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1955~ )
가난의 자격
가득한 여백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가을 그림자
가을 나무
가을입니다
거인
걸어온 날들
겨울 나그네
경청
고맙다
고양이 성자
고양이 키우기
고요함의 깊이
고흐의 별
구두에게 물어보네
국밥
국화 앞에서
귀향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그대 안의 바다
그림자놀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금잔화
기다리는 사람
기차는 가고
기차 타고 싶은 날
길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길 위에 흔들리다
꽃 떨어져 밟힐 때
꽃을 버리며
꽃 자국
나
나란타
나목
나무
나무 기도
나비에 대한 명상
나의 치유는 너다
나이
낙과
낙산을 걷다
낙엽과 바이올린
남은 생
남은 시간
내게서 너를 빼면
내 안의 나
너 닮은 꽃 민들레
너를 만나고 싶다
너를 처음 본 그해 봄날
넉넉한 마음
네가 내게로부터 문 닫았을 때
노래
노을 강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눈물
눈물로 쓰는 시
눈발 퍼붓다
눈 오는 밤
늙는다는 것
능소화
늦은 그리움
다 버리고 가라
다비
다시 누군가를
다시 별 헤는 밤
다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단념하듯 날 저물고
달빛 가난
도끼
동백, 당신
따뜻한 그리움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
또 한 번의 기도
마라도
마음 길
마음속의 별자리
마음의 빈집
마음의 절
마음의 행상
마지막 편지
만남
먼 길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멀리 가는 강처럼
멀리 있는 연인에게
모란
몰랐네
못
묶여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물고기
물 먹는 하마
미시령
미안
민들레
바라나시
바람의 시
밤이니까
배려
백내장
벼랑에 대하여
별
별똥별이 가는 곳
병
봄날
봄비
부르는 소리는 아득히
비
비 맞는 나무
비박(卑薄)
비상(飛翔)
빗소리
비올라
빈방
빈 병
뿐이다
사람이 그리울 때
사랑과 평화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을 묻거든
사랑의 기도
사랑의 상실
사랑의 진실
사랑이 내게로 왔을 때
사랑의 이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사막
사모
산꽃 이야기
산다고 애쓰는 사람에게
산다는 게 뭔데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살아라 친구여
살아 있는 것들이 슬프다
살아 있어서 감사
삶에서 깨어나기
삶이 나를 불렀다
상실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새벽에 용서를
새 빛
새장의 문을 열자
서늘한 고요
선운사 가라
선운사 동백
섬
섬, 아침 바다
섬에서
세상의 꼬리
세월
소중한 나
솔방울 하나
스타카토
스펀지
슬픔의 나이
시간에 내리는 비
시간의 세 가지 걸음
아름다운 사람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아픔
안나푸르나의 별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린 가을
어린 왕자
어머니
언제나 너는 멀다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여름의 안주
여우의 사랑
여행은 때로
연어가 돌아올 때
연필 깎는 시간
옛 궁터
오늘 밤 물소리는
오래된 사이
오래 산 집
오래전 헤어진 연인에게
오십견
오지 않는 사람
외경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은둔의 사랑
은어
읍내 여자
이별이 두려운가요
작은 평화
잠 안 오는 밤
장미꽃
재심청구
저 강에
적산가옥
조금 더 위로가 필요할 때
존엄사
종이비행기
죽도록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말이
지나간 노래
지난여름
지우개
짐
집으로 가는 길
짧은 봄
찔레
참회
창
창밖에 은하수가 보인다
첫눈 생각
추락
축복
치유
친구에게
캐논
커피
토닥토닥
파라솔
편지 쓰고 싶은 날
푸른 넝쿨
풀
풍경
하늘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하얀 민들레
한 방울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한 여자가 있었네
함께 있어도 쓸쓸한 세상
햇살 이야기
행복
허공 꽃
헤어지기 좋은 시간
혼자 가는 여행
혼자라고 느낄 때
혼자 있는 시간
후회
흑백사진 속으로
흘러간 당신
12월
가난의 자격
김재진
무엇이 부족한지 그는
11평짜리 아파트 공모에도 떨어졌다.
빈 몸뚱이 하나 눕힐 수 있는 자격 또한
행복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건지
아니면 행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있는 건지
집도, 아내도, 몇 푼 예금도 없이
위를 절제하고 심장을 이식한
그는 이제 공식적으로
가난의 지위에도 미달된 것을 증명한 셈이다.
그렇다고 그가 불행한 것은 아니다.
지인들이 모아준 수술비를 몽땅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줘버리고 웃는
그는 누구보다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가득한 여백
김재진
만약에 네가 누구에게 버림받는다면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으리라.
쏟아지는 빗줄기에 머리카락 적시며
만약에 네가 울고 있다면
눈물 멎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리라.
설령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때아닌 장미를 고른다 해도
주머니에 손 넣은 채 웃기만 하리라.
가시에 손가락 찔린 네 예쁜 눈이
찡그리며 바라보는 그 짦은 순간을 다만
안타까운 추억으로 간직하리라.
만약에 내가 너로부터 버림받는 순간 온다면
쓸쓸한 눈빛으로 돌아서리라.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 긴 시간을
너의 후회가 와 채울 수 있도록
가득한 여백으로 비워두리라.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김재진
별에서 소리가 난다.
산 냄새 나는 숲 속에서 또는
마음 젖는 물가에서 까만 밤을 맞이할 때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겨울은 더 깊어 호수가 얼고
한숨짓는 소리.
가만히 누군가 달래는 소리,
쩌엉쩡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
바람소리,
견디기 힘든 마음 세워 밤 하늘 보면
쨍그랑 소리 내며 세월이 간다.
가을 그림자
김재진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나서는 황혼은
물 빠진 감잎에 근심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선 여윈 추억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가을 나무
김재진
눈앞이 잠깐 흐려오거나
텅, 텅, 텅, 소리 내며
가슴이 서늘하게 비어버릴 때
가을 나무는 가을 나무,
하늘은 구두 뒤축 구겨 신고
걷는 남자 어깨에 물끄러미 앉아 있는 앵무새,
사랑해요, 라는 단 한마디밖에 하지 못하는 바보 앵무새,
흔들면 화르르 눈물 떨구는 가을 나무는 가을 나무,
내가 정말 추수하는 농부였다면
내가 정말 멍석 위의 고추였다면
아, 내가 그만 빨갛게 익은 저 잠자리였다면
가을 나무는 가을 나무,
가을날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다 나무의 수액으로 흐르고 있다.
가을입니다
김재진
한 그루 나무이고 싶습니다.
메밀꽃 자욱한 봉평쯤에서
길 묻는 한 사람 나그네이고 싶습니다.
딸랑거리며 지나가는 달구지 따라
눈 속에 밟힐 듯한 길을 느끼며
걷다간 쉬고, 걷다간 쉬고 하는
햇빛이고 싶습니다.
가끔은 멍석에 누워
고추처럼 빨갛게 일광욕하거나
해금강 바라뵈는 몽돌밭을 지나는
소금기 섞인 바람이고 싶습니다.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이
구두 아래 바지락거리는 이맘 때
허수아비처럼 팔을 벌린 내 마음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거인
김재진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 여기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할 때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 속에서 더 이상
내 안을 비추는 따뜻한 빛 찾을 수가 없을 때
답답함이 세력을 얻어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내일이 안 보이는 깜깜함에 갇혔을 때
어딘가에 매달려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어하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한때 내가 미워했던 사람과
한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벽들과
벽들이 갈라놓은 질식의 공간과
저녁의 식사와 아침의 푸른 공기 사이에 박혀있는
갈구의 절박함
그러나 기도는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기도는 또 하나의 나
내 안에 숨어 있는 거인을 불러내는 일이라네
걸어온 날들
김재진
한 장의 낙엽을 보며
내 걸어온 날들을 생각합니다.
꽃이 되기 전의 씨앗
그리고 잎이 되기 전의 새순같이
우리는 모두 눈부신 날들이 있었습니다.
겨울 나그네
김재진
점점 더 눈이 퍼붓고 지워진 길 위로 나무들만 보입니다
나무가 입고 있는 저 순백의 옷은 나무가 읽어야 할 사상이 아닌지요
두꺼운 책장 넘겨 찾아내는 그런 사상 말입니다
그대가 앉아 있는 풍경 뒤에서 내가 노을이 된 것은 알 수 없는
그런 사상 때문은 아닙니다
그대라고 부르는 그 이름의 떨림이 좋아 그대를 그대라 부르고 싶을 뿐,
또 한 번의 사랑이 신열처럼 찾아와서 나를 문 두드릴 때
읽고 있던 책 내려놓으며
그대는 나무가 입고 있는 그 차가운 사상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대, 단 한 번 내가 가슴속에 쌓아두고 싶은 맹세나 기도 같은 그대
그대가 퍼붓는 눈발이라면 나는 서 있는 나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가 바람이라면 나는 윙윙 울고 있는 전신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눈 위에 세워놓은 이정표 따라 슬픔 쪽으로 좀 더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그대는 쏟아지는 하늘입니다
경청
김재진
저무는 날 파도가 하는 소릴 들었네.
비오는 숲 새들이 하는 소릴 들었네.
햇살 아른대는 봄 같은 겨울
멈추어 선 채 지켜보는 그림자 소릴 들었네.
네 몸을 적시는 비가 내 몸을 적시고
네 안을 적시는 눈물이 내 안을 적시던
꽃 피는 행성의 행복한 날을 들었네.
고맙다
김재진
너를 밟고
네게서 나는 것들을 먹고 살면서도
고마운 줄 몰랐네 대지여
너를 마시고
네가 적신 숲에 깃들어 살면서도
고마운 줄 몰랐네 강이여
지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숫자만큼
각자의 고향이 따로 있어도
어머니 가신 뒤 고향도 사라졌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네 삶이여
고마운 줄 몰랐네 그대여
내 곁에 존재하는 소중한 당신을.
고양이 성자
김재진
우리집 개나리 나무 밑에 도둑고양이들이 산다.
한 번도 도둑질하다 들킨 적 없어도 도둑이라 불리는
고양이는 억울할지 모른다.
한 번도 시 쓰는 장면 들킨 적 없어도
시인이라 불리는 나처럼
가끔은 모든 것이 황당할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이 허망해 사람들은 때로 눈물을 흘린다.
개나리나무 밑, 조그맣게 뚫린 토굴에 안거하던
고양이들이
햇빛을 받기 위해 화단으로 나오던 날
나는 그들과 친해지기로 했다.
친해지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도둑고양이가 아니다
어떤 삶이 고귀하듯 어떤 삶은 또 그만큼 환멸이다.
어떤 삶이 고행이듯 어떤 삶은 또 그만큼 쾌락이다.
세간에 나와 생선 뼈 뜯고 있는
고양이가 문득 성자처럼 느껴지던 날
민들레가 폈다.
엄동의 가운데를 뚫고 있는 느닷없는 꽃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삶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 시가 해줄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나는 혹시 도둑고양이, 아니
도둑시인인 건 아닐까.
꽃을 만들어내는 흙 속의 저 뿌리나
일용할 양식을 만들기 위해 생을 바치는 농부에 비해
아무것도 세상을 위해 하는 일 없는 것 아닐까.
고양이가 나왔다고 떠드는 아이들이 알고 있는 세상과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간격이 너무 넓어
밤마다 나는
고양이처럼 훌쩍 뛰어넘기 힘든 벽 앞에 서야 한다.
고양이 키우기
김재진
전화가 온다.
문자가 아니라 전화라면
중요하거나 심각한 일이다.
급하게 받자마자
고양이를 키워볼까? 한다.
하다가 만다.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야.
혼잣말 던지며 포기한다.
정 줄 때는 몰라도 정 떼기는 힘들어.
키우기도 전에 죽을 것부터 걱정하며
책임질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데 단호하지 않다.
한 번도 단호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주춤거리다가 다 늙었고
머뭇거리다가 다 놓쳤다.
기죽지 마. 라고 문자 남기며
액정 속으로 그녀가 사라진다.
고양이 하품하는 이모티 하나 남긴 채
또 하루가 갔다.
고요함의 깊이
김재진
의미 없는
백 마디 말보다
마음에 평화를
주는 한 마디가 소중하고
무관심한
백 마디 말 보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한 마디가 아름답다
백 마디
공허한 위안보다
말 없는 한 곡의
음악이 더 심금을 울리며
백 송이 장미보다
병상을 지키는
단 한 사람의 친구가
더 향기롭다
고흐의 별
김재진
압셍트를 마시며 고흐가 말했다
별이 아를에서만 빛나는 건 아니야
론강에 비치는 별은
별이 아니라 폭죽이지
슬픔과 절망이 뒤섞인 함성 말이야
그건 하늘에서 작렬한 내 인생 같지
내 귀에는 들려, 폭죽처럼 생이 터지는 소리가
그건 눈에 보이는, 그러니까 붉은 포도밭이나
사이프러스 나무 같은 것과는 달라
나는 지금 압셍트를 마시지만
때로는 통째로 영혼을 마시기도 해
화가의 영혼은 언제나 둘이지
하나는 혼강을 비추는 저 별 같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감으로 그려진 지폐 같은 것이야
나는 다시 돌아올 거야
뭔가를 그린다는 것은 어딘가로 돌아간다는 말이지
별이 어디에서 빛나건
그것이 카페 테라스에서 빛나건
고갱의 머리 꼭대기에서 빛나건
빛나고 있는 한 돌아올 거야
구두에게 물어보네
김재진
한 발 건너 또 나무가 우수수
이파리를 흩날리고 있었지.
기다리던 차도 끊긴
길 위에 앉아 너는 새까만 밤하늘을
골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어.
별들이 열어놓은 차 밖으로
꽃 피듯 누군가 노래 부르는 밤이었지.
어둠이 펼쳐놓은 악보 위로 또 누가 그려넣은 시간들이
얼굴 내민 떡잎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어.
내게 불협의 화음을 새겨넣던 너는
비어 있는 오선지야.
눈감고 나무가 뿌려놓은 음표들을 살펴봐.
바스락거리며 길 위를 굴러가는 저
계절의 수레들을 따라가봐.
고단한 음계 위로 걸어가고 있는
구두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란 말이지.
시간은 가고, 세월도 갈 거야.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도 몰라.
사실은 아무 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눈물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 다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또 알면 뭐해. 그냥 그렇게 떠다니면 좋은 걸 뭐.
단양, 여주, 봉화,
닭실마을 지나 청량사 가면
그 어디쯤 있을까 나도 몰라.
서둘러 옛날을 지우는 지우개라도 있다면 모를까.
눈감으면 눈앞이 온통 별밭으로 변하는
그 귀퉁이 어디에다 너를 꼭꼭 상감시켜놓을 거야.
국밥
김재진
한 사람이 가고 국밥을 먹는다.
또 한 사람이 가고 또 국밥을 먹는다.
생과 사가
국그릇 위에 걸쳐놓은 숟가락처럼
어중간하게 갈리고
댓글 다는 그 사이에 문장이 바뀐다.
국밥처럼 삼키고 만 뭉클한 문체
죽음을 불멸이라 오독하며 나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를
문장과 문장 사이의 말줄임표로 읽는다.
국화 앞에서
김재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 살아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 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귀향
김재진
그 봄을 두고 간다.
단풍도 두고 가야지.
다시 올 수 있을까 염려할 것 없다.
온 적 없으니 가야 할 것 또한 없다.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김재진
내가 있기에 그대가 있습니다.
나 또한 그대가 있기에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허공이 있기에 그 자리에 있습니다.
숲에 가서 숲을 보면
떨리는 물푸레나무 가지 하나도
그대가 있기에 거기 있습니다.
오솔길 따라 걷는 순간
그대 얼굴 사라지고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덩달아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길은 끊기고
숲을 물들이던 노을이
사라진 마음 불러 물들입니다.
그대에게 물든 나를 나는 끝내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얹혀 있는 그대를 어디에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업고 가야 하는 그대의 무게
시린 눈빛에 매여 나는
그대가 있기에 거기 있습니다.
그대 안의 바다
김재진
바다를 보며 그대를 생각하네.
그대를 보면 바다를 생각하네.
그대 안에 바다가 있어 나는
하루 종일 앉아 그대를 마시네.
그림자놀이
김재진
불안을 꺼내 화분에 심습니다.
다들 잠든 밤에 혼자 앉아
화분을 살핍니다.
꽃들도 다 자고 있습니다.
유리창을 통해 보는 밤하늘은
적막할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수첩을 뒤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밤마다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화할 데가 없으면서도
그렇게 번번이 수첩을 뒤지는 건
희망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내 마음은 혹시나 하는 희망에
속고 싶어 안달입니다.
희망을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은 것입니다.
심어놓은 불안이 잘 크는지
화분을 파 봅니다.
나와 나의 그림자
어느 것이 환영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김재진
갑자기 모든 것 낯설어질 때
느닷없이 눈썹에 눈물 하나 매달릴 때
올 사람 없어도 문밖에 나가
막차의 기적 소리 들으며 심란해질 때
모든 것 내려놓고 길 나서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 위를 걸어가도 젖지 않는 만월(滿月)같이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벗어나라
벗어난다는 건 조그만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것
남겨진 흔적 또한 상처가 되지 않는 것
예리한 추억이 흉기 같은 시간 속을
고요하고 담담하게 걸어가는 것
때로는 용서할 수 없는 일들 가슴에 베어올 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 위를 스쳐 가는 만월(滿月)같이
모든 것 내려놓고 길 떠나라
금잔화
김재진
풀 위에 앉은 그대를 보았네
한 해를 살고 가는 금잔화처럼
가볍디 가벼운 그대 눈물 보았네
이슬 머금은 산야초들이
햇볕에 몸 말리는 아침
울음을 감추는 벌레처럼
모르게 삼켜놓은 그대울음 보았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새로운 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를 만난 뒤에야 알았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스스로를 사랑한 뒤에야 할 수 잇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물이 마른 뒤에야 알았네
발끝을 적시던 이슬들이
가난한 시냇물 따라 흘러가는 아침
숲에서 한 나무가 베어지는 것이
향기 나는 한 세상이 베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랑을 배운 뒤에야 알았네
기다리는 사람
김재진
설령 네가 오지 않는다 해도
기다림 하나로 만족할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묵묵히 쳐다보며
마음속에 넣어둔 네 웃는 얼굴
거울처럼 한 번씩 비춰볼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던 저무는 해를
눈 속에 가득히 담아둘 수 있다.
세상에 와서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
알고 보면 다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동안 따뜻했던 내 마음을
너에게 주고 싶다.
내 마음 가져간 네 마음을
눈 녹듯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다.
삶에 지친 네 시린 손 잡아주고 싶다.
쉬고 싶을 때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기다림으로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다.
기차는 가고
김재진
해 지네요
반쯤 잠긴 얼굴 꺼내 해님이
물 위에 얹어 놓네요.
물 위로 기차가 지나가요.
가고 돌아오지 않을 이름들이
부표처럼 떠 있네요.
손 흔들어 본들 뭐하겠어요.
세월도 가고 내 님도 간 걸요.
다 가버린 걸요 뭐.
흘러간 유행가나 부르며 추적추적
비나 되어 내렸으면 좋겠어요.
비 되어 저 감물 든 강이나 바다를
휘저어 놓았으면 좋겠어요.
함부로 죽겠다는 말 하진 말아요.
누군 살고 싶어 사나요 어디.
오도카니 앉아서 하늘이나 쳐다보는
꽃들 좀 봐요.
대책없이 비 맞고 있는 그 꼬라지들 말이에요.
걸어서 거기까지 가야죠.
살아서 무덤까지 가야 하듯
갈 데 까지 아등바등 가보는 거죠.
