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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속의 라이온

Bollnow 2024. 3. 14. 12:40

폭우 속의 라이온

Yvonne Whittal

 

1

억수 같은 비였다. 회색의 오스틴 자동차의 와이퍼가 요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시야는 그저 뿌옇기만 하다. 우스터를 출발한 벌써 수 시간, 폭우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다. 한 시간 전에 이미 린제이 농장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캐롤라인은 아직도 진흙투성이의 샛길을 허둘거리고 있었다.

마체스펜텐을 지나고 난 뒤 길을 잘못 들어선 게 틀림없다……. 캐롤라인은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면서, 되돌아가기 위해서 차의 방향을 돌렸다. 어느새 어둠이 짙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은 부근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데니스에게 전화로 사정을 설명할 도리밖에 없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알면 그는 틀림없이 화를 내겠지.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캐롤라인의 약혼자 데니스 린제이는 일이나 시간에 관해서는 여간 철저하고 까다로운 사나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를 독선적이라느니 고루한 사람이라느니 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캐롤라인만큼은 데니스를 항상 믿음직스럽고 아주 진지한 남성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성격은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없었던 특징으로, 그녀가 그처럼 데니스를 존경하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2년 전 그녀의 치구 집에서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데니스는 요즘 세상에는 걸맞지 않게 빅토리아시대식으로 캐롤라인과 교제를 계속해 왔다. 그리하여 그녀와 친구인 동시에 의논 상대이기도 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2주 전, 데니스는 휴가차 부모의 농장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그녀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청혼을 하였고 캐롤라인은 그것을 승낙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말인 오늘 밤에 데니스의 부모에게 두 사람의 결심을 알리고,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줌으로써 약혼을 정식으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캐롤라인은 한숨을 쉬며 급히 핸들을 꺾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힘껏 브레이크를 밟아 자동차를 급정지시켰다. 바로 앞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그녀가 한 시간 전에 건넜던 다리가 급류에 휩쓸리고 있엇다. 지금 저 다리를 건너는 위험을 무릅슨다는 건 바보스러운 짓이다. 캐롤라인은 기어를 바꿔 넣고 악셀을 밟았다. 그러나 바퀴만 헛돌 뿐 진흙 속에 더 깊이 빠지고 말았다. 당황한 나머지 기어를 고쳐 넣고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케롤라인은 핸들 위에 얼굴을 묻었다. 만일 일이 틀어지게 되면 어쩌나. 울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정말 울기라도 하련만.

어떻게 해서든 린제이 농장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캐롤라인은 다시 한번 진흙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시도했지만, 차바퀴는 물에 잠김 길바닥에 달라붙은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참을 수가 없어진 그녀는 울 저지 윗도리의 지퍼를 완전히 올리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다음 차가운 빗발 속으로 내려섰다. 회중전등의 희미한 불빛으로 보니 바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이 진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길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몇 시간 후일까……. 낙심한 나머지, 억수 같은 비에 옷이 흠뻑 젖는 것도 잊고, 자동차에 기대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에 잠겼다.

그때 길에서 수 미터 떨어진 숲속에서 불빛이 번적 비쳤다. 순간 캐롤라인의 마음이 밝아졌다. 다행히도 이 곤경에서 도와줄 사람을 만났구나. 그녀는

자동차 도어를 잠그고 길가의 나무 울타리를 뛰어넘어 가시덤불을 헤치며 오르막길을 기어올랐다. 빗발은 사정없이 그녀의 가냘픈 몸을 후려치고 눈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겨우 다다른 곳은 농가같이 보이는 자그마한 오두막이었다. 순간 그녀는 주저하였다. 그러나 창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폭우 속에 서 있는 캐롤라인에게는 몹시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그녀는 마음을 크게 먹고 오두막으로 다가가 창문으로 집 안을 살펴보았다.

벽난로에는 장작이 기세 좋게 타고 있고 그 앞에 낡은 소파와 팔걸이의자가 있으며, 낡은 찬장 위엔 파라핀 램프가 놓여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까 망설이며 캐롤라인은 그대로 폭우 속에 서 있었다. 젖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고, 진흙투성이의 젖은 구두는 차갑고 무거웠다. 방안의 따뜻한 불이 그리웠으나, 그렇다고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되돌아갈까……그렇게 생각한 순간 큼직한 손이 캐롤라인의 어깨를 붙잡아 콘크리트 벽으로 밀어붙였다. 회중전등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부서졌다.

"누구요?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거요?" 굵직한 목소리로 남자가 캐어 물었다.

경계하듯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덩치 큰 사나이를 캐롤라인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입도 열 수 없었다.

"말해 보시오!" 그는 캐롤라인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캐롤라인은 무슨 말이건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나이는 뭐라고 거친 말투로 중얼거리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곳은 방금 창으로 들여다본 그 방이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무엇보다 무서움으로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검은 레인 코트를 입은 덩치 큰 사나이가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을 보닌 난로 곁으로 다가서는 일조차 꺼림칙하였다. 발밑에는 물이 핏기 시작했다. 발은 마치 물먹은 솜덩어리 같았다. 이윽고 사나이가 캐롤라인에게 앉으라고 손짓으로 말했다. 난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의자였지만 그녀로서는 고마웠다.

사나이는 레인 코트와 중절모를 벗어 도어 곁의 옷걸이에 걸자 캐롤라인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더욱 겁이 났다. 사자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이 넓은 이마 위에 헝클어져 있고, 일주일쯤 자랄 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둔 것 같은 수염 때문에, 가뜩이나 험한 얼굴이 더욱 야수처럼 보였다.

넓은 어깨를 더욱 넓어 보이게 하는 두꺼운 스웨터에, 단단한 허리와 넓적다리에 꼭 끼는 색 바랜 진즈를 입고 있었다. 힘 세고 건장한 사나이. 캐롤라인은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총이 벽에 기대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 사나이에게 무기는 필요 없으리라. 자기 욕심을 채우고 싶으면 저 힘세어 보이는 큰 손을 사용하면 될 터이니까. 사나이는 엄지손가락을 허리띠에 지르고 캐롤라인의 눈앞에 우뚝 섰다. 그녀는 시선을 재빨리 문 쪽으로 돌려 봤지만, 도망치려고 생각하는 것은 헛일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 똑바로 말해 봐요. 무엇 때문에 내 집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소?" 사나이는 소리쳤다.

", 전 도, 도움을 청하고 있었어요. 자동차가 저 개울가에서 진흙 속에 빠져 버렸거든요." 캐롤라인은 이빨을 맞부딪치면서 겨우 말했다.

사나이는 잠자코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녀 앞으로 다가서서 비에 흠뻑 적은 그녀의 모자를 잡아 벗겼다. 젖은 머리가 그녀의 가는 어깨에 늘어졌다.

"아니, 여자가 아니오!" 사나이는 놀란 듯 캐롤라인의 회색 눈동자와 떨고 있는 입술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화가 난 듯이 따져 물었다. "이런 밤중에 무엇 때문에 밖으로 헤매고 있었느냐 말이오?"

"저는 길을 잃었어요. 거기에다 자동차는 냇가의 진흙 속에 빠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개울물은 지금 넘치고 있고……." 캐롤라인은 당장이라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가시 이름을 물어도 괜찮겠소?"

"캐롤라인, 캐롤라인 애덤스예요."

사나이의 태도는 약간 누그러진 것 같았지만, 경계심을 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죄송하지만, 차를 끄집어내는 일을 도와주시지 않겠어요? 되돌아가서 마체스펜텐으로 가는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어요."

"그건 헛수고요. 샛길로 가려면 다른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도 물에 잠겼을 거요."

"그렇다면 저는 물에 잠긴 두 개의 다리 사이에 갇혀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셈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죠?"

사나이의 수염투성이 얼굴이 떨고 있는 캐롤라인의 모습을 못마땅한 듯이 노려보았다.

"여기서 묵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을 것 같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거절했다. 이렇게 무서운 사나이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여기서 묵든지, 이틀 밤을 차 속에서 지내든지 둘중의 하나요."

"여기 전화가 있어요?"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전화는 없소." 사나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나서 엄지손가락으로 난로를 가리켰다. "잠시 몸을 녹이고 있어요, 곧 돌아올 테니."

캐롤라인은 난로 앞으로 뛰어가 불타고 있는 장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젖은 옷이 차차 따뜻해지고 공포심도 사라져 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룻바닥을 울리면서 사나이가 돌아왔다. 그녀가 뒤돌아보자 사나이는 담요를 펼치더니 두 사람 사이에 커튼처럼 쳤다.

"젖은 옷을 벗어요."

"전 그럴 수 없어요." 캐롤라인은 당황해서 얼른 거절했다.

"어처구니없군. 여자의 나체를 보는 것은 당신이 처음이 아니야, 아가씨." 캐롤라인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그는 얼굴을 돌리고 담요를 높이 쳐들어 주었다.

캐롤라인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얼른 젖은 구두와 옷을 벗었다. 그러자 사나이는,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거칠게 담요로 감쌌다. 이젠 나 혼자 있게 해 주었으면 하고 그녀는 바랐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녀의 슬랙스, 셔츠, 스웨터, 심지어 속옷까지를 난로 곁의 철제 스탠드에 걸었다. 캐롤라인은 부끄러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사나이는 그녀의 슬랙스 주머니에서 떨어진 자동차의 키를 주워 들자, 레인 코트를 입고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두꺼운 담요를 몸에 감고 난로 옆의 팔걸이의자에 앉은 캐롤라인은 냉정하게 한 모퉁이에서 데니스와 그의 양친은 내가 도착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나는 저 무서운 사나이의 불청객이 되고 말았다. 캐롤라인에게는 약혼이 두 가지 뜻에서 중요한 것이다. 린제이 일가로부터의 경제적 원조가 그 하나로서, 부채의 반환을 독촉하는 맥스웰 힐튼의 문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 채 홍수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되고 말다니…….

캐롤라인은 문득 자기를 붙잡은 덩치 큰 사나이를 생각했다. 누구일까?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언뜻 보기엔, 텁수룩한 수염과 초라한 옷차림이 부랑자 같아 보이지만, 그에게는 그렇게만 단정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나이 같다. 그렇다면 이런 시골의 누추한 오두막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유리창을 두들기는 빗발의 리듬과, 통나무가 벽난로 속에서 탁탁거리며 타는 소리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얼마나 잤을까? 캐롤라인은 난로에 통나무를 던지는 소리에 문뜩 잠이 깼다. 눈앞에 큰 사나이가 서 있었다. 언제 돌아왔을까, 내가 잠자고 있는 모습을 얼마 동안이나 보고 있었을까? 캐롤라인은 또다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가씨 차는 진흙 구덩이에서 끄집어내서 오두막 뒤에다 두었소." 사나이는 무표정하게 말하고, 마룻바닥에 갖다 놓은 그녀의 슈트케이스를 가리켰다. "당신 슈트케이스를 가져왔으니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도록 해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방을 나갔다.

"이것을 뜨거울 때 마셔요." 그는 수프 한 접시와 버터를 곁들인 빵을 캐롤라인 앞의 테이블에 놓았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 수프는 진했고, 빵은 갓 구워낸 듯 향기로웠다. 생각해 보니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운전하면서 먹은 사과밖에 없고, 어젯밤부터 식사다운 식사는 하지 못했다. 캐롤라인은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사나이는 저쪽 소파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담배 연길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어쩐지 거불해져서, 적당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물었다.

", 혼자서 여기에 살고 계신가요?"

"그렇소."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사생활에 대한 질문은 싫어한다고 짐작하고 캐롤라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을 깨뜨린 것은 사나이 쪽이었다.

"아가씨는 휴가 중인가?"

"일종의 휴가인 셈이지요." 이상한 결과가 되어 버린 하루를 돌이켜 보면서 그녀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알지도 못하는 사나이의 오두막에서 묵는 신세가 되었지만, 혹시 그는 피신하고 있는 법인이나 아닐까……. 슬쩍 사나이 쪽을 살펴보면서 캐롤라인은 공포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사나이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낯익어 보이고 범죄자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갖가지 생각들이 가슴을 스쳐갔다.

"아가씬 입담이 없는 것 같군." 캐롤라인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갑자기 사나이가 소리쳤다. "이봐요, 아가씨.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위리 두 사람은 싫어도 여기서 통조림 신세가 돼야 해요. 그렇다면 좀 더 마음을 풀어 놓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군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캐롤라인 생각했다.

사나이는 파이프를 채떨이에 두들기더니 새로 담배를 쟁여 불을 붙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일종의 휴가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그 말은 곧, 지금까지 하던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 사이의 공백 기간이라는 뜻이죠. 제가 일하고 있는 케이프타운의 회사가 문을 닫아서……새로운 취직 자라를 찾고 있는 중이거든요……." 목소리가 떠리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캐롤라인이 설명했다.

"빈자리가 별로 없을 것이요."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사나이가 눈치 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 주었다.

", 그래요."

"그건 그렇다치고, 밤중의 이런 시간에 어디로 가는 길이었소?"

"세저랜드 지구에 있는 제 약혼자 집에서 주말을 보낼 예정이었어요. 어디선가 길을 잘못 들어섰어요, 비 때문이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이 사나이가 녹색이 감도는 독특한 금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캐롤라인은 비로소 알았다. 그 눈동자가 문득 그녀의 왼손을 보았다.

"아직 반지는 끼고 않았군."

"이번 주말에 정식으로 약혼 발표를 하려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나하고 통조림 신세가 되어 버렸군요." 그의 눈동자에 어렴풋이 비웃음이 떠오른 것 같았다. "아가시의 부모에 대해서 이야기해 봐요."

다짜고짜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캐롤라인은 순순히 대답했다.

"어머니는 제가 아직 젖먹이일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재혼하셨구요. 그러나 오래 가진 못했지요, 그 아버지도 1년 전에 돌아가셨지만요."

"다른 가족은 없소?"

", 아무도. 저에게는 데니스가 있을 뿐이에요."

냉소가 잠시 그의 눈을 스쳤다.

"데니스가 바로 아기씨 약혼자인가요?"

캐롤라인은 일방적인 질문 공세에 울적해졌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사나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캐롤라인을 쳐다봤다. 그녀는 가슴의 고동이 강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사나이로부터 난로의 하늘거리는 불꽃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가 오는 오두막 밖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사나이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처음에는 다만 무섭기만 했지만 지금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겉보기는 거칠어 보여도, 그의 행동이나 말투에서는 은연중 전통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 같은 교량이 풍긴다. 캐롤라인의 머리는 금세 어지러워졌다. 데니스가 가르쳐 준 길과 방향을 소홀히 한 것이 후회되었다.

"아가씨 나이는?

생각에 잠겨 있었던 캐롤라인은 깜짝 놀라 얼떨결에 대답했다.

"스무 살이에요."

"그래, 아직 어린애군!" 의외로 나이가 어린 데 사나이는 놀란 모양이다. 이맛살을 찌푸리며서 파이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린애가 아니에요!" 캐롤라인은 화난 듯이 말했다. 그러나 사나이가 자기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훑어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알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화제를 바꾸는 것이 현명하다.

"이 비, 얼마나 계속될까요?"

"앞으로 하루나 이틀? 확실히는 나도 모르겠소." 사나이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다시 하얀 이빨 사이에 파이프를 물었다.

"여기 말고도 어딘가에 저를 묵게 해줄 집이 있겠지요?" 캐롤라인은 이젠 필사적이었다.

"이 빗속을 15킬로나 걸어갈 작정이라면 있겠지. 아가씨는 나를 무서워하고 있군." 날카로운 눈이 의자에 앉아있는 캐롤라인의 얼굴에 못 박혔다.

"제가 무서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사나이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그녀를 쳐다보고 있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벽에 세워둔 총을 들어 그녀에게 주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은 안심이 되겠지?" 그는 캐롤라인을 심술궂게 내려다보았다. "총알이 들어 있소,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되지."

캐롤라인은 손 위에 놓인 무기를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총을 사나이에게 돌려주었다.

"사용법을 몰라요."

"그렇다면 나를 신용하는 수밖에 없지." 총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서 사나이는 조용히 말햇다. 그 태도로 그가 캐롤라인에게 마음을 커놓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총을 돌려주기를 잘했던 것이다.

사나이는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난로 앞에 외롭게 남은 케롤라인은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몸을 떨며 벽난로 위에 놓인 시계를 보니 벌써 열 시였다! 이 누추한 오두막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나이와 세 시간 동안이나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난롯불은 고맙지만, 저 사나이와 한지붕 밑에서 하룻밤 지내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그녀의 생각은 데니스에게로 달려갔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와 연락을 취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빠져나갈 길이 없는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참을 수밖에 없다.

"커피 마시겠소?"

캐롤라인은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잠긴 나머지 그가 들어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받아 들면서 사나이의 얼굴을 보았다. 불빛 때문에, 붉은 빛이 도는 금발의 수염을 기른 얼굴은 말할수 없이 무섭게 보였다. 도발하기 시작하면 사나이는 악마 같은 위험한 사나이가 될 것이다…….

"아가씨는 무슨 일을 했지?" 난로 곁의 자기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뻗으면서 다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비서였어요." 캐롤라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허세가 들어 있었다. 다시 두려워지고 초조해지는 마음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우수한 비서였나?"

"고용주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간단하게 대답하고 커피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사나이는 난로의 불꽃을 쳐다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뭔가 괴로운 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캐롤라인은 생각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는 것은 삼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기를 빗속에서 강제로 끌고 들어온 사나이에 대해서 조금씩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캐롤라인은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피로 때문에 눈두덩이 무거워지고 정신이 흐려졌다.

"피로한 모양이군." 나지막하고 사나이다운 목소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던 캐롤라인의 귀에 올렸다. 사나이는 슈트케이스를 들고 따라오라는 몸짓을 했다.

사나이는 거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 캐롤라인을 침실로 데리고 갔다. 침대와 작은 거울이 붙은 화장대, 그리고 옷장. 최소한 필요한 가구만 놓여 있는 수수한 방이었다.

"이곳이 댁의 침실인가요? 제가 사용해서는……."

"글쎄, 시키는 대로 해요." 사나이는 못마땅한 듯이 명령했다.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잘 테니 걱정 말고. 나하고 한지붕 밑에서 자는 것이 불안하면 문에 열쇠가 꽂혀 있으니 잠그도록 해요." 방금 전까지의 불안을 간파 당하자, 캐롤라인의 두 볼이 뜨거워졌다.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해주셔서……." 그녀는 수줍게 중얼거리면서 사나이가 옷장 위에 놓은 램프 쪽을 돌아봤다. "램프가 필요하시지 않아요?"

"난로 불빛으로 어떻게 되겠지. 욕실은 복도 왼편에 있어요." 문 옆에서 이렇게 말하며 사나이는 등 뒤로 도어를 닫고 나갔다.

캐롤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의 구식 열쇠구멍에 꽂혀 있는 열쇠를 만져 보았다. 새삼스럽게 문을 잠글 필요가 있을까. 그럴 생각만 있었다면 사나이는 벌써 자기를 농락했을 것이다. 데니스는 그녀가 사람을 쉽게 믿어 버린다고 곧장 비난했지만, 자기와 침대를 양보해 주는 사나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지. 캐롤라인은 열쇠를 잠그지 않기로 했다.

피로하였기 때문에 캐롤라인은 곧바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순간 발 끝에 따뜻한 물통이 닿았다. 겉으론 난폭하게 보이는 사나이지만 마음씨는 꽤 자상하였다. 캐롤라인의 입술에는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고, 아직 남아 있던 두려움도 깨끗이 사라졌다. 결국 나를 어린애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게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긴 밤을 캐롤라인은 달게 잤다. 사나이는 잠 한숨 못 이루고 파이프를 문 채 난롯불만 지켜보며 밤을 세웠다는 것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욕실로 간 캐롤라인은 오두막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원시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수기에서는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고, 한쪽 구석에 있는 고풍스런 변기는 수세식이었다. 그녀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를 정돈하고 방안을 치우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끊임없이 창밖을 살폈다. 비는 그쳐 있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짙은 회색이었다. 이래 가지고는 오늘 출발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리라.

사나이는 주방에 있었다. 캐롤라인이 들어가니 계란과 베이컨을 굽고 있는 중이었다.

"식탁을 차려 주지 않겠소, 창밑의 찬장에 모두 갖추어져 있을 거요." 아침 인사도 없이 불쑥 명령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두 사람은 잠자코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식사를 하면서 힐끗힐끗 사나이를 관찰했다. 눈살을 찌푸린, 넓은 이마 속에는 어떠한 사악한 생각이 숨어 있는 것일까? 텁수룩한 수염은 고사하고라도, 콧등에는 흉터가 있고 입가엔 잔인성마저 감돌고 있는 이 사나이를, 소위 매력적인 남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갑자기 사나이가 예의 날카로운 눈으로 캐롤라인을 쏘아보듯이 응시했다. 강렬한 전류가 흐른 듯이 그녀의 감각이 마비되었다. 시선 속에 갇힌 몇 초 동안은 사나이로부터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캐롤라인은 문득 이 사나이를, 어젯밤 자기에게 몹시 겁을 주었던 오두막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의식했다.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한 가슴의 설렘이었다. 겨우 그로부터 눈을 돌려서 커피를 따르는데, 가슴의 고동이 심하여 손마저 떨렸다. 그는 눈치 채고 있을까? 눈치 채고 있는지 어떤지, 사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니스는 아가씨를 걱정하고 있을까?" 사나이가 마침내, 두 사람 사이의 거북한 침묵을 깨뜨렸다.

"물론 걱정하고 있겠지요. 그리고 제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늦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겠지요."

"아가씨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에 대해 화를 낼까, 아니면 약혼 발표를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에 대해서 화를 낼까?"

"양쪽 다겠지요." 캐롤라인은 씁쓸하게 인정했다. "그이는 무엇이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요. 더구나 린제이 목장으로 가는 길은 어린애도 혼자 갈 수 있을 만큼 알기 쉬운 길이니까요."

곧고 굵직한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그럼 아가씨는, 데니스가 수색대를 파견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소?"

"그가 어떻게 할지는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어요." 캐롤라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여기서 농사를 짓고 계신가요?"

"아가씨는 약혼자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식탁 위의 식기를 설거지통에 담그면서 사나이는 놀려대듯이 말했다.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캐롤라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냉정한 말투로 설명했다.

"나는 다만 세상을 떠나서 살고 있는 사람이지. 내 신상 이야기를 해봤자 아가씨 같은 철부지에게는 지루할 뿐일 거요."

어떠한 신상 이야기일까? 캐롤라인은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겉보기 그대로의 사나이인, 하루하루의 생활에 쫓기고 있는 평범한 농부일까? 그러나 그의 손은 결코 농부의 손이 아니다. 억세기는 하지만 거칠지는 않다.

"아가씨가 설거지를 좀 도와주면 좋겠는걸." 그의 목소리가 캐롤라인의 상상의 실을 끊어 버렸다.

그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것은 잠시 중단하고 설거지에나 열중하자……. 그러나 사나이가 이처럼 곁에 붙어 있어서는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2

시간은 느릿느릿 지나갔다. 그저, 앉아서 날씨가 개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나이는 시무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낮이 될 때까지 캐롤라인은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냇가에 가서 상태를 보고 오겠어요."난로 속에다 장작을 쌓아올리고 있는 사나이를 향해 캐롤라인이 말했다.

"시간 낭비요, 내가 오늘 아침 냇가에 가봤는데 여전히 냇물이 넘치고 있더군. 다리가 아직도 물에 잠겨 잇으니 건너가는 것은 위험해요." 사나이는 얼굴도 들지 않고 일을 계속했다.

심심해서 견딜 수 없게 된 캐롤라인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엇이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점심 준비를 한다든지……."

사나이가 마침내 얼굴을 들었다. 그 특징 있는 눈으로 그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더니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냉장고 속에 고기가 들어 있고, 빵도 남아 있을 거요. 하고 싶다면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어요."

사나이는 넓은 등을 캐롤라인에게 돌리고 다시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그의 등을 잠시 동안 멍하니 쳐다보고 나서 방을 나갔다. 사니이에 대한 자기의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괜한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

난로 앞에서 서로 마주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캐롤라인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했다.

"항상 이곳에 살고 계시나요?"

"그렇게 보이나?" 세 개째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사나이가 반문했다.

"그렇게 보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아 보일 때도 있어요." 캐롤라인은 흘끔 곁눈질로 그를 보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댁의 말투가 세련되어 있어서요."

"아가씨 말씨도 그래, 아가씨의 아버지 얘기를 들려 주지 않겠소." 사나이는 대답을 피하고 질문의 화살을 다시 캐롤라인에게 돌렸다.

"아버지는 화가로, 공상가이셨어요. 전혀 믿음직하지 못하신데다가, 돈에는 관심이 없어서……."

"빚만 남기고 돌아가셨군." 캐롤라인이 우물거리고 있자 사나이가 정확히 뒷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꾸려 가고 있어요."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으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지금 그녀는 음침한 싸구려 하숙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유일한 사치품은 소형 자동차인데, 그것도 중고를 싸게 산 것이다. 그것도 아버지가 죽기 전에 지불이 끝났기에 망정이지, 아버지가 막대한 빚을 남기고 죽은 지금 같았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실직한 지 얼마나 돼요?"

"2주일 되었어요." 캐롤라인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은 비가 안 오내요."

"어쩌면 내일은 떠날 수 있을 거요."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캐롤라인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로.

"제가 떠나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댁도 저를 내쫓고 싶어 하시는군요."

그러는 그녀에게 사나이는 새삼스럽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아가씨는 아주 예쁜 여자이고, 나도 성인 군자는 못되니까……."

캐롤라인은 더럭 겁이 나서 그를 쳐다봤다. 그랬더니 그는 벽에 세원 둔 총을 눈으로 가리켰다.

"……걱정이 되면 저 총을 들고 있으면 돼요."

그의 비웃는 듯한 말투에 캐롤라인은 당황하고 무안하여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사나이가 컵 너머로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자, 긴장을 풀려고 머리에 떠오른 말을 꺼냈다.

"아직 댁의 성함을 모르고 있어요."

"내 이름 같은 건 알 필요 없소." 딱 잘라서 말하고 커피 잔을 놓더니 일어섰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나이의 등에 대고 캐롤라인은 말했다.

"제 이름은 알고 계시면서……."

조용한 가운데 불꽃이 튀는 소리만 들렸다. 캐롤라인은 그를 화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뒤돌아보더니 일그러진 미소를 보였다.

"존 스미드라고 해두지."

"안 돼요, 그것은 본명이 아니잖아요." 천성이 정직한 캐롤라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성함을 그렇게 비밀로 하신다면, 제가 이름을 지어 드리겠어요."

"그것 재미있군. 어떤 이름을 붙여 주겠소?" 파이프를 꺼내어 조심스레 담배를 재면서 사나이가 물었다.

사나이가 담뱃불을 붙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캐롤라인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했다.

"댁을 보고 있으면 사자를 연사하게 돼요. 그래서 레오라고 부르기로 하겠어요."

"레오." 사나이는 그 이름을 되풀이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굵고 거친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온 방안에 울리는 웃음소리였다. 겨우 웃음이 멈추자, "좋은 생각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왜 그는 그렇게 웃었을까? 이상히 여기면서 캐롤라인은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자기가 붙인 이름이 아주 바보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우연히 본명을 알아맞히기라도 한 것일까? 어느 쪽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레오>라고 부르기로 한 사나이가 없는 오두막은 휑뎅그렁하니 쓸쓸하였다. 저녁때가 가까워지자 캐롤라인은 주방에 들어가 찬장과 냉장고 속을 뒤져 보았다. 무슨 일이건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큰 고깃덩어리와 통조림을 두세개 꺼내어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레오는 일몰 직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전 완전히 익숙해진 모양이군." 그는 약간 언짢은 기색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테이블 옆에 앉았다.

캐롤라인은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는 그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캐롤라인이 접시에다 스케이크와 소스에 졸인 감자, 주사위 모양으로 썬 당근과 송이 등을 가지런히 담아 내놓자 깜짝 놀라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맞은편에 앉은 캐롤라인은 천천히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 괜찮은데. 아주 맛있어."

