치장한 음식점 안에는 일요일인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예약하셨습니까?"
"오재섭 의원이라고......."
"아 예, 저쪽 방에 와 계십니다."
한인곤은 오재섭과 악수하며 낯선 남자를 빠르게 훑었다.
"자아, 두 분 인사하시지요. 한 의원님, 이분은 제가 말씀드렸던 임상천 사장님이시구요, 임 사장님, 이분이 바로 한인곤 의원님이십니다."
오재섭이 세련된 몸짓으로 양쪽을 소개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소생 임상천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 올리겠습니다."
임호태의 아버지 임상천은 이마가 식탁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예, 첨 뵙겠습니다. 한인곤이라고 합니다."
차돌 같은 인상에 비해 너무 굽실대는 것이 한인곤은 과히 달갑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임 사장님은 한 의원님하고는 인연이 아주 깊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임 사장님은 군납사업가이시기 전에 6. 25에 참전한 육군 장교였거든요. 부상으로 제대를 하셔서 그렇지 동기 분들은 지금 다 장군으로 계십니다."
오재섭이 한인곤에게 담배를 권하며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한인곤은 호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한쪽 감정은 직감적으로 꼬이고 있었다. 오재섭의 그 말은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은근한 압력이었다.
"임 사장님은 사업가로서도 빈틈없이 성실하시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아주 신뢰가 두터운 분입니다. 원내에서 보증수표로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아, 예......."
한인곤은 '보증수표'라는 말을 곱씹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비위를 건드렸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업원들이 나가자 오재섭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임 사장님, 군복 사업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그럼요. 제작공장 시설은 작년에 벌써 완료했고, 결정만 떨어지면 바로바로 생산할 수 있도록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임상천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한 의원님, 거 금년부터 실시되는 군복 국산화 사업 말입니다. 임 사장님께서 그 사업에 참여하실 계획을 세워왔습니다. 그게 국방위 소속사업 아닙니까. 한 의원님께서 힘이 좀 돼주십사 하고......."
오재섭은 목소리만큼 은밀한 눈길을 한인곤에게 보냈다.
"글쎄요, 저 같은 초선이 무슨 힘이 있다고......."
한인곤은 오재섭의 술수에 걸려든 것인지, 그의 말마따나 요로에 사람을 많이 알아두는 것이 재산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저어, 반대만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인사드렸으니 곧 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전 의리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임상천이 또 머리를 깊이 숙였다.
성북동 골짜기를 휩쓸어 내리는 북풍은 그야말로 살을 에는 칼바람이었다. 남천장학사는 그 매서운 바람보다 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기숙생들은 책을 덮고 하나같이 풀이 죽어 서성거렸다. 겨울방학이 끝나면서 제각기 짐을 싸야 할 그들은 그 다음 거처를 마련할 일에 쫓기고 있었다. 애초에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장학사 생활을 하게 된 그들로서는 극심한 가뭄 피해까지 입어 굶주림에 빠진 집에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거처를 마련하는 길은 단 한 가지,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가지 끝에 하나 달려 있는 감을 돌팔매질로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동원해 그 자리를 구하려고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선오 학생, 선오 학생, 전화 받어."
"예, 예, 누구래요?"
김선오는 다급하게 방에서 뛰쳐나오며 물었다.
"잘 모르겄는디. 못 듣든 여자 소리여."
김선오의 다급함에 비해 태평스럽기 그지없는 수위 영감의 대꾸였다. 못 듣던 여자 목소리! 순간 김선오의 마음은 활짝 밝아졌다. 박자영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럼 광고를 보고 걸려온 전화일 것이 분명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김선오라고 합니다."
김선오는 긴장 속에서 최선의 예의를 갖추려고 했다.
"안녕하셨어요, 안자경입니다. 오랫동안 못 뵈었네요."
김선오는 그만 맥이 풀렸다. 의대생 안자경의 전화는 뜻밖이었지만, 빗나간 기대를 상쇄할 만큼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아 예,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시고......."
"신문광고 봤는데, 혹시 동명이인 아닌가 해서......."
"아닙니다. 제가 맞습니다."
김선오는 의식 속에서 아까의 기대가 번쩍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머, 그러시군요. 그 일로 좀 봤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어떠신지......."
"예, 저는 빠, 아니 아무 때나 좋습니다."
김선오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가려는 '빠를수록 좋다'는 말을 황급히 바꾸었다.
"그럼 이따가 오후......."
김선오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허겁지겁 덤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얌전하고 차분한 안자경의 말이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형편이니 그런 것 저런 것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뭐야, 희소식이야?"
