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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의 사랑(One Reckless Night)

Bollnow 2024. 3. 14. 13:24

하룻밤의 사랑(One Reckless Night)

Sara Craven

 

1

재너 웨스트콧은 호텔 스위트룸 거실로 들어서면서 등뒤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벽에 걸린 거울에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 보며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정갈하게 이마 위로 빗어 넘긴 윤기 나는 금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빠진 검정색 비즈니스 양장, 빳빳하고 새하얀 셔츠에서부터 까만 스타킹에 감싸인 날씬한 다리와 굽 낮은 펌프스를 신은 조그만 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냉정하고 단정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들이켰다. 다음 순간, 좀전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은 승리의 미소로 활짝 벌어졌다.

"해냈어" 그녀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춤추듯 반짝였다. "정말로 해냈다구!"

방금 전 호텔 회의실에서 거래가 최종적으로 합의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감정을 전혀 내색할 수 없었다. 또 하나의 가족 소유 회사가 경매로 넘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아주 어둡고 침울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그녀는 어제 오후에 조건을 제시했었다. 그것도 냉정하고 명확하게. 교묘한 책략 따위는 먹혀들지 않을 것이며, 제의를 거절해도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결정하라는 점 또한 분명히 해두었다.

스물다섯 살짜리 여자라고 해서 무시했다면 이젠 생각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제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면서 그들이 선택할만한 대안을 대충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10시에 최종 대답을 들을 테니 하룻밤 동안 충분히 생각해 보라고 충고했다.

오늘 아침 회의실로 들어가 불행하고 침통한 얼굴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그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이성이 이겼고, 웨스트콧 투자회사는 쓸모 있는 자산을 손에 넣었다. 또 하나의 승리를 기록한 것이다.

<나의 승리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전화기 있는 곳으로 걸어가 웨스트콧 투자회사의 아버지 개인 직통 번호를 눌렀다.

"제럴드 웨스트콧 경의 사무실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아버지의 개인 비서인 케사 로이드의 새치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재너는 실망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와 통화하고 싶어요, 테사"

"죄송합니다, 웨스트콧 양. 제럴드 경께서는 회의 중이세요. 찾는 전화가 오면 전갈을 받아 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재너는 아이처럼 악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전갈 따위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성취를 직접 알려 주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사랑과 자긍심으로 부드러워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리라. <잘했다>고 말하는.

그녀는 회의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딸의 전화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재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아 갔다.

하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졸토 전자회사를 애초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소유하게 되었다고 전해 주세요."

"멋진 소식이군요, 웨스트콧 양" 테사의 단조로운 말투에는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제럴드 경이 기뻐하실 거예요. 바로 회사로 돌아오실 거죠?"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테사의 목소리에는 재너가 당연히 자기 말에 따를 거라는 주제넘은 어조가 있었다. 그것이 재너에게 흔하지 않은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그러한 기분에 놀라면서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아니오, 그러지 않을 거예요. 지금부터 쉴 생각이에요. 그리고 주말도요" 그녀가 무모하게 덧붙였다. "월요일에 사무실로 돌아가겠어요"

"하지만 웨스트콧 양" 테사 로이드는 꽤나 충격을 받은 목소리였다. "제럴드 경께서는 가능한 한 빨리 완전한 보고를 받고 싶어 하실 텐데요"

"전갈을 남기라고 했다면서요" 재너가 대꾸했다. "저는 확실하게 전갈을 남겼어요. 안녕, 테사"

재너는 그녀가 더 이상 항의할 틈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테사의 유능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호감이 가는 여자는 아니라고 재너는 시무룩하게 생각했다. 테사 로이드는 질투심 많은 어미 닭처럼 자기 고용주를 호위하려 들었다.

그리고 이제 재너는 그 여자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48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겠노라고 선언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휴식 따위는 필요 없었다. 대체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도 모르는 시간을 가져서 뭘 한다는 말인가? 그녀는 우울한 기분으로 자신을 나무랐다.

재너는 스위트룸을 힐끗 둘러보았다. 고상한 가구, 희미한 프린트 무늬가 반복되는 아름다운 벽지, 한쪽 벽에 마주 댄 금빛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화려하고 세련된 꽃들.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거의 밀실 공포증에 가까웠다.

전화 대신 접수대로 직접 가서 계속 머무르겠다고 말하기로 했다. 이곳은 화려한 도시다. 극장도 있고 식당도 있다. 혼자 멋진 저녁 식사를 즐길 만한 식당을 예약해야겠다. 체류하는 동안 가볼 만한 화랑이나 미술관이 있을 것이다. 분명 재미있을 거야. 최소한 색다른 기분을 즐길 수는 있겠지. 그녀는 빈정대듯 입술을 비틀었다.

재너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붐비는 로비로 나왔다. 길다란 접수 데스크에 늘어선 종업원들은 모두 손님을 상대 하느라 바빴다.

등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웨스트콧 양"

놀라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졸토 전자회사의 사장인 헨리 월튼의 모습이 들어왔다.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피곤하고 우울해 보였다.

그가 말했다. "축하의 말을 하고 싶었소, 웨스트콧 양. 헐값에 거래를 성사시켰으니까. 물론 당신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 재너는 도전적인 표정으로 턱을 치켜 올렸다. "너무 언짢게 여기지 않으시기를 빌어요"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지나친 부탁이오." 그는 날카롭고도 총기 있는 시선으로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맨주먹에서 시작하여 꿈을 이루었지만 결국은 경기 침체로 무너져 가는 회사를 지켜보아야 했던 남자의 모습을 얼핏 볼 수 있었다.

그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 그 아버지에 그 딸이야. 웨스트콧 양. 이건 칭찬으로 한 말이 아니오. 사실, 거의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드는구려." 월튼은 냉랭한 예의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재너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가 실제로 주먹을 들어 그녀를 후려친 것 같은 충격으로 숨이 가빠왔다.

그것은 이를 데 없이 조용한 대화였지만, 그녀는 갑자기 심한 자의식에 사로잡혔다. 호텔 로비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비판적인 눈초리 앞에서 마치 그녀가 벌거벗고 서 있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승리감이나 저녁 계획이 갑자기 시시하게 느껴졌다. 몸이 싸늘해지고 기묘할 정도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시간이 난 종업원 한 명이 질문하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얼굴에는 직업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재너는 고개를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안내 책자를 여전히 손에 꽉 쥔 채로. 처음에 그녀는 방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의 달리다시피 호텔 정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여기서 나가야만 해. 머릿속에 그 생각만이 계속 맴돌았다.

 

그것은 고속도로에 접한 다른 주유소와 별반 다룰 것이 없었다. 주유소에 딸린 간이식당에서 재너는 샐러드 한 접시와 커피 한 잔을 골라 빈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런 사소한 대면으로 자제심을 잃고 말다니. 자신의 어리석은 짓을 떠올리며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왜 흔들려야 한단 말인가? 제럴드 웨스트콧의 딸이라는 것은,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었다. 실패, 패배 따위에는 존경할 만한 점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배워 온 가르침이었다.

성취--첫째가 되는 것--는 게임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하든 최고의 성적을 얻는 것을 의미했다. 일등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하는 남자로부터 실망스러운 평가밖에 들을 수 없을 테니까. 어떤 분야에서도 이등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생은 험난하다. 그녀는 거칠어져야 한다. 사업에는 감상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감히 어떻게 그녀를 가엾게 여긴단 말인가? 그녀는 어느 누구의 동정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템스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막대한 활동비, 매년 새로 바뀌는 차가 그녀의 몫이었다. 게다가 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중요한 협상을 성공리에 마쳤다. 그녀의 삶은 만사가 원활하게 돌아갔다.

재너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의자에 앉았다. 월튼은 우아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못 되는 것뿐이다. 그건 그 사람의 문제였다. 그의 말이 상처를 주도록 허락하다니 그녀는 바보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녀의 승리감을 상당부분 빼앗아가 버렸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최정예팀에 끼도록 해줄 오늘의 성취를 스스로 망쳐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을 바꾸어 런던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테사 로이드의 잘난 체하는 미소가 마음속에 떠올랐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미소는 휴식을 취하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강력하게 되살려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호텔 안내 책자를 갖고 있었다. 정처 없이 고속도로를 방황하는 대신, 나머지 하루를 보낼 좀 더 생산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아 둔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페이지 안쪽에 끼워져 있던 연녹색의 전단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지역 마을 회관에서 열리는 봄맞이 전시회에 관한 홍보물이었다. 다른 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행사였다. 하지만 몸을 굽혀 전단을 주워 올렸을 때, <엠플레삼>이라는 이름이 마치 달려드는 것처럼 눈에 확 들어왔다.

잠시 멈칫한 그녀는 그것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기억 밑바닥으로부터 무언가 아련히 떠올랐다. 엠플레삼. 그곳이 여기서 그렇게 가까운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예전의 그녀는 엠플레삼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모른다. 지금처럼 우연히 자극을 받지 않아도 그 단어는 항상 그녀를 따라다녔다. 어렸을 때 그녀는 거의 편집증적으로 지도를 훑었다. 런던으로부터, 기숙학교로부터의-그녀가 기억하는 거의 모든 곳으로부터-거리를 계산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에 꼭 가보고야 말겠노라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어머니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실체로 바로 옆 동네까지 왔는데 이 전단을 보지 않았다면 아무 미련도 없이 이곳을 떠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울적해졌다. 이것은 외롭고 내성적이었던 소녀가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가르쳐 주는 증거였다.

어머니 수잔 웨스트콧이 죽은 후, 아버지는 집과 가구를 전부 팔고 함께 살던 하인들도 내보냈다. 그리고 아직 아기였던 딸 수재너와 함께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했다. 물론 그 뒤로 그녀는 언제나 재너로 불렸다. 아내와 비슷한 이름으로 자신의 딸을 부르는 것조차 그에게는 지나친 고통이라는 듯이.

유품이나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아이가 어머니에 대해 물어 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제럴드 경이 유일하게 견딜 수 있었던 유품은 서재에 걸어 둔 아내의 초상화였다.

그것은 묘하게 마음을 뒤흔드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그림이었다.

어머니의 초상화는 언제나 재너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림은 어머니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명한 소용돌이처럼 묘사한 선홍색 블라우스를 입은 수잔 웨스트콧은 흐린 얼룩처럼 희미했다. 대충 위치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애매한 이목구비에도 불구하고 유독 눈만은 거친 녹색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절망적인 눈이었다. 재너는 자라면서 그렇게 판단했다. 그녀는 종종 어머니가 자신의 생이 얼마나 적게 남았는지 알고 있었을지 궁금해 했다.

열한 번째 생일날, 기숙사에 있었던 그녀는 조그만 소포를 받았다. 어머니의 이전 유모였던 그레이스 모스의 유언장이었는데, 재너에게 소포의 내용물을 보내라고 지시했음을 설명하는 변호사의 편지가 함께 들어있었다.

그것은 조그만 가죽 장정의 사진첩이었다. 안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스냅 사진이 가득했다. 재너는 얼굴도 모르는 그 노부인이 왜 이런 것을 그녀에게 보냈는지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사진 뒷면에 모두 <처치 하우스, 엠플레삼>이라고 표시된 마지막 몇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첫 번째 사진은 <1950, 수잔, 두 살>이라고 적혀 있었고, 아마도 유모 모스인 듯한 깔끔한 드레스에 앞치마 차림의 여성이 높고 하얀 집의 등나무 가지가 늘어진 문가에 서서 조그만 아기를 품에 안고 활짝 웃고 있었다.

다른 사진에는 정원의 키 큰 접시꽃과 참제비고깔 사이에서 놀거나 세발자전거를 타는 조그만 금발 소녀가 있었고, 어머니 수잔이 새로운 교복과 모자를 자랑스레 내보이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엄마>라는 생각이 확 몰려오면서 재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는 마침내 뭔가 손에 잡히는 유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했다.

그때부터 앨범은 어디든지 그녀와 함께 다녔고 그녀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보물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리긴 했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과 똑같은 눈으로 그 앨범을 보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와 공유할 수 없는, 영원히 비밀로 간직해야 할 선물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또다시 불행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몇 번 어머니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너무나 화를 내고 당황해했기 때문에 그녀는 거의 두려움마저 느꼈었다. 죽은 아내에 대한 끊임없는 고통과 비탄은 그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그도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징후이기도 했다.

어쩌면 헛수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는 처치 하우스에 살았던 작은 소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수잔 웨스트콧이 남기고 떠난 명백한 공백을 메워줄 사람이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한 번 가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밑져야 본전 아닌가?

엠플레삼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출구를 탄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미로 같은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표지판을 지나갈 무렵, 재너는 차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차츰 알아차렸다. 앤진 소리가 좋지 않았다. 털털거리는 소리가 섞여 났다. 그러더니 결국은 차가 멈춰서버렸다.

마을 경계선 안으로 딱 들어가는 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꼭 누군가가 요술이라도 건 것 같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녀는 채 2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지붕들과 교회 종탑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곳까지 가면 누군가 도와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최소한 전화라도 있겠지. 그녀는 차문을 잠그고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모퉁이를 돌았을 때 조그만 차고와 정비소가 눈에 들어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발걸음을 빨리 해서 정비소 앞마당에 세워진 중고차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믿기지 않게도 바흐의 <브란덴브루크 협주곡>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주저하듯 앞으로 움직이다가, 차 아래에서 뻗어 나온 청바지에 싸인 길다란 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 차는 평범한 차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클래식 재규어였다. 새 차는 아니었지만 흠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리 근처에 놓인 휴대용 카세트가 아마도 음악의 진원지인 것 같았다.

재너는 음악 소리에 묻힐세라 큰 소리가 말을 건넸다.

"이봐요, 도움이 필요한데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굽혀 카세트를 껐다. 그녀는 다시 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런 다음 긴 다리의 주인은 차 밑에서 빠져 나와 일어나 앉아 그녀를 응시했다.

남자는 크고 호리호리했다. 갈기처럼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햇볕에 그을은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무표정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의 티셔츠와 청바지는 엔진 오일로 지저분했다. 이 남자는 거의 집시처럼 보이는군, 재너는 약간 경멸하듯 생각했다.

그래도 여기는 폭풍 속의 항구 같은 곳이었다. 재너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달랬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사람에게 저런 고급차를 손봐 달라고 부탁할 정도라면 그리 무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그럼 실례하시오" 저음의 목소리에 점잔빼듯 희미하게 끌리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희미하게나마 유쾌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재너는 계속해서 뜯어보는 그의 눈길에 약간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그를 차갑게 마주 보았다. 이번에는 언젠가 한 번 부러졌던 게 틀림없는 콧날, 냉정한 느낌의 얇은 입술,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인상이 아니었다.

그녀가 간단히 말했다. "차가 고장났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셔츠의 찢어진 부분을 통해 짙은 갈색 어깨가 맞받았다. "안됐소" 그러고는 다시 재규어 밑으로 들어가려는 동작을 취했다.

"잠깐만요!" 재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질문하듯 동작을 멈추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동정을 구하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차를 고쳐 주기를 원해요. 그리 큰 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녀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소" 그의 얼굴은 엄숙했다. 하지만 무거운 눈꺼풀 아래에서 그의 눈이 즐겁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지금 바쁘단 말이오. 당신도 알겠지만"

", 하지만 내 쪽은 긴급 상황이에요" 재너가 초조하게 말했다. "그리고 여기는 정비소잖아요"

"맞는 얘기요"

"그리고 이곳을 출장 서비스를 하고 있잖아요."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바깥이 광고판에 그렇게 적혀 있던데요"

그는 헝겊에 손을 닦았다. "당신, 꽤나 끈덕진 사람이로군." 그는 천천히 몸을 펴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영원처럼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재너는 언제나 자신이 제법 큰 키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의 어깨와 머리를 쳐다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한참 위로 올려야 할 것 같았다.

재너는 기묘한 위협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구두가 바닥에 떨어진 엔진 오일에 미끄러지면서 몸이 비틀거렸다.

"조심하시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빼냈다.

그 순간 그의 냉소적인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런데 언제나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운 거요?"

물론 그렇지 않았다. 방금 있었던 짧은 접촉에 대한 과잉 반응은 그녀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기분이 나빠서요. 차 때문이에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는 뭐가 문제인 것 같소?" 전혀 열성적이지 않은 어조로 그가 물었다.

"엔진이 털털거리다가 갑자기 멈췄어요." 그녀가 다소 어설프게 설명했다.

남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랬소? 흐음, 그럼 다시 그 불쌍한 녀석에게 돌아가서 연료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떨까 하는데 말이오?"

재너는 화가 나서 숨을 들이켰다. "고속도로에 나오기 전에 기름을 채웠어요." 그녀가 매섭게 말했다. "그리고 선심 쓰는 충고 따위는 필요 없어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쪽도 성질 돋우는 말대꾸 따위는 필요 없소. 다른 정비소를 이용하는 게 어떻겠소? 그 사람들은 기분 좋게 대해 줄 거요."

재너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러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하지만 당신은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되잖아요." 그녀는 또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이봐요, 비용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평소의 두 배를 드리겠어요."

"완벽한 독재자의 말투로군" 그의 음성에 담긴 비웃음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봐요, 혹시 모르는 것 같아 하나 알려 주겠소. 이 사회가 시장 경제라곤 하지만 모든 것이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오"

"그런 태도로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군요." 재너가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아니면 이런 촌구석에서는 당신 같은 사람의 서비스도 감지덕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남자가 말했다. "물론 네가 알기로 그들은 더 이상 소작을 치거나 아이들을 노예로 팔지는 않지만 말이오" 짙은 색을 띤 눈동자가 그녀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이런 촌구석에 웬일로 왕림하셨는지 모르겠군?"

"왕림한 게 아니에요" 그녀가 딱딱하게 부정했다.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흥미로운 변명이로군." 남자가 말했다. "특히나 이 도로가 홀린스 농장에서 끝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말이오. 어쩌면 당신은 대형 트럭으로 차를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소. 그 농장을 넘어서 지나갈 작정이라면 말이오. 아니면 물 위로도 갈 수 있는 차로 바꾸든지" 그가 사려 깊게 덧붙였다. "테드 홀린스 농장에는 오리 연못이 있거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버릇없는 어린 계집아이처럼 혀를 내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겨우 자신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를 더 이상 약올릴 수는 없었다.

진짜로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라구.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며 자신을 타일렀다. "사실 나는 전시회를 보러 왔어요" 그녀가 짐짓 환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건 완전히 지역 행사요. 피카소도 반 고흐도 없소. 대금을 치르기 위해 신용 카드를 쓸 일도 없을 거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당신 차를 고치는 동안 시간을 때울 수는 있겠군"

"고마워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는 겨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차 열쇠는?"

재너는 그가 내민 손을 마지못해 열쇠를 놓아 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지나, 긴 다리로 성큼성큼 햇빛 속으로 나갔다. "나중에 봅시다."

그의 태평스러운 약속에 그녀가 서둘러 쫓아갔다. "정확히 어디서 보자는 거예요?"

그는 몸을 홱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이 갑자기 찌르듯이 날카롭게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 내가 당신을 찾을 거요."

그것은 위협일 수도 있고, 약속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맥박이 갑자기 흥분과 공포가 뒤섞인 기묘한 감정으로 불규칙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깜짝 놀란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마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등뒤로 꽂힌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고개를 힐끗 돌리며 여전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 보고 있는 그를 발견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2

뛰어가고 싶은 압도적인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재너는 고개를 높이 들고 씩씩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일단 그의 시야에서 안전하게 벗어났다고 확신하자, 그녀는 걸음을 늦추고 흔들리는 평정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녀가 당황하거나 불안한 감정을 느낀 것은 지난 두 시간 동안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곱만큼도.

그녀는 벌써 이 충동적이고도 감상적인 여행을 후회하고 있었다. 차가 고쳐지는 대로 그녀는 도시 호텔의 기계적인 정중한 분위기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최소한 그곳에서는 무슨 일을 기대하면 좋을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엠플레삼 마을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길을 따라 늘어선 오두막은 돌로 지은 것들이었다. 지붕은 짚으로 이었고 정원에는 봄꽃이 만발했다.

그녀는 길모퉁이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제일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을지 궁리해 보았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엠플레삼 전체가 늦은 봄의 따뜻한 햇빛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재너는 옹기종기 달라붙은 오두막들의 창문 뒤에서 사람들이 그녀의 도착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조심스레 커튼이 드리워져 있긴 하지만 말이다.

스스로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었지만 재너는 처치 하우스를 제일 먼저 찾아가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우연히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여느 관광객들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녀는 표면상으로 전시회를 구경하러 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마을 회관은 교회 녹지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울타리에 고정된 나무 게시판이 전시회를 광고하고 있었다.

재너는 조그만 현관 홀로 들어섰다.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탁자 뒤에 앉아 있던 여인이 뜨개질을 멈추고 재너에게 전시회 카탈로그를 50펜스에 팔았다.

"겨우 시간에 맞추어 오셨군요" 그녀의 미소는 다정했다. "전시회는 오늘 끝나기 때문에 저녁의 댄스 파티를 위해 곧 회관을 정리할 참이었거든요"

"댄스 파티?" 재너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한가롭게 졸고 있기는커녕 엠플레삼 사람들은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이 사촌쯤 되는 모양이라고 그녀는 심술궂게 생각했다.

", 그럼요" 여자가 유쾌하게 말했다.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어요. 우리는 화가 클럽의 전시회와 교회에서 개최하는 봄꽃 축제를 합쳐서 멋진 행사를 즐기고 있거든요."

여자는 회관 안으로 통하는 이중문 쪽으로 고갯짓을 해보였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구입하실만한 그림은 별로 남지 않았어요."

"상관없어요" 재너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하지만 별로 성실하지 않은 어조로 덧붙였다. "그냥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거에요."

하지만 회관 안의 그림들은 다채롭고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로 그녀의 감각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모든 벽면이 가득 메워져 있었고, 모든 작품들이 그녀가 예상했던 창백한 수채화나 안쓰러울 만큼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풍기는 정물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신중하게 회관 안을 둘러보는 동안, 폭풍우와 햇살을 그린 생생한 풍경화들이 캔버스에게 튀어나와 그녀에게 곧바로 달려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그림에서는 나무와 풀 냄새가 나는 듯했고, 또 어떤 그림에서는 두꺼운 먹구름을 몰아대는 거센 바람이 얼굴에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 마을 사람들이 이다지도 열정이 충만한 그림 그리는 법을 어디서 배운 것일까? 그녀는 우스꽝스럽게도 열렬한 감동의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캔버스 하나가 회관 뒤쪽에 자리한 이젤 위에 홀로 놓여 있었다. 마치 다른 그림들과 의도적으로 떼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곳으로 다가서는 순간 재너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런 일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등나무 가지가 늘어진 하얀 집이 햇빛을 가득 받으며 그녀를 조용히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소중한 사진첩에서 그랬던 것과 똑같았다. 단지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빠져 있을 따름이었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재너의 뒤에 다가와 섰다.

"이 그림을 보고 있었어요" 재너는 무심한 어조를 내려고 애썼다. "카탈로그에는 빠져 있는 것 같네요. 아마 이 지역 풍경을 그린 거겠죠?"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이죠. 풀밭 건너편 교회 옆에 있는 집이에요. 그리고 이건 빌린 그림이라서 카탈로그에 넣지 않은 거에요."

"빌린 그림?" 재너는 실망감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든 씨의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 그려진 실제의 처치 하우스를 소유하고 계신 분이죠"

"그렇군요" 재너는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자신을 나무랐다. 난 오늘 졸토 전자회사를 산 장본인이다. 유화 한 장 정도를 손에 넣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어차피 세상에서 사지 못할 것은 없는 법이다. 가격만 제대로 부른다면.

그녀는 헨리 월튼이라면 틀림없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을 미소를 활짝 지었다. "글쎄요, 어쩌면 그분은 비공식적인 제안을 고려해 보실 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여자는 재너에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번 들러서 여쭤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요." 재너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예요."

여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고든 씨는 여기에 사시지 않아요. 그분은 한 해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세요" 여인은 반 당황한 듯한, 반은 모욕을 받은 듯한 몸짓으로 양손을 뻗어 보였다. "계속 고집을 피우신다 해도 시간 낭비일 뿐이에요."