기차 타고 싶은 날
김재진
이제는 낡아 빛바랜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반짝거리는 레일이 햇빛과 만나고
빵처럼 데워진 돌들 밟는
단벌의 구두 위로 마음을 내맡긴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떠나는 친구 하나 배웅하고 싶은
내 마음의 간이역
한 번쯤
이별을 몸짓할 사람 없어도 내 시선은
습관에 목이 묶여 뒤돌아본다.
객실 맨 뒤칸에 몸을 놓은
젊은 여인 하나
하염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머무르지 못해 안타까운 세월이 문득
꺼낸 손수건 따라 흔들리고 있다.
길
김재진
길 위에 있던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생멸의 흔적 알 수 없는 대양의 물방울처럼
지금 내가 걷는 이 길
어디서 끝날는지 알 수 없다.
성주괴공 거듭해온 별들의 행로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길은 다
벼랑을 향해 있다.
칼끝의 꿀을 핥는 혀의 쾌락으로
지상의 시간은 계속되고
온 적 없으니 간 적 또한 없는 세상 속을
잘 빗질해 놓은 단풍잎 같은 길들이
존재의 가벼움 던져 툭툭
떨어지고 있다.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김재진
둥근 우주같이 파꽃이 피고
살구나무 열매가 머리 위에 매달릴 때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는
걸을 수 있는 동안 행복하다.
구두 아래 길들이 노래하며 밟히고
햇볕에 돌들이 빵처럼 구워질 때
새처럼 앉아 있는 후박꽃 바라보며
코끝을 만지는 향기는 비어 있기에 향기롭다.
배드민턴 치듯 가벼워지고 있는 산들의 저 연둣빛
기다릴 사람 없어도 나무는 늘 문 밖에 서 있다.
길들을 사색하는 마음속의 작은 창문
창이 있기에 집들은 다 반짝거릴 수 있다.
아무것도 찌르지 못할 가시 하나 내보이며
찔레가 어느새 울타리를 넘어가고
울타리 밖은 곧 여름
마음의 경계 울타리 넘듯 넘어가며
걷고 있는 두 다리는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길 위에 흔들리다
김재진
도처에 죽음이 입간판처럼 깔려 있다.
길의 끝에
도착하지 않은 이별을 기다리는 사람들 서성거리고
멈추어 서서 보면 이 길,
어디로 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끝난 것이다. 예행연습도 없이
몇 번의 삽질,
삼베 옷자락이나 적셔놓고
그렇게 시시하게 끝나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 강물에다 눈물 하나 보태고
죽음은 그렇게
정거장마다 서 있는 사람들을 일별하며 가는 것이다.
계획된 의식도 없이 흙은
자신의 일부가 될 육신을 받아들이고
몇 번의 삽질을 허락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길,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죽은 이의 주민등록번호를 외며 가는 길,
여기서 비롯된 것인가 우리 삶의 본적?
보다 빨리 사망증명서를 떼기 위해 나는
구청까지 가기로 한다.
죽은 이의 증명을 위해
길 위에 흔들리다.
꽃 떨어져 밟힐 때
김재진
꽃 떨어져 밟히는 그 짧은 사이
한 사람의 생애가 왔다가
간다.
바람은 몸 안에 새소리 하나 심어놓고
살구꽃 진 언덕을
남루뿐인 한 생애가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동안
시간은 잠깐
우물에 비친 바람소리 같다.
내가 너를 안을 때
내 안의 우주가 미묘하게 떨리듯
꽃 한 송이 벌어질 때 하늘로 난 창문 하나 열리듯
너는 없지만
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울던 사람들이 눈물을 닦고
꽃 떨어져 밟히는 길을 손 모으며 걸어갈 때
자신을 쏜 암살자를 향해 합장하며 쓰러지던
마하트마 간디처럼
세상의 슬픔 속에 우린
따뜻한 미소 하나 심을 수가 있을까?
꽃을 버리며
김재진
오늘 아침 꽃병의 꽃을 버리듯
만약 버림받는다면 나는
나를 버린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도 나처럼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랬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나를 버린 것인지 모른다.
내가 배고플 때 나 대신 아무도 밥 먹어줄 수 없듯
내가 버리지 않았는데 나 대신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설령 나를 버렸다 해도
그것은 그를 더 이해하는 기회일 뿐
우리는 단지
세상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조금 더 이해받고 싶은 것이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우리는 먼저 버리려 한다.
꽃 자국
김재진
꽃 핀다
나는 아무 말 할 수가 없다
아무 노래도 부를 수 없다
기어코
지고 말 저것들이 온몸에
자국을 낸다
나
김재진
1
누구인가?
그림자처럼 따르며
가만히 나를 지켜보는 눈은.
머리 흔들어 떨쳐내려 해도
내 속에 누군가 숨어 있다.
숨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 나는?
나는 도대체 어디서?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온 곳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아갈 어딘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속에 숨어 나를 지켜보는 그늘지고 깊은 눈
내 죽고 나서도 어쩌면 그렇게
지켜보고 있을 눈
문득 나는 내가
몇 개의 나로 겹쳐져 있음을 깨닫는다.
2
문득 내가
남의 옷 입고 있는 것 같은 생각들 때가 있다.
보고 듣고 먹고 말하는 것 모두
내가 나라고 여겼던 것이 몽땅
남인 것 같을 때가 있다.
나 대신 걷고 있고,
나 대신 먹고 있고,
나 대신 고민하고 있는 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또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는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느끼며 나는
마치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저 유리 속의 옷처럼
장식되어있는 것이라 생각들 때가 있다.
내 속에 겹쳐 있는 저 많은 나는 누구인가?
쉴 새 없이 소멸하고 생성하는 무수한 시간 중에서
내게 허락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인가?
나란타
김재진
마음에도 폐허가 있다.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박토처럼
황폐한 정신이 있다.
하기야 아직도 황폐하지 않은 정신이 있다면
성자가 아니면 백치다.
아무한테나 잘 줄 것 같아 뵈는 여자를 미화해
백치미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폐허는 석양에 봐야 아름답다는 말만큼이나 거짓이다.
폐허는 언제 봐도 아름답지 않다.
황성 옛터건, 그 당시 이미 만 명이 넘는 학승이 있었다는
천축의 저 나란타 대학이건 간에
폐허는 일종의 쓰레기 하치장일 뿐,
냄새가 박제된 쓰레기 수거장일 뿐,
아름다운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서 피둥피둥하게
살쪄 있거나 탱탱하게 흔들고 다니는 것들이다.
천년이 지나가도 마음의 폐허엔 악취가 난다.
백치미가 있다고 칭송되는
그 얼굴만 반지르르하고 골통은 빈 TV 화면처럼
천년이 지나가도 정신의 폐허엔 쓰레기만 쌓인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것은 그저 쪼르륵거리며 면발 삼키는
내 새끼들의 뱃속에나 숨어 있다.
뱃속에 숨은 채 삼시세끼 챙기는 평생의 그
거지에나 있다.
마음의 폐허 부시고 나면 딴 세상 나올까.
기름기 진득한 국그릇 수세미로 문지르며 나는 오늘도
청소 아니면 설거지로 득도한다.
나목
김재진
옷 다 벗어버린 나무를 본다.
마지막 열매마저 새들에게 내준
가지는 부러져 아궁이로 간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
나무
김재진
문득 눈앞의 세월 다 지워지고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수첩 속에 빽빽하던 이름들 하나같이
소나기 맞은 글씨처럼 자욱으로 번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세파에 치여 각양각색인
남루 또한 지나간 상처마냥 눈물겹고
서 있는 사람들이 한 그루 나무처럼
이유없이 그냥 아름다울 때 있다.
가파른 세월이야 지나면 그뿐,
코끝을 감고 도는
한 자락 커피 향에 두 눈을 감고
비 맞는 나무처럼 가슴 적시는
무심한 몸놀림이 아름다울 때 있다.
나무 기도
김재진
기도가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속 공간이 넓어야 한다.
울리는 공간이 더 커지도록
아무것도 담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과 나의 거리
그 간격이 속 깊은 항아리처럼 비어야 한다.
멀어진 간격마다 그윽한 나무 한 그루씩
심어야 한다.
노각나무 심는 날
나무가 드리는 기도 소리 듣는다.
차꽃같이 하얀 꽃 피우고 싶은
노각나무 큰 키가 마음의 통로 따라
파릇한 수맥으로 올라가던 날
기도가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가진 것 조그맣게 줄여야 한다.
나비에 대한 명상
김재진
한 마리 나비의 날개짓이
바다 건너 태풍을 몰고 올 것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꽃 한 송이를 꺾기만 해도
별들이 깨어난다
자세히 보면 세상은 다 연결되어 있다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허공에 숨었던 꽃이 느닷없이 만개하듯
지켜보면 세상은 놀라움 투성이다
내가 저지르고만 낯 뜨거운 실수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무수한 기적
저지르고, 버림받고, 관계 맺는
기적 아닌 기적
다만 인간이라 꿈꾸고 있을 뿐 나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개는 자기가 개라고 꿈꾸고 있을 뿐
개가 아닐지도 모른다
태풍이 나비의 날개짓인 줄도 모르고 나는
지금까지 내게 속아왔는지도 모른다
나의 치유는 너다
김재진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만난 경우는 없다.
오히려 꼭 그 사람을 만났어야 하는 것이다.
원수같이 헤어졌다 해도
내 인생에 그는 필요한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그와의 경험을 통해
나는 크게 학습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우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큰 산을 보는 데 눈을 크게 떠야 할 필요는 없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우리는 마음 하나에 그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당신이 우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주가 당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정면으로 마주 보는 사람에겐 대부분 꼬리를 내린다.
달려드는 맹견을 정면으로 맞서 물리친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고통을 만나면 두려움 때문에 피하거나 도망가지 말고
그것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라"
행복한 상황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마음 상태를 행복 쪽으로 틀어라
기다림에 시간을 써버리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나이
김재진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보고 싶은 사람보다
볼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던 슬픔을 순서대로 만나는 것이다.
세월은 말을 타고 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침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낙과
김재진
무거운 책은 읽지 않기로 했네 마음이 너무 무거워.
가벼운 책도 읽지 않기로 했네 삶이 너무 가벼워.
고단한 머릿속에 더 집어넣을 것 없이
단순하게, 그냥 단순하게
풀 끝에 달려 있는 물방울같이
살다가 슬며시 떨어지기로 했네.
낙산을 걷다
김재진
생이 아플 무렵 낙산을 걷는다.
조금 헐렁한 신발과 멀리 있는 그리움과
걷다가 자주 쉬는 약한 무릎 데리고
시린 이빨같이 생이 흔들리는 날
낙산을 걷는다.
물들어도 물들지 않는 내 안의 잎들과
끝내 안아보지 못한 슬픈 어깨와
적막이 깊어 더 내려가지 못한
돌층계 밟으며 외로움 따라 밟는다.
디딜 때마다 끌려오는
생의 무게와
남아있는 길의 남아있지 않은 위안과
어둠의 등 뒤에 누가 있는지
고요의 그림자가 성보다 크다.
낙엽과 바이올린
김재진
한 번쯤 하늘을 보듯.
조금씩 높아가는 하늘의 키를 보듯
어쩌다 한 번쯤은
걷고 있는 구두를 보라.
구두가 데리고 간 많은 길들과
낮은 언덕.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 정류장에 서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보라.
기미 낀 누이처럼 먼지 덮어쓴
죄 없는 들꽃 꺾어 머리에 꽂고
가난한 친구를 향해
사랑한다는 한마디 건네어보라.
늦게 핀 해바라기 키 재고 있는
이름없는 간이역에 홀로 내려서
혼자라는 허전함에 길들어보라.
보이지 않던 것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 들리는
쓸쓸한 시간 속에 몸을 낮추고
바이올린 소리에 한 번쯤 귀기울여보라.
남은 생
김재진
며느리를 어머니라 부르며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저귀 갈아 차는
백발의 인생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자식에게 버림받고
뙤약볕에 앉아 졸고 있는
가랑잎 같은 무게
어디로 날려갈지 알 길 없는
태풍 전의 고요처럼
남은 생은 없는 생이다.
없어서 가난한 게 아니라
없는 듯 많아 가난한
잉여의 시간이다.
머릿속 모든 것 다 지워버린 채
있는 듯 없는 듯, 어디에도 없는
남은 생은
있으면서 없는 증발의 시간이다.
남은 시간
김재진
내 생의 남은 시간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라.
그러고도 더 남는 것 있다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앉아 있고만 싶어라.
앉아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적막한 호수처럼 깊어지고 싶어라.
부질없는 이름과 실없는 다툼
상처 준 이 있으면 용서받고 싶어라.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할 시간 허용된다면
아낌없이 주기만 하리라.
주고서 행여 돌려받지 못해도
준 것에 만족하며 침묵하리라
내게서 너를 빼면
김재진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달콤함에 속아
말하는 동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쫓겨
나는 어느새 막다른 곳까지 갔다.
내게서 너를 빼면
남는 건 나뿐이다. 사실은 그렇게 모두
처음부터끝까지
남는 건 저 하나뿐
나마저 나는 믿을 수가 없는데
사랑한다고 너는 말한다. 사랑이
쓰라린 것인지 부질없는 것인지
아니면 누굴 놀리는 것인지도 알 필요 없이
무작정 고귀한 것이란 각본에 맞게
연기하던 내 마음이 깜짝 놀라
바깥을 본다.
내 안의 나
김재진
상처받은 이를 껴안기에 나는 너무 작다
작은 나를 넘어서기에는 너무 작다
멀리 있는 사람이여,
나는 아직 너를 안을 수가 없다.
너 닮은 꽃 민들레
김재진
돌 틈에 피어 있는
너 닮은 꽃 민들레
시멘트 담 사이로 고개 내민
훤하고 착한 얼굴
작지만 약하지 않은
네 웃는 모습 보며 나는
네 노란 웃음 보며 나는
네게 가 안기고 싶다.
힘들어도 표 내지 않는,
밟혀도 꺾이지 않는,
네 얼굴 보며 나는
한 아름 하늘을 안고 싶다
너를 만나고 싶다
김재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둔 금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성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너를 처음 본 그해 봄날
김재진
봄은 오고 너도 온다.
얼음새꽃이 오고, 노루귀가 오고
화야산의 얼레지가 보랏빛으로 오는 그사이
운곡암 지나 주저앉으며
눈물 흘리듯 두 줄로 우는
해금 소리 듣는다.
세상의 절반이 남자라거나
나머지 절반이 여자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으니
세상 모든 것이 너였던 시절이 우리에겐 있다.
해금은 울고
울어서 단숨에
피던 꽃을 지게 하고
지는 꽃 밟으며 가던 길을
돌아서 내려와 다시 간다.
세상 상처 다 품어 안은 어머니처럼 꽃은 오고
오는 꽃 바라보며
닫혔던 산이 환하게 문을 여는 그 시각
너는 온다 처음 봄을 듣는 자줏빛 노루귀처럼.
* 너를 처음 본 그해 봄날‘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전수연이 쓴 곡이 제목. 신날새의 해금으로 연주된 곡의 애잔함에 끌려 쓴 이 시는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화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넉넉한 마음
김재진
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도는
편안한 곡선 하나 가지고 싶다.
뾰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닳고 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멩이처럼 둥글고 싶다.
지나온 길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
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
날카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
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네가 내게로부터 문 닫았을 때
김재진
네가 내게로부터 문 닫았을 때
비로소 알았다 너의 아픔을.
자동차가 멈추고, 다시 시동을 걸기 위해
한바탕 소란을 떤 뒤
그제야 알게 된 사물의 고마움처럼.
한 마디 불평 없이 나를 실어 나르던
딱딱한 저 기계의 노동이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빨리 내 여행은 끝나고 말았으리.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지만
네 속에 고여 있던 아름다운 샘을
어둠에 몸이 빠져 나는 볼 수 없었다
발등에 쏟아지는 사막의 별 또한
자동차가 서지 않았더라면
혼미한 잠에 끌려 놓치고 말았으리.
네가 내게로부터 떠나고 말았을 때
비로소 알았다 너의 사랑을.
노래
김재진
떠오르는 그 순간
말하라.
늦지 않도록.
내 마음속에 그대가 있다고 말하라.
버려도 버려도 내 안을 맴도는
버릴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하라.
늦지 않도록 말하라.
바람을 타고 흘러가 어젯밤
내가 부르던 노랫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기 전에.
노을 강
김재진
사랑도 못잊을 사랑이라면
흐르는 강물인들 멈춰 가지 않겠나.
아물지 않고 덧나기만 하는 상처처럼
이별도 그렇게 아픈 이별이라면
메마른 눈빛인들 젖어오지 않겠나.
원근의 들판 위로 새들이 물어놓는
금빛 햇살
눈감아도 온몸 가득 흘러 들어오는
초록을 수태 시키는 저 햇살
사랑도 마음 깊어 넣어둘 수밖에 없는
말 못할 사랑이라면
속 모를 강이라 한들 타오르지 않겠나.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 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눈물
김재진
꺼내어도 꺼내어도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당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구속이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그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 징역이다.
제 형기 다 채우고 만기 출소한 아들 입에
두부를 떠 넣는
죄 없는 어머니의 눈물 같은,
사람이 사람을 잊을 수 없다는 그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형벌이다.
눈물로 쓰는 시
김재진
때로 눈물로 시 쓸 때가 있습니다.
방학이면 급식을 받지 못해
끼니를 걸러야 하는 아이들을 보거나
달구경도 못하는 달동네에서
손주들 데리고 연명하다 자리에 누운
병든 할머니를 보거나
어머니날
아 으 오 우 ... 끊어지지 않는
모음의 음절만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하며 노래 부르는
뇌성마비 장애인의 '어머니 은혜' 들을 때
눈물보다 시가 더 젖을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죽고, 정신이상에 걸린 엄마 옆에서
가장 갖고 싶은 게 뭐냐는 후원자의 질문에
겁먹은 듯 기어드는 소리로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대답하는
아이의 눈망울은
말뿐인 시를 흐느끼게합니다.
구석구석 숨어 있던 증오와 분노,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어느새 녹여버린
모음뿐인 노래를 따라 부르다
시보다 더 진실한 게 눈물이란 걸
아프게 깨닫습니다.
세상이 외면하는 가난 때문에
세상이 외면하는 아픔 때문에
제대로 못 먹고 병든 사람이
아직도 우리 곁에 너무도 많습니다.
눈발 퍼붓다
김재진
누가 지우개 들고 내 인생
지우고 있다.
손가락이 지워지고, 발가락이 지워지고
퍼붓고 있는 눈 속에서 누가
파랗게 울고 있다.
다가가면 아직 지워지지 않은
동백 한 그루,
생전에 낙엽지지 않을 혓바닥 빼물어
살아있음 경악한다.
집들이 지워지고 길들이 지워지고,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어디쯤 서서 지워지는 중일까?
보냈던 편지 되돌아와 우편함에 꽂히듯
지워져 버린 나를 누군가에게
반송시키고 싶다.
수취인 불명, 또는 배달 착오의 내 인생,
아는 이 없는 어딘가로 반송시키고 싶다.
눈오는 밤
김재진
편지를 쓴다.
모처럼 하얀 종이 위에 써 보는 편지.
사각거리며 걸어가는 연필심 따라
어디선가 환하게 눈 내린다.
미끄러지는 사람 있는지
까르르 입을 막는 여자의 웃음소리 들린다.
검은 세상의 하얀 약속들.
누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에 몸을 담그는 거라
너는 가르쳐 주었다.
어느새 눈 그치고
사각거리던 편지도 마침표에 닿는다.
지치도록 걸어가도 집이 보이지 않던
젊은 날의 시간.
