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초콜릿 1
하트 초콜릿
E. Gladstone
1
적은 쉽사리 걸려들었다. 토니 캔달은 만족감과 흥분으로 미소를 지었다. 일이 제대로 풀려나갔던 것이다.
그는 손바닥을 벌려 주먹을 내리치면서 전화 쪽으로 걸어가 다이얼을 돌렸다.
상대는 졸리운 듯 짜증스런 목소리였지만 토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꽤 잘 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술술 풀려나갈 줄 몰랐어요. 나머지는 사람을 찾아내서 그걸 되찾는 일 뿐이겠죠?"
"그런데 단서는 있소?"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토니는 거실 창을 통해 밖을 보았다. 크리스마스 기분을 한층 돋구듯,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전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단서라고요? 농담은 그만두십시오. 새벽 두 시가 아닙니까? 이제 막 손님이 돌아갔어요. 단서가 어떠니하고 말할 시간이 아닙니다. 여하튼 지금은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하지만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도망쳐버릴 텐데…"
"괜찮아요. 실패 안 할 방법으로 했으니까요. 내게 맡겨 두십시오. 걱정은 필요 없어요, 미키"
토니는 전화를 끊고 그대로 잠시 동안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이곳은 그리니치빌리지의, 초라하고 막다른 골목에 있는 아파트의 5층이다.
토니 캔달은 늘씬하고 핸섬한 청년으로, 트위드 자켓에 진즈차림이 잘 어울렸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는 밤색이었으며 눈동자는 밝은 블루, 단아한 용모에 날이 선 코, 한일자로 꾹 다물고 있는 입이 긴장을 풀고 있을 때는 더욱 관능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매료시켰다.
바로 전에 끝난 파티 때문에 방은 몹시 너저분했다.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이 쌓였고, 마호가니 가구 위에는 잔을 놓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닳아서 해진 카페트 위에는 감자 칩과 땅콩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었다. 날이 밝으면 가정부가 와서 치울 것을 알면서도, 그는 내키지 않는 손놀림으로 대충 방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접시들을 아담한 주방에 옮겨 놓고 커피포트의 플러그를 뽑은 그는, <라비앙 로즈>라는 빵집에서 배달한 케익 위에 있는 조그만 슈크림 두세 개와 샴페인 병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파티는 토니의 발명품을 기념하기 위한 자축연이었다. 그 발명품이란 일종의 기어장치로, 대발명도 아닐뿐더러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외관상은 차치하고, 파티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올가미에 걸려들도록 적을 유인하려던 것이었다. 상대가 걸려들게끔 어떤 물건을 주방에 두었었는데, 이쪽의 의도대로 그것을 훔쳐갔던 것이다.
물론 토니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범인을 알아 내기란 간단했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초대 손님의 리스트를, 보물 지도라도 되는 것처럼 토니는 조심스럽게 집었다. 그리고는 이따금 창밖을 보며 리스트에 실려 있는 이름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얼마 후 토니는 리스트를 내려놓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슈크림과 샴페인, 추리소설을 가지고 침대에 들어갔다. 오늘은 이만 자기로 하자. 아침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성공한 때문인지, 흥분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평상시 위험과는 무관한 생활을 보낸 데다가 최근에는 자극에 굶주렸었던 때문이었다.
그는 책을 펴고 샴페인 병으로 손을 뻗었다. 책이든 샴페인이든, 하나는 자신을 잠으로 인도할 것이다.
암호작성 장치를 적의 손에 넘어가게 해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무리를 적발해야 한다고 토니를 설득한 건 빨간 머리에 주근깨투성이인, 마키라는 사내였다.
검은 상자에 넣은 장치는, 지금 옮겨져 토니의 눈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옮겨져버렸다.
미키의 설득에는 반론한 여지도 없었다.
"토니, 녀석들이 암호작성 장치에 손을 안 댈 리가 없소. 어떻게든 수중에 넣으려 할 거요. 우린 그 현장을 잡아야 하오."
"만약 현장을 잡을 수 없다면요?"
"아니, 잡을 수 있고말고. 우리가 당신 뒤를 바짝 쫓아다니니, 안심하시오"
"내게 달려들도록 하진 마십시오."
미키는 웃고 있었다.
이번 일로 토니가 국가의 보물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사물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새로운 암호를 발명해 낸데 이어 암호작성 장치까지 만들었으니까. 펜타건(미국방성) 주위에서는 ‘군사면으로의 응용’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CIA(중앙정보국)에선 미키라는 인물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 대단한 장치를 적이 지나칠 리가 없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빨리 그 적에게 올가미를 씌우자는 게 미키의 계획이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작전에 참가하게 된 토니는, 남몰래 암호 공식에 수정을 가했다. 만일 장치가 소련 과학자의 손에 넘어가도 공식이 금방 탄로 나지 않도록 손을 썼던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언젠가는 이 공식도 상대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자유주의 사회는 몇 년이나 앞선 상태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토니의 손에서 책이 떨어지고 눈이 감겼다.
그대 돌연 전화벨이 울려, 그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지금이 몇 시인데!" 토니는 짜증스런 소리로 중얼거렸다.
"토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난 당신 수중에 굴러들어올 거액의 용돈을 생각했죠. 물론 날 위해 쓰겠죠, 토니?" 언제나처럼 교태스런 속삭임이 들려왔다.
"엘리제!" 토니는 짜증스러움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돈이 들어오려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그리고 당신은 어차피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겠지?"
엘리제 세블린은 애교를 섞어 콧소리로 웃었다.
"피터와 함께 돌아간 것에 화나 있는 거죠?" 그녀는 토니의 형인 피터와 팔짱을 끼고 일찌감치 파티장에서 물러갔었다.
"내가 화났다고? 당신에게? 농담은 그만 둬!" 토니가 쏘아붙였다. 그에게 있어 엘리제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피터는 좀처럼 만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콘서트 여행이 어땠는가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녀가 변명했다.
만사 순조롭게 말이지, 언제나처럼. 그리고 유명한 형에게 좋은 감정을 품었겠지… 토니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형 피터 캔달이 많은 관객을 상대로 연주함으로써 상당한 수입을 얻으면서도 계속 빚투성이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형과 엘리제의 일로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었다.
"엘리제." 토니로선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내일 내가 다시 전화하지. 잘자!" 그는 난폭하게 전화를 끊고 샴페인 잔을 단숨에 비웠다. 피터는 아무리 걱정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엘리제와의 관계는 일찍 결말 지을 작정이었다.
<라비앙 로즈>의 종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켈런 예거의 뒤로 싸락눈이 따라들어왔지만 향기로운 냄새가 풍기는 실내의 따뜻한 공기와 마주치자 소리 없이 녹아 없어졌다.
"아무도 없나요?" 켈런은 모자를 벗고 눈을 털어냈다.
"돌리, 없어요? 에밀?"
켈런이 아침 일찍 왔을 때는 없었던, 핑크색 구슬과 각종 장식품으로 치장된 크리스마스트리가 카운터에 놓여 있었다.
"저예요! 아무도 없어요?" 켈런은 가게 안으로 이어지는 아치 아래의 통로를 걸어가며 소리쳤다.
안에도 역시 사람이 없는 듯했다. 켈런은 자신의 초콜릿 토리(구운 과자)가 아까와 다름없는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작업 테이블 위에 초콜릿을 입힌 커다란 토리프가 늘어서서 포장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제일 안쪽 선반 위에는 오늘 아침에 그녀가 담은 빨간 카톤(포장용 상자)이 놓여 있었다. 각 카톤에는 금박으로 <켈런 초콜릿 클라우드>라고 인쇄되어 있고, 그 안엔 한 다스씩의 토리프가 들어 있었다.
에밀이 끝내지 못한 것 같군, 금빛 리본을 다는 작업만 남았는데… 이것은 거래처에 좋은 인상을 주려고 그녀가 최근에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운전사가 감기로 자리에 누웠기 때문에 켈런 자신이 직접 배달을 해야 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거래처는 대부분 조그만 가게가 많아서, 크리스마스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오늘 중으로 다 배달할 수 있다면, 월요일 아침에는 모든 거래처에서 다 진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무실 문이 열려 있어서 수염을 기른 이곳의 주인, 에밀이 통화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켈런이 상을 찡그리고 들여다 보자, 에밀은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치켜 올렸다.
서둘러서 코트를 벗은 그녀는 자신의 짐을 의자 위에 놓았다.
"정말 이건!" 어차피 에밀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켈런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하지 않으면 정리되지 않으니!"
켈런은 상자를 조립하고 그 안에 파라핀 지를 깔아나갔다. 한 상자에 몇 개의 토리프를 넣어야 되는지 알면서도, 그녀는 상자를 닫기 전에 새삼 무게를 헤아리며 한두 개 보탰다 뺐다 해 보았다.
조금이라도 수입이 는다면 내 가게를 가질 수 있을 텐데…. 어느 새 그녀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당초 초콜릿은 만들었던 건, 여배우로서 살아가기 위한 생활비를 버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랬는데 이제와선 자신의 가게를 꿈꾸다니….
켈런은 토리프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는 그 맛과 향기를 즐겼다. 초콜릿이 여러 층으로 겹쳐져서, 중심에 가까워지면 쌉쌀한 맛에 부딪힌다. 그리고 조금 단단한 층의 안은 버터 맛이 나는 초콜릿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고모가 집에서 만들어 주던 토리프가 이렇게까지 잘 재현시켜 주다니, 에밀은 역시 굉장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켈런에게 들어온 주문은 상당했다. 어쨌든 에밀을 만난 것은 가히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문의 종소리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에밀은 아직 통화를 끝낼 수 없는 형편인 듯, 켈런에게 봐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돌리는요?" 켈런이 묻자,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게로 나가 손님에게 케잌을 하나 팔았다. 에밀이 만드는 케잌은 어느 것이고 버터가 듬뿍 들어간 고급품이었다. 토요일 점심 때면,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보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눈발 때문인지, 손님의 발길이 뜸했다.
캘런이 안으로 돌아와 다시 상자를 포장하는데 에밀이 다가왔다.
"미안해요. 뭘 팔았소?" 그의 말은 독일식 발음도 프랑스 발음도 아니었다. 그 지독한 언어는, 그가 25년 전 알사스 로렌 지방을 등지고 미국에 왔던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케잌요. 금고가 잠겨 있어서 돈은 카운터 서랍에 넣어 두었어요. 20센트는 내 돈으로 거슬러 주었으니까, 나중에 갚으세요. 그보다, 왜 아직까지 포장을 끝내지 못하셨죠? 도저히 시간에 못 대겠어요. 어떻게든 도와주시겠어요?"
"잠시만 더 기다려주어요. 곧 돌아와서 거들 테니까."
"에밀!"
"곧 돌아와요."
"운전사가 감기 때문에 못 나왔어요. 48개 카톤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도 매우 급하게요! 카톤에는 리본도 달아야 하는데, 어쩌면 좋죠?"
"리본쯤은 없어도 불평하지 않아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당신이 포장을 끝내면 내가 차로 옮길께요. 에밀, 사람을 좀 더 고용하는 게 어때요? 그리고 돌리는 어떻게 된 거죠? 내 일이 성공하면 당신도 큰 부자가 될 수 있어요. 기운 내요!"
에밀의 웃음은 차갑게 울렸다.
"토리프는 호의로 만드는 것 뿐이오. 부자가 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리고 돌리를 집에 보내지 않았다면 재채기 때문에 당신 토리프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거요."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건강한 사람은 당신과 나뿐인 것 같군요. 이 바쁜 때 아파 누워 있을 수는 없지."
켈런은 코트를 걸치고는 선반에서 카톤을 내리기 시작했다.
"5시에 셰이에 가야 돼요. 오늘은 마지막 쇼라서 피곤한 얼굴로 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카톤을 몇 개 안고서 황급히 봉고트럭으로 가져갔다. 눈을 털면서 가게로 돌아오니, 에밀은 또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켈런은 고개를 저으며 초콜릿 포장일로 돌아가, 시간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에밀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화를 받지 않을 때는 손님을 상대하거나 오븐에서 케잌과 과자를 꺼내놓고 새 재료를 넣는 등 분주했다.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길가와 맛있는 냄새가 나는 따뜻한 가게 안을 왕복하면서, 켈런은 인생이란 참 묘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켈런 예거-가수이자 댄서이며 배우이기도 한 여성. 셰이 카바레의 쇼에 출연하면서,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해야 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바빠진 초콜릿 과자 판매업의 경영자겸 종업원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점심을 못 먹은 채였다.
여러 번의 종이 울렸을 때, 켈런은 가게 안에서 마지막 남은 몇 개의 카톤을 손에 드는 참이었다.
"에밀, 잠시 나와 봐요! 난 시간이 없어요. 에밀, 손님이에요!"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외쳤다.
제일 마지막 카톤에는 이미 금빛 리본이 달려 있었다. 켈런은 순간 놀라운 듯 그것을 바라본 뒤에 다른 카톤과 함께 그것을 집어 들었다. 흐응, 적어도 하나만은 제대로 했군!
"부탁이니까, 대신 상대해 주겠소?" 에밀이 사무실에서 마주 소리쳤다.
"그렇게 말하셔도 내겐 정말 무리예요!" 켈런은 양손 가득 백과 모자와 장갑을 들고 황망히 나서며 덧붙였다.
"오늘 밤 돌아가는 길에 들를게요. 이야기는 그때 해요."
에밀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쇼가 끝난 뒤에 들러도 에밀은 이곳에 있을 게 틀림없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낡아서 스프링조차 없는 소파 위에서 자는 것은 아닐까….
켈런이 안에서 나왔을 때 다시금 종이 울렸다. 그녀는 안고 있는 카톤의 무게에 허둥거리며, 그것들 사이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곧 주인이 나올 테니까, 죄송하지만 문을 열어 주시겠어요?"
상대는 마침 장갑 낀 손으로 자켓에 묻은 눈을 털던 참이었다. 그 남자는 이 추위에도 트위드 자켓에 진즈, 그리고 머플러만의 차림이었다. 켈런은 새삼 그 손님을 훑어보았다. 남자는 얼굴을 들고, 뭔가 질문하듯 파란 눈동자를 그녀에게 향했다. 상당히 뛰어난 용모였다. 모자를 않은 남자의 밤색 머리에서는 눈이 녹아 방울져 있었다.
"도와 드리지요." 남자는 위쪽의 카톤을 들었다.
켈런은 숨을 몰아쉬면서 급히 말했다.
"아니, 괜찮으니까…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남자가 열어주는 문을 빠져나가면서, 그녀는 인사말을 되풀이했다.
빨간 봉고트럭까지의 눈이 쌓인 길을 그녀는 조심조심 걸어갔다. 트럭의 타이어는 이미 눈 속에 파묻혀 도저히 이대로는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상태였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손님을 향해 켈런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정말 괜찮은데… 고맙습니다." 남자는 봉고트럭의 뒷문을 열고 그녀가 들고 있던 짐을 받아 안에 쌓았다. 켈런이 얼굴을 드니, 상대는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 오는 날에 젊은 아가씨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을 수 없으니까요." 그의 말은 극히 평범했지만, 목소리는 나직하고 포근한 여운이 느껴졌다.
"당신이 <켈런 초콜릿 클라우드>의 켈런 양입니까?"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묻고는 트럭 문을 닫았다.
켈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죠?"
"솔직이 말해 그런 생각은 못 했었습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답소. 말하자면…" 상대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트럭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초콜릿 구름’을 끌고 다니며 살기에는요."
커다란 눈송이가 그녀의 뺨에, 또 콧등에도 떨어졌다. 그러자 그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털어내 주었다. 그 감촉은 몹시도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서도 남자다움이 느껴졌다.
"유감스럽게도 난…" 켈런은 그와 마찬가지로 틈을 두었다 덧붙였다. 왜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초콜릿 구름’을 끌면서 살고 있어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 어쩌면 딱 맞는 일인지도 모르죠."
기쁨과 수줍음에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걸 켈런은 알아채었다. 그녀가 뭔가 응수하려 했을 때, 가게 안에서 에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켈런, 잠깐 기다려요!"
돌아보니, 에밀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차가운 눈초리로 에밀을 보고 있다가, 켈런이 자신을 응시함을 깨닫자 곧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장갑을 낀 채로 그녀의 손을 살짝 잡으며 물었다.
"트럭은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네, 괜찮아요." 켈런은 그가 무슨 말을 꺼내지 않을가, 기다렸지만 그는 잠자코 있었다.
"켈런!" 차가 있는 쪽으로 오던 에밀은, 도중에서 남자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췄다.
"다녀오시오, 아름다운 눈사람 아가씨!" 남자는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에밀의 옆을 지나쳤다. 에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켈런과 마찬가지로, 그 남자의 건장한 체격과 늠름한 태도에 매료된 것 같았다. 켈런은 할 수만 있다면 남자의 뒤를 쫓아가서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녀의 존재가 안중에 없는 듯해 보였다.