"다행이에요." 캐롤라인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같은 여자를 만난 데니스는 아주 행운아군." 레오가 담담히 말했다.

"데니스 같은 사람을 만난 저야말로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캐롤라인은 재빨리 대꾸했다. "그이는 결코 저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아가씨 아버지가 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데니스라면 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오?"

그의 말에 캐롤라인은 서둘러 변명하듯이 대꾸했다.

"오해 하지 마세요, 아버지에게는 결점이 있었지만 저는 아버지를 사랑했어요."

그의 눈이 조롱의 기색을 띠고 있었다.

"아가씨는 데니스도 아버지의 경우와 똑같은 방법으로 사랑하고 있나?"

"데니스에게는 결점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캐롤라인은 완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아가씨는 결혼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를 좀 더 냉정한 눈으로 관찰해야 하겠군."

"아무리 그러셔도 제 결심은 변하지 않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하겠어?"

그의 말은 오랫동안 캐롤라인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에게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결국은 생각하는 것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날 밤, 캐롤라인은 난로 곁에서 한 번도 데니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까이에 있는 오두막 주인, 즉 레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말없이 파이프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눈동자는 불꽃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늘씬한 근육질의 몸은 언제, 어떤 일이라도 재빨리 행동에 옮길 수 있을 것처럼 날렵해 보였다. 캐롤라인은 어느 틈에 이 사나이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무서운, 그러나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강한 자력을 이 사나이는 지니고 있었다.

"내가 미쳤나 봐." 캐롤라인은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불꽃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렇게 하면 사나이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녀의 온 신경이 사나이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애인을 만나고 싶어졌소?"

갑작스런 사나이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캐롤라인은 어깨 너머로 뒤돌아봤다.

"데니스는 애인이 아니에요!" 캐롤라인은 화난 음성으로 외쳤다.

"그와 알게 된 지는 얼마나 돼요?"

"2년이에요."

"2년이나 사귀면서 아직 한 번도 관계가 없었단 말인가?" 사나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캐롤라인의 두 볼이 붉어졌다.

"우리들,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약속했어요."

짧고 어색한 침묵 뒤에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그에 대해서 조금도 욕망을 느끼지 않는게 사실이라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몹시 따분하고 딱딱할 거요."

"댁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캐롤라인은 화가 나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뱀같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에 감겨붙더니,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소?" 타오르는 듯한 사나이의 눈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물론이죠!" 캐롤라인은 손목을 빼내려고 몸부림치며 고집하면서도, 한편 그의 눈초리가 무서웠다. "데니스는 선량하고 친절하고 믿음직스러워서, 저를 상심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요!"

", 그는 아가씨의 아버님과는 정반대란 말이지?" 레오는 냉소를 보냈다.

"아버지를 끌어들이지 말아요." 캐롤라인은 화가 치밀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소." 그녀의 손목을 놓으면서 그는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아가씨가 그에게 끌린 것이 그의 육체적 매력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선량하고 친절하고 믿음직스러운 건전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니!"

그 빈정거림은 캐롤라인을 괴롭히고 화나게 만들었다. 어느 면에서 그의 비난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제게 그런 말을 할 권리는 없잖아요. 저는 데니스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결혼하려는 거예요." 가슴이 뛰어 캐롤라인은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사랑하고 있다니?" 그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과대평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에 다시 한번 아가씨 자신의 마음을 확인해야 해요."

"그러나 절대적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럴까?" 날카로운 눈이 캐롤라인에게 최면술을 걸고 있다.

", 그렇다니까요."라고 계속 말하면서도 그녀는 차차 확신을 잃어 갔다.

사나이의 체취가 캐롤라인을 감싸고 관능을 자극했다. 그 야릇한 눈빛으로 그녀는 두려움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매혹에 사로잡혔다.

"왜 떨고 있나? 내가 무서워서인가, 아니면 다른 까닭이 있어서인가? 어느 쪽인지 확실히 알게 해주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캐롤라인은 금빛 눈썹을 내리깔아 흐트러진 마음을 감추었다.

레오는 무릎 위로 캐롤라인을 안아 올리자 그녀의 떠는 입술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의 고동이 갑자기 높아졌다.

"데니스는 키스 지도에는 서투른 모양이군."

캐롤라인은 갑자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두 팔을 뻗어서 그녀를 잡아, 단단히 자기 가슴쪽으로 끌어당겼다. 캐롤라인은 얼굴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의 수염이 뺨에 스치는가 싶더니 입술의 무게가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정열적인 키스. 캐롤라인의 감각이 잠을 깨어 설레고, 손발의 맥이 풀렸다. 사나이의 손이 가슴에 닿았다. 캐롤라인은 몸속에서 거칠고 혼돈스러운 욕망이 눈뜨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두렵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했다. 레오는 한참 만에 그녀를 풀어 주었다. 그녀는 두 볼이 상기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고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레오도 따라 일어서서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 손의 감촉이 그녀의 내부에서 새로운 욕망을 불러 있으켰다. 저 믿음직스러운 몸에 다시 한번 기대고 싶다…….

캐롤라인은 순결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었을 때의 피할 수 없는 위험을 직감하고, 그에게선 한 발자국 물러서며 말했다.

"이제 쉬고 싶어요."

"그 말은 침대로의 초대인가?"

캐롤라인은 얼굴을 확 붉히며, 난처함을 숨기려고 새침하게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는 거실을 나왔다. 그는 붙잡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눈으로 좇았다. 어둠 속에서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어제까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사나이의 품안에서 자기가 체험한 일 모두를 되새겨 보았다. 그러자 그에게 쉽사리 마음을 허락한 것이 부끄러웠고, 한편 그가 자기를 어떤 종류의 여자로 생각했을까, 하고 걱정도 되었다.

캐롤라인은 데니스에 대한 일, 그에 대한 애정, 두 사람의 우정이 따뜻하고 단단한 결합으로 성장한 일 등을 억지로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그와의 결혼은, 항상 바라고 있던 안정된 행복을 가져올 것이다. 자기 마음에 뜻밖에 침범해 들어온 의심을 몰아내면서 캐롤라인은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다른 사나이의 가슴에 안겼던 저 아찔했던 일순간의 일은 잊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결심하고 그녀는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 창으로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회색의 황량했던 전원 풍경은 밤 사이에 녹색과 황금색의 파라다이스로 변해 있었다. 캐롤라인은 급히 옷을 갈아입고 슈트케이스를 챙겼다.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고 싶었다.

레오는 아침 식사의 테이블에서 물이 줄어서 다리를 건널 수 있다는 말만 간단히 하고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캐롤라인의 슈트케이스를 차로 운반하려 할 때 겨우 입을 열었다.

"휘발유가 얼마 없기에 10리터 넣었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할 거요."

"고맙습니다." 캐롤라인은 맥없이 미소지었다.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그랬던가?" 그는 놀리듯이 되물었다.

캐롤라인은 당황하여 눈을 내리깔았다.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휘발유 값, 얼마 드리면 되지요?"

"그만둬요!" 그는 잘라 말하고는 슈트케이스를 자동차 앞좌석에 올려놓고 그녀를 위해서 도어를 열어 주었다. ", 빨리 가요."

그가 재촉하자 캐롤라인은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음으로 넘겨 버렸다.

"그러겠어요. 길도 멀고, 저쪽에 도착하면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

그는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약혼자에게는 어디서 이틀 밤을 지냈는지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왜요?" 차에 키를 꽂으면서 캐롤라인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가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캐롤라인은 잠시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저는 거짓말을 못해요. 그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아가씨의 정직성에는 감탄하지만, 어젯밤 일도 그에게 말할 작정이오?" 그는 비웃듯이 입가를 찡그렸다.

"아니오." 캐롤라인은 볼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얼굴을 돌렸다. "그 일은 잊어버리는 것이 제일 좋아요."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캐롤라인은 마음이 동요되었다. 급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창밖으로 한쪽 손을 내밀었다.

"안녕히……레오." 입술에 어색한 웃음을 띠고 레오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미소도 짓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것을 가져가요." 그는 갑자기 이렇게 말하더니, 그녀의 손을 놓고 한 장의 명함을 꺼냈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인쇄된 것이었다. "케이프타운에 돌아가면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해요, 일자리가 있을 테니까."

"해럴드 프라이스. 이분이 당신의 친구세요?" 캐롤라인은 인쇄된 이름을 소리 내어 읽고 나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 좀 아는 사람이지. 틀림없이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어 줄 거요." 그는 반은 농담인 것처럼 말했다.

몇 분 뒤 캐롤라인은 아래쪽에 있는 큰길을 향해서 울퉁불퉁한 샛길을 달리고 있었다.

백미러에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진즈의 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바보스러운 일이다-자신에게 타일러 보았지만 캐롤라인은 자기가 빈 껍데기같이 되어 버린 것을 느꼈다, 소중한 것을 남겨 두고 떠나는 것처럼.

그저께 밤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던 곳은 곧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쉽게 올바른 길을 찾았다.

일요일 오전 열 시 반, 캐롤라인은 린제이 농장 안의 저택 앞에 차를 세웠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벌써 데니스가 곁으로 달려왔다, 메마르고 약간 검은 얼굴에는 노여움이 가득 찬 얼굴로.

"도대체 어디에 갔었어?" 당장이라도 양손으로 캐롤라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 것 같은 기세다.

"나는……."

"걱정이 돼서 미칠 것 같았어." 데니스는 화를 내며 그녀의 설명을 가로막았다. "여기하고 케이프타운 사이에 있는 경찰서에는 모두 연락을 했는데도 당신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단 말이야."

"이제 설명하겠어요, 데니스." 캐롤라인이 겨우 입을 열자 다시 데니스가 가로막으며 재촉했다.

"이리 와요. 빨리 부모님을 만나 줘, 설명은 자중에 천천히 들을 테니." 그는 캐롤라인의 슈트케이스를 차에서 꺼내더니 넓은 베란다가 있는 저택 쪽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린제이 부처는 적어도 곁으로는 예의바르고 따뜻하게 캐롤라인을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방에 안내되어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널찍한 거실에서 모두와 함께 차를 마셨는데, 그 자리에서 캐롤라인은 왜 계획대로 금요일 밤에 도착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았다.

캐롤라인의 설명이 끝났을 때 아무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아스러운 듯이 데니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긴장된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데니스의 어머니였다.

"아가씨는 이틀 밤과 한나절을 그 사나이와 단둘이서 지냈는데, 그러고도 그 사나이의 이름이나 직업을 모른다는 말이지?"

캐롤라인은 몸이 굳어져 데니스로부터 눈을 돌리고는, 자기의 맞은편에 앉아서 분개하여 입술을 떨고 있는 그의 어머니 쪽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꼭 알아둘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었고요."

"그놈은 범죄자일지도 모르지 않아." 불쑥 데니가 말했다.

캐롤라인은 조용한 미소를 보이고 나서 대답했다.

"절대로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요."

"이 이야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부탁해요." 데니스의 어머니가 캐롤라인에게 주의를 주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어머님?" 캐롤라인은 초조함을 누르고 말했다. "저는 아무런 부끄러운 일도……."

"어머님이 하신 말씀의 뜻은……."

"데니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하겠다." 데니스의 어머니는 흥분한 말투로 아들의 말을 가로막고, 캐롤라인 쪽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 집안은 이 지방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가문이에요. 아들의 장래 신부감이 어떠한 사정이 있었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나이와 단둘이서 이틀 밤이나 같이 지냈다는 소문이 난다면 세상에 얼굴을 들 수 없게 돼요."

"그렇지만 어머님. 저는……."

이번에 데니스의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물론 우리들은 아가씨를 믿고 있어요, 아가씨와 그 사나이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제멋대로 어떤 상상을 할지, 아가씨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지요?"

"두 분의 말씀이 옳아요, 달링.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둡시다." 데니스는 냉정한 태도로 캐롤라인의 팔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캐롤라인은 화가 치밀었지만 데니스를 위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다면." 하고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 이제 됐어. , 그럼 중요한 일을 끝내야지." 데니스는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 저고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캐롤라인이 영문도 알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불쾌한 일은 참시 잊고, 약혼에 감격해 하는 체 해보이려고 캐롤라인은 노력했다. 데니스의 양친도 두 사람에게 축하의 말을 해주며 시종 웃음 지었지만, 아들이 선택한 상대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을 캐롤라인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해서 린제이씨는 점심 식사의 테이블에서 샴페인을 터뜨려 주었다. 모든 일이 격식에 맞게 돌아가 통나무가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서 수염이 텁수룩한 레오와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데니스는 오후에 캐롤라인을 농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는 계속 말이 없었다. 아카시아 나무 아래서 단 한 번 키스를 했지만 그의 입술은 차가왔고, 캐롤라인의 입술도 역시 매정했다.

그날 밤, 데니스의 양친이 침실로 물러가고 난 뒤, 데니스와 캐롤라인은 난로 곁에 단둘이 남았다. 데니스는 그녀를 끌어안았고, 캐롤라인은 입술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정열을 불러일으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포옹은 조금도 뜨거워지지 않았다.

"이봐, 캐롤라인, 그 사나이 이야긴데……." 그녀에게서 몸을 떼고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데니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알고 있어. 그러나……." 그는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의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캐롤라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지?"

노여움과 실망으로 캐롤라인의 몸이 굳어졌다.

"그와 잠자리를 함께한 일은 없어요, 알고 싶으신 것이 그 일이라면."

"그냥 물어 봤을 뿐이데, 그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잖아."

"화를 내는 게 아니에요." 캐롤라인은 조용히 반박했다. "그의 침대에서 자기는 했지만, 그는 다른 장소에서 잤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을 뿐예요."

"줄곧 함께 있었나?"

", 거의."

"그 사나이가 무엇인가 못된 짓을 하려고 당신을 유혹하지는 않았겠지?"

그의 깊은 의심에 캐롤라인은 마침내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이글이글 빛나는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가 저에게 한 오직 하나의 제안은, 제가 어디서 묵었는지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아요."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놈은 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권했을까?" 캐롤라인의 시선을 피하면서 데니스는 계속 다그쳤다.

그녀는 잠시 동안 데니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약혼자의 날씬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도 마음이 타오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의 도움과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에 대해서 차가운 마음밖에 가질 수 없다니……. 캐롤라인은 무서워졌다. 절박한 경제 문제를 데니스와 그의 가족들과 의논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가 방금 끼워준 다이아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캐롤라인은 조용히 물었다.

"데니스, 당신은 왜 그런 식으로만 묻는 거죠?"

"우리들은 결혼할 몸이야. 그래서 당시 일을 확실히 알고 싶은 거야."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입술 사이로 내뿜으면서, 체면이 안 선다는 듯이 캐롤라인을 보았다.

"제가 순결한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말하자면 그렇지." 데니스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그 순간 캐롤라인은, 그가 몹시 소견이 좁은 사나이로 생각되었다.

"저를 믿어 주시지 않나요?"

"지금까지는 항상 당신을 믿어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군요?"

"캐롤라인, 내가 당신 일을 확실히 해두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아? 우리 집의 체면도 생각하여야 하고, 오늘 밤 어머니도 당신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말씀하셨어." 데니스는 화가 난 듯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어머님의 말씀은 백번 옳아요." 캐롤라인은 도전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오두막 주인은 아주 매력적인 남자였어요. 그리고 어젯밤 저에게 키스를 했어요. 그 키스를 즐기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되겠죠?"

마침내 말하고 말았다! 이제 데니스는 이 고백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캐롤라인은 눈을 내리깔고 스며나오느 눈물을 떨쳐내려고 눈을 깜박였다.

"그녀석이 당신에게 키스했다고?"

", 그래요."

"나쁜 자식! 또 어떤 짓을 했는지 알게 뭐야."

"그 이상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캐롤라인은 비참한 심정으로 이렇게 대답하고, 무거운 반지를 뽑아서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소파 위에 놓았다. "저는 이제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캐롤라인, 그 말은 본심이 아니겠지?"

"아니에요, 본심이에요." 캐롤라인은 그의 눈을 쳐다보고 대답했다. 왜 갑자기 그 사나이에 비해서 데니스가 나약한 사람같이 느껴지는 것일까? 틀림없이 데니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 왔었는데, 그 사나이의 키스 한번으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니. 데니스는 나에게 어울리는 남성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괴롭더라도 곧 이 결과에 익숙해질 것이다. "당신에겐 저보다는 집안의 명예가 소중하지 않아요.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들춰내어 당신들을 난처하게 만들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예요. 저 내일 아침 떠나겠어요."

다음날 아침, 데니스와 그의 양친과 함께 아침 식사의 테이블에 앉은 캐롤라인은, 데니스가 이미 약혼 파기의 뉴스를 그들에게 알렸음을 느꼈다. 양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캐롤라인,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지 않겠어. 어젯밤은 두 사람 다 너무 흥분했던 것 같아.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 캐롤라인을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전송하면서 데니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기나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여서인지 캐롤라인은 몹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처럼 철석같이 믿어왔던 사나이의 본심을 꿰뚫어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를 내고 있었다. 데니스는 그 화풀이를 받고 있었다.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의 본성을 알았어요. 당신은 거만하고 고집이 센데다 몹시 소견이 좁아요.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거예요."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 않아?"

"그것은 틀린 말이에요, 데니스. 정열이 없는 결합은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당신은 좋은 친구였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어요.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이렇게 되어 버려서 유감이에요."

겨우 하루 사이에 캐롤라인은 또 한 사람의 남성 곁을 떠나서 차를 달리고 있었다. 지금은, 불확실한 희망과 꿈 위에 세워진 미래를 향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견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냉엄한 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캐롤라인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 오두막으로 통하는 갈림길에까지 왔을 때, 캐롤라인은 악셀을 늦추었다. 다시 한번 더 레오를 만나고 싶다. 그러나 그가 비웃을지도 모른다……. 캐롤라인은 곧 생각을 단념하고 케이프타운을 향해 달렸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3

직업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역시비서의 일자리는 없었다. 전화 박스 속에서 크게 한숨을 쉰 캐롤라인은, 일자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다, 약간의 호기심도 일고 해서, 레오가 준 명함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입니다." 전화 교환수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까닭도 없이 당황한 캐롤라인은 급히 수화기를 놓았다.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 귀에 익은 이름이다. 견실한 개인 기업으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요트 건조회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정체불명의 오두막 주인은 상류 사회와 접촉이 있다는 것인가. 과연 이러한 일류 회사의 헤럴드 프라이스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도 좋을 것인가. 캐롤라인은 당혹감으로 결심이 서지 않았다. 직업소개소에서도 일자리도 나는 대로 전화 연락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언제까지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숙집 근처의 찻집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앞에 놓고, 그녀는 마침내 프라이스씨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반시간 뒤, 캐롤라인은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사의 수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수위는 그녀에게 용건을 묻고 낡아 빠진 오스틴 자동차 안을 수상하다는 듯이 들여다보더니, 프라이스씨와 전화로 연락을 취하고 나서야 겨우 통과시켜 주었다.

프라이스씨의 비서는 타이프를 치고 있다가, 캐롤라인이 방에 들어서자 고개를 들어 용무를 묻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용무이신가요?"

캐롤라인은 마음의 동요를 억제하듯이 핸드백의 끈을 꼭 쥐었다.

"프라이스씨를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캐롤라인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대답했다.

"지금은 빈자리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일단 프라이스씨에게 확인해 보겠어요." 비서는 인터폰의 단추를 눌렀다. "프라이스 부장님, 여기에 일자리를 찾는 젊은 여자가 와 계시는 데요……." 잠시 동안의 침묵 뒤에 비서는 재빨리 캐롤라인을 뒤돌아보았다. "성함은?"

"애덤스입니다, 캐롤라인 애덤스."

비서는 인터폰에 대고 캐롤라인의 이름을 되풀이해 말하고는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부장님께서 곧 만나시겠답니다, 들어가시지요." 비서는 <인사부장>이라 쓰인 도어를 손으로 가리켰다.

캐롤라인은 그 사무실로 들어갔다. 살풍경한 사무실의 데스크 뒤에서 머리가 벗겨진 사나이가 일어섰다.

"이리 앉으십시오, 애덤스양. 일자리를 찾고 계시다구요?" 인사부장은 검은테 안경을 벗어, 크것을 데스크 맞은편에 있는 의자 쪽을 향해 흔들었다.

", 이곳에 빈자리가 있을까요?" 캐롤라인은 의자 모서리에 천천히 앉으면서 맞은편에 앉은 사나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회계과에 빈자리가 하나 있는데, 타이프를 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인사부장은 염려스럽다는 듯이 캐롤라인은 보았다.

", 물론입니다." 그녀는 재빨리 대답하고 나서는 상기된 얼굴로 수줍은 듯이 덧붙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됐어요." 그는 즉시 이야기를 매듭짓고 안경을 쓰자 책상 위의 서류를 읽기 시장했다.

"필요하시다면 자격증을 가지고 왔읍니다만." 캐롤라인이 핸드백을 열러고 하자 부장은 손을 흔들어 말렸다.

"그런 건 볼 필요 없습니다. 내일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해 주십시오."

이런 기묘한 면접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왜 인사부장이 자기를 순순히 채용해 주었는지 그 이유를 따져볼 생각은 없었다. 캐롤라인은 부장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미스터 프라이스."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애덤스양. 나는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니까. 앞으로는 당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어요."

캐롤라인은 한 시간도 못 되어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에서 나왔다. 나는 진짜로 채용된 것일까, 아니면 대낮에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자기

손 등을 꼬집어보았다. 틀림없이 꿈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 뜻밖의 행운에 몹시 감사했다.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에 입사한 지 일주일이 됐을 무렵에는, 그녀는 인사부장과의 기묘한 면접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주말은 눈앞에 두고 초라한 하숙방에 돌아오니 데니스가 없는 쓸쓸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를 생각하고 그와 함께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생각하니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와의 결혼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낯선 사나이의 오두막에 묵었던 사정을 솔직이 설명했을 때, 데니스와 양친이 그런 태도로 나온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지워 버릴 수는 없지만, 자기를 믿지 못하겠다고 단언한 사나이와 평생을 함께 살 수는 없다. 데니스는 폭풍우 속에서도 캐롤라인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기는커녕, 자기 집안의 체면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캐롤라인은 싫어도 그 사나이를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의 키스로, 생각지도 못했던 정열을 불러일으켰던 그 사나이. 지금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설랜다. 그러나 두번 다시 그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오두막까지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은. 그러나…….

캐롤라인은 마음을 가라앉히자 샤워를 하기로 작정했다.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사나이의 일을 생각하다니 참으로 바보스럽다. 캐롤라인은 자신을 꾸짖었다. 수염이 텁수룩한 그 얼굴이, 일주일 동안 몇 차례나 문득문득 떠오른 것을 사실이었다.

월요일 아침, 캐롤라인이 책상 앞에 앉으려 할 때, 늘씬한 빨강 머리의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 뵙겠어요, 매즐리 데일이라고 해요. 신입사원이죠?" 그녀는 캐롤라인에게 웃는 얼굴을 돌렸다.

", 그래요. 캐롤라인 애덤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캐롤라인은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이 여자는 서른에서 마흔 사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매즐리는 의자를 잡아당겨 앉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휴가 갔다가 막 돌아오는 길이에요. 아직 일할 기분이 안 나는데."

"저 같은 신입 사원은 아직 휴가는 생각할 수 없어요.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회사의 분위기도 확실히 모르는 걸요." 캐롤라인은 웃었다.

"나에게 물어보면 돼요, 무엇이든지 가르쳐 줄 테니까." 매즐리는 약속해 주었다.

캐롤라인은 첫눈에 매즐 리가 좋아졌다. 오전중 함께 일해 보니, 매즐리는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사원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다.

사원 식당에서 점심을 들면서 캐롤라인은 아무 생각없이 물었다.

"당신을 미세스 데일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던데요, 왜 결혼반지를 끼지 않고 계세요?"

"이혼했어요, 두번 다시 똑같은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을 거예요." 매즐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캐롤라인은 당황해서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이 회사에서 일한 지 오래 되었나요?"

"5년 전에 라이온이 아버님의 뒤를 이었지만, 나는 그 전부터 있었어요."

"<라이온>이라니, 누구예요?" 캐롤라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매즐리를 쳐다보았다.

"사장 이름이 구스타프 드 레오예요. 드 레오, <더 라이온>이 아녜요?"

"그렇군요. 저는 아직 만나 뵌 일이 없어요……."

"앞으로도 만날 기회는 없을 거예요. 라이온은 자기 전용 입구와 전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해서 6층에 잇는 사무실로 출퇴근하지요. 부장이나 중역들과만 사무적인 이야기를 할 뿐, 사원들과 얼굴을 맞대는 일은 거의 없어요."

"당신도 사장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나요?" 캐롤라인은 놀라서 되물었다.

"은빛의 재규어 승요차를 운전해서 회사를 나가는 것을 두 번 정도 본 적이 있어요. 그 외에는 때때로 신문에서 사진을 볼 뿐,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어요. 그래도 맡을 잘 안 들으면 무섭다는 소문이에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주 무서운 사람 같군요." 캐롤라인은 약간 진저리쳤다.

"사원에 대한 대우는 아주 좋아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보장할 수 있어요. 그러나 라이온 앞에서는 누구든지 발소리를 죽이고 걷는다고 해요."

캐롤라인은 그 말을 듣고,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사의 사장은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일 거라고 생가했다. 그리고 그 사나이와 만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자 내심 마음이 놓였다.

P.M.E - 모두가 이렇게 부르고 있다 - 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 캐롤라인은 또다시 절박한 경제문제에 직면했다. 어느 날 퇴근 후 하숙으로 돌아오니 방문객이 한 사람 좁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셔츠에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나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고 캐롤라인은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힐튼씨!"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언제 보아도 아름다우시군, 캐롤라인." 맥스웰 힐튼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온몸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무슨 용무세요?" 힐튼이 문을 닫고 자기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바라보면서 캐롤라인은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나타내며 물었다.

"그 대답은 아가씨도 알고 있을 텐데요." 얇은 입술에 야비한 웃음을 띠며 힐튼은 말했다. "내 친구들은 당신이 조금씩 분할해서 빚을 갚는 지금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답니다. 전액을 한꺼번에 갚아 달라고 합니다, 현금으로 말입니다."

"요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당장은 어려워요, 힐튼씨. 7천 랜드나 되는 큰돈을 당장 내놓으라니……."

"그럼 손 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힐튼은 그 특유의 은근한 말투로 가로막았다. "담보가 없으니……그것이 문제입니다, 아가씨. 그래도 내가 오늘 밤 찾아온 것은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서입니다."

"좋은 생각?" 캐롤라인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떤 생각인데요?"

힐튼은 가늘고 뼈가 앙상한 손으로 천천히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자 연기를 내뿜으며, 가늘고 작은 눈으로 캐롤라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앞으로 두 주일만 여유를 드리지요. 두 주일 후에도 당신이 돈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당신 대신에 내가 빚을 갚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제 대신에 당신이 빚을 갚겠다니요?" 캐롤라인은 놀라 되물었다. "당신이 한꺼번에 갚아 줄 테니, 저는 이제까지처럼 매월 조금씩 당신께 갚으란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캐롤라인. 당신더러 빚을 갚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힐튼은 배시시 웃었다.

"무슨 뜻이죠?" 캐롤라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당신같이 예쁜 여자가 나 같은 사나이에게 빚을 갚는 방법은 돈말고도 달리 또 있지 않겠어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캐롤라인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당장 여기서 나가 주세요!"

힐튼의 얼굴에서 엷은 웃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나가 주지, 그러나 두 주일 안에 돈을 준비하는 것은 잊지 말아요. 만일 준비를 못한다면 내가 어음을 끊겠소. 그 후로는 내 방식대로 돈을 받아낼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

힐튼이 다녀간 뒤, 캐롤라인은 필사적으로 은행이나 금융기관에 융자를 부탁했으나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게는 저당잡힐 것이 없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맥스웰 힐튼이 흉측한 제안을 해온 지 일주일째의 수요일, 캐롤라인은 매즐리와 함께 사원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있었다. 매즈리는 파란 눈으로 캐롤라인을 말끄러미 보고 있다가 상냥하게 물었다.