아무도 몸 담그지 않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편지의 말미에 얼른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다. 추신한다.
늙는다는 것
김재진
잘난 그대도 아파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아라
도대체 뭣이 그리 중하다고 역설을 하는가
늙는다는 것은 차츰차츰 잃어가는 것이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게 스쳐 가는 것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폐부를 찔러올 때
회한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제대로 배설할 때 그것을 최고의 복이라 하거늘
뭐 하러 그리 한눈을 파는 것인가.
산다는 것은 말이지
평범한 일상이 최고의 행복이려니
더 바래 무엇하고 혹여 고통에 시작일 뿐이다.
참을 수 없도록 죽을 만치 아파보지 않았으면
세상을 탓하지도 말고 생긴 대로 어우러져 살자
너나 나나 잠시 머무른 여행자일 뿐이다.
능소화
김재진
능소화가 핀다.
저 꽃이 피기까지 나는
몇 벌의 옷을 갈아입고
몇 번의 식사를 했던 것일까?
지금 피고 있는 저 꽃은
눈앞에 있지만 다시 보면 없다.
다만 피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숨 쉬고 가끔 사랑에 빠지는 그대여
그대가 느끼는 그것 또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우리는 어디에도 없다
늦은 그리움
김재진
어딘가 자꾸 전화해야 할 곳이 있는 것만 같다.
안부를 물어야 하루가 끝날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한 번씩 부재중 전화를 확인해봐도
간 사람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화분에 꽃이 피고
어디에 둔 건지 보이지 않는 물뿌리개 찾듯
어딘가 자꾸 안부를 확인해야 마음 놓일 것 같은
그런 날이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다 버리고 가라
김재진
설령 당신이
백 송이 수선화를 선물 받는다 해도
그 누구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가질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
이룰 수 있는 많은 것들 쌓여 있다 해도
어느 것도 당신이 포기하지 못해 괴롭다면 무슨 소용인가.
뜻대로 되는 것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사랑해야 할 것들과 사랑해서는 안 될 것들 사이에 끼어
당신의 마음이
한치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어질 때
채울 수 없을 뿐 당신의 삶은 텅 비어 있다.
설령 당신의 하루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보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에 의해 가득 찬다 해도
누구에게도 당신의 따뜻한 마음 낼 수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인가.
어느 날 당신이 가까운 이로부터 상처 나거나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워질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
전쟁같이 하루가 힘겹고 외로울 때
다 버리고 한 번쯤 자신으로 돌아가라.
다비
김재진
소라 껍데기를 주워 귀에 대어보면
바닷소리가 난다.
불길 속에 마른 솔방울을 넣으면
쏴~아 하고 솔바람 소리를 내며 탄다.
타오르는 순간 사물은 제 살던 곳의 소리를 낸다.
헌옷 벗어 장작 위에 누울 때
나는 무슨 소리를 내며 타오를까?
다시 누군가를
김재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햇볕과 그 사람의 그늘을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두운 밤 나란히 걷는 발자국 소리 같이
멀어져도 도란도란
가지런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 속에 사려 잇는 기쁨을 찾아내는 것이다
창문을 활작 열고새 바람 들여놓듯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별 헤는 밤
김재진
가령 네가 나를 사랑한다 쳐보자.
너 기다릴 걸 생각하며 내 굼뜬 발길이
머무르지 않고 너를 향해 달려간다 쳐보자.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맑은 밤 은하수처럼 눈부시게 살아나고
별 하나에 네 이름을,
그리고 또 별 하나에 문득
잊었던 얼굴들 한꺼번에 떠오른다 쳐보자.
어머니,
내 살아왔던 만큼의 힘 다해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가령 어머니만큼의 사랑으로
그렇게 내가 너를 껴안을 수 있다 쳐보자.
시냇물, 꽃, 동그라미, 고드름, 첫눈 오는 날의
작은 발자국,
가만가만 그 발자국 위를 밟아보는
목 긴 구두 하나,
그렁그렁 눈물 머금고 있는 연못 속의 별들
가을하늘, 소나기, 채송화, 맨드라미,
어머니, 나는 아무래도
살아갈 시간보다 사랑할 것들이 더 많은가 봅니다.
다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김재진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라는 표현은 어딘가 낡았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 눈은
그렇게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공중전화에 매달려 있는 한 여자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푸르고 짙은 청록의 녹,
한동안 닦지 않아 멈춘 시계처럼 어느 날 문득
당신에게 향하는 내 마음도 녹이 낀 걸 알았습니다.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그 말의 무게에 눌려 나는 시퍼렇게 잊혀졌을 뿐입니다.
발 동동 구르며 누군가를 갈망하던 여자는
긴 의자가 놓여 있는 공원 저쪽으로 사라집니다.
여자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나는 무심코
당신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맙니다.
실수였습니다 그건.
한동안의 지독하던 습관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나눌 누군가를 호출하려 했을 뿐,
정말 실수였습니다 그건.
그렇듯 당신을 사랑했던 것 또한 실수였습니다. 나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눈이 그치고
다시는 비치지 않을 듯 싶던 태양이
세상의 지붕을 적십니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김재진
1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그때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
용서할 수 있으리
자존심만 내세우다 돌아서고 말던
미숙한 첫사랑도 이해할 수 있으리
모란이 지고 나면 장미가 피듯
삶에는 저마다 제철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찬물처럼 들이키리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나로 인해 상처받는 누군가를 향해
미안하단 말 한마디 건넬 수 있으리
기쁨 뒤엔 슬픔이
슬픔 뒤엔 또 기쁨이 기다리는 순환의 원리를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너에게 말해주리.
2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그렇게 쉬 너를 보내지 않으리
밤새 썼다 찢어버린 그 편지를
찢지 않고 우체통에 넣으리
사랑이 가도 남아있는 마음의 흔적을
상처라 부르지 않으리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망설이기만 하다 포기하고만
금지된 길들 찾아가 보리
사랑에는 결코
금지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리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그때 내 마음 흔들어놓던
너의 그 눈빛이 일러주는 길을 따라
돈에도 이름에도
그 아무것에도 메이지 않으리
3
너를 위해 다시 한번 살아볼 수 있다면
지키지 못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
한 톨의 씨앗 속에 나무가 숨어 있듯
절망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을 보여주리.
다시 한번 너를 위해 살아볼 수 있다면
물방울 같은 네 손톱에 물들기 위해
해마다 봉숭아를 내 가슴에 심으리.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널 기다리며 서성대던 영화관 앞을
만날 사람 없더라도 서 있어 보리.
영화가 끝나면 밀려 나오는 사람들 속에
네 얼굴 찾아보며 가슴 두근거리리.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한 방울의 눈물도 너를 위해 흘리리.
때로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 다 바쳐 너를 사랑하리.
단념하듯 날 저물고
김재진
눈 내린다.
일제히 하얀 점으로 변하는
눈동자 속의 십이월,
길 위로 나서기 위해
목이 긴 구두를 꺼내 신는다.
여름의 끝에 헤어진 친구를
눈발 속에서 찾다.
그대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일에
정말 나는 길들어 있을까.
사막에 눈 내리면
검은 머리카락이 반쯤 젖는다.
타클라마칸이나 라자스탄쯤의 십이월,
때로는
지쳐서 주저 앉아 있는,
내 청춘의 사막 쯤에 숨겨놓은 십이월,
가끔은 그대 침묵 앞에
온몸을 사르르 숯으로 빛나고 싶을 때 있다.
달빛 가난
김재진
지붕 위에도 담 위에도
널어놓고 거둬들이지 않은 멍석 위의
빨간 고추 위로도
달빛이 쏟아져 흥건하지만
아무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부지, 달님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나요?'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지.'
'잠도 안 자고 그럼 우린 어디로 가요?'
'묻지 말고 그냥 발길 따라만 가면 된다.'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도 무섭지 않았던 건
아버지의 눌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부지 그림자가 내 그림자보다 더 커요.'
'근심이 크면 그림자도 큰 법이지.'
그날 밤 아버지가 지고 오던 궁핍과 달리
마을을 빠져나오며 나는
조금도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도끼
김재진
도끼로 누가 나무를 찍고 있다.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나무
나무가 아프고 나도 아프다.
아무 소리 못하고 당하는 것이
세상엔 참 많다.
세상엔 너무 아픈 것들이 많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픈 것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상처가 세상을 굴리고 있다.
동백, 당신
김재진
섬에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문을 열면 후두둑, 꽃이 지던 그 섬에
동백 보느라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동백은 절벽 아래 몸 던지는 궁녀처럼
치마 뒤집어쓰고 뚝, 수직으로 낙하하곤 했습니다
동백이 환각이듯 섬은 내게 환각이었습니다
사실 산다는 것 모두가 환각입니다
번개같고,그림자 같고,꿈같고, 뜬구름 같은 것입니다
환각 속에서 나는
살아가는 동안 나를 따라오던
욕망이나 집착 같은 것들은
한순간 다 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차가운 물 속으로 발을 담갔습니다
물은 금세 예리한 비수처럼 나를 찔렀고
물의 은장도에 베는 순간 나는 나의 성급함이
여전한 욕망이나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집착을 버리기 위해 당신을 버립니다
당신을 버리기 위해 또 오랫동안 동행했던 아픔도 버립니다
다시 떨어진 동백이 물위로 떠내려가는 날
한번쯤 당신 이름을 불러보겠습니다
당신 조금도 아프지 않아도 아픈,
비수같은,
당신,
그립거나 말거나......
따뜻한 그리움
김재진
찻잔을 싸안듯,
그리움도
따뜻한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생각하면 촉촉이 가슴 적셔오는
눈물이라도
그렇게
따뜻한 눈물이라면 좋겠네
내가 너에게 기대고
또 네가 나에게 기대는
풍경이라도
그렇게
흐뭇한 풍경이라면 좋겠네
성에 낀 세상이 바깥에 매달리고
조그만 입김 불어 창문을 닦는
그리움이라도 모락모락
김 오르는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
김재진
마음속에 한 여자 있네.
비가 와도 떠내려가지 않는 여자
가끔은 마음속에
졸졸대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 들리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 가버린 세월
침묵이 두려워
지나간 유행가나 불렀네,
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
변하지 않는 건 슬픔밖에 없네.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는 건 슬픔밖에 없네.
마음속에 한 여자 살고 있네.
바람이 세차도 날려가지 않는 여자
그 여자의 마음속에
나는 없네.
또 한 번의 기도
김재진
내가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더 외롭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나를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에게
떠올리기만 해도 다칠듯한
아픔으로 맺히는
대상이 되지 않게 하소서
순간을 머물다 세상과 멀어진다 해도
눈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미소로 남으며
내게 기대는 그 누군가에게
그 자리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고마운 존재가 되게 하소서.
마라도
김재진
바다여, 무슨 인연으로 나는
이 슬픔의 끝에 앉아 너를 적시고 있느냐
마음 길
김재진
마음에도 길이 있어
아득하게 멀거나 좁을 대로 좁아져
숨 가쁜 모양이다.
갈 수 없는 곳과 가고는 오지 않는 곳으로
그 길 끊어진 자리에 절벽 있어
가다가 뛰어내리고 싶을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어
열리거나 닫히거나 더러는 비틀릴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항아리 있어
그 안에 누군가를 담아두고
오래오래 익혀 먹고 싶은 모양이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
달그락달그락 설거지 하고 있는 저녁
일어서지 못한 몸이 따라 문밖을 나서는데
마음에도 길이 있어 나뉘는 모양이다
마음속의 별자리
김재진
간밤에 비가 내려 세상이 다 투명합니다.
빗방울이 씻어놓은 투명한 세계를
심호흡하며 받아들입니다.
내 몸은 빛나고
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길을 건너온 투명한 별빛이
햇빛에 가려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별들은 수풀 위에서
반짝거리거나 총총거리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곳곳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며 위로 받고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이 하나씩 없어지고
우리가 알고 있던 곤충의 이름들이
새로 펴낸 도감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해도
머리 위를 비추는
별들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햇빛이 사라지는 깜깜한 밤이 와도
별빛은 수풀 위를 비추고 있습니다.
마음의 빈집
김재진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붙들어 놓겠습니다.
못 박아 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못 박아 놓겠습니다.
그대 보내고 잊었던 세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을
묶어놓을 데 없어
드러누울 집 한 채 없이
빈 몸으로 삽니다.
마음의 절
김재진
마음이 먼저 가 절을 만난다.
더러는 만남보다 먼저 이별이 오고
더러는 삶보다 먼저 죽음이 온다.
설령 우리가 다음 생에서 만난다 한들
만나서 숲이 되거나
물이 되어 흘러간들 무엇하랴.
절은 꽃 아래 그늘을 길러 어둠을 맞고
문 열린 대웅전은 빈 배 같아라.
왔어도 머물지 못해 지나가는 바람은
이맘때 내가 버린 슬픔 같은데
더러는 기쁨보다 슬픔이 먼저 오고
더러는 용서보다 상실이 먼저 오니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한 생은 눈물 같아라.
마음의 행상
김재진
하루를 걸어 백 리를 가고
이틀을 걸어 그보다 멀리
깃들일 곳 없는 마음 하나 내려놓으려
억울한 마음 하나 내려놓으려
찌르레기는 노래하고 쑥독새의 울음이
바람 아래 수근거리고
쑥부쟁이의 어둠, 엉겅퀴의 어둠, 물 위를 스쳐가는
작은 물떼새의 종종거리는 어둠
하루를 걸어서 백 리를 가고
이틀을 걸어서 그보다 멀리
방랑의 행상 되어 걷다간 쉬고, 걷다간 쉬고
서러운 마음 하나 내려놓으려
억울한 마음 하나 내려놓으려
마지막 편지
김재진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게 놓여진 시간 앞에 나는 다만
정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다시 당신을 사랑할 기회가 생긴다 해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한 번뿐
더 이상의 사랑은 내게
무의미한 반복입니다.
만남
김재진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통째로 그 사람의 생애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아픔과 그가 가진 그리움과
남아 있는 상처를 한꺼번에 만나기 때문이다
먼 길
김재진
오늘 저 먼길을 가기 위해
당신의 눈빛이 필요합니다.
내 사랑 너무 깊어 병들고
가야 할 길은 마른 자작나무 가지처럼
툭툭 소리 내어 꺾어집니다.
오늘 바람 부는 세상, 바람 속을 헤매며
길 나서기 위해
타다가 지는 불씨만큼이라도
당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김재진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드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 소리나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 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 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멀리 가는 강처럼
김재진
이제 내 마음의 순결이 조금 더 굳어지기 전에
모르는 누군가를 더 받아들이고 용납해야지.
죽음을 앞둔 노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눈 속에 깊이 담긴 삶의 진실을 조금 더 이해하고
끌어안아야지.
어쩌면 한 번쯤 더 사랑을 하고
한번쯤 더 고통 앞에
멀리 가는 강처럼 소리 낮춰 소용돌이친다 해도
마음의 근육 조금 더 굳어지기 전에
상처 받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다독거려야지.
용서하기 힘든 일도 내려놓으며
가보지 않은 길이라도 익숙한 사람처럼
성큼성큼 두려움 없이 걸어가야지.
이제 남은 시간 더 어두워지기 전에
화분에 물을 주고 장미꽃 향기를 들여놔야지
멀리 있는 연인에게
김재진
바깥으로 나오면
건물의 입구에 앉아 있거나 비스듬히 기댄 채
찢어진 바지 더 찢거나 담배피고 있는 여자.
편지를 보냈어요 산성비에 젖어
당신의 주소가 흐려졌어요.
우체통을 본다 낡은 추억의, 붉어지는 그림자.
뒤뚱거리는 육교밑으로 즐거운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는 아무도 기다릴 사람이 없는 것을 안다.
조명 아래는 하루살이 떼처럼
붐비는 사람들.
붐비며 기어코 잊으려 하는 사람들.
한 줄의 기타, 몇 가닥으로 번지는 그림움 뜯어내며
그 여자는 노래한다 부드러운 목젖 떨리며,
그 여자가 말하는 그리움을 나는
모른다.
멀리 있는 연인에게 아무것 보낼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고
내 속에 남아있는 한 방울의 기다림도 짜내버린다.
가령 누가
어떻게 말한다거나, 노래한다거나,
누군가 죽는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은행나무 아래서 나는
은행잎으로 어지러운 길들이
인간의 꿈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을 본다.
은행나무 사이에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당신을 생각해요.
그래, 가령 누가 누구를 생각한다 이건
그리움관 다르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이 가고,
시간의 사이에 납작하게 낀 사람들이 나사못처럼
건물 속에 박혀있다.
또 한 통의 청구서,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이름들을 나는
수첩 가득 적어 넣기도 한다.
죽은 가수를 추모하는 콘서트가 열리고, 시간이
멀리있는 연인의 우편함을 기웃거릴 때까지.
모란
김재진
우리 만나던 밤은 모란이었다
헤어지던 날은
바람이 섬의 모든 문을 흔들어대고
자줏빛 심장마다
구멍을 뚫어놓았다
섬에서 피는 모란은 바람의 통곡이니
그것은 만날 수 없던 날의
타버린 심지 같다
호랑이 눈 같은 불길 하나 가슴에 안고
한 생을 모란같이 살던 사람은
모란이 지면 따라서 진다
바람의 유서 같은 상처를 남긴 채
모란이 질 때면 따라서 져라
후두둑 지고 나면 섬의 오월은
밤을 지키는 맹수의 눈으로
등불 하나 없어도 환하게 탄다.
몰랐네
김재진
한때 상처라고 알았던 것
꽃눈인 줄 몰랐네
꽃 피우기 전의 눈, 꽃눈
터지기 전의 침묵 또한
꽃인 줄은 몰랐네.
겹겹이 싸여 있는
침묵의 그 화사함
한마디 말 전할 수 없어
목이 타던
단절의 그 순간이
기다림인 줄 몰랐네.
만지면 묻어날까 숨어 있는 그 빛깔이
기쁨인 줄 몰랐네.
아직은 차가운
바람 속에 길 나서면
도망간 사랑이 나를 흔드네.
못
김재진
당신이 내 안에 못 하나 박고 간 뒤
오랫동안 그 못 뺄 수 없었습니다
덧나는 상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당신이 남겨놓지 않았기에
말 없는 못 하나도 소중해서입니다.
묶여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김재진
한때는 사람을 피한 적이 있습니다. 문을 닫아도 찾아오는 소리들이 싫어 귀를 막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덧 조용해지고 온종일 떨어지는 시간이 창틀에도 책상 위에도 먼지처럼 쌓였습니다. 가만히 손가락 대어보면 세상은 한꺼번에 먼지처럼 묻어납니다. 어느 날 마음속의 먼지를 훌훌 털어 내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던 당신을 몰아낸 것입니다. 햇살 쏟아지는 뜨락에 앉아 다시 나는 은박지처럼 반짝입니다. 창틀에 놓아둔 화분에 물 주거나 환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내 마음에 찾아온 자유를 기뻐합니다. 묶여 있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을 묶어두는 어떤 것도 결코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물고기
김재진
견디기 힘든 슬픔은
침묵이라 부른다.
그 뒤엔 아마 고요가 따라갈 것이다.
상복 입은 행렬과 다른
커다란 돌 하나 던져 넣을 때
호수가 보여주던
파문 뒤의 묵언 같은
고요는 그런 것이다.
고요는 마침내 속을 비워
햇빛에 투명한 내부를 비춰주는
물고기 같다.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물고기는 물결 대신
지느러미를 흔든다.
슬픔이 와도 눈을 뜬 채
지느러미만 흔든다.
입만 벙긋거리며 아무 말 하지 않는
호수가 물고기 속에 숨죽이고 산다.