찬바람이 몰아치며 켈런을 현실세계로 돌려 세웠다. 그녀가 트럭의 시동을 걸려고 했을 때, 에밀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켈런, 기다려요. 할 말이 있소."
"지금은 안 돼요." 그녀는 시동을 걸고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나중에 다시 올께요."
조금 전의 사나이가 가게 안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만 가봐야 해요."
48카톤이나 되는 초콜릿을, 열두 집에 5시까지 배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크리스마스의 지독한 교통체증 속에서… 지금 에밀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또 다시 생각했다. 애초에 이 일은, 브로드웨이의 멋진 데뷔에 이를 때까지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계획했었다. 일년 전,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며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본업을 압도하려 하고 있었다. 켈런은 한숨을 지었다. 새삼 이런 일을 돌이켜본들 별 도리가 없겠지.
그녀는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았다. 진창길로 나가는 일은 의외로 쉬웠다. 주택가를 향해 떠나는 순간, 백미러를 통해 에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체념한 듯, 길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토니 캔달은 가게 안에서 봉고트럭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그녀 생각으로 가득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여성인가! 그는 아까 자신이 눈을 털어내 줄 때 그녀의 사랑스런 코에 찡긋 주름이 잡혔던 것을 생각해 냈다.
"무슨 짓이지!" 에밀은 입구에서 구두 밑창에 달라붙은 눈을 털고 들어왔다.
"조금도 안 기다리다니.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딱한 일이야." 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카운터 뒤로 돌아가는 에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흘끔 토니를 보았지만 곧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캔달 씨, 무슨 일이십니까? 케잌은 어땠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에밀은 빵이 담긴 쟁반을 옆으로 밀어내고 불안한 모습으로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케잌은 훌륭했고, 그에 대해서는 불평이 없소. 다만… 이곳 배달원이 아무래도 내 집의 물건을 몰래 가지고 간 것 같아서… 그래서 왔는데, 지금 여기 있소? 아니면 배달이라도 나갔나요?"
에밀은 뭔가 변명하려다가, 단념하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만 뒀어요.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당신도 아시겠죠, 그런 인간들이 어떤지… 만약 뭔가 잃으셨다면 제가 변상하겠습니다. 그런데 뭘 잃으셨다고 했죠? 분명 훔친 사람은 우리 배달원이었습니까? 귀중품이었나요? 보험은?" 상대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에밀은 그대로 사무실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불과 한순간이었지만, 토니의 얼굴에 만족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과연 미키가 옳았다. 이 빵집은 스파이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또한 에밀은 그러기에 알맞은 인물이었다. 그는 25년 전 알사스 로렌 지방을 경유해 이민 온 루마니아인으로, 빵 굽는데 명인이었다. 그 암호작성 장치는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만 위협을 가하면 스파이를 유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밀은 필시, ‘토니 캔달이 자신을 위협해 여러 가지를 알아내려 했지만 한 발 늦은 걸 알고 돌아갔다’고 상부에 보고하겠지.
토니의 추측으로는, 예의 장치는 오늘 아침 일찍이 이곳에 들어와 있다. 미키의 말대로 이 <라비앙 로즈>는 매우 의심스런 곳이었다.
그렇지만 가게 주인에게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은 실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에밀이 만드는 빵과 케잌은 언제나 맛이 있었다… 토니는 달콤한 것에는 맥을 못 추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귀중한 것을 도둑맞았다. 그것을 되찾을 때까지는 가차 없이 대해야 된다-그것이 이번 시나리오였다. 또한 도둑맞은 것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려서는 안 될 비밀스런 것임을 에밀이 눈치 채게 해서도 안 되었다.
토니는 길가에 면한 문으로 가서, 주인은 15분 후에 돌아온다고 적은 메모를 붙여놓았다. 그가 카운터로 돌아와 안을 들여다보니, 사무실로 피한 에밀은 전화 옆에 선 채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토니는 위협하듯이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배달원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버터 냄새가 나는 실내에는 숨을 장소가 없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에밀과 자신뿐이다. 공포에 질린 주인의 얼굴이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자! 내놓으실까, 에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박력이 넘쳤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점원이 훔친 물건을 내가 갖고 있을 리 없지 않겠습니까?" 에밀의 눈은 토니가 아닌, 복도 끝의 잠긴 문에 향해 있었다.
토니는 흘끔 거리에 시선을 보냈지만, 주인을 공포에 빠뜨릴 인기척은 없었다.
"검은 상자요. 정확히 케잌 정도의 크기지." 토는 지극히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젯밤 여기 배달원이 케잌을 가져왔을 때 훔쳐갔소."
"뭐라고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난 관계없다고 말했을 텐데… 검은 상자라니, 그게 뭡니까? 그런 건 본 적도 없어요." 에밀은 손짓을 섞어가며 계속했다.
"그렇게 의심스럽다면 경찰을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말 그러길 원하오?"
주인은 책상 뒤로 피하며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난 상관없으니 얼마든지 거시지." 토니는 일부러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제 자신의 뜻대로 되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토니는 강력하게 에밀을 비난했다.
"동료에게 전화를 걸고 싶겠지? 거시오, 내가 원하던 바요." 그는 얼른 책상 뒤로 돌아서는 에밀의 멱살을 바고 벽의 캐비넷에 강하게 밀어 붙였다.
"자, 내놔! 지금 당장!"
"오해예요! 상자 따위는 없어요. 검은색이건 횐색이건, 보시는 대로 아무것도 없잖소!" 에밀은 토니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쳐내고는 도망치려 했다.
"배달원은 아무것도 몰랐겠지만 당신은 알고 있었어. 그렇지, 에밀?" 토니는 주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말했다.
"녀석이 도둑이라면 그냥 두지 않겠어요."
힘이 빠진 에밀을, 토니는 재차 캐비넷에 밀어붙였다. 그 바람에 캐비넷이 조금 움직였다.
"도둑이 아니야. 도둑이라면 그런 시시한 것은 훔치지 않아. 은식기나 라디오라면 또 모르지만, 알지도 못하는 전기 부품을 훔쳐가겠소? 훔쳐오라고 명령받은 게 틀림없어. 당신은 그것이 어디 있었는지 분명 알고 있었소.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들여다봤겠지?"
"그렇지 않아요." 에밀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시선은 토니의 등 뒤에 있는 문을 더듬었다.
토니는 손의 힘을 늦추었다.
"뭘 염려하는 거요, 에밀? 가게 문은 닫혀 있으니 걱정 마시오."
"그런 소중한 것이라면 왜 일부러 날 불렀습니까? 왜 많은 사람이 들락거릴 파티를 열었습니까? 보물을 도둑맞고 싶지 않았다면 배달원 따위는 집 안에 들이지 말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토니는 태연스럽게 웃어넘겼지만, 내심은 철렁했다. 에밀은 의심을 품기 시작한 눈치였다.
"누구나 자신의 집만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에밀을 다시 세차게 밀어 목을 눌렀다. 손잡이가 등에 파고들어 아플 것이었다.
"에밀, 나는 이해력이 빠른 편이오. 당신, 지금 두렵소? 자, 상자를 내놓으실까? 어디 있소? 캐비넷 안? 소파 위? 필요하다면 이곳을 엉망으로 만들고 찾아낼 수도 있소. 당신이 맡은 역할은 대체 뭐요?"
에밀은 몹시 헐떡였다.
"가슴이… 답답해…" 토니가 손을 조금 풀자, 에밀은 내뱉듯이 말했다.
"놈들은 날 죽일 거요!‘
"놈들이라니, 누구 말이오?" 토니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가슴이 매우 뛰놀고 있었다.
"그건 없어졌어요… 날 죽일 게 틀림없어요!" 에밀은 갑자기 매달리듯 애원조로 뇌까렸다.
"난 죽고 말아요. 어떻게든 도와주시겠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토니는 그를 누르고 있던 손을 내렸다.
"여긴 이제 없습니다. 그 아가씨가 가져가버렸어요." 에밀은 느닷없이 얼빠진 사람처럼 웃었다. 눈엔 이제 초점이 없었다.
"당신은 자신의 물건을 되찾고 싶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그녀 뒤를 쫓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곤란하게 되고 말았다. 지금가지는 너무 순조로울 정도로 진행되어 갔는데… 자신은 도둑맞은 것이 어디 있나 찾아낼 뿐으로, 되찾을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모스크바로 통할만한 곳을 알아내면 나머지는 미키와 그 동료들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이 작전의 주목적은 선량한 시민을 가장해서 소련에 기밀을 파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지금 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토니는 에밀의 팔을 잠아 뒤로 비틀어 올렸다.
"전부 털어놓으시오. 천천히, 분명하게. 아이들도 알 수 있도록 말이오."
에밀이 팔의 통증으로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토니는 황급히 문 쪽에 눈길을 보냈다. 그때 여자 손님이 손잡이를 잡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마침내 메모를 본 듯 천천히 물러갔다.
"자, 몽땅 털어놓으시오. 놈들에게 죽을 거라는 걱정은 할 필요없소. 내가 뒷일을 맡아줄 테니까."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이지요." 그 목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으리만치 작았다.
"그들은 오늘 아침 9시에 가지러 온다고 했었는데, 눈 때문인지 그 시간에 못 왔어요. 롱아일랜드에서 온다던가 했는데…" 자신의 말에 숨이 막히는 듯, 에밀은 헛기침을 했다.
"계속하시오."
"좀처럼 오지 않아서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감췄소?"
에밀은 끄덕였다.
"안쪽 선반에 있는 빨간 카톤에 넣었었어요. 구분할 수 있도록 금빛 리본을 달아서요. 리본이 달린 건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봉고트럭에 실리기 전에 그것만 빼내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마침 그때 그들의 전화가 와서 지시를 받는 동안 켈런이 그걸 가지고 떠나버렸소."
"아까 이곳에 있던 아가씨?"
"그래요, 켈런 예거요. 당신 상자를 가져간 건 그녀예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에밀은 어깨를 움츠렸다.
"알 리가 없죠. 일단 카톤을 닫아버리면 다시 열진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배달을 나갔잖소?" 토니는 에밀을 자유롭게 놔주었다.
"자, 그 배달처의 리스트를 주시오."
"난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아요. 주문한 대로 토리프를 만들어 줄 뿐이니까요."
"켈런 예거… 초콜릿 클라우드라, 그럼 그녀의 연락처는 어디요?"
에밀은 한 발 한 발 움직여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토니는 그것을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
"페리 가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요. 사무실 대신으로 쓰고 있어요. 하지만 한밤중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셰이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소. 정말 그녀 때문에 일이 엉뚱하게 됐어요."
토니는 에밀의 옆을 지나 가게로 나갔다.
"내가 당신이었다면, 버터쿠키 만드는 데만 전념했을 거요." 토니가 쏘아보며 그렇게 내뱉자, 에밀은 두려움에 전신을 굳혔다.
"당신은 너무 깊이 들어간 것 같소. 하지만 알고 싶지는 않아요. 내 물건이 돌아오면 그것으로 난 만족하오. 동료들이 올 때까지 여기 있을 거라면, 그들에게 전해 주시오. 나와 켈런 예거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토니는 등을 휙 돌려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잠시 걸음을 멈추어 추위에 몸이 대처할 때를 기다렸다.
"어머, 고마워요." 블론드의 젊은 여성이 <라비앙 로즈>의 문을 밀면서 말했다.
"에밀은 언제나 중요한 때 문을 닫으니까요."
2
박수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토요일 밤, 한 해의 마지막 쇼를 장식하기에 썩 어울리는 열렬한 박수는 약간의 노스텔지어(향수병)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제 2코러스를 기다리던 켈런은, 금사 스타킹 신은 다리를 높이 들어올리며 담배연기가 자욱한 카바레 안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테이블은 만원이었고, 어느 손님이나 노래와 춤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다리를 올리고 빨간 실크 해트를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보니 닐을 따라 무대 뒤로 물러나왔다. 피아노가 같은 멜로디를 반복하고 있었다.
켈런은 다섯을 세고 다시 무대로 나가 오른쪽을 향해 인사한 뒤 다시 왼쪽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는 실크 모자를 들고 생긋 웃으며 막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캘런, 이번 월요일에 칼 디에즈의 새 뮤지컬 오디션이 있어." 좁은 휴게실로 들어서자 보니가 말했다.
"디에즈는 긴 다리에 검은 머리를 좋아하니까, 꼭 가야 돼."
켈런은 유감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아, 하지만 무리야."
"왜? 무리는 아니잖아."
"월요일에 배달할 게 많아.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시즌인 요즘 오디션이라니, 어쩐 일이지? 운전사는 병이 났고, 도와줄 사람이 없어. 에밀도 믿을 수 없고…"
켈런은 말하면서 스타킹에 어울리는 빨간 팬츠를 입었다. 턱시도우를 벗자 검은 탱크톱이 드러났다.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무대화장을 한 자신에게는 스스로도 늘 놀라게 된다.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낯선 인물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느낌이었다. 커서도 낯선 인물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느낌이었다. 커다란 갈색 눈, 선명하게 그린 아이라인, 부드러운 입술에는 윤기 있는 빨간 립스틱이 칠해져 있다.
"이제는 어느 길을 택할지 분명히 결정해야 돼, 켈런." 보니의 말이었다.
"극장인지 토리프인지, 둘 중 하나야. 두 가지 다는 너무 지나쳐. 오늘 밤 쇼가 끝나면 넌 실업자야."
"하지만 셰이는 재계약을 약속했어." 켈런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셰이의 약속은 불확실해." 보니가 응수했다. 그녀는 켈런의 친구로, 키가 크고 늘 우울함을 감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쉴 작정이래. 봄까지는 피아노와 나만을 상대로 지내면서 그동안에 새로운 쇼를 기획할 생각인 것 같아. 그 쇼의 출연에 대해서는 기대하지도 마. 그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지만, 언제나 충동적으로 일을 결정하니까. 기린 코러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어떡해서든 기린을 준비할 사람이야."
"그러면 난 기린 복장을 살 테니까. 됐지?" 켈런은 그렇게 말하고 보니와 함께 웃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 보니의 말대로, 이쯤에서 진로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토리프인지 쇼 비즈니스인지. 그것들을 함께 해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켈런은 이미 스물여덟 살로, 코러스걸의 경쟁률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고 있었다. 다리를 높이 쳐들 수 있고 성량 있는 젊은 여성은 많다. 그렇게 되면 경험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자주 듣는 충고였지만, 이제는 그만 자리잡을 일을 생각할 나이인지도 모른다. 계속 초콜릿을 만들것인지, 아니면 드라마틱한 세계에서 살아갈지… 방법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키가 크고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남자…" 켈런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휴게실 밖의 뮤직 큐를 들으면서 그녀는 계속했다.
"크리스마스에는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어."
"그런 일이 쉽사리 이루어질 리는 없잖아."
"하지만 오늘 오후 그런 기회가 있었어." 거울에 비친 반신반의 하는 보니의 얼굴을 향해 켈런이 말했다.
"팔에 가득 초콜릿 상자를 들고 라비앙 로즈를 나오려다가 부딪칠 뻔했어. 그 사람은 짐을 날라다 주었지. 그뿐이었지만…"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남자에 대해서 왜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계속했다.
"조금 말을 나누었는데 난 어찌된 일인지 더듬거렸어… 우습지?"
"어머, 그랬니? 겨우 건전한 정신 상태로 돌아온 것 같은데! 이런 일 이외의 일에도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됐지." 켈런은 보니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걸리는 게 있어. 그 사람의 눈… 왠지 모르지만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느낌이었어."
"으음!" 보니는 의미심장하게 켈런을 바라보았다.
"지나친 생각이야. 넌 로맨틱한 것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어. 빈스와 헤어진 지 벌써 일 년이나 되었는데 너 아직껏 모든 남자를 의심하고 있구나. 도날드 덕까지 의심하지 않을까?"
"그런 게 아니야!" 켈런은 반박했지만 특별히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빈스 때문에 울었던 게 언제던가? 먼 옛날로 느껴지다니… 상당히 오랫동안, 그녀는 그의 존재를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무대 쪽에서 탭댄스 스텝 소리와 최후의 곡을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차례가 돌아오고 있었다.
셰이가 그 대머리를 문틈으로 들이밀었다.
"앞으로 60초 후면 나갈 차례야, 켈런. 그리고 쇼가 끝난 다음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남자가 있소."
"셰이!" 켈런은 애써 화나는 걸 감추고 말했다.
"당신과의 계약에 고객을 상대하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셰이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규칙은 내가 정해. 그 남자는 빵집 주인과 아는 사이라든가… 하던데?"
"에밀의?" 켈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도 만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일까?"