"이봐요,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무엇인가 고민이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 같으면 말해 봐요."

"고마워요, 매즐리.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지만……." 캐롤라인은 한숨을 쉬면서, 손도 대지 않은 접시를 옆으로 밀어내고 홍차 잔을 당겼다.

"말해 봐요."

캐롤라인은 홍자를 젓고 스푼을 살그머니 받침 접시에 놓더니 불안한 눈초리로 매즐리의 얼굴을 보았다.

"내주 수요일까지 7천 랜드를 준비해야 해요."

매즐리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는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머나, 그런 큰돈을 어디에 쓰려고?"

캐롤라인은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 만약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그 맥스웰 힐튼이라는 사나이가 야비한 방법으로 지불을 요구한다는 말이군요, 알았어요."

"그런 큰돈, 저는 도저히 마련할 수가 없어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2천쯤은 내가 빌려 줄 수 있지만, 나머진 어떻게 하지? 누군가로부터 빌어야 하는데."

"정말 고마워요, 매즐리. 그러나……." 캐롤라인은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어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돼!" 매즐리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캐롤라인의 팔을 살그머니 잡았다. "나도 아는 분에게 부탁해 보겠어요, 내주 수요일까지는 되는 대로 긁어모아 볼게요."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캐롤라인은 생기가 도는 목소리로 물었다.

"꼭 된다는 약속은 할 수 없어요." 매즐리는 덧붙였다. "그러나 힘껏 해보겠어요."

"고맙습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자 안도의 눈물이 캐롤라인의 속눈썹을 적셨다.

오후의 일과가 시작되고 얼마 후 매즐리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매즐리가 곧 수화기를 캐롤라인에게 건네 주었다.

"당신 전화예요."

"애덤스양?" 해럴드 프라이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곧 드 레오 사장의 방으로 가주십시오, 하던 일을 중단하고. 늦장을 부려서는 안 돼요, 사장님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시니까."

"알겠습니다, 프라이스 부장님. 제가……제가 곧 가도록 하겠습니다." 캐롤라인은 긴장해서 딱딱하게 대답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캐롤라인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슨 전화예요?" 캐롤라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매즐리가 물었다.

"드 레오 사장님이 저를 보자고 하신데요."

"라이온이?" 매즐리가 큰 소리를 냈다. "라이온의 소굴로 호출을 받다니, 당신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어요, 캐롤라인?"

"모르겠어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녀는 신경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구말구요. , 빨리 다녀와요."

6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캐롤라인은 자기가 한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왜 라이온에게 호출당한 걸까? 그러나 생각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일에 관한 것이라면 경리부장에게 불려가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6층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유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복도의 맨 안쪽에 있는 사장실에 들어가기 직전 캐롤라인은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애덤스양입니까?" 백발인 비서가 책상 위에서 사무적으로 이름을 확인했다.

", ." 마음의 설렘을 억제하려 애쓰면서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비서는 왼쪽 도어를 가리켰다. 캐롤라인은 주저하면서 다가갔다. 이 문의 저쪽에 <라이온>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갑자기 겁이 나서 책상 뒤에 있는 비서 쪽을 뒤돌아보았다.

"기다리시게 해서는 안됩니다." 도움을 청하는 듯한 캐롤라인의 눈초리를 보고 비서는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다.

캐롤라인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도어를 가볍게 노크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실은 널찍하고 호화로웠다. 그러나 캐롤라인의 시선은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창가에 서 있는 사나이의 뒷모습에 못 박혔다. 잎담배의 향기가 캐롤라인 쪽으로 풍겨 왔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녀가 들어온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지 창가에 계속 서 있었다.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기침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그러나 이렇게 긴장하고 있어서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캐롤라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꿀꺽 하고 침을 삼키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드 레오 사장님이십니까?"

사나이가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책상 있는 곳으로 왔다. 그때 캐롤라인은 처음으로 사나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의 고동이 멎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눈을 깜박거리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갑자기 방안이 빙글빙글 돌더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캐롤라인은 헐떡이면서 외쳤다.

"당신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 쓰러질 것 같아서, 그가 권하는 의자에 허물어지듯 앉았다. 그는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더니 단추를 하나 눌렀다.

"미세스 프랑클린, 한 시간 정도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아요." 그리웠던 낮은 목소리였다.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긴 머리, 날카로운 눈, 면도자국이 파란, 거칠게 생긴 얼굴 모습. 이 사나이는 내가 묵었던 오두막의 주인, 정체불명의 그 사나이가 아닌가. 스웨터와 진즈는 검은 양복으로, 낡은 부츠는 고급 가죽 구도로 바뀌었고, 하얀 실크 셔츠에 다이아를 박은 넥타이핀을 꽂고는 있지만…….

그는 가난한 농부에서 부호 실업가로의 변신을 상징하듯이, 파이프 대신에 잎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몇 주일 동안이나 캐롤라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사나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뭐 할 말이 없소?" 책상 뒤의 회전의자에 몸을 묻고 사나이는 익살스럽게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캐롤라인은 자기가 예의에 어긋나게 이 사나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자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는 상관없다. 캐롤라인은 문득 억제할 수 없는 노여움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제가 당신을 레오라고 불렀을 때 왜 당신이 그처럼 재미있어했는지 이제야 그 까닭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면접하러 왔을 때 프라이스 인사부장이 당장 취직을 시켜 준 이유도……." 사정을 알게 됨에 따라 캐롤라인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부장이 저를 어떤 종류의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상상하기만 해도 부끄러워요." 그녀는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신음했다.

"당신은 자신의 평판에 그토록 신경을 쓰고 있소?"

그의 목소리가 비꼬는 투로 들리자 캐롤라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물론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고 이어 불꽃이 튀었다. 문득 그가 조롱하듯이 말했다.

"아직 반지를 끼지 않은 것 같군."

"약혼은 파기했습니다."

"?"

"개인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나하고 단둘이서 주말을 지낸 뒤, 데니스군에게 당신은 여전히 순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믿어 주지 않았다, 그런 말이군 그래."

캐롤라인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것도 이유의 하나이긴 합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계속되었다. 그가 다시 퉁명스런 말투로 물었다.

"이제 아무 이야기도 안 할 작정이요?"

캐롤라인은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 자기가 레오라고 이름 붙여 준 사나이에게라면 자기 마음속을 털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눈앞에 있는 것은 구스타프 드 레오, 즉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사를 이끌고 있는, 이른바 사장이고 자기는 그 밑의 일개 사원이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그러나 제 사생활 같은 것은 사장님에게는 아무 흥미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캐롤라인은 단숨에 말했다.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나는 오히려 당신의 사생활에 대단한 관심이 있거든." 그는 잎담배를 책상 위의 대리석 재떨이에 놓으면서 그녀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캐롤라인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박이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아까와 같이 창가로 가서 캐롤라인에게 등을 돌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려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숨을 죽였다.

"당신 아버지 빈센트 애덤스는 1년 전에 돌아가셨더군. 표면상으로는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친구들은 과음이 원이이라고 믿는 모양이오. 아버지는 거의 빚으로 살았는데, 현금이 손에 들어오면 모두 도박으로 탕진하고 말았더군.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했으니 모든 부채는 소멸되는 것인데, 당신은 자존심 때문에 빚을 갚겠다고 나섰소. 당신이 호트베이에 있는 집을 팔아 갚았으나 그래도 노름빚 8천 랜드가 남았는데, 그중 7천 랜드를 아직 같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홱 뒤돌아서서 캐롤라인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뚫어지도록 노려보았다. "내 정보가 매우 정확하지? 그렇지?"

"어떻게……어떻게 알고 계시죠?" 캐롤라인은 모깃 소리만한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뒷조사를 했지."

사나이의 무례한 말에 캐롤라인은 몹시 화가 나서 고쳐 앉았다.

"방금 어떻게 했다고 말씀하셨지요?"

"내가 한 말 들었을 텐데……." 그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어요?" 캐롤라인은 그의 야성적인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따져 물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소."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캐롤라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맥스웰 힐튼이라는 사나이가 일주일 전에 당신을 찾아 갔었다는 데 사실이오?"

캐롤라인은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겁을 먹고는 대들 듯이 말했다.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시지 않아요? 맞아요."

"당신은 7천 랜드를 같을 거요. 아니면 그의 요구에 응할 작정이오?"

"힐튼의 애인이 될 작정인가, 라는 질문이시라면 저의 대답은 노우입니다.

그에게 지불할 만큼의 돈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만일 그가 내 몸에 손을 댄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어요." 캐롤라인은 혐오감에 입가를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바로 그 말을 듣고 싶었지." 그는 희미하게 조소를 띠고 데스크 뒤의 의자로 돌아갔다. "그럼 이것으로 당신과 나와의 거래를 의논할 수 있게 되었군."

캐롤라인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사나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거래라니요, 도대체 무슨 거래 말입니까?"

구스타프 드 레오는 순금 라이터로 잎담배에 불을 붙이고, 잎담배가 잘 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설명을 시작했다.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이달 말까지 아내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소. 이 점에서 당신이 나늘 도와준다면, 맥스웰 힐튼이 두 번 다시 당신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 주겠소."

캐롤라인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도 충격이 큰 나머지 얼굴빛이 붉어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그의 말을 되풀이해서 씹어 보았지만 틀림없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결혼해 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캐롤라인은 간신히 되물었다.

"그렇소." 이글이글 빚나는 두 눈이 잎담배의 연기 저쪽에서 뚫어지게 캐롤라인을 쳐다본 채 움지이지 않았다. "나하고 결혼해 줘요. 그러면 아버지의 노름빚은 내가 갚겠소."

"좋아하시는 분 중에 사장님과의 결혼을 바라고 있는 여자도 많을 텐데요?" 캐롤라인은 반문해 봤다.

"나는 자유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은 모두 결혼으로 나를 평생 얽매어 두고 싶어한단 말이요. 그러나 상대가 당신이라면, 필요한 기간이 끝나는 대로 결혼을 해소시킬 수도 있잖겠소?"

"곧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저같이 보잘것없는 여자는 마음대로 이용해도 상관없다, 그 말씀이군요." 캐롤라인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동의해 준다면 우리들 쌍방에게 모두 편리하다고 생각되는데." 익살스러운 웃음이 꼭 다문 입술을 일그러지게 했다. "어때, 그럴 생각 없소?"

캐롤라인의 마음은 움직였다. 실은 그를 향해서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외치고 싶어서 좀이 쑤실 정도였으나,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맥스웰 힐튼의 마수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하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은 낙관적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떻게든지 나를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매즐리가 있다. 이 사나이에게 언질을 주기 전에 좀 더 상황을 살펴보아야지…….

"사장님의 제의,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시지 않겠어요?" 한참 후에 캐롤라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이렇게 말을 했다.

"힐튼에게서 빈 돈은 내주 수요일까지 갚기로 되어 있지? 화요일 저녁 일곱 시 당신을 찾아가겠소. 저녁 식사를 하면서 대답을 들려주기 바라오."

"좋습니다."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면서 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으로." 그는 이야기를 끝냈다. 그러나 도어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요."

", 무슨 일인데요?" 캐롤라인은 뒤돌아 보았다. 입술 끝이 씰룩씰룩 신경질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일어서자 캐롤라인에게 다가왔다.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도록." 그는 캐롤라인을 덮치듯이 하고 명령했다.

그녀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나 왜 이 방에 불려갔었는지 동료들이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을까요?" 그는 캐롤라인을 내려다보고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나서 도어를 열고 뒤로 물러서서 그녀를 복도로 내보냈다.

 

4

엘리베이터는 캐롤라인을 단숨에 일층으로 운반하였다. 자기 책상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매즐리가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며 물었다.

"그래, 라이온의 용건은 뭐었어요?"

"죄송해요, 매즐리. 아직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 용건이에요." 캐롤라인은 미안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7천 랜드의 돈과 관계있는 일?"

", 부분적으로는 그래요. 그러나 돈을 마련하는데 역시 도와주셔야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 않아요?"

"고마워요, 매즐리." 마음의 동요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캐롤라인은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하루 또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날 무렵엔 그 미소도 사라졌다. 타오르는 불꽃에 앞뒤를 가로막히고 만 것처럼, 도망칠 곳 없는 초조감에 사로잡혔다. 맥스웰 힐튼에게 몸을 파는 것보다는 구스타프 드 레오와 결혼하는 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아직도 매즐리 데일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매즐리가 7천 랜드의 돈을 마련해 준다면 자기는 저 괴상한 사나이와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화요일 아침, 출근하는 캐롤라인의 마음은 납덩이 같이 무거웠다. 사태가 바라는 대로 안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매즐리와 얼굴을 맞댄 순간, 캐롤라인은 예감이 들어맞는 것을 알았다.

"캐롤라인, 부탁할 만한 사람에게는 모두 말해 보았지만……."

"알았어요,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해요." 캐롤라인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설마 맥스웰 힐튼이라는 사나이가 하자는 대로 할 작정은 아니겠지요?" 매즐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절대로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군요. 그러나 어떻게?"

캐롤라인이 손을 흔들자 매즐 리가 입을 다물었다.

"조그만 기다려 줘요. 곧 그 까닭을 얘기하겠어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일을 시작했지만 캐롤라인은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오늘 밤의 약속이 머리 위에 매달린 다모클레스(Damocles)의 검처럼 염두에서 떠나지 않았다. 죽도록 싫은 맥스웰 힐튼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는 라이온과 결혼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라이온은 아내를 필요로 하고 있다. 결혼을 결심하는 이유로서 최상의 이유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단순한 거래라고 생각한다면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만도 아니었다.

캐롤라인은 그날 하루 어떻게든 자신을 가져 보려고 노력했지만, 저녁때 구스타프 드 레오가 하숙으로 데리러 왔을 때는 겁이 나서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라이온은 캐롤라인을 콘스탄시아에 있는 자택으로 데려갔다. 넓고 웅장한 저택은 골동품 가구로 장식되어 있었다.

호화스러운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캐롤라인은 골동품 따위를 감상할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더 위축되었고, 싸구려 드레스를 입고 온 자기가 몹시도 어울리지 않고 초라하다고 느껴졌다.

두 사람은 대식당 옆의 방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하인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왔다 갔다 하면서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떡갈나무로 만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라이온과 마주앉은 캐롤라인은 음식의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여러번 말을 걸어 왔으나, 야릇한 눈초리로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근엄한 얼굴의, 독재자와 같은 그의 눈앞에서 캐롤라인은 용기를 잃고 말았다. 저 산장에서 같았으면 두 사람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인 이 사나이가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는 훨씬 윗자리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어떠한 목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자기를 아내로 선책한 이유를 캐롤라인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식사가 끝난 뒤 그가 또다시 포도주를 권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거절했다.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은데다가, 포도주를 과음했기 때문에 이미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추태를 부리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마셔서는 안 된다.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요."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어서 캐롤라인이 말을 꺼냈다. "그렇게 먼 시골의 오두막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어요?"

"그 오두막은 내 소유의 땅 위에 지은 것이오. 농장에 제대로 지은 집은 냇가 건너에 있지만 관리인이 살고 있소. 그래서 찾아갈 때는 항상 그 오두막에 묵고 있지.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생활을 좋아해요. 무엇인가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그곳의 평화롭고 조용한 환경이 안성맞춤이거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캐롤라인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자기가 뛰어들었으니, 얼마나 폐를 끼친 건지 이제야 겨우 이해가 갔다.

"이해할 수 있다니, 참말이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에 캐롤라인의 가슴이 설렜다.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방 안은 침묵에 잠겼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의 눈 속에 비쳐들었다. 캐롤라인은 낭떠러지의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숨도 쉴 수 없었다.

"피차 말을 돌려 가면서 탐색하는 것은 그만둡시다. 이젠 당신의 대답을 들려줘요." 그가 갑자기 침묵을 깨뜨렸다.

"왜 이렇게 서둘러서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캐롤라인이 되물었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연하게 말했다.

"예스라는 대답을 할 때까지는 그 이유를 밝힐 수가 없소."

"저에게는 조금도 선택의 자유가 없나요?" 캐롤라인은 비참한 심정으로 자신의 처지를 지적했다.

"선택의 자유는 있지 않소, 힐튼과 나 둘 중의 하나 말이오." 그는 거칠게 반박했다.

"바로 그것이에요,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맥스웰 힐튼의 요구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죽는 쪽이 나아요. 그러니 당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럼 나와의 결혼에 동의하는 거요?" 그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다짐을 했다.

캐롤라인은 주저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녀의 대답은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

"좋소, 거실로 옮깁시다. 거기서 사정을 설명하지." 그는 갑자기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거실에는 향나무로 만든 가구가 있고, 포도주같이 붉은 빛깔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캐롤라인은 정교한 조각을 한 의자에 앉아서, 그가 잎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기다렸다.

벽난로 속에서 장작이 타고 있어 넓은 방은 훈훈했으나 캐롤라인의 마음은 몹시도 춥고 몸은 덜덜 떨렸다. 그는 난로에 등을 돌리고 서 있다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긴 설명을 시작했다.

"내 어머니는 병약한 분이어서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소. 아버지는 그 후 내가 열두 살 때 이자벨 핀드레이와 재혼했는데, 그녀는 미망인으로 세 살 된 아들 럿셀을 데리고 개가한 것이었소." 그는 거기까지 말하자 얼굴을 찡

그리고 잠시 잎담배를 내려다보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폭군이었지. 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전원을 매로 지배하셨거든. 그런데 이자벨은 거꾸로 아버지를 멋대로 다루었단 말이오. 이자벨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럿셀을 양자로 삼아 레오의 성을 갖게 했을 정도니까. 그뿐 아니라, 내가 유산을 상속을 할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버지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했었소. 그 결과 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이자벨은 이 주택과 회사의 주식 25퍼센트, 거기에다 막대한 현금을 상속받을 수 있었지. 그 후 그녀는 럿셀을 데리고 고향인 나미비아로 돌아간 거요."

"그래도 사업은 당신이 물려받은 게 아녜요?" 캐롤라인은 위로하듯이 말했다. 남의 위로를 받는 것은 구스타프 드 레오가 가장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일 거라는 추측은 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년 이내에 결혼하라는 조건부로 상속했던 것이오."

"어마, 그건 불공평해요!" 캐롤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도 잘못은 있었소."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캐롤라인을 보았다.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는 독신 생활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했었지. 아버지는 만년에, 사업의 경영을 가족만으로 이끌어 가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계셨는데, 내가 미혼으로 있는 이상은 후계자도 생기지 않을 테니, 이자벨은 그것을 이용해서, 럿셀 쪽이 휴계자로서 적당하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설득시켰소. 그 결과 유언장에 그런 조건이 붙어 버린 것이오."

"당신 의붓동생은 결혼했겠지요?"

"물론이지." 그는 또 일그러진 웃음 웃었다. "그건 계모가 나미비아로 돌아가자 곧 손을 썼지. 동생은 작년에 결혼해서 곧 아이가 태어날 것이오 - 그들은 이 상속 싸움에서의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셈이지."

"우리들이 결혼을 해소했을 때는 어떻게 되는 거죠? 유언장의 조건은 그 이상은 해당되지 않나요?"

"일단 결혼만 하면 괜찮아요."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캐롤라인은 처음으로 그의 관자놀이에 백발이 약간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유언장에는,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사를 상속하기 위해서는, 내가 결혼했다는 증거를 정해진 날에 제출해야 한다고만 씌어 있소. 그것뿐이오. 일생 동안 결혼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고는 씌어 있지 않거든."

"알겠어요." 캐롤라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무릎 위에서 굳게 쥐고 있는 주먹의 뼈가 하얗게 비쳐 보였다. "결혼의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 날은 언제죠?"

"915."

"아직 두 달정도 남았군요. 그런데 이달 말까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캐롤라인은 의아해서 그를 올려다보고 되물었다.

"그렇게 말했지, 왜냐하면 계모인 이자벨이 일주일 후에 이곳에 오기 때문이오, 럿셀과 그의 처 니콜라도 함께. 아들의 유산 상속 준비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처하기 위해서지. 물론 내가 독신으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고." 그는 잎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검정 바지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으면서 설명했다.

"아내가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기를 꺾자는 계획이군요?" 캐롤라인은 대충 파악한 듯 물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계모인 이자벨은 아마 현금을 다 써버린 모양이오. 우리들의 계획이 성공하면 이자벨이 가진 주식뿐만 아니라 이 저택도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오게 돼요."

그는 그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당연히 그의 것이어야 할 유산을 되찾는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자기는 도대체 그 역할을 어떻게 해내야 좋을 것인지, 캐롤라인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캐롤라인은 불안한 듯 물었다.

"이제부터 당신을 저 훌륭한(?) 하숙으로 되돌여 보내 주겠소. 맥스웰 힐튼이나 기타의 문제는 나에게 맡기시오." 그의 명령조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캐롤라인은 반발을 하지 않았다. 하숙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만 지켰을 뿐이다.

"한 가지만 부탁이 있어요. 우리의 결혼은 매즐리 데일에게 이야기해도 좋을까요? 그분은 제게 아주 친절하게 해주고 있어요. 이 뉴스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자동차 안까지 비쳐 들어온 가로등 불빛에 그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빛났다. 캐롤라인은 순간, 거부의 말이 튀어나올 걸로 짐작했는데, 그의 굳은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싶다면 이야기해도 좋아요."

"고맙습니다." 캐롤라인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는 차에서 내린 그녀를 부축하고 전등빛이 입구를 비추고 있는 벽돌 건물까지 전송해 주었다.

"내일 다시." 그녀가 하숙집 건물에 들어서자 그는 짧게 말하고 차로 돌아가 속력을 내며 가버렸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캐롤라인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한 사나이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나이에게 자기를 팔아버리는 데 동의한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일종의 거래이다. 자기가 그의 아내로서 행동한다면 그는 자기의 빚을 갚아 준다. 그러나 그의 오두막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의 키스를 생각한 캐롤라인은, 몇 주일 동안이나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 두 사람이 깨끗한 관계를 과연 유지할 수 있을까, 하고 불안해졌다. 불안하고 좋지 못한 예감이 가슴을 스쳐갔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그녀는 잠들었다.

 

"맥스웰 힐튼을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돈을 빌려줄 만한 사람은 찾았어요?" 다음날 아침, 출근한 매즐리는 캐롤라인을 보자마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 그런 셈이에요."

"누군데요?"

캐롤라인은 타이프라이터를 옆으로 밀어놓고 회전의자를 돌려서 매즐리를 마주 보았다.

"매즐리,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릴 게 있어요."

매즐리도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중대한 이야기인 모양이죠?"

"그래요." 캐롤라인은 신경질적으로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라이온과 결혼하기로 했어요."

어안이 벙벙해진 매즐리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하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요!"

"농담이 아니에요, 매즐리. 그이가 결혼을 신청했고 제가 승낙했어요." 캐롤라인은 조용히 설명했다.

"그이와 결혼하면 그가 7천 랜드를 지불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이죠?" 매즐리의 질문의 화살은 날카로왔다.

", 대체로 그런 셈이에요, 매즐리. 우리들, 라이온과 저는 전에 만난 일이 있었어요. 그때는 그의 정체를 몰랐지만……."

매즐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캐롤라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주, 그의 사무실에 불려가서 처음으로 그이 정체를 알았다는 말이죠?"

"." 캐롤라인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구스타프 드 레오와 자기와의 사이에 단순한 거래 이상의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럼 이 회사에 취직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나요?"

"우연은 아니었어요, 매즐리." 친구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캐롤라인은 정직하게 인정했다. "제가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을 그분은 알았어요. 그래서 해럴드 프라이스 부장님의 명함을 주시면서 그분에게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당신이 이 회사에세 일하도록 라이온이 계획적으로 만든 거군요."

매즐의 말을 듣고 캐롤라인은 문득 사정을 깨달았다. 굴욕감에 몸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그랬었군요, 이제야 겨우 알겠어요."

"신경 쓸 것 없어요. 이제 곧 미세스 구스타프 드 레오라는 높은 자리에 올라앉으면, 이런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될 테니."

친구의 태도에 일종의 악의를 느끼자 캐롤라인은 마음이 아팠다.

"매즐리,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설명을 제대로 할 수 없다구요."

"무엇을 설명하겠다는 거예요, 모든 일이 잘 됐지 않아요?" 캐롤라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매즐리는 채근해 물었다. "그렇죠?"

"물론 그렇지만……매즐리, 우리들……앞으로도 계속 친구로서 사귈 수 없을까요?" 캐롤라인은 매달리듯이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매즐리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잠시 조용히 있다가 이윽고 일어서더니 캐롤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듯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서.

"미안해요, 캐롤라인. 내가 심술이 좀 났던 모양이야. 물론 우리들은 앞으로도 친구야."

점심시간이 되기 전 매즐리의 책상 위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매즐리는 수화기를 캐롤라인에게 건네주면서 함축성 있게 말했다.

"당신 전화예요."

캐로라인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받아 귀에 대고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캐롤라인 애덤스입니다."

"한 시 정각에 현관에서 기다리겠소. 상의해야 할 일이 많으니, 함께 점심을 들면서 이야기하고 싶소."

뜻밖에 구스타프 드 레오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의 등은 약간 떨렸다.

", 알겠습니다." 그녀가 대답하자 전화는 찰카닥 끊어졌다.

한 시 정각, 캐롤라인은 햇빛이 빛나는 건물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회색의 울 슈트와 순백의 불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매우 이지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실은 얼떨떨한 감정과 함께 뭔지 모를 막연한 불안에 싸여 있었다. 그녀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은빛의 재규어 승용차가 미끄러져 오더니 그녀 앞에서 멈추었다. 차안의 사장이 몸을 비스듬히 하고 팔을 뻗치더니 그녀를 위해 도어를 열었다.

놀란 사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에게 쏠리는 것을 의식하고 캐롤라인은 당황했다.

"빨리 타요." 라이온은 명령하듯 말했다.

계단 위에서 서로 수군대고 있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캐롤라인은 황급히 차에 올랐다.

구스타프 드 레오는 두 사람에게 쏠리고 있는 호기심어린 눈초리 같은 것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은 그러한 그가 공연히 얄미웠다. 그러나 놀란 듯한 수위의 표정을 보고 캐롤라인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경례를 하려고 올리던 손은 도중에서 멈추고 턱을 힘없이 내려 입을 크게 벌리고 잇는 것이었다. 캐롤라인의 밝은 웃음소리에 이끌린 듯, 라이온의 엄숙한 얼굴에도 드디어 미소가 떠올랐다.

"미안합니다." 겨우 웃음을 억누르면서 그녀는 사과했다.

"웃고 있을 때가 차에 타기 전보다 휠씬 예쁜데."

"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같이 보았지." 멈칫하는 캐롤라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시선을 앞으로 돌려 급커브를 돌았다. "울고 싶었었지?"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다만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봐서 부끄러웠을 뿐예요." 캐롤라인은 아직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곧 익숙해질 거요. 그리고 참아야 할 기간도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것이고."

캐롤라인은 그의 말뜻을 캐어 묻는 일은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드라이브를 계속하여 이윽고 바닷가의 조그마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점심으로 로브스터 요리와 이국풍의 샐러드가 나왔지만, 캐롤라인에게는 식사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오늘 아침 힐튼을 만나, 당신이 무모하게도 사인한 계약서를 파기하였소. 그놈은 이제 두번 다시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요." 커피가 나온 뒤 구스타프가 말했다. "이것으로 우리들이 약속한 제일 단계는 실천된 셈이지. 다음은 우리들의 결혼인데, 금주 토요일 오후에 식을 올리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놨소." 그는 사무적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급히요?" 캐롤라인은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쥐었다.

"토요일에 결혼해야, 계모가 도착하기 전에 두 사람의 호흡을 맞춰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만 제가 맡은 회사 일들은 어떻게 하고요?"

"금요일까지만 일하면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요."