"아마 부인 말씀이 맞을 거예요" 여자가 몸을 뎔려 떠나려 하자 재너가 재빨리 말했다. "참 아름다운 집이군요. 고든 씨라는 분은 이 집을 오래 소유하고 계셨나요? 혹시 이전 주인에 대해서 아시는 것은 없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집은 현재의 주인이 계약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거쳤어요. 죄송하지만 더 이상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여자는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는 걸어가 버렸다.

엠플레삼에서는 방문객을 겨우 참아 넘기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해 너무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간단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살든 살지 않든, 처치 하우스는 풀밭 너머에서 마치 자석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이번에는 누가 저켜 보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출입문은 손을 대자 소리 없이 안으로 열렸다. 깔끔하게 손질된 이끼 낀 길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잔디밭에서 현관문까지 이어졌다. 이웃 교회 앞뜰에서 비둘기가 구구거리는 소리와, 문 근체의 꽃밭에서 윙윙대는 벌 소리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죽은 듯이 조용했다.

고든 씨는 집에 없다고 했지만 매우 사려 깊게 집을 돌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집과 정원 모두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텅빈 집과 정원을 보고 있자니 거의 비애감이 들 정도였다. 아니면 단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한 것일 뿐일까?

자신에게는 이런 식으로 남의 집을 엿볼 권리가 없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면서도, 재너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집 뒤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부엌 창문으로 집 내부가 훨씬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재너는 거대한 웨일스 풍의 조리대를 볼 수 있었다. 조리대 위에는 파란색과 하얀색의 중국 도자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과일 바구니가 놓인 커다란 식탁도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용한 듯한 머그잔과 접시가 싱크대 한쪽에 놓여 있고, 도마 위에는 썰다 만 빵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서둘러 아침을 먹고 나서 그대로 남겨 두고 떠난 것처럼.

하지만 집은 비어 있어야 했다. 설마 불법 침입자가 들어왔던 건 아니겠지. 다음 순간 그녀는 어깨에 손이 닿는 바람에 냅다 비명을 질렀다.

"둘러보는 재미가 어떻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물었다.

재너는 침을 삼키고는 몸을 돌렸다.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당신을 찾으러 온다고 했잖소."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군. 이건 그냥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거요, 아니면 무단 침입을 위한 사전 답사요?"

재너는 얼굴을 붉히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웃기는 소리 말아요" 그녀는 그나마 남아 있는 위엄을 최대한 긁어 모아 말했다. "집이 비어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혹시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제의를 할 계획이었소?" 그가 고갤르 설레설레 저었다. "운이 없군. 확실히 말하지만 이 집은 팔려고 내놓지 않을 거요"

"나는 주인과 이야기하겠어요." 재너는 턱을 들어 올리고 차갑게 말했다.

"주인은 미국에 있소"

"하지만 누군가가 여기에 살고 있는데요."

그는 창문으로 힐끗 시선을 던지고는 어질러진 내부를 보았다. "맞소." 그가 천천히 말했다. "이곳에 살면서 관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소"

"잘됐군요. 그럼 그 사람이 나에게 고든 씨의 연락처를 알려 줄 수는 있을 거예요."

"당신은 바쁠 텐데" 그가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 사람을 만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오. 낮 시간에 하는 일이 있으니까."

"정말이에요?" 재너가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만나고 싶다면 오늘밤 댄스 파티장에 가보시오."

"댄스 파티?"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풀이했다.

"이곳에 그렇게까지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소, 당신 차의 연료통에 먼지가 들어가서 카뷰레터를 떼야 하오"

"그럴 수가!" 재너가 투덜거렸다. "얼마나 걸릴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침까지는 될 거요."

"" 재너는 실망감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 우스꽝스런 여행을 기억 속에서 제거해 버리고 문명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오늘밤 안으로 끝낼 수는 없나요?"

"미안하오" 하지만 그의 어조에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알겠지만, 나는 댄스 파티에 가야 하오."

", 맙소사"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내 사정 때문에 당신의 사교 생활에 방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걱정 마시오,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테니" 그는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교회 앞에 있는 블랙 불에 방을 예약하시오. 트루디에게 내가 보냈다고 말하면 될 거요"

"고마워요" 그녀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 없이도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어요."

"알겠소." 그는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어깨 너머로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이 집을 사겠다고 설치지만 마시오. 몇 세대 동안 한 집안의 소유였으니까"

재너는 딱딱하게 굳은 채 계속 서 있었다. 그가 나갔는지 출입문이 딸깍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이 양손을 꽉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 시골뜨기가 이토록 쉽게 그녀의 성미를 건드리도록 내버려두다니! 잔뜩 화가 난 이사회 임원들도 문제없이 다룰 수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썼다.

하긴 여기까지 오면서 대체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수잔 웨스트콧을 발견하기라도 할 줄 알았던가?

어쩌면 그녀가 여기서 배운 교훈은 과거를 들쑤신다고 해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뿐이리라. 그래서 아버지 역시 짧은 결혼을 상기시키는 물건들을 모두 치워 버렸는지도 모른다.

차가 수리되는 대로 여기서 떠나야지. 그녀는 우울하게 자신에게 맹세했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트루디 셔먼은 흰머리가 많은 금발을 아무렇게나 말아 올려 머리 꼭대기에 핀으로 고정시킨 몸집 크고 웃음이 많은 여자였다.

"하룻밤 묵으실 방은 있어요. 아직은 본격적인 관광철이 시작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녀는 연필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녁 식사는 제한된 메뉴밖에 드릴 수가 없어요, 아시겠지만"

"모두 댄스파티에 가나 보군요." 재너가 체념하듯 말했다.

셔먼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렇답니다. 여기는 관광객들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오늘밤 휴가를 주었어요." 그녀는 재너에게 희미하게 걱정스런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

"괜찮아요" 재너는 애써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방에서 샌드위치나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까 해요"

", 그럴 수는 없지요" 셔먼 부인이 분개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제한된> 메뉴라고 했지 메뉴 자체가 아예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쇠고기와 버섯 캐서롤, 새끼양 커틀렛, 또는 생선 파이가 있어요. 저는 생선 파이를 추천하겠어요. 그런데 당신도 댄스 파티에 갈 거죠?"

재너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춤출 줄 몰라요. 게다가 파티에 참석할 만한 옷차림도 아니구요. 하지만 생선 파이는 맛있겠군요."

"그럼 7시가 어떨까요?" 셔먼 부인은 데스크 뒤에 일렬로 걸린 열쇠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건넸다. "혹시 마음이 바뀌어 댄스 파티에 가고 싶을 경우를 생각해서요." 그녀는 애매하게 덧붙였다.

재너는 날카롭게 말대꾸를 하려는 것을 꾹 참고 조용히 셔먼 부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방이 매력적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벽지의 파란색과 흰색이 나뭇가지 무늬가 커튼과 프릴 달린 침대 커버에도 장식되어 통일감을 주었다. 욕실은 작았지만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재너는 움푹한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재스민 오일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옷을 벗고 사치스런 향기가 나는 물속으로 천천히 몸을 담갔다. 고맙게도 하루의 긴장이 전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 몸을 뻗고 누워 수화기를 들었다. 먼저 그랜드 비스타 호텔에 전화를 걸어 이틀 더 체류할 테니 방을 그대로 두라고 지시했다. 그런 다음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집 응답기에 전화했다.

화가 난 아버지의 목소리가 호통을 치고 있었다. "재너, 대체 어디 있는 거냐?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야? 당장 전화하거라. 내 말 알아들었니?"

재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런 경우 언제나 아버지의 말에 복종했다. 하지만 오늘밤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일도 그럴지 모른다. 그녀는 딱 한 번만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해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자유를 마음껏 만끽할 것이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책이 몇 권 있었다. 그 중에는 반갑게도 아직 읽어 보지 못한 딕 프랜시스의 작품도 있었다. 오늘밤을 함께 할 친구를 찾았군. 그녀는 만족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작스레 침입해 들어오는 조롱하는 듯한 거무스름한 얼굴과 수수께끼 같은 한 쌍의 검은 눈을 서둘러 머릿속에서 몰아내야 했다.

그녀는 오늘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재너는 심한 짜증을 느끼며 자신을 나무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저녁 식사가 나올 무렵에는, 머리도 말랐고 속옷도 말랐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낮에 입었던 옷을 걸치고, 머리를 빗어 언제나처럼 리본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러고는 식당을 겸하고 있는 아래층의 선술집으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댄스 파티에 가기 전에 먼저 한잔 하러 들른 사람들이 분명했다.

재너는 자기 차례가 되자 드라이 셰리를 주문했다.

"트루디가 당신 테이블을 아늑한 자리에 마련해 두었어요." 여종업원이 가득 채운 셰리 잔을 건네며 말했다. "거기에선 훨씬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재너는 잔을 들고 종업원이 가르쳐 준 문을 지나 걸어갔다.

테이블 한 군데에만 식기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세련된 유리 홀더 안에서 촛불이 흔들거렸다. 게다가 프리지어 꽃이 담긴 꽃병 옆에 백포도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뭔가 실수가 있는 것 같아요." 재너가 입을 열었다. "저는 와인을 주문한 적이"

"그건 화해의 선물이오."

그녀는 그 목소리를 즉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무나 화가 난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재빨리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에서는 미리 생각해 놓은 오만한 거부의 말 대신에 놀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깨끗하게 면도하고 갈기 같은 머리를 깔끔하게 빗은 그는 완벽하게 호감을 줄 만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몸에 꼭 맞는 짙은 색 바지, 아마도 캐시미어인 듯한 연회색 재킷, 고전적인 흰색 셔츠 그리고 거무스름한 보석 색깔의 실크 타이-이탈리아 디자이너라도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사실 호감을 주는 것 이상이었다. 재너는 기묘한 자각이 신경을 따라 전율하듯 이동하는 것을 느끼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위험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조롱하는 듯한 그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재너는 그의 치아가 얼마나 근사한지 이전에 이미 알아차린 바 있었다.

"할말을 잊었소?" 그가 가볍게 물었다. "당신에게는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겠군."

"사실 그래요"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을당신을 거의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덧붙였다.

"어쩌면 그건 그리 나쁜 경험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마치 조심스럽게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아까는 우리가 첫 발을 잘못 내딛었다고 생각하오." 그가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그래서 보상을 하고 싶었소."

재너는 갑자기 심장이 아플 정도로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에게 경고하듯이. "정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요."

"그럼 반대쪽 구석에서 나 혼자 먹으란 말이오?" 그녀의 동정을 구하듯이 말을 건네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트루디의 입장도 생각해야 할 것 아니오. 우리가 테이블을 함께 쓴다면 그녀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을 거요."

어찌된 일인지 그의 말은 꽤 논리적으로 들렸다.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재너는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도 모르게 프리지어 꽃을 사이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고 있었다. 그러자 마치 보이지 않는 신호라도 받은 듯이 셔먼 부인이 부산스레 첫 번째 코스를 가지고 들어왔다.

식사는 물냉이 수프부터 시작되었다. 재너는 식욕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맛이 괜찮소?" 건너편 남자가 일렁이는 촛불 속에서 미소 지으며 물었다.

"괜찮은 것 이상이에요. 난 그저 생선 파이만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트루디의 부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오늘밤에는 영업을 하지 않을 예정이었겠지만 그녀도 자존심이 있소. 게다가 당신은 우리 마을을 찾아온 손님이니 성대히 대접해야지."

"당신에게는 무슨 이유 때문인데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혼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외로운 총각이오. 그래서 그녀는 나를 가엾게 여겨 가끔씩 먹을 것을 주고 있소."

이 남자가 외롭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선택 때문일 거라고 재너는 빈정대듯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단순히 너무 바빠서 사생활을 누릴 시간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녀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셀 수도 없이 많이 아버지와 파티에서 여주인 노릇을 해왔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으로 남자와 단둘이 식사를 한 적이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그녀와 교제하고 싶어 한 남자들 중에서 제럴드 경의 엄격한 검열에 통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너는 내 딸이다, 재너. 내 상속녀란 말이야. 그들이 원하는 게 너인지 네 돈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위험이 없다고 재너는 자신을 안심시켰다. 왜냐하면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저 남자는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이 상태가 이어지도록 내버려둘 작정이었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가 말했다. "우리는 서로 자기소개도 하지 않았군, 안 그렇소?"

"그렇군요." 재너의 머릿속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수잔이에요. 수잔으음, 스미스"

"정말이오?" 그는 씨익 웃으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독특한 소개군. 나는 제이크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제이크으음, 브라운" 그가 냉소적으로 강조하며 덧붙였다.

재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냉담한 시선으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결국 무슨 상관이람? 그녀는 자신을 위로했다. 그들은 어차피 서로 스쳐 지나가는 배일뿐이었다. 걸코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이상으로 그의 진짜 이름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다음 음식들이 도착하면서 어색한 순간을 구해 주었다.

생선 파이는 주인의 추천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제이크는 식사 내내 대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은 이 지역에서 가볼 만한 장소나, 전시회의 성공 같은 일반적인 화제에만 국한되었다. 개인적인 질문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트루디가 근사한 커피를 내왔다. 이제 더 이상은 죽어도 못 먹을 지경이었다. 재너는 나무 의자의 높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긴장을 풀진 마시오." 그가 미소를 짓자 그녀의 등줄기에 묘한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첫 번째 왈츠를 당신에게 부탁할 거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댄스 파티에 가지 않을 거예요."

"? 오늘밤에 달리 할 일도 없잖소."

"나는 춤을 못 춰요."

"내가 가르쳐 주겠소."

"거기에 갈 만한 복장도 아니에요." 그녀가 재빨리 덧붙였다.

"약간만 손을 보면 괜찮을 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왔다.

재너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머리를 묶고 있는 리본을 제이크가 풀자 그녀는 아연실색했다.

"이제 훨씬 낫군." 그녀의 금발이 아래로 흘러내려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자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거의 똑같은 동작으로 손을 아래로 내려, 블라우스의 제일 윗단추를 풀었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올려 그를 막았다. 전신의 피가 얼굴에 몰린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이제 됐소." 그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그녀의 머리에서 풀어 낸 리본을 드러난 목에 감고 깔끔하게 매듭을 지어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벽난로 위의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 신데렐라 아가씨, 이제 무도회에 갑시다."

재너는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했다. 뺨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었고, 눈은 평소 때보다 두 배는 커진 것 같았다. 목에 감긴 짙은 색 리본은 크림처럼 새하얀 피부와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블라우스의 목선 사이로 유혹적인 가슴의 굴곡이 드러났다.

자신이 달라 보인다는 사실에 재너는 당혹스러웠다. 거울 속에서 그들의 눈이 만났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말해 보시오, 스미스 양. 누군가 당신을 수지라고 부른 적이 있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흘러내린 머리가 뺨 주위에 휘감겼다. "한 번도요" 그 말은 마치 목구멍에서 짜내듯 나왔다.

"그렇다면 오늘밤에는 모두가 당신을 수지라고 부를 거요" 그의 시선에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차분하게, 거의 최면을 걸 듯한 눈길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의 주문을 풀어야만 한다. "나와 춤을 추겠소, 수지? 부탁이오."

그녀는 싸늘하게 쏘아붙일 말을 찾았다. 이 말도 안되는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 줄 궁극적인 거절의 말을.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대답을 들었다. ""

 

3

풀밭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내내 재너는 자신의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수작이 뻔한 촌뜨기 자동차 정비사와 시골 마을의 댄스파티에 가게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 남자는 성적 카리스마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고 머릿속에서 엄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재너 웨스트콧이라면 몇 미터 근방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을 유형의 남자. 하지만 오늘밤, 겨우 몇 시간 동안일 뿐이지만 그녀는 재너 웨스트콧이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수지 스미스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숨겨진 모습들을 발견해 낼 수도 있으리라. 그런다고 손해 볼 건 없지 않은가?

그녀는 가만 벨벳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에게 말했다.

회관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환영의 미소와 호의적인 관심으로 재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차츰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재너는 주위를 둘러보며 마치 또 다른 시간, 또는 다른 행성으로 들어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뭘 기대했소? 최신 디스코 음악이라도?" 그는 무엇 하나 놓치는 법이 없었다.

"아뇨. , 아니에요" 그녀가 서둘러 부정했다. "하지만 대단한 변화로군요."

제이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다면 정말로 전시회에 왔던 거요?"

그는 놀란 듯한 말투였다.

"물론이죠" 그녀가 가볍게 응수했다. "달리 뭘 했을 것 같아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지."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그림을 샀소?"

"아뇨, 내가 원한 그림은 파는 게 아니더라구요." 원래는 그런 말을 할 작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전시된 대부분의 그림은 다 팔렸던데요. 이렇게 작은 마을치고는 작품 수준이 놀라웠어요. 틀림없이 훌륭한 선생이 있는 모양이에요"

"내가 알기론 여러 명이 있소" 그는 거의 거만한 투로 말했다. "이곳에는 연극 클럽, 원예 클럽, 그리고 합창단도 있소. 문화 생활을 즐기는 데 그리 부족하지는 않을 거요."

"않을 거라니요?" 그녀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당신이 여기 살게 되면 말이오" 그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집을 사려고 한 게 아니오?"

", 맞아요." 그녀는 자신을 걷어차고 싶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이크는 다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법이오. 제대로 된 가격만 제시한다면 말이오. 아까도 말했지만 처치 하우스의 관리인이 곧 나타날 거요. 그와 한 마디 해볼 수는 있겠지. 가능성을 타진하는 차원에 말이오."

"고마워요, 그렇게 하지요" 그녀가 신중하게 말했다.

"혹시 이 지역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그룹도 있나요? 확실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곳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요. 이해하겠죠?"

", 그럼" 그가 천천히 말했다. "완벽하게 이해하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몇 사람을 소개해 주겠소. 하지만 그들이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 주리라고 보증할 수는 없소."

"일반적인 배경 정도면 충분해요." 재너가 짐짓 쾌활하게 대꾸했다. 누군가는 수잔이라 불렀던 어린 소녀를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재너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안타까운 공백을 메워 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음악 템포가 점점 느려지더니 낭만적인 선율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왈츠요." 제이크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었다. 재너는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맥박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춤을 못 춰요"

"배타적인 기숙 학교에서 댄스 교습은 받지 않았소?"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글쎄요, 받기는 했어요" 그녀가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아주 오래 전 일이에요."

"그렇다면 기억을 되살릴 시간이로군." 그는 단호한 손길로 그녀를 잡아당겨 무자비하게 품에 끌어안았다. "내가 인도하겠소. 당신은 따르기만 하면 되오."

그것은 그녀가 익숙한 상황이 아니었다. 아마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재너는 이빨을 갈았다. 처음 얼마 동안 그녀는 완전히 꼴불견이엇다. 그녀의 발은 아무 곳이나 내딛었고, 몸은 그의 품안에서 딱딱하게 긴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음악의 리듬과 파트너의 말없는 신호를 따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소절에 이를 무렵 그녀는 뽐내듯이 말했다. "고마워요. 즐거웠어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연습뿐이오."

"나는 춤 선생은 아무도 모르는데요."

"왈츠 얘기가 아니오, 수지" 그가 조용히 말했다. "삶을 말하는 거요."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탁한 어조로 말했다. "대단히 무례하군요."

"그렇기로 유명하오."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그가 동의했다.

"이런! 나는 지금까지 잘살아 왔어요."

"최고의 것에 둘러싸여 살았겠지. 그건 의심하지 않소" 제이크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게 아니오."

재너는 턱을 치켜 올리고, 그에게 북극의 서릿발 같은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자동차 수리나 하는 게 좋겠어요. 물론 당신의 정비 기술도 아직 증명된 바는 없지만 말이에요. 미스터, 으음"

"존스요" 그가 일부러 친절한 듯이 알려 주었다.

그건 아까 그가 말한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 문제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당신은 인간 심리학 쪽은 생각지도 않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목소리를 반 옥타브 올리며 계속했다. "완벽한 아마추어인 것 같으니까요."

"그 점은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소, 수지. 최소한 이 경우에는" 그는 날이 선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가서 음료수나 마십시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재너가 딱딱하게 거절했다.

"이제 그만 블랙 불로 돌아가고 싶군요."

그는 대담하게도 웃음을 터뜨렸다. "화내지 마시오." 그녀가 격분해서 반박하려고 하자,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거짓말도 하지 마시오. 수녀원장의 말씀을 기억하는 게 좋겠군."

"내가 수녀원에서 세운 학교에 간 걸 어떻게 알지요?"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어림짐작이 맞았군."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게다가 지금 가버리면 처치 하우스의 관리인을 안내받지 못하게 되오. 그 정도면 내 존재를 잠시만 더 참고 견딜 가치는 있지 않겠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플로어 뒤쪽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빌 셔먼이란 남자가 음료를 담당하고 있었다.

턱수염에 전염성이 강한 웃음을 가진 커다란 덩치의 남자였다.

"어서 오게, 제이크" 그가 재너에게 평가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쾌활하게 말했다. "두 사람에게는 뭘 줄까?"

"차가운 맥주로 주세요." 제이크가 질문하는 시선으로 재너를 보았다. "당신도 같은 걸로 할 거요, 수지?"

"나는 맥주를 좋아하지 않아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할 판에 알코올을 마신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과일 주스를 한 잔 마실 게요."

"훌륭한 선택이오." 빌 셔먼이 유쾌하게 말했다. "트루디의 특제 혼합 음료지. 그게 없으면 댄스파티가 완벽해 지지를 않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 아내 얘기로는 당신이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는다고 하던데"

", 맞아요. 딱히 예정된 방문은 아니었지만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요. 여기 계시는 제이크가 제가 바라던 것보다 고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요."

잠시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빌이 말했다.

", 그럼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로구먼?"

놀랍게도 그녀는 얼굴을 붉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사실 우리는 오늘 오후에 만났습니다. 그녀가 느닷없이 정비소로 걸어 들어왔지요." 제이크가 매끄럽게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오늘밤 할 일이 없어 심심해하기에 이곳으로 초대했습니다."

"잘했군" 빌이 칭찬했다. 그것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열렬한 어조였다. "훌륭해. 그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오"

"고마워요" 그녀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과일 주스가 참 맛있군요."

과일 향에 상큼한 향신료가 섞인 것 같았다. 계피일까?

재너는 다시 한 모금 홀짝이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육두구(--+)도 들어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재너는 과학적 탐구에 대한 흥미를 과일 주스와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제이크가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자기 잔과 함께 가까운 창문 선반 위에 놓았가. "가서 춤을 춥시다." 그가 부드럽게 초대했다.

이번에는 느린 폭스트롯이었다. 재너는 자신이 얼마나 빨리 스텝을 익혀 나가는지를 깨닫고 놀라움을 느꼈다. 빠르고 흥겨운 곡으로 템포가 완전히 바뀌었을 즈음에는 거의 실망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녀는 계속 파트너를 바꾸며 플로어를 빙글빙글 돌았다. 마침내 음악이 끝났을 무렵에는 너무 웃느라고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재너는 본능적으로 제이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댄스 플로어 한쪽에 서서 공공연하게 그리고 부끄럼도 없이 집어삼킬 듯 그를 응시하는 예쁜 빨강머리 여자와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됐지 뭐야. 재너는 남은 과일 주스를 쭉 들이켠 다음 잔을 다시 채우려고 테이블로 돌아갔다. 결국 제이크는 엠플레삼 사람인 것이다. 그의 삶은 여기에 있고, 그녀가 떠나고 잊혀진 후에도 오랫동안 이곳에서 계속될 테지. 그 생각에 회한 비슷한 감정이 아프게 찔러 왔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그 감정을 억눌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도 삶이 있으니까. 이런 촌구석에서 영위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삶이라고 재너는 확고하게 자신에게 말했다. 그것은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삶이며, 그곳에서는 그녀가 중요한 존재였다.

그녀는 빌 셔먼에게 씩씩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춤을 추니까 목이 마르네요." 그녀가 국자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말했다.

"늘 그렇죠."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동의했다.

"익숙하지 않다면 천천히 즐기시오"

"전 괜찮아요." 그녀가 쾌활하게 대꾸했다. "전에도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었나 모르겠어요."