금사 스타킹에 싸인 다리, 보기좋은 가슴을 감싼 검은 탱크톱, 괴로울 정도로 짧은 팬츠… 정말 멋있군! 토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켈런은 다리를 들고 만면에 웃음을 띄운 채, 빨간 실크 모자를 들고 듣기 좋은 노래를 되풀이해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자, 그녀는 생긋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고, 그대로 춤추면서 무대 뒤로 사라져갔다. 켈런 예거-그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토니는, 그녀의 인생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은 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쇼와 작별을 고할 것이다. 카바레 뒤쪽에는 지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피날레 박수가 우레같이 쏟아지자, 켈런은 눈물을 억제하며 인사를 했다. 이번 쇼는 정말 즐거웠기 때문에 이대로 끝나는게 아쉬웠다. 갑자기 미래가 암담하게 여겨졌다. 그녀에게 앞으로 남은 즐거움이란 일 주일 후의 크리스마스와 토리프 뿐이었다.
"만날 작정이니?" 그녀가 휴게실로 돌아와 눈물과 무대화장을 닦아낼 때 보니가 물었다.
"누구?"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떼기는… 밖에서 기다리는 네 팬 말이야."
켈런은 어깨를 치켜 올렸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지? 여길 나가려면 클럽 안을 거쳐야 하니까." 켈런은 의상을 벗어 정성껏 옷장에 걸었다.
"이 스타킹과 실크 모자는 잊을 수 없을 거야." 사랑스런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카키색 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굽 옾은 부츠를 신은 켈런은, 머리를 살짝 쓸어넘기고 나서 코트를 걸쳤다.
"이것으로 작별 준비가 끝났어."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보니,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켈런, 기운을 내." 보니는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격려했다.
"난 알아. 이제부터야. 네게는 분명 뭔가 멋진 일이 약속되어 있을 테니까."
켈런은 웃었다. 갑자기 기분이 가벼워졌다.
"보니, 넌 정말 남을 위로하는 솜씨가 뛰어나. 정말 고마워."
다른 스탭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해야 되지만, 파티 때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오늘 밤 다운타운에 있는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열겠다고 셰이가 전했었다.
버니 덕분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지만 그것도 길게 계속되지는 않았다. 헤어지면서 보니를 끌어안는 순간, 켈런은 말로는 표현한 수 없는 고독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당장이라도 재난을 만나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불쑥 일었다. 녹아버린 토리프를 배달해서, 그 불평이 사방에서 터지는 건 아닐까? 아니면, 설탕과 소금을 바꾸어 넣지는 않았을까… 분명 피곤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거야. 언제나처럼 토리프는 내가 직접 맛을 보았고, 평상시보다 솜씨가 더 나은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으니까.
"켈런, 정말 괜찮아?" 보니가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초콜릿 걱정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켈런은 대꾸하며 백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따 만나."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당분간 돌아올 예정이 없는 무대 뒤의 조그만 휴게실을 나섰다.
또다시 한 막이 내려졌다. 이 6년 사이, 시작과 끝을 몇 번이나 되풀이 했던가! 오디션, 리허설, 에이전트,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곳에서의 평범한 무대… 그런 것에 둘러싸여 몇 년을 지내왔다. 셰이의 쇼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내년 초에 재계약을 할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토리프 만드는 일만은 일관되고 있었다.
켈런은 통로를 지나 카바레 안쪽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대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낮에 마주쳤던 사나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대었다. 그는 뒤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키가 크고 거무스름한 피부의 남성… 날 기다린다던 사람임에 틀림없어!
켈런은 서슴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단골들은 그녀에게 축복의 미소를 던졌고, 개중에는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켈런이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가 겨우 그 테이블 앞에 당도하자, 그는 재빨리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켈런이 내민 작고 보드라운 손은, 그의 따뜻하고 듬직한 손에 잡혀 흔들렸다.
"토니 캔달입니다." 그는 잠시 동안 손을 놓지 않았다.
보통때는, 누구든간에 접근하려는 남자들을 피해온 캘런이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 잔 어떻소?" 토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만요." 여느때라면 따를 스스로의 경고를 무시하고, 켈런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제 곧, 올해의 마지막 쇼를 자축하는 파티에 참석해야 되거든요."
"알았습니다." 토니는 그녀를 위해 의자를 끌어주고 코트 벗는 것을 거들었다.
"에밀의 부탁으로 여기에 오셨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셰이가 그렇게 말하던데요. 그의 추측이었을까요?"
토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곧 미소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난 에밀과 아는 사이라고 말했을 뿐이오."
"에밀은 나를 위해 초콜릿 토리프를 만들고 있을 따름이에요. 친구라고 해서 나를 만나도록 권하지는 않을 거예요."
토니는 안심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바라보자, 켈런은 조금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뭘 마시겠습니까?" 토니가 물었다.
그가 에밀의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켈런은 감지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고마웠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여운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북적거리는 실내를 빙 둘러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럼 에스프레소(커피의 일종)를 마시도록 할까요?"
그는 웨이터를 불러 에스프레소와 브랜디를 주문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반쯤 빈 브랜디 병과 얼음이 든 잔이 놓여 있었다.
"상당히 좋은 노래였소. 즐겁게 들었어요." 그는 켈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의상, 그것도 실로…"
그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또야! 켈런은 다소 실망했다. 그녀의 느낌으로, 남자들이란 모두 이런 일을 하는 여자는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켈런의 생각을 간파한 듯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3,4개월 전에도 당신을 본 적이 있었소. 그때도 역시 아름답고 재능 있으며 매력적인 여성이라 생각했었지."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기뻐할 줄 알겠지.
"그런데도 꽃다발은 오지 않았더군요."
"보내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꿈을 꾼 것이 아닐까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에밀의 가게에서 당신을 만나리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었소. 그런 우연이 또 있을까요?"
"놀랍군요." 진의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려고, 켈런은 내리깐 속눈썹 밑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경쾌하게 웃었다. 그 눈은 테이블의 램프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음료를 가져온 웨이터가 켈런의 스테이지를 극구 칭찬하고 돌아섰다.
에스프레소 컵에 레몬 조각을 넣으며 켈런이 물었다.
"이제 이쯤에서 당신이 누군지, 왜 여기에 왔는지 밝혀 주시겠어요?"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구냐고요? 35년 전쯤에 뉴욕의 북부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오. 지금은 그리니치빌리지에 살고, 빵과 케잌류는 언제나 라비앙 로즈에서 구입하고 있소. 이것이 개괄적인 내 인생이오, 미스 예거."
"켈런이라고 불러도 돼요." 왠일인지 몹시 당혹스러웠다. 어쩌면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닐까?
"그런데 당신이 여기 온 건 에밀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오늘 오후, 도망치듯이 사라진 이유는 뭡니까?"
"도망… 치듯이라고요? 에밀이 뒤에서 불렀을 때 말인가요? 그는 가게를 봐달라고 했지요. 정말 양심 부족이에요,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잘 알면서… 하지만 그 일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 눈초리는 몹시 매서웠다. 오늘 오후, 에밀의 모습을 지켜보던 것과 똑같은 시선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당신은 참으로 매력적인 여성이오. 당신 같은 미인을 만났을 때, 남자라면 누구나 말을 건네고 싶어질 거요." 그는 잔을 들고 의자에 기대어 켈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왜 내가 여기 왔는지의 수수께끼는 풀렸을 테죠?"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라고 켈런은 생각했다. 나를 만나러 온 목적이 분명치가 않아. 그가 내게 끌려 여기까지 왔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걸.
켈런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성가신 일에 끌려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지쳐서 생각하기도 힘들었고, 또 에밀을 만나야만 되었던 것이다.
"커피, 마시지 않을 겁니까?"
그의 물음에 켈런은 재빨리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에스프레소는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토니는 여전한 자세로 앉아 한 손으로 테이블 끝을 잡고 있었다.
켈런은 일부러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새로 뜨거운 것을 주문할까요?" 그가 물었다.
"됐어요. 잠들기 힘들어질 테니까 커피는 사양하겠어요."
"하지만 파티가 있다고 했잖소? 파티 석상에서 잘 생각인가요?"
캘런은 의자에서 고쳐앉았다.
"아직 갈지 말지 결정 안 했어요."
"켈런의 초콜릿 클라우드라…" 그는 갑자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어떤 점이 특별하오?"
"에밀에게서 듣지 못했나요?"
그는 순간 당황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모두 다 특별해요, 훌륭하죠. 적어도 맛을 본 손님들은 그렇게 평해 주시죠."
"그건 아름다운 판매원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켈런은 작은 분노를 터뜨렸다.
"내가 목적이란 말인가요?"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덧붙였다.
"손님들은 날 몰라요. 내 거래처로 초콜릿을 사러 오니까요!"
그는 놀라는 모습이었지만, 곧 다른 질문으로 켈런의 허점을 찔렀다.
"한 가지 가르쳐 주겠소? 당신의 초콜릿은 아무 상점에서나 손쉽게 살 수 있는 거요?"
그녀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턱을 받쳤다.
"에밀의 가게에서도 살 수 있어요. 모르셨던가요?"
"물론 알고 있소." 그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맛본 적은 없어요. 다이어트중이거든."
거짓말쟁이…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곧 먹을 수 있다면 꼭 맛보고 싶소. 사실 다이어트와는 관계없소. 예쁜 색으로 도장된 그 봉고트럭에 있겠지?"
"미스터 캔달, 미안하지만 차 안엔 향기조차 남아 있지 않아요."
그에겐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트럭은 차고에 모셔두었고요. 설마 당신은, 윌러 고모님의 토리프 비밀을 훔치러 온 사람은 아니겠죠?"
그는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정말 시원스럽고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사실을 밝히면, 난 발명가요. 토리프와는 전혀 상관없소."
"발명가?" 켈런은 조금 몸을 젖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그에 대한 견해를 바꿔야 할 성 싶었다.
"어떤 것을 발명하죠?"
"세상이 좀 더 부드럽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 들을 발명하지."
"발명가를 만난 건 처음이에요."
토니는 브랜디 잔을 들어올려 건배했다.
"나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카바레 댄서를 만난 적이 없소."
"카바레 댄서였던 사람이라고 정정해 주세요."
"과연 그렇군요." 그는 알겠다는 듯이 미소 지어 보였다.
켈런은 의미없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곤함은 어느 새 사라지고 머리도 맑아져 있었다.
"발명 아이디어라면 나도 많이 갖고 있지만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유감이지만 이제 실례해야겠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언제든 전화를 주시오. 돌아간다는 말은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의미겠지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발명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생각나면 전화하죠. 낮이든 밤이든간에요. 그것만은 약속해요."
두 사람 모두 태연한 척 가장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왜 왔는지는 곧 알게 되리라고 켈런은 생각했다.
"밤이 더 좋겠군요."
그녀는 그의 그 말을 무시했다.
"예를 들어 토리프를 만드는 로봇 따위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상자에 담아 포장까지 해주는 로봇도요. 배달을 맡을 로봇도 좋고요."
"그리고 켈런은 사라진다 이거요?"
"켈런은 브로드웨이의 장기 뮤지컬에 나가고 싶어 하리라 생각해요. 만약 나갈 수만 있다면, 토리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초콜릿이 아니라 나사못이 들어 있는 토리프가 만들어져 불평을 사게 될지도 모르오."
켈런은 즐거운 듯 웃었다.
"그건 당신 탓이에요, 발명가 캔달 씨."
"그러면 내 쪽에서 블루밍테일 백화점에 사과하러 가겠소."
"더 바에도 부탁해요." 그의 만족스런 표정을 깨닫고, 켈런은 문득 말을 끊었다. 어느 새 경계심을 풀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대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왜?
"죄송하지만 이젠 정말 가야 돼요." 그녀는 차갑게 선언했다.
켈런이 일어나자, 그도 재빨리 따라 일어서서 그녀가 코트입는 것을 도왔다.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소."
"아니, 됐어요." 캘런은 황급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가겠소."
그가 코트 깃을 세워줄 때, 켈런의 뺨에 그의 따뜻한 숨결이 와 닿았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발명가 캔달 씨!" 그녀는 단호히 사양했다. 뉴욕에서의 질긴 접근에 대응하는 방법쯤은 잘 알고 있었다. 토니 캔달이 그런 부류의 남자란 걸 깨닫자, 솔직히 실망이 컸다.
"지금은 한밤중이오. 여자 혼자 거리를 걸을 시간이 아니잖소?"
"괜찮아요,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과는 처음 만났을 뿐이고요."
한순간 그녀는 그에게 기대는 모습이 되고 말았지만, 곧 몸을 떼었다. 현재의 자신의 길을 그르치면, 그대로 영 파멸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감각이 그녀의 내부에 엄습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몰라도 좋으니, 이 남자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자신의 감정에 질 것 같아서, 그녀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도 분명 그것을 알아차렸을 것 같았다. 그녀는 웨이터에게 손을 흔들고는 총총히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가 계산을 끝내고 코트를 받아들 때까지 계단 앞에서 기다렸다.
"나는 바에 일할 때가 많아요." 그가 가까이 오자 켈런은 말했다.
"난 무대에 서기 위해 뉴욕에 왔어요. 낮과 밤이 바뀔 것을 충분히 납득하고서죠." 그녀는 맨 아래층에 있는 라운지까지 뛰듯이 하며 내려갔다.
"만약 걱정스러우면, 내가 택시를 잡을 때까지 함께 있어 주겠어요?"
토니는 켈런의 뒤를 따라 모든 게 얼어붙어버릴 듯 무섭게 추운 바깥으로 나섰다. 눈도 멎은 캄캄한 하늘 아래 얼어서 매끄러운 길이 이어져 있었다.
"꼭 집까지 바래다 주고 싶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켈런의 얼굴은 달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흡사 한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유감이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얼굴을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군요, 토니."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 준다는 게 이상한 의미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재빨리 얼굴을 대어 눈깜짝할 새 그녀에게 키스하였다.
"좋아요. 그렇다면 내일 꼭 만납시다."
켈런은 가늘게 몸서리를 쳤다.
"꼭요?" 그때는 택시가 앞에 와 멎었기 때문에 그녀는 서둘러 다가갔다.
"무리예요. 에밀과 토리프를 더 만들어야 되고… 할 일이 태산 같아요! 미안하군요."
갑자기 내게 키스를 하다니… 사실은 따귀라도 올려붙였어야 해!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왠지 그 키스는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토니는 그녀가 차에 오르기 쉽도록 택시 문을 열고 잡아주었다.
"아침을 함께 합시다." 그는 끈질기게 청했다.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분명 그에게 끌리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에 뭔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는 뭔가를 감추고 있어. 그래,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조소는?" 토니는 운전사를 힐끗 보며 물었다.
"페리 가 25번지까지 부탁해요." 켈런은 운전사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는 토니가 그대로 차에 오르지 않을까 싶어서 황급히 문을 닫았다. 택시가 떠나는 순간, 그녀는 운전사에게 다시 말했다.
"아저씨, 도중에 들를 곳이 있는데요."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토니 캔달이 다른 택시를 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3
켈런은 늙수그레한 운전사에게 부탁하였다.
"라파이에트 거리의 4번 가와 교차되는 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라비앙 로즈에 들러 에밀이 깨어 있으면 그와 이야기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일에 관한 것은 아니다. 아까까지는 그럴 작정이었지만, 지금은 토니 캔달에 대해 좀 알아보고 싶다. 그에게 미행당하지 않는지 다시 돌아보았으나, 그의 차는 모퉁이에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 사라졌다. 켈런은 안심하며 시트에 몸을 맡겼다. 그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운전사에게 주소를 말한 것은 실수였어… 아니, 어쩌면 그에게 알려지길 원하며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택시는 다른 차들 사이를 잽싸게 빠져나갔다.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제설차가 보였다. 이미 밤이 깊었는데도 사람들은 마구 떠들면서 네온이 켜진 극장가를 활달하게 오갔다.
좀 전까지의 우울한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토니 캔달 덕분인 듯 싶었다.
켈런은 이 혼잡스런 뉴욕에 온 것을 눈곱만치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일자리를 찾는 것도, 집세를 버는 일도 고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6년 전… 장미 빛 뺨을 가진 순진한 그녀는, 4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들고 이 대도시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는 마티 밴드라가 주재하는 유명한 액터즈아리나 장학금도 받았었다. 그 2년 후, 그녀는 연극 오디션에서 캐빈 랭이란 남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잠시 함께 지냈었지만, 그는 마침내 켈런을 홀로 두고 할리우드로 가버렸다. 그후 그녀는 역시 배우인 빈스와 교제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 곁엔 아무도 없다. 때문에 켈런은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였다.