캐롤라인은 그의 엄숙한 표정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자문하듯이 천천히 물었다.

"당신과 오두막에서 헤어진 후 저는 줄곧 당신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럴까요?"

"그 직감은 아주 정확한 것이오." 캐롤라인이 처음부터 싫어했던 저 일그러진 웃음을 보이면서 그는 말을 계속했다. "나에게는 아내가 될 여자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당신을 만나게 되었고, 당신이 조건에 꼭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 그래서, 당신의 약혼 파기를 알았을 때 나는 신원 조사를 부탁했었소. 당신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소. 내 청을 받아들이도록 당신을 설득하는 게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소." 테이블 너머로 그의 눈이 비웃듯이 캐롤라인의 눈을 응시했다. "쇼크를 받았소?"

캐롤라인의 가슴속에는 원망과 노여움이 타올랐지만, 그녀는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역시."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한 것은 진실이오."

"진실이라는 것은 전혀 의심하지 않아요." 캐롤라인은 뾰로통해져서 대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억제 할 수 없었다. "당신은 거만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이니 남에게 이런 처사를 하는 거예요. 맥스웰 힐튼과의 문제만 없었다면 상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무거운 침묵. 주위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들이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구스타프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당신에게 나를 비판할 권리가 있을까?"

"아뇨, 없어요. 저도 당신과 같은 죄인인걸요, 당신의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캐롤라인은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눈썹이 한순간 치켜 올라가더니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던졌다.

"당신의 솔직함에는 참으로 감탄하고 있소, 캐롤라인. 당신의 솔직한 말에,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았소 - 몹시 싫단 말이군."

캐롤라인은 굳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잠자코 나머지 커피를 마셨다. 고개를 들기 시작한 불안을 무시해 버리려고 애쓰면서.

 

마침내 토요일이 되었다. 정오가 지나자, 제복을 입은 흑인이 예정대로 도착하여 캐롤라인의 자동차를 인수해 가면서 메모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세 시 반 정각에 맞으러 가겠소.> 용건만 간결하게 씌어 있는 메모지에는 구스타프의 사인이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에 냉정해지려던 마음은 무너지고 완전히 현실에 압도되었다. 오늘은 결혼실 날, 2, 3시간 후에 나는 구스타프 드 레오 부인이 된다…….

두려운 나머지 손발의 맥이 빠진 캐롤라인은 침대 위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발밑의 닳아빠진 카핏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결혼을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도 없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를 힐끔 쳐다본 캐롤라인은 당황해서 일어섰다. 목욕과 화장을 두 시간 동안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이다.

세 시 15분이 지나고 있을 때 캐롤라인은, 명주실 같은 머리카락이 가냘픈 어깨에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빛의 눈썹 아래 회색의 눈동자에 어려 있는 것은, 이제 마악 다가서려는 어떤 큰 그림자를 향한 주체할 길 없는 불안과 고뇌 바로 그것이었으며, 도톰한 입술은 겁먹어 약간 벌어져 있었다.

캐롤라인은 거울 속의 자신이 도무지 신부 - 결혼식의 꽃으로서 거의 의무적으로 아름다워야 하는 - 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신부라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그때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캐롤라인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 사람만의 조용한 결혼식을 올린다는 말을 듣고 궁금해서 왔어요. 뭐 도와 줄 것 없어요?" 매즐리는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인 두 개의 슈트케이스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준비는 다 되었군요. 그러면 그냥 함께 있어 주기라도 할게요."

"어마, 매즐리. 고마워요, 와주어서." 캐롤라인은 큰 소리로 환영하면서, 손을 뻗어 친구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매즐리는 캐롤라인의 얼굴을 살피듯 보았다.

"마음의 안정이 안 되는 모양이죠?"

"저는 무서워요." 캐롤라인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고백했다.

"라이온은 몇 시에 와요?"

"곧 올 거예요."

매즐리는 캐롤라인의 상아 빛 드레스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멋있어요, 캐롤라인. 당신의 하얀 살결을 돋보이게 하는 데는 이 이상의 드레스는 없을 거예요. 마치 천사 같아요."

"어마, 매즐리……."

"제발 부탁이니 울지 말아요. 예쁜 눈화장이 엉망이 되지 않아요?"

캐롤라인은 울다가 웃으면서 친구를 꼭 껴안았다.

노크 소리가 났다. 야윈 얼굴을 한 하숙집 안주인이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전했다.

"미스터 드 레오라는 분이 당신을 찾아왔어요, 미스 애덤스."

"올라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캐롤라인은 침착하게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안주인이 나가자 용기가 없어지고 말았다.

되는대로 몸을 단장하고 자잘한 물건들을 화장백 속에 쑤셔넣고는 당황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핸드백과 장갑을 어디에 두었을까?"

"여기 있네요." 매즐리가 주의를 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해서는 안 돼요. 침착해야 해요."

"명심하겠어요." 캐롤라인은 그렇게 약속했지만 매즐리와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쉬며 호소했다.

"매즐리, 나 왠지 겁이 나요."

"그러면 안 된다니까." 문밖의 발소리를 듣고 매즐리가 작은 목소리로 주의했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나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도어가 열렸다. 다음 순간 그 쏘는 듯한 눈이 캐롤라인의 눈을 보았고, 다음에는 그녀의 온몸을 탐색하듯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재빨리 온 방안을 둘러보았다.

"준비는 다 되었겠지?" 매즐리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몸집이 커서인지 방 안이 갑자기 좁게 느껴졌다.

"." 캐롤라인은 굳어진 입술로 겨우 대답하자 화장백을 들고 매즐리와 함께 구스타프의 뒤를 따랐다.

추운 겨울 오후 같아서 케이블 산이 안개 속에 흐릿하게 보였다. 코트를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캐롤라인은 후회했다. 승용차 안은 따뜻했지만 역시 바깥 공기는 냉랭하였다.

콘스탄시아의 돌로 지어진 작은 교회 앞에서 매즐리를 기다리면서 구스타프가 불쑥 말했다.

"사진사를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의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워."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찬탄의 빛을 보자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진은 추억이 돼요, 결혼을 해소할 때는 두 사람 다 오늘의 결혼식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텐데요." 캐롤라인은 경솔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구스타프의 표정이 차차 험악해지더니 석상처럼 보였다.

"물론 당신 말이 맞아요. 불쾌한 추억 같은 것은 하루빨리 잊어버리는 게 좋지." 그는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5

아담한 교회에서 목사가 주례를 서고 그 아내가 오르간을 치는 가운데 구스타프와 캐롤라인의 결혼식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두 사람은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서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겠다고 맹세하였다, 거짓 맹세를.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인정받았고, 전통에 따라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를 하도록 재촉을 받았다. 캐롤라인은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억센 팔이 그녀의 몸을 껴안고 방향을 바꿨다. 캐롤라인은 머리 위의 조각 같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서는 한 점의 감정도 볼 수 없었다. 구스타프의 눈은 쌀쌀했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닿는 그의 입술은 차가왔다. 그러나 태롤라인의 가슴은 왠지 크게 고동쳤다.

"기쁜 얼굴을 하세요, 제발!" 매즐리는 축하의 말을 할 기회가 생기자 속삭였다.

캐롤라인은 참담한 심정을 눌러 참고 그녀의 충고에 따랐다.

"당신이 와주어서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캐롤라인은 충심으로 감사하였다. 매즐리는 그녀의 볼에 키스하려고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내 주소 알고 있죠?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구스타프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졌다.

잠시 후, 구스타프와 캐롤라인이 교회 밖으로 나오니 햇볕이 구름 사이로 따뜻하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좋은 징조라고 보아야 할까?

"당신이 상상해 온 결혼식과는 약간 다르지 않았소?" 돌아오는 길에 구스타프는 비꼬듯 물었다.

"호화로운 결혼식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나 이런 이상한 사정으로 결혼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가지 못했어요."

"앞으로 바라던 대로의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겠지. 모든 일이 잘 되면 3개월 이내에 당신은 다시 자유의 몸이 돼요. 오늘 일 같은 건 깨끗이 잊을 수 있게 되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의 말에 속이 상한 캐롤라인은 화가 난 듯이 대꾸했다.

"그날이 기다려지네요!"

구스타프는 그녀를7힐끔 쳐다보고 예의 그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데니스가 당신더러 돌아와 달라고 할지도 모르지."

"글쎄요." 설령 데니스가 자기에게 용서를 빈다 해도 그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캐롤라인은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얼마나 행복할까?"

"대단히 행복하겠지요." 그려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그 결혼식에 나를 초대해 주지 않겠나? 돌아가신 아버님 역할을 해줄 수 있겠지."

"당신은 그런 나이도 못 되지 않아요?"

"나는 서른 여섯이야. 당신에 비하면 늙은이나 다름 없지." 그는 쿡쿡 웃었다.

캐롤라인은 잠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본 후 물었다.

"제가 당신을 아버지같이 생각하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천만의 말씀!"

캐롤라인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저택에 거의 다다랐을 때 캐롤라인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고 구스타프 쪽으로 돌렸다.

"진실한 결혼을 해서 당신의 성을 이을 아들을 갖고 싶지 않으세요?"

"결혼도 아기도 질색이야."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난폭하게 급커브를 꺾어 라 로슈 저택의 정문의 돌기둥을 지나 정원 안의 차도에 들어섰다. "여자에게는 곧 싫증이 나고 말지. 그리고 집 안을 뛰어 다니는 시끄러운 아이들은 성가셔서……."

두 사람은 묵묵히 차에서 내리고, 구스타프는 캐롤라인의 슈트케이스를 현관 홀로 운반하였다. 흑인 여자가 두 사람을 마중 나왔다.

"티리가 방을 안내할 테니 옷을 갈아입도록 해요. 내려올 때는 코트를 가지고 와요. 오늘 저녁 식사는 밖에서 할 테니."

구스타프는 거실 쪽으로 가버렸다. 캐롤라인은 티리 뒤를 따라 융단이 깔린 계단을 올라가서 건물의 동쪽으로 통하는 복도로 나왔다. 티리는 숱하게 많은 도어 중의 하나 앞에 슈트케이스를 내려놓자 도어를 열고 방안으로 안내했다.

널찍한 방 한쪽을, 떡갈나무로 만든 네 개의 기둥이 달린 큼직한 침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얼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창문의 금색 커튼이 유안과 침대 커버에 잘 조화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저녁 외출하실 동안에 짐을 정리해 두겠습니다, 마님." 침대 옆에 슈트케이스를 가지런히 놓으면서 티리가 말했다.

"내가 할 테니 괜찮아요, 티리." 캐롤라인은 자기를 신기하다는 듯이 지켜보는 흑인 여자에게 무뚝뚝하게 웃어 보였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님. 저에게 맡겨 두세요." 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자 방을 나갔다.

침실 옆에는 넓은 화장실이 있고, 그 안에는 최신식 설비를 갖춘 욕조가 있었다. 캐롤라인은 손을 씻고 화장을 고치면서, 손가락에 끼워진 순금의 결혼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급히 낙타털의 코우트를 꺼내 가지고 구스타프가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구스타프는 난로 곁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캐롤라인이 들어가자 일어서서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와인 글라스를 손에 들고 그녀도 난로 곁으로 다가가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저택 안은 평온한 고요속에 잠기어, 홀의 큰 시계가 시간을 새기는 소리와 난로의 통나무가 타면서 불꽃이 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글라스를 들어 입술에 댔다. 그 순간 맞은편의 사나이와 눈이 마주쳤다.

캐롤라인은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리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포도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뜨거운 피가 온몸에서 달음질친다, 심장의 고동이 높아진다, 오두막에서의 그날 밤 그에게 키스를 당했을 때와 같이. 뜻밖의 정열이 일깨워졌던 그때의 일은 상기하고 싶지 않은데. 하나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 한번 저 억센 팔에 안기고 싶다는 - -자신을 거부하고 싶은 - 욕망이 치밀어올랐다. 결혼한 지 불과 몇 시간 안 되는 사나이가 내 마음을 이처럼 뒤흔들어 놓다니……. 캐롤라인은 자기 자신이 무서워져서 억지로 그로부터 눈을 돌리면서 일부러 엉뚱한 것을 물었다.

"당신 어머니는 이 저택을 상속하셨으면서, 왜 나미비아에 살고 계시죠?"

그는 이 질문에 입가를 찡그리고 음산하게 웃었다.

"계모와 나는 성격이 맞지를 않아. 그녀는 나를 여기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다행히 아버지 유언으로 나는 여기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던 거지. 그러니 그녀는 할 수 없이 자기 가족이 있는 나미비아로 돌아갈 수밖에. 내 감시를 받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그녀가 이 저택을 팔기로 결정할 경우에도 내게 우선권이 있단 말이야."

"어머니는 이 저택을 팔고 싶어 하시나요?"

"아니, 지금은 팔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그러나 난 기회를 봐서, 계모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으로 이 집을 사겠다고 제의할 작정이지."

그녀는 그 말뜻을 생각하며 포도주를 조금씩 마셨다.

"이미 계획은 다 짜 두었겠지요?"

", 짜 놓았지. 그러나 임기웅변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자 갑자기 일어섰다. ", 나갑시다."

캐롤라인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가 무언가 초조해 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해변의 레스토랑에서는 식사와 댄스, 플로어 슈우도 즐길 수 있었다. 캐롤라인으로서는 이러한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구스타프가 식사와 샴페인을 주문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주위를 신기하듯 둘러보았다.

간접 조명 장치가, 촛불이 켜 있는 테이블 위에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을 던지고, 새하얀 테이블클로드 위에 놓인 은접시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남녀들, 웃음소리,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고 있는 쌍쌍의 남녀들…….

샴페인 덕택으로 캐롤라인은 가벼운 취기를 느꼈고, 구스타프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데 대한 긴장감이 조금씩 풀렸다. 식사하는 동안 구스타프는 즐거운 농담을 하거나 주위에 있는 다른 손님들에 대해 마음대로 악의 없는 품평을 했기 때문에, 캐롤라인도 끝내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쇼유가 시작되자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6명의 댄서가 스테이지에 나와 플로어 쇼유를 시작한 것이다. 댄서는 절묘한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체에 가까운 알몸의 관능적인 움직임에 캐롤라인은 얼굴을 붉히고 힐끔 구스타프 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그는 희롱하는 듯한 눈초리를 캐롤라인의 몸에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당황해서 눈길을 돌렸지만, 일단 그의 시선 속에 들어가 버린 지금, 스테이지의 댄서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알몸이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곧 무용수들이 빌로도로 만든 커튼 뒤로 사라졌고, 구스타프가 그쪽을 보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캐롤라인은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관심을 자신으로부터 딴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녀는 급히 물었다.

"당신이 결혼한 것을 안다면 어머니가 어떻게 나오실까요?"

"글쎄……. 이자벨은 교활한 여자요. 간단히 물러서지는 않겠지."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무서우신 분 같군요."

구스타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절대로 이자벨에게 약하게 보여서는 안 돼요. 당신에게는 뭔가 만만찮은 데가 있어. 나는 당신의 그 점을 믿고 있지."

캐롤라인은 꿈에서 깨어난 듯이, 이 결혼이 결코 유희나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구스타프로서는 아버지가 창업한 사업을 승계하여 발전시키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고, 캐롤라인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어요." 회색의 눈을 크게 뜨고 구스타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캐롤라인은 겨우 대답했다.

"당신 같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구스타프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오케스트라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일어서자 캐롤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 한 번 출까?"

캐롤라인은 댄스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부드럽고 센티멘털한 곡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녀는 구름을 타고 높은 하늘을 떠다니는 듯한 충만감에 잠겨들었다. 서먹서먹한 기분이 없어졌다. 구스타프의 양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캐롤라인은 얼굴을 들어 그의 엷은 빛깔을 띤, 수수께끼 같은 눈을 조용히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금세라도 맞닿을 것 같았다. 순간 캐롤라인은 격렬한 정열에 사로잡혀 온몸이 떨렸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의 눈빛에서 그것을 그가 읽어낼까 두려워 그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마 샴페인과 음악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구실을 찾아낸다 해도, 자기가 이 사나이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캐롤라인은 부정할 수 없었다.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는 캐롤라인은 필요가 없게 된다고 처음부터 확실히 자기에게 말한 사나이인데도.

캐롤라인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사나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이렇게 밀착해서 춤을 추고 있는 동안만은 냉정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캐롤라인에게 약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그에 대한 사모의 정을 억제해서 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구스타프를 사랑할 만큼 자기가 어리석다는 것을 그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밤이 깊어, 라 로슈 저택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구스타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캐롤라인은 자기 감정을 정리하는데 급급하고 있었던 나머지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었다. 캐롤라인을 부축하고 이층까지 데리고 가자, 자기도 함께 침실로 들어와서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구스타프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윗도리를 벗고 넥타이를 풀더니 방구석에 있는 의자 위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하얀 실크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끄르며 앞가슴을 조금식 드러내는 것이다.

"뭘 하시는 거예요?" 겨우 입을 열 수 있게 된 캐롤라인이 따지듯 물었지만 그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옷을 벗는 중이오. 당신도 보아 알지 않소." 바지속에서 와이셔츠 자락을 끄집어내면서 구스타프가 대답했다.

"안 돼요! 여기서는 안 돼요."

"우리들은 결혼했잖아. 그리고 여기는 내 침실이기도 한데 뭘." 셔츠를 벗어던지면서 놀려대듯이 말했다.

캐롤라인은 구스타프의, 근육이 발달한 팔과 가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서 주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허리에 손을 대고 침대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구스타프는 캐롤라인의 겁먹은 얼굴을 보고 말했다.

"침대는 2인용이야."

"당신도 맥스웰 힐튼과 다름이 없군요. 무엇을 바라는지 처음부터 확실히 밝힌 힐튼이 오히려 나아요!" 캐롤라인의 얼굴에 핏기가 올라 붉어지더니 곧 다시 창백해졌다.

"다른 것이 있지. 잘 생각해 봐요. 그놈은 당신을 애인으로 삼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 했잖소."

"우리들의 결혼은 한낱 거래라고 저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캐롤라인은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거래임에는 틀림없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그는 캐롤라인의 전신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결혼하고 있는 동안은 둘이서 서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캐롤라인은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으나, 곧 그의 곁에서 빠져나와 도어를 향해 달렸다.

"저는 나가겠어요!"

그러나 캐롤라인은 이내 손목이 붙잡혀 난폭하게 끌려 들어오고 말았다.

"연극 같은 짓은 그만두고 잘 생각해 봐요." 캐롤라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을 내려다보면서 구스타프가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들의 결혼이 진짜라는 걸 이자벨에게 믿게 하려면 침대도 함께 써야 하는 것이오. 이자벨은 이 결혼이 계획적인 가짜 결혼이 아닌가 하고 틀림없이 의심하고 있을 테니 말이오. 당신에게는 나를 도와줄 의무가 있다는 것을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냉철한 눈을 되쏘아보면서 캐롤라인은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상황은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당신이 아주 싫어질 것 같아요."

"우리들의 결혼이 해소될 무렵에는 내가 더욱 싫어지겠군." 그는 분명치 않는 목쇠로 대답하고는 캐롤라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등을 돌리자 어깨 너머로 말했다. "먼저 목욕을 해요."

캐롤라인은 코우트를 어깨에서 벗어 소나무로 짠 옷장에 걸었다. 캐롤라인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문득 깨닫자 가슴이 내려앉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서둘러 목욕을 끝내고 레이스로 짠 네글리제 위에 느슨한 소매가 달린 실크 가운을 입은 그녀는, 침실로 통하는 문 앞에서 겁에 질려 발을 멈추었다.

아버지 이외의 남성에게 네글리제 차림을 보여 준 일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모습으로 구스타프 앞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캐롤라인은 부끄럽기가 그지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구스타프는 그를 진짜 남편으로 보이게 하고 두 사람의 결혼을 진짜같이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잠자리까지 같이해야 할 남성이었다. 그러나 자기는 앞으로 이런 생활을 견뎌나갈 수 있을 것인가?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자기는 그를 격렬하게 사랑하기도 했고, 반면 몹시 환멸을 느끼고도 했었다. 캐롤라인은 두 가지의 극단적인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잇는 자신이 무서워졌다.

더 이상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캐롤라인은 문을 노려봤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손잡이를 돌렸다.

구스타프는 의자 등에 기대어서 눈을 감고 손가락 사이에 잎담배를 끼워 들고 있었다. 구두와 양말은 벗고 있었지만 바지는 입은 채였다. 캐롤라인이 다가가자 그는 번쩍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치자 그녀의 볼이 뜨거워졌다.

구스타프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핥듯이 쳐다보았다. 캐롤라인은 긴장감과 당혹감으로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딱딱한 자세로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보이려고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그때 구스타프가 일어서는 것이 거울 속에 비쳤다. 그녀의 가슴은 불안감으로 두근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잠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구스타프가 돌연 시선을 비끼더니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캐롤라인은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빗던 브러시를 놓고 가운을 벗자 곧장 침대로 파고들어갔다. 운이 좋으면 그가 돌아오기전에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턱까지 담요를 끌어당기고 머리맡의 스탠드를 끄고는, 구스타프에게서 등을 돌린 자세로 누웠다.

그러나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샤워 소리, 오두막에서도 들은 기억이 나는 가락이 맞지 않는 휘파람 소리,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느끼는 긴장감이 잠을 방해했다.

구스타프와 같은 침대에서는 도저히 잠들 수 없다는 것을 캐롤라인은 깨달았다. 창백해진 얼굴을 베개에 묻자, 이곳 이외에는 갈 곳이 없는 자신이 슬퍼졌다.

샤워 소리가 마침내 그쳤다. 휘파람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요해졌다. 캐롤라인은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화장실의 문이 열렸다.

구스타프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캐롤라인은 눈을 꼭 감고 잠든 체했다. 그러나 가슴의 고동이 이렇게 강하고 빠르게 울려서는 틀림없이 그에게 들릴 것이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뒤범벅이 된, 감각이 마비된 것 같은 상태에서 캐롤라인은 기다렸다. 구스타프가 옆에 누웠다. 스탠드가 꺼져 방안은 캄캄해졌다.

"잘 자요, 캐롤라인."

뜻밖의 말에 그녀는 자기가 잠든 체하고 있는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이 그녀도 똑같은 인사말을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부끄러움에 가득 찬 얼굴을 감싸주고 있는 어둠이 고마웠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두 사람의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구스타프가 누워 있다는 사실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캐롤라인은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긴장감은 더욱 팽팽하게 배가되었다. 그ㄹ을 구스타프가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캐롤라인." 스태드를 켜면서 구스타프는 거칠게 그녀를 똑바로 뉘었다.

험악한 표정의 그의 얼굴이 똑바로 누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저는 남자와 함께 자는 건 처음이에요." 캐롤라인은 더듬거렸다.

"무슨 일에든 처음은 있는 법이야." 그의 눈동자가 놀려대듯이 캐롤라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남자의 체취, 넓은 어깨, 그녀의 어깨로부터 목을 애무하는 손의 감촉. 캐롤라인은 그 순간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던져진 자신이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당신은 자기중심적인 남자군요!"

목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주춤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로부터 몸을 떼자 벌렁 누워 버렸다.

"이제 자요, 방해하지 않겠으니." 그는 불을 끄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캐롤라인은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 이상야릇한 상실감을 참으면서.

이내 구스타프의 깊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벌써 잠든 모양이다. 캐롤라인은 그제야 겨우 긴장이 풀리고 차차 눈두덩이 무거워졌다. 그녀도 마침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허리 근처가 묵직하여 캐롤라인은 잠을 깼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은 구스타프의 팔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체온을 느끼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구스타프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숨소리로 보아 그는 잠이 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손을 놓기는커녕 캐롤라인의 작은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이젠 못 참겠어……." 구스타프는 그녀의 귀에 신음하듯이 속삭이며 어둠속에서 그녀의 입술을 찾아내어 타오르는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캐롤라인에게는 반항할 여유도, 그의 억센 팔에서 벗어날 방법도 없었다. 구스타프에게 부드럽고 감리로운 입술을 내맡기면서, 캐롤라인은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안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욕망이 뜨거운 액체와 같이 몸속을 흐르자, 캐롤라인은 자기를 잃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을, 그리고 자기는 반항할 힘을 잃고 마는 것을. 그때 구스타프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의도에서 캐롤라인을 안아 올리더니 그의 뜨거운 몸으로 눌러댔다. 순간 그녀는 재빨리 이성을 되찾았다. 공포가 그녀에게 찬물을 끼얹자, 방금 그가 불러일으켰던 정열은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스타프, 부탁이에요. 안 돼요." 두 손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 올리면서 캐롤라인은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이윽고 구스타프는 캐롤라인 곁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지만, 캐롤라인은 아직 울고 있었다. 허탈하고 깊은 실망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새벽녘에 겨우 안정이 되어 잠들려고 했지만 곧 아침 햇살이 비쳐들어 그녀는 지친 채 아침을 맞이했다.

구스타프는 아직 잠을 깨지 않고 있었다. 한손을 머리 위에 얹고 똑바로 누워 잠자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엄격함을 빼앗아간 것 같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구스타프는 약간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다시 언제나와 같은 엄격한 표정이 되돌아왔다.

캐롤라인은 재빨리 일어나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고 가운을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순간 그에게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캐롤라인!"

"놓아주세요!" 그려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구스타프는 곧 손을 놓았으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처음엔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거야. 그러나 두번째는……."

"두 번째 따위는 없어요." 가운을 걸쳐 입고 허리끈을 졸라매면서 캐롤라인은 얼굴을 붉히고 외쳤다.

"정말 그럴까, 두고 보지."

놀려대는 듯한 대답이 화장실에 있는 캐롤라인의 귀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녀는 또다시 구스타프에 대해서 거의 증오심에 가까운 감정이 일어났다.

 

캐롤라인은 그날 아침 구스타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침 식사 뒤 그가 바로 서재로 들어갔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저택 구조를 잘 알아 두려고 그녀는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려서 방 하나하나를 둘러보았다. 가족의 초상화가 식당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중의 하나에 특히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구스타프의 아버지지의 초상화임에 틀림없었다. 억세고 거칠게 생긴 용모가 구스타프와 흡사했고, 엷은 빛깔의 눈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볼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그 옆에 또 하나의 초상화가 걸려 있음직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곳의 벽이 약간 변색된 것으로 미루어, 그전에 걸려 있었던 그림을 어떠한 이유로 떼어낸 것 같았다. 누구의 초상화를 무엇 때문에 떼어냈을까?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캐롤라인은 또 다른 방의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돌렸다. 그런데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 방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아요."

캐롤라인이 홱 뒤돌아보자, 구스타프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그녀 뒤로 다가와 있었다. 문과 구스타프의 사이에 끼여서 캐롤라인은 초초해졌다.

"왜 들어가면 안 되죠?"

"그곳은 전에는 포도주 저장고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필요 없는 물건들을 넣어두는 창고로 쓰고 있지."

"포도주 저장고를 창고로 사용하는 것이 불만이신 것 같군요."

"나는 오래 된 것을 없애지 않고 보존해 두는 성미요. 그러나 이자벨이 이 저택의 관리를 맡으면서부터는 오래 된 물건들이 꽤 많이 고물 취급을 당하고 있소."

구스타프는 예의 우울한 표정을 띠었다. 캐롤라인은 침묵이 두려워 주저하듯이 물었다.

"가능하면 지하실을 보고 싶은데요."

그는 비웃듯이 캐롤라인을 힐끗 보더니 선반에서 열쇠를 찾아 들고 말했다.

"거미줄이나 먼지를 뒤집어써도 좋다면 안내하지."

그가 열쇠를 꽂자 문이 삐걱거리면서 열렸다. 지하실은 먹물을 쏟아 놓은 듯 캄캄했다. 캐롤라인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후회했다, 지하실을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말 것을…….

 

6

구스타프가 전등 스위치를 누르자 칠흑 같던 지하실은 조금 훤해졌다. 그는 캐롤라인의 팔을 잡자,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인도해 갔다. 마치 땅속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포도주 저장고였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포도주통, 포도를 짜는 기계, 병에 담는 기계 등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널려 있었다. 박물관에 진열하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고 캐롤라인은 아깝게 생각했다.