그 즐거움에는 예쁜 빨강머리에게 산 채로 잡아 먹히고 있는 제이크를 쳐다보는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음료수 값으로 돈을 내밀었지만 빌은 고개를 저었다. "음료는 우리가 파티에 기부하는 거요. 트루디와 내가 말이오. 돈은 받지 않소."

회관 옆문 중의 하나가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을 통해 쌀쌀한 어둠 속으로 나갔다. 갓 손질한 잔디 내음이 신선했다. 그녀는 음료수를 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한 은빛 초승달이 나무 위에 걸려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마치 애무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흩날려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불편하게 몸을 들썩였다.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뭔가 기묘하고 이해할 수 없는 흥분 때문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그리고 충격적일 만큼 명료하게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달았다. 만일 용기를 낼 수만 있다면. 이 밤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계속해서 수지가 되고 싶어. 나는."

그녀는 거기서 생각을 중지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소망을 마음속 깊숙이 묵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달을 보았다. 가련한 멍청이! 그녀는 자신을 사정없이 비난했다. 그런 다음 안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바로 뒤에 서 있던 커다란 몸체에 충돌하는 바람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리 부드럽지 않은 손길로 그녀를 붙들어 주었다.

"이러다가 습관이 되겠소.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달 구경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기묘하게 들렸다. 마치 자기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바람을 쐬고 싶었어요."

"트루디의 펀치에는 그런 효과가 있지." 그가 엄하게 말했다. "당신이 두 잔째를 가지러 왔었다고 빌이 말하더군." 그는 재너의 손에서 빈 잔을 빼앗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액체에는 정부의 건강 경고문을 붙여야 하오. 당신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마셨던 다른 모든 음료를 포함해서"

재너의 몸이 굳었다. "당신 말은 그러니까 여기에"

"그렇소." 그는 강철 같은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고 회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오렌지 주스만 마시는 게 좋겠소, 수지. 내일 아침에 운전을 하고 싶다면"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그를 올려보았다. "블랙 불로 돌아가자마자 잠자리에 들면 돼요."

그가 초조하게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군."

아뇨! 그녀 내부의 목소리가 강하게 반발했다. 갑자기 더 이상 그러하지가 않아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다시 안전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자신감 넘치고 안전하게. 어제처럼. 이전의 모든 날들처럼.

그녀가 커다란 목소리로 뽐내듯 말했다. "이봐요, 당신도 오늘밤에 계획이 있을 거에요.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을 테구요." 그녀는 회관 반대편에서 그들 쪽으로 탐욕스런 시선을 던지는 빨강머리 아가씨를 볼 수 있었다. "당신 일정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아까 말한 관리인이라는 사람에게 소개해 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각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양 눈썹이 거의 만나다시피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퇴짜 놓지 마시오, 수지. 적어도 아직은 아니오."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또다시 느리고 감미로운 왈츠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그녀가 쓸 만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기도 전에, 제이크는 그녀를 간단히 플로어로 다시 이끌었다.

"긴장을 풀어요." 그녀의 몸이 굳어지자 그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와 싸우지 마시오. 세상과도"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온기가 옷을 통해 그녀의 피부로, 더 깊은 곳으로 스며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게도 내부 깊숙이 감추어진, 겁에 질려 꽁꽁 얼어붙은 중심부가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미지의 새롭고 상처 입기 쉬운 무언가를 남기고 있었다.

재너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온 사방에서 그녀를 압박하는 위험을 감지했다.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그녀는 또한 알고 있었다. 그 위험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는 자신을.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독특하고 남성적인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의 호리호리한 근육질의 몸이 그녀의 젖가슴, 복부, 허벅지에 가하는 거친 압박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의 넓고 튼튼한 등을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그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느끼고 싶었다.

그녀의 갈망은 깊고도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재너는 내일 아침 상처 입지 않고 여기서 떠나려면 그 갈망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너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알코올에 대해서는 당신 말이 맞아요. 아까는 미처 몰랐어요. 아무래도 이만 돌아가서 잠을 자야겠어요. 내일 제대로 운전을 하려면 말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좋소. 당신 재킷을 가져오겠소."

그가 그녀를 달빛이 비치는 풀밭을 가로질러 데려다 준다는 것은 전혀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머뭇거렸다. "바래다줄 필요는 없어요. 이런 마을에서 뭐 그리 위험한 일이 있을라구요."

"누가 알겠소?" 그의 어조는 퉁명스러웠다. "어쨌든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지 않소."

그가 재킷을 입는 걸 도와주는 동안 재너는 위험은 모두 자신의 부담이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여기서 유일하게 위험한 존재는 바로 그녀 옆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많은 펀치를 마셨다고 해도 지금처럼 피의 흐름이 빨라지거나, 모든 감각과 모든 신경이 고동치듯이 깨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향긋한 풀 내음이 나는 어둠 속으로 함께 걸어 나갔다.

그녀가 덤불에 발이 걸려 잠깐 휘청거리가, 그가 즉시 그녀의 몸에 팔을 감았다. "조심하시오."

", 이런! 신발이 벗겨졌어요." 그녀는 신발을 찾으려고 스타킹 신은 발로 이리저리 바닥을 더듬었다.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았소" 그의 목소리에는 유쾌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가만히 있어요, 신데렐라 아가씨. 내가 신발을 찾아보겠소."

"손전등이 있어야 돼요" 한쪽 다리로 서 있으려니 위엄이 깎이는 동시에 어쩐지 가불거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묘하게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동화 속의 왕자님도 손전등은 갖고 있지 않지." 제이크는 그녀 옆으로 돌아왔다. "손전등을 갖고 와서 다시 찾아보겠소. 하지만 그 동안에는"

그녀가 항의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그는 깃털처럼 가볍게 그녀를 번쩍 안아들더니 잔디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입을 열 수 도 없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부탁이니 당장 내려놓으세요."

그는 거의 모욕적일 만큼 흔쾌하게 그녀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나머지 길을 한 발로 뛰어서 갈 거요?"

"물론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엄청나게 빨리 뛰고 있는 맥박이 원망스러웠다.

"그렇다면 문제를 어렵게 만들지 마시오" 그는 다시 그녀를 안아들고 출발했다.

"자신이 모든 일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그녀가 따끔하게 비난했다.

"가끔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소."

재너는 그가 몸을 앞으로 숙여 출입문의 빗장을 푸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블랙 불이 아니잖아요."

"뛰어난 관찰력이오, 수지"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정원에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녀를 부드럽게 현관 매트 위에 내려놓고는 열쇠를 찾아 호주머니를 뒤졌다. "처치 하우스를 둘러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소."

"하지만 당신이 무슨 권리로" 목소리가 충격적인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그런 다음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맙소사! 당신이었군요? 당신이 관리인이었어요. 단신은 저녁 내내 나를 가지고 놀았군요"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맙소사, 믿을 수가 없어."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심하게 비난하지 말기를 바라오, 친애하는 스미스 양. 당신에게 완전히 정직하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오." 그의 말은 마치 경고의 칼날처럼 공기를 갈랐다. 그는 현관문을 밀어 연 다음 그녀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당신을 안고 문지방을 건너 주었으면 좋겠소?"

"고맙지만 됐어요." 그녀가 사납게 말했다. "나는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현간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커피를 마시는 대로"

"커피 따위는 마시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마시고 싶소." 그는 거실 문을 열고 전기 스위치를 켰다. 재너는 언제나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집이 그녀 앞에 펼쳐지는 것을 발견했다.

"신발은 벗어 놓으시오" 제이크는 부엌으로 걸어가며 어깨 너머로 말했다. "오늘 겪은 재난에 삔 발목까지 추가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최소한 나에게 재난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는군요."

"아마도 대부분은 내 책임이겠지. 당신이 보기엔 말이오." 그는 주전자를 채워 불 위에 올려놓았다. "마침 그 얘기가 나왔으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당신 차는 오후에 다고쳐 놓았소. 지금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지. 그래서 저녁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블랙 불 앞에 주차시켜 놓았소."

재너는 한 손에 신발을 든 채 그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너무 화가 나서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왜 아까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과 춤을 추고 싶은 사악한 충동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오, 수지.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소. 또한 그 독선적이고 공격적인 외피 아래 부드러운 속살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소."

"당신의 관심에 우쭐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그녀는 거의 그를 마구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제 호기심이 만족되었을 테니 이 소굴에서 떠나도 될까요?"

"그렇게 빨리는 안 되지" 그는 찬장에서 도자기 머그잔을 꺼내 커피를 담았다. "물론, 운전 면허를 취소당하고 싶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그의 말에 제법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 재너의 분노를 달래지는 못했다.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나를 속일 권리가 없어요."

제이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특히 어떤 속임수를 두고 하는 얘기요?"

"더 이상 비웃지 말아요." 그녀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가 울겠군."

두렵게도, 그녀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이 그녀를 파괴하려고 위협하면서 표면 바로 아래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남자 앞에서 스스로를 굴욕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게 소름 끼치는 유약함에 항복하도록 자신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1, 2분이면 물이 끓을 거요" 그가 긴장된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 동안 당신의 신발을 찾아야겠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원한다면 집을 둘러보시오. 어디든 마음대로 들어가도 좋소"

"집주인도 당신이 이러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녀가 거칠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이방인을 들어오게 해서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게 내버려두고 있다는 걸 말예요"

"이 집에는 어두운 비밀이나 출입 금지 구역 따위는 없소" 제이크는 뒷문 근처의 선반에서 손전등을 꺼냈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그러기를 원하는 경우에만 이방인일 뿐이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반박했다.

"나는 도둑일 수도 있어요."

그녀의 스타킹 신은 발을 힐끗 쳐다보면서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발로 얼마나 멀리 도망칠 수 있겠소? 게다가 나는 이미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더 알아낼 작정이오."

그의 눈이 그녀의 눈에 고정되었다. 수수께끼 같은 시선이었다. 그녀의 눈은 충격으로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그들 사이의 공기가 갑자기 변했다. 새롭고 위험한 긴장으로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자기가 듣기에도 아주 멀리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정확히 무엇을 알아내겠다는 거예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을. 당신이란 존재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낼 거요, 수지. 왜냐하면 그 이하로는 만족할 수 없을 테니까. 이건 경고요."

그는 그녀를 남겨 두고 어둠 속으로 나갔다. 그녀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4

한동안 재너는 뻣뻣하게 굳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양손을 서로 꽉 움켜쥐고 그녀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있으리라고 다짐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리고 구두를 되찾는 대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중단시키고 떠날 것이다.

하지만 집 안의 정적이 따뜻한 망토처럼 그녀를 둘러싸자, 재너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며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매우 실용적인 부엌이었다. 구리 냄비들에는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다양한 기능과 모양의 주방 용구들은 싱크대 위에 갈끔하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두꺼운 나무 도마는 사용한 지 오래되어 가운데에 홈이 파였다.

마침내 호기심보다 더 깊은 어떤 충동에 이끌려 재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이 있는 쪽으로 나갔다.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어서, 문이 살짝 열려 있는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거대한 석조 벽난로가 버티고 있는 천장이 낮은, 길다란 방이었다. 소파 의자에는 몸이 완전히 잠길 듯한 두껍고 푹신한 오리털 쿠션이 깔려 있었다. 모든 테이블과 장식장은 오랜 세월 동안 덧바른 광택제의 윤기로 반들거렸다. 방 전체의 분위기는 단순히 사치스러운 허영을 초월하는 오래된 편안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벽난로 위에 걸린 처치 하우스의 그림이 그녀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전시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그림이야." 그녀가 속삭였다.

아주 오랫동안 그녀는 그림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런 다음 절망감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그림이다. 그리고 여기는 다른 사람의 집이다. 혹시 그림과 집을 둘 다 소유하게 된다 하더라도, 과거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대체 그녀는 정말로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여기로 온 것 자체가 처음부터 바보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천히 아래층을 둘러본 다음 2층으로 올라갔다.

"잘 둘러보았소?"

그녀는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2층을 둘러보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그는 맨 아래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고 한쪽 팔을 난간에 걸친 채 이를 데 없이 편안하게 서 있었다.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눈동자는 수수께끼처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재너는 그가 집 안을 둘러보라고 먼저 얘기했는데도 갑자기 죄의식을 느끼며 자기 방어에 나섰다. "그럼요" 그녀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 집의 주인 부부는 당신이 그들의 침실에서 잔다는 걸 알고 있나요?"

그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아마 짐작은 하고 있겠지."

그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넓은 공간을 좋아하오, 수지"

그녀는 계단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신발은 찾았어요?"

"찾았소, 신데렐라 아가씨. 하지만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소."

"웃기지 말아요."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사실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지나치게 연장된 것 같아요. 나는 이만 떠나고 싶어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그건 완전히 당신의 선택이오, 수지. 하지만 신발이 필요할 거요."

그는 몸을 돌리고 홀을 지나 거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를 따라가는 것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거실 문가에서 멈춰 섰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이게 뭐죠?"

벽난로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하나가 벽난로 앞으로 이동했다. 아주 많은 접시가 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볼로방(vol-au vents, 고기 파이의 일종), 키시(quiche, 치즈베이컨 파이) 조각, 아스파라거스로 속을 채운 분홍빛 햄, 닭다리, 각기 다른 샐러드가 담긴 조그만 접시들, 껍질이 딱딱한 빵 한 덩어리까지 둘러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머그 잔에 커피를 따르는 제이크를 향해 물었다.

"잠깐 동안에 이걸 다 했단 말이에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커피만 끓였소. 나머지는 트루디의 생가이오. 우리는 간식이 나오기 전에 파티장을 나왔지 않소" 그가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트루디가 우리 몫을 따로 챙겨 준 거요."

"설마 진심은 아니겠죠." 재너가 힘없이 말했다. "아직 저녁 먹은 것도 소화가 안 됐는데요"

"트루디는 천성이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하오. 당신이 최소한 한 입이라도 먹지 않으면 그녀는 호의를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받을 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트루디가 당신에게 이것도 보냈소" 그가 열쇠를 들어 보였다. "블랙 불의 옆문 열쇠요. 당신이 돌아왔을 때 혹시 아무도 없을 경우를 생각해서"

". 정말로생각이 깊군요."

"그녀는 언제나 생각이 깊지" 제이크는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만 서성이고 이리와서 앉지 그러오?"

"난 여기 있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단호하게 손을 내밀었다. "열쇠와 신발을 주신다면 이만 가보겠어요" 그녀는 그의 평가하는 듯한 시선을 마주 보며 턱을 치켜 올렸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예요."

"갈 길이 먼 거요?"

언뜻 무심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재너는 긴장했다. 자칫하면 금지된 영역을 넘을 수도 있었다.

"상관없잖아요?"

"아마 그렇겠지" 그의 미소는 얄미울 만큼 태평스러웠다. "하지만 나도 당신처럼 호기심이 아주 많소, 수지. 그리고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당신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요."

그녀가 부자연스런 웃음소리를 냈다. "차가 고장 나서 여기 들른 사람들 모두에게 그런 호기심을 느끼나요?"

"천만에" 여전히 유쾌한 빛이 담긴 눈길이 그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차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다시 얼굴이 붉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따갑게 의식하며 재너가 계속 조잘거렸다.

"수리비가 얼마인지 말해 주겠어요?"

"그 문제는 식사를 하면서 애기하지. , 여기 앉아서 커피를 마셔요."

그녀는 분통이 터져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이지 당신 멋대로군요?"

"그건 우리 두 사람 다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그가 응수했다. "스스로 앉을 거요, 아니면 내가 앉혀 주어야겠소?"

재너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고개를 높이 들고 소파로 쿵쿵 걸어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만족했나요?"

"천만에" 그들 사이의 거리를 주의 깊게 유지하며, 제이크는 그녀의 손이 닿을 거리를 주의 깊게 유지하며, 제이크는 그녀의 손이 닿을 만 한 거리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직 밤은 많이 남았으니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재너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당신의 행동이 성희롱 범주에 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요?"

"그리 자주는 아니오." 그가 교활한 시선을 던졌다. "나는 구식 남자요, 달링. 나는 인류가 정확히 어떻게 수백만 년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알고 있소. 내 말을 믿으시오. 그 일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만 엄격하게 고집하는 것으로 성취되지는 않았소."

"그렇다면 나를 여기 가두어 두기라도 하겠다는 뜻인가요?" 재너는 그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질렸다.

"나는 또한 낙천주의자요." 제이크가 느릿하게 말했다.

"어쩌면 당신이 잠시라도 나와 함께 있는 순간을 즐겨주지 않을까 기원하고 있소."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꿈도 야무지군요." 그러고는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그건 사실이었다. 위장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체내의 모든 신경이 철사줄처럼 팽팽하게 늘어난 것 같았다.

"최소한 커피라도 마셔요." 제이크는 벽난로 건너편의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쭉 뻗었다. 그는 이미 재킷을 벗은 후였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내리고, 셔츠의 맨 윗단추를 편안하게 풀었다. 그는 소매 단추까지 풀어 말아 올렸다. 그러자 짙은 체모와 근육질의 팔이 드러났다.

유쾌한 기운이 담긴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일깨웠다.

"크림을 넣느냐고 물었소, 수지"

재너는 그를 지켜보느라 너무 바빠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녀는 애써 냉정을 되찾으며 고개를 저었다. "블랙으로 마실 거예요."

재너는 커피를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시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제이크가 끓인 커피는 뜨겁고 강하고 맛있었다.

그녀에게는 알코올, 특히 치명적인 과일 펀치의 효과를 상쇄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녀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므로 술에 익숙하지 않은 셈이다. 그것이 오늘 그녀가 평소의 성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된 유일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

만일 이 향기 만점의 진한 액체를 마셨는데도 이성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이성을 되돌릴 수 없으리라고 재너는 침울하게 생각했다.

"춥소?" 그의 갑작스런 질문이 그들 사이의 침묵을 깼다. 그리고 재너는 자신도 모르게 벽난로 쪽으로 다리를 뻗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별로요" 그녀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기회가 있을 때 진짜 불을 최대한 즐겨 보려는 것뿐이에요. 중앙난방은 효율적이긴 하지만 인간적이진 않죠."

아주 많은 것들이 그렇지" 제이크가 건조하게 동의했다. 그는 재킷을 집어 양쪽 주머니에서 하이힐을 하나씩 꺼냈다. "이제 이걸 돌려주는 게 좋겠소."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신겨 주겠소."

그녀는 의자 속으로 몸을 움츠리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내가 할 수 있어요"

"그건 아누도 의심하지 않소"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발목을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붙잡았다. "하지만 이건 내 기쁨이오."

재너가 말없는 석상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는 동안, 그가 신발을 차례로 그녀의 발에 신겼다.

"고마워요" 그녀가 얼음처럼 싸늘하게 말했다. "정비소가 잘 안 되면 언제든지 구두 판매원으로 나서도 되겠군요."

"당신에게 추천장을 부탁하라고? 천만의 말씀이오." 제이크는 등을 펴고 앉아 자신이 신긴 구두를 찬찬히 관찰했다. "나는 원래 계획을 고수해서 돈 많은 여자와 결혼이나 하겠소."

재너는 순간 숨이 막혀 왔다. "대단한 야망이군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마을에는 그런 일을 도와 주는 단체도 있는 모양이죠?"

"우리는 서로 외로운 가슴을 위로하지."

"댄스 파티장에서의 예쁜 빨강머리 아가씨도 포함해서 말인가요?" 그 질문은 내내 표면 바로 아래에 도사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질문이 나오는 동시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가 유쾌하게 대꾸했다. 그녀가 두려워하던 가시 돋친 빈정거림은 없었다. "샐은 노는 여자요."

재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노는 여자도 언젠가는 정착하는 법이에요."

"나와는 아니오."

"부자가 아니라서?"

"그녀의 은행 잔고를 확인해서 알려 주지."

"별로 신사적이진 않군요." 그녀는 약간 심술궂고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가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숨기김 위해 애쓰면서. 그녀는 그의 호리호리하고 우아하면서도 강인한 몸과 얇은 셔츠 사이로 애태우듯 비치는 거뭇거뭇한 가슴털, 그리고 희미하고 자극적인 코롱 냄새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재너는 서둘러 말을 계속 이었다. "나는 그녀가 미래의 스미스 부인이 될 줄 알았는 데요."

"여러 부분에서 틀렸소, 수지. 이름까지 포함해서. 혹시 잊었나 본데 당신 이름이 스미스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그가 말을 멈추었다.

"당신은요?" 그녀가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의 이름은 정확히 뭔데요?"

"미스터 X라고 부르시오. 미지의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지" 이제 그이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진 채 강렬한 두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남자 얘기를 해보시오, 수지. 당신을 이렇게 뻣뻣하게 만든 남자 말이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없어요!"

제이크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소. 당신은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요. 하지만 자신을 새장 안에 가두어 두고 있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또다시 실없는 소리를 시작하는군요." 재너가 화를 내며 목청을 높였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이런 엉뚱한 추측을 시도할 권리 따위는 조금도 없구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내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소. 당신은 앞으로도 평생을 청창 속에서 지낼 거요? 그건 대체 무슨 목적이오? 당신을 보호하려는 거요, 아니면 나머지 세상을 몰아내려는 거요?"

"나는 잘살고 있어요" 그녀가 거칠게 말했다. "나는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요. 나는 이제 그 자유를 사용할까 해요" 그녀는 단호하게 일어섰다. "열쇠를 주세요. 블랙 불로 돌아가겠어요."

제이크는 유연하게 일어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손으로 장난치며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대로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잖아요." 재너가 차갑게 말했다.

"기다린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잖소." 그가 그녀를 향해 눈을 번득였다. "아니면 당신이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이 넓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당신의 말에 주목해야 한단 말이오?"

"여기 오기 전까지 나는 스스로 획득한 존경으로 대우 받았어요"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 아침 헨리 월튼이 그녀를 마치 신발에 묻은 더러운 진흙이라도 되는 듯이 쳐다보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치른 존경의 대가는 얼마였소, 수지?"

그녀를 갑작스레 무너뜨린 것은 그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낯선 부드러움이었다.

목구멍이 꽉 조여 들었다. 그녀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지옥에나 가요."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황량하고 절망적인 외로움의 한가운데서 그녀는 그의 팔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리고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의 바위라도 되는 양 꼭 붙들었다. 흐느낌은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내면의 아주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왔다.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에 눈과 귀가 모두 멀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희미하게 의식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누군가가 어르고 흔들어 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가운데 실제 어린 시절에도 지금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지금은 다른 아이들처럼 상처를 입어도 되고, 상처 입기 쉬운 모습을 보여 주어도 되는 그런 아이가 되었다. 실패를 해도 좋고, 위로받을 권리가 있는 아이.

그녀에게는 완전히 낯선 아이였다. 재너는 그 이질감에 더욱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천천히 눈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길고 격렬한 울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자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 위에 있었다. 제이크의 품에 단단히 안긴채였다. 그녀의 젖은 얼굴은 그의 목을 눌렀고,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맙소사" 그녀가 서둘러 그로부터 몸을 떼려고 했다. "미안해요"

"진정해요" 그는 그녀를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게끔 했다. "사과할 필요 없소."

하지만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끊겼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행동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짐작했소." 신중한 어조였다. "설명할 필요는 없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당신은 안전하오."

안전하다고? 스스로를 미스터 X라고 부르라는 남자와 함께 있는데 말인가? 이곳에 안전이란 없었다. 특히나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온기가 그녀라는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이 순간에는.

"이만 놓아 주겠어요?" 그녀는 차분하고 자신 있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꼭 죽어가는 생선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어떤 유형의 친밀감도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군."

"아니, 물론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소리내어 웃으려고 했다. "단지단지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울 뿐이에요.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진자 삶과 만난 거요"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몸이 약간 들썩이자 그녀의 오감에 불편한 떨림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보호막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소."

"정말로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제이크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수지. 그렇게 되려면 평생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소"

"글쎄요, 어쨌든 내 인생은 모두 드러났어요." 그녀는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정말이지 이만 가봐야겠어요"

"아직 수리비 얘기는 하지 않았소."

", 물론이지요." 그녀는 지갑 속에 현금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수표나 신용 카드로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명이 드러나게 된다. 그녀는 절대로 본명을 드러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트루디 셔먼에게 숙박비를 치러야 한다는 점도 잊으면 곤란하다. 그녀는 희미한 걱정을 누르고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를 드리면 되죠?" 재너는 애써 쾌활하게 물었다.