하지만 토니 캔달은, 캐빈이나 빈스같이 자기중심적이며 남에게 몹쓸 짓을 하는 남자들과는 달라보였다. 그는 머리가 좋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인 듯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인생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켈런은 눈을 감고 시트에 한 것 기댔다.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고모가 만든 훌륭한 토리프는, 켈런이 철들 무렵부터 크리스마스 시기가 되기 무섭게 클리블랜드의 집으로 보내져왔다. 그러나 설마 그것으로 돈을 벌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켈런은 그리니치빌리지의 조그만 아파트 주방에서 토리프를 만들기 시작했었다. 홀리데이 시즌에는 오픈 브로드웨이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끝나면 언제나 공연자들에게 토리프를 선물했다.
첫손님을 데려온 것은 보니 닐이었다. 그 손님은 보니의 사촌으로, 주택가에 상점을 갖고 있었다.
그후 켈런은 스스로 주문을 받으러 돌아다니게 되었다. 토리프 만드는 일은 좁은 아파트 주방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됐을 때, 그녀는 에밀과 그의 가게 라비앙 로즈를 발견했던 것이다. 에밀은 켈런에게서 재료명세서를 받아들고는, 맛을 손상시키지 않을 만큼 대량 생산하고 비전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택시는 라파이에트 거리와 4번 가의 교차점으로 접어들었다. 길은 어둡고, 어느 가게고 문을 걸어잠근 채 잠들어 있었다.
"저기서 세워 주시겠어요?" 켈런이 말했다.
"오른쪽에 있는 두 번째 가게, 라비앙 로즈라는 빵집 앞에요."
"빵집이라고요?" 운전사는 속도를 늦추고는 창밖을 살폈다.
켈런도 흘끔 내다보았다. 그러나 윈도우 위에 있어야 할 크고 고풍스런 간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게의 창도 캄캄했다.
"이상하군요, 여느 때 같으면 조그만 불이라도 켜져 있을 텐데…" 그러나 눈이 심하게 퍼붓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싶어서, 그녀는 운전사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하지만 잠시 확인하고 올 테니, 기다려 주시겠어요?"
다시 불안이 엄습해왔다. 왠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토니 캔달 탓인지도, 아니면 오후의 에밀의 태도로부터 그렇게 생각되는지도 모른다. 물론 에밀이 가게에 묶여 있는 것만은 아니므로 이 시간에 없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지만, 다만 보통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켈런은 차에서 내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반은 눈에 묻힌 차 사이를 걸어갔다. 겨우 당도해서 캄캄한 윈도우 너머로 안을 살피던 그녀는 놀라움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 켈런은 장갑 낀 손으로 눈을 비볐다. 가로등 불빛을 의지해서 들여다본 가게 안엔, 카운터와 선반,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택시 운전사는 차의 실내등을 켜놓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켈런이 다시 한 번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없어졌다. 테이블과 의자, 상품명을 적은 표, 계산대… 뒷선반에 놓여 있던 축하 메시지가 든 케잌까지도 없었다. 모든 것이…단지 핑크빛 장식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혹시나 거리를 잘못 알고 다른 가게 앞에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도 없었다. 어쨌든 에밀의 가게임은 분명했다. 길가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문이 있고, 검은 장미무늬가 찍힌 하얀 타일바닥이 보였다. 둥글고 잡기 힘든 문의 손잡이도 똑같았다. 그러나 에밀은 모든 짐과 고모의 토리프 재료명세서까지 가지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왜?" 켈런의 중얼거림은 조용히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혀버렸다.
집으로 돌아가 에밀에게 전화를 해 보자. 집이라면 꼭 있을 테니까. 켈런은 서둘러 택시로 돌아갔다.
"페리 가 25번지까지 부탁해요." 좌석에 등을 기대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에는 뭔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최후로 본 에밀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다가 체념한 듯 서 있었다. 그때의 토니 캔달의 싸늘한 눈초리… 켈런은 불현듯 몸서리를 쳤다.
아니, 별로 이상한 일은 안 일어났을 거야. 에밀은 계속 전화를 받고 있었고… 혹시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몰라. 어떤 일이든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브레이크를 밟으며 운전사가 고함치는 순간, 켈런은 시트에서 옆으로 쓰러졌다.
"이 놈들이!"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뒤에서 온 차가 택시 오른쪽에 부딪히며 예리한 금속성을 발했다.
"미안합니다, 손님."
운전사가 문을 열려는 순간, 부딪혀 온 차에서 뛰어내린 두 남자가 택시에 달려들었다.
"대체 어딜 보고 달리는 거야! 취했나?" 운전사는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지만 아무리 보아도 건장한 두 사내와 대적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남자들은 수수한 색깔의 코트로 몸을 감싸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잠자코 있어. 그러면 안전하게 보내줄 테니!" 한 남자가 약간 강한 액센트의 굵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남자는 어리둥절해서 서 있는 운전사 옆을 스쳐서 문을 열고 켈런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함께 갈까, 아가씨!"
"잠깐만요!" 켈런의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돈이라면 모두 줄게요."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지만,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다가오는 손을 피하려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시트 옆으로 피했다.
"불필요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요." 반대쪽 문이 열리며 또 한 사람이 앞을 막았다.
켈런은 재빨리 손을 들어 그 남자의 얼굴을 세차게 할퀴었다.
"아얏!" 남자는 한순간 주춤거렸다.
"이봐, 무슨 짓들이야!" 운전사는 이미 택시의 무선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경찰을 부르겠어. 정말 왠 놈들이지!"
그때 켈런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마치 그에 응하듯이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4번 가를 달려왔다.
두 사내는 황급히 자신들의 차로 돌아가서는 맹렬한 속력으로 달려나갔다.
"저 순찰차에 알립시다." 운전사가 말했다.
"아가씨는 뭔가 사건에 말려들어가 있군요?"
공포에 떠는 켈런의 곁을, 순찰차는 멈추지도 않고 지나쳐 버렸다.
"이건 곤란하군. 가버렸어요. 중요한 때인데… 자, 뒤를 쫓아봅시다. 아니면 병원으로 가는 편이 나을까요?"
"아뇨, 페리 가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아직도 몸이 떨렸다.
"차 번호, 혹시 못 보셨나요?" 그러나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운전사는 잠자코 택시 오른쪽으로 돌아가 문의 상태를 살폈다.
"손님, 죄송하지만… 주소와 성함이 필요해질 것 같습니다. 이건 심하군요. 문이 완전히 상했어요. 사장은 틀림없이 내게 책임 지우려 할 겁니다."
"알았어요." 켈런은 시트에 몸을 기댔다. 떨리는 몸은 언제까지나 진정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만약 순찰차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공포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나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했어. 지금 이 순간 얼굴에 깊이 할퀸 자국을 얻은 유괴 미수범이 핸들을 잡고 있을 거야! 그 얼굴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수수한 복장에 무표정한 남자였지만 눈에는 지적인 무엇이 있었고 퍽 주의깊게 행동했다. 또 한 사람은 땅딸막한 몸매에 험악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 역시 잊지 못할 것이었다.
"괜찮습니까, 손님?" 운전사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네, 아직까지는요."
"녀석들을 아십니까?"
"전혀요."
운전사는 다시 앞으로 돌아와 운전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회사 사장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설명해 주시렵니까, 손님?"
"네, 설명할 수 있는 것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페리 가 25번지였었죠." 운전사는 그녀에게 목적지를 확인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이윽고 택시는 그녀가 세들어 있는 아파트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문득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요금과 함께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켈런의 초콜릿 클라우드? 이건 뭡니까?"
"과자예요. 내가 켈런이고요." 그렇게 대답하고 그녀는 택시에서 내렸다.
"사장에게 거기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하도록 말하세요.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가 현관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봐 주시겠어요?"
"물론 그러죠. 나라면 지금 곧 경찰에 연락할 겁니다."
"충고 고마워요." 현관으로 통하는 계단에는 소금이 뿌려져 군데군데 눈이 녹아 있었다. 켈런은 기진맥진한 몸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조각이 새겨진 마호가니 문 앞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창 너머로 안의 로비가 보였다. 그녀는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는 돌아서서 택시 운전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구두와 머리, 코트에 붙은 눈을 털어내고 로비로 들어섰다. 어디선지 맛있는 음식의 냄새와 바닥의 왁스 냄새가 떠돌았다.
겨우 안전한 집으로 돌아왔구나… 켈런은 한시름 놓으며 카페트가 깔린 계단을 올라갔다. 모든 것을 잊고 목욕이나 하자. 납치 미수사건이고 뭐고….
만약 토니 캔달과 함께 곧장 돌아왔다면 그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켈런은 4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면서, 어쨌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었다. 방 문을 연 순간, 찬바람이 얼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창은 분명히 닫았었는데… 황급히 불을 켰을 때,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서서 방 안의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나, 이럴 수가! 너무해!" 켈런은 입에 손을 대고 못박힌 듯 꼼짝하지 못했다. 파스텔 칼라로 꾸민 아담한 방은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옷장 안이고 서랍이고, 마치 회오리 바람이 휩쓸고 간 뒤처럼 제멋대로 바닥에 뒹굴었다.
"설마! 또 도둑이라니!"
일 년 전에도 도둑을 맞았었지만 피해는 대단치 않았었다. 오히려 신사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보석과 타이프라이터, 그리고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준 밍크 모자를 훔쳐갔을 뿐이었다.
"얌전히 있어요! 움직이면 안 돼요!"
켈런은 옆에서 뻗쳐온 팔에 난폭하게 붙잡혀 바닥에 쓰려졌다.
토니 캔달은 몸을 낮추고 그녀 옆을 지나, 활짝 열린 창에서 펄럭이고 있는 커튼 앞으로 다가갔다.
켈런은 몸에 걸리적거리는 백과 코트, 스카프를 풀려고 악전고투 중이었다. 가까스로 일어섰을 때, 토니가 재빨리 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켈런, 몸을 낮추시오. 서 있으면 안 돼요. 놈들이 아직까지 서성이고 있을지도 몰라!"
"놈들이라뇨? 대체 누굴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켈런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열려 있는 문 쪽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토니는 창을 닫아 잠그고 커튼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대체 어디로 갈 셈이오?" 말투는 딱딱했지만 눈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어머니의 화장품을 바르다 들킨 아이처럼, 켈런은 눈앞에서 움찔했다.
"당신이야말로 여기에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대체 이게 다 어찌된 일이에요?"
그는 어느 새 방에 있는 것들 하나하나를 둘러보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아무래도 내가 들어올 수 없을 만한 열쇠를 만들지 못한 것 같소." 토니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저 창의 열쇠, 저건 너무 조잡하오. 마치 ‘들어오십시오’ 하는 것 같잖소. 내가 좀 더 좋은 열쇠를 만들어 주지."
"그렇군요, 발명가 캔달 씨! 당신이라면 열쇠를 설사 벽이라도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겠죠? 자, 어찌된 일인지 설명을 들어보기로 할까요?"
"하지만 놈들이 찾는 물건을 손에 넣지 못했다면…" 토니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꼭 다시 올 거요."
책과 몇 개 있는 귀금속류가 모두 선반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그가 주워 모았다.
"놈들이라니, 대체 누구예요? 당신이 하는 말을 전혀 모르겠어요." 켈런은 열린 문을 통해 다시 뒷걸음질 쳐서 복도로 나갔다.
"경찰을 부르겠어요."
"켈런, 당신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까 굉장한 소리가 났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혼났다고요." 이웃인 페트라 클라크가 복도로 뛰어나왔다. 머리에는 굵은 헤어컬을 만 채로였다. 당황한 탓인지 잠옷 위헤 걸친 가운의 단추가 잘못 채워져 있었다.
"당신이 돌아오는 소리가 나서… 당신 발소리는 곧 알 수 있어요…" 페드라는 갑자기 말을 끊고는, 켈런의 뒤에 서 있는 토니 캔달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머나!"
페트라가 남의 사생활을 엿보길 좋아한다는 것을 캘런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것에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페트라, 마침 잘 됐어요. 지금 당신 방의 벨을 누르려던 참이에요."
그 순간 토니 캔달이 문 앞으로 와 켈런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 아무 일도 아니오."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고, 그는 캘런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했다.
"켈런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요. 창을 열어놓은 채 외출했어요. 그래서 방 안이 온통 엉망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 겁니다." 토니가 너무도 환하게 웃어 보였기 때문에 페트라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었다.
"용건이 뭐였죠?" 페트라는 켈런에게 물었다.
"지금 내 방 벨을 누르려 했다고 했잖아요." 그는 켈런의 뒤를 살폈지만 토니가 재빨리 가로막고 서서 방 안의 광경은 볼 수 없었다.
"난 토니 캔달이오. 당신이 페트라입니까? 당신 이름은 켈런에게서 종종 들었어요." 토니는 켈런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귓불에 키스하면서 다정하게 방으로 끌어들였다.
"대체 무슨 짓이에요?" 문이 닫힌 순간, 켈런은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바둥거렸다.
"당신, 페트라가 얼굴을 똑바로 봤어요. 그녀는 잊지 않을 거예요!"
"그래 주길 바라오." 토니는 켈런이 다시 도망칠 수 없도록 팔을 꽉 잡았다.
"날 믿어 주지 않겠소?"
"믿으라고요?" 켈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말이에요? 당신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 그녀는 다시 문 앞으로 갔다. 그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손잡이에 손을 댄 채, 그녀는 뒤를 향해 외쳤다.
"페트라는 아직도 밖에 있어요. 부르면 곧 뛰어올 거예요."
"켈런, 내 말을 들어요." 토니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소. 당신은 지금 어떤 사건에 말려들어 위험에 처해 있소. 그러나 그것에 관해 설명할 시간이 없소. 이것은 단순히 도둑의 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절대 아니오. TV와 타이프라이터는 있소만 보석은 어떻소? 도둑맞지 않았소?"
"보석같은 건 갖고 있지도 않아요." 켈런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작년에 도둑이 들어 전부 훔쳐가버렸어요."
토니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을 사무실 대신으로 쓰고 있다고 에밀이 말하던데, 사실이오?"
"에밀? 그에겐 그런 말을 일러줄 권리가 없는데요."
"장부는 어디 있소? 거래용 장부 말이오."
"여기에는 없어요. 전부 회계사에게 맡겨 두니까요. 그런데 장부가 어쨌다는 거죠?"
"켈런, 이건 아주 중대한 일이오.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소?" 신중한 목소리였다.
"찾는 물건이 발견되지 않으면 놈들은 다시 올 거라고 말했잖소? 이런 말다툼은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할 뿐이오."
"귀중한 시간이군요…?" 돌연 그녀는 택시에서의 사건을 떠올렸다.
"나를 습격한 두 남자, 그 사람들과 뭔가 관련이 있나요?"
"두 남자라니, 누굴 말하는 거요?" 토니는 몹시 허둥대며 물었다.
"누군지 모르세요?"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었어….
토니는 그 매력적인 눈으로 잠자코 그녀를 주시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소?"
"누군가를 잘못 안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눈 깜박 할 새 일어난 일이었어요. 아까 라비앙 로즈에 들렀었어요. 에밀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켈런은 말을 끊었다. 얼굴이 빨개진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에밀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토리프에 관한 것도, 배달이 지연된 데 대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에 관해서 묻고 싶었던 것이다.
"자, 계속하시오." 그가 재촉했다.
"택시에서 내려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믿을 수 없지만 모두 없어졌어요. 가게 물건 전부가… 마치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단지 그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만이 남아있었어요."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토니는 침착한 태도였지만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 곳은 분명 라비앙 로즈였소?"
켈런은 끄덕였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한 그는, 사태를 납득하려고 애썼다.
"잠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켈런은 계속했다.
"할 수 없어 다시 택시에 올라서 이곳으로 오려던 참이었지요. 그런데 몇 미터도 가지 않아 뒤에서 달려온 차에 택시가 받혀버렸어요. 운전사가 차에서 내렸을 때, 두 남자가 뒤차에서 나오더니 날 끌어내려 했어요."
토니가 상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켈런은 그가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 재촉하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다시 몸서리를 쳤다.
"난 비명을 질렀죠." 켈런은 잠시 씁쓸하게 웃고는 뒤를 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우연히도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왔어요. 그바람에 두 사람은 잽싸게 도망쳤죠. 순찰차는 그대로 지나쳐 버렸지만요."
"납치당할 뻔 했다는 거요?"
"그때는 돈이 목적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상하군요.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닐까요?"
"얼굴은 기억하오?"
"네. 내 팔을 잡아당길 때 그 사람의 얼굴을 할퀴었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해요. 그 사람은 크고 각이 진, 아주 무서운 얼굴이었어요."
"결국 그렇게 가까이까지 그 남자가 다가왔었다는 말이로군!" 그렇게 말한 토니의 입술은, 화가 난 듯 꼭 다물어져 있었다.
"이제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야겠어요."
켈런은 엉망이 된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을 믿어야 할지, 어떨지 하는 것과는 달라요. 일단 경찰을 부르는 편이 좋겠어요."
"아니오. 잊는 편이 좋겠소. 아무것도 잃은 건 없으니, 경찰도 어쩔 도리가 없을 거요."