물 먹는 하마
김재진
속이면 속이는 대로
놀리면 놀리는 대로
물 먹는 나는
하마입니다.
뚱뚱한 몸 풍덩거리며 자맥질하는
대책 없는 슬픔입니다.
무능하다고 손가락질해도
변명 한마디 할 수 없는
벌레입니다.
월급날을 기다리다 월급날도 까먹은 채
야근하고 눈 붙이다 시말서 쓰는
속 터지는 중생입니다.
기차게 머리 좋아 승승장구하거나
줄 한번 제대로 서 대박 터뜨린
똑똑한 이들 기세에 눌려 허리 한번 못 펴본
영원히 잠수하고 나오고 싶지 않은
하마입니다.
미시령
김재진
바깥은 어둡고
남루한 세월이 와 있고 가령 누가 나를
생각한다고 해보자
톱밥난로 앞에 바알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며 누가 나를
머뭇거리지 않는 시간 속에서 아련하게
건져 올렸다고 생각해보자.
유리창엔 체온 모아 김이 서리고 주전자의 물이
쓰르라미같이 노래 부르며 뚜껑을 여닫을 때
한물 간 누구의 첫사랑도 불빛 속에서
타닥타닥 수줍은 소리내어 피고 있다 해보자
그래, 이제 허연 머리 빗겨 쪽지고
물기 없는 허접데기 손 모아 찬물 올리는
노모의 눈 속에 그렁그렁 고여 있다 해보자.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 설국으로 가는 마음이 무거워
미시령 유형가는 차들만 사슬을 감고
인구 몇백 또는 몇몇, 그리움 깨진 집들 향해
뒤뚱거리며 무너진다 해보자.
바깥은 여전히 어둡고, 암담한 세월이 와 있고
잊혀진 사람들 목소리의 윤곽만 네모난 벽에
두런두런 묻어온다 쳐보자 그렇게
가는가, 아득하나 묻갊아둔 이야기들 눈길 위
새새끼 발자국 따라 재재재 날아서 가버리는가
타다닥 소리 죽여 타는 속내 들척여놓고
가령 누가 가버린 듯 나를 잊었다고 해보자
잊혀져 아예
없는 사람되어 살고 있다 쳐보자.
바깥은 아직 어둡고
황폐한 바람이 칼 가는 소리나 내며
고개 너머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허기진 산짐승의 걸음마다 에이는지
에움길 따라 누가
어흥어흥 짐승의 소리로 울고 있다 쳐보자.
미안
김재진
허락 한 번 받은 적 없으면서
꿀을 가져갔으니
꿀벌에게 미안하다.
허락 한 번 받은 적 없으면서
네 마음에 기대었으니
네 마음에 미안하다.
내 인생의 따뜻했던 순간들
꿀벌같이 잉잉거리던
그 달콤한 시간들을 공짜로
누리기만 했으니
세상에게 미안하다.
민들레
김재진
날아가는 홀씨는
민들레의 우주다.
꽃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별이 있다.
꽃은 다 우주다.
걸릴 데 없이 만행하는
꽃씨는 불성이다.
천지간에 만개해 있는 식물의 불성
꽃이 피어도 사람들은 꽃 핀 줄을 모른다.
날아가는 꽃을 봐도
별빛인 줄 모른다.
바라나시
김재진
하늘에 강이 떠있다.
손가락 없는 문둥이들의 전생
힌두교도의 붉은 빈디가
깜깜한 내 금생에 찍혀 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다.
자욱한 먼지와 들끓는 파리
맨발로 걷는 사람들 따라
내 다음 생이
소 되어 어슬렁거리고 있다.
어디서 멈출 건가 이 지독한 윤회
타다 남은 시신 떠내려가는
강 한쪽에선
양치하거나 머리 감는 사람 보인다.
입은 채 몸 잠기는 하늘 위로
해가 진다.
떠가던 촛불 사라지고 없는
세상의 끝
구미꼬 집 앞에 걸터앉아
울고 있는 나를 본다.
하늘로 강 흐른다.
가트 한 쪽에서 흩어지는 연기
더러운 사리를 입고 있는
내 전생이
3000년 전 바자르를 헤맨다.
바람의 시
김재진
1
바람이 불면 네가 온다.
바람은 몸이 없어
꽃지는 소리나 창문을 두드리는
손가락 예쁜 저녁의
발자국에 얹혀서 온다.
가만히 있어도 흔들릴 것 같은
아프고 시리고 쓰리기만 한
하루가 가면 너도 간다.
어제는 별을 보여주던 하늘이
오늘은 풀 끝에 빗방울을 매단다.
눅눅한 사연을 실어 나르는
바람의 발바닥이 젖고
오지 않는 소식을 기다리다 멈춘
언덕의 풍향계가
너 오는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다.
2
내려와 있던 그를 포구에서 만났다.
묶여 있는 배들이 출렁거리고
빨간 등대가 있는 곳까지 걸어오라며 그는 내게
문자를 보냈다.
어눌한 말투로 왜 여기 내려왔는지 설명하며
아직도 노래를 부른다고 얼굴 붉히는 그는
이름이 없다.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가지고 있는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한 채 그저
무명가수로 한 생을 살아온 그는 지금
선배의 가게를 봐주기 위해 여기 와 있다.
바람 많은 섬 한쪽에
바람이 되어 날아온 것인지
그리움은 아픔의 한 종류라고 더듬거리는
그를 따라 그가 봐주는 선배의 가게에 앉아
삶이 저질러놓은 잦은 패배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늙은 후회와
마이크 앞에만 서면 결코 어눌하지 않은 그의 노래를
눈 감은 채 듣는다.
나이 먹은 기타가 소리를 내고
읊조리는 그의 생은 그가 쓴 시(詩)다.
바람이 불러주는 대로 따라 적는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가 흘린 눈물이다.
밤이니까
김재진
울어도 돼, 밤이니까.
울긴 울되 소리 죽여
시냇물 잦아들듯 흐느끼면 돼.
새도록 쓴 편지를 아침에 찢듯
밤이니까 괜찮아 한심한 눈물은 젖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넋 나간 모습으로 앉아 있거나
까마득한 벼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아아 소리치며 뛰어내리거나
미친 듯 자동차를 달리거나
무슨 상관이야.
사람들의 꿈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문득
부러진 연필심처럼 버려진 채
까만 밤을 지샌들 무슨 상관이야.
해가 뜨면 그뿐
밤이니까 괜찮아.
말짱한 표정으로 옷 갈아입고
사람들 속에 서서 키득거리거나
온종일 나 아닌 남으로 살거나
남의 속 해딱해딱 뒤집어 놓으면 어때
떠나면 그뿐,
가면 그뿐인데.
배려
김재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이해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나 보다.
눈물 뒤에 숨겨놓은 화해처럼
삶은 때로
지극히 통속적인 곳에 진실을 감춰두고
네가 내게 보냈던 그 미소가
너의 배려였다는 사실을 나는
또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때로
지독한 미움을 퍼붓는 것과 같아서
사랑 뒤에 오는 아픈 망각을
너는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기쁨을 지워버릴 오랜 환멸을 너는
그렇게 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그
통속적인 한마디를 이해하기까지 나는
이해보다 질시를,
미소보다 냉정을,
그리고 용서보다 미움에 길들어 있었나 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그 낡은 독백이
나에 대한 너의
마지막 배려였다는 사실을 나는
사랑이란 연극이 다 끝난 뒤에야 깨달았을 뿐이다.
백내장
김재진
내 귀에 살고 있던
풀벌레 소리 여럿
가을의 동선 따라 옮겨 간다.
별에서 온 문자를 보관하던
노각나무 편지함은 비어 있고
시간이 만든 사물함에 열쇠를 꽂으며
황혼이
공원의 벤치 위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
윤슬에 눈이 부신 강물이 길을 잃고
내 눈동자에 살고 있던 맑은 별 하나
희미한 슬픔 뒤로 사라져 간다.
벼랑에 대하여
김재진
한 줄의 편지 쓰고 싶은 날 있듯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있다.
견딜 수 없던 마음 갑자기 풀어지고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이 문득
이해되어질 때 있다.
저마다의 상황과 저마다의 변명 속을
견디어가야 하는 사람들
땡볕을 걸어가는 맨발의 구도자처럼
돌이켜보면 삶 또한
구도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세파에 부대껴
마음 젖지 않는 날 드물고
더 이상 물러설 데 없는 벼랑에 서보면
용서할 수 없던 사람들이 문득
용서하고 싶어질 때 있다.
별
김재진
나는 나를 만드네
별이 기다림을 만들듯
긴 기다림에 지진 사람들이
새로운 만남 앞에 머뭇거리듯
나를 끌고 다니던 숱한 아픔들이
나를 만드네
고통을 자르고 돋아나는 또 다른 고통의 싹
버릴 수 없는 상처들이 나를 만드네
별은 투명한 고해
상처로 얼룩진 시간을 비추는
차가운 거울
살갗에 닿는 새벽공기가 두려워
얼굴을 감싼 내가 걸어가네
뒤에서 바라보는 또다른 나
푸른 수증기가 어른거리고
얼어붙은 길을 마찰하는 바퀴들이 요란스레
시간에 다친 사람들을 쓰러뜨리네
별똥별이 가는 곳
김재진
나와 다른 너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의 오랜 습관
네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초식동물이 날고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듯
소유와 번민을 사랑이라 믿는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새가
꽃씨 쪼듯 물고 온 밤하늘을
지붕 위에 널어놓고
별똥별의 안부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것이 단지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견고한 콘크리트를 뚫고 돋아난
새싹의 힘 같은 것
떨어진 별똥별의 행방을 찾아
영혼의 망원경을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고배율의 렌즈가 펼쳐놓은 달의 표면을
느릿느릿 떠다니는 무중력의 한 생이
사랑이라 새겨놓은 은하계의 비밀을
병
김재진
가슴속에 하나씩
슬픔 없는 사람 있으랴.
슬픔이 깊으면 병 된다지만
마음속에 하나씩
아픔 없는 사람 있으랴.
마음에 병 없기를 원하지 말라.
가끔은 병도 친구가 될 때 있다.
힘들고 먼길을 가야 할 때
아픔도 가끔은 양식이 될 때 있다.
봄날
김재진
문 앞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네.
봄빛은 환하고 슬픔은 옅네.
귀 기울여 들어보면 어디쯤
당신이 살금살금 발끝을 들고
걸어오며 흥얼대는 콧노래 들리네.
이맘때면 눈감아도 잠들 수 없네.
꽃 지는 소리 들려 잠들 수 없네.
가진 것 다 버리고 싶어 혼자 나온 마음이
처마 끝에 매달려 살랑거리고
그 마음에 매이기 싫은 또 하나의 마음이
당신 생각하다가 짙어져 가네
봄비
김재진
평행봉이 비를 맞는다
허공에 매달린 채 젖고 있는 그네는
고행중인 성자같다
우산을 든 채 나는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 본다
분주하던 소리 그치고
조용하다
다들 집 나가고 없는 모양이다
목련이 벌어지고
작약은 지금 가부좌한 채 정진중이다
비 오는 날 공원에 가보면
묵언 중인 선방 같다
막 터질 것 같은 하두 하나 거머쥔 채
꽃들이 용맹정진하고 있다
침몰하지 않고 견딜수만 있다면 나도
한 소식 할는지도 모른다
부르는 소리는 아득히
김재진
그대 갑니다
흐르는 물에 씻기는 멀리 밤개가 짖고
천지 가득 꽃내에 취해 심약한 그대 눈물을 만져봅니다
풀더미에 앉아 잠시 그대 눈물을 만져 봅니다
발등을 적시고 달아나는 차가운 물소리에 씻겨
부르는 소리는 아득히 흩어지고 맙니다
그리운 시냇물
섬섬옥수의 달빛이 긴 머리채를 빗어 내리는
다시는 오지 않는 밤입니다
비
김재진
발부터 촉촉이 젖으며 오는 비는
누군가를 기다리다 돌아서는 비
온몸을 적시며 화내는 비는
기다림을 배우지 못한 성미 급한 비
차는 끊기고 길 어두운데
그대 만나지 못해 고개 숙인 저 비는
비인지 비애인지
우산도 못 펴들고 부슬부슬 내리네.
비 맞는 나무
김재진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비 맞는 나무는 비 맞는 나무다.
온종일 줄줄 흘러내리는
천상의 눈물을 온몸으로 감수하는
비 맞는 나무는 인내하는 나무다.
모든 것 다 용서하신 어머니같이
비 맞는 나무는 다 받아들이는 나무다.
온통 빗속을 뚫고 다녀도
날개에 물방울 하나 안 묻히는 바람처럼
젖어도 나무는 젖지 않는다.
세속의 번뇌 온몸으로 씻어내려
묵묵히 경행하는 수행자처럼
맨발로 젖은 땅 디디고 서 있는
비 맞는 나무는 비 안 맞는 나무다.
비박(卑薄)
김재진
방랑자로 살고 싶었다 빈 몸으로 떠돌며
총총총 쏘아대는 별빛의 탄환 속에
수통 하나 차고 비박하거나
무장한 삼림 속을 서책 들고 엄호하며
가난한 행군으로 닿고 싶었다.
하루치의 보행이 멈추는 시각
침상 끝에 나앉아 일석점호하며
세상의 일몰에 섞이고 싶었다.
박명(薄明) 속에 길들이 새처럼 떠오르고
수목(樹木)은 묵언 속에 생을 토한다.
방랑자로 살고 싶었다 나는
기쁨의 전류 속을 단신으로 관통하며
구두 아래 흙들을 밟고 싶었다.
비상
김재진
잠들지 마라 내 영혼아.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연 농아처럼
하염없는 길을 걸어 비로소 빛에 닿는
생래의 저 맹인처럼
살아 있는 것은 저마다의 빛깔로
부시시 부시시 눈부실 때 있다.
우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이 인생.
덫에 치어 버둥거리기만 하는
짐승의 몸부림을 나는 이제
삶이라 부르지 않겠다.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숨 막힘,
사방으로 포위된 무관심 속으로 내가 간다.
단순히
우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넘어진 것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그렇듯
넘어짐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일으켜 세우는 자 없어도 때가 되면
넘어진 자들은 스스로 일어나는 법,
잠들지 마라 내 영혼아.
바닥에 닿은 이마 들어 지평선 위로
어젯밤 날개를 다쳤던 한 마리 새가
힘겹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아라.
빗소리
김재진
비워야 할 것 비워내지 못하는
버려야 할 것 버리지 못하는
내 마음의 구정물 통.
서성거리며 문 밖에 서있는 내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의 아픈 오물.
홈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벗은 발바닥에 닿는 새벽 두 시.
멀쩡히 잠든 사람들의 얼굴 밟고
욕된 시간들이 일어난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눈감지도 못하는 미망
아무것도 믿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비올라
김재진
우산도 없는데
비올라?
이쪽에도 못 서고 저쪽에도 못 서는
결정(結晶)되지 않은 그대 눈물
나무는 언제쯤 울음을 울까.
언제쯤 나무는 제 몸 흔들어
노래를 할까.
섬유질의 부드러운 속살 문질러
언제쯤 따뜻한 숨결 토해낼 수 있을까.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 맞으며
그대 집 앞에 닿는 순간
누군가와 마주 서 있던 그대 모습
함께 쓰고 있던 우산 벗겨지고
벗겨지는 우산 밖으로
눈감은 채 고개 젖히던
그
대
빗방울 묻은
입술
그 입술 쳐다보는 내 마음
시벨리우스, 눈물, 커피 향, 오선지
그리고
비, 비, 비
비올라 소리 ㆍㆍㆍㆍㆍㆍ.
빈방
김재진
내 안에 있는 평화를 위해 노래합니다.
내 안에 있는 진실과
내 안에 있으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문 닫힌 사랑을 위해 노래합니다.
아무도 없는 내 안의
불 꺼진 방을 위해 노래합니다.
작은 식탁과 낮은 책상
마음의 조명을 밝혀야 볼 수 있는
사랑스런 불빛 따라 노래하며
내 인생의 따뜻했던 순간들을
손가락 뻗어 만져봅니다.
자물쇠 하나 채워놓지 않은 방 안에 있으면서도
방문 열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여리디여린 사람들을 위해 노래합니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내 가족과
세상 모든 다친 사람들을 위해 이 노래를 보냅니다.
빈 병
김재진
그 무엇에라도 절실할 수 있다면 좋겠다.
비 그친 뒤 쏟아내는 나무 향기에 숨 막혀
질식해 죽을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꽃 보기 위해 왔다 가는 가을 햇볕처럼
파리하고 텅 비어 있는 세월
시드는 것들이 싫어
화병에 아무것도 꽂지 않는다.
뿐이다
김재진
분노 속에 들어가
분노를 자기라고 믿으며 더 광분한다.
기쁨 속에 들어가
기쁨을 자기라고 믿으며 더 열광한다.
생각을 자기 자신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그 생각을 비판하면 상대를 공격한다.
공격받고, 공격하며 생각에 갇혀
생각의 종이 되어 시키는 대로 산다.
생각이 자기라고 굳게 믿은 나머지
생각이 다른 이를 원수처럼 미워한다.
어쩌겠나.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날씨가 나쁘다고
화내는 꽃을 본 적 없다.
바람이 거칠게 다룬다며
바람에게 복수하겠다는 파도를 본 적 없다.
바람은 바람이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고
꽃은 꽃대로 제 모습을 지킬 뿐이다.
파도는 밀려와 해변을 적시고
모래는 젖어도 다시 마를 뿐이다.
꽃잎 떨어져 길바닥에 누워도
뿌리와 가지는 다음 해를 준비하고
때가 되면 사람은 꺾일 뿐이다.
사람이 그리울 때
김재진
빈 가방 하나 메고 길 나섰지요.
새도록 내린 비가 나 모르는 새
하늘을 거울처럼 닦아 놓았어요.
얼굴이 비칠까 봐 자꾸 하늘만 쳐다봤지요.
비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알고 보면 다 제 생각만 하고 사니까요.
꼭꼭 숨어 한세월 잊어버렸죠.
문득 사람이 그립데요.
그럴 땐 길 나서야 해요.
먼 길 나서며 모든 것 싹 잊어버려야 해요.
그리움은 아픔이니까.
아픔은 또 병든 시간이니까.
나이가 들면 어떤 아픔도 두려워지기 마련이죠.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성가시거나 두려울 뿐이지요.
그리워지는 건 그럼 뭔가요?
약해진다는 증거일까요?
나이가 든다는 게 그러나 좋은 것도 있어요.
웬만한 건 다 용서해버리죠.
용서가 아니라 회피라고 해도 좋아요.
그럴 땐 길 떠나고 싶어요.
밤에 내린 비가 길 밖으로 나를 자꾸 떠미니까요.
사랑과 평화
김재진
바람이 붑니다.
쓸지 않고 버려 둔 나무 아래는
떨어진 잎새들이 수북합니다.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람들은 내가 앉아 있는 이쪽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바쁘기만 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그렇듯 힘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치의 틈도 없이 바쁜 저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나와 똑같이 저 사람들도 자기 삶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나와 똑같이 저 사람들도 자기 삶에서
고난을 피해 보려 하고 있습니다.
나와 똑같이 저 사람들도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을 겪어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해리 팔머의 Avitar 교재에서 차용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김재진
나 몰래 집 나간
내 마음 돌아오지 않고
남의 마음만 바람불어 심란한 날
길 위에 앉아 길 끝을 본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원래의 그 자리,
너 없던 그 평온하던 자리로 돌아가야지.
