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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언덕

Bollnow 2024. 3. 14. 13:18

하늘의 언덕

Jessica Steele

 

1

울음을 참으면서 레기 바링튼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이 아파트에서 레기는 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등뒤로 문을 닫고 나자 바깥 세계와 차단되었다. 순간 레기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흑 하고 울음을 삼키더니 이내 엉엉 소리내어 울면서 침대에 쓰러졌다.

아침에 클라이브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후, 레기는 저녁이 되기를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약속 시간이 되어 그를 만나고 보니 모든 것이 레기의 기대와는 이만저만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레기가 클라이브와 교제하기 시작한 것은 두 달 전부터다. 어제,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어제, 레기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여느 때 같으면 두 사람이 만나지 않는 월요일인 오늘 아침, 클라이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을 때도 레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클라이브는 어느 전자회사의 기술관계의 일에 종사하고 있다.

"나에 대한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겠지?"

그의 열기 어린 질문에 레기는 ""하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어진 클라이브의 말은 기쁨에 빠져있는 레기의 마음을 무참하게 찢어놓고 말았다.

"나쁜 소식이야. 얼마 전에 우리 회사와 미국의 한 회사가 합작 회사를 설립했어. 그래서 연내에 설비를 완성하고 가동할 수 있도록 기술반을 파견했었어. 그런데 그 중의 한사람이 병에 걸려 내가 대신 가게 됐어. 내일 아침 출발해. 한 달쯤 그곳에 체류하고 새해에 돌아올 것 같아."

"그럼, 크리스마스를 미국에서 보내게 되겠군요. 그리고 베라 언니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없겠고요."

"알고 있어. 그러나 이번 일은 내 장래에 큰 플러스가 돼."

클라이브로부터 그러한 말을 듣자, 레기는 자기가 사적인 일을 입 밖에 낸 것이 부끄러워졌다. 클라이브는 레기의 실망감을 날려보내는 말을 했다.

"여태까지 우리는 월요일에는 만나지 않았지만, 오늘밤은 예외로 하는 게 어때?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내가 없는 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문제야."

클라이브가 청혼을 하려 하는구나. 레기는 그렇게 직감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실제로 청혼해 온다면 한달 동안 생각해 볼 필요 없이, 물론 좋아요 라고 쾌히 승낙할 수 있다.

작은 아파트 안이라 흐느낌 소리가 더 크게 메아리쳤다. 그 소리에 레기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작은 책장 위에 달린 시계 바늘이 열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곧 베라가 돌아올 시간이다.

레기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울고 있었던 것을 베라가 눈치 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동요까지 숨길 자신은 없었지만...

베라와 레기는 사이가 좋은 자매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조부모가 그녀들을 맡은 뒤로는 더욱 그러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 그래서 클라이브가 자기에게 구혼하려 한다는 것을 레기는 베라에게 알렸었다.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현관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는 소리가 들렸다. 레기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 앉아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때 금발 미인인 베라가 큰소리로 결혼행진곡을 노래하면서 기세 좋게 들어왔다.

베라는 레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노래를 그치고, 급히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

"언니, 아아 언니!" 레기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 사람... 클라이브에게... 부인이 있대!"

그 말을 듣자 베라는 최대한 상냥하게 레기를 위로해 주었다. 이런 멋있는 언니는 이 세상에 또 없으리라고 레기가 확신케 할 정도였다.

베라는 따뜻한 차를 끓여 와 차근차근 이야기하도록 해주었다.

"레기, 클라이브가 네게 특별히 의논하고 싶어 한 것이 동거를 하지 않겠느냐였단 말이지.....결혼이 아니라."

"클라이브는 나하고 결혼하고 싶대. 분명 그렇게 말했어. 그러나 부인이 이혼해 주지 않는대."

베라는 냉정한 눈길로 레기를 바라보았다. 레기는 베라보다 세 살 연하지만 성숙도가 지나치게 낮다. 베라는 이내 따스한 눈초리로 돌아가 상냥하게 물었다.

"넌 물론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겠지."

",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레기의 창백한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런 레기를 보는 베라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레기는 당황했다. "그렇다고 좋다고 한 건 아니야. 클라이브와 함께 있을 때는 동거가 그렇게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어-- 그의 이야기를 들고 보니 해결책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거든.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쇼크로부터 깨난 뒤에는... 그가 결혼 중이란 건 오늘 처음 들었거든. 그래서 지금 언니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어쩐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럼, 이제부터 대답을 생각해 보겠단 말이니?"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하는 데 대해 일반의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난 클라이브가 좋아. 그와 함께 있으면 다른 일은 모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기는, 다른 일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클라이브와 동거를 시작하고, 그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도 과연 태연히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방법이 있단 말인가? 클라이브를 단념하다니, 도저히 불가능해.

"레기, 지금까지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은 적은 없지만, 이번은 문제가 문제인 만큼 묻겠는데... , 클라이브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 있니?"

"물론 없어."

"클라이브 쪽에서 유혹은 했겠지?"

레기는 얼굴을 붉혔다. 그것으로 대답은 분명했다.

"레기, 너에게 동거는 무리야. 나 같으면 문제없을지도 모르지만. 너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거야. 혼자 있게 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테니. 둘 다 직장을 가지고 있으니 혼자 있을 때가 많을 거야. 그와 동거를 한다고 네가 행복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어."

그 후 몇 시간 동안 레기는 여전히 결심을 굳히지 못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베라 언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라이브가 좋은 건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몹시 화를 냈을 것이다. 난 그때 분명 화를 내지 않았다, 약간 쇼크를 받았을 뿐.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였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동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레기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저 쪽의 침대에서는 베라가 아직 자고 있었다. 레기는 베라가 깨지 않도록 가만가만 방을 나왔다. 베라는 출근을 하지 않는다. 지난달, 남미에서 갑자기 귀국한 후 댄서의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제임스와의 결혼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결혼할 때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일할 자리를 찾는 것은 극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 밑에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걸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레기는 잠시 동안 자신의 문제를 잊었다. 베라가 3월까지 남미에 체재하는 일자리를 계약했을 때, 제임스와 크게 다투었다. 남미로 가겠느냐, 아니면 자기를 택하겠느냐고 제임스가 베라를 다그쳤을 때는 이미 계약이 끝난 뒤여서 베라는 그대로 남미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제임스에 대한 베라의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도 되기 전에 베라는 계약을 파기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 이유가 오로지 제임스 자기 때문이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베라에게 청혼했고, 그 후 웰즈본에 집을 샀다. 웰즈본은 스트라트포드 온 에이븐 근처의 작은 마을인데 제임스는 여기서 건축가로 일하고 있다.

레기와 클라이브는 베라와 제임스를 따라 그 집에 가본 적이 있다. 그날 레기와 클라이브는 스트라트포드의 강가를 산책했었다.

레기의 생각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클라이브는 오늘 미국으로 출발한다. 레기가 스스로결단을 내리도록, 미국에 가서는 편지를 내지 않겠다고 그는 말했다.

화요일의 근무시간이 끝나자 레기는 타이프라이터의 커버를 씌웠다. 그리고 낡아빠진 미니 카로 런던 교외를 달려왔다.

베라는 오늘 웰즈본에 갔다. 집 안을 꾸미기 위해 여러 곳의 치수를 재기 위해서 간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되도록 제임스와 함께 있고 싶어서다.

12월치고는 이상하게 따뜻한 날이다. 지금쯤 클라이브는 미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출발 전에도 전화하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레기는 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역시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아파트의 현관 벨이 울렸다. 레기가 나가니 단정한 옷차림의 여성이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나이는 레기보다 두세 살쯤 윌까. 여자는 용건은 말하지 않고 계속 레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레기가 말을 꺼낸 것과 동시에 그녀도 입을 열었다.

"당신이 레기 바링튼?"

"" 레기의 대답을 듣고 여자는 이상하게도 기가 꺾였다.

"당신이 아름다운 분이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실례입니다만, 전 당신을 처음 뵙는데요."

"제가 당신을 찾아온 걸 안다면, 클라이브는 화를 내겠지만 아무래도 찾아뵙지 않을 수 없어서..... 전 아이린 워커예요. 클라이브의 아내죠. 오늘 아침, 아침식사 전에 클라이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미국으로 떠나게 됐는데 그 전에 잠깐 집에 들르겠다고. 저는 클라이브가 크리스마스를 외국에서 보내기 때문에 아이들을 만나려고 그러나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아이들?"

"클라이브는 아이들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요. 그러나 그는 자식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토요일에는 항상 아이들과 놀러나가니까요."

레기가 토요일에 클라이브를 만난 일이 없던 것은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상황이 벌어져 얼이 빠져서, 레기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토미가 여섯 살, 던은 다섯 살이죠."

레기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아이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클라이브가 출발하기 직전에 집에 들른 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린으로부터 이혼의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저는 거절했죠. 그제서야 클라이브는 당신 이야기를 하더군요.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아이린은 여기서 말을 끊었다.

레기는, 아직도 그녀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치심이 레기를 덮쳤다. 아이린은 자제심을 되찾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싫다고 했기 때문에 클라이브는 화를 냈죠. 그러나 저는 그 이상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거절했죠. 그리고 그 후는 다른 이야기, 주로 금전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아이들 양육비가 제겐 중요하더군요. 그래서, 만약 남편이 외국에 있는 동안 사고를 당하면 어떤 보장이 돼 있느냐고 물었죠.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험금이 나올 때까지 아이들이 성장을 멈춰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이린이 아이들 이야기를 입에 담을 때마다 레기는 타격을 받았다. 레기는 다만, 자기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클라이브는, 그런 문제는 걱정 말라, 모두 확실히 해두고 있다. 지금도 제가 그의 아내로 되어 있고 아이들은 회사가 돌봐주게 되어 있다고 했어요. 아마 전 어떤 일이든 나쁜 면만 보게 되는 버릇을 얻게 된 모양이에요. 여하튼, 당신은 클라이브에게는 아주 소중한 분인 것 같아 염치없이 당신의 주소를 물었죠. 클라이브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생각해서요. 늘 신문에 끔찍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클라이브는 잠시 망설이더니 가르쳐 주더군요. 그전에 먼저, 그의 신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그 주소로 당신을 찾아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지요."

"당신은 그 약속을 어겼군요."

"어길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러나 하루종일 이혼문제를 생각하다보니 어쩌면 당신은 임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임신?"

"죄송해요. 내가 클라이브와 결혼할 때는 토미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클라이브가 그렇게 당신하고의 결혼을 원했으므로 어쩌면 당신도 그 때의 나와 똑같은 상황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클라이브와 이혼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면, 그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제 마음을 이해하시죠?"

"임신하고 있지 않아요."

아이린 워커는 무례한 방문을 다시 한번 사과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반시간이 지났을 때까지도 레기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옷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레기가 거실로 들어섰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하필 이런 때 전화가 걸려 오다니-- 레기는 한숨을 쉬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당신이 레자이너 바링튼이요?" 외국어의 악센트가 강한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런데요."

"나는 세베로 카르디노사요." 사나이의 목소리는 더욱 험악해졌다. 그는 자기 이름을 듣는 순간 레기가 모든 걸 알아채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

"" 하고 반문했으나, 레기는 상대가 누구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레기를 레자이너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잊어버린 체하지 말아, 나를. 그리고 우리들의 약속을."

"약속?" 아아, 이것은 베라 친구의 장난임에 틀림없다-- 레기의 머리에 가까스로 그런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당신은 새로운 역할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았을 거야." 차가운, 분노를 담은 목소리였다. 멋진 연기다. 레기는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연극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레기에게는 한마디도 못하게 하고 일방적인 지시를 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당신을 데리러 갈 형편이 못 돼. 그러니 실수를 하면 안 돼, 레자이너 바링튼. 만약 당신이 이번 주말까지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가까운 장래에 이 쪽에서 데리러 가겠어." 정말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그 때 갑자기, 열려 있는 창 너머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레기는 무서움에 목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수화기는 어느새 손에서 미끄러 떨어져 있었다. 그것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내려놓은 건지, 기억이 없었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은 용기를 내어 어떻게든 창가로 가, 창을 닫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로부터 10분쯤 후에 베라가 집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베라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레기를 보자마자, 급히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레기는 베라를 보자 안심이 되어 웃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어 공포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조금 있으면 괜찮을 거야." 베라는 레기를 위로하려 했다.

레기의 천둥 공포증은 13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날 두 자매의 부모는 베라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레기만을 데리고 외출했다. 달려가는 자동차의 뒷좌석에서 레기는 기쁜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차는 심한 태풍을 만나 나무를 들이받고 말았다. 레기는 상처를 입고 숨이 끊어진 부모를 보고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레기, 홍차를 마셔."

"오늘은 어땠어?" 차 쟁반을 들고 온 베라에게 레기는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베라는 웃음을 띠고 황홀한 말투로 대답했다.

"멋있었어."

"빨리 돌아왔군."

"웰즈본도 번개가 쳤어. 그래서, 빨리 왔지."

"어머나, 언니, 나 때문에... 제임스는 화를 내지 않았어?"

베라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방긋 웃었다.

"제임스의 독점욕은 너도 알고 있잖니. 항상 나의 마음을 독차지하고 싶은 모양이야. 그러나 나는 선언했어. 󰡐크리스마스 다음날부터 내 시간은 전부 당신거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때까지는 제 동생을 염두에 두세요. 동생과는 앞으로는 자주 만나지도 못할 테니까요.󰡑 하고 말이야." 홍차를 마시면서 쾌활하게 잡담을 계속했다.

그러나 레기는 알고 있었다. 베라는, 레기가 또다시 번개가 칠까 두려워 불안해하는 걸 잊게 해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가 바닥이 날 무렵, 베라는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클라이브가 출발 전에 전화했었니?"

천둥 때문에 레기는 클라이브의 일도 아이린 워커의 일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니. 클라이브의 부인이 집으로 찾아왔었어."

"클라이브의 부인이!"

레기는 베라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베라는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클라이브는 어젯밤에 왜 아이들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뻔하잖아, 그런 말을 하면 너와 동거할 수 없게될까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베라의 말이 맞다. 클라이브가 그러한 비겁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레기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레기는 무의식중에 어떤 결심을 하고, 갑자기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했다.

"언니, , 어디론가 떠나야겠어."

"어디로 떠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니?"

"런던 이외의 다른 곳으로, 클라이브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 같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직장을 그만두고 생활 근거를 바꾸어 새 출발을 해야겠어. 그것도 클라이브가 돌아오기 전에."

"클라이브의 얼굴을 본 순간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까 봐 두려워하고 있지?"

"모르겠어..."

"쉬운 일은 아니지." 베라는 상냥하게 말했다.

레기의 처신에 대해서 일사천리로 진행을 시킨 쪽은 당사자인 레기가 아니라 베라였다.

"회사에는 내일 사표를 내. 아파트 문제는 내가 집주인에게 이야기할께. 2주정도 시간을 두자. 어디로 옮길 것인지를 정하고 집을 구하기 시작하면 될 거야. , 그래. 우리 집 가까이로 옮기는 게 어때? 마땅한 집을 구할 수 있을 거야. 너는 유능한 비서니까 일자리를 스트라트포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테고. 네 생각은...."

"글쎄, 그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 클라이브가 나를 찾으려 할 경우, 맨 처음 언니 집을 찾아가지 않을까?"

"그건 그래, 클라이브가 웰즈본에 와본 적이 있다는 걸 잊었어."

레기의 앞으로의 처신에 대해 완전히 결정을 한 다음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레기는, 회사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든 내일 사표를 내기로 했다. 그만두는 이유는 가정 사정.

베라는 한숨을 쉬면서 침대에 들었다. 나란히 놓인 침대 사이에는 작은 옷장이 있다. 레기는 그 옷장 위의 불을 끄려 했다. 그 때, 베라가 아무생각 없이 물었다.

"나에게 전화 온 것 없니?"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레기는 번개 때문에 중단되었던 이상한 통화가 생각났다.

"언니의 친구가 나에게 장난 전화를 걸어 왔어. 어째서 나에게 그런 전화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한 친구?" 베라는 흥미가 동한 모양으로 팔꿈치를 짚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런 친구는 한 둘이 아니지만 누구일까?"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 외국 악센트로 자신은 세베로 카르디노사라 했어."

베라의 얼굴색이 금세 달라졌다.

"세베로 카르디노사! "

베라가 겁먹은 표정을 짓자, 뜻밖의 사태의 전개에 레기는 자기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레기는 침대에서 나와, 베라 곁으로 갔다.

"그 사람 알아?"

"아아, 어쩌면 좋지! 세베로 카르디노사라고. 내 인생을 파멸이야! "

 

2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레기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무서운 전화가 장난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이 확실해졌을 뿐.

"그 사람 누구야?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

베라는 남빛이 된 얼굴을 들었다.

"우루과이에서 만난 사람이야."

"남미 사람?"

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여기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하기야 그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틀림없이 나의 동료로부터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냈을 거야."

"그가 왜 언니를 찾으려 하지? 그리고 주말까지 언니를 오라고 한 곳은 우루과이야"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니? 우루과이로 오라고?"

"만약오지 않으면 자기가 데리러 오겠대. 지금은 형편이 좋지 않다고도 했어."

베라는 신음소리를 냈고 얼굴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그 사람이 한 말을 한마디도 빼지 말고 상세하게 이야기해 봐."

레기는 세베로 카르디노사의 말을 생각나는 대로 전부 말했다. 베라의 갑작스런 태도변화 때문에,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까지 떠올려 말했다.

"그 사람은, 언니가 하기로 되어 있는 역할에 대해서, 언니가. 충분한 보수를 받았다고 했어. 무슨 말이야? 그리고 왜 내 이름을 썼지? 내 기억에 약간의 착오가 있을지 모르지만, 󰡐실수를 하면 안 돼, 레자이너 바링튼!󰡑이라고 확실히 말했어....."

베라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베라가 울다니, 레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레기는 깜짝 놀라 이야기를 중단하고 두 팔로 베라를 안고 상냥하게 말했다.

"나에게 전부 이야기해 줘. 실제로는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몰라."

"그래.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다음날 레기는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클라이브와의 문제 따위는 지금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클라이브로부터 몸을 숨긴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 사표만은 냈다.

점심 시간이 되자, 레기는 공원 벤치에 앉아 베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였다-- 베라는 도대체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베라가 저렇게 겁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독점욕이 강할 뿐만 아니라, 고지식하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제임스가 이 사실을 안다면 두 사람의 결혼이 깨질 것은 뻔하다.

참으로 베라답지 않은 일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베라에게서 직접 들었으므로. 베라는 무용단과의 계약을 파기했을 뿐만 아니라 세베로 카르디노사와의 계약-- 정식으로, 서면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계약임에는 틀림이 없다-- 까지 파기하고 만 것이다. 세베로 카르디노사가 화를 낸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베라가 소속하고 있는 무용단은 몬테비데오에서 120킬로쯤 떨어진 휴양지, 푼타 델 에스테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단원 한사람이 몬테비데오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여 그곳 병원에 입원하였고 베라는 그녀를 문병하러 갔다.

병원 근처까지 왔을 때, 베라는 제임스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어, 제 정신이 아니었다. 자기냐 남미행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다그치는 제임스의 외골수에는 화가 났으나, 그때는 그가 그리워 견딜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 어떤 길모퉁이를 돌았을 때, 베라는 어떤 문제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던 한 사나이와 보기 좋게 정면충돌하고 말았다.

"그 남자는 나를 일으켜 세워줬어. 그리고 내가 몹시 지쳐 보였던지, 뭔가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권해주었어. 처음에 난 단순히 그는 내가 걸려드는지 어떤지를 시험해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것은 우루과이식의 예의였거든."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갔어?"

"평소에는 잘 그러지 않지만, 제임스에 대한 그리움에 몰려 있고 게다가 세베로 카르디노사라는 남자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어...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은 홍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지."

"미남이야?"

"글쎄, 미남이랄 수도 있지. 그러나 내가 그 남자를 따라간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어. 사실은, 그가 나를 조금도 여자로 보아주지 않은데 있었어. 하기야 그런 경우에 어울리는 예의는 다 차렸지만, 그가 나의 여자로서의 매력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에 화가 났지. 그래서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끄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시험해보자고 결심했어. 그래서 다시 만날 실마리를 만들기 위해 내가 푼타 델 에스테에 묵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지."

레기는 베라에게 그러한 일면이 있었다는 점에 가벼운 쇼크를 받았다. 그러나 놀라움을 감추고, "그래서 얼마나 걸렸어?" 하고 물었다.

"헛수고였어. 그는 예의 상 자기는 내륙 쪽에서 왔다고 대답하고 나더러 휴가차 왔느냐, 홍차를 더 들겠느냐고 물었지만, 실제로는 한시라도 빨리 일어서고 싶어 하고 있는 눈치였지. 그래서 나는, 나를 매력적인 젊은 여자로 보지 않다니, 두고 보자고 엉뚱한 생각을 했지.󰡐저는 목이 말라요. 당신과 부딪쳤기 때문에 혈당량이 내려갔음에 틀림없어요!󰡑하고 말했지. 그러자 상대는 󰡐홍차를 한 잔 더 주문할 수밖에 없군요.󰡑 하고 말하지 않겠니. 그 후는 천천히 시간을 끌면서 홍차를 마시고, 여러 가지를 물었지. 결혼했는가 하는 질문까지 했어. 그는 싱글이라고 대답했어. 하지만 빨리 일어서고 싶은지 연신 팔목시계를 쳐다보았어. 약혼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지금 그런 사람이 내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어 말하지 않겠니, 내가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그 말에 나는 이상야릇한 느낌을 받았어, 당연히 약혼녀가 있을 것 같은 타이프였기 때문에. 그런데 그 후에도 그 남자는, 예의와 제발 빨리 꺼져 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얼굴을 했어."

"뭔가 급한 약속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별로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는 기색은 아니었어. 그 후, 그 남잔 이렇게 말했어.󰡐당신은 이제 정상을 회복하신 것 같군요. 이 정도에서 실례해도 될까요? 입원중인 친척을 문병하고 가야 해서요.󰡑10분 정도 나하고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그 사이에 친척의 병세가 악화될 리가 없지. 그런데 낯선 여자 앞에서 걱정을 하니, 그 친척은 이 남자에게 있어 꽤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래서 나는 그가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실은 저도 문병차 왔어요.󰡑라고 말했지. 두 사람이 같은 병원으로 간다면 굳이 따로 갈 필요가 없잖니." 베라는 침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절망적인 표정이 되살아났다.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 남자를 만났다고 바보같이 허세를 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병원에서도 얼마든지 그대로 헤어질 수 있었어. 그런데 나는 간단히 물러설 수가 없었어. 함께 걸으면서, 상대가 문병하러 온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아내었지. 그 때 나는 직감했지. 이 사나이가 약혼녀를 갖고 싶어 하고 있는 것과, 할아버지와는 특별한 관계가 있구나 하고. 그래서 그것을 물었더니 역시 내 짐작이 들어맞았어. 와병중인 할아버지가 손자인 자기의 결혼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것을 몹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니. 나는 너처럼 감상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럼, 제가 당신의 약혼녀인 체하고 함께 가드릴까요, 하고 물었지 뭐니."

"상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

",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몹시 의아한 얼굴을 했지. 그는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내려고 하는 눈치였어."

"그럴 수가!"

"그 후, 사나이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더군. 그는 이 쪽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할아버지를 행복하게 돌아가시게 해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결심했음에 틀림없었어."

"제의를 받아들였군."

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상대는 내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기 시작한 것 같아. 할아버지는 영국인과 결혼하셨으니 당신 손자가 영국인과 결혼한다면 크게 기뻐하실 거라고까지 했어. 그는 자기 이름을 말하고 내 이름을 물었어. 그런데 그 때 나는 생각이 달라져..."

"생각이 달라졌다고 상대에게 말했어?"

"아니, 말할 수 없었어. 그런 짓을 했다면 틀림없이 웃음거리가 되었겠지. 그때까지는 제임스를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세베로가 내 이름을 묻는 순간 무서운 광경이 눈앞에 떠올랐어. 세베로와 나의 약혼 기사가 <라 마냐나>신문에 날지도 모른다. 세베로는 세계적인 부자라니까, 틀림없이 영국 신문에도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임스와의 관계는 끝이다. 제임스가 얼마나 고지식한지는 너도 알고 있지."

"그래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난 완전히 겁을 먹고 말았지. 상대는 나의 입을 쳐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 때 생각나는 이름이라곤 네 이름밖에 없었어. 내 본명 로자벨 바링튼과 예명 베라 로슨은 둘 다 제임스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레자이너 바링튼이라고 말해버렸군."

"사정이 사정인 만큼 너도 용서해 주리라 생각했지. 여하튼 그 후 둘이서 세베로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어. 할아버지는 보기에도 중태인 것 같았어. 세베로가 나를 소개하자, 마치 오랫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던 손녀를 다시 만난 것처럼, 내 손을 잡고 매달리시는 거야."

 

누군가가 던진 빵 조각을 두 마리의 새가 서로 먹으려고 시끄럽게 다투고 있다. 레기는 서둘지 않으면 오후의 근무시간에 늦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타이핑하다만 서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레기의 마음은 또다시 베라의 생각으로 돌아갔다.

베라는 세베로 카르디노사에게 연락했을까? 오늘 중에 전화하겠다고 말했었지만, 그러나 세베로는 목장의 주인이라고 하니까, 목장에 나가 집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베라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세베로 카르디노사가 충분한 보수를 지불했다고 하는, 그 거래의 내용을 들었을 때, 레기는 천지가 뒤집혀지는 듯 깜짝 놀랐다. 베라는 세베로 카르디노사의 약혼녀 행세를 계속한다는 약속의 댓가로 1만파운드를 받았다는 것이다. 베라는 돈을 받은 후 어이없게도 그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더구나 그 돈을 제임스에게는 유산으로 상속받았다고 설명하고는 집의 계약금으로 충당했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레기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베라가 그렇게 한 것은, 제임스의 저금을 그 때는 인출할 수 없었고, 일주일 후 제임스의 돈이 나오자, 그 돈을 집의 수리비용으로 써버렸다.

베라가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제임스가 아무리 베라를 사랑하고 있다 해도, 이런 당치도 않은 이야기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제임스에게는 절대로 이 일이 탄로 나지 않도록 해야지. 어떻게 베라를 구할 방법이 없을까.