"토니, 왜 그러는지 난 모르겠군요."
"켈런, 거듭 말하지만 지금은 경찰을 부를 때가 아니오."
"그러면 날 말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녀는 전화기 쪽으로 가서 경찰서의 번호를 돌렸다.
그러나 벨이 울리기도 전에 토니가 다가와 전화를 끊어버렸다.
"왜 내 말을 듣지 않소? 지금은 경찰을 부르지 말자고 했는데."
"그럼 이 일은, 에밀이 사라진 것과도 관계가 있군요. 도대체 어찌된 거죠? 에밀은 이것과 어떠한 관계가 있죠?" 오싹하는 그 무엇이 등줄기를 스쳤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위험에 처하게 되다니!
"당신의 토리프가 문제요. 내가 차에 싣는 걸 도왔던 바로 그것 때문이지. 배달처의 리스트가 급히 필요하오."
"뭐라고요?"
"이유는 묻지 말아 주시오, 켈런. 하지만 그 리스트에 적혀 있는 상점 이름을 알고 싶소. 그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오. 여기 들어온 녀석들도 같은 것을 생각한 게 틀림없소."
켈런은 순간 눈을 감았다.
"나를 잡아가려던 남자들… 그들도 관계가 있을까요?"
"켈런." 토니는 그녀 곁으로 다가와 팔을 잡았다.
"당신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됐소. 난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요? 어디에 말인가요?" 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하고는 토니를 밀쳐냈다.
"당신은 날 모르고, 나도 당신을 몰라요.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난 당신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녀는 다시 전화로 다가갔다.
"경찰을 부르겠어요. 말려도 소용없어요."
그가 노한 듯이 쏘아보았기 때문에 켈런은 두려워져서 입을 다물었다.
"켈런, 내 말을 들어요. 오늘 배달한 거래처의 리스트는 어디 있소?"
그녀는 무심코 소파 위의 백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금세 후회했다. 너무도 쉽사리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는 한 걸음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지만 입 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에밀이 놈들에게 당신의 거처를 가르쳐 준 것 같소. 당신은 무슨 일인가 궁금하겠지만 내겐 그 리스트가 필요하오. 당신 고모님의 토리프가 어떻다는 게 아니오. 당신이 배달한 것 중에 잘못해서 내 물건이 섞여 들어갔소.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카톤 속에 말이오.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손님에게 보냈던 거지." 토니는 잠시 말을 끊고 그녀를 응시했다.
"물론 당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난 거짓말 따위 안 해요. 당신의 말은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에밀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토리프는 내가 담았어요. 그리고 운전사도 결근이라 예정된 배달은 모두 내가 하게 되었고요. 카톤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분명해요. 각 카톤에는 토리프가 한 다스식 들어 있어요. 그외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신이 직접 담지 않은 카톤이 그 중에 하나 섞여 있었을 거요."
"그럴 리 없어…" 순간, 켈런은 금빛 리본이 달려 있던 카톤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돌리나 에밀이 담아놓은 것으로만 믿고 있었다. 그 속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었던 걸까? 어디에 배달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켈런은 토니가 어떻게 나올지 살펴보기로 했다.
"내게 리스트를 건네주겠소, 켈런?"
"어떻게 된 게 아니에요?" 문까지의 거리를 재면서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섰다. 문 너머에는 아직도 페트라가 서 있을 것이다. 필시 이 모든 대화는 그녀의 귀에도 들렸으리라. 기지를 발휘해 그녀가 경찰을 불러오면 좋으련만….
토니는 잽싸게 소파에 뛰어올라 켈런의 숄더 백을 집어 들고는, 안에서 리스트를 꺼냈다.
"어떻게 할 작정이죠…?" 켈런은 황급히 그를 밀어냈지만 그의 얼굴엔 이미 미소가 떠올랐다. 켈런은 뺨에 그의 숨결을 느꼈다.
토니는 돌연 그녀의 팔을 가볍게 뒤로 비틀어올리고는, 장난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자, 이젠 됐어요, 켈런. 난 검은 띠의 유단자요. 체념하지 않겠소? 아까부터 말했듯이 우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 놈들은 일시적으로 물러났을 뿐이오. 곧 돌아올 거요."
토니는 그녀의 팔을 놓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켈런은 아프지도 않은 팔을 비비면서 난폭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짜증스럽게 바닥에 흐트러진 옷들을 집어올렸다.
"어차피 읽을 수 없을 걸요, 한 자도요. 리스트는 내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요."
"이건 뭐요?" 그는 리스트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그것은 그녀밖에 알 수 없는 기호로 적혀 있었다. 켈런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웠다.
"당신은 머리가 좋죠? 직접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리스트를 대강 훑어본 토니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것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여기서 나갑시다. 자, 빨리."
켈런은 그를 응시한 채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떨어져 서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격렬한 불꽃이 튀었다.
"괜찮다면 리스트를 돌려받고 싶은데요?"
"슈트케이스는 어디 있지?"
켈런은 의아한 듯이 그를 본 뒤에 열려 있는 옷장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것들도 엉망으로 뒤죽박죽이었다.
토니는 곧 옷장 안에서 조그만 여행용 백을 찾아냈다.
"켈런, 여기에 하루나 이틀분의 옷을 넣으시오." 그는 백을 소파 위에 던지며 명령했다.
그 말을 무시하고 켈런은 전화 앞으로 다가갔다.
"날 따라오는 편이 나을 거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놈들이 그 안에 돌아오면 어쩔 셈이오?"
"어떻게 해서든 날 여기서 끌어내려는 거죠? 그것도 경찰에 알리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켈런은 다시 경찰서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토니는 바로 뒤에 서서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그렇습니다만…" 켈런은 전화를 받은 상대에게 말했다.
토니는 소리를 내서 웃고는 멀어졌다. 주방으로 간 듯, 냉장고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런은 쌀쌀맞게 대응하는 교환원에게 사건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고요?"
켈런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네, 그래요."
"정말 도둑이 들어온 겁니까?"
"그렇습니다." 토니 캔달의 일도 이야기할까 생각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좀 난감했다.
토니는 캔 음료를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났다. 얼굴은 무표정했다. 켈런은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이대로라면 전화 상대가 경찰차를 이쪽으로 보내는 데 수십 년이나 걸릴 것 같았다.
"이젠 됐어요!" 수화기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고함친 그녀는 난폭하게 전화를 끊었다.
"가겠어요. 어차피 여기서 잘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리스트는 돌려줘요. 그러면 여길 나가겠어요."
"돌려주긴 하겠지만 어차피 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을 거요."
"그 리스트가 왜 필요하죠?"
"리본이 달린 카톤을 찾아내기 위해서."
"무엇이 들어 있는데요?"
"당신과는 무관한 일이오. 아니, 모르는 편이 좋아요."
그는 침착해 보였지만 그 목소리는 뒤에서 절망감이 배어나왔다. 그것을 눈치 챈 켈런은 또다시 공포에 몸을 떨었다. 눈앞을 가로막고 선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그녀는 그만 침묵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했다.
"당신은 리스트를 달라고만 했을 뿐, 그것을 어떻게 할지는 가르쳐주지 않는군요."
"난 그 리스트를 손에 넣었소."
"그랬군요. 그럼 난 택시를 부르겠어요. 그만 나가 주시지 않겠어요?"
그가 반대하지 않을까하고 켈런은 잠시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는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전화로 택시를 부르고, 행선지로 셰이의 조소를 알렸다. 그리고 다음에 셰이의 전화번호를 돌려 보니를 호출하고는, 그녀의 아파트에 머물 수 있도록 이야기를 끝냈다.
"이제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군. 다행이오." 그는 나이트 가운을 집었다.
"이 향기는 샤넬이군요?"
"리스트는 가져가도 좋아요." 켈런은 그의 눈을 보고 당황해서 말했다.
"그대신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
"미안하오. 그러나 그처럼 내정하게 굴건 없을 텐데… 언제든 기회를 봐서…" 그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켈런이 놀란 것은, 그의 얼굴에 틀림없는 후회의 빛이 나타난 것이었다.
"내가 택시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겠소. 당신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난 이번 일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어요. 사실이오. 그리고 상대는 꽤나 난폭한 수단을 쓰는 녀석들이오. 명심해요. 이번 일도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오."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켈런은 짐을 챙기면서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안에 든 동전을 소리 내어 만지작거리며 기다려주었다. 켈런은 백에 몇벌의 옷을 챙겨 넣고 나서 그가 열고 있는 문을 빠져나가 서둘러 복도로 나섰다.
"아가씨, 열쇠를. 별 도움이 안 되는 열쇠지만 일단은 잠가 둡시다." 토니는 열쇠를 받아들고 문을 잠갔다.
"정말 미안하게 됐소." 그는 열쇠를 돌러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의 눈이 그녀의 몸을 주르르 훑어내렸다.
"언제든 또 만납시다." 토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제든이란 건 있을 수 없어요." 켈런은 냉정하게 단언하고, 페트라가 문틈으로 이쪽을 엿보는 건 아닐까 우려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배달처의 리스트를 뺏겼지만 전혀 상관없어. 뭐가 적혀 있는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리스트는 정확히 내 머릿속에 들어 있어!
켈런을 태운 택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토니는 실망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리스트를 빼앗을 때는 그녀가 그것을 되찾으려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쫓아오리라 기대했었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강하게 나왔다. 아니면 정말로 뺏겨도 상관없는 건지… 어쩌면 이 리스트는 가짜로, 자신이 속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에밀의 착각일지도 모르지. 자신이나 미키가 적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상대편 남자의마음을 혼란시키기 위해 여자가 선수를 치는 일은 흔히 있으니까.
그녀는 실로 아름다웠다. 에밀의 가게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알게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보통과는 다른 묘한 만남이었다. 그리고 쇼에서 보여 준 늘씬하고 매혹적이 모습….
택시는 어느 새 모퉁이를 돌아가 보이지 않았다. 토니는 머리를 흔들고는 리스트를 쥔 채 계단을 올라 복도의 불빛 밑으로 갔다. 리스트를 찬찬히 보았지만 마치 암호 같아서, 뭐가 적힌 건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니셜과 체크 마크 옆에 수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 옆에 주소도 업이 우편번호가 쓰여 있었다. 아니, 우편번호로 보이지만 어쩌면 그녀 나름의 암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이런 것을 해독하는 데 시간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과연 뺏겼어도 그녀가 당황하지 않은 까닭을 알 수 있을 듯했다.
머리가 좋은 여성이야.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도 몰라. 이번에도 택시를 부를 때 내 앞에서 행선지를 알렸지. 난 분명 그것을 적어 두었고.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함정일지도 모르지.
토니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발밑의 눈이 가로등에 빛나고 있었다. 그녀와 다정히 팔짱을 끼고 아무 생각없이 이 눈길을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택시가 한 대 서서히 다가왔다. <차고행>이라는 램프가 켜져 있었다. 토니는 주머니에서 1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들고는 운전사에게 잘 보이도록 들고 흔들었다. 택시는 그의 코 앞에서 급정거하였다.
4
켈런이 아담한 로비에 들어설 때까지, 보니는 위에서 자동문의 보턴을 눌러 주었다. 이곳은 소호에 있는 셰이의 맨션이었다. 뒤쪽에는 그의 방으로 직접 통하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도 있지만, 켈런은 잠시 망설인 뒤에 폭넓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두소리가 따각따각 메아리쳤다.
3층까지 오르니, 거기 보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구나." 그녀는 켈런이 들고 있는 백을 받아 들었다.
"왼쪽에서는 파티중이야. 짐은 오른쪽 침실에 두면 돼. 그런데… 피해는 없었니?"
드넓은 맨션 안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마치 소음과도 같았다.
"피해?" 켈런은 보니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소파 위에는 코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TV도 도둑맞지 않았고, 스테레오와 타이프도 무사해. 토니의 이야기로는, 상대가 전혀 다른 것을 찾는 것 같다는 거야."
멜런은 코트를 벗고 거울 앞으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그만 코는 빨갛고 눈화장도 지워져 있었다.
"토니라니, 누구야?"
"그게 말이지…" 켈런은 핸드백을 집어 화장품을 꺼내려고 안을 뒤적거렸다.
"누군지 나도 몰라."
"형사?"
"셰이가 말하던 그 팬이란 사람이야. 쇼가 끝난 뒤에 날 만나고 싶다던 남자… 그가 나타난 뒤로 이상한 일만 계속되고 있어."
무슨 이야기든 듣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어 있던 보니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를 아파트까지 데리고 갔니? 정말 웬일이니?"
"‘웬일이니’라고 할 만한 것은 못 돼. 내게 5분 정도만 시간을 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는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일을 말해 줄게."
보니는 방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5분으로는 모자라겠지? 10분 줄게. 넌 꿈속의 왕자님이라도 만난 얼굴이구나."
마침내 침실에서 나왔을 때는, 보니의 머리도 켈런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토니 캔달이 그 침입사건에 어느 정도로 관련되어 있는지, 그녀 역시 도무지 짐작이 안 갔다.
"그가 리스트에 적힌 가게들을 알아내지 못할 거라는 것은 확실하니?"
켈런은 한숨지었다.
"그런데 부주의하게도, 블루밍테일과 더 바의 이름을 말해 버렸어."
"내일은 일요일이야. 두 군데 다 문을 열어." 보니가 말했다.
"나는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을 만큼 바빠서 토니의 일 따위는 상관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넌 드러나지 않도록 모습을 감추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말은 했으나, 토니 캔달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단념이 너무 빨랐어. 분명히 뭔가 비장의 수단이 있을 거야."
"그를 만나지 못하다니, 유감이구나." 보니의 말이었다.
켈런은 보니의 뒤를 따라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도중에 누군가가 샴페인을 건네주었다.
"승리의 여신, 우리 여주인공의 도착이군!" 셰이가 뒤에서 다가와 켈런의 뺨에 키스했다.
"이야긴 보니에게서 들었소. 하지만 이미 경찰이 와서 사건은 해결되었겠지?"
"글쎄요…" 켈런은 이번 사건을 별로 화제로 삼고 싶지 않았다.
"내 아파트 열쇠를 주었어요." 보니가 말했다.
"완벽하군." 셰이는 켈런의 손을 잡고 벽가에 놓인 쿠션에 편히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데리고 갔다. 방 한가운데는 의자가 열 개 정도 놓여 있었다.
이제부터 무엇이 시작될지, 켈런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엉뚱한 곳에 왔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가담되지 않기를 빌었다.
"캐스퍼의 신작을 함께 맞춰보는 중이었소." 셰이는 방 맞은편에 앉아 손을 흔드는 각본가를 가리켰다.
"멋있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으로는 몹시 귀찮게 됐다고 켈런은 생각했다.
셰이는 이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크게 너털웃음을 웃으며 윙크했다.
"당신을 위해 꼭 어울리는 파트를 남겨 두었지, 켈런."
"어머, 그건 정말 고맙군요." 켈런은 예의상 인사치레를 하고는, 그가 내민 대본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변함없어.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 대본이야." 옆에 앉은 보니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셰이가 주최하는 파티라고만 생각했는데…" 켈런이 대꾸했다.
"그럼 <이지고>의 대본 읽기를 다시 시작합시다." 셰이가 말했다.
"우선 각본가 캐스퍼 제임스를 소개하겠소."
짝짝짝-박수소리가 나자, 캐스퍼 제임스가 일어났다. 그는 왜소한 남자로,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이 간신히 훌렁 벗겨진 대머리 부분을 감추고 있었다. 가는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흔들면서, 캐스퍼는 자신이 쓴 극의 요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어떻게 영감을 얻었는지-하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모두들 완곡하게 비난해서 그를 앉히고, 비로소 대본 읽기에 들어갔다.
그 극은 지나칠 정도로 시시한 내용이었다. 켈런은 지루함을 참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겨우 제1막의 중반쯤에서 순서가 돌아와 대사를 막 읽기 시작한 그 순간, 현관 벨이 울렸다.
"셰이가 방에서 나가더니 금세 돌아왔다. 그리고는 켈런에게 윙크하며 손가락을 까딱여 문 쪽을 가리켰다.
획 돌아보니, 문 앞에 토니 캔달이 팔짱을 낀 채 기대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배달처를 알아내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켈런은 얼굴을 옮겼다. 처음엔 횡설수설하였지만 곧 원래 자세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마치 대본이 외국어로 쓰여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파트를 다 읽고 난 그녀는 대본을 의자 위에 놓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토니에게로 가까이 갔다.
"여긴 또 웬일이죠?" 켈런은 몹시 화난 투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고요? 그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나요?"
토니는 그녀의 팔을 잡고 주방으로 데려갔다.
"리스트가 정말 필요하오."
"당신이 갖고 있잖아요!" 켈런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결국… 해석이 필요해요."
"여긴 사람들이 많아요. 밖으로 내쫓을 수도 있다고요."