신문쪽지에 꽁초를 까고 앉았던 윤이 김선오를 치켜보았다.
"응, 만나보자는군."
"허! 역시 대학 차이나네."
"알게 뭐야. 이 선배 꼴 날지 모를 일인데."
김선오는 결과를 알 수 없는데다 번거롭기도 해서 안자경과의 관계를 그대로 덮어버렸다.
"참 미치고 환장할 일이야. 아니, 전라도사람들이 즈이들 애비 에미를 잡아먹었나 즈이들 재산을 뺏기를 했나. 왜 서울 것들은 우리 전라도 사람들을 못 잡아먹어 그 안달이지? 김형은 순진하게 전라도라고 하지 말고 충청도라고 해 호적등본 때오라는 것도 아니고, 곤충도 생존을 위해 보호색을 갖는데 우리도 그 정도 전략은 세워얄 것 아냐."
기숙생들의 가정교사구직이 급해지면서 이규백은 자신이 전에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에 모두 열 받치고 분노했지만 결국에는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글쎄, 그 이유 없는 차별이나 냉대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억울하긴 한데, 그런 방법으로 했다가 들통 나는 날에는 정말 전라도사람들이 나쁜 것으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다구."
"화아 이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한강에 빠져죽는 사람 심정 이제야 알 것 같네."
인생살이 사연도 구구해 한강 인도교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 인도교 양쪽에는 '잠깐만 참으세요' 하는 빨간 글씨의 푯말이 서 있을 정도였다.
"힘내, 이것저것 억울해서라도 한판 멋들어지게 살 날을 기다려야지."
김선오는 윤의 어깨를 툭 쳤다.
"모르겠어, 그런 날이 올라는지."
윤은 쓰디쓴 얼굴로 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선오는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르게 화신백화점 옆 송아지다방에 도착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서야 김선오는 스스로 머쓱해졌다. 그건 시계가 없어서라기보다 궁색하고 다급한 자신의 마음의 표현이었다. 한기로 몸을 부르르 떨며 김선오는 난로에서 먼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톱밥난로는 나이 지긋한 남자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난로를 에워싸다시피 한 그들은 엉망인 정치에 대해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람 모이는 장소에서는 으레 있게 마련인 그런 열변에 김선오는 귀를 닫았다. 무슨 탁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리 떠들어댄다고 정치가 달라질 리도 없었던 것이다.
"왜 모두 국회의원 될라고 그리 두 눈에 쌍심지를 켜는지 아냐? 국회의원이 되는 그 순간부터 특별예우만 100가지가 넘게 생기는 거야. 평민에서 특권층으로, 인생이 확 바뀌는 거지. 허지만 의원님 감투 쓰려면 만석꾼 재산을 지녀야 해. 아니, 만석꾼 재산 탈탈 털어먹고도 의사당 문턱 넘지 못한 자들이 어디 한둘이야. 그런데 판검사는 머리 하나만 가지면 되거든. 신분이 달라지기로는 판검사도 국회의원에 못지 않아 아니, 4년마다 표를 구걸해야 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낫지. 국회의원이 낙동강 오리알 되면 그것처럼 비참한 꼴이 없지만 판검사는 법복을 벗어도 최소한 변호사님이시니까 말야."
어느 선배의 말이었다. 그러나 곧 손에 잡힐 것 같았던 그 길은 한사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공부에만 몰두해도 어려운데 가정교사까지 하다 보면 그 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새 개정안은 응시자의 연령을 만 30세로 제한하고 있었다. 고등고시에 목숨 걸고 있다가 그 규정에 걸려 신세 망치게 된 사람들이 수두룩할 거였다. 자신인들 그런 신세가 안 되리란 보장이 없었다. 김선오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와락 쓸어내렸다. 상상만으로도 그 생각은 너무 끔찍스러웠다.
"이 애비가 무일푼으로 논 장만해 나갔디끼 맘 강단지게 묵고 공부혀라. 글먼 니넌 누구보담도 먼첨 판검사 된다. 사람에 강단진 맘은 쇠도 녹이고 태산도 떠 옮기는 법잉께."
서울로 떠나기 직전에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 아버지가 당부한 말이었다.
"아버지......."
김선오는 손을 깍지 끼며 신음처럼 아버지를 불렀다. 양식이 다 떨어져 이제 죽도 끓일 수가 없게 되었으니 비싼 고리채를 내는 것보다는 논을 한 마지기 처분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동생의 편지가 온 것이 보름 전이었다. 그런 동생의 의견을 묵살하고 무조건 고리채를 내라고 했던 것은 아버지 영혼 앞에 죄짓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논을 파는 것은 아버지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어서 성공해 아버지한테 크게 효도해야 한다고 다짐했었는데, 그건 아버지께 논을 100마지기쯤 사드리는 것이었다. 100마지기의 논을 가진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고 흡족해 할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벌떡거리고 힘이 솟았던 것이다.