레기는 베라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베라의 도피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베로를 만난 3일 후, 베라의 마음은 또다시 제임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몬테비데오에서 있었던 일 따위는 이미 잊고 있었다. 그런데 베라가 호텔을 나서려고 했을 때, 세베로가 불쑥 들어선 것이다. 세베로는 베라가 택시 운전수에게 말한 호텔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녀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베라는 흥미가 동해 세베로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거기서 세베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베라를 만나보고 손자가 곧 영국 여성과 결혼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시자, 갑자기 기력을 되찾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퇴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까지 했다. 할아버지의 몸은 쇠약하지만 정신은 맑다. 그러니까 만약 영국인 약혼녀가 목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세베로의 약혼이 거짓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이번에는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에스탄시아에 와서 살아 줄 수 있는가....

"세베로의 말로 미루어 할아버지는 이제 얼마 더 살지 못할 것 같았어. 그 때 나는 제임스에 대해 반발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베로에게 이렇게 말했어. 󰡐만약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면 나는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게 돼요. 금전상의 손해뿐만 아니라 무용단과의 계약까지 파기하지 않으면 안 되니 신의까지 잃게 돼요. 그렇게 되면 다시 무용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아주 어렵게 돼죠."

세베로가 할아버지의 병 때문에 몹시 침통해 있었을 텐데, 돈 이야기를 하다니, 하고 레기는베라의 분별없음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입 밖에 내지 않고, 다만 "세베로는 뭐라고 대답했어?"라고 물었다.

"아니꼽다는 눈길로 나는 뚫어지게 쳐다봤지. 너는 내게서 한 밑천 뜯어낼 심산이지, 하고 말하듯이. 그러고 나서 몹시 거만한 태도로 물론 자기로서도 나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힐 생각은 없다. 1만 파운드라면 어떨까, 라고 말했어."

베라가 세베로의 제안에 동의하자, 세베로는 당장에 수표를 끊어 베라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었다-- 자기는 자주 몬테비데오에 오지만, 정확한 예정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내주 비행기로 두라스노까지 오도록. 그렇게 하면 공항까지 어김없이 데리러 갈 테니...

"그것이 어디서부터 이상하게 어긋나기 시작했지?"

"별로... 다만 두라스노 행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자, 갑자기 제임스를 만나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었어. 그가 보고 싶어져 그대로 영국 행 비행기를 타고 말았지."

 

베라가 전화했을 때 세베로는 조금은 화가 풀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왔을 때의 레기는 아직도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베라의 초췌해진 창백한 얼굴을 본 순간, 그 희망은 사라졌다. 베라는 울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눈알이 새빨갛다.

"세베로가 뭐라고 했지?"

"별로 긴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요점만 말했어. 할아버지가 퇴원했으니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어-- 내가 가든지, 세베로 쪽에서 오든지, 아니면 돈을 돌려주든지. 세베로는 바보가 아니니 내가 돈을 써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사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레기는 베라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홍차 마실래?"

"아니, 필요 없어."

두 사람은 침울한 얼굴을 하고 뚫어지게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고 있으면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하듯이. 레기의 입에서 무의식중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베라가 미안한 듯이 말했다.

"내 문제까지 너에게 짐이 되게 해서 미안해. 네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일 텐데. 사표는 냈니?"

레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며 받았어."

"그럴 수밖에 없지. 클라이브를 따돌리고 새로운..." 베라는 크게 숨을 삼켰다. 레기는 베라 쪽을 돌아봤다. 베라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왜 그래?"

"굉장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아, 레기, 난 참 바보구나. 뭔가 도망갈 길은 없는가하고, 하루종일 여기에 앉아서 걱정만 하고 있었다니. 좋은 방법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

"그렇게 독점하지 말고 나에게도 들려줘. 무슨 생각이 떠올랐어?" 레기는 베라의 대답을 열심히 기다렸다. 그런데 대답을 듣자마자 쇼크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너 클라이브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고 있지. 그래서 클라이브를 따돌릴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지. 클라이브는 남미까지 너를 찾으러 갈 생각은 못 할 거야."

"남미!"

"어째서 더 빨리 이 생각을 못했을까. 완벽하지 않니! 너는 클라이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 세베로 카르디노사는 레자이너 바링튼이라는 이름의 약혼녀를 손에 넣고. 그리고 제임스는 내 것이 돼."

베라는 갑자기 배고픔을 느꼈다. 한편 레기는 어떤가 하면, 항의하는 말도 무시당하여 완전히 식욕을 잃고 말았다.

저녁식사는 폭찹과 야채였다. 레기는 식사하는 동안 베라의 생각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납득시키려 애썼다.

"그런 걸 세베로가 받아들일 까닭이 없잖아."

"왜 없니? 세베로의 할아버지는 세베로가 레자이너 바링튼이라는 영국 여자와 약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너는 영국 사람이잖니. 이름도 레자이너 바링튼이고."

"그것은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러나 그런 건 걱정 없어. 우리는 둘 다 금발이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나를 만났을 때, 내 손을 잡고 있었을 뿐, 거의 눈을 감고 계셨거든. 안경도 쓰지 않았고."

"그러나 세베로 카르..."

"세베로 문제라면 걱정 없어. 나를 닮은 영국인 약혼녀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일 테니까."

베라는 레기가 주말이 되기 전에 출발할 수 있도록 서둘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그렇게 빨리 갈 수는 없어. 그렇지 않아도 회사 쪽에서는 내가 한 달 전에 사표를 내지 않았다고 언짢아하고 있으니까. 크리스마스 전에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어. 그리고 그밖에도 출발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있어."

"그러나 세베로는 금주 중에 약혼녀가 필요하대."

"안 돼. 첫째, 아직 여권도 없는걸. 그리고 미니카를 팔지 않으면 비행기삯이 없어."

"비행기삯 정도는 세베로가 기꺼이 보내줄 거야."

레기는 그런 신세를 질 정도라면 바다를 헤엄쳐 건너가겠어, 하고 말하고 싶은 얼굴을 했다.

"여하튼, 세베로에게 전화해서 계약 약혼녀가 간다는 것을 알리지 않으면 안 돼. 그리고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붐벼서 여권을 쉽게 받을 수 없어."

다음날 밤 레기는, 베라에게 세베로에게 연락했는지를 물었다. 상대가 바뀌었다고 세베로 쪽에서 거절해줬으면 좋겠다고 레기는 내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에 베라의 행복이 달려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책임감을 느꼈다.

베라는 레기에게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전화했어. 그래도 좋대."

"그래, 언니가 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 않았어?"

"전혀." 베라는 뒤돌아보고, 밝은 웃음을 지었다. "세베로는 너를 만나는 날을 즐겁게 기다리겠대."

 

3

나를 만나는 날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다고! 그럴테지!

그로부터 약 3주일이 지나 있었다. 몬테비데오에 온 지 벌써 사흘째. 기다려도 기다려도 세베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설날까지 런던을 출발하지 않은 것이 그의 비위를 상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니카가 좀처럼 팔리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미니카를 판돈으로 비행기 표를 구입하고 나니 한 푼도 남지 않았다.

레기에게 호텔 숙박비가 없다는 것은 산수를 못해도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세베로의 마중이 늦어짐에 따라 레기의 불안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레기의 자유의사로 호텔을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그녀는 더 싼 곳을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직장에 나가 있을 동안 세베로로부터 베라에게 전화가 걸려 와,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베로는 아직 예정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레기를 위해서 호텔을 예약해두겠으니 자기가 마중 갈 때까지 그 호텔에서 기다리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호텔에서 첫 날 밤을 보낸 후, 레기는 전화로 세베로에게 자기의 도착을 알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하룻밤 더 보낸 뒤에 레기의 결심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레기가 호텔 레스토랑을 나와, 프런트 곁을 지나쳤을 때였다. 프런트의 여성이 방긋 웃었기 때문에 그녀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먼저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저어, 전보를 칠 수 있나요?"

". 바로 발신하죠."

전보를 치고, 또다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레기는 전문이 좀 더 진지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침식사 때는 레기의 마음속에 또다시 반항심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였다. 󰡐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달링.󰡑이라는 전문이 세베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세베로를 만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세베로는 나에게 전화조차 걸어 주지 않았다. 그런 불안이 레기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 반면에, 레기는 세베로에 대해서, 어젯밤보다도 더욱 편견을 갖게 되어 버렸다. 혹시 세베로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호텔 방에 들어박혀 있을 수도 없다. 레기는 마음이 달라지기 전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프런트 앞에 섰다.

", 외출하기 때문에, 혹시 제 약혼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면 메모해 주세요."

일부러 이런 부탁을 할 필요까진 없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레기는 서둘러 프런트를 떠났다. 그리고 냉방이 잘 된 호텔로부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몬테비데오의 거리로 나갔다. 지금까지 레기는 몇 번,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외출해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서둘러 돌아 올 필요가 전혀 없다.

인데펜덴시아 광장에는 국가적 영웅 호세 헤르바치오 알티가스의 말을 탄 동상이 서 있었다. 레기는 그 멋있는 동상을 황홀한 눈길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거기서부터 레기는 아베니도 디에시오초 데 풀리오를 따라 가간차 광장으로 걸어갔다. 지갑은 거의 비어 있었기 때문에 구경만 했을 뿐이었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 레기는 다시 한번 아베니도 디에시오초 데 풀리오의 넓은 길로 돌아왔다. 이 큰 거리는 1830년 우루과이 헌병의 발포를 기념하는 곳이다.

레기는 오후까지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세베로는 고집을 꺾고 전화를 걸어 왔을까. 조금은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레기의 그런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오도 되기 전부터 불안을 느꼈다. 호텔에 뭔가 자기 앞으로의 전갈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어서 참을 수 없게 되었다.

호텔까지 지름길로 가려고 레기는 넓은 길을 잰걸음으로 가로질렀다. 도중에서 문득 눈을 들자, 한 동상이 갑자기 시야에 들어왔다. 레기는 깜짝 놀라 넘어질 뻔했다. 그것은 소리오 데 산 마르턴이 만든 유명한 가우초(Gaucho, 남미의 카우보이) ()이었다. 그 동상에 대해서 레기는 알고 있었으나, 조금도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나치고 나서 레기는 다시 한번 뒤돌아봤다. 무섭게 생긴 가우초 상은 레기에게 공포 이외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레기는 시선을 돌리고 길을 서둘렀다. 이윽고 공포심이 가시자 레기는 자신을 나무랐다-- 조각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겁을 먹다니, 마치 저 동상이 나에게 해를 끼칠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레기의 마음속에서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물론 동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실물은 아직 만나지 못했잖아.

지금까지의 경위로 미루어 볼 때, 실물을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레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세베로는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지 아직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만약 전화로 세베로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고, 베라의 겁먹은 표정도 보지 않았더라면, 레기는 지금쯤 그가 실재하는 인물인가 아닌가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프런트는 손님들로 붐볐다. 레기는 전갈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을 나중으로 돌리고, 먼저 방으로 돌아가 얼굴과 손을 씻기로 했다. 그런데, 방안으로 한 발짝 들여놓은 순간,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어야 할 방에 왠 사나이가 긴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나이는 방금 도어 쪽을 본 것 같았다. 군살이 없는 날씬하고 단단한 몸, 침착한 분위기에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파란 눈이 뚫어져라 레기를 쏘아보았다. 갈색의 피부, 우뚝한 콧날, 네모진 턱, 전형적인 우루과이인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국적인 파란 눈이 더욱 돋보였다. 사나이의 얼굴 생김새와 쏘아보는 것 같은 눈은 레기의 마음속에, 조금 전 가우초 상 앞에 섰을 때 받은 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왜 비명이 나오지 않는지, 레기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의외로 "제 방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죠?"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을 한 것이다. 레기는 그런 자신에게 감탄하였다.

순간 레기는 사나이가 영어를 전혀 몰라서 자기의 질문에 대한 답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나이의 날카로운 지력(知力)을 레기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는 레기와 다름없을 정도로 유창하게 영어로 말했다.

"당신의 방? 이 방을 당신 혼자 쓰고 있어요?"

이 사나이가 세베로 카르디노사일까? 미리 전화도 주지 않고 전보에 대한 답으로 본인이 직접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요." 레기는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 필사적이 되어 있었다. 베라는 세베로를 미남이라고 했었다.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10초 만에 상대방의 성격을 꿰뚫어볼 것 같은 파란 눈에 대해서 베라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세뇨리타." 그 때까지 부드럽던 목소리가 갑자기 험악해졌다. 차갑고 매서운 그 목소리는, 전화선을 통해 들려온 그 목소리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당신이 누군지 말해 주겠소?"

"친구들은 레기라 부르죠." 사나이의 공격적인 태도에 기가 눌린 레기는, 그에게서 아무런 친근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가 이 사나이와 약혼하고 있다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레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정한 태도를 취하려했다.

그러나 상대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요구했었던 모양이다.

"저는 레자이너 바링튼이에요." 레기는 다 알고 있으면서라고 말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사나이에게 물었다. "당신이 저의 계약 약혼자인 세베로 카르디노사 씬가요?"

사나이는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레기의 머리끝에서부터 샌들을 신은 발끝까지 싹 훑어보면서, 그녀의 옆으로 돌아 나왔다.

"그렇소. 금발의 허수아비 인형 대신 진짜가 온 셈인가, 달링. 당신은 더 이상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했으니.... 인사로 키스해 주겠나?"

"그런 약혼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 내용의 전보를 친 것은, 당신이 그것을 할아버님께 보여드릴 경우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할아버님󰡑이란 한마디에 세베로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패스포드."

"패스포드?"

"당신의 패스포드를 보여 주기 바라오."

레기는 핸드백 속을 뒤져 패스포드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세베로에게 건넸으나, 마음속으로는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세베로는 분명히, 바링튼 자매를 신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레기가 자칭한대로의 인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하고 있다. 레기는 베라 때문에 자기까지 의심받고 있는 현실에 난처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레기는 세베로가 흐릿한 사진과 실물을 대조하고 패스포드의 내용을 훑어보는 것을 잠자코 보고 있었다.

"레자이너 바링튼, 비서, 22. 도대체 어떤 진귀한 물건이 있나 보러 온 모양이지?"

"뭐라고요?"

"당신은 한 밑천 잡으러 온 것이 아닌가?"

"당치도 않아요! 제가 뭣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잘 아시잖아요! 만약 언니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베라와는 친척인가? 두 사람의 성은 같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베라는 제 친언니에요."

세베로는 그런 것은 전혀 모른다고 말하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레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고 한기를 느꼈다. 레기는 믿지 않는다는 듯이 세베로를 말똥말똥 쳐다봤다.

"모를 리가 없어요. 제가 온다는 것을 언니가 전화로 알려드렸을 텐데요." 세베로가 또다시 천천히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 레기의 목소리는 가냘퍼졌다."당신은 저를 만나는 날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다고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당신 언니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언니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레기는 큰소리를 치기는 했으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지금 자기를 비웃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이 사나이에게는 거짓말을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베라 언니가 거짓말을 했다... 그런 생각이 번쩍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니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당신에게 이야기했겠지. 그리고 둘이서 나로부터 1만파운드를 더 긁어내자고 계획을 꾸몄지. 그렇지 않은가?" 세베로는 태도를 일변시켜 몹시 비아냥거리는 태노를 보였다.

"아니에요!"

"그렇다면, 당신이 왜 여기에 왔지?"

자기가 세베로의 돈을 목적으로 왔다는 말을 듣자, 레기는 몹시 화를 냈다.

"베라 언니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미세스 제임스 아서가 되었어요. 베라 언니가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을 언니의 남편이 좋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레기의 말을 듣고 세베로는 비웃음을 띠며 더욱 몰아 세웠다.

"베라의 남편까지 한 패가 되었단 말이지?"

4일간을 마음 졸이며 기다린 끝에 받게 된 보상이 이것이란 말인가? 베라 언니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변변치 못한 사나이로부터 돈을 노리는 여자로 취급받다니.

"아니에요. 제임스는 아무 것도 몰라요. 언니가 한 일을 안다면, 제임스는 저와 마찬가지로 어이없어 할 거예요."

세베로는 레기의 분노 따위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여전히 레기의 말을 믿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레기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파란 눈을 반짝였다.

"당신이 처음 전화했을 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에요.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난 단순한 장난 전화일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난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을 만나보고, 여기에 온 것을 더욱더 후회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음 비행기로 돌아가겠단 말이지?"

정말 밉살스럽군! 그럴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남아 있는 돈으로는 리오까지의 여비도 되지 않을 텐데. 더군다나... 세베로는 첫눈에 내가 싫어졌음에 틀림없다. 할아버지의 병세를 악화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베라의 대역으로 쓰고 싶지 않을 만큼. 레기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분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클라이브와 함께 영국에 있을 수 있다면... 눈물로 눈두덩이가 붓고, 목이 메었다. 레기는 필사적으로 자존심에 매달렸다. 그리고 쉰 목소리이기는 하나, 또렷한 말투로 가까스로 말했다.

"베라 언니의 행동을 사과드려요. 제가 온 목적은 언니의 빚을 청산하는 것뿐이에요." 세베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몸도 꼼짝하지 않았다. 레기는 용기가 사라져 더 이상 세베로를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녀는 창가로 가, 멀리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려 천천히 말을 이었다."제가 대리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면 죄송해요."

레기는 이 때 대단한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하는 문제는 잊어버렸다-- 방금 나는 베라의 행복을 파괴시킬 수 있는 무기를 세베로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화가 나서, 베라와 제임스의 결혼에 대해 지껄이고 말았다. 만약 세베로가 스스로 영국으로 건너가, 베라와의 일을 처리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레기로서는 그 이상의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언니를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레기는 급히 세베로쪽을 돌아봤다. 그런데 레기가 수치를 무릅쓰고 그런 부탁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당신이 대리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소."

"그렇다면... 저라도 좋다는 말씀인가요?"

"당신이 우루과이에 온 것을 당신 부모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지?"

"제 부모님 말이에요?"

"당신네들이 하고 있는 짓을 부모님은 전혀 모르고 계시나?"

딸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치 않는 부모인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말투에, 레기는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스로 분노를 억눌렀다.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우리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어요."

"그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시나?"

"아니요." 부모가 돌아가신 후, 주저하지 않고 자기와 베라를 맡아주셨던 조부모. 상냥했던 두 분을 회상하는 레기의 표정은 자연히 부드러워졌다. "할아버지는4년 전에 돌아가셨고, 그 반 년 후에 건강하셨던 할머님마저 뒤따라 가셨죠. 할아버지를 사랑하신 나머지, 손녀들로는 그 자리를 메울 수가 없었나 봐요."

레기는 이야기를 그쳤다. 자기가 얼마나 조부모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 마음이 세베로에게 전해졌는지, 레기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이 그에게 통하건 통하지 않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세베로는 또다시 태도를 급변시켜 또렷한 투로 말했다.

"좋아. 아래층에서 점심을 끝낸 뒤, 짐을 꾸려요. 그리고 출발해요."

"저를 데리고 가주시는 거예요?"

세베로는 오른쪽 눈썹을 치켜 올려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레기 바링튼. 물론 당신을 데리고 가요."

세베로가 레기를 데리고 간다고 한 뒤는 모든 일이 급속히 진전되었다. 레기는 갑자기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공복을 느꼈다. 그런데 디저트인 케이크를 기다리는 동안 또다시 불안이 되살아났다. 호텔 요금에 대해서 세베로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레기는 자기 마음이 그렇게 바로 얼굴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세베로의 관찰력이 보통 이상으로 날카로운 것일까? 머리 회전이 몹시 빠른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 지금 생각났는데요... 출발하기 전에 숙박료를 지불해야 하는데요?" 세베로는 조금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어떤 의도로 그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을 텐데. 레기는 조바심이 났다. ", 비행기 삯을 만들기 위해서 차를 팔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하지만 지금 제 수중에는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레기는 큰마음 먹고 솔직히 말했다. 이런 사나이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다니.... 레기는 부끄러움으로 자기 얼굴이 빨개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세베로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레기의 붉어진 얼굴을 쳐다봤다. 그 눈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 레기에게는 몇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호텔을 예약한 것은 나니까, 마이 달링, 호텔료는 당연히 내가 부담해야지."

세베로로부터 마이 달링이라는 말을 듣고, 레기는 더욱더 얼굴을 붉혔다. 세베로의 할아버지 앞에서는 그런 말투를 써야겠지만, 지금부터 그 연습을 하다니...

"마음을 편히 가져요, 레기. 앞으로 당신의 일은 내 책임이오." 세베로는 또다시 힐끗 비웃는 것 같은 눈길로 레기를 바라봤다.

아아, 싫다, 싫다. 세베로로 하여금 책임을 지게 하다니. 레기는 조금 전까지 맛있게 생각되어 주문한 케이크가 지금은 조금도 먹고 싶지 않았다. 레기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돌아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세베로가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것은 그만한 여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라스노 공항에서 대단한 고급 승용차 바세라티에 레기를 태운 것을 보아도 그것은 분명했다. 한낮의 더위 때문인지, 긴장이 약간 풀렸기 때문인지, 차안에서 레기는 심한 피로를 느꼈다. 차는 세로스 데 시에로를 향해서 달려갔다.

인사가 늦었지만 비행기 속에서 레기가 세베로의 할아버지의 용태를 물었을 때, 세베로는 입을 한번 꼭 다물더니, 심술 궃은 말투로 되물었다.

"걱정되나?"

다음부터는 저쪽에서 말을 걸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입을 열지 않겠다고 레기는 결심했다. 그러나 곧 세베로의 말투가 심술궃어진 것은 할아버지의 병세가 좋지 않아, 그 때문에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동차 속에서 레기는 숨막히는 침묵을 자기가 먼저 깨트렸다.

"저어.... 저는, 어떤 분을 만나게 되는지-- 당신 할아버님 외에-- 여쭈어보고 알아두는 것이 좋을 듯해서요."

세베로는 힐끗 레기를 쳐다봤다. 그 싸늘한 파란 눈에, 레기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까닭도 없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레기는 당황해서 세베로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부모님은 살아 계세요?"

"사생아가 아니냐고 묻고 싶은 거지."

이 약혼극은 세베로의 따귀를 한 번도 갈기는 일없이 막이 내려질까- 세베로의 비아냥거림에 레기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이어진 세베로의 말에 머리에서 깨끗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나의 부모는 익사하셨어.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조부모 밑에서 자랐어." 세베로는 험악한 얼굴로 이제, 이 이상은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그러한 세베로에게 감히 가족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것은 레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레기는 힐끗 세베로를 쳐다봤다. 얇은 감으로 만든 양복에 엷은 회색의 샤쓰, 목 언저리까지 자란 탐스러운 검은머리, 내가 이 핸섬한 불량배와 약혼하고 있다니...

레기는 몹시 지쳐 있었다. 창밖의 경치도 희미하게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동차가 긴 주차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언덕을 올라간 것만은 의식하고 있었다. 차는 속도를 늦추었고 전방에 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견고한 기둥이 베란다의 지붕을 받치고 있었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드문드문 놓인 커다란 화분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드디어 연기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 레기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세베로는 벌써 레기가 앉은 쪽의 도어 앞에 서 있었다.

"카르디노사 목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베로는 레기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면서 말했다.

세베로는 레기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레기의 머릿속은 잠시 동안 갖가지 인상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50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에이프런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그 뒤에는 18세쯤 되는 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수다스러운 스페인어의 대화가 오고갔으나 너무 빨라서 레기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베로는 한쪽 손을 들어 혼자서만 일방적으로 지껄이는 나이든 여자를 침묵시켰다. 그는 치열이 고른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말했다.

"여러 번 전화를 걸어 혼란을 일으키게 해 미안해. 그러나 빨리 손을 닦고 내 약혼자를 맞아 줘." 세베로가 그렇게 말했다고 레기는 생각했다.

레기는 자기의 번역이 옳은지 어떤지를 확인할 틈이 없었다. 세베로가 이미 오른팔을 레기의 어깨에 감고,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허니, 마리아를 소개하지. 마리아는 내가 철 들기 전부터 계속 이 집의 살림을 맡아 왔어."

레기는 손을 뻗어 "처음 뵙겠습니다, 마리아(Mucho gusto Maria)"하고 인사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페인어 실력을 발휘했다. 마리아가 뭐라고 대답했으나, 레기는 반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스페인어를 할 수 있나?" 세베로는 놀란 듯이 물었다. 다행히도 세베로는 영어로 질문했으므로 마리아는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상을 잘 알고 있어야 할 약혼녀에게 그런 질문을 했으니 마리아의 의심을 사게 될 테지. 레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하고 대답한 뒤, 레기는 파나에게 소개되었다. 파나는 레기의 시중을 들 사람이라고 했다.

파나는 검은머리에, 커다란 밤색 눈을 가진 소녀였다. 수줍어하며 미소 짓는 파나에게 레기는 "잘 부탁해."라고 말했다.

마리아는 세베로에게 세뇨라 고메스가 와 있다고 알렸다.

세뇨라 고메스는 레기가 모르는 사람이다. 처음 세베로는 레기의 어깨를 안고 세뇨라 고메스가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그녀를 데리고 갈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세베로는 레기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어깨에서 손을 뗐다. 레기는 방문객을 만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는 파나에게 잇달아 지시를 하였다. 그것을 들으면서 레기는, 영국으로부터의 긴 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우루과이에 도착한 이후의 수면 부족이 가져다 준 피로를 한꺼번에 느끼고 있었다.

"파나하고 함께 가요. 이 나라는 저녁식사 시간이 늦어요. 그전에 푹 쉬어두는 것이 좋을 거요." 세베로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말투에 불과할 것이다.

레기는 파나의 안내로 자기를 위해 준비해 놓은 방으로 갔다. 그리고 파나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서늘하고 기분 좋은 시트 속으로 몸을 뉘었다. 잠자리 준비를 남이 해주다니, 레기로서는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머리를 베게에 댐과 동시에 레기는 잠이 들었다. 파나가 가만히 발끝으로 걸어 나가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변덕스런 미소가 레기의 입가에 떠올랐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새로운 생활양식에 뛰어들고 말았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생활을 해온 것처럼. 그런 생각을 끝으로 레기는 무의식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4

레기는 몸을 움직여 기지개를 켰다. 눈을 뜨자 기억이 급속히 되살아났다. 자기는 지금 런던에서 96백 킬로나 떨어진 세로스 데 시에로에 와 있는 것이다. 세뇨르 세베로 카르디노사라는 사나이의 약혼자로서. 좋아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매일, 아침 해를 떠오르게 해주는 것이 이 사나이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득 클라이브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레기에게 있어서 사랑한다는 것과 클라이브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클라이브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이린이 이혼해주지 않는 한, 그와의 장래는 없다.