"키스 한 번"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걸로 그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합시다."

"뭐라구요?" 재너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그 분노로 인해 그녀는 다시 힘이 났다. 재너는 벌떡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이건 혐오스러운 제안이에요."

제이크는 다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정말로 느긋해 보였다. 그녀의 반응에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좋소" 그가 말했다. "그럼 2백 파운드 내시오."

재너는 얼어붙었다. "농담 말아요."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소. 내 작업은 가격이 비싸오. 특히 출장에다 시간외 근무일 때는" 그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내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견적을 요청하지 그랬소?"

"그런 가격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어요" 그녀가 화를 내며 항의했다.

"나는 정당화할 필요가 없소. 당신 말에 따르면 그건 응급 수리였소. 난 응급 수리를 할 경우에는 항상 그만큼의 값을 부르지. 물론 언제든지 다르 대안을 제고할 수도 있소."

그들 사이의 침묵에 갑자기 전기가 흐르고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미쳤군요." 마침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2백 파운드라구요, 키스 한 번에?"

"그렇소. 당신이 그렇게 단단히 꼭 다물고있는 맛있는 입술을 맛보고, 톡 쏘는 신맛 너머에 달콤한 꿀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한 페니 한 페니까지 모두가 가치가 있을 거요." 그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 그런 도전에 저항할 수 있는 남자가 있을지 의문이오."

그의 느긋한 미소를 보자, 그녀의 내면에서 떨림이 살아나며 이상하게 몸에 힘이 빠졌다.

"결국" 그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친구 사이에 키스가 무슨 대수겠소?"

그건 그랬다. 무슨 대수겠어? 이렇게 격하게 심장이 뛰어야 할 이유는 없다. 맙소사, 전에도 키스는 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깊은 키스도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저녁 식사 또는 극장이나 영화관에 데려다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짧고 가볍게 입술을 스치는 키스였다.

제이크는 여전히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일어났다. "내게 키스해요, 수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가까웠다. 너무나 가까웠다. 손으로 그를 어루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태양을 쫓는 해바라기처럼 얼굴을 들어올리고 그의 품안으로 다가서면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5

그의 입술은 차갑고 아주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나른하게 탐사하기 시작했다.

재너는 그의 품안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애무가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감각에 온몸이 반응하는 것을 의식했다. 그녀는 그의 혀가 그녀의 윗입술을 핥는 것을 느꼈다. 그의 이가 파르르 떨고 있는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키스는 점차 감각적인 압력의 도를 높여갔다.

이제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그녀의 머리가 힘없이 뒤로 젖혀졌다. 마치 줄기가 너무 무거워진 장미처럼 감긴 눈꺼풀 뒤에서 조그만 별들이 춤을 추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위로 올려 그의 목을 감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여전히 입술을 벌린 채 그녀는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입술은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단단히 맞물렸다.

그것은 바로 항복이었다. 황홀한 환희는 또한 선물이기도 했다. 재너는 평생 처음으로 욕망에 휩쓸리며 그를 게걸스럽게 탐했다. 자기도 모르게 부드러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함께 흔들렸다. 그들 두 사람 모두를 집어삼키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갈망, 서로에 대한 이 압도적인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그에게 밀착시켰다. 어떤 어둡고 되돌릴 수 없는 문지방을 넘게 만드는 고대로부터의 오랜 본능에 따라 그를 재촉하면서.

그의 손은 이제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조그맣고 팽팽한 젖가슴을 쓰다듬고, 유두를 자극하여 약동하듯 살아나게 만들었다. 이제 그의 손은 허리와 복부, 엉덩이로 내려갔고, 허벅지 사이의 오목하고 부드러운 곳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충격으로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길이 주는 강렬한 기쁨에 거의 죄의식마저 느꼈다.

그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봐요, 수지. 당신의 눈을 봐야겠소" 그녀가 멍하니 얼굴을 들자 그가 물었다.

"혹시 다른 남자가 있었소? 나는 알아야 하오"

"아뇨" 부정의 말이 가느다란 실처럼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 아래에서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청동 조각상처럼 딱딱했다. 높은 광대뼈 언저리는 붉게 물들었고, 짙은 눈은 영원 같은 한순간 동안 지글지글 타듯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들어 거실을 나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그녀 옆에 누웠다. 그리고 팔꿈치로 몸을 받치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 다음 목선을 따라 셔츠의 깃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그녀의 눈을 응시한 채 부드럽게 말했다. ", 우리가 어떤 기쁨을 나눌 수 있을지 알아봅시다"

제이크는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 위에서 가볍고 감각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마치 장미 꽃잎을 벌리듯 느긋하고 섬세한 손길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가 가슴에서 레이스 브래지어를 밀어내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가슴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팔목을 잡아 중지시켰다.

"감추지 마시오." 그가 속삭였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소.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는 거요?"

그이 머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피부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의 혀가 짙은 분홍빛 유두 주변을 느릿하게 맴돌다가 예민한 양쪽 젖꼭지를 차례로 입술에 머금었다. 재너의 전신이 그 감각에 전율했다. 반은 충격으로, 반은 통증 어린 기쁨으로.

이제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완전히 나체가 되었다. 그의 양손이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탐색해 갔다. 몽롱한 상태에서 그녀는 그의 애무하는 손길에 반응하며 전율했다. 재너는 자신의 매끄러운 살에 체모로 거칠거칠한 그의 피부가 관능적으로 닿는 것을 느꼈을 때에야 제이크 또한 옷을 벗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으면 곧 입술이 그 뒤을 따랐다. 그의 손과 입술은 약간 오목한 그녀의 복부에서 날씬한 골반,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나른한 탐사는 마지막 장소에 도달했다. 그의 길고 경험 많은 손이 그녀의 숨겨진 비밀의 장소를 찾아내자, 그녀는 등을 활처럼 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도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초조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금방이오" 그가 그녀의 입에 대고 속삭였다. "약속하겠소."

그의 손이 율동적으로 움직였다. 애태우듯이, 고문하듯이. 재너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베개 위에서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제력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 전체가 제이크가 그녀의 내부에서 만들어 내는 찌르는 듯한 달콤한 감각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절정의 순간이 오자, 그녀는 끊임없이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얼마 후 경련하던 몸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자, 재너는 문득 얼굴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오늘밤 그의 앞에서 우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수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다정했다. 제이크는 그녀의 턱을 잡아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숙여 짭짤한 물기를 키스로 닦아 주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절대 울지"

"감정을 거부해서는 안 되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감정을 부끄러워해서도 안 되고"

그는 그녀를 품안에 끌어안고 그녀의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머리와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제 말해 보시오" 그가 말했다. "왜 울었소? 나는 진실을 듣고 싶소."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건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그녀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끝나 버렸어요."

"천만에"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내 사랑, 그건 겨우 시작일 뿐이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부드러운 손바닥에 키스했다. 그런 다음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에 갖다 대고는 속삭였다. "알겠지만, 수지. 당신도 나를 만질 수 있소."

그녀가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란 뜻인가요? 단지 그것만이에요?"

", 아니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오. 곧 명백하게 보여 주겠지만 말이오. 아무래도 기쁨에 대한 당신의 수용력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T니 큰 것 같소."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이해하지"

"당신 생각이 틀렸소"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너무나 틀렸소."

이제 그녀의 입술에 닿는 그의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그의 말없는 재촉에, 재너는 새로운 갈망으로 그의 강인한 근육과 뼈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두 다리 사이에 이르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수줍게 그의 것을 움켜쥐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신음을 토하자 그녀는 용기를 얻었다. 재너는 그가 보여 주는 기쁨과, 자신이 발휘하는 힘에 넋을 잃었다. 오늘밤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젖가슴에 닿았다. 그의 애태우는 손끝 아래에서 그녀의 젖가슴이 흥분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의 입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축축한 내부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양 다리 사이로 그의 허벅지가 자리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 몸 위로 올라와 한 번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그녀는 말도, 움직임도 잃고 완전히 멈추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치켜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녀를 소유한다는 느낌, 그를 그녀의 내부에 가두고 있는 실체적인 감각에 적응하면서.

그녀는 그 감각에 완전히 항복하면서 그를 향해 몸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즉각적이고 확실한 반응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들은 입을 맞댄 채로 격렬하게 함께 움직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뜨거운 요구에 그들의 몸이 뒤얽혔고 그들의 땀이 뒤섞였다.

절정에 이르자, 재너는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감각이 너무나 예리하게 반응하여, 어쩌면 이 기쁨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 먼 곳에서, 그녀는 제이크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들은 함께 지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로.

마침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재너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나언제나 이런 건가요?"

"아니오." 그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그의 몸은 여전히 그녀와 결합해 있었다. 그의 머리가 그녀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그녀는 그의 축축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깨어났다. 그리고 잠깐 어리둥절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음 순간 거의 공포에 가가운 감정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낯선 방, 구겨진 침대, 그리고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인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옆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남자의 몸이 있었다.

, 맙소사.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나는 틀림없이 미쳤던 거야.

재너 웨스트콧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두었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그녀가 자기 주위에 쌓인 차가운 껍질을 너무나 쉽게 부서졌다. 그것도 이런 이방인에 이해서 말이다. 겨우 어제 만났을 뿐이며 신뢰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남자. 시골 마을의 자동차 정비사.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두 번도 쳐다보지 않았을 관리인.

이곳에 온 이후로 그녀는 현실 감각을 잃은 것 같았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물론 용서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자제력 상실을 그렇게 변명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제 완전히 깨어났고 원래의 정신 상태로 돌아왔다. 지금 이 순간 제일 필요한 것은 그가 깨기 전에 이 침대와 이 집에서 무사히 빠져 나는 것이었다.

재너는 천천히 침대 모서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옷이 어디 있는지 열심히 둘러보았다. 옷은 온 사방에 널려 있었다.

재너는 연신 침대 쪽으로 경계의 시선을 던지며 옷가지를 주워 모았다. 고맙게도 침대 위의 남자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나머지 물건을 마저 모아 서둘러 옷을 입은 후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블랙 불의 옆문을 따고 들어갔다. 트루디 셔먼과 맞닥뜨리지 않기만을 기원하며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방은 어제 저녁에 두고 온 그대로였다. 운이 좋다면, 그녀가 여기서 밤을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시트를 흐트러뜨리고 베개에 움푹 들어간 자국을 만들었다.

재너는 머리를 빗고 언제나처럼 목 뒤로 단단히 묶었다.

머리를 너무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눈물이 났다. 하지만 리본이 목 주위에 어떻게 감겨 있었는지를 망각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재너는 세수를 한 다음 기초화장을 했다. 립스틱을 손에 든 채 그녀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입술이 달라 보였다. 평소의 냉정한 윤곽선이 사라지고 분홍빛으로 부풀어 있었다. 눈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낯선 여자의 눈이 거울 속에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재너는 가방 속에 립스틱을 다시 넣었다. 그리고 방을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벌써 계산하겠다구요?" 트루디 셔먼이 놀라고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아침 식사는 드셔야지요? 아침 식사도 계산에 포함되는 데요."

재너는 고개를 저었다. "일찍 출발해야 돼요. 약속이 있어서요."

언제나처럼 자신감 넘치는 음성으로 들렸다. 그녀의 내부가 잔뜩 긴장하여 떨고 있다는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블랙 불은 벌써 하루의 영업을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재너는 조바심을 치며 혹시 제이크가 들어온 것은 아닐까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재너는 셔먼 부인이 제시하는 말이 안 된다 싶을 정도로 적은 돈을 현금으로 치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를 표시한 다음, 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차를 고쳤다고 말했다. 그녀는 운전석으로 들어가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이제는 그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차 지동을 걸었다. 엔진이 즉시 살아났다. 마치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제 그녀가 할 일은 호텔로 돌아가 남은 소지품을 챙기는 것뿐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애당초 했어야 할 일을 실행할 것이다. 런던으로 돌아가는 것.

그녀는 과거로 돌아간 것이었고, 이제 그곳이 위험한 장소임을 알았다. 뜬구름 잡는 듯한 과거로의 추적은 결국 재앙으로 끝났다. 그 일이 재앙이 아니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제이크는 익숙하지 않은 알코올에 취한 그녀를 유혹했다. 어디에나 널린 그렇고 그런 얘기다. 완전히 자제력을 상실한 자신에 대한 다른 어떤 변명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제이크는 그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수지 스미스는 엠플레삼에 남겨 두었다. 마치 쓸모없어진 허물을 벗어던지듯이. 그녀는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최소한 흔적도, 책임도 없이 그녀가 그곳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고말고. 또한 그녀의 인생에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난 열두 시간을 지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가 깨어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를 찾아 손을 더듬다가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모습을. 심장이 고통으로 조여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은 바람에 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어깨를 으쓱하며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겠지. 그는 그녀를 그리 오래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예쁜 빨강머리도 있고, 그를 위로해 줄 다른 <수지>도 많이 있을 테니까.

재너는 자신을 위로해 줄 사람은 어디서 찾을 거냐는 조그만 내면의 속삭임에 귀를 막았다. "나는 아버지의 딸이야"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는 이겨낼 수 있어"

 

6

재너는 호텔에서 하룻밤 쉬고 나서 다음날 오후 런던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응답기의 빨간 불빛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하지만 메시지는 전부 제럴드 경이 남긴 것들이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서 재너는 아버지 말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발견한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식사를 함께 하자거나 영화를 보러 가자고 청하는 여자 친구도 좋겠지. 그녀 또래의 대부분이 즐기는 일상적인 주말 활동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갑자기 최근 그녀의 삶이 얼마나 외롭고 단조로운 지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지 않을 경우에 그녀는 거의 대부분 혼자서 식사했다. 그리고 주말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바쳤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재너는 얼굴을 찡그리며 졸토 전자회사의 인수에 관한 보고서를 인쇄하려고 랩탑 컴퓨터를 메인 컴퓨터 터미널에 연결했다. 어젯밤 혼자 식사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였다.

보고서가 모두 나오자, 재너는 레깅스와 스웨터로 갈아입고 냉장고 속에서 간식거리를 찾아냈다. 치즈, 크래커와 토마토로 반쯤 식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불길한 호출음처럼 현관 벨이 울렸다.

재너는 심호흡을 한 다음 안전 고리를 풀었다. "들어오세요, 아버지"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다." 제럴드 웨스트콧은 남들의 시선을 끄는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의 풍채는 흠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재단된 짙은 색 양복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그의 자연스러운 얼굴 혈색은 평소보다 더 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예리한 눈길로 딸을 훑어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 재너? 주말 내내 어디 있었어? 호텔의 멍청이들이 내 메시지를 전해 주지 않더냐?"

"아니오, 아주 똑똑히 전해 주었어요. 커피 드시겠어요?"

"나는 대답을 원한다"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사라진 거냐? 내가 금요일 회의에 대해 완전한 보고를 받고 싶어 하는 줄 몰랐단 말이냐?"

"보고서는 여기 있어요." 재너가 파일을 건네주었다.

"제가 사라진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약간의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부터는 더 자주 휴식을 취할 작정이에요.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네게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가 있다고 느낀다니 기쁘구나." 제럴드 경이 험악하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편안한 복장에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앞으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기 전에 내게 먼저 친절하게 알려다오. 그래야 비상시에 어디로 연락할 수 있는지 알 게 아니냐."

"알았어요" 재너는 생각에 잠긴 채 커피를 다시 채웠다. "제 걱정은 하지 않으신 걸 보니 기쁘군요, 아버지"

"걱정이라고?" 그의 짙은 눈썹이 올라갔다. "왜 걱정을 해야 하지? 너는 다 자란 성인이고,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여자야. 네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젠 돌아왔으니 더 이상 그 얘기는 하지 말기로 하자. 졸토 전자회사 건은 아주 잘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주 싼 값에 샀어. 네가 자랑스럽구나."

한때는 그녀의 귓가에 천상의 음악으로 울려 펴졌을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 불편한 느낌 외에는. 헨리 월튼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야>

재너가 조용히 대답했다.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내일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오너라" 그는 파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침을 함께 들면서 이 건에 관해 상세하게 얘기하자꾸나." 그는 다시 재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왔을 때만큼이나 갑자기 떠나갔다.

재너는 아버지의 등뒤로 꽝 하고 닫히는 문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혼자 남았다. 문득 이제는 하루종일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몸을 떠는 자신을 발견했다.

 

"괜찮아요, 웨스트콧 양?"

차가운 물을 얼굴에 적시던 재너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테시 로이드가 옆에 서 있었다. 재너의 입술이 딱딱하게 긴장했다. 한 차례 격심한 구역질이 지나가긴 했지만, 여자 화장실에는 그녀의 불편함을 알아차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하던 참이었다. 이제 그녀의 생각이 틀렸음이 드러났다. 언제나 그렇지만 결국에는 목격자가 있게 마련이다.

재너는 몸을 바로 폈다. 세상이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같이 어지러웠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종이 타월을 집어 들었다.

"난 괜찮아요." 그녀는 거울 속의 창백한 얼굴과 생기 없는 눈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하며 거짓말을 했다.

"뭘 잘못 먹은 모양이에요"

테사 로이드가 얼굴에 찌푸렸다. "간부용 식당에서 먹은 음식이 아니면 좋겠는데. 요리사에게 말을 해야 할까요?"

재너는 사용한 종이 타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난 이제 괜찮아요, 로이드 양" 그녀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전면적인 조사를 시작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이번 주 들어서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요." 테사 로이드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회사 주치의에게 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재너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가 막히게 효율적인 회사 내에서의 소문 전달 체계가 저주스러웠다. "당연하죠. 사소한 복통으로 쓸데없이 회사 비용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만 집으로 가는 게 낫겠어요." 그녀가 실제 상태보다 더 냉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누워서 쉬면 나아질지 알아보기로 하죠."

테사 로이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런 병은 냉방 건물 안에서는 아주 빨리 퍼질 수 있으니까요."

"악성 폐렴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재너는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선 맡은 일을 먼저 처리해야겠어요. 물론 당신도 이의 없겠죠?"

"물론이죠." 테사 로이드는 상대방의 명백한 냉소에도 전혀 꿈쩍하지 않았다. "제럴드 경에게 당신이 아프다고 전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재너가 재빨리 말했다. "어차피 내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할 테니까"

그녀가 이른바 <무단결석>을 한 이후로-제럴드 경은 익살맞은 농담이랍시고 그렇게 표현했다-재너는 아버지의 시야에서 거의 한순간도 벗어나질 못했다. 일을 책상위에 산더미처럼 쌓였고, 상념에 잠기기는커녕 불만을 품을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주말마다 사업상의 행사에서 여주인의 역할을 요구받았다. 꼭두각시가 다시 돌아와 당기는 줄마다 순순히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주 조금이라도 몸이 좋지 않다는 눈치라도 보이면 아버지는 귀찮게 꼬치꼬치 캐 물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사무실까지 돌아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서인 미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재너가 들어오자 곁눈길로 불안한 시선을 힐끗 던졌다.

테사 로이드가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재너는 우울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아무래도 좀 더 신중한 비서를 찾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급한 거라도?" 재너는 우편물 더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웨스트콧 양" 미건이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꺼냈다. "하나는 <친전>이라고 되어 있어서 따로 남겨 두었어요."

"그래요?" 재너는 비서가 건넨 두꺼운 크림색 봉투를 받아들었다. 겉봉투에는 <수재너 웨스트콧 양>이라고 우아한 필치로 씌어 있었다. 생략하지 않은 이름 전체가 적힌 것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틀림없이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낸 모양이다. 그녀는 봉투를 뜯어 도드라진 무늬를 넣은 초대장을 꺼냈다.

재너는 눈썹을 올렸다. 란트렐 화랑의 런던 지부 개관식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란트렐?"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 사람 알아요? 웨스트콧 투자회사에서 후원하고 있나요?"

"안 그럴 텐데요. 홍보부에 전화해서 확인해 볼까요, 웨스트콧 양?"

"그래 주세요" 개관식은 이번 주에 열리는 모양이었다.

미건이 전화하러 나간 사이에 재너는 수첩을 들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아마 마케팅 전략을 것이다. 그녀가 참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초대했을 때는 날짜와 시간을 표시해 두는 편이 좋았다.

재너가 수첩을 멍하니 응시하며 여전히 그대로 앉아 있는데, 미건이 돌아왔다. "우리 회사는 란트렐 회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웨스트콧 양. 하지만 린지는 그들에 관해 들은 바가 있대요. 린지의 말로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마드리드, 파리, 니스에 란트렐 화랑이 있다는군요. 그들은 현대 미술보다는 전통적인 회화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는군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웨스트콧 양, 괜찮으세요?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요"

"사실 몸이 별로 좋지 않군요"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너무나 정상적인 것에 깜짝 놀랐다. "녹음기에 구술해 놓은 게 조금 있어요, 미건. 그건 내일 결재할 거예요. 오늘은 일찍 퇴근하겠어요."

"운전하실 수 있겠어요? 택시를 부를까요?" 미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했다. 재너 웨스트콧이 아파서 조퇴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제발 호들갑 피우지 말아요." 재너는 미소 비슷한 표정으로 짜증스런 말투를 상쇄시키려 애썼다. "내일 아침이면 말짱해질 거예요."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고 문으로 걸어갔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재너는 언제나 거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전망을 좋아했다. 구불구불한 템스 강과 붐비는 차량의 물결도 좋아했다.

오늘 그녀는 강 위로 떠오른 이른 아침 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자신의 상태를 분석하고 거부하고, 자신의 의심이 사실일 리 없다고 타이르는 등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리고 15분 전에 실시한 테스트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서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며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발이 납덩이처럼 뻣뻣해졌을 무렵 그녀는 마침내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실 너머의 욕실로 향했다.

시험과 위의 표시가 최악의 악몽을 확인해 주면서 그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재너는 움켜쥔 주먹으로 복부를 눌렀다. "안 돼" 그녀가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 맙소사. 안 돼"

평생에 딱 한 번의 경솔한 하룻밤이 이렇게 끔찍한 결과로 끝나야 하다니. 이건 사실일 리가 없다. 절대 사실이어서는 안 된다. 눈앞에 버티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잠시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 다음 순간 낚아채듯 가방을 집어 들고 아파트를 달려나갔다. 재너는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또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통에 불이 날 것이다.

한동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다시 추스를 시간이.

재너는 아무 생각 없이 도로를 선택했다. 본능이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를 깨달은 것은 실제로 고속도로에 접어든 다음이었다.

마을 표지판을 통과할 무렵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재너는 정비소에 가까워지자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정비소 문은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었다. 꼭 버림받은 장소 같았다. 재너는 입술을 깨물며 마을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그녀는 처치 하우스 옆에 차를 세우고, 정원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천천히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집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기를 기다렸지만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재너는 뒤쪽으로 돌아가 부엌 창문으로 들여다보았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집에 없다>는 표시가 아니라 <멀리 떠났다>는 표시였다. 심장이 돌처럼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근거로 그가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이곳으로 돌아오면 그가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에게 키스하여 다시 완전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상상했단 말인가? 재너는 자신을 사정없이 비난하고 경멸했다. 그가 악몽을 사라지게 해줄 거라고 생각했니?

그렇고 그런 평범한 하룻밤의 관계 이상의 뭔가 중요하고 소중한 의미가 있는 관계로 만들어 줄 거라고 여겼던 거야?

이 집의 관리인은 더 이상 집을 관리하지 않는다. 재너는 자신에게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 집에 그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마음에 의지가 되었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얼마나 간절히 그의 품안으로 뛰어 들어가 공포와 혼란을 눈물로 쏟아내고 싶었는지, 그의 심장이 그녀의 심장과 마주 뛰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싶었는지 또한 처음으로 깨달았다.

굳게 감긴 눈꺼풀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이름이 따가운 목구멍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어디 있어요?" 그녀가 암울한 정적 속에서 고통스레 속삭였다. "제이크, 돌아와요. 당신이 필요해요. 달아났던 나를 용서해줘요. 그리고 도와 줘요, 제발, 제발"

재너는 자신의 말이 단단한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들었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뻣뻣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차로 다시 돌아왔다.