나의 전쟁은
내 마음속으로
네가 들어온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너에게 쫓겨난 내 마음
집 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불에 덴 사람이 불에 놀라듯
네 이름 석 자에도 놀라는 나.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만 아무도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랑을 묻거든
김재진
사랑을 묻거든 없다고 해라
내 안에 있어 줄어들지 않는 사랑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니
누가 사랑했냐고 묻거든 모르겠다고 해라
아파할 일도 없으며 힘들어할 일도 없으니
누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거든
나를 적시며 흘러가 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강물이라고 해라
사랑의 기도
김재진
영하의 대지를 견디고 있는 나목처럼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제 생애 바친
깜깜한 땅속의 말 없는 뿌리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누리지 못해도
온몸으로 한 사람을
껴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잔잔하고 따뜻하며 비어 있는 그 마음이
앉거나 걷거나 서 있을 때도
피처럼 온몸에 퍼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상실
김재진
이제 나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 쓰려 한다
한순간에 눈이 머는 공격적 사랑에
다쳐보지 않은 사람은 이 글 읽지 말기를
사랑은 그렇게 온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대단하게 만드는
바보 같은 버릇이 사람에겐 있다
고여 있는 샘물같이 찰랑거리며
사랑은 단지 누군가 퍼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모른다
운명적인 사랑이란 없다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
어리석은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을 필연이라 믿을 뿐이다
물질이 세상을 지배하듯
우연 또한 세상을 지배한다
우연히 얻은 사랑을 잃어버린다 해서
억울해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다
사랑의 진실
김재진
당신이 나 아닌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듯
나 또한 당신 아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흘러가는 물이 바위를 만나 부서지듯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설령 당신이 정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 한들
내 마음에 머루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별 속에 제 별 하나 빛나듯
셀 수 없이 많은 사람 속에 당신이 빛나는 건
변하지 않는 내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내게로 왔을 때
김재진
사랑이 내게로 왔을 때 나
말 없는 나무로 있고 싶었다
길 위에 서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
해님은 또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빛 고운 열매. 등처럼 걸어둔 채
속으로 가만가만 무르익고 싶었다
다시 사랑이 내게로 왔을 때 나
누구냐고 넌지시 물어보며
감춰둔 그늘 드려 네 안으로
소리 없이 그윽하게 스며들고 싶었다
그만 사랑이 내게서 떠날 때
닫혔던 속 그제야 열어뵈며 나
네 뒤에 오랫동안 서 있고 싶었다
사랑의 이유
김재진
당신이 꼭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장점보다
결점이 두드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결점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어쩌다 보니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힘들던 마음 역시
내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김재진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을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예요, 여기예요, 손짓한 적 있습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어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지
사랑은 기다린 만큼 더디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사랑한다는 말
김재진
누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속엔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이 들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사랑받는다고 하는 말속엔
햇빛처럼 가득한 따뜻함이 들어 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누가 누구를 한없이 기다린다는 말속에
숨어 있는 예쁜 가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보다
예리한 아픔은 없다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김재진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온다던 소식 오지 않고 고지서만 쌓이는 날
배고픈 우체통이
온종일 입 벌리고 빨갛게 서 있는 날
길에 나가 벌 받는 사람처럼 그대를 기다리네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사막
김재진
나는 오늘 또 사막을 생각한다.
내장을 다 태울 듯 지글거리는
욕망의 사막 대신 눈 내리는 사막
검고 거친 모래만 황량한
그곳에서 나는 속수무책의 내 삶을
체념하고 있었다.
체념도 때로 위안이 된다.
환상으로
아니면 사탕 같은 승리로 위안받기보다
체념으로 삶을 위로하라.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체념으로 사막을 지나가라.
하나뿐인 낙타가 죽고
눈꼽 하나 떼 낼 수 없이 무기력한 손가락 들어
조금씩 죄어 오는 압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격렬한 투쟁보다 나는 압사를 택한다.
더 이상 눌릴 수 없을 만큼 눌려 찢어지는 순간
일시에 탁, 나가는 전기불처럼
홀연 세상 밖으로 떠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죽은 낙타 곁에 앉아 망연히 나는
한때 내 정신을 매혹하던 별들을 본다.
별들은 아직도
쨍그랑 쨍그랑, 접시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 있다.
사모
김재진
내 안에 그대를 들이는 일은
무거운 짐 내려놓고 가만히
쉬는 것과 같습니다.
쉬면서 옆에 있는 바람소리에
귀 맡겨놓는 것과 같습니다.
맡겨놓은 귀에 하고 싶은 말 다하며
홀가분하게 마음을 비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를 내 안에 들이는 일은
마음먹기에 따라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나를 물리고 그대 앉힌다 생각하면
물린 만큼 내가 힘겨워
오래갈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그대를 진심으로 들이는 일은
아무것도 그대에게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바라지 않고 다만 나를
그대가 편하도록 길들이는 것입니다.
산꽃 이야기
김재진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가령 산딸기가 하는 말이나
노각나무가 꽃 피우며 속삭이는 하얀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톱 한 자루 손에 들고 숲길 가는 동안
떨고 있는 나무들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
꿈틀거리며 흙 속을 사는 지렁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제는 사라져 찾을 길 없는
늑대의 눈 속으로 벅차오른 산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너로부터 닫혀 있는 나와
나로부터 닫혀 있는 너의
그 많은 창문들 하나하나 열어 볼 수 있다면
휘영청 달뜨는 밤
산꽃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산다고 애쓰는 사람에게
김재진
애썼다.
봄이 오면 나무들에게 그렇게 말해야지.
애썼다.
꽃이 피면 꽃들에게 그렇게 말해야지.
고맙다.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힘들었으면 날 버리고 갔겠니.
애썼다. 수고했다.
세상 떠나는 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야지.
산다는 게 뭔데
김재진
신경아 너는 얼마나 견딜까.
어제와 오늘의 경계,
아니면 오늘과 내일의 갈라지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심지처럼 태우고 있는
내 신경아 너는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행여 그것이 꿈이라 해도
그것이 행여 착각이라 해도
희망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살아간다는 말은 이겨낸다는 말.
이겨낸다는 말보다 오히려
잊어낸다는 말.
그러나 하등의 희망 없어도 사람들은
살아내고 있잖은가.
순간을 위무하는 안식이나
오랜 습관이 된 무관심,
약처럼 찾아오는 망각 사이에
거미줄처럼 걸려
내 신경아 너는
얼마나 더 견디어낼 수 있을까.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김재진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오나 봅니다.
그때 우리는 탱자꽃 하얗게 피던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먼지 날리며 버스가 지나가고
조금만 더 다가서면 온몸 드러낼 것 같은
연둣빛 강을 찾아 당신과 나는
그림 같은 길 위를 걸어가고 있었지요.
분가루같이 곱게 먼지가 내려앉은 당신의 구두 위로 나는
손가락으로 글씨 하나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결국 강을 찾지 못했습니다.
강이 있던 방향과는 정반대편을 향해
내가 당신을 안내했으니까요.
당신의 마음속에 강보다 더 큰 흐름을 만들고 싶어 했던
내 소망은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었고
당신은 다만 단 한 번 내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렸지만
그때 당신이 편지를 시작하며 썼던
그 한마디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뒤 벌써 셀 수 없이 많은 봄이
들판의 냉이꽃을 피우고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냉이꽃을 보며 나는 집을 나와
계절이 바뀌는 철길을 따라 끝없이 걷곤 합니다.
문득 지난가을 벗들과 어울려 찾아갔던
산수유 마을의 정경이 떠오르는군요.
지천으로 매달려 있던 산수유 붉은 열매를
보석인 양 바라보며
당신이 보냈던 그 편지를 생각했습니다.
산수유가 피고 있습니다.
세월이 가도 사랑은 그렇게 가슴에
따뜻한 그림 하나 남기는가 봅니다.
살아라 친구여
김재진
오래오래 힘든 이 세상도
살아라 친구여
참담히 눈물 마른 들판 질러
강인 듯 기적소리 하나 흘러가고
서른을 넘겨버린 빈 날들 모아
쭉정이처럼 후후 날리며
살아라 친구여 살아라 친구여
죽자고 일하던 사람들 돌아와
새벽을 기다리던 어둠 속에서
새벽이 오면 무엇하랴
풀 끝에 맺힐 이슬 아예 시들고
굴러서 깨어질 빛의 파편만
남은 일의 무게에 눌려 눈 시린데
희망을 만드는 것은 손쉬워라.
만들었다 지우는 아기처럼
금세 지울 죽음이나 떠올리며
가만히 불러보는 세상이여
오래오래 놓치고 싶지 않은 이름처럼
서른 넘겨 견디어 온 이 세상이여
캄캄한 부름으로
살아라 친구여 살아라 친구여
살아 있는 것들이 슬프다
김재진
달맞이꽃 피고
쓰르라미 울고 있다.
몸 가벼운 별들이 떠오르고
나는 몹시 아프다.
기침 한번 나지 않는 존재의 통증
눈감고 가부좌하면
살아있는 것들이 다 슬프다.
별빛에 매달려 흔들리는
물고기 하나
풍경이 울고 벌레가 운다.
조심조심
삼키듯한 울음소리
뒤꿈치 들고 가만가만
달빛이 지나간다.
살아 있어서 감사
김재진
안 날 줄 알았는데 새 눈이 나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파랗게
산천을 물들이네
아픈 세상살이 이와 같아서 바닥인 줄 알았는데 더 내려 가네
다 내려간 줄 알았는데 창이 뚫리네
겨우 열린 창틈으로 먼 하늘 보며
때로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
살아 있어서 감사.
삶에서 깨어나기
김재진
은행나무 사이에 사람들이 서 있다.
은행잎 밟는 소리가 노랗게
저녁의 아스팔트 위로 걸어나온다.
묵언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사람들을 피한다.
말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으면
입에서 냄새가 난다.
갇혀 있는 말들에서 나는 냄새다.
떨어진 은행 열매에서도 악취가 난다.
말은 생각의 열매,
우리가 열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악취였던 것이다.
은행나무를 보면 노란 은행잎을 넣어 보내던
옛날의 편지 생각이 안다.
한때 현재라고 생각했던 것들 모두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
금세 날아가고 말 현재가 두렵다.
뚜껑만 열면 날아가는 향기처럼
얇고 가볍기만 한 삶...... .
삶이 나를 불렀다
김재진
한때는 열심히 사는 것만이
삶인 줄 알았다.
남보다 목소리 높이진 않았지만
결코 턱없이 손해 보며 사랑하지 않던
그런 것이 삶인 줄 알았다.
북한산이 막 신록으로 갈아입던 어느 날
지금까지의 삶이 문득
목소리를 바꿔 나를 불렀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고 있는 건가?
반짝이는 풀잎과 구르는 개울,
하찮게 여겨왔던 한 마리 무당벌레가 알고 있는
미세한 자연의 이치도 알지 못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듯 착각하며
그렇게 부대끼는 것이 삶인 줄 알았다.
북한산의 신록이 단풍으로 바뀌기까지
노적봉의 그 벗겨진 이마가
마침내 적설에 덮이기까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살아왔다.
상실
김재진
노랗게 번지기 전 나는 이미
개나리가 필 것을 알고 있다.
가파른 비탈에 뿌리내린 채
겨울을 견디어 준비한
네 눈물의 빛깔을 알고 있다.
미미하게 묻어오는 바람의 안부를
속달로 접수하며
나 역시 봄을 준비할 때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금세라도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것 같은
그 화사한 절규 속에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
꽃은 나무의 눈물,
가지마다 별을 달고 솟아오를
말없는 탄식,
또 한번의 상실
다가오는 비탈에 서서
네 이름 불러본다.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김재진
하늘에 뿌려놓은 새의 발자국,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사람 있어
안개꽃 다발을 흔든다.
지겹도록 떨어지는 링거 한 방울.
병실엔 침묵이
바깥엔 채 이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침녘에 꺼내놓는 시리고 찬 이름 하나.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편지의 모서리가
주머니 밖으로 하얗게 손가락 내밀고 있다.
시린 입김 올리며
쓸쓸한 날엔 철길을 걷는다.
연기 흩어진 하늘을 떼지어 날아가는 새 떼,
강을 건너가는 햇빛의 발이
꽁꽁 얼어 애처롭다.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가갸거겨, 소리 내며 흩어지는
무수한 저 글자들도 사연이 있을까.
추락하는 이름 위에 앉아본다.
내가 사랑에 실패하는 건 다만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새벽에 용서를
김재진
그대에게 보낸 말들이 그대를 다치게 했음을
그대에게 보낸 침묵이 서로를 문 닫게 했음을
내 안에 숨죽인 그 힘든 세월이
한 번도 그대를 어루만지지 못했음을
새 빛
김재진
얼마만 한 아픔이 그 속에 있었을까.
손가락 내밀어 살결 만지면
가만히 떨림으로 응답해 오는
들꽃에게 머리 숙인다.
언 땅에 갇힌 채 제 모습 드러내지 않고
열매 같은,
따뜻한 이의 마음 같은,
꽃송이 피워 올린 뿌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가만히 귀 대어보면
물 긷는 꽃들의 두레박 소리
길어 올린 물들이 졸졸거리며 줄기 속을 달려가는 소리
햇살을 맞이하며 활짝활짝 생명이 문 여는 소리
남은 날은 얼마일까?
가려 있던 마당에 가득한 새 빛.
새장의 문을 열자
김재진
새장에 갇힌 새들은
미칠 것 같지 않을까?
제철도 아닌데 꽃 피워야 하는
온실의 저 화초들도
미칠 것 같지 않을까?
감옥에 살면서도 갇힌 줄 모르는
인간이 세상을 다
미치게 만들었다.
서늘한 고요
김재진
종소리 머금고 있는 꽃은 곧
종소리가 될 것이다.
산은 어둠 속에 긴 선만 남기고
천리향 향기 아래 앉아 나는
떨어지는 별 소리를 듣는다.
내 안을 흐르던 우주가 꽃피워낸
깜깜하고 서늘한 고요.
두드려서 아름다운 북은
선운사 댓돌 아래 밟히고
나는 나 자신만으로도 가득 차 있는데
법고는 소리 내어 먼바다로 흘러간다.
모든 것 다 품어 안고서도
아무것도 붙잡고 있지 않는 바다
모든 것 다 끌어당기면서도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향기처럼
나는 내 안에서 꽃핀다.
나는 내 안으로부터 고요하며
내 밖의 종소리가 된다.
선운사 가라
김재진
그래 이제 선운사 가라.
꽃 떨어지듯 툭, 마음 내려놓고
꽃이 데리고 온 사람들 사이에서
기어코 찾아올 이별을 허락하라.
그것이 오는 것을 지켜보며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
깨달을 것 또한 아무것도 없으니
죽어도 나는 현존하며
꽃 또한 떨어져도 그 자리에 있다.
오고 가는 것은 너와 나 뿐
그대와 나의 빈 몸뚱이뿐
가지 않는 삶은 침묵 속에 있다.
선운사 동백
김재진
꽃 떨어져 눈에 밟힐 때
선운사 가지 마라.
가는 길이 맘에 밟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 해도
동백 떨어져 세상이 다 숨 가쁠 때
선운사 가지 마라.
사람에게 다친 마음 일어나
앉아도 누워도 일어나기만 해
숨 한번 몰아쉬기 힘들어질 때
선운사 가려거든 그렇게
가더라도 나 없을 때 가라.
나 아닌 나는 몰래 떼어놓고
가더라도 혼자 가서
밀어둔 눈물 은근 적시고 오라.
섬
김재진
1
내 안의 어둠이 내 밖의 사랑과 만나 빛이 되기를
내 안의 파도가 내 밖의 바다와 만나 새가 되기를
내 안의 분노가 내 밖의 거룩함과 만나 용서가 되기를
내가 뭔가를 간절히 원하며 기도할 때마다
갈망하는 그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내가 세상으로부터 상처 받는 그 순간마다
마음으로부터 많은 것 배우게 하소서
내가 고독함에 시달리는 그 순간마다
묵묵히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섬으로 있게 하소서
2
맨발로 걸어
닿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혹은 나무처럼 꺾어지며,
아니면 치의(緇衣)의 납자(衲子)처럼 운수하다
주저앉아 버린 작은 점
너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반짝거리고 있는 저 햇살
동백이라도 피면 좋겠다.
누가 흘렸는지 모를 눈물에라도 젖어
뚝뚝,
떨어져 내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더 생각할 것 없이 이대로 그만
가라앉아 버려야겠다.
섬, 아침 바다
김재진
꽃 앞에 서서 그렇게 사진 찍고 있어요.
햇살이 눈을 찔러
찡그리고 있더라도 할 수 없어요.
바다는 지금 아침햇살이
부채같은 손 흔들어 살랑거리고 있네요.
동백이 떨어지면 울고 싶어요.
치마 활짝 편 채 벼랑을 뛰어내린
백제의 궁녀 같아 어질머리 느껴요.
이제 그만, 사진은 그만 찍어요.
어차피 지나면 다 잊을 건데
미련만 자꾸 키워 뭐 하겠어요.
한쪽으론 들어오고 한쪽으론 또 배가
사람들을 싣고 나가고 있어요.
배에 타고 있는 아이들 좀 봐요.
이 작은 섬에선 배울 것이 없다고
뭍으로 나가는 저 어린 것들 말이에요.
밤새도록 새가 울어 잠 못 잤어요.
자다가 쳐다보면 별들이 창 안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더군요.
나가보면 별이 아니라 동백이었어요.
떨어지는 꽃 때문에 눈물 흘렸지요.
우는 게 아니라 사실은 그리워하는 거였어요.
그리워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꽃도 어쩌면 제가 동백이라는 것을
그리워하기 위해 피고 있는지 몰라요.
꽃 앞에 서서 그렇게 아무 일 없는 듯 사진이나 찍으며
열리는 아침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요.
통통거리는 고깃배들이 은빛 그물을
반짝이는 빛 속으로 감추고 있고
학교 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깔깔거리며
물 위로 헤살헤살 떠다니고 있어요.
섬에서
김재진
오늘 당신에게 처음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보낸 편지가 당신은 어쩌면 낯설지도 모릅니다.
나 또한 편지를 주거나 받지 않은 지 오랩니다.
항시 낮보다 밤이 더 길어 깔깔한 나의 땅에
저렇게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건 무엇 때문입니까.
그때 섬에서 잤던 날들이 생각납니다. 섬은 우리에게
아궁이였습니다. 따뜻하고 연기나는 그곳에서 나는
밤새 울고 다니는 새 한 마리 만났습니다.
머리맡에서 울다가 한밤, 뒷간 가는 맨발까지 따라와
살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울어대던 그 소리가
휘파람 소리였다는 것을 나는 아침에야 알았습니다.
동백 피는 소리였다는 것을 해 뜨고야 깨달았습니다.
오줌누러 나와 올려다본 세상은 별천지였습니다.
오줌줄기 위로도 뚝뚝 떨어지는 별을 받아먹기 위해 나는
고개 젖히고 입 벌렸습니다. 아, 그때쯤 내겐
딴 세상이 열렸습니다.
깜깜한 데서 하는 이야기가 산 건너 전해오고
동백은 문득 산달을 앞둔 여자처럼 조신해졌습니다.
마당에 서 있던 비파나무, 소사나무, 멀구슬나무들 사이로
빙빙 돌던 새소리가 멀어진 건 그때였습니다.
밤내 따뜻하던 아궁이가 식어버린 것도 그때였습니다.
마흔 넘겨버린 한 사내가 잠 못 들고 서 있는 것이 지겨워
인연을 끊은 것도 그때였습니다.
오줌을 눈 뒤에도 끝없이 펼쳐지는 밤을 담 너머로 나는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세상의 꼬리
김재진
무심코 걷던 스승은 돌연
이빨 드러내며 달려오는 맹견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두려움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 때
어디로 피하는가 그대는?