레기는 애써 주위에 있는 물건으로 주의를 옮겨 클라이브를 사고 밖으로 쫓아내려 했다.

그곳은 멋있는 방이었다. 산뜻한 하얀 벽이 번쩍번쩍 윤이 나게 닦아놓은 튼튼한 가구를 돋보이게 하고 있고, 중후한 레이스 커텐과 같은 레이스로 만든 침대 커버, 장밋빛 빌로드를 씌운 의자가 두 개 놓인 널찍하고 통풍이 잘되는 방은 그래도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다.

레기는 자기의 슈트케이스가 방안에 옮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은 전혀 없다. 세베로는 저녁식사는 늦게 한다고 말했었다. 슬슬 일어나서 사랑하는 약혼녀의 역할을 시작해야겠다. 슈트케이스에서 레기는 실크의 롱 스커트와 자케트, 그리고 새 속옷을 꺼냈다.

방에는 도어가 또 하나있어, 그 안은 레기의 예측대로 욕실이었다. 레기는 샤워를 하고, 세베로를 만날 준비를 했다. 그를 사랑하는 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연기 공부라도 해둘 걸 잘못했어....

파나가 살그머니 모습을 나타냈다. 레기가 아직까지 자고 있다면,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레기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파나는 넓은 홀을 빠져나가 거기서 오른편으로 뻗은 긴 복도에 면한 식당으로 레기를 안내했다.

식당은 굉장히 넓고 매우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1인분 것밖에 세팅되어 있지 않았다. 나 혼자서 식사를 하는 모양이군, 하고 레기는 생각했다.

세베로의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하게 되리라고는 레기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는 병중이니 아마 자기 방에서 식사할 테지. 세베로의 할아버지는 내일까지 만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세베로는, 할아버지께서 나를 당장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했었는데.

마리아가 수프 주발을 안고 성큼성큼 식당으로 들어왔다. 마리아의 빠른 스페인 말에 레기의 생각은 중단되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수프를 따르면서, 마리아는 뭐라고 했다. 아마도 잘 잤느냐고 묻고 있는 모양이었다.

", 잘 잤어요. 고마워요." 하고 레기도 스페인어로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아의 웃음 띤 얼굴이 확 밝아졌다. 레기가 마리아의 질문을 올바르게 알아듣고 대답한 모양이다.

우루과이의 고용인은 영국의 고용인이 가지는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에 따른 소극적인 태도와는 인연이 없는 것을 레기는 발견했다. 적어도 마리아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마리아는 레기가 말상대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곁에 붙어 있었다. 레기가 수프를 먹는 동안 그녀는 내내 지껄였다. 때때로 레기가 모르는 단어가 나와 마리아를 쳐다보면 그녀는 되풀이 말해주었다.

레기는 자기가 왜 혼자서 식사를 하는지를 마리아와의 잡담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레기가 낮잠을 자러 간 뒤, 세베로는 세뇨라 고메스와 함께 고메스 목장으로 간 모양이다. 세베로가 저녁식사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약혼녀를 도착 첫날밤에 혼자 있게 하는 것도, 마리아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레기로서는 몹시 멋 적고, 화가 났다. 자기 혼자만이 베라의 대리자 역할을 하게 내버려두고 상대는 멋대로 돌아다니다니.

세뇨라 고메스는 몇 살일까? 레기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더욱 화가 났다. 세뇨라 고메스가 세베로의 어머니뻘이 될 정도의 연상의 여성이 아니라 해도 그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인가. 그녀에 대해서 마리아에게 묻지는 않겠다. 만약 세베로가 세뇨라 고메스와 특별한 관계라 할지라도- 세베로는 고메스 가에서 식사를 하는 편이 더 좋은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을 자기가 마음 아파하고 있다고 마리아가 생각하게 될 것 같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

레기는 마리아에게 세베로의 할아버지의 용태를 물었다. 마리아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레기의 스페인어 구사가 틀린 것에 틀림없다.

"할아버지의... 어떠시죠?" 레기는 다시 한번 물었다.

"할아버지!" 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마리아의 눈에 눈물이 솟구쳤다."할머니 이야기시겠죠?" 하고 마리아는 에이프런 끝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물었다.

"별로 좋지 않아요. 그러나 어제 장례식을 치뤘기 때문에 무리도 아니에요."

레기가 아마 명사의 성()을 잘못 말한 모양이다. 그러나 누구의 장례식을 말하는지- 아마도 세베로의 할아버지의 친구나 누구겠지- 를 물으면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스테이크를 날라 왔다. 그리고 레기가 그것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 그 자리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레기는 화제를 바꾸었다.

"내 방은 아주 멋있어요. 나를 위해서 그 방을 준비해줘서 고마워요, 마리아."

치사 같은 것 필요 없어요, 라고 말하듯이 마리아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오래 전에 당신이 오실 테니 방을 준비하라는 분부를 받았죠. 그 후, 도나 에바는 런던에 안개가 많아 당신의 도착이 늦어진다고 말씀하셨죠. 그로부터 며칠 뒤 돈 세베로로부터 당신은 이제 오시지 않지만, 그것을 도나 에바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어요. 그런데, 오늘 낮에 전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제일 좋은 방을 준비하라고 돈 세베로께서 말했어요. 약혼녀를 데리고 간다고요."

마리아의 이야기를 자기가 얼마나 정확히 이해했는지 레기는 자신이 없었다. 그때 파나가 식당입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주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파나의 이야기를 듣자 마리아는 식당에서 나갔다. 레기가 마리아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있는데, 그녀가 돌아왔다, 군침이 돌게 하는 케이크를 들고.

"당신은 이것을 좋아한다고 돈 세베로께서 말씀하셨죠." 마리아의 황홀한 눈길은 두 피앙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을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세베로는 레기를 위해서, 특별히 그 케이크를 만들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호텔에서의 점심식사 때 갑자기 식욕을 잃어 먹지 못했던 것과 똑같은 딸기 케이크였다. 세베로는 레기가 딸기 케이크를 먹지 못하게 되어 불쌍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것은 오히려 심술궃은 장난임에 틀림없다. 레기는 세베로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일부러 케이크를 만들어준 데 대해서 웃는 얼굴로 치하했다.

그 날 밤 레기는 잠자리에 든 후에도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갖가지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베라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준 쇼크에서 레기는 아직 깨나지 못했다. 베라가 레기에게 거짓말을 한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런데도 베라는 레기가 자신을 대신해서 우루과이에 갔다는 것을 세베로에게 알리지 않았다. 굉장히 다급했음에 틀림없다. 대리자를 세베로가 받아들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잠이 쏟아져 몽롱해지기 시작한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도나 에바는 누구일까?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 세베로의 또 다른 여자 친구일까? 세베로는 그럴 생각만 하면 얼마든지 바람을 피울 수 있을 인상이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첫 대면한 순간 󰡐인사로 키스해 주지 않겠나?󰡑라고 말했었지. 이상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칼자루는 이 쪽에서 쥐고 있으니까. 그가 진짜 약혼자 같은 행동을 하려 들면, 당신 할아버지께 모든 사실을 털어놓겠다고 협박해야지.

마리아는, 오늘 낮까지도 세베로는 약혼녀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었다.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잠이 달아나 버렸다. 틀림없이 내가 마리아의 스페인 말을 잘못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세베로는 마리아를 나에게 소개하기 전에 마리아에게 말했었다, 갑작스런 전화로 성가시게 해서 미안하다고. 세베로는 내가 짐을 꾸리고 있는 동안 마리아에게 전화했음에 틀림없다.

레기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세베로는 나를 이곳으로 데려올 것인지 아닌지를 나를 만나기 전에는 확실히 결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일부러 몬테비데오까지 나를 만나러 왔을까? , 그렇다. 내가 친 전보 때문이다.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세베로의 할아버지가 그 전보를 보았을 경우에는.

레기는 또다시 시트 속으로 파고들었다. 밤새도록 생각해봤자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세베로뿐이다. 그리고 그 세베로는 지금 고메스인가 뭔가 하는 여자와 함께 있다. 레기는 베개를 두드렸다-- 이것이 세베로의 머리라면 좋은데. 내가 지금 이렇게 이곳에 있는 것은 세베로의 할아버지를 위해서다. 아직도 영국인 약혼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가 말한 장례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 말기로 하자...

레기는 잠을 깨자 기지개를 켰다. 방안에는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 좋은 아침의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창가에 서 있는 사람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잘 잤소, 마이 달링."

무시하는 말소리에 레기는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놀람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시야에 세베로의 모습이 들어왔다. 세베로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침대 위에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있는 레기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여 입을 맞췄다.

어깨가 거의 드러나게 디자인된 네글리제, 그 어깨에 세베로가 손을 얹자 살갗이 화끈거리고 머릿속은 쾅쾅 울렸다. 레기는 본능적으로 체크무늬 자케트를 입고 있는 세베로의 팔에 매달렸다.

그것이 상대에게 호의적인 반응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어떤지를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어느새 세베로는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레기는 세베로를 밀어냈다. "뻔뻔하군요, 정말!"

분노가 떠오른 짙은 청색의 눈. 그러나 세베로는 레기의 분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몸을 세웠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여하튼 당신이 일어나기를 여기서 우뚝 선 채로 10분이나 기다렸으니까. 황홀한 미인을 눈앞에 두고-- 아름다운 금발은 베개 위에 펼쳐져 있고 입술은 자고 있을 때도 매혹적으로..."

"나가주세요, 이 방에서. 그리고 다시는 이 방에 들어오지 마세요!"

나가라는 명령을 받자, 세베로는 화를 내기는커녕, 몹시 재미있어 했다.

"나가라고? 그것이 약혼자에 대한 말투인가?"

"당신은 나의...가짜 약혼자에요. 그러니 당신이 하고 싶을 때 나에게 멋대로 키스할 수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치도 않아요!"

"당신의 내부에는 불꽃이 숨어 있어, 나의 아름다운... 알고 있었어." 분노하고 있는 파란 눈과 시트위로 드러난 단아한 어깨선과 비단처럼 매끄러운 살갗을 세베로의 파란 눈은 황홀하게 내려다보았다.

레기는 당황했다. 그녀는 시트를 목덜미까지 끌어올렸으나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것을 보는 세베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레기는 더욱더 화가 치밀었다.

"그런 걸 당신이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내친 김에 말씀드린다면, 당신은, 희망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키스를 아껴주시면 고맙겠어요." 내가 이 집에 온 첫날밤에 세베로는, 내가 모르는 세뇨라 고메스와 함께 식사를 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나는..."세베로의 얼굴에서 유머가 자취를 감추고, 험악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자 레기는 말이 막혀 우물거렸다.

"거기서 이야기를 중단해서는 안 돼. 내가 또다시 당신 입술에 매혹 당하는 경우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지? 똑똑히 말해 줘." 감히 나에게 도전하다니, 누구도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세베로의 차가운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쉽게 기가 꺾이리라 생각하고 있다. 나를 크게 잘못 본 것이다.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으니까. 레기는 냉엄하기만 한 세베로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여전히 화가 나 있지만, 레기의 분노의 열은 얼마간 식어 있었다.

"만에 하나..." 하고 말하다가 레기는 주저했다. 󰡐당신의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세베로는 상처를 받을 것이다. 세베로의 마음을 자기가 왜 고려하고 있는지 레기는 알 수 없었다."내가 체류 중에 다시 한번 이런 일을 저지르실 때는 당신 할아버지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어요. 그래도 나는 정당하다고 생각해요."

세베로의 얼굴은 험악한 정도를 넘어서,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는 표정으로 바뀌어졌다. 격정을 억제하고 있는 듯한 단단한 턱, 불끈 쥐고 있는 주먹. 문득 세베로는 레기로부터 눈길을 돌려 허공을 쳐다봤다. 순간 레기는 자기가 여기에 있는 것을 세베로가 잊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베로는 곧 정신을 차려, 레기의 침대로 다가왔다. 만약 지금 세베로가 겁탈을 하려 하여 비명을 지른다 해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레기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베로는 침대 끝에 걸터앉더니, 사나운 눈길로 레기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이 방에 온 것은, 그 멋있는 몸을,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시트로 감추고 있는 그 몸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오. 당신은 나를 협박하여 물리치려 하고 있지만, 에이스 쪽이 킹보다 강하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소."

"에이스?"

"당신은 내가 당신 언니와 체결한 계약을 잊었소?"

레기는 눈을 휘둥그래 떴고 얼굴이 새파래졌다. "착오 없기를 바라오, 아가씨. 당신이 내 계획을 무산시키려 한다면, 베라 아서와 그 부군은 내가 보낸 편지를 받게 될 테니까."

"그럴 수가!"

"협박놀이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세베로는 경멸하듯이 말했다. 대단한 노력도 없이 레기로 하여금 제 분수를 깨닫게 만들어 버렸다. 더 이상 그런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마치 체면이 깎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세베로는 자케트 주머니에서 약혼반지를 꺼내어 레기에게 건넸다. 그것은 레기가 본 것 중에서 가장 화려한, 멋있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어제 당신이 짐을 꾸리고 있는 동안에 샀어."

"당신 할아버지를 만나 뵐 때만 끼면 되죠?"

"항상 끼고 있도록 해요." 세베로는 그렇게 대답하자, 레기가 꾸물거리는데 지쳐, 반지를 손수 레기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 내가 이 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하지."

"나에게 이것을 주려고 온 게 아닌가요?" 레기는 왼손을 들고 물었다.

"좀 더 빨리 몬테비데오로 마중가지 못해서 미안하오. 돈이 한푼도 없어서 꽤 불안했지."

세베로가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레기의 얼굴이 빨개졌다.

"빨리 오실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있었고 말고. 당신이 도착한 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

감정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세베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몇 초 동안 레기의 머리는 완전히 활동을 멈췄다. 레기는 그저 멍하니 세베로를 쳐다봤다.

"돌아가셨다구요?" 자기의 조부모에 대한 사랑, 그리고 두 분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레기는 생각해봤다. 세베로는 얼마나 할아버지를 사랑하였을까..."아아, 세베로 불쌍하게도....." 그러나 그때 레기의 머리는 또다시 슬픔의 감정과는 전혀 별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레기는 여우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당신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면.... 난 이제 이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지요?"

세베로는 오랫동안 레기를 쳐다본 채,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을 때도 세베로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당신에게도 상상이 가리라 생각되지만, 할머니는 비탄에 잠겨 있어."

"할머니?" 세베로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의 마리아와의 대화를 결국 제대로 알아들은 것 아닌가."할머니가 살아 계시는 줄은 몰랐어요. 마리아가 도나 에바라는 분의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그 분이 할머니?"

세베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같은 영국인이야. 레기, 당신은 할머니께 많은 위로를 해드릴 수 있을 거야. 이미 말한 대로 할머니는 슬픔에 잠겨 계셔. 조부모는 결혼한 지 60년을 함께 살아오셨어. 그러나... 그러한 슬픔을 당한 할머니를 지탱해 주는 것이 있어."

레기는 자기 어깨에 무거운 짐이 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죠?"

"당신의 사랑하는 로베르토가 행복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이오."

"그건.... 우리의 약혼 때문에?"

"조부모에게는 서로가 전부였어. 할머니의 희망은 할아버지의 희망, 그리고 할아버지의 희망은 할머니의 희망이었지." 세베로는 일어서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고요가 방안에 감돌았다. 그 고요를 깨뜨리고 세베로의 슬픔에 비집고 들어가는 행동을 레기로서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레기의 두뇌 활동이 멈춘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약혼도 당연히 해소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세베로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려 주기 위해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일이라면 몬테비데오에서도 할 수 있었으니까. 이 아름다운 약혼반지도 불과 몇 분전에 건네주었고.... 레기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려다 봤다. 그 반지를 왜 자기가 끼고 있는가. 레기는 어떤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확신으로 이어졌다. 레기는 마침내 그것을 입 밖에 내어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당신은 내가 계속 약혼녀 행세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지요? 이번에는 할머니를 위해서."

세베로는 뒤돌아봤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현재 할머니의 유일한 위안은, 머잖아 내 약혼녀가 도착한다는 말을 들은 사랑하는 남편이 행복하게 운명하셨다는 사실이오."

레기는 자기의 성격이 좀 더 강하다면 하고 생각했다. 이 이상 더 세베로의 할머니의 괴로움을 더해 주는 일을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정이 이성적 판단을 무디게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애당초 레기의 우루과이 체재는 세베로의 할아버지의 병세로 미루어 별로 길지 않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나 에바는 지금까지 병을 한번도 앓은 적이 없는 건강한 분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레기는 무의식중에 한숨을 쉬었다.

"... 새로운 결정은... 얼마동안 이 역할을 계속해야 되지요?"

레기는 세베로의 부탁에 동의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에 대해서 세베로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조금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할머니는 80세야. 얼마나 쇠약한지는 당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 난 내 조부모의 서로에 대한 사랑이 당신의 조부모의 그것과 같은 성격이라 생각해."

"저희 할머니는 할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셨죠. 실제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개월 후에 할머니도 돌아가셨으니까요." 레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전에도 한 적이 있는 말을 되풀이 말했다.

그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이제 와서 자기를 책망해 봤자 소용없다. 지금 세베로와의 약혼을 해소시켜, 세베로의 할머니의 슬픔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을 자기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레기는 알고 있었다.

"할머님은 언제 만나 뵈면 좋을까요?" 감정이 목소리에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레기는 물었다.

세베로는 비로소 감정을 겉으로 드러냈다. 의기양양한 마음을 나타내는 희미한 미소였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하고 레기는 생각하고 싶었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하고 세베로는 코르덴 바지에 승마용 구두라는 자기의 차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난 한두 가지 볼일이 있소. 할머니의 하녀인 안나에게 당신이 열 한 시에 찾아갈 것이라고 해두었는데, 그래도 좋겠지?"

"할머님은 이 집에서 살고 계세요?"

"지금은 그렇지. 건강해지시면, 할머님의 집-- 여기서 그리 멀지않아-- 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때의 이야기고."

레기는 세베로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샤워를 하고 커피 빛깔의 모시옷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도 고급에 속하는 것이었다. 레기는 그 후, 혼자서 아침식사를 했다. 그렇지만 일이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 세베로의 할머니는 영국인이니까, 실언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베로를 기다리는 동안의 몇 분은 달팽이 걸음처럼 느릿느릿 지나갔다. 레기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가장자리에 여러 종류의 꽃이 피어 있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평화로움이 가득한 고요한 정원으로 나가고 싶었다. 이제부터 직면하게 될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하는 예의도 모르는 것일까. 그러나 이 정도 일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세베로의 할머니와의 대면에 대비해서, 지금은 되도록 냉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레기는 되도록 침착하게 세베로를 쳐다봤다. 큰 키, 거만하면서도 잘 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까와는 달리 엷은 회색 슈트를 입고 있다. 레기는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굳이 들고 갈 필요는 없지만, 뭔가 의지가 될 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다.

세베로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눈길로 레기의 차림을 점검했다. 그러나 그가 레기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베로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고 다만 "갑시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5

세베로가 맑은 파란 눈을 누구로부터 이어받았는지를 레기는 금방 알았다. 도나 에바가 쓰고 있는 거실은 차양이 내려져 있어 서늘했다. 그러나 그런 어둑한 방안에서도 그녀의 파란 눈은 나이와 함께 흐려지지 않고 산뜻한 빛을 내뿜었다. 도나 에바는 세베로가 레기를 소개하자 눈물을 글썽였다.

또 하나, 레기의 주의를 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에 대한 세베로의 상냥한 마음씀이었다.

"할머니, 미래의 손자며느리를 소개할께요." 레기를 소개하는 세베로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넘쳤다.

두 개의 가는 팔이 자기 쪽으로 뻗어오는 것을 보고 레기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늙은, 주름투성이의 볼을 자기 볼에 밀어붙이는 도나 에바를 끌어안았다.

"좋은 사람을 골랐구나, 세베로. 할아버지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을 거야." 도나 에바는 마침내 얼굴을 떼며 말했다. 그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레기는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뭐라고 말을 해야지... 그러나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도나 에바 쪽에서 생각난 듯이 말했다. "세베로의 할아버지를 만났지요, 레자이너 ?"

베라는 세베로의 할아버지를 문병하러 병원에 갔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노부인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세베로, 저를 도와줘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자, 정말 애통했어요." 상냥하게 말하는 레기의 두 손을 도나 에바는 정성을 담아 꼭 쥐었다.

세베로는 할머니를 의자에 앉게 하고, 레기를 사랑스러운 듯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눈길이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레기는 알고 있었다.

"당신도 할머니 옆에 앉지?"

레기는 도나 에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애써 세베로의 애정이 넘치는 눈초리의 흉내를 내었다. 그러자 세베로는 약간 놀란 표정을 보였다. 레기는 당황해서 마룻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 크림빛의 융단을 보는 체했다.

그렇게 놀랄 것은 없잖아요. 이제 와서 내가 당신에게, 지옥으로 떨어지라는 따위의 말을 해서, 할머니를 슬프게 만들기라도 할 줄 아셨나요? 연기를 하는 자신이 레기는 미웠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도나 에바 앞에서 그녀의 슬픔에 또 하나의 슬픔을 첨가시켜 주는 짓을 레기로서는 할 수 없었다.

도나 에바의 하녀인 안나가 조용히 들어왔다. 안나는 커피를 따르고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조용히 나갔다. 그 뒤 잠시 동안은 조용한 가운데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보자, 레기는 긴장이 풀렸고 불안감이 없어졌다. 도나 에바는 갑자기 밝은 얼굴로 레기와 세베로를 번갈아 봤다.

"지금은 더 행복한 시간을 즐기지 않으면 안 되지."

도나 에바는 무슨 말을 꺼낼 작정일까? 무슨 말이 뛰어나와도 좋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두어야지... 그런데, 도나 에바의 말은 완전히 레기의 말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이었다.

"로베르토와 나는 긴 생애를 함께 살아, 행복한 추억이 많아요. 이번에는 아가씨와 세베로가 그러한 추억을 만들 차례라오. 이 달 24일에 결혼식을 하기로 어젯밤에 정했다고 했죠. 오늘 아침에 세베로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만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기뻐서 아가씨와의 대면을 기다려 왔어요."

"24!"

세베로는 어젯밤 세뇨라 고메스의 집에 가 있었다. 그러면서 잘도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구나. 세베로는 레기가 무슨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서서, 레기 곁으로 왔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돌리더니 잠자코 있으라는 의미로 어깨가 아플 정도로 팔에 힘을 주었다.

"여행의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았지, 그리운 사람? 어젯밤, 앞으로 3주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하고 말할 때는 틀림없이 잠을 깨어 있었는데 말이오." 세베로는 입으로는 그렇게 놀렸지만 눈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고 매서웠다.

"저는... 저어..."

레기는 도나 에바 쪽을 흘끗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 미간을 찌푸린 도나 에바의 창백한 얼굴. 레기는 도나 에바가 불쌍했다. 남편이 죽은 지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할 수 없다, 우선은 세베로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밖에, 설령 갖가지 거짓말을 다 늘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할지라도.

"...저어... 당신이 그렇게 빨리 할머니께 말씀드리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달링. 죄송해요. 저어... 도나, 에바. 물론 세베로가 말한 대로, 저는.... 우리의 결혼식 날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어요. 다만 할머니께서 걱정하시지 않을까 해서."

도나 에바의 얼굴에 또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로베르토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해서 그러지.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 기왕이면 아가씨, 세베로와 마찬가지로 나를 친할머니처럼 대해주면 좋겠어." 도나 에바는 애정이 담긴 눈길을 세베로에게 돌렸다. 자기가 손수 기른, 크고 핸섬한 손자가 자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눈치였다. "세베로가 영국인 여성과 결혼하기로 되었다는 말을 듣고, 로베르토는 다시없이 행복해 하였지. 이제 곧 자기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게 될 것으로 알고 로베르토는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므로, 세베로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가씨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면 박수를 치며 좋아할 거요."

레기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들어 속이 메스꺼웠다. 그러나 지금은, 다만 웃는 얼굴로 본심이 표정에 나타나지 않도록 애쓸 수밖에 없다. 그 때 세베로가 일어섰다.

"할머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죠." 세베로는 상냥하게 말하면서, 할머니께로 다가가 주름투성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레기와 함께 또 찾아뵐게요."

세베로는 안나를 찾으러 나갔다. 그 동안 레기는, 도나 에바와 단 둘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레기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도나 에바 쪽에서 잽싸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대개 오후에는 한 시간 정도 쉬어요. 만약 네시 경 여유가 있다면 함께 차를 마시는 게 어때요?"

레기는 웃는 얼굴로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즐겁게 기다릴게요."

"내가 아가씨를 레기라 불러도 좋을까?"

", 그렇게 불러주시면 기쁘겠어요." 레기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이것이 처음으로 하는 정직한 대답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때 세베로가 돌아왔다.

"갈까, 달링?" 세베로는 레기의 어깨를 안고 말했다.

레기는 미소 띤 세베로의 얼굴을 갈겨주고 싶은 심정으로 핸드백을 집어 들고, 도나 에바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레기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한 곳까지 오자, 화를 내며 세베로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저에게 손대지 마세요, 두 번 다시!"

"그것은 약간 어려운 일인 것 같군."

레기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그녀는 발을 구르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복도의 모퉁이에 이르자, 세베로는 레기가 거기서부터는 혼자서 자기 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말했다.

"여기서 헤어져야겠어. 난 서재에서 할 일이 있어서." 그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자, 어이가 없어 우뚝 서 있는 레기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잠깐, 기다리세요!" 레기는 무의식중에 고함을 질렀다.

세베로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그 눈에는 장난기가 떠올라 있었다. 만약 그때, 세베로가 조금이라도 웃었다면, 레기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 대들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몹시 화가 나 벌겋게 상기된 레기의 얼굴을 세베로는 잠시 동안 말똥말똥 쳐다봤다.

"계속 히스테리 환자처럼 소리칠 생각이라면 나와 함께 서재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자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의 태도는 마치 레기가 순순히 뒤따라올 것이라고 깔보고 있는 것 같았다. 레기는 불같은 기세로 그의 뒤를 따라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 세베로는 서둘지도 떠들지도 않았다. 그는 유유히 서재의 문을 닫았다. 레기는 세베로가 도어를 닫기도 전에 대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죠? 할머님께 내가 당신과의 결혼에 동의했다고 말하다니, 어젯밤 나는 당신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레기가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흥분해서 말하는 것을 세베로는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팔짱을 끼고 책상에 기댄 채, 레기의 분노가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것이 레기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죠? 나를 서둘러 내 방으로 보내놓고... 고메스인가 뭔가 하는 여자와 밀통을 했잖아요."

