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5-4-1
토지 5부 제4편 순결과 고혈
1장 만산은 홍엽 이로되
엉성하게 만든 널평상에 한 다리는 세우고 한 다리는 늘어뜨린 채 곰방대를 물고 붕어같이 입을 버억버억 벌리듯 담배를 피우던 강쇠는 연기가 나지 않자 성냥을 그어댄다.
"니 댁 네는 코가 삐뚤어졌나? 와 안 오노."
하고 강쇠가 말했다. 축담에 걸터앉아 있던 몽치는
"절색은 아니지마는 코는 안 삐뚤어졌소."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라믄 와 안 오노."
"염치가 있인께 그러제요."
"염치가 있었다믄 애시당초 총각을 물긴 와 물었는고?"
"지가 물었지 그 앤네가 물었소?"
"하여간에 봇장 하나 알아주겄다."
"그거 없었이믄 벌써 옛날에 지리산 흙이 됐일 깁니다."
"말말이 저렇게 나오니, 대키 순! 해도사가 대체 머를 우떻게 가릋칬길래 저 모양이고. 하기사 피장파장이기는 하다마는."
"그런 말심 마시이소. 다른 거는 모리겄소만 인물 하나는 맨들어 놓으싰지요."
"허허어, 자칭 천자네."
"야, 지는 그렇십니다. 그렇기 살 기니께요."
"기떡이 맥힌다. 이놈아! 머를 믿고 니가 그러노."
"지리산 신령을 믿제요. 마음묵기 나름 아니겄십니까?"
하다가 뭉치는 낄낄 웃었다. 부엌에 나뭇단을 들어다주면서 휘는 이들 수작하는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코가 삐뚤어졌느냐고 물은 여자는 다름 아닌 모화였다. 지난봄부터 그들은 동거 생활로 들어갔는데 모화는 같이 산다 했고, 뭉치는 장가 들었다고 했다. 숙이가 울고불고 야단이 난 것은 물로, 영호도 드물게 친동생 대하듯 당장 갈라서라 호통을 쳤으며 여선주 부자도 몹시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뭉치는 오불관언이었다. 산에서는 가타부타 소지감은 말이 없었고 해도사는
"팔자다. 네놈이 말린다고 말 들을 놈인가."
반쯤은 찬동하는 듯 말했다. 그러나 강쇠는
"우떻게 된 계집인데 남의 새 총각을 돔비 갔노. 그래 계집은 또 그렇다 치자. 만고에 미친놈 아니가. 혼비가 없는 것도 아니겄고 시집오겄다는 처자가 없는 것도 아니겄고 어디가 벵신이가? 자식새끼 딸린 헌계집이라니, 말이나 되는 일가."
분개를 했다.
"좋은 거를 우짭니까. 여자는 별 인물 볼 것 없고 성칼도 대단한 모앵인데 경우가 바르고 비루한 짓은 죽어도 못하는 성민갑더마요. 몽치 가아가 보통내깁니까. 다 지 생각이 있을 깁니다. 그냥 모르는 척 내비리두시이소."
중재하듯 하는 휘의 말에
"내비리두라니, 내가 그놈아아 애비가? 지 누부 말도 안 듣는 놈인데."
슬그머니 후퇴를 했다. 다만 몽치를 이해하는 사람은 평사리의 한복이었다. 영호와 그 형제들의 생모요 자신의 마누라인 영호네는 하동 저잣거리에서 비럭질하던 계집아이였었다. 그 과거사를 생각하여 한복은 몽치를 이해했을 것이다.
"불쌍한 사람끼리 만내서 서로 아끼고 의지하믄 되는 기지, 형제 된 입장에 욕심이야 와 없겄노마는, 못 만났거나 죽었으믄 그런 동생도 눈앞에 못 볼 거 아니가. 애기 니가 맘을 풀어라."
며느리 숙이에게 타일렀던 것이다.
몽치는 어제 저녁때, 마른 생선을 수월찮이 짊어지고 추석을 쇠기 위해 산에 돌아왔다. 휘는 그보다 훨씬 앞서, 그러니까 지난 초여름, 통영의 생활 터전을 걷어버리고 산에 돌아와 있었다. 모두 살기가 각박했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전시인 만큼 소목일을 맡기는 사람들도 드물었지만 징용이라는 위험 부담이 있어서 그곳을 원했고 특히 해도사는 신중한 태도로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하다시피 했다. 옛날과 같이 휘는 숯을 굽고 화전을 넓혀 농사도 지었으나 네 식구가 늘어난 산 살림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통영서 벌어온 돈이 있어서 그나마 지탱이 되는 형편이었다. 영선은 국민학교에 다니던 선아를 산으로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을 못내 아쉬워했다. 어쨌든 추석을 하루 앞둔 산에서는 그런대로 추석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올 추석, 도솔암은 시끌벅적하겄다."
강쇠는 곰방대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와요"
몽치가 물었다.
"서울서 손들이 많이 왔인께."
강쇠는 더 이상 설명르 않고 곰방대를 허리춤에 찌르며 문밖으로 나간다.
"교장선생님 가족들이 오신 기라."
휘가 덧붙여 말했다.
"헌 생이틀 겉은 그 양반."
"제발 그놈이 말버릇 좀 고치라. 언제까지 그럴 기고."
"성이야말로 서울서 똥깨나 뀌는 사람이라꼬 쩔쩔매는 기요?"
휘는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오장육부 사람은 다 매일반인데 그래싸을 것 없소, 보아하니 늙은네가 곧 죽어감서도 개화장에 양복 걸치고, 신식 배우니라고 부모 재산깨자 축냈을 성싶더마요, 우리네 고학파하고 안 맞일 것 같애서 별 재미없소."
"얼싸구? 그 양반이 지리산 몽치 장군을 만내로 오기라도 했단 말가?
허파에 바람든 소리 그만해 두어라."
"지감스님이나 도사 선생님은 모두 우리 구역 사람 아니오?"
"태산 깨는 소리 하네, 몽치야."
"말하소."
"그 따우로 풍을 치다가는 산에 발 딜이놓기도 어렵게 될라?"
"무슨 소리요?"
"산의 형편이 전과 같은 줄 아나?"
"별 희한한 소리 다 듣겄소. 영문이나 압시다."
"지금 징요을 피해서 도방사람들이 많이 숨어들고 있다. 모두 죽기 아니믄 살기로 독이 오른 사람들인께 잘못했다가는 봉변당할 기다."
"이 내가요?"
"함부로, 대나깨나 시부리지 말라 그 말이다."
"객이 주인을 내친다 그 말인가 본데 언제부터 성이 그리 곤장 해졌소? 통영에다가 실개를 빼놓고 왔소?"
"미친놈, 그나저나 니 형편은 우떻노?"
"그거야 두고 보아야제요. 기름도 어구도 딸리는 판국이니 배 띄우기가 수울찮고 뱃놈이라고 언제꺼지 그냥 놔두겄소? 아무튼 지랄 겉은 세상이요."
"큰일이다."
"얼마 전에 왜놈 간장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는 사람이 떼여가는 거를 보았는데 산월이 다 된 댁네가 목을 놓고 울더마요. 왜놈해구는 꼴을 보이 간장 안 맨들어도 좋다, 개기 안 잡아도 좋다, 가자, 그 쪼더마."
"..."
"그거는 그렇고 산에 숨어든다는 사람들은 뭐 묵고 살 기요?"
"식량 댈 만한께 들어왔겄지, 없는 사람들이야 어디 피신이나 할 형편가. 배급 통장이 발을 꽉 묶어놨는데 하기야 뭐 먼지 죽는가 나주엥 죽는가 그 차이 아니겄나. 그래 니는 언제 갈라노."
"내일 일찍 산소에 갔다가 평사리에 들리서."
"생각 좀 해봐라."
"생각하나마나요."
"그런 소리 말고 니도 산으로 돌아와야 할 기다."
"그거는 안 되요."
"와 안 되노."
"하야간에 그 바닥에서 나는 비비대볼랍니다."
"각시 땜에 그러는갑네?"
휘는 빈정거리듯 말했고 몽치는 눈을 희뜨며 노려보다.
"나 실개 빼놓고 사는 놈 아니오."
"말이사?"
"이판사판, 당할 때는 당하더라 캐도 숨어댕기는 거는 싫구마요.
가깝해서 못 사요."
"미련한 놈이나 하는 짓이제. 니 눈에는 세상이니 손바닥 위에 있는 거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거는 풋내기라서 그런 기다. 지 심만 믿는 놈치고 어리석지 않은 경우는 드문께."
"인명재천이라 했소."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쏫아날 구멍이 있다 했소."
"그렇고말고. 네놈만 쏫아날 구멍이 있긴 있일 기다. 지리산 신령을 믿은께."
휘의 집에서 점심을 먹은 몽치는 해도사 거처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몽치는 아비 산소에 갔다. 쓰러져 죽은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묻어놓고 해도사가 표지만 해놨던 조그마한 봉분이었다. 그 동안, 그러니까 몽치가 산을 떠난 후 그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에는 평사리 시댁에 추석을 쇠러 온 숙이가 무덤을 찾았고, 해서 비교적 손질은 잘 되어 있었다.
"아부지, 저 왔소."
초라한 제수를 차려놓고 술을 부은 뒤 몽치는 엉덩이를 치켜들고 절을 세 번하고 반절도 한번하고 무덤에 술을 끼얹는다. 그리고 무덤가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이었다. 그 동안 날이 가물어서 그랬는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건조했다. 선명하게 물들기 시작한 잡목 숲, 나무잎새들도 종이 잎새같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메마르게 들려왔다. 풍성한 가을 산이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지,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르는가 했더니 맞은 편 숲속에서는 지치지도 않고 소쩍새가 울었다.
몽치는 술병을 들고남아 있는 술을 마신다. 그리고 북어포를 찢어서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세월을, 한을 씹는 것처럼, 그의 얼굴은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아부지, 와 그렇기 어리석게 살았십니까? 싫다며 도망간 여자를 찾아서 머할라 캤십니까. 자식들 끌고 유리걸식, 결국 이곳에 묻힐라꼬... 아부지!"
도망간 여자, 그는 그의 생모였으며 몽치는 한번도, 마음속에서 나마 어머니라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첩첩산중, 첩첩산중... 어린것 하나 놔두고 눈을 감을 수 있던가요? 아부지!"
산소에 오면 언제나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나는 세상 그렇기는 안 살 깁니다. 그렇기 못나게는 안 살 깁니다. 천지간에 낯선 곳에 떨어진 목심, 누부나 내나 살아남은 기이 천행이었제요. 죽은 사람 원망해서 머하겄소. 하지마는."
병을 기울여 또 술 한 모금을 마신다. 몽치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 아버지는 산속으로 들어왔느냐는 그것이었다. 죽을 생각이었다면 마을, 사람 사는 곳에 아이를 버렸으면 될 것을, 누이를 주막에 맡긴 것처럼 할 수도 있었는데, 사람을 찾아서 산에 들어왔는지 아니면 화전이라도 일구어 살아볼 요량으로 산에 들어왔는지, 그러다가 갑작스레 병이 나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몽치는 한 번도 그날 밤을 잊은 적이 없다. 시신을 곁에 두고 차디찬 이슬에 젖으며 쭈그리고 앉아서, 산발한 듯 숲이 바람에 울부짖고 산짐승들이 울부짖던 그날, 그 칠흑 같은 밤을 그는 결코 잊지를 못했다.
산소에서 돌아온 몽치는 해도사와 지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휘와 해도사에게 나누어주었기에 훨씬 양이 줄어든 마른생선 꾸러미를 들고 평사리를 향해 산을 떠났다. 도솔암에는 명희와 그의 올케 백씨, 그리고 여옥이 와 있었다.
"스님, 언젠가 한번 만나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여옥이 물었을 때 지감은 빙그레 웃었다.
"여수서, 두 번이었지요."
"노상에서 한 번, 그리고 부둣가에서 한 번."
지감은 여옥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뜻밖입니다."
"전도부인께서 절에 오셔도 되겠습니까?"
다소 비아냥거리듯 지감은 말했다.
"산중인데 그러면 우릴 쫓아내시겠습니까?"
여옥도 스스럼없이 말했다.
"원래 절에서는 기식을 거절하는 법이 없소이다."
명희는 엉거주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여옥은 완전히 건강이 회복되었고 임명빈은 거동에 불편이 없을 만큼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그는 여자들이 셋이나 몰려온 것을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좀 내려가면 여자들만 있는 암자가 있는데 거기 가있는 게 어떻겠느냐 권하기도 했다. 사실 산에 있는 동안 이곳 형편도 다소나마 알게 되었고 산사람들의 기질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어렵고 힘든 속에서 얼마나 그들이 강건하게 살고 있는가, 물론 조용한 산사의 분위기를 어지럽히다는 생각도 했으나 서울 부르주아들의 유람 행각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 점이 염려되었다. 모두 양식이 있는 여인네들이지만 차림새에서부터 산사람들은 예사롭게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심들이 보통이 아닌 해도사나 지감 그리고 강쇠에 대하여 켕기는 구석이 없지도 않았다. 그들 입에서 무슨 독설이 튀어나올지 조마조마한 심정이기도 했다. 실은 백씨와 명희는 추석을 산에서 혼자 쉴 명빈을 생각하여 음식이며 밑반찬을 장만하고 겨울 옷가지, 불전등을 준비하여 조용히 다녀가려 했다. 그랬는데 공교롭게도 여옥은 여수의 최상길로부터 편지를 받았으며 내용이 추석 다음날 자기는 지리산 도솔암으로 갈 터인데 여옥이더러 내려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해서 여옥은 명희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 심산유곡이지요."
점심을 먹고 난 뒤 여자 셋은 밖으로 나왔는데 계곡의 개울 길을 따라 올라가며 백씨가 말했다. 그는 한번 이곳을 다녀간 일이 있었지만 명희와 여옥은 초행이었다. 슬랙스에 운동화를 신은 명희는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걸으면서
"나도 이런 곳에 와서 살았으면, 세상만사 다 잊고."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오빠 같은 환자는 정양하기 위해서지만 아무리 좋다 해도 첩첩산중, 아무나가 살 수 있나요?"
하는데 여옥은
"그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예요."
하고 말을 가로막았다.
"서울서 왔다는 그 암자의 여자도 십 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는 중이잖아. 여기 살고 싶지만 중이 될 생각은 없어. 하긴 언니 말이 맞아요. 아무나가 살 수 있는 곳은 아닐 거예요."
명희는 생각을 철회하듯 말했다.
"그 여자는 중 옷만 입었다 뿐이지 제대로 된 중은 아니래요. 서울서 알만한 집안의 따님이라 하고 지감스님의 이종누이라 하든지... 어딘가 좀, 정상이 아닌 것 같더군요. 전에 한번 왔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왔더군요. 지감스님은 영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어요. 뭔지 하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고, 그런가 하면 스님한테 따지듯 맹랑한 면도 있구, 그리고는 자기 암자에 놀러오라 하며 일어섰는데 돌아서서 하는 말이 자기는 이 산말고는 갈 곳이 없다, 그 말을 들으니까 어째 가슴이 찡하더구먼."
명희는 지나날 그 남쪽 바닷가에서의 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던 그곳, 두 번 다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째 이곳에서 살고 싶다 했는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보다, 제대로 된 중이 아니라 하더라도 중 차림의 여자가 아이는 어떻게 된 걸까요?"
여옥이 말했다. 실은 어제 임명빈의 권유도 있고 해서 여자들은 민지연의 암자로 내려와 잠을 잤던 것이다. 그러나 민지연은 대하기가 편한 여자는 아니었다. 신경에 날이 서 있는 것 같은가 하면 망연한 눈빛으로 말없이 앉아 있곤 했다. 잠자리에 든 후에도 끊임없이 한숨을 쉬며 몸을 뒤척였다. 그런가 하면 자다 말고 마루에 나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도솔암으로 올라온 여자들은 방이 비좁아 잠을 못 잤다는 불평을 임명빈에게 했다. 어쨌든 그곳에서 여옥이 말하는 아이를 보았던 것이다.
"그 아이는 그 여자 애가 아니예요. 누가 버리고 간 아이라나요? 처음에는 펄펄 뛰었답니다. 혼인도 안 한 처지에 아이를 기르다니 말이나 되는 가고, 했는데 지감스님께서 우격다짐으로 기르라 했던 모양이에요. 이제는 너무 이뻐서 그 아이 없인 못 살겠다 그러는 거예요."
"혼인을 안 했어요?"
여옥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네, 안 했대요.'
"무슨 곡절이 있군."
명희는 평상같이 반듯하고 넓은 바위 곁에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쉬어요."
세 여자는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는다.
"여옥아."
"응."
"우리가 여기 오래 있으면 방해가 되겠지?"
"무슨 소리야?"
"최선생 오시면 우리 떠날게."
"놀랍군."
"뭐가?"
"명희 너한테도 심술이란 게 있으니 말이야."
"언니, 심술이래요. 실은 샘이 나서 그러는데."
낄낄거리며 명희가 웃는데 백씨는 웃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샘이 나면 너도 애인 하나 만들어."
"망칙한 소리하지 마."
"앙큼스럽기는, 희재 어머니."
"네."
"이런 시누이 보기가 힘들지 않으세요? 마음을 꽁꽁 묶어서 남이 볼세라 전전긍긍하는 꼴, 터버리면 서로 편할 건데 아직 고생을 덜해서 그런가 부지요?"
"나는 괜찮지만 길선생은 그럼 어째서 고모랑 그리 다정하지요?"
여옥은 껄껄 소리를 내어 웃는다.
"나도 한때는 그랬거든요. 명희는 개심하기 어려울 거예요. 눈앞에 백마 탄 사내가 나타나도 머뭇거리다가 볼일 다 볼 거예요."
"그러면 여수 최선생은 백마 탄 사나야, 너에겐?"
"사내... 친구야. 구혼을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 사람 구혼 같은 것 하지 않을 거야."
여옥은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놨다.
"금홍인가 하는 그 여자 떠났다며?"
명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인은 나보고 그런 말 안 해. 하지만 갈라선 것 같애."
"그러면 결혼 못할 것도 없지 않아?"
"그건 남들의 생각이지. 실상 난 친구든 남편이든 상관없어. 난 난생 처음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 생긴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희재 어머니, 다 늙어가면서 이런 말하는 것 숭 없지요?"
"별말을 다 하세요. 나도 그리 구식은 아니랍니다. 고모한테서 들었지만 형무소에서 길선생을 업고 나왔다면서요?"
"..."
"그런 지극한 사랑이 어디 있겠어요? 이해합니다. 그러나 조금은 섭섭하네요."
"왜요?"
"다정한 친구를 빼앗긴 고모 땜에."
여옥은 또 웃었다. 그러나 어딘지 멋쩍어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힘들지요."
"힘들어하지 마. 미안해할 것도 없구, 한 사람이라도 정상으로 되는 편이 낫지."
"끝내 자신의 얘기는 안 하는 구나."
"안 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그건 진실이야."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여옥이나 백씨나 다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세 사람은 다 뭔가 이야기를 이어나가야겠다고 초조하게 생각하면서도 가위눌린 것처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어느덧 각자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저귀는 새소리, 흐르는 물소리, 바람, 바스락거리는 마른 나뭇잎 소리, 숲에서는 온갖 생령들이 일렁이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침묵은 계속되었다.
사실 명희는 쓸쓸했다. 색바랜 헌옷 같은 자기 존재가 서글프기도 했다. 인척집 늙은이는, 소생 하나 없이 노년을 어디다 의탁할꼬, 그 곱던 얼굴도 속절없이 늙는구나, 늦기 전에 개가를 하든지, 그런 말을 했다. 수다스러운 원아의 젊은 엄마는, 원장님 같은 분은 재혼하시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좋은 상대가 있을 거예요, 아름다우시고 교육은 최고로 받으셨고 재산도 넉넉하겠다, 그런 말을 지껄였다. 은근히 혼담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명희는 모욕을 느꼈고 넌더리를 내며 싫어했으나, 그러나 그는 역시 외로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선혜의 경우도 그랬고 길여옥, 양현의 경우도 어떤 아픔 같은 것을 늘 자아내게 했다. 그들은 모두 명희가 아끼는 사람이며 다정한 선배, 벗이었으며 딸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행복하건 불행하건 모두 절실한 대상과 더불어 절실한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들의 삶과 무관한 자기 처지를 때때로 깨닫게 될 때 명희는 쓸쓸해지는 것이다.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적에도 그랬다. 강선혜의 남편 권오송은 결국 영월에서 잡혀왔다. 그의 죄명은 불온사상이었고 잡지 『청조』를 발행했을 때도 목적은 불온사상의 전파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 사실무근은 아니었다.
"본인은 차라리 편안하다 하더군. 불안한 나날을 보내기보다 오히려 낫다, 말이 그렇지."
하며 강선혜는 명희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선혜 언니가 큰일이야."
침묵을 깨고 명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게요."
숨이 트인 듯 백씨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날이 곧 추워올 건데, 들어간 분들이 겨울을 어찌 날 것인지 큰 걱정이에요."
백씨는 또 말했다.
"권오송 씨는 어떤 괴물 같은 여자 때문이라며?"
여옥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니?"
"나도 귀는 열려 있어."
"이일 저일로 선혜 언닌 불운했어.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그것도 알어. 그 괴물은 소위 상류사회를 누비고 다니는 경찰의 스파이라 하던데 명희 너도 알고 있니?"
"그 얘긴 선혜 언니한테서 들었어. 전에 한번 찾아온 일이 있는데 공교롭게 선혜 언니 하고 부딪쳤지 뭐니? 여러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 모양이야."
"흡혈귀 같은 여자라 하더군. 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건 언니에 비하여 순진한 편이고, 애비도 밀정이었다는 거야. 그런 연유로 경찰 간부 어떤 왜놈의 정부이자 그 손끝에 노는 스파이라 하더군."
"어떻게 그리 소상히 아니?"
그러나 이상하게 여옥은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선혜언니 말로는 처음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거야. 무용발표 때도 청조에서 후원하는 것으로 해주었고, 한데 권오송 씨를 유혹하려다가 거절당한 앙갚음으로, 참 세상엔 별놈의 여자가 다 있지?"
"상류사회의 할 일 없는 여자들 속을 뽑아내어 거미줄 감듯 친친 감아서 돈을 말아 올리기도 하겠지만 동정을 살피고 정보도 수집하고."