"검은 띠의 나를 말이오?" 토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바닥을 수리하는 데만도 많은 돈이 필요해질 텐데?"
셰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켈런, 당신 차례야. 친구는 좀 기다리게 해요."
"자, 나가요! 이건 경고예요."
켈런은 그렇게 말하고 의자로 돌아와 대본을 집어 들었다. ‘친구’라고? 셰이는 샴페인을 상당히 마셔서 이미 취해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토니까지도 그룹에 끌어들일 기세였다.
대본 읽기는 좀처럼 끝날 기색이 없었다. 눈을 내리뜨고 있었기 때문에 켈런은 토니가 아직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제1막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자, 그녀는 셰이에게 다가갔다.
"셰이, 그만 실례해도 될까요? 내게는 길고긴 하루였어요. 그만 쉬고 싶어요."
셰이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렇지 않아도 끝내려던 참이야. 보니가 캐스퍼를 눈 속에 던져버리라고 해서 말이오."
"애써 던져버릴 필요도 없어요. 눈덩이를 던지기에 적당한 표적이 될 거예요." 켈런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흘끗 문 쪽을 보니, 토니 캔달이 만면에 미소를 띠운 매력적인 여성과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다.
켈런은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고, 토니 옆을 스쳐 코트를 가지러 갔다. 그녀가 코트를 걸치고 있는데 토니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멋진 연극 아니오? 날 사로잡았소."
켈런은 홱 돌아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의 잘난 척 하는 말투, 난 그런 투를 혐오해요. 그리고 이건 내 직업이고, 나름대로 긍지도 갖고 있어요. 장난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결국은 모두 남에게 펼쳐 보이기 위한 세계가 아니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현실세계요. 다시 말해 두지만, 배달처 리스트를 가르쳐 주지 않는 한 당신에게 언제 또 위험이 닥쳐올지 몰라요."
"그건 내 머릿속에 있어요. 당신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죠. 하긴 팔이라도 비틀어 무리하게 실토하게 한다면 이야긴 달라지겠지만."
"난 여성에게 난폭한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렇지만 내 말을 들어요. 내가 당신을 따라 다니는 것은 당신이 아름다워서, 당신을 원해서가 아니오. 물론 그런 마음도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당신에게는 아직 분명히 설명하지 못했소. 그러나 이유를 알면 알수록 위험이 커져요. 그래서 당신에게는 말하지 않는 거요. 자, 그러니 내게맡겨 주시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애원하듯이 바뀌어 있었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진 그는, 그대로 행동을 멈춘 채로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미친 예상외의 반응을 알아차린 듯이.
"자, 켈런. 내게 기회를 주지 않겠소?"
두 사람은 얼마간 서로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요, 나."
"이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요."
"내 목숨이 말인가요?"
"그 뿐만이 아니오." 토니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살며시 끌어안았지만, 켈런은 놀라지 않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바보요."
입술에 부드럽게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켈런은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마치 꿈속과도 같았다. 갑자기 그가 두려워졌지만 키스 탓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토니에게서 몸을 떼었다.
"토니, 당신이란 사람은,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군요? 그러나 아직도 난 당신을 완전히 믿어야 할지 어떨지를 모르겠어요."
"믿으시오." 토니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의 코트 깃을 세우고 단추를 채워주었다.
"여기서 조금 가면 밤새 영업하는 곳이 있어요." 켈런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했다.
"그곳이라면 한적하니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몇 시죠?"
"2시 반이오. 하지만 어제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지 않았소?"
"7시에 일어났는데… 그렇군요, 사실은 좀 피곤해요. 그래도 아직 쉬고 싶은 마음은 없군요. 그리고 미리 말해 두겠는데, 보니의 아파트까지 바래다 줄 필요는 없어요."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켈런의 백을 든 토니는,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현관문을 막 열려던 순간, 그녀는 쿵쿵쿵 뛰어오는 발소리와 타일 바닥에 백이 던져지는 소리를 들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용서없어!"
목소리는 굵은 명령조로, 왠지 기억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켈런은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토니는 공격해오는 두 남자로부터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순간, 토니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팔을 휘둘러 작은 사나이의 턱에 무거운 펀치를 한 방 먹였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난간에 부딪히더니, 숨을 내쉬며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토니는 잽싸게 돌아서서 또 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벽 쪽으로 밀리며 상대에게 얻어맞고 말았다.
문을 열고 셰이에게 인터폰을 누르려던 켈런은, 문득 백 안의 헤어스프레이를 생각해 냈다.
토니가 반격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덩치가 몹시 큰 사내는, 다시금 토니에게 연타를 퍼부으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토니가 그곳에 무너져버리자, 남자는 켈런을 향해 불쾌한 미소를 띠우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남자의 뺨에 있는 상처를 보는 순간, 켈런은 오싹했다. 토니가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켈런은 재빨리 백에서 헤어스프레이를 꺼내 뚜껑을 벗겨버리고, 달려드는 사나이의 얼굴에 기세 좋게 내뿜었다. 그것은 눈에 정통으로 뿌려진 듯, 거구의 남자는 비틀거리며 한손으로 양 눈을 감싸고, 도움을 요청하듯 또 한손을 내밀었다. 헤어스프레이의 효과는 일시적인 것이다. 켈런은 계속 스프레이를 뿌리며 뒤로 물러섰다.
"토니, 빨리 도망쳐요!"
그 순간, 스프레이는 다 나와 버린 듯 헛바람만 나왔다. 켈런은 스프레이통을 던지고 백을 낚아채듯이 집어 들었다.
"토니, 괜찮아요?"
그는 일어나 있었지만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검은 띠의 아저씨, 어떻게 할까요? 셰이에게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여기를 나갈까요?"
"바로 옆에 차를 세워 놓았소." 그의 목소리는 아픔으로 쉬어 있었다.
"서둘러서 이곳을 나갑시다."
두 사람은 황급히 문을 닫았다. 켈런은 재빨리 셰이의 방 인터폰을 누르고, 수상한 남자가 둘이나 계단 밑에 있으니 경찰을 부르라고 부탁했다.
"어떻게 그 녀석을 쓰러뜨렸소?":
"헤어스프레이로요. 다 써버렸어요."
"내가 새 걸 사 주겠소. 잔뜩 사 주지."
차체가 낮은 카멜로에 당도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토니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연 다음, 운전석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앉자마자 곧 시동을 걸었다. 차는 굉음을 내며 얼어붙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형편없는 검은 띠로군요!" 켈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공포심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운전솜씨는 괜찮은 편이군요. 그건 그렇다치고, 당신과는 채 5분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건 왜죠?"
"어디로 가겠소? 하긴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 같군. 당신 아파트고 내 아파트고 지금은 모두 위험하니까."
"당신 아파트라고요?" 켈런은 소리쳤다.
"당신 집에는 안 가요."
"내 아파트는 틀림없이 감시당하고 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이 간다 안 간다, 말할 수는 없소. 이제부턴 모두 내가 결정하겠소."
"난 역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켈런은 어둡고 긴 복도를 바라보았다. 양쪽으로 기분 나쁜 녹색의 문이 있었다. 그녀는 보니의 방 열쇠를 토니에게 건네주었다. 일의 발단은 토니이니까, 그에게 모든 걸 맡기는 편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토니는 흡족한 얼굴로 열쇠를 받아들었다.
"이제야 겨우 내 존재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군."
"그런 건 아니에요. 길고 피곤한 하루였기 때문에 에너지가 떨어진 것 뿐이지요."
"헤어스프레이처럼 말이오?" 토니는 문을 활짝 열었다. 잠시 동태를 살핀 뒤, 그는 벽을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찾았다.
"자, 들어갑시다."
멜런은 토니의 바로 뒤를 따라, 잘 정돈된 아담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이곳을 알 리는 없겠죠.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는 한." 그녀가 말했다.
"아, 물론이오."
토니가 주위를 돌아보는 동안 켈런은 코트를 벗었다.
"괜찮소. 아무도 없어요." 토니가 돌아와서, 그녀에게 문을 닫아도 좋다는 신호를 했다.
"탐정님, 수고하셨어요. 이런 밤중에… 아니, 아침이라고 해야겠죠. 또다시 아까 같은 일이 생기거나 한다면 난 죽고 말 거에요." 켈런은 손을 내밀었다.
"잘 자요, 토니. 바래다 주셔서 고마워요."
악수대신 토니는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문을 닫았다.
"켈런." 팔을 잡은 채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는 물었다.
"언제쯤이면 날 믿어줄 거요?"
"정신과 의사로부터 괜찮다는 증명서를 받을 때까지는 안돼요."
"당신은 아까 내 목숨을 구해 주었소. 집시의 오랜 풍습에 따르면, 이것으로 당신은 내게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는 거요. 내가 죽을 때까지."
"지금으로 봐서는…" 켈런은 빈정거렸다.
"그 일생이 짧아질 것 같군요." 그녀는 앤 여왕시대풍의 조그만 의자에 앉아 부츠를 벗었다. 그리고는 백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은 기분이 들더 있어서 좀처럼 잠들 수 없을 듯했다. 혼자 있는 게 무서운지, 아니면 토니 캔달과 둘만이 있기가 두려운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아니, 구원한 것 같은 형태가 되었지만….
백을 내려놓은 켈런은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면 이 근육통이 좀 풀어질까? 그러나 역시 이쯤에서 토니에게 나가달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토니." 그녀가 입을 떼기 무섭게 그가 말을 막았다.
"알고 있소." 토니는 그녀의 뒤로 다가와서 그 팔에 자신의 팔을 감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은 마치 여우에 홀린 것 같은 하루였을 거요. 에밀은 사라져 버렸고 토리프도 없어졌고. 빨간 카톤도 마찬가지이고. 잠시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겠소?"
그는 현관 옆에 있는 옷걸이에 자신의 코트를 걸었다. 켈런은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쫓아낼 기회를 일고 만 것 같았다.
"이야기라고요? 지금 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에요."
"마음대로. 그러나 너무 높은 소리는 내지 말아요. 이웃사람이 경찰을 부르거나 하면 귀찮아지니까."
"어머, 그래서 경찰이 오면 오히려 더 좋지 않은가요?" 돌연 그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보고 켈런은 의아스러움을 느꼈다.
"오늘 밤 일어난 일을 전부 이야기하고, 뒷일을 경찰에 맡기는 편이 좋을 듯한데요."
"그들은 당신의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일 거요." 토니는 켈런 쪽으로 돌아와서 꼼짝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지 않소?"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듯 토니는 싱긋 웃었다.
"내 머리가 이상하다고요? 이상한 건 당신 쪽이에요."
"아직도 날 의심하오?"
"뭘 믿어야 좋을지 난 모르겠어요." 켈런은 그의 턱에 생긴 상처에 손을 대었다.
토니는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곧 그녀의 손을 잡고 꼭 끌어안았다.
"괜찮을까요?" 켈런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약이라도 바르는 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단치 않소."
"정말요?"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켈런의 손은 그의 따뜻한 손에 잡힌 채였다.
"큰일 날 뻔했어요." 그녀는 불현듯 솟구치는, 그에게 안기고 싶은 욕구를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람들이 누구고, 왜 나를 쫓는지 말해 주겠어요?" 그녀는 살그머니 손을 뺐다.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하는 게 어떻겠소?"
"좋아요. 냉장고의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보니가 말했어요."
그는 주방으로 가 거실에 있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은 거기서 잠시 쉬도록 해요. 내가 끓일 테니까."
켈런은 그 말에 감사하면서 백을 들고 보니의 침실로 갔다. 자그마한 방안에 큰 침대와 프랑스풍의 옷장이 놓여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대비해서 그녀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마음먹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뒤인데도 이상하게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다시 거실로 돌아갔을 때도 토니는 여전히 주방에서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이제 다 됐나요? 켈런은 주방을 향해 소리친 뒤 소파에 앉아 부어오른 다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설탕과 크림은?"
"일만 하느라고, 난 저녁도 못 먹은 기분이에요."
"정말이오?"
"네, 기억이 잘 안 나요." 정말 몹시도 긴 하루였다. 문득 카바레에 가기 전에 버터바른 빵을 조금 떼어먹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 누군가로부터 사과를 받았었지.
켈런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토리프가 담긴 빨간 카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토니가 그 괴한들과 관련된 것이 어떤 일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토니와 그 남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똑같이 리스트였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거래처로 찾아가기라도 한다면 일은 더 엉뚱해질 것이다. 그리고 토니가 말했던 그 빨간 상자. 손님이 포장을 뜯고 초콜릿 대신 영문을 알 수 없는 괴상한 물체를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
켈런은 길게 하품을 했다. 토니가 휘파람을 분 것도 같았다. 아니며 물이 끓는 소리였을까?
눈을 뜨니, 침실의 하얀 커튼을 통해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침대 안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얼마 후에야 자신이 상당히 오래 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켈런은 시계를 찾았다. 7시 반. 토니는 어찌됐을까? 그 순간, 어젯밤의 일이 모두 떠올랐다. 나는 거실 소파 위에서 다리를 펴고 커피가 끓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리고 어떻게 된 거지? 서서히 그가 손을 뻗었을 때, 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셰이의 집에서 마신 샴페인 탓이었을까? 겨우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아니야, 공복에 샴페인을 마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긴장의 연속인 날이었기 때문에 녹초가 되었던 거야. 얼마 동안 토니는 날 안고 있었어. 그 팔에 몸을 맡기고 난 그의 목을 껴안았지. 그리고 몸을 숙여 키스하는 그를 나는 정신없이 끌어안았어. 문득 그의 말을 생각해 내고, 켈런은 얼굴을 붉혔다.
‘지금은 그만두겠소, 켈런. 이런 상태일 때는 좋지 않아요. 반 몽롱한 상태가 아닌, 분명한 정신일 때에 당신을 사랑하고 싶소!’
어쩌면 좋지… 켈런은 난처한 심경으로 자문했다. 어젯밤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상책이야.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기서 잤을 까?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있었다고 한다면?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상관없어, 그의 목적은 리스트이니까. 켈런은 획 주위를 둘러보다가,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백을 발견했다. 어젯밤 그곳에 놓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재빨리 백 안을 살폈으나, 뒤져보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리스트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백을 살폈을 거야, 물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겠지만.
켈런은 살금살금 문 앞으로 걸어가서 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낡은 의자에 앉아 열심히 잡지를 읽고 있는 토니를 보자 안심이 되었다. 옆의 조그만 테이블에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잠을 잤는지, 어디서 어떻게 잤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흐뭇했다.
머리가 현명하게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요약하면, 자신이 이 남자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켈런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갈색 레저 바지에 헐렁한 베이지색 스웨터를 걸쳤다. 가져온 건 이것뿐이었다.
침실을 나서는 순간, 커피 향기와 토스트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토니는 이제 베이컨을 굽고 있었다.
"당신 친구는 콜레스테롤을 겁내지 않는 것 같소." 토니의 첫 번째 말소리였다. 그는 그녀를 죽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는 경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건 셰이의 몫이 아니었을까요?" 켈런은 창가의 테이블에 접시를 놓았다.
"잘 잤소?"
"그런 편이에요."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 모두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당신은요?"
"당신 친구에게, 소파를 고칠 필요가 있다고 전해주지 않겠소?"
켈런은 그의 턱의 상처를 살폈다. 그동안 그는 흡사 대피훈련중인 초등학생처럼 몸을 경직시켰다. 벌겋게 부었던 곳은 이제 잘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의 명예로운 부상으로 아픈 곳은 없나요?" 켈런은 레인지에 올려놓은 커피포트를 가지러 가며 물었다.
"괜찮은 것 같소."
"어제는…" 켈런은 조심스럽게 커피를 따랐다.
"둘이 밖에 나가려 했었죠. 식사하면서 당신의 발명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데."
"계획이 변경됐소." 토니는 보울에 계란을 깨 넣고 소금과 물을 섞은 뒤 베이컨이 구워지고 있는 프라이팬에 부었다.
"그러면 지방이 축적되게 되어 안 돼요. 좀 더 건강을 생각해야겠군요."
"지금은 내 건강보다 당신의 건강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소. 오늘은 상당히 많이 걷게 될 테니까, 충분히 먹어야 해요. 블루밍테일과 더 바, 그리고 나머진 어디요?"
"그 방법에는 응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 아침식사를 들고 싶다면 말해야 해요."
"그쪽도 그나름의 사정을 말한다면요."
토니는 살짝 익힌 계란을 이 등분해서 접시에 담았다.
"그런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신의 자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더군. 혹시나 꿈에 내가 나타나지 않았소?"
"잠시 기다려요. 어젯밤의 일이라면…" 말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 켈런은 구언받은 듯한 기분으로 전화를 받으러 달려갔다.
"보니일지도 몰라요."
두 사람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 무엇이든, 켈런으로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누구이고 무슨 목적으로 자신의 생활에 끼어 들어왔는지를 알 때까지는….