"밀통? 고메스라는 여자와?" 세베로의 눈이 번쩍 빛났다고 생각되자 웃음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레기, 질투를 하고 있군, 만나보지도 못한 여자에게."

세베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질투 따윈 하고 있지 않아요.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나는 다만... 마치 나를 귀찮은 짐짝처럼 내던지고 외출하다니, 참으로 무례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무례하다는 말을 듣자 세베로는 정색을 했다. 그리고 팔짱을 풀고, 책상에 기댄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어색한 말투로 사과했다.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그런 생각은 안 했어. 고메스의 집에 간 것은 볼 일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내버려두고 가지 않았을 거야. 그때 당신은 몹시 지쳐 있었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거든."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이 할머님께 거짓말을 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나는 당신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것은 당신도 알고 있죠?"

"할머님께 마음의 평화를 드리고 싶은 일념에서 내가 약간 무리를 했는지도 몰라. 그러나 이 달 24, 레자이너 바링튼과 결혼한다고 할머님께 말했을 때, 나는 조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 그러나 나는 한번도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레자이너 바링튼이라고 자처하는 여성이 그렇게 말했어."

"베라 언니가 당신과의 결혼에 동의했단 말이에요?"

"당신 언니는 당신에게 몇 가지 거짓말을 한 모양이군. 먼저, 당신이 자기 대신 간다는 것을 나에게 알렸다는 말도 그렇고..."

그렇다, 세베로의 말이 옳다. 레기는 속이 답답해져서 크게 치켜 뜬눈으로 세베로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레기는 베라의 제임스에 대한 사랑을 상기하였다. 그렇게 제임스를 사랑하는 베라가 다른 남자와의 결혼에 동의를 했을 턱이 없잖나. 결혼에 동의하는 것과, 실제로 결혼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제임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베라는, 세베로의 가짜 약혼녀 역할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파기하고 런던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언니가 설마...

"베라 언니는 그런 약속을..."

"거기에 전화가 있으니까, 걸어보지 그래."

레기는 전화기에 손을 뻗다가 전화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베라 언니는 지금 신혼여행 중이에요. 그리고 설령 베라 언니와 연락이 닿는다 해도, 내가 직접 물어볼 수 없으리란 걸 당신은 알고 있지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당신이니까요."

"나는 신부를 위해서 1만 파운드를 지불했소. 그러니까, 레자이너 바링튼은 틀림없이 나의 신부로 확보된 셈이오."

"나는 당신 따위와는 결혼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과 결혼하다니, 꿈에도 그런 생각은 마세요."

세베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당신은 무엇이 목적인가? 돈이 더 필요한가?"

"돈이 더 필요하냐고요?"

"값을 더 올리려 하고 있는 거지. 잘 되면, 당신의 은행 구좌에도 l만 파운드를 넣으려고."

레기는 자기도 모르게 세베로의 뺨을 갈겼다. 레기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세베로가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사정없이 몸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세베로는 몹시 화가 났다.

"오해하지 말아요." 자기의 뺨에도 금방 세베로의 뺨에 생긴 것과 똑같은 빨간 손자국이 생기겠지. 세베로의 냉담한 얼굴 표정에 겁을 먹은 레기는 이렇게 외쳤다. 완전히 공포에 질린 레기는 여느 때 같으면 베라 이외의 사람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말을 지껄였다. "나는 당신의 돈 따위에는 흥미가 없어요. 나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세베로... 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세베로는 레기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뼈가 부서질 정도로 세게 잡았다. 세베로는 격노하고 있었다. 레기는 세베로의 격노가 자기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세베로는 레기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을 두 번이나 거절당했으니 화가 난 것이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 잔인하게 꼭 다문 입술. 레기는 새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레기는 너무나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 세베로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가 레기를 얼마나 난폭하게 다루고 있는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세베로는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적의가 드러나 있었다.

"이 문제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로 하지. 오늘 오후 할머니를 만날 때 결혼을 않기로 했다는 따위의 말을 하면, 당신과 당신의 소중한 언니가 평생 후회하게 될 일이 벌어질 거요."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자, 성큼 서재에서 나갔다. 그 상태로 레기와 함께 있다간 이성을 잃은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레기는 착잡한 마음으로 뒤에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세베로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공연히 화가 났다. 서재를 나서기까지의 몇 분 동안, 레기는 거기에 없는 세베로에게 실컷 욕설을 퍼부었다.

레기가 이성을 되찾아 이번 일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베란다로 나간 뒤였다.

베라가 한 가지 거짓말을 한 것은 확실하다. 베라는, 레기가 베라의 대리자로 우루과이로 떠나는 것에, 세베로가 동의했다고 했다. 세베로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 베 라는, 몇 달 동안만 세베로의 약혼자 역을 해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세베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베라는 이 점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일까? 레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베라는 무슨 짓이라도 하고 말 정도로 필사적이 되어 있었다, 세베로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뒤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외출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레기는 방으로 돌아와 선글라스를 꺼냈다. 어디로 갈까?

카르디노사 목장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거기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몇 채의 건물이 보였다. 저 근처로 가는 것은 삼가자, 세베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레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건물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도중에 풀이 있었다. 한낮의 무더위 탓인지 풀의 물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풀을 지나치자 잔디밭과 화단이 나왔다. 레기는 그 곳도 성큼 지나쳤다. 그렇게 걸어 다녀도 불안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세베로에 대한 분노만은 얼마간 가라앉아 있었다.

레기는 이상한 전화 이야기를 들은 뒤의 베라의 태도를 생각해 봤다. 지금 베라에게 전화해서, 이 새로운 사태에 대해 따져 물을 수 있을까. 베라가 그때처럼 당황하게 되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제임스가 눈치 채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베라에게 진상을 캐 물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끝이다.

눈을 들자, 멀리에 나무들이 한 줄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생각을 해보면 좋은 수가 떠오를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떠올라 레기는 그 곳을 향해 걸어갔다. 머릿속은 갖가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어 중도의 주위 경치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그때까지 레기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던 갖가지 문제들이 사라져버렸다. 레기의 눈앞에는 그녀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에 완전 무심한 사람이라도 매료되고 말 듯한 풍경이었다. 레기는 벅찬 감동에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따뜻한 바람이 레기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수양버들의 엷은 녹색 잎이 흔들리고 플라타너스의 잎이 수런거렸다. 레기의 발밑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에서는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시냇물이 졸졸 경쾌한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레기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칼륨분이 많아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흙. 수정처럼 맑은 시냇물. 그 건너편에 펼쳐져 있는 청록색의 목장, 그 안에는 야생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속을 어디선가 나타난 산토끼가 달려가는 것을 레기는 숨을 삼키며 지켜봤다. 우루과이는 보랏빛 땅을 의미한다. 그 이름 그대로 보랏빛의 꽃이 사방에 피어 있고 드문드문 야생의 금잔화가 섞여 있었다. 신기하게도 바람에 실려 왔는지 자줏빛 루핀(lupine)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광경은 레기의 모든 감각을 만족시켜 주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레기의 바로 옆에는 들장미가 피어 있고, 그 밑에는 가련한 들국화가 어지럽게 피어 있었다. 들장미 특유의 맑고 황홀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세로스 데 시에로-- 하늘의 언덕-- 이라니, 멋있는 이름을 붙였구나. 고개를 돌려 세베로의 집 쪽을 바라보면서 레기는 생각했다. 집은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다. 베라는 우루과이에는 해발 6백 미터 이상 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었다. 전체가 큰 물결처럼 돼 있고,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 레기는 자기가 마치 마법의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다보고 집 쪽을 봄에 따라, 마법은 약간 사라졌다. 도대체 얼마동안 망아(忘我)의 경지에 있었던 것일까. 베라의 일도, 제임스의 일도, 그리고 세베로의 일도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 언제였던가- 레기는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든지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내야 한다.

아뭏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세베로는 결혼 계획이 변경되었다는 것을 할머니께 알리지 않으면 안되겠지. 어떤 방식으로 알리든 나는 상관없다. 그것이 다만, 할머니를 상심케 하지 않는 방법일 것만은 확실하다. 오늘 아침 세베로가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마치 깨지기 쉬운 드레스덴 도자기를 다루는 듯했다.

만약 세베로 쪽에서 결혼식이 중지되었다는 것을 도나 에바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오늘오후 그녀에게 갈 수는 없다. 레기는 갑자기 깨달았다. 이 아름다운 장소와의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을 틈이 없다. 세베로가 서재에 돌아와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불확실한 바람을 안고 레기는 서둘러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현관에 들어섰을 때 레기의 옷은 땀에 젖어 등에 찰싹 붙어 있었다. 바깥은 뜨거운데 집 안은 벽이 두터워 시원했다. 레기가 집 안으로 들어서서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파나가 나타났다. 레기의 모습을 보고, 파나의 얼굴에 금세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레기를 찾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도나 에바가..." 파나가 입을 열었을 때 세베로가 나타났다. 세베로는 작은 소리로 파나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그 사이에도 그의 시선은 레기가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상기된 얼굴에 못 박혀 있었다. 레기의 이마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드리워져 있었다.

"달링, 모두가 당신을 찾고 있었소." 세베로는 레기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달링이라고 부른 것은 파나가 아직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레기는 알고 있었다.

"세베로, ,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이야기는 나중에도 할 수 있어.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시원한 음료수라고 생각해."

세베로는 레기가 더 이상 어떤 말도 못하게 하고, 시원한 객실로 데리고 갔다. 세베로는 그 곳으로 가는 동안, 더운 날에는 갑자기 햇살 속으로 나가자 말고 서서히 더위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나서야만 한다고 레기에게 주의를 주었다.

파나가 차가운 오렌지주스를 날라 왔다. 세베로가 주스를 가져오라고 시켰음에 틀림없다. 파나가 나간 뒤, 레기는 손에 들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목이 마르긴 했으나 의무감이 먼저였다.

"주위 환경을 완전히 알게 될 때까지는 외출할 때 반드시 누군가에게 행선지를 알리도록 해."

레기는 그의 말이 외출 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말로 들려 화가 났으나 사과했다.

"죄송해요, 생각이 모자라서."

세베로는 씽긋 웃었다.

"뭔가가 잘못 되어서 그런 건 아니오. 당신이 길을 잊어버리리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하여튼 오늘 당신은 우리가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멀리까지 갔었지."

세베로는 짐짓 상냥하게 행동하여 오전의 일에 대한 벌충을 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수고다, 나는 이미 그의 격노한 모습을 보고 말았으므로. 갈증은 가라앉았지만 레기는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세베로..."

"어디를 갔었지?" 레기가 급히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무시하고 세베로는 물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레기의 머리에 방금 보았던 광경을 되살려 주었다.

"시냇가까지. 아아 세베로, 정말 아름다왔어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레기는 엉겁결에 감정적인 말을 하여 자기의 내면을 너무 보여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무릎 위로 눈길을 떨구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레기는, 자신의 턱에 세베로의 손이 닿는 것을 느꼈다.

"달링, 당신이 발견한 이 고장의 아름다움에 당신의 아름다움이 가해지면 더욱 멋있어 질거요." 세베로는 레기의 턱을 들어올려, 눈 속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세베로는 달링이라고 불렀다. 더구나 그 말투에는 가식이 아닌 진실이 담겨져 있다고 느껴졌다. 레기는 멍하니 세베로를 쳐다봤다. 그러자 세베로는 몸을 구부려,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이제 정신이 드는 것 같군. 마리아가 점심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어. 나는 지금 당장 외출하지만, 오늘밤에는 당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겠어."

세베로는 가버렸다. 레기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그러나 곧 레기는 화가 나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베로는 나에게 이야기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멋대로 가 버렸다.

 

6

세베로는 나의 심중을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말을 못하게 했다. 레기는 그렇게 생각되자, 세베로가 미웠다. 그러나 도나 에바에게 차를 마시러 갈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그러한 마음은 엷어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 도나 에바 앞에서 뭔가 실수하게 되지 않을까만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네 시. 레기는 마음을 졸이면서 자기 방에서 나왔다. 도나 에바의 방문을 두드리자 안나가 나왔다. 안나는 오랫동안 도나 에바의 시중을 들어 온 모양으로 정중한 태도로 영어로 말했다.

"도나 에바님은 당신이 오시기를 무척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와요!" 도나 에바는 일어서려 했다.

레기는 급히 달려가 일어서려는 도나 에바를 말렸다. 그러고 그녀의 창백한 하얀 볼에 키스했다.

"네가 가까이에 앉을 수 있도록 안나가 오늘 아침에 의자를 고쳐 놓아주었어." 도나 에바는 천천히 의자에 고쳐앉아 레기가 앉기를 기다려 말을 계속했다. "안나가 지금 홍차를 내올 거야. 런던에 주문한 거야. 우루과이의 마테차는 너도 마셔본 적이 있겠지만, 영국의 홍차보다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 물론이에요." 하고 레기는 맞장구를 쳤다. 도나 에바의 밝은 표정이 레기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다만, 그것이 레기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이고, 나중에 그 반작용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걱정이 되었다.

잠시 동안 세베로 이야기는 거의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이야기의 촛점이 그 방향으로 맞춰져서는 곤란하다고 레기 쪽에서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기는 오늘 아침의 산책 때 본 것들을 도나 에바에게 이야기했다.

"너도 나처럼 벌써 이 나라가 좋아지기 시작한 모양이구나." 하고 도나 에바는 말했다. 그리고 레기가 우루과이에 흥미를 나타내자 도나 에바는 우루과이가 열 아홉 개의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두라스노는 그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두라스노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겠죠." 레기에게는 오늘 아침 시냇가에서 본 풍경 이상으로 아름다운 곳이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 나도. 순전히 나의 편견인지 모르지만."

우루과이는 라플라타 강의 동쪽 기슭에 세워진 나라며, 그 때문에 1830년대에 독립할 때까지는 동쪽의 땅이라 불리었다. 도나 에바 자신은 두라스노의 일부의 경계를 이루는 이 강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도나 에바는 차례차례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강 이야기에 이르자 눈물을 글썽였다. 세베로의 부모가 익사한 곳은 이 강일까? 레기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도나 에바는 아들과 며느리가 이 강에서 요트를 타다 익사했다고 말했다.

레기는 도나 에바가 또다시 슬픔에 잠겨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도나 에바에게 남아있는 것은 과거의 추억- 그것이 설령 슬픈 것이라 할지라도- 뿐이다. 레기는 문득 그것을 깨닫고,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지 않고 그녀의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옛날 친할머니의 추억담을 몇 번이나 들어주었던 것처럼.

"부모를 잃었을 때 세베로는 아직 어린 아이였어.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 당시 로베르토와 나는 따로 살고 있었지. 그래서 우리는 세베로를 우리 집에 데려와 길렀지. 그려나 세베로는 눈에 익은 언덕과 골짜기가 없는 곳에서는 조금도 행복하지 못했어. 그래서 이곳으로-- 로베르토가 좋아하는 곳이기도 했거든-- 우리는 이사를 했지. 세베로는 그 뒤에 대학에 들어갔고, 그 애는 완전한 성인이 되어 졸업하고 돌아왔지. 그 때 로베르토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앞으로는 세베로 혼자 독립해서 살아나가도록 해줘야겠다고 했지."

"두 분께서 떠나시는 것을 세베로는 싫어하지 않았나요?"

"전혀." 하고 도나 에바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로베르토의 말대로 세베로는 그 때 어엿한 어른이었으니까. 연로한 조부모가 함께 살면 혹 밤에 늦게까지 놀다가 돌아오면 귀찮게 잔소리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약간 짜증스러우리라 생각했겠지."

이 말에 레기는 피식 웃고 맡았다. 레기는 상황의 변화에 재치있게 대처해 온 도나 에바의 마음씀씀이에서 부러움을 느꼈다.

도나 에바는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서 말을 이었다.

"그 이후 손자의 걸프렌드는 누구다 하는 소문을 가끔씩 듣게 되었지. 로베르토와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궁금해 하고 있었지. 그런데 세베로는 도무지 우리에게 찾아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 로베르토는 세베로에게, 빨리 결혼해서 우리 부부가 그리고 짧은 동안이지만 세베로의 부모가 경험한 것 같은 충실한 가정을 꾸미기 바란다고 끊임없이 말해왔었지. 그래서 작년에 로베르토는 세베로가 36세의 생일을 맞는 날, 󰡐세베로, 너는 이제 가정을 가져야 한다!󰡑고 준엄하게 선언했지."

레기는 안절부절못했다. 세베로와 자기의 결혼 문제로 이야기가 돌려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인 것이다. 막상 그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떻게든지 화제를 바꾸어야지. 그러나 섣불리 도나 에바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세베로는 그 말에 따른 모양이죠."

"글쩨, 어떨지. 그 때 세베로는 진실로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면 결혼하겠다고 했어."

󰡐살았다. 세베로가 그 말대로 할 테니 문제는 없다.󰡑 레기는 마음이 편해졌다, 세베로가 진심으로 자기와의 결혼을 원할 이유가 없으므로. 오늘아침에 도나 에바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다만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결혼식 날까지는 아직 3주나 남아 있다. 그 때까지 도나 에바는 건강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면 그 때 가서, 무슨 지장이 생겨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게 됐다든가- 여하튼 무엇이든 좋으니 세베로가 마음대로 이유를 만들어 댈 테지.

"하얀 드레스를 입겠지?"

결혼은 하지 않는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는 데 난처한 질문을 받자 레기는 당황했다.

"하얀 드레스?"

"웨딩드레스 말이야.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하얀 것보다 화려한 색상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잖아?"

"... 그래요." 레기는 자기가 어떤 말에 동의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버무렸다. 이제 슬슬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10분쯤 후에 레기는 도나 에바의 방에서 물러났다. 레기의 불안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더구나, 조심성 없게도 내일도 또 놀러오라는 도나 에바의 청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세탁물을 가지고 온 파나는 저녁식사 시간이 아홉 시라고 알려줬다. 그때까지의 시간, 레기의 마음은 불안과 안도의 사이를 시계의 추처럼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세베로는, 진실로 사랑하는 여성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도나 에바의 말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신부를 위해서 1만 파운드를 지출했다고 말할 때의 세베로의 표정을 생각하면 몹시 불안해졌다.

아홉 시 5분전에 레기는 방을 나왔다.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몹시 불안했다. 식당 앞에서 세베로의 모습을 본 순간 레기는 외면상의 침착성조차 잃고 말았다. 넓은 어깨, 몸에 꼭 맞는 검은 양복. 세베로는 너무나 멋있었다. 세베로는 레기 쪽으로 다가왔다.

"당신을 데리러 가려던 참이야." 세베로의 느긋한 말투에 레기의 불안은 약간 엷어졌다.

"파나가 식사시간이 아홉 시라고 이야기해 주었어요." 레기는 세베로가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걸음을 멈추고, 불안하게 대답했다.

세베로는 레기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유유히 훑어보고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을까? 정말 아름답군." 세베로의 목소리에 놀리는 듯한 기색이 있었지만,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세베로는 레기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식당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의 한쪽에 2인분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잘 되었다고 레기는 생각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는 것이 아니므로 큰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으니, 이럴 때 임기응변으로 재치있게 처신해야지. 세베로는 흥분을 잘하는 타이프니까, 매력적인 호스트로부터 느닷없이 공격자로 일변하여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절대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레기는 세베로가 의자를 끌어내주는 대로 맡겼다. 세베로도 자리에 앉았다.

,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레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리아가 첫 번째 접시를 날라 왔다. 마리아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레기는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세베로가 앞지르고 말았다.

"오늘은 뭔가 즐거운 일이 있었나?" 세베로는 레기가 하루를 즐겁게 보냈으리란 따위의 환상을 품고 있지 않단 말이지!

"오후에 당신 할머님과 차를 마셨어요."

"알고 있어. 할머니는 당신이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야, 레기."

"저도... 당신 할머님을 좋아해요."

"당신을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내가 세베로와 사귀는 것을 사절하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와 같이 있을 시간 따위는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주제에!

"요 몇 주 동안 계속 집안 일에 묶여서 바깥에서의 용무를 거의 보지 못해서 말이오."

상황이 이래서는 하고 싶은 말을 꺼낼 수 없다. 레기는 상황이 점점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돼 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힘드셨겠어요." 레기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바로 화를 감추려 입술을 깨물었다, 레기의 대답을 듣고, 세베로가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레기가 세베로의 할머니에 대한 연민에 빠진 것을 세베로는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독심술의 천재인가? 아니면 나의 인상이 상냥해 보이는 걸까? 레기는 이러 저리 생각을 굴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앞으로는 자기의 성격과는 반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나이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이 깐깐한 여자로 보이는 데 있다면, 앞으로는 이곳에서 사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가 정에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지 말아야겠다고 레기는 생각했다.

"레기,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당신은 승마를 할 줄 알아?"

그때 마리아가 두 번째의 접시를 가지고 왔다.

"한두 번 타본 적은 있어요."

"내일 아침, 날씨가 좋으면 나와 함께 말을 타고 나가서, 시골 경치를 보는 게 어떨까 생각하는데."

"어머나, 가고 싶어요." 레기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자기가 세베로의 반짝이는 파란 눈을 보면서 미소 짓고 있는 것을 깨닫고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것은 지긋지긋하다-- 마리아가 첫 번째 요리 접시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며 레기는 결심했다.

"식사는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어. 만약 구미에 안 맞으면 마리아에게 영국요리를 만들게 할 수도 있거든."

"맛있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레기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실제로 레기는, 이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할까를 궁리하느라 제 정신이 아니어서, 자기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세베로. 우리의 일에 대해서... 결혼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베로는 양쪽 글라스에 와인을 따랐다. 레기는 그것이 대답을 궁리하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같이 생각되었다. 세베로는 레기를 보고 글라스를 들어 올리더니 한 모금 마셨다. 그는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갑자기 레기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어서 세베로의 시선은 레기의 입으로 옮겨졌고, 그대로 멈췄다.

"좋아. 우리들 이야기를 하지." 세베로는 입을 열자, 레기의 답을 기다리려고도 하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당신은 오늘 아침, 언니가 대단히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랬었지."

"."

"l 만파운드의 대가가 이 집에 와서 나의 약혼녀 역할을 하는 것 뿐으로, 말하자면 긴 휴가를 즐기는 것만으로 끝나리라고,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레기는 접시 위로시선을 떨구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돈 문제 따위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언니는 그 역할과 함께, 돈도 당신에게 주었나?"

"아아뇨! 만약 그 돈을 베라 언니가 이미 써버리지 않았다면 벌써 당신에게 둘려주었을 거예요. 그리고 일부러 제가 멀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을 거고요."

"그렇게 했으면 계약무효가 되었을 테지. 돈을 쓰는 취미를 가진 언니가 있다는 것이 당신에게는 운이 나빴던 셈이지."

"그 돈을 아무렇게나 써버리진 않았어요. 언니와 제임스가 살 집의 계약금으로 썼어요."

"그랬었군."

레기는 세베로의 눈을 보고 실수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베로가 나중에 무기로 쓸 수 있는 재료를 주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의 핵심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제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당신의 약혼녀 역할을 해주고, 베라 언니가 당신에게 진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예요. 그러니 소임은 어김없이 잘 해내도록 할께요. 당신에게서 불평을 듣지 않도록 저는...."

"목적은 그것뿐인가?" 조용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레기의 가슴을 콕 찔렀다. 내가 더 큰돈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뿐이라니, 무슨 뜻이죠?"

"당신은 오늘 아침,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잖아. 당신이 진정으로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당신은 왜 우루과이에 왔지? 그의 곁에 있지 않고."

레기는 지금 세베로에게서 지적 받을 때까지, 자기가 몇 시간동안 클라이브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에요!"

"나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3주 후에 당신은 나의 신부가 될 테니, 당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진실로 사랑해요. 당신과는 3주일 후는커녕, 영원히 결혼하지 않아요. 그것은 당신도 잘 알고 계시죠." 그럴까라고 말하듯 세베로는 한쪽 눈썹을 추겨 세웠다. 레기는 세베로가 말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하려고 애썼다. "당신은 할아버지께 진실로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면 결혼한다고 했었죠. 오늘 오후 도나 에바로부터 들었어요. 당신은 나에게 사랑은커녕 눈꼽만큼의 호의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레기는 세베로에게 말허리를 꺾이는 일 없이, 단숨에 말을 끝내고는 의기양양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세베로는 아주 냉정하게 상대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특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레기의 승리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애정이 없는 결혼을 하게 될 것 같군. 그러나 결혼은 결혼이니 착오 없도록. 당신 애인은 당신과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는 모양이지. 그럴 의사가 있다면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을 리가 없거든. 무슨 문제가 있었나? 남자 쪽에서 최종 결심을 하지 못했나?"

"최종 결심?"

"남자 쪽에서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면 그 남자는 결혼하려고 했을 텐데. 아니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나?"

세베로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계속 공격해 올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자기가 왜 대답을 망설이는지 그 이유를 모르면서도 레기는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아아, 알았어. 남자가 항상 쓰는 수법을 그도 썼나 보군- 아내가 이혼에 동의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정말 이혼해 주지 않았어요!" 클라이브를 변명해 주려다가 레기는 자기도 모르게 사실을 실토했다. 그리고 금세 아차했다. 지금의 말은 세베로가 알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인정한 거나 다름없다.

세베로는 레기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나 만족한 눈길은 아니었다. 레기는 자기 얼굴이 붉어진 것을 알았다. 얼굴을 붉힌 이유는, 자기가 기혼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세베로에게 고백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클라이브와의 동거를 원했었던 것일까? 만약 동거를 단행했다면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까? 레기는 지금 그 사실을 확실히 자각했다.

"부인을 만난 적 있나?" 세베로는 클라이브가 진짜 기혼자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말투였다.

레기는 아이린과의 만남을 생생하게 상기했다.

"있어요. 부인은 클라이브에게 이혼을 강요당한 날 저를 찾아왔어요." 레기는 마치 얼이 빠진 것처럼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남자 쪽에서도 진지했단 말이지. 당신이 런던을 떠나 이곳에 온 것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는 모르고 있어요. 클라이브는 회사 일로 외국으로 출장을 갔어요. 출발 전에, 그는 내게 동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죠. 그 때까지 난 클라이브가 기혼자란 걸 모르고 있었어요. 다음날 밤, 그의 부인이 찾아왔더군요. 그리고 그 때서야, 아이가 둘 있다는 것을 알았죠. 당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 후였어요. 물론,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러나 당신의 말을 베라 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언니는... 완전히 흥분했어요. 베라 언니는, 클라이브에 대한 내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클라이브가 아이까지 딸린 기혼자라는 것을 알고서도 내가 만약 그를 또다시 만나게 되면, 여지껏 내가 받아온 교육이 아무 소용없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해서...."