"어느 정도 정체가 밝혀졌으면 끊어버려야 하는 건데 여전히 그 여자는 다니던 집에 드나들고 있는 모양이더군. 왜 그럴까?"
"이 맹추야, 그것도 몰라?"
"뭘?"
"세상 물정 하낫도 모르는 군. 사람들 심리에 대해서도 캄캄 소식이구."
명희는 쓰게 웃는다.
"사람들은 해악을 당할까봐 두려운 거야.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지 않아? 왜 떡 하나를 더 주겠니? 제발 해코지 말고 물러가라는 뜻이지. 악신을 달래는 것도 우리들 풍속이야. 어떤 면에서는 아주 노회한 생각이지만, 그리고 또 일부에서는, 소위 친일 패거리들인데 그 여자 뒤에 엄청난 힘이 있는 거로 착각을 하고 이용해보려는 속셈도 있겠지. 그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게끔 하는 데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모얌이고, 하기야 뭐 경찰 간부의 정부면 힘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
"여옥아, 너 형무소 살이를 하더니..."
"하더니?"
"말하는 투가 어쩐지 전과 같지 않아. 왜 그렇지?"
명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거칠어졌니? 누굴 저주하는 것 같아? 나 그렇지는 않은데."
"거칠다기보다 뭐랄까, 가끔 그런 걸 느끼는데 좀 이상해."
순간 여옥의 얼굴에 긴장하는 빛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그런 일 겪고 나면 글쎄... 생각을 꾸미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걸까? 단순해지면서 강해진다고 나 할까? 아무튼 내게는 그곳이 값비싼 인생의 교습장이었어. 상상도 못할 그런 인생들과 만나게 되는 곳이기도 하구."
여옥은 말을 하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겁나는 얘긴 이제 그만들 하세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백씨가 말했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회재어머니."
"그보다 법당에 있는 그림은 보셨어요?"
"무슨 그림 말예요, 언니?"
하고 명희는 올케를 쳐다본다.
"내가 얘길 안 했던가요?"
"...?"
"법당에 걸려 있는 관음상 말인데요. 재영이 할아버지께서 감옥에 들어가시기 전에 그 관음상을 그려놓으셨다 하는데 기가 막히더구먼. 정말 놀랬어요."
"그분이 어떻게?"
여옥은 의아해했다.
"옛날 어렸을 때 절에서 그림 공부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그아 금어라, 하든지요. 불화 그리는 스님을 금어라 한답니다. 장차 금어가 될 것으로 생각들 했는데 운명이 바뀐 거지요."
"이제 생각하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아요. 환국이한테서 들었나?
양현이한테서 들었을까?"
명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그림이 법당 안에 있어요?"
여옥이 물었다.
"네."
"보고 싶지만 예수쟁이가 법당에 들면 벌 안 받을까요?"
여옥은 웃으며 말했다.
"이 절 안에 들어왔고 절 지붕 밑에서 잠을 자놓고서 왜 그러세요? 길선생도 참 짓궂은 데가 있네요."
백씨의 짓궂다는 말은 벌받지 않겠느냐는 말에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여학생 시절부터 집에 드나들어 백씨는 여옥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 좋아하기도 했는데 오늘은 백씨 기분은 그렇지가 않았다. 뭔지 모르지만 명희에게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상대처럼 느껴지는 것이었고 한편 부럽기도 했던 것이다. 백씨는 명희를 어떻게든 명희가 새 출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명희를 위해서도 그랬지만 한편으로는 빚진 삶의 죄책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임명빈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으나 명희의 불행이 친정 때문이라는 부담은 백씨에게도 늘 있었던 것이다.
'학식도 인물도 우리 고모한테 비하면 모자라는데 어디서 그같이 좋은 사람을 만났을까? 하기는 결혼까지 할지, 그것은 모를 일이지만 하여간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어쨌든 사람의 일이란 몰라."
여옥의 말에 백씨는 깜짝 놀란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중얼거린 말을 바로 여옥이가 말했지 때문이다.
"관에 못질하는 그날 끝나는 거지, 인생에는 종지부지가 없어. 우리가 내일 어떻게 도리 것인지 그걸 누가 알겠어?"
그 말은 화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의미심장한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일어섭시다. 더 올라가보든지 아니면 절로 돌아가든지."
여옥이 먼저 일어섰다.
"절로 돌아가지 뭐, 나 피곤해."
명희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때 산사람 하나가 우쭐우쭐 걸어 내려왔다. 백씨는 안면이 있었는지 인사를 했다. 그도 알은 체는 했으나 냉담하게 그들 앞을 지나가 버린다. 강쇠였던 것이다. 그는 성큼성큼 보통 보폭으로 걸어갔는데 이내 이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구예요?"
"저 위에 사는 화전민인지, 스님과도 가깝고 오빠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사인가 봐요. 김장사라 하든가."
"그럼 씨름꾼인가요?"
"글쎄, 몸은 힘깨나 쓰는 것같이 보이지 않아요?"
여자 세 사람이 절로 돌아왔을 때 강쇠는 절 마당에 서서 지감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절 방으로 피신하듯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눈치예요. 오빠도 쌀쌀하게 대하는 것 같고."
명희가 푸념하듯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좀 그래. 오늘밤도 그 암자로 내려가서 자야 하는 지, 한방에 다섯 사람, 아이까지 여섯 명이 자기에는 너무 비좁아."
"그보다 그 보살인지 하는 여인이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명희 불평에 백씨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이 그리워서, 더구나 서울서 왔다니까 함께 지내고 싶어 하는데 성질이 좀 이상한가 봐요, 산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 세 여자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남의 얘기도 했고 수학여행 온 여학생같이 들떠서 다소 철부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산속 별천지에서 일상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홀가분함도 있었을 것이며 임명빈이 건강이 생각 밖으로 호전되어 심각해할 문제에서 비켜설 수도 있었고 그러나 무엇보다 산은 자유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들 여자들도 따라서 자유러워 졌는지 모른다. 민지연이 산에 오래 있어서 이상할 것이라 한 백씨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자신이 믿는 것 이왼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아집이 완명하게 굳어버린 민지연의 타고난 성품이나 남다른 파탄을 겪었고 그 풀수 없는 운명과 아직도 마주서 있는 그의 처지, 그것들이 일단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하지만 산중 생활은, 그 생활의 감정 자체가 사바세계하고는 사뭇 다르다. 하여 밖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상한 감을 갖게 하는 면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아씨 참 가여운 분이에요."
민지연의 시중을 드는 소사라는 여자의 말을 백씨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가여운 사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우린 내일 떠날 건데 여옥이 넌 어차피 그 여자 신세를 져야할 거야."
명희 말에 여옥은 펄쩍 뛰었다.
"내일 가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는 내일 가야 해요. 볼일이 좀 있어서."
백씨가 말했다.
"사정이 그러시다면 희재어머니는 가시고, 명희는 나랑 함께 지내다가 가는 거야. 서울 가서 뭘 하니?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최선생하고 너 꽁무니를 눈치 없이 졸졸 따라다니란 말이니? 난 싫다."
"어어? 이거 누가 하는 소리지? 그 따위로 속된 말, 정말 임명이가 했단 말이야?"
"기가 막혀서."
"잔말 더 이상 할 것 없다. 여기 있다가 나랑 함께 서울로 가는 기야. 날 데려다줄 의무가 너에겐 있어. 내가 성한 사람이니?"
"최선생이 데려다주실 건데 뭘 그래. 걱정 없어."
"안 돼. 넌 나랑 함께 가야 해."
"그렇게 하세요. 모처럼 오셨잖아요? 산에 단풍이 더 드는 것 보시고 천천히 놀다오세요. 오빠하고도 얘기할 새가 없었고."
"오빠하고 할 얘기가 뭐 있겠어요."
"오빠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정말 그럴 거니?"
여옥이 따지듯 말했다.
"응."
"그러면 너 나하고는 절교다."
"무섭지 않아."
순간 여옥의 표정이 달라진다. 명희를 반히 쳐다본다.
"그럼 말이야."
"..."
"최상길 씨가 오면 말이야, 쫓아버릴게."
"뭐라 했니?"
"그래도 나랑 안 있겠어?"
"정신나간 소리 하지도 마."
했으나 명희는 저도 모르게 어떤 위안 비슷한 것을 느낀다.
"아까 내가 결혼 얘길 해서 너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우린 정말. 좋은 친구야."
"누가 아니래?"
"사회적 통념으로 생각지 말아. 일반적인 그런 사이였다면 나 내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너희 오라버니, 지감스님도 계시는데 하필 이곳에 오겠니? 최상길 씨도 날 만나는 목적만으로 오는 거 아니잖니?"
진지하게 말하는 여옥의 태도가 우스웠던지 명희는 웃는다. 백씨도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진지함은 서투르고 천진해 보였다.
"아까 나보고 뭐라 했지?"
여옥은 어리둥절했다.
"세상 물정 하낫도 모르고 사람들 심리에 대해선 캄캄 소식, 날 맹추라 했던 것 같은데?"
"그랬는데?"
"피장파장, 이 맹추야."
"무슨 뜻이니?"
"관두자. 정황이 가련하여 그럼 있어볼까?"
"이제 보니 너 재롱 떨었구나!."
세 사람은 깔깔대고 웃는다.
"너 두고보자아, 언제고 한번 나한테 당할 테니."
"언니."
"네."
"여옥일 보면 이상한 생각 들지 않아요?"
"어떻게요?"
"저렇게 살아서 눈알을 굴리고 있는 모습...기적 같애."
"정말 그래요. 그땐 아무도 살아나리라 생각지 않았지요. 인명 재천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가 봐요. 인력으로는 저렇게 될 수 없지요."
백씨는 새삼스럽게 여옥을 바라본다.
"그때 나는 종로거리를 지나면서...전포, 왜 그 장례에 필요한 것 말예요, 그 전포 앞에 서서 관을 보고 있었어요. 관이 두 개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지요. 정말 막막해지더군요. 아주 추운 날이었어요."
그러니까 일년 반이 훨씬 지난 작년, 겨울이 끝날 무렵의 일을 명희는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창경원에 가서 혼자 울었던 일은 얘기하지도 않는다.
"오빠도 그땐 가망이 없었지요."
눈시울을 적시며 백씨가 말했다.
"누구에게나 어차피 관 하나는 필요해."
관 속으로 들어갔을지 모를 자기 자신의 해골 같았던 그때 모습을 생각했는지 여옥이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지금은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다행이라는 생각은 바로 불안이야. 불행은 고통이고.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의 일이란 관에 못질하는 그날이 끝이지, 인생에는 종지부가 없어. 내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걸 누가 알겠어?"
"그래서 불만이라 말이니?"
"그렇다는 얘기지 뭐. 겸손해야 한다는 뜻도 있을 거구."
"어쨌거나 너 최선생 은공 잊으면 안 될 거야. 친구이든 애인이든 결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요, 정말. 그리 지극한 마음이 어디 흔히 있겠어요?"
"그건...그건 최상길 씨의 양심이지요. 기독교인으로서..."
"과연 그것만일까?"
"그것 이상으로 내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 교만이다."
여옥이 성난 사람같이 말했다.
'여옥아, 너 정말 괜찮은 여자구나. 조금도 들떠 있지 않구, 뭔가 넌 확고해.'
명희는 저도 모르게 여옥의 손을 잡았다.
"어쨌든 살아주어서 고마워."
"이앤, 새삼스럽게?"
"그 동안 왜 말을 못했을까?"
"감상에 푹 빠졌구나. 아서, 겁난다."
"..."
"감상적인 성미도 아닌데 그러니까 겁난다 말이야. 그보다 법당에 있다는 그림, 그거 보러 안 갈 거니?"
"그래, 그거 보아야지."
명희와 백씨는 일어섰다. 그러나 여옥은 앉아 있었다.
"넌 안 갈 거니?"
"그림 같은 것 보아도 몰라. 취미도 없구, 보나마나 뭐. 넌 최씨 댁과 연고가 깊으니까 보는 게 도리겠지만 난 좀 쉬어야겠다. 피곤해."
명희는 굳이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왔다. 그때 산사라 같지 않은 청년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강쇠와 임명빈이 절 뒤편으로 돌았다.
"저이가, 어딜 가시는 거지?"
백씨가 중얼거렸다.
"어떻습니까, 거처하기 불편하시지는 않으십니까?"
돌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지감이 서 있었다.
"스님."
"네."
백씨는 다소 불만스럽게 지감을 쳐다보며
"오늘 밤은 도솔암에서 묵어야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곳은 방이 비좁고..."
"그럼 여운암에 가서 주무셨단 말씀입니까?"
"네."
"왜요?"
"...?"
"임교장께서 그러라 하셨군요."
지감은 빙그레 웃는다.
"절의 넓은 방 놔두고. 오늘은 이곳에서 편히 주무십시오."
"스님의 뜻은 아니셨군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하면은 그이가 어찌 우리를 박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짐짓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실은 남편의 생각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냥 그래본 것이다.
"세 분이나 함께 내려오신 걸 보시고 서울로 모셔갈까 봐 두려워 그러시는 거 아닐까요?“
하고 지감은 소리 내어 웃었다.
"글쎄요...우리는 지금 관음상 그림을 보러 갈려구요."
"네. 어서 가보십시오."
명희와 백씨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명희는 본시 기독교인이었지만 시작부터 타성적이었고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그리고 진정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명희 자신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따라서 절에 왔다거나 법당에 들어온 일에 저항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백씨는 독실하다 할 수는 없지만 불교를 믿는 편이며 그것은 그의 의식이 습관화된 것이기도 했다.
명희가 관음탱화 앞에 섰을 때 백씨는 불상 앞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무엇을 기원하는지 예배를 울리는 한복차림의 그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눈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화에 대한 상식이 없었고 종교적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판쯤으로 인식했던 명희 눈에 처음 관음상이 비쳤을 때 그 현란함과 섬세한 데 호기심을 느끼긴 했다. 보관이며 영락, 투명한 옷자락의 우연한 선과 그것에 싸인 아름다운 자태는 정교했고 색조는 유려했다. 그리고 환국의 부친이자 서희의 남편 김길상에게 이와 같이 숨은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백씨는 계속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오십대 중반의 나이, 평소 집에 있을 때는 오래된 가구의 일부처럼 각별한 의미도 존재도 뚜렷하지 않았는데, 하기는 모처럼의 나들이여서 차림이 달라지기는 했다. 은은한 보랏빛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모습은 오랜 세월 한복에 길들여진 독특한 멋이 있었고 또 서울 여자의 세련된 탯거리가 역력했지만 그러나 그저 그런가 부다 했던 사람이 피어오르는 향과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부처님 미소를 나래를 펴듯, 나래를 접듯 일어서고 엎드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탱화에서 눈을 떼고 백씨를 바라보던 명희는 여간하여 그 예배가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다시 관음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명희는 참으로 기이한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현란하게 보이던 관음상이 폐부 깊은 곳, 외로움으로 명희 이마빼기를 치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명희는 자기 마음 탓이려니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바람과도 같이 영성을 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법당에서 나왔을 때, 선명한 단풍과 아직은 푸름이 남아 있는 맞은편 숲이 투명한 푸른 하늘에 묻어날 듯 명희 시계에 들어왔다. 마치 인생의 한 고개를 넘은 듯 명희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나왔다. 도대체 김길상이란 누구냐 하는 의문도 명희 마음속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그가 출옥한 지 십여 년, 그러나 명희가 길상을 만난 것은 환국이 결혼할 무렵에서 그 이후 서너 번인가? 정확하게는 환국이 결혼하던 식장에서 처음 명희는 길상을 보았다. 투사형의 장대한 체구를 상상했던 명희는 뜻밖이라는 생각 했다. 키는 컸지만 다소 마른 편이었고 몸가짐이 매우 조용했다. 투사형이기보다 오히려 명상적이며 현실과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언젠가 임명빈은
"출신 신분과도 다르고 활동을 한 행적과도 다르고, 학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뭐랄까? 인간의 존엄성이라 할까, 범치 못할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더군. 그분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야. 말수도 적은 편인데 그 말도 아주 절제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모든 것이 생래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생역정에서 갈고 다듬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사람의 인연이란 참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했지. 신분이 극과 극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도 세상에 그리 흔치는 않을 게야. 그분들의 인생이야말로 굉장한 드라마다."
그런 말을 했다. 문청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임명빈의 말투를 그때 명희는 민망스럽게 생각했다.
"드라마 아닌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 그야 그렇지만 ."
해가 떨어지고 저녁을 끝냈을 때 산사에는 어둠이 밀려왔다. 상좌가 와서 불을 밝혀주고 간 절방은 한결 넓게 보였다.
"명희야."
"응."
명희는 좀 지친 듯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달이 떴을 거야. 달구경 안 갈래?"
"나 피곤해."
"나갔다가 호랑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구요."
백씨가 농담하듯 말했다.
"호랑이가 있을까요?"
"공양주 말로는 호랑이가 있다 하더군요. 옛날에는 밤이면 나무판자 같은 것을 산막 둘레에 세워놓고 지냈다고도 하구요."
"요즘에도 그런대요?"
"글세, 아마 호랑이도 총소리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인가에는 접근 안 하는 것 아닐까요."
하고는 까닭 없이 두 여자는 까르르 웃었다. 그러나 명희는 화제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옛날에는 호환이 많았던가 봐요. 그래서 호식으로 태어났다는 말도 있잖아요?"
"얼마나 무서웠으면 산신령이라 했겠어요?"
"무섭기도 했겠지만 호랑이는 영물이라 하더구먼. 그 눈빛을 보면 오금을 떼어놓을 수가 없대요. 해서 백수의 왕이라 하잖아요?"
"그런 호랑이도 사람에게 잡혀 죽으니 사람같이 영악한 건 없어요."
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원장 계신가?"
익살스런 목소리였다.
"네, 오라버니. 들어오세요."
여옥이 얼른 말했다. 임명빈은 방문을 열고 엉거주춤 방안을 들여다본다.
"내일 가니?"
선 채 물었다.
"들어오시기나 하세요."
뾰로통한 백씨의 말이다.
"내일 서울 가는 거요?"
임명빈은 여자들의 기색을 살피고 백씨에게 또 물었다. 지나치게 이들 일행에게 냉담했던 것이 다소 미안해진 눈치였다.
"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 엉거지춤 거기 서 계시면 어쩝니까?"
임명빈은 슬그머니 방안으로 들어왔다. 전과 별로 달라진 모습은 아니었다. 밀도 잃은 큰 체구, 큰 두상이 엉성하기로는 서울에서 누워 있었을 때와 매일반이었지만 거동하는 것만은 전과 달랐다. 그는 온종일 산속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것 같았다. 몽치가 헌 상여틀이라 한 말은 어느 정도 적절한 표현이었고 곧 죽어가면서도 개화장에 양복 걸쳤다는 얘기는 평사리, 장연학을 찾아 나들이할 때 모습을 몽치가 보았던 모양이다.
"틀림없이 내일 서울 갑니다. 행여 안 갈까 봐서 오신 겁니까?"
백씨가 또 비꼬았다.
"유감이 이만저만 아니구먼. 남의 속도 모르고."
"네, 유감이 많습니다. 이만저만? 두고 보십시오. 서울 오시면 단단히 받은 만큼 갚아드릴 테니까요."
백씨는 눈을 흘겼다. 마음속으로는 흡족해하면서 일부러 성난 체, 임명빈이 자유롭게 거동하게 된 것만도 얼마나 큰 홍복인가. 죽음을 기다리던 음산했던 서울의 그 시절을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임명빈의 목숨은 덤으로 받은 거나 다름없다. 백씨 마음에 불평은커녕 감사와 평화스러움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큰일 났습니다, 오라버니.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습니다."
여옥의 말이었다.
"누가 서울 가기나 한 대?"
"아닌 게 아니라 오라버니는 산동네 식구가 다 되셨군요. 우리는 불청객이구요. 너무하셨습니다."
"나이 들면 여인네들은 뻔뻔해지고 남자들은 순진해진다 그런 말을 누군가가 하던데, 여자 셋이 모이니까 못할 소리가 없군 그래. 나, 깃발 쳐들고 환영한다 해도 서울에는 안 갈 테니, 앙갚음 할 기회가 없어 어쩌누."
"장담하는 사람치고 장담대로 하는 사람 여직 못 보았습니다."
"하여간 나는 서울 안 가."
"독립이 되어도 말입니까?"
"뭐?"
임명빈은 여옥을 빤히 쳐다본다.
"내로라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서울로 모여들 텐데 오라버니는 이 산속에서 그냥 지내시겠군요."
"그게 언제일까...내 살아생전, 그걸 볼 수 있을까..."
"그건 그렇고 오라버니."
"..."
"희재 어머님께서는 내일 떠나시지만 우리는 남을 건데 어쩌지요?"
"무슨 소린가."
"여수서 최선생이 오신답니다."
백씨 말이었다.
"최선생이?"
"네."
"그걸 어떻게 알았소."
"길선생한테 연락이 왔다 합니다. 그래서 함께 내려온 거구요."
대강 사정을 알고 있는 임명빈은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나 명희가 지친 듯 말없이 앉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명희는 어디 아프나?"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올케하고 함께 가지 그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임명빈은 그렇게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여옥이 두 팔을 치켜들며 맹렬한 기세로 말했다.
"저하고 함께 갈 거예요. 가까스로 맘 돌려놨는데 그런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해요?"
마치 개구쟁이 같은 여옥의 동작에 모두 웃는다. 명희도 웃는다.
"큰 업덩어리 만났지 뭐예요?"
기대었던 벽에서 몸을 일으킴 명희는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온다.
"주변에서 불편하니까 결혼해라."
임명빈은 좀 심각해지며, 또 명희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야박하게 그러지 마세요, 오라버니. 저에게도 오빠 있어요."
그 말에 모두 또 한 번 웃는다.
"못 당하겠다. 그럼 나는 물러가야겠군."
임명빈은 일어섰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해맑은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절 마당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고, 땅에 떨어진 절 그림자는 유난히 검고 짙게 보였다. 바람이 차디차게 목덜미에 와서 닿는다. 임명빈은 옷을 여미며 자기 거처방에 들지 않고 절 밖으로 나선다. 임명빈이 찾아간 곳은 도솔암에서 과히 멀지 않은 해도사 산막이었다. 장지문 안에서 사람의 머리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 왔소."