"고가에 흥미가 있나?" 구스타프는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으나, 그 말투가 사뭇 비웃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하마터면 캐롤라인을 화나게 할 뻔했다.

", 아주 흥미가 있어요." 캐롤라인은 똑똑히 대답하고, 상자나 여행용 가방, 고가구 등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물건마다 개성이 있는 것 같아요."

"고가에는 망령도 있어요."

캐롤라인은 어둠침침한 속에서 구스타프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올려다봤다.

"놀리시는 거예요?"

"당신은 망령를 믿나?"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당신은?"

"하인들이 이 지하실에서 사람 우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고 해서 어느 날 밤 여기에 내려와 조사해 봤지. 그랬더니 어느 일정한 방향에서 바람이 불면 벽의 금간 틈바구니로 바람이 들어와서 슬픈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이었어. 이것으로 당신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까?" 구스타프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일이든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시군요?" 가볍게 몸이 떨려오는 것을 참지 못하면서 캐롤라인은 물었다.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이제 이 정도로 구경하고 나갈까?" 그는 짧게 대답하자 등을 폈다.

"그러죠." 캐롤라인은 상자에 기대어 놓은 액자에서 눈길이 멎었다. 그녀는 먼지에 싸인 고물들을 넘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액자는 돌려 세워져 있었다. 금박을 한 액자에 쌓여 있는 먼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바로 돌려 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았다. 금발에 살결이 흰 날씬한 여인이 하얀 레이스 옷을 입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넓은 이마와 긴 속눈썹, 그리고 그 눈매는 어딘지 낯익은 데가 있었다.

"아버지는 결혼 후 곧 어머니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셨지." 바로 뒤에서 구스타프가 말했다.

"그런 초상화가 어째서 지하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나요?"

"이자벨이 질투가 심하고 아주 독점욕이 강한 여자여서 그랬지. 그녀가 식당의 벽에서 떼어 버리도록 명령한 거지."

"어째서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돈벌이에 바빠서 집안일에는 통 무관심했지." 그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려 캐롤라인도 자연히 우울해졌다.

"이 그림의 먼지를 깨끗이 떨어서 제자리에 갖다 걸어도 괜찮을까요?"

"그것이 소원이라면." 구스타프는 잠깐 생각한 후 대답을 했지만, 입가는 뜻모를 미소가 스며 있었다. 곧이어 이죽거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이자벨이 식당에 걸린 그림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흥미진진한데."

"이자벨 때문에 그림을 걸려는 것은 아니에요."

"어머니 초상화가 제자리에 돌아간다고 해서 내가 기뻐하리라 생각했나?"

그의 말 그대로였다. 초상화를 제자리에 장식하면 구스타프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그런 생각이나 하는 센치멘털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훌륭한 예술 작품이 지하실에서 썩는 게 아깝기 때문이죠." 캐롤라인은 생각나는 대로 적당히 변명했다.

"하긴 그렇군." 그는 기묘하게 감정을 억제한 표정으로 말했다.

캐롤라인이 놀란 것은, 구스타프가 초상화를 지하실에서 꺼내는 일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먼지와 거미줄을 제거하는 일도 도와준 것이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의 초상화가 나란히 어머니 초상화를 걸었을 때, 캐롤라인은 자신들의 수고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몸집이 작으셨나요?" 얼마나 화사한 손인가, 하고 감탄하면서 캐롤라인은 용기를 내서 물어 봤다.

"어머니는 몸집이 작고 살결이 흰 미인이셨어. 당신과 비슷하게 생기셨었지."

캐롤라인은 볼을 붉혔다.

"당신은 틀림없이 아버지 피를 많이 이어받으셨을 거예요. 아버지와 꼭 닮으셨어요."

"아버지는 까다로운 분이셨어. 그러나 이자벨에 대해서는 자신과 어울리는

상대라고 믿고 계셨지. 가지고 싶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이자벨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 말야."

캐롤라인은 그의 설명을 잘 생각해 본 후에 물었다.

"그런데 왜 이번엔 그렇게 지독한 이자벨도 가지고 싶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이번의 승부의 상대는 <>란 말이야. 그리고 내가 이처럼 유언장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자벨이라고 할지라도 움직일 수 없지." 구스타프는 동의를 구하듯 캐롤라인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구스타프를 무시하고 초상화에 눈을 못박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의미에서 당신은 내 아내이지?"

캐롤라인은 그의 마지막 말에 순간 아뜩해졌다. 목구멍이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겨우 그녀는 꿀꺽 하고 침을 삼키고는 그에게서 떨어져 서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산책하고 오겠어요."

"더 좋은 생각이 있어." 그의 손이 캐롤라인의 손목을 잡았다. 여전히 그녀는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반도를 드라이브하고 어디 조용한 데서 점심을 들도록 하지."

승용차는 포르스만을 따라 사이몬즈 타운을 향해 달렸다. 캐롤라인은 전에도 여러 번 이 길을 드라이브했었지만, 구스타프와 함께인 지금은 완전히 새로운 기분이었다. 그는 길가에 있는 작은 부락의 역사를 마치 작기 집안의 내력처럼 자세히 알고 있어, 하나하나 캐롤라인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윽고 호우트만에 도착하여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점심을 들기로 했다.

캐롤라인은 눈앞에 놓인 로브스터 요리보다 건너편에 앉아 잇는 구스타프에게 신경이 쓰였다. 테이블 밑에서 그의 무릎이 살짝 캐롤라인의 무릎에 닿았다. 쑤시는 듯한 감각이 곧 그녀의 온몸에 번졌다. 구스타프는 완벽하게 호스트 역을 다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의 마력에 끌려드는 자신을 느꼈다.

북쪽을 향해 반도의 서쪽 기슭을 따라 계속 드라이브를 했다. 바다가 이처럼 푸르고 탱야이 이처럼 빛났던가? 카스텐봇슈 가든에 도착할 무렵에는 캐롤라인은 마치 노예와 같이 그의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며 반응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좁은 샛길을 천천히 산책했다. 나무에는 아직 꽃은 피어 있진 않았으나, 작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유카리나무의 야성적인 향기가 그들을 둘러쌌다. 달걀 모양을 한 풀장 앞을 지났다. 그때 무엇인가가 캐롤라인의 머리카락 속에 파고들어오더니, 그녀의 행복스럽게 가라앉은 기분을 뒤흔들었다.
"가만히 있어요, 딱정벌레야."

구스타프의 손가락이 캐롤라인의 머리칼을 뒤적거리자, 그의 체취가 강하게 풍겨 왔다. 캐롤라인은 순간 그에게 몸을 기대고 싶다는 반사적 충동이 일었으나 그 욕망을 억누르고 손을 꼭 쥐었다.

그는 딱정벌레를 털어 버리자, 그녀의 내부의 싸움을 짐작이나 한 듯이 양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고 자기 얼굴을 가져갔다. 이글이글 빛나는 눈이 캐롤라인의 시선을 비껴갔다고 생각하자 입술이 겹쳐졌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차차 억세게. 캐롤라인은 손발의 맥이 풀려서 그대로 구스타프의 팔에 안겨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캐롤라인은 나른하게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의 부축을 받아 승용차가 잇는 곳으로 되돌아가면서 그녀는 그의 손의 감촉만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라 로슈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캐롤라인의 흥분은 어느 정도 식어갔다. 구스타프는 그것을 눈치채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녀의 넓적다리에 한 손을 얹었다. 캐롤라인은 그가 교묘하게 파 놓은 관능의 함정에 또다시 빠져들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자 구스타프는 그녀의 몸을 팔로 휘어감고 허리를 안아서 이층의 침실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고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자 그녀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구스타프의 입술과 손이 캐롤라인의 정열을 눈뜨게 했다. 캐롤라인은 그대로 그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어는 사이에 구스타프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캐롤라인을 꼭 껴안았다. 그의 손 밑에서 캐롤라인은 붙잡힌 나비처럼 떨고 있었다. 애무는 천천히 계속 되었다.

캐롤라인은 땀을 흘리며 가늘게 떨고 있는 구스타프의 목에 팔을 돌려서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또다시 겹쳐졌다. 캐롤라인은 그의 목에 팔을 단단히 감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상관없다. 무엇인가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 캐롤라인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이 그 한 점을 향해서 긴장했다. 갑자기 강해지면서 드높아가는 긴장감, 캐롤라인은 마침내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구스타프, 아아 구스타프, 제발!" 그녀는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캐롤라인은 욕실로 도망쳤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상할 것은 없다. 나는 구스타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런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행동으로 애정을 표시한 일도 없다. 그리고 비참하게도, 구스타프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캐롤라인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목욕을 하고 저녁 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구스타프도 샤워를 하고 나왔으나 단단한 허리의 둘레에 타월만 감은 채 알몸이었다. 햇볕에 그을은, 사나이다운 매력이 넘치는 그의 나신을 캐롤라인은 무시하려고 했다. 그는 캐롤라인의 등뒤로 다가서자 경대의 거울 속에서 그녀의 반항적이 회색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이 세상의 종말이라도 올 정도의 몹쓸 짓은 아니지? 당신에게도 이제 겨우 이 세상에서의 봄이 시작된 셈이군." 구스타프는 그녀를 놀려댔다.

그 말에 캐롤라인은 대뜸 쏘아붙이려 했으나, 이미 그것은 자신도 인정하기 시작한 사실이었으므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구스타프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날에는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다. 캐롤라인은 어디로 간다는 생각도 없이 그의 앞으로부터 도망쳤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구스타프는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거실로 옮겨, 항상 피우던 잎담배 대신 파이프를 물고 난로 앞에 앉아 있는 그는, 오두막에서 이틀 밤을 지냈을 때 캐롤라인이 보았던, 그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오늘 밤에는 이 거만하고 무정한 사나이에게는 걸맞지 않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 자기가 잘못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물었다.

"어머니와 럿셀 부부가 오면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남편의 장래가 위기에 봉착해 있을 때 현명한 아내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행동을 취해 주기 바라오. 이자벨과 럿셀은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진짜 적은 이자벨이고, 럿셀은 다만 그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지만."

"럿셀이란 사람, 겁장이인 모양이군요?"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이자벨이 훠낙 교활하고 지배욕이 강하니까."

"당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는 당신 일도 마음대로 하려고 하셨나요?"

"물론이지."

캐롤라인은 구스타프가 억지 웃음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그분은 당신을 마음대로 하시지는 못했었지요?"

"물론이지. 이자벨이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아예 없었겠지."

구스타프의 더듬는 듯한 눈초리를 피하면서 캐롤라인은, 이자벨 모자에게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의 마음속을 언제나 민감하게 꿰뚫어보는 구스타프가 말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맥스웰 힐튼의 말을 들었던 게 차라리 나았을 거라고 후회할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마, 말도 안 돼요.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요. 저는……." 캐롤라인은 심란해져서 말을 더듬었다. 자기의 강한 부정의 말을 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캐롤라인은 짐작이 갔다. 얼굴이 달아올라 의자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햇다. "저 이층으로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캐롤라인!" 그녀가 문까지 가기 전에 구스타프가 불러 세워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담배 냄새와 콜로뉴의 향기가 섞여서 그녀의 감각을 간지랬다. "힐튼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보다 나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이제 겨우 알게 된 모양이군." 짓궂은 말투였다.

캐롤라인의 양볼은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드높았다. 그것을 감추듯이 그녀는 짐짓 화를 내어 보였다.

"당신 같은 사람은 싫어요! 어젯밤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오늘 오후 일은 제가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에요.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구스타프는 그녀의 몸을 홱 돌려서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녀의 매서운 눈동자가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눈에 금세 압도당해 캐롤라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어젯밤 당신을 사랑한 일은 후회하고 있지 않아. 그리고 오늘 오후는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있었어."

"놓으세요!" 주먹을 쥐고 그의 단단한 가슴을 계속 치면서 그녀는 외쳤다. 자기의 분노와 굴욕을 내뱉고 싶었다. "당신이 손대는 것은 싫어요!"

구스타프는 캐롤라인의 손목을 잡아 뒤로 비틀고는 꽉 껴안았다.

"입과 눈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군. 도대체 어는 쪽을 믿으면 좋을까?" 그는 놀려대는 것처럼 점잖게 꾸짖었다.

"당신 같은 사람 싫어요!" 캐롤라인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증오심은 아주 강한 감정이지. 나는 증오심을 좋아해. 당신이 나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더욱 당신을 갖고 싶어져."

캐롤라인은 쇠사슬 같은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녀를 안아 올린 채 계단을 올라갔다. 침실에 들어가 문을 발로 차서 닫았다.

"이 암코양이! 내가 길들여 주겠어." 캐롤라인이 손톱으로 할퀴려 하자 구스타프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녀가 고통스러운 듯 소리를 지를 때까지 비틀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면 더 아프게 해주겠어."

 

그때는 미친 듯 출렁거리는 파도를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들어 있는 구스타프 곁에 조용히 누워 어둠 속에서 캐롤라인은 그 순간을 되씹고 있었다. 그의 거친 욕망에 자기도 휘말리고 말았다. 자기는 구스타프에게서 빼앗은 만큼을 그에게 주기도 했다. 지쳐 녹아떨어져서 서로 껴안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고동이 평상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월요일 아침 캐롤라인이 눈을 떴을 때 구스타프는 벌써 침대에서 빠져나갔고, 대신 베개 사이에 한 장의 종이쪽지가 끼어 있었다.

<캐롤라인> 편지는 아무런 서두도 없이 곧바로 용진이 적혀 있었다. <어젯밤은 의외로 멋있었어……. 그것은 당신도 인정하겠지. 그러나 모든 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당신은 젊어. 그러니 나와의 관계에 너무 구애받지 않도록. 아버지와 결혼하였던 기생충을 내쫓으면 우리의 관계는 끝난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라오. 귀가 시간은 여섯 시, 저녁 식사는 일곱 시에. 구스타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서 잉크가 번졌다. 캐롤라인은 편지를 구겨 버렸다. 구스타프가, 이러한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가 어젯밤 정신없이 그를 사랑했었던가? 캐롤라인은 심한 굴욕감에 사로잡혔다. 직접 말하지 않고 편지로 적어 알릴 정도의 동정심을 구스타프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헤어져야 할 때가 온다면 그에 대한 일방적인 그리움을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 것인지…….

캐롤라인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오자 맨살에 가운을 걸쳤다. 그가 남긴 편지를 찢어 버리야 하는데 그녀는 그러지를 못했다. 구겨진 것을 도로 펼쳐 경대의 서랍 속에 간직하였다. 로슈 저택에서 그의 아내로서 생활하는 동안 이 편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충고가 되어 줄 것이다. 자기에게 일시적인 노리개로서밖에는 흥미가 없다고 단언한 사나이에게 자기의 참다운 마음을 밝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날 하루 종일 캐롤라인은 자신의 입장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이틀 전에 자기와 결혼한 사나이에게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구스타프가 귀가할 때까지 그녀는 침착을 되찾아, 저녁 식사의 테이블에서는 구스타프의 눈길을 아무렇지 않게 맞받았다. 식사 중에는 서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화제도 없어 대화는 겉돌다가 곧잘 끊어지곤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벼랑이 생기고 말았다고 캐롤라인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 때도 서먹서먹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갑자기 구스타프는 수표를 꺼내자 테이블 너머의 캐롤라인 쪽으로 밀어 놓았다.

"이것으로 보기 좋은 옷을 두세 벌 사 입어요." 커피를 다시 한 잔 자기 컵에 따르면서 구스타프는 점잖게 말했다.

"그런 짓은 싫어요!" 자기도 모르게 대꾸하고 나서 캐롤라인은 후회했다.

"내 아내로서 어울리는 옷차림을 해주기 바라오. 이자벨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말이오. 그런 일만 아니면 당신에게 헛돈을 쓸 내가 아니지."

구스타프의 말은 노예를 부리는 사람의 매처럼 정확히 캐롤라인을 후려쳤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대답했다.

"잘 알았어요!"

"알아주어서 고마워!" 구스타프는 비꼬았다. "쇼핑은 오늘 끝내는 것이 좋겠어, 환영하지 않는 손님이 아마도 내일쯤 도착할 것 같으니까."

캐롤라인은 얼굴을 들었다.

"소식이 있었어요?"

"아니, 직접 소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그러나 나에게는 정보원이 따로 있으니까." 테이블 너머로 힐끔 캐롤라인을 쳐다보더니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런 겁먹은 얼굴을 하지 말아요, 겁을 먹으면 당신은 아주 어리고 약하게 보인단 말이야. 그것만으로도 이자벨은 우리들의 결혼의 정당성을 의심할지도 모르거든."

캐롤라인은 꿀꺽 침을 삼키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또 한 가지 말해 두겠는데, 절대로 울어서는 안 돼.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찔끔찔끔 짜는 여자는 참을 수 없어." 캐롤라인의 눈에 희미하게 눈물이 번지는 것을 보고 구스타프는 딱 잘라서 경고했다.

얼마든지 대답할 말은 있었으나 캐롤라인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커피를 다 마신 구스타프가 성큼성큼 식당에서 나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몇 분 후 재규어 승용차는 달려 나갔다. 캐롤라인은 수표를 손에 들고 분노가 타오르는 눈으로 차의 뒷모습을 내다보았다.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물리치고 스커트의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쇼핑도 마음껏 하는 등의,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을 해보고 싶었던 캐롤라인이지만, 구스타프의 가족의 눈을 속이기 위해 새 옷을 산다는 것을 즐거울 수가 없었다. 캐롤라인은 그 일을 점원에게 일임했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실크나 울이 살갗에 닿는 감촉은 역시 기분이 좋았다. 비싸지만 모두가 캐롤라인의 늘씬한 스타일에 잘 어울렸다. 점원은 이미지 체인지를 위해서 머리도 커트하라고 권했다.

"이미지 체인지……." 캐롤라인은 그 착상이 마음에 들었다. 구스타프 드 레오 부인이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임시>의 드 레오 부인 - 캐롤라인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뇌어 보았다.

오스틴 승용차에 짐을 실은 캐롤라인은 저녁 무렵에 라 로슈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중나온 티리가 짐을 나르는 일을 도우면서, 구스타프는 서재에 있다고 알렸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도 했다.

침실을 혼자 차지한 캐롤라인은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새로 산 옷 중에서 한 벌을 골라 입었다. 갸름한 목을 돋보이게 하는 넓은 칼라가 붙은 울의 원피스로서, 빛깔은 그녀의 눈동자에 어울리는 엷은 불루이고, 디자인은 심플해서 그녀의 젊음을 강조해 주고 있다. 어깨 근처에서 짧게 잘라낸 머리가 섬세한 얼굴을 감싸며 느슨하게 물결쳤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몰라보도록 세련되어 있었다. 사나이의 정열적인 포옹을 알고, 보담이 없는 사랑의 괴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한 성숙한 여자의 분위기를 그녀는 풍기고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찔끔찔끔 짜는 여자는 참을 수 없다고 한 구스타프의 준엄한 말이 언뜻 생각났다. 당황해서 눈을 깜박거리며 캐롤라인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쪽에서 수군거리는 듯한 말소리가 들렸다. 캐롤라인은 계단의 맨 밑에서 발을 멈췄다.

거실의 문은 난로의 온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닫혀 있었기 때문에, 구스타프의 손님이 사업 관계 손님인지 또는 단순한 친구인지 그녀로서는 판단이 가지 않았다. 거실에 들어가야 할 것인가, 그대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구스타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 여자의 목쉰 웃음 소리가 들려 캐롤라인은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틀림없이 방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거실로 들어가 보기로 캐롤라인은 결심했다.

홀을 가로질러 문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캐롤라인은 거실로 들어갔다.

대화가 뚝 그쳤다. 방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캐롤라인을 주시했다. 먼저 놀라움이, 이어서 호기심이 손님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구스타프는 희미하게 냉소를 띠면서 캐롤라인의 손을 잡고 자기 곁으로 끌어당겨서 한쪽 팔을 그녀의 허리에 감았다. 눈동자는 저항하지 말라고 캐롤라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 달링, 이분이 어머니 이자벨, 동생 럿셀과 그의 처 니콜라야." 구스타프는 할 말을 잃고 사태의 진전을 주목하고 있는 세 사람의 손님을 향해 승리를 확신하듯이 말했다. "이쪽은 캐롤라인, 제 처입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거실은 바늘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하였다. 먼저 이자벨이 침착을 되찾았다. 연령에 비해 몸의 곡선은 부드러웠으나, 검은 머리에는 약간의 새치가 섞여 있었다. 여왕과 같은 태도로 일어서자, 노여움에 불타는 검은 눈동자로 캐롤라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구스타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구스타프, 농담을 하는군. 네가 결혼이라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여자 친구를 항상 바꾸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말이다." 이자벨은 쉰 목소리지만 감정을 억제해 가며 말하고 나서, 다시 경멸하듯이 캐롤라인을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이 여자는 누구냐? 라 로슈 저택에 무슨 용무가 있는 거냐, 아니면 구스타프, 네가 정사의 상대로 자기 딸 뻘밖에 안 되는 젊은 아가씨를 선택할 정도로 분별없는 바보가 되었나?"

아자벨의 욕지거리에 화가 난 캐롤라인은 당돌하게 대꾸했다.

"저는 어린애도, 구스타프의 애인도 아닙니다. 그의 아내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주세요."

검은 눈동자는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담고 캐롤라인을 노려보았고, 새빨갛게 루즈를 칠한 입술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아가씨는 어디서 굴러왔어?"

"그만 해 두세요, 어머니. 어머니 마음에 들든 안들든 캐롤라인은 제 처입니다. 증거 서류를 보시고 싶다면 나중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구스타프는 떨고 있는 캐롤라인의 허리를 감싸듯이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이자벨를 견제했다.

"이 정도로는 끝내지 못해." 아자벨은 낮음 목소리로 위협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 정도로는 끝내지 않는다."

"어머니." 럿셀이 끼어들었다. 그는 일어서자 어머니 쪽으로 다가갔다. "형님의 결혼에 쇼크를 받으셨겠지만, 그래도 예의에 어긋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두 분에게 축하의 말을 해야지……."

놀라운 것은 이자벨이 아들의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억제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더니 무어라고 적당히 중얼거렸다. 캐롤라인은 이자벨의 임시변통의 인사말은 한쪽 귀로 흘려보내고 아들인 럿셀 쪽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는 어머니 아자벨을 빼쏜 듯했다. 늘씬한 키에 약간 검은 살결,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얼굴 모습은 어머니보다는 훨씬 잘생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딘가 수상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구스타프의 의붓동생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캐롤라인은 생각했다.

 

7

그 숨 막힐 듯한 긴 밤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캐롤라인은 구스타프의 세 사람의 가족 중에서 니콜라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다갈색의 머리를 가진 젊고 아름다운 니콜라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일은 여간해서 없었지만, 그녀가 친절하고 잘생긴 남편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곁에서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또 남편과 마찬가지로, 성깔이 있는 시어머니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든 니콜라는 캐롤라인으로서는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그날 밤, 일동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식당으로 들어갈 때 이자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거친 말투로 따져물었다.

"왜 리리안의 초상화를 여기에다 걸어 놓았어?" 그녀는 분노에 찬 눈길을 구스타프에게 돌렸다.

"제가 걸자고 했습니다." 캐롤라인이 말했다.

"내일 아침 맨 먼저 이것을 떼도록 하인에게 일러두어요." 이자벨은 명령했다.

"어머니 초상화는 계속 걸어 두겠습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합니다." 구스타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와 계모와의 시선이 불꽃을 튀기고 있어서 캐롤라인은 이자벨의 또 한 차례의 격노를 각오했었는데, 그 자리는 그것으로 일단 수습되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식사가 시작되었다.

"결혼식은 언제 올렸니?"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이자벨이 구스타프에게 말을 걸었다.

캐롤라인은 뜨끔해서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구스타프는 태연하였다.

"실은 어머니의 도착 때문에 우리들의 허니문이 엉망이 된 셈이에요. 식은 불과 며칠 전, 정확히는 지난주 토요일에 올렸습니다." 구스타프는 이자벨에게 음료수를 건네주고 캐롤라인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그래? 방해를 해서 미안해. 타이밍이 나빴었군." 이자벨이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모멸감과 당혹감으로 캐롤라인은 귀밑까지 붉어졌다.

캐롤라인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던 구스타프의 손가락이 딱 멈추었다.

"달링, 그 정도로 얼굴을 붉히다니, 당신은 참 매력적이군. 이런 장면을 견뎌 낼 수 있는 방법은, 어머니의 말씀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는 일이야. 어머니만큼 상냥하지 못한 사람은 없으니까 말야."

"너같이 신경이 무딘 사람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다니 영광이구나." 이자벨은 목소리를 높여서 대꾸했다.

이제라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캐롤라인의 눈이 우연히 럿셀의 눈과 마주쳤다.

"캐롤라인,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아요. 우리들은……말하자면……가족으로서 함께 있을 때, 단란한 가족이란 말과는 도대체 인연이 없으니까."

"입 닥쳐라, 럿셀! 너보고 말참견을 해 달라고 아무도 부탁 안 했다." 이자벨은 아들을 내리눌렀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는 얌전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사과했다.

"럿셀, 넌 그러고도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니?" 구스타프가 의붓동생을 비꼬았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이 자기에게 득이 되는지 그애는 잘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너보다는 훌륭한 사내지!" 이자벨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그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요?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의지한 적이 없었어요. 앞으로도 절대로 의지하지 않을 겁니다."

구스타프가 계모에게 가볍게 응대했다.

그러자 이자벨은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꽤 건방지군. 네 아버지와 결혼하던 날로 이 저택에서 너를 쫓아냈으면 좋았을 것을!"

캐롤라인은 불안한 듯 구스타프를 올려다보았으나, 그의 얼굴은 무표정 그대로였다.

"아버지에게는 당신보다는 약간 분별력이 있었던 것 같군요, 유감스럽게도……."

캐롤라인은 이 정도에서 말다툼을 말리고 싶었다.

"커피라도 드릴까요?" 그녀는 일어서서 모두의 얼굴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캐롤라인. 진하게 타줘요, 어머니는 오늘 밤 정력이 다 소모됐을 테니까, 기운이 나도록 다른 음료를 드리는 것이 좋겠어."

"니콜라, 같이 가지 않겠어요?" 이자벨이 구스타프에게 한마디 하기 전에 캐롤라인의 니콜라에게 빠른 말로 권했다.

", 그러지요."

"니콜라, 넌 가서는 안 돼. 오래 서 있으면 안 된다. 몸을 편히 가지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소파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하는 니콜라를 이자벨이 말렸다.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캐롤라인은 니콜라를 동정하듯이 쳐다보고는 혼자서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서 커피를 따르는 동안 캐롤라인의 마음은 상당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컵를 쟁반에 받쳐 들고 거실로 돌아갔을 때도 말다툼은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던 모양으로, 구스타프가 때마침 불쾌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 우리들은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 밤은 이 정도로 쉬기로 하고, 필요하면 내일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네 낯가죽은 꼭 물소같이 두꺼우니까." 이자벨은 또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그런 욕을 듣는 것은 이제 질색이에요, 어머니. 특히 그 욕이 어머니 자신에게 돌려야 할 욕일 때는 말입니다." 구스타프는 날카롭게 반격했다. 그리고 나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럿셀을 바보 취급 하듯이 쳐다보고 말했다. "한번쯤은 사나이다운 면을 보여 주는 것이 어때, 빨리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서 말야."

"여기가 내 집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모양이군." 이자벨이 우쭐대며 말했다.

"여긴 내 집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기를 바라고 있는 이상 라 로슈 저택은 내 집입니다." 구스타프가 못 박듯 대꾸했다.

"어머니, 언제까지 말다툼을 계속해 봤자 끝이 없고, 또 모두 피곤해 있으니……." 럿셀이 용기를 내어 참견을 했다.