 

재너는 이른 오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서둘러 돌아오려고 애쓰지 않았다. 천천히 운전하면서 돌아오는 내내 똑같은 문제를 넌더리가 날 정도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쓸 만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

재너는 아파트 현관에 열쇠를 꽂으면서 우울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동작을 멈추었다. 코를 찌르는 담배 연기에 오감이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아버지?" 재너는 거실로 들어서며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여기서 뭘 하시는 거예요?"

"널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제러드 경의 육중한 몸집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 더러운 암캐 같으니"

재너는 갑자기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겠군요."

"나도 그랬다. 그런데 욕실에서 그 음탕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의 눈은 차돌 같았다. 불투명하고 차가운 돌. "벤 위크햄을 데리고 왔었다. 네가 토하더라고 테사가 말하더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위크햄의 진찰을 받게 할 생각이었지."

재너는 입속으로 테사를 저주했다. "아버지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회사 주치의는 필요하지 않다고 얘기했어요."

"충성심이 뭔지 아는 고용인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겠구나."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 허접쓰레기가 무슨 물건인지 벤이 말해 주었을 때에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도"

재너는 턱을 치켜 올렸다. "두 사람이 여기 들어와서 내 사생활을 엿볼 권리는 없어요. 대체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이 아파트는 회사 소유야. 나는 모든 웨스트콧 투자회사 소유의 집 열쇠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네 일을 우리가 알아내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일은 스캔들 없이 즉시 처리할 수 있어. 벤도 그렇게 보증했다.

재너는 순간 얼어붙었다. "무슨 얘길 하시는 거에요?"

"벤은 훌륭한 병원을 알고 있다. 빠르고 신중하게 처리해 준다더구나. 그는 지금 너를 위해 수속 중일 게다."

재너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지금 낙태를 말씀하시는 거에요?"

"물론이다" 그가 초조하게 말했다.

재너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묻지 않으셨잖아요. 우리에게 나름대로 계획이 있을 수도"

"물을 필요가 없지"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네 손가락에 반지가 없고, 네가 정기적으로 만난 남자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너는 멍청한 매춘부처럼 행동했지만 결과를 책임질 필요는 없어. 요즘에는 그러지 않아도 되지."

재너는 그를 말똥말똥 응시했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지금 손주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내가 사생아를 반기가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이냐? 온 런던 시민의 눈앞에서 나를, 웨스트콧 투자회사를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내버려둘 줄 알았어?" 제럴드 경의 웃음소리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 "정신 차려라. 네가 누군지, 네 인생의 목적이 무언지 기억하란 말이다."

"내 인생의 목적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죽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녀는 차분하고 조용히 말하려고 애썼다.

"너는 멍청한 것보다 더 나쁘구나. 내 딸도 아니야." 재너는 방 건너편에서 전달되어 오는 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갈가리 찢어 놓을 듯한 아버지의 분노를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잘 들어라, 재너. 네가 그 아이를 낳아 미혼모가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너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직장, , 이 아파트까지 말이다. 너는 실직자가 되어 사회 보장 제도에 기대 살아가야할 게다. 그때도 아이 아버지가 너를 원할지 두고 보자꾸나."

"그건 협박이에요."

"이건 상식이다" 제럴드 경이 무자비하게 응수했다.

"한 번의 바보 같은 실수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직장을 포기할 필요는 없어."

"저는 바보 같은 일을 참 많이 한 것 같군요." 재너가 무감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제가 어떤 게 바보 같은 일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할 것 같지는 않네요."

아버지는 창가에서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재너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는 조그만 도자기 접시에 담배를 비벼 끄고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꽁초를 반들거리는 표면에 신중하게 으깼다.

"내가 한 말은 진심이다." 그가 현관문으로 걸어가며 어깨 너머로 말했다. "벤이 해놓은 수속을 지키지 않으면 네 인생은 끝장이다"

그녀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긴장이 천천히 빠져 나갔다. 무릎에 힘이 빠진 그녀는 가까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아파트. 내 힘으로 획득한 반짝이는 트로피. 나의 가치와 성공을 입증하는 증거.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재너는 신중하게 선택한 가구, 흠 하나 없는 파스텔 색조의 벽면, 몇 장의 그림과 디자이너가 추천한 도자기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서 그것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위를 둘러싼 환경에 자신의 영향과 흔적을 어저면 그리고 적게 남길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이 집은 처음 들어와서 꾸몄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새롭고 정갈해 보였다.

이제 그녀의 내부에는 새롭고 작은 생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생명에 대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재너는 아버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선택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그녀가 아이를-제이크의 아이를-죽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 아이는 일밖에 모르던 그녀의 메마르고 공허한 삶에서 딱 한 번의 무모한 하룻밤 동안 그녀 역시 인간이었음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네 인생은 끝장이야> 아버지의 잔인한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그 소리를 떨쳐 냈다.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뇨, 이제 막 시작했어요."

 

7

차가 없다는 것은 다리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고, 재너는 또 다른 직업소개소를 나서며 울적하게 생각했다.

단칸방을 구하는 것은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려는 지금가지의 노력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훼스트콧 투자회사를 나온 지 이제 3주째였다.

재너는 자신의 경력이면 다른 회사의 관리직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의 확신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재너는 사실 아버지가 위협을 실천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닥터 위크해에게 임신 중절 수술을 위해 아버지가 잡아 놓은 약속을 지킬 수 없노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난 다음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당혹스러워 하는 경비원이 그녀 앞을 막아섰다.

재너는 테사 로이드가 도착할 때까지 검수계에서 기다리는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자신이 책상을 비우는 동안 옆에서 지켜 보기 위해서 테사가 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테사 로이드는 숨길 수 없는 승리감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재너가 떠나기 전에, 그녀는 차 열쇠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되자, 재너는 아파트에서 내쫓기는 굴욕을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옷과 컴퓨터를 챙겨 호텔로 이사했다. 그곳을 기지로 새로운 집과 직장을 찾을 작정이었다.

다행히도 돈은 아직은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원히 통장 잔고에 기대어 살아갈 수는 없었다. 잔고가 줄어 가는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녀의 이름이 인력 시장에서 독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지원서를 제출하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것 같았다. 추천장이 없다는 점에 일간지 경제란에 그녀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 일에 관한 짧고 비열항 논평까지 더해져 마치 무슨 끔찍한 비행이라도 저지르고 쫓겨난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건 사기였다. 그 모든 일에 아버지가 있었다. 이것은 그를 거역한 데 대한 징벌의 일부였다. 그리고 분명 그는 재너가 라이벌 회사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재너는 이를 갈면서도 비서직에 응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시직을 주선하는 소개소에도 이름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녀가 방금 나선 소개소를 포함해 대부분의 소개소에는 현재의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명단에 올라 있었다. 직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모두가 불경기 때문이었다.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다가, 재너는 길어 이어지는 인상적인 판유리 뒤의 약동하는 듯한 느낌의 추상화를 멍하니 응시했다. 처음 와본 곳인데도 흠 하나 없는 암녹색의 차양 위에 아름답게 장식된 이름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란트렐 화랑. 그녀가 조용히 되뇌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그녀는 건너편 인도에 닿은 후에야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개관식에 초대를 받았었다. 그녀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힐끗 시계를 보았다. 그러고는 결단을 내렸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때 늦은 방문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란트렐 화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접수계원은 전형적인 금발 미인이었다. 그녀는 재너에게 카탈로그를 건네면서 진심에서 우러난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화랑에 처음이신가요?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전시회는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대부분의 작품이 팔렸답니다. 하지만 특별히 관심 있는 화가가 계시다면, 저희 직원이 기꺼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고마워요. 저는그냥 둘러보고 싶어요."

"저희 방명록에 서명하시겠어요? " 아가씨는 세련된 가죽 장정의 방명록을 내밀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 화랑에서 앞으로 열리는 전시회 날짜는 손님께 계속 알려드릴 수 있답니다"

현재로서는 액자 하나 구입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재너는 펜을 들어 서명하고 입구를 떠났다.

그림에 대해 좀 더 알았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캔버스에 캔버스로 천천히 이동하면서 생각했다. 실내 장식가가 대신 고르게 맡겨 두는 대신 이런 그림을 직접 사서 아파트에 걸어 놓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또. 그녀는 거기서 멈추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에게 허락된 세 번째 소원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엇을 소원으로 빌어야 할지도 몰랐다.

거짓말. 그녀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게 그를 찾아 엠플레삼까지 갔던 이유이기도 했다.

단지 그 생각을 하도록 스스로를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심지어 어깨 위에 부드럽게 닿는 그 손을 느꼈을 때에도, 그의 목소리가 아주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에도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때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직 소원을 빌지 않았어,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라는 생각뿐이었다. 다음 순간, 원과 삼각형이 미친 듯이 주위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그녀를 미지의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소원 말이오?" 제이크가 물었다.

그녀는 사무실이 분명한 어떤 방의 편안한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에는 그가 그녀를 안아들고 깜짝 놀란 사람들을 헤치고 경사로를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란트렐 씨? 그분이 갑자기 쓰러지신 거예요?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면 구급차라도"

"아뇨" 재너는 바짝 마른 입과 벙글거리는 머리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뇨, 난 괜찮아요"

금발의 접수계원 아가씨는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약간 더 나이가 든 다른 여자는 서둘러 커피를 준비했다.

이제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곳의 거대한 책상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아 있었다. 우아한 짙은 색 양복과 비교적 갈끔하게 다듬은 머리 때문인지 그는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사실 그는 낯선 사람이라고, 재너는 똑바로 일어나 앉으려고 애쓰며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무기력하고 약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이크 브라운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황홀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배웠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사람과 그녀가 다시 돌아가 찾으려 했던 장난스러운 집시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제이크 랄트렐. 이곳의 화려하지만 노골적이지 않는 사치스러움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힘을 가진 남자. 그녀가 전혀 모르고 알 수도 없는 남자였다.

재너는 초조하게 치맛단을 끌어내리고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기절하기 전에 소원이 어쩌고 하는 말을 했소"

"내가요?" 그녀는 소리내어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지나치게 혹사당한 신경계에 미친 충격의 효과로 생각하세요"

"그렇게 충격이었소?"

", 그럼요. 결국 자동차 정비공이 화랑 주인이 된다는 건 대단한 변신이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시 찾았을 때 당신이 내 발치에 쓰러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당신은 나를 찾은 게 아니에요. 내가 걸어 들어왔어요."

"행운이 따랐지. 하지만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소. 그럼 당신이 그런 식으로 사라지게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했던 거요?"

재너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이 내 소망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기를 바랐어요"

"나는 내 소원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순순히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개관식 초대장을 받았을 때 전혀 짐작하지 못했소?"

". 어떻게 짐작했겠어요? 수지 스미스 앞으로 온 것도 아니잖아요."

그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 입술, 그리고 가슴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어쩌면 그렇게 적었어야 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우리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소. 이번에는 어떤 가식도 없어"

"언제 알았어요, 내가 누군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소." 그의 표정은 수수께끼 같았다.

", 아마도 그랬겠죠.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 짧은 만남 때문에?"

"나는 있었소. 우리 사이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나 많소, 수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올리고, 또록또록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안다면, 내가 언제나 재너라고 불리는 것도 아실 텐데요."

그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그게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대단한 신경이군요."

"그런 신경이 없었다면 이 날까지 살아오지 못했을 거요. 당신도 아버지 회사라는 안전한 장소를 떠났으니 신경줄이 튼튼한 것을 어느 정도는 증명한 셈이오." 그가 매끄럽게 덧붙였다. "진짜 세상을 살아 보니 어떻소?"

그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재너는 그의 조사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했을까를 생각하며 숨을 들이켰다. "흥미로와요."

"일자리는 찾았소?"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결국 못 찾았다는 얘기군"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거절당한다는 것은 당신에게는 새로운 경험이겠군, 수지"

"수많은 새로움 중의 하나죠" 그녀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가스 요금, 대중교통 수단, 그리고 욕실 나눠 쓰기, 심지어 완두콩을 굽는 수천 가지 방법까지 알게 되었죠."

"웨스트콧 투자회사는 왜 그만두었소?"

그것은 그녀가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었다. 물론 제이크에 대해서 뭔가를 예상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의견 차이 때문이에요" 그녀가 대충 둘러댔다.

"당신 아버지와?"

"또 누가 있겠어요? 소문과 달리 나는 회사 돈을 스위스 은행 계좌에 넣지 않았어요."

그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 안 그래도 그런 소문이 귀에 들려왔던 참인데"

무릎 위의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어떤 말을 들었는데요?" 재너는 유쾌한 듯한 음성을 내려고 애썼다.

"철저하게 단절했다더군, 개인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나는 예전에 당신이 살았던 곳에 가보았지만 경비원은 당신이 떠났다고 했소"

나도 당신이 예전에 살던 곳에 가보았더니 비어 있더군요.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너가 쌀쌀맞게 말했다. "왜 굳이 그런 수고를 했는지 모르겠군요."

"말했잖소, 우리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고"

"우습군요. 우리는 만나서 약간의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리고 헤어졌어요. 그게 내가 원하는 방식이에요. 오늘 여기 온 것은운 나쁜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그렇소? 하지만 당신은 하룻밤의 정사를 즐기는 타입이 아니오, 수지"

"그 모든 연구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제이크는 입을 비틀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이라고 말하겠소."

"물론 맞는 말이겠죠. 나는 평소에는 그 날 밤처럼 행동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꾸 그 날 일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되풀이하는 것도 싫구요."

"그건 내가 하려던 제안이 아니오." 제이크는 책상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그녀 옆에 앉아 손으로 턱을 잡아, 그녀의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얼굴을 향하게 했다. "그 동안 힘들었던 모양이군. 체중도 줄고, 눈 밑에 커다란 그림자가 생겼소."

"칭찬해 주어서 고마워요."

"난 사실을 얘기하는 거요" 그가 그녀를 놓아 주었다. "오늘밤 식사를 함께 합시다."

그것은 요청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재너의 몸이 굳어졌다. 이것은 그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안 돼요."

"나와 함께 식사하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소?"

"편집증 환자처럼 굴지 말아요. 난 바빠요, 그게 전부예요."

"내일 밤은 어떻소?"

"내일도 안 돼요."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비싸게 구는 거요, 수지?"

"당신도 어두운 밤에 스쳐 지나가는 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거에요. 나는 이 문제를 그렇게 남겨 두고 싶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짙은 눈동자가 최면을 걸 듯이 그녀의 눈을 강렬하게 응시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지 않았소, 수지. 우린 충돌했소."

"글쎄요, 누구나 한 번쯤은 실수를 하게 마련이죠. 나는 그 일을 실수로 생각하겠어요. 하지만 일을 더 악화시킬 마음은 없어요." 그녀는 무릎 위로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궁금한 게 있어요. 당신은 왜 엠플레삼에 있었던 거예요?"

"집을 봐주고 있었소"

", 제발요" 그녀는 냉소적으로 말하며 주위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당신은 이런 곳을 소유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말 시간을 관리인으로 보낸다는 말이에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오.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처치 하우스를 관리하고 있소."

"하지만 그 집은 고든 씨의 소유라고 했잖아요."

"고든 란트렐이오."

"그것도 거짓말을 했군요."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게임을 원할 사람은 당신이었소. 나는 다름대로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을 뿐이오."

"어련하시겠어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당신의 정비공 연기는 참으로 그럴듯했어요."

"고맙소. 하지만 완전히 꾸며 낸 얘기는 아니오. 그 정비소 주인인 스티브는 이제 반쯤 은퇴한 상태요. 그래서 일이 없을 때는 내게 그곳을 빌려 주지. 그 대가로 나는 전기 요금을 내고 말이오."

"고결함의 표본 같으신 말씀이군요."

"재규어 같은 클래식 카를 손보는 작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아니 그 중의 하나라고 해야겠지."

그는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유쾌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과 곡선을 그린 단단한 입술은 그녀에게 강력한 마력을 발휘했다. 재너는 벌떡 일어났다. 너무나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몸이 기우뚱거렸다.

"조심하시오" 그도 역시 일어나 그녀의 팔꿈치를 붙들어 주었다. "다시 기절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소."

"그럴 리 없어요. 습관적으로 기절하진 않으니까요. 아마아마 더워서 그랬을 거예요."

"설마. 화랑 내의 온도는 주의 깊게 조절되고 있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긴 조절이라면 당신도 일가견이 있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요." 재너는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 날 밤의 여자는, 엘플레삼에서의 그 여자는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그는 매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내게 묻는다면 당신에게 진짜 삶이 시작된 거라고 말하겠소, 수지"

"제발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그녀가 좌절감에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수지라는 사람은 없어요. 결코 존재한 적도 없다구요."

"그 말을 들으니 유감이오. 나는 그 이름을 그리워할 거요." 그는 의도적으로 잠시 말을 끊었다. "수재너"

"나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요."

"이유를 말어도 될까?"

"어머니의 이름이 수잔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어머니를 기억나게 하는 모든 것을 고통스러워 하셨어요. 그래서 나는 재너가 되었죠."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당신이 열심히 부정하고 있는 짧은 몇 시간 동안을 제외하고는"

"나에겐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겠죠."

"그와는 반대로 당신의 고백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유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만 당신을 놓아 주겠소, 웨스트콧 양. 한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그게 뭐죠?" 재너는 달아날 준비를 하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이 귀찮은 인터뷰의 처음에 내가 던졌던 질문이오. 나는 당신이 무슨 소원을 빌고 있었는지 알고 싶소."

"쉬운 질문이로군요. 당신과 내가 애초에 만나지 않았기를 빌었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그가 가볍게 말했다. "이렇게 슬플 수가.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데도 말이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기억을 더해 주겠소."

제이크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기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분노를 담고 빠르게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 그와의 키스가 시작되자마자 그녀는 격렬한 환희에 울고 싶었다. 재너는 그의 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녀의 몸을 끌어안는 강력한 팔을 느끼고 싶었다.

재너는 욱신거리는 입술을 손으로 누르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말이 그의 아픈 곳을 찌른 모양이었다,.

"게임은 끝났어요. 안녕히 계세요. 란트렐 씨"

"잘 가시오, 웨스트콧 양"

그는 다시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사무실 밖으로 안내되었고, 힐끗힐끗 훔쳐 보는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경사로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꽝하고 닫힌 그의 사무실 문소리는 바깥 거기로 나서는 내내 그녀의 머릿속에서 기묘한 종결 선언처럼 메아리쳤다.

 

재너는 반짝이는 호수 근처의 벤치에 혼자 앉아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지난 한 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을 정리해 보려고 여전히 애쓰는 중이었다. 제이크는 이곳 런던에서 그녀는 찾고 있었고, 동시에 그녀는 엠플레삼으로 그를 찾으러 갔었다.

그가 그녀를 찾으려 한 이유에 대단한 미스터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재너는 씁쓸하게 인정했다. 그는 부인했지만, 그녀는 그들의 해결하지 못한 사항이 어떤 종류위 것인지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의 관계를 원래의 자리-침대-에서 다시 이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갑자기 떠나 버리는 바람에 그는 그녀의 진짜 신분에 호기심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별 어려움 없이 알아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그의 조사는 그리 깊은 곳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녀는 보호하듯이 양손을 배 위에 놓았다. 적어도 그는 아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를 찾으러 엠플레삼으로 달려갈 때조차도, 그녀는 제이크 브라운에게 그의 아이를 낳을 작정이라고 말할지 어떨지를 확신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제이크 란트렐에게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만은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비록 그가 힘을 가진 다른 남자들, 예를 들면 그녀의 아버지처럼 반응하며 낙태를 하라고 하지는 않더라도, 아기의 양육에 대해 돈을 지불하겠다고 고집하거나 그녀를 지배하려 들거나, 심지어는 그녀를 동정할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에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녀는 그의 연민도, 돈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것 없이도 잘살 수 있다. 그녀는 이겨 낼 수 있다.

어쩌면 런던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그녀를 찾지 못하도록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제이크 랄트렐은 <>라는 대답을 쉽게 받아들이거나, 그녀의 오만한 거절을 기거워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달아나야 한다. 그리고 숨어야 하리라.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왜 제이크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찾으려 애썼는지 알았다. 아주 명확하게. 비록 짧은 몇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녀의 반쪽을 만난 거라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녀 앞에 펼쳐진 반짝이는 수면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감히 흘릴 엄두가 나지 않는 눈물이 염치없게도 눈게 가득 고인 탓이었다.

 

8

재너는 촉촉해 보이는 분홍빛 햄을 열었다. 하지만 전혀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그녀는 샐러드와 감자를 곁들여 피클로 맛을 돋우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냥 햄은 빼고 피클 한 병을 다 비워 버릴까?

재너 웨스트콧! 이 아기가 신맛만 맛보면서 살길 바라는 거야? 확실히 아이를 가진 이후 그녀는 신 것을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오늘밤은 전혀 식욕이 없었다. 뭘 먹어야 한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뚜렷한 계획이 생겼으니까 힘을 내야 한다.

그녀는 북부의 거대 도시, 맨체스터나 리드로 옮길 생각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게 훨씬 쉬울 것 같았다. 그녀는 결심을 굳히며 이젠 모험을 해야 할 때라고 다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생각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기차보다 저렴한 버스를 타야하고 가장 싼 셋방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직업안내소를 들락날락해야 하리라.

어떤 일이라도 할 거야.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아파트를 구해 놓아야 한다. 출산 후에는 휴가를 받으면 된다.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격려했다. 제이크 란트렐이 나를 찾아 런던 시내를 헤매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다.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몰래 이사한 건 아닐까 해서 집주인이 보러 온 것이 틀림없다고 재너는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이렇게 빨리 달려오실 줄 몰랐"

"다시 또 기저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이크는 쇼핑백 가방과 와인 한 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 "보다시피 난 이번엔 양손에 이렇게 뭘 잔뜩 쥐고 있으니 당신을 붙잡아 줄 수 없을거요."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나랑 저녁을 먹자고 청했잖소. 그런데 당신은 거절했고. 그래서 당신과 저녁을 먹으로 직접 온 거요. 손님 대접을 잘 받으려고 내가 직접 먹을 것까지 가져왔소."

"정말 당신은 이게 남을 즐겁게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괴롭히는 거예요. 당장 가세요."

그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친절하게 할 수는 없소?"

"친절이 베풀어질 때까지 기다리시죠"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재너가 애써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녀는 그가 빨리 가버리기를 바랐다. 쇼핑백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가 그녀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중국 음식인 모양이라고 그녀는 군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정말 나랑 저녁 안 먹겠소?" 그는 그녀의 등 뒤 테이블 위에서 벌써 말라빠진 듯 끝부분이 꼬부라진 햄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먹으려던 음식도 맛있게 생겼지만 말이오."

"정말 그냥 음식만 가버릴 수 없어요?"

"그건 안 될 말이지, 수지" 그의 미소에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기운이 서려있었다. "이건 2인분 식사요. 당신은 나누는 걸 배워야겠군."

"다시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그렇소. 당신은 분명히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오. 아침엔 그저 기분이 안 좋았다고 합시다. 난 보상을 하고 싶소."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소름 끼치게 누추한 이곳에서 혼자 먹는 것도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소. 이곳이 찾을 수 있었던 최상의 장소였소?"

"댁이 찾아보시죠. 내 일에 전문가인 양 행세하는군요. 내가 거절했던 곳을 좀 찾아가 보셔야겠군요."

"아니, 그러다간 이 음식을 못 먹게 될 거요." "날 들어오게 할 거요, 아니면 바삭바삭한 오리구이와 돼지고기, 새우에 블랙 빈 소스를 얹은 이 기막히게 맛있는 중국 요리를 그냥 버리게 할 거요?"

그녀는 마지못해 비키며 말했다. "그럼, 할 수 없지요."

"정말 황송하군." 그는 은박 호일에 담긴 음식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젓가락을 가져왔소, 그리고 이것도" 그는 짧은 길이의 끈을 내놓았다.

"이건 뭐예요?"

"난 당신이 내 손을 뒤로 묶으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물론 그 경우엔 당신이 날 먹여 줘야 하오."

그녀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장난치지 말아요. 난 정말 당신을 묶고는 나 혼자 저걸 다 먹어 버릴 수도 있어요."

"재너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당신은 아니오, 수지"

"그만둬요. 내가 두 개의 인격체로 나누어진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지" 그는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느라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잔 있소?"