하자 방문이 열렸다. 해도사가 내다본다. 얼굴에 달빛이 쏟아졌다. 임명빈은 몸을 반으로 접듯 하며 방안으로 들어간다. 방안에는 해도사말고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불빛 아래 드러난 청년의 얼굴은 칼날같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러나 다문 입술은 도톰했다.
"그냥 자기도 뭣해서 왔소이다."
"피신하러 오신 거는 아니구요?"
해도사 말에 청년은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피신이야 이군 쪽이고, 한동네서 피신은 무슨 피신."
"나는 마나님을 피해 오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허허어, 젊은 사람 앞에서 그 무슨 말씀."
"산속이 훤해졌소이다. 눈요기도 과히 나쁘지 않더구먼요."
"아무리 그래봐야 서산에 지는 해, 가을 들판의 서리 맞은 들꽃이라, 눈먼 새나 돌아보겠소?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소이다."
일 년 넘게 산중 생활을 하더니, 또 입심 좋은 무리와 어울리더니 임명빈도 제법 수작이 는 것 같았다.
"그보다, 어떻게 하나마나, 내일부터 더듬어야지요. 추워지기 전에 대강 요량은 해놔야 하니까."
"마땅한 자리가 있을까?"
"마땅한 자리야 부지기수지요. 지리산이 어떤 곳인데? 어떻게 경영하는가가 문제지요. 이군 한 사람 피신하는 거야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하면은."
"지금도 수월찮은 사람들이 산에 들어와 있는데 앞으로의 일이 큰 문제지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 말씀이오?"
"아암."
해도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피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뜻대로 된다면야 조선 사람 몽땅 피하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
"철없는 젊은이들은 산에 들어만 가면 솔잎을 뜯어먹더라도 살 수 있다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 있어보면 그렇게는 안 되어 있거든. 첫째는 식량이 문제고 산이 표적이 되어서도 곤란한 일이지요."
"그건 그렇소."
"그렇다고 해서 명을 걸고 들어오는 사람 막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소?"
"..."
"평사리 우가 놈, 면소에서 서기질을 하는 그런 놈이 하나 있어요. 그놈이 사냥감을 찾듯이 며칠 전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간 일이 있었지요. 그놈을 잡아 없이하는 거야 어려운 일 아니나 일이 크게 벌어져서 산사람들 많이 다칠까 싶어서."
"한 놈이 와서 뭘 어떡하겠소. 이 넓은 산중에서."
"그도 그렇지만 들어오는 사람 중에 염탐꾼이 끼여들 수도 있을 것이며 미련한 산놈 중에서 내통하는 자가 없으란 법도 없지요."
"하지만 지금 일본의 사정을 봐서는 군대를 동원할 그런 처지도 아니고 경찰 역시 많은 인원을 투입하여 일 벌일 그런 형편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이군이라 부르는 청년이 입을 떼었다.
"나도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속수무책 가만히 있겠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과격한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산은 조용한 것이 상수라. 그리고 보다 은밀해야 하고. 내 이군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나 자초하는 일만은 삼가야하네."
평소 어느 만큼 농담이고 어느 만큼이 진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해도사의 말버릇과는 딴판으로 매우 신중하게 타이르듯 말하는데 청년은 해도사의 심중을 뚫어 본 듯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름 아닌 이범준의 친사촌동생이었다. 그러니까 외사촌인 소지감과 민지연에게는 사돈뻘이 되는 셈이다. 이름은 이범호, 나이는 이십칠 세, 그는 진작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특히 만주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범준을 통하여 국내연락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범호가 소속된 조직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분산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이범호는 지리산에 나타나게 된 것이지만 실상 이범준의 지시에 의하지 않고 산에 나타날 리는 없었다. 이범준은 진주의 형평운동에 관여하면서 송관수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군자금 강탈 사건 때만 해도 그는 깊이 그 일에 참여하였으며 그 자금은 도솔암 일진과 함께 만주로 수송해갔던 것이다. 이범준은 그렇기 때문에 산에 관한 일은 소상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며, 사실 소지감만 하더라도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범준을 통하여 송관수를 알게 쇤 때문이다. 가닥은 좀 다르나 출가전, 민지연의 약혼자였던 일진이 도솔암에 온 내력도 그렇고. 얼기설기 엮어져 복합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물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동상이몽이 아닌 것은 아니다. 산사람들과 의병 봉기에 합류했던 사람들, 만주로 도피했다가 돌아온 사람들, 그들은 깊든 얕든 간에 김환을 정점으로 흘러내려온 사람들이며 동학혁명 세력에서 대일항쟁으로 돌아선 민족주의. 말하자면 조선의 토종이라 할 수 있고 이범준은 막간에 뛰어 들어온 사회주의 행동파다. 그러나 이범준의 조직은 따로 있었고 이쪽과의 연대 의식도 희박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찰이나 갈등 같은 것은 없었지만 송관수가 죽었고 김길상은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조직도 일단 해산한 형편이어서 그 해산된 조직을 그쪽에서 활용해보려는 가능성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쨌거나 정석과 일진이 만주서 이범준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고 또 이홍이 그들을 지원하고 있는 형편이라면 그런 계획을 세워봄직도 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제반 사정을 알고 있는 해도사인지라 범호가 산에 나타난 것이 단순한 피신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게 된 것이다.
해도사의 얼굴에서 신중하고 진지진한 표정은 차차 사라져갔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풀잎은 바람이 잘 때까지 엎드려야 하고 파도가 거세어지면 돛을 접어서 파도가 가라앉을 때가지 기다려야 하는 법, 인간사도 그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용기도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보다 지혜로움이 앞서야 하고, 이런 얘기를 하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풍월 읊는다 하며 비웃을지 모르나, 머리속에 도판을 그리기보다 땅을 먼저 밟아야 하네."
해도사는 점쟁이 같고 엉터리 도사 같은 일상의 면모를 되살려 내며 진부한 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조만간 딴 뜻이 있다면 범호는 그것을 내어놓을 것이다. 해도사는 항일을 위한 일이고 굳이 그것을 저지할 명분은 없으나 견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파도나 바람이 거센 것은 누구에게나 눈에 보이는 일이지만 정세에 관한 한 그것이 강풍인지 노도인지,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또 정보를 많이 가진 쪽이 판단하는데 유리하기도 할 거구요."
범호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거는 그렇지. 허나 판단이란 일 끝난 뒤 가부가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는 거나 기다려라, 그런 뜻으로도 들리는데요?"
비꼬는 투로 말했다. 범호는 아주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바로 그 뜻일세. 총알이 빗발칠 때는 누워 있어야... 개죽음이 용기는 아닌 게야."
해도사는 논쟁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심산인지 미련하게 밀었다. 범호의 얼굴이 벌개졌다. 두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임명빈은 자신이 나설 기회라 생각했는지,
"그러면 이군에게는 따로 무슨 계획이라도 있단 말인가?"
하고 물었다.
"계획 같은 것 없습니다. 그냥 생각해본 거지요."
"그게 뭔데? 말해보게."
해도사는 일부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앞날에 대비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고... 일본은 철저하게 그 동안 우리 민족을 분산해왔습니다. 한데 이곳 지리산은 관헌의 손이 미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유능한 젊은 사람들이 피신해오는 곳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그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는데 그 피신이라는 소극적, 혹은 소모적 기간을 어떻게 힘으로 응집해볼 수는 없을까, 지금 일본은 말할 수 없이 약화되고 인적, 물적, 모두가 궁핍 상태입니다. 겉보기에는 치안 유지가 잘돼 있는 것 같지만 내실이 없고 하나의 타성으로 밀고 나가고 있거든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조선 민족 스스로가 공포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이 빠진 호랑이 앞에서 덜덜 떨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면은 있지."
임명빈 말에 해도사는
"그런 면이 있다 하시었소? 임선생, 그러면 공포의 타성인가 뭔가 그것을 벗겨내면 삼일운동도 되고 독립도 되겠구랴."
삐딱하게 말했다.
"뭐가 또 그리 못마땅하오?"
"흠."
"점괘가 안 좋은 모양이지요?"
임명빈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점괘가 잘 나올 리 없지. 싸울 때보다 숨어야 할 때가 가장 위급한 시기니까, 하여간에 공포의 타성인가 뭔가 그거는 하늘이 풀어주어야지 인사로는 어려워. 그거를 나무껍질처럼 벗겨내자면 낫도 필요하고 소위 용사도 필요할 터인데 낫과 용사들은 어디서 마련할 것이며 삼천만 백성에 이 강산 방방곡곡 무슨 수로? 흔히들 도화선이라고도 하고 불시라고도 하지마는 사람과 때가 맞아야 하느니, 삼일운동이나 동학봉기를 보건대 백성들이 무르익었고 그 때에 맞추어 인도하는 사람이 길을 터주어 노도가 되었거늘, 벗기는 운동이 일시일각으로 되는 일이던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전쟁이란 이미 백성들 손에서는 떠난 것, 군대 안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든가 자중지란이 벌어졌다면 모를까, 전쟁이란 이기든 지든 간에 두말할 것도 없이 도살장인데 맨주먹의 백성들이 그 어찌 공포감 없이 대할 것인고. 불과 기만의 병사가 남경에서 삼십 만 양민을 학살한 사실을 어찌 모르는가. 독이 오른 독사를 피해야 마땅하고 그것을 잡으려면 독이 쇠하여 비실거리는 낙엽을 잡는 것이 지혜로움이라. 전쟁은 패하든 승하든 독오른 독사들 집단이 행하는 무극지옥이라, 내 말이 틀렸소? 임선생."
어떻게 보면 해도사는 상대를 설득하려는 것보다 덮어놓고 지껄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이 얼굴에는 도통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범호가 해도사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해도사는 손을 저으며 벽면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대신 임명빈이 말했다.
"오해는 무슨, 이군은 처음이라 잘 몰라 그렇지, 저건 엉터리 도사의 상투고 다 알면서 바람 잡는다고 저러는 게야, 하하핫..."
"..."
"한동안 넋을 뺄 거야. 당해본 사람이나 알지. 나도 처음 산에 왔을 적에 동쪽에서 번쩍하길래 돌아보면 아니고 서쪽에서 번쩍하길래 돌아보면 아니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네. 천 년까지는 못되어도 한 오백 년 묵은 지리산 여우로 생각하면 틀림없어. 통하라는 도는 안 통하고 둔갑술에만 능하니 엉터리 도사, 하여간 처음에는 관망하는 것이 현명하네. 그러고 나면 진짜 가짜를 볼 수 있게 될 거야. 어디 여우뿐이겠나? 호랑이도 있고 구렝이도 있지. 하하핫핫..."
"제법 늘었소이다."
"아암, 신선은 내가 먼저 될 게요. 지감스님도 늦게 오셔서 법사가 되시지 않았소?"
"어째 봄도 아닌데 노곤하구면. 이군, 술 생각 안 나나? 나지."
"네, 술 생각납니다."
해도사는 일어서서 나가며 말했다.
"서둘지 말게, 산에는 철 따라서 꽃이 피고 잎이 지네. 서두는 것은 사람뿐이지."
술잔과 술병과 안주를 들고 해도사는 들어왔다. 서울서 장만해온 음식이 이곳에도 나누어진 모양이다. 화사한 음식과 뚝배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범호가 술병을 받아 술을 부었다.
"임선생."
"말씀하시오. 준비돼 있소."
해도사는 씨익 웃었다.
"마나님도 오셨것다, 운우지락에 들어야 할 밤인데 영 망가져버린 모양이지요? 피신 오는 것을 보아하니, 안됐소."
"허허어, 저래가지고 명대로 살까 싶지 않구먼."
했으나 임명빈은 난처해한다.
"밝히자니 계집이 있어야지, 하하핫핫핫."
한바탕 웃고 나서
"이군, 자네, 장가 들었는가?"
"아닙니다, 아직."
"어째서? 나이 세었는데 어째 미장가인가."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매사 서두는 게야."
"네? 제가 서두는 것입니까?"
"아닌가? 천지만물 음양이 합해야 태어난 구실을 하는 법이네. 나랏일을 한다고 해서 대처를 아니 한다는 것은 순리가 아닌 게야. 순리를 어기고서 무슨 놈의 나랏일인가."
"이 정도 되면 그릇을 깨보든지 해야지, 제정신 가지고 말하는 거요?"
임명빈의 말이었다.
"어째서요."
"육십을 넘긴 홀아비가 삼십 미만의 총각을 보고 순리 운운, 배꼽 터질 일 아니고 뭐겠소."
"내가 장가를 세 번이나 간 일을 임선생은 모르고 있었오?"
"백 번을 가면 뭘해. 홀아비는 홀아빈데."
"허허어 세 번 가서 안 될 때는 조상이 말리고 신령이 말리는 거요. 그 이상 또 취하려 한다면 그건 순리가 아니지."
하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째 날 쳐다보나? 자네 사회주의에서는 이론이 안 맞다 그건가?"
"아아, 아닙니다."
범호는 부인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뜨악했다. 이런 인물들이 도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이군."
"네."
"내 말을 시덥잖게 들을 것이네만, 자네가 믿는 그 서양서 온 사회주의라는 것 말이세, 그거 안 되네."
해도사 말에 순간 범호의 낯빛이 싹 달라진다. 산에 와서 해도사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무릎에 시선을 떨어뜨리거나 아니면 곁눈질을 하며 좀체 눈이 마주치지 않았던, 그래서 범호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해도사의 눈이 범호를 똑바로 쳐다본다. 눈은 형형히 빛났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 빛은 사라지고 해도사의 몸은 흐물흐물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과 미욱한 시정잡배 같은 웃음이 흐르는 것이었다.
"산중에 앉은 점쟁이 따위가 개뿔도 모르면서 주제 넘는 사설 한다 싶겠지마는 한 가지 충고를 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서양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뜯어고쳐야 하네."
범호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낸다.
"사람 사는 꼴이나 이치가 동서에 따라 뭐가 그리 크게 다르겠는가. 사람이란 항상 남의 것을 탐내고 부러워들 하는 본성이 있어서, 또 알맹이보다 겉모양에 현혹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를 알기 전에 남의 것에 먼저 덤벼드는 경우가 많아."
"좀 지나치시군요. 이념이 어디 탐나는 물건이겠습니까."
"천지만물의 이치는 하나일세. 공연히 식자들이 그것에다 각기 다른 옷을 입혀 다른 것같이 생각하는데, 내 말을 끝까지 듣게. 그러면 그 옷이 무엇이냐. 소위 이론일세. 이론이란 꿰듯 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사람 사는 이치가 다 드러난 것일까? 아니지. 하기야 끝없이 부연한다 하더라도 진리가 도드라질까?"
"본론에 들어가자면 고개를 또 개나 넘어야 할꼬?"
임명빈이 탄식하듯 말했다. 범호는 부르터서 앉아 있었다.
"또 하나, 과거의 유생들이나 요즘 신식 공부한 젊은이들, 그들의 폐단이 뭔 줄 아나? 그것은 쉬운 일을 어렵게 말하는 버릇일세. 아니, 어렵게 말한다기보다 쓸데없는 것으로 꾸며대거나 쓸데없이 개칠을 자꾸만 해서 오히려 알맹이에 도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말 잘하는 사람을 두고 왜놈들은 널판자 세워놓고 물을 흘리듯 한다는 비유를 했고 조선에서는 청산유수라 했네. 일본 가서 신식 공부한 젊은이들은 특히 그러한 것 같은데 세운 널판자 물이 흐르듯 가파롭고 장소가 협소하단 말씀이야. 과거 우리네 선비들이 반드시 청산유수는 아니었네만 쉬엄쉬엄 쉬어도 가도 폭포가 되기도 하고."
"그야말로 청산유수요. 서양서 온 사회주의는 안 된다 해놓고, 또 그런 것이 서양에만 있다는 생각 뜯어고쳐라 해놓고, 쉬엄쉬엄 쉬어서 가는 겁니까? 도대체 폭포에는 언제쯤 도달하게 되는 거지요? 해도 짧아졌고 어서어서 갑시다. 해도사."
임명빈은 비꼬는데
"허허어, 늙은네가 성미는 왜 그리 급하시오? 임선생도 왜물 마신 티 내느라 그러시오? 해가 짧으면 밤이 길어지는 법, 썩을까 걱정이오?"
"이군, 명심해두게."
임명빈은 웃는 얼굴을 범호에게 돌리며 말했다.
"뭘 말입니까?"
"왜물 마신 사람, 그러니까 일본 유학한 사람들에겐 늘 저렇게 눈에다 불을 키는 것이 해도사의 버릇이다, 그걸 명심하라는 얘기네."
"아암, 눈에 불만 키든가? 오장육부가 뒤틀리지. 가져오는 거를 뉘 마다할꼬? 내것 내어다버리고 조상 신주까지 내다버리니 그게 어찌 간 쓸개가 붙어 있는 사람이라 하리. 비록 내 자신은 심산유곡에서 신선 되려다가 되지 못한 이무기 꼴이기는 하나 그런 잡베들은 존중한다면 나 역시 간도 쓸개도 다 빼버린 놈이 되지 않겠소이까?"
"이군, 이직 저 정도는 서곡일세."
"하여간에 아까 내가 말한, 서양서 온 그것이 안 된다, 그것은 틀려먹었다는 얘기는 아닌 게야. 결국은 태어난 생명들이 다 고르게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무리에서 따돌림 받지 않고 업신여김을 받자않고 복되게 사는 것은 꿈꾼 것이 어디 오늘만의 염원이던가? 그것이 어디 사람만의 염원이던가? 천지만물 생명 있는 일체의 염원 아니겠는가. 하낫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 사람의 경우 그러기 위하여 정치의 형태가 달라져야 한다는 그 자각도 변함없이 내려온 것이고 보면 동과 서의 차이가 뭐 그리 대단할꼬. 안 그런가? 그것을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그네들에게서 비로소 비롯된 것으로 치부하는 생각, 그것이 근본적으로 틀려먹었다, 내 얘기는 그 뜻알세.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정치의 형태가 달라져야 한다는 염원이 우리나라에서는 진작부터 백성들에 의해 폭발했었다는 일을 서양 사회주의 하는 젊은이들이 깡그리 잊고 있는 것이 나로선 안타깐네."
해도사는 술로 마른 입속을 축였다.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던 그의 모습은 그새 수축이 되어 단단해진 것 같았고 슬프게 보였다. 범호 얼굴에는 호기심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오백 년 묵은 여우, 둔갑술에 능하다는 임명빈의 말을 실감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소련에 앞서서 동학혁명의 전쟁이 있었네. 동학농민전쟁, 이군 자네 말을 빌리자면 소위 이념이라는 것인데, 동학이 어디 단순한 권력의 쟁탈전이던가? 아니지, 그야말로 이념의 전쟁이었다. 서양에서 한창 입으로만 왈가왈부하고 있을 적에 조선에서는 동학사상을 위한 전쟁이 있었다. 학문한 젊은 놈들, 특히 신식 학문을 한 젊은 놈들, 동학사상을 뭘로 생각하느냐, 미신이다, 하눌님 떠받드는 황당한 미신이다, 좋게 말해서 종교전쟁이다, 이군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아니 그런가?"
해도사는 쏘듯 범호를 쳐다본다. 범호는 너무나 강렬한 그 시선에 약간 질리는 기색이다.
"그 생각이야말로 황당한 것이야. 동학의 사상은 천상을 향한 것이 아니네. 지상에 세워야겠다는 바로 그 염원일세. 증산교에서 강일순이 말했듯이 천상이 아니고 천하공사를 다시 하는 일인 게야. 그것은 조선 민족의 죽지 않고 남아 있던 뿌리가 다시 거목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던 거고 동학은 그렇게 꺾이었으나 다시 살아날 것이네. 하눌님은 천상에 계신 것이 아니며 백성 하나하나, 사람뿐만 아니라 억조창생 생명 있는 것, 그 생명이야말로 하눌림이기 때문이다."
해도사는 비어 있는 잔에 술을 치고 천천히, 깊은 생각에 빠져들며 술을 마신다.
"그것을 조선의 식자들보다 먼저 깨달은 것이 왜놈들이다. 한 뿌리에서 나간 왜족들이야말로 참으로 영악한 족속이지. 그놈들은 먼저 동학의 잔여 분자들을 회유하여 힘을 뽑아버렸고 증산교는 끝없이 핍박한 게야. 물론 강일순 후계자들의 잘못이야 있었지만 왜놈 그네들이 말하듯 일개 사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같이 끈질기게 핍박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표면으로야 혹세무민의 사교라는 것을 유포한 데 불과한 것처럼 보이나 기실 개명했다는 청년층, 기독교도들을 부추겨 알게 모르게 각 지방에서, 심지어 제주도에서까지 증산교를 발붙이지 못하게 한 것이 일본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명산 산봉우리에 쇠말뚝을 박은 왜놈들, 그네들은 사악하게도 조선에서 무엇을 끊여놔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던 게야. 국토를 점령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 혼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야. 참으로 기막힌 일은 그 하수인들이 바로 조선의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은 잘해보자고 한 일이겠으나, 일찍이 눈을 떠서 수천 년을 내려온 것이라면 그 세월이 어찌 헛되게 갔을 손가. 경험을 남기고 갔을 것인즉, 경험은 쌓이는 것, 그것들을 깡그리 묻어 버리고 없이하자, 그것만이 사실인 양, 황당하고도 황당하도다! 되어 있는 밥 엎어버리고 언제 꼬부랑 글씨 배워서 새 밥을 짓누, 내 것을 모멸하고 부수면서 독립운동을 해? 내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는 마음이어야 독립운동도 되는 거지.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의 대표적인 이 아무개인데, 그자가 독립운동을 안 했던 것도 아니오, 그러나 오늘은 어떠한가? 당연히 갈 자리에 가서 서 있는 게야. 하루아침에 변절한 것은 아닐세. 내 것을 버려라, 벼려, 깡그리. 결국 본받아라, 본 받아라 했던 그곳으로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 아니겠는가. 당연한 귀결이지. 소위 그 뭔가,"
"쉬엄쉬엄 쉬어서 가시오 해도사."
말로는 농조였으나 임명빈의 표정에는 감상적인 동의와 감동이 있었다.
"그 뭣이냐,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는데..."
하다가 해도사는 까닭 없이 씩 웃었다.
"사람들 뽑아서 맨드는 대통령, 그런 제도를 민주주의라 하는 모양인데, 이군."