"너도 가끔은 옳은 말을 하는구나. 확실히 나는 지쳤다. 니콜라는 더 지쳤을 계고……." 이자벨은 며느리에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일어섰다. "가자, 니콜라. 그만 쉬는 것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나갔다. 문이 닫히자 구스타프는 개비닛 쪽으로 다가갔다.

"한잔 마시고 싶군."

"저두요,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독한 것이 좋겠어요." 캐롤라인이 곧 찬성했다.

"당신 나이 정도엔 포도주로도 정신이 아찔해질걸." 그는 캐롤라인에게 포도주 잔을 건네주고 자기는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마셨다.

"당신까지 제 나이를 왈가왈부하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 말이 맞기는 맞아. 확실히 우린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

"그렇지 않아요……."

"내가 당신 아버지인 편이 좋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이에요!"

"당신 애인인 쪽이 좋은가?"

캐롤라인은 가슴이 울렁거려 더 이상 구스타프의 시선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화제를 바꾸는 게 좋겠어요."

"알았어." 그는 빈 술잔을 선반에 놓자 어깨르 움츠리고 손을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나서 마치 애무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캐롤라인의 두 볼이 다시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 새로운 헤어스타일과 드레스가 아주 마음에 들어. 상냥한 여자 같은 느낌을 주어서 내 마음을 몹시 자극하는군."

"구스타프, 그만두어요." 캐롤라인은 자기의 마음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조용히 포도주를 마셨다.

"당신은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군."

캐롤라인은 못 들은 체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앞으로 한 달 반 동안은 매일 밤 이런 곤욕을 치러야 하나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와 내가 얼굴을 맞대면 아무래도 충돌은 피할 수 없지."

"지금까지 항상 그랬어요?"

"그래, 항상 그랬어." 그는 무뚝뚝하게 인정했다.

캐롤라인은 약간 주저하면서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나와 함께 침대로 가지."

"그런 말이 아니에요. 잘 알고 계시면서." 그녀는 장나스러운 구스타프의 눈초리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제발 농담은 그만 하세요! 정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요?"

"기다릴 수밖에."

"기다려요?" 캐롤라인은 의아스러운 듯 눈을 든 자기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마음이 흐트러졌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거예요?"

"이자벨이 먼저 행동을 취하는 것을 기다린다는 거지."

"마치 지루한 체스 게임 같군요."

"우리들의 적은 무서운 상대야." 그는 경고하듯이 말하자 캐롤라인 쪽으로 다가왔다.

속셈이 있는 듯 번쩍이고 있는 그의 눈초리에 압도되어 그녀는 술잔을 놓

고 도망치듯이 뒷걸음칠 쳤다.

"그럼 이제 저는 가서 쉬겠어요." 캐롤라인은 다급히 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구스타프의 눈에 놀리는 듯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자, 그녀는 혀를 깨물고 싶도록 자기의 실언을 후회했다.

"그것참 반가운 제안이군." 그는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은 잠자코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침실에 들어서자 구스타프는 마음이 달라졌는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캐롤라인은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길고 건강한 다리가 드러나는 짧은 가운을 입고 화장실에서 나타났다. 그가 캐롤라인 뒤에 서자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이에 있는 구스타프를 의식하자 그녀는 온몸의 신경이 팽팽히 죄어들어 긴장되는 듯했다.

"오늘 밤도 아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캐롤라인은 놀랐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화가 났다.

"의무는 당연히 이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캐롤라인은 브러시를 놓고 일어섰다. 그에 비해서 훨씬 키가 작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놓이기 위해서 그로부터 떨어지자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령 저를 말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저에게 큰돈을 건 셈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제게 어떠한 일이라도 요구할 수 있어요."

"그렇지, 나는 당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산 거니까. 돈을 썼으면 쓴 만큼의 만족과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내 신조지." 그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캐롤라인의 뒤로 다가서서 아플 정도로 거칠게 어깨를 붙잡고 몸을 돌려 세웠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때는 제가 당신을 불쌍히 여길 거예요."

"예를 들면?"

"애정이에요."

"애정 같은 것은 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것이고, 나는 그런 것에 구애되고 있을 틈도 없어.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때때로 잠자리를 같이할 여자뿐인데, 그런 종류의 여자는 언제든지 돈으로 살 수 있어." 그는 캐롤라인을 업신여기듯 말했다.

"더러워요!" 캐롤라인은 이렇게 외치며 구스타프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으나,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그의 두 손이 사정없이 피부로 파고들었다.

"나는 당신을 산 거야!"

캐롤라인은 마치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쇼크를 받아,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크게 뜬 눈에는 눈물이 가뜩 괴었다.

"제가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아요!"

"확실히 나는 결혼 증명서를 손에 넣어야 할 절박한 사정에 놓여 있었어.

그러나 결국 마찬가지야. 대개의 여자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좋아서 몸을 판 거야."

"제발 더 이상 저로 하여금 당신을 결명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얼마든지 경멸해도 좋아. 화낼 때의 당신은 참으로 매혹적이야. 더욱 당신을 가지고 싶어졌어." 구스타프는 차갑게 웃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실크 가운과 얇은 네글리제를 벗겼다. 침대 모서리에 캐롤라인의 오금이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침대 위에 밀어 넘어 뜨러졌다.

그때 갑자기 침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구스타프는 심한 욕을 퍼부으면서 머리를 들어, 두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진흙발로 짓밟은 침입자 쪽을 홱 돌아봤다. 우연인지 아니면 구스타프가 일부러 그렇게 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큰 몸이 그녀의 발가벗은 몸을, 침입자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부터 가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에게는 그의 어깨 너머로 아직도 단정히 옷을 입은 채 서 있는 이자벨의 모습이 보였다.

"어마, 미안해요. 이 방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이자벨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검은 눈동자에는 증오심이 가득 차 있었다.

구스타프는 격렬한 분노로 가운 속의 어깨를 들먹거리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노크를 하고 대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자벨의 미소가 싸늘한 억지 웃음으로 바뀌더니, 올 때와 마찬가지로 불쑥 나가 버렸다.

한동안 구스타프도 캐롤라인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몸을 일으키고 비웃듯이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캐롤라인은 방금 두 사람의 모습을 이자벨에게 들키고 말았던 때의 수치심보다 지금의 발가벗은 몸에 더 신경이 쓰였다.

"어머니가 말한 것은 거짓말이에요!"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쳐서 구스타프의 주의를 돌리고, 그 사이에 침대 커버로 몸을 감싸며 약간 몸을 일으켰다. "문 밑의 틈으로 불빛이 틀림없이 보였을 거예요."

"어머니는 우리들이 침실을 함께하고 있는가 아닌가, 또 두 사람이 부부로서 맺어져 있는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문을 연 거야." 구스타프는 당연하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아까의 행동은 틀림없이 계획적이었던 것이다. 캐롤라인은 그가 태연히 자기를 조종하여 그건 굴욕적인 장면을 연출했다고 생각하니, 그만 분노가 치밀었다.

"당신같이 염치를 모르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제 몸에 손을 댄다면 큰 소리를 지를 테니 그리 아세요."

"걱정 말아요. 당신 몸은 확실히 아름다워. 그러나 우리들의 결혼이 진짜라는 것을 이자벨에게 믿게 했으니 이제는 손을 대지 않겠어."

기가 찬 캐롤라인은 잠시 대꾸할 말도 잊은 채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알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사나이. ……." 구스타프는 그녀의 네글리제를 주워들자 침대 위로 던졌다. "이것을 입고 자요. 당신은 오늘 밤 소임은 다했으니까. 말이야."

차라리 폭력을 휘둘러 주는 것이 휠씬 나았을 것이다. 캐롤라인은 산란해진 눈빛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네글리제를 집었다. 그것을 머리로부터 뒤집어쓰면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자, 조금 남아 있던 프라이드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이튿날 아침 캐롤라인이 눈을 떴을 때는 구스타프는 벌써 출근한 뒤였다. 한 시간 후, 스웨터와 슬랙스 차림에 워킹 슈즈를 신고 레인 코트를 걸쳐 입은 그녀는, 현관 홀에 내려왔을 때 불쑥 나타난 니콜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젯밤은 미안했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신 정도로 내 몸이 아프지는 않아요. 그러나 되도록 어머니께는 거역하지 않는 것이 무난하기 때문에……." 니콜라는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왜 그렇게 소극적이에요, 니콜라? 당신에게는 자기 일은 자기가 결정할 권리가 있어요."

"당신은 몰라요. 어머님의 비위만 맞추고 있지만, 저는 럿셀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를 잃고 싶지 않아요."

"그를 잃다니, 무슨 말이에요?"

"어젯밤 보셨겠지만, 어머님이 럿셀에 대해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계시는지 당신도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캐롤라인은 자기보다 한두 살 연상인 니콜라를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다가 곧 사정을 깨달았다.

", 어머님이 당신을 쫓아낼 결심만 한다면 럿셀은 감히 반대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군요?"

"그래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말예요." 니콜라는 슬픈 듯이 시인했다.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가벼운 발소리를 듣더니 걱정스러운 듯이 올려다보았다. "어머니에요. 저더러 당신과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적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래요."

"니콜라?" 몇 초 후 이자벨이 내려와서 엄한 투로 말했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뭘 하고 있니?"

"밀크를 마시고 싶어서 내려왔어요. 캐롤라인에게 주방이 어디 있는지 묻고 있는 중이었어요."

"주방은 저쪽이야." 이자벨은 주방이 있는 복도 한 쪽을 손가락질했다.

"방금 캐롤라인으로부터 들었어요." 하고 니콜라는 둘러대며 캐롤라인에게 애원하는 듯한 시선을 한번 주고는 총총히 가버렸다.

캐롤라인도 구역질이 날 듯한 가슴을 억누르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가냘픈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 이자벨은 이렇게 말하고, 팔을 잡았던 손을 놓더니 눈으로 거실 쪽을 가리켰다.

캐롤라인은 할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자벨은 거실의 문을 닫자마자 캐롤라인에게 캐어 묻기 시작했다.

"왜 내 아들과 결혼했지?"

이자벨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캐롤라인은 한순간 주춤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한 것입니다."

"애정이 있기 때문은 아닐 거야, 구스타프에게는 다정한 데란 전혀 없으니까.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지?" 이자벨은 차가운 눈초리로 캐롤라인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애는 여자를 기쁘게 해주는 일에는 아주 능수라면서?"

"설마 제가 그런 질문에 답변하리라고는 생가지 않고 계시겠지요?" 캐롤라인은 불쾌함을 누르며 말했으나, 양볼은 벌써 화끈거렸다.

너도 나만큼 구스타프를 잘 알고 있다면 그를 처음부터 신용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결혼 예물로 큰돈을 주었는가보구나." 이자벨은 생각에 잠기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이에게서 아내가 되어 달라는 청혼을 받았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캐롤라인은 딱딱한 말쿠로 대꾸했다. 적어도 그것만은 사실인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나서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 조반을 드시겠어요, 아니면 럿셀을 기다렸다가 같이 드시겠어요?"

이자벨은 초조한 듯한 몸짓을 했다.

"럿셀은 아침 식사가 늦으니, 나 먼저 들겠다."

"하인을 불러서 시중들도록 하겠어요." 캐롤라인은 이렇게 말하자 이자벨은 밀어 젖히듯이 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

"내가 부르겠다, 여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집이니까. 그 사실을 잊지 말아 줘." 이자벨의 화난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캐롤라인의 손이 문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그녀는 결연히 연상의 여자 쪽을 돌아보았다.

"저는 구스타프의 아내이므로 여기는 내 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생각은 자유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산책하러 나갑니다."

밖은 춥고 비까지 뿌리는 궂은 날씨였다. 캐롤라인은 정원 안의 차도를 빠른 걸음으로 건너서 저택 밖으로 나갔다. 가로수 길을 한참 걸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작정인가? 발길 닿는 대로 가보는 거다. 어깨를 움츠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굴에 와 부딪치는 빗줄기가 캐롤라인의 괴로움을 씻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슴속 깊이 박히 무거운 응어리를 없앨 수는 없었다. 머릿속엔 차례차례로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반발도 해보고 이해도 해보고 하다가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앞으로 구스타프로부터 어떠한 굴욕을 당한다 해도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자. 캐롤라인은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승용차가 한 대 캐롤라인 곁으로 다가왔으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수석의 도어가 열리면서 남자 목소리가 캐롤라인을 불렀다. 그녀는 뒤돌아보며 일순 놀랐으나, 차에 타라는 무언의 권유에 응했다.

"당신을 만나서 기뻐요, 데니스." 계혹의 경치를 즐기고 싶어 하는 그녀를 위해 노폭이 넓어진 장소에 차를 세운 데니스에게 캐롤라인은 충심으로 말했다.

"은행의 단골 거래선을 찾아갔다가 돌아가는 길인데, 빗속을 걷고 있는 당신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내 눈을 의심했었어." 데니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시트 위에서 캐롤라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젠 두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결혼하려고 생각했던 남성의 눈길이 자기에게 못박혀 있는 것을 보자, 캐롤라인의 눈에는 남모르는 슬픔이 밀려왔다. 오래간만의 재회인데도 특별한 기쁨이나 격렬한 흥분도 없이 단순한 친구를 만났을 때와 같은 약간의 반가움이 느껴질 뿐이다.

"결혼을 취소했다고 해서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없지요." 캐롤라인이 주저하면서 말했다.

데니스는 화가 난 듯한 몸짓으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캐롤라인, 친구 같은 건 절대로 될 수 없어. 당신을 포기하다니 내가 바보였어."

"우리들이 결혼했다면 불행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데니스.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어요. 지금 그것을 알았어요." 캐롤라인은 데니스의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구스타프 드 레오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이 큰 쇼크를 받았지. 그는 당신보다 훨씬 연상이 아닌가." 데니스는 아직도 화가 가시지 않은 투로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나이 차는 문제도 안 돼요."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그는 늙고 당신은 젊어 아직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시기가 되면 연령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실례가 아니에요!"

데니스는 이렇게 화를 내는 캐롤라인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자기 말이 지나쳤다는 것을 알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캐롤라인, 잘못했어. 질투심에서 심술을 부린 것 같아. 화내지 말아요."

"이젠 가겠어요."

"기다려 줘!" 도어의 손잡이에 손을 뻗은 캐롤라인을 데니스가 제지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날 필요도 없잖아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당신이 말했으니까요. 친구로 만날 수 없다면 우리들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지요." 캐롤라인은 한때 자기가 반했던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은 가벼운 짜증뿐이었다.

"확실히 당신 말이 옳아." 그는 몸을 뒤로 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그리고 저는……."

한 대의 승용차가 지나갔다. 운전석에는 럿셀이 타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나를 보았을까, 아니면 커브길에 조심을 하느라고 나를 보지 못했을까?

"왜 그래?" 그녀의 표정을 보고 데니스가 물었다.

"지금 지나간 승용차에 남편의 의붓동생이 타고 있었어요."

"그것이 어때서?" 데니스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우연히 동생을 보았을 뿐예요. 그래서 라 로슈 저택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초조해져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캐롤라인……."

"만나서 기뻤어요, 데니스. 그러나 이번에는 진짜로 안녕." 캐롤라인은 단호하게 데니스의 말을 가로막자, 그의 차에서 내려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자동차를 출발시키는 소리가 들렸으나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전에도 가끔 그렇게 생각한 일은 있었지만, 이번에야말로 분명히, 데니스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두 사람이 헤어지는 계기가 된 그 사건은 타이밍이 매우 좋았던 것 같다. 그 사건 덕택으로 데니스와 결혼하는 실수를 하지 않아도 되엇으니까. 그러나 구스타프의 결혼은 더 큰 잘못이 아니었을까? 캐롤라인의 마음에 문득 이런 의문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때 럿셀의 자동차가 다시 다가왔기 때문에 그녀의 골똘한 생각은 흩어지고 말았다.

"! 집에까지 태워다 드릴까요?" 럿셀이 유리창을 내리고 인사했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고맙지만 그냥 걸어가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걷기에는 별로 좋은 날씨가 아닌데요." 럿셀은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빗길을 걷는 것을 좋아해요."

"그럼 나중에 봅시다." 유리창을 올리면서 럿셀은 미묘한 웃음을 던졌다..

몇 초 후, 라 로슈 저택을 향해 돌아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면서, 캐롤라인은 자기가 데니스와 함께 차에 타고 있는 것을 그가 틀림없이 보았음을 확신했다. 럿셀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도, 만약 이 사실이 구스타프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가 더 중대한 문제였다.

"어떻게 할까?" 캐롤라인은 발로 자갈을 걷어찼다. 이자벨이 자기를 감시하기 위해 럿셀에게 뒤를 밟도록 했음에 틀림없다. 다른 용건으로 외출했다면 럿셀이 저렇게 빨리 되돌아올 리가 없을 것이고, 이자벨 이외의 다른 사람이라면 이처럼 비열한 책략은 꾸미지도 못할 것이다.

구스타프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더욱 신중하게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캐롤라인은 우울해졌다. 이자벨과 그 아들은 가지고 싶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덤비는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가리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캐롤라인은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8

점심을 들면서 럿셀이 때때로 넌지시 암시하는 듯한 시선을 자기에게 보내고 있는 것을 캐롤라인은 깨달았다. 한 번은, 네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를 보였다 - 역시 그는 내가 데니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었구나 - 캐롤라인은 이제 그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럿셀이 그 비밀 정보를 어떻게 이용할 작정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아자벨이 니콜라를 데리고 휴식을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캐롤라인은 럿셀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의 속셈을 알아낼 의도로 캐롤라인은 두 잔째의 차를 천천히 마셨다.

럿셀은 담배에 불을 붙이자 의자에 등을 기대고 캐롤라인을 노골적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독신주의였던 형님을 함락시킨 여성이라니, 완전히 예상 밖이었어요."

예기치도 못했던 럿셀의 이 말에 캐롤라인은 약간 흠칫했다.

"그럴까요?"

"절대로 당신을 모욕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형님은 항상 키가 크고 섹시한 타입의 여성을 좋아했지요. 당신도 매력은 있지만 타입이 달라서 말입니다."

캐롤라인은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남자들이 실제로 아내를 선택할 때는 의외의 타입을 찾는 게 아닐까요?"

럿셀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의작 약해 보이는 입술에 교활한 웃음을 띠었다.

"형님이 내달 15일가지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당신의 계부님께서 유언장에 쓰신 조건에 관한 것이라면 제 대답은 예스입니다. 그 일은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럿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이야기했습니까?"

"우리들은 서로 비밀을 갖고 있지 않아요." 캐롤라인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차를 마시면서 약간 장난기 어린 눈으로 컵의 모서리 너머로 럿셀을 관찰했다.

"형님이 유언장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당신과 결혼한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한 일은 없었습니까?" 럿셀은 담배 연기를 천장으로 뿜어 올리면서 실눈을 하고 캐롤라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제 마음에 구스타프에 대한 의심을 심으려고 하는데, 그건 헛수고예요, 럿셀."

"그러나 이 문제는 잘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당신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형님이 좋아하는 타입은 절대로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가 사업을 독차지하고 싶은 생각에서 결혼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고 늘어지면서, 캐롤라인의 스웨터에 감싸인 부드러운 가슴으로 무례한 눈길을 보냈다.

"사업을 독차지할 권리는 당연히 당신보다는 구스타프에게 있어요." 캐롤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을 옹호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레가르트는 형님이 후계자로서 적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럿셀은 어머니를 닮은 냉소를 입가에 띠고 반박했다.

"레가르트라니……. 구스타프의 돌아가신 아버님 말입니까?"

"그래요." 럿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심상치 않은 눈빛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당신은 형님의 아내인데,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군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들이 결혼한 지 아직 4, 5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도록." 그녀는 실수를 적당히 넘기려고 했다.

"그래도 물론 결혼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겠지요?"

", 물론."

"알게 된 지 얼마나 됩니까?"

"꽤 오래 돼요." 그녀는 럿셀의 뺨을 한대 갈겨서 그 엷은 냉소를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면서 말했다. 캐롤라인은 결국 자기가 알고 싶었던 것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이 대화에 일단락을 지으려고 일어섰다. "실례하겠어요, 나도 이층에 올라가 쉬어야 하니까."

저녁때, 캐롤라인은 구스타프의 귀가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럿셀이 구스타프와 자기와의 사이에 찬물을 끼얹을 속셈이라면 구스타프가 집에 있을 때를 노릴 것이다. 저녁 식사 전에 모두가 거실로 모여서 식전의 술을 마실 때가 절호의 찬스가 될지도 모른다. 그 광경을 상상하니 캐롤라인은 온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지만, 덫에 걸린 짐승과 마찬가지여서 도망칠 길은 전혀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는 위가 아플 정도로 긴장되었다.

마침내 구스타프가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으나 캐롤라인은 긴장한 나머지 음식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럿셀과 캐롤라인의 눈이 마주친 것은 둘째 번의 코스가 끝났을 때였다. 그때 그녀는, 오후 내내 두려워 하고 있던 순간이 드디어 닥친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캐롤라인, 오늘 아침 낯선 남자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있던 여자가 당신 같아 보였는데, 틀림없이 당신이었지요?"

모두의 눈이 일제히 캐롤라인을 향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구스타프의 무표정한 얼굴밖에 들어죄 않았다.

", 저였어요. 산책을 하고 있는데 마침 데니스가 차를 타고 지나가지 않겠어요. 그가 차를 세워서 우리는 잠시 잡담을 나누었어요." 캐롤라인은 구스타프의 눈을 똑바로 보며 고백했다.

"놀러오라고 말하지 그랬어?"

캐롤라인은 순간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구스타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의 연극에 맞장구를 쳤다.

", 그랬어요. 데니스는 틈이 나면 전화를 걸겠다고 말했어요." 캐롤라인은 스스로 감탄할 정도로 손발이 맞게 거짓말을 했다.

"그 데니스라는 남자는 항상 당신을 차에 태워 주고 사이좋게 잡담을 하는 사이입니까?" 럿셀이 집요하게 물었다.

비꼬는 말투에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지는 않아요!"

"럿셀이 하는 말에 신경을 쓸 필요 없어요, 달링. 그도 데니스를 한번 만나 보면 자기가 오해했다는 걸 알게 되겠지." 구스타프가 재치 있게 거들어 주었다.

빈정대는 말들이 몇 차례 왔다 갔다 했지만 결국 그날 밤은 전날 밤보다는 조용하게 막이 내렸다. 그러나 캐롤라인에게는 그날 밤 늦게 결국 태풍이 몰아닥치고야 말았다.

저고리를 벗고 넥타이도 푼 구스타프는 상처를 입은 짐승같이 초조하게 침실 안을 서성대고 있다가, 캐롤라인이 욕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 재빨리 다가가 뼈가 부러질 정도로 그녀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야, 내 눈을 피해서 데니슨가 뭔가 하는 남자를 만나다니!" 구스타프는 험악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그의 이름은 데니스 린제이예요. 산책하다가 우연히 만났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캐롤라인은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거짓말 말아." 그가 비웃었다.

"하지만 정말이에요."

구스타프가 힘껏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기 때문에 캐롤라인은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질렀다.

"당신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내 계획이 산산 조각이 날 뻔했잖아. 대체 그것을 알고 있어?"

"구스타프, 약속해서 만난 게 아니에요." 캐롤라인은 팔이 저릴 정도의 아픔을 참고 다시 설명했다.

"옛날의 달콤한 추억에 젖어서, 재미있었겠군?"

"그건 무슨 뜻이에요?"

"이봐, 캐롤라인. 당신들이 악수하고 잡담만 했을 뿐이라는 이야기, 내가 믿을 줄 아나?"

캐롤라인은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서 간신히 봄을 지탱하고 서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구스타프, 당신은 아주 비열해요!"

구스타프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덮었다.

"데니스의 키스도 내 키스만큼 자극적이던가?" 이렇게 말하고 곧 입술을 캐롤라인의 목으로 가져가, 그녀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드는 애무를 되풀이했다. "데니스의 애무는 당신의 욕망을 자극했는가? , 어땠어?" 그의 조롱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구스타프, 저는 맹세코……."

"맹세한다고? 먼 옛날부터 여자들은 신성한 하느님의 이름 아래 남편에게 정절을 맹세해 왔지만, 다른 남자를 보는 순간 그 맹세는 편리하게 잊어버리곤 하지." 구스타프의 눈에는 경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에요, 그것은 틀린 말이에요!" 캐롤라인은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는 눈을 험악하게 번뜩이면서 캐롤라인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려는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당신에게 정절을 맹세하라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 나는 당신의 정절을 <>거야. 그 차이는 알겠지? 애초부터 당신은 나에게 정절을 지킬 의무가 있는 거야." 구스타프는 거만스럽게 말했다.

그 순간 노여움이 공포를 압도했다. 캐롤라인은 그에게 목을 졸리면서도 목소리를 짜내어 외쳤다.

"당신이 제 정절을 사셨다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당신의 계획이 성공하도록 협력은 하겠어요. 그러나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저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구스타프는 캐롤라인의 목에서 손을 떼자 입가에 심술궂은 웃음을 띠었다.

"그 조건으로 충분해. 그러나 사랑하는 캐롤라인, 그때까지는 침대에서 함께 즐기도록 하지."

"야만이! 당신을 증오해요!" 그녀는 내뱉듯이 외쳤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손발을 흔들면서 저항하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리자 침대로 갔다.

"얼마든지 미워해도 좋아!" 그는 매정하게 웃자 부드러운 침대 위에 그녀를 위고 위에서 덮쳐눌렀다.

일어나려고 하는 캐롤라인의 헛된 노력을 구스타프는 웃음으로 경멸했다. 핀에 찔려 박힌 빈사 상태의 나비처럼, 이윽고 캐롤라인은 지쳐서 축 늘어져 조용해졌다. 그가 입술을 겹쳐 왔다. 실크 가운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 보드라운 살결을 매만졌다.

"저에게 손대지 말아요! 제발 만지지 말아요……." 캐롤라인은 신음하듯이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저항해 보았다.

"그럴 수는 없어, 내가 당신을 갖고 싶어하는 것과 똑같이 당신도 나를 갖고 싶어 하니까 말야."

캐롤라인은 자신의 나약한 의지가 부끄러웠다. 또 자기가 그를 갖고 싶어 하고 있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있어서조차도 그녀의 손가락은 구스타프의 실크 와이셔츠의 진주 단추를 끄르려고 손끝을 놀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마침내 그의 탄탄한 가슴에 닿았다. 몇 초 후, 캐롤라인의 가슴에 남아 있던 모든 잡념들은 격렬한 포옹 속에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구스타프는 캐롤라인이 그의 애무를 요구했던 이날 밤의 이야기를 여러번 꺼내어 그녀를 난처하게 했다. 그의 애무에 저항력을 잃고 마는 밤이 오는 것을 그녀는 두려워하게 되었다. 라 로슈 저택에서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밤뿐만이 아니라 낮시간의 생활도 차차 괴로워졌다.

럿셀은 어머니와는 달리 항상 그녀 가까이에 자리 잡아, 그녀를 가볍게 만지기도 하고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것도 항상 구스타프가 함께 있을 때에 대해서. 럿셀의 수법은 아주 교묘해서, 그것이 모두 의심스러운 인상을 주기 위한 책략이 아닌가 하고 캐롤라인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지만…….

캐롤라인이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니콜라뿐이었으나, 그녀는 항상 이자벨의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캐롤라인은 정원을 혼자서 걷고 있는 니콜라를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저 혼자예요, 어머니는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기 때문에 아직도 침대 속에 계세요." 니콜라는 살포시 미소지으며 캐롤라인을 안심시켰다.

"잘 됐어요!" 캐롤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를 싫어하는 기분을 알겠어요. 저도 역시 어머니를 좋아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녀는 마치 병아리를 노리며 낚아챌 찬스를 살피고 있는 일이에요. 자기가 노린 것을 손에 넣으려고 찬스를 엿보고 있는 독수리 같아요."