"여보세요?"
"켈런 예거요?"
켈런은 가슴이 철렁해서 숨을 삼켰다. 토니는 스푼을 들고 뒤에 서 있었다. 켈런은 그에게 손짓을 했다.
"여보세요, 잘 안 들립니다만…"
그러나 전화는 거기서 끊겨버렸다. 켈런은 멍하니 수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토니가 그녀의 손에서 수화기를 들어서는 내려놓았다.
"납인형처럼 창백한 얼굴이군."
"내 이름을 말했어요. 남자예요."
"누구 목소린지 알겠소?"
"글쎄… 그저 ‘켈런 예거요?’하고 물었을 뿐이에요. 액센트가 강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켈런은 토니를 쳐다보았다.
"난 왜 액센트에 구애받을까요?"
"어제 일이 있기 때문이겠지." 토니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이제는 그만 아침을 먹으면서 정리해 봐야 하지 않겠소?"
켈런은 그에게 이끌려 주방으로 갔다.
"눈이 그쳤군요." 창밖을 바라보면서 켈런은 중얼거렸다.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밑에 보이는 도로 양쪽에는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제설차가 지나간 것 같은데, 그 소음 속에서도 깊이 잠들었었다니!
"자, 먹읍시다."
켈런은 순순히 따랐다.
"처음부터 이야기해 줘요, 토니. 지금의 나로선 전혀 영문을 모르겠어요. 이런 상태에서 당신을 못 믿게 되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무의식중에 포크를 움직였다.
"암호란 걸 아오? 당신 리스트에 쓰는 암호 이외의 의미요."
"모르스 부호와 같은 종류요? 그렇다면 유감스럽게도 몰라요."
토니는 빙그레 미소를 띠웠다.
"춤을 출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거요? 선이고 악이고 말이오."
"뭐라고요? 결국 당신의 발명품은, 장난감과는 다르다는 얘기인가요?"
"그것들보다는 훨씬 중요한 거요. 정말 알고 싶소, 켈런?"
"네, 계속해요. 모르면 물을 테니까요."
"우린 블랙박스 작전이라고 부르는데…"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켈런은 곧 그 말을 막고 물었다.
"우리?"
"정부관계자."
"CIA? 아니면 FBI가 관련됐나요?" 그렇게 물으면서 그녀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대본을 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토니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블랙박TM! 언젠가 우주의 비밀을 풀, 수수께끼의 검은 상자지."
"흐음…" 켈런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당신이 발명했다는 거군요, 토니. 왠지 당신의 말을 신용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의 진지한 표정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면…" 그는 참을성 있게 계속했다.
"암호의 새로운 작성법과 전송방법의 발명이지. 동구측으로서는 아직 해독 불가능한 거요. 이런 이야기, 따분하지 않겠소?"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알겠어요. 암호와 그것을 전송하는 장치라… 극비사항이겠군요? 자, 계속하세요."
"그것은 온갖 통신 분야에 모두 응용할 수 있소. 정보가 보존되고 처리, 전송되는 분야 전부에." 토니는 의자에 기대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동구나 국내, 양쪽에서 주목을 받고 있소. 왜냐면 군사적 목적에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
켈런은 눈을 감고,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감수했다.
"알겠어요."
토니는 말을 잇기 전에 잠시 틈을 두었다. 다시금 입을 연 그의 어조는 너무도 차분하고 진지했다.
"정말 이해할 수 있겠소?"
대답하는 켈런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변화되었다.
"‘국가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은 거군요."
"그렇소."
"토니…" 켈런은 말을 끊고 깊게 한숨을 내쉰 뒤에 계속했다.
"아무래도 내 토리프가 국제적인 사건에 말려든 것 같군요. 빈정거려서 미안해요. 그러나 이것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스타워즈>같은 공상이 아니란 증거는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서요." 그가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켈런은 덧붙였다.
"확인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가를 복습해 볼까요? 그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당신을 믿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겠어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의 거래처 리스트요. 금고 열쇠나 보물을 달라고는 하지 않았소. 나아가서 토리프 만드는 방법 같은 것도. 하는 김에 말해두겠는데, 당신은 늘 나와 함께 있을 것. 난 절대로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소. 그렇지 않으면 놈들에게 발견되고 말 거요. 놈들이 어떻다는 건 당신도 이미 알 것으로 생각하오."
"토니,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건 에밀의 가게 앞이에요. 두 번째는 당신이 카바레로 날 찾아왔을 때고요. 세 번째는 내 아파트로, 당신의 말을 빌면 날 도우러 왔을 때에요. 하지만 그 때도 물론 도움이 필요치 않았어요." 켈런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때 내 아파트에 침입한 사람이 당신이 아니란 증거는 어디 있죠?"
그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그 표정에서 켈런은 예상이 어긋났음을 알고 얼른 말을 이었다.
"셰이의 파티까지 왔고…"
분노의 표정은 사라지고, 토니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요컨데 당신은, 토니 캔달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좀 더 잘 알고 싶은 거겠지?" 웃음을 참으면서 그가 물었다.
"대체 내가 누구고, 무슨 목적으로 당신에게 접근했는지를 알고 싶겠지? 알았소, 켈런. 당신을 내편으로 삼고 싶이니 가르쳐 주지.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들으시오. 피아니스트 피터 캔달을 아는지?"
"네?" 켈런은 깜짝 놀라며 토니를 쳐다보았다.
"캔달! 당신은 그 사람과 친척이란 말인가요?"
"그가 내 형이오."
토니는 너무도 쉽게 말했지만, 캘런은 그를 의심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죠?"
"당신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시간은 다 합쳐서 20분도 안 되오. 그 동안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건 그렇군요." 켈런은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설마 일요일 아침에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
"피터가 내 신분을 보증하리라 믿어요. 그러면 나를 믿어 주겠소?" 토니는 마치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걸 알기라도 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피터의 집에 잠시 들른 다음 곧 행동개시오. 피터는 뭐든 따지고 들지 않으니까, 안심해요."
피터 캔달을 만날 수 있다니, 하물며 그가 토니의 형이라면 더욱 근사해. 올봄에 링컨센터로 연주를 들으러 갔을 때는 뉴욕 필과의 공연이었지. 가늘게 뜬 눈으로 토니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피아니스트 형과의 유사점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게 듣고 보니 닮은 곳이 없잖아 있었다.
"함께 가겠어요." 켈런이 그렇게 대답한 순간, 그의 얼굴에 만족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 전에 난 아파트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겠소."
"그것이 함정은 아니겠죠?" 켈런은 중얼거렸다.
"당신이 먼저 가고 난 뒤에 따라가면 어떨까요?"
"안 되오,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고 말했잖소."
5
차에서 내리자, 켈런은 토니의 뒤를 따라 워싱턴스퀘어에 세워진 빨간 벽돌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토니는 싱글거리며 수위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보턴을 누른 뒤에 그는 엘리베이터가 5층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챘다. 5층은 자신의 방이 있는 층인데, 같은 층의 다른 세 가구 중 두 가구는 크리스마스 휴가 여행 중이었고, 또 한 세대의 노인 부부는 교회에 갔을 것이다. 이상하군. 조심하지 않으면… 켈런이 옆에 있을 때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여기서 기다려 주겠소?" 토니는 그렇게 말하고 수위에게로 달려갔다.
"에드, 누가 날 찾아왔나?"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에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 전부터 그 대답은 알고 있었다. 우편배달부들도 수위에게 고개를 까닥하는 것만으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낯선 사람이 들어오진 않았나?"
"들어올 리가 없죠, 캔달 씨.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군."
적이 더 뛰어날 게 분명하다. 낯선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쯤 놈들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토니는 주머니의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수위에게 쥐어 주었다.
"내가 돌아온 것을 못 본 걸로 해 주게. 난 집에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거야. 알겠지? 누가 물어도 그렇게 말해 주게."
"잘 알았습니다." 수위는 모자를 조금 기울이고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켈런을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윙크를 하였다.
토니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방에 들어가 깜짝 놀라기는 싫소." 그렇게 말했을 때 눈앞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괜찮을까요?"
"글세, 무슨 말도 할 수가 없겠소." 엘리베이터 안은 짙은색 마호가니로 되어 있고 주위는 금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문득 그녀가 뿌린 향수냄새가 토니의 코에 와 닿았다. 라일락일까, 은방울꽃일까?
"15분만 드리겠어요. 그 사이에 샤워와 면도를 끝내세요." 켈런은 손을 들어 그의 턱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 수염엔 16분이 필요하겠군요. 마지막으로 면도한 게 언제였죠?"
"24시간 전쯤 됐을까?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소. 16분이면 충분하오." 토니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 "그 정도면, 내 방을 수색한 당신이 나를 조금은 알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계획을 간파당하고, 켈런은 놀란 듯이 그를 쳐다보며 웃었다. 엘리베이터가 멎자, 두 사람은 깔끔하게 청소된 넓은 홀로 나갔다.
"만약 당신 방에 누군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은 뭘 찾고 있을까요?" 그녀가 불쑥 물었다.
"당신이 검은 상자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텐데요."
"당신을 찾고 있는 거요."
순간 눈을 감는 켈런을 보고, 토니는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의 몸에 팔을 감았다.
"어쩔 셈이죠?"
"싸우는 수밖에 없겠지."
토니는 열쇠를 꺼내었다. 가정부는 왔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파티의 어수선함이 남아 있는 채일까? 이런 때 문득 우스운 걱정거리가 머리를 스쳤다. 그로선 난생 처음, 자신을 잘 보이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열쇠를 돌리고 문을 살며시 연 토니는, 잠시 그대로 귀를 기울이며 안을 살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실내를 둘러보았다. 방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침입자가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내가 안을 살펴보는 동안 여기서 기다리겠소?"
"난, 갓난아기가 아니에요." 켈런은 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며 반박했다.
"그야 그렇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받았다. 방엔 역시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간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놈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소. 내가 당신을 안전한 장소로 데리고 갔으리라 짐작하고 있을 거요."
"하지만 별로 안전하지도 않았어요. 전화가 걸려왔는걸요."
"놈들의 눈도 멋으로 뚫려있는 건 아니니까. 여기도 빨리 떠나는 편이 좋을 성싶소."
"놈들?" 켈런은 거실로 들어가자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놓았다.
"토니, 정말 엉뚱한 일에 날 끌어들였군요. 사실은 오늘부터 내일에 걸쳐 열 두 카톤의 토리프를 준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죠."
"토리프 따위 난 모르오. 그것 때문에 세상의 움직임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 생활을 이끌어가는 거라고요." 켈런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토니는 당황해 하며 그녀 곁으로 갔다.
"그랬었지, 미안하오. 가끔 말을 무심코 내뱉아서… 당신이 손해본 것을 말해 줘. 그러면…"
"토니, 당신들 인텔리들은 정말 우리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군요. 난 당신의 도움을 원한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에밀과 토리프가 돌아오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그녀가 말했다.
"에밀에게 전화해 볼까요? 혹시 돌아와 있을지도 몰라요."
"전화라면 거기 있소." 토니가 말했다.
너무 쉽게 승낙해서 켈런은 의심하듯이 그를 보았으나, 그는 다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들고 에밀의 집 번호를 돌렸다. 계속 신호음이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리스트 건이 정리되고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게 되면 다른 좋은 빵집을 찾아주겠소. 어때?" 토니는 켈런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뺨에 살짝 입맞추었다.
"16분이에요." 수줍은 미소를 띠우며 그녀가 말했다.
토니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끌어안았다.
"그것으로 됐겠지, 켈런? 이제는 일부러 피터에게 가지 않아도 되잖겠소? 당신은 날 믿어주는 것 같고… 그렇지 않소?" 두 사람은 꼼짝 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두려움과 분노에서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에서였다.
"나의 일방적인 추측일지도 모르지." 그는 그이상 말하지 않았다.
"켈런, 샤워와 면도를 하고 오겠소. 그러면 곧 여길 나가도록 합시다. 계속 당신과 둘이만 있다가는 내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소."
켈런은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얼른 하고 나와요."
토니가 샤워를 막 끝내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침실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때 딸칵하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혹시 켈런이 거실에서 전화를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보세요."
"미키요."
토니는 잠시 주저했다.
"잠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데다 물에 젖어 있어서…"
"다시 걸까요?"
"아뇨, 타월을 가져올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토니는 커다란 타월을 몸에 감고, 문 밖 거실의 동태를 살폈다. 켈런에게 들킬지도 모르지만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적이라고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에밀의 말만을 믿을 수만도 없었다.
켈런은 창가에 서서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밖을 보고 있었다. 넓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을 받고 있는 늘씬한 모습-그녀가 더없이 결백하게 보였다. 만약 적이라면 책장 주위를 더듬고 있었을 것이다. 토니는 다시금 전화기를 들었다.
"미키, 무슨 일입니까?"
"수사는 어떻소?"
"문제의 인물은 여기 확보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빵집 주인이 말하던 여성이오. 어제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곤란한 일은, 그 주인이 모습을 감췄습니다." 순간적으로 토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필요 없는 것까지 말하고 말았다. 에밀이 사라지고 가게 안의 물건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 건 켈런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그것을 확인하지도 않았었다.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미키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토니는 눈살을 찌푸리고, 벽에 걸어 둔 액자 속의 오래된 특허신청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켈런이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에밀의 가게가 없어졌다는 것에 관해서는. 무론 그것만으로 결백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당신들이 데려갔는가 했습니다." 얼마간의 침묵 뒤에 토니가 말했다.
"거기에 갔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소."
뭔가 이상하다고 토니는 생각했다.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질문방법이 나빴는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녀에 관해서는 뭔가 알아냈습니까?"
"지금 당신 보호하에 있는 인물은 결백하오. 하지만 더 세밀한 조사가 진행 중이오."
토니는 잠시 간격을 두고는 다음 질문을 했다.
"켈런의 아파트에 침입한 건 당신들이었습니까?"
미키는 토니보다 더 오래 틈을 둔 뒤에 입을 열었다.
"아니, 필시 KGB일 거요. 그들은 지금 혈안이 되어 있소."
토니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데 에밀은요?"
"질문시간은 끝났소."
어차피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만 여길 나갈 겁니다. 오늘 중에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생각입니다만 어느 정도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또다시 저녁에라도 전화하겠어요."
"2,3일이면 정리될 거요. 그게 잘 안 될 경우, 당신은 손을 떼고 우리가 나서게 되겠지."
"손을 떼라고요!" 토니는 고함쳤다.
"놈들이 노리는 건 장난감이 아니오! 그건 내 발명품입니다. 당신들에게 지시받을 마음은 없어요."
"거기까지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소, 토니." 전화의 상대는 더할 수 없이 냉담했다. 그 목소리가 말해 주는 의미는, 비단 적뿐만이 아니라 토니 쪽도 귀찮다는 것 같았다.
"이 일이 정리되면 바하마 근처로 여행이라도 가는 게 어떻겠소? 당신에게 방해받아서는 곤란하니까."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토니는 전화를 끊었다. 예의 그 장치는 이제 자신의 손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과자상자에 넣어져 행방불명이 됐을 뿐더러 펜타건의 주시까지 받게 되었다. 그가 발명한 전송장치는 통신혁명을 가져와, 역관계를 전환시키는 일까지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토니로선 그 효과를 직접 지켜보고 싶었고, 만약에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그는 장치를 곧 파괴시킬 작정이었다.
얼마 후, 토니는 면도를 하면서 켈런을 형 키터와 만나게 하는 것은 큰 잘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니의 아파트에서 이곳까지 오는 도중, 그녀는 피터의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자신과 상당한 나이 차가 있는 형을, 그녀는 분명 존경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형의 베토벤 피아노콘체르토 시리즈 레코드를 전부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굉장하군." 토니가 말했다.
"별 것 아니에요. 피아노와 발성공부를 하는 동안 자연히 클래식을 좋아하게 됐을 뿐이죠."
"피터가 턱시도우를 입고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은 모습은 상당하니까."
"어머나!"
켈런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형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터와는 십 년이란 터울이 있었고, 좀처럼 만날 수도 없었다. 두 번의 이혼경력이 있는 형과 만나는 것은 바쁜 콘서트 중에 겨우 짬을 내서였다. 그것도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피터의 팬트하우스에서.
거실에 돌아오니 켈런은 변함없이 창가에 서서 챔벌린의 목조모형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특허번호 3564872요."
"솜씨 있게 조각되어 있군요. 당신이…?" 그녀는 집어 들었던 모형을 원래의 장소에 되돌려 놓았다.
"물론 내가 조각했지. 발명품의 미니츄어 모델은 꼭 만들고 있어요."
"그 장치도요?"
토니는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건 조그만 상자 속에 너저분하게 코드가 들어있을 뿐이오."
"그렇군요. 당신은 발명가 겸 조각가고, 형님은 피아니스트라! 그 외에 형제는 없나요?"