"당신이 조부모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어기고 동거를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단 말이지."

"."

"당신의 우루과이 행에 대해서는 누가 생각해냈나?"

"베라 언니요."

"베라는 몹시 당황했었던 모양이지. 그런데 당신과 그... 클라이브는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이였나?"

"그런 걸 당신이 알 필요 없잖아요."

"그런 관계였단 말이지?"

어떻게든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굳이 부정할 것까지야 없지. 세베로가 그렇게 믿는다면 나에게 유리해질지도 모르니까. 아아, 그런 여자라면 결혼은 그만두기로 하자-- 세베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결혼계획을 취소할 지도 모른다...

마리아가 들어왔다.

"식사가 입에 맞나요?" 마리아의 질문에 레기는 자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먹었는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이없게도 접시는 깨끗이 비어 있었다.

"아주 맛있었어요, 마리아." 레기는 스페인어로 대답했다.

디저트를 내놓고 마리아는 또다시 나갔다.

"이제 아시겠죠, 세베로. 내가 카르디노사 가의 며느리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걸."

"그 이유는?"

레기는 어이없어 하며 스푼을 놓고 세베로를 말똥말똥 쳐다봤다.

"좀 전의 제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세베로는 대답 대신 껄껄 웃었다. 그것은, 그 날 밤 두 사람이 식당으로 발을 들여놓은 후로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그러나 레기로서는 자기 이야기가 왜 우스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스러운 레기. 기혼자와 사랑에 빠진 여인이 당신이 처음은 아니오. 당신의 경우는 상대가 기혼자인지 아이가 있는지 전혀 모르고 사귀었잖아. 그리고 요즘, 결혼 전에 순결을 잃는 여자가 한 둘이 아니고. 그 남자와 당신이 어떤 사이였는가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아."

"부언하면.... 당신은 여전히... 나와 결혼할 생각...." 이제 레기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결혼만은 피해야 한다. "돈 문젠데, 나와 결혼하면 당신 집의 기둥까지 뽑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 않아요? 결혼을 하게 되면 난 당신 재산에 대해서 권한을 갖게 되잖아요."

세베로는 실눈으로 레기를 날카롭게, 마음 구석구석까지 꿰뚫어보려는 듯이 쳐다봤다. 무척 길게 느껴지는 1분이 지나갔다. 레기는 이 싸움은 자기 쪽에 승산이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만약 세베로가 자기와 결혼한다면, 세베로의 전 재산의 일부는 레기의 것이 된다. 세베로는 애써 모은 재산의 일부를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여자에게 빼앗기는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을 것이다.

세베로는 엷은 웃음을 머금은 레기의 입매를 쳐다봤다. 레기는 뚫어지게 그를 지켜봤다. 이윽고 세베로의 입술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인생에는 때때로 도박이 필요해, 레기. 이 나라 사람에 대해서 당신이 더 깊이 알게 되면 달링, 우루과이인이 무엇보다도 도박을 좋아하는 국민이란 걸 알게 될 거요."

"당신은...." 레기는 말문이 막혔다. 자기 두뇌가 알려주는 것을 레기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귀여운 레자이너, 나는 위험을 무릅쓸 작정이오. 이달 24일에, 나는 당신과 결혼하오. 그러니 당신도 그 사실을 수용하는 편이 좋을 거요."

레기는 눈에 분노의 빛을 띠고서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일어섰다. 세베로의 얼굴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사라지게 해주고 싶었다.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아요.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결혼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도 그럴 생각이 없어요. 당신 할머님께 상처를 주는 것은 죄송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나는 할머님을 좋아하니까... 그러나 할머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으로 뭔가 다른 구실을 생각해내는 편이 좋을 거예요. 당신은...".

"당신은 정말 사람을 제멋대로 다루고 싶어 하는군."

"제가요? 당신이야말로 그래요. 말해둡니다만, 세베로 카르디노사,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아요. 이 결정은 변함 없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어요."

"그렇다면 참 안됐군."

"안 됐다뇨?"

세베로는 한숨을 쉬더니, 싱글벙글 웃었다.

"제임스 아서에게 편지를 내는 것을 이틀쯤 연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는 베라의 남편이 틀림없지?"레기는 새파랗게 질려서 세베로를 멍하니 쳐다봤다. 세베로는 신중한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언니의 전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 지금의 집으로 우송되겠지. 제임스 아서는 누가 집의 계약금을 제공했는지 틀림없이 알고 싶어 할 테고."

"비열한 사람!" 목구멍에서 짜낸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화가 난 레기는 식당에서 나갔다.

 

7

이튿날아침 잠을 깼을 때, 레기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화를 내며 식당을 나온 후,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 이상할 정도다. 밖에는 밝은 햇살이 내리비치고 있어 어젯밤에 내린 비로 축축한 대지가 마르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함께 승마를 하러 가려고 내려오리라 기대하고 있다면, 천만의 말씀! 시골을 좋아하는 레기는 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화를 내고 세베로와 동행하지 않는 것이 손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존심을 생각할 때, 세베로의 약혼녀 역할을 하면서 다녀야 하는데 자진해서 따라나서고 싶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어, 파나가 홍차를 가져왔다. 파나는 수줍어하면서 레기에게 다가와 쟁반에서 종이쪽지를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 파나." 레기는 웃는 얼굴로 답례하고, 전언을 훑어봤다. 그리 사랑하지 않는 레기의 약혼자는, 만약 그녀에게 승마할 의향이 있다면, 30분 후에 출발하겠다고 씌어 있었다.

파나는 세베로가 약혼녀에게 사랑의 말을 적어 보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레기는 파나를 향해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핸드백을 집어 들어 안에서 펜을 꺼내 세베로에게서 온 메모를 뒤집었다. 그 뒤에 뭔가 모욕적인 말을 쓸 작정이었다.

레기의 그러한 충동에 브레이크를 건 것은 파나의 표정이다. 주인과 약혼녀 사이의 사랑이야기에 한숨을 쉴 정도로 황홀한 얼굴을 하고 있는 파나의 표정. 레기는 문득 비꼬아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달링, 당신에게는 압도당하고 말아요. 난 아직 어젯밤의 일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있어요.

세베로가 집을 나갔을 무렵이라고 짐작하고, 레기가 아침식사를 하러 간 것은 그로부터 45분쯤 지난 뒤였다. 아침식사 후 레기는 앞으로 무엇을 할까를 곰곰 생각한끝에, 먼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베라 앞으로 길고 즐거운 편지를 썼다. 신혼인 제임스도 이 편지를 읽을지 모른다. 레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진상을 눈치 챌만한 일은 일체 쓰지 않았다.

편지를 다 쓴 뒤, 레기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부쳐달라는 말을 하러 갔다. 그때까지 베라에게 속은 일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

우체통이 있는 곳을 알려 준 사람은 마리아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 레기의 번역기계가 잘 작동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마리아의 스페인어가 너무 빨랐는지, 이야기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리아는 단념하고, 󰡐편지를 주세요.󰡑 하고 말하듯 손을 내밀었다.

"제가 부쳐 드리죠."

풍만한 가슴을 흔들면서 웃는 마리아에게 레기는 방긋 웃어 보이고는 편지를 건네주었다.

레기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방으로 가 선글라스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따뜻한 햇살 아래로 나서자, 주저하지 않고 언덕 밑에 늘어선 나무들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어제와 똑같은 마법의 세계가 아직 거기에 존재하면 좋으련만.....

레기의 기대는 보기 좋게 이루어졌다. 들장미의 향기에 감싸이자, 한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걱정거리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서는 복잡한 생각에 끙끙 앓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기는 시간의 흐름을 잊고 나무그늘에 서 있었다. 바삐 일하고 있는 꿀벌들, 갑자기 나타나서는 또 갑자기 날아가 버리는 비둘기. 그것들 하나하나에 레기는 넋을 잃었다. 레기는 비둘기가 날아간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시내를 따라 난 길은, 그녀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차례차례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해서 8백미터쯤 걸어갔을 때, 레기는 뜻하지 않게 한 여자를 만났다. 나이가 설흔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캔버스를 얹은 이즐을 앞에 놓고 한 손에 화필을 들고 앉아 있었다. 여자는 뒤돌아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침입자를 귀찮게 생각함에 틀림없다.

"죄송해요. 몰랐기 때문에....." 사과의 말이 무의식적으로 영어로 레기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영어로는 상대에게 의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레기는 서툰 스페인어로 바꾸어 말하려 했다. 그러나 여자의 눈살이 펴진 것이 그보다 먼저였다. 여자는 화필을 왼손으로 고쳐들자 물감이 묻은 오른손을 진바지에 문지르면서 일어섰다.

"당신은 세베로의 약혼녀시죠?"

"... 그래요. 나는...."

"난 카를로타 멘도사에요, 모두들 로타라고 부르죠."

여자는 자기 소개를 하면서 레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너무나 붙임성 있는 웃음 띤 얼굴에 레기도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레기라고 불러요. 방해를 해서 죄송해요. 설마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건 조금도 개의치 않아요.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낼까 하고 있던 참이니까요. 우리 집에 가셔서 커피를 마시지 않으실래요? 집은 그리 멀지 않아요."

레기는 금세 로타가 좋아졌다. 그녀의 초대가 진심인 것 같아 레기는 흔쾌히 응낙했다.

두 사람은 로타의 짐을 나누어 들었다. 튼튼한, 보행자 전용의 다리를 건너, 초원을 걸어가자 이윽고 전방에 집이 몇 채 보였다. 아직 아무 곳도 구경하지 못했다는 레기의 말을 들은 로타는, 여기서부터 마을이라고 설명했다.

"제 남편 프란치스코는 세베로의 집의 관리를 맡고 있어요. 저 끝에 있는 집이 우리 집이에요. 이 마을의 사람들은 대부분 세베로 밑에서 일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문을 들어서서 안으로 향했다. 좁은 길의 양쪽을 메우고 있는 스톡과 팬지, 현관 옆에 보초처럼 서 있는 접시꽃, 사방이 현란한 색상의 홍수였다. 레기는 모두가 너무나 탐스럽다고 말하자, 로타는 유감스럽게도 잡초까지 그렇다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의기투합했고,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레기는 로타로부터 우루과이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레기가 정장을 한 투우사의 그림을 칭찬했을 때의 일이다. 로타는 그 그림을 프란치스코를 위해서 그린 것이라고 했다. 우루과이에서 투우는 50년 전에 금지되었으나, 지금도 코로니아에 가면 투우장은 볼 수 있다고 했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우루과이의 인구 이야기로 옮아갔다. 인구 3백만 중반 가까이가 몬테비데오와 그 근교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내륙지방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모두들 그 곳에 모여 있죠-- 레기의 의견에 로타도 완전히 동의했다. 레기는 참다운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어, 기운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레기가 그만 목장에 돌아가야겠다며 일어섰을 때는 정오가 지나 있었다. 레기는, 바깥주인의 점심 준비가 늦어지겠다며 로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니에요, 프란치스코는 점심때는 좀처럼 집에 돌아오지 않아요. 점심으로 아사다를 실컷 먹으니까요."

"아사다?"

아사다는 동물을 통채로 구워 모든 것을 먹는, 일종의 바베큐라고 했다.

"모든 것을 먹는다고요?"

"가죽만 남기고 모두 먹죠. 레기, 점심도 함께 드시지 않겠어요?"

"마리아가 뭔가를 준비해 놓았으리라고 생각돼요."

레기는 섭섭한 마음으로 로타의 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때야 자기가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집을 나온 것이 생각났다. "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저어.... 세베로가 점심을 먹으러 돌아올지도 모르니까요."

로타는 그 말을 듣자, 󰡐알고 있어요󰡑 라고 말하듯이 미소 지었다. 로타의 웃음 띤 얼굴이 작은 다리를 건널 때까지도 레기의 뇌리에 계속 들러붙어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목장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레기는 모르고 있었다. 다만 마리아가 모처럼 만들어 놓았을 식사를 망치게 되지나 않을까가 걱정되어 걸음을 빨리 했다.

레기가 나의 장소라고 정해둔 곳에 이르는 길을 돌았을 때,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레기가 마음껏 사방을 둘러보며 서 있었던 바로 그 장소에,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참으로 멋진 말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신이 칠흑같은 그 말등에 타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오늘 아침 레기가 비꼬는 투로 답장을 써 보냈던 상대였다.

레기는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혼연일체가 된 말과 사람. 그것은 마치 그 자리에 오기만 하면 레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레기의 장소에 서 있었다. 그때 어디선지 갑자기 돌풍이 불어왔다. 레기의 스커트가 바람을 받아 들추어졌다. 레기는 긴 다리뿐 아니라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가릴 틈조차 없었다.

돌풍은 불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그치고 말았다. 레기는 얼굴을 붉히면서 앞으로 나가, 세베로를 올려다봤다. 세베로는 불쾌한 표정이 아니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판페로에 대해서 경고를 해두었어야 했군, 달링. 갑자기 불어오는 서남풍이야. 판페로는 남자의 어떤 저기압도 달콤한 기분으로 바꾸어 놓고 마는 것으로 유명해."

외출할 때는 누군가에게 알리고 나가라는 세베로의 명령을 레기는 어겼다. 그는 그 일로 기분이 나쁜 것이다.

"잊었어요. 아무생각 없이 밖에 나왔다가, 그만....."

"다음부터는 잊지 말아요." 세베로는 팔을 뻗어 레기의 손을 잡았다. 레기는 까닭을 알 수 없어, 난처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집에까지 타고 돌아가고 싶지 않나?"

"괜찮아요. 저어... 말 한 마리에 당신과 나, 두 사람이 타면 말이 힘들어요. 게다가 돌아가는 길은 계속 오르막이라서...." 레기는 말꼬리를 흐리며 홱 방향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걸음도 가기 전에, 레기의 발은 땅에서 떨어졌고 등을 세베로의 가슴이 꼭 누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말 등에 앉혀졌다.

레기는 놀란 나머지 얼마동안 항의조차 못했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세베로는 레기를 낙마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베로는 무릎으로 말을 다루었고 양팔로는 레기를 꼭 받쳐주었다. 세베로의 팔의 힘과 근육의 움직임이 엷은 옷을 통해서 레기에게 생생히 전달되었다.

말과 말 위의 두 사람은 삼위일체가 되어 가볍게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레기는 점잔을 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감추는 것보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지금의 레기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레기는, 그렇게 말 등에 앉아 있는 것이 즐거워졌다. 숙달된 기수가 몸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그 기수의 강인한 실과 같은 확실한 힘을 의식하자, 레기는 가슴이 설레는 흥분을 느꼈다. 예기치 못했던 일에서 오는 흥분에 불과한 것이라고 레기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리고 그 후는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다만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자기 몸의 움직임에 따라서 미풍이 일었고, 그것이 시원하게 볼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다는 기분 좋은 감각뿐이었다.

 

로타 멘도사를 만난 지 이틀째 되는 날 전화가 걸려왔다. 만약 틈이 있으면 커피를 마시러 오지 않겠느냐는 초대의 전화였다.

레기에게 하루 생활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생긴 것은 그 주일의 일이다. 오전 중에는 전원을 산책하고, 산책 도중 로타를 만날 때는 그녀의 집으로 가 커피를 마셨다. 오후에는 수영을 했다. 영국을 출발하기 전 짐을 꾸리며 목장에 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혹시 일광욕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수영복을 넣어왔었다. 수영하기 전에는 반드시 근처에 세베로가 있나 없나를 먼저 확인했다. 풀에서 수영을 한 다음에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도나 에바의 방으로 오후의 차를 마시러 갔다.

일주일 후, 레기는 목적도 없이 넓은 객실로 들어갔다, 결혼문제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웨팅 케이크는 이미 구워졌고, 이제 장식하는 일만 남아 있다. 레기는 그 날, 그것을 도나 에바로부터 들었다. 결혼식의 무기 연기에 대해서 세베로가 도나 에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상, 자기가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레기는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에 큰 슬픔을 겪은 도나 에바의 파란 눈을 보자 레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기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 날은 하늘은 흐렸으나 따뜻한 날이었다. 다시 한번 세베로에게 이야기해야지...

"당신의 승마솜씨를 보여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레기는 깜짝 놀라며 뒤돌아봤다. 세베로가 언제부터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는지를 레기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만나고 싶은 상대가 나타났으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즈로 갈아입고 올 테니 기다려 주시겠어요?"

"5분간 여유를 주지." 이런 말이 때때로 세베로에게서 느껴지는 매력의 일면이다.

레기는 객실을 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되돌아왔다.

"별로 잘 타지 못해요." 레기의 고백을 듣자 세베로는 놀려대듯이 왼쪽 눈썹을 추켜 세웠다. "당신이 만약 지난번처럼 나를 태울 생각이라면, 가지 않을래요."

"그 때는 당신도 즐기는 것 같던데." 세베로는 또다시 놀렸다.

󰡐이제 두고 보라지, 세베로 카르디노사! 󰡑 화를 불끈 내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간 레기는 진즈로 갈아입고 머리를 묶었다.

세베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레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레기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말은 성질이 온순해 보이는 늙은 말이었다. 세베로 자신의 말도 지난번의 그 말은 아니었다.

", 페타로에게 인사해야지."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자 레기를 도와 안장에 태우고 등자를 조절했다. 그리고 그녀가 승마에 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은 드디어 출발했다.

세베로는 레기가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도중에 굉장히 무서운 얼굴을 한 동물을 가둬놓은 우리 곁을 지나갔다. 그 때 세베로는, 동물을 엄격히 선택하여, 계획적으로 사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세베로는 무슨 일이든 계획적으로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레기에게 일깨워 주는 말이었다.

레기가 말에 익숙해지자, 두 사람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레기가 탄 말은 세베로의 말과 마찬가지로 걸음걸이가 믿음직했다. 두 마리의 말은 수천 평방미터나 되는 넓은 청록색의 초원을 힘들이지 않고 달려갔다. 언덕을 넘을 때마다 군데군데 철조망이 처져 있어, 두 사람은 울타리 가까이에 올 때마다 속도를 늦추었다. 관리가 잘 된 목장답게, 철조망에는 모두 손질이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수천 마리나 되는 소떼를 만났다. 그것은 반갑게도 레기가 알고 있는 헬레포드 종이었다. 그때 세베로와 똑같은 검은머리의 사나이가 소떼를 떠나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말을 타고 있는 그 사나이는 키가 세베로와 거의 비슷했다. 세베로는 레기에게 프란치스코 멘도사라고 소개했다.

"로타의 부군이시군요!" 레기는 환성을 질렀다. 그리고 자기 옆으로 말을 나란히 세우고, 손을 뻗어오는 사나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신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프란치스코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그도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으나 아내인 로타만큼은 잘하지 못했다. "로타는 당신을 알게 되어 행복하대요."

"저도 로타와 친구가 되어 아주 행복해요." 레기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레기는 로타로부터 우루과이와 그 국민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모른다. 아리엘이나 로스 모티브스 프로테오의 저자, 로도의 이야기. 레기가 몬테비데오에서 동상으로 보았던 알티가스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뒤,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파라과이에서 빈곤과 고독 속에 보내야 했던 이야기... 이러한 모든 것을 로타로부터 들었다.

프란치스코는 그야말로 로타와 잘 어울리는 호인 같았다. 프란치스코와 몇 분간 이야기한 뒤, 세베로와 레기는 말머리를 돌려, 또다시 물결치는 초원으로 향했다.

이윽고 경사가 가파른 둑이 나왔다. 세베로가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레기는 가까스로 다 내려간 뒤에, 안도의 숨을 쉬면서 눈을 들자, 눈앞에 아름다운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도 나의 장소와 마찬가지로 나무들이 서 있었다. 다만, 여기에 있는 것은 종류도 빛깔도 다른 떡갈나무와 플라타너스 등이었다.

"아아 세베로, 멋있어요."

"당신은 눈이 높으니까, 여기라면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세베로는 이 장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단 말인가? 레기의 세베로에 대한 적의가 엷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레기의 마음속에 맴돌 때 세베로는 다른 말을 시작했다.

"여기서 말을 쉬게 하지, 목이 마를 테니."

그 말을 듣고 레기는 방금 전의 생각을 지워버렸다. 세베로는 나를 위해서 특별한 일을 해준 것이 아니다. 다만 말이 목마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에 불과하다.

레기는 혼자서 말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전에 억센 팔이 레기의 허리를 받쳐서 말에서 내려주었고, 레기의 발이 딱딱한 대지에 닿는 것과 동시에 팔을 떼었다. 세베로는 풀 위에 누웠다. 지금이 그 문제를 처리할 기회인지도 모른다. 레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세베로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았다.

,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화술이 필요하구나. 이야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문제의 핵심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세베로를 화나게 만들뿐이니까.

"세베로!" 세베로는 레기 쪽을 돌아봤다."내가 자주 로타 집에 가서 커피를 대접받는 것을 알고 계시죠?" 세베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란 눈이 레기를 주의 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레기는 풀잎을 뜯었다. 신경이 흥분된 것은, 세베로의 대답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 뒤에 끄집어내려는 말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 답례로 로타를 목장으로 초대해서 커피를 대접해도 좋을까요?"

레기는 세베로를 화나게 하고 말았다. 그것은 세베로가 대답하기 전부터 알았다. 무엇을 잘못했을까? 레기는 침울해졌다.

"당신이 그런 것을 묻다니, 놀랍군." 레기가 예측하고 있었던 벼락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풍의 전조는 이미 보이고 있었다. 세베로 따위가 무엇이 무서운가. 레기는 용기를 내어 무e뚝뚝하게 대꾸했다.

"고용인의 부인이 객실에서 유유히 앉아 있는 것은 못마땅하단 말인가요?" 순간, 레기는 자기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베로는 사나운 기세로 일어나 앉았다. 레기를 붙잡고 마구 흔들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그는 주먹을 꼭 쥐고, 가까스로 그 충동을 억눌렀다.

"로타도 프란치스코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집에서 식사를 했어. 그 부부를 집에 초대하는 것은 나로서도 기쁜 일이오. 그것을..."

"죄송해요, 세베로. 정말 죄송해요." 말을 꺼낼 때부터 레기도 알고 있었다, 세베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세베로가 마리아나 파나나 판초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말을 함부로 해서 저는.... 틀림없이 신경이 예민해졌던 모양이에요."

세베로의 분노는 확 타올랐다가 금세 꺼져버렸다. 세베로가 자기를 웃는 얼굴로 쳐다보는 것을 보고, 레기는 호흡이 조금 편해졌다.

"머지 않아 신부가 될 테니 무리도 아니지." 세베로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은 레기의 마음에 온갖 걱정이 한꺼번에 되살아나게 했지만, 그녀가 참견할 틈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곧 나의 아내가 될 당신에게는 누구든지 좋아하는 사람을 우리 집에 초대할 권리가 있다는 거요. 당신이 그런 걸 일일이 물어 본다는 것이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오."

"너무해요!" 이번에는 레기가 화를 냈다. "세베로 카르디노사, 난 당신하고 결혼하지 않아요. 되풀이 말하죠, 결혼하지 않아요." 레기의 말소리는 크고 또렷또렷했다.

세베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레기의 눈을 똑바로 쏘아봤다. 그러고 나서 침착하게 이야기를 딴 방향으로 돌렸다. 세베로 특유의, 레기를 애태우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보기 좋게 효과를 거두었다.

"클라이브의 경제력이 좀 더 나았더라면 당신은 동거에 대해 여자다운 불안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비열한 사람! 너무해요!" 레기는 몹시 화를 내고 일어서서 세베로에게 덤벼들려 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두 사람 사이에는 몇 미터의 거리가 있었고, 그 근방 일대는 빗물에 팬 웅덩이 투성이었다. 게다가 레기는 그런 웅덩이 중의 하나에 발이 걸려 세베로 위로 덮치듯이 넘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레기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미친 듯이 세베로에게 마구 대들었다.

한편 세베로는,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같은 레기를 아주 쉽게 깔고 앉더니 레기의 양팔을 억센 팔로 꼭 눌렀다. 세베로도 레기 못지않게 화가 났다.

"이 말괄량이! 당신 속에는 불꽃이 있다고 말했었지. 아마 이 정도의 불꽃이면 당신을 얌전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레기는 세베로에게 욕을 퍼부으려 했다. 그런데 욕을 하려고 벌린 입 위로 세베로의 입술이 덮쳐왔다. 그것은 강렬한 키스였다. 레기가 지금까지 누구에게서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런 키스였다.

잠깐 세베로의 입술이 떨어졌다.

"놓아요!" 레기는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면서 격분해서 외쳤다.

"미안하게 됐어.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 같아서 그만."세베로는 레기의 손을 어깨로 누르고, 자유롭게 된 손을 그녀의 등에 돌리면서 또다시 입술을 가까이 댔다. 레기는 세베로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런데 세베로가 갑자기 입술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레기는 자기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놓아주세요!" 세베로가 얼굴을 들어, 자신의 화난 얼굴을 내려다보자 레기는 또다시 외쳤다.

"당신이 나를 욕하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가르쳐주지. 나에게는 당신에게 한번 뺨을 얻어맞은 빚도 있어. 그때 난 너무 신사적이어서 빚을 갚지 못했지."

"신사적! !"

"모욕을 하면 그만큼의 댓가를 받게 될 거야."

세베로의 분노는 가라앉기 시작한 것 같았다. 레기는 빠져나오려고 바르작거렸으나 헛수고였다.

"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모욕이 하나 더!" 세베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한번 레기의 입술을 빼앗았다. 이번 키스는 아까처럼 난폭하지 않았고 오래 계속되었다.

세베로의 입술에 공격성이 없어진 것을 느끼고, 레기는 어리둥절해졌다. 세베로가 간신히 얼굴을 떼었을 때, 레기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투쟁심이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레기는 세베로의 입술이 또다시 가만히 자기 입술에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깨닫자 레기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세베로의 키스를 받고 있는 레기의 입술도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레기가 세베로에 대한 투지를 완전히 잃은 것은 이때였다. 레기의 입술이 열리고, 그녀의 등에 감겨 있던 세베로의 두 손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무의식중에 레기는 두 팔로 세베로의 등을 안았다. 세베로의 입술이, 레기의 눈에서 얼굴, 얼굴에서 목으로 움직였다. 레기는 황홀감에 잠겼다.