"참말로 꼭 들어맞는 비유인데요." 니콜라는 웃다가 곧 표정을 긴장시켰다. "그것은 바로 지금 어머니가 하고 있는 일이에요. 자기가 노린 것을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사와 라 로슈 저택 두 가지를 다 손에 넣으려 하고 있어요."

캐롤라인의 등줄기에 섬뜩하게 한기가 돌았다. 일종의 저항감이 그녀의 말투를 다소 격앙되게 했다.

"구스타프는 결혼했어요. 회사를 빼앗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그는 라 로슈 저택에서 영원히 살 거예요."

니콜라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더니 마음이 언짢은 듯 눈을 돌렸다.

"미안해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요. 그래도 이것만은 당신에게 일러 드리겠어요. , 구스타프가 상속권을 얻기 위해서는, 결혼을 했어야 하고, <아내와 함께 살고 있어야 한다>라고 유언장에 뚜렷이 적혀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캐롤라인의 눈꼬리가 치켜졌으나 그 이상 니콜라를 추궁하지 않았다. 니콜라가 자기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충실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구스타프와 자기에게 대해서 어떠한 음모가 꾸며질 것인가……캐롤라인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유언의 조건 중 뒷부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지만, 이제부터는 더욱 그것을 머릿속에 새겨 두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자벨과 럿셀이 구스타프와 자기를 떼어 놓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자기가 그 음모에 걸려들게 되리라고는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날 아침의 티 타임에 일동이 테라스에 모였을 때 캐롤라인은 어리석게도 쇼핑을 하러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럿셀, 캐롤라인을 차로 모셔다 드리면 어떨까?" 하고 이자벨이 상냥하게 말을 꺼냈다.

캐롤라인은 곧, 럿셀의 최근의 이상한 행동은 음모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고 거절했다.

"아녜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저 혼자 제 차로……."

"기꺼이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도 야간의 용무가 있으니까,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럿셀은 매우 정답고 따뜻한 시선을 캐롤라인에게 쏟으면서 친절하고 그럴듯하게 설명을 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니콜라는 그러는 게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도 캐롤라인은 럿셀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을까지의 드라이브는 캐롤라인이 지금까지 경험한 일이 없을 정도로 괴로운 것이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에게 잡힌 손을 떼어내고 무릎 위에서 그의 손을 뿌리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시간 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번화가에서 헤어졌을 때에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러나 느긋하게 쇼피을 함으로써 약속 장소에 가는 시간을 되도록 늦출 수는 있었지만, 라 로슈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럿셀의 승용차 뒷좌석에 쇼핑한 꾸러미를 놓고 캐롤라인은 말없이 딱딱하게 그의 곁에 앉았다. 두 사람이 콘스탄시아 근처까지 왔을 때 럿셀은 갑자기 차를 세웠다. 캐롤라인은 그를 돌아다보며 날카로운 말투로 물었다.

"왜 세웠어요?"

"여기서 보는 산의 경치는 아주 멋있어요."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것은 산이 아니라 캐롤라인이었다.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라 로슈 저택으로 돌아가야지요. 곧 점심시간이에요." 그녀는 쌀쌀하게 대꾸했다.

"서두를 것은 없어요. 형님이 당신과 결혼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당신은 참으로 미인이오."

럿셀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예의 무례한 태도로 그녀 쪽으로 몸을 붙이더니 거리낌 없이 캐롤라인의 어깨에 팔을 돌렸다.

"럿셀, 손을 놓아요!" 마침내 그가 껴안자 캐롤라인이 외쳤다.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그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입술을 가져왔다.

"못된 짓은 하지 말아요, 럿셀!" 겨우 그를 밀쳐낸 캐롤라인은 발칵 화를 내었다. "점잖게 굴지 않으면 집에까지 걸어서 가겠어요."

"도도하게 굴 것 없잖아요." 럿셀은 빙그레 웃자 다시 한번 캐롤라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매정하게 그를 밀어내면서 쏘아붙였다.

"이게 어째서 도도하게 구는 거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구스타프와 결혼했고, 당신에게는 아내인 니콜라가 있지 않아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예쁜 아내를 잊고 있는 건 아니오. 그러나 한번쯤 키스한다고 해서 별로 해로울 것은 없잖아요?"

"라 로슈 저택의 분위기를 이 이상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계속 이런 태도로 나온다면 구스타프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럿셀은 떨어져 나갔지만 그 눈초리에는 캐롤라인을 불안케 하는 요소가 있었다.

"나는 당신 이야기를 전부 부정하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의심받게 될 것입니다. 형님은 옛날부터 여자를 믿지 않아요, 당신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자 도어에 기대어 눈을 가늘게 뜨고 캐롤라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문제로 럿셀ㄹ에게 반론을 제기할 입장은 아니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구스타프에 대해서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남편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요." 캐롤라인은 쌀쌀하게 말했다.

럿셀은 어깨를 움츠리자 담배 꽁초를 창밖으로 내던지고 차를 출발시켰다.

캐롤라인은 이 사건이 이것으로 그치기를 바랐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며칠 후에 알게 되었다. 구스타프가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캐롤라인은 저녁 식사 전에 항상 가족 전원이 모이는 거실로 천천히 내려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 안쪽으로 한 걸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 캐롤라인은 순식간에 억센 팔에 안기고 말았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어." 놀란 그녀를 럿셀이 웃으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 지난번에는 그렇게도 주지 않았던 입술을 오늘 밤에 주시겠지요?"

"럿셀, 빨리 손을 놓아요!" 그녀는 힘주어 말하고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바둥거렸다.

"키스만 한 번 - 그것이면 됩니다." 그는 목쉰 소리로 고집했다.

"싫어요!" 그녀는 크게 외쳤지만, 그의 팔 힘이 워낙 강하여 그의 집요한 입술에서 도망치는 일은 불가능했다. 캐롤라인은 하는 수 없이 여자인 자기의 유일한 무기를 사용키로 했다. 몸부림치는 것을 그치고 그에게 몸을 내맡기는 체했다. 럿셀은 그녀가 정열에 불타 넋을 잃고 있다고 생각하고 팔의 힘을 늦추었다. 그 순간 캐롤라인은 그를 밀어붙이고 힘껏 뺨을 갈겼다.

"아얏!" 럿셀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캐롤라인의 손가락 자국이 생긴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또다시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의 눈은 미친 듯 번쩍였다. "가만 두지 않겠어!"

"럿셀, 두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말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캐롤라인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남편이 사나은 눈초리에 일그러진 표정을 담고 문 옆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스타프!" 캐롤라인은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의 엄숙한 표정에 질려 그 자리에 뻣뻣이 서 버렸다.

럿셀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구스타프 형님, 형님은 굉장한 말괄량이와 결혼했군요." 하고 캐롤라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구스타프의 턱의 근육이 꿈틀 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그가 럿셀을 때리지나 않을까 하고 캐롤라인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는 냉소를 띠고 방안에 들어서자 캐롤라인의 어깨에 팔을 돌렸다. 그는 캐롤라인을 바라보고 희미한 미소를 짓고 나서 럿셀 족으로 돌아섰다.

"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나?"

캐롤라인은 아무래도 해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의 팔 밑에서 몸을 비틀며 애원하듯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구스타프……."

"나중에 이야기해." 구스타프는 사실을 말하려는 그녀의 노력을 한마디로 물리쳤지만, 그녀는 그 이유를 조금 후에 깨달았다. 이자벨과 니콜라가 거실로 들어섰던 것이다. 캐롤라인은 럿셀을 노려봤지만, 그의 갸름한 얼굴에 자만심이 가득 서려 있는 것을 느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한 사나이 같이 보였던 것이다. 캐롤라인은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했다 - 누가, 무엇 때문에, 왜 오늘 밤의 사건을 꾸몄는가를.

니콜라는 저녁 식사가 끝나자 곧 침실로 들어갔지만, 이자벨과 럿셀은 식당에 잠시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이 계획한 작전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임이 명백했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언제나와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친절한 남편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마침내 거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캐롤라인은 적당한 기회다 싶어 입을 때려고 했다. 그러나 구스타프의 얼음같이 찬 시선에 용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구스타프……." 그녀는 추위로 언 손을 난로불에 녹이려고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주저하듯이 입을 열었다. "럿셀은 마치 제가 유혹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에요." 캐롤라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잎담배를 피우면서 서 있는 남편에게 간절한 시선을 돌렸다.

"럿셀이 당신한테 반한 모양이야." 그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자 잎담배를 재떨이에 놓고 손수건으로 가볍게 입가를 닦았다. "당신은 럿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주지 않겠나."

"럿셀은 아주 못된 방탕자예요. 그러나 니콜라는 좋아요. 그래서 그가 내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해서 난처하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어요."

"달링, 참으로 좋은 변명을 생각해 냈군." 구스타프는 그녀에게 다가서면서 희롱하듯이 말했다.

"달링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의 매력으로부터 도망치려고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럿셀이 하던 방식을 흉내내는 것이 좋을까?" 그는 비꼬는 듯한 웃음을 담고 캐롤라인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급작스럽게 그 넓은 가슴에 그녀를 으스러지게 안았다. "때가 되면 당신을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겠지만, 아직은 안 돼. 그때까지는 당신은 남편에게 반해서 열중하고 있는 아내로서의 연기를 해야 해, 럿셀과 시시덕거리는 짓은 그만 둬. 그렇지 안으면……."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구스타프?" 캐롤라인은 쌔근거리며 뒷말을 재촉했다.

"당신을 죽여 버릴지도 몰라!"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런 짓을 하면, 그거야말로 이자벨이 노리고 있는 것죠. 그것이 저들의 목표라는 것을 모르세요? 럿셀의 못된 행동은 계획적인 것이었어요. 오직 하나의 목적은, 당신과 나 사이를 갈라 놓아서 정해진 날이 되기 전에 당신을 아내가 없는 상태로 만들려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휠씬 높은 곳에 있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이제는 쌀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노리는 것을 알았어요. 두 사람은 나를 내쫓으려 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치 않을 거예요."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이 함께 있어 주지 않으면, 나는 상속권을 얻기 위한 조건을 반밖에 갖추지 못하는 셈이지." 구스타프는 무뚝뚝하게 인정했다.

"그래요,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세요?" 그가 팔의 힘을 늦추었기 때문에 호흡이 편해진 캐롤라인이 물었다.

"<>가 어떻게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뜻이겠지?" 그는 힐끔 창 쪽을 쳐다보고는, 의아스러운 듯 쳐다보는 캐롤라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저들이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 지금 당장에."

캐롤라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억세게 입술을 겁쳐 왔다.

"구스타프, 부탁해요! ……."

"가만있어, 바보! 창밖에서 우리를 보고 있잖아. 나는 명연기를 보여 줄 작정이야." 구스타프는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캐롤라인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쳐 왔을 때는 그대로 내맡겨 버렸다. 계모와 럿셀이 엿보고 있는 불괘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키스에 격렬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캐롤라인은 차차 정신을 잃어 갔다. 구스타프는 마침내 두 팔로 그녀를 안아 올리더니 그대로 거실을 나와 이층의 침실로 올라갔다.

 

9

일요일 아침, 캐롤라인은 테라스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이자벨은 언제나와 같이 주방에서 하녀들을 상대로 한바탕 싸움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은 이른 봄이지만 바람은 훈훈했다. 그녀는 내리쬐는 햇볕을 팔다리에 받으면서 안락의자에 길게 누워, 나무 위에서 새들이 둥우리를 트는 것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자벨과 럿셀만 없다면 라 로슈 저택은 참으로 천국이나 다름없을 텐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가 쓰고 있는 하얀 모자를 거칠게 눈 아래까지 잡아내렷다. 의자에서 뛰어내려 모자를 고쳐 쓴 그녀의 눈에, 능글맞은 웃음을 띤 럿셀의 모습이 미쳤다.

"악직은 신혼 초인데 형님은 곧잘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는군요?" 럿셀은 빈정대듯이 물었다.

"구스타프에게는 회사일이 있어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캐롤라인은 상대하고 싶지 않아 매정하게 말하고 일어서자, 기둥 곁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있는 화단 쪽으로 걸어갔다.

"참으로 기특한 마음씨군요. 니콜라도 그만큼 너그럽게 자유를 인정해 주면 좋겠는데." 럿셀은 더한층 그녀를 무시하듯 말했다.

"어머니로부터나 좀 더 자유를 보장받아야 하지 않아요? 니콜라는 당신 행동을 왈가왈부할 기회도 없던데요." 캐롤라인은 신랄하게 반박했다.

그는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어깨를 움츠렸다.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모든 일을 배려하고 있어요."

"당신과 니콜라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가는 이제 자기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아이가 태어난다면 아버지로서의 권리까지 할머니에게 빼앗겨도 좋은가요?" 캐롤라인은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그녀도 럿셀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정원을 산책하고 오겠소."라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연못으로 가는 길로 가보세요, 니콜라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녀가 기운을 좀 차리게 해주세요."

"당신도 그렇군! 남자에게 명령하는 데는 모든 여자가 똑같군요." 럿셀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정원으로 걸어갔다.

"럿셀도 가끔은 옳은 말을 하는군." 조용한 목소리가 캐롤라인 뒤에서 들렸다. 뒤돌아보고 구스타프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럿셀의 말 때문에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여자들은 모두 마찬가지야. 여자들은 미소 하나로 남자를 녹이거든. 그러니 빨리 도망치지 않고 우물쭈물하다간 그 쇠사슬에 묶이고 마단 말씀이야." 구스타프는 피곤한 목소리로 비웃으면서 테라스로 나왔다.

"왜 그런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세요!" 캐롤라인이 대꾸했다.

"나는 오랫동안 하나의 철칙을 지켜 왔소. 그것은 절대로 여자를 신용하지 말라는 것이오. 여자는 육체를 무기로 삼아 남자를 유혹하고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데 어리석게도 거기에 넘어가 함정에 빠지고 나서야, 여자에게 흥미 있는 것은 돈이었고 자기 자시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그는 입에서 잎담배를 빼고 여전히 비꼬는 듯한 표정을 담은 눈으로 캐롤라인을 내려다보았다.

"심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여자란 돈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오."

"구스타프, 모든 여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캐롤라인은 구역질을 느끼면서 반박했다.

"우리 예쁜 마나님, 당신도 예외는 아니야. 당신에게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와의 결혼을 그처럼 간단하게 승낙했던 것이지."

캐롤라인은 비툴거렸다. 쏘아대는 듯한 그의 시선 앞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당신은 정말 비겁해요."

"그러나 사실이잖아."

"물론 사실이에요. 그러나 반드시 당신이 지금 말씀하신 그 사정 때문만은 아니에요."

구스타프는 그녀의 턱을 받쳐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비웃음과 경멸을 담은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돈이 필요하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과연 나하고 결혼했을까?"

, 했을 거예요 - 캐롤라인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은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비웃음을 담고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역시 내 생각이 옳은 모양이군." 구스타프는 마침내 결론을 내리고 또 한번 심술궂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의 턱에서 손을 떼었다.

"만약 당신에게 아내를 필요로 하는 다급한 사정이 없었더라도 당신은 저하고 결혼했을까요?" 캐롤라인이 도전하듯이 되물었다.

"물론 하지 않았어. 당신을 몇 번이고 유혹해서 내 것으로 만들기는 했을 거야. 그러나 당신에게 싫증이 나면, <즐거웠지만 이것으로 이별이다.>라고 쓴 카드를 끼운 꽃다발을 보냈을 거야."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캐롤라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구스타프, 당신 가슴에 있는 것은 하트가 아니라 기계로 만든 펌프예요. 기계는 섬세한 감정까지는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여자 문제에 관한 한은 하트를 가지고 있으면 손해를 보게 되지. 여자와의 사이가 끝장이 날 무렵에는 남자는 자기의 넋까지도 빼앗겨 버릴 때가 많으니까." 그는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논쟁을 계속해 봤자 어릭석은 양과 같이 자기 머리를 단단한 벽에 부딪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한 캐롤라인은 구스타프를 테라스에 남겨 둔 채 천천히 넓은 정원으로 나갔다. 작은 새와 벌레들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울었다.

앞으로 3주일이 남아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3주일, 모욕을 당하고 바보 취급을 당해가면서도, 보상받을 수 없는 그에 대한 사모의 정을 견뎌 나가야 할 3주일이다.

 

어느 날 아침,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자벨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돈을 얼마나 주면 구스타프와의 인연을 끊고 이 집에서 나가 주겠어? 바라는 액수를 말해 봐." 이자벨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돈을 줄테니 구스타프와 헤어져 달라, 그런 말씀인가요?" 캐롤라인은 주저하면서 되물었다.

"맞아, 얼마?" 타산적인 눈이 캐롤라인을 향해 흥정하듯 다그쳤다.

"그런 이야기엔 흥미 없어요." 캐롤라인은 분명하게 불쾌한 표정을 보이고 거절했다.

"5천 랜드 정도면 어때?" 이자벨이 미끼를 던졌다. 캐롤라인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잘 생각해 봐. 5천 랜드라면 당신 같은 아가씨에게는 큰돈이야."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뇌물을 받고 구스타프와 헤어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참으로 한심한 이야기예요!" 캐롤라인은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섰다.

"구스타프란 남자는 언제까지나 아가씨에게 만족할 리가 없어. 그렇게 되면 아가씨는 결국 여기서 그대로 나가야 돼. 그러나, 지금 나간다면 굉장히 큰 돈을 가지고 나갈 수 있잖아?" 이자벨은 친절한 체하며 설득하는데 열중했다.

"당신의 돈 같은 건 욕심나지 않아요, 어머니. 지금도 앞으로도 절대로. 만약 구스타프가 나가라고 한다면 그때는 말없이 나가겠어요 - 돈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캐롤라인은 격렬하게 혐오감을 표시했다.

그녀는 그대로 식당에서 뛰쳐나오자 계단을 두 계단씩 뛰어 올라가 침실로 들어갔다. 순간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기분은 조금씩 가라앉았으나 얼굴은 창백하고 식은 땀에 촉촉이 젖었다.

누구하고든 의논을 해야겠다. 이런 괴로움을 가슴속에 계속 눌러 담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누구에게 털어놓고 하소연할 수 있단 말인가? 캐롤라인은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물끄러미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차차 머리가 맑아졌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자 반가와서 외쳤다.

매즐리는 전화를 걸어 온 것이 캐롤라인임을 알자 반가워서 외쳤다.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그러지 않아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매즐리, 오늘 점심시간에 만날 수 있을까요?" 캐롤라인은 인사말도 없이 물었다.

"좋아요, 어디서?"

"크로우즈 네스트는 어떨까? 깨끗한 가게이고, 사무실에서 가까우니까 당신이 시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데는 거기밖에 없는 것 같아요."

"좋아요." 매즐리는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승낙했다.

전화를 누가 도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캐롤라인은 전화를 간단히 끝냈다.

"그럼 한 시에 만나요."

매즐리와의 통화가 끝나기 직전에 찰칵 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역시 누군가가 도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롤라인은 눈을 감고 또다시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았다. 누가 도청을 했을까?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정하다고 생각한 캐롤라인은 침실에서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래층에 내려가 모두와 함께 차를 마시지 않고 이층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 점심은 필요 없다고 요리사에게 전하도록 티리에게 부탁했다. 머리를 잡고 다크부라운의 슈트아 거기에 어울리는 블라우스를 골라 입었다.

집을 나서서 차를 모는 캐롤라인의 몸은 떠렸다. 무엇인가 사악한 것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것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요즘 몇 주일 동안은 소핑을 나갈 때 이외에는 거의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자벨이나 럿셀과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매즐리와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캐롤라인은 일찌감치 크로우즈 네스트에 도착했다. 그러자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빨간 머리를 흩띈 매즐 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캐롤라인은 옷차림을 관찰하고 미소를 지었다.

"어마, 멋있는 헤어스타일로 하셨네, 그 옷차림도 좋구. 그리고……." 그러나 매즐리의 웃음 띤 파란 눈은 캐롤라인의 어두운 표정을 보자 날카로웠다. "당신 행복해요, 캐롤라인?"

허를 찔린 캐롤라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 물론이지요. 당연하지 않아요?"

"아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그런데 매즐리, 실은 무슨 얘기든 다 편안한 마음으로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캐롤라인은 매즐리에게 자기의 개인적인 문제를 털어놓아도 좋을지 망설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가요?"

캐롤라인은 자기를 건너다보는 걱정스러운 파란 눈을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당히 심각해요."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요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이것저것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식사가 끝나고 짙은 커피가 들어오자, 매즐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캐롤라인 쪽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라이온인가요? 그가 못살게 구나요?" 매즐리는 서슴지 않고 물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실은……." 캐롤라인은 망설였다. 그녀는 곤란한 듯한 제스처를 하고 말을 계속했다. "이런 집안일을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당신 이외에는 나의 이 고충을 말할 만한 사람도 없고."

", 아무에게도 이야기 않겠어요. 믿어도 좋아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여기에 온 거예요. 지금부터 이야기할 테니 들어 봐요."

", 말해 봐요." 매즐리는 재촉하듯이 미소를 짓자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세웠다. 편안한 자세롤 이야기를 들을 작정인 것이다.

캐롤라인은 잠시 주저하였으나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끊겼다 이어졌다 했으나, 이야기가 계속됨에 따라 목소리가 차차 또렷해졌다.

매즐리는 한 번도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마치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은 것같이 시원하고 홀가분해졌다. 막상 이야기를 하고 보니 그렇게 무서운 상황같이는 생각되지 않았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사건조차 있었다.

그러나 매즐리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구스타프와 자기에 관한 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에게만 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라이온의 계모라는 분, 참으로 지독한 여자군요." 캐롤라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매즐리가 처음으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필사적이에요. 그러니까 돈을 줄 테니 나가라는 말까지 나에게 하는 거죠. 다음에는 무슨 일을 당할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당신이 구스타프와 결혼한 것이 애당초 잘못된 일이었어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아요? 구스타프나 맥스웰 힐튼, 어느 쪽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힐튼에게 내 몸에 손대게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요."

"당신, 구스타프를 사랑하게 된 거 아녜요?" 매즐리가 갑자기 물었다. 캐롤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표정으로 나타내고 말았다. "그것참, 정말 곤란하게 되었군요!"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린 매즐리는 작은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매즐리. 그를 사랑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냉혈한이니까요. 그런데도……." 캐롤라인은 울고 싶은 것을 참고 변명하려고 했으나 말이 막혀 버렸다.

"그런데도 구스타프의 교묘한 애무에 당신의 순진한 하트가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 말이지요?" 매즐리가 말을 매듭지었다.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캐롤라인의 손을 꼭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 - 되도록 이자벨의 가족들과 가까이하지 말 것. 거리를 드라이브하든지 시골로 가보는 것도 좋겠어요. 마음이 내키면 점심도 밖에서 들고, 여하튼 구스타프의 귀가 직전까지는 당신도 집에 있지 않는 것이 좋아요. 만일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 집으로 오세요. 침실도 여유가 있고 하니 환영하겠어요."

서로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되는데 다정한 친구가 되어 주는 매즐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캐롤라인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힘없이 미소를 짓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이야기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참으로 고마워요, 매즐리."

오후가 되어, 캐롤라인은 아침보다 훨씬 밝은 마음이 되어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맨 먼저 만난 것은 이자벨이었다. 마치 공포와 함께 위험을 느낀 동물과도 같은 긴장감이 캐롤라인의 온몸을 떨게 했다.

"캐롤라인,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 하고 이자벨은 말하고 캐롤라인을 거실로 들어가도록 재촉했다.

캐롤라인은 몸을 도사리고 대항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자벨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용서해 줘요. 오늘 아침에 돈을 줄 테니 구스타프와 헤어져 달라고, 몹시 실례되는 말을 한 것 같아. 자기가 졌을 때는 깨끗하게 인정해야 하겠지?"

이 여자는 또 어떠한 새로운 계략을 꾸며 놓고 있는 것일까? 캐롤라인은 의아히 여기면서 앵무새처럼 되물었다.

"지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머니?"

"기왕에 결혼했으니, 그것을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지 않겠어?" 이자벨은 미소 지었다.

넘쳐흐를 것 같은 이자벨의 미소가 도리어 캐롤라인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자벨의 사죄가 짐심에서 우러난 것이며 앞으로 자기가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이자벨은 진실로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구스타프를 앞지르기 위해 새로운 책략을 짜고 있는 것일까?

캐롤라인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괴로왔다. 그러나 이자벨의 상냥한 태도는 9월에 들어서 봄이 찾아올 무렵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캐롤라인의 경계심도 차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보다는 15일이 다가옴에 따라, 자기가 라 로슈 저택에서 사는 일이 틀림없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지금으로 보아서는 구스타프가 그녀에게 싫증을 느낀 것 같은 기미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그녀를 요구하는 것이다. 구스타프의 태풍과도 같은 포옹을 받고 있으면서도 이제 곧 이것도 끝난다고 캐롤라인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타일러 왔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 사나이를 사랑하고 말았지만, 그는 곧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앞으로 난 그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런 나약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꼭 느끼게 되는 구역질이다. 그러나 그것은 멀지 않아 자기가 견뎌 나가야 할 슬픔에 비한다면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구스타프의 상속권을 벌률적으로 인정받게 될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캐롤라인이 점심 후 산책에서 돌아오니 니콜라가 테라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캐롤라인, 꼭 말슴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하고 니콜라가 말했으나, 현관 쪽에서 하이힐 소리가 들려오자 겁먹은 듯 뒤를 돌아다보았다. "한 시간 후에 연못가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녀가 속삭이듯 하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자벨이 테라스에 나타났다. 그녀는 매서운 시선을 재빨리 니콜라에게 돌렸다.

"니콜라, 지금은 이층에 올라가서 쉴 시간 아니냐."

", 그렇게 하겠어요. 캐롤라인도 마침 이층으로 올라가는 길이래요." 니콜라는 애원하듯이 캐롤라인을 보았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니콜라는 캐롤라인을 이자벨과 단둘이 있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캐롤라인은 니콜라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니콜라가 설명해 줄 찬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나도 티 타임까지 잠시 쉬는 것이 좋겠다. , 함께 이층으로 가겠니?" 이자벨은 니콜라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셋이서 나란히 잠자코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캐롤라인은 이상야릇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이자벨이 초조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씻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현재의 상태를 변경할 수 없다고 깨달음 때문일까, 아니면 니콜라가 구스타프나 캐롤라인과 이야기를 나눠서는 안 된다는 이자벨의 분부를 어겼기 때문일까……. 캐롤라인은 혼자 자기 방에서, 테라스에서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창가에 앉아서 무심코 정원을 바라보았다.

라 로슈 저택에서는 하루 중에서도 오후의 이맘때쯤이 가장 한가한 시간이다. 넓은 정원의 나뭇잎들이나 화단에는 벌써 봄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 있다. 이자벨과 럿셀만 없다면 이 저택은 참으로 평화로울 텐데……. 하루의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구스타프를 위해서 이곳을 편안한 휴식처로 만들고 싶다.

그때 번쩍 하고 하얀 빛깔이 정원을 스쳐가는 것이 보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캐롤라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니콜라가 집 쪽을 계속해서 뒤돌아보면서 연못 쪽으로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니콜라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은 이층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숲 속으로 사라진 후에 캐롤라인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책 나가, 캐롤라인?"

"어마나!" 깜짝 놀라 뒤돌아본 캐롤라인의 눈앞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자벨이 버티고 서 있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캐롤라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 그래요."

"참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야. 나도 산책하고 싶은데 함께 가도 좋을까?" 이렇게 말하고 이자벨은 캐롤라인과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는 니콜라가 있는 곳과는 반대쪽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볼까?"

캐롤라인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입속이 마르고 가슴의 고동이 빨라졌다. 다 알고 있다. 이자벨은 알고 있는 것이다. 순간 그녀는 니콜라가 자기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매우 중대한 일임에 틀림없다고 깨달았다. 중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이자벨이 이처럼 필사적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니콜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데 신경이 쓰이면서도 캐롤라인은 애써 명랑하게 행동했다. 이자벨도 다르 때와는 달리 마음이 들떠서 말이 많았다. 레가르트 드 레오와 결혼한 직후의 저택의 생활 등을 자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캐롤라인도 그 이야기에 흥미가 생겨 차차 경계심을 늦추었다.