"둘 뿐이오. 형과는 열 살이나 차이가 나오. 피터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진 나의 어머니와 재혼했소. 예술가의 피는 그의 어머니, 발명가의 피는 우리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다고나 할까. 조각가의 피? 그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생각되오. 아버진 법률가였지만 점토세공을 좋아하셨소. 난 그런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소."
"두 명의 우수한 아들… 자랑스런 아들들이군요."
아니, 불초한 자식들이라고 토니는 생각했다. 형 피터는, 관객 앞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지만 한 껍질 벗기고 보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타산적이고 이기적이며, 나아가서 경박하기까지 했다. 토니는 이따금 자신이 오히려 연상으로 생각될 적도 있었다.
그는 물끄러미 켈런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생각하며 그렇게 본 것은 아니었다.
"켈런…"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당신의 방은요…" 켈런은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대화의 실마리를 꺼냈다.
"굉장히 멋져요." 난로와 장중한 느낌의 가죽 소파, 그리고 벽에 걸린 포스터 등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그녀는 말했다.
"이곳이야말로 발명가에게 꼭 어울리는 방이에요." 그리고는 그에 대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쑥스럽게 웃었다. 터들네크 스웨터와 트위드 바지차림의 그를 보고, 켈런은 조금 염려스러운 듯이 덧붙였다.
"좀 더 있다가 나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바깥은 추워요. 머리가 아직도 젖어 있는데." 그녀는 그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의 온기가 전해지자, 토니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얼마간 그대로 있었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지만 이대로 척척 진행될 리가 없다고 토니는 고쳐 생각했다.
"자, 갈까요?" 그는 소파로 가서 그녀의 코트를 들었다.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될거요. 당신은 피터를 만나야 하고."
"굳이 만나고 싶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켈런은 급히 코트에 팔을 넣으며 반박했다.
"만나게 해 주겠다고 말을 꺼낸 건 당신이에요. 막상 그를 만난다 해도, 나로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몰라요." 그녀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차피 칭찬의 말에는 질려있을 테고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 ‘어머 정말 토니의 형님이십니까?’라는 어리석은 질문만은 하지 마시오."
켈런은 반항하는 표정이었다.
"난 그렇게까지 바보가 아니에요. 다만 그분의 귀에 너무도 익은 말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그는 어떤 말이고 전부 싫증낼 거요." 그리고 토니는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당신이 내 신원을 확인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피터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소."
"토니, 난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아-" 그가 미안하다는 듯 사과했다.
"말투가 틀렸소. 사과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피터는 농담을 좋아한다는 거요. 만약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내 발명품이 초콜릿 카톤에 섞여 행방불명이 됐다고 피터는 온 시내에 터뜨릴 거요. 잠자코 있을 사람이 아니지. 또한 몇 달이고 파티 때마다 그것을 화제로 삼을 거야."
"왜지 두 사람은 라이벌 같군요."
"라이벌이라고? 발명가와 피아니스트는 싸울 수가 없잖소?"
"그야 그렇지만요." 켈런은 갑자기 그의 얼굴에 손을 대어 뺨에서 턱에 걸쳐 살짝 쓰다듬었다.
"말끔해졌군요. 라임인지 레몬인지, 향기가 정말 좋아요."
토니는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했으나, 불쑥 그 이상의 욕구가 끓어오르는 걸 느끼고 황급히 몸을 떼었다. 지금은 곤란해, 위험이 너무 많기 때문에.
켈런은 놀람과 고마움이 뒤섞인 표정을 띄웠다.
"그럼 형님을 만나러 갈까요?"
토니가 어떤 주차장에 차를 세운 것은 아침 10시 경이었다.
"피터는 12시 전에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소."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낸 그는 공중전화 박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를 돌리고 벨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함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켈런에게 손짓했다.
"여-" 피터의 목소리는 분명치 않고, 왠지 귀찮아하는 것도 같았다.
"형, 5분 정도, 괜찮아?"
아차! 엘리제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피터가 다시 말했다.
"5분 쯤 이라면 좋아. 그런데 무슨 일이냐?"
"형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지금 곧 올라가죠."
"그만 둬, 토니. 이런 아침부터… 합중국 대통령이라도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
"합중국 대통령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오."
"어쨌든 그럴 마음은 없어."
수화기에 바싹 귀를 대고 대화를 듣고 있던 켈런은 실망의 표정을 지었다.
"이제 됐어요." 그녀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이 피터 캔달이라니!"
"분명 본인이오."
"앞으로 10분 후에 올라갈 테니…" 다시 수화기에 대고 토니는 소리쳤다.
"사랑스런 동생을 만나 기뻐하는 얼굴을 해 주십시오."
"아무래도 팬을 만나고 싶지 않나 보군요." 켈런은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며 말했다.
"아마도 당신이라면 대환영일 거요."
피터의 집사가 문을 열고 두 사람의 코트를 받아 주었다.
"주인님은 곧 나오십니다." 작은 체구에 물을 들인 듯한 빨간 머리카락의 집사는 두 사람을 옅은 색조로 정돈된 차분한 분위기의 방으로 안내했다.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한쪽의 전면 창 앞에는 하얀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어머나, 멋져라!" 켈런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이런 생활을 하니 빚에 쪼들리지." 토니는 비난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방을 서성거리다가 몇 장의 사진이 놓여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백악관에서의 기념사진이었다. 세상은 얼마나 엉뚱한가! 형은 합중국 대통령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한편으로 자신은 이 백악관과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지키려고 이토록 혈안이 되어 있다니.
5분 정도 지나서 피터는 엘리제 세블린과 함께 나타났다. 토니는 이미 켈런을 데려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분명 앤소니 캔달, 통칭 토니 캔달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켈런을 이리로 데려오다니….
어색한 분위기는 엘리제 때문이었다. 그녀는 강렬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부자연스런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엘리제는 키가 크고 당당한 30대의 여성으로, 가는 몸매에 금발 머리가 위로 치켜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양 오만한 태도로 두 사람을 맞았다.
엘리제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켈런의 미모 때문이리라고 토니는 생각했다.
"이쪽은 누구시더라?" 엘리제는 켈런을 흘끔 보면서 토니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피터의 팬?" 그러면서 켈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가씬 정말 아름답군요. 피터도 필시 기뻐하겠죠."
토니는 켈런을 돌아보며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엘리제 세블린, 여긴 켈런 예거야.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피터 캔달이오."
검은 셔츠와 바지 위에 하얀 아이리쉬 스웨터를 입은 피터는, 검은 머리에 흰 머리털이 약간 섞여 있는 것과 최근 기르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염을 제외하면 토니와 모습이 똑같았다. 두 사람 모두 비슷한 당당함과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피터 캔달은 켈런 앞으로 다가와 길고 깨끗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이건 정말… 이럴 수가! 내 사랑하는 동생이 당신 같은 여성을 어디에 숨겨 두었었죠?" 그의 음성은 토니와 마찬가지로 나직하지만, 나른하고 분명치 않은 말투였다.
"숨겨둔 게 아니에요." 켈런은 얼굴을 붉히면서 손을 뺐다.
"최근에 알게 된 사이인걸요."
엘리제는 토니의 팔에 자신의 팔을 걸었다.
"먼저번 파티는 훌륭했어요. 사실 도중에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는데… 기분 상하지 않았겠죠?"
"개의치 않으니까 염려마. 켈런, 피터에게 당신의 레코드 콜렉션 이야기를 하면 어떻겠소? 그 얘기가 끝나면 나갑시다."
"그렇게 서두를 건 없잖니?" 피터는 지체 없이 반박하고 켈런을 소파로 안내했다.
"모두의 아침을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오후에는 계속 이 아름다운 분의 눈동자를 보며 지내고 싶은데… 켈런이라고 했지요? 버라이어티 쇼 <키스 미 켈런>의 켈런 맞습니까?"
피터가 집사에게 ‘5분이 지나면 중요한 전화가 왔다고 말하며 들어오도록’ 명령했을 것을 토니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아침은 끝냈어요. 켈런, 이야기가 끝나면 돌아갑시다."
켈런은 겨우 차분함을 되찾았다.
"저는 꼭 이야기하고 싶어서…"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토니를 돌아보았다.
"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죠?"
토니는 엘리제의 팔을 뿌리치고 피아노 앞으로 갔다. 몇 년 동안인가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는 그는 가볍게 건반을 두드렸다.
"켈런은, 클래식 피아니스트라면 나름대로의 위엄이 있고, 결코 여자들과 놀아나는 일도 없고, 아침 10시에도 숙취로 누워 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글쎄… 결론을 말하자면, 자제심 있는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거지요."
피터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제심이라고? 해가 나온 뒤에도 누워 있으면 안 된다는 건가? 오늘 아침은 클래식에 관한 건 잊읍시다, 켈런. 그런데 이야기라니?"
왠지 마음에 안 드는 분위기가 떠도는 것을 감지한 토니는 켈런을 빨리 데리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거실을 나와 주방으로 들어가니 집사가 커피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형이 미리 말해 둔 메시지를 전하러 오라고 했소." 토니는 포트의 커피를 따르면서 말했다.
"네, 알았습니다."
집사의 즉각적인 대답에,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작전완료! 지금부터라면 블루밍테일과 더 바, 그리고 켈런의 머릿속에 있는 리스트의 상점 전부를 돌 수가 있다. 이대로 좀 더 여기 있으면서 피터와 켈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 일과 예의 장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
집사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주방으로 돌아왔다.
"주인님이 모두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커피잔을 내려놓고 거실로 돌아왔다. 피터는 여전히 켈런과 소파에 앉아 그녀의 손가지 잡고 있었다. 토니는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질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엘리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밍크코트를 걸치고 스카프를 맨 뒤 현관으로 갔다.
"토니-" 그녀는 억지웃음을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택시를 불렀는데, 아래까지 데려다 주겠어요?"
"어디 가는 거지?" 토니는 문을 열며 물었다.
"가끔은 홈 베이스를 밟아야겠죠. 피터, 나 가요!"
켈런이 난처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엘리제, 또 전화할게." 피터가 건성으로 말했다.
토니는 형의 턱에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엘리제의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갔다.
엘리베이터가 멎고 문이 열렸다. 토니는 먼저 그녀를 태우고 자신도 올라탔다.
"피터는 요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나?"
엘리제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말하려던 건데, 그는 너무 술을 많이 마셔요. 언젠가는 비틀거리면서 무대에 서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끝장이죠."
"괜찮아,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술에 먹히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은 형님을 전연 몰라요."
설득력 있는 말투에 토니는 움찔했다.
"그는 분명 위대한 피아니스트지만 타락의 길을 가고 있어요." 엘리제는 태연하게 끝가지 말했다.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토니는 코트도 걸치지 않은 채였으나 엘리제를 택시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공기는 정말 상쾌하고 하늘은 물감을 칠해놓은 듯이 파랗다. 강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추워도 웬만큼 누그러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화나지 않았죠, 토니? 말하자면, 내가 피터와 함께 있었다고 해서… 아무 일 없었어요." 엘리제는 택시에 오르기 직전 그렇게 말했다.
토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날씨도 근사한 오늘의 소망은 단 하나, 켈런과 둘이만 있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엘리제의 뺨에 살짝 입맞추었다.
"전화할게."
"피터에게 너무 마시지 말라고 말해 줘요."
"응, 그렇게 하지." 토니는 문을 닫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택시가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켈런은 아직도 피터와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집사는 쟁반에 머핀과 커피를 받쳐들고 왔다.
토니는 옷걸이에서 켈런과 자신의 코트를 내려 손에 걸었다.
"켈런, 돌아갑시다. 터번 온 더 그린에 점심 예약을 해 두었소. 11시 예약이니 일찍 나가야 하오."
"토니!" 켈런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달려갔다.
"당신의 형님이 칼 디에즈를 만나신다는군요!"
"포커 친구지." 피터는 일어서서 천천히 피아노 앞으로 걸어갔다.
"칼 디에즈라니, 그 무대감독 말이오?" 토니가 물었다.
"월요일 오디션에 대해서 형님에게 말씀드렸어요." 켈런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그 분에게 내 이야길 해 주시겠다고요!"
키퍼는 토니의 대꾸를 가로막듯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켈런, 어떻게 당신에게 연락할 수 있겠소?" 피터는 건반을 두드리면서 물었다. 모차르트의 곡이었다.
켈런은 잠시 망설이듯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희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토니에게 전화해 주시겠어요? 내게 연락이 닿도록 해 놓겠어요."
피터는 자기 혼자만의 격리된 세계에 도취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토니는 켈런과 함께 방을 나섰다.
"터번 온 더 그린이 뭐죠?" 거리로 나온 순간 켈런이 물었다.
"자, 빨리!" 토니는 그녀의 팔을 잡고 서둘렀다.
"블루밍테일은 여기서 금세요."
"그 엘리제 세블린이란 여성, 어떤 사람이에요?"
"형의 피앙세요." 토니는 짜증스럽게 내뱉았다.
"어머, 그랬었군요."
"형에게는 네 대륙에 비슷한 부류의 여성이 많이 있소."
"세상은 좁군요." 켈런은 토니의 팔을 끼면서 보조를 맞추었다.
"형님이 칼 디에즈를 알고 계시다니…"
"그것이 어쨌다는 거요?"
켈런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토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를 만나게 해 준다고 한 건 당신이에요. 그가 나를 조금 도와준다는 게 왜 나쁘죠? 물론 재능이 없으면 디에즈는 본 척도 안 하겠죠. 하지만…"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과는 상관도 없잖아요."
토니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더 이상 피터나 무대감독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았다.
"왜 피터를 만나게 했는지 그 본래 목적을 잊어버린 것 같소. 당신은 놀러 온 게 아니오. 에밀의 일과 내 발명품이라는 중요한 문제 때문에 왔소. 앞으로 몇 시간 동안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태산 같소."
켈런은 오랫동안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니, 피터 캔달은 분명 당신의 형님이었고, 그리고 당신이 누군지도 잘 알았어요. 그렇다고해서 당신을 믿어도 좋다는 건 아니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말다툼할 시간은 없소." 토니는 그녀의 팔을 잡은 채 계속했다.
"블루밍테일은 코 앞이오. 빨리 가서 캔디 담당자든 매니저든 아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들어야겠소. 빵집에서 조그만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제 배달한 토리프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는 거요. 알겠소?" 그는 말하면서, 켈런이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네 거리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뒤를 쫓아간 토니는 그녀의 귀에다 속삭였다.
"해 보는 거요." 상쾌한 샴푸 냄새가 코에 와 닿았다.
켈런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길은 여전히 질척거렸지만 그리니치빌리지처럼 많은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철면피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녀는 다시 그와 팔짱을 끼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담당은 블린 부인이지만 지금 점심 먹으러 나갔기 때문에…" 블루밍테일 1층에 있는 캔디솝의 점원이 말했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삼사십 분 정도 있으면 돌아오겠죠."
"어제 배달한 토리프를 살펴봐도 될까요? 전 <켈런 초콜릿 클라우드>의 켈런 예거입니다."
"살펴본다니, 무슨 의미입니까?" 그렇게 물은 뒤 하얀 모자 밑으로 백발이 성성한 친절한 점원은 손님을 상대하러 가 버렸다. 카운터에는 그 점원 한 명밖에 없었다. 혼자 남겨진 켈런은 토니를 향해 한숨지었다.
가게는 사람들이 붐비는 통로에 면해 있고, 가게 안에는 초콜릿 상자와 컬러풀한 젤리 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토니는 켈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창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10분만 기다립시다. 그래도 안 되면…"
"토니, 내게 잠깐 맡겨요. 방해하지 마세요."
점원이 돌아오자 켈런이 말했다.
"카톤 하나가 잘못 들어갔어요. 어디 배달 됐는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찾아내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너무도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로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켈런 예거 씨라고 하셨죠?"
"네, 배달을 잘못 했어요. 이곳인지 다른 가게인지 몰라서…"
점원은 갑자기 웃음을 보였다.
"어머, 그러셨나요? 그렇다면 걱정 없어요, 예거시. 댁의 매니저가 오늘 아침에 이미 왔었어요. 몹시 당황하고 있었지만… 블린 부인의 허가를 얻어 카톤을 조사했었죠. 들어보면 곧 알 수 있다던가 하면서요."
켈런이 숨을 꿀꺽 삼키는 것을 토니는 지켜보았다.
"저런, 우리 매니저가 말인가요… 그래요, 그건 다행이군요."
"롤랑 씨라던가 하는 것 같던데…" 점원은 미소 지었다.
"에밀로 불러달라고 했어요."
"그럼 먼저 왔었군요!" 그녀는 기뻐하는 척했다.
"그렇다면 찾았을까요?"
"아뇨. 몹시 실망하는 모습이던데요." 점원은 입을 오무렸다.
"블린 부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녜요, 됐습니다." 켈런은 토니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