사자의 꼬리만 봐도 사자의 포효를 떠올리는
유약한 상상력이 우리의 두려움이니
세상의 꼬리 하나 밟고 서서
세상의 거대한 몸뚱이를 봤다 소리치지 마라.
스승의 속도에 놀란 맹견이
꼬리 내린 채 달아나는 잡견으로 변하듯
꼬리 세운 세상 향해 온몸 내던져
정면으로 돌진하라.
세월
김재진
살아가다 한 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나 살자.
먼 길을 걸어가 닿을 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
먼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 끝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나 살자.
소중한 나
김재진
그대에겐 내가 좋아하는
그대가 많습니다.
그대를 사랑한다고 떠올리는 순간
활짝 펴진 웃음으로 그대는 나를
어루만져 줍니다.
그대 부르는 자리에 언제나
놓여 있고 싶은 나
내가 싫어하는 내가 내겐 많습니다.
내가 감추고 싶은 내가
그대와 만나는 순간
조바심하며 나를 지켜보는
그대는 또 다른 나 입니다.
내가 나를 좋아하기 위해 애쓰는 순간
나를 위해 함께 애쓰는
그대는 내가 좋아하는 단 하나의 나입니다.
솔방울 하나
김재진
어머니 뿌린 자리 위로 솔방울 하나 얹는다.
가볍구나.
손바닥에 묻은 재는 따뜻하였지.
빠져나간 체온같이 싸늘한 달도 하나
하늘에 떴다.
오늘은 꿈도 없이 자야겠구나.
꿈에서 어머니가 찾아와도 그대로 자야겠구나.
머리맡에 놓아둔 걸레가 꽁꽁 얼던
함께 살던 옛집 떠올리며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써야겠구나.
스타카토
김재진
똑 똑 똑
끊어졌다 이어지는 소리
똑 똑 똑
내 마음 두드리는 노크 소리
스펀지
김재진
칼로 너를 찌른다.
빵 자르는
칼
로…….
케이크처럼 부드러운 나의 비애,
아무것도 나는 다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슬픔의 나이
김재진
별똥별 하나 떨어진다 해서
우주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내가 네게로부터 멀어진다 해서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별을 산 위로 데려오고
너는 네 안에 있던 기쁨 몇 개 내게로 데려왔지만
기쁨이 있다 해서 슬픔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기쁨을 더한 만큼 세상은 아주 조금 풍요로워졌을 뿐
달라진 건 없다
꽃은 그 자리서 향기를 내뿜고 있고
둥근 나이테 새기며 나무는 조금 더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뻗을 뿐이니
누구도 내가 초대한 이별을
귀 기울여 듣는 이 없고
사라져 간 별똥별의 길게 드린 꼬리 위로
휘황한 아픔을 새겨넣는 이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흔적 없이 지워질 것이다
네가 내 영혼에 새겨넣고
내가 네 영혼에 조그맣게 파놓은
우물이나 그리움 같은 것들도
자국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간에 내리는 비
김재진
이 시간 지나고 나면 어떤 시간 올까?
시간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열 길 물 속 알아도
몇 분 뒤 시간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발달하는 과학이 무슨 소용이랴.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변덕
코앞에 온 시간의 예측불허
도대체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다.
철없는 아이들은 잠들고 지금쯤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내 마음은 어딘가
그네가 매달려 있는 놀이터쯤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것이다.
불 끄기 두려워 새도록
불 켜둔 채 지샌 밤이 내게 있다.
환하고 환해서 더 어두운 밤
닫기 두려워 열어둬도
한 줄기 빛 새들어 오지 않는
열린 문의 닫힘
시인은 시를 쓰지 않고
가수는 어차피 노래하지 않는다.
밤새 방안을 맴돌다 지친 새벽
무심하게 사는 사람들의 편한 얼굴이
부럽게 느껴지는 시간이
내겐 있다.
시간의 세 가지 걸음
김재진
‘시간은 세 가지 걸음이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달아나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승자는 패자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만
시간에 여유가 있고,
패자는 승자보다 게으르지만
늘 바쁘다고 말한다.
승자의 하루는 25시간이고
패자의 하루는 23시간밖에 안 된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듯이
폭염이 내리쬐다가 또 비가 쏟아지고,
다시 폭염이 계속되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다가온다.
절정에 가면 모든 것은
내리막길을 가기 마련이다.
느리게, 그리고 주저하면서
다가오는 것 같지만
미래는 현재가 되는 순간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가 버린다.
하루하루는 지루한데 일주일은 금방 흩어지고,
한 달이나 일 년은 쏜살같이 날아가고 없다.
우리 만난 지가 언제였더라 하며
악수하다 보면 못 본지 10년.
강산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해
한때의 친구가 서먹서먹한 타인이 되어 있다.
승자는 시간을 관리하며 살고,
패자는 시간에 끌려가며 산다는데
인생에서 패자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인생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이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우린 그저 무엇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그 경험이 다할 때
세상을 떠날 뿐이다.
적지 않은 경험을 했지만
아직도 다 하지 못한 어떤 경험이
내 인생에 남아 있을까?
다가오는 미래를 다 알 수야 없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시간에 끌려다니며 살지 말고
시간을 부리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
김재진
어느 날 당신의 존재가
가까운 사람에게 치여 피로를 느낄 때
눈감고 한 번쯤 생각해 보라.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무심코 열어두던 가슴속의 셔터를
철커덕 소리내어 닫아버리며
어디에 갇혀 당신은 괴로워하고 있는가.
어느날 갑자기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두렵고 낯설어질 때
한 번쯤 눈감고 생각해보라.
누가 당신을 금 그어놓았는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가리고 분별해놓은 이 누구인가.
어느 날 당신의 존재가
세상과 등 돌려 막막해질 때
쓸쓸히 앉아서 생각해보라.
세상이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어느 날 당신의 존재가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초라해질 때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용서하라.
용서가 가져다줄 마음의 평화를
아름답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김재진
1
실패가 나를 눕게 했을 때
번민과 절망이 내 인생을
부러진 참나무처럼 쓰러지게 했을 때
날마다 걸려오던 전화
하나씩 줄어들다 다 끊기고
더 이상 내 곁에
서 있기 힘들다며
아,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부터 돌아섰을 때
마음에 칼 하나 품고
길 위에 서라.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
이제는 어둡고 아무도
가는 사람 없는 길.
적막한 그 길에 혼자서
다시 가라.
돌아선 사람을 원망하는 어리석음
조용히 비워 버리고
가진 것 하나 없던
처음으로 돌아가라
마음의 분노 내려놓고 돌아보면
누구도 원망할 사람 없다.
원망은 스스로를 상처내는
자해일 뿐
가진 것 없던 만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빈 공간일수록
채울 것이 많듯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더 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말.
주머니에 찌른 빈손 꺼내 희망을 붙잡으며
다시 시작하라.
조금씩 웃음소리 번지고
접혔던 마음 펴지기
시작할 때
품었던 칼 던져버리며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하라.
아름다웠던 순간만을 떠올리며
한 번쯤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라.
2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이들과
만나질까?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이들과
헤어질까?
햇빛 들여놓는
창가에 앉아 오래전
헤어진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끔은 떠오르는
어린 날의 따사로운
이름에게
솜털 뽀송뽀송한
얼굴을 비추던 밝은
하늘에게 편지를 쓴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을 사랑하게 될까?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을
미워하게 될까?
말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에게 쓰고는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쓴다.
얼마나 우리는 더
기다릴 수 있을까?
얼마나 우리는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햇살 반짝이는
강가에 앉아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썼다가 찢어버릴
편지를 쓴다
얼마나 우리는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얼마나 우리는
더 인내할 수 있을까?
한때 우리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
다 눈물일지 모른다
아픔
김재진
계절이 바뀌고 누군가 아프다.
꽃이 피고 누군가 아프다.
아무도 아프지 않은데 혼자서 아파하며
살아오며 누군가를 위로한 적 있는지
돌 틈에 떨어진 풀씨 한 톨만큼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촛불 켠 적 있는지.
안나푸르나의 별
김재진
네게 별을 보여주겠다던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어.
세월이 가고 내 머리카락이
빛나는 히말라야의 만년설 같은 은발이 될 때
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빗겨주겠다던
네 약속을 잊지 않고 있어.
바람이 불고, 세찬 눈보라처럼 꽃잎 떨어질 때
떨어진 그 꽃잎을 내 발등 위로 흩뿌리겠다던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어.
사랑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잊을 수 없다는 말도 하지 않을게.
우리가 세상에 와서 했던 말 다 떠올릴 수 없어도
은하수 아래 앉아 어둠을 만지던
세월의 손가락들을 기억할 거야.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김재진
만남이 이별을 감추고 있다면
기쁨은 또 슬픔을 감추고 있습니다
내 가슴이 사무치는 건 결코
당신이 떠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만남이 마침내 다다르고 마는 이별보다 나는
이별 뒤에 찾아올 망각을 아파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까맣게 잊어버리고야 말 당신은 이제
허공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떨어지는 저 나뭇잎 한 장의 의미도
우리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만남이 이별을 감추고 있다면
희망은 또 상처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별보다 아픈 건 망각이라
스스로를 베면서도 나는 또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린 가을
김재진
가을 벌레가 우네.
아직 엄마 품에 있고 싶은 어린 가을이
홀짝홀짝 풀섶에서 울고 있네.
눈감으면
저만치 가고 있던 여름이
쥐고 있던 별들을 강물에 던져 넣네.
잠시 세 들어 사는 집도 내 집인 양
정들면 떠나기 힘드네.
정들면 상처마저 버리기도 힘드네.
벌레라도 저런
울고 있는 벌레라면 예쁘기나 하겠네.
벌레 기듯 징그러운 한 세월을
나,정들어도 더 못사네.
마당에 나가 하늘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는 것 없네.
어디서 우는지 벌레는
풀섶도 아무것도 있을 만한 곳이 없네.
정들면 눈물마저 버리기가 힘드네.
어린 왕자
김재진
아, 내가 만약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온종일 내 마음이 시계를 보거나
기다리는 조급함에 내 손이
걸려 오는 전화마다 달려 나간다면
방심한 마음 내비치며 너는
한 번쯤 나로부터 비켜 있어도 좋다.
쳐다보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고정된 풍경이란 방관해도 좋다.
아, 내가 만약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너에게 붙박혀 있는 나의 시선이
어느덧 싫지 않은 일상이 되어
외로우면 한 번씩 돌아다봐도 좋다.
너 또한 만약에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밀밭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여우처럼
지나가는 내 발소리에 길들어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 지어도 좋다.
어머니
김재진
부모 잃고 남의 집에 얹혀 있는
뇌성마비 송 씨는 모음만으로 노래한다.
아・으・오・우……
어버이날 그가 부르는 어머니 은혜
휠체어에 앉은 채 몸 비틀며 부르는
모음(母音)들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는 급히
손 내밀어 받는다.
언제나 너는 멀다
김재진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을 너는 느낀다.
알 수 없는 너의 느낌
나처럼 너 역시 나를 알 수가 없다.
노란 햇살이 현기증처럼 퍼지고
골목마다 차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온다.
가까이 있지만 너는 언제나 멀다.
오래된 대문을 소리내어 밀며
주저앉아 울먹이는 봄날의 상실
흙 한 줌 찾기 힘든 바닥을 비집고
햇살보다 노란 민들레가 핀다.
더 이상 나는
너를 견디기를 포기한다.
포기한다는 것은 삶과의 타협
다 그런 거야.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마.
모르는 척 있는 거야 그저.
삶의 이치에 익숙한 듯
앞서서 가고 있는 너
마음아 너는, 마음아 너는......
등 돌린 사람에 길들여지는
새로운 인간관계에 안착한다.
붙들지 못한 마음 좇아 사방팔방 뛰다니는
또 다른 마음이 겪는 행로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나는 정말
알 수 없는 모양이다.
여름의 안부
김재진
걱정하지 마라. 나는 나대로 잘 산다.
햇빛이 이쪽으로 들어오면 이쪽 커튼을 내리고
햇빛이 저쪽으로 바뀌면 저쪽 커튼을 내린다.
겨울보다 여름은 캔버스에 칠해놓은
물감이 빨리 말라서 좋다.
무서운 햇살이 창이 되어 찌르는 한낮엔
고흐가 그렸던 탕기 아저씨의 초상을 떠올린다.
시원한 삶이 어디 있겠느냐.
시원함이 그리워질 땐
외상값도 갚지 못한 궁상맞던 고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던 아저씨의
따뜻하고 푸근한 표정을 떠올린다.
이열치열도 아니면서
더운데 따뜻함을 떠올리는 게 말이 되냐 다그치진 마라.
유리 조각 밟듯 살아왔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되씹는 날이 잦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전부였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비어도 가득해지는 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김재진
문이 닫히고 차가 떠나고
먼지 속에 남겨진 채 지나온 길 생각하며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얼마나 더 가야 험한 세상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건너갈 수 있을까
아득한 대지 위로 풀들이 돋고
산 아래 먼 길이 꿈길인 듯 떠오를 때
텅 비어 홀가분한 주머니에 손 찌른 채
얼마나 더 걸어야 산 하나를 넘을까
이름만 불러도 눈시울 젖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얼마나 더 가야 네 따뜻한
가슴에 가 안길까
마음이 마음을 만져 웃음을 짓게 하는
눈길이 눈길을 만져 화사하게 하는
얼마나 더 가야 그런 세상
만날 수가 있을까.....
여우의 사랑
김재진
사랑한다는 말보다 쉬운 말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낡은 말도 없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랑 앞에 다쳐 내 마음은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기 두렵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하는 내 마음
달리 표현할 길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결코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낡은 말도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내 마음
습관에 길든 한 마리 여우입니다.
여행은 때로
김재진
때로 여행은 그럴 때 있어라.
낯선 이들 속에 앉아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
보내기 싫은 사람을 보내야 할 때 있어라
지구의 반대편을 걸어와 함께 시간을 나누던
친구와 작별하듯 여행은 때로
기약 없는 이별일 때 있어라
닫혀진 문 밖으로 음악이 흐르고
때로는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모르는 여인을 안고 싶을 때 있어라
한때는 내 눈이 진실이라 믿었던 것
초처럼 녹아내려 지워질 때 있듯이
여행은 때로 행복한 도망일 때 있어라
음음음, 소리내어 포도주를 음미하듯
눈감고 바라보는 향기일 때 있어라
숨죽인 채 들어보는 침묵일 때 있어라.
연어가 돌아올 때
김재진
1
칠판에 누가 낙서를 해두었습니다.
(연어가 돌아오듯 그대가 돌아옵니다.
그대가 돌아오듯 연어가 돌아옵니다.)
창 밖을 내다보던 나는
지우개로 천천히 낙서를 지웁니다.
눈을 감으면
반짝이는 강이 내 안에 흐릅니다.
아무리 지워도 눈부신 강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워도 눈부신 기억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미루나무 가지 위로 키 큰 하늘이
급류가 쏟아지듯 파랗게 쏟아지고
연어가 돌아오듯 그대가 돌아옵니다.
못 잊을 기억 찾아 연어가
그대가 돌아오듯 돌아오고 있습니다.
2
누가 강물의 눈 속으로 돌아온다.
누가 새의 가슴속으로 돌아온다.
꽃 지는 모습으로 아, 누가
산의 눈썹으로 밀려온다.
그대를 여전히 잊지 못할 까닭은
그대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때문이다.
연필 깎는 시간
김재진
마음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듯 이야기할 때 있습니다.
사각거리며 걸어가는 눈 위의 발소리처럼
내 마음속의 백지 위로 누군가
긴 편지 쓸 때 있습니다.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뭔가를 깎아 보고 싶어 연필을 손에 쥡니다.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겨울 저녁 9시
유리창엔 김이 서립니다.
내 마음에도 김이 서립니다.
때로 몸이 느끼지 못하는 걸
마음이 먼저 느낄 때 있습니다.
채 깎지 않은 연필로 종이 위에
'시간'이라 써 봅니다.
좀 더 크게 '세월'이라 써 봅니다.
아직도 나는
내게 허용된 사랑을 다 써버리지 않았습니다.
옛 궁터
김재진
나보다 먼저 이곳을 다녀갔을
사람들이 궁금하다.
하하 웃으며 즐거웠거나
슬픔으로 글썽였을 사람들이 궁금하다.
나, 살아갈수록 궁금한 일은
어디서 삶이 끝나는가이다.
어디서 끝나서 어디로 이어지는가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도 있었고
가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곳을 지킬
나무에게 물어본다.
찾아왔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갔기에 보이지 않는 건가?
한껏 두 팔을 펼쳐도 안을 수 없는
오래된 나무 아래 앉아 옛날 일을 떠올린다.
옹주와 사대부와 상궁과 나인,
수많은 후궁과 무수리들이 흘려놓은
눈물자국 떠올린다.
나무는 지금
백 년도 못 살고 가는 인간이 가여워
눈물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오늘 밤 물소리는
김재진
오늘 밤 물소리는 나를 떠밀어
하염없이 씻기게 한다
누워서 짐짓 생각해 보는
짧은 그리움
길고 지겨운 기다림 밖으로
녹슨 시간의 모습들이 째깍거리며
지나간다.
욕실의 수증기처럼 막연한 통증
아픈 곳을 찾기 위해 숨을 죽이는
오늘 밤 빗소리는 나를 떠밀어
멍들고 비어 있는 육체 밖으로
떠나게 한다.
참담한 식욕의 시간이 지나가고
비로소 꽃 피는 절망
삶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남루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울고 있는지
오늘 밤 물소리는 나를 떠밀어
문밖에서 서 있게 한다.
오래된 사이
김재진
사랑이란 말만큼 때 묻은 말이 없습니다. 사랑이란 말만큼 간지러운 말도 없습니다. 너무 닳아 무감각해진 그 말 대신 달리 떠오르는 말 없어 당신을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연도 오래되어 헌 옷처럼 편해지면 아무 말도 더 보탤 것이 없습니다. 한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익숙한 오래된 사이는 담담합니다. 때로 벅찬 순간이 밀물처럼 가슴을 고즈넉이 적셔올 때 잔잔히 바라보는 그 눈빛 떠올리며 멀리 와서 생각하면 다투던 순간마저 따뜻한 손길인 듯 그립습니다.
오래 산 집
김재진
나는 오래된 몸을 가진
집에 살고 있네.
사랑은 저절로 일어나는 치유이니
오래된 주전자가 차를 끓이듯
이파리 하나에도 향기가 우러나네.
눈물은 내 영혼의 누옥
오래 산 집에 빗물 스미듯
조금씩 내려앉아 허물어지네.
오래 깃들여 바꿀 때 가까워진
내 몸은 오래된 집
달 기울어 꺾이기 전
별 뜨게 한 그 산을 누가 옮길 수 있을까?
오래전 헤어진 연인에게
김재진
당신과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
움직이는 버스에서 뛰어내린 적 있습니다.
다급한 소리에 놀라 버스 문이 열리고
채 서지도 않은 버스에서 뛰어내린 나는
횡단보도 건너는 당신을 좇아 찻길로 뛰어들었습니다.
급정거한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고
수많은 시선들이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선을 받아본 적 없는 내 가슴은
축제인 양 마구 뛰기 시작했습니다.
축제란 그렇게 늘 허망한 긑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폭죽이 터지고, 오색의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잘게 찢긴 색종이가 쏟아져 내렸을 뿐
어깨를 잡아챈 순간 돌아본 당신은 그러나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이란 때로 공상 같아서 나는
무수히 많은 희망을 지우며 살아갑니다.
당신과 헤어진 뒤 수많은 공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헤어진 뒤 수많은 희망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당신과 만날 희망 하나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십견
김재진
나는 오십견이
쉰 살 된 개인 줄 알았다.