"어머, 먼저 와 계셨군요."
"아 예, 오다 보니까......."
김선오는 생각에서 깨어나며 벌떡 일어섰다.
"저어......, 고시 공부도 힘드실 텐데, 무슨 변동이 생기셨나요?"
안경자의 조심스런 물음이었다.
"예, 변동도 큰 변동이 생긴 셈이죠."
김선오는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를 간추려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낮고 침울한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다들 어렵게 되셨군요."
안경자도 그늘진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제 남동생이 중3짜리가 있는데 마침 선생님이 필요하던 참이었어요.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녀는 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무슨......?"
안경자를 쳐다보고 있는 김선오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듯싶었다. 그녀의 말에 따라 김선오의 마음은 맑았다 흐렸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고 동생이 서울에 있는 게 아니라 광주에 있거든요. 어차피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시킬 예정이고, 중3 공부는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서울로 올려 보내라고 해도 아버지가 반대세요. 당신이 옆에 끼고 마지막까지 감독하시겠다는 거지요. 제가 동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것 같고, 동생이 공부에 열중할 것 같지 않고, 둘 다 안 믿으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동생도 의사가 되어 당신의 뒤를 잇기를 바라시니까, 개가 의대를 가려면 고등학교 3년 내내 가정교사를 붙여야 돼요."
"난 또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당장 내려갈 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김선오는 허리춤을 추키며 속 시원하게 말했다. 앞으로 3년 보장이라는 언질이 그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어머, 정말이에요?"
안경자가 활짝 반색을 했다.
"그럼요, 언제 가면 됩니까?"
김선오는 자신의 말대로 당장 떠날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
"저희야 빠를수록 좋지요."
"그럼 내일 중으로 떠나지요."
"어머, 그래 주시면 너무 고맙지요. 그럼 제가 바로 오늘 밤에 아버지께 전화 드려 놓겠어요. 보수는 서울의 최고급으로 해서요."
안경자는 긴 숨을 내쉬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이 절 마음에 들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꼭 겸손만이 아니었다. 새로 시작되는 일에 불안감이 없지 않았고, 소개를 좀 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깃들어 있었다.
"어머,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라는 말이 있던데요. 고등학교, 대학교, 학과 모두가 저의 아버지가 최고로 꼽는 일류인데 마음에 안 들 리가 있겠어요. 더구나 제 동생하고는 선후배 사이가 되는 거니까 아버지가 더 좋아하실 거예요. 대선배님 앞에서 새까만 후배가 꼼짝달싹 못할 테니까요. 제가 오히려 큰 체하게 생겼어요."
안경자는 '생김도 남자답다'는 말은 슬쩍 감추었다.
"너무 과찬이군요."
"근데요, 종원이 개가 좀 골칫거리예요. 늦게 본 아들이라 오냐로 키워서 그런지 어쩐지 국민학교 때부터도 재앙 궂고 공부보단 딴 데에 더 정신을 팔거든요. 머리는 있는데 집중력이 없는 게 탈이에요."
"그거 사내답고 좋지 않습니까. 그 나이에 공부만 파는 것도 비정상일 수 있지요. 기본적으로 머리가 있으니까 그 담은 저한테 맡겨두세요. 공부도 요령이고 재미니까요."
김선오는 아주 자신 있게 말했다. 괜한 허풍이 아니라 중3짜리 하나 틀어잡고 공부시킬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부에 마음잡게만 되면 아버지가 너무 기뻐하실 거예요. 같은 고향 사람 중에서도 김 선생님 같은 분을 모시게 되어 안심이고 참 다행이에요. 그럼, 낼 떠나시려면 채비하셔야죠."
"예, 병원으로 찾아가면 되겠지요?"
"네, 그러세요."
안경자와 헤어져 추위 속을 걸으며 김선오는 가슴이 훈훈해지고 있었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 안심이고 다행이라는 안경자의 말이 그 어떤 난로보다 뜨겁게 열을 내고 있었다. 이 의지할 데 없고 고적한 도시에서 결국 새 삶의 길을 열어준 것은 고향의 인연이었다. 그러나 김선오는 자신의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다. 징검다리, 그것도 단 두 개의 돌을 번갈아 앞에 놓아가며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가 자신의 일생일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그만 가위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