세베로의 입술은 레기의 입술 위로 돌아왔다. 그것은 레기의 힘을 뺏아간 동시에, 그녀의 몸 속에 새로운 불을 지펴 욕망을 일깨웠다. 차가운 손이 진즈 속에 집어넣은 블라우스를 끌어올리는 것을 레기는 의식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애무하며 차츰 가슴으로 다가오자 레기는 소리를 질렀다.

"이러지 마세요!"

세베로는 움직임을 멈췄다. 팽팽하게 긴장된 세베로의 몸. 더 일찍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레기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나를 돈을 노리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상대로. 레기는 도망치려고 몸을 들었다.

"조용히!" 쉰 목소리가 명령했다. "그렇게 몸을 비비꼬며 자극하면 머릿속이 혼란해져."

레기는 금방 얌전해졌다. 세베로에게 아직 이성적 사고력이 남아 있었던지, 그는, 레기가 생각만큼의 흥분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갑자기 레기의 몸이 자유로와졌다. 세베로는 잔디밭을 한 바퀴 뒹굴어 레기에게서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그 후 오랫동안 그는 양팔을 무릎 위에 얹고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지금, 레기는 자기의 존재를 세베로에게 상기시킬 의사가 털끝만큼도 없었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서, 세베로는 레기쪽을 흘끗 쳐다봤다. 한 가닥으로 묶었던 머리가 풀어져 엉망이었다. 머리를 빗으려 해도 빗이 없다. 불이 화끈거렸다. 자신의 두 팔로 세베로를 안았다는 것을 생각하자 레기는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지금의 당신의 모습은 당신을 기쁘게 하는 능력을 내가 조금은 갖고 있는 느낌을 주는군." 세베로는 비아냥거리더니 일어서서 말곁으로 갔다. "돌아가지. 오늘은 할머니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어. 그래서 다른 날보다 식사시간이 빨라."

 

8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비열해요.󰡑레기는 내심 화를 내면서 식탁에 앉았다. 네 사람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레기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은, 세뇨르 페리페 아르마라르라고 소개받은 50대 후반의 풍채 좋은 신사였다. 식사가 진행됨에 따라 그가 사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 불쾌한 것은 도나 에바가 화제를 결혼식 쪽으로 옮긴 것이다. 이야기의 진행으로 보아, 세뇨르 아르마라르가 결혼식의 주례를 맡을 예정임이 분명했다.

레기가 도나 에바 쪽을 보니, 그녀의 얼굴은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행복한 표정이었다. 지금 화제에 올라 있는 이야기가 도나 에바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엷은 청색의 드레스에 몸을 감싸고 있는 도나 에바는 여전히 몹시 병약해 보였다. 그런 그녀 앞에서 결혼식을 할 수 없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다. 레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베로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레기는 세베로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노려보았다. 그에 대해서 세베로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또 레기를 자극했다.

"한 잔 더 들지 않겠소, 달링?" 세베로가 권하는 와인을 레기는 유별나게 상냥한 목소리로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아요. 달링, 충분해요."

"아직 밤이 깊지 않았으니까."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며, 세뇨르 아르마라르의 글라스를 채웠다.

도나 에바가 레기에게 말을 걸어왔다.

"결혼식은 오전보다는 오후 두 시쯤이 좋겠지. 날이 더우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거야. 피로연을 정원에서 할 수도 있을 테고."

레기는 도나 에바의 제의에 찬성을 표했다. 그러나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가 결혼식 따위는 없다고 선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식사가 끝나 손님이 떠나자 세베로는 도나 에바를 침실로 모셔다 드렸다. 레기는 세베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짜증을 내면서 얼굴을 씻고 네글리제로 갈아입었다. 모두가 세베로 탓이야.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오늘 오후에도 말했는데. 그 날 오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레기의 머릿속은 다시 어지러워졌다-- 자신의 그 놀라운 행동, 내 몸 속에는 여태까지 내가 모르고 있었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정열이 숨어있는 것이다. 세베로에 의해서 자극 받아 잠을 깬 감정....

레기는 잽싸게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세베로 때문이라는 한 가지 점에 생각을 집중시키려 했다. 오늘 저녁식사 때만해도 세베로가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결혼식에 관한 타합을 중지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베로는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하였다.

하기야, 나도 뭐라고 한마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때 레기의 머리에 도나 에바의 상냥한 얼굴이 떠올랐다. 레기는 도나 에바를 이제는 친할머니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었다. 세베로가 지금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레기는 끈질기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상념들을 내쫓고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이나-- 레기에게는 그렇게 길게 생각되었다-- 노력을 계속했지만 끝내 그녀는 체념하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잠을 자고 싶으면 문제를 먼저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레기는 밤 기온이 후덥지근하다고 느끼면서, 가운을 걸치고 살그머니 방을 나왔다. 레기는 베란다를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15분 정도 그러고 있었을까. 마음의 편안은 조금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베라와 제임스의 일까지 비집고 들어와, 레기의 머릿속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만약 내가 세베로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베라의 행복은 깨지고 만다. 그것을 세베로는 확실히 알고 있다. 이상하게도 레기의 양심을 가장 괴롭히는 일은 다름 아닌 도나 에바의 일이었다. 오늘 밤 작별 인사를 하는 도나 에바의 얼굴-- 레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 지친 얼굴에는 머지 않아 자기 손자며느리가 될 레기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도나 에바의 얼굴이 레기 앞에 크게 떠올랐다.

레기는 갑자기 어깨의 짐이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도나 에바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으로 결정할 수 있다. 이것으로 이젠 잠들 수 있다. 레기는 방으로 돌아가려고 뒤돌아 섰다.

그때 어듬 속에 사람 그림자가 떠올랐다. 레기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어둠 속에서도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계셨어요?" 세베로는, 고민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레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세베로는 레기에게 다가가면서 애매한 대답을 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어서 침대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졌나?"

진짜 이유를 알면서 뻔뻔스럽군! 레기는 욕을 퍼붓고 싶은 것을 참고, 세베로에게서 30센티쯤 떨어진 곳에 잠자코 서 있었다. 눈앞으로 개똥벌레가 한 마리 날아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된 공기가 감돌았다. 레기는 그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녀는, 겉으로는 느긋하고 침착하게 보이지만, 세베로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기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당신과 결혼한다고 하면..."

세베로는 레기에게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하고, 성큼 그녀의 팔을 잡자, 정원으로 끌고 갔다. 누구에게도 말소리가 들릴 우려가 없는 장소에 도착했다. 주위에는 스톡꽃의 향긋한 냄새가 충만했다.

세베로는 레기의 팔을 놓으면서, 일부러 레기를 화나게 하려는 듯이- 그녀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결혼했을 때는 이라고 말했지."

", 만약 내가 당신과 결혼한다고 하면이라고 했어요." 마음속으로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이 세베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레기는 아직도 결혼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달렸다고 그에게 강조하려 했다. "그럴 경우, 언제까지.... 당신하고 결혼생활을 해야만 되죠?"

"클라이브를 기다리면서?"

"왜 클라이브 이야기를 꺼내는 거예요?" 클라이브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지긋지긋해. 레기는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레기가 한 발짝을 내딛기도 전에 세베로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레기는 걸음을 멈추고 두세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베로가 옳은 거야. 도망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야. 지금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 훨씬 좋아. 그리고 그 후는, 영국에 돌아갈 때까지, 매일 매일을-- 결혼식 날까지 포함해서-- 그때의 상황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

"이상한 말을 해서 미안해." 세베로는 뜻밖에 사과의 말을 했다. 그 듣기 좋은 말투는 레기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괜찮아요."

"결혼이 언제까지 계속되느냐는 질문을 했지." 세베로의 목소리는 엄숙하다고 할 정도로 진지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

레기는 도나 에바를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고 있지만, 만약 도나 에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난 이곳을 떠나도 좋다는 말인가요?"

"그 후까지 당신이 남아 있어 주기를 내가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나?"

차갑고 거만한 질문에 레기는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세베로는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침과 동시에 가라앉았다.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냉담하게 할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다니. 세베로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죄송해요!" 나쁜 것은 세베로인데도, 레기는 그만 사과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는 되도록 사무적인 말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세베로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거래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때가 오면 이혼해 주시겠죠?" 우루과이는 가톨릭 국가다. 평생 세베로에게 얽매이는 건 견딜 수 없다.

"우루과이에서는 이혼이 자유로와. 위대한 개혁자 호세 바토이에 이 올도니에스 덕분에 말이오. 올도니에스는 남녀평등권을 만들었지. 아내 쪽에서는 이혼을 원하는 이유조차 댈 필요가 없게 돼 있어."

그 대답을 듣고 레기는 안심했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레기는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또 한 가지만... 이 결혼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일단 말을 꺼낸 이상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저어, 다시 말해서, 오늘 오후 같은 일은... 말하자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죠?"

"내가 당신을 침대로 데려 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말인가?" 세베로의 말투는 또다시 비아냥거림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레기는, 이번에는 자기가 바라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화를 내고 먼저 자리를 뜨거나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확실히 말해 주세요."

세베로는 한숨을 쉬고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레기가 자기와의 잠자리를 거부한다는 생각자체가 몹시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정확한 대답을 들을 때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레기의 단호한 태도에 마침내 세베로는 고집을 꺾었다.

"1만 파운드의 댓가로서 조금은... 가정적인 위안을 기대해도 좋겠지. 하기야 집 밖에서도 모든 걸 간단히 해결할 순 있지만."

레기는 돈 이야기에도 화가 났지만, 그보다도 세베로가 결혼 후에도 아내 이외의 여성과 공공연히 관계를 맺겠다는 의미로 그 말을 한 것 같아, 더욱 부아가 났다.

레기가 집 안으로 돌아가려 하자, 세베로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때 문득 레기의 머리에 일주일 이상이나 들어보지 못한 세뇨라 고메스의 일이 떠올랐다. 레기는 충동적으로 세베로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어둠 속에 볼썽 사납게 넘어질 자기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리고 그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세베로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 여자에게 가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다른 잠옷으로 갈아입어, 달링." 베란다까지 왔을 때 세베로가 말했다.

"뭐라구요?"

"오늘밤은 안개가 많이 내려 잠옷자락이 흠뻑 젖었으리라 생각돼."

방으로 돌아온 레기는 몹시 짜증이 났다. 그런 어둠 속에서도 세베로는 내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 똑똑히 보았단 말 아닌가? 세베로의 말대로 네글리제 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 사실이 레기의 울화통을 부채질했다.

도어가 열리는 소리에 레기는 눈을 떴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는 분명히 갖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레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잘 잤소, 달링."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세베로가 들어왔다. 레기가 나가달라고 말할 틈이 없었다."잘했어, 나의 조언을 들어주어 고마워."

"조언?" 레기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깜박이며 세베로의 시선을 쫓았다. 세베로의 눈은 엷은 네글리제 하나만 입고있는 레기의 상반신을 보고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물으려다가 레기는 그만두었다. 자기가 잠옷을 갈아입은 것을 세베로가 알고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방금의 그의 말은 마치 어젯밤 자기가 세베로가 시키는 대로 잠옷을 바꿔 입고 잠자리에 든 것을 그가 확인했다는 투 아닌가? 세베로가 싱긋 웃어 보이자 레기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시트를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세베로는 성큼 침대로 다가와 그 끝에 앉더니 돈 다발을 꺼냈다.

"뭐죠?" 레기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세베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레기는 앞으로 그의 돈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을 작정으로 있었다.

"아마 당신 언니는 당신에게 자세한 사항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테지. 그러니 당신은 24일날 입을 만한 드레스를 가지고 오지 않았을 테고."

레기는 아직까지 웨딩드레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서, 카르디노사 목장의 안주인으로서 창피하지 않을 정도의 드레스가 필요한 것은 확실하다. 어젯저녁 식사 때의 이야기로 미루어, 세로스 데 시에로의 역사상 기념해야 할 이 날에는 가족의 친구들은 물론, 세베로가 고용하고 있는 모든 종업원과 그 가족이 참석할 것이다. 레기는 몹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그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것을 사는 게 좋으리라 생각하세요? 청순한 흰색으로 할까요?"

"회색 쪽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얀 드레스는 클라이브와의 결혼 때 입었을 테지. 아니면 클라이브가 처음이 아닌가? 옷을 갈아입어. 시내까지 데려다 줄 테니."

"내버려두세요!" 레기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굳이 당신이 함께 간다면 검은 드레스를 살 거예요. 로타와 함께 가겠어요."

세베로는 거칠게 도어를 닫고 나갔다.

레기는 로타에게 전화를 한 뒤에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는 블보(vo1vo)가 서 있었다. 목장을 찾아오는 손님의 차는 종류가 다양하지만 볼보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레기의 관심은 이내 자동차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세베로와 이야기하며 서 있는 여성으로 옮아갔다. 3O대로 보이는 검은머리에 우아하고 날씬한 여성이었다.

약혼녀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려면 세베로 곁을 모른 체 지나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레기는 열심히 뭔가를 세베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여성의 말을 중단시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레기는 세베로의 등에다 대고 소리질렀다.

"다녀올께요, 달링! "

가까이에서 보니 여자는 눈매가 매서운 미인이었다. 레기의 목소리에 여자는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여자와 세베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자는 레기를 보고서도 세베로의 팔을 놓지 않았다. 레기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뒤돌아본 세베로는, 레기의 눈치를 살피더니 갑자기 웃어 보였다.

"마누엘라와는 초대면이지, 달링?"

"초대면이란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 당신은 지금까지 이 여인과 은밀히 만났죠?" 레기는 부아가 나서 틀에 박은 듯한 약혼녀 역을 했다.

레기는 잰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너무 피로하지 않도록 무리하지 말아요, 달링." 세베로의 말소리가 레기의 귓전에 울렸다.

세베로와 마누엘라는 깊은 관계일 것이다-- 그 생각은 레기의 머릿속에서 뿌리를 내린 듯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레기는, 세베로가 󰡐로타의 집에까지 데려다 주지.󰡑하고 말했을 때, 마누엘라가 세베로에게 은밀한 눈짓을 하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 그 후 마누엘라는 바로 말했다.

"우리는 되도록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요."

세베로가 달래듯이 말했다.

"물론이지, 마누엘라."

레기는 그 말을 듣고, 자기가 방해자라는 것을 느꼈다. 레기는 그 자리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결혼식 당일은 날씨가 더없이 좋았다. 레기로서는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나쁜 날씨라도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목장에는 손님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모든 손님에게 인사를 하다가는 식을 올리기 전에 기진맥진해 버린다고, 레기의 점심식사는 방으로 날라 왔다. 오전 중은 굉장히 느릿느릿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점심식사를 끝내고 나자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버렸다. 레기는 파나의 도움을 받아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은 다음, 아래로 내려왔다.

프란치스코 멘도사의 인도로 예쁘장한 교회에 당도하니 교회에는 넘쳐날 정도로 많은 하객이 와 있었다.

이것은 잘못이다. 이만저만한 잘못이 아니다. 레기는 막다른 순간에 서자 마치 생명의 밧줄에 매달리듯 프란치스코의 팔에 매달렸다.

그때 레기의 눈에 정장차림의 세베로의 모습이 들어왔다. 세배로의 옆에는 그의 대학 동창이 나란히 서 있었다. 세베로는 레기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의 당당한 뒷모습을 본 순간, 레기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결혼은 세베로의 할머니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세베로를 존경해서 모여든 하객 앞에서 그에게 창피를 줄 수는 없다. 이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다.

프란치스코는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는 결혼을 진행시키기 위해 신랑 앞으로 신부를 데리고 갔다. 세베로와 레기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베로의 파란 눈에는 자랑스러움과 찬양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정말 뜻밖의 것이었다. 베일 너머로 세베로를 본 레기는 그의 눈이 금세 따뜻해지고 그것이 특별히 자기만을 위한 마음같이 느껴졌다. 그 후는 사고 작용이 정지해버렸는지, 그 때부터 세베로의 아내가 되어 교회를 나설 때까지의 일을 레기는 무엇 하나 기억하지 못하였다.

피로연장에서 차례차례 악수를 청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마누엘라의 남편 홀헤 고메스의 얼굴만은 레기의 기억에 남았다. 홀헤만큼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을 레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홀헤는 아내인 마누엘라보다 20세쯤 연상으로, 몸집은 작지만 아주 튼튼해 보였다. 그는 세베로와 마누엘라의 정사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생각은 줄곧 레기의 머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홀헤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레기가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피로연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그 근거로 세베로와 이야기하는 홀헤의 얼굴에는 적의가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오늘의 널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을 거야, 세베로." 마지막 손님이 떠난 뒤, 세베로와 레기의 전송을 받으며 자택에서 모시러 온 자동차 쪽으로 안나와 걸어가면서, 도나 에바는 말했다."레기의 조부모님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셨을거야, 틀림없어." 도나 에바는 레기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날 중의 하루야. 너희들의 결혼식을 보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단다."

세베로와 레기는 나란히 서서, 주차장을 떠나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레기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세베로는 눈물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레기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뒤돌아봤다.

그때 세베로의 손이 슬쩍 뻗어왔다. 세베로는 레기의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쳐다보게 하더니, 레기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올렸다. 세베로는 레기로 하여금 자기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게 하였다. 레기의 속눈썹에 눈물이 번쩍였다. 그녀는 얼굴을 돌리려 했다.

"아아, 달링! 그런 슬픈 얼굴을 하지 말아." 세베로는 상냥하게 말하자 레기의 턱을 붙잡은 채 몸을 구부려 그녀의 양 볼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할머니는 무척 행복해 하셨어. 그러니 눈물을 흘리지는 말아. 함께 가지,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

"옷을 갈아입고 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야. 그대로 가는 것이 더 좋아. 당신에게 줄 결혼 선물을 보러 가는 거니까."

"결혼 선물?"

세베로는 레기의 반문에는 대답하려 하지 않고, 지체 없이 레기를 차고 쪽으로 데리고 갔다.

 

9

레기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멀뚱멀뚱 빨간 미니카를 바라보았다.

"이런 것을 선물하다니, 생각지도 못했어요... ....? 저는 당신에게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 그러고 보니 세베로를 처음 만났을 때, 우루과이까지의 항공료를 만들기 위해 낡은 차를 팔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났다. 레기는 그 일을 생각하자 난처해졌다."세베로, 이런 걸 사주지 않아도 되는데, 전 전혀 갖고 싶지 않아요." 레기는 이렇게 말해 놓고 금세 잘못 말했구나 하고 후회했다. 세베로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레기는 그가 자신을, 넘어져도 그냥 일어나지 않을 여자로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는 적어도 오늘만은 싸움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것일까. 판초가 자동차를 보러 왔다고 하여 레기가 어리둥절해 하자 갑자기 싱긋 웃으며 레기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내가 당신에게 결혼 선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었던 거야, 모두, 달링."

아아, 그랬던가! 세베로의 고용인들은 주인이 신부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하고 흥미진진하게 주목하고 있었단 말이구나. 이 비싼 선물은 단지 고용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구나. 레기는 왠지 실망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렇지만 나는 아직 연극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멋진 선물이에요. 고마와요, 세베로! 지금 당장 옷을 갈아입으면 저녁식사 전에 시승을 할 시간이 있을까요?"

"나도 함께 가지."

함께 가겠다는 말은 신부로부터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는 것을 고용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마음대로 차를 쓰기 전에 나의 운전 솜씨를 보아두겠다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레기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복도에서 자기 방 쪽으로 가려고 하는 레기를 세베로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데려가려 했기 때문이다.

"왜요?"

세베로는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레기를 의도한 쪽으로 걸어가게 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사용했던 방은 카르디노사 가의 며느리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을 유지해야지. 이 집에 도착한 날 밤, 마리아는 목장에서 최고의 방을 나를 위해서 준비하라는 분부를 세베로로부터 받았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세베로는, 그 방은 이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세베로는 어떤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도어를 밀어 열었다. 그리고 레기를 먼저 들여보냈다.

방안은 사방이 온통 흰색이었다. 하얀 침대 커버, 하얀 커텐, 경대 위에 놓인 꽃병에까지 탐스러운 하얀 꽃이 꽂혀 있었다. 세베로는 등 뒤에서 뚫어지게 레기를 관찰하였다. 레기는 세베로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면서 말없이 흰 나무로 만든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장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레기의 옷이 전부 옮겨져 걸려 있었다.

레기는 말없이 장문을 닫았다. 신경이 곤두서서 슬그머니 세베로쪽을 살펴보자, 그는 무심하게 벽에 기대서 있었다. 방에는 두 개의 도어가 더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레기의 긴장은 풀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도어를 여니 욕실이었다. 욕실 또한 흰색 일색이었다. 내심의 불안을 세배로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어쩌면 그는 눈치 채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레기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또 하나의 도어를 열었다.

레기는 마음이 놓여 그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을 뻔했다. 도어 안쪽은 다른 침실이었다. 만약 두 사람의 침실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고용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레기와 마찬가지로 세베로도 그것을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부부의 침실을 이런 식으로 이어진 방에 꾸며두면, 고용인들은 약간은 의아해 하겠지만 최근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유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열쇠가 붙어 있으면 좋겠는데.... 레기는 도어의 양쪽 면을 살펴봤다. 그러나 열쇠는 어느 쪽에도 없었다. 그때 레기는, 자동차를 보여 주었을 때 세베로가 싸움을 피한 것을 생각했다. 여기서는 먼저 싸움을 걸지는 말아야지. 레기는 그렇게 다짐하고서 입을 열었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요." 세베로가 벽에서 몸을 떼어 꼿꼿하게 서는 것을 보고 레기의 말소리는 끊여졌다. 세베로는 레기가 무슨 말을 하든 설득시킬 작정인 것 같았다. "저어, 당신은 노크하지 않고 제 방에 들어오시겠죠?"

그러자 세베로는 큰소리로 웃었다. 레기는 화가 불끈 치밀었으나 그 화는 금세 가라앉았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해서, 당황한 듯 얼굴을 돌렸다.

"당신은 멋있는 사람이야, 레자이너 카르디노사!"

무엇이 멋있단 말인가? 마음대로 이 방으로 짐을 옮겨 놓은 데 대해 화를 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옮겨 놓은 이유를 재빨리 알아챈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내가 이 방에 와서 발가벗은 당신의 몸이라도 보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나?"

레기는 이제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세베로는 그것을 깨달았는지 말투가 진지해져 있었다.

"만약 당신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 때는 반드시 도어를 두드리지. 그렇게 약속하면 마음이 편해지겠나?"

비아냥거림인가? 레기는 세베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레기가, 그가 정말 도어를 두드릴지 그러지 않을지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베로는 다음 말을 이었다.

"되도록 빨리 옷을 갈아입어. 피로연에서는 거의 먹지 못했으니 배가 고플 거야. 시운전은 이 근처를 잠깐 도는 정도로 하지."

미니카의 시운전을 끝내고 돌아왔을 매 레기는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또다시 자동차 핸들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더구나 이번 차는 레기가 전에 몰았던 차와는 다르다. 언제 어느 때 고장이 날지 모르는 그런 고물 차는 아니다.

저녁식탁에서의 세베로의 매너는 최고였다. 레기를 화나게 만드는 말은 한 마디도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리아가 수시로 드나들면서 수선스럽게 잡담을 늘어놓았다. 마리아의 시선은 레기에게 쏠릴 때마다 더욱 상냥해졌다. 그것은 레기에게, 오늘밤은 최고로 기쁜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하게 해주었다.

"오늘은 긴 하루였어요. 저는 그만 잠자리에 들고 싶어요." 식사가 끝났을 때 레기는 수줍어하지도 않고 말했다.

"그렇게 해요. 나도 곧 가지. 당신 방으로 파나를 보내줄까?"

오늘 아침나절 파나의 꿈꾸는 것 같은 표정이 생각나 레기는 당황하며 거절했다. 세베로는 일어서서 레기를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레기는 갑자기 까닭 없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 안녕히 주무세요!"세베로가 도어를 열기 전에 인사를 하고 그대로 뛰어갔다.

욕조의 물에 몸을 잠그고 있자, 동요한 마음이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행동했을까. 마치 불에 덴 고양이처럼 도망치다니. 세베로의 행동에 특별히 경계를 필요로 하는 구석은 조금도 없었는데. 레기는 여느 때보다 더 오래 향기 좋은 거품을 즐긴 다음, 마침내 욕실을 나왔다.

그런데 도어를 연 순간 지금까지 참아왔던 불안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뜻밖에도 레기의 침대 위에 가운만 걸친 세베로가 길게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 주세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이 먼저 입에서 튀어나왔다.

"신랑을 대하는 태도로는 최상이군." 세베로는 느긋하게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 저는... 당신..."

"난 어김없이 도어를 노크했어." 쇼크로 멍해져 있는 레기를 우스운 듯이 쳐다보면서 세베로는,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납작한 박스를 집어 들었다."당신에게 이걸 주려고 왔을 뿐이야."

레기는 세베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다가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무엇이죠?"

"당신을 물어뜯을 물건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세베로는 레기에게 박스를 내밀었다. 세베로는, 레기가 경계의 눈을 번뜩이며 천천히 박스를 여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박스에서 나온 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것은, 시냇가의 나의 장소에 앉아 있는 레기의 초상화였다. 그 장소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재현해 놓아 레기는 멍해진 채 구멍이 뚫어질 정도로 그 그림을 쳐다봤다.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아, 세베로! 어떻게?" 레기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어떻게라니 ? 자동차보다 더 개인적인 물건을 선물하고 싶어서야."

"왜요?"

세베로는 어깨를 움츠렸다.

"할머니 일로, 당신에게 치하를 하고 싶어서라고나 할까."

"그 일이라면 치하 같은 것 할 필요 없어요. 난 할머니를 정말로 좋아하니까요." 레기는 가시 돋친 어조로 말했다.

"알고 있어." 세베로는 조용히 대답했다. 레기가 한 말을 세베로는 처음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었다-- 레기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레기는 또다시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 아름다와요."

"당신을 위해서 로타에게 부탁했지."

"어마, 그랬어요. 고마와요, 세베로." 레기는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세베로에게 달려들어 키스했다.

세베로는 레기의 양팔을 잡고 밀어냈다. 그리고 레기의 발그레한 얼굴과 윤이 나는 금발을 쳐다보면서, 나무라듯이 말했다.

"당신은 이 결혼을 진짜로 만들고 싶어?"

"아아뇨!" 레기의 날카로운 부정과 함께, 두 개의 침실을 연결하는 도어가 쾅하고 거칠게 닫혔다.