"네."
"그것도 서양 것인가?"
"물론이지요."
"대키! 순, 소귀에 경 읽기, 똑똑하다는 놈도 이 지경이니 무슨 희망이 있겠다."
"..."
"자네 보통학교 나왔나?"
범호는 쑥스럽게 웃는다.
"그러면 중학교는 건너뛰어서 대학으로 들어갔는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지가 무슨 천재라구."
"그러면 분명히 역사를 배웠겠다? 왜놈들이 맨들 교과서이기는 하나 배우기는 배웠을 거네."
"무슨 말씀이신지."
범호는 이 여우가 무슨 말을 또 하려는 건가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우며 되물었다.
"설마 자네 요순시대를 모르는 거는 아니겠지?"
"하 참, 도사님, 왜 그러십니까?"
"그려, 산골 늙은네들도 요순시대를 알고 잇는데 자네가 모를 까닭이 없지. 바로 그게 민주주의인 게야. 황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만백성에게 뽑히어 제왕이 되었으니, 국토를 바르게 관리하고 백성들을 재난에서 지켜주며 일하여 먹고 살게 했으면 그게 바로 태평성세요 민주주의 아닌가. 각별하게, 어렵게 이러고 저러고 꿰어 맞출 필요 어디 있누. 하하핫... 하하핫..."
해도사는 호탕하게 웃어젖힌다.
'아닌 게 아니라 둔갑술이 대단하군. 저 엉터리 도사 백년 가도 세뇌될 물건이 아니다.'
범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해도사."
함께 웃다가 임명빈이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왜 부르시오? 무슨 반론이 있소이까?"
"아니 그게 아니구, 오늘은 그런 대로 비교적 빨리 끝내어 허전하오. 산굽이를 안고 바위를 동아서, 실개천도 지나면서, 한참 갈 줄 알았는데 젊은 사람이 상대라, 해도사도 별 수 없이 많이 생략했구려."
"직행했지요. 한데 임선생."
"네, 무슨 반론이 또 있소?"
"그 땡땡이중 지감 옆에 계시더니 많이 본을 본 눈친데, 그게 신상에 해롭소이다."
"그야 절에 오면 절 풍속을 따르는 것이 상례 아니겠소? 그도 그러하나 어디 본볼 사람이 지감스님 혼자, 그거는 아니지요. 산속에는 장사도 계시고 도사도 계시고 참말 여러 가지 많이 배웁니다. 팔십 할애비가 손자한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을 항용 하는데 하물며 내가 할애비도 아닌 터에, 도사 장사 스님께서 손자도 아닌 처에 배워서 안 된다는 이유가 있겠소?"
"허허어, 산 떠나기 영 글렀네."
"등을 밀어도 아니 떠날 것이요."
"큰 업덩이를 만났구먼."
"전생의 인연 아니겠소."
"전생의 인연리라 하시니 생각나는 일이 있소, 거 임선생 매씨 말씀인데 친누이가 틀림없소?"
순간 임명빈의 표정이 뜨악해진다.
"어디서 줏어다 기른 것 같소?"
"안 닮아도 유분수지 형제간이라 믿을 수 없어서 그러요. 매씨께서는 젊었을 적에는 필시 천하절색이었을 거요. 한데 임선생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글쎄올시다. 호남아로는 천리만리 밖인 듯싶고 누가 보아도 의심을 아니 할 수 없을 거외다."
"그런 말씀 마시오. 늙고 병든 몸이니 그렇지요. 나도 젊었을 한 시절에는 남의 축에 빠지는 인물은 아니었소이다."
명희가 화제에 오른 것이 영 못마땅했으나 명빈은 애써 웃는 얼굴로 응수한다. 그러나 독설이 심한 해도사 입에서 무슨 말이 또 나올까 명빈은 속으로 전전긍긍한다.
"한데 말씀이오, 임선생 매씨는 얼핏 보았소만 학상이더군,"
임명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무슨 뜻이요."
"고적하다는 뜻이지요. 지감같이, 여러 가지로 매씨는 지감과 비슷한 데가 있어요."
"..."
"신식으로 말하자면 수녀가 되었거나 중이 되었어야 할 팔자다 그 말이오."
"그런 말씀 마시오. 해도사가 뭐 안다고."
명빈의 얼굴이 벌개졌다.
"내가 점쟁이, 관상쟁이라는 것을 모르셨소?"
"점쟁이건 관상쟁이건 나 내 누이 보아 달라 하지 않았소이다."
"하나 보이기 위하여 태어난 것을 어쩔 것이오. 그레 그리 언잖으셨소?"
"좋을 리 없지요."
"허허 참, 산에서 나가시지 않겠다 하시면서 연이 그리 질겨서야."
"하무튼 나에 대해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 아니 할 말로 몽둥이로 쳐도 개의치 않겠소. 허나 내 누이에 관한 얘기는 삼가주시오."
"모두 허상이거늘, 좋고 나쁘고 뭐 그리 천지에 차이가 있을꼬."
"그럼 나는 이만 가겠소이다. 밤도 저물고, 더 잇다간 무슨 몽둥이가 정수리를 내리칠지."
하며 명빈이 웃기는 했다. 그가 돌아간 뒤
"도사님, 좀 지나쳤습니다."
범호 말에 해도사는 씩 웃었다.
"사람은 진국인데 너무 순직하고 씹히는 맛이 없다."
그렇게 임명빈을 평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말해보게."
"도사님은 옛날에 동학 하셨습니까?"
"아니네, 그냥 보았지."
"그럼 증산교를 믿으셨습니까?"
"그것도 아닐세. 그냥 구경했지."
"그렇다면 아까 말씀으로는."
"박에서 보았으니까 잘 보였던 게지. 내일은 길 많이 걸을 텐데 그만 자지."
휘영청 달이 밝은 산길을 지나 자기 거처로 돌아온 임면빈은 상처받은 짐승같이 한동안 씩식거리다가 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올리 없었다. 산사의 정적과 장지문을 통하여 스며드는 달빛 속에서 차츰 분노는 가라앉았다. 대산 괴로움이 마음 바닥을 핥고 목구멍을 치솟는 과정을 임명빈은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녀나 중이될 팔자라는 해도사 말이 언짢기도 했으나 그보다 이성을 잃은 자신의 처신이 못내 떠나지 않고 마음에 걸렸다. 부끄러웠다. 일어설 때, 간신히 웃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치졸한 자신의 언동을 덮어버렸다. 할 수는 없었다. 해도사가 바위 같은 존재라면 자신은 하잘것없는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털어 내어도 털어 내어도 마음속에 달려들었다. 서울서 그를 괴롭혔던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자의식도 되살아나 견들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냥 웃고 넘길 것을 발끈하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됐을 텐데... 그 사람 입버릇이 늘 그런 걸 알면서... 졸장부 같으니라구.'
사실 명빈은 자기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은 한 일이 있지만 자신이 피해자란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명희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명희는 늘 피해를 받는 처지이며 그것은 명빈의 가슴속에 낙인같이 찍혀 있었다. 아까 해도사에 대한 태도만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과잉 방어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명희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 가족 모두가 가해자라는 의식, 산에 오면서 얼마간 가라앉혔던 그 의식은 다시 자책감을 불러일으키며 명빈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제가 명희 신세를 망쳤습니다. 저 아이를 어쩌면 좋지요? 비루하고 비천하게 저는 하는 일 없이 평생을 저 아이 괴로운 심장을 쪼아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직이 강쇠가 보내준, 휘가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범호는 해도사를 따라 길을 떠났고 아침나절에는 백씨도 상좌의 안내를 받아 화개 나루터까지 갔고 그곳에서 따라온 여옥과 명희하고 작별하며 떠났다.
"너희 오라버니 기분이 아주 나빠 뵈던데 우리가 산에 남아서 그러시는 거 아닐까?"
돌아오는 산길에서 여옥이 염려스럽게 말했다.
"오빤 가끔 그래. 별 이유 없이 우울해하는 일이 있어. 그게 병 아니겠니?"
"난 너희 오빨 사람 좋고, 이건 실례의 말이지만 다소 우둔하게, 화내지 마. 신경이 굵다는 생각을 했는데, 전에는 말이야."
"그렇지는 않아. 늘 감상적이어서... 나이 들어도 그러는 걸 보면 나도 어떤 때는 짜증스러워. 하지만 사실 오빠는 굉장히 예민하고 수집은 성미야. 그래서 능력이 없는 건지. 하기야 뭐 이제는 오빠의 인생도 다 간 거 아니겠니? 편하게 사시다 가야 하는데.. 나 때문이지 뭐. 오빠 때문에 내가 이리 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게 탈이야. 거기다가 자신은 할 짓을 못하고 살아왔다는 자책감 그것도."
명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 제몫대로 사는 건데 누가 누굴 위해 희생을 하나? 나는 내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었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데... 내게 꿈은 없지만 안정되고 홀가분한데."
"하여간 너희 오누이는 다 같이 답답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면에서는 어쩌면 그리 꼭 닮았니."
그들이 절에 돌아왔을 때, 절은 비어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들어오는 것은 몰라도 나간 것은 안다는 말이 있듯 백씨가 가고 난 자리가 텅하게 비어버린 듯 명희와 여옥은 공연히 풀이 죽었다.
"여옥아."
"음."
"며칠이나 더 묵게 돼?"
"그건 최상길 씨가 언제 오는가에 달린 거지. 심심해?"
"응, 답답해."
"벌써? 어제는 이곳에 살고 싶다 하더니."
"인간은 습관의 동물인가 봐. 조용하다는 게 갑자기 부담으로 나를 누르는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나 뜨갯거리라도 가져오는 건데."
"가나 오나 청승이다."
"넌 안 그러니?"
"안 그래. 고마울 뿐이야. 시간이라는 게 아주 귀중하고 고마워."
"..."
"그렇지 않다면 난 벌 받아."
"하긴."
"그런데 너희 올케 말이야."
"언니가 왜?"
"정확하게 돌아가는 시계바늘 같다."
"..."
"너희 오빠도 그냥 식구 같을 뿐 남편 같지가 않고, 타인 같기도 하고 그렇게 몇십 년을 함께 몇십 년을 함께 살아왔다는 말이지?"
"오빤 아까도 말했지만 수집음이 많아. 그래 그런 거야. 금실은 좋아. 남 앞에서는 항상 타인 같아 보이지만 대개 조선 사람들 그렇지 않니?"
화개까지 갔다 왔다는 것은 이들 두 여자에게는 강행군이었다. 명희는 산길에 익숙지 않았고 지난날 길 걷기로는 선수였던 여옥도 회복이 되었다고는 하나 몸이 옛날 같지는 않았다. 사실 이들은 몹시 지쳤고 맥이 쑤욱 빠져서, 그냥 타성으로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하고 있었을 때, 해가 서편으로 엄치 기운 산문 밖에는 허름한 참림의 최상길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 절에서 내려오던 상좌 보신과 마주친다.
"어서 오십시오, 최선생님."
도솔암의 지감을 만나기 위해 몇 차례 온 적이 있어서 낯이 익은 보신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음, 스님 계시냐?"
"예."
"서울서 손님들은 오셨고?"
"예, 세 분이 오셨는데 교장선생님 부인께서는 아침나절에 떠나셨습니다.."
얼굴 위에 날아 내린 나뭇잎을 고개를 흔들어 떨어뜨리며 보신이 말했다.
최상길은 기감이 거처하는 방 앞에까지 갔다.
"형님."
"들어오게."
지감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나왔다. 최상길은 방으로 들어서면서
"그간 별 일 없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중한테 무슨 별일이 있겠나."
지감은 읽던 책을 덮고 돌아앉았다.
"서울서 손님들이 왔다는데 어째 절이 조용합니다?"
"글세... 한 분은 가셨고 임선생은 몸이 불편하신지 여태 거동을 안 하시는구먼."
"원래 편찮으신 분이지요."
"그간 많이 회복이 되어 운신하는 데 불편이 없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다. 서울바람이 하도 거세게 불어와서 병이 났는가?"
지감은 말하면서 슬그머니 웃었다.
"중이 체모 없이 그런 말해도 되는 겁니까?"
"나 같은 땡땡이중, 이런들 저런들 어쩌리."
하고는 턱을 쳐들고 손바닥으로 목을 슬슬 만진다. 저고리 넓은 깃 속의 목이 유난히 가늘어 보인다. 가을이어서 그랬는지, 진정 그의 모습은 가을만 같았다.
"파계는 안 했는지 모르겠소?"
"대처승이 판치는 세월, 그까짓 것 무엇이 그리 대수인가. 어차피 육신은 헛껍데기거늘, 집착한들 아니 한들 다 소용없는 일이네. 허울 벗어놓듯, 잠깐 왔던 곳을 떠나면 그만."
"번뇌를 벗었다는 말씀입니까?"
"심각하게 그러지 말게. 어찌 그것을 확인하려 드는가. 그보다 자네는 뭣하러 왔나. 여자 때문에 온 게야?"
"그 문제도 있지만... 그냥 와봤습니다. 지가 뭐 하는 일 있습니까?"
"금홍이는 깨끗이 정리했고?"
"그런 셈이지요. 그 얘기 형님보고 안 하던가요?"
"못 들었다."
"..."
"계집의 투기가 유별나기는 했으나, 버릴 양이면 뭣 땜에 합쳤는가. 아무리 화류계 출신이기로."
"버린 게 아닙니다."
"최상길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그리고 망연히 연기를 뿜어낸다.
"그러면."
"지 성질에 못 이겨 떠난 거지요."
데가 따로 있으니까 그랬던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형님은 길여옥을 두고 그러시는 모양인데 그건 오해입니다."
하면서도 최상길은 설명하기가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최상길은 물고 있는 담배를 질근질근 씹듯 하다가 미친 차를 달여온 보신에게
"뭐 재떨이 같은 것 없냐?"
하고 말했다. 보신이 자그마한 뚝배기 하나를 가져왔다. 담배를 버리고 나서 최상길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금홍이 투기심은 불안과 열등의식이 그릇되게 표현된 것입니다. 큰집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사회가 그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최씨네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겠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독점하려는... 그러니 병적 집착이 나타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의외의 관계를 철저히 짜르려 하고 고립, 사회 활동까지 저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가엾은 여자지요."
최상길은 잠시 동안 말을 끊었다.
금홍이가 집을 나간 뒤 한 달이 지났을 때 최상길은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돌아오기를 원치 않았음에도 최상길은 찾아가서 돌아오라고 달래었다. 그것은 일종의 연민이기도 했으나 일종의 가책이었고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최상길은 그때 일을 생각했다.
"걱정 마세요. 나 오히려 홀가분해요. 다 버리니까 이렇게 편한걸. 사람은 다 제 분수대로 살아가야 하나 봐요. 나는 남의 눈치 보면서 살 수 없어요. 참고 견디면서 살 수 없어요. 짓눌리어서 살 수 도 없어요."
"..."
"당신 나 때문에 많이 참은 것도, 불쌍해서 데리고 산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단신하고 같이 사는 이상 평생 그럴 거예요. 나도 내 명대로 못 살 것 같구.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볶아대도 내 자신을 볶아대고..."
하다가 금홍이는 울었다.
"어디 돈 많고 못난 영감쟁이 하나 얻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요.."
금홍이는 헤어져서 나오는 최상길에게 그런 말을 하며 웃었다. 최상길은 돌아오는 길에서 등에 짊어진 짐을 내려놓은 듯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러한 자기 자신을 가증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지금 금홍이는 어디 있나."
지감이 물었다.
"얼마 전까지 여수에 있었습니다만 고향으로 갔다 하더군요."
"살 궁리는 해주었어?"
"그건 물론 그랬지요."
"결국 동기는 길여옥 그 사람이구먼."
"지금 와서 왈가왈부한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옥씨한테 대한 감정... 쑥스런 얘기지만 그런 감정이 있기 훨씬 전에 금홍이가 떠났으니까요."
"잠재적으로 있었겠지."
"글쎄요, 그건."
"그러면서 어쩨 먼 길을 돌아왓나."
지감은 농조로 말했다. 최상길은 처음으로 웃었다.
"그건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
"길여옥이란 여자에 대한 감정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근 그는 선배의 누이였고 친구의 아내였습니다. 전도사로 여수에 나타났을 때도 선배의 누이이며 한때 친구의 아내였다는 사실 때문에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편안했고 거리낄 것도 없었고요. 파렴치한 친구에 대한 분개도 한몫 했을 겁니다."
"흠."
"형무소에 들어갔을 적에도 같은 교인으로 순교하는 그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내 자신의 양심 때문에 그를 도왔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에게 애정을 느낀 것은 형무소에서 그를 없고 나온 그 순간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그같이 이상한 감정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사람의 형상도 아니고 새털같이 가벼운 죽어가는 여자,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밑바닥에 피눈물이 고이는 것 같고, 이 죽어가는 여자를 위해 내 뭣인들 못하리, 그때 난생 처음 강렬한 애정을 느꼈습니다."
"그래?"
한동안 침묵이 지나갔다. 최상길은 담배 한 개비를 뽑으며, 묘하게, 수줍게 일그러진 듯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결혼하겠는가?"
"그게 두렵습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부모가 맺어준 처음 여자는 불미스런 일로... 금홍이는 내 삶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을 무렵 저를 도와준 여자였습니다. 서로 사정이야 다르지만 두 번이나 파탄을 겪은 지로서는 사실 그 문제가 두렵고 결단을 내리기도 어렵지요."
"그럼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건가?"
"형님은요?"
"나야 머릴 깎지 않았는가."
"그 이전에는 왜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다 지나간 일, 허허헛..."
"형님."
"음."
"형님이 머리를 깎으신 것은 진실입니까?"
"대답은 없다."
"왜요?"
"진실을 어떠한 자로 재겠나."
"하지만 그것은 형님 자신의 마음이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어떻게 꺼내어 너에게 보여주나."
"적어도 아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사바에서 하는 식으로? 아니다, 그렇다 해서는 이 길로 들어올 수는 없네.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일세."
" 최상글은 천착하듯 지감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다.
"너 자신이 본 대로 느낀 대로... 그것도 일순, 일순간일세. 왜냐하면 너도 나요, 나도 너이기 때문이네."
아리송한 말을 하며 지감은 다 식은 찻잔을 들었다.
2장 독아
시월도 가고 십일월의 중순, 찬비가 내리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 했다. 바람에 따라 미루나무의 노란 잎새들이 눈보라처럼 흩어져 날아 내리곤 했는데 해가 떨어지면서 한층 바람은 드세어졌다. 초겨울의 짧은 해는 창가에 비치는 새 그림자와도 같이 저녁을 먹었는가 했더니 어느새 사방은 캄캄, 칠흑 같은 어둠에 마을은 휩싸였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길을 쓸어가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비는 멎은 듯했다. 집집마다 목마름과도 같은 등잔불이 켜지고 다그쳤던 추수기를 보낸 느긋함이 없지는 않았으나 초저녁부터 자리에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추뿌리, 고구마 같은 것을 삶아놓고 그것으로 덜 찬 배를 채워가면서 마을 아낙들은 목화씨를 지치지도 않고 발가내는가 하면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헌옷에 무를 대어 깁기도 하고 소반을 들여다 놓고 콩나물 콩을 고르기도 하면서 식구 없는 사람은 홀로 한숨 쉬기, 식구 많은 사람들은 이웃 얘기며 지나온 얘기며, 그날이 그날인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극성스런 아낙은 비 멎는 것을 보고 바람 속에서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도 콩탁 콩탁! 보리방아를 찧고 있었다.
"무슨 청승고. 새북에 하믄 될 긴데 오밤중에, 하야간에 오도방정이다."
남정네가 내다보며 혀를 찼자만
"시끄럽소. 이침 일찍 산에 갈라꼬 안 그러요."
"초상났나? 묏자리 보러 갈 기가!"
"새끼나 애비나 할 것 없이, 이 집 식구들 나무 한짐 져다주었십니까?"
아낙은 콩탁 콩탁 방아질을 하면서 말대꾸를 한다. 하기는 겨울이 코앞에 닥쳐 있었다. 그새 추수하느라 틈이 없었고 수숫대 고춧대 콩대가 있으니 우선은 지낼 만했으나 부피만 컸지 그것들은 마디질 못해 금세 동이 날 것이다. 땔감의 준비는 사실 절박한 일이었다.
"하도 긁어낸 께로 산이 마알갛더마. 생나무 꺾어오다 들키믄 큰일이고, 그나저나 우짜노. 멀리 가도라 캐도 이자부터 시작해야지. 그새 숨 돌릴 새나 있었던가? 대강 하고 들어오라고. 냉방에 자게는 안 할 긴께."
"보리쌀이 물 묻혀놨는데 끝은 내야제요. 오늘 밤 바람이 이리 분께 내일 아침 일찍이 가믄, 멀리까지 안 가고 한 짐 올 성싶소."
"셈 하나는 빠르구만."
그런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논둑길을 꾸물꾸물 기다시피 가는 것이 있었다. 바람이 세찰 때는 논둑길에 엎드리곤 한다. 어둠 속에 움직이는 그것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몹시 작아 보였다. 신음 소리를 내다간 흐느껴 울기도 하는데, 계집아이 같았다. 인가의 불빛은 저 멀리서 깜빡이고
있었다.
"할무이 할무이... 할무이..."
드디어 그는 성환할매 집 앞에까지 갔다.
"할무이, 하, 할무이..."
집안에서는 도란도란 바람 사이로 얘기가 들려왔건만 밖에서 부르는 소리는 집 안까지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할무이 할무이."
그러나 그 소리도 끊어지고 계집아이는 앞으로 고꾸라졌는데, 이때 마을왔다가 돌아가는 야무네 발길에 계집아이가 걸린 것이다.
"아이구매! 이기이 머꼬?"
야무네는 몸을 기울여 들여다본다. 보다가 손으로 더듬어본다.
"아이구 우짜꼬! 귀남아! 성환 할매!"
"와 그라요."
귀남네가 마루에 선 채 어두운 밖을 내다본다.
"여기 좀 나와봐라! 사람인갑다. 쓰러져 있구마. 불 좀 가지고 나와브라 카이."
귀남네가 초롱을 들고 나왔고 성환 할매도 뒤따라 나온다.
"뭐가 우떻다 캅니까."
"사람이다! 쓰러져 있네"
귀남네가 초롱을 비췄을 때 맨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인 성환 할매였다.