"난 와인은 안 마실 거예요" 그녀는 선반에서 잔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나랑 안 마시겠다고 맹세라고 한 거요?"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저 맨 정신으로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 건 걱정 말아요."

"그냥 친구로 지냅시다. 그 이상은 아니오. 잔을 가져와요. 건배를 하고 좋은 친구가 되는 거요."

그녀는 주저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건강을 위해 술을 안 마시기로 했다고 말하면 제이크가 알아챌 수도 있다.

"크리스털 잔을 기대하진 마세요" 몇 모금만 마시면 될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우정을 위하여! 수재너"

"우정을 위하여"

그녀는 그를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는 이미 아버지 제럴드 경처럼 고집이 세고 무조건 자기 뜻대로 하며 교묘하게 속임수를 쓰려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녀는 다시는 그런 조정을 받으며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음식은 맛있었다. 한창 배가 고플 때 딱 맞게 먹고 싶은 음식이 배달된 것처럼 그가 시간을 맞추어 온 게 신기했다. 재너는 바삭한 오리고기를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어 치웠다.

"훨씬 낫군. 몇 주만 둘이 함께 노력하면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갈 거요."

그녀는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둘이 함께라니요?"

"바로 당신에게 필요한 거요. 내가 틀리지 않다면 그게 당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오."

"내 일에 그렇게 신경 쓰지 마세요. 대부분이 사람들 기준으로 봐도 난 괜찮게 사는 편이에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수재너, 난 당신을 알려고 노력하는 거요. 날 힘들게 하는군."

"난 내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하는 거예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뒷조사했다고 화난 거요?"

"당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날 괴롭게 해요."

"당신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한 데는 이유가 있소."

그녀는 그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입술 향내와 자신의 벗은 몸을 더듬던 그의 손길, 갑작스런 설레임, 갈망이 뚜렷하게 기억났다. 폭풍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을 추스르며 그가 과연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언젠가 그 이유를 말해 주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올해, 내년, 언젠가. 하지만 아마 그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갔다. "커피 마실래요?" 정중하고도 냉정한 목소리였다.

"난 서로 진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소."

"누가 주세를 정하죠?"

"아무 이야기나 합시다."

"좋아요. 란트렐 화랑에 대해 이야기해 봐요. 당신 화랑은 전 세계에 있는 건가요?"

"그게 우리의 목표요. 첫 번째 화랑은 고조부에 의해 뉴욕에 세워졌소. 석유로 돈을 벌었지만 예술에 쏟는 열정이 대단한 분이셨지. 무명 화가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작품들을 전시하는 게 그 분의 삶의 기쁨이었소. 거기서부터 이 모든 게 시작되었지."

"그분은 미국인이셨군요."

"그렇소. 놀란 것 같군"

"조금요. 당신은 전혀 미국인 억양을 쓰지 않는걸요"

"우리는 국제적인 가족이오. 할머니는 프랑스인이고 내 어머니는 영국인이오. 난 여기서 학교를 다녔소."

", 그래요. 그래서 당신 아버지가 엠플레삼에 별장으로 사용할 집을 샀군요."

"그게 한 이유이기도 하지."

"하지만 런던에는 왜 이제서야 개관했죠? 약간 이상하군요."

"내 선조들은 다른 일로 바빴었나 보지. 언젠가 열려고 했소. 개관식에 참석 못했다니 좋은 구경을 놓쳤군."

"굉장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요. 공간 구성이 잘 되었더군요."

"새어머니의 안목이지"

"새어머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소."

"어머나, 미안해요. 괜한 걸 물었군요. 그 심정이 어떤지 알아요. 친어머니는 기억나요?"

"그럼, 분명히 기억하오."

"그럼 그나마 다행이군요. 난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기억을 못해요. 새어머니와는 잘 지내나요?"

"그렇소. 훌륭한 분이시지. 아버지도 덕분에 행복해지셨소."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결혼을 다시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홀로 지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예요."

"외로움은 때론 사람을 망가지게 할 수도 있지"

재너는 뜨거운 물을 커피 잔에 부으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가 중 한 사람이에요. 망가진다는 것과 거리가 멀다구요."

"내 말을 정정하지. 난 그가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심스럽소."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왜 아버지와 다툰 거요? 수지"

"당신이 풀어 놓은 수색대가 산업계 스파이 노릇은 하지 않은 모양이죠?"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후회했다. 제이크든 누구든 웨스트콧 투자회사에 관해 정탐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의 비밀이 들통 날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스파이 노릇도 하오. 하지만 난 당신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소."

"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그냥 흔한 호기심이 아니오. 난 돕고 싶소, 수지. 친구란 그런 거요."

"무슨 뜻이에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척 고립감을 느낄 거라는 이야기요."

"그럼 당신이 아서 왕이나 되는 것처럼 달려와서 구해 주겠다는 거군요." 그녀는 커피를 따르려다가 손이 떨려 그만 흘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하겠소."

"당신은 이미 할 만큼 했어요. 커피나 마시고 얼른 가주세요."

침묵이 흘렀다. 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내가 정말 잘못했나 보군."

"음식 잘 먹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하지만 동정심은 다른 소중한 일에나 쓰세요."

"동정심이라니, 정말 미치겠군. 난 당신 친구가 되고 싶소."

"우리는 한 번 섹스를 한 사이에요" 그녀는 손이 거의 하얗게 질릴 정도로 의자 모퉁이를 꽉 쥐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는 갖지 말아요. 동정심을 구하려면 자선단체에 전화를 거는 게 나아요."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돌처럼 차가웠다. "당신이 이겼소." 그는 덧붙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소."

"그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의 전부예요."

그녀는 그가 돌아서는 걸 지켜보았다. 문이 닫혔고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는 차가운 냉기와 침묵만이 흘렀다. 그녀의 발아래 그가 가져온 끈이 보였다.

<당신이 이겼소> 그 소리가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는 듯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느 정도는" 목구멍이 메어오고 뜨거운 눈에는 눈물이 솟구쳤다.

 

"웨스트콧 양" 이웃 사람 하나가 문을 쿵쿵 두드렸다. "전화 왔어요."

재너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제이크가 떠난 후 그녀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었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밤새 희미하고 뭔가 알수 없는 꿈에 시달렸다. 그녀는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샌 것처럼 피곤했지만 벌써 점심때가 가까워진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누가 전화했을까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재너 웨스트콧입니다."

"안녕하세요. 퍼스트 어포인트먼트 사의 다이애나 맬런입니다. 어제 임시직을 구한다고 우리를 찾아왔었죠?"

", 하지만 현재로서는 런던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은데요."

", 문제없어요. 여권을 가지고 계시나요?"

", 왜 그러시죠? 일자리가 있나요?"

"그렇습니다. 오늘 오후에 회사로 찾아오시겠어요? 오후 3시가 어떨까요?"

재너는 좋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런던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크와 멀리 떨어질수록 좋았다. 그녀가 멀리 가버리면 그도 그녀에 대해 잊어버릴 것이고, 그녀 자신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완전히 그를 지워버릴 수 있다.

 

다이애나 맬런의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이애나의 설명을 듣자 그녀는 정말 안도감이 들었다.

"제출하신 서류에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고 되어 있더군요."

"학교 다닐 때 프랑스어는 모두 최고 학점을 받았어요. 이전 직장에서도 유럽건 계약을 체결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죠."

"당장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셨죠?"

", 하지만 이렇게 일찍 연락을 받을 줄은 몰랐어요."

"자주 우리 회사를 이용하시는 분이 소개해 준 새로운 고객이죠. 일을 의뢰한 분은 잠시동안 현재의 여비서를 대신해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임시 여비서를 찾고 있어요. 그분은 남부 프랑스에 살고 있는 영국 여자예요. 그 여비서가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잠시 일을 떠나는 바람에 임시비서가 필요해졌다는군요"

"그럼 내가 얼마 동안이나 일을 할 수 있나요?" 재너는 기쁨에 겨워 말을 이었다.

"적어도 6, 아니면 두 달이요. 일은 간단할 거예요. 코르뎃 부인은 남편을 위해 자주 사교 모임을 갖는다고 해요. 당신은 아마 사교적인 편지나 초대장 보내는 일을 맡아할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그 지역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쓴다고 해요. 누가 알겠어요? 언젠가 출판이 될지.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죠. 그 집은 칸 뒤편의 언덕에 있고,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가 있다는군요. 왕복 비행기 표를 그쪽에서 제공하고, 프랑스에 도착하면 운전사가 마중 나올 거예요."

"너무 좋은 조건이라 믿기지가 않네요."

"그렇죠. 하지만 에덴에는 항상 사악한 뱀이 있는 법이죠. 아마 여주인의 성질이 보통이 아닐지도 몰라요. 어쨌든 이 일은 임시직이고 최고의 보수를 제시했으니까요. 삼 일 후 도착한다고 통보해도 될까요?"

그녀는 맬런을 향해 미소 지었다. "준비는 다 되었어요. 정말 빨리 가고 싶어요."

 

허겁지겁 한 준비였지만 삼 일 후 그녀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었다. 비행기가 니스 공항을 향해 하강하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며칠 정도는 구경을 다닐 수 있겠지만, 여기는 일

때문에 온 거지 휴가가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는 코르뎃 부인이 우아하고 그 남편도 점잖은 사람이기를 바랬다.

그렇다면 모든 게 순조로울 것이다.

맬런이 준 서류에는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데스크에 문의하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로 부채질을 하며 데스크로 다가섰다.

"마드모아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안내 데스크에서 직업적인 미소를 띤 여자가 물었다.

"누구를 찾고 싶은데요. 코르뎃 부인의 운전사요. 그가 도착했는지 알아볼 수 있나요?"

"그럼요, 마드모아젤. 무슈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는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무슈? 운전사에게 지나치게 공손한 호칭이 아닌가? 그녀가 잠시 생각하고 있는 참에 손에 들고 있던 그녀의 가방을 누군가 낚아챘다.

얼른 고개를 돌린 순간 숨이 탁 막혔다.

"안녕, 재너" 제이크가 반갑게 미소 짓고 있었다. "프랑스에 온 걸 환영하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양 볼에 예의바르고 가볍게 키스했다.

 

9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그는 즐거운 듯 보였다. "보면 모르겠소? 마중 나왔지."

"당신은 런던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어제 날아왔소. 니스에 있는 화랑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내가 와야 했소." 그는 그녀의 가방을 들고 출입구로 향했다. 그녀는 그를 뒤쫓았다.

"멈춰요. 내가 여기로 올지 어떻게 알았어요? 코르뎃 부인이 말해 주었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건 아니오"

"! 이제 알았어요. 이 모든게 조작된 거군요. 일 같은건 애초에 없었고 코르뎃 부인도 존재하지 않은 거죠!"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자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초리는 거의 경탄에 가까웠다. 크림색 바지에 푸른색 실크 셔츠를 입은 제이크의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그 사실이 그녀의 분노를 오히려 더 자극했다.

"그런 말 말아요. 난 그녀를 15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소. 차 안에서 이야기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지 않소?"

"지옥에나 가요. 당신과는 어디에도 안 가요."

"여기에 마냥 있을 수는 없소.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잖소."

"당신 지금 이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군요." 그녀가 소리쳤다. "맘껏 웃어요. 브라운 씨. 아니면 란트렐 씨 누구건 간에! 난 영국으로 갈 거예요."

"영국행 비행기는 매진이오."

"좌석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그때까지 어디 있을 거요?"

"호텔에요"

"니스는 지금 한창때요. 관광객들로 꽉 찼지. 그는 그녀의 가방을 쥔 채로 이야기했다. "특급 호텔에 들어갈 돈은 있소?"

"그건 내 문제예요."

"아니오. 내 문제요. 왜냐하면 당신 말대로 내가 이 모든 걸 조작했거든"

"당신에겐 이럴 권리가 없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함께 프랑스 남부에 가자는 내 제안을 당신이 거절할 게 뻔했으니까."

"당연하죠. 난 그런 제안 같은 건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우리 사이는 완전히 끝났다고 이미 말했잖아요."

"이미 말했소. 그리고 난 받아들였지. 지금은 그런 문제를 이야기할 때나 장소가 아닌 것 같소. 하지만 내가 그날 밤 엠플레삼에서 생긴 일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오.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다시 시작하자고 여기로 부른 게 아니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잖아요? 왜 내가 여기 있죠? 내 건강을 위해?"

"그 비슷한 거요. 당신은 함께 하는 일이 뭔지 느낄 필요가 있다고 내가 말했잖소. 그리고 당신은 일자리를 찾고 있고. 이곳으로 당신을 부르면 일석이조인 셈이지"

"코르뎃 부인의 일자리가 진짜로 있다는 말인가요?"

"그 실비아 코르뎃의 일은 아니오. 그녀는 당신의 새로운 사장의 가정부지. 코르뎃 부인은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운전사의 부인이오. 당신 일은 실제로 있소. 이제 내 동기가 얼마나 순수한지 알겠소?"

"고맙게 생각할 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요. 당신이 주는 일자리는 반갑지 않아요. 당신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내 가방 돌려줘요"

"안돼. 내일이나 되어야 좌석을 구할 수 있을 거요. 24시간 이상 기다려야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당신을 오도 가도 못하게 놔두고 가진 않겠소. 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울 거요"

"그럼 있지도 않은 걸 있다고 하면서 나를 여기까지 유혹하지 말았어야죠."

"그건 아니오. 일자리는 있소. 당신의 새로운 사장을 만나러 에뜨왈(Etoile)까지만 함께 갑시다. 최소한 오늘밤 지붕 아래서는 잘 수 있잖소. 다음날 그래도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영국으로 가는 첫 비행기 좌석을 알아봐 주겠소."

"할 수 없군요" 솔직히 말해 무거운 짐을 들고 싼 잠자리를 찾아 니스 거리를 헤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코르뎃 부인과 일하는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내 고용인이죠?"

"내 새어머니"

그는 앞장서 햇살이 밝게 비추는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제이크 옆에 뻣뻣하게 앉아 검은 유리창 너머로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운전사 모리스가 일부러 니스와 아름다운 칸 사이의 아름다운 해변 경치를 따라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긴장했다. 그는 셔츠를 자연스럽게 접어 올리고 있었고, 잘 그을린 피부의 털까지 보였다. 그녀는 깨끗하고 남성적인 그의 향취까지 뚜렷이 맡을 수 있었다. 자신의 손과 입으로 탐험했던 그 남자가 아닌 완전히 처음 만나는 사이인 것처럼 그렇게 앉아 있었다.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 분위기를 깨고 싶었다.

"어떻게 내가 퍼스트 어포인트먼트 사에 연락한 걸 알았죠?"

"몰랐소. 하지만 논리상 그랬지. 내가 그 거리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돌아가면 다이애나 맬론과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그녀를 탓하지 마시오. 단지 그녀는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오."

"만약 내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다면요, 또 여권 기한이 지났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지요?"

"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을 거요"

"아무렴 그랬겠지요. 이류를 모르겠어요. 대체 왜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 난책임감을 느낀다고나 할까"

"그 일 때문에? 우리는 어른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하룻밤 사랑을 즐긴 게 처음은 아니었을 텐데요"

"내겐 흔한 일이 아니오."

", 내겐 영광이로군요."

"아니오. 하지만 당신이 어떤 감정을 갖든 그건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 될 거요"

"내일이면 당신은 마음의 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당신 새어머니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일 거예요. 하지만 난 떠나겠어요. 당신은 화랑 일에나 매달리세요. 날 내버려두고 말이에요. 내가 만약 명령받고 조정당하는 것을 원했다면 그냥 웨스트콧 투자회사에 남아 있었을 거예요"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거요?"

"누구나 선택할 권리는 있는 거예요"

"누구나 그런 건 아니지.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소."

"이제 그게 아니란 걸 알았겠군요." 재너는 고개를 돌려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서둘러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경치였다.

"춥소? 에어컨이 너무 센가?"

"아니에요. 얼마나 더 가야 되죠?"

"1킬로미터쯤. 그 집은 에뜨왈이라고 부르지. 별이라는 뜻이오. 재미있는 이름이잖소?" 제이크는 희미하게 웃었다.

"구름이 없을 때는 주먹만한 별이 가득 보이지. 손에 닿을 것같이 가깝게 말이오."

엠플레삼 에서처럼. 재너는 자신의 생각을 지우려 애쓰며 얼른 말했다. "그걸 볼 정도로 오래 머무르진 않을 거예요."

 

정교하게 조각된 철문과 담이 보였다. 문 앞에 다다르자 모리스가 리모컨으로 문을 열었고 그들 뒤로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저택으로 이어진 길에는 보초병처럼 가로수가 두 줄로 늘어져 있었다. 적갈색 기와지붕에 녹색 덧문이 달린 창문의 크림색 2층 건물은 예상했던 것보다 웅장하거나 위압적이진 않았다.

어두운 색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현관에서 나와 그들을 반겼다.

"코르뎃 부인이오. 내가 꾸며 낸 사람이 아니오."

그는 재너의 팔을 잡아 계단으로 이끌었다. 가정부는 정중하게 그들을 맞았다. 재너와 악수를 하면서 그녀의 검은 눈은 호기심으로 빛났다.

"마담은?" 제이크가 코르뎃 부인에게 물었다.

코르뎃 부인은 그들을 집 안으로 안내하며 뭔가 걱정스러운 듯한 태도였다.

오후의 태양빛이 진 뒤라 집 안은 시원했고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두운 실내로 들어서며 재너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홀의 중앙에 위치한 널찍한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계단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흰색 치마에 진홍색 블라우스를 입은 키 큰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선은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녹색빛으로 불타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낯선 사람이었지만 친숙해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 방에 걸린 초상화 속의 얼굴처럼 낯익었다. 재너는 갑자기 돌처럼 굳어졌다.

"대체 누구죠?"

"난 당신이 알고 있는 줄 아는데" 그의 팔이 그녀의 등을 가만히 부축했다.

"아뇨"

그녀는 햇빛 속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그녀는 집 안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이 믿을 수 없는 끔찍한 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괜찮소.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요, 내가 보장하지" 그는 계단위의 여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침내 내가 그녀를 데려왔어요."

그 여자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수지 내 아기, 내 사랑스런 아기" 그녀의 목소리는 벅찬 감정에 못이긴 듯 떨리고 있었고 깊고 허스키했다.

재너는 이제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와 있었다.

재너는 제이크를 향했다. "이게 뭐예요? 또 당신의 게임이에요? 이런 연극까지 하다니! 우리 엄마는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돌아가셨어요. 이 여자는 누구죠?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제이크는 그녀의 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잘 들어요. 당신의 어머니는 죽지 않았소. 그건 당신의 아버지가 사실을 감추기 위해 꾸며 낸 거요. 당신 어머니가 당신 아버지 없이도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엔 당신 아버지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던 거요."

"하지만 당신 어머니는 언제나 완전한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소. 당신 없이는 말이오. 오랜 세월동안 당신 어머니는 당신과 만나게 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소."

"아니야! 사실일 리가 없어, 절대! 어떻게 그런 일이"

"아버지는 내가 죽길 바랐던 거야" 수잔 란트렐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쩌면 그는 정말 내가 죽었다고 믿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 당신도 그 모든 것을 내가 믿도록 내버려 두었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난 두려웠어." 슬픈 듯 잠긴 목소리가 답했다.

제이크는 걱정스런 얼굴로 서 있는 가정부를 향해 말했다. "차를 거실로 가져와요. 아무래도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해야겠소."

"나를 탓하렴. 원한다면 나를 증오해도 좋아. 하지만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보렴."

긴 침묵이 뒤따랐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재너의 뇌리를 스쳤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하나씩 차례로 떠올랐다.

재너는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길 원했다. 모든 일을 다 지워 버리고 몇 달 전처럼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여 권력을 쫓아 열심히 일했던 여자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그 경솔했던 밤 이전으로.

하지만 그 여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스럽더라도 그녀의 어머니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해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치유되지 않는 상치처럼 그녀 자신의 남은 인생 내내 따라다닐 것이었다.

"좋아요. 듣겠어요."

 

"난 그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그를 사랑했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모든 걸 알아서 했지. 아버지는 빚만 남겼고 제럴드는 부자였어. 하지만 난 다른 사람이 있었단다. 피터라는 남자. 그는 막 엔지니어링 사업을 시작해서 약혼할 비용도 없었지. 난 화가가 될 생각이었고, 그를 기다리려고 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그녀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제이크는 그녀의 옆에 앉고 그녀의 어머니는 맞은편의 등받이가 높은 팔걸이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가운데 테이블에 놓인 뜨거운 홍차를 마시면서 재너는 떨리는 가슴을 약간 진정시켰다.

"피터의 회사가 파산했단다. 하룻밤 만에.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고 하셨어. 피터틑 아무 가망이 없다고. 그는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난 가끔 병원을 찾아갔지만 나중에는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어머니와 제럴드로부터 압력을 받았단다. 변명거리가 안되지. 하지만 그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다."

"상상이 가요"

"난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지.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포기하는 게 쉬었단다. 신혼여행으로 간 자메이카에서 제럴드는 피터가 죽었다고 전해 주더구나. 자살했다고. 제럴드는 마치 적자가 난 대차대조표를 그리면서 말하는 듯했다. 손해나는 거래나 한 것 같은 말투였지."

"난 피터의 파산이 제럴드 때문이었다는 걸 알았단다. 그는 피터를 망치기 위해 힘을 썼던 거야. 난 그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한다는 것을 알았지. 그때 난 제럴드를 떠났어야 했어. 하지만 그가 정말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단다. 우리는 가정을 꾸렸고 난 웨스트콧 부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지. 우리의 모든 일상은 웨스트콧 투자회사의 원칙대로 이루어졌다. 그는 나를 마치 트로피하도 되는 양 아름답고 재능있는 젊은 부인으로 자랑하고 다녔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 제럴드는 자신에게만 신경 쓰기를 바랐고 내가 그림을 쏟는 시간 때문에 화를 냈지. 집에서는 내 그림에 냉소를 보였지만, 사람들에게는 예술적 감각이 있는 취미 생활이라고 말하고 다녔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부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어. 난 그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았지. 그는 껍데기를 원했던 거야.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시계처럼 움직이며 다툴 일도 없었던 고분고분한 여자."

"얼굴 없는 초상화를 그렸던 게 그때였나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기 바로 직전이었단다. 도움을 청하는 울부짖음이었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임신 사실을 알고 화를 냈어. 극동 아시아로 긴 사업 여행을 가려던 참이었는데 의사는 내가 같이 갈 수 없다고 했거든. 그는 계속 얼마나 불편한지,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이기적인지 불평을 늘어놓았단다. 그러고는 갑자기 친절해지기 시작했다. 의사가 내 건강에 대해, 내 감정상의 동요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구나. 지금은 가족을 만들기엔 좋지 않은 때 같다고 말이야. 다시 생각해 보자고"

", 하느님" 재너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속삭였다.

"아마 난 멍청했는지도 모르지. 처음에는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단다. 말뜻을 깨닫고 난 너무나 두려웠어. 그가 런던으로 간 사이 난 집을 떠나 어릴 때 내 유모였던 사람의 집으로 갔어. 제럴드에게 편지를 썼지. 휴식이 필요하다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보자고"

"왜 완전히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려고 했어. 난 이혼을 요구하려고 했단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단다. 아이를 낳은 후의 계획을 떠들어 대고 방을 육아실로 바꾸자고 하더구나. 난 이제 모든 게 변할 줄 알았지."

"사람이 변하는 건 어려워요. 특히 아버지는"

"네가 태어났을 때 그는 너무나 기뻐했단다. 세상을 다 얻은 듯했지. 난 우리 결혼생활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를 데리고 집으로 온 후 바뀌었단다. 난 내 유모에게 널 돌보게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에이전시에서 추천한 젊은 여자를 데려왔지."

"난 그 여자가 싫었단다. 제럴드는 시간이 많이 든다고 모유도 먹이지 못하게 하고, 유모 일에 방해를 해서도 안 된다고 했어. 난 또다시 그를 따라 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어. 네 방은 다른 별도의 건물에 마련되었고 너와 나는 따로 떨어져 지냈단다"

"그래서 떠날 때 오히려 나를 두고 쉽게 떠날 수 있었군요"

"쉽게?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정말 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제이크가 일어나 그녀를 위로했다. "염려 마세요. 모든 일이 잘될 거예요. 이제 그만 이야기해요. 수재너를 방으로 안내할 게요."