"옛날 이 건물은 포도주를 냉각시키는 데 사용되었단다." 키가 큰 나무와 숲으로 일부가 가려진 낡은 건물로 다가가면서 이자벨이 가르쳐 주었다. "두꺼운 돌로 된 벽에 창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공기나 광선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설계된 거야. 너는 이런 건물에 흥미가 있니?" 이자벨은 캐롤라인을 힐끔 보며 지나가는 말같이 물었다.

", 아주 흥미가 있어요." 호기심이 생긴 나머지 캐롤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안에 들어가 보겠니? 옛날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거야. 너에게는 틀림없이 재미있는 구경일 거야." 이자벨은 캐롤라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서 건물 쪽으로 다가가, 오래 되어 녹이 슨 무거운 빗장을 열었다. 떡갈나무로 만든 문이 그녀의 손에 의해 천천히 열렸다. 이자벨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캐롤라인은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발효한 포도주와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자벨 바로 뒤에 따라붙었을 때는, 더 안쪽을 보고 싶다는 캐롤라인의 호기심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캄캄하네요. 그리고 곰팡내가 몹시 나지요?" 어둠속에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서 캐롤라인은 겁먹은 듯이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어딘가에 양초가 있을 텐데 - 그리고 성냥도. 내가 찾아올게 기다려라." 이자벨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캐롤라인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별안간 문이 꽝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캐롤라인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 어디 계세요? 성냥은 아직 못 찾았어요? 문이 닫혀서 캄캄해졌어요."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움직이는 기척도 없었다. 주위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어머니, 어디 계세요? 어머니!" 캐롤라인은 공포에 빠져 외쳤다.

공포심으로 정신을 잃다시피 한 캐롤라인은 어둠 속에서 자갈이 깔린 바닥을 손으로 더듬어 가며 비틀거리면서 입구로 돌아왔다. 몹시 허둥대며 빗장을 찾았으나, 오랜 세월 동안 썩어 버린 빗장은 그 조각이 한 도막 있을 뿐이었다.

문밖에서 이자벨의 목소리가,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캐롤라인은 마침내 무서운 진상을 깨달았다. 그녀는 갇히고 만 것이다 - 낡은 포도주 창고 속에. 이자벨은 금빛 햇살이 내리쬐는 속에서, 이렇게 손쉽게 승리를 얻게 되어 소리 높이 웃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여기서 나가도록 해주세요!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캐롤라인은 미친 듯이 외치면서 육중한 문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이젠 끝장이다. 캐롤라인은 단념했다. 이 오랜 세월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 어둠 속에 나는 갇히고 만 것이다. 자신의 사악한 계획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이자벨은 절대로 나를 여기서 내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10

주위와 공포로 손이 언 캐롤라인은 양팔로 자기 몸을 안 듯이 하고 문 옆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갇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서너 시간은 지난 것 같다. 쥐들이 기어다녔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캐롤라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 어둠속에서 무서운 시간을 보내면서, 왜 니콜라가 그렇게 허둥대며 자기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했는지 캐롤라인은 곧 짐작이 갔다.

"불쌍하게도, 니콜라……." 캐롤라인은 작은 소리로 웃었지만, 신경질적인 그 웃음소리는 텅 빈 창고 구석구석에 음산하게 울렸다. 니콜라는 나에게 귀띔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자벨 쪽이 한수 위였기 때문에 나는 그 덫에 걸리고 말았다…….

구스타프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캐롤라인은 초조해졌다.

그는 나를 찾으러 올 것인가, 아니면 중요한 때에 내가 자기를 버리고 가버렸다고 생각할 것인가?

"하느님! 구스타프가 빨리 저를 발견하도록 해주십시오. 오늘 밤도 내일도 여기에 갇혀 있게 되면 이자벨의 음모는 성공하고 맙니다. 아무쪼록 도와주십시오."

캐롤라인은 신음하듯이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공기가 탁한 지하 감옥에서 그녀는 차차 졸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점점 앞으로 숙여져서 턱끝이 가슴에 닿으려고 했다. 졸음을 참는 몹시 어려웠다.

몇 분 후, 아니 몇 시간 후일까, 무엇인가를 긁는 듯한 소리에 캐롤라인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문밖에 누군가가 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차갑고 상쾌한 밤공기가 한꺼번에 흘러들어왔다.

"캐롤라인?" 굵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손전 등의 불빛이 캐롤라인의 얼굴을 비쳤다. "어떻게 된 일이야!" 구스타프는 외치면서 그녀를 힘껏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자 밖으로 끌어냈다.

갇힐 때도 갑작스러웠지만 구출될 때도 갑작스러웠다. 캐롤라인은 비로소 마음이 놓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여러 시간 어둡고 축축한 창고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냉정한 캐롤라인도 지금은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자기가 그렇게도 오래 괴로움을 받은 것은 구스타프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손을 놓으세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아픈 다리로 비틀비틀 구스타프에게서 떨어지면서 캐롤라인은 외쳤다. "당신의 아내가 되어 라 로슈 저택에 온 날부터, 난 바보 취급만 당하고 온갖 굴욕을 참아야 하는, 나 자신을 타락시켜 가는 매일이었어요. 이젠 참을 수 없어요. 나가 버리겠어요. 당신이나, 당신의 유산이 어떻게 되든 제가 알 바 아니에요!"

"침착해, 캐롤라인!" 구스타프는 컴컴하고 불길한 그림자같이 그녀 머리 위를 덮치면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격렬하게 흔들었다. "이 일은 끝까지 해치워야 해. 당신에게는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단 말이야. 목적이 달성된 뒤에는 당신이 어떡하든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것이 당신의 제일 큰 단점이에요, 자기 입장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 점이! 거만하고 독선적인 에고이스트예요. 당신 같은 사람은 싫어요!"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어둠 속에서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닥쳐! 적당히 해두고 정신 차려! 그렇지 않으면 한 대 갈기겠어."

구스타프의 말은 곧 효과를 나타냈다. 캐롤라인의 노여움은 차차 진정되어 갔고, 자신의 지나친 언동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창고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구해 준 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이자벨에게 터뜨려야 할 분노를 그에게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제가 있는 곳을 아셨어요?" 캐롤라인은 작은 소리로 망설이듯이 물었다.

"니콜라가 가르쳐 주었지. 어머니는 내일 변호사의 방문이 끝날 때까지 당신을 여기에 가둬 둘 계획이었어." 구스타프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웃옷을 벗어 떨고 있는 캐롤라인을 감싸 주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저고리 안쪽에 남아 있었다. 캐롤라인은 차가운 손가락으로 웃옷을 힘껏 잡아당겼다.

"어머니는 당신 물건들을 슈트케이스에 넣어 감추었고, 럿셀은 당신 차를 운전해다 어딘가에 주차시켜 놓고 왔더군. 당신이 가출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말이야. 이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내일 찾아오는 변호사는 틀림없이 의심스럽게 생각했을 거야."

"그렇네요. 틀림없이 제가 당신을 버리고 나간 것으로 보일 거예요." 캐롤라인이 떨면서 대답했다.

"당신이 나를 버릴 리가 없다는 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또 니콜라가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계획은 성공했을 거야."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구스타프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돌리고 말했다. ", 가요. 친애하는 계모님과 차분히 대화를 나눠야겠어. 당신도 집에서 가만히 듣고 있어 봐."

드디어 최후의 대결의 순간이 온 것이다……. 구스타프의 매서운 표정을 보면서 캐롤라인은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전등이 훤하게 켜져 있는 현관홀을 지나 거실로 들어갔다. 가족 세 사람이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말없이 두 사람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자벨은 여전히 도전하는 듯한 표정으로, 조금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럿셀은 무표정하게 자기 발밑의 카펫을 내려다보고 있고, 니콜라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다.

"어머니, 제안이 있읍니다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캐롤라인이 난로 곁의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나서 구스타프가 말을 꺼냈다. "프로티 머린 엔지니어링사의 어머니 주식을 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저택을 사들이는 것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스타프는 단도직입적으로 요점만 말했다.

한동안 누구 한 사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이자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미치기라도 한 줄 알고 있나?" 그리고는 큰소리로 웃었다.

"미치신 것은 아니지요, 어머니. 돈 때문에 필사적이 되어 있을 뿐이지요."

구스타프가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이자벨은 틈을 주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얼마 내겠니?"

구스타프는, 캐롤라인으로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은 액수를 제시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당신과는 앞으로 모든 관계를 끊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구스타프는 덧붙였다.

"형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아요, 어머니." 갑자기 럿셀이 외쳤다.

"입 닥쳐, 럿셀!" 이자벨은 무서운 눈초리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아니, 잠자코 있을 수는 없어요, 어머니. 저는 더 이상 어머니 음모에 가담하는 일은 못하겠습니다. 구스타프 형님의 제안을 승낙하지 않는다면, 저는 니콜라와 나미비아로 돌아가서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겠습니다." 럿셀은 일어서서 어머니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선언했다.

이자벨은 벌컥 화를 냈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얼마든지 말하겠어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 싫어졌어요. 니콜라와 저는 두 사람만의 인생을 살아 갈 생각입니다." 럿셀은 니콜라를 끌어당겼다.

이자벨은 검은 눈으로 며느리를 밉살스러운 듯 노려보았다.

"니콜라, 내가 럿셀을 선동했구나!"

"니콜라를 책망하지 마세요, 어머니. 나쁜 쪽은 어머니이니까요." 니콜라를 감싸듯이 안아 당기면서 럿셀은 어머니에게 대꾸했다. "어머니, 이번만은 너무했어요, 저도 그 일에 가담했던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죽겠어요."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전부냐?" 이자벨은 내뱉듯이 비꼬았다.

", 더 이상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달링, 우리는 이층에 올라가 짐이나 꾸리지."

캐롤라인은 럿셀을 크게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어머니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야 만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참다운 사나이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럼 어머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제안을 승낙하시겠습니까?" 구스타프가 이자벨에게 다그쳤다.

"승낙하겠다, 주식 배당금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으니까 말야. 라 로슈 저택을 파는 것에도 이의 없어, 너하고 같은 지붕 밑에서 내 여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자벨은 퉁명스러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사합니다. 변호사에게 전화해서 내일 필요한 서류를 가져오도록 부탁해 두겠습니다."

이자벨은 의붓아들을 한 번 노려보고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나가, 그 진동으로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힘껏 문을 닫았다. 이자벨은 자식들에게 무참한 수모를 당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것이다……. 문득 캐롤라인은 그녀에게 동정이 갔다. 이자벨은 싸웠고, 그리고 졌다. 내 아버지도 패자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패자가 될 것이다…….

"그것참, 오늘 밤은 둘이서만 식사를 하게 되는 것 같군." 구스타프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조롱하듯이 웃었다. 그 제멋대로인 자기 만족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내쫓을 때도 이런 얼굴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캐롤라인은 몹시 언짢아졌다. 그리고 음식을 생각하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죄송하지만 식욕이 없어요. 이층에 올라가 쉬겠어요. 목욕도 하고 싶고." 캐롤라인은 웃옷을 벗으면서 매정하게 말했다.

구스타프는 그녀를 붙잡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놀려대듯이 그녀를 향해 크게 절을 했을 뿐이다. 캐롤라인은 재빨리 거실을 나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캐롤라인은 향기 좋은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타월로 온몸을 씻었다. 네글리제를 입은 다음, 가운도 걸치지 않고 맨발로 침실로 돌아왔다. 시트로 들어가면서, "피로하다, 몹시 피로하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샌드위치와 밀크를 얹은 쟁반을 받쳐든 구스타프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는 것은 좋지 않아." 캐롤라인이 제일 좋아하는, 그러나 때로는 혐오하기도 하는 저 명령조의 말투로 그는 말했다.

"친절에 감사해요." 캐롤라인은 예의바른 어린아이처럼 감사했다.

"친절이 아니야, 걱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거야. 당신은 여러 시간 동안을 포도주 저장 창고에 갇혀서 혼이 났잖아. 나에게도 책임이 있지." 그는 캐롤라인의 야윈 얼굴을 탐색하듯이 쳐다봤다.

구스타프가 나의 일을 걱정하다니, 몹시 기이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에게 신경을 써준 일이 없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왜 그럴까? 캐롤라인은 약간 비꼬듯이 물었다.

"거기에 갇힌 것도 제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에 들어가겠지요. 당신은 7천 랜드를 위해서라면 어떤 여자든, 지옥의 불꽃도 싫다고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제가 당한 괴로움 같은 건 대단한 일은 아니지요."

구스타프의 얼굴이 굳어졌다. 얼음같이 차가운 눈을 하고 일어서자, 캐롤라인 머리 위를 덮치듯 하면서 위협조로 말했다.

"샌드위치를 먹고 밀크도 마셔야 해. 당신은 지쳐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구."

배고프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캐롤라인은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고 따끈한 밀크도 마셨다. 전 등을 끄고 누웠다. 위장 근처의 허전했던 느낌은 사라지고 상쾌한 피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차차 졸음이 밀어닥쳤지만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윽고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잠에 빠져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럿셀과 니콜라는 일찍부터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지만, 이자벨이 변호사를 만나고 가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에 그대로 나미비아로 떠날 수 없었다. 구스타프도 오늘은 출근을 하지 않아, 몇 주일 만에 온 가족이 아침 식사 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서먹서먹한 침묵이 흐르고 있어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키가 크고 건장한 50대의 변호사는 티 타임에 맞춰서 도착했다. 차를 마신 후 구스타프가 서류를 꾸미는 문제를 끝내기 위해 변호사를 서재로 안내하자, 이자벨도 당연히 그들과 동행했다. 뒤에는 럿셀과 니콜라, 그리고 캐롤라인이 남았다. 세 사람은 다만 기다릴 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점심 전, 캐롤라인이 혼자서 테라스에 있는데 니콜라가 들어왔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어머니 계획을 알고 당신에게 주의를 주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알고 있어요. 창고에 갇혔을 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었어요. 당신이 내게 귀띔하려고 생각한 것을 어머니가 눈치 채셨던 것 같아요. 당신을 만나러 가다가 붙잡히고 말았어요." 캄캄한 지하실에서 지내던 일이 떠올라 캐롤라인은 몸을 떨었다.

"한 시간이나 당신을 기다렸어요." 이렇게 말하는 니콜라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캐롤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굽히고 니콜라의 볼에 키스했다.

"울지 말아요, 니콜라. 이젠 끝난 일인걸요. 그리고 당신은 앞으로 아주 행복하게 될 거예요."

",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예요." 니콜라는 캐롤라인이 건네 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라인은 니콜라가 부러웠다.

변호사는 점심 전에 일단 돌아갔으나, 오후 두 시가 지나 서명을 필요로 하는 서류를 가지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서명은 곧 끝났고, 한 시간 후 저택에는 구스타프와 캐롤라인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날 밤 말없이 조용한 저녁 식사를 하면서, 패배를 모르는 구스타프가 이번에도 역시 승리를 얻어냈다고 캐롤라인은 생각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자벨이 간사한 책략으로 그 의지를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당연히 그의 것이 되었을 라 로슈 저택이 마침내 그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역할이 끝난 지금 자기도 방해자가 된다는 것을 캐롤라인은 알고 있었다.

밤도 깊어 캐롤라인은 침실의 창 너머로 달빛이 가득한 정원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구스타프도 곁으로 다가오자 나란히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은 말수가 적군.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루 종일 별로 말을 하지 않는군." 그의 콜로뉴 향기가 그녀를 감싸 관능을 건드렸다.

캐롤라인은 그에게 돌아섰지만, 회색의 눈동자는 그의 시선을 피하듯이 내리깔고 있는 채였다.

"제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축하한다는 말뿐이에요. 그리고 여쭙고 싶은 것은, 앞으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냐는 것입니다."

"이대로의 상태를 계속하는 거지." 구스타프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했다.

"언제까지요?"

"내가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을 때까지." 그의 대답은 화가 날 정도로 가벼웠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연히 저에게도 말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저는 팔려 온 몸이니까 당신이 좋을 때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세요?" 캐롤라인의 눈이 반짝거렸다.

"문제가 해결된 지금부터 함께 생활하는 시간은 보너스라고 말하고 싶군. 당신 생각은 어때?" 양팔을 캐롤라인의 허리에 돌려 끌어당기면서 구스타프는 희롱하듯이 물었다.

"저에게 손대지 말아요!" 구스타프를 밀쳐내면서 캐롤라인은 화를 냈다. 그러나 구스타프의 힘을 당할 수는 없어 그에게 끌어안기고 말았다.

"당신 같은 건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이 암코양이야." 캐롤라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구스타프는 웃었다. 구스타프가 탐내듯이 그녀의 입술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캐롤라인의 몸은 곧 깊은 욕망과 그리움에 내맡겨져 구스타프의 몸과 하나가 되었다.

다음 날, 라 로슈 저택에 혼자 남은 캐롤라인은 앞으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하였다. 언제까지나 이런 어중간한 상태가 계속되면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저택에서 나가라는 선고를 받기라도 한다면 그 굴욕은 또한 도저히 견뎌 내지 못하리라. 그녀는 이제 단 하루도 이 저택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나는 구스타프의 아이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절대로 나를 이 집에 놓아 두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오후 저택에서 나가자. 그러면 구스타프가 자기를 내쫓는 수고도 덜어 주게 된다. 그로부터는 이미 많은 굴욕을 당했다. 이 이상 더 굴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손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의 남성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러한 상태로 그와의 생활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 프라이드에 관한 문제였다. 그의 장난감, 좋을 때는 가지고 놀다 싫어지면 내버리는 장난감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남은 길은 오직 하나, 캐롤라인이 이 집에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는 매즐리뿐이었다.

 

"캐롤라인 아니야!"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연 매즐리는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곧 사정을 짐작하고 캐롤라인의 언 손에서 슈트케이스를 받아 들자 조용히 재촉했다. "빨리 안으로 들어와요."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나는……."

"빨리 앉아요, 쓰러질 것 같네요." 매즐리는 캐롤라인을 의자로 끌고 가서 앉힌 다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모두 끝났어요." 캐롤라인은 멍하니 대답했다.

"구스타프가 나가라고 말했나요?"

"아니에요. 그러나 언제 쫓겨날까 하고 벌벌 떨면서 사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그는 처음부터 이 결혼은 언제든지 편리할 때 해소하겠다고 단언했었어요. 저는 쫓겨날 때의 굴욕만은 참을 수 없어요."

캐롤라인은 여기까지 말하자, 억제하여 왔던 슬픔이 봇물 터지듯이 넘쳐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매즐리는 그녀가 울다 지쳐서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기댈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이것을 마셔요. 마음이 가라앉을 거예요." 매즐리는 뭔지 모르는 음료를 그녀 손에 쥐여 주었다.

액체는 캐롤라인의 목을 태우고 위가 아리도록 강하고 독한 맛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곧 안정되었다. 온몸이 따뜻해지고 긴장도 풀렸다.

"고마워요. 매즐리. 당신 이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캐롤라인은 눈물을 닦으면서 힘없이 미소 지었다.

매즐리는 캐롤라인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여기로 오기를 참 잘했어요. 이젠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요."

다음날 아침 식탁에 앉은 캐롤라인은 커피를 마셨을 뿐이었다.

"그이를 사랑하고 있지요?" 매즐리가 테이블 너머로 물었다. 캐롤라인의 눈에는 곧 눈물이 넘쳐흘러, 매즐리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분에게 사랑을 고백했나요?"

"마음이 돌 같은 사람에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이는 사랑 그 자체를 비웃었고 또 하나, 그이와 더 이상 살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있어요……. 그이의 아이를 갖고 말았어요." 캐롤라인은 떨리는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어머나, 참말이에요?"

"그이는 아이가 싫대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매즐리는 말문이 막혔다. 핸드백을 손에 들자 다시 한번 캐롤라인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출근한 동안 마음 편히 쉬어요. 구질구질하게 고민하면 안 돼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해결될지도 모르니까요……." 매즐리는 이렇게 위로하자 현관으로 나갔다.

몇 분 후, 초인종이 울렸다. 세일즈맨이 온 줄 알고 문을 연 캐롤라인은 새파랗게 질리며 우뚝 섰다. 문밖에 서 있는 것은 놀랍게도 구스타프였다.

그가 그녀가 있는 곳을 찾는다면 맨 먼저 올 곳이 매즐리의 아파트였다. 그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주의해서 살펴본 캐롤라인은 갑자기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이 솟아올랐다. 면도도 했고 검은색의 통상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지만, 눈두덩이 붓고 몹시 지친 표정이었다. 분명히 한순간도 자지 못한 얼굴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그를 동정할 때가 아니다……. 캐롤라인은 어거지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무엇하러 여기에 오셨어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하고 이야기하러 왔지." 구스타프는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방으로 들어와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돌연한 그의 출현에 캐롤라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것을 그가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안녕히 계시라는 그 말뿐입니다. 제발 그만 돌아가 주세요." 그녀의 대답은 더 이상 말도 붙여 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매정하였다.

"그런 말버릇은 용서할 수 없어!" 구스타프는 버럭 화를 냈다.

"이제는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어요. 제 역할은 끝났으니까요. 이자벨에 대한 지불도 끝났고 - 당신은 저택과 회사를 독점하셨어요. 오직 한 가지 문제는, 당신과 저와의 가짜 결혼을 아무도 모르게 빨리 해소하는 일뿐이에요." 캐롤라인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거실 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억센 손이 캐롤라인의 어깨를 힘차게 붙잡더니 홱 뒤로 돌려 세웠다. 캐롤라인은 어쩔 수 없이 그와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우리들의 결혼에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그녀는 구스타프의 눈을 피하면서 대꾸했다.

"그것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하고는 말예요! 더이상 아무하고도!"

"당신은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군." 캐롤라인의 숙인 눈, 창백한 볼, 떨고 있는 도톰한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구스타프는 조용히 말했다.

", 부끄러워하고 있어요! 돈 때문에 당신과 결혼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시킨 연극을 한 것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캐롤라인은 그를 올려다보고 말하고는 곧 눈길을 떨구었다. 그러고 나서 결심한 듯이 괴로운 고백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크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게 되고 만 일이에요."

"캐롤라인."

구스타프가 기묘한 목소리로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그를 뿌리치고 창가로 달려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캐롤라인,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해." 구스타프가 그녀 뒤로 다가오면서 나직이 말했다.

"이번에는 무슨 목적에서예요? 아직도 아내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가르쳐 줘요." 몸을 돌려 그와 마주치면서 캐롤라인은 비꼬듯이 물었다.

"당신은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나에게는 어렵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구스타프는 지친 듯이, 그러나 그녀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캐롤라인은 뚫어지게 그를 쳐다봤다. 그를 사랑하고 또 동시에 미워하면서. 그러나 여기서 그에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결심도 하고 있었다.

"왜 여기 왔어요, 구스타프? 저를 비웃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즐긴 다음에 영원히 안녕이라고 말하려는 건가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잠깐 그의 얼굴을 스쳐갔으며, 구스타프는 엄숙한 말투로 통고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라 로슈 저택이야. 당신을 맞아들이러 왔어."

"어마, 그래요? 당신이 손가락만 한 번 탁 튀기면 제가 좋아하며 따라갈 줄 알고 있군요?" 캐롤라인은 비웃었다.

"부탁해, 캐롤라인! 내가 당신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구스타프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그의 거친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 캐롤라인의 노여움과 원망은 사라졌다.

저 떡벌어진 가슴에 매달려 힘껏 안기고 싶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에 대한 그리움을 억제했다. 희롱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버림까지 받는 꼴은 되고 싶지 않다. 구스타프는 지금까지 여러 명의 여자에게 그와 같은 꼴을 당하게 했을 것이다.

"당신과 같이 자만심이 강한 분에게 감히 무릎을 꿇게 하다니요." 캐롤라인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가?"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혼자 있게 해주세요. 이런 얘기 주고받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캐롤라인은 울음이라고 터뜨릴 듯이 호소했다.

구스타프는 기가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가겠어, 캐롤라인. 그러나 헤어지기 전에 꼭 당신에게 말해 두고 싶은 게 있어." 구스타프는 긴 침묵을 깨뜨리자 캐롤라인의 어깨에 손을 얹어 억지로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고뇌에 찬, 그의 눈이 애원하듯 그녀를 들여다보자, 그녀의 얼음장같던 마음의 풀리고 뜨거운 그리움이 가슴 가득히 번져 갔다.

"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야, 캐롤라인.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될 때, 당신은 나를 불쌍히 여길 거라고 말했었지? 지금 나를 불쌍히 여겨줘, 캐롤라인. 당신은 지금 나를 조금은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사랑을 내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거짓말같이 들릴지 모르지만내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없는 게 안타까와.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알아줄지 모르지 - 당신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내 전재산을 기꺼이 내던져도 아깝지 않아." 그의 낮은 목소리는 격렬한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구스타프의 마응의 문이 마침내 열리고 진정이 두 눈에 넘쳤다. 캐롤라인은 환희에 가득 찼지만, 아무래도 매정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당신에게는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은 안 되겠어요."

구스타프의 손이 힘없이 캐롤라인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의 표정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하고 가련했다.

"캐롤라인, 당신은 이젠 나 같은 것은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군?"

"그렇지 않아요!" 캐롤라인은 비참한 표정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집안에 시끄럽게 구는 어린애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 - 언젠가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기억하고 계세요?"

구스타프는 순간 숨을 한 번 삼키더니 곧 만면에 미소를 띠고 캐롤라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달링, 정말 임신했나? 만일 그렇다면 난 이보다더 기쁜 일은 없어."

"그런데 전에 당신이 아이는 싫다고……."

"전에는 바보스러운 말을 많이 했지. 그러나 지금은 달라." 구스타프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믿어도 되나요?" 캐롤라인은 허덕이듯 속삭였다.

"나와 함께 지금 곧 돌아가요, 달링. 짐을 꾸려요. 매즐리에게는 메모를 남겨 두고 가면 되잖아." 구스타프는 부드럽게 입맞추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쓰면 좋아요?" 캐롤라인은 기쁜 나머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써요 - 남편에게 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남편은 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어떤 여자도 그의 마음으로부터 피와 눈물을 짜낼 수는 없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이가 저르 괴롭힌 데 대한 보상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 라고 말야." 그의 고양이 같은 눈은 장나기로 빛나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상함과 사랑이 넘쳐 있었다.

"구스타프." 그의 품에 안기면서 캐롤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구스타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캐롤라인은 오랫동안 숨기고 있던 사모의 정을 나타내며 황홀한 듯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은 절대로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참으로 비참했어요."

"바보 같은 아가씨군." 구스타프가 따뜻이 웃었다. 캐롤라인이 처음으로 보는 따뜻한 눈빛. 저 따뜻함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캐롤라인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비가 오는 밤, 당신을 오두막에서 만난 이후로 나는 계속 당신에게 끌려 왔었어.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허사였지. 어떤 여자보다도 강하게 당신하게 반하고 말았었지, 거기에다 아버지의 유언 문제도 있었고. 당신과 데니스의 약혼이 파기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하늘에라도 날아오를 것 같았지. 당신과 결혼하고 내가 회사와 저택을 되찾은 후에 당신을 내보내는 것쯤은 간단하다고 생각했었어. 그러나 처음부터 나는 자신의 참다운 마음과 격렬하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어."

"사랑하고 있어요, 구스타프." 그에 대한 벅찬 감정이, 억누르려 해도 억누를 수 없는 말이 되어 캐롤라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는 신음하면서 캐롤라인을 안고 얼굴의 여기저기에 입맞춤을 하고 난 다음에야, 떨면서 그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던 캐롤라인의 입술을 겨우 찾아냈다.

구스타프는 이제 사랑을 속삭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말이 필요없다. 라 로슈 저택의 라이온은 나를 아내로서 맞이한 것이다 -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눈동자가, 입술이, 애무가 그것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그에게 기대어 한평생 살아가며, 그의 아이를 기르는 행복 - 나에게 그 이상의 바람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