"남아!"
하다가 성환 할매는 중심을 잃고 나자빠졌다.
"맞다 남희다! 이 사람아, 초롱은 나 주고 아아부터 안아 들이라."
하다가 야무네는 아이 가슴에 귀를 대본다.
"어서, 어서, 아아 몸이 얼음겉이 차다!"
귀남네가 남희를 방에까지 안고 들어왔을 때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방까지 달려온 성환 할매는
"세상에 이기이 무신 일고!"
하며 아우성을 쳤다. 그러고는 아이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남아! 아가! 눈 좀 떠봐라!"
야무네는 남희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주무르면서
"귀남아, 더운 물 좀 가지오니라."
"야."
귀남네는 바삐 나갔고 성환 할매는
"아가아! 남아! 눈 좀 떠봐!"
그러자
"할무이."
하며 남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가! 남아!"
성환 할매는 와락 남희를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할무이, 여기가 우리 집이요?"
남희는 굳게 감았던 눈을 뜨며 물었다.
"우, 운냐, 우리 집이다. 이자 정신이 좀 드나?"
"응."
성환 할매는 남희 얼굴을 쓸고 또 쓸어본다.
"아 아니지, 옷부터 갈아 입어야겄다. 무엇 땀시 찬비를 맞고."
성환할매는 농짝 문을 열고 서둘러 치마저고리를 꺼내었다. 성환 할매 자신의 옷이었다.
"아가, 옷 갈아입자."
몸을 웅크리는 아이를 달래며 가까스로 젖은 옷을 벗겨낸다. 얼핏 보기에도 진짜 털실로 짠 수박색 스웨터며 갈색 사지로 만든 바지는 요즘 같은 전시, 최고급의 옷이었다. 그러나 발은 양말도 안 신은 맨발이었다.
"우찌 이리 뻬만 남았노. 어이구."
키는 훌쩍 컸으나 몸은 여위어 뼈만 앙상했다. 야무네는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닦으며 옷을 갈아입히는 할미와 앞가슴을 가리면서 순순히 옷을 갈아입으려 하지 않는 손녀, 그들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다. 그 광경이 애잔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야무네는 지난 날 섬에서 병든 푸건이를 데려왔던 일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폐인이 되어 일본서 돌아온 야무의 일도, 둑길에 쓰러진 야무를 동생 딱쇠가 업고 오던 날 밤 생각도 났다. 단단하게 야무지게 살라고 이름 지었건만 야무는 한창 젊은 나이, 형무소살이로 인생이 망가졌고 넉넉하게 살라고 이름지어준 푸건이는 이 세상을 못다 살고 청춘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자식이란 멋일꼬? 애간장을 녹이는 기이 자식이다. 전생에 무신 인연으로 부모 자식은 맺어진 길까?'
그러나 야무네는 요즘 한 가지 한을 푼 것이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크나큰 위안이었다. 한복의 딸 인호를 며느리로 맞이한 그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우가네 집 식구들이 한복이 내외를 막바지까지 몰고 갔을 때 돌연 인호는 야무에게 시집가겠노라, 실로 놀라운 선언을 했던 것이다. 폐인에게 시집을 가다니,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을 인호는 끝끝내 고집을 했다. 우가네의 일동이를 피하기 위한 마지막 방도이긴 했지만 인호는 오래 전부터 가엾은 야무에게 깊은 동정심을 안고 있었던 모양이다.
"병든 사람 수발이나 들믄서 세상 보낼랍니다. 어진 사람들인께 아부지 어무이 못살게 할 까닭도 없일 기고 박복한 지가 사는 길은 그것밖에 없일 성싶습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중이나 되지."
하고 영호네는 울었다.
"중 된 셈 치고...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겄소."
"나이가 얼만데 그러노. 아부지뻘이나 된다."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몸도 성찮은 사람, 언제 무신 일이 있을지 누가 아노. 억울하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과부 소리 들을 기가."
"천년만년 사는 사램이 어디 있겄소."
"세상 사램이 모두 미쳤다꼬 웃일 기다."
"..."
모녀간에 하는 말을 들으면서 한복은 끝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다. 결국 인호는 야무에게 갔다. 한복은 딱쇠와 의논하여 비어 있는 오서방 집을 손보아 야무 내외가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고 야무네도 큰아들을 따라왔다. 그리고 한사코 사양하는 것을, 한복은 밭 한 자락과 논 두 마지기를 딸에게 떼어주었는데, 물론 딱쇠도 형이 장만했던 땅을 가졌기 때문에 병든 형을 위해, 또 모친을 위해 추수 때는 얼마간의 곡식을 형네 집에 날라다 주었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희망이 생겼기 때문일까 뜰 안에서만 거동하던 야무는 차츰 들판에 나오게 되었으며 때론 풀매는 일을 거들어주는 일도 있었다.
귀남네가 더운 물을 가져왔다. 성환 할매는 남희를 안아 일으켜 물을 먹인다.
"할무이, 나 배고파요."
"우짜꺼나! 귀, 귀남아, 우선에 미음부터 좀 쑤어라."
"알았소."
귀남네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그는 귀남이가 아파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때 일을 생각한 것 같았다.
남희는 배고프다 했으나 마음을 놓은 때문인지 지쳐서 그랬던지 이내 자리에 쓰러졌다. 야무네는 남희 팔을 만져보면서
"이자 아아 몸에 온기가 돌아오요."
하고 말했다. 성환 할매는
"한심 잘라나?"
하고 묻는다. 남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음이 끓을 동안 눈 좀 붙이라."
방바닥은 따뜻했다. 성환할매는 자리이불을 끌어다가 덮어주고 다독거린다. 남희는 이내 잠에 떨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깜박거리는 등잔불 아래 잠든 남희 얼굴은 창백했고 일그러져 보였다. 들꽃을 꺾으며 노래를 부르던 천진난만했던 그 모습은 찾을 길 없고 어떤 음산한 절망감만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몹쓸 년!"
성환 할매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소리를 죽여 운다.
"마목 겉은 년! 우찌 아아를 이 지경 맨들었겄노."
"그만하소. 이자 아아가 돌아왔인께."
"돌아와도 유분수지, 우찌 이리 되어 돌아왔겄소."
"오매불망, 밤낮으로 노래를 부르든 아아가 돌아온 것만도 얼매나 다행이요. 이자는 품안에 왔인께 마음 놓으소."
"우찌 마음을 놓겄소? 아아 성상 좀 보소."
"..."
"꽃봉오리 겉은 나이에 머를 우쨌길래 아아가 철골겉이 말랐겄소? 빈손에다가 맨발로 온 거를 보이 그 제집이 순순히 보낸 거는 아닐 기고 필시 도망을 쳐서 나온 모앵인데 이 바람 부는 날 천비를 맞고... 대체 무슨 곡절이겄소?"
"그거는 아아가 정신차리믄 차차 얘기 안 하겄소."
"참말이제 억장이 무너지요."
"커나는 아이, 한밥에 오르고 한밥에 내린다 안 카요? 며칠 조섭만 잘하믄 회복이 될 깁니다. 사램이 어찌 무병으로 살 수 있겄소? 아플 때도 있고, 고개를 넘고 또 넘어도, 사람 사는 기이 안 그렇소? 더군다나 여기 오니라고 지 딴에는 용을 썼일 기고 날씨마저 이러이 찬비 맞고 헤맸일 긴데 몸이 온전할 리가 없지."
"온 거사 천분 만분 잘한 일이지마는 아아 꼴을 본께 피가 마를 것 겉소. 이년을 그만, 지 죽고 나 죽고 이 악연을 끊어야지. 전생에 무신 철천지원수가 졌길래 이리 끝끝내 몹쓸 짓을 하는지 모리겄소. 내 아들 잡을라꼬, 우리 석이 발붙이지 못하게 한 것도 그년 때문이며 일일이 말을 다 할라 카믄 기가 넘어서 내가 못살 기요."
"참으소, 참아. 원수는 세월이 갚고 남이 갚아준다 안 카요."
"많이 참았제. 더 이상 머를 우찌 참을 기요?"
"이런 때일수록 참아야제요. 성환이 남희, 불쌍한 그것들 끈이나 붙여주고 눈을 감아도 감아야지, 안 그렇소? 하늘이 무심치 않을기요. 하모요, 죄지어 남 주요? 공든 탑이 무너지겄소?"
"어디 세상이 야무어매 말맨크로 그리 됩니까? 죄 많은 연놈들은 문딩이 되듯 되는데 아, 우리 동네 꼴 보소. 우가, 숭악한 그것이 판을 치고 떵떵거리는 세상 아니요? 불쌍한 사람들만 보국대에 끌리나가고 정말 이래 가지고는 영신이 있다 할 수 있겄소?"
"어디 다 살았소?"
"다 사나마나."
"죽을 때꺼지 영화를 누릴지 그거사 모리는 일이라요. 아무도 장담 못하제."
몽매간에 그리던 손녀가 와서 반기기보다 통탄하는 성환 할매 심정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 맨발에 빈손으로 와서 쓰러진 사정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나 남희 모습 자체가 처참했던 것이다. 그새 세월이 흘러 다소간 달라지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병색이 완연했고 마치 혼을 빼어놓고 허울만 돌아온 듯 성환 할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들판을 달려가는 바람 소리, 숲에 부딪쳐 소용돌이치는 소리, 날씨마저 음산하고 불길했다.
귀남네가 미음을 쑤어 가져왔다.
"남아 아가, 미음 한모금 마시고 자거라."
성환 할매는 남희를 안아 일으키려 한다. 남희는 그 손을 뿌리쳤다.
"배고프다 안 했나? 자아."
다시 흔들어본다. 남희는 겨우 눈을 뜨고
"할무이, 여기가 우리 집이요?"
아까 물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하모, 우리 집이고말고."
미음을 먹인다.
"우찌 미음만 달랑 가지왔노? 입가심하게 김치라도 좀 가지오지 않고."
성환 할매는 저도 모르게 귀남네한테 짜증을 부린다.
"아이 참, 별시럽게 그래쌓네. 남우 집 고공살이하다 병들어서 우리 귀남이 돌아와도 남 보듯 하더마는 범이 제 새끼 잡아묵겄소? 어매한테 있음서 호강하다 왔는데 천지가 무너진 듯 참말로 해도 너무하요."
샐쭉해서 말하는 귀남네에게
"귀남네 니가 접어서 생각해라. 에미라 캐도 유만부동, 그거를 어릴 적부터 끼고 살았이니 어매가 그런다고 생각하라모. 니한테도 하나밖에 없는 오래비 핏줄 아니가."
귀남네한테 모진 말을 듣고 기절을 하고부터 야무네는 귀남네 대하는 것을 신중히 해왔다.
"부모 맴은 매일반 아니겄소. 자나 깨나 친손자손녀 노래지 어디 한분 외손자 걱정한 일이 있어야제요. 나도 심장이 상하요. 안 그러겄다 싶으면서도."
"그만해라. 그런 얘기는 두었다 하고, 입가심하게 김치나 가지오너라."
야무네는 눈을 깜빡거리고 팔을 저으며 말했다. 성환 할매는 아무 대꾸 없이 남희에게 미음만 먹이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할머니 옷을 입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반은 졸면서 미음을 받아먹는 남희, 성환 할매는 오로지 그것에만 정성을 쏟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상 그는 분노를 참고 있었던 것이다.
'허깨비겉이 돼서 아아가 돌아왔는데 제 버릇 개 못 주고 심청을 부리? 그래가지고 복 받을라.'
그러나 귀남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성환 할매는 그것을 수긍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난 세월이 되살아나서 맺힌 응어리가 도지는 것이었다. 귀남 애비가 집 나가기 전에는 친손자만 끼고 돈다고 귀남네가 불평을 할 때마다 성환 할매는
"귀남이는 애비 에미가 있인께, 불쌍한 저것을 내가 안 그러믄 누가 그럴 기고."
하며 애원하다시피 했다. 원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 자식과 조카들을 구별하여 귀남이는 헐벗어도 노상 배불리 먹였고 기가 나서 펄펄했건만 부모 없는 남매는 항상 굶주려야 했으며 풀이 죽어 있던 세월, 남매를 끌어안고 보낸 눈물의 세월을 성환 할매는 잊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그러한 사연 때문에 귀남에게 정이 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정이 가지 않았던 것에는 사위에 대한 감정도 있었다. 무경위하고 미련하여 심술궂고 무지막지했던 사위에 대한 원망과 경멸은 아직도 성환 할매 기억에는 짙게 남아 있었다. 그가 집 나간 뒤 꽤 긴 세월이 지나갔고 사위도 자식이라 했건만, 혼자 남은 딸의 신세가 가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환 할매는 사위 생사에 대하여 절실한 느낌이 없었다. 그것은 바람만 불어도, 밤하늘의 별만 쳐다보아도 아들 석이의 생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 탓이었는지 모른다. 핏줄도 아니요 좋게 지낸 적도 없는 사위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사야 어찌 되었든 현재로서는 성환이가 똑똑하고 최참판댁에서 뒤를 보아주어 대학생이 된 처지에 비하여 가까스로 보통학교를 나와 진주서 남의 집 고공살이를 하는 귀남이, 게다가 남정네 없는 자신의 신세를 생각할 때 귀남네 마음에 시샘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사리로는 판단하지만 성환할매 감정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딸의 불손은 다 잊었지만 아이들의 서러운 성장기를 성환 할매는 영 잊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모녀간에는 메우지 못하는 도랑이 가로놓여 있었고 두 사람의 심정은 영원한 평행선이었다.
귀남네는 김치 한 보시기를 갖다놓고 나가버렸다.
"오동지 섣달, 지 오래비가 물지게 져가믄서 저거들을 키웠는데 손톱만치라도 그거를 생 저렇게는 못할 긴데 우리 복연이 반만 돼도 저러지는 못할 긴데..."
귀남네가 나가자 성환 할매는 구시렁거렸다.
"태성이 그런 거를 우짜겄소. 성환할매가 그냥 접으소. 지 처지가 처량한께 안 그러요."
"사촌이 어디 뭐요? 서로 도아감서 살아가야 할 긴데 우찌 국량이 그리 좁아터졌소."
비몽사몽인 듯 미음을 다 먹은 남희는 그냥 쓰러져 다시 잠들고 말았다. 성환할매는 다독거리고 손녀의 얼굴을 쓸어주고 또 쓸어주면서
"산골에 산께로 지 자식은 공부도 못 시키고 무식꾼으로 키우믄서도 조카들 일이라 카믄 주야로 애달파하는 작은 아아한테 비하믄... 천양지간이제요. 귀남이가 아파서 왔일 직에 성환이 소식을 물었다고 길길이 뛰고 울고 야단이더마는 기진맥진한 아아가 하룻밤도 새기 전에 해구는 꼴 보소. 내 속에서 우찌 저런 기이 나왔나 싶고. 애시당초 소나아를 잘못 만내서 저리 장호가 변했는가, 클 때는 안 그렇더마는."
"그래서 딸하고는 함께 못 산다 안 카요. 복연이사 어디 보통 고모건데? 그러기 참말로 쉽잖은 일이구마."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둘째딸 복연이는 그새 친정을 많이 도와왔다. 구겨 넣었던 돈푼은 틈틈히 학교에 보태라 하며 부쳐왔고 인편이 있으면 밤을 새워 옷을 지어 보내왔다. 일 년에 한두 번은 내외가 다녀갔고 돌아갈 때는 조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라믄 나는 갈라요."
야무네가 일어섰다.
"저문데 그라믄 가보소."
야무네가 떠난 뒤 귀남네는 무엇을 하는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거리에서 부는 바람보다 거센 바람이 성환 할매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잠든 아이를 보면 볼수록 절로 한탄이 나왔으며 근심과 원망으로 가슴이 저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사정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캄캄해지곤 하는 것이다.
"명천의 하느님네, 부디 굽어살피시오. 인간이 미련하여 알게 모르게 죄를 짓지마는 꽃봉오리 겉은 저거한테 무신 죄가 있겄십니까. 벌을 받아야 한다믄 이 핼미가 받아야제요. 비나이다. 제발 무탈하게 넘어가게 하시이소. 영명한 하느님네. 이 늙은 것을 가련키 보시어 소원 들어주시이소."
빌다가 졸다가, 소스라치고 하면서 성환 할매는 한밤을 앉아서 지샌다. 잠시 눈을 붙이는 사이, 어수선한 꿈을 꾸었고 새벽닭 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을 때 남희는 말똥하게 눈을 뜨고 누워서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 일어났더나?"
"야."
"인자 좀 괜찮나?"
"야."
"남아."
"야?"
"니 도망온 기가?"
남희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그랬노? 못 가라 캐서 도망온 기가?"
"..."
"그 숭악한 에미가 니한테 우짜더노? 우찌 했길래 니가 이 모양고."
"엄마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제발 엄마 욕하지 말아요, 할무이."
남희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그라믄 그 왜놈이 니를 패더나?"
"아니오. 그 사람은 맘씨가 좋아요. 지한테는 잘해주었소."
"그렇다믄?"
남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물어도 말하지 않았다.
'필시 무신 곡절이 있구나.'
성환 할매는 한숨을 내쉬며
"남아."
"야."
"어디가 아프노."
"..."
"어디가 아파서 이리 콜콜이 여빘노 말이다."
"아픈 데는... 없, 없어요."
하고는 할머니를 피하듯 돌아 눕고 말았다.
"무신 말이라도 해야, 답답해서 어디 살겄나. 아픈 데가 없는데 우찌 니 형상이 그렇노?"
남희는 아까처럼 아무리 물어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니 또 부산 갈 기가."
"안 가요!"
"니 에미가 데불로 와도 안 갈 기제?"
"야."
"하모, 그래야지. 가자 마라. 거기는 니 있을 곳이 못 된다. 할매는 니가 보고 접어서."
하는데
"할무이."
그런 말에는 관심 없다는 듯 남희는 불렀다.
"와."
"나 배고파요."
"그래 그래, 미음 데파오께."
배고프다는 말이 반가워서 성환 할매는 얼른 일어섰다.
"미음 말고 밥 먹고 싶어요."
밥 먹고 싶다는 것은 더욱 반가운 말이었다.
"운냐 운냐, 할매가 밥 새키 해가지고 오께."
성환 할매는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어둠을 헤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새 바람은 씻은 듯 멎었고 하늘에는 반달이 기우뚱 걸려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성환 할매는 남포의 등피를 들어올려 성냥을 그어대 놓고 등피를 씌운다. 부엌 안이 밝아왔다. 바가지를 들고 발소리를 죽이며 마루로 올라간 그는 항아리 속에서 쌀을 꺼낸다. 역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부엌으로 돌아와 쌀을 씻는다. 그는 귀남네가 깰까 봐서 겁이 났다. 밥을 안쳐놓고 장독에서 된장을 떠다 뚝배기에 풀어서 밥 위에 얹고 솥뚜껑을 닫은 뒤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당초에 머를 해믹일 기이 있어야 말이제, 찬거리를 구할라 캐도 날이 밝아야, 도방에서 묵기는 잘 묵었을 긴데 입에 맞일랑가."
부지깽이로 불을 헤쳐가며, 솔가지를 밀어 넣어가며 혼자 시부렁거린다.
"성환이한테 알리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핵교는 우떡하고 왔는지 장서방한테 의논을 해봐야겄다."
밥이 끊었다. 디밀던 솔가지를 중단하고 부지깽이로 불을 헤집는다.
"이 불에 갈치 한 토막이라도 있었이믄 굽을 긴데, 세상에 김치밖에 더 있다? 전에 입던 옷은 작아서 옷 입을 기고 입은 옷에 왔이니 옷도 해입히야겄고, 우선 벗어놓은 옷부터 빨아야겄다."
성환할매는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꾸부정한 모습으로 사발하나를 들고 장독으로 간다. 항아리 뚜껑을 열고 김치 한 포기를 꺼낸 뒤 뚜껑을 닫는다는 것이 손이 어줍어 뚜껑을 떨어뜨린다. 요란한 소리가 났으나 천만 다행으로 뚜껑은 깨지지 않았다.
"누고!"
귀남네가 방에서 뛰어나왔다.
"누고!"
"나, 나다."
성환 할매는 풀이 죽어서 말했다.
"거기서 머하요?"
"남이가 배고프다고 캐서... 김치를 내다말고 그만 뚜껑이, 안 깨졌어이 다행이다."
성환 할매는 항아리 뚜껑을 바로 놓으며 말했다.
"지를 깨우지요. 신새벽에 무신 청승이요."
새벽 찬바람같이 목소리가 쌩 울려왔다. 귀남네가 방으로 되돌아가며 방문을 올곧잖게 닫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엌으로 되돌아온 성환 할매는 김치를 썰어 보시기에 담아놓고 솥뚜껑을 열었다. 김이 서리는 솥에서 된장 뚝배기를 조심조심 꺼내어놓고 밥을 푸려 한다.
"비키소. 지가 할 긴께요."
귀남네가 부엌에 나타나 성환 할매 손에서 주걱을 뺏었다.
"누가 하믄 우때서 그러노."
"늙은 어매 부려 묵었다는 말은 듣기 싫구마요."
"곰뱅이 성해서 하는데 누가 머라 칼 기고."
"배고프다고 당장 죽나? 그새를 못 참아서,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러노. 다른 아아들 겉으면 보리쌀 곱찧어서 밥 해낼 나이 아니요."
"어디 가아가 지금 성하나."
"엄니가 오냐오냐 함서 키워 안 그렇소. 어린양할 나이요? 그래 가지고 시집은 우떻게 보낼 긴고? 종이 줄줄이 있어서 시중을 들어주믄 모리까."
"그만 해라. 남이는 어젯밤에 왔다. 그것도 찬비를 맞고."
"들어가소. 좁은 정기에 제집아아 밥상 하나 차리는데 둘씩이나, 잔칫집도 아니겄고."
말 하나하나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성환 할매는 잠자코 부엌에서 나와 방으로 들어간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남희가 눈을 치뜨고 성환 할매를 올려다본다.
"고모가 또 뭐라 해요?"
"아니다. 밥은 다 됐고 고모가 상 차리 올 기다."
"할무이."
"와."
"요새도 고모하고 싸워요?"
"싸우기는, 사람 사는 기이 다 그렇지 뭐. 고모도 심장이 상할 기다."
"왜요?"
"고모부 집 나간 지가 언제고, 귀남이도 객지에서 고생을 한께."