"고맙다. 제이크" 수잔은 침착하려고 애썼다. "그 애를 찾아줘서 고맙다. 여기 데려와 줘서"

재너는 계단으로 향하며 제이크에게 거칠게 물었다. "나도 당신에게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하나요?"

"언젠가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당신은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놀랄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내 아버지가 계속 나에게 거짓말을 해왔고, 아버지 생각대로 되었다면 난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라는 걸 알았을 뿐이에요. 그게 충분치 않다면 죽은 줄 알았던 내 어머니가 내게 걸어왔고, 프랑스 남부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잘살고 있더군요. 정말 놀라운 소식이죠?"

"진정해요. 당신이 어떻게 느낄지 잘 알고 있소"

"당신은 절대 몰라요. 악몽을 거울로 보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녀는 멈춰섰다. "난 여기 머물 수 없어요."

"오늘밤만" 그는 문을 열고 한쪽에 작은 장미 문양의 크림색 침대보가 깔린 나지막하고 오래된 목재 침대가 놓여 있는, 복숭아색 벽지로 장식한 넓은 방을 보여 주었다.

"다 들을 때까지 기다리시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고 나서 결정하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봐요. 엠플레삼에서 내가 누군지 알았나요?"

그는 망설였다. "처음엔 몰랐소. 하지만 당신이 이름을 말했을 때"

", 그래요. 큰 실수를 했군요. 제인이나 바네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럼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내 갈 길을 갈 수도 있었는데"

"당신이 새어머니를 위해 어떻게 했는지 그분에게 말했나요? 온몸과 영혼을 다 바쳐서 당신을 온통 내던졌다는 걸 말이에요?"

"그런 게 아니었소."

"그런 유혹적인 장면 말고 당신이 내게 그 뉴스를 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그분에게 이야기해서 판단하게 할까요?"

"난 당신에게 말하려고 했소. 아침에, 하지만 당신은 떠나버렸지."

"그러니까 내 잘못이라는 말이군요. 당신의 교활한 계획을 망쳐 놓은데 대해 사과해야겠군요."

"아니오, 모두 내 잘못이오. 당신에게 손댈 권리가 없었는데. 이미 말했듯이 그건 잘못된 행복이었소. 난 그 후 줄곧 후회하고 있소."

"아닐걸요. 내가 후회한 만큼은 아닐 거예요. 이젠 가세요. 난 좀 쉬어야겠어요. 내일을 위해 힘을 다시 충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그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라보며 오랫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둘다 후회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난 사실은 그게 아니오. 난 당신을 여기 데려온 것은 물론이고, 당신과 만난 날을 저주하게 만들 어떤 이유도 만들지 않기를 바라고 있소."

그는 밖으로 나갔다. 재너는 잠시 굳은 듯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침대 가장자리에 쓰러져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10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자 재너는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듯했다. 적어도 몸은 가뿐하다고 우울한 기분으로 재너는 속삭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였다. 태어난 지 몇 주 동안만을 같이 지낼 수 있었던 어머니와 그 긴 세월을 넘어 이제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녀는 아까 욕실에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었다. 허리는 아직 굵어지지 않았지만 가슴은 조금 커진 것 같았다. 임신은 오랫동안 비밀로 지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 집의 그 어떤 사람도 그녀의 변화를 알아채서는 안된다. 진실이 밝혀지면 문제가 심각하다. 재너는 허리선이 위로 올라가 배를 감추기에 딱 좋은 상아색 드레스를 입으며 다짐했다.

제이크는 감정적으로 유약한 수잔 란트렐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음이 틀림없다. 만약 그녀가 자신이 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딸이 동기야 어쨌든 간에 의붓아버지에 의해 고의로 조작된 유혹에 걸려 들었다는 것을 알면 어떤 기분이 될까?

재너는 입술을 깨물며 그들의 행복을 깨뜨려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가족간의 유대란 중요한 것이다.

잠시 후에 그녀는 그들의 생활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수년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도 그저 사라지면 된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떠난 후 제이크의 우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와 아래층으로 향했다. 집안은 조용했다. 거실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나와 계단을 살폈다. 자신의 방 창문에서 보았던 정원 옆으로 수영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로 반대편으로 향했다.

"어머나, 너무나 아름답구나" 가까이에서 콧소리를 내고 있는 말을 발견하고는 재너가 소리쳤다.

말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기숙학교로 가기 전까지 조랑말은 그녀의 오랜 친구였다. 방학 중에 집에 갔을 때 빈 마구간을 보고 절망감에 빠졌던 그날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놈은 너무 커버렸어. 그래서 좋은 데로 보냈다> 아직은 어린아이였던 재너가 항변하자 아버지는 간단히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워. 넌 일 년 내내 학교에 가 있는 데다가 조랑말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다. 그리고 동물에게 너무 정을 주면 안 돼. 어른이 돼야 한다. 얘야>

그 이후로 개든 고양이든 동물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소용 없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손길에 말은 계속 콧소리를 냈다. 재너는 누군가 아치형 통로에서 정원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숨을 멈추며 재너는 제발 제이크가 아니기를 바랴T.

그녀는 더 이상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장하며 그와 얼굴을 대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고 이번에도 기도는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잘생긴 말을 타고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갈 길을 찾는 거요, 수재너? 나라면 그 말을 택하진 않을 거요. 그 말은 2킬로미터쯤 가다가 집으로 다시 향할 테니까"

"충고 고맙군요. 하지만 난 잠시 동안은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그는 말에서 내려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그 말밖엔 할 말이 없소. 어머니를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게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이오?"

"물론 의미가 있어요. 어떤 문제가 있었든지 간에 어떻게 자신의 아이를 버리고 떠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돼요. 게다가 그 오랜 세월동안 어떻게 내게 연락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았는지 말이에요"

"이런! 당신은 너무 아는 게 없소"

그의 어두운 눈을 보고 순간적으로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돌려 <구스타프>하고 부르자 키 작은 남자가 나타나 고삐를 쥐었다.

"이리 와요. 내가 보여 줄게 있소"

"싫어요. 이건 나와 어머니가 풀어야할 개인적인 문제에요"

"하지만 이건 그 차원을 넘어섰소. 그리고 난 이미 이 일에 깊이 관여했소. 기억하오?"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한쪽 편의 건초더미를 모다둔 집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재너는 손을 뿌리치려고 애썼다.

"건초더미 속으로 가는 건 아니오. 다시는 그런 기본적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요"

그는 그녀를 나무계단 쪽으로 안내해 위로 올라갔다. 친숙한 물감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위층은 대단히 넓고 깔끔했으며 한쪽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밝고 환한 빛이 그대로 내리쬐었다. 이젤 위에 캔버스가 놓여 있었고 반쯤 그려진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당신 아버지는 모든 집에 어머니의 스튜디오를 마련했나요?"

"그렇소"

"그렇군요. 그분은 자신의 꿈을 쫓기 위해 나를 떠났군요. 예술적 감각을 희행하지 않기 위해 말이에요."

"난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오. 난 누구도 때려 본 적이 없소. 하지만 웨스트콧 양, 예외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 당신을 내 무릎에 눕혀 몸부림 칠 때까지 실컷 때리고 싶소."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군요, 란트렐 씨. 여기에 날 데려온 목적이 있겠지요?"

"목적이 있었소. 하지만 그게 소용 있을지 의문이오. 당신은 마음을 닫고 있소. 당신은 어떤 식드로든 양보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소."

"난 당신 말을 들었을 거예요. 그날 밤 엠플레삼에서 라면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다른 방식의 양보를 원했던 것 같군요."

"내가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이미 말했잖소. 당신은 내가 엎드려 절이라도 하길 바라는 거요? 와인과 달빛 때문이었다고 할까, 아니면 둘 모두의 실수 때문이었다고 할까?"

"둘 모두?"

"그렇소. 내가 당신을 원했던 만큼 당신도 나를 원했소.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거요."

재너는 자신의 서 있는 땅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우리가 연관된 사람들이라는 걸 미리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문제될 만큼 연관된 건 아니오.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 개인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소. 게다가 수잔의 허락없이 비밀을 말할 수는 없었소."

"정말이에요?"

"그렇소" 그는 무릎을 꿇고 벽에 세워진 캔버스를 꺼냈다. "이제 이리 와서 이걸 봐요."

그녀는 주저하며 그 옆에 무릎을 꿇고 그림을 보았다.

"모두 처치 하우스를 그린 거네요. 모두 똑같은 그림이군요. 이 모든 게"

"더 가까이 와서 보시오. 이제 조금씩 다르다는 게 보이나?"

", 그래요. 아이가 있군요. 푸른 옷을 입고 강아지와 놀고 있어요. 그리고 여기엔 같은 여자아이가 조랑말 위에 있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이건 교복을 입고 있고, 이건 다 큰 모습이지."

"저 그림의 아이는 나군요."

"그렇소. 당신과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 당신의 성장 과정을 상상하며 그린 거지.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 지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을 거요."

"그럼 왜 어머니는 떠났죠? 떠나야 했다면 왜 날 버려두고 떠난 거죠?"

"그분은 노력했소. 그 모욕과 모멸감으로부터 자신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떠나야한다는 사실을 알았지. 새벽에 당신을 유모차에 태우고 짐을 꾸려 집을 떠났소. 당신 아버지에게 이혼을 원한다는 쪽지를 남기고. 그분은 유모였던 그레이스 모스의 집으로 가서 외국으로 떠나려 했소. 하지만 당신 아버지가 곧 따라잡았고 그분이 타고 있던 차를 길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했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재너는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차는 나무를 박았고 당신 어머니는 당신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소. 당신 아버지가 차 옆으로 와서 유모차를 끌어내렸지. 당신 어머니는 절대 그때 당신 아버지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을 거라고 했소. <가도 좋아, 수잔. 당신 멋대로 해. 당신은 더 이상 아내로서 가치가 없어. 하지만 아이는 데려갈 수 없어. 당신이 차 안에 있기에 이번엔 가볍게 끝날 수 없어. 당신이 차 안에 있기에 이번엔 가볍게 끝날 수 있었지만 다시 우리 곁으로 가까이 왔다간 당신을 없애 버릴거야. 맹세하지. 지금부터 당신이 죽은 거야."

", 맙소사. 어떻게 아버지가 그럴 수 있죠?"

"그분은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데리고 차를 몰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소.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지. 그리고 당신 아버지가 진심으로 한 말임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했소. 그분은 너무 두려워 당신 아버지를 막지 않은 자신을 탓했소. 그 이후 줄곧 당신을 아버지와 살게 한 자신을 탓했지. 당신을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 아버지와 싸울 수 없었기에 겁쟁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거요."

"그건 겁쟁이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자기 방어일 뿐이죠. 난 알아요."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당신 아버지를 떠난 거요?"

그의 손길은 그녀의 모든 감각을 깨어나게 했다. 빛이 온통 그들을 감싸는 듯했다. 그녀는 핏줄의 힘찬 박동을 느낄수 있었고 거의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던 그의 따뜻한 손길, 절망적일 만큼 그녀를 격정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떠올랐다.

이 수간 아이에 대해 말하는 건 너무나 쉬울 것 같았다. 그의 입술에 입 맞추고 그의 손을 이끌어 배를 만져 보게하고.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알게 모르게 나도 엄마를 닮았나 봐요. 어쨌든 난 내 영혼을 구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당신 어머니보다는 빨리 위로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소. 아버지가 당신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소. 사랑받고 신뢰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도록 하는 데는 말이오. 그분에게 기회를 줘, 수지. 다시는 그분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되오. 그리고 당신에게도 기회를 줘."

그녀는 그의 눈길을 마주 보기 싫었다. 염려가 담긴 부드러운 눈길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신은 계속 아버지 얘기를 하는데 정작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요."

제이크는 한숨을 지었다. "아버지는 파리에 있소. 오늘밤 돌아올 거요."

"그럼 그때 뵈어야겠군요. 그때까지 난 혼자 있고 싶어요."

", 그렇게 하시오."

이윽고 그가 나무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해졌다. 재너는 그림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잠시 후 뒤를 돌아본 재너는 수잔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너는 당황스러워하며 일어섰다. "제이크가 날 데려왔어요. 그림을 보여준다고"

"그 애가 너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고 말하더라. 하지만 난 그저"

재너는 말했다. "조랑말이 있었어요. 이름은 솔로몬이었죠. 난 그 말을 무척 사랑했어요. 아버지가 그놈도 없애 버렸죠."

긴장된 얼굴이 점차 사라지며 미소가 활짝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긴장도 누그러졌다. 그녀가 한 발짝 걸음을 내딛자 바닥에 세워 둔 그림이 쓰러지고, 그녀는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11

그날 저녁은 축제 같았다.

재너와 수잔은 스튜디오에서 두 시간 동안 웃고 울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는 제럴드 경과 사이가 틀어진 이유에 대해 캐묻지 않고 재너가 둘러대는 말을 믿었다. 재너는 어머니에게 굳이 말해야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빼고 제이크를 어떻게 만났는지 설명했다.

어머니는 그 후 겨우 그레이스 모스이 집에 도착했고, 신경쇠약에 걸려 몇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학창시절의 친구를 방문하러 포르투갈로 간 이후에야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내 친구 베로니카와 그 애 남편은 내게 잘해 주었단다. 내게 그림을 다시 그릴 힘과 용기를 주었지. 난 관광객에게 그림을 팔고 그림 공부를 원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단다. 그리고 법적으로 그의 동의 없이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이혼수속에 들어갔지"

"어떻게 란트렐 씨를 만났어요?"

"내가 몇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도중에 만났지. 난 그때 프랑스에서 일하고 있었단다. 난 사람들을 이끌고 마을 시장에 나가 스케치를 가르치고 잇었는데 마침 길을 지나던 고든이 그림을 보러 다가왔어.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만났지. 그는 참을성이 많았지. 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끌렸지만 피하기로 결심했단다. 하지만 결국 그가 이겼어. 그는 항상 이기고야 말지. 제이크도 그를 닮았어"

"그래요"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다를 거예요. 내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고든 란트렐이 이윽고 파리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 둘이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30년 후의 제이크의 모습이 저럴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유머 감각과 활기가 넘치면서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만큼 매력적인 노신사였다.

저녁식사가 차려지고 수잔이 샴페인 잔을 들었다. "건배해요. 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위해" 그녀의 다정한 눈길이 한 사람 한 사람 얼굴 위에 놓였다.

수잔은 재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돌아갈 용기를 주기위해 고든이 그 처치 하우스를 사는데 몇 년이 걸렸지. 난 그 집 유리창을 내다보며 네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상상하곤 했단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어머니는 없었죠. 대신 날 도둑이라고 생각한 제이크가 있었죠."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소." 제이크의 눈이 촛불이 켜진 테이블 너머로 재너의 눈과 마주쳤다. "지금도 잘 모르겠소."

그녀는 갑자기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이제 더 이상 못 먹겠어요. 벌써 2인분도 넘게 먹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얼굴이 붉어져 오는 것을 느기며 의자 등받이로 바싹 등을 밀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않았기를 바라며.

수잔은 행복에 겨운 듯 중얼거렸다. "널 친구들에게 소개해야겠다." 그녀는 남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여보, 우리 파티를 열어요."

"좋은 생각이오. 하지만 수재너도 쉴 시간이 좀 있어야지. 시간은 얼마드니 있으니까"

재너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끼여 들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여기 와서 정말 기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어요. 전 일을 해야 하거든요."

"여기서 하면 돼. 널 아무 일도 없이 부르지는 않았단다. 난 남부 프랑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화가들을 위한 책을 준비하고 있어. 뭐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니지만 말이다. 비서가 있었는데 어머니를 간호하러 가는 바람에 난 비서가 필요해졌어. 넌 경력도 있고 랄트렐 화랑 관리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난 임시직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른 곳에도 자리를 구했거든요." 재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쳇바퀴 도는 경쟁사회로 돌아가려고, 수재너?" 제이크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다.

재너는 그의 말에 흥분하여 즉흥적으로 말을 꾸며냈다.

"학교 친구 하난가 헤드헌팅 회사를 차리려고 해요. 내게 같이 하자고 제안해 왔어요. 파트너로 공동 경영할 수도 있어서 거절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예요."

침묵이 흘렀다.

"그래, 네 경력을 염두에 두어야겠지" 수잔이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실망이지만 네가 너무 멀리 떠나야 하지만 않는다면"

재너는 빈 접시를 밀어 내었다 "유감스럽게도 멀리 떠나요. 호주에서 일할 거예요."

테이블 위에는 충격으로 인한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제이크가 물었다. "어디 말이오?"

재너는 긴장했다. 호주에서 란트렐 화랑이 있을까? 그렇다면 시드니나 멜버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미건이 한 말을 생각해 내기 위해 애를 썼다.

"브리즈번"

"정말 멀고도 먼 곳이군"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동의했다. "하지만 다윈하고는 가깝군."

"그럼 우리가 가진 이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겠구나."

수잔은 애써 밝게 이야기하려고 눈물 겹고 노력하고 있었다.

"친구 이름이 뭐니? 얘야"

재너는 얼른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캐롤린 필립이에요."

드디어 방으로 돌아온 재너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어머니는 걱정어린 마음에 여걸가지를 물어왔고 고든 랄트렐 씨도 염려를 했다. 제이크는 예외였다. 그는 오직 앞에 놓인 코냑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가 호주로 그녀를 찾으러 온다해도 헛일일 것이다.

재너가 브리즈번에는 온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알 때쯤이면 그녀는 이미 영국 북부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리라.

그녀는 잠들고 싶었다. 그리고 수잔 란트렐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의 기색을 떨쳐내고 싶었다. 지난 스물 네시간 동안의 혼란과 격정을 모두 잊고 빨리 잠들기를 바랐지만 온통 눈앞을 사로잡는 영상 때문에 안정감을 가질 수 없었다.

재너는 일어나 가운을 입었다. 입이 바싹 말랐다. 목이 말라서 잠이 안오는 거야. 차가운 걸 마시면 진정되겠지.

그녀는 아래층 부엌으로 살금살금 걸어 내려갔다. 달빛에 가지런히 정돈된 실내가 반들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고 생수를 꺼내 선반의 유리컵을 꺼내는데 갑자기 부엌의 전깃불이 켜졌다.

재너는 너무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손에 들고 있던 유리컵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제이크가 거칠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 어슬렁거린 게 당신이었군. 난 유령인 줄 알았지"

"유령이라뇨, 목이 말라서요. 다른 삼을 깨우고 싶지 않았어요."

"난 자고 있지 않았소." 그는 재너 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구부려 깨진 유리를 주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내가 이걸 다 치울 때까지"

"내가 치울 수 있어요."

"발에 유리가 박히고 싶소? 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소."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직도 저녁 식사 때 입었던 우아한 정장 바지에 자연스럽게 윗단추를 풀고 상아색 실크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의 맨발과 얇은 가운을 걸친 잠옷 차림이 마음에 걸렸다.

"고마워요" 그가 유리를 다 치우고 나자 재너가 말했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군요. 조용히 물을 가지고 방으로 가야겠어요."

"당신은 날 놀래켰소. 목이 너무 말라서 잠을 못잔 거요, 아니면 양심에 걸려서?"

"무슨 말이에요? 낯선 곳에서 자려니까 그런 것뿐이에요."

그가 속삭였다. ", 또는 낯선 침대라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쨌든 종이컵을 가져가는 게 안전하겠죠?"

"그런 건 없소. 대신 불면증을 치료할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녀의 커진 숨소리를 듣고 그는 더욱 크게 미소 지었다.

"무슨 말이에요?"

"티잔(tisane)을 권하려는 거요. 약초로 만든 차지. 하지만 당신은 그게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군. 당신이 조금 전에 한 폭탄선언이 얼마나 충격적일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봤소?"

"그럼요. 후회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행복한 대가족을 꿈꾸는 어머니가 미래를 계획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 볼 수 없었어요."

"대체 언제 그 획기적인 결심을 한 거요?"

재너는 밝은 목소리를 가장하며 얼른 말했다. "캐롤린이 몇 년 전에 이미 말했어요. 하지만 난 그때 웨스트콧 투자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라서"

"그래, 이제 또다시 기회를 가진 거로군. 흔치 않은 행운이오."

"난 언제나 운이 좋아요."

"당신의 행운이 당신 어머니께는 불행이오. 다시 한번 고래해 볼 마음은 없소?"

"넌 이해를 못하겠어요"

"이해될 거요. 난 당신이 왜 갑자기 다윈으로 가겠다고 결정했는지 의심스럽소."

"브리즈번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생각해 낸 거요? 만약 그렇다면 날 상관할 필요는 없을 거요."

"그 말은 당신이 떠나겠다는 말인가요?"

"나를 멀리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거요. 조금만 계획해서 움직이면 우린 마주치지도 않고 지낼 수 있소."

"제이크, 여기선 내가 남이에요. 당신을 당신 집에서 내좇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우리 둘 사이의 전쟁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새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소. 내가 떠나는 게 최상의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일을 쉽게 할 수 있소."

"당신 아버지는 어쩌구요. 당신을 곁에 두고 싶으실 거예요."

"아버지는 눈치가 빠른 분이오. 벌써 우리 사이의 이상한 기운을 알아채셨소. 아버지가 이유를 꼬치꼬치 깨묻기를 원하는 거요?"

"아니에요."

"다행히도 란트렐 회랑은 전 세계에 지사가 있소. 어디에 가더라도 특별히 변명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소. 동의하겠소?"

잘 모르겠어요. 난 겨우 독립했어요. 이렇게 빨리 다시 나를 위해 준비된 곳으로 속박되고 싶지 않아요"

"브리즈번에서 할 일도 마찬가지 아니오?"

"아니에요. 캐롤린은 사업을 확장시키려는 거고, 난 이렇게 보호와 특권을 누리는 환경 속에서 지내는 게 아니라 바쁘게 싸워야 할 거예요"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 당신은 정말 많이 변한 것 같군. 당신은 여왕처럼 특권을 누리고 살지 않았소?"

"그럼 그때부터 변했나보죠. 차 고마워요"

"차는 내가 가져다주겠소."

"난 유리를 그리 자주 깨뜨리지 않아요. 걱정 말아요."

"안 그렇다고?" 그는 싱긋 웃었다.

재너는 돌아서서 거의 뛰듯이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계단 뒤에 바싹 따라오는 그의 체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지나쳐 방문을 열고 중세의 기사 같은 자세로 그녀를 안내했다.

심장이 뛰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그녀를 따라 들어와 스탠드에 불을 켜고 침대 옆 테이블에 유리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곧 떠나려 했다.

그가 문 앞에 이르자 재너가 말했다. "제이크, 아래층에 서 한 말" "남은 시간 동안 좀 더 노력하면 안 될까요? 우리 서로 잘 지내보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힘들 것 같소."

"왜죠?"

"말해야 알겠소?"

그녀는 그가 움직이는 것조차 보지 못했지만 그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다른 한쪽 손으로 그녀의 목을 어루만지며 서둘러 키스했다. 그들의 입술이 만나자마자 그녀는 원초적인 열기에 휩싸였다.

미래가 없어도 좋았다. 오직 현재만이. 제이크의 달콤하고 불꽃같은 키스만이.

그의 몸짓은 부드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욕망으로 몸이 뜨거워졌다. 그들의 입술이 닿고 제이크이 몸이 바싹 그녀의 몸에 다가오자, 그녀의 욕구는 더 강해졌다. 그녀의 입에서는 부드러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그녀의 가운을 어개에서 벗겨 내리고 가슴이 드러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가슴에 대고 잠시 망설이듯 멈추었다. 그녀는 그가 뭔가 새롭고 성욕을 자극하는 그녀의 살 냄새를 맡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몸을 구부려 유두를 입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재너는 그의 그을린 피부에 입을 맞추고 그의 어깨와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이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비밀스러운 곳을 더듬자 그녀의 몸은 열기로 가득해졌다.

그년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 눕혔다. 내너는 기대감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 역시 그에게 계속 키스를 하면서 그의 목을 감싼 팔을 풀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가운과 잠옷을 벗겨 내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너무 사랑스러워. 이전보다도 더 아름다워"

그이 손가락이 그녀의 가슴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배를 살며시 애무했다.