오십에도 사랑을 하고
오십에도 눈물이 있는지
비릿한 나이에는 알지 못했다.
오십에 기르게 된 어깨 위의 개들을
풀어놓아 먹이려고 침을 맞는다.
어깨에 꽃힌 이 바늘은
우주와 교신하는 안테나다.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피뢰침 세워놓고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이 짐승은
못돼먹은 성깔에 내린 벼락일지 모른다.
벼락 치듯 가버린 친구 한, 둘 늘어나는
쉰 살 된 몸 안에 개들이 살고
부글거리는 속 지그시 눌러 앉히며
양념 센 국그릇에 소 떼가 산다.
오십에도 그리워할 것이 있고
오십의 하늘에도 별이 돋는지
들끓는 나이에는 알지 못했다.
오지 않는 사람
김재진
저만치 오는 사람을 보고 당신인 줄 알았습니다.
뒤집을 수 없는 결과를 낳은 우연이
필연이라 불리듯
당신은 내게 뒤집을 수 없는 필연입니다.
당신,
어디 가 있어도 내가 찾아내고 말던 당신,
당신 기다리는 마음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당신 웃는 모습 떠오르는 순간 내 마음
대번에 따뜻해집니다.
불 꺼져도 당신은 내게 환한 대낮입니다.
만지면 김 서리는 찻잔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르는 날의 미숙한 사랑,
삶은 그러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랑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오래된 흙담 내려앉듯
삶 앞에 사랑은 무릎 꿇었습니다.
멀리서 다가오던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디 가도 나는 이제 당신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죄 없는 세월만 강처럼 흘러
당신은 내 맘속에
잔물결 하나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시간이 간 뒤에야 알았습니다.
뒤집을 수 없는 결과도 뒤집힐 수 있다는
시시한 사실 하나를 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모든 만남이 이별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당신과 헤어진 뒤에야 알았습니다.
외경
김재진
상처는 나의 기쁨, 나는 그것을 통해 배운다
잃을 것 남아 있어 행복한
상실은 나의 희망, 그것을 통해 나는 채운다
부서진 도끼날이 나무 결을 기억하듯
예민한 칼날이 사과 향을 기억하듯
나무가 품은 봄 향기에 언덕의 풀이 깨어나듯
두려움은 나의 스승, 그것을 통해 나는 세상을 외경한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김재진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당신을 내보내기 위해 힘들어했습니다.
당신이 내 마음속에서 나가는 날
나는 드디어 평온을 찾았습니다.
풍랑 뒤의 바다가 고요해지듯
내 삶의 물결 또한 고요해졌습니다.
더 이상 내 마음 흔들릴 일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 부르는
이유 없는 격정에 대해 생각합니다.
격정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삶의 한순간을 관통하는
총탄 같은 격정에 다친 적 있을 뿐입니다.
은둔의 사랑
김재진
그 자리에 네가 있어 주기만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멀리서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스치기 전 한 번쯤 내가 보낸 눈길에
미소짓기만 해도 너를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기다림은 멀고 나의 밤은 채워지지 않는다
단지 제 이름 불러 스스로를 애무하는
고독한 위로
세상 어딘가에 네가 존재하기만 해도 나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은어
김재진
썩어가는 모과에서 향기가 납니다.
자식들 다 키우고 홀로 된
어머니 품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사랑도 어디쯤 지나간 사랑에선
향기가 납니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상처에도 향기가 있습니다.
수박 향 서늘한 은어회처럼
상처도 견디면 향기가 납니다.
세월 속에 곰삭은 향기가 납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알지 못한 향기도
저만치 떨어지면 느껴집니다.
멀리 갈수록 잘 보이는 산처럼
헤어져 있는 동안 그대 모습이
은은한 향기처럼 그립습니다.
읍내 여자
김재진
사람들이 다 불쌍하지 않나?
멀쩡한 이들이 왜 불쌍하냐고?
마음이 그런 것일 뿐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문득 멀리 남쪽 바닷가 마을에서
점심 먹고 나오던 날이 생각난다.
네비가 없던 때라 지도를 보며 찾아갔던
읍내 유서 깊은 맛집이던 그 식당에서
함께 앉아 밥 먹던 여자를 떠올린다.
별것 아닌 일에도 글썽이던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봄 풍경은 어땠는가.
늙으니 눈물이 많아진다며 미소 짓던
돌이켜 생각해보면 새파란 나이였던
그녀는 그때 아마 막 이혼을 하고
돌담 위에 선 듯 기우뚱거리던 삶을
추스르려 했던 모양이다.
봄꽃 피는 담장 위로 새순 돋던 가지와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향기와
방금 나온 식당에 머물고 있던 생선 비린내와
조금 더 걸어가면 들려올 것 같은 육자배기와
진양조장단의 끝 모를 삶에 넌더리를 내던
그때 보고 다시 못 본 사람들의 안녕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하나씩 세상 떠나거나 소식 끊긴 일행의
불쌍하지 않은데도 슬픈 인생이
느닷없는 속도로 나를 향해
안부를 물으며 걸어올 때가 있다.
이별이 두려운가요
김재진
당신 뒤를 바쁘게 따라 걸었던 것은
자꾸만 물에 빠지는 당신 그림자를
막어서기 위해서였어
당신보다 먼저 밥을 먹고 일어선 것도
성급함 때문이 아니야
시간을 이기기 위해 술 한잔을 곁들였고
말 한마디 없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이는 동안
강변의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들판의 봄나물은 식탁 위로 옮겨 갔지
정류장을 향해 다가가던 걸음이
정류장 지나서도 멈추지 못한 것은
사나운 세월의 속도 때문이 아니야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야, 우리가 삶에서 만난
침묵과 소외가 다 환멸인 건 아니니까
까닭 없이 상처받고
어쩔 수 없는 체념에 잠긴다 해도
꼭 그런 건 아니야. 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은 아니야
세상 사는 풍경이 엇비슷하다지만
꽃이 진다고 슬픔이 더 커지는 건 아니야
슬픔은 슬픔대로 길이 다르고
꽃은 꽃대로 피다가 또 지는 것이
봄이 왔다고 모든 것이 다
피거나 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야
당신과 내가 꼭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작은 평화
김재진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귀 맡기고 있으면
흔들리던 마음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창가에 걸려 있는 흐린 하늘을
커튼 걷듯 걷어서
세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찌푸리고 있는 얼굴 위로
활짝 웃는 입 모양 그려 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흐린 하늘은 금방 울음을 터뜨릴지 모릅니다.
찌푸리고 있는 얼굴을 또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 때문에 힘겨운 건지도 모릅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더 큰 이유는
상처받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 안 오는 밤
김재진
잠 안 오는 밤에는
비디오를 보지.
마음가는 장면은 되풀이해서 몇 번씩
알 수 없는 너를 다짐하듯
되돌려 보며 확인하지.
그것도 아니면 컴퓨터를 켜고
통신에 들어가 이런 말 저런 말
키보드를 두드리다 시시해지면
안녕, 꾸벅
인사를 던지고 빠져나오지.
CD의 스위치를 발가락으로 끄는 새벽
밤새운 고민을 팽개치며
음악 속 입들이 침묵하네.
스프링 늘어진 침대에 누워
손 뻗으면
맹물 대신 컵 속에서
오래된 슬픔이 나를 만지네.
장미꽃
김재진
양이 뜯지 못하도록
가시를 내밀고 있는 꽃,
감기에 걸릴까 봐
유리 덮개로 바람을 막아줘야 하는
예쁜 내 장미꽃,
별을 쳐다보며 나는 별 속에
네가 피어 있을 것이란 상상으로 행복해진다.
눈감으면 느낄 것 같은
네 향기 떠올리며 따뜻해진다.
네 마음이 보내는 환한 빛,
별 같이 많은 사람 가운데
아, 나는
네가 걷고 있을 것이란 생각 하나로
세상의 험한 길들 사랑할 수 있다.
다만 사랑받기 위해 우린 사랑하지만
그 사랑 깊어지면
어딘가에 누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할 수 있다.
재심 청구
김재진
기쁨의 유통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관절에 생긴 통증이 그것을 가리킨다.
일용할 양식을 마트에서 사며
유통 기간을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다.
버려야 할 것을 냉장고에 그대로
넣어두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유통 기간이 지난 사람들이 퇴출된 채
폐기될 시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이정표는 어디 있나?
유통 기간을 폐지하겠다며
하느님과 맞장 떴던 사람들이
재심을 청구하기 위해 하늘나라로 간다.
하느님의 심기를 건드린 그들이
승소할 가능성은 없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포장지에 적힌 날짜를 확인하며
늙어빠진 희망이 성형수술을 하겠다며
거울에 주름살을 비춰보고 있다.
저 강에
김재진
흘러가는 것들은 모두
잊기 위해 갈 뿐이다.
상류로부터 그것들은
슬프거나 더러운 것들을 싣고 온다.
아픔 속에 소리나지 않게 발을 담그고
떠내려가는 것들은 서로에게
잊혀지기 위해 가는 것이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의
더러운 그리움
누가 상처를 아무는 거라 하는가.
깃털 빠진 새들이 꼬리를 담그고
뱃사공처럼 늙은 가을은
기우뚱거리며 강을 건너는데
수심 어린 얼굴로 앉아 있는 저 얼굴은
누구의 상처난 스무살인가.
먼 데 있는 식구들 생각나는
저녁강의 쌀 안치는 소리
아득하게,
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달아나는 새들이
뒤숭숭한 갈밭을 흔들어놓는 소리 듣는다.
적산가옥
김재진
오랜만이야, 하고 속삭여봤다.
많이 늙었네, 하며 돌아오는 소리가
복도 지나 먼지 털며 걸어 나온다.
낮잠 자다 해거름에 일어나
학교 늦다고 허둥대며 가방 챙겨 뛰쳐나가던
어릴 적 국민학교 운동장에 서봤다.
변소에 빠진 아이를 씻어내던 수돗가에
여선생님 닮은 분꽃은 피지 않고
구충제 먹듯 아득해지는
옛길 일으켜 교문 나서면
문방구 건너 이발소, 줄장미 피던 양옥집 지나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 가파른
적산가옥 한 채 보인다.
자전거 타고 귀가하던 아버지가 눈에 밟혀
열차 따라 남쪽에 온 저녁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이불 위에 쪼그리고 앉은 늙은 소년 하나
발가락에 묻은 밥풀 떼내고 있는
옛날 살던 동네에 가봤다.
조금 더 위로가 필요할 때
김재진
한 마디 말에 상처 받고
한 마디 말에 문 닫아건다 해도
마음은 희망을 먹고 산다
꽃 만진 자리에 향기가 남아 있듯
묻어 있는 아픈 흔적 지우기 위해
지금은 조금 더 위로가 필요할 때
카랑코에 떡잎이 햇빛을 먹고 살듯
마음은 기쁨을 먹고 산다
행복한 상태에선 더 보탤 것 없으니
지금은 조금 더 미소가 필요할 때
마음은 위로를 먹고 산다.
존엄사
김재진
병들어 죽을 때가 된 늑대는
무리를 떠나 숲으로 간다.
병들어 날아갈 수 없는 새들은
나뭇가지를 떠나 바닥으로 내려온다.
그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낡은 몸뚱이 뉘어둔 침대 하나
우리는 왜 꽃처럼 숲에서 질 수 없을까?
종이비행기
김재진
먼 길을 걸어와 네 앞에 서면
너는 가만히 웃고만 있다.
그 웃음만으로도 따뜻하다고
나는 스스로를 달래며 돌아선다.
손잡아도 언제나 너는
일정한 거리만큼 서 있을 뿐이다.
거리가 만들어놓는 그 간격을
너는 절제라고 이야기한다.
너의 절제 앞에 나는 언제나
접혀져야 날 수 있는 종이비행기같이
높이 오르지도 못하고 가라앉고 만다.
첫서리 하얗게 이고 있던 국화가 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외롭다고 고백한다.
외롭다고 술을 마시고
외롭다고 단풍나무 숲을 지나
산으로 간다.
네가 파놓은 간격을 넘지 못한 나는 다시
접혀진 채
노랗게 깔려있는 은행나무 이파리 위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죽도록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말이
김재진
돌 틈을 비집고 나온 제비꽃
길가에 앉아
반쯤 허리가 접혀 있는 민들레
기어 다니는 벌레와 조그만 새들
서 있는 나무와 조용한 햇빛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 없어라.
한고비 넘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 다 신기한 것밖에 없어라.
죽도록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말이
한순간에 다 부질없어라.
껴입던 옷 벗어 바람에 내다 걸듯
모든 것 훨훨 벗어버리고 싶어라.
텅 빈 채 다 받아들이고 싶어라.
지나간 노래
김재진
지나간 노래를 들으며
지나간 시절을 생각한다
뜨거웠던 자들이 식어 가는 계절에
지나간 노래에 묻어 있는
안개 빛을 만나는 것은 아프다.
너무 빨리 늙어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 보다
아프다.
누군가 나를 만나며 아파야 할
그사람을 생각하면
지나간 노래를 들으며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는 것은 아프다.
지난여름
김재진
지난여름을 잊지 못한 사람은
쏟아지던 별들을 잊지 못한 때문입니다.
별들을 매달고 있던 그
나무들을 잊지 못한 때문입니다.
단풍나무 숲을 만나 불길에 싸입니다.
지난여름이 남긴 상처가 덧나 가을은
온통 화염을 내뿜습니다.
불길을 피해 도망가다 누가
연못에 빠진 별을 보고
눈물 머금었다 말하는 소리 듣습니다.
글썽거리는 별과 달리 단풍은
연못에 빠져서도 화염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살아나도록 상처가 깊은 것은
축제의 기억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지우개
김재진
엄마의 세계가 사라지고 있다.
골목길이 사라지고
숟가락이 사라지고
마침내 자식들이 사라졌다.
꽃은 여전히 화분에 담겨 미소 짓고 있는데
한 사람의 생이
지우개도 없이 지워지고 있다.
짐
김재진
무거운 짐 내리듯
내려놓을 수 있다면
이쯤에서 나,
그대를
내려놓고 싶습니다
그대에게서 벗어나 외로운 나를
그대보다 더
아껴주고 싶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김재진
가까이 가서 보려는데 참새는 왜 날아갈까?
떨어지는 구름을 줍기 위해 언덕을 넘던
아이들은 왜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오나?
밤이 되면 바람은 왜 목소리가 커지나?
보고 싶은 사람보다 왜
보기 싫은 사람들이 많고
헤어지기 싫은 연인들은 왜 헤어져야 하나?
이별이란 말엔 왜 안타까움이 묻어 있나?
작별 인사 한번 없었는데
사람들은 왜 가고 오지 않나?
가을 하늘은 까닭 없이 왜 파랗기만 하나?
기차에 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나?
먹었는데도 밥은 왜 자꾸자꾸 먹어야 하나?
우린 지금 어디로 가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앞만 보고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는 어디까지 구를까?
짧은 봄
김재진
인연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연이 다했다고 말했다.
함께 바라보던 등대의 불빛은 꺼지고
바다는 어두웠다.
표선으로 가는 길에 봄이 짧았다.
찔레
김재진
거짓말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너를 훔친다.
푸른 달빛아 꽃 피는 봄날의 진한 한숨아
쪼그리고 앉아 밤새우는 황톳길아
내 사랑, 가시마다 찔렸다.
참회
김재진
누군가 나로 인해 아프다면
그 아픔으로 나는 더 아파야 하네
세상에 사랑은 많고
사랑 아닌 것은 더 많아
분노로 분노를 채울 수 없고
증오로 증오를 멈추게 할 수 없으니
누군가 나로 인해 목말라한다면
그 목마름으로 나는 더 목말라야 하네.
창
김재진
누가 창문 좀 열어줄 수 없겠소
나 좀 하늘로 갈 수 있도록.
노모는 애원한다.
누가 나를 침대에서 내려줄 수 없겠소
내 발로 걸어볼 수 있도록.
3년째 사용하고 있는
의료용 침대의 임대료를 입금하며 나는
노모의 애원을 모른 척한다.
쓸모없게 된 휠체어를
대여점으로 반환해야 되나 마나를 고민하며
살면서 이제껏
창문 하나 내지 못한 마음 위로
소리 죽여 가만히 못을 박는다.
창밖에 은하수가 보인다
김재진
문을 열고 좀 내다봐.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던 것 다 저물어 가잖아.
강처럼 깔려있는 저 주단을 좀 봐.
난 누가 오렌지 빛 불기둥을 세워놓은 줄 알았어.
홍시같은 해님이 강물에 빠지고 있어.
강 위로 미끄러져 가는 것, 저것들은 뭐지?
은어떼가 흐르듯 반짝거리는 것, 저것말이야.
눈속에 은하수가 보이잖아.
강물같은 은하수가 내 눈속에 떠 있어.
울고 있는 건 아니야.
눈물흐르면 눈물 흐르는 대로
강가에 앉아 손 담그고 있고 싶어.
지나가 버린 당물은 이미 강물이 아니니까.
강물은 다시 돌아올 줄 모르니까.
흘러오는 강과 흘러가 버린 강,
어떤 강을 강이라고 불러야 하는거지?
사람들은 그걸 세월이라 부르나 봐.
세월은 결코 흘러가는게 아닌데도 말이야.
흘러가는 건 우리뿐이야.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 만큼 흘러가고 있다고 믿지.
나이를 난 거꾸로 먹고 싶어.
한 해, 한 해 줄어들다 마침내 제로가 되어
사라져버리고 싶어.
엄마 뱃속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다는 얘기는 아냐.
엄만 이제 늙으셨으니까.
어떤 강을 강이라 불러야하는지 엄만 알고 계셔.
그걸 삶이라고 하는거지.
삶이란 결국 강에 대해 아는거지.
강의 이름과, 강의 나이와,
강의 길이와, 강의 국적과, 강의 슬픔을 저절로 알게되는거지.
창밖에 은하수가 보여.
눈감고 가슴뛰는 소리를 들어봐.
물살을 가르며 튀어 오르는 은어 떼들 좀 봐.
깔려 있는 주단위로 별들이 떨어지고 있어.
너무 빨리 나와버린 별들이 눈물처럼 자꾸 떨어지고 있어.
첫눈 생각
김재진
입김만으로도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기다리는 눈은 안 오고 손가락만 시린 밤
네 가슴속으로 내려가
너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나는
더 깊은 곳 어디라도 내려갈 수 있다.
종소리에 놀란 네가 잠에서 깨고
잠옷 바람으로 언뜻 창밖을 내다볼 때
첫눈 되어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색하며 기뻐하는 너를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쌓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
햇빛에 녹지 않는 응달이 되어
오래도록 네 눈길 끌었으면 좋겠다.
추락
김재진
너무 맑아서 그랬던 걸까.
유리창에 비친 세상 속으로
새 한 마리 부딪혀 떨어진다.
날개도 없는데 사람은 왜
세상에 받혀서 떨어지나.
떨어져 바닥에 누운 사람들이
구랍(舊臘)의 날짜로 몸 가리고
새처럼 날다가 추락하는
몸이여, 불행한 동력이여.
떨어지지 않으려 바쁜 걸음 하는
지하도 속으로 아픈 몸들이
누운 몸 건너서 더 아픈 몸들이
밟힌다. 떨어지지 않으려 떨어지며
밟고 또 밟힌다.
축복
김재진
주사기 꽂힌 채 묶여 있는
곰의 발바닥에도
한 마리 매벌레의 영혼에도
꺼지지 않고 스며 있는
저 빛은 누구의 기도일까?
내 안에 총총한 별빛 따라
영혼의 따뜻한 한 순간을 적시는
말 없는 저 눈물은 누구의 축복일까?