밥상이 들어왔다. 김치 한 보시기 된장 뚝배기 하나, 그리고 된장에 묻어둔 콩잎이 한 접시, 남희는 군침을 삼키며 얼른 숟가락을 든다.
"콩이파리,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다고."
중얼거리며 콩잎 하나를 밥 위에 얹어 먹는다. 남희를 내려다보고 서 있던 귀남네
"입맛 떨어지지 않는 거를 보니 죽지는 않겄구나. 남희 노래를 불러 귀가 따갑더마는 엄니도 걱정은 그만 하소."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방에 들어오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많이 타이른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밝자마자 귀남네는 쇠스랑과 새끼 뭉치를 들고 나무하러 간다면서 휭하니 집을 나갔다. 마루 끝에는 어젯밤 내다놓은 남희 젖은 옷이 그대로 있었다. 노인네에게 빨래는 힘든 일이다. 털스웨터와 사지 즈봉은 더군다나 힘든 빨래거리다. 성환 할매는 부엌에서 물을 데워 남희 옷을 담그고 비누질을 해서 주무른다. 쉬었다가는 또 주무르고
"귀남네는 어디 가고 성환 할매가 빨래를 합니까, 남희 옷인 갑네요."
"시적 입을 기이 없어이, 가을볕에 쉬이 마르지도 않을 기고."
"가을볕이라니요? 이자 겨울인데? 귀남네는 어디 갔십니까?"
"나무하러 간다믄서, 간밤에 바람이 불어서 간 모앵이요."
"우리 집 인호도 새벽에 밥해 묵고 산에 갔소. 한짐 긁어 온다고,
찬바람이 분께 양식도 양식이지마는 집집마다 땔감이 걱정이제. 남희는 좀 우떻소?"
"밥도 많이 묵고 자는 거를 보고 나왔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답도 짧고 어딘지 회피하는 기색이다.
"가지 말린 거를 무쳐봤더마는 묵을 만하길래 가지왔더마는, 반찬이 없지 싶어서, 그라믄 점심때나 주소."
야무네는 부엌 선반 위에 가져온 그릇을 놨다.
"그는 그렇고 남희가 무신 말을 안 하든가요?"
"하기는, 묵고 자고, 그런 말 할 새가 있어야제."
"우떻게 해서 왔다는 말도 안 하고요?"
"아직은, 지 에미 욕한다고 듣기 싫다하더마."
사실 그랬었지만 성환할매는 의도적으로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두 늙은이가 빨래 한 가지씩을 나누어 다 빨았을 때 해는 엄치 솟아올라 장독대의 항아리에 빛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해는 나는데 수울찮이 칩소."
두 늙은이는 귀남네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이불 속에 두 손을 찌른다.
"빨래 한 가지 가지고 쩔쩔매니 이자 우리는 밥값도 못하요. 안 그렇소 성환 할매."
야무네는 눈을 꿈벅거리며 슬프게 말했다.
"밥산 노릇 못하는 거사 어디 어제그제 일이겄소? 간당간당, 외가닥 새끼줄에 매달리 있는 기지 우찌 살았다 할 수 있일 기든가... 죽어서 다시 사람으로 환생한다믄 나는 인병 안 드는 중이 되고 접소."
"그것도 팔자에 있어야."
"중 팔자로 태어나고 접다 그 말이제. 하고많은 병 중에 인병겉이 질긴 기이 어디 또 있을라고."
"하기야 그렇소. 골수에 백이서 떠나지 않는 기지요. 무신 인연으로 부모자식, 부부로 만내서... 잊었다 싶으믄 생각나고 산 이별, 죽은 이별, 요즈막에는 우리 야무 일이 풀린께로 죽은 푸건이 생각이 나요. 불쌍한 제집아."
"생각나겄지요. 한이 어디 끝이 있겄소? 그래도 느지막에 호박덩이 하나 안았이니 그나마 얼매나 다행이요? 다 야무어매 심덕으로 영신이 돌보아주었일 기요."
"야,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제요. 내 복에 얼매나 과한지, 이자는 세상만 안 이러믄 살 만한데, 인호가 우리 집에 온 거를 생각하믄 자다가도 꿈만 겉소. 우리 야무, 속절없이 몽다리 구신 되겄다 싶었는데."
"하긴,누가 머라 캐도 야무어매는 우가네 욕 못하게 됐소."
"야?"
하다가 야무네는 말뜻을 알아차리고 웃는다.
"우가네 집구석에서 그 지랄을 안 했이믄 인호가 왔겄소?"
"그건 그렇소."
성환할매는 그런저런 얘기를 하면서도 얼굴은 어두웠다. 이따금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고생꾼이 돼놔서 병든 가장을 하늘겉이 생각하고, 한시 반시 앉아 있는 법이 없고, 우리 야무도 나무하고 논 갈고 하지는 못해도 자자부레한 일은 한께."
야무네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남희가 집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그는 한 번도 집밖에 나간 일이 없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가끔 마당에 나와 우두커니 서 있곤 했는데 그럴 때 누가 오기라도 하면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제 또래의 마을 동무들이 찾아와도 양 무릎을 세우고 무릎에 턱을 얹은 채 말이 없었다. 성환 할매가 무슨 말을 물어도 대답하는 것은 한정이 돼 있었다. 엄마는 아무 짓도 안 했고 욕하지 말라는 것, 엄마와 같이 사는 일본인은 마음씨가 좋고 잘해주었다는 말, 그것 이왼 그간에 있었던 일, 집에서 도망쳐 나온 경위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왕성한 식욕을 나타내어 과식을 하는가 하면 때론 온종일 굶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도 않았다. 뚜렷하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은 창백했고 날로 여위어갔다.
"말만한 제집아가 방구석에 밤낮으로 저리 처자빠져 있이니, 삼시 세끼 밥 채려주랴, 양식이나 전같이 넉넉하단 말가, 내가 무슨 할 짓꼬."
귀남네는 불평하기 시작했고 성환할매는 말수가 적어져갔다. 마을에서는 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남희가 미쳐서 돌아왔다누마."
"아니 그기이 아니고 연애질을 하다가 핵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러든데?"
"어린기이 연애질을 해?"
"열여섯 살이 머가 어리노. 시집갈 나이다."
"에미가 데리가더마는 신세 망쳤구나."
"그기이, 요릿집을 한다 카이 좋은 본을 봤겄나? 성환 할매 골병이 들겄다."
"와 아니라, 밤낮 길에 나앉아 행여 손녀가 올까 하고 기다리더마는, 성환 할매도 액운이 많은 사램이다."
그런 얘기들은 모두 우가네 집에 모이는 여자들의 추측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말은 돌고 돌아서 어느덧 사실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핵교는 안 갈 기가?"
남몰래 가슴을 치다가 성환 할매가 남희에게 물어보면
"안 가요."
"와 안 갈라 카노."
"그냥, 가기 싫어요."
"장서방이 그러는데 부산 핵교에서 징명만 띠어오믄 진주 핵교에 전학할 수 있다 카든데."
"..."
"방학 때 오래비 오믄 진주 핵교에 전학하는 기이 우떻겄노?"
순간 남희의 낯빛이 달라졌다. 성환 할매 입에서 오빠 말만 나오면 남희 얼굴빛은 언제나 달라졌던 것이다. 달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으나 성환 할매는 속수무책이었다.
"성환 할매 기십니까?"
남희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성환 할매는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장서방."
성환 할매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낡은 회색 두루마기에 색바랜 갈색 모자를 쓴 연학은 제법 큰 꾸러미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언제 왔노? 지금 오는 길이가."
"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혹과 근심에 시달리던 성환 할매는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남희가 돌아온 다음날 의논을 하려고 최참판댁의 연학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연학은 여수에 볼일이 있어 갔다 와야 한다면서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잘 됐십니다. 핵교는 전학 수속해서 진주로 옮기믄 될 기고."
"그기이 아니고, 아아 몸이 말이 아니다, 그것도 도망을 쳐서 온 모앵인데 통 말을 안 한께... 내지구지를 알아야, 무신 영문인지 도모지 알 수가 없다."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연학은
"여수 갔다 와서 얘기합시다."
해서 성환할매는 연학이 돌아오는 것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귀남네도 급히 부엌에서 달려나오며 인사를 했다.
"귀남어무니."
"예."
"이거 큰집 어장에서 가지왔는데 서너 마리 내놨다가 성환이 할무이 해드리이소. 생선이요."
하며 연학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냥 가지가시이소. 귀한 거를 우리꺼지."
귀남네가 사양을 하니까
"아니요. 많은께 서너 마리 내놔도 우리들 실컷 묵을 깁니다."
"고, 고맙십니다."
귀남네는 말할 수 없이 공손했다. 어떤 면에서는 귀남의 장래가 연학에게 달려 있다 할 수 있었고 귀남네는 그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연학이라면 기는 시늉이라도 할밖에 없었다. 만일 귀남이가 집에 있었다면 벌써 옛날에 징용으로 뽑혀 나갔을 것이다. 마을에서는 눈 닦고 보아도 젊은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까. 게다가 귀남이가 아파서 연학이 데리고 왔을 그때 울고불고 모친을 원망하여 한 소동을 피운 일을 생각하면 혹 연학에게 밉 뵈지는 않았을까, 그게 늘 마음에 걸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사실 모친에 대한 불만, 조카들에게 대한 시기심 같은 것을 억제하는 것도 연학의 존재를 의식한 때문이다. 연학이 평사리에 온 후로는 거의 모친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치분데 방에 들어가시이소."
귀남네가 권했고 성환 할매도
"어서 방에 들어오니라."
하고 말했다. 연학은 모자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남희는 고개를 숙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남아, 인사 안 하고 머하노."
성환 할매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인사 대신
"아제씨."
하고 남희는 고개를 들고 연학을 쳐다본다. 여느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깊은 신뢰를 나타낸 눈동자였다.
"오냐, 걱정할 것 없다."
연학은 두루마기 자락을 걷으며 자리에 앉는다. 어렸을 때부터 아비인 석이를 대신하여, 남희는 아비 얼굴도 모르지만 하여간, 연학은 어린 오누이와 성환 할매를 돌보아왔다. 특히 두 아이의 취학 문제는 적극적으로 최참판댁에 건의하여 일을 추진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석이 만주로 건너가서 심상찮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러려니와 아비의 원수, 조준구 신변을 맴돌며 최참판댁 재산을 회수하는 데 공노인과 더불어 석이는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성환 할매와 최참판댁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온 장연학, 나룻배를 타고 어린 계집아이의 손을 잡고 보통학교 입학할 때 읍내로 데려갔던 사람도 장연학이었다. 신발이며 옷가지, 학용품, 사탕 같은 것을 사오던 사람도 장연학이었다. 아이들은 진작부터 장연학을 믿었고
보호자라 생각해왔다.
'이거 예삿일 아니구나.'
연학은 몰라보게 변한 남희를 보는 순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우선에 몸부터 추슬러야겠고나."
"아저씨."
"오냐, 아무 걱정 마라."
"..."
"공부를 하더라 캐도 몸이 나아야, 많이 쇠약해졌다."
"나 공부 안 할 깁니다."
"그거는 건강해진 뒤 생각해도 늦잖은 일이고 하여간에 병원에 가보는 일이 첫째다."
남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필우곡절 무신 사단이 있긴 있는 모앵이다.'
연학은 남희 얼굴로부터 눈을 돌리며 신중한 어조로
"남아."
하고 불렀다.
"..."
"아부지맨치로 생각하제?"
남희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믄 됐다."
순간 연학을 쳐다보는 남희 얼굴에 뭔지 모를 절실한 것이 지나갔다.
"핵교를 안 가겄다 하는 거를 보이 아무래도 핵교에서 무신 일이 있었지 싶은데 도모지 말을 해야 알제."
성환 할매는 학교 쪽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눈치였다. 남희는 어미에게 아무 잘못 없다고 말했다. 어미와 함께 사는 일본인도 착하며 잘해주었다는 것이다. 한다면, 집 쪽에서 달리 원인을 찾는다는 것이 성환 할매는 두려운 것이다. 집은 바로 요릿집이었기 때문이다.
"말이야 차차 지 맘 내킬 때 하겄지마는 지가 걱정하는 것은 핵교를 그만두는 일보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도 큰일이기는 하지마는 시국이 시국인 만치 정신대에 뽑혀가지 않을까 그기이 걱정입니다."
정신대라 했을 때 남희는 강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어쩌면 그는 정신대 내막에 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대라 카믄 여자 보국대 말가."
"예, 수울찮이 처녀 아이들이 뽑혀 나간 모앵인데, 이 동네서도 더러 나갔을 걸요?"
"하모, 웃담에 사는 길수 딸이 나갔고 성냥간 하다 온 그 집 손녀도 나갔고, 전에는 모집이라 캄서 선금 주고 아이들을 데리고 갔는데 갔다한 연에는 편지 한 장 없단다. 세상에, 그런 생이별이 어디 하나둘까."
"남희가 핵교에 다니고만 있다믄 나중 일이야 우찌 되든 우선은 괜찮을 긴데 걱정이구마요."
"그렇다믄 우떻게 하든지 핵교에 보내야제. 시집을 보내든지."
"젊은 놈들이 있어야 시집도 보내지요. 우가놈, 그놈들 식구가 우환이요. 손바닥의 손금 딜디다보듯 동네 일을 환하게 알고 있이니."
"그러게 말이다. 처녀 아이들 모집 때도 그놈이 권해서 나간 거 아니가."
"개동이 그놈이 동네를 쑥밭으로 맨들었소. 이러다가는 젊은 놈 뿐이겄소? 늙은 사람들도 끌고 갈 판이요."
"무섭은 세상이다."
이때 귀남네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구석에 앉은 귀남네는
"오신 김에 좀 물어볼라꼬요."
어렵게 말했다.
"무슨 일 말심입니까."
"우리 귀남이는 우찌 되겄십니까."
"..."
"가아도 보국대에 나가까요?"
"나이가 아직은 좀 어린께."
"우리 동네에서는 그 또래 머슴아들도 뽑히 나갔십니다."
"진주는 넓어서 여기 맨치로 싹 훑어가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정세 따라서, 안 갈 거라 장담할 수는 없지요. 나이가 아직 어린께 그냥저냥 삐대보지마는."
"그라믄 앞으로 우찌 했이믄 좋겄십니까."
울음 섞인 말로 귀남네는 물었다. 연학은 대답을 못한다.
"가기만 하믄 못 돌아온다 카든데 우짜믄 좋겄십니까. 그거 하나 믿고 오늘까지 사, 살아왔는데."
치맛자락을 걷어 눈물을 닦는다.
"도리 없지요."
"장서방, 그라지 말고 우리 귀남이 보국대 안 가게..."
성환 할매도 거들어서 말했다. 장서방은 쓴웃음을 띤다.
"돈 있는 사람, 세도 있는 사람들도 이자는 우짤 수 없게, 그만큼 다급해졌십니다. 지가 무신 심이 있어서, 가든지 숨든지 양단간에 하나를 택해야지요. 위험하기로는 마찬가지겠으나."
"숨는다 카든."
귀남네는 필사적으로 연학을 쳐다본다.
"만 사람이 다 겪는 일인께, 전쟁이 끝나는 거를 기다릴밖에 없고, 귀남이 일은 앞으로 궁리를 좀 해봐야겄소."
그 말에 귀남네 얼굴이 다소 펴진다.
"우짜든지 간에 장주사만 믿겄십니다."
주사라는 칭호가 어색했으나 귀남네는 그것이 대단한 존칭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연학은
"내일 하루 더 쉬었다가 모래는 진주로 가자. 여기는 좋잖은께."
남희를 보고 말했고,
"성환 할무이도 그렇게 알고 기시이소."
진주 보낼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말했다.
"알았네."
성환 할매는 한숨 쉬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학이 말한 대로 하루를 더 쉬고 다음날 남희는 연학을 따라 나섰다. 빨아서 손질을 한, 부산서 입고 왔던 스웨터와 즈봉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기운 것이기는 하나 깨끗하게 빨아놨던 성환의 양말을 신고 성환 할매가 준비한 옷가지가 든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나루터까지 따라 나온 성환 할매는 품속에서 손수건에 싼 것을 꺼내었다.
"이거."
하며 죄지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다.
"멉니까?"
"미안하다. 그새 모아놓은 긴데 얼매 안 된다."
"허허 참, 그러지 마이소."
연학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일할라 카믄 돈이 들 기고, 벵원비도, 첫째는 식량을 우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요량도 없이 지가 남희를 데리가겄십니까. 애당초부터 아아 둘은 최참판댁에서 책임을 졌으니께 실데없는 걱정 마이소."
"그기이 어디 한 해 두 해가,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제."
그러나 연학은 손수건에 싼 돈을 끝끝내 받지 않았다. 나룻배가 떠나려 할 때
"할무이!"
처음으로 남희는 울부짖었다. 성환 할매는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하며 서 있었다. 그리고 배가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성환 할매는 서 있다가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는다.
"남아, 내 새끼야. 개똥밭의 개똥맨크로 아무렇게나 굴러도 명만 길어라. 하모, 명만 길어라, 니 애비 만나봐야 할 거 아니가."
"막 나갔다 캐서 달리왔더마는 벌써 떠나부맀네. 아이고 숨차라."
야무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할라꼬 나왔소."
돌아보며 성환 할매가 말했다. 그 말대답은 없이
"바람도 없고 날씨가 좋소."
햇볕이 따스했다. 두 늙은이는 모래밭에 엉덩이를 붙이고 강물을 바라본다.
"이자 한시름 놨소."
"그러기."
했으나 성환 할매는 말할 수 없이 불안했다. 할무이, 하며 울부짖는 남희 모습이 눈앞에 밟혀 견딜 수가 없었다.
"성환 할매, 우리 집에 가입시다."
"머하로요."
"집에 가서 할 일 있소? 보나마나 왼종일 보속겉이 앉아서 남희 생각만 할 긴데."
"..."
"안 그렇소? 우리 집에 가서 인호보고 따신 점심 해돌라 캐서 묵읍시다."
"며누리로 봐놓고 언제꺼지 인호 인호 할 기요?"
"입버릇이 돼놔서 안 그렇소. 아이라도 있이믄 어멈이라 하겄지마는."
"거물장으로 아아 하나 있었이믄 싶제요?"
"말하나마나, 인력으로 되는 일이겄소? 그기이 또 어디 쉬운 일 이겄소?"
두 늙은이는 둑 길을 지나고 논둑길을 질러서 새로 꾸민 가정, 야무 집으로 간다.
"어서 오시이소 성환 할무이."
인호가 나와서 상냥스럽게 말했다. 친정에 있을 때는 항상 사람을 피하듯 들판에 나가 일만 하던 인호, 찌들었고 웃음기라고는 없었던 얼굴이 제법 토실토실하고 보기가 좋았다. 옷매무시도 단정했다. 누군가를 섬기면서 산다는 것이, 이토록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일까.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며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오십니까."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았던 야무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건강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음산하고 산송장만 같았던 분위기는 없어졌고 얼굴은 맑게 개어 있었으며 눈동자는 또렷했다. 처음, 인호를 야무지게 보내는 것을 몹시 꺼리던 영호네도 얼굴이 피는 딸을 보고 매우 흐뭇해한다. 동생 딱쇠가 반농사는 지어주건만 영호네는 한복이더러 논도 갈아주라 거름도 좀 내어주라 하며 잔소리를 하게 되었고 사위 몸보신하라면서 이것저것 보내주기도 했다. 첫 결혼에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 친정에 와서는 군식구로 미안한 세월을 보냈으며 우가네 집 식구들에게 시달려야 했던 인호의 세월. 얼마나 살지, 끝내 완전하게 회복이 안 될지 알 수 없는 야무 처지였으나, 인호에게는 봄이 온 것이다. 그것은 ,야무가 어질고 착했기 때문이며 시어머니가 존중했고, 그러나 무엇보다 인호 생활에 활기를 준 것은 독자적으로 산다는 그 모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가 확실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집안 되겄다. 야무지게 해놓고 집안에 앵이가 돈다."
올 때마다 성환 할매가 하는 말이었다. 앵이가 돈다는 것은 아마 너무나 깨끗하여 날벌레들이 앉지 못하고 날아만 다닌다는 뜻인 모양이다.
"다 사돈댁 덕이제요. 저승에 가서 갚을라 카믄 한이 없일 기요."
"사람이 까꾸막길을 오르다가도 쉬어갈 곳은 있다 하다마는... 하모, 고생 많이 했인께 이자는 쉴 때도 됐다. 남 보기에도 얼매나 좋노. 야무야."
"예."
"니한테 늦복이 터졌구나. 오래 살아래이."
야무는 스스럼없게 웃었고 인호는 점심 준비를 하기 위해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간다.
한편 장연학이 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해거름이었다. 쓸어놓은 듯 거리는 조용하고 쓸쓸했다. 더러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림자처럼, 어항 속의 붕어가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활기가 없었다. 먹는 데서 인심 나더라고 밥 한술, 술 한 잔 나누어 먹을 것이 없게 된 세상,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의지할 남정네 없는 젊은 아낙들 아이들, 이슬같이 서글픈 명줄이나마 잇기 위해 식량 배급에만 매달려 있는 일상에서 사람들은 원시 세계로 돌아간 듯 일체를 생략하고 살았으며 냉수 한 그릇 떠놓고 혼례하는 것이 예사요, 장례식인들 무슨 수로 조문객 대접을 하겠는가. 징용 나가는 아들 남편을 위해 주먹밥이라도 몇 개 뭉치고 나면 식구들 죽 그릇에서 푸성귀만 돌아야 했다. 극도로 이기적인가 하면 극도로 외로워하고 거리 에서 직장에서 혹은 집 마당에서 기둥 뽑아가듯 젊은이들을 잡아 가지만 그것도 거의 일상화 되어 울음소리 한숨 소리 위로의 말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농촌보다 도시의 식량 사정이 한층 각박했다. 돈푼 있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암거래를 통해 식량을 구할 수 있었을 뿐, 옷가지며 양은솥 따위 생활필수품을 들고 시골에 가서 양식을 구해오던 사람들도 이제는 바닥이 날 때가 된 것이다. 배급이라고 그냥 주던가. 배급을 받아 절반은 팔아서 다음 배급 탈 돈을 마련해놓고 배급의 절반으로 연명하는 기막힌 처지도 있었고 생산량이 날로 줄어만 가는 양조장의 술찌꺼기, 두부공장의 비지조차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식량 배급소의 우세는 대단했으며 배급계 관리들은 살림이 윤택하여 태평성세였다. 죽 한 그릇에 급급하니 내일 닥칠지 모를 불행은 일단 접어두고, 그래서 거리는 조용하고 쓸쓸해 뵈는 것이다. 남희를 데리고 연학은 곧장 영팔노인 집으로 갔다. 시내에는 천일의 넓은 집이 있었고 판술이가 맡아서 영업을 하는 연학 소유의 여관도 있었다. 그러니까 평사리에 가서 병을 고치고 돌아와 다시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남희 고종오빠 귀남이도 있는 여관이지만 영팔노인 집이 적합할 것 같아서 그곳을 찾은 것이다.