잠시동안 눈물을 흘린 다음, 레기는 가까스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레기는 하루의 출발만큼은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하고, 자기가 먼저 세베로에게 아침인사를 했다. 그에 대해 세베로부터는 불쾌한 목소리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자기 컵에 커피를 따르는 세베로의 얼굴을 레기는 슬그머니 관찰했다. 밤새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세베로가 갑자기 눈을 들어, 레기와 시선이 마주쳤다.레기는 당황해서 눈을 내리깔고 토스트에 마말레이드를 바르는 시늉을 했다.

세베로의 시름에 겨운 듯한 표정은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고 말하는 듯했다. 혹시 나에게, 어젯저녁처럼 자기에게 달려들어 키스하는 것 같은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어요. 레기는 반항적인 심사가 되었다.

세베로는 입을 열었지만 어젯밤의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을 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지 않기로 했으니, 앞으로 일주일 동안 난 목장 근처에 있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해."

레기는 접시에서 눈을 돌렸다. 이 사람은 항상 자고 나서 잠투정을 심하게 하는 것일까? 확실히 그가 내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레기는 내심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몹시 흥미 있다는 듯이 세베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해요."

"좋았어. 오늘은 하루 쉬기로 하고, 오후에 승마를 하지."

"좋아요." 이건 마치 명령 투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 레기는 맞장구쳤다.

세베로는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도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식당에서 나갔다.

오늘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 하루가 될까?

레기의 예측과는 반대로, 며칠 간 두 사람은 어디를 가건 함께 행동했고,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둘 다 쉽게 화를 잘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각자 스스로의 언동에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긴 하지만, 3일째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아직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세베로는 몇 번이나 레기를 웃겼고, 그때마다 그도 함께 웃었다. 레기가 웃는 것을 보는 것이 마치 기쁜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하기야 레기의 울적해 하는 얼굴은 세베로도 보고 싶지 않겠지.

지금 레기는 나의 장소로 걸어가고 있다. 이렇게 혼자가 된 것은 세베로가 신혼초인 것을 모르는 방문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레기는 말없이 섰다. 그때 레기의 신경을 곤두세운 것이 있었다. 바삭바삭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쳐다보니 한 마리의 아르마딜로(armadillo)가 달려가고 있었다. 아르마딜로의 모습은 레기에게 학창시절에 배운 노래를 연상시켰다. 틀림없이 롤링 다운 투 리오(Ro1ling down to Rio)라는 노래였지. 처음에는 건성으로 부르다가 기억이 완전히 되살아나자 레기는 큰소리로 불렀다.

레기의 노랫소리가 갑자기 그쳤다. 갑자기 세베로가 나타나 가만히 레기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즐거워 보이는군, 레기. 행복해?"

레기는 자기가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 따위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지금은 철저히 불행해야한다. 그런데 레기는 놀랍게도 불행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런 가 봐요."

세베로는 레기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발했다.

"정직한 대답에 대한 보상으로 집에까지 당신을 모셔다 드리지. 집에 돌아가서 콜라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셔도 좋아."

세베로가 놀려대는 데도 레기는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혼자서 신이 나서 큰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던 것을 세베로에게 들킨 것이 쑥스러웠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 있어 그런 것은 금세 잊어버렸다.

"손님은 벌써 돌아가셨나요?"

"지금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알기 위한 기간이야. 이럴 때는 누구든 타인의 방해를 받고 싶어 하지 않지."

뜻하지 않은 대답에 레기는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세베로가 아직도 놀려대고 있는 것이라면,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만약 진심에서 나온 말이라면, 세베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파나가 마중 나와, 레기가 외출 중에 배달된 편지를 내밀었다. 그 편지를 세베로가 받았다. 그는 미스 R바링튼 앞이라고 적힌 봉투를 찬찬히 쳐다보면서 레기를 객실로 데리고 갔다. 그 후 세베로는 몹시 심각한 얼굴로 레기에게 편지를 건네고 말없이 방에서 나갔다.

세베로는 레기가 천천히 편지를 다 읽었을 무렵에 돌아왔다. 음료를 가져 온 것으로 보아, 주방에 갔었던 모양이다. 세베로는 레기의 몹시 놀라는 표정을 보자마자 음료를 놓고, 급히 그녀 곁으로 와서 앉았다.

"무슨 일이야? 혹시 언니가 병이라도 났나?"

레기는 눈을 깜빡여 정신을 차리려 했다. 편지는 베라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클라이브에게서 왔다. 옛날의 레기라면 뛰면서 기뻐할 내용이 씌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편지의 내용이 아니다. 편지의 끝에서 클라이브의 서명을 보았을 때, 레기는 최근에 단 한번도 그의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자기가 클라이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레기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레기를 보다가 기다림에 지친 세베로는, 레기가 말릴 겨를도 없이 편지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말미의 서명을 보자 세베로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당신의 아파트가 잠겨 있어서 깜짝 놀라 베라와 제임스의 집으로 찾아갔소. 베라는 쇼핑을 나가 없었지만, 마침 제임스가 복통으로 출근을 않고 쉬고 있어서, 당신이 베라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내어 당신의 주소를 가르쳐 주었소. 당신이 남미에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소. 이 편지를 받는 즉시 돌아와 주오.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소.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은 아이린이 이혼에 동의해 주었소.󰡑

세베로는 편지를 다 읽자마자 일어섰다. 세베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레기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보낸 즐거운 시간은 이제 끝이 난 것 같았다.

"당신의 클라이브는 이제 곧 자유를 얻어 당신을 정식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나 보군." 딱 버티고 서서 레기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세베로의 얼굴은 냉엄했다 "틀림없이 당신은 애인에게 답장을 하겠지.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는 이미 결혼했읍니다, 하고 말이오. 그때 내 말도 전해 주면 좋겠소. 클라이브는 결혼의 맹세를 예사로 파기할지 모르나, 카르디노사는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세베로가 얼마나 강한 자제심을 발휘했는지는, 그가 도어를 조용히 닫고 나간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세베로가 격노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레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베로는, 레기를 내일 첫 비행기로 클라이브에게 돌아갈 정도로 비열한 여자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세베로는 레기가 아직도 클라이브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레기는 이제 클라이브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아직도 믿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애정이란 그렇게도 쉽게 식을 수 있는 것일까...? 레기는 그렇게 하면 머릿속이 개운해질 것 같은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얼음을 띄운 오렌지주스가 든 주전자가 레기의 눈에 띄었다. 레기는 갈증을 느껴 컵에 주스를 따랐다. 레기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도 주전자 속의 얼음은 어느새 완전히 녹아있었다.

나는 참다운 뜻에서 클라이브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즉 앞으로의 인생을 계속 함께 하려는 상대로서의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조금 전에 나는 행복하다고 세베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인 것이다. 정말로 클라이브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클라이브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세베로의 애무에 정신이 없었던 그 날... 그때 깨달았어야 했던 것이다. 클라이브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다른 남자에게 안기면 어떻게 해서든지 저항했어야 하지 않은가.

레기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세베로의 그 쌀쌀한 분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러니까, 다음에 세베로와 얼굴을 대할 때는 그 분노가 가라앉아 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세베로가 화를 내는 이유는 분명하다. 도나 에바가 여생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일-- 이것이 세베로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신혼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옛날 애인에게로 돌아가 할머니를 슬프게 만들려 한다는 이유일 것이다.

세베로는 결코 서약을 깨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것은 절대로 나하고 이혼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레기는 그렇게 해석했으나, 이상하게도 그것이 조금도 고민이 되지 않았다. 또 한가지 레기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베로는 클라이브가 간단히 마음을 바꿔 결혼이나 이혼을 쉽게 하는 사나이라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런 남자에게 걸려 상처받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세베로는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만약 이것이 나의 착각이 아닐 경우에는 세베로는 나를 조금은 좋아한다고 할 수도 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레기는 깨달았다.

그러나 세베로가 조금은 레기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당치도 않은 오해였다.레기가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식당으로 가자, 세베로는 이미 와 있었다. 그의 인사는 무뚝뚝하였다. 마리아 앞인데도 체면을 세워주려 하지 않았다. 신혼부부가 뭔가로 말다툼을 했음에 틀림없다고 금방 알아차린 마리아는, 식사의 시중을 들면서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세베로의 어깨 넘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비참한 마음으로 있었던 레기는 마리아의 우스꽝스런 표정과 몸짓에 그만 웃고 말았다.

"뭐가 우스워?"

마리아는 세베로의 신경질적인 말에 일이 벌어지겠구나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

"애인으로부터 편지가 왔으니, 앞으로의 인생은 장밋빛이리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 우리는 당신이 바보처럼 히죽이죽 웃으며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참고 보아주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지. 한마디 더 한다면...."

레기는 화를 버럭 내며 일어섰다.

"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버리면 좋겠어요, 그것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어요! "

화가 난 레기는 식당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 앞에 가기도 전에, 세베로에게 붙들려 의자에 도로 앉혀지고 말았다.

"나의 아내로서의 예의만은 지켜야 해. 식사는 끝내고 가. 애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후, 당신은 나와의 식사마저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마리아나 고용인에게 주어서는 안 돼."

편지의 내용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클라이브는 애인이 아니었다. 더우기 세베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는. 레기는 그런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치 투정을 부리는 아이에게 억지로 식사를 시키는 것 같은 세베로의 방식이 아무래도 비위에 거슬렸다. 레기는 좀 전에 내던졌던 냅킨을 다시 집어 들며 소리쳤다.

"당신은 구제불능이군요."

"그것은 내가 할 말이야."

레기는 오로지 먹기만 했다. 그것은 식탁의 맞은 쪽에 앉아 있는 저기압의 사나이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완전히 끝낸 뒤 레기는 달콤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이제 실례해도 될까요?"

세베로는 험악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쏘아봤다.

그 날 밤은 몹시 더웠다. 찌는 듯한 더위여서 레기는 아무것도 덮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웠다.세베로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잠이 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세베로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맡의 시계를 보니 자정이 지났다. 세베로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 좋겠다. 나를 이런 꼴로 만들어놓고 그는 태평하게 잠을 자면 얼마나 울화가 치밀까.

레기는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천둥소리 때문에 깊이 잠들 수 없었다. 번갯불이 번쩍이며 하늘에 가지를 뻗었다. 레기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아, 뒤에 이어질 천둥소리를 기다렸다. 긴장으로 전신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천둥소리는 곧 들려 왔다. 레기는 손으로 귀를 막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번갯불이 또다시 하늘을 달려갔다. 방안이 번쩍 밝아졌다고 생각하자, 바로 이어 귀청을 뗄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레기는 입안이 바싹 말라 이젠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공포감에 몰려 침대 한가운데에 몸을 웅크렸다.

천둥은 더욱 심해질 뿐이다. 이제는 번갯불이 먼저인지 천둥이 먼지인지 모를 정도로 미친 듯이 뇌우가 퍼붓고 있다. 레기의 눈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머리에 되살아났다.

사나운 비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웅크린 채, 레기는 얼마동안 그렇게 있었을까. 이윽고 또다시 번개가 번쩍였고 일시에 주위가 환해지며 모든 것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레기는 숨을 헐떡이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레기는 침대를 빠져나와 옆방의 도어를 향해 달려갔다. 옆방에 가면 세베로에게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할 틈이 없었다. 레기는 천둥소리와 동시에 도어를 열고, 세베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방안에는 번갯불이 번쩍였고 레기는 비명을 질렀다. 세베로가 침대 위에 일어나 앉는 것이 순간적으로 레기의 눈에 비쳤다.

"무서워요, 세베로. 무서워요, 부탁이니 곁에 있게 해줘요."

실내는 또다시 번갯불로 밝게 떠올랐다가 어두워졌다. 세베로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세베로는 더블베드의 반대쪽 시트를 들췄다. 레기는 쏜살같이 그의 침대로 달려가, 세베로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서워 견딜 수 없었어요." 잠깐 천둥이 그쳤을 때 레기는 외치듯이 말했다. 레기와 세베로 사이에는 얇은 네글리제뿐이었다. 그러나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는 레기는 그런 것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고, 세베로에게 매달려 헛소리처럼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으며, 그때 자기도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것을, 그 일로 천둥을 무서워하게 됐다는 것까지.

세베로는 오랫동안 레기를 어르듯이 흔들고 있었다. 천둥소리는 전보다 낮아졌다. 세베로의 목소리는 레기의 곤두선 신경을 진정시켰고, 위로하듯이 쓰다듬는 손길은 레기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아직도 먼 곳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천둥이 또 칠까요?"

"또 칠지도 모르지, 달링. 때때로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세베로는 한쪽 손으로 레기의 팔을 쓰다듬고, 나머지 손으로 레기의 떨고 있는 어깨를 안으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요?" 레기는 불안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갑자기 레기는 세베로를 의식했다. 그녀는 세베로가 자기를 안고, 상냥하게 팔을 쓰다듬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레기는 어이없게도, 세베로의 따뜻하고 늠름한 가슴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죄송해요."

"사과할 것 없어. 이럴 때 남편을 의지하지 누굴 의지하겠나?"

그때 또다시 작은 천둥소리가 들려 왔다. 몹시 민감해져 있는 레기의 귀에는 또다시 뇌우가 오는 것처럼 들렸다. 레기는 세베로에게 매달렸다.

"난 정말 어린애 같애..." 부끄러운 듯이 중얼거리는 레기의 입을 세베로는 자기의 입술로 상냥하게 덮었다. 그것이 자기를 위로하려고 하는 일인지, 레기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당신이 천둥을 무서워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오. 어린 시절에 그런 사고를 당했으니 쇼크가 꽤 컸을 거야." 천천히 레기를 똑바로 눕히면서 세베로는 상냥하게 말했다.

세베로는 또다시 레기의 팔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을 레기는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천둥소리가 가까워졌고 레기는 세베로에게 꼭 매달렸다.

"세베로!" 레기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기는 자기가 천둥 때문에 숨을 헐떡이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 레기가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고, 세베로는 입술을 가까이 해왔다. 레기는 약간 열린 입술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다음 순간, 천둥소리는 바깥에서가 아니라, 레기의 몸 안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세베로의 손길이 따뜻해짐에 따라, 레기의 심장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네글리제의 어깨 끈이 벗겨지고, 맨살이 드러난 레기의 어깨를 세베로는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레기는 세베로를 사나이로서, 남편으로서 의식하며 어느새 양손으로 세베로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예리한 감각이 레기의 몸을 꿰뚫었다.

레기의 입술을 덮고 있는 세베로의 입술에 갑자기 힘이 주어졌다. 동시에 세베로의 손은 레기의 어깨에서 미끌어졌다. 레기는 숨을 삼켰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다!

"세베로! "레기는 마음에도 없는 항의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세베로는 레기에게 거절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고 레기는 세베로에게 꼭 매달렸다.

세베로의 손이 허리에 닿았을 때, 레기는 거부의 몸짓을 했다. 세베로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왜 그래, 허니?"

"..." 레기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아아, 세베로. 말릴 생각은 없어요. 실은... ... 처음이에요." 레기는 얼굴을 붉혔다. 주위가 캄캄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베로는 양손으로 레기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에 상냥하게 키스하며 말했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

"세베로, 거짓말이 아니에요."

순간 세베로는 움직임을 멈추었고, 긴장된 몇 초가 흘렀다.

"당신이 처음..."

"아아, 나의 사랑!" 세베로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레기를 끌어당겼다.

그 후에 이어진 세베로의 애무에는, 평소 공격적이고 성미 급한 사나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냥함이 담겨 있었다.

레기는 넋이 나간 것처럼 되었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기분이었다. 세베로는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레기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니 두려워 말아요, 나의 레기."

레기는 순간 깨달았다, 자기의 처녀를 버릴 때가 왔다고. 레기는, 세베로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췄다. 󰡐미지의 세계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난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듯.

 

10

레기가 눈을 떴을 때, 어젯밤의 태풍은 거짓말처럼 지나가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햇살이 창 너머로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레기는 바로 일어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의 베개를 쳐다봤다. 세베로가 베고 잔 자리가 움푹 패어 있었다. 레기는 멍하니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처럼 더 없는 상냥함과 완전한 이해심을 세베로가 보여 주다니, 레기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세베로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확실히 그가 암시 한대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어서 레기는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모두가 미지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세베로는 자신의 정열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레기는 알 수 있었다. 세베로는, 믿을 수 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레기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멋있는 일이 되도록 해줘야겠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기는,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때 도어가 열렸다. 세베로였다. 세베로와 시선이 마주치자 레기는 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레기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세베로가 뭐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오래 계속되자 레기의 얼굴에서 붉은 기가 가셨고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레기." 마침내 침묵이 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늘 아침의 당신은 나를 미워하고 있었겠지."

"당신을 미워해요? 왜요?" 레기는 얼굴을 들어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세베로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레기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잘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당신은 뇌우의 무서움을 잊게 해준 나를 미워하고 있지 않나?"

"그때, 뇌우는 이미 끝나 있었잖아요."

"아니, 더 심해져 있었어. 당신이 사랑하는 클라이브를 위해서 소중히 간직해두었던 것을 내가 빼앗았을 때는."

레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세베로를 말똥말똥 쳐다봤다. 세베로의 애무에 황홀해져서, 상냥하게 격려해주는 그의 말 이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었다.

그 후 레기는 세베로가 빈정대고 있는 걸 알아차리고 화가 불끈 치밀었다. 내가 클라이브를 위해서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고? 레기는 하마터면 세베로에게 덤벼들 뻔했으나 간신히 억제했다. 지난밤의 경험은, 레기에게는 처음이었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것을 분노에 찬 말다툼으로 망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일로 당신을 미워하다니, 그럴 수 없어요. 그런 짓은 모든 걸 전부 당신 탓으로 돌리는 행동이에요. 만약 내가 좀 더 냉정했더라면, 당신 방으로는 절대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난 그러지 못했어요. 무서움으로 반 미친 상태였어요. 그래서 당신의 품안으로 뛰어들면 어떻게 되리란 것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요."

레기는 언제까지나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지 않아도 좋도록, 세베로가 뭐라고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베로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게다가 레기는 세베로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세베로가 조금도 도와주지 않는 데 대해서 화를 내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레기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 일에....제가 얼마나 무지한가... 당신도 지금은 알고 있죠. 그러나 남자라면, 성인 군자가 아니면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내가 만든 것 정도는 알고있어요. 그렇게 당신에게 매달리다니, 네글리제 하나만 걸치고. 당신은 그저 저를 위로할 생각으로...."

"정말 어이없군. 내가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세베로는 몹시 비아냥거리듯 말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레기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어깨에서 시트가 흘러내렸고 세베로의 눈길이 거기에 멎었다.

"저는..." 하고 말하려다가 레기는 당황했다.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는 네글리제를 보았기 때문이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순진한 아가씨, 실은 어젯밤의 뇌우는 내 계획의 실천을 앞당겨 주었을 뿐이라오."

", 앞당겼다고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 작정을 했지."

"그러나.... 그것은 약속에는 없었던 일이잖아요."레기는 여우에 흘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세베로의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레기는 쇼크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사로잡혔다. 만약 그때 분노가 머리를 쳐들지 않았다면 레기는 그 자리에 쓰러져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레기의 분노는 마침내 사나운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래요, 돈을 지불했으니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게 하고 말겠다고 생각했단 말이죠. 상대는 베라 언니건 나건,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단 말이죠? 영국인 아내에게 1만 파운드를 지불했으니 단 돈 일 파운드까지 그에 대한 보상을 받겠다고..."

"당신 언니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어."

"그래도 당신은 어젯밤 내게 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베라 언니에게도 했겠지요.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으니까."

"아니야."

단 한마디의 단호한 부정의 말에 레기는 갑자기 맥이 빠지고 머리가 혼란해졌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 언니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어. 당신 언닌 아름답긴 하지만 눈이 매서워. 난 그런 사람에게는 조금도 끌리지 않아."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고요? 그러나... 결혼 날짜까지 정했었는데도. 할머니는 첫 대면 때부터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당신 언니와 결혼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나는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할머니께 그 이야기를 했고, 날짜를 정했지."

레기는 어이가 없어 세베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몇 초 뒤, 이번에는 태어난 후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의 격렬한 분노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나를 속였군요?"

"속아서 기쁘지 않나?"

세베로는 바로 이 침대에서 자기가 레기에게 안겨준 그 기쁨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같은 돈 많은 목장주와 결혼한 것을 말하는지, 레기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레기는 격렬한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자기가 발가벗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 상태로 침대에서 뛰어내려 세베로에게 덤벼들 수는 없다. 레기는 사이드테이블에서 큰 책을 집어 들어, 생각 이상으로 묵직한 그 책을 힘껏 내던졌다. 그러나 책은 빗나가고 말았다.

레기는 금세라도 불을 뿜을 것 같은 눈으로 세베로의 시선을 쫓았다. 레기는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 난 뒤 자기 마음속의 수치심이 분노로 바뀌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레기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뜻하지 않게 시트가 완전히 흘러내려, 상체가 그대로 드러난 것과 세베로의 찬양의 눈길이 거기에 쏠려 있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화를 내서 정열을 낭비하지 말아요, 달링. 나는 당신 정열의 더 좋은 사용법을 알고 있어."

"나가세요!" 레기는 시트를 몸에 감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세베로는 바닥에서 책을 집어 들어 경대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낮은 웃음소리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샤워를 하고 몸단장을 한 뒤에도 레기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아침식사를 들지 않고,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딱히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은 없었지만, 예의 나의 장소에만은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만약 세베로가 찾게 되면 맨 먼저 거기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걸어가니 레기는 두 개의 언덕 사이에 있는 작은 분지에 다다랐다. 여기라면 언덕 위에 올라서서 보지 않으면 레기의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알맞은 은신처다. 레기는 땅바닥에 앉았다. 주위에는, 야생화 사이를 한 마리 벌이 꿀을 찾아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레기는 몇 시간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세베로에 대한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윽고 레기는 생각하는 것에 지쳐서 일어섰다. 멀리 조용하고 평화로운 목장이 보였다. 레기는 공복감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목장 현관으로 발을 옮기는 레기의 시야에 움직이는 물체가 들어왔다. 그 쪽을 쳐다보자 세베로가 마누엘라 고메스와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어서 레기를 보지 못한 듯 했다. 레기는 걸음을 멈췄다. 관자놀이께가 쑤셨다. 레기는 두 사람의 곁으로 달려가 마누엘라의 몸에서 세베로의 팔을 떼어놓고 싶었다. 세베로에게, 당신의 아내는 레자이너 카르디노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카르디노사라는 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나지, 마누엘라 고메스는 아니다. 마누엘라는 세베로와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언제 발이 그 자리에서 떨어졌는지 레기는 정신없이 자기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레기는 마침내 세베로가 마누엘라를 안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자기를 사로잡은 격정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순간 식욕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질투였다. 질투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을 떼어놓고 싶어졌는지 모른다. 어젯밤 세베로의 행동에 자기가 어떤 저항도 하지 않은 이유를 그것으로 알았다.

나는 세베로를 사랑하고 있다. 클라이브가 그렇게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싶어 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이제 알았다. 나는 클라이브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세베로를 사랑하는 만큼은. 세베로에게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주었다. 그것도 자진해서.

밤 열 한 시가 되었을 때도 세베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레기는 침대에 들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세베로에게 다시는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낮 동안의 생각이 지금은 몹시 바보스럽게 생각되었다. 세베로가 그것을 바라기만 하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세베로가 레기를 소유하고 싶다고 바란 유일한 이유인지 어떤지 하는 의문을 레기는 모두 떨쳐버렸다. 낮의 그들의 태도로 미루어, 세베로의 육체적인 욕구를 마누엘라 고메스가 기꺼이 해결해 주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레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세베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보답 받을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레기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세베로가 서약은 깨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바로 어제다. 레기는 그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짐과 동시에 분노가 솟구쳤다. 지금 세베로는 아내에의 성실에 관한 서약을 어기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옆방에 세베로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린 것은 새벽 세 시가 지나서였다. 󰡐그는 꽤 행복하겠군,󰡑하고 레기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가 들어오고 10분쯤 되었을 때 그의 방에서 레기의 방으로 통하는 도어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뻔뻔스럽군.

"제 방에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한다고 약속했잖아요." 레기는 큰 더블베드 속에서 소리쳤다.

세베로는 방의 불을 켰다. 세베로는 방금 샤워를 한 모양으로 머리가 젖어 있었다. 가운만 걸친 세베로의 모습에 레기의 가슴은 괴로울 정도로 뛰었다.

"노크하는 것을 잊어서 미안해. 그런 형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어."

그 여자에게서 방금 돌아왔는데도, 정말 뻔뻔스럽군!

"어마, 당치도 않아요. 다음부터는 약속을 잊지 말고 어김없이 노크를 해주시면 고맙겠어요!"

세베로는 느긋하게 벽에 기대어 레기를 쳐다봤다, 흐트러진 금발과 감정의 동요로 거의 감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어져 있는 파란 눈을. 세베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정한 규칙이야. 안 됐지만 난 동의한 기억이 없어."

"하여튼 앞으로는 노크해 주세요. 제 방에 들어오지 않으면 더욱 좋고요."

"세뇨르 카르디노사, 나더러 아내가 있다는 것을 잊어달라는 말인가?"

"아내가 있다는 것을 잊어달랬다고요?" 레기는 분노로 인해 떨리는 손으로 시계를 집어 들었다. "지금은 새벽 세 시 l5분이에요. 이제 와서 아내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단 말인가요? 편리하게, 마누엘라 고메스와 함께 있을 때는 잊고 있었겠죠?"

세베로는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로와 하며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아내 앞에서 애인 생각을 하고 기뻐하다니, 정말 밉살스럽군.레기는 세베로를 노려보았다.

"질투하고 있군, 나의 새끼고양이님?"

"농담은 그만두세요! 당신이 어디를 가든 상관하지 않아요. 불을 끄고 나가주세요!"

레기는 세베로에게 등을 돌리고 시트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불이 꺼졌다. 레기는 도어가 닫히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베로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레기는 세베로의 움직임을 들었다. 세베로가 나갈 때까지 기다릴 걸 잘못했다. 그가 가 버린 뒤 침대에서 나와 손수 불을 끄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어야 하는데.

이윽고 침대의 반대쪽이 가라앉는 것을 레기는 느꼈다. 그녀는 완전히 당황했다. 레기는 순간적으로 몸을 굴려 난폭하게 세베로를 밀면서 소리쳤다.

"이상한 짓 하지 말아요!"