한 마리 곰처럼 베드 위에 묶인 채
일용할 양식을 호스로 공급받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생명을 비추는
침묵의 저 순간은 누구의 자궁인가요?
치유
김재진
나의 치유는
너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가듯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는 내게 그 모든 것이다.
모든 치유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아무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 모두였고
내가 꿈꾸지 못한 너는 나의
하나뿐인 치유다.
친구에게
김재진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 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 내게 온다면
가만히 네 손 당겨 내 앞에 두고
네가 짓는 미소로 위로하리라.
캐논
김재진
매달려 있는 홍시가
멀리 있는 호롱불 같다.
안개도 투명한 안개가 있는지
이파리 떨군 감나무를 보며
파헬벨의 캐논을 듣는다.
첫소절이 그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
계절이 벌써 마흔 번 넘게 집앞을 지나가고 있다.
슬픔을 가장 극대화 할 수 있는 것은 슬픔의 절제다.
금세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최대한 억누르며
연주되는 음악은 마음속의 슬픔을 갈 수 있는 데까지 몰아간다.
그러나 그때 몰려가는 마음 역시 절제된 상태를 잊지 않는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포르테보다 여린 피아니시모가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파헬벨의 캐논을 들을때마다 나는 그런 절제를 느낀다.
그때의 절제는 격렬한 슬픔보다 더 오랜시간
내 가슴에 흔적을 남긴다.
포르테 같은 젊은 시절을 떠나보낸 뒤
피아니시모에 귀 기울이게 되는 나이
음악은 종종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내 마음에 남겨놓는다.
커피
김재진
또 하나의 절망이 내게 있어 저무는 저녁 창 넓은 탁자에 앉게 하거나 또 하나의 슬픔이 내게 있어 수근거리는 인간의 말소리 흘려보내고 몇 개의 동전과 몇 날의 양식 받고는 보내지 않은 몇 통의 편지 모아 아침은 야채처럼 싱싱하고 한낮은 전사처럼 활달할진대 또 하나의 희망이 내게 있어 깨어 있는 새벽 또 한 번의 완성과 또 한 번의 작별이 눈가를 물들여 흐르게 하는
토닥토닥
김재진
나는 너를 토닥거리고
너는 나를 토닥거린다.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하고
너는 자꾸 괜찮다고 말한다.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
너는 자꾸 토닥거린다.
나도 자꾸 토닥거린다.
다 지나간다고 다 지나갈 거라고
토닥거리다가 잠든다.
파라솔
김재진
발레리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라고 노래했지만
바람이 불면 나는
마당에 펴놓은 파라솔을 접어야 한다.
태풍이 온다는데 접지 않고 내버려둔 파라솔을
길 가던 누군가 문 따고 들어와 접어놨다.
문 열어놓고 다니는 나를 알고 있는 누구인지
지나가던 우체부나 검침원인지
내 집을 제 맘대로 들고나는 사람들께
경외심을 느낀다.
생명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무단침입에 대한 경외이니 이건
그들과 나 사이에 금 긋지 않은
경계 없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다.
봐라.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느냐.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파라솔까지 접어주니.
접히는 것들은 다 아름답다. 너와 나 사이에
금 그어놓은 뭔가를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한 수 접어준다는 말이다.
한 수 접고 모르는 척 네 편이 된다는 말이다.
태풍에 파라솔 챙기듯 접어주며
내 편, 네 편 없다는 걸 보여준다는 말이다.
편지 쓰고 싶은 날
김재진
때로 그런 날 있지.
나뭇잎이 흔들리고
눈 속으로 단풍잎이 우수수 쏟아져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런 날 말이지.
은행나무 아래 서서
은행잎보다 더 노랗게 물들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카락 생각 없이 바라보며
꽁무니에 매달려 바람처럼 사라지는
폭주족의 소음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런 날 말이지.
신발을 벗어들고 모래알 털어내며
두고 온 바다를 편지처럼 다시 읽는
지나간 여름 같은 그런 날 말이지.
쌓이는 은행잎 위로 또 은행잎 쌓이고
이제는 다 잊었다 생각하던
상처니 눈물이니 그런 것들이
종이 위로 번져가는 물방울처럼
소리 없이 밀고 오는 그런 날 말이지.
푸른 넝쿨
김재진
창을 타고 올라가는 푸른 넝쿨을 바라본 적이 있다.
투명한 햇살에 속 내비치는 넝쿨의 이파리들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앉았던 적 있다.
달리던 삶에서 갑자기 내려
같이 가던 사람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서 있을 때
멀리 하나씩 길들이 떠오르고
먼지를 피워 올리며 사라지는 버스가 남겨놓은
남루한 얼굴들 사이로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 들린다.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넝쿨의 저 연두,
또는 초록의 이파리들도 사실은
빛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
사랑 또한 그런 것이다.
저녁이 오면 내 마음은 습관처럼
헛된 약속을 위해 서두르지만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란 없다.
오랫동안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 그것과 다르지 않다.
눈감고 올려다보는 창 위로 이윽고
푸른 넝쿨은 사라진다.
한때 내 마음을 휘감고 올라가던 연두,
도박 같은 것, 아니면 비루한 호구나
순간을 휘감는 질투 같은 욕망
더러는 바람소리 나는 새벽의 산책 또한 그런 것이리.
아름다움 또한 다르지 않다.
짐짓 허리 펴고 앉아 이마를 드는 저 산의 입정.
한 마리 산새가 깨워놓는 침묵에 무너지는
거짓말 같은,
꿈.
막다른 골목의 투항처럼 나는 슬리퍼 사이로 맨발
드러낸 채
삶의 한때를 흔들어 놓던 질문들에 매달린다.
풀
김재진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풍경
김재진
그는 세상에 와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갔다.
가끔 팔지도 않을 몇 장의 그림을 그리거나
하루종일 골똘히 생각에 잠기거나 했을 뿐이다.
그의 삶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가치 있는 인생이라거나, 열심히 산다거나,
짐승 같은 삶이라거나,
그런 것들이 도대체 그가 살다 간 생과
어떤 차별을 갖는가?
삶의 의미를 묻는 이여,
나는 모르겠다.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아가는 것이 꼭 의미를 지녀야 하는 것인지,
가치 있는 삶이 가치 없는 삶보다
얼마나 더 가치 있는 것인지,
땡그랑거리고 있는 저 풍경소리가
바람이 우는 건지, 풍경이 우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조사는 그 소리 가리켜 바람도 풍경도 아닌
마음이 우는 거라 답하겠지만,
다친 마음
꺼내놓을 수 있다면 고쳐주리라 설하겠지만,
바람도 풍경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내게 의미가 없었던 만큼
아무것도 내 귀를 열어놓지 못한다.
하늘
김재진
모였다가 떨어지는 저 물방울은
한 번쯤 아파 본 이의 눈물이다.
눈 녹아 흘러내리는 창가에 앉아
유리 위에 맺혀 있는 물방울 바라보는
아련한 저 눈빛은
언젠가 내 시선을 붙들어 놓던 감옥이다.
지금 아무것도
놓인 것 없는 이 탁자는
기다리던 사람 오지 않아
비워놓고 채우지 않은 내 마음이다.
지붕 위에 걸려 있는 파랗게 갠 하늘은
깨끗이 간직하던 지난날이다.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김재진
돌이켜보면 모두 사라져버렸네.
밤새워 이야기하던 친구도
영화 속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던 발길도
지워져버렸네.
십 년 만에 만난 사람 앞에서도 무덤덤한,
잠깐의 반가움이 지나고 나면 시들해지는,
망각만이 유일한 나
저기 건물의 유리에 비친 나 또한
내가 아니네.
퀭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저 사내는 도대체 나일 수 없네.
황망히 바퀴 굴려
알 수 없는 복잡함 속으로 떠나는 저 자동차들만이
내가 있는 곳을 안다고 하네.
읽었던 한 권의 책
머리를 들끓게 하던 한때의 이념
열렬했던 사랑마저 내가 아니네.
하숙집 벽 위에 붙여놓았던
몇 줄의 잠언 속에도 나는 없네.
정말 하모니카를 잃어버렸네.
하얀 민들레
김재진
내 눈에 닿는 곳에
조그맣게 피어 있던 너
사랑 받는 것이 두려워 고개 숙인 소녀처럼
숨죽이고 그늘 속에 앉아 있던 너
사랑도 넘치면
견디기 힘들어라.
하얗게 탈색해버린 네 소망은
밟힌 채로 일어서는 노란빛 날개
오늘도 너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편지 접어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한 방울
김재진
아무것도 넘기지 못하는
노모의 입 속으로
물 한 방울 떠 넣으려 숟가락 쥐고 있다.
인생의 용량이 그만
물 한 티스푼으로 바뀌었구나.
바람 불고 낙엽 지고 그동안에
눈도 내렸다.
응달의 잔설은 사라지고 없어라.
봄은 또 들판에
파릇한 희망 하나 심어놓고 가겠지.
한 방울 물에도 사래 걸리는
산다는 건 모든 것이 혹독하구나.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김재진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때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
용서할 수 있으리.
자존심만 내 세우다 돌아서고 말던
미숙한 첫사랑도 이해할 수 있으리.
모란이 지고 나면 장미가 피듯,
삶에는 저마다 제철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찬물처럼 들이키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나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를 향해
미안하단 말 한마디 건넬 수 있으리.
기쁨 뒤엔 슬픔이
슬픔 뒤엔 또 기쁨이 기다리는 순환의 원리를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너에게 말해주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쉬, 너를 보내지 않으리.
밤새 썼다 찢어버린 그 편지를
찢지 않고 우체통에 넣으리.
사랑이 가도 남은 마음의 흔적을
상처라 부르지 않으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망설이기만 하다 포기하고만
금지된 길들 찾아가 보리.
사랑에는 결코
금지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리.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때 내 마음 흔들어놓던
너의 그 눈빛이 일러 주는 길을 따라
돈에도 이름에도
그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으리.
너를 위해 다시 한번 살아 볼 수 있다면,
지키지 못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
한 톨의 씨앗 속에 나무가 숨어 있듯,
절망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을 보여주리.
다시 한번 너를 위해 살아 볼 수 있다면,
물방울 같은 네 손톱에 물들기 위해
해마다 봉숭아를 내 가슴에 심으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널 기다리며 서성대던 영화관 앞을
만날 사람 없더라도 서 있어 보리.
영화가 끝나면 밀려 나오는 사람들 속에
네 얼굴 찾아보며 가슴 두근거리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리.
때로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 다 바쳐 너를 사랑하리.
한 여자가 있었네
김재진
사막의 별,
바람,
모래,
졸졸대며 머리 속을 흘러가는 시냇물
누군가 내 머리 속에
퐁당거리며 돌 던진다.
갑작스레 발목 적시는 내 마음의 오아시스
누구나 마음속에 여자 하나 지니고 산다.
오렌지 같은 여자.
사탕 같은 여자,
더러는 사막의 별같은 여자,
가던 걸음 멈춰 돌아다보면
하얗게 피는
그리움 같은 여자.
종이배,
반달,
분꽃,
접다가 만 색종이,
내 마음의 별,
손가락 사이로 은빛 모래알이 떨어진다.
함께 있어도 쓸쓸한 세상
김재진
사람이 그리운 날 있다
눈 녹아 질퍽대는 길 위에 서서
누군가 몹시 그리워지는 날 있다
함께 있어도 쓸쓸한 세상
허공에 떨어지는 네 그림자가
모르는 이름처럼 멀기만 하다
네 어깨에 기대어 내 눈은
먼 산을 본다
그리움도 인격이 있을까?
함께 있이도 쓸쓸함을 느끼는
염치없는 그리움도 인격이 있을까?
네 맑은 눈 속에서 나는 하늘을 본다
조각조각 깨어져 길 위로 깔려버린 하늘
하늘은 이제
질퍽거리며 녹고 있다
깍깍거리며 울고 있는 새 한 마리
철탑 위에 앉아 있는 그리움이
무르르 진저리치며 떨고 있다
햇살 이야기
김재진
모든 것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날
반짝이는 햇살이 다가와
아니라고 말했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니
아무것도 잃은 것 없다고
어깨에 앉은 햇살이 내게
아니라고 말했네.
행복
김재진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는 나무처럼
사람들 속에 섞여 고요할 때
나는 행복하다
아직은 튼튼한 두 다리로 개울을 건너거나
대지의 맨살을 발바닥으로 느낄 때
만지고 싶은 것
입에 넣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하나 없이 비어 있을 때
행복하다
가령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어깨에 닿고
한 마리 벌이 꽃 위에 앉아 있는
그 짧은 세상을 눈여겨보라
멀리 산 그림자 조금씩 커지고
막 눈을 뜬 앵두꽃 이파리 하나하나가
눈물겹도록 아롱거려 올 때
붙잡는 마음 툭, 밀어 놓고 떠날 수 있는
그 순간이 나는 행복하다
허공 꽃
김재진
바람 소리에 귀 맡기는 들풀처럼
파도에 옷고름 푸는 해변처럼
눈물에 마음 내어주는 하얀 빰처럼
바라는 것 없이 나를 인생에 내어주라.
산수국, 카랑코에, 패랭이, 오랑캐꽃
때가 되면 피는 꽃처럼
층꽃나무, 댕강나무, 감탕나무, 눈측백
엄동(嚴冬)의 흔적 지운 나무처럼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모든 것 다 품어 안은 허공처럼.
헤어지기 좋은 시간
김재진
네가 나의
심장인 줄 알던 날은 두근거렸다.
뚜껑을 들썩이며 끓고 있는 라면처럼
세상 모든 것이
증기기관차 내달리듯 입김을 뿜고
황혼이 좋은 날엔 자전거를 타고
황혼의 심장을 향해 달렸다.
네가 나의 심장이 아니라
일몰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을 땐 슬펐다.
헤어지고 싶은 날엔 편지를 쓰고
모서리 돌아서 안 보이는 곳까지
자전거도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세상이 나의 심장이라 믿는 날은 벅찼지만
세상은 언제나 부정맥이라
멈추어 선 기관차처럼 레일을 벗어났다.
혼자 가는 여행
김재진
가을에는 모든 것 다 용서하자.
기다리는 마음 외면한 채
가고는 오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그만 잊어버리자.
가을의 불붙는 몸에 이끌려
훨훨 벗고 산 속으로 가는 사람을
못 본 척 그대로 떠나보내자.
가을과 겨울이 몸을 바꾸는
텅 빈 들판의 바람소리 밟으며
가을에는
빈손으로 길을 나서자.
따뜻한 사람보다 많은 냉정한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미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두 잊어버리자.
한 알의 포도 알이 술로 익듯
살아갈수록 맛을 내는 친구를 떠올리며
강처럼 깊어지자.
살아가며 우리가 만나야 했던 미소와 눈물.
혼자 있던 외로움 하나하나 배낭에 챙겨 넣고
가을에는
함께 가는 이 없어도 좋은
여행을 떠나자.
혼자라고 느낄 때
김재진
함께 가던 사람들 속에서 문득
혼자라고 느낄 때
깜깜한 영화관에 앉아 막
불이 켜지고 흐릿해진 화면 위로
올라가는 자막 바라보며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렇게
흐르는 눈물 닦아내고 있을 때
영화 속의 슬픔이 마음속의 슬픔을
건드려 덧나게 할 때
비어 있는 방문을 도둑처럼 열고
상처받고 상처 내며 보낸 하루를
구겨진 편지처럼 가만 책상 위에 놓을 때
아, 온종일 그렇게
함께 있어도 혼자라고 느낄 때
사랑아, 너는
내 속에 숨어 언제나 나를 보고 있다.
혼자 있는 시간
김재진
내 속에서 걸어 나온 사내 하나
나를 보고 있다.
거울 속에서도
낯선 사내 하나 곰곰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사방에서
감시당하고 있다.
나를 들여다보는 몇 개의 나.
까딱거리고 있는 저 손가락은
누가 움직이는 것인가.
누가 누른 스위치에 의해 나는
웃거나 때로
찌푸려야 하는 건가.
혼자 있는 시간에도 완벽하게 나는
혼자이지 못하다.
그러나 누가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도.
언제나 그러하듯 마침내 아무도
같이 있을 수 없다.
후회
김재진
1
내가 무심코 한 장의 종이를 구겨버릴 때
몇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지 모른다.
내가 무심코 입술을 움직이며 혀 놀릴 때
몇 사람의 가슴이 상처 날지 모른다.
내가 신고 다닌 이 구두가
얼마나 많은 벌레들을 위협했는지 나는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를 용서하며 받아들인다는 그 말이
스스로를 용서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간이 간 뒤에야 나는 알았다.
2
그는 곧 후회할 것이다.
아버지께 했던 일을.
그리고 또 그는 후회할 것이다.
병상의 어머니께 뱉었던 말을.
너무 힘드니 이제 그만 가시라고 했던
뼈아픈 한 마디를.
흑백사진 속으로
김재진
어느 날 문득 나 사라지고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으리.
여전히 자동차는 밀리고 길마다 세워둔
표지판을 보며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바다를 찾아가리.
오월이면 또 모란이 피고
아카시아의 달콤한 향기에 취해 연인들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리.
한때는 친구였던 사람들이 법정에 서서
서로를 헐뜯으며 소송을 하리.
어느 날 문득 나 사라지고 없는 날
귀여운 아이들과 아내는 울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모여 살던
몇 평의 아파트는 남의 것이 되리.
사진관은 문을 열고 빵 가게의 주인은
하루치의 케이크를 주문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하리.
병원은 여전히 붐비고 눈가에 잔주름이 질세라 여자들은
눈꼬리 붙잡고 웃음 터뜨리리.
나 사라져 지상에 없어도 세무서는 붐비고
상속세 한 푼 낼 것 없어
아내는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 쉬리.
오지도 않은 의사가 발급해준 사망진단서를 들고 친지들은
매장 허가를 받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갈까 말까를 걱정하고
다시는 필요 없는 주민등록증을 반납하리.
나 묻혀도 세상은 줄어드는 것 하나 없고
삽날에 찍힌 흙만 붉은 몸 드러내리.
나 세상에 없어도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으리.
유월이면 산성비가 내리고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늙어가리.
흘러간 당신
김재진
알뜰한 당신, 아니
그리운 당신
코맹맹이 소리의 케케묵은 유행가처럼
아니면 노란 민들레의
폴폴 날아가는 솜털처럼
가볍다가, 가볍다가 마침내 그만
가여워지는 당신
기어코 눈물 흘리고 마는 당신
벽에 기대어 나는,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또 만나는
반복되는 인생에 기대어 나는,
아, 하얀 지팡이 두드려 길 찾고 있는
약시의 희망에 기대어 나는,
비 내리는 기억 속에 숨어버린 당신
흘러간 당신
12월
김재진
달력 속의 숫자에 우표를 붙인다.
이혼한 여자처럼 불꺼진 그믐에
혼자 앉아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쓴다.
십이월, 십이월...
입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그대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일에 나는
길들어져 있다.
단념하듯 날 저물고
눈 내린다.
일제히 하얀 점으로 변하는
눈동자 속의 십이월,
길 위로 나서기 위해
목이 긴 구두를 꺼내 신는다.
여름의 끝에 헤어진 친구를
눈발 속에서 찾다.
그대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일에
정말 나는 길들어 있을까.
사막에 눈 내리면
검은 머리카락이 반쯤 젖는다.
타클라마칸이나 라자스탄쯤의 십이월,
때로는
지쳐서 주저앉아 있는,
내 청춘의 사막쯤에 숨겨놓은 십이월,
가끔은
그대 침묵 앞에
온몸을 사르르 숯으로 빛나고 싶을 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