"야아가 누고?"
판술네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남희 아닙니까. 모리겄십니까?"
"아이고! 세상에, 남희가 이리 컸나? 몰라보겄다."
영팔노인도 곰방대를 물고 내다보며
"머라? 남희라꼬?"
하며 놀란다. 판술이댁네도
"어매가 데꼬 갔다 카더마는 이자 다 큰 처니가 됐네."
하고 말했다.
"하야간에 어서 방에 들어가자."
판술네가 남희 등을 밀었다. 그리고 판술네는 며느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며
"저녁은 우찌 됐노."
"죽 끓일라 카는데요."
"아니다. 밥 해라."
일러놓고 방으로 들어온 판술네는 남희를 살펴보면서
"우째 아이가 키만 멀쑥 커가지고 그리 예빘노?"
하자 그 말을 받아서 영팔노인은
"독한 년 밥을 얻어묵으이 무신 살이 갈꼬."
하며 말을 내뱉었다.
"남아, 인사해라. 니 할무이 할아부지 진배없는 분들이다."
남희는 영팔노인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잠자코 고개만 숙인다.
"앉거라. 그래 우짠 걸음이고? 석이어무이는 편키 기시나?"
연학에게 묻는다.
"예. 그냥저냥 보내고 기시지요."
"그 숭악한 제집, 그래 가잔다고 도척이 겉은 그 제집을 에미라꼬 따라가아? 아무리 철이 없기로."
영팔노인은 울분이 치미는 듯 남희에게 올곧잖게 말했다.
"옛날부터 그 제집 얘기만 나오믄 자다가도 일어나 방바닥을 친다 카이."
판술네는 웃었다.
"무신 소리 하노? 임자는 안 그랬나? 그 제집이 우째 벼락도 안 맞고 이적꺼지 사는지 모르겄다. 전사를 생각하믄, 세상에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
남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희 니를 보이 생각이 난다. 아아 몸이 불덩어리가 된 것을 친정에다 처박아놓고, 사니 못 사니 할 직에 니 할무이가 니를 찾아서 벵원에 데리고 안 갔더나. 가보이 종기가 나서 그거를 째는데 고름이 한 종지나 나왔다 카더라. 니 할무이겉이 어진 사램도 이를 갈더마. 그때 니를 벵원에 안 데리고 갔이믄 죽었일 기다. 정말 그럴 수가 없제. 그래놓고 무신 염치로 다 큰 니를 찾아갔노 말이다."
아무 말이 없었던 남희는 무릎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기는 다 지나간 일이제. 그러니 니 할무이 가슴속에는 한이 첩첩이 쌓ㅇ이 있일 기다. 천근 겉은 자식을 눈앞에 못 보고 어린 남매를 키우니라...할무이 공을 잊이믄 안 될 기다. 어디서든 니 아부지만 돌아오믄 옛말하고 살 긴데."
판술네 역시 어미를 따라간 남희 행위를 섭섭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우찌된 일고?"
연학에게 시선을 옮기며 판술네는 물었다.
"예, 무신 사정인지 아직은 모리겄십니다마는, 부산서 남희가 도망을 쳐서 온 모앵이라요."
"하모, 그러사 잘한 일이제. 말을 들으이 술집인가 요릿집인가 한다 카든데 커가는 제집아이, 있일 곳이가? 좋은 뽄은 보기 어럽아도 나쁜 뽄은 보기 쉽더라고, 그라고, 그 에미 밑에서 어디 혼인길이나 열리겄나?"
일본 남자하고 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러고 왔이니 핵교 문제도 있고, 몸이 성찮은 것 겉애서 병원에 데리고 가볼라꼬요."
"보기에도 어디가 좀 아픈 아이 겉다. 벵을 키우믄 안 되세. 귀남이도 서둘렀인께 그 정도로 하고 말았지."
영팔노인의 말이었다.
"게다가 요새 평사리가 요상하게 돼 있어서, 정신대다 머다 함서 처녀애들 공출해 가는 시절 아닙니까. 우가네 개동이놈 또 무신 술책을 쓸지 그것도 걱정이 돼서요."
"그 목이 뿌러져 죽을 놈이 감정 있는 집을 골라감서 징용에 뽑아 갔다믄서?"
"이자는 감정이고 머고, 마구잡입니다."
"하기사 진주도 그렇다. 우리 승구도 산판에 보내기를 잘했제."
승구란 영팔노인의 큰손자다. 그는 산판 따라 다니면서 감독 일을 하고 있었다. 손자며느리는 남편 겨울옷을 장만하여 어제 아이를 업고 떠났으며 손녀딸은 국민학교를 나오자마자 두만어매 중매로 독골로 시집보냈고 막내손자가 지금 국민학교 오학년이었다.
"그라믄 남이가 진주에 오래 있을갑네?"
"예. 사정 봐서...여관에 두기도 그렇고, 양식은 지가 주선하겄십니다. 여기밖에 믿을 곳이 없어이 당분간만 맡아주시리라고 왔십니다."
"말이라고 하나? 죽이든 밥이든 우리 집에 안 있고 어디 갈 기고."
했으나 식량은 주선하겠다 하는 말에 판술네는 안도의 빛을 나타 내었다.
"아이들이 쓰든 빈방도 있고 니 할무이도 우리 집에 있다 카믄 맘을 놓을 기다."
하자 영팔노인이 큰 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세상 야박하지. 이래가아 어디 살겄나? 여관에 오는 손님도 쌀을 가지고 온다 카이. 석이어매 우리 사이가 그런 기이 아닌데, 허허어. 하지마는 장서방. 무리할 것 없다. 우리도 독골에 가든 얼마간 양식은 구해올 수 있인께."
"무리할 기이 머 있십니까. 최참판댁에서 다 요량하실 겁니다."
"아무리 부자라 캐도 하루 이틀이제. 성환이도 그 집 신세를 지고 있고 또 길상이가 그리 됐이니 머가 속 편할꼬? 생각을 해보믄 만사가 일장춘몽이다. 만주 있일 적의 일을 생각하믄, 그런 일이 있나 싶기도 하고."
"문자 쓰는 거를 보이께 또 시작하는구마요."
마누라 핀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주서 되놈 땅 얻어서 농사도 지어봤고 광산에 가서 일도 해봤고 벌목하러 댕기도 봤다마는, 천리타향 타국인데, 그래도 인심이 안 그랬제. 오늘 겉은 세상이 어디 있겄노."
영팔노인은 식량 문제 때문에 안도하는 듯안 마누라 표정이 얄밉기도 했고 공연히 연학한테 미안한 생각도 드는 것 같았다. 그것을 빤히 알고 있는 판술네는
"삼대 구년 묵은 얘기 또 하누마, 세상 인심 변한 것이 어디 우리 뿐이요? 하기사 머 방구들만 지키고 있이니 고릿적 일밖에 생각할 밖이 없일 기요마는 귀에 못이 박히겄소."
떠듬떠듬 매끄럽지 않게 응수한다.
"젊은 놈들 다 앞세우고, 구신맨크로 저눔의 할망구, 죽지 않으믄 할 길이 없겄다."
"죽으믄 면할 성싶소? 저승길에 따라올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녁 나기요. 하시기부시기, 실이 노이 되도록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독거를 누가 들어줄 기라고, 아이구 참말이제 엉글나요."
티격태격하는데 저녁상이 들어왔다. 판술이댁네는 정성껏 밥상을 차린 것 같았다. 어쨌거나 장연학은 그들에게 있어 물주나 다름없었으니까.
저녁을 먹고 연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남희가 불렀다. 나는 어떻게 하느냐 묻는 표정이다.
"내일 아침에 올 기니께 니는 여기 있어라."
해놓고
"야아 심정이 지금 편치 않을 깁니다. 혼자 있게 방 하나 치야주이소."
하고 판슬네한테 부탁한다.
"그란해도 빈방에 불 지피고 이부자리도 옮길 생각이다. 걱정 말고 가서 일 보아라."
영팔노인 집에서 나온 연학은 본성동의 서희를 찾아갔다. 서희는 전등 밑에서 수를 놓고 있다가 수틀을 한 곁으로 밀어 놨다.
"그간 안녕하싰습니까."
연학은 모자를 벗어놓고 꿇어앉아서 정중하게 절을 했다.
"오래간만이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희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뇌의 빛을 감추지는 못했다. 오십을 갓 넘긴 나이, 아직도 그는 아름다웠으나 몹시 수척했다. 십여 년 동안 놓았던 수틀을 다시 매어놓고 수를 시작한 것만 해도 허약해진 자기 자신을 추슬러보려는 그이 심중의 일단을 넘볼 수 있었다. 벌써 삼 년이 넘어가려 하는 길상의 감옥살이, 어쩌면 서희가 길상보다 먼저 지쳐버렸는지 모른다. 전관 같지 않았다. 전에는 정해진 형기가 있어서 출옥할 그날을 기다리는 희망이나마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약이 없다. 예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그러나 그 전쟁이 어떤 상태로 끝이 날 것인지 확신은 불가능했다. 과연 죄수들. 특히 사상범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최악의 경우를 상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 일에 대하여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정국은 물론 바라는 바요 희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초토 작전으로 나올 때 어느 누가 살아남으리. 남희는 두 아들을 위해서 근심했다. 옥쇄라는 말을 들을 때다 서희는 환국이와 윤국이, 특히 윤국이에 대하여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한 근심 걱정 속에서 큰 타격을 준 것은 양현이었다. 연학도 서희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양현이가 서희에게 얼마나 깊은 타격을 주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요즘 평사리는 조용한가요?"
우울하게 서희는 물었다.
"조용할 리가 있겄십니까."
"우가네 행패가 여전한 모양이군."
"태생인데 그게 고치지겄십니까. 악종은 따로 있는 모앵입니다."
"도솔암에는 가보셨소?"
"예."
"임교장께서는 그대로 계시구요?"
"예, 서울서 가족이 다녀간 후 몸이 좀 안 좋았는데 지금은 회복 되었다 하더마요."
"장서방은 무슨 각별한 일이 있어 오신 거요?"
"아닙니다."
"..."
"안만 산에 가보니께 여러 가니로 생각하지 않으믄..."
"...?"
"여기 오기 전에, 잠시 여수에도 갔다왔십니다마는 사방이 꽉 막혀서...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예. 그러니께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지리산 한 곳뿐이 이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십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서희는 차갑게 말했다.
"지 혼자의 생각은 아니옵고."
"해도사라는 돌팔이 생각이기도 하다 그 말이요?"
"머, 딱히 그 사람의 말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그렇다는 말들이었십니다."
무슨 심산이 있어서 장연학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그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서희는 느끼고 있었지만 흥미가 없다기보다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회피하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기싰더라면무신 생각을 하싰을지 우떻게 하싰을지..그 것도 깊이 생각해보았십니다."
"나더러 또, 골치 아픈 일에 관여하라 그 말이오?"
역시 차갑게 되물었다. 그러나 장연학은 안개를 잡듯 명확한 말은 놔두고
"어차피 예측할 수 없게끔 만사가 돌아가고, 그렇다믄 그중 한 가지는 해놔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또 전혀 건덕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의논을 해보는 기이 좋겄다 싶어서 말입니다."
"도대체 예측할 수 없는 일이란 무엇이며 건덕지가 있다는 얘기는 무슨 뜻이요. 알기 쉽게 말하시오."
서희는 짜증을 냈다. 그러나 연학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알기 쉽게 하자믄 군량미를 비축하는 일입니다."
"산에다가요?"
"예."
"싸움하자는 것은 아닐 테고."
"예."
건덕지란 조직을 두고 한 말인 것을 서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연학은 더 이상 설명을 아니 했고 서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능변가가 아닌 연학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시시콜콜 설명을 듣고 있을 서희도 아니었다. 긴 세월 이들 사이에 형성된 이심전심이라고나 할까, 화두만 던져놓으면 가부간 서희는 문제에 대하여 심사숙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사실 서희는 이미 산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두 아들을 위하여. 연학은 끝내 남희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고 일어섰다. 잊은 것은 아니었고 자기 혼자 처리해도 되는 일로 생각한 것 같았다.
"번갈아가며 어찌된 일입니까?"
전에는 귀남이를 데리고 병원에 왔었는데 그 무렵의 귀남이 또래로 뵈는 남희와 함께 진찰실로 들어서는 연학을 향해 허정윤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기 됐구마. 웨낙이 오지랖이 넓다보이...어디가 우찌 아픈지 좀 자세하게 보아주었이믄 좋겄네."
여자 아이여서 옷 벗는 것을 보기가 민망하였던지
"그라믄 나는 밖에 나가서 기다릴 기니께."
하며 연학은 밖으로 나온다. 대합실 걸상에 앉은 연학은 무료하여 밖을 내다본다. 여전히 거리는 쓸쓸해 보였다. 가을이 지난 이맘쯤이면 진주는 꽤 활기가 넘치는 고장이었다. 추수를 끝낸 근동의 지주들이 느긋하게 돈을 쓰기 위하여 모여드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물건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던 시절이 언제였던지, 혼수 장만에 토목점이 왁자지껄하던 때가 그 언제였던지, 은은한 지분 냄새 풍기며 날아갈 듯 맵시를 뽐내던 명기들의 소식이 감감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너그럽고 규모가 널찍널찍했던 도시는 시어머니 눈살에 오그라든 며느리같이. 거리에는 낙엽만 구르고 있었다.
"양현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연학은 문득 양현이 생각을 한다. 병원에 왔기 때문에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팔자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줄곧 성장기를 지켜보아 온 연학은 양현에 대하여 애틋한 부성애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냉철하고 곱돌같이 단단하며 야무진 연학에게도 젊은 시절. 그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기생 기화(봉순)는 연상의 여인이며 연학이 그를 만났을 때 아편으로 망가진 인생이었다. 석이가 기화를 사랑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티끌만큼도 욕심내지 않았고 크게 번민하지도 않았으나 그리움은 있었고 그는 그 그리움을 자기 자신에게도 속이려 했다. 하여간 그런 감정을 가져본 것은 기화에 대한 것이 유일이다. 양현에 대하여 부성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윤국이는 잘 있을까?'
평사리에서 괴로워하는 윤국을 지켜보았던 연학은 그때 무뚝뚝하게 모른 체 대하기는 했으나 딱했다. 마음 잘못 먹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이 다 기울지도 모자라지도 않건만 어찌 그리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연학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늙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해도사 말이 옳다.'
생각은 산으로 건너갔다. 이범준의 사촌동생 이범호에게 연학도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칙적인 문제에는 동의를 했고 어젯밤 서희에게 운을 뗐던 것이다. 얼마가 될지 누가 될지 그것은 지금 막연하지만, 또 절대적으로 안정하다 할 수 없지만 박살이 난다고 생각할 때 조그마한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움직여보는 것이 나쁠 것은 없었다. 군량미 비축 운운 했을 때 서희는 대뜸 산에다가? 하며 되물었고, 싸움하자는 것도 아닐 테고 하며 되뇌었던 것이다. 해도사나 자신도 싸움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피신만을 당장의 목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큰 배가 가라앉는다면 목적지에 닿고 안 닿고는 생각할 것 없이 보트하나 장만하자, 그런 셈인데, 연학은 가끔 해도사를 황당하게 느끼듯 순간 그러한 계획이 황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해서 그는 굳이 우기기보다 그 정도의 운을 떼어놓고 자연에 맡겨버릴 심산이었다. 그 자연은 서희의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학의 생각은 또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경거망동하지 않게 꽉 눌러놔야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범호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보는 연학의 모습은 반 조는 것 같았고 색바랜 모자같이 낡고 기진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해도사보다 연학이 쪽이 둔갑술에는 능했는지 모른다. 산전수전 다 겪었으며 항상 사건의 전방에서 박쥐처럼 밀착해 살아왔고 뒷설거지는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가 해왔으니.
"아저씨."
"어."
눈을 들었다. 남희가 서 있었다.
"진찰 다 받았나?"
"예."
"의사 선생님이 머라 카시더노."
"아무 말 안 해요."
"그래? 그라믄 니는 여기 앉아 있거라. 내가 물어보고 올 긴께."
"예."
남희는 슬며시 걸상에 걸터앉았다. 연학이 진찰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허정윤은 펜대를 책상 위에 뉘었다 세웠다 하며 창밖에 눈을 던지고 있었다. 연학이 들어온 것도 모르듯, 굉장히 우울한 표정이었다.
"무신 병고?"
정윤은 창밖에 눈을 던진 채 대답이 없었다.
'이거 큰 병인갑다.'
연학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멍청하게 선 채 기다린다. 여느 때보다 진찰실 안이 푸르게 느껴진다. 정윤의 흰 가운이 더욱더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근처에 있는 여학교 운동장에서 목검을 하는지 나기나타의 연습 시간인지 기합 소리가 들려온다. 한참 만에
"도대체 아저씨하고는 어떻게 되는 사입니까?"
왠지 모르게 정윤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음 그런께."
막상 그렇게 묻고 보니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학생인 모양이던데요?
"여학교에 다니누마. 여기 말고 부산서 다닜는데...하야간에 고생하는 사람의 딸네미다. 우리가 돌보아주지 않으믄 안 되는 형편이고."
고생하는 사람이라는 말뜻을 정윤은 단박 알아버린 눈치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약을 지어서 일단 가십시오. 주사는 놨습니다."
"...?"
"저녁에 지가 술 한 잔 사지요. 종용한 밀주집이 한 군데 있어요."
"술이야 머 내가 사도 되는데."
"그때 얘기합시다."
여간해서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 연학의 낯빛이 싹 달라진다.
"그, 그러지."
연학은 남희를 데리고 나왔다. 영팔노인 집에 가는 동안 남희는 말이 없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연학이도 아무 말 묻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다 카더노."
집에 들아 서자마자 멍석에 무말랭이를 펴 널고 있던 판술네가 물었다.
"아 네, 심장이 좀 안 좋다 카더마요."
덮어놓고 주워섬긴다.
"아이구 얄궂어라. 귀남이도 그 벵이라 안 캤나? 사촌간인데 그것도 내림인가?"
"그러씨요..."
신장과 심장을 구별 못하고 말하는 판술네나 어정쩡하게 말을 메우다 보니 연학이 역시 그것을 구별 못하기로는 마찬가지다.
"얼굴에 붓기도 없고 삐짝 말랐는데, 와 같은 벵이고?"
판술네는 남희를 쳐다본다.
"그란믄 아무래도 벵을 치로하는 데 오래 걸리겄제?"
"아직은 소상한 말은 못 들었십니다. 아무래도 시일이야 안 걸리겄십니까."
"시일이 걸리더라 캐도 낫는 벵인가 마 괜찮다."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는 남희를 곁눈질해 본 연학은
"남아, 니는 방에 들어가서 좀 쉬어라. 맘을 편하게 하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희는 인사도 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아저씨는 안 기십니까?"
"아니다. 방에 누워 있다. 멋에 틀어?는데 밤새 콩당거리 쌓더마는, 옛날 겉지가 않다. 하루하루가 다르네. 갈 날이 얼매 안 남았는가."
판술이댁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여관에 일 거들어주려고 간 모양이었다. 집안은 휑뎅그렁, 을씨년스러웠다. 원래 대가족이 살던 집이라, 아래 위채 방은 많은 초가였으나 많이 낡았고 손질이 잘돼있지 않았다. 아들 두 명은 그에 따른 식구들을 데리고 분가해 나간 지 오래되었고 판술이는 여관 일을 맡아 하면서부터 거의 그곳에서 기거했으며 바늘 가는 데 실 가더라고 판술이댁네도 낮에는 대개 그곳에 가 있었다. 요즘에는 주로 손주 며느리가 살림을 관장하고 있었지만 그마저 젖먹이를 업고 산에 남편을 찾아가고 없으니 집안이 휑뎅그렁할밖에.
"승구가 일하는 산판에는 사램이 얼매나 된다 카든가요?"
별안간 연학은 엉뚱한 것을 물었다.
"머라꼬?"
"산판에서 일하는 사람 말입니다. 일꾼이 얼매나 되는고요?"
"그거는 모리겄다마는, 말은 안 한께."
"..."
"일꾼들 나이는 모두 지긋하다 하더마. 젊은 사람들은 별로 없고."
"그 산판이 어디다 카든가요."
"지리산이라 카든지."
"손주 며느리가 갔다믄서요?"
"음, 가아는 산중꺼지는 안 가고 산맡 마을에서 기다린다 카더마. 산 밑에서 기별을 하믄 내리온다 카고."
"아저씨도 만주 기실 적에 벌목일을 하싰다 카든데."
"와 아니라, 했제. 죽은 홍이 아배하고. 주갑이라고 있었네라. 전라도서 온 사램인데 명창이었다. 옛날 서금돌이 평사리 근동에서는 소리꾼으로 명이 났지마는 주갑이 그 사람한테는 댈 것도 아니제. 사람 좋고 우스갯소리 잘하고, 그래 세 사람이 한당이 돼가지고 함께 벌목을 했네라. 어젯저녁에도 뜬금없이 영감쟁이가 주갑이 그 사람을 들먹이더마."
"..."
"그때 일을 생각하믄 참말이제 눈물 난다. 월선이도 그때 죽었고, 홍이가 산중까지 아배를 찾아갔던 일 하며...그 일을 다 말할라카믄 끝이 없다. 왜놈들한테 쫴끼서 만주로 간 우리 조선 사람들, 가심에 첩첩으로 쌓인 그 한을 우찌 다 풀겄노."
"그라믄서 아제씨는 손자가 산판에 가는 거를 우째 반대를 안 했이까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판술네 말허리를 또 꺾으며 연학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거는 사정이 다르제."