세베로는 대답 대신 자기에게 덤벼든 레기의 양손을 쉽게 한 손으로 잡고는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레기를 위에서 눌렀다.

"놓아요!" 레기는 그 때 세베로의 가슴에 자기 손이 닿는 것을 느꼈다. 세베로는 어느새 가운을 벗고 시트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아아, 레기, 새벽 세 시에 남편으로 하여금 수염을 깎게 하고서는 이제와 남편을 쫓아내다니. 어떻게 된 영문이지?"

"수염을 깎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은 제 침대에 들어올 자격이 없어요!"

세베로는 키득키득 웃었다.

"나 이상으로 그럴 권리가 있는 남자는 없지, 달링."

레기는 있는 힘을 다해 바르작거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이를 갈았다.

"나가주세요!"

세베로는 레기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자신의 입술로 레기의 입술을 덮었다. 순간 레기는 맥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마누엘라를 안고 있는 세베로의 모습이 눈에 떠올라 또다시 분노에 사로잡혔다.

"싫어요!" 세베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레기는 쉰 목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후 레기는 세베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싸움을 해야 했다. 세베로는 말없이 레기의 눈두덩과 귀와 목덜미에 키스의 비를 퍼부었다. 그러한 가운데 마누엘라를 안고 있는 세베로의 모습은 차츰 엷어졌고, 왠지 세베로의 요구에 기꺼이 응하고 싶은 욕구가 점점 생겼다.

마침내 레기는 조용해졌다. 세베로가 레기를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하자 레기는, "아아, 세베로!"하고 쉰 목소리를 냈다.

"뭐라고, 달링?"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상냥했다. 그것은, 전날 밤 레기를 파라다이스로 데려 갔을 때의 상냥함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레기는 하마터면 사랑해요.󰡑라고 말할 뻔했다. 수줍음을 타지 않았더라면. "이젠... 안 되겠어요." 레기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달링!󰡑 한마디에는 레기에 대한 모든 욕망이 담겨져 있었다.

지금 레기는 세베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세베로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레기의 감성을 일깨웠다. 나선형을 그리며 고조되어 가는 정열 속에서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레기의 몸속에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 자기의 내면에 타고 있는 불꽃 못지않게 세차다는 것을 발견한 세베로는 타오르는 용광로 같은 격렬한 정열로 레기를 요구했다. 레기는 전날 밤에 파라다이스에 있는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고 표현한다면, 오늘밤은 뭐라고 형용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레기의 무의식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레기로부터 잠을 빼앗아가기라도 한 듯 레기는 짧은 숙면 후에 눈을 떴다. 레기는 아직도 세베로의 품안에 있었다. 규칙적인 숨결로 보아 세베로가 잠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잠이 또다시 레기를 찾아왔다. 레기의 속눈썹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다음에 레기가 잠을 깼을 때 세베로는 옆에 없었다. 세베로가 없는 것을 레기는 기뻐했다. 환희는 사라졌고, 레기에게 남아 있는 것은 진저리를 치게 하는 굴욕감뿐이었다.

새벽 세 시까지 다른 여자와 지내고 오는 사나이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자기의 육체가 얼마나 엄청난 배반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된 지금, 어떻게 세베로와 잠자리를 함께 해나갈 수 있을까. 이성이 강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낮 동안은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이를 수 있지만, 세베로가 일단 자기 몸속의 정열을 일깨우면 또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말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매일 아침 이런 마음으로 잠을 깨게 될 텐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세베로에게서 떠나자. 레기가 그 결심을 굳혔을 때 파나가 홍차를 들고 들어왔다. 레기는 세베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파나에게 넌지시 세베로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파나의 대답을 듣고 레기는 얼굴을 돌렸다. 세베로는 고메스의 집에 갔다고 한다. 레기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화는 나지 않았다. 어젯밤의 그 사랑의 결합 뒤에, 오늘아침 세베로의 최초의 행동이 애인 마누엘라 고메스를 찾아가는 일이었다니.... 이제는 목장을 떠나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고마워. 하나 오늘 아침은 도와주지 않아도 좋아. 아마 마리아가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나." 레기는 파나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면서 조금 유창해진 스페인어로 말했다.

 

11

한 번 더 세베로를 만나면 마음의 아픔만 더 커질 뿐이라는 것을 레기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슈트케이스에 짐을 꾸려 떠나기로 했다. 미니카를 가지고 가자. 팔아서 쓸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웨딩드레스를 사고 남은 돈이 아직 얼마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 비행기 삯이 되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최대의 난관은 세베로에게 남길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일단 결심을 굳힌 이상, 레기는 한시라도 빨리 이 집을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이 이성을 혼란시켜서, 쉽게 편지를 쓸 수 없었다. 그에 따라 출발도 늦어졌다.

마침내 레기는 지극히 간단하게 용건만 적었다. 레기는, 자기가 이 곳을 떠나는 진짜 이유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부수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그쳤다- 세베로가 계획적으로 레기를 속여 결혼까지 했으니, 이제 베라의 빚에 대한 세베로의 권리는 소멸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과, 그의 할머니께는 영국에서 언니의 병을 알리는 전화가 있었음을 전하라고 썼다.

가만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슈트케이스를 복도에 내놓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현관으로 이어진 복도를 돌아서다가 레기는 걸음을 멈췄다. 뜻밖에 세베로의 말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곤란하다! 세베로는 분명 외출했다고 했는데. 서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가야 한다. 세베로가 서재의 문을 열고 눈앞에 서 있다 해도.

서재의 문은 열려 있었다. 레기는 마치 도둑처럼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늑골에 금이 가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서재의 문 앞에 왔을 때 레기는 속으로 안도했다. 세베로는 열려져 있는 문에 등을 돌리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레기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그 후 레기는 미니카로 주차장을 떠날 때까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갖가지 생각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레기의 머릿속에, 세베로의 통화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8킬로쯤 달린 뒤였다.

레기는 그의 이야기의 심각성을 깨닫고 아차 했다. 그녀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

레기가 잘못들은 것이 아니라면, 세베로는 상대에게 자기가 경제적 파탄에 직면한 것을 인정하는 말을 했었다. 그럴 수가! 세베로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누구와의 통화였을까? 은행의 지점장. 아마 그럴 거야....

상대가 뭐라고 했는지 레기로서는 알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세베로의 목소리가 몹시 침통한 것만은 확실했다.

"....장부를 보시면 아시겠죠." 그 후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기서 뭔가를 잘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 저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그 뒤에 계속된 대화는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 소 값의 폭락으로 파산을 할 수밖에 없으며 소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한 것 같다.

누구의 눈에도 유복하게 보이는 목장이 파산하다니.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베로의 말로 미루어 그것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불쌍한 세베로! 지금까지 얼마나 괴로왔을까. 그런데도, 그런 사정을 나에게 조금도 비치지 않다니. 물론 자존심 때문에 그랬겠지.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런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베라에게 1만 파운드를 주어 적자를 더욱 늘리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행복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아아, 세베로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은 그의 조부가 부럽다.

그렇다. 지금은 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세베로의 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 목장의 파산은 얼마나 큰 타격을 줄까. 설상가상으로, 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신부가 도망간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면 그는 또 얼마나 타격을 받을까? 세베로에게 돌아가야 한다.

레기는 차를 돌렸다. 세베로는 경제적 파탄에 처해있으면서도 이 차를 사주었다. 주위 사람들이 신부에게 주는 신랑의 선물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데 나는 이 차를 팔아치우려 했었다-- 레기는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로 차를 몰면서 생각했다. 이 차도 내놓지 않으면 안 되겠지. 세베로의 승용차 마세라티와 마찬가지로. 부채를 갚기 위해 모든 것을 팔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세베로 곁에 있으면서 그를 도와 일하자. 둘이서 힘을 합쳐 다시 한번 목장을 일으켜 세우자. 제발, 내가 적어놓은 편지를 세베로가 아직 보지 못했으면 좋으련만. 방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 편지를 찢어 버려야지.

레기의 미니카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려 했을 때, 반대쪽에서 세베로의 마세라티가 질주해 왔다. 마세라티는 미니카를 만나자마자 굉장한 기세로 급정거했다. 세베로의 찌푸린 험악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레기의 심장은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마세라티의 도어가 홱 열리고 세베로가 귀신같은 형상으로 나왔다. 그 순간, 레기는 자기도 모르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큰일이다! 편지를 본 모양이다.

목장의 정면에 레기가 차를 세웠을 때, 마세라티는 미니카의 밤바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섰다. 레기가 미니카의 엔진을 끄기 전에 세베로가 미니카의 도어를 홱 열었다. 세베로는 엔진을 끄고, 이그니션 키를 뽑았다. 그러고 나서 레기를 밖으로 끌어내어, 트렁크 쪽으로 끌고 갔다. 트렁크 속에 레기의 슈트케이스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증거다. 레기는 세베로의 분노를 가라 앉힐만한 말을 찾았다. 그 사이에 세베로는, 슈트케이스 하나는 옆에 끼고 다른 하나는 손에 들고, 또 한 손으로 레기를 붙잡고 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세베로...?" 레기는 잰걸음으로 세베로를 따라가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세베로는 완전히 두 사람만 남게 될 때까지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세베로가 레기를 끌고 간 곳은 레기의 방이었다. 그는 도어를 힘껏 닫자, 슈트케이스를 내던졌다. 슈트케이스는 방의 저쪽 끝까지 굴러갔다. 세베로는 레기를 홱 자기 쪽으로 돌려세우고는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짜내듯이 말했다.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슈트케이스에 든 것을 꺼내.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었나? 먼저 그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군."

마치 불을 뿜고 있는 화산 같은 세베로의 기세에 레기는 벌벌 떨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두려움을 감추고 어떻게든지 자기의 마음을 전하려 했다.

"편지를 보셨군요." 이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레기는 말했다.

"내가 당신을 가게 내버려 둘 줄 알았나?"

생각했던 대로 세베로는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의 고십거리가 될 인물이 아니었다.

"... 내 뒤를 쫓아오셨군요?"

"당신은 내 것이야." 이것으로 모든 것이 결말이 났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세베로의 말에 무조건 맞장구를 치는 것이 좋겠다고 레기는 생각했다. 세베로는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일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세베로의 말투에 화가 불끈 나서, 레기는 한바탕 싸우고 싶어졌다.

"난 내 거예요.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당신은 내 아내야." 세베로는 덤벼들 듯이 말하며, 레기를 밀어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레기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다른 남자에게로 도망치는 것을 내가 용서하리라 생각하나?"

"다른 남자?"

"애인으로부터 편지가 온 후, 당신은 애인에게 갈 생각만 했잖아. 부정하고 싶어?"

"당치도 않아요! "

"거짓말 마! 당신은 분명 애인에게 가려고 했었잖아. 그러나 도중에 마음이 달라졌나 보군. 나와 사는 것이 이득이 더 많다는 걸 깨달았나 보지."

얼마나 모욕적인 말인가. 목장이 파산의 위기에 처해있는데, 여기에 있어본들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비열한 사람!" 레기는 저도 모르게 세베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난폭하게 손목을 잡혔다. 레기는 언성을 더욱 높였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요? 당신의 뒤를 깨끗이 정리하려면 일년은 걸릴 거예요."

"나의 뒤?"

"당신이 내 편지 내용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 다행이에요. 내가 떠나려 했던 진짜 이유는, 조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것은 당신과는 인연이 없는 것이지만."

"조심성?"

"클라이브와 사귀기 시작할 당시, 난 그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세베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레기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고 있단 말인가?"

이 뻔뻔스런 철면피! 순백의 눈 못지않게 결백한 것처럼 거만하게 굴다니!

"그 유부녀가 누군지 내게 이름을 말해 줄 수 있겠나?"

"시치미 떼지 마세요. 마누엘라 고메스와 그런 사이잖아요. 어제 낮에도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어요. 밤마다 당신이 어디에 가는지를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베로는 더욱 더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세베로는, 레기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재빨리 변신을 해서, 그렇게도 격렬했던 분노를 갑자기 진정시켜 버렸다. 레기에게 비난받는 것을 몹시 재미있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본 레기는 더욱 더 흥분하여 또다시 그에게 덤벼들려 했다. 그것을 말린 것은 돌변한 세베로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역시 질투하고 있군." 세베로는 방긋 웃었다.

"질투 따위는 하지 않아요. , 다만, 나는 보수적이기 때문이에요. , 그리고 굴욕적이에요. 당신은 그 여자의 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내게로 와서, 그리고..."

"아내의 침대에 와서, 정열에 눈을 뜨기 시작한 아내와 즐긴다."

세베로의 품에 안겼던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레기의 창백한 볼에 희미하게 붉은 기가 돌았다. 세베로는 곧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로부터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레기의 어깨에 팔을 돌리고, 이제는 빨갛게 붉어진 레기의 볼에 상냥하게 키스했다.

"당신은 내 품에 안기는 것을 좋아하지, 달링?"

어젯밤과 똑같이 되고 말겠군-- 이미 이성의 힘을 잃어가고 있는 레기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레기는 세베로를 밀어내려 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면 머리가 맑아질 것이다.

뜻밖에도 세베로는 순순히 레기를 놓아주었다.

"당신은 아직 어젯밤과 같은 탐험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군. 당신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많이 있어...."

어젯밤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레기는 오늘 아침 결심했었다. 그런데도, 세베로의 너무나 상냥한 말소리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잊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레기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우리의 이야기를 끝내야죠" 레기는 단호하게 세베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베로의 말소리에 유혹되어 그대로 질질 끌려가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좋아" 세베로는 조용히 대답했다.

레기는 갑자기 당황하였다. 세베로는 말없이 레기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매우 신중히 말해야지. 냉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라도 잘못 말해서는 안 된다. 말을 잘못했다간 세베로를 화나게 만들 것이고, 레기 자신도 울화통이 터져 엉뚱한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를 화나게 만들어 그런 상황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세베로뿐이다. 나는 세베로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레기는 심호흡을 크게 하였다.

"제가 당신 곁을 떠나려 한 것은, 당신과 마누엘라 고메스와의 관계 때문이에요."

세베로는 오른쪽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책망하려는 게 아니에요. 난 다만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그 다음을 계속해 봐."

레기는 세베로의 목소리에서 비아냥거림을 느꼈다. 그러나 레기는 속마음은 어떻든간에 겉으로는 애써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을 바꾼 것은 클라이브 쪽보다 당신 쪽이 더 이득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아까 당신은 말했죠."

"그래서?" 세베로의 목소리가 사나와졌다. "아아, 세베로." 세베로가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면 전화 내용을 엿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말하면, 우루과이인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리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레기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세베로, 난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니? 무엇을?" 레기는 아파 오는 가슴을 누르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당신이 파산 직전에 있다는 것을.""파산?" 세베로는 놀라는 얼굴을 했다.

그의 뛰어난 연기력에 레기도 놀라며, 자기의 눈앞에서 세베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레기는 눈을 돌렸다.

"한 시간 전쯤, 당신이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세베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기는 다시 세베로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자존심이 상한 사나이의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한참 지나 세베로는 불쑥 말했다. "나는 스페인어로 이야기했었는데."

"맞아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 스페인어 실력은 그때의 당신의 이야기 정도는 이해할 수 있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나의 기억을 조금 되살려 주겠나. 정확하게 나는 뭐라고 말했었지?"

"아아, 세베로." 그것을 말한다면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격이 될 텐데... 레기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말해 봐." 세베로는 준엄한 명령조로 재촉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요. 아마 은행 사람이었을 거예요." 세베로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소를 팔지 않을 수 없다. 파산은 면할 수 없다. 그리고 뭔가 파탄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은 말을 하셨어요."

"그밖에는?""그 이상은 몰라요. 나는 이미 거기에 있지 않았으니까요."

"그 길로 바로 이 방으로 와서, 짐을 꾸렸단 말이지. 내게 큰 재산이 있는 한, 싫은 나와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파산했으니 남아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내가 떠나려 한 이유는 앞에서 말했잖아요. 서재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이미 짐을 꾸려 이 집을 나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목장이 망하는 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어떤 충격인지, 거기에다 결혼해서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아내가 가버리면 당신은 얼마나 자존심을 상하게 될까 하는 것을 깨닫고 돌아온 거예요. 당신과 힘을 합쳐 카르디노사 목장을 옛날대로 재건하자는 결심을 하고. 당신은 내게 몹시 비싼 댓가를 치루었으니 내가 이런 결심을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세베로가 너무나 놀란 얼굴을 했기 때문에 레기는 말을 끊었다.

"나를 미워하고 있지 않나, 레기?" 세베로는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이번은 레기가 놀랄 차례였다. 이야기가 위험한 고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챈 레기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미워하지 않아요." 이렇게 대답하는 레기를 세베로는 뚫어지게 쳐다봤다. 레기는 당황한 나머지, 그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말았다. "만약.... 당신을 미워하고 있었다면..... 당신의 도전에 그런 반응을 나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세베로는 갑자기, 레기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밝은 얼굴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굉장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세베로는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세베로의 선명한 파란 눈은 의아한 얼굴로 조금도 재미있어 하지 않는 레기를 보자, 진지함을 되찾았다. "언젠가 카르디노사 목장이 재건되는 날까지 당신은 내 곁에 있어 주겠단 말이지." 세베로는 말을 끊고 레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을 이야기해 버린 레기는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마누엘라 고메스와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아내 이외에 애인도 필요로 한다는 걸 인정해 주겠나?""아니요. 당신이 그 사람과 사귀는 한, 제 침대로 오진 마세요. 그 정도의 예의는 지켜 주셔야죠."

"만약 내가 마누엘라 고메스와 애인 관계가 아니고, 마누엘라 고메스와 바람을 피운 일이 한번도 없다면, 그녀는 확실히 매력적인 여성이나, 사나운 눈을 가진 당신 언니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내 마음을 끌지 못했다면, 달링, 그때는 내가 당신 침대로 가도 좋아?" 세베로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바람을 피우고 있잖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녀를 다룬 적은 한 번도 없어." 세베로는 쌀쌀하게 말했다. 그러나 세베로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다만 눈만은 여전히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레기를 지켜보았다. "하기야 마누엘라를 소개받을 때의 당신 표정이 약간 사나와지는 것은 보았지. 솔직이 말해서 당신이 질투를 하는 것이 그리 싫지는 않았어."

"그러나.... ?""왜라고?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 나는 당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 남자에 대해 미칠 정도로 질투를 했어. 그래서 당신도 조금 그런 심정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어.""어머나, 클라이브에게 질투를 하고 계셨나요?""질투를 숨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군."

세베로가 괴로와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다니,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레기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금세 얼굴이 밝아졌고, 마침내 진실을 고백하고 말았다.

"클라이브의 편지를 받고, 난 진실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세베로의 눈에 레기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넘쳐흐르고 입술이 벌어졌다. 세베로는 레기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래. 그때 당신이 그렇게 놀란 것은 그 때문이었어. 나에 대한 감정이 참다운 사랑이라고 깨달은 것이 그때였나?"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레기는 이렇게 부정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훨씬 전부터 자기가 세베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레기는 "아아." 하고 신음했을 뿐, 얼굴을 들어 세베로를 마주 쳐다볼 수는 없었다.

세베로는 레기의 얼굴을 들어올려,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러고 나서 레기의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레자이너 카르디노사.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난 지 몇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랑하게 되고 말았어."

레기는 세베로에게 매달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거짓말이죠?"

"아니야. 사실이야, 달링." 세베로는 레기의 눈두덩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나는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레자이너 바링튼에게 이제 우루과이에 체재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생각으로 몬테비데오로 갔었지. 그런데, 난 거기서 상냥한 눈을 가진 레자이너 바링튼을 만났어. 할아버지는 내가 빨리 결혼해서 손자를 안겨 주기를 바라고 재촉하셨지. 그러나 난 계속 독신을 고집했었지. 그런데 당신을 만난 순간, 그 이유를 알게 됐어."

레기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멍하니 세베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세베로는 큰소리로 웃었다. 세베로의 따뜻한 입술이 레기의 입술 위에서 멈췄다. 레기는 가슴이 벅차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길고 긴 입맞춤 뒤에 세베로는 마침내 얼굴을 들어, 레기의 멍해 있는 얼굴을 사랑스러운 듯이 들여다봤다.

"아아, 세베로." 레기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베로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자, 의문이 생겼다. "정말로 베라 언니를 영국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어요?"

세베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베라 언니 역시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할머니를 위해서..."

"나의 사랑하는 사람.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오직 하나, 당신에게 첫눈에 반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결혼할 작정을 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비탄에 잠겨 있었으니, 그것이 큰 이유가 아니었던가요?"

"당신의 조부모에 대한 상냥한 마음씨를 발견한 건 사실이야. 당신이 그 따뜻한 마음으로 쇠약해 있는 할머니의 원기를 회복하게 할 것이다. 그것을 이유로, 평생 내 곁에 당신을 붙잡아둘 수도 있으리라 계산을 한 건 사실이야." 세베로는 그렇게 말하자, 놀란 얼굴로 말똥말똥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레기를 보고 빙긋 웃었다. "할머니는 무척 건강하셨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과 쇼크로 지금은 몹시 쇠약해 졌지만. 그러나 일단 건강을 회복하시게 되면 전혀 딴 사람같이 될 테니 두고 봐."

기쁨에 들떠 자신에게 꽉 매달리는 레기를 세베로는 이제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편안함을 즐기며 레기는 오랫동안 그대로 안겨 있었다. 레기의 귀에 세베로의 가슴의 고동이 들렸다. 목장을 잃는 아픔을 가져야하는 세베로. 이제부터 나는 이 사람을 도와서 살아가는 거야. 나의 아픔은 자기의 아픔이라고, 세베로는 전에 말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

레기는 세베로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어, 애정이 담긴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달링. 젊으니까요. 언젠가는 반드시 목장은 옛날같이 될 거예요."

"나의 아름다운 사람." 세베로는 울먹이면서 레기를 아플 정도로 힘주어 끌어안았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당신은 나의 돈이 목적이란 걸 인정하라고 스스로를 괴롭히다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면서. 당신이 오해를 하고, 자꾸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더욱더 당신을 좋아하게 되어 버려. 이제 나는 당신에게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오해? 고백?"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 당신의 스페인어 실력은 확실히 늘었어. 그러나 당신이 아직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가 있어. 어미변화도 그렇고. 스페인어는 어미가 조금만 달라져도 뜻이 상당히 달라지지. 나와 홀헤 고메스와의 전화를 당신이 좀 더 들었다면...."

"홀헤 고메스?"

세베로는 싱긋 웃었다.

"오늘 아침 나는 홀헤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어. 그래서 집을 나서기는 했으나, 당신의 너무나 맑고 아름다운 잠자는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도중에 돌아오고 말았지. 용건은 전화로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됐거든. 어젯밤, 나는 틀림없이 고메스의 집에 있었어." 레기의 몸이 약간 굳어졌다.

"질투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나는 홀헤를 만나러 간 것뿐이니까. 홀헤는 오래 전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어. 몇 주일 전에 마누엘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힘닿는 데까지 도와 주리라 생각했지. 그러나 흘헤는 자존심이 강한 사나이라 도와 주는 것이 쉽지 않았어. 그 문제가 어제 마침내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고 말았지. 홀헤가 자살할 것 같다고 하면서, 완전히 넋은 잃은 마누엘라가 찾아왔어."

"그래서 당신은 마누엘라를 안고 있었군요."

"당신이 그것을 본 줄은 몰랐어. 하여튼, 마누엘라와 함께 가지 않을 수 없었어. 고메스의 집에 도착해 보니 과연 그녀의 말 그대로였어."

"불쌍하게도! 그래 뭔가를 도와주었어요?"

"아까 말한 대로 홀헤는 자존심이 강한 남자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시간이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지. 마침내 홀헤는 자기의 사업상의 문제를 나에게 털어놓기 시작했어. 그리고 혹시 자기가 간과하고 있는 점을 내가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나에게 장부를 보여주었어. 장부를 파악하는 작업을 새벽까지 계속했지."

레기는 세베로의 행동에 대해서 자기가 당치도 않은 의심을 한 것을 사과했다. 세베로는 용서한다는 표시로 레기에게 긴 입맞춤을 했다.

"장부를 다 보았을 때 홀헤는, 마누엘라가 몰래 음료수에 넣은 수면제 덕택에 잠들어 있었지. 그는 일주일동안 한잠도 못 잤던 모양이야. 마누엘라도 함께 잠들어 있었어.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에 연락하겠다는 메모를 남겨 두고 왔지."

"그래서 홀헤에게 전화했군요."

세베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나는, 만약 사태가 홀헤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심각할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은지, 그에게 어떤 제안을 했었지. 홀헤는 하룻밤 숙면을 취한 덕택으로,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모양이야. 오늘 아침은 이미 내 제안에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어. 나는 홀헤에게 말했지. 사태는 확실히 심각하지만, 구제 불능은 아니다. 최근에는 양모의 수요가 늘어, 값이 좋으니 소를 팔아 양을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홀헤와 똑같은 상황에 빠진 목장주 몇이 이미 그렇게 해서 성공하고 있다고 했지.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들었던 거야."

"그렇다면.... 파산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사정이 달라지나, 달링?"

"당치도 않아요, 기뻐요.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지금도 부자라서가 아니라.... 그러나 소 값이 떨어진다면 당신도 영향을 받겠죠?"

"내 소는 우량종이야. 소 값이 다 떨어져도 나는 다른데서 그 손실을 메울 수 있어."

"그래요." 세베로는 내가 전에 생각했던 대로의 부자인 것이다. 내가 목장의 재건을 도와 줄 필요 따위는 없다-- 레기는 자기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는 데 약간 실망했다. 레기의 그런 마음이 세베로에게 전해진 것일까. 그는 레기의 한쪽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당신이 곁에 없으면 나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말거야." 세베로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가만히 입을 맞췄다.

세베로가 입술을 떼고 자못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레기를 보았을 때, 레기는 깜짝 놀라며 창가를 쳐다봤다.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려 왔다. 레기의 불안을 알아차린 세베로는 또다시 레기의 볼에 손을 댔다.

"사랑하고 있어, 나의 아내. 다시 한번 천둥을 잊어버리기로 할까?"

레기는 수줍은 듯이 세베로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레기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세베로의 얼굴에 따뜻함이 떠올랐다고 생각한 순간 레기는 그의 억센 팔에 안겨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세베로가 레기 옆에 누웠을 때, 천둥은 망각의 저편으로 멀어져 갔고 레기의 마음에는 검은 구름이 완전히 걷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