그 단순한 손놀림에 재너는 갑자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기!>

그녀는 걱정스러웠다. 의사는 임신 초기의 성행위가 아기에게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조심해야 한다.

지금 같아선 의사의 경고를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다시 이렇게 유혹을 받았고 마법에 걸린 듯 자신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 작은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일이 생긴다면,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거야.

제이크가 자신의 옷을 벗으려고 그녀로부터 잠깐 떨어진 사이에 재너는 일어나 앉아 제이크의 손을 치웠다.

"제이크, 안 돼요. 우린, 우린 이러면 안 돼요."

그는 조용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더 이상을 그녀를 쳐다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래. 우리는 정말 당신의 어머니와 내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모독할 수는 없지." 그는 침대 가장자리로 움직이며 풀어 젖힌 셔츠를 추스렸다.

"내 말 들어봐요. 당신은 이해 못해요"

"난 이해하오" 제이크는 그녀의 손을 치웠다. 그의 목소리는 전혀 낯선 사람처럼 차가웠다. "난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소. 조금 전 당신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아니에요" 재너는 거의 울부짖었다. "내 말 좀 들어봐요"

"설명할 필요 없소. 변명도. 영국에서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중대한 실수였소. 난 그럴 권리가 전혀 없었소.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한다면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지."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난 떠나야 하오. 당신과 한 지붕 아래서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소" 그는 짧고 거칠게 웃었다. "난 당신에게 중독된 것 같소.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즉각적으로 끊는 것이오. 나도 그래야겠지. 내일부터"

문 앞에서 그는 돌아서며 냉소적이고도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티잔 잊지 마시오. 깊은 잠을 자게 해주고 좋은 꿈을 꾸게 해줄 거요. 우리 둘을 위해서. 잘 자요, 그리고 잘 있으시오"

 

12

"제이크가 떠나서 아쉽구나. 우리 모두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는데 말이야."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며 수잔이 말했다. 그녀는 접시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재너를 힐끗 쳐다보았다. "난 너희 둘이 친구가 되었으면 했는데."

"금방 돌아올 거요, 여보. 런던에서 일이 끝나면 곧."

"그렇겠죠. 하지만 때때로 그 애가 일 중독자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애 인생에는 화랑 일하고 구식 자동차뿐이잖아요."

"딱 맞는 여자를 찾으면 제대로 될 거요. 나처럼 말이오."

"언제나 그렇게 될까요"

"아마 오다가다 만나는 여자들과 즐기는 걸 그만둘 때쯤. 제이크도 우리가 만난 것처럼 누군갈르 만날 거요. 그 애는 단 한번 본 순간, 그리고 한 번만 만져보면 그 사람이 바로 찾아 헤매던 자신의 운명적인 짝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될 거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애는 파티 때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재너는 이런 식의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면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놀랍게도 감정적인 혼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티잔 차는 그녀에게 깊은 잠을 선사했다. 아침에 거울을 보았을 땐 다소 창백하고 눈이 들어간 듯했지만, 그래도 기운을 회복한 듯 보였다.

돌이켜 보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제이크가 막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는 <심각한 실수>가 이미 <재앙>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모든게 확실해졌다. 그에겐 그들이 함께 보낸 밤에 대해 후회밖에 없었다.

반면 미혼모가 처할 어려움과 외로움에 맞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후회란 없었다. 그날 밤 그녀를 향한 제이크의 마법이 무엇이었는지 그녀는 이제 확실히 알았다. 바로 사랑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2주가 지났지만 제이크는 돌아오지 않았다. 재너는 마음의 고통과 말 못할 비밀로 속이 탔지만 에뜨왈의 평화롭고도 한가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그녀는 수잔의 책 집필을 도와 주는데 대부분이 시간을 할애했다. 반 고흐, 키파소, 마티스와 르느아르에게 영감을 주었던 장소를 방문하여 사진을 찍고, 녹음기로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음하는 일이었다.

저녁에는 수잔이 육성으로 불러주는 생각들을 컴퓨터에 입력했고 수영을 하기도 했다.

재너가 싫다고 했지만 수잔은 선불 봉급이라며 충분한 돈을 은행 잔고에 넣어 주었고 파티를 위해 드레스를 사주기도 했다.

결국 재너는 긴 상아색 실크 드레스를 샀는데, 파티 때까지 만이라도 이 옷이 맞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코르뎃 부인의 맛있는 음식 탓이라며 웃어넘기기는 했지만 자신의 허리 사이즈가 전보다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티를 위한 준비는 순조로웠다. 수잔은 초대장을 보냈고,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몰려들 거야" 수잔은 답장을 정리하며 말했다.

"신경 쓰이지 않으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난 너무 행복해. 난 그저 그 날밤 파티 때 멋진 사람을 만나서 네가 떠나지 않겠다고 하길 바랄 뿐이다."

재너가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모르죠. 도와 드릴 일은 없나요?"

"없어. 파티 전문업체가 올 거란다. 그들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거든."

고든이 들어와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방금 제이크의 전화가 왔는데 오늘밤에 도착한다는군. 신디 와이브랜트와 같이 온다는군."

재너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또다시 시작인가요?"

"그런가 보오. 그 애는 굉장히 아름답지. 그리고 그 애 아버지는 우리 고객 중에서도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렇죠" 수잔이 웃었다. "아마 다음 파티는 그 애의 결혼식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재너는 입맛이 없었지만 보통 때처럼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간 그녀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제이크가 후회한 이유가 있었구나. 어떤 유혹이라 해도 물리치고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었던 거야.

<난 권리가 없었소> 그가 그렇게 말했었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 너무나 정확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의 행복을 깨는 것은 너무나 간단했다. 분명 그녀의 아버지가 즐겨 쓸 만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비록 비참하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제이크를 사랑했다. 그의 인생을 망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재너는 다짐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재너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파라솔 아래 그늘에서 책에 신경을 집중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물속으로 뛰어든 재너는 마라톤을 하듯 수영장을 수 차례 가로질러 급기야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수영장에서 나가려고 가장자리로 다가갔을 때는 숨이 찬데다가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아 수영장 밖으로 이끌었다.

"잘 있었소?" 밝은 색 바지에 푸른빛 셔츠를 입은 그는 다소 어색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가 어색해하는 이유를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잘 그을린 피부에 짧은 치마를 입고 긴 다리를 드러낸 조각상처럼 완벽한 신디 와이브랜트가 서 있있다.

"잘 있었어요?"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심지어 신디에게도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어요. 난 재너 웨스트콧이라고 해요. 당신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요."

"저도 제이크에게서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푸른 눈이 응시했다. "바로 당신이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고 지냈던 여동생이죠?"

제이크가 그렇게 말했구나. 재너는 미소 지었다. 수건을 들어 몸을 닦으며 마음속 심정과는 반대로 자신도 놀랄 정도로 공손하게 물었다. "여행은 어땠나요?"

"정말 좋았어요. 제이크가 그의 멋진 차로 여기까지 운전해 왔어요. 마침 사자우리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정말 굉장했어요. 우리는 오래된 방앗간처럼 예쁘고 아담하게 지은 강가의 작은 호텔에서 묵었어요.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었죠. 너무나 낭만적이었어요."

재너는 가슴이 아파왔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럼 실례하겠어요. 어머니가 날 찾고 있을 거예요. 할 일이 있거든요."

"재치가 있는 여동생이군요.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아첨하는 듯한 알랑거리는 말투였다. "어떻게 할래요, 허니. 더운 날씨에 계속 운전해 왔으니 수영으로 몸 좀 식힐래요?"

"좋아. 먼저 짐을 풀어야겠어. 우리 수영복도 챙기고"

"평소엔 상관없었잖아요" 신디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우리만 수영하는데 뭐 어때요?"

재너는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다시 재빨리 움직였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신디가 제이크의 옷을 모두 벗기는 걸 보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나중에 봐요" 그녀는 말으 마치고 최대한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껏 발을 내딛었다.

곧 이어 이제 더 이상 듣기 싫어진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드디어 탈출할 즈음 재너는 새로운 손님을 향해 그나마 남아 있던 친절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디는 테이블의 대화를 주도했다. 식사 내내 그녀는 재너에게 공손했고 수잔과 고든에게도 깍듯했다. 신디는 스스로 우아하다고 생각하는 손짓으로 식사 내내 그의 머리를 손보고, 있지도 않은 재킷의 먼지를 털면서 제이크의 소매에서 턱까지 쓰다듬었다.

거실에서는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신디는 오디오로 다가가 제이크와의 추억이 담긴 듯한 음악을 틀고는 그에게 춤을 추자고 했고, 제이크는 전혀 망설임 없이 흔쾌히 응했다.

재너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을 청하려 누웠다. 그때 조용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제이크요" 그는 손잡이를 돌리며 말했다. "문 열어요. 할 이야기가 있소. 뭘 가져왔소."

"아침에 볼게요."

"거의 아침이오. 당신은 어차피 자고 있지 않잖소. 뭐가 문제요?"

주저하며 재너가 불을 켜고 문을 열었다. "문제는 난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방해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내 앨범이" 그녀는 그에게서 얼른 뺏어들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가져갔군요."

"난 소파에서 발견한 거고 그냥 빌려 갔던 거요. 어머니가 확실하게 알고 있을 거요. 진작 돌려주었어야 했는데, 마음이 혼란해서"

"알겠어요. 어쨌든 고마워요"

"너무 고맙게 생각할 것 없소. 난 당신이 여행갈 때 필요할 것 같아서"

"여행?"

"호주 말이오. , 마음을 바꾸었소?"

"아니오. 안 바꿨어요. 잘 자요" 문을 닫으려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밤새 혼자 뭘 했소?"

"밤하늘을 봤어요. 여긴 런던의 하늘에 비해 너무 깨끗해요."

"공해가 없으니까"

"난 이제 자야겠어요."

"그래야겠지. 당신은 오늘 내내 피곤해 보였소."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손으로 재너의 턱을 들어올려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이오? 수지" 그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갑작스런 분노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떻게 이런 질문을 내게 할 수가 있는 걸까. 조금 있다가 그 나긋나긋한 여자에게 바로 달려갈 거면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난 아주 좋아요. 더워서 그럴 뿐이에요."

그는 뒤로 물러서싸. "그럼 더 이상 당신을 성가시게 하지 않겠소."

문을 닫고 돌아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절망스럽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더 이렇게 견뎌야 하는 걸까? 대체 얼마나"

 

13

재너는 두통과 함께 깨어났다. 폭풍이라도 몰아칠 것 같은 날씨였다.

식사를 하러 내려갔을 때 신디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오늘은 집에 있어야겠어." 수잔은 날씨 이야기를 했다.

"파티는 에정대로 한다고 전화를 해야겠네."

제이크는 재너를 응시하며 물었다. "오늘은 뭘 할 거요?"

"할 일은 많아요." 우선 두통약을 찾는 일부터 하고 싶었다.

"말 타러 가는 게 어떻겠소. 날씨가 나빠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소."

"몇 년 동안이나 타지 않았어요."

"한 번 배운 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오."

"글쎄요. 내가 주인공인 파티장에 기브스를 하고 가고 싶지는 않아요."

재너는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어제 한 작업을 프린트할까요? 한번 볼 수 있게요"

"그래, 드디어 일에 진척이 생기는 것 같구나. 고맙다"

그때 신디가 예쁘게 하품을 하며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나타났다. 재너는 그 틈을 타서 서재로 갔다. 서재에서 재너는 어머니의 말대로 일이 잘 진행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전 내내 일한 그녀는 정원으로 나가 코르뎃 부인이 들고 나온 신선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즐겼다.

갑자기 멀리 언덕 너머에서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내리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재너는 불현듯 말을 타러 나간 제이크가 무사히 돌아왔는지 궁금해졌다.

그 생각과 거의 동시에 그가 유리창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걱정이 부질없는 것이었다는 데 기분이 상한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날 체크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게 아니오." 그의 어두운 눈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런던에서 전화가 걸려왔소. 당신 아버지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군."

"아버지가? 그럴 리 없어요. 한 번도 아프신 적이 없었는데"

"사실이오, 수지. 심각한 것 같다는군. 당신은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소. 아버지가 공항에 전화하셨소"

흰 침대에 누운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힘과 권력, 무자비한 완력, 이 모든 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럼 얼른 서둘러야" 그녀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이 멈추는 듯했다.

수잔이 짐 싸는 것을 도와줘서 재빨리 준비를 끝낸 그녀는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국 여자 신디가 제이크 옆에 심각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입술은 조용히 움직였고 그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었다.

재너는 그제서야 그도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난 혼자 갈 수 있어요."

"이러지 마시오."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 운전사가 받치고 있는 우산을 그녀에게 씌우며 차로 향했다. "우리가 당신 혼자 보낼 줄 아오?"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모든데 현실로 다가왔다.

"들어올 필요 없어요. 이젠 돌아가세요. 신디가 당신을 가게 허락하다니 정말 친절하군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오."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가 만약 잡아 주지 않았다면 쓰러졌을 것이다. "지금 당신은 날 보낼 수 없을 거요. 안 될 말이지."

제럴드 경이 특실에 입원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크는 아직도 그녀를 잡고 있었다. 재너는 수잔과 고든도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사가 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녀는-너무나 늦게 왔기에-그녀의 아버지가 이미 저 세상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남은 모든 용기를 내서 기운을 차려야 했다.

그녀는 안락한 의자와 테이블 위에 꽃이 놓여 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위로의말을 전했다.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 날 아침 사무실에 도착하고서 심장발작을 일으킨 뒤부터는 줄곧 무의식의 상태였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수녀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가 애타게 찾은 수지가 당신이죠?"

"그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한 번도 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른 적이 없고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사용했던 이름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사실을 듣고 기뻤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녀의 옆에 있었다. 그들이 떠나자 그는 자신의 팔에 그녀를 감싸 안았고 재너는 울음을 터뜨렸다.

 

재너는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치우며 햇빛이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방이 굉장히 허전하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은 교회에서 조용하게 열렸다. 런던에서는 추모식이 행해졌다. 웨스트콧 투자회사의 신임 회장도 참석했지만 그에게는 힘겨운 싸움이 남아있었다. 이미 적대적인 합병에 관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집에도 문상객이 찾아왔고 하나씩 하나씩 그녀와 악수를 하고는 런던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가정부밖에 없었다. 재너의 요청으로 제이크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며칠동안 제이크를 보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가 돌아갔다면 이제 스스로 고통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그날 그가 예약해 놓은 호텔로 그녀를 안내했다.

주문한 음식을 조금 먹고 난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갔고 한밤중에 조용히 울먹이는 그녀의 침대로 그가 찾아왔다.

그는 침대가에 앉아 그녀가 울다가 지쳐 잠들 때까지 위로하고 안아주었다. 그녀가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친절했는지, 얼마나 힘 있게 그녀를 위로했는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회계사와 변호사, 웨스트콧 이사회 이사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도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녀는 호텔에서 며칠을 그와 함께 보냈다. 매일 밤 어둠 속에서 바로 옆 침대에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고문이었다.

하지만 거실에서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후 모든 것은 사라졌다. 그는 문간에 서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신다와 전화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날 저녁 재너는 그에게 모든 것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이제부턴 혼자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호텔로 나가 아버지의 집에 잠시 머물겠다고 이야기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말을 꺼냈다. <그게 최선일거요> 그러고는 떠나 버렸다.

 

그녀는 제럴드 경이 유언장을 고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남긴 것을 알고 놀랐다. 자신이 자란 집이며 주식, 경주용 말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으므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그녀는 제이크에게 물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고 이야기할 건가요?>

<아니오. 당신이 그러길 바란다면 하겠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었어요. 아마 어머니는 모르는 게 나을 거예요>

그녀는 더 이상 초상화도 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이 초상화는 필요 없다. 없애는 게 나을 것이다.

그녀는 런던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도 팔기로 했다. 이제 무엇을 할지 정할 때까지 다른 곳을 빌릴 수 있었다. 아직도 사라지려는 계획은 유효했고 이제는 그 가능성의 영역이 더 넓어진 것이다.

아버지의 책상에 앉아있던 재너는 문 밖에 테사 로이드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테사. 아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지 않았나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책상 쪽으로 다가와 마주섰다. 재너는 앉아 있던 의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뭐 마실 거라도 줄까요, 테사?"

테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완벽한 안주인에 완벽한 딸이라, 얼마나 웃기는 얘기야!" 그녀는 주먹을 쥐어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어떻게 감히 네가 그가 앉았던 의자에 앉을 수 있어? 이 암캐 같은 것아! 어떻게 네가 그의 자리에 앉을 수 있냐고?"

재너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내쉬고 말했다.

"당신이 흥분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때와 장소가 좋지 않군요"

"그래? 오늘 내가 널 교회에서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알아? 상주 노릇을 태연히 하다니, 이 마녀야!"

"난 아버지의 무남독녀예요"

"그리고 상속자지. 네 주변의 바보들이 네가 쫓겨났다는 것을 모르는지 알아? 그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널 완전히 제거할 계획이었다는 걸 사람들이 모르는 줄 아냐구"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네가 죽인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알지, 이 암태야. 네가 죽였어"

"심장병 때문이에요. 의사는 아버지에게 2년 전에 수술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고 하더군요. 유연정을 고칠 기회도 있었어요. 그랬더라도 난 상관 안 했을 거예요."

그녀는 그가 살아 있었을 때 그의 진정한 사랑과 이해를 얻을 수 있다면 온 재산을 맞바꾸어도 좋았다.

"그는 이 집을 사랑했어. 그가 죽어서 이 집에 네가 와 있다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게 다행이군"

"이제 그만!" 재너가 소리쳤다. "할 만큼 했을 테니 이만 돌아가요."

"내가 가고 싶을 때 갈 거야!"

그 여자는 재너를 향해 침을 뱉었고 재너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 여잔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신경쇠약에 걸려 어딘가 잘못된 거야. 재너는 귀을 틀어막았지만 분노와 증오에 찬 그녀의 목소리를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네가 매춘부 같은 더러운 계집이라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너무나 괴로웠을 거야. 이제 적어도 네 뱃속에서 자라는 더러운 씨를 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군."

테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재너는 친숙한 목소리가 조용하고 힘 있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너무하는군. 제 발로 떠나겠소, 아니면 경찰을 부를까?"

재너는 눈을 번쩍 떴다. 제이크가 테사의 팔을 쥐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죠, 당신은?"

"난 웨스트콧 양의 남편 될 사람이오." 제이크가 말했다.

"그 더러운 씨앗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지"

재너는 다리가 떨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아하니 당신 차로 온 것 같은데 똑같은 방법으로 얼른 떠나시오"

테사 로이드는 그를 노려보았다. 분노로 휩싸였던 그녀의 얼굴에서 붉은 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한풀 기가 꺾인 모양이었다.

"당신은 몰라요" 그녀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를 사랑했다구요."

"난 사랑이 뭔지 잘 알고 있소" 제이크가 쏘아붙였다.

"당신과 당신의 고용인이 빠져 있던 그런 따위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지" 주저함 없이 그는 그녀의 팔을 이끌어 문으로 향했다.

"핸슨 부인? 손님이 떠나니까 차까지 배웅해요."

두 여인인 눈앞에서 사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는 서재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괜찮소?"

". 이젠 괜찮아요.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어요. 날 미워한 것은 알았지만.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여긴 어쩐 일이죠?"

"장례식 도중에 도착했소. 난 핸슨 부인에게 당신과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했고 그녀는 내가 부엌에서 기다릴 수 있게 해주었소."

"난 당신이 프랑스로 가버린 줄 알았어요." 신디에게 말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랬겠지" 그는 거칠게 말했다. "말해 보시오. 우리의 아이에 대해 내게 언제 말하려고 했소?"

"어떻게 알아요. 이 아이가 당신의 아이인지?"

"왜냐하면 당신을 내 침대에 끌어들였기 때문이지. 난 당신의 매춘부니 더러운 여자니 하는 조금 전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당신은 사랑스럽고 너그럽고 지극히 순수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 어떤 말로도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 걸 믿게 만들 수 없을 거요. 게임은 그만둬요.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는지 말하시."

"너무 급작스러웠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무 의미도 없었어요. 그럴 리가 없었죠. 그저 하룻밤의 사랑이었다구요. 그건 더 이상은 없을 잠깐의 섹스였을 뿐이에요. 당신이 말했듯이 실수였어요."

"그랬소" 그가 천천히 말했다. "궁극적인 목적을 망각하고 당신을 향해 탐욕스럽게 손을 뻗은 명백한 내 실수였소. 난 당신과 거리를 유지해야 했고 당신에게 모든 것 말해야 했는데. 하지만 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소.

아침에 일어나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걸 알고 난 공포감에 사로잡혔소. 난 당신을 나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당신이 떠났을 때 좀 더 참을성 있게 행동하지 못한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소. 그날 밤이 다시 온다면 난 다르게 행동했을 거요. , 잘 모르겠소."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단지 하룻밤의 사랑이었다니. 20년이나 같이 살면서도 그날 우리가 느꼈던 것과 같은 육체적 정신적 교감을, 그런 완벽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오. 우리가 키스하고 서로에게 닿을 때마다 그게 진정하고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소. 난 당신도 나처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게 아침에 일어나 당신이 없다는 걸 알고 산산조각 나 버린 내 심정의 이유였고 당신을 찾아 지구 끝까지 가겠다고 생각한 이유였소."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당신을 만난 후 냉정해지기로 작정했지. 난 당신을 당신 어머니에게 데려가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완벽할 거라고 생각했소. 우리가 만났을 때 당신은 거리를 두었소. 당신은 방어막을 치고 <침입자 들어오지 마시오>하듯이 행동했지.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소. 어떻게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난 당신이 그저 육체적인 관계만을 원하는지 알았어요. 난 그걸 견딜 수 없었어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의 목소리는 자책감으로 떨려왔다. "난 그날 당신이 화랑에서 쓰러졌을 때 아이에 대해 눈치 챘어야 했소. 난 그저 당신을 만나 반가운 마음뿐이었소. 솔직히 그날 밤 이후 한 번도 그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소. 최악은 바로 내가 당신이 날 미워하도록 행동한 것 이외도 나 혼자만의 사랑이자 염려였다고 생각하고 당신이 나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해석한 것이었소"

"아니에요, 나도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죠.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난 당신을 찾기 위해 엠플레삼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난 거기 없었지"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땐 모든 게 변해 있었어요. 난 생각할 시간을 가졌죠. 난 두려웠어요. 당신이 그런 소식을 듣고 싶지 않을 줄 알았어요. 어쩌면 돈을 주고 해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난 심지어 아버지가 말한 대로 중절수술을 하려고도 했어요"

"당신 아버지가 그러라고 했소? 맙소사, 그래서 당신이 아버지와 싸운 뒤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것이군."

"그래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마리에요."

"더 이상 책상 건너편에서 이러고 있을 수가 없군." 그는 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난 일자리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 당신에게 결혼을 청하러 왔소."

"나랑 결혼하고 싶다구요? 하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난 반드시 해야겠소."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버지와 당신 어머니가 당신 없이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소."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면 실망하실 거예요"

"아니, 오히려 기뻐 날뛸 거요. 당신 어머니는 준비 중인 파티를 결혼 파티로 바꿀 거고."

"신디는요?"

"신디도 물론. 그녀는 들러리가 되어 줄 거요."

"신부 들러리?"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신디는 연극을 한 거요"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오랜 친구요. 신디와 그녀의 약혼자랑 저녁을 먹던 중 그들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소. 그들은 내가 바보처럼 굴었다며 구식 방법으로 질투를 유발하면 당신 속마음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지."

"그럼 모든 게 연극이었다는 말이에요? 어쩜 그럴 수가!"

"나도 신디의 연기에 놀랐소. 그녀는 내게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다고, 다만 스스로 부정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주었지. 그리고 참을성을 가지고 당신 곁을 지키라고 하더군" 그는 그녀를 잡고 흔들었다. "그 말이 맞는 거요? 남은 내 생애 동안 내내 내 옆을 지켜 주겠소? 아내가 되어 주겠소?"

"물론이에요."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부드럽고 따뜻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갑시다, 수지. 우리 셋이"

그는 미소를 띠고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