"..."
"연비연비로 일을 그렇게 됐다마는 우리 승구는 벌목일은 안 하더라. 가아는 식자도 있고, 어디 노동일 할 처지가? 산판 임자 대신으로 일을 본께. 그래도 그렇제, 식구들을 떠나가는 것도 그렇고, 처음에사 진주 내리와서 취직이라도 하라 했지마는 그 아이도 역마살이 들어서 그런지 마다 안 카나."
"취직하는 일이 어디 쉽습니까."
"하다못해 장사라도 하라 했제. 하기사 이자는 잘된 일로 생각한다. 그 아이가 여기 있었다믄 온전했겄나? 어이구우, 자식들이 많다 보이 밤낮으로 걱정이다."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영팔노인뿐만 아니라 판술네도 못잖게 말이 많아졌고 근심은 펴 널어놓은 무말랭이만큼이나 많아졌으니, 그래서 또 말이 많아졌는지 모른다. 연학은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의 머릿속도 무척 복잡했던 것이다.
"가볼랍니다."
"갈라나?"
섭섭해 하는 얼굴이다.
"여관으로 갈 기가?"
"예. 다른 볼 일도 있고, 저녁에나 내일 아침쯤 오겄십니다."
밖으로 나온 연학은 멀리 보이는 형무소 쪽에 시선을 보내다가,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까마귀들이 무리지어 들판에 날아 앉았다가는 날아오르곤 한다. 사방이 어두워진 뒤 연학은 병원으로 허정윤을 만나러 갔다. 기다리고 있던 정윤은 가운을 벗어놓고 간호부에게 몇 마디 말을 남긴 뒤 연학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여전히 그의 기분은 좋아 뵈질 않았다. 말도 없었다. 밀주집이라 했으나 정윤이 연학을 안내해 간 곳은 요릿집이었다. 모두 폐업을 하고 몇 채 안 남은 요릿집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내어놓는 술이 밀주인 것 같았다. 미리 청을 넣어놨던지 술상은 이내 들어왔다. 술을 부어서 마신다.
"거 듣자하니까 양현이하고 윤국의 혼사가 틀어졌다 하든데요?"
정윤은 지나가는 말로 얘기를 꺼내었다.
"뉘한테 들었는고?"
"이시우 그 사람, 저하고는 동서뻘 아닙니까."
"아아, 참 그렇지. 그 사람이 양현에 대해서 뭐라 하든가."
다가앉듯 묻는다.
"일절 말이 없었소. 자주 만나는 처지도 아니고, 여자들끼리 오가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 머라 하든고?"
"집사람 말로는 혼사가 틀어졌다, 그 이상 내막은 잘 모르는 모양이더군요."
"음...하기는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리네. 젊은 사람들 속을 알아야제."
"이시우 그 사람, 혼사가 성사되길 그렇게 바랐다 하든데."
"왜 안 그렇겄나. 배는 달라도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이고 보믄...양현이 어디 보통 아이든가."
"지 생각에도 참 좋은 한 쌍이다 싶었는데."
"다 팔자지 머. 인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
연학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는다.
"요즘 겉은 세상에 근심 없는 사람은 자네 겉은 의사제."
"사람인데 어찌 근심 걱정이 없겠습니까."
"모두 사는 기이 칼끝에서 용 천 지랄하는 기라."
"어떻게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싶은데 그게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연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학생들은 우선 괞찮다 하겠으나 사불여의할 때는 무더기로 끌려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대학 중학 할 것 없이."
"무슨 들은 얘기라도 있었던가?"
"들은 얘기라기보다 일본인들은 대개 그것을 예상하고 있는 모양이든데요?"
"예상이야 우리도 하지."
"이태리는 완전히 패망했고 독일이 항복하는 것도 시간문젠데. 일본의 시간문제가 우리에게는 가장 절실한 일이지요. 항복을 하느냐 본토 작전에 들어가서 전 국민이 옥쇄하느냐, 만일 본토에서 결정을 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우리 조선인들은 방탄용이 될 겁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럴 게야."
연학은 그 순간 이범호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렸다. 이범준하고는 전혀 다른 칼날 같은 눈이 살 속으로 몰려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술만 마신다. 조선 민족의 운명은 진작부터 그런 방향으로 예상되어 왔다. 식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극히 소수만이 그 포악한 칼날을 피부에 느끼고 있었을 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의식이 마비된 상태였다. 체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의식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날이면 날마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단장의 이별이나 굶주림, 오로지 하나, 일본 왕에 대하여 충심하며 초개같이 제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총칼의 위협이 강산에 충만해 있건만 사람들에게 그것은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 원인이나 결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으며 다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만 느끼고 있었다. 아마 일본인들이 그러했을 것이며 친일파라고 뾰족한 희망이 있을 리 없었다.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일본과 운명을 같이 할밖에 없다는 것을 때때로 느낄 따름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횡포하게 했을는지도 모른다. 말단의 일본 녹을 먹는 친일분자는 한층 가열하게 내 백성에게 채찍질하며 끌어내고 잡아내고, 그들은 포식하는 처지만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며 미쳐 날뛰었을 것이다. 상부층은 협력을 해야만 조선 민족이 살아남는다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 논리를 녹음하여 되풀이 되풀이하여 판을 돌리고 있었다. 열혈의 조선 청소년들이여! 국가 위안을 보고만 있을손가,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라! 대군의 신금을 우리는 보위해야 하느니, 펜을 버리고 총을 들라! 오오 감읍의 극이로소이다. 폐하의 적자로 조선백성을 안으신 그 크나큰 성은을 어찌 우리가 잊을손가! 저 하늘의 태양이 영구불멸이듯 우리의 인군 또한 그 영광이 무궁하리, 오오 조선의 청소년들이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라! 썩어 죽을 놈들, 유다의 낙인은 이천 년에 이르기까지 소멸되지 않았음을 그 어찌 모르는가. 연학은 이범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간간 그 사이에 끼어드는 남희 얼굴을 생각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허정윤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눈앞에 남희 얼굴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석이며 성환, 성환 할머니의 얼굴도 지나간다.
'혹 불치의 병이 아닐까? 혹?'
하다가 연학은 불미스런 상상을 물리치곤 한다. 그러나 연학은 정윤에게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말을 하기 위해 이렇게 만난 것이니 말할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할까 싶었던 것이다.
"아까 고생하는 사람의 딸이라 했던가요?"
정윤이 비로소 서두를 꺼내었다.
"그랬지."
"짐작은 갑니다만 독립운동 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옥살이하는."
"하여간 그 정도로만 알아두게."
"그게 하도 이상하고 끔찍스러워서 차마 입 밖에 말 내기가 거북합니다."
"...?"
"사실 의사로서 적잖은 세월을 보냈지만 이런 일은 처음 경험했기에 저로서도 충격이 컸습니다."
"말해보게."
"그런 어린 나이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말하게."
"놀라지 마십시오. 그 아이의 병은 성병입니다."
"뭐라!"
연학의 손에서 술잔이 떨어졌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연학은 넋이 빠진 듯 정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 후 연학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대체 그 아이는 부산서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말대답은 하지 않고 연학은
"못 고칠 병은 아니겠지?"
하고 물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치료하면 고치기야 고치지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연학은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았다.
"허선생."
"네."
"이 일은 꼭 비밀을 지켜주게."
"..."
"남들에게는 물론이나 본인보고도 절대로 병에 관한 얘기는 말아주게. 철없는 것이 그런 거는 알지도 못할 기고 심장병이라든지 머 다른 병이라 하고."
연학은 또다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솔직히 말해서 연학은 혹 잘못되어 아이라도 가진 것이 아닐까, 거기까지는 상상을 해 보았다. 수 없이 그 생각을 물리치면서도. 굉장한 충격이었다. 실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미라는 것이 요릿집을 하다 보니, 정말 억장 무너지는 일이구마. 하 참,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일 수 있일까."
"..."
"하여간에 병이나 고쳐주게. 뒷감당은 내가 다 할 긴께."
"알았습니다."
"여하튼 아이가 멍청이가 됐는지 순순히 병원엘 따라오는 거를 보아도, 흠 절대로 본인보고 말하지 말아주게."
혼자 여관을 향해 밤길을 걸어가는 연학은 가다 말고 멈추어서곤 한다. 토할 것 같았고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 최참판댁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 험난한 일들의 뒷설거지를 해온 세월이. 때론 숨이 막히게 긴장을 하기도 했고 굽이굽이 사태를 넘겨야 했던 절박함, 그런 것을 말없이, 때로는 졸 듯 태연하게 넘겨왔지만 한시도 마음을 놓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밤과 같이 험악한 일을 격을 것은 처음이다. 사실 사생활에 있어서는 담박하고 지극히 도덕군자였던 연학이었던만큼 뭐가 어떻게 되어 이 지경까지 왔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충격이 며 경악이었다. 화류계에서 더러 그런 일이 있다고 들었지만 자기 주변에서, 그것도 아직 나이 어린 정석의 딸이. 연학은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며 마치 악몽과도 같은 사실을 털어버리려 했다.
이튿날 연학은 적잖은 돈을 내밀면서 판술이 내외에게 말했다.
"집에 들리서 남희한테 이르고 갈라 캤더마는 좀 급한 볼일이 있어서 가야겠네."
"남희 일이라 카믄 걱정 마시이소."
"그래도 그냥 두고 가기가 걱정이네. 성한 아이가 아닌께. 매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데."
"지가 데리고 가지요."
판술이댁네가 말했다.
"하루라도 빠짐믄 안 될 깁니다."
"예, 알겄십니다. 열일 제쳐놓고라도."
"그는 그렇고, 이 돈은 멉니까?"
"벵원비도 들 기고 양식도 보태야 안 하겄나."
"돈이야 여관에도 안 있십니까."
"여관 돈은 여관 돈이고, 이 돈 넣어두었다가 자네가 알아서 남희한테 쓰게, 아픈 아이니께 음식도 조심부리 믹이야 할 기고 할매를 떨어져 남의 식구 속에 있인께 특별히 맘을 써주었이믄 싶다."
"알았소. 걱정 마이소."
신신당부를 하고 연학은 진주를 떠나 평사리로 향했다. 그는 남희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민망하고 그 자신 너무나 깊은 수치심을 느꼈던 것이다. 설사 원인을 캔다 하더라도 부산의 그 생모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래야 하는지 연학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희에 관한 일은 남에게 미루어버리고 자신은 손을 떼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나루터에서 연학이 막 내렸는데 복동이네가
"인자 오십니까?"
하고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시큰둥하며 인사도 잘 하지 않았던 아낙이다. 말하자면 우가네 편이었던 것이다.
"성환 할매 집에 난리가 났소"
"왜죠?"
복동이댁네는 나들이 가는 모양이었다.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부산서 손님이 왔는가배요. 남희 어매라 캄서 하이칼라 여자가 와 있더마요. 성환 할매하고 시비가 붙어서 시끄러벘십니다. 남희는 진주에 두고 오십니까?"
그새 소문은 쫙 퍼져 있었던 것이다. 연학은 대꾸 없이 지나친다.
"쳇! 남의 집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웬 챔견이 그리 많을꼬? 에미 자식 에미가 데리가는 거이 당연하지."
하며 들으란 듯 시부렁거렸다. 그만큼 세상은 변했고 최참판댁이라면 쪽을 못 쓰던 왕시와는 다르게 우습게보니까 따라서 연학도 우습게 보는 것이다.
복동이댁네를 만나기 전만 해도 연학은 성환 할매 집에 먼저 들를 생각은 안 했다. 자기 거처로 가서 좀 더 생각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평소같이 능청을 부리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산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학은 곧장 성환 활매 집으로 갔다. 과연 남희 에미 양을례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한 소동이 지나갔는지 귀남네가 마당을 우두커니 서 있었고 방안에 성환 할매가 있는 눈치였다. 기가 넘어서 스러지기라도 했는지 방안에서는 달래듯하는 야무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을례는 의기양양해서 앉아 있지는 않았다. 어딘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댁이 부산서 온 사램이오?"
양을례를 쳐다보는 연학의 눈은 불이 붙은 듯 형형히 빛난다. 증오와 멸시와 분노에 찬 눈빛을 받을 을례는 위축된 듯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을 들어 보인다.
"네, 그렇소."
말씨만은 도전적이었다.
"날 따라오시오."
"...?"
"따라와요!"
"그, 그렇지만 댁이 누구길래."
"남희를 진주 데리다주고 오는 길인께, 당신 할 말이 있을 거 아니오!"
"그렇기로니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날 욱대지르는 거요? 별꼴을 다 보겠네."
"별꼴을 보나 안 보나 두고 보믄 알 기구마. 다리몽댕이 분지르기 전에 못 일어나겄소?"
이렇게 노하는 장연학을 본 일이 없는 성환 할매, 야무네는 방문을 열어보고는 감히 방에서 나오질 못한다. 귀남네 역시 몸을 떨고 있었다. 양을례는 뭔가를 깨달은 듯 부스스 일어섰다. 장연학은 성환할매한테 이렇다 저렇다, 남희에 대한 설명 한마디 없이 휑하니 나가버린다. 양을례는 비실거리다가 묘하게 꼴사나운 몸짓을 하며 연학을 따라 나갔다.
"장서방이 저러는 거는 처음 보겄다. 웬일이꼬?"
성환할매는 풀이 죽은 양을례 꼴이 고소하다는 것보다 몹시 불안해하며 말했다.
"마침 잘 됐거마는. 아아를 데리가느니 우쩌느니 그런 말 두 번 다시 못하게 조질라고 그러는 거 아니겠소? 아닌 게 아니라 장서방도 성질 내니께 무섭네."
"남이가 우찌 됐는지 한마디 말도 없이."
"그거사 급한 일이 아닌께 그러겠지요. 아무튼 내사 속이 씨원하거마는. 남자 없는 집이라꼬 척 들어서서 지 곤리를 주장하는데, 애시당초 대찬 남정네가 있었다믄 어림이나 있는 일이건데? 감히 어디라꼬 이곳에다 발을 딜이놓다?"
"하기사."
"귀남네."
멍하니 선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귀남네는 야무네가 부르는 소리에 당황한다.
"넋 빠진 사람맨치로 와 그러고 있노? 니도 놀랬는갑네."
무심히 한 야무네 말이었지만 귀남네는 무엇을 잘못하다 들킨 사람같이
"야, 저기."
하다가 부엌 쪽으로 급히 간다. 기실 귀남네는 놀라기도 했지만 그는 두려워했던 것이다. 장연학에서 상당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귀남네는 장연학을 잔뜩 무르게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실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지난날 방자했던 자신의 언동이 생각났고 어매와 자신의 갈등을 연학이 어찌 보았을 것이며 사사건건 조카들을 시샘했고 적대시해온 것도 그랬다. 오늘만 하더라도 귀남네는 어미 편에 서지 않았다.
'지 에미가 지 새끼 데리갈라 카는데 머를 저리 빼딱시럽게 저러는고? 벵이 났이믄 어련히 지 에미가 고쳐줄까? 돈이 없나 벵원이 없나. 한다리가 천리라꼬 에미는 에미, 할매는 할매 아니가.'
귀남네로서는 물론 남희가 없는 편이 좋았고 게다가 전사야 어찌 되었든 양을례는 식자가 있고 말을 잘했으며 차림새도 시골서는 볼 수 없는 하이칼라의 여자였다. 들고 있는 손가방이며 구두가 번쩍번쩍 빛나는 것만으로도 귀남네는 그 위세에 눌려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여자를 마치 양 새끼 몰고 가듯, 귀남네가 두려워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한편 최참판댁 사랑에서 양을례와 마주앉은 장연학은 오랫동안 여자를 노려보고만 있다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말하시오."
하고 입을 떼었다.
"어떻게 되다니요?"
을례는 상대가 얼마만큼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것을 살피듯 말했다.
"몰라서 그러는 거요? 잘 알 텐데."
"나는 몰라요. 아이가 아프다는 것밖에, 거기서 알고 있다면 말씀하세요."
을례는 전세를 가다듬듯 허리를 빳빳이 세운다.
"당신 겉은 여자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돼!"
"무슨 권리로."
"권리 있어!"
연학은 집어삼킬 듯 말했다. 을례의 기세가 다소 꺾인다.
"다짜고짜 이래도 되는 건가요?"
"왜 말을 못하요? 할 말은 내게 있는 기이 아니라 바로 당신한테 있어!"
을레 가슴을 겨누듯 연학은 손가락질을 했다.
"남희를 우떻기 했소? 손님 술자리에 내놨나?"
이번에는 어세를 떨어뜨리며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벌 받을 소리!"
했으나 양을례의 얼굴은 온통 구겨지고 말았다.
"천벌 받을 소리, 어느 에미가 지 자식을."
하다가 별안간 을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오랫동안, 오래 울어본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울었다. 이윽고 핸드백 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남희 장래를 위해 죽어도 입 밖에 내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거기서 어느 정도 내막을 알고 말하는지 그거는 모르지만."
그는 또 눈물을 닦았다.
"내가 여기 온 것도 전처럼 아이가 욕심나서 그런 것도 아니며 영영 아이를 버릴까 싶어서 어떡하든 아이를 돌보아야겠다 싶어서."
본론에 들어가기가 아무래도 힘이 드는 눈치였다.
"이 세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그것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요."
을레는 힐끗 연학을 쳐다보았다.
"병정 놈한테 당한 거예요. 그 몹쓸 놈이 아이를."
"병정 놈! 왜놈 병정이오?"
을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은 다 해제되고 여자는 누더기같이 초라하게 자기 무릎만 내려다본다.
"천하에 무도한 놈들!"
차라리 연학은 눈을 감아버린다. 눈앞의 여자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도끼를 치켜들고 달려가서 개동이놈을 찍어 죽이고 싶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했나. 정확하게 한 땀 한 땀 꾸부리고 뻗으면서 가지 끝을 기어가는 한 마리 자벌레, 소리 없이 잠자듯 시간은 흘러가는데 조선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도가니 속에서 축 늘어진 지렁이가 다 되고 말았단 말인가. 밟아도 꿈틀거릴 줄 모르는 지렁이, 연학의 눈앞에는 범호의 얼굴이 커다랗게 다가왔다. 그 매서운 눈초리가 연학을 응시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 가끔 오던 놈이었어요. 그것도 명색이 장교라 하는데 그런 짐승일 줄이야... 함께 사는 사람하고 면식도 있고 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치욕스런 상대를 여자는 함께 사는 사람이라 표현하는 것이었다.
"남희를 귀여워했고 점잖으며 교양도 있어 뵈든데... 속았어요, 그날."
하다가 여자는 말을 끊었다.
"그날."
또 말이 끊어졌다. 한참 있다가
"그날, 그놈이 와서, 차타고 구경 가자 했던가 봐요. 그래 그 철없는 것이 따라갔던 모양이에요. 우리는 몰랐지요. 나중에 알았을 때 그 사람 얼굴빛이 달라지더군요. 안절부절못하고, 저녁때 아이를 집 앞에 내동댕이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달려 나가서 차를 막아섰지요."
여자는 이제 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시비가 붙었어요. 원래 야쿠자 출신인 그 사람이 아이구치(단도)까지 휘두르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일 당한 뒤 무, 무슨 소용이."
을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을 다시 꺼내었다.
"지쿠쇼! 고로시테야루, 고로스! 기사마가 닌겐카!(짐승 놈! 죽여주겠다. 죽일 거야 ! 네놈이 인간인가!)"
아이구치를 휘두르고 덤비며 입이 찢어져라 소리소리 지르던 사내 얼굴이 악몽처럼 을례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남편이라 부를 수도 없는 사내, 일본인과 동서하는 여자도 거의 없었지만 그런 처지 일 때는 작부보다 더욱더 천시하며 철저하게 집요하게 따돌림을 당해야 하는 조선인 사회를 등지고 살아온 세월. 돈으로 치장하고 돈으로 가꾸어 위세를 부려본들 무슨 소용인가, 진정 무슨 소용인가. 사가라 부르던 사내, 머리숱이 많고 눈이 작던 육군 중위, 그 사내가 비웃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데테곤카! 데로!(나오지 못하겠나! 나와!)"
사내는 자동차 문을 열어젖히고 사가를 끌어내려고 용을 썼다.
사용인들이 우우 몰려나와 말렸다.
"호자쿠나! 오마에노 무스메데모 나이쿠세니 나니요 즈베코베 유운카!(짖어대지 마라! 네놈의 딸도 아닌 주제에 이러쿵저러쿵 지껄일 것 없다!)"
"하라와타마데 구삿테루, 지쿠쇼! 구삿타 하라와타 에구루카라 데테고이(뱃속까지 썩었어, 이 짐승 놈아! 썩은 창자 도려낼 테니 나와라!)"
"센진노 아맛코 히코리, 좃토 다노시미니 시탓테 소레가 난카! 이노치오 가케타 다이닛폰노 군진, 몬쿠 유우 야쓰라와 오란! (조선 계집애 하나 잠시 즐겼기로 그게 뭐 어떠냐! 목숨을 건 대일본제국의 군인, 누가 뭐라 할 놈들 없다!)"
결국 을례가 그 사람이라 부르는 야나기는 군인 폭행을 했다 해서 구류를 살고 나왔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에도 그놈은 정신대에 끌고 가도 누구 말할 사람 없다면서 협박을 하고,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서 학교에는 장기 결석계를 내놓고, 게다가 아이는 온정신이 아니었소. 멍청이가 돼 버린 거지요. 부득이 가두어둘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가 없어서 행여 어디 가 죽었는가, 그놈이 채갔는가, 사방팔방을 헤매다가 여기 와본 겁니다. 죽든 살든, 어떡허든 데리고 가서 제정신이 들게 해야 안 하겠습니까."
"당신이 받아야 할 천벌을 남희가 대신 받은 거요."
그 와중에도 을례 눈에 날이 섰으나 그러나 이내 그 날은 사라졌다.
"아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와요?" 데리가서 두 분 죽음 시킬라꼬요?"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남이 가슴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소? 시집을 못 보내는 한이 있어도 공부시켜서 혼자 살 수 있게 마련하겠소. 아이를 내어주시오."
"당신 돈 아니라도 뒷바라지할 사람은 있소. 오래비도 있고."
오래비라는 말에 을례는 찔끔한다.
"좋게 끝낼라 카믄 가소. 아무 말 말고 가소."
연학